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 얻은 구원을 잃어 버릴 수 있는가? (가룟 유다, 사울 왕, 히6:4-9의 경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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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여러분을 천국에서 살게 하고자 이 땅에서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정결하게 하시려고 죽으셨고, 또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여러분은 그분께서 바라시는 만큼 놀랍게 정결해졌습니다. 그분의 생명이 여러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책임지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이루신 그 일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보시고, 그리스도를 보시듯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 합니다. 더 이상 죄에 잔뜩 찌들고 잘못된 길로 들어선 불쌍한 영혼들처럼 음울한 표정을 지은 채 율법주의나 경건주의 혹은 거짓 신학이라는 복도를 서성거리지 마십시오. 너무나 오랫동안 이런 일이 되풀이 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분깃이 얼마나 풍성한지, 부활하사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위치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확실히 깨달아, 이 땅에서 사는 날동안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고,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주님의 처소에서 그분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소망 가운데 하루 하루를 보내십시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거듭남에 관한 진리 중에서 [ C. H. 매킨토시 지음. 크리스챤북셀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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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2)
C.H.매킨토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되신 주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뭐라고 답하셨는지요? 이것은 특히나 흥미롭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5-8).
여기서 우리는 거듭남 혹은 새로운 출생이 “물과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분명한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심오하고 하늘에 속한 신비들을 알아가려면 그는 반드시 물에서 나고 또한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가장 명석한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그 심오한 비밀들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러하기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으로만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물에서 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당황합니다. 확실히 이 표현 때문에 많은 논쟁과 토론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성경 구절에 대해 정확한 의미를 확증하고 싶다면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특정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굳이 성경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그리스도들에게 내리는 특별한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물에서 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적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 질문에 답변해야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이 구절들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 관한 성경 기록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모두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단지 믿는다고 말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앞에 나온 구절들의 참된 의미를 받아들이고 진실로 그렇게 믿은 자들입니다. 그 말씀이 계시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말씀 안에 바로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리고 죽은 자들이 그 음성을 듣는 일에 대해 조롱하거나 놀라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말씀이 보태집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죽은 몸은 물론 죽은 영혼들(souls)은 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 있는 목소리는 몸과 영혼에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들이 제아무리 논리를 세워 반대할지라도 자신의 헛된 생각을 기준삼아 하나님을 일부러 제쳐놓는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두가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로 거듭난다’는 것과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는 야고보서 1장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가운데 최초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약 1:18, 현대어성경).
또한 베드로전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새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여러분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생명은 곧 썩어 버리지만 거듭난 이 생명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이 새 생명은 인간 가운데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1:23, 현대어성경).
이 말씀에서처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새로운 출생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교통하게 된 것을 볼 때 물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구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도구로 특별히 제시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진리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 새 생명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자, 우리 주님께서 “물로 거듭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면 여기서 물은 어떤 중요한 비유적인 의미로 “말씀”을 표현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에스겔 36:25-27절을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던 니고데모는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말씀이 물로 아름답게 비유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5-26).
또한 디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5-7).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십시오
앞에서 인용된 모든 구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죽은 영혼들을 불러 생명을 주시는 데 있어 위대한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를 통해 우리는 이 진리를 독특한 방식으로 확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합니까?”라고 니고데모가 계속 여쭈었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구약에 나온 구리뱀에 관한 단순한 교훈을 가르쳐주십니다. 구약에서 뱀에게 물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지 장대에 달린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사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죄로 인해 죽은 죄인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뱀에 물린 상처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그 상처가 아니라 장대 위에 달린 뱀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비록 죄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 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죄인들은 모두 살아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대에 달린 구리뱀은 결코 차선책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구원얻는 데 있어 우리 영혼도 결코 차선책으로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누구를’ 바라보는가의 문제입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나를 바라보아’(Look unto Me)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다비역).
