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준 교수 "구약 안식일과 신약 주일의 (불)연속성"



워싱턴한인목회연구원(원장 김범수 목사)은 2015년 신년 목회자 세미나와 부흥성회를 "이민 목회와 치유"라는 주제로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메시야장로교회에서 열었다. 주강사인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총신대학교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해 강의를 이어나갔다. 김남준 교수는 강의를 통해 주일성수에 대한 흥미있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1.
몇 해 전에 1920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안하는 교인들을 치리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주일성수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수찬정지등 매주 치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치리만을 가지고 안된다는 것이 보였다. 새문안교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리해야 하니 어느 시점에 와서 치리를 포기한다.

2.
오래 전 제가 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에서는 주일에 무엇이 필요하게 되어 목사님이 당장 가져오라고 하자, 저는 주일에 교회에서 돈을 안 쓰는데 어떻게 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너는 왜 이렇게 머리가 안돌아 가는가. 물건을 지금 가져오고 돈을 내일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안되는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담임목사가 하라고 하니 하던 시절도 기억난다.

주일성수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혼란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박용규 교수 같은 경우 "주일성수가 흐려지면 위기가 온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남준 교수는 2014년 합동총회에서 총회의 요청에 따라 준비한 "주일성수"에 대한 논문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 나갔다. 김남준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한 3가지 이슈 △과연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신학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러면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를 중심으로 수차례 강의를 인도했다. 특히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의 시각과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을 설명하며 주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김남준 교수는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 탁월하지만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상황과 고민하면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주일의 의미를 교인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하며, 주일성수를 강제하기 보다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따르고 주일에 대한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멘넷은 두차례에 걸쳐 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다음은 첫 번째 강의 내용이다.


▲김남준 총신대학교 교수

교회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연로하시고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장로를 비롯한 어른들이 '주일에 뭐 사먹지 말라' '돈을 쓰지 말라'라고 하는 주일성수에 개념과 젊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충돌하는 양상을 보게 된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한번쯤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주일이라는 말이 성경에 4번 나온다. 주일이라는 것이 영어로 'Lord's day'이다. 문자 그대로 '주님의 날'이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표현을 사용하는데 '주님의 날', '그 주님의 그 날', '그 주님께 속한 날'이라는 표현으로 나오는데, 3번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해서 나타나고 한번은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그 주님께 속한 날"이다. 그 날은 무엇인가? 초대교회 학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정한 날이라고 본다. 이미 초대교회 안에 주일을 지키는 전통이 확고하게 수립되어 있다는 암시를 준다.

안식교 등은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 자체가 기독교 배교의 역사와 관련 있다고 해석한다. 그 이유는 당시에 일요일이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기에 그러한 로마의 정책에 굴복해서, 말하자면 기독교가 토요일을 안식을 지키던 신앙의 정절을 꺾고 그 정책에 순응해 버린 것이 주일의 유례라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야기가 맞지 않다. 그 당시에 일요일은 태양의 날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 아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전부 다 신과 관련이 있는 날이었다. 월요일은 달과 관계있고, 다 관련이 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 역시 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당한 근거가 있는 비판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3세기경 로마제국 전체에 태양신을 포교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국 안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획일적으로 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국민을 통일하려는, 우리나라도 단군을 통해 정신적으로 통일하려고 했던 정도로 어떤 정서적인 국민적인 정서를 통합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지 하나의 종교적인 운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문제가 없다.

실제로 교회역사에서도 이미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수많은 초대교회의 문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부 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모이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고,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속사역이 신약과 구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심장한 신학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었기에, 사실은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들이 주일에서 성취가 되었다고 보았기에 그들은 주일이 신구약 역사 전체에 중심이 된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그 의미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인간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을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되돌리신다고 한다면, 사실은 구속의 사건은 창조를 계승하는 위대한 역사이기에 얼마든지 새로운 안식일이 도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주님을 뵈온 날도 주일이었고, 뵙게 되는 모임도 안식후 첫날이었고,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본 것도 주일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에 대해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과 교회역사에 전통에 입각해 볼 때 결코 그것은 우상숭배의 제도에 굴복한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을 하나 한다. 지금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킨다. 그런데 정부에서 일요일을 월요일로 옮겼다고 치자. 그렇다면 주일을 어떻게 할것인가? 정부하고 싸워서라도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거나, 정부의 결정과 상관없이 교회가 결정하면 월요일로 옮기면 된다 중 답이 무엇인가? 루터와 칼빈등 종교개혁자들은 공교회가 결정하면 상관없는 것이라고 본다. 교회의 공동의회에서 다른 요일을 주일로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회가 결정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루터와 칼빈은 보았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육일 창조하시고 마지막 쉬시는 날이 안식일이다. 주일은 그것이 아니라 첫날이다. 한주일의 시작이다. 의미가 다르다. 그러면 안식일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들이 주일을 정한다고 보면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한국에서 비해기를 타고 미동부로 날라오면 하루종일 날아왔는데도 시간이 뒤로 갔다. 어떻게 날짜를 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북반구로 올가가면 6개월이 낮이고 6개월이 밤이다. 이런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기에 계량적인 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만 무질서하게 내버려 두면 교회의 질서가 흩어지니 공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에 대해 여러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믿음의 강함과 연약함의 차이였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은 6일 창조후에 안식을,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지만 계기적인 한주간의 나중과 처음을 완벽하게 확정하기 어렵다. 계기적인 그날이기 보다는 교회결정에 의해 정해진 주일의 날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주일로 지키는 날을 개인이나 개교회가 함부러 바꿀 수 있다면 혼란과 무질서가 뒤따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결정를 따라 역사적으로 지켜온 그날을 그날로 삼을 뿐이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종교개혁자들의 입장-불연속성 강조


안식일과 주일의 신학적인 연속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두가지로 견해가 나뉘게 된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두개가 단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강조점의 차이이다. 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 아니면 불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에 따라서 의견이 둘로 나뉘어진다.

먼저 우리 개신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인 루터나 칼빈같은 사람들은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있고 신약에 주일제도가 있는데 이 두 제도가 신학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가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사이에는 신학적인 점진적인 계시, 모형과 실체의 완성이라는 관계에 연속성은 있지만 그것이 율법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이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은 루터이다. 루터는 만약에 구약에 안식일의 계명에 나왔기에 우리가 그 유대인들이 지키는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같은 방식을 주일도 지켜야 한다면 나는 주일에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모든 일을 다 해서 결코 이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겠다 라고 까지 발언한다.

칼빈은 그 입장을 기본적으로 계승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 주일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위해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노동의 의무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 루터의 입장을 따른다. 이 입장이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면 어디하고 맞닿는가 하면 특별히 초대교구들과 맞닿는다. 뒤에 4세기로 넘어가면서 엄격주의가 도입되고 엄격한 주일의 규례들이 도입된다.

여기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라.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성령강림사건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주일에 대해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이들이 당연히 주일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안식일을 점차 버리면서 주일을 지켰는데 그 방식이 누가 와서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이들은 평생을 유대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인데, 그러니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의미는 알았겠고 의식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도 사도행전 15장에 와서 공의회를 해서 결정할 정도였으니, 그러니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나고 15장 올 때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평생을 안식일을 지켜오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니,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을 따라서 주일을 지켰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신약시대에는 선지자가 필요가 없었지만 성경이 완성이 되기 전까지 선지자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게 신약과 구약의 과도기적인 성격 속에서 선지자들이 존재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그런 역사적인 전개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엄격하게 안식일을 평생준수하면서 살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주일을 지켰다. 문제는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던 것, 속사도 교구들과 초대교구들에 오면서 안식일을 지켰던 것, 중세로 넘어오는 것, 종교개혁자들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이후의 계승자들 그렇게 각각 구간이 나누어지는데, 처음에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안식일을 지킬때에 그것을 청교도들은 모델로 본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에서 모델을 찾지 않고 초대교구들에서 모델을 찾는다. 초대교구들의 주일에 대한 생각이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의 뿌리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자유, 그리고 율법에서 정한 안식일이 계승이 아니라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 같은 예고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성취되는 것, 그리고 그 주일은 종말이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 나라가 앞당겨져서 맛보기로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구속사적으로 주일을 이해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들이 생기면서 견해 차이들이 일어난다. 안식일 제도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이들이 루터와 칼빈들이다. 반대편에서 영국 청교도들, 찰스 하치(개혁신학의 초석을 많이 놓은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 들이 안식일의 연속성을 강조했던 사람들이다.

