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



영국의 모든 신학자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들 중의 하나, 청교도들 중의 왕자, 그는 존 오웬이다.

그는 방대한 하나님의 지적 능력과 지식을 기억하며, 지식을 조직하는 비상한 능력을 소유한 신학자였다. 그의 거룩한 영적 능력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와 인간에 대한 바른 사고로 인한 겸손과 복음에 대한 능력을 경험으로 되어진 것이다.
청교도 교육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에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 대한 사고는 필수조건이라고 한결같이 주장했으며, 존 오웬 역시 신자들에게 네 가지 항목으로 상기시켰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인간이다.

 

 그는 이성적인 활동을 위한 피조물이며 삼위일체적인 기능을 하는 이해력과 의지와 감정을 부여받는다.지성이며 이해력인 정신은 영혼의 선도적인 기능을 한다. 이의 기능은 인도하고 지시하고 선택하고 안내하는 것이다. 의지는 행동의 능력이고 이성적인 욕구이다. 정신에 인도되므로 이성적이며 감정에 의해 자극되므로 욕구적이다. 의지는 선의 모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직 이성적인 선에 따라 선택한다. 감정은 특별한 대상들로 이끌거나 또는 물리치는 선택들을 이끌어내는 정서적 연상들이다. 감정이 없이는 절대로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무엇이 감정의 지지를 얻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힌다.
하나님은 진리를 감정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탁월함으로 심령을 압박하신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배우는 것'이다. 영혼의 방향키가 감정이라면 항해지도는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인간이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에 Thomas Boston은 죄로 인한 4중 소외로 하나님, 이웃, 자신,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주장했다. 죄의 열매는 영혼의 무질서와 인격의 분열이다. 정신기능인 지성은 서로 엇갈리고 정반대로 움직이며, 의지는 정신이 발전하는 선한 것을 택하지 않고, 감정이 주권을 잡아 영혼을 포로로 잡고 이끌게 된다.
죄의 근원은 창조주에 대한 뿌리깊은 불만과 반감이다.(롬8:7) 불경과 불의와 불신과 이교는 내주하는 죄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죄는 전 인격에 침투하여 오염시킨다. 지성은 무지하고 허영되며 부패하게 된다. 감정은 선한 것에 대한 혐오와 증오하게 되며 의지는 무기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존재와 능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기 혐오와 자기불신 위에 기초되어야 한다. 자기 신뢰와 자기 만족은 자기 무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건강한 그리스도인, 참된 성도는 상하고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구속을 받은 인간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빚을 갚으시고 그에게 생명을 얻게 하시고 그를 죄책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시고 그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키신 영원한 구속언약 가운데 보증인이 되신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핵심이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인간, 곧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운 생명의 법칙과 순종의 습관이 주입되는 마음의 할례인 중생으로 인도하신다. 이 할례의 직접적인 결과인 회심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진정으로 구원을 얻는 믿음의 첫 번째 의식적인 행동이다. 중생은 인간의 심령을 죄와 싸우는 전투장으로 만든다. 죄는 마음속에서 항상 활동하고 있다. 죄가 일시적으로 공격의 소강상태를 보이는 것은 죄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죄는 가장 잠잠해 보일 때 가장 잠잠하지 않은 것이다. 죄의 호수가 잔잔할 때 가장 깊다." 죄의 전략은 기습의 전조로 거짓된 안전감을 주는 것이다. 이 죄와의 전투, 죄죽임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이 글은 존 오웬의 설교식 논문들, "내주하는 죄(indwelling Sin)", "죄의 억제(Mortification of Sin)", "유혹(Temptation)", "성령에 대한 논설(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를 수집하여 집필한 청교도 사상(기독교문서선교회)의 저자 제임스 패커의 글 "존 오웬의 영성"에서 발췌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의 기능을 창조하셨고 사용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사고를 인식하고 조명되어 인간에 대한 내면의 기능을 바르게 이해함으로 그분의 거룩하고 탁월한 말씀 가운데 목적하신 바를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을 상실했다. 죄의 깊이는 가난하고 상한 심령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깊이와 비례한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언약의 보증을 통하여 구원의 완결을 향해 이루어져 가는 은혜는 죄죽임을 통한 날로 새로워지는 거듭남을 의미한다. 이는 지상에서 거룩한 자녀가 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가져온 곳 : 
카페 >양무리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존 오웬 - 청교도 신학의 최고 정상 (믿음의 거장 시리즈 08 신학)

 

송삼용 넥서스CROSS

 

 

 

청교도 신앙과 비범함을 간직한 학자
그의 수많은 작품은 하나님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오웬은 12살에 옥스퍼드 퀸스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천부적인 두뇌를 소유했다. 그처럼 어린 나이에 옥스퍼드에 들어간 사람은 드물었다. 어려서부터 가문의 유산으로 배워온 청교도의 신앙과 비범함이 그를 자연스럽게 ‘청교도 왕자’의 자리에 앉게 해준 셈이다. 그의 저서들은 천부적인 지적 능력과 깊은 통찰력, 그리고 탁월한 영성이 담겨 있어서 후대에 길이 남을 만한 기독교 유산이 되었다. _본문 중에서

청교도 신학의 최고 정상
짧은 생애 동안 맥체인이 보여준 경건한 삶은 장엄의 극치였다!

수많은 작품을 통해 하나님을 표현한 청교도 왕자《존 오웬》이 넥서스CROSS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설교, 목회, 신학, 기도, 선교, 영성 각 분야에서 하나님께 쓰임받은 신앙 위인들의 삶을 차례로 조명해보는 《믿음의 거장 시리즈》 중 하나로, 국내ㆍ외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존 오웬의 생애와 사상, 업적과 영향력을 고르게 다루고 있다. 일반적 전기 스타일에서 벗어나 생애에 드러난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드라마틱하면서도 구속사적인 역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다. 깊이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게 구성되어 있어, 평신도와 신학생, 목회자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믿음의 거장들의 생애를 통해 독자들은 신앙적 교훈을 얻는 것은 물론, 신앙의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저술가
홀Hall 주교가 15살에 옥스퍼드에 입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기록을 깨지 못했는데, 존 오웬이 12살에 입학하므로 그 기록이 깨짐과 동시에 그의 천재성이 두각 되는 증거가 됐다. 이처럼 오웬은 탁월한 지성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은사를 하나님은 그냥 두시지 않고, 널리 저술활동에 이용하셨다. 그 결과 《알미니아니즘의 진상》, 《히브리서 강해》, 《그리스도의 영광》 등 성경과 그리스도께 가장 충실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이를 보고 제임스 패커는 “역시 오웬은 거인들의 시대에 가장 높이 솟았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또한 청교도의 경건과 신앙을 가문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오웬의 성품을 보고 윌버 스미스는 “오웬이 그런 가문에 태어난 것은 커다란 명예였고, 17세기 기독교 전체에도 큰 영예”라고 할 정도였다. 오웬이 이러한 높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고난 신학에서 근거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는 12명의 자녀 중에 11명의 자녀를 잃었고, 지성의 요람인 옥스퍼드의 부총장과 의회의 의원이 되는 자리까지 올라가지만 통일령 사건으로 강단에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놓지 않았고, 저술활동도 그치지 않았다.

