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본문: 딤후 2:11-13

요절: 11

 

?미쁘다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11 미쁘다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노릇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없으시리라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을 위해 싸우고 고난받는 예수님의 증인들을 격려합니다. 증인으로서의 우리 삶은 전투에 임한 군인과 경기자와 농부와 같이 수고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결코 무사히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투쟁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에 좋은 모범이 없이는 너무나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자기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도 죄인과 같이 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이제 처형을 기다립니다. 사도는 우리를 바로 이러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만약 사도가 이렇게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이미 1-2세기에 완전히 변질하여 다른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이러한 가르침에 순종하여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피를 흘림으로써 신앙과 가르침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려면 먼저 주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지 않으면 결코 증인의 삶을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는 , 어찌하든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되 영원히 죽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진리의 말씀에 대해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사도는 본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미쁘다(피스토스) 말이여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은 믿을만하다!”라는 의미로서 뒤에 나오는 말을 강조합니다. 무엇이 강조되었습니까?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시작한 1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반드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마음에 꽂혀있어야 하며, 매일 살아나가는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이해와 실천에 따라 여러분의 영생이 달려있으므로 정말로 중요합니다!

 

우선 본문의 형식과 구조를 보겠습니다. 본문은 NA(원어) 판에 송가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4 문장이 모두 조건절(“…한다면”) 시작하고, 뒤따라 나오는 주절은 “…하리라 되어 있습니다. 있으면 개역개정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다시 번역을 합니다:

 

말은 믿을만하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우리가 끝까지 견디면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미래)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현재)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를 부인하실 없기 때문이다.

 

 

1.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그리스도인은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므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과거형

  • 6:2-8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가운데 살리요…그의 죽으심과 합하여…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우리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죽은 죄에서 벗어나…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줄을 믿노니

  •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현재형

  •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8:36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고전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후 7:3 “내가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이것을 통해서 분명히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죽은 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6:2),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에 대해 죽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입으로 낱낱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심전심이 통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죄를 짓는 자신을 미워해야 하고, 거룩함을 갈망하여 전심으로 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감동할지라도,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말씀이 항상 자기를 찔러야 합니다. 교회는 주로 말씀에 찔림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또한 저와 같은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사함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항상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 찾지 않고 남에게 찾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으므로 교회가 어지러워집니다. 그들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실제로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우리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자기 영광에 영원토록 참여하게 하신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있습니다. 그는 이생에서 자기를 좇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3).

 

여러분을 포함하여 대부분 교인이 자기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심하지 않았음에도 강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징그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이것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습관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에 무관심하거나 이것을 싫어하고 어기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죄를 생각하고 , 수십 년간 고통스러워한 경험이 없음에도 자기가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음에도 자기는 영적이라고 생각하므로 남을 전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확신은 여러분을 지옥으로 이끄는 독약이 있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구원을 수없이 의심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자기도 놀라고 불안해서 그리스도를 찾지만,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고후 4:10-11 다시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의 특징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고사는 입니다. 그는 항상 죽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를 위하여 자기를 죽음에 넘겨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있는 시체에 욕설을 퍼붓는다고 해서 시체가 화가 나서 다시 벌떡 일어나겠습니까? 옛사람 때문에 잠시 그럴 수는 있지만, 이것은 잠시여야 합니다. 상처를 받는 것은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함의 은혜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실을 몰랐다면,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러분에게 엄청난 경고가 됩니다. 오늘 설교가 무의미하게 끝나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자기에게 기울여져서 이것이 이미 굳어졌으므로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2. 우리가 끝까지 견디면 함께 다스릴 것이요

 

말씀은 누가 구원을 받으며 구원의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단지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받습니다. “ 너희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13). 곳에서 모두 휘포메노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고된 행군에서 탈락하여 적진에서 죽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너무 힘들다고 달리기를 중단하면 상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여러 들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끝까지 견디고 인내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안에서는 죄가 끊임없이 나를 죄로 부추기고, 외부에서는 나를 유혹하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방심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이렇게 험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받는다 진지하고 경고하는 설교를 듣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십자가를 지며, 부담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르는 자는( 16:24), 주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을 입니다. 그분은 교회에 보내는 순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1). 우리 주님이 승리하신 능력으로 승리하고, 자신을 이기고 극복하는 자에게는, 그분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주실 것입니다(참조: 22;3-5). 이렇게 우리의 보잘것없는 신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대답해주실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진지하게 설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모두 목표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7:3).

 

 

3.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예수님도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10:33).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매우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번만 부인할지라도 재생의 기회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그분을 쉽게 부인하게 것이고, 이미 타락한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을 한두 부인할지라도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가 자기 마음을 다스리거나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부인하기 전에 부인하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있으나, 부인한 후에 이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통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우리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쉽게 늘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6:4-6 에서 배교와 같은 무거운 죄에 대해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러므로 신사참배와 같은 배교는 결코 용서받을 없습니다. 당시 모든 한국 교회는 매주 예배 시에 일본 신에 대해 고백을 하고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이것을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음은 아스팔트처럼 완전히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한 교회가 나중에 감옥에서 풀려난 성도를 오히려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미 양심이 더러워진 채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회개하지 못하고 부흥과 성장운동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단순히 자비한 아버지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우리 피속에 이들의 더러운 피가 조금씩은 흐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정말로 예외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특히 한국인은 실수로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일이 없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돌이킬 없는 죄도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언행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하고 짓는 죄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은 매우 죄이므로, 우리 생각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죄는 반드시 기억이 것이고, 이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드러났음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점차로 둔해지고 굳어져서 나중에는 회개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저는 50-60 전에 지은 죄도 갑자기 기억이 됩니다. 그간 번도 생각이 나지 않고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하고 부끄러운 일이 한둘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함의 은혜에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만약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점차로 생각이 나지도 않을 것이고, 결국 마음이 돌처럼 굳어집니다. 그러면 쉽게 주님을 부인해도 자신은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다시 듣습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4.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못할지라도)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과 거의 반대되는 것처럼 들리므로, 해석자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바로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주님도 그를 부인하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주님께 신실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장은 주님의 신실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실하지 못한 것과 주님의 신실하심이 선명하게 대조가 되어 주님의 신실이 크게 돋보입니다. 진실로 가장 위대한 주님의 종일지라도 주님의 엄밀한 판단으로 본다면 신실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함의 은혜를 근거로만 있습니다. 이것이 루터가 가르친 이신칭의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구절은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절은,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말씀을 듣고 불안해진 우리 양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있습니다. 과연 내가 앞으로 주님을 번도 부인하지 않고 영적 싸움을 싸울 있으며,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낼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저도 앞으로 15년은 살아야 같은데, 저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구원에 대한 자신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믿음을 끝까지 지킬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 이상하게 사람이나 침해에 걸린 사람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도는 대답합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도우십니다. 만약 우리가 실수로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분은 반드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한다면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계속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저의 위로가 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있게 자신을 생각하며, 영원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사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면, 내가 지금 죽어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왕처럼 다스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정말로 내가 죽어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시기를 바랍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MvxA/96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에 대한 반성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행위이시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이 많은 이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또 있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조직신학에서 반드시 배운다. 물론 구원의 서정 서론에서 “그 궁극적 실현에는 긴 과정을 요하는 구원 과정의 순서를 논한 것이다.”라고는 했지만 막상 서정의 모든 것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고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살아생전에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조차도 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신자가 받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과 신자가 그것을 수용하는 분야에서의 일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논하자면 구원의 근원이시고 주체자이신 하나님의 일을 논하는 것이 우선일 테고 그것을 받아 수용하고 혜택을 누리는 신자의 일을 나누어서 따로 논해야 마땅하다.

우선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전통 장로교의 구원의 서정을 간단히 나열해보자.

1. 소명

2. 중생

3. 회심

4. 칭의

5. 양자

6. 성화

7. 견인

8. 영화

이것은 원래 서양의 학자들이 7가지로 했던 것을 박형룡 박사가 견인을 추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중생, 회심, 성화 3가지는 명확히 신자의 몫이고 나머지 소명, 칭의, 양자, 영화 등, 4가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전적으로 소속된다.

그러면 나머지 1인 견인은 신자에게 해당되더라도 신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특징 설명에서는 명확히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서나 신자의 일에서나 다 같은 것은 모두 성령의 활약이 전제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다른 양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은 어디까지이고 신자의 자의적 결정이 어디가지 요구되는 것인지를 다루지 않고 있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성화가 현세에서는 완성되지 않으며 영혼의 성화는 성도의 죽음에서, 육체의 성화는 육체의 부활 시에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면 바울의 주장을 되새겨보자.

[빌3:10~12]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 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성경에서 바울이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이 자기가 빨리 죽어서 부활에 이르겠다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살아생전에 성화를 이룩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위 성경 15절에서 바울을 포함하는 몇 사람들이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했다.

[빌3:15]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신자가 하나님의 요구처럼 거룩할 수 있는지, 또는 완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확대하고 이유를 붙여서 이 성경을 본문의 이야기에서 제외시키려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이다. 온전히 이룬 사람들은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할 더 이상 다음단계가 없다.

16절에 말하기를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온전히 이룬 자들이 확실히 존재하며 어떤 상태인지와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까지 설명되고 있으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문제를 더 짚어보자

[롬8:29, 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 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등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 5가지를 빠짐없이 나열하고 있다. 특별히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은 30절의 마지막 부분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이다.

구원의 서정에서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 죽거나 재림 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어째서 성경과 신학이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구원의 서정에서 말하는 영화는 위의 성경 로마서 8장 30절의 영화와는 서로 다른 어떤 무엇인가? 분명히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여 완료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 성경을 보면 마치 바울이 탕자의 비유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아버지는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서 집나간 아들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다. 멀리서 아들이 오는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가서 포응을 하고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마을사람들을 초청하여 떡 벌어지게 잔치를 벌였다.

패륜아를 위하여 얼마나 영화롭게 대하여 주었든지 그토록 얌전하던 큰 아들이 시기가 나서 투정을 부리기까지 하였다. 부르신 자를 곧바로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조직신학은 그 영화로운 대접이 먼 훗날로 지정되었다니.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행위이시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이 많은 이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또 있다.

칭의에서, 사실은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셨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성화를 통하여 언젠가는 의인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라는 것은 행위이다. 상태의 어떠함이 아니다.

행위는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여 의롭다는 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장차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은 착오일 뿐이다. 하나님은 나중에 다시 더 온전한 의를 선포해주시지 않으신다. 그럴 기회는, 오류가 있는, 이 구원의 서정에서조차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칭의는 우리의 어떤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단지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거저 넘겨받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 훗날 정말로 의롭게 되는 날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칭의에 대한 성경을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자.

[롬5:14, 15, 18, 19]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예수의 의가 신자 모두에게 전가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아담의 불순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됨. / 예수의 순종이 신자 모두에게 전가

2018. 5/10 17:36 정 정조

기독교이단사이비 연구가 원로목사 정정조

 

김문제  munjettl@naver.com

<저작권자 © 목회와진리수호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저자: 라일 비에르마 (Lyle D. Bierma,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마틴 루터는 이 찬송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만일 그것을 알았더라면 기쁨으로 찬송했을 것이다. 루터는 은혜의 소리가 언제나 그렇게 달콤한 것은 아니었던 신학적 전통에서 공부했다.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로 구원의 은혜를 얻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주신다고 배웠다. 그의 스승들은 야고보서 4장 8절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러면 그가 네게 가까이 다가 올 것이다" 라고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이기보다는 보상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그것을 시도했다. 그는 수도사가 되어 빈곤, 순결, 순종에 대한 서약을 했다. 끊임없이 기도했고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죄까지 고백했다. 스스로에게 매질했고 잠을 자지 않았고 너무 심하게 먹지 않아, 어떤 기록에 따르면, “배꼽이 그의 등뼈에 닿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보다는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로마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눈 앞에 우리가 의롭게 서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댓가로 얻어야 하는 게 아니고 오직 은혜 (값없이 거저 주시는 호의) 에 의한 (sola gratia; by grace alone)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는 나중에 “나는 한번에 (all at once) 거듭 났고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갔다" 라고 회고했다. 은혜가 그처럼 감미롭게 들렸던 적은 결코 없었다.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 (salvation by grace alone) 에 관한 종교개혁의 강조는 이내 개신교인들이 더이상 선행 (good works) 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값싼 은혜를 원한다는 가톨릭 반대자들의 비난을 유발하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제 86문에서 이렇게 그런 염려를 정리했다: “우리가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왜 우리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 교리문답은 이 질문에 관한 대답에서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에서의 “오직 (sola)” 은 착한 행실이 더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의미하지 않음을 명료하게 한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께의 감사의 표현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확인하며, 이웃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 그 교리문답은 에베소서 2장 8-10절에 부합한다. 거기서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즉시 덧붙여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라고 한다. 선행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그 열매이다.

 


“오직 은혜로 인한 (sola gratia) 구원”에 관한 이 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본성 뿐 아니라 인류의 상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그것을 매우 필요로 하기 때문에 참으로 놀랍다. 루터가 한때 배웠던 바와는 반대로, 우리에겐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는 내적인 능력이 없다. 타락한 피조물로서 우리 각자는 우리 존재의 가장 중심에서 거짓되고 (렘 17:9절), 영적으로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다” (엡 2:1절). 우리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 바닥에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사람들과 같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내려와서 우리를 소생시키고 우리를 자유로 끌어 내는 누군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구출이다. 도르트 신경이 말하듯이, 인류는 “중생케 하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 돌아가려 하지 않고 돌아갈 수도 없는” 그런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다 (제 3조, 3항).


   안타깝게도 은혜에 의한 구원의 진실은 북미권 문화에 매우 반대되기 때문에 북미 기독교에서 종종 빛을 잃는다. 우리 사회는 “할 수 있다는 정신 (a can-do spirit)” 이 지배적인 성과-지향적인 사회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농구 코트에서 승리를 거둔다.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고 직장에서 성과급을 얻기도 하며 잘못을 행하는 경우엔 벌도 받는다. 이 모든 노력과 성취 가운데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필요,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함에 관한 한, 우리 스스로는 절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루터가 500년 전에 재발견한 그 은혜가 참으로 놀라운 이유이다. 우리 스스로는 그 은혜를 누릴 만한 자격이 없다. 우리가 그것을 획득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기꺼이 구원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 오직 은혜로 (sola gratia) - 실제로 구원하신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7297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중보자 그리스도는 단번에 구원의 의를 이루시고 성도에 전가하기 위해 지금도 중보 하신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삼위일체론, 기독론과 더불어 삼대 교리 중의 하나라고 불리는 이신칭의 교리가 체계적으로 수립되어 갔다. 루터는 본 교리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천명하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칼빈은 다음 세 가지를 들어 이를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 외에 다른 구원의 의는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전가(轉嫁)된다. 즉, 거저 성도의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나 <로마서 주석> 등 여러 곳에서 구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음을 강조한다. 첫째, 구원의 근원적 동기는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 혹은 의가 구원의 유일한 질료 혹은 실체, 즉 값이 된다. 셋째, 구원의 유일한 도구는 믿음이다. 믿음은 도구일 뿐, 믿음 그 자체에는 어떤 공로도 없다. 넷째,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행 16:31).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꾀는 것은 모두 불법이며 미혹이다(갈 3:1).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롬 10:17; 마 17:5).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값이 된다. 성도의 선택, 칭의, 성화, 영화의 전(全) 구원 과정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롬 10:3). 여기에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이 개진한 언약신학의 핵심이 있다.



▲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형벌을 당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을 순종하셨다. 칼빈은 이를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성도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계속 중보하신다’고 복음의 핵심을 설명했다.

구속사적 성취: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의를 이룸

루터가 이신칭의를 기치로 삼아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면서 성도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 자체에 집중했다면, 칼빈은 그 은혜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성도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계속적으로 중보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복음의 핵심을 간파하였다. 이로부터 개혁신학을 특징짓는 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이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의를 다 이루게 하셨다(롬 8:3; 엡 1:4; 요 19:30). 그 의는 모든 형벌을 당하신 순종(obedientia passiva, 受難 혹은 受罰)과 율법에 계시된 아버지의 모든 뜻을 행하신 순종(obedientia activa, 守法)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에 모두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마 1:1).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레 17:11; 히 9:22).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요 12:2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오신 주님이 “하나님의 큰 일”을(행 2:11) 다 이루셨다(요 19:30). 그 다 이루심은 구약의 언약과 절기와 제사에 모두 미친다.


성경에 280회 이상 나오는 모든 언약을 주님이 다 이루셨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과 맺은 구약의 언약이 모두 성취되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었을 뿐, 그들에게 공로가 있어 그들의 후손이 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의 주님이 모든 언약을 다 이루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마다 “피로 세운 새언약”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고전 11:25). 주님이 유일한 대속의 “씨”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르셨다. 이것이 “새언약”(히 8:8, 13; 9:15), “더 좋은 언약”(히 7:22; 8:6), 곧 신약의 복음이다.


주님은 또한 모든 절기를 다 이루셨다. 주님이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이 되셨다. 주님은 또한 단번에 죽음을 죽이시는 죽음을 죽으셔서 영원한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의 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맺혔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주님은 초막절의 장막이 되셨다. “성전보다 큰 이”가 자기 자신을 깨뜨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되셨다(마 12:6). 그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육체를 찢어 모든 민족이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있도록 “새로운 살 길”을 여셨다(히 10:20; 슥 14:16~21).


이렇듯 주님은 절기를 다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또한 다 이루셨다. 절기의 중심에는 제사가 있었다. 유월절에는 죽음이 지나간 것을, 오순절과 수장절에는 생명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제사를 드렸다(출 12:43~51; 레 23:1~44; 신 16:1~17).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의 제물로 반복해서 제사를 드렸지만, 주님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엡 5:2; 갈 1:4; 딤전 2:6) “단번에”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9:12, 26, 28; 10:10; 롬 6:10; 벧전 3:18).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속죄제(贖罪祭)로, 허물을 가리는 속건제(贖愆祭)로, 감사로 되돌리는 감사제(感謝祭)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화목제(和睦祭)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자기 자신 전부를 헌신제인 번제(燔祭)로 드리셨다. 허공에 달리셔서 거제(擧祭)로, 몸을 요동치시며 요제(搖祭)로, 살이 짓이겨져 소제(素祭)로, 물과 피를 다 쏟아 전제(奠祭)로 드리셨다(레 1:1~7:38).


구원론적 적용: 보혜사 성령의 임재


주님은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상세히 가르쳐주셨다(요 14~16장).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녀요 상속자로서 그가 이루신 모든 의를 누리게 된다(롬 8:17).


첫째,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영원히 계신다(요 14:16~17; 마 28:20). “임마누엘”이신 주님이(마 1:23)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갈 2:20; 골 1:27). 성령의 임재는 ‘단회적’, ‘절대적’, ‘인격적’이다. 성령은 두 번 임하시지 않고, 양적으로 임하시지 않고, 물질적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성령을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내 안에 마음껏 사시도록 성경 읽고, 기도하고, 경건하게 살고, 회개하는 것이다(엡 5:18).


둘째,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요 14:26; 16:13; 요일 2:20, 27).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신다(요 15:2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요 14:20). “진리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주님 못 박히신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갈 3:1). 그리고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이 되심을 믿게 된다(요 14:6).


셋째, 보혜사 성령은 ‘능력의 영’이다. 이는 ‘은혜의 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성도에게는 은혜 외에는 어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능력이다. 보혜사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받은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이 친히 행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롬 8:15; 갈 4:6; 요 14:13~14). 성도의 순종은 오직 그의 “예”에 대하여 “아멘”하는 순종밖에 없다(고후 1:20).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은 임마누엘 되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일컬어지신다(롬 8:9; 빌 1:19).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세 가지 특성이 주님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가운데 하신 다음 말씀에 모두 나타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임마누엘의 영)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진리의 영)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능력의 영)”(요 15:7).


그리스도의 삼중직: 선지자, 제사장, 왕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 의를 우리의 것 삼아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신학자들은 언약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 점에 특히 주목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이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모사”와(사 9:6; 28:29) “증인”이(사 55:4) 되셨다. 그가 “영원한 의”를 드러내셨다(단 9:24). 사람들에게 “큰 빛”이 비추어(사 9:2) 그들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요 4:25). 그는 곳곳에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다(마 4:23).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1:1~2).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오직 그의 얼굴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다(고후 4:6).

 

둘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랬듯이, 우리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시는 일과 기도를 드리시는 일을 포함한다.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요 17:19; 벧전 1:19; 히 7:26~27; 10:10~14).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마 20:28; 롬 5:8). 그가 우리의 “화목자”로 세움을 받았으며(롬 3:2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롬 5:10). 그가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것은 죽음에 삼킴을 당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삼키시기 위함이셨다(요 1:29; 10:15; 롬 4:25; 벧전 3:22). 그리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 동안 죽음에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시고자 하셨다(히 2:14~15). 그가 하늘에 있는 참 성소에서 그들을 위하여 지금도 간구하신다(히 7:24~25; 9:11~12).


셋째, 그리스도의 왕직이다. 교회가 영원하듯이 그리스도의 왕국도 영원하다(단 2:44; 눅 1:33; 엡 1:20~23). 그리스도의 통치는 단지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을 부여하심이 다스리심이다(엡 4:7).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시고, 자신의 의로 우리를 채워주시고, 자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시고, 자신의 부요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심에(고후 8:9) 왕권이 있다.

▲ ●기고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서 친히 다스리신다(엡 1:20~22; 빌 2:9; 고전 15:27). 보혜사 성령을 내려주심이 주님의 통치방식이다. 그 영의 임재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영의 임재의 확산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산이다. 전도와 선교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701

 

출처: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 


-->
  

시작하는 말


종교개혁의 신앙유산과 교훈들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들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을 주장하는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하거나 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롬 1:7).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롬 5:17,21). 은혜를 강조하면 할수록, 선행과 성화를 무시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아래에 있지 아니하지만,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자들은 의를 추구한다!


로마 가톨릭과는 전혀 다르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적으로 은혜의 교리를 재구성하게 되면서, 구원 교리가 완전히 다시 정립되었다.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종교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신앙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은혜의 교리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칭의론과 구원론을 가능하게 했고, 죄의 용서와 사면을 확신케 해 주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영혼의 위로를 맛보고 싶어하던 중세 말기의 성도들은 시원한 복음의 축복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일터와 삶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어, 열심히 주어진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갔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유산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경고한 바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기억을 상실할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유산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들, 상실된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러하다면, 과연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적 유산을 얼마나 소화하고, 계승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은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다 새롭게 체험하고, 핍박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생애를 슬기롭게 가꾸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각박한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했던 은혜의 교리와 그와 연계된 성경적 교훈들은 설교와 책자를 통해서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침으로 남았다. 루터와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성도들의 일상생활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 깊은 감동을 주었고, 역동적인 삶에의 동기를 부여했다. 중세 말기 시대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둠이 깊이 드리워져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로마 가톨릭의 권세 아래 농촌과 가정에서 소소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성도들에게 자긍심과 행복이란 전혀 맛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전쟁과 전염병과 마귀에 연루된 소문들은 널리 팽배해 있었다. 일상은  불안하고 비참하며 우울했으며, 불행한 소식들만이 난무했었다.


중세말기에는 명쾌한 구원론이 정립되어져 있지 않았다. 칭의와 대속, 교회와 구원에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흘러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 교회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게 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종교개혁의 신학사상들은 16세기를 살아가던 성도들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이었고, 주어지기 시작한 모국어 성경, "말씀의 빛"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큰 감동과 평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 죽음과 전쟁으로 퇴락하던 사회


종교개혁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갈망하고 있던 생존에의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를 제공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 아래서 신음하던 자들이 기다려온 자유함에의 응답이기도 했다. 비록 뮌쩌의 농민혁명이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군주들과 교황에 대해서 절대 충성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유럽에 몰아닥친 전쟁과 전염병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을 흔들어 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종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신뢰를 저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자유에의 갈망과 근대적인 개인의 소중함을 터득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낸 개신교회로 진행하게 한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연옥에 가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고백하지 못한 죄 때문에 고행을 당해야 한다는 형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고행과 순례를 마친 후에 면죄부를 받았다. 사람들은 장래에 지은 죄에 대해서도 미리 면죄부를 주문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의 사업수단으로 변질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형벌을 피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재발견하게 된 종교개혁자들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로부터 거대한 공적인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전쟁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분야의 문제들을 새롭게 재설정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는 성직자들과 수도원에서만 하나님께 의미 있는 일들이 이뤄진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특징은 아주 사소하고 시시하게 여겨지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그것을 아는 지식으로 파헤쳐 나가도록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고답적인 학문탐구에 빠지지 않았고, 일상이라는 현실의 토양에서 자신들의 깨우친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들이 견고히 뿌리내기기를 갈망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자신들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에 깊이 관련을 맺은 사항들에 대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새로운 서구문화의 출현을 갈망하던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적합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에 격리된 경건이 아니라, 시장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중요시하여 복음을 선포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와 강의와 저술을 통해서 선행과 공로사상에 대해 냉철한 비판정신을 발휘하면서, 일상을 중시하는 성경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했다. 칼빈이 수도사들을 비판했는데, 그들의 게으름, 무지, 악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적합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교황권의 혼돈, 권위의 위기와 민족주의


오랫동안 쇠퇴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던 유럽사회에서 무기력하고 무능하던 봉건 군주들과 결탁했던 로마 교황청에서는 자신들의 내부적인 권력쟁탈에 여념이 없었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는 결정적인 날을 맞이하고 있던 중세말기,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가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1303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전쟁비용의 충당을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보니파시우 8세 교황이 반발하였다. 1308년 프랑스 국왕은 교황의 별궁인 아나니를 습격하고 교황을 납치하였다. 프랑스 국왕의 간섭 하에 새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지만,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비뇽에 머물면서 힘을 잃어버렸다. 이것을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고 있는데, 1307년부터 1377년까지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프랑스에서 재위하던 변칙적인 상황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 우르바노 6세가 로마에서 선출되자,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이를 거부하고 1379년 아비뇽에 또 다른 교황을 세웠다.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각각의 교황이 재위하는 극심한 혼란상이 빚어졌다. 두 명의 교황들은 서로를 향해 파문하였고, 어느 쪽이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모두 취소하고 새로운 교황을 뽑았지만, 모두 다 물러나지 않아서 세 명의 교황이 재위하기도 했었다. 세 명 교황들 중에서 1415년에 마지막 한 사람이 사망하면서 극렬한 혼돈 사태가 종결되었다.