칼빌은 주일을 거룩히 지킴에 있어서 안식일의 율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와 현실적 실천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래서 주일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일을 지킴으로서 신자는 전 생애에 걸쳐 완전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안식일 규례들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계승은 하되 그 구체적인 규정사항은 의식법에 속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학적인 의미가 다 폐지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칼빈은 안식일 제도의 각종 규정들은 의식법이라고 보고 폐지가 되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정신들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이 안식일 개념을 두신 것이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첫째, 안식일을 정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안식이 앞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표로 삼았다. 그래서 주일은 하나님 앞에 율법적으로 얶매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한없이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날이며 그것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줄 것이 주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 용돈도 주일에 주고, 선물도 주일에 주고, 뭔가 주안에서 기뻐하고 좋아할 일이 있으면 주일에 하라고 했다. 그 대신 그것이 다음에 있는 것을 침범하면 안된다고 했다.

둘째, 믿음의 백성이 정해진 날에 모여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고 예배하기 위함이었다. 이 신학적인 정신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유는 칼빈은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제약이 없이 내버려 두면 하루라도 더 일하려 한다. 그런 연약성 때문에 공동체 전체를 묶어서 하나님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교육받고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영혼과 정신을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의 법도로 도향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들은 율법의 신학적인 정신이 주일에 계승되었다고 본 것이다.

셋째, 사람들을 노동으로 부터 쉬게 하시게 위함이었다. 노동에서 쉬어야지 두 가지 목적이 성취된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그렇게 휴식을 함으로 재창조가 가능해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노동의 의미에 억매이지 않고 자기의 신앙심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칼빈은 이제 구약에서 영적인 표로 바라보고 그림자로 제사했던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가 되어서 그것을 조항적인 규정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주일은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에 주일에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천국의 복락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주일에 육체적인 환락으로 기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즐거워하라고 하니 파티하고 댄스를 하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고 이야기했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즐거움이 그런 영적인 즐거움이 주일에 충만해 지는 날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이 주일로 돌아가는 정신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일성수 문제에 대해 중세시대까지 전통은 굉장히 엄격했다. 그런데 엄격한 것이 다 지켜졌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이 파격적으로 안식일과 주일사이에 신학적인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야기했던 것은 당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그것은 중세후기에 가서는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수없는 이름을 붙여서 절기를 만든다. 365일 가운데 거의 200일 이상이 성인의 이름을 가진 날이다. 그것을 다 미신적으로 지키고 준수함으로서 그 공덕이 쌓이고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라는 종교개혁의 지침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에 루터와 칼빈이 주일을 계량적으로 몇 번째 날, 이 날은 매우 중요하다고 지정을 해버리면 중세에 만들어 놓았던 그 미신적은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나가 더 늘어가거나 강조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주일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많은 관습적이고 미신적인 절기 중에 하나와 어깨를 겨루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이런 루터와 칼빈 같은 1-2세대의 종교개혁자들은 안식일과 주일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성령강림 직후에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방식에서 가져오지도 않았고, 중세시대의 바리새적인 엄격주의와 후기의 신비주의에서도 가져오지 않았고, 초대교회 교구들에게서 정통성을 가져왔다.

칼빈은 주일성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상당부분을 '아디아프로'에 속하는 것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칼빈이 주일성수와 예배참석의 의무, 형식과 예전의 시행 등에 있어 규모없이 목회한 것은 아니다. 1537년에 작성된 제네바교회의 법규인 교회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예배나 주일성수에 대해 언약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 다른 개혁자들과 함께 중시했던 양심의 자유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양심의 자유문제를 '아디아포라'와 관련지었는데, '아디아포라'는 말씀에 명백히 규정된 바가 없고 종교적으로 행동을 규정할 타당한 근거가 없는 중립적인 것이어서 때에 따라 작위와 부작위가 허용되기에 양심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상황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안식일 준수에 있어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있어 주일이라는 정한 날에만 실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생의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식일이 폐지되기는 하였지만 추출되는 원리를 따라 우리가 여전히 지켜야 할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로 정해진 날에 성도들이 모여 말씀을 들어야 하며 성찬의 떡을 떼고 공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 둘째 노동으로 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루를 쉬는데 자기뿐 아니라 식솔과 일꾼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칼빈의 이런 견해는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두개의 문답에서 신약의 교인들이 노동을 금하는 것이 안식일에 주신 금지명령이 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칼빈이 주일에 노동을 쉬라고 이야기했지만 율법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하루를 떼어놓아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배우고 경배할 때 영적인 생명이 고양될 수 있기에 한 것이지 안식일을 지키라 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교도들과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지된 제사에 대한 율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일에도 노동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율법에 정한 노동금지 명령이 아니라 육체의 쉼속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충분히 쉴 수 있는 날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가운데 말씀과 은혜, 성도의 교제와 같은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마음과 뜻을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십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일성수에 대해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기존에 있었던 중세시대에 통용되었던 주일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게 정해놓고 실제적으로 방종하게 지키던 그 날에 대한 도입된 미신들을 제거하면서 순수한 개혁신앙으로서 주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주일을 바라보면서 빠지는 오류가 주일은 이미 다 율법적으로 끝났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데 주일을 안 지키면 어때하는 방종주의, 주일에 대해 마치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십계명 율법을 위반한 것 같은 바리새주의등 양쪽 극단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칼빈의 입장은 분명하다. 안식일에 대한 것은 제사에 관한 것으로 해서 종식되었다. 그 대신 그것에서 항구적인 신학적인 원리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그것들이 추출해 낸 원리가 두 가지인데 노동으로 부터 육체가 쉬어야 하고, 우리가 연약하기에 하나님과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는 집중된 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안식일의 계명을 연장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만 확실히 붙잡으면 된다. 교인들을 가르칠 때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주의적인 방법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 자유주의적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을 둘 다 하지 못하게 타일러야 한다.

요점은 안식일에 강조된 육체의 안식은 주일 안에 강조되어야 할 영혼의 안식을 바라 본 것이었다. 물론 안식일 제도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혼의 유익을 누리는 영적 안식에 대한 신적 배려가 있고 주일제도에는 육체노동을 쉬게 하려는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강조점의 문제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루어질 종말의 안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 안식을 강조했다면, 청교도들은 구약의 안식일 제도의 성취가 그리스도 구속 안에 이루어졌고 이것은 종말 안에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이행하는 과정으로 보아 육체의 안식을 보다 강조함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균형추에서 다소 이동했다.

(다음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 그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 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제 2 장 하나님의 율법 / 월터 챈트리

 

 

제 2 장 하나님의 율법

 

