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력 있는 부르심"-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 중에서 (요약 발췌)

구원론 2012. 11. 13. 16:09

 

효력있는 부르심(총신학점제 성령론5)
keeper77 | 조회 34 |추천 0 |2005.04.18. 00:09 http://cafe.daum.net/keeper77/B5TQ/34 

 

 

 

“효력있는 부르심”

 - 안토니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중에서
 요약발췌

 

           

 (요약)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 모두가 다 그것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복음초청을 수락하는 여부는 궁극적으로,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半 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안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복음을 들은 사람 모두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의지의 자연적 능력에 의해서나(半펠리기우스)혹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충분한 은총 때문에 유산적으로 물려받은 부패성을 극복하게 됨으로서이다(알미니안주의자들). 결국 하나님은 복음초청의 반응에 대해 결정하시지도 않거나 관장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이다. 복음초청에 대한 결과는 오직 인간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354-430)과 그의 신학적 전통에 따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복음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극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아닌(물론 인간의 의지가 복음초청에 응답하는 과정에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이러한 어거스틴적 전통은 칼빈주의적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대를 이어왔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내면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불러왔다. "내명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 믿게 하시는 일을 가리켜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부르려고 한다.

 

 1.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경적 기반

 

  성경은 에베소서 2:1-2이다: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도다 이 세상의 방법들을 따라 살았을 대가 바로 그때였다." 사람이 본성상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은 니고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 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문자적으로, "위로부터 나다".헬:gennethe anothen)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5).

 

  본래적으로 영적으로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적대적이며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이해할 수없고, 하나님의 법에 순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마치 귀먹은 여인에게 질문에 답하라고 하는 것이나, 장님에게 악보를 읽어보라고 부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고린도전서 1:22-24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란 "하나님께서 효력적으로 불러내신 사람들"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클레토이스"(kietois)는 효력있는 부르심을 지칭함에 틀림없다.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된 그 사람들만을 가리켜 "클레토이" 즉,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칭하고 있다.

 

  로마서 8:28-30을 보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tois kata prothesin kletois). 여기서 kletois("부르심을 입은자들")는 단순히 복음초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4에서처럼 여기서도 kletois(부르심을 입은자들")는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부르심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택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엡1:4). 그렇다면 복음에로의 초청을 받은 사람 모두가 그 초청에 반응을 어떻게 했건 상관없이 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효력있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두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8절과 30절의 "부르심을 입은"이란 용어는 궁극적으로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바울은 "부르심"이란 단어를 보통 유효적인 부르심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서 1:7; 9:23-24; 고린도전서 1:26; 갈라디아서 1:15; 에베소서 4:1-4을 보라 베드로도 효력있는 부르심에 대해 베드로전서 2:9에서 말하고 있다. 당신들은 더 이상 어두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 안에 있다고 베드로는 말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 때문이라고 분명히 덧붙이고 있다. 베드로후서 1:10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하라." 즉 부르심은 우리의 택정함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다. 두 명사인 "부르심"(klesin)과 "선택"(eklogen)앞에는 오직 하나의 정관사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부르심"(klesin)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복음초청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없다: (1)단일 정관사에 의해 "선택"(eklogen)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선택"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자기 것을 택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2)어떤사람에게 "당신의 부르심을 확실케 하라"는 뜻은 당신이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었는가를 확실케 하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부르심"의 용법이 유다서 첫절에도 나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kletois)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요한계시록에도 "저희가(짐승의 보좌역들)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kletoi), 선택받고 충성스런 추종자들은 이기리로다"(계17:14). 간단히 말해, 효력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삶 속에 구원을 효력화시키게 하는 복음의 초청(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유효적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2. 효력적 부르심의 목표들

 

  유효적 소명은 어떤 특정한 목표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이미 부르심이란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목적과 목표를 향해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잆었다(고전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딤전6: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로(살전2:12), 그리고 거룩한 삶에로(살전4:7; 딤후1:9)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벧전2: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갈5:13)와 화평 (골3:15)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에베소서 4:1의 용어를 빌러 말하자면,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머레이(John Murray)교수가 말하듯이, "이 부르심(유효한 부르심)의 주권성과 그 효력성은 결코 인간의 책임성을 둔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책임성의 기반일 뿐 아니라 책임성 자체를 확고히 하기까지 한다. 은혜의 위용은 의무수행을 더욱 공고히 한다."

 

 3.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효적 소명

 

  복음의 부르심과 유효적 부르심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름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마22:14). 한편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잆은 자들은 모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종종 복음의 부르심과 효력있는 부르심을 한 부르심의 두 가지 측면 혹은 양면이라고 말하였다. 성령의 능력적인 사역은 설교자나 교사가 선포한 말씀을 성령 자신에게 연합시킨다. (1)사람의 마음을 열어 말씀에 응답하게 하시고(행16:14), (2)마음을 밝히사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하시고(고전2:12-13; 참고, 고후4:6), (3)영적 생명을 부여하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향하여 가게 하신다(엡2:5)

 

  그러므로 복음초청을 통해 들려진 말씀이 효력있는 부르심을 통하여 유효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4.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반대 의견중 하나는, 이 교리는 복음전도열과 선교열을 오히려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효력적인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믿음으로 복음초청에 응답할 수 있다면 왜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복음의 전파와 그 복음을 가르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도록 제정하신 방법이요, 도구들이다.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위의 반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할 수도 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만이 (세상의 창조가 있기 전에 택정함을 받은 자들)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누가 그러한 자인지 알지 못한다. 다시금 바빙크의 제안은 도움이 된다: "복음은 선택자나 유기된 자에게 전파된 것이 아니라 구속이 필요한 죄인들에게 선포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택한 자기의 사람들이 구원얻는 믿음으로 복음에 응답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신뢰해야 한다.

 

  두 번째 반대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믿지 않는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로 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복음은 초청을 거역하는 자는 오직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을 뿐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요5:39-40),(마 23:37)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자기를 향하여 모욕하고 조롱하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고 하였다.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효력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복음의 배척은 항상 인간이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반대주장은 유효적 부르심에 관한 교리는 앞서 논의된 바 있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연적 상태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지만 그래도 복음의 초청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半 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일 비록 우리가 부분적으로든지 전적으로든지 부패하긴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충분한 은혜를 주시어서 누구든지 복음의 초청을 받은 자마다 다 이 충분한 은혜와 협력하여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알미니안의 견해) 당신은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성상 전적으로 죄 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가 복음의 초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개혁주의 견해)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절실하게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생각건대 마지막 견해야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하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놀라운 은총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영적 암흑에서 그 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효력적으로 부르실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영적으로 살아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다시금 참여하게 된다. 회개와 믿음과 성화와 견인의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효력있는 부르심의 경이에 대해 하나님께 함께 찬양합시다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나의 영혼을 움직여 그를 찾게 하시며, 나를 찾게 하심을.
          오, 구세주여 내가 당신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찾으신 것이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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