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뭐야?

복음이 무엇인가?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수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기쁜 소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주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그것은 복음을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성경을 읽으니 성경에 펼쳐지는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서사와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살리시고 당신의 우편에 앉히사 만물을 주관하는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고 했다. 이 말씀이 베드로가 선포한 복음의 절정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주님이 승천하심으로 성령의 선물을 보내심에서 그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이 구절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신학과 복음의 가장 중요한 골격을 형성하는 말씀이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펼쳐지는 모든 성령의 역사와 사도들의 사역은 승천하신 주님이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말씀에 기초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정점도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만유를 주관하는 권세를 지금 집행하고 계신다는 선언이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1:20-22) 

승천하신 주님이 하늘에서도 온 세상을 다스리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방편이 성령이다. 성령은 승천하신 주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직무를 이 땅에서 집행하는 능력이다. 성령은 또한 이 땅에서 주님이 임재하시는 방편이다. 성령을 통하여 승천하신 주님이 권능으로 신자와 교회 안에 임재하신다. 

누가는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주님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가 되셨다는 복음을 믿으면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 했다. 성령의 선물은 다름 아닌 영광을 받으신 주님이 만물을 주관하는 권능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운데 임재하심이다. 그래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 구약에서부터 맥맥이 흐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 즉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신다는 언약을 성취하신다. 교회가 세상의 축복이 되기 위해 이 성령의 권능에 사로잡혀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성령과 성경

요즘 소위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이들이 성령이 자유롭게 말하심을 따라 예언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직통계시를 받은 것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성경적으로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케 한다.

그러나 성령의 주된 사역은 진리를 새롭게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진리를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즉 성령의 일차적인 사역은 예언(predict)이 아니라 회상(recollect)이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그 점을 강조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주님이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성령이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셨다. 이 모든 것에는 주님이 말씀하신 앞으로 일어날 일, 요한이 자주 언급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포함된다.

또한 예수님과 그 사역에 관해 인용된 구약의 말씀도 내포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12:15-16). 결국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은 구약 말씀의 배경과 맥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깨달게 하신다.

이런 요한의 성령이해는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누가의 관점과도 맥을 같이 한다. 사도행전에서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요한의 기록이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성취됨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충만하자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달고 선포하게 된 것이다.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전한 첫 번째 메시지는 구약의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풀어낸 탁월한 성경해석의 정수였다. 그에게 성령 충만의 우선적인 결과는 성령의 영감에 의한 성경해석과 선포였다. 청중들에게 나타난 성령 충만의 임팩트는 많은 사람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믿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영감에 의한 성경해석과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는 설교의 전형이다.

따라서 성령은 공백 속에서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 충만은 베드로가 전혀 알지 못하는 말씀을 계시해준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말씀, 특별히 주님으로부터 듣고 배운 말씀들이 생각나게 하고 깨달게 하셨다. 그 말씀들이 구약 언약의 맥락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성취되는 관점을 따라 체계적으로 조합되고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복음 선포를 가능케 하였다. 베드로의 증언과 설교는 모세와 선지서, 그리고 시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메시아이며 부활하신 주가 되신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 영감어린 성경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해야 한다. 말씀이 성령이 일하시는 자료이며 방편이다.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할수록 성령이 우리 안에서 더 충만하게 자유롭게 역사하신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③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성령충만한 목사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다. 아멘넷은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라는 내용을 3번에 걸쳐 소개하고 있으며 이번이 마지막 이다. 이번 기사에는 성령안에 있을때 나타나는 성령의 7중사역,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인지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마지막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성령의 7중사역

우리가 옛사람일때 율법안에 있을때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다. 율법의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는 7관점으로 요약할수 있다. 어둠, 속박, 비참, 쉼이 없는 수고, 불모, 헐벗음, 무력함이다.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율법안이 아니라 은혜안에 있게 되었다. 성령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새언약의 언약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새언약의 은혜를 7가지 포인트로 요약할수 있는데 7중축복이라고 한다.

1. 조명(illuminate)=흑암의 권세에 있는 우리들에게 성령의 진리의 빛을 '조명'해 주신다.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시고, 그 은혜의 풍성과 자비하심을 알게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알게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감각을 살아나게 하셔서 그것에 반응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아름다움과 은혜에 매료가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루미네이션에 의해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보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세상의 보화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하시고, 우리들의 욕망과 가치관과 삶의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해 주신다.

2. 자유(ilberate)=자유함의 은혜이다. 사단이 우리를 속박하는 유일한 무기와 권세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어떤 다른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 다른것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 다른 것은 항상 비진리이고 거짓말이고 왜곡된 진리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에게 진리의 빛이 비추어오면 거짓말로만 지탱되는 우리안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다. 북한체제가 폐쇄되었기에 거짓말로 지탱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개방되어 서방의 모든 정보들이 밀려오게 되면 북한이라는 체제가 지탱되지 못한다. 거짓말로 지탱되는 우리안의 어둠의 왕국에 진리의 빛이 비치게 되면 어둠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고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3. 치유(heal)=죄의 속박가운데 망가진 인생, 비참한 인생이 성령의 은혜로 치유함을 얻게 된다. 온전함을 얻게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행하신 메시야로서 대표적인 사역 3가지는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들린 이들을 자유케 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이 3가지가 사도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공관복음에 특별히 주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왜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안식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좋은 창조를 축하하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망가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비참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주님이 병자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심으로 원래 창조하신대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여 주셔서 하나남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일을 골라서 병자들을 고치신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을 회복해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전시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것이다.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서의 사역을 다 끝내시고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사역, 전인적인 치유, 심령의 치유를 예표한다고 볼수 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치유가 심령의 치유라고 할수 있다. 지금도 성령이 육신을 치유하신다. 그러나 치유를 받아도 또 약해지고 병들기에 온전한 치유는 종말에 가야 완성된다. 육신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치유는 심령의 치유이다. 우리 모든 교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마음이 병든 사람이 많다. 마음이 심히 아픈 사람들이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보더 더 심각한 심령 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다. 심령이 완전히 파쇄된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생명의 근원으로 부터 끓어지게 된것이다. 하나님이 분리된 것이 지옥이다. 우리 심령에 지옥의 권세가 임한것이다. 사탄의 억압에 짓눌린 마음의 상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를 주관하는 세력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실존의 특성은 불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새로운 삶의 특성은 평강이다.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새언약의 내용이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판에 성령님이 심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 불손중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창조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법이 우리안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신다. 심령이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의 심정이 다시 연합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심령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에게 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물댄 동산과 같이 되는 것이다.

4. 안식(rest)=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평안한 가운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열매를 맺게되고 최대의 능률이 오르게 된다. 설교를 잘하는 비결은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목회를 잘하는 비결도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평강의 영이시다. 우리들에게 이런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과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평안한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5. 번성(flourish)=번성함이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되면 9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게되면 아름다운 사람, 존귀한 사람이 된다. 6. 아름답게 하심(beautify)=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기 위함이다. 어떤 목사가 좋은 목사이고 훌륭한 목사인가. 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목사이다. 그 아름다움을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 그것을 본받도록 목회해야 한다.

7. 능력있게 하심(empower)=마지막이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부여 받음으로 그들이 복음의 증인이 될수 있었다. 그들안에 일어난 자유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많은 사람안에 다시 일어날수 있도록 생명의 재생산의 사이클이 일어날수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음사역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말과 이론만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창조의 강력한 능력이 동반해야 교회가 새로워 질수 있고 교인들이 변화가 될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전파하는 새언약의 복음에 분명히 새언약의 7중사역이 함께 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이러한 놀라운 셩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바라면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교회인 동시에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이다. 구약의 성전의 구조를 보면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임하고 그리고 분향단에서 향이 계속 올라가고 구름이 내려오는 구조이다. 그래서 분향이 끓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내 기도가 분향향 같아서 라고 했다. 분향은 지금의 기도를 뜻한다고 볼수 있다. 주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이고 주님의 집인 교회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집이라고 할수 있다. 기도가 계속 올라갈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임재, 말씀, 성령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이슬비 처럼 임한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 않는다. 말씀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먼저이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도 효력이 없다. 그래서 목회의 두축은 말씀과 기도이다. 교회를 세워가는 두 기둥이 말씀과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가 약해지니 다른 방법 또는 그에 대한 어떠한 대처할 방법을 찾으며 이상한 성령운동을 자꾸 기웃거린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말씀과 기도사역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치유도 일어날수 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며, 기적도 일어날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만으로는 목회가 안된다고 하는 목사도 있는데 말씀으로 제대로 안하니 안되는 것이다.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목회하는 것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성령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일까. 탁월한 설교은사를 가졌다고 그 목사가 성령충만하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교만하고 자아가 충만한 사람일수도 있다. 아주 뛰어난 은사와 능력을 가졌다고 성령충만한 목사라고 할수 없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을 닮은 성품의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열매를 맺는 것이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이것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다. 우리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안에 성령을 내재하게 하신 목적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가장 중요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은사, 초자연적인 은사에 너무 치중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은사운동에 대한 반발로 전통적인 교회는 은사를 또 평가절하하는 것이 문제이다. 은사의 남용을 보고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쳐서는 안될것이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성령충만의 온전한 증거는 열매 플러스 은사이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교회는 열매와 은사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열매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할수 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능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밑천이 있어야 하는 것 처럼 사랑을 하려면 은사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인들을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설교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목회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은사가 없어서 교인들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놓는다면 아무리 목사가 인간적으로 교인들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참으로 교인들을 사랑하는 목사라고 할수 없다. 교회에 설교와 가르침과 목회의 은사가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수 없고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할수 없다. 그래서 우리 사역자들은 열매뿐만 아니라 은사도 추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 바울 사도가 더 큰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명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속에 푹 잠기게 된다. 우리가 예수로 점점 물들어 간다. 성령이 우리의 전인을 계속 관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 빛을 우리의 마음과 인격속에 계속 투사해 주심으로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이 점점 찍혀 나오게 한다.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게 한다. 그래서 쇳덩이를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불이 쇠를 관통해서 얼마후에 불과 쇠가 한덩어리가 된다. 이것처럼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성령이 하나가 된다. 성령이 우리의 영을 계속 관통하고 투사해서 예수의 인격과 형상을 계속 찍혀 나오게 하는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상에도 예수의 온유함과 진실함과 거룩함이 배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몸뚱아리도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이동하는 성전이 된다. 그래서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의 몸이 성령의 은혜가 흘러나가는 출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입을 열면 은혜와 진리가 흘러나오고 눈빛에서는 사랑과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가 입을 열면 은혜로운 권세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된다. 우리의 눈빛에서 뭔가 영적인 것이 전달된다. 눈빛에서 사랑도, 미움도, 사람을 깔보는 것도, 비웃음도, 의심하는 것도, 경계하는 것도 신비하게 전파된다. 눈빛으로 은혜도 전파된다고 볼수 있다.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얼굴빛과 인상도 달라진다고 한다. 잘알려진 로보트 머레이 매케인는 29살에 별세했다. 그가 설교하기 위해 강당에 올라오면 교인들이 그 모습만을 보아도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서 은혜와 감동으로 울곤 했다고 한다. 이정도 되면 목회하기 쉬울것이다.

제가 청년때 신앙생활하던 교회 목사님은 오래전에 작고하셨다. 그 목사님은 학식이 별로 없고 언변도 별로 없다. 그분은 일제시대에 만주 봉천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고초를 겪었다. 그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너무 자주했다. 그래서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만주 봉천을 한번 돌고 오면 끝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분에게 들은 설교중 기억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최고의 설교를 그분에게서 들었다. 그분의 모습이 메세지이다. 그분을 만나면 하나님을 느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목사님 앞에 있으면 교인들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과거에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었다. 그런 목사님들이 학식은 없었어도 한국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목사님이 저의 모델인데 저에게는 교인들이 접근하기를 두려워 한다. 인상이 목사안같고 검사같다고 한다. 통렬히 회개하며 목회를 하는데 그래서 요즘 좀 나가진 것이 이렇다. 내가 지나가면 찬바람이 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목사의 임재자체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 성령충만한 목회라 할수 있다.

성령의 교제와 은사활용

성령충만한 교회는 교제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은 교제의 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합해서 하나님을 섬길때 그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신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진정한 교제를 누리기가 어렵다. 공동체를 체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교제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소그룹 운동을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 평신도의 피동성이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교인들이 청중과 관람객과 학생의 위치에서 신앙생활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잠재력을 교회를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평신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탈렌트를 활용해서 교회를 섬기고 서로를 섬길때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교인들이 그런 봉사의 일을 할때 더 기도를 하게되고 성령충만을 구하게 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될수가 있다. 그래서 성경이 설정한 평신도의 위치를 회복해주어야 한다. 교인들을 작은 목자, 작은 사역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특권이자 의무

마지막으로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내재하는 이유는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고 우리를 항상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는 역사를 방해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들은 간헐적으로 성령의 감동과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는다. 설교할때 성령의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문제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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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시와 은폐 사이에서



말은 자기계시인 동시에 자기은폐의 수단이다. 우리의 말을 통해 자신이 드러난다. 우리 영혼과 인격의 얼굴이 나타난다. 인간은 말씀하시는 인격이신 하나님을 닮아 유일하게 말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죄의 치명적인 결과는 말이 진실한 자기계시의 방편이 아니라 자기를 은밀하게 포장하는 은폐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말이 은폐의 방편으로 작용하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먼저 침묵함으로 자신을 은폐한다. 말이 너무 많은 것 못지않게 말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이다. 말이 없으면 과묵하고 근엄하며 신비한 무엇인가로 가득한 존재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다. 이것이 침묵의 영성을 구가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꼼수이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침묵의 경건을 추구하는 분들과 오래 같이 지내도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어 갑갑하기 그지없다. 참된 인간관계의 기본은 자신을 말과 글로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다른 은폐의 방식은 말로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미화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이다. 말과 글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멋지게 꾸미는 가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지식과 경륜이 많을수록 이 포장술은 완벽해진다. 다른 이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멋진 가면을 자신으로 착각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탁월한 신학적인 지식까지 완벽한 자기 은폐의 수단으로 동원된다. 온갖 선하고 좋은 말은 다 골라 하며 은혜롭고 감동적인 설교를 하려는 나 같은 목사가 그런 일에 고수가 된다. 지식이 얄팍하고 판단이 미숙한 사람은 그 포장의 조잡함이 확 티가 나지만 공부깨나하고 영특한 사람일수록 이 포장술은 감식이 불가능할 정도로 고차원이 된다. 그럼에도 예리한 매의 눈을 가진 사람들의 레이더망은 피해가지 못한다. 그런 이들에게 매서운 매의 눈과 함께, 가면의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는 부드러운 비둘기의 눈도 필요하리라.


<박영돈 목사>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이 대목에서 사랑하다는 두 가지 헬라동사,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사용되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처음 두 번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다. 그에 대해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고 본다. 아가파오는 무조건적, 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반면에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면 주님이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신적인 고차원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셈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신적인 사랑으로는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뜻으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세 번째 주님께서 물으실 때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러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의미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기발한 해석인 것 같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성경은 헬라 문헌처럼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헬라역본인 70인 역(LXX)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상호교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아가파오가 숭고한 신적 사랑만 의미하지 않는다. 한 예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했을 때도 아가파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딤후4:10). 요한도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에서도 두 단어가 등장한다(요3;35, 5:20). 특별히 요한은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동의어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주님과 베드로가 실제로는 아람어로 대화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셨을까? 이 질문에 실패한 자를 일으키는 섬세한 사랑의 배려가 담겨있음을 보게 된다. 실패로 인해 깊은 죄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이에게 죄와 실패를 잘못 지적하면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그를 회복하기보다 그를 더 망가트릴 수 있다. 베드로의 마음과 그의 상실감을 가장 잘 아는 주님이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밤새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물 가득히 물고기가 잡혔는데 그 수가 153마리였다. 바다 속 어느 곳에 물고기가 몇 마리 있는지를 다 아시는 주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우리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우리 마음에 센서라도 달아놓으신 듯 우리 마음의 작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민감하시다. 우리 마음의 동기와 욕망과 추구와 끌림을 잘 아신다. 베드로가 비록 자신이 장담한 대로 주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에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고자 하는 진심과 열정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 진심을 알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내가 그 진심을 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심을 직관적으로 안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로 인해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할 수 없었던 베드로도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아시나이다는 말에서 주님이 자신의 진심을 아심을 그가 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주님이 세 번이나 이렇게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했다. 자신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이 생각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세 번 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그의 과오를 상기시키시는가. 그것은 그의 실패를 온전히 만회해주시기 위해서였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을 이제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상쇄해버리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변절자가 아니라 세 번이나 최고의 사랑을 고백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자로서의 자신감과 권위와 명예를 회복해주셨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신자의 삶에 양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성화와 거룩한 삶은 우리 양심이 얼마나 청결하고 예민한지에 달려있다. 양심이 깨끗한 만큼 거룩하게 된다. 성령이 우리 양심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가이드 한다. 양심을 통해 성령이 우리의 잘못과 죄를 깨닫게 한다. 어떻게 행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준다. 성령이 우리 안에 바른 양심의 소리를 일깨워준다. 신비한 음성, 이상한 음성 들으려고 하지 말고 이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양심이 둔해지고 어두워지면 이 소리가 안 들린다.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자기기만의 음성만 들린다.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어떤 사람은 깊은 자책감을 느끼는데 어떤 이는 죄의식이 전혀 없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조자도 인식하지 못한다. 양심이 심히 굳어있는 증거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일깨우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살면 그 양심이 점점 굳어지고 마비된다. 나중에는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면 성령이 전혀 깨우칠 수 없고 인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다(딤전1:19). 선한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아무리 좋은 것 같아도 그 믿음은 파선한 것이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비례해야한다. 믿음이 성숙할수록 양심이 밝아지고 청결해져야 한다. 그런데 신앙 생활할수록 양심이 굳어지고 강퍅해지고 더러워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일이다.

 

오늘날 믿노라하면서 신앙 양심이 없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한국교회가 처한 심각한 위기이다. 그러니 믿어도 세상사람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심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양심이 형편없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교회 생활로 인해 양심이 굳어질 수 있다.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양심이 더 청결해져야 하는데 거룩한 것으로 인해 오히려 양심이 더 강퍅해질 수 있다. 거룩한 것을 계속 접하고 반복하다 보면 거룩한 것에 타성이 생긴다. 거룩한 것을 하찮게 여긴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우리 양심을 더 굳어지게 할 수 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달고 살며 거룩한 일을 반복하는 목사들이 가장 양심이 굳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령이 우리의 잘못과 죄를 깨우치고 바로 살도록 우리를 감화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도 받고 눈물도 흘린다. 그런데 마음에 감동받고 찔림 받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으로 그치고 삶에 돌이킴이 없으면 그 양심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다음에는 성령의 감동조차 느끼지 못한다. 오래 교회 생활한 이들 중에 양심이 굳어질 때로 굳어진 사람들이 많다.

신자에게 신앙양심은 생명 같이 소중한 것이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깨끗케 된 양심을 더럽히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다.

박영돈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박영돈

 

아이테오 님의 방에서

교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설교를 듣다. / 박영돈 목사

 

 

교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설교를 듣다.

잘 알려진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그는 복음을 교리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죄를 안 짓게 된다고 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복음을 교리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오히려 교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의 설교는 부실한 교리적 골재로 형성된 설교가 얼마나 듣는 이에게 오해와 혼란과 의문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말 대로 과연 성경은 예수 믿으면 죄를 안 짓게 된다고 가르치는가? 성경과 교회역사 속에 그렇게 산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그렇다면 역사 속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교리로 잘못 믿어서 그런 것인가? 그런 주장은 오히려 그 목사가 성경의 가르침에 담긴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함의를 전혀 성찰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목사는 아마 요한 일서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요한 일서와 로마서의 전체 문맥과 성경의 총괄적인 가르침의 맥락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교자는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거기에서 성화론이라는 교리적인 성찰이 필요하게 된다.

신자는 죄의 지배에서는 결정적으로 자유했으나 신자 안에 죄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신자 안에 성령과 육신의 끊임없는 갈등과 싸움이 있으며 신자는 자주 쓰러진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신음과 탄식이 있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은 대개의 경우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래서 신자는 하루도 죄용서함의 은혜와 회개가 필요치 않는 날을 이 땅 위에서는 맞이하지 못한다. 그는 매일 매 순간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다. 그러면서 신자는 서서히 죄의 질병에서 자유하게 된다. 성경은 예수 믿으면 확실히 죄를 안 짓게 된다고 말씀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믿는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며 죄를 안 지으려고 몸부림쳐도 그렇게 살지 못해 자괴감을 느끼는 신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메시지이다. 설교자들이여 교리 공부 좀 합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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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영성이 유행하는 시대 / 박영돈 목사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책방에 들러 종교분야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영성에 관한 책이 많았는데 대부분 기독교와 뉴에이지, 힌두교와 불교 등 잡다한 가르침이 혼합된 다원주의적인 영성을 소개하는 책이었다. 종교의 대상, 궁극적인 실체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 인간에게 행복과 유익을 안겨주는 존재라면 모두 환영한다. 그런 짬뽕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존재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그를 통해 우리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혜택과 실용적인 가치이다.