(막 10: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첫 번째 아홉 가지 계명

부자 죄인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메시지를 좀더 밀접하게 분석하면 할수록 현대 복음전도와의 차이점은 훨씬 현저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는 나머지 대화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 특히 십계명으로 요약되어진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진술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인해 그는 첫 번째 4 가지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적절하게 예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인간을 찬양하는데 더 민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그 관원으로 하여금 ‘첫번째 부분의 율법들’을 깨뜨릴 수 있도록 깨닫게 해주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비록 정확한 순서는 아니지만 그 다음의 다섯가지 계명들을 명확하게 인용해 나가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는 질문에 이것은 좀 이상한 답변처럼 보이지 않는가? 진실로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값없는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점입니다! 왜 자신을 “개인의 구세주”로 제시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이 모든 것들은 율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다시금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보다도 훨씬 유능한 전도자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메시지를 그분의 메시지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 반대로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은 복음 전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롬 3:20). 현대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빠진 것은 아마도 현대의 교회와 선교가 무기력한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 관원은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누구를 대적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께서 계명들을 열거하셨을 때 그는 계명들에 따른 모든 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예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부자는 “전혀 무죄입니다”라고 이와같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그의 대답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려진 눈이 진실로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 그에게 율법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조명을 통해서만이 마음속에 있는 죄라고 하는 해충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의 답변은 요한일서 3:4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오해했다면 부자 관원은 자신의 죄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의 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하다면 자신들을 정죄되어진 죄인으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마음속에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개념도 생소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복음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쉽게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율법과 분리해서는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극심한 고난은 온전한 계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이 볼 때에는 비참하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합당한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만약 죄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십계명의 요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정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십자가는 죄인들로부터 구원의 믿음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동정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화목제물(롬 3:25) - 즉 파기되어진 율법에 대해 가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속물 - 로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위험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비록 자신이 영생을 얻을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율법의 파기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따라서 그는 자신이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도덕주의자가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서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현대의 설교는 인간은 구세주를 진심으로 영접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개념에 대해 입에 발린 말만을 할 뿐입니다. 일반적인 전도용 소책자는 “당신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강조합니다. 만약 그 질문에 머뭇거림이 있다면 여러분은 즉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정의는 결코 포함되지 않습니다. 가장 완악한 죄인을 포함해서 이 광범위한 진술을 부인할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물론 나는 하나님보다 거룩하지 못하며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젊은 관원 역시 그처럼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죄에 대한 인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거짓말장이요 간음자요 도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옛 시대의 쓸모없는 유물이요, 오늘날 그것을 지키면 죄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차단시키게 될 것이라고 하는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율법을 전도의 일차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전하는 것이 죄인에게 죄의식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 그 안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그녀의 양심에 적용되어진 제7계명을 들어야만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결코 회개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 관원도 개인적으로 전하여진 율법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여전히 혼돈 가운데 머물렀을 것입니다. 모든 참된 성도는 자신의 회심을 율법의 사역에 기인한 것으로 말했던 바울에게 동의를 표할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 7:7). 죄를 알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특정한 죄에 대해서 정죄가 행해질 때 비로소 죄인은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이해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죄인이 해야 할 일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과거 그 어느 세대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무지합니다. 강단은 출애굽기 20장을 무시하며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안식일을 기념하라”고 하는 제 4계명을 무시합니다. 이 세대가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잡동사니 신학에 대해 나무라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설교자들은 현대에 필요한 진리의 참 요소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멸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도구로 필요한 율법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매우 현명한 계략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율법과 사랑은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원수요 적대관계라고 제시해왔습니다. 만일 양자가 대립관계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을 택하고 율법을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무시할만한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악한 원수는 사랑은 율법과 무관한 것이요 그것과 적대관계라고 선포해 왔습니다.

성경은 이 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사랑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사람들에게 강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의로운 율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질 수 있습니다.

(마 22: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은 사랑의 요구에 대한 설명 자체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을 율법과 연관지어 정의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한 반복은 놀랄만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랑은 율법의 인도 없이 표현되어질 수 없고 율법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고서는 결코 영적으로 준행되어질 수 없습니다.

요한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사랑은 율법을 즐겁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을 기쁘게 준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윗처럼 외칠 것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자연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율법은 사슬과 같고 지배자의 뜻에 강요와 같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부재를 말해줍니다. 만일 그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그는 율법을 결코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율법도 사랑을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은 약해지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살아하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답변을 제시해줍니다. 요한일서 5:3이 선포하듯이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표출되어집니다. 또한 로마서 13:8-10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듯이 율법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지침입니다.

(롬 13: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과 사랑은 결코 대립관계가 아닙니다. 갈등은 구원의 방식으로서 율법과 은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생명으로 나가는 길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여 칭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은혜에로 그를 이끕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를 인한 믿음으로 말미암는(엡 2:8)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복음전도에 있어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압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준행되어지는 기준으로는 무가치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부터 율법의 검을 폭 넓게 휘둘렀습니다. 그가 이처럼 행한 이유는“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죄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미움과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명들을 선포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 의와 사랑을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설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주제를 오랫동안 취급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그 계명으로 인해 죽게 될 때까지 십계명을 설명하십시오.(롬 7:10). 사람들이 율법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때가 복음이라고 하는 향유를 발라줄 때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바늘을 통해서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주홍색 실은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 10 계명

우리 주님께서는 계명에 대한 그 관원의 지식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주께서 계명을 언급하셨을 때 이 가련한 친구는 자신의 무죄를 고백했습니다. 외적인 행위가 결코 계명이 요구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그 청년은 “율법이 신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습니다(롬 7:14). 아마도 그는 율법의 엄한 외적 규율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마음과 생각과 뜻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세주께서는 율법을 전하시는 데 있어서 훨씬 철저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점을 그 영혼 깊은 곳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계기로 삼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셨던 것처럼 각 계명들에 영적인 적용을 첨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함께 그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설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아무런 이유없이)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마 5:22)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부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상생께서는 부자가 그 마음속에 가장 아끼는 죄를 지적하실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네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제10계명을 적용하여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탐 내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영혼에 있는 지독스런 탐욕을 찌르는 칼로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그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죄는 부자의 표면적인 행위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오물과 추함에 딸라 탐욕은 그의 영혼을 지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치 화살처럼 이 청년의 양심을 처음으로 꿰뚫었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탐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공손한 질문자는 “나는 그 누구의 재물이나 부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출애굽기 20장을 재인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제 10계명을 실제적인 테스트로 전환시키셨습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부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떠나갈 때 그는 자신이 탐욕스런 죄인이라는 명백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었습니다(마 22:40).

여러분은 예수께서 구한 것이 그 청년이 하나님보다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 관원의 양심에 깊고도 고통스러운 상처가 생길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칼을 휘두르셨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그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사실에 동의하도록 그를 설득시키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청년의 영혼이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요, 그의 영혼은 탐욕으로 인해 사단에게 팔리운 바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서 율법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미영하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진리와 타협하기보다 오히려 그 관원이 떠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죄인을 자신에게 이끌기 위해서 온전한 율법의 파기할 수 없는 특성을 무시했다면 그는 사랑을 파괴시키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과 연루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자리를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의 설교자들은 필히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을 선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양심에 상처를 내는 법을 알아야만 비로소 그 상처들을 복음이라고 하는 붕대로 감싸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교회들은 미력이나마 전도하여 회심자들을 얻는 비결을 알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공동적인 메시지가 우리의 힘을 유지하고 복음을 널리 전하며 나아가서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연합을 가져다 줄 것으로 가정해왔습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진리를 약하게 전해왔기 때문에 세상은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단조롭게 반복되어져 왔던 사영리의 전도방법은 죄인들이 우리 주위에 생겨나게 했으며 또한 교회를 약화시켰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풍성한 복음을 회복시킬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증거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우리의 회중 가운데서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적용시키면서 전파해야만 합니다. 율법의 용례를 보면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율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끌어내고자 하신 것은 “무지하고 무감각하며 자고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법의 적용은 바로 인간의 속사람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율법이 영혼의 동기, 열망, 감정과 태도에 엄격한 요구를 행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강단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강단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또한 그 교회가 구원의 도에 대해 듣고자 하는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십계명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존 플라벨)

(Preaching Christ from the Decalogue) 




존 플라벨(John Flavel, 1627-1691)영국의 회중교회 목사



십계명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 양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완벽한 모범이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 아버지 앞에 그 어떤 신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말과 달리, 그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끕니다. 

율법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우상숭배자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자이며, 안식일을 어기는 자들이며, 

그 외에도 많은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 보십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떻게 감사하기를 바라시는 지를 보여줍니다. 

십계명에서는 순종이 구속에 뒤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자신이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그들이 구속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값없이 주어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방식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율법을 감사의 부분에서 설명하면서 

다루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실체입니다. 

이 말은 1번의 요점과 관계되어 있지만, 

그것과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준수한 분(그분의 인성을 따라)일 뿐 아니라, 

그분의 신성에 따르면 

그 분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때, 

우리가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바로 그 대상이 되시는 분입니다. 



1. 제 1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제 1계명은 

우리에게 예수를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 구세주, 중보자로 예배할 것을 가르칩니다. 



