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새로운 피조물에 심긴 마음의 법

 


 지금까지 변화, 생명적인 원리, 습관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에 심긴 하나의 법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에 속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성의 법칙을, 짐승은 감각과 본능의 법칙을, 식물은 성장의 법칙을, 무생물은 운동의 법칙을 가지고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그 마음에 주입된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이 구절이 신약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어진 법은 ‘마음의법’이라고 불리는데, 그 마음이라는 기능적 구조물이 생기자마자 그것과 함께 그 법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몇 개의 명제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마음의 법은 본성의 법과 다릅니다


1) 마음의 법은 회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이 행위언약의 법이라면, 마음의 법은 은혜언약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은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마음의 법은 그의 회심 때에 주어졌습니다. 본성의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죄와 불신앙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본성의 법은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육신으로 태어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법은 성화의 한 부분이 되어서, 몸의 지체의 법과 싸웁니다.

 


 2) 타락 이전에는 본성의 법과 마음의 법이 같았습니다

  마음의 법은 원래 본성의 법이었던 그 법의 회복입니다. 처음에 아담의 마음속에 새겨졌던 그 법을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은, 아담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다가 잃어버린 그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이 법을 지워 버리고, 그 분의 의를 잃어 버렸으며, 오히려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적개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거듭남이란 죄의 법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나님의 법을 그 합당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3) 마음의 법은 마음속에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모든 법과 모든 명령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명령을 돌판에 새기셨던 것처럼, ‘마음의 판’에도 전체의 법을 새기셨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참된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이 전체의 법이 아니라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한 무엇인가가 결핍되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음의 법은 외적인 법을 필요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외적인 법은 여전히 하나의 규칙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내적인 법은 외적인 규칙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법은 규칙 자체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법은, 성령의 손길에 의해서 외적인 말씀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법의 진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법을 의뢰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법은 비록 그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외적인 율법과 조화를 이루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규칙이 되려면 기록된 율법과 같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 속에 기록된 법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이 말씀에는 주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약속되어 있으며, 또한 내적인 가르침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법을 새기는 것은 문자로 쓰인 법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적인 법을 확립하고 진전시키며, 또한 존중하게 만듭니다.

 


2. 마음의 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법의 내적인 지식과, 지적으로 그 법을 찬동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의의 지식과 법의 존재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특성으로서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사51:7). 이 말씀에서는 지식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에 율법이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그 법이 있는 것입니다. 회복된 지성 안에는 어떻게 그 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외적인 법을 적용하는 내적인 기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씨앗이기 때문에, 옥수수 씨앗에서 옥수수가 나오는 것처럼, 이 씨가 먼저 지성에 뿌려지고 품어져서, 그것에 일치되는 원리들과 생각들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것으로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며, 율법의 돌판을 보존하는 방주가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시력으로 율법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교훈들 속에 있는 거룩을 보게 되고, 또한 자신 속에 있는 더러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에 내적으로 일치하는 마음입니다

  거푸집에 부어진 쇳물이 그 이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형태, 곧 그 거푸집의 모양대로 변화되는 것처럼, 영혼도 이전에는 죄의 종이어서 죄의 법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녹아서 율법의 모양과 형태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법과 하나님의 율법은 서로 유사합니다. 동일한 하나의 인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은 그 명령을 친근하게 느낍니다. 마치 자연인이 죄를 친근하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행하는 것은 본성적

 

 

인 자유와 선택, 판단에 의한 것이지, 그 율법에 포함된 위협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3) 율법에 복종하려는 강력한 성향입니다

  죄에 이끌리는 습관이 이전의 본성에 강하게 작용했던 것처럼, 새 본성에는 율법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강한 이끌림이 있습니다. 이러한 새 본성의 효과적인 덕을 마음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마음의 법과 외부의 법은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법을 구성합니다. 하나는 지도 감독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실행을 위한 것입니다. 외부의 법은 훈령을 내리며, 마음의 법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강력한 법이 작용하는 것이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롬8:2). 죽은 문자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원리로서 마음을 살아나게 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며, 또한 이전에 마음을 방해했던 것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 전체의 주된 목적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를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서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이렇게 영혼은 복음에 물들고 영적인 것이 되어서, 이제는 본성으로 그 복음에 담겨져 있는 것들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4) 율법에 대한 강한 애정입니다.

  말씀 속에 기록된 교훈들은 사랑의 율법으로 마음속에 있습니다. 말씀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은 명령의 율법인데, 마음속에 있는 법은 자유의 율법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율법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완성합니다.

옛 사람은 율법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순히 죽은 문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법이 자기 마음속에 새겨지자 너무 기뻐서, 이제는 그 법과 그 법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자기 마음이 충분히 반응하지 않을 때면 선지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 법도를 사모하여 찾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119:40). 그는 그 법도의 거룩함에 다시 일치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전에 즐거워하던 상태로 회복되기까지 결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 법은 그에게 내재적으로 선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편안함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과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5) 실제적으로 복종하는 능력입니다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하는 것은, 영혼 속에 어떠한 능력과 힘을 넣어 주는 것,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갈 수 있고, 또한 마음과 애정이 그 계명에 이끌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함축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율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주어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율법은 ‘의문’이라고 불립니다. 율법을 읽거나 듣는 것은 눈이나 귀를 교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을 가르칩니다. 율법은 죽이는 의문인 반면, 복음은 살리는 성령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준수를 명령하되,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줍니다. 율법은 ‘정죄의 직분’이지만 복음은 ‘의의 직분’입니다.

 

 

율법은 ‘지성의 인지’, ‘의지의 동의’, 감정의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마음에 기록됩니다. 지성에 있어서는 믿음의 빛이 선명한 가운데서, 의지에 있어서는 사랑의 불길의 그 열기 가운데서 마음에 기록됩니다. 지성에서는 그 율법을 판단하여 옳다고 승인하는 것이 있고, 의지에서는 그 율법을 향하는 움직임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따라서 율법과 보조를 같이 하려고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11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게 되는 하나님의 형상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생명의 원리, 습관, 마음의 법이 있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과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한다는 차원에서 서로 유사합니다. 그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닮은 모습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닮은 모습 안에 거듭남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1. 낳은 자와 난 자는 닮은 꼴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 낳으신 분, 곧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타락 이후 모든 인류를 덮친 죄가 사탄의 형상을 각인했다고 한다면, 거듭남의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각인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부패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닮음은, 창조 때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구속함을 받음으로써 그 행복이 회복된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은 바로 그것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신의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신적이라고 불립니다. 신적 원리인 그 은혜가 거듭난 영혼 속에서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궁과 능력이 그 은혜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젖을 물려 빨게 하셨습니다. 그러하다면 아기가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복사판이 원판을 닮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3:9)들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났다는 것은, 그 낳은 자와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1) 본체가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체에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본체가 아니라 본성이 닮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기질의 유사함이지, 무한한 본체의 유사함이 아닙니다. 그 신적 본체는 다른 피조물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그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창조 때에 신적인 본체가 전달된 것이 아니라, 아담의 본성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닮은 의가 전달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본체적인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동등한 자가 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 그러나 실제적인 참예를 의미합니다

  출산이란 하나의 생명체를 그 사랑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그 본성의 유사성도 지닌 채로 낳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그러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게 됩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이는 밀랍이 인장의 모양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록 그 도장과 재료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도장의 글자를 정확하게 새기게 되고, 그 도장에 새겨진 글자와 찍힌 것은 서로 딱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하나님의 완전함에 속한 것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피조물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체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만큼 실제로 하나님과 닮은 것입니다. 거듭날 때 그 첫 번째 설계도가 작성되고, 영광의 때에 그 설계된 대로 최고의 성취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3) 새로운 피조물 속에 새겨진 것은 하나님의 전체 형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집니다(골3:10). 어린아이의 신체 각 부분은 부모의 것과 일치합니다. 보모님만큼 크지는 않아도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새사람에게 나타나는 즉각적인 효과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을 그 영혼의 본질적인 부분들 속에 새겨 넣으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인간이 갖추게 되는 모든 요소들 위에 그 본성이 새겨집니다. 지성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새겨지며, 의지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4) 그의 본성에 참예하는 면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와 닮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3:7). 새로운 피조물은 의로우심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새로운 본성에는 그리스도를 닮은 청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갈4:19).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우리는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4:1)라는 권면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권면에는 이러한 마음이 새로운 피조물 속에 들어가 그를 자극하여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그의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정하셨습니다(롬8:29). 여기서 ‘본받게 한다’는 것은, 같은 형태와 모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을 부여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씨(후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새롭게 된 사람들은 그의 ‘동류들’이라고 불립니다(히1:9). 언약에 있어서, 그리고 영광의 상태에 있어서 그와 동류가 되었다면,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기질에 있어서도 그와 동류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성에 있어서 옛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의 본성에 참예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은 믿음에 의해서 새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본성에 참예하게 됩니다. 전자에 의해서는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갖게 되고, 후자에 의해서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지게 됩니다(고전15:48,49). 그러므로, 믿음과 겸손, 인내와 사랑,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 등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씨앗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 새 본성을 갖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신 성령과 닮습니다

  자연인이 개괄적으로 육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개괄적으로 영이라고 불립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육으로 난 것은 그 본성이 육을 닮은 것처럼, 성령으로 난 것은 그 본성이 성령을 닮았습니다. 영의 풍미, 기쁨, 호흡도 그 영적인 기원과 닮게 됩니다. 또한 그 활동과 목적, 기질이 성령의 것과 닮았습니다. 그것이 성령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2. 거듭난 자는 무엇이 하나님과 닮습니까

 

 

1) 사랑이 닮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서 나타나는 믿음과 사랑에 의해서 그에게 하나님과 닮은 것이 있음이 증명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예수님과 닮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요일4:7)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의 형상과 닮은 모든 것들을 향하여 자신의 팔을 뻗습니다. 영혼이 모든 선한 것에 손을 뻗어 그 선한 것에 만족할 때, 그것이 곧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복의 원천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사랑을 가지게 될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행복과 복된 상태를 조금이라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활동이 닮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모든 본성에는 그것에 부합되는 애정과 행동이 있기 마련입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신적 성질의 영향을 받아서 그 신적 성질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고도 탁월한 상태로 그 영혼을 고양시켜 주는 은혜는 더욱 고상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더욱 완전한 방식의 행동을 하기 위한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한 존재를 더욱 완전한 상태로 끌어 올리는 것은 없습니다.