니고데모는 자신이 질문한 “어떻게?”에 대한 답변으로 이런 소중한 교훈들을 배워야 했습니다. 새로운 탄생에 관해서 이리저리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분명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새로운 탄생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런 탄생을 가능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있어 갈피를 못잡습니다. 그들은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어떤 ‘과정’을 거쳐 거듭나는지에 관해서만 골몰합니다. 그러기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기보다 자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자명하지요? 우리가 자신에게 아무리 골똘하더라도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대상과 바라보는 행위 사이에 아무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상처만 쳐다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엇을 얻었나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죄인이 자신만 쳐다본다면 무엇을 얻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을 접합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우리가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모두 다시 태어난 자들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아들 하나님을 믿은 모든 자들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이들입니다. 이 믿음의 근원도 신적이고, 그 대상 역시 신적이며 이 믿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역사하는 권능도 신적입니다. 거듭남의 모든 사역은 이렇듯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사로잡힌 나머지 니고데모처럼 “내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믿음으로 예수님께 자기를 내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걸고 그분을 신뢰한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생명을 얻어 거듭납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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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1)
C.H.매킨토시
성경은 여러 구절을 통해 거듭남 혹은 새로운 탄생이 그저 타락한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신적인 본성을 부여받는 것임을 누차 강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난 니고데모를 봅시다
그럼 이제부터 복되신 성령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이러한 새로운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새로운 본성이 어떻게 인간 안에서 교통하게 되는지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데 쓰시는 엄청난 도구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죽은 영혼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합니다. 말씀은 세상을 존재케 합니다. 말씀은 죄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십니다. 옛적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그 동일한 음성이 “생명이 있으라”고 외치셔야만 죄인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듭남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귀중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종교계에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자신보다 지위도 높고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은 별로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권이란 특권은 다 거머쥔 사람에게도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던 모든 종교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바리새주의나 유대교 전체를 통틀어도 제공받지 못한 무엇인가를 애타는 마음으로 갈구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뭐라고 꼭 찍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뭔가를 원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 밤에 예수님께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도록 아버지께서 그를 아들에게로 이끄신 것이 분명합니다. 니고데모가 가진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필요’를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죄책감을 지닌 채 예수께로 나아오고, 어떤 이들은 간절한 필요가 있어 주님께 이끌립니다. 니고데모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니고데모가 속한 종교적인 신분을 감안할 때 커다란 부도덕으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경우는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보다는 마음에 나타난 공허함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엔 다 똑같은 얘깁니다. 죄로 검게 그을린 양심이나 뭔가를 갈망하는 마음은 둘 다 예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분만이 이 두 가지가 요구하는 바를 완벽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귀한 희생을 통해 양심에 깃든 모든 얼룩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 독보적인 인격으로 인간 마음의 공허를 모두 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 양심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마음은 완벽한 만족을 누립니다.
니고데모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
하지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진정 알게 되기까지는 다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단순한 구원 계획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복잡한 종교관념을 송두리째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랍비식 학습과 전통으로 둘러싸인 종교의 최정점에서 내려와 그리스도의 학교에 등록해 복음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며 “이스라엘의 선생”이던 사람에게는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종교나 지식만큼은 누가 뭐래도 간섭받기 싫어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 자신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을 때, 이런 말씀이 니고데모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유대인 태생이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갖는 모든 특권을 부여받은 니고데모가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반드시 새로 태어나야 한다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했겠습니까? 이것은 그가 지닌 특권과 영예를 모두 무시하라는 말입니다. 그를 사다리 맨꼭대기에서 끌어내려 맨아래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한, 바리새인이요 지도자요 존경받는 선생이라는 그의 특권은 가장 악랄한 인간 말종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굴욕적인 일입니다. 자신의 특권과 영예를 가져다가 새로운 왕국에서 자기 몫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굉장할 텐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최소한 창녀나 세리들보다는 훨씬 더 나아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됩니다. 학식 있는 종교인이자 유력한 지도자에게는 참으로 수치스런 일입니다.
인간의 육체로는 그 무엇도 개선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 일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요 3:4). 물론 그렇지요. 사람이 자연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연인이 만 번을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난다고 해도 그는 결국 그 사람 그대로일 뿐이며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따름입니다. 육체의 본성으로 행하는 일로는 육체를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육체에 속한 일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잘 지키고 유대인들의 지도자요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도, 아니 그보다 더한 위치에 서더라도 그것은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하고 널리 이해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열매없는 수고를 덜어줄 텐데 말입니다. 육체는 그 무엇을 해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시든 풀과 진배없습니다. 육체의 힘을 빌어 아주 경건해지고, 종교적인 특권과 여러 업적들을 달성하며, 의로운 행동을 하더라도, 주님의 영감 있는 선지자의 펜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더러운 누더기”(사 64:6)와 같습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개혁주의 구원론/안토니 호쿠마 (0) | 2012.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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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이든 토저 (0) | 2012.11.26 |
거듭남에 관한 진리 (0) | 2012.11.21 |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2)/C.H. 매킨토시 (0) | 2012.11.21 |
"효력 있는 부르심"-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 중에서 (요약 발췌) (0) | 2012.11.13 |
“효력있는 부르심” - 안토니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중에서
(요약)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 모두가 다 그것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복음초청을 수락하는 여부는 궁극적으로,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半 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안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복음을 들은 사람 모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의지의 자연적 능력에 의해서나(半펠리기우스)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충분한 은총 때문에 유산적으로 물려받은 부패성을 극복하게 됨으로서이다(알미니안주의자들). 결국 하나님은 복음초청의 반응에 대해 결정하시지도 않거나 관장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이다. 복음초청에 대한 결과는 오직 인간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354-430)과 그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복음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아닌(물론 인간의 의지가 복음초청에 응답하는 과정에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적 전통은 칼빈주의적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대를 이어왔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내면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불러왔다. "내명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 믿게 하시는 일을 가리켜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부르려고 한다.