14세기 백 여 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는 권력쟁탈전에 몰두해 있었기에,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혼돈 속에 빠져 있었다.


최고로 여겨지던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상실되고 교황청에서 관할하는 행정력도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활의 거의 모둔 분야에서 로마 가톨릭의 무능함이 드러났다. 일반 시민들은 교회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정치와 사회와 경제까지도 장악하여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 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들어왔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이탈리아 주변의 유럽 거의 모든 국가들의 군사문제 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대에, 이 사건은 유럽을 뒤흔든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밀라노의 감독 사보나롤라는 부패한 교황청과 시정부 부유층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질타하였다.


유럽 각 지역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결탁해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림에 저항하는 민족주의가 등장하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저지대 국가, 영국 등 국왕들과 군주들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황제에 맞서서 각자의 재정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발이 크게 퍼져있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사회적 요구가 무엇이었던가를 민감하게 파악하였다.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등 각 지역에서 확산된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제시하여 재세례파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분리주의를 방지하는데 앞장섰다.


2) 전쟁과 죽음


유럽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1337-1453)이었다. 프랑스 국왕 필립 6세 (1328-50까지 재위)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키텐 지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프랑스 전지역에서 피나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부담시켰고, 농민들과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6세기에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던 것은 귀족들의 억압과 큰 땅을 소유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귀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의 영토 확장 경쟁에도 나섬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받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스위스 땅에 침략해 들어오자, 칸톤들이 연합하면서 스위스라는 산악지대의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1511년에 합스부르그 왕가의 후원을 받은 스위스 용병부대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1515년에 이탈리아 마리그나노에서 대대적인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는데, 프랑스에서는 밀라노 지역을 남부의 관문으로 생각하여 장악하려고 했다. 스페인, 잉글랜드, 이탈리아 로마 교황의 군대까지 동원되어 스위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연합군이 형성되었으나, 프랑스의 새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스위스 부대를 전멸시켰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교황과 이탈리아에 대해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자 방안을 강구해 왔었다. 스위스 등 연합 군대가 참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가공할 신무기로 무장된 프랑스 군의 포병부대가 없었던 것이다.


츠빙글리는 전쟁의 비통함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면서, 스위스 사람들이 참여하던 용병제도에 반대하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던 스위스 칸톤 들의 연맹은 살아남기 위해서 결코 주변국가들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영구 중립을 선포해야만 했다.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이상을 갖고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14세기에 실존했었다고 알려진 "빌헬름 텔의 신화"를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폭정에 거부하여 민족을 구원하려던 한 영웅의 이야기는 전쟁의 공포에 두려워하던 스위스 동맹들에게는 큰 위로였다.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동부를 지배하던 사보이 공국은 수백 년 동안 인접지역에 있는 스위스 제네바를 다스려왔다. 인구 6천명이 살던 교통의 요충지 제네바는 교황이 지명한 주교가 다스리던 독립 도시였다. 그래서 사보이 공작이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고, 점령군을 통해서 지배를 강화하자 목숨을 걸고 싸웠다. 1525년에 주교와 모든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두려움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웃 도시 베른 등에서 온 스위스 동맹군의 도움으로 마침내 제네바는 독립을 하게 되었고, 1535년에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과거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종교개혁으로 가입하였으며,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 (post tenebras lux)는 문구를 도시의 표어로 채택하였다. 1602년 11월에 다시 재침공을 가해왔으나, 완전히 무찌르고 독립하였다.


3) 흑사병과 심판의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관념은 중세 말기 유럽 사람들에게 강하게 남아있었다. 흑사병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인들의 의식주 생활환경이 너무나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열악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체에 필요한 기본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면역력이 극히 저하되어 있었다. 여러 항구를 드나드는 이탈리아 상선들에 실린 짐들 속에는 벼룩과 쥐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1347년 10월 이탈리아 제노아 선박들이 시칠리에 당도하면서 흑사병이 발병했고, 다음 해에는 남부 독일로 확산되어졌으며,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저분한 오물들이 뒤섞여있는 더러운 거리와 습기에 가득 차 있는 건물의 음습한 곳에는 쥐와 벼룩들이 들끓었다. 일단 사람에게 감염이 되면,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서 병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한번 감염이 되면 흑사병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드러내는 흑사병에 감염되면 림프선이 부어올랐고, 피부에 출혈이 있어서 검은 반점과 검은 색 버짐이 나타났다. 그래서 흑사병이라고   불렀는데, 마지막 단계는 피를 토하고 고열을 이기지 못하다가 사망하였다. 몸 속에서 나오는 물질들은 병균에 감염되어져 부패한 것들이, 땀, 배설물, 침, 숨 등에 섞여서 몸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악취가 진동했다. 소변의 색깔도 검은 색이라서,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시켰다. 어떤 도시에는 인구의 절반이 죽기도 했다.


흑사병은 언제 어떻게 옮겨지는지도 모른 채 확산되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박테리아에 감염이 되면 혈관 속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패열증으로 쓰러졌다. 1347년부터 1353년 사이에 퍼진 전염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천 5백 만명이 희생되었다. 공포스러운 죽음은 각 지역의 미풍양속을 바꿔놓았다. 부모가 감염된 자녀를 내다 버렸고, 역시 자녀들도 병으로 죽은 부모를 버렸다. 심지어 교황의 경우에도 페스트에 감염될 경우에는 종부성사를 받지 못할 정도였다.  


1505년 가족의 비극적 사망을 경험하게 되는 루터도 페스트로 인해서 동생 하인츠와 바이트를 잃게 되었다. 루터는 둘째 아들이었고, 네 명의 누이들이 있었다. 자주 흑사병이 창궐해서, 유럽 전 지역에는 예기치 못한 희생자들이 나왔는데, 1505년 6월 13일, 에르푸르트 대학에서도 교수 세 명이 한꺼번에 사망했고,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람들은 차라리 수도사로서 죽게 된다면, 위대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수도사의 길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집에서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으로 돌아가던 길에, 7월 2일 벌어진 무시무시한 천둥번개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된 것은 우연히 벌어진 낙뢰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형제들의 죽음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1519년 여름, 유럽 전 지역에 전염병이 확산되어서 인구의 삼분의 일, 혹은 사분의 일이 몰사하고 말았다. 유럽의 가정들은 엄청난 비극에 휩싸이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성도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돌보다가 자신도 감염되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를 남겼다. 다행히 은혜를 입고 회복되었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생애 속에 개입하여서 호의를 베풀어주신 바에 따라서 살아난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줄어들었지만, 비텐베르크에서는 또 다시 1527년에 흑사병이 발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신을 떠났다. 루터의 집은 원래 수도원 건물이었기에 숙소로 사용되면서, 많은 환자들이 머물러서 치료를 받았다. 루터가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을 정도였다. 여기에 다가 매독병도 널리 확산되어 있어서, 군인들, 성직자들, 농민들, 심지어 교황까지도 감염되었다.


이처럼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기에, 면죄부 판매가 상상치도 못할만큼 성공적으로 판매되었던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옛 신앙이 무너져 내리던 시기에,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품게 하는 새 소식이 될 수 있었다.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유입으로 신속하게 기능적인 소상공인들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제네바는 새로운 정치적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칼빈은 이처럼 전쟁의 공포와 불신, 주교에 대한 불신과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도시에 설교자로 사역하면서,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진 원주민들과 각지에서 몰려온 6천여 명의 종교 피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도합 인구가 1만 2천명에 이르게 된 도시의 문제들을 다뤄야만 했다. 칼빈은 모든 노력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도시에 만연된 불신앙과 신성모독을 고치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경건하게 증진시키는 노력에 치중하였다는 점이다.      


복음을 통하여 제시된 구원의 은총에 확신을 가지도록 선포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교리를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가치로 선포하였다. 오직 은혜로만! 중세말기와는 달리 은혜에 대해서 번잡한 신학적 이론만을 개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여 가장 순수한 복음적 사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하였다. 죄인을 향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가 역동적으로 나타나서 생명이 회복되어지도록 개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 말기의 쇠락해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던져진 은혜의 교리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지만, 결국 루터와 칼빈 등은 이단자들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계속)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3840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영혼을 잘 아십니까?

 

영혼에 대해 잘 알고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잠언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한글개역]
   
    성경의 모든 하나님말씀은 영혼을 위한 꼴(양식)이다. 영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인간이 인간되고 인간일 수 있는 절대조건과 내용이요 이성의 본질과 실체란 사실이다. 사람영혼은 하나님 계신 진리의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인간에게 있는 유일의 절대적기관이다. 영혼을 절대논리로 모르면서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구원을 언급하고 말씀을 전파하면 아무리 고상한척해도 가식과 위선의 파렴치한 이중인격자일 수밖에 없다.

    교회의 부패와 쇠퇴, 사회에서 보는 부정적인 요인들, 다 영혼무지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이단들과 기성교회가 구별이 안 되고 교회의 영혼무지가 그들이 설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놓고도 그들을 비난만하고 있다. 부패하고 썩으면 파리가 먼저알고 알을 까고 구더기가 생기듯이 기성교회가 썩으니 이단들이 달려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기성교회가 자처한 일이다.

    영혼구원을 받았다면서 영혼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일을 한다고 성직자라 부른다. 그런 영적지도자라 자부하는 목회자라면 더욱 영혼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을 모르면서 모르는 것도 모르고 매우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영혼으로 사기치는 자는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 위에 한 말이 목회자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최고로 기분 나쁠 것이다. 복음에 대한 자부와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목회자에게 가장 불쾌하고 식상하게 하는 말이 자기 전문성에 대해 모른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영혼에 대한 자기의 육신논리, 즉 학문, 상식의 상대적 지식으로 모른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영혼을 안다면 하나님의 절대논리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모른다고 하는 말에 너무 흥분하지 않았으면 한다.

    인간은 오감과 육하원칙에 의존하여 존재와 사실여부를 인식하고 인정한다. 영혼은 오감과는 다른 차원이라 육적감각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영혼에 대해 모두가 다 구체적으로 모른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말하면 말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인간오감에 분배된 최대 허용 영역은 2%이다. 하나님영역은 98%이다. 최소한 영혼의 정체성이라도 알아야할 것이다.

                        주여! 저들의 영혼을 알게하여 주시옵소서!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소명순례자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회장 현창학 박사)는 ”이사야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란 주제로 지난 6월 22일 삼일교회(담임 송태근 목사)당에서 '제7차 구약과 목회와의 만남' 학회를 가졌다. 송태근 목사가 설교한 개회예배 후에 김창대 박사(안양대)가 “이사야의 구조와 신학적 주제들”, 장세훈 박사(국제신대)가 “귀머거리 모티브로 읽는 왕들의 이야기”, 이희성 박사(총신대)가 “이사야 40-66장에 나타난 종의 교회론적 해석과 적용”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이사야와 복음

김창대 박사(안양대)는 “이사야의 구조와 신학적 주제들” 논문을 통해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 성경이 시편과 이사야와 신명기"라 밝히고, 특히 이사야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 자신의 사역을 규정하는 본문으로 인용한 책이기에 신약의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통찰력과 지식을 전달해 준다고 했다.

김 박사에 의하면, 이사야서가 복음을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강단에서 이사야서 본문을 가지고 선포되는 메시지들은 주로 고난 주간에서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이야기와 크리스마스 시즌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본문(사 7:14)에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이사야서는 다른 선지서들과 달리 매우 복잡한 구조로 얽혀져 있기에, 언뜻 여러 자료들이 아무렇게나 배열된 글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자세히 보면 이사야서만큼 주도면밀하게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도 없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유다의 심판 이후에 열국의 심판이 있고, 최종적으로 시온이 회복될 것이라는 라는 이사야서의 큰 틀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청사진이 제시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계획은 심판 아닌 희망

김 박사는 "이사야서는 유다의 심판과 열국의 심판을 다룰 때, 심판 본문 사이에 종말의 회복을 삽입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말했다. 심판의 문맥에서 회복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구조는 하나님의 계획이 결국에 심판이 아닌 희망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이사야서의 수사적 기법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런 이사야서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이사야서는 간절한 하나님의 마음을 무엇보다 잘 전달하는 귀중한 보고"라고 했다.

김창대 박사는 이사야서의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 "유다의 심판-열국의 심판-메시아의 출현-새 언약 체결과 시온의 회복(새로운 창조 질서 동반)―여호와의 종들인 남은 자의 출현 이라는 종말의 회복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구도"라고 했다. 그는 "이사야서의 신학적 주제들은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종말에 시온의 회복이 갖는 의미들을 생생하게 증언한다"면서 "이사야서를 아우르는 통합적 주제는 회복된 시온이 공의와 의로 빛나는 데에 있다"고 다음과 같이 전했다.

"원래 하나님은 시온을 공의와 의로 빛나게 하여 그 빛을 바라보고 열국이 찾아와서 열국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계획을 세우셨다. 하지만 유다는 탐욕으로 인해 공의와 의에 눈과 귀를 닫고 어둠에 거하는 맹인과 귀머거리로 전락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에게 흑암의 심판을 내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다. 어둠을 좋아하는 그들에게 어둠에 갇히는 심판을 내린 셈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에, 종말에 시온을 회복시켜 시온을 다시 공의와 의로 빛나는 곳으로 만드실 것이다. 이를 위해 메시아가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통해 새 언약이 체결되고 시온이 회복될 것이다. 그래서 새 언약의 수혜자인 여호와의 종들이 시온에 거할 것이다.

이들이 시온에서 공의와 의를 행할 것인데,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의 결과다(44:2; 59:21). 회복된 시온(또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부이다. 종말의 시온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로운 창조 질서를 동반할 것이다. 이로써 시온의 회복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사야서가 말씀하는 구원의 목적

김 박사는 "이런 이사야의 구조와 서로 유기적 네트워크를 이루는 신학적 주제들을 안다면, 설교자는 성도의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성도의 구원의 목적은 성령을 통해 공의와 의를 실행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설교자들은 "우리의 구원은 시온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있고, 성도의 구원은 공동체를 넘어 창조질서를 세우는 우주적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김 박사는 이사야서의 이런 구조와 신학적 주제들을 통해서 설교자들은 더욱 풍성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발표를 마쳤다.

 

학회장 현창학 박사(합동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는 학회와 목회가 서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복음주의구약신학회가 한국교회를 섬기고 목회를 도울 뿐만 아니라 목회 현장의 소리를 경청함으로 학문 활동을 발전 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학회장의 바람에 부응하듯이 이번 학회는 이사야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를 설교 현장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둔 모습이었고, 학자들 뿐 아니라 목회자들도 많이 참석한 이번 학회는 은혜로운 분위기 가운데 마무리되었다.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43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오직 믿음”은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
이성호교수

종교개혁의 구호 중에서 “오직 믿음”만큼 오해된 말도 없을 것이다. 이 구호를 잘 못 오해하면, ‘믿음만 있으면 된다.’든지 혹은
‘믿음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은 다른 영적 덕목들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의 “오직”은
그 성격 상 배타성을 지닌다. 즉 “오직... 믿음”은 행위를 배제한다. 그러나 이 배타성도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제한적인
영역에서 배타성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핵심을 이야기하면,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칭의에 관한 한 믿음은 배타성을
가지며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고려의 대상 혹은 원인도 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따르면, 칭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오직”만 있을 뿐이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칭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은 ‘오직’ 믿음이다.

‘오직 믿음’을 여기까지만 이해하면, 선행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를 믿음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믿음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식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이나 교회가 전하는 말을 믿고 싶은 열망도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로마교회는 형성된(formed) 믿음과 미형성된
(unformed) 믿음을 구분하고 지식없는 미형성된 믿음도 일종의 믿음으로 간주하였다.

로마교의 믿음관에 대항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믿음에 대한 그 유명한 자신의 정의를 내린다. 믿음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
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졌다.”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인쳐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신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오직 이 참된 믿음만을 통해서 획득된다; 행위가 들어설 자리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참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의 일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가들이 믿음
이라고 이야기라고 할 때는 항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전자는 헛된 믿음 혹은 죽은 믿음이라
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실제로 전혀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말하는 ‘오직 믿음’은 다음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신자는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
‘오직 믿음’을 이렇게 온전한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신칭의가 선행을 소홀히 취급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전혀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칭의, 선행, 믿음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세밀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선행의 전제가 되고, 믿음은 칭의를 받아들이는 수단이며 그와 동시에 선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 결과, 칭의, 선행, 믿음이 아주 밀접하고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어떤 학자들은 선행을 칭의와 어떤 인과론적인 관계에까지 ‘격상’시키려고 하였
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결론들을 칼빈에게서 직접 찾으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원종천 교수의 경우에는 칼빈이 선행을 칭의에
있어서 열등적 원인(inferior cause)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교수는 칼빈이 그 용어를 사용한 문맥
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칼빈이 열등적 원인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대조되는 우월적 원인들도 언급하
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용어를 빌려서 구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우리 구원의 효과인(efficient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질료인(material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순종이다; 수단인(instrumental cause)는 성령님의 조명, 즉, 믿음이다; 최종인(final cause)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우리 구원에 있어서 선
행은 앞에서 언급된 4가지 주요 원인들 중에 하나라도 될 여지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들은 [앞에서 말한 원인들] 주님으로 하여금 선행을 열등한 원인(inferior causes)으로 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주님께서 자비로 영생의 기업을 위해 정하신 자를, 당신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을 통하여 소유하도록 인도하신다.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그는 앞에 나오는 것을 뒤에 나오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때로 영생을 선행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왜 선행을 열등한 원인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순서를 정하실
때 선행이 있고 나서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선행 때문에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비해서 단지 순서상 먼저 발생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칼빈은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
자신이 한 말이 오해가 되지 않도록 덧붙인다. 그가 말하기를,
“그러나 참된 원인이 고려될 때에는,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행위에 피난처를 두지 말고 오직 그분의 자비만을 묵상하도록 명하신다.” 적어도 이 말에서 확실한 것은 칼빈이 언급한 “열등한 원인”은 “참된 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자
신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로마서 6장 23절을 인용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주님의 은혜는 영생이다.” 여기서
칼빈은 질문을 던진다. 사망의 원인이 인간의 죄라면, 영생의 원인은 인간의 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영생의 원인은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원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칼빈이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불렀을 때는 구원과 선행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원종천 교수는 또한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를
루터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데, 이것도 사실에 그렇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우리의 순종을 “부분적 원인”이라고까지 부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것이
쓰여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루터와 칼빈의 견해가 크지 않다
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의 순종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것은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부분적 원인이다. 필수적
인 것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원인이거나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지구는 필수적이지만 의롭게 하지 않는다. 만약 죄인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 . . 어거스틴이 한 말은 진리이다: "당신 없이 당신을 창조하신 분은 당신 없이 당신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행위는 구원에 필수적이
다, 그러나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위선자들 때문에 우리는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루터가 선행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루터는 선행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았다. 특히 선행의 필수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루터는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을 거부한 것 뿐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선행이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요소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선행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되도록 하시지는 않는다.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말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선행은
단지 구원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뿐이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이 글은 채경락 교수가 지난 4월 22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 69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표한 논문이다.

채 경 락 교수(고신대학교)

 

Ⅰ. 들어가는 글

구속사적 설교는 설교학의 뜨거운 이슈 가운데 하나다.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바람직한 성경적 설교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반대편에서는 해석학적으로 무리가 있는 접근이라고 우려한다. 구속사적 설교 주창자는 대표적으로 Sidney Greidanus, Graeme Goldsworthy 등이 거명되는데, 그들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선포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구속사적 진전 안에서 신약과 구약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그 절정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 혹은 구속사적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강한 확신은 은연중에 혹은 때로 명시적으로, 그렇지 않은 설교를 향해 미완의 설교 내지는 심지어 비기독교적 설교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한다.

한편, 구약학자인 Walter Kaiser는 저자-지향적 해석학 원리에 기초하여 구속사적 설교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구속사적 설교가 이슈가 되는 것은 특히 구약을 설교할 때인데,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구약을 읽을 때에도 신약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의 진전 속에서 신약이 구약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Kaiser는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는 주입(eisgesis)이라고 비판한다. Kaiser에게 저자는 우선적으로 인간 저자이며, 타당한 해석(exegesis)의 울타리 역시 인간 저자의 의도다. 따라서 인간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내용을 본문에 억지로 주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약 저자는 구약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약을 읽을 때 구약을 참고하는 것은 당연하고 타당하지만, 구약 저자는 신약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약의 눈으로 구약을 이해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Kaiser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Greidanus의 길을 따를 것인가? 특히 구약을 설교할 때 Greidanus 등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미완의 설교라고 우려하는 Kaiser의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Kaiser가 시대착오적 주입이라고 비판하는 Greidanus의 길을 따를 것인가? 이것은 설교학자들의 논의 속에서도 민감한 이슈지만, 현장 설교자들에게도 난감한 갈림길이다. 둘 모두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성경적 설교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해설교자들은 Kaiser의 저자-지향적 해석학을 원리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면서 또한 구속사적 진전에 기초한 그리스도 중심적 메시지의 가치도 충분히 공감한다. 이 둘을 동시에 포섭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본 논문은 바로 그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본 논문은 해석과 적용의 구도 속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새로이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하며, 이를 통해 구속사적 설교 논의의 긴장감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Kaiser의 저자-지향적 해석이 말 그대로 해석의 범주에 속한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둘의 논의 범주가 서로 다르다는 의미다. 따라서 둘은 양자택일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공존의 관계다. 구속사적 설교를 자주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부르는데, 본 논문은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며, 이를 통해 Kaiser와 Greidanus 사이의 긴장감이 해소된다고 본다. 해석이 옳고 그름의 엄밀한 판단 대상이라면, 적용은 다분히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가 실천하고 있는 고유한 적용 자산들을 정리하려고 한다. 구속사적 설교는 전통적인 강해 설교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적용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구속사적 메시지로 나타난다. 성경신학적 적용, 하나님 중심의 적용, 그리고 고백형 적용 등의 이름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기존 설교 강단에 보다 풍성한 적용의 기조를 공급한다. 또한 이미 일부 구속사적 설교자들 사이에 시도되고 있지만, 앞으로 더욱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소위 실존적 적용을 구분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본 논문을 통해 구속사적 설교와 전통적 강해설교 사이의 긴장감이 다소간 해소되고, 보다 생산적인 논의로 나아가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Ⅱ. 펴는 글

 

1.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인가, 적용인가? 본 논문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는 구속사적 설교와 전통적인 강해설교의 설교 작성 단계를 비교하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Haddon Robinson의 강해설교 작성법과 Sidney Greidanus의 구속사적 설교 작성 단계를 비교해보자. 둘은 공히 10단계 작성법을 소개하는데, 병치하면 다음과 같다.

 

Robinson의 작성 단계

Greidanus의 작성 단계

1단계. 단락 선택하기

1단계. 본문 선택하기 - 청중의 필요 고려

2단계. 단락 연구하기

2단계. 본문 읽기 - 문학적 문맥 안에서

3단계. 본문 개요 작성하기

4단계. 본문 해석하기 - 역사적 배경 안에서

3단계. 석의 주제 발견하기

5단계. 본문의 주제와 목적 기술하기

- 원독자에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4단계. 석의 주제 분석하기

- 설명, 증명, 적용의 발전 질문

6단계.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메시지

이해하기 - 구속사적 해석의 일곱 다리 활용

5단계. 설교 주제 결정하기

6단계. 설교의 목적 결정하기

7단계. 설교 주제와 목적 기술하기

7단계. 목적 달성 방법(설교 유형)

결정하기

8단계. 설교 형식 선택하기

8단계. 설교의 개요 작성하기

9단계. 설교 개요 준비하기

9단계. 설교의 개요 채우기

10단계. 서론과 결론 작성

10단계. 설교문 작성하기

- 구어체로

주목할 대목은 Robinson의 3-5단계와 Greidanus의 5-7단계인데, 공히 석의 주제(본문 주제)에서 설교 주제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Robinson의 4단계와 Greidanus의 6단계에 주목하라. Robinson의 4단계를 통해 석의 주제를 현청중에게 ‘적용’한다. 석의 주제가 원독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라면, Robinson은 4단계 발전 질문들(적용 질문 포함)을 통해서 그것이 현청중에게 의미하는 바를 추적하는데, 그 결과물이 설교 주제(5단계)다. 다시 말해, Robinson은 석의 주제(3단계)를 현청중에게 적용(4단계)함으로써, 설교 주제(5단계)를 확보한다.

한편, Greidanus는 본문 연구의 결과물인 본문 주제(5단계)를,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이해(6단계)함으로써, 설교 주제(7단계)를 확보한다. Greidanus의 본문 주제(textual theme)는 Robinson의 석의 주제(exegetical idea)와 사실상 동일한데, 본문이 원독자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의미한다.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출발하여 현청중을 위한 설교 주제로 나아가는데, Robinson이 4단계 ‘적용’을 통해 5단계 설교 주제로 나아간다면, Greidanus는 6단계 ‘정경과 구속사 문맥 안에서 이해하기’를 통해 7단계 설교 주제로 나아간다. 구도상 Robinson의 4단계와 Greidanus의 6단계는 동일 단계로서, 원독자에게 주어진 본문의 메시지를 현청중에게 적용하여 설교 주제를 확보하는 단계다. 다시 말해, Greidanus의 구속사적 설교는 본문 해석의 결과물이 아니라, 적용의 산물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구속사적 적용을 통해 확보된 구속사적 메시지다.

