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혈의 능력 / 찰스 스펄전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출12:13)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안전합니다. 그러나 오직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합 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마에 뿌려진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의 보배로우신 피로 이 백성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이 백성들 위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들을 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날 밤 애굽이 있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 때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핏자국이 있는 집집마다 하나님은 해치지 않고 그대로 넘어 가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때 그 피가 유월절에 쓰는 어린 양의 피였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해 두셨던 제물(祭物)의 피,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이 세상에 약속없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에게 우리 만민의 죄를 지우셨던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만민의 구세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단 하나님의 약속하신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마치 어린 양처럼 흠없고 티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 한 가지라도 죄가 있었던들 결코 우리들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겠지만, 참으로 주님은 죄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이 피는 죄사함을 위하여 단 한번 흘리신 것입니다. 유월절에 드리던 그 어린 양은 해마다 잡아야 되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죄를 멀리 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 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또 장사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땅도, 과연 하나님께서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셨는지 알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무죄 방면(放免)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실 그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사방의 매는 줄에 묶여져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는 받으신 바 되었고, 죄는 용서함 얻었습니다.

잠깐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를 상상해 보십시다. 높다랗게 언덕 위에 세워진 세개의 십자가를 보십니까? 그리고, 그 중앙에 가시 면류관을 이마에 엮어쓰신 그리스도가 보이십니까? 저 저주 받은 쇠같은 나무 위에 꽉 못박힌 저 양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인생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상하고 이그러진 저 얼굴을 좀 보십시오. 그리고 사망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가슴 위에 내리뜨리운 저 무거운 머리를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진정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달리신 곳은 실제로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을 무슨 헛된 공상이나 이야기로 생각지 마십시오. 진정코 그러한 분이 계셨으며, 또 그 분은 지금 내가 말씀드린대로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죽어가는 저 분의 피가 나를 구원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일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나는 오직 저 분이 날 위해서 쓰라린 죽음을 맛보신 이 사실만을 의지할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를 넘어가리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아무것도 우리 영혼을 건질 수 없습니다. 만약 그 때 어떤 어리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코웃음을 치고, "난 우리 집 양 기둥에다 다른 걸 칠해 놓아야겠다."하거나, "우리 집 문 인방은 금은 보석으로 꾸며 놓아야지"하였다 합시다. 그들의 집은 반드시 앙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 뿌림 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의 집을 구원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이 닦아 둔 것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우리 모두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나의 공로, 나의 기도, 나의 눈물이 나를 건지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 보혈만이 구속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함께 다른 어떤 소망이든지 두어 보십시오. 당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든지 보혈과 함께 겸하여 의지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물론이죠, 교회의 성례식(聖禮式)으로 내가 구원얻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로 구원도 받고, 또, 성례식도 조금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한다면 이 사람을 참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의 영광과 존귀가 제아무리 좋은 것이라 한들 어찌 감히 그 곁에 두어 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 니다. 그리스도를 노엽게 한 그것은 즉시 저주받은 물건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대관절 여러분은 어찌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또 다른 소망을 두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공로, 여러분의 선행입니까? 보세요! 꿈틀거리는 벌레를 가지고 천사와 함께 같은 멍메를 지우려고 하는 것입니까 - 아니, 당신이 감히 수레를 그리스도와 함께 끈다는 말씀인가요? 도대체 당신의 선행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습니다. 그래 그 더러운 넝마조각을 그리스도의 흠없는 의와 한가지로 한단 말입니까?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께만 매달리세요. 그러면 그대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위에 또다른 어떤 소망이든지 둘 때에,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죄에다 소망을 두는 것 이상으로 영원히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 아, 우리 구원의 튼튼한 반석이시여!

또,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믿으려면 좀 더 깊은 회개를 경험해야 되겠는데." 보십시오. 당신의 회개는, 마치 못다 채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반분(半分) 해서 채우기 위한 것 같군요. 그리스도의 피는 당신의 눈물을 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건지기 위한 것이에요.

회개로써 만족말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시란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 결코 죄 때문에 일어나는 당신의 감정을 의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보다 그들의 회개를 더 많이 신경을 쓰기 때문에 그러한 큰 영혼의 어려움 가운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난 믿음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소망이 없어." 이 역시 어느 것에도 못지않은 크게 위험한 생각입니다. 당신에게 효험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결코 당신의 믿음의 효험으로써 당신이 구원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의 믿음에 의지해도 천국은 못갑니다. 자기의 믿음을 의지하는 것은 자기의 선행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더 기막히게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신의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께 향한 것 이고, 그 스스로는 아무 쓸 데가 없는 것입니다. 지구 덩어리는 제 스스로 의지하고 돌지만, 믿음은 결단코 제 스스로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믿음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함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사단이 우리 인간의 마음 속으로 어떤 몸트림을 해서 기어 들어가는지를 잘 알 수 없지만은 이것은 한가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단은, 보혈,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이 진리를 항상 미워하고 감추기를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혈과 함께 다른 어떤 것에 소망을 두든지 다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단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내게도 남과 같이 이러 이러한 놀라운 경험이라도 있으면 믿어 볼 희망이 일어나겠건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여, 보십시오. 문제는 당신 경험이 아니라 오직 보혈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의 한 일을 볼 때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내게 좀 더 이러한 미덕(美德)과 장점이 있더라도 내가 이렇게 소망 없지는 않을 거에요" 이렇게도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천만에요,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 때에' 하셨지, '내가 네 좋은 성품을 생각할 때에' 하셨습니까? 물론 믿음과 사랑과 소망 등, 당신이 누릴 수 있는 한의 모든 좋은 점을 기르십시오마는 아, 결단코 여러분, 응당 그리스도의 보혈을 모실 자리만은 그중 아무 것으로든지 범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한번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만족 못할 형편이 세상에 없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씻지 못할 죄악이 세상에 없습니다. 첩첩이 쌓인 죄악의 천근같은 무게라도 보혈은 옮겨내고, 붙고 또 붙어 진흙덩이 같이 뭉쳐진 악이라도 보혈은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죄악이 배나 물들인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 모든 것을 한 터럭도 남김없이 다 깨 끗케 할 것입니다. 조석으로 밥먹듯이 주의 이름을 저주한 자도 올 것이요, 주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잘못 안 자도 올 것이요, 주의 종들을 욕하고 핍박한 자들도 올 것입니다. 다 주님 의 보혈로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생겼든지 찌그러졌든지, 병신이든지 온전하든지, 마귀의 화신(化身)이든지 아니든지, 주의 보혈이 못 씻어낼 자가 없습니다. 마치 지옥이, 한 죄악으로만 빚어낸 사람 덩어리를 만들기 위하여 죄로 다듬고 다듬어 낸 것 같은 흉측한 인간일지라도, 주님의 보혈은 그를 변화시켜 양과 같게 만들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일곱 귀신을 쫓아낸 것도 이 보혈 이었습니다. 귀신들려 미친 증세, 해묵은 문둥병, 모두 이 보혈로 고치셨습니다. 아무리 중한 심령의 병이라도 우리 대의사(大醫士)이신 주께서 못고치실 병이 없습니다. 먹장 같이 검고 마귀 같이 악할지라도 어떤 형편에서든지 이 보혈의 힘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아, 모든 것에 풍성하고 모든 것에 전능한 보혈입니다!

이 보혈에 뿌리움을 입은 자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구원얻은 자입니다. 그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보호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누구의 머리터럭 하나도, 멸망시키는 주의 사자가 손대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이 지금 보혈을 믿는 자는 모든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잘 대표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는 좋아합니다. 어떤 순교자가 어느날 「보네르」 앞으로 불리워 가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네르」가 "너같은 이단자는 정죄를 받아야 마땅하리라"하고 호통을 치니, 순교자는 그 사랑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런고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얼마나 복스러운 생각입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보호함을 입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문의 인방과 양쪽 설주에다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립시다. 멸망이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애굽 백성들 가운데는 멸망시키는 여호와가 있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가운데에는 없었습니다. 악한 자에게는 지옥의 멸망이 있지만은, 그러나, 의인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빈틈없이 온전히 구속하십니다. 모든 죄를 남김없이 씻어 내십시다. 모든 축복을 아낌없이 부어주십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보혈의 그 막대한 값어치를 나는 도저히 이 혀끝으로 형용해 낼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들 가운데 역사하사, 여러분은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시기를 기도하는 마음 뿐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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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구령을 위한 복음 전도자의 특성

스펄전

 

우리의 주요 임무는 영혼을 구령하는 것이다. 대장장이가 여러 종류의 말(horses)과 편자에 대해 정통한 것처럼, 우리도 영혼과 구령에 관한한 정통해야 한다. 지혜로운 일군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서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확실히 위대하신 하나님, 모든 일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하신 역사 가운데, 특히 영혼 구령의 아름다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도구를 갖기를 기뻐하셨다. 옛 창조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도구를 사용하셨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것이 이루어졌고.."(33:9). 더군다나 새 창조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한 도구는 여전히 그분의 능력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의 전도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구가 되기에 합당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사람의 귀와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하는 도구가 되기에 온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준비되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그 특성 하나 - 거룩함

 

내가 확신하건대, 영혼 구령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특성에 대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거룩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조지 뮐러씨가 멘톤(Menton)이라는 곳에 왔을 때, 한 번은 그곳에 가서 그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데, 그 설교는 평범한 주일학교 선생이 학생들에게 하는 듯한 설교였지만, 내 영혼에 그 이상 좋을 뿐만 하니라 그토록 풍성한 설교는 들어본 일이 없는 듯 했다. 조지 뮐러는 자신의 인격으로써 진리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거기 있었으며, "자기가 믿은 것을 말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믿은 대로 사는 사람"으로서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방식으로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가 증거한 모든 말속에는 자신의 믿음의 영광스러운 삶이 각 영혼의 귀와 마음에 호소하는 듯했다. 거룩함이 그 설교자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여러분도 거룩함을 입어, 우리의 능력이 그 동일한 원천에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특성 둘 - 겸손의 영

 

그리스도인이 교만하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저것을 다 따져 봐도 이것보다 마귀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혼을 구령함에 있어 겸손은 여러분을 아무 것도 아니며 보잘 것 없는 자로 여기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능하게 하셔서 열매를 주시면, 여러분은 곧바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에 대한 자랑이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보게 한다. 여러분에게 만일 아무런 열매가 없으면, 겸손은 그 실책을 하나님의 주권에 돌리지 않게 하고,오히려 여러분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에 돌리게 해준다. 영혼 구령자에게 있어서 깊은 겸손에 대한 필요는 그가 참으로 겸손하지 않은 만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외눈박이라도 분명히 볼 수 있는 사실이다.

 

 

그 특성 셋 - 살아있는 믿음

 

주의 일을 함에 있어 열매를 맺는 필수적인 일군의 자질은 -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 바로 살아있는 믿음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복음 증거를 듣는 사람의 영혼을 얻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매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여러분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어야 한다. 나는 종종 강단에 서게 되면, "이것은 내가 그분의 이름을 위해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축복을 위해 구한 이상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이고, 내가 전한 메시지가 듣는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향기던가, 아니면 사망을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써 그분의 목적은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고 확신한다. 주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고, 그러한 확신 가운데 힘을 다해 수고하는 사람이다. 주의 일에 많은 열매가 맺히고 큰 성취가 있게 되면 그 사람은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바라고 일했기 때문이다.그러한 사람은 살아있는 말씀의 씨를 뿌리고 큰 수확을 거두기를 바라는 사람이다.자기의 식물을 물위에 던지는 사람은 도로 찾으리라는 기대로 열심히 살피고 깨어 경성할 것임에 틀림없다(11:1 참조).

 

 

그 특성 넷 - 열심

 

여러분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도록 도울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믿고 의지하기 바란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열심이 없다면 사람들로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일은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한밤중에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창문 밖으로 내다보게 될 때, 문을 두드린 그 사람이 냉담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당신 집 뒤편에 불이 났어요"라고 말한다면, 나 같으면 그 불에 대해선 상관치 않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물 한바가지를 쏟아 붓고자 할 것이다. 하나님이 영혼 구령을 위해 세상에 자기 사람을 보내시고자 할 때, 그 복음전도자가 문을 두드린 바로 그 사람의 삶의 태도나 정신 자세와 같다고 생각해 보자. 영혼을 향한 격렬한 고뇌도 없는, 그 마음과 입술에 "재앙이로다!큰 재앙이로다!"라는 외침도 없는, 온전한 헌신도 없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도 없는 그러한 복음 전도자룰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함께 열심을 내도록 하자. 온 마음을 다해 주의 일에 힘쓰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특성 다섯 - 단순함

 

영혼 구령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또 다른 자질은 마음의 단순함이다. "자 이제, 여러분은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높은 신분과 많은 월급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일 성공적인 사업이나 좋은 대학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면 여러분은 일생동안 가난한 복음 전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나는 종종 여러 그리스도인에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의 진심은 오히려 나를 쳐다보며, "그래요, 저는 가난하지만 영혼을 구령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우리는 진실로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 특성 여섯 - 전적인 순종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야 한다. 하프 연주자는 자신이 특별히 아끼는 하프로 연주하기를 즐거워하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하프를 잘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하프도 그의 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프의 모든 현을 다루듯 여러분을 붙드시면 여러분의 모든 능력은 그분의 손의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하게 되므로, 비로소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그러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과, 성령께서 여러분을 쓰시고자 할 때, 그분에 의해 즉시 감화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민감한 상태에 항상 긴장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 하나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러한 자질을 우리에게 주소서 아멘.

 

 

 

출처: 브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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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 스펄젼

 

목회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호통을 쳐서 혈기를 발산하는 것.
(2)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교만을 드러내는 것.
(3) 강단에 선 것도 황송해하는 듯이 설교하는 것.
(4) 강단에 선 것 자체가 자기 딴에 겸손인 것처럼 설교하는 것.
(5) 태도와 말투에서 오류를 피하려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7. 설교가 열매를 맺으려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8. 항상 기도의 영으로 충만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9. 거룩하게 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목회자는 모름지기 할 수만 있다면 복장까지도 흠이 없어야 한다.


10. 다양한 성도들을 목양하고 교회를 잘 지도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교회는 믿음을 부차적으로 여기지 않는 성도다운 성도를 길러내야 한다.


11. 언제 성령이 떠나시는가?
(1) 영적 예민함이 부족하면 성령이 떠나신다.
(2) 신실성이 부족하면 성령이 떠나신다.
(3) 은혜가 부족하면 성령이 떠나신다.
(4) 교만하면 성령이 떠나신다.
(5) 게으름을 피우면 성령이 떠나신다.
(6) 개인 기도를 소홀히 하면 성령이 떠나신다.


