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다시 분열시키는 WCC 부산 총회 유치

WCC 부산총회가 임박했다. 교계 한 편에서는 총회준비에 한창인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반대운동이 더욱 극렬해지고 있다. 부산총회가 개최되는 동안 집회장소 안팎에서 거센 반대 시위와 집회가 예상된다. 교회연합을 목적으로 한다는 총회가 극심한 분열을 야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WCC 총회를 유치하여 한국교회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이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치부를 온 세계에 드러내는 꼴이 되었다. WCC 총회 한국 대회장을 맡은 김삼환 목사는 “세계 교회들 너무 궁금해 하죠. 한국교회 잘 되는 비결 뭐냐고”라고 했는데, 세계교회는 거대하고 화려한 외형에 가려진 한국교회의 허접한 실상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며 이렇게 내실 없이 외적으로 비대해진 비결이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 할 것이다.

WCC 입장에 대한 찬반을 논하기 전에 WCC 총회를 한국에 유치한 자체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최소한의 역사의식과 판단력만 있어도 WCC 총회를 한국에 유치할 경우 이런 소동이 일어날 것을 불 보듯 뻔한데 그만한 분별력도 없는 자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행세를 하며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교회를 연합하려는 선한 뜻이 아니라 세계적인 연합단체를 끌어드리는 업적 세우기와 한국교회의 허세를 과시하고픈 허욕이 부른 결과이다. ...

1959년 한국의 장로교회는 WCC 참여문제로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는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그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장로교단 간의 긴밀한 교류와 연합을 위한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갑자기 WCC 총회를 끌어드림으로써 이 모든 화합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과거보다 더 극심한 분열과 대립의 양상을 초래하였다. 한국교회역사를 더 후진시킨 셈이다. 사전에 이런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고 논의함이 없이 너무도 졸속으로 WCC 부산총회 유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찬반의 입장을 모두 수렴해서 조율해보고 반대 측의 동의를 끝내 얻지 못해 극렬한 충돌이 예상되면, WCC 총회 유치를 포기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그나마 분열을 막는 연합의 차선책이었다. WCC의 신학입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보수 측 교회들을 향해 그들의 신앙양심을 거슬러 WCC총회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며 그러지 않는 그들을 향해 폐쇄적이고 분파적이며 수구 꼴통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연합의 이름으로 범하는 또 다른 독단이고 횡포이다. WCC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측이 서로가 이해하고 확신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최소한 서로를 존중해야하며, 각자의 신학적인 입장과 신앙양심에 반하여 행동할 것을 강압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견해는 묵살된 채 일방적으로 개최되는 WCC 부산총회에 대해 반발하는 이들의 심정도 이해는 하지만, 역 앞이나 공공장소에서 극렬한 반대 시위와 집회를 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난맥상을 이 사회에 그대로 노출하여 교회의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된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벌려놓은 분열의 불씨에 기름을 붙는 격이 될 뿐이다. 교인들에게 왜 WCC 총회를 반대하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족하다. WCC에서 심각하게 문제되는 부분만을 극대화하여 거기에 참여하고 동의하는 교회들은 제 2의 신사참배를 한 배도자들인 것처럼 극단적으로 매도하여 교인들을 선동하는 태도는 한국교회를 완전히 두 동강 나게 할 수 있는 지혜롭지 못한 행위이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니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더 심하게 균열되지 않도록 모두 슬기로운 마음과 기도의 손을 모아야 할 때이다. 교계 지도자들도 이왕에 깔아놓은 멍석이니 의식 없이 털썩 주저앉을 일이 아니다. 어느 편에 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한국교회가 침몰해가는 위기상황에 이런 분열과 대립을 가져온 과오에 대해 심각한 자성과 회개가 있어야 하며 이렇게 찢겨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다시 화합하기위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이런 기본 의식이 없는 자들을 어찌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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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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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우들은 목사도 연약한 인간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기본적으로 바르게 하려는 목사는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기다려주고 참아주며 점점 더 농익은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사랑과 기도의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온전하게 모든 것을 구비한 목사는 없다. 그런 목사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 목사는 하늘이 내리는 선물이지만, 주님께서 이 선물을 완숙한 상태가 아니라 설익은 채 내려 보내신다. 이 선물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데 우리 교우들의 역할이 크다. 좀 부족한 목사도 훌륭한 목사로 변화되게 돕는 아름다운 교우들이 있는 반면에 좋은 자질을 가진 목사도 기를 꺾어 아주 망가트리는 악한 교인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하사하신 ...선물을 짓밟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교인들이 의식이 깨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갖는 것은 좋은데, 교회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촉각만이 날카롭게 곤두선 채 교회를 겸허히 섬기려는 자세를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또 다른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의식 있는 지성인들 가운데 웬만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 정도로 비판의식이 지나치게 투철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상당한 전문 지식을 가진 한 교인은 어떤 목사의 설교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설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랐으면서도 그는 어떤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의 날카로운 판단력에 은밀히 똬리를 틀고 있는 독한 지적인 교만이 불완전한 교회와 부족한 목사의 설교를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인 기인이 되게 한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병들고 아픈 주님의 교회를 더 사랑하고 섬기며, 미숙한 목사라도 품어줄 수 있는 넉넉한 도량과 겸손을 겸비한 이들이 참으로 프로테스탄 정신에 투철한 그리스도인들이며 한국교회의 희망이다

 

박영돈목사의 페이스북


성령운동하는 종교 사기꾼들


  한국교회의 근본문제는 메시아 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거 유대인들 같이 지금도 많은 교인들이 십자가의 메시아가 아니라 엘리야처럼 큰 능력을 행하는 영광의 메시아를 원한다. 전에 오산리 기도원에서 한 목사가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을 들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부자가 되어야 한다. 셋방에 사는 이는 70평 빌라에 살고, 티코 차를 타는 교인은 에쿠스를 타야한다.” 이런 기복적인 메시지가 십자가의 메시아보다 만능의 메시아를 선호하는 대중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다. 교인들의 궁극적인 관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들의 메시아 관이 결정된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이 죄에서 자유하여 성결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이 될 때 그들의 메시아 관도 교묘히 변질된다. 여전히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지만 그들이 믿고 섬기는 대상은 더 이상 성경이 증거한 십자가의 예수는 아니다. 그것은 그들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욕망이 형상화된 우상이다. 현대 교인들은 그들의 옛 자아와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메시아는 질색하지만, 세상에서 그들의 빵문제,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들을 번영하게 해 줄 메시아는 대환영한다. 이렇게 세속화된 교인들의 욕망에 의해 변질된 메시아 관이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예수를 믿어도 삶에 변화가 없다. 믿노라 하지만 그들이 실제 믿는 대상은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니 어찌 변화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집회가 이러한 거짓된 메시아 관을 퍼뜨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과 초자연적인 기사의 폭발적인 역사를 강조하는 성령집회는 만능의 메시아를 바라는 교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에 충분하였다. 성령의 기적과 초능력이 그들의 고난과 질병을 일격에 날려버리고 그들의 소원과 자아의 욕망을 성취하는 동력으로 무상으로 제공되니 어찌 그런 집회에 매료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에 만연한 성령운동의 심각한 문제점은 십자가의 메시아에서 일탈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만약 성령운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 분명한 포커스를 맞추지 않으면 복음은 현저히 왜곡되고 성령의 능력은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보다 인간의 종교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남용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기적이나 은사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십자가에 대한  초점을 흐려지게 하는 데 있다.
  한국교회에 초자연적인 현상들, 즉 기적과 병 고침, 방언과 예언의 은사들은 넘쳐난다. 한국교회에 이런 것들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현상들은 광신적이고 주관적으로 치우치는 신앙의 혼란을 심화시킨다.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한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 옛사람이 처리되고 거룩한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거룩함을 상실했기에 한국교회는 대사회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복음의 빛을 가리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다. 세상의 빛 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성령의 역사에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아름다운 새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이다. 성령은 이 구속의 목적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해 강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거룩함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고 성령의 간절한 소원을 무시하며 그 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그렇게 많은 성령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꼭 나타나야 할 성령의 열매는 희소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일하고 기적을 행하며 귀신을 쫓아내도 이 열매가 안 나타나는 것은 분명한 거짓 선지자들의 사인이다. 이런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자칭 성령의 사역자라는 많은 사람들은 이 부류에 속하며, 대부분의 은사집회는 거짓선지자들이 활개 치는 잡신집회에 더 가까울 것이다.
  진정한 성령집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가 바르게 전파되며 우리의 옛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외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밝히 증거되지 않는 곳에는 성령이 현저히 부재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외칠지라도 십자가의 능력으로 도살당하지 않은 옛사람이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은근히 과시함으로 그리스도에게만 돌아갈 영광을 교묘히 가로채는 곳에 성령은 심히 근심하신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그 십자가에 육신의 욕심과 야망을 못 박은 사람만이 진정한 성령의 통로가 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부흥케 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교만하고 부패한 옛사람이 십자가로 철저히 처리되지 않은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목회 성공에 대한 은밀한 야망이 죽지 않은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과 은사는 자기실현과 성공을 위한 동력으로 남용될 뿐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많은 경우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복음 사역자들의 야망의 산물이다. 성령의 능력까지 총동원하여 교회부흥과 목회성공을 이루어 보려는 집요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발로이다. 그런 동인에서 촉발된 성령운동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명분하에 교묘하게 인간의 헛된 영광을 지향한다. 그런 성령운동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부르는 바벨탑 운동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을 한다는 자들은 조심해야한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이 다루는 불에 자신들이 삼킴을 받을 수 있다. 요즘 한국교계가 사이비 성령운동으로 인해 너무도 혼란스럽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이용하여 부패한 인간의 야욕을 채우려는 자들이 많다. 성령을 팔아(빙자하여) 사기 치는 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비둘기같이 온유하신 성령님을 진노케 하면 그 분은 무서운 사자로 돌변하여 그들을 찢으실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도 성령운동이라는 말을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하긴 했지만, 성령운동이라는 말 자체는 아주 잘못된 용어이다. 성령님은 결코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운동을 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예수님의 이름과 사역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신다. 곧 성령운동이 아니라 예수운동을 하신다. 지금까지 전통교회에서는 이 예수를 드높이는 운동을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성령운동은 성령을 이용하여 인간을 높이는 운동으로 둔갑해버렸다.
  또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뜻대로 성령을 작동하고 운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우리는 우리의 뜻, 목회성공을 위해 성령을 운동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 예수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운동케 하시도록 우리를 성령께 내어드려야 한다. 우리가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성령님을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고 순종해야하는 인격적인 대상으로 모셔야한다. 한국교회에 성령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이들은 많아도 성령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여 그분과 매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며 그분과 함께 걷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에 열광적이고 신비적인 현상 같은 잎사귀들은 무성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찾으시는 성령의 열매는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발췌본문: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많은 경우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복음 사역자들의 야망의 산물이다. 성령의 능력까지 총동원하여 교회부흥과 목회성공을 이루어 보려는 집요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발로이다. 그런 동인에서 촉발된 성령운동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명분하에 교묘하게 인간의 헛된 영광을 지향한다.          

선지동산 52 게재 / 성령의얼굴(2) / 박영돈 교수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


/ 거룩한 수줍음은 성령의 얼굴을 분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심히 부끄러워하며 오직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온통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이다. 요즘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에게서 이 성령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

  성령은 얼굴 없는 인격(Person without face)이라는 말이 있다. 성령은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신비한 인격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성령에 대한 많은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한국교회에 성령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몇 십 년 전에 한국교회를 휩쓸고 지나간 방언 열풍이 다시 불어오며, 신유집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예언과 환상과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이들의 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일어나는 온갖 잡다한 은사집회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무질서한 현상들이 성령에 대한 오해와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다. 어디까지 성령의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광명의 천사의 얼굴로 위장하는데 명수인 마귀는 성령의 얼굴도 모방한다. 소위 성령집회라는 모임에서 성령의 얼굴과 마귀의 얼굴이 혼재하여 나타나며, 성령의 사역자라는 이들에게서 두 얼굴이 교차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얼굴을 마귀의 얼굴과, 광신자의 얼굴 그리고 이단자의 얼굴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게 하는 성령의 특성을 바로 이해함이 절실하다.
  패커(J. I. Packer)는 성령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에 하나를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이라고 했다. 이 수줍음은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병든 자의식의 산물, 즉 자신감이 결여되거나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하는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수줍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쏟는 사랑의 특성이다. 성령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온전히 예수님만 드러내는 수줍음을 가지셨다. 성령님은 자신의 영광을 베일로 감추고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하신다(요 16:14). 이 거룩한 수줍음은 예수님의 특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셨다. 예수님뿐 아니라 성부 하나님마저 수줍어하신다. 성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지만 성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그리고 아들 안에서 우리도 영화롭게 하신다. 삼위 하나님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바로 마귀의 특성이다. 인간이 스스로 이름을 내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욕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을 닮은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
  이 거룩한 수줍음은 성령의 얼굴을 분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심히 부끄러워하며 오직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데 온통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이다. 요즘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에게서 이 성령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과시하며 자신의 영광과 명성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일그러진 마귀의 얼굴이 나타날 때가 많다. 어떤 이는 사람들을  자주 쓰러뜨림으로 은근히 자신이 능력 있는 사역자임을 과시한다. 마이크로 후 불기만 해도 사람들이 쓰러지고 마치 검불처럼 데굴데굴 구르기도 한다. 과거 영국과 미국에 부흥이 일어났을 때 간혹 말씀을 듣다가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강한 역사하심에 압도되어 의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설교자들은 말씀만 전했을 뿐, 전혀 그런 현상을 어떤 식으로든 유도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의도적으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안수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사람들을 안수하여 쓰러뜨리는 행위는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어떤 이들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묵시를 받을 때 땅에 엎드러진 것과 그와 비슷한 사례(다니엘)를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하는데, 어찌 두 현상이 비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사건들은 인간의 안수나 어떤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현현이나 계시에 의해 압도되어 일어난 현상이다.
  또 어떤 이들은 멀쩡한 이빨을 금이빨로 바뀌게 하는 해괴한 현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초능력과 기적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많은 무리들을 끌어 모아 집회가 대성황을 이루게 한다. 전에 아프리카의 어떤 선교지에서 이빨이 빠지고 잇몸이 상해 음식을 못 먹는 이들에게 새 이빨이 생기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보도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기적은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이빨을 요술과 같이 금이빨로 둔갑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 볼 수 없고 오히려 미혹케 하는 악령의 장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은 진리와 질서의 영이시기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 없이 기적을 남발하여 우리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게 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기적을 아주 경제적으로 행하신다. 분명한 경륜적 목적 없이 기적을 마구 행하지 않으신다. 이는 우리가 살도록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므로 우리의 삶을 혼돈케 하지 않기 위하심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표적을 통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들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거침돌이 될 수 있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을 단숨에 날려 버림으로 믿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회개와 사랑의 반응은 이끌어 낼 수는 없다. 죄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그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나 믿는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고전 1:23-24). 기적을 통해서는 결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사는 그 절정에 이르렀으나 유대인들은 그로인해 더욱 강퍅해졌다. 이후부터 복음서에서 기적은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지고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전면에 부각된다.
  과거 유대인들과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십자가의 메시야가 아니라 기적과 표적으로 세상을 제압하는 만능의 메시야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광야에서 사단이 제시한 유혹이자 십자가 밑에서 군중들이 원하던 것이다. “네가 메시야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의 능력을 보여 달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십자가 복음만이 아니라 마술과 같은 표적으로 사람을 끌려고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십자가의 신학에서 일탈하여 번영신학, 영광의 신학으로 경도된 메시야관이 교회에 은밀히 침투하고 있는 사인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능력보다 기적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려는 자칭 성령사역자들의 메시지와 사역이 십자가의 메시야보다 만능의 메시야를 더 선호하는 대중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다.

선지동산 51 게재 / 성령의얼굴(1)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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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교인들(1)
어떤 교회에 가서 설교하면서 목사가 죽어야 한다고 하니 한 교인이 큰 소리로 아멘으로 화답해 심각한 대목에서 그만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필자가 목사로서 우리 목사들 자신을 주로 비판했지만 어디 한국교회의 문제가 목사들에게만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교인들이 마치 자신들은 목사의 잘못으로 인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인 양 한국교회의 문제를 목사들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 또한 목사들 못지않게 중대한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교회의 대형화로 인해 발생한 온갖 비리와 부작용이 어찌 목사만의 책임이겠는가. 교인들이 대형교회로 꾸역꾸역 모여들지 않았다면 어찌 대형화가 이루어졌겠는가. 사실 대형화의 주역들이 교인들이다. 대형교회를 이룰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정신적 자원뿐 아니라 그 명분과 의의까지 제공한 이들이 바로 교인들 자신이다. 그러니 대형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목사들도 찾아오는 교인들을 박절 맞게 내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대형교회가 되었다는 핑계거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교인들의 의식이 깨어있다면 대형교회는 존재할 수도 없으며 순진한 영혼들을 홀려 대형화의 야심을 채우려는 목사들은 발붙일 곳이 없었을 것이다. 대형화를 성공의 기준으로 보고 그런 것을 선호하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허영심, 대형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혜택과 안락함을 원하는 다분히 이기적인 마음이 교인들을 대형교회로 몰려들게 한 것이다.