 

석의 주제 ======> 구속사적 적용 =====> 구속사적 설교(메시지)

 

이로써 Greidanus와 Kaiser 사이의 긴장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둘은 논의의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Kaiser가 본문 해석(Robinson의 2-3단계, Greidanus의 2-5단계)을 다룬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의 영역(Robinson의 4-5단계, Greidanus의 6-7단계)에 속한다. 둘은 양자택일의 대립 관계가 아니라, 충분히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공존의 관계다. 물론 Kaiser가 Greidanus의 구속사적 적용을 거부할 수는 있다. 적용은 원리적으로 다양성으로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Greidanus가 Kaiser를 거부할 수는 없으며, 사실 거부하지도 않는다. Greidanus는 자신의 2-5단계를 통해 Kaiser가 요구하는 인간 저자-지향적 해석을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Greidanus와 Kaiser의 논의 사이에 다소간 긴장감이 감도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용어 사용의 혼선 때문으로 보인다. Greidanus를 비롯한 구속사적 설교 이론가들은 흔히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구속사적 해석과 구속사적 설교는 익숙하지만, 구속사적 적용이라는 용어는 지극히 생소하다.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명칭을 통해 구속사적 메시지는 적용이 아니라 해석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여기서 Kaiser의 해석과의 긴장이 발생한다. 사실 둘은 범주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다른 말로, 구속사적 설교를 적용의 범주가 아니라 해석의 범주로 이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과도한’ 확대의 결과라고 판단된다. 문학적 문맥의 과도한 확대, 그리고 역사적 문맥의 과도한 확대다. 설교를 위한 본문 해석에 관한 Greidanus의 다음 말에서, 두 가지 과도한 확대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역사적 주제와 목적을 확고히 마음에 품은 채, 이제 우리는 지평을 확대하여 그 메시지를 전체 정경과 모든 구속 역사의 맥락(context) 안에서 이해하기를 시도할 수 있다. 이러한 포괄적인 수준에서, 문학적(literary) 해석은 정경(canonical) 해석이 된다. 그것은, 이 단락이 창세기 1장에서 계시록 22장까지 전체 성경의 문맥(context)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역사적(historical) 해석은 이 수준에서 구속사적(redemptive-historical) 해석이 된다. 그것은, 이 단락이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이야기의 맥락(context)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첫째,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본문의 문학적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한다. 위에서 보듯이 Greidanus는 본문(text)의 문학적 문맥(literary context)을 정경 문맥(canonical context)으로 확대하는데, 이는 과도하다. 강해설교의 문학적 해석의 대원칙은 문맥 안에서(in its context)의 연구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문맥은 좁게는 말 그대로 문학적 단위 내에서의 문맥이다. 좁게는 절별 문맥 혹은 장별 문맥, 최대로 확대해도 권별 문맥을 의미한다. 사무엘상 17장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해석한다면, 작게는 사무엘상 16장과 18장 문맥을 살펴야 하고, 크게는 사무엘상 전체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Greidanus는 문학적 문맥의 범위를 정경 문맥으로까지 확대한다. 이는 일반적인 문학적 문맥을 넘어서는 과도한 확대다.

필자는 하나의 단락을 정경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다. 성경 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역사 전체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신약은 물론 구약 본문도 정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이라고 칭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해석이 전제하는 통상적인 문학적 문맥인 권별 문맥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은 지혜롭지만, 과도하게 문맥을 넓히는 것은 말 그대로 과도한 해석의 단초가 될 수 있다.

Greidanus가 문학적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은, 문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설교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반동의 결과로 보인다. 그는 소위 ‘본문 설교(textual preaching)’에 대한 오해를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본문 설교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주제 설교와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선택된 본문을 그것의 문맥에서 분리하여 오직 그 본문에만 설교를 제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본문을 중시하는 설교자들이 주어진 본문 자체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칫 문맥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피력하고 있다. 문맥에 대한 소홀은 곧 본문에 대한 오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1) 본문의 원래 의미 결정하기. (2) 정경 전체 문맥에서의 의미로 나아가기. 그리고 (3) 이 의미를 오늘 우리 청중을 위해 적용하기. 청중을 위한 적용으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본문을 정경 전체의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필자는 문맥을 소홀히 한 본문 해석에 대한 Greidanus의 우려와 비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그 대안이 문맥의 과도한 확대가 될 수는 없다. 문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본문 해석도 문제지만, 문맥을 과도하게 확대하는 것도 건강한 본문 해석에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Kaiser가 우려하는 대로,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과도한 의미의 주입(eisgesis)을 초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Greidanus의 소위 구속사적 ‘해석’은 해석이 아니라 적용으로 봐야 한다. 문학적 문맥의 경계인 권별 문맥 안에서 이루어진 본문 이해는 해석이요, 권별 문맥을 넘어선 정경 문맥 안에서의 본문 이해는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마땅하다.

둘째,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역사적 문맥도 과도하게 확대한다. 위에서 보듯 Greidanus는 본문의 역사적 문맥(historical conext)을 구속사적 문맥(redemptive-historical context)으로 확대하는데, 이는 과도하다. 강해설교자들은 본문 해석에 있어 문학적 문맥과 더불어 역사적 해석을 중시한다. 역사적 정황과 실존적, 문화적 상황을 감안할 때 본문의 의미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석서들은 저자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역사적 배경 연구를 포함한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그 본문이 기록된 역사적 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로 과도하게 확대한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17장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에 관하여, 구약의 왕정 시대라는 배경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배경으로 상정한다.

필자는 하나의 본문 혹은 사건의 의미를 구속사 전체를 배경으로 추적하고 이해하려는 Greidanus의 열심과 방법론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존경하는 마음으로 수용한다. 특정한 시대적 배경에 집중하는 미시적 안목이 놓칠 수 있는 깊은 의미를, 구속사의 거시적 안목이 추적하고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경 문맥에서의 본문 이해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하듯이, 저자가 본문을 기록한 특정한 시대적 배경을 초월하는 구속사적 조망 속에서 본문을 보는 것은 일반적인 해석의 범주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Greidanus의 구속사적 해석은 ‘(구속)역사적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구속사적 적용’이라 부름이 마땅하다. 이는 Greidanus 자신이 구분한 해석과 적용의 범주에도 부합한다. 그는 “[성경] 메시지가 처음에는 한 고대 교회에 전달되었기에 설명(explication)이 필요하다면, 이제는 그 메시지가 한 현대 교회에 전달되어야 하기에 적용이 필요하다.”고 정리한다. 해석(혹은 설명)이 저자가 원독자에게 의도한 메시지를 발굴하는 과정이라면, 적용은 그것이 현청중에게 가지는 의미를 발굴하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Greidanus가 강조하는 구속사적 메시지는 원리적으로 원독자였던 구약 교회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교회에 선포되는 메시지다. 다시 말해,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설교자들이 역사적 해석을 실천하는 이유는, 원저자와 원독자의 대화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함이다. 저자와 원독자의 대화는 특정한 역사적 정황과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기에,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 사이에 주고받은 메시지를 오해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인데, 여기에 구속사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은 해석의 차원을 넘어선다. 구속사적 메시지 자체가 오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일반적인 본문 해석의 차원을 넘어서는 메시지라는 말이다. 구속(역)사적 적용을 역사적 해석의 범주에 놓는 것은, 일종의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해석이 다루는 역사와 구속(역)사가 가리키는 역사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전자가 본문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거대한 통치와 섭리를 지칭한다.

요컨대, 구속사적 설교(메시지)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Greidanus가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본문 해석의 문학적 문맥과 역사적 맥락을 과도하게 확대한 처사다. 권별 문맥을 정경 문맥으로 확대하고, 역사적 배경을 구속사 전체로 확대하였는데, 이는 저자와 원독자 사이의 대화 지평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이로 보건대, 구속사적 설교는 구속사적 ‘해석’이 아니라 구속사적 ‘적용’으로 칭함이 바람직하다.

 

2. 구속사적 적용의 특성

지금까지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메시지)가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범주에 속함을 살펴보았다. 이제 구속사적 적용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겠다.

 

1) 성경신학적 적용

우선,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이다. 먼저 논의를 위해 필자는 대(大)적용과 소(小)적용을 구분할 것은 제언한다. 대적용은 석의 주제를 청중에게 적용하여 설교 주제를 얻는 과정이라면, 소적용은 설교 주제를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과정이다. 설교에서 적용은 사실상 두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데, 먼저 원독자를 겨냥했던 석의 주제를 현청중을 위한 설교 주제로 변환하는 대적용이 이루어지고, 이어서 설교 주제를 청중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소적용이 이루어진다. 구속사적 적용은 대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성경신학적인 대적용을 추구한다. 강해설교자들이 실천하는 대적용의 일반적 루트가 원리화 혹은 추상화였다면,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을 전향적으로 도입한다. “성경신학의 통찰들은 한 본문을 그 단락과 복음 전반에 부합하도록 풀어주기를 원하는 설교자들에게 결정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인 강해설교가 미처 깊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새로운 적용 루트다. Graeme Goldsworthy는 강해설교 작업에 성경신학의 중요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를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설교를 주제로 다루는 서적들 사이에서 성경신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조사했다. 나는 설교에서 성경신학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징후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설교와 관련된 상당수의 서적들을 검토했다. 하지만 심지어 강해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서적들 사이에서도 성경신학이 설교 준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경우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성경신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되살아나고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 여전히 먼 것 같다.

 

구속사적 설교는 곧 성경신학적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속사적 메시지가 생산되는 주요 (대적용) 루트가 성경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신학적 적용은 그 신학적인 특성으로 인해 적용으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적용의 영역보다 오히려 신학적 해석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구체적인 적용 대신 다분히 신학적인 선언의 설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은 그 자체로 (대)적용의 영역이다.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에 대하여 이우제는 적실성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다를 뿐, 구속사적 설교도 매우 적실한 설교라고 변호한다. 적용은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하는 방편인데, 설교의 적실성은 구체적인 행동 적용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대적용과 소적용의 구분을 제언하였는데, 구속사적 설교가 적용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을 때의 적용은 소적용을 일컫는다. 반면, 구속사적 설교도 적실성을 충분히 확보한 설교라고 변호할 때, 그때의 적용은 대적용을 가리킨다. 구속사적 설교는 소적용보다 성경신학에 의거한 대적용을 통해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하는 설교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구속사적 설교가 소적용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 관하여 Greidanus는 다음과 같은 적용을 제언한다.

 

구체적인 적용은 교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핍박으로 고통당하는 교회라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라는 확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정복하였고 또한 정복할 것이다. 만일 국가의 번영을 이기적으로 향유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우주적 전쟁의 시각을 놓쳐버린 교회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악을 향한 우리 시대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면할 수 있다. 만일 전쟁에 참여는 하지만 자기 힘을 의지하는 교회라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에게 힘을 주셔서 싸우시도록, 초대할 것을 권면할 수 있다. 요는 구속사적 진전은 그리스도 중심적 초점만이 아니라 현시대 적용도 부여한다.

 

그런데 인용에서 보듯, Greidanus가 말하는 적용은 구체적인 삶 보다는 포괄적인 선언에 가깝다. 구체적인 삶 적용을 시도하고는 있지만, 비판자들이 바라는 만큼은 구체적이지 않다. 비판자들은 보다 구체적인 삶 적용을 기대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전쟁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 것인지, 또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전투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한, 실제로 실천 가능한 구체적인 적용을 기대한다. 물론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설교의 적실성이 반드시 소적용, 즉 구체적인 행동에 제한될 필요는 없다. 포괄적인 신학적 선언만으로도 충분히 적실한 설교가 가능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적용에 관심을 쏟으라는 비판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요컨대, 구속사적 설교는 성경신학적 적용이라는 새로운 적용 자산을 공급하였다. 본문에서 삶으로 바로 직진하지 않고, 구속사적 발전을 좇아 성경신학적인 메시지(적용)을 확보한 후, 거기서 청중의 삶으로 나아간다. 이는 전통적인 강해설교의 적용에 구속사적 설교가 선물하는 소중한 기여다.

 

2)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

둘째,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메시지)을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적용의 초점은 주로 사람에게 맞추어진다. 다시 말해 사람의 생각, 사람의 행동, 사람의 반응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말 그대로 사람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속사적 설교는 적용에 있어서도 하나님 중심성, 나아가 그리스도 중심성을 견지한다.

구속사적 설교의 주제 문장을 살피면, 대체로 “하나님은” 혹은 “예수님은”이라는 주어로 시작한다. 예를 들어, 가인과 아벨 사건을 설교하면서 Greidanus는 “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를 얻으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 계보를 그의 성실로써 보존하신다.”를 설교 주제로 잡는다. 또 창세기 12장을 설교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되도록 하시려고 그의 백성들에게 이 땅을 주신다.”를 설교 주제로 잡는다. 물론 우리 인간이 주제 문장의 주어가 되기도 하지만, 그때도 메시지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예를 들어, 전도서 7장을 설교하면서 그는 설교 주제를 “하나님이 때를 주권적으로 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곤고한 날에는 그 날의 상대적 유익을 찾아야 한다.”로 정한다.

구속사적 설교의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성은, 본문에 대한 하나님 중심적 해석에 기초한다. Greidanus는 하나님 중심적 해석, 즉 신중심적(theocentric) 해석을 애초에 강해설교를 위한 본문 연구의 한 요소로 포함시킨다. 강해설교자들은 통상 본문의 문법적, 문학적, 그리고 역사적 해석을 실천하는데, Greidanus는 여기에 신중심적 해석을 추가하여 역사적 연구, 문학적 연구,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 연구로 구성한다. 본문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본문 해석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Greidanus가 이렇게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중시하는 이유는, 성경은 곧 하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 전체를 다음 네 포인트로 요약한다. “창조(창 1-2장), 구약 시대의 구속(창 3장-말 4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마 1장-계 20장), 새 창조(계 21-22장).” 네 포인트의 의미상 주어는 공히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창조요, 하나님의 구속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창조다. 그는 이 네 포인트가 메타 내러티브가 되어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정당한 본문 해석을 위해서는 “이 단락이 하나님, 그의 구속 행위, 그의 언약, 그의 은혜, 그의 백성을 향한 그의 뜻에 관해 무엇을 계시하는가?”를 지속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본문 해석은 곧 하나님 해석, 즉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하나님 중심적 해석은 구속사적 적용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레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가 된다. 하나님의 모든 구속역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Greidanus는 모든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해석하기를 요구한다. 강해설교는 곧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는 Chapell의 주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행하시고, 또 행하실 일을 중심에 세우지 않는 설교는 기독교적 독특성을 상실한 인간 중심적인 믿음을 창조한다.”고 우려한다. 그리스도를 비켜간 설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적 설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금언으로 사랑하는 “이 성경이 곧 나를 증거한다.”(요 5:39)는 구절의 설교학적 실천이다.

하나님/그리스도의 중심성이야말로 구속사적 설교가 전통적인 강해설교에 공급한 가장 소중한 자산일 것이다. 설교는 인간 선포가 아니라 하나님 선포이고, 하나님 선포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Timothy Keller는 성경을 읽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나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혹은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한 책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분이 행하신 일에 관한 책으로 읽을 것인가. 물론 이 둘은 양자택일의 대상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책이지만, 더불어 사람에 관한 메시지다. 요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무게중심을 확고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둔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매번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요청한다. Greidanus는 『구약에서 그리스도 설교하기』를 출판한 후 창세기, 전도서 등 권별로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교할지에 관한 저작을 내놓고 있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설교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Keller 역시 성경의 모든 장르,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고, 성경의 모든 주제와 모든 주요 인물, 또 모든 주요 이미지와 모든 구원 이야기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주창하며, 구체적인 방법론을 예시한다. 심지어 본능을 통해 그리스도를 설교하기를 권면한다. 그리스도가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설교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현장 목회자들에게는 다소 과한 지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설교가 중요하지만, 1년 52주 모든 설교를 그렇게 채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목회적으로 편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가능하다. 그러나 작은 나무 한 그루도 전체 숲의 조망 속에서 제대로 터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적 해석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적용으로 나아가라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의 외침은 모든 강해설교자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소중한 권면이다.

 

3) 고백형 적용

셋째, 구속사적 설교는 고백형 적용을 중시한다. 고백형은 행동화 적용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설교의 적용이 구체적인 행동 변화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세상,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백으로 구성될 도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적용의 중심에 자주 세우는데, 이것이 강해설교의 적용에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공급한다.

적용하면 으레 행동실천 혹은 행동화를 많이 떠올린다. 적용과 행동화의 동일시는 소위 ‘관찰-해석-적용’ 구도의 영향이 크다. 개인 묵상에 자주 활용되는 이 구도에서, 관찰은 본문 읽기를 의미하고, 해석은 본문 연구를 통한 원리화를, 그리고 적용은 행동화로 인식된다. 본문을 읽어 원리를 확보하고, 그것을 실제 삶에 실천하는 것이 적용이라는 구도다. 이는 개인 묵상을 넘어 설교 작성에도 활용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구도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설교의 적실성은 행동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적용은 행동화보다 크다.

적용의 본질이 청중의 실천과 반응이라면, 설교에 대한 청중의 반응은 반드시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적실성을 논하건대, 꼭 적용된 행동 지침이 아니더라도 복음 자체가 적실하다. 설교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청중이 마음으로 받아 고백하는 자체로도 충분히 설교의 적실성을 확보한다. 더욱이 구약의 원독자에게 전달된 미완의 복음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완성된 형태로 선포하고 함께 고백한다면, 그 자체로 더할 나위없는 적실한 적용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고백형 적용은, 성경의 직설형(indicative) 복음의 중시에서 나온다. 성경은 다양한 표현법을 사용하는데, 대표적으로 직설형과 명령형(imperative)다. 성경에 동원되는 언어 형태 혹은 패턴을 연구한 John Carrick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패턴은 직설-명령(indicative-imperative)의 조합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서신서의 전반부는 직설형 교리를 선포하고, 후반부는 명령형 윤리를 선포하는 패턴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 두 영역 가운데 구속사적 설교는 직설형 교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거기서 고백형 적용이 나온다.

물론 구속사적 설교는 명령형 적용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수용하되, 다만 직설형 복음에 철저히 기초한 명령이기를 요구한다. Bryan Chapell이 명령형 메시지에 대한 구속사적 설교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거하지 않는다. 다만 그 원천을 불가항력의 은혜 안에 위치시킨다. 순종의 법칙은 변함이 없다. 다만 이유가 변했을 뿐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이름 하여 ‘고백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고백은 단순 동의가 아니며, 그에 부합하는 행동을 수반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우리의 강단에서 자주 성경적 고백과 무관한 인본주의적 윤리가 선포된다고 우려한다. 다른 말로 복음의 동기가 아닌 인간적 열심에 기초한 윤리가 자주 선포된다고 염려한다. 선포되는 명령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해서 동일한 메시지는 아니다. 표면적인 선포와 더불어 이면의 동기가 메시지의 근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적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단순 윤리적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 고백적 행동이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소위 Do 설교, 혹은 Be 설교에 대하여 Chapell은 다음과 같이 균형을 잡아준다. “Be 메시지 자체는(in themselves)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고립되면(in themselves) 잘못된 것이다.” 명령형 설교 자체가 오류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라!” 혹은 “저렇게 되라!”는 명령형 메시지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 가르침이 구속적 맥락에서 나왔음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온전한 의미의 기독교적 설교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Keller는 다음 말로 Chapell의 정리에 공감을 표한다. “어떤 설교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만 일러주고 그 원리를 복음의 맥락 안에 연계시키지 않는 것은, 자칫 열심히만 하면 스스로 감당할 만큼 충문히 완벽해질 수 있다는 [비복음적인] 인상을 주게 된다.”

설교자에게 고백과 명령, 혹은 직설형 복음 선포와 명령형 권면은 결코 양자택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많은 신학적인 이슈들이 그렇듯이, 이 경우도 둘 사이에 유기적인 균형이 필요하다. 설교의 이상은 본문에 충실한 설교일진대, 정창균이 말하듯이 “본문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본문은 무엇인가를 행하고자 한다. 즉 청중에게 장엄한 구속사를 설명하거나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어 진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중에게서 어떤 반응을 창출해낼 것을 의도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할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에 기초하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반응을 지향하는 균형 잡힌 설교다. 행동 적용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설교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강조하는 고백형 적용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행동 적용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3. 실존적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

지금까지 우리는 구속사적 설교가 추구하는 적용의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구속사적 설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보고자 한다. 이른바 실존적 적용으로서의 구속사적 설교(적용)다. 일반적으로 구속사적 설교는 다분히 신학적인 설교로 알려져 있다. 성경신학의 루트를 좇아, 하나님 중심적인 고백형 적용을 중시한다.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접근도 시도되는데, 이른바 실존적 적용이다.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찾는 방식이다.

대표적으로 고통의 문제인데, 고통은 신비의 영역으로 불릴 만큼 인간 실존의 풀리지 않는 난제 중의 난제다. 성도에게 고통이 찾아올 때, 설교자들은 자주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가지고 접근한다. 섭리 신앙에 기초하여 ‘필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을 겁니다!’라는 말로 위로한다. 그런데 일정 부분 이해의 실마리가 되기도 하지만, 고통의 깊이가 깊어지면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한다. 더 큰 신앙인으로 빚어가려는 연단의 과정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고통의 당사자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이에 Bryan Chapell은 고통이라는 실존적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명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소개한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하신 분이 결코 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이 시대의 가장 극심한 고통 가운데 궁극적인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을 수 있는 바탕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고통에서 멀찍이 물러난 객관적인 고통 신학은, 고통 받는 실존에 다가갈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 오직 고통 중에 있는 자, 특히 나보다 더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고통을 당한 자가 고통 받는 실존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인데, 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고통 받는 실존들의 위로와 해명이 된다. 지금까지의 구속사적 설교가 신학적인 루트를 따라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면, 이 경우는 실존적인 요청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끌린다.

고통 외에도 Bryan Chapell은 인간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메울 수 있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 실존을 구멍이 송송 뚫린 스위스 치즈에 비유하는데, 이 구멍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구현되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Greidanus가 약속과 성취의 구도를 통해 그리스도께 나아갔다면, Chapell은 실존적 공백과 메움의 구도를 따라 그리스도를 초청한다. 이것이 실존적인 구속사적 설교의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Timothy Keller는 문화적 압점(pressure points)이라는 개념을 통해 실존적 적용을 추구한다.

 

기독교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하자면 아픈 데가 있다. 꽉 끼는 신발을 신었을 때 발이 아파 오듯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아픔을 느끼는 데가 있다. 세상에 대해 그들이 믿는다고 공언하지만, 정작 그들의 직관이나 경험에 부합하지 않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아픈 데를 파악하고, 질문과 제안과 예화와 예들을 동원해 그곳을 눌러야 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예수님을 인간 실존의 대답으로 소개하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함께함 그리고 대신함을 통해서다. 신학적인 이름을 붙인다면, 성육신의 길과 십자가의 길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성육신적 함께함에 관해서는, 필자의 판단에 가장 현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혹은 구속사적 설교를 실천한다고 판단되는 Timothy Keller는,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성도들의 아픔과 고뇌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성도들을 돈과 관련해 후해지는 삶으로 초대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님을 가리킴으로써 그들의 두려움과 굳은 마음을 만져야 한다. 예수님은 가장 부요한 분이시지만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 친히 가난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셨다(고후 8:9 참조). 성도들이 응답 없는 기도에도 잘 인내하도록 돕고자 한다면, ‘주님을 의지하라’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유익이 되고, 비그리스도인에게는 낯선 말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지만 거절당하신 한 분을 보게 하라.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온전히 아버지를 신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함을 넘어,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시는 주님이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에게 예수님을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를 설교의 기초로 삼는 것이다. Keller는 예수님의 치유 기사를 설교할 때는 반드시 주님의 십자가를 관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그 사람과 자리를 바꾸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리자가 되셨다. 예수님이 이 사람의 삶에 들어오셔서 그를 고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를 위해 죽으셨고 죗값을 치르시고 본질상 이 모든 것을 친히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발가벗겨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옷을 걸칠 수 있다. 그분이 가장 깊은 좌절과 고뇌에 던져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알고 내적인 고요함을 누릴 수가 있다.

 

그는 예수님의 치유 기사에 관한 두 설교자의 설교를 비교하면서, 한 설교자는 “그저 우리 상처에 대한 치유”를 설교하였다고 다소 낮게 평가하고, 다른 설교는 “위대한 복음 주제의 빛 안에서 읽었다”고 높게 평가한다. 전자는 십자가를 우회하였고, 후자는 십자가를 관통하였기 때문이다. Keller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넘어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 메시지의 중심에 세우는 것이다. 설교가 인간 실존을 터치해야 한다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우리의 실존적인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십자가는 단지 신학적인 선포를 넘어 인간 실존의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근원이다.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의 미래를 위하여 실존적 적용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지나치게 실존적이고 실용적인 적용에 대한 반동으로 구속사적 설교는 다분히 신학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적용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도 균형이 지혜다. 설교는 하나님을 선포하지만, 인간 실존을 향해 선포한다.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의 성경신학적인 기조를 유지하되, 실존의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다면, 보다 적실한 설교가 가능할 것이다.

