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담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참된 진리(드흐라프)

3) 아담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실을 고백한 후 그 즉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을 다룰 필요가 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는 문자적으로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언약 체결을 본다. , 사람은 생명 나무를 통해 언약의 약속의 인침(sealing)을 받으며, 반면에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취할 경우 언약을 깨뜨리게 되면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1장은 오직 하나님이 사용되지만 2장과 3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 이름에 의해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이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때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호세아 6 7절의 증거가 따로 필요없게 된다. 또한 그 구절은 언약 체결의 근거로 사용하기에 의심적인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6:7)라는 내용이 일반 사람처럼 언약을 어기고라고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과 세운 언약을 믿음으로 알아 그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예비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체결할 어떤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독립적인 두 양측이 함께 언약을 세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언약을 야기하셨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호의에서 나온 주권적인 언약이었다. 우리는 먼지와 재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언약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에 또다시 깜짝 놀라게 된다. 한편,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하기 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반면에 그를 지극히 높임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상대로 삼아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사람을 친구로서 대해 주셨으며 그 둘은 서로 친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 지어진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단지 주권적인 권위로 다스릴 수 있는 피조물을 원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 로보트처럼 완벽하게 조정되는 피조물을 원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러한 피조물을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이러한 관계를 가지시려면 반드시 언약이 있어야 한다. 언약을 체결함이 없이는 모든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게 되고 사람은 복종만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만 공의가 있을 것이고 사람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약속을 주심으로써 인간에게 권리를 허락하셨다. 이에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는 즉시 그 약속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룰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후로 쌍방은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에 언약의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를 결정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임의로 대하실 수 없었으며,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직 이러한 상태에서 상호 사랑의 관계가 가능하였다. 이제 쌍방은 그들의 삶의 비밀스러운 일들마저 나눌 수 있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25:14).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언약의 율법 아래 있게 된 사실과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된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약화시키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은 주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해 자신과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에 묶으셨던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율법을 초월하시지만, 주의 주권적인 경륜 가운데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 안에 가두셨다. 더욱이 하나님이 주권적인 계획 안에서 우리와의 관계를 스스로 율법에 묶으신 후로는 그 관계만이 하나님께 합법적인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이 관계를 믿음으로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을지라도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항상 갖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에게 훨씬 더 가까이 내려오셔서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에 묶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언약의 발단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시작되었을지라도 언약은 사람이 하나님이 형상으로 지어진 것과 연결된다. 실제로 우리는 언약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말해야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실은 언약의 체결과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사람의 창조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언약 체결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언약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이미 있었다는 뜻이다.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지어졌기에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언약의 율법을 받은 후에 그 율법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담과의 언약 체결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라도 그 언약 체결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행위였다. 그럼에도 언약을 통한 관계는 그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부터 쌍방이 그 언약에 따라 각각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더욱이 쌍방의 언약 관계는 언약의 율법에 의해 서로 묶이게 되었다.

생명수 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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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죄의 형벌 참된 진리(드흐라프)

