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벌콥의 인간론 요약

신원균 교수

 

. 서 론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철학과 신학의 가장 난해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이 문제가 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악이 가진 힘은 크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삶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일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늘 긴장감을 가지고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세상에 있는 도덕적인 악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악이 삶 그 자체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사물의 자연적 구조에서 찾았다.

 

그러나 한편 어떤 학자들은 악은 자율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인간의 선택에 좌우된다고 생각했다. 이 관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에 보다 가깝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의지로 죄를 선택함으로 죄를 선택함으로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2:17; 5:12). 그래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들은 공통된 근원 즉,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7:21-23).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된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고 모든 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미 범법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재주의자들은 죄를 단지 동료 인간들의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들은 죄가 빈번히 자신들의 반역하는 정신을 충동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죄의 개념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인간사이의 윤리적, 도덕적 관계로만 해석되고 있다.

 

이제 루이스 벌콥의 인간론을 중심으로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바른 개념과 역사적으로 대두되었던 인간론을 살펴봄을 통해 바른 인간관을 정립해 보고자 한다.

 

. 본 론

1. 성경적 죄의 개념

 

1) 죄는 악의 구체적인 형식이다.

 

모든 악이 죄는 아니다. 죄는 물리적인 악, 곧 어떤 해로운 것 또는 재난 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죄는 악보다 구체적인 개념이다. 죄는 도덕적 악이다. 성경에서 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대부분의 명칭은 윤리적인 의미를 가진다.

죄는 불시에 인간에게 덮쳐서 인간의 삶에 독을 주고 그의 행복을 파멸을 이끈 재난이 아니라, 인간이 의도적으로 따르기로 선택한 악의 길이요 미증유의 재난을 동반한 길이다. 근본적으로 죄는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연약성, 실수, 불완전성과 같은 수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요 그의 율법을 적극적으로 범하는 것으로서 소위 죄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자유로운 그러나 악한 선택이다(3:1-6; 48:8; 1:18-32; 요일 3:4).

 

2) 죄는 절대성을 갖는다.

 

윤리적인 범주에서 선과 악의 대비는 절대적이다. 선과 악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 선한 도덕적 존재는 단순히 자신의 선을 축소시킴으로써 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질적인 변화, 곧 죄로 향함으로써 악하게 되는 것이다. 죄는 선의 정도가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행위에 의하여 악으로 규정된다. 성경은 어떤 형태의 중립성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옳은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릇된 편에 서든지 양자 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10:32,33; 12:30; 11:23; 2:10)

 

3)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가장 중심적인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도덕적 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도덕적 악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요, 하나님에 반대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끊임없이 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32; 2:12-14; 4:15; 2:9; 요일 3:4)

 

4) 죄는 죄책과 부패를 포함한다.

 

죄책은 율법 또는 도덕적 요구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 처벌 또는 정죄를 받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죄책은 인간 안에서 생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수여자가 법적으로 제정한 것이다. 죄책에 대한 형량을 정하는 것 역시 율법 수여자이다. 죄책은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직접 또는 대속적으로 충족시켜 줌으로써 제거된다. 많은 사람이 죄는 죄책을 포함한다는 견해를 부인하나, 이는 죄에 대해서 처벌이 뒤따를 것을 경고하는 현실적 상황과 부합되지 않으며, 성경의 평범한 진술과 어긋난다(6:12; 3:19; 5:18; 2:3).

 

부패는 모든 신자에게 생득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부패는 죄책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법적인 관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죄책은 직접적인 부패 없이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죄책에는 항상 부패가 따른다.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진 자는 결과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14:4; 17:9; 7:15-20; 8:5-8; 4:17-19)

 

5) 죄는 마음속에 거한다.

죄는 혼의 어느 한 기관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거한다. 죄는 인간의 의지에 기원하지만 의지는 인간의 의지적인 본성 또는 의지적인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실제적인 의지의 밑바닥에는 마음의 성향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4:23; 17:9; 15:19,20; 6:45; 3:12)

 

6) 죄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습관과 영혼의 죄악된 상태까지도 가리킨다. 죄악된 상태는 죄악된 습관의 기초가 되고, 이것들은 다시 죄악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되는 죄의 행위는 죄악된 관습을 낳는다. 자연인의 생각과 감정이 육식적인 것으로 불릴 수 있으며 동시에 죄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마 5:22,28; 7:7; 5:17,24등을 보면 알 수 있다.

 

2. 죄의 기원에 관한 성경적 근거

 

1)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로 간주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악도 불의도 행치 않으신다(34:10). 그는 거룩하시다(6:3). 따라서 그의 안에는 불의가 없다(32:4; 92:16). 그는 악에게 미혹될 수 없으며, 친히 아무도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1:13).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는 적극적으로 죄를 미워하신다(25:16; 5:4; 11:5; 8:17; 16:15).

 

이 모든 말씀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사물의 본질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필연성으로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견해를 거부해야 한다.

 

2)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일군의 천사들을 창조하셨다. 이들이 창조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모두 선했었다(1:31). 그러나 천사의 세계에 타락이 있었고, 이때 일군의 천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천사들의 타락을 초래한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딤전 3:6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새로 입교한 자를 감독으로 세우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그 권고의 이유를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능한 추론은 천사를 타락시킨 것은 권능과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의 죄일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들의 욕망이 바로 그들이 특별히 받았던 시험이라면, 이 사실은 인간이 왜 이 점에서 그토록 크게 유혹을 받는가를 알 수 있다.

 

3) 인류 안에 있는 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은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함과 더불어 죄기 시작되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죄는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담이 단순히 하나의 죄를 범했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최초의 죄로 인해서 아담은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죄는 영원한 부패를 동반했다. 이 부패는 인류의 연대성 때문에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그의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인류의 조상은 타락함으로써 그의 후손에게 부패한 본성을 물려주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으로서 범죄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후손의 대표적인 머리로서 범죄했다. 그러므로 그의 죄책도 후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모든 인류의 후손이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5:1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짊어진 죄인이라고 판단하신다. 그것은 그 방법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판단받는 것과 같다(5:18,19)

 

3. 인류의 삶에 나타난 죄

 

1) 원 죄

 

인간은 죄악된 상태와 조건 안에서 태어난다. 이 상태을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부른다. 원죄는 원초의 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죄책은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전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인류의 원초적인 뿌리로부터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생명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모방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용어를 죄는 인간 본성의 원초적인 구성 요소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으로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위해야 한다.

 

원죄는 자유의 상실 곧 자유 의지의 상실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를 상실했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를 상실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동인(動因)을 천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성향과 성품에 완전히 일치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부여되어 있다.

 

인간은 그가 책임적인 도덕적 행위자가 되는 데 필요한 구조적 기능들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성, 양심,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에게는 지식을 획득하고 도덕적인 특징과 의무를 느끼고 인식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의 감정?성향 ? 행위는 자발적이어서,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선택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선하고 우호적이며 인애롭고, 정당한 것을 감득(感得)하고 행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실질적인 자유를 상실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원초적이고 도덕적인 구조적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최고선의 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합리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억제하기 어려운 편견에 사로잡혀 악을 지향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인간에게는 영적인 탁월함을 인식하고 사랑하거나, 영적인 일들 곧 구원에 속한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고 행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2) 자범죄

 

원죄는 인간의 오염된 자질 또는 상태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내적인 부패가 모든 자범죄의 거룩하지 못한 원천이다.

 

자범죄(실제적 죄)’라는 용어는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인 행위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원죄에서 유래하는 모든 의식적인 사유와 의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 및 경향과 구분되는 개별적인 죄의 행위를 가리킨다. 원죄는 하나요, 자범죄는 다양하다.

 

자범죄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이나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속임, 도둑질, 간음, 살인 등과 같은 외적인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4. 죄의 형벌

 

1) 형벌의 본질과 목적

 

형벌이란 율법을 범함으로써 침범당하는 공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율법 수여자가 직접 ?간접적으로 가하는 고통 또는 손실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형벌은 하나님의 의 또는 형벌적 정의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주장하시며,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 필연적으로 거룩함과 의를 요구하신다. 형벌은 죄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벌을 말한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공의에 기인하는 일종의 빚이다.