12. 성령이 떠나시면 목회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1) 성령이 떠나시면 사울처럼 버림받을 수 있다.
(2) 스게와의 아들들처럼 될 수있다(행 19:14).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있는 자리는 그 어떤 자리보다 위험한 자리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3) 성령이 떠나면 발람이나, 유다처럼 될 수 있다.
(4) 성령이 떠나시면 여로보암 시대의 한 선지자처럼 갑자기 죽을 수 있다(황상 13:24).
(5) 성령이 떠나시면 삼손처럼 될 수 있다.
(6) 성령이 떠나시면 모세처럼 고통스럽게 사역을 마감할 수도 있다.

찰스 스펄전. 목회황제 스펄전의 목사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236-274.

양우광목사정리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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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자들의 특징


찰스 스펄전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것은 종교상 가장 중요한 질문의 하나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교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하는 대답만으로는 안된다. 이름뿐인 교인들의 대다수는 성경적인 중생의 표나 증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중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 죄의 습성을 멀리함


첫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3:9, 5:18)했습니다.


거듭난 사람, 다시 말하면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던 못된 버릇을 끊어버리고 지난날에 행하던 죄악된 마음과 의지와 모든 나쁜 성벽(性癖)을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게 된다.


무슨 일에든지 죄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려 하며, 악을 행하고도 전연 마음 아프게 느끼지도 않던 지난 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악과 더불어 고민하기는커녕 악을 벗으로 여겨왔던 과거의 모든 생활을 이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죄를 미워하여 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죄에 대항하여 싸우며, 죄의 비참함을 깨달으며 그러한 죄의 멍에를 탄식하며 넘어질 때마다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심령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는 죄를 즐거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장 미워하고 가증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는 그의 마음 속에 죄를 용납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일 1:8). 다만 죄를 무엇보다도 미워하며 심령으로부터의 간절한 소원이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나쁜 생각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일어나는 추하고 더러운 언행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우리는 다 실수가 많다"(약 3:2)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실수와 허물까지라도 다 원통하게 여겨 매일매일 참회하며, 언제나 하나님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전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힘쓰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믿음


둘째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 5:1)라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심을 믿는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보내주신 거룩한 자이며 그분 외에 다른 구세주가 또 없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오직 무가치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달으며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을만한 확실하고도 견고한 터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함 받은 것을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취하신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것을 확신하며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과 심판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공포와 의심을 가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전연 믿음이 없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를 믿으려고 하느냐?"하고 반문해 보라. 그리고 또 "당신은 당신이 쌓은 선이나, 수양(修養)이나, 기도나, 교회를 봉사하는 일이나, 심지어 당신의 교회에 영생의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자문 자답해 보라.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떠한 대답이 떠오르는가 귀기울여 보라.




3. 의로운 생활을 힘씀


셋째로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성도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은 피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항상 바라보고 그의 가신 발자취를 따라 살고자 하며, 그의 명령대로 행하므로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나타내려고 힘쓴다. 그렇다고 하여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악을 인하여 탄식하며, 자기 마음 속에 다른 한 지배자가 있어서 은혜의 길을 가로 막으며, 하나님의 품에서 멀리 떠나게 하려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그러나 마음 속에 거하는 악을 비록 완전히 빼어버리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는 결코 악의 세력에 본심으로 동조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전혀 분간할 수 없을만큼 의심하는 자리에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는 곧 용기를 회복하여 죤 뉴톤이 말한 것과 같이 "오늘 나의 나된 것은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원하여서나 애씀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4.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함


넷째로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 3:14)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진실된 사랑으로 사랑한다. 특히 한 마음을 가진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뜨거운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할 수 없이 악한 죄인에게라도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한편 자기와 함께 한 멍에 아래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열렬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골육의 친척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더 즐겨한다.


그들은 서로 한 집안 식구와 같이 여기며, 같은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 전우가 되며, 또한 같은 차에 동승한 반려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돕는다. 그들은 비록 사회적 지위나, 부나, 나라와 얼굴 빛이 서로 다를지라도 다 한 아버지의 아들과 딸들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세상을 이김


다섯째로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세상의 표준에 의하여 하지 않는다. 그는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세상의 온갖 풍조에 휩쓸려 흘러 내려가지 않으며 남들이 무어라 한들 자기의 목표를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행복을 줄 듯이 속삭이는 주위의 모든 식물 중에서 향락을 구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허무하며 무익하며 무가치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는 이미 모든 일의 경중을 다 판단해 놓았기 때문에 남에게 비난을 받든지 칭찬을 받든지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첫째 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향하여 전진할 뿐이다.




6. 정결한 생활을 계속함


여섯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자기를 지키매"(요 5:18)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조심한다. 그래서 그는 죄에 물들지 않으려고 힘 쓸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할 바 모든 일에 정결한 마음으로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려깊게 친구를 사귄다. 그는 악한 사귐이 마음을 더럽게 한다는 것과, 질병이 사람들에게 건강보다 해를 끼치듯이 악한 것들은 유익하기보다 손해를 끼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아껴 쓸 줄 알며, 시간을 선용하려고 힘쓴다.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군인과 같이 무장(武裝)을 늦추지 않고 유혹의 함정에 빠질까 늘 경계한다. 그리고 그는 항상 조심하며, 겸손하며, 기도하기를 힘쓴다.



중생의 표현: 이상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따르는 여섯가지 표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거듭난 사람들에게서 표현될 때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약하게 나타나며 어떤 사람에게서는 힘있게 나타나서 누가 보나 확실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표현된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또 어떤 것들은 저런 사람들에게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하튼 이 여섯 가지 표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임에는 틀림없다.


끝으로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이 여섯가지 표를 가진 사람만이 중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중생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중생의 표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거듭났는가? 누구든지 이 물음에 확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내일의 양식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깊은 궁핍 속에서 지내지만 결코 동요하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한 한 그리스도인 사나이를 본 적이 있다. 만일 그가 인디안 추장만큼 부자였더라도 그에게는 약간의 근심거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으니 바로 그에게는 전혀 가난하지 않고 그의 근심을 언제나 무덤 속으로 가져가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웃이 있었던 것이다. 


- 스펄젼 -

 





* 출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원문보기▶   글쓴이 : 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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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를 조장하지 않는 은혜의 교리 (스펄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6:14-15)

 

참된 복음의 본질과 핵심은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입니다.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버리면 가장 생명이 되는 핵심을 뺀 것이기 때문에 설교하거나 믿거나 분투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은혜는 복음의 영혼이요 음악이기 때문에 은혜가 없는 복음은 적막할 따름입니다.

 

인간의 죄악을 아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셔서 죽게 하심으로 사람들의 과거 행위나 앞으로 할지도 모르는 선행에 관계 없이 용서하시기 위한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로 믿음을 선택하시고 대속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심으로써 구원이 전적으로 은혜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람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을 때 역사를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선하고 받아들일 만하게 되도록 지금도 역사하며 이 역사는 그가 본래 만들어진 목적인자 영광 가운데 신자로서 받아들여짐으로써 은혜의 행위가 온전하게 되는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구원의 모든 것은 은혜 오직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구원은 거저 주시는 것이지 결코 공로에 따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그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음

 

우리가 구원이라 할 때 의미하는 바는 죄를 사랑하는 것에서 구출되고 죄의 습관에서 떠나고 죄의 욕망에서 자우롭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믿는다면서 계속 자신의 죄를 즐기는 가운데 있어도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복음은 주예수를 믿게 됨으로써 경건하지 않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바꿀수 있고 사단과 죄를 섬기는 대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어서 바싹 마른 해골과 같은 영혼이라도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 생명을 얻을수 있습니다.

 

사랑은 어떤 경우에든지 죄를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나쁩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려울 때 자주 도와 주었던 친구에게서 훔치는 것은 더 수치스러운 범죄입니다. 사랑은 붉게 달궈진 쇠로 죄에다 낙인을 찍습니다. 적을 죽이는 것은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생명을 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은 지옥의 괴물처럼 울부짖는 것입니다. 사랑이 비추어질 때 죄는 더욱 죄되게 보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사랑은 가장 고상한 형태의 미덕을 향하여 온 힘을 집중하도록 합니다. 법 때문에는 할 수 없이 어떤 행동을 하지만 사랑 때문에 하는 일은 기쁨으로 합니다. 법에 의해서강제로 위험한 일을 하게 되면 대항하지만 자신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는 기꺼 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롬 5:7) 선함은 마음을 얻고 친절과 관용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도자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던지는 것을 보십시오.

 

사랑만이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사랑의 법에 의해서 움직이는 친절은 가장 가치없는 사람을 자주 변화시켰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은 자신이 악의 요소가 아닌 것을 증거합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비록 악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을 사랑의 열쇠로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선이 때로는 어려움을 겪지만 끝내는 승리하리라는 것을 아십니다.

 

은혜는 죄악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윗처럼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라고 소리지를 때까지 죄를 보게 하십니다. 내 죄를 인식하게 되었을 때 내 영혼은 어두움과 무서운 폭풍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죄악 때문에 다가올 진노가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도 죄를 생각하면 마치 불에 덴 아이가 불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이 두려운 심정이 생깁니다.

 

은혜의 역사로 우리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주는 즐거움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우리 본성의 토양에서 죄악을 완전히 뿌리 뽑을려고 합니다. 성령의 분명한 열매 중 하나는 거룩을 사랑하고 모든 악한 길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의 심판과 죄의 저주를 알고 있기에 죄를 아주 싫어하게 됩니다.

 

은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변화시켜서 무지를 제거하고 감정을 바로 잡으며 지성을 깨우치고 의지를 복종시키며 소망을 정화시키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죽음에서의 부활과 새로운 창조 새로운 탄생과 비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요 3:7)고 하신 것처럼 은혜를 입은 사람은 거듭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신자가 결코 깨려고 생각하지 않는 의의 약속이 됩니다.

 

구속을 통한 성결

 

예수님의 보혈은 용서할 뿐 아니라 성결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용서받은 죄인의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며 이로 인해 용서받은 죄인은 죄의 살인적인 악에 대해서 타오르는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악을 몹시 싫어하게 됩니다. 이는 그의 몸에 구주의 심장에서 흘러 나온 피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회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 때에 자신의 죄로 인해 무서워합니다. 예수님까지 죽으셔야 했던 것을 본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 에 죄가 지극히 나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구주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모든 상처와 떨어지는 모든 핏방울로 죄를 고발하는 모습보다 은혜입은 마음에 더 큰 능력을 행사하는 것은 없습니다. 무엇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못박은 죄 가운데 사시렵니까? 그분의 죽음을 불러온 것에서 즐거움을 찾으시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못박힌 손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코 죄에 탐닉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맞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받는 도움

 

우리가 날마다 영원한 능력의 거룩한 샘에서 목욕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약하고 우유부단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를 새롭게하여 죄와 열정적으로 싸우게 합니다. 본성적인 양심은 단단하고 무감각하지만 은혜받은 양심은 점점 부드러워져서 나중에는 금방 생긴 상처처럼 민감하게 됩니다.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한 것을 가장 많이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거룩한 두려움 성스러운 염려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성령은 바로 이런 수단을 통해서 자유가 방탕으로 흐르지 않도록 여러분을 경계하십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면 상아궁의 향기가 여러분에게서 날 것이며 사람들은 여러분이 자신들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랑의 가족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자녀입니다. 이 사람이 더 살기 좋은 곳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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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거듭난 자들의 특징

 

챨스 스펄젼 목사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것은 종교상 가장 중요한 질문의 하나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교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하는 대답만으로는 안된다. 이름뿐인 교인들의 대다수는 성경적인 중생의 표나 증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중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죄의 습성을 멀리함)

첫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3:9, 5:18)했습니다. 거듭난 사람, 다시 말하면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던 못된 버릇을 끊어버리고 지난날에 행하던 죄악된 마음과 의지와 모든 나쁜 성벽(性癖)을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게 된다.

무슨 일에든지 죄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려 하며, 악을 행하고도 전연 마음 아프게 느끼지도 않던 지난 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악과 더불어 고민하기는커녕 악을 벗으로 여겨왔던 과거의 모든 생활을 이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죄를 미워하여 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죄에 대항하여 싸우며, 죄의 비참함을 깨달으며 그러한 죄의 멍에를 탄식하며 넘어질 때마다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심령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는 죄를 즐거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장 미워하고 가증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는 그의 마음 속에 죄를 용납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일 1:8). 죄를 무엇보다도 미워하며 심령으로부터의 간절한 소원이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나쁜 생각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일어나는 추하고 더러운 언행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우리는 다 실수가 많다"(약 3:2)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실수와 허물까지라도 다 원통하게 여겨 매일매일 참회하며, 언제나 하나님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전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힘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


둘째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요일 5:1)라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심을 믿는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보내주신 거룩한 자이며 그분 외에 다른 구세주가 또 없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오직 무가치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달으며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을만한 확실하고도 견고한 터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함 받은 것을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취하신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것을 확신하며 아무 두려움없이 죽음과 심판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공포와 의심을 가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전연 믿음이 없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를 믿으려고 하느냐?"하고 반문해 보라. 그리고 또 "당신은 당신이 쌓은 선이나, 수양(修養)이나, 기도나, 교회를 봉사하는 일이나, 심지어 당신의 교회에 영생의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자문 자답해 보라.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떠한 대답이 떠오르는가 귀기울여 보라.

(의로운 생활을 힘씀)

셋째로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성도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은 피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항상 바라보고 그의 가신 발자취를 따라 살고자 하며, 그의 명령대로 행하므로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나타내려고 힘쓴다. 그렇다고하여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악을 인하여 탄식하며, 자기 마음 속에 다른 한 지배자가 있어서 은혜의 길을 가로 막으며, 하나님의 품에서 멀리 떠나게 하려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그러나 마음 속에 거하는 악을 비록 완전히 빼어버리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는 결코 악의 세력에 본심으로 동조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전혀 분간할 수 없을만큼 의심하는 자리에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는 곧 용기를 회복하여 죤 뉴톤이 말한 것과 같이 "오늘 나의 나된 것은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원하여서나 애씀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함)


넷째로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 3:14)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진실된 사랑으로 사랑한다. 특히 한 마음을 가진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뜨거운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할 수 없이 악한 죄인에게라도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한편 자기와 함께 한 멍에 아래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열렬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골육의 친척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더 즐겨한다.

그들은 서로 한 집안 식구와 같이 여기며, 같은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 전우가 되며, 또한 같은 차에 동승한 반려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돕는다. 그들은 비록 사회적 지위나, 부나, 나라와 얼굴 빛이 서로 다를지라도 다 한 아버지의 아들과 딸들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이김)


다섯째로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세상의 표준에 의하여 하지 않는다. 그는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세상의 온갖 풍조에 휩쓸려 흘러 내려가지 않으며 남들이 무어라 한들 자기의 목표를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행복을 줄 듯이 속삭이는 주위의 모든 식물 중에서 향락을 구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허무하며 무익하며 무가치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는 이미 모든 일의 경중을 다 판단해 놓았기 때문에 남에게 비난을 받든지 칭찬을 받든지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첫째 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향하여 전진할 뿐이다.