4) 죄의 형벌

보편적으로 말하면 죄의 형벌은 죽음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빼앗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만 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와 삶을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께 영원히 버림 받은 자들도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의미로 말하는 이 없다. 이 없을 때 그들의 존재는 내적으로 끝없는 모순을 겪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때 그들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버림 받은 자들은 그들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채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한 내적 갈등 속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죄는 죽음을 가져왔다. 모든 죄는 본질상 지독한 죄악이다. 어떤 죄라도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 담겨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의해 스스로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르면 죄에 대한 처벌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 죄가 있는 곳에서는 자동적으로 보응이 발생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면 우리는 스스로 삶을 버리는 것이 된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언약을 세우셨기 때문에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라온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형벌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가해하는 면이 있고 또한 하나님 측에서 의도하신 요소, 즉 언약의 공의에 따른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가 있다. 따라서 형벌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보응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 차이를 영원한 형벌과 연결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바깥 어두운 곳이란 하나님께 영원토록 버려진 상태이다. 그런데 죄인은 그 상태를 스스로 원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한번도 원치 않았으며, 이에 자기 소원대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연적인 보응이다. 한편 성경은 영원한 불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히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의 공의가 훼방된 것에 대해 그분의 영원한 진노를 나타내신다. 지옥의 고통 역시 하나님의 거절된 사랑의 공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정당한 보응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을 인간의 몸과 영혼에 발생하는 영원한 죽음으로 이해한다. 그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 및 그분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교제를 잃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저주를 받게 되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대항하여 돌아선다. 따라서 우리는 고립되며 철저하게 외롭게 된다. 하나님은 시험적 명령을 주시던 때에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2:17)라고 저주 및 처벌을 선포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로 떨어지자 주께서는 당장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언약의 은혜를 통해 그에게 찾아가셨다. 따라서 그 이후로 즉시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형벌을 보류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언제 형벌이 집행될지 정확하게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의 끈이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죽음의 형벌이 시행되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빈말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는 이 세상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당장 언약의 회복을 주도하셨다. 이는 이미 작정되어 있는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제거하고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교의 끈은 곧바로 다시 회복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 언약 안에서 온 세상과 인류 전체가 구원을 받았다. 이 말은 모든 각 개인이 구속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머리로 한 유기적 연합체인 이 세상이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열매없는 가지처럼 잘려나갈 것이다. 이에 성경은 죄인들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들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시리로다( 104:35)라고 말한다.

 

이 사실이 불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은혜의 언약의 열매인 많은 축복들을 누리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하나님과 회복된 교제의 결과들이 신자들에게 당장 최대한으로 다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이 뜻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은 구별하는 특징을 가진다는 뜻이다. , 추가적인 구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세상과 인류 전체는 하나님과의 친교로 되돌아왔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제거되었다. 이 사실은 내가 너(, 사단)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3:15)는 말씀에서 표현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셔서 자기에게 영원토록 있게 하시려는 인류와 사탄의 관계를 끊어놓으셨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더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들은 보응의 의미로서의 형벌이 아니라 은혜의 언약 내에서의 징계였다. 그 징계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3:19)는 주님의 말씀이었다. , 육체의 임시적인 죽음은 하나님의 징계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육체의 죽음이라는 격변을 통과하지 않고는 영원한 영적인 삶으로 변화할 수 없다. 이는 위협적인 자연적 죽음은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심판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여인의 삶과 남자의 삶에 대해 각각 심판을 선포하실 때 나타난다. 그 심판 안에는 은혜가 있었다. 그 심판을 통해 사람은 더욱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염두하게 될 때 영원한 죽음과 일시적 죽음이 구별되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온 세상에 은혜가 임한 결과로 인하여 불택자들은 당장에 궁극적인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온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는 오늘날도 존재하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여전히 은혜의 날들 가운데 살고 있다. 하지만 불택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연결된 끈이 없다. 그러나 영원한 죽음의 결과들이 당장 그들 안에서 최대한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영원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하지 않고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 개인에게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다. 우리는 아직 거듭나지 않는 택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분명하게 하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에 따른 영원한 죽음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붙택자들의 영원한 죽음을 통해 그들에게 거절된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 심판과 자비가 상호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따라서 같은 사건들의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영향을 나타낸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징계로, 불택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을 알리는 일시적인 심판으로 나타난다.

 

이 사실은 또한 이 세상에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재난에 적용된다. 주 여호와 하나님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7)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안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심판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심판 또한 그 당시 당장 간섭하였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부딪히게 된다. 지금도 모든 피조물들은 성령을 통해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기를( 8:21) 부르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다(, 1:18).

 

[출처] 4) 죄의 형벌|작성자 스데반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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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요구하는 사랑 참된 진리(드흐라프)

2) 요구하는 사랑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의 율법으로 요구하시는가?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정당한가?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요구한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는 여러 방면에서 거부되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은 오직 주기만 하는 가장 숭고한 속성이 있다고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요구를 반대한다. 그들은 당장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13:1)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의 사랑 가운데 자기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주셨다고 이해한다. 사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런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만일 인간적 사랑이 사랑의 응답을 요구하거나 주장할 수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러한 권리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우리는 특별한 관계 속에서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 자체에는 그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없지만 하나님의 뜻 때문에 그러한 요구가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의 사랑을 사랑의 패턴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종종 우리들 중에는 그 기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여 하나님의 사랑도 아무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모든 것을 주는 사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은 요구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의 정당한 요구를 다시 분명하게 깨닫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 사랑 안에서 심지어 자신까지 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신 만큼 또한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즉 우리의 전심을 요구하신다. 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자아-사랑이라는 것을 계시할 때 더욱 분명하여진다. 하나님은 자신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신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이에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은 주고 요구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정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 안에서 이러한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세우셨다.