이런 실용주의 영성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미국제 영성에 깊이 배어있는 특성이다. 일찍이 실용주의 철학(pragmatism)의 대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다양한 종교체험(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s)”이라는 책에서 이런 실용주의적 영성을 주창하였다. 그는 다양한 종교체험과 현상을 분석함으로 참된 종교체험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진정한 영적 체험을 진단하는 척도는 그 대상이 누구이냐가 아니라 그 체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와 열매, 실용적인 가치에 있다. 우리 마음에 행복과 평안과 안정감을 안겨주며 우리 삶에 도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면 어떤 신이든 종교든 좋다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책, “다양한 종교체험”은 1902년에 발간되었다. 세계 일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서구사회는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더 살기 좋은 세상, 유토피아가 바야흐로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나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더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고 인간이 행복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의식은 보편적이었다. 제임스의 책은 이런 불안감을 잠재우고 과학이 선사하지 못하는 마음의 행복과 평안을 누리는 길이 종교체험에 있다는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과학과 문화의 발전으로 행복한 환경이 주어질 뿐 아니라 영적인 체험을 통해 마음의 행복까지 누리게 된다면 유토피아의 환상은 실현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종교와 신을 택해서 종교체험을 하라고 제임스는 권면한다. 결국 실용주의 영성의 목표는 자기실현을 통해 인간의 유토피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의 골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이다. 영성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실용적인 유익과 혜택을 얻어내느냐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의 실용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을 섬김으로 얻는 은택,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우선순위가 뒤바뀌거나 무시된다면 영성의 본질이 왜곡된다. 이렇게 실용주의적으로 변질된 영성이 현대교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영적인 토양에서 제 입맛에 맞는 잡다한 신들을 불러 모아 혼합시킨 짬뽕영성이 더욱 기승을 떨칠 것이다.

http://cafe.daum.net/churchinsejong/1T4Q/241

 

출처: 영적분별력/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최근에 들어와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훈련학교에서 선무당같이 어설픈 예언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자기 안에서 떠오른 생각에서 나온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가하면 마귀적 음성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쑤이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계시된 말씀을 전파하는 것 같아 그들의 예언을 성경말씀보다 더 솔깃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의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케 한다는 점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을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셈이다. 

성경말씀을 듣기는 원치 않아도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이들은 많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에는 은혜를 못 받아도 직통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같은 예언자의 말에는 엄청 은혜를 받는다. 평소에 늘 설교를 통해 들어도 별 감흥이 없던 말도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으면 큰 감동으로 와 닿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이 귀히 보신다는 말을 설교를 통해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똑같은 말씀을 예언자가 “네가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구나 착한 종아 내가 너를 귀히 여기노라 내가 앞으로 너에게 더 큰일을 맡기리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설교를 통해 누리지 못한 큰 위로를 받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대신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다는 식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교인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을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단언함으로써 마치 주님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믿도록 교인들의 심리를 교묘히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일부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주장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중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예언사역을 하는 이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야기하는 혼란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되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요즘 예언하는 이들에게 이런 지혜와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 자기 마음에 일어난 감동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함부로 확언하는 것은 아주 경솔할 뿐 아니라 진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병고침의 집회에서 자주 “주님께서 지금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만지시고 계십니다. 방금 무릎 관절이 치유 받은 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신장에 이상이 있는 이를 고치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몇 천 명이 운집해 있는 모임에 으레 그런 병자들이 있으리란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셨기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알려 주신 것일까?
소리를 들은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에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인가? 그 계시가 확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면 왜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좀 더 확실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셨는가? 정확히 누가 어떤 병에서 나았다고 알려주시지는 못하는가? 

과거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강사가 회중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복음사역자는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의 예언은 마음속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감동이나 느낌, 또는 예측을 발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백 퍼센트 주님의 말씀인지 사실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과감히 믿고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담대한 믿음이 아니라 경솔한 믿음이다. 분명한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위험성을 간과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확실치 않은 것을 직통계시를 받은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이며 청중을 교묘히 조정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를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미국의 신유집회에서 허풍쟁이 사역자들이 즐겨하던 짓인데 한국의 사역자들이 그것을 아무런 성경적인 검증도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예언집회나 예언훈련학교에서 예언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예언을 해준다. 수많은 예언집회를 쫓아다니며 예언을 받았던 한 교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대부분 가서 받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님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데요. 지금 앞에 일곱 가지 빛이 보이고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축복하고 축복하노라. 네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혹은 ‘네 눈물과 기도를 들었노라’ 혹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께서 지금 답답한 문제 가운데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 형제님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계속 꾸준하게 인내하며 기도를 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인내하면 그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포도나무가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지금 물질의 축복을 간구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이 물질을 심으시고 우리 형제님뿐만 아니라 형제님의 가족도 물질의 궁핍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등 이런 저런 예언을 많이 받았는데, 그 말들은 순간적인 감동은 되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건강한 몸이 병만 들었습니다.” 

이 교인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언 받으러 나온 사람을 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지껄여대며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성경에서 예언하는 이는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여 자신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만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이 원하면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예언을 해준다. 이는 성령님을 자기들이 필요할 때 호출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하수인처럼 취급하는 행위이다.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한다. 자기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을 말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그 누구도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무오 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사도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다(고전14:1). 자칭 예언자들은 주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의 은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예언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 세 사람이 예언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하라고 했다(고전14:29). 이 말은 예언의 진정성을 달아보고(weight) 잘 분별하여 참과 오류를 가려내라는 말이다. 그들의 예언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경말씀에 의해 항상 점검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보다 열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해(고전14:3), 또는 숨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고전14:25), 성령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한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이 떠오르게 한 인상과 메시지가 인간에 의해 잘못 이해되고 해석되어 잘못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철저한 검증과 분별을 명한 것이다. 이런 유의 예언이 지금도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아직도 연구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이와 유사한 예언을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예언적인 의견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예언적인 통찰을 꼭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진실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성경말씀을 전하면서는 담대하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외쳐야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하면서 그렇게 선언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번창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반드시 금지되어야한다. 이런 사이비 예언이 난무할 때 교회에 극심한 혼란을 불러오며 기독교 신앙을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무섭게 역사한다. 아무리 신통한 예언의 능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예언할 때 교인들은 성경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며 그 말을 실질적으로 더 의존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것에 의해 주관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의해 주관되면, 예언자의 오류와 부패성을 통해 역사하는 거짓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에 관한한 아무리 주의를 기우려도 부족하다. 어떤 예언적인 의견이나 통찰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 점검되어야한다. 그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을 예언자들의 말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한다. 고린도교회에 예언이 성행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전체가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씀의 공백을 잠정적으로 메우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완전한 성경말씀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으로만 부족하여 예언자들의 엑스트라 말씀을 쫓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의 역할을 지금은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설교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함인데 이 일을 하기에 성경말씀보다 더 적합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은 성도를 세우고 위로하고 주의 계명으로 권면할 은혜로운 말씀으로 가득한 진리의 보고이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성경말씀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찔러 쪼개어 숨은 죄악을 드러낸다. 성령님의 대표적인 사역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달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가장 중대한 장래 일을 예언한다.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율법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만약 교인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면 새 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것이나 성령님을 거스르고 육신을 따라 살면 과거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설교를 하고나면 교인들이 목사님은 어쩌면 그렇게 자신들의 사정과 고민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내 일을 훤히 다 아는 것처럼,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직면한 문제에 꼭 적중한 말씀을 해 주셨다고 고마워하는 교우들도 자주 접한다.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딤후3:16-17). 성령님은 이 성경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교인들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와 은혜를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예언자의 말이 판을 치고 성경말씀은 뒷전으로 밀려난 최근의 성령운동은 부흥이 아니라 심각한 영적인 탈선이며 쇠퇴이다.

선지동산 55 게재 / 성령의얼굴(5) / 박영돈 교수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그리스도와의 연합 

따라서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그것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했듯이, 이 연합은 단순히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는 이 교리가 ‘모든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하였다.4) 특별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속죄 사역의 혜택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서신에만 이 용어(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바울 서신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바울이 도입한 독창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사상은 요한의 기록에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할 때 주님과 우리가 상호내주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이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연합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서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바울의 연합 사상도 이 주님의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이 부패하고 유한한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통해 정화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성결해져야만 신인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골(goal)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영성의 근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대응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과 성화의 전 과정의 바탕으로 본 것은 신앙의 특성과 영성의 색깔을 뒤바꾸어 놓은 영적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는 고역스럽고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와 자격을 우리 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같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될지라도 그런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출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는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게 한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 연합의 근거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법적 연합’(judicial un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이런 연합의 교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칭의론의 개혁은 연합에 대한 기존의 가르침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경건의 부단한 노력과 신비체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높은 경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회복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법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소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연합하면 주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예수님과 같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므로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가 되며 추한 자가 아름다운 자가 되고, 빈곤한 자가 부요한 자가 된다. 


이 연합은 법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연합, 즉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연합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의 성격을 머리와 몸,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부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연합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시공간의 무한 간극으로 분리된 두 존재가 실질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다. 성령은 하늘에 있는 주님과 땅에 있는 신자, 무한자와 유한자,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의 무한 간극을 극복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인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둘을 긴밀히 연합하는 동시에 구별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그 어떤 “잡스러운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다.5) 성령은 이 연합의 매개체와 방편인 동시에 이 연합의 모든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성령은 연합의 매개체와 채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제공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서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 즉 영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했다(엡 2:6). 거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과 계획 속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주의 새로운 상황과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과 ‘아담 안’은 서로 대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며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 새사람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진행되는 새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 포괄하는 반경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하였다. 죄로 오염되고 와해된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통합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속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세상의 영역들을 그 반경 안으로 복속시키는 중대한 책무를 띤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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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내세의 소망이라는 것이 있어?



이 시대에 참 믿음의 여부를 진단하기 위해서는 믿음보다 소망이 있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믿는다는 이들은 많으나 진정으로 내세를 소망하는 이들은 드물다. 그러나 참 믿음은 소망하는 믿음이다. 오늘날 소망이 없는 믿음으로만 충만한 이들이 많다. 그런 믿음은 이 땅에서 잘 살고 번영하고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한다. 하나님과 성령을 이 땅의 것에 대한 우리 욕망을 시중드는 시녀로 삼으려고 한다. 기복신앙과 번영신학, 그리고 그와 맞물린 성령운동은 대부분 믿음으로 충만하나 소망은 텅 비었다. 성령은 종말의 영이기에 성령으로 충만하면 소망으로 충만한 것인데, 이 소망 없이 믿음으로 가득 찬 것은 사실 성령으로 위장한 세상 신과 욕심으로 충만한 것이다.


이것이 대부분의 교인과 목사들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나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부흥을 위한 사역자가 되기 위해 힘써왔다. 경건과 학문을 겸비한 목사가 되기 위한 야심찬 비전 실현을 위해 15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30년 넘게 성령 충만을 간절히 추구하며 탐구해왔다. 그러나 나를 사로잡았던 소망은 상당부분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지향적인 것이었던 것 같다. 미국에서 피를 말리는 것 같이 힘든 학위과정을 거쳐 여러 개의 석사와 박사의 간판을 딴 것이 과연 누구의 이름을 위해 한 것이며, 누구를 위해 종을 친 것인지 깊이 반성하게 된다. 내가 가졌던 비전과 소망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교묘히 위장된 현세지향적인 소망, 즉 목사와 교수로서의 성공과 영광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이제 그런 비전과 소망이 이루어질 가망이 없어지니 내세의 소망을 거들먹거리게 된다. 요즘은 나를 사로잡아 몰아가는 야망이 별로 없다. 솔직히 빨리 사역을 접고 조용히 쉬고 싶다. 나이 들수록 삶과 사역이 고단함을 느낀다. 이 땅의 것에 별 애착도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다. 이루지 못한 세상의 욕망과 소망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면서 내세에나 소망을 가져본다고 자위한다. 이것 역시 성령이 주시는 건강한 소망 같지는 않다. 일종의 현실도피적인 소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칼뱅의 말에서 위로를 얻어 본다. 칼뱅은 우리가 이 세상을 지긋지긋하게 사랑하기에 이 땅에서 우리가 행복하고 평안하면 결코 내세를 묵상하고 소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신자의 삶을 힘들고 비참하게까지 하여 우리 마음을 이 땅에서 천상으로 돌리게 하신다고 한다. 칼뱅의 말이 이상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솔직한 진단이다. 이 땅에서 평안하고 번성하여도 내세의 소망으로 가득한 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증거이지만, 우리 대부분은 사실 그렇지 못하다. 앞길이 창창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젊은이들, 아직 세상에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많은 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소망은 가득하나 내세에 대한 소망은 별로 없다. 역으로 이 땅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잘 풀리지 않고, 삶을 지탱하기도 버거우며 오랜 병과 고난과 역경으로 신음하는 교인들은 다시는 고난과 슬픔과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만큼 더 소망하는 것 같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박영돈 목사>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합력이 아니라 합심 기도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19,20)


신앙생활에 매뉴얼은 없다.

성경을 개인적 의도나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읽으면 온전한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자칫 이해의 부족, 착각, 오류는 물론 이단으로까지 흐릅니다. 환난 중에 힘을 얻어 위로가 되는 말씀만 골라 읽는 정도는 그나마 순진한 편입니다. 잘 믿어서 형통하기 원하는 자의 성경은 기복주의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말씀으로만 가득 찰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판단 정죄하고자 하는 심사가 있다면 성경도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식의 상대주의 도덕교과서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불순한 의도 없이 읽는데도 쉽게 오류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기도에 관한 말씀을 읽는 신자들의 관심은 거의 대부분 어떻게 하면 빨리 응답을 받을 수 있을 지에만 쏠립니다. 본문도 그 대표적 예로서 두세 사람이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면 응답이 빨리 잘 된다고만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나 앞뒤 문맥에서 드러나는 본문의 정확한 의미와 무관하게 예수님이 단지 기도하는 방식을 가르친 양 받아들이고 치웁니다.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 이루게 하시리라”는 표현에만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들이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곳에 함께 하셔서 아주 기뻐하십니다. 또 응답이 잘 되는 경우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기도의 방식이 응답이 잘 된다고 이해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와 근거는 그 방식에 있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심지어 신자들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나 견고한 믿음일지라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완벽하고도 신실하신 당신만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움직이실 뿐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어떤 방식이 있다고 말하면 엄밀히 따져서 틀린 진술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바로 그 방식 때문에 그분의 은혜나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나기는 마찬가지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만 보십니다. 특정한 기도 방식을 선호, 고집, 의지하는 것도 사람의 외모에 해당됩니다. 쉽게 말해 어떤 매뉴얼이 있어서 그대로 따라하면 하나님이 더 잘 움직일 것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려면 그런 예상, 추측, 기대, 소원, 믿음부터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 대신에 기도하는 우리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가장 먼저 지금 기도드리는 제목과 내용이 정말 자신에게 갈급한 문제이기에 꼭 이뤄져야만 한다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뤄져도 그만, 안 이뤄져도 그만인 경우는 구태여 기도할 이유조차 없지 않습니까? 또 모든 기도의 바탕에는 자신의 무능함, 어리석음, 연약함을 철저히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순전한 믿음이 따라야 합니다.

한 마디로 갈급함과 믿음이 기도가 기도되게 하는 두 근본요소입니다. 이 둘이 없으면 아예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기본 구조 위에다 실제적인 기도의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온전한 기도가 되려면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둘 다 갖추어야 하는데 갈급함과 믿음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두 기본 조건은 그런대로 갖추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기도의 충분조건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기도가 응답이 됨으로써 자신의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길 소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실은 이 조건이 더 우선되기를 원하십니다.

앞에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더 선호하시는 매뉴얼이 따로 없다고 했지만 특이하게도 기도에만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을 이미 주셨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현실적 안락과 형통만을, 또는 문제와 환난의 해결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습관이 완전히 몸에 배어서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을 하나님도 아신 것입니다. 일종의 예외로 제발 기도만은 이렇게 하라고 모범 답안을 가르쳐 주신 셈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소원으로 시작해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토록 드러나길 바라며 마치는 기도입니다. 물론 자신의 일용할 양식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목이 결코 우선이 아니며, 또 단지 일용할 양식이었지 도에 지나친 풍요나 자신의 욕망을 구하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기도를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실천해 보였습니다. 마지막 날 밤 십자가의 잔을 마시지 않았으면 하는 자신의 소원은 빌되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달게 마시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순전한 중심을 하나님 앞에 하나 가감 없이 온전히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습니다. 만약 자기 소원의 응답만 목적이라면 십자가를 비켜가게 해달라는 기도만 했을 것 아닙니까?

기도하는 존재 - 인간

인간의 외모란 인간이 세상에 나와서 스스로 만들어 쌓은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잘 보이려 과장과 가장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여 본 모습과 다르게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중심은 하나님이 원래 당신의 형상대로 만들고서 당신의 생기를 불어 넣은 곳입니다. 당신과 교제토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외모가 아닌 중심을 드리는 것이 기도라면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은 당신께 기도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탄에 넘어간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그 중심이 부패되었다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면 성령이 내주하는 전으로 바뀝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인간이 만들어졌던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시 교통할 수, 쉽게 말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불신자 때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 믿지 않거나 모릅니다. 어쩌다 간절하거나 위급한 문제가 생기면 알지 못하는 천지신명에게 자기 형통만 빕니다.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확신도 없으니 그분의 뜻에 대해선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신자가 됨으로써 비로소 그분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자신을 향한 뜻과 계획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그대로 살고 싶은 소망도 생깁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에 다양한 뜻이 있지만,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게 된 것도 그 중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만 당신께 기도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피조물과 가장 유별나게 다른 인간만의 특성이기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 형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단순히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반드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a)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의” 형상을 닮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우리라는 복수 단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다신주의(多神主義)를 지지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태초부터 성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창조 사역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위격이 다른 세 종류로 만들었다거나, 인간 안에 그런 세 본질을 함께 내재시켰다는 뜻도 아닙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완전한 사랑으로 합력하고 교제하였듯이 인간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도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 하나님의 형상 안에 남자와 여자 같은 성(性)의 구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서 서로 사랑하는 남녀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게 다스리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창조의 뜻에 비추건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평생에 해야 하는 일도 두 가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신자가 그분을 사랑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본질상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기에 평생을 두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거기다 처음 만드신 인간의 형상대로 회복되었기에 마땅히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만의 안위만 염려하던 자에게서 남들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처럼 자신이 수고, 희생, 심지어 생명까지 바치더라도 다른 이들이 주님의 새 생명을 얻게끔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된 것입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사랑은 불신자와는 달라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소유나 능력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신자도 현실적으로는 자기 시간, 소유, 능력 등을 사용해 자신의 열정과 긍휼과 믿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지만 실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 대신에 주님의 것을 사용하여 이웃을 섬기는 셈입니다.

또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여전히 죄의 본성이 살아있기에 스스로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마음이 주님처럼 정말 순전하게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만 비로소 신자의 인간적인 불완전한 사랑이 주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대체됩니다. 하늘에 있던 주님의 긍휼이 이 땅까지 내려와서 신자를 통해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웃을 섬기되 가장 먼저 이웃의 삶의 모든 영역 위에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란 신자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종교적 의무로 그쳐선 안 됩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는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입니다. 중보기도로 이웃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형상을 회복한 참 인간답게 사는 첫 걸음입니다. 요컨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합심기도의 본질

신자가 동료 성도나 불신자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꼭 두세 명 이상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심이 갈 수 있습니다. 혼자 집에서도 열심히, 간절히, 성실히 이웃을 위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흔히 이해하듯이 합심 기도의 목적과 효능이 하나님 보좌를 흔드는 신령한 능력이 더 강해지는 것인지, 성도 간 교제를 위해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인지, 함께 힘을 합해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 잘 분별이 가지 않습니다.

물론 합심기도에 그런 요소들은 분명히 작용합니다. 그러나 재차 강조하지만 기도의 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기도의 본질을 따져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독립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다른 어떤 가르침과도 연결되지 않는 말씀이라면 합심으로 중보 기도만 하면 응답이 잘 된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다른 가르침을 주시는 가운데 나온 말씀이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본문 앞에 어떤 기사가 나옵니까?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처럼 먼저 낮아져서 소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자여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래서 네 형제 중에 누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권면, 증참(證參)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했습니다.(마18:1-17)

그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고 했습니다. 그럼 땅에서 매고 푸는 문제는 어떤 것입니까? 바로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 등입니다. 그 일을 두고 제자들이 열심히 기도하면 하늘에서도 용서와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선 바로 합심중보기도에 대한 본문 말씀이 이어지는데 어떻게 시작합니까?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 17절을 풀어서 설명하면서 다시 강조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미 1-17절까지 가르친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처럼 다시 강조하자면, “스스로 먼저 낮아지는 일, 소자를 잘 대접하는 일,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범죄한 형제를 용서하여 회개케 하는 일” 등입니다.

바꿔 말해 하늘나라에서 누가 클지 논쟁, 시기, 쟁투하지 말고 당신의 제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부터 성실히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자연히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말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와 기도 응답의 신속성과는 어떤 직접적 연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합심(合心)은 말 그대로 기도하는 두세 사람이 똑 같은 마음을 함께 모으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하는 힘을 보태어서 강력한 역사를 일으켜보려는 합력(合力)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정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소자를 주님의 심정으로 진실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 중에 범죄한 자도 정말로 불쌍히 여기며 조건 없이 용서해주려는 마음에 일치해야 합니다. 신자가 땅에서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누구라도 죄나 사단의 묶임에서 풀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 하늘에서 풀어주십니다.

