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얻은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는가? (가룟 유다, 사울 왕, 히6:4-9의 경우)

[질문]

히브리서 6장 4 - 9절을 근거로 해서 가룟 유다와 사울의 경우처럼 한 번 잃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연 한 번 얻은 구원을 잃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까?

[답변]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 대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자체가 사실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이 인간의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잃고 안 잃고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구원했다는 뜻이 되어 버립니다. 한 번 준 구원을 언제든 취소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채 예수님을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이 질문이 성립되려면 구원 받은 인간이 구원 이후에 하는 짓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들어 하나님이 구원했을 때의 그 심정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인간이 구원 되었을 때의 상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상태입니까?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롬5:8)

간혹 질문자가 적시한 대로  히브리서 6:4-9절을 근거로 해서 사울 왕과 가룟 유다의 예를 들어 구원 받은 사람도 그 구원이 취소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성경의 진리를 추적해서 과연 그런 주장이 옳은 지 살펴 보기로 합시다.

사울 왕의 경우

성경에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한 삶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하나님의 인류 전체를 향한 구속사를 진행 시킴에 있어서 일정 부분의 역할만 담당 시키기 위해 선택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구원과는 상관 없이 악역 배우 역으로만  등장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할 줄 아셔야 하는데 사울과 유다의 경우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 배경을 자세히 살펴 보면 사울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원래 의도는 완전한 신정 국가였습니다. 세속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라고 줄기차게 사무엘에게 요구했습니다. 실망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8:7)고 그 사태를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재차 그들에게 세족적 군주 제도의 폐해를 열심히 설명해 준 후 “그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8:18)고 까지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자 할 수 없이 하나님은 사무엘더러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비록 성경 기록에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불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 보았노라”(삼상9:16)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어디에도 사울 개인에 대한 구원의 언급은 없습니다. 자기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초대 왕의 역할을 할 자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선택에 주권적 간섭을 했다고 해서 사울을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려 하나님이 자기들의 왕이 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기준에 합당한 왕으로 사울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드는 왕 다윗을 예비 해 놓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뽑은 왕 사울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 다윗과 극명하게 대조시키기 위해 그를 세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울의 무엇을 보고 왕으로 뽑았습니까?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삼상9:2) 그들의  기준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다”에 가장 적합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세울 때에 사무엘에게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고 했습니다. 오직 백성의 요구에 맞게 고른 왕일 뿐 내 참 의도와는 상관 없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삼상16:12) 신체적 조건을 말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해 얼굴이 동안이었고 눈은 천진난만할 정도로 순수했다는 것입니다. 전쟁과는 전혀 상관 없는 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자기들을 앞서 나가 싸워줄 전쟁의 용사를 왕으로  구했지만,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세울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용모와 신장을 보지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했다고 기록된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해에 맞추기 위해 신인동형법(神人同型法 Anthropomorphism) 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구원했다가 취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 예언을 했다는 것(삼상16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구약 시대는 알다시피 성령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요엘이 예언했었고 승천하시기 전 주님이 약속했던 대로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 이후 신약시대는 성령이 신자에게 한 번 임하면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모든 성도가 성령의 전이 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개인의 구원과는 상관 없이 성령이 특정 사건의 특정 인물에 특정 목적으로 일시적으로 왔다가 떠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세우는 절차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하며 또 본인을 좀더 강건하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당신의 뜻을 거슬려 세속적 왕을 세워주지만 전혀 자격과 능력도 없는 왕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악인이라도 일반적 은총으로 다스리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망하게 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설령 자격 없는 자를 세웠거나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서라도 그를 변화시키기 원한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기골만 장대했지 성격은 매우 부끄러움이 많은 자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택함을 받고도 숙부에게 “사무엘의 말하던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삼상10:16)했으며 모든 백성이 모인 중에 왕으로 선출되었음에도  행구 사이에 숨었습니다.(10:22) 그러자 백성 중 일부는 심지어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아니”(10:27)했습니다. 그런 사울을 좀더 담대한 왕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구원 받은 자라면 처음부터 악신이 그를 괴롭힐 수 없으며 나아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본인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여 자신의 일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기를 왕이 되고 여러 사건을 겪고 난 한참 후에야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삼상14:35) 고 합니다.

사울의 생애를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님이 왕으로 선택한 직후를 포함해 구원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에게 완전히 겸비하게 무릎 꿇은 적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께 구원 받으면  반드시 진정한 회심이 따르며 삶에서 실제 행동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구원을 위해 선택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왕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세움 받은 것 뿐입니다. 처음부터 구원 받지 않은 자였으므로 구원이 취소된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

하나님이 인류 구속사를 진행시키는 과정 중의 한 역할만 맡기려고 뽑았다는 것이 가룟 유다의 경우에는 더욱 명백합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雇價)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11:12,13) 스가랴 선지자는 주님 오시기 500여년 전에 이미 유다의 배반을 예언했습니다. 예언대로 유다가 배반했었으므로 그 예언의 역할을 맡을 자로 뽑힌 것이지 처음부터 구원을 전제로 선택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길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는 또 다시 이왕 씻겨져야 관계가 생긴다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겨 줘서 더 많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덤벼 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요13:1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목욕했는가, 식사 전에 손 발을 씻었는가를 따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목욕한 자란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택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듯이 구원 받은 자라도 매일의 삶 속에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가 있는데 그것도 매일 주님께 씻음을 받고 또 제자들끼리 서로 용서해 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요13:11)라고 유다는 목욕하지 않은 자 즉 구원을 위해 택한 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럼 이제 문제는 배반할 줄 알고도 선택한 주님 쪽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입니다. 그럼 유다를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고, 또 설사 잘못된 선택을 했어도 유다를 삼 년간 같이 다니면서 깨끗게 해서 구원해 줄 수도 있었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맞습니다.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유다는 반드시 언제 어디나 있게 마련입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인류 구속의 신비는 영원을 꿰뚫는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유다라는 한 특정인의 입장에서 이 경륜의 잘잘못을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고의로 유다를 택해 그가 배반토록 하고 비극적인 자살로 강제적으로 몰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배반했을 때 이미 그 모든 되어질 상황을 알고 계셨지만 아담의 자유의지에 맡겼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말리지 않거나 미리 사탄의 흉계를 막아 주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치 않게 하려면 인간에게서 자유의지를 뺏고 전부 로보트 같은 인간으로 만들든지 사단을 아예 없애 버려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참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해 자신을 배반할 줄 알아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이 준비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처음부터 유다가 배반할 자인 줄 알지만 그를 택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속사 가운데 제 3, 제 4의 유다는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의 어느 집단에나 배반자는 반드시 있습니다. 수난 받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야 스승에게 로마를 무찔러 주는 메시야를 기대했던 유대인 제자 중에서 배반자가 한 명 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시고도 유다에게 3년간 한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도 않았고 차별 대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계라는 중책을 맡겼습니다. 아마 여러 번 그에게 마음을 고쳐 먹을 기회도 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까지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마26:21)고 회개의 기회를 주었고 심지어 유다가 그 배반할 제자가 자기인가 물었을 때도 “네가 말하였도다”(26:25)라고 직접적으로 마지막 경고까지 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완악하여져 죄 짓는 것 조차 하나님이 막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책임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유다가 배반할 줄 알고도 택한 것을 가지고 유다에게만 마치 불공평하게 대한 것으로 착각하셔선 안 됩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다 뿐 아니라 제자 12명 다 예수님을 버리는 자로 선택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수제자 베드로마저 세 번 부인했지 않습니까?