 

형벌의 목적은 거룩한 의도는 정의의 수호이다. 율법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서있다. 그러므로 형벌의 목적은 위대한 율법 수여자의 의와 거룩함의 수호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필연적으로 죄에 대항하며, 이와 같은 대항은 죄를 처벌하는 데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32:4; 34:10,11; 62:12; 119:137; 9:24; 벧전 1:17)

 

오늘날 전면에 크게 부각되고 있는 형벌의 목적은 죄인의 처벌을 가차없이 요구하는 형벌적 정의가 없으며, 하나님은 죄인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며, 죄인에게 역경을 주시는 것은 다만 그를 교화 시키고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이키게 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형벌이 교정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의로운 것으로 곧 정의에 입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미 교정된 죄인은 더 이상 처벌될 수 없으며, 인간에게 교정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결국 사탄에게도 형벌이 있을 수 없으며, 사형이라는 형벌은 폐지되어야만 하고, 영원한 형벌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또 오늘날 보편화된 또 하나의 이론은 어떤 죄인이 범한 비슷한 죄를 다른 사람이 범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사회를 보전하기 위하여 형벌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형벌을 가하실 때 자비롭게 뒤따르는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죄인은 언제나 자기 죄 때문에 처벌되며, 이것이 부차적으로 사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이론이 참되다면, 어떤 범법자가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그를 처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면 그를 내보내야 한다. 더욱이 형벌을 기꺼이 견디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범죄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2)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

 

성경은 죽음이 죄를 통하여 들어왔으며(5:12),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6:23) 말한다. 죄에 대한 형벌에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는 그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영적이 죽음이 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이 같은 분리는 죽음을 의미한다. 살아 계산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초래된 죽음의 상태 안에서 우리는 죄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죄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둘째로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초대되는 삶의 고통도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가 된다. 죄는 인간의 삶 전체를 교란시킨다. 인간의 육신적인 삶은 연약성과 질병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불안과 쓰라린 고통이 초래된다. 그의 정신 생활도 그를 좌절하게 만드는 갖가지 방해거리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오늘날 홍수, 지진, 태풍, 화산 폭발등 이런 사건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읽지 않으며, 그 재난들이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건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재난들을 개별화 시켜서, 재난이 일어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범한 심각한 죄에 대한 특별한 형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늘에 서 불이 내려와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죄와 재난의 인과 관계를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못 된다. 우리는 언제나 집단적인 책임 의식을 느껴야 하며, 하나님께서 어느 도시들, 구역들, 그리고 국가들을 재난으로 벌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셋째로 육체적인 죽음이다. 몸과 영혼의 분리도 또한 죄의 형벌의 일부이다. 교회의 입장은 언제나,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하여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죽음은 죄의 결과인 동시에 죄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3:19; 5:12-21; 고전 15:12-23)

 

마지막으로 영원한 죽음이다.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의 절정이요,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속박이 제거되고 죄로 인한 부패가 완성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저주받은 인간에게 임한다. 인간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의미에 있어서 죽음이다.

 

5. 교리사적 인간론

 

1) 교부시대의 인간론

 

(1) 헬라 교부들의 인간론

 

그들의 죄관과 은혜관에는 이원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사상보다는, 후년의 펠라기우스 사상에 더 가까운 교리들을 강조함으로써 마침내는, 교리상의 혼란을 빚게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윤리적인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성질 안에 도덕적 완전의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아담은 범죄할 수 있었으며, 또 범죄 했다. 그래서 그는 사단과 죽음과 죄악적 부패의 권세 아래 들어갔다.

 

그들은 이 물질적 부패는 인류 안에서 널리 만연 번식하였으나. 그 자체가 죄는 아니며, 또 그것 때문에 인류가 정죄받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인류의 연대성을 인정하여, 인류와 아담과 물질적 관련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성경을 띤 관계일뿐, 하나님의 직접 창조인 인성의 고등한 이성적인 면에까지 미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의지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지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그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죄는 항상 인간의 자유 선택에서 오며, 그것은 허약과 무지의 결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아들이 물질적 부패만을 유전받았기 때문 죄가 있다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리겐은 일정한 유전적인 부패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타고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고, 그 이유를 영혼의 출생전 타락에서 찾았다. 이것은 원죄 교리에 매우 가깝다.

 

헬라 교부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크게 중점을 두었다. 중생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협력하여 인간 의지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교부들은 자연인이 행할 수 있는 선과, 성령의 능력이 요구하는 선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했다.

(2) 서방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난 다른 견해

 

터틀리안은 헬라 신학의 창조설 대신에 영혼 유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의 유전설과 실재설을 결부시켰는데. 이 실재설이란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을 가진 보편적 인간성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생식에 의하여 개화하였다고 하는 이론이다. 이 과정에서 있어서도 본성은 그 특질을 잃지 않고 계속하여 모든 점에서, 또는 개인화하는 모든 점에서 이성적 책임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적인 인성의 죄는 모든 개개인의 본성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영아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아마 이것은 본죄가 없다는 상대적인 의미일 것이고,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최소한도까지 제한하기는 하였으나 합력적 중생론의 색채를 띤 언어를 가끔 사용하였는데, 이 설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중생에서 협력하여 일한다는 것이다.

 

키푸리아누스는 원죄의 죄책은 본죄의 죄책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암브로스와 힐라리는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그러므로 죄 속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 의지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아니하여, 결국 합력적 중생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2)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인간관

 

(1) 펠가기우스의 인간관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원상태는 거룩하지도 않고 죄성을 갖지도 않았으며,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중성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지와 미정적 의지를 가졌는데, 이 양자 중 어느 것이라도 편의한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선택할 수 있었어도 이미 숙명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창조 되었기 때문에 죽음 문제만은 임의로 선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담의 범죄 타락은, 자기 자신만을 해하였을 뿐,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본성에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않았서 죄악적 성질이나, 죄책에 대한 유전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원죄와 같은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금도 아담의 타락 이전과 같은 상태로 출생한다고 하였다. 다만 인간과 아담의 차이는 인간이 자신 이전에 범죄한 악의 사례를 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어떤 경우이든지 인간 스스로 선택하여 이루어지며 어느 때에든지 선과 악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죄가 보편적이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릇된 교육과 악한 전레, 또 죄에 젖어든 오랫동안의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어거스틴의 인간관

 

어거스틴은 죄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는데, 이 죄는 필연적으로 악을 수반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죄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질적인 악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죄의 근본원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를 사랑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 배반에서 오는 일반적 결과는, 음욕과 또 이성의 법칙에 반대되는 과도한 육적 욕망이며, 죄와 그 죄가 가져오는 무절제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아담이 후손과 유기적 관계에서 죄와 부패성을 가진 타락한 그의 본성을 후손들에게 전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의 단일성을 언약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재론적으로 생학하였다. 온 인류는 아담 안에서 어린 싹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 없으나 의지가 아직도 일정한 본래적 자유를 지고 있어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갱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불가항력적 은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강제성을 띠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을 택할 수 있도록 그 의지를 변화시키신다는 의미이다.

 

(3) 반펠라기우스주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양극단 사이에서, 그 두 파 사이를 중재하고자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인간을 갱신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동등한 요소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순종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다고 주장하므로 양파간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무익한 시도를 했다.

 

이들은 인간의 부패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을 받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약화 되었거나 병든 것으로 보았다. 타락한 인성은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준다는 것이다. 중생은 그 두 요인이 연합하여 산출한 것이며,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였다.

 

3) 중세기의 인간론

 

(1) 그레고리의 인간론

 

그레고리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허약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는 자유행위였으며, 이 행위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영적 맹목과 영적 사망의 노예가 되었고, 이 최초의 죄 때문에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죄를 죄책이라기보다는 허약과 질병으로 보았으며, 또 인간의 어떠한 공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구속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은혜는 인간이 실지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변화는 세례에서 시작되는데. 이 세례는 믿음을 만들어내고, 과거의 죄에 대한 죄책도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지는 다시 새로워지고,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며,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만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은혜의 불가항력성을 말하고, 또 예정을 확실한 수의 선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이라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예정은 결국 예지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일정수의 사람들을 구원받데 하

 

신 것은, 그들이 장차 복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아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의 선택이나 타인의 선택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2) ?쇌크파 논쟁

 

그는 어거스틴의 선택 교리를 통해서 얻은 구원받은 자와 멸망자의 예정을 말하는 이중예정성를 열렬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을 구속하시고 거룩하게 만드는 그런 정도로 제한 시켰고, 또 죄를 허용적 작정의 대상으로만 보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정은 죄를 확실케 한다).

 

그는 예지에 기초를 둔 예정성를 부인하였다. 왜냐하면 이 설은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지는 단순히 예정에 따르며, 또 예정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의 교리는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들었다고 비난 받았다. 그의 교리는 A.D. 848년에 메이언스에서 정죄 받고, 그 다음 해는 그 자신이 고형(苦刑)을 받고, 일생동안 금고의 생활을 하였다. 그 결과 논쟁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는데, 프루덴티우스, 라트람누스, 레미기우스와 그 외 몇몇 유력한 신학자들은 어거스틴파처럼 이중예정설을 옹호하였고, 한편 라바누스, 라임스의 힌크말은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결국 언어에 대한 싸움에 불과하였다. 이 교리의 옹호자나 반대자도 그 중심에 있어서는 반 어거스틴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동일한 사상을 다르게 표현하였을 뿐이다. 전자는 어거스틴처럼 이중예정을 말하였으나, 유기의 기초를 예지에다 두었으며, 후자는 예정이라는 말을 생명의 선택에만 적용하고, 유기의 기초를 선견에다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 같이 성례적 은혜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면서도, 엄격한 예정설이 성례의 영적 가치를 빼앗아, 그것들을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치얼시 회의와 발레스 회의(A.D 853)의 결정은 위의 두 견해들과 전적으로 조화되었는데, 전자는 반대자의 견해를 후자는 옹호하는 자들의 입장을 각각 재생하였다.