 


 3) 거룩이 닮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12:10). 아버

 

 

지가 자기 자식을 가르쳐서 마땅히 가져야 할 덕성을 가지도록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거룩에 참예하도록 거듭남을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2:29). 의를 행하는 바로 이 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귀들의 자녀들과 다른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롬3:23)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갱신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곧 거룩의 상태를 얻게 되며, 마침내는 그 거룩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거룩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앞으로는 그 교제를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9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I)

-준비가 전제되는 역동적인 습관

 


1.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한 습관입니다


1) 기질적 측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죄의 습관이 모든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영혼을 준비시키는 것처럼, 은혜의 습관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영혼을 준비시켜서 그 주인이 사용하시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이러한 말에 미흡함을 느끼는 분들을 위하여 몇 마디 더 보충하겠습니다.

 


(1) 내제된 준비가 언제나 표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준비는 새롭게 된 모든 사람들 속에 배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가장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이 속성보다 저 속성을, 때로는 오래 참으심을, 때로는 인자하심을, 때로는 공의로우심을 더욱 현저하게 드러내면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습관 속에 있는 신적인 성품은 배아적으로 모든 은혜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신적 성품과 연관된 의무에 기꺼이 동의하고,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기회를 주실 때 모든 열매를 맺게 되는 원리를 그 안에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어떠한 봉사를 위하여 더욱 긴박하게 요구되는 기질이 실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죄를 범해서 영혼이 더러워진 경우가 그럴 수 있습니다.

또한 목적이 변한 새로운 피조물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그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기회가 올 때마다 이러한 습관으로의 목적을 실천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의 인내는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뿐 아니라 다른 모든 덕성들에 있어서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욥도 그러한 덕성들을 강력하게 드러냈을 것입니다.

 


(2) 준비됨이 거듭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습관들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마음 가운데 주께 붙어 있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 것입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행11:23) 이러한 분명하고도 지속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식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모든 봉사할 기회에 그 목적의식이 실제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초기에는 강력한 저항이 그 안에 있습니다. 지옥의 군

대가 그것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 안에 바울처럼 믿고 사역

 

 

하며, 엘리야처럼 열정적이고, 욥처럼 인내할 수 있는 최상의 활동과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준비가 실제적으로 모든 갖춰져 있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그러한 상태에까지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숙을 위하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어린아이 때가 있는 것처럼, 은혜 중에 자라가는 일도 그렇습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 영혼이 어른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른의 이해력과 이성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선한 것을 행하려고 원하는 바는 그와 함께 있습니다.

이런 특징 속에서 회복된 영혼 속에 나타나는 첫 번째 은혜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거듭남이 이전의 그루터기를 뽑아내고 새로운 줄기를 심기 때문에, 이전의 죄의 그루터기와 관계되어 있던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게 되면서 반드시 회개하게 됩니다. 또한 죄인이 구세주께 가까워지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믿음은 그 죄인을 새로운 그루터기에 접붙이는 데도 필요하기 때문에 회복된 영혼 속에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 뒤에 사랑과 경외, 감사가 뒤따르고, 구원을 얻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묵상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 활동적 측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두 번째 조망은, 기질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활동의 면에서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새생명은 무한하신 분께서 주입하신 생명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는 하나의 습관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견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속해서 잠만 자고 있고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새생명은 살아 있는 영이기에 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습관이 주어지고, 그리고 나서는 행동이 뒤따릅니다.

 


(1) 새로운 피조물의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수치심을 느낄 때 얼굴이 붉어지는 자연적인 반응이 있듯이 새로운 습관이 새로운 행동을 산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은 그들의 본성에 일치하게 움직입니다. 가시나무가 가시를 내는 것처럼, 샘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은혜의 습관에서는 거룩한 행동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입2:10)

선행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그 뿌리를 둔 영혼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에게 봉사는 먹고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노동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의롭고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새롭게 된 사람들이 때때로 범하게 되는 오류들은, 그들 안에 있는 거듭남의 새로운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원리에 의해서 어느 정도 약화되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부패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잔존하는 부패성은 결국 하나도 남김 없이 전적으로 뽑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2) 그것은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생명과 습관에 따라서 자연적인 필연성 때문에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자발적인 선택에 의

해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부득불 할 일”(고전

 

 

9:16)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변한 뒤에 따르는 자발적인 행위였습니다.

새로운 본성에는 달콤한 필연성과 의지의 은혜로운 선택이 있는데,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강압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필연성인 것입니다. 은혜로 날개를 달게 된 인간의 영혼은, 공중의 새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 보혈로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왕들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계1:6). ‘왕들’이라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 안에 왕족이 지니고 있는 고결한 품성을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라는 말은, 이러한 왕족의 고결한 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본성과 그 본성의 자유로운 선택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 이라고 말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그것은 열정적인 활동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영혼 안에 심어진 추진력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 지상의 물질들 가운데서 불과 물 보다 더 활동적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처럼 성령은 물과 같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그리고는 불과 같은 은혜로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새로운 원리는 피조물의 모든 구석구석을 채우면서, 납덩이 같이 딱딱한 마음을 녹여서, 뜨거운 열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또한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즉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영의 활동은 신체의 활동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한 순간에 영혼은 얼마나 놀랍도록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땅 끝까지 한순간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선을 향한 열정에 있어서 은혜의 습관은 ‘사랑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피조물의 움직임은 한 순간에 지상에서 하늘에 날아올라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2. 은혜로운 습관의 활동은 역동적입니다


1) 그 활동은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열망은 그 본성만큼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전에 지니고 있던 기질의 협소한 활동 안에 매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자연스러운 활동은, 비 온 뒤에 불어난 강물처럼, 모든 자연적인 범위를 넘어서 넘쳐흐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여러 번 사랑을 느끼게 되고, 또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다음과 같은 일들에 제한이 없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애정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피조물의 사랑도 제한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을 향한 애정으로 그분을 가득 채우

고자 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 그를 슬프게하고, 하나님께서 바람의 날개로 그

 

 

에게 날아오시는 것이 그를 기쁘게 합니다.

 


(2) 죄에 대한 혐오감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사망의 육신이 자기 영혼의 열망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주님과의 자유로운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항해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이 때문에 하늘 문을 두드리면서, 영적 전투에 필요한 새 힘과 죄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합니다.

 


2) 그 활동은 강력합니다

  이 습관에는 제한 없는 사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혼을 행동하게 만드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 안에 있는 능력’(엡3:16)이라고 부리기도 하고 ‘능력의 마음’(딤후1:7)이라고도 불립니다. 거듭나게 될 때 생명과 함께 능력이 생깁니다. 새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 능력이 어떠한 도덕적인 습관들보다 더 높은 원인, 곧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심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활동하기 위한 일조의 전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입니다.

 


3) 그 활동은 용이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활동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이며, 새로운 피조물 안에 어떠한 힘과 능력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 활동은 대단히 쉬울 것입니다. 습관은 그 능력을 강화시키고, 쉽게 행동하도록 해줍니다. 영혼 속에 새로운 습관이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의 도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 이전에 죄와 어리석음을 행했을 때처럼 아주 쉬워집니다.

 


4) 그 활동은 유쾌합니다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유쾌한 것처럼, 영혼 속의 신적인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유쾌합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잠21:15)이 됩니다. 우리가 영적 원수들을 우리의 발 아래 깔아뭉개고, 더 이상 그들과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 또한 지순한 즐거움입니다.

습관적인 은혜로 채워진 마음의 즐거움은, 어떠한 감각적인 즐거움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합니다. 그 즐거움이 바로 은혜의 영이요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영혼 속에 심으신 습관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배하는 행위 속에서 달콤함을 발견합니다. 자기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이야말로 그의 즐거움이며, 또한 승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곤란으로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12:10)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영혼의 활동이 그의 생명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몸에 이상이 생겨 움직일 수 없거나, 질병에 매여 있고, 부패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는 이전에 누렸던 것을 기억하면서 기뻐합니다.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탄식

하면서도, 또한 다른 것을 소망하며 그것이 회복될 것을 믿으면서 기뻐합니다.

 

 


5) 그 활동은 영구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 있는 새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서 행하게 하되,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단일하고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그렇게 합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기 하시니”(겔36:27). 그 율례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면서 그것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주하는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입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되었고,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보증으로 지지되고 확증되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이 습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1,22)

이것은 아담 안에 있을 때보다 더욱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며 습관입니다. 아담의 생명은 자기의 영혼의 올곧음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이 새생명의 습관은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의존합니다. 그것은 모든 갈증을 그치게 하는 생명수이며, 영생에 이르기까지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그것은 강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영광 가운데서 흘러넘치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흘러나와 활동합니다.


6) 그 활동은 질서 있습니다

  자연적인 운동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이 습관은 영혼에 ‘언제나’능력을 줍니다. ‘거의 언제나’가 아닙니다. 이런저런 봉사 활동에 무질서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일들이 그 정해진 때와 장소가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도 ‘시절을 좇아’(시1:3)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적당한 때를 따라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으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떠한 때에는 사랑의 열매를, 어떠한 때에는 겸손의 열매를, 또 다른 때에는 인내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습관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새 열매와 옛 열매를 때를 따라서 따게 되는 것입니다.

 


3. 새 습관은 옛 습관과 싸워 이깁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모든 사실에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는 새 습관이 우세합니다

 자연의 상태에서는 한 인간 전체 속에 스며드는 부패한 습관이 우세했던 반면, 은혜의 습관이 우월하게 된 지금은 그 은혜가 영혼 전체에 스며들어서 생명은 사망을 이기고, 은혜는 자연(본성)을 이깁니다. 그래서 몸의 지체들이 죄에 대한 불의의 도구가 되는 대신에,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됩니다. 그 습관은 이성과 의지를 인도하기 위하여 심어진 것이며, 그러므로 그 안에는 주권적인 능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 안에서 감각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왕좌를 차지하게 되면서 감각은

베일에 가려졌습니다. 감각보다 이성이 더욱 탁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이성은 그 자리를 은혜에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은혜가 이성보다 더욱 탁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이제 그 고유한 권리를 은혜를 통하여 다시 회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은 창조의 법칙에 의해서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껏 죄의 법칙의 종이 되어서 거짓된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이성이 그 왕좌에서 강력히 쫓겨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은혜로 말미암아 제자리로 되돌아온 셈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만이 아니라 능력의 영도 지니게 됩니다. 그 영은 그리스도 안에도 계셨던 바로 그 능력의 영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5:4). 은혜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집니다. 이렇게 은혜는 우세합니다.

