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  호라티우스 보나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믿음이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럴 것입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믿음은 여러분에게 만족스럽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튼 저는 여러분이 만족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만일 여러분이 평강을 얻기에 앞서서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에게 만족스러워지기를 기다린다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평생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에 안식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 만족스러운즉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굉장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믿음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만족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로 만족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더 이상 무엇을 바랍니까? 여러분이든 그 어떤 죄인이든 그리스도로 만족하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바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종류의 믿음이 아닙니까?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만족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곤란에 빠뜨리도록 마십시오. 다음 사실을 확신하십시오.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사역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관해서 더이상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만유로 삼은 사람으로서 기뻐하며 여러분의 본분을 계속 행하십시오.

 

세례 요한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자아는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지 쇠하여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것은 마치 여러분이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듯 한 인상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작에서도 중간에서도 끝에서도 자아에 대해서는 불만족이요 그리스도에 대해선 만족이어야만 합니다. 믿음의 영광스러운 대상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그리고 믿음 자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믿음이 제아무리 완전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는 만유시다"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나를 보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바라보라고,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바라보라고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믿으라고, 그 믿음의 탁월한 자질을 확인하라고, 또 여러분의 거듭남을 알라고 요구하시며, 그런 이후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자격이 있고, 평강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믿음에 만족할 필요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그 어떤 개인적인 자격을 입증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단 한 가지,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그것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죄인으로 느낀다는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다면, 여러분 자신의 느낌에 대한 끝없이 난해한 조사를 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저 여러분이 죄인이라는 사실 바로 그것뿐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십시오.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이것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이것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악 됨을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이것을 근거로 해서 행하십시오.

 

복음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공통되는 것 외에는 우리 자신에 관한 그 어떤 입증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공통된 것이며,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한 가지 입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구주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필요 때문입니다. 믿음이 은혜의 보좌 앞에 서는 것은 바로 이 필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내 믿음이 내게 만족스러운가?"가 아니라, "나는 궁핍한 죄인인가?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으로 인해 만족하고 있는가? 입니다.

 

여러분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내 사랑이 내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기대했습니까? 여러분에게 평강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값없이 사랑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안식처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믿지 않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측은히 여기는 사랑이요, 다른 한 가지는 믿는 자녀들을 향한 기쁨과 만족의 사랑입니다.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집에서 고분고분 순종하는 충실한 아들에 대한 사랑과 동일하게 지극히 진실합니다. 비록 그 종류가 다를지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여러분을 믿는 사람으로서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련한 죄인으로서 사랑하십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최초의 안식처를 제공해 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추하고 더러운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이 값없이 풍성한 사랑은 죄인을 만족시키고 죄인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여러분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 회개가 내게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좋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과거에 여러분의 회개에 만족을 했더라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나는 내 회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내 회개는 그 자질도 훌륭하고 그 분량도 훌륭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지독한 교만과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 되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회개에 만족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평강의 기초로 삼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으로 양심을 평온케 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나아가고 싶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하기 전에 여러분의 회개에 대해 만족하고 싶다는 여러분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요컨대, 여러분은 종교적인 느낌에 있어서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만족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그렇게 만족하고 있지 못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종교적인 느낌에 대해서 모두 만족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관해서 매우 주제넘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고, 율법과 복음이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것에 관해서는 매우 경솔하게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느낌의 상태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는 면에서 여러분이 옳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즉각적으로 믿는 중차대한 의무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모든 느낌을 제대로 다 갖추기 전까지는 복음이 여러분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그것은 결코 죄인을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특별한 적합성과 영광이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택하고, 여러분의 모든 느낌이 전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가져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의 본성에 대한 자기 존중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너무 높게 평가하면, 우리는 전적인 죄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영접해 주실 것 같은 개인적인 자격이 없는 한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싫어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서든지, 크든지 작든지, 믿음이든, 느낌이든, 아니면 행위이든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려는 이와 같은 모든 시도를 포기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성령으로 하여금 슬퍼하며 여러분을 떠나가도록 만들 수밖에 없는 길을 추구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선함 때문에 여러분을 만족해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완전히 만족스러워 하시는 것이 오직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독생자의 인격과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즉시 하나님의 길을 취하고 그리스도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더욱더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죄 사함과 평강은 지체 없이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의 은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여러분이 이 중대한 일에 있어서 자신과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 외에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든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만족하게 된 사람의 자격 외에 다른 어떤 근거로도 여러분을 영접하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이 모든 것은 충분히 쉽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정확히 맞아 떨어집니다. 설령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으로 만족하게 되는 일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모든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만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분으로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http://www.cyworld.com/misspark0113/4295414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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