 

(3) 안?의 인간론

 

a. 안?의 죄관

안?은 원죄의 교리를 강조하였으나 그 ”(orignal)이라는 말은 인류의 기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태에 있는 개인의 기원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비록 원죄는 인간이 본래 타고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창조된 후에 인간에게 들어온 한 상태라고 하지만 그것은 또한 본래적 죄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유죄하고 부패하여졌으며, 그 죄책과 오염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유전되어진다고 하였다. 원죄와 본죄의 모든 죄는 죄책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죄가 자유에서 나온 행위라고 가정하면 어떻게 유아들이 죄가 있고, 그들의 사죄를 위해 유아세례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답을 인간 본성이 창조 이후에 변절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는 어거스틴처럼 어린아이들은, 아담이 가졌던 보편적 인간성의 개체화된 부분들로 보고, 그러므로 그들도 아담 안에서 실제적으로 범죄하고, 유죄하며 부패하였다고 보았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성은 악변하지 않았을 것이며, 성성(聖性)이 그대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그 기원을 본성의 죄에다 두고 한편 본죄는 성질상 전혀 개체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안?은 가까운 선조들의 죄도, 인류의 첫 조상의 죄처럼, 그 후손에게 전가되는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죄들은 아담 안에 있는 공통적인 성질에 범한 것이 아닌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죄는 독특하였으며 그것과 결코 같은 죄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전 인류를 대표한 한 개인의 범죄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 사상은 그 후에 범한 모든 죄들이 비록 개별적인 것이라도, 똑같은 인간 본성에 의하여 범하여지기 때문에 이며, 또 왜 아담의 최초의 죄만이 후손에게 전가되고, 그 후의 죄는 전가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아담에 있어서 본성의 죄책 즉 원죄는 개인의 죄책에 머무르나, 그 후손에 있어서는 개인의 죄책이 본성의 죄책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주의시켰다. 아담의 인격 안에서 전 인류는 시험을 받았다고 하여 그가 후대의 언약관념에 접근하였다고 하겠다.

 

b. 안?의 자유의지관

 

그는 자유를 범죄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어떤 힘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타당치 않다고 선언하였다.

 

안?은 인류 조상의 행위는 분명히 자발적이며, 순수한 자의지의 행위였으나, 진정한 자유의 행위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들이 범죄한 것은 자유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분명 자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가능성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행동하려는 힘은, 그들의 자유에 아무것도 가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유가 없이도 임의로 거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참 자유와 자발적 능력 자체를 구별하였다. 전자는 상실되었으나, 후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의지의 참 목적과 목표는 선악간에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선을 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자발적 능력은 하나님께서 다만 의를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을 뿐, 결코 다른 것을 위해 주신 것은 아니며 그것의 참된 자유는 성()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하나의 대상, 즉 성(거룩함)만을 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자결정이어야 하며 어떤 외부적인 강요에 의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악을 택하는 능력이 시련을 목적으로 하여 주어졌을 때 그것은 완전한 참된 자유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 선택의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4) 로마교회의 인간론

 

로마 캐톨릭은 반어거스틴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 사상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후자가 점진적으로 세력을 얻었다.

 

원시적 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혜라는 생각이 점점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육신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이질적인 상반되는 성질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서 때때로 선행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 본성의 원시적인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은사 즉, 원시적 의를 주셨다. 이 본래적인 의는 적극적인 의도 적극적인 불의도 없이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은 이 원시적인 의를 상실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떤 자연적인 천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과는 별 상관이 없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악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룩한 상태도 아닌 중립적인 상태로 돌아왔으나, 성질의 구조상 육신과 영혼은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그의 모든 후손들의 대표자가 되었으므로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원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죄가 어떤 적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뭔가 꼭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그것을 원시적 공의의 결여라고 말하였다. 이 죄는 인류 조상에게서부터 나온 것으로 보편적이요, 자원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세욕이나, 악한 욕망, 정욕들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정당한 의미의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인간의 영적 무능력과 또 갱신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관념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협력 중생논을 채택하였다.

 

4) 종교개혁기의 인간론

 

(1) 개혁자들의 인간론

 

종교 개혁자들은 실재설을 대신하여 언약설을 주장하여 아담의 죄와 그 후손의 죄와의 관계를 더 명백히 정의 하였다. 베자는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인 시조일뿐 아니라 언약적 대표였으며 따라서 그의 최초의 범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책으로 전가된다고 하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유죄하기 때문에 또한 부패한 상태에서 출생되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로마 캐톨릭을 반대하여 원죄는 단순한 원시적 공의의 결핍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과, 또 죄로 향하는 그 최초의 단계들로 비록 그것들이 의지의 동의를 받기 전에라도 현실적으로 죄요, 다만 죄가 되게 하는 연료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있게 하고 정죄받게 하는 내재적 죄들이다. 일반적으로 칼빈과 개혁자들은 원죄란 인성의 유전적인 패괘요 부패로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며, 육신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개혁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유력했던 견해는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져서, 어떠한 영적 선도 행할 수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회복을 위해 최소한의 전진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쯔빙글리도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였으나, 원죄를 정당한 의미의 죄라기 보다는, 오히려 질병이나 한 상태로 보는 듯하였다. 멜랑톤도 처음에는 생각을 같이 했으나 나중에는 그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개혁자들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주장하면서도, 한편 중생하지 못한 자라도 사회적인 대인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세속적인 의는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적 부패의 교리는 자연히 인간의 갱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에 귀결된다. 하지만 멜랑톤은 처음에는 루터와 완전히 견해를 같이 했으나, 의지의 속박 교리를 강하게 반대하는 점에서 의지에는 얼마쯤은 구체적인 자유와 영적 자유가 있다 하여 합력중생론을 주장하였다.

 

개혁자들은 엄격한 예정론자였고 루터도 칼빈 처럼 이중예정을 믿었으나 때로는 유기의 교리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거나 혹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케 하기도 했다. 쯔빙글리는 유기를 효과적 작정이라 주장하였고 멜랑톤은 이 문제에 대해 죄와 중생에서처럼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가능한 예정의문제를 피하려 했다.

 

종교개혁 이후 아담은 인류의 자연적 머리일 뿐만 아니라, 언약적 머리,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후손의 도덕적 및 법적 대표자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결과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문자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범죄하였다는 관념은 그들이 대표적으로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사상에 양보하였다.

 

(2) 소씨니안파의 입장

 

이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급 피조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단순한 주도권일 뿐이요, 어떤 도덕적 완전성이나, 성질의 우월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담은 적극적인 의나 거룩함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의 결과를 그것을 상실할 수가 없었다.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나, 그의 도덕적인 성질은 해를 입지 않은 채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고 가사적(可死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담과 같은 상태이나 그들이 보고 듣는 죄의 실례 때문에 다소 더 나쁜 환경 속에 처하게 되었다. 이 환경은 사람들에게 죄로 떨어지는 기회를 더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죄를 전적으로 피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어떤 이들은 피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죄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진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구주나 혹은 하나님의 어떤 비상한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쏘우물 학퍄의 입장

 

쏘우물 학파의 아미랄두스는 보편적 및 조건적인 작정과 제한적 및 무조건적인 작정을 구별하였다. 전자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하여 신앙을 조건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보편적 구원을 주기로 작정하셨고, 후자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을 아신 때문에 얼마를 영생하도록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신앙과 회개의 필요한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또 폴라카에우스는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직접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인간은 유죄하여, 그것 때문에 부패한 상태로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성질의 부패를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책으로 인간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간접적 및 결과적 전가)

 

5) 종교개혁 후기의 인간론

 

(1) 웨슬레파 알미안주의

 

원죄는 엄밀한 의미에서 죄라고 불리울 수 없는 성질의 질병이나 부패가 아니라, 참으로 진정한 죄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유죄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주장하였다. 아담의 죄책은 참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원시적 죄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됨으로 말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은혜와 합력할만한 아무런 능력도 없으며, 인간은 전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보편적인 취지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능력있는 은혜를 주셨으므로, 인간은 신앙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알미안파들과 달리 그들은 인간이 믿고 회개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보았다.

 

2) 뉴 잉글랜드에 있어서의 개혁파 견해의 수정

 

죠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과의 관계에서 효능의 항목을 제거하고 통상적인 칼빈주의적 어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인간이 범죄하는 데는 신적 효능이 분명히 있다고 암시하였다.

 

후대에 티모디 뜨와이트와 테일러와 같은 인사를 대표로 한 뉴 잉글랜드 신학, 혹은 뉴 헤이븐 신학에서는 죄가 세상의 최저 가능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들어오는데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되어 있다고 하는 강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도덕적 우주를 창조하려는 결정에는 필연적으로 정반대의 것을 선택하려는 힘을 가진 자유로운 도덕적 동인의 창조를 내포하였으며, 그렇게 때문에 죄가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거의 확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듯 하다. 동시에 죄는 가장 좋은 조직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의지의 결정적 성경을 좀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정론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도덕적 자유를 가졌으며, 현재도 가지고 있다. 죄악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인간이 이 자유를 행사함에서부터 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참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의지는 본성의 원시적 구조에 의하여 선과 성의 방향으로 결정 되었다고 한다. 이 참자유는 죄로 인하여 상실 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뉴 잉글랜드 신학자들은 자유와 책임을 가진 도덕적 존재에는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는 실재설을 채용하였다. 나무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는 아담과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이고, 마찬가지로 그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하였다. 우즈나 타일러 같은 뉴 잉글랜드 신학자들은 폴라카에우스파의 간접적 전가설을 옹호하였다. 인간은 아담과의 자연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에게서 도덕적 부패를 이어받고 이것이 죄책으로 그에게 전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죄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3) 현대의 죄관

 

a. 철학적 죄관

 

라이쁘닛츠는 세상의 악을 윤리적인 것보다는 형이 상학적인 것으로 보고, 피조물의 필요한 제한에서 생긴, 단순하고도 자연적인 결과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존의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 안에 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원인자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부정 또는 결여라고 보아야 한다. 죄에 대하여 어떤 유효한 원인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죄는 불가피하다. 이 이론에서 죄는 필요 악이 된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유한한 존재요, 죄는 이같은 유한성의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원인자로 만들지 않으려는 이 이론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왜냐하면 죄가 어떤 유효한 원인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한 부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의 유한성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이론은 도덕적 악과 육체적 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이론이 죄를 인간에게 임한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이론은 악과 죄의 부패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킴으로써 죄 의식을 파괴하고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박탈해 간다.