지금 쓰고 있는 책 내용 중에서-

 

박영돈목사의 페이스북 


설교에서 성령을 거스르는 것들

설교는 창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달하는 것이기에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성경본문연구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연구에 소홀할 때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이 본문에서 의도하신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고, 본문의 뜻에 멀어질수록 설교에 함께 하는 성령의 능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설교자가 사람들의 욕구와 기호에 맞추어 말씀을 조작할 때, 청중의 마음을 끌기 위해 쓸데없는 것을 말씀에 더 하거나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꼭 해야 할 말을 뺄 때 성령은 근심하신다.

기발한 예화나 유머를 가미하여 설교의 효과를 돋우려는 시도는 오히려 성령의 감동을 삭감시키고 대체할 수 있다.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강하게 발동하여 성령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힘들게 할 수 있다. 성경강해가 탁월하고 신학적인 치밀함과 영적인 깊이가 있는데다 대중적인 적용성까지 두루 갖춘 불후의 명 설교를 창작하고픈 유혹이 열심 있는 설교자들을 늘 따라 다닌다. 설교준비를 게을리 하는 것 뿐 아니라 열심히 하는 데에도 성령을 거스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설교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그 자체를 거의 우상화하므로 성령께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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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의 즉각성 - 박영돈 교수

출처: 고신대  http://www.kts.ac.kr

 


 

성화의 즉각성

선지동산 45호 게재 / 성화의 복음(5) / 박영돈 교수



오늘날 강단에서 전파되는 성화에 관한 많은 설교들은 온통 신자의 책임과 사명, 그리고 열심을 고취시키는 윤리적인 지침과 권면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 대해, 그리고 예수 안에 주어진 은혜의 풍성과 영광에 대해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다. 칭의 뿐 아니라 성화에 관해서도 우리는 예수와 그의 십자가를 전해야 한다. 예수보다 윤리를 더 전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설교에 예수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가 경고했듯이, 예수보다 성화를 전하려는 것까지도 복음사역의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Osward Chambers, My Utmost for His Highest(Westwood, NJ: Barbour and Company, 1963), p. 52.).
  
단번에 이루어진 성화: 결정적인 성화
성화의 설교도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예수가 성화의 근원이며, 능력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사도는 성화도 칭의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구속사역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성화와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되는가를 잘 보여 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신자의 성화는 신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부터 신자가 죄에 대해 단번에 죽고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살게 하는 효력이 유출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죄에 대해 죽고 새 생명 가운데 다시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롬 6:2-6). 여기서 죄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 안에 죄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와 결정적으로 결별했다, 죄의 지배에서 전격적으로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 믿을 때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롭게 되었을 뿐 아니라 죄와 획기적으로 분리된 거룩한 자가 되었다. 칭의와 함께 ‘결정적인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가 일어난 것이다. 보통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신약에서 성화에 대한 용어들은 주로 “어떤 진행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성된 결정적인 사건을 의미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John Murray, Collected Writing of John Murray, vol. 2,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1977), p. 27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우리 안에 근본적인 성화를 이루어 주셨기에 오직 그 바탕 위에서만 점진적인 성화가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서신에서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살라는 성화의 명령(imperative)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되었다는 복된 사실(indicative)에 항상 기초한다(Herman Ridderbos, Paul(Grand Rapids: Eerdmans, 1975), tr. John R. De Witt, pp. 253ff.). 그러므로 성화과정에서 ‘행함’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예수 구속의 은혜가 우리 안에 얼마나 놀랍고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어 주었는가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영적빈곤은 이 복된 사실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결핍된 것과 이 믿음을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영성훈련이 부족한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

성화의 비결
  어떻게 매일의 삶 속에서 죄의 세력을 극복하고 옛사람의 욕심과 구습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 죄에서의 자유,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몸부림쳐도 우리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주셨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 죄로부터의 자유함과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 삶 속에서 죄를 이기는 유일한 비결은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이다. 스펄젼이 그의 설교에서 자주 강조했듯이 우리는 구원받는 것과 똑같은 방법, 즉 예수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으로써 우리 옛 성품, 교만과 정욕에서 자유할 수 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 외에 다른 방법으로 결코 죄를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펄젼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죄사함을 위해 예수께 나아가면서 죄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을 위해서는 율법으로 돌아갑니까? 당신은 그다지도 어리석은가요.”(C. H. Spurgeon, The Metropolitan Tabernacle Pulpit, vol. 10(Pasadena, Texas: Pilgrim Pub., 1991), p. 130.).
  우리의 죄와 옛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보혈의 권세와 부활의 능력밖에 없기에 우리는 성화과정에서도 계속 예수를 바라보아야 하며, 예수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성화의 은혜를 의존해야 한다. 그와 함께 이렇게 변화된 사람으로 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의존해야 한다. 성령은 예수 안에 일어난 결정적인 성화의 사실을 신자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하신다. 성령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부터 유출되는 거룩하게 하는 효능을 우리 안에 적용하여 우리가 실제 죄에서 자유한 삶을 살게 하신다. 이와 같이 결정적인 성화와 성령의 사역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성화의 근본 바탕을 이룬다.

은혜와 책임
  성화의 명령(imperative)을 따라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에만 맡겨진 사안이 아니라 오직 이 예수의 은혜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은혜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화 과정에서의 신자의 책임은 반드시 이 은혜의 토대 위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성화의 메시지는 복음적인 특성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모든 율법적이고 경직된 윤리적 가르침과 확실히 구별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화가 우선적으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행하심에 근거한다는 진리에 좀 더 깊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위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행하셨고 지금도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행하시기에, 오직 이 신적 사역의 토대 위에서만 우리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성화에 대한 설교 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경륜과 부르심, 그 뜻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내포된 성화론적 함축과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성령사역의 다이내믹을 심도 있는 고찰을 통하여 밝히 증거함으로써 이에 대한 확신 있는 믿음 위에 서게 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이 믿음의 채널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의 바탕 위에서 신자의 책임의 특성과 중요성을 선명하게 밝혀 주어야 한다.
  성화 과정에서 신자는 부단히 경건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가 그 책임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는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정적주의 신앙이 아니라 은혜를 힘입어 능동적으로 책임을 수행해가는 역동적인 신앙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의 노력은 ‘은혜를 향한’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인한’ 행위이다. 은혜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은혜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조건이 아니라 그 은혜의 결과이며 열매인 것이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의 책임보다 앞선다. 그리하여 신자의 노력을 헛된 수고가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산출하는 생산적인 수고가 되게 한다. (다음호에)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소모하는 설교사역



서울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주일 설교사역을 한지가 어언 9년이 되었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교인수가 장년이 30명 정도였다. 젊은 신학도 시절에 많은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리라는 비전을 하나님이 꺼구로 응답해 주신 셈이다. 나 같은 죄인이 한 영혼 앞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감사해야 할텐데, 그 당시 나는 그렇게 작은 인원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설교를 하고 천안에 있는 신학교 사택으로 내려가면서 대형교회 목사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 비애에 빠지곤 하였다. 미국에서 같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는 몇 만명 앞에서 설교하는데 똑 같이 설교를 준비해서 나는 고작 그 보다 천분의 일도 안되는 인원앞에서 설교를 하느냐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 투덜... 대곤 하였다. 거기다가 내가 그 목사보다는 설교를 훨씬 잘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묻혀 썩고 있느냐는 독한 교만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9년이라는 세월은 이런 야망과 교만에서 서서히 자유하는 연단의 기간이었다고나 할까. 다행히 지금은 교인수에 별로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교인수가 전보다는 좀 늘었지만 여전히 작은 무리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아직도 어떤 때는 내가 마치 허공에 대고 설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얼마 안되는 교인들 중에 내 설교를 제대로 소화하고 그 말씀을 심각하게 듣고 말씀대로 살려는 이는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해서 전해도 설교 들으나 듣지 않으나 아무 상관없이 산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들을 보면 복음 사역은 내 청춘과 함께 모든 것을 소모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말씀을 바르게 전해 교인들을 새롭게 하려는 뜨거운 열정이 식지 않으면서도, 10년이 지나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교인들을 보며 지치고 낙심하지 않는 오래 참음이 설교자들에게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연약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주님이 간혹 말씀에 목말라 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착한 양들을 만나게 하신다. 우리 교회에 매주 녹음한 설교를 3번 다시 듣고 설교 원고까지 받아가 꼼꼼히 읽고 말씀을 온 가족이 나누는 집사가 있다. 그 만큼 말씀을 온전히 체화하여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니 난로 새로워지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교인이 목사가 지쳐 탈진할 것 같을 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대부분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사실 목사는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몇 사람을 위해서 설교하는지도 모른다. 회중 가운데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소모하는 것 같은 설교사역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박영돈 목사의 페이스북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지난해 10월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아멘넷은 주강사 박영돈 목사(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의 세미나 내용를 시리즈로 소개한바 있다.

관련 세미나 기사 보기
- 박영돈 목사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 ①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②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①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 ②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설교와 성령충만
- ③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성령충만한 목사
- 신비체험을 원하는 교인을 어떻게 지도하나?


다음은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본문으로 "더 좋은 섬김의 길"이라는 제목의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내용으로 우리는 목회자를 의미한다. 박 목사는 본문의 마르다를 통해 주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기의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는 목회자들을 조명했다.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인 교회의 세속화를 인간본연의 인정의식에서 찾았으며, 목회자의 탁월성조차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목사의 비전과 목회관이 교회가 나갈 방향을 결정한다. 목사의 경건과 영성이 교회 전체의 영적인 분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목사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다.

본문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두종류의 교인으로 비유가 되곤한다. 성경공부시간에 참석하지 않고 주방에 가 일하는 교인은 마르다와 같이 문제가 있는 교인으로, 성경공부 시간에 만사를 제쳐놓고 말씀을 공부하는 교인은 마리아와 같은 착실한 교인으로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이 말씀때문에 종종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은 성경공부에 들어가고 싶은데 누군가 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방에 들어가 일하는 교인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 말씀을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다 아실것이다.

주님과 조용히 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봉사하는 것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주님을 섬기는 봉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것은 아니다. 주님에 대한 포커스를 잃어버린 봉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오신 주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의도와 정성은 귀한것이다. 문제는 마르다는 먼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신대로 주님을 섬긴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방식대로 주님을 섬긴것이다.

주님의 포커스와 사역자의 포커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것이다. 주님은 그런 대접과 섬김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마르다 자신을 원하셨다. 마르다와 교제를 원하셨다. 마르다가 먼저 자신을 알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먼저 마르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마르다를 섬겨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마르다의 섬김의 방식은 주님이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알게 하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마르다의 모습에서 율법주의자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자기가 수고한것에 대한 보상의 심리, 그리고 공로의 심리, 그리고 그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진 그녀를 보게된다. 마르다는 주님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주님께 자신의 수고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수고하지 않는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처럼 수고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을 비난한 것 처럼 마르다도 자신의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마르다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우리는 천성적으로 지독한 율법주의자이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과정속에서 율법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신앙생활의 과정속에서 다시 도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안에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성취지향적인 욕망을 부추긴다. 우리안에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신지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신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나의 야먕과 계획과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나의 야망을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혼돈할때가 많다.

주님의 일을 하지만 우리들의 포커스가 주님이 아니라 일. 그리고 사역의 성과일때가 많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주님의 영광은 파이널이 아니라 세미 파이널인 경우가 많다. 배후에 숨겨진 파이널,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영광이고 나의 성공일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자주 잊어버린다. 주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를 잘해야겠다, 설교의 성과를 좀 올려야겠다는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 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주님을 잊어버릴때가 많다.

주님을 위한 사역이 아이러니 하게도 주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릴수가 있다. 목사에게 사역의 우상화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사역이 주님이 아니라 사역에 오리엔트가 되버린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만들어내기 위해 읽고 공부한다. 기도를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하기보다 사역을 감당할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끌어당기는 방편으로 하게 된다. 교인들을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가 목회에 필요한 이유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님까지도 도구화 하려고 한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끌어당겨서 목회의 성공과 교회성장을 꾀하려 한다. 주님은 우리를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과의 깊은 영적인 사랑의 교제이다. 우리사역의 열매가 없고 능력이 없는 원인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경건의 피상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깊어질수록 우리의 사역이 더 열매를 맺게되고 우리의 메세지가 은혜로워지게 된다.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만큼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주님으로 부터 섬김을 받는 만큼 섬길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만큼 사랑을 베풀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은혜와 생명을 공급받는 만큼 우리도 생명을 흘러 보낼수가 있다. 목회사역에 나가는 것은 많은데 들어오는 것은 별로없기에 영적인 적자에 허득이고 있다. 그래서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마르다와 같이 많은 염려와 근심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고 결국에 영적으로 고갈됨으로 교회 전체에 영적인 피폐함을 몰고 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 목회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자기를 돌보는 일, 자기를 관리하는 일 즉 '자기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자기목회에 실패한 사람은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목회가 사실 가장 어렵다. 목사에게 가장 어려운 대상은 목사 자신이다. 자신때문에 가장 힘들때가 많다. 나의 욕심, 야망,  교만, 조급증, 자기중심적인 성정, 인격의 미숙함때문에 목회에 어려움을 격을때가 많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이다. 어떤 시인이 말한대로 나는 내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이런 골치아픈 나를 내가 어찌할수 없다. 주님이 나를 목회하실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를 섬겨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을 주님이 져 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 나의 옛 자아를 주님이 매일 져주셔야 우리들은 목회를 할 수 있다. 옛 자아가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로 게속 못박혀야, 우리들의 야먕과 교만이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온전한 목회를 감당할수 있다. 옛 자아의 짐을 매일 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만 우리는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수적인 것이다.

십자가의 가장 큰 축복은 나를 가장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내안의 그리스도가 살게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내가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나를 통하여 주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교회안에 밀려들어오게 된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사의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교회가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서 교회가 새로워지고 부흥하게 된다.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우리의 옛 자아의 정욕과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탁월함도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 목사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한다. 경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탁월한 것이 주님이 일을 하시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학적인 영적인 탁월함으로 인해 교인들의 관심이 하나님 보다 나에게 어느 정도 쏠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탁월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주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일부분을 가로채게 된다. 목사가 헌금을 도독질 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은 그와 비교할수 없는 악질적인 죄악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더 훌륭한 목사일수록, 더 거룩한 목사일수록, 더 설교를 잘하는 목사일수록 그래서 교인들에게 많은 감동과 은혜를 끼치는 목사일수록 마귀적인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우상숭배를 은근히 유도하는 존재이다. 우상으로 숭배받고 싶은 교주 근성이 우리안에는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 주의 종들인 목사님들을 존경은 해야 하지만 너무 추앙하면 안된다.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를 존경해야 하지만 너무 우상시해서는 안된다. 주의 종은 주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이 너무 영광스러운 곤란하다. 사인판은 심플할수록 간단할수록 좋다. 사인판이 너무 화려하고 특출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사람들이 사인판을 보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유명하고 탁월한 목사가 대형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를 바라보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이 더 바라보고 존경하게 된다. 장모님은 신앙심이 깊은 권사님인데, 우리 교단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그렇게 존경한다. 박 목사가 작고하기 전에 80세가 되어 교인들에게 "나는 80년된 죄인입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장모님은 그 말을 전하면서 박 목사님이 그렇게 휼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더 그를 존경하게 된다. 물론 박 목사님은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훌륭한 분일수록 그렇게 겸손의 말조차 할 필요가 없다. 겸손의 말을 하면 교인들의 목사를 더 존경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더 고차원적인 경건의 꼼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경건의 팡파레를 할 필요가 없다.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고 추앙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교인앞에서 좀 망가지면 된다. 좀 찌그러지면 된다. 좀 파손되고 망가진 우상을 교인들은 보기가 싫으니 숭배안한다. 그런데 목사중에 스스로 망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남자들은 지도자로서 교인앞에 망가지고 찌그러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죽기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 깨뜨려 주신다. 망가뜨려 주신다. 그래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시고 우리에게 어떤 약점을 주신다.

그래서 목회를 잘하는 비결은 약간 모자라야 한다. 2% 부족한것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비결이다. 그것이 은혜의 통로이다. 빈틈없이 완벽하고 아주 탁월한 사람과 하나님은 일을 같이 안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로채가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갈 정도로 보잘것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망가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의 약함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신비의 베일로 가린다. 교인들의 추앙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들은 자기의 탁월함을 좀 감추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약할때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서 나가고, 약하고 부족할때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완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니,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세속화와 인정욕구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우리들의 가장 무거운 짐,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는 그런 은혜를 점진적으로 체험할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잃어버리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비전과 목표가 하늘의 영광과 인정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성공과 이 땅에서의 영광으로 변해버린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안에 가장 큰 욕구중의 하나가 인정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우리안에 심리와 욕구를 계속 부추겨 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속에서 내가 좀 더 앞서고 뛰어나고 더많이 소유하고 성취함으로 내가 굉장한 사람이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평가를 받을때 우리는 살맛이 난다. 그제서야 삶의 희열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가 나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에 우리는 그것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보면 내가 중요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우리 주위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배심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심사위원으로 부터 어떻게 평가를 받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실패한 사람인가, 내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평가를 받는데 노심초사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 나자신마저도 나의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저변에 인정욕구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가련한 인정 중독자라고 할 수 있다.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한다고 인정중독이 치유되기 보다 오히려 더 악화될수 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인정욕구가 우리안에서 강하게 발동하는 것을 체험한다. 세상에서 못이룬 인정욕구를 교회안에서 주의 일을 하면서 이루어 보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받는 사람일수록 교회안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이라도 맡게되면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와 갈등은 그런 인정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식으로도 인도를 하신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자랑할것이 없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인정욕구를 목사가 되어서 이루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큰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목사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일을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가 기독교 연합단체의 회장이 되기위해 20억이라는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해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참으로 정신없는 목사이다.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교회의 이미지가 훼손되는가 하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사를 보면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게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안에 숨은 명예욕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저의 사역을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주의 사역을 해 왔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인정에 더 목말라하며 주의 일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가져본다. 사람들앞에서 우리는 쇼를 할때가 너무나 많다. 나도 치유를 받아야 할 가련한 인정 중독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은혜가 없는데 은혜있는 사람처럼 나를 꾸미는데 무진 애를 쓰게되고, 아주 괜찮고 솔직하고 의식있는 목사라는 그러한 좋은 목사의 이미지를 관리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성령, 인정욕구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

이런 인정중독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이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발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과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수있다. 그 당시에 랍비의 발앞에 앉는것은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의지적인 표현이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영광을 계속 주시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안에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 항상 임재해 계셔서 우리들이 성령안에서 주님의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언약의 일꾼들, 사역자들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수있다. 옛 언약, 율법의 중보자였던 모세도 누리지 못했던 축복이다.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지만 율법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수건에 가려진 것 처럼 온전히 계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계시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4장 6절(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과 고린도 후서 3장 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에서 말했다.