그렇다면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자가 하나님 대신에 판단, 정죄, 심판할 권세를 주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것입니까? 어떤 이를 정죄 심판해달라고 기도로 요청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와 구원은 얼마든지 신자가 구할 수 있고 또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정죄 심판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구해선 안 됩니다.

인간은 서로 돕고 섬기며 사랑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지, 판단 정죄 심판하라고 창조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신자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인간은, 신자끼리도 서로 사랑만 하기에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최대한 노력, 훈련해도 평생을 두고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정죄 심판은 인간의 몫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그런 일에 허비할 시간과 여유조차 사실상 없습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앞에서 하신 말씀과 짝을 맞추려는 표현법입니다. 범죄한 형제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것이 땅에서 푸는 일입니다. 반면에 교회의 증참, 권면 등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겨야 하는데, 바로 땅에서 매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출교만 결행할 것이 아니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말씀대로 여전히 하늘에 대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로선 어쩔 수 없이 출교시켜야 하지만 하나님께는 정죄와 심판보다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끝까지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교회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범죄한 형제의 출교를 결행했던 심정 그대로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4,5) 교회 안에 음행한 형제를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내쫓았지만 언젠가는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결행했다는 것입니다. 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 즉, 교회의 영적 순결성을 보존하는 것이 더 급선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시 이르되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왕 다시 강조하려면 더 많은 사람이 합심하라는 것이 좋을 것인데도 왜 겨우 두 사람이라고 했겠습니까? 증인의 최소 요건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담임목사 부목사 둘이서 합의만 하면 출교시켜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어떤 행사라도 절대로 법적 하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출교를 시키는 데도 교회 안에 먼저 온전한 합심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간의 모든 행사는 반드시 한 주님, 한 성령, 한 믿음, 한 진리, 한 마음 안에서 기도하며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바로 이어 베드로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21절) 그는 예수님이 강조하신 포인트가 형제들 사이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에 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두세 명이 모여 합심해 기도하면 응답이 더 잘 되리라는 요소는 아예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혼자서 하는 합심 기도

재차 강조하지만 합심기도가 신자 여러 명이 모여 함께 기도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몇 명이 모였든 간에 그들의 마음이 같아야, 그것도 스스로 기꺼이 서로 낮아져서 진심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묶인 잃어버린 양들을 되살리려는 애끓는 열망을 똑 같이 공유할 때만이 온전한 합심기도가 됩니다.

단순히 교인들이 모여서 함께 했다고 합심 기도라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더 응답이 잘 되고 하나님이 더 기뻐하신다는 뜻이 됩니다. 교회 전체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면 응답되지 않은 일이 없어야 합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교회가 대형 교회가 되길 원한다는 이상한 결론까지 나옵니다.

물론 신자가 가능한 많이 모여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리는 결코 없습니다. 그럼에도 가라지와 알곡이 섞인 상태에서 중구난방으로 기도하는 것보다는, 온전히 거듭나서 이웃을 당신을 사랑하듯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단 몇 명의 기도를 더 기뻐 받으십니다. 아니 그런 자 단 한명을 통해서라도 그렇지 못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보다 더 큰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엘리야 한 명의 순전한 기도로 삼년 간 하늘에 비를 그쳤으며, 불이 내려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심판했고, 마른하늘에 갑자기 뭉게구름이 생겨 폭우를 퍼부었듯이 말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모여 단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고 응답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고,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하고, 스스로 겸비해진 다음에 구하라고 합니다. 또 그러면 이미 징계로 내리신 가뭄, 황충, 염병의 재앙 등도 다 그치고 그 땅을 고쳐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본질은 신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겠다는 소원과 열망의 표시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스스로 낮아지고, 죄에서 떠나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워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가 몇 명이 되었든 완전히 합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나아가 신자 개인이 드리는 기도라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드렸던 주님의 심정과 합심해야만 합니다. 이 땅의 황폐함과 길을 잃고 헤매는 목자 없는 양들을 두고 정말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항상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실상은 목사가 기도 제목을 꺼내 놓을 때에 마지못해 중보기도 하는 정도입니다. 또 구역예배에서 각자 기도제목을 꺼내어서 구역식구들과 함께 기도하면 응답 잘 받으리라는 기대밖에 못합니다. 중보기도라는 형식은 갖췄지만 합심이 아니라 합력한 것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솔직한 영적 수준입니다. 또 현실 문제가 너무 고달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기도라도 하니까 불신자 시절에 비하면 엄청나게 진전한 모습입니다. 또 그런 연약한 모습이라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는 어차피 연약하고 가난하며 아직도 완악한 모습을 버리지 못하는 진토 같은 체질임을 그분이 더 잘 아시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기도에서 꼭 보기를 원하고 기뻐하는 가장 기본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서두에 강조한대로 외모가 아닌 중심만은 드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을 철두철미 까뒤집어서 온전히 실토, 자백,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만, 불신, 분노마저 다 꺼내 놓아야 합니다.

외모로만 경건하고 의롭게 기도하는 것에는 하나님이 일절 귀를 막으시지만, 당신께 욕하고 대들더라도 진짜 중심이 그러하다면 오히려 더 경청하고 심지어 기뻐하면서 들으십니다. 또 비록 내 개인적 기도를, 심지어 불만과 의심에 차서, 했을지라도 중심을 온전히 드러냈기에 하나님은 하늘에 이미 예비해놓으신 놀랍고도 거룩한 은혜와 권능을 기도한 신자뿐 아니라 그 주변에 풍성하게 드러나게 해주십니다.

말하자면 우리 중 대부분이 온전한 합심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영적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개인 기도에서라도 주님과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황폐함과 잃어버린 양에 대한 주님의 민망함과 통분함에 동참한다면 그럴 수 없이 좋겠지만, 그보다 나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운 심정이라도 제대로 헤아리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분이 왜 나를 택하여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알게 해주셨는지 온전히 깨달은 바탕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나의 심령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회복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셔서 세상으로 다시 보내신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나의 모든 중심을 있는 그대로 하나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자기 자신부터 땅에서 온전히 풀고 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점차 이웃을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이미 구원 받은 신자가 믿은 후에 가장 많이 또 크게 누려야 할 권세란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합심해서) 중보 기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믿을 때부터 성령 인도함 받는다  

박도� 교수 / 고신대학교

남포교회(박영선 목사) 설립 20주년 기념 학술 축제가 ‘구원 그 이후: 성화의 은혜’라는 주제로 지난 3월 7일 남포교회에서 열렸다. 박영선 목사의 ‘나의 목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비롯해서 Bryan Chapell 카버넌트신학교 총장, 김영재 교수, 김정우 교수, 변종길 교수, 박영실 교수, 이수영 목사, 오덕교 교수, 김병훈 교수, 박영돈 교수 등이 발제자로 참석했다. 이중 박영돈 교수의 ‘오늘의 구원과 성화’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성화의 성령론적 다이내믹

1) ‘제 2의 축복’ 성화론
개신교 안에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을 성령충만과 함께 회심 이후의 획기적인 체험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획기적 성화에 대한 견해는 웨슬리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일차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칭의와 회심 후에 성화를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라고 칭했다.

웨슬리의 뒤를 이어 일어난 성결운동과 ‘더 풍성한 삶 운동’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성화를 이차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그들은 대개 죄책과 형벌에서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구분했다. 신자는 칭의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지만, 그 후에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를 체험해야만 실제적인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자유하게 되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사람에 따라 길거나 아니면 짧은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모든 신자는 믿을 때 칭의의 은혜에 참여하나, 성화의 은혜는 대개 나중에 가서야 이차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신자의 삶과 사역은 그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신자의 삶이 실패와 좌절과 신음으로 점철된 곤고한 삶에서 능력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승리의 삶으로 급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맥을 이어온 케직 사경회(Keswick movement)에서는 이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 체험을 자주 제 2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케직 사경회를 인도했던 마이어, 앤드류 머레이, 알 에이 토레이 같은 이들의 사역과 그들이 남긴 대중적인 경건서적을 통하여 이러한 성화론은 지금까지 많은 교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또한 디엘 무디 같은 부흥사, 에이 비 심슨, 이에 제이 고든, 모울 같은 이들도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을 전파한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성경적 대안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성화와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간접적으로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 사건과도 연결시킴으로써, 성화는 기독론적인 바탕뿐만 아니라 성령론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의 은혜뿐만 아니라 성령의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 Jr)도 정통교회에서는 중생에 있어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나 그 후 신자의 삶속에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자의 삶의 출발점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 이후 성령은 거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부터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극단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가장 자주 나타났던 병폐로서 체험의 진공상태를 야기했고, 이는 결국 또 다른 극단, 즉 ‘두 번째 축복’을 주장하는 오류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Richard B. Gaffin, Jr. “The Holy Spirit”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3:1(fall 1980): 76)

이러한 양극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은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걸쳐 역동적으로 계속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이’, 즉 ‘성령충만한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8:9, 갈5:16, 엡5:18).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과 지배 아래 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성령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삶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갈 5:17), “성령으로 산다”(갈 5:25)는 표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든 피가 지적했듯이,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말들이 의미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더욱 강렬하고 부요한 은유적 표현이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성화의 기독론적-성화론적인 바탕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분리된 성결한 삶,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회심 후 제 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줌으로써 웨슬리-오순절 운동의 가르침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에 걸쳐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누리는 삶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로 인해 새로운 은혜체험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는 전통적인 성화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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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창립 10주년을 맞은 어떤 교회는 매년 교인이 천 명씩 늘었다고 한다. 어떤 대형교회는 매년 수천 명씩 몰려온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접하며 기쁘기보다 마음이 좀 씁쓸한 것은 왜일까? 교인수가 적은 교회를 섬기는 이로서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껴서일까. 솔직히 그런 것도 없지 않을게다.

 

10년 동안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찾는 자 없이 싸늘하게 외면당하는 작은 교회의 설음을 뼈속 깊이 체감하였다.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새 교인 한 명이라도 오면 얼마나 기쁜지, 그러나 교인 한 명이라도 교회를 떠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오랫동안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작은 교회를 섬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80% 이상의 한국교회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교인 한 명으로 인해 희비가 엇갈리는 작은 교회의 옹색함과 일 년에 천 명씩 몰려드는 교회의 도도함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보다 더 심한 ... 양극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 교회와 목사에게 천 명 속에 한 사람의 존재감이 제대로 느껴질까.

 

그렇게 특정한 교회로 몰리는 현상은 그만큼 갈만한 교회가 없다는 반증이라고 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참신하고 의식 있고 설교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스타 목사를 중심으로 몰려들어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은 결코 건강한 현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이다. 몇 만 명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 속에서 어떻게 친밀한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해 끈끈한 하나님의 가족애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여러 가지 큰일을 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은 점점 구현하기 힘들어진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이런 교회관을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스타목사들 못지않게 순수하고 참신하며 실력 있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형교회에서의 럭셔리한 교회생활을 포기하고 작은 교회의 열악하고 구질구질한 여건 속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라도 쓰러져가는 한국교회에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수고와 고난에 동참할 의향만 있다면 말이다.

 

작은 교회 목사는 아프다. 교인들이 늘지 않는 것이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고 자책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인식, 즉 목사가 능력이 없어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는 은연중의 암시와 따가운 시선 때문에 더욱 그렇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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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교인들의 귀환

 

기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교인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적으로 교회와 유리된 신자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을 뜻한다. 팔과 다리가 몸통에 붙어있지 않고는 머리와 연결될 수 없듯이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 접합되어있지 않으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없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음을 뜻한다(Being in Christ means being in the body of Christ). 동시에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의 전인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To be in the Spirit is to be in the temple of the Spirit). 바울의 가르침에서 교회와 분리된 신자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초대교회에서부터 개혁교회까지... 계속 이어져 온 전통적인 신앙관이다.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교부 어거스틴은 태아가 모태를 떠나 생존할 수 없듯이 신자는 교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개혁교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뱅도 신자는 교회라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고 그 품안에서 젖을 빨며 양육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를 안 나가고도 신자로 산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신앙이다. 그렇다고 가나안 교인들만 비난할 수는 없다. 과연 현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교인들을 양육하는 영적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형식과 외식으로 화석화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그 생명력이 소멸된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가나안 교인들이 자신들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생명이나마 부지하려고 영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교회를 탈출하는 것은 아닌지 기존 교회와 교인들(목사를 우선적으로 포함해서)의 심각한 자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온유하신 성령님을 너무도 오래 거스르고 근심케 하여 성령님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아마 예수님과 성령님도 가나안 교인들과 함께 기존 교회를 떠나실 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나안 교인들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타락한 교회를 떠나 참된 교회를 찾고 있는 일종의 순례자들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 모두가 다 그렇지 아닐지라도 말이다. 성령께서 부디 그들을 인도하사 교회로 귀환시킬 날을 고대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속히 교회 되어야 하리라.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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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 박영돈 교수


김세윤 교수님의 책, “칭의와 성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어, 뒤늦게나마 책을 읽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과거 김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 많은 유익과 통찰을 얻었던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너무도 중대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몇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1. 가장 아쉬운 점은 전통적인 구원론에 대한 김 교수님의 비판이 종교개혁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김 교수님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그러나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부요하고 치밀하며 성경적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2.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교수님이 제시한 성경적인 대안이다. 김 교수님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며 같은 구조와 특성을 띠고 있다. 그는 성화를 “의인됨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칭의와 성화』, p. 189). 또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칭의와 성화』, p. 192). 이런 논리에 따르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까지 유보된 칭의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연합해버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유사한 논리적인 맥락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렇게 칭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는 종교개혁 전에 신자들이 겪었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에 따라 우리의 의인됨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 루터가 겪었던 영적 고뇌였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있지만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으면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복음의 핵심이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우리는 이 칭의의 영원한 바탕 위에서만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 우리가 이룬 보잘 것 없는 거룩함을 의존해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영원한 칭의의 반석은 우리의 연약함과 성화의 부진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고 변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수도 없다. 라일 감독(J. C. Ryle)이 말했듯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칭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김 교수님이 주장하듯이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사실 성화는 실패를 통한 성화이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신자는 연약하여 수없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영적인 회복의 바탕과 다이내믹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날을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성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보다는 칭의의 은혜만을 더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칭의의 복음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아 애초부터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자들에게는 악용될지 모르나, 성령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예민해진 신앙양심을 가짐으로 작은 죄에도 고통 받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이며 피난처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순기능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 칭의론의 남용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결국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위로와 유익을 유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영원불변한 사랑 가운데 진행된다는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선진들의 통찰을 영적유산으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의 틀에 갇혀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좋은 전통을 모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전수된 역사적 신앙의 진귀한 유산을 섭렵한 바탕위에서만 참된 진보가 가능하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복음을 바로 잡으려는 김 교수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그마저 선진들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칭의론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 속에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500년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탱해온 핵심교리를 뒤집는 주장을 할 때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분석이 마땅히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성경신학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주관이나 신학적인 전제가 완전히 배제된 성경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님이 개혁주의 구원론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그의 해석의 관점은 전통적인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세부적으로 논하고 싶은 점이 많아 “칭의와 성화”에 대해 또 하나의 책을 써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책의 제목은 “다시 전해야 할 칭의의 복음”이 어떨지.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500년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하게 세워져갔다.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혁주의 칭의론 때문이 아니라 이 교리가 바르게 전수되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축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 재 발굴하여 바르게 전파해야한다. 복음 사역자들이여, 개혁교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복음을 여러 도전 앞에 주저하며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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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그리스도와의 연합 

따라서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그것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했듯이, 이 연합은 단순히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는 이 교리가 ‘모든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하였다.4) 특별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속죄 사역의 혜택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서신에만 이 용어(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바울 서신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바울이 도입한 독창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사상은 요한의 기록에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할 때 주님과 우리가 상호내주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이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연합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서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바울의 연합 사상도 이 주님의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이 부패하고 유한한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통해 정화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성결해져야만 신인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골(goal)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영성의 근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대응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과 성화의 전 과정의 바탕으로 본 것은 신앙의 특성과 영성의 색깔을 뒤바꾸어 놓은 영적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는 고역스럽고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와 자격을 우리 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같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될지라도 그런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출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는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게 한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 연합의 근거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법적 연합’(judicial un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이런 연합의 교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칭의론의 개혁은 연합에 대한 기존의 가르침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경건의 부단한 노력과 신비체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높은 경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회복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법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소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연합하면 주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예수님과 같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므로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가 되며 추한 자가 아름다운 자가 되고, 빈곤한 자가 부요한 자가 된다. 


이 연합은 법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연합, 즉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연합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의 성격을 머리와 몸,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부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연합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시공간의 무한 간극으로 분리된 두 존재가 실질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다. 성령은 하늘에 있는 주님과 땅에 있는 신자, 무한자와 유한자,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의 무한 간극을 극복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인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둘을 긴밀히 연합하는 동시에 구별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그 어떤 “잡스러운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다.5) 성령은 이 연합의 매개체와 방편인 동시에 이 연합의 모든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성령은 연합의 매개체와 채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제공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서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 즉 영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했다(엡 2:6). 거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과 계획 속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주의 새로운 상황과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과 ‘아담 안’은 서로 대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며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 새사람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진행되는 새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 포괄하는 반경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하였다. 죄로 오염되고 와해된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통합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속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세상의 영역들을 그 반경 안으로 복속시키는 중대한 책무를 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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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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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서론 

개혁주의 교의학은 구원론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속성과 경륜과 은혜에 대한 계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며, 구원론은 바로 이 계시의 결정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비밀인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의 성품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도 우리를 향해 무한한 인자하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이며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들을 다룬다. 그만큼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특별히 개혁교회는 중세 로마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을 개혁함에서 출범하였기에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독특성이 구원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경적으로 개혁된 구원론을 개혁교회임을 증명하는 표징처럼 여겨 왔으며, 바른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척도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개혁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개혁주의 구원관과 거리가 먼 메시지가 전파되는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개혁교회임을 표방하면서도 전혀 개혁되지 않은 구원론을 전하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무율법주의적 폐단을 불러온 값싼 은혜의 복음, 즉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또 다른 극단인 새로운 율법주의로 치우쳐 종교개혁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가 참으로 개혁되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개혁이 시급하다. 올바른 구원의 진리가 강단에서 선포될 때, 우리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 

기독론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신 구속 사역을 다룬다면, 구원론은 객관적으로 성취된 예수의 구속사역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전자가 ‘과거’(past)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행하신 일을 조명한다면, 후자는 ‘현재’(present)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Christ in us) 행하시는 일을 고찰한다. 곧 구원의 객관적인 면(objective)에서 구원의 주관적인 측면(subjective)을 다룸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개혁 교의학에서는 이 전환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런 특징은 칼빈의 구원론에서부터 확실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 기독교 강요 제 3 권 서두를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속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혜택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과거 예수께서 이루신 사역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가? 칼빈의 대답은, 우리가 주님과 분리된 채 주님께서 우리 밖에 계시는 한, 주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남아있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1)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효력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신비로운 연합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칼빈 이후 대부분의 개혁 교의학자들은 이런 패턴을 따라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론의 특징으로 형성되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이렇게 구원의 적용 과정에 있어서 먼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에서 차단하였다. 특별히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앞세우는 알미니안적 오류를 효과적으로 배격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이 객관적으로 성취되는데 조금도 기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자신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데도 성령의 은혜가 선재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심으로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여 이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마저 스스로 할 수 없다. 물론 구원이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따른다.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지 않는 한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마저 인간 안의 생래적인 선함이나 종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자율성을 상실하였다. 인간이 주님을 믿기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박에 매여 있는 그의 의지를 자유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선재해야 한다. 이렇게 성령 사역의 우선성을 강조함으로써 개혁주의 구원론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이면서도 선재적인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동시에 은혜의 바탕 위에서 믿음과 회개의 참된 의미와 가능성을 밝혀준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지상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담지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셨다. 구속사역을 완료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성령의 수여자’가 되셨다. 동시에 성령 안에 내재하여 성령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의 동반자’가 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과 함께 당신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세상에 전달하며 적용하신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때에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성령을 통하여 세상 속에 내재하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다.2) 주님은 육적인 존재의 형태를 벗은 후 영적인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 성령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전 우주적으로 확장시키며 종말론적으로 연장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실현해 가신다(엡 1:23).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내재하시고 성령과 함께 그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와 ‘성령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와 ‘성령이 우리 안에’라는 표현을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였다. 구원과 성화의 모든 과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공재와 동역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하여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시는 신비가 실현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고난 받으심으로 얻게 되는 모든 효력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중생과 칭의, 그리고 양자됨과 성화와 성령 충만 등 구원의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실현된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임하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다.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과 그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그 분과 연합하지 않고는 구원의 은혜를 결코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 효력을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한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혜택은 원하지만 주님 자신의 임재는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원의 모든 은택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출처:물과피와성령/박요셉

영적인 돌연변이

하나님의 역사에는 영적인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납니다. 경건한 부모세대 밑에서 그들의 거룩한 신앙의 본을 보며 온갖 영적인 혜택을 누리며 자랐음에도 아주 악하고 불경한 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가 밝히 드러납니다. 반면에 매우 악한 세대로부터 신실하고 거룩한 후손이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본이 없고 악한 영향에 에워싸여 살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시대에도 악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주의 청년들을 일으키십니다. 짙은 어두움을 밝히는 새벽빛 같은 주의 청년들이 나오게 하십니다.

