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가장 큰 은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병고치는 은사 (신유)

순교하는 것 (좋아하지 않겠지만 상급은 최고)

전도 많이 하는 것 (상급 최고)

기도 많이 하는 것

구제하는 것

예언하는 것 (요즘 예언하다가는 이단 됨)

큰 믿음

가르치는 은사

지혜와 지식

방언, 방언통역, 영분별

성령, 구원, 영생, 능력행함....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7~38)


가장 큰 계명이자 은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인격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근본적인 삶의 기준을 말하며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신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은사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 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이것은 신자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가이다

예를 들면 신자가 하루하루 살면서 직장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사역도 하면서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고 있나요?

질문하면 사실은

돈이 최고죠

현재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입니다

머니머니해도 선교가 제일 중요하지 않겠어요

목사님들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겁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는 신자들이 대부분 거절을 한 이유는 경제문제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들이 우선순위에 있었기 때문이다(눅14장)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신뢰하고 있습니까?

실패의 연속 가운데서도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일상의 바쁜 삶을 살다보면 현상에 집중하면서 본질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보다 사역이 우선이 되고 교회가 우선이 된다

예수 없는 사역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에베소교회가 처음사랑을 잃어 버리자 예수님은 촛대를 옮기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가 옮겨져서 예수없는 수많은 교회가 생긴 것이다

담임목사가 주인행세를 하고 삯꾼 목사가 생겨난다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목사가 뉴스를 탄다

가장 큰 은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은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맘몬을 섬기는 것이다

맘몬을 섬기는 것은 사탄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의 대상을 기억하는 것이며 인격적이고 실제가 되어야 한다


출처: acolo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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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들어가는 비밀이 있다(마13:11)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면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밀을 깨닫는 자가 있고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비밀은 무엇일까?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비밀을 깨닫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세계인구 76억명중에서 구원받을 자는 몇명이나 될까?

깨닫는 자는 6억명(8%) 정도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76억명의 세계인류 중 기독교인은 31%인 24억명이고 그중에서 3/4(75%)은 자갈밭,잡초밭,길에 뿌려져 결실하지 못한 신자들이고 1/4(25%)만이 깨닫고 결실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관심이 있다

깨닫지 못한 수십억명은 단지 그들을 개들이라고 인식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계22:15)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빌3:2)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15:26)

여기서 개들이란 부정한 동물로 불신자와 깨닫지 못한 자들을 상징하며 예수께서 언급하신 '그들'에 속한다

그들이란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깨닫지 못한 부류에 속했던 자들이다

노아 홍수때에 세계인구는 최소 10억명이라고 추정하는데 구원받은 8명은 단지 0.0000008%에 불과하였다 

사람은 존귀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단지 짐승과 다를바 없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

​그러나 실상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

짐승은 죽으면 그 존재가 소멸되지만 사람은 불못에 들어가 세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비밀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란 '연하여 던진다'는 의미로 알려진 진리와 감추어진 진리를 동시에 던진다는 의미다

알려진 진리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다

알려진 진리를 아는 사람은 76억명 중 31%인 24억명이다

그러나 24억명 중에서 감추어진 진리까지 깨달은 사람은 1/4인 6억명 수준이다

교회의 일원이지만 깨닫지 못한 18억명도 '그들'에 속한다

감추어진 진리를 아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66권의 성경에서 복음의 진수를 기록한 것은 사복음서이며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에 중요하다

사도행전은 예수께 직접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 예수 승천 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굳이 성경에서 중요도를 따진다면 바울서신은 복음의 교리를 해석한 것이기에 복음서보다 더 중요하거나 우선순위에 위치할 수 없다

교리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 복음의 진수는 복음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비밀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비밀은 복음서에 너무 강조되어 있고 너무 빈번해서 무시되곤 한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Acts(행적)를 제거하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요소가 많지 않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냈고 그들의 병을 고쳤으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집도 없었고 교회건물도 세우지 않았으며 통장도 없었고 부동산도 갖지 않았다


사도들의 행위들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의 Acts (행적, 행위, 행동)를 기록한 책이다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았고 병을 고치고 선교와 구제를 했으며 감옥에 갇히고 순교했다

예수님의 사역과 유사하지만 현대교회의 행적은 사뭇 다르다

현대교회는 Acts가 없다

성경은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사실 현대교회는 행적이라고 할 것도 없는 형편이다

현대교회의 행위의 대부분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교회봉사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삶은 예수님처럼 살았지만 현대교회는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다

초대교회에는 동물제사와 할례를 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현대교회는 동물제사와 할례를 버리면서 신자가 올바르게 살아야 할 행실도 함께 버렸다


 


천국의 들어가는 비밀은 다음과 같다(산상수훈이 복음의 진수에 속한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지만 무시되거나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행하지 못한다

깨닫는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기 깨문이다

다카이오수네는 성도가 살아가야 할 고결한 삶의 지침이자 근원이며 진정한 내면의 선에 기반한 의로운 삶이다

산상수훈은 디카이오수네의 최상의 지침이다

예수를 몰라서가 아니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명하신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

 아름다운 열매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 

(깨닫고 삶으로 행하는 신자)

 의로운 삶

 예수

 천국의 백성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넓은 문 

 나쁜 열매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신자)

 불의한 삶

 자신

 지옥의 백성들


76억개의 길이 있다

세계인구 76억명은 모두 다른 길을 간다

복음의 씨가 뿌려진 사람의 마음은 다양하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고의적이다

옳고 그름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도 알고 말씀도 알지만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며 나쁜 행실을 선택한다

죄중에 가장 질이 나쁜 케이스로 염소들에 속한다

2. 무지하다

죄가 죄인지 모르고 깨닫지 못하니 잘못 살아간다

무지하다고 죄를 탕감받지 못하는데 무지도 죄에 속하기 때문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53:4)

이들은 진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이단의 미혹에 빠지기도 한다

3. 착각한다

자신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만 산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알지만 예수님처럼 살지는 않는다

인본주의적 교훈에 미혹되기도 하고 바리새인의 누룩이나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려간다

천국의 비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산상수훈에 기록된 삶의 지침대로 사는 것이며 그래야 결실할 수 있다

산상수훈은 신자가 살아가야 할 삶의 지침서요 안내서요 설명서다

이대로만 살아라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거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 성령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인가? 그들인가?



출처: acoloje


 

"기독교는 사랑과 포용의 종교다!"


이 명제 안에

진리적 기준에 의한 부연설명이 없으면,

이 명제만큼 사악한 명제도 없다.


특히나 광명한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미혹이 극에 달한 이 시대라면 더더욱...


이 명제로 인해

이 시대에 맺어지는 열매는 무엇인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고,

그들과 연합해 평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하게 되고,

결국 WCC는 사랑과 평화의 연합체라는

미혹의 알을 깐다.


김정은도 사랑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미혹의 알을 깐다.


동성애자를 사랑으로 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성정체성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해줘야 한다는...

미혹의 알을 깐다.


미혹이 난무하는 이 때,

거짓이 거룩한 모양을 가장하고 있다면,


그 누구보다 

거룩한 모양으로 가장한 껍데기를 꿰뚫고

내면의 본질을 영적으로 

투시해 볼 수 있어야 하는게,

바로 목회자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이다.


하지만 지금 대다수의 교회들은, 

이런 영적 투시를 전혀 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그 모양에 혹해서

미혹된 흐름에 다 휩쓸려 가버린다.


마지막 때 교회들에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고 본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채,

거짓된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전혀 자각이 되지 않으니,

아주 당연하게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며,

당당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름 부르며,

종교행위에 열심을 다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게,


구약은 하나님의 엄중한 모습,

즉 심판과 징계를 내리시는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신약은 은혜와 용서,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그런 사랑의 하나님만 그려지는,


그런 관념속에 갇혀있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구약 못지않게 신약 역시,

우리가 인지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가는데,

아무리 기적을 행하고, 외적으로

큰 일을 많이 해도

실상 주님과 상관없는 자들을

가차없이 내치는 엄중한 모습들...

(마 7:21-23)


또한 하나님의 두려움을 강조하면서,


눈이 너로 죄짓게 하면 눈을 빼버리고,

손과 발이 너로 죄짓게 하면 다 찍어내버리고,

지옥에 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몸과 영혼까지 지옥에 보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살벌한 공의의 말씀들... 

(막 9:43-47)


또 열처녀 비유 가운데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서

결국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구절...

(마 25:1-13)


혼인잔치에 초대됐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다가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내던져지는 구절...

(마 22:11-14)


이 모두 다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구절들임에도,


나에겐 적용되지 않을거라 생각하며

터부시해버린다.


교회안에서는...

사랑과 은혜, 축복을 뒷받침하는

그런 말씀들만 요리조리 뽑아내서

한주한주 지나도 계속 메아리처럼

같은 패턴으로 울려진다.


목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편향적인 메시지만 전하게 되니,

메시지의 극단적 불균형으로 인해,

개인적 차원의 영적 영역에 있어서도

교인들이 죄에 대한 인식 자체를 못하는

회개 불감증에 빠지게 만든다.


또 교회밖을 나가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에도,

세상의 거짓된 흐름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거룩한 모양에 혹해 그 거짓에 동조하고

그런 흐름을 쉽게 따라가 버리게 된다.


말세에는 목자를 잘 만나야 하는데,

목자를 잘못 만나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다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


하나님께서 목자에게도

그 책임을 반드시 물으시지만,


본질적인 책임은

안타깝게도 그 목자를 믿고 따라간 

본인 스스로가 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 때, 주님오심이 가까울수록,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키워드보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회개, 심판 등

이런 영적 키워드를 내면의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한다.


왜 계시록에서는 초반부터 

일곱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 단 두곳을 제외하곤,

나머지 교회들에겐 

회개치 않으면 토하여 내친다는

엄중한 심판의 경고를 하셨을까?


잊지 말자.

구약보다 더 무서운 신약의 위 말씀들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글: 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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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이 외친 다섯가지 구호가 있는데 ,

첫째는 ‘Sola Scripture’(오직 성경)이며,

둘째는 ‘Sola Fide’(오직 믿음)이며,

셋째는 ‘Sola Gratia’(오직 은혜)이며,

넷째는 ‘Solus Christus’(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다섯째는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Sola Scripture' 오직 성경입니다.

이는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tes'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라는 의미이며,

성경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도 교황의 말도 목사의 생각도 교인의 체험도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오직 성경으로써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바로 해석할 때

비로소 바른 믿음을 소유할수가 있고,

바른 은혜를 누릴수가 있으며,

그 바른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구원자로 믿을수가 있고,

그 바른 은혜로써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드릴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Sola"가 서두마다 붙은 이유는 그 전까지의 신학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즉 인간의 이성위에다 하나님의 계시를 더한다는 신학을 염두해 두고

 "Sola(오직)"를 붙인 것이다.

로마 천주교의 대표적인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 중에

대 이교론(Contra Gentiles)” 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는 '이성 위에 계시가 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 카톨릭 신학의 대부이며, 로마 카톨릭의 대 신학자입니다.

지금의 천주교인 로마카톨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수도생활이나 인간의 헌신과 행동들이 함께 덧붙여져야만이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겨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부활 가르침의 본질

  

본문: 딤후 2:16-18

요절: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4절에서 사도는, 교회의 교사는 교회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는 사람과 절대 논쟁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이들과 논쟁에 들어가면 옆에서 듣는 사람도 영향을 받아 망하게됩니다. , 교인과 교회가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 대신 교사는 진리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여 이것을 먼저 자기가 실행하면서 가르치고, 또 성도들이 실행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사도는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리에 대해 경고합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이들이 부활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부활 가르침은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이며, 이것 없이는 우리 믿음도, 기독교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므로(고전 15:14), 우리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복습하고자 합니다.

 

지금 주목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는 이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대부분 오늘날 교인의 문제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대체로 부활을 믿습니다. 교회를 상당히 파괴한 루돌프 불트만과 몰트만과 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르치고 믿는 부활은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과는 전혀 다릅니다. 독일 일반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신자도 이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분명 부활 신앙은 가졌는데, 무슨 부활을 믿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이단 가르침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사회, 후기 사실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부활 가르침이 교회에서도조차 올바로 선포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은 우리가 죽은 후 영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정말로 중요한 가르침이므로 우리는 성경의 부활 가르침을 정확하게 알고, 믿고,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삶이 전혀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죽으면 영원한 심판으로 눈을 뜨는가, 아니면 영원한 구원으로 눈을 뜨는가를 결정합니다. 오늘 확실하게 부활 가르침을 배워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사도는 망령되고 빈말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이 나오면 대화에 응하지 말라고 합니다. 망령되다는 말은 거룩한 성도에 걸맞지 않은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말합니다. 그 말이 매우 영적으로들릴지라도 그것은 빈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되며 우쭐하게 되어 더욱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불경건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이것이 오히려 진전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교회는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토론을 그치고 이들에게 말씀을 쓰인 그대로,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순종하면 그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고, 이들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면 영생을 완전히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할지라도 회개하지 않고 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진다면, 교회는 이들을 축출(권징)해야 합니다. 그 전에 참을 수 있는 대로 참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속 복음을 가르치면서 다른 사람이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를 게을리해서 때가 너무 늦으면, 이들이 사람을 선동하여 오히려 목사, 장로가 쫓겨나고 교회는 완전히 이단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을 여러 명을 둔 교회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는 다른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신자가 대부분이므로, 오늘날 목회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17절이 이들의 문제를 말합니다: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악성 종양을 적시에 잘라내지 않으면 결국 몸이 죽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교인은 그리스도와 끊임없이 교제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 다른 복음, 다른 말이나 생각은, 악성 종양이 퍼지는 것처럼 교회에 영향을 줍니다. 갈수록 교회 지체가 그곳에 빠지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영에 감염된다면, 이때는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체 일부분인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는 일은 없도록 미리 조처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을 댑니다. 그 이유는 사도가 무엇을 말하고 누구를 문제로 삼는지를 분명히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후메네오는 이미 딤전 1:19-20에 언급되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버렸고 바울은 그를 무섭게 징계했습니다(참조: 고전 5:5). 그 후로 그는 이제 교회 밖에서 복음을 위조하여 다른 복음을 만들어 전하는 사람들의 지도자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결단력이 없었더라면, 에베소 교회는 암이 퍼져서 이단 교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18절에서 사도는 이들의 문제를 분명히 밝힙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18)

 

이들은 잘못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면 먼저 성경이 부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쓰기 한참 전에 이미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부활에 대해 상세하게 가르쳤습니다. 그곳 교회에서도 부활을 두고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의 순서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고전 15:23).

 

이에 따르면 먼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그다음에 그분이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자들이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아무도 부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마감하시고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비로소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시체가 썩어서 흔적도 없어진 사람도 예수님께서 부활시키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전혀 새로운 몸을 입고 부활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3-44).

 

우리는 지금 땅에 합당한 몸을 가지고 있지만, 부활 시에는 하늘의 영광과 영생에 합당한 몸을 입습니다.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영광된 몸입니다(고전 15:40-41). 모두 똑같은 몸을 입는 것이 아니라, 외관이 서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우리 몸만 부활할 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도 새로워집니다. 우리는 완전히 성화 되어 하나님을 면전에서 뵙게 됩니다. 우리는 새로운 육신을 입고 있으므로, 육신이 우리를 정욕으로 자극하지도 않고, 사단도 불못에 있으므로 우리를 충동질하지 못합니다. 죄는 더이상 간 데가 없고,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없게 됩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며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그분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내일 복권이 당첨되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내일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영광된 부활에 참여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지금 에베소 교회에서 문제 되는 사람은 이미 부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영지주의 가르침으로서, 이들의 부활론은 기독교 가르침과 겉으로는 매우 비슷하게 보이고, 이들은 일반 교인에게. “우리는 너희와는 다른 고급 신자다라고 자랑하므로, 점차로 이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게 됩니다. 이들의 부활 가르침은 신비하게 보입니다. 그 안에 깊은 무엇이 있는 것 같아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이들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이들이 엑스터시 때 부활이 일어나서 완전한 구원이 이미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영혼이 드디어 육신의 감옥을 빠져나와 구속 받은 것입니다.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이것이 가끔 일어나지만, 죽고 부활한 다음에는 항상 이러한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들 가르침이 기독교 가르침과 비슷한 것은, 6장에서 그리스도인도 믿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다고 하고, 죽어서도 다시 부활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는 엑스터시를 통해 먼저 부활하고, 죽어서 온전히 육으로부터 해방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과 성경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양자는 전혀 다릅니다. 이들은 부활을 체험한 이후에도 육을 제어하고자 대단한 금욕생활을 합니다. 혹은 이들은 육은 영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므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영지주의파도 있었습니다. 1945년에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도울 김용옥이 까불고 다니면서 영지주의를 많이 소개하면서 신약성경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합니다(“기독교성서의 이해”). 이것은 유명한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이야기입니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을 극단적으로 주장하여, 영은 선하고 육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가 악한 육을 입을 수가 없으므로, 단지 육을 입을 것으로 보인 것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인간이 죽었다는 가현설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자기들만 알고 있는 영적 비밀을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승천 이후에 그들에게 이 비밀 코드를 알려줍니다. 이것이 영지라는 것입니다. 이 영지는 자기들만 알고 그들만 관리합니다. 이것을 터득하려면 많은 비밀 제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단전문가 정동섭 박사에 따르면, 신천지가 바로 이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람을 합숙시켜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는 또한 구원파가 영지주의적 이단임을 밝혔습니다. 박옥수에 따르면, 죄 사함을 깨달으면(영지를 얻으면) 의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는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진짜 의인이 되므로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된 후에는 절대 회개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구원파의 진정한 복음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파격적이고 기쁜 소식입니까? 회개하기를 즐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를 기쁜소식선교회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가면서 혼합종교 운동이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영지주의 가르침이 이미 교회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체계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을 통한 깨달음을 좋아하고, 유럽인들처럼 수년간 조금씩 배워 높은 지식에 도달하기보다는, 순간적인 통찰(영지)을 통해 도를 깨달으려는 한국인의 유전인자가 여기에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독일에서 공부하면서 이러한 경향 때문에 처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우리는 특별한 깨달음을 좋아하고, 이 깨달음으로 성경을 기발하게 재해석하는 사람이 많고, 이 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이단의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 더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교묘하게 성경 가르침의 옷을 입혀 가르쳐, 많은 사람을 모으고 대형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올해 1월에 홍정길 목사는 다음과 같이 실토했습니다: "누가 양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목자라 할 수 있겠나. 그러다 보니 어느새 목회는 사라지고 매니지먼트(관리)만 남게 됐다" "주님이 보시기에 나는 가짜 목사였던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많은 사람이 관상기도 찬양자인 홍정길, 이동원과 같은 무리를 가짜 목사로 알고는 있지만, 그가 이것을 실토한 것은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따르면 가짜 목사는 사람을 물어 찢는 늑대이며, 그가 죽어서 가는 곳은 지옥이며, 일반인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태연히 나는 가짜 목사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믿음을 통한 구원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하나님입니다. 그가 이것을 지금 실토하는 것은, 그가 누릴 영광은 이미 다 누렸으니, 이제 죽기 전에 마음에 남은 부담을 제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가 받을 죄의 삯(영원한 죽음)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죄가 없으시므로 죽음이 그를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분은 죄인도 부활에 참여하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죄인이 부활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시인하고 가슴 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이것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죄 고백은 간단한 입 놀림이 아니라 죽는 것과 같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런데 수십 번 죄 고백을 해야 참다운 고백이 나오므로 수십 번 죽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인, 일본인에게는 진실한 죄 고백이 정말로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은, 칼로 자신을 찔러죽이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고백이 매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죄를 고백하는 자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하기까지는 적어도 30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진심으로 아내에게 과거의 제 잘못을 사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아내에게 사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진심으로 사과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한 번 진실되게 죄 고백을 한 사람은, 계속 죄 고백을 할 수 있고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죄가 더욱 잘 보여서 계속 회개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새 삶으로 부활했으므로, 자기 죄가 더 많이 보이고, 자기의 추한 모습을 알므로, 이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부활했지만, 아직 옛사람을 지니고 있으므로 계속 공격을 받아 연약해져 죄를 짓는 경우가 있고, 이것을 마음 아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입니다. 또한, 그는 죄인이지만, 사함 받은 의인입니다.

 

내 안에 아직 옛사람이 살아있고, 이것은 내가 몸으로 부활할 때에 비로소 벗어버릴 수 있으므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옛사람의 충동질 때문에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나는 때로는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부인이며 우리가 일생 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권능을 나누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계속 믿음과 능력을 주셔서 죄에 대항한 투쟁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취하는 부활의 권능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권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고전 15: 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이미 부활한 자의 표적입니다. 다른 표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통해 이미 깨달음이 왔으므로(영지를 받아) 나는 거듭났으며(부활했으며),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니(세례도 받고 성찬식에도 참여하고, 교회 생활을 적극 하니), 내가 구원받은 것은 지극히 다양하다. 내 구원의 확신은 아무도 흔들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방언을 구원(영지)를 받은 증표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자기는 고급 신자라는 표시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하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방언과 구원은 관계가 없을뿐더러, 아무도 자기가 진짜 방언을 하는지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영지주의자는 자기는 고급신자이며, 일반 교인은 하급신자라고 합니다. 한국인은 비교우위를 좋아하므로, 될 수 있으면 고급신자가 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단의 큰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고 합니다. UBF, 한국 Navigator가 이런 무리에 속합니다. 대형교회도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이 의의 열매(성화)을 가르칩니다. 구원은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은혜로 그분의 뜻이 담긴 계명을 지키면서, 회개하면서 거룩한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거짓이며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시발이 된 루터의 95개 조 제1항이 그리스도인은 매일 옛 아담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 관상기도를 한다든지, 방언을 한다면 그는 입신한 영지주의자와 같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기도하거나, 말씀을 외우고 읽음으로써 위로를 찾는 것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이미 의인이 되어 있으므로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에게는, 늘 마음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마음이 영원한 부활에 가 있으므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면 마음에 큰 부담이 생겨 회개하여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그가 부활했다는 표시이며, 앞으로 새 몸을 입고 영생으로 부활한다는 보증입니다. 여러분이 이 부활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이 죄 문제에 달려있습니다. 죄를 해결하는 길은 회심/ 회개 외에는 없습니다. 회개가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부활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MvxA/97


출처: 영적분별력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

제46강 막14장22-24절 세례와 성찬 / 박영선 목사

 

 

 

46강 막1422-24절 세례와 성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성례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의 백성 됨과 우리가 그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한다. 교회는 성례와 이 예식의 내용을 충실히 가르쳐야 한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형벌의 자리로부터 그들을 구해내는 것, 즉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대속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며 그의 요구가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반대되는 길을 가면 마음이 거북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표요 성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있는 백성이기 때문에 얻게 된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대속적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은 늘 예수를 믿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 씻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28:31) 또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간의 밀접한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예수님의 죽음은 직결되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신다는 이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나라인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나라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 메시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의 주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나라의 선포에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16:21, 참조:8:31, 9:31, 10:33). ,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나라 선포의 대상과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한 성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 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며, 비록 성례 의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용과 의미를 모른 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로마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갖고 있었으나 개혁주의 교회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을 가리켜 성례라고 합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하신 항구적인 제도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하여 그의 백성됨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례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시행되며 그 의식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 세례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며,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 한해서 비로소 베풀게 되며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를 함께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 아래로 들어가심으로 죄인인 우리와 동일시된 것 같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우리가 동질화됨으로써, 이제 우리 역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고 동질화되면 그와 함께 죽음에도 가지만 그의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2:12“‘함께장사한 바 되고 함께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시되어 물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와 동일시되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그가 사망을 통과한 일에 내가 동참한 자가 되고 싶다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연합되기 위해서는 동질화되고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연합이라는 말로 많이 일컫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3-8).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로 다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죽음의 자리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내 이름만으로의 죽음이라면 죄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며, 사망이 그를 붙들 수 없는 분이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므로 이제 내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면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갖는 뜻입니다. 이 세례의 효능은 시행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내적 역사는 세례집행 전이나, 그 순간이나, 그 후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상관없이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한 이 세례는 오직 한 번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이 집행될 때마다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미, 성찬

그러면 성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잘 설명하신 부분은 최후의 성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이 성만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이며, 둘째는 그 행위에 이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22:19)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14:24)라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특별히 잔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구약에서 가르치고 기다려왔던 구원의 내용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받는 종의 역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주의 종이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매를 맞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주어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잔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 장면이 묘사된 출애굽기 2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이제 그 다음날 이뤄질 자신의 피흘림으로써 제자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1:3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바로 이 새 언약의 제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31:31).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고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해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 예식이 행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 죽음심의 공효(功效)가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참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하나님나라 백성의 창조는 어떻게 성취됩니까?