이것은 유다에 대한 주님의 형평성의 문제도, 유다가 구원을 받고도 구원이 취소되는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12제자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베드로마저 저주하며 부인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삼년을 가르침을 받고 동고동락을 해도 그 깨우침만으로 절대 구원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목욕시켜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목욕시킨 후 내 쫓아 내겠습니까? 그럴 것 같으면 왜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까? 목욕은 일회로 충분하고 발만 씻으면 되는 것입니다. 발을 안 씻었다고 목욕한 사실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4-9

그런데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드는 성경 근거는 히브리서 6:4-9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 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를 해석하는 근본적인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책의 제목 그대로 유대인을 대상으로 지은 책입니다. 그래서 일차적인 수신자가 유대인들이었으며 본 구절이 의미하는 내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할 수 있는 기적과 표적을 보았고 예수님이 직접 증거하신 말씀도 들었고 부활을 목격했음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이후의 유대인들(지금 히브리서의 수신자)도 똑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하여 선조들이 예수님을 못박은 것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 못 박았던 자들과 다름 없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본 구절들의 표현이 마치 구원을 얻은 자가 타락하는 것처럼 되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것은 다 같이 “한 번 비췸”, “맛보고”, “참예 한바 되고”, “맛보고” 네 번 모두 일회성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부흥회나 은사 집회 가서 말씀에 은혜 받고 심지어 병이 낫고 방언도 터졌는데 예수님을 믿지는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성령으로 완전히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 밭에서 채소를 내면 구원을 얻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저주를 받는다고(히6:7,8) 했는데 신약 성경 전체적 맥락에서는 나무가 다르면 다른 열매를 맺는 것이지 나무가 노력한다고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저자가 앞장에서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으로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2)고 믿음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6)라는 구절이 논란이 될 소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타락한 자들은 거룩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타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 죄를 지었다고 해서 다시 용서 받지 못한다거나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 구절의 앞 뒤 문맥을  살피면 예수님을 못 박는 잘못을 하는 타락입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신성을 끝까지 거부하고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타락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떤 문제에 봉착하는가 하면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가 예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고 성령 세례를 받았으면 성령님이 타락을 막아 주시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경은 분명히 자연인에게 성령의 간섭이 있어야만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자라면 스스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본 구절이 스스로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타락한 자를 지칭한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구원과 상관이 없었던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히브리서 본문과 같은 설명은 이곳과 벧후 2:20-22 두 군데 뿐입니다. 베드로 후서의 경우도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신자들이 선한 생활을 하며  복음을 따르는 듯 하다가 다시 이단 사설에 넘어가 배교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지 거듭난 성도들의 도덕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구절에 조금 오해할 소지가 있는 표현이 있을 때는 성경 전체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은 완전히 거듭난 신자를 두고 윤리적 타락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원 자체의 취소에 대해선 어느 곳에도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두 구절로 인해 미혹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이므로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범죄한 것을 회개케 하여 죄인을 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자체를 새롭게 바꾸어 범죄 한 것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생이자 새 피조물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구원된 신자를 다시 죽이면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자들이 교회도 나오지 않고 도저히 돌아 올 수 없는 것 같은 타락한 겉 모습만 보고는 마치 구원 받은 자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해선 안 됩니다.  교회 안에 거듭난 신자는 사실10-20%에 불과하거나 더 낮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과 본인만이 압니다.

예수 믿었다는 것, 거듭났다는 것, 구원을 얻었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그 형벌을 면한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어떤 선한 행위나 경건한 제사로도 도저히 구원은 불가능했고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만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확신이 있는 자이며 두 번 다시는 죄의 종과 사단의 노예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돌아 갈 수도 없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이렇게 간단하게 접근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생의 확신이 있는 자에게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몰랐을 때의 생각과 생활로 다시 되돌아 가기를 원하는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 같습니까? 백이면 백이 ‘노(No)’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죄를 안 짓고 윤리적으로 타락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두 번 다시 원죄 아래로 돌아가 사단의 종이 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그러지 않겠다는데 왜 하나님이 구원해 놓은 자의 구원을 취소하겠습니까?    

박신목사

1장 방향설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순종과 고난 그리고 죽음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런 구원 사역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삶에 적용되어 질 때 비로소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구원론이다.

본 책에서 다루는 신학의 입장은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전통에 의한 복음주의 노선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성을 갖고 있다.
1) 누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다.
2) 구원의 뿌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두고 있으며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영생을 주시고자 그의 백성을 택하신 것에 있다.
3)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그의 택한 백성(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어지는 보편적이 아니라 특별한 은혜인 것이다.
4)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며 또한 유기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5)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기 위하여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1. 역설의 의미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한 전적주권을 갖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그의 뜻에 따라 인도 하신다는 사실과 한편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결정해야하며 그 결정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성을 하나로 일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사실을 모두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1)에서 볼 수가 있고
인간의 책임성에 대해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이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편 다음의 두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성경적 진리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인자는 이미 예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눅 22: 22)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니” (행 2:2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작정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 자는 그들의 악행에 대한 응분의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2. 상관관계들

구원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죄로부터 구속하셨는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구원론이 신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에 가서는 구원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이루게 될 것이다.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인 기독론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믿는 자만이 성경적인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아타나시우스는 “내가 나의 구속주로 믿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다”라고 강력하게 말한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구원론은 또한 기독교 인간학 혹은 인간론과 관계가 깊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인간이 구원에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해져 있으며(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죄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인해 중생되어지며 새 영을 힘입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개력주의 혹은 칼빈주의적인 구원론을 굳게 믿는 자이다.

구원론은 성령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며 믿음 안에서 인내하게 하신다. 다시 말하면 구원론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과정 전체에서 구원을 성령이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구원론과 종말론(마지막 이들에 관한 교리)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먼저 우리는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으로 구분지어야 한다.
시작된 종말론이라 함은 신자들이 종말론적인 추복들을 현세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기에 구원의 축복들을 이미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랬다.
미래적 종말론이란 다가올 종말론적인 사건들에 관한 교리를 말한다. 이생에서 얻고 있는 구원의 축복들은 우리가 다가올 세상에서 얻기를 대망하고 있는 더 큰 축복들의 전조일 뿐이다.

2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구원의 교리를 잘 이해하려면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함에 있어 어떤 순서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1) 죤 머레이(John Murray)는 그의 저서 <성취된 그리고 적용된 구속>이라는 책에서 “구원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그의 지혜 그리고 은혜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했다.
머레이는 로마서 8:23로부터 부르심(calling), 의롭게하심(justification), 영화롭게하심(glorification)이란 구원의 순서를 추출하고 있다. 이 순서를 근간으로 하여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를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즉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정리했다.

2)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서 성경은 이와 같은 형태의 구원의 순서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구원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즉 부르심, 중생, 돌이킴(회개와 믿음을 포함),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 라고 정리했다.

3) 다른 한 극단적인 예가 벌카우어(G.C.Berkouwer)의 경우이다. 그는 구원의 순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성경에서 구원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할 수 없다고 하며 그는 믿음은 구원의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구분점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널리 편만해져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순서”라기 보다는 “구원의 길”이란 표현을 더 좋아한다.

2. 어려운 문제들

구원의 순서를 정하려고 할 때 우리가 당면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1) 구원의 순서를 설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와는 다르게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2)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단계들의 순서가 항상 똑같이 않다.
3)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 중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 삶을 통해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다.
4)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5) 구원의 순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3. 우리가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해서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씩 다루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서 토의하지만 이 둘이 언제나 항상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길에 혹은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4. 함축된 의미들

구원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신학에 대하여 갖는 함축성은 무엇인가?
1) 중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처음에 일어나지만 그것이 주는 여파는 신자가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어 진다. 또한 믿음과 회개가 시초에 일어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역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져야 한다. 또한 칭의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자마자 일어나지만 칭의가 수반하는 혜택들의 소유를 위한 일평생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성화는 신자의 일평생에 걸처 지속되며 죽기 전까지 완료되지는 않는다. 믿음 가운데서 인내 역시 일평생의 행위이다.