 

Ⅲ. 나가는 글

구속사적 설교는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성경적인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들에게 소중한 설교적 자양분을 공급하지만, 때로 진영논리의 향취를 풍기며 다른 설교의 길을 배제하는 강한 비판의 잣대가 되기도 한다. 본 논문은 구속사적 설교 논의가 보다 생산적으로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해석과 적용의 구도 속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기를 시도하였다. 살펴본 대로, 구속사적 설교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의 영역에 속한다. 해석이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이라면 적용은 다분히 선택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강해설교와의 공존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흔히 구속사적 ‘해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본 논문은 구속사적 ‘적용’이라고 부름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구속사적 설교는 기존의 강해설교가 미처 중시하지 못한 중요한 적용 자산을 제공하는데, 성경신학적 적용과 하나님/그리스도 중심적 적용, 그리고 고백형 적용이다. 전통적 강해설교는 청중의 삶의 변화를 지향하며, 다분히 실존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적용, 그리고 행동화 적용을 중시하였는데, 여기에 구속사적 설교의 적용 기조가 의미 있는 균형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근자에 구속사적 설교자들 사이에 소위 실존적인 구속사적 적용이 시도되고 있는데, 모든 적용은 원리적으로 인간 실존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설교의 중요한 적용 기조가 되기를 희망한다.

1) 한국에 구속사적 설교가 소개된 데는 화란 선교사인 고재수(N.H.Gootjes)의 입국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 선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구속사적 설교를 소개하고, 그의 제자인 권수경이 Sidney Greidanus의 박사논문을 번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Sidney Greidanus, Sola Scriptura: Problems and Principles in Preaching Historical Texts, 권수경 역,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서울: SFC, 1995).

2) 여기에 Edmund Clowney, Bryan Chapell 등도 구속사적 설교학자로 많이 거론되고, 근자에는 Timothy Keller도 구속사적 설교를 강조한다. Edmund Clowney,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 (Wheaton: Crossway, 2003).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Redeeming the Expository Sermon (Grand Rapids: Baker, 2005). Timothy Keller, Preaching, 채경락 역, 『팀 켈러의 설교』 (서울: 두란노, 2016).

3)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Bibliotheca Sacra 161 (2004): 3. Greidanus는 자신이 구속사적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한 성도의 질문을 소개한다. 자신의 전도서 설교를 들은 후 한 노신사가 묻기를, “설교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설교라면 랍비가 회당에서 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는 설교,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는 설교는 사실상 온전한 기독교 설교가 아닐 수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Graeme Goldsworthy, Preaching the Whole Bible as Christian Scripture: The Application of Biblical Theology to Expository Preaching (Grand Rapids: Eerdmans, 2000), 150. 그는 구약은 그 자체로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큰 이야기의 일부이기에 구약 자체만으로 설교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설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4) Jason Allen, “The Christ-Centered Homiletics of Edmund Clowney and Sidney Greidanus in Contract with the Human Author-Centered Hermeneutics of Walter Kaiser”, (Ph.D. Diss.,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2011), 18. 그는 Walter Kaiser가 구속사적 설교 주창자들에 대한 균형추(counterbalance)의 위치에 선다고 정리한다.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정경 문맥 안에서 신적 저자의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면, 구약학자인 Kaiser는 본문 의미의 근본적인 좌소는 인간 저자의 의미라고 주장한다.

5) 해석과 적용의 구도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익숙한 구도이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이해하는 틀로서는 새로운 시도라고 필자는 자평한다.

6) 해석과 적용이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Sidney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Interpreting and Preaching Biblical Literature (Grand Rapdis: Eerdmans, 1988), 해석이 저자가 원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를 발굴하는 것이라면, 적용은 현청중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는 과정 혹은 그 결과물을 의미한다. 해석과 적용의 구분 가능성에 대한 학자들의 다양한 입장에 대해서는 Daniel Doriani, Putting the truth to work : The theory and practice of biblical application, 정옥배 역, 『적용, 성경과 삶의 통합을 말하다』 (서울: 성서유니온, 2009)을 참조하라. Robert H. Stein, A Basic Guide to Interpreting the Bible, 배성진 역, 『성경해석학』 (서울: CLC, 2011), 63-65. Stein은 해석(interpretation)과 이해(understanding) 사이를 구분하는데, “이해란 저자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고, “해석이란 독자가 저자의 의미를 이해한 것을 말이나 글로 표현한 것”이라고 구분한다.

7) Haddon Robinson, Biblical Preaching: The Development and Delivery of Expository Messages (Grand Rapids: Baker, 2001), 51-181. 명칭은 필자가 적절히 요약적으로 제시하였다.

8)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279-92. 단계의 명칭은 필자가 요약적으로 제시하였다.

9) 설교는 해석을 넘어 적용이라는, 강해설교의 기본 원리가 바로 이 대목에서 구현된다. Jerry Vines & Jim Shaddix, Power in the Pulpit: How to Prepare and Deliver Expository Sermons (Chicago: Moody Press, 1999), 134-35. Vines와 Shaddix의 구도와 비교해도 결론은 동일하다. Vines는 석의 주제를 가리키는 CIT(central idea of the text)에서 설교 주제를 의미하는 proposition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데, 그 과정은 CIT를 현시대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본문 주제를 현시대에 적용한 결과물이 설교 주제라는 의미다. CIT가 보편적인 메시지일 경우에는 proposition이 거의 CIT와 동일하고, 다른 경우에는 개인화(personalized)하거나 혹은 상황에 맞게 번역하여 proposition을 확보할 것을 주장한다.

10) 둘은 성경적이고 건강한 설교를 위한 양 기둥이다.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헤르메네이아 투데이」 제42호(2008, 봄): 24.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나 회중과의 적용점이 분명하지 않은 설교는 설교의 적실성을 상실한 채 단순한 성경 진리의 진술이나 해설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회중과의 적용점은 분명하나 그것이 성경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교는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 있다.”

11)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12) Tim Keller, Preaching, 채경락 역, 『팀 켈러의 설교』 (서울: 두란노, 2016), 68. “어떤 성경 본문이든,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문맥 아에서 살펴야 하는데, 여기에는 ‘정경 문맥’이 포함된다.”

13) Robinson, Biblical Preaching, 21. 강해설교에 대한 그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강해 설교란 문맥 안에서(in its context) 한 단락의 문법적, 문학적, 역사적 연구로 유추되고.”

14)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1.

15)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1. 여기서 그는 (1)과 (2)는 해석의 과정으로, 그리고 (3)은 적용의 과정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상 (2)도 적용의 범주에 속한다.

16) Walter C. Kaiser, Recovering the Unity of the Bible: One Continuous Story, Plan, and Purpose (Grand Rapids: Zondervan, 2009), 217-118. Greidanus 자신도 주입(eisgesis)에 대한 우려를 피력한다. Grei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212. “우리는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구약으로 밀어넣어 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입(eisegesis)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첨언하기를, “대신 우리는 신약의 문맥 안에서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17)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앞서 “역사적 해석은 이 수준에서 구속사적 해석이 된다.”는 그의 말이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다.

18) Gredanus, The Modern Preacher and the Ancient Text, 183.

19)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5-88. 4단계 본문 해석하기에서 그는 역사적 해석을 요청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디서, 그리고 왜 이 본문을 기록했는가? 즉, 저자가 원독자에게 의도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해석을 막는 객관적인 통제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20)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8. 그는 반드시 “본문의 역사적 의미를 확고히 설정한 후에, 그리고 그것을 선명한 본문 주제로 담아낸 후에, 이 단락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는지를 묻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도 스스로 직접 본문을 연구하는 본문 연구에서 적용적 차원으로 넘어간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는 방증이다.

21) Haddon Robinson의 추상화 사다리(abstraction ladder)가 대표적이다. Donald Sunukjian, Invitation to Biblical Preaching, 채경락 역, 『성경적 설교의 초대』 (서울: CLC, 2009), 63. Donald Sunukjian은 “역사에서 신학으로” 나아갈 것을 제언하는데, 보편적 원리화라고 부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는 지그재그다.” 출애굽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이,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둘러가는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최단거리였다고 선포한다. 보편적인 원리로 확대한다.

22)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69.

23) Graeme Goldsworthy, Christ-Centered Biblical Theology, 윤석인 역, 『성경신학』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3), 34.

24) 김재선, “적실성 있는 설교 적용을 통한 청중의 변화 방안”,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33권 (2014): 9. 그는 구속사적 설교자들이 대체로 적용에 소홀하다고 말하며, Greidanus의 다음 말을 인용한다. “말씀은 적용되어지는 것이요, 성경은 케리그마다. 따라서 설교를 이 말씀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으로 보고 그것을 적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적용을 덧붙여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25) 이우제, “Sidney Greidanus의 설교 연구: 현대 설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을 중심으로”,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복음과 실천신학」, 제27권 (2013, 봄): 353-54. 이우제는 Greidanus를 비롯한 구속사적 설교자들은 신학적인 지식에 치중한 나머지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적실한 적용이 빈약하다는 비판을 소개하면서,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논박한다.

26) Sunukjian, 『성경적 설교의 초대』, 136. Sunukjian은 적실성과 적용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적실성은 청중이 그 성경적 진리가 구체적인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눈으로 ‘볼’ 때 비로소 획득된다.” 적용이 모종의 설교학적 행위라면, 적실성은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설교의 성격이다.

27)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9.

28)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적용 루트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구속사적 적용은 또 하나의 적용 루트를 공급할 뿐, 다른 루트를 포기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적용 루트는 아니다. 추상화와 원리화, 혹은 원리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적용 루트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여기에 더하여 구속사적 적용 루트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29)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Genesis, 강정주·조호진 역, 『창세기 프리칭 예수』 (서울: CLC, 2010), 151.

30) Greidanus, 『창세기 프리칭 예수』, 234.

31) Sidney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Ecclesiastes, 전의우 역, 『전도서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포이에마, 2012), 295.

32)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35.

33)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86. 그는 이 질문을 통해 소위 도덕주의적, 모범 설교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4) Greidanus, Preaching Christ from the Old Testament, 227. 단지 ‘그때 그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으로의 원리적 적용을 넘어서는 듯하다. 하나님의 모든 구속 행위는 그리스도로 수렴된다는 차원에서, 보다 명시적인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요구하는 듯하다.

35)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72.

3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79.

37) Greidanus, Goldsworthy, Chapell, Clowny 등 구속사적 설교를 주창하는 학자들이 그들 주장의 성경적 근거를 찾을 때 이 구절을 빼놓지 않고 거론한다. 누가복음 24:25-27도 자주 거론된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강해설교자들에게 적용은 많은 경우 원리에서 행동화를 의미하지만, 구속사적 설교자들에게 적용은 하나님 중심적 해석을 통한 그리스도 설교하기를 의미한다. 설교의 중심은 하나님이요, 하나님 사역의 중심과 절정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38) Keller, 『팀 켈러의 설교』, 84.

39) Greidanus는 주제 문장에서는 대체로 하나님/그리스도를 주어로 삼지만, 설교의 목적을 진술할 때는 반응자인 청중을 중심에 세운다. 이를 통해 설교는 하나님에 관한 선포이지만, 사람을 향한 선포라는 균형을 확보한다.

40)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8-123.

41) 정승원, “교리적 주제를 시리즈로 설교하기”, 「헤르메니아 투데이」, 제44호 (2008, 가을): 118.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공로를 언급하지 않고 그 나라 백성인 성도들의 일상적인 삶과 모습을 주제로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 설교 역시 그리스도가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존귀케 한다.”

42) 행동이 중요하지만, 무리하게 행동 일변도의 적용을 시도하는 것은 오히려 설교를 경직화시킬 수 있다. 설교가 청중의 변화를 의도한다면, 그 변화는 행동 변화 이전에 믿음과 고백의 변화이며,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43) Greidanus,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187.

44) 또한 구속사적 설교의 고백형 적용은, 앞서 소개한 하나님 중심적 적용의 중시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술은 직설형으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행할 일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명령형으로 기술된다. 소위 윤리적 설교에서는 사람의 행동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설교의 중심에 세운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초점이 있다면, 그것을 담아내는 언어 상자는 명령보다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

45) John Carrick, The Imperative of Preaching: A Theology of Sacred Rhetoric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2002), 5.

4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302.

47)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85.

48) Bryan Chapell, Christ-Centered Sermons: Models of Redemptive Preaching, 안정임 역, 『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서울: CUP, 2015), 325-86. Chapell은 서술형(indicative) 복음과 명령형(imperative) 복음을 어떻게 다룰지를 소개하면서, 동일한 복음 설교의 이름 아래 “서술적인 면이 강조된 설교”(325-54)와 “명령이 강조된 설교”(355-86)를 각각 예를 들어 소개한다. 복음 안에서 서술과 명령은 따로 분리될 수 없고, 다만 강조하는 초점의 선택만이 있다는 실천적인 예증이다.

49) Keller, 『팀 켈러의 설교』, 84.

50)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28.

51) 정창균, “구속사와 성경 인물 설교”, 24.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나 회중과의 적용점이 분명하지 않은 설교는 설교의 적실성을 상실한 채 단순한 성경 진리의 진술이나 해설로 그칠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회중과의 적용점은 분명하나 그것이 성경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설교는 설교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수 있다.”

52) 욥기가 그토록 두꺼운 성경이 된 데는, 고통의 난제가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해답을 어디서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가장 억울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죄인들의 용서를 구하셨던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욥의 마음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욥기는 기본적으로 창조주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범접할 수 없는 주권으로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실존적인 답을 얻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욥기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결말에 이르게 된다. 예수님을 지향할 때 완성도 있는 설교가 구성될 수 있다.

53) 김병년, 『바람 불어도 좋아』 (서울: IVP, 2013). 고통을 더 큰 신앙으로 나아가는 연단의 과정으로 소개하는 이들에게 김병년은 “하나님, 제가 언제 큰 성도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냥 이대로가 좋으니 고통을 제거해 주세요.” 하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54) Bryan Chapell ed., The Hardest Sermons You'll Ever Have to Preach: Help from Trusted Preachers for Tragic Times, 허동원 역, 『성도의 불행에 답하다』 (서울: 지평서원, 2014), 22.

55)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필자도 욥기를 본문으로 위로하는 설교를 시도하는데,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56)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291.

57) John Stott, Between Two Worlds (Grand Rapids: Eerdmans, 1982), 325. 실존적 적용의 흔적은 John Stott에게서도 발견된다. “설교의 주된 목표는 성경을 신실하고도 적실하게 풀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필요에 온전히 부합함을 인식되게 하는 것이다.”

58) Keller, 『팀 켈러의 설교』, 157. 덧붙여 말하기를, “기독교는 그 열망과 이슈를 단지 설명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성취하고 다루고 있음을 보여야 한다. 어떤 문화적 이야기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행복한 결말이 된다.”

59) Keller, 『팀 켈러의 설교』, 161.

60)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0.

61) Keller, 『팀 켈러의 설교』, 91.

62) 여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추가할 수도 있다. 함께함과 대신함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라면,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그분과의 연합니다. Chapell, Christ-Centered Preaching, 387-415.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고,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준다고 선언한다.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26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등은 모두 하나님이 미리 마련하신 구원의 수단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이러한 일들을 성도들을 택하실 때에 그 자녀가 되는 수단과 방법으로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영원한 영광으로 택하실 때에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방법과 수단까지도 정하신다. 이런 것들을 정하지 않고 성도들에게 알아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 목표를 이루는 자에게만 상을 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란 수단을 준비하셨고, 부르심, 믿음,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등과 같은 성령님의 사역을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수단으로 미리 준비하셨다. 예수님이 객관적으로 획득하신 구원과 성령님이 주관적으로 적용하시는 구원을 성도들이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수단으로 준비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 성도들이 구원을 획득하고 획득한 구원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획득하시고 하나님이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의 순전한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성도들이 그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수단들도 미리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심, 믿음,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등에 성도들을 참여시켜 주심으로 성도들이 이 일들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하고, 우리가 죄에 대하여 회개를 하고, 우리가 점점 더 거룩한 자로 자라가고, 우리가 여러 시험과 고난들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지만, 실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순전한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미리 정하신 것이므로 이것들 모두는 하나로 묶여있다. 일종의 사슬(체인, chain) 같은 것이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이것을 황금사슬:(golden chain)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획득과 적용을 위해 부르심, 중생, 회개, 양자, 칭의, 믿음, 성화, 영화, 견인 등을 황금과 같이 귀하고 견고한 체인으로 하나가 되게 묶어 주셨다는 것이다. 체인을 이루는 각 이들이 촘촘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페달을 밟는 발의 힘이 그 체인을 통해 바퀴에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전거 체인의 이들보다 더 깊고, 많고, 신비하다. 그 구원이 우리에게 한 번에 순간적으로 간단히 펼쳐지지 않는다. 과정과 순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황금과 같은 귀한 사슬로 연결되어 반드시 우리에게 실패 없이 주어진다.

 

요사이 이것을 구원의 서정”(序程, The order of salvation)이라고 부르는데, 자칫 오해하면 부르심, 중생, 회개, 양자, 칭의, 믿음, 성화, 영화, 견인 등에 엄밀한 순서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구원의 서정은 이것들이 나열한 순서대로 사람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사람에게 주어질 때 위와 같은 과정이 있다는 뜻이다. 이 과정은 하나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자전거의 체인의 이들을 보면 이것이 없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이 이것이 없는데, 바로 우리의 구원의 과정을 이루는 것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이 되어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신칭의오직 은혜오직 믿음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이해 없는 이신칭의는 언제든 신인협력으로 나아간다. 이미 성화는 신인협력으로 너무 이해되고 있다. 황금사슬과 떨어져 오직 믿음을 말하면 이미 거기에서는 믿음이 구원의 원인이 되기 시작한다. 이것 없이 저것을 준비하시지 않은 하나님의 크고 다양한 사역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들을 이해할 때 비로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가시는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해가 된다. 이에 대한 이해가 적으면 우리는 그만큼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 사람이 하는 일로 읽게 되어 성경을 때로는 위인전기전으로 읽게 되고, 때로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긍정적 사고방식을 고취하는 인간 계발서로 읽게 되고, 진리 대신에 정직과 인내와 성실이라는 인간적 교훈에 집중하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과 이스라엘 민족을 보라. 하나님은 부족한 이들의 범죄와 탈선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며 끝내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지 않는가?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예수님이 획득하신 구원과 성령님이 적용하신 구원에 대한 기록이지, 절대로 사람들의 정직, 용기, 인내, 화합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이러한 구원의 사역을 사랑으로 하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모두 죽어갔을 것이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을 당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자들에게 즉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든, 선지자이든, 제사장이든, 왕이든, 열 두 제자이든 모두에게 부르심, 중생, 회개, 양자, 칭의, 믿음, 성화, 영화, 견인을 하나의 사슬로 묶어 주셨다. 이들 모두의 생애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반드시 주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과 마지막이 되시고,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마침이 되시어 우리에게 완벽한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http://seum.seoul.kr/xe/writing/57686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원의 서정에 대한 새로운 고찰

 

한국개혁신학회 제65회 정기학술발표회



한국개혁신학회(회장 정일웅·총무 안명준)는 지난 9월 2일 총신대학교 사당동 종합관 520호에서 제65회 정기학술발표회를 가졌다. 이날 ‘구원의 서정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백석대학교 권호덕 교수는 “구원이란 우리가 육신의 정욕대로 살면서 성령의 도움을 모르는 ‘비참한 상태’에 있다가 ‘빛의 상태’, 성령의 추진을 받는 ‘주안의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우리는 이 사건을 소명의 시각으로, 중생의 시각으로, 회심의 시각으로, 칭의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권 교수는 또 “우리는 구원 문제를 ‘소명, 중생, 회심…’의 순서로 이루어진다고 사변하기보다는 나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중심으로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날 참가자들의 열띤 호응과 논란을 일으킨 권호덕 교수 발표의 전문을 싣는다.


서 론


인류의 시조가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인간은 그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종교성으로 인해 자기 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이런 사실은 그동안 인류의 역사는 물론이거니와 현재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인간들의 종교 활동이 뒷받침해 준다. 문제는 그런 자연인의 이런 시도가 자기 구원을 위해 성공을 거두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그 모든 종교들이 각기 고안해 낸 구원방법이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는데 도움을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죄 때문에 타고난 그대로는 영적인 인식기관에 문제가 생겨 진리를 바로 인식할 수 없음을 가르친다.

따라서 개혁신학은 특별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특별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방법을 성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열거함을 통해 교회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신학은 역사 속에서 여러 단계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만물의 원리와 그의 뜻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진리도 아닌 것을 진리로 착각하고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할 때 이데올로기적인 신학이 형성되는 것이다.

일종의 구원의 적용방법인 ‘구원의 서정’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문제도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죄인들에게 어떻게 적용하여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 신학 작업은 결국 바른 방법을 규명하는 데로 수렴되는 것이다. 어쩌면 구원론이라는 것은 죄인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영적인 처방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가르쳐진 ‘구원의 서정’은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1. 문제제기

지금 많은 교회에서 ‘구원의 서정’에 대해 가르칠 때 “소명, 중생, 회개, 믿음, 칭의, 입양, 성화, 견인, 영화”를 중심으로 가르친다. 이런 구원의 서정은 어디에서 유래할까?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사실 성경 어디에도 이런 내용을 뒷받침할 만한 성경 구절이 없다. 로마서 8:30은 “예정, 소명, 칭의, 영화”만을 다룬다.

칼빈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구절을 ‘구원의 서정’의 시각으로 주석하지 않았다.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비하 상태의 모습과 일치해야 하는 문제와 연관하여 이 구절을 해석한다. 즉 그는 소명, 칭의, 영화를 십자가에 참여하는 문제와 연관시킨다. John Murray는 전형적인 ‘구원의 서정’론의 옹호자이다.

그는 로마서 8:30절에 나오는 소명, 칭의, 영화 등에 몇 가지 요소를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부가해서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을 고안했다. “소명, 중생, 믿음과 회심, 칭의, 입양, 성화, 견인,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 영화” 그는 이 각각은 하나님의 활동과 은혜 속에서 그 고유의 특징적인 의미, 기능 그리고 목적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머레이에 의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구원 사역은 어떤 질서 안에서 일어난다고 한다.(ibid. 80) 머레이의 논지가 과연 성경과 종교 개혁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또 종교개혁신학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 방법이 인간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것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른 처방법이 가르쳐지고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매우 비판적이 될 것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개혁주의의 구원의 서정
orthosim | 조회 34 |추천 0 | 2006.04.06. 14:40

 

 

박형룡 박사는 『교의신학V-구원론』(서울:은성문화사,1972)에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오르도 살루치스) 9단계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텍스트 북으로 크게 의존하였던 루이스 벌코프는 양자를 독립적인 단계로 제시하지 않았고, 마지막 영화단계도 생략하고 있습니다. 박박사는 1950년대에 구원론을 저술한 H. Kuiper아 J. Murray등의 저술을 읽으므로서 벌코프의 구원 서정론을 약간 수정 보완하게되었습니다. 아래에서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구원서정론은 누군가 입시준비를 위해서 요약한 것입니다. 박은제 목사님이 제게 보내준 많은 자료중에 속해 있습니다. 후일에 시간을 내어 본격적인 정리를 해 보고자 하나 당분간 임시적으로 아래의 요약으로 대체합니다.


① 소명 :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구원을 신앙으로 수납하도록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다(롬 8 :30).

② 중생 : 사람안에 새 생명의 원소를 심고 영혼의 주관적 성향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요 3 :3-5)

③ 회심 : 죄인이 죄에서 더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요일 1 :9)

④ 신앙 :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혼의 운동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심적으로 신뢰함이다(막 1 :15).

⑤ 칭의 :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죄인에 관한 모든 율법적 요구가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롬 8 :30).

⑥ 수양 : 사람을 외계의 세속적 가족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의 가족 중에 전입시키는 행위(요 1 :12)

⑦ 성화 :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건지셔서 그의 전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닯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롬 8 :14).

⑧ 성도의 견인 : 택함을 받은 자들을 기어코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딤후 4 :18).

⑨ 영화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이다(롬 8 :30).

 

 

루  터

로 마 가 톨 릭

펠라기우스

1

준비단계

소 명

충족한 은혜(저항, 차동가능)

회개(죄인자력)

2

조 명

협력은혜(칭의준비) 하나님의 말씀접수. 죄악상태통찰 긍휼희망. 하나님사랑시작 죄의 증오. 계명순종결실 세례받을 욕구

순    종

3

회 심

 

4

중 생

 

5

신  앙

 

6

칭  의

 

7

신비적 연합

주입은혜(칭의의 은혜) 세례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온다.

 

8

갱  신

 

9

보  전

 

 

 

 

 

개혁파

알미니안파

칼빈

1

소  명

소명(순웅, 저항)

소명

2

중  생

회  개

신앙

3

회  심

신  앙

중생

4

신  앙

칭의(의의전가)

회심

5

칭  의

중  생

성화

6

수  양

성  화

칭의

7

성  화

견  인

예정

8

성도의 견인

 

부활

9

영  화

 

 

 

 

2. 소명이란 복음을 죄인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이다.

명사의 의미로는 καλειν, κλησι?, κλητο?, εκκλησια가 있다. 소명의 발령자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특히 성부이시다.

실물적 소명과 말씀의 소명으로 구분되며, 외소(external calling),와 내소(internal calling)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외적소명이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 제시하여 사죄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진실한 권고인데, 이 경우에 죄인은 응답을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소명이다. 그러나 이 소명에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다.

외적 소명의 요소로는 복음적 사실과 이념의 제시, 신앙과 회개로 그리스도를 받으라는 초청,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가 용서되며 구원에 이른다는 약속의 제시 등이 있다.

외적 소명의 특징으로는 외적 소명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다. 즉, 이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는 모두 아무 차별없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외적 소명은 성실한 소명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이 복음으로 죄인을 부르실 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진정으로 바라신다.