2. 제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20:4-5)


제 2계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십니다.(골 1:15; 히 1:3) 

그분을 향한 우리의 헌신은 그 어떤 다른 형상에 대한 예배도 배제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3.제 3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20:7)


제 3계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모든 무릎이 엎드려야 할 바로 그 이름입니다. (빌 2:10-11; 비교. 사 45:23)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0-11)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사45:23)



4.제 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20:8-10)


제 4계명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누리는 우리의 안식입니다. 

그 분의 임재 가운데, 

우리는 일상의 할 일들로부터 물러나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눅 10:38-42)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8-42)



5.제 5계명: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 20:12)


제 5계명에서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고(히 2:10) 영광으로 이끄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6.제 6계명:살인하지 말라(출 20:13)

제 6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생명으로, 생명의 주님(행 3:15)으로, 

우리가 살도록 당신의 생명을 주신 분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요 10:10; 14:6; 갈 2:20; 골 3:4)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행3:1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요10:1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10)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골 3:4)



7.제 7계명:간음하지 말라 (출20:14)

제 7계명에서 우리는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정결하고 흠이 없는 신부 삼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께 

우리의 신랑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8.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출20:15)


제 8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기업으로(엡 1:11),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1)


  

9.제 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


제 9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리(요 1:17, 14:6)로 영광을 돌립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10. 제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출20:17)


제 10계명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외적인 필요와 우리 마음의 새롭게 된 욕망을 모두 만족시키는 

우리의 충만의 충만(고후 3:5,12:9)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3:5)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안상홍 증인회(하나님의 교회) 안식교 등에서는 '안식일을 부인하고 성경에도 없는 일요일 예배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인 것처럼 덧붙여서 가르치는 이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우매한 것인가를 밝히는 자료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안식일' 의미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엿새 동안에 마치고 칠일 째에 안식하시고(2:1-3),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 4 계명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성별 하신 데서 비롯되었다(16:26,20:8,31:13-17;5:12,B.C.1446년경).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곱째 날로 오늘날의 토요일이다.

 

2. 이루어지지 못한 안식일

하나님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려 하셨다(2:8).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낙원에서 쫓겨나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을 해야 있게 되었다(3:19).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7:1), 아브라함을 통하여(17:1-8), 모세를 통하여(3:1-10), 여호수아를 통하여(1:3-9) 안식에 참여할 기회를 여러 주셨으나 계속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범죄로(13:17;20:12-16)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저희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95:11;3:11) 선포를 하시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성일이라 더럽히지 말고 쉬어 평안하심을 원하셨는데(31:13-17)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훼손하였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성경에도 없는 39가지 안식일 금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안식일의 노예로 만들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2:27)

예수님의 깨우치심이 이것에 연유한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부담과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온전한 쉼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란 것이다.

 

3. 안식일을 완성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5:17).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안식일은 B.C. 5년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땅에 오셔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으로 폐지되었다고 보아야 것이다(2:27,28). 이는 B.C.793년경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고되어졌던 일이기도(2:11).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5:14) 명령을 하셨는데도, 안식일을 피하여 병자를 고치셨다면 바리새인의 비난을 피할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38 병자를 고치시거나(5:5-9), 마른 사람을 고치신 (3:3-5) 많은 일을 안식일에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안식일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12:8;2:28;6: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들의 안식을 가로막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27:32-46;15:24-34;23:33-45;19;18-30).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안식을 가로막고 있던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렸다(28:1-6;16:2-6;24:1-6;20:1-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은 안식일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안식에의 초청 거부를 거두시고(95:11;3:1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하시며 안식에 참여하라고 초청하신다. 이제 누구든지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할 있게 되었다.

 

4. 예배하는 날이 주일(일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20:7)이.

날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의 (1;10)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 것은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 것이다(14:9). 따라서 날을 기념하여 주일에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교부 저스틴(Justine) 자신의 저술에서 주일이 신자들의 예배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첫째, 주일은 주의 날로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어둠에 빛을 던지신 날이기 때문이다.

둘째,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계속적으로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셋째, 주일은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이 갖지 못한 '영적 신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초대 교회에서는 지금의 토요일 저녁에 예배하였다. 당시의 유대력에 의하면 일요일은 현재의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 안식일 다음 시간을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시간으로 삼았고 이는 유대교 안식일인 토요일과 불과 시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으므로 신자들이 주일과 안식일 예배에 대한 거리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트라얀(Trajan, 98-117) 황제의 박해 '제국내의 모든 야간 종교 집회가 불법이 되었기 때문에' 주의 만찬을 위한 초기 신자들의 주일 모임은 다음날인 일요일로 옮겨졌다.

주님과 가장 먼저 영적 교제를 갖기 위해 해가 뜨는 시간이나 전에 예배하였다. 변화는 안식일과 주일이 적어도 날에 있었던 관습을 깨는 사건이 되었다.

처음에는 예배하는 날이 유대인의 토요일과 이방인의 일요일로 공존하였다. 그러다 보니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14:5,6). 바울은 안식일 문제로 폄론하지 말라고 하였다(2:16).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2:17).

구약의 유월절 만찬이(대하30:15-17) 신약의 성찬예식으로 대치되듯이(6:53), 구약의 짐승의 피가(3:2;13:11) 신약의 그리스도의 피로 대치되듯이(1:7), 구약의 '안식일' 신약의 '주일' 대치하여 완성된 것이다.

 

5. 주일(일요일) 예배한 기록

1) 주후 98~118년경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이며 안디옥 교회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에 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2) 주후 100년경 기록된 기독교 예배 지침서인 디다케(Didache) 기록 :

"'주의 ' 특별한 날이므로 주의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돌릴 것입니다."

 

3) 주후 70~130년에 기록된 위경으로 분류된 프슈도 바나바(Barnabas) 편지 :

"여덟째 (*일요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인 천년왕국의 안식 후에 마지막 영광을 바라본다."

 

4) 주후 165년경 순교한 교부 저스틴(Justine) 1 변증서 :

그리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곳에 모입니다."

 

5) 주후 165년경에 사망한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 기록 :

일요일이라는 날에 모이는 기독교 집회의 예배 순서를 기록하고 있었다.

" 순서는 성경봉독, 설교, 기도, 주의 만찬 의식과 봉헌이 있었다."

 

6) 주후 170년경 고린도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 로마 감독 소테르(Soter)에게 보낸 편지 :

우리는 주의 거룩한 날을 지켰습니다. 날에 당신의 서신을 읽었습니다."

 

7) 주후 21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Clemens) 일요일 준수를 지지하는 글을 남겼다.

 

8) 초대 교회의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us)

당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위정자들과 일반 이교도들에게 호소하기를,

"태양과 일요일을 가지고 우리를 비난하는 그대들은 우리와 친근해야만 한다. 우리도 그대들의 '사투른 '(Saturn. *농사의 ) 그대들의 쉬는 날들(*토요일)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9)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 그리스 교부 오리게네스 (origenes 185~254) :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날을 항상 지키고 있는 것이다."

 

10) 주후 253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난지 8일만에 행하는 유대교의 할례 관습을 기독교의 주일 준수를 예시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11)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페트로스(Petros) :

"주일을 기쁨의 날로 지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날에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12) 주후 321 3 7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 주후 274~337) 일요일을 휴일로 하는 칙령 :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에 쉬어야 한다."

 

13) 주후 386 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치리 379~395) 휴식령 :

"우리 선조들이 주일이라고 옳게 불렀던 일요일에는 모든 기소와 소송에 관한 처리와 업무를 일체 중지할 것이다."