2) 구원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국면들은 동시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상호적이다. 중생은 반드시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게 마련이며 또한 성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3) 성화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종말론에 속한 것이기에 현재의 삶 가운데 종결되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그가 이 생애 있는 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즉 이미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은 온전한 자가 아니다.

정리를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영적인 성장은 하나의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이러한 성장이 반드시 위기 혹은 절정의 경험의 형태를 이룰 필요는 없지만 성장 자체는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는 갓 개종한 자들에게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밷전 2:2)
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범사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찌라”(엡 4:15)

그렇다면 구원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이 연속되는 단계들이 아니라 동시적인 사건들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와 구원의 희열을 갖게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자라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장 성령의 역사

1.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성령은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유일한 동인이다. 바을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라고 가르치고 있다.(딛 3:5)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6:63)
 구원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바을은 우리가 다 한 영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느니라.(고전 12:13)고 했다.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주요 요소들이 성령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생 혹은 신생은 성령의 사역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요 3:5)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신자들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다. 바울은 “너희는 양자됨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고 했다.

2.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구분 짓는 일반적인 방법은 기적적인 은사와 비기적적인 은사와의 구분이다. 비기적적인 은사에는 가르침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 구제와 긍휼을 베푸는 은사들이 있으며(롬 12:6-8) 기적적인 은사에는 병고치는 은사(고전 12:9) 기적을 행하는 은사(고전 12:10)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고전 12:10)가 있다.
 
 바울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복리에 필요한 것은  가르침과 다스림의 능력과 같은 비기적직인 은사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있다고 했다.(고전 14:1-5, 12, 18-19) 바울은 목회서신 어디에도 교회 직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에 대하여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하여 말 한 마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가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가르침과 다스림의 은사들이다.

3. 교회의 치료사역

 이상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병 고침의 은사를 포함한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 속에서 더 이상 기대되어서는 안될 듯하다. 이 논리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에 의한 주장도 아니요 오직 신약성경의 여러 자료들로부터 추론된 결론이다. 그러나 지금도 때를 따라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회의 치료사역에 대하여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치료는 교회의 정상적인 사역의 일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치료라 함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치료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기도가 반드시 병고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들째, 이러한 치료사역은 의학적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도해야 할 병고침은 단순히 육체적인 병고침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들의 치유는 영적이며 정서적인 치유와 근심의 제거 및 파기된 가족관계의 회복등이 포함 되어야 한다.

4. 성령의 열매

 갈라디어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얘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새롭게 발견한 자유의 열쇠는 성령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갈라디어서 5:22에서 열매를 가르치는 단어를 단수로 쓰고 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육체의 일들과의 대조이다. 육체의 일들이 많음에 비교하여 성령의 열매는 하나이다. 여기서 바울은 육신적인 탐욕은 단일성이 결여된 반면에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은 조화와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령의 열매를 과실이라 부름은 열매가 자라난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열매가 성숙하여 익게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영적인 성장의 지속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향한 복합적인 열매이다.

5.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함은 중생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중생 이후의 경험으로서 성령세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신자들은 언제라도 특별한 임무를 감당키 위하여 성령 충만을 언제라도 요구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예배와 교제에서 나타나야 한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한다는 뜻은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고 성령의 힘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메일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4장 그리스도와 연합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내주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만이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뿌리를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두고 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근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근거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두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전한 바를 기억하고 있다. “그를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니라.”(마 1:2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 있으니 그의 양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엡 1:4)

3.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1) 우리는 제일 먼저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다. 거듭남이라고 불려지는 중생의 의미는 성영께서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와 산 연합에 이르게 하시고 그럼으로 한 때는 죽었던 우리를 이제 영적으로 새롭게 살리셨다.
 2)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이 연합을 소유케 되며 이 연합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와 의를 부여하심으로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온전히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4)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거룩하게 된다. 점진적 의미의 성화는 성령께서 믿는 자의 삶을 점진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통해 믿음의 삶을 견디어 낸다. 성경은 참다운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되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믿음의 삶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보존하신다. 이것을 견인의 축복이라고 한다.
 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롬 14:8 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7)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받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살아남을 받은 자들이다.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어 질 것이다. 골 3: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있다.

4. 그리스도와 연합의 중요성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개개인의 갱신을 가져오긴 하나 그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궁국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 우주의 새롭게 됨과 새로운 창조를 포함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그리스도 사역의 두 개의 중요한 측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아마 법적인 측면과 역동적인 측면일 것이다.
터틀리안이나 안셈과 같은 신학자들로 대표되는 서방측 기독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법적 근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죄책을 강조한다. 이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를 통하여 제거하셨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죄책에 대하여 만족을 성취하였다.
한편 이레니우스와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신학자로 대변되는 동방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생동적 혹은 삶을 같이하는 측면을 강조했다. 이들이 강조하는 죄의 측면은 오염인데 이 오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와 연합함으로 제거하였다.
서방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적 혜택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이며 동방교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5장 복음의 초청

 복음의 초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사람들에게 제의하는 일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초청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와 영생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1. 복음초청은 듣는 사람 모두를 초대한다.

 복음 초청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복음 초청이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듣는 자 모두에게 전달된 초대라는 것이다. 이 점은 혼인 잔치 비유(마 22:1-14)와 대 잔치 비유(눅 14:16-24)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이 두 비유는 각각 복음 초청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처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인 유대인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들을 통해 일찍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고 있으나 두 비유에서 먼저 초대된 이들 모두가 오기를 거절하였다. 그럼 나중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유대인은 유대인이로되 첫 번쩨 그룹에 끼지 않은 사람들 _ 세리들, 죄인들 - 을 가르키는 것 같았다. 이 둘째 그룹의 사람들은 기꺼이 잔치에 나온다. 단지 누가복음서에만 언급되고 있는 세 번 째 그룹의 사람들(길과 산을가에 있는 사람들)은 후일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완수하게 될 즈음에 복음을 듣게 될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신들의 죄된 상태를 인정하는 자만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지만 복음초청은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상관없이 모든 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2. 복음 초청은 진지하게 의도되었다.

 훅스마에 의하면 복음이 진지하게 사람들에게 제의되었다(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도록) 는 주장은 제한 속죄 교리와 상충되고 있다고 한다. 정말 구원에 이르게 되는 복음의 진지한 제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속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택정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그리고 좋은 의도로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의하신다는 것도 주장한다.

 하나님은 결코 참회치 않는 죄인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3. 좋은 의미로 의도된 복음제시와 돌트신경

 이상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개혁주의 신조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돌트신경에는 이 문제에 관해 두 가지 조항이 관련되어 있는데 첫 번째 조항은 제 2장 5조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아무런 차별과 차이없이 선언되고 선포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한 기쁨 안에서 복음을 보낸다.

4. 합리적 해결을 위하여

 1) 하나님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2) 훅스마와 초칼빈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셩경이 분명히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자들 중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장 효력있는 부르심

 복음 초청에 대한 응답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어거스틴(354-430)과 그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 복음 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국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명백히 하였다. 이 어거스틴의 전통은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여기서 사람은 본성상 복음의 초청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원죄라 불리우는 죄된 상태와 조건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 원죄는 철저한 부패성과 영적 무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적 무능력 때문에 중생치 못한 사람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 없이는 자기 삶의 근본적 방향을 죄된 자기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꿀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내면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불러왔다. 전에 공부한 복음 초청을 외적 소명이라 하면 이런 종류의 부르심은 내적 소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1.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경적 기반

 타락한 인간이 본성상 어떠한 가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잠시 생각해 보자. 성령의 특별한 사역 없이도 복음 초청에 대해 믿음과 회개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성경은 분명히 그렇지 못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전 2:14, 롬 8:7, 엡 2:1-2, 요 3:3, 5, )
따라서 성경에서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로 하여금 복음 초청에 대해 “네”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유효적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2. 효력적 부르심의 목표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다. (고전 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딤전 6:12)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로 (살전 2:12) 그리고 거룩한 삶에로 (살전 4:7, 딤후 1:9)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벧전 2: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갈 5:13) 와 화평(골 3:15)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삶 즉 지금의 악한 세상과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부지런한 참여를 요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3.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효적 소명

 어거스틴의 교리에 의하면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될 때 어떤 이는 믿고 또 다른 이는 믿지 않는다. 믿는 자는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설교자의 목소리를 듣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은 귀로는 듣되 내적으로는 듣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전자에게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주어졌으나 후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친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도다“ (요 6:4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칼빈도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르쳤는데 그는 그것을  “내면으로 향하는 부르심”이라 불렀다.