성령은 새 언약의 영이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살고 사역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보고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 탁월한 주님의 영광을 알지못하는 사람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될 수 없다.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헛된 명예를 부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가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쫓는것은, 새 언약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에 비쳐온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 그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과 은혜의 풍성함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고 도취되지 않는다면 이 복음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은 것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한것 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인 감각이 우리안에 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아름다우심과 영광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로 섬길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집요한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게된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볼때 우리안에 가장 강한 욕망인 인정욕구가 변하게 된다.

인정욕구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욕구이다. 기독교는 욕망을 부인하는 종교가 아니다. 욕망을 비우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상반된다. 욕망을 비우면 큰일난다. 더 악한 욕망 일곱이 들어와 앉을수가 있다. 기독교는 참된 욕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종교이고, 더 거룩한 욕망으로 우리를 충만케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사무치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열망이 없이 아무도 주님을 바르게 섬길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가장 사모하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목사가 된다. 영광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바라보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목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 추구하고 살며 사역을 할때 우리가 종말의 주님께 들을 칭찬을 미리 성령안에서 부분적으로 듣게된다.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의 길을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종말에 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미리 종말의 영인 성령안에서 듣게된다. 육성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그윽한 만족과 평안으로 그 음성이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이다.

세상의 인정과 박수갈채는 우리를 일시적으로 들뜨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를 더 허탈하게 만들고 공허하게 만들고 더 목마르게 만든다.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주님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평안으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것이다. 이런 은혜가 사역자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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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 박영돈 교수 |박영돈 목사님
새언약 | 조회 92 |추천 0 |2013.02.17. 12:05 http://cafe.daum.net/waterbloodholyspirit/MFfy/53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거침돌로 작용하는 것이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한편에서는 ‘은사중지론’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의 틀에 꿰맞추기 위해 성경을 조작해 버린다. 어떤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경 해석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과 전통 그리고 배워온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방언에 대해 서로 다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오순절 교회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언에 대해 긍정적인 반면, 보수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보수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는 바로 워필드를 뒤이어 은사중지론을 철통같이 고수했던 개핀 교수였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이 필자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씀의 능력이 신학적인 전통을 세뇌하는 마력에서부터 필자를 자유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은사인 방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은 자신이 꼭 체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체험한 것만 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꼭 그에 대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체험하는 것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에 치우치게 하여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방언 체험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많은 경우 ‘경험’뿐 아니라 ‘무경험’도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방언 체험의 유무가 방언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불행한 연결고리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양극화를 극복하고 방언에 대한 원만한 일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하는 이나 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 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으로서 성경적인 계시가 종결됨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 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방언이 그쳤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과 예언도 그친다는 바울의 말(고전 13:8-12 참조)을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도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신학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 말씀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 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띠었다.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난 지방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이를 보건대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하는 현상이었다.


이런 유의 방언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 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 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방언과 꼭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자들의 방언이 찬양과 함께 선포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설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외국어 방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 방언은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특별한 이벤트를 장식하는 표적의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만방에 전파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 사역을 출범했다는 것을 알리는 특별한 표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순절 후에도 그런 방언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반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심령이 아니라 ‘생각’ 또는 ‘이성’을 뜻한다. 즉, 이해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 볼 때 이 방언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한 기도의 언어 또는 영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때의 방언이 어떤 말의 형태로 나타났는지, 어떤 음률과 강세를 띠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소리가 단음절로 끊어졌는지 연음으로 유연하게 이어졌는지 아무도 들어본 사람이 없다. 녹음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과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이기에 그 진실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조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요즘 소위 방언이라고 말하는 현상 중에는 의심쩍은 것들이 적잖다.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각별한 주의와 냉철한 분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다 마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는 명수이기에 얼마든지 은사의 모조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장로의 부인은 한 기도원에서 방언을 받은 후 귀신들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 한동안 고생하다가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자 방언도 같이 사라졌다.


또한 몰몬교 같은 이단이나 타종교에도 방언과 유사한 종교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무조건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언이 과연 성령의 은사인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의 상담을 통하여 면밀히 점검해 보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앞에서 지적했듯이 방언은 모두가 다 받아야 하는 은사라는 주장만큼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없다. 다른 은사는 선택적이지만 방언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견해는 왜곡된 성경 해석이 아니고는 도저히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다. 은사는 모두 선별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필수적이라면 방언은 더 이상 은사로서의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한 것이며, 은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없다.


만약 방언을 모든 신자가 다 받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실제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 중에서 방언을 부인하고 구하지 않는 이들은 못 받는다고 쳐도 방언을 간절히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그런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와 같은 직분과 은사는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서 된 것이다. 모두 순수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물론 어떤 은사는 받는 자의 소원과 간구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면서 애타게 구해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애먹이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구하기 전에라도 자연스럽게 주어지며, 구하면 필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방언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방언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기로 하신 선물이 아닌 것을 한사코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또 방언을 더 이상 하나님이 기꺼이 주시는 선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방언을 달라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인위적으로 방언을 유도해 내려고까지 하는 것은 그 선물을 뺏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미치는 폐해는 엄청나다. 교인들 모두가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사 체험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완전히 획일화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이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대단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도 자신이 누리는 은혜를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위는 자신의 잘못된 확신을 따라 다른 이들을 강압하려는 교만의 발로다.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우월 의식을 낳고, 그 반대급부로 영적인 열등 의식과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며, 급기야는 그로 인한 갈등과 혼란을 조장한다.


이런 문제는 실제 교회 현장에서 더 역력히 드러난다. 방언이 모든 신자의 영적인 성숙에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은 자연히 방언을 못 하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열등한 신자로 강등시킨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떻게 영적인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모든 신자에게 필히 있어야 할 은사이기에 강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그렇게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가 유행병처럼 번져간다. 그런 집회에서는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라는 진리는 묵살되어 버리고 방언을 꼭 받게 하려는 인간의 강권이 은사를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압도해 버린다. 마치 방언이 인간에 의해 유도될 수 있는 것처럼 방언 전도사들은 가는 곳마다 방언의 돌풍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선물을 안겨 준다.


일단 한 사람만 방언을 받게 하면 다른 이들의 시기심이 자극되어 방언하는 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부패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열심을 부치기는 방언 전도사들에 의해 촉발되고 조작되는 일종의 영적인 집단 흥분 상태를 방불하게 한다. 이것을 은사를 나눠 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공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해 대는 것을 삼가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을 모아놓고 강권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모두 방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처사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주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방언을 받게 부추기고 강권한 예나 그런 행위를 권장한 말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령의 순리적인 역사하심에 배치되는 행위를 통해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하기 쉽다.


그런 집회의 진정성은 그 열매로 드러난다. 집회에 모인 교인들이 모두 방언받기를 강권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방언이 터지지 않는 사태가 항상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교우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히 소외당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모든 신자에게 예비된 하늘의 선물이 자신들만 비켜가는 것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들에게만 싸늘하게 등을 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을 느낀다. 이런 집회는 어떤 이들에게는 흥분과 기쁨을 안겨주지만, 다른 교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회의를 안겨 줄 수 있다.


자신의 일시적인 희열과 감정적인 도취를 맛보는 대가로 다른 형제들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김우현 씨는 방언이 작고 소외된 이들을 세우는 귀한 은사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에서는 도리어 방언이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된 이들을 더 소외시키고 짓밟을 수 있다.


방언 집회가 성행하며 방언 전도사들이 맹활약을 하면서 이런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경은 공중에서 방언을 마구 해대는 것을 철저히 금하였다. 방언 집회를 인도하는 이들은 이 성경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과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방언 집회로 인한 좋은 열매까지 싸잡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방언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고 그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과 실제는 매우 다를 수 있다.


방언 체험의 경우가 특별히 그렇다. 왜냐하면 방언은 그 특성상 가장 전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과 센세이션과 표적을 동반하기에 그 당시에는 굉장한 부흥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시간을 두고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집회에서 방언받은 이들의 삶에 얼마나 지속적인 변화가 나타나는지 조사해 보았는가? 그런 변화의 열매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물론 그런 열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방언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열심과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삶과 신앙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꾸준히 말씀에 따라 성령과 동행하는 신앙 훈련을 대신하는 임시변통의 은혜 체험으로 그치고 만다.


김우현 씨의 글에는 방언이 단숨에 하늘 문을 열어 충만한 영적 세계로 도약시키는 마술과 같은 은혜로 과대선전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방언 체험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놀라운 변화와 부흥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대에 사로잡히게 한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는 수많은 교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부진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에 여념없는 목사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흥분과 감흥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이 있어야만 신앙을 지탱하고 열심을 내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방언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적이기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개인과 교회에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이 있느냐를 먼저 계산하는 이 시대의 실용주의 가치관과 이런 대중의 심리와 관심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과 영적 현상을 대중화하여 큰 이익을 챙기는 기독교 상업주의가 한국 교회에 방언 열풍을 몰고 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이 지금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흥 코드’라고 보는 견해는 지극히 피상적이면서도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침체한 한국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기 위한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충족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방언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


방언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방언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방언은 하나님의 귀한 은사다(고전 12:4-28 참조). 방언을 성경적인 지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고전 14:4 참조) 그로 인해 공동체의 성숙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의 남용은 교회를 허물지만 방언의 선용은 교회를 세운다.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 인격자와, 형제들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건전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가는 이런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은사를 조금이라도 과시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다 자신과 같은 은사를 체험해야 한다고 강권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방언함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위축되며 혼란스러워할까 우려하여 공중에서 방언하는 것을 절제한다. 방언하는 이들 중에 이렇게 겸손하고 훌륭한 교인들도 많다. 이들처럼만 한다면 방언으로 인해 무슨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바울이 가르친 바이다. 방언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하나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뜻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만, 어떤 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방언하는 이가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하기 쉽다고 말할 수 없다.


뉴욕에 있는 어느 한인 순복음 교회 집사가 필자가 잘 아는 목사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집사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많은 집사들 중에 유일하게 방언을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방언을 구했음에도 하나님이 방언을 안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척이나 답답해하며 그런 하나님을 향해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장로교 목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목사는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은 방언이 꼭 있어야 신앙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기에 방언을 주시지만, 집사님은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기도와 경건 생활을 잘하실 수 있을 것 같기에 방언을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사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기질과 성향과 사명과 상황에 꼭 필요하고 알맞은 은사를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은혜를 주기 원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없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시기에 그 은사를 안 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최상의 은혜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영적인 성숙에 꼭 필요한 은사이기에 방언을 못하면 뭔가 영적으로 부족하고 열등한 신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방언을 못 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한 이들도 많다.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방언을 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영성과 신앙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성 프란체스코, 칼뱅,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이들이 그랬고, 한국 교회에서도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등 수많은 훌륭한 목사들과 교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방언 체험의 유무는 결코 신앙 성숙이나 영적인 충만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언의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누린다는 점이다(고전 14:14-18 참조). 그로 인해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이 방언을 체험함으로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신앙의 열심이 자극된다. 기도를 잘 안 하던 이들, 5분만 기도해도 기도할 것이 없던 이들이 기도를 자주, 오래 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영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니 기도를 10분도 못하는 교인들은 방언이라도 받아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만하다. 거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기도를 안 하던 이가 방언을 체험한 후 방언으로는 기도하지만 여전히 생각과 이성을 통해 기도하는 데는 전혀 진보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마음(생각, 이성)이 열매 맺지 못한다고 했다(고전 14:14 참조). 생각 없이 기도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이지적인 관계가 성숙하지 못한다.


방언을 말하는 신비한 현상에 탐닉하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정작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할 수 있다. 또한 방언 체험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반면에, 항상 그런 표적과 증거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영적인 미성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의 실제적인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방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랫동안 방언을 해 온 어느 목사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볼 만하다.


“나는 방언을 30년 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방언이 100퍼센트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 마음이 주께로 향해 있다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실이 방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언하는 이들 중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까지 이른 이들은 실제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는지 잘 모르며 시간만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아 방언을 그렇게 즐겨 하지 않는다. 방언 집회에서 방언과 같은 현상을 처음 체험했을 때는 열광했던 이들도 별 효력이 없으니 차츰 열심이 식어지고 방언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방언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권면은 자신의 방언이 과연 성령이 주신 은사인지 냉철하게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은사를 주신 뜻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유용한 방편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 이 은사로 인해 영적인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이들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림으로써 은혜가 충만하여 교우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미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들이 누리는 방언의 은사가 더 빛을 발하게 되며 다른 교우들도 그런 은혜 체험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한 아집을 내려놓고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겸손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방언은 하나님이 교회에 내려주신 귀한 은사라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 현상이 다 성령의 은사인지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하지만, 교인들이 하는 방언을 다 싸잡아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것이라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라고 했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멸시하고 평가절하하거나 방언하는 이들을 광신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방언의 은사를 잘 분별하여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선도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은사 체험을 존중하며, 제대로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그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돌아와 서로 화합할 때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더 이상 갈등의 요인이 아니라 축복의 방편이 될 것이다. 방언 열풍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뒤흔드는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화평하게 하는 성령의 미풍이 한국 교회를 부드럽게 감싸안을 것이다.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IVP)에서

 

예언자인가 점쟁이인가?


  얼마 전 텔레비전의 한 프로에 오왕근이라는 청년 점술가가 출연하였다.

그는 같이 출연했던 연예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쪽지게처럼 잘 집어내고 그들의 미래를 예언했다.  

모두 그의 신통력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어떤 이를 보면 그의 운이 바닥을 치고 있고 재물이 흩어지며 사람들도 그를 배신하고 떠나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오왕근씨는 17살 때부터 이런 신기가 나타났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한 선생님을 보니 그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자신도 그런 기이한 체험은 처음이고 그것이 미래를 예시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아 말해주지 못했는데 그 선생님이 자신이 본대로 성수대교에서 대형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그는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이 사회의 정치, 경제의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주식이 언제 오르고 내릴지,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어디에 투자해야할지를 예언한다.


  필자는 그를 보면서 요즘 한국교회에서 활개치고 있는 자칭 예언자들이 얼마나 이 점술가와 흡사한지를 새삼 발견케 되었다. 어떤 예언자라는 이들은 기독교라는 탈을 쓴 점쟁이와 다름없다. 자녀들이 어떤 학교에 가야하고 무슨 사업을 해야 하며 심지어 어디로 이사해야 하는지 까지 예언한다.

그러니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나 미래가 불안하고 궁금할 때 점쟁이를 찾아가듯이 이런 예언자들을 찾아다니는 교인들이 꽤 많다.

 

 필자와 상담했던 한 아가씨는 예언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여전도사가 자신이 사귀고 있는 청년이 결혼할 대상이 아니니 헤어져야 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 여전도사의 예언을 거의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그녀의 어머니가 한사코 그 청년과 결별할 것을 종용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하다고 했다.

 

그 청년이 불신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혼인해서는 안 될 만한 부적격 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결혼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이다.

단순히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점괘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일까?


  성경에서 이런 유의 예언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모르게 하셨다.

그래서 내일 일과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오늘 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보다는 우리의 앞날을 미리 아는 안전을 원한다.

 이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미래를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도록 우리 휘하에 두고 싶은 교만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소치이다.


  미래를 미리 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불가능해진다.

그와 더불어 믿음의 삶 속에서 누리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그 선택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성숙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래를 훤히 내다본다면, 우리는 이미 정해져 어찌 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운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 이제 달리 선택할 자유는 전혀 없다.

 우리의 미래가 탄탄대로임을 안다면 우리는 안일과 나태에 빠질 것이며, 반대로 고통스럽고 암울한 미래가 보인다면 자포자기 한 채 그 불운한 말로를 기다리며 공포와 불안에 떠는 삶을 살 것이다.

 

알려진 미래는 더 이상 우리의 꿈과 비전을 펼칠 수 있는 자유의 전당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꿈을 앗아가고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미래가 우리에게 알려질 때 미래는 모든 희망과 믿음과 가능성에 대해 닫힌 냉혹한 운명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개척자가 아니라 그 미래에 의해 철저히 억압당하는 비참한 노예로 전락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자유를 보장해주시고 믿음과 소망의 삶이 가능케 하셨다.

희망찬 미래를 바라보며 사랑의 수고와 책임을 다하는 인간성숙의 기회를 제공하셨다.