 

6. '안식일' '주일' 비교

< >       < >                                                    < >

1.     구약( 언약)                                         시대 신약( 언약) 시대

2.     일곱째 (23:3)                                   안식 첫날(20:7)

3.     토요일(Saturday)                                   일요일(Sunday)

4.     여호와의 (31:13)                              주의 (1:10)

5. 예배자  이스라엘 자손(5:3)                              주의 이름을 부르는 (2:21)

6.     짐승의 피로 제사함(17:1,6; 9:22)       그리스도의 피로 예배함(9:12;20:7)

7.     창조하신 하나님(20:8-11)                    부활하신 예수님(20:19)

               창조의 완성(2:2)                                  구원의 완성(2:8)

               육체적 안식(2:3)                                  영적 안식(4:10)

               애굽의 종에서 구원받음(5:15)               죄의 종에서 구원받음(6:6)

8.     처음 하늘과 처음 (21:1)                     하늘과 (21:1)

               안식의 미완성(4:8)                               안식의 완성(4:3)

               안식에의 거부(95:11)                           안식에의 초대(11:28)

               의문의 묵은 (7:6; 고후3:6)                 영의 새로운 (7:6; 고후3:6)

               장래 일의 그림자(3:17)                         형상(10:1)

9. 할    몽학 선생의 역할(3:24)                         몽학 선생이 필요 없음(3:25)

               안식일은 폐하여 것임(2:11)               예수님이 안식을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한국교회의 무속적 현상과 그 극복(1)

한국교회가 비복음적, 반복음적인 무속적 현상을 문제로 의식하고 있지 않거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묵인 내지 허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심각한 것이고 비판을 받아야 한다.

<연재순서>

Ⅰ. 서론
Ⅱ. 한국교회에 내재하는 무속적 현상들
1. 긍정적인 현상들

1) 새벽기도회 2) 성미 3) 각종헌금4) 주일성수와 헌신적 봉사 5) 번영신앙

2. 부정적 현상들
1)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2) 일천번제 3) 각종 작정기도회와 특별집회 4) 교패와 십자가 장식들
5) 경품행사 6) 공인(公人)들의 공적(公的)인 기도7) 기도원운동 8) 가계에 흐르는 저주

Ⅲ. 무속적 현상의 극복을 위한 대안
1, 성경적 신관, 세계관의 확립
2. 신앙고백서를 통한 신자양육
3. 성례전의 회복과 권징의 시행

Ⅳ. 결론

1. 서론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이 120년 남짓이다. 그 시간 속에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안팎의 걸림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 극복하고 오늘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돌아보아야 하고, 반드시 개혁해야만 하는 요소들이 있다.

특별히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속종교가 한국인이 가치관과 생활습관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회가 이 땅에 들어왔다. 서로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른 종교이기 때문에 신앙적, 문화적 충돌은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라는 아픔의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환경들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이질화 현상이 기독교와 토속 종교의 혼합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어떤 종교적 색채가 강한가에 따라서 종교로서의 명칭을 붙이게 되겠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많은 변질이 동반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토착화신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기독교’와 ‘한국이라는 토양의 전통적 종교’의 조화를 추구하는 노력이 교파에 따라서는 이미 선교 초기에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1960년대 감리교회의 윤성범을 중심으로 크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리고 토착화신학의 여파는 현재까지도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들에 의해서 적용되고 있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도 있다. 이처럼 토착화라는 신학적 방법론이 적극적으로 개발되고, 또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은,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요소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문화이든 그 이면에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이념이나 의식은 문화를 통해서 그 사회를 지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한국이라는 문화(사회)에 기독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기독교회의 신앙이 한국적인 것으로 변질되거나 변질될 요소를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무속적)이 만들어 낸 문화 혹은 의식, 전통, 관습 등과 같은 것들이 기독교회의 신앙에 포함될 수밖에 없음도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한국기독교회의 무속화를 낳게 하고, 결국 기독교회의 신앙이 변질, 왜곡되는 현상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현재의 한국교회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다양한 종교적 형태와 표현을 동반하는데, 대개의 경우는 무속신앙적인 요소들이 기독교로 포장된 것이다. 특히 부흥회, 기도원,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도 생각 없이 행해지는 집회, 기도회, 행사 등에서 무속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들이나 지도자들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기독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거나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한편 이러한 요소들은 한국교회의 양적인 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지향하는 일부 지도자들과 그러한 신앙에 매료된 신자들이 추구하는 내용은 다분히 무속적인 내용을 동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적인 요소를 분별력 없이 목회와 전도의 방법이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한국교회는 중세 말기의 기독교회가 처했던 것처럼 신앙의 무속화가 불 보듯 뻔하다는 사실 때문에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모양과 분위기로 포장된 무속적 신앙의 현상을 정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성경적 대안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한 한국교회 안의 무속적 신앙의 현상은 지금 와서 오히려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것을 극복하고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기독교회 안에 만연해 가고 있는 무속적 현상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도 이 글의 목적이다.


Ⅱ. 한국교회에 내재하는 무속적 현상들

한 사회는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세계관에 의해서 어떤 신관(神觀)과 사회적 가치관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즉 한국이라는 사회에는 다신론적, 자연신론적, 혼합주의적 신관을 바탕으로 하는 샤머니즘(Shamanism)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신관은 우리 역사와 사회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기독교회는 전혀 다른 신관과 가치관을 갖고 있기에 그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돌의 고통을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이해와 수용, 그리고 적당한 타협을 통해 혼합된 형태의 신앙적 현상들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무속적 양태를 갖게 되었으며, 한국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전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무속적 신관과 가치관이 기독교회의 신앙형성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전제할 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1) 긍정적이라는 표현은 무속적 신앙의 요소가 기독교 신앙형성과 성장에 일조(一助)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을 통해서 형성된 신앙적 측면들을 어떻게 성경적 신앙과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는 가운데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과제인 것도 사실이다.

한편, 부정적인 면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차원에서 평가하고 개혁해 나가야 할 내용들이며, 한국교 안에 있는 비복음적 내지는 반복음적인 요소들로서 반드시 개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그것을 문제로 의식하고 있지 않거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묵인 내지 허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심각한 것이고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면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크게 기여한 것들로서 한국교회 안에서 확실하게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거나 문제 의식화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성경의 가르침 위에 바르게 세우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결코 순결하게 유지될 수 없을 것이고, 어는 순간 모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기에(마 7:24-27), 지금 개혁해 바로 세워야만 한다는 사명의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무의식적으로 혹은 분별하지 못한 채 그것을 사용한다면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


1) 필자의 긍정적이라는 표현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임을 밝혀둔다. 여기서 사용된 긍정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무속적 정서와 가치관이 교회 안에서 신앙적 내용과 조화를 이루어 기독교회의 성장과 신앙의식에 널리 영향을 주었다는 제한적 의미에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





이종전/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크리스천인사이드 제49호 2012년 10월 2일 10면/출처: 개혁주의마을


 

십계명 (서론) / 아더 핑크

 

서론적 고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의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식에 부응하는 양심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빛나는 소망은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순종에 대한 확실한 방법도 모를 것이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는 있어도 지식이 없는 행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원래 우리 마음속에 기록된 본성의 율법을 우리가 더럽힘으로써 그 계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십계명에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십계명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십계명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던 모습은 엄숙했고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으로 가득 찼다.
먼저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 전에 외부적인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갖기 위해 이틀 동안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출 19:10,11).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기다리게 되거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기 전에 몸과 마음의 신중한 준비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자신들을 성결하게 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하늘에 계신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강림하셨던 산은 지경이 정해져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거룩한 산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금령이 있었다. (출 19:12,13)
이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최상의 존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그의 율법의 엄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여호와께서 그의 율법을 전수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던 두려운 현현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출 19:18,19).
여호와의 현현의 그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의 전수에서도 그렇게 무서운데 율법을 어김으로 우리에게 심판하러 오신다면 그 무서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의미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전달하셨을 때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와 통역자로 일해 달라고 간청했다. (출 20:18,19)
이는 율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직접 전달된다면 그것은 정죄와 죽음의 역할을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이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달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고 지키게 된 것이다. (고전 3:19, 갈 9:21, 갈 6:2)
따라서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서 두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율법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래가 악하여 하나님의 손가락 외에는 누구도 그의 율법의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돌판들은 모세의 거룩한 분노로 말미암아 깨뜨려져서(출 32:19) 하나님이 다시 기록하신 것이다.(출 34:1)
이것은 자연의 율법 창조시 우리 마음에 기록 되었으나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을 때 깨뜨려졌고 중생 시 우리 마음에 다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10:16).
그러나 혹자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아무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속박의 멍에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십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주셨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는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십계명의 권위를 인간의 양심에 부과하려는 시도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질문에 우리는 흔히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마 5:17,18).
진실로 그리스도인은 행위언약이나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활의 법도와 거룩케 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십계명의 독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는 이 독특성이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 두렵고도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내산 하나님의 계시는 오는 모든 시대에 섬겨야 할 인간 의무를 집대성하였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에 특별하신 중요성을 부과하셨는데 그 공포 모습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십계명은 구름과 어두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의 무시무시한 부대현상과 함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 왔으며 그렇게 들려진 신적 계시는 유일무이한 부분들이었다. 어떠한 의식법이나 시민법도 이렇게 독특할 수 없었다.
그 열 가지 말씀들, 그것만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판 위에 쓰여 졌으며 그것만이 보호되기 위해 언약궤에 넣어졌다. 이와 같이 십계명에 부여된 유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우리는 극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십계명의 원천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십계명의 서두에 아주 보잘것없는 관심을 가져 왔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아무리 웅장한 권위가 율법의 공포 때에 수반되었다 해도 율법의 원천은 사랑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율법은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운 구속자이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즉, 그의 성품)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분명히 이해함으로 얻어지는 결론이자, 원리는 다음과 같다. 즉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일치하는 생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심은 사랑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기초로 자기 백성에게서 사랑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함을 받는 백성들 사이에 일치와 동일함이 있게 된다.
제 2 계명 후반부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순종이란 오직 사랑하는 데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필요조건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요약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