내적 소명이란 복음이 제시될 때, 죄인이 믿음으로 응답하는 경우로서, 이 소명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명이다. 외적 소명에서 전해진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내적 소명을 받은 죄인의 마음 속에서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내적 소명의 특징은 도덕적 설유의 방법으로 역사한다. 즉, 하나님은 권능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수용하도록 설득하신다.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역사한다. 즉, 인간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감화시킨다. 항상 한 목적지로 향하게 한다. 즉, 성령께서 피택자를 인도하여 확실하고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한다.


3. 중생에 대하여 약술하라.

 

중생의 정의 : 협의 - 죽은 영혼을 일깨워 새생명의 원리를 심어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광의 -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사람의 첫 번 응답. 즉 말씀에 응답하여 새생명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약1:18, 벧전1:23). 칼빈의 경우에는 회심과 성화의 전과정을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과정을 말한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일생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계속한다.

중생의 본질 :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즉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인간의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므로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

중생의 논리적 순서 : 말씀전파(외소) - 성령의 역사(새생명의 발생) - 유효적 소명 - 거룩.

중생의 필요성 :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과 평화하고 교제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영혼의 전 성향을 갱신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중생의 역사가 필요하다.

중생은 하나님 편의 단독 사역이다. 중생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하지만 말씀이 있어도 성령의 일깨우는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의 단독 역사이다.


4. 회심(convers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회심의 성경적 의미 - 국민적 회심(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니느웨 등), 넓은 의미의 피상적 회심 = 일시적 회심(자시 동안은 진정한 회심인 것 처럼 보이나, 허식적 회심에 불과), 좁은 의미의 진정한 회심(중생자가 자기의 의식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과 회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을 의미) = 반복 회심 등이 있다.

회심의 특징 : 회심의 특징은 구원과정의 한 부분이며, 회심은 재창조의 동작, 각성의식에서 회심하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음이며, 단번적인 변화, 돌연적 회심과 점진적 회심이 있다. 이는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의해서 일어난다.

회심의 정의 : 회심은 죄악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다. 구약의 개념으로는 ??? ‘후회하다’의 뜻으로서 계획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는 ‘떠났다가 돌아오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심의 구약적인 개념은 계획과 행동을 수반하는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약의 개념에서는 μετανοεω 는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며, επιστρηφω는 ‘방향을 돌려 되돌아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적인 개념에서 회심은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로 방향을 돌려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의 요소 : 知(생각의 변화로서 자신의 생활이 죄로 가득찬 생활이었음을 인식하는 것), 情(감정의 변화로서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한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 意(목적의 변화로서 죄에서 떠나 전격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의 회개의 개념 - 통회, 고명(고백), 보속이 있다.

통회 - 죄에 대해 진정한 애통과 비애를 느끼는 것

고백 -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신부에게 고백하는 것

보속 - 죄인의 행동의 회개로서 자신의 죄를 인내와 선행으로 속량하는 것

회심의 특징 : 회심은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회심은 인간의 의식생활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죄를 벗고 하나님을 향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은 좁은 의미로는 단회적이며, 넓은 의미로는 반복적이다.

회심의 창시자와 선행자는 하나님이지만 사람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한 인간의 협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회심은 회개의 복음, 구원에 필요하며, 사죄에 필요하다. 회개의 과실(열매)로서 성실한 자백 수복과 개선, 깨어 죄를 대적함, 하나님 사랑이 진정한 회개의 열매이다.


5. 신앙에 대하여 약술하라.

 

신앙(πιστι?)란 하나님의 진실성에 관한 확신이다.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중심으로 그에게 신뢰하는 것 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구원적 신앙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일으켜진 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신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다.

일반적 기초적 의미의 신앙 : 자아헌신, 의견보다 강함, 즉각적 확정, 증언에 기초하고 신뢰를 포함하는 확신을 의미한다.

종교적 구원적 신앙 : 신앙의 개념은 역사적 신앙, 일시적 신앙, 이적의 신앙, 진정한 구원적 신앙으로 구별된다.

신앙의 조성자 : 신앙의 조성자는 성령의 중생하게 하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으로, 성령의 증언으로 신앙이 조성된다.

신앙의 본질과 자리는 마음이다.

신앙의 성분 : 신앙은 지성적 성분, 감정적 성분, 의욕적 성분으로 구성된다.

다른 파들의 신앙관 : 로마 가톨릭의 신앙관 : 역사적 신앙과 구원적 신앙의 구별이 없다. 표명적 신앙과 묵종적 신앙, 비형성적 신앙과 형성적 신앙으로 구별한다. 알미니안주의 신앙관은 하나의 칭의하는 행위로 만든다. 불완전한 행위를 완전한 행위로 계정한다. 사람이 창시한다. 칭의의 원인과 근거이다. 자아 충족 경향.



6. 칭의에 대하여 약술하라.

 

칭의의 정의 :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이다.

칭의의 중요성 : 칭의가 미치는 영향은 죄인의 상태가 아닌 신분에 해당한다.

칭의의 성질 : 은혜성, 법정성, 선언성, 제정성, 즉각 완전 최종성.

칭의의 특징 : 1)죄책의 제거, 2)외계에서 단행, 3)단번에 단행, 4)성부의 선고

칭의의 구성과 구별 : 1)사죄 - 중요성, 포함성, 무차별성 2)영생권 3)능동적 혹은 객관적 칭의와 수동적 혹은 주관적 칭의로 구별된다.

칭의의 때와 관계 : 1)영원부터의 칭의 - 도덕폐기론자들은 죄인의 칭의가 영원에서 혹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단행되었다고 주장한다. A.Kuyper, Herman Hoeksema 등이 주장하고, H.Bavinck가 이에 반대하였다. 2)그리스도의 부활에서의 칭의 3)신앙으로 칭의 - 성경에 의한 신앙과 칭의의 관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칭의된다.

칭의의 근거 : 1)사람의 선이 아니다. 2)그리스도의 의다 3)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롬5:17-19)

칭의의 다른 견해들 : 로마 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한다.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강조한다. Schleiermacher는 우리 안에 구속의 시작의 주관적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Ritschl은 은혜로 죄인을 영접하여 자기와 교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신정통(Barth)주의는 칭의를 순간적 행위로 말하나, 오히려 칭의는 성화와 제휴하여 전 노정을 행진하는 것으로 보았다.

칭의 교리에 이의 : 1)행위에 의한 심판 2)은혜의 제외 3)불경건한 처사 4)방조에 인도한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칭의의 요소 : 소극적 요소 - 죄의 용서를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기초로 해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모든 죄책과 모든 형벌을 제거한다. 적극적 요소 - 자녀됨과 영생에의 자격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신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때, 그들은 자녀의 모든 법적 권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다. 그래서 영원한 기업과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보증받는다.


7. 수양(收養;Adopt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수양의 개념 : 사람을 외계의 세속적 가족으로부터 하나님의 자신의 가족 중에 전입시키는 행위이다.

수양의 절차와 자격의 함의 : 아들(子)격의 함의 - 1)하나님의 독생자 혹 맏아들 2)하나님의 총애받는 피조물 3)하나님의 파견하신 권세를 받은 재판장 4)신적 수양의 대상들로서의 사람들(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특정적으로는 영적으로 구속된 양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되는 자들)

양자의 기업 :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기업


8.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신약 명사 : 동사 ?γιαζω의 다양 의미, 거룩의 관념을 표현하는 형용사들, 성화와 성결을 표시하는 명사들

구약 관념 : 위엄적 거룩, 윤리적 거룩, 파생적 의미의 거룩.

성화의 정의 :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성화의 특징 : a.성화의 창시자는 인간의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으며, 또한 협력해야 한다. b.성화는 칭의와 달리, 법정적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다. c.성화는 오랜 기간의 과정이어서 현세에서는 결코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d.그러므로 성화는 죽을 때 완성된다.

성화의 성질 : 1)하나님의 초자연적 공작 2)신자들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공작 3)의식적 협력 4)거룩한 생활의 실제이다.

성화의 특징 : 1)옛사람과 새사람 2)온사람에 영향을 미친다. 3)현실적인 변화이다. 4)성장성 5)장구한 과정이다. 6)완성기는 죽음과 부활의 때

성화의 조성자와 방편 : 1)삼위 하나님, 특별히 성령이 조성자이시다. 2)신적 조성자 강조의 필요 3)성령에 전적 의뢰 4)성령 공작의 신비 방편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와 묵상, 섭리적 지도, 방편의 고집적 사용을 통해 성화된다.

완전론 :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현세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신자라도 그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결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백과 사죄기도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중생한 신자는 매일 그 속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한다. 중생함으로 죄는 그 지배력을 상실하였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와 말씀과 성령에 의지하여 죄와의 전쟁을 계속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날마다 닮아가야 한다.

성화와 율법 : 율법은 신자 생활의 규범이다. 율법에 의한 선행이 강조된다. 이는 강요없는 생활지도의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 요구된다. 율법은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감사 생활의 규칙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9.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

 

교리의 진술 :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그의 영에 의해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화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도 최종적으로도 타락할 수 없고, 그 상태에서 끝까지 확실히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 얻을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ⅩⅤⅠⅠ. 1)

견인의 정의 : 견인(끝까지 인내함)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이다.(요10:28-29, 롬11:29, 빌1:6, 살후3:3, 딤후1:12, 4:18)

추론적 증명 : 1)선택의 교리 2)구속언약의 교리 3)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대언의 효력 4)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5)마음에 성령과 말씀의 역사 6)구원의 확신

견인 교리의 이의 : 1)사람의 자유에 모순 2)나태와 방종에 인도 3)부도덕에 인도 4)성경에 위반 5)이의의 결과-견인 교리는 성도에게 큰 위안과 능력의 원천이 된다.


10. 영화에 대하여 약술하라.

구성과 시기 : 영화는 현세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에서이다. 죽음에서 영혼의 완전성화와 부활에서 신체의 영화가 이루어진다. 죽을 때 영혼의 성화가 완성되는데, 성령의 순간적 행동과 하나님이 구원의 조성자이기에 죽을 때 영혼의 성화가 완성된다. 또한 신체의 부활에서 구속이 완성되어 온사람의 최종 완성한 구속으로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영화된다. 영화의 시기는 개인별로 다른 때(성화의 완성)와 모든 성도들이 동시에(구속의 완성) 곧 죽음과 부활 때에 이루어 진다.

   

--------------------------------------------

 

이상웅 목사님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구원의 서정

개혁주의 교리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은 항상 신적 작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으로 부터 서술되지 않는 모든 구원의 서정에 대한 주장들은 거짓 교리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역사적 정통 교리는 항상 변함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신적 작정으로 부터 서술되어야 한다.

신적 작정의 교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교리도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구원의 서정은 신약 성경의 교리가 아니라 신구약 성경의 교리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에 신자들에게 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 신자들에게 해당한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이스라엘도 모두 신적 작정 가운데 유효적 부르심을 받아서 중생과 회심과 믿음과 칭의의 과정을 거쳐서 영화에 이르렀다.

구약 모든 선택받은 백성들은 신적 작정을 따라서 신약의 성도들과 동일한 구원의 과정을 따라서 영화로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 교리는 단지 신약의 교리가 아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포함하는 교리이다.

가장 먼저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신적 작정 가운데 은혜 언약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으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이 있다.

그리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된 자들에게는 유효적 부르심이 있다.

그리고 중생과 희심과 신앙과 칭의에 이르는 전 과정은 항상 논리적일뿐 시간의 순서는 아니다.

신자들의 구원은 시간의 순서를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시간이란 인류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한 방편일뿐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의 신적 작정을 따라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이 되는 것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의 선택이다.

인간 편에서는 공로는 전혀 없다.

다만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없지만 개혁 교리는 반율법주의를 거짓 교리로 단죄하기에 인간이 마땅히 해야할 당위법 조차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신자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마땅히 해아할 도리는 있다.

그것이 당위법이다.

신자의 공로로 행할 수 없으나 행하여야 하는 영원한 도덕법이 있다.

그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인간이 자기 의로 자력으로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타락한 인류는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위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있다.

중생한 신자들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결국 중생한 이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간다.

그 중생한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자들의 삶이 영원한 도덕법을 성취해가는 삶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순종이라는 과정이 요구된다.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 있는 신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영원한 도덕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중생한 신자들이 영원한 도덕법을 따라서 살아갈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다.

거기에 인간의 자리는 없다.

인간의 공로도 인간의 자기 의도 없다.

영원한 도덕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영화로움에 이르는 법으로서 십계명은 그것을 지켜가는 과정을 통하여서 영화로움에 이른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성화란 영화의 시작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화로움에 이르기 전까지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부단히 영화의 완성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선수와 같다.(갈 2:2)

그때에 사도 바울이 푯대로 삼은 영원한 도덕법이 십계명이다.

십계명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서 신자들에게 믿음을 통하여서 마음에 심기워주신 영원한 도덕법이다.

신자들은 십계명을 온전하게 지켜가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되어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부단히 신자들 안에 하나님의 계명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영역의 개념 보다 통치의 개념이 앞선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가시적 교회에 모여 있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때에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한 신자라는 허울을 뒤집어 쓰고 아무리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도 그곳이 결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원의 서정의 교리는 교회론과도 연결된다.

하나님의 교회란 중생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여서 세워진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나 가시적 교회가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방 종교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법을 잃어 버리고 철저하게 세속화 되어 버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라는 색채를 띄고 있는 서양 종교이다.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을 신의 대리자로 여기는 로마 카톨릭 교회는 비참하게도 하나님의 법을 상실하여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참된 구원의 교리는 참된 교회의 교리와 맞물려 있다.

참되게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다.

그렇게 참된 신자들이 없는 교회는 그야말로 복마전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서 사데 교회를 책망하셨을때에 그러한 교리가 드러났다. (계 3:1~6)

결국 참된 신자가 사라져 버린 시대가 아닌가 우려 스럽다.

로마 카톨릭 교회 처럼 참된 신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지금의 개신교 분파주의 교회들이다.

지금의 개신교는 종교 정서주의 만 남아서 예배시에 꽥꽥 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육신의 쾌락을 추구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나라의 계명에 순종해야하는 교리들이 가르쳐지지 않고 있는 듯 하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작정 가운데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서 그의 기업으로 예정된 신자들에게 구원이란 자신에게는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교회론적이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 기록한 증거들을 살펴 보면 알 수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4~12)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 / 존 머레이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오는 죄와의 확정적인 단절과 성령 안에서의 새 생명에 대한 강조는 죄가 점점 더 멸해지고 거룩함에의 일치가 점진적으로 획득되는 금욕과 성화 과정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서 6장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죄의 권능과 더러움으로부터의 결정적인 옮김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같은 서신에서 바울은 내주하는 로 인해 계속 갈등을 묘사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14)라고 스스로를 고발해야 했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7:23, 24), "내 자신이.....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로마서 6장에서도 우리는 죄의 잠식(蠶食)에 끊임없이 깨어 있을 필요를 함축하는 권면들을 거듭 듣는다.

 

신약 성경 기자 가운데서 사도 요한보다 더 신자의 성화의 확정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람은 없다. 요한의 용어들은 너무 강렬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가르침 또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명백한 사실들과 조화시키기에 아주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 3:9).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그런데 이와는 달리 요한은 같은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그는 신자가 죄 없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신자가 범죄할 때 신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그리고 요한은 신자의 삶에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는 측면이 있음을 말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신자 안에 여전히 내재하는 죄와 신자가 아직 정해진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세에서의 신자의 상태는 정적인 현상(status quo) 유지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진보의 상태 즉 성격상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진보의 상태라는 것을 보여 주는 풍부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금욕성화 양자를 포괄한다. 

 

금욕과 관련해서 신약 성경에 그 구절들이 등장하는 문맥으로 인해 특히 두드러지는 두 개의 구절이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 두 구절들은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과 그로 인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영역으로서의 이전이 강조되고 있는 문맥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더욱 도움이 된다. 로마서 6장은 이 확정적 성화를 강조하는데,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말이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8:13에서 바울은 신자들을 향해 말하면서 몸의 행실을 죽이는 데 신자들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밝힌다. 이것은 그가 이미 죄의 몸이 멸하여졌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주목되는 것이다(롬 6:6). 이 활동은 성령의 힘과 은혜 안에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영으로써'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들이 참여해야 하는 활동이며, 죽이는 것과 다름없는 격렬한 활동이다. 골로새서 3:5의 문맥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한 죄에 대한 단번의 죽음이라는 같은 사고를 포함하고 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라는 권면은 선행하는 범주적 명제들로부터 나온 권면이다. 로마서 8:13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서 신자의 활동이 요구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골로새서 2:20; 3:3에 언급된 죄에 대한 확정적인 죽음에도 불구하고, 죄의 사욕과 더러움으로부터 신자가 해방되지 않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죄들을 죽이는 도살장의 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확정적인 죽음을 말할 때 쓰였던 어법이 수동의 어법인 것같이-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너희는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다(롬 6:2; 골 2:20; 롬 7:4)-이제 그 용어들은 신자 자신 편에서의 활동의 용어이다. 고린도후서 7:1의 권면도 같은 취지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여기의 주장은 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과 영의 더러움이 있으므로 우리 자신을 그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욕과 정화(淨化)의 과정은 신자에게 여전히 붙어 있는 죄 및 더러움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의 목표는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의 제거다. 이러한 죄 됨의 완전한 근절(根絶)은 신자의 목적 즉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의 일치와 양립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거룩하고 흠 없고 점 없고, 죄인들과 구별되었는데, 그들은 그를 닮아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형상과도 일치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리고 요한도 아버지에 대해 말한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우리는 아버지를 닮을 것이다. 요한이 이 소망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가 곧장 우리의 죄 됨과 관계가 있는 이 소망의 의미의 주의를 집중시켜야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곧장 덧붙인다. "주(아버지)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근절과 이것에 기여하는 금욕의 요구는 구원을 누리는 것과 그 구원이 향해 있는 목표의 성격에 내재해 있다.

 

성화의 과정은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는 것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근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는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7:1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라는 말을 덧붙여야 했던 것은 뭔가 더 적극적인 측면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완전의 총합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완전의 농축으로서의 거룩함에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점진적인 변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용어는 다음 두 경우에서 바울에 의해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예수님의 변형과 관련하여 사용된 것도 바로 이 용어다(마 17:2; 막 9:3).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된 전 구속 과정의 목표는 형제들 중에서 처음으로 난 그리스도의 형상에의 일치이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3:18보다 점진적 성화의 방법을 더 정확히 규정하는 성경 구절은 없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주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는 것이든, 두 가지 모두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요한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 영광을 보기 때문이요, 보면서 점점 더 변화되어 그를 닮아가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에(참고. 히 1:3), 비길 데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고정되어, 우리는 점점 더 한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의 특성들을 띠게 되고, 마침내는 온전히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관심과 의욕을 갖고 몰두하는 것을 닮는 것은 심리학의 법칙이고, 이 경우에도 그 법칙은 적용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자연적 요소들은 이 변화의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변화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이 표현을 '영이신 주로 말미암음이니라'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성령에 대한 암시가 배제되지 않으며, 성령의 깨우는 권능과 효과적 사역을 새 언약의 탁월성을 특징 짓는 일례로 늘고 있는 6절과 8절로 거슬러 올라 간다. 여기서 바울이 '영이신 주'를 말하고 있다면, 그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구속 과정의 목표를 완성하려는 목적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 자신의 말씀을 상기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 14).

 

적극적 측면에서의 점진성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제시된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기도한다(빌 1:9).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말씀의 순전한 젖으로 말미암아 구원 즉 종말에 완성되고 계시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 가라고 말한다(벧전 2:2; 참고. 1:5). 그는 또한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 주 곧 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에베소서 4:12-16은 특히 에베소서 전체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고찰할 때 이 점에서 가장 도움이 된다. 여기서는 성장 즉 지식과 사랑으로 구체화된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1절에 규정된 직분들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향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13, 14절). 신자들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절)는 것도 동일한 권면이다.

 

그러므로 성장의 법칙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에 적용된다. 하나님은 과정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에 이 원칙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쓸모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어른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기괴한 일일 것이다. 어른이 어린 아이처럼 행동한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서 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행위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스도 안에는 어린 아이가 있으며, 청년도 있고, 노인도 있다. 그런데 성장의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기괴하고 비극적인 일들이 교회의 증거를 얼마나 손상시켜 왔던가!

 

이 과정은 특히 지식사랑으로 구현된다. 진리에 관한 지식과 이해로서의 지식과 이해력의 개화(참고, 엡 1:17, 18; 4:13-15; 벧후 3:18)에 대한 강조는 이러한 것들이 증진됨에 따라 사랑, 희락, 화평 등 성령의 열매가 증진될 수 있다는 교훈을 강화시켜 준다. 이 둘의 상보성(相補性)은 그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분변함 속에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빌립보 신자들을 위한 바울의 권고에 예시되어 있다. 요한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러나 사랑은 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증진되고 풍성해져야 한다(참고. 빌 1:9; 살전 3:12; 4:10).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분, 사랑 자체이신 분의 영광을 점점 더 알게 됨으로써 자라간다.

 

이러한 진보는 개인뿐만 아니라 통일성과 연대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도 연관되어 있다. 실제로 개인의 성장은 성령과의 교제와 마찬가지로 교회와의 교제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신자들은 결코 독립된 단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았다(엡 1:4). 그들의 구속이 성취되었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후 5:14, 15; 엡1:7). 구속의 적용에서 그들은 그리소도와의 교제로 인도된다(고전 1:9). 그리고 성화 자체도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온전하고 전적으로 흠 없고 점 없이 나타날 때에야 비로서 개인에게 실현되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온 몸의 성화를 계발하고 진전시킬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책임, 특권, 호기(好期)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들이 명백해진다.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성화에 무관심하고 은혜, 사랑, 믿음, 지식, 순종, 거룩함 안에서의 그들의 성장을 촉진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그 자신의 성화를 방해한다. (1)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 부족 자체가 영적 성장의 밑동을 갉아먹는 악덕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안에서의 성령의 열매에 관해서 갖지 않거나 깨어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데 거룩한 열심으로 불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모든 단점과 죄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며,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인 사람들의 결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식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그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행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가 하지 않는 만큼 다른 사람들을 메마르게 하며, 이러한 메마름은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지지, 격려, 가르침, 교화, 권면을 충분하게 그에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의 교제 안에서의 상호 작용과 상호 소통이 하나님의 백성의 점진적 성화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측면들을 보게 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그리스도의 몸의 연대성 안에서의 우리의 상호 의존의 진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 성화에만 몰두하는 것의 위험성과 모순됨을 밝혀 준다. 다음과 같은 사도의 말은 독립성과 초연성의 반대되는 덕목을 얼마나 웅변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참고. 롬 12:4 이하; 고전 12:12 이하; 골 2:19). 

 

성장에 있어서의 이러한 교제는 방금 인용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라는 표현에 유의할 것을 요구한다. 이 표현은 성화 과정의 목표에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 자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충만의 나눠 줌과 받음보다 이 과정의 특징을 더 잘 나타내 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1:19부터 살펴보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이 본문은 존재론적으로 해석되어 왔기 때문에, '모든 충만'은 영원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충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을 논박하고, 경륜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적이고 중보적인 정체성 안에 있는 충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18절이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말하면서 특히 메시야로서의 경륜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이라는 표현은 존재론적 명칭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된 명칭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의 영원한 성자의 신분과 신성에 고유한 탁월성이 아니라 이 역사적 사건에 의해 그에게 발생한 탁월성이며, 나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는 계획된 결과라고 분명히 진술된 탁월성이다.

(3) 19절은 탁월성의 획득의 인과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탁월성이 그에게 속하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본질적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행사할 만한 자격이 없었다면, 즉 신성의 충만이 본질적으로 그의 것이지 않았다면, 그러한 탁월성은 그에게 부과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진정 사실이다. 그러나 19절이 그 탁월성을 만들어 내는 수여(授與)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은 경륜에 대한 문맥에 있어서의 강조와 더욱 부합한다.

(4) 만약 19절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전혀 만들 필요가 없는 중대한 신학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성자 안에 거하는 것은 성부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성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그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골로새서 1:19이 말하는 충만은 구원의 경륜 안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에 부여된 충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골로새서 2:9은 이러한 결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2:9은 영원한 성자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본질적으로 속해 있는 신성의 충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의 주된 의도는 이 충만이 그의 성육신된 상태 안에 거하며, 육신이 말씀으로서의 그의 육체적 정체성으로 인해 삭감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신성의 충만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은 그가 메시야 직분의 수행으로 인해 얻게 될 충만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충만은 생명, 은혜, 진리, 지혜, 지식, 선함, 자비, 의, 권능의 충만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논란이 있어 왔던 바울의 본문을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성화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설명이다.

이제 에베소서 1:23로 돌아가 보자.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첫번째 문제는 여기서 '충만케 하다'로 번역된 용어의 의미다. 그것은 능동태 또는 수동태 중 어느 것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수동태로 해석되어야 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가 충만케 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은 충만케 된다는 개념을 강조할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그가 온전히 충만케 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렇다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그에게 적용된 충만이 가리키는 것으로 계속 충만케 된다는 것이 된다. 이 견해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는 것이 하나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충만은 그리스도 안에 영속적으로 거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엡 4:10). 이것은 최소한 나눠 주심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능동적인 의미를 택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물 안에서 만물'은 우주적 관련성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이다(엡 1:22). 그리고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엡 4:10). 그러나 '만물 안에서 만물'은 단지 교회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는 교회를 온전히 충만케 하신다. 문제가 되고 있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하기란 어려운 것 같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충만'의 선행사는 무엇인가? 22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교회인가?

그리스도가 선행사라고 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 거의 유지될 수 없는 견해다.