 그러면 복음의 부르심과 유효적 부르심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 둘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무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러 돌아온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외적(혹은 복음의) 부르심을 통하여 전파되게끔 하시는 말씀이나 내적(혹은 효력있는 ) 부르심을 통하여 성경에 의해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시는 말씀이나 동일한 한 말씀이다.”

4.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1) 이 교리는 복음 전도열과 선교열을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로 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불신앙을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3) 유효적 부르심에 관한 교리는 앞서 논의한 바 있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빗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본성의 상태는 어떤가?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다. 죄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살아 날 수 없다. 죄 가운데 죽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귀들은 복음의 부르심에 귀가 먹었고 우리의 눈들은 복음의 빛에 대해 멀어 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하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놀라운 은총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영적 암흑에서 그 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효력적으로 부르실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7장 중생

 중생(거듭남) 혹은 신생이라고도 한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하사하신 선물이다. 중생은 구원의 과정 중 첫 출발을 장식하기에 더욱 중요한 주제이다.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 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밍에서의 중생이다. (요 3:3,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약 1:18, 벧전 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마 19:28)

 좁은 의미의 중생의 의미가 중요하다. 즉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사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게 하신다.

2. 인간 부패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중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인간의 부패성에 관한 이해에 거의 매달려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철저하게 부패하였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에서 잘 가르처 주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너희는 죽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엡 2:1, 4-5)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비로서 그때에야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신 30:6에서는 우리의 영적인 갱신을 마음의 할례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안들을 깨끗하게 하셔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중생에 대하여 더 많은 가르침을 준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대모의 가르침은 중생에 대한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이 새로운 출생은 위로부터의 출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 뒤에는 그들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행위가 있다.
 중생을 요약하면 중생은 영적인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적인 변화이며 성령에 의해 역사되며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는 우리 본성의 내면적 새로워짐을 맗라는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하여 일어난다.

4. 중생의 본질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3)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이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칼빈주의자들은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를 믿는다. 이 문구는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지칭하는 TULIP(튜립)의 네 번째 약어이다. 이 의미는 중생은 일방적이지 상호협력적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혼자만의 사역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은혜는 참으로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것이다.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1)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의 관계 : 협의의 중생을 효력적 부르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미 17세기 신학이 이 두 가지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회개외 믿음을 통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기에 중생과 별다름이 없다.
 2) 중생과 돌이킴과의 관계 :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돌이킴(회심, 개종)과 동일시될 수 없고 구별되어야 한다. 중생은 돌이킴에 이르게 된다.(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다시 말하면 돌이킴은 중생이 일어났다는 외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즉 중생이 돌이킴보다 앞선다. 루디아성 자주 장사의 돌이킴이 그 예이다.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 일반적으로 성화는 평생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면 중생은 성화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 중생은 사회적 측면을 갖고 있다. 즉 “거듭난다”는 말은 개인주의적 의미로 “개인 구원”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4) 중생과 세례와의 관계 : 세례는 죄의 용서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세례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세례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이다. (딤 3:5)
그러나 세례를 통해 받은 중생도 다시 상실될 수 있다고 로마 카토릭교와 루터교들은 말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은 세례는 우리의 중생에 대한 증표와 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약은 세례를 통해 세례 받은 자에게 은혜의 언약 또 그가 그리스도께 접붙임바 되었다는 사실, 중생했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 걷게 된다는 증표와 도장으로 주어진다.

8장 돌이킴(Conversion)

1. 돌이킴이란 무엇인가?

 돌이킴이란 거듭난 사람이 의식적인 행동을 통하여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 정의한다.  돌이킴은 두 가지의 돌아섬을 의미한다. 하나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며 또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에로의 돌아섬이다.

2. 돌이킴 : 하나님과 사람의 일
 
 돌이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역이다. 비록 돌이킴이 거듭남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만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얻게된 새 생명은 우리가 그 분과 계속적으로 연합하여 있는 한 나타나게 된다고 가르치셨다.

 좁은 의미에 있어서 돌이킴을 거듭남(중생)으로부터 구별짓는다면 돌이킴은 사람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신구약을 통하여 돌이킴은 하나님의 사역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사역으로 종종 묘사되곤 한다.
 사례를 찾아보면 구약에서는 사 45:22, 겔 33:11을 생각하고 신약에서는 행 2:38, 행 16:31,롬 10“9에서 찾아 볼 수있다.

3.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이킴

 진정한 돌이킴은 단회적 사건이다. 그 예는 성경에 많이 있다. 나아만(왕하 5;15) 므낫세(대하 33:12-13) 삭개오(눅 19:8-9), 오순절의 삼천명(행 2:1), 사울(행 9:1-19), 고넬료(행 10:44-48), 루디아(행 16:14), 빌립보 감옥의 옥사장(행16:29-34)

 성경은 가끔 소위 민족적 개종에 대하여 언급한다. 즉 전체 국가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때를 가르킨다. 그 예로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만을 섬기고 그에게 복종하기로 한 경우(수 24:14-27) 히스기야 시대(대하 29:10-36), 요시야 당시 (왕하 23:1-3) 또한 요나의 설교에 따라 니느웨 사람들의 개종(욘 3;1-10)을 들 수 있다.

 일시적 개종도 있다. 진정한 회심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경우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바위틈에 떨어진 씨를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개종으로 제 2의 회심을 말할 수 있다. 다윗의 회심이 이렇다. 시 51편은 그의 제 2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는 소아시아 7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고 말씀하신다.

4. 돌이킴 형태의 다양한 변형들

 돌이킴이 한 사람의 전 인격이 관영되는 일이긴 하여도 주로 지 정 의에 관계하고 있다.
 주로 지성적인 개종의 좋은 예가 루이스(C. S. Lewis)의 경우이다. 그는 지적인 문제들과 회의들과 씨름하였으나 결국 하나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의지적인 개종의 예로는 어거스틴(Augustine)을 들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고민하고 갈등하였으나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던 그가 로마서 13:14을 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할 힘을 얻게 된다.
 감성적인 개종의 예로는 존 번연(John Bunyan)을 둘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심한 내면적 정서적 갈등과 고통의 세월을 보낸 후 최종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함으로 영혼의 평안을 가졌다.

9장 회개

 마태복음에는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슬퍼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은 자기의 주님을 부끄럽게도 부인했던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은 삼십 냥에 자기의 주인을 배반한 유다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죄의 용서함과 회복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 베드로의 회개는 참된 것이었지만 유다의 회개는 그렇지 못하였다.

1. 회개의 중요성

 한 마디로 바울 사역의 목표는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 회개의 선포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회개를 촉구하는 엄한 음성이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2. 회개와 믿음의 관계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어떤 이는 회개가 믿음에 앞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반대로 이야기 한다. 칼빈은 분명히 이야기 한다. “회개는 끈임 없이 믿음을 뒤따라야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고 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생(거듭남)으로부터 나오며 돌이킴(회심, 개종)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했다.