천부적인 능력을 하나님께 바치다
어린 나이에 옥스퍼드에 들어간 천재 소년 존 오웬.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른 학생들보다 몇 갑절이나 노력했다. 4시간의 취침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공부에 몰두했다. 타고난 두뇌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시절을 마칠 때까지 초인적인 노력으로 학문 연구에 전력했다. 그리고 그 탁월함으로 하나님을 널리 알리는 저술활동에 힘썼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내 자랑하기에 바쁜 생활을 하지 않는가?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야 함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존 오웬의 삶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머리말
생애 개관

1장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소년
출생과 어린 시절의 교육_21
옥스퍼드에 입학한 천재 소년 _24
심장을 불태운 진리의 촛불_30
죄의 각성과 회심_37

2장그리스도의 종이 되다
하나님과의 교제_47
첫 목회지 포드햄 사역과 결혼_54
2천여 명의 회중에게 둘러싸이다_61
크롬웰과 함께 청교도 개혁의 기수로_68


3장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저술가
지성의 요람 옥스퍼드 부총장_75
심오한 작품들 _82
영성의 바다에서 건진 진주_84
죄 죽임에 관하여 _92


4장의원에서 강제 추방까지
의회 의원이 되다 _101
크롬웰과의 결별 _106
사보이 선언의 주역 _111
강단에서 추방되다 _115


5장하나님의 비밀을 가르친 학자
시련 중에 피어난 고난의 신학 _123
16년간 심혈을 기울인 대작 _128
영성의 원동력인 영적 사고방식 _134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모하며_144

생애 연보_156
참고문헌_157

 

그 무렵까지 오웬처럼 어린 나이에 옥스퍼드에 입학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능력을 인정받았던 홀hall 주교가 15살에 입학한 것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기록을 깨지 못했다. 당대에 큰 영향을 끼쳤던 유명한 청교도 존 하워John Howe조차도 17살이 지나서 옥스퍼드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 정황에서 오웬은 겨우 12살에 지성의 요람 옥스퍼드에 입학했으니 그의 천재성이 세상에 입증된 셈이다.
_24쪽

하나님과의 교제는 영성의 심장부요, 절정이다. 오웬 역시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영성의 정상에 섰던 청교도 영성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청교도들은 인간 실존의 목표와 목적을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고 주장했다. 창조와 구속의 결과도 하나님과의 교제에 두었다. 그것은 청교도 신학과 설교의 핵심이기도 했다. 오웬은 영적 체험을 한 이후에 하나님과의 교제로 평생 영성의 정상을 향하여 달려 갔다. 하나님과 교제를 이어가기 위해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 끝에 그는 마침내 태양 같은 영성의 족적을 남겼다. _47쪽

오웬은 칼뱅처럼 평생 경건한 삶을 추구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영적 생활의 실상을 파헤치면서 경건에 관련된 주제로 지속적으로 설교했다. 예를 들면,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활을 방해하는 ‘유혹’을 주제로 설교했다. 또 경건 생활의 최고의 적수인 ‘죄’라는 주제로도 설교했다. 이런 주제들로 설교한 것을 모아 편찬한 작품이 《죄와 유혹》이다.
죄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죽는 순간까지 죄를 떨쳐버릴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성화에 이를 때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경건의 정상에 오르려면 죄의 산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죄와 유혹》은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한 교과서와 같다.
_84~85쪽

오웬은 청교도 사상으로 무장한 개신교 신학자였다. 게다가 회중교회주의자로서 입장을 굳게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웬은 찰스 2세의 요구에 쉽게 순응할 수 없었다. 다른 청교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청교도들은 강단에서 추방되는 무서운 고초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소위 ‘비국교도들nonconformists’이 되어 강단 밖을 유리하는 몸이 되었다. 1662년에는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으로 인하여 청교도 목사 2천여 명이 강단에서 쫓겨난 사건이 일어났다. 오웬도 그때 강단에서 추방되었다. _115쪽

오웬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근면함으로 고난의 폭풍 속에서도 저술을 했다. 강단을 빼앗긴 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고의 능력과 이성적인 활동을 송두리째 저술로 성화시킨 것이다. 십자가 고난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임했던 것처럼 시대의 폭풍우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관리하며 저술에 전력한 결과 영광스러운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런 점에서 오웬의 신학은 고난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고난이 없으면 신학이 완성되지 않는다. 신앙도 고난을 통해서 다듬어지는 법이다. _124쪽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템테이션(Temptation)

 

- 존 오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의 시험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가난한 심령으로 인도하심으로 죄를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함일 수도 있고, 또는 욥과 같이 우리를 고난의 시험을 통과시킴으로써 놀라운 은혜와 믿음을 주시기 위함일 수도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징계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고난의 징계를 받을 때는 절대로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을 통하여 가난한 심령이 될 것이고, 가난한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실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실 것이며, 그 가운데 주님은 그들을 만나 주실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만나 주시고 우리를 더욱 낮추시고 우리에게 더 큰 은혜와 믿음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사탄의 유혹하는 목적은 항상 동일하다. 모든 유혹에 있어서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고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유혹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 유혹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면서도 유혹 앞에서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겠는가? 당신은 그 유혹이 하나님과 당신 자신에게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정말 알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유혹의 힘이 얼마나 강하며 유혹이 실패하든지 성공하든지 간에 당신의 영혼에 얼마나 큰 손상을 주는지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절대로 그냥 자신을 방치하거나 유혹에 대하여 소홀히 생각지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유혹의 큰 힘을 알고 있다면 사탄이 당신을 유혹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분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 주신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기도, 그리고 경건의 훈련들을 떨림과 감사함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 꾸준히 사용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며 죄에 대하여 너무 소극적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유혹을 받아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베드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유혹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건져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누군가 유혹에 빠져 있는데 이러한 생각 속에서 자신을 죄에 방치하고 있다면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이 가룟 유다가 될 가망성이 훨씬 큰 것이다. 은혜가 있는 사람들은 죄를 싫어하고 유혹을 민감하게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교회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을 통하여 항상 권면을 하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 존 오웬, [템테이션(Temptation)] 중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의 차이점 (존 오웬)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각성되고 죄에 대한 신령한 자각으로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감지하게 된 영혼은 두 가지 지배적인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각성한 영혼이 이 두 가지 소망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없이는 한순간도 지낼 수 없으며, 각성된 영혼 안에서 이 두 가지 소망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죄인들은 이 두가지 소원 중 첫 번째 소원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이 사람들은 첫 번째 소원과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율법적인 차원에서 죄를 자각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율법적인 차원에서 죄를 자각했을지라도 그와 동시에 신령한 빛을 일체 받지 못했다면, 이런 사람들 역시 첫 번째 소원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자신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소원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아 지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확보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들은 첫 번째 소원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으며, 첫 번째 소원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외적인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든지 안 받으시든지 그저 자신들이 외적인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을 소원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구원을 전혀 소원하지 않는 셈입니다.