(1) 구문론적으로, '충만'의 선행사를 22절로 소급해 찾는 것은 조악하다. 그러므로 다른 견해들이 극복되지 않는 난점을 갖기 전에는 이러한 구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2) 그리스도 자신이 '충만'이라면, 이어지는 문맥을 보아 그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 인식되고 있는 또 다른 위격의 충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셔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경의 관념, 특히 바울의 관념에 이질적인 개념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성부의 충만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충만이 거한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또 다른 위격의 충만으로 얘기되지는 않는다.

(3) 이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그 위격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하지만 바울에 따르면, '만물 안에서 만물'이 우주를 가리키든지 교회를 가리키든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같은 서신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명백히 표현되어 있다(엡 4:10). 그러므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방어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특히 두번째와 세번째의 이유로 인해, 문제가 되고 있는 해석은 기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대안은 교회를 '충만'의 선행사로 보는 것이다. '그의 몸 된 교회'가 밀접하게 선행한다는 사실은 이것을 자연스러운 구성이 되게 한다. 그리고 강력한 증거가 다른 해석을 요구할 때까지는 이것을 논쟁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충만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어떻게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교회가 그리스도를 충만케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 특히 바울의 가르침에 반한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받는다(요 1:16).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골 1:19; 2:9). 그리고 교회는 때를 따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엡 4:13). 하지만 충만은 온전케 하는 것 즉 보충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참고. 마 9:16; 막 2:21). 경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자격과 직분은 결코 그와 연합된 자들과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다. 몸과 분리된 머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는 항상 서로에 대해 보완적이다.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은 이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충만'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통해 보충 관념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적절하다.

 

'충만'은 또한 어떤 것을 저장해 두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서신에서 이 의미는 두 번 나타난다(3:19; 4:13). 그리고 이 두 경우에 유일하게 적절한 의미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라는 요한복음 1:16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4:13) 된다고 인식될 때, 그 의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이 그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를 때, 이 상태는 그리스도가 구현한 은혜, 덕목, 진리, 지혜, 의로움,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상태다. 이러한 전달은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신 자의 형상을 닮아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1:23의 바울의 가르침의 유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분여(分與)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충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회는, 영속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이 동일한 전달의 목적과 실현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는 경륜에 의해서 그 안에 거하는 의로움, 지혜, 지식, 권능, 은혜, 선함, 인내, 사랑, 진리, 자비의 충만의 수혜자다. 이 충만을 신자들은 분리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통일성과 교제 안에서 받는다.

 

그러므로 점진적 성화가 수반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외적으로 모방하는 동화(同化)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충만의 분여, 우리가 지상의 삶 속에서 익숙해 있는 유기체나 생물보다 무한히 높은 차원에서 살아가고 행동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통하여 흘러 나오는 분여에 의해서 획득된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과 특권에 적용될 때, 그것은 점진적 성화에서 기본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연합과 교제 또 그로부터의 전달의 의미들을 점점 더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우리들의 필요, 그리스도 예수 안의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에서 연유하는 절박한 요구, 그의 몸의 지체가 됨으로써 생기는 요구, 그리스도와 교회를 섬기는 데서 행해야 할 직분 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으로부터 제공된다. 성화의 목표가 수반하는 모든 요구의 실행에 있어서 그의 은혜의 총족성을 의심하는 것은 모든 충만이 거하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맏아들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 즉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궁극적인 성취의 소망과 자신감을 생기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충만뿐이다.

 

'존 머레이 조직신학'에서 발췌(307-318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리스도와의 연합 / 리챠드 개핀

 

바울신학의 중심에 우리의 요약을 통하여,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과 4절에서는 그 연합이 명백하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문제는 바울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제일 중요한" 문제로 꼽힐 수 있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다.

 

간략한 윤곽을 제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관련한 바울의 이해는 구약에서 비롯된 것이며, 무엇보다 더 바울이 언약신학자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하나님 자신을 자기 백성의 "분깃"이라고 묘사할 정도로 가장 명쾌한 신학이다.(시73:26; 119:57; 렘10:16). 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분깃"이라는 언급도 나타난다(신32:9). 이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사야 53장 12절에 나타나 있는 주의 기름부음 받은 종에 대한 것이다. 다른 어떤 설명보다도 5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가 "우리의 불법을 대신하여 상함을 입으셨고, 우리의 불의를 대신하여 부서지신"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고난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님께서 "내가 그에게 많은 사람들을 위한 분깃을 할당할 것이라"고 언급하신다.

 

이 언약적인 연합과 유사한 실현, 즉 삼위 하나님과 그의 백성으로서 교회 사이의 순환적인 소유가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중심에로 귀착한다. 앞으로 더 자세히 논의할 기회가 있겠지만, 바울에게서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핵심으로서 구원론적인 현실, 즉 구원의 중심적인 진리를 형성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이 표현은 바울이나, 혹은 신약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반면에, 여러 곳에서 표현된 것을 미루어 볼 때, 그 실재는 "함께"라는 전치사를 포함하여, 약간 다른 변화와 함께 "주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전치사구의 용례에서 두드러진다. 그 의미에 대한 학문적인 토론은 "안에"라는 전치사구의 힘에 집중되었으며, 장소나 혹은 분위기를 전달하는 순전히 도구적인 이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심지어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라는 생각까지도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실상, 바울의 용례는 다양하고, 이 표현의 전반적인 의미의 폭은 아담과 둘째 혹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를 통하여 형성된다(롬5:12-19; 고전15:21-22, 45, 47). 각자가 행한 것은 결정적인 것이어서, 사실상 그들의 대표로서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나, 그리고 그들의 죄가 마땅히 초래하는 정당한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자로서 그들의 대리자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각각 죽음과 삶의 결정을 가져오는 것이다(롬3:25-26). 이와 관련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그와 함께"와 같은 표현은 상호 연관된 것이며,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된 것이다. 전자는 단지 후자가 언급하는 연합 안에서만 기능한다. 동시에 "우리를 대신하여"는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이 연합 안에는 되돌릴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 사실은 고린도전서 1장 13절의 "바울이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라는 수사적인 질문을 통하여 두드러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 연합 혹은 연대성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며, 사실상 영원에서부터 영원까지를 확장되는 것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미래의 영광에 걸쳐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연합의 의미를 토론할 때, 이것은 본문의 낯선 것을 억지로 끼어 넣는 것이거나, 혹은 불필요한 조직화의 산물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삼중의 범주적인 구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① 예정(엡1:4)과도 관계되며, ②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단번에 성취된 구속사적인 사건으로서 과거적인 연합과도 관계되고, 혹은 ③ 현재적인 일로서 구원의 현재적인 소유 내지는 적용과 연관된 연합으로서 실존적인 차원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다.

 

꼭 기억해야만 하는 이러한 구별들은 서로 다른 연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일한 연합의 서로 다른 측면과 차원을 지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 차원들 각각을 인식하되 그들 중의 하나를 거절하거나, 혹은 그들 사이의 구별을 거절함으로써 그것들을 무차별적으로 동의어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와 같은 구별을 위한 필요는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인 현실적인 연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교훈적인 예들로 인하여 잘 묘사될 수 있다.

 

로마서 16장 7절에서 바울은 "나에 앞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혹은 "내가 있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자서전적으로,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있는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과 후를 예리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교훈의 전반적인 구조 안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로 알고 있으며(엡1: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때에 "그분과 함께" 있었던 자로서 자신을 묵상하고 있다(갈4: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 기간 동안 그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가 있었고, 따라서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복수형으로 인격화되고 있는 "다른 이들처럼 진노의 자녀"였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질문, 곧 구원의 서정과 관련한 질문이 등장하는 것이다. 진노에서부터 은혜에로, 그리스도밖에 있는 진노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로 넘어서는 이 전이(轉移)는 무엇이 일으키는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 질문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물음으로서, 그 답변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사로잡을 것이다.

 

이제 특히 현재적 연합, 구원의 현실적인 적용 혹은 적용 안에서의 연합, 그리고 그 연합의 구원 서정적인 측면에 집중하게 될 때, 여러 가지 국면이 지적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예정과 관련한, 구속사적인 연합과 관련한, 그리고 대표적이며 법률적인 연합과 관련한 것만큼 이것은 또한 신비적인 연합인 것이다. 바울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유비를 사용하여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처럼, 이것은 "큰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엡5:32). 이 유비는 확실히 깊고 친밀한 연합을 지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한 생각을 분명하게 견지한다. 그런 친밀함이 공상한 것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인격적인 구별을 제거하거나, 혹은 무디게 하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인격적인 정체성은 유지된다. "신비적"인 연합은 인격적인 본래모습(integrity)을 지워버리거나 혹은 경감시키지 않는다. 현재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대표자로서 그리고 대리자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유지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가장 괄목할 만한 증거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롬8:34)의 현재적 중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구속의 적용에 있어서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연합, 즉 칭의와 성화 사이의 차이가 애매하게 적당히 처리되어서는 안 되고, 혹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사실상 타협되고 만다는 이해할 만하고 또한 적절한 그런 관점은 바울의 윤곽이 보여주는 통합적인 연합을 상실하고 있다. 구별할 수 있지만 그러나 분리할 수는 없는 따라서 법적이고 갱신적인 측면이 공존하는 단지 하나의 연합만이 있다.

 

현재적 연합은 또한 영적이다. 이것이 비물질적이며 관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내주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연합과 관련한 독특성이다. 이것이 이 연합과 관련한 신비적인 면을 가능하게 하며, 이 연합을 다른 종류의 연합과 혼동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즉 성령께서 일으키신 영적인 현실로서 이 연합은 삼위일체의 연합과 같은 존재론적인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신인양성과 같은 위격적인 연합도 아니며, 인간의 인격 내의 육체와 영혼의 상관적 관계를 상정하는 심인적인 연합도 아니며, 남편과 아내 사이의 육체적인 연합도 아니며, 열정과 목적 및 이해와 관련된 지적이고 도덕적인 연합도 아닌 것이다.

 

영적인 연합은 "그리스도"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셔서 이 연합의 배후에 계신 "성령" 사이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이 바울의 근본적인 생각이며, 이것이 무엇을 함의하는 것인지는 나중에 또 생각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의 사실만을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때문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즉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형되었으며, 현재 성령을 완전하게 소유하심으로써 "생명-주시는 성령이 되셨고", 그 결과로서 현재 "주 곧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고전15:45; 고후3:17). 위격적인 구별을 지워버리지 않는 기능적인 동일시로서 부활의 생명을 주는 행동에 있어서(고전15) 그리고 종말론적인 자유를 주는 행동에 있어서(고후3) 성령과 그리스도가 하나임을 보여주며, 그 결과로서 교회의 삶과 신자들의 내면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사실상 분리 불가한 하나인 것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9절과 10절에서 "여러분들이 성령 안에", "성령이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여러분 혹은 "그리스도의 소유된" 여러분,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은 모두 하나의 연합을 묘사하는 분리할 수 없는 국면인 것이다. 비슷하게, 에베소서 3장 16절과 17절에도 "여러분의 속사람에 그의 영을 가진" 자는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자라는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영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성령의 행동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하며, 비성경적인 관념론이나 비물질적인 본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즉 영적인 연합으로서 이 현재적인 연합은 순환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다. 환언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며, 또한 교회를 위한 "영광의 소망"이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골1:27). 그러므로 그런 연합은 본질상 살아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생명 그 자체이다.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여러분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취었습니다"(골3:4).

 

마지막으로 현재적인 연합은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신자들을 위하여 영원히 의도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영광에서 도달하게 될 종말론적인 완성에서 반드시 성취된다(롬8:17; 고전15:20, 23).

 

요컨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과 현재 그의 죽으심과 부활 덕택에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공유하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연합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바울의 구원론의 중심을 차지한다.

 

 

리챠드 개핀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에서, 69-77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5부. 그리스도와의 연합
둥지 2012.04.14 10:38 http://blog.daum.net/7gnak/15717996

 

 

5.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해하기 위해 언약을 알아야 한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예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부른 것이다.하나님과 아담의 교제는 언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담을 만드시고 정기적인 교제를 하신 것은 언약을 전제로 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관계는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다 라는 특별한 관계이다. 이 언약적 관계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즉 구원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사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 특별한 관계란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언약적 관계에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곧 구원이다. 구원이란 사건인 동시에 사건보다 선행하는 것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는 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나도 하나님을 알고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나를 자기의 자녀라 부르는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바로 이 특별한 관계에 들어갈 대상으로 우리를 예정해 주셨다. 그리고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없다면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다 무한자와 유한자가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것이다 어떻게 맺는가?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는 자녀로 부르고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대화하고 느끼고 그 친밀한 관계속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자와 유한자가 사이의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한계를 뛰어 넘을수 있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인격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그 채널로서 하니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독교의 종교는 없다. 그것이 없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와도 우리를 위해 죽었을 찌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은혜도 알고 감사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줄도 알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땅에 기어다니는 구더기에게 미분 적분방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떠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다. 우주를 아는 사람만이 우주가 광대하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 우리를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 언약적인 관계는 특별한 관계다. 이것은 전폭적인 헌신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우리는 그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기 원해서 부르신 그들에게 은사를, 언약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언약적 관계로 만드신 것이다. 구원은 이런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도 우리를 예정하신 대로 언약적 관계로 들어오시게 하는 관계다. 하나님의 형상을 아담에게 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신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3장38절에서 아담을 사람의 조상으로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다.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선택된 사람들이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이 언약의 징표다. 그 사람이 언약에 머무는지 머무르지 않는지 가리기 위한 시험지다. 그것을 따먹지 않은 한 그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 있음을 그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세상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언약적 관계가 파괴되고 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항상 부르신 다음에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람 부르시고 언약을 세우시고 이삭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야곱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계속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모세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셨다. 나중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을 파괴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너희들을 회복시키신다 하셨다. 예수님도 유월절 전날 밤 마지막 식사 때 이것은 나의 피로 살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라고 하셨다. 우리가 지금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룻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룻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있는 언약 안에 들어오는 신앙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올 때 그를 하나님이 복되게 하셨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언약에 들어갈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게 하는 사역이다.


고전 15장 21~22절, 롬 5장 12절~17절 구원에 관한 언약적 배경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아담을 대조하는 것이다. 구원을 이해하는 도표가 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역사에 존재하였던 인물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다. 구원의 원리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언약의 머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는 아담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미쳐진다는 대표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아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아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말미암는 모든 인간의 후손들이 아담처럼 범죄한 자로 아담처럼 범죄하고 아담처럼 죽는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죽는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죽음이다. 언약을 깨뜨린 자가 겪는 결과이다. 그래서 아담은 결국 자기 자신의 한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죄를 만든 사람은 아담 한 사람이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죄를 범했다. 행위로 죄인된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것이다. 내가 언약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같은 원리로 모든 사람이 의로움에 이른다는 것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새 언약에 들어가는 수단이 무엇인가?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마찬가지로 믿는자가 그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죄인 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케 하므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적 출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인 출생은 육체로 말미암아 영적 출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로 얻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성령의 아버지 삼위일체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으로써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언약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언약에 참여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 언약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믿음으로 참여한다. 그 믿음이 성령의 중생케 하심을 일으키신다.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기는 한데, 원인과 결과식으로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연쇄적인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10장~16장에 보면 언약적 모델로 되어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원의 경험을 원인과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다. 구원의 서정을 언약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루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성도들을 언약으로 한대 묶는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칭의와 성화처럼 구원의 경험중의 하나가 아니다. 구원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라고 한다. 그리스도 연합안에는 모든 구원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출발한다. 구원의 적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적용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엡5장 30~31절 “우리는 그의 몸의 한 지체다...”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되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몸이 성전 이라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연합 때문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한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언약적 관계이다. 그것이 곧 교회와 그리스도와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공동운명체이다. 교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힘은 바로 성령으로 부터이다. 언약적 관계를 깨버리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깨어 버리면 한 몸 한 지체가 될 수 없다. 약함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결국 언약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하고 육체를 죽이고 성령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즉 죄를 죽이고 성령께 순종하게 하는 이유는 언약 안에 머무르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목적은 죄를 소멸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소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신부로 그와 연합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이 일반 세상윤리와 다른 것이다. 죄의 소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순결한 신부로 언약의 동반자로 그와 연합하기위해 죄의 소멸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없고 그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구원의 경험도 결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안된다면 구원의 경험이 없다. 칭의 회심도 없고, 믿음도 없고 회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죄이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이 죄에 끌려가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악한 양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죄의 확신을 주시고 우리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케 하신다. 우리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것도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해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언약의 동반자로서 그리스도의 연합에 머무르지 못한다. 성령의 사역은 외적인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본질적인 그리스도의 형상 만든 요소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명령인 동시에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 연합적 힌트가 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짐승 머리 위에 안수하고 그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물로 드린다. 이럴 때 안수할 때 그 대상인 짐승과 제사를 드리는 제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짐승은 그 죄를 지은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서 그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의 인격적인 개체성을 믿는 믿음 때문에 불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신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죄도 언약으로 사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듯이 이것은 정해놓으신 질서이다.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되고 언약으로 죄사함 받는다. 다른 것으로 절대 죄시힘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 동물제사가 많이 행해졌던 것은 언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다. 그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다. 우리를 위한 언약에서 대신하신 죽음이다. 실제로 나의 죄가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다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가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그 외에는 죄가 해결되는 방법이 없다.


이사야 53장 4~6절, 이사야 53장 11~12절에서 고난 받는 종의 기사가 나온다. 고난 받는 종의 고통은 그 고난 받는 종에게 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이다. 채찍을 맞고 질고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수욕당하고 버림당하고 결국 죽는 그 모든 그의 고통은 그가 고난 받는 종과 붙어있는 모든 사람의 위한 고난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고통 받을 때 언약적으로 내가, 그와 함께 고난을 다 받았고 그가 장사되어 죽을 때 내가, 언약적으로 그와 함께 죽고 그가 부활할 때 내가, 함께 부활하여 산바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마25장40절“작은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identify) 한다. 언약적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가장 작은 자와 억울한 자와 버림 받은 자와 자기와 동일시한다. 구제하는 것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잊혀지지 아니하고 소멸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언약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다.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헌금한 것이 다른 사람이 오용한다 할지라도 내가 바친 것이 오용된다 할지라도, 바쳐진 것이 무효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받쳐진 것이다. 헌금할 때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 오직 언약적 하나님만 생각해야 한다. 요15장에서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는 한 구원의 경험은 모두 내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모두 내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이 중요한 것이다.


(3강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영원전에 예정하시고 작정하신대로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기를 쉬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계속하게 하옵소서. 우리속에 하나님의 이 사랑이 붙들린 바 된 간절한 심령을 주사 하나님의 종되기를 마음 또한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언약에 동참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우리 것으로 받았사오니, 우리가 복받은 사람이요 정말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세상의 재물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모하게 하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날마다 붙잡아 주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믿음의 기초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양심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이어서 coming soon.... 6부. 구원과 언약의 관계 편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칭의론

 

2016. 6. 22. 신원균 박사(한마음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

 

 

서 론

 

근래에 전통적 칭의론인 법정적 칭의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다양한 칭의론들은 한국교회가 100년 이상을 지켜온 성경적 칭의론에 심각한 도전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법정적 칭의론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새관점 학파의 선교적 칭의론도 문제지만 전통적 칭의론을 일부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새관점 학파의 칭의론을 수용하려는 김세윤 박사의 관계적 칭의론도 문제가 있다. 특히 최근에 와서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을 전통적 입장에서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는 김영한 박사의 중도적 칭의론입장도 큰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들의 칭의론에 대한 공통된 접근은 전통적 칭의론이 지나치게 하나님의 중심적 입장에서 다루기 때문에 인간의 성화적 책임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이제는 칭의와 성화가 융합된 형태, 즉 성화를 토대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칭의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로마 가톨릭이 칭의와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여 성화적 칭의를 주장한 의화교리의 변형이며, 또한 알미니안주의가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신인협력적 칭의론을 제시하며 저항할 수 있는 은혜은혜로부터 타락 가능성을 주장한 것의 변형일 뿐이다.

개혁교회의 전통적 칭의론은 이와 같은 인간중심적 칭의론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적 구원의 원리로 법정적 칭의”, “선언적 칭의”, “확정적 칭의”, “오직 은혜적 칭의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과 은혜에 기초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에 의한 칭의론을 확립했다. 또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되 분리시키지 않고 성화의 원인과 기초로써 칭의와 칭의의 열매와 증거로써 성화의 관계를 체계화시켰다.

이런 구원의 원리가 도르트 신조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할 따름이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라고 고백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신적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33)라고 표현되었다. 이 고백들은 우리의 칭의와 구원이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총에 의한 선택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임을 강조해 주었다. 이처럼 개혁주의 칭의론은 철저하게 예정론 안에서 시작하고 다루어진다. 칭의론을 포함한 구원론 전체를 예정론 안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방식이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구원론의 원리이다.

따라서 근래에 등장하는 성화중심적 칭의론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서는 칭의를 포함하여 구원론 전체를 인간 중심으로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다루며, 특히 신적작정에 기초한 예정론 안에서 칭의론을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과 칭의론의 특징을 좀 더 세말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본 론

 

1. ()개혁파 신학의 구원론 특징

 

1) 로마 가톨릭의 견해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구원의 모든 과정과 결정을 교회의 주최가 되는 교황과 신부들이 주도하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론 자체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이해하는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제시한다. 이들은 어린 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주입 은혜(gratia infusa)을 통해서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서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 분류는 크게 충족 은혜와 협력 은혜로 나뉠 수 있다.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의 심령과 삶에서의 구속 사역의 주관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편에서 행해지는 것보다는 인간 편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형태로 구원의 서정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HollatzPhilippi의 분류에 의하면 그 순서는 소명 조명 회심 중생 신앙 칭의 신비적 연합 갱신 보전으로 나누어진다.

 

3) 알미니안파의 견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외면적으로는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부수적이다. 이들에 대한 입장은 도르트 신조 잘못된 3-4교리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은혜와 자유 의지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데, 회심의 과정을 볼 때 은혜는 자유 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작용하여 결정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 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의 도르트 신조 내용에서 보듯이 이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기회의 이용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완전한 영적 복과 구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충족한 은혜를 베푸신다고 본다. 결국 알미니안주의 입장은 은혜를 말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결정적 주체가 된다.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의 순서를 소명 회개 신앙 의로 전가 중생 성화 견인으로 말한다.

 

4) 웨슬리안의 견해

 

웨슬리적 혹은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자들은 17세기의 알미니우스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론 기초는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력설을 토대로 한다. 다만 원래의 알미니안주의보다는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많이 수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논리적 구성면에서는 알미니안파 보다 더 비논리적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의 특징은 점진적인 성화와 발전에 있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점진적인 성장에 대한 개념은 인간 의지에 의한 순간적인 요소와 결합된다. 웨슬리의 강조점은 선행적 은혜를 말하지만 이 은혜는 언제나 인간 의지의 결단과 성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구원의 서정을 그의 설교, “성경적 구원의 방법에서 선행 은혜의 역사 칭의 전의 회개 칭의와 죄의 용서 신생 혹 중생 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 완전 성화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는 선행 은총 회개(깨닫는 은총) 칭의 성결의 순서로 설명하였다.

 

4) ()개혁파 신학의 구원의 서정 특징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비개혁파 신학은 알미니안주의의 견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구원론 순서에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회심의 기원과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 가에 대한 사실로 간명하게 드러나며, 또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는 대신 인간의 의지를 최종 결정적 자리에 전제시키는 데서 나타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인간론 중심적으로 치우치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약화시켰다. 김길성 교수는 이런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특히, ()항력적 은혜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속이 인간의 신앙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부정한다.”

 

 

2. 개혁파 구원론의 독특성

 

1)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예정론에 기초한 구원론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고백하는 예정론적 구원론의 형식은 전 개혁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구원론은 초교파적인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신적 예정론은 빼고 단순히 인간의 회개와 신앙만 강조하는 인간중심적 구원론으로 기울어 졌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칭의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론 전체를 예정론 안에서 다루는 신조의 독특한 구원론 형식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초교파적인 복음주의나 알미니안주의 계통에서는 구원론을 인간론을 중심으로 다루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신론을 중심으로 다룬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독자적 사역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이해할 때도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시는가가 강조점이다라는 벌콥의 지적처럼 인간의 사역보다 하나님의 사역이 더욱 강조되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드러내려고 했다.

특히 구원론을 신론 중심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인간론 중심적으로 다루려는 알미니안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처럼 기독론 중심적이거나 신비주의처럼 성령론 중심적으로 다루는 방식들과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 즉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인간론이나 기독론이나 성령론을 중심으로 구원론을 다루지 않고 구원론 전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에 기초한 신론 중심적 형식으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특징을 조석만 교수와 박형룡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이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평화의 의논(6:13), 속죄계약이 선행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의 효과는 필연적으로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의하여 속죄의 대상(선택된 자)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 조성자로 높인다. 이 신학은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추적하여 돌아간다. 사람이 구원의 참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나가는 길에 유효적으로 실현하시는 선택의 영원한 작정에 의지한다. 영국 교회의 39개신조(17), 돌트신조(16, 7),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36)가 모두 이 진리를 선언한다.

 

이처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구원론은 비록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원인과 근거를 제시할 때는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적 사역임을 강조했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풍성하신 지혜와 은혜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을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으로 이해했다. 이런 구원론의 독특성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 하시게 하셨다고 위는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는 또한 성령이 우리의 중생 이전이든 이후이든 간에 우리에게서 나오는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성화 시키시고 중생 시켰음을 고백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창조와 속죄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처럼 중생과 성화를 위해서도 그 어떤 영광이나 영예도 쾌히 포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선량한 생각을 한 가지도 못하며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의 과분한 은혜의 영광과 찬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적 사역과 또한 그분의 신적작정의 적용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개혁교회 신앙고백에서 드러나는 예정론적 구원론의 독특성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구원론을 따로 독립해서 다루지 않고 신론의 논리적 열매와 적용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 견인 등과 같은 구원의 모든 내용들은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나타난다. 즉 구원의 혜택은 오직 택자자들에게만 적용되고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론은 예정론과 분리해서 다룰 수 없고 반드시 예정론으로부터, 또는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 한.