3. 단어 연구

 회개의 구약 히브리어는 “니함”과 “수브“가 있다. ”니함“은 유감스럽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다 라는 뜻이 있다. ”수브“는 돌이킨다. 반대 방향으로 가다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외쳤던 회개는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판단을 뒤집으라는 외침이었다. 아덴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회개는 하나님에 관한 그들의 관념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 안에서 삶을 가지라는 호소이었다.

4. 회개의 개념

 회개란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반영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회개는 단일적인 경험이다. 즉 회개는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회개는 다음과 같은 측면들로 구별될 수 있다.
 1) 지적인 측면 :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함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2) 감정적인 측면 : 단지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가슴저리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경건한 슬픔”이라고 불렀다.
 3) 의지적인 측면 : 죄로부터의 내면적인 돌아섬과 용서를 추구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과 동기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내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감사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5. 회개 : 하나님과 사람의 일

 성경은 회개룰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회개를 사람의 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들을 보아왔다.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사 55:7 겔 33:11 마 4:17 행 3:19) 그러나 행 11:18에서는 히개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6. 회개는 한평생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요구하신  그리스도의 요청은 우리가 마땅히 평생토록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바울도 그의 독자들에게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롬 12:2)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한 평생 이루어 나가야 할 사명이며 도전을 말한다.

 회개가 평생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반부에 있는 처음 회개와 그의 평생토록 이어지는 회개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2)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3) 회개는 결코 우리에 의해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0장 믿음

1. 믿음의 중요성

 신약에서 믿음으로 사용된 명사와 동사는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회개와 함께 돌이킴의 본질적 측면에서 구원의 필수 요건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유별난 행위로(요 6:29)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일이다.(요일 13:23)

2.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믿음

 믿음은 신약시대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중심이었다. 일명 “어머니의 약속”으로 불리는 창 3:15에서 최초의 은혜언약의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믿음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벨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고(히 11:4)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5절) 그리고 믿음으로 노아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7절)

 족장 시대를 보면 아브라함이 구약에서 뛰어난 믿음의 본으로 나타나기에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롬 4:1-3)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갈 3:7) 가르친다. 사라 이삭 야곱 이런 모든 자들도 믿음으로 살았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거의 백번 정도 나온다. 여기서 강조점은 이적적인 신앙이 아니라 구원하는 신앙이다.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다.

3.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믿음

 히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다”라고 표현했다.
믿음은 신약에서 수많은 현저한 특징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또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먹는 일로 묘사된다. 한편 믿음은 그리tm도 안에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4. 칼빈의 견해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특히 그 분의 자비를 아는 지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칼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겂없이 주어진 진리에 기초한 것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라도 표현했다.

칼빈은 믿음을
 1)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2) 전혀 알지 못하거나 반쯤 아는 진리들에 대한 단순한 찬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실하게 앎이며
 3) 의심에 반대하는 견고한 확신이나 신뢰가 그것이다.
 4) 믿음에 대한 어떠한 공로도 모두 반대한다.

5. 믿음의 개념

 믿음은 여러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1) 지식이다. 우리가 알지 못한 자나 잘못알고 있는 자를 우리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2) 찬동이다. 찬동이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되다고 확고히 받앙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3) 신뢰이다.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신뢰에는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첨가시켜야 한다.

6. 믿음의 중심적 신비

 믿음의 중심적 신비라는 의미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또다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역설이 있다.

 1)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의 열매이다.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2) 인간의 행위로서의 믿음
 가장 평범한 믿음은 인간이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7.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에 대한 로마교회의 부정적 태도는 결국 복음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였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여기에 포함된 근본 문제는 인간이 은혜로만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부분적으로 자신의 구원이 공적이 되는 선행에 좌우되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가 사실이라면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전자가 사실이라면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다.

11장 칭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그가 갖고 있던 죄의식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딱딱한 마루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손과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죄의 고을은 깊어만 가더란 것이다.
 그가 시편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자주 언급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로 죄인들을 멸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루터는 자신이 죄인임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를 읽으며 1장 16-17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생각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죄인들을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으로 죄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흠없는 완전한 의로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터는 더 이상 자신의 선행으로 평안의 기준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제서야 자신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었고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칼빈도 이와 비슷하게 칭의의 교리를 종교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받아드렸다.

1.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창 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한다. 수많은 씨의 약속이 그로 인해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한 자의 출생의 약속이 포함되었음이 틀림이 없기에 (창 12:3) 여기에 아브람의 믿음은 오실자인 메시야를 믿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여기셨는데 즉 믿음으로 아브람은 의롭게 되었다.
 롬 4:3, 갈 3:6에서 믿는 자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제시하고 있고 야고보도 약 2:23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가 있다.
 1) 이 교리는 구약에 기원하고 있다. (롬 3:21)
 2) 이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롬 3:22)
 3)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다. (롬 3:24)

2. 칭의에 대한 로마교회(카토릭)의 견해

 16세기 로마교회는 루터와 칼빈에 의한 개신교회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에 날카롭게 반대했다. 이를 반대한 내둉이 트랜트 종교회의 6회기애서 나온 규범과 칙령들 속에 포함되었다. 이 6회기는 1546년 6월 21일부터 1547년 1월 13일 까지였다. 1547년 후기에 칼빈은 이 의사롤 논평을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트렌트 신조에 의거한 로마교회 신학에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킨 선포적 행위로써 보다는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본질에 변화를 주는 은혜의 주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부인한다.
 2)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에 있어서 중심적 의미가 아니라 부차적이다. 성경은 롬 3:23에서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트렌트 신조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있으나 그 강조가 아주 약하다고 했다.
 3) 칭의의 은혜는 한 번 받으면 다시 잃지 않는다. 롬 8:30에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한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트렌트 신조는 이것에 반대하여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4) 칭의로 받은 의 또는 의로움은 향상될 수 있다고 한다. 트렌트 신조는 신자가 칭의로 받은 의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 보지않고 신자의 신행을 통해 증감될 수 있는 우리 속의 주관적 자질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5) 칭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공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종교개혁자들이 칭의에 대한 로마 카토릭의 개념을 왜 그렇게 맹렬하게 반대했는지를 명백히 알 수가 있다.

3. 개혁주의 고백서들에 나타난 칭의

 16, 17세기의 개혁주의 고백서들은 종교개혁 개신고의 칼빈주의파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과 벨직 고백서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다음 주제 칭의의 개념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4. 칭의의 개념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법적인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양도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며 또한 그들에게 영생을 누릴 권리를 주는 것이다.

 칭의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그 하나님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실 수밖에 없다.
 2)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혹은 “법적인” 행위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 혹은 선고하시는데 우리 자신들이 사실 어떤 존재냐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 우리의 착한 행실 때문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서 하신다. 이 복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이다. 이 선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이다.(골 1:22)
 3)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롬 3:28)
 4)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5) 칭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이 장을 우리는 “구약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 장에서 주께서 그(고난받는 종으로서 행 8:35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에게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다.(6절)는 것과 이 종이 많은 사람의 죄를 떠맡았다.(12절) 고 했다. 베드로는 이 선지자의 말씀을 자기의 말처럼 그대로 되플이 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언했다. (벧전 2:24)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포함한다.
 7) 칭의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함께 나타난다.
 8) 칭의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적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입적되는 것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권리를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9) 칭의는 종말론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졌기 때문이다.(요 5:24)
 10) 칭의가 성화로부터 절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두 복은 서로 구별된다. 고전 1:30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하신 사람을 반드시 성화도 시킨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함께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주의 깊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즉 칭의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제거하는 반면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방지한다. 칭의는 신자의 밖에서 일어나며 성화는 신자의 안에서 일어난다. 칭의는 평생에 단 한 번 일어나며 성화는 생애에 걸쳐서 계속되는 과정이며 현생이 끝나기 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12장 성화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우리들에게도 역시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우리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화라고 한다.
 레 19:2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벧전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1. 정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정의한다. 성화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전에 우리가 소유했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어떤 능력과 재능을 우리에게 부여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죄된 방법대신 올바른 방면으로 사용하도록 역사하신다.