 


2) 새 습관으로는 죄를 짓기가 힘들어집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뿌리를 내린 습관에 대항해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본성에 반대되게 행하는 것은 힘겹고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떠한 피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에 힘쓰겠습니까? 어떠한 사람이 자기 몸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상처를 입히는 것을 즐거워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본성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광기가 그들을 사로잡아서 이성을 빼앗아 버렸을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의와 거룩은 새로운 피조물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따라서 이제는 죄를 행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밖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지만, 이제는 새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요셉은 창세기 39장 9절에서 “내가 이 큰 악을 행할 수 없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 일이 자신의 영혼의 성향과 기질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1) ‘마음의 목적’을 거슬러서 죄를 짓기는 힘듭니다.

  마음으로 목적하는 바를 거슬러서 죄를 짓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자신의 분깃으로 선택한 자가 죄를 짓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2) 새로운 습관에 반대되는 것들은 그에게 힘듭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습관으로 너무나 기뻐하며, 그 습관 안에서만 오직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죄악들을 다시 살려 행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힘들 것임이 분명합니다.

 


(3) 이 본성은 사람 속에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만일 새로운 피조물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습관에 의해서 불편을 느끼고, 흙투성이가 되어 버리면, 그의 영은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며, 양심은 가책을 느끼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죄에 대하여 불쾌함을 가진 채로 하나님께로 도피하게 됩니다. 자기를 살피면서 하늘과 땅의 도움을 호소합니다. 자기의 무기들이 날카로운지를 점검하게 됩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6 무엇이 거듭남인가(III) - 거듭남은 외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이면서 또한 외적인 변화입니다. 그것은 대상과 작용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내적인 좌소에서의 거듭남이 형태를 취한다는 면에서 외적인 변화입니다. 예를 들어 보는 능력은 영혼 속에 있지만, 보는 행위 자체는 눈으로 합니다. 이러한 내외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일들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서 행하게 합니다. 모든 외적 변화가 내적 변화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인 변화는 언제나 외적인 변화를 동반합니다.


1. 대상을 향하여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 앞에 놓여 있는 세상과 죄를 추구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의 영혼이 열심히 하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처럼 대상의 측면에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하나님과 친숙해지고, 그분을 품고,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친숙해지고, 그분께서 자기의 길을 지도하시고 자신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게 되는 것, 이것이 영혼의 반응입니다. 이에 지성은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는 데에, 의지는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에, 정서는 그것들에 만족하는 데에 익숙해집니다. 모든 기능적 구조물에 의해서 영적인 대상들이 기뻐하는 일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는 그 기뻐하는 일들을 영혼이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된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열망과 애정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대상, 무한히 영광스러운 대상으로 삼게 만듭니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대적하고 그 세상적인 대상들에 대하여 가졌던 애정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처럼 복음과 마음이 합하게 된 사람은 삶도 복음의 중심 주제와도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의도하는 바에 응하게 됩니다.

 


2. 내면이 외면의 변화로 작용합니다

  작용은 본성을 따릅니다. 작용이라는 것은 본성에 지속적으로 반대될 수가 없습니다. 그 작용의 측면에서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음과 그 마음의 행동은 언제나 서로 모순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마12:34) 마음 속에 있는 은혜의 샘을 따라서 그 생명의 현상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작용을 가져 옵니다. 판단의 변화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행하게 됩니다’(골2:6)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새로운 창조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

 

 

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만일 새로운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열매는 뿌리의 본질을 닮는 것이고, 그 뿌리의 본성을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거룩이 그 본성에 유입되었다면, 그 거룩이 또한 삶 속에서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은혜가 왕좌에 오르게 되면, 그 작용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활동하게 되어서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행하게“(갈5:18,25)된 사람이, 그 영적 풍미가 없이 어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행동은 그 행동이 나오게 되는 원리와 같은 색깔을 띄기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성도의 의무 즉, 성도의 삶이 행하게 만드는 재료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작용 방식에 있어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았던 것처럼 성도의 의무들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따라서 그것들을 알게 되었고, 또한 행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연 대신에 은혜가, 육신 대신에 성령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내적일 뿐만 아니라 외적입니다. 엄격하게 도덕적이었던 사람이 은혜를 받게 되면, 내적 원리가 분명하게 변화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그 엄격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도덕적으로 느슨했던 사람이 변화를 받게 되면, 분명히 외적인 행동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전의 생활과 본성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어떠한 내적인 변화가 없이 단지 외적으로만 바뀐 사람은, 그렇게 바뀐 행동은 이전과 동일한 영으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3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


7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생명의 원리

 


 지금까지 거듭남, 즉 새로운 창조를 변화의 본질의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생명에 관한 원리의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주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때, 나사로에게 생명과 운동의 원리를 주셨습니다. 죄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을 불러내실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을 하십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우리가 물려받은 모든 것이 사망에 속한 것이지만, 둘째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것은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후자가 영적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영적 죽음을 증식시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숨은 사람, 곧 속사람에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피조물이 생명을 가지고 운동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효과가 그 원인에서 나오는 것처럼, 육체의 생명이 영혼에서 나오고, 영혼의 생명은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공로적 원인이며, 그것의 효력적인 원인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이 생명의 형상적인 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담에게 생명이 주입되었던 것처럼, 자기 안에 불어 넣어진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림자에 불과한 위선과 구별됩니다. 위선은 형태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생명의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위선은 꾸밀 수 있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본성에 관한 것이어서 꾸밀 수 없습니다. 그림으로 사람의 윤곽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 그림에 생명이나 지성, 정서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8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

- 새것이 필연적인 새 습관


 이제 하나의 습관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습관이란 내적인 틀을 의미합니다. 마치 숙련공이 노련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손쉽게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영혼의 실체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체조직과 기능적 구조물들이 여전히 똑같고,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 새로운 창조는 은혜로 인한 성질들과 습관들의 형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의롭게, 거룩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또한 새롭게 배열하게 됩니다.

본성의 부패는 우리의 본성의 독이며, 질병이고, 변형입니다. 은혜는 우리 본성의 아름다움이고, 건강이며, 장식품이고, 그 영혼에 가치와 진가를 제공합니다. 방탕한 사람이 덕스러워지게 되면, 비록 그가 이전과 똑같은 영혼과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다름 사람,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이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들을 벗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습관을 가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습관들이 없이는 그 어떠한 것도 부패한 상태에서 순결한 상태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어둠을 빛으로 만드는 것, 바로 그 본질 속에 새로운 성질을 유입시키는 힘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씨앗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요일3:9). 이전에는 잡초만 나게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던 땅에 좋은 씨앗을 뿌려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1.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습관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선하심을 따라서 그가 사랑하시는 피조물들에게 일반적인 것들을 베푸시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선하심을 따라서 그의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초자연적인 것들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베푸실 때에 그냥 베푸시는 곳이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떠한 형태와 성질을 주셔서, 그 형태와 성질을 따라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본성에 이끌려서 활동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선하심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감동시키신 그들에게 더욱 영적인 성질들을 주입시키십니다. 그 성질들에 의해서 그들은 합리적으로 부드럽게, 손쉽게, 그 영적 선을 획득하도록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그 영혼 속에 사랑의 영, 은혜의 영을 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성이 하나님의 뛰어난 방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들의 의지도 이러한 습관의 능력과 달콤함에 의해 흥이 돋아서, 그것과 반대로 행할 수도 없고, 그렇게 반대로 행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습관은 은혜로운 방식으로 행사하는 영적인 힘을 가집니다. 죄의 습관이 그 본성의 면에서는 육신, 그 결과의 면에서는 사망이라고 불리는 것같이, 은혜의 습관은 그 조건과 결과가 생명이라는 면에서 새로운 피조물과 영이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일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하나의 육체가 준비되었던 것같이, 영혼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의 일을 하기 위한 습관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진리의 습관, 즉 의지의 신실함이 있고, 지성에는 ‘숨겨진 지혜’가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에 죄의 습관이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에는 은혜의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믿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며,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 복종과 은혜를 모두 마음의 토양에 심어 그곳에서 자라나서 영원에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즉, 믿고 사랑하며 복종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하시고, 또한 신속하게 반응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새 습관은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습관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게 하셔서 위로부터 받게 하셨던 그 능력이 없이는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초자연적 원리가 없이는 은혜로운 행동들을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영혼 속에 은혜의 습관이 없다면, 그 어떠한 행동도 은혜에 속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창조는 성령께서 억지로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을 바꾸시고 다른 본성을 심으셔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 안에서 본성상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이제는 은혜가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습관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처럼 반대되는 습관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그 사람이 반대되는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죄에 이끌렸던 것과 같이, 이제는 영혼이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이끌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이끌림이 습관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이끌림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3.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습관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오직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이란 모든 기능적 구조물 속에 있는 전체의 올곧음이며, 또한 의롭게 활동하는 것의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패의 본성이 ‘옛 아담’, 혹은 ‘사망의 몸’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은혜의 본성은 ‘새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의 신체가 비록 여러 부분의 조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영으로 결합되고, 오직 하나의 습관에 의해서 조직됩니다. 그와 같이 모든 죄도 한 사망의 몸의 부분들이고, 또한 모든 은혜들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모든 은혜들은 그 활동이 드러나게 되는 때가 서로 다르고, 서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 뿌리로서의 습관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또한 그 습관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은혜들은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계속 공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완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은 하나이면서 그 안에 모든 완전함을 탁월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것은 신적인 본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마음속에 주입되는 은혜도 그 안에 실제로 모든 완전함을 포함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서로 다른 사람에게 주시겠지만, 그 새로운 피조물에는 모든 은혜들을 포함하는 본성이나 습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적인 본성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려고 하신다면 모든 은혜를 주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은혜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이며 구성물이기 때문입니다.

 


4. 이러한 습관은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주체에서 비롯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습관은 주관적으로 영혼의 본체에 있는 것이지만, 지성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칭하고, 의지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택함’이라고 칭하며, 정서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활동’이라고 칭합니다.

사망의 몸이 지성에 있을 때는 그것을 무지라 부르고, 의지에 있을 때는 증오, 양심에 있을 때는 죽음의 상태, 정서에 있을 때는 무질서와 심술궂음 이라고 부릅니다. 어떠한 질병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여러 부분들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그것은 기질의 기능장애나 이상 상태의 다른 이름 뿐인 것과 같습니다.