(정결한 생활을 계속함)


여섯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자기를 지키매"(요 5:18)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조심한다. 그래서 그는 죄에 물들지 않으려고 힘 쓸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할 바 모든 일에 정결한 마음으로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려깊게 친구를 사귄다. 그는 악한 사귐이 마음을 더럽게 한다는 것과, 질병이 사람들에게 건강보다 해를 끼치듯이 악한 것들은 유익하기보다 손해를 끼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아껴 쓸 줄 알며, 시간을 선용하려고 힘쓴다.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군인과 같이 무장(武裝)을 늦추지 않고 유혹의 함정에 빠질까 늘 경계한다. 그리고 그는 항상 조심하며, 겸손하며, 기도하기를 힘쓴다.

중생의 표현: 이상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따르는 여섯가지 표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거듭난 사람들에게서 표현될 때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약하게 나타나며 어떤 사람에게서는 힘있게 나타나서 누가 보나 확실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표현된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또 어떤 것들은 저런 사람들에게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하튼 이 여섯가지 표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임에는 틀림없다.

끝으로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이 여섯가지 표를 가진 사람만이 중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중생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중생의 표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거듭났는가?

누구든지 이 물음에 확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내일의 양식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깊은 궁핍 속에서 지내지만 결코 동요하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한 한 그리스도인 사나이를 본 적이 있다. 만일 그가 인디안 추장만큼 부자였더라도 그에게는 약간의 근심거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으니 바로 그에게는 전혀 가난하지 않고 그의 근심을 언제나 무덤 속으로 가져가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웃이 있었던 것이다.

- 스펄젼 -

 

 

거듭난 자들의 특징 / 찰스 스펄전 목사
다사랑해 | 조회 12 |추천 0 |2013.10.03. 18:13 http://cafe.daum.net/selck/CJhT/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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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거슬리고 가슴에 찔리는...(C.H. 스펄전)

 

귀에 거슬리고 가슴에 찔리는 말씀을 들으라.

나는 말씀을 들으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온갖 성향을 잘 알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선하고 온전한 교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하면
“아, 정말 달콤하네요!”라고 말한다. 또한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깃털을 결대로
쓸어주는 설교만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만약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전하면 그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홱
돌아선다. 그런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유익을 얻지 못할뿐더러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시는
경건한 무리에도 들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는 이와 달리 "진리가 제 마음을 찌른다 해도
오직 진리만을 말해줄 목사님을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내게는 내 몸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검사해줄 의사, 자기의 지식을 총동원해 나를 괴롭히는
질병이 무엇인지 밝혀줄 의사, 내가 몹쓸 병에 걸렸다고 솔직하게 말해줄 의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를 치료할 의사가 필요하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꾼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설교자는 사람들의 심령 깊이 성령의 검을 찌르라고 보냄을 받았지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라고 보냄을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호 6:5)”

  사랑하는 자들이여! 진리는 귀에 거슬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은 가슴을 찌른다.
그러므로 그런 말을 참지 못하고 경청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결코 훌륭한 성도가 아니다.
또한 우리들 가운데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러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실로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한다.

  어떤 경우에 거룩하지 못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누군가와 다투다가 예배당을 올 수 있고,
언짢고 성난 표정으로 올 수 있다. 이는 귀를 틀어막은 채 하나님 말씀을 들으러 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올바른 경청 방법은 기도로 준비하고 듣는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기도한 뒤에 하나님 말씀을 듣는가?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복을 놓치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하실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지 않고 예배당에 나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시골에서 말씀을 전할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해 집회 장소를 찾는다.
그들은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을 밀치고 들어와 앞자리에 앉고, 자기들에게 필요한
말씀과 축복이 되는 말씀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입을 크게 벌린 채 내가 전하는 말씀을
다 받아 먹는다. 굴이 스스로 껍데기를 벌리니 내가 강제로 그것을 벌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렇게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고 오면 그들 마음 문을 열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입견을 품고 껍데기를 꼭 닫으면, 그 날 집회에는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사람들 역시 그 이유를 의아해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께서 준비된 심령 안에서만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시기 때문이 아닐까?

-  네 주께 굴복하라 / C.H. 스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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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역치 않으시는 하나님/ 스펄젼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말라기 3:6) 우리 인생들은 얼마나 변화 무쌍합니까? 그런데 전혀 변치 않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입니까. 그는 바로 여호와십니다. 여호와는 그 마음이 절대 변치 않는 분이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마에 주름 하나 생기지 않는 분입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변해 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변하고 있습니다. 태양도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으며 이 세상도 그 연수가 다해 가고 있습니다. 모두 낡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온 하늘과 땅도 곧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곧 멸망할 것이요 옷처럼 낡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불멸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연수가 다함이 없으며 그 성품이 절대 변치 않으시는 분. 오랫동안 파도에 시달리던 뱃사공이 마침내 상륙하여 땅에 그 첫발을 디딜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도 이 환난 많고 변화 무쌍한 인생 가운데서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는 진리 위에 그 믿음의 발을 올려 놓고 쉴 때 말할 수 없이 기쁠 것입니다.

닻을 꼭 잡아매야 배의 안정이 유지되듯 성도도 그 소망을 이 영광스러운 진리에 고정시킬 때 비로소 안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 1:17). 하나님이 전에 어떤 속성을 갖고 계셨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속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능력, 그의 지혜, 그의 공의, 그의 진리 이 모든 것이 하나도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항상 그 백성의 피난처요 환난 때의 요새였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 백성을 확실하게 돕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이전에 “영원한 사랑”으로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십니다. 마지막 날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불 속에서 다 녹아 없어진다 해도 그의 사랑은 초록 이슬처럼 생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는 이 확신은 얼마나 소중한 확신인지 모릅니다! 섭리의 바퀴는 돌아가지만 그 바퀴의 중심축은 언제나 영원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항상 변하며 스러져 가듯 인간도 소멸하고 세월도 흘러가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절대 시들지 않나니 하나님은 지혜요 사랑이시라.”

유일한 기초

(고전 3: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건물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기초가 관건입니다. 어떤 건축가가 아무리 빠르고, 솜씨 있게 건물을 지었다 하더라도 기초가 부실하게 되었다면 그는 엉터리 건축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천천히 그리고 힘들게 건물을 짓더라도 기초가 튼튼하다면 그는 자랑할 만한 건축가인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초가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폭풍우가 몰아치면 휩쓸려 가버리듯이, 파멸적인 종말을 맞게 됩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깊게 파고 암석 위에 놓은 기초와 같아서, 아무리 시험의 비가 내리고, 박해의 홍수가 닥치고, 사탄의 유혹 바람이 아무리 휘몰아 친다 하더라도 끄덕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이라 할지라도 기초작업이 부실하다면 무너져 버립니다. 기초가 불안전한 건물은 높이 세우면 세울수록 그만큼 빨리 무너져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있어서 기초가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에 대해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상부를 세우는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의 취향이나 판단에 의지할 수도 있겠지만, 기초는 유일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또한 건물의 상부구조에 있어서는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할 수도 있겠지만, 기초작업에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기초는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으니"(사 28:16) 라고 말씀하신 불변의 하나님께서 놓으셨기 때문에 영원히 불변하는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과 삶이 꼭 같은 형태와 스타일을 잦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최고의 건축가 (기독교인)들을 모아 놓는다 하더라도 그들 간에는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으로 건물을 지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은으로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값 비싼 돌로 건물을 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초에 관한 한 그들은 모두 꼭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이며 만유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넘쳐 흐르는 삶은, 그것이 황금궁전처럼 호화롭든지, 은희당처럼 순결 하든지, 대리석탑처럼 견실하든지 간에 관계없이 또한 그것이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넓든 좁든 관계없이 모두 같은 기초인 영원의 암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라." 여러분은 상부구조에 관해서는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기초에 관한 한은 일치해야만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극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라."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다양한 교사들이 서로 다른 기초를 놓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며, 얄팍한 속임수를 부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래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가 버리면, 그것은 기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썩은 나무나 쓰레기가 잔뜩 섞여 있다면, 그 어떤 건축가도 그것을 "기초"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로지 하나의 기초만이 있을 뿐이며,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유일의, 불변의, 부동의, 영원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그 어떠한 기초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 어떠한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유일한 것 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제아무리 훌륭한 근거나 원리라 하더라도, 기초로 자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주 예수만이 배타적으로 기초가 될 수 있으며, 모든 기초적인 것은 그분에게 집약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를 기초와 초석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 깊이는 무한하여서 모든 사물의 본성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그는 기초로 예정되었기 때문에 그 이외에는 어떠한 기초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잠 8:23).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서 난 하나님이므로 이 기초란 바로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라고 본다면, 두 분의 하나님이 있을 수 없듯이 두 개의 기초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두 개의 기초를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 구원을 상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구원이니, 두 분의 구세주, 그리스도 같은 것이 도대체 있을 수 있을 법이나 한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두 개의 기초가 있으려면, 그런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아닌 기초라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모든 영혼은커녕 단 하나의 죄지은 영혼의 무게도 제대로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실 수 있으며, 영원한 진노로부터 구원하여 영원히 축복받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예수라"(딤전 2:5). 예언서에서도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으니라" (사 43:11) 고 말씀하고 계시며, 예수님께서도 직접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으니라" (요 14:6)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릴 설교를 네 가지로 요약해 보겠습니다.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각각의 주제는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쉽게 구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없다. 둘째,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복음은 없다. 셋째,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구원의 희망은 없다. 넷째,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신자는 없다. 

첫째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없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참된 교회를 말합니다. 세상에는 교회라고 불리는 것이 많이 있지만, 오로지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교회만이 참된 교회입니다. 어떤 공동체, 모임, 성직자단, 교파, 법인체가 자신을 교회라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제 아무리 사람이 많고, 오래되고, 재산이 많고, 지식이 높고, 자랑할 것이 많고, 견고하고, 유력하고, 독보적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는 주 예수님이 첫째이며, 최고이십니다. 그의 백성은 그분께서 몸소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선택하여 백성으로 삼으시는데,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를 백성으로 삼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 1:3~4).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시며"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한 재산이 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는 내가 처음 택한 자라.' 그 후에 우리의 영혼을 우리의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네." 그리스도와 관계하여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택함을 받을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영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영혼도 택함을 받았다 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백성들의 머리가 되시고 대표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뜻과 분리된 하나님의 교회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기초는 가장 먼저 놓여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놓여져야 합니다.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으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사 28:16).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사 42:1). 영원한 축복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서는 결코 택함을 얻었다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기초는 모든 것을 지탱해 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탱해 주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 이외의 것에 의지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실한 진리입니다. 구세주는 교회의 초석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유일한 기반이시며,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는 유일한 대들보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집을 지을 때는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을 줍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6). 각자 개인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구속에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하심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첫째가 되는 가장 위대한 교리로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이 없다면, 교회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구속해 주셨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한다면, 그 공동체는 종교 클럽이라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교회는 아닙니다. 전능하신 구세주 이외의 것에 의지하여 현재의 능력과 미래의 발전을 얻고자 하는 공동체는 결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요 14:19)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불멸하심에 의지하여 하루 하루의 생명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며,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의 백성을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에 의지하여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천상과 지상의 모든 권능이 그분께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만방에 나아가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고 예수님께 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온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닌 육의 병기, 세속적인 권세, 육적인 지혜, 교육, 웅변술, 명성, 또는 우리 자신의 열정이나 열의에 의지한다면, 이는 마치 암석대신 모래를 취하는 격이어서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지으려고 마음조차 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만이 교회를 살아있는 교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집을 세울 때는 오직 그리스도 위에 세워야 하며 그리스도께 의지하여만 합니다.

그렇지 않은 건축물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립니다. 우리 교회는 돌아가신 그리스도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영광 받으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 통치하시며, 곧 흩어진 자들을 불러모으셔서 그 중에서 지배하실 그리스도께 또한 의지해야만 합니다. 참된 교회는 포도나무와 같이 오직 줄기가 되시는 예수님께로부터만 수액을 공급받아 가지를 살게 합니다. 그런 교회는 영광의 구세주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영혼 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시 62:5). 다른 공동체는 군주에 의지할 수도 있겠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지합니다. 다른 집회는 인간의 위대함에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교 회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얻습니다.