 

심지어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 자신을 다 주신 후 그 언약을 유지시키기 위해 사랑의 응답을 율법 조항으로 넣으셨다. 그 조항은 아담에게 명령으로 요구되었지만 그는 그 조항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아담과는 다른 상황에서도 그 조항을 완벽하게 이루셨다. 이에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주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한때 언약을 통해 사람에게 하셨던 요구를 이루셨다. 이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 언젠가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사랑과 순종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다.           

 

따라서 처음부터 우리의 삶은 사랑의 요구에 의해 얽매여 있었다. 지금 우리가 더 이상 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하여 그 명령의 권리나 요구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그 권리에 기초하여 서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나 타당하다. 만일 우리에게 그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응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권리의 기준을 하나님의 위치와 작정에 두지 않고 인간의 능력 여하에 달려있게 하려는 것과 같다. 아무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본성을 주시기로 결정하셨으며 그 결정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조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말이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본성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에 따라 우리의 본성을 정하셨다. 주관주의는 사람의 본성의 능력에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의 기준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거짓이며 자가당착이다. 또한 역사주의는 인류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 권리도 비례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거짓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없으면 황제라도 권리를 잃는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조는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를 잃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에 따라 주권적인 결정을 통해 우리 삶에 그분의 사랑의 공의를 세우시고 그 관계를 통해 우리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에 각 사람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응답할 수 있었다. 지금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이는 과거 한때 인간이 무분별하고 주의없는 결정을 내린 결과이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지만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상태로 떨어져 버렸다. 그의 방자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의 존재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의 부조리한 상태는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불합리한 상태를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려는 생각을 철저하게 버릴 필요가 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합당한 요구를 함부로 바꾸려는 욕구가 사라질 것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고의적인 불순종을 행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아담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은 맞지만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이 부분은 이미 앞 과에서 다루었는데, 이러한 반대는 인류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우리가 모두 개인주의자로 태어났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생각은 날 때부터 죄성으로 인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후 우리는 각각 자신의 삶에 대해 개인주의적인 접근을 취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전적으로 부패하였을지라도 나의 생각만은 여전히 순수하고 건강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모두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람들과 분리된 상태로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아로부터 생각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내 스스로 내가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생각은 처음부터 전부 잘못되어 간다. 이에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모든 생각의 패턴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생각의 기능과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그릇된 생각으로 형성된 죄악된 관점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올바르게 되려면 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기 시작하며 인류 공동체의 위치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개인주의라는 난관을 벗어나게 되면서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가졌던 이의를 내려놓게 된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믿음을 통해 정화되어 하나님을 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리 문답의 답변에 동의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주지한 것처럼, 교리 문답의 답변은 죄성이 제시하는 질문을 육신의 차원에서 반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하나님의 계시로 죄성을 대면하여 그 논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러므로 교리 문답은 아담 또는 우리라고 언급하지 않고 아담 안에서 공동 책임을 진 모든 인류를 포함하여 사람이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육신의 질문을 대할 때 교리 문답의 답변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 죄성에서 나오는 그러한 고의적 질문을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취해야 한다.