 

2) 다양한 적용 대상들에서 비롯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습관은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라 부르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이기에 사랑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기에 겸손이라 부릅니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복종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에 인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가 무시당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기에 근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의 습관에서 말미암고, 믿음에 의해서 활성화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믿음의 사랑이고 믿음의 기쁨이며, 믿음의 겸손이고 믿음의 인내입니다. 이모든 것들이 영혼에 자리잡은 하나의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 다양함 속에서 일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피조물의 모든 완전함은 한 하나님 안에 우뚝 솟아 있고, 모든 악한 기질은 자연인 안에 태어나면서부터 배아 상태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처럼 은혜의 모든 아름다움은 이 습관 안에 훌륭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청교도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4 무엇이 거듭남인가(1) - 거듭남은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변화입니다. 그러하다면 어떠한 종류의 변화이겠습니까? 즉, 그 변화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은혜에 의한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실제로 작용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작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재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시각이 작용하여서 사람이 보게 되기 위하여는 시력이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본성도 그렇습니다. 그 본성 안에는 작용하는 힘이 뿌리박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활동이 실제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렇게 활동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과 그렇게 작용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습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활동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행동들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적인 성품’, ‘하나님의 형상’, ‘마음에 심긴 법’과 같은 용어들은 명목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이 소유하게 되는 실재입니다. 실제 그대로, ‘새로운 사람’,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 ‘새로운 피조물’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부활이라고 불립니다.

 


2.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변화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면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공통된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 되게 합니다. 그들 속에 자리잡게 되는, 새로운 존재로서 그들에게 새겨지는 새로운 도장이며 날인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성도는 한 가족이며, 한 영으로써 행하고, 마치 거울에 비춰진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같은 대답을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실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3. 어둠이 빛이 되는 정반대로의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이전의 모습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변화입니다. 짙은 어둠대신에 밝은 빛이 들어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이는 육과 영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하나는 육의 구성물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구성물이기 때문에,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먼 것처럼, 세상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먼 것처럼 서로 대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게 되면, 죄로 뒤틀렸던 기질이 벗겨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로 옷 입게 됩니

 

 

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솟아 나오는 그 생명으로 인하여 정욕이 소외됩니다.

이것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전적으로 다른 토양과 기후 속에 살게 되고, 다른 일들, 다른 법률들, 다른 특권들, 다른 자연들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인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부패함으로 육적이고도 동물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에 의해서 그들은 영적이고도 신적으로 변화됩니다. 부패함으로 모든 악의 씨앗들을 가지게 되었지만 거듭남으로 모든 은혜의 씨앗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패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에 거슬러 대항하게 만들었다면, 거듭남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게 합니다.

“잣나무로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55:13)


4. 전인(全人)의 전체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이나 새로운 기능적 구조물을 가지게 되는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에서처럼 이것은 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곧 이해력, 의지, 양심, 정서, 이 모든 것들, 즉, 죄로 인하여 부패된 모든 부분들이 은혜로 인하여 새롭게 됩니다. 영혼 전체가 은혜로 인하여 아름답게 변화하기 시작해서 영광스러운 변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 전신에 미치는 생기의 변화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출생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형성될 때에는, 단지 한 부분만이 만들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불완전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작용해서 전체의 신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의 모든 부분들이 형성되는 일에 작용하십니다. 어느 한 부분만 개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어중간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2)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타락함으로 죄가 원래의 의로움의 뼈대 전체를 무너뜨려 버렸던 것과 같이, 이제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의 뼈대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죄는 곰팡이가 빵 전체로 번지는 것처럼 모든 부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가 모든 기능적 구조물에 영향을 끼쳐서 오염된 것들을 쫓아내 버립니다. 지평선 너머에 해가 떠오를 때 빛이 어둠을 쫓아내고 모든 대지 구석구석을 밝게 비취는 것과 같습니다.

 

3) 은혜가 영혼 본체의 주인으로 자리합니다.

  영혼의 실체야말로 은혜가 거하는 적절한 처소이므로 그곳에 있는 은혜가 영혼의 모든 기능

 

 

적 구조물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로 그 실재에서 지성과 의지의 완전함이 흘러나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영혼의 좌소가 바로 은혜가 거하는 좌소이기에, 성령께서는 어느 한 기능적 구조물에 부분적으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전체에 거하십니다. 따라서 은혜로 인하여 영혼 전체의 구석구석까지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 연합은 영혼 전체에 속한 것입니다. 마치 불길이 쇠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요소들을 깨우고 뜨겁게 하며, 물렁물렁하고 유연하게 하고 그 속에 있는 반대되는 요소들을 녹여 없애는 것과도 같습니다.

 

 

4) 은혜가 전체적인 조화를 이룹니다.

  은혜를 받고 거듭나게 된 사람의 모든 부분 속에는 은혜로 인한 조화가 있습니다. 자연 출생을 보더라도 하나의 존재가 두 가지 형태를 동시에 취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형태가 주어지면 그와 동시에 이전의 형태가 제거됩니다. 은혜라는 단 한 가지 공통된 원리에 의하여, 기능적 구조물이 함께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할 수 있도록 상호작용을 하게 되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변화가 우리 전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우리 영혼의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5장 무엇이 거듭남인가(II) -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원리적으로 내적인 변화입니다. 영혼이 내적인 것이기에 거듭남 역시 내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이 내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외적으로 올곧은 행동의 변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침이나 분침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계 내부의 스프링이나 톱니바퀴가 제대로 작동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내적인 변화는 사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이를 4 가지 주제로 살펴 보겠습니다.

 

 

1. 거듭남은 원리의 변화입니다

 

  자연인이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 그 안에 작용하는 원리는 인위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원리는 영적이고도 내적인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처음 작동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원리에 의하여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호흡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모든 행동은 마음 속에 있는 악한 뿌리나 원리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선한 뿌리나 원리에서 온 것인지를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선한 두 가지 원리들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1) 믿음과 관련된 변화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영적 활동의 직접적인 원리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행동이라도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별로 반짝거리지 않는 행동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믿음은 다른 은혜들이 자라게 되는 가장 기초적인 은혜입니다. 거듭난 자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에게 훈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비록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절하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어떠한 봉사도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봉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떠한 봉사도 신적인 동기에 의하여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자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방법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오실 메시야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도 중보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행함입니다.

 

 

2) 사랑과 관련된 변화입니다.

  행동의 원리에는 하늘의 소망, 지옥에 대한 두려움, 평판, 흥미, 자연적인 양심의 압박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내적, 외적 원리들은 사람의 행동에 열정을 불어 넣는 풀무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활동에 하늘에 속한 뼈대를 제공해 주는 참된 불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말미암습니다. 이 최고의 애정은 봉사를 신령하게 만들며, 영혼에 놀라운 생동감을 솟아오르게 합니다. 새로운 창조란, 영혼이 반역의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영혼에게 만족을 주던 원리들을 내쫓고, 중심의 올바른 위치에 그 사랑을 쏟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사랑이야 말로 변화의 위대한 구성 요소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다른 것들과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거듭나지 못한 자의 행동은 바로 자신을 향한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부패한 자기 사랑의 불길을 사그라지게 하고, 그 대신 영적이고도 신적인 불길이 타오르게 합니다.

 

2. 거듭남은 목적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새로운 피조물의 목적입니다. 옛사람의 목적은 자아, 그 자체였습니다. 즉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목적으로 삼아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타락함으로 변질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사람을 더욱 높은 곳으로 옮겨 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 분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희생하게 합니다.

 

 

1)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새창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위하심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호2:23) 이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교회를 심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농부는 자신을 위해 추수하고자 씨를 뿌리고, 곡식은 그것을 뿌린 농부를 향하여 자라납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러한 영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기 마련입니다.

 

 

자연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곳에는 신적인 본성이 없습니다. 그 영혼 속에는 하나님과 닮은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즉 그분을 위하여 영혼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2) 새로운 창조는 복음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창조는 복음이 인쇄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창조된 자는 그 의도하는 바가 복음과 일치하게 됩니다. 마음이 복음으로 감동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덕과 우수함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변화가 있게 되면, 그 분의 이름을 가장 높은 보좌에까지 이르도록 높이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 차게 됩니다.

복음의 목적이 자기를 부인하고 의에 이르게 하며,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 분의 율법,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최상의 존재로 높이는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3)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그 영혼이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인이 되시고 새로운 피조물의 모형이 되십니다. 그 모형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영혼의 틀을 형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주된 목적인 하나님을 전혀 닮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과 그 피조물 사이에는 단지 서로 다르다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소동과 싸움은 바로 이러한 목적의 차이 때문에 발생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거듭남의 모형이며 대의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부활은 단순히 영적인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를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질 때보다 더욱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에, 넘치는 활력과 고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영혼의 증진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그것 자체보다 낮거나 동등한 목적에 의하여 결코 증진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그 행실을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퇴보시키는가 하는 것은, 그 목적이 얼마나 고상한가, 아니면 저급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진 그 무한한 성격에서 볼 때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영혼의 증진에 합당치가 않습니다. 하지만 영구적이며 사람의 영혼을 가장 고귀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은혜만은 인간의 증진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때, 영혼은 완성될 것입니다.

 

  

5) 지향점이 바뀌지 않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영혼이 추구하던 목적의 변화가 없이 새로운 창조에 속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영혼은 그 원래의 상태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활동을 하더라도 그 주된 목적이 그분께로 향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게 된 새로운 피조물은 더욱 고상한 의무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식으로 응답하는 것에 그친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이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껴안고 뒹구는 자는,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은혜의 효과적인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 즉, 성령의 성전이 된 사람들은 그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최고의 탁월한 목적인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6) 바른 변화가 바른 봉사를 하게 합니다

  목적의 변화만이 그 영혼이 감당해야 할 봉사를 적절히 수행하게 합니다. 변화된 목적으로부터, 모든 봉사를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신속함과 진심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분을 위하여 무슨 봉사를 시작하고서도, 우리의 마음이 곧 시들해지고 지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목적의 변화야 말로 새로운 피조물이 지녀야하는 가장 본질적인 성질들 중의 하나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의 몸으로도, 영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3. 거듭남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거듭남의 변화가 원리와 목적에 있어서 내적인 변화인 것처럼, 그것은 또한 사고(思考)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새롭게 된 피조물은 최상의 기능적 구조물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가 육체를 좇을 때에는 육체의 일들을 마음에 두었지만 이제는 영을 좇는 자가 되어 영의 일들을 마음에 두고 생각합니다(롬8:5). 하나의 원리가 그 지성 속에 주입되어, 이전에 연기에 가려져 있던 빛과는 다른 빛을 그 지성에 발하게 됩니다. 이제 지성은 무엇이 처음으로 솟아 나오는지를 더욱 재빠르고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되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는 내부의 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되어서, 왜곡되고 타락한 영혼이 죄를 생각하면서 스릴을 느끼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4. 거듭남은 위로의 변화입니다

  본성에 변화가 있기 때문에, 만족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게 됩니다. 모든 본성에는 그 본성이 만족하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인의 만족은 어린 아이와 다르고 왕자의 만족은 농민의 것과 다른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원리를 공급하시는 성령님은 새로운 위로를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즐거움과 위로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부르십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그 마음 속에 심긴 기쁨이 있습니다.

