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생명체로 거듭나고 성장하라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영원히 그 생명을 이어간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사역이다. 거듭남은 이성적인 추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사건이다. 거듭남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자는 없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날이 이르면, 자신이 거듭남의 기적이 없이 단지 기독교 신앙을 정신적으로 동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계문명의 시대와 더불어 도래한 ‘인스턴트 기독교’는 기독교적인 삶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새 신자가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발육을 위해 적절한 양분섭취와 운동이 필요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장의 능력을 지닌 갓난아이와 같다. 따라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성장이 둔화되거나 발육이 지체되기도 하고, 또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건강하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신자의 영적 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애를 믿음으로 위장하지 말라

 

우리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세련되게 위장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 죄를 다른 죄로 바꿔치기 했을 뿐인데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회개를 장소의 변화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한때 는 먼 타국의 돼지치기들과 어울리며 죄를 짓고 살다가 지금은 왼견상 훨씬 더 깨끗하고 존경할만한 경건한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더라도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불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교만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영향 아래 이른바 자긍심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하나님의 가증스럽게 여기는 자기애를 도모하면서도 겉으로는 성경말씀으로 위장해 교묘하게 그 실체를 숨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럴 경우에는 문제가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더욱 깊이 숨어든다.

험담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면 ‘영적 조언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전과 다름없이 강한 호기심과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그대로인 것을 보게 된다. 즉 외양만 변했을 뿐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 침투해 중상과 분열을 조장하고 신자들을 연약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기 행각으로 인정되는 사업수완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한 뒤에 적용한 경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하나님이 그일에 함께 동참하신다는 증거로 크게 선전된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사례는 죄가 그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외양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세련되게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참 믿음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하지만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요즘처럼 큰 인기를 누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믿음을 인간의 도덕적, 영적, 경제적 질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강한 믿음만 있다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신념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믿음의 가치를 부르짖는다.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믿으며 된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는 믿음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는 우주의 절대적인 힘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믿음만 있으면 절망, 공포, 패배, 실패 등이 사라지고 희망, 자신감, 자기통제를 비롯해 전쟁과 사랑과 스포츠와 사업과 정치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진리를 믿을 때만 믿음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짓을 믿으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단지 ale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믿어야만 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우리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전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수 없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종교는 바로 여기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분에 대해 말한 모든 증거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영접한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날조되거나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복종을 요구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신념에만 귀를 기울이는 감상적인 믿음의 청산가리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자기의 신념을 믿은 믿음은 거짓믿음이다. 그런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둠 속에서 두 동간난 다리를 건너겠다고 차를 몰고 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은 혁명이다

 

초창기 루터교 신자들은 “믿음은 사람을 동요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교리가 요즘에는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바울과 루터가 말한 믿음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온통 뒤흔들 뿐 아니라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믿음은 최종적인 권한을 지닌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삶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결정하게 한 뒤 하나님이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종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소곳한 태도로 영혼 구원에 열중하는 전도자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믿음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 그런 믿음은 자아의 표면을 깨끗이 닦아주고 자긍심을 회복시켜 준다.

기독교가 장난삼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오직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사람만이 진정한 성경적 신앙의 소유자라고 자신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믿음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의속죄사역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교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진술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도 일종의 믿음이기는 하지만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는데 그칠 뿐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참 믿음은 거짓을 말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도적적인 완전함 위에 다른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을 뜻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은 회개하는 영혼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일 뿐 감각이나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자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믿음은 기적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 믿음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믿음과 도적적인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믿음의 본질은 도덕적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하며 결국에는 거짓으로 드러날 뿐이다. 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허락하신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순종이 뒤따른다.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에 이르는 그릇된 교리를 피하려다가 우리는 순종이 없는 구원을 말하는 극단에 치우쳤다.

 

믿음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다가오신다. 하지만 마지막 열 걸음을 떼어놓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지만 우리 대신 회개하실 수는 없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신종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날숨과 들숨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그분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그분의 길을 우리의 길로, 그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으로,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 세상에 새 생명을 얻지 못하게 속이는 마귀의 책략이 설치되어 있다. 맡기는 믿음으로 포장해 겉으로는 아무런 위험도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을 노리는 계책이 설치되어 곳을 하나 예로 들자면, 바로 기도다.