1.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경적 기반
성경은 에베소서 2:1-2이다: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도다 이 세상의 방법들을 따라 살았을 대가 바로 그때였다." 사람이 본성상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문자적으로, "위로부터 나다".헬:gennethe anothen)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본래적으로 영적으로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적대적이며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이해할 수없고, 하나님의 법에 순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마치 귀먹은 여인에게 질문에 답하라고 하는 것이나, 장님에게 악보를 읽어보라고 부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고린도전서 1:22-24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효력적으로 불러내신 사람들"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클레토이스"(kietois)는 효력있는 부르심을 지칭함에 틀림없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 그 사람들만을 가리켜 "클레토이" 즉,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칭하고 있다.
로마서 8:28-30을 보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tois kata prothesin kletois). 여기서 kletois("부르심을 입은자들")는 단순히 복음초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4에서처럼 여기서도 kletois(부르심을 입은자들")는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부르심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엡1:4). 그렇다면 복음에로의 초청을 받은 사람 모두가 그 초청에 반응을 어떻게 했건 상관없이 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8절과 30절의 "부르심을 입은"이란 용어는 궁극적으로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바울은 "부르심"이란 단어를 보통 유효적인 부르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서 1:7; 9:23-24; 고린도전서 1:26; 갈라디아서 1:15; 에베소서 4:1-4을 보라 베드로도 효력있는 부르심에 대해 베드로전서 2:9에서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더 이상 어두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 있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 때문이라고 분명히 덧붙이고 있다. 베드로후서 1:10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즉 부르심은 우리의 택정함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두 명사인 "부르심"(klesin)과 "선택"(eklogen)앞에는 오직 하나의 정관사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부르심"(klesin)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복음초청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1)단일 정관사에 의해 "선택"(eklogen)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선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기 것을 택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2)어떤사람에게 "당신의 부르심을 확실케 하라"는 뜻은 당신이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었는가를 확실케 하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부르심"의 용법이 유다서 첫절에도 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kletois)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요한계시록에도 "저희가(짐승의 보좌역들)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kletoi), 선택받고 충성스런 추종자들은 이기리로다"(계17:14). 간단히 말해, 효력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삶 속에 구원을 효력화시키게 하는 복음의 초청(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유효적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2. 효력적 부르심의 목표들
유효적 소명은 어떤 특정한 목표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이미 부르심이란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목적과 목표를 향해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잆었다(고전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딤전6: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로(살전2:12), 그리고 거룩한 삶에로(살전4:7; 딤후1:9)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벧전2: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갈5:13)와 화평 (골3:15)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에베소서 4:1의 용어를 빌러 말하자면,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머레이(John Murray)교수가 말하듯이, "이 부르심(유효한 부르심)의 주권성과 그 효력성은 결코 인간의 책임성을 둔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책임성의 기반일 뿐 아니라 책임성 자체를 확고히 하기까지 한다. 은혜의 위용은 의무수행을 더욱 공고히 한다."
3.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효적 소명
복음의 부르심과 유효적 부르심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마22:14). 한편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잆은 자들은 모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복음의 부르심과 효력있는 부르심을 한 부르심의 두 가지 측면 혹은 양면이라고 말하였다. 성령의 능력적인 사역은 설교자나 교사가 선포한 말씀을 성령 자신에게 연합시킨다. (1)사람의 마음을 열어 말씀에 응답하게 하시고(행16:14), (2)마음을 밝히사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하시고(고전2:12-13; 참고, 고후4:6), (3)영적 생명을 부여하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향하여 가게 하신다(엡2:5)
그러므로 복음초청을 통해 들려진 말씀이 효력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유효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4.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반대 의견중 하나는, 이 교리는 복음전도열과 선교열을 오히려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효력적인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믿음으로 복음초청에 응답할 수 있다면 왜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복음의 전파와 그 복음을 가르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도록 제정하신 방법이요, 도구들이다.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위의 반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만이 (세상의 창조가 있기 전에 택정함을 받은 자들)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누가 그러한 자인지 알지 못한다. 다시금 바빙크의 제안은 도움이 된다: "복음은 선택자나 유기된 자에게 전파된 것이 아니라 구속이 필요한 죄인들에게 선포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한 자기의 사람들이 구원얻는 믿음으로 복음에 응답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신뢰해야 한다.
두 번째 반대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로 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복음은 초청을 거역하는 자는 오직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요5:39-40),(마 23:37)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자기를 향하여 모욕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고 하였다.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효력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복음의 배척은 항상 인간이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반대주장은 유효적 부르심에 관한 교리는 앞서 논의된 바 있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연적 상태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지만 그래도 복음의 초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半 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일 비록 우리가 부분적으로든지 전적으로든지 부패하긴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충분한 은혜를 주시어서 누구든지 복음의 초청을 받은 자마다 다 이 충분한 은혜와 협력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알미니안의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성상 전적으로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가 복음의 초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개혁주의 견해)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절실하게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생각건대 마지막 견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하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놀라운 은총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영적 암흑에서 그 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효력적으로 부르실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영적으로 살아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다시금 참여하게 된다. 회개와 믿음과 성화와 견인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의 경이에 대해 하나님께 함께 찬양합시다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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