자연인은 세상적인 것이 제거되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세상적인 것들이 없어지더라도 그들의 위로가 손상되기는 커녕 오히려 커집니다. 그의 기쁨의 근원이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넘치는 생명의 샘을 제공하여 줍니다. 그러한 위로로 인

 

 

하여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조차도 그에게 영광스러운 위로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14절은 선포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모든 일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에서 최상의 기쁨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연합되어 있는 영혼들의 유일한 행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에도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하여 행할 때마다 그 행위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위로가 묻어 있기 마련입니다.

출처: 청교도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2장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

 

 

1.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는 어렵습니다.

 

  

1) 본질에 대한 논쟁들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거듭남이 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본체인가’, ‘만일 질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습관인가, 아니면 능력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성령 그분 자신이신가’ 하는 것들에 대한 논쟁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오히려 거듭남의 본질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본질을 새로운 피조물, 새마음, 우리 안에 새겨진 율법, 하나님의 형상, 신적인 성품이라는 말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경적인 용어들 또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 효과만이 가시적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가시적인 것은 그 본질이 아니라 효과 뿐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씨가 자라나서 번식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씨를 성장하게 하는 요소는 씨의 껍질과 외피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원소와 요소에 의하여 성장하게 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무엇이 영혼인지, 그리고 어떠한 부분에 그 영혼의 주된 원리가 담겨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기는 무척 힘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바람을 느낄 수 있고, 그 바람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을 볼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 바람이 일어나는지, 어디로 몰려가는지, 어떻게 거센 바람이 약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탐구도 그렇습니다. 그 효과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떠한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을 묘사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3) 자연적인 무지가 눈을 가리기에 어렵습니다.

  가장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속에도 여전히 자연적인 무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경건에는 비밀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숨겨졌고, 이성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는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부터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 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씌운 눈가리개가 완전히 벗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하여 아는 것 조차도 우리의 육신적인 개념들로 인하여 혼동하게 되었습니다.

 

  

4) 경험하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것은, 자연인들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그 능력을 친히 맛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거듭남의 기술을 성경을 따라서 하려고 합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효과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위대하고도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통해서, 생명력이 넘치는 원리, 새로운 습관, 하나님의 법, 그리고 신적인 성품이 마음 속에 심어지고 뼈대를 형성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워하면서 거룩하게 행할 수 있게 하며, 영원한 영광을 향하여 자라 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의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용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없던 것이 존재하게 된, 변화와 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 있는 자라면 분명히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이며, 살아 있는 자로서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살아 있는 피조물이라며, 살아 있기 때문에 행동하게 되는 어떠한 힘과, 이러한 행동들을 쉽게 하게 만드는 습관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렇게 행동하는 힘과 그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피조물의 본성 속에는 그러한 행동의 원리로서 어떠한 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입시키신, 영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원리이며 주요 행동 패턴으로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한 양식입니다. 이것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위하여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거듭난이 그리스도인의 다른 상태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1) 거듭남은 회심과 다릅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변화이며, 회심은 영적인 활동입니다. 거듭남은 하나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며, 회심을 이 힘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환할 수 있는 원리가 주어지고, 회심은 바로 그 전환하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거듭남은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회심은 그렇게 주어진 능력으로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1) 회심이 결과라면, 거듭남은 원인입니다.

 생명의 활동이 있기 전에 먼저 생명이 생겨야 합니다. 생명이 그 활동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회심의 측면에서 그 힘을 행사하게 하십니다. 회심은 거듭난 사람에서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행동의 원리가 활동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2) 거듭남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회심에서는 능동적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생명이 자궁에서 처음으로 수태가 될 때에는 생명의 유입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지만, 생명이 유입된 이후에는 그 생명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처음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활동으로 주어진 첫 번째 원리에 의하여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내는 활동입니다. 이 첫 원리에서 이후의 모든 행동, 곧 믿는 것, 회개하는 것, 죄를 죽이는 것, 죄를 각성하는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에 있어서는 사람이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의지 안에 어떠한 경향과 성질을 불어넣는 것은, 각성시키는 성령의 역사하

 

 

심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경향의 능력으로써 의지를 하나님께고 향하게 하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거듭난 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 날이지만 회심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때는 사람이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능동적일 수 있는 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영혼 안에 먼저 심긴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칭의와 다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됩니다. 거듭남과 칭의는 한꺼번에 동시에 일어납니다. 죄책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칭의와 새롭게 출생하는 거듭남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 집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릅니다.

 칭의는 관계적인 변화입니다. 칭의로 인하여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집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성속자로 옮겨집니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의 변화입니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화된 것입니다.

즉 칭의는 상태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의 변화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은 ‘전가하는’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에서 ‘무죄언도’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에서 ‘친교’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전가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은 입양과 다릅니다.

  입양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고귀함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칭의에서 파생되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합니다. 입양이 우리에게 자녀됨의 ‘특권’을 주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자녀됨의 ‘본성’을 줍니다.

입양은 우리들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관계시키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특성을 ‘새겨 놓는’ 것입니다. 입양은 일종의 권세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관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반면에, 거듭남은 하나의 원리를 심으심으로써 우리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입양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애정의 대상이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4) 거듭남은 성화와 다릅니다.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뿌리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과 같이, 거듭날 때에 주어지는 습관으로서의 이 원리에서부터 자라는 것입니다. 즉 거듭남은 성화의 생명이며, 영혼의 강건함과 생동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2부 무엇이 거듭남인가


3장 거듭남이 아닌 것들

 

 

1. 거듭남은 본성 자체의 파괴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영혼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실체나 기능적인 구조믈들을 아예 제거하거나 없애 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전에 있던 기능적 구조물에 새로운 성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쎈씨병(문둥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 신체의 피부 조직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피부에 있는 질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비록 금과 불길이 서로 뒤섞여서, 불의 속성이 금의 모든 부분 속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의 실체가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금은 유연하게 되어서 예술가가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더욱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지만, 금은 여전히 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이란, 촛대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촛대 위에 새로운 초를 세우는 것처럼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새로운 성향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과 이성, 이해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올곧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이전과 동일한 몸에 새로운 성질이 부여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기품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황폐해지는 대신에 풍부해지며, 일소되는 대신에 오히려 개조되는 것입니다.

 

 

 

2. 영혼의 활동은 여전합니다.

  거듭남은 영혼의 본질적인 활동 자체의 변화가 아닙니다. 영혼의 활동에 있어서 거듭난 전후에 그 본체와 본질이 동일한 것처럼, 그 영혼의 열정과 정서의 특징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열정과 정서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행동과 자연인의 행동은 둘 다 행동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하고 두려워한다는 영혼의 활동의 면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하지만 활동의 대상은 서로 다릅니다.

 

바울은 적극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본성과 기질은 은혜를 받은 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옳은 방향으로 물꼬가 트여서 옳은 대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핍박하는 일에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것처럼, 은혜 받은 이후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의 수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기질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원리가 그 기질 속에서 작용하여 다른 대상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의 정서들의 실체와 본질, 그리고 그것들로 말미암은 활동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원리로 인하여 분노가 열정으로 변화되고, 슬픔이 회개로 바뀌게 되며, 두려움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고, 세속적이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활동들에 새로운 기질들을 공급하는 전혀 새로운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3. 동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새생명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본성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원리를 각성시키거나 그 무엇을 끌어내어 다듬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잠자는 무엇을 깨우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남은 죽어 있는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무에서 사람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의 원리들을 흔들어서 깨우거나 그것들을 새롭게 자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람 속에는 한 톨의 은혜도 없습니다. 오직 죄의 씨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

거듭남이란, 새로운 씨앗이 영혼의 토양 속에 뿌려지는 것이며, “썩지 아니할 씨”(벧전1:23)가 심겨서 자라나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연인의 상태를 무의식의 상태나 잠자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고, 죽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곧 부활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4. 본성에 새 옷을 입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에게 어떠한 것을 첨가시킨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새로운 머리요, 또한 아담이 되셨는데, 이는 하나의 머리이면서, 또한 공통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그와 일치한다는 견지에서 아담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새로운 피조물도, 영혼 속에 형성되신 그리스도도, 이전의 옛 본성에 첨가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은혜는 이전의 죽은 나무 등걸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옷이 해져서 새 헝겊으로 꿰매는 것이 아니라, 이전 것을 완전히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골3:9,10) 그것은 이전에 있던 것을 치

워 버리는 것으로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지, ‘수선된’ 피조물이 아닙니다.

빛은 어둠에 다른 것을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넣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부가되어 옛 본성이 힘을 얻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힐 뿐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부수적인 것들이 함께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부패된 옛 본성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자연인 안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은혜를 받을 만한 가능성을 지닌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 사람이지, 개선된 것이나 새 옷을 갈아 입은 사람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5. 거듭남에 대한 표시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외적인 세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것을 거듭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형적 요소의 물이 내적인 생명을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세례를 받게 될 때 모든 사람이 거듭나게 된다면,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아야 하며, 결국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세례가 거듭남의 은혜가 전달되는 방편이 될 수는 있어도 기계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성찬이 영적 양식을 제공 받는 성례인 것처럼, 세례는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로서의 성례입니다. 성례의 실제화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영적으로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예 그러한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입에 가장 맛있는 음식을 넣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죽은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받아 먹고 그것을 소화해서 영양을 섭취하려면 먼저 생명의 원리가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영적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통하여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원리입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 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I. 이 책을 공부하며 가져야 할 문제의식과 목적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세계 기독교 역사상 보기 드문 놀라운 영적, 양적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성장이 둔화하다 못해 퇴조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왜곡된 신학 사조(자유주의)와 각종 이단활동(구원파)의 득세에 개 교회들이 질적 성숙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개 교회들이 하나님에 대한 소명의식과 거듭남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듭남의 복이 마치 물질의 복과 자녀의 복과 건강의 복 등과 같은 현세적 복을 성취하기 위한 전제조건 정도로 이해하는 현실입니다.