 이렇게 미래를 우리 앞에 열린 상태로 놔두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춘 우리의 비전과 갈망에 의해 우리의 미래를 빚어가게 하신 것이다.

미지의 미래가 우리 앞에 하얀 백지처럼 펼쳐 있기에 우리는 그 화폭 위에 우리의 비전과 꿈의 나래를 한껏 펼쳐나간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우리에게 숨기심으로 장래에 예비해 두신 풍성한 은혜의 깜짝쇼를 즐기게 하신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우리 앞에는 놀라운 자유의 길이 열려있다.

우리가 결혼할 대상은 무한히 많다.

이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고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도록 운명론적으로 점지해 두셨다고 생각하기에 그 사람을 꼭 찾아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금지된 미래를 엿보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거나 예언자들의 신통한 예측을 듣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 예정하신 것을 우리가 미리 다 알지 못하도록 예정하셨다. 마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자유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책임 있게 우리의 자유를 활용한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결혼대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둘 다 좋은 상대이고 호감이 간다고 하자.

실제 이런 상황은 드물겠지만 한 번 가정을 해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에 한 사람은 분명 하나님이 정해둔 나의 배필이 아니니 그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속출해내야 할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예언자를 찾아가야 하나? 열심히 기도하고 최대한 지혜를 모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노력이 물론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판단을 인도하여 점차 어느 한 쪽에게 더 끌리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애써 봐도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두 사람 중 누구를 택하든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당신의 미래를 펼쳐갈 수 있는 지혜이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여기에는 전혀 유도리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 예를 들어 어떤 직장을 택하며 누구와 결혼하며 자녀를 몇을 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뜻이 꼭 이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못박아버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저 길을 택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미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융통성을 허용하신다.

어떤 길을 택하든 하나님을 중심한 삶의 목적과 원리 가운데 내린 선택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미래로 우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두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두셨다.

당신은 A와 결혼할 수도 있고 B와 결혼할 수도 있다.

둘 다 하나님이 금하신 결혼대상이 아니라면 누구와 결혼하든 하나님께서 그 결혼을 축복할 것이며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것이다.

혹여 A가 하나님이 정하신 배필인데 B와 결혼했기에 내 결혼생활이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깨끗이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가운데 내려진 선택이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당신의 지혜를 최대한 활용하여 내린 판단에 근거한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는 미래를 미리 훔쳐보게 하여 하나님이 뜻하신 모든 유익을 앗아가며 자유를 박탈하고 믿음과 소망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한 마귀의 짓이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띠고 있다.

이 구속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 예언하는 예를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박영돈 교수


박영돈 교수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지난해 10월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아멘넷은 주강사 박영돈 목사(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의 세미나 내용를 시리즈로 소개한바 있다.

관련 세미나 기사 보기
- 박영돈 목사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 ①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②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 ①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 ②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설교와 성령충만
- ③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성령충만한 목사
- 신비체험을 원하는 교인을 어떻게 지도하나?


다음은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0장 38-42절을 본문으로 "더 좋은 섬김의 길"이라는 제목의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내용으로 우리는 목회자를 의미한다. 박 목사는 본문의 마르다를 통해 주님의 방식대로가 아닌 자기의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는 목회자들을 조명했다.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인 교회의 세속화를 인간본연의 인정의식에서 찾았으며, 목회자의 탁월성조차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나심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목사의 비전과 목회관이 교회가 나갈 방향을 결정한다. 목사의 경건과 영성이 교회 전체의 영적인 분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목사 자신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가 하는 것이 목회의 핵심이다.

본문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좋은 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는 두종류의 교인으로 비유가 되곤한다. 성경공부시간에 참석하지 않고 주방에 가 일하는 교인은 마르다와 같이 문제가 있는 교인으로, 성경공부 시간에 만사를 제쳐놓고 말씀을 공부하는 교인은 마리아와 같은 착실한 교인으로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이 말씀때문에 종종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은 성경공부에 들어가고 싶은데 누군가 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방에 들어가 일하는 교인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 말씀을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다 아실것이다.

주님과 조용히 교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봉사하는 것 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주님을 섬기는 봉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계신것은 아니다. 주님에 대한 포커스를 잃어버린 봉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 오신 주님을 극진하게 대접하려는 마르다의 의도와 정성은 귀한것이다. 문제는 마르다는 먼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신대로 주님을 섬긴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기방식대로 주님을 섬긴것이다.

주님의 포커스와 사역자의 포커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것이다. 주님은 그런 대접과 섬김을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주님은 마르다 자신을 원하셨다. 마르다와 교제를 원하셨다. 마르다가 먼저 자신을 알기를 원하셨다. 주님은 먼저 마르다에게 은혜를 베풀고 마르다를 섬겨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마르다의 섬김의 방식은 주님이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주님을 알게 하는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마르다의 모습에서 율법주의자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자기가 수고한것에 대한 보상의 심리, 그리고 공로의 심리, 그리고 그에 대한 우월의식에 빠진 그녀를 보게된다. 마르다는 주님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주님께 자신의 수고를 알아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수고하지 않는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처럼 수고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인을 비난한 것 처럼 마르다도 자신의 동생을 비난하고 있다.

마르다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우리는 천성적으로 지독한 율법주의자이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후,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속에서 주님을 섬기는 과정속에서 율법주의로 치우치기 쉽다.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신앙생활의 과정속에서 다시 도지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안에 율법주의적인 성향이 성취지향적인 욕망을 부추긴다. 우리안에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의 눈을 멀게한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이신지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신지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나의 야먕과 계획과 방식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나의 야망을 주님의 뜻으로 착각하고 혼돈할때가 많다.

주님의 일을 하지만 우리들의 포커스가 주님이 아니라 일. 그리고 사역의 성과일때가 많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실제 주님의 영광은 파이널이 아니라 세미 파이널인 경우가 많다. 배후에 숨겨진 파이널,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영광이고 나의 성공일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을 자주 잊어버린다. 주님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를 잘해야겠다, 설교의 성과를 좀 올려야겠다는 성취지향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 그 욕망에 눈이 멀어서 주님을 잊어버릴때가 많다.

주님을 위한 사역이 아이러니 하게도 주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릴수가 있다. 목사에게 사역의 우상화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우리의 모든 사역이 주님이 아니라 사역에 오리엔트가 되버린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설교를 만들어내기 위해 읽고 공부한다. 기도를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귐을 위해서 하기보다 사역을 감당할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끌어당기는 방편으로 하게 된다. 교인들을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서 대하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가 목회에 필요한 이유

우리는 하나님과 성령님까지도 도구화 하려고 한다.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끌어당겨서 목회의 성공과 교회성장을 꾀하려 한다. 주님은 우리를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과의 깊은 영적인 사랑의 교제이다. 우리사역의 열매가 없고 능력이 없는 원인은 주님과의 깊은 교제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경건의 피상성이 아닌가 생각한다.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깊어질수록 우리의 사역이 더 열매를 맺게되고 우리의 메세지가 은혜로워지게 된다. 우리는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만큼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주님으로 부터 섬김을 받는 만큼 섬길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사랑을 받는 만큼 사랑을 베풀수 있고, 주님으로 부터 은혜와 생명을 공급받는 만큼 우리도 생명을 흘러 보낼수가 있다. 목회사역에 나가는 것은 많은데 들어오는 것은 별로없기에 영적인 적자에 허득이고 있다. 그래서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마르다와 같이 많은 염려와 근심속에서 주님을 섬기게 되고 결국에 영적으로 고갈됨으로 교회 전체에 영적인 피폐함을 몰고 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 목회에서 가장 우선적인 일은 자기를 돌보는 일, 자기를 관리하는 일 즉 '자기 목회'라고 할 수 있다. 자기목회에 실패한 사람은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목회가 사실 가장 어렵다. 목사에게 가장 어려운 대상은 목사 자신이다. 자신때문에 가장 힘들때가 많다. 나의 욕심, 야망,  교만, 조급증, 자기중심적인 성정, 인격의 미숙함때문에 목회에 어려움을 격을때가 많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이다. 어떤 시인이 말한대로 나는 내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이런 골치아픈 나를 내가 어찌할수 없다. 주님이 나를 목회하실수 있어야 한다. 주님이 나를 섬겨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을 주님이 져 주셔야 한다. 목회의 가장 무거운 짐, 나의 옛 자아를 주님이 매일 져주셔야 우리들은 목회를 할 수 있다. 옛 자아가 십자가에 하나님의 은혜로 게속 못박혀야, 우리들의 야먕과 교만이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온전한 목회를 감당할수 있다. 옛 자아의 짐을 매일 지어주시는 십자가의 은혜로만 우리는 목회사역을 감당할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수적인 것이다.

십자가의 가장 큰 축복은 나를 가장 무거운 짐에서 자유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죽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내안의 그리스도가 살게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풍성하게 나타난다. 내가 십자가에 처리되어야 나를 통하여 주님의 부활의 생명력이 교회안에 밀려들어오게 된다. 목사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목사의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어야 교회가 부활의 생명력으로 충만해서 교회가 새로워지고 부흥하게 된다.

2% 부족한 목사를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

우리의 옛 자아의 정욕과 교만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동시에 우리의 탁월함도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설교를 잘해야 한다. 목사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영적인 깊이가 있어야 한다. 경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탁월한 것이 주님이 일을 하시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학적인 영적인 탁월함으로 인해 교인들의 관심이 하나님 보다 나에게 어느 정도 쏠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탁월함으로 인해 우리들은 주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일부분을 가로채게 된다. 목사가 헌금을 도독질 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가.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것은 그와 비교할수 없는 악질적인 죄악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더 훌륭한 목사일수록, 더 거룩한 목사일수록, 더 설교를 잘하는 목사일수록 그래서 교인들에게 많은 감동과 은혜를 끼치는 목사일수록 마귀적인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자인 동시에 우상숭배를 은근히 유도하는 존재이다. 우상으로 숭배받고 싶은 교주 근성이 우리안에는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 주의 종들인 목사님들을 존경은 해야 하지만 너무 추앙하면 안된다.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를 존경해야 하지만 너무 우상시해서는 안된다. 주의 종은 주님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손가락이 너무 영광스러운 곤란하다. 사인판은 심플할수록 간단할수록 좋다. 사인판이 너무 화려하고 특출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사람들이 사인판을 보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그래서 대형교회의 유명하고 탁월한 목사가 대형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목사가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를 바라보지 말라"고 하면 교인들이 더 바라보고 존경하게 된다. 장모님은 신앙심이 깊은 권사님인데, 우리 교단에서는 박윤선 목사를 그렇게 존경한다. 박 목사가 작고하기 전에 80세가 되어 교인들에게 "나는 80년된 죄인입니다. 나를 바라보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장모님은 그 말을 전하면서 박 목사님이 그렇게 휼륭한 분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렇게 말하면 교인들이 더 그를 존경하게 된다. 물론 박 목사님은 진심으로 우러나와서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훌륭한 분일수록 그렇게 겸손의 말조차 할 필요가 없다. 겸손의 말을 하면 교인들의 목사를 더 존경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더 고차원적인 경건의 꼼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경건의 팡파레를 할 필요가 없다.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보고 추앙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교인앞에서 좀 망가지면 된다. 좀 찌그러지면 된다. 좀 파손되고 망가진 우상을 교인들은 보기가 싫으니 숭배안한다. 그런데 목사중에 스스로 망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남자들은 지도자로서 교인앞에 망가지고 찌그러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죽기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금 깨뜨려 주신다. 망가뜨려 주신다. 그래서 바울에게 가시를 주시고 우리에게 어떤 약점을 주신다.

그래서 목회를 잘하는 비결은 약간 모자라야 한다. 2% 부족한것이 하나님께 사용되는 비결이다. 그것이 은혜의 통로이다. 빈틈없이 완벽하고 아주 탁월한 사람과 하나님은 일을 같이 안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 가로채가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갈 정도로 보잘것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은 망가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의 약함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신비의 베일로 가린다. 교인들의 추앙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나 복음 사역자들은 자기의 탁월함을 좀 감추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약할때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통해서 나가고, 약하고 부족할때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완전히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니, 우리는 우리의 약함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자랑할수 있어야 한다.

세속화와 인정욕구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우리들의 가장 무거운 짐, 옛 자아가 십자가로 처리되는 그런 은혜를 점진적으로 체험할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게 된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것은 신앙의 종말론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잃어버리고 현세지향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의 비전과 목표가 하늘의 영광과 인정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성공과 이 땅에서의 영광으로 변해버린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안에 가장 큰 욕구중의 하나가 인정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어려서 부터 내가 사랑받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치열한 경쟁사회가 우리안에 심리와 욕구를 계속 부추겨 왔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경쟁속에서 내가 좀 더 앞서고 뛰어나고 더많이 소유하고 성취함으로 내가 굉장한 사람이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평가를 받을때 우리는 살맛이 난다. 그제서야 삶의 희열과 환희를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평가가 나의 존재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에 우리는 그것에 목을 매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보면 내가 중요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우리 주위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배심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심사위원으로 부터 어떻게 평가를 받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실패한 사람인가, 내가 좋은 사람인가 아니면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평가를 받는데 노심초사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 나자신마저도 나의 존재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삶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저변에 인정욕구가 강하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가련한 인정 중독자라고 할 수 있다.

목사가 되어 주의 일을 한다고 인정중독이 치유되기 보다 오히려 더 악화될수 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다 보면 인정욕구가 우리안에서 강하게 발동하는 것을 체험한다. 세상에서 못이룬 인정욕구를 교회안에서 주의 일을 하면서 이루어 보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세상에서 인정을 못받는 사람일수록 교회안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이라도 맡게되면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와 갈등은 그런 인정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세상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실패해서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식으로도 인도를 하신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자랑할것이 없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그런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인정욕구를 목사가 되어서 이루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큰교회를 이루고 성공한 목사라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일을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세속화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한국의 어떤 유명한 목사가 기독교 연합단체의 회장이 되기위해 20억이라는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해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참으로 정신없는 목사이다. 명예욕에 사로잡히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교회의 이미지가 훼손되는가 하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목사를 보면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게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안에 숨은 명예욕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저의 사역을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보다는 보이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주의 사역을 해 왔다.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보다 사람들의 영광과 인정에 더 목말라하며 주의 일을 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가져본다. 사람들앞에서 우리는 쇼를 할때가 너무나 많다. 나도 치유를 받아야 할 가련한 인정 중독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은혜가 없는데 은혜있는 사람처럼 나를 꾸미는데 무진 애를 쓰게되고, 아주 괜찮고 솔직하고 의식있는 목사라는 그러한 좋은 목사의 이미지를 관리하는데 무의식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성령, 인정욕구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

이런 인정중독에서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이 주님과의 깊은 교제이다. 마리아와 같이 주님의 발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과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수있다. 그 당시에 랍비의 발앞에 앉는것은 랍비의 제자가 된다는 의지적인 표현이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앞에 앉아서 주님의 얼굴을 주님의 영광을 계속 주시하는 것이다.

지금은 성령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안에 그리고 우리 바로 앞에 항상 임재해 계셔서 우리들이 성령안에서 주님의 얼굴에 반사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새언약의 일꾼들, 사역자들이 누릴수 있는 특권이라고 할수있다. 옛 언약, 율법의 중보자였던 모세도 누리지 못했던 축복이다. 모세가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했지만 율법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수건에 가려진 것 처럼 온전히 계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계시되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후서 4장 6절(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과 고린도 후서 3장 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에서 말했다.

성령은 새 언약의 영이다. 성령안에서 우리가 살고 사역하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보고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영광보다 탁월한 주님의 영광을 알지못하는 사람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될 수 없다. 복음 사역자가 될 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헛된 명예를 부인할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가 이 세상의 영광과 명예를 쫓는것은, 새 언약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에 비쳐온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 그 아름다우심과 사랑스러우심과 은혜의 풍성함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고 도취되지 않는다면 이 복음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은 것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말한것 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름다움에 대한 영적인 감각이 우리안에 소생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아름다우심과 영광에 우리의 마음이 매료되지 아니하고 주님을 바로 섬길수 없다. 세상의 영광과 명예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집요한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게된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주님의 영광을 계속 바라볼때 우리안에 가장 강한 욕망인 인정욕구가 변하게 된다.

인정욕구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욕구이다. 기독교는 욕망을 부인하는 종교가 아니다. 욕망을 비우라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상반된다. 욕망을 비우면 큰일난다. 더 악한 욕망 일곱이 들어와 앉을수가 있다. 기독교는 참된 욕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종교이고, 더 거룩한 욕망으로 우리를 충만케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진정한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 사무치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런 열망이 없이 아무도 주님을 바르게 섬길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가장 사모하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목사가 된다. 영광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 바라보고 추구하게 될때 우리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목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인정만 추구하고 살며 사역을 할때 우리가 종말의 주님께 들을 칭찬을 미리 성령안에서 부분적으로 듣게된다. "내가 너를 인정하노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내가 너의 길을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종말에 들을 하나님의 음성을 미리 종말의 영인 성령안에서 듣게된다. 육성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그윽한 만족과 평안으로 그 음성이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이다.

