4.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공중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는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신자의 개인 기도 생활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 의하면 알지 못하는 방언에는 네 가지 사용 혹은 목적이 있습니다.(1) 성령 세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사도행전 2:4; 10:46; 18:6); (2) 방언이 통역될 때에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로서 (고린도전서 12:10); (3)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는 표적으로서 (고린도전서 14:33); 그리고(4) 효과적인 기도와 찬양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로서 (고린도전서14:2, 4; 14:18). 이모든 경우에 방언은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목적은 다릅니다. 이러한 독특한 사용과 목적에 관한 오해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 왔습니다.

초기의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그러나성령님께서 나누어 주신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오늘날도 신자들이성령 세례를 받을 때 나타나는 똑같은 증거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성령 세례를 받을 때, 예배를 위해 교회에서 모였을 때 방언으로 말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증거를 가질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방언 통역의 은사가 함께 역사하는것을 필요로 하는 공중에서의 방언의 은사를 행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2, 13).

처음에, 공중 예배에서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아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떤 사람이 성령에 감동을 받아 그 방언의 해석을 말합니다. 이 영역에서 역사하시면서, 성령님은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을마련해 줍니다.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며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고린도전서 14:2-12).

개인의 경건의 시간에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님의 또하나의 사역입니다.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영적 생활을 매우 부유하게 만든다고 증거합니다. 성령님이 예배와 사랑의 영광에 넘치는 표현 가운데 인간의 영혼을 북돋우면서 지성의 한계는 극복됩니다. 제한된 어휘와 영혼의 감정과 관심을 표현할 수 없는 무능함의 곤혹함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언어가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올 때 사라져 버립니다.그것은 마치 하늘과 땅이, 시간과 영원이, 하나님과 인간이 예배의 영광에 넘치는 행동을 통하여 모두 함께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3. 사람이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왜 후에 재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오순절날에 120명의 제자들 (예수님을 따르는 헌신한 사람들)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4). 이것은 며칠 전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이 실현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5)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처음 나타나는 이 체험은 단지 전 생애를 통해서 체험하는 것의 시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성령으로 늘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마도 하나의 예는 이 점을 분명히 해 줄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전력을 생산하는 저수지와 비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우리들의 저수지 건축은 완성이 됩니다. 이제 우리들은 유용하고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수지의 문이 열리고 강물이 그곳을 통하여 흘러내리기까지는 전력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고, 성령님은 우리 속으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흐릅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가장 효과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저수지와 관련해서, 이 전력을 만드는 체험은 단 한번 일어나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 진행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전력이 낮아질 때에 우리들은 그 자원으로 되돌아가서 축복하는 성령님이 우리들 가운데 다시 흘러 들어 오셔서 새로운 전력을 공급하시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초대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핍박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새로운 성령의 능력의 충만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다시 한번 기도를 드렸으며,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4:31).

성령 충만한 신자가 주님을 섬길 때, 영적 전력의 소모가 있습니다. 그는 그의 능력을 재충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성령님께 열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한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받고 주는 것, 성령 충만함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고 복음의 사역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의 연속적인 과정 입니다.


2.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영생을 받는 것은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박국 2:4; 요한복음 6:28, 29; 갈라디아서 3:65:6; 에베소서 2:8). 그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위해 값주고 사신 선물입니다. 우리들이 해야하는 일은 오로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십자가에 달려있던 회개한 행악자가 바로 그날 낙원에 있게 될 것을 보장 받은 것처럼 만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들도 또한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 있게 될 것을 보장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당신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위배됩니다.

비록 성경이 성령 세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와 동시에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49; 사도행전 1:8).

성경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충
만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라고 명령합니다. 개인적으로 성령과의 만남은 모든 신자들이 구하고 소중히 해야 합니다. 그것과 함께 영적 깨달음에 대한 새롭고 전보다도 더 충만한 단계에 이르게 되며 영적 은사가 넘쳐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9-13).


하나님의 성회
우리들의 특유의 교의

성령 세례

 - 20가지 질문과 대답 -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

 

내 용

성령 세례: 그것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성령 세례의 목적

1.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체험이 성령 세례와 어떻게 다릅니까?

2.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3. 사람이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왜 후에 재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4.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공중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신자의 개인 기도 생활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방언과 은사의 사용

5. 성경의 기준에 의해 공중석에서 방언으로 말할 때, 항상 방언 통역이 있어야만 합니까? 누가 방언 통역을 해야 합니까?

6. 방언으로 말함과 그 후에 따르는 방언 통역은 누구에게 유익함이 있으며, 무슨 목적이 있습니까?

7.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방언 통역이 가능합니까?

8. 교회에서 방언과 다른 은사들이 역사할 때에 우리들이 한 역할을 담당합니까?

 

혼돈되는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 답변들

9.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10. 신약 성경에 기록된 첫번 째 성령이 임하였을 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왜 이러한 것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습니까?

11.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가능합니까?

12. 고린도전서 13:8절은 “방언도 폐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 세례가 단지 2000년 전 초대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13.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9절에서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 . . 말하는 것이 . . .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말했는데, 이 말씀은 방언의 체험이 오늘 날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14. 오늘날 체험하는 성령의 부으심이 진정으로 성경적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15. 왜 오순절파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오직 몇 번 언급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합니까?

 

성령 세례 받기

16. 누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17. 사람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받을 때 그들은 절반은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까? 아니면 그들은 완전히 정신이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18. 왜 어떤 사람은 즉시 성령 세례를 받으며,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갈망하여도 받지 못합니까?

19. 개인이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할 때 성령 충만함을 빨리 받기 위해 그의 생활이나 주위 환경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20. 방언이 성령 충만함에 대한 유일한 증거입니까?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그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어떤 의미있는 변화가 있습니까?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성령 세례: 그것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체험할 수있습니까?

교회의 그 어떤 교의 보다도 더 많은 질문과 논란을 일으킨 것은 없습니다. 러한 논쟁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날의 이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 그러한 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질문을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성령님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에 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성령의 바람은 결코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2세기의 터툴리안으로 부터 10세기의 시메온, 18세기의 요한 웨슬리, 그리고 19세기의 미국 부흥사들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님의 강력한 나타내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보다 완전한 체험을 갈망하던 몇 개의 작은 경건한 모임의 회원들은 성령의 은사의 회복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의 모임에서 그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령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을 하였으며, 예언을 하였고 병자를 위하여 기도했을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으며, 새로운 선교 사역의 물결이 일어나서 곧 전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20세기의 오순절파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체험이 사도행전 1:4, 5에 기록된 예수님의 약속이 실현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이 “아버지의 약속”이 “모든 신자들이 받을만 하고, 또 열렬히 고대하고 진정으로 구해야만 하는” (P. C. Nelson, 성경 교의, 774) 체험으로 믿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거의 모든 기존 기독교 단체들과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순절파 사람들은 조롱을 받고 기존의 교회들로부터 내어 쫒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흥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들 “거룩한 무리들”은 야외에서 모이거나 점포를 임대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치유와 구원의 이적들은 군중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을 비웃던 호기심에 찬 사람들은 흔히 기도하기 위해서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무리들은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이적이 계속됨에 따라 모이는 사람들은 사업가나 전문가들로 불어났습니다.

그 후 50년 동안 오순절파 사람들은 교회와 대학들을 설립하고 사역자들을 훈련시켰습니. 그들은 주일 학교를 조직하였고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중점을 두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1960년대에는 또 다른 부흥의 물결이 오순절의 축복을 전파했습니다. 많은 루터교 신자들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로마 캐토릭 신자들이 예배 중에 손을 들고 성령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장로교 신자들, 성공회 신자들감리교 신자들, 침례교 신자들, 형제교 신자들, 그리스도의 제자회 신자들 --- 성령의 바람은 모든 교회들에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믿음에 대해 진지한 모든 교파의 신자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이 체험은, 구원과 별개의 것으로 구원 후에 따르는 것으로, 성령 충만한 삶의 부요함으로 신자를 인도합니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그 영혼이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갖도록 함으로서 질문에 대해서 가장 잘 대답을 하며, 논란을 가장 잘 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이러한 복된 체험을 하는 것으로부터 방해하는 성령 세례의 교의에 관한 오해가 있습니다. 대답을 요구하는 진정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성령세례_ "20가지 질문과 대답" 중 1번 입니다.
 

성령 세례의 목적

1.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체험이 성령 세례와 어떻게 다릅니까?

,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님이 그들의 삶에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6:44; 14:17; 로마서 8:9; 고린도전서 12:13). 아무도 성령의 자비로운 역사하심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라고 불리우는 성령의 또 다른 그리고 특유의 사역이 있습니다. 세례는 모든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있게 만드는 선물입니다 (마태복 3:11; 누가복음 11:13; 24:49; 사도행전 2:33, 38). 그것은 기독교인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새로운 헌신적 애정을 갖게 해주며, 그것은 예수님을 매우 사실적이고 귀한 분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 세례의 주된 목적은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더욱 큰 능력을 베풀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다른 유익한 점은 영적 예배에 있어서 가지는 더욱 큰 기쁨과 세계를 향한 우리의 사명에 대해 더욱 고무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제12장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자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분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작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
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
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도박 왜 기독교인이 도박을 하지 않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일인가?

열 두 번째 질문

비록 “너는 도박을 하지 말라.” 가 십계명중의 한 가지가 아닐지라도, 도박을 하는 것 은 성경이 인정하는 가치를 위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을 순종하는 것 외에도, 성경이 분명하게 의미하는 것도 또한 지켜야 합니다.

청지기의 원리 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기독교인은 부를 포함한 그들의 모든 소유물과 또한 그들의 소유물 이 어떻게 사용되고 쓰여 지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청지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시편 24:1; 마태복음 25:14-20). 도박은 우리들의 자원에 대하여 책임 있는 청지기 직분 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정직한 노동과 생산적인 일을 존중하는 성경의 원리는 도박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닌 방법으로 부유하게 되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진실에 위배됩니다 (잠언 12:11, 28:19-20; 데살로니가2장 3:10). 모든 인간에 대한 기독교인의 사랑의 성경적 원리는 도박을 반대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마태복음 22:39), 우리는 이웃의 손실을 통해서 이윤을 얻으려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도박을 두둔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도박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무도 언제 혹은 어떻게 자기의 삶이 끝날지 모른다고 그것을 합리화시킵니다. 어느 때라도 대참사와 병마는 일생의 계획을 뒤집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그토록 모험인데, 왜 교회는 복권과 도박을 반대하느냐고 그들은 질문을 합니다.

차이 --- 한 가지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승마투표 도박(paramutual betting)은 정상적인 삶의 환경에서 부딪치는 위험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이익의 유혹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지게 된 위험입니 다.

중요한 점은 도박은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확실한 사건이 일어나는 조건으로 가치 있는 무엇을 옮겨주기로 해서, 그 결과 한 쪽에게는 상당한 이득의 결과를 주고 다른 쪽에게는 상대적인 손실을 주도록 두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정의에 근거해 볼 때 우리들은 모든 형태의 도박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계획하신 대로 사람들 사이의 건전한 관계를 개발하고 유지하는 것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은 오락이나 유흥으로서의 도박과, 도박으로부터 얻어진 수익을 정부가 사회와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하기로 계획되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면서 이 위치를 취합니다. 이것은 정부에 대하여 고발하는 것입니다. 목적(즉, 교육을 위한 더 많은 금액을 사용하는 것)이 수단을 정당화시키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에 공헌을 하고 싶다면, 그들은 직접 그렇게 해야 하며 모든 위험한 요소를 제거해야 만 합니다.

도박의 유익한 점에 대한 선전은 환상적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의도하 는 사람들의 이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권, 카지노 도박,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도박에서 돈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는 사실이고 비극입니다. 도박에서 돈을 잃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기업은 도박에서 돈을 딴 사람들에 대해서 선전하지만, 잃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밖에도 – 도박에서 돈을 따서 갑자기 부해진 사람들은 큰 유혹에 빠쳐서, 결국에 가서는 흔히 “패자”가 되어 버립니 다.

관심사: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는 애매모호한 점들이 있습니다. 증권시장 에 투자하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까? 자신의 돈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어떤 것에 투자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떤 신학자들은 운에 맡기는 게임과 결정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술 이나 정보를 사용을 필요로 하는 모험이 포함된 사업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청지기직분에 관한 자기의 양심과 서약이 여기에서 안내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많은 은퇴 프로그램이 총명한 투자회사에서 기술적으로 운영하는 반면에, 적절한 준비와 배경지식이 없는 개인의 투자는 그 투자를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만들며, 거의 도박과 같은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지키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의 소중한 청지기직분을 통해 맡기신 것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가지 고려할 사항은 아주 필수적인 것 이상의 자원에 대한 성경적 사용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정직한 일 윤리를 축복하실 때, 그 결과는 번영이 될 것입니 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이외에 얼마만큼의 부를 저축하거나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예상되는 십일조 이외에 얼마나 더 주님의 일에 “투자”를 해야만 합니까? 우리들의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물어보는 것은 좋은 성경적 청지기임 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1983년도 하나님의 성회의 위치를 표방한 “도박에 대한 성서적 고찰” (1983)에 기록되어 있다.

역자 주: 승마투표 도박 (paramutual betting)은 경마에서 경주를 관전하는 관객들이 우승이 예상되는 출전 마를 선택하여 돈을 거는 행위로서, 이긴 말에게 건 사람들에게 수수료를 제하고 건 돈의 남은 돈 전부를 분배하는 방법으로 하는 도박이다.

제11장 창조의 교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성경은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견해이다. 근본적으로 성경이 과학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다른 주제에서와 마찬
가지로 과학의 영역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딤후3:16)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성경은 변할 수 있는 인간의 말이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나타낸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대하여 보다는 창조자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창1:1에서 2:3까지 모든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셨다. 하나님
이 나누셨다. 하나님이 부르셨다. 혹은 칭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 두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쉬셨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창조는 지적인 하나님, 사랑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나타내 준다. 범신론과는 달리 하나님의 그의 피조물과는 다르다(시90:2). 자연신론과는 달리 그는 그의 손으로 만드신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시는데, 그것은 그가
만드신 것을 떠받치고 계시며, 유지하시며, 보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느9:6).
그 외에 나머지 성경에서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계속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면을 알게 한다. 우리는 그 분을 창조자로서 섬기며 예배해야 한다. (사40:26,28,31)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와 다투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사45:9) 우리는 선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이신 그분께 부탁한다. (벧전4:19)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또한 인정한다. (렘32:17)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주이신 사실을 더욱 강조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반복적으로 이것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출20:11, 느9:6, 시146:6, 행14:17, 계4:11, 10:6)

이것은 성경계시의 특별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고대 이방종교나 현대 물질주의와는 달리 성경은 순수한 시작을 가르친다. 대부분의 이방종교는 우주가 어떠한 형태로 신들과 함께 영원히 존재했었다고 가르치는 이원론을 보인다. 이방종교의 신화에서 신들은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창조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선언은 하나님을 다른 우상과 분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96:5)
물질주의자들은 물질과 그의 법칙은 영원하며 모든 존재의 총합계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상을 모두 제외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며, 모든 것이 있기 전부터 존재하신 분이라고 선언한다. (시90:2).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존재하도록 하신 참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성경계시의 중요한 사실은 창조가 삼위일체의 협동적인 일이었다는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신이 그 일부를 담당하는 것을 보인다.(창1:2) 신약은 우리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신 예수가(딤전2:5) 또한 창조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심을 더욱 계시한다. 상속자의 위치에서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먼저 나신 자(The first born)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골1:15) 창조에서 활동적인 집행자였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3) “말미암아”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dia)인데 제2의 집행자에 대한 단어로써 예를 들면 “하나님이 선지자로 말미암아 혹은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셨다.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존재하도록 말씀하신 살아있는 말씀이었다. 그는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그분이었다. 그는 모든 것 이전에 계시며, 또한 보이지 않는 천사의 셰계의 창조주시다.(골1:16) 창조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은 전개와 절정을 나타낸다.

전개와 절정은 창조에 대한 성경적인 성명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개인적인 배려의 증가에서 전개를 볼 수 있다. 채소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땅은 ...내라 하시매....땅이...내니라”(창1:11,12) 짐승에 대하여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즉 “땅은 ...내라 하시고...하나님이...만드시니”(창1:24,25) 그러나 사람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이...창조하시고”(창1:26,27)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사람은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이며 절정이며 인간에게 지배권이 주어졌다.

순서, 균형, 조화, 전개 및 절정에 대한 이러한 모든 증거는 주의 깊고 지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창조했다는 것은 일부 피조물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어떠한 사상도 전적으로 배제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사용하셨고, 항상 통제하셨고(시136:5, 148:5, 사45:12, 48:12,13), 완전하고 잘 계획된 종결에 이르게 되었다.
순서, 균형, 조화, 전개 및 절정에 대한 이러한 모든 증거는 주의깊고 지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창조했다는 것은 일부 피조물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는 어떤 사상도 전적으로 배제한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를 사용하셨고, 항상 통제하셨고(시136:5, 148:5, 사34:12, 48:12,13), 완전하고 잘 계획된 종결에 이르게 되었다. (창1:31)
성경적인 설명은 뚜렷한 창조의 단계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뚜렷한 단계로 그의 계획을 이루신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창조시에 이어지는 날들에 대한 언급과 저녁과 아침에 대한 언급으로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저녁이 되다”라는 말은 이 부분을 끝냈다는 것이고, “아침이 되다”라는 말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창세기 2장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창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창세기 1장에서 언급하지 않은 활동을 확대한 것이다. 즉,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을 단순히 진술한 것이고, 2장은 여섯 번째 창조하는 날에 대하여 더욱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흙을 취하여 사람을 만드시는 것을 본다. 그리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이러한 행동은 사람이 짐승의 생명과 다르다는 것을 가리키고,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짐승으로부터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고전15:39) 흙으로 짐승의 생명을 창조하신 것은(창2:19) 하나님이 사람과 짐승에 대하여 같은 재료를 사용하신 것을 가리킬 뿐이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에게 할 일을 주셨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여자를 만드셨다.(창2:21) 이와같이 이러한 창조에 대한 성경기록은 모든 생명의
형태가 내재하는 힘에 의하여 수행된 점차적이고 점진적인 진화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진화론적인 사상을 배제한다. 또한 그것은 유신론적 진화론을 포함하여 모든 진화이론이 여자 이전의 남자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으며, 남자가 어떻게 여자로 진화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으므로 사람에 대한 진화론적인 근원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 어느 것도 사람이든지, 천사든지, 마귀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듯이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은 또한 확실하다. “창조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바라(bara)”인데 이 동사의 주어는 항상 하나님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하여 사용되며, 하나님이 색다르고, 전례없는 어떤 일을 하고자 하실 때 사용된다. 땅이 반역하는 고라 일당을 삼키기 위하여 입을 벌렸을 때 “새일을 행하사”라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피조물을 택하사”이다.(민16:30).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을 때에도 사용되었다. “내가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bara, 창조하다)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출34:10)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나타내었던 이사야의 시대에 기적과 예언의 성취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새 일을 네게 보이노니 이 일들은 이제 창조된 것이요 옛적 것이 아니라”(사48:6,7)고 하셨다. 이와같이 창세기 1장에서도 “창조하다”는 단어는 완전히 새롭고 전례없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사용된다. 다른 경우에는 만들다.(히브리어 asah)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창조하다(bara)라는 단어는 이와같이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심을 강조하며 그의 창조행위는 독특하고 전례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 목적을 갖고 계셨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잠16:4, 계4:11), 그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사43:7)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땅이 거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원하셨다.(사45:18) 이와같이 모
든 창조물은 그의 뜻과 능력의 표현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창1:26,27) 즉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자아인식 및 자아표현이 가능하다. 도덕적 및 영적 이해력을 가지며,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사람은 예수 안에 완성된 구속을 통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만이 창조물 안에서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창조의 설명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이다.
창조의 설명은 사실적이며 역사적으로 취급되도록 의도되었다.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에 대한 계시와 그의 아들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성격상 역사적인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신약성경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면 첫사람 아담은 역사적 인물로서 인정하고 있다.(롬5:14, 고전15,45, 딤전2:13,14)

어떤 사람은 창세기의 처음 두장은 시가체(poetical)이며 비유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에 대한 시가적인 언급과(신명기32, 33장, 욥38:4-11, 시90, 104:5-9) 비교해 볼때 창세기는 시가체가 아니라 산문체인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시가체는 자주 사실적이고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으며, 시가체의 사용이 사건을 비유나 신화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비록 창조의 사건이 현대의 과학적 용어로 기술되고 있지는 않으나 이 사건들은 특이하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로 주어졌으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확실한 기록을 제공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요약하면 성경이 창조의 각 단계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 우리는 본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저가 말씀 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33:9)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2장 신자의 보장  (0) 2014.04.22
(Q 12) 도박  (0) 2014.03.26
(Q 11) 재정 관리와 신용  (0) 2013.10.12
제10장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견해  (0) 2013.09.19
(Q 10) 유물론  (0) 2013.05.29
재정 관리와 신용

성경은 연장신용장(extended credit)과 같은 개인의 재정 관리에 대해서 어떻 게 말하는가?
또한 기독교인은 개인의 빚을 갚는 것에 대하여 어떤 책임이 있는가?

열 한 번째 질문 
비록 성경이 오늘날 우리들과 매우 다른 문화와 사회에서 씌어졌지만 그것의 원칙는 영원한 것이며 또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지침과 진실 중에 서 어떤 것들은 우리들의 개인 재정 및 사업 거래에 적용됩니다.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만큼 수입을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 도전이 될 수 있는 데, 그것은 특별히 새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인플레의 위협, 우리들이 빌리는 돈에 대한 금리, 경제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결정,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휘발성 주식 시장,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직업의 유지, 가족에 대한 의무,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기대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시간과 돈에 대하여 고 려해야만 합니다.

위에 나열한 대부분의 항목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항은 소비를 수입 이내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

실상은 하나님께 10%의 십일조 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수입의 90% 이내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 항목의 끝에 있는 관심 사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복잡한 일들과 예상하지 못한 비용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훌륭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돈 이상은 쓰지 않는 것과 같이 간단할 수도 있고, 미래의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매주 그리고 매달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마서 13:8)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입니까? 그 구절의 문 맥과 나머지 구절은 빚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주된 적용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 었느니라.”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빚을 갚지 않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재정적인 빚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구입했을 때, 혹은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구입했을 때, 그 계약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지불을 하는 한 아무 빚도 없습니 다.

