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1)

C.H.매킨토시

 

성경은 여러 구절을 통해 거듭남 혹은 새로운 탄생이 그저 타락한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신적인 본성을 부여받는 것임을 누차 강조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거듭난 니고데모를 봅시다

그럼 이제부터 복되신 성령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이러한 새로운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새로운 본성이 어떻게 인간 안에서 교통하게 되는지를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데 쓰시는 엄청난 도구입니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므로 반드시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죽은 영혼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고 거듭나게 합니다. 말씀은 세상을 존재케 합니다. 말씀은 죄인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내십니다. 옛적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그 동일한 음성이 “생명이 있으라”고 외치셔야만 죄인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듭남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귀중한 가르침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 종교계에서 매우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한 사람”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자신보다 지위도 높고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은 별로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권이란 특권은 다 거머쥔 사람에게도 여전히 불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던 모든 종교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바리새주의나 유대교 전체를 통틀어도 제공받지 못한 무엇인가를 애타는 마음으로 갈구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뭐라고 꼭 찍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는 뭔가를 원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 밤에 예수님께 찾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부드럽지만 거부할 수 없도록 아버지께서 그를 아들에게로 이끄신 것이 분명합니다. 니고데모가 가진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필요’를 느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깊은 죄책감을 지닌 채 예수께로 나아오고, 어떤 이들은 간절한 필요가 있어 주님께 이끌립니다. 니고데모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니고데모가 속한 종교적인 신분을 감안할 때 커다란 부도덕으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예수님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경우는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보다는 마음에 나타난 공허함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엔 다 똑같은 얘깁니다. 죄로 검게 그을린 양심이나 뭔가를 갈망하는 마음은 둘 다 예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분만이 이 두 가지가 요구하는 바를 완벽하게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귀한 희생을 통해 양심에 깃든 모든 얼룩을 제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 독보적인 인격으로 인간 마음의 공허를 모두 채우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된 양심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마음은 완벽한 만족을 누립니다.

니고데모가 포기해야만 했던 것

하지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진정 알게 되기까지는 다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단순한 구원 계획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복잡한 종교관념을 송두리째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랍비식 학습과 전통으로 둘러싸인 종교의 최정점에서 내려와 그리스도의 학교에 등록해 복음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며 “이스라엘의 선생”이던 사람에게는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 종교나 지식만큼은 누가 뭐래도 간섭받기 싫어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 자신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을 때, 이런 말씀이 니고데모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유대인 태생이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갖는 모든 특권을 부여받은 니고데모가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반드시 새로 태어나야 한다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했겠습니까? 이것은 그가 지닌 특권과 영예를 모두 무시하라는 말입니다. 그를 사다리 맨꼭대기에서 끌어내려 맨아래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소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한, 바리새인이요 지도자요 존경받는 선생이라는 그의 특권은 가장 악랄한 인간 말종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굴욕적인 일입니다. 자신의 특권과 영예를 가져다가 새로운 왕국에서 자기 몫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굉장할 텐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최소한 창녀나 세리들보다는 훨씬 더 나아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됩니다. 학식 있는 종교인이자 유력한 지도자에게는 참으로 수치스런 일입니다.

인간의 육체로는 그 무엇도 개선하지 못합니다

또한 이 일은 어리둥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요 3:4). 물론 그렇지요. 사람이 자연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연인이 만 번을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난다고 해도 그는 결국 그 사람 그대로일 뿐이며 “육에서 난 것은 육”일 따름입니다. 육체의 본성으로 행하는 일로는 육체를 바꾸거나 개선할 수 없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육체에 속한 일을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잘 지키고 유대인들의 지도자요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도, 아니 그보다 더한 위치에 서더라도 그것은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하고 널리 이해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열매없는 수고를 덜어줄 텐데 말입니다. 육체는 그 무엇을 해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시든 풀과 진배없습니다. 육체의 힘을 빌어 아주 경건해지고, 종교적인 특권과 여러 업적들을 달성하며, 의로운 행동을 하더라도, 주님의 영감 있는 선지자의 펜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더러운 누더기”(사 64:6)와 같습니다.

 

출처 : http://www.christian.or.kr/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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