세상의 인정과 박수갈채는 우리를 일시적으로 들뜨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우리를 더 허탈하게 만들고 공허하게 만들고 더 목마르게 만든다. 우리에게 결코 만족을 안겨주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주님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면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평안으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것이다. 이런 은혜가 사역자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란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③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성령충만한 목사

2012/11/10 (토) 17:11 ㆍ추천: 0  ㆍ조회: 362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다. 아멘넷은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라는 내용을 3번에 걸쳐 소개하고 있으며 이번이 마지막 이다. 이번 기사에는 성령안에 있을때 나타나는 성령의 7중사역,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인지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마지막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성령의 7중사역

우리가 옛사람일때 율법안에 있을때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다. 율법의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는 7관점으로 요약할수 있다. 어둠, 속박, 비참, 쉼이 없는 수고, 불모, 헐벗음, 무력함이다.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율법안이 아니라 은혜안에 있게 되었다. 성령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새언약의 언약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새언약의 은혜를 7가지 포인트로 요약할수 있는데 7중축복이라고 한다.

1. 조명(illuminate)=흑암의 권세에 있는 우리들에게 성령의 진리의 빛을 '조명'해 주신다.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시고, 그 은혜의 풍성과 자비하심을 알게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알게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감각을 살아나게 하셔서 그것에 반응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아름다움과 은혜에 매료가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루미네이션에 의해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보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세상의 보화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하시고, 우리들의 욕망과 가치관과 삶의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해 주신다.

2. 자유(ilberate)=자유함의 은혜이다. 사단이 우리를 속박하는 유일한 무기와 권세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어떤 다른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 다른것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 다른 것은 항상 비진리이고 거짓말이고 왜곡된 진리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에게 진리의 빛이 비추어오면 거짓말로만 지탱되는 우리안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다. 북한체제가 폐쇄되었기에 거짓말로 지탱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개방되어 서방의 모든 정보들이 밀려오게 되면 북한이라는 체제가 지탱되지 못한다. 거짓말로 지탱되는 우리안의 어둠의 왕국에 진리의 빛이 비치게 되면 어둠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고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3. 치유(heal)=죄의 속박가운데 망가진 인생, 비참한 인생이 성령의 은혜로 치유함을 얻게 된다. 온전함을 얻게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행하신 메시야로서 대표적인 사역 3가지는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들린 이들을 자유케 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이 3가지가 사도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공관복음에 특별히 주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왜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안식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좋은 창조를 축하하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망가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비참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주님이 병자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심으로 원래 창조하신대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여 주셔서 하나남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일을 골라서 병자들을 고치신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을 회복해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전시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것이다.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서의 사역을 다 끝내시고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사역, 전인적인 치유, 심령의 치유를 예표한다고 볼수 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치유가 심령의 치유라고 할수 있다. 지금도 성령이 육신을 치유하신다. 그러나 치유를 받아도 또 약해지고 병들기에 온전한 치유는 종말에 가야 완성된다. 육신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치유는 심령의 치유이다. 우리 모든 교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마음이 병든 사람이 많다. 마음이 심히 아픈 사람들이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보더 더 심각한 심령 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다. 심령이 완전히 파쇄된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생명의 근원으로 부터 끓어지게 된것이다. 하나님이 분리된 것이 지옥이다. 우리 심령에 지옥의 권세가 임한것이다. 사탄의 억압에 짓눌린 마음의 상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를 주관하는 세력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실존의 특성은 불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새로운 삶의 특성은 평강이다.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새언약의 내용이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판에 성령님이 심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 불손중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창조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법이 우리안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신다. 심령이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의 심정이 다시 연합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심령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에게 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물댄 동산과 같이 되는 것이다.

4. 안식(rest)=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평안한 가운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열매를 맺게되고 최대의 능률이 오르게 된다. 설교를 잘하는 비결은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목회를 잘하는 비결도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평강의 영이시다. 우리들에게 이런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과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평안한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5. 번성(flourish)=번성함이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되면 9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게되면 아름다운 사람, 존귀한 사람이 된다. 6. 아름답게 하심(beautify)=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기 위함이다. 어떤 목사가 좋은 목사이고 훌륭한 목사인가. 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목사이다. 그 아름다움을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 그것을 본받도록 목회해야 한다.

7. 능력있게 하심(empower)=마지막이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부여 받음으로 그들이 복음의 증인이 될수 있었다. 그들안에 일어난 자유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많은 사람안에 다시 일어날수 있도록 생명의 재생산의 사이클이 일어날수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음사역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말과 이론만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창조의 강력한 능력이 동반해야 교회가 새로워 질수 있고 교인들이 변화가 될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전파하는 새언약의 복음에 분명히 새언약의 7중사역이 함께 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이러한 놀라운 셩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바라면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교회인 동시에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이다. 구약의 성전의 구조를 보면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임하고 그리고 분향단에서 향이 계속 올라가고 구름이 내려오는 구조이다. 그래서 분향이 끓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내 기도가 분향향 같아서 라고 했다. 분향은 지금의 기도를 뜻한다고 볼수 있다. 주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이고 주님의 집인 교회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집이라고 할수 있다. 기도가 계속 올라갈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임재, 말씀, 성령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이슬비 처럼 임한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 않는다. 말씀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먼저이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도 효력이 없다. 그래서 목회의 두축은 말씀과 기도이다. 교회를 세워가는 두 기둥이 말씀과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가 약해지니 다른 방법 또는 그에 대한 어떠한 대처할 방법을 찾으며 이상한 성령운동을 자꾸 기웃거린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말씀과 기도사역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치유도 일어날수 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며, 기적도 일어날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만으로는 목회가 안된다고 하는 목사도 있는데 말씀으로 제대로 안하니 안되는 것이다.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목회하는 것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성령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일까. 탁월한 설교은사를 가졌다고 그 목사가 성령충만하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교만하고 자아가 충만한 사람일수도 있다. 아주 뛰어난 은사와 능력을 가졌다고 성령충만한 목사라고 할수 없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을 닮은 성품의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열매를 맺는 것이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이것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다. 우리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안에 성령을 내재하게 하신 목적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가장 중요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은사, 초자연적인 은사에 너무 치중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은사운동에 대한 반발로 전통적인 교회는 은사를 또 평가절하하는 것이 문제이다. 은사의 남용을 보고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쳐서는 안될것이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성령충만의 온전한 증거는 열매 플러스 은사이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교회는 열매와 은사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열매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할수 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능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밑천이 있어야 하는 것 처럼 사랑을 하려면 은사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인들을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설교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목회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은사가 없어서 교인들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놓는다면 아무리 목사가 인간적으로 교인들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참으로 교인들을 사랑하는 목사라고 할수 없다. 교회에 설교와 가르침과 목회의 은사가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수 없고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할수 없다. 그래서 우리 사역자들은 열매뿐만 아니라 은사도 추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 바울 사도가 더 큰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명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속에 푹 잠기게 된다. 우리가 예수로 점점 물들어 간다. 성령이 우리의 전인을 계속 관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 빛을 우리의 마음과 인격속에 계속 투사해 주심으로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이 점점 찍혀 나오게 한다.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게 한다. 그래서 쇳덩이를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불이 쇠를 관통해서 얼마후에 불과 쇠가 한덩어리가 된다. 이것처럼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성령이 하나가 된다. 성령이 우리의 영을 계속 관통하고 투사해서 예수의 인격과 형상을 계속 찍혀 나오게 하는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상에도 예수의 온유함과 진실함과 거룩함이 배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몸뚱아리도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이동하는 성전이 된다. 그래서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의 몸이 성령의 은혜가 흘러나가는 출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입을 열면 은혜와 진리가 흘러나오고 눈빛에서는 사랑과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가 입을 열면 은혜로운 권세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된다. 우리의 눈빛에서 뭔가 영적인 것이 전달된다. 눈빛에서 사랑도, 미움도, 사람을 깔보는 것도, 비웃음도, 의심하는 것도, 경계하는 것도 신비하게 전파된다. 눈빛으로 은혜도 전파된다고 볼수 있다.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얼굴빛과 인상도 달라진다고 한다. 잘알려진 로보트 머레이 매케인는 29살에 별세했다. 그가 설교하기 위해 강당에 올라오면 교인들이 그 모습만을 보아도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서 은혜와 감동으로 울곤 했다고 한다. 이정도 되면 목회하기 쉬울것이다.

제가 청년때 신앙생활하던 교회 목사님은 오래전에 작고하셨다. 그 목사님은 학식이 별로 없고 언변도 별로 없다. 그분은 일제시대에 만주 봉천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고초를 겪었다. 그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너무 자주했다. 그래서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만주 봉천을 한번 돌고 오면 끝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분에게 들은 설교중 기억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최고의 설교를 그분에게서 들었다. 그분의 모습이 메세지이다. 그분을 만나면 하나님을 느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목사님 앞에 있으면 교인들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과거에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었다. 그런 목사님들이 학식은 없었어도 한국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목사님이 저의 모델인데 저에게는 교인들이 접근하기를 두려워 한다. 인상이 목사안같고 검사같다고 한다. 통렬히 회개하며 목회를 하는데 그래서 요즘 좀 나가진 것이 이렇다. 내가 지나가면 찬바람이 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목사의 임재자체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 성령충만한 목회라 할수 있다.

성령의 교제와 은사활용

성령충만한 교회는 교제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은 교제의 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합해서 하나님을 섬길때 그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신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진정한 교제를 누리기가 어렵다. 공동체를 체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교제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소그룹 운동을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 평신도의 피동성이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교인들이 청중과 관람객과 학생의 위치에서 신앙생활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잠재력을 교회를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평신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탈렌트를 활용해서 교회를 섬기고 서로를 섬길때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교인들이 그런 봉사의 일을 할때 더 기도를 하게되고 성령충만을 구하게 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될수가 있다. 그래서 성경이 설정한 평신도의 위치를 회복해주어야 한다. 교인들을 작은 목자, 작은 사역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특권이자 의무

마지막으로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내재하는 이유는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고 우리를 항상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는 역사를 방해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들은 간헐적으로 성령의 감동과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는다. 설교할때 성령의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문제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다. 아멘넷은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라는 내용을 3번에 걸쳐 소개하고 있으며 이번이 마지막 이다. 이번 기사에는 성령안에 있을때 나타나는 성령의 7중사역,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인지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마지막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성령의 7중사역

우리가 옛사람일때 율법안에 있을때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다. 율법의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는 7관점으로 요약할수 있다. 어둠, 속박, 비참, 쉼이 없는 수고, 불모, 헐벗음, 무력함이다.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율법안이 아니라 은혜안에 있게 되었다. 성령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새언약의 언약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새언약의 은혜를 7가지 포인트로 요약할수 있는데 7중축복이라고 한다.

1. 조명(illuminate)=흑암의 권세에 있는 우리들에게 성령의 진리의 빛을 '조명'해 주신다.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시고, 그 은혜의 풍성과 자비하심을 알게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알게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감각을 살아나게 하셔서 그것에 반응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아름다움과 은혜에 매료가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루미네이션에 의해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보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세상의 보화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하시고, 우리들의 욕망과 가치관과 삶의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해 주신다.

2. 자유(ilberate)=자유함의 은혜이다. 사단이 우리를 속박하는 유일한 무기와 권세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어떤 다른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 다른것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 다른 것은 항상 비진리이고 거짓말이고 왜곡된 진리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에게 진리의 빛이 비추어오면 거짓말로만 지탱되는 우리안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다. 북한체제가 폐쇄되었기에 거짓말로 지탱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개방되어 서방의 모든 정보들이 밀려오게 되면 북한이라는 체제가 지탱되지 못한다. 거짓말로 지탱되는 우리안의 어둠의 왕국에 진리의 빛이 비치게 되면 어둠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고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3. 치유(heal)=죄의 속박가운데 망가진 인생, 비참한 인생이 성령의 은혜로 치유함을 얻게 된다. 온전함을 얻게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행하신 메시야로서 대표적인 사역 3가지는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들린 이들을 자유케 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이 3가지가 사도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공관복음에 특별히 주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왜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안식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좋은 창조를 축하하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망가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비참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주님이 병자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심으로 원래 창조하신대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여 주셔서 하나남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일을 골라서 병자들을 고치신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을 회복해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전시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것이다.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서의 사역을 다 끝내시고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사역, 전인적인 치유, 심령의 치유를 예표한다고 볼수 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치유가 심령의 치유라고 할수 있다. 지금도 성령이 육신을 치유하신다. 그러나 치유를 받아도 또 약해지고 병들기에 온전한 치유는 종말에 가야 완성된다. 육신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치유는 심령의 치유이다. 우리 모든 교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마음이 병든 사람이 많다. 마음이 심히 아픈 사람들이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보더 더 심각한 심령 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다. 심령이 완전히 파쇄된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생명의 근원으로 부터 끓어지게 된것이다. 하나님이 분리된 것이 지옥이다. 우리 심령에 지옥의 권세가 임한것이다. 사탄의 억압에 짓눌린 마음의 상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를 주관하는 세력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실존의 특성은 불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새로운 삶의 특성은 평강이다.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새언약의 내용이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판에 성령님이 심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 불손중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창조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법이 우리안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신다. 심령이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의 심정이 다시 연합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심령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에게 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물댄 동산과 같이 되는 것이다.

4. 안식(rest)=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평안한 가운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열매를 맺게되고 최대의 능률이 오르게 된다. 설교를 잘하는 비결은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목회를 잘하는 비결도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평강의 영이시다. 우리들에게 이런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과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평안한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5. 번성(flourish)=번성함이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되면 9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게되면 아름다운 사람, 존귀한 사람이 된다. 6. 아름답게 하심(beautify)=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기 위함이다. 어떤 목사가 좋은 목사이고 훌륭한 목사인가. 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목사이다. 그 아름다움을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 그것을 본받도록 목회해야 한다.

7. 능력있게 하심(empower)=마지막이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부여 받음으로 그들이 복음의 증인이 될수 있었다. 그들안에 일어난 자유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많은 사람안에 다시 일어날수 있도록 생명의 재생산의 사이클이 일어날수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음사역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말과 이론만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창조의 강력한 능력이 동반해야 교회가 새로워 질수 있고 교인들이 변화가 될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전파하는 새언약의 복음에 분명히 새언약의 7중사역이 함께 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이러한 놀라운 셩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바라면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교회인 동시에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이다. 구약의 성전의 구조를 보면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임하고 그리고 분향단에서 향이 계속 올라가고 구름이 내려오는 구조이다. 그래서 분향이 끓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내 기도가 분향향 같아서 라고 했다. 분향은 지금의 기도를 뜻한다고 볼수 있다. 주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이고 주님의 집인 교회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집이라고 할수 있다. 기도가 계속 올라갈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임재, 말씀, 성령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이슬비 처럼 임한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 않는다. 말씀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먼저이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도 효력이 없다. 그래서 목회의 두축은 말씀과 기도이다. 교회를 세워가는 두 기둥이 말씀과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가 약해지니 다른 방법 또는 그에 대한 어떠한 대처할 방법을 찾으며 이상한 성령운동을 자꾸 기웃거린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말씀과 기도사역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치유도 일어날수 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며, 기적도 일어날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만으로는 목회가 안된다고 하는 목사도 있는데 말씀으로 제대로 안하니 안되는 것이다.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목회하는 것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성령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일까. 탁월한 설교은사를 가졌다고 그 목사가 성령충만하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교만하고 자아가 충만한 사람일수도 있다. 아주 뛰어난 은사와 능력을 가졌다고 성령충만한 목사라고 할수 없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을 닮은 성품의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열매를 맺는 것이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이것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다. 우리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안에 성령을 내재하게 하신 목적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가장 중요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은사, 초자연적인 은사에 너무 치중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은사운동에 대한 반발로 전통적인 교회는 은사를 또 평가절하하는 것이 문제이다. 은사의 남용을 보고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쳐서는 안될것이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성령충만의 온전한 증거는 열매 플러스 은사이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교회는 열매와 은사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열매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할수 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능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밑천이 있어야 하는 것 처럼 사랑을 하려면 은사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인들을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설교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목회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은사가 없어서 교인들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놓는다면 아무리 목사가 인간적으로 교인들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참으로 교인들을 사랑하는 목사라고 할수 없다. 교회에 설교와 가르침과 목회의 은사가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수 없고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할수 없다. 그래서 우리 사역자들은 열매뿐만 아니라 은사도 추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 바울 사도가 더 큰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명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속에 푹 잠기게 된다. 우리가 예수로 점점 물들어 간다. 성령이 우리의 전인을 계속 관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 빛을 우리의 마음과 인격속에 계속 투사해 주심으로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이 점점 찍혀 나오게 한다.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게 한다. 그래서 쇳덩이를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불이 쇠를 관통해서 얼마후에 불과 쇠가 한덩어리가 된다. 이것처럼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성령이 하나가 된다. 성령이 우리의 영을 계속 관통하고 투사해서 예수의 인격과 형상을 계속 찍혀 나오게 하는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상에도 예수의 온유함과 진실함과 거룩함이 배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몸뚱아리도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이동하는 성전이 된다. 그래서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의 몸이 성령의 은혜가 흘러나가는 출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입을 열면 은혜와 진리가 흘러나오고 눈빛에서는 사랑과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가 입을 열면 은혜로운 권세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된다. 우리의 눈빛에서 뭔가 영적인 것이 전달된다. 눈빛에서 사랑도, 미움도, 사람을 깔보는 것도, 비웃음도, 의심하는 것도, 경계하는 것도 신비하게 전파된다. 눈빛으로 은혜도 전파된다고 볼수 있다.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얼굴빛과 인상도 달라진다고 한다. 잘알려진 로보트 머레이 매케인는 29살에 별세했다. 그가 설교하기 위해 강당에 올라오면 교인들이 그 모습만을 보아도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서 은혜와 감동으로 울곤 했다고 한다. 이정도 되면 목회하기 쉬울것이다.