 

칸트는 인간 속에 인간으로서는 근절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에의 성향, 즉 근본악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였다. 그는 이 근본악을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어떤 것과 동일시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원죄의 역사적 근거와 물질적 유전의 관념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죄라는 것이 설명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헤겔은 죄를 자의식적 정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전과정에 필요한 한 단계로 보았다. 인간의 원시적 상태는 천진난만한 무죄의 상태, 곧 짐승과 거의 같은 상태였으며, 이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악을 모르고, 단순히 자연과 일치하여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동물들에게는 자연적일 수 있으나, 인간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고, 비이상적이었다. 인간은 이런 상태에서 떠나, 자의식적 정신을 가져야 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이런 자연적인 상태에서 도덕적인 상태로 옮겨지게 된 것은 지식에 의함이었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간은 축복의 낙원에서 쫓겨났다. 자의식적 생명을 깨달음과, 자아의식이 시작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의 자연적인 욕망을 따르기 시작하였으며, 이 새로 발견된 자아가 이것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이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한 과정이다.

 

이기주의가 죄악이기는 하나, 인간이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과 그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기주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그것을 고의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것을 인간에게 죄로 돌릴수는 없다. 이 이기주의와의 싸움은 덕행으로 향하는 길이다.

 

b. 신학적 죄관

 

슐라이어막허는 죄를 인간의 육감적 성질의 필요한 산물, 즉 영혼과 육체의 물질적 조직과의 관계에서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그것은 육욕이 정당한 일울 수행하려는 정신적인 결정력을 방해하며 감성적인 본성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서 발견된다.

 

그는 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주관적인 존재, 즉 우리의 의식 내면에 있는 것으로만 보았다. 죄의식, 즉 인간 안에서의 고투의식은 감성적인 본성이 우세하는 동안 신의식이 불충분한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부족감을 죄로 여기도록 제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원죄는 단순히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후천적 습관이며, 그것은 결국은 현재 모든 본죄의 원천이 되었다.

 

칸트의 제자요, 조정학파의 대표자인 쥴리어스 뮬러는 죄를 도덕률에 불순종하는 의지의 자유행위라고 본 칸트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뮬러는 칸트가 말하는 이 근본 악은 출생 때부터 인간 안에 나타나는 것이며, 적어도 의지의 어떠한 의식적 결정보다 우선하며, 또 이것이 없으며 죄도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죄의 기원을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의지의 비 현세적, 혹은 전현세적 결정에서 찾았다. 어떤 이전 존재에서, 이미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유죄하게 출생되었고, 또 부패하여졌다는 것이다.

 

릿츌은 죄를 헤겔 처럼 일종의 무지요,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 꼭 필요한 필연적 과정으로 보았다. 슐라이어막허와 같이 인간은 종교적 의식을 통하여서만 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신국을 최고선으로서 찾아야 하나, 그 완전한 선을 알지 못함으로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본죄(릿츌은 이것만을 유일한 죄로 인정했다)를 범하고는 신국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적인 지식이 많아질수록 죄의식도 증가되는데, 이죄의식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벌하지 않으시며,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노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테난트는 죄의 교리를 진화론적 견지에서 전개하였다. 인간의 마음 속의 야수성에서부터 온, 충동이나, 욕망, 특성 등을 죄악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들은 죄의 소재가 될 뿐이요,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가 되어 가는데, (테난트는 어떻게 그런 의지가 진화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존재에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 의지가 유일한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죄는 개개인의 양심, , 정의의 개념, 또는 도덕률과 신의에 반대되는 사상과, 언어와, 행위를 나타내는 의지의 행동이라 하였다. 인류의 발전의 정도에 따라서, 윤리적 표준이 더 정확하여 지며, 죄의 흉악성도 증가되는 것이다. 테난트는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또 우리의 본성과 환경은,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하였다.

 

. 결 론

 

모든 사람이 아담과 관계로 인해서 타락한 후 죄의 신분과 상태에서 태어난다. 이것은 아담의 죄의 죄책이 우리에게 전가됨을 뜻한다.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로 범죄한 이래, 우리는 아담 안에서 유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태어난 상태가 율법에 대한 고의적 위법의 상태라는 점,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 형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의 죄책으로 무거운 짐을 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부터 도덕적 오염을 상속받았다. 그들은 원시적 의를 박탈 당하는 동시에 죄에 대한 적극적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그로 인해 전적을 부패 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는 바가 악하여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선을 행할 수 없다든다, 또는 절대적으로 진, , 미에 대한 예찬의 감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고유의 부패가 인간성의 모든 부분에 미쳐서 그에게는 영적, , 곧 하나님과 관계된 선이 조금도 없으며 다만 도덕적 왜곡만이 있음을 의미한다.

 

죄인도 자연적인 선,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려는 참다운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이런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인간과 인간사이에 해가 되는냐 안되느냐에 따라 죄가 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죄는 하나님의 요구를 불이행하는 것이 죄라고 하였다. 범법한 죄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거나 혹 순종하는 것이 부족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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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Berkhof의 종말론 요약

서 론

 

뻘콥은 개인적이건 민족적이건,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 있었던 곳이면 어디서나 인간의 기원과 본질, 그 목적지에 대한 물음이 철학과 종교를 통해 항상 있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호하고 불확실한 차원의 것이고, 오직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정확한 신적 기원의 교리를 가진다는 것을 잘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종말론이 성도의 영화나, 그리스도의 통치의 완성을 다루는 중에, 또 객관적, 주관적 구원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소개하고 있는 정도로 축소되어서는 않되고, 종말론이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완전한 형태로 지시되는 것인 만큼, 기독교의 원리가 가장 순결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이 실재가 축소되지 않고 제대로 다루어져야함을 뻘콥은 지적하면서, 종말론을 이야기 할 때에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현세대의 종말을 확정지으며, 또한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예고할 그런 사실과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뻘콥은 종말론을 다룸에 있어서 두 부분으로 나눌수있는데, 먼저 일반적 종말론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세상의 종말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체적 부활, 최후의 심판, 왕국의 완성, 그리고 경건한 자와 악한 자의 최종적인 상태등을 다루고, 둘째로 개인적 종말론은 육체의 죽음, 영혼의 불멸성, 그리고 중간기 상태를 다룬다고 말하고 있다.

 

 

1부 개인적 종말론

1. 육체적 죽음

1) 육체적 죽음의 본질

뻘콥은 죽음을 육체적 죽음, 영적 죽음, 영원한 죽음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 죽음은 마10:28, 눅12:4을 근거로 혼과는 구별되는 몸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체란 살아있는 유기체이고, 혼(프쉬케)은 분명 사람의 영(프뉴마) 즉 자연적인 생명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영적 요소를 말하기 때문이며, 벧전 3:14에서도 육체의 죽음이 혼(프쉬케), 즉 동물적 생명이나, 삶의 끝 혹은 상실이라고 묘사되고 있음을 예로 들고 있다.(마2:20, 막3:4, 눅6:9, 14:26, 요12:25, 13:37, 38, 행15:26,20:24, 전12:7, 창2:7, 요19:30,행7:59, 빌1:23). 또한 이것은 존재와 비존재로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존재의 양태로서만 대립하는 것임을 잘 지적하고 있다.

 

2) 죄와 죽음의 관계

펠라기우스주의자와 소시니주의자들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며, 현대 과학도 유기물은 그 속에 부패와 해체의 씨앗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은 유기체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육신의 죽음을 영적인 죽음의 결과로 제시하고 있으며, 죄에 대한 적극적인 처벌이라는 점을 뻘콥은 지적하고 있다.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시90:7,11)이고, 심판(롬1:32)애며, 정죄(롬5:16)이고, 저주(갈3:13)라는 것이다.

 

3) 신자들의 죽음의 의미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서 영적인 진보와 하나님 나라에 최고의 유익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의 죽음은 영혼의 성화를 완성하는 것이며, 완전한 생활의 시작이며, 천국의 문이며, 예수 안에서 잠드는 것이며,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게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롬8:11, 살전4:16,17).

 

2. 영혼의 불멸성

1) 불멸성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상이한 의미들

뻘콥은 불멸성이라는 말이 인간에게 해당될 때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절대적인 의미에서 불명성을(딤전6:15,16)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 혹은 무궁한 생존으로서의 불멸성을 말하는 것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불멸성은 인간의 영혼을 포함한 모든 영들에게도 해당됨을 말하고 있다. 또한 불멸성이라는 용어가 신학용얼 사용 될 때에는 부패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인간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고, 특히 종말론적인 용법에서는 죽음과 무관하며, 죽음의 제물이 될 가능성도 없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2)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일반계시의 증거

진화론, 유물론은 인간의 내세적삶을 의심하며 부인했지만 역사적으로 불멸성에 대한 강하게 존재해 왔고, 형이상학적으로도 단일한 영혼은 해체되거나 분리되지 않음을 추론하였다. 또한 목적론적으로도 인간의 능력이 생전에 결코 충분히 개발될수없음을 보고 미래적 생존을 하나님이 준비하셨음을 말하고 있으며, 도덕적으로도 정의가 최고의 지배자가 되고 현재의 부당함이 시정되는 미래의 한 상태가 있어야함을 말하고 있다.