하나님이 항상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승낙’은 물론 ‘거절’도 응답이고, 또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논리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불순종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데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반드시 하나님이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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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
 
          
주님은 깊은 상처를 
경험한 사람을 
위대하게 쓰신다. 
It's doubtful that God can use 
any man greatly until 
he's hurt him deeply. 
- A.W. Tozer  
 

새 생명체로 거듭나고 성장하라

 

기독교 신앙은 거듭남이라는 기적을 통해 영원히 그 생명을 이어간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이 사역이다. 거듭남은 이성적인 추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사건이다. 거듭남의 체험을 설명할 수 있는 심리학자는 없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날이 이르면, 자신이 거듭남의 기적이 없이 단지 기독교 신앙을 정신적으로 동의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계문명의 시대와 더불어 도래한 ‘인스턴트 기독교’는 기독교적인 삶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새 신자가 갓난아이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발육을 위해 적절한 양분섭취와 운동이 필요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성장의 능력을 지닌 갓난아이와 같다. 따라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성장이 둔화되거나 발육이 지체되기도 하고, 또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건강하고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가르침이 없으면 신자의 영적 성장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애를 믿음으로 위장하지 말라

 

우리는 죄를 제거하지 않고 세련되게 위장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 죄를 다른 죄로 바꿔치기 했을 뿐인데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회개를 장소의 변화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한때 는 먼 타국의 돼지치기들과 어울리며 죄를 짓고 살다가 지금은 왼견상 훨씬 더 깨끗하고 존경할만한 경건한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더라도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불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교만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영향 아래 이른바 자긍심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하나님의 가증스럽게 여기는 자기애를 도모하면서도 겉으로는 성경말씀으로 위장해 교묘하게 그 실체를 숨기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럴 경우에는 문제가 깨끗이 청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으로 더욱 깊이 숨어든다.

험담을 일삼고 문제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면 ‘영적 조언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좀더 깊이 관찰해 보면 이전과 다름없이 강한 호기심과 불안정한 심리상태는 그대로인 것을 보게 된다. 즉 외양만 변했을 뿐 내면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 침투해 중상과 분열을 조장하고 신자들을 연약하게 만든다.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기 행각으로 인정되는 사업수완도 그리스도인이 기도한 뒤에 적용한 경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자 하나님이 그일에 함께 동참하신다는 증거로 크게 선전된다.

지금까지 열거한 여러 사례는 죄가 그 본질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외양만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죄를 세련되게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무엇을 믿는가?

 

참 믿음은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하지만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요즘처럼 큰 인기를 누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믿음을 인간의 도덕적, 영적, 경제적 질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한다. 강한 믿음만 있다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신념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믿음의 가치를 부르짖는다. 무엇을 믿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믿으며 된다.

이런 현실의 배후에는 믿음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는 우주의 절대적인 힘이라는 모호한 개념이 도사리고 있다. 믿음만 있으면 절망, 공포, 패배, 실패 등이 사라지고 희망, 자신감, 자기통제를 비롯해 전쟁과 사랑과 스포츠와 사업과 정치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진리를 믿을 때만 믿음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거짓을 믿으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단지 ale음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리이신 하나님에 관한 진실을 믿어야만 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그분 자신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우리 인간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먼저 우리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전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수 없다.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종교는 바로 여기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분에 대해 말한 모든 증거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영접한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에 의해 날조되거나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다.

참 믿음은 언제나 복종을 요구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스스로의 신념에만 귀를 기울이는 감상적인 믿음의 청산가리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자기의 신념을 믿은 믿음은 거짓믿음이다. 그런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둠 속에서 두 동간난 다리를 건너겠다고 차를 몰고 질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믿음은 혁명이다

 

초창기 루터교 신자들은 “믿음은 사람을 동요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교리가 요즘에는 이상하게 변질되었다.

바울과 루터가 말한 믿음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온통 뒤흔들 뿐 아니라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믿음은 개인의 삶을 완전히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 믿음은 최종적인 권한을 지닌다. 믿음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삶의 우선순위를 올바로 결정하게 한 뒤 하나님이 뜻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피종적인 동의를 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다소곳한 태도로 영혼 구원에 열중하는 전도자의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믿음은 사람들을 동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편안하게 해준다. 그런 믿음은 자아의 표면을 깨끗이 닦아주고 자긍심을 회복시켜 준다.

기독교가 장난삼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오직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사람만이 진정한 성경적 신앙의 소유자라고 자신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계획 가운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믿음이 있어야만 그리스도의속죄사역이 가져다주는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믿음은 순종을 낳는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교리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실로 알고 있는 진술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도 일종의 믿음이기는 하지만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이성에 근거한 믿음은 확실한 증거를 받아들이는데 그칠 뿐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참 믿음은 거짓을 말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도적적인 완전함 위에 다른 증거를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을 뜻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믿음은 회개하는 영혼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선물일 뿐 감각이나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자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믿음은 기적이다.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실 때 믿음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은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이다.