2. 거룩의 성경적 의미

 거룩이라는 단어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 즉 어떤 영역이나 범주 속에 있는 일반적이고 세석적인 사물이나 사람으로부터의 구별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와 함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어졌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 우리의 성화는 진보한다. (고전 1:30)

 종교개혁 속에서 선언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신칭의였다. 고로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하는 점도 역시 동등한 진리이다.

 신앙 속에서 성화의 방편은 무엇인가?
 1)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계속 유지한다.
 2)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움켜 잡는다.
 4) 믿음은 수용하는 기능일 뿐만 아니라 작동하는 능력이다. 그 자체의 본성 때문에 믿음은 영적인 열매를 산출한다.

3. 성화의 모형

 성화의 모형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요 14:8-9, 고후 4:4, 골 1:15, 히 1:3) 그래서 우리는 성화의 모형이 그리스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성화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과 같이 또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과정 중에 있다. 이 과정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능동적인 노력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하나님의 역사 : 성경은 성화시키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시켜 자지의 형상대로 회복시킨다고 가르친다.
 2) 우리의 능동적인 능력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본에 따라서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직설법인 동시에 명령법이다.

4.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또한 그의 백성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화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공히 담당하신다고 묘사한다.
 예수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라고 성부께 기도하셨다. 이 구절은 성부가 성화의 주체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는 성화의 주체자로 계시되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 (벧전 1:2)

5. 즉각적이고 점진적인 성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위인 동시에 단번에 완성되는 칭의와 구별하여 성화를 신자의 전 생애를 거쳐 계속되는 것으로 구별하였다.
 성화는 즉각적인 동시에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각적인 의미는 성화는 우리를 죄에서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 점진적인 의미는 성화는 계속 시롭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에로 변화시키며 우리를 계속 은총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시며 우리의 거룩이 완전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6. 성화의 사회성

 가끔 성화는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착오이다. 성화는 중요한 사회적 공동체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개체적으로 성화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으로 성화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롬 12:4-5) 성화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에게 관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구를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관심없이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는 우리가 법률 정치적 행위 그리고 매개체의 사용을 통하여 전 분야에 정의가 시행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7. 성화의 목적

 성화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 우리가 영광스런 신적 사역에 대하여 이야기 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 행복이 아니라 단지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성화의 가장 가까운 목적은 하나님 백성의 완전이다. 이 완전은 하나님 형상의 역사에 있어서 최종 단계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우리의 성화가 완전해졌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영화로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볼 수 있을 뿐 아리라 영원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이다.

13장 참 신자들의 견인

 요 10:28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를 끝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는 의미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1. 견인의 개념

 참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믿음을 전적으로 잃어버릴 수가 없다. 참 신앙을 가진 성도가 그 신앙을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개혁 신학에서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참 신자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하기 때문이다.
 참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구원받지 않는 상태에서 사망할 수도 없다. 더욱 이 고백은 성도들의 은혜의 상태 속에서 꾸준히 견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교리의 성경적 근거

 1) 복음서에 있는 구절들
 눅 22:31-32, 요 5:24, 요 6:39, 요 10:27-28,

 2) 서신에 있는 구절들
 롬 8:29-30, 고전 1:8-9, 엡 4:30, 빌 1:4-6, 딤후 4:18, 히 7:23-24, 밷전 1:3-5

3. 견인교리에 대한 이의

 1) 견인교리는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
 성경은 이런 방종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2) 견인교리는 성경과 상충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3 가지의 성구들을 묶어서 예증으로 제시한다.
① 믿음을 지속하라는 권면
② 배교에 대한 경고
③ 실제적인 배교의 경우들

4. 견인에 관한 돌트 신조

 참 신자의 견인교리를 설명하는 개신교 신조에 있어서 돌트 신조(1618-19)보다 더 훌륭하고 완전한 진술은 없다. 중요한 50개의 교리의 요점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 진술들은 명백하고 짜임새가 있다.
 처음 두 조항은 연약하기 때문에 매일 범죄하는 신자의 성향에 대하여 설명한다.
 3조는 신자 자신의 능력에 방임해 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을 진술한다.
 4조는 만일 참 신자가 깨어있거나 기도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심각한 죄 속에 빠질 수 있음을 지시한다.
 7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심각한 죄에 빠진 그의 백성들을 회개시켜 확실하고도 효과있게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8조는 하나님의 백성의 견인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돌트 신조는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이 항상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에는 반대하고 있다. 12조와 13조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확정한다. 즉 하나님에 의한 성도 견인의 보증은 생활의 부주의함이나 도덕적인 방종을 야기시키기는 커녕 실제로 경건을 위한 자극이 된다.

5.결론적 고찰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떠나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시며 그리스도는 누가 자기의 손에서 자기의 양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리고 성령은 구속의 날까지 그들에게 인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두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데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심에 의존한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3IK/36?docid=1QfVM|D3IK|36|20121128084115&q=%B0%B3%C7%F5%C1%D6%C0%C7%20%B1%B8%BF%F8%B7%D0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허참

바다를 항해하는 데 나침반이 필요하고 사막을 여행하는 데 안내인이 필요하듯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있다. 이 필수적인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은 기회를 포착하거나 잃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살을 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오직 의롭게 되거나 죽은 것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서 대단히 고차원의 일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으며, 인간은 자신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며, 또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개개의 인간은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에 대해 구원받는 관계에 들어가는가? 구원받는 관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객관적으로 예비된 구속과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구원 사이의 심연을 어떻게 건너는가? 그리스도께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어떻게 내 안에서 작용하게 되는가? 우리는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배워야 한다. 이 일에 실패하면 영혼을 거는 모험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추방된다. 여기에서 올바르게 행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버림을 받는다.

이 걱정스러운 질문에 대해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 대답을 마련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스도를 당신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라”,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 이 답변들 중 두 가지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며(행 16:31; 요 1:12), 세 번째 것은 앞의 두 가지를 요약하여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답은 세 가지가 아니라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으로 나태하기 때문에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을 위한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만병통치약이 되었으며, 나는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진지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사람은 자신을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접촉으로 인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교훈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양속의 땅으로 가는 지름길로서 그것을 사용하지만 결국 그것이 “어둠의 땅” 질서가 없으며 빛이 어두움처럼 존재하는 사망의 그림자의 땅으로 인도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태도가 옳지 않은데 있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불안한 심령으로 무릎을 꿇고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평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로 하여금 공손한 태도로 자신에 대한 우리의 평결을 기다리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자아를 조금도 버리지 않으며 일상적인 생활 방식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으며 전혀 고통이 없이 정신적인 충동이나 감정에 의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허용할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문제를 이처럼 비효과적인 방법으로 다루는 것은 몇 가지로 비유할 수 있다. 예컨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의 피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계속 노예로 살았다든지 또는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먼 나라에 머물면서 돼지치기로 일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면, 그것과 일치하는 도덕적 행동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표현이 다른 방법으로는 잘 표현할 없는 것을 간단히 말하려는 정직한 노력이라고 인정하고서, 우리가 그 표현을 사용하여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인간의 체험 안에서 주 예수라는 인격에 대한 애정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 애정은 지적이요, 의지에 의한 것이요, 감정적인 것이다. 신자는 예수가 주요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지적으로 확신한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신의 의지로 결단을 내리며, 곧 그의 마음은 주님과의 교제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감미로움을 즐기게 된다.