제가 청년때 신앙생활하던 교회 목사님은 오래전에 작고하셨다. 그 목사님은 학식이 별로 없고 언변도 별로 없다. 그분은 일제시대에 만주 봉천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고초를 겪었다. 그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너무 자주했다. 그래서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만주 봉천을 한번 돌고 오면 끝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분에게 들은 설교중 기억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최고의 설교를 그분에게서 들었다. 그분의 모습이 메세지이다. 그분을 만나면 하나님을 느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목사님 앞에 있으면 교인들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과거에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었다. 그런 목사님들이 학식은 없었어도 한국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목사님이 저의 모델인데 저에게는 교인들이 접근하기를 두려워 한다. 인상이 목사안같고 검사같다고 한다. 통렬히 회개하며 목회를 하는데 그래서 요즘 좀 나가진 것이 이렇다. 내가 지나가면 찬바람이 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목사의 임재자체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 성령충만한 목회라 할수 있다.

성령의 교제와 은사활용

성령충만한 교회는 교제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은 교제의 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합해서 하나님을 섬길때 그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신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진정한 교제를 누리기가 어렵다. 공동체를 체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교제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소그룹 운동을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 평신도의 피동성이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교인들이 청중과 관람객과 학생의 위치에서 신앙생활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잠재력을 교회를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평신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탈렌트를 활용해서 교회를 섬기고 서로를 섬길때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교인들이 그런 봉사의 일을 할때 더 기도를 하게되고 성령충만을 구하게 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될수가 있다. 그래서 성경이 설정한 평신도의 위치를 회복해주어야 한다. 교인들을 작은 목자, 작은 사역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특권이자 의무

마지막으로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내재하는 이유는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고 우리를 항상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는 역사를 방해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들은 간헐적으로 성령의 감동과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는다. 설교할때 성령의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문제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②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설교와 성령충만

2012/11/05 (월) 16:08 ㆍ추천: 0 ㆍ조회: 130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라는 내용을 3번에 걸쳐 소개한다. 성령충만은 과연 무엇인가. 오해로 가득찬 성령충만의 세계를 소개한다. 2번째 소개 내용은 목회자에게 꼭 필요한 "설교와 성령충만"이라는 주제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20세기에 들어와서 강해설교의 붐이 일어났다. 이는 설교학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성경본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중대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강해설교의 발전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설교에 있어 성경말씀만큼 성령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그만큼 강조하지 못한것이다.

과거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항상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성경말씀도 아무 효력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성경을 잘 강해하면 자동적으로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성경을 탁월하게 강해한 설교가 왜 아무런 은혜가 없고 맥이 없는가. 반면 성경강해가 좀 엉성한데도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하는 설교가 있다.

성경본문에 충실한 강해설교와 성령이 함께 하는 설교가 서로 다른것인가. 그렇지 않다. 양자택일할 필요는 없다. 성경말씀과 성령이 함께 결합할때 엄청난 영적 시너지 효과를 자아낸다. 우리교회가 성경본문에 충실한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발견했다면 한걸음 더나아가 설교사역에 있어서 성령사역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는 설교사역

어떻게 성령의 능력에 이끌리는 설교사역을 감당할수 있는가. 우리 설교사역을 위해서 성령을 도구화하려면 안된다. 오히려 우리가 성령님이 자유롭게 편하게 사용할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위해서 우리들이 성령님에게 온전히 점령당해서 사로잡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권세가 있는 말이 되고 우리가 전파하는 설교를 통해 성령의 7중사역(3편에서 나온다)이 역사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내가 쉽게 은혜를 받을뿐만 아니라 쉽게 은혜를 전달할수 있다.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쉽게 성령의 감동과 영감을 받게 된다.

말씀을 읽을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씀을 들을때 많은 영감이 온다. 그것뿐만 아니라 기도할때 일상속에서도 좋은 아이디어와 메세지와 지혜가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설교를 준비하는 모든 과정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그래서 설교에 있어서 우리의 노력과 성령의 역사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성령님은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우리들이 열심히 성령을 따라서 설교를 준비하는 만큼 성령님이 우리의 설교를 축복하시는 경우가 많다.

게으른 설교가 되는 위험성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다 보면 게을러질수 있다. 우리의 역할을 제대로 안하면서 성령님만 전적으로 의지한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강단에 올라가면 성령이 메세지를 주신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그런 사람을 향하여 성령님은 메세지를 주시는데 "이 게으른 놈아" 하는 메세지를 주신다고 했다. 얼마나 좋은 자료가 많은가. 우리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좋은 설교를 만들수 있는데 우리 목회사역이 너무 바쁘기도 하지만 너무 게으른 것 같다.

성령안에 영적인 재충전

육신의 힘으로 수고하는 것과 성령안에서 수고하는 것은 다르다. 수고하는 것도 이상하게 쉼이 있다. 그래서 성령안에서 안식을 누린다.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과도한 긴장과 피로하는 법이 없이 주의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 성령안에서 안식하면서 일하기를 원하신다.

어떤 목사의 좌우명은 넘치게 일하지 말고 넘쳐 흐르자이다. 멋있는 말이다. 넘쳐 흐르는 삶은 과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으니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불가항력적으로 온다. 성령안에서 일을 하면 게속 영적 재충전이 된다. 하이브리드 차처럼 배터리가 자동적으로 재충전되는 것 처럼 우리가 성령안에서 영적으로 재충전된다는 것이다.

삶으로 준비하는 설교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는 설교를 하려면 설교준비뿐만 아니라 성령과 동행하는 삶으로 설교준비를 해야 한다. 어떤 목사는 설교단위에 '위험'이라는 큰 표지판을 붙여놓았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는 거룩하고 순전한 사람만이 이곳에 서서 설교할수 있다는 경고이다. 죄속에 살면서 설교자가 설교할수 없다. 죄속에 살면 죄가 설교단에 따라 올라가서 말씀의 권세를 빼앗아 간다. 설교자의 교만과 불결함이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방해하고 성령의 빛과 자유와 능력을 빼앗아 간다. 그래서 범죄한 삼손과 같이 무력한 자신을 설교단에서 체험한다.

강단에서 모든 것이 들통날수 있다. 평상시에 성령님과 함께 걸어가는 설교자가 강대상에 올라갈때 성령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보통때는 아무렇게나 정신없이 성령을 거스리면서 살다가 설교하기 전에 발작적으로 기도한다고 성령의 사람으로 돌변할수 없는 것이다. 설교자의 바르지 못한 삶이 강단에 교회전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탁월한 설교를 못해도 한주간 성령과 동행하는 이의 설교를 교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햇다.

성령은 자유로운 설교를 하게 만든다

성령이 설교하는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먼저 설교자를 자유하게 한다. 스폴전은 자유한 가운데에서만 설교자들이 자유의 복음을 가장 잘전할수 있다고 했다. 자유의 복음을 전하면서 죄의 결박에 매여있는 것 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했다. 두려움과 긴장과 불안에서 자유하게 해주신다. 설교하면서 설레지 않고 당황하지 않는다. 차분하고 온유하고 여유가 있다. 자유의 복음을 자유한 모습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전하는 메세지의 내용뿐만 아니라 전하는 자세 모습 인상 그리고 목소리도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커뮤니케이션에서 바디랭기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내용보다 더 크다고 말한다. 당황하고 경직되고 불안한 모습 흥분하고 혈기찬 음성은 자유의 복음과 상충된다. 메시지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또한 성령은 설교자를 죄성에서 자유하게 한다. 내가 잘해야 겠다 또는 설교에 성과를 거두어야 하겠다 하는 강박에서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겠다는 죄성에서 우리를 자유케 한다.

건전한 두려움과 긴장

이런 욕망의 뒷면은 두려움이라 할 수 있다. 설교를 못해서 내가 교인들 앞에서 망가지면 어떻하나, 내가 창피를 당하면 어떻하나 하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런 육신적인 두려움과 긴장에서 성령님은 우리를 자유케하시는 동시에 건전한 두려움과 긴장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다. 설교하는데 건전한 긴장이 있어야 한다.

세월이 지나면서 설교자가 노련해 질수록 영적인 긴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성령이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실수 없다. 설교를 오래한 어떤 목사님은 사람들과 잡담을 하다가 또는 탁구를 열심히 하다가 바로 강단에 올라가 아무 준비없이 설교한다. 강단에서 내내 열쇠를 꼼지락 하면서 성의없이 설교를 한다.

성령이 주는 자유와 겸손

성령은 설교자의 기억력을 새롭게 한다. 혀를 풀어주어서 유창하게 한다. 설교를 준비하고 작성할때 미치 정리되지 않은 것이 설교중에 놀랍게 풀리는 경우가 있다. 설교준비시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 오르게 하신다. 어떤경우에는 준비한 설교내용을 떠나서 성령이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럴때 우리는 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자유할때 우리는 말실수를 한다. 자유하면 좀 까분다. 그럴때 더 겸손하고 더 조심해야 힌다.

온유한 음성의 설교

성령이 우리의 몸에 힘을 준다. 설교하고 나면 피곤이 가시고 더 힘이 난다. 그래서 어떤 주간에 설교안하면 설교안해서 좋다고 했는데 주일저녁에는 더 피곤함을 느낀다. 반면 주일에 힘들게 설교를 했는데 주일 저녁에는 하나님안에서 쉼을 누리는 경우도 있다. 성령은 음성과 제스추어, 그리고 표정까지 자유롭게 하신다.

되도록 강대상에서 마이크가 있기에 소리를 지르지 않고 온유한 음성으로 설교하는 것이 좋다. 자칫 소리를 지르면 육신의 혈기가 표출될수 있다. 부드러운 음성이 뼈를 부르뜨린다고 했다. 부드러운 음성이 설득력이 있다. 부드러운 음성이 주님의 성품과 성령님의 성품과 그리고 복음의 세미한 음성과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다.

얼마전에 어떤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큰교회 노련한 목사였다. 얼마나 온유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설교를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내용은 엄청난 교만과 자기자랑으로 가득차 있었다. 저는 그 부드러운 음성이 얼마나 역겹게 들렸는지 모른다. 이런 역겨운 온유함을 흉내내면 안된다.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연스러운 온유함으로 설교해야 한다.

성령에 지배당하는 설교의 역사

성령이 설교를 통해서 온 회중에게 은혜를 공급한다. 새언약의 7중축복이 임한다. 암울한 현실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영육간의 은혜가 공급되게 된다. 그래서 설교하고 나면 내가 가진 고민이 풀렸다며 어떻게 목사님은 나의 사정을 그렇게 잘아셔서 설교를 통해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시는가 라고 하는 교인이 있다. 전혀 모르는데 이러한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억압된자가 자유하게 되고 망가진 인생이 치유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바르트가 말한 것 처럼 설교는 하나의 사건이다. 은혜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늘이 열리는 놀라운 사건이 설교중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스폴전과 로이드 존스 같은 이가 말하는 것 같이 설교자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은 필수적이다. 무디가 성령충만을 받은후에 설교사역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무디가 성령을 독점했느냐고 하니 다른 사람이 무디가 성령이 독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무디를 독점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성령에게 완전히 지배를 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의 욕망을 십자가에 처리를 해야 할것이다.

죽쑤는 설교, 이상한 성령님의 은혜

설교를 잘준비하고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버려진것 처럼 힘겹게 고전하면서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에서 이런 체험을 말하는데 소위 죽쑤는 설교를 하고 다음주에는 교인들이 줄어들겠다고 생각했는데 교인들이 더 많이 오고, 그리고 어떤 주간은 정말 성령의 은혜가운데 자유한 가운데 능력있게 말씀을 전하여 다음주는 더많은 교인을 기대했는데 줄어든다며 이것이 하나님과의 로맨스라고 했다.

우리 설교자가 항상 준비를 잘했다고 성령을 의지했다고 능력있게 자유함 가운데 설교를 할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혼자 버려진 것 처럼 힘겹게 성령이 나와 함께하지 않는 것 처럼 고전하면서 설교할때가 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거두어 가는 이상한 은혜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은혜가 우리에게 영적으로 우리에게 큰유익이 된다. 이런 실패를 통해 자기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성령의 은혜를 더 의존하게 된다. 실패했을때 자기의 내면세계를 돌아보게 되며 우리들이 점검할수 있게 된다.

이런 실패의 경험이 죽쑤는 설교가 교인들에게도 유익이 된다. 교인들이 목사가 죽쑤는 설교를 할때 저것은 목사의 실력이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롭게 설교를 했을때 저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래서 설교를 목사의 탁월함과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는 것을 교인들도 알아챈다. 그래서 목사를 너무 추종하고 바라보지 않게 된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때 테난트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었다. 교회에서 항상 능력있는 설교를 했는데 오랫동안 교회에 나오면서도 목사의 능력있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테난트 목사가 죽쑤는 설교를 듣고 깨지고 회개하고 개종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설교가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는 설교임을 그가 깨닫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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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라는 내용을 2번에 걸쳐 소개한다. 성령충만은 과연 무엇인가. 오해로 가득찬 성령충만의 세계를 소개한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성령충만과 목회

성경적인 의미로 목회를 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능력있는 사역, 풍성한 삶의 비결은 무엇인가. 너무 싱거운 대답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들의 삶과 사역이 달라질것이다. 구약에서 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만이 주의 일을 감당할수 있었다. 구약의 선지자가 그랬고, 신약의 사도들도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한 후에야 복음사역을 능력으로 수행할수 있었다. 하늘에서 능력이 임할때 까지 그들은 기다려야 했다. 그들에 임한 성령충만은 복음사역을 위한 능력부여였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성령충만한 사람들로 주로 묘사가 되어있다. 베드로, 요한등 제자들과 바울이 성령충만했다는 언급을 자주 발견한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15번 등장한다. 그중 14번을 누가가 사용했기에 누가의 전용어였다. 오직 한번만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5장 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의 표현을 사용했다. 누가복음에 4번, 사도행전에 10번의 표현이 등장한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해서 교회를 세우지만 모든 사건과 상황에서 제자들을 인도하고 주관하여 복음사역을 주도하는 이는 성령이라고 하는 것을 부곽시키기 위해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성령이 주관하셨다, 성령이 그들을 인도하셨다, 성령이 그들의 사역에 능력을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선지자와 제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복음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감당할수 있다. 목회는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다. 목사가 목회를 하지만 성령에 온전히 사로잡혀서 우리를 통해 성령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거침없이 흘러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성령의 뜻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과 야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육신의 열심과 힘을 빼서 성령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실수 있도록 내가 옆으로 비켜서야 할것이다. 이렇게 성령님이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는 사람으로 훈련되지 않은채 목사가 되는 것이 현대교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학교육을 받아서 정식으로 목사 라이센스를 받았다고 해서 목사의 자격을 갖춘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성령의 기름부음 곧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신학교가 이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양산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래서 과거 서기관처럼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많은데 사역의 열매가 없고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목사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라이센스를 따는 것이 시급하다. 알 에이 토레이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설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했는데 극단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목사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을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이다. 목사에게 최고의 욕은 성령없이 목회하라는 말이라는 말도 있다.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충만이 유행어 처럼 사용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어떤이는 성령으로 충만하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신비체험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광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충만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이들을 보고 성령충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그런 이들처럼 성령충만하기를 교인들이 꺼려하게 된다.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분명한 이해와 설명없이 남발하면 혼란과 오해가 야기된다.

에베소서 5장 18장(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에서 성령충만은 구약적인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구약을 읽다보면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했다는 말씀을 접하게 된다. 바울 사도가 이 성전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1절(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에 바울사도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성전이다.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니라 성령이 친히 지으신 이동성전이다. 구약의 성전보다 더 업그레이드 된 영광스러운 성전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구약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한 것 처럼 영광의 영이 가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하고 있다.

구역에 또 하나의 성전 이미지가 등장한다. 에스겔서 47장에 에스겔의 환상에서 본 성전의 문지방에서 물이 계속 흘러나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고 그 물이 흘러가는 곳 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리고 나무의 과실이 풍성히 맺히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성전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래서 충만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했다. 헬라어의 충만이라는 단어는 가득 채워지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넘친다는 의미가 있다. 교회가 성령의 생명수로 충만해서 흘러넘침으로 온누리를 적시고 만물을 충만케 하는 교회 종말론적인 비전을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23절(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 유명한 교회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성령충만의 또 다른 의미, 비유적인 의미를 찾아볼수 있는데 에베소서 5장 18절에 성령충만이 술취함과 비교되어 있다. 술에 취하면 알콜의 영향과 주관을 받는 것 처럼 성령충만을 받게되면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해서 주관을 받고 지배를 받게된다. 성령충만의 비유적인 의미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두가지 의미를 종합해서 성령충만을 정의한다면 우리 개인과 교회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성령에 의해서 주관되고 인도함을 받아서 성령의 생명수를 세상으로 흘러보낸다는 의미라고 볼수 있다. 또 성령충만은 명령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 성전이 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은혜로운 사실을 전지하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성전의 이미지가 변천되는 것을 우리는 잘안다. 성전의 전신은 성막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실체로 오셨다. 그래서 성전 다음의 온전한 성전이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전의 마침인 동시에 온전한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요소는, 첫째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육체가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가 가득하다. 다른 요소는 제사이다. 주님이 자신의 육체를 영원한 희생제물로 바쳐서 하나님에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지냄으로 제사 제도를 폐지하시고 손으로 만든 성전이 더 이상 필요없게 하셨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다. 21절에는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고 말씀이 이어지고 있다. 유대인들이 온전한 성전인 예수님의 육체를 죽이면 파괴하면 우리 주님이 3일만에 부활하셔서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겠다는 하는 말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새로운 성전이 교회이다. 우리들이다. 더 영광스러운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약교회가 인간이 보기에는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공동체 인것 같지만 하나님 구원의 경륜의 관점에서 보면 더 영광스러운 성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에 전초된 세워진 탁월한 성전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전으로서의 교회

신약시대에 우리는 목회자들은 솔로몬이 지은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보다 더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건축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삼위 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영적인 성전을 지으라고 콜링을 받았다. 그래서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성전을 짓는 일이 목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성전의 청사진을 먼저 발견해야 한다.