예정론이 구원의 서정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파의 중요한 구원론 이해이다. 이렇게 구원의 서정을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 중심적인 구원론이 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예정론적 구원론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은 10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이것이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0장에 부르심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101)라고 소개한다. 이 고백을 살펴보면 구원의 서정이 어디에 기초되어 있고 또한 무엇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위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신론에 기초해 있으며, 또한 구원의 서정이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부르심에 대한 고백은 철저하게 3장의 신적작정에 기초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3장에서 신적작정을 고백하면서 그 작정 안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포함하여 고백했기 때문에 부르심은 바로 3장의 예정에 대한 논리적 열매로 소개한 것이다. 3장에서는 신적작정과 인간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33),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35).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철저하게 구원론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구조는 알미니안적 복음주의에서 소개되는 구원론 구조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들은 신론과 구원론을 분리해 놓았고, 그 결과 구원론에 이르러서는 가항력적 은혜” “보편구원론”, “회개와 신앙 중심론”, “성화적 칭의론”, “신인협력적 구원”, “견인 불가능성등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구원론을 고백하게 될 때 구원론은 인간중심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며, 개혁신앙의 핵심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의 형태로 정립될 수 있다. 특히 36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전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세부 내용들을 이 기초 위에서 장엄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지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미리 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 때를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이처럼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

 

위의 고백에서 우리가 놀랍게 발견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항목의 모든 내용들을 하나님께서 절대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선물로 주셨음을 강조하는 고백이다. 특히 인간의 책임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하는 성화와 견인까지도 모두 포함해서 다루는 것을 더 주의해 보아야 한다. 결국 구원의 모든 내용은 비록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강조하더라도 전체 구원의 토대는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등의 모든 내용이 이처럼 3장의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다. 구원의 서정의 각 항목들은 10장에서 다루고 있지만 그 기초와 근원은 이미 3장에서 모두 정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기초를 중심으로 해서 10장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론적 구원론 구조를 잘 이해해야만 구원론의 한 부분인 칭의론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예정론적 구원론의 구조적 특징은 부르심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각 항목들의 고백에서도 계속 살펴볼 수 있다. 11칭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라고 고백하였다. 칭의는 바로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강조하여 칭의의 기초를 앞서 소개한 10장의 예정론적 부르심에 두었다. 결국 본 신조는 칭의론도 예정론의 논리적 귀결이요 열매로 다루어 주었다.

다음으로 12양자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라고 고백하였다. 이 부분에서도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양자된다고 고백하므로 앞서 고백한 칭의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칭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양자에 대한 고백도 예정론적 부르심의 고백으로 돌아가고 있다.

13성화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성화는 인간이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과 결단을 바르게 강조해 주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의 근원적 힘과 기초는 인간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와 예정의 선물로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본 신조는 성화도 부르심의 논리적 귀결이며 예정론의 실천적 열매로 고백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4신앙에 대한 부분에서는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는 부르심을 넘어서 3장에서 고백한 예정론으로 더 돌아간다. 신앙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고백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근원적 기초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들로 대상을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도 예정론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5회개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라고 고백하므로 회개의 성격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총에서 오는 것으로 고백해 주고 있다. 16선행에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고백하므로 선행의 기초도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제시해 주었다.

17견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도 역시 견인의 기초를 부르심에 기초해서 고백하여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본 고백에서는 견인에 대한 구원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세하게 드러내 주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 안에서 선택하신 것과 그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것과 또한 성령께서 그 구원을 효과적으로 성취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분리할 수 없는 위격적 사역의 특징을 고백하였다. 이런 형식 때문에 개혁교회는 구원론을 성령론으로 부르기도 한다.

18은혜와 구원의 확신부분에서도 이 확신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즉 구원의 확신은 인간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기초해서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고백하였다.

이상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구원의 확신까지 전 구원의 서정이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인간의 신앙적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구원론 전체의 구조와 토대는 인간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직 신적작정에서 출발하여 예정론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고백하는 구원론의 독특성인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의 서정

 

위 항목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았다면, 본 항목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대. 소요리문답에서 고백하고 있는 일반적인 독특성으로서 구원의 서정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순서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벌콥(Louis Berkhof)의 선을 따라서 부르심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성화 성도의 견인영화 등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으나, 본 신앙고백서에서는 부르심(부르심, 중생 포함) 칭의 양자 성화 신앙 회개 선행 견인 은혜와 구원의 확신등과 같은 순서로 고백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로 볼 수 없다. 즉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신조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신론을 기초로 하나님의 신적작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동일한 공통점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표현과 내용을 다루는 범위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 자체가 종교개혁 시대에서부터 정립되어 후대로 올수록 좀 더 세분화되고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에 부딪히면서 지금과 같은 논리적인 순서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초기에 소개된 구원의 서정과 후기에 좀 더 세밀하게 정립된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 신조는 후기 조직신학의 구조에 비해서 하나님의 주체적 구원사역이 좀 더 능동적으로 발휘되는 내용을 앞에 배치시키고 인간의 책임이 부여되는 부분을 뒤로 구분했다. 따라서 부르심, 칭의, 양자가 앞 부분으로 나오고 성화에서 확신부분까지가 뒤로 배치됐다. 이런 차이점은 당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를 일으켰던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에 대한 강한 저항적 성격도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도르트 총회 이후 계속적으로 인간중심적인 구원론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본 신조는 이 부분을 강력하게 배척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A. 핫지는 신조 작성 당시 영국의 배경에 대해서 포악한 왕실파가 교회건설자들의 칼빈사상을 버리고 알미니우스 사상을 채용하므로써 충돌에 새 요소가 첨가되었다. 이 알미니우스 사상은 독단적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과 교회제도적이며 예전적인 종교의 열성자들 사이에서 항상 우세하였다라고 지적한다.

구원론에 대한 이와 같은 특징은 후크마가 중생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종교개혁 시대와 17세기의 신학자들이 소개하는 중생의 범위가 오늘날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넓고 좁은 형태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소개해 주는 부분에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박형룡 목사는 이와 같은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사들의 다양 의미’, ‘영적 행위들의 대조적 구별’, ‘다양 동작의 선후 순서등을 잘 고려해야만 한다고 지적해 주기도 한다.

이런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본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부르심안에 부르심중생이 함께 포함되어 소개되어지고 있고, 또한 신앙회개가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중생 뒤에 소개되지 않고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조직신학에서 회개신앙으로 소개되는 것이 여기서는 신앙회개순서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는 선행이란 부분이 따로 설정되어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조직신학에서 성화에 대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 있는 부분인데, 신조에서는 따로 이 부분을 구분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성화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 주었으며 성도의 삶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좀 더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한 17세기 목회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은 은혜와 구원의 확신라는 부분이 견인뒤에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것은 견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본 신조에서는 견인교리가 가지고 있는 풍성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을 따로 구분해 주고 있다. 즉 앞 부분인 견인은 예정론의 논리적 귀결로서 부르심이나 칭의가 상실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으며, 뒷 부분인 확신에서는 인간의 신앙적 책임을 더 강조해 주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의 서정은 부르심에서 견인으로 이어지는 전체 내용을 따로 분리해서 다루지 않고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다루어가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 본 신조가 구성한 형식은 더욱 놀랍다. 즉 예정론에 기초한 부르심은 이어지는 모든 구원의 내용들의 기초로 다루었으며, 또한 이어지는 각 과정은 다음과정의 논리적 결과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견인은 이런 논리적 구조의 최종확증으로서 예정과 연결된다. 즉 견인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예정의 논리적 결과인 것이다.

이런 예정론적 구원론 구조를 통해서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간 자신을 모든 구원의 주체로 삼고 싶어 하는 인본주의적 구원론을 막고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을 지켜 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구원론 논쟁과 관련해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칭의론과 성화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칭의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다루는 칭의는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와 예정론적 구조에 기초한 고백이다. 즉 본 신조는 칭의를 인간의 실질적 변화에 기초하여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과 죄책을 사면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주와 절대주권자로서의 법정적 선언으로 구별하였다. 특히 칭의에 대한 고백도 앞서 소개되었던 부르심에 대한 고백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이 칭의를 이루시는 주체로 소개한다. 그리고 전체 고백도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칭의를 다루고 있다. 이런 구조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111).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순종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이같이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빚을 완전하게 갚아 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만족을 드렸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 그들 대신으로 그의 순종과 만족이 받아들여졌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113).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114).

 

우선 3절에서 칭의 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만족을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세 전 속죄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라는 고백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의 사역들이 분리할 수 없이 동등하게 칭의 사역과 어떻게 연결되어져 있는지를 드러내 주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칭의 사역을 위해서 작정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칭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성령께서는 칭의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으로 고백하였다.

다음으로 칭의의 사역이 신적작정을 기초로 해서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고 있는 구조를 언급해 볼 수 있다. 위의 고백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신적작정과 선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주체적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칭의의 사역은 구원의 서정에서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소개된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칭의는 부르심뿐만 아니라 다른 항목들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안에서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원의 은사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112).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의 죄들을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그들은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전락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성적인 진노를 살 수 있게 되며, 그들이 자신들을 낮추어,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들이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 전에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게 된다(115).

 

위의 고백을 보면 칭의와 믿음이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와 믿음과 회개가 서로 깊은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칭의의 기초에 의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구원의 서정 각 단계들이 서로 단독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고백되는 구원의 서정의 또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구조는 구원의 서정이 인간중심적으로 이해되어지지 않도록 하며 오직 하나님 중심적으로 그 내용들을 고백하고자 한 당시의 노력들이다.

칭의 부분에서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면은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오류를 함께 소개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즉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에 가장 심각한 도전은 알미니주의적인 인간중심적 칭의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적인 칭의관은 도르트 신조에서 배격되었던 알미니안적 구원론과 동일한 성격이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미니안적인 구원론을 배격했다.

 

이 칭의(稱義)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1).

또한 이 모든 것이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값없이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칭의(稱義)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3).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선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의 칭의관이 배격되고 있다. 즉 로마 가톨릭은 새로운 의를 인간에게 주입하여 성화를 통해 의를 발전해 가는 의화교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먼저 비판해 주었다. 다음으로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알미니안주의적인 신인협력적 칭의관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본 신조는 믿음이 칭의의 수단이며 도구라는 사실은 분명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믿음 자체를 칭의의 원인이나 기초로 주장하는 알미니안적 입장은 비판했다.

이 표현은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는 칭의관이 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으로 칭의관을 거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믿음 행위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 또한 신비적인 종교현상을 통해서 자신 안에 무슨 변화나 경험을 인식하므로 칭의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 고백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도 잘못된 칭의관을 분별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근래에 전통적 칭의관을 비판하는 새관점 학파의 선교적 칭의나 김세윤 박사의 관계적 칭의나 김영한 박사의 중도적 통합적 칭의론등은 바로 위에서 지적한 알미니안적 칭의론의 변형들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3 주장들은 칭의론에 대해서 관계적”, “윤리적”, “성화적”, “연속적”, “보상적”, “칭의 상실 가능적”, “인간 성화적 노력 협력적”, “인간의 능동적 참여등의 표현을 제시하면 성화적 칭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전통적 칭의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법정적”, “단회적”, “선언적”, “확정적”, “절대 은혜적”,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 “인간은 수동적”, “그리스도의 은혜 전가등과 같은 표현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들이다.

특히 김영한 박사는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라는 제목을 통해서 크리스천투데이3번에 걸쳐서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과 전통적 칭의론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는 죄인의 칭의와 죄의 칭의를 구분하여 칭의의 법정적 단회적 확정적 성격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종말론적으로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전통적 칭의론의 예정론적 성격과 성화를 구별하여 다루는 방식을 강하게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필자는 정통개혁교회의 신학자로서 "새 관점 학파"가 제기하는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에 함축된 동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우리 신자들은 칭의의 일회적으로 주어짐의 성격과 종말론적 완성 속에서, 오늘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부르심에 매 순간 응답하여야 한다. 그리고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으로, '안일한 예정 신앙''성화 없는 칭의 신앙'에서 깨어나 선한 누룩이 되고 각종 세속주의 풍조, 동성애, 성매매 자유화, 급진적 이슬람이 밀려오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영한 박사는 법정적 칭의를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칭의가 종말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나 법정적 칭의는 예정론과 견인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본 신조 115절에서 그들은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타락할 수는 없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칭의 상실 가능성을 주장하면 그 자체가 법정적 칭의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이런 주장들은 전통적 칭의론을 일부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칭의론의 핵심적인 원리나 주체를 인간편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인간중심적 칭의론들이다.

오히려 성경적인 바른 칭의관은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라는 고백처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이루어 주신 속죄의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돌려(전가) 주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그 은혜를 우리게 전가 시켜주시는 하나님 중심적인 칭의관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선물로 칭의가 주어지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라는 고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칭의가 단순히 신약에서만 제시되는 내용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동일한 성격으로 제시되는 부분이다. 본 신조는 6절에서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와 모든 면에서 똑같았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세대주의적인 극단적 종말론주의자들의 칭의관을 비판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관련해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많은 오류가 발생되고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구약은 행위로 구원받고,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세대주의 방식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도 오는 것이지만 역시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온다. 이와 같은 식으로 성경의 통일성을 깨뜨리면 전체 성경의 구조가 무너지게 되고 결국 신론중심적인 칭의관 자체도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고백에서는 철저하게 신구약의 칭의관이 신론중심적인 칭의관으로 동일한 성격임을 명백하게 정립해 주었다.

이런 구조는 이미 앞서서 소개하고 있는 7언약8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에 기초하고 있는 고백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7장에서는 신적작정에 의해서 주어진 은혜언약의 본질이 구약과 신약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원의 은혜임을 고백해 주었다. 또한 8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비록 신약에 오셔서 구원의 실제적인 내용을 성취하셨지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도 구원의 주체로 존재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 구원의 사역 내용은 비록 신약에서 성취되었어도 구약의 모든 택한 백성들에게도 역시 그 효력과 은혜가 성취되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므로 신구약의 구원적 성질의 통일성을 확립해 주었다.

그러므로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76).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사역의 공덕과 효능과 혜택은 창세로부터 모든 세대에 살던 택함 받은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받아 누려 왔다(86).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칭의론 고백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부분들을 정리하여 주었다. 즉 칭의론 고백에서는 펠라기우스주의, 반펠라기우스, 로마 가톨릭, 알미니우스주의, 세대주의적 종말론주의 등이 배격되었고, 특히 성화나 신앙, 회개, 견인과 연결시키지 않는 분리적인 형태의 칭의론도 배격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성화론

 

성화와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은 성화의 주체에 대한 부분이다. 많은 초교파적 복음주의자들은 성화는 인간이 실제적인 참여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주체가 되는 것으로, 또는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서 이루어 가는 신인협력설 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에서는 철저하게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한다. 비록 인간이 성화의 대상으로 실제적인 참여자이고 실행자일지라도 그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성화의 사역을 이루시는 분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런 하나님 주권적인 성화의 의미가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즉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앞서 소개했던 구원의 서정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성화는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역시 성화의 사역을 앞으로 거슬러서 예정론적 부르심에 기초하여 고백하고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성화칭의에서부터 설명하므로 신인협력설쪽으로 기울어진 것에 비해서, 본 신조는 이들과의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칭의보다는 부르심에 기초해서 설명하였다. 부르심에서 기초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이 성화를 다룸으로 성화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여 성화는 예정론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화의 주체이시며, 또한 각 위격의 사역이 성화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자세히 고백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대요리문답),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신의 사역으로 고백된다.

또한 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서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라고 고백하므로 모든 성화의 과정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주어지는 실제적인 도우심과 힘이 없이는 인간의 공로와 의지와 노력으로는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통해서 이루시는 성화는 인간의 공로에 이루어지거나 신인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성화부분에서도 아주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화부분에서 인간의 공로와 노력과 상급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화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며, 또한 은총의 선물인 부분을 약화시키려고 하지만 본 신앙고백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은총의 선물로서 성화에 대한 고백은 3절에서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라고 고백하며, 대요리문답에서는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끓어오르고 증가되며 강력해져서(75)”라고 고백하며, 소요리문답에서는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이신 데(35)”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런 정신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성화의 수단에 대한 부분이다. 본 고백에서는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화의 수단이 말씀과 성령으로 고백된다.

말씀이 성화의 외적수단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다. 즉 인간의 판단이나 결정, 좋은 의도나 공로가 성화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성화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16장에서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들만을 가리킨다’(1)라는 고백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 설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 부분은 칼빈주의에서 율법의 제3용법을 강조하여 성화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루터파와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삶의 규범이 되는 원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기초해서 고백해 주고 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5:26). 특히 이와 같은 성화의 수단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 하는 것으로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라는 말씀을 통해 성화의 수단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이해인 것이다.

또한 본 고백에서는 성화의 범위와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먼저 성화의 범위는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3)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의 전 인격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의 자라남이 종교적인 모습에서만 열정적이고 그의 삶에서는 전혀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이원론적인 신앙을 비판 할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이다.

성화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의 전 인격에서 세워져 감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으로는 두 가지를 소개한다.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라는 고백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죄에 대해서 슬퍼하며, 의로운 삶을 향해 가는 것으로 증거한다.

이것은 소요리문답에서 좀 더 명확하게 요약되어 거룩하게 하신 것은 점점 죄에 대하여서는 능히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능히 살게 되는 것이다(35)”라는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성화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성화는 단지 외부적으로 나오는 몇몇의 구별된 행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반응과 그리고 의로운 삶에 대한 태도를 총체적으로 해서 평가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 삼고, 그 말씀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슬퍼하며, 또한 그 말씀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는 성화의 내용은 칼빈주의 삶의 독특성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성화의 상태에 대한 고백이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완전성화를 고백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고백된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로 인하여 계속적이고 화해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2).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 전쟁에서, 그 남아 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7:23)(3)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이 땅에서 순간적으로 완전히 성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죄 때문에 여전히 부패의 내용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성화라는 것은 일평생 동안 끊임없이 전인격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성격이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이 생에서 아무도 완전한 성화에 달할 수는 없고 다만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갈 뿐이다(77)”, 신자들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숨어 있는 죄의 잔재 때문에, 그리고 영을 끊임없이 거스리는 육의 정욕 때문에 성화를 완전히 달성할 수 없다(78)”라는 표현으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이런 성화의 성격 때문에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싸워가며, 또한 의로움 향해 항상 전진해 가야 하는 삶의 과정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성도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본 고백에서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라는 표현으로 제시되었다.

결국 성화에서 거룩한 삶이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부정의 삶이. 성화에 대한 이런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우리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라는 말씀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구원이 우리의 노력과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이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해 주었다. 하지만 비록 성화에서 인간의 노력이 중요한 위치에 있다할지라도 본 신조는 결코 성화의 주체로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 신조는 인간의 선행과 노력은 구원의 대상자로서의 책임과 의무임을 강조해 주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보존 및 확립되는 거룩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다.

성화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성격과 인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조화를 윌리암슨( G. I. Williamson)은 다음과 같이 구별해 주었다. “성화는 사람과 하나님이 활동하셔서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가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화에 대한 공로를 다 취하시는 그러한 것이며 반면에 사람의 역사는 자기가 무익한 종이라는 것 외에 결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또한 빈센트(T. Vincent)우리가 성화의 주체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성화의 주관자나 그것을 유효케하는 원인 될 수 없다라고 구분해 주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성화론은 칭의의 원인이 아니라 열매이며 증거로서의 역할을 잘 드러내 주었다. 대요리문답에서는 신조의 칭의론을 더 보충하여 칭의와 성화의 중요한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소개하였다.

 

77.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성화되는 것은 어떤 점이 다른가? : 성화는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그 둘이 같지가 않다. 하나님께서는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 주시며,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은총을 부어 주신다. 또한 칭의로는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화로는 죄를 이기게 하신다. 그리고 칭의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벌하시는 진노로부터 면제를 받게 되며, 칭의는 이 생에서도 완전하여 신자들이 다시금 정죄되는 일이 없게 한다. 그러나 성화의 경우는 사람에 따라 같지가 않다. 그 뿐 아니라 이 생에서 아무도 완전한 성화에 달할 수는 없고 다만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갈 뿐이다.

 

따라서 본 신조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여 말하면서도 둘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특히 칭의를 성화의 원인이며 근거로 설명하였고, 성화는 칭의 열매요 증거로 다루었다. 또한 칭의와 성화 모두 신적작정과 예정론에 기초하여 구원의 논리적 열매로써 고백해 주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결코 성화가 칭의의 원인이나 근거로 말해서는 안되며, 그리고 성화의 열매를 가져오지 않는 형태로 칭의를 분리해서 말해도 안되며, 더 나아가 칭의와 성화를 예정론과 나눠서 다루어도 안된다.

 

 

결 론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개혁파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론은 구원의 서정 전체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해서 예정론 안에서 이해되고 고백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구원의 서정은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원인이나 조건이 아니라 바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 열매로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주체에 있어서도 역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신론 중심적으로 구원론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파 구원론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와 같은 구원론의 이해가 있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고백될 수 있다. 비록 구원의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론에서는 당연히 인간이 많이 소개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본 신조는 구원론의 완성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이르어야 한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소요리문답의 고백처럼 구원론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자리까지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구원론의 구조를 기초로 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전체 구원의 서정들을 다루어 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부르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이 기초 위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런 특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기 위해서 각 구원의 서정들의 근거를 부르심으로 소급해서 고백해 주고 있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특징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칭의론이 논의될 때만이 칭의의 법정적, 단회적, 완성적, 은혜적, 선언적, 전가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영적분별력 /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뿐인가?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구원의 여러 길?

 

복잡하고 바쁜 도시를 떠나 시골에 들어가 자연과 함께 살면서 많은 현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졌던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미국인 부부가 있다. [조화로운 삶](보리),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도 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의해 삶을 조직하고 결정해 삶을 역동적으로 자주적으로 이끌어 멋진 삶을 일구었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아내고 인간의 생사고락을 스스로 해결하며 자생자구(自生自救)할 수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도 스스로 구원을 추구하고 스스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다.

기독교 안에서도 인간은 타락의 원죄를 조금도 유전 받지 않았다고 믿는 펠라기우스 같은 이단도 있지만, 타락과 원죄의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미미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등 많은 일을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만 된다고 가르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많다. 구원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아니고 인간 스스로의 기여가 필요하다고 믿는 교리 말이다.

 

 

 

도르트 신조가 말하는 본성의 빛

 

 

17세기 초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때문에 온 교회가 도르트에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토론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제가 공교회적인 성격이 있기에 유럽의 자매 교회에게 연락해 신학자들을 초청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에서 제기된 도전이었지만 세계 여러 교회에서도 제기 될 수 있는 공교회적인 문제였다. 그 내용을 1618-19년에 정리한 것이 도르트 신조이다. 그 가운데 세 번째 네 번째 교리 4항에서 본성의 빛을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을 참고로 위의 질문에 대답해 보자.


 

 

4항 본성의 빛의 무능함

 

그러나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심지어 사람은 이 본성의 빛을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에 조차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된다.

 

 

 


본성의 빛의 존재

그러나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이라는 말로 도르트 신학자들이 말하는 본성의 빛을 표현한다.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전자는 일반은총’(혹은 본성의 빛)으로 구원 자체를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비해 후자는 불가능하다고 성경을 기초로 바르게 정리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뭐라고 주장하는지 보자. “부패한 자연인이 일반 은총(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이 용어로 본성의 빛을 말함)이나, 타락 이후에도 남겨진 은사들을 아주 잘 사용할 수 있으며, 이를 선하게 사용함으로 더 큰 은혜 즉 복음적 은혜 또는 구원의 은혜와 구원 자체를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심에 필요한 방편들을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오류 5)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본성의 빛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대등하게 취급한다. 두 가지를 근본적 차이로 보지 않고 정도의 차이로만 본다. 그들 중 어떤 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 가장 부패한 사람, 둘째, 덜 부패한 사람, 셋째, 특별히 알맞은 사람이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16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작성된 벨기에 신앙고백서(1561)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 다만 그 중에서, 인간이 변명치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약간의 흔적만 남았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배가 파선하여 겨우 나무판자만 남아 있는 상태와 같다. 그 넓은 바다에 나무판자 조각이 떠돌아다닐 뿐이다.

로마서 2:14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불신자도 신실하고 정직하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본성의 빛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불신자도 신자처럼 같은 봉사와 선을 행할 수 있지만, 그 원리가 다르다. 신자는 율법을 사랑의 원리로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 물론 외식하는 자들도 사랑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본성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아담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죄의 오염은 영혼, 마음, 정신 등 모든 부분으로 퍼졌다. 전적부패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여전히 사람이고, 희미하게 지식과 의와 거룩함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도르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별했다. 넓은 의미의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남아 있지만, 좁은 의미의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사라진 것으로 본다. 이것이 희미함의 의미이다. 사람이 사고의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은 죄 된 것으로 사용한다.