이 애정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포괄적이다. 오늘 주님이 구세주이심을 인정하며, 주님의 주인되심에 대한 결정을 내일로 미룬다는 등 직무의 구분이 없다. 참 신자는 조금도 보류하는 것이 없이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가장 귀한 분으로 소유한다. 그는 혁명적인 거래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일에 포함시킨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애정은 지극히 독점적이다. 그에게 있어서 주님은 몇 가지 경쟁적인 이해관계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영원히 독점적으로 유인하는 매력이 되신다. 그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듯이 그리스도의 주위를 돌며, 주님의 사랑의 매력에 완전히 사로잡힌다. 그의 생명과 빛과 열기는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끌어온다. 이처럼 행복한 상태에서 그에게 다른 유익들이 주어지는데, 그것들은 그가 주님과 갖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이처럼 지극히 포괄적이고 독점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여기에서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의해 하나님에게로 도약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조금도 수정하거나 보류하는 것이 없이 믿으며, 그리함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 안에서 이루신 모든 것, 지금 하늘나라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모든 것, 그리고 자기 백성들 안에서 그들로 말미암아 행하시는 모든 것을 받고 누린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아니라(요한1서 4:17)”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친구를 우리의 친구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원수는 우리의 원수로 여기며, 그리스도의 방법을 우리의 방법으로 삼으며, 그리스도께서 거절하신 것은 우리도 거절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여기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생영으로, 그리스도의 장래를 우리의 장래로 여겨 받아들인다.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마을/Grace 님


 

거듭남에 관한 진리|

" 주님은 여러분을 천국에서 살게 하고자 이 땅에서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정결하게 하시려고 죽으셨고, 또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여러분은 그분께서 바라시는 만큼 놀랍게 정결해졌습니다.

 그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책임지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이루신 그 일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보시고, 그리스도를 보시듯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 합니다.

 더 이상 죄에 잔뜩 찌들고 잘못된 길로 들어선 불쌍한 영혼들처럼

 음울한 표정을 지은 채 율법주의나 경건주의 혹은 거짓 신학이라는

 복도를 서성거리지 마십시오.

 너무나 오랫동안 이런 일이 되풀이 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분깃이 얼마나 풍성한지,

 부활하사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위치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확실히 깨달아,

 이 땅에서 사는 날동안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주님의 처소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소망 가운데 하루 하루를 보내십시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거듭남에 관한 진리 중에서 [ C. H. 매킨토시 지음. 크리스챤북셀프 ]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2)

C.H.매킨토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되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뭐라고 답하셨는지요? 이것은 특히나 흥미롭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5-8).

여기서 우리는 거듭남 혹은 새로운 출생이 “물과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분명한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심오하고 하늘에 속한 신비들을 알아가려면 그는 반드시 물에서 나고 또한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가장 명석한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그 심오한 비밀들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러하기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으로만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물에서 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당황합니다. 확실히 이 표현 때문에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확증하고 싶다면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특정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굳이 성경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들에게 내리는 특별한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물에서 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질문에 답변해야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 구절들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 관한 성경 기록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모두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지 믿는다고 말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앞에 나온 구절들의 참된 의미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그렇게 믿은 자들입니다. 그 말씀이 계시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말씀 안에 바로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해 조롱하거나 놀라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이 보태집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죽은 몸은 물론 죽은 영혼들(souls)은 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 있는 목소리는 몸과 영혼에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들이 제아무리 논리를 세워 반대할지라도 자신의 헛된 생각을 기준삼아 하나님을 일부러 제쳐놓는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두가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로 거듭난다’는 것과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는 야고보서 1장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가운데 최초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약 1:18, 현대어성경).

또한 베드로전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생명은 곧 썩어 버리지만 거듭난 이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새 생명은 인간 가운데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1:23, 현대어성경).

이 말씀에서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교통하게 된 것을 볼 때 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도구로 특별히 제시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새 생명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자, 우리 주님께서 “물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면 여기서 은 어떤 중요한 비유적인 의미로 “말씀”을 표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에스겔 36:25-27절을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던 니고데모는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말씀이 물로 아름답게 비유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5-26).

또한 디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십시오

앞에서 인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죽은 영혼들을 불러 생명을 주시는 데 있어 위대한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를 통해 우리는 이 진리를 독특한 방식으로 확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합니까?”라고 니고데모가 계속 여쭈었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구약에 나온 구리뱀에 관한 단순한 교훈을 가르쳐주십니다. 구약에서 뱀에게 물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장대에 달린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죄로 인해 죽은 죄인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뱀에 물린 상처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그 상처가 아니라 장대 위에 달린 뱀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비록 죄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 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죄인들은 모두 살아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대에 달린 구리뱀은 결코 차선책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얻는 데 있어 우리 영혼도 결코 차선책으로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누구를’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아’(Look unto Me)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다비역).

니고데모는 자신이 질문한 “어떻게?”에 대한 답변으로 이런 소중한 교훈들을 배워야 했습니다. 새로운 탄생에 관해서 이리저리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분명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새로운 탄생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런 탄생을 가능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있어 갈피를 못잡습니다. 그들은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어떤 과정을 거쳐 거듭나는지에 관해서만 골몰합니다. 그러기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기보다 자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자명하지요? 우리가 자신에게 아무리 골똘하더라도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대상과 바라보는 행위 사이에 아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처만 쳐다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얻었나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죄인이 자신만 쳐다본다면 무엇을 얻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을 접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우리가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모두 다시 태어난 자들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아들 하나님을 믿은 모든 자들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이 믿음의 근원도 신적이고, 그 대상 역시 신적이며 이 믿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역사하는 권능도 신적입니다. 거듭남의 모든 사역은 이렇듯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사로잡힌 나머지 니고데모처럼 “내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기를 내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을 신뢰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생명을 얻어 거듭납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1)

C.H.매킨토시

 

성경은 여러 구절을 통해 거듭남 혹은 새로운 탄생이 그저 타락한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신적인 본성을 부여받는 것임을 누차 강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난 니고데모를 봅시다

그럼 이제부터 복되신 성령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이러한 새로운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새로운 본성이 어떻게 인간 안에서 교통하게 되는지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데 쓰시는 엄청난 도구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죽은 영혼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합니다. 말씀은 세상을 존재케 합니다. 말씀은 죄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십니다. 옛적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그 동일한 음성이 “생명이 있으라”고 외치셔야만 죄인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듭남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귀중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종교계에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자신보다 지위도 높고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은 별로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권이란 특권은 다 거머쥔 사람에게도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던 모든 종교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바리새주의나 유대교 전체를 통틀어도 제공받지 못한 무엇인가를 애타는 마음으로 갈구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뭐라고 꼭 찍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뭔가를 원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 밤에 예수님께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도록 아버지께서 그를 아들에게로 이끄신 것이 분명합니다. 니고데모가 가진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필요’를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죄책감을 지닌 채 예수께로 나아오고, 어떤 이들은 간절한 필요가 있어 주님께 이끌립니다. 니고데모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니고데모가 속한 종교적인 신분을 감안할 때 커다란 부도덕으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경우는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보다는 마음에 나타난 공허함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엔 다 똑같은 얘깁니다. 죄로 검게 그을린 양심이나 뭔가를 갈망하는 마음은 둘 다 예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분만이 이 두 가지가 요구하는 바를 완벽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귀한 희생을 통해 양심에 깃든 모든 얼룩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 독보적인 인격으로 인간 마음의 공허를 모두 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 양심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마음은 완벽한 만족을 누립니다.