 

사람의 책임은 마귀의 꾐에 빠졌다는 이유로 줄어들지 않는다. , 사람의 책임은 온갖 종류의 외부의 요소들을 겪게 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모든 영향은 우리를 죄로 유인할 수는 있지만 죄의 원인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을 받았다고 해도 그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삼을 수는 없다. 만일 외부의 자극을 범죄의 요인으로 여긴다면 인간은 그 어떤 책임도 부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로 유인하는 유혹과 범죄의 요인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둘을 혼동할 경우 엉뚱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리 문답은 마귀의 꾐을 말할 때 죄성이 사용하는 의도와 전혀 다른 의도로 언급한다. , 변명을 위해서 마귀의 꾐을 언급하지 않고 도리어 죄에 떨어진 범죄를 강력하게 조명하기 위해 언급한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여 마귀같은 존재에게 이끌리는 것을 허락한다! 그는 신성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을 선호한다. 사람은 신령한 것보다 마귀적인 것에 마음을 더 빼앗겼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게 우리가 스스로 범죄하였음을 큰 소리로 고발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한 숨에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이 마귀의 꾐에 빠지려고 마음을 활짝 열고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음을 보여준다.

 

교리 문답의 답변은 인간의 죄성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육신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있다. 그 답변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법적인 결정에 따른 선포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결정은 하나님 자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 결정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이 결정하신 공의 앞에 항복하는 자세로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한 눈에 무의식적으로 비참과 구원을 보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내 대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좇아오는 것과 굴복시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의를 거부하며 그 공의의 기준을 변경시키려고 할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의 요구 자체를 아는 것이 싫어서 고개를 돌리거나 그 요구를 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안다는 것과 동의한다는 것은 함께 있어야 하며 서로 상호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리과 공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권리와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 역시 그 공의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 공의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죄를 통한 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공의에 동의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그 공의의 충족을 발견한다. 그후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온 맘으로 인정하게 된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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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0 23:30

 3) 주권적인 결정

하나님이 세상과 인류를 자신과 묶으시기 위해 만드신 공의의 관계는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조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의도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고 전개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전혀 다른 관계를 설립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없는 질문이다. 우리의 속성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관계와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를 넘어서는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여져서 죄를 범하지 않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은 친히 일단 주도하신 관계에 있어서  언약의 상호 권리를 지키신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임의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상호 권리를 위반하는 경우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형벌의 경고는 언약의 설립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하나님은 일단 설립된 언약을 친히 준수하시며 그 언약을 유지하신다.

 

형벌에 대한 통보는 하나님이 자신과 피조물 사이에 세우신 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 그 관계는 언약적 관계로서 언약은 상호 권리와 의무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 언약 관계는 동시에 공의의 관계였다. 법적인 관계는 약속 위반 또는 침해를 범죄로 정의한다. 범죄가 발생할 경우 범죄한 측은 형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생기고 상대 측은 형벌을 시행할 의무가 있게 된다. 형벌은 처벌 조항에 따른 것으로써 이 조항에 의해 그 관계의 권리와 공의가 유지된다. 따라서 공의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시작과 계시는 위반에 대한 형벌 조항이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 말을 할 때 결코 절대적인 의미로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친히 설립하신 관계의 틀 내에서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는 공의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서 있기 때문에, 만일 공의가 무너지거나 사라지면 우리의 삶은 불가능하다. 언약의 권리가 포함되지 않은 삶이 있다면 그 삶은 구원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필요하지도 않다. , 공의는 인간 존재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는 공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이 망해도 공의는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맞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하에 영원히 멸할 지라도 공의는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공의가 사라진다면 모든 피조물의 존재 가능성도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가 세워짐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는 유지되게 되었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분의 뜻 가운데서 말씀하시길 이 세상이 보존되기 위해 공의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의 공의는 그분의 사랑의 공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공의 관계 속에서 자신 전체를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런 감정없이 제 삼자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이 거절됨으로 나타나는 의로운 심판이다. 더욱이 사랑은 공의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공의는 사랑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라 임의적 심판이 된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하나님 자신도 관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깊은 감정으로 심판하신다. 따라서 교리 문답은 하나님이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에 대해 심히 진노하시사라고 고백한다. 이 말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죄에 대해 심히 진노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관계를 통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이 자신을 주셨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심판하실 때는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이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 안에서 드러나며, 피조물과 관련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은 벌을 면제하지 아니하고 보응하신다( 34:7)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장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 사실에 있다. ,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결국 언약 체결과 관련한 모든 것들은 임의적일 수 없으며, 언약 관계는 오직 자신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었다.