 

로마교회는 타락의 범위가 초자연적 은사로 본다. 인간은 타락 이후에도 자연적 은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성적 사고, 선과 악의 구별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 초자연적 은사를 받을 능력과 준비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을 그리스도의 특별은총과 대등한 위치에 놓는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이다. 이들은 모두 반쪽(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도르트 신학자들은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본성의 빛이란 인간이 그것으로 뭔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은 그 본성의 빛을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본성의 빛을 희미하게 남겨 두신 것)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 본성의 빛은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능력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본성의 빛의 사용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심지어 사람은 이 본성의 빛을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에조차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본성의 빛’,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그렇다. 인간은 본성의 빛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소유한 본성의 빛이 자신의 구원에 얼마나 될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

도르트 신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한다.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인간이 소유한 본성의 빛은 엉망진창이고 비뚤어져 있을 뿐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자신의 기준을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자연과 사회에 관한 일들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불신자들 가운데 생각보다 잘 하는 사람들도 본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이 아니라, 이타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지, 이방인에게 칭찬할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제아무리 멋진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종교적 선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본성의 빛을 가진 자연인은 영적인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참 회심은 본성과 이성의 빛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 문명으로도 불가능하다. 심리학적인 효과로도 불가능하다. 참된 회심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16:6-7)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이 기록하여(31:3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44:3)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5)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31:18)

 

 

 

본성의 빛의 결과

“......게다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이 타락 후에도 남겨 두신 본성의 빛을 잘 사용해서 구원에 이를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는. 이제 우리는 본성의 빛의 실제를 만나게 된다. 물론 인간 속에 남아 있는 본성의 빛은 선하다.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이 희미할 뿐이다.

그런데 자연인은 이 본성의 빛을 오용한다. 불신자의 학문도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 본성의 빛을 사람들이 오용하여 종교를 만들기도 한다. 불교나 유교나 도교가 그렇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람을 신화화한다. 사탄 숭배자들도 있다.

 

사람 속에 있는 본성의 빛을 이용해서 악한 불량배가 고상한 철학자와 학자인 척 할 수도 있다. 적그리스도는 존경받는 사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최고로 창조된 인간이 부패하면 가장 나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성의 빛은 뭔가 그 위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없다. ‘본성의 빛은 쓸모없게 되었고 희미해 졌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의 빛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아주 추악한 죄들에 빠지고 만다(1).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그래서 사람은 무시무시한 죄를 짓는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32)

 

 

그러면 본성의 빛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성의 빛은 은혜이고 특권이다.

 

 

본성의 빛의 역할(목적)

“......사람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본성의 빛을 남겨 두신 목적을 볼 수 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희미한 본성의 빛은 무슨 역할을 할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 날에 저는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어요!’라고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의 빛을 통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의 빛은 사람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

 

 

종교 개혁가들은 구원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주장했다.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교리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

 

 

성경 말씀에 의하면 구원에 있어 오직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그것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려 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믿는다. 결국 자신의 자유를 바란다. 외부로부터의 하나님의 법을 거절하고 스스로(auto)가 법(norm)이 되는 자율적(autonomous)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현대 철학도 자유이야 말로 구원이고 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인류의 시조가 빠진 함정도 바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의 자율이다. 첫 아담(고전 15:45)은 에덴동산 시험에서 하나님과 같이”(3:5) 되어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로서 혼자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삶의 의미가 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불순종하게 되고 그것이 곧 죄이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인 예수님은 유대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3:17)이시지만 첫 아담처럼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며 승리하셨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스스로 자유하려 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셨다.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은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근거임을 믿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 구원의 튼튼한 반석이시다. 할렐루야!

 

 

 

 

http://www.reformedjr.com/

출처:영적분별/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04.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어떤 태도가 구원받은 자로서의 태도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구원에 대해 한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받음에는 반드시 구원받는 것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구원에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것과 구원 받은 것에 대한 확신은 다를 수 있습니다.”(마틴 로이드존스. 로마서강해 5. 335). 그러면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전적으로 죄인임을 깨달으면 또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여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또한 다만 우리를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순종하심을 이루신 역사와 십자가 나무 위에서 달려 우리의 죄를 위해 수동적인 순종 자세로 징벌을 당하신 역사만을 의지한다면 비록 구원의 확신이 없더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ibid., 438).

 

자 어떤가요?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제 18장의 제 1은 이렇게 말합니다.
“위선자나 그 밖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며 구원받는다는 거짓된 소망과 속물적인 뻔뻔스런 확신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 이 말씀은 사람의 확신과 구원은 관계가 없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두렵지 않습니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구원받았다고 믿었는데 성경은 그 확신이 과연 바른 확신이냐? 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신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바른 믿음에 근거한 확신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14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욥 8:13-14 / 13) 이 말씀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구원에 대한 바른 확신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도 구원받았다고 얼마든지 주장하기도 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확신은 거미줄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미 3:11). 거짓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말씀을 왜곡하여 거짓을 말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들의 거짓에 기뻐하며 그들에게 삯을 지불하였고,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니 구원을 확신하는 자들은 정말 자신의 구원이 믿음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짓 위안에서 나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한복음 8:41). 이들은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들을 향해 책망하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것이 거짓 구원을 확신한 자들이 행한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구원받은 자는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주 예수를 참으로 믿고, 성실하게 그를 사랑하며, 그 앞에서 모든 선한 양심으로 행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자기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 2:3).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일 3:14, 18, 19, 21, 24 14).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 소망 때문에 부끄러워할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믿는 자에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2, 5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러한 확실성은 허황된 소망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히 6:11, 17-19)

 

이러한 약속에 따르는 은혜의 내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해 주시는 양자의 영, 곧 성령의 증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성령께서 우리의 기업인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을 보증해주십니다. 우리는 속량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고후 1:21-22)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반드시 구원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구원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조금도 주저 없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운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어, 매우 난감해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 질문에 주저하는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헛 믿은 사람이라고 심하게 몰아붙이는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제 성도들이 가져야 할 구원에 대한 확신 여부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원의 근거와 성격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해방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항상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취급한다. 따라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아무렇지 않는 일이나 생각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심각한 죄로 여겨질 때가 많다(시 51:4). 그러므로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주시는 과정에서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이 선물은 믿음을 통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우리가 구원을 위해 제시해야 할 우리 편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엡 2:8).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효과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나,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효과는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그리고 이 세상이 없어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래서 구원은 영생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롬 5:21).

구원의 효과는 우리가 그것을 분명하게 의식하는가 또는 하지 못하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역사는 사람의 그 무엇으로도 무효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한번 주어진 구원 은혜는 결코 취소되는 일이 없다(요일 5:18).

 

2. 확신의 두 유형
성도가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 객관적 확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어진다고 믿는 것을 객관적 확신이라고 한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 객관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내가 그 분을 믿으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하는 것 등,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약속은 분명한 사실이요 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고 말씀하셨다(히 10:22,23). 그리고 야고보 사도께서는 확신을 갖지 못한 성도를 향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주의를 주셨다(약 1:6,8). 객관적 확신은 참된 믿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객관적 의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다 가지고 있다.

 

성도는 자신의 형편이나 주변의 상황과 관계없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구원은 과거에 세례나 특별한 영적 은사를 받았는가, 지금 감사와 은혜에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장차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 떠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여러 현상들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일 뿐이다.

 

2) 주관적 확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자신은 이제 죄 용서를 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기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주관적 확신이라고 한다. 성도는 객관적 확신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에서 나오는 객관적 확신은 개인차가 있을 수 없지만, 성도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주관적 확신에는 많은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객관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이 가지는 성격이나 받은 교육의 결과에 따라서 지나치게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도 있고, 남달리 전혀 확신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기독교 밖에서도 잘못된 진리에 대한 대단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주관적 확신의 여부만 가지고 그 사람의 구원을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세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8:13,14). 이 비유에 등장한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리가 구원에 대한 주관적 확신까지 가졌을 것이라고 단정할만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옥합을 깨뜨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여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눅 7:50).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여자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그 여자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 여자가 주관적인 확신까지 가지고 돌아갔다고 단정할 증거는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는 말씀을 본다(행 2:38-41). 그 날에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삼천 명 모두가 자신의 구원에 대한 주관적 확신을 동일한 수준으로 가졌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3. 구원과 확신
객관적 확신은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자신의 연약한 형편만을 생각하고 구원에서 멀어질까 염려하는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탕자처럼 멀어진 사람이라도, 한번 구원하신 사람은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불러내서 아들(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하신다.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함이 없다(롬 11:29). 성도는 어떠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주관적 확신은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주관적 확신은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이다. 열매는 맺히고 익어가는 정도에서 한 나무 가지 중에서도 서로 개인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확신이 부족하다고 하여 구원받지 못했다고 쉽게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믿음은 사람마다, 그리고 시기마다 그 정도가 다양하여서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다(히 5:13,14, 롬 4:1920). 믿음은 종종 여러 가지 공격을 받아 약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참 믿음은 마침내 승리를 얻는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 믿음은 여러 면에서 성장을 하여(히 6:11, 10:22), 우리 믿음의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한 확신에 이르고야 말기 때문이다(히 12:2).

 

주관적 확신이 구원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는 말을, 주관적인 확신은 없어도 좋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라도 새가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믿음도 성장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하여 부족하던 확신을 몰아내고,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마음속에 자신의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수준에까지 자라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은 사람의 조건에 따라 주어지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구원에 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각 사람의 주관적인 느낌에는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관적 확신만으로 구원 여부를 단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주관적인 확신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익혀서, 주관적 확신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수준에 이르도록 자라기를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
글쓴이 : 金鐘日牧師|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신본주의적 구원은 하나님 중심의 존재로 변화하는 축복의 사건
총체적 복음 관점에서 구원의 축복 바라봐야…‘돌이킴’ 통한 삶의 결단 계속 추구해야



1.개혁신학의 가르침을 따라 신본주의적 구원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 김광열 교수(총신대·조직신학)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도전들 가운데 하나는, 신본주의적 신앙을 버리고 인

본주의적 신앙으로 들어가려는 유혹들에 직면케 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나 구원의 의미를 자기 자신의 어떠한 개인적인 욕구나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인본주의적(man-centered) 접근방식으로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성경적 신앙은 우리를 자기 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향한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개혁신학은 바로 그 점을 강조한다. 신앙이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의 원동력으로 삼게하는 신본주의적(God- centered) 접근방식이 개혁신학의 주요 가르침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가 신본주의적 신앙의 관점을 놓치게 될 때, 구원을 나의 욕구를 채워주는 어떤 축복이라고만 생각하게 되며, 결국 그는 인본주의적인 구원이해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아니면 물질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나의 소원을 이뤄주는 어떤 무엇이라고만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주께서 베푸신 구원을 통해서 내 인생에 주어지는 어떤 유익들과 열매들만 관심갖는 -때로는 그 안에 세상적인 욕심들까지도 포함시키면서- ‘인본주의적’ 신자의 삶으로 전락되기 쉽다.

이러한 점에서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신본주의적 구원관은 그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구원이란, -물론 내가 얻는 무엇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사건이다. 소위 축복이라는 용어를 굳이 붙힌다면, 그것은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의 존재로 변화되는 축복의 사건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기에 적합한 존재로 변화되는 사건인 것이다.
 
2. 개혁신학이 가르치는 신본주의적 구원이해는 구원의 축복들을 총체적 복음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요점은,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주어지는 변화가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변화라면, 그 변화의 범위는 전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영적 차원의 변화가 그 출발점이지만, 그것은 또한 중생자의 육적, 정신적, 사회적 삶까지도 그 분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함으로 그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의 새로운 방향성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서 주어지는 회복의 역사는 온 우주 만물까지도 그 분의 새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변화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총체적 구원’이라고,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총체적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역사 속에서 주어지는 축복들은 단지 신자의 영적 차원에서의 변화만을 가리키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변화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포괄성을 놓치고, 그 축복들을 영적 차원의 변화로만 축소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럴 경우, 우리는 쉽게 이원론적인 신앙태도로 전락하게 되며, 결국 그 나머지 영역들 속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세속적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사건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을 성경적으로 검토해볼 때, 그것이 좀 더 포괄적인 변화들에로까지 지향하고 있는 사건임을,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총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3.중생의 축복은 신자의 개인적 영적 변화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가리키는 사건이다.

중생이란 불신자가 주께로 나아올 때 경험하는 첫 번째 단계의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만을 가리키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우주적인 변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사건으로 설명된다.

 

중생은 신약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이미지로써 표현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이미지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이미지로서 중생의 역사를 제시해주는 말씀으로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과 마태복음 19장 28절을 들 수 있다.

 

전자의 성구에서 중생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피조물로서 묘사된다. 중생이란 하나님의 처음 창조와는 구별되는, 마지막 때에 주어진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가리키는 사건인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어진, 그리고 죄의 영향 아래 놓인 온 세상을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건으로서 중생이다.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28절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신약성경 안에서 중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단어 팔링게네시아(παλινγγενεσια)가 사용된 두 구절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인데, 여기에서 중생의 의미는 우주적으로 새롭게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사건으로서 설명되고 있다.

 

(“만물이 새롭게되어”)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신자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경험케 되고, 만물이 새롭게 되는 그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최종적인 완성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들로 바라볼 때, 중생이란 단지 신자의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를 넘어 더 포괄적인 문맥에서 이해되어야함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중생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회복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변화의 한 국면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자의 중생사건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되고 추구되거나 혹은 그러한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좀 더 포괄적인 성격으로 접근돼야 할 사건인 것이다.
 
4. 회심과 성화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구원의 총체성

 그런데, 성경적 중생이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포괄성’은 또한 회심과 성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회심이란, 중생이라는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주어진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이므로, 중생에서의 총체적 성격은 회심사건 속에서도, 그리고 성화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

만일 성경이 말하는 그와 같은 총체적 성격을 놓치게 될 때, 회심에 대한 이해가 단지 자신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죄의 용서와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의 차원에서만 머무르게 될 위험성이 높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심이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변화가 중심적이긴 하지만,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속한 가정과 사회 속에서의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의 ‘돌이킴’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관점들, 즉 세속적 가치관이나 삶의 원리 등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정신, 그리고 삶의 원리들을 받아들이는 삶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참 회개란 소위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가치관과 삶의 원리를 적용하며 살아감을 의미한다. 회개자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세워나간다.

 

그러나 또한 진정한 회개자에게는 그가 새로이 들어가게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또한 그 나라의 통치 원리를 따라, 그 나라의 삶의 가치와 원리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도 구현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의 삶이란 회심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회심에서 결단한 총체적 돌이킴의 삶에로의 결단은 회심자의 전 생애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추구될 것이며, 그것은 곧 “총체적 성화”의 삶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총체적 회심의 대표적 사례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회심 장면을 통해서 확인된다. 누가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하게 되는 회개의 ‘돌이킴’에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에서의 ‘돌이킴’ 뿐만 아니라, 이웃들과의 사회-경제적 관계에서의 ‘돌이킴’도 포함되는 것임을 강조한다.(눅 19:8)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만나서 이뤄진 총체적 회심의 결단은 그 이후에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뿐 만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영역들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구현되도록 노력하는 총체적 성화의 삶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은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인가?

< 이차식 목사, 덕일교회 >

 

시작하는 말

 

동정녀 탄생교리가 기독교신앙에 있어서 왜 필수적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묘사는 명확하고 분명하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잉태 당시 남자를 몰랐으며 마리아의 태는 성령의 능력으로 성자의 성육신의 요람이 된 것이다(1:20; 1:35).

 

그러나 동정녀 탄생교리는 교회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꾸민 이야기처럼 환상이나 웃음거리로 여겨져 왔다. 문제는 교회 내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1. ‘동정녀에 대해 오해한 사상들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로 두 논리가 있어왔다.

 

첫째는, 이사야 7:14에서 선지자가 언급한 처녀탄생에 대한 예언은 실제로 젊은 여성을 의미하며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학자들이 이사야의 예언에 관하여 이 주장을 하며 여전히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

많은 이들이 이사야의 히브리어는 almah이며 처녀의 전문용어 bethula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 왔다. almahbethula 보다 넓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almah가 처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구약에서의 증빙문구는 명백하지 않다.

 

almah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9번 나타나며, 어디서나 전후문맥은 단어의 의미를 명백하게 하는데, 처녀를 나타낸다. 더 중요한 것은 셉튜아진트는 almah를 번역하기를, 이사야 7:14를 인용한 마태복음 1:23에서의 동일한 단어인 희랍어 parthenos라고 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parthenos처녀라는 것에 의견을 일치한 것이다. 만일 70인경 유대 번역자들이 이사야7:14를 젊은 여인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했더라면 그들이 처녀의 명확한 헬라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많은 이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교신화의 대표적 형태로 안 좋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들의 전쟁에 처녀 탄생이 있으며 미트라교에 있으며, 기독교에도 동정녀 탄생이 있다. 그게 어떻다는 거냐. 무슨 대수라도 된단 말이냐, 그것들은 모두 우화들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동정녀 탄생도 우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언뜻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주장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2.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는 동정녀 잉태개념

 

1) 우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으며, 그 분은 남자를 모르는 처녀에게서 성령으로 나시고, 역사적인 무대 위에서 실제로 확실한 기적들을 행했으며, 그의 백성들을 구원했으며 부활하셨다라는 사실을 추정하고 가정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가? 답은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러한 실제적인 인물은 기독교의 출현 이전에 존재한 적이 없다.

 

2) 유대인이 그들의 복음적 이야기에 이단적 요소들을 삽입해서 자기들의 종교로 귀의하거나 새로운 회심자를 얻으려 했다는 것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혹 능한 유대인이 구약의 예언 성취를 위해서 이야기를 재구성했을 것이라고 가정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단의 사상을 첨가하거나 혼합하는 것이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받기 쉬었겠는가. 그런 가정자체가 유대인들에게는 심히 어렵고 혐오스런 것이다.

 

3) 세상 역사 가운데는 그 어디에도 성경과 같은 예언과 성취로서의 실제적 동정녀 탄생은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알렉산더대제, 디오니수스, 미트라 그리고 석가모니들의 탄생 설화를 보면 그들이 죽은 후 여러 세기가 지나서 고대 전기작가들이 만든 이야기이지, 성경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역사성과 내용을 언급한 적이 전혀 없다. 게다가 떠도는 그 이야기들은 비정상적 잉태설이며 동정녀 탄생이 아니다.

 

알렉산더의 부모들은 이미 결혼했다. Dionysus는 제우스신이 자신을 인간으로 변장하여 왕자를 수태해서 태어났다. 이것은 동정녀 탄생이 아니며, 우리가 복음서에서 읽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고대 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신()Mithra는 한 반석에서 태어났다. 동정녀가 아니다. 석가모니의 경우, 그의 어머니는 부처가 하얀 코끼리 형태로 그녀 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의 사후 5세기까지도 없었던 이야기일 뿐이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자였다. 소위 이런 우화는 불확실한 이야기로서 모두가 사후에 생겨났으며. 어찌됐든지 세상 역사상 실제 동정녀 잉태 사건은 아니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중요성

 

문제는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인 사실이란 것과 그 교리를 믿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신앙을 위하여 심각한 문제가 되는가이다. 응답은 완전히 그렇다.

 

1)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필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로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전기 작가들이 허구로 만든 설화가 아니다. 동정녀 탄생은 오랜 구약교회의 역사동안 선지자들이 성령으로 감동하여 예언한 것이며, 이 사실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교회 보편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초대 교회때부터 보잘 것 없거나 하찮은 것처럼 치부하지 않고, 그리스도 교회에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인 신앙에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교회 역사상 동서고금을 통하여 참 교회는 그 교리를 경시하거나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묵살하지 않았다.

 

2)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잉태되었을 때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성령하나님으로부터 잉태되었다는 것 외에 마리아의 태에 어떻게 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모른다(1:20). 마리아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묻기를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일이 내게 있으리이까”(1:34)라고 하였다.

 

복음서들은 동정녀 탄생을 증인들로부터 실제 역사에 대한 자세한 보도”an orderly account, 1:1-4)라고 표현하였다. 만약 동정녀 탄생이 거짓이라면 복음서의 역사적 신뢰성이 심각하게 손상된다.

 

3) 이러한 사실을 요리문답이 잘 요약해 준다.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참으로 인간이셨고 참 하나님이셨음을 증명해준다.

 

하이델베르그 제14주일은 이렇게 성경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은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스스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친히 참된 인성을 취하셨다.”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는 창세전에 성부의 본질로 부터 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시간 안에 자기 어머니의 본질로부터 나신 사람이시다....한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것을 신실하게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14주일에 보면 왜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이 되셨는가? 14주일 제36문답의 답에 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 되시고 그 분의 무흠하고 완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있었던 나의 죄를 가려주시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가려질수 없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라고 했다. 여기서 다윗이 말씀하는 것은 자신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에게서 탄생이 아니라면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충분한 인간성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의 탄생이 여느 사람의 출생처럼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합에 의해서 탄생하였다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해야 하는 그의 충만한 신성을 의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참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지니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치는 말

 

예수님은 타락한 아담성의 부패의 저주를 물려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동정녀 탄생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나 죄는 없으시다(4:15; 7:26, 27).

 

모든 인간 아버지는 죄성을 가진 자녀를 낳는다. 죄인들은 죄인들을 낳는다(51:5).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나 이것이 타락후의 세상의 방식이다.

 

만약 요셉이 예수님의 참 아버지이거나 마리아와 동침하였다면 예수님은 흠이 없지도 무죄하지도 완전히 거룩치도 않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중재자도 없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도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위한 전가할 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정녀 탄생은 우리의 신앙의 필수적인 것이다.

 

 

출처: 영적분별력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구원의 완성.. / 송영찬 목사

 

<에클레시아 3.0> 그 스물두번째 이야기

구원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원 창조의 질서가 파괴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원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고 부패시킨 죄에 대해서 구속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이 구원의 결과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여 마침내 새 창조를 완성하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 완성이다. 바로 그 모습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통일된다. 무너진 원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고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 곧 구원이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그의 백성을 택하셨고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준비하셨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온 인류와 우주를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시도록 작정하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과 전능하심과 영원하심이 나타나고 있다. 이 안에 우리가 부르심 받아 들어가 있을 때 비로소 복음에 대하여 정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① 구원의 완성은 창조 질서의 회복에 있어

내가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계획안에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해 가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부르심을 받은 지체들과 필연적인 관계를 이루어서 그들과 공동으로 이루어가야 할 역사적인 사명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좀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나에게 임한 구원은 곧 지금까지 진행된 역사의 완성으로 임한 결정체이다. 그리고 지금 나의 위치는 그 결정체를 완성하는 마지막 위치에 있어야 한다. 나아가 다음 시대 교회에게 구원의 결정체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의 최종점에 서 있는 구원의 완성체이며 나아가 계속해서 다음 시대 교회에게 구원을 완수하기 위한 원인자가 되고 마침내 이러한 구원의 연속성의 결정체가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들과 우주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 있을 때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 있다. 정상적인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고 그 복음에 따라 자기의 생명력이 발현될 때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신다. 이 일을 성취해 나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작용하시는 정도(正道) 안에 있는 경우에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한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여러 과정에서 일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사도는 정하신 성도들을 그 목적지인 영화의 자리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가리켜 ‘선을 이룬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은혜가 되고 자기에게 크나큰 교훈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그 복음에 따라서 우리의 생명력이 발현될 때 그 사람이 비록 세상에서 어렵게 아니면 편히 살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과는 관계없이 구원을 완성해 내고야 마는 상태,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이 완성된 상태를 가리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그 과정을 ‘선’이라고 한다.

② 복음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 안에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어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고 마침내 그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하시려고 구원의 역사를 친히 경영하시고 이끄신다. 그래서 친히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성취하셨고 그 안에서 각각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모으시어 구원을 완성해 나가신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을 마침내 성취하시는 역사의 진행 가운데서 나온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 안에서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명백히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 곧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신실한 언약의 시행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가 순일한 복음에 접촉하고 반응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일에서부터 그 자신을 계시하시기 시작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여타의 기기묘묘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먼저 그의 자녀들을 순전한 복음에 접촉케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가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에 접촉한 성도들은 그 복음을 흡수하고 소화시켜 지식이 자라남으로써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신실한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 가게 되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 가게 된다.

마치 신생아가 처음부터 어머니를 알아보고 어머니를 위해 효도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신생아에게 자기의 신선한 젖을 먹여 자라게 해서 그 장성한 아이가 나중에 어머니를 위해 효도를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새 생명으로 태어났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보존하고 장성케 하기 위해 신령한 젖을 공급해 주신다. 우리는 그 신령한 젖을 먹고 자라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깨달아 그의 영광을 발현하기 위한 자리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③ 교회는 복음을 순결하게 보수해야

하나님께서 그의 신령한 자녀들에게 공급하실 신령한 젖을 위탁하신 곳이 바로 교회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개혁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신령한 자녀들을 위해 공급하시고자 하신 신령한 젖 곧 복음을 순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한 그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 이 복음이 오염되지 않게 파수하고 이단들로부터 복음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나아가 이 복음을 잘 간직하여 다음 시대 교회에게도 전수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순일한 복음이 역사를 타고 우리에게까지 전수된다.

바로 이러한 전달의 과정에서 곧 우리에게 순수한 복음이 전수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보호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받은 복음은 이미 상당히 훼손되거나 오염되기 쉽다.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만 순수한 복음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만일 하나님께서 순일한 복음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 위해 복음이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복음을 섭취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복음이 참으로 살아 있고 우리의 생명이 새 생명으로서 분명하다면 그 복음의 능력으로 장성하게 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다운 품성이 드러나고 정상적인 생명의 모습이 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새로운 생명력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구제 사업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는 등의 종교적 행사를 하는 것에서부터 구원받은 생명이 발현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일 먼저 정상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정당하게 반응하는 것이 그가 참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표징이 된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복음이 아닌 것에 반응하고 마음이 끌리어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비록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또 어떤 직분을 맡아서 봉사하고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는 데까지 내어준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새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살아있는 생명이라 한다면 복음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 반응할 수 없다. 때문에 이단 사설(邪說)에 빠져 있다거나 복음이 아닌 비진리에 대해서 고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함부로 새 생명을 가졌다든지 중생했다고 말할 수 없다.

<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104-108>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