2. 신자들이 성례를 시행함으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성찬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행위와 말씀은 각각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 적어 보십시오.

행위:

말씀: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세례받았던 때의 감격과 느낌을 서로 이야기 해봅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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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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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 마르틴 부처

그러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취하셨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 바치며,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살아가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선택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위하여 성도들에게 부음 바 되어, 그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들이 현재 속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는 여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여’라고 번역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바울은 올바르게도 우리의 선택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다. 만약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로 파악할 경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고도 복된 삶으로 예정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항상 바울의 교리와 전적으로 일치할 뿐만 아니라, 첫 번째 의미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을 그의 자녀들의 유업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그들을 그곳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거룩하고도 행복한 삶이 주어지고, 선하고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능력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 이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돌려져서는 안 된다.

- ‘에베소서 주석’(1527) 중에서 -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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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는 하나님 (존 오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측면에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므로 그의 백성을 향한 사랑에도 변함이 없다.



1. 그의 속성

2. 그의 목적

3. 그의 언약

4. 그의 약속

5. 그의 맹세



성도의 견인은 이 다섯 가지에 각각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앞으로 몇 장에 걸쳐 이 다섯 가지 면들을 다룰 것이다. 먼저 본 장에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속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말라기 3:6에서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계속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야곱의 자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분명히 야곱의 모든 육체적 자손들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9:6)라고 말했다.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도 아브라함의 자녀임을 자랑하며 그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줄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말3:5). 그리스도 예수는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로 돌아오게"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사49:6). 야곱의 진정한 아들들은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거듭난 자들이다(요1:13).



하나님은 친히 부르시고 은사를 주신 것에 대해서 마음을 바꾸는 일이 절대로 없으시다. 로마서 11:29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바울은 단언하고 있다.



야곱의 진정한 자손은 야곱의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새로 선택받은 자들이다. 그들의 열조들이 파한 옛 언약 대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새 언약을 세우셨다(렘31:31-34, 겔36:24-28, 히8:8-12). 하나님의 새 언약을 즐거워하며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지와 어둠 그리고 죽음 가운데 있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실 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칭의와 성화를 얻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큰 위로 중 하나는 그들은 이제 영원토록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이사야 40:27-31에서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고 있느냐고 하나님은 반문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놀라운 능력을 가지셨으며, 변역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다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신다. 이것이 바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들이다. 그들은 새 힘을 얻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창세 전에 택하였다. 너희는 벌거벗었고, 쓸모 없으며, 바싹 말라 시들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내 신을 너에게 주어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리라. 너는 내 것이고 나는 영원토록 너의 주가 되며 왕이 되고 구속자가 됨을 너로 알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영원함을 확신시켜 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유대인과 같은 한 민족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개인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에 대해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민족들과 구분해서 유대 민족에게 외적인 복을 주시고 심판에 있어서 특별히 다루셨다. 그러나 그들이 한 민족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 여부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좌우되었다. 따라서 가끔씩 하나님은 세우셨던 것들을 허물기도 하셨다. 또 어떤 때는 전에 허물었던 것들을 다시 세우기도 하셨다. 하지만 이 민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외적인 변화까지도 결국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목적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의 속성은 변하지 않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구속해 주신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구속받은 자들은 결코 회개치 않는 배교자가 될 수 없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동영상 설교


주제
 
의롭다 하신 은혜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아멘.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처럼 소위 외적(外的) 부르심을 받아 교회 를 다닐 수는 있어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확실치 않습니다.그래서 오늘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증을 위한 여러 말씀 중에 <의롭다 하신 은혜>에 대해 확신을 얻고자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선택하셨기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잘 믿어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믿음 으로 나아올 때 의롭다 해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 라고 하는 말씀처럼 칼빈은 하나 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구원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세상 만들기도 전 에 택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 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어쩌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싶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같은 아담 후 손으로 나서 같은 죄인입니다(롬6:23). 대하6:3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기로 작정되고 어떤 이는 유기되어 버 려지냐, 이겁니다. 이런 반문이 있을 것을 알고 바울은 답하기를,롬 9: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사29:16,렘18:). 롬9:20-21‘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 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합니다. 피조물로서 의 질문의 한계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전도하실 때, 요6: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 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이 구원의 대상을 마음대로 하실 수 없고 성부 하 나님의 작정을 따라 역사하실 뿐이었습니다. 마11: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 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 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실 때 제자의 발을 씻기시며 하신 말씀에서, 요13:10-11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 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 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 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가룟.유다는 온 몸을 씻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그는 중생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유다를 두고, 마26:24 ‘..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구원 받을 자에 대해 그리 말씀하시 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성경만 봐도 구원은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얻게 된 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끌려 나온 우리는 은 혜를 입은 자요 얼마나 놀라운 복을 받은 자인가를 감동받아야 합니 다. 2. 의롭다 하심의 영적 확신 교회를 나와도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는 속죄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단순히 예수 종교인으로 살다보면 환난을 받을 때 완전히 좌절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유다처럼 자살도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보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의롭다하신 은총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본문 롬8:30‘...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 시고..’라고 했습니다. 의롭다 하심은 믿을 때 주어지는 현상으로 이것은 어떤 경험에 속하 는 일입니다. 단순히 그리 생각한다는 수준은 나중에 그리 생각 든 것이 무너질 수 있지만 상처처럼 깊이 속죄의 감동을 체험하고 거듭 난 영혼이 되는 경험이 주어지면 그 추억이 평생 영혼을 붙들기 때 문에 낙심을 해도 주를 영영 떠나거나 하지 않고 좌절해도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 것은 능력이라 기보다 의로우신 분이라서 가능한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16: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 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씀은 의롭다 여김 받은 자 만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믿습니다! 를 외치는 자라기보다 의롭다 칭함을 얻은 새로 운 양심을 지녀야 합니다.죄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얻 은 결과 영혼의 새로운 감각을 지녀야 합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의 대 속을 믿고 의롭다 여겨주시는 영혼의 경험을 얻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영혼에 햇빛 같은 생명의 빛을 받아 의롭다하 심을 느끼는 일입니다. 아직도 육신이 있어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 이지만 영혼을 새롭게 하신 영생의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속사람입니다. 3.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이기에 지켜주심도 믿음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기까지 아주 특별하신 역사로 도우셨고 가나안 땅에 가기까지 늘 함께하신 점을 봅니다. 민수기 13장에서 이스라엘 12명의 가나안 땅 점탐꾼을 보내고 돌아 와 보고를 하는데 10명은 좌절하고 낙망하는 말로 보고 했지만 여호 수아와 갈렙은 매우 긍정적으로 답했습니다. 같은 땅을 탐지하고 와서 보고하는 말에 10명의 보고가 현실적이었 지만 믿음의 사람은 역사관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철학이나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14:8-9 ‘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 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9. 다만 여호와를 거 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 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 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이것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언약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상을 바라 보고 사는 정신입니다.본문 끝에 롬8:30‘..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 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이것은 끝까지 지켜주셔서 영 생부활을 얻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 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빌1: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 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살전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중보자 예수님은 승천 이후에도 중보기도를 계속하십니다.사람이 죽 으면 산 자와의 교통이 끊기지만(시115:17) 예수님은 살아나셨기에 중보기도가 효력이 있습니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 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 구하심이라’ 심판 때 마지막 백보좌의 심판에 보면,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 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두 가지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책이라는 단수와 행위를 따 라 심판받는 책들이란 단수어가 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하 나님의 은총으로 부르시고 의롭다 여겨주신 은혜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 일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느 8:10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고 했습니다.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사는 것은 곧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유익을 얻고 영생에 이르기까지 도우심을 얻을 것입 니다. 할렐루야~ --------------------------------------------------------------- 출처:글쓴이:nulserom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기독교란 무엇인가?

-성경공부를 간절히 권하며-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다양한 인본주의적인 사상들이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존재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도 다른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 종교들처럼 단지 몇 가지 아름 다운 사상이나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평범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란 한마디로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라는 의 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알 려주는 최고의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와 생각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삶을 타인을 위해 살다간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해방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대제국으로 만들어줄 왕인 줄로 알았으나, 평화적인 방법만을 사용하다가 당시 기득권 세력들 에게 반격당해 죽은 실패한 반역자?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선한 삶을 살다가(산타크로스처럼) 그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개혁을 외쳤으나, 기득권세력과 대적 자들의 공격을 받고 십자가 의 형벌을 받아 죽은 비운의 민중 혁명가?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실제로 살면서 가르치심으 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 도덕 선생님이나 사상가?

▶그에게만 가면(또는 그에게 기도만 하면) 세상 축복을 한 없이 부어주는 만사형 통을 이루어주시는 형통의 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의 이러한 평가는 자신들의 협소한 관점에서 본 것이기에 진실이 아 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도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 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나사렛 작은 시골 마을의 목 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니?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정말 증거가 있는 것일까요?

이에 관한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여 부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성경의 내적 증거와 세상 역사 기록들의 외적인 증거를 다 동원해서 살펴본다면, 그 증거는 가장 역사적이며,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 스는 믿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그가 보여주신 수많은 기적들과 선한 일들은 그 분이 사람이라고 말해 야 될지 모르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게 했던 유 대인들의 후손이 기록한 탈무드마저도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마술)을 행하고 이 스라엘을 배교하도록 했기 때문에 처형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 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이것을 일관되게 증거하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 다. 절대 권력과 권세 자들이 교회의 이 신앙고백을 없애려고 온갖 참혹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 중에도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과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예수님은 하나 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지키기 위해 화형과 같은 참혹한 형벌을 당하면 서도,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사 가 운데 수없이 많은 탁월한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믿음을 고백하면서 삶이 놀랍게 변화되었으며, 이웃과 사회를 위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제자들이 그 선생님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하나님이라고 신 격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의 시간 속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명백한 역사 적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기독 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인 자살(?)을 하지 않 고도 우리의 합리적인 지성을 사용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예수 님께서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담대 하시면서도 겸손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완벽했습니다. 그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방문자처럼 행동했습니 다. 그의 굳셈과 온유함, 타협을 모르는 의와 부드러운 자비,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사랑, 자제력과 자기희생 등 세상은 그와 같은 사람을 본적 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이 그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했으며, 그의 부활의 증거는 너 무나 명백하여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가 “죄인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왔다”고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 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멸망(사망)을 가져왔고, 더 무서운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게 가장 큰 필요와 시급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 멸망에서 벗어나 는 것입니다. 이 멸망은 영적인 사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육신 사망과 영원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최우선적인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히 멸망을 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영생의 지 복(至福)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 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 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란,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하나님과 같은 생명에 참여해 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속성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 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토록 복된 삶을 살 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을 새 창조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첫째는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 가졌던 하 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교제 누리는 예배자로 세우 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러한 예배자는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되 고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새 인류로 하나가 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와 자원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 리고 누리면서 왕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런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진리를 단지 지적으로 동의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교리에 동의하 고, 그 교리에 감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마음, 우리 의 인격전체의 변화를 수반하여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누리도록 하는 사랑의 종교 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배운바 진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고, 그 진리를 따라 정 서가 고양되고, 그 진리를 따라 의지적인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진정한 종교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인격 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 그 어디에서나 우리의 삶으로 표현됨으로 인해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그 진정한 믿음이 표현되는 기쁨과 능력의 현장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는 계시해야만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영적 인 무지,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눈이 밝고 시력이 좋아도 외부세계에 빛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외부세계에 찬란한 햇빛이 비친다고 해도 우리가 눈이 어둡다면 역시 사물을 분별할 수 없을 것입니 다. 바로 이런 내적인 어둠과 외적인 어둠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내 부와 외부에 참된 빛을 비추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계시의 종류에는 일반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초자연계시)가 있습니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과 역사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 19편 1절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1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 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 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이 만드신 만물과 사람 속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도록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특별계시를 주셨습니다. 이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하나 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바로 그 특별계시가 기록되었는 데, 그것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 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락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신 생명과 구원의 종교입니다. “예 수”라는 이름에서도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마저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셨고,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찾 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근원부터 치료할 처방과 약을 다 갖고 계시 는데, 그에게 가셔 그 처방에 따라 약을 먹기만 하면 낳는데, 그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전도란 불치병으로 죽어가던 한 사람이 탁월한 의사를 만나 그 질병을 완벽하게 치료 받고서, 그와 똑같은 질병으로 고생 하고 있는 환자에게 그 의사를 소개해 주고, 그 의사의 처방전과 약을 소개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복락을 주시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처방전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언제 나 가장 확실한 처방입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두 손을 활짝 열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히 11:6). 그러나 하나님은 게으른 자들을 동정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큰 장애물입니다. 우리의 기존의 생각과 사상에 고 정된 채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사용하되, 그 이성을 최고의 권위에 두면 안 됩니다. 즉 우리는 이성 이 만능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내 고정된 생각을 근거로 판단하 는 것을 보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 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은 겸손 한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직하게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 하나님께 대한 편견을 벗어 버려 야 합니다. 개방적이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의사에게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숨기거나, 정확히 알리지 않고 정직하지 못하다면, 의사가 그 질병을 고치는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장 13절 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우리가 만약 그동안의 편견을 버리고 기독교가 진정 참된 진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 하고 그 가르침에 듣기 위해 찾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참된 자유와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단지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바꾸고, 나의 삶 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성경공부에 임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지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적용하도 록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성 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과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 을 체험해 보십시오.

 

성경공부를 막는 최대의 적(敵)은 우리 내부의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게으름과 교만, 편견과 죄를 버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적인 편견과 도덕적인 자기 의(義)가 가장 극복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결국 두려움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이 두려움이 성경진리를 깨닫는데 가장 큰 적입니다. 두려움은 탐구의 정신을 마비시킵니다. 하나님을 만나 고, 성경의 진리를 대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불편한 진실을 대하는 것이고, 힘겨운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았던 세계관과 인생관 전체에 도전을 가할 수 있고, 우리의 생활방식 전체를 개혁해야 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러 한 요구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망설이며 주저하게 만드는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지금 현재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을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 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찾지 않기 때문이고, 찾지 않는 것은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 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를 찾지 않 는다면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백퍼센트 효과가 입증된 약이 있다 고 해도 그 약을 먹는 것을 두려워해서 약을 먹지 않으면 결코 질병을 고칠 수 없 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두려움을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사 상과 생활 방식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었는지를 솔직히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 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들이 틀릴 수도 있고, 예수님의 방식이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성경 공부에 참여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진지하고도 열정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그 존재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던 영적인 실상과 영생 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 였다.”(고린도전서 2:9) 성경을 공부하고 그 진리를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누리며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현재 삶에 대해 무기력하고 “딴 세상 사람인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 다. 오히려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즐거움을 지금 여기서 누리면서 능동적이고 진취 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求道者)가 되시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부지런하고 겸손하게, 정직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 님을 찾기 위해 성경공부에 참여하시길 사랑과 눈물로써 간절히 권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에게 풍성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세계관학교장 노천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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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1) / 박일민 교수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늘 깨어서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시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셨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계획을 하시는 일과,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는 일과,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간섭을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각각 작정, 창조, 섭리라고 부른다. 이 중 작정과 창조에 대해서 다루되 본호에서는 작정, 다음호에서는 창조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작정의 대상과 목적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는 분이시다(엡 1: 11).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작정의 대상이나 범위, 그리고 그 성질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하찮게 보이는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이나 국가나 온 인류에 이르기까지와 바다와 바람과 햇빛과 비 등 무생물까지도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는 우연하게 보여지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생사화복이나 인류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체적인 일들까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며(마 6:26), 참새 한 마리라도 허락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이(마 10:29)가 하나님이시다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면서(마 10:30) 그 하나라도 상치 않게 하신다고 하셨다(눅 21:18).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게"(행 17:26) 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것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만 작정을 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고, 변함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항상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며(롬 8:28), 불변한다. 출애굽 40년을 보자. 40년 세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는 땅을 내주고 쫓겨가야 할 정도로 죄악이 성해질 때를 기다리는 기간이었다. 40년 세월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의 과정이었다. 바벨론 포로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타국에서의 70년은 슬픔과 탄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이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는 여호와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기간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은 합력하여 선이 되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작정이 합력하여 결과적으로 선이 되어지고, 특히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어떠한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일 때에라도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2. 작정과 예정

사도 바울께서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 중에서도 사람을 향한 작정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것들 중에서도 영혼의 구원, 즉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작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특별한 관심사인 사람의 구원에 관한 작정을 흔히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작정은 만사, 만물(萬事, 萬物)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지고, 반면에 예정은 이성적인 존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진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는 영생과 영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도 영생을 위한 예정이 있고, 영벌을 위한 예정이 있다. 영생을 위한 예정은 선택이라고 부르고, 영벌을 위한 예정은 유기(遺棄)라고 부른다.

 

 

(1) 유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지만,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서 죄를 범했다. 사람은 그 죄의 댓가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사망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향해 살아날 수도 없고,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영원한 형벌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말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셨다"(엡 2:1)고 했다. 그리하여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악해졌다. 그리고 죽은 시체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사람의 죄는 점점 더 관영해지고 악해졌다.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의지의 남용으로 죄를 범하거나, 죄 가운데서 점점 더 악해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것을 막지 않으시기로 예정을 하신 것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요셉이나 바로의 예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요셉의 형들에게는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방법을 통해서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심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기근에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대비를 하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었다(창 45:5). 또 애굽 왕 바로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고 종으로 부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점점 더 강해지는 재앙들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을 위한 결심을 촉진하게 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애굽에게는 그 완악한 죄를 인한 형벌을 내리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출 10:27 등)는 적극적인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나 추수 때까지 알곡 속에 섞여 자라는 가라지 등을 비롯한 많은 말씀들에서 발견된다.

 

(2) 선택

한편, 하나님께서는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죽은 생명을 살리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아 엎고, 소경된 눈을 떠서 보게 하고, 귀머거리 된 귀를 열어 듣게 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빌립보 강가에 있던 루디아가 사도 바울께서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게 된 것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행 16:1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경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신다"(시 119:18)고 노래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혀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도록 하는 계획, 즉 은혜의 계획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경우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보다 내놓을 만한 장점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른 포도나무의 가지나 타다 남은 그루터기와 같이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계시를 전달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윗이 임금으로 선택된 것도 그러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을 부으러 왔음에도 들에 있던 다윗을 집으로 불러 들이지도 않고 형들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는 같은 흙으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였다(사 45:9; 롬 9:21). 사도 바울은 이 계획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19)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있었다(행 13:48).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로 사용되어진다. 죄인에게는 영생으로의 선택이 무한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은 "모든 신령한 복으로 주어지는 복"(엡 1:3)이다. 만일 선택 때문에 감사가 아닌 비방이나 불평이 생겨난다고 하면, 이는 선택을 오해함에서 나온 것이다.

 

 

(3) 작정과 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에 흔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몇 가지 궁금한 문제가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면, 죄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일까. 하나님이 죄를 작정하시지 않았다면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시지 않은 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진다면, 사람은 단지 로봇에 불과하지 아니한가 하는 것 등이다. 그 중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죄의 문제이다.

 

 

역사에는 하나님이 죄를 생겨나게 만드신 원인자이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만휼히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불의나 죄와 상관이 없으시기 때문이다(롬 9:14).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요일 1:5). 하나님의 생각과 활동은 항상 선하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선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악한 수단을 동원하시지 않는다.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반드시 선한 방법을 사용하시고 악에 대해서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그 책임을 물으신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선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선이라야 참된 선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서 나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바로 죄이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우주 안에 온갖 악이 뒤따랐다. 그러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잘못인가.

 

 

본래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을 돌려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필연적이고 기계적인 찬양보다는 자발적인 찬양이 훨씬 더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에게는 오직 선한 의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어졌다. 이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완전하심과 관계없이 피조물에게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그를 특별히 신임하여 훈련시키셨고 금전관리까지 맡기셨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신임을 저버리고 오히려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아넘겼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하였던 그의 결과는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악한 행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가 악용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전능하시다고 하여 죄도 범하실 수가 있다거나 스스로의 모순을 범하실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의 자유로운 사용을 강제로 막는 것은 자유의지를 주신 의도와 모순이 된다. 자유의지는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예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죄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자유의지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에 앞서서 피조물의 창조가 먼저 고려될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은 창조를 계획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사 60:21)이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창조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목적의 가장 효과적인 달성을 위한 수단은 바로 자유로운 의지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려고 작정하신 이상, 그 창조 목적에 적합하도록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허용하신 죄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죄악된 피조물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선하심마저도 악용하여 죄를 범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작정과 인간의 책임

우리에게는 때때로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 다른 곳에 있으면, 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내가 수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당연히 얻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기 도취에 빠지거나 책임전가에 급급할 우려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작정이 세밀한 모든 부분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이 과연 인간의 나태함과 책임회피의 구실로 이용될 수 있는가.