 

우리는 형벌을 적절한 처벌 또는 보응이라고 정의한다. 형벌은 모독을 입은 공의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공의가 위반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은 의로운 요구를 하게 된다. 이때 형벌은 임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보응을 통해 그분의 사랑의 공의를 세우며 자신을 유지하신다. 우리가 그러한 보응을 부인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못할 것이다. 형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공상, 즉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 누구도 무너진 마음과 찢겨진 영으로 하나님의 형벌하시는 공의를 인정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멸하시는 불로 알지 않는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죄로 물든 본성에 따라 알고 생각하는 자세를 버리고 성경을 통해 올바르게 알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에야 우리는 더 이상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없이 제 멋대로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의 관점에서 모든 것들을 상고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사랑의 거절에 대한 보응을 마땅하게 주장하려면 그 형벌은 언약을 세울 때 바탕이 되었던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야 한다. 이 원칙에 따르면 형벌은 어긋난 만큼 주어져야 한다. 따라서 형벌은 무한하게 정도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형벌에 있어서 임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도 형벌하시는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불평할 수 없다. 사랑은 심판에 있어서 모든 작은 차이와 모든 상황을 고려한다. 이에 성경은 여러 범행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는 형벌은 범행에 상당하여 주어져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21:24, 24:20, 19:2)고 말한다. 한편 그리스도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5:38-39)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보응을 부인하는 것일까? 그럴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보응을 부인한다면, 이미 우리가 그 오류를 지적한 것처럼,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 또는 권리를 인간의 사랑의 공의 또는 권리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랑에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인간의 사랑의 권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멋대로 자기 자신에게 권리를 허락한다면 우리는 자기 권리가 무시될 때 보응하게 되면서 도리어 불의를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불의에 대해 경고하신 것이다. 율법이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계시의 조항은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조항을 오용하여 자기 개인의 권리를 변호하고 주장하는데 사용하여왔다. 따라서 도리어 하나님의 공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오용에 대해 반박하신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공의만이 이 땅에서 시행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때, 우리의 이해는 산상 수훈의 주제와 조화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나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가르치신다.

 

작성자 스데반 황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12) 중생의 필요성 참된 진리(드흐라프)

2012/01/19 09:29

 

 

12) 중생의 필요성

우리는 교리 문답을 통해 우리는 선을 전혀 행할 수 없고 모든 악을 향하는 성향을 지닐 정도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중생하지 않는 한, 전부 부패하여 있다고 고백한다. 이때 여러 질문이 생겨난다. 중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전적 타락을 말할 수 있는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는 이곳에서 중생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지는 못하더라도 몇가지 중요한 질문을 답해 보려고 한다.

 

중생이란 마음의 변화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이 마음의 변화는 변화된 삶으로 나타나면서 계속 변화를 받는 삶을 추구한다. 교리 문답은 우리가 성령으로 중생한다고 언급한다. 이 말은 다음 성경 말씀과 조화를 이룬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 25). 우리는 성령의 두 가지 활동을 구별한다. 직접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열게 하는 일과, 그 마음이 주를 믿고 의지하도록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는 일이다. 이에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6:14)고 말한다.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역사에 대해 면밀하게 생각해 보자. 사탄은 하나님을 향하던 인간의 마음을 바꾸어낼 수 있었다. 어떻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때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고,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은 이제 그에게 어리석은 것으로 보였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 열어놓으셔야 한다. 성령의 이러한 직접적인 역사에 의해 우리는 참으로 다시 하나님께 향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가운데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의탁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거듭남의 사건, 즉 중생 안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사람 안에서 이와같이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을 보시고 다시 자기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생을 통해서 기본적으로는 죄악으로 인한 부패와 어쩔 수 없이 그릇된 길에서 옹고집을 부리는 타성인 본성적 부패가 제거된다. 따라서 중생을 통해 원칙적으로는 원죄와 그 결과가 무효가 된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 부분,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 거룩이 본질적으로 회복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다시 하나님을 알게 되며 믿음을 통해 기본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다시 한번 얻게 된다. 이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5:20)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순전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성령은 다시 그의 소욕을 다스리는 책임을 갖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택함을 받은 자의 중생을 독립된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중생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며, 이 연합은 중생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중생한 자를 계속 영적으로 성장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 없이는 그 어떤 사람도 회심이 불가능하다. 둘째 아담이며 은혜의 언약의 머리되시는 새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류에게 새 원칙를 제공하셨다.