 다음으로 기초는 건물의 모양을 규정합니다. 참된 교회는 기초계획과 개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여 모양을 결정합니다. 건물의 모 양은 대체로 기초에 의해 결정됩니다. 옛 수도원이나 성의 기초들을 조사해 보면 같은 토질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기초가 어떻게 되어있나를 보면 그 건축물의 모양을 추리해 낼 수 있습니다. 여기는 귀퉁이였고, 저기는 둥근 탑이 있었고, 또 여기는 버팀목이 있었고 저기는 후미진 곳이 있다는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는 기초선에 따라야만 하듯이 모든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지하여 세워져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과 명령을 최선의 지혜로 알고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곧 교회의 법입니다. 교황과 종교회의의 법령, 총회나 장로회의 또는 각종집회의 결의, 그리고 개개인들의 법령등은 제 아무리 훌륭하고 또 한번에 다 모은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법과 다르다 면 그것들은 공허한 바람이나 휴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손상하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벗어나서 건물을 세운다는 것은 마치 기초 닦아놓은 곳을 벗어나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아서 그 건물은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만이 법이요 권위가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속하는 목사, 종이기 때문에 군주나 법률가의 종이 아닌 교회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충실히 따로는 교회만이 모든 일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입법자가 아니라 섬기는 종입니다. 교회의 법이나 의식 방법 등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취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명할 때에, 우리에게 명한대로, 우리에게 명한 것을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왕이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아무런 권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오로지 그리스도께서만이 지배하십니다. 만일 교회에 그리스도에 기초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건축자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는 것이며,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집을 손상시킬 뿐입니다. 그리스도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 여러분이 속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법령을 따를 때는 안심이 되지만, 관습이나 인간의 권위를 따를 때는 불안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교리를 믿을 때는 안심이 되며, "이것은 인간의 생각이나 현명한 자의 판단 혹은 무슨 회의의 결의 등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포하신 것이다"하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한 마디도 빠짐없이 모두 기초가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늘 하늘나라에 거하며,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후나 마찬가지로 꼭 같으시기 때문에 주님의 권위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는 견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과 권위를 벗어나는 교회는 기초를 잃게 되어 교회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건축에 있어서는 기초가 필수불가결한 것이듯이, 참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가옥의 경우에 창문 하나쯤 없어지고, 문을 폐쇄하고, 지붕 일부를 옮긴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가옥일 수 있지만, 기초가 없어져 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가옥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 지로 기초와 초석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없어져 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은 설교를 놓고서 "그것은 신자의 설교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기가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는 뒷전에 쳐박아둔 가르침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그런 따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여러분은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달려 나오면서 외쳤듯이 "그들은 주님을 없애 버렸다. 도대체 그들이 주님을 어디로 가져갔는지 모르겠다"고 외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의 설교는 유대인들과 마호메트인들이 칭찬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신앙이 좋다고 하는 목사나 은혜에 넘친다고 하는 예배도 실제로 가보면 그리스도를 소홀히 다루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 이십니다. 그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시며, 시작이자 끝이신 분입니다. 참 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충실히 섬깁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서 전부입니다. 그들은 목사와 전도사에 대해서는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 들이니라" (고전 3:5) 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 진리를 확실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계셔야 할 곳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적 그리스도입니다. 참된교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 지식과 웅변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설교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한가운데에 거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참된 배우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주님께서 모욕 당하는 것을 보고도 만족할 수 있는 교회라면,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순결한 배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첫 번째 주제를 몇 마디로 요약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거나 결합의 끈이 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인간들끼리 서로 결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목적을 위해 친목회나 연맹 또는 연합회 등을 구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지 않는 한 교회는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희망의 근거와 기초가 되시는 분입니다. 신자들과 목사가 결합했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도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몹시 좋은 일이며, 목사와 성도들 사이가 완전한 사랑으로 충만 되어 있다는 것은 몹시 유익한 일이지마는, 그 관계는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만의 사이에서는 어떠한 영광도 있을 수 없으며, 거기에는 맹목적으로 숭배해야 할 대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선생의 이론이나 견해에 의지하여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바울이 나아볼로나게바에 기초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그리스 도의 권위에 기초해서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루터나 칼빈이나 웨슬레 혹은 휘트필드 등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 도를 믿는 자들로 구성될 때만이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특정의 형식이나 의식을 따른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하나님을 섬기며, 같은 신앙을 가지며, 같은 세례식을 행합니다. 따라서 의식에 있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식을 행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간에 서로 의지하면서 충실하게 결합을 이루고 함께 결속하는 것은 좋지만 교회의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정통을 주장하기 위한 결합체이거나, 어떤 종교사상을 지키기 위한 연합체에 불과한 것입니다. 교회에는 주님만 계셔야 합니다. 물론 목사, 장로, 집사, 교사, 복음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는 귀한 돌들이지만,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것은 기초가 없는 것과 같아서 결코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께 나아가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이 집 전체가 바로 세워질 수 있으며, 거룩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배태시키는 씨앗이며, 교회라는 가지가 뻗어 나오는 줄기이며, 교회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머리이며, 교회를 먹이는 목자이며, 교회를 통솔하는 장군이며, 교회의 남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서 구원해 주신 교회의 만유속에 계시는 만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한 기초를 주셨네. 하늘 법령처럼 굳건한 불변의 영원한 반석에는, 폭풍, 번개도 당하지 못하네. 지옥 문이 헛되이, 반석에 대항하네. 그리스도는 반석, 초석이시며, 하나님께서 그 위에 아름다운 집 짓네."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서, 그들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복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사이비 복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한 때는 "다른 복음"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으나, 곧 수정하여 "다른 복음은 없다"고하였습니다. 복음은 오로지 하나이며, 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음은 단 하나인 것입니다. 두 분의 구세주가 없었고, 두 번의 구속하심이 없었듯이 두 개의 복음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의 구세주와 한 번의 구속하심은 복음에 있어서 절대 불가결한 것 이며, 복음은 단 하나뿐입니다. 복음의 기초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다른 기초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을 중보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명하시기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으신 어떤 것을 너에게 전하라 하셨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사이비 예언자이며 하나님과는 무관한 자입니다. 그리 고 또 설사 주교의 말이 종교회의나 교회에서 행해진 말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르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이전과 그리스도 이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꼭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음성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둘이나 셋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을 경우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며, 하나님은 계시를 봉인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다른 음성에 귀 기울인다면 우리는 비참해질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양떼들이라면, 낯선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요 10:5) 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복음은 오로지 중보자 이신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선포됩니다. 그렇지 않은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찬양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신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우리 의 병을 고쳐주시고 슬픔을 없게 해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라거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찬양되지 않는 설교는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중보자이실 뿐만 아니라, 복음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가 그분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한 구원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우리는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 우리는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신자들에게 완전한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에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 그리고 거룩함, 구속하심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 들려 올려져서 영원히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되는 모든 축복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절정이며, 본질이며, 극치이며, 자랑거리이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람의 행위나 목사가 행하는 의식이 근본적인 위치를 점하는 그런 복음을 듣게 된다면, 그런 가르침은 거부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 5:19).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설교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설교할 수 있도록 합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고 하신 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중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오늘의 본문을 상기하셔 서 그리스도와 무관한 복음은 결코 가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그리스도와는 무관한 건조한 훈계조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가 택함을 받음에 관한 교리를 설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기초를 무시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기초를 무너뜨려 버리게 되면, 벽은 휘고 담은 휘청거릴 것입니다. 제가 최후의 은총에 관해 설교할 경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것이며, 모든 성도들의 은총은 예수님과의 결합에 달려있음을 설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가 의로움에 대해 가르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의로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본 교회의 이전의 목사님들이 설교하신 것들을 모아 보면, 그들은 구세주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 났던 사건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처럼 위대한 교리들을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오히려 바울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교 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값진 피에 대해서는 굉장히 많이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듭남에 대해서는 그렇게 명쾌하게 설교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로 인해 성도들이 누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쁨에 관해서는 풍부하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용서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또한 거듭남은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신 것이 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구세주의 실제 삶과 죽음에서 일어났던 사실에서 도출해 내었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 참으로 경탄하는 바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으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으니" (고전 15:1~5).

 바울에게 있어서 신성이란 사시고 돌아가셨던 육화된 신성, 즉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선포할 때는 그 복음을 주신 주님과 밀접하게 결합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포도밭에서 싱싱한 포도를 확인하여 바로 짜낸 즙이라면 그 포도즙은 대단히 맛이 좋을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포도주는 싱싱한 포도송이로 담글 때 가장 달콤한 술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설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에 대하여 설교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 교리는 주님 무덤 입구에 있었던 돌과 같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리는 솔로몬이 앉았던 상아왕좌와 같아야 되며, 주님이 거기에 앉았을 때 찬연히 빛날 수 있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험을 설교하는 것도 괜찮지만, 그럴 경우에는 예수님을 현저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특히 주의해야만 합니다. 설교를 거의 다 경험으로 채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는 그들을 저주하지는 않겠지만, 궁핍한 죄인들의 경험이 뭐 그리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는 그가 저와 같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니겠지만, 훨씬 더 유용한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느끼시며, 나의 형제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알고 싶습니다.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오히려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공이든 실패든 그리스도가 뒷전에 밀려나 있는 경험은 오히려 복음을 손상시키게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유일한 기초이십니다. 그 분을 떠나서는 결코 복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행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많은 설교를 해야 하고, 이 시대의 죄악에 대해 단호하게 비난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시대적인 죄악을 비난하고 선행을 찬양하는 데 그친다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는 충분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불충분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선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범은 죄악을 퇴치하고 선행을 고무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완벽한 귀감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복음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하셨을 줄로 믿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셋째로,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구원의 희망은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말씀이 필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이비 희망에 대해서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릴 때부터 높은 신분으로 자랐으며, 자신들의 부모들은 훌륭한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만족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은 잘못된 일을 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믿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희망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여러분은 죄로 인해 죽은 몸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제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육에 불과한 것입니다. 육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야만 하며, 출생 이후 여태까지의 삶에서 가질 수 없었던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만 합니다.

혹자는 "나는 교회의 모든 의식을 다 거쳤는데"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의식에 기초해서 집을 짓는다면, 그것은 만족스럽지 못하며, 여러분 영혼의 무게도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례식이나 성찬식 그 밖에 수많은 의식들, 이것들은 여러분을 조금도 도와주지 못합니다. 영혼의 희망은 그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에 기초해야만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부지런히 많은 선행을 행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열 배나 더 많은 선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단 한 번의 죄를 범한다면 그 선행은 여러분을 구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 제 아무리 많은 선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만일 그들이 그들의 선행에만 의지하려 한다면 그 모든 선행은 부패한 기초에 불과할 것입니다. 선행을 많이 행했다고 해서 곧 바로 그 사람을 신뢰하지는 마십시오. 인간의 공로란 모래기초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특별한 영적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신 없이 울기도 하고, 또 무한한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지옥 문에 이르거나 하늘 문에 이르는 느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느낌이나 흥분이 희망의 기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느낌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고민입니다"라고 하면서 고민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민하지 마시고, 느낌이 느껴지든 말든, 무조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서 그분에게 의지하십시오. 그 어떠한 느낌이라 하더라도 만일 거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망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행과 마찬가지로 느낌에 의지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놀라운 꿈을 꾸고 소리를 듣고 환상을 보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꿈, 소리, 환상! 그 따위 것은 다 쓸데 없는 것입니다. 다 내팽겨쳐 버리십시오. 그런 것은 전혀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것 아닙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보았지만 결국은 죽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꿈은 확실히 나를 구원해 줄 것입니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꿈은 여러분에게 헛된 희망을 줄뿐입니다. 여러분이 다음 세상에서 깨어나면 그 꿈은 깨져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이 말씀,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로지 이 말씀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자들의 죄를 구속해 주시기 위해서 돌아 가심으로 해서, 그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그로 인해 의롭게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나는 의롭게 되었음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자는 저주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구원을 얻었음을 압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신뢰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분을 기초로 의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은 나의 기초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말씀이 거짓이라는 결과가 됩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이 진실됨올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고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는 멸망치 않을 것이며 결코 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결코 멸망치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희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하나님을 모욕하는 구역질 나는 희망 따위는 똥 더미에 내팽겨쳐버리십시오. 위조지폐를 갖게 된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버리고는, 혹시 다른 사람이 자기가 아직도 그 위조지폐를 갖고 있지 않는가 하며 의심할새라 재빨리 도망쳐 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이외에 믿는 것이 있다면, 그 따위 믿음은 땅에 묻어버리고 재빨리 그것으로부터 도망쳐 나오십시오. 그런 믿음은 사이비 믿음이며, 영혼을 병들게 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붙잡도록 하십시오. 모든 구원은 바로 그런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한 구원이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라."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신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가 아르미니우스파이든 칼빈파이든 관계없이 오로 지 그리스도만을 기초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에 카톨릭 신자, 개신교 신 자, 침례교신자가 있다고 합시다. 이 중에서 누가 기독교인이겠습니까?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에 기초하여 세워진 사람은 기독교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 좀더 설명해 봅시다. 첫째,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자기 영혼 전체를 그리스도에게 맡겨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어야 하며, 불순 물이 (목사든 의식이든) 섞여서는 안됩니다. 깨끗하고 곧은 길과 같이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전부이며 유일한 희망이어야 합니다. 그 길에서 조금 이라도 벗어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진 영혼의 유일한 희망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여러분이 처해있는 지위나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경우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결코 그리스도의 지도력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십자가만을 붙잡고 주님만을 따라야 하는 기독교인이 되기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구세주이기도 하지만, 여러분을 지배하는 왕이기도 하십니다. 참된 신자들은 기초 뒤에 벽을 세우듯이, 그리스도에 기초하여 자신의 모범을 세우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집이 자라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자란다는 말이 약간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집은 살아있는 집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건축물의 경우에 왕왕 놀랍게도 마치 자연적으로 자라난 것과 같은 건물이 있습니다. 평범하고, 솜씨 없는 건물의 경우에는 석공이나 목수가 손댄 흔적이 많이 드러나지만, 완벽한 건축물은 마치 저절로 자라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자라므로, 그리스도의교회도 자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라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몇 년 전에는 같이 즐겁게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이, 이제 내가 공부를 많이 하고 보니, 영 형편없게 보인다"고 말하는데, 그 사람은 은혜가 아닌 자신의 자존심을 따라서 사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자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신자는 크게 성장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확고하게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만 합니다. 참된 신자는 현명해지면 현명해질수록 더욱 더 그리스도의 지혜를 드러내야만 합니다. 참된 신자는 그가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리스도를 능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발전하면서 자신은 점점 작아지고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가 점점 커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기초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신자는 결코 그 기초를 벗어나지 않으며, 오로지 그 기초 위에다가 집을 세웁니다. 이를 철저히 고수하지 않는 자는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셋째,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참된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 삶에서 최고의 것으로 여깁니다. 참된 신자는 예수님을 위해 사용되지 못한 시간, 그리고 예수님께 바쳐지지 않고 사용된 물질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신자는 자신 안에 살아계시는 그리스도가 없다면 자신은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바로 이와 같은 참된 신자가 되시길 빕니다. 항 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길 법니다. 주님의 현존 하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 저는 설교가 하기 싫어집니다. 그럴 때 설교하는 것은 저에게 전혀 위안을 주지 못합니다.

월요일 기도희 때마다 저는 주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참된 신자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주님께 의논을 드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단히 분주한 교회입니다. 일 많이 하는 바쁜 교회에 다니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그럴수록 항상 주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사업을 하면서 주님의 귀한 사랑이나 달콤한 현존, 그리고 은혜로운 미소를 만끽하지 못한다면, 거룩한 사업이 단지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일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르다처럼 주님을 위해 일을 함과 동시에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앞에 있으십시오. 주님께서 교회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 우리의 성격,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기초가 되어 주시기를 법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고, 주님의 값진 보혈에 의지하며, 감사의 기름으로 향기롭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영원히 집을 짓게 되며, 주님의 귀한 이름을 영광되게 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선교회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인 찰스 스펄전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19)

 

청소년기의 찰스 스펄전

장차 영국의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게 될 찰스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1834년 6월 19일 에세스의 캘버던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조합교회 목사인 가정에서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 반대하던 존 번연의 영국 침례교적 전통 속에서 자라났다. 스펄전은 신앙 속에서 양육되었으며 기도하는 손에 의해 길러 졌으며 예수님에 관한 노래를 들으며 잠들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특히 찰스 스펄전을 위해서는 “제 아들이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앙의 엄격한 교리와 경건한 칼빈주의자들과 청교도 신학과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펄전은 17세기의 존 폭스의 ‘순교자의 책’과 존 오웬, 리처드 십스, 존 플라벨, 매튜 헨리, 리처드 백스터와 같은 위대한 청교도 작가들의 책을 읽고서 신학적 논의의 의미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그가 죽기 전까지 무려 100번이나 읽었으며, 15살 된 스펄전의 상상력은 풍부했고 기억력이 뛰어 났고 그의 독서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스펄전의 회심

15세의 스펄전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알고 싶어 했다. 어느날 주일 아침 스펄전은 눈보라 때문에 옆길로 빠져 어떤 작은 감리교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본문은 이사야 45:22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설교했다.

“여러분 중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신 속에는 어떤 위안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라, 나는 큰 핏방울들을 흘리고 있다. 나를 보라, 나는 십자가에 달려 있다. 나를 보라, 하늘로 올라간다. 나를 보라, 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가련한 죄인들아, 나를 보라! 나를 보라!”는 메시지가 스펄전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는 어두움으로부터 찬란한 빛으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워 졌고, 절망으로부터 구출되었고,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결국 스펄전은 1850년 1월 6일 회심하였다. 1850년 5월 3일 라크강에서 침례를 받은 후 그는 일생동안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그분의 일을 확장 시키겠다”고 서원한다.