 

 

모든 일은 궁극적인 원인, 즉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제2 원인들의 활용을 포함한다. 여기서 제2 원인이란 주로 자연법칙이나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의 노력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수단으로 사용하여서 자신의 계획이 달성되어지도록 작정을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거나 거스려서 일하시도록 작정하신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우리 편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그래서 작정은 체념적인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작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음식과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음식은 수고하여 일하는 자에게 보상으로 주어진다. 독을 마시면 죽는다. 여기서 음식이나 음식을 위한 수고나 독을 마시는 것은 제2 원인에 해당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2 원인이 되는 땀흘려 일하기를 게을리 하는 자에게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살후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그것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얻게 하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도록 하신다(마 7:7). 제2 원인을 활용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주시려고 작정하신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 믿음과 천국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제공하심에서, 힘써 침노하는 자(마 11:12),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가 천국을 차지하도록 제2 원인을 활용하신다(딤후 4:7). 또 그 선물의 전달과정에 있어서도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힘써 외치는 전도자의 수고와 그 복음에 대한 진지한 들음이라는 제2 원인의 활용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한다.

 

 

로마로 향하던 사도 바울의 예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폭풍으로 파선을 당한 276명 모두를 구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사도에게 보이셨다(행 27:24). 그러나 그 목적은 배불리 먹고, 안심을 하고, 밀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하고, 선원들의 경험을 동원하여 의논을 하고, 닻을 끊고, 키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해안까지 헤엄을 치는 등의 온갖 제2 원인으로서의 수단들이 동원됨으로써 이루어졌다(행 27:36~44). 또 민족의 위기를 앞에 두었던 모르드개의 경우를 보자.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는 말로 에스더의 역할을 촉구했다. 그리고 에스더는 밤낮 삼일의 금식과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감과 지혜로 왕을 접대하는 등 제2 원인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우리는 대부분 매사에 주도면밀하게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작정을 별 어려움이 없이 인정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된다.

때로는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작정을 확인하고 더욱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그러나 죄나 사람의 책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거나 오해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하나님되시게 해야 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소망 중에 전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겸손함으로 힘써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출처: 행복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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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강 막14장22-24절 세례와 성찬 / 박영선 목사

 

 

 

46강 막1422-24절 세례와 성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성례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의 백성 됨과 우리가 그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한다. 교회는 성례와 이 예식의 내용을 충실히 가르쳐야 한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형벌의 자리로부터 그들을 구해내는 것, 즉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대속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며 그의 요구가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반대되는 길을 가면 마음이 거북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표요 성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있는 백성이기 때문에 얻게 된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대속적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은 늘 예수를 믿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 씻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28:31) 또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간의 밀접한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예수님의 죽음은 직결되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신다는 이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나라인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나라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 메시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의 주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나라의 선포에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16:21, 참조:8:31, 9:31, 10:33). ,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나라 선포의 대상과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한 성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 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며, 비록 성례 의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용과 의미를 모른 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로마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갖고 있었으나 개혁주의 교회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을 가리켜 성례라고 합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하신 항구적인 제도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하여 그의 백성됨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례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시행되며 그 의식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 세례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며,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 한해서 비로소 베풀게 되며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를 함께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 아래로 들어가심으로 죄인인 우리와 동일시된 것 같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우리가 동질화됨으로써, 이제 우리 역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고 동질화되면 그와 함께 죽음에도 가지만 그의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2:12“‘함께장사한 바 되고 함께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시되어 물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와 동일시되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그가 사망을 통과한 일에 내가 동참한 자가 되고 싶다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연합되기 위해서는 동질화되고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연합이라는 말로 많이 일컫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3-8).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로 다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죽음의 자리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내 이름만으로의 죽음이라면 죄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며, 사망이 그를 붙들 수 없는 분이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므로 이제 내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면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갖는 뜻입니다. 이 세례의 효능은 시행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내적 역사는 세례집행 전이나, 그 순간이나, 그 후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상관없이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한 이 세례는 오직 한 번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이 집행될 때마다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미, 성찬

그러면 성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잘 설명하신 부분은 최후의 성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이 성만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이며, 둘째는 그 행위에 이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22:19)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14:24)라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특별히 잔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구약에서 가르치고 기다려왔던 구원의 내용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받는 종의 역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주의 종이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매를 맞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주어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잔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 장면이 묘사된 출애굽기 2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이제 그 다음날 이뤄질 자신의 피흘림으로써 제자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1:3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바로 이 새 언약의 제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31:31).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고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해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 예식이 행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 죽음심의 공효(功效)가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참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하나님나라 백성의 창조는 어떻게 성취됩니까?

2. 신자들이 성례를 시행함으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성찬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행위와 말씀은 각각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 적어 보십시오.

행위:

말씀: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세례받았던 때의 감격과 느낌을 서로 이야기 해봅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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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며칠 전,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아픈 개인사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가 풀러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뛰어난 신학자이며 제게도 책을 통하여 탁월한 신학적 통찰들을 제공해준 분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런 아내와 살면서 미칠듯한 고독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결혼 24년 만에 분노하며 떠나겠다는 아내를 그는 놓아 보내야 했습니다. 수년이 흘러, 아내는 외로이 심장마비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 때문에 불평을 하면 정신질환을 겪는 엄마와 사는 많은 아이들이 더 힘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간다고 지적을 했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된 아들이 “아빠는 그때 30대 중반이셨잖아요. 난 겨우 7살이었다고요”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안겨준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긴 이야기(그의 삶은 아무리 길게 말한다고 해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 세월이었겠지만)를 읽으면서 저는 이런 고난이 그의 신학을 깊이 있게 만든 요소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사의 몇 분이 생각났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1761~1834)의 아내 도리시 캐리도 인도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들이 죽은 후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품으로 데려가시기까지 마지막 12년을 심각한 정신질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사에 탁월한 신학자요 목사였던 토마스 보스톤(1676~1732)의 아내도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마지막 10년을 보내고서야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개혁신학의 거성인 벤저민 워필드(1851~1921)는 신혼여행에서 아내가 번개를 맞고 불구가 된 이래 평생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 두 시간 이상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아픔들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신실하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깊이는 그들이 겪은, 답 없는 고난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정답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 우리와 똑같이 나눠가진 성향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답에서는 깊이가 나오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깊이 따위는 필요 없으니 편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천박하고 얄팍한 인생들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마지막 말이 제 가슴에 울립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난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모른다. 내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이다......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의 주장이 최소한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내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답 없는 인생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교리전통은 구별되어야 한다

 

바빙크가 그의 교의학에서 잘 지적했듯이, 교회의 전통을 성경보다 '위에' 혹은 동등한 '옆에' 두는 것은 중세 교회가 범했던 실수였고 악습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을 개혁하여, 전통을 성경 '아래에' 두면서, 오직 성경을 기치로 내걸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온 교리조차도 저런 '전통'과 같은 것이라고 혼동을 해버린다면 그것은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즉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아래에' 두고자 했던 그 '전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교회의 전통은 소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구분되며, 반드시 성경 아래에 있어야 한다. 교리도 소중하다. 전통과는 다른 이유에서 소중하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소중하다. 따라서 이것은 성경 위에 혹은 옆에 혹은 아래에 두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교리는 항상 성경에서 비롯되며,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곧 성경을 배운다는 것이다.

 

교리가 역사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다음 세대의 교회에 상속되면서 교회의 전통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출발점도 다르고 개념도 다른 것을 혼동하여 '교리와 전통은 배제해야 한다'거나, '교리와 전통을 배우기 전에 성경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교리와 전통에 대한 개념의 혼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교리는 성경에서 나오고 성경으로 돌아가기에 성경 연구를 통해 성경과 다른 점이 밝혀진 교리가 있다. 그 교리는 즉시 자기 자리를 상실하고 개혁된다. 그 위치에서 개혁되지 않고 버티는 교리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단이다. 이처럼 교리를 만들기도 하고 개혁하기도 하는 주체는 오직 성경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전통을 만들고 그 전통을 따라 잘못된 교리를 고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단과 사이비를 양산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따름이다. 이러한 개념조차 구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교리는 성경을 가로막는 전통일 뿐이다.

 

차제에 우리는 역사적인 보편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서와 그에 따른 교리문답서에 보다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문서들을 전통이라는 명찰을 붙여서 배제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고백하는 역사적인 신앙의 내용들조차 무시하는 잘못된 관행을 낳을 뿐임을 명심할 일이다.

기독교개혁신보

http://rpress.or.kr/xe/index.php?mid=private&document_srl=362035

 

 
개혁주의마을/Grace

성경의 내용은 유일하다. 성경의 완전한 권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계시론에 기독교 영감론이 첨가되어야 한다. 영감론이란 다음과 같다. 성경은 중요한 일들에 대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그 기록 자체가 참되며,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히 지켜져 그들의 생각과 표현의 습관이 온전히 유지되면서도, 그들이 쓴 책이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이 되는 것이다.

 

완전 영감교리는 지속적으로 잘못 제시되어 왔다. 이 교리의 반대자들은 완전 영감 교리가 성령이 기계적으로 작동한다는 주장인 것처럼 말해 왔다. 성령이 저자들에게 셩경 내용을 불러 주었고, 저자들이 그것을 받아쓴 것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이런 모든 희화화된 내용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한 천박한 비판을 그저 따르기에 앞서, 본인이 직접 그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좋은 태도다. “기계적혹은 그와 유사한 몇 가지 무례한 말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실제로 완전 영감 교리는 성경 저자들의 개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정보 획들을 위해 그들이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했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각 책이 만들어진 역사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완전 영감 교리가 부인하는 것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다. 완전 영감 교리는 성령이 성경 저자들의 마음을 잘 가르쳐서, 다른 모든 책에는 반드시 있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의 기록을 포함하지만, 참된 기록을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감 교리에 따르면, 그것도 실제로는 참된 기록이다. 성경은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인 것이다.

 

자유주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주, 성경의 오류에 관한 미묘한 문제를 피하고자 기계적 영감설”, “받아쓰기 영감설”, “성경을 부적으로 사용하는 미신등에 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 자유주의 설교자도 성경은 신성하다- 실제로 그것이 더욱 인간적이기 때문에 더욱 신성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덕을 세우는 데 이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물론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외면은 속임수다. 오류로 가득한 성경을 신성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현대의 범신론적 의미에서 신성하다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불완전함과 죄로 가득한 세계의 진행과정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경배하는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다.

 

완전 영감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내에는 이와 같이 성경의 중심 메시지를 받아들이면서, 성경 저자들이 작품을 쓸 때 성령의 초자연적인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오직 그 증언이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성경 메시지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의 근거가 되는 메시지를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생사가 달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는 매우 다르다. 현대 자유주의자는 완전 영감을 거부할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모든 책에 대해 갖는 정도의 존경심마저 성경에 대해서는 갖기를 거부한다. 기독교적인 성경관을 무엇으로 대체했는가? 종교의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는 무엇인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 대신 내세우는 것이 그리스도의 권위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유주의자는 구약의 잘못된 도덕적 가르침, 혹은 바울의 궤변론적 논증으로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거부하고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상은 완전히 거짓된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사실 예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의 구원 사역의 의미는 그 일이 성취되기 전에는 완전히 제시될 수 없었다. 예언을 통해 제시될 수도 있었으며, 예수가 지상 생애 동안에 그 의미를 설명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완전한 설명은 당연히 그 일이 성취된 후에 주어졌고, 그것이 실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사도들을 통해 주어진 성령의 가르침을 예수의 가르침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령뿐 아니라 예수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실제로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권위마저도 굳게 견지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록된 예수의 말씀 속에는 현대 자유주의 교회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서 예수는 나중에 사도들을 통해서 드러날 더 충만한 계시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권위를 인정 받을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은, 기록된 말씀의 더미 속에서 비평 과정을 통해 걸러져야 하는 게 분명하다. 이 비평 과정은 확실히 매우 난해하며, 비평가들 자신의 선입견에 맞는 말들만이 역사적 예수의 진짜 말들로 선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자주 일어난다. 현대 역사가들에 의해 재구성된 역사적예수의 말 가운데서도 어떤 말들은 참되지 않다고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개 많은 부분이 예수의 말씀으로 여겨지고 있다. 설령 예수가 말한 모든 것이 참되지는 않다 하더라도, 그의 중심적인 삶의 목적은 교회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고 주장된다. 그렇다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가장 짧은 복음서이며 현대 비평주의가 인정하는 가장 초기 복음서에 따르면,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는 본문이다(10:45). 여기서 대속의 죽음이 예수의 삶의 목적이 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 자유주의 교회에서는 이런 말이 당연히 한쪽으로 밀쳐진다. 진실을 말하자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발견한 예수의 삶의 목적은 예수의 진짜 삶의 목적이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격리되고 잘못 제시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프로그램과 우연히 일치하는 요소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참된 권위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기록된 교훈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결정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원칙이다. 산상수훈에서 뽑힌 윤리적 원리들이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그것들이 예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관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예수의 권위에 근거해 있다는 말은 전혀 참이 아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의 모범과 교훈에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상당한 분량을- 대표적으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메시아라는 의식- 거부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진짜 권위는 오직 기독교적 의식혹은 기독교적 경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독교적 의식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는가? 제도 교회의 다수결 투표에 의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방법은 양심의 자유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결과가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권위는 개인의 경험일 수밖에 없다. 각 개인을 돕는것만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권위는 전혀 권위가 아니다. 개인의 경험이란 무한히 다양하며. 진리가 어떤 특정한 때에 작동되는 것으로만 간주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그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 회의주의다.

 

반면에, 기독교인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다. 한 책을 의지하는 것은 죽은 것이거나 인위적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16세기 종교 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근거로 했으면서도 세상에 불을 붙였다. 사람의 말을 의지하는 것은 맹종이 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생명이 된다. 만약 우리 자신의 수단만 남아 있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이 없다면, 세상은 어둡고 우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근거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성경 위에 서 있다. 기독교는 그 사상과 삶에서 성경을 근거로 한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죄 있는 사람의 무상한 감정에 근거해 있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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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 글은 재침례(재세례)파에 관한 소개글이다. 윌리엄 에스텝의 <재침례교의 역사>를 읽어보기 전에 먼저 읽어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 이와 함께 재세례파 관점에서 쓴 정수영 목사님의 <새교회사>를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재침례(재세례)파의 핵심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사람이 되어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인 한계와 로마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세력에게도 박해를 받아 재침례(재세례)파의 순수한 신앙이 왜곡되기에 이른 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은 청교도의 신앙과 비슷하다. 청교도들이 거듭난 성도의 모임을 교회로 보고, 거듭난 성도의 가견적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려했다. 신대륙에 미국에서 그들의 신앙의 이상은 처음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마지막 청교도인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노스햄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청교도의 가견적인 교회관은 자취를 감추었다.


재침례(재세례)파도 청교도와 같은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건데 그들은 청교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존 웨슬리는 신대륙을 향해 대서양을 건너다가 재침례(재세례)파의 후손인 모라비아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각성한 경험을 한다. 그후 모라비아에 방문하여 그들과 교류도 한다. 물론 그후 그들의 수동적인 신앙의 모습에 실망하여 웨슬리는 모라비아 성도들과 관계를 끊는다. 그럼에도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에 있어 모라비아 성도들의 거룩한 신앙이 크게 기여했다.


이와 같이 재침례(재세례)파는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이상으로 개인과 교회의 거룩한 신앙을 추구했다.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더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 결과 청교도와 웨슬리 목사님의 선구자로서 많은 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신앙이 참모습이 무엇인지 이제는 후세에 사는 우리들은 재평가해야 한다. 물론 재침례(재세례)파에도 가라지가 있다. 하지만 참 열매와 가라지를 구별하지 않고 배척한다면 참으로 후대의 크리스천으로서 크나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침례(재세례)파 운동과 확산


 

Ⅰ. 서론

Ⅱ. 본론

     1. 재침례(재세례)파 운동의 기원과 성격

     2. 재침례(재세례)파 개혁자들

       (1) 스위스 형제단

       (2)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arsar Hubmaier, 1485∼1528)

       (3) 새틀러와 슐라이다임 신앙고백서(Michael Sattler,1490∼1527)

     3. 광신적 천년왕국주의자들 

       (1) 광신적 신령주의자들

       (2) 뮌스터의 천년왕국운동

     4. 네덜란드의 재침례(재세례)운동


  Ⅲ. 결론


Ⅰ. 서론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의 무지와 미신으로 오염된 하나님의 교회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점점 확대되어 그 움직임이 유럽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중 재침례(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성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스스로의 판단에 의한 신앙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침례(세례)를 베풀어야한다는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재침례(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기에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들에게 재침례(재세례)파란 이름이 붙은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유아세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성인이 된 다음에는 입교문답만 했으므로 성인에게 세례를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아세례를 받았음에도 새로이 세례를 베풀었으므로 재침례(재세례)파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루터나 츠빙글리, 칼빈의 개혁운동의 그늘에 가리워져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단으로 몰리기도 하였는데 이는 재침례(재세례)파가 다른 종교개혁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재침례(재세례)파는 루터나 츠빙글리의 동지나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이 처음에 생각하고 있던 개혁의 이념에서 이탈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 몇 년 동안에 이 운동은 스위스와 독일에서 수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하여 그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재침례(재세례)파의 기원과 성격을 알아보고 아울러 재침례(재세례)파가 진행되는 가운데 어떠한 흐름으로 나아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후 재침례(재세례)파의 활동을 알아보려 한다.



Ⅱ. 본론


1. 재세례파 운동의 기원과 성격

루터와 츠빙글리는 중세 교회가 가진 교회와 신학적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들의 개혁 근거는 성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개혁적 주장을 추종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루터나 츠빙글리의 개혁 운동이 성경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 되었다. 더구나 개혁가들은 자신의 주변 정치 상황과 타협한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


루터나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은 영주나 시의회의 도움을 받아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비판하면서 나온 사람들이 재세례파였다. 이들은 기존의 모든 질서를 사탄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아 역사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들에게는 중세 1000년은 성령의 사역이 중지된 교회 역사의 단절시기이며 사탄이 지배하연 시대였다. 그래서 기존 교회는 개혁이 아닌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입장 때문에 재세례파에게 있어 성경 연구의 목적은 현실 세계에서 기존의 질서를 바로 잡고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모범을 발견하는데 있었다.


재세례파들은 세상과 교회를 완전하게 구분하였다. 그들은 이 세상이 마귀의 지배아래 있으므로 멀지 않는 장래에 멸망할 것이라고 보았고, 그리스도의 교회는 잠시 잠깐 박해를 당하지만 말씀 운동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재세례파는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려면 우선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칼빈이나 루터가 거짓 교회로부터 참 교회를 구별하는 척도로 말씀의 바른 선포와 성례의 바른 시행을 강조하였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 권징의 성실한 시행을 강조하였다. 권징에 의하여 교회의 순수성이 유지되고 순수한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 개혁이 완성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재세례파의 핵심은 도덕에 대한 강조였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그 도덕 수준을 개선하였더라면 자신들은 그리로 복귀하는 것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다. 재세례파는 엄격한 도덕 수준을 요구했고 그들은 이를 달성하였다. 그를 반대한 츠빙글리조차 그들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의 행실은 책잡을 데 없고 경건하고 가식 없고 매력적으로 보인다....심지어 비판적 성향을 가진 이들도 그들의 생활이 훌륭하다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그들은 도덕을 중시했다. 한 예로 알코올음료를 완전히 금지하는 운동은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가톨릭 수도원조차 완전한 금주를 요구하지 않았고 루터와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재세례파는 이를 노선을 고수하였고 또한 실천하였다.


2. 재세례파 개혁자들


(1) 스위스 형제단

스위스에서 출현한 재세례파는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모여서 성격을 연구하던 제자들 가운데 발생하였다. 이들을 가리켜 '스위스 형제단' 이라고 부른다.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은 취리히의 개혁자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48∼1526)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또 한명의 스위스 형제단인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은 그레벨에게 재세례를 주고 블라우록가 그레벨을 비롯한 몇 사람에게 침례를 주어 교회를 형성하여 1525년 1월 21일에 재세례파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레벨은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로마 천주교회의 유산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면서 츠빙글리와는 달리 급진적인 교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그레벨은 통치자의 도움 없이 교회 스스로 신속한 개혁을 이룰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교회를 자발적으로 모인 신자들의 모임으로 보고, 츠빙글리와 시의회에게 중생한 신자로 구성된 참된 교회를 세움으로 교회를 개혁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정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개혁 방법론의 차이가 두 개혁자를 갈라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레벨은 도나투스(Donatus)의 교회관을 수용하고 신자들로만 구성된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1523년 펠릭스 만츠(Felix Manz, 1500∼1527)와 함께 교회에서 태어난 모든 자에게 교회 회원권을 주는 국가 교회 제도가 자발적인 신앙 고백에 의해 순수한 교회를 세우려는 개혁운동을 막는 장애물이라 주장하였다.


또한 참된 성도로 구성된 교회를 세우려면 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 온 유아세례 제도를 폐지해야 가능하다고 하였다. 세례는 중생과 신앙의 상징이므로 자기 자신의 판단과 책임 아래 신앙적인 고백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달한 성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것 때문에 교인으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유아세례는 성격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 유아세례를 제정하셨다면 왜 성경이 침묵하며, 1∼2세기의 기록에 유아세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유아세례가 인간들에 의하여 세워진 제도임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레벨은 교회와 정부의 전적인 분리를 주장하였다. 정부는 모든 백성과 관계를 맺지만 교회는 단지 성도로 구성되며, 정부는 죄 때문에 생겨났지만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를 위하여 존재하므로 정교의 분리는 당연하다고 보았다.


블라우록은『재세례파 종교개혁의 출발』(Beginnings of the Anabaptist Reformation)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재세례파 운동을 옹호하였다. 유아세례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교황 제도의 산물이므로, 미사와 연옥 교리처럼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충만히 비춰지는 진리의 샛별' 운동을 그레벨과 만츠와 불라우록 자신을 통해 시작하셨다고 하였다.


이러한 재침례파의 주장에 대하여, 츠빙글리는 유아 세례와 계약신학을 옹호하는 4편의 글을 썼다. '모든 믿는 자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세례를 받아야 하며 구약 시대에 할례가 은혜 계약의 표시였던 것처럼, 세례는 신약 시대의 은혜 계약 표시이므로 어린아이는 나면서 8일 안에 유아 세례를 받아야 한다. 또한 성경에는 재세례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없다.'