따를 스승이 없는 시대,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고 너무 한탄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종종 좋은 선생들보다 나쁜 선생들과 기성세대들을 통해 더 많은 깨달음과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그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개혁의 의지와 열정이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이 개혁의 열정이 우리 내면에서 개혁과 부흥을 위한 에너지로 승화되게 하십니다. 못난 기성세대를 욕하고 정죄하는데 열을 올리며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개혁의 때를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실패를 극복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영적인 거인들이 등장하게 하십니다.

뻔뻔한 말인지는 모르나 우리 젊은이들, 기성세대의 열매 없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으시라. 저렇게는 살지 않으리라는 개혁의 정신과 의지가 투철한 젊은이들이 일어나야 한국교회의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교회와 나라를 후손들에게 남긴 부패하고 무능한 우리 기성세대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젊어서 인격과 영성과 실력을 함양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전국 SFC 대학생 대회 설교 중에서)"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지난 주일 설교했던 것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본문인데 자주 오해되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한 설교라서 참고하시라고 시원찮은 내용이나마 올려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빌 2:12-16



바울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바울 구원론의 진수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바울이 말한 구원의 핵심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매우 생소하게 들릴 뿐입니다. 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구원이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 질 때까지 신자의 구원은 미완성이며 자신의 구원을 미리 확신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셈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심대하게 위협한 중세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이지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값싼 은혜와 거짓구원의 확신을 양산하는 무율법주의 폐단을 낳는다면, 후자는 신자들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며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리게 합니다. 


전자가 구원의 즉각적인 면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구원의 점진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면, 후자의 경우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을 무시한 채 그 점진적인 측면에만 역점을 기울인 우를 범한 것이지요.


바울사도의 가르침에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과 점진적인 측면이 절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구원은 인간의 선한 행위(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 즉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행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가 없이 온통 죄로 가득한 사람이라도 이 예수님의 의로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즉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즉시로 신자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믿음은 신자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며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여 하나님이 신자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너희가운데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희생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기쁘신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그의 아름다운 형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새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를 세워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우리로 인해 찬양과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효력과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것을 이루어가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to work out what God works in us). 이것이 신앙생활, 성화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행위구원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내포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 안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을 그 목표를 향해 진행시키는 말씀입니다. 이루라는 원어의 의미는 “결론, 마지막 단계로 계속 발전시키라”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강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머지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다 떠 맡겨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처음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을 진행시켜 완성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과 그 과정과 마지막이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보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확신과 유일한 근거는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열심과 오래 참으심에 있습니다. 


우리 구원과 성화는 우리의 시원찮은 열심의 산물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무한한 열심의 결실입니다. 하나님의 이 뜨거운 열심이 우리의 냉랭하고 강퍅한 마음에 절연이 되어 잘 전달되지 않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할 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권적으로 이루거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자유로운 의지를 상실한 로버트나 꼭두각시로 대우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인격자로 하나님과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그 뜻을 이루어 가는데 성령과 긴밀하게 연합하여 일하게 하십니다. 


성화과정에서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부지런하게 합니다. 피동적으로 손 놓고 가만히 있게 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게 합니다. 선한 일에 열심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려는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강렬한 열정의 영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 열정과 소원을 불붙이는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아들의 영, 자녀의 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아들의 소원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성령,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며, 그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사무치는 소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소원에 온통 삼킨바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성부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려는 불타는 열심에 사로잡혀 사신 분입니다. 비록 그 뜻이 자신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일일진대도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주님과 같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의 덕을 보는 것, 그 모든 혜택을 누리는 것인데도 그 뜻을 이루기를 별로 원치 않는다는 것은 영적 무지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이런 평생의 소원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God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소원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원하는 바를 행하게 하십니다. 


선한 의지와 소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선함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선한 의지와 마음은 있지만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 우리 의지의 연약함입니다. 


바울사도가 롬 7장에서 이 인간의 연약함을 잘 묘사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을 본다고 괴로워했습니다. 


선한 의지만으로는 결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안 밖에서 우리의 선한 의지를 좌절시키는 많은 세력들이 그 의지를 압박하여 무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부패성과 죄의 습관, 죄의 관성이 우리를 우리의 선한 의지에 거스려 죄로 치우치게 합니다. 죄에 익숙해진 우리의 몸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악으로 치우치기십상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밖의 수많은 환경적 방해와 난관이 우리의 선한 의도를 번번히 무산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고 변명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넋두리가 아직 은혜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별수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변명의 구실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계속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분명히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은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하고는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원하지 않고 희미하게 원하기 때문이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나누인 두 마음을 품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육신이 연약해서, 또는 죄와 사탄의 세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유혹이 너무 많아서, 이 세대가 악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No excuse입니다. 유일한 이유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우리의 선한 의지를 거스르는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8:2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죽음의 권세를 죽이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 안에 잔재해 있는 부패성과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아직은(not-yet) 누리지는 못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미(already) 풍성히 임한 자유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이 구원의 목적, 즉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보혈로 확보하신 모든 새 언약의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주시고자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갈망과 무한한 열심과 인내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내가 혹시 거스르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자기만 바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빌 2:4에 자신의 일 뿐 아니라 각각 다른 이의 일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도록 자신이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성숙과 성화는 혼자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섬김과 기도와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이들의 성숙을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와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런 공동체적인 구원과 성화를 의미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며 사랑의 화평의 열매가 가득하여 천국을 맛보며 증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우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이 말씀을 무시하고 거스르고 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가지신 계획과 소원,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모든 고난과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성령이 충만한 은혜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간절한 소원과 뜻을 거스르고 그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고 복음의 빛을 현저히 가리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모두 탕진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구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가르침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신앙의 나태와 방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바울이 전한 구원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며,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마귀도 믿고 떠든다고 했습니다. 


자신 안에 구원의 목표를 향해 성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예수를 믿었으니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은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이들의 확신은 자꾸 흔들어대는 반면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의 자기기만은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메시지는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는 그 구원의 목표가 자신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분명한 증거와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교회생활을 했어도 이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이는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났더라도 심각하게 타락한 교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참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봐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마귀의 교활한 수법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는 도리어 안일하게 사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혹 자신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가 아닌지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은 참된 신앙의 핵심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이 두렵고 떨림이 사라지면서 온갖 부패와 방종이 밀려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며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목사들과 교인들로 큰 군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다른 이에게 전파하고 자신은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 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자 안에 시작한 구원을 결국 완성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 1:6에서 그는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거듭 확신하였습니다. 그의 서신은 온통 이런 확신에 찬 선언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행여 자신을 버림받게 하실까 두려워함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신실하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경건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오는 율법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함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할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께 버림받거나 징계 받을까 두려워하는 율법 아래서 떠는 종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받는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깊은 경외심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비천하고 추악한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아빠가 되어 주심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는 그 거룩한 임재 속에 산다는 의식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변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배반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우리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가장 기뻐하는 뜻을 이루어주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어 주지 못할 때 한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이런 소원과 슬픔이 없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무시하고 사는 수많은 교인들, 교회들을 보면서 마음에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스르고 살므로 우리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모습으로 인해 생명의 말씀이 땅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제 우리의 말에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진저리를 냅니다. 우리의 말과 너무도 모순된 삶을 보며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거룩한 말씀이 짓밟히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로부터 빼앗아 말씀을 잘 청종하고 순종할 이들과 민족에게로 옮겨가실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깊은 각성과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 계속 지금처럼 안일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부터, 우리 교회부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박영돈 목사님

출처: 물과피와성령/새언약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서론

개혁주의 교의학은 구원론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속성과 경륜과 은혜에 대한 계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며, 구원론은 바로 이 계시의 결정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비밀인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의 성품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도 우리를 향해 무한한 인자하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이며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들을 다룬다. 그만큼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특별히 개혁교회는 중세 로마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을 개혁함에서 출범하였기에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독특성이 구원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경적으로 개혁된 구원론을 개혁교회임을 증명하는 표징처럼 여겨 왔으며, 바른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척도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개혁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개혁주의 구원관과 거리가 먼 메시지가 전파되는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개혁교회임을 표방하면서도 전혀 개혁되지 않은 구원론을 전하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무율법주의적 폐단을 불러온 값싼 은혜의 복음, 즉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또 다른 극단인 새로운 율법주의로 치우쳐 종교개혁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가 참으로 개혁되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개혁이 시급하다. 올바른 구원의 진리가 강단에서 선포될 때, 우리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

 

기독론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신 구속 사역을 다룬다면, 구원론은 객관적으로 성취된 예수의 구속사역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전자가 ‘과거’(past)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행하신 일을 조명한다면, 후자는 ‘현재’(present)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Christ in us) 행하시는 일을 고찰한다. 곧 구원의 객관적인 면(objective)에서 구원의 주관적인 측면(subjective)을 다룸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개혁 교의학에서는 이 전환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런 특징은 칼빈의 구원론에서부터 확실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 기독교 강요 제 3 권 서두를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속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혜택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과거 예수께서 이루신 사역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가? 칼빈의 대답은, 우리가 주님과 분리된 채 주님께서 우리 밖에 계시는 한, 주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남아있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1)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효력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신비로운 연합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칼빈 이후 대부분의 개혁 교의학자들은 이런 패턴을 따라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론의 특징으로 형성되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이렇게 구원의 적용 과정에 있어서 먼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에서 차단하였다. 특별히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앞세우는 알미니안적 오류를 효과적으로 배격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이 객관적으로 성취되는데 조금도 기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자신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데도 성령의 은혜가 선재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심으로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여 이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마저 스스로 할 수 없다. 물론 구원이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따른다.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지 않는 한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마저 인간 안의 생래적인 선함이나 종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자율성을 상실하였다. 인간이 주님을 믿기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박에 매여 있는 그의 의지를 자유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선재해야 한다. 이렇게 성령 사역의 우선성을 강조함으로써 개혁주의 구원론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이면서도 선재적인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동시에 은혜의 바탕 위에서 믿음과 회개의 참된 의미와 가능성을 밝혀준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지상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담지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셨다. 구속사역을 완료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성령의 수여자’가 되셨다. 동시에 성령 안에 내재하여 성령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의 동반자’가 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과 함께 당신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세상에 전달하며 적용하신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때에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성령을 통하여 세상 속에 내재하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다.2) 주님은 육적인 존재의 형태를 벗은 후 영적인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 성령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전 우주적으로 확장시키며 종말론적으로 연장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실현해 가신다(엡 1:23).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내재하시고 성령과 함께 그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와 ‘성령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와 ‘성령이 우리 안에’라는 표현을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였다. 구원과 성화의 모든 과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공재와 동역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하여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시는 신비가 실현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고난 받으심으로 얻게 되는 모든 효력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중생과 칭의, 그리고 양자됨과 성화와 성령 충만 등 구원의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실현된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임하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다.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과 그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그 분과 연합하지 않고는 구원의 은혜를 결코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 효력을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한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혜택은 원하지만 주님 자신의 임재는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원의 모든 은택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따라서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그것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했듯이, 이 연합은 단순히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는 이 교리가 ‘모든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하였다.4) 특별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속죄 사역의 혜택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서신에만 이 용어(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바울 서신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바울이 도입한 독창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사상은 요한의 기록에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할 때 주님과 우리가 상호내주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이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연합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서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바울의 연합 사상도 이 주님의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이 부패하고 유한한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통해 정화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성결해져야만 신인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골(goal)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영성의 근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대응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과 성화의 전 과정의 바탕으로 본 것은 신앙의 특성과 영성의 색깔을 뒤바꾸어 놓은 영적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는 고역스럽고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와 자격을 우리 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같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될지라도 그런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출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는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게 한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 연합의 근거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법적 연합’(judicial un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이런 연합의 교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칭의론의 개혁은 연합에 대한 기존의 가르침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경건의 부단한 노력과 신비체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높은 경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회복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법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소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연합하면 주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예수님과 같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므로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가 되며 추한 자가 아름다운 자가 되고, 빈곤한 자가 부요한 자가 된다.

  

이 연합은 법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연합, 즉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연합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의 성격을 머리와 몸,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부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연합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시공간의 무한 간극으로 분리된 두 존재가 실질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다. 성령은 하늘에 있는 주님과 땅에 있는 신자, 무한자와 유한자,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의 무한 간극을 극복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인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둘을 긴밀히 연합하는 동시에 구별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그 어떤 “잡스러운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다.5) 성령은 이 연합의 매개체와 방편인 동시에 이 연합의 모든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성령은 연합의 매개체와 채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제공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서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 즉 영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했다(엡 2:6). 거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과 계획 속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주의 새로운 상황과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과 ‘아담 안’은 서로 대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며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 새사람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진행되는 새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 포괄하는 반경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하였다. 죄로 오염되고 와해된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통합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속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세상의 영역들을 그 반경 안으로 복속시키는 중대한 책무를 띤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 되는 논점은 구원론이었다. 개신교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을 개혁함으로써 출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로마 가톨릭과 개혁주의 구원관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이 다르다는데 있다. 로마 가톨릭은 칭의를 ‘의롭다고 선언하다’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믿음만이 아니라 사랑을 수반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이 충만해짐에 따라 칭의가 진척된다. 결과적으로 믿음으로 단번에 얻는 칭의와 믿음의 열매인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성화를 구분치 않고 혼동해 버린 것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이 칭의를 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성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죄인을 실제적인 변화와 상관없이 의롭다고 칭하는 교리는 심각하게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본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런 로마 교회의 가르침은 구원의 확신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만약 칭의가 우리의 거룩함에 근거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땅 위에서 우리의 성화는 매우 유변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런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께 인정받을만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평안과 확신보다는 오히려 죄의식과 불안과 두려움만이 더 고조되는 쓰라린 체험을 하였다. 그는 그런 고뇌 속에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이 아니라 오직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완전한 의로움에 근거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루터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칭의에 대한 이해만이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반응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우리를 죄책감에서 자유하게 하며 자원하는 심령으로 선을 행하게 한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진정한 경건의 바탕과 다이내믹을 제공한다. 루터는 칭의 교리가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킨다는 가톨릭의 비난에 대응하여 칭의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6)

  

그러나 루터의 가르침에서 칭의는 신학의 으뜸 원리로 추앙된 반면에 성화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로 강등되었다. 그는 주로 칭의론을 가톨릭의 공격에서 보호하기 위한 소극적인 목적으로 성화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온전한 성화 교리를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7)

  

이렇게 칭의에 집중된 채 성화를 홀대하는 경향은 급기야 개신교 안에 무율법주의라는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개신교 안에 만연하게 나타나는 이 현상은 칭의와 성화를 지나치게 분리하여 성화를 구원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를 교묘히 회피할 수 있는 편리한 논리로 남용된다. 본회퍼(Dietrich Bonheoffer)의 말로 표현하자면, 값진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한 것이다.8) 이렇게 왜곡된 복음이 개신교 안에 심각한 윤리적 방종과 타락을 조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아주 거리가 멀다. 칼빈은 이런 식으로 칭의의 교리가 남용될 가능성을 치밀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이런 사실은 그가 칭의와 성화를 논하는 순서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성화를 칭의 보다 먼저 다루었는데 이는 다른 교의학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9)그것은 칭의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는 가톨릭의 비난을 원천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성화를 전략적으로 칭의보다 앞세운 것이다.

  그 구조 뿐 아니라 내용에서 칼빈은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리로 칭의론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을 차단하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10)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칼빈의 논리에 따르면 성화 없이 칭의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로마 가톨릭처럼 이 둘을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격이 흐려지게 된다. 만약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에 대한 확신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도 불가능하게 된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께 의로운 자로 인정받기 위해 쉼 없이 쫓기며 강박적으로 행하는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데 대한 감사하는 심령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함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칼빈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로마서에 제시된 바울의 구원론과 맥을 같이한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맞서서는 성화와 구별된 칭의를 강조하였고(롬 3-5장), 무율법주의의 반론을 배격하기 위해서는 칭의와 연결된 성화(롬 6장)를 논하였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칭의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칭의는 실제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처럼 칭의를 실제적인 변화와 상관없이 법적 선언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윤리적인 방종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불경스러운 가르침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칭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온전해진다. 심각한 죄에 빠지면 칭의의 은혜를 상실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 은혜를 회복해야한다. 결국 개인의 구원과 칭의는 교회의 예식과 제도에 참여하는 한도 내에서만 보장되는 셈이다. 또한 이 땅 위에서 신자의 칭의는 항상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기에 마지막에 성화가 완성될 때까지 구원의 확신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가톨릭의 칭의론을 배격하고 칭의를 신분적인 변화로 이해하였다. 칭의는 신자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이다. 즉 법적인 선언이다. 칭의는 우리의 의로움이나 거룩함에 전혀 근거하지 않는다. 칭의의 근거를 우리 안에서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칭의는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의로움(alien righteousness)에 근거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리인으로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시므로 성취하신 의로움이 칭의의 유일한 공로적 근거이다. 이 의로움이 믿음을 통하여 법적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완전한 칭의의 은혜를 받았다. 이 칭의는 성화의 퇴보로 인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불변하며 유효하다.11)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 전 과정을 힘차게 떠받치고 있는 영원한 은혜의 반석이다. 신자는 이 반석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없다.

  

개혁교회의 간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칭의의 교리가 최근 들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칭의론이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왜곡되어 개신교 안에 무율법적인 혼란을 불러온데 대한 반작용으로 칭의 교리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팽배해 가고 있다. 칭의 교리 때문에 한국 교회가 윤리적으로 타락하였다는 말을 예사로이 듣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개혁주의 칭의론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개혁주의 칭의론이 바르게 전파될 때 교회는 영적으로 흥왕하였다. 칼빈과 루터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칭의론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교리이다. 한국교회의 윤리적 타락은 칭의 교리를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교리를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비 개혁적이고 이단에 가까운 구원론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최근 상당수의 신학자들이 칭의를 새롭게 이해해야 하며 개혁주의 칭의론을 수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 중에는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점 자체가 재고되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12) 그런 신학자들은 종교개혁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입장 차이가 사실 근본적이고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양측 다 성경적으로 일리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공통점을 부각시키는 관점에서 두 입장은 조율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과 복음주의 교회의 일치 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이런 신학적인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가톨릭교회와 루터파 교회(미국과 독일)는 수년간의 연구를 걸쳐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13) 거기서 그들은 칭의의 기본 입장에 있어서 서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보고서를 꼼꼼히 살펴보면 피상적으로는 일치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칭의를 신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실제적인 갱신으로 보는 가톨릭의 입장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이런 추세에 편승하여 여러 신약학자들이 칭의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14)그들은 유대교를 율법의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를 배격하며 유대교는 언약사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언약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준수를 구원의 방편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이 언약 안에 머무는 의무로 요구된다고 본다. 바울 사도가 유대교를 반대한 것은 행위구원을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할례와 같은 율법의식을 이방인에게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배타주의와 선민우월주의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과 의식과 문화적 방식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것들은 모두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결국 칭의의 교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방해하는 사회적, 문화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쓰였다고 본다. 따라서 칭의의 가르침은 원래부터 바울의 핵심사상이 아니라 이방선교 현장에서 파생된 교리이다. 특별히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유대 할례자들을 보고 도망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메이첸(J. Machen)을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바울은 이방선교 때문에 칭의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칭의에 대한 그의 확신 때문에 이방선교에 전념했던 것이다. 칭의는 처음부터 그의 삶과 사역을 주관했던 핵심 사상이었다. 바울이 비판한 것은 단순히 유대교의 율법 의식만이 아니라 행위구원 사상 자체였다는 사실이 그의 전 서신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누누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그런 이는 오히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갈 2:16; 3:10- 11).

  

바울 사도는 예수님이 전파하신 종말론적인 구원을 다양한 범주와 그림언어(화해, 구속 양자됨, 칭의, 새 창조, 새 언약, 중생)로 묘사했다. 그 중에서 칭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응하여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잘 부각시키는 최상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 상황에서 의로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치밀한 논리로 발전시켰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의로움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칭의의 근거는 인간 안에 있지 않고 전적으로 인간 밖에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롬 3:23-31; 4:5).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의로움이 칭의의 근거이다(롬 5:6-21).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롬 3:26, 28; 4:3,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라고 할 때 ‘의’라는 단어가 ‘여기다’(logi,zomai)는 동사와 함께 사용됨으로 칭의의 선언적 의미가 더욱 뚜렷해진다.

  

일부 신약학자들은 칭의를 법정적인 의미로만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갱신의 의미까지 내포된 것으로 본다. 곧 칭의는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아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해버리는 것이며 로마 가톨릭의 입장으로 회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바울과 칼빈의 가르침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의 경험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특성 상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로마 가톨릭이 빠진 논리적인 오류를 극복하기 힘들다.