믿음과 도적적인 삶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믿음의 본질은 도덕적이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지극히 불완전하며 결국에는 거짓으로 드러날 뿐이다. 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순종한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허락하신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는 항상 순종이 뒤따른다.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에 이르는 그릇된 교리를 피하려다가 우리는 순종이 없는 구원을 말하는 극단에 치우쳤다.

 

믿음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아홉 걸음을 다가오신다. 하지만 마지막 열 걸음을 떼어놓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지만 우리 대신 회개하실 수는 없다.

세상을 버리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믿는 신종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생명을 유지하려면 날숨과 들숨이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그분의 원수를 우리의 원수로, 그분의 길을 우리의 길로, 그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으로, 그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그분의 미래를 우리의 미래로 받아들여야 한다.

온 세상에 새 생명을 얻지 못하게 속이는 마귀의 책략이 설치되어 있다. 맡기는 믿음으로 포장해 겉으로는 아무런 위험도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을 노리는 계책이 설치되어 곳을 하나 예로 들자면, 바로 기도다.

하나님이 항상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승낙’은 물론 ‘거절’도 응답이고, 또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논리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그런 논리는 불순종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는 데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함으로써 기도하는 자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려면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반드시 하나님이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

분할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에이든토저)

언제 연합하며, 언제 분할할 것인가? 이 질문에 올바르게 답변하려면 솔로문의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림짐작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여 ‘연합은 모두 선한 것이며 분열은 모두 나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아주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이처럼 전혀 노력함이 없이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역사가 제공하는 교훈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간이 살아갈 표준이 되는 심오한 영적 규례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만일 선한 서람들은 모두 연합에 찬성하며 악한 사람들은 모두 분열에 찬성한다면, 또는 그 반대가 된다면, 모든 일을 판정하기가 쉬울 것이다. 또는 만일 하나님께서는 연합하시며 마귀는 항상 분열한다면, 이 혼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길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태는 그렇지 못하다.

나눌 것을 나누며, 연합할 것을 연합하는 것은 지혜이다. 서로 유사한 것이 없는 요소들을 합하는 것은 - 비록 그 일이 가능하다 해도 - 결코 선한 일이 아니다. 서로 닮은 요소들을 자의적으로 분리하는 것도 역시 선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일이나 학문적인 일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일에도 적용된다.

최초로 구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이 구분은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자연계에서 행하시는 모든 조처들의 방향을 설정했다. 빛과 어두움은 서로 상반된다. 동일한 장소에 이 두 가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결국 빛도 소유하지 못하고 어두움도 소유하지 못하고 다만 희미함과 어두컴컴함을 소유할 뿐이다.

현제 인간 세상에는 뚜렷한 윤곽들이 거의 없다. 인류는 타락했으며, 죄는 혼돈을 가져왔다. 밀이 가라지와 함께 자라고, 양과 염소가 공존하며, 의인들의 농장과 불의한 사람들의 농장이 나란이 있으며, 술집 옆에 선교센터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양과 염소를 구분하며, 밀과 가라지를 나눌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실 것이며, 만물이 그 종류대로 대로 나누일 것이다. 가라지는 가라지와 함께 불에 던지 우고, 밀은 밀과 함께 곡간에 들일 것이다. 희미함은 안개처럼 걷히고 모든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지옥은 항상 지옥으로 보일 거시며, 하늘나라는 신의 성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본향으로서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인내하며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 동안에 우리 각 사람, 그리고 인간 사회 내에 있는 모든 교회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되풀이 된다. 우리는 무엇과 연합하며, 무엇으로 무엇으로부터 분리할 것인가?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공존의 문제가 아니라 연합과 협력의 문제이다. 밀이 가라지와 같은 밭에서 자란다고 해서 이 두 가지가 타화수분하는가? 양들이 염소들 근처에서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이종교배를 하는가? 불의한 자들과 의인들이 같은 태양빛을 받고 같은 비를 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도덕적인 심오한 차이를 망각하고 서로 결혼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흔이 긍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합을 위한 연합에 불과하지만, 인간들은 결국 형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연합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혼인을 축하하는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그리고 전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근거를 두지 않은 연합의 개념을 지원하기 위해 진리가 죽임을 당한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 교회는 결코 이런 일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이 타락한 세상에서 연합이란 것은 타협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살 만큼 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 진리에 충실함, 선한 양심의 보존 등이 광산에서 캐낸 금강석이나 오빌의 금보다 더 귀한 보석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보석들을 얻기 위해 재산의 상실, 투옥,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수한다. 최근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얻으려고 은밀하게 완전한 헌신을 값으로 치르고 고요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칭송을 받지도 않은 채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는 알려졌으며, 아버지의 마음에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 장차 모든 영혼의 비밀들을 밝히는 날이 오면,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았을 때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현대의 유행을 거역할 용기가 없으며 당분간 유행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애를 지껄이며 종교적으로 무의미한 연합을 추종하는 사람들보다 현명한 철학자들이다.