 

3) 영혼의 불멸성에대한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의 증거

(1) 뻘콥은 일반계시 차원에서 진화론과 유물론등이 강하게 반대해 왔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목적론적으로, 도덕적으로 항상 강하게 존재해왔음을 말하고 있다.

(2)구약에서의 불멸성의 교리

구약에서는 창조주와 구속주, 그리고 그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창조(전3:11), 스올의 교리(시16:10,49:14,15), 죽은 자를 불러내거나 혹은 신접한 자에 대한 빈번한 경고, 죽은 자의 부활 교리, 죽은 후 하나님과 교제하며 누릴 신자들의 복에 대한 구절들에서 증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시16:9-11, 73:24,25).

(3) 신약의 불멸성의 교리, 의인의 영혼이나 악인의 영혼이 모두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마10:28, 마11:21-24), 부활(눅20:35,36),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자들의 복된 삶(롬2:7,10)등에서 증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4)인격의 불멸성에 대한 반대와 그에 대한 현대의 대안들

유물론과 생리학적 심리학이 정신이나 영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두뇌 활동의 산물 혹은 기능일 뿐이라고 말하며, 기관이 사라지면 그 기능도 멈춘다는 것을 근거로 인격의 불멸성을 반대하지만, 뻘콥은 이러한 사고는 두뇌의 기능을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기능 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며, 이 기능은 수용적, 혹은 전달적 기능일 수도 있음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다.

 

3.중간상태

1) 중간상태에관한 성경의 견해

뻘콥은 성경을 근거로 신자의 영혼은 몸과 분리되면 그리스도 앞으로 가며(고후5:8, 빌1:23, 눅 23:43, 고후 12:3,4, 고후5:1, 히12:23), 악인들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인 지옥에(눅 16장) 머물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2) 역사적으로 본 중간상태의 교리

초기에는 예수님이 곧 재판장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중간상태는 그리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으나, 즉시 재림하시지 않는 다는 것이 분명해 진 이후로 중간상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뻘콥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알렉산드리아학파에서 중간상태에 관한 교리가 영혼의 점진적 정화의 교리로 바뀌어 갔고, 결국 카톨릭의 연옥교리를 마련하였다고 파악하고 있다. 연옥교리와 장소의 개념을 수반하는 중간상태를 주장하는 카톨릭의 견해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어떤 사람들로부터 잘못된 견해들은 계속해서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다.

 

3)스올-하데스에 관한 해석의 제시

뻘콥은 스올이나 하데스와 같은 용어들이 항상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즉 스올이 종종 종종 죽음의 상태나 몸과 영혼의 분리 상태를 지칭하는 추상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는 것이다(마16:18,계1:18, 삼상2:6, 행2:27,31, 계6:8,20:28). 또한 지하세계, 죽음의 상태, 무덤, 지옥 등의 어떤 경우도 동일한 단어로 나타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시49:14, 55:15, 잠15:11, 15:24 눅16:23).

 

4) 죽음뒤의 영혼의 거처에 관한 로마교회의 교리

뻘콥은 먼저 연옥(Purgatory)을 말하고 있는데, 연옥은 완전히 깨끗함을 받지 못한 자, 즉 여전히 소죄(小罪)를 짓고 있어서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최상의 복락과 즐거움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결의 과정을 겪는 준비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땅위에 있는 신자들의 기도나 선행, 특히 미사의 제사에 의해 연옥에 있을 기간이 경감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교황은 연옥에 대해 사면권, 고통감소권, 고통을 끝내게 할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사4:4, 미7:8, 슥9:11, 말3:2,3, 마12:32, 고전3:13-15, 15:29).

그다음 선조림보(The Limbus Patrum)이다. 선조림보는 구약시대 성도들의 영혼이 죽은 후부터 주의 부활하시기까지 머물러 기다리는 장소로 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이곳에 내려가셨다고 로마카톨릭은 말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로마카톨릭은 유아림보(The Limbus Infantum)를 말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방인의 자녀든 그리스도인의 자녀든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어린이들의 영이 거하는 장소로서, 천국에서는 제외도지만 실제적인 고통을 겪지 않으며, 자연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충만한 자연적 행복을 누린다고 로마카톨릭은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5) 죽은 후 영혼의 의식적 존재상태

뻘콥은 크게 3가지로 말하고 있다. 먼저 영혼수면설(Psychopannychy)이다. 이것은 죽으면 영혼은 영적인 개체의 존재로 살아 있게 되지만, 무의식적 휴식의 상태로 존재한다(행7:60, 고전15:51, 살전4:13, 시6:5, 30:9, 115:17, 146:4, 전9:10, 사38:18,19, 마7:22, 23, 25:37-39,44, 요5:29, 고후 5:10, 계20:12)는 주장을 펴는데, 아라비아의 작은 종파와 중세시대, 영국의 어빙파, 미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서 옹호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멸절설을 말하고 있다. 멸절설이란 인간이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속에서 계속된 영혼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역에 의해 그 불멸성의 선물을 박탈당하여 궁극적으로 멸망하거나 혹 영원히 의식을 박탈당하여 비존재와 같이 된다는 것이고,

세 번째로 조건적 불멸설은 불멸성이 자연적인 영혼의 은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영혼은 궁극적으로 존재할수없게되거나, 모든 의식을 상실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요10:27,28, 17:3, 롬2:7, 6:22,23, 갈6:8, 마7:13,10:28, 요3:16, 롬6:23,8:13, 살후1:9). 이러한 모든 주장은 성경과 다른 주장임을 분명히 뻘콥은 말하고 있다.

 

6. 중간상태는 재시험의 기간이 아님

중간상태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한 것들에 관한 일반적인 사색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사역을(벧전3:19, 4:6, 요3:18,36, 막16:15,16, 롬10:9,12, 엡4:18, 벧후2:3,4, 요일4:3) 가급적 포괄적으로 만들려는 욕구에 기초하여 제2시험설(second probation)이 주장되고 있다고 뻘콥은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중간상태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 혹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이 구원은 현세에서와 동일한 방식, 곧 구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뻘콥은 성경은 사후 불신자의 상태를 확정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중간상태의 행위가 아니라 육신을 입었을 때 행한 일들에 근거하여 심판이 행해짐을 말하는 것을(눅16:9-11, 전11:3, 요8:21,24, 벧후2:4,9, 유7-13, 마7:22, 23,10:32,33, 25:34-46, 눅12:47,48, 고후5:9,10, 갈6:7,8, 살후1:8, 히9:27)근거로 분명히 반대하고 있다.

 

 

제2부 일반적 종말론

일반적 종말론에 대해서 뻘콥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세상의 종말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체적 부활, 최후의 심판, 왕국의 완성, 그리고 경건한 자와 악한 자의 최종적인 상태등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재림

공생애 사역이 끝나갈 무렵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여러번 말씀하셨고,(마24:30, 25:19,31, 26:64, 요14:3), 천사들과(행1:11) 사도들(행3:20, 살전4:15,16, 살후1:7,10, 딛2:13, 히9:28)을 통해서 예언을 하셨음을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재림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1) 재림(파루시아)이전의 대사건들

뻘콥은 재림이전의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서 5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첫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될것이라는 것과(마24:14, 막13:10, 롬11:25, 마8:11, 13:31,32, 눅2:32, 행15:14, 롬9:24-26, 엡2:11-20) 둘째로, 참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슥12:10,13:1, 고후3:15,16, 롬11:25-29), 셋째로, 큰 대배교와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는 것(마24:9-12, 21-24, 막13:9-22, 눅21:22-24, 살후2:3,딤전4:1, 딤후3:1-5), 넷째로 적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다섯째로 전쟁과 전쟁의 소문, 기근과 지진, 거지선지자의 미혹, 거짓그리스도 해와달과 별들을 포함하여 무서운 징조(마24:29,30, 막13:24,25, 눅21:25,26)를 말하고 있다.

 

2) 파루시아, 즉 재림 그 자체

이 재림에 있어서 그 시간은 중보자로서 받으신 계시속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마24:36) 잉을 말하며, 재림의 방식은 인격적이고(행1:11,3:20,21, 마24:44, 고전15:22, 빌3:20, 골3:4, 살전2:19, 3:13, 4:15-17, 딤후4:8, 딛2:13, 히9:28), 육체적, 가시적 강림이며(막13:26, 눅21:27, 행1:11, 골3:4, 딛2:13, 히9:28, 계1:7), 갑작스럽고(마24:37-44, 25:1-12, 막13:33-37, 살전5:2,3, 계3;3, 16:15), 영광스럽고 승리에 찬강림(히9:28, 마24:30, 살후1:7, 살전4:16, 3:13, 살후1:10, 고전15:25, 계19:11-16)이 될것임을 말하고 있다.

 

3) 재림의 목적

뻘콥은 재림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미래의 시대를 여시고 만물에게 영원한 상태를 부여하시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마13:49,50, 16:27, 24:3, 25:14-46, 눅9:26, 19:15, 요5:25-29, 고전4:5, 15:23, 빌3:20,21, 살전4:13-17, 살후1:7,10, 2:7,8, 딤후4:1-8, 벧후3:10-13, 유14,15, 계20:11-15, 22:12)

 

2. 천년왕국에 관한 견해들.

1) 전쳔년설(Premilleialism)

역사적으로 과거에는 이레네우스의 견해 즉 창조시의 6일간과 상응하여 현세대의 기간을 6천년으로 보고, 또 일곱째 날과 상응하여 천년간 지속될 천년 왕국적 복의 기간을 주장하며, 천년의 마지막 때에 마지막 심판이 있을것이며 새로운 창조계가 나타나 거기서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속에 영원히 살게될 것이라는 이레네우스의 견해가 지배적이었음을 뻘콥은 말하고 있다.