  

교리적인 전통의 틀에 꿰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피해야 하지만 교회역사 속에서 신앙의 선진들에 의해 성경이 해석되고 적용되는 과정에서 발전된 신학적인 전통을 무시해버리는 자세도 지양해야 한다. 교의학자들이 간혹 성경에 무지한 과오를 범한다면, 그와는 달리 성경학자들은 신학적인 전통에 문외한인 경우가 적지 않다.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깊은 연구와 반성이 없이 선진들의 귀한 신앙의 유산을 쉽게 무시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지만 칭의를 성화와 구별되는 법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신약학자들의 견해보다 더 성경에 충실할 뿐 아니라 실제 목회 상황에도 더 적실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칼빈은 칭의의 교리가 기독교의 주요점이며, 교회의 안녕이 이 교리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만일 이 교리의 순전성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면 교회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며, 파멸의 벼랑에 몰리게 된다. 이 교리가 사라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소멸되며 종교는 폐지되고 교회는 파멸에 이르며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15)칭의 교리는 구원 메시지의 심장이며 복음의 젖줄이고, 심오한 영성의 바탕이며 고통받는 양심의 유일한 위안이다. 교회가 부흥될 때마다 칭의의 교리가 바로 전파되었다. 개신교의 위대한 설교자들이 칭의 교리의 전도사였다. 영미의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그랬고, 설교자의 황제로 불리는 스펄전도 칭의 교리의 열렬한 옹호자이며 전파자였다. 그러므로 존 파이퍼(John Piper)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형제들이여, 영혼들이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 모여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신칭의라는 크고 중심되는 진리를 선포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십시오.”16)

 

한국교회가 그 동안 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했기에 교인들을 방종에 빠지게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칭의를 너무 많이 전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바르게 전하지 못한데 있다. 칭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과 이해는 항상 성화를 증진시킨다. 그것은 성화의 진전은 오직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칭의의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비록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영적으로 방황할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다.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칭의의 메시지는 교인들을 타락에서 돌이키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방편이 되며, 영적 회복의 바탕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제2의 찬스를 부여한다. 그래서 범죄 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항상 칭의의 복음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타락한 백성들에게 징계를 선언하시는 동시에 용서와 회복을 약속하는 칭의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는 설교만으로 타락한 이들을 돌이킬 수 없다. 그들의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무궁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복된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새롭게 깨달을 때 그들은 그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교회가 부흥할 때마다 다시 부활했던 메시지는 죄를 날카롭게 지적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드럽게 강조한 칭의의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을 고대하는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도  칭의의 복음이 부활하는 것이다.


근본적인 성화


  일반적으로 칭의는 즉각적인 반면에 성화는 점진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화에도 즉각적인 측면이 있다. 칼빈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으로 체험한다. 그는 의롭다함을 받을 뿐 아니라 거룩하게 된다. 칼빈은 성화를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고찰했다. 성화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전통적으로 성화의 기독론적 바탕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칭의와의 관계는 많이 논의되었지만 성화와의 관계는 그만큼 충분히 연구되지 못했다.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교리에 따르면 칭의와 성화가 일련의 논리적 순서를 따라 단계적으로 발전되는 것처럼 서술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칭의와는 직결되지만 성화와는 칭의를 거쳐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동시적으로 일어나며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진행된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그 결과 구원은 ‘성화 없는 칭의’로 얻고, 구원 후의 삶은 ‘칭의 없는 성화’로 이루어 간다는 오해를 낳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논리적인 순서를 따라 이어지는 분리된 단계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은혜로 보았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모두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다.1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칭의의 근거일 뿐 아니라 성화의 효력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다시 살게 하는 효능이 계속 흘러나온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서 6장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육신의 부패성을 파괴하며 분쇄하는 효력이 있으며, 그의 부활은 더 나은 본성으로의 갱신을 초래한다”18)고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통찰이 그동안 개혁주의 성화론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근래에 와서야 존 머레이(John Murrary)와 같은 개혁주의 신학자가 이 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결정적인 성화론(Definitive sanctification)”이라는 논문에서 이런 관점을 더 발전시켜 성화의 즉각적인 측면을 성경적으로 규명함으로써, 개혁주의 성화론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는 인정을 받고 있다.

  

머레이는 우선적으로 롬 6장을 근거로 결정적인 성화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로마서 6장의 내용에 의하면, 신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살게 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부터 신자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살게 하는 능력이 유출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흘러나오는 이 효능이 곧 “신자의 성화의 영속적인 원동력이다.”19)

  

머레이는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바울의 표현(롬 6:2)을 우리가 죄에 대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말은 심리적으로 그렇다고 여겨야 한다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의미한다.20)물론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안에 모든 죄가 없어졌다거나 우리 안에 죄성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유혹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이 말은 우리 안에 죄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죽었다는 동사(avpeqa,nomen)가 아오리스트(aorist) 시상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다시 번복될 수없이(irreversible) 죄의 지배로부터 확실하게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이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왕 노릇하는 영역으로 획기적으로 전환됨을 뜻한다.

  

머레이는 로마서 6장뿐 아니라 “신약에서 성화에 관해 사용된 가장 특징적인 용어들은 어떤 진행 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성된 결정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지적했다.21)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 했는데, 여기서 “거룩하여지고” 라는 완료형 시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22) 바울 사도가 자주 사용한 성도라는 용어는 단순히 격식으로 붙여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실에 근거하여 부여된 영광스러운 칭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뿐 아니라, 죄와 획기적으로 결별한 거룩한 이가 되었다. 이렇게 결정적으로 죄와 분리되어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점진적인 성화의 근본 바탕이 된다. 죄와 육신과 대적해서 싸우며 새사람 가운데 행하라는 점진적인 성화에 관한 신약성경의 모든 권면과 명령은 근본적인 성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곧 점진적인 성화에 대한 명령(imperative)은 이 근본적인 성화의 사실(indicative)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성화과정에서 ‘행함’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 구속의 은혜가 우리 안에 얼마나 놀랍고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어 주었는가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우리의 영적빈곤은 이 복된 사실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결핍된 것과 이 믿음을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훈련이 부족한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예수를 믿을 때 칭의와 함께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났다는 가르침은 개혁주의 구원론이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고 신앙의 방종을 초래한다는 비난을 불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동시에, 역동적인 성화의 확실한 토대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성화의 복음적인 특성을 분명히 밝혀 줌으로써 성화의 메시지가 율법주의로 치우치는 위험을 막아준다.

 

성화의 두 다이내믹: ‘근본적인 성화’와 ‘성령충만’

 

또한 근본적인 성화론은 2차 축복을 강조하는 성화론의 전통에 대한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웨슬리는 칭의와 회심 후에 성화를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 그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 or Entire sanctification)라고 칭했다. 신자는 이 은혜를 체험하면서부터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의 가르침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성화를 칭의와 분리된 획기적인 경험으로 보는 운동(성결운동-케직 사경회-오순절 운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20세기 초부터 오순절 성령운동이 일어나면서 제2의 축복을 ‘성령세례’ 또는 ‘성령충만’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편화되었다.24) 그래서 오순절 성령세례 교리의 역사적인 기원은 웨슬리-성결운동-케직 사경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의 전통에서 주장하는 ‘제2의 축복’과 오순절 운동에서 가르치는 ‘성령세례’는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획기적인 제2의 은혜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가르침의 근본 문제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순간 죄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는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난다는 진리를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칭의 후에 2차적으로 체험하는 은혜로 본 것이다. 그러나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체험은 웨슬리와 케직 사경회 그리고 오순절 성령운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꼭 나중에 가서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신자가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하는 순간부터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에 대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근본적인 성화가 일어나며, 동시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경이 제시한 정상적인 성화의 패턴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여 죄와 결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현대 교인들의 문제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적했듯이,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령에 속한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고전 1:2; 3:1-3).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와 오순절 전통의 가르침은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25) 즉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개혁주의 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사건과도 연결시켜 이해하는 신학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성화는 기독론적 바탕뿐만이 아니라 성령론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의 은혜뿐만이 아니라 성령의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전통적인 은혜의 교리는 중생과 함께 성령의 모든 것이 신자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과거 회심과 중생의 체험에만 안주한 채, 새로운 성령의 은혜에 대한 갈망과 기대를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중생과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고 볼 수 있는가? 사실 많은 교인들이 거듭났지만 그들의 실제 모습은 성령으로 충만하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때 성령의 모든 것을 받았으니 새롭게 성령충만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은 교인들을 거짓된 안위감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화의 전 과정에 걸쳐 성령의 지속적인 충만케 하심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이’, 즉 ‘성령 충만한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 8:9; 갈 5:16, 25; 엡 5:18).26)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그 모든 전제 조건을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모두 충족하셨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신 것이다(딛 3:6).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성령으로 충만한 성전으로 존재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 특권은 책임과 서로 맞물려 있다. 성령은 항상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므로 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지 말고 잘 순종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바울의 권면(엡 5:18)도 ‘특권인 동시에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은 “너희가 하나님이 거하실 새로운 성전이 되었기에(엡 2:21-22), 너희 가운데 성령이 충만히 거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은혜로운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고(엡 4:30), 그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써 성령이 너희를 항상 주관(충만)하도록 허락하라는 말씀이다(Let the Spirit keep filling you).

 

결국 성화의 전 과정은 근본적인 성화의 바탕 위에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진행된다. 곧 ‘근본적인 성화’와 ‘성령충만’이 성화의 두 다이내믹이다.


점진적인 성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다시 사는 것은 획기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동시에 매일 신자의 삶 속에서 반복해서 실현되어야 할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 죽고 매일 다시 사는 삶이다(daily dying and rising).

   

칼빈주의 전통에서는 성화를 날마다 옛사람이 죽고(mortificatio) 새사람으로 소생(vivificatio)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가르침이 안고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은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매일 옛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은 자신이 새사람인지 아니면 아직도 옛사람인지 헷갈리게 된다. 성화에 진전이 있을 때는 새사람처럼 보이나 성화가 부진할 때는 여전히 옛사람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 옛사람과 새사람의 두 얼굴을 보면서 분열된 자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다(고후 5:17). 또 신자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라고 하였다(골 3:9-10).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지배아래 있는 죄의 종이 아니다. 아담의 부패성에 의해 주관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성품의 지배를 받는 성령의 사람이다. 첫 사람 아담과 단절되고 둘째 사람 예수와 연합하여 새 인류(사람)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자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고 새사람이다. 부분적으로만 새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새사람이다. 물론 그는 불완전하며 성숙의 과정을 통해 완성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성화는 우리의 옛사람을 끊임없이 뜯어 고쳐 조금 씩 새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다. 성화는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의 부활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은혜로운 사건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면, 그것만큼 헛되고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 아니라, 또한 죄의 근원인 우리의 옛사람을 끌어안고 못 박히신 것이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불행의 근원을 제거하는 복된 죽음이다. 죄와 율법과 사탄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가져다주는 죽음, 죄의 노예생활을 끝내주는 죽음,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다. 동시에 이 죽음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루신 모든 구속의 은혜가 충만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영광스러운 관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옛사람의 방식과 성향을 따르는 그릇된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육체에는 죄의 추억과 관성과 습관이 배어 있다. 이 몸의 부패한 성향은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계속 자극과 충동을 받아 우리를 죄로 치우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몸의 부패한 성향과 소욕을 제어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라고 하였다.

 

여기에 신자의 중대한 책임이 있다. 육신의 부패한 성향을 성령의 능력으로 복종시키기보다 거기에 굴복하여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면 신자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경고하였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신자는 육신의 부패성이 자극되는 상황과 기회를 최대한 피하는 반면에 자신의 심령이 성령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과 (은혜의)방편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자신을 죄의 유혹과 충동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계속 들이밀면서, 예를 들어 음란 사이트에 계속 접속하면서 죄에서 자유하기를 바라는 것은 커다란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에서 신자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소극적으로는 죄의 유혹과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차단하며 그런 상황을 피하는 것이다. 이는 죄의 유혹이 범람하는 세상을 떠나거나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받는 죄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자는 짧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과의 내적인 교통을 유지해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성령에 의해 고무되고 새롭게 될 수 있는 은혜의 장에 열심히 참여해야 하며, 모든 은혜의 방편을 부지런히 활용하여 자신의 성화가 촉진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 심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심기 위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귀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열심과 에너지를 쏟지 않고는 결코 거룩함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령의 열매는 교회 안에서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예배와 기도와 성도의 교제를 통해 풍성하게 맺히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고립된 개인의 경건생활에서 빚어지는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서로 더불어 사는 섬김과 교제의 삶에서 배양되는 덕목이다. 그러므로 성화의 첫걸음은 ‘고립’에서부터 나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화는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누릴 수 있는 건강한 교회,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고 운행하는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교인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교회가 세속화되고 제도적으로 경직되어 성령의 열매를 도저히 맺을 수 없을 정도로 영적인 토양이 척박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는 죄악을 회개하고 제도적 부조리를 개혁하므로 거룩함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화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또한 성화는 궁극적으로 선교를 지향한다. 세상 속에서 빛된 사명을 수행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신자가 이 땅 위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을 이루어야 하는 근본 이유이다. 이 일에 실패할 때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민족이 한국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한국 선교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거룩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아무리 외형적으로 비대해져도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한국교회 앞에 놓인 시급한 문제는 숫자 늘이기 전도를 통한 자체 교회의 팽창이 아니라 범 교회적인 회개와 개혁운동을 통한 거룩성의 회복이다. 교회는 교인들을 교회활동과 봉사에만 익숙한 종교인이 아니라 세속의 한복판에서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영적인 빛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양육해야 한다.


성화의 목표

 

많은 교인들의 문제는 죄와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서 살기를 한사코 꺼려하고 회피하며 여전히 옛사람의 소욕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영적 불모의 세월과 방황의 시간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다. 성령은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사건과 환경을 통하여 우리가 스스로는 절대 자원해서 하지 않으려는 자기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수많은 낭패와 깨어짐의 아픔을 통해서 옛 자아의 욕심을 좇는 삶이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해져서야 옛사람의 죽음을 원하게 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순간부터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사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대 교회의 실제 상황에서는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대개 성화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며 그 여정은 실패와 고난과 신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이다. 우리 자신을 죽었다가 다시 산 자로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면 그리스도가 우리 육체 안에 다시 사신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에 동참한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그의 삶을 고스란히 되살아 내신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자 안에 들어와 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하였다(갈 2:20). 우리의 옛 자아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신다. 우리의 옛 자아가 살아 있으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그 생명을 나타내지 못하신다. 옛사람이 죽음에 넘겨져야만 우리 안에 부활의 새 생명이 밀려오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한없이 지체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사시면,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약동한다. 바울 사도는 신자의 삶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삶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롬 6:4; 골 2:5).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의 삶을 한 마디로 부활의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부활의 능력은 마지막 날 우리의 육체가 부활할 때만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신자들이 이 땅 위에서부터 누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이 믿는 자 안에 강력으로 역사한다고 하였다.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기록하였다(엡 1:19-20). 종말에 맛볼 부활의 능력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현재로 앞당겨 이 땅 위에서 미리 맛보게 하신다. 성령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능력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부활의 능력이다(롬 8:2). 이 부활의 능력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동력이다. 이 능력이 없이 우리는 죄와 세속의 세력에 대해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왜 죄를 극복하기가 그다지도 어려운가? 죄의 배후에는 사망의 권세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죄의 배후에 역사하는 사망의 권세를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 부활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권능으로 작용한다. 세상과 옛 자아에 대해 못 박힌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체험은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근본적인 혁신이 일어나게 한다. 이 땅에 속한 옛 정체성이 죽고 하늘에 속한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엡 2:6). 비록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이 땅에 있지만, 영적인 차원에서는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편, 즉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의 자리에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특권에 동참하게 되었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그리스도와 연합한 근거 위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은 것이 우리 구원의 절정이다. 거기에서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이들, 즉 하늘의 시민(빌 3:20)으로서,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하늘에서 공급해 주는 모든 자원(엡 1:3)을 누리며, 하늘에서 부여받은 사명을 이 땅에 수행하는 하나님의 전권 대사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그 믿음대로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믿음만큼 누리며 믿음의 분량만큼 큰일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하늘의 비전과 사명을 좇아가고 있는가이다. 이 땅의 영광과 성공을 위해 하늘의 능력과 자원을 끌어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성화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하였다. 성화의 패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본받아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부활하는 것이다. 그 성화의 원동력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흘러나온다.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도 역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 결국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화의 근원이며 패턴이고,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성화의 원동력이며,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가 성화의 목표이다. 곧 성화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니 주의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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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Calvin, Institutes, 3. 1. 1.

2) 우리는 이런 표현을 사용할 때 바르트(Karl Barth)나 헨드리커스 벨코프(Hendikus Berkohf)의 글에서 감지할 수 있는 양태론적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존재론적인 구별성을 확실히 하는 바탕 위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3) John Murray, 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Grand Rapids: Eerdmans, 1955), 205. 

4) Emil Brunner, Vom Werk des Heiligen Geist(Tubingen, 1935), 38.

5) Calvin, Institutes, 3.11.10.

6)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는 “쫓겨서”가 아니라 “자원해서 즐겁게 모든 이들에게 선을 행한다”고 역설했다. Martin Luther, "Preface to the Epistle of St. Paul to the Romans", Martin Luther: Selection from His Writings. ed. John Dillenberger (New York: Doubleday), 24.

7) 오토 베버(Otto Weber)가 지적했듯이, 루터의 사상에서 “성화는 그 모든 성경적 증거의 충만함 속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Otto Weber, Foundation of Dogmatics, v.2 (Grand Rapids: Eerdmans, 1983), 317.

8) Dietrich Bonhoefer, The Cost of Discipleship (New York: Macmillan, 1959)

9)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에서 먼저 성화를 논한 후에 11장부터 칭의를 논하였다.

10) Calvin, Institutes 3.11.1.

11) Calvin, Institutes, 3.11.11.

12) 그 대표적인 예가 Alister McGrath 라고 할 수 있다. 그는 Iustitia Dei 라는 책에서 이런 시도를 하였다. 13) 미국의 루터파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가 6년간의 논의를 거쳐 1983년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연구서를 발표하였다. 그 보고서에서 그들은 양측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서로 견해를 같이한다고 했다. 이어서 독일의 루터교 연맹과 로마 가톨릭이 1999년 종교개혁 주일에 양측이 칭의의 기본 진리에 있어서 합의하였다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4) E. P. Sanders, N. T. Wright, James Dunn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한국에서도 이한수 교수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그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15) John Calvin, "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in Tracts and Treaties v. 1 (Grand Rapids: Eermands, 1958), 137. 

16) 존 파이퍼가 한 강연 중에 언급한 말. 칭의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그의 글을 보려면 다음 책을 참조하라. John Piper, 『칭의 교리를 사수하라』(서울: 부훙과 개혁사, 2007) 

17) Calvin, Institutes, 3.11.1. 

18) Calvin, Commentaries on Romans, 6:3-4. 

19) John Murray, Principles of Conduct (Grand Rapids: Eerdmans, 1984), 207. 

20) John Murray,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1977), 279. 

21) Ibid., 277. 

22) 이 외에도 고전도전서 6장 11절(“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사도행전 20장 32절(“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에베소서 5장 25절 이하(“거룩하게 하시고”); 골로새서 3장 1절(“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3장 3절(“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3장 9-10a절(“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 등의 성경 구절은 과거의 단회적인 사건을 의미하는 완료형이나 아오리스트 시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23) John Wesley, The Letters of the Rev. John Wesley, ed. John Telford (London: The Epworth Press, 1983), pp. 221-22. 

24) Klaude Kendrick, The Promise Fulfilled (Springfield: Gospel Pub. House, 1961), 33. 켄드릭(Klaude Kendrick)은 ‘성령세례’라는 표현은 성결운동에서 제2의 축복에 대한 명칭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잘 지적하였다. 

25). A. A. Hoekema는 “우리는 신오순절파가 성령충만의 중요성을 절박하게 강조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했다. Holy Spirit Baptism, 79. 

26) 바울은 성령으로 주관되는 삶을 다양하게 묘사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롬 8:14; 갈 5:18)는 표현을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했다. 성령충만이란 말은 이런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강력한 은유적 표현이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특별히 우리를 향한 성령의 능력과 은혜의 풍성함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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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과 소모되는 설교



방금 저녁식사를 하는데 TV에서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오래 전에 유행했던 대중음악을 젊은 가수들이 현대 감각을 살려 새롭게 부르는데 정말 압권이다. 40여 년 동안 온 국민들이 애창해온 하얀 손수건을 다시 열창하니 그 감동의 물결이 온 관중과 시청자들에게 퍼져가는 듯하다.


그것을 들으며 문득 오래 전 어떤 목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가수는 한 번 자신의 곡이 히트하면 평생 그것을 재탕하며 돈을 버는데 목사는 아무리 좋은 설교를 만들어도 같은 교회에서 다시 써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프로를 보아서 그런지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그렇게 보면 설교사역은 무한히 소모하는 일 같아 보인다. 몇 년 전에 큰 교회 목사가 내가 주일마다 몇 십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설교한다는 말을 듣고 참 아깝다고 했다. 정성껏 설교를 준비해서 전해도 적은 회중 가운데서도 소수만이 경청한다. 그러니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너무도 비효율적인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서는 효율성이 핵심가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특별히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열 명 가까운 성도들을 상대로 충성스럽게 말씀사역을 하는 목사들이 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설교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기에 한없이 더디고 완고한 사람들에게 무한히 소모하는 사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봉사를 통해 자격 없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말씀을 무한히 탕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된다.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성공적인 사역의 기준은 효율성이 아니라 주님이 맡기신 일이라면 작은 것이라도 우직하게 충성하는 것이다.


별 효율도 없이 곧 소모되어버릴 설교를 준비하느라 이 밤도 노고를 아끼지 않는 동료 설교자들에게 파이팅을 보냅니다.


<박영돈 목사>

 

성령의 빛을 받고 배도할 가능성



한 페친이 히브리서 6:4-6절에 대해 문의했는데 그 성경구절에 대한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모두가 다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참고는 될 것입니다.


오웬은 배도를 다룬 책에서 끝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들도 히6:4-6절의 말씀처럼,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교회생활을 잘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John Owen, On the Nature and Causes of Apostasy, and the Punishment of Apostacy, the Works of John Owen, v.7(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8-31).