이렇게 유아세례에 대한 비판으로 취리히가 혼란에 빠지자, 시의회는 1525년 1월 유아 세례에 대한 공개 토론을 열어 유아들이 출생 후 8일 안에 세례를 받고, 무자격자에 의한 설교와 불법 예배 모임을 금지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시의회의 결정을 무시한 채 믿는 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유아 세례 논쟁 후, 취리히 시는 혼동과 무질서에 빠지게 되었다. 재침례주의자들의 유아 세례 부인과 교회와 정부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영권과 세속권의 권세가 추락하였다. 재침례파가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군대에 나가는 것,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에 대하여 반대하고 정죄하므로, 사회적 기강이 무너지고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교회와 정부는 재침례교들을 백성의 영혼을 죽이는 자들로 간주하고, 재침례를 주장하는 자를 정부를 전복하는 자로 정죄하였다. 이처럼 스위스 형제단은 그 출현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레벨은 두 번이나 투옥당했다가 결국 감옥에서 병에 걸려 죽었고, 만쯔는 1527년 취리히 시의 관헌이 호수에 던져서 죽게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스위스와 남독일 일대에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2) 발타자르 후브마이어(Baltarsar Hubmaier, 1485∼1528)

이러한 재침례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 후브마이어이다. 그는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의 교수로부터 루터의 영향을 받아 개종하였으나, 얼마 후 재세례파가 되어 제세례파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유일한 법이라고 표방하고, 교인이 성경의 영적인 표준에 따라 자라야 하는데,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음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농민 전쟁으로 발츠후트 신앙 공동체가 해체되자, 취리히로 피신하여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을 돕던 중 미사 제도를 인정하는 등 진부한 취리히의 개혁에 실망하여 그레벨과 함께 급진적인 개혁을 촉구하였다.


후브마이어는 교회를 청소하라는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교회에서 로마 천주교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특히 유아 세례 교리를 반대하면서, 신앙고백이 선행되어야만 세례를 베풀 수 있다는 재침례교도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많은 재침례교도들이 독일에서 스위스로 건너 와 1525년에 츠빙글리에 대항하였다. 얼마 후 후브마이어는 농민전쟁의 발상지 발츠후트(waldshut)에서 1525년 4월 15일에 재세례를 받았다.


1527년 『자유의지에 대하여』(On Free Will)에서 영의 순수성을 주장했다. 영의 순수성을 주장한 것은 인간 안에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 어떠한 기능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라비아에서는 루터란 교회를 재침례교회로 만들기도 했다. 그는 1527년 모라비아 형제단을 섬기던 중 한스 후트와 논쟁을 벌이면서 세속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군대 복무와 납세 등의 문제에 대해서 정부에 복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인도 관료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한 전쟁과 사형 제도를 옹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세례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못하여 1528년 비엔나에서 화형 당하였다.


(3) 새틀러와 슐라이다임 신앙고백서(Michael Sattler, 1490∼1527)

재침례교도들의 신앙과 신학 사상은 마이클 새틀러에 의해 1527년 작성된 『슐라다임 신앙고백서』(Schleitheim Confession)에 잘 나타난다.


① 회개 및 회심을 체험하고 자신의 죄가 그리스도에 의하여 다 사하여졌다고 믿는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푼다. 교황이 제정한 가장 큰 오류인 유아 세례를 제외시켰다.

② 일단 재침례교의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세례 받은 이가 실수하거나 범죄 했을 경우 출교에 처한다.

③ 성찬을 기념으로 보았고, 성찬 참여 자격을 세례 받은 자로 제한하였다.

④ 세례를 받은 이는 사탄이 세상에 심어 놓은 악과 죄악으로부터 스스로 성별되어야 한다. 로마 천주교회와 기독교의 국가교회를 포함하는 악한 세상에서 구분되어야 한다. 교인들은 어떤 이유로도 무기를 사용할 수 없고,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며, 때리는 자에게 맞으라고 하였다.

⑤ 목사는 불신자들 사이에도 좋은 평판을 가져야 한다. 목사의 직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훈계하고, 가르치고, 경고하고, 모든 형제자매를 위해 기도하고, 떡을 떼어야 할 때에 떡을 떼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세워져 발전하도록 돌보고, 비방자의 입을 막는다.

⑥ 이 세상의 통치는 육신을 따르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통치는 성령을 따르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철과 검으로 무장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무기인 진리, 정의, 평화, 믿음,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다.

⑦ 교인은 누구 앞에서도 맹세할 수 없다. 구약 성경에 맹세를 언급했지만, 인간이 맹세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는 맹세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새틀러는 이와 같은 재침례주의를 보급하다가 1527년 5월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선동적이며 이단적인 주장을 편다는 이유로 정죄 되었다.


3. 광신적 천년왕국주의자들 

스위스 형제단보다도 더 과격한 신학적 입장을 전개한 이들을 광신적인 신령주의자들이다. 한스 후트(Hans Hut), 데이비드 죠리스(David Joris). 멜키올 호프만(MelchioHofmann), 그리고 1534년 뮌스터에서 폭동을 일으킨 천년왕국주의자들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1) 광신적 신령주의자들


① 한스 후트(Hans Hut)

독일의 광신적 신령주의 운동은 한스 후트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1526년 오순절에 한스 뎅크에게서 재침례를 받았고 귀족 가문의 사람들을 포섭하여 큰 교회를 세웠으며 나중에는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후브마이어가 정당방위를 주장한 것과는 달리,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의 사용을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후트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사도로, 예언자임을 자처하고,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신령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혁명에 의한 천년 왕국의 건설을 주장하여, 당국의 수배를 받았고, 1527년 체포되어 아우구스부르그에 투옥되었는데, 감옥의 화재로 인하여 타 죽었다.


② 한스 뎅크(Hans Denk, 1500∼1527)

재침례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학자로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을 수용하였으며, 사랑의 실천, 평화의 유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다. 1525년 뮌쳐의 신령주의적인 견해에 동조하면서 광신적인 신령파가 되었다. 신령파의 영향을 받은 뒤로는, 성경이 계시를 포함하고 있지만 오늘날 신자는 계시를 직접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광신적 신비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뎅크의 과격한 신학 사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심해졌고, 1526년 후브마이어에게 재세례를 받은 뒤로는 광신적인 재침례파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스 뎅크를 유명하게 만든 1526년 8월 재세례교도자 집회에서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처형되었다. 재침례파 지도자들이 처형된 것은 그들의 신앙 때문만이 아니라 광신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③ 멜키올 호프만(Melchior Hoffmann, 1498∼1543)

호프만은 스와비안 지방의 모피공으로 1523년 개종하여, 유럽 북동부 및 라인랜드를 돌아다니면서 임박할 세상의 종말에 대해 설교하였다. 1529년 츠빙글리의 성찬관을 지지하다가 덴마크에서 쫓겨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생활하던 중, 슈벵크펠트의 영향을 받아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학 사상을 주장하였다. 호프만은 1530년 재침례교도로 개종하여 『하나님의 규례』(The Ordinance of God)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세례란 그리스도의 현현이며,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이고, 옛 아담을 버리고 새 아담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호프만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후 임박한 천년 왕국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는 루터를 “시작의 사도”, 자신을 “마지막 사도”라고 칭하면서 자신을 사도 시대의 기독교를 회복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지명 받은 자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1533년에 스트라스부르에 재림하사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실 것이며, 이 일을 위해 자신이 부름을 받았다고 설교하였다. 이 일로 박해가 이어지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그를 따르는 자를 멜키올파(Melchiorites)라고 부른다.


(2) 뮌스터의 천년왕국운동

네덜란드 저지대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뮌스터시에서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것은 베르나트 로츠만(bernt Rothman, 1495∼1535)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마우리 교회의 설교자로 봉사하고 있던 로츠만은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러 모았으며, 그의 설교 운동으로 개혁 운동이 점차로 힘을 얻으면서 교회의 영향력도 확대되었다. 그런데 뮌스터 시의 상인조합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던 그는 비밀리에 학자금을 받아 비텔베르크 대학에 가게 되었다.


1531년 7월 뮌스터 시에 돌아온 로츠만은 개혁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에 놀란 주교가 그를 사제직에서 해임시키자 조합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로츠만을 지지하였다. 이 무렵 시내에 거주하고 있던 시민 들 중에는 루터파, 개혁과, 그리고 나중에 재세례파가 혼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로마교회를 반대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행동을 같이 하였다. 시민들은 신속하게 로스만을 뮌스터 시의 종교적 지도자로 추대하였다.


뮌스터 시의 길드 회원들은 도시의 평민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532년 이들은 주교와 무력으로 대항하여 승리를 얻었다. 뮌스터를 다스리던 로마 천주교회의 주교도 1533년 뮌스터를 “복음적인 도시”로 선포할 단계에 이르렀다. 뮌스터가 복음을 받아들이자, 박해로 인해 피신했던 많은 재침례파들이 네덜란드에서 뮌스터로 몰려왔다. 1533년 이후에는 뮌스터의 시민들보다 이민자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뮌스터시는 네덜란드인 쟌 마티스(Jan Matthys)의 수중에 들어갔다. 마티스는 농민 전쟁을 부추겼던 뮌쳐의 사상을 뮌스터 시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다. 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성경에 따라 뮌스터를 개혁하고자 하였지만, 그의 성경 강조는 주관주의에 머물렀다. 그는 주관적으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종말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마티스 자신을 스스로 예언자 에녹이라고 자처하여 재세례파를 규합하였고, 곧 뮌스터 시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칭하고, 성도돌이 철장을 가지고 다스릴 천년 왕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설교했다.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모든 현금과 재산은 국가 소유로 되었다. 성경을 제외한 모든 서적은 불태워졌고,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현물로 임금을 받았다. 이와 같은 공산 사상에 반대하는 세력은 존재할 수 없었으며, 항거하는 자들은 처형되었다. 소수의 군대로 로마 천주교의 군대를 무찌르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외치면서 로마 천주교회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나. 막강한 로마 천주교회의 군대에 의해 마티스은 살해되었다.


그가 죽은 후 함락되기 까지 마지막 1년 2개월 동안 버티면서 뮌스터를 지휘한 한 사람이 존 레이든(Jhon of Leyden)이었다. 그 역시 주관주의적인 인물이었다. 친위대를 조직하여 모든 뮌스터 시민의 생활을 규제함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였고, 로마 천주교도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하면서, 과부들에게 결혼하여 자녀를 두어 전쟁을 준비해야 된다고 설교하였다. 그는 구약의 족장들처럼 일부다처제를 수용하라는 계시를 환상 중에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미모의 여인 15명을 아내로 삼았다.


존은 1534년 8월 주교의 용병을 격퇴한 후, 자신이 마지막 시대의 메시아요, 새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주관주의적 이단 사상의 위협에 직면한 교회들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1535년 1월 뮌스터를 공격했다. 결국 투쟁 끝에 1536년 6월 24일 뮌스터는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존은 불에 달구어진 쇠로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이 일로 명성이 땅에 떨어진 재침례교들은 박해를 감수하거나, 아니면 신앙을 버리고 아우구스부르그 신조에 서명하여 정통 신학으로 복귀하려는 양자택일을 하여야 했다.


4. 네덜란드의 제세례운동

뮌스터시의 붕괴로 하층시민을 중심으로 하는 재세례 운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극심한 탄압 속에서 살아남은 재세례파들은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들의 움직임을 크게 4개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로 얀 반 바테른베르히(Jan van Baternberch)를 중심으로 뮌스터 시를 재탈환하려고 시도했으나 전멸했던 바테른부르크파가 있었고 둘째로 박해 속에서 네덜란드의 재세례를 평화주의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려다 재세례파에 대해 실망하고 신비주의자가 된 오베 필립스(Obbe Philips)파가 있었다. 셋째, 다비드 고리스(David Goris)파는 고리스가 전파한 사상을 계승하여 비밀단체인 '사랑의 집'을 만들어 신비적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다. 필립스와 고리스 등이 사라진 후  네덜란드에 있어서 재세례파를 조직화하고 교리화 시킨 사람은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 였다. 메노 시몬스는 뮌스터 사건의 결말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평화 지상적 복음주의적인 침례 교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메노는 슐라이다임 고백서에 진술된 대로 복음적인 재세례교의 입장을 재조명하였다.


그는 혁명을 통한 교회 개혁을 반대하고, 개인적인 특별 계시를 주장하면서 성령의 내적인 조명에 의존하던 심령주의적인 재침례파를 반대하였다. 참된 개혁 운동은 성경대로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메노는 성경을 해석할 때,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 예로 마리아를 예수의 “양모”로 보았는데, 이미 2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된 사상으로, 그는 역사를 경시해서 이단으로 빠지게 되었다.


메노는 성경적 교회를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으며 평화와 봉사의 삶을 사는 중생한 자로 구성된 교회로 보고, 이러한 교회를 세우려면 권징이 철저하게 실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권징의 최종적인 단계로 출교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출교는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성도는 출교 받은 자를 격리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주신 출교의 명령은 우리가 출교를 행하든 아니면 우리 자신이 "공동체에 의하여 기피되고 출교 당하던가 해야 한다"고 하였다.


메노는 성찬을 츠빙글리의 전통을 따라 기념으로 보았고, 세례는 성도의 중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유아들이 설교를 듣거나 교훈을 받을 수 없으므로 유아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메노는 세례가 은혜를 수반한다거나 은혜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배척하고, 오히려 순종의 표징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신학적인 전제에 근거하여, 그는 유아 세례가 407년 교황청에 의하여 도입되었다고 주장했다. 재침례파의 전통을 따라, 서약하거나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는 일, 세속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Ⅲ. 결론


이처럼 재세례파 운동은 종교 개혁기에 종교적 순수운동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오로지 성경에 있는 대로만 하자는 주장하였다. 또한 그들은 형식과 외적인 모습을 통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고 내적으로 진실한 신앙고백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이 주장했던 재세례는 중세 로마가톨릭의 형식적이었던 모습을 탈피하고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다시금 세례를 받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점차 극단적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많은 박해를 받았다. 또한 그들의 광신적 행동은 급진적은 종교개혁이었기 때문에 그 16세기 당시 가톨릭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조차도 처절하게 비판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재세례파의 등장에 대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중세 로마가톨릭이 깨어지면서 새로운 신앙에 대한 이해에서 나타난 순수 신앙 운동이라는 점에서 좀더 적극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들의 고난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순수하고 올바른 신앙은 박해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한 흐름은 후터파와 연결됨으로서 경건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 참고문헌 ◈

1. 롤란드 베인턴 저 홍치모 ·이훈영 옮김, 『종교개혁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2. EM.번즈 · R 러너 · S 미첨 씀, 박상익 옮김, 『서양문명의 역사Ⅱ』, 소나무, 1994

3. 오덕교 저, 『종교개혁사』, 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 1998

4. 오연수 저, 『종교개혁사』, 한글, 2000

5. 홍치모 공저, 『급진종교개혁사론』느티나무, 1993



출처: 청교도 도서관/ 천국도서관지기

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정국가(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사다.

에덴 동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다.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아담은 모든 지상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만 했다. 구약학자인 Meredith Kline은 이와 같은 신정국가들을 시종일관 종교(예배)와 문화(세속적 활동)의 결합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이 '예배'라는 보편적 방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아담의 왕적 신분을 통해 에덴동산을 통치하셨다. 바꿔 말하자면, 에덴 동산은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이적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것은 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예배와 문화의 통일성이 와해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장래를 위한 상징과 그림자와 약속을 통해 구원을 소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하실 때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세계 역사가 진행된 훨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장차 그 방주를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셨다. 각각의 종류에서 보존된 생명체들은 이 작은 신정국가, 곧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범람하는 바다를 견뎌 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한 왕을 통해 기적으로 자기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신정국가가 되었다. 성막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 성전은 에덴 동산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냄세로 가득 찬 방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다시 한번 종교(예배)와 문화(인간의 활동)가 융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직접다스리셨다. 홍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고 그들의 대적을 집어삼키키 위해 덮쳤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한번 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사의 중심이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가진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행함으로 종교와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구원, 기도, 예전 그리고 '영적'인 일에 관한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의 모든 양식을 지시하셨다.

그와 같은 각각의 신정국가에는 성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으며, 희생 제사도 있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첫 신정국가의 성전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이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의  경우, 신정국가에서는 대개 한 사람의 대리자가 그 세가지 직무를 모두 겸임했다. 희생 제물의 경우,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을 수 있는 가죽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며(창 3:21),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을 약속하셨는데, 단지 이 동물 희생은 장차 있을 궁극적 희생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창 3:15). 홍수 이후에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창 8:20). 희생제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정 국가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신정 국가들은 이적으로 통치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의 어느 고요한 밤, 한 유대인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잉태했을 그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다. 과거에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예표했던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신정국가는 이적과 계시와 구속 행위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으로 국면으로 펼쳐질 것을 예고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나라의 실제 속에서 천국을 지상으로 이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성전이셨으며, 그것은 솔로몬이 최고 전성기 때 누렸던 명성과 영예의 찬란함을 능가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선언하셨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적보다는 섭리가 특정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점으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신정국가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이 땅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 세계를 통해 신앙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홍해를 통해, 혹은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기 보다는 심판의 바다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점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일이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대중들이 믿고 있는 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행동지침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희생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정결한' 짐승 제사로 예표되었던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한 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화목을 위한 최고의 방식을 충족시키셨다.

은혜의 복음이란/ Michael S. Horton




출처: 영락교회 http://club.youngnak.net/yn_contents/home/whats.htm#top

 

 

 

 


 

이 내용은 1956년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기독교방송국을 통하여 "기독교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방송한 설교원고를 그대로 옮겨 만들었습니다.
아직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여러분께 이 글을 드립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를 이해 하시는 가운데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종교의 필요성

 

기독교란 어떠한 종교인가? 하는 이 문제를 특별히 기독교를 아시지 못하는 여러 동포를 위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종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과학시대 인데, 종교시대는 이미 다 지나가고 과학시대가 되었는데 우리가 과학만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각 방면에 진보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없지않고 있을 줄 압니다. 혹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줄 압니다.

특별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그렇게 생각하던 이 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그저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또 여러 가지 과학의 이치를 발견도 하고 그렇게 되어 이세계가 진보하면 그냥 발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온 세계인류는 행복스럽고 평화롭게 잘 살게 될 터이고, 참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과학의 꿈은 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꿈은 20세기 초엽을 지나자마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산산이 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여러분, 가장 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20세기의 양상을 잘 살펴보십시오. 전 세계를 휩쓴 세계 제1차 대전후 얼마가지 못하여서 전 세계 인류의 참화를 가져온 2차 대전, 그리고 이곳 저곳의 열전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냥 계속되는 냉전, 과학이 제일 발전되었다고 하는 이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극도로 발달되어 지금은 원자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세계인류는 언제 이 원자탄이 우리 도시, 아니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아니 할까 하는 염려로 전전 긍긍하고있습니다.

과학이 가져온 세계의 결국은, 첫째 피비린내 나는 세계, 둘째 전 인류를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한 세계를 가져왔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동포여러분, 과학은 물론 필요합니다. 불처럼 필요합니다. 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밥을 짓는데도 쓰고, 방을 뜨겁게 하는데도 씁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나, 그 불을 쓰는 사람이 바로 써야지 잘못 쓰면 오히려 인류에게 큰 피해와 화를 가져오고 맙니다.

과학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은 올바르게 써야지 이것을 사람이 바로 쓰지 못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참화를 가져 오고 맙니다.

물론, 과학은 비행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원자탄 수소탄도 역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을 과학이 만들지 못합니다.

이 썩고 악한 사람의 근성을 바로 잡을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서 이 사람을 바로 만들 수 있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본래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공허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빵 문제가 아닌가? 빵을 달라고 대중은 부르짖습니다. "나를 따라 만 오라. 그렇게 하면 내가 네게 빵을 주리라"고 어떤 지도자들은 외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도 옳습니다. 과연 ".."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정말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생각할 것은, 이 문제만을 해결한 사람이 과연 그 생활에 참된 만족이 있었습니까? 공산국가에서는 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약속을 가지고 전 국민을 노예와 기계로 삼고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그 독재 아래서 시달리는 그들에게 과연 참된 행복이 있는 줄 믿습니까?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 나라는 아마 제 생각에는 미국일 것입니다. 미국은 참된 민주주의 정책아래에서 국민에게 자유를 확보하면서도 모든 생활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미국사람에게는 참된 만족이 다 있을 줄 압니까? 바로 오늘 아침에 제가 어떤 책을 들쳐보니 미국에서 매년 생의 권태를 느껴서 자살하는 사람이 16,000명 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만일 육신 만이라 할 것 같으면, 아마 밥만 먹고 옷만 잘 입으면 만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상한 불길,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조건이 만족하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에게 다른 조건, 이 영적 만족이 없으면 그는 언제든지 텅 빈 느낌,  공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이 떡만 먹으면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람을 단순히 한 짐승과도 같이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이상의 다른 무엇이 그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탐구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공허감을 느끼고야 맙니다.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로 갑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쇼펜하워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이 인생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황혼이 깃 들어 공원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 옆을 보니까, 의자에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이 공원지기는 아마 어떤 빌어먹을 노인인가 생각하고 큰소리로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하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에, 쇼오펜하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어디서 왔어? 아 내가 그걸 알면야 나는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눈을 감고 앉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몇 해전에 제가 어떤 장례식 주례를 맞아 갔었습니다.

그때 한 오십 세 되는 여자 교우가 세상을 떠났는데, 방금 출판을 하려는 직전에 만주에 가있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집에 돌아 왔습니다. 들어서자 마자 이 아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관을 출관 못하게 그냥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부짖는 말이,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셔요.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갑니까?"

그 말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인생이 다 산후에는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흔히 생로병사 (生老病死) 즉 四苦를 말합니다. 죽은 다음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 옵니다. 어떤 이는 이 문제에 대단히 등한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참된 종교의 신앙심이 없이는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죽음은 초막에나 궁궐에나 다 같이 옵니다. 노인에게나 청년에게나 같이 옵니다.

,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종교란 이름아래 별별 것이 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종교를 어떤 길이 참 길인지 택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누렇다고 다 황금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汰?없느니라."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학 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합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인간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문제를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지금 기독교하면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 '예수교'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교파를 따라서 '장로교' '감리교' 니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의 첫 이름, 처음에는 우리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그 첫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제일 쉬운 줄 알아서 첫 이름을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첫 이름

 

첫 이름은 다른 것이 아니고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우리 기독교 성경을 읽어보신 이가 계신지 모르지마는, 성경 가운데는 구약과 신약 두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의 신약이 우리 기독교의 내용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을 펼쳐보면 거기 처음 네 책은 전부 '복음'이라고 하는 말로 씌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1 1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또 마가복음 1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요.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기 전에 "복음"이라고 불렀는데, 여러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론 한문 글자 뜻대로 '복된 소리'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대말로 하면, 그저 '기쁜 소식', 지금은 '소식'이란 말을 영어로 그냥 써서 '뉴스(news)'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말로 표현하면 '좋은 뉴스' 입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부를 때 '좋은 뉴스' 또는 '기쁜 뉴스'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전에 아테네 사람들이 흔히 새것을 듣기 좋아해서, 언제나 뉴스를 듣기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누구나 뉴스는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게 될 때 뉴스시간을 좋아해서 더구나 뉴스시간을 제일 많이 듣습니다. 또 우리가 신문을 왜 사서 늘 읽습니까? 그 가운데 뉴스가 있는 까닭입니다.