그러나 만일 약속한 시간에 지불을 하지 않는다면, 구매자는 빚을 지게 되며, 그러한 경우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바울의 훈계를 위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원래의 계약 기간을 지킬 수 없다면, 기독교인으로써 해야만 하는 일은 채권자에게 문제를 설명하고 새로운 계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해 연락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조정할 수 없다면, 지불해야할 의무를 가진 그 구매자는 빚쟁이가 됩니다. 할부 구입은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치품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기 위해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약에 따라 돈을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용으로 필수품을 사는 것은 실제로 투자가 될 수 있습니 다. 수년간 월세를 지불하는 것은 물을 땅에 부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집 을 구입하기 위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만 행해져야 합니다. 만일 일이나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 차가 필요하다면, 그것 역시도 적절한 신용 구입이 됩니다. 만일 신용카드로 불필요한 것을 구입한다면, 매달 구매한 것에 대한 모든 금액을 갚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 다. 기독교인은 반드시 좋은 평판이 있거나 “칭찬 듣는” (사도행전 6:3) 사람이어서, 그 의 정당한 빚을 갚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을 사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시편 37:21). 연 장신용(extended credit)에 의한 중요한 구매는 흔히 담보물이 보증이 되기 때문에, 구매 자가 지불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빚을 없애는 대신에 대금업자가 그 구입한 물건을 다시 가져갑니다. 계약에 따라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을 갖는 것은 기독교인의 정직성에 위반되는 것이며, 그것은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빌리는 것을 허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5:41; 누가복음 6:35). 그러나 신자는 신용대부(크레딧)를 매우 주의 깊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개인이나 가족의 예산을 가지고 정기적 지출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잠언 저자의 지혜로운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 (잠언 23:4) 그리고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언 28:20). 돈과 소유물을 취급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관심사:

우리들은 도덕과 윤리가 추락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의무를 피하는 수단으로 파산과 파산법 절차(chapter 11 proceeding)를 사용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많은 사람들의 사는 방법이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인도 이러한 길을 따라야 하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보다 높은 규약에 의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재정, 신용, 빚, 그리고 기독교 가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사치품으로 생각되곤 하던 것을 필수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정은 그들이 필요로 느끼는 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일을 해야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의 영적 성장은 사랑하는 부모가 함께 있지 못하는 대신에 사 주는 더 크고, 더 좋은 장난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실질적으로 가정에 필요한 것 이 무엇인지 합의할 것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어린이들의 복지는 모든 가정의 결정에 최 우선으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시편 127:3). 돈이나 소유물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관심사는 그들이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형편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재정이 허락할 때에 주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드리려고 계획합니다. 또는 그들은 신약성경 어디에서 기독교인들이 십일조 를 드려야만 한다고 요구하는지 질문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구약성경의 말씀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십일조에 대해서 계속해서 명하시는 동시에, 또한 그들이 더 중요한 의(義)와 인(仁)과 신(信)(마태복음 23:23)에 대한 것은 순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한 것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십일조를 드릴 때보다 드리지 않을 때가 재정적으로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산을 세우고 지출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돈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깁니 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역자 첨부: 연장신용장 (extended credit) - 수출업자의 자금조달편의를 위하여 신용장개설 의뢰인의 요청 으로 상품을 선적하기 전에 수익자가 신용장개설 은행 앞으로 무담보어음을 발행하면 이것을 통지은행이 매입하고 무담보어음이 발행된 후 일정 기간 내에 해당상품에 대한 일체의 선적서류를 어음매입은행에 제공할 것을 조건으로 한 신용장을 말함.





기독교인의 성품과 현대의 쟁점들에 대한
하나님의성회의 관점 Q/A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12) 도박  (0) 2014.03.26
제11장 창조의 교리  (0) 2013.11.26
제10장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견해  (0) 2013.09.19
(Q 10) 유물론  (0) 2013.05.29
제9장 영원한 심판  (0) 2013.05.21
제10장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견해

하나님의 성회의 안수에 대한 견해는 성경의 원리에 기초를 두며 복음주의적인 견해와 일치한다.
다음과 같은 특징은 하나님의 성회 견해에 포함된다.

안수는 공적인 의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 공적인 의식에 의해서 교단은 하나님의 성회에서 사역하고자 하는 사람의 소명과 임무와 자격을 인정하며, 교단의 축복과, 교제와 기회를 베풀고, 그의 헌신과 성실과 충성을 받아들이며, 성공적인 생애와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주심을 기원한다.
안수식은 성직적인 것보다는 영적이며 기능적인 것으로 거행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리 부르시고 임무를 맡기신 사실에 대한 공적인 인정으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동등하다. 그러나 목사는
특별한 전임봉사와 지도력을 위하여 따로 세운 자이다. 필요한 경우에 평신도가 주정부가 안수받은 목사를 요구하는 것을 제외하고, 목회의 모든 기능을 행할 수 있다.

안수는 6가지 기본적인 자격에 대하여 지원자를 세밀히 조사한 후에만 이행할 수 있다.
1. 그의 기독교 경험의 순수성
2. 그의 영적, 도덕적, 감정적, 그리고 사회적인 성숙도의 충분성
3. 그의 소명에 대한 진실성
4. 그의 교리에 대한 정확성
5. 그의 준비와 실제적인 능력의 적합성
6. 교단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그의 의무의 수락 정도

목회를 위한 권위와 능력은 안수식을 거행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직접 전달된다. 안수식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그룹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구일 뿐이다. 역사적인 사도직의 계승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즉각적인 영적 관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교회의 살아계신 주께서 오늘 날 그의 몸 안에서 직접적이고 역동적으로 임명하고 계신다.
안수는 지역교회의 차원을 벗어나 전 교회에 대한 관심 가운데 행해진다. 이것은 목회 영역에 있어 국제적이었던 사도들이 다섯 개의 신약적 안수식을 개별적으로 관장하였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회 안수식은 더불어 총회장에 의해 지역총회 차원에서 거행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회 본부총회의 실행위원회에 의해서 인준되며 총회장과 총회 총무에 의해서 서명된다. 또한 각각의 신약교회 의식에 목사들이 참여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성회 안수식에도 실행위원들과 다른 선배목사들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일에 관여한다.
하나님의 성회는 형식적인 의식보다는 안수식의 영적인 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하나님의 성회 안수식은 금식과 기도 그리고 손을 얹는 것, 설교, 책임, 신약교회의 안수식에서 보이는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다.
안수는 딤전 3:1-7과 딛1:5-9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교회에 주신 복음선포 유형의 사역 중 한 조건을 구비한 남자와 여자에게 가능하다. 이것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감독과 장로)이다. 청소년 지도자, 음
악 혹은 기독교 교육의 지도자로서 사역의 조건을 구비한 사람들은 기독교 사역자 증명이나 특별한 자격증에 대한 자격은 부여할 수 있으나 기본적인 복음 선포목회 사역의 조건을 구비하지 않는 한 안수를 받을 수 없다. 임시의 사역조건(집사)을 구비한 사람들은 자격증 없이 종신 봉사자로 임명된다.

안수의 유익

1. 목사에 대한 유익
첫 번째 유익은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 지적 그리고 목회적 성숙도의 높은 차원을 나타내주는 목표로서 작용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수받은 목사는 이러한 모든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계속 성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익은 자신의 기독교 경험의 순수성, 자신의 영적, 도덕적, 감정적 그리고 사회적 성숙도, 자신의 소명에 대한 진실성, 교리에 대한 정확성, 준비와 실제적인 능력의 타당성, 교단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자신의 의무의 수락 정도 등에 대해 협력하여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안수를 통하여 제공된다.

세 번째 유익은 안수로 인하여 두 번째 유익에서 언급된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개인적 그리고 직업적 성숙도와 유효성에 대한 목표이며 시험이며 증언이 된다.

네 번째 유익은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서 목회할 수 있는 기회를 안수를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이다. 안수는 목사, 복음전도자, 행정가, 교사, 기관목사(Chaplaincy) 그리고 다른 사역에 있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요한 열쇠이다.
따라서 교단 내에서의 사역은 자신의 사역의 열매가 보호될 것이라는 합리적인 보증을 제공한다.

다섯 번째 유익은 안수가 장례식, 결혼식 그리고 마을, 주 혹은 연방의 위원회나 기관에서 봉사하는 특정한 기능에 대한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자격을 부여한다.

여섯 번째 유익은 안수가 목사로 하여금 교단의 생활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즉 정책과 프로그램의 형성을 도우며 지원하고, 교리를 가다듬으며 직분을 맡는다. 그리고 그 외에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유익이 많이 있다.

2. 교단에 대한 유익

첫째 유익, 교단의 사역이 순수한 기독교 경험과 자신의 소명에 확신을 가지고 효과적인 사역을 위하여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포함하도록 보장함으로써 교단에 유익이 된다.

둘째 유익, 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성경내용과 교리에 대하여 충분하고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는 사역을 보장하기 위한 검문소 역할을 함으로써 부조화를 방지하기 때문에 교단에 이익을 준다.
마지막으로 교단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성회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수준 이상의 지식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게 됨으로써 교단에 유익하다.

안수를 위한 자격
딤전 3:1-7과 딛1:5-9에서 말씀하는 감독에 대한 자격은 하나님의 성회 총회헌법과 조례에서 취급하는 자격과 더불어 오늘날 모든 목사들에 대한 기준이다.
이에 덧붙여 다음의 특징들은 안수 목사를 위하여 추천되는 것이다.

1. 영적 특징
다음의 영적 특징은 대부분의 생산적인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경건한 영, 사랑(하나님과 사역과 사람에 대하여, 살전1:3, 딤전6:11,12, 요일3:16), 믿음(롬(12:3-8, 고후3:5,6, 5:18-20, 엡3:7, 4:11, 골1:23-29, 살전1:3), 겸손(잠15:33, 롬12:3) 확신(유3), 헌신(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김), 봉사의 영(섬기고자 하는 자세,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며 잘 되기를 갈망함), 충성(고전4:1,2, 시간 관리하는 면에서, 영적 준비성에 있어서,
사업의 일 등에 있어서).

2. 도덕적 특성
다음과 같은 도덕적 특징은 대부분의 생산적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성실성(기본적 정직성과 인격의 온전함, 영적인 정직(시51:6), 지적인 정직, 설교와 매일 부딪치는 일에 있어서 정직성 및 도덕적 순수성(사52:11, 갈12:10,
2:11-14, 딤전6:11-14, 딤후1:7,9).

3. 감정적 특성
사역에 있어서 비능률과 실패는 건강이 나쁘거나, 도덕적 탈선이나 훈련, 교육 혹은 재능의 부족 때문인 경우보다 감정과 인격의 결함에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감정적으로 건전하고 자아이해에 있어서 아주 성숙해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만일에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제나 극심한 기분의 진폭, 성격적 갈등, 혹은 강박관념이 있으면 그것은 그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 자세 뿐 아니라 강대상에서의 자세에 크게 악영향을 줄 것이다. 적어도 다음 일곱가지 인격의 감정적 특징은 목사에게 중요하다. 성화된 기질(갈5:22,23), 균형감각(유머어와 진지함 사이의 균형), 정열, 현실주의 미적 감각(발4:8, 딛1:15), 동정(롬12:15, 히5:1), 인내(롬5:1-5, 벧후1:5-8)

4. 지적특성
다음과 같은 지적 특징은 목사들에게 중요하다. 면학성, 조직력(합리적으로 잘 조직할 것), 절제성(급진적인 극단에 비하여, 고전9:25, 갈5:23, 빌4:5, 딛1:8, 벧후1:6), 논리성, 상상력, 집중력, 기억력(요14:26) 및 지혜(약1:5)

5. 사회적 특징
목사들에게 필요한 사회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사교성, 인간성에 대한 지식, 편견이 없을 것, 협동적 자세, 융화적 성질, 권위에 대한 존경,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성질 및 충성심(가정, 교회, 교단, 동료 및 친구에 대하여)

6. 실제적인 특성
목사가 사역의 기능을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생산적인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이다. 목사가 자신의 두뇌를 계발시키기 위하여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나, 자기의 입과 손을 계발하기 위하여 실천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 목사는 설교와 교육, 예배, 의식집행, 목회적 돌봄 및 행정들의 기능에 필요한 영적이며 실제적인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안수의 과정
하나님의 성회의 안수는 질서정연한 과정을 밟는데 그 과정은 규정된 중요 서류 심사, 목회적 차원의 승진(인정받은 전도사로서 2년이상 목회에 종사한 후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역자주), 시험, 안수식으로 되어있다.

1. 조직체로서의 구조와 안수
목사 안수에 관련된 교단 내의 중요한 사람들은 그의 담임목사, 지방회장, 지방회 임원회, 지역총회 총회장, 그리고 지역 총회 실해위원회 등이다. 담임목사는 지원자를 영적으로 돌보며, 사역을 위해 훈련시키며, 실행위원회나 고시위원회에 추천하는자로서 이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된다. 지역총회 안수위원회는 지원자를 최종적으로 심사하며, 지역총회 총회장과 실행위원회들은 그를 안수한다.
하나님의 성회 본부총회 실행위원회는 지역총회에서 이루어진 안수를 인준하
며, 본부총회 행정위원회는 안수증서에 서명과 인을 침으로써 안수에 대하여 증인이 된다.

2. 안수절차
하나님의 성회에서 안수받고자 하는 사람은 담임목사와 상의한 후에 담임목사로부터 지방회장 앞으로 보내는 추천장을 받아야 한다. 지방회장은 지원자에게 지역총회의 추가 자격을 위한 신청서를 기입하도록 배려하고, 지방회 임원회는 이를 심사한다. 그들의 인준을 받게 되면, 지역총회는 그에게 초기 자격(initial credential)을 부여한다. 그는 적어도 2년이상 전도사 수준에서 인정할만한 사역을 유지해야하며, 안수 받기 전에 적어도 23세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인격
적으로, 직업적으로 그의 성숙도를 보장하기 위함이다.(초신자는 안된다. 딤전3:6) 안수를 위한 신청서가 지방회장 앞으로 제출되면 다시 지방회 임원회는 그를 심사한다. 여기서 인준이 되면 지역총회의 안수위원회의 면접이 허락되는데
거기서 다시 그를 심사하게 된다. 여기서 인준되면 지역총회에서 안수를 받게 되고 본부총회로부터 안수증서를 받게 된다. 이 자격증서(credential)는 매년마다 목사가 질문서에 기입하므로써 갱신되는데, 이 질문서는 지역총회와 본부총회가 보관한다.

3. 안수를 위한 고시
지방회 임원회나 지역총회 안수 위원회는 필기시험과 구두면접을 통해 다음 사항에 의거하여 지원자를 심사한다.

1) 기독교 경험의 순수성
2) 사역에 대한 소명의 진실성
3)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인 성숙도의 충분성
4) 성경내용과 교리에 대한 이해의 충분성과 적합성
5) 그의 준비와 실제적인 능력의 적합성
6) 교단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의무와 지식의 정도

4. 안수식
하나님의 성회는 형식적인 예식보다는 안수식의 영적인 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성례전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우리의 말과 손에 의하여 초자연적인 은혜와 능력이 전달된다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가 안수받는 사람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은혜와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으며,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와같이 안수식은 안수받는 자가 부르심을 받아 임무를 받았으며 성숙한 사역을 위한 자격이 있음을 공적으로 알리는 것 외에, 목사가 자기의 생애를 완전히 헌신하며, 봉사를 위한 최상의 은혜와 능력을 받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안수의 책임들
순수한 복음사역에 대한 안수는 관계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책임있는 단계이다. 엄숙한 책임이 안수하는 교단에게 주어지며, 안수받는 목사에게와 안수받는 자가 섬기게 되는 당사자들에게 주어진다.

1. 교단의 책임
6가지 심사해야 할 사항에 나타난 바대로 성경적인 자격에 상당히 적합한 목사만을 안수하는 것은 교단의 책임이다. 그 안수 받은 목사들 가운데 개인적인 경건생활과 목회적인 숙련도에 있어서 수준을 높이도록 권하는 것도 교단의 책임이다. 그 안수받은 목사들 가운데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 지적, 직업적인 성장을 위한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교단의 책임이다. 열매가 풍성한 사역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교단의 책임이다.

2. 목사의 책임
6가지 심사기준에 나타난 바대로 성경적인 자격에 대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힘 입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자격을 획득하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주님께서 그를 도와 획득할 수 있게 하시는 최고 수준의 개인적 경건생활과 목회의 숙련도를 유지하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스스로 점검하며 계속적인 성장의 자극제로서 매년 안수질문서를 기입할 때 마다 안수의 정의, 성경적인 자격, 심사의 6가지 기준을 재검토하는 것이 좋다. 자기가 사여하는 사람들과 교단에게 그리고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봉사가 되게 하기 위하여 헌신과 사랑, 믿음, 기름부음 및 충성으로써 사역의 기회에 들어가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3. 사역 대상자들의 책임
한 목사가 사역하는 대상자들의 책임은 다음과 같다.
1)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받아들이라.(눅10:16, 고전4:21, 갈4:14)
2) 그를 위해 기도하라(롬15:30, 고후1:11, 엡6:18,19, 히13:18)
3) 그를 사랑하며 존경하라(고후8:7, 살전3:6, 5:12,13)
4) 그를 따르며 복종하라(고전11:1, 16:16, 빌3:17, 히13:7,17)
5) 그를 재정적으로 관대하게 지원하라(고전9:7-14, 갈6:6, 딤전5:17,18)

안수사역의 질을 높이기
복음사역보다 더 가치있고 귀한 목적을 지닌 직업은 없다. 안수는 성숙에 대한 목표이며, 시험이며, 증거일 뿐 아니라 생활과 사역에 있어서 능력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몇 가지 점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다음의 제안은 안수받기 위한 과정 및 그 후의 일들을 통해 사역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1. 처음으로 자격(credential)을 받는 사람은 안수에 관한 본부총회 정책방침서(position paper)의 사본을 받게 되는데 안수를 진척시키면서 주의 깊게 읽어 보아야 한다.

2. 자격 심의 위원회(credential committee)는 맡은 바 일을 진지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그들은 누가 안수를 받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행13:2, 14:26, 20:28) 그들은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의
문이 가는 지원자에 대하여 일년 혹은 그 이상 마지못해 유예기간을 연장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기독교 사역증명이나 모든 승진에 대한 지원자들을 이 책에서 반복해서 다룬 6가지 점에 대하여 세심하게 조사하여야 한다.

3. 인격, 감정문제, 인간관계에 대한 견해, 영적 및 실제적인 일등에 한 광범위한 설문서를 개발하여 실해위원이 자격이나 승진의 기회를 찾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야한다. 이러한 설문서는 실행위원이나, 자격 심사위원 혹
은 위촉된 지방회 상담자가 상담시간의 기본적인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설문서는 위원회에 의해 장점, 단점, 추천 등의 메모를 기입할 수 있는 여백을 지닌 목사의 서류철에 있어서 작업표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지원자가 안수를 받을 때까지 보다 나은 분석, 지속성 그리고 사후관리에 기여한다. 이것은 지원자가 안수 받을 때까지 비밀로 보관하며 그 후에는 파기한다.

4. 안수가 예상되는 목사에게 그의 수습기간에 교리에 대한 신조 및 사역의 기능에 대하여 쓸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지방회장과 지방회 임원회가 읽고 지원자가 안수받을 때까지 서류철에 보관하였다가 본인에게 돌려준다. 위에서 언급한 신조와 설문서는 지원자가 자신을 이해하며 자신의 믿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돕는 일에 사용된다. 또한 이것들은 자격 심사위원회로 하여금 지원자의 인격, 믿음, 장점 및 필요한 것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한다. 이것들은 지원자가 합격해야하는 시험으로서가 아니라 지원자의 상담과 성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5. 담임목사와 지방회장과 지방회 임원의 일을 보충하며, 지방회 차원의 목회상담에 임할 때까지 철해둔다. 목회 상담은 반드시 깊이 있고 장시간 상담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으로 숙련된 상담자일 필요는 없다. 성숙한 목사들이 돌아가면서 상담을 해줄 수 있으며, 퇴직한 목사나 현역 목사들을 이 일에 임명할 수 있다.
이런 원로목사들은 다년간 경험을 통해 우수한 상담을 제공할 수 있으며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약간의 보수를 받으면서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에게 매우 긴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특히 젊은 목사와 그 동료들이 그들의 생활과 사역에 대한 도움의 필요성을 인정함에 따라 더욱 긴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역은 실행위원의 짐을 덜어주며, 젊은 설교자들에게 개인적, 가정적, 사역적인 성장을 이룩하는데 도움이 되고, 성회 내에서 조화와 진보를 증가시키는 일에 도움이 된다.

6. 안수식을 진실로 중요한 영적 경험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금식과 기도가 표준 과정이었음을 안다. 우리는 손을 얹는 외적인 상징에 머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안수식에서 금식과 기도의 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행13:3)

7. 기본적이며 지속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안수를 위해 공식적인 학문이나 학위를 요구하지 않으나(1951년 총회에서 의결) 교단은 사역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확실히 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 안수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회 성경대학 졸업생들이다. 정규 신학교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연장교육, 통신교육, 강습소, 세미나 및 독서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공부할 것이 요청된다.(딤후2:15)

8. 모든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성회 성경대학, 신학교, 강습소 등) 실질적인 영적, 도덕적, 윤리적, 감정적, 사회적, 지적 및 실제적인 일을 강조한다.

9. 하나님의 성회 성경대학과 신학교는 인격적으로 성숙하며 감정적, 사회적, 영적 생활에 있어서 성숙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행정요원과 교수요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또한 이 사람들은 성경의 거룩함, 오순절적 특성, 교리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의 정책과 프로그램 등에 헌신되어야 하며, 목회사역의 성공, 계속적인 기름부음, 사역에서의 활동성 그리고 목회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주제들에 대한인지 등이 입증된 사람이어야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1장 창조의 교리  (0) 2013.11.26
(Q 11) 재정 관리와 신용  (0) 2013.10.12
(Q 10) 유물론  (0) 2013.05.29
제9장 영원한 심판  (0) 2013.05.21
(Q 9) 일의 윤리  (0) 2013.05.05
유물론 유물론과 세속성에 대한 성경의 위치는 무엇인가?

열 번째 질문 

하나님의 성회는 창설 초기부터 일상생활의 필요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 주님께 사랑의 표현으로 헌신적 헌금을 드리고, 또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것 보다는 영적 가치에 대한 성경의 주제들에 대해서 강조해왔습니다. 우리들을 세상으로 이끌며, 영 원한 진리와 가치로부터 멀리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모두 세속적인 것입니다. 물질주의, 혹은 세속적인 소유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받는 가장 강한 유혹 중의 한 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부(富) 그 자체를 견책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하나의 선물과 축복으로 인식되며, 특별히 그것을 구하지 않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열왕기상 3:13). 그러 나 성경에는 부의 위험과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부는 부 그 자체를 위해서 축적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정 또는 탄압을 통해서 얻어져서는 안 됩니다. 부는 흔히 탐욕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 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단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가 난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 그리고 압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죄 를 짓는 것입니다 (에스겔 22:29). 관대함은 기독교인이 부를 사용하는 표시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부유함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본적인 음식, 의 복, 그리고 거주지를 위하여 필요한 것보다 더 가지고 있을 때, 우리들은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부유합니다. 부와 물질에 대한 유혹은 부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들이 가지는 욕심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는 욕심은 유물론에 대한 징후 입니다.
세속적 사회는 항상 부와 물질의 소유에 높은 값어치를 두어왔습니다 (누가복음 16:9,11에 기록된 불의의 재물).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 교회의 성격을 나타내야 하는 영적인 우선권을 착색하고 침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부나 소유물을 축적하지 않고, 겸손하고 낮은 신분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쳤는 데,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 음 6:25-34).
신약 성경이 부자에 대하여 강력한 권고와 경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은 물질적 빈곤함이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추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 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은 고통을 완화시키는 그들의 노력 가운데 기독교 인의 노력을 칭찬했습니다. 어떤 초대 기독교인들은 부유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부유한 것이 충분할까요? 유물론은 “조금만 더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예는 모든 신자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의 중년에 요한 웨슬리는 그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 매년 얼 마가 필요한가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활비를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유 지하겠다고 서약했으며, 후에 그의 많아진 수입은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 의 성회는 모든 회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하여 좋은 청지기가 될 것을 격려합니다.