 

2) 현재의 전천년설

뻘콥은 현재의 전천년설을 다룸에 있어서 그들의 역사관, 종말관 등을 세세히 다루고 있다.

(1) 그들의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과정속에서 몇 개의 언약에 기초하여 혹은 일곱 개의 다른 세대의 원리에 따라서 인간세계를 다루어 가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시내산시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

(2) 또 그들의 종말론의 특색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중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뻘콥은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은 칠년의 간격을 사이에 둔 독립된 두 개의 사건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사건은 파루시아로써 모든 의로운 죽은자들은 일으키심을 받고, 살아있는 성도들은 변형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만나는 것이고, 대환란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칠년 기간 마지막에 나타나심 즉 주님의 지상강림으로 나누고 있다. 이 강림은 성도들과 함께 하기 위한 것으로, 남아있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마25:32이하), 염소와 양이 분리되고 대환난으로 죽임당한 성도들이 일어날 것이며 적그리스도가 멸망하고 사탄은 천년동안 갇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적이고 가시적이며 지역적이고 물질적인 유대인의 왕국이 천년왕국이 이 시작되며, 이 왕국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세상은 매우 빨리 회개할 것인데 어떤 사람은 복음에 의해 회개할것이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강림이나 성도들의 복음 보고 생기는 부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로 위대하고 끔찍한 심판과 같은 전혀 다른 수단에 의해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년왕국 후 사탄은 잠시 놓여나고 곡과 마곡의 무리가 거룩한 성을 대적하여 모일 것이지만,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리는 불에 삼키우고 사탄은 짐승과 거짓선지자들이 던지움을 받은 무저갱에 떨어지고, 잠시후 죽은 악인들이 부활하여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고(계20:11-15). 그 다음에 새하늘과 새땅이 있게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3) 끝으로 뻘콥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적통치만을 기다리거나, 계시록 20장의 천년을 다소 길거나?게 지속되는 불확정적인 기간으로 간주하거나, 그리스도와 다천년동안 다스리는 장소에 대한 문제등을 다루는 전천년설의 변형된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3) 전천년설에 대한 반대

뻘콥은 분명하게 .이 이론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관한 예언적 설명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성경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과, 성경에는 재림연기설(요한과 예수님이 유대인의 신정이 가까움을 선포했지만,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그 왕국의 건설을 재림시까지 연기하셨다는 주장)이 전혀 없다는 것, 또 성경은 부활과 마지막 심판, 세계의 종말에 대해 동시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마13:37-43, 47-50, 24:29-31, 25:31-46, 요5:25-29, 고전 15:22-26, 빌3:20,21, 살전 4:15,16, 계20:11-15)을 근거로 비판하고 있다.

또 계시록 계20:1-6에 근거하여 1절에 있는 쇠사슬과 2절에 있는 결박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며, 종종 천년을 길고도 불명확한 시간으로 이해하고, 4절의 영혼들을 부활한 성도로 바꾸어 해석하는 것들은 잘못된 것으로, 이 구절들은 언급되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순교한 성도들과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자들)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게 살아서 다스렸다고만 말하고있는 것이며, 또 이 구절들 속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이 땅위에서 다스렸다는 의미는 결코 없으며, 계4:4, 6:9과 연결해서, 이것은 오히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라고 바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4) 후천년설

뻘콥은 후천년설이 16세기와 17세기동안에 화란 개혁파신학자들인 코케이우스, 알팅, 두사람의 비트랑가, 다우트레인, 비치우스 호른백, 코엘만, 부라켈등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천년왕국이 세상의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복음이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게되어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풍성한 보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고, 이 황금 시대에는 유대인들도 미증유의 방법으로 이 복에 동참하게될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전천년설의 두가지 핵심적 개념, 즉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이땅을 다스리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다는 것과, 그가 오시면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와 함게 천년 왕국에서 다스리게된다는 사상을 거부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 날에는 천년왕국은 진보에의해 점차적으로 생겨나게 될 것이며 세계개혁의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서 이 새로운 세대에 스스로 참여해야만 한다는 주장까지 나타나고 있다.

 

5) 후천년설에대한 반대

뻘콥은 후천년설이 주장하는 세계의 회개에 대한 기대로 성경은 지금세대에서든지 오는 세대에서든지 우리를 인도하지는 않고 있으며, 오히려 종말 바로 직전 시대는 대배교와 환난과 박해의 시대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식어지고,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들은 심한 고난에 빠질 것이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고백을 피로써 인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마24:6-14, 21, 22, 눅18:8, 21:25-28, 살후2:3-12, 딤후3:1-6, 계13장). 또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는 세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을 말하고 있음을 들어 후천년설을 반대하고 있다(마24:29-31, 35-44, 히12:26,27, 벧후3:10-13). 그리고 후천년설에는 자연적인 지보와 교육, 사회개혁, 그리고 법률들의 분야에 있어서의 인간의 노력이라는 현대적 개념이 기독교적 정신 전 영역으로 스며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3. 죽은자의 부활

1) 역사적으로 본 부활교리

뻘콥은 부활교리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많은 오류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먼저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마22:23, 행23:8), 또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이 부활을 순전히 영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그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상의 사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딤후2:18)과 영지주의 자인 켈수스(Celsus)를 반대한 오리겐조차도 무덤에 묻혀있는 바로 그 육체가 부활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또 두명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다마스커스의 요한등으로 대표되는 동방교회는 영적인 관점을 취하는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천년왕국 주장자들은 천년왕국 통치의 초기에는 의인의 부활이, 그 말기에는 악한자의 부활이 있을 것으로 오해했으며, 중세에는 환상적이고 거의 무가치한 사색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일찍부터 사도신경을 통해서 이미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으며, 이러한 바른 신앙은 모든 위대한 교회의 신앙고백들로 이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2)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거

구약은 부활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를 두고있는 것(출3:6, 마22:29-32, 히11:10, 13-16, 19, 시49:15, 73:24, 25, 잠23:14, 욥19:25-27, 사26:19, 단12:2, 겔37:1-14)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음을(마22:23-33, 요5:25-29, 6:39, 40,44,54, 11:24, 25, 14:3, 17:24, 고전15장, 살전4:13-16, 고후5:1-10, 계20:4-6, 20:13)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4. 부활의 성격

뻘콥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고만 말하는 것을(마22:29, 고후1:9) 증거로 부활이 삼위하나님의 사역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부활이 보다 구체적으로 성자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지며(요5:21,25,28,29, 6:38-40, 44, 54, 살전4:16), 또한 성령님의 사역으로도 지칭됨을(롬8:11)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부활이 육체적 부활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고전15:20,23, 골1:18, 계1:5)증거하고 있다(롬8:11, 23, 고전6:13-20, 고전15특히35-49).

세 번째로 뻘콥은 부활을 반대하고, 멸절설과 조건적 멸절설, 악인들이 부활하지 않고 없어진다는 주장을 하는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들에 반대하여 성경을 근거로 악한자의 부활을 변호하고 있다(단12:2, 요5:28,29, 행24:15, 계20:13-15).

네 번째로 의인에게 있어서 부활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고 주권적 공의의 사역으로서 악인의 부활은 죽음이라는 최고의 형벌이 됨을 밝히고 있다(요5:28,29).

 

5. 부활의 시기

뻘콥은 부활의 시기에 관하여 전천년주의자는 성도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사이에는 천년의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성경은 성경은 죽은자의 부활은 재림, 주의 날의 계시, 그리고 이 세상의 종말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 바로 전체적인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살후1:7-10).

그리고 뻘콥은 전천년주의자들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로 성경은 죽은자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반복적으로 이것을 죽은자로 부터의 부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천녀주의자들이 이것을 죽은자 가운데서라고 번역함으로써 아직도 많은 죽은 자들이 무덤에 남아있음을 암시하도록 하였다.

둘째로 전천년주의자들은 더좋은 부활(히11:35)이나 생명의 부활(요5:29), 의인들의 부활(눅14:14),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살전4:16)과 같은 어떤 특정한 구절에 호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지 천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분리된 두 번의 부활이 잇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셋째로 전천년주의자들은 고전15:22-24을 통해 그리스도의부활, 신자들의 부활, 악한자의 부활을 추론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에는 즉각적이 아니라는 개념이 바탕이된 해석이다.

넷째로 전천년주의자들은 계20:4-6에 근거하여 5,절이 첫 번째 부활을 언급하고있기 때문에 두 번째 부활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6절은 땅위가 아닌 하늘의 장면이다. 즉 지금 일으키심을 받은 인격이나 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왕노릇하는 영혼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게 살아서 왕노릇하는 이것을 첫 번째부활이라고 부르고있는 것이다.

 

6. 최후의 심판

1) 역사적으로 본 최후의 심판의 교리

뻘콥은 초대교회의 최후의 심판의 교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연결되어 육신에 있을 때 행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며, 중세에는 죽은 자의 부활뒤에는 바로 전체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며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시간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이러한 견해가 대체적으로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칸트, 쉘링, 폰 하르트만 등은 미래의 심판의 사상을 부인했으며,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이 심판을 현존하는 내재적 과정이라고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2) 최후의 심판의 성격

뻘콥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와 동일한바 영적이고, 비가시적이며 무한한 과정으로(신9:5, 시9:16, 37:28, 59:13, 잠11:5, 14:11, 사32:16,17, 애5:7) 간주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하고, 성경을 근거(마25:31-46, 요5:27,29, 행25:24, 롬2:5-11, 히9:27, 10:27, 벧후3:7, 계20:11-15)로 마지막 심판의 분명성을 말하고 있다.