“나누고 정복하라.”는 것이 마키아벨리를 추종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사단도 연합하고 정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독재자가 한 국가를 정복하려면 반드시 그 국가를 통합해야 한다. 선동 정치가들은 국가적인 자존심에 호소하거나, 혹은 과거나 현재에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한 복수의 필요성에 호소함으로써 민중을 자기에게로 모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쉽게 군대를 통제하며 입법기관을 정복하며 완전히 통합할 수가 있지만, 그것은 임시 수용소나 포로 수용소의 통합일 뿐이다. 우리는 금세기에 이러한 일을 여러 차례 보았으며, 장차 지구상의 국가들이 적그리스도 밑에서 연합할 때 다시 한번 그 일을 목격할 것이다.

놀란 양들이 당황하여 절벽에서 달리기 시작할 때에, 각각의 양들은 전체 무리에게서 떨어져 나와야만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런 때에는 완전한 연합은 모두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할 뿐이다. 지혜로운 양은 자신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서 양떼에서 이탈한다.

서로 닮은 것들의 연합과 서로 다른 것들의 분리에 힘이 있다. 아마도 오늘날 종교계에 필요한 것은 연합이 아니라 현명하고 담대한 분리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력을 휘두른 뒤에 부흥이 따를 것이라는 식의 평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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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인의 자가 진단법 7가지(에이든 토저)  

  1)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조그마한 흥분이라도 다 잠재우고 마음속에서 흘러 나오는 세미한 욕구의 소리를 듣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에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어 보라. 틀에 박힌 진부한 답을 하지 말라. 정말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2)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 말고, 당신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보물' 주위에 모여들기 마련이다. 우리의 생각들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보물이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마6:21)

 3) 나는 돈을 어떻게 쓰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우리는 의무적으로 돈을 지출해야하는 것들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세금을 내거나 가족과 자신을 위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지출하는 돈은 여기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거의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4)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우리 시간의 많은 부분이 문명화 된 삶을 영위하고 지속하는 데 소요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바로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여가가 생기면 대부분??사람들은 테리비전을 보거나 장기를 두거나 언론이 전하는 저속한 기사를 읽거나 수다를 떤다.
나는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준다.

 5)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고하니"(행4:23).
우리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찾아가는 곳이 곧 우리가 어떤 사람임을 말해준다.

6)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여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이 세상을 너무 흠모하는 것 같다. 우리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 주변의 이교도 국가들을 동경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영광, 하나님과의 언약, 율법, 복에 대한 약속, 믿음의 조상들을 모두 잊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이스라엘만을 비난할 수 있는가? 우리도 그들과 똑같지 않은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

 7)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지혜를 존중하는 사람은 '웃는 것' 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머는 우리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여러가지 중요한 속성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유머 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그만큼 건강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유머 감각과 '경솔한 웃음'은 다르다. 경솔하게 웃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죽음, 출생, 그리고 사랑 같은 것들을 경솔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기도, 성경, 의, 인간들의 큰 슬픔과 고통 및, 그리스도께서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교회를 가지고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된 이야기를 가지고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질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 외에도 다른 질문들을 생각해낼 것이다. 

   


성령님은 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합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영의 일에 가치를 우선하라 by A.W 토저 **

인생을 제대로 꿰뚫어보려면, 위대함을 명성과 동일시하는 잘못된 풍조를 단호히 거부해야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교회에서 이기기 때문에, 교회는 가장 깨끗한 성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만일 교회가 인간적인 것들보다 신앙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따른다면,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한 순수한 공동체라면, 교회에서 가장순수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존경받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현재 교회에서는 교회 활동의 홍수 속에서 경건한 사람들이 완전히 잊혀졌다. 사람들은 목소리가 큰 사람, 주제넘게 나서는 사람, 코미디언처럼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주변으로 몰려든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 이타적인 사람들 그리고 내세를 사모하는 사람들을 옆으로 제쳐둔다. 영원한 가치를 지닌것들을 무시하고 세상의 시시콜콜한 것들에 온통정신을 쏟는 것은 불신앙의 한 형태이다.

이런 불신앙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 보상을 요구한다. 그들은 인내심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숨은 비밀을 드러내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 주실 날을 기다리지 못한다. 반면에 참성도는 휠씬더 멀리 보기 때문에 그들의 영원한 기업을 얻고 거룩함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그 말이 오기를 고대한다.