관심사:

현대 사회로부터 받는 심한 압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들의 성경적 가치와 삶의 우선순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압력은 물 질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평가, 성공의 상징으로서 물질의 축적, 상류상회로 진출하려고 하는 노력(pursuit of upward social mobility), 그리고 당장 만족을 취해야만 하는 것 (fixation on immediate gratification)을 포함합니다. 공생애 동안에 이 땅위에서 가지셨 던 예수님의 삶은 오늘날의 여러 문화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자세와는 매우 대조적이었습 42 니다. 마가복음 8:31-38의 “복음의 역설”은 생명이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 에 기초하여 사는 제자직분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 니다. 왕관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희생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한 부분이어 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회의 위치를 보여주는 선언문 “신자와 긍정적(적극적)인 고백”은 성경적 가르침을 어떤 은사주의 모임에서 인기 있는 유물론적 “믿음 가르치기 (faith teaching)”와 구분하는 명확한 선언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자들을 물질과 재정적인 성공으로 축복 하셔서 그들이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 나 물질적 성공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부를 내려줌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 한 것을 하나님이 승인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별로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와 유물론에 관 하여 주의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소유물을 유 연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믿고 맡기신 것들에 대해 좋은 청지기가 되는 부 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면에, 가지고 있지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탐내고 움켜 쥐려 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갖고 있지 않은지가 아니라, 참된 경건의 삶을 이끄는 것은 무엇이 그 사람이 삶에서 우선순위냐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7-19).

* 위에 기술한 선언은 “신자와 긍정적인 고백”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11) 재정 관리와 신용  (0) 2013.10.12
제10장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견해  (0) 2013.09.19
제9장 영원한 심판  (0) 2013.05.21
(Q 9) 일의 윤리  (0) 2013.05.05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5.02
제9장 영원한 심판

영원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입장을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 선언”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 15항, 마지막 심판 :

악한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그들의 행한 대로 심판받는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마귀와 그 사자들 그리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영원한 심판으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 에 던져질 것인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마25:46, 막9:43-48, 계19:20, 20:11-15, 21:8) 여기서 우리는 심판이 마귀와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둘째 사망이라 불 리는 불못에 있는 것임을 주목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정의하고 설명을 하고자 한다.

악한 자는 사단과 운명을 같이 나눈다.

성경은 불못이 사람을 위해 예배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되었다고 말씀한다.(마25:41)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셨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좋게 창조되었다.(창1:31). 율법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 여 주어졌다.(신6:24)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 3:9) 사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선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역사하신다.(롬8:28)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단이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더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못에 그를 가두러 놓으실 것이다.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의 운명을 같이 나눌 것이다.(요16:8,11)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사단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요8:44)
사단이 받는 벌을 함께 받는 사람들은 “악인”이라고 한다.(마13:49,50) 이것은 그 행동이 악하고 가치 없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자이며(믿음이 부족하여 비겁하게 행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 들이며, 흉악한 자들이며(혐오스럽고 진저리나는 사람), 살인자들이며, 행음자들이며, 술객들이며(마술을 사용하는 사람과 마약을 쓰는 사람), 우상 숭배자들이 며,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계21:8, 마8:12, 13:41,42, 22:13, 23:15, 25:30,33, 눅13:27, 계21:27, 22:15 참조) 바울은 이것을 구원에 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와 복음을 계속적으로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자라고 요약하고 있다.(살후1:8)

악한 자의 심판은 끝이 없다.

“근본진리의 선언”에서 주어진 첫 번째 성경 인용문인 마25:46에서 “영(헬라 어, anonion)벌”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절대적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영원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 똑같은 말을 “영(헬라어, aionion)생” 이라는 말에서 사용하는데 여기서 이것은 직접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전자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생명 이 영원한 것처럼 그 벌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악인을 회복시켜 주 겠다는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25:41에서 그 벌은 “영원한(헬라어, anionion)불”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악인이 죽은 후에 가는 중간상태를 하나의 불로서 특정짓고 있다. (Hades, hell, 눅16:23,24)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있을 불과 구분해야 한다. 눅 16장에서 예수의 말씀은 악인이 의식이 있는 상태이며,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 으며,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영원한 불 은 예수께서 게헨나 혹은 “불의 게헨나”라고 부르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마 5:22,29,30, 10:28, 18:8,9, 23:15, 막9:43,45,47, 눅12:5) 이 불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꺼지지 않는 특성을 가졌다. 이것은 그 불이나 벌이 끝날 수 있는 가 능성이 전혀 없음을 가르친다. 그 형벌은 불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만일에 불 이 악인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라면 불이 영원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는 같은 불을 “풀무불”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13:42,50),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가는 비참한 후회는 “멸망의 자식”으로서 영원한 파멸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요17:12, 행1:16-20) 예수께서는 이렇게 울며 이를 가는 것을 “바깥 어두 운데서” 일어나는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마8:12, 22:13, 25:30) 이 어두움은 최종적인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새 예루살렘의 빛이신 어린 양과의 분리를 가리 키는 것이다.(계21:23)
또 다른 신약성경 구절은 영원한 벌은 영원한 심판으로 언급한다. 즉 영원토록 유효한 심판이라는 뜻이다.(히6:2) 여전히 다른 구절은 “침륜”(문자적으로 파괴, 사망, 분리를 의미함) 그리고 “멸망”(영원한 사망) 이라고 말한다.(딤전6:9) 이러 한 “영원한 멸망”(혹은 분리)은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능력의 영 광으로부터”의 분리이다.(살후1:9) 이러한 구절들에서 “사망”이라는 단어는 영 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죄인은 현재도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이며, 그리스도와 분리되었거나 그리스도가 없는 자이다. (엡2:1,12) 영원한 심판은 최종적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둘째사망 

성경은 이렇게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둘째사망”이라고 부른다. 요한계시 록에서 불못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계20:14) 예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게헨나 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눅12:4,5)고 경고하셨을 때 예수께서 는 게헨나를 둘째 사망과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육체적인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죽음은 상태나 종류에 있어서 판이 하게 다르다. 육체적임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적 인 죽음이 몸에서와 우리의 생활환경에서의 분리라고 한다면, 둘째 사망은 하나 님으로부터와 새 창조에서 맛보게 될 생명으로부터 최종적이고 영원한 분리이다. 이 둘째 사망에 던져지는 사람 중에는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있다. (계14:9-11) 이 사람들은 천사들과 그리스도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즉 봇물에 갇혀서 새로운 창조물과 격리되어 있지만 나사로가 음부 (Hades)와 아브라함 몸 사이에 있는 깊은 구렁을 건너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거부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눅16:23) 그들은 결코 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그 고난의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 다....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로다.”(계14:11)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 문이다. 이들은 영원히 성도들에게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 중 어느 것도 최종적인 심판이 선언된 뒤에 복구시키거 나 회복시키는 것을 약속하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볼못이나 게헨나와 관련하여 신성한 기관은 나타나 있지 않다. 불은 막9:44,48의 구더기와 병행하고 있다. 그것은 깨끗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형벌로서의 붙인 것이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기회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흔들어 깨워“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며 외치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고후6:2)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0장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견해  (0) 2013.09.19
(Q 10) 유물론  (0) 2013.05.29
(Q 9) 일의 윤리  (0) 2013.05.05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5.02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4.20
(Q 9) 일의 윤리

왜 개인의 이니셔티브(主導)와 강한 직업윤리가 기독교인과 일반 사회에 대하 여 그토록 중요한가?

아홉 번째 질문 

어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벌이 일이라고 느낍니다. 아담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얼굴[에] 땀 을 흘[려]” (창세기 3:19) 수고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을 유익하고 생산적인 것이며 심지어는 창조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창조하시고, 지으시 고, 세우시고, 또 심으셨습니다 (창세기 1:1, 2:7,19; 시편 127:1; 아모스 9:15). “모든 일 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창세기 2:2). 그리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습 니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 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2,13). 바울은 여러 번 그들에게 게으르지 말 것에 대해서 경고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4; 데살로니가후서 3:6,11). 그러나 성경에 일은 결코 모든 인간을 위해 마련된 소중한 활동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은 타락한 세상의 체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즐거운 활동으로 나쁘게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더 많은 여가를 갖기 위해서 또는 더 나은 생활수준을 갖기 위해서 부를 축적하는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은 이러한 점에 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일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성경은 일을 회피하는 사람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고 말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하는 대신에 웰페어를 받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성경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현대의 일의 모양에 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은 일에 대해서 어떤 매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러한 말씀을 참고로 해서 오늘날의 일터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는 동물을 다스리고 에덴동산을 돌보는 특정한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은 그들의 농업과 경작을 통하여 얻은 것의 소출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일상생활에서의 일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게으름과 도둑질을 비난하고 유용한 일의 활동을 격려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28). 그는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든지 있을 것을 기대할지라도 계속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4).

성경에는 일에 대한 어떤 귀천함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정직한 노동에 대해서는 칭찬을 합니다.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과 기술직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나 육체적 노동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적게 받는 직업 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닙니다. 직업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 일꾼은 그 일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받은 특별한 은사로 보아야만 합니다. 기독교인 부모는 지시하는 일과 본을 보이는 일을 통하여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자녀들에게 양심적으로 가르쳐야만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간단한 “일”을 맡기고 좀 더 큰 아 이들에게는 더 책임감 있는 일을 맡기는 방법은 본을 보이는 일의 아름다운 시작입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적당한 용돈을 지불하는 것도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이러한 것이 뇌물을 주는 것과 같이 느낄 수 있으며, 어린이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느낌이 없이 일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 대해서 심지어 적은 금액이라도 지불하는 것은 “ 일”의 경험에 대한 동기유발과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관심사:

일에 대한 세상의 태도가 기독교인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필요한 것으로 보는 대신에 기독교인의 의무가 전도서 9:10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그가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은 고귀하고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지상 대 명령과 같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입니다. 적극적인 태도는 가장 실증이 나는 일을 부담이 별로 되지 않는 일로 만들 수 있습니 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환경을 달가워하지 않는 동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인 태도에 결코 굴하지 마십시오. 적극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생각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들은, 비록 그 일이 매우 만족 스럽고 성취감을 주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감독이나 상사에게 하는 것처럼 일을 하지 않 고, 주님께 하는 것처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삶의 모든 곳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야만 하며, 보통 한 주일의 약 25%를 차지하는 일터도 예외가 되어서는 않됩 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10) 유물론  (0) 2013.05.29
제9장 영원한 심판  (0) 2013.05.21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5.02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4.20
제8장 집사와 이사  (0) 2013.04.16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잠긴동산 ㆍ 2013-05-01 (수) 08:40 IP: 67.xxx.142 ㆍ조회: 53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왜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는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사용의 절제를 옹호하는 가?
왜 그것의 절도 있는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가?

여덟 번째 질문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역사적으로 고린도전서 6:19-20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는 이 말씀과 다른 말씀은 술, 담배, 또는 마약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로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 전을 더럽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1) 현대 사회는 이 세 가지 중독성 물질의 파괴적인 결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2) 이러한 물질, 특별히 술과 마약은 심지어 소량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흔히 파괴적 중독성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노아의 술 취함은 그의 가정에 수치를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9:20-27). 롯의 술 취함은 그의 두 딸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야기시켰습니다 (창세기 19:30-38). 술 취한 아하수에로는 공중 석에서 왕후 와스디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에스더 1:9-22). 술의 소비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불을 붙이며, 폭력을 초래합니다 (레위기 10:8-11; 잠언 20:1; 23:19-35; 31:4,5).

술중독과 그것과 연관된 우울증은 흔히 도덕적 저해(沮害)의 와해, 무분별한 혹은 포악한 행동, 또는 양심의 상실(술 취함)에 이르게 합니다. 장기간의 음주는 간, 췌장, 뇌, 혹은 심장을 완전히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마시는 폭음은 순식간의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천 4백만 명이 술 취함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치명적 자동차 사고의 절반은 음주 운전자들에 기인합니다. 매년 술과 관련된 사고, 병, 강력 범죄, 그리고 노동시간의 손실은 천억 불을 초과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불법 약물 (마약)

비록 마약의 사용에 대하여 성경에 특별히 언급이 없지만, 마약 사용자와 사회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은 음주의 해로운 결과를 훨씬 초과합니다. 어떤 마약의 중독성은 매우 강력하여서 단 한 번 사용할지라도 그 사람을 평생 동안 마약 중독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용하는 사람의 장기와 정신적 수용능력에 미치는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손상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마약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위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개인의 대인 관계와 영적 행복을 파괴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삶을 극단적으로 소모시키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약 중독으로 인한 개인의 손상 이외에 마약은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비참한 짐을 지웁니다.
술과 불법 약물의 사용은 가정 폭력, 거리와 직장에서의 격노, 아동 학대, 자살, 그리고 여러 가지의 사회의 다른 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한 요인이라고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중독과 마약중독은 우리 사회 기간(基幹)의 파괴를 위협하는 국가적 위기를 제공합니다.

담배

담배를 피우고 씹는 것이 그 사람의 판단을 손상시키거나 여러 가지 술과 마약에 연관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담배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강의 관심사인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마다 젊은이들이 담배가 성숙함과 인기에 연관시키는 효과적인 속임수 광고 캠페인 때문에 그 습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수 년 동안 미국 연방의무감(surgeon general)은 흡연의 위험에 대해서 사회에 경고해 왔으며, 심지어 담배 제조회사들에게 제품에 위험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구강암과 폐암 및 담배중독의 희생자들이 증가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경고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연가가 간접흡연으로 인하여 담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을 때에야 사회는 담배의 사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대하기 시작 했습니다. 최근의 의학 연구들이 담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교회는 성령의 전(殿)인 기독교인의 몸에는 물론 기독교인의 증언에 해로운 습관이기 때문에 담배의 사용을 반대해 왔습니다.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의 사용에 관한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보면 이러한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육체와 영적인 행복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 높은 표준의 자제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취하지 말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술, 마약, 혹은 담배를 어떤 정도 “적당히 사용”하는 것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중요함과 우리 사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재의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들의 세상 앞에 순수한 증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로마서12:1,2) 해야 합니다.

관심사:

위에서 언급한 술, 마약, 담배의 사용은 중독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약물의 남용은 더 큰 사회에서 생산성 있는 개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재정적인 짐을 지워줍니다. 중독자로 인하여 생기는 상해(傷害)와 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의 비용은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더욱 소모합니다. 그리고 약물 남용이 흔히 범죄 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는 보험 비용의 추가와 법의 집행을 위해 비용을 두 배로 지불합니다. 우리들은 사탄이 중독자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노예로 구속하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이러한 중독성 물질과 싸울 것을 모든 사회에 요구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장 영원한 심판  (0) 2013.05.21
(Q 9) 일의 윤리  (0) 2013.05.05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4.20
제8장 집사와 이사  (0) 2013.04.16
(Q 7) 생각의 삶  (0) 2013.04.03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왜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는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사용의 절제를 옹호하는 가?
왜 그것의 절도 있는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가?

여덟 번째 질문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역사적으로 고린도전서 6:19-20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는 이 말씀과 다른 말씀은 술, 담배, 또는 마약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로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 전을 더럽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1) 현대 사회는 이 세 가지 중독성 물질의 파괴적인 결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2) 이러한 물질, 특별히 술과 마약은 심지어 소량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흔히 파괴적 중독성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노아의 술 취함은 그의 가정에 수치를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9:20-27). 롯의 술 취함은 그의 두 딸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야기시켰습니다 (창세기 19:30-38). 술 취한 아하수에로는 공중 석에서 왕후 와스디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에스더 1:9-22). 술의 소비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불을 붙이며, 폭력을 초래합니다 (레위기 10:8-11; 잠언 20:1; 23:19-35; 31:4,5).

술중독과 그것과 연관된 우울증은 흔히 도덕적 저해(沮害)의 와해, 무분별한 혹은 포악한 행동, 또는 양심의 상실(술 취함)에 이르게 합니다. 장기간의 음주는 간, 췌장, 뇌, 혹은 심장을 완전히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마시는 폭음은 순식간의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천 4백만 명이 술 취함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치명적 자동차 사고의 절반은 음주 운전자들에 기인합니다. 매년 술과 관련된 사고, 병, 강력 범죄, 그리고 노동시간의 손실은 천억 불을 초과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불법 약물 (마약)

비록 마약의 사용에 대하여 성경에 특별히 언급이 없지만, 마약 사용자와 사회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은 음주의 해로운 결과를 훨씬 초과합니다. 어떤 마약의 중독성은 매우 강력하여서 단 한 번 사용할지라도 그 사람을 평생 동안 마약 중독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용하는 사람의 장기와 정신적 수용능력에 미치는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손상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마약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위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개인의 대인 관계와 영적 행복을 파괴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삶을 극단적으로 소모시키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약 중독으로 인한 개인의 손상 이외에 마약은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비참한 짐을 지웁니다.
술과 불법 약물의 사용은 가정 폭력, 거리와 직장에서의 격노, 아동 학대, 자살, 그리고 여러 가지의 사회의 다른 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한 요인이라고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중독과 마약중독은 우리 사회 기간(基幹)의 파괴를 위협하는 국가적 위기를 제공합니다.

담배

담배를 피우고 씹는 것이 그 사람의 판단을 손상시키거나 여러 가지 술과 마약에 연관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담배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강의 관심사인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마다 젊은이들이 담배가 성숙함과 인기에 연관시키는 효과적인 속임수 광고 캠페인 때문에 그 습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수 년 동안 미국 연방의무감(surgeon general)은 흡연의 위험에 대해서 사회에 경고해 왔으며, 심지어 담배 제조회사들에게 제품에 위험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구강암과 폐암 및 담배중독의 희생자들이 증가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경고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연가가 간접흡연으로 인하여 담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을 때에야 사회는 담배의 사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대하기 시작 했습니다. 최근의 의학 연구들이 담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교회는 성령의 전(殿)인 기독교인의 몸에는 물론 기독교인의 증언에 해로운 습관이기 때문에 담배의 사용을 반대해 왔습니다.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의 사용에 관한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보면 이러한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육체와 영적인 행복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 높은 표준의 자제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취하지 말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술, 마약, 혹은 담배를 어떤 정도 “적당히 사용”하는 것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중요함과 우리 사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재의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들의 세상 앞에 순수한 증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로마서12:1,2) 해야 합니다.

관심사:

위에서 언급한 술, 마약, 담배의 사용은 중독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약물의 남용은 더 큰 사회에서 생산성 있는 개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재정적인 짐을 지워줍니다. 중독자로 인하여 생기는 상해(傷害)와 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의 비용은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더욱 소모합니다. 그리고 약물 남용이 흔히 범죄 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는 보험 비용의 추가와 법의 집행을 위해 비용을 두 배로 지불합니다. 우리들은 사탄이 중독자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노예로 구속하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이러한 중독성 물질과 싸울 것을 모든 사회에 요구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9) 일의 윤리  (0) 2013.05.05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5.02
제8장 집사와 이사  (0) 2013.04.16
(Q 7) 생각의 삶  (0) 2013.04.03
제7장 초월명상  (0) 2013.03.31

제8장 집사와 이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수세기 동안 움직여 내려온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셔서 지도자(목사)로 세우시고, 지도자에 대한 지지자로서 그리고 회중에 대한 동료 봉사자로서 섬기는 평신도 지도자(집사)를 주신 것이다.

교회 위원회에서 사용되는 용어

집사들 : 집사들은 신자들의 모임의 실질적, 영적인 문제와 당면한 문제들에 있어서 교회를 섬기기 위한 회중 가운데서 택한 사람들이다.
이사들 : 이사들은 교회 재산을 관리하며, 서명인으로서 봉사하기 위하여 회중 가운데서 택한 사람들이다.
자문위원들 : 자문위원들은 집사의 자격을 갖춘 사람의 수가 부족한 교회에서 목사를 보좌하기 위하여 택하여진다.
운영위원회 : 목사와 집사들이 개교회의 운영위원회가 된다. 교회가 제직회를 구성하지 못하였을 때 운영위원회는 목사와 함께 사역하기 위해 선출된 이사들로 구성한다.

자격

사람이 섬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생활과 인격이 특정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성경은 이러한 자격을 말씀하고 있다.
1. 집사는 반드시 “너희 가운데서” 택해야 하며(행6:3), 적어도 1년 이상 지역교회의 평신도 회원이어야 한다.
2. 집사는 반드시 좋은 평판이 있어야 하며(행6:3), 회중과 그 사회의 신뢰와 신임을 받아야 한다.
3. 집사는 영적 사역에 종사하므로 행2:4 에 따라서 “성령이 충만”해야 하며(행6:3), 계속 충만함을 유지해야 한다.(엡5:18)
4. 집사는 실질적이며 당면한 문제를 결정하며,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목사를 지원해야 하기 때문에 건전한 방향 설정과 지혜로운 조언을 위한 “지혜”가 필요하다.(행6:3)
5. 집사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일에 “적극 참여할”의사가 있어야 한다.(행6:2)
6. 집사는 “단정해야 한다.”(딤전3:8) 즉 진실하고 진지해야 한다.
7. 집사는 “일구이언하지 말아야한다”(딤전3:8) 즉 자기의 말에 책임을 지며 믿을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8. 집사는 술에 인박하지 말아야 한다.(딤전3:8) 즉 온화하며 신체적인 자극제를 의존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9. 집사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여야 한다.”(딤전3:8), 즉 그는 십일조를 드리며, 주기를 좋아하며 돈 때문에 일하지 않는 신실한 청지기어야 한다.
10. 집사는 그의 교리에 상응해야 하며,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며”(딤전3:9), 하나님의 성회의 믿음의 신조에 완전 동의해야 한다.
11. 집사는 성숙한 신자이어야 한며 “먼저 시험해 보아야 한다.”(딤전3:13)
12. 집사는 중혼의 경험이 없어야 하며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딤전3:1,3)
13. 집사는 가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인도해야 하며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딤전3:1,3)
14. 집사의 아내는 신자생활의 모범이 되어야 하며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이어야 한다.”(딤전3:11)
15. 지역교회의 재량으로 여성들의 모임을 위해 다른 기준들을 두어 여집사로 일하도록 선출할 수 있다.

이사들

교회 안에서 이사회(Board of Trustee)는 제직회와 유사한 기능이 주어지기도 한다. 만일에 이사회에 그러한 기능이 주어진다면 그 자격은 집사의 자격과 같아야 된다고 권고한다.

운영위원회

만일 운영 위원회가 제직회나 이사회와 다른 것이라면 그 자격은 지도력에 대한 성경적 기준의 범위 안에서 지역교회의 헌법과 조례에 의해서 결정된다.
모든 위원회의 관계

목사에 대한 관계
위원회의 회원은 목사의 조언자이며 돕는 자이며 기도 동역자이다. 이러한 지위에 있는 동안 목사에 대하여 충성스러운 지지자가 되며, 하나님께서 지역교회를 위하여 그에게 주신 사명과 목표를 이루는 일에 협력해야 한다. 목사는 교회
의 모든 위원회의 의장이며, 선거권을 가진다.