신학적 쇠퇴기였던 19세기의 영적상태

비국교도 교파들인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조합교회 등은 18세기에 경험했던 부흥의 열기가 많이 침체되었고, 다소 형식주의가 교회에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1859년의 부흥으로 인해 다시 신앙적 열정이 일어났고, 복음주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 활동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출현하였다. 1840년대에 시작된 현대주의 운동과 1859년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도전과 성경 고등비평 (Higher Criticism)이 들어와 기독교의 기초를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신 신학’ 또는 ‘신 사상’의 공격을 받으면서 칼빈주의적 신학과 신앙이 쇠퇴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급속하게 일어났다. 스펄전은 이러한 개혁 신학의 쇠퇴를 지켜 보면서 성경적인 교리가 회복되는 것만이 영국교회 부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워터비치 침례교회 부흥

스펄전은 1851년 10월 17살 때 워터비치 한 오두막집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했다. 캐임브리지 근처 워터비치 (Waterbeach) 침례교회 에 모여든 그곳 주민들이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자기네 교회 목사로 초청하여 1852년 1월에 부임했다. 그가 설교하자 사람들이 회심하기 시작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다. 특별히 스펄전은 영적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능력을 보였고, 그 능력은 설교할 때 마다 나타났다. 처음에 40명이던 교인수가 100명으로, 더 나아가 450명으로 급증했다. 교인들은 스펄전을 사랑했고, 그가 대학으로 떠나지 않은 것을 기뻐했다. 스펄전은 워터비치에서 2년간 목사로 사역한 후 “청년 설교자”로서의 그의 명성이 런던에까지 퍼져 나갔다.

런던 부흥 - 메트로폴리탄 성전

당시 열아홉 살이던 스펄전은 1854년 4월 런던에 있는 침례교회인 New Park Street Baptist 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스펄전이 런던으로 온 것은 1859-1860년에 이루어진 잉글랜드 부흥의 전조였다. 매우 약해졌던 그의 교회는 시간이 갈수록 많은 성도수로 인해 넘치게 되었다. 주일 예배 때가 되면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차게 되어 곧 교회 증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엑서터 홀에서 드린 주일 예배에 매주 4,500명이 몰려왔다. 또 좌석이 부족했다. 이보다 더 넓은 뮤직 홀로 옮겨 예배드린 첫번째 주일에 무려 2만 2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가 설교한 초창기 때 수 백명이 그의 설교를 듣고 복음을 영접했는데 장차 아내가 될 수산나 톰슨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교회는 청중을 사로잡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스펄전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청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 교회를 짓기로 결정했다.

새로 지은 메트로폴리탄 테버네클 (Metropolitan Tabernacle) 교회는 1861년 3월에 문을 열었다. 당시 국교회에 반대하는 신도들이 예배드리는 장소로는 가장 큰 교회로 5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스펄전이 사역하는 동안 평균 출석 교인의 수는 약 5천명 이상 넘었다. 교인들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더니 1854년에 232명이던 교인수가 스펄전이 사망할 때 쯤에는 그 수가 5,307명으로 늘어났다. 스펄전이 런던에서 설교한 이후로 거의 매 예배 때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찾았다.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목회자 대학 (The Pastor's College) 설립

많은 젊은이들이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그 영적인 열정에 감동되어 빈민학교나 길 거리에 나가서 설교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복음의 열정이 강하였고 신학 수업을 받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였다. 그래서 스펄전은 이러한 젊은 설교가들을 훈련시키는 목회자 대학 (The Pastor's College)을 설립하게 된다. 이 칼리지에 대한 그의 비전은 학자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설교자와 영혼구원에 열정을 가진 복음주의 사역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펄전은 2년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교회가 없는 곳으로 가서 교회를 세우게 하였다.

1866년에 런던에서만 스펄전 칼리지 학생들이 18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 후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고, 새로운 교회조직이 만들어지고, 오래되고 쇠퇴해가는 교회에 다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스펄전 칼리지를 졸업한 80여명의 사역자들이 영국의 각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두각을 나타 내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18명으로 줄어든 교회에 갔는데 몇 년 후 약 800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스펄전의 기도의 영성 - “스펄전의 기도는 신학적이다”

스펄전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말씀, 기도, 교리, 은혜, 성령이다. 그는 평생 동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사도시대 이래로 스펄전의 강단 기도에 비길 만한 기도가 없었다. 그의 강단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교우들을 위한 사랑과 격려, 축복,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표현들이 많다. 스펄전의 기도는 신학적이다. 그리고 그의 기도에는 진지함, 열정, 뜨거움, 창의적, 승리감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영원한 언약의 피가 가득하다. 그는 가끔 금식기도 기간을 정하든지 특별기도의 달을 마련하기도 했다. 스펄전은 교회 모든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최선책은 개인 기도훈련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 생명력이 넘치려면 기도회를 살려야 하고 기도회를 살리면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한다고 강조했다. 스펄전은 주일 예배가 시작되기 전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개인 기도실로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실패감을 한탄했다. 스펄전은 설교자의 능력을 얻는 조건은 뜨겁고 끈질긴 기도가 가장 급선무라고 강조하면서 능력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무릎 꿇고 땀을 흘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 핵심 - “복음 설교”

스펄전의 모든 설교는 복음설교이다.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대속이다. 그의 설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가득 채워졌고, 성경과 죄의 타락성, 은혜 교리, 하나님을 향한 사랑, 구원의 영광이었다. 그의 설교는 권위있고, 열정적이며 우렁차고, 독창적이며, 감동적이고, 심오하고, 어휘 선택이 참신하고, 구체적인 적용사례들이 가득했다. 스펄전은 목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의 사역 기간 동안 예배나 성례전보다는 설교와 회심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다.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명하고도 열정적으로 전했다. 그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핵심 사항들과 복음주의 신앙을 끝까지 사수했으며, 교리적으로는 칼빈주의를 고수하며 굽힐 줄 모르는 신학적 신념들이 강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스펄전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바로 이 사람인데 그는 칼빈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스펄전은 한 편의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 수백 권의 책을 참고했다. 그의 서재에는 1만 2천권 정도 있는데 약 60-70%는 청교도 서적이다.

내리막 논쟁 (Down Grade Controversy)과 생의 마감

칼빈주의 신학이 확고한 스펄전은 연합침례교 안에서 자유주의와 논쟁을 하게 된다. 침례교 연맹을 분열시킬 뻔 했던 사건으로 1887년 교리적인 문제인 “내리막 논쟁”이 발생한다. 이 논쟁은 당시 침례교 목사들과 교회 및 신학 대학들 가운데 현대 성경 비판이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난했을 때 발생했다. 스펄전은 새로 나온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칼빈주의 교리를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검과 흙손 월간지에 청교도 입장을 옹호하며 “우리 믿음의 적들”을 공격하는 내용의 글을 발표하면서 그는 침례교 연맹을 탈퇴했다. 비록 침례교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복음주의 연맹 회의가 열려 스펄전을 지지할 뿐 아니라 복음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스펄전은 진리수호를 위해 싸웠고 은혜교리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도 불사했다.

스펄전은 1892년 1월 31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불타오르는 사역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올리브 나무로 만든 스펄전의 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영원히 사랑하는 찰스 하돈 스펄전 목사를 기억하며, 1834년 6월 19일 캘베던에서 태어나 1892년 1월 31일 멘톤에서 예수님 품에 잠들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노라.’

찰스 스펄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

1.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Christ-centredness)' 삶이다.

스펄전은 스스로 고백하기를 "나는 내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말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본질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한다. 스펄전의 모든 고백과 신학 그리고 교리적인 관점은 그의 예수님 중심적인 생각과 삶에서 비롯되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받은 날 부터 스펄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전부가 되었다. 만약 예수님을 향한 스펄전의 이 헌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스펄전의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2. 스펄전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고는 곧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졌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며 순종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따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실천하며 설교하였다. 성경은 스펄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스펄전은 사람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고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았다.

3. 스펄전이 오늘날 목회자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도전은 그의 목회자상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 떼들을 참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섬겼다. 스펄전은 어디를 가든 어디서 설교를 하든 늘 목자와 같은 마음으로 설교를 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가장 중요하였으며 그 영혼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을 스펄전은 사랑하였다. 스펄전의 설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는 영혼을 향한 목자의 마음과 사랑이었다. 스펄전의 설교는 영혼을 살리는 설교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설교의 황태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부흥을 위한 메시지

오늘날 유럽교회나 조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피 묻은 십자가가 잊혀져 가고 있다는 상황이다. 이러한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였던 스펄전과 같은 능력있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부흥이 없는 이 시대에 스펄전 처럼 영혼을 살리는 설교자가 필요하며, 복음으로 불타오르는 설교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스펄전 처럼 예수! 예수 !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가득한 복음 설교가 이 땅에 울려 퍼져야 한다. 복음 설교가 부흥의 불을 지피우게 될 것이다. 제 2의 스펄전, 제 3의 스펄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 주님, 스펄전의 설교아 영성이 이 땅에 리바이벌 되게 하소서! 스펄전과 같은 설교자를 통하여 이 땅과 온 열방에 부흥이 일어날 것을 기대한다.

*김현배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국 부흥운동사를 공부했다. 현재 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을 맡아 유럽 재복음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도 맡고 있다.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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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

 

 



성도의 견인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 욥기 17:9


1. 교리를 살펴봅시다.


p.33.

우리는 특별구속을 믿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그 구원의 결과로 일어나는 구속받은 자의 견인을 보증합니다. 우리는 효과적 소명을 믿습니다. 이것은 영화를 보증하는 칭의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 교리는 하나의 사슬과 같아서, 여러분이 하나의 교리를 믿으면 그 다음 교리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교리는 나머지 교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교리를 받아들인 여러분은 반드시 견인교리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견인교리는 은혜교리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효과적 소명


매우 담대한 예언


p.55.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교하는 사람은 담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명시대는 은혜교리를 거부합니다. 복음을 가르칠 때 은혜교리는 핵심입니다.


p.90.

그 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지만, 값없이 주는 은혜는 그를 찾아가서 죄인이여,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어도 그리스도는 손으로 문을 여십니다. 우리가 일어나지 않고 그분을 냉정하게 거절해도 그분은 내가 들어가야 하겠으니 들어갈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눈물로 우리를 이기실 때까지 우리를 보고 우십니다. 그분은 자기의 울부짖음이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시면서 우리를 따라다니십니다. 마침내 자신이 정한 시간, 주님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거기 거하십니다.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제한적 속죄


예수님께 담당시킨 죄


p.110.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나의 경험을 솔직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대속의 교리만큼 나의 영혼을 기쁨으로 불타게 하는 교리는 없었습니다.

 


 

무조건적 선택


야곱과에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로마서9:13


p.164.

사람들이 많은 논쟁에서 나는 이렇게 저렇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대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씀에 확고히 서 있다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가진 이 큰 교리를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내가 생각한 것, 곧 어떤 사람은 택함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성경적 증거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커다란 증거는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본문 속에 증거됩니다.


이 구절은 무서운 본문입니다. 나는 가능한 한 솔직히 이 본문을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미워하다라는 말이 미워하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덜 사랑한다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내가 야곱을 사랑했고 에서를 덜 사랑했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나는 그렇다고 믿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미워하다라는 뜻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다른 성경을 제시할 때까지, 나는 이것을 고집할 것입니다. 나는 이 단어가 정확하고 알맞게 번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워하다라는 단어가 원문의 뜻보다는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덜 강하게 (p.165)표현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덜 사랑한다는 의미 없는 단어를 제공하는 다른 번역서보다는 나은 표현입니다. 나는 덜 사랑한다는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본문의 뜻을 그대로 사용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는 사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야곱은 택하셨지만, 에서는 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야곱을 끝까지 일생동안 복주셨지만, 그의 은혜는 에서에게 결코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죄의 길로 가도록 여전히 내어버려 두셔서 내가 에서를 미워했다는 무서운 진리를 입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불쾌한 본문을 회피하고자, 다른 사람들은 이 본문이 에서와 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손, 에서의 자손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자손, 에돔 자손을 뜻한다고 합니다. 나는 그 차이점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 뜻을 확대 해석함으로 곤란한 점이 없어졌습니까?


웨슬리파의 형제 중 몇몇은 민족적 선택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민족은 택하시고, 다른 민족은 택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우리에게 말하기를, 한 사람을 택하고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불공평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합리적으로 그들에게 한 민족을 택하고 딴 민족을 버리는 것은 똑같은 하나님의 불공평이 아니겠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한 논법이 그들을 역시 뒤엎었습니다. 민족적 선택을 입증하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속임수는 결코 없습니다. 단체나 다수의 선택이 아니라 민족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개인의 제한적 선택과 같은 것입니까? 좀더 생각해 볼 때, 비록 우리는 순간이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한 사람을 택하고 다른 사람을 택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불공평이라면, 한 민족을 택하고 다른 민족을 택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더 큰 불공평일까요?


그렇습니다. 어려움은 이렇게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과 싸우는 어리석은 싸움으로 더 커질 뿐입니다. 게다가 여기 옳지않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앞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것은 결코 민족들에 대한 것을 (p.166)말하지 않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이 구절은 민족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 후에 협박적인 이 말씀이 두 나라의 상태, 곧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상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민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구절에서 야곱이란 이름을 가진 그 사람 야곱을 말합니다.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대로 만지작 거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이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말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 있도록 하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고개 숙이도록 만들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는 하나님의 보좌만큼 확실하며,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나는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하여 말할 것입니다. 나는 본문이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는 의미를 그대로 지닌다고 설명(p.167)했으므로, 이 구 절을 변경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몇몇 사람들의 입술을 깨물게 만든 무서운 이 교리의 위세를 꺾기 위해, 나는 이제 이 말씀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자 합니다.



Ⅰ. 이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선택의 교리를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그러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몇 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알미니우스파 형제에게 선택에 대해 물어 보십시오. 금방 그는 당신을 무섭게 쳐다보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서, 이 사실을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 전쟁의 아우성 같은 끔찍한 일이며, 그는 즉시 논쟁의 칼을 날카롭게 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 형제여! 당신을 자연의 상태에서 부르셔서 지금의 당신을 만드신 분이 주님이 아니십니까?라고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는 말하기를 물론이지요.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 다음, 왜 한 사람은 개종하고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그는 오, 성령님께서 이 사람 안에 역사하셨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의 형제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낫게 취급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 안에는 놀라운 일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날마다 이것이 사실임을 인식합니다. 저기 2층 복도 위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한만큼 열심히 일했지만, 일주일에 15실링 이상 벌 수 없었습니다. 여기 일년에 일천 실링 버는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한 사람은 왕의 궁궐에서 태어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지붕도 없는 마굿간에서 그의 첫 호흡을 내쉬어야 하다니!