또한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부재와 오해로 로마서 10장 10절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을 통하여 단순히 입술의 시인을 곧 거듭남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이렇게 따라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듭남에 대한 얄팍한 이해와 잘못된 가르침은 한국 교회가 썩어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이한 형상은 기독교인의 삶의 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창출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스테판 차녹의 본서는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본질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거듭남과 칭의, 그리고 성화를 일목요연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 세 가지 구원적 요소는 상호 분리할 수 없는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철저하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종교적 소신의 변화, 도덕적인 변화 또는 회복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적 개념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음을 논증하면서 이를 내적인 변화를 통해 삶의 원리와 목적과 사고가 변화하는 것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진 내면 변화는 외적인 변화를 창출시키게 됨을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교도 작품답게 신학적 탐구로 글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의 신학이 되도록 “적용‘ 부분을 통해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점검에 필요한 시금석으로서, 가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철저하게 들여다보게 하여 이전에 좋아하였던 것들을 지금은 혐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자기 점검 작업을 하게 합니다. 또한 자신의 삶의 변화는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도록 죄된 습관과 마음 속에 내재된 죄의 법, 죄를 짓게 하는 옛 법의 본성이 날마다 죽고, 하나님의 법과 성품과 습관의 법이 내 속에서 활화산처럼 일어나고 있는지를 점검하도록 권장합니다.

 

즉, ‘ 과연 내게 하나님과 닮아 가기를 바라는 뜨거운 열망이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내적이고도 영적인 의무들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 정도는? 내 마음과 생활에 어떠한 거룩함의 요소들이 있는가?’ 등과 같은 믿음의 시금석을 통해 거듭남에 대한 확신과 성화에 대한

 

 

갈급함으로 삶을 채워 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저자 스테판 차녹에 대하여 (이 책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

 


 스테판 차녹(1628 - 1680)은 영국 찰스 1세가 국왕이 된지 3년 되는 해에 태어나 왕당파와 의회파의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던 시민전쟁의 대혼란의 시기를 살아갔던 인물로서, 찰스 2세의 ‘1662년 법령’에 의해 청교도운동의 공식적인 활동의 종언을 고하게 된 시대에 활동하였던 위대한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그는 찰스 왕이 선포한 대추방령 아래 약 15년 동안 런던의 사역지에서 쫓겨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의 저서 중 대표적인 작품은 ‘신론’과 ‘중생론’이 손꼽히고 있는데 ‘거듭남’이라는 작품은 당대의 최고의 신학자이자 청교도신학의 완성자로 불리던 죤 오웬의 작품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세밀하고도 예리하게 거듭남의 신비와 정체성에 관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본 저서 ‘거듭남의 본질’은 그의 4권의 중생론 중 2권으로 1권은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 3권은 ‘거듭남의 유효성’ 4권은 ‘거듭남의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윤종훈 교수의 추천의 글 요약)

 


III, 전체 목차

 


1부 거듭남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정의

1장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2장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

2부 무엇이 거듭남이가

3장 거듭남이 아닌 것들

4장 무엇이 거듭남인가(I) - 거듭남은 변화입니다.

5장 무엇이 거듭남이가(II) -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6장 무엇이 거듭남이가(III) - 거듭남은 외적인 변화입니다.

3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

7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생명의 원리

8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 - 새 것이 필연적인 새 습관

9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I) - 준비가 전제되는 역동적인 습관

10장 새로운 피조물에 심긴 마음의 법

11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게 되는 하나님의 형상

4부 적용

12장 참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

 

 

13장 영광 중에 완전하게 된다는 소망이 주는 위로

14장 자기 점검을 위한 시금석

5부 권면

15장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가는 새로운 피조물에게

16장 여전히 옛사람을 벗지 못하고 사탄의 형상을 입고 있는 자들에게

 

 


1부 거듭남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정의

 


1장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본문 요절 ;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바를 그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가 지금 나의 온전함을 강조하는 것은, 나의 판단을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말하는 것이나 침묵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한 교회의 유익을 준다면, 언제든지 나는 말할 것이고, 또한 그렇게 침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고후5:14)”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성도들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임을 설명합니다.

 


1. 본문은 놀라운 변화의 교리를 제시합니다.

 

  14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에 기초하여 볼 때 죽으심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것을 참으로 체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힘이 됩니다. 또한 그분을 위한 봉사와 영광 돌리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만드는 즐거운 동기가 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우리를 위하여’가 그 목적입니다.

 

1) 거듭난 자와 자연인의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자연인과 거듭난 자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자아가 그 목적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가 그

목적입니다. 15절에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말씀은, 우리 구주의 죽으심의 실제적인 혜택과 효력 아래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 목적과 다르게 자아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칩니다. 모든 곤경과 고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쓴 뿌리인 것입니다.

 

 

 2) 우리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입니다.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타락한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아를 끌어내리고 하나님을 높임으로써 우리의 주된 목적이 되시는 그분의 권리를 회복하십니다.

 

 

3) ‘나에게서 주께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 왔던 우리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대상, 곧 그리스도께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에 제대로 반응 할 수가 없습니다.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은 자아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4) ‘우리를 위하여’였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옳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가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정당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천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합당하고도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우리의 애정의 대상입니다. 이를 이루는 자신을 보면서 느끼게 될 행복감은 존재의 만족입니다.

 

 

5) 부활하심도 ‘위하여 죽은 자들’을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그 분의 부활하심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대표적인 행위로 인하여 우리의 거듭남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성립됩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같이 우리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 분의 부활과 같이 생명을 주는 은혜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6) ‘이제부터는’ 달라집니다.

  16절에 보면 ‘이제부터는’이 나옵니다. 또 위 말씀에 ‘안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사

 

 

람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히브리 원어로 ‘야다’로서 ‘실제적인 체험을 갖고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따라 안다는 것은 사람들의 위대성, 지식, 가치를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할례와 예식 등의 외적 특권들을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오직 내적인 은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 분을 향하여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을 따라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육체대로 알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그 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 그 분께서 전하신 뛰어난 은혜들, 그 분께서 실행하신 놀라운 직분들을 보면서 그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아는 것으로 예수님이 은혜의 근원이 되시며,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임명받으셨고, 또한 맡겨진 그 일을 잘하셨다고 하나님께 인정되었으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화롭게 여김을 받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3. 거듭난 자에게는 증거가 드러납니다.

 

 

1) 거듭나지 않은 자의 관심은 세속적입니다.

  자연인은 세속적인 흥밋거리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사랑하며, 참으로 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2) 거룩을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자신에게서 벗아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부는 증거는, 거룩을 기준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모습입니다. 즉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고려하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평가에 근거를 두고 평가하지 육체를 따라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만일 자신을 위하여, 육체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 분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집중해야 하고,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하되 이를 위한 조건은 그 분을 하나님께 인정받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은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과 같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8-10)

 

 

 

 

 


4.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는 본질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15절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주어진 그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하며 변화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함으로 그분에게 접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17절) 즉 아담의 옛 감정, 옛 기질이 지나갔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규칙과 통치자가 되고, 선과 악의 기준이며, 자기 자신의 목적이 되고자 하는 것이 지나갔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지명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상의 선이요, 최고의 목적이며, 최적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를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고정시키는 것이며, 사랑은 옛 아담처럼 스스로가 기준과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곧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법적으로’, ‘의무적으로’, 또한 앞으로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채로’ 이전 것은 지나가 벼렸습니다. ‘새 것이 되었도다’. 이는 우리의 함으로써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나니”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교리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형성된 참되고 놀라운 변화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중생의 교리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시편51:10)

 

제가 볼 때 사람이 천성적으로 중생의 교리에 반대하는 것만큼 이상한 일은 없습니다. 또 거듭남과 중생의 교리에 반대하는 것만큼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깊이를 잘 보여 주는 일은 없다는 생각도 종종 듭니다. 신약성경을 읽어 보면 그 당시 사람들도 이 교리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요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도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중생을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주님을 싫어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의 깊이를 폭로하시고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그를 오해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그때도 중생의 교리를 싫어했고, 지금까지도 그것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

존 웨슬리도 참으로 회심한 후에 옥스퍼드 대학으로 돌아가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다가 미움을 받았습니다. 옥스퍼드의 존경받던 종교 인사들은 이 교리가 싫어서 웨슬리가 대학에서 계속 설교하는 것을 금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육에 속한 사람,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중생과 거듭남이라는 크고 놀라운 성경의 교리를 반대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나 인간의 형제 됨 같은 주제에 대한 강연이나 설교를 들을 때에는 전혀 반박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삶을 살라는 권면을 들을 때에도 이견을 표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합니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는 책망조차 전적으로 옳고 지당한 말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은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육에 속한 사람들 앞에 서서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면 "대체 이게 무슨 괴상한 교리야?"라고 반문합니다.

>>>>>>>>>>>>>>>날마다 읽는 마틴 로이드 존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6. 중생

(조직신학 개론, 존 M. 프레임, 개혁주의신학사, 266p~269p에서 발췌)

 

 

구원의 첫 번째 축복이며, 구원의 서정의 두 번째 단계는 중생 또는 거듭남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는 우리에게 새 생명, 새 마음을 주십니다. 중생은 효과적인 부르심의 첫 번째 효과입니다. 그리고 중생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순서 중 첫 단계입니다.

 

우리가 8장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전제조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엡2:1-3). 이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임신과 탄생이 새로운

육체적 생명을 가져오는 것처럼, 중생의 사역은 새로운 영적 생명을 가져옵니다. 거듭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새로운 소망과 능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중생에 대한 저의 정의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입니다.

 

거듭남의 언어는 요한복음 기자로부터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만약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29, 3:9, 4:7, 5:1, 4절, 18절에서 요한은 유혹에 대항하는 거룩한 삶 안에서 자라는 성도 안에 심으시는 씨에 대해 말합니다.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의 언어를 사용합니다(고후5:17; 갈6:15; 엡2:10; cf 약1:18). 또 동일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라 함께 살아 있게 되는"자의 언어를 사용합니다(엡2: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자로 말하는 로마서 6장과 같은 본문에서 부활의 사상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그와 함께 죄로 인해 죽고, 그와 함께 의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이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로 부르시는 것처럼, 중생도 그의 부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거듭남은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겔36:26-27; 요3:8). 여러분은 스스로 태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탄생과 연관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태어나게 했습니다. 여러분의 출생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선물, 즉 이런 경우에는 성령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일반적으로 성경이 표현하는 것처럼, 효과적인 부르심이 성부의 사역인 것처럼, 중생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창조는 "무로부터"(out of nothing)입니다. 창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는 무언가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실재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부활도 동일합니다. 부활 전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은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 안에서 우리는 수동적입니다.