 

7. 심판에대한 잘못된 견해들

뻘콥은 심판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심판으로 슐라이에르마허와 다른 독일학자들의 견해인데, 심판을 세상과 교회의 최종적 분리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2) 순전히 내재적인 심판으로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심판이다라는 쉘링의 금언이 진리의 일면을 담고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순전히 내재적이어서 세계의 도덕적질서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심판을 단일한 사건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견해로 전천년주의자들의 개념이다. 이들은 첫째로 파루시아 즉 주님의 강림시에 부활하여 살아있는 성도들이 받는 심판, 둘째 대환난 직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주의날)때 있을 심판, 셋째 계20:11-15에 묘사된바 크고 희보좌 앞에서 받는 악한 죽은 자들의 심판등을 말하고 있다.

4) 최후의 심판을 불필요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잠들면 구원을 받고 죄가운데서 죽으면 멸망을 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 심판과 그 조력자들

뻘콥은 하나님의 모든 외부적 사역(opra ad extra)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심판 또한 당연히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고있으며, 구체적으로 성경은 이 최후의 심판을 특별히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요5:27, 행10:42, 17:31, 빌2:10, 딤후4:1). 이러한 심판의 권한은 마28:18, 요5:27, 빌2:9,10에 근거해서 볼 때 속죄적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서, 또 그의 높아지심의 한 부분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영예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조력자에 관해서는 마13:41, 42, 24:31, 25:31과 같은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는 이 큰 역사에서 천사들이 그를 도울 것이라는 사실과 시149:5-9, 고전6:2,3, 계20:4을 근거로 성도들은 분명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심판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9. 심판을 받게될 무리들

뻘콥은 심판을 받게될 무리들은 타락한 천사들(마8:29, 고전6:3, 벧후2:4, 유6)과 모든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전12:14, 시50:4-6, 마12:36,37, 25:32, 롬14:10, 고후5:10, 계20:12). 그러면서 신자들의 죄가 비록 용서받은 죄로서이기는 하겠지만도 하나님 앞에서 역시 드러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마12:36, 롬2:16, 고전4:5, 마13:30, 40-43, 49, 25:14-23, 34-40, 46).

 

10. 심판의 시기

뻘콥은 심판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파루시아)에 수반된 사건일 것이며, 죽은자의 부활직후에 있게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천지의 갱신직전이 될지, 동시적일지, 혹은 그 직후에 일것인지는 성경적 기초위에서 확정하기란 어려우며, 또한 심판날이 정확히 24시간의 하루라고 추론할 필요는 없음을 말하고 있다.

 

11. 심판의 표준

뻘콥은 심판의 표준은 분명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뜻임을 밝히고 있다. 즉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의 법에 따라서, 옛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계시에 의해서만, 그리고 자연의 빛과 구약의계시 말고도 복음의 빛을 누린 사람들은 그들이 받았던보다 큰 빛에 의해 심판을 받게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지만 천국의 복락과 지옥의 형벌에 있어서는 육체에 있었을 때 행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마11:22,24, 눅12:47, 48, 단12:3, 고후9:6).

 

12. 심판의 다양한 부분들

뻘콥은 심판때 하나님께서는 사건의 상태, 즉 마음의 생각과 은밀한 의도를 포함한 사람의 과거생활 전부를 심리하실 것인데, 책을 열어펴는 것이 바로 이것을 상징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책의 비유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계20:12). 또한 각 사람에 대한 판결은 모두에게 알려져서 하나님의의와 은혜가 찬란하게 빛날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판결로 인해서 의인은 영원한 복을, 악인에게는 영원한 불행을 초래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13. 최후의 상태

1) 악인의 최후의 상태

재림론자(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으로 대표되는 멸절론자들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고, 현대 자유주의신학에서는 지옥이라는 말은 대개, 사실상 지상에있는 것이지만, 뻘코은 성경에 근거하여 마18:9의 불의 게헨나, 13:42의 풀무불, 불못(계20:14,25), 옥(벧전3:19), 무저갱(눅8:31), 어두운 구덩이(벧후2:4)등이 장소를 가리키는 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악인은 이곳에 거하게 될것임을 말한다. 결국 악인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총이 젼혀 없고, 죄가 완전히 지배하는데서 생기는 생활의 끝없는 혼란, 육신과 영혼의 극심한 고통과 고난, 양심의 가책, 고뇌, 절망, 비찬, 이를 갊등의 주관적 형벌들(마8:12, 13:50, 막9:43, 44, 47, 48, 눅16:23,28, 계14:10, 21:8)을 받게 될것임을 말하고 있다(마11:22,24, 눅12:47,48, 계14:11, 20:10, 마18:8, 살후1:9, 계14:11, 20:10)

 

2) 의인의 최후의 상태

신자들의 영원한 상태가 오기 전에 현재의 세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가 있게될 것인데(마19:28, 행3:21, 히12:27, 베후3:12,13, 계21:1), 시102:26, 27, 히12:26-28에 근거하여 이것은 지금 있는 창조물의 갱신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곳에서 거처하게 될것이며, 영생, 즉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게될것임을(마25:46, 롬2:7, 계21:3), 말하면서 이것은 영적인 것 뿐만아니라 몸에 상응하는 어떤 것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뻘콥은 천국의 기쁨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것인데(단12:3, 고후9:6), 우리의 선한 행위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받는 은혜의상급의 척도가 됨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의 즐거움은 완전하고 충만할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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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교회관 / 루이스 벌코프의 교회론에서 발췌

믿음은 ㆍ 

개신교의 교회관 / 루이스 벌코프의 교회론에서 발췌

3. 개신교의 교회관.

종교개혁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로마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발이며, 특별하게 형식적 교회관에 대한 반발이다. 종교개혁은 외형적인 기관으로서의 교회로부터가 아니라 성도의 무리로서의 교회로부터 교회의 본질을 발견해야 한다는 진리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루터와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단순한 성도들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자들,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이 같은 입장은 개혁 교회의 신조들을 통해서 거듭 천명된 바 있다. 예컨대 벨기에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기대하며,  그의 피로 씻음을 받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은 참된 신자들의 회중인 한 보편 교회 혹은 우주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스위스 일치 신조도 같은 진리를 이렇게 고백한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실실한 자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말씀을 통하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바르게 경배하며 섬기는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조건 없이 주어지는 모든 선한 은혜들에 믿음으로써 참여하는 자들이다”(17장).

선택의 관점에서 교회를 정의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무형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있으며 또 모이게 될 택함을 받은 모든 자들로 구성된다. 또한 이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배우자이며 몸이며 충만이다”(25장). 보편 교회, 곧 하나님의 계획안에 존재하며 시대의 과정에서만 실현되는 교회는 시간 속에서 영생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택함을 받은 자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도 성도들의 공동체로 간주되었다. 무형 교회만이 아니라 유형 교회도 또한 성도들의 공동체(무리)로 간주되었다. 이 두 교회는 두 개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이며, 따라서 본질도 하나이다. 두 교회가 모두 본질적으로 성도의 무리이다. 그러나 무형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로서 신자들만을 포함하는 교회인 반면, 유형 교회는 인간이 보는 교회로서 자녀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함으로써 성도들의 공동체로 간주되는 교회이다. 여기에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포함될 수 있고 또한 항상 그러했다. 그것은 알곡에 가라지가 섞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분명히 드러난 불신자들과 악한 자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바울은 유형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성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악한 자들과 범죄자들에게서 떠날 것을 역설한다(고전5장; 살후3:6,14; 딛3:10).


'벌코프 조직신학'의 교회론에서 발췌 (p821~822),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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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 벌코프의 조직신학에서 발췌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A. 중생에 대한 성경적 용어와 그 의미

 

1. 고려되야 할 용어.

2. 이 용어들의 의미.

이 용어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중생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며, 따라서 이 사역에서 인간은 완전히 수동적이며 인간의 협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새로운 생명을 생성하고, 이로 인해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되며,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3) 중생에는 두가지 요소, 즉 새 생명의 발생(generation)과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는 영혼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principie)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중생을 적적하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B. 신학에서의 중생이라는 용어의 용법

 

1. 초대교회와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2.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위한 의미로 언급했다. 칼빈도 역시 이를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 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우 포괄적으로 사용했다. 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부르심 즉 효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도르트 신조도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서 중생을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중생이란 용어의 이러한 포괄적 사용은 종종 혼동을 초래하고 매우 필요한 구분들을 무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중생과 회심이 동일시 되는 반면, 회심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협력하지만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선언된다. 중생과 칭의의 구분은 명백해졌지만, 중생을 보다 제한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점차 필수적이고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투레틴은 두 종류의 회심을 구분한다. 첫번째는 '습관적인' 또는 수동적인 회심으로서, 영혼의 성향 혹은 습성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는 '중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실제적' 또는 '능동적' 회심으로서, 여기서 나온 습관이나 성향이 신앙과 회개에서 능동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C. 중생의 본질

 

1. 그릇된 견해들.