이것이 무슨 이유일까요? 하나님의 예정이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이 상황에, 또 어떤 사람은 저 상황에 놓으십니다. 여기 두 가지 이상의 생각은 할 수 없는 머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함께 무엇(p.168)을 할 것입니까? 여기 앉아서 책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질문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것은 독수리로, 어떤 것은 벌레로 만드셨습니다. 그분은 어떤 것은 사자로, 어떤 것은 기어다니는 도마뱀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어떤 사람은 왕으로, 어떤 사람은 거지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몇몇 사람은 아주 넓은 마음을 가지고 태어 났고, 어떤 사람들은 거의 천치가 되려고 합니다. 왜 이럴까요? 이것 때문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평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뿐, 불평함으로써 유익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들에 반항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맨발로 저항하면 상처를 입을 뿐입니다. 여러분 자신만 상처를 입을 뿐, 사실들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자, 그렇다면 선택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일광처럼 분명합니다......(p.169) 그렇다면 우리가 더 이상 토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잘 믿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견해를 달리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실을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단순한 교리를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를 바꿀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대하시는 것보다 확실히 몇 사람을 더 잘 대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변호하지 않겠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태도를 설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변호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해석자이시며 사실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그 교리에 대해 논쟁하기 전에, (p.170)여러분이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이 교리를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이 교리를 반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적인 사실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은 전적 구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 디모데후서1:9


p.185.

생각이 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확고한 논증이 필요합니다. 생각이 얕은 사람은 단지 감정과 흥분에 의해서도 설득되지만, 사회 중요 계층의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영향을 주기 원할 때-디모데는 부지런하고 열심히 있는 제자였고, 은혜와 은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그는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확고한 교리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디모데에게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이것이 목회에서 행해져야 할 학습입니다.


어떤 열심히 있는 목사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흥분시키지만, 교육시키는 (p.186)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불을 많이 일으키지만, 빛은 거의 비춰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에 호소하여 말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정처리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감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흥분에 기초하여 지탱하고 유지하는 종교는 틀림없이 보잘것없고 견고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편의 도전이나 짓누르는 시간의 손아귀에 매우 빠르게 굴복할 것입니다. 그 목사는 하프 연주자가 하프 줄을 튕기듯이 큰 호소력으로 감정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만약 잘 준비된 훌륭한 악기를 무시한다면, 그는 정말 어리석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사람들을 대하게 될 때, 그는 반드시 이치와 이해에 바탕을 두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령이 가르쳐주신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잘 이해력에 호소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강력한 동기를 우리에게 틀림없이 부여해 줍니다.


만약 우리가 비이성적인 충동에 의해 여러분을 어떤 행동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불안전하고 신빙성이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와 같은 일에 능수 능란한 사람들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이 똑같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러분의 마음에 확고한 진리와 견고한 논증으로 영향을 미치도록 하실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것에 도 변치 않는 능력의 불변성에 의해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깃털은 바람에 날리지만, 그것은 고유의 힘이 있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강풍이 불 때, 깃털은 땅에 떨어집니다. 흥분의 종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자체 내에 생명을 지녔으므로, 바람이 불든 아니 불든, 높이, 드높이 날아갑니다. 진리의 확실성으로 견고한 종교는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실패하거나 사라지는 곳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들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진리 안에 잘 서 있어서 요동치 않습니다.


다소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p.187)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목할 만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즉, 사도는 디모데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그가 믿음 안에서 끊임없이 견고히 서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다는 위대한 교리를 디모데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사도는 이 구절 속에서 복음의 짧은 요약을 제시합니다.-이 구절을 어떤 사람은 삽입 구절로 보지만, 나는 완전 문장으로 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두드러지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담대하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유용성이 은혜 교리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교리적 진리를 비실용적인 이론으로 여기기보다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더 실제적으로 더 유용한 것으로 말하여 왔습니다. 우리가 더 밝은 빛 속에서 건전한 교리가 실제적으로 거룩함을 이루는 생명력과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들을 순종으로 인도하며, 거룩함을 유지하는 길 중 가장 평탄하고 확신에 찬 길입니다.


첫째, 본문 속에서 사도가 가르친 교리를 살펴보고, 둘째, 그 교리의 목적을 살펴보는 동안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1. 본문 중에서 사도가 가르친 교리를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우리의 목적은 가장 인기가 있거나 가장 마음에 맞는 교리를 설교하려는 것이 아니며, 집회에서 어떤 사람의 견해를 발표하려는 것도 아님을 친구들은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의 단 한가지 목적은 본문이 의미하고 판단한 것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교리를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교리를 싫어한다 해도 우리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이 속상해 하며 화를 낸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설교를 듣는 자들을 기쁘게 하도록 위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은혜로운 자에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청중의 견해에 우리의 견해를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본문에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본(p.188)문의 의미를 제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제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와 모순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가 영감된 말씀 속에 분명히 들어 있다면, 정직한 마음을 지닌 모든 자들은 그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p.196) 4. 영원한 목적이 제시되었으므로, 본문은 더욱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본문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자기 뜻대로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오, 낚시꾼의 낚시에 달린 미끼처럼 사람들은 이 말에 꿈틀거리고, 그곳에 매달려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아니 자기 자신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여, 피조물의 모든 행위와 힘은 이 말씀에 아무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구원받았다면, 여러분의 행위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나는 여기에서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목적은 선택하신 사랑의 놀라운 신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라도 그 진리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가 구원받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증거를 결코 읽어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구주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 함이라......


(p.198) 6. 또한 자랑할 만한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 선물이라고 말합니다......선물 보다 더 대가없이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은혜보다 더한 것이 무엇입니까?......


(p.199) 8. 더욱이 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영원한 때 전부터. 이 말씀은 영원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우리의 행위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 있었습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어떤 손이 여러분을 은혜 안에 있게 했습니까?......

 


 

(p.200)Ⅱ.나는 이 교리의 목적을 설명하는 동안 여러분의 인내를 원합니다.

 

은혜 교리는 잡동사니가 모인 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조 속에서 고백되었기 때문에 진리임이 알려졌습니다. 알미니우스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영국 교회 신조에서도 나타나며, 모든 종류의 개신교 고백서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진리가 너무도 적게 설교됩니다! 과거의 유물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활동적인 봉사를 기대할 수 없는 은퇴한 군사를 향해서 갖게 되는 일종의 존경의 요소로밖에 여 겨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 진리가, 주님의 군대에서 늙어 퇴직한 군사가 아니라, 여전히 힘과 정력이 충분한 군사라고 믿습니다......(p.201) 더욱이 이 교리는 사람들에게 견고케 하는 어떤 것을 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견고케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는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가 아님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서 이 신앙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교리는 마치 진흙(p.202)과 구르는 돌이 뒤범벅이 된 산비탈처럼 미끄러 운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여행자는 순간적으로 발을 발판 위에 디뎌 보기도 전에 산 아래 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이 발판은 마치 영원한 진리의 피라밋 위에 서 있는 견고한 발판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발을 이 발판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그러면 교리적 기준이 서 있는 곳에서 멀리 미끄러져 내려가리라는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영국 교회에 서 잘 배우고 진리를 굳게 잡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 나님의 영원하신 뜻의 참된 진리를 세상에 알려야만 합니다. 오, 성령님께서 이 진리를 우리 마음에 기록하옵소서.

 

나의 형제여, 게다가 이 교리는 마치 눈사태처럼 사제의 책략적인 모든 주장을 부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줍시다. 그러면 그들은 즉시 그렇다면 사제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안다면 그렇다면 면죄부를 사거나 미사를 올리기 위하여 돈을 들일 필요가 없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제는 곧 몰락합니다. 사랑하는 이 여,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옥문을 부수기 위해 사용하신 공성망치입니다. 이것은 많은 신학자의 아름다운 글보다 더욱 힘이 있습니다. 그 글은 큰 고랭이보다 힘이 없고, 연기 나는 아마의 빛보다 빛나지 않습니다.

 

박해 시대 때 사람들이 숲속에 자주 모이는 것이 무슨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자기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 안트위프 시 밖 수천 킬로나 떨어진 유럽대륙이나 이와 비슷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만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이 시대의 우유에 물 탄 듯 한 힘없는 신학을 들으러 다 함께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현대 반(反) 칼빈주의자들의 우유에 물을 탄 미적지근한 것을 받으러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나의 형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좋은 고기와 그들의 구미에 당기는 더 맛있는 음식을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밤의 그림자 아래서, 폭풍우 날개 가운데서, 철학적 연설이나,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나, 물에 물 탄 듯 하고, 가짜같고, 영혼이 없는 신학적 가설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만한 일로, 사라들은 (p.203)자기 생명이 위협당하는 곳에 모여들지 않습니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치는 죽음의 밤에 무엇이 그들을 모이도록 했습니까? 무엇 이 그들을 모이게 했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 교리요, 예수님의 교리요, 예 수님의 종 바울의 교리요, 어거스틴, 루터, 칼빈의 교리 때문입니다. 이 교리 속에는 기독교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영혼의 사랑과 같은 음식과, 하늘 나라에 태어난 그들 의 구미에 맞는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를 듣는 사람 들은 용감하게 죽었고, 칼 따위는 문제삼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빨간 모자가 착용자의 머리에서 벗겨지고, 번쩍번쩍 빛나고 번드르르한 로마의 관들이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다면, 또 그것들과 함께 퓨지주의 신봉자의 국교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외쳐야만 합니다. 이 교리가 선언되고 여러 곳에서 주장될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들에 게 한순간도 그들의 땅에 설 수 없음을 알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 하 나님의 사람들이 주의 검과 기드온의 검을 휘두르며, 하나님의 은혜 교리를 선포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사람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 진리를 기록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이 진리가 사람을 똑바로 서게 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보고 걸어갈 것 입니다. 그는 자연과 예정 속에 계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그는 주님께서 모든 곳에서 일하심을 깨닫고 겸손히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연 법칙이나 국가의 계획에 돌리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보이지 않는 통치자를 존경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내가 행하리라. 이것이 신자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믿으며, 하나님의 약속 위에 살리라. 이것이 모든 일에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사람들을 가르치는 복받은 생활 습관입니다.

 

동시에 이 교리는 사람에게 자신을 쳐다보도록 합니다. 그는 이렇게 (p.204)말합니다. 아,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존경받을 만한 장점이 내겐 아무 것도 없어. 내겐 선한 것이 전혀 없어. 구원을 받아도 나 자신을 찬양할 수 없지. 나는 조금도 자신에게 존경을 표할 수 없어. 하나님이 하신 거야. 하나님이. 아무 것도 그 사람을 이처럼 겸손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매우 기쁘게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은혜자리 까지 낮출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그를 그의 동료의 얼굴을 쳐다볼 만큼 용기있게 만들 수 없습니다. 이 교리는 굉장한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강력한 능력을 알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귀중한 진리는 죄인에게 충만한 만족을 줍니다. 이것이 내가 진리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첫 열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8


p.206

열렬히 믿음에 의한 칭의론을 주장한 믿음의 옹호자인 마틴 루터는, 자기를 대적하기 위하여 야고보서를 인용한 반대자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인정하기를 꺼렸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론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주어지는 각양 좋은 은사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고 믿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합니 다. 야고보는 1장 17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내려오나니 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이나 어떤 자유로운 행위에서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완벽하고 선한 은사들은 인간의 더러운 본성 위에 피어난 귀하고 풍요로운 꽃과 같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오나니. 야고보는 어떻게 영광을 (p.207)돌려야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속하였나니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릴지라.


사도 야고보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즉, 그는 면류관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께 면류관을 드리고,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본서는 Charles H. Spurgeon의 SPURGEON ON THE FIVE POINTS(Florida:Tyndale Bible Society)를 완역한 것입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찰스 스펄젼, 김군섭역 서울:크리스 챤 다이제스트, 1997.

 

 

[출처] 찰스 스펄젼의 칼빈주의 5대 교리설교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822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거룩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

    온전한 성품이다 / 촬스 스펄젼

    거룩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성품이 아닌가?

    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 없는,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다.

    그것은 차갑고 생명이 없는 조상(彫像)과 같은 도덕이 아니다.

    거룩은 생명이다.

    여러분은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

    거룩한 생활은 그 자체가 놀라운 능력으로,

    여러분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이다.

    사실 거룩한 생활이야 말로 최선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설교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순결을 소유하고,

    우리가 이를 수 있는 모든 성결에 이르며,

    하나님의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로 결심하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면,

    우리의 사역에서 놀라운 기름부음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성품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가 받을 십자가의 고난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은 우리를 더 높이 들어올리시며,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 찰스 스펄젼, 『목회자들을 위하여』, pp 72-73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 - 6 / 찰스 스펄전

 

 

진정으로 함께할 동지를 얻으라

나는 성령의 역사가 설교자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사역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실 혼자서 밖에 나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다. 기도로 열심히 후원해 줄 교회와 관계를 맺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그런 교회를 찾기가 어려울 때는, 뒤에서 필요한 도움도 주고 기도도 해 주고 함께 거리에 나갈 수도 있는 형제를 대여섯 명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성이 뛰어나서 돕는 사람들 없이도 혼자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혼자서 일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 “내가 꼭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가 그들에게 유익을 주고 그들을 훈련해 일군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대여섯 명의 형제들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제법 많이 알고 있는 젊은이라면 서로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은 나의 사역에 큰 복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모두 앞에서 고백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테버나클교회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랑스런 친구들 덕분이다. 설교자들은 주의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나의 사랑스런 친구이자 집사인 월리엄 올니(Willian Olney)는 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지금까지 잘 이끌어 왔고, 우리는 목사님을 진심으로 따랐습니다. 모든 것이 매우 형통했습니다. 모두 목사님의 지도력을 믿지요?” 교인들은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만일 목사님이 건널 수 없어 보이는 도랑까지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의 몸으로 도랑을 가득 채워 목사님을 건너게 합시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감동적이 말이었다. 도랑이 채워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채워진 것을 느꼈다. 진정한 동지가 있다면 설교자의 능력은 매우 커질 것이다.

훌륭한 아내는 남편에게 큰 복이다. 여성들이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제 역할에서 벗어난 것일 테지만, 거리에서 전도를 하고 돌아온 남편을 즐겁게 평안하게 맞아 주는 일은 얼마든지 잘 감당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남편이 말씀을 더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중하고 온유한 태도로 보이는 것도 남편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남편이 사소한 문제에 관해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태도로 넌지시 깨우쳐 준다면, 남편은 즉시 잘못을 깨닫고 바르게 행동할 것이다.