한국교회 문제는 설계도가 없이 교회가 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설계도가 없이 지어진 건물이 부실할수 밖에 없는 것 처럼 교회의 분명한 청사진 없이 지어져 가는 교회가 온전할수 없는 것이다. 좋은 예술품이 존재하기 전에 그것은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머리에 존재하듯이 좋은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비전에 먼저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는 말씀속에서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비전과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꿈을 교인들에게 전해서 교인들과 함께 그 꿈을 공유하고 그 꿈을 꾸고 교인들을 설득하고 동력화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전을 지어가는데 앞장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교회에 성령이 충만하면 그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구약에는 신비한 구름이 가득했다고 했다. 지금도 신비하고 영험한 구름이 교회에 가득하다면 얼마나 놀라겠는가.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질것이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예배를 드릴것이다. 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신비한 구름을 보기위해 사람들이 몰려올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런식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계시하지 않으실까. 구원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됨에 따라 주님의 임재 방편도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성령이 상징적으로 임재했다. 구름과 불이라는 성징을 통해 백성가운데 임재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완성됨에 따라서 이제는 상징이 아니라 상징이 가르켰던 영적인 실체, 영광의 영이 직접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사인이 나타났다. 불의 혀, 강한 바람의 사인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모인 사람들이 오랜 세월 구약에서 부터 잘알던 성령의 상징적인 임재였다.

바람과 불이라는 상징으로 임재했던 성령님이 이제는 영적인 실체로 임했다고 하는 분명한 표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성령님이 더 탁월하고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런데도 아직도 열등한 방식으로 가시적인 증거와 상징을 통해 성령의 임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구원역사를 되돌려서 구약시대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에는 지금도 구름기둥이 나타난다는 교회가 있지만 이단적인 교회이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데 가시적인 구름을 통해서 임재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방법으로 우리가운데 당신의 임재를 나타나고 계시다. 어떻게 나타나고 계시는가. 영은 보인다는 말이 있다. 영혼이 어떻게 보이는가. 영혼을 가졌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말을 가졌다는 것과 같다. 말을 통해서 영혼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저의 말을 계속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저의 영혼과 제가 추구하는 것, 그리고 영적인 상태를 알수가 있다. 그래서 계속 사람에게 말을 하고 설교한다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사람들앞에 벌거벗기는 일이기에 어떻게 보면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그의 얼굴과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내신다. 설교는 성령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얼굴, 성령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 성령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수있는 설교는 듣기가 어렵다. 그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이다. 오히려 설교에서 미혹의 영의 모습이 살포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주 가벼운 인격의 소유자, 잔꾀로 가득한 목사의 얼굴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욕망으로 일그러진 목사의 얼굴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방송에 등장하는 목사중에 간혹 그런 분이 있는데 교인들이 영적으로 어두워서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우리들의 영혼이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못한다. 성령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는 설교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교회에 구름이 가득하면 그것을 통해 무엇을 알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호기심과 두려움을 자극할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신비주의적인 신앙에 빠뜨릴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주님이 누구이신지,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무엇인지, 주님이 우리들에게 어떠한 일을 행하여 주셨는지, 어떠한 은혜를 주시는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당신을 우리들에게 계시하여 주시니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사역과 그 은혜와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한 영광과 그 은혜의 풍성과 탁월함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무엇인지, 너무나 당신의 뜻과 존재를 우리들에게 계시해 주시니 우리는 구약 성도들보다 훨신 더 영광스러운 빛가운데 지금 신앙생활을 한다고 볼수 있다.

우리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면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것으로 그 증거가 나타난다. 그래서 성령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에베소서 5장 18-21절 말씀과 골로새서 3장 16-17절 말씀은 평행구절이라고 할수 있다.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는 교회는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현상이 많이 나타나는 교회가 아니라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교회라고 할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복음이 바로 전파되는 곳에 교회가 있고 그곳에 성령이 계시다고 말했다. 성령충만은 신비충만이 아니고 열정충만도 아니고 감정충만도 아니고 말씀충만이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인격으로 교회에 임재하실뿐만 아니라 행동하시는 인격으로 우리가운데 임재하신다. 당신의 말씀이 꼭 우리가운데 성취되도록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 전능하신 인격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의 핵심내용은 '새언약'이다. 새언약의 은혜를 우리가운데 실현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다. 신구약 성경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새언약이다. 구약은 새언약에 대한 약속이며 신약은 새언약의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언약의 중보이다. 내 피를 새언약을 위한 피라고 하셨다. 성령님은 새언약의 영이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새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시는 분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에는 성령의 7중사역,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 성도의 교제와 은사활용, 성령충만의 특권과 의무등의 내용으로 진행됩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강의는 두번째 주제강의인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다. 이 강의는 박영돈 목사의 저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요약한것으로 한국교회의 잘못된 성령운동을 지적하며 성경적으로 성령의 특성을 해석한 내용이다. 다음은 두번째 내용이다.


영적탈선의 요인들

성경적인 이해를 따지기 보다는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시대의 실용주의적인 가치관과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대중을 선동하는 표풀러리즘이 이런 성령운동을 부추켰다고 볼수있다. 이와 더불어 어떻게 하던 교인의 열심을 자극하여 교회를 속히 부흥시켜 보려는 사역자들의 열망이 절묘하게 맞물려서 빚어낸 현상이라고 볼수있다. 어떤 목사는 온갖 세미나를 돌아다니며 쓰러뜨리는 기술이나 방언과 예언하는 법을 습득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전수받아 정체된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안성 모수양관에서 이런 집회가 열렸을때 수백명의 목회자들이 모였다. 집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둘씩 짝을 짓게하고 입을 벌려서 아말감으로 때운 이를 확인하게 하고 "예수이름으로 아말감은 금니로 변할지어다"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금니로 변했다는 환성이 터져나왔다. 처음에는 그런 현상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막상 눈앞에서 그런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고 한다. 기적앞에서는 너무도 상식적인 판단마저도 무기력해질수 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다. 성경은 사단도 이적과 표적을 행해서 미혹케하니 조심하라고 했다.

미국에서 어떤 그리스도인 여성은 마술적인 힘을 행사하는 한 주술사에게 놀랍게 치유함을 받았다. 두발의 길이가 5센티 차이가 나는데 주술사를 통해 놀랍게 치유함을 받았다. 그후에 그녀는 심한 우을증과 심리적인 압박감으로 시달렸는데 담임목사에게 고백하고 회개하자 심리적인 압박이 떠나게 되었다. 그순간에 발의 길이는 원상태로 돌아갔다. 표적과 기사는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이슬람의 성자로 알려진 바바 화리드는 죽은자도 살리고 불치의 병을 고치고 마른 대추나무 열매를 황금덩이리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였다고 얼려졌다. 그러므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성경적으로 분별하고 검증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 어떤 선교지에서 사람들이 나쁜음식으로 인해 잇몸이 상해서 이빨이 다 빠졌다. 이가 다시 날수가 없는 상태인데 선교사의 기도로 인해 기적적으로 생니가 돋아났다고 한다. 그것은 기도로 통한 하나님의 긍휼의 나타남,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가난해서 의료적인 혜택을 받을수 없는 곳에 기도를 통해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이를 요술과 같이 노란색 이로 둔갑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볼수 없고 미혹의 영의 장난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와 질서의 영이시기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없이 기적을 남발해서 우리를 혼란과 무질서속에 빠뜨리게 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지금도 기적을 행하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기적을 경제적으로 행하신다. 분명한 경륜적인 목적과 의미가 없이 기적을 마구 행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면 기적을 아끼신다. 그것은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데 인색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가운데 살도록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 뜨림으로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시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가 육체가운데 살도록 이런 세상의 질서속에서 살도록 정하였다. 그런데 주님이 기적을 행함으로 당신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면 우리들은 엄청난 혼란속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표적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수는 있을수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을 주님앞에 인도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거침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을 일격에 날려버림으로 그 표적앞에 믿지 않을수 없도록 그들을 굴복시킬수는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 그들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순종과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 낼수는 없다.

만약 기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사는 그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그로인해 유대인들은 더욱 강팍해지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을 하게된다. 그 이후부터 복음서에서 기적은 무대뒤로 사라지고 에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건이 전면에 부곽되는 것을 볼수있다.

죄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그들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순종의 반응을 이끌어 낼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만이 완고한 죄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나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표적과 기사를 쫓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다.

지금도 십자가를 피상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의 복음보다 마술과 같은 표적으로 사람을 끌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이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기적과 은사를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강조가 십자가에 대한 포커스를 흐리게 하는데 있다고 볼수있다.

복음사역의 편법을 동원하려는 유혹

성령운동 하는 이들이 그토록 초자연적인 은사와 기적을 갈구하는 것은  사람들을 제압하고 콘트롤하기에 그보다 더 효과적인 방편이 없기 때문이다. 말씀은 아무리 전해도 사람들이 눈하나 까닥 안하지만 놀라운 표적앞에 사람들이 쉽게 압도된다. 표적이 사람들을 간단하게 굴복시키는 비결이라고 할수 있다. 여기에는 사람들의 불순종과 완고함을 오래참고 기다리는 고통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광적인 열심과 교인들의 자원과 에너지를 유도하는데도 효과만점이다. 몇년동안 아무리 말씀을 열심히 전해도 교인들이 좀처럼 변화되지 않을때 설교자는 지치고 탈진하게 된다. 복음전파 사역이 에너지와 정력과 시간을 마냥 소모하는 일같이 느껴진다. 자신의 청춘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왜 이렇게 맥없는 말을 주셨는가, 불을 좀 내려 주시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복음전파의 성과가 신속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하는 조급증과 성취지향적인 성향이 맞물리면 성령의 원칙보다 변칙을 따라서 목회하려는 사람들을 끌고 조종하려는 유혹이 극대화된다. 많은 사역자들이 복음만을 전하며 불순종하는 이들을 오래참고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을 견디지 못하고 쉬운길을 택하려고 한다. 편법을 동원하려고 한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성령운동은 성령님을 따라가는 느리고 힘든길을 회피하고 속성반을 택하려는 방편으로 이용된다. 종교의 주식시장에서 기적만큼 인기있는 상품은 없다. 말씀은 아무리 전해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지만 병고치는 능력이라도 받아서 암환자라도 고쳐서 그것이 소문이 나면 텅빈 교회당이 가득할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런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워 진다. 복음사역자들은 비록 느릴지라도, 사역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정도를 따라서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역을 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했던 것 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참음으로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사역이 우리의 에너지와 시간과 우리들의 모든것을 소모하는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소모하는 것 같은 우리들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구체적으로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고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무한히 탕진하고 낭비하는 분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낭비하는 사랑과 소모하는 사랑이 우리의 소모하는 것 같은 복음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증거가 된다고 볼수있다. 이런 낭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를 설복시킨것처럼 우리들의 소모하는 것 같은 복음사역이 탕자들을 결국 설복시켜서 주님앞으로 돌이키게 한다. 목사 자신도 하나님의 오래참음의 사랑을 실천하고 본받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다.

성령은 우선적으로 기적과 표적이 아니라 복음의 세미한 음성가운데 역사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약하고 미련해 보이듯이 복음의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방법이 약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약하심이 구원이 되는 것 같이 성령님의 약하심이 우리들에게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강압적으로 다루시지 않으시고 부드럽게 대함으로 우리가 충분히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신다. 우리가 얼마든지 불손종할수도 있게 하셨다. 성령님은 단숨에 우리들의 완고함과 강팍함을 꺽어서 우리를 하루아침에 뒤집어 놓지 않으신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수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고집을 부리면 성령님은 우리들에게 져주신다. 오래참고 기다려 주신다. "성령님도 자신의 성질은 고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말이지만 일리가 아주 없는 말은 아니다. 강압적으로 우리들의 못된 성질을 성령님은 뜯어고치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자원해서 간절히 원할때까지 성령님은 기다려주신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 삶에 신물이 나야, 죄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남김없이 들이킨후에 죄의 쓴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더 이상 비참할수 없을정도로 비참하고 곤고해져야 죄에서 돌이키려고 한다. 죄의 삶이 아직 숨쉴 여유가 있는 동안 우리는 성화의 길로 들어서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성화는 더디게 진행된다. 평생동안 성화가 거의 진행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 완고한 옛자아가 성령님을 평생동안 이겨버린 것이다. 굉장히 센 사람들이다.

우리교회에 변화가 안된 교인이 많은 것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오래참고 기다리신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만큼 성령님이 온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분명한 반증이라고 할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완악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어떤 신학자는 2천년 교회역사는 성령의 수난받은 역사라고 했다. 우리 개인의 신앙역사도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오래 고난을 받는 역사라고 할수있다. 성령님이 그동안 우리안에서 우리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심히 고난을 받아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평생을 걸쳐서 그들의 마음의 강팍함과 완고함으로 성령을 거스리고 근심시키며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한순간도 그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무한한 인내와 온유로 기다리신다. 이 성령님의 오래참으심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성령님이 오래참으시고 기다려 주셨다. 나의 많은 죄악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너무 인자하심으로 나를 대해주셨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한다.

지금 우리는 전무후무한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사야 32장 15절에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라고 나온다. '부어주다'의 히브리어는 특별한 의미를 띄고 있는데 벌거벗기다, 비우다, 바닥을 드러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의미를 살려서 이 말을 다시 풀어서 표현을 한다면, 하늘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하늘이 텅빌정도로 성령님을 몽땅 이땅에 부어주셨다는 말씀이다.

성령님이 그 거처를 완전히 하늘에서 이 지상으로 옮긴것과 같다. 우주에서 성령이 가장 거하시기 원하시는 곳이 우리안이다. 당신의 아들의 핏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거처로 그리고 성전으로 삼으셨으니 우리안에 얼마나 그분이 거하시기를 원하시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성령님이 우리를 오래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를 오래 기다리고 계시는 성령님께 돌이켜야 한다.

침체된 목회의 유일한 돌파구

성령을 거스리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살고 사용하던 것에서 우리들이 돌이켜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운동은 회개운동으로 시작한다. 오순절로 돌아가는 길은 한 길 밖에 없다. 우리의 옛자아가 예수그리스도와 못박힌 십자가가 우리의 삶과 사역의 한복판에 복귀되는 것이다. 성령운동의 문제는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장 오순절로 나가가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회개의 은혜를 추구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과 은사만을 체험하려고 하기에 성령운동이 변질된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오순절에 이르는 길은 없다. 십자가 없이 우리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이 땅에 부흥이 아니라 재앙이 임하게 될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순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후에 오순절의 시간이 있었다. 우리가 오순절을 체험하기 위해 예수님의 구원사건에 주관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한후에 우리들은 오순절을 체험할수 있다. 객관적으로 구원역사의 관점에서는 오순절이 지난지가 2천년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적인 신앙역사속에서는 아직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한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의 참여하지 못했기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자아가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체험을 하지 못했기에 우리 신앙의 주관적인 역사속에서는 아직 오순절을 맞이하지 못한것 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부진한 목회를 돌파하는 성경적인 대안은 무엇일까. 침체한 한국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는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대안은 없다.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 다른 기롤 우회하려고 할때 영적인 불모지에서 끓임없이 맴돌게 될 뿐이다. 옛사람의 부패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성령의 깊은 사역을 먼저 추구하지 않은채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성령운동이 한국교회를 참된 개혁과 부흥으로 이끌기 보다는 오히려 광신과 혼란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부진한 목회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교회의 강단에 말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이 교회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말씀사역자에게 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는 목사대로 매주 반복되는 설교사역을 꾸려가기가 힘들고, 교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식상한 내용의 설교를 들어주느라 무척 힘들다. 교인들 뿐만 아니라 목사들도 자신의 설교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설교해도 변화가 안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점차 잃어간다. 그래서 여러가지 세미나나 은사집회에 기웃거리며 부진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열매없고 무기력한 말씀사역의 공백을 다른데서 메우려고 하다 보니 복음사역의 정도에서 벗어나 편법을 사용하게 된다. 말씀의 능력대신 사람들을 쓰러뜨리거나 신비한 표적이나 은사를 나타냄으로 교인들을 제압하여 사역의 즉각적인 성과를 거두려는 유혹에 빠진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설교가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고 중요하다고 굳게 믿지만 실제 목회현장에서 나타나는 설교의 효과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인것 같다. 우리 개혁교회가 설교중심의 목회를 포기하던가 아니면 개혁교회의 간판을 내려놓아야 할 판이다.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이 능력있게 전파되지 않는 이유중의 하나는 복음전파자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복음의 능력은 전하는 자와 상관없이 역사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사역은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 오순절을 체험한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온전히 감당할수 있다. 십자가에서 못박혔으나 다시 사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다시 산 신자안의 성령을 통해 다시 사시고 강림으로 역사하신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못박힌 사람만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전할수 있는 것이다.