 

반대로 신령한 빛과 은혜가 사람에게 맨 처음 비추이면, 그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 시작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령한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없이 자기 자신의 구원만을 소원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드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신령한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영혼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방식으로는 결단코 구원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 없다면, 영혼이 아무리 좋은 상태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은 본질적으로 구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원은 각성된 모든 사람의 영혼 안에 확고부동하게 각인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영적으로 각성된 사람들은 아무리 영원한 것을 제안받을지라도,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면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새로운 계시는 없다

 

 
성경의 계시는 종결되었다.
종결된 계시에 더 부가될 것은 없다.
하나님은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으시며,
이전에 주신 계시에 대하여 확고부동하게 보존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그 확고부동한 계시를 기억 속에서 잊어버릴 때,
주님은 그것을 우리의 기억에서 끄집어내어 깨끗한 그림으로 만들어 놓으시며,
새로운 그림을 그려주시는 않는다.
새로운 교리란 없다.
단지 이전에 주신 계시를 자주 기억나게 만드시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성령의 위로가 있는 그 어떤 새 계시는 없다.
따라서 성령님은 반복하여 전에 주신 계시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성경에 숨겨진 보화들을 밝은 빛 가운데로 이끌어내셔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신다.


성령님은 진리가 오래도록 놓여있는 보관실을 열어주시며,
전에 알 수 없었던 부요함이 가득한 비밀의 방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미 충분히 댓가를 치루었으므로 그분은 더 이상의 값을 요구하시 않는다.


신자여!
그대의 영생에 관한 것은 성경으로 충분하다.
만약 그대가 무드셀라보다 더 오래 산다고 해도 새로운 계시는 필요하지 않다.
그대가 요나가 당했던 그 깊은 절망 가운데 처하거나
깊은 지옥에 빠진 것 같다던 다윗과 같은 상황이라 해도
당신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바로 성경으로 충분하다.

 

 

- 찰스 스펄전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목적 (존 오웬)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시험하신다.

 

...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속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은혜와 부패 모두 신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신자에게 충분히 그 실재의 상태를 바로 알게 해 주지 않는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고하거나 격려하실 목적으로 넒은 의미에서 시험을 행하시는데 이로써 그는 어떤 특별한 환경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작용 안에서 은혜와 부패의 상태 여부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때로는 은혜를 막으시는 방법으로 시헌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믿던 사람들이 사실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셨기 때문에 살아왓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또 때로는 은혜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중요성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신자는 다시 새롭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 그리고 은혜를 확인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더 깊이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념과 합리적 원리들에 의존함으로써 자기들에게 거짓 평안을 말한다

 

사람들이 자기 신념과 합리적 원리들에 따라 평안을 측정하는데,이것은 거짓 평안으로 결코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만 설명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죄로 인해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는 죄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에 합당한 바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영혼 사이의 관계는 모두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그는 빛을 소유하고 있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또 이런 경우 과거에 자기 영혼이 어떻게 고침 받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적용해야 할 외적 수단으로 간주하고,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약속들을 뒤져서 문자적 표현들이 자신의 상태에 직접 부합되는 말씀들을 몇 가지 골라 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하나님은 이 약속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기서 내 상처를 덮을 만한 크기의 고약을 발라야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약속의 말씀을 자신의 상태에 적용시키고 평안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산 위에서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가까이는 계시지만 그 안에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우리를 책망하실 수 있는’ ( 16:8)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지성적,이성적 영혼의 단순한 작용에 불과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생명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생식적인 생명, 감각적인 생명 그리고 이성적 또는 지성적인 생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단지 생식만합니다. 어떤 존재들은 감각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또 어떤 존재들은 이 두 가지에 이성을 추가로 구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성적인 생명을 갖고 있는 존재는 이성적 원리에 합당하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다른 두 요소의 원리에 대해서도 합당하게 행동합니다. 즉 성장할 뿐만 아니라 감각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자연적이고 합리적입니다. 또 어떤 이 들은 계몽을 통해 추가된 깨달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후자에 속한 사람은 전자의 요소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때로는 자연적인 사람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계몽된 사람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참된 영적 생명의 원리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항상 영적 생명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행동의 열매가 반드시 이 원리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제가 언급한 경우의 사람은 단순히 신념과 계몽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이로 언해 첫 번째 자연적 요소가 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은 이 모든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재발된 타락으로 인해 영혼이 받고 있는 상처와 불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타락이 악한 행위든 아니면 미련한 행위든 결코 작은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영혼이 받게 되는 상처보다 더 큰 상처는 없고, 영혼이 갖게 되는 불안 보다 더 큰 불안은 없습니다. 극도로 마음이 혼란한 상황에서 그는 이사야 55 7절의 약속을 찾아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여기서 그는 하나님이 거듭해서 무조건 용서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또는 호세아 14 4절의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라는 말씀을 찾아 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신에게 평안 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든 안 하든, 곧 그 말씀에 생명과 권능을 불어넣으시든 안 넣으시든,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주 하나님이 평안 하라고 말씀하시는지 여부는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고 가련한 피조물이 평안을 빼앗겨 평안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다루시고 새로운 판단의 자리로 자기를 부르실 때 곧 하나님이 손으로 자기를 끌지 않으시면 발자국을 떼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때를 곧 깨닫게 될 것 입니다.

On Mortification of Sin by John Owen (1616~1683)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4001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습관적 탐욕에 대한 고찰(존 오웬)

질문 1 : 누군가의 죄나 탐욕이 습성적이거나 지배적이라고 간주되는 경우는 언제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나는 다음의 전제들을 밝혀야만 한다.

1. 모든 탐욕들과 타락은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그 근원과 거주지는 바로 우리의 본성 안에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성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특별한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가 경험하듯이 그 욕심의 근원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안에 있습니다. 이러한 탐욕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며, 이 본성은 모든 사람가운데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후라 할지라도 이런 욕심은 사람의 본성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고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을 쫓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육신의 일입니다. 육신의 일은 무엇입니까? “곧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 5:19-21)입니다. 육신은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이렇게 추악한 것들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진리는 악한 시대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빛으로 강조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될 커다란 재앙과 황폐함과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눅 21: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간절하게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분명하게, 주님께서는 죄악이 난무하는 그 때가 다가올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최고의 것은 바로 죄의 심각성과 악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탕함과 술취함에 빠지고, 그런 문제와 괴로움 가운데 삶을 걱정하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지혜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그 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임하게 될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크리스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멸망이 문 앞에 누워있는 것과 같이 육적이고 자극적인 죄악들을 범하게 되는 위험에 처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날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의 근원과 뿌리는 우리를 유혹하여 모든 악한 일을 행하도록 시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의 영혼과 또 다른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룩한 질투심을 자극할 것입니다.

