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움의 본성적 성향

 

교리 문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문에 대해 지킬 수 없다.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한참 모자르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을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오직 위선적인 몇 사람만이 자신들이 의를 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미워하는 성향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미움의 성향에 대해 자명하게 선포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7)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어려울 수 있다. 불신자의 삶 가운데 죄를 저지하는 성령의 영향력이 여전히 나타나는 상황에서 죄를 극복하는데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성령의 그러한 수고를 인식하면서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마땅히 우리가 본성상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본성이라는 용어는 물론 죄로 타락한 우리의 속성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잠시라도 죄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언약의 율법에 따르는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사실, 죄야말로 비정상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신앙 고백은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만일 이 표현이 말이나 생각에까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미워하는 성향은 충분히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의 여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실제 상태에 대해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인간의 미움의 성향을 분명히 보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의 관계를 따로 구별하여 고려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능할까? 이 질문은 위의 성경적인 점검에 의해 이미 답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많은 진지한 노력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평생 수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질문은 과연 그들의 모든 섬김과 추구가 뭔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보상을 바라고 행한 것이라면 그들의 섬김과 추구는 본질적으로는 사랑이 아니라 교만을 위한 것이거나 또는 이기심에 의한 것이 된다. 물론 사랑 안에도 언제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얻으려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사랑에 의한 바람은 보상이나 지불 개념이 아니다. 또한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섬김의 열망 역시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다는 확신에 근거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섬기는 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계속 인류를 끌어당기시고 호소하신다는 사실이다. 순수하게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 뭔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뭔가를 먼저 시작하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만일 아무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람을 유죄로 선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20). 그렇다면 하나님의 호소와 영향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일종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같은 것이 그 결과가 아닐까? 이때 그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굴복을 의미하며 사랑의 표현도 굴복으로 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이끌린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그들의 여러 종교적인 섬김과 헌신을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 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신에 굴복하는 우상 숭배이다. 이러한 숭배는 언제나 말씀의 계시와 언약의 말씀과 언약의 율법을 거절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그들의 숭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골적인 불순종이다. 반면 참 사랑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약을 통해, 언약의 말씀 안에서, 언약의 율법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절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재미난 사실은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하는 성향이 인간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사랑함으로 계속 가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결권이 분명하여진다.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 멋대로 결정하여 행한다. 사람이 그러한 자결권을 더욱 실현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러한 종류의 예배에 자신을 헌신하여 드린다. 이스라엘의 산당에서 드려진 번제는 예루살렘 제단에서 드려진 제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종교적인 헌신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절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 가운데 이제 이웃을 향한 사랑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웃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서로 극진히 사랑하는 모양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그들의 이웃 사랑을 순전히 이기심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분명히 부당한 처사이다. 그들에게도 이타주의적인 이웃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웃 사랑은 그들의 관점과 생각에 따라 이웃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 믿음이 없이는 사람은 이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위하는 관점 및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웃을 보지 못하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을 진정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되고 결함있는 편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잠깐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다가 그 이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알면 미움의 성향이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웃을 향해 곧바로 미워하는 마음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웃 사랑 안에는 그 만큼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한 반감이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힘을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서로를 사실과 다르게 알 만 아니라 서로를 우상으로 만들거나 존경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옆으로 밀쳐낸다. 이때 그들은 서로를 참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의미에서 볼 때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로는 영원한 친교를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영원한 교통을 나눌 때만이 그들의 외로운 고독의 상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독은 그들이 서로를 판단할 때나 헤어질 때 끔찍할 정도로 뚜렷하여진다. 이때 그들은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이웃을 향해 미움을 갖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웃이라는 관계 때문에 그 미움은 억압된다. 이는 이웃이라는 관계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열매이며 또한 성령의 보존하시는 역사로 인해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이웃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의 미움이 억압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할 때 내 자신과 관련한 고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미움의 세력 또는 성향은 우리 안에 잔재하여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의해 억제된다. 종종 우리 자신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미움을 억제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 같다. 불신자들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의 세계 안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이웃을 향한 미움이 종종 터져 나오곤 한다. 인간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미움을 대하며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의 성향은 우리 자신 안에 잔재로 남아있는 사랑에 의해 극복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잔재하는 사랑은 뿌리가 잘린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승리는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사랑의 결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성령이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을 창조하실 때, 우리는 그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실, 그 사랑을 만들어내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잔재하는 자연적 사랑을 사용하거나 관계하실 수 없다. 도리어 성령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랑을 죄악된 것으로 정죄하고 그러한 인간적 사랑을 물리친다. 언약의 율법 아래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심판 밖에 없다. ,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참에 대한 지식은,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믿음의 지식이다.


'S.G. 드흐라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의 형벌  (0) 2013.01.25
2) 요구하는 사랑/참된 진리  (0) 2013.01.20
주권적인 결정  (0) 2013.01.14
중생의 필요성/드흐라프  (0) 2013.01.06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참된 진리(드흐라프)  (0) 2012.12.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