@ 출처 : A.W 토저 의 임재체험중에서

성령충만의 표지 (에이든 토저)

외적인 특정한 사실만으로는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성령충만의 참된 표시는 그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무엇인가를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행복하기보다 거룩하기를 열망한다.
은혜 생활을 한다고 공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생활보다도 인생의 행복을 더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참된 성령충만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신령한 생활과 거룩함을 먼저 구한다.
그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열망한다.
비록 자신은 욕과 손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되기를 바란다.
그의 신령한 생활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기에 힘쓴다.
모든 일에 자신과 의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를 생각한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기를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 한다.
그는 십자가를 지기를 열망한다.
인생의 불행과 역경을 십자가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나 이는 모든 이들이 지는 인생고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신앙의 결과로 짊어지는 특별한 고난과 고통이다. 이는 자원하여 지는 고통이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자 하면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다.
이는 그의 계명을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를 지고자 열망하는 사람이야말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기를 열망한다.
세속적 신자는 겉을 보지만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물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는 자기 개인의 입장과 처지가 곤란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죄악 속에 살기보다 의로운 죽음을 열망한다.
그의 모든 사상과 생활은 다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작정된다.
그는 육신의 생사를 문제 삼지 않는다.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르기를 열망한다.
그는 남을 자신보다 높이기를 열망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이 영광을 누리는 것을 볼 때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도 기뻐한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영화롭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모든 일에 자기보다 남을 높이기를 갈망한다.
그의 생활은 벌써 영원 속에 살고 있다. 신앙에 의해 그의 생활은 현세를 초월하여 산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된다. 아무도 자력으로 은혜의 생활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성령께서 그에게 충만히 역사하실 때에 은혜의 생활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의 7가지 습관  

 

첫째,영적인 사람은「행복」해지는 것보다는「거룩」해지는 것을 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좀더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바람은 그 사람의 관심이 세상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둘째,영적인 사람은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 오며」라는 구절 바로 뒤에「제게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라는 조건을 덧붙이는 사람이다.즉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셋째,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사물의 겉모양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흥분하게 된다.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겉과 속을 한꺼번에 통찰하시는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흥분하거나 상처받지 않는다.

 

넷째,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이 낮아지고 다른 사람이 높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줄 안다.

 

다섯째,영적인 사람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릇된 모습으로 살기보다는 아름답게 죽기를 원한다. 죽음이 두려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들과 달리 영적인 사람은 불의와 타협해 가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보다는 단 하루라도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마련이다.  

 

여섯째,영적인 사람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영적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거나 섬김을 받으려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쓴다.

 

일곱째,영적인 사람은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단 무겁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에 짓눌려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도 전에 한숨과 탄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그 십자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탄식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고난 당하신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미 세상적인 것들을 포기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토저는『인간의 힘만으로는 이러한 일곱가지 습관을 가질 수 없다』면서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출처: 포도나무선교원/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이상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인 아니다. 신앙을 고백한 많은 신자들은 그리스도가 실재하시고 행하시는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 자세는 언제나 말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 드러난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할 수 있을 뿐 다른 방도는 없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명령할 수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 단지 거짓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신앙에 직면해 갑자기 실제 생활의 불 속에서 믿음을 시험한다면 대부분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진리가 의미하는 것을 당황하지 않고 인정하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조절하는데 매우 능숙해져 있다.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그의 도우심 없이 잘 살 수 있도록 능숙히 조절한다. 주를 자랑하되 그를 신뢰하지 않는 게 아닌지 조심스럽게 살펴야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거짓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실패하시면 빠져나갈 길을 마련하다. 참 믿음은 한 길밖에 모르며, 제 2의 길이나 임시변통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빼앗긴다 해도 신경쓰지 않는다. 참 믿음은 하나님 아니면 전적인 실패 둘 가운데 하나이다. 아담이 이 땅위에 창조된 이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단 한 사람의 기대도 저버리신 일이 없다.

거짓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의 형식적인 신조를 위해 싸울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신조에 자기 장래를 맡겨야 한다는 데는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언제나 제2의 도피구를 마련해 두고 지붕이 꺼질 경우 도망하려 한다.

말세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신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참으로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는 때가 기필코 달쳐올 것이다. 건강과 재물과 친구와 피난처는 다 쓸어버림을 당하고 우리는 하나님만 소유하게 될 것이다. 거짓 신앙인은 이 말에 간담이 서늘해지고, 참 신앙인은 이 말에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하는 경지에 이르고서도,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하지 못한 것이 발견된다면 그야말로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과연 실제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는 넓을 곳으로 들어가려면, 지금 바로 하나님을 모셔 드리라. 이것만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확실한 치료법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ace

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에이든 토저)

 

진리를 체험으로!