3. 만약 죄가 우리 안에 거하여 항상 모든 악한 일들을 하도록 부추긴다면, 죄를 극복하고 정욕과 감정을 억제하고 극복하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의무가 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골 3:3) 축복받은 지위와 신분! 온 세상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진리로 인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의무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그것이 무엇입니까? “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죄를 벗어버리는 것은 성숙한 성도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4. 개개의 죄가 특별한 우월함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지위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죄성은 보편적으로 동등하게 타락되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죄들은 특별한 우월함으로 말미암아 지배력을 얻게 됩니다. 지금 이 우월함이 무엇인지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먼저 현저하게 나타나는 2가지를 지목할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난 체질적인 성향이 특정한 죄악들에 특정한 우월함과 지배력을 가져다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투심이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쉽게 분노하거나 격정(激情)하는 성향이 강하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는 탐식과 술취함같은 육욕의 죄악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질을 죄에 대한 핑계와 구실로 삼으려는 악마의 거짓말입니다. 어떤 이는 “나는 천성이 성미가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체질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본래 낙천적이고 친구들을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당신의 기질은 당신의 죄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죄에 대한 구실이나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다룰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타고난 체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그 은혜를 자랑스러워 하겠습니까. 늑대나 사자도, 곰이나 원숭이도 독사의 본성마저도 양과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이 바로 위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타고난 기질이나 체질에서 오는 삶의 습성적 패턴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은혜는 결코 그런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습성적인 원리로 인하여 은혜가 천성적이고 체질적인 성향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저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적인 유인(誘因) 역시 특정한 죄에 대해 특별한 우월함을 가져다 줍니다. 어떤 죄들은 교육을 통해 우월함을 얻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아이들을 거만하고 오만해지도록 교육한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욕심이 그들을 불사르고 파괴할 때까지 바짝 마른 연료를 쌓고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또한 삶 속에서 상이한 사회적 환경들 역시 특별한 죄악들을 선동하고 자극합니다.
이 같은 전제를 토대로 이제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누군가의 죄나 탐욕들이 습성적이고 지배적이라고 간주되는 경우는 언제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나는 우리 주님과 그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인내하며 극복하라고 경고하셨던 가장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탐욕들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특정한 욕심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습성적으로 널리 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외적인 결과나 효과를 수반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생각과 영혼속에 빈번하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특별한 욕망과 타락이 밀어 닥쳐와서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 사실 자체가 특별한 욕망이나 혹은 타락이 습성화, 혹은 지배적인 것이 되었음을 증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유혹이 가져온 힘겨운 순간에 지날 수도 있습니다. 유혹과 결합하여 내재하고 있는 죄는 당신을 죄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강력하고 힘겨운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습성적인 죄의 지배 가운데 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일반적인 유혹일 뿐인지 당신은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만약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이 옳다면 당신은 습성적인 죄에 빠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1. 만약 당신이 죄로 인하여 더럽혀지기보다는 더 슬퍼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유혹이지 습관적인 탐욕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죄와 은혜 모두 자신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정반대입니다.
은혜의 목적은 영혼을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고, 죄의 목적은 영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죄에 동의하게 되면 영혼은 타락하고 맙니다. 생각속에서만 일어나는 활동적인 유혹은 사람을 타락시키지 못합니다. 단지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를 동의하게 만드는 유혹만이 ‘타락’하게 만듭니다.
죄에 대한 동의가 본래 얻어졌든지 오랜 기간 동안의 유혹이후에 얻어졌든지 간에, 그것은 죄로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겠다는 동의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죄로 인해 더럽혀지기보다는 더 슬퍼하고 애통해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죄가 습성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유혹은 길고도, 피곤하고, 절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유혹에 동의하기를 거절하는 한, 영혼은 유혹의 공격으로부터 순결함과 거룩함을 지킬 수 있습니다.

2. 만약 당신이 진심으로 특정한 죄를 가장 큰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이것은 죄를 바라보는 당신의 관점이 되며, 당신은 습성적인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유혹의 힘이 미치는 범위아래 있는 것일 뿐입니다.

3. 만약 당신이 죄에 대한 전쟁과 투쟁을 끊임없이 그리고 특별히 개인적인 기도와 중보기도라는 두 가지의 의무가운데서 계속해 나간다면, 영혼은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죄는 분명히 정복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은혜가운데서도 이러한 갈등을 계속해 나간다면, 나는 그가 유혹을 받는 것 자체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언제 죄가 습성적으로 지배적인 것이 되는지를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참이라면 특별한 죄가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당신이 죄로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하거나 기꺼이 맞아들인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죄입니다. 정직한 모든 크리스챤들은 어떤 경우의 일들이 우리 안에 죄를 자극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죄 자체를 위해 죄를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일들이 특별한 타락의 행위들을 휘젓고, 흥분시키고, 불러일으키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죄악된 일들로 둘러 쌓여 지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지배아래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모든 일들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세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2. 당신이 특별한 죄에 대한 논쟁이 힘을 잃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죄는 습성화된 것입니다. 특별한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모든 크리스챤은 그런 타락 속에 계속 거함으로 인한 파멸과 두려움과 위험과 수치심으로부터,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는 논쟁들을 처음에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의 이런 논쟁이, 힘을 잃어가고 당신의 삶 가운데서 이전에 가졌던 만큼의 영양력을 행사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면, 죄가 이미 습성화된 것임을 두려워하십시오.

3. 당신이 유혹이나 죄에 빠질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한번도 빼놓지 않고 죄 가운데 거하게 된다면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업가가 할 수 있을 때마다 사기를 친다면, 그는 마음속에 탐욕을 갖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술을 마신다면, 그것은 습성적인 타락의 징표가 됩니다.

4. 당신의 행동의 동기가 새로워지는 은혜 안에 있기보다는 기껏해야 제한되거나 구속된 은혜에 의한 것이 전부라면,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끔 유혹의 구렁텅이 아래로 미끄러질 때, 하나님은 은혜를 제한하시거나 구속하심으로, 죄에 대한 위험과 수치스러움과 겸손함을 가르치시고, 우리를 질서 안에서 지켜 나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께서 마음속에 주시는 내적인 새로워짐보다는 외적인 상황들을 의지하여 자신을 죄에서 지켜나가려 합니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죄로부터 당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것이, 하나님의 제한되고 구속된 은혜 때문에, 외적인 상황이나 조건들이 전부임을 발견하게 되거나, 날마다 새로워지는 은혜로 인하여 변화되고 거듭나고자하는 내적인 바램이 없다면, 그것은 죄가 당신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죄에 대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죄의 위험과 죽음과 지옥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 없이 당신 삶의 목적을 더럽힌 것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새로워지는 은혜 즉, 사랑을 통한 믿음으로 행동하기보다는 제한되고 구속된 은혜로 인하여 죄의 사슬에 묶이게 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삶에 대한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지혜를 가진 자는 그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며, 자신의 행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발견합니다. 그것이 새로워지는 은혜인지 아니면 제한되고 금지된 은혜인지 말입니다.

5. 우리의 의지가 주권적으로 죄와 관련되어 질 때, 그 죄는 습성적인 것입니다. 죄는 생각을 혼란시킬 수고 있고 감정의 무질서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배력을 갖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노예화시킬 때, 죄는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질문 2 : 습성적인 죄, 탐욕, 타락이 어떻게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구원의 은혜의 능력과 양립할 수 있습니까?