히6:4-6절 말씀은 매우 난해하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구절이다. 이 말씀을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들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할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인 교리를 지원하는 성경적인 근거로 삼기도 한다. 반면에 이 본문을 한 번 믿은 사람은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다는 교리에 꿰어 맞추어 해석하기도 한다. 곧 이 말씀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가상적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특정 교리적 입장을 본문에 투사해서 해석한 것이다.


이 본문을 진정으로 거듭난 이들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주장의 증거 구절로 삼는 것은 성경 전체의 진리와 상충되는 해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역으로 이 말씀을 정통 구원론의 틀에 무리하게 뜯어 맞추려는 시도는 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켜 단순히 가상적인 위험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는 우를 범하고 만다.


오웬의 견해는 이런 오류들을 지혜롭게 피해간다. 오웬은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도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봄으로 성령에 참여하고도 타락할 자가 있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이중적인 선택의 관점에서 풀려고 하였다. 오웬에 의하면 교회에는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선택된 이들이 있는 반면 일시적인 교회 사역을 위해 선택된 이들이 있다. 결국 버림받을 사람은 구원을 위한 선택(the election for salvation)이 아니라 사역을 위한 선택(the election for function)만을 받은 것이다. 곧 그들은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 없이 사역을 위한 은사만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은혜체험은 그들을 진정으로 회심하게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이가 한 때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사역에 은사가 나타나면 그는 당연히 중생하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은혜체험이 반드시 회심을 동반하지 않으며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곧 그런 은혜를 체험하고 한 동안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도 타락하여 영원히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Ibid, v. 7, 24).


-박영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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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밖에 있는 의로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종교개혁주일이 다가온다. 종교개혁의 핵심교리는 칭의론이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칭의론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았다. “우리 밖에 있는 의로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루터의 칭의론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칭의는 조금이라도 인간 안에서 이루어진 생래적인 의에 기초하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성취된 그리스도의 외래적인 의에 근거한다. 


외래적인 의란 우리 바깥에서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타자,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성취하신 의로움이며 결코 인간 자신의 것으로 융화될 수 없으며, 인간의 의로움과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외래적이다. 이 낯선 의로움이 죄인에게 법적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에게 낯선 의로움 자체로 남아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법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제로는 죄인으로 남는다. 신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항상 의인이며 항상 죄인이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외래적인 의로 말미암아 살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만을 유일한 공로로 의존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칭의와 구원의 근거를 자기 안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자신의 외부로부터 오는 의에서 찾아야 한다.


이 의로움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의 소유가 되지만 우리의 생래적인 의로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결코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되지는 않는다. 중세 신학이 가르치는 대로 이 의로움이 인간의 본성이나 특질을 변화시키지는 않고 우리에게 항상 낯선 의로움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루터의 칭의론이 중세신학 뿐 아니라 어거스틴의 입장과도 분명히 단절됨을 확인할 수 있다. 서방신학의 전통에서 칭의를 인간의 실제적인 의로움과 분리된 외래적인 의로만 이해한 것은 새로운 개념의 유입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에 의하면,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on account of Christ),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only through faith) 일어난다.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단순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인 승인이 아니라 믿음의 인격적인 대상인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이다(apprehending faith).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를 취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Faith grasps Christ, appropriates Christ, makes Him my own).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개관적인 대상일 뿐 아니라 믿음 안에 내재하는 실존이다. 믿음은 성전이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좌정해 계신다(Faith is the temple and Christ sits in the midst of it).


여기서 믿음에 대한 루터의 탁월한 통찰을 보게 된다. 이는 믿음에 대한 매우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이해이다. 믿음은 모든 은혜와 선과 사랑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게 하며 우리와 연합하게 하는 것이기에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창조물이 되게 하는 살아 있고 창조적이고 활동적이며 강력한 것(living, creative, active, powerful)이다. 


그래서 신자의 의는 항상 자기 밖에 있는 외래적인 의이지만 그 의를 전가하시는 그리스도는 항상 신자 안에 거하시기에 실제적인 갱신과 중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 밖에 있는 의로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가 루터 칭의론의 핵심이다. 이런 루터의 통찰을 살펴볼 때 그가 외래적인 의만을 강조한 나머지 실제적인 갱신을 무시했다는 비난은 잘못된 것이다.


-박영돈 목사-

 

설교는 표절이나 모방이 아니다.

설교는 이미 계시된 성경말씀을 전하는 것이기에 표절과 모방은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는 참으로 궁색한 변론이다. 물론 설교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이 아니라 말씀을 잘 듣고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의 원재료는 성경말씀이며 설교는 그 말씀의 충실한 해석에 기초해야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설교는 성경을 그대로 되뇌거나 주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설교자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말씀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처해있던 특별한 정황 속에 주어진 말씀이었듯이 지금도 성령님은 이미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새로운 상황과 영적인 상태와 필요에 적중하는 살아있는 말씀을 들려주신다. 설교자의 임무는 자신의 공동체와 교인들에게 매 주 새롭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설교자는 자신 안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하며 그 말씀을 자신의 회중의 상태와 문제와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하는 성령의 지혜의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설교자는 노련한 외과의사와 치유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좋은 처방책이라고 해서 모든 환자에게 다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내용의 설교가 한 교회에서는 은혜가 되었을지라도 다른 교회에서는 별 유익이 없을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약이 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책망과 견책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에게 위로가 가득한 메시지는 그 사람을 더 깊은 거짓 안위에 빠지게 하여 파멸을 재촉하게 할 것이다.

만약 똑같은 성경본문을 가지고 모든 강단에서 설교할지라도 성령이 주시는 메시지는 천편일률적으로 고루함을 드러내기보다 모두가 색다른 다채로움의 조화가 만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같은 본문에 대한 해석은 동일하거나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시대적인 정황과 자신의 교회의 영적인 필요에 맞게 잘 요리된 영적인 양식으로 만드는 데는 각자가 다를 수 있다. 이렇게 성령과 진리의 말씀은 다양성 가운데 통일된 하모니를 이루게 하신다.

목사마다 서로 다른 인격과 기질과 특성을 가지고 있고 각 교회마다 서로 다른 문제와 필요를 안고 있기에 인격이신 성령님은 목사의 독특한 인격을 통해서 교인들의 특별한 상황에 잘 맞는 말씀을 공급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같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는 무궁무진한 진리의 광맥이 흐르고 있다. 오직 영적으로 어둡고 피폐한 사람만이 이 진리의 보화를 포착하지 못하고 성경과 다른 이의 설교를 밋밋하게 읊조릴 뿐이다. 이렇게 성령과 말씀에 사로잡혀 때를 따라 풍성한 양식을 교인들에게 공급하는 선하고 충성된 목자들이 등장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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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마귀의 얼굴



더 큰 은혜와 능력을 받은 사람일수록 더 무서운 죄에 빠질 위험이 있다. 큰 은혜를 받은 것으로 인해 인간의 부패성이 자극되어 헛바람이 부풀어 오르게 되면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교만의 죄에 휘말리게 된다. 그래서 간혹 영적인 은혜를 많이 체험한 이들에게서 마귀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흠칫 놀라게 된다. 


우리는 은혜로 충만해지고 거룩해질수록 더 사악한 죄, 즉 자신의 은혜로움과 거룩함으로 인한 영적인 우월의식과 교만에 사로잡히기 쉽다. 영적으로 우쭐해져 자신과 같지 않은 이들을 무시하고 쉽게 판단하는 영적인 폭력을 휘두른다. 은혜와 능력을 충만히 받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큰 은혜를 받음으로 자고하지 않기는 바울 같이 위대한 사도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바울을 도와주셔야만 했다. 하나님이 바울을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했다.


바울에게 있었던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는 바울이 스스로를 높이고 싶어 하는 욕망, 충동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그를 쳐서 때려눕히는 역할을 한 동시에, 사람들이 바울을 지나치게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그를 추앙하는 것을 막아주는 기능을 했다. 이 가시 자체는 고통이고 악이며 사탄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악을 허용하시므로 당신의 종이 더 큰 악과 파멸에 빠지지 않게 그를 보호하신 것이다. 그 악을 허용하시므로 바울이 받은 큰 은혜가 교만으로 인해 변질되지 않고 그 안에 온전히 보존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다. 육체의 가시로 인한 바울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에게 충만히 거하는데 전혀 방해나 거침돌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사탄의 가시가 은혜의 통로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 안에 안전하게 거하게 하는 장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바울에게 있었던 육신의 가시와 똑같지는 않지만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고난이나 약함이 있다. 우리를 자고하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각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려는 교만이 머리를 들고 올라올 때마다 그것을 꾹 눌러주는 무언가가 자동제어장치처럼 우리 안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벌써 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은혜를 받을수록 이 가시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 가시가 우리를 은혜로 인해 자만해지지 않게 하고 더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한다.


바울사도가 이 가시의 비밀을 깨닫고 더 이상 그로 인해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기뻐할 수 있게 된 것은 고통스러운 가시가 주는 엄청난 유익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이 처음에는 그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는데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사실을 알고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드리며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가시와 같은 약함과 고통에 깃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깨닫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에 “정말 그렇습니다”라고 화답할 수 있다면 그 가시는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축복의 사자가 될 것이다. (주일 설교 중에서)


-박영돈 목사-

 

한국교회 방언 열풍의 허와 실(박영돈)


“방언은 귀한 은사, 그러나 균형 잡힌 이해가 꼭 필요하다”

 

  한국 교회에 때아닌 방언 열풍이 불고 있다. 20세기 초 오순절 성령 운동과 함께 불기 시작한 이 열풍은 점점 거세져 급기야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상관없이 교파를 초월해 온 지구상의 교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방언 열풍은 성령 체험과 은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뜨겁게 달군 반면,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자국처럼 세계 교회의 처처에 상처와 갈등과 분쟁을 남겼다.
  이제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상처는 아물고 그 열기에 대한 추억마저 아스라이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유독 한 곳, 한반도에만 이 열풍이 또다시 불어닥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를 다시 강타한 방언 열풍

  과거에도 한국 교회에서 방언은 성령 세례와 함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고 많은 교회들이 이로 인해 혼란과 진통을 겪었다. 다행히 그 논쟁의 열기는 한풀 꺾여 사그라지고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방언의 열풍이 다시 불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왜 한물간 유행이 복고풍으로 다시 인기를 끌듯 방언이 다시 주목받는 것일까? 그동안 한국 교회가 평양 대부흥 백 주년을 맞이하여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기도해 왔는데, 그 기도의 응답일까? 그보다는 무엇인가 영적 침체의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는 많은 교인들에게 방언은 손쉽게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반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온 듯하다.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것에 끌리는 한국 교인들의 종교적 성향과, 극적인 변화와 확신을 안겨 주는 획기적인 은혜 체험을 바라는 교인들의 영적인 요행심에 방언이 딱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어떻게든 교인들의 열심을 자극해 교회를 속히 부흥시켜 보려는 사역자들의 열망과 그것을 부추기는 데 성공한 대중 매체의 역할이 절묘하게 맞물려 빚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같이 방언이 다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기독교 서적과 인터넷 매체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들의 탁월한 기여가 없었다면 방언 열풍은 결코 한국 교회에 다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우현 씨처럼 대중과 잘 소통하는 뛰어난 기술과 은사를 가진 이의 글을 통해 사그라졌던 방언의 열기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방언 열풍의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하늘의 언어」(규장)라는 책의 등장이다. 이 책의 저자 김우현 씨는 이미 KBS ‘인간극장’ ‘친구와 하모니카’로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방송계에서도 인정받은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이며 연출자다.
  그는 ‘팔복 시리즈’와 「부흥의 여정」(규장)으로 교계에도 널리 알려졌고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기독교 작가로서의 위치도 굳힌 사람이다. 그는 방송 작가로서의 오랜 경험을 통하여 대중의 심리와 감성에 효과적으로 호소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이야기를 구성해 가는 데 뛰어난 역량을 갖추었다.
  그의 책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은 아마도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되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생한 성령 체험담을 마치 다큐멘터리가 눈앞에 펼쳐지듯 실감나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해 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이론적인 책과는 달리 그의 책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도록 독자들의 공감과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방언 열풍을 촉발한 저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언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방언의 유익과 가치에 눈을 뜨고는 방언 체험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종종 듣게 된다. 그의 책이 이런 ‘개종’의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체험담의 대부분이 방언을 하찮은 은사로 무시했던 이들의 ‘회심’(방언에 대한 회심)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하늘의 선물을 아직도 거부하고 있는 ‘죄인들’을 돌이키는 데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연이어 ‘개종’하는 사건을 기록하였다. 규장출판사의 대표까지 방언을 체험하고 그가 받은 놀라운 은혜를 혼자만 누릴 수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방언받기를 권하는 ‘방언 전도사’가 되었다. 급기야 이 방언의 불길은 규장출판사 전 직원과 자매 회사인 갓피플닷컴 직원에게까지 번졌다. 한꺼번에 70명에 달하는 직원이 방언을 받고 무려 3시간에 걸쳐 방언 기도에 전념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선교사는 마치 오순절 부흥의 현장이 재현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결국 저자는 그동안 줄곧 추구해 온 한국 교회의 부흥이 방언 체험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책을 쓴 목적도 부흥의 불길이 온 땅에 확산되기를 바람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서적과 인터넷을 통해 방언을 파급시키는 것으로 부족해 자신이 직접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며 방언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그 노력의 결과로 방언이 바로 하늘의 충만한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이며, 이 잊힌 통로를 재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의 길이라는 메시지가 전국 구석구석에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는 오순절파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단이 예외 없이 방언 열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과거에는 방언이 지성적이지 못한 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는데, 지금은 오히려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방언에 열광하는 형편이다.

  이런 추세에 저항하여 전통적인 신앙의 기치를 높이 든 이는 목사나 신학자가 아닌 김우현 씨와 같은 평신도였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부흥과 개혁사)라는 책은 김우현 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양측의 입장이 극과 극을 이루며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인터넷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택대학교의 김동수 교수가 방언에 대해 양극화된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책을 펴냈다. 드디어 평신도들의 논쟁에 신학자가 끼어든 셈이다. 그는 두 사람과는 달리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로서 방언에 관련된 성경 말씀을 꼼꼼히 주해하고 정리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한 견해를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결론적인 입장은 양극단적인 견해를 원만하게 조율하기보다는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준 격이 되었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라는 그의 책 제목이 이미 시사하듯이 김우현 씨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 셈이다.

  결국 양극화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갈등과 대립의 골이 깊어만 가고 있다. 「하늘의 언어」로 촉발된 방언 열풍은 그에 대한 반박과 이어지는 논쟁들로 인해 더욱 거세져 한국 교회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다. 방언 열풍은 한편으로는 신앙 생활에 취미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관심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며 일시적으로 교회를 뜨겁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더욱 시들게 하는 이중적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이 “이 시대의 진정한 부흥을 위한 하늘의 전략”이라는 김우현 씨의 주장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 전략일 뿐 진정한 하늘의 전략은 아닌 듯하다.

 



김우현 - 하늘의 언어

  김우현 씨는 그의 책 「하늘의 언어」에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무시했던 방언의 은사에 뜻밖에도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바로 방언이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해 예비하신 가장 강력하고 충만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 즉 “하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통로”라는 사실이다.
  방언은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통로이며, “지치고 무기력해진 주님의 교회를 강하게 충전시키는 귀중한 에너지”다. 더불어 방언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강력한 방편인 동시에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비밀 병기다. 그렇기에 “이 영적 기도의 언어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수행했던 모든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방언에 대해 이처럼 극찬을 한 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참으로 유별난 책이다. 방언을 성령 세례의 증거로 보았던 오순절 교회에서도 방언을 이렇게까지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견해는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방언에 대해 논하면서도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온 방언에 대한 책들의 대부분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바탕 위에서 쓰였다. 그러나 김우현 씨의 책은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 제시나 기본적인 신학적인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주관적인 생각과 확신을 마치 하나님의 생각이며 말씀인 양 마구 쏟아놓은 책이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확신을 성령의 음성으로 굳게 믿고 있다는 데서 사태는 더 심각해지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할 위험이 커진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열심과 사랑은 뜨겁지만 그의 신앙은 말씀의 토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성경의 큰 그림을 볼 줄 모른다. 성경을 전체의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라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의 큰 윤곽이 드러난다. 김우현 씨는 전체 그림의 극히 미세한 일부분이 마치 가장 중심적이고 모든 것인 양 단순화하고 과장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 결과 진정한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전 포괄적인 계획과 전략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작은 하나의 방편만이 핵심 전략으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총체적인 개혁과 부흥의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며 이에 부응하는 부흥관의 정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런 부흥에 대한 올바른 신학이 없으니 부흥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잡다한 가르침들을 따라 목사들과 교인들이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험하고 멀더라도 부흥의 정도를 밟아가기보다 속성으로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원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방언을 체험하기만 하면 진정한 부흥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같이 약속하는 희소식에 매료되는 모양이다.

  김우현 씨가 말하는 방언 체험의 유익은 가히 환상적이다. 방언만 체험하면 오래 계속되는 영적 침체에서 확실하게 벗어나고, 자신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하늘 문으로 들어가는 이 비밀 통로를 발견하기만 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세계로 들어가 하늘의 강력한 능력을 받게 된다고 하니 이런 은혜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가르침은 단숨에 충만한 은혜를 받는 횡재를 바라는 영적인 요행 심리를 조장하여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으나 그들을 진정한 부흥으로 인도하기에는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체험을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다. 성령의 다양한 역사하심과 은사들 중에 유독 방언의 은사만을 이토록 부각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균형을 현저히 상실한 가르침이며 교회를 부흥으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위험성이 높다.

  그의 주장대로 방언이 하늘의 충만한 은혜를 여는 가장 강력한 통로라면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히 성령 충만함을 누리기 힘든 영적인 열등생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찌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하늘의 능력과 은혜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을 받아야 한다. 방언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받으라고 권한다. 이런 가르침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조장한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도 누리기를 바라는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방언을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 큰 소외감과 상처를 안겨주며 또한 그들을 은혜 없고 영적 결함이 있는 교인으로 보는 무례를 범한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신앙의 열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을 때 교회에 큰 폐해를 입힌다.

  방언의 유익과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는 귀하다. 그러나 말씀의 한도 내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의 인기몰이를 하는 데는 완전 실패했겠지만 교회에 혼란을 조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방언의 놀라운 유익을 강조하는 데에서는 성경이 전혀 말하지 않는 데까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지나치게 비약한 반면에, 방언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해 버렸다. 그래서 그의 책에서 방언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를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바울이 염려했던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옥성호 -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극단은 항상 또 다른 극단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은 제목에서부터 방언이 하늘의 언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글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책의 논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에 대해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인 논리를 거의 제시하지 못한 김우현 씨와 달리 이 책을 쓴 옥성호 씨는 방언에 대한 많은 신학 서적을 읽고 성경 주석들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방언에 대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을 제시하려 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를 강타하는 방언 열풍을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말씀을 향한 또 하나의 사탄의 공격”으로 보았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체험을 검증하기보다 우리의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왜곡하고 거기에 꿰 맞추려는 경향을 개탄하면서 방언 현상을 무분별하게 수용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말씀을 통해 냉철하게 검증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김우현 씨와는 정반대로 그는 방언을 하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은사가 아니라 가장 남용될 가능성이 높은 은사로 보았다. 성경은 방언을 권장할 대상이 아니라 “조심하고 선별해야 할 대상의 은사”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이 바울 사도가 그토록 방언의 은사를 특별하게 다룬 유일한 이유라고 보았다.

  옥성호 씨가 「하늘의 언어」가 무시해 버린 바울의 메시지에 다시 주목하며 방언 현상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려고 한 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은 지나치게 특정한 신학적 전제, 즉 ‘은사중지론’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 그 전제는 방언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그는 모든 체험은 반드시 말씀에 비추어 검증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지만, 체험뿐 아니라 모든 신학적 전통까지도 성경의 빛 가운데 점검해야 한다는 확신은 없는 것 같다. 성경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신학적 편견을 성경적으로 진단할 만한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듯하다.
  잘못된 신학적 선입견에 한번 사로잡히면 거기에 맞추어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김우현 씨가 체험에 치중한 나머지 말씀을 무시했다면, 말씀을 수호하려던 옥성호 씨는 신학적인 전통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성경 말씀을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


  그가 신학적인 전제를 투사하여 성경을 해석한 대표적인 일례는 고린도전서 13:8-12에 대한 해석이다. 이 대목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옥성호 씨는 방언과 예언이 다 폐하고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바로 성경이 완성될 때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 이 세 가지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아직 없었던 초대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중요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완성되자 이 은사들은 그 목적을 완수했기에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해석은 성경 본문을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기 보다 ‘은사중지론’의 안경을 끼고 읽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문맥을 통해 볼 때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바울 사도는 절묘한 시적 표현을 통해 사랑의 탁월성을 찬미한다. 그는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이 더 큰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더 큰 은사가 아니고 은사를 사용하는 더 좋은 길일 뿐이다.