 

인류의 유익을 위한 모든 영향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분에게서 새롭게 흘러나온다. 이 영향은 특히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해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더욱 특별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고 그들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을 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향이 거듭나지 않은 불택자들에게 어느정도까지 역사하는지는 질문으로 남아있다.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한, 그들은 택자와 어느 정도 유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즉 그들은 택자와 함께 하나의 인류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만큼 그만한 변화를 나타내는 영향은 아니다. 하지만 불택자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의 유대관계가 유지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불택자들의 마음에도 어느 정도의 변동이 나타난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삼상 10:9)고 언급한다. 사울은 자기 중심적이었지만 새마음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주는 법을 배웠다. 이처럼 불택자들도 자신과 관계된 자들을 이해하며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는 불택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다소간 나타나 죄의 세력에 대항하거나 절제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불택자들도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철저한 교만 가운데 완전히 격리된 것은 아니다. 인간들끼리 철저하게 격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 역시 아직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불택자들이 상호 서로 의존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 및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는 불택자들에게도 아직은 하나님을 아는 제한된 지식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의존하는 의식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불택자들 중에는 나름대로 의를 시행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있다. , 하나님 뿐만 아니라 각 사람에게 해당하는 분깃을 돌려주려고 노력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을 절제하며 어떤 거룩함을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 중에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를 구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불신자 중에도 하나님을 아는 어느 정도의 지식 및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있다. 나아가 종교적인 확신을 갖고 사람들 앞에서 어떤 의로운 행위들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그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불택자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하나님을 계속 계시하기 때문에 만물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의식과 감각과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으로는 영생을 얻기에 불충분하다. 이는 성경에 따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17:3)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생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아는 지식이며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아는 것이다. 불택자들이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배는 자기들의 깨달음과 기준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망가뜨려 놓은 상태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신원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보기에 합당한대로 인간들의 친교를 위해 헌신하지만 그 헌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명을 받은 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의 능력에 의한 섬김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섬기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자신을 주장하기 위함이며 자신을 완전하게 하기 위함일 뿐이다. 이와 같이 불택자들 사이에도 그리스도의 특별한 영향력이 있다. 그러나 불택자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향을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영향을 인정하지만, 한편 우리는 본성적으로 아무런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참된 영적인 선을 행할 수 없다. 더욱이 비록 모든 형태의 악이 그리스도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실현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끝없이 악을 행하여도 결코 만족이 없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중생할 때에,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이에 우리의 마음은 성령에 사로잡혀 완전하게 변화되어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적 속성이 우리 안에 회복되는 것이다.

 

그때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양된다. 불택자들이나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가 그들에게서 발견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 자녀로 삼는 자들만이 중생이 허락되며, 중생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다.

 

 

생명수 쉼터/ 한아름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참된 진리(드흐라프)

2012/01/10 11:41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율법이 언약의 율법이라는 사실은 죄의 지식을 아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율법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죄의 참된 지식을 줄 수 있는가? 양심의 가책만으로는 우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51:17)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한 결과로서 우리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종종 하나님이 짓누르고 깨뜨리실 때까지 자신을 책망하는 양심을 붙들고 오래 동안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책망을 받게 되면 그 책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떄문에 우리는 율법을 사랑의 율법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율법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신다.  

 