답변 : 이것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답변과 관련된 내용의 난해함 때문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현재적이고 또한 영원적인 지위와 관련되어지는 그런 문제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매우 신중해야만 합니다.

1. 먼저 이런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모든 믿는 자들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습성적인 죄라는 짐을 덧붙이지 않고도, 우리가 누리게 될 영원한 지위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과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용서와 죄 씻음과 정결함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가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그러나 그는 특별히 우러나오는 양심에서 자신의 죄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3) 같은 맥락에서, 사도바울 역시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 12:15)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모든 죄 가운데는 쓴 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형제들을 권하노니 여러분들의 영혼과 나의 영혼을 위해 이런 일들이 절대로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2. 구원과 습성적인 죄의 양립성에 대해 어떠한 논쟁이 오간다 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이 평화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습성적인 죄를 따라 사는 누군가에게 존재하는 평화가 거짓된 평화인지 말하는 것은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죄의 지배가운데 살아가는 순간 내내 어느 날 한 순간에 하나님께 자신들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멋진 기대와 함께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 마지막 날은 자신들에게 유일할 것이며, 그 날은 적절한 시기나 혹 자신들이 편한 시기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습성적인 죄악들을 경험하는 자는 믿음에서 되돌아섭니다. 누군가 크리스챤이 되겠다고 고백을 하고 자신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신실한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고 성숙하기 이전의 모습이나 자신의 타고난 체질이나 유혹 등으로 인하여 탐욕이 그를 지배하게 될 때, 그 모든 것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니라"(히 10:3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기쁘지 아니한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평화가 되겠습니까? 당신의 기쁨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습성적인 죄 아래 거할 때에도 평화를 누렸다고 하면, 그 평화안에서는 더 이상 믿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고통의 순간에 당신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3. 만약 습성적인 죄가 은혜의 진리와 모순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은혜의 참된 역사(예배)와 모순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여전히 주님 앞에서 신성한 의무들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습성적인 죄는 그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습성적인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한 이런 의무들 가운데는 은혜의 참 역사(예배)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습성적인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이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 보상하고자 혹 그들의 양심을 잠재우고자 여러 가지의 종교적인 의무들을 감당하는 것이 종종 발견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 가운데 만연한 죄악들의 가리개로써 사람들의 눈속임을 위해 이런 경건한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도 많이 할 것이며, 설교하는 곳마다 따라 다닐 것이며 다른 의무들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무들 가운데는 은혜의 참된 역사(예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죄가 우리 삶 속에서 습성화되고, 은혜는 언제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을 통해 우리를 실제적으로 새롭게 하도록 제한되고 구속되어 지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습성적인 죄의 능력아래 있다면, 기도와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십시오. 왜냐하면 습성적인 죄안에서는 절대로 참된 은혜의 역사(예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어떤 사람의 영적 생활이 기절한 상태라면 그 영의 사람은 아직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인들에게는 삶의 어떤 징표도 나타나지 않고 영적 착란상태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때도 아직 죽은 것은 아닙니다. 습성적인 죄를 통하여 영적인 삶이 기절한 상태에 있다는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라도, 나는 그들의 영혼이 죽었다고 쉽사리 결론짓지 않습니다. 다윗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밧세바와 불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죄를 지을 때부터 나단 선지자의 따끔한 지적을 듣고 회개할 때가지 영적인 기절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죄에 빠짐으로 영적인 삶을 속여 그의 육신을 가로챈 것입니다.

나는 앞에 언급한 영적 삶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가 영적 삶의 모든 증거와 관련해서 기절한 상태에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이 죽었다고 판단하면 당신은 그에 대해 소홀해질 것이며 분명 그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가 기절 상태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의 삶을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5. 실제로 구원과 양립할 수 없는 죄의 습성적인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고백했던 사람들에게 닥칠 수 있다고 했던 일입니다. 계속해서 죄의 종노릇하는 것은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질문 3 : 습성적이고 지배력을 지닌 타락과 죄와 유혹의 능력아래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답변 : 만연된 죄는 우리 삶에서 외적인 치욕과 수치심을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내적인 평화의 상실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혹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 가운데 정말로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 죄의 위협이 당신의 생각 속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힘쓰십시오.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죄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인지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당신이 죄라는 것이 사망과 지옥과 저주 가운데로 이끄는 것임을 명심하고 모든 일에 임하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일이 마지막에는 다 잘 될거야'라는 자기 기만적인 합리화 속에서 안주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위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2. 죄로 인한 양심의 짐을 지십시오. 우리의 생각은 죄의 위험을 깨닫는 것에 느립니다. 우리의 양심은 아주 오랫동안 죄의 짐을 지는 것을 너무나도 꺼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인 죄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너무나 쉽게 자신의 상황을 변명하고 합리화시킵니다.

3. 일단 우리가 죄의 위험을 깨닫고, 죄의 짐을 짊어지기로 했다면, 우리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신음하고"(시 32:3) "부르짖어"(애 3:8)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십니다"(히 2:18) 우리가 "도우신다"라고 번역한 그리스 단어는 멸망해 가려고 하는 사람을 도우려고 달려가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힘들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사단의 올무에서 우리 자신을 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이것은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4. 당신의 특별한 죄악들에 반하여 당신을 지도하는 성경의 모든 교훈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모든 죄의 위험에 관하여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단지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그 같은 좋은 교훈을 주셨다면,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아야만 하며 그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명심하여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궁극적으로, 당신은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합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

마지막으로,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두 가지의 규칙과 내가 하려고 하는 것들.

1. 죄와의 싸움이 아무리 힘들고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절대로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당신은 죄의 능력으로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패배했다고, 이젠 모든 것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죄의 정복과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2. 모든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순간에 전력을 다하지도 않고 만연되어 있는 죄를 극복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당신은 어떠한 장소에서도 순종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따라야만 합니다. 당신이 죄와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어떤 영역에서 불순종을 하게 된다면 현재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죄를 철저하게 다루려고 할 때에 너무나 힘겨운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규칙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당신이 성령님의 탄식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죄악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면, 당신의 마음에 슬픔을 주는 어떠한 죄도 절대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선교회


믿음이 믿음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
(존 오웬)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관한 복음의 계시와 선포에 대한 신령한 지식과 발견 - 계시된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닌 내용 자체에 대한 영적인 분별과 지각과 이해가 필요하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고후4:6)이라고 부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특별히 자기 자신의 칭의와 구원에 적합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의 칭의와 구원이라는 목적을 효력있게 성취하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복음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믿는 사람 각각을 구원하기에 적합하고 적당하며 유력하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스러운 확신입니다.

3. 믿음의 마지막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원 방식과 구원 방편들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구원 방식만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의 이 같은 행위에 있어서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인격과 그 중보와 그 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생명과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이십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안수 받은 사역자의 의무(존 오웬)

 

어떤 교회가 복음의 순결을 지킬지 아니면 배도할지는 그 교회의 목사, 지도자, 교사 및 설교자들에게 많이 달려 있다. 마치 구약시대 때 교회의 순결 여부가 제사장들의 신실성에 달려 있었듯이 말이다(말 2:1-9 참조).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사역자가 거룩하고 겸손한 삶을 살면 열심을 다해 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 안으로 인도되어 복음적인 순종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 정신, 모범, 삶, 기도, 설교 및 노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욱 더 창대해졌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설교하는 복음의 능력과 진리가 참되다는 사실도 뒷받침되고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오는 세대들이 영적 퇴보를 거듭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의 주류는 타락한 교사들, 즉 불화, 분열, 야망 및 세상적 마음이라는 슬픈 본을 보여준 교사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구약시대 때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두 가지 종류의 배도를 하게 했다.