  다만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이 은사들보다 더 탁월하며 믿음과 소망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나 예언과 방언은 종말에는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가면 믿음과 소망이 바라던 것도 성취될 것이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이다(고전 13:13 참조).
  고린도전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어조는 확연히 종말론적 특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말씀은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성경이 완성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완결된 성경이 주어지면 내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며, 주님이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되는가?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서기까지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해석은 앞뒤 문맥과도 상충될 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도 배치된다. 바울이 그 글을 쓸 때 자신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완성될 것을 예견하여 그런 의미를 담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불과하다. 이런 해석은 바울 사도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뜻을 투사하여 그의 메시지를 왜곡하는 것이다. 요즘 신약학자 중에서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은사중지론의 대부 워필드의 뒤를 이어가는 개핀(Gaffin) 교수마저 이런 해석은 바울의 관점을 현저히 곡해한 것이라고 배격했다.

  또한 옥성호 씨는 은사중지론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 방언은 예언과 함께 성경 계시가 주어지는 방편이었기에 계시가 완료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가 계시의 방편이라는 견해를 입증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되면 계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방언의 특성상 그것은 타당하지 않은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방언이 성경적 계시의 통로라면 사도들에게만 주어졌어야 할 텐데 사도들 외에 많은 신자들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면 그들도 모두 계시의 전달자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계시적 권위를 가진 방언과 일반 신자들에게 주어진 비계시적 방언은 도대체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이런 유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고린도전서 12-14장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성경 해석의 오류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별히 ‘사랑 장’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을 쓴 바울의 의도와 거기에 담긴 바울의 교훈을 온전히 간파하지 못했다. 그 결과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공정하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만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바울 사도가 사랑 장을 쓴 목적이 방언을 최고로 여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방언보다 사랑을 더 우선적으로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랑은 방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좋은 길”이라고 했다. 일견 그의 견해는 타당해 보인다. 바울이 사랑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이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이 더 탁월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인 것 같지만, 은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만약 그런 식으로 사랑 장을 이해하면 바울이 본래 의도했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석할 경우, 사랑에 의해 은사가 열등한 자리로 밀려나고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사랑을 구하는 것으로 대체됨으로써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바울의 명령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결코 사랑을 제시하여 상대적으로 은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은사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의 우월성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사랑과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추구하고 사용하는 서로 다른 두 방식들이다. 곧 은사가 이기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그것이 사랑을 따라 활용될 수도 있다. 은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면 교회에 혼란과 분쟁을 야기한다. 그러나 사랑의 길을 따라 은사를 사용할 때,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유익하고 풍요롭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고전 13:8-13 참조). 따라서 사랑은 은사를 추구하고 사용하는 더 탁월한 길이며 방식이다.

  사랑 장을 통해 전달하려는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랑의 길을 따라 은사를 구하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사랑뿐 아니라 은사도 중요하다. 그는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과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은사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이며 능력이다. 은사 없이 사랑의 소원과 목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만을 강조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과는 아주 거리가 먼 가르침이다. 옥성호 씨는 “바울은 13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은사가 있더라도 그 은사 속에 사랑이 없으면 은사가 없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 장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를 잘못 읽은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은사로 인해 분쟁과 혼란이 야기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그들의 은사 추구를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였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라고 권면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고 논란이 많아 여기서 다 다룰 수 없다. 이에 대해 의문이 있는 이들은 필자가 이 구절을 좀 더 자세히 다룬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물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열정이 육적이고 이기적인 동인에 의해 자극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은사에 대한 열정이 교회를 세우기보다 허무는 방식으로 분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은사 추구가 지향해야 할 훨씬 더 바람직한 방향, 곧 사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은사를 그 본래의 기능대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확실한 바탕 위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은사와 사랑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은사에 대한 바울 이해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근본 사상인데, 옥성호 씨는 애석하게도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은사에 대한 그의 견해는 부정 일변도로 치우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김우현 씨는 방언의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 남용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함구했다면, 옥성호 씨는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방언의 긍정적인 측면을 간과해 버렸다. 그래서 두 견해는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다.

 

 

 

김동수 -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이렇게 방언이 하늘의 언어인가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면서 이 논쟁에 마침표라도 찍으려는 듯 황급히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한 책이 연이어 발간되었다. 바로 김동수 교수가 쓴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라는 책이다.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입장이 양극화되어 갈등과 혼란이 점증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껴 서둘러 쓴 글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옥성호 씨의 책을 집중적으로 반박하면서 그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아마추어적인가를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신학을 전공한 프로답게 성경을 심도 있게 해석하고 자신의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전개하였다. 방언이 지금도 존재하며 신앙 생활에 큰 유익을 주는 은사임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나서 어떻게 방언을 체험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는 김우현 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하늘의 언어」라는 책에 대해 적극적인 호응을 보였고, 성경적인 고찰이 부족한 점을 유일한 아쉬움으로 지적하였다. 그래서 그 결함을 보완해 주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책에서 김우현 씨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그의 책의 핵심논지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맞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우려한 문제, 즉 방언으로 인해 교회가 양극화되는 현상을 해소하는 데는 그의 책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셈이다.

  김 교수는 옥성호 씨가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한 부분들을 잘 지적하여 교정해 주었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이 아니었다는 점, 고린도전서 13:10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종말을 의미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은 은사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은사를 사용하는 제일 좋은 길이라는 점 등을 올바른 성경 해석을 통하여 잘 밝혀 주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그의 해석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신학적으로 별 하자가 없다.
  이처럼 방언에 관련된 많은 성경 구절에 대한 그의 해석이 대체로 원만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성경 말씀을 무시해 버린 김우현 씨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성경을 충실히 해석해서 이르게 된 결론이 성경적 근거 없이 경험에서 나온 주관적인 확신과 엇비슷한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방언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방언 체험 유무와 거의 일치한다. 예외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방언을 체험했는가 아니면 안 했는가가 방언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김 교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그가 확신한 대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체험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연구를 조종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 교수도 자신이 방언 체험에서 얻은 확신, 즉 방언은 하늘의 언어라는 전제가 그의 성경 해석과 논리 전개의 모든 과정을 은밀히 주관하고 있지 않은지 냉철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어떤 전제를 가졌느냐에 따라 어떤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어떤 측면을 더 부각시키며, 또 어떻게 그 전제를 맞추어 자료를 분석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지가 결정된다. 똑같은 성경 본문을 다루면서도 전제에 따라 보는 각도와 강조점이 다를 수 있으며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김 교수의 책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드러난다. 그는 방언을 긍정하는 말씀만을 다루고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회피해 버렸다.
  방언의 밝은 면은 최대한 부각시킨 반면, 그늘진 면은 최대한 숨겨 버렸다. 어떤 성경 말씀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무리하게 뒤틀어서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해석을 뒤집어엎는 아주 독창적인 이해처럼 보이게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 보기로 하자.

  먼저 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방언관을 교정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14장을 썼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방언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옥성호 씨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이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고 보았다.
  두 입장 모두 서로 상반되는 편견에 이끌려 본문의 분명한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는 기본적 균형 감각을 상실한 듯하다. 옥성호 씨는 바울이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기조를 이루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여기에는 방언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며 성장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은사로 인해 대혼란이 빚어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은사에 대한 추구를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였다.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권면하였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은사가 잘못 사용되면 교회를 세우기보다 허무는 역기능을 할 수 있다고 경계하였다. 그런 메시지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은사로 인해 야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었다. 곧 은사를 사랑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은사를 대체하는 더 우월한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더 잘 사용하게 해주는 탁월한 방식이다. 사랑은 은사의 가치와 역할을 하락시키기보다 은사의 효력을 더욱 고취시킨다. 사랑은 은사를 빛나게 하고 은사는 사랑을 성취시켜 준다. 사랑과 은사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꼭 있어야 할 단짝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은사에 대한 바울의 기본 입장이다. 방언에 대한 이해도 이런 맥락 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라는 김 교수의 지적은 백 번 타당하다.
  바울은 결코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다른 은사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방언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았다. 은사 추구를 장려하는 그의 권면에서 방언만은 제외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두가 자신처럼 방언하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그의 심정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에 대한 그의 언급에 부정적인 어조가 강하게 깃들어 있는 것은 방언이 그 특성상,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성향 때문에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고린도 교회 안에 그것으로 인한 갈등과 혼란이 빚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바로잡고 은사 사용의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김 교수의 문제는 바울이 방언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을 변호하는 데 급급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고찰하지 못한 점이다. 방언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바울의 언급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하고 이런 문맥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만을 국부적으로 발췌하여 자신의 입장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 결과 온전한 바울의 메시지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방언이 잘못 사용됨으로 야기될 수 있는 혼란과 문제점을 다룬 바울의 교훈은 침묵 속에 묻혀 버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에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수사학적인 표현을 통해 사랑이 없는 방언이 다른 이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자기 과시와 만족을 위해 교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무질서하게 하는 것은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혼란과 갈등만 조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방언이 잘못 사용되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13장의 비유적인 표현과는 달리 14장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구체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14장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방언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공동체에 덕을 끼치기보다 해를 입히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며 경계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6-9, 16-17, 19, 23).

  비록 바울이 방언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서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보다 방언이 남용될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김 교수는 어떤 본문을 자신의 주관적인 확신에 지나치게 꿰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예를 들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라고 한 바울의 말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구절을 방언의 은사가 모든 신자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 본문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해석은 그 말씀의 문맥과 정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역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교인들이 예배를 할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 사적으로 기도할 때가 아니라 공적으로 예배할 때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이 오히려 문맥과 조화되지 않는 무리한 해석이다. 그가 지적했듯이 고린도전서 14:26 이하에는 공적 예배의 상황이 묘사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2장의 문맥과 정황은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의 사역 일반과 관련된다. 12장 전체에서 바울이 전달하려는 일관된 메시지는 몸은 하나이나 지체는 여럿이고 은사는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의 지체가 다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에게도 다 똑같은 직분과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울은 다 동일한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고 반문하였다. 12장 전체 문맥만이 아니라 바로 앞 구절의 말씀만을 살펴봐도 이 말이 예배에만 국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여러 직분을 세우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이것은 바울이 예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교회 직분과 은사 일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30)라고 반문했다. 이 말은 교회에 여러 직분이 주어졌으니 모두가 같은 직분이나 은사를 가질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김 교수는 왜 이렇게 성경의 명료한 뜻을 왜곡하는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성령의 은사가 모두가 다 받을 필요가 없지만 예외적으로 방언만은 모든 신자가 다 받아야 할 은사라는 그의 확신을 고집스럽게 성경적으로 입증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관철하는 데 가장 거침돌이 되는 본문, 즉 모두 다 방언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의 증거 본문을 제거한 셈이다.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방언을 받아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의 신념을 뒷받침할 성경 본문을 찾아냈다. 그가 유일하게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 본문은 고린도전서 14:5이다.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되는 것이 자신의 분명한 뜻임을 밝힌 것이다. ,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실제 가능한 일이기에 그렇게 되기를 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하다’라는 바울의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이해를 초월한 지나친 비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바울은 같은 서신에서 독신에 대해 논하면서도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전 7:7)라고 하였다. 거기서는 바울이 실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김 교수는 그 말씀은 전후 문맥에서 그 소망이 실현될 수 없음이을 확신한 반면, 방언에 대한 바울의 소원은 그 문맥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렇게 억지스러운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라는 말씀을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 구절만이 아니라 12장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바울은 12장에서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시하였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다 같은 은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못 박아 말하였다. 이런 명확한 말씀을 곡해하니까 억지로 꿰 맞추기식의 무리한 해석이 이어진 것이다.

  김 교수는 바울의 소망을 이렇게 무리하게 해석한 것으로 부족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비약해 버린다. “하나님이 지금 모든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도 같은 것이다.” 즉, “개인 기도로서의 방언의 은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경험하여 하나님과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 없이 잘못된 해석과 지나친 비약으로 이끌어낸 결론일 뿐이다. 오히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은사의 기본적인 특성은 선별적이라는 점이다. 바울이 계속 강조한 것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의 다양성이다. 그는 은사를 획일화하는 위험성을 엄중히 경계하고 그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사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특정 은사를 획일화함으로써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 결국 고린도교회에서처럼 방언을 과대평가하여 다른 은사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성을 주장하는 문제가 재현될 것이 뻔하다.

  만약 다른 은사는 모두 선택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모든 이들에게 다 주어져야 한다면 방언을 다른 은사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다뤘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은 단순히 은사가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인 기도처럼 자주 강조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외에 방언을 언급한 예는 없다.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6)라는 말씀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신자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기도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탄식이 방언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간구하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그들의 기도가 어찌 천상을 가르고 하늘의 보좌에까지 상달될 수 있겠는가? 김 교수는 그렇게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의 성경 해석은 이런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는 것을 피하기 힘들다.


방언은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할 은사인가

  김 교수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방언은 모든 신자에게 꼭 있어야 할 은사이며 온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사다. 그는 책 앞부분에서 자신이 방언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온건하게 인정하는 입장을 위한다고 밝혔다. 방언은 신앙 성숙의 척도가 아니며 하나의 도구이기에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2급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갔다.
  이 정도면 그의 견해가 나무랄 데 없이 건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책이 도달한 결론은 그것과 사뭇 다르다. 그런 언급은 그의 견해가 건전하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표방한 것에 그칠 뿐 실제 내용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는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만은 예외 없이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한다고 고집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옮기면, “방언 기도가 신앙 생활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앞부분에서는 방언이 “하나의 도움”이라고 말해놓고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지만 그 말은 그의 진정한 속내를 드러낸 것이며 그의 입장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신자가 방언을 받아 하나님과 하늘의 언어로 교통하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바울의 뜻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리고 영적으로 성숙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방언이 다른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통로일 수 있고 사실상 중요한 통로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결국 성경적 수준에 미달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사는 셈이다. 신앙 성숙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은혜의 방편이 없으니 어찌 영적으로 열등한 2급 신자의 신세를 면할 수 있으랴!
방언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그의 행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모든 교인들이 방언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에 사로잡혀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참석한 전 교인들이 방언을 체험하게 하려 했다. 그는 방언을 하는 이들은 “이 은사를 다른 사람들도 체험하게 하여 같은 복을 누리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라고 역설했다.

  그도 역시 김우현 씨처럼 방언 전도사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강권하여 방언을 받게 하려고 한다. 그의 책에 방언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방법대로 방언을 받게 한 실제 사례를 소개하였다.
  “수련회나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저는 첫째 날 일단 한 명이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합니다. 한 명만 받으면 그 다음에는 쉬워집니다. 방언받는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1분간 간증을 시키면 그 다음에는 방언받는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친구가 받으면 열불이 나서 못 견디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기심과 경쟁심이 자극되면 다 방언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김 교수는 그렇게 해서 나타난 현상이 성경적인 방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증하는가? 일일이 다 검증해 보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어떤 부흥사들이 그러하듯이 혀가 꼬여 이상한 말이 나오면 무조건 방언이라고 보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의 말인지 귀를 의심하게 된다. 성경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감정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삼류 부흥사의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방언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논하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비약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런 미심쩍은 행위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진다. 물론 이 뜻은 인간의 원함을 무시하지 않고 그 갈망에 따라 성취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나서서 사람들을 강권하다시피 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그런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도록 교묘히 유도하는 행위는 전혀 성경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성령의 은사는 인간의 강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진다는 성경의 분명한 진리와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행위를 통해 촉발된 현상을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는 없다. 질투심과 경쟁심에 의해 자극된 열심과 인간이 은사를 유도해 내려는 은근한 교만으로 점철된 것에는 오히려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일종의 집단 최면이나 흥분 상태로 사람들을 몰아가 그런 현상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견해가 예외 없이 그 사람의 방언 체험의 유무와 일치한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켜 주었다. 영적인 은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의 방언을 해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체험을 해석하여 성경 본문에 대입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제라는 것을 그는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견지해 온 입장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어떤 주관적인 확신을 주입해서 성경을 읽는 것인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책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김우현 씨의 책보다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미혹하게 하는 위험성이 더 클 수 있다. 그것은 학자의 깊이 있고 권위 있는 성경 해석에 근거한 주장이기에 독자들은 그만큼 설득되기 쉽고 반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자와 선생들의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의 견해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과거 고린도 교회 안에 방언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과 혼란을 고스란히 한국 교회 안에 재현시킬 수 있다.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있어야 할 필수적인 은사라는 주장은 가진 자의 우월 의식과 못 가진 자의 열등 의식을 조장하여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못 가진 이들은 하나님과의 풍성한 영적인 교제와 신앙 성숙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은사가 없으니 어찌 위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급 신자로 취급받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반면에 가진 이들은 노골적으로 우월 의식을 표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은사가 없는 이들을 무엇인가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받는 방언을 못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면 방언 못하는 이들은 무엇인가 영적으로 결핍되고 열등한 신자라는 선입견을 떨쳐버리기가 어렵게 된다. 모두가 다 방언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방언 못하는 이들은 이 주님의 뜻에 못 미치는 삶, 즉 주님이 의도하신 풍성한 은혜와 충만한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셈이다.
방언 은사로 인해 전혀 교만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방언을 모두가 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큰 무례를 범하는 교만인 것이다. 그런 주장 자체에는 깊은 우월 의식이 잠재해 있을 뿐 아니라 많은 혼란과 갈등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방언 열풍이 한국 교회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피해 사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모두 방언 받을 것을 강권하는 집회에서 끝내 방언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은사 체험에서 자신들만이 제외되는 소외감과 하나님에게까지 ‘왕따’를 당하는 씁쓸한 비애를 느끼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자신만 외톨이로 남고 싶지 않은 절박한 심정에서 방언 전도사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리고 혀를 굴려 “랄랄랄라”를 연발하며 인위적으로라도 방언과 같은 현상을 만들어 내려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방언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 한 맺힌 신앙 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한 권사는 오랫동안 방언을 사모하여 구해 왔음에도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산다. 그녀는 아주 신실하고 경건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 방언을 못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 이 죄의식과 함께 자신만 외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이 그녀의 마음속에 뒤엉켜 있어 주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방언을 모든 신자들이 꼭 받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목사나 전도사 밑에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 중에 방언을 못하는 교인들은 무척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을 지도하는 한 전도사는 방언을 못하는 학생들을 방언을 받을 때까지 교회에 잡아 놓고 기도하게 해서 말썽을 빚은 적이 있다.
  반면에 방언은 다 받아야 한다고 믿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방언을 못 하는 목사나 복음 전도자가 엄청난 고충과 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체험한 몇몇 집사들이 담임목사에게 방언을 하느냐고 물었다. 목사가 방언을 못한다고 하자 그들은 평신도도 하는 방언을 목사가 하지 못하면 어떻게 교인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였다. 그 목사는 방언을 못하는 이유 때문에 목사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어떤 신학생이 노회에서 신학을 계속 공부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여러 목사들 앞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세 명의 다른 신학생과 함께 면접을 보았는데 한 목사가 방언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나머지는 다 받았다고 대답했는데 자신만 방언을 받지 못했다고 하자 기도를 잘 하지 않는 전도사라며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상당히 보수적인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까지 이런 가르침에 경도되어 있으니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실태가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만을 든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런 가르침이 확산되어 가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전에는 방언하는 이들이 광신자로 따돌림을 당했는데, 이제는 방언 못하는 이들이 시원찮은 신자와 사역자로 취급받고 수난 받는 시대가 되었다.

  결국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바로 그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 점증해가는 방언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 역시 바울의 방언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편견을 내려놓고 바울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자세와 균형 잡힌 감각이 필요하다.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거침돌로 작용하는 것이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한편에서는 ‘은사중지론’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의 틀에 꿰맞추기 위해 성경을 조작해 버린다. 어떤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경 해석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과 전통 그리고 배워온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방언에 대해 서로 다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오순절 교회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언에 대해 긍정적인 반면, 보수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보수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는 바로 워필드를 뒤이어 은사중지론을 철통같이 고수했던 개핀 교수였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이 필자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씀의 능력이 신학적인 전통을 세뇌하는 마력에서부터 필자를 자유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은사인 방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은 자신이 꼭 체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체험한 것만 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꼭 그에 대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체험하는 것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에 치우치게 하여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방언 체험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많은 경우 ‘경험’뿐 아니라 ‘무경험’도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방언 체험의 유무가 방언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불행한 연결고리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양극화를 극복하고 방언에 대한 원만한 일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하는 이나 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 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으로서 성경적인 계시가 종결됨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 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방언이 그쳤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과 예언도 그친다는 바울의 말(고전 13:8-12 참조)을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도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신학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 말씀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 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띠었다.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난 지방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이를 보건대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하는 현상이었다.

  이런 유의 방언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 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 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방언과 꼭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자들의 방언이 찬양과 함께 선포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설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외국어 방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 방언은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특별한 이벤트를 장식하는 표적의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만방에 전파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 사역을 출범했다는 것을 알리는 특별한 표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순절 후에도 그런 방언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반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심령이 아니라 ‘생각’ 또는 ‘이성’을 뜻한다. , 이해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 볼 때 이 방언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한 기도의 언어 또는 영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때의 방언이 어떤 말의 형태로 나타났는지, 어떤 음률과 강세를 띠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소리가 단음절로 끊어졌는지 연음으로 유연하게 이어졌는지 아무도 들어본 사람이 없다. 녹음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과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이기에 그 진실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조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요즘 소위 방언이라고 말하는 현상 중에는 의심쩍은 것들이 적잖다.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각별한 주의와 냉철한 분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다 마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는 명수이기에 얼마든지 은사의 모조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장로의 부인은 한 기도원에서 방언을 받은 후 귀신들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 한동안 고생하다가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자 방언도 같이 사라졌다.