소위 행위 언약의 율법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10:28)는 규정이 아니다. , 이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규정이 아니다. 행위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공로 및 대가 개념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통해 언제나 먼저 사랑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셨다. 이 관계에는 어떤 규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규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언약 율법(covenant-law)이다. 따라서 행위 언약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호의의 언약(covenant of Gods favor)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낫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명령은 언약을 떠난 자에게 해당한다. 그에게는 다시 스스로 율법을 완성하여 살아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길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옛 언약은 실은 은혜의 언약을 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율법을 통하거나 율법에 의해서는 사람은 저주의 판결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해야 함을 알려준다. 더욱이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 언약 밖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옛 언약은 인간의 저주 상태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셨다.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룰 수 있으셨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조차 율법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언약으로써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해 사랑 가운데 먼저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주셨다.  율법의 형태가 법적인 형식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양면을 띄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면서도 뒤로 물러나셨다.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베일 뒤에 숨으셨다. 이제 율법은 언약의 율법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것으로 우리와 및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규정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율법을 볼 때 그 율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및 그 사랑의 요구를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깨어지게 만든다. 그때에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깨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책임하고 무반응적인 삶에 대해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는 언약의 법으로써의 율법은 우리 안에 책임을 일깨우고 계속적으로 책임 의식을 갖도록 채촉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여길 때, 우리의 사랑을 위한 지침과 규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언약의 율법으로서의 율법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표현할 것일 뿐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사랑-율법은 하나님도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초월하여 있는 어떤 외적인 기준이 아니다. 또는 사랑-율법은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다른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여 하나님을 통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율법이 하나님 위에 있지 않고 또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스콜라 철학이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그러한 신학적인 관건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고백은 오늘날까지 큰 가치가 있다. 이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발견되는 가치이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을 벗어난 어떤 외적인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할 때 우리는 율법을 신격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에서 발견된다. 언약적 율법으로써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그 율법에 따르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율법을 지키는 데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주의 사랑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게 되는 것은 주의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일을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킬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율법주의는 그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거나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 사는 데 있지 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데 있다. 율법주의자들의 최고의 목적은 율법에 일치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수고로운 일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 심지어 율법마저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러할 경우 율법의 기능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되고 사람들은 율법을 오용하게 되고 율법 자체를 향상시키게 된다. 율법주의는 하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위해 충성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알 때 우리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은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된다. 이는 특히 안식일 명령에 대한 자세에서 분명하여진다. 그리스도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안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신성화하여 섬기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율법이 오용되는 정도는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되는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2:27)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는 하나님은 언약적 율법 안에서 사람의 삶에 복을 베푸시며 사람은 율법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안식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청교도의 여러 형태 역시 율법주의에 빠진 것들이 있다. 특히 어떤 청교도 단체 내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 문제는 안식일과 관련한 순종과 섬김이 본질적으로 율법 자체과 관련되어 버린 사실이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언제나 교회 내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해 율법에 일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고 율법은 속박하는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상반되게 된다. 그 이유는 은혜로 받은 율법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규칙으로 사용할 때 사람은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욱이 율법을 임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쉽게 극복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전혀 다른 뭔가를 명령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하는데서 하나님의 주권이 칭송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크게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은 율법이 임의적이어야만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전우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율법을 결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전우주적으로 적용되는 율법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법에 묶여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온 우주에 적용되는 율법이 없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과 주어진 상황 만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되면 상황 자체가 율법이 되며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자체가 율법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이 아니며 도리어 상황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주장과 함께 참으로 가장 달갑지 않은 형태의 이상주의에 이르렀다. 인간들은 다양한 관계의 이상들을 형성하여 놓았다. 인간들은 그러한 이상으로부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율법을 따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은 완전하게 자아 의지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만든 율법에서 나온 그러한 행위와 자세를 여러 인간 관계 가운데서 보게 된다. 결혼 관계에서, 가족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과 소유의 관계 속에서, 집단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국가들과의 관계 가운데서조차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적용한다. 하지만 사물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이상주의는 실제로는 불법의 형태일 뿐이다. 물론 이상주의와 함께 많은 불법이 묵인되고 위선이 난무하게 된다! 우리는 이상주의를 통해 사랑은 신이다라는 전제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선포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이 결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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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미움의 본성적 성향

 