첫째,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신과 우상숭배로 인도했다(렘 23:9-15 참조). 이 배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들을 시날 땅에 묻게 된다(슥 5:11 참조).

둘째,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 나태, 및 나쁜 본보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을 경멸하게 만든다. 이것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 시대 때 시작되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회와 나라가 다 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하셨을 때 백성으로 하여금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 내에서의 첫 번째 배도도 미신과 우상숭배에 의한 것이었다. 이 미신과 우상숭배가 성행하자 결국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더 사악해졌다.

그런가하면 미신과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었던 많은 교회들은 또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인 행위들로 빠져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 내에서 행해지는 사역이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임명받은 사역자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고 교회가 배도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교회의 순결과 복지는 그 교회 사역자들의 순결과 신실성에 달려있다(엡 4:11-15).

교회는 그 교회의 임명받은 사역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다. 만약 사역자들이 나태하고 부패되어 있다면 교인들 역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목자가 게으른데 양떼들이 안전하게 보존 될리 없다. 만약 목자가 교회를 끊임없이 돌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잡초와 가시덤불들로 무성하게 될 것이다.

사역자의 중요한 의무 몇 가지

임명된 사역자는 복음의 가르침, 특히 거룩에 관한 가르침을 순결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한다.”(말 2:7; 엡 4:11-15 참조)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한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행 20:28-30 참조). 바울은 또 디모데에게도 복음의 순전을 지키라고 당부했다(딤전 6:13,14,20; 딤후 2:14,15 참조). 그리고 이 복음의 가르침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충성된 자들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했다(딤후 2:1,2).

성경, 신자들의 마음, 안수 받은 사역자, 이 셋이 함께 있어야 그 안에 거룩한 진리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지옥과 세상의 모든 반대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지켜진다.

신자들 마음에 있는 거룩한 진리는 그리스도의 영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켜진다(요 14:16,17,26, 16:13; 요일 2:20,21; 요 6:45; 히 8:10,11 참조). 신자들의 마음에 진리를 보존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배도하던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이 일을 하셨다. 마치 이스라엘이 배도하던 시절에도 성령께서 이 일을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엘리야 혼자 참 종교를 위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 7,000명을 남겨 두셨다.(왕상 19:18 참조)

거룩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든 일이 임명받은 목사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거룩한 진리는 전통이라는 수도원의 밀실에 보존되거나 그 순전함을 지키려는 어떤 보살핌이나 지혜 또는 정직함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 진리를 열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열쇠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그런 비가시적이며 환상적인 보고(寶庫)에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진리와 거룩이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복음적 거룩은 복음의 진리라는 뿌리 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만약 그 뿌리가 부패하면 그 열매 역시 부패할 것이다. 복음의 경건은 복음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가르침이이 없거나 부패하거나 혹은 경시되는 곳에서는 경건의 능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편 사람들이 일단 거룩에 대해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갈구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거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 무엇이 유용하고 유익한지 그리고 자기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볼 줄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하는 것이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의무이다(행 20:27 참조).

그들은 보살핌과 근면함과 충성됨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딤후 4:1,2 참조). 디모데에게 한 바울의 이 말은 자기 의무를 충성되이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목회자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서 세우고 보존해 주는 일을 하는 데에 지금이라고 해서 사도시대보다 노력을 덜 기울여서야 되겠는가?

목회자들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행 6:4; 딤전 5:17; 고전 16:16: 살전 5:12 참조).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해야 한다(행 6:4). 기도의 뒷받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위에 어떤 축복도 임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기도에 있어서 초특급 모본을 보여 준 사람이다(롬 1:9,10 참조).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엡 6:18,19참조). 전파한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은 채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마음속에 무신론주의를 은밀히 품고 있는 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거룩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도 별로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목사의 의무는, 사역과 삶을 통해 자기가 설교하는 그 크고 거룩한 가르침의 능력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임명된 목회자들은 삶을 통해 온유와 겸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중용 및 자기부인 그리고 언제든지 십자가를 짊어질 자세 등에 있어서 본을 보여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부패한 소욕들을 극복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세상을 경멸하고 그 마음을 하늘나라에 두며 누구에게나 오래 참고 친절함으로써 복음의 사역자다운 표징을 나타내야 한다.

만약 사역자들의 삶 속에서 어떤 악덕이나 부패상이 드러날 경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사역자 안에 아직도 거하고 있는 타락한 옛 본성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대신 복음을 비난할 것이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딛 2:7참조).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살후 3:9; 딤전 4:12참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영예의 표지이다.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순결과 거룩 및 순종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해 주신 거룩한 훈련 및 규율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 복음의 가르침 그리고 복음의 비밀을 타락하지 않도록 순전하게 지키는 데 있어서도 신실하지 못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그 비밀들을 조사해 볼 의욕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경을 충성되이 연구하는 노고를 경멸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게 되고 이 지식의 결여로 말미암아 패망해 간다. 그들은 물론 그들 죄로 죽어야 하고 또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 값을 이런 충성되지 못한 사역자들에게서 찾으실 것이다(겔 3:16-21참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있는 신부들의 대다수가 얼마나 무지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것을 전해 문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정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그것들을 신봉하는 많은 나라들이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 자처는 하고 있지만 실상은 무식하여 어리석기 짝이 없고,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거룩한 일들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할 뿐 아니라, 혐오스러울 만큼 부도덕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실정이라 그 도가 지나쳐 이방인들보다 더 심할 정도이다.

만약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이 인간의 본성을 중생시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편이라면(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자체를 부인하는 것임). 그 두 종료를 믿는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유능한 목회자가 없는 한 그것들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충성되지 못한 타락한 사역자, 가령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사역자를 통해 그동안 복음의 진리는 그 품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타락하여 부패했다. 우리 시대만 해도 부패되지 않은, 아주 복음적인 순종을 증진시킬 만한 가르침이 하나도 없다. 진리가 순전히 지켜지려면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만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 게으르고 냉담하며 무관심하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과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부지런히 자기 사역을 수행하는 자는 아주 드물다.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들이 하는 매일의 일과-가령 말씀과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성무일도(聖務日禱) 시간에 성무일과를 말해 주고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 주는 것 등-가 곧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인류를 죄와 무사안일 속에 효과적으로 가두어 놓는 것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또 그것을 좋아한다.

많은 사역자들이 아주 공공연하게 야망적이며, 한없이 탐욕스럽고 교만하며 감각적일 뿐 아니라 최악의 인간(부패한 마음이 고질화된 사람)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선한 자들까지 증오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에 전파했던 사람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시여, 다시 한 번 더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저희에게 주시어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저희를 양육하게”(렘 3:15참조) 하소서.