 

  또한 몰몬교 같은 이단이나 타종교에도 방언과 유사한 종교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무조건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언이 과연 성령의 은사인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의 상담을 통하여 면밀히 점검해 보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앞에서 지적했듯이 방언은 모두가 다 받아야 하는 은사라는 주장만큼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없다. 다른 은사는 선택적이지만 방언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견해는 왜곡된 성경 해석이 아니고는 도저히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다. 은사는 모두 선별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필수적이라면 방언은 더 이상 은사로서의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한 것이며, 은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없다.

 

  만약 방언을 모든 신자가 다 받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실제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 중에서 방언을 부인하고 구하지 않는 이들은 못 받는다고 쳐도 방언을 간절히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그런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와 같은 직분과 은사는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서 된 것이다. 모두 순수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물론 어떤 은사는 받는 자의 소원과 간구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면서 애타게 구해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애먹이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구하기 전에라도 자연스럽게 주어지며, 구하면 필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방언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방언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기로 하신 선물이 아닌 것을 한사코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또 방언을 더 이상 하나님이 기꺼이 주시는 선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방언을 달라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인위적으로 방언을 유도해 내려고까지 하는 것은 그 선물을 뺏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미치는 폐해는 엄청나다. 교인들 모두가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사 체험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완전히 획일화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이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대단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도 자신이 누리는 은혜를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위는 자신의 잘못된 확신을 따라 다른 이들을 강압하려는 교만의 발로다.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우월 의식을 낳고, 그 반대급부로 영적인 열등 의식과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며, 급기야는 그로 인한 갈등과 혼란을 조장한다.

  이런 문제는 실제 교회 현장에서 더 역력히 드러난다. 방언이 모든 신자의 영적인 성숙에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은 자연히 방언을 못 하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열등한 신자로 강등시킨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떻게 영적인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모든 신자에게 필히 있어야 할 은사이기에 강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그렇게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가 유행병처럼 번져간다. 그런 집회에서는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라는 진리는 묵살되어 버리고 방언을 꼭 받게 하려는 인간의 강권이 은사를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압도해 버린다. 마치 방언이 인간에 의해 유도될 수 있는 것처럼 방언 전도사들은 가는 곳마다 방언의 돌풍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선물을 안겨 준다.
  일단 한 사람만 방언을 받게 하면 다른 이들의 시기심이 자극되어 방언하는 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부패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열심을 부치기는 방언 전도사들에 의해 촉발되고 조작되는 일종의 영적인 집단 흥분 상태를 방불하게 한다. 이것을 은사를 나눠 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공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해 대는 것을 삼가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을 모아놓고 강권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모두 방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처사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주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방언을 받게 부추기고 강권한 예나 그런 행위를 권장한 말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령의 순리적인 역사하심에 배치되는 행위를 통해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하기 쉽다.

  그런 집회의 진정성은 그 열매로 드러난다. 집회에 모인 교인들이 모두 방언받기를 강권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방언이 터지지 않는 사태가 항상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교우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히 소외당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모든 신자에게 예비된 하늘의 선물이 자신들만 비켜가는 것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들에게만 싸늘하게 등을 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을 느낀다. 이런 집회는 어떤 이들에게는 흥분과 기쁨을 안겨주지만, 다른 교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회의를 안겨 줄 수 있다.

  자신의 일시적인 희열과 감정적인 도취를 맛보는 대가로 다른 형제들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김우현 씨는 방언이 작고 소외된 이들을 세우는 귀한 은사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에서는 도리어 방언이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된 이들을 더 소외시키고 짓밟을 수 있다.
  방언 집회가 성행하며 방언 전도사들이 맹활약을 하면서 이런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경은 공중에서 방언을 마구 해대는 것을 철저히 금하였다. 방언 집회를 인도하는 이들은 이 성경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과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방언 집회로 인한 좋은 열매까지 싸잡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방언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고 그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과 실제는 매우 다를 수 있다.
방언 체험의 경우가 특별히 그렇다. 왜냐하면 방언은 그 특성상 가장 전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과 센세이션과 표적을 동반하기에 그 당시에는 굉장한 부흥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시간을 두고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집회에서 방언받은 이들의 삶에 얼마나 지속적인 변화가 나타나는지 조사해 보았는가? 그런 변화의 열매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물론 그런 열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방언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열심과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삶과 신앙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꾸준히 말씀에 따라 성령과 동행하는 신앙 훈련을 대신하는 임시변통의 은혜 체험으로 그치고 만다.

  김우현 씨의 글에는 방언이 단숨에 하늘 문을 열어 충만한 영적 세계로 도약시키는 마술과 같은 은혜로 과대선전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방언 체험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놀라운 변화와 부흥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대에 사로잡히게 한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는 수많은 교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부진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에 여념없는 목사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흥분과 감흥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이 있어야만 신앙을 지탱하고 열심을 내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방언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적이기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개인과 교회에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이 있느냐를 먼저 계산하는 이 시대의 실용주의 가치관과 이런 대중의 심리와 관심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과 영적 현상을 대중화하여 큰 이익을 챙기는 기독교 상업주의가 한국 교회에 방언 열풍을 몰고 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이 지금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흥 코드’라고 보는 견해는 지극히 피상적이면서도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침체한 한국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기 위한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충족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방언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

  방언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방언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방언은 하나님의 귀한 은사다(고전 12:4-28 참조). 방언을 성경적인 지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고전 14:4 참조) 그로 인해 공동체의 성숙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의 남용은 교회를 허물지만 방언의 선용은 교회를 세운다.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 인격자와, 형제들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건전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가는 이런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은사를 조금이라도 과시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다 자신과 같은 은사를 체험해야 한다고 강권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방언함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위축되며 혼란스러워할까 우려하여 공중에서 방언하는 것을 절제한다. 방언하는 이들 중에 이렇게 겸손하고 훌륭한 교인들도 많다. 이들처럼만 한다면 방언으로 인해 무슨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바울이 가르친 바이다. 방언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하나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뜻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만, 어떤 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방언하는 이가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하기 쉽다고 말할 수 없다.

  뉴욕에 있는 어느 한인 순복음 교회 집사가 필자가 잘 아는 목사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집사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많은 집사들 중에 유일하게 방언을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방언을 구했음에도 하나님이 방언을 안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척이나 답답해하며 그런 하나님을 향해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장로교 목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목사는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은 방언이 꼭 있어야 신앙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기에 방언을 주시지만, 집사님은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기도와 경건 생활을 잘하실 수 있을 것 같기에 방언을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사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기질과 성향과 사명과 상황에 꼭 필요하고 알맞은 은사를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은혜를 주기 원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없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시기에 그 은사를 안 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최상의 은혜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영적인 성숙에 꼭 필요한 은사이기에 방언을 못하면 뭔가 영적으로 부족하고 열등한 신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방언을 못 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한 이들도 많다.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방언을 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영성과 신앙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성 프란체스코, 칼뱅,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이들이 그랬고, 한국 교회에서도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등 수많은 훌륭한 목사들과 교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방언 체험의 유무는 결코 신앙 성숙이나 영적인 충만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언의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누린다는 점이다(고전 14:14-18 참조). 그로 인해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이 방언을 체험함으로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신앙의 열심이 자극된다. 기도를 잘 안 하던 이들, 5분만 기도해도 기도할 것이 없던 이들이 기도를 자주, 오래 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영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니 기도를 10분도 못하는 교인들은 방언이라도 받아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만하다. 거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기도를 안 하던 이가 방언을 체험한 후 방언으로는 기도하지만 여전히 생각과 이성을 통해 기도하는 데는 전혀 진보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마음(생각, 이성)이 열매 맺지 못한다고 했다(고전 14:14 참조). 생각 없이 기도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이지적인 관계가 성숙하지 못한다.
  방언을 말하는 신비한 현상에 탐닉하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정작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할 수 있다. 또한 방언 체험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반면에, 항상 그런 표적과 증거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영적인 미성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의 실제적인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방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랫동안 방언을 해 온 어느 목사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볼 만하다.
  “나는 방언을 30년 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방언이 100퍼센트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 마음이 주께로 향해 있다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실이 방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언하는 이들 중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까지 이른 이들은 실제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는지 잘 모르며 시간만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아 방언을 그렇게 즐겨 하지 않는다. 방언 집회에서 방언과 같은 현상을 처음 체험했을 때는 열광했던 이들도 별 효력이 없으니 차츰 열심이 식어지고 방언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방언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권면은 자신의 방언이 과연 성령이 주신 은사인지 냉철하게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은사를 주신 뜻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유용한 방편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 이 은사로 인해 영적인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이들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림으로써 은혜가 충만하여 교우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미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들이 누리는 방언의 은사가 더 빛을 발하게 되며 다른 교우들도 그런 은혜 체험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한 아집을 내려놓고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겸손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방언은 하나님이 교회에 내려주신 귀한 은사라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 현상이 다 성령의 은사인지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하지만, 교인들이 하는 방언을 다 싸잡아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것이라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라고 했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멸시하고 평가절하하거나 방언하는 이들을 광신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방언의 은사를 잘 분별하여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선도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은사 체험을 존중하며, 제대로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그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돌아와 서로 화합할 때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더 이상 갈등의 요인이 아니라 축복의 방편이 될 것이다. 방언 열풍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뒤흔드는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화평하게 하는 성령의 미풍이 한국 교회를 부드럽게 감싸안을 것이다.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IVP)에서

 



 


지난 주일 설교했던 것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본문인데 자주 오해되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한 설교라서 참고하시라고 시원찮은 내용이나마 올려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빌 2:12-16



바울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바울 구원론의 진수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바울이 말한 구원의 핵심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매우 생소하게 들릴 뿐입니다. 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구원이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 질 때까지 신자의 구원은 미완성이며 자신의 구원을 미리 확신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셈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심대하게 위협한 중세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이지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값싼 은혜와 거짓구원의 확신을 양산하는 무율법주의 폐단을 낳는다면, 후자는 신자들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며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리게 합니다. 


전자가 구원의 즉각적인 면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구원의 점진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면, 후자의 경우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을 무시한 채 그 점진적인 측면에만 역점을 기울인 우를 범한 것이지요.


바울사도의 가르침에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과 점진적인 측면이 절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구원은 인간의 선한 행위(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 즉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행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가 없이 온통 죄로 가득한 사람이라도 이 예수님의 의로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즉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즉시로 신자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믿음은 신자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며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여 하나님이 신자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너희가운데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희생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기쁘신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그의 아름다운 형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새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를 세워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우리로 인해 찬양과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효력과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것을 이루어가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to work out what God works in us). 이것이 신앙생활, 성화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행위구원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내포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 안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을 그 목표를 향해 진행시키는 말씀입니다. 이루라는 원어의 의미는 “결론, 마지막 단계로 계속 발전시키라”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강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머지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다 떠 맡겨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처음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을 진행시켜 완성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과 그 과정과 마지막이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보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확신과 유일한 근거는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열심과 오래 참으심에 있습니다. 


우리 구원과 성화는 우리의 시원찮은 열심의 산물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무한한 열심의 결실입니다. 하나님의 이 뜨거운 열심이 우리의 냉랭하고 강퍅한 마음에 절연이 되어 잘 전달되지 않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할 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권적으로 이루거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자유로운 의지를 상실한 로버트나 꼭두각시로 대우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인격자로 하나님과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그 뜻을 이루어 가는데 성령과 긴밀하게 연합하여 일하게 하십니다. 


성화과정에서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부지런하게 합니다. 피동적으로 손 놓고 가만히 있게 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게 합니다. 선한 일에 열심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려는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강렬한 열정의 영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 열정과 소원을 불붙이는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아들의 영, 자녀의 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아들의 소원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성령,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며, 그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사무치는 소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소원에 온통 삼킨바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성부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려는 불타는 열심에 사로잡혀 사신 분입니다. 비록 그 뜻이 자신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일일진대도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주님과 같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의 덕을 보는 것, 그 모든 혜택을 누리는 것인데도 그 뜻을 이루기를 별로 원치 않는다는 것은 영적 무지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이런 평생의 소원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God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소원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원하는 바를 행하게 하십니다. 


선한 의지와 소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선함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선한 의지와 마음은 있지만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 우리 의지의 연약함입니다. 


바울사도가 롬 7장에서 이 인간의 연약함을 잘 묘사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을 본다고 괴로워했습니다. 


선한 의지만으로는 결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안 밖에서 우리의 선한 의지를 좌절시키는 많은 세력들이 그 의지를 압박하여 무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부패성과 죄의 습관, 죄의 관성이 우리를 우리의 선한 의지에 거스려 죄로 치우치게 합니다. 죄에 익숙해진 우리의 몸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악으로 치우치기십상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밖의 수많은 환경적 방해와 난관이 우리의 선한 의도를 번번히 무산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고 변명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넋두리가 아직 은혜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별수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변명의 구실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계속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분명히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은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하고는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원하지 않고 희미하게 원하기 때문이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나누인 두 마음을 품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육신이 연약해서, 또는 죄와 사탄의 세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유혹이 너무 많아서, 이 세대가 악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No excuse입니다. 유일한 이유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우리의 선한 의지를 거스르는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8:2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죽음의 권세를 죽이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 안에 잔재해 있는 부패성과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아직은(not-yet) 누리지는 못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미(already) 풍성히 임한 자유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이 구원의 목적, 즉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보혈로 확보하신 모든 새 언약의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주시고자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갈망과 무한한 열심과 인내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내가 혹시 거스르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자기만 바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빌 2:4에 자신의 일 뿐 아니라 각각 다른 이의 일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도록 자신이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성숙과 성화는 혼자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섬김과 기도와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이들의 성숙을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와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런 공동체적인 구원과 성화를 의미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며 사랑의 화평의 열매가 가득하여 천국을 맛보며 증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우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이 말씀을 무시하고 거스르고 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가지신 계획과 소원,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모든 고난과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성령이 충만한 은혜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간절한 소원과 뜻을 거스르고 그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고 복음의 빛을 현저히 가리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모두 탕진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구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가르침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신앙의 나태와 방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바울이 전한 구원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며,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마귀도 믿고 떠든다고 했습니다. 


자신 안에 구원의 목표를 향해 성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예수를 믿었으니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은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이들의 확신은 자꾸 흔들어대는 반면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의 자기기만은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메시지는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는 그 구원의 목표가 자신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분명한 증거와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교회생활을 했어도 이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이는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났더라도 심각하게 타락한 교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참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봐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마귀의 교활한 수법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는 도리어 안일하게 사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혹 자신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가 아닌지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은 참된 신앙의 핵심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이 두렵고 떨림이 사라지면서 온갖 부패와 방종이 밀려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며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목사들과 교인들로 큰 군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다른 이에게 전파하고 자신은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 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자 안에 시작한 구원을 결국 완성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 1:6에서 그는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거듭 확신하였습니다. 그의 서신은 온통 이런 확신에 찬 선언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행여 자신을 버림받게 하실까 두려워함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신실하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경건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오는 율법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함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할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께 버림받거나 징계 받을까 두려워하는 율법 아래서 떠는 종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받는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깊은 경외심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비천하고 추악한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아빠가 되어 주심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는 그 거룩한 임재 속에 산다는 의식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변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배반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우리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가장 기뻐하는 뜻을 이루어주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어 주지 못할 때 한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이런 소원과 슬픔이 없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무시하고 사는 수많은 교인들, 교회들을 보면서 마음에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스르고 살므로 우리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모습으로 인해 생명의 말씀이 땅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제 우리의 말에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진저리를 냅니다. 우리의 말과 너무도 모순된 삶을 보며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거룩한 말씀이 짓밟히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로부터 빼앗아 말씀을 잘 청종하고 순종할 이들과 민족에게로 옮겨가실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깊은 각성과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 계속 지금처럼 안일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부터, 우리 교회부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박영돈 목사님


믿을 때부터 성령 인도함 받는다  

박영돈 교수 / 고신대학교

남포교회(박영선 목사) 설립 20주년 기념 학술 축제가 ‘구원 그 이후: 성화의 은혜’라는 주제로 지난 3월 7일 남포교회에서 열렸다. 박영선 목사의 ‘나의 목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비롯해서 Bryan Chapell 카버넌트신학교 총장, 김영재 교수, 김정우 교수, 변종길 교수, 박영실 교수, 이수영 목사, 오덕교 교수, 김병훈 교수, 박영돈 교수 등이 발제자로 참석했다. 이중 박영돈 교수의 ‘오늘의 구원과 성화’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성화의 성령론적 다이내믹

1) ‘제 2의 축복’ 성화론
개신교 안에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을 성령충만과 함께 회심 이후의 획기적인 체험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획기적 성화에 대한 견해는 웨슬리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일차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칭의와 회심 후에 성화를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라고 칭했다.

웨슬리의 뒤를 이어 일어난 성결운동과 ‘더 풍성한 삶 운동’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성화를 이차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그들은 대개 죄책과 형벌에서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구분했다. 신자는 칭의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지만, 그 후에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를 체험해야만 실제적인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자유하게 되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사람에 따라 길거나 아니면 짧은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모든 신자는 믿을 때 칭의의 은혜에 참여하나, 성화의 은혜는 대개 나중에 가서야 이차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신자의 삶과 사역은 그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신자의 삶이 실패와 좌절과 신음으로 점철된 곤고한 삶에서 능력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승리의 삶으로 급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맥을 이어온 케직 사경회(Keswick movement)에서는 이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 체험을 자주 제 2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케직 사경회를 인도했던 마이어, 앤드류 머레이, 알 에이 토레이 같은 이들의 사역과 그들이 남긴 대중적인 경건서적을 통하여 이러한 성화론은 지금까지 많은 교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또한 디엘 무디 같은 부흥사, 에이 비 심슨, 이에 제이 고든, 모울 같은 이들도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을 전파한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성경적 대안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성화와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간접적으로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 사건과도 연결시킴으로써, 성화는 기독론적인 바탕뿐만 아니라 성령론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의 은혜뿐만 아니라 성령의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 Jr)도 정통교회에서는 중생에 있어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나 그 후 신자의 삶속에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자의 삶의 출발점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 이후 성령은 거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부터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극단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가장 자주 나타났던 병폐로서 체험의 진공상태를 야기했고, 이는 결국 또 다른 극단, 즉 ‘두 번째 축복’을 주장하는 오류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Richard B. Gaffin, Jr. “The Holy Spirit”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3:1(fall 1980): 76)

이러한 양극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은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걸쳐 역동적으로 계속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이’, 즉 ‘성령충만한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8:9, 갈5:16, 엡5:18).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과 지배 아래 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성령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삶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갈 5:17), “성령으로 산다”(갈 5:25)는 표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든 피가 지적했듯이,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말들이 의미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더욱 강렬하고 부요한 은유적 표현이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성화의 기독론적-성화론적인 바탕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분리된 성결한 삶,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회심 후 제 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줌으로써 웨슬리-오순절 운동의 가르침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에 걸쳐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누리는 삶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로 인해 새로운 은혜체험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는 전통적인 성화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포도나무 선교회

"칭의와 성화”

김세윤 교수님의 책, “칭의와 성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어, 뒤늦게나마 책을 읽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과거 김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 많은 유익과 통찰을 얻었던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너무도 중대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몇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1. 가장 아쉬운 점은 전통적인 구원론에 대한 김 교수님의 비판이 종교개혁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김 교수님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그러나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부요하고 치밀하며 성경적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2.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교수님이 제시한 성경적인 대안이다. 김 교수님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며 같은 구조와 특성을 띠고 있다. 그는 성화를 “의인됨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칭의와 성화』, p. 189). 또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칭의와 성화』, p. 192). 이런 논리에 따르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까지 유보된 칭의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연합해버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유사한 논리적인 맥락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렇게 칭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는 종교개혁 전에 신자들이 겪었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에 따라 우리의 의인됨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 루터가 겪었던 영적 고뇌였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있지만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으면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복음의 핵심이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우리는 이 칭의의 영원한 바탕 위에서만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 우리가 이룬 보잘 것 없는 거룩함을 의존해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영원한 칭의의 반석은 우리의 연약함과 성화의 부진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고 변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수도 없다. 라일 감독(J. C. Ryle)이 말했듯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칭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김 교수님이 주장하듯이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사실 성화는 실패를 통한 성화이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신자는 연약하여 수없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영적인 회복의 바탕과 다이내믹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날을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성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보다는 칭의의 은혜만을 더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칭의의 복음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아 애초부터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자들에게는 악용될지 모르나, 성령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예민해진 신앙양심을 가짐으로 작은 죄에도 고통 받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이며 피난처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순기능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 칭의론의 남용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결국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위로와 유익을 유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영원불변한 사랑 가운데 진행된다는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선진들의 통찰을 영적유산으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의 틀에 갇혀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좋은 전통을 모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전수된 역사적 신앙의 진귀한 유산을 섭렵한 바탕위에서만 참된 진보가 가능하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복음을 바로 잡으려는 김 교수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그마저 선진들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칭의론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 속에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500년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탱해온 핵심교리를 뒤집는 주장을 할 때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분석이 마땅히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성경신학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주관이나 신학적인 전제가 완전히 배제된 성경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님이 개혁주의 구원론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그의 해석의 관점은 전통적인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세부적으로 논하고 싶은 점이 많아 “칭의와 성화”에 대해 또 하나의 책을 써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책의 제목은 “다시 전해야 할 칭의의 복음”이 어떨지.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500년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하게 세워져갔다.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혁주의 칭의론 때문이 아니라 이 교리가 바르게 전수되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축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 재 발굴하여 바르게 전파해야한다. 복음 사역자들이여, 개혁교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복음을 여러 도전 앞에 주저하며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하시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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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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