예전에 “나의 조언자는 오직 아내뿐입니다. 아내는 나보다 교육을 더 잘 받았습니다. 전에 나는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나에게 문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라고 넌지시 말하더군요.” 그에게 그의 아내는 영어 교사나 다름 없었다. 그에게 그녀는 금보다 더 귀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조력자들을 얻는다면, 날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보다 지식이 더 많고, 또 신중한 태도로 우리를 깨우쳐줄 수 있는 친절한 신자들과 두터운 관계를 맺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데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다. 말씀을 전해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서 자화자찬에 빠진 설교자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는 날 밤 그는 꿈속에서 마지막 날에 자신이 받게 될 상급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천사에게 누가 상급을 받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사는 “강단 계단에 앉아 너를 위해 기도하는, 귀가 들리지 않는 노인이 복을 가져다 나르는 통로였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런 노인과 같이 중보하는 기도로 우리의 사역에 복을 가져다 나른 나이 든 기도의 용사들과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한쪽에게만 복을 주시지 않고 양쪽 모두에게 복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많이 기도했지만, 그만이 구원받은 다섯 개의 도시 가운데 하나를 얻는 것은 아니다(창14:1-16, 18:16-19참고). 비참한 처지가 된 그의 조카 롯도 복을 받았다. 그는 조금밖에 기도하지 못했지만, 그 적은 기도가 그의 처지를 바꿔놓았다. 그가 피한 소알은 심판에서 보존되었다 훌륭한 성도들이 드리는 많은 기도에 우리는 기도를 조금이라도 보태도록 노력하자.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런 기도가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믿을만한 부활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이 세상을 떠난 우리 교우들의 영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드리신 잊지 못할 그 기도대로, 그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있음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적게 알지만, 그들이 안식을 누리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복되도다, 죄와, 근심, 고통이 이제는 없으며, 그들의 구세주와 더불어 안식하도다." 우리의 주된 고통은 그들의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육체를 어둡고 쓸쓸한 무덤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들이 부패하여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으며, 육체의 겉모습들이 썩어져 없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손과 발들, 그리고 아름다운 그들의 온갖 모양들이 분해되어 먼지가 되고, 해체되어 철저히 황폐되는 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눈물 없이 무덤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셨던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음을 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교우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슬픕니다. 우리는 무덤을 조금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카타콤과 그 지하 납골당을 기뻐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지금도 계속 슬프게 여기지만, 그렇게 죽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히 9:27)라는 무서운 파문이 우리 인류에게 이미 떨어 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형벌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벌인 죽음을 즐거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교리는 그 슬픔의 원인을 없애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근심하며 고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영혼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과 염려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불멸에 관하여 믿음을 갖게 될 때 의로운 영들은 불멸하리라. 믿음으로 모든 두려움과 떨림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부활에 관하여서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되면 육체에 관한 허무한 모든 슬픔도 지워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관상 파멸된 것 같이 보이는 육체가 다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육체가 전멸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지 속에 뉘여 둔 그 육체는 잠시 동안 잠자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이 땅에서는 알려지지도 않은 속성들을 덧입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깨어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전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육체를 벗어난 영들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혈과 육을 지니고 있는 남녀들을 택하였습니다. 택한 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히 보다 아름다운 부분인 영혼에 대한 애정뿐 만 아니라, 우리가 열등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부분인 육체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책에 택한 자들의 모든 지체들이 헤아린 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모든 뼈들을 계수하시며, 그들의 머리털까지도 모두 세십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완전한 육체를 입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성과 인간의 영혼을 결합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성과 영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인성, 혈과 육을 좋아하신다는 증거를 얻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의 대속 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혼 모두를 완벽하게 대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은 부분적인 속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되 우리의 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에 대해서도 그러하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벌레가 육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고, 무덤의 감옥으로부터 대속하셨기 때문에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육체와 영 전부가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크리스천은 단순히 영으로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그의 하늘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바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 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지금까지 계속 성령의 전이 되어왔던 몸이 종국에 파멸되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몸은 광야에 세워졌던 장막처럼 무너질 것 입니다. 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무너뜨린 것입니다. 아니면 같은 기능을 가진 다른 장막을 일으켜 세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장막은 없어지겠지만 그 뒤에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만일 구세주께서 자기 백성들의 몸을 무덤 속에 남겨두신다면, 그것은 죄와 사단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구세주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만을 석방하셨다면, 사단의 모든 일들을 파멸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 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백성들의 뼈 하나도 아니 뼈 한 조각도 납골당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사망은 단 하나의 승리의 트로피도 보여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감옥에 들어있는 인간으로부터 끌어 모은 모든 전리품들이 철저히 약탈당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만유 중에 뛰어나실 것이며, 물질세계까지 다스리실 것입니다. 또 사망과 무덤을 멸하시며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전적으로 구원하셨으며, 전적으로 의롭게 하셨으며, 전적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므로, 우리는 육과 영 전 인성으로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죄짓던 손을 높이 들어서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악한 일들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은 아름다우신 왕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을 귀찮게 여기는 마음이 주님을 영원토록 사랑하게 되며, 지금은 주님을 멸시 하는 영이 주님을 영원토록 기뻐하여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에 크게 반역하며, 영에게 거추장스럽던 이 육체도 그리스도께 목소리와 손과 두뇌와 귀와 눈으로 경의를 바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 곧 양자됨이 성취되는 부활의 때를 기다립니다. 자,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가 믿으며 어느 정도 즐거워하는 것일지 라도, 때때로 불신의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것이 사실일까?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들이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오늘 본문으로 잡은 질문이 특별히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오늘 아침, 저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에게 첫째로, 직면한 어려움을 살펴보도록 요구하겠습니다. 둘째로, 그 어려움을 제거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하는 데에는 한 가지 방법뿐이며, 그것은 대단히 간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진리의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한 두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Ⅰ. 그러면 첫 번째 대지로 직면한 어려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부활을 믿는다는 대담하고 확고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려움들을 표면에 드러내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매 시대마다 오류에 빠진 크리스천들이 회의주의자들과 철학적 사고를 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교리를 더 잘 받아들이게 하려고 부활의 교리와 거기에 따른 진리들을 쉽게 설명하고, 다른 뜻으로 둘러대려는 많은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부활의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면서 그 진리를 말하거나, 죄지은 자의 목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할 때, 그 진리를 받아들여 확신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말하는 자의 말을 듣고 어느 누가 믿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쉬운 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바 교리적 내용들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입증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도 믿지 않는 바를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여김 받을 뿐입니다. 그렇게 자르고 심지를 꺼버리는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을 스스로 잘라버리며, 우리 자신의 팔을 스스로 부러뜨려 버리는 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 속에 넣어둔 몸이 진실로 부활할 것을 믿으며, 그것이 의미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그렇게 말씀 드립니다. 제가 비유를 사용하거나 신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죽은 자들의 몸이 무덤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의 몸에는 장차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을 인정하며, 실제로 즐거워합니다. 지금 몸을 감싸고 있는 부패성을 지닌 요소들과 모든 조잡한 것들은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더욱 고상한 환경에 적합한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는 우리의 영혼이나, 보다 하위의 지적 기능들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우리 본성의 보다 고상한 부분이나 영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렇지만 육체는 동일한 육체일 것을 우리가 압니다. 무덤 속에 넣어둔 동일한 몸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죽는 우리의 몸과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우리의 몸 사이에는 절대적인 동일성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하다고 해서 본질이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구성요소가 계속 동일하다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제한을 두어 말씀 드린다고 해서 앞서 말씀 드린 내용을 번복하거나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20년 전에 입었던 그 동일한 육체에서 살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한 원소도 20년 전의 것은 없다고 듣습니다. 또 그 사실을 의심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유아 때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겪는 우리 육체의 모양의 변화는 대단히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그와 똑같음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의 몸은 우리가 태어날 때의 몸과 동일한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동일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모두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몸은 동일한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할 때의 우리의 몸 은 죽을 때의 우리의 몸과 동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변화된 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변화들이 동일성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부활의 교리를 좀 더 쉽게 믿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이러한 설명을 하였지만, 저는 성경에서, 우리가 무덤에 넣어두었던 모든 뼈들과 살과 신경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대로 몸의 동일성의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며 믿음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믿는 바가 철학적이거나 개연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들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과학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 좋은 대로 과학적인 것을 요구하도록 놔두십시오. 믿음을 요구하는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인간의 과학을 공격하지 않으며,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에 아첨하거나, 그것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들을 사용하며,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고 말할 때는 과학적 인 근거와는 전혀 다른 근거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다 죽음에서 부활할 것을 기대합니다. 문자 그대로 무덤에 묻힌 인간의 몸이 부활할 것을 우리는 견고히 믿습니다.

하지만 이 소망은 많은 난해한 어려움들로 자연스럽게 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죽은 자의 몸의 대부분은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몸의 대부분은 썩었고 철저히 분해되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몸도 아마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방부처리 되어 석화시켜져 있거나, 미라가 되어 있는 시체들을 볼 때는, 모든 몸들이 그런 식으로 보존되어 있다면, 그들의 부활을 믿기가 더 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대의 대리석 석관을 열어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약간의 갈색 가루 외에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교회 마당에 있는 무덤을 팔 때는 몇 개의 부셔진 뼈 조각만 발견하게 됩니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쓰러져 죽어 간고대의 전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 곳에는 이제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뼈들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녹아서 흙으로 돌아갔고, 어떤 경우에는 나무뿌리와 식물들에 의해서 흡수되어 버렸으며, 또 다른 유기체에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못 믿을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어떤 시체들은 화학물질에 의해서 분해 되었고, 불태워졌으며, 짐승들이 먹기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먹히기도 하였습니다~그런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겠습니까? 한 때 살아있던 유기체로 세워졌던 원소들이 이제는 얼마나 널리 흩어져 버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는 고레스, 한니발, 스키피오, 시저의 몸을 구성하였던 원소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압니까? 한 때는 어떤 사람의 생명을 구성하였던 원소들이 지금은 극과 극이 먼 것처럼 널리 흩어져 있습니다. 원소 하나는 바람에 불려 사하라 사막을 건너가 있고, 다른 하나는 태평양에 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구의 모든 원소들이 윤회하고 있는데, 한 때 어떤 사람의 몸의 중요 부위를 구성하였던 요소가 지금 이 시간에는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바울의 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을 로마로 보냈던 베스도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을 사형에 처하였던 그 폭군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감히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산다는 것이 못 믿을 것 같다 한들 무엇이 이상합니까?

부활의 교리는 모든 사람, 일부 사람이 아니라, 몇 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려움은 증대합니다. 한 때는 죽은 아이를 살렸던 엘리야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한층 쉬울 것입니다. 나인 성 문에서 죽은 청년을 살렸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고, 병들어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하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교리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홍수 이전의 수만의 사람들, 니느웨와 바빌론의 수많은 사람들, 페르샤와 메대의 사람들, 크세르 크세스의 발 앞에 엎드렸던 수백만의 사람들, 알렉산더와 함께 진군하였던 수많은 사람들, 로마인들의 칼 아래 쓰러졌던 셀 수도 없는 수 백만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부활하게 된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중국과 같은 나라들에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6천년 동안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파선과 역병, 지진, 무엇보다도 나쁜 유혈 참사와 전쟁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어느 누구도 영원토록 잠들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때 이 땅에서 숨 쉬며 걸어 다녔던 모든 육체들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 기괴한 일이군",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못 믿을 면이 많은 일이야". 좋습니다. 제가 그 말에 대해서 논쟁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사실에 대한 좀 더 타당한 이유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 몸들이 지금 있는 곳이 얼마나 이상한 장소인지 기억한다면 놀라움은 더욱 커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의 몸은 그들이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갱도 속에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조수와 파도에 밀려 망망대해의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독수리의 눈으로만 알아 볼 수 있는 곳인 길도 없는 먼 사막에 누워있기도 합니다. 또 무너져버린 바위산 밑에 묻혀 있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 어디가 있습니까? 아담의 자손의 먼지가 뒹굴지 않는 곳을 땅 위에서 누가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거리에 불어오는 여름철 바람치고 한때 사람이었던 먼지 알갱이를 휘몰아가지 않는 바람이 있습니까? 바닷가에 밀려와서는 부서지는 파도치고 한 때 사람이었던 물질이 용해되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파도가 있습니까? 그들은 각 나무 아래 누워있고, 그들은 들판을 살찌게 하며, 그들은 실개천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그들은 초장아래 숨어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듯이 흩어졌던 몸들이 분명히 모든 곳으로부터, 모든 곳으로부터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한 것처럼, 우리의 죽은 사람들도 살아나서, 그들의 두 발로 서며, 엄청나게 많은 군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기이하게, 그들은 단번에 부활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크게 두 부류로 부활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크게 두 부류로 부활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5, 6절에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천 년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질 것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장은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확실합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러나 이 천 년의 큰 간격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의인들이 부활할 때 얼마나 많은 무리가 모이겠습니까?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계 7:9). 하나님만이 계수할 수 있는 셀 수도 없는 큰 무리가 갑자기 "티끌과 잠잠한 진흙으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일천 년의 간격은 하나님의 보시기 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곧 끝날 것이고, 다음에는 불의한 자들도 또한 부활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무리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다 어디에 서겠습니까? 땅의 평지들이 그들을 모두 다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온 땅을 덮고 산꼭대기까지 덮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대 심판을 하려면 바다를 심판석으로 사용해야 할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대 심판을 알리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선명하고 날카롭게 울리며 그들을 부를 때 그들은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공장에서 뼈가 제대로 맞춰지고, 기이한 신체 조직들이 재구성되는 데에는 긴 세월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수 세기 동안 파괴되어 있던 것을 재건하는 데에도 한 순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이 세상에 처음 생기게 되었을 때는 기이하게 만들어졌으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몸이 죽은 상태에서 회복되는 데에는 눈 깜짝할 사이만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이시며,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억만 년의 세월도 하나님께는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순간에 지극히 기이한 하나님의 기사들이 성취됩니다. 비할 데 없이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놀라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것은 못 믿을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사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악인들의 부활은 과거의 상태로의 회복이 될 것이지만, 성도들의 경우에 부활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 보다는 괄목할 만한 향상이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는 땅 속에 뿌리 하나를 심 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황금 수술을 단 아름다운 백합화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화분에 씨 하나를 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눈부신 색깔을 가진 절묘하게 아름다운 꽃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땅 속에 심은 씨앗이나 그러한 꽃들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 얼마나 다릅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무덤에 묻혀 있는 몸들도, 많은 씨를 심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몸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싹터서 완전히 성장케 되어 모든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놀라움을 더욱 증대시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파괴자의 이빨 사이로부터 먹이를 낚아 챌 뿐만 아니라, 벌레의 먹이가 되었거나 재나 먼지가 되었던 몸들도, 자신의 거룩한 형상을 지닌 것으로 부활 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너덜너덜해지고 좀먹어 갈기갈기 찢겨진 옷들이 거룩한 말씀 한 마디에 완벽하게 회복되고, 거기다가 세상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회고 더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전에는 없었던 값진 수술들과 수놓은 문형들로 치장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 사실을 기이함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 그대로 놔둡시다. 저는 그 사실을 한 순간에 설명하거나, 그 사실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부활의 사실을 믿는데 많은 어려움들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즉, 자연 계 속에서 부활의 사실을 지지해 줄 만한 완벽하게 유사한 것이 명백하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부활과 얼핏 비슷한 현상들이 있어서 우리가 비교를 할 수는 있습니다만, 전적으로 부활을 논증할 좋은 근거로 쓰일 유사한 것이 자연계에는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들이 잠을 죽음에 비유하고, 잠에서 깨는 것이 일종의 부활이라고 말들을 해왔습니다. 그러한 상징은 매우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완벽한 유추가 되기에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잘 때에는 생명이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계속 존재하고 있음은 잠자는 그 사람 자신에게도 명백하며, 잠자는 자를 지켜보며,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심장이 고통 하는 것을 지켜보는 모든 자들에게도 명백합니다.