능력 있는 복음의 사역이 회복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현재의 배도 상태로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존 오웬은

어떤 교회가 복음의 순결을 지킬지 아니면 배도할지는 그 교회의 목사에게 많이 달려 있고, 교회는 그 교회의 임명받은 사역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 흥하고 망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 사역자의 중요한 의무를 제시하고 있다.

(1) 임명된 사역자는 복음의 가르침, 특히 거룩에 관한 가르침을 순결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사람들이 일단 거룩에 대해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갈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거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2)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쳐야 한다. 무엇이 유용하고 유익한지, 그리고 자기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볼 줄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
(3) 목회자의 의무는 사역과 삶을 통해 자기가 설교하는 그 크고 거룩한 가르침의 능력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4)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순결과 거룩 및 순종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해 주신 거룩한 훈련과 규율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능력있는 복음의 사역이 회복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현재의 배도 상태로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개혁주의마을

부분적인 배교 / 복음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섬 /존 오웬

오웬은 복음의 거룩한 명령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복음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배도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며 주의해야 할 배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안에 거하시며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도 받지 않은 채, 혹은 회개하고자 하는 소원도 전혀 갖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계속 죄악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를 부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거룩할 것을 요구하며 거룩할 것을 명한다. 복음의 가르침에 의하면 “거룩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다.” 참 거룩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수 있다. 진리를 증거하고 복음적 예배를 준수하는 일들로도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 그러나 거룩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들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증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은혜의 능력, 그 순결함 및 효능을 증명하며 결국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거룩에 대한 잘못된 관점 세 가지

(1) 로마 가톨릭 교회
오웬은 로마 가톨릭 교회만큼 거룩을 자랑하는 교회도 없을 것이라고 하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거룩한 순종이라고 부르는 청빈, 순결, 순종의 서약이나, 수도원 생활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 등은 복음에서 요구하는 순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하는 거룩에 대한 서약은 복음적 거룩의 영적 자유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류와 편견들로부터 자유케 하며, 또한 모든 거룩의 원리로서 마음과 영을 넓혀 준다. 그러나 “종교적 의무에 있어서 사람의 종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유인이 아니다.” 공덕을 세우기 위한 종교적 훈련은 “거저 받은 선물인 칭의와 영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고 기쁘게 기꺼이 행하는 그런 순종은 있을 수 없다.” “복음적 거룩의 핵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 거룩을 행하도록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다.”

(2) 도덕성을 가장한 배도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요구하는 모든 순종은 고상하며 도덕적이요, 정직하고 고결한 생활이므로 사람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그 순종을 위해 복음적인 은혜와 도움이 필요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도덕성의 가면을 쓴 배도이다. 즉 도덕성은 복음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심의 빛에 의해 인도되고 지배당할 때 배도가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도우심이나 하나님의 은혜없이 이성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확신으로부터 생긴 도덕성은 복음적 수종이 아니다. 중생을 통해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어 이루게 된 도덕성이 아니라면 그 도덕성은 복음적 거룩이 아니다. 즉 새롭게 변화된 영혼 안에 있는 은혜의 원리로부터 우러나오는 도덕성이 아니라면 복음적 거룩이 아니다. 초자연적 진리들 위에 세워진 도덕성이야말로 참 복음적 도덕성이다.

(3) 완전을 가장한 배도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행위가 완전하다고 주장함으로써 복음이 요구하는 참 거룩으로부터 멀어진다. 이런 주장은 은혜언약을 파기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중재사역 및 끊임없는 죄 씻음의 사역이 모두 필요없다고 보는 행위이다.

오웬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의 눈에 확 띄는 경건과 자선을 행하도록 격려함으로써 복음의 주된 은혜들을 등한히 만드는 것이다. 이는 큰 배도가 시작되고 교회들이 복음의 능력과 순결로부터 돌아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둘째는 그러한 위선적 가면을 책망하며 속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된다고 고집하는 가운데 복음의 외적 의무들을 등한히 하는 일이다.

'존 오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수받은 사역자의 의무  (0) 2013.10.06
사역자의 임무  (0) 2013.09.01
하나님께서 인간을 시험하시는 목적  (0) 2013.05.15
성령이 인도하시는 기도  (0) 2013.05.12
구원(혹은 용서)의 확신  (0) 2013.03.23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시험하신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속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은혜와 부패 모두 신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신자에게 충분히 그 실재의 상태를 바로 알게 해 주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고하거나 격려하실 목적으로 넒은 의미에서 시험을 행하시는데 이로써 그는 어떤 특별한 환경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작용 안에서 은혜와 부패의 상태 여부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때로는 은혜를 막으시는 방법으로 시헌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믿던 사람들이 사실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셨기 때문에 살아왓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또 때로는 은혜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중요성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신자는 다시 새롭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 그리고 은혜를 확인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더 깊이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개혁주의마을/Grace

성령이 인도하시는 기도 / 존 오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으므로, 우리의 영혼에 큰 유익을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늘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개인적으로나 가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나 필요를 느낄 때마다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있고 우리의 삶이 그분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경험하며 모든 죄를 이기며, 모든 선한 것을 획득하며 매사에 순종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하려고 할 때 많은 어려움과 잦은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올바로 기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며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이를 가로막고, 우리를 산만하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축복은 바로 이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은혜의 보좌앞에 자유롭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우리가 자녀로서 기쁘게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분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와 간구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시는 은사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죄가 되는 일인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성령을 근심케 하고', 우리 영혼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간구의 영을 주셨는데,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경계를 받았던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이를 무시하면서 제대로 기도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로운 도우심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 어찌 책임을 지겠습니까?
날마다 이 의무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그들을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알지 못하고,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도 이를 무시하고 내적으로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까?
종이 울릴 때마다, 자신들이 배운대로 영적인 관심은 없이 오직 양심의 평화를 얻기위해 기도하러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도대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도우심을 무시하며 기도하겠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비록 맹목적이며 미신적이기는 하지만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로마카톨릭 신자들 중에서 종이 울리거나, 미신적인 어떤 표시들이 내결렸을 때 한밤중에도 기도를 하거나 집에서든 거리에서든 관계없이 무릎을 끓는 사람들을 때때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때를 따라 기도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와 안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도의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정확히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받을 수 없는 성령을 받고 그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도우시는 사람들이 성령의 활동을 거부하고,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로 우리의 영혼에 생길 모든 불이익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감히 감사를 잃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죄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를 좀 더 확대시켜 우리가 드리는 온갖 종류의 기도에 대해 곧 개인적인 기도이든 공적인 기도이든 관계없이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유혹들과 위험들이 특별히 이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을 줄이고, 좀 더 많이 기도한다면 상황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우리의 역할을 보다 만족스럽게 감당했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안전을 멀리하고 파멸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라벤더 2012.02.03 12:05  http://blog.daum.net/iyunjeong/8718040
출처: USA아멘넷/믿음은 님

구원 (혹은 용서)의 확신      

 

존 오웬(John Owen)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죄로 인해 혼동에 빠진 영혼이 하나님 안에 있는 용서를 발견하는 과정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발견하는가? (시편 130)
아들의 피로 마련하신 죄 사함을 믿음으로 발견하며, 죄 사함을 받은 영혼은 예배와 순종을 하게 된다.