벌써 40년이 거의 됐습니다마는, 그 때에 일본이 항복 했다고 하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서 들어올 때, 그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어떤 이는 기뻐서 날뛰다가 뇌출혈이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큰 뉴스도 있고 작은 뉴스도 있고, 그래서 흔히 언론계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않습니까. 가령 금년엔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다고,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혹 이런 생각을 더러 해 보셨는지요.

이 우주가 창조되고, 인간이 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에 제일 큰 뉴스가 과연 어떤 뉴스였던가 말입니다. 가령 역사적으로 ' 동양' 하면 동양에서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던가?

징기스칸이 이백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는 뉴스, 물론 굉장했을 것입니다. 혹은 서양으로 말하면, 나폴레옹 (Napoleon)이 온 유럽을 지배하는 그 뉴스였던가?, 콜럼버스(Columbus)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처음으로 새 대륙을 발견한 그러한 뉴스였던가?

다 굉장한 뉴스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제일 큰 뉴스가 무엇이었던가 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신라의 반도통일,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뉴스, 신문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 큰 뉴스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뉴스 가운데는 크다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여기 1950년의 6.25사변, 물론 전 세계를 통해서 큰 뉴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큰 뉴스라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일 큰 뉴스가 될 뿐더러 제일 좋은 뉴스, 그런 뉴스가 무슨 뉴스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 아무리 좋은 뉴스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 가령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민족에게는 참 좋은 뉴스입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야 그것이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에게야 오히려 슬픈 뉴스이겠지요.

어떤 뉴스는 크고 좋은 뉴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만 좋은 뉴스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뉴스가 못 되는 뉴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크고, 또 제일 기쁘고, 또 제일 좋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요,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국가에게나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좋은 뉴스가 무엇인가?

이제 그런 뉴스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주 최대의 뉴스

 

여러분, 기독교는 우주가 생긴 이후에 제일 큰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들은 모든 뉴스가운데 제일 좋은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누구에게나 어떤 민족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저 북빙양 근방에 사는 에스키모에게나, 남양군도에 사는 흑인들에게도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물론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그냥 옛날에는 '좋은 뉴스'라고 그랬습니다.

, 이제 좋은 뉴스의 내용을 간단히 여기서 말하고 또 이 앞으로 조목조목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 볼까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좋은 뉴스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쓴 말씀이 우리 성경에 한절 있습니다. 혹 예수를 믿는 이가 어느 성경구절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 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뉴스는 누구로부터 시작하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을 본래 지으시고, 인간의 운명을 주장하시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설비하시는, 유일무이하신 대주재 하나님께서 하신일, 이런 우주적 뉴스를 전에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과연 큰 뉴스입니다. 제일 큰 뉴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사랑

 

"이세상"은 세계란 말입니다. 물론 세계라 하면 온 지구를 가리킨 말입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금수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사랑하셨습니다. 세계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지마는 특별히 세계 위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을 잠깐만 생각해 보세요. 민족과 민족이 서로 미워해 싸우고, 서로 죽이고 하는 이런 세상입니다. 슬픔 많고, 미움 많고, 고통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더 귀한 것을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은 아마 우리의 자녀일 것입니다. 자녀 가운데 외아들이 있다면, 외아들처럼 귀한 것이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세상에 보내셨단 말입니다. 무엇 하려고 이런 사람을 도와주시고, 이런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사실, 이거 얼마나 큰 뉴스입니까! 과연 천지가 진동할 만한 뉴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물론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만 잠깐 생각하여도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독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독생자 그리스도의 종교요, 믿음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가장 쉽게 말하면, 제일 큰 뉴스라고 제일 좋은 뉴스라고 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독교를 단순히 복음이라고 일컬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 뉴스의 내용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성경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

이렇게 말씀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이 뉴스를 좀 더 해설해야 되겠습니다.

이 뉴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뉴스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믿어왔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뿐 아니고, 서양 사람들도 동양 사람들도 거의 다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옛날에도 혹 어떤 사람들, 또 특별히 근자에 와서는 공산주의를 신봉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득이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인가에 대하여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무신론의 우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셨는지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대단히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장하기가 심히 곤란한 이론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론, 곧 유신론에 대한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신론에 대한 논증,, 하나님이 안 계시다 하는 논증은 사실 전우주와 전우주의 역사를 탐색해서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령 쉽게 예를 들면, 우리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있는데, 갈매기라는 새가 있다는 그런 논증은 만일 어떤 바닷가에서 그 갈매기가 남긴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이것을 보니까 갈매기가 한국에 있지 아니하느냐고 이렇게 논증하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없다고 논증하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천지방에 만일 갈매기가 없다는 것을 다 증명한다 할지라도 부산근방에 있는 지 어떻게 압니까? 목표근방에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

갈매기가 사실 한국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면, 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답사해서 증명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면, 우선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자취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여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모든 다른 별, 유성과 행성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가서 증명하여야 되겠고, 또 지금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없지만 옛날에 계셨던 증거가 있어도 안 될 터이니까. 전 우주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 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무신론의 논증이 되지 아니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무신론의 논증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자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가지고 70년도 못사는 사람이 함부로 이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생각해보세요.

가령 무신론이 옳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주와 시간을 만든 이는 없습니다. 이 우주와 우리인간의 두뇌의 고안자는 없습니다. 우리인간의 두뇌라는 것도 한갓 물질분자의 우연한 배합으로 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물질 문자들이 그저 우연히 모여서 된 그런 두뇌의 사색작용을 우리가 과연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두뇌에서 나오는 무신론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무신론 혹은 유신론은 무신론 자체가 그 무신론을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과 당착을 모르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실상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셋째로, 또 생각해 보세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인 이론입니다. 부정적 이론입니다. 여기 어떤 관념 가운데, 가령 어둡다고 하든지 거짓되다고 하든지, 구부러졌다고 하든지 하는 이런 관념들은 다 부정적 관념입니다. 이 부정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곧 긍정적 관념이 있음으로 비로소 생긴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빛이 없으면 어둡다고 하는 말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또 거짓이라는 것도 참이 있기에 거기에 대한 부정적 관념인 것입니다. 참이 없으면 거짓이란 말도 없을 것입니다., 구부러졌다는 것도 곧은 것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구부러졌다는 말도 생기고, 그런 부정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어둡다고 하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빛이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거짓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부러졌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바른 것이 있는 증거입니다.

사실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그런 부정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지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답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시편 14 1절에 어떻게 말씀했는지 아십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어리석은 이는 별로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 어리석은 것은 여러분께서 잘 계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1956 1 10일 호 타임(TIME)잡지 종교란에 미국의 여론조사로 유명한 갤럽(Gallup)박사가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을 발표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시민들 중 여러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왜 믿느냐?"를 물어보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미국시민가운데  96% 다시 말하면 100명에 96명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제일 많은 이유부터 열거해 보면,

첫째로, 우주의 질서와 그 위대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제일 많고,

둘째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하는 것이 두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을 보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넷째로, 내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으실 때, 혹은 이런 대답, 혹은 저런 이유로써 하나님을 믿으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존재

 

지금까지 논술한 것으로, 기독교는 좋은 뉴스, 즉 복음이란 말씀과, 또 이 뉴스는 하나님에 대한 뉴스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도 있기 때문에 이 무신론이라는 이론이 이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몇 가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찌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그 이유를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19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이런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음절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첫째로, 우리 사람 자체를 가만히 살필 때, 안으로 살필 때, 내성할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바깥 모든 세상, 외계의 대자연과 전우주를 바라볼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는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시간에 우리 손에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자체를 잠깐 찾아 볼까 합니다.

 

 

 

인생의 종교본능

 

첫째는 인간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점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우리 사람에게는 종교가 있습니다.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문명한 사회에는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는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그렇고, 서양에도 그렇고, 아프리카에도 그렇고, 또 현대 남양군도에도 그렇고, 또 현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그렇고,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어떤 사회문화 가운데 들어가 보던지 종교가 없는 데는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안 계신 듯이 사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믿지 아니하는 형제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말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는 도무지 않지만 몇 해전에 38선을 몰래 넘어 올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괴뢰군에 억지로 붙들려 나갔다가 석방되어 나온 애국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괴뢰군과 함께 몰려서 유엔군이 북진하여 올라갈 때, 저 삼각산 어떤 골짜기에 숨었는데 유엔군 비행기들이 대편대를 지어와서 폭격을 하고 기관총 소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그 저 공산당들과 정치 보위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솔포기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랍니다. 사람이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사람은 불치병적으로 종교적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사람에게는 먹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먹는 본능을 만족시킬 음식물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사교할 수 있는 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본능이 생겼습니다. 가령 눈을 보면, 눈이 필요하게 쓸만한 빛이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다고 하면 눈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귀가 있습니다. 이 귀가 들을 만한 소리가 있습니다.

, 우리 사람의 육체를 가만히 보면 감각이 있습니다. 가령 감각하는 기관, 눈이든지 코든지 하는 감각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냄새가 있습니다. 만일에 세상에 빛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사람에게 눈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깊은 굴 속에 못이 혹 있을 수가 있는데, 그런 못 가운데 사는 고기는 다른 것은 다  있지만 눈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캄캄한 데 사는 고기에게 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감각기관 있는 것은 벌써 대상이 있는 까닭에 감각기관 생긴 줄 압니다. 빛이 있어서 눈이 생겼고 , 소리가 있어서 귀가 생긴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은 이런 종교적 동물이요, 종교성이 있고 무엇을 숭배하려고 하는 영혼으로써 동경하는 이런 마음, 부인하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욕망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상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신 까닭입니다.

왜 봄에 풀이 위로 자랍니까? 위에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사람의 심령이 높은 것을 앙망하고 동경합니까?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환자입니다.

우리는 다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소경은 빛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간의 종교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성

 

다음에는 우리 인간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둘째로,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다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 된 증거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마비는 안됩니다. 언제나 어느 한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 할 때는 칭찬해주고, 잘못 할 때는 책망해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내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양심가운데 후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 요소를 다 제하여 버리고도 그 속에 선천적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인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 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 법칙을 준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와 우리사람과 도덕적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사람은 인격적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 되었음으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살펴볼 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 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살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자리에 누울 때, 혹은 아침 일찍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우주의 원인

 

그리고, 지금은 로마서 1 20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 하는 말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현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간단히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됩니다. 인과의 법칙대로 안되면 과학이 성립 못 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꼭 옳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대 우주의 이런 결과가 생겼은 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보고 특별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이렇게 또한 주장했습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보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 수 밖에 없는 데,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까지 그냥 있다고 요새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시 무종하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우주가 영원하다.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하다" 하는 이런 주장은 오늘의 과학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의 과학적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거의 단언합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전체가 몇 해전부터 시작이 되었겠나 그것을 측정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라늄 원소의 그 방사하는 것을 측정해보고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33 5천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우주전체의 연령은 약 백억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간에 시작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에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생물이 이 지구에 영원히 있었는가?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자라나고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 영원부터 살았느냐? 지질학을 연구해보면, 일정한 시기 그것도 아주 말기에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그대로 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식물도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주자체가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히브리서 3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 이시라"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절대의 신입니다. 하나님의 배후에 다른 원인이 있으면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수학을 좀 공부해 보신 분은 무궁대 또는 무한대의 개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하나입니다.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모두 무한대로 같습니다. 그런 반대의 이론은 이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견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아니할 수 가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고안(考案)

 

,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살펴보면 되는 대로 복잡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직이 꼭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하늘을 쳐 다 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의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가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계가 여럿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갤럭시(별무리)가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우주가 형성됩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큰 것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볼지라도 그렇습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속을 들여 다 보면 그 속에도 양자가 있고, 그 양자를 중심하여 빙빙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데서부터 작은 데까지 질서가 있습니다.

, 보십시오.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에 고안이 있습니다. 꽃을 보십시오. 이 꽃 한 송이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같은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생각해야 그 같이 만들 수 있겠나? 꼭 고안이 있습니다. 새 한 마리도 고안이 꼭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떻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그것뿐 만이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게끔 된 것을 보면, 기막힐 정도로 놀랍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들과 나비가 왔다갔다하지요. 벌과 나비가 왜 왕래합니까? 물론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꽃은 꿀을 거져 줍니까? 그렇지않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꽃가루가 서로 왔다 갔다 해서는 결국 씨를 맺게 만듭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동물이 쓸 데 없다고 호흡으로 내버린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은 동화작용으로 탄소를 섭취하고 내버리는 산소는 동물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협동하여 살게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에 의한 고안이 있습니다. 비 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 가면 물이 많지요. 햇빛에 쪼여서 남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서 찬 바람을 만나서는 다시 물이 되어 비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빗물이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모두 잡아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온 다음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비가 오면 이 땅을 아주 깨끗이 씻어줍니다. 비가 오래 안 오면 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저 백운대위의 먼지를 누가 씻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깨끗이 씻어버립니다. 그것뿐입니까? 빗방울이 사막에 떨어져서는 풀이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합니다.

땅을 깨끗이 씻은 빗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더러운 것들을 다 씻어다가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이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짭니까? 짜야 소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깨끗이 소제하고, 더러운 것을 다 흘러버리게 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합니다.

전에 제가 제네바에 가보니, 거기 호수 옆에 꽃을 가지고 시계를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두 꽃으로 만들었더군요. 그 속에 기계를 묻었습니다. 큰 바늘이 돌아갑니다. 꽃 시계입니다. 이 꽃 시계를 보고,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안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 곧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큰 정신 병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 우주에 대한 이론을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는 액나스티즘 즉 불가지론(不可知論)이요, 또 하나는, "이것이 다 거저 되었다.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19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이 하나님께서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고, 이 하나님께서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총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되 수 천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화를 삼 사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튼튼히 믿고, 어떠한 환경을 당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 신앙을 전파하여 우리민족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神性

 

지금은, 예수는 누구이시며, 그의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물으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각각들은 대로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엘리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예레미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세례요한,또는 선지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더이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일어나며 하는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 곧 구주라는 말입니다.

이 대답은 모든 제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대답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그 당시의 사람들처럼 선지자 중의 하나, 다시 말하면 성자 중의하나, 혹은 위대한 종교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실상 예수를 믿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의견은 이론적으로 성립도 되지 못합니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도덕적 사표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위대한 종교가 가운데 한 분이란 것도 틀림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는 과연 성인인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산상보훈을 보든지 그의 순결 무흠한 생활을 볼 때에 누가 예수님을 성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산상보훈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씀도 가르친 것이 많습니다. 가령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노라. 내가 죄를 사하여 줄 권세가 있노라"

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직접 사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내가 장차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터이요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또 사실 살아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가 바로 승천하시기 전에 말세에는 자기가 다시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보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입니까?

또는, 사실이 아닙니까? 만일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를 도덕적 인물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기자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혹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정신병자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감히 이런 생각이라도 하여 볼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인데, 이것이 사실이라 할 것이면 그는 정녕 사람이상 입니다. 사람만은 아닙니다. 과연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는 만유의 주로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단순히 도덕적 위대한 종교가로만 믿고 그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은 도무지 성립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요. 곧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이제 그의 하신 일을 간단히 생각해 보고 자 합니다.

그의 하신 일을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하나님의 경륜이 어떠하신 것이며 우리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가 있다고 하는 그 모든 진리를 우선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실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활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이 뜻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나 물론 제일 크신 일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만인의 죄를 대속하신 일입니다.

이제, 인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실인 십자가의 뜻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었습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능히 옳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또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서 이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결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 사랑으로써 세상에 보내시고 만민의 무거운 죄의 짐을 그의 어깨에 지우셨습니다. 그는 만민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죄의 형벌을 받아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갚았습니다.


 

십자가의 속죄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 죄는 주님께서 담당 하셨습니다. 단순히 그 다음부터 죄인이 구원 얻을 길은 자기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를 회개할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말씀은,

"네가 죄를 지었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죄를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너를 죄에서 구원한 예수가 있는데, 네가 네 죄를 대속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이것이 결국 심판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과 영벌이 이 문제로 필경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살 때에 무슨 죄를 지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 받을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길을 내가 거역하고 나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를 믿지않는 까닭으로써 결국은 정죄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 큰 죄가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지않는 까닭으로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말씀을 제가 읽을 때 직접 들으세요.

요한복음 3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아서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만 그 심판 아래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 36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동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죄를 짓고 안짓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이 지금 어떠한지, 과거 어떻게 많은 죄를 지었던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길은 이미 크게 열렸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음 곧 좋은 뉴스인데, 뉴스의 골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생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으라고 하였는데 ,영생이란 뜻은 무엇인가'?여기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보통으로 영생하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생의 한 부분이요, 전체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생은 지금 현재, 당장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면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현재에 소유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요한1 5 12절을 읽으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이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뜻을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영생이란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곧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영접하는 이는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영생을 그 마음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불멸의 생명인 까닭으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의 마음에 계시게 되면, 그 사람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 과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육에 속한 것은 없어지고 영적으로 변합니다.

고린도후서 5 17절에 이 변화를 가리켜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새로운 사람, 새사람, 다시 말하면 새 마음, 새 생각, 새 사랑,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희망,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다' 또는 '중생',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가령 쉽게 말하면, 어린애가 어두운 모태 속에 있다가 광명한 세계로 옮겨집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이렇게 나옴으로 세상에 옵니다. 다른 방법으로 올 수 없습니다. 출생함으로 옵니다. 역시 이 신생, 거듭나는 것도, 영적 세계에 낳는 것도 거듭 영으로 출생함으로 말미암아 영의 세계,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천국은 그저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생하여야,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낳는 사실은 갑자기 일어납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에게는 산고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그 자체는 즉각적으로 되는 것과 같이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으려고 할 때에 특별한 영적고민도 있고, 믿으려고 하는 마음도 있고,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와 애통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하여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내 주로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으로 영접하는 중생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은 제 말씀을 듣는 여러분 누구든지 참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 이 시간이라도 영접하면 즉각으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양이 아닙니다. 교육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르는 진리를 깨달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빈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면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마치 곤충 세계를 관찰 해보면 유충이 변하여 성충이 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온전한 변화가 있습니다. 유충으로 있을 때, 즉 벌레로 있을 때는 땅을 좋아하고 햇빛에 나왔다가도 땅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벌레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한번 변화하여 나비나 또는 벌 같은 것이 될 것 같으면 땅속에는 살 수 없습니다. 땅 밖에 나와야 합니다. 햇빛을 보아야 합니다. 날아다녀야 합니다.

 

 

 

 중생자의 변화

 

중생한 사람의 경험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에는 육에 속해서 땅에 속해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특색이었지만, 한번 주님을 영접한 후, 성신으로 거듭나게 되면 위에 있는 것을 찾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그 특징이 됩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중생한 사람은 자기도 중생한 줄 알고 또한 다른 이도 알게 됩니다.

요한1 5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함 이라."

중생이 있으면, 이미 중생한 후에는 내게 영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중생한 것을 아십니까?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고 한다면, 그 가족으로 출생해야 합니다. 태어나야 실상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유산,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온 천지만물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금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지금도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축복입니까!

지금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접하십니까?

마음 문을 열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영생을 이제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신학도 있습니다. 신조도 물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위대한 도덕적 교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 기독교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최대의 뉴스입니다. 평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이 기쁜 뉴스를 다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한 두시간에 이 기쁜 뉴스를 다 말할 수 는 없습니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이 뉴스를 좀 더 아시고, 기독교의 진리를 좀 배우려고 원하신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십시오.

여러분 이웃에 있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그와 같이하면 여러분은 이 뉴스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출처: 영락교회 http://club.youngnak.net/yn_contents/home/whats.htm#top

 

 

 

 


 

이 내용은 1956년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기독교방송국을 통하여 "기독교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방송한 설교원고를 그대로 옮겨 만들었습니다.
아직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여러분께 이 글을 드립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를 이해 하시는 가운데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종교의 필요성

 

기독교란 어떠한 종교인가? 하는 이 문제를 특별히 기독교를 아시지 못하는 여러 동포를 위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종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과학시대 인데, 종교시대는 이미 다 지나가고 과학시대가 되었는데 우리가 과학만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각 방면에 진보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없지않고 있을 줄 압니다. 혹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줄 압니다.

특별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그렇게 생각하던 이 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그저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또 여러 가지 과학의 이치를 발견도 하고 그렇게 되어 이세계가 진보하면 그냥 발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온 세계인류는 행복스럽고 평화롭게 잘 살게 될 터이고, 참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과학의 꿈은 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꿈은 20세기 초엽을 지나자마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산산이 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여러분, 가장 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20세기의 양상을 잘 살펴보십시오. 전 세계를 휩쓴 세계 제1차 대전후 얼마가지 못하여서 전 세계 인류의 참화를 가져온 2차 대전, 그리고 이곳 저곳의 열전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냥 계속되는 냉전, 과학이 제일 발전되었다고 하는 이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극도로 발달되어 지금은 원자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세계인류는 언제 이 원자탄이 우리 도시, 아니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아니 할까 하는 염려로 전전 긍긍하고있습니다.

과학이 가져온 세계의 결국은, 첫째 피비린내 나는 세계, 둘째 전 인류를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한 세계를 가져왔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동포여러분, 과학은 물론 필요합니다. 불처럼 필요합니다. 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밥을 짓는데도 쓰고, 방을 뜨겁게 하는데도 씁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나, 그 불을 쓰는 사람이 바로 써야지 잘못 쓰면 오히려 인류에게 큰 피해와 화를 가져오고 맙니다.

과학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은 올바르게 써야지 이것을 사람이 바로 쓰지 못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참화를 가져 오고 맙니다.

물론, 과학은 비행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원자탄 수소탄도 역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을 과학이 만들지 못합니다.