교리 문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문에 대해 지킬 수 없다.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한참 모자르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을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오직 위선적인 몇 사람만이 자신들이 의를 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미워하는 성향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미움의 성향에 대해 자명하게 선포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7)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어려울 수 있다. 불신자의 삶 가운데 죄를 저지하는 성령의 영향력이 여전히 나타나는 상황에서 죄를 극복하는데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성령의 그러한 수고를 인식하면서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마땅히 우리가 본성상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본성이라는 용어는 물론 죄로 타락한 우리의 속성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잠시라도 죄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언약의 율법에 따르는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사실, 죄야말로 비정상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신앙 고백은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만일 이 표현이 말이나 생각에까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미워하는 성향은 충분히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의 여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실제 상태에 대해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인간의 미움의 성향을 분명히 보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의 관계를 따로 구별하여 고려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능할까? 이 질문은 위의 성경적인 점검에 의해 이미 답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많은 진지한 노력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평생 수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질문은 과연 그들의 모든 섬김과 추구가 뭔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보상을 바라고 행한 것이라면 그들의 섬김과 추구는 본질적으로는 사랑이 아니라 교만을 위한 것이거나 또는 이기심에 의한 것이 된다. 물론 사랑 안에도 언제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얻으려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사랑에 의한 바람은 보상이나 지불 개념이 아니다. 또한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섬김의 열망 역시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다는 확신에 근거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섬기는 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계속 인류를 끌어당기시고 호소하신다는 사실이다. 순수하게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 뭔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뭔가를 먼저 시작하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만일 아무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람을 유죄로 선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20). 그렇다면 하나님의 호소와 영향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일종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같은 것이 그 결과가 아닐까? 이때 그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굴복을 의미하며 사랑의 표현도 굴복으로 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이끌린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그들의 여러 종교적인 섬김과 헌신을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 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신에 굴복하는 우상 숭배이다. 이러한 숭배는 언제나 말씀의 계시와 언약의 말씀과 언약의 율법을 거절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그들의 숭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골적인 불순종이다. 반면 참 사랑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약을 통해, 언약의 말씀 안에서, 언약의 율법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절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재미난 사실은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하는 성향이 인간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사랑함으로 계속 가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결권이 분명하여진다.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 멋대로 결정하여 행한다. 사람이 그러한 자결권을 더욱 실현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러한 종류의 예배에 자신을 헌신하여 드린다. 이스라엘의 산당에서 드려진 번제는 예루살렘 제단에서 드려진 제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종교적인 헌신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절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 가운데 이제 이웃을 향한 사랑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웃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서로 극진히 사랑하는 모양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그들의 이웃 사랑을 순전히 이기심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분명히 부당한 처사이다. 그들에게도 이타주의적인 이웃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웃 사랑은 그들의 관점과 생각에 따라 이웃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 믿음이 없이는 사람은 이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위하는 관점 및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웃을 보지 못하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을 진정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되고 결함있는 편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잠깐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다가 그 이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알면 미움의 성향이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웃을 향해 곧바로 미워하는 마음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웃 사랑 안에는 그 만큼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한 반감이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힘을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서로를 사실과 다르게 알 만 아니라 서로를 우상으로 만들거나 존경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옆으로 밀쳐낸다. 이때 그들은 서로를 참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의미에서 볼 때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로는 영원한 친교를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영원한 교통을 나눌 때만이 그들의 외로운 고독의 상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독은 그들이 서로를 판단할 때나 헤어질 때 끔찍할 정도로 뚜렷하여진다. 이때 그들은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이웃을 향해 미움을 갖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웃이라는 관계 때문에 그 미움은 억압된다. 이는 이웃이라는 관계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열매이며 또한 성령의 보존하시는 역사로 인해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이웃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의 미움이 억압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할 때 내 자신과 관련한 고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미움의 세력 또는 성향은 우리 안에 잔재하여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의해 억제된다. 종종 우리 자신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미움을 억제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 같다. 불신자들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의 세계 안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이웃을 향한 미움이 종종 터져 나오곤 한다. 인간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미움을 대하며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의 성향은 우리 자신 안에 잔재로 남아있는 사랑에 의해 극복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잔재하는 사랑은 뿌리가 잘린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승리는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사랑의 결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성령이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을 창조하실 때, 우리는 그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실, 그 사랑을 만들어내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잔재하는 자연적 사랑을 사용하거나 관계하실 수 없다. 도리어 성령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랑을 죄악된 것으로 정죄하고 그러한 인간적 사랑을 물리친다. 언약의 율법 아래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심판 밖에 없다. ,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참에 대한 지식은,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믿음의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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