지금 내가 당신에게 말하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짧고 단순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엡 5:18).

사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만일 내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빌려다가 그대로 반복한다면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내가 발견하고 깨달은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말은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극단적인 것도 아니고 광신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복음주의적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적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거론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저 구석으로 밀어둔 진리를 다시 한복판으로 가져와 횃불처럼 높이 쳐들고 “이 진리를 단지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이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만듭시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의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 충만한 백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단지 목회자나 선교사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미 앞에서 나는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나는 성령 충만과 관련된 네 개의 성경 본문을 결론 부분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 이런 방식이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본론에서 요점이 한 개 나오는 반면에, 결론에서는 요점이 네 개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이 설교학 전공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판단이다. 우리는 선한 신자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고?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왜 굳이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봐 분명히 말하건대, 마귀는 선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푸른 초장에 뱀이 있다고 겁을 주고 있다. 육신의 정욕을 따른 이상하고 섬뜩한 사람들과 마귀가 성령 충만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개념을 퍼뜨리기 때문에 우리는 겁을 집어먹고 초장에서 자꾸 멀어지고 있다. 성령 충만의 이야기만 나오면 “나 같은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어. 그것은 신앙이 뜨거운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낙심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이 계시다. 만일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령님은 다시 태어남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시키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후 13:5).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령 충만의 정도가 다를 뿐이지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신다.

그런데 단순히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구속의 일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는 우리의 성령 충만도 포함된다. 당신은 이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이 점에서는 당신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무슨 비정상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편견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충만의 상태에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비정상적 상태이다. 성령 충만이 왠지 섬뜩하고 이상한 것이라는 편견은 우리 머릿속에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려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확신하지 못하면 믿음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령 충만을 원하신다고 이미 선포하신 마당에 우리가 그분께 부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혹시 당신은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것을 하지 말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령 충만에 관한 구절들을 찾아 묵상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믿고 평안을 느껴라.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려라.

성령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신다.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고통당한다면, 그것은 사탄 때문이거나 우리가 지나친 상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님은 악인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불안하게 하지 않으셨다. 신약성경을 보면 은혜를 사모하고 의에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럴 때 그분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화를 내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셨다. 그러나 자기의로 이미 배부른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거짓말쟁이들이 찾아왔을 때 그분은 언제나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이 오직 하나님의 뜻만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의에 굶주린 사람들을 대하셨듯이 당신을 친절하게 대하실 것이다.

성령 충만을 갈망하라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내게 “토저 목사님, 지금 목사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왜 목사님은 당연한 이야기를 자꾸 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갈망한다고?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성령 충만은 그저 머릿속을 스쳐가는 희망사항 정도일 뿐이다. 즉, 그들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거룩해진다. 마찬가지고 우리는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만큼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마 5:6) 배부른 자에게는 산해진미가 다 소용 없고,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지 않는가?

여러 세대 전에 아주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거 경건한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듣고 멀리서 젊은이들이 그에게 찾아오곤 했다.

어느 날 두 젊은 목회자가 먼 길을 걸어서 그에게 찾아왔다. 이 경건한 사람은 문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아 인사를 하면서 “그대들은 그대들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한 후 뒤로 돌아 문을 닫아버렸다. 두 젊은이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 후,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우리가 좋은 말을 들으려고 경건한 사람에게 갔는데, 그는 단지 ‘그대들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우리에게 잘 가라고 인사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 말은 사방으로 퍼졌으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경건한 사람의 말은 매우 짧았지만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원한다’는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갈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원하되, 우리의 마음속에서 불이 날 정도로 갈망해야 한다.

기독교 경건 서적 작가들은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진정으로 갈망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였고, 어린양의 보혈로 죄의 장벽이 제거되었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령 충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께 순종하라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이시다. 예수님의 영도 마찬가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이시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성령님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신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하신 동시에 당신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이 당신 안에 거하시기를 진정 원하시는가? 혹시 당신은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가?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예수님의 영, 즉 성령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갈망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성령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을 때 그분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말씀은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왕좌 우편에 계신 ‘살아계신 말씀’ 곧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자아’에서 나오는 모든 죄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우리의 자애, 자기의 또는 방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만일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분은 우리가 회개하여 이런 것들을 버릴 때까지 우리를 징계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것들과 동거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은 함께 나란히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로를 가로지르며 상대를 잘라버린다. 이 과정에서 마찰과 적대와 갈등과 심지어 핍박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복되신 성령님은 세상의 편한 길을 철저히 반대하신다.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성령님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적 태도를 두려워하여 움츠러들지만, 성령님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셨던 예수님을 보라. 그분이 이 땅에서 살면서 활동하실 때 세상이 얼마나 그분을 반대하고 핍박했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라. 성령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려는 교회는 언제나 핍박을 받지 않았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기독교를 세상에 잘 적응하는 종교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에 적응하려는 것은 십자가 때문에 당할지도 모르는 수모를 피하고자 함이 아닌가?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가 말씀의 빛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당신의 것을 내어 놓으라