서로에 대한 관계
위원회는 한 팀으로서 교회의 성고적인 진전을 위하여 각자의 담당 영역 안에서 동역하는 것이다. 위원회 회원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며, 예배드리며, 목사와 그의 스텝들과 협력함으로써 가까운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회중에 대한 관계위원회의 회원은 그 사회 안에서 교회의 공보활동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들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서 진실한 기독교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

위원회의 책임
목사는 그의 직분상 법인체의 대표가 되며, 위원회의 의장이 되는 것은 일반적 사실이다.

집사들
집사들은 영적 생활과 의식의 집행에 있어서 교회에 대한 제반사항에 대하여 목사와 함께 자문역할을 담당한다. 그들은 회원 신청자에 대하여 심사하며 교회 징계의 업무를 담당한다. 목사의 재량으로 각각의 위원회 회원은 지역교회의 기능에 따라 책임부서의 장이 될 수 있다. 운영 위원회는 목사의 선택을 위한 청빙위원회로서 봉사할 수 있다.

이사들
이사들은 업무를 관장하는 공식적, 법적 일군이다. 보통 대표(목사)와 이사회의 총무가 교회를 대신하여 법적인 서류에 서명하는데 특히 재산이나 재정적인 계약이 관련될 때에 더욱 그렇다. 교회 자신의 관리자로서 봉사하는 이사들은 적절한 건물 유지, 보험 등 관리하며 재산을 팔거나 사는 일에 교회를 대신하여 수행한다.

자문위원회
자문회원회가 봉사하고 있을 때 지역총회 임원이 지역교회의 운영위원회로 섬기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이 자문 위원회는 지역 교회의 일상적인 기능에 있어서 목사에게 자문역할을 담당한다.

운영위원회
운영 위원회는 이상의 지침에서 정의된 바에 따라서 봉사의 임무를 수행한다.

기타부가사항
장로 혹은 장로직

헬라어 사본에서 장로에 대한 단어를 연구한 결과(행20:17,28, 딤전5:17, 약5:14), 장로나 장로직은 목사, 주교, 감독과 같은 직분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직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영역 이상의 것이다.
자격있는 사람을 결정하기 위한 과정

1. 지역교회의 헌법과 조례에 의하여 공천 위원회가 이루어지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는 것이 유용하다.
1) “자격”에 대해 이미 언급된 것처럼 영적 자격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2) 추천된 사람은 출석과 재정으로 지역교회를 충실하게 지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3) 추천된 사람은 하나님의 성회 교회 행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4) 추천된 사람을 회중에게 공고하기 전에 목사는 자기의 목회 철학과 비젼을 나누고, 봉사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2. 위원회 회원의 선출은 추천된 사람을 인준한 후에 지역교회 회중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한다.

결론
목사는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위원회 회원은 목사에 대한 교회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5.02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4.20
(Q 7) 생각의 삶  (0) 2013.04.03
제7장 초월명상  (0) 2013.03.31
(Q 6) 유흥  (0) 2013.03.17
생각의 삶

기독교인은 왜 자기 개인의 생각의 삶에 그토록 중요성을 두는가?
환상과 상상 그 자체는 죄가 될 수 있는가?
언제 그런 생각이 유혹이 되며, 언제 그들이 죄가 되는가?

일곱 번째 질문

성경은 개인의 사적인 생각에 대한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방법은 그 사람의 성품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비고. 잠언 23:7). 믿음과 신앙은 생각의 방법 입니다. 비록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더라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생각이 하나님을 향할지 아니면 세상을 향할지 지시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을 사는 한 유명한 시인이 다음과 같은 것을 관찰했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것으로 가득차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매력과 산만함 속에서 순수하고 도덕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어려운 목표가 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 4:8) 라고 그들의 기억을 상기시켜야만 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들에게 준 바울의 권면은 우리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즉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은 타락한 쾌락주의(hedonistic)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위는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우리들은 생각의 삶에서 그것을 제일 먼저 직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우리들의 생각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유혹과 죄악, 유혹은 생각의 영역을 통하여 인간에게 찾아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죄악된 문화로 부터의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에 섬광같이 비춰지면서 일어납니다. 비록 유혹이 죄악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을 분별하고 거절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파괴적인 생각이 싹이 나도록 허락하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첫 번째 죄악을 만듭니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 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15) 라고 말합니다. 환상은 사람이 마음에 자리를 잡도록 허락하는 총천연색으로 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무해할 수도 있고 사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신중하게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

성적인 감각과 낭만적 매력은 정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건전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욕망이 성경이 금하고 있는 성적 행위의 생각으로 저하될 때에 그것들은 정욕이 됩 니다. 그러한 포르노 영상과 성경적 도덕의 표준을 범하는 생각에 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침체 되도록 만듭니다. 성적 환상은 흔히 자기의 육체적인 더러운 것(자위)에 사로잡히게 되며, 또한 그로 인한 죄의식으로 항상 괴로움에 빠지게 되고, 그로 하여금 마침내 영적인 패배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것이 뿌리를 내리도록 허락했을 때, 사악한 성적 생각은 감정적이며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남용하는 것과 같은 부정(不貞)한 행동과 때로는 강간, 근친상간, 그리고 어린이 성폭행과 같은 비열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 주위에 있는 문화와 세속적인 활동을 통하여 풍부하게 심겨진 생각을 통하여 우리들을 유혹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그토록 엄숙하게 우리들에게 훈계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서 4:7).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가복음 14:38)

관심사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각과 행동 에 대해서 염려를 해야만 하는지 질문합니다. 사실을 말하면, 즉시로 아니면 어떤 미래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각 그 자체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섬광같이 비취는 불순한 생각을 통하여 우리들이 유혹을 받을 때에 우리는 죄악을 범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그러한 죄악된 생각을 감싸고 그것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되면 우리들은 그에 대하여 책임이 있게되며 또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들은 재빨리 우리들을 유혹하는 각각의 생각을 분별하고, 그것을 쫓아버리며, 의식적으로 우리들의 생각을 순결한 생각으로 바꿀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심지어 우리들의 생각의 삶까지도 거룩할 수 있습니다. 순결한 생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우리들이 통제할 수 있는 삶의 영역부터 먼저 보호해야만 합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건전하지 못한 잡지, 서적, 음악, 라 디오, 텔레비전, 케이블 프로그램, 영화, 비디오, 컴퓨터 소프트웨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그들의 가정과 주위가 타락한 영향을 받도록 허락합니다. 건전하지 못한 것을 입력하면 어떤 사람의 마음도 타락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님께서 이러한 분야에서 필요한 변화를 시키는 가운데 그들을 인도하도록 허용해야만 합니다 (갈라디아 6:7,8). 그러한 세속적인 유혹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순결하고 하나님 의 도덕적 표준과 진실을 반영하는 것들로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일을 시작하는 좋은 방법은 죄악된 것으로 알려진 모든 것들을 여러분의 삶에서 정결케 하며, 또 여러분의 행위 에 대해서 성숙한 신자로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과 영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사용하시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성경공부와 기도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 특정한 시간을 정해 놓으십시오. 기독교 서점이나 카탈로그들은 많은 기독교인 성장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의로움을 심으며” 걷는 매 발자국에서 우리들은 “의로움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죄악이나 육신의 생각들이 침범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지키는 것은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가져야할 책임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생각을 위하여 인도자와 파숫군으로서 성령님을 보내셨으며, 그분의 도움을 통하여 우리들은 덕을 세우며 고귀한 일들을 생각할 수 있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우리 들을 끌어내리는 그러한 생각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습니다 (로마서 8:6, 12:2).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0) 2013.04.20
제8장 집사와 이사  (0) 2013.04.16
제7장 초월명상  (0) 2013.03.31
(Q 6) 유흥  (0) 2013.03.17
(Q 5) 성적 순결  (0) 2013.03.08
제7장
초월명상

동양과 서양철학 사이의 간격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들 중에 하레 크리쉬나
(Hare Krishna)와 초월명상의 시도가 있다. TM이라고 불리는 초월명상
(Transcendental Meditation)은 특별히 최근에 미국 전역에 퍼져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전에는 동양의
신비적인 의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이제 TM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
다.

초월명상의 특성
 

초월명상의 표면적인 정의는 매일 두차례씩 20분 동안 긴장완화를 위한 자연
적인 운동이라고 묘사되었다. 이 과정 중에 만트라(Mantra)라는 한 단어가 반복
하는데 이러한 리드미컬한 반복이 긴장완화의 노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초월
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물학적, 심리학적 법칙에 근거한 과학적인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종교인들이 참여해서 많은 유익을 얻
을 수 있는 비종교적인 활동이라고 반복해서 선전한다.
소정의 요금을 지불하고 초월명상에 가입한 후에 초월명상에 대한 세심한 지도
를 받고나서 그 기법을 성실하게 사용하면 생활의 모든 영역 즉 신체적, 심리학
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인 영역에서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얻는다는 보고가
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연구 결과라고 하는 것을 제시하며 정치가,
교육가, 운동가, 연극배우, 심지어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수많은 증언을 제시하
며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초월명상을 깊이 연구해 보면 그에 관한
모든 것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월명상을 진지하게 조사
한 결과 그것은 긴장완화의 도구 이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활동이
다.
초월명상은 그 뿌리를 힌두교에 두고 있다. 실존, 신, 사람, 구원에 관한 이의
모든 가르침은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Vedas)에서 따온 것이다. 초월명상에 있
어서 의식적 초입례의 포함과 은밀하게 만트라를 사용하여 동양의 사교에서 행
하는 신비적인 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초월명상의 세계적인 지도자인 마하리쉬
(Maharish)는 그 기법의 유익을 설명할 때 과학적 언어보다는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초월명상은 심리학적, 신학적, 사회학적인 면에서 의문이 생
기게 한다. 이러한 의문들은 교회가 무시할 수 없는 도전으로서 교회에 제시되고
있다.

초월명상의 뿌리
 

초월명상은 기원상 종교적인 활동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개념은 힌두교에까지
추적된다. 힌두교 예배에는 수백만의 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중에
셋만이 특출하게 부각된다. 첫째 브라마(Brahma)인데 모든 것의 창조자이다.
둘째가 쉬바(Shiva)인데 파괴, 질병 그리고 죽음의 신이며 또한 채소와 동물과 인
간번식의 신이다. 인도사람의 생각에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의 전조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의 신은 또한 생식의 신이기도 하다. 셋째가 비쉬누(Vishnu)인데
사랑과 자비의 신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모든 곳에 퍼져있고 비인격적인 신적 능
력을 가진 존재로서 브라만(Brahaman)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 초월명상의
문헌은 창조적지성(Creative Intelligence)으로서 브라만을 언급한다.
힌두교에서는 신들을 예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금욕주
의 의식, 의례적인 헌신 그리고 명상 등을 포함한다. 명상은 수세기 동안 예배의
수단으로 주목 받아왔다. 모든 요가의 주된 특성은 명상이다. 힌두교의 전통에
있어서 명상은 신들이 신과 연합하여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에서 도
피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정의하자면 명상은 초월 혹은 신과의 연합을 경험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
로 초월명상에서 강조된다. 지금까지 초월명상의 마지막 부흥은 중세기에 있었
다. 중세 힌두교의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 상카라(Sankara)가 있는데 그는 힌두
교의 뛰어난 옹호자였다. 동양의 명상술을 회복하기 위한 현대의 노력은 스와미
브라마난다 스라스와티(Swami Brahmananda Saraswati)라는 사람과 더불어 가
장 큰 추진력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사람은 보통 구루 대브(Guru Dev)라고 하며
인도에 있는 4명의 주요 종교지도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초월명상의 대중적인
지도자는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Maharish Mahesh Yogi)인데 구루 데브의 제자
이다. 보고에 의하면 마하리쉬가 구루 데브의 명령을 받아 간단의 명상의 형식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히말라야에서 은둔한 후에 1955년 초월명상을 소개하였다.
인도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자 그는 그의 가르침을 영국에 수출하였다.
가장 괄목할만한 개종자 중에는 비틀즈(The Beatles)가 있다. 마하리쉬는
1959에 미국에서 그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1973년에 아이오와주의 페어필
드에 초월명상의 교육적인 기관으로서 마하리쉬 국제 대학교(Maharish
International University)를 설립하였다.

초월명상의 가르침
 

초월명상은 그 기법이 세워진 개념 때문에, 성격상 종교적인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것의 신학적 전제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신에 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힌두교 신학의 전통에 따라서 신 혹은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은 영원하며, 무한하며, 알 수 없으며, 성이 없으며, 비인격적인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 신은 속성, 질, 특성, 형태 등이 없다. 힌두교의 사상에서는
신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없다.

실재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모든 창조물이 신과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범신론적인 관
념을 버터가 우유에 스며들고 수액이 나무에 스며들 듯이 신이 모든 존재에 스며
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설명한다. 기본적 실재(Basic reality)는 상대적인 것
과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들은 단지 한 본질 안에 있는 두 개념이다.
상대적인 것은 신이 창조물 중에 그 자신을 나타내는 모습인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그 속성상 신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다. 마하리쉬의 견해
에 의하면 신은 그것이 실재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모든 창조물 안에 내재한다.
나무의 줄기, 가지, 잎, 꽃 그리고 열매는 항상 변하지만 신과 같은 수액은 항상
동일하다. 이와같이 이 세상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와 같이 보일 뿐
이다.

사람에 관한 가르침
 

이와 같이 마하리쉬의 견해에 따르면 신은 창조물 중에서 여러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거한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브라만
을 구성하는 거대한 바다 중 하나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일
부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주적인 생명과 그의 관계는 전체 몸에 대한 각각의 조
직의 관계와 같다. 각 사람은 그가 자신에게 하는 것같이 창조물 안에 있는 모든
신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나와야 한다.

구원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에 의하면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인간이 무시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
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환상과 무지의 세계에 묶이게 된다고 한다. 창조물이 실
제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그는 신과 동일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가 이러한 무지
함 속에 있는 한, “업”(Karma)의 생명에 묶이게 되는데 여기서 업은 탄생,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활동이다. 사람의 구원은 생명의
환상을 아는 것과 사람이 신과 하나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사람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것은 그의 업(Karma) 혹은 그의
전 생에 있어서의 활동의 결과이다. 혼이 지식에 있어서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과 합하지 않는 한, 각 사람은 개인으로서 지속될 것이며 전 생애 업
(Karma)의 열매를 계속 받게 될 것이다. 모든 고난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 안으로 뛰어드는 방법에 대
한 지식의 결핍은 인간의 생명 안에 있는 모든 질병의 뿌리이다. 그러한 경험이
없이는 사람에게 힘과 지성이 부족하게 된다. 그는 피곤하고, 염려하고 긴장하게
된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신적 의식을 접촉하기 위한 마하리쉬의 기술은 초월
명상이다.

초월명상의 방법
 

초월명상이 긴장완화의 기술 이상의 것임은 보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전제가 종교적일뿐 아니라 그것의 방법도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마하리쉬는 그
의 명상술 자체를 사람 안에 있는 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상의 기술
 

마하리쉬는 명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 자신의 정의를 조심스럽게 보여 준다.
명상은 집중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정신집중은 그의 기법이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명상에 있어서 마음은 전적으로 소극적(Passive)이어야 한
다. 어떤 의식적인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은 창조적지성의 거대한 바
다에 자연스럽게 뛰어 들도록 단지 허용되어야 한다. 인간지식의 내용물인 인간
사고의 모든 활동은 절대가 아닌 실제의 상대적 영역 안에 있다. 따라서 명상 안
에 그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신의 능력이 주입되어진다. 성공적인 삶을 살리려 계
속적으로 그러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신과의 일체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고의 중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마하리쉬는 그
의 윤리학에 관한 토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세계의 각 종교마다 윤리의 규
약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대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같이 거기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성문화된 절대적
기준이 없다. 초월명상을 통하여 창조적 지성에 의해 영향을 받은 마음만이 불변
하는 윤리와 더불어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초입례(Initiation Ceremony)
 

초월명상에서 초입례는 성격상 분명히 종교적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힌두교의
예배의식 혹은 푸자(Puja)로 되어있다. 그 의식에서 초월명상의 초보자는 6개의
꽃과 3개의 싱싱한 과일과 하나의 하얀 손수건으로 된 제물을 가져온다. 교사는
이것을 구루 데브의 사진 앞 제단에 놓는다. 촛불과 향의 분위기 아래서 교사는
산스크리트(Sanskrit)로 떠나간 힌두 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그는
형상이 없는 브라만의 현현으로서 브라마, 비쉬누 그리고 쉬바의 힌두 트리무르
티(Trimurti)를 예배한다. 그러나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구루 데브에 대해서인
데 그는 작고한 마하리쉬의 교사이다. 그의 사진의 출현은 실제로 예배의 대상으
로서 우상의 개념을 암시한다.

만트라
 

초입례의 마지막 행동으로서 초월명상 교사는 개종자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서 그를 위하여 선택한 비밀 만트라를 반복하기 시작한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만트라는 최면적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선택한 무해하며 의미없는 단
어라고 선언하지만 그것은 여러 힌두 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전통적으
로 사용되어 온 베다(Vedas)에서 따온 단어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
미없는 말이 될른지 모르지만 만트라는 힌두교 개념에서 분명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월명상의 문제점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초월명상은 심리학, 신학, 사회학적인 면
에서 문제를 야기시킨다.

심리학적인 문제
 

심리학적 문제의 가능성은 초월명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소극적 자세를 강조하
는 데 있다. 이 기법은 명상하는 동안 사람의 마음이 완전 방임상태에 놓이게 되
는 것을 요구한다. 일상적인 생각도 함께 초월하게 된다. 초월명상에서 배출되
는 것은 지성적인 이해의 도를 넘게 된다. 크리스찬에게 초월명상의 방법은 역사
를 통해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침묵 의식의 회복이 아니다. 그 기법은 지식이나
이성과 동떨어진 신비적인 경험을 유발한다. 이와같이 초월명상은 우상숭배 이
상으로 해로운 것이다. 성경시대에 귀신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신32:17,
고전10:19,20)
초월명상의 또 다른 심리학적인 문제점은 근본적인 문제해결보다는 염려에 대
한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심리학적 스트레스
의 원인을 무시하고 오직 임시변통만을 제공할 뿐이다. 초월명상에 대한 외부 학
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초월명상으로부터 얻어지는 유익은 단기간에 그칠 뿐이었
다.

신학적 문제
 

초월명상이 가져다주는 신학적 문제는 다양하다. 마하리쉬는 그의 신학적 가르
침을 창조적 지성의 과학(Science of Creative Intelligence) 혹은 SCI라고 불렀
다. SCI가 가르치는 신, 실재, 사람,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거
스리고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을 부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임을
보여 준다. 그는 아시고(마6:8,32) , 사랑하시고(요3:16), 뜻하시고(마6:10) 그
리고 활동하신다.(창1:1) 더구나 SCI는 성경 계시에서 근본적인 창조자-창조물
의 구분을 부인한다. 신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SCI의 범신론
적인 전제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과 구분된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작
품에 지나지 않는다.(시19:1) 하나님은 창조물과 혼동함으로써 SCI 는 옛날 사람
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다.(롬1:23,25)
SCI는 자신을 계시하지 않은 신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연에서, 양심,
역사, 기적, 예언, 성경,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 마하리쉬는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
원할 능력이 없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로 보
고 있다. SCI의 교리는 인간이 중보자가 필요로 한다는 개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초월명상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
SCI에서는 회개라는 말이 없다. 업(Karma)에 의하면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 거기에는 자비나 은혜를 위한 공간이 없다. 사람의 현재 상태는 그의 업
혹은 과거의 행동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재 상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르침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하리쉬는 기독
교인들이나 어느 종교 추종자도 아무런 갈등 없이 초월명상을 행할 수 있다고 주
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그의 신학에 있어서 수만의 선하고 악한 신들을 수
용하는 힌두의 배경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을 더 받아들이는 것이
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의 종교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지, 교회나, 절이나 , 모스크나 사원에서 어떤 예식을 따르던지 별로 관계없다고
한다.
힌두교는 그의 거대한 우상으로 세계의 종교를 덮고 있다는 것이 마하리쉬의
관점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가장 관
대하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베다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세계의 신성한
책들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베다에 이미 처음으로 나
타났다. 이와 같이 한 종교의 기본적 진리는 모든 다른 종교의 기본적 진리라고
한다.

사회적인 문제
 

창조적 지성의 과한(SCI)을 퍼뜨리기 위한 마하리쉬의 대담한 계획으로 인하여
초월명상과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 그는 그의 교리를 세계의 모든 질병들
즉 신체적, 심리학적, 영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인 질병에 대
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1972년에 마하리쉬는 SCI와 초월명상 프로그램을 지상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세계적 계획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 천명당 SCI의 교사가 한 명
이 있으면 이 계획을 이루는데 충분하다고 계산하였다. 이 사업을 위한 3600개
의 세계적 계획 센터(World Plan Center)를 짓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에 있다.
마하리쉬 국제대학, 비디오 테입 프로그램 그리고 초월명상이 소유하고 있는 텔
레비전 방송국들이 이 계획을 위해서 쓰여질 것이다.
대학 외에도 4개의 다른 기관이 세계적 계획의 가지들로서 형성되었다. 학생
들의 국제 사회(Student's International Society)는 젊은이들과 함께 일한다.
국제 명상학회(The International Meditution Society)는 폭넓게 장년층에게 환
심을 사고 있다. 영적 갱생 운동(The Spiritual Regeneration Movement)은 생
활에 대한 영적 접근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 특히 은퇴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다.
창조적 지성의 과학은 위한 재단(The Foundation for thew Science for
Creative Intelligence)은 사업가와 전문인을 위하여 기획되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건강과 행복 이상의 것에 관심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야망은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고지에 도달하는 것
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하리쉬는 주어진 시간에 사회에서 인기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 혹은 교육 혹
은 정치일 수도 있다.
이 세대에 초월명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무엇이 가장 적합하겟는가?
마하리쉬에 의하면 그것은 정치이다. 이와같이 그는 정부기관을 통하여 초월명
상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그의 정력을 쏟고 있다. 이미 실험적인 조건으
로 초월명상에 대한 가르침이 정부의 경비로 미국의 어떤 학교들 안에서 행해지
고 있다. SCI와 초월명상(TM)학과가 일리노이, 뉴욕 매사추세스, 플로리다 그
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공립학교에서 합법적으로 개설 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염려하는 시민들이 그러한 계획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적절한 것인
지에 관하여 법적 질문을 하고 있다.

초월명상의 도전
 

초월명상은 3가지 면에서 교회에 도전하고 있다.

첫째는 교리의 정확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에 관한 것이다. 교리와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의 신학적 잘못을 보고 초월명상 기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다.
둘째로 교회는 신자의 생활에서 성령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일을 강조해야 한다
초월명상은 순수하고 성경에 근거한 성령의 경험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대치물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로 교회는 성경의 시작부터 가르쳐 온 안식일, 안식의 위대한 원리를 다시
선포해야 한다. 일과 놀이에 미친 현대인들은 점점 안식일의 원리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칠일 중에 하루는 쉬고 예배함으로써 신체적, 정신적, 그리
고 영적인 쇄신을 가져다주는 적합한 도구를 인간에게 주셨다. 초월명상을 주장
하는 사람들 밖에서 행해진 어떤 사람들의 연구는 그들의 기술은 아무런 신체적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의 원기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따른
다면 크리스찬은 초월명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시1:2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권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
한 명상의 참된 내용이다. 이러한 묵상의 유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8장 집사와 이사  (0) 2013.04.16
(Q 7) 생각의 삶  (0) 2013.04.03
(Q 6) 유흥  (0) 2013.03.17
(Q 5) 성적 순결  (0) 2013.03.08
제6장 제자도와 복종운동  (0) 2013.03.06

유흥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슨 해로움이나 위험이 있는가?
텔레비전, 연극, 비디오, 도서 등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형태의 오락물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흥물들이 삶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에 주의해야할 점은 무엇인가?