오순절에 이르는 광야의 훈련

이러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능력있게 사용하실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우리의 사역이기보다 우리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는 일을 먼저 끝내셔야 한다. 그래서 많은 실패와 고통을 통해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가신다. 이를 위해 성령님이 우리를 번성케 하시기 전에 우리를 시들게 하신다. 육신의 야망을 시들게 하시고 육신의 완고함을 깨뜨리셔서 육신의 힘을 다 빼게 하신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는 우리들의 기도를 많은 경우 거꾸로 응답하신다. 우리의 능하게 해달라는 간구를 우리를 깨뜨려서 스스로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력한 자리로 내려가게 하는 희안한 방식으로 응답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심히 당혹스럽게 하신다. 육신의 힘과 지혜를 막다른 길에 이르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은 심히 낙심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성령의 충만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과정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가 죽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완강함이 불러온 비상사태이지 성령님이 지시한 정상코스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경험에서 이런 쓰라린 과정을 대개 맛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곤혹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는 절대 자원해서 하지 않려고 하는 자기 비움의 자리와 자기 죽음의 자리에 내려가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수많은 실패와 아픔을 통해 아주 서서히 자기 죽음의 자리로 기어 내려가게 된다. 우리가 그토록 내려가기 싫어하는 죽음의 자리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는 축복의 동산이다. 그 심연이 하나님이 즐겨 일하시는 장소이다. 새역사를 창조하시는 곳이다.

우리의 실패의 심연을 부흥의 정점으로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공이시다. 오순절의 성령충만의 은혜는 철저히 실패한 제자들에게 임했다. 성령충만의 은헤는 실패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파격적인 선물이다. 이러한 선물이 우리들에게도 임해서 다시 한번 우리 사역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성령충만은 영적으로 철저히 실패했다는 것을 절감하고 인정하는 개인과 교회만이 받을수 있는 은혜이다. 이점에서 한국교회는 성령충만하기에는 자격미달이다. 한국교회는 성령충만하기에는 너무 충만하고 크고 강한것 같다. 막강한 숫적 위력과 거대한 조직력, 그리고 재정적인 파워가 상당부분 성령의 능력을 대신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령님이 사용하시기에 너무 비대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형교회와 탁월한 지도자들을 보면 부흥이 일어나면 과연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지 심히 의심이 된다.

한국교회는 자만할때가 아니라 회개할때이다. 외적성장을 자축할때가 아니라 내적인 타락을 애통해야 할 때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성공으로 만족하지 않고 숫자와 조직과 재정의 위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이 충만하게 하시기에 충분히 작고 가난하고 애통해 하는 교회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하게 하실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성령을 이용하는 한국교회의 성령집회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강의는 두번째 주제강의인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다. 이 강의는 박영돈 목사의 저서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을 요약한것으로 한국교회의 잘못된 성령운동을 지적하며 성경적으로 성령의 특성을 해석한 내용으로 이를 2번에 걸쳐 소개한다.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과 영적인 분별력

최근 한국교회에 성령에 대한 혼란이 아주 심한편이다. 수십년전에 한국교계를 휩쓸고 지나간 방언의 열풍이 다시 오는 것 같고 치유집회가 인산인해를 이루고 예언과 환상과 신비체험을 추구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온갖 은사집회에 그리고 성령집회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무질서한 현상으로 인해 성령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증폭되어 가고 있다. 어디까지가 성령의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다.

소위 성령집회라는 곳에서 성령의 얼굴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왜곡된 가르침과 사역으로 인해 성령의 형상이 일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광명의 천사라고 자기를 위장하는데 명수인 마귀는 성령의 얼굴도 모방한다. 성령집회에서 성령의 얼굴과 미혹의 마귀의 얼굴이 혼재해서 나타나며, 성령의 사역자라는 이들에게서 두얼굴이 교차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어느때보다 더 예리한 영적인 분별력이 절실한때이다.

어떤 영적인 현상이 성령의 역사인지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하면 안된다는 논리로 냉철한 성경적인 검증과 분별을 거부할때 교회안에 온갖종류의 사이비 가르침과 미혹의 영이 들어오게 된다. 성경으로 입증될수 없는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한다고 겁박하는 것이 사이비 성령운동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진리의 잣대를 가지고 영적인 건강을 진단하는 것은 중대한 과제이고 임무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할까 두려워 성경적인 검증을 회피하는 것이야 말로 어리석은 일이며 성령의 뜻을 거스리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성령의 근본적인 사역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 성령은 말씀의 영이다. 자유하지만 말씀을 통해 역사한다. 말씀의 테두리안에서 역사하신다. 말씀의 굴레를 벗어난 성령운동은 이단들이 가장 많이 득실거리는 미혹의 온상이다. 성경의 기본진리만 알아도 쉽게 파악할수 미혹의 영의 장난을 분별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모습은 그만큼 교인들이 성경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증거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이나 다 믿는 것이라 할수 있다. 한국교회 문제는 아무것이나 너무 잘믿는데 있다. 비성경적인 것까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한다. 교인들이 아멘을 너무 잘하는 것이 문제이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멘을 한다. 생각하면서 아멘을 하게 해야한다.

요즘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라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예언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그곳에서 선무당처럼 어설픈 예언자들이 무더기로 배출된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직통계시라도 받은 것 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했다" 또는 "성령님이 말씀했다"라는 말을 거침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기 생각에서 나온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되고 마귀적인 음성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수이다. 그래서 온갖 허튼소리까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한국교회를 혼란하게 한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오히려 그들의 말에 귀를 솔깃한다.

성령은 성경말씀을 계시하셨고 그리고 계시된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는 표현과 말은 성경의 계시가 주어진 통로로 사용되었던 선지자들과 사도들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사용할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분명히 말할수 있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고있는 사업이 번창할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미혹의 영의 장난이라 말할수 있다.

어느 목사가 큰기업을 하는 장로를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찾아가면 개척교회를 하는 자금을 후원해줄것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그 장로가 자금을 후원할 사람은 나인데 그런 계시가 당신에게 주어졌다면 나에게도 주어져야 할텐데 나에게는 그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 하고 지혜롭게 목사를 돌려 보냈다고 한다. 어떤 청년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당신이 나의 배우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고 겁박하는 수단으로 예언을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구속사와 직접 관련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이 예언하는 일을 성경에서는 찾아볼수 없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간혹 성경의 감동과 메세지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확신과 감동이 틀릴수도 있음을 알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증적으로 단정적으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이 존재하여 복잡한 메세지가 우리안에서 교차되고 있기에 어떤 것만이 성령의 음성이라고 확증적으로 말하기가 어렵다. 우리안에 어떤 분명한 확신이 있는 경우에 성령님이 나에게 이런 감동을 이런 메세지를 주시는 것 같다 정도로는 말할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진리의 말씀은 잘 안믿고 점쟁이같은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표적에 끌려가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한국교회에 초자연적인 표적 현상으로 인해서 광적인 열심을 내는 이들은 많지만 복음의 진리에 사로잡혀 불꽃처럼 타오르는 건강한 신앙의 열심을 가진 사람은 희소하다. 말씀앞에 엎드리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지만 기적과 표적앞에 무분별하게 굴복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령과 거룩한 수줍음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진리로 우리를 자유케해서 그리스도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은 아름다운 분이다. 그래서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키신다. 지금 한국교회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은사가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없어서 복음의 빛이 가려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히는 것이 문제이다.

성령은 얼굴이 없는 인격이라는 말이 있다. 성령은 자신을 감추시는 신비로운 인격이다. 그렇기에 성령의 임재와 사역을 분별하기가 어려울때가 많다. 성령의 얼굴에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신학자들은 거룩한 수줍음이라고 표현했다. 이 수줍음은 인간에게 볼수있는 병든 자의식의 산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너무 자신을 의식하고 그리고 자신감이 없어서 수줍어 한다.

그러나 이 거룩한 수줍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사랑의 속성이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통해 예수님만을 드러내는 거룩한 수줍음을 가졌다. 자신의 영광을 베일로 가리고 자신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만을 드러낸다. 거룩한 수줍음은 예수님의 속성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만을 추구했다.

성부 하나님마저도 수줍어 한다는 말이 있다. 성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러나 성부 하나님 또한 성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또한 주님안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서로에게 영광을 돌리시는 겸손하신 분이다. 자신만이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속성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때 우리들이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자기를 드러내기를 심히 부끄러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온통 관심을 집중하는 사람이다. 요즘 성령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거룩한 수줍음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자신의 능력과 은사를 과시함으로 자신의 영광과 명성을 추구하려는 욕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그들에게서 나타날때가 많다.

성령의 얼굴이 나타나는 집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가 바르게 전파되고 옛사람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받는 은혜가 강하게 역사하는 곳이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외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바르게 전파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아니한 옛사람이 주관하며, 그런 옛사람이 자신의 은사와 능력을 과시하는 곳에는 성령이 현저히 부재할수 박에 없다.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

성령운동이 아니라 주술운동

성령운동이라는 말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편의상 사용하지만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아주 잘못된 말이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하는 운동을 하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드러내고 에수님의 사역과 이름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성령의 특성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가 굳이 운동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면 성령은 성령운동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운동을 하는 분이라고 말을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우리교회에서는 예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운동을 하는 성령사역을 강조했다. 그러나 작금에는 성령의 이름으로 인간을 높이는 성령운동으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성령운동이라는 말은 마치 우리마음대로 성령을 운행하고 조정할수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부적합한 용어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성령을 조정하고 움직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자유롭게 편하게 사용하셔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사용할수 있는 에너지나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사모하고 순종해야 할 인격적인 대상이다.

한국교회에 성령운동과 집회가 많이 열리기에 그만큼 성령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지만 어찌보면 오히려 성령님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자신의 야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성령님을 참으로 사랑해서 매일 성령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고 성령님과 함께 걷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성령운동과 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정작 그런 운동에서 나타나야 할 열매,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정작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없이 광신적인 운동으로 성령운동이 전락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신앙이고,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주술이다. 성령운동이 자칫 잘못하면 주술운동으로 변해가고 있다.

성령을 인간의 도구로

최근 성령운동에서 임파테이션이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사용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다른사람에게 전수해 준다는 말이다. 은사집회를 인도하는 목사가 안수를 통해 방언과 예언과 병고치는 은사를 전수해 주고 성령의 기름을 그에게 흘러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무시하고 성령을 하나의 인간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반면에 인간을 신격화하는 말이 될수가 있다. 자신이 마치 성령님을 유출시킬수 있는 성령의 원천처로 생각하는 위험에 빠질수 있다.

성령님은 신적인 인격이다. 이것이 성령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인식이다. 성령님이 인격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신앙은 붕괴된다. 구원도 있을수 없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도 불가능하게 된다.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 능력이나 영향력이라면 우리들에게 구원의 효력과 은혜를 전달하는 채널역할을 할수 있지만, 주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우리들에게 중재해주는 채널은 될수 없다. 신적인 인격을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임재가 불가능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구원의 경륜과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성령이 인격이 아니라면 삼위일체적인 신앙이 붕괴하게 된다. 성령을 통해 우리안에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적인 신앙이 붕되된다. 입으로는 삼위 하나님을 고백할지라도 성령을 자신이 마구 끌어당겨 사용할수 있는 능력으로 취급하는 일은 하는 사람은 이단자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인들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체함함으로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에서 부터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기도와 예배가 나오게 된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는 교리보다 체험이 앞선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성령을 체험함으로 거룩하시고 지존하신 하나님이 가장 자애롭고 친밀한 아빠로 체험하게 되었다. 아빠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가운데 부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그들의 존재속으로 밀려들어옴으로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물러나고 부활의 능력과 생명력이 그들안에 밀려들어와서 그들을 주관하고 점령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게 된것이다.

초대교인들은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잘 정리하고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는 없었지만 성령체험을 통해 그들의 삶속에 삼위 하나님의 부요한 임재와 축복을 만끽하는 삶을 산 것이다. 현대교회는 초대교회에 비해 아주 정교하게 발전된 삼위일체 교리는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속에 삼위 하나님의 부요한 임재와 그 분과의 깊은 교제의 체험은 많이 결여되어 있다. 교인들이 입으로는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그들의 삶속에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순위이든지 상관이 없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과 같다.

성령체험의 3박자

성령체험의 3박자는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빠로 체험하는 것이다. 아빠의 사랑이 우리안에 밀려들어옴을 체험하게 되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과 생명력이 우리를 사로잡은 것을 체험하게 된다. 두번째 성령체험의 축은 성령을 체험하면 나를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평안해진다. 염려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내가 평안해 진다. 짓눌렸던 내가 자유해진다. 겁먹었던 내가 관대해진다. 새로워진 나를 체험하게 된다. 주님을 사모하는 나, 주님을 닮아가는 나, 아름답게 변화되는 나를 체험하게 된다.

성령체험의 3번째 축은 너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이용할 대상으로 너는 있지만 사랑하고 교제하고 내가 섬겨야 할 대상으로서 너와 당신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성령을 체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우리안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를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삼위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나를 체험하게 되고, 그리고 너를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천국공동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체험의 3박자이다.  

한국교회에 그렇게 많은 성령집회가 열리지만 진정한 성령체험은 희소하다. 대부분의 성령집회가 은사체험과 초자연적인 현상에 온통 관심이 집중한채 성령체험의 심장과 영원이라고 할수있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빠져있다. 성령체험을 모든 다른 영의 체험과 구분하며 기독교 영성을 다른 모든 영성과 구별되게 하는 삼위일체적인 특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렇게 성령운동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고 본다.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것에 끌리는 한국교인들의 종교적인 심성과 단숨에 획기적으로 변화되는 은혜를 갈구하는 영적인 요행심이 이런 성령운동과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볼수있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아서 방황하는 많은 교인들에게 그런 성령운동은 금방이라도 그들에게 놀라운 구원과 변화를 가져다 줄 것 같은 기대를 안겨주기도 한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종교적인 흥분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을 보아야 믿음이 지탱되고 믿음의 열심을 낼수있는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성령운동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이어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2부가 진행됩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4번의 주제강의를 했는데 그 제목은 '성직자의 육신의 소욕',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 '성령과 기도'등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다음은 주제강의후 질답을 통한 박영돈 목사의 대답이다. 교회밖 신비체험을 하기 원하며 무분별한 성령운동속으로 들어가려는 교인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손기철 장로 집회같은 쓰러뜨리기 집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혹시 그러한 집회들의 유익은 없는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질문] 목사는 목회현장에서 교인들이 경험하는 일들을 바르게 가이드할 필요가 있는데 배우기는 했어도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현상에 대하여 대답하기 여려운 경우가 많다. 교인들이 아이합등 교회외 집회에서 일반 장로교회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넘어지는 현상등 영적인 액스타시 같은 것을 경험한다. 더우기 갔다와서 하는 말이 집회에 참석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말썽을 피우면 이야기가 하기가 쉬는데 그렇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무분별한 성령운동속으로 교인들이 들어가는 문제를 어떻게 가이드하면 좋겠는가?

우리들의 신학과 논리세계는 한계가 있기에 영적체험의 다양성을 모두 설명할수 없고 그런 체계안에서 우리들의 영적인 현상을 다 제한하고 가두어 놓을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잡다한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성경의 척도에 의해 검증해야 한다. 교인들이 너무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다. 먼저 성경적인가 진리인가 바른것인가를 판단하기 보다는 나에게 실제적인 유익이나 효과가 무엇인가를 먼저 고려한다. 이런것으로 진리를 진단할수 없다. 그것은 자유주의적인 접근이다. 경험적인 차원을 완전히 무시할수는 없지만 신앙체험을 항상 성경적으로 완벽하게 검증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제시를 해 주어야 한다.

쓰러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이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쓰러지는 능력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기도원을 방문했다. 바닥에 사람들이 앉아 1시간동안 예배를 드리고 다 일어나라고 하더니 사열을 하듯이 목사가 지나가면서 손가락을 대도 사람이 넘어지고 어떤 경우는 그냥 지나가도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차례에 그 목사는 저를 보고 심상치 않게 생각하고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을 가슴에 댔는데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다 스러졌는데 혼자만 그냥 서있기 멋적어서 그냥 나왔다.


▲손기철 장로가 집회에서 두손으로 빠르게 지나가며 손을 대자 쓰러지는 사람들

쓰러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손기철 장로 집회등 다른 집회에서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쓰러진 사람중에 영적인 유익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쓰러져서 평안함과 안식을 경험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유익이 있는 반면에 그것을 하나의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맨날 나가 쓰러지려고 한다. 그래야 안식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다른 문제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과거 부흥집회등 집회에서 말씀이 전파될때 성령이 강력히 역사해서 사람들이 각성하여 울고 쓰러지는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 경우는 사람을 쓰러뜨리려고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사람을 쓰러뜨리려는 현상을 창출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미혹의 영이 그 가운데 역사할수 있다. 사역자들의 그런 능력과시를 통해 온전한 성령의 역사가 주관하는 집회가 될수 없게 된다. 여러가지 문제가 생길수 있다. 손가락만 대도 사람들을 넘어지는 것을 보고 목사를 이상적으로 추종하는 일도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로 그런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면 모르는데 일부러 사람을 불러내서 사람들앞에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것 처럼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현상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유익이 아주 없을수는 없다. 유익이 있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더 혼란과 무질서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존하는 것 보다 항상 나가 그런것을 체험해야 은혜를 유지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이다. 가끔가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간혹있는 일이고 그것이 하나의 모멘트가 되면 좋은데 그런것을 통해서만 신비한 현상을 체험하고 그래서 짜릿함을 느끼고 그래야만 신앙을 유지하는 그러한 것이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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