성령님은 당신의 삶의 어떤 부분들을 바꾸기를 원하실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분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만일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당신에게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에게는 당신이 지극히 소중히 여기는 것을 당신에게서 거두어 가실 권리가 있다. 그분이 그 권리를 행사하실 때에 당신은 어느 정도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매를 들 때 자식이 어느 정도 상처를 입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당신을 연단하실 때마다 당신이 상처를 입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당신을 연단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고통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성령님이 당신을 대하실 때 그분은 당신에게 지극히 소중한 것들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 당신은 그것들이 무해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분이 보시기에는 매우 위험한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그분이 보시기에도 위험한 것이 아니고 진정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들을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내어놓으라고 명령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순종하였을 때 오히려 이삭을 돌려주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하신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독침이 달려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독침을 제거한 후 돌려주실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신의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독침이 달린 것을 가지고 있다가 찔려서 죽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당신의 안전에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은 독침을 제거하신 다음 그것을 돌려주시면서 “이제 내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당신에게 있는 것이 재물이든 야망이든 연인이든 재능이든 간에 그것들에는 독침이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빼앗아 독침을 제거한 후에 다시 돌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허락하시는 연단은 이런 독침 제거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독침 제거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미래를 이해 참아야 하듯이 연단도 참아야 한다. 그러면 연단의 아름다운 열매가 열릴 것이다.

세상을 따르지 말라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한 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말했다(행 3:6).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즉 ‘혼혈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 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열매를 맺고 승리의 삶을 살고 전도의 열매를 맺고 평안히 죽어서 그리스도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다고 믿는가?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다(출 33:15).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롬 7:18).


출처: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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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멸망한다

 

교회가 서서히 그 위엄을 잃어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분명한 징후를 감지한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시중드는 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하지 않고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라고 말한다.
똑같은 말 같아도, 사실 그 의미는 동이 서에서 먼 것만큼이나 다르다.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숭고한 신념을 버리고, 그 대신에 생각할 가치도 없는
저급하고 천박한 인간 숭배 사상으로 무장하고 말았다.

하나님에 관한 천박한 개념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만연한 탓에 도처에 온갖 악이
횡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런
잘못된 종교적인 사고방식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멸망하고, 교회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여 영적 기갈에 허덕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실재하는 분이 아니라 한갓 추론의 결과물로 생각한다.
자신들이 적당하다고 판단한 증거에 근거하여 도출한 하나님일 뿐,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들에게도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

하나님에 관한 이런 모호하고 막연한 인간적인 생각들과는 달리, 성경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잘라 말한다. 성경에는 사랑이 충만한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 가득하다.

하지만 정작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에 관해 그토록 무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고질적인 불신앙 때문이다. 하나님과 영적인 세계는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마음의 창을 더럽혀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은 위대한 실재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순간 비로소 우리의 심령은 서서히 신령한 일들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의 마음에 나타난다(요 14:21-23). 하나님을 알게 하는 신령한 지혜에 사로잡혀 우리의 생명이자 전부인 하나님을 내밀하게 느끼고 맛보고 듣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고, 그분의 임재는 우리의 삶을 영광과 경이로움으로 가득 채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나타내셨다. 물론 하나님은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서 알 수 있는 분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게 하고, 사랑은 그분의 인격을 경험하게 한다. 하나님은 성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대속으로 우리와 화목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다. 사랑과 믿음은 하나님과 신비에 속한 것이다. 이성은 겸손히 물러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잘못된 지식은 영혼을 구속한다.

인간에 대한 사탄의 첫 공격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하와의 믿음을 교묘하게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비열한 혹은 부당한 개념을 가진 것만큼 인간의 영혼을 심하게 비틀고 흔드는 것은 없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관대하게 품어주는 분이 아니었다.