이 썩고 악한 사람의 근성을 바로 잡을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서 이 사람을 바로 만들 수 있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본래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공허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빵 문제가 아닌가? 빵을 달라고 대중은 부르짖습니다. "나를 따라 만 오라. 그렇게 하면 내가 네게 빵을 주리라"고 어떤 지도자들은 외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도 옳습니다. 과연 ".."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정말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생각할 것은, 이 문제만을 해결한 사람이 과연 그 생활에 참된 만족이 있었습니까? 공산국가에서는 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약속을 가지고 전 국민을 노예와 기계로 삼고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그 독재 아래서 시달리는 그들에게 과연 참된 행복이 있는 줄 믿습니까?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 나라는 아마 제 생각에는 미국일 것입니다. 미국은 참된 민주주의 정책아래에서 국민에게 자유를 확보하면서도 모든 생활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미국사람에게는 참된 만족이 다 있을 줄 압니까? 바로 오늘 아침에 제가 어떤 책을 들쳐보니 미국에서 매년 생의 권태를 느껴서 자살하는 사람이 16,000명 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만일 육신 만이라 할 것 같으면, 아마 밥만 먹고 옷만 잘 입으면 만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상한 불길,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조건이 만족하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에게 다른 조건, 이 영적 만족이 없으면 그는 언제든지 텅 빈 느낌,  공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이 떡만 먹으면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람을 단순히 한 짐승과도 같이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이상의 다른 무엇이 그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탐구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공허감을 느끼고야 맙니다.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로 갑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쇼펜하워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이 인생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황혼이 깃 들어 공원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 옆을 보니까, 의자에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이 공원지기는 아마 어떤 빌어먹을 노인인가 생각하고 큰소리로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하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에, 쇼오펜하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어디서 왔어? 아 내가 그걸 알면야 나는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눈을 감고 앉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몇 해전에 제가 어떤 장례식 주례를 맞아 갔었습니다.

그때 한 오십 세 되는 여자 교우가 세상을 떠났는데, 방금 출판을 하려는 직전에 만주에 가있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집에 돌아 왔습니다. 들어서자 마자 이 아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관을 출관 못하게 그냥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부짖는 말이,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셔요.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갑니까?"

그 말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인생이 다 산후에는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흔히 생로병사 (生老病死) 즉 四苦를 말합니다. 죽은 다음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 옵니다. 어떤 이는 이 문제에 대단히 등한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참된 종교의 신앙심이 없이는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죽음은 초막에나 궁궐에나 다 같이 옵니다. 노인에게나 청년에게나 같이 옵니다.

,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종교란 이름아래 별별 것이 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종교를 어떤 길이 참 길인지 택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누렇다고 다 황금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汰?없느니라."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학 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합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인간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문제를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지금 기독교하면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 '예수교'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교파를 따라서 '장로교' '감리교' 니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의 첫 이름, 처음에는 우리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그 첫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제일 쉬운 줄 알아서 첫 이름을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첫 이름

 

첫 이름은 다른 것이 아니고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우리 기독교 성경을 읽어보신 이가 계신지 모르지마는, 성경 가운데는 구약과 신약 두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의 신약이 우리 기독교의 내용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을 펼쳐보면 거기 처음 네 책은 전부 '복음'이라고 하는 말로 씌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1 1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또 마가복음 1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요.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기 전에 "복음"이라고 불렀는데, 여러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론 한문 글자 뜻대로 '복된 소리'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대말로 하면, 그저 '기쁜 소식', 지금은 '소식'이란 말을 영어로 그냥 써서 '뉴스(news)'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말로 표현하면 '좋은 뉴스' 입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부를 때 '좋은 뉴스' 또는 '기쁜 뉴스'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전에 아테네 사람들이 흔히 새것을 듣기 좋아해서, 언제나 뉴스를 듣기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누구나 뉴스는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게 될 때 뉴스시간을 좋아해서 더구나 뉴스시간을 제일 많이 듣습니다. 또 우리가 신문을 왜 사서 늘 읽습니까? 그 가운데 뉴스가 있는 까닭입니다.

벌써 40년이 거의 됐습니다마는, 그 때에 일본이 항복 했다고 하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서 들어올 때, 그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어떤 이는 기뻐서 날뛰다가 뇌출혈이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큰 뉴스도 있고 작은 뉴스도 있고, 그래서 흔히 언론계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않습니까. 가령 금년엔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다고,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혹 이런 생각을 더러 해 보셨는지요.

이 우주가 창조되고, 인간이 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에 제일 큰 뉴스가 과연 어떤 뉴스였던가 말입니다. 가령 역사적으로 ' 동양' 하면 동양에서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던가?

징기스칸이 이백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는 뉴스, 물론 굉장했을 것입니다. 혹은 서양으로 말하면, 나폴레옹 (Napoleon)이 온 유럽을 지배하는 그 뉴스였던가?, 콜럼버스(Columbus)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처음으로 새 대륙을 발견한 그러한 뉴스였던가?

다 굉장한 뉴스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제일 큰 뉴스가 무엇이었던가 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신라의 반도통일,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뉴스, 신문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 큰 뉴스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뉴스 가운데는 크다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여기 1950년의 6.25사변, 물론 전 세계를 통해서 큰 뉴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큰 뉴스라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일 큰 뉴스가 될 뿐더러 제일 좋은 뉴스, 그런 뉴스가 무슨 뉴스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 아무리 좋은 뉴스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 가령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민족에게는 참 좋은 뉴스입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야 그것이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에게야 오히려 슬픈 뉴스이겠지요.

어떤 뉴스는 크고 좋은 뉴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만 좋은 뉴스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뉴스가 못 되는 뉴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크고, 또 제일 기쁘고, 또 제일 좋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요,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국가에게나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좋은 뉴스가 무엇인가?

이제 그런 뉴스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주 최대의 뉴스

 

여러분, 기독교는 우주가 생긴 이후에 제일 큰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들은 모든 뉴스가운데 제일 좋은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누구에게나 어떤 민족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저 북빙양 근방에 사는 에스키모에게나, 남양군도에 사는 흑인들에게도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물론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그냥 옛날에는 '좋은 뉴스'라고 그랬습니다.

, 이제 좋은 뉴스의 내용을 간단히 여기서 말하고 또 이 앞으로 조목조목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 볼까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좋은 뉴스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쓴 말씀이 우리 성경에 한절 있습니다. 혹 예수를 믿는 이가 어느 성경구절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 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뉴스는 누구로부터 시작하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을 본래 지으시고, 인간의 운명을 주장하시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설비하시는, 유일무이하신 대주재 하나님께서 하신일, 이런 우주적 뉴스를 전에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과연 큰 뉴스입니다. 제일 큰 뉴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사랑

 

"이세상"은 세계란 말입니다. 물론 세계라 하면 온 지구를 가리킨 말입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금수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사랑하셨습니다. 세계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지마는 특별히 세계 위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을 잠깐만 생각해 보세요. 민족과 민족이 서로 미워해 싸우고, 서로 죽이고 하는 이런 세상입니다. 슬픔 많고, 미움 많고, 고통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더 귀한 것을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은 아마 우리의 자녀일 것입니다. 자녀 가운데 외아들이 있다면, 외아들처럼 귀한 것이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세상에 보내셨단 말입니다. 무엇 하려고 이런 사람을 도와주시고, 이런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사실, 이거 얼마나 큰 뉴스입니까! 과연 천지가 진동할 만한 뉴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물론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만 잠깐 생각하여도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독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독생자 그리스도의 종교요, 믿음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가장 쉽게 말하면, 제일 큰 뉴스라고 제일 좋은 뉴스라고 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독교를 단순히 복음이라고 일컬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 뉴스의 내용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성경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

이렇게 말씀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이 뉴스를 좀 더 해설해야 되겠습니다.

이 뉴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뉴스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믿어왔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뿐 아니고, 서양 사람들도 동양 사람들도 거의 다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옛날에도 혹 어떤 사람들, 또 특별히 근자에 와서는 공산주의를 신봉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득이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인가에 대하여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무신론의 우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셨는지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대단히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장하기가 심히 곤란한 이론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론, 곧 유신론에 대한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신론에 대한 논증,, 하나님이 안 계시다 하는 논증은 사실 전우주와 전우주의 역사를 탐색해서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령 쉽게 예를 들면, 우리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있는데, 갈매기라는 새가 있다는 그런 논증은 만일 어떤 바닷가에서 그 갈매기가 남긴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이것을 보니까 갈매기가 한국에 있지 아니하느냐고 이렇게 논증하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없다고 논증하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천지방에 만일 갈매기가 없다는 것을 다 증명한다 할지라도 부산근방에 있는 지 어떻게 압니까? 목표근방에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

갈매기가 사실 한국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면, 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답사해서 증명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면, 우선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자취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여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모든 다른 별, 유성과 행성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가서 증명하여야 되겠고, 또 지금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없지만 옛날에 계셨던 증거가 있어도 안 될 터이니까. 전 우주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 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무신론의 논증이 되지 아니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무신론의 논증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자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가지고 70년도 못사는 사람이 함부로 이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생각해보세요.

가령 무신론이 옳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주와 시간을 만든 이는 없습니다. 이 우주와 우리인간의 두뇌의 고안자는 없습니다. 우리인간의 두뇌라는 것도 한갓 물질분자의 우연한 배합으로 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물질 문자들이 그저 우연히 모여서 된 그런 두뇌의 사색작용을 우리가 과연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두뇌에서 나오는 무신론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무신론 혹은 유신론은 무신론 자체가 그 무신론을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과 당착을 모르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실상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셋째로, 또 생각해 보세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인 이론입니다. 부정적 이론입니다. 여기 어떤 관념 가운데, 가령 어둡다고 하든지 거짓되다고 하든지, 구부러졌다고 하든지 하는 이런 관념들은 다 부정적 관념입니다. 이 부정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곧 긍정적 관념이 있음으로 비로소 생긴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빛이 없으면 어둡다고 하는 말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또 거짓이라는 것도 참이 있기에 거기에 대한 부정적 관념인 것입니다. 참이 없으면 거짓이란 말도 없을 것입니다., 구부러졌다는 것도 곧은 것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구부러졌다는 말도 생기고, 그런 부정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어둡다고 하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빛이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거짓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부러졌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바른 것이 있는 증거입니다.

사실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그런 부정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지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답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시편 14 1절에 어떻게 말씀했는지 아십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어리석은 이는 별로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 어리석은 것은 여러분께서 잘 계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1956 1 10일 호 타임(TIME)잡지 종교란에 미국의 여론조사로 유명한 갤럽(Gallup)박사가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을 발표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시민들 중 여러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왜 믿느냐?"를 물어보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미국시민가운데  96% 다시 말하면 100명에 96명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제일 많은 이유부터 열거해 보면,

첫째로, 우주의 질서와 그 위대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제일 많고,

둘째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하는 것이 두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을 보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넷째로, 내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으실 때, 혹은 이런 대답, 혹은 저런 이유로써 하나님을 믿으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존재

 

지금까지 논술한 것으로, 기독교는 좋은 뉴스, 즉 복음이란 말씀과, 또 이 뉴스는 하나님에 대한 뉴스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도 있기 때문에 이 무신론이라는 이론이 이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몇 가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찌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그 이유를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19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이런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음절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첫째로, 우리 사람 자체를 가만히 살필 때, 안으로 살필 때, 내성할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바깥 모든 세상, 외계의 대자연과 전우주를 바라볼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는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시간에 우리 손에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자체를 잠깐 찾아 볼까 합니다.

 

 

 

인생의 종교본능

 

첫째는 인간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점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우리 사람에게는 종교가 있습니다.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문명한 사회에는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는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그렇고, 서양에도 그렇고, 아프리카에도 그렇고, 또 현대 남양군도에도 그렇고, 또 현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그렇고,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어떤 사회문화 가운데 들어가 보던지 종교가 없는 데는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안 계신 듯이 사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믿지 아니하는 형제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말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는 도무지 않지만 몇 해전에 38선을 몰래 넘어 올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괴뢰군에 억지로 붙들려 나갔다가 석방되어 나온 애국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괴뢰군과 함께 몰려서 유엔군이 북진하여 올라갈 때, 저 삼각산 어떤 골짜기에 숨었는데 유엔군 비행기들이 대편대를 지어와서 폭격을 하고 기관총 소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그 저 공산당들과 정치 보위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솔포기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랍니다. 사람이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사람은 불치병적으로 종교적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사람에게는 먹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먹는 본능을 만족시킬 음식물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사교할 수 있는 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본능이 생겼습니다. 가령 눈을 보면, 눈이 필요하게 쓸만한 빛이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다고 하면 눈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귀가 있습니다. 이 귀가 들을 만한 소리가 있습니다.

, 우리 사람의 육체를 가만히 보면 감각이 있습니다. 가령 감각하는 기관, 눈이든지 코든지 하는 감각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냄새가 있습니다. 만일에 세상에 빛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사람에게 눈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깊은 굴 속에 못이 혹 있을 수가 있는데, 그런 못 가운데 사는 고기는 다른 것은 다  있지만 눈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캄캄한 데 사는 고기에게 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감각기관 있는 것은 벌써 대상이 있는 까닭에 감각기관 생긴 줄 압니다. 빛이 있어서 눈이 생겼고 , 소리가 있어서 귀가 생긴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은 이런 종교적 동물이요, 종교성이 있고 무엇을 숭배하려고 하는 영혼으로써 동경하는 이런 마음, 부인하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욕망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상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신 까닭입니다.

왜 봄에 풀이 위로 자랍니까? 위에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사람의 심령이 높은 것을 앙망하고 동경합니까?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환자입니다.

우리는 다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소경은 빛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간의 종교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성

 

다음에는 우리 인간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둘째로,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다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 된 증거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마비는 안됩니다. 언제나 어느 한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 할 때는 칭찬해주고, 잘못 할 때는 책망해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내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양심가운데 후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 요소를 다 제하여 버리고도 그 속에 선천적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인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 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 법칙을 준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와 우리사람과 도덕적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사람은 인격적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 되었음으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살펴볼 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 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살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자리에 누울 때, 혹은 아침 일찍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우주의 원인

 

그리고, 지금은 로마서 1 20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 하는 말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현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간단히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됩니다. 인과의 법칙대로 안되면 과학이 성립 못 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꼭 옳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대 우주의 이런 결과가 생겼은 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보고 특별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이렇게 또한 주장했습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보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 수 밖에 없는 데,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까지 그냥 있다고 요새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시 무종하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우주가 영원하다.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하다" 하는 이런 주장은 오늘의 과학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의 과학적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거의 단언합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전체가 몇 해전부터 시작이 되었겠나 그것을 측정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라늄 원소의 그 방사하는 것을 측정해보고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33 5천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우주전체의 연령은 약 백억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간에 시작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에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생물이 이 지구에 영원히 있었는가?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자라나고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 영원부터 살았느냐? 지질학을 연구해보면, 일정한 시기 그것도 아주 말기에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그대로 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식물도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주자체가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히브리서 3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 이시라"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절대의 신입니다. 하나님의 배후에 다른 원인이 있으면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수학을 좀 공부해 보신 분은 무궁대 또는 무한대의 개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하나입니다.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모두 무한대로 같습니다. 그런 반대의 이론은 이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견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아니할 수 가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고안(考案)

 

,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살펴보면 되는 대로 복잡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직이 꼭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하늘을 쳐 다 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의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가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계가 여럿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갤럭시(별무리)가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우주가 형성됩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큰 것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볼지라도 그렇습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속을 들여 다 보면 그 속에도 양자가 있고, 그 양자를 중심하여 빙빙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데서부터 작은 데까지 질서가 있습니다.

, 보십시오.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에 고안이 있습니다. 꽃을 보십시오. 이 꽃 한 송이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같은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생각해야 그 같이 만들 수 있겠나? 꼭 고안이 있습니다. 새 한 마리도 고안이 꼭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떻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그것뿐 만이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게끔 된 것을 보면, 기막힐 정도로 놀랍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들과 나비가 왔다갔다하지요. 벌과 나비가 왜 왕래합니까? 물론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꽃은 꿀을 거져 줍니까? 그렇지않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꽃가루가 서로 왔다 갔다 해서는 결국 씨를 맺게 만듭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동물이 쓸 데 없다고 호흡으로 내버린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은 동화작용으로 탄소를 섭취하고 내버리는 산소는 동물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협동하여 살게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에 의한 고안이 있습니다. 비 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 가면 물이 많지요. 햇빛에 쪼여서 남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서 찬 바람을 만나서는 다시 물이 되어 비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빗물이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모두 잡아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온 다음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비가 오면 이 땅을 아주 깨끗이 씻어줍니다. 비가 오래 안 오면 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저 백운대위의 먼지를 누가 씻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깨끗이 씻어버립니다. 그것뿐입니까? 빗방울이 사막에 떨어져서는 풀이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합니다.

땅을 깨끗이 씻은 빗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더러운 것들을 다 씻어다가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이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짭니까? 짜야 소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깨끗이 소제하고, 더러운 것을 다 흘러버리게 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합니다.

전에 제가 제네바에 가보니, 거기 호수 옆에 꽃을 가지고 시계를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두 꽃으로 만들었더군요. 그 속에 기계를 묻었습니다. 큰 바늘이 돌아갑니다. 꽃 시계입니다. 이 꽃 시계를 보고,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안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 곧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큰 정신 병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 우주에 대한 이론을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는 액나스티즘 즉 불가지론(不可知論)이요, 또 하나는, "이것이 다 거저 되었다.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19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이 하나님께서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고, 이 하나님께서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총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되 수 천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화를 삼 사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튼튼히 믿고, 어떠한 환경을 당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 신앙을 전파하여 우리민족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神性

 

지금은, 예수는 누구이시며, 그의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물으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각각들은 대로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엘리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예레미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세례요한,또는 선지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더이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일어나며 하는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 곧 구주라는 말입니다.

이 대답은 모든 제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대답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그 당시의 사람들처럼 선지자 중의 하나, 다시 말하면 성자 중의하나, 혹은 위대한 종교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실상 예수를 믿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의견은 이론적으로 성립도 되지 못합니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도덕적 사표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위대한 종교가 가운데 한 분이란 것도 틀림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는 과연 성인인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산상보훈을 보든지 그의 순결 무흠한 생활을 볼 때에 누가 예수님을 성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산상보훈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씀도 가르친 것이 많습니다. 가령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노라. 내가 죄를 사하여 줄 권세가 있노라"

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직접 사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내가 장차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터이요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또 사실 살아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가 바로 승천하시기 전에 말세에는 자기가 다시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보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입니까?

또는, 사실이 아닙니까? 만일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를 도덕적 인물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기자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혹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정신병자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감히 이런 생각이라도 하여 볼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인데, 이것이 사실이라 할 것이면 그는 정녕 사람이상 입니다. 사람만은 아닙니다. 과연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는 만유의 주로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단순히 도덕적 위대한 종교가로만 믿고 그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은 도무지 성립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요. 곧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이제 그의 하신 일을 간단히 생각해 보고 자 합니다.

그의 하신 일을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하나님의 경륜이 어떠하신 것이며 우리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가 있다고 하는 그 모든 진리를 우선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실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활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이 뜻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나 물론 제일 크신 일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만인의 죄를 대속하신 일입니다.

이제, 인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실인 십자가의 뜻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었습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능히 옳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또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서 이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결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 사랑으로써 세상에 보내시고 만민의 무거운 죄의 짐을 그의 어깨에 지우셨습니다. 그는 만민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죄의 형벌을 받아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갚았습니다.


 

십자가의 속죄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 죄는 주님께서 담당 하셨습니다. 단순히 그 다음부터 죄인이 구원 얻을 길은 자기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를 회개할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말씀은,

"네가 죄를 지었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죄를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너를 죄에서 구원한 예수가 있는데, 네가 네 죄를 대속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이것이 결국 심판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과 영벌이 이 문제로 필경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살 때에 무슨 죄를 지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 받을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길을 내가 거역하고 나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를 믿지않는 까닭으로써 결국은 정죄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 큰 죄가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지않는 까닭으로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말씀을 제가 읽을 때 직접 들으세요.

요한복음 3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아서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만 그 심판 아래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 36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동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죄를 짓고 안짓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이 지금 어떠한지, 과거 어떻게 많은 죄를 지었던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길은 이미 크게 열렸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음 곧 좋은 뉴스인데, 뉴스의 골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생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으라고 하였는데 ,영생이란 뜻은 무엇인가'?여기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보통으로 영생하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생의 한 부분이요, 전체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생은 지금 현재, 당장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면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현재에 소유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요한1 5 12절을 읽으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이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뜻을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영생이란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곧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영접하는 이는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영생을 그 마음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불멸의 생명인 까닭으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의 마음에 계시게 되면, 그 사람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 과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육에 속한 것은 없어지고 영적으로 변합니다.

고린도후서 5 17절에 이 변화를 가리켜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새로운 사람, 새사람, 다시 말하면 새 마음, 새 생각, 새 사랑,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희망,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다' 또는 '중생',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가령 쉽게 말하면, 어린애가 어두운 모태 속에 있다가 광명한 세계로 옮겨집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이렇게 나옴으로 세상에 옵니다. 다른 방법으로 올 수 없습니다. 출생함으로 옵니다. 역시 이 신생, 거듭나는 것도, 영적 세계에 낳는 것도 거듭 영으로 출생함으로 말미암아 영의 세계,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천국은 그저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생하여야,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낳는 사실은 갑자기 일어납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에게는 산고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그 자체는 즉각적으로 되는 것과 같이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으려고 할 때에 특별한 영적고민도 있고, 믿으려고 하는 마음도 있고,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와 애통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하여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내 주로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으로 영접하는 중생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은 제 말씀을 듣는 여러분 누구든지 참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 이 시간이라도 영접하면 즉각으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양이 아닙니다. 교육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르는 진리를 깨달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빈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면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마치 곤충 세계를 관찰 해보면 유충이 변하여 성충이 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온전한 변화가 있습니다. 유충으로 있을 때, 즉 벌레로 있을 때는 땅을 좋아하고 햇빛에 나왔다가도 땅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벌레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한번 변화하여 나비나 또는 벌 같은 것이 될 것 같으면 땅속에는 살 수 없습니다. 땅 밖에 나와야 합니다. 햇빛을 보아야 합니다. 날아다녀야 합니다.

 

 

 

 중생자의 변화

 

중생한 사람의 경험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에는 육에 속해서 땅에 속해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특색이었지만, 한번 주님을 영접한 후, 성신으로 거듭나게 되면 위에 있는 것을 찾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그 특징이 됩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중생한 사람은 자기도 중생한 줄 알고 또한 다른 이도 알게 됩니다.

요한1 5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함 이라."

중생이 있으면, 이미 중생한 후에는 내게 영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중생한 것을 아십니까?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고 한다면, 그 가족으로 출생해야 합니다. 태어나야 실상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유산,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온 천지만물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금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지금도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축복입니까!

지금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접하십니까?

마음 문을 열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영생을 이제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신학도 있습니다. 신조도 물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위대한 도덕적 교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 기독교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최대의 뉴스입니다. 평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이 기쁜 뉴스를 다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한 두시간에 이 기쁜 뉴스를 다 말할 수 는 없습니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이 뉴스를 좀 더 아시고, 기독교의 진리를 좀 배우려고 원하신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십시오.