니고데모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

하지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진정 알게 되기까지는 다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단순한 구원 계획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복잡한 종교관념을 송두리째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랍비식 학습과 전통으로 둘러싸인 종교의 최정점에서 내려와 그리스도의 학교에 등록해 복음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며 “이스라엘의 선생”이던 사람에게는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종교나 지식만큼은 누가 뭐래도 간섭받기 싫어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 자신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을 때, 이런 말씀이 니고데모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유대인 태생이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갖는 모든 특권을 부여받은 니고데모가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반드시 새로 태어나야 한다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했겠습니까? 이것은 그가 지닌 특권과 영예를 모두 무시하라는 말입니다. 그를 사다리 맨꼭대기에서 끌어내려 맨아래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한, 바리새인이요 지도자요 존경받는 선생이라는 그의 특권은 가장 악랄한 인간 말종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굴욕적인 일입니다. 자신의 특권과 영예를 가져다가 새로운 왕국에서 자기 몫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굉장할 텐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최소한 창녀나 세리들보다는 훨씬 더 나아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됩니다. 학식 있는 종교인이자 유력한 지도자에게는 참으로 수치스런 일입니다.

인간의 육체로는 그 무엇도 개선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 일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요 3:4). 물론 그렇지요. 사람이 자연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연인이 만 번을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난다고 해도 그는 결국 그 사람 그대로일 뿐이며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따름입니다. 육체의 본성으로 행하는 일로는 육체를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육체에 속한 일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잘 지키고 유대인들의 지도자요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도, 아니 그보다 더한 위치에 서더라도 그것은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하고 널리 이해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열매없는 수고를 덜어줄 텐데 말입니다. 육체는 그 무엇을 해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시든 풀과 진배없습니다. 육체의 힘을 빌어 아주 경건해지고, 종교적인 특권과 여러 업적들을 달성하며, 의로운 행동을 하더라도, 주님의 영감 있는 선지자의 펜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더러운 누더기”(사 64:6)와 같습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효력있는 부르심(총신학점제 성령론5)
keeper77 | 조회 34 |추천 0 |2005.04.18. 00:09 http://cafe.daum.net/keeper77/B5TQ/34 

 

 

 

“효력있는 부르심”

 - 안토니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중에서
 요약발췌

 

           

 (요약)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 모두가 다 그것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복음초청을 수락하는 여부는 궁극적으로,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半 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안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복음을 들은 사람 모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의지의 자연적 능력에 의해서나(半펠리기우스)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충분한 은총 때문에 유산적으로 물려받은 부패성을 극복하게 됨으로서이다(알미니안주의자들). 결국 하나님은 복음초청의 반응에 대해 결정하시지도 않거나 관장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이다. 복음초청에 대한 결과는 오직 인간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354-430)과 그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복음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아닌(물론 인간의 의지가 복음초청에 응답하는 과정에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적 전통은 칼빈주의적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대를 이어왔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내면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불러왔다. "내명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 믿게 하시는 일을 가리켜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부르려고 한다.

 

 1.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경적 기반

 

  성경은 에베소서 2:1-2이다: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도다 이 세상의 방법들을 따라 살았을 대가 바로 그때였다." 사람이 본성상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문자적으로, "위로부터 나다".헬:gennethe anothen)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본래적으로 영적으로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적대적이며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이해할 수없고, 하나님의 법에 순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마치 귀먹은 여인에게 질문에 답하라고 하는 것이나, 장님에게 악보를 읽어보라고 부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고린도전서 1:22-24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효력적으로 불러내신 사람들"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클레토이스"(kietois)는 효력있는 부르심을 지칭함에 틀림없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 그 사람들만을 가리켜 "클레토이" 즉,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칭하고 있다.

 

  로마서 8:28-30을 보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tois kata prothesin kletois). 여기서 kletois("부르심을 입은자들")는 단순히 복음초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4에서처럼 여기서도 kletois(부르심을 입은자들")는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부르심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엡1:4). 그렇다면 복음에로의 초청을 받은 사람 모두가 그 초청에 반응을 어떻게 했건 상관없이 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8절과 30절의 "부르심을 입은"이란 용어는 궁극적으로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바울은 "부르심"이란 단어를 보통 유효적인 부르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서 1:7; 9:23-24; 고린도전서 1:26; 갈라디아서 1:15; 에베소서 4:1-4을 보라 베드로도 효력있는 부르심에 대해 베드로전서 2:9에서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더 이상 어두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 있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 때문이라고 분명히 덧붙이고 있다. 베드로후서 1:10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즉 부르심은 우리의 택정함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두 명사인 "부르심"(klesin)과 "선택"(eklogen)앞에는 오직 하나의 정관사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부르심"(klesin)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복음초청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1)단일 정관사에 의해 "선택"(eklogen)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선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기 것을 택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2)어떤사람에게 "당신의 부르심을 확실케 하라"는 뜻은 당신이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었는가를 확실케 하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부르심"의 용법이 유다서 첫절에도 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kletois)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요한계시록에도 "저희가(짐승의 보좌역들)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kletoi), 선택받고 충성스런 추종자들은 이기리로다"(계17:14). 간단히 말해, 효력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삶 속에 구원을 효력화시키게 하는 복음의 초청(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유효적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2. 효력적 부르심의 목표들

 

  유효적 소명은 어떤 특정한 목표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이미 부르심이란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목적과 목표를 향해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잆었다(고전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딤전6: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로(살전2:12), 그리고 거룩한 삶에로(살전4:7; 딤후1:9)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벧전2: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갈5:13)와 화평 (골3:15)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에베소서 4:1의 용어를 빌러 말하자면,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머레이(John Murray)교수가 말하듯이, "이 부르심(유효한 부르심)의 주권성과 그 효력성은 결코 인간의 책임성을 둔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책임성의 기반일 뿐 아니라 책임성 자체를 확고히 하기까지 한다. 은혜의 위용은 의무수행을 더욱 공고히 한다."

 

 3.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효적 소명

 

  복음의 부르심과 유효적 부르심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마22:14). 한편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잆은 자들은 모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복음의 부르심과 효력있는 부르심을 한 부르심의 두 가지 측면 혹은 양면이라고 말하였다. 성령의 능력적인 사역은 설교자나 교사가 선포한 말씀을 성령 자신에게 연합시킨다. (1)사람의 마음을 열어 말씀에 응답하게 하시고(행16:14), (2)마음을 밝히사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하시고(고전2:12-13; 참고, 고후4:6), (3)영적 생명을 부여하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향하여 가게 하신다(엡2:5)

 

  그러므로 복음초청을 통해 들려진 말씀이 효력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유효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4.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반대 의견중 하나는, 이 교리는 복음전도열과 선교열을 오히려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효력적인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믿음으로 복음초청에 응답할 수 있다면 왜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복음의 전파와 그 복음을 가르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도록 제정하신 방법이요, 도구들이다.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위의 반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만이 (세상의 창조가 있기 전에 택정함을 받은 자들)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누가 그러한 자인지 알지 못한다. 다시금 바빙크의 제안은 도움이 된다: "복음은 선택자나 유기된 자에게 전파된 것이 아니라 구속이 필요한 죄인들에게 선포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한 자기의 사람들이 구원얻는 믿음으로 복음에 응답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신뢰해야 한다.

 

  두 번째 반대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로 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복음은 초청을 거역하는 자는 오직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요5:39-40),(마 23:37)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자기를 향하여 모욕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고 하였다.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효력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복음의 배척은 항상 인간이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반대주장은 유효적 부르심에 관한 교리는 앞서 논의된 바 있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연적 상태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지만 그래도 복음의 초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半 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일 비록 우리가 부분적으로든지 전적으로든지 부패하긴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충분한 은혜를 주시어서 누구든지 복음의 초청을 받은 자마다 다 이 충분한 은혜와 협력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알미니안의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성상 전적으로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가 복음의 초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개혁주의 견해)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절실하게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생각건대 마지막 견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하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놀라운 은총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영적 암흑에서 그 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효력적으로 부르실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영적으로 살아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다시금 참여하게 된다. 회개와 믿음과 성화와 견인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의 경이에 대해 하나님께 함께 찬양합시다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나의 영혼을 움직여 그를 찾게 하시며, 나를 찾게 하심을.
          오, 구세주여 내가 당신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찾으신 것이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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