 

더욱이 거듭남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것들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만약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은 우리의 의지와 생각을 바꿉니다. 로마서 1장과 죄인들이 진리를 거스르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중생은 우리로 진리를 거스르는 것을 멈추게 하시며, 하나님을 진실로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발생시키는 거듭남은 믿음에 선행됩니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성경적으로 부정확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축복의 통로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믿음의 원인이지, 그 역은 아닙니다. 다시금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며, 믿음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이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중생이 믿음의 원인인 것처럼, 우리의 선한 행위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제가 앞서 요한일서로부터 작성한 본문들을 기억하십시오. 요한일서 2:29은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말합니다. 의를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중생 없이 의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처럼 중생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발생합니다. 베드로전서 1:23은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cf 벧전1:25)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거듭남을 주시는 성령의 위대한 능력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통해서 옵니다. 야고보서 1:18은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십니까? 이는 보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역사가 바람 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여러분은 이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혹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물론 중생이 틀림없이 발생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바람처럼 그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선행들은 중생의 결과입니다. 믿음과 선행은 중생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선 요한일서 3:9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4:7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5:22~23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진술하며 사랑과 모든 성령의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는 명백하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부터 순종으로 바뀔 때, 거듭남을 주시는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 개론, 존 M. 프레임, 개혁주의신학사, 266p~269p에서 발췌)

 

 

 

존 M. 프레임
프린스턴 대학교(A.B.),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B. D.), 예일 대학교(A.M., M.Phil.)를 졸업하였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과 캘리포니아에 있는 동대학원에서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미국 오랜도에 위치한 개혁신학 대학(Reformed Theological Seminary)교수로서 조직신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신학, 변증학, 윤리학 그리고 예배에 관련된 많은 글들을 저술하였다. 그 저술에는 [주권에 관한 신학] (Theology of Lordship) 시리즈의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교리] (Th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변증](Apologetics to the Glory of God)과 [코넬리우스 반틸: 그의 사상에 대한 분석] (Cornelius Van Til: An Analysis of His Thought)도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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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 후크마의 중생의 본질

 

 

4. 중생의 본질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째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새 생명의 이식이라는 좁은 의미로 중생을 이해하는 일에서 우리는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 확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더욱이 중생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잡기란 어렵기 때문에 추측할 뿐이다.

 

중생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로 언급하려 한다: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시금 에베소서 2장 5절을 생각해 보자. 중생은 죽은 죄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구절의 동사는(synezoopoiesen) 부정시제로서 순간적 동작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는 루디아의 개종이 기록돼 있는데,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다.’고 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가르킨다. ‘연다’(dienoixen)는 동사 역시 부정시제이다.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알미니안들ㅡ처음에는 레몽스트랑트(Remonstrants)라고 불리움ㅡ은 중생이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이뤄지는 변화라고 돌트총회(synod of Dort)에서 주장했다. 이 돌트회의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펠라기우스주의이며 비성경적이라고 배척했다:

 

돌트 총회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ㅡ여기서 ‘돌아선다’는 것은 ‘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ㅡ 은혜는 부드러운 설득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의 본성에 가장 적당하고 고상한 방법인 설득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의 오류를 배척한다.18)

 

돌트에 모였던 신학자들이 알미안주의자들에 대답했던 내용들, 특히 그들이 볼 때 성경적 중생관은 인용할 만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이것이 중생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로부터 일어남, 다시 살아남 등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성경 안에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이 중생은 외적인 가르침,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시되 거듭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동시에 이것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놀랍고, 비밀스럽고 표현될 수 없는 일로서 그 능력에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조사역이나 부활보다 결코 뒤떨어지거나 열등하지 않다.19)

 

(3) 중생은 근본적(radieal) 변화이다: 

‘근본적’(radieal)dlfks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에서 유래됐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은 본성상 영적으로 죽었다.(엡 2:1,5; 골 2:13; 롬 8:7,8). 죽은 죄인들이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께 대한 저항이 없어지며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로 중생의 순간이다. 중생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것은 피상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이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불란서 신학자인 요한 카메론(John Cameron:1579~1625)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에서 성령의 역할은 단순히 사람의 마음이나 지성을 밝게 비춰서 사람의 의지가 결과적으로 도덕적, 영적 문제에서 지성의 인도함을 따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주장은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배격됐다.

 

이 견해는 기능 구조 심리학(faculty psychology)을 잘못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실제적이기도 하다. 내 마음으로는 이러저러한 행동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죄와 범법함들 가운데서 죽어’ 있다면 나는 결토 올바른 행동들을 따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돌트회의에 섰던 알미니안들은 중생에서 의지의 역할에 대해 온당치 못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사람 의지는 죄의 영향을 절대로 받지 않으며,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의지가 잘 기능할 수 있도록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한 장애물이란 “마음의 어두움과 억제되지 못한 감정들”20)이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은 전적 변화로서 한 인격 전체를 변화케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경적 용어를 빌리자면, 중생은 새로운 마음을 부여받는 것이다. 성경에서 마음은 한 인격의 중심부이며, 모든 내적 기능의 중앙으로 정신적, 영적 경험들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즉 생각, 느낌, 의지, 믿는 일, 기도하는 일, 찬양하는 일 등이 결국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중생 시에 새롭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원천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죄 된 성향성들이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까지 완전한 것은 아니다.21)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 점은 우리의 자연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태도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리가 본성상 죄와 부패 가운데 죽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상태와 반대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바꾸려고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자연적 방법으로 우리의 존재 밑바탕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심리학자들이 소위 “무의식”이라고 말하는 영역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변화는 우리의 의식적 삶속에 반영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변화가 의식의 아래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점은 중생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용어를 통해서도 자명해진다: “내가 새마음을 너에게 줄 것이라.”, “만일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이러한 종류의 표현구들은 중생 시에 일어나는 변혁이 너무도 근본적이라서 우리라는 존재 속에 있는 무의식의 뿌리로부터 변화가 있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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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7항. 근자에 나온 알미니안적 중생론으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이하 각주 생략}···

 

19) Canons of Dort, Ⅲ~Ⅳ, Art. 12. Art. 11도 보라. 개혁주의 신조들 가운데 나타난 중생에 관한 언급으로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질문 8항; [벨직 신앙고백문] 24항(넓은 의미의 중생)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일반적으로 ‘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 ‘유효한 부르심’이란 문구를 사용한다: Ⅹ장 및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질문 31항을 보라.

 

20) Canons of Dort, Ⅲ~Ⅳ, 오류반박문 3항.

 

21) 중생과 죄 된 성향들 간의 관계는 본서 12장에서 다룰 것이다.

 

*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169쪽~173쪽.

* 읽기 쉽게 제가 문단을 나누고 칸을 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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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 스테판 차녹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호후5:17)

 

1. 본문은 놀라운 교리를 제시한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은 것이라면, 그 한 사람이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그가 대신한 그 모든 사람은 다 죽은 것이다. 법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그들 자신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분의 능력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 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 이상 근심해서는 안 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5:15). 그분은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것은 우리를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칼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서 살지 않고 자신을 구속하신 분의 영광과 그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2. ‘우리를 위하여’가 그 목적이다.

 

1) 거듭난 자와 자연인은 삶의 목적이 다르다. 자아는 모든 자연인의 최상의 목적이다. 자연인에게는 자아가 그 목적이고, 거듭난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목적이다. 자신을 의존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고자 하는 것이 아담의 큰 죄악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아담은 자기 자신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의 피 속에도 그러한 욕망이 흐르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곤경과 고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쓴 뿌리인 것이다.

 

2) 우리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다.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타락한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일찍 죽음을 당하사--우리들을 피로 구속해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즉, 우리를 더러운 욕망의 노예 상태에서 구속하셔서 우리의 목적이 되시는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3) ‘나에게서 주께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은 자아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되었다(벧전1:18,19). 그저 가까운 선조들의 잘못된 길에서뿐만 아니라, 첫 조상 아담의 망령된 행실에서도 구속되었다. 자기 앞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 흉악한 우상숭배, 곧 자기숭배에 빠져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말이다.

 

4) ‘우리를 위하여’ 였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옳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정당하다. 그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통치권을 얻으셨다.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그 통치권이 확증되었고, 그것으로 우리의 사랑과 봉사의 의무가 늘어났다. 그분이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일에 성장해 갈 때, 그것은 영적 성장의 위대한 증표가 될 것이다.

 

5) 부활하심도 ‘위하여 죽은 자들’을 위함이다. 그분의 즉으심과 같이 우리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분의 부활과 같이 생명을 주는 은혜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6) ‘이제부터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아니하노라”(고후5:16). ‘안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사람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외적 치장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 그분께서 전하신 뛰어난 은혜들, 그분께서 실행하신 놀라운 직분들을 보면서 그분을 알게 된다.

 

3. 거듭난 자에게는 증거가 드러난다.

 

1) 거듭나지 않은 자의 관심은 세속적이다.

2) 거룩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3)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다.

4)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인다.