여러분 이웃에 있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그와 같이하면 여러분은 이 뉴스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생명나무쉼터/한아름

[질문] : 신약 성경을 읽다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0)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상기 구절의 영광이 각기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 영광(榮光)은 하나님만의 광채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영광”이라는 용어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에만 적용됩니다. 그 의미는 쉽게 말해 하나님께 도저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이나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광채가 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간혹 인간이나 물건에도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앞뒤 문맥만 잘 살피면 금방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를 구약과 신약에 각각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에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그 얼굴에 반사되어서 백성들이 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30) 또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랐을 때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1,2)

 

하나님의 영광은 빛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사 4:5) 구름과 연기와 화염의 빛을 “그 모든 영광”이라고 합니다. 구름이나 연기로도 그 영광을 드러내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느꼈을 때의 인간 인식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실체가 임재하면 그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한 것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불’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고도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나 상황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8,19)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원했지만 직접 그분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바위틈에 숨게 하고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으로 모세 앞에 지나게 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등이었습니다.(23절) 말하자면 인간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모든 선한 형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이 아니라 등입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광채도 단순히 그분을 인식토록 만든 수단으로써 빛이 동원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나타나시든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싶으면 인간이 그분의 임재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A. Richardson 이라는 신학자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지상(地上) 임재(臨在)를, 주로 빛으로 나타나는, 인간이 인식한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Bengel은 더 명료하게 “영광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이다”(The Glory is the Divinty manifests.)라고 정의했습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

 

그러나 영광을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는 빛 같은 물리적 현상에만 제한시켜 이해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영광은 그분의 속성 전체를 망라한다고 봐야 합니다. 쉽게 비유하면 이러합니다. 아주 의로운 사람이나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말로 ‘아우라’라고 표현하듯이 왠지 모르게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고 큰 권위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빛이 나거나 물리적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쌓아온 그 모든 성품이나 실력, 나아가 그 인격체 자체가 아우라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도 이러할진대 정말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교제, 동행한 체험이 있다면 그분에게서 느끼는 아우라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영광이라는 한 단어로 밖에는 말입니다. 영광은 그분의 임재는 물론 동행하심을 직접 겪고 난 이후에 그분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속하지만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그들로 당신을 알게 했던 그 모든 신앙체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1)

 

이스라엘이 당신께서 간섭하신 내용을 제대로 안다면 도무지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 8:1)

 

하늘 위에 영광을 두셨으니 하늘의 별빛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쉽게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동일 내용을 평행구절로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대표적 수사법입니다.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은 동의어입니다. 주의 이름 즉, 그분의 모든 속성을 온 땅과 온 하늘, 우주 만물에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여기서 영광은 그분의 그분다우심, 그분의 모든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지지 않는다.(immortal)”(롬 1:23)고 형용했습니다.

 

요컨대 영광은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 고귀한 성품, 권세, 힘 등이 다 없어져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품성, 권위, 능력 등이 다 합쳐져서 겉으로 드러나는 아우라 즉, 영광이 사라지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alvin은 “우리가 그분을 알 때 그분의 영광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비록 영광이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빛, 구름, 연기 같이 물리적 양상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종교적 관념으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과 당신 사이에서 반드시 지정의적 반응이 수반되는 영적 교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그분의 영광을 맛보면 반드시 1) 그분의 그분다우심에 대한 경외감과, 2)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겸비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을 보고 지각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와 그 피조물에 드러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에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운행되는 모습을 볼 때에 그분의 숨결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창조와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당신의 영광스런 속성을 인간에게도 부여했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영광을 인간도 일부 갖고 있기에 인간을 숭배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할 수 있고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려야 할 책임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둘째 대상은 예수님과 그 십자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9,14,17)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다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어 죄인을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외적으로는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셨기에 찬란한 광채가 나는 상태와는 전혀 반대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더라도 죄인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뜻은 도무지 인간의 생각과 다른 오직 그분만의 성품이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그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는 그분에 대한 경외감과 자신에 대한 겸비함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는”(눅 24:2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스승의 참혹했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시작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견뎌낸 성도들에게는 독생자의 영광으로 덧입히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천국에서 부활한 성도는 영광스런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4) 부활한 성도도 주님과 함께 강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창조와 재림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성령의 간섭으로 신자의 영이 거듭나야 비로소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신자 속에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교통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아니 평소에도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중에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서있다는 인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위대한 능력, 신비한 섭리, 완전하신 인도, 또 장래에 보여주실 비전 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리게 됩니다. 외적 예배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심령이 완전히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신의 심령과 삶에 가득 채워지기를 소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여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어지며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역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신자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경외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장하게 됩니다.

 

반드시 거창한 종교적 의식이나 업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뜻이 세상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듯이 사탄의 미혹된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죄에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려고만 해도, 하나님 외의 어떤 다른 존재나 대상을 경배해선 안 됩니다. 특별히 사람들과 자신을 높이는 그 어떤 것이라도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언제나 질투의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출 34: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만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셨기에 절대적 배타적 사랑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신자는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 1항대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구체적 예들

 

지금껏 설명 드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근본 개념을 갖고서 질의하신 세 구절의 구체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 2:20)

 

본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온전히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만 수긍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를 보고 들으면서 그 분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또 천사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들의 말대로 베들레헴에 가서 보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 강보에 안고 있음을 목도했습니다.(2:8-19) 이 모두가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는 와중에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권세에 온전히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또 그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 웅장한 찬양을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합창곡보다 더 장엄하고 경건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또 그 예언대로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틀림없이 천사의 예언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즉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1) 본문의 영광도 같은 의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실제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휘어져 광채가 나더니 무든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29,30절)였습니다. 성경에 구체적 묘사가 없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가 본 것은 천국의 영광이었습니다. 지상세계와 전혀 다른 광채와 위엄이 아름답게 눈앞에 펼쳐졌던 것입니다.

 

변화산 기사의 첫 머리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팔일 쯤 되어”(28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려고 산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라는 말씀입니다. 제자 중 일부가 죽기 전에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세 제자가 본 것은 실제 천국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했으면 베드로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싫다고 말했을까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 기도의 시작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동일한 사역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통해 복음의 비밀 깨닫게 되고, 또 성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 같이 하나가 되며, 비록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나 진리로 이겨내며, 하나님이 당신을 세상에 보낸 것 같이 저들도 세상으로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제자들을 볼 때에 아버지의 이름과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3-26)

 

요컨대,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께서 인간 앞에 당신다우심을 직접 나타내실 때에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장엄함과 거룩함을 말합니다. 그분의 현현(顯現)은 천사나 빛과 구름 같은 가시적 매개체를 통해, 혹은 말씀과 기도 같은 신자와의 불가시적인 영적교통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떤 경로가 되었던 그분을 실제로 만나 그분의 마음을 읽게 된 신자는 그분을 향한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또 마땅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그분 뜻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 외의 어떤 반응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의 영광을 실제로 본 것도 아닙니다.

 

10/30/2012

http://cafe.daum.net/aspire7/ElV1/74?docid=3982056241&q=%C7%CF%B3%AA%B4%D4%C0%C7+%BF%B5%B1%A4%C0%CC%B6%F5/개혁주의마을/이지명


1. 서론

        현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다. 80 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의 존립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큰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태만의 소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주 5일 근무제의 실시를 앞두고 그 분명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서 더욱더 흔들리고 있다. 참고로 안명준, “주 5일 근무와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 크리스천투데이 신문 11월 9일,
http://www.chtoday.com/new/template/news_view.htm?code=oc&id=158
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크게 두드러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신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중요 내용의 범위는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다루지 않았다.

I.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최근 미국의 한 기독신문사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문제점들을 조사하였다. “목회자 '지나친 성장주의' 갱신대상 1호: 종교 개혁절 교회갱신 설문조사 66%응답.
미주 목회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교회의 문제점으로 '지나친 교회성장주의'를 꼽아 관심을 모은다. 이는 미주크리스천신문(발행인: 장영춘 목사)가 최근 종교개혁 484주년을 맞아 미주교회 목회자 1백명을 대상으로 교회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나타난 것으로 전체 응답자의 66%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를 교회갱신 목록 제1호로 꼽았다. 두 번째로 많았던 응답은 목회자의 세속화와 성직자 탈선 등과 같은 '목회자 자질 문제'(18%)였으며, 그 다음은 '윤리의식의 실종'(14%)이었다. 교회가 바람직한 냠린�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는 '성경으로 돌아가자'(58%)가 가장 많은 응답을 보였으며 '목회자의 각성과 개혁'(37%)도 꽤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밖에 '교단에서 안수조건 및 기준 강화', '대형 교회주의 지양', '평신도 바로 세우기' 등의 의견이 제기됐다. 미주크리스천신문이 목회자들에게 설문한 내용은 △오늘날 교회들의 잘못된 점들은 무엇인가? △교회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이었으며 서부와 동부의 목회자들을 무작위로 선정, 설문 대상을 뽑았다.“ http://www.Christiantoday.com에서 인용.
물론 미국이었지만 우리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점으로 삼는 주된 것들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 목회자들의 세속화와 탈선, 그리고 윤리의식의 실종으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참고로 기독교신문 취재팀 편, 『한국교회의 허와 실』, 1, 2, 3, (서울: 쿰란출판사, 1993); 김명혁, 『한국교회 쟁점진단』, (서울: 규장, 1998); 강원돈,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http://www.socialethics.org. 여기서 강원돈 교수는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으로 근본주의, 물량적 성공주의, 개교회주의, 교파주의, 사회윤리 문제와 선교의 과제에 대해 닫힌 정치적 신학,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부터 유리된 신학적 담론형성에서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본다.  손봉호, 홍치모, 김영우, “종교개혁과 현 한국교회개혁의 방향”, 『총신대보』, 2001년 11월 8일(화) 제 242호, http://csdb.net/all.htm; 채 수 일, “한국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판,”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월례포럼 (2001. 6. 25), http://www.minjungtheology.net/forum/f2001-06-csi.htm.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말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개혁이 문제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목회자와 신자의 도덕성에 관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구와 제도로서의 교회에 관계된 것이다. 성직자와 신자의 각종 스캔들에서부터 지도층 인사들의 선거에서의 금품수수, 각종 신학교의 난립과 명분 없는 교파 분열, 재산권과 교권을 중심으로 한 다툼, 대형교회의 세습, 교회의 양극화 등은 당사자의 개인적 비리를 넘어 기독교와 한국교회 자체의 이미지는 물론 종교로서의 공신력을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도로서의 한국교회의 문제로서는 친미 반공주의, 정치-경제 권력과의 유착, 교회 안의 성차별과 성폭력, 권위주의적 성직자 중심주의, 대형교회 재정운영의 불투명성, 무분별하고 전투적인 해외선교 행태 등이 비판의 표적에 들어올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먼저 다루려고 한다.

   1) 극단적 이원론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로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들을 수 있다. 이원론(dualism)은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손봉호 교수는 이원론에 대한 정의로 “일반적으로 현실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현실의 근본적인 기원을 서로 동등한 두 가지의 원칙에서 찾으려는 견해를 말한다”라고 한다. 손봉호, “이원론,” 『신학사전』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84).
이원론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동양학자 토마스 하이드 (Thomas Hyde)가 『고대 페르시아인의 종교의 역사』(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 1700)라는 책에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영구히 대립하는 종교체계를 이 말로 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형태는 플라톤의 이데아계(영지계)와 감성계(현상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 Timaeus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줬다. 이 책은 우주론에 대한 요약으로, 그는 세상은 Demiurg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혼돈된 물질 위에 형상의 패턴을 인쇄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주장하기를 학문은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 항상 변하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하게 진실이 될 수 없으며, 보이는 세계는 영원하고 참된 것의 하나의 복사요, 하나의 상(像)이다라고 한다. "He pointed out that science cannot be accurately true since it deals with the
temporal, the finite, the forever changing, never with the eternal. But yet the
visible world is a copy, an image, of what is eternal and true." Hamilton and Huntington Cairns, "Introduction," in Timaues, The Collected Dialogu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3), p. 1151.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유한과 무한의 차이를(the difference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말하고 있다. 이 사상은 서구의 철학사를 흘러서 교부들과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에서 변증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유한과 무한의(infinite, unlimited) 관계를 말한 내용은 Philebus 15b-17b.
그는 이원론 사상을 설명하기를 보이는 것들은 복사나 유사한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All visible things are the copy and likeness, not the eternal things themselves, Timaeus 29c)라고 한다.
        결국 플라톤은 철저한 이원론(실제와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에서 전자가 후자 보다 더 우월하다.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필로를 통하여 클레멘트, 오리겐 문제가 되는 그의 성자의 종속론적 삼위일체, 영혼의 선재, 우주적 타락, 성육신 교리 등은 모두 플라톤의 영향이다.
,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플라톤의 영향도 제법 크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해석, 지식의 궁극 목표는 지복이라고 하는 가르침, 이데아들과 영원한 진리들은 항존한다고 하는 일, 그리고 인간의 지식은 신적 정신에 의한 조명이라고 하는 설명 등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데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교부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경을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했다. 안명준, 『칼빈의 성경해석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23-35.

        서구 철학에서는 이원론이 대표적으로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여러 개념들이 이원론적 대립의 구도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육과 영,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를 이원론의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은 이원론의 유혹을 물리치는 강한 무기라고 말한다. 손봉호. 이원론.

        초기 한국교회는 경건하고 헌신된 선교사들을 통하여 건전한 신학과 경건한 신앙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박응규, "일체하 한국 교회의 종말론 형성에 관한 연구," 『역사신학 논총』, 제 2집 2000, p. 183;  이 덕 주,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6 호; 장동민,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논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6 호.
이들을 통하여 신학교가 세워지고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의 핍박과 6 25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었다. 80년대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교회는 물질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격동기의 시련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민족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세상과 내세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고, 경제적 풍성함과 사회적, 윤리적 자유의 시대를 맞이해서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자의 구도에서는 기도와 기도원 그리고 치료의 은사와 신비주의의 강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후자의 구도에서는 지상 교회 내에서 특별은총의 충만함을 강조하였고,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세상에서는 특별은혜의 적용이 미약하였다. 전자의 경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했지만, 후자는 점차적으로 영역적 이원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 수직적 신앙의 형태에서 수평적인 신앙의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의 개인의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과 사회구원을 주장한 진보적 신앙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 그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교회가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며 그 숫자적으로 많은 성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목회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목회자들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의 수정 없이는 참된 목회나 성도들의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다. 한국교회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현을 이 땅위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 천국인 장소로 인식하고 기독교인들이 삶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강조한 결과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이원화 문제에 대한 참고로 홍성국, “현대 한국 기독교회의 이중성,” 『복음과 신학』 4 (2001), 9-28; 신현수,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 문제,” 『복음과 신학』 4 (2001), 63-84.


2)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많은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 카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은 성례전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윌리엄 워커, 『기독교회사』 (서울: 한국기독교문화원, 1987), 63.
그리고 주교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폴 스티븐스,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서울: IVP, 2001), 52.
심지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와 논쟁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특히 예정론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한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로마 교회의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시켰다. 성직자들은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하였다.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하였다.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된 교회를 강조하였다. 결국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구원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 보다는 전통과 기구적인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독재적이며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장성우, 1992년 이후의 한국교회 권위적 구조의 문제점 분석비판-체제이론의 Feedback을 중심으로, http://www.kccs.pe.kr/thesis09.htm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킨다. 그런 지도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 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멸할 것이다. 한스 큉은 성령은 로마 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에드먼트 클라우니, 『교회』 (서울: IVP, 1998),  63.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 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들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는 말은 로마카톨릭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에 공로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하여 개혁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을 비판하였던 개혁자들의 소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들리지 않고 있다.


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한국교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과 치리를 바르게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관심이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국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 대형교회는 많은 목회자들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이론의 대가인 맥가브랜(Donald A. McGavran)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위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은 참고로 Myung Jun Ahn, "Current Theological Issues in Korea," Theological Forum Reformed Ecumenical Council, vol. 26 (1998): 23-26. 인터넷 참고는 http://www.gospelcom.net/rec/TFDec98.html. 교회성장에 관한 연구를 위한 참고로 전호진, “한국교회의 성장과 해외선교”,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호, 자료 인용 http://user.chollian.net/~ikch0102.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 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들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한국 초대 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하여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 교회의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 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리게 하였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 교회의 생태계에 지각 변동이 왔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들과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 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담임 목회자의 힘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를 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바로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있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한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하지 않을까?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 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4) 개 교회주의        

        한국 교회는 그 저변에 개 교회주의라는 사상으로 교회의 성장 신화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친 잘못된 개 교회주의를 해체하고 기독교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개 교회주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 교회로서 지 교회의 외형적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나타난 배경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네비우스 방법의 부정적인 면이 바로 개 교회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강원돈,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런 네비우스 방법은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면은 물론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듯이 지나치게 될 때 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개 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김남식은 교회의 일치에 부족과 경제적인 면에서 너무 집착한 점을 네비우스 선교 방법의 약점으로 지적한다.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특별 좌담회』, (서울:베다니, 1997), 176.
외국과는 달리 한국처럼 교파의 벽이 높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 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개 교회주의의 심각한 원인 중에 근본적인 것은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이다. 현 한국과 미주의 각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은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지만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들이 서로 경쟁을 심하게 해야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나라의 젋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나라가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는 사회적 활동과 봉사를 한창 할 나이에 비생산적이며 정적인 삶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국가적 손실이 많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와 같이 승려가 많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개 교회주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 번째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위의 주님의 형제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교회들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며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 시킨다. 이런 결과는 이단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가 감당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의 피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두 번째 지나친 개 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는 이단으로 되기 쉽다. 특히 개 교회주의 속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교회에 미칠 때는 이미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지난 과거를 보면 이단들이 어떻게 거대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면 이런 개 교회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세 번째 개 교회주의는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 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현세적이며 형태적으로 흐르게 한다. 개 교회주의의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오직 개 교회에만 국한되어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실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김동호 목사  는 한 일간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너무 교회만을 위해 살아 왔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인도 생겼지요, 건실한 사회인,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집중해야 합니다.“ 중앙일보 2002년 01월 10일.
그의 말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개 교회주의에 묶여 사회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5)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현재 21세기의 한국사회는 무속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마니즘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동아일보 2002년 3월 21일. 기사 제목 "백남준 예술세계는 샤머니즘과 통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n=200203210331&main=1
ꡒ첨단 미디어아트는 한국의 원초적인 샤머니즘과 통한다. 비디오아트와 같은 미디어아트는 가상과 현실 사이에 새로운 교류의 공간을 마련한다. 샤머니즘에서 무당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 저승과 이승, 초월 공간과 현실 공간을 매개하는 일종의 미디어 역할을 한다. 백남준(사진)의 비디오아트도 이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 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마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만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이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마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샤만유산의 발견』, Unpublished Paper,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1998년. 샤만니즘에 대한연구로  Mircea Eliade, Shamman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 단체들의 행사에서 진혼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을 조장하는 무속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 보다도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왕국으로서 심지어 신 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으로 통하여 방송되었다. 무속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미신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샤만이란 말은 시베리아의 퉁그스족의 언어인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 예언자 및 의사를 뜻한다. 만주족의 살만과 인도의 sramana(산스크리트어로 승려)은 동일 계열의 어원으로 알려졌다. 샤만의 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 현재적인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백재,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샤마니즘, 『두산백과사전』.
이와 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때 멸종한 듯 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와 무속에 관한 연구로 신경하, 무속 현상에 대한 목회적 대응, 『기독교사상』, 1996, 12월, 61-68.; 노치준, 한국 기독교와 기복신앙, 『전통과 현대』, 1998, 가을호, 134-151.

이런 요소는 전도에서 나타난다.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를 기복적인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된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 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마니즘적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라는 믿음이다.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신앙은 현세 중심적 기복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 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와 샤마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 고치는 일에만 제한 시킨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이 자신을 위하여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가깝다. 아무 조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서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한번 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하여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6) 목회자의 윤리의 실종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많이 받아 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의 목회자의 윤리적 붕괴를 맞이하고 있다.
        기독교는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의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가 있었으며,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고,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몇몇 목회자들로 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돈의 사용에 문제를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랫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빛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먼저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 타락에서 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시대를 감각의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의 시대라고도 불리 운다.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에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전 성 경험은 해마다 그 숫자가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성 윤리는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으로 즐기고 보자 라는 사고로 전환 되고있다. 많은 인터넷 음란사이트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 메일로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이 메일까지 보내고 있다. 바로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따르면 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은 46건으로 나타났다. http://www.8275.org/article/
한국성폭력상담소 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http://www.sisters.or.kr/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이성문제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성문제로 교회에서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타락은 목회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Richard C. Gamble,  "Reformed Theology and its Relevance to Evangelical Theology," Unpublished Paper,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vangelical Theology, Korea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2001. 44.
최근의 한 언론에서 보도 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는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2001년 6월 7일.
요즘 한국의 어떤 목회자들은 교회를 조용한 사임을 조건으로 또는 퇴임하는 조건으로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하여 어떤 목회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교회의 공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자기가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에 대한 시험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그 명예의 직함 보다는 섬기는 리더로서,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사역을 모든 사람들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에 서로 하려고 세상적인 방법을 쓰고, 그것도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하여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가 있는 것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 전에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국민일보 2002년 1월 3일.

        최근 한국 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자들 역시 개 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 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왕적인 기능을 감당하는 기관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하여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손봉호 교수가 제안하는 목회자 윤리강령, 『디지털 성결』, 제316호 2001년 3월 10일.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으며, 감정적이고 야비하고 저속한 말을 하지 말며, 일 처리를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으로 하며, 편견, 편애, 과장, 왜곡을 피해야 한다. 소득과 소비에 있어 절제하고 검소하며, 자격 없이 명예, 지위, 권리의 획득을 시도하지 않으며, 가정에 충실하고 이성문제로 어떤 오해도 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기호와 취미활동에 지나치게 탐닉하지 않으며,타 종교인에 공정하고 예의를 지키고, 공익을 위한 사회적 활동은 하지만 파당적 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  http://www.kehcnews.co.kr/news/2001/316/인물손봉호.htm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맹에 의하여 공식으로 결정된 목회자 윤리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3.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의 극복을 위한 과제

         한국교회는 잘못된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서 분리되어 내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임을 교회에서 주장해야 한다. 이 세상을 도피하거나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의 변혁자로서 사는 크리스천의 삶을 말해야 한다.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서울: IVP, 1986).

 잘못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이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며, 오직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 성령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맹목적 권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목회자의 참된 기능과 평신도들의 은사에 맞는 교회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대형교회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감시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약화되어 가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과거 한국 교회는 개 교회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통하여 교회에 대한 사랑과 기도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연합성과 통일성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잘못된 개 교회주의 사고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사고의 실현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일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올바른 말씀의 적용과 성령이 하나로 매는 역사를 통하여 새롭고 건전하게 성숙해 질 것이다.