그러나 죽었을 때는 몸에 맥박이 뛰지도 않고 몸 안에 생명이 남아있는 다른 흔적들도 없습니다. 잠자는 자의 몸과는 달리 생명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잠자는 자의 사지가 갈기갈기 떨어지고, 회반죽과 혼합되며, 그것이 먼지가 되고, 그 먼지가 진흙과 부식토와 섞이고, 그런 다음에 여러 분이 부르면 깨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유사한 것이라고 부를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잠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깨어나는 것은, 뛰어난 비교는 될 수 있을 것이나 부활을 예언하는 것이나, 부활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또 곤충들의 탈바꿈을 부활의 뛰어난 유사로 말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애벌레는 사람의 현재 상태이고, 번데기는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성충, 완전한 곤충은 사람의 부활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들 합니다.

확실히 감탄할 만한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번데기에는 생명이 있고, 조직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번데기도 완전한 곤충입니다. 어떤 관찰자라도 번데기가 죽은 것이라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번데기를 집어 들고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번데기 속에 앞으로 나타날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완벽한 곤충이 명백하게 그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번데기를 뭉개고, 그 생명의 증액을 모두 말려버리고, 밟아서 흙 속에 쳐 넣고, 그것으로 화학적인 분해과정을 겪도록 하며, 철저히 분해시키고, 그 다음에 여러분이 그것을 다시 불러내어서 나비가 되게 한다면, 여러분은 부활의 유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 연계에서는 아직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씨앗으로 부활을 비유하는 데에는 저는 흠잡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교훈적이며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따지자면 결국 유치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씨앗으로 부활을 유추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씨앗은 땅 속에서 죽게 되지만 적당한 때에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땅 속에 묻힌 씨앗을 죽음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씨가 소생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유기체의 조직들이 원래의 미립자의 원소들로 분해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씨앗도 구성 원소들이 각기 분해되어 생명의 유기적인 조직으로부터 유기적인 기능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생명의 배종은 여전히 남아있고, 분해된 유기적인 조직은 배종의 양분이 되고, 배종은 그 영양분으로부터 다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몸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겠습니까? 죽은 몸에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누가 부패한 몸에서 생명의 배종을 발견하겠습니까? 좀 더 고등한 존재들은 인식할 수 있는 생명의 핵이 몸에 남아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부패한 몸의 어디쯤에 그러한 것이 머물러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뇌 속에 그 것이 있습니까? 두뇌는 몸 중에서 가장 먼저 썩어 없어지는 부분입니다. 해 골은 비어있고 공허합니다. 그것이 심장 속에 있습니까? 심장 또한 대단히 빨리 썩어 없어져 버립니다. 뼈보다는 더 빨리 썩어 없어집니다. 무덤에서 끄집어낸 몸의 어디를 현미경으로 살펴보아도 생명의 어떤 요소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씨가 묻혀있는 땅을, 여러분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파헤쳐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씨앗을 묻어둔 곳에서 그 씨앗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그 씨앗은 그 땅에서 싹 터 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동안 묻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무덤에 함께 넣어둔 유품도 아마 거의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대의 사람들보다 장차 올 세대의 사람들은 그를 더욱 더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홍수 이전에 묻혔던 사람들이나, 그 대홍수에 익사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그들의 유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밀 알갱이를 고운 가루로 빻아서, 바람결에 날리십시오. 그리고 그 가루에서 살아난 밀밭을 바라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여러분이 완벽한 부활의 유사를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계에는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활은 부활로서 독자적인 것입니다. 부활에 관하여서 여호와께서 잘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9). 우리 주님의 부활과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던 몇 사람의 부활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할만한 것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찾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사실을 믿을 확실한 한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려움이 있고, 그 한 가지는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 마른 뼈들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것이 믿을만한 것이겠습니까?

Ⅱ. 그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대지에서는 그 어려움을 제거하겠다고 서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공연히 뽐낸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본문을 다시 적당히 강조하여서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은 못 믿을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 곧 전능자요 무한자께서 죽은 사람 살리시는 것을 왜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어려움들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과,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음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믿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요, 필연적 인 것이 됩니다. 불가능과 불신이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신을 깨뜨리는 무기로써 이성을 들고 나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참된 방어책입니다.

견고한 돌들이 있는데 나무와 짚으로 건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약속하시고 어떤 진리를 계시하신다면, 제가 그것에 대해서 철학자들에게 물어본 후에, 그분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유한한 이성으로 인정할 때에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진리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판단이 궁극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알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계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쳐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은 거짓될지라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현자라고 칭함 받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동요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의뢰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는 인간의 지식을 모아놓은 도서관의 모든 책보다 더욱 무게가 나갑니다.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란 말씀이 모든 합리적인 이유를 대신합니다. 우리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웅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 것이라고 선포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못 믿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너무나 힘겨운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산적한 난해들을 이성으로 건너지 못할 너무나 어려운 교리로 여기십시오. 그 교리 자체에 분명한 자체 모순과 일관성이 없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믿을 기회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말했을 때는 한 유대인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그립바에게 변명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그립바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 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고 말할 좋은 근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아그립바는 유대인으로서 욥의 간증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 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의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조급하구나". 그는 또한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말한 간증도 알았습니다, "내 육체도 안전이 거하리니". 그는 또 이사야서 26장 19절의 이사야의 간증도 알았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그는 또 다니엘서 12장 2, 3절의 다니엘의 증언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 선지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티끌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또 한 가지 더, 아그립바는 호세아 13장 14절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증언을 알았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도 그렇게 명백하게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아그립바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인 우리에게는 더 온전한 증거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숨을 가냘프게 쉬면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킬 의도를 자신 없이 선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의 문장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6장 40절도 그러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성령께서도 사도들을 통하여 동일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귀중하고 복된 로마서 8장 11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중언을 듣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또 제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 말씀을 여러분에게 지금 읽어드리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참으로 부활의 교리가 충만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명령 받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부활의 교리에 대하여 장엄한 논증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일이 말씀 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성령의 중언은 죽은 자들이 부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한다면, 부활 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 복된 소망을 간직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주위를 돌아보며, 주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도움이 되도록 정해놓으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주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는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고 관찰해 보지 않으면, 단순히 보고서를 통해서는 믿을 수 없는 기사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전보, 그것은 사람이 발명해 낸 것에 불과하지만, 지금 우리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을 수 없듯이 천 년 전의 사람은 그것을 믿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짐 마차를 부리던 시대의 사람이라면 누가 영국에서 미국까지 전파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우리 선교사님들이 적도의 여러 나라에서 원주민들에게 얼음의 형성과, 사람들이 얼어붙은 물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망망대해에서 배들이 빙산으로 둘러싸이는 것, 주위의 모든 물들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을 말했을 때, 원주민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보고를 믿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우리가 적응하기까지는 모든 것이 기이합니다.

부활도 우리가 관찰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그것이 전부입니다. 부활 후에는 지금 우리가 피조물과 섭리에 익숙한 것처럼 부활도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의 하나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할 것과 부활을 영원토록 기이히 여길 것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지금 피조물을 보고 기이히 여기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간 후에는 하나님의 이 새로운 일에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태어난 것에 불과하며, 아직도 너무나 적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다 보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피며 보내는 짧은 세월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우리의 왜소함을 벗고 성년이 되었을 때는, 지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들이 친숙하게 되어 찬양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부활이 창조보다 더 큰 기사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말씀으로 세상을 불러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있으라" 하시니 세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무에서 창조해내는 것이나, 흩어졌던 미립자들을 불러 모아서 이전의 그들의 모습으로 다시 빚는 것이나 똑 같이 너무나도 기이한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가 전능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 두 가지 중에서 굳이 쉬운 것을 하나 택한다면, 부활이 더 쉬운 일입니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만 아니라면 모든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의 탄생을 신적 능력의 가장 초월적인 현시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인간의 탄생과 우리의 계속적인 존재에 있어서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 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너무나 흔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건대 부활의 일은 우리가 아직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색해하는 것뿐 입니다. 너무나 기이한 하나님의 다른 행적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믿을 만한 증거를 근거로 받아들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진리의 한 부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부활하여야 할 근거가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모형이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전조가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부활할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가능성을 입증하셨습니다. 아니 주님 자신은 사람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부활을 확실하게 입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은, 주님께서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고전 15:22).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백성들의 부활에 관한 모든 의심들이 영원토록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요"( 고전 15:16). 그러나 주님께서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또한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미 부활과 같은 큰일을 내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내적 본성에 관하여서 여러분이 죽은 데서 부활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하였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있지만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그 일에 관하여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제게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에게 그 뜻을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으로 아는 것이지 설명으론 이해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려면 여러분 자신들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죄의 무덤으로부터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악한 정욕과 불순한 욕망의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이 부활을 여러분 속에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그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힐 때 그리스도께 이루셨던 것과 필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본성이 소생한 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모든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부활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은 헛되며 필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포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불신을 하나님께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 이 하나님의 택한 자중의 하나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을 믿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모든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증거를 거절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쓰라린 쓸개즙 가운데 있으며, 은혜가 없으면 그 가운데서 멸망하게 될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과 교리는 그 모든 영광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고귀한 자들과 악한 자들로 나누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요 8:47)라고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밀히 택하셨음이 눈에 보이는 증거 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요 10:26, 27). 그러므로 이 진리와 다른 그리스도의 진리들이 드러나고, 유지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져서 사람들 사이를 나누며, 애굽인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나누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택함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고 남아있는 자들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거절한 그 진리에 의해 정죄 받고, 그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합니다.

Ⅲ.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대지로, 이 진리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의 진리와 우리와의 첫 번째 관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 말씀으로 서로서로 위로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소중한 자들을 잃었습니다~방금 드린 말씀을 수정하겠습니다~그들은 더 좋은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뒤에 남겨둔 몸은 잃은 것이 아니라, 이자가 붙는 저축을 하듯이 맡겨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별 때문에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마십시오. 왜 우리가 성도들의 장례식에서 항상 슬픈 장송곡을 애달프게 부르며, 검은 상복을 입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 방식대로 한다면, 저는 저의 운구를 흰 말들로 장례지까지 끌도록 하고, 복장은 상복을 입었지만 기쁨을 표하는 자들이 어깨로 메고 하관식을 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영광 중으로 들어갔으며, 불멸함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왜 슬퍼해야 합니까? 옛날 청교도들은 성도들이 관을 어깨에 메고, 무덤까지 시편을 노래하면서 걸어갔는데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영화롭게 된 자들에 대해서 슬피 운다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기쁨의 나팔을 울리십시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클라리온으로 승리의 즐거운 음 조를 연주하도록 하십시오. 위대한 정복자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왕께서 자기의 보좌에 오르셨습니다. "즐거워하라", 하늘로부터 우리의 형제들이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즐거워하자, 우리는 우리의 안식에 들어왔도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우리가 죽은 자들을 생각할 때 슬픈 기색을 계속 띄지 않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으로는 고통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비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게 죽은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살아있는 약속을 우리가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영원 무궁히 찬양합시다.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들도 떠날 것을 기대하며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도 역시 죽어야 합니다. 이 전쟁에 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화살이 한 대 있고 궁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화살은 제 심장을 겨냥하고 있고, 궁수는 필사적으로 그 목표물을 맞히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잠들어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아마도 외국의 쓸쓸한 무덤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여러분의 뼈가 여러분의 선조의 뼈와 나란히 적소에 안치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여러분은 먼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 어디에 묻히든지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 동안입니다. 그것은 불멸의 길로 가는 중에 잠시 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금생과 내생 사이에 잠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마음을 평안히 가질 뿐만 아니라 기대를 하면서 죽음을 맞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망하는 것은 지금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복된 부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귀히 여기도록 합시다. 우리의 지체들이 악의 병기가 되도록 하지 말며, 죄로 더럽히지도 맙시다. 크리스천은 탐식이나 술 취함이나, 불결한 행동들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고전 3:17). 여러분은 순결하게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 여러분의 몸이 깨끗한 물로 씻음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후로 여러분이 모든 불결한 것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모든 악한 것들을 제해버리십시오. 천국에서 영원토록 거해야 할 몸들이 지금 이 땅에서 더럽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준엄한 사상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도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활은 불행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죄를 지었으므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마 10:28).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 모두를 영원토록 지속되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무덤에서 잠자는 것이 그러한 부활~"심판의 부활"보다 무한히 더 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 칭합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표현하기를,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단 12:2)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부활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부활로부터 피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육체를 입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을 받는 것도 충분히 무서운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몸과 영혼이 함께 죄를 지었다면 몸과 영혼이 함께 영원토록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예레미 테일러는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라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라는 사람이 졸도하였는데, 그의 친구들이 그가 죽은 줄로 알고 화장시키려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열기로 몸이 뜨거워지자 그가 깨어났고 자신은 화장 불길에 휩싸여 소망 없이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출해달라고 부르짖었지만 헛되었습니다. 그는 구출 받을 수가 없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전신이 일그러지며 마비되었습니다. 모든 죄악 된 몸이 무덤에서 잠자다가 부활하게 될 때에 바로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깨어나서 심판 받고, 정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을 얻도록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거듭나지 않았는데 거듭났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매우 많다!(찰스 스펄전)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7)


중생은 구원에 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거듭났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거듭났으면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는 중생하지 않았으면서
자기 혼자 중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해서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난다든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
이런 것은 중생이 거기 첨부되지 않는 한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알고 느낄 수 있는 변화입니다.
즉 거룩한 행위에 의해 알려지고
은혜로운 체험에 의해 느낄 수 있는 변화입니다.
중생은 초자연적인 위대한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어떤 작용이 아닙니다.
대신 가슴 속에서 역사하고,
영혼을 새롭게 하며,
그 전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 새로운 원리가
그 사람 안에 불어넣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이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본성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체를 깨끗이 씻겨 옷을 입히는 것과
그 시체를 살아나게 하는 것은 전혀 별개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인간이 할 수 있고
후자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오 주 예수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제 영혼의 아버지십니다.
주님의 영이 제 안에
이 새롭고 거룩한 영적 생명을 불어넣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오늘까지 ‘죄와 허물로 죽어’있을 것입니다.
저의 천국 생활은 전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덕분입니다.
‘제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바 되었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십니다.”

주여,
우리가 지극히 중요한 이 사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중생하지 않은 것은
곧 구원얻지 못한 것이요,
용서받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도 소망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펄젼의 아침 묵상’ (생명의 말씀사 역간)중에서

http://www.newsnjoy.co.kr/bbs/list.html?table=bbs_25&idxno=58287&page=1&total=17148&sc_area=&sc_word=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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