넷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십계명이 모든 세대를 거쳐 각 사람들을 얽매고 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밝혀진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해 확고부동한 표현이 있지만 모든 도덕적 행위(moral agent)위에 십계명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율법(다스리시는 법도)이 폐지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특성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하며 그로부터 인간은 계속적으로 율법에서 떠남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피조물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도덕적 율법이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방인들에게 바울 사도가 특별히 “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는 의문을 제기하고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는 율법을 세우느니라.”라고 자문자답했다(롬 3:31).

마지막으로 율법의 영속성은 그의 백성들이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심으로 유지된다. (렘 31:33, 겔 36:26,27)

다섯째, 도덕률이 십계명의 숫자에 있어서 열 가지가 완전할 수가 있겠는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성경상에서 “십계(十戒)”(출 34:28)라고 언급되었는데 열이란 숫자는 전체가 필요한 것들로서 완전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이 그렇게도 여러 번 계속되었다는 점은(10번 재앙이 내림) 하나님 심판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숫자의 상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의 범죄가 열 번에 이르도록 허용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열 번이나 죄를 범했기 때문에(민 14:21) 죄악의 모든 분량을 채웠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십일조, 혹은 십분의 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며 모든 소산은 십이라는 숫자로 표현되고, 이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있다는 표시로 주께 바쳐진다.

여섯째, 십계명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 행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신 것에는 특별한 뜻이 계셨다. 이러한 의도는 표면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를 한 데 묶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후자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대해, 후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주관자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한다면 우리 이웃에게 아무리 예의바르다 해도 그러한 의는 철저히 무가치하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처럼 된다 해도 이는 역시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 내가 음행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위안 받으면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거부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의무가 첫 돌판에 기록된 것은 칼빈이 일컫는 바와 같이 그 계명들이 ‘종교의 제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활기’를 이루는, 즉 ‘종교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경배함이 없이는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평등도, 사랑도 무익한 것이다. 경건치 않은 인간들이 제 아무리 자기들끼리 실시하는 정의가, 자비가, 인내가 있다 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우리가 옳고 그름의 주관자로 그를 공경한다면 우리는 이웃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5계명이 첫 돌판에서 끝났는지 둘째 돌판에서 시작되었는지 하는 십계명 구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대는 부모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고 성경상에서도 부모를 이웃과 동등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첫 돌판의 다섯 계명이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으나 나머지 계명들에게서는 그 어디에도 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율법이 신령하다”(롬 7:14)는 것은 율법이 신령한 입법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단순히 외부적인 복종보다 더한 것 즉, 인간 마음의 순종을 가장 철저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가 십계명을 얼마나 지키지 않는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에서”(시 51:6) 진실을 요구하신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조그만 탈선해위도 금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가장 은밀한 성향과 의도를 감찰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성과 사랑과 의지를 거룩한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율법의 기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까지 인간의 영을 주장한다고 장담한 법은 없었으나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의 깊은 마음속을 감찰한다. 이러한 율법의 영적인 면은 예수께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분노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관계로 명백해졌다.

“여덟째, 우리는 십계명의 임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오직 의(義)이지만 우리에게는 불의(不義)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죄는 우리의 판단을 어둡게 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고, 잘못된 자신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율법의 높고 거룩한 요구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더러움과 허물과 오만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능력의 부족을 의식하게 된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2권, 7장 7절) “이와 같이 율법은 일종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얼굴에 묻어 있는 오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속에서 우리는 첫째 우리의 무능을, 둘째 우리의 허물을, 셋째 이상 두 결과로 인하여 저주를 알게 된다.”라고 잘 표현했다.
율법의 두 번째 임무는 악인들을 경고한다. 악인들이 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지라도 형벌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악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사회에 유익이 된다. 세 번째,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되는 것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지켜주는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십계명의 상벌에 대해 생각하자. 여호와는 우리를 죄의 예속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의무를 감당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엄숙한 광경을 보여줌으로 그들 마음속에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셨다.
그 다음에 그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약속과 경고의 말씀을 후반부에 추가시키셨다. 이는 우리가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기쁘게 순복하며 그가 금하신 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헛되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반역자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 번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계명의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 119:96)라고 했다. 도덕적 율법은 대단히 넓어서 그 권위가 우리 생활의 모든 도덕적 행위에까지 미친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십계명에 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우리를 경고함으로 자극하고, 약속함으로 우리를 달래며, 경고함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실례들을 취하여 전자는 고무시키고 후자는 금지시킨다.
신약의 명령들은 단지 십계명에 대한 설명, 확충 그리고 적용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자. 특별히 명령되거나 혹은 금지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이는 형식적으로 말하는 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나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각각의 계명들에 있어서 주요한 의무나 죄악은 그보다 사소한 것들의 전형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타난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관련된 원인까지도 포함된다. 어떤 죄가 거론된다 해도 그러한 죄의 원인과 결과와 동일한 종류의 모든 죄는 금지된다. 그리스도께서도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분노도 육 계명에 저촉된다고 설명하셨다.
둘째 어떠한 악이 금지되면 그 반대로 선이 요청되며, 어떠한 선이 명령되면 악은 정죄 받는다. 이를테면 제 3계명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망녕되이 일컫게 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 결과로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시는 것이다.
제 8계명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금했던 것은 그 반대의 의무, 즉 우리가 일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는 대가를 주신다는 것이다(엡 4:28).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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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Ⅰ)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현재의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구원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이것 외에는 하늘 아래에 달리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의인(義認), 곧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다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를 할 뿐 아니라 아무도 자기 자신의 무죄를 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장 1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추론을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의"핑계를 대거나 변명하는 "모든 입을 막아야 하며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순종을 통하여 즉,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율법과는 별도로" 율법에 대한 우리의 이전의 순종과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사람들의 의롭다 하심을 얻을 필요에 있어서나 그것을 얻는데 있어서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곧 그 모습을 따라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리스도를 세워 그의 피로 속죄의 제물을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지금 이때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까지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어떤 의혹을 하는 일 없이 그 속죄 제물을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이 확신은 바울의 대전제입니다.)(3:20-28)

2. 여기에 대하여 나올 반대 이론을 미리 내다보기란 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와 같은 반대는 모든 시대를 통해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적 행위 없이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페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쟁을 할 여지도 없이 바울은 그와 같은 주장을 간단히 부정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3. "사람의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이 말할 때에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라고 어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상상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말로 충분히 논박됩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굳게 세웠습니까? 그가 그런 율법을 세우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그(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었고, 또 자신이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공언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유리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덕상의 율법입니다.