한국교회는 샤마니즘의 요소들을 스스로 버릴 때가 되었다.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대에 기복적 물질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받아 들였다. 그러나 기복적인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축복을 바르게 가르켜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가르켜야 한다. 또 현세 중심적 구원의 축복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지 현세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목회자 윤리에 대한 의식이 먼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목회자는 신앙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어 타의 모범을 보이며, 지나치게 비 성경적인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주의 종으로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며, 영성 뿐만 아니라 전인격의 수양도 필요하다.

 

복음 전파에 헌신한 바울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윤리가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의 윤리의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

4. 결론

한국교회의 여러 신학적 문제점은 다양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또 현대의 세속적 사상에 의해서 교회가 변질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많이 닮아 가는 현상은 한국 교회가 성경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는 성경의 권위가 실시되며 신학과 목회가 성경으로 검증 받아 참된 교회를 위한 올바른 신학의 모습을 되찾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은 이제 그 극복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1. 타락한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보다 더 타락한 교회는 없었을 것 같다. 교회사 학자 몇 분에게 물어봐도 그런 예를 제시하지 못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성적 스캔들을 일으키고, 수억을 횡령하여 감옥에 들어가고,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자식에게 세습하는 예가 빈번하다.

  어떤 교단의 총회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기관이 억대의 돈이 오고가는 선거로 회장을 뽑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어떤 교단 총회에는 조폭이 동원되고 가스총이 등장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 개신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인하는 교회와 총회들이 이렇게 많은 나라도 한국 외에는 없다.

  어느 다른 나라에서도 교인들 목회자의 세습을 절대다수로 찬동한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적 수준보다 낮은 나라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해 1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개신교인들을 포함한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조사할 결과 17.6%만이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개신교인이 인구의 약 19%를 차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개신교인들 가운데도 개신교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09년 18.4%보다 떨어졌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41.4%, 불교 33.5%에 비해서도 월등하게 낮다.

  한 NGO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신을 받는 집단이 정치인들이고 두 번째로 불신을 받는 사람들이 종교인으로 드러났는데, 그 종교인들 가운데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장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1+1=2란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 따라서 누가 그것을 주장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기꾼이 1+1=라 주장한다 하여 그 사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1=3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보통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계시의 종교는 마치 1+1=3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3위 1체, 예수님의 양성, 부활, 동정녀 탄생 같은 것은 모두 1+1=3이란 것과 같이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2세기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말이 안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 absurdum)라는 우명한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계시의 종교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고 이기적이라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충선된 증인”, 즉 “믿을 만한” (pistos) 중인인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이었으며 모든 신자들도 믿을만한 증인이 되어야 복음을 올바로 증거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지 못하는 교회와 교인은 계시에 근거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한국 교회가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나 6.25 전쟁 때 공산군의 핍박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이다.

  과거의 위기는 외부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교회와 신앙을 정화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교회 내부에서 부패로 인한 것이고 성경적인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기 때문에 회복을 매우 어렵게 하는 성질의 것이다.  


  교회의 타락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는 주위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다.  주위 이방 나라들과 다른 방법으로 타락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

  구교가 타락했을 때는 성경의 가르침과 도덕적 원칙을 어겨가며 그 때 세상이 섬기던 우상, 즉 돈과 권력을 추구했다. 한국 교회가 타락하는 것도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세상이 은을 섬길 때 타락한 교회는 금을 섬기는 경우는 없다.


  우상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울이 분명히 가르친다 (고전 8:4).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거나 하나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인 줄 알고 믿는 것이 우상숭배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들이 섬기는 것이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나 교인도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은 믿을만한 것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상인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 대부분은 “우리 교회”란 우상을 섬긴다. 개교회주의가 정도를 넘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에 해가 되더라도 “우리 교회” 성장이나 명예에 이익이 되면 감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이는 것이라도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은 누가 봐도 비신사적이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양 훔치기” (sheep snatching)나 대형버스가 온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교인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 “교회 장사” 한다고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렇게 더럽혀지고 교회 전체의 사역이 큰 방해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자행된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교회의 명예보다 “우리 교회”의 성장과 영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하나님 사랑이 교회 사랑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수억 원의 돈을 부정하게 쓰면서 총회장이 되거나 기독교 단체의 대표가 되는 것,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비난과 냉소는 정당하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나 교회를 오해해서 그것을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궤변 중에 궤변이다. 하나님 영광과 전체 교회의 명예와 신임도에 큰 해가 되는 것이 자명한데도 그것을 감행하는 것은 명예와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인데도 자신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세씁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이 우상숭배고, 그것은 신사참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우상숭배다. 신사참배는 외부 세력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천황을 신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아무 압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세습을 감행하는 것은 자발적인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우리 교회 우상”이나 성직매매, 세습 등의 배후에 작용하는 것은 “탐심의 우상”이다.  바울사도는 엡5:5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고 주님도 마6:24에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한국 교회가 섬기는 우상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섬기는 돈, 명예, 권력의 우상과 같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울처럼 세상적인 이익이나 특권을 배설물로 치부한다면 탐심의 우상숭배가 생겨날 수가 없다. 

 

2. 차세중심적 한국적 세계관


 돈, 권력, 명예는 오늘날 전 세계,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열심히 추구한다. 그것들은 공유가 불가능한 (zero-sum) 가치들이다.  즉 한 사람이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경쟁심이 가장 강한 것과 돈, 권력, 명예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한국인의 이 엄청난 경쟁심 덕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불과 60년 만에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성취하지 못한 두 가지를 거뜬히 이룩했다.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했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2009년에는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회원이 됨으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6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Korean Dream을 쫓아 한국에 찾아왔다. 과학기술 수준도 세계에서 7위 정도를 유지하고, 교육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문화적으로도 한류가 전 세계에 휩쓸고 싸이가 세계 방방곡곡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매우 불행하다. 영국의 레가툼연구소 (Legatum Institute)가 발표한 2011년도 번영지수 (Prosperity Index)에 의하면 한국의 생활만족도 (Average Life Satisfaction)은 세계 110개국 가운데 104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28.4명으로 OECD 국가들에서 1위이며, 2위인 헝가리의 19.4명과의 차이가 9명이나 된다는 객관적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의 노인들의 경우 10만 명당 81.4명이 자살해서 일본의 일본 17.9명, 미국의 14.1명의 거의 5배나 된다.  경제가 아무리 좋아지고 과학기술과 문화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민이 불행하면 그 모든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불행한가? 그것은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그 경쟁이 공정하게만 이뤄지면 억울한 사람이 생겨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는 경쟁심은 유난히 강한데도 도덕적 수준은 너무 낮아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질투가 생기고 억울한 사람이 많아지면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국제투명성기구는 2011년 한국의 투명성이 세계에서 43위로 아프리카의 보츠와나 32위보다 11이나 뒤떨어진다 했다.

  

  김승규 전 법무부 장관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2000년 한국에서 위증으로 기소된 사람의 수는 일본의 671배이며, 무고로 기소된 사람은 무려 4151배나 된다 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선진국이나 윤리에 있어서는 후진국이 아니라 야만국에 가깝다.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가톨릭을 포함해서 전 인구의 1%정도인데 한국에는 천주교인을 포함하면 27%나 된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이렇게 불투명하고 불공정하다.

  이렇게 경쟁심이 강하고 도덕적 수준이 낮은 것은 한국의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간 사회는 이런 저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대부분의 경우 그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종교에 의하여 형성된다.


  한국의 세계관은 주로 무속종교와 유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던 것은 불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에 끼친 불교의 영향은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세계문화 분류에서 한국은 불교 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유교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가 가장 최근까지 근 500년을 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가장 크게 남아 있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가장 최근의 지배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이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무속신앙의 세계관과 비슷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유교의 영향이 큰 것이 아닌가 한다.


  무속신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권을 이룩할 만큼 세계적인 종교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고 유교나 불교 수준의 고등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속적 문화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저변에 흐르면서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무속종교란 주장이 일반적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한국에 들어 온 모든 고등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무속화한 것만 보아도 그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불교 사찰에는 거의 빠짐없이 무속 신앙과 관계있는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고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은 무속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교와 무속종교의 공통점은 둘 다 절대 신이나 내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속종교도 귀신을 인정하나 무당에 의하여 쫓겨나가거나 복을 가져다 줄 정도일 뿐 자체의 독립적인 의지와 전능한 능력을 가진 절대 신이 아니다.

 

무교는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축복기원이 그 핵심이다. 무병장수 (無病長壽), 부귀영화 (富貴榮華), 무사태평 (無事泰平)이 그 이상이다. 그런 축복은 선한 삶, 부지런한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귀신들의 자의적인 호의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으로 우연한 운수의 결과로 본다.

 

  유교도 신이나 내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공자의 제자 계로 (季路)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나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죽음에 대한 질문에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느냐 하고 대답함으로 내세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한국 무교와 유교는 절대 신이나 내세를 부인하는 철저한 인간중심적, 차세중심적인 (diesseitig) 세계관을 형성해 놓았다. 이런 세계관은 다양한 형태의 한국적 특성을 생산해 놓았다. 그 가운데는 물론 긍정적인 것들이 없지 않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경의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삶의 모든 가치와 목적은 이 세상에서 이룩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다른 나라보다 더 경쟁심이 강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풍토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차세중심적 세계관이 없었다면 한국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경제적 발전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매우 뒤떨어진 윤리문화다.  경제, 예술, 과학기술, 스포츠 등 경쟁적인 추구의 대상이 되는 분야는 매우 빨리 발전하고 성공했으나 비경쟁적인 분야는 매우 뒤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윤리다.

 

  윤리는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부당하게 이익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가능한 것이다. 더 윤리적이 되기 위하여 경쟁하는 사람은 없고, 도덕성에서 1등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없다.

  도덕적이 되면 경제나 정치 등 다른 분야에서 오히려 1등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오기가 쉽다. “정직하면 잘못 산다”는 생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는 ‘신과 내세가 존재해야 건강한 윤리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논리는 복잡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실제로 모든 선행이 다 보상을 받고 모든 악이 다 철저하게 보응을 받지 못하므로 완벽한 정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이 세상이 전부라면 구태여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할 유혹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세가 있다고 믿으면 이 세상에서 미완된 인과보응이 거기서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의가 실현되려면 인과보응을 집행하는 전능한 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세도, 신도 믿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악을 행할 유혹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인격적 신이나 인과보응을 주제하는 우주의 법칙 같은 것을 무시하면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감시자(police within)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다.  한국의 윤리적 수준이 낮고 특히 정직에 뛰어나지 못한 것은 이런 차세중심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세계관에서 성취해야 할 삶의 의미는 효경이 말하는 입신양명 (立身揚名)이다.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유명해지는 길은 시대마다 달랐다.  시대에 따라 좋은 가문, 높은 학식, 높은 벼슬자리, 돈 등이 이름을 날리는 수단이었다.

  오늘날에는 돈, 권력, 명예가 한국인의 우상이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돈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다.  차세중심적 세계관이 한국 사회로 하여금 돈의 우상을 섬기게 하고 도덕적 수준을 낮게 한다.


  역사상 어느 다른 시대에도 오늘에 만큼 돈이 모든 가치를 주도하고 모든 가치의 표준으로 등극하지는 않았다.  돈은 오늘날 생물학적 생존을 보장해주고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를 넘어 정치적 권력, 사회적 명예, 학문적 성취, 예술적 창조, 운동경기의 승리, 심지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 까지 도와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가문, 명예, 존경, 사랑, 인기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졌다.

  돈은 흔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 하지만, 앞으로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에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 그 자체를 얻는 것이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돈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거뜬히 등극했다.  오늘날의 돈만큼 전 세계가 숭배하고 믿는 우상은 역사상 존재해 본 일이  없다.


  특히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돈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8년 4월 8일 일본청소년연구소가 한국, 일본, 미국, 중국의 고교생 1000-1500명씩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한 결과 한국학생의 50.4%는 “부자가 되는 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응답했고, 일본 학생은 33%, 중국 학생은 27%, 미국 학생은 22.1%가 그렇게 응답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선 어떤 수단을 써도 괜찮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23.3%가 동의해서 미국 21.2%, 일본 13.4%, 중국 5.6%보다 높았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은 54.3%나 동의했는데, 미국, 일본, 중국은 30%대였다 한다.


  한국인이 삶에 불만이 많은 것도 돈을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돈은 공유불가능(zero-sum)한 하급가치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그렇지 않아도 경쟁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인을 더 경쟁적이 되게 하고 질투와 갈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랑, 지혜, 지식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적게 가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질투와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런 공유 가능한 가치는 고급 가치라 할 수 있는 반면에 돈, 권력, 명성 같이 공유 불가능한 가치들은 하급가치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가치들은 사람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질투심과 갈등을 조장하며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인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낮은 수준의 도덕이다.  도덕이란 다른 사람에게 직접 혹은 간접으로 해를 끼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인데, 도덕적 수준이 낮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빈도가 높고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에는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자연에 의하여 결정되었지만 현대인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그런데 윤리문화가 뒤떨어져서 사람이 사람에게 해가 되도록 행동하면 해를 입은 사람은 불행할 것이고, 전체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낮으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윤리적 질서가 깨어지면 모든 사람이 그 피해자가 되지만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더 큰 피해자가 된다.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크고 튼튼한 차를 모는 사람보다는 작고 약한 차를 모는 사람이 더 큰 손해를 보고 자전거를 타거나 � 다니는 사람은 길거리에 나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비윤리적인 행동은 정의에 어긋나고, 모든 비윤리적인 행위는 약자를 해치는 것이므로 비겁하다 하겠다.


3. 물질주의 극복이 한국 교회의 사명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심각한 한국의 도덕적 상황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것을 고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동시에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복음전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당할 정도로 잘 감당했다.  비록 교회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더라도 한국교회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비교적 잘 감당했으며,  한국 역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과거 한국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한 것은 주로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공헌이었다.  한국 사회에 없었거나 약했던 평등사상, 민주주의, 인권 사상을 도입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새로 시작하는 교회들이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있고 또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보다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것과 고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창조의 교리와 십자가의 치유와 관계가 있다. 

  인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나 많은 쓰레기와 찌꺼기를 생산해 놓아서 질식할 상황에 처해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주 활동은 창조적(creative)인 것이 아니라 치유적(curative)인 것이다.

  인류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함으로 병든 세상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시대적 소명도 한국 사회에 무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우상과 더불어 싸우는 종교다.  한국 교회가 진정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영적으로 민감한 눈으로 자신과 이 시대를 관찰하면 세상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교회 자체가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없게 된다.  누구도 우상인 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다.  우상이 아닌 줄 알고 섬기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만이 절대이며 그의 말씀은 진리임을 믿는다면 모든 우상은 그 자체로 거짓일 뿐 아니라 우상숭배는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만 부정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사회에도 부정적이다.

  그러므로 우상을 제거하는 것은 곧 세상에도 이익을 주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할 수 있는 공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시대를 가장 병들게 하고 이 시대가 가장 열렬히 섬기는 우상이다. 바로 물질만능주의, 곧 돈의 우상이다.  돈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상으로  등장했고 예수님도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 하심으로 재물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마6:24).  예수님의 경고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재물을 사랑하는 잘못과 관계된 것이란 주장도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바울사도가 경고하였다면 (딤전 6:10) 초대교회가 투쟁하던 시대에도 돈은 심각한 우상이었던 것 같다.

 

 돈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고 정당화하는 제도가 자본주의다.  18세기 네덜란드인 만더비어 (B. Mandeville)가 쓴 <벌의 우화>란 책의 부제가 “사적인 악이 공적인 이익” (Private Vices, Public Benefits)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악이지만 그 악이 결과적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윤택해지고 발전함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논리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윤택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를 택한 사회는 가난해지고 만 것이다.  성경도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열심히 일할 것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그런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희년제도를 둔 것,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유무상통한 것,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비유 등 자본주의와 상치되는 가르침도 많이 있다.

  성경이 허락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유재산은 자본주의가 이해하듯이 우리 마음대로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이용해야 할 책임의 영역이다.  즉 권리로서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할 정치기 재산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사유재산과 성경이 인정하는 청지기 재산은 구별해야 한다. 


  과거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자본주의가 그 견제를 받았고,  그 때문에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없었다.  누진과세, 독과점 금지 등의 제도를 도입하여 그 약점들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진 오늘날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할 만 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재 받지 않는 모든 세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지금 타락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최근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돕기 위하여 봉사해야 할 금융기관들이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으로 변신하여 돈으로 돈을 버는 상황으로 변질되고, 거기에 도덕성까지 타락해서 오늘날 전 세계가 신음하는 경제위기를 유발한 것이다. 

  성경의 원칙은 모든 소득은 노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이 이자를 금한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노동을 통하지 않는 소득은 문자 그대로 불로소득 (不勞所得)이고,  과거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에서는 불로소득은 대부분 도둑질이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지금처럼 방임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결국 전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서버리면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 한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경제가 어디까지 계속 자랄 것인가? 그런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원료는 어디서 구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사용할 에너지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날로 심각해지는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미 우리는 과소비와 과 생산을 통하여 우리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자원을 도둑질하고 있으며, 심각하게 오염된 자연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다.  이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환경오염에 의한 인류의 종말은 불가피하고 촉진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신이 되어 있는 돈의 우상을 대항하여 교회가 수행하는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돈의 우상을 제거하여 자본주의의 회포와 타락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 특히 오늘의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대적 소명이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면 교회의 영적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들의 삶도 심각한 위기에 당도할  것이다. 


4. “세계내적 금욕”


  돈의 우상을 제거하고 자본주의를 견제, 수정하려면 교회부터 돈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돈 때문에 거짓말하고, 총회장 등 기독교 단체의 장이 되기 위하여 돈을 쓰고,  목사가 교회의 돈 수십억 원을 횡령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보다는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물질주의의 심각성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설교가 강단에서 거의 사라졌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도, 봉사, 헌금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수단으로 이해하는 설교자와 교인이 한 둘이 아니다.  교회가 돈의 우상을 섬기는데 어떻게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시대적 소명을 조금이라도 감당하려면 가난해져야 한다.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고는 물질주의를 비판할 수 없으며,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없다.  예수님도, 바울사도도, 위대한 믿음의 용장들도 모두 가난했다. 

  예배당은 검소하고 교인들의 생활방식도 단순해져야 한다.  돈이 있다면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써버려야 한다.  지금도 전 세계 인군의 거의 절반이 하루에 2000원 이하로 생활하고 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과소비하고 사치하게 사는 것은 죄악이다.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자본주의는 개신교의 절제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 (Max Weber)의 주장이다.  그에 의하여 초대 칼빈주의자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번 돈을 가능한 한 쓰지 않고 저축했기 때문에 자본이 축척되고 거기서 자본주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은지는 논란꺼리지만 적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개신교는 처음부터 근면과 절제를 매우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베버는 초기 개신교회가  세계내적 금욕 (innerweltliche Askese)을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수도사들이나 승려들이 속세를 떠나 수도원이나 절에서 수행하는 금욕과 달리 개신교인들은 속세에 살면서 사치를 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절제했다는 것이다. 그런 전통은 지금도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북유럽 개신교인들의 삶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이나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 음식 맛이 유난히 없는 것도 맛있게 먹는 탐식(gluttony)을 죄악시하는 전통 때문이다.  탐식은 중세 교회의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seven deadly sins)에 속한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절제하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경제는 비교적 건전하지만 사치하고 과소비하는 이태리나 스페인의 경제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그러나 북유럽국가들도 점점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고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던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다.  독일도, 네덜란드도 사치와 쾌락에 서서히 탐닉되고 있다.  전 세계가 쾌락의 자본주의란 말을 타고 쾌락의 미끼만 바라보고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의 경고는 말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동쪽바람 (馬耳東風)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특히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다시 일어서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하지 않고는 다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비록 물질적인 것에 대한 절제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어떤 해결이나 개혁도 불가능하다.


  돈의 우상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에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명예욕, 권력욕, 쾌락욕 등 다른 욕망에도 절제할 수 있을 것이고 탐심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이든 타율적이든 교회가 가난해지면 철저히 순수하고 헌신된 사람 이외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 이전 한국 교회가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하고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도 교회가 가난해서 오직 순수하지 못하고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총회나 기독교 단체의 장이 되는 것은 무거운 책임만 지는 것이었지 세속적인 이익은 아무 것도 없었고, 세습은 곧 가난과 고난의 세습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 교회는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  장기려 박사는 “예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자의 생활을 보고 감탄해서 그런 모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예전에는”이란 표현을 쓴 것은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비록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항상 정확하고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기려 박사, 한경직 목사 같은 분들이 교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 것을 보면 순수한 신앙과 절제된 삶은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은 우리 사회가 걸려 있는 돈 중독을 조금이라도 해독하는 것이다.  사회가 돈의 우상 때문에 빈부 격차가 커지고 양극화가 심각해지며,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자포자기 하며 냉소적이 된다.

  OECD 국가가운데 네 번째로 갈등지수가 높고 그 때문에 연간 약 300조원의 돈이 낭비된다 한다.  돈의 우상숭배를 제거하거나 약화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는 한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다.


  한 사회의 도덕성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책임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종교는 기독교라 할 수 있다.  신도의 수로는 불교 (인구의 23%)가 가장 큰 종교이지만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서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한 불교 신문에 의하면 한국의 중요한 직장 70%를 개신교인이 차지하고 있다 한다.  장관,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의 사회지도층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많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도덕성은 기독교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부터 돈의 우상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하고 돈을 미워할 만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세속화되어 있고 타락한 교회가 과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수정하여 자연과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할 의지와 안목을 가질 수 있을까?


5. 자발적 불편운동


  금년부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자발적 불편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좀 불편하게 살자는 운동이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을 들지 않고나 노인이 아니면 지하철이나 건물의 승강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이용하고, 주차장에서는 가장 불편한 곳에 주차하고 교회에서는 가장 불편한 곳에 앉는 것 등이 그 예다. 

  물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 정도로는 못하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손해를 보는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라야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 

  작은 것도 양보하지 못하고 희생하지 못하면 큰 것은 전혀 양보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작은 것부터 조금씩 손해보고 양보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6. 강의를 마무리 하면서


  물론 한국의 모든 교회, 모든 지도자가 다 세상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히 충실하여 올바로 믿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교회와 교역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듣고 있으며, 그 충고는 정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예외를 인정하자 말자 정말 타락한 교회와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들이 바로 그런 예외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우상숭배자의 가장 전형적인 표식이다.


  그러므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이 7천이나 되었지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을 개탄하고 비판했다.  자기와 자기 교회는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사회가 교회에 대해서 하는 비판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은 무책임하다.


  그리고 기독교는 윤리만 강조하는 종교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선한 행위가 아니라 참된 믿음만이 구원의 수단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반드시 올바른 삶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윤리적이라야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 


  마치 반드시 비가 와야 길이 젖는 것은 아니다. 비 이외의 다른 이유로도 길이 젖을 수 있다. 그러나 비가 오면 반드시 길이 젖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하셨다.


참 믿음만 회복하면 한국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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