여섯 번째 질문

하나님의 성회에는 유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대한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대부분은 연령의 차이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 연령의 구룹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하며 또한 같은 유흥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 포함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과 나이 많으신 분들의 구룹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사회의 문화나 혹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청년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가 부식되거나 손실되지 않도록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종 유흥 매체에 대한 것을 취급한 아래의 사항들은 우선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성경적 결론에 입각하여서 특별한 매개체에 대해 가지는 전통적인 태도와 현세대의 태도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성숙해질 수록, 현대의 여러가지 형태의 유흥이 영적 생명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경 원리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종류와 유형의 유흥이 적합합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45; 20:7; 베드로전서 1:15,16)라고 하는 명령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영적으로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됨” 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의로움 가운데 지시하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며, 또 성령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그러한 일로 부터 절제하도록 도우시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거룩하다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로마서6:12-19; 데살로니가전서 4:3,4). 따라서 적합한 형태의 세속적인 유흥을 선택할 때에, 우리들은 성경이 저주하는 죄악된 활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든 것들은 거룩함의 표준에 어긋난다고 결론을 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간음, 혼전(婚前) 성생활, 동성애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그밖에 그릇된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특별한 지혜와 지도가 필요한 때는 성경이 저주하지도 않으며 또 승인하지도 않는 그러한 활동에 관련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조차도 성경에는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할 지침과 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에 위반되거나 혹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게 할 때에 그에게 죄가 되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비고. 고린도전서 8:1-13; 로마서 14). 그러한 경우에 기독교인은 때때로, 개인적으로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나 자매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에 있어서 흔히 필요한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4:15; 고린도전서 8:13).

성화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은 구별됨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거룩”과 “거룩함”을 의미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결하거나 깨끗지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의 구룹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3:1, 6:15). 우리들의 유흥 활동은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4,5).
구별됨과 거룩함의 원리는 하나님의 성회의 조례, 9조, 6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에서 성경은 다음에 대하여 경고하나니 그들은 아래와 같다. 즉, 육신을 병들게 하고 마음과 심령을 썩게 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일; 결국 남용케 되는 쾌락, 직위와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과 집착; 극단적인 태도, 적합지 않은 언어의 사용, 부적당한 외모;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약화시키는 유혹과 이에 관련된 것(누가복음21:34,35; 로마서 8:5-8, 12:1,2; 고린도후서 6:14-18; 에베소서 5:11; 디모데전서 2:8-10,4:12; 야고보서 4:4; 요한일서 2:15-17; 디도서 2:12) 등이다.”

마지막 원리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저 빠져나가기 원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완전히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합니다. 어떤 유흥은 명확히 잘못된 것이며, 그러한 일에 참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유흥의 종류 가운데 어떤 것들은 성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해 지침이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으로는 가한 것이나 유익한 것은 아닌 것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두 번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고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원리는 유흥을 포함한 모든 활동에 적용 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 어떤 유흥은 그것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유흥이든지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러한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일에 지나치게 열중함으로서 흔히 영적으로 중화되거나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하나님보다는 다른 어떤 능력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바는 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이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유흥이 덕을 세우거나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굳세게 만들까?” 또는 “이 특별한 유흥이 나의 생활을 일시적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영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모든 유흥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유흥의 장소가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함께 웃고 노는 시간들은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족이 결속하도록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비록 유익한 유흥을 통하여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러나 유흥이 항상 교육적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유흥은 악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도 만들어 주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중립적인 형태의 유흥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어린이들의 나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이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이어야만 합니다. 몇 년 후에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은 재미있게 놀 줄도 모른다고 조롱할 때에, 어린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인은 죄악된 행위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유흥을 위해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제품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 제품에 적당한 나이 수준을 알리는 레이블을 제품에 부착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왔습니다. 이러한 레이블을 붙이는 제도는 세속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품은 폭력, 나체, 성적인 내용, 그리고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R” 등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연령에게 피하도록 경계를 주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PG 13, TV 14, NC 17 등과 같은 등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등급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이 어린 아이들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어떤 내용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제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지금 그 나이보다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또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장합니다. 세속적인 검열관이 보아도 좋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러한 행동과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것을 묘사하는 그러한 것들 속에 우리들이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적 생동력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G” 등급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서 특별히 주의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에 “R” 등급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등급을 주는 그러한 제도는 그 이야기 뒤에 있는 사상적 의도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습니다. 행동주의자 작가나 제작자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모든 성인들은 그러한 영화나 비디오가 어린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 비평가들은 진실로부터의 이러한 탈선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고 동료 신자들에게 그것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 만 합니다.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을 위한 여가 시간의 활동에 합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많은 유흥 프로그램과 영화를 직접 볼 필요는 없습니다. 등급제도 이외에도 여러 유흥 매체에 대해 평론한 인쇄물들은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관해서 경고할 것입니다.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염려하는 시청자들이 폭력과 성적인 내용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그러한 등급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영화를 상영하는 공중 영화관은 그러한 영화를 기독교인 -- 흔히 가족과 함께 -- 과 동시에 감상하는 비 기독교인들의 유익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관심사에 추가적인 요인을 제공할지 모릅니다. 모든 형태의 유흥에서 기독교인은 그 유흥의 실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유익한 유흥이 저주하는 말, 술취함, 그리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말을 하는 군중에 의해서 망쳐질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사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심지어 때때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종교 프로그램 조차도 신자들이 지역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뉴스 취재원들이 보도하는 뉴스의 경향은 사람들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미묘하게 영향을 줍니다. 광고주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욕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매력적이고 해(害)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나 다른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면밀한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연속 코미디극, 심야 프로그램,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특별히 유혹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웃는 것들은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며, 진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머들은 교묘하게 살며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들이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텔레비전이 가족에게 매우 해(害)가 된다고 결정을 하고, 그들의 가정에 텔레비전을 가지지 않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갖지는 않을지라도, 텔레비전은 주의 깊게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어린이들을 위한 보모의 대용품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면에 대하여 염려하는 성인, 부모,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공합니다. 자기 집에서 가지는 사생활에서 비기독교적인 주제와 그릇된 행실을 촉진시키는 케이블 채널뿐만 아니라 유료 시청을 통해서 온갖 종류의 호색적(好色的)인 요소들에 관한 것들을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모든 성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들인은 그들의 유선 방송 회사에게 적절하게 여과되지 않은 혐오감을 주는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비디오와 오디오 신호를 철저히 봉쇄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케이블 방송국들은 그러한 채널 프로그램들이 가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료로 완전히 봉쇄할 것을 법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읽을거리

어떤 지역사회의 공립 도서관은, 검열 없이 무제한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명(美名) 아래, 인쇄물이나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부도덕한 것들과 심지어 포르노 서적들까지도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도서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숙하지 못한 대중의 태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관찰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동안에 일어난 조용한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와 동시에, 반기독교인의 계획을 가진 행동주의자 구룹들은 그들의 주장을 촉진시키는 서적을 포함하도록 압력을 넣어왔습니다. 책방이나 소매점포의 잡지 진열대는 성경의 가르침은 물론 공중의 도덕을 해치는 읽을거리들을 뻔뻔스럽게 진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터넷

가장 최근의 유흥 매체인 인터넷은 교회가 청년과 성인들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 전쟁터가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른 매체의 형태에 대해서 도덕적 표준이 느슨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비록 그러한 표준이 최근에 매우 침식을 당하긴 했지만), 인터넷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떤 제한이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정 지역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지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것이며, 또한 그러한 프로그램은 모든 원하지 않는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지는 못합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원거리 통신 학교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에게 추천한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컴퓨터 모니터에 부착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특별히 포르노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여 접촉하는 것을 피함으로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관심사:

거룩함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항상 율법주의나 세속적인 것을 촉진시키려 한다는 책임 추궁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표준을 위한 어떤 형태의 정의라 할지라도 그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비난하지 못하는 것을 거룩함에 대한 타협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매체의 표현에 대해서 위에서 언급한 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에 반대되는 가치, 표준, 및 행동에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헌신에 대해서 계속해서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활동을 단지 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구한 성품에 대한 이방인입니다.
비록 휴식, 유흥, 그리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결정한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의 입술로 나오는 모든 안일한 말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마태복음 12:36), 우리들은 시간과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몇 몇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대한 깊은 책임감 때문에 육체적 및 정신적 힘을 유지하기에 겨우 충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유흥이나 오락을 위해 소비합니다.
책임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저울질합니다. 신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유흥을 위한 장소를 평가하고 재고(再考) 할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한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회 조례, 8조, 6항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7) 생각의 삶  (0) 2013.04.03
제7장 초월명상  (0) 2013.03.31
(Q 5) 성적 순결  (0) 2013.03.08
제6장 제자도와 복종운동  (0) 2013.03.06
제5장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2) 2013.02.15

성적 순결

왜 성적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그토록 중요한가?

다섯 번째 질문

비록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지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제거하기 위하여 잘못 설계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순결은 진정한 행복과 가족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지혜로우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 진리에 대한 선언은 성화(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와 “국가의 놀랍게 퇴폐되어가고 있는 도덕적 기준” (세속적인 것)에 관한 선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적 순결에 관한 하나님의 성회의 위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도덕에 대한 성경적 기준이 가장 보편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성경적 기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문화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와 로마에 적용이 가능했듯이, 뉴욕, 로스앤젤레스, 싱가포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지역사회에 적용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성(性, sex)으로 넘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물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도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성적생활에 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agnostics)들이 행동하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성적 순결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性)이 넘쳐흐르고, 온갖 종류의 성적 표현이 허락되는 문화 속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훌륭한 시험이 됩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 본연으로 할수 있는 최대의 노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구속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했던 말씀은 현대의 타락한 사회에 대해서도 충분히 적용이 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5: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9).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6:13).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고린도전서 7:2). “우리는 ... 간음하지 말자” (고린도전서 10:8). 첫 번째 편지에서 말했던 권면을 듣지 않았을 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2:21).
바울은 모든 개인들 속에서 용솟음치는 성욕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발적인 의상, 성적 파티에 관한 공공연한 이야기, 그리고 성에 관련한 유머들은 정욕과 죄악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성적 유혹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7:5)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배우자를 유혹과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적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8,9). 이러한 여러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결혼 밖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며,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성관계는 개인의 관계와 사회의 안전을 파괴합니다.

성적 부도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간통, 음행, 동성애, 근친상간, 매춘, 강간, 및 음욕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변의 대중적인 문화는 성관계를 갖지 않는 다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더 젊은 청년들에게 하신 성경말씀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후서 2:22) 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적으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접촉과 육체적 친밀함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이 성관계에 이르기 전에 자연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일생을 언약하기 전에 그러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정욕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복을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보다는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이기주의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망과 믿음의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원하여 책임있는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을 갖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들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방황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만일 마음이 즉각적인 육체의 만족을 원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랑과 책임있는 결혼의 기회는 크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제의 시간이 상대방의 육체를 탐구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영원한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적으로 순결치 못함과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년 디모데에게 적어도 세 번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디모데전서 4:12). 그는 디모데에게 순전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디모데전서 5:2). 그리고 또 한 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함으로 순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관심사:

성과 성적 자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급속도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청년들이 성적 순결에 대하여 전심으로 책임있는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멸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관계에 대한 이교도의 악한 영향은 심지어 교회의 세계 속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성경적 기준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쉽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가 우리들을 보존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총명한 규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결혼전이나 결혼 생활 가운데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풍부한 유익을 가져다 주며, 그것은 흔히 성공적인 평생의 결혼 생활로 나타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화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근본진리에 대한 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7장 초월명상  (0) 2013.03.31
(Q 6) 유흥  (0) 2013.03.17
제6장 제자도와 복종운동  (0) 2013.03.06
제5장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2) 2013.02.15
제4장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0) 2013.02.09

제6장
제자도와 복종운동

최근에 성령의 부어주심은 예수가 신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로 많은 옛날의 장애물들이 무너졌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갈급함이 일어났다. 매일같이 기도와 성경공부란 목적으로 새로운 모임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모임들 중 어떤 모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가진 지도자가 없다. 많은 경우에 이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전통적인 교회의 목사들은 너무나 바쁘든지, 아니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상담하거나 도와주는데 유익한 오순절 경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훈련시키고 지도력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공인된 목적을 갖고 유명한 성경교사들이 목양, 제자도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조장하고 있다. 옛적 충성으로부터 이탈된 많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인도해 줄 사람이 없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좋은 결과처럼 보이는 것으로 진공사태를 메꾸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어 왔다. 파괴적이고 분파적인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성경과 교회와 신자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과 연관해 이러한 운동의 주장을 조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성경

이러한 교사들 모두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행위에 대한 영감된 오류가 없는 법칙으로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성경에 의하여 판단되어야한다고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상황에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의 매일의 필요와 문제에 대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현재 말해진 말 즉 레마에 보증되지 않은 권위를부여함으로써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와 동등하다고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과 통역같은 성령의 은사가 신자들에게 구체적인 도움과 격려 그리고 안내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사해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적인 의도에 의해서 그 말들을 판단하는 대신에 선택된 구절을 영해하거나 비유를 해석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합리화 할 때는 위험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요한복음 10장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요한복음10:1-6에서 예수께서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다른 데로 넘어가는 도적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림을 바꾸시고 평이한 말로 말씀하셨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요10:7,8) 또한 선한 목자와 같이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자 하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나는 문이다”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든 사람이 문(door)인 목동(undershepherd)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목동이 절도와 강도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을 빼앗고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로부터 보호한다고 가르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목동이 그의 양을 평생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상담하고 안내하는 일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새로운 개종자가 누군가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며, 진리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지할 경우 그는 성경을 찾아보기를 그칠 것이며 거짓교사에 저항하기 위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는 거짓교사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그 해결책이 신자를 보호해 줄 인간 목자를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6:1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방패와 성경의 검을 사용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굳게 서야 한다.(엡6:10-18)

요한복음 10장을 더욱 세밀하게 조사해 보면 예수께서 문이 되신 것 같은 의미로 어느 사람이 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모든 양의 문이시다. 참된양은 그리스도 외에 어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
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양들이 그를 알고, 그 분만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양들의 필요를 아신다. 그분은 그 양의 음성을 듣고 안다. 이와같이 요한복음 10장을 취하여 개종자와 그리스도 사이
에 인간 목자를 끼어 넣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인간 교사를 문으로 만들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교리를 억지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목자들)이 양무리를 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늑대가 그 가운데로 들어가 양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장로들이나 목동들 안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나 성경을왜곡하고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즉 그들은 얼핏 좋은 선생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자기를 좇는 자들을 늘리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할 것이다. 이와같이 신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목자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는 성령의 인도아래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

교회

이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은 교회에 대한 이 운동의 자세에서 볼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은 그들이 새로운 교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현존하는 교회와 목자들을 존중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성 교회와 목사들은 잘못되었
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어떻게 애쓴다 할지라도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목자제도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교단을 세우고 있다.

이것과 일치하여 이들 중 어떤 교사들은 그들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은 더 이상 복음적이지 못하지만 이 지상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이 시대에 순수한 질서를 세울 수 있다
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지만 추구할 때까지 곡식 중에 가라지도 있게 마련이다. 다니엘서 2장, 데살로니가후서 1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지상에 이루어지기 전에현재의 세상질서를 파괴하는 심판이 필요하다. 현 시대에 교회의 복음적 목적을 무시하는 이러한 후천년설의 주장을 피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관계에서 새로운 제자도의 질서에 대한 모형을 찾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유대주의 배경안에서 행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안에서 교회의 모형에 대한 안내를 구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한 필요를 채워 주는 다양한 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함께 교회안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선호하여 민주주의적인 자세가 내리막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교회들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는 것처럼 추측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사도들은 단지 그 자격요건을 말해 주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일곱명을 선택하여 뽑아줄 것을 부탁하였다.(행6:3,5) 행14:23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을 안수하였는데(한글 성경에는 “택하여”라고 번역된:역자주) 안수에 대한 헬라어의 뜻은 “손을 들어 선택하다 혹은뽑다”라는 의미가 있다. 고후8:19 에서 “택함”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주어이므로 행14:23에서의 “뽑다”라는 말과는 같은 뜻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동사가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에 대 한 자격을 설정한 후에(딤3:1-7에서와 같이) 선거를 행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고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신약에서 한 가지 고정된 형태의 조직보다는 다양한 조직을 본다. 조직의 목적은 항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역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교회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내었을 때 그것은 관심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나바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조언을 듣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주의해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그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와 함께 일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의 권위 아래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둘 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위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바나바는 기쁜 마음으로 바울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바나바와 다투었으며(행15:36-41)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들과 베드로와 다른 일로 인하여 다투었다.(갈2:11-14) 그의 권위는 말씀이었으며 성령과 말씀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결례를 행하라는 야고보의 요청에 바울이 응한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다.(행21:17-26) 성경은 사랑 안에서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문제이다. 성경은 또한 지도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벧전5:3) 바울과 그 일행은 다른 개종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돕는 자였으며 이 개종자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서는 것이 기대되었다.(고후1:23,24) 베드로는 (벧전5:5) 젊은이들이 순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모든 사람이 서로 복종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덧붙이고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 위에 함부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각 사람이 사단에 대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

신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 목자운동(Shepherding movement)의 경향은 성경을 지나치게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으며 너무나 광범위하게 비유화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신자가 어리석은 양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는 극단적인 비유를 취한다. 성경에 신자는 양으로 비유되는데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스도는 그를 인도하며 먹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그는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각자와 함께 계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시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이 신자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롬12:4-8, 고전12장, 엡4:11-13) 이 목자운동의 강조점은 신자 자신이 목자를 발견하여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엡4: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지지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우리가 마디 혹은 줄을 통하여 몸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또한 비유의 인간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한 것이다. 이 문맥은 모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일치에 이를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도 여러 가지 교회의 풍조에 밀려 이리 저리 방황하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 함으로써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이 올바른 위치에 있게되면 각 부분은 그리스도로 부터 직접 받아서 몸은 자라게 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된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는 포도나무이다. 모든 가지는(모든 신자) 직접 그와 연결되어 있으며 직접 그의 생명을 받는 것이지 다른 가지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체 몸에 대한 다양한 사역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엡4:11) 이러한 사역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지혜로운 공급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크리스챤이 인간 목자를 떠나서는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든지 혹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고 한다면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잇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히4:14-16)

이와 관련하여 목사는 사람들의 모든 계획과 결정사항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목자는 그 사람을 덮어줄(cover)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용어는 사람들을 오도한다. 성경은 “덮는다”(cover)는 말을 피의 대속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것이며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관계를 비교함으로써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역자에 대한 나이먹은 사역자의 관계였을 뿐이지 목자와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한 모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복종의 비유이지 한 사람에 대한 신자의 비유가 아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결론 아마도 현재의 목자-제자 복종운동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자유분방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권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말씀의 권위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을 우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그들을 귀히 여기라는 바울의 충고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살전5:12) 비인격적인 우리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작은 모임의 밀접한 교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은 개교회 안에서 목자의 지도를 받아 지도자 훈련을 통하여 제공될 수 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나타난 것 같이 인간 지도자를 따름으로 해서 생기는 분파작용 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필요가 한 사람이나 한 교회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개 교회 안에서 사역과 은사의 다원화를 요구하고 있다.(고전12장) 또한 성경은 아볼로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음을 말해준다.(행18:27,28) 또 다른 사람을 훈련받기 위해 성경 학교에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분파를 조장하는 죄는 가장 심각한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롬16:17,18, 딛3:9-11) 오늘날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려고 한다면 보다 큰 몸으로서의 연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치된 노력은 많은 지역 교회 간의 협력의 효과에 대한 증언이다. 각각 개별적으로 일하는 소수 집단들이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수행되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한다. 그분만이 양의 위대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언약은 그의 피로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히13:20,21)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6) 유흥  (0) 2013.03.17
(Q 5) 성적 순결  (0) 2013.03.08
제5장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2) 2013.02.15
제4장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0) 2013.02.09
(Q 4) 험담과 적절한 대화  (0) 2013.02.06

제5장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처음부터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신유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신 복음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의 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 제12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신유는 복음의 필수부분이다. 질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속죄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사53:4-5, 마8:16-17, 약5:14-16). 이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실과 양상을 여기에서 모두 다루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성명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임을 보이고저 한다.