4. 그러나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생각에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의 어느 시대에서도 수많은 사람들, 곧 크리스쳔이란 이름을 붙이고 산 사람들 가운데서도 "성도들에게 일단 주어진 믿음"은 율법 전체를 무용하게 만들도록 되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덕상의 율법이나 종교 의식상의 율법을 모두 헌 신짝 같이 버릴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주 앞에서 산산히" 그 두 가지를 다 난도질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렇게 열렬히 주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율법을 세우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아무 유익도 못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무 효력도 없게 되며 또한 여러분은 은혜에서 떨어질 것입니다."

5. 이런 사람들의 열정이 지식에 의한 것입니까? 그들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살펴 본 것일까요?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고 어느 한 가지를 파괴하는 것이 결국 그 둘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과 도덕상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믿음과 율법을 함께 폐기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관찰한 것일까요? 어쨌든 이런 경우에, 결과는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든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어떤 적절한 수단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를 원하거나 구세주로 모신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 모두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 경계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겨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 둘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도 바울을 따를 수 있는가, 특히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를 물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길은 어떤 것인가"를 물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설교자의 경우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길이란 율법에 관하여 전혀 설교를 않하는 것으로 해 놓았을 때에 율법에 관하여 설교를 하는 소위 "율법의 설교자"라는 말은 비록 복음의 원수라는 말보다는 덜 할지 모르지만 욕을 하기 위하여 쓰는 말이 됩니다.

2. 이런 모든 일들은 율법의 본성과 속성 그리고 그 사용에 관한 전적인 무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즉 산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생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최소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젓먹이들로서 마치 "의의 말씀에 미숙한" 사람들과 같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입니다.

3. 그들이 당당하게 내세우는 구실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의 판단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 이를테면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적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율법의 모든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그것은 율법의 첫 번째 목적,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에조차도 부합되지를 않습니다. 지옥의 문턱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여기 저기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천 명 가운데 한 사람 정도가 복음에 의하여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일반적인 법칙이나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은 율법으로,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복음은 이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신 방편도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이런 목적으로 복음을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복음을 이런 목적에 적용할 수 있는 권위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것이 효율적이라고 증명할 도리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율법의 본성을 고려할 때에 이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이나 최소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를 보내주는 것 같이 어이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들이 병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수고를 조금도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번도 마음이 아픈 일이 없었던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들이 그것을 짓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되돌아서 물어 뜯을" 것을 기대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4. "그러나 비록 방심한 상태의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라고 하는 명령이 성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 예가 성경에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것은 하나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예를 4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입니다. 사도들의 어떤 글을 통해서도 사도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5.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에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4:5)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서 뜻을 찾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분의 발자취를 밟으며 그 분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로지 바울 사도가 전한 대로만 전한다면 논쟁은 끝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으뜸갈 만큼 완벽하게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을 비록 우리가 확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누가 사도 바울보다 율법을 더 많이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이 동일한 목적에 부합되는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던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6.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서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설교는 이런 말씀으로 결론이 맺어집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여러분에게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보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행할 터인데 그 일을 누가 너희에게 말해 줄지라도 너희는 도무지 믿지 않으리라 하신 말씀입니다."(행 13:39-41). 이제 여러분이 율법이란 말을 이해하는 뜻에서 이 설교는 율법을 전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은 아니고 비록 대부분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유대인이었거나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필경 그들의 대다수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죄를 이미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그 다음에는 가장 강력한 의미로 율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내용으로 해서 심하게 그들을 위협합니다.

7. 바울의 그 다음 이야기, 곧 루스드라의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에서 (행 14:15이하) 그리스도의 이름 같은 것은 그렇게 찾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그들이 "헛된 일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이제 진실을 고백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여러분이 바울보다도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울이 설교를 그렇게 잘못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잘못 대접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심판으로 그가 돌로 맞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8. "뛰어 들어가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묻은" 간수에게 바울은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행 16:29이하). 이와 같이 죄를 깊이 뉘우친 사람의 경우에 그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향해서는 바울이 전혀 다르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미신과 무지와 우상 숭배를 꾸짖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심판과 죽은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생각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감동을 시켰습니다.(행 17:24-31)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들으려고"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부르려 사람을 보냈을 때에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대신에(사실 그렇게 했더라면 벨릭스 총독이 필경은 놀려댔거나 딴 소리를 했거나 불경한 말을 했겠습니다만) 바울은 (그렇게도 마음이 굳은) 벨릭스가 두려운 생각이 들 때까지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행 24:24,25) 여러분도 가서 그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방심한 상태에 있는 죄인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9. "그렇지만 바울은 그의 서간문을 통해서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였습니다"라고 여러분이 말씀하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 있어서 설교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문제 삼고 있는 설교란 회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고집하지는 않다라도 이렇게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둘째는, 바울의 서간문들은 우리가 현재 말하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로마와 고린도와 빌립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하여 쓴 것입니다. 물론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보다는 이들을 향하여 더욱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째로 할 수 있는 대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보아도 그렇고 그의 모든 서간문들은 모두 율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여러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율법을 전하며 설교를 하는데" 믿을 사람들과 믿지 않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율법에 관한 설교를 합니다.

10. 이런 점에서 보면 명백한 것이 여러분은 바울 사도가 의미하는 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것 없이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서 벨릭스에게 뿐만 아니라 안디옥과 루스드라와 아덴에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였습니다.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와 같은 그의 예로 미루어 생각(추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죄인에게 선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불꽃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선포하는 것은 바울의 의미로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완전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하는 일은 신구약성서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인 만큼, 여러분이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들은 모두 지옥에 빠질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든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하고 말을 할 때에 그것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이 됩니다.

11. 이 점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 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이오, 그 분의 책인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것입니다.

12. "그렇지만 우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에 관하여 설교를 할 때에 그런 이야기에 가장 큰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까?"
아마 애통하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의 회중을 향하여 설교를 할 때에는 그런 설교가 가장 큰 축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가 특별히 그들의 상태에 적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최소한도 이런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가장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을 예리하게 찌르는 이야기나 나를 낮추게 만드는 이야기를 통해서 훨씬 더 큰 축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설교를 하지 않거나 듣지도 않는다면 그런 위안을 받아서도 안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풀이하다 보면 이런 이야기가 되고 말기 때문에 드디어는 영(靈)도 생명도 덕도 없는 그져 맥빠진 말의 되풀이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하며 설교를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결국 복음은 물론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두 번째 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그 자체가 천 갈래 작은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사실상 거기서 전적으로 헤어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까지도 조만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 샛길로 빠져듭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그의 율법을 지킬 필요성을 전적으로 배제한다고 확고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와 같은 샛길로 빠져드는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상상을 합니다. 즉,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이제는 성결이 덜 필요하다든가, (2) 성결의 필요성은 그 정도가 낮다든가, (3)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덜 필요하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 샛길로 빠져드는 사람들은 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라도 그들이 믿기 전보다 여러 가지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그들입니다. 사실상 그와 같은 태도로 사용하는 "자유"라는 말, 곧 순종과 성결로부터의 자유는 그들의 판단이 거꾸로 되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인한 죄와, 믿음이 성결을 대신한다고 생각함으로써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죄를 스스로 짖고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나타내줍니다.

3. 이런 것을 명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첫째 구실은 우리가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언약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해야 할 필요성에 더는 묶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타락하기 전에 아담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용납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조건으로서 완전하고 보편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그 언약 아래에 아담은 완전히 적합하게 묶여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장 작은 잘못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그에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로도,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할 것 없이 그 밖에 아무도 이 언약 아래에 있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아담의 모든 자손들은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들이 이 수락을 받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는 믿는 모든 사람들, 곧 모든 순종과 성결을 낳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믿음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대로 사람들이 "현재"보다도 "과거"에는 그분의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않되었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좋게 살릴 수 없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위의 언약 아래 있었다면, 우리가 용납되기에 앞서서 그런 모든 행위를 다 하지 않으면 않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늘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와 같은 모든 선한 행위가 우리가 용납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언약의 본성은 어떤 예나 정도로서도 순종을 배제할 수 없고 부분적으로나 전체로서 성결을 배제할 근거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해 주지 않습니다.