 

4.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는 본질은 ‘믿음과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있는 자는,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하게 되고, 누구나 그분에게로 접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아담의 옛 감정, 옛 기질들은 지나갔다. 대신에 하나님께 지명하신 새로운 머리 아래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해야 한다. 그렇게 지명되신 분을 우리의 최상의 선이요, 최고의 목적이며, 죄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며, 또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아담이 가장 실패했던 것은 불신앙과 자기 사랑이었다. 믿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고정시키는 은혜이다. 사랑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곧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 스테판 차녹, 『거듭남의 본질』, pp 21-36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거듭남은 칭의와 다릅니다 / 스테판 차녹

 

 

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됩니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합니다. 구세주의 부활은,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그 죄책들로부터 의롭다고 여김 받은 것이며, 주님께서 의로우신 종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것인데, 그 부활을 새로운 출생(a new begetting)이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을 보십시오.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 말씀은, 그분이 이전에는 인생의 연약함으로 감춰져 있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부활하심으로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책으로부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새롭게 출생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모두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1).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는 것은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엡2:5,6 참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을 받는 '아브라함의 복'(갈3:14)을 받게 되고, 믿음에 의해서 그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은, 모두 함께 일어나는 일입니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릅니다

칭의는 관계적(relative)인 변화입니다. 칭의로 인해서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집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상속자로 옮겨집니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physical)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이 구절을 번역한 사람은 뒤에 나오는 5절을 참고하여 '살리셨도다'라는 말을 1절에 삽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로는, 에베소서 1장 23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한 '충만케 하시는 것'과 관련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도 영적 생명으로 충만케 하였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사도가 그리스도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언급한 뒤에, 우리를 일으키시는 그 능력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nature)의 변화입니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적인 삶에 빠져들기 쉬운 본성,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그 본성에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칭의가 상태(state)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disposition)의 변화입니다. 종이나 노예가 자유인이 되면 그 사람의 상태에 있어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원리들을 채워 넣거나 그의 본성에 새로운 뼈대를 세워주는 것은 아닙니다. 관계와 본성은 서로 다른 것들입니다. 창조 세계에는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피조물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또한 존재의 위계상 피조물의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 위에 첨가된 것입니다.

 

본문의 뒤에 따라 오는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은 화목, 곧 우리의 범죄함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변화와는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matter)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form)은 ‘전가하는(imputing)’ 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infusing)’ 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putting into)’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condemnation)’에서 ‘무죄언도(absolution)’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pollution)’에서 ‘친교(communion)’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right)’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fitness)’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perfect)’ 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to)’ 전가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in)”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 46~50p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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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인간의 내면은 영(靈)인가 혼(魂)인가? (Q&A) / 박신 목사


[질문]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개역본)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킹제임스 흠정역)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데 ‘생령’과 ‘혼’의 차이가 무엇인지요?

[답변]

모든 성경은 번역본이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매일 읽고 있는 성경은 원어본이 아니라 번역본이라는 사실입니다. 번역자(기관)에 따라서 그 용어나 표현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역본에서 ‘생령’으로, 흠정역에서 ‘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네페쉬”인데 여러 의미를 지닙니다. 한 단어인데도 문장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용례(用例)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각각의 문장과 앞뒤 문맥에 따라 실제로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었고 사용했던 의미로 바꿔서 번역합니다. 개역본이 취한 번역 방법입니다. 반면에 흠정역의 경우는 주로 원어와 의미가 가장 근접하는 단어를 선정하여 성경전체에서 그 원어가 나올 때마다 동일한 단어로 번역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이 두 번역방식은 각기 장단점이 있는데, 한 쪽의 장점은 다른 쪽의 단점이 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다양한 의미의 단어로 바꾼 경우는 이해하기 쉽고 문맥 안에서의 뜻과도 대체로 일치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에 의미가 다른 여러 원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지레 짐작하게 됩니다. 원어의 뜻을 알려면 일일이 대조해봐야 합니다. 반면에 흠정역처럼 원어 하나에 동일한 단어로만 번역되면 그 일관성은 유지됩니다. 원어와 대조해볼 필요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원어에 충실한 번역입니다. 그러나 문맥 안에서의 활용되는 의미는 독자가 스스로 추정해봐야만 된다는 단점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와 자기 조카 롯과 하란에서 그들이 모은 그들의 모든 소유와 또 그들이 얻은 혼들을 데리고 가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라.”(창12:5-흠정역) “얻은 혼들”로 번역된 단어의 문장과 문맥 안에서의 뜻은 “얻은 사람들”(개역본)입니다. 히브리 원어는 동일하게 ‘네페쉬’이고 KJV 영어판도 일관되게 ‘soul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국어 흠정역은 당연히 영어판 KJV와 동일하게 ‘혼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영어번역본들, 대표적으로 NASV는 persons, NIV는 people로 번역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으셔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혼이 나를 축복하소서, 하매”(창27:19- 흠정역) 아버지의 혼을 개정역은 “아버지의 마음껏”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본들을 다시 살피면, KJV ? soul, NASV와 NIV ?단순히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참고로 이 네페쉬는 구약성경에 751회 사용되었는데 영어로는 soul 475, life 117, person 29, mind 15, heart 15, creature 9, body 8, himself 8, yourselves 6, dead 5, will 4, desire 4, man 3, themselves 3, any 3, appetite 2, 기타 45회입니다.

그리고 개역본은 원래 영어번역본과 한자번역본을 중심으로 번역했기에 영어번역본의 방식대로 따랐습니다. 또 KJV가 어렵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많아 새로 개정된 영어 NKJV는 상기 창12:5에서 soul 대신에 people로 번역했습니다. 최신판 영어흠정역도 다른 영어번역본처럼 문장과 문맥의 뜻에 따라 적절한 용어로 대체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영과 혼의 차이

다시 강조하지만 모든 성경은 번역본이라 용어와 표현이 다를 수 있음부터 인식하고 대해야 합니다. 그럼 다음으로 원어에서 영과 혼의 구별이 있는지 여부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혼(魂)은 인간의 지정의 측면 즉, 인간 혼자로만 따져서 육체와 구분되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네페쉬’이고 헬라어로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경우와 신약성경에서 ‘푸쉬케’(예: 살전5:23, 히4:12)를 사용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영어로는 용례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반면에 영(靈)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왕상22:21), 헬라어로 ‘프뉴마’(눅8:55)인데 영어로는 ‘spirit’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펴본 인간 정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특별히 구약성경)로 볼 때는 이 둘의 의미를 혼동해서 즉,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함께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질의하신 창2:7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네페쉬(영어 soul, 한글 혼)인데 실제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내면)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인간(의 내면)”이라고 표현한 까닭이 있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이분법(육체와 정신, 육신과 혼) 혹은 삼분법(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해서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의 온전한 한 인격체로만 대하며 한 사람 한 사람과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서고 안 서고는 한 인간 전체로서 행할 바이자 책임입니다. 내 정신은 하나님을 찾는데 내 육체는 반대라는 법은 없습니다. 정신이 멀어졌기에 육체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한 인간 안에서 육체에만 혹은 정신에만 은혜나 벌을 구분해서 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육신이 정신보다 또는 혼이 영보다 열등하다거나, 육체가 죄의 근거 내지 원인이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육체는 악하고 추한 것이라 죽으면 완전히 없어지고 영만 천국으로 간다는 헬라식 이분법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신자에게는 마지막 날의 육체를 포함한 전 인격체의 완전한 부활이 궁극적 소망이자 목적지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과 신자의 믿음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편의상 삼분법적 구분을 사용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흠정역도 영혼몸으로 번역) 하나님께서 신자의 육체, 정신, 영 전부를 주님 오시는 날까지 거룩하게 보존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흠정역도 동일한 번역)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영만 아니라 정신과 육체까지 심대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로 하여금 그 영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따르게 하며, 혼으로는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며, 육신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름답고 강건하게 가꾸도록 바꾸어준다는 것입니다.

상기 두 구절에서 영혼육으로 인간을 셋을 구별했어도 결국은 그 셋 전부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영만 따로 거룩하게 보존하고 성장시키지 않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한 인간을 영혼육이 합일(合一)이 된 하나의 인격체 전체로 보시고 그에 맞게 대우합니다.  

창세기 2:7의 뜻은?

창세기 2:7의 원어 네페쉬에는 영, 혼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의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NASV NIV 등에선 “living spirit”이 아니라 “living be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한 흠정역의 “living soul”도 동일한 의미이긴 하지만 자칫 ‘soul’ 만 살아있는 듯 오해될 수 있는 것보다 더 적합한 번역 같습니다.

또 비록 주로 혼으로 번역되는 히브리 원어가 사용되었지만 앞뒤 관계로 봐선 우리말로는 영으로 번역되는 편이 더 합당한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영혼육으로 구분시킨 의도와도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무엇보다 당신의 영을 인간에게 부어넣어 주셨다는 뜻이 강조되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내면을 말하는 영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글 개역판이 생영(生靈)으로 번역했다고 해서 영만 살아있다거나, 하나님이 영을 특별히 우월하고도 인간 중에서 별개로 구분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선 안 됩니다. 영혼육이 합일된 하나의 인격체 아담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보다 창2:7에서 더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다른 모든 동식물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있으라’는 명령 한마디로 이 땅에 존재케 되었습니다. 인간만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직접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당신께 아주 특별한 존재이자 창조의 궁극적 묵적이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피조세계를 인간이 생존 번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상태로 완벽하게 조성한 후에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불어넣으신 생기 가운데는 단순히 육체적 생명과 지정의를 망라하는 정신(본 주제에선 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도 함께 불어넣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으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릴 소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창1:28) 그래서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도록 영을 불어넣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닮게 만드셨다는 중요한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해야만 그분 대신에 그분의 뜻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 아닙니까?  한글 개역판 ‘생영’의 의미입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개역, 흠정역도 영으로 번역, 헬-프뉴마, 영어-spirit)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을 자기는 물론 이 세상의 주인으로 세움으로써 그 영(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이 전적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이런 원죄 하에 태어난 인간 중에는 스스로 기꺼이 순전한 감사와 경배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여서 은혜를 주셔야만 하나님을 순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개역, 흠정역도 동일한 번역) 한 죄인의 영에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광채가 비취는 것을 막고 있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성령이 오셔서 깨트리고 임재 내주해주셔야 비로소 예수를 믿게 되고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예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주님이 천국 보좌의 본래 위치로 되돌아가심)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16:8-11)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죄인데 성령이 오셔서 그 죄에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타락한 인간의 영(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 물리적으로 혼과 구분되는 것은 아님)을 새롭게 거듭나게 해주시어 예수를 주라 시인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창세기2:7에서 두 성경이 영과 혼으로 갈리는 것은 번역상의 차이일 뿐이지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 단순히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으로 구분하지 마시고 최초인간 아담을 완전한 한 인격체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단 그를 특별한 방식으로 만드셨는데 동물과 달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이 땅에 존재케 하신 목적,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소명을 달성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만 첨언하자면 성경에서 서로 모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 혹은 교리적 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못했던 혹은 할 수 없는 신자로선 당혹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변 목회자에게 질문하시어 일일이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떨어진 상태의 의심이 아니라 온전하고 성숙한 믿음으로 가기 위한 구도(求道)입니다. 만약에 그럴 기회나 여유가 없다면 성경 전체를 반복해서 통독하셔야 합니다. 앞뒤 문맥을 관통하고 나면 그런 지엽적인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또 정확한 의미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9/25/2014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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