복음의 필수부분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관할해 볼 때 신유는 과외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유는 예수가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자로, 약속된 메시야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신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요10:37, 28). 성경은 예수의 신유의 사역과 그의 구원하며 용서하시는 사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실제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권위에 대한 증거이다.(막2:5-12). 반복적으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행하며 똑같은 동정을 보여준다.(마4:23, 9:35-36)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온 것은 그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눅5:15, 6:17-18) 그는 아무도 거저 보내지 아니하시고(마12:15,14:14)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기형된 것과 불구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고쳐주셨다.(마15:30,31, 21:14) 그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귀신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마4:24) 예수는 질병이 자주 죄의 결과임을 인정하셨고(요5:14), 또는 사단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눅13:16) 그러나 또한 예수는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님을 인정하셨다.(요9:2,3)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막2:12)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하게 하신 사역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요9L2,3) 이것은 치료하시는 주 혹은 위대한 의사로서 하나님의 계시한 구약과도 일치한다.(출15:26, 시103:3, 여기서 이 두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 분사들은 그것이 치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신유가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임을 보이셨다.
치유는 또한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와 구세주로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이사야53:4의 예언은 성취하셨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보면 매우 강조적이다. 즉 “그는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자신이 짊어지셨고 (들어서 가져 가셨고), 우리의 고통을(무거운 짐으로서) 옮기셨다.” (여기서 ‘질고’라는 말은 아픔이나 질병과 같은 단어이며 ‘슬픔’이라는 말은 욥33:19에서 사용된 육체적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마태는 이를 예수의 치유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8:17을 문자적으로 직역한 것임). 이사야는 이것을 예수의 구속사역과 연계시키고 있다.(사53:5)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의 문맥과 벧전 2:24,25의 적용은 특히 치유 혹은 죄로부터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 53:4의 육체적 아픔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문장은 우리의 죄나 제멋대로 행한 것에 대한 영적 및 육체적 결과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인지 아닌지 혹은 자신처럼 메시야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적인 사역에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다. 치유는 복음의 필수 부분이며 중요한 증거였다.(사61:1,2, 눅4:18, 7:19-23). 신유는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필수 부분이었다. 예수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며 아픈 사람을 고치게 하셨다.(눅9:2, 10:9) 오순절 이후 많은 기사와 이적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졌다.(행2:43) 누가는 사도행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장으로 취급하였다.(행1:1,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약속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다시말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본질과 목적에 맞게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것이었다.(요14:12-14) 하나님은 빌립과 같은 집사를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며 치유하게 하였고(행8:5-7),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제자를 통하여 사울(바울)을 치유하게 하셨다.(행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사역에서 치유를 지지하고 있다.(막6:13, 9:38,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 중에 포함되며(고전12: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는 것과도 관련된다.(고전12:3)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관심의 대상인데 그 사역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이 위대한 대제사장은 무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히4:14,15)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속한다. 히브리어 성경 안에 나타난 속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셨는데 속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문자적으로 속죄소)로 세우셨다.(롬3:25)
속죄소(Mercy seat)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6장에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하여 들어갔다. 속죄소는 법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금으로 입힌 부분이다. 법궤안에 십계명을 적은 돌판이 있는데 이 계명은 바로 사람들이 어긴 하나님의 법이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초래하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죄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시고 자비와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속죄의 원래 목적은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었다.(레16:30, 롬5:11 여기서 “속죄”라는 말은 롬11:15이나 고후15:18,19에서 “화목”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과와 벌에서 속죄를 통하여 면제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고라와 다
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셨다. 그때 모세는 아론을 회중 가운데로 보내여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전염병이 그치게 되었다.(민16:47,48)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의 수효를 계수할 때 그들의 구속과 그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반세겔을 내야 했음을 읽을 수 있다.(출30:12,15) 이와같이 속죄를 아픈 것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속죄를 제공하셨다.(롬3:25, 시65:3, 78:38, 79:9, 롬3:21-28) 이 속죄는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음이 호세아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호세아는 그의 아내가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을 때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를 도로 샀다.(호3:1-5, 13:4, 14:4) 이것은 구리뱀 사건에 의하여 더욱 설명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민21:9)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요3:14-16) 거기서 예수께서 전인(Whole man)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속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속과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롬3:24, 엡1:7, 골1:14, 히9:15) 다시 말하거니와 속죄는 죄의 결과를 위하여 드려진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역시 죄 때문에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멸하고자 하시는 마귀의 일들 가운데 있으며(요일3:8), 이와 같이 속죄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롬8:2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전15:42-44, 51-54) 그러므로 구속과 속죄 사이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롬8:23에서 말씀하시는 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관련지어서 이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우리 몸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43, 고후5:1-4, 요일3:2) 신유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복음의 모든 축복과 같이 속죄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또 사53:4은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 안에서 죄뿐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신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신자들의 특권

구원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엡2:8),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도 그의 은혜 혹은 공로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치유해 줄 것을 당연한 자세로 청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구하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를 바라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은혜스러운 특권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자의 특권으로서 치유의 약속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히5:8, 벧전2:19,21, 4:12-14, 19) 또한 우리는 신유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대용물(substitute)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잠시동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셨다.(막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기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될 것을 보았다.(출18:18) 또한 신유는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힘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눈도 밝았었다.(신34:7) 그러나 이러한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1:1-4) 전도서 12:1-7에 잘 묘사된대로 점진적인 노화현상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임하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치유는 여전히 노인에게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유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과 같이 노화되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인내로 기다리면서 신음하며 고통중에 탄식하고 있다.(롬8:21-25) 우리가 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몇 번씩 치유를 받든지 상관없이 만일 예수께서 더디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촉진시키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소생시키시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롬8:11)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실제로 신유의 특권을 보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이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5:34)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는 것이 앉은뱅이의 마음에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불어 넣어준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행14:9,10) 마음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롬12:2, 골3: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의 큰 믿음에서도 볼 수 있으며(마8:5-13) 부스러기라도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다.(막7:24-30, 마15:28)

신유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사렛과 변화산 기슭에서 불신앙이 그 역사를 방해했던 사실을 통해서 증명된다.(막6:5,6, 막17:14-20) 거기서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막9:29) 기도는 구약에서 중요한 치유의 수단 중 하나였다. 많은 시편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약 5:15)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큰 믿음은 주님의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치유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등을 돌리시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이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만져 주셨고(막1:41, 8:22),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막1:31, 눅14:4) 혹은 그의 손을 그들에게 얹으셨다.(막6:5, 8:25, 눅4:40, 13:13)
그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믿음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것은 순종을 요구하였다.(막7:33, 8:23)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옷이나 그를 만지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막3:10, 5:28, 6:56, 눅6:19) 베드로의 그림자로 그 당시 같은 효과가 있었다. (행5:15) 또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마찬가지였다.(행19:12)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도록 돕는데 사용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수단이 사용된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수단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약5:14)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여기서 아픈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치유하게 하는 것은 기름(성령의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그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요14:12-14, 16:23,24)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우리가 그것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된다.(요15:7) 그리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과 일치하며, 우리는 우리의 의도하는 바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정시키려고 한다.(특히 출15:26의 약속인 치료 혹은 건강의 언약)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치료는 치료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사실 치료를 갈망하며 예수께 반응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죄를 아직 다루시기도 전에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경우, 요5:2-9, 14) 어떤 사람은 신유를 의학적인 치료와 충돌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의사는 자기 기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주님이 위대한 의사이심은 사실이다. 또한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아사왕을 정죄한 것도 사실이었다.(대하6:12) 그러나 아사는 이미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였다.(대하:16:7) 강조점은 그가 의사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의사는 이방인 의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기를 거부한데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렘8:22)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약용으로 사용한 것을 말씀하셨다.(눅10: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여졌다는”(막5:26) 것을 듣는다. 만일에 그 여자가 의사에게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안하시고 그 여자가 표현한 그 믿음을 받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그 여자를 칭찬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는 또한 열명의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보내셨다.(눅17:4)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진단, 격리,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레13:2이하, 14:2이하, 마8:4)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병을 진단하는 사람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치료는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막8:24) 이와는 달리 성경에서 치료된 사람들이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신유를 간증하지 않았다.

오늘날 신유에 대한 남용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포를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도들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유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 두신 성령의 나타냄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12:4-11, 28,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을 위하여 몸의 지체들을 통하여 수행되어질 수 있다.(지혜의 말씀이 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사람을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지혜의 말씀이 각각 필요에 따라 주어지듯이 신선한 신유의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각각 아픈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의 기적이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특별한 기적이 바울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던 경우인 것과 같다.(행19:11) 우리는 신유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이어서 표적이 따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5) 성적 순결  (0) 2013.03.08
제6장 제자도와 복종운동  (0) 2013.03.06
제4장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0) 2013.02.09
(Q 4) 험담과 적절한 대화  (0) 2013.02.06
(Q 3) 교만  (0) 2013.01.28

제4장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의 첫 번째 조항은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무오하고 권위있는 행위와 믿음의 규범이다.”(딤후3:15-17, 벧1:21, 살전2:13) 이러한 원리를 고수하는 교회나 개인은 안전한 기초 위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탈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 결과는 실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음과 행위의 권위있는 규범으로 여겨야 하지만 특히 부흥운동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흥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자주 교회에게 무시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상기시켰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극단적인 곳으로 나가기가 쉽다. 어떤 사람은 부흥의 교리를 거부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친 열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의 범
위를 넘어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은 해로우며 그리스도의 대의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흥의 결과로서 그 동안 강조 되어온 진리 중 “지체사역”(Body ministr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진리를 잘못 적용하거나,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극단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지체사역의 타당성
지체사역에 관한 진리는 원래 성경적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교회는 사람의 몸과 비교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과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 가지는 살아있으며 친밀한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5:30) 성경은
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엡4:15, 5:23,32, 골1:18) 몸은 하나이며 그것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전12:26, 엡2:16, 4:4) 그러나 몸이 하나인 반면 그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다.(고전12:14) 그리고 이 지체들은 서로를 돌본다(고전12:25,26) 지체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역하며(엡4:15,16) 그것을 보전하며 섬기는 것을 추구한다.
비록 몸의 지체들이 다르며 직분, 사역, 기능에 있어서 다르다 할지라도(롬(12:4) 여전히 몸의 일부이다. 지체들은 하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고전12:18) 우리가 지체사역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이에 대한 교회의 전 사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돕기 위해서 교회에 주신 사람들의 사역을 포함하는데 이들의 사역의 실제이다. 즉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엡4:7-16참조) 그것은 또한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는데 각각의 신자는 성령의 은사나 혹은 영적 사역의 다른 모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지체 관계에 대한 언급이 빈약하지만 지체사역이 다음과 같은 상호 인격적 기능을 포함하는 것은 명확하다. 즉 위로와 격려하는 것(고후1:4, 살전4:18, 5:11), 권고하는 것(히3:13, 10:25), 기도하는 것(엡6:18), 사랑하는 것(요일93:23), 대접하는 것9벧전 4:9),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는 것(벧전4:10), 충고하는 것(롬15:14, 골3:16)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지만 개념의 양극화, 강조, 실시 등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한 극단은 몸의 지체들에 의한 표현과 참여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다른 극단은 성령의 참된 움직
임보다는 인간의 개성과 지도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참여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지체사역을 제한하는 것의 위험성
교회가 마땅히 조심해야 할 위험성들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몇몇 영역에서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섬기고 표현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성령의 나타남을 믿는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공중 예배 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지체들이 유용한 기능을 완전히 거부당하는 데까지 이르는 극단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만 너무나 많은 정력을 낭비한다. 목사들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고 대부분의 지체들은 소극적이다. 장려하는 강조점은 지체들의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활동들이 세속적인 마음
을 향하여 돌려졌다. 때대로 그냥 계속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경향도 있다. 원대한 프로그램에 고정되는 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대신하고, 정통은 현실을 대신하게 된다.

지체사역을 남용하는 것의 위험성
지금은 성령의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시대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 이전의 조건을 돌아보면서 영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에
대하여 조직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교회 조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조직된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를 피하고 그러한 조직을 한쪽에 젖혀두는 경향이 있다. 가라지를 태우려는 열심 때문에 알곡가지 날리게 된다. 전통은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주류에서 벗어난 소위 지체사역의 접촉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들은 이 나라의 이쪽에서 저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변칙적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예배를 위하여 면밀하게 준비하는 것 대신에 소위 지체사역이 기다리는 형태의 모임(waiting-type meeting)을 연습하는 것으로부터 개발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예
배시에 언어적인 은사가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비록 지도자가 그룹 중에서 개인들에게 요청해야 하지만, 성령의 모든 은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도자에 의하여 개인들에 관한 소위 예언을 하도록 지시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체사역의 다른 형태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과 잘못을 고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성경적인 민감도 훈
련 기술(sensitivity-training techniques)에 근사한 때가 여러번 있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유감스럽게 벗어난 것들 중 하나는 목사의 지도력과 조직 그리고 보다 조직화된 예배를 거부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목회의 은사(엡4:11)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강조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성경적인 경험을 유지하도록 도우려는 다른 신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지체사역에 있어서 균형의 필요
잘못된 것을 다루는 일 중에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떠났거나, 명확히 부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진리의 어느 관점을 부적당하게 혹은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생기는 경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우려고 시도하는 지도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자칫 오해받기가 쉽다.
문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신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들에게 예상되는 것이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서 관용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의 가치있는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엡4:1-3).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교회 안에 목사의 은사를 두셨다.(엡4:11-16).
만일 양이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 전반적으로 공급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양떼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행동하는 제멋대로 구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목사-교사 직분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만일에 소그룹 개념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까지 목회사역이 연장될 수 있다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신약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그들은 독재자가 아니라 종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되거나 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그들 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2,13, 딤전5:17-19, 히13:7,17) 우리는 교리적인 탈선을 피하기 위하여 도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때때로 남용되어진다. 성경은 항상 모든 관계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권위여야 한다. 우리는 몸의 각 지체가 교회성장에 있어서 채워야 할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남용이 존재할 때 목사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교회 봉사를 조사해야 하며, 이러한 불법 행위를 조장하는 잘못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적절한 가르침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의 봉사가 하나님의 말
씀의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성경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 제기된 그리스도 몸 안에서의 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체들이 교회 안에 두어진,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지도력의 한계를 넘어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조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연합이 항상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빋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때까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엡4:3,13) 위하여 모든 부분에 대하여 성실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라서 살며 기능을 발휘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사역을 이루어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운동(movement)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의 성경적 기능에 우리 자신들을 새롭게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Q 4) 험담과 적절한 대화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왜 개인의 대화와 언어를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교회는 정말로 험담을 죄악이라고 믿는가?

 

네 번째 질문

언어와 대화는 한 사람의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34).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셨는가 하는 것(누가복음 22:4, 42)을 읽음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 분의 독생자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모독과 음란한 말은 그들의 마음의 본질을 나타내 줍니다.

입으로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칼과 화살과 같은 무기로 표현됩니다 (시편 57:4, 64:3; 예레미아 9:8). 야고보는 혀와 말의 능력을 배의 키나 산불을 일으키는 불꽃으로 표현했습니다 (야고보서 3:2-12). 기독교인은 오늘날 정치적 선전이나 매체 뉴스에서 말의 힘을 관찰합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험담이 죄라고 하는 성경말씀에 동의합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그리고 자주 소문을 퍼뜨리는 모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비난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레위기 19:1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서1:26).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12:3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에서 험담은 기독교인과 성령 충만한 삶의 말, 생각, 그리고 행위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험담이 가져다 주는 공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며 가장 강력한 도구인 언어와 말을 잔인한 무기로 변화시킵니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가 진실에 상처를 주며, 지혜로움을 어리석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야고보서 3). 험담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6; 갈라디아서 5:14, 15). 그것은 도움 대신에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화평 대신에 분노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잠언 16:28; 고린도후서 12:20). 그것은 믿음 대신에 배신을 가져옵니다 (잠언 20:19).

 

왜 기독교인들 사이에 험담이 존재할까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리고 야고보는 혀의 힘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 모두 험담은 마귀에게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옥의 불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25-32; 야고보서 3:6).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에 험담이 존재하는 주된 이유는 험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마귀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은 그것이 일종의 오락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험담은 전형적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화의 필요성을 단지 임시동안 만족시켜 줄 뿐이며, 관계는 하나님께서 덕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충족되도록 계획하신 것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비록 사람들이 험담을 나누는 것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또 어떤 그룹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룹 밖에 있는 사람들을 남용하는 일입니다. 때때로 험담은 노여움의 돌출구가 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들이 노여워하는 사람이나 문제에 대해서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서 그들의 분노를 발산시킵니다. 이 모든 이유들은 주님 안에서 신뢰와 힘을 갖는 사람, 기독교인의 봉사를 사랑으로 감당함으로 기쁨을 갖는 사람의 생활에는 험담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것이 합법적이거나 허용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적당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강요나 습관이 우리들을 지배하거나, 그것의 힘 아래 우리들이 얽매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6:12). 기본적으로 진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건설적이거나, 다른 사람을 북돋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시적 감정에 의해서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한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사려 없이 관여하는 것은 자제심이 결여된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혹은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어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2).우리들은 험담에 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함으로서 소문을 만들기 시작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기도를 요청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한 요청을 하는 데 필요한 것만을 말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무엇을 암시하는 질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불미스러운 일을 캐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2) 비밀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잠언 11:13).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떤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오직 목사님이나 혹은 적절하게 행동할 위치에 있는 부모에게만 말하십시오.

(3)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험담을 듣지 않겠다는 당신의 의도를 표현하십시오.

(4)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불을 끄는 사람이 되십시오 (잠언 26:20).

 

우리의 어휘는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가운데 흔히 간과하는 분야는 사려 없는 표현과 조심없는 맹세의 사용입니다. 철저히 모독하려는 의도 없이, 어떤 기독교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gee), “단 (darn)” 그리고 “가쉬 (gosh)” 와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낱말의 어원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말들이 “예수 (Jesus), “댐 (damn), 그리고 “하나님 (God)” 을 의미 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부지중에 사용하는 어휘 가운데는 이와 비슷한 어원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낱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어휘들을 평가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하며, 또 신자의 생활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세하게 증거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관심사: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개 교회에서, 왜 그토록 많은 긴장이 있고, 또 화합하지 못하는 때가 많은지 생각을 해 봅니다. 흔히 그러한 어려움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급하게 내뱉은 부주의한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하기 전에 생각하십시오.” 라고 하는 한 옛 속담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명령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성령님께서 먼저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게 되며, 또 하는 말을 통하여 덕을 세우며 신자들을 연합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 충만한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위한 전적인 사랑을 반영하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령 세례는, 내적 충만과 함께 받는 기도의 언어와 함께, 인간의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게 보일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들은 험담의 유혹에 깊이 빠지지 않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익한 말씀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Q 3) 교만
왜 교만은 신자의 생활과 교회에 대해 그토록 파괴적인가? 언제 적절한 자기존중이 오만함과 죄악의 선을 넘는가?

세 번째 질문
교만은 심지어 창조 이전에 하늘로부터 사탄을 타락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첫 번째 죄라고 일컬어집니다
(두로 왕의 교만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에스겔 28:14-17에 사탄의 교만을 기록한 에스겔 28장을 보십시오).
성경에서 교만이나 무례함으로 번역된 모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단어는 마음의 잘못된 태도, 거만한 영을 묘사합니다. 잠언 16:18 은 이 말의 부정적인 사용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그러나 영어 사전은 교만(pride)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면의 사용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우리들은 오늘날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함, 보화나 정말로 값어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깊은 애정, 혹은 영웅에 대한 사회의 존경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사이의 구별
을 인식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칭찬하는 말을 하면 그러한 표현이 그들을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 것이라고 두려워하여서 어떤 부모들이 그러한 말을 자녀들에게 사용하지 않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가치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가르침은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물에게 두신 가치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은사에 대해 감사할 필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러한 생각이 이기주의적이며 경쟁적인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했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에서 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한 구분을 분명하게 하면서, 우리들은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이 하나님의 눈에는 천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미묘하게, 주의하지 않는 사람을 사로잡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육체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서만 우리들은 성경이 인정하는 겸허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만하고 교만한 마음 속에는 창조물에게 사랑과 복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에 대항하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적인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은 그로 하여금 생존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교만은 스스로에게
도취되게 만들어서 자신을 신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에,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들어내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경향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거나 심지어는 그들에게 상처나 굴욕을 주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도록 만듭니다 (시편 10:2-4; 디모데전서 1:12, 13). 사회에서 혹은 소수의 문화권 안에서, 총체적 교만은 인종 차별, 계급 차별, 그리고 편견을 낳을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의식 속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을 항상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교만을 점검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다른 사람의 등 뒤에서 그 사람을 헐뜯음 (시편 101:5), 교만한 눈 (잠언 6:17), 술 취한 자들의 교만함(이사야 28:1), 백성들을 임으로 주관함 (마태복음 20:25, 26), 가치 없는 칭찬을 받아들임(사도행전 12:21-23), 다른 사람들보다 낫게 여기는 자만함 (고린도전서 4:6, 7), 이기적인 명예심이나 허영심 (빌립보서 2:3, 4), 장래 일에 대한 자만함 (야고보서 4:13-16), 장로들이나 영적 지도자들의 권면을 무시함 (베드로전서 5:5,6), 그리고 피차 복종하기를 거부함(에베소서 5:21) --- 랄프 해리스의 자만의 증상에서 인용함.

우리들 스스로가 항상 감시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잘못된 교만은 우리들의 삶 속으로 기어들어 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들이 고의적으로 그것의 존재를 은폐하기 때문에 교만이 겉으로 요란스럽게 나타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함이 주는 우리들의 영적인 삶을 망가뜨립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
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라고 한 다윗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관심사: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은 오만하고 교만함을 다루기 위한 것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들의 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신약성경에서 여덟 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그 가치를 보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 나아가서, 실제적으로 내면의 교만을 감출 수 있는 가장된 표면적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겸손함에 대한 교만이나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부어주신 덕이나 성품에 대해서 교만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제3장
이혼과 재혼: 성경적 원리의 적용

결혼
1. 결혼은 기본적인 인관관계이다.

①결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사람을 지상에 살도록 창조하신 것의 특성은 서로에 대하여 남자와 여자를 의도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들의 관계는 사회적이며 또한 육체적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창2:18) 처음 여자는 남자에 대하여 돕는 배필(배우자)이었으며, 옆구리에서 취한 자였으며,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었으며 그의 완전한 짝이었다.(창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특권과 책임을 나누도록 의도하셨다는 것이 확실하다.

②하나님은 평생 일부일처의 연합을 이루는 결혼을 의도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사랑과 충성으로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마태복음 19: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연합에 대한 헬
라어 단어는 “아교를 붙이다” 혹은 “가깝게 묶여 있다”는 의미를 지닌 것을 사용 하였다.
실제로 구약성경은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일부다처제의 첫 번째 경우는 가인의 계보이었음을 볼 수 있다.(창4:19) 그러나 여전히 일부일처제가 이상적임을 보여준다.(시128:3, 잠5:18, 31:10-29, 전9:9) 예수께서도
처음 하나님의 이상적인 결혼도 일부일처제였음을 말씀하셨다.(마19:8)

2. 결혼은 언약을 포함한다.
결혼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행해지는 엄숙하고 구속력 있는 계약 즉 언약이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세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말2:14) 에스겔은 결혼의 개념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적용하고 있다.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16:8) 이상에서 살펴 볼 때 남편은 아내에게 맹세하고 (충성을 서약하
고) 깨뜨릴려고 하지 않겠다는 엄숙한 언약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희생의 의미가 없다. 따라서 좀더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언약을 맺는 것”(cut a convenant)에 대하여 사용된 단어와는 구별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사랑은 근본적으로 히브리어 헤세드(hesed)라는 말로써 “충성스럽게 언약을 지키는 사랑”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아무런 가치도 없을 때에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이혼
1. 하나님은 이혼을 싫어하신다.

①“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지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작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시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시켜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말2:14-16) 이 구절은 이혼이 자기 배우자에 대하여 궤사(속이는 것, 충실치 못한 것)을 행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잘못된 심령에서 나오는 위법한 일이다. 더욱이 나쁜 것은 그것이 “경건한 자손”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가정이 깨어지면 건전한 자녀를 양육할 수 없다.

②“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19:6) 이혼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멍에를 부러뜨림으로서 해롭게 된다. 이 목적은 짝으로써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복
종함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엡5:21-31에 아름답게 기록되어 있다.

2. 율법은 이혼을 제한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 가운데 이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다.(고대 사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던 많은 다른 풍습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들의 잘못된
관습에 대하여 제한을 두시고 그들을 지도하시려고 시도하셨다. 그들이 이혼에 대하여 예수와 논쟁했을 때 그들은 아내를 버릴 때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모세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분명한 잘못을 범하였다. 예수는 모세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분이지 그 당시에 성행하던 것처럼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19:3,7,8) 이것은 신명기24:1-4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모세가 인용한 히브리어는 이혼을 명한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결혼을 유추한다. 그는 단순히 사람이 그 아내와 이혼하는 것을 인정할 뿐이었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 부정한 것 [이 히브리어 단어는 번기를 덮지 않은 것과 관련된 것이며(신23:12-14), 노아가 벌거벗은 것(창9:21-23), 그리고 술취한 여인으로 상징한 에돔(애가4:21) 등과 관련된 것이며, 이는 간음
이 아닌 도덕적, 성적 불결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간음을 행한 자는 율법에 의하여 죽이게 되어있기 때문이다.)을 발견했을 경우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서주어 집으로 내어보내고 그 여자가 집을 나가 남편을 구하였는데 도 그 남편이 그 여
자를 싫어하여 이혼증서를 그녀에게 써주어 집에서 내어 보내거나 혹은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인 그 남편이 죽으면 그 여자를 내어보냈던 첫 번째 남편이 그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다시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기 전에 아무리 타당한 이유처럼 보여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쩌면 그 여자를 다시 받아들이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이미 재혼했으며 그는 그 여자를 아내
로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3. 예수는 이혼을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배치되는 것으로 금하였다. 예수는 마19:5,6 과 막10:6-9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4. 바울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혼하는 것을 금하였다.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니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
리지 말라”(고전7:10,1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혼하게 될 것을 인정하였지만 그는 다시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5.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 먼저 이혼을 제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저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 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고전7:12-16) 이
와같이 바울은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이혼할 것을 고집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굳이 막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6. 예수께서는 음행이 관련되었을 때 그리스도인의 이혼을 허용하고 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①(마5:32, 19:9 참조) 이것은 허용
일 뿐이지 명령은 아니다. 음행에 대한 헬라어 “포르네이아”는 특별히 반복적인 간음을 포함하기도 하나 보통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 습관적으로 행하는 성적 부도덕성을 의미한다(포르네는 창녀를 의미함) 몇몇 학자는 여기서 음행의 의미를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한하지만 이것은 이 단어가 보편적으로 쓰이는 뜻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발견할 수 없다고 하여 예외로 규정한다. 이 사람들은 마태복음에 있는 두 구절을 근거로 교리로 만드는 것이 적합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년왕국의 길이가 비록 성경 한곳(계20:2-7)에만 언급되고 있지만 천년 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같은 원칙이 다른 성경적 가르침에게 적용된다. 어느 한 구절이 어떤 단일 주제에 대한 진리의 모든 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어떠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전체적으로 취해야 한다.