5.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 아닙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습니다.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도덕상의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정말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악을 미리 방지합니다. 이를테면 특히 율법무용론을 방지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율법무용론을 만드는 것은 바리새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와는 뚜렷하게(Palpably) 반대되는 한 쪽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극단으로 치닫게 만듭니다.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을 길을 찾는 그들은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치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듭니다.

6. 그러나 진리는 그 둘 사이에 있습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적 구조의 머릿돌입니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얻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서 (흔히 생각되는)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다만 그와 같은 율법의 행위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게 하는 믿음에 즉각적으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행위가 즉, 모든 내적이나 외적인 성결이 우리의 믿음을 따라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가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 즉 행위와는 별도로 의롭다함을 얻는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어떤 종류나 정도의 성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근거도 되지 않습니다.

7. "아닙니다. 그러나 '행한 것이 없더라도 불경건한 자를 의로운 사람 같이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인정됩니다' 하고 바울이 명백히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적인 말이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의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만약 믿음이 의나 성결의 자리에 있는 것이라면,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이 말이 핵심을 찌르고 있으며 사실상 율법무용론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애써서 길게 대답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인정합니다. (1)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그 시간까지는 모든 악으로 가득 차 있고, 선은 하나도 없는 전적으로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2)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시간까지는 선한 행위를 하지도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3) 어떤 선이나 의를 앞서서 행하지 않았어도, 믿음으로만 그를 의로운 사람같이 받아 주신다는 사실과, (4)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의로 인정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마치 그가 모든 의를 이미 다 완성한양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그를 받아 주신다는 사실 등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는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집니까? 여기에서나 그 밖에 어디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이 "결과적인 의"로 인정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믿음 "이전에" 의가 없다고 바울이 가르치기는 합니다만 믿음 "후에" 의가 없다고 어디에서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을 대신한다고 가르침으로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들 수 있도록 구실(colour)을 만들어 주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1. 그러나 아직도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또 다른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어느 것 보다도 더 보편적인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성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믿음이 핑계가 되는 양 "삶"을 사는 것으로서 "원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사실상"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잘 알려진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경계를 시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롬 6:15).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경계를 아주 깊이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2.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여기서 이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즉, (1) 종교의식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2) 모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3)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조건으로서, 모든 도덕상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않되는 것과, (4)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히 죽을 사형 선고 아래 있으며, 무서움과 노예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죄 의식과 정죄 아래 있는 것 등을 의미할 것입니다.

3. 이제 믿는 사람이 비록 "하나님께 대한 율법 없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율법 아래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믿는 순간부터 어떤 선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가 "율법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그는 "은혜 아래" 있으며 보다 더 자비롭고 은혜스러운 섭리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종교 의식상의 율법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용납의 조건으로서 도덕상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만큼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로부터 벗어났으며 모든 죄의식과 정죄에서 벗어났고, 그로서 전에는 그의 삶 전체가 노예와 같이 속박되었던 사망과 지옥의 공포와 모든 무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율법 아래" 있는 동안은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기꺼이 모든 일에 순종을 합니다. 그는 노예 같은 공포에서 비롯되는 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원리 곧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그의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 때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행동에 대한 이와 같은 복음적 원리가 율법적인 원리보다 힘이 더 없습니까? 우리가 노예 같은 공포에서 우러나오는 것보다 자식으로서의 사랑으로 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을 덜하겠습니까?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좋습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율법무용론 곧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고는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이 길이 수많은 신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에게는 악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솔직하게 그리고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것 같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감히 하지도 않던 일을 여러분이 현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면 여러분이 감히 음식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취했고 그것도 가장 검소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 스스로에게 더 넓은 자유범위를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보다 "조금은" 더 스스로 탐닉하며 만족하지 않습니까?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5. 여러분이 죄를 깨닫고 있었을 때에 여러분은 감히 어느 모양으로도 안목의 정욕에 탐닉하지는 않았습니다. 크고 작고 간에 여러분은 자신의 호기심을 단순히 만족시키기 위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더구나 의복에 있어서도 오로지 깨끗하고 필요한 것만을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조금 편리한 것으로 소박한 물건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넘치는 것이나 너무 고운 것이나 멋을 부리는 물건들은 여러분들에게는 겁나는 물건이거나 혐오를 일으키는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그렇습니까? 전과 같이 당신의 양심이 아직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예민합니까? 여러분이 아직도 가구나 의복에 있어서 꼭 같은 법칙을 따르며 모든 고운 것과 모든 넘치는 것과 모든 무용한 것, 그리고 아무리 모양이 좋고 멋이 있더라도 단순히 장식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모두를 발 아래 밟아 버립니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예전에 이미 다 버린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양심을 상하지 않고는 하지 못하던 일들을 다시 하지는 않습니까? "아, 나는 이제 그렇게 양심적이지를 않구나!" 라고 하는 말을 할 줄을 모릅니까? 내가 바라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정말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이와 같이 죄를 짓게 되지는 않습니다.

6. 여러분이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면전에서 칭찬을 하는 일에도 성실하였고 더욱이 누가 여러분을 칭찬할 때 그것을 견디는 데도 성실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대화를 견딜 수가 없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덕을 기르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대화를 견디지를 못했습니다. 모든 한가한 이야기나 시사한 잡담을 여러분은 몹시도 싫어했습니다. 비록 불의의 재물일지라도 재산에 대한 불충실한 청지기가 될까봐 떨었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그로 인해서 멸망할 각오를 하기 전에는 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그 칭찬을 이제는 목숨을 앗아갈 무서운 독약으로 봅니까? 덕을 쌓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모든 대화를 아직도 몸서리치며 싫어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보다 향상시키지 않은 채 순간순간이 지나가지 않도록 매 순간을 보다 선용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돈이나 시간을 쓰는 일에 있어서 덜 신중하지는 않습니까? 돈이나 시간 중 어느 것이라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그런 방향으로 이제는 쓸 수 없습니까? 애석합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있어야 할 것이"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7. 그런 일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정욕으로 바꾸는"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명백하고 강한 것이었던가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리고 동시에 그와 같은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안 만큼 여러분이 진정으로 만족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여러분이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충분히 성실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고통스러운 수련(school) 속에 더 오래 두신 것은 여러분이 그와 같은 위대한 교훈을 더 완벽하게 배우도록 만들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벌써 다 잊어버렸단 말입니까? 너무 늦기 전에 그 모든 교훈을 상기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도 많은 고생을 한 것이 헛수고였단 말입니까? 나는 그것이 아직도 헛되지 않다고 믿습니다. 이제 고통 없이 그 확신을 사용하십시오! 징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 교훈을 실행하십시오! 전에 하나님의 무서운 분노에서 느꼈던 것보다 이제 느끼는 하나님의 자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두려움보다 약한 동기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불변의 법칙을 잡으십시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감히 하지 않았던 일들을 이제 내가 '은혜 아래'에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8. 이제 부작위 죄에 대하여 언급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스스로를 살피도록 권면을 하지 않고는 이 설교의 결론을 맺을 수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을 때만큼 "은혜 아래" 있는 현재에도 이런 부작위 죄(sins of omission)에 대하여 명백합니까? 그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주어진 기회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습니까?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까? 조그만 방해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까? 작은 사업 때문에? 찾아온 손님 때문에? 기분이 조금만 언짢아도? 푹신한 침대를 떠나기가 싫어서? 아침에 날씨가 컴컴하게 흐리고 추워서? 그래서 못했습니까? 자주 금식을 하며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제를 하며 정진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지옥 문전에서 오락 가락 할 때에 (춥고 고생스럽더라도)기도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도 가리지 않고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대담하게 하나님의 뜻에 호소를 하고 죄인을 꾸짖고 음란한 세대 앞에서 진리를 외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졌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던 때 보다도 이제 여러분의 주님을 위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열심을 덜 낼 수가 있습니까? 아,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여러분이 계속해서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끊어버리시고 여러분의 몫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실까 염려하면서, 이제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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