용서를 발견하기 전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창 3:10)
아담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자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범한 후에 두려움에 빠졌다. 아직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이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

가인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다. (창 4:16) 어리석은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숨을 수가 없다. (시 139:7-10)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 33:14)

죄의 책망과 질책은 있었으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나님을 소멸하시는 불로 인식하게 된다.

죄에 대한 압박은 커지고 용서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블레셋은 공격하려고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오지 않고 있을 때의 사울의 심령과 같은 것이다.

 

죄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은 신비적인 것이며, 거룩한 것이며, 한편으로 드문 (rare) 경우이다.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 까지 이른다. 가인과 삽비라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의 생각은 비고 만다.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 안에 있다. (엡 3:8, 9)
그러나 무지와 어두움으로 인하여 발견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그 본성상 용서를 알지 못한다. (롬 2:14, 15)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은 뗄 수 없는 쌍둥이와 같다. (히 10:1, 2)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을 비추어 주는 빛과 같다. 이것 역시 죄 용서함이 없다. (갈 3:10, 12)
죄 용서의 복음이 사람들에게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혹은 어리석어 보인다. (고전 1:18)

 

죄 용서함에 대한 잘못된 확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체험하였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체험들로 인한 거짓 확신들과 용서에 대한 헛된 거짓 확실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림자와 구름을 잡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 거룩, 순결, 엄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이 없다. (시 50:21) 사람들의 자신의 죄에 대해 심각성이 없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 (계명, 죄, 심판, 용서) 문제될 것이 거의 없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고, 죄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며, 용서는 단지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과 순결함에 대해서 모르는 자는 죄와 죄 성에 대해서 모르는 자이며, 용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자이다. 

 

복음이 일반적으로 외쳐지며, 어느 정도 교리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용서의 준비가 되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죄에 대한 용서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죄에 대한 용서를 믿음으로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 대한 질책으로 인하여 심령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때 마다 나는 용서함 받았다, 혹은 구원 받았다라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주거나 심리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설득에 불과하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견해 (opinion)에 불과하다. 거짓 평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죄의 용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성령의 더 깊은 죄의 질책과 책망이 있어서, 결국 자기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기까지 부르짖고 찾아야 한다. 이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주시게 되며, (갈 1:16) 이 빛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원리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구절을 남용한다. 그러나 같은 요한 일서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함이지, 우리로 마음껏 죄를 지어도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자신의 죄를 보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로 부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공경함이 없다. 자신의 육신적 만족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계명을 지키거나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갈 마음도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거나 용서하여 주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요 5:14, 8:11, 참고, 겔 37:23) 

그리스도의 용서함을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시편 116:1, 5-7절에 의하면 용서함 받은 자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죄의 용서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죄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싸우는 심각성이 없다. 오히려 그 영혼은 죄를 짓는 것에 용기를 가지고 있다. 죄에 대해서 물타기를 하는 영혼이다. 유다서 1:4 에 의하면 경건하지 못한 자이며, 은혜 아래에서 죄를 짓는 방탕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남용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알면서 죄에 방임하고,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로마서 6:1, 2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용서에 대한 믿음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로 죄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주는 능력이 된다. 용서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복음적 순종 가운데 살게 만든다. (딛 2:11, 12)

 

용서에 대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에 평안함이 없다. 물론 일시적으로 기쁨이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인 것은 아니다. 잘못된 근거에서 스스로의 확신은 잘못된 목적을 낳게 된다. 그것의 뿌리는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은 결국 교만하게 된다

 

복음의 용서에 대한 진정한 성격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을 하는 것이며, 그의 거룩하심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의 공의에 도전을 하는 것이며, 그가 부과하신 멍에를 거부하고 내어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로 자신에게 오도록 제안하시고 격려 하시는 것이다. 죄의 용서함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은 자신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출 34:6, 7; 시 9:10) 죄인들로 하나님에게 나아오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사 1:10)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요한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요일 4:8)

죄인들로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나아오게 하는 일은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다. (느 9:17; 미 7:18; 호 11:9)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는 복음의 용서와 관련하여 몇 가지가 있다. 
아들을 보내셨다. (롬 3:25; 사 53:11)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는 죄인들로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주셨다. 
그의 피 안에 있는 용서의 약속은 믿음으로 우리가 호소 할 수 있다. (고후 1:20)
주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 (골 3:13)
성령에 의해서 적용된다. (골 2:13)
믿음의 눈은 실제적 용서를 보게 한다. (사 44:22)
그래서 우리로 완전하게 (fully)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한다. (삼하 23:5)

 

용서의 발견

용서의 발견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다. (고전 2:9-10; 롬 1:17)
이것은 매우 깊고, 놀라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발견하는 자들은 놀라워하고, 감사한다. (엡 1:19; 엡 3:19)그러나, 용서의 확신을 못 가지는 경우들이 있다 (행 13:38, 39; 욜 2:13, 14) 이러한 경우 복음적 회개가 일어나도록 촉구하고 있다. 확신을 얻게 하기 위한 지침들은 다음과 같다.
1) 죄로부터 평안해지고자 하는 자신들의 노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삼하 15:25, 26)
2) 기다려야 한다. (애 3:26)
3) 기다리되 은혜의 수단 가운데 있어야 한다.

 

특별한 용서의 확신을 얻게 된다.
영적으로 깊은 황폐의 상태에서 용서함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된다. (갈 2:20, 딤후 4:8, 롬 8:38, 39)
구원의 확신을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히 10:22, 3:14)
믿음의 성질 때문이기도 하다. (신 4:4; 수 23:8; 행 11:23)
이것은 성령의 인침, 증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인 것보다 더 충만한 성령의 교통으로 인한 열매이다. (롬 5:1-5)

 

용서의 확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효과들

1)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결심 (요 15:4) 어려움과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자 하는 심령이 일어난다. (시 73:28, 2, 14절 참조, 요 6:66-68)
2)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게 된다. (사 28:16) 내가 서두르지 않는다 (사 9:22)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으로 얼마나 기다렸는가?
3) 압력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출함을 받고 위로를 받게 된다. (잠 25:25; 사 33:17)

 

확신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삶

1) 이기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주요한 목적이다. (롬 4:20) 하나님께서 용서를 제공하시는 목적은 사람들로 그의 은혜로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엡 1:6)
2) 인내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기다린다. 
3) 염려와 불안에서부터 벗어나서 확신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의무

1)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 6:12)
2) 우리의 신실성의 표식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3) 용서함 받은 것으로부터 강력한 동기를 요구한다. (엡 4:32)
4) 구약에서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명기된 것이다. 
5)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서 용서 받는 조건은 아니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다는 것은 우리가 용서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이다. (마 6:14, 15
6) 자기 부정,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버리는 것과 같이 복음 속에 있는 의무이다.
7)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이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 인해 나타나야 하는 덕목이다)(엡 4:24)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