재혼
1. 이혼이 재혼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율법은 용납한다. 이것은 이미 인용한 바있는 신 24:1-4의 구절로 보아 명확하다. 동일한 구절은 율법이 재혼에 대하여 모종의 제한을 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2:11은 불신자와 재혼하는 것을 정
죄하였다. 제사장에게는 이혼한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금지되었다.(레21:7)

2. 예수는 그의 기본적인 가르침에서 이혼한 사람들의 재혼을 금하였다. 예수는 재혼을 간음행위 즉 첫 번 결혼의 언약에 대한 죄로 정죄하였다.(마5:32, 19:9, 막10:11-12, 눅16:18) 그러나 예수는 기본적인 문제가 이혼 그 자체임을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이혼한 사람이 결국 재혼하게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간음을 행하고 새 배우자에게도 간음을 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의 근본 목적은 첫 번째로 이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 마5:32 은 예외적인 조항을 더해 주었다.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며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이것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여자와 이혼한 남편인 이 여자로 간음하게 아니한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이미 간
음하였기 때문이다.

4. 마19:9 역시 이러한 예외적인 조항을 지니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해 가장 권위있는 사본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음행한(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이혼하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 이니라” 여기서 예
외는 성적 부도덕성 때문이지 단순한 한번의 과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성적으로 부도덕한 습관은 회개, 고백, 용서 그리고 회개 과정을 통하여 다루어져야 하며, 이와 같이 하여 그 결혼을 유지시켜야 할 것
이다.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몇몇 사람들은 이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 이니 ”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음행 혹은 성적 부도덕성은 침대와 식탁을 따로 할 수 있는 권리는 부여하지만 결혼관계를 끊거나 그것을 해체시킬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다루고 있는 다른 구절과 맞추기가 어렵다. (고전7:2-5) 그러므로 대부분의 개신교는 예외조항이 “다른데 장가드는 자”라
는 구절에 적용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이혼이 필요한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재혼을 명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마19:9에서 예수께서 사람이 재혼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구절은 이혼과 재혼을 다루고 있
으며 문법상 예외 조항은 양쪽 모두에 적용된다. “내버리다”는 말에 대한 헬라어 “아폴루오”라는 단어는 마5:31과 막10:2-12에 인용된 신명기 구절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거기서 “내버리다”는 말은 확실히 결혼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의
미하였다. 예수는 이혼의 본질을 결혼생활을 청산하는 것으로 바꾸지 않았다.
예수는 단지 음행(포르네이아, 습관적인 성적 부도덕) 이외의 다른 변명이나, 이유나 원인을 이혼의 조건으로 하는 것을 거부한 것뿐이다. 또한 롬7:1-3 고전7:39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 해체된다는 선언에 대하여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혼에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결혼관계가 죽음에 의해서만 깨어진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기본적인 원리를 진술한 것으로 예외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 롬7장은 율법 아래에서 남편이 이혼할 수 있지만 아내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율법에 의해서 남편이 죽을 때까지 메여있었다. 또한 율법 아래서는 간음에 대한 벌은 죽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죽음의 형벌은 결혼관계를 끊기 위하여 가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끊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5. 고전7:15도 예외를 담고 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는 말은 강한 표현이다. 롬7:2에서 바울이 이혼과 재혼에 관한 주제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단지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신자의 종속을 설명하기 위하여 남편이 죽은 후에만 자유케 되는 율법 아래에 있는 여자의 독특한 위치를 사용한 것뿐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에서 남자는 그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으나(신4:1-4), 여자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죽음만이 여자를 남편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건전한 성서해석학의 원리는 여기에 이혼과 재혼에 관한 바울의 견해가 나타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가 결혼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아서 이혼하고자 할 때 신자가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다면 그는 이에 대해 자유롭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혼하려 하고 주도하는 이가 믿지 않는 배우자이기 때문에 신자의 자유는 그(혹은 그녀)를 떠나게 하는 자유 이상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혹은 그녀)는 어차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신자가 원한다면 자유롭게 재혼 할 자유가 있는 의미처럼 드려진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는 재혼 할 것을 권하지 않는다.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고전7:27,28)

6. 재혼은 새로운 계약 혹은 언약이다. 어떤 사람은 재혼한 자는 간음 중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간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아니지만 진정한 회개는 도적이 도적질을 그만두는 것처럼 그 죄를 그만두는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재혼한 사람이 새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을 계속적으로 간음을 행하고 있다고 논쟁한다. 그러나 결혼과 도적질은 그렇지 않다.
잘못되어진 재혼은 전에 맺은 계약에 대하여 간음행위가 성립된다. 이것은 전에 맺은 계약을 파괴한 것임으로 전 배우자는 자유하게 된다. 한번 재혼한 사람은 또한 새로운 계약에 대하여 충실할 책임이 있다. 신24은 결혼계약으로 돌아가는 것이 잘못임을 보여준다.(호세아는 다시 가서 아내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것을 타락한 이스라엘을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한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과 잘못된 계약을 맺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이 충실히 이행되기를 바라셨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를 돕기 위하여 우박의 기적과 해를 길게 하는 기적을 행해 주셨다.(수9,10장) 이사야는 아하스가 앗수르와 계약 맺는 것에 대하여 경고하였으나 아하스는 듣지 않고 맺었다.(사7장) 그리고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그 계약을 깨드리고 도움을 청하러 애굽에 가려는 것을 경고하였다.(사30,31)

교회안에서 이혼과 재혼의 위치
1. 모든 중생한 신자는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구원받기 전에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을 포함한다. 바울은 할례받은 자, 노예의 신분에 있던 자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법적지위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구원받을 당시
에 지니고 있는 조건을 그대로 받아주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7:17-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하나님은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을 받아주셨다.(행10,11장) 그 당시 로마인들 중에는 이혼
과 재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고넬료의 집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함께 살기를 원하는 믿지 아니하는 배우자와 계속해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주지 않았다. 또한 고린도 교인들 중 대다수가 아직도 이전 배우자가 살아있는 불신자와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러한 사람을 받으셨다면 우리가 누구관대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은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2. 재혼한 사람은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맡을 수 없다. 장로(목사에 해당)나 집사의 직분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에 의하여 제한된다.(딤전3:2,12)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일부다처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
당시 일부다처제는 일반적으로 행해지지 않았지만 이혼과 재혼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굉장히 성행하였음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에서 이러한 직분을 돌아가면서 맡을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장로와 집사에 대하여 특별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그들이 교회 밖에서도 좋은 평판을 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증거를 위해서나 복잡한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역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이러한 조건과 다른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도덕성의 기준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장로와 집사의 특별한 사역에 대한 자격문제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재혼한 사람을 교회의 모든 사역에서 제한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몸의 모든 지체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사역은 성령에 의해서 주신 것이다. (롬12:6-8, 고전2:11, 엡4:16)

총회에 의하여 수정 채택된 조례에 대한 성경적 원리의 적용 제 8 조 5항

회원
1. 지금 많은 크리스찬들 중에 지난 날 죄악 가운데 살 때 결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서 이런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지역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복잡한 결혼관계는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추천한다(고전7:17,20,24)
2. 우리는 현재 내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회원으로 받지 말아야함을 추천한다.

재혼
결혼과 이혼에 대하여 기준을 낮추는 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그리스도의 일에 많은 상처를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합법적 수단과 가르침을 통하여 이혼을 배격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음행이나 간음의 연고 외에 다른 이유로 신자가 이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마19:9) 이러한 예외적인 환경이 있었거나,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에 의하여 이혼당했을 경우 우리는 재혼 문제를 신자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결정하기를 추천한다.(고전7:15,27,28)

개교회의 지도력
1. 신약성경이 이혼하고 재혼한 신자가 교회의 감독이나 장로나 집사의 직분을 받는 것을 제한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지역교회가 이 기준을 준수할 것을 추천한다.(딤전3:12, 딛1:5-9)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자에게 적합한 다른 봉사
의 기회를 제공할 것을 추천한다.
2. 추천은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나 지역교회는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특권을 유지해야 한다. (헌법 제 11조에 의거하여)

결혼식 주례
1. 우리는 조례 8조 5항 2목에 기술된 예외적 상황에 해당되는 경우가 아닌 한 하나님의 성회 목사가 이혼한 경력이 있으면 전 배우자가 현재 살아 있는 한 경우 결혼을 주례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정받지 못한(위와 같은 경우) 결혼의 주례를 행한 본 교단의 목사는 결백하게 속아서 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교단에서 제명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성회 목사는 결혼식 집례하기 전에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성경의 지침에 따라 결혼식 신청자와 상담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의 의견에 결혼 당사자들이 적절한 사려나, 지혜나 진지함 없이 결혼을 하려 한다고 판단 될때 결혼식 집례를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
2. 우리는 8조 5항의 2 목에 있는 예외적인 환경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의 재혼이 목사의 양심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사실이 그렇다면 목사는 결혼식울 집례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자격
하나님의 성회의 결혼한 목사로서 목사나 그 배우자의 전 배우자가 살아 있는 경우에 그 목사직을 거부한다.(7 조 5항의 2 목과 3목 참조)
1. 우리의 한 지역총회가 다른 지역총회에서 자격증을 받은 설교자에게 목사안수를 행할 때 목사 안수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안수 받기를 원하는 지역총회에서 적어도 1년간 자격을 유지해야 하며, 전에 자격증을 받았던 지역총회의 임원으
로부터 확인 이서가 있을 때까지 목사 안수를 보류할 것을 추천한다.
2. 우리는 결혼한 사람이나 그의 배우자 중 누구든지 그 사람의 전 배우자가 살아있는 경우 지역총회가 그러한 사람에게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한다.
(제8 조 5항 3목 참조)
3. 본부총회 실행위원회는 신청자의 전 결혼의 취소가 목사 자격증을 부여하거나 유지하는 것과 관련하여 성경적으로 부합한지, 혹은 이혼이나 결혼해체의 경우 그 상황이 결혼 취소로 분류 될 수 있는 상황인지 결정할 권위를 보유한다. 이러한 신청은 거짓이나 사기에 의한 불법적인 결혼이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하고 만족할 만한 증거와 함께 제출되어야 한다. 본부총회 실행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상소는 본부총회 총대회의에 보내질 수 있다.

①)어떤 사본들은 “다른 데 장가드는”이라는 부분을 생략했지만 시내 사본을 포함한 다른 사본들은 이 부분을 포함시켰는데 이는 문맥상 적합하다. 이 예외적인 조항을 생략하는 것은 아무런 사본적 증거가 없다.(존 머리, 이혼. )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4) 험담과 적절한 대화  (0) 2013.02.06
(Q 3) 교만  (0) 2013.01.28
제2장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0) 2013.01.23
제1장 성경의 무오성  (0) 2013.01.23
(Q 2) 훈련과 절제  (0) 2013.01.19

제2장 중생한 신자가 귀신들릴 수 있는가?

동양종교와 미국내의 사교의 보급으로 전에 외국에서 선교사 들이 보고한 것과
유사한 귀신들린 역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반면 이러한 영역에 있어서의 가르침은 너무나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원수에 대하여 확고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귀신은 가볍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손길”, 성령의 권능, 그리고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극단주의의 위험


어느 무시된 교리를 강조할 때 성경의 의도를 넘어서 극단주의로 나갈 위험이 있다. 또한 무시된 교리를 전체의 사역으로 삼음으로써 목회의 궤도를 벗어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귀신론의 주제에 매혹된 어떤 사람들의 경우와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관심을 귀신론에 집중함으로써 함정에 빠지고 만다. 그들이 귀신을 많이 쫓아내면 낼수록 쫓아내야 할 귀신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에 귀신 쫓는 이외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된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보다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빠지게 되는 이러한 경향은 성
경의 균형에 모순된다. 또한 귀신을 좇아낼 때 여러 가지 토해내는 등 외적인 현상에 대한 부수적인 선입관은 성경에서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귀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잊었다.) 거품을 일으켰던 경우에 있어서도 성경은 귀신이 쫓겨가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일이었으며 귀신이 쫓겨날 때만 있었던 현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귀신론에 대하여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경우 유감스러운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성경적인 가르침까지도 악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영국 그리고 17세기 미국의 소위 마법의 결과였다. 영국에서
사례들이 보고된 것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아이들이 그들의 몸속에 들어갔다고 추정되는 악령을 토해냈다는 것이다.

1962
년 커튼 마더(Cotton Math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바드를 우수한 성
적으로 졸업한 유능한 설교가였다. 이 사람이 마녀들에 대하여 메사추세츠주의 살렘에 사는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귀신들린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증언 때문에(이 아이들은 다른 설명이 더욱 필요하겠지만 거짓말하는 귀신에 의하여 움직였던 것 같다.)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50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고발 당한 사람들 앞에서 이 아이들은 발작을 일으키다가 혼수상태처럼 보이는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었다. 고발당한 사람 중 상당수는 기독교 순교자에 해당하는 믿음과 정신을 보였지만 인격적으로 고상한 판사는 이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였다. 재판이 공개된 결과로 이때 당시의 미국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하여 외면하게 되었으며 사탄과 악령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귀신이나 악령들에 대하여 잘못된 관
심을 갖게 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명확한 가르침의 도에서 떠나도록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방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귀신이나 악령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은 방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조심한다고 해서 귀신론을 가볍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귀신의 활동과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을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 마귀(devils)라는 단어는 실상 귀신(demons)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 더욱 자명한 일이다.

실지로 마귀라는 단어는 (헬라어, Diabolos는 “참소자”이다) 사탄에게만 적용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가 귀신들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탄은 피조물이며 제한 받는 영이며, 편재하지도 않는다. 사탄은 세계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귀신들을 통해서 대부분 그의 일을 수행한다. 귀신들을 쫓아내던 예수의 사역은 적어도 마귀에게 눌린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의 일부였다. (10:38)-여기서 사용된 “눌린”의 뜻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제기되는 질문은 오늘날도 귀신이 활동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도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있는가 혹은 누군가가 중생한 신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과 귀신이 한 집에 같이 거할 수 있는가?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아닌가
?

저자들이 말한 것


대부분의 옛날 저자들은 참된 기독교인들 안에 귀신이 거할 수 없으며 귀신이 참된 신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예로서 존 네비어스(John L.Nevius)라는 장로교 선교사는 거의 40년간 중국에서 살았는데 귀신들린 사례를 많이 보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볼수 없었다고 한다. 빅톨 플리마이어(Victor Plymire)라는 오순절 계통의 개척 선교사는 티베트에서 유사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최근 여러 교단의 저자들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넬슨(M. H. Nelson)이라는 의사는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고통 당하는 듯이 보이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많은 보고서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중 몇몇은 하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불순종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외견상 이 의사는 영원한 보장을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귀신이 신자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신자의 몸이 귀신에 의하여 사로잡히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귀신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사로잡지 않은 채 기독교인의 몸속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성경의 관점에 배치되는 것 같다. 또한 책임이 관계되는 한에 있어서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방식이다. 만일에 귀신이 몸이나 마음(혹은 자세)중 어느 영역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것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문제들로부터 구원하고 계시며, 귀신들리는 것으로 부터도 구원 하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건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는지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영(spirit of cowardly fear)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려움으로부터 구원받으려면 두렵게 하는 귀신과 근신 혹은 절제의 영(한글판에는 spirit이 마음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두려움을 쫓아낼 필요가 있는 악한 영이라고 해석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선한 영들이 들어오기를 간청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잘못은 명확한 것이다. 사랑이나 절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사랑이나 절제의 영은(a spirit of love and of self-control) 우리가 성령을 따를 때 결과로서 나타나는 자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영(spirit)이라는 단어는 자세 혹은 기질을 나타낸다.
다윗은 상한 영(broken spirit:상한 심령, 51:17)이라고 말했으며 솔로몬은 겸손한 영(humble spirit: 마음을 낮추는 것, 16:19)이라고 말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갈 때에 매대신 사랑과 온유한 영(love and meek or gentle spirit: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가기를 원한다고 하였다.(고전4:21) 베드로는 온유하고 조용한 영의(meek and quiet spirit: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단장하라고 말하였는데 (벧전3:4) 실제로는 조용한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의 심령이나 그것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한 것
을 알 수 있다.(학개1:14), 17:16, 고전2:11 . 그러나 학1:14, 17:16 spirit 을 한글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 역자주) 이와같이 문맥상 독립된 영적 존재라는 뜻이 나타나 있지 않다면 거만한 영, 급한 영, 졸리운 영, 시기의 영 등과 같은 말은 귀신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6)이나 죄의 기질로 취급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죄의 기질을 귀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 개인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지 않게 되며, 회개할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이러한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세를 버
리라고 한다. 우리 안에서 싸우는 싸움은 성령과 귀신 사이에 싸움이 아니라 내주하는 성령과 육신과의 싸움인 것이다.(육신은 죄의 경향을 띤 모든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영”이라는 단어가 귀신에 대하여 사용될 때는 성경은 악령 혹은 더러운 영이
라고 말한다. 때로는 이 단어는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더러운 마귀의 영(a spirit of an unclean devil, 한글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 4:33)같은 것이 있다. 많은 경우 이 귀신들은 질병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모든 질병을 귀신이나 악령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실재로 많은 구절들이 귀신에 의한 질병과 그렇지 않은 질병 사이에 분명한 구분을 보여준다.(4:24, 8:16, 9:32,33, 10:1, 1:32, 3:15, 6:17,18, 9:1 들 중 어느 구절에도 귀신에 의한 질병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있었다는 단서를 보여주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예가 오순절 이전에 사건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이모니조마이”라는 헬라어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다, 혹은 귀신들리다라는
뜻인데 많이 나타나지 않는 단어이다. 이것은 오직 한번 동사로 사용되었는데 심하게 귀신들린 가나안 여인의 딸의 경우이다. 그 외에는 “귀신들린”이라고 번역
되는 분사로써 사용되고 있다. (8:28,32, 9;32, 12:22, 5:15-18, 8:35)

다시 말하거니와 이 귀신들린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
고 할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심한 괴로움을 겪거나 급격한 인격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신자도 귀신들릴 수 있다는 사상은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데 그것은 믿음을 잠식하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제공하는 구원에 대한 개념을 약화시킨다. 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1:13) 지난 시대에는 우리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다(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였으며 우리를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으로 삼으셨다(2:19)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는데 우리의 몸 안에 귀신이 거한다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우리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6:17)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자유인이 되었다. 지금도 신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신자가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자기의 의지 때문이지 귀신에 의해서 침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로마서는 귀신을 좇아낼 것을 요구하지 않고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데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의 신분이 결정된다
.
만일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면 예수님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분쟁사태를 초래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 낸다고 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사탄의 왕국이 서로 대적하며 분쟁하고 있다고가정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거부하였다. 11:21,22은 사탄이 신자를 사로 잡으려고 할 때에 예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무장해제 시킨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귀신이 돌아와서 그 집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만 귀신이 다시 들어갈 수 있다.(11:24-26, 12:43-45) 진실한 신자에게 귀신이 있다는 사상은 또한 구원과 평강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잠식한다. 이것은 신자가 다음 어떤 귀신이 자신을 침입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두려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가 소유했다고 확신시켜주는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2세기 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갖지 아니했다. 주후 139년경에 목자(The Shepherd)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기독교 책을 쓴 헤마스(Hermas)는 부패를 책망하며 기독교의 덕목을 격려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 안에서 악령이 거하면서 주관할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러한 악령을 지니고 있는 사람 안에 성령이 거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였다. 성경은 신자를 위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신자는 귀신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적한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탄이 그 안에 가득하여 성령께 거짓말하기 전에 이미 타락하였던지, 아니면 스스로 교회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5:13,14참조) 적어도 그 당시에 자칭 그리스도인 이상은 아니었다.

악령을 대적할 것


귀신들린다는 말을 진실할 신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하게 보인. 성경이 보여주는 것은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외부적인 원수라는 것이다. 리는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전쟁 중에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6:12 참조) 성경적인 강조점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에서 무엇을 대면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 요구는 우리가 누군가를 시켜서 우리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은 밖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시험하고 있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요구는 깨어 있어 전신갑주를 입고 굳게 서라는 것이다. (고후10:3-6, 6:10-18, 벧전5:8,9)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사탄을 물리쳤다.( 4)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믿음으로 대적해야 한다.(4:7,벧전 5:8,9) 그리고 믿음의 방패는 원수의 불화살을 꺼버릴 것이다.(6: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대대로 천사를 통해서 오듯이 사탄의 공격도 대대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탄의 공격이 외부적이라는 사실은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의 육체에 있는 가시의 경우인데 바울은 이것을 자기를 치기 위하여 사탄이 보낸 사자라고 불렀다.(고후12:7 참조) 바울은 이것을 떠나게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으나 하나님은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셨다. 그 결과 바울은 그의 연약함과 수치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 여기서 사탄의 사자가 귀신인지, 질병인지, 혹은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치고 공격하는 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쫓아 달라고(cast out) 간구하지 않고, 떠나게 해달라고(to be kept away) 간구하였다. 또한 우리는 바울이 그 자신과 우리 안에서 유일한 소망으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1:2,29) 우리는 또한 영들 분별의 은사가 성령의 내주함이 없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영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여겨지는 귀신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만일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2:24) 오직 우리가 포도나무에서 잘려져 죽은 가지로 버려졌을 때만이 사탄이나 혹은 그의 귀신들이 우리를 주장할 수 있다
.

우리의 구속은 전인적인 구속이다. 모든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리스도가 귀신들렸다고 공격하였다. 그것은 마귀의 교묘한 수작으로서 오늘날 성실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귀신들렸다고 공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확실히 여러 가지 구원들이 있다. 그러나 귀신들림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3) 교만  (0) 2013.01.28
제3장 이혼과 재혼: 성경적 원리의 적용  (0) 2013.01.24
제1장 성경의 무오성  (0) 2013.01.23
(Q 2) 훈련과 절제  (0) 2013.01.19
(Q 1) 진실과 성실  (0) 2013.01.10

제1장 성경의 무오성

우리는 성경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영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오가 없으며 오류가 없다.