오늘날 선한 그리스도인들조차 비참한 일들을 겪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기대하는 것만 많고 용서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격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감시 아래서 십자가를 짊어진 채로 침울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분이시고, 그분의 돌보심은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사랑을 우주 전체보다 더, 아니 우주가 수억 개 더 생긴다고 할지라도 그보다 더욱 귀히 여기신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왜곡된 개념으로 알고 있다. 그런 개념들은 심령에 해악을 끼치고 내면의 자유를 구속한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가인’처럼 열정도 기쁨도 없이 마땅히 해야 할 것만 행하며 의무감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안해 떨며 서둘러 예배하길 원하지 않으시고, 시대를 좇아 기계적인 방법으로 자신께 나아가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면 그분께 시간을 드려야 한다.

 

바로 알고 바로 믿어라

하나님의 활동은 그분의 속성과 일치한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 그분의 신성에서 비롯한다. 그분에게 존재와 행함은 하나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

역사적으로 교회를 괴롭혀 온 이단은 모두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교리를 믿거나 아니면 그분의 다른 속성을 무시한 채 단지 한두 가지 속성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함으로 생겨났다. 하나의 속성을 배제하고 다른 속성만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그릇된 신학체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그런 유혹에 시달린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성경의 또 다른 진리를 외면하다. 또한 하나님이 선하심만을 강조하고 그분의 거룩하심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긍휼만을 강조하고 그분의 진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배제하고 그분의 주권만을 지나치게 높이기도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모든 것을 믿어야만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유지할 수 있다.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못마땅해 보이는 것들은 추려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 강조하면 엄중한 문책을 감당해야 한다.

삼위 하나님은 따로 떨어져 사역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활동은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이루셨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하라

하나님은 늘 변함이 없으시다는 진리를 깨달으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그분이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실 기분인지 아닌지를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물론 불행과 필요에도 항상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근무시간을 따로 정해 두시거나, 아무도 만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따로 떼어놓지도 않으신다. 또한 어떤 일에도 변덕을 부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식거나 열정이 사라지는 법도 없으시다. 하나님의 타협을 불허하실 뿐만 아니라 속아 넘어가는 일도 없으시다. 하나님은 설득당하여 말씀을 바꾸는 분이 아니시며, 이기적인 기도에 응답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과 사귐을 가지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나는 네 주 하나님이다. 나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분명히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나타내신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진리의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원리에 따라 우리의 삶에 항상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선원이 별을 보고 배의 위치를 파악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도덕적 상태를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는 많은 어려움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여 그분께 자신의 삶을 내어드리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변형시키려고 하며 그분을 우리 자신의 형상에 맞추려고 애쓴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준엄한 판결을 짐짓 못마땅하게 여기며 육체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치 아각처럼 조금만 봐주십사하는 심정으로 애처로운 태도를 취하곤 한다. 하지만 그건 다 소용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그분이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올바른 출발선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우리에게 무한한 기쁨의 근원이 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의 틀에 맞추지 마라

유한한 우리는 그 한계를 무한하신 하나님께 돌리려 든다. 하나님은, 영원을 품고 계신다. 하나님께 시간의 경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는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무한한 시간과 영원한 삶을 주님과 공유한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지 않으신다. 그분에게 마감일자 따위는 없다. 이런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영혼은 평화를 얻고 안정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이들에게 시간은 먹이를 삼키려고 달려드는 맹수와 다름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며 그분의 무한하심을 함께 나눈다 하나님 안에는 무한히 누릴 수 있는 생명이 존재한다. 그분의 사랑은 다함이 없다.

믿음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면의 눈을 들어 만물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쉬운 일의 하나일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일을 쉽게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셨다. 우리 가운데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이들도 얼마든지 믿음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가장 쉬운 이유는 그것이 힘든 정신활동을 통해 얻는 지식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햇빛이 들판을 비추듯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거저 주어진다. 반면에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이유는 타락한 인간의 완고한 본성에는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는 조건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을 살아가는 요즘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너무 저급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생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전혀 걸맞지 않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유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신앙적인 두려움도, 하나님의 임재의식도 모두 잃어버렸다. 또한 예배의 영을 잃어버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침묵으로 경배하며 내면으로 침잠하는 능력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 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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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계시는 하나님     
 
                              
 
나는 주님의 임재를 원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앙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는다.

I want the presence of God Himself, or I don't want anything at all to do with religion. - A.W. Tozer
 



 

 

 

말씀과 성령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성령 없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 없는 성령이다.
전자는 메마르고 죽었으며, 후자는 불완전하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님의 음성과 교훈을 직접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음을 잊고 있다.

당신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살지 않고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더 복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성령의 조명)이

당신에게도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에게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양심의 음성까지 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D. L. 무디나 A. B. 심슨의 설교를

직접 듣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한다.
그러나 당신이 녹음테이프에 담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는다고 해도,
그의 설교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인간의 양심이나
당신의 손 안에 있는 성경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 속에 있는 빛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스도인은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한다..

- A.W 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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