성경의 의도

1. 우리는 원본을 참조한다. 본문비평문학은 원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으며 성경의 무오성은 원문에만 한한다고 말한다.(렘36:2)

2. 우리는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생각을 넣어주셨다.(암3:8)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도록 인도하셨다.(출4:12, 125)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읽는 독자의 마음에 조명하심으로 독자가 기자의 마음에 있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고전2:12, 엡1:18, 18) 이와같이 사상과 언어는 계시와 영감으로 된 것이다.

3. 우리는 영감이 성령의 특별한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영감에 의해서 성령은 성경의 기자들을 인도했다고 본다. 이와같은 성령의 감독은 기자들의 다양한 배경, 능력, 개성들을 전적으로 포용했고 성경의 정경에 나타낸 것처럼 그들의 쓴 모든 것에 적용된다.

4. 우리는 “무오성”을 “과오로부터 면제된” 뜻으로 정의하며 “무류성”은 “과오를 범할 수 없는 확실한” 뜻에 근사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 두 단어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오성은 성경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무류성은 성경의 신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오성과 무류성은 모든 성경에 적용되며 계시적인 무오성과 사실적인 무류성을 포함한다. 성경은 진리이다.(시11:34,160, 요17:17,19, 골1:5)

역사적 고찰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논쟁은 주로 최근에 있었던 현상이지만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와 함께 영감설에 대한 확실한 입장을 오랫동안 고수해온 것을 알 수 있다. 교부시대에는 성경이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성령의 독특한 저작품으로 간주되었다. 교부들에게 있어서 영감은 성경의 문체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마5:18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Protepticus, IX, 82, 1) 그레고리 나지아누스(Gregory Nazianus)는 성경의 작은 선까지도 성령에 의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의미에 대해서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권면한다.(Oat., 2, 105) 순교자 저스틴은 인간과 하나님의 영감을 구분했고,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했다.(Apology I. ch. 36) 이레니우스 성경을 허위가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Apology, ch, 18) 초대 교부들이 성경의 영감설을 믿었으며,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믿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세 혹은 스콜라학파 시대에는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논쟁을 위한 자료집 정도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영감설에 관한한 비생산적이었다. 이 당시는 교회내의 다른 권위들과 성경의 위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비록 아벨라드와 아퀴나스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인간적인 요소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중세시대의 분위기에 의해서 영감설이 손상을 입었다고 할만한 증거는 없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경의 영감설을 채택하였는데 그 안에는 성경의 무오성의 교리가 포함되었다. 쯔빙글리는 순수한 기독교 교리를 변호할 때 지속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인용하였다. 칼빈은 성경을 하나님이 바로 그 저자라고 완전하게 확인할 때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남기기를 기뻐하신 유일한 기록이라고 기술하였다.(Institutes, I, 7, 2, 4) 루터는 영감설을 지지하였으며 정경성 문제가 해결되자 성경을 오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개혁자들이 영감설의 주제에 대한 신학에 몰두했다고 할 수 없어도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성주의 시대에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설을 적용하는 것이 공격을 받게 되었다. 문예부흥의 정신에 의하여 언어학적이며 본문에 의한 연구가 홍수를 이루었다. 이성주의적인 접근방식으로 성경의 본문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여 성경의 영감설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하는 주장에 불을 지르게 되었으며 따라서 비판자들은 영감설의 교리를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불행히도 정통주의는 똑같은 이성적인 방법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성경은 오류가 없으므로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우리가 낮은 규준의 영감설을 용납해야 한다거나, 무오성의 교리를 배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이 단지 성경에 요구하는 것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성경은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 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해야 옳다. 만일에 성경이 오류가 없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이며 인본주의적인 사고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되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성서적이며 영감설 및 무오성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게 할 것이다.

주석학적 고찰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한 시발점은 성경 스스로의 증거이다. 성경은 스스로 신적 권위와 충만한 영감을 분명하게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 안에는 무오성의 교리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뢰할만한 증인이며 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세세한 것까지 영감에 의한 것임을 단언하였다. 마5:18에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점은 히브리어 글자중 가장 작은 것이며 획은 글자와 글자간의 차이를 분간하기 위해 긋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의미상으로 받아들인다면 일점일획은 성경의 세미한 부분을 가리키지만 의미는 같다. 예수님은 성경을 하찮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의 완전한 영감과 무오를 믿지 않았다면, 그의 논쟁은 의미가 없다.

성경은 각 부분의 기본적인 특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장은 요10:34,35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의 말씀을 가리키면서 율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만일 예수께서 성경이 부분적으로만 영감을 받은 것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여기서처럼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마22:32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정당한 이유는 성경의 자세한 부분 즉 현재 시제를 사용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22:43-35에서 바리새인들에게 한 질문에서 대화의 강조는 “주”라는 한 단어의 사용에 있다. 갈3:16에서 사도바울은 그의 논쟁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는데 의존하고 있다. 시제, 특별한 단어, 단수와 복수 등 세세한 예증들은 성경이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오류가 없이 완전히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완전 영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말씀 중에서 딤후3:16이 있다. 이 구절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혹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 (Breath out of God)것임을 가르친다. 이 구절은 번역할 때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 이라고 하거나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해도 의미는 똑같은 것이다. 한 성경에서 진실한 것은 성경전체 혹은 모든 성경에 대해서도 진실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특한 저작품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해 볼만한 구절이 있다. 벧후1:21은 구약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대로” 말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영감된 말과 비교해 볼 때, 이 문맥에서 이 구절은 성경의 독특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고 움직여졌다. 성경 자체의 변함없는 증거는 명확하다. 즉 하나님이 기자의 마음에 개념을 말씀하였고(계시), 성령은 이 개념을 객관적인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도록 인도하셨고(영감),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를 통하여(조명)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원래 계시된 것을 받게 된다.

이상의 구절 외에도 성경이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 보면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라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다른 구절에 보면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와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말씀하시기를” “기록되었으되” 그리고 “경에 이르기를” 등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오성의 교리에 대한 반대 의견

1. 우리는 원본을 갖고 있지 않음으로 무오성의 교리는 가치가 없다.

이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유능한 학자들에 의하여 발달한 본문 비평학은 우리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본문(헬라어, 히브리어)이 의미상 잘못이 없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구하는 본문은 신뢰할만하며 주의깊고 세심하게 연구할만하다.

둘째로, 만일 무오성의 교리를 배척한다면 진리에 대한 의문이 객관적인 것으로 주관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어느 부분이 옳고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이라고 누가 결정 할 수 있는가? 어느 부분이 신뢰할 만하며, 어떤 부분이 무가치한 것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는가? 우리가 성경을 이성주의 아래 두거나 사람의 평가에 맡긴다면 성경이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성경의 주장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2. 무오성의 교리는 성경을 저술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개성을 제거하는 영감과 교리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성령의 감독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의 말씀을 기록할 사람을 준비하셔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하셨다는 주장을 견지한다. 각 저자의 모든 개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성경에 의하여 사용되어 다양성과 개인적 특성이 허용됨과 동시에 하나님이 저자에게 맡기기를 원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파괴시키지 않게 하신다.(벧후1:21)

3. 성경은 과학, 역상, 윤리, 추론, 인용 등에 있어서 오류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신뢰할 수 있다.

첫째로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주장인 반면에 실증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기도 하나 과학과 시간은 항상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해 왔다.

둘째로 성경은 종교적이 아닌 주제에 대하여 교재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이러한 영역 안에서 말할 때 성경의 진술은 비록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였고 불완전하지만 그 진술은 오류가 없다.

셋째로 성경은 그 당시의 배경과 함께 연구해야 한다. 문화, 언어, 문화적 진행 등의 문제를 주의 깊게 고찰해야 한다. 만일 신실하고 지성적인 연구자세로 성경에 접근한다면 성경이 무류성을 갖춘 것임이 드러날 것이다.

4. 영감설에 대하여 확실한 입장을 가진다면 무오성의 교리는 불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3가지 방향으로 해야 한다. 보다시피 역사의 증언은 설득력이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영감설과 무오설을 분리시키지 않은 채 영감설에 대하여 강한 자세를 유지해 왔다.

둘째로 성경을 연구하면 영감설과 무오설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성경의 기자들이 성경을 단순히 무오하거나 무류한 어떤 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논리적 접근방식이다. 하나님은 성경이 증거한 대로 잘못을 범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시31:5, 100:5, 요7:28, 8:26, 롬3:4, 고후1:18, 요일4:6, 5:20, 계6:10)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한 도구로 사람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을 만드는 작업을 주관하셨고 모든 오류를 피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그러나 작은 부분일지라도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모순이 된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훈련과 절제
(Q 2) 기독교인은 훈련과 절제의 삶을 사는 것을 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합니까?

우리들은 훈련과 절제의 중요성에 대하여 두 가지 면에서 직면합니다.
첫째로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합니다. 둘째로는, 통제 불가능하며, 자유분방하고, 또 이기주의적인 우
리 사회의 본질이 그것을 바로 잡아 줄 것을 부르짖고 있는데, 그것은 오직 개인의 훈련과 절제를 통하여서만이 성취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 보도되는 뉴스와, 기독교에 반대하는 주제를 가진 영화, 그리고 묘하게 도덕을 타락하도록 만드는 텔레비전의 연속 코미디와 같은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특별히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있을 도덕적인 현상에 대해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은 결국 내면의 훈련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통제할 수 없는 사회로 귀결됩니다. 디모데후서 3:1-5은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다급하게 그 항목들을 급하게 스쳐 지나갔다면, 아마도 당신은 “절제하지 못하며” 라는 말을 놓쳤을런지도 모릅니다. 이 항목들 가운데 있는 다른 모든 악한 행동들은 절제함의 결핍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예(例)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는 그러한 악(惡)과는 다른 모습으로 굳게서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35).
물론, 사랑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첫 번째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절제는 그 항목 가운데 마지막에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는 앞에 있는 모든 다른 성령의 열매 혹은 덕을 통제합니다. 통제함이 없는 사랑은 욕정이 됩니다. 과도한 희락은 천박한 것입니다. 자제함이 없는 화평은 나태함이 됩니다. 균형이 없는 오래 참음은 냉담함이 됩니다. 자비는 약점이 되며, 양선은 이기적인 것이 됩니다. 아무런 이유 없는 충성은 맹목적인 미신과 같습니다. 극단적인 온유는 겁쟁이가 됩니다. 세상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속해있는 어두워진 마음은 경건한 삶의 거짓 그림자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통제할 수 없는 세상 앞에서, 절제에 대한 본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타락하고 악한 세상에서는, 절제는 신앙심이 없는 길로부터 완전히 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1편). 성령의 열매를 나열한 곳 바로 앞에서 육체의 일로 기록한 것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 (갈라디아서 5:19-21) – 은, 주님 앞에서 걸어가는 우리들의 삶을 성령님께서 순화하시도록 함으로서, 우리들의 삶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훈련과 절제는 성품을 나타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여가와 쾌락이 높은 목표를 성취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직업과 휴식을 기독교인의 훈련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도, 금식, 성경공부, 그리고 고귀한 것들에 대한 명상과 같은 것들과 얼마나 더 잘 균형을 유지해야만 할까요?
절제는, 편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다른 덕에 보태는 사치품목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이 충만한 기독교인을 확인시켜주는 표시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일곱 가지 덕 가운데 나열하였으며, 그것을 무엇보다도 믿음에 포함시켰습니다 (베드로후서 1:5-7). “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베드로후서 1:8, 9).

관심사:
절제는 훌륭한 지도력을 위해 필요한 근본적인 자질입니다. 영적 지도자는 절제함에 대해 본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절제함를 배우고 실천하도록 젊은이들에게 권면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절제함에 대해 본이 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주일학교 교사와 학부형들 또한 그들이 영적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들에게 절제함을 고취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은 젊은이들의 시대입니다. 엄청난 숫자의 20세 이하 젊은이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본질상 그들은 자연적인 경험을 통해서나 혹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별로 절제함을 개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은 절제심에 대해 본이 되는 지도자를 더욱 더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절제심에 대한 본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의 생활과 일관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분명히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술을 절제하는 것에 대해 호소를 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히 절감될 것입니다. 자신의 성질을 자제하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욕설이 나쁜 것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다지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절제가 성령 충만한 삶의 열매 가운데 하나인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진실과 성실
(Q 1) “진실을 말하는 것”이 기독교 신자 중에서 왜 그처럼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습니까?

두말할 나위 없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근본적인 성경적 원리입니다. 많은 현대 사회의 악은 진실을 부주의하게 취급하거나 고의적으로 잘못 다루는 결과의 산물입니다. 가족이나, 친구, 및 일터에서 다른 사람의 정직함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개인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일입니다.

재정과 사법 과정의 세계에서는 정직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기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많은 합의 사항을 주로 문서로 작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과 약속이, 구두로 하는 약속을 입증하는 법률 문서 없이도, 모든 면에서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2천 년 전에 유대의 총독 빌라도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 질문은 오늘날에도 야기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실에 대한 절대 기준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쓰면서 빈정거리는 말투로 그러한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실한 사람이라면 그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들이 솔직한 대답을 찾을 것을 원합니다.
진실은 입증 될 수 있는 특정한 사실일까요? 올바르게 작동하는 것이나 또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그 자체는 진실함을 의미하나요? 진실은 사람마다 다른 것인가요? 혹은, 진실은 그 누가 믿지 않아도 참된 것인가요?

진실은 상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며, 상황마다 다른 도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보편적인 진실을 찾아야만 하며, 현대 문화가 그것에 대해 논박할 때라도 그것을 변호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방어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 4:15).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수많은 음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속임수에 빠져서 거짓 가르침을 따라갑니다. 명백하게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자께서 선언하시고 믿음과 행위의 척도로서 우리들을 위해 기록해 놓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진리 뿐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개인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살도록 우리들에게 요구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사실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입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들이 책략과 거짓입니다. 광고, 정치, 관계, 사업과 상업,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삶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위선을 보며, 또한 공공연한 결의가 부정직하고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선은 진실과 솔직함의 외면만을 보여주지만, 그러나 가면은 사악함과 진리의 남용을 숨깁니다. 위선은 실제적인 삶은 다른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원할 때에라도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복지를 염려하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입니다. 위선은 이기적인 행동과 악한 습관이 비밀스러운 마음을 지배하고 있을 때 겉으로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정직은 진실과 정직한 행동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여는 것이나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스스로 진실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약속 혹은 서약을 지키는 것은 정직함의 행위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정직과 진실을 지키는 자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지적인 정직함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개인적 의견에 상치될지도 모르는 그러한 모든 진실에 대해서 까지도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성실함은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요한복음 1:47)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정직하지 않더라도 겉으로만 정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정직한 사람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고린도전서 13:6) 불의와 위선에 대해서는 화를 내며 슬퍼합니다.

사기는 오직 세상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부정직함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바울이 그 당시에 믿는 자들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권면해야만 했다면, 우리는 우리들이 같은 신자들을 대할 때에 옳고 정직하게 행하도록 더욱 더 조심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연합은 그것을 요구합니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저는 너희 형제로다.” (고린도전서 6:7, 8).

마가복음 10:19에 기록된 부자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제5, 6, 7, 8, 그리고 9계명은 모두 “하지 말라”고 하는 계명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거짓 증거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관심사:
거짓말을 하려고 계획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이기적인 이유를 드는 것을 북돋아 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에 대해 감당해야 하는 형벌을 피하는 것은 그가 모르는 상대방 사람에게도 생명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부정직함을 정당화시키는 교활한 일은 우리들의 사회의 심각한 재해인 사악한 상대주의(상대론, relativism)와 상황윤리(situational ethics)를 생산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히 염려되는 것은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의 성실함과 정직함입니다. 성령님을 “돕기 위한” 노력으로, 혹은 지도자로서 그 사람의 명망(名望)을 높이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인간적인 형상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은 형상으로 표현될 때에 진실은 위태롭게 됩니다. 모든 영적 지도자들은 바울과 함께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라고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말과 행동으로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진실함에 대한 본을 보이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 역자 첨부: 상대주의 -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란 있을 수 없고 올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라는 주장.

상황윤리 – 1960년대 말에 생겨난 용어로서 보편적인 윤리 규범을 부정하면서, 구체적인 상황에 처한 개인은 자신의 윤리적 당위(當爲)를 스스로의 직관을 통해 식별해야 하거나 윤리 규범을 글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윤리 학설이다. 즉, 절대적인 원리의 윤리를 따지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즉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합리화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장 성경의 무오성  (0) 2013.01.23
(Q 2) 훈련과 절제  (0) 2013.01.19
교회의 휴거와 복스러운 소망  (0) 2012.12.26
재미있는 만리장성 이야기  (0) 2012.08.24
궁금이와 WOMAN  (0) 2012.08.03

교회의 휴거와 복스러운 소망

“주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과 함께 변화할 것은 간절하고 복스러운 교회의 소망이다.” (살전4:16, 롬8:23, 딛2:13, 고전15:51,52)

예수는 그가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그의 제자들이 항상 준비되어 있도록 주의 깊게 경고하였다.(마24:42-51, 25:1-13, 막13L37, 눅12:37)
그들은 현재의 시대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끝이 날 것이라고 이해하였다.(마24:3) 그의 재림에 대한 확증은 그가 죽으시기 전에 그의 추종자들을 위로한 진리들 중 하나이다.(요14:2,3)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에 하늘을 쳐다보는 무리들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가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되풀이 하였다. 그들은 그가 가신 그대로 오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다.(행1:11) 이것은 그의 재림이 문자적으로 육체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서신서가 예수의 재림을 가르친다.
신약의 서신서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자주 언급하며, 재림의 절박성은 이 주제를 다루는 모든 성경구절을 통하여 나타난다. 비록 초림과 재림에 관한 가르침의 전체 대의는 재림이 경고 없이 갑자기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며, 신자는 끊임없이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빌4:5, 히10:37, 약5:8,9, 계22:10)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러한 기대의 상태에서 살았다.(고정1:7, 살전1:9,10) 고전15:51과 살전4:17에서 바울이 “우리”라고 한 것은 그가 예수께서 오실 때에 살아 있으리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상으로부터 신자들의 휴거
재림에 관한 성경구절을 비교해 보면 어떤 것은 죄인들의 심판을 수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사건으로 말하며, 또 다른 경우는 재림이 신자들에게만 알려지며 지상으로부터 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후자의 경우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휴거라고 불리운다. 이 단어는 우리말 성경에는 없으나, 널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웹스터 사건”(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Unabridged)에서 휴거에 대한 정의를 “그리스도가 참된 교회와 그에 속한 자들을 그들이 그 주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지구 위의 왕국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라고 내린다. “휴거된다.”는 단어는 살전4:17의 “끌어 올려”라는 표현대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 오실 때에 한 장소에서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을 신자들이 지구에서 갑자기 없어지고, 불신자들은 남아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마24:26-42)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보고 통곡할 때라고 말씀하셨다.(마24:30) 사도바울은 주의 재림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진노의 때라고 말하였다.(살후1:7-10)

살전 4:13-18에서 바울은 재림의 다른 양상을 생각하였다. 이 간단한 구절은 신약에서 휴거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명백한 가르침이며 이것은 오직 살아있는 신자와 주 안에서 죽은 신자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다. 이때에 재림하는 그리스도를 보는 악한 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공중에 오시는 것을 묘사했으나 슥14:4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재림시에 그의 발이 땅에 닿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요일3:2 말씀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며,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살전4:17에서 사용된 “끌어올려”에 대한 헬라어는 행8:39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세례를 준 후에 사용된 “이끌리어”라는 단어와 똑같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단어는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 것을 말하고 있는데 휴거시에 지구에서 신자들을 끌어올릴 능력의 근원을 밝히는 것이다.
살후2:1에서 바울은 휴거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이라고 불렀다. 이 “모임”에 대한 헬라어는 히10;25에서 예배를 위한 크리스찬의 모임에 대하여 사용된 “모이기”와 똑같은 단어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의 주변에 모이는 성도들에 대한 한폭의 그림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지구에서 초자연적으로 휴거되는 것은 성경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에녹의 생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하나님과 동행한 후에 지구에서 기적적으로 없어진 것이다.(창5:21-24) 히브리어 기자는 이 경험을 “죽음을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돌연히 없어진 것을 보여준다.(왕하2:1-13)
고전15:51은 살전4:14-18과 똑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바울은 휴거시에 살아있는 신자와 죽은 신자에게 일어날 변화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불렀으며(고전15:51), 전에는 숨겨졌으나 성령에 의해서 알려진 진리라고 하였다.

빌3:21에서 바울은 주님의 오심과 “우리의 낮은 몸”이 변하게 되는 때와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것 역시 휴거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이다.
휴거에 관한 구절은 그의 백성을 위해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구절은 그의 성도와 함께 오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다. 골3:4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와 함께 나타나는 신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유다서 14절 역시 그의 공적인 나타남과 관련된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 말하고 있는 심판을 행하시려고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재림하시는 것을 미리 보고 있다.

성경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은 그의 오심에 대한 두가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다. 이 두가지 상태 사이의 중간 시기는 적그리스도가 통치하고 악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대환란 시기라고 가정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정확하다고 믿는다. (단12:1, 10-13, 마24:15-31, 살후2:1-12)

크리스찬과 대환란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께서 오시기 전에 심각한 환란을 견뎌야 하지만 교회는 대환란이라고 불리우는 시기 이전에 휴거될 것이다.
살후 2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이(대환란은 주의 날의 일부이다.) 시작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이라 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바울의 시대부터 불법의 비밀이 활동하였으나 참된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영이 막고 있다. 오직 교회가 휴거에 의해서 지구에 없어질 때 이 사람은 공적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있는 휴거에 대한 구절에 이어서, 살전 5장에서 바울은 주의 날에 대하여 경고하였다.(살전5:2,3) 그리고 그는 즉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있다.(살전5:4)
바울이 여전히 주의 날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살전5:9) 바울이 대환란을 포함하여 주의 날의 심판에서 신자들이 구원받을 것을 의미했다는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찬은 주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주의해야 한다고 신약성경은 여러차례 말한다. 그러나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비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그러한 일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신약에 충만하게 들어있는 임박성에 대한 가르침(the teaching of imminence) 시대의 마지막 징조가 나타날 때 그들은 위를 보며, 대환란이 아니라 그들의 구속을 기대하면서 고개를 들어야 한다.(눅21:28)
주님의 오심에 대한 징조들은 그가 공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이 휴거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들이 휴거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임박성의 교리(the doctrine of imminence)와 조화되지 않는다.
교회가 대환란 전에 세상에서 들려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것과도 부합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 안전하게 들어갈 때까지 홍수를 보내지 않았다. 그는 소돔에서 롯을 구출할 때까지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성경의 무게는 환란 전 휴거를 지지하는 편에 실려 있다. 신약에서 재림에 대한 가르침이 있는 곳마다 절박성이 강조된다. 휴거 이전에 다른 사건을 개입시키는 것은 이러한 가르침에 위배된다.
크리스찬들이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는 동안 디도에서 한 바울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즉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2:11-14)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잠긴동산

'하나님의 성회(윤영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Q 2) 훈련과 절제  (0) 2013.01.19
(Q 1) 진실과 성실  (0) 2013.01.10
재미있는 만리장성 이야기  (0) 2012.08.24
궁금이와 WOMAN  (0) 2012.08.03
노무호 목사의 20가지 성령 질문에 대한 답변  (0) 2012.05.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