 

(1) 중생은, 원죄를 실체로 이해하여 중생시 다른 실체에 의해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종교 개혁 시대의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나 고대의 마니교도들이 주장하듯 인간 본성의 실체의 변화가 아니다. 어떠한 새로운 물질적인 씨앗이나 싹이 인간에게 이식되는 것은 아니다. 영혼의 기능에 있어서는 어떠한 첨가나 감소도 없다.

 

(2) 중생은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영혼의 기능의 변화가 아니다. 중생은, 예를 들면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생각하듯 하나님의 일에 대한 혐오의 제거를 통한 정서적 생활(감정이나 마음)의 변화, 혹은 합리주의자가 생각하듯이 죄로 어두워진 마음에의 조명을 통한 지성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생은, 성경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영혼의 중심적이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기관으로 생명의 원천인 인간의 마음(heart)에 영향을 준다. 이것은 중생이 인간 본성 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또 중생은 재세례파나 다른 열광적인 종파들이 주장하듯, 인간의 본성 전체나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 변화가 아니다. 이들은 중생한 자들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중생은 인간의 본성 전체에 영향을 주지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인간 안에 야기되는 모든 변화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다.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2. 중생의 긍정적 특성.

 

(1) 중생이란 인간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소(principle)를 주입하고 성령의 영향아래 하나님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변화로,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이 변화는 전인적으로 일어난다.

 

(2) 중생은 전인적으로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의 즉각적인 변화이다. 중생을 즉각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① 중생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나 모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듯 인간이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예비되는 사역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이다.

중생은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을 성화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구원의 순서가 오늘날처럼 완전히 전개되지 못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3)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 변화는,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후에 있어서도 인간은 '단지 그 결과로서만' 이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인이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회의와 불확실성과 투쟁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점진적으로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고 확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3. 중생의 정의

현재 사용되는 중생에 관한 상기 진술로부터 중생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중생을 "새 생명의 원소가 인간에게 심겨지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이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행위"(Regeneration is that act of God by which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is implanted in man, and the governing disposition of soul is made holy.)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발생"의 개념뿐 아니라 새 출생의 개념을 포함하기 위해서, 본 정의에서 "이러한 새로운 성향의 최초의 거룩한 활동이 확보되어 있다"라는 문장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D. 외적 부르심에 관련된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

 

1. 외적 부르심과 불가분의 관계성

(1) 내적 부르심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 구원적으로 적용된 말씀에 의한 부르심이다.(고전1:23,24; 벧전2:9)

(2) 이는 강력한 부르심,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적인 부리심이다(행13:48; 고전1:23,24).

(3) 이는 회개 없이 일어난다. 즉 변화될 수 없고, 결코 철회될 수 없는 부르심이다(롬11:29)

 

2. 내적 부르심의 특징

(1) 도덕적 설득과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결합되어 일어난다.

(2)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 역사한다.

(3)목적론적이다.

 

3.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관계

 

(1) 17세기 신학에서의 양자의 동일시.

17세기 신학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부 옛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관해서는 별개의 장(章)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중생을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2절에 의하면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르심과 중생이 인과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내적 혹은 효과적 부르심이 아니라, 창조적 부르심까지도 포함하는 일반적 부르심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서는 죄인의 삶에서 은혜의 사역의 발단을 지칭하기 위해 중생보다 부르심이라는 용어를 광범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사역간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부르심이라는 용어가 사도 시대에 성행한 것은, 선교적 시대에 교회에 모이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이 일반적으로 동시적이었으며, 그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강력한 부르심으로서 의식 생활 가운데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지만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과 중생을 구분해야 한다.

 

(2)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

엄격한 의미에서 즉 "재발생"으로서의 중생은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발생하며, 인간이 이에 대해 취할수 있는 어떠한 태도와도 독립되어 있다. 반면 부르심은 의식을 대상으로 하며 의식생활의 일정한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중생은 안으로부터 역사한다면, 부르심은 밖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유아들의 경우, 우리는 부르심보다는 중생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더욱이 중생은 창조적이며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으로, 이로써 인간은 다른 상태로의 전이, 즉 영적인 사망의 상태에서 영적인 생명의 상태로 옮겨지게 된다. 반면 효과적인 부르심은 목적론적이며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 내며 하나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새로운 성향이 발현되게 하며 새 생명을 활동하게 한다.

 

(3) 부르심과 중생의 관련 순서.

우리가 다음의 단계들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관련 순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시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시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시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가 심어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이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 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효과적 부르심이다.

 

④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 안에 탄생된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 한다. 새 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愚)를 범치 말아야 한다. 새 생명은 종종 유아들이 복음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만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새 생명이 생성되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은 항상 존재한다. 복음의 집행하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분별력을 갖추기 오래 전,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식에 침투하기 오래 전에 중생의 씨앗을 가질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중생된 자로서 이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 생활하며 그들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언약의 집행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 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 벌코프의 조직신학에서 발췌 (714-7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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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성도의 견인

 

                                                                                       -루이스 벌코프

 

A. 성도의 견인론의 역사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며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 사람들이 그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은혜의 신분에서 끝까지 견디어 내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에 의해 최초로 설파되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엄격한 예정론자에게 기대된 만큼은 이 점에 대한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거스틴에게서는 이 교리가 위에서 서술된 것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선택된 자가 결국 궁극적으로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새 생명과 진정한 신앙을 부여받은 자들 중 일부가 은혜로부터 완전히 타락하여 궁극적으로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을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로마 교회는 자유 의지론을 포함하는 반 펠라기우스주의적 견해로 인해 성도의 견인론을 부인하며, 자신들의 견인을 인간의 불확실한 순종에 의존하게 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교리의 정당한 위치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루터 교회는 성도의 견인을 인간의 신앙의 지속적 활동에 의존하게 하고, 진정한 신자들도 완전히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를 불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칼빈주의적 교회만이 이 교리를 절대적인 확신을 부여할 수 있는 형태로 주장한다.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의 자녀의 약점과 실패를 다수 열거한 후 “하지만 풍성한 자비를 지닌 하나님은 선택이라는 불변의 목적에 따라 중죄에 있어서도 자신의 백성에게서 성령을 거두시지 않으며, 양자 됨의 은혜를 상실하고 칭의의 신분을 상실하며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도록 방임하시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이들이 완전히 유기되거나 영원한 파멸에 빠지도록 허용하시지 않는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고, 신자의 견인을 신앙하고자 하는 의지와 선행에 의존하도록 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이러한 극단을 회피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신인 협동설을 그 모든 결과들과 함께 주장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웨슬리적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많은 소종파들이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추종한다. (이 부분은 원본과 약간 다르게 번역된 것 같아서 삭제했음- )

B.견인의 교리의 진술


견인의 교리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용어가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진술되어야 한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의 견해처럼 우선 선택된 자가 궁극적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교리는 하나님에 의해 중생하고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비록 때때로 악에 정복당하기도 하고 죄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코 그 신분에서 완전히 타락하여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중생의 생명과, 성화 과정에 있어서 중생에서 발현된 성향들은 결코 전적으로 폐기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견인이 신자의 본래적인 자산 혹은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의 길에서 견인할 수 있게 하는 인간의 지속적인 활동이라는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 스트롱은 견인을 “그리스도인 편에서의 신앙과 선행의 자발적인 지속”, “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우리가 성화라고 부르는 영적인 진보의 인간적 측면”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견인이 인간에게 의존한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하지만, 개혁파는 성화에서와 같이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도 인간이 협력한다고 믿고 있지만, 성도의 견인을 우선적으로 신자의 활동이나 성향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신자가 홀로 남아 있다면 타락해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엄격히 말해 견인하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은
“심령 안에 시작된 신적 은혜의 사역이 지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신자 안에서의 성령의 지속적 사역” 이라고 정의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자들은 끝까지 견딜 수 있게 된다.


C.견인의 교리에 대한 증명

견인의 교리는 성경적 진술과 다른 교리로부터 추론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1.성경적 직접적 진술


여기서 고려되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성경 구절이 있다. 요10:27-29에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메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고 롬11:2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후회하는 것처럼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관련되지만 일반적인 진술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위로한다(빌1:6) 살후3:3에서는 기쁨으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한다. 딤후4:18에서 그는 주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한다.


2.추론적 증명.

견인의 교리는 다음의 교리로부터 추론적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다.


(1)선택의 교리로부터

선택은 어떤 사람들이 일정한 외적인 특권으로 호의를 입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택된 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될 것이며 필히 완전한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의미이다. 선택은 궁극으로의 즉 구원으로의 선택이다. 이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성령의 감화력을 주셔서 이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할 뿐만 아니라 끝까지 견인하고 궁극적으로 구원되도록 인도한다.


(2)구속 언약의 교리로부터

구속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들의 순종과 고난의 보상으로 자기 백성을 아들에게 주셨다. 이 보상은 영원 전부터 결정된 것으로, 인간의 여하한 불확실한 충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외면하시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간주되고 하나님의 보상의 일부가 된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거나, 생명의 연함으로써 언약에 들어간 자들이 타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롬8:38,39)


(3)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 기도의 효력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자신의 속죄 사역에서 죄인의 용서와 열납을 획득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의 의는 죄인의 칭의를 위한 완전한 근거를 구성하며, 그렇게 완전하고 효과적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정의받은 자들이 다시 정죄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을 위해 계속 중보기도를 드리며, 백성을 위한 그의 중보 기도는 항상 효과적이다(요11:42;히7:25)


(4)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으로부터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그의 영의 참여자가 되고 그의 한 몸이 되며 성령의 생명으로 약동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리스도가 살아있듯이 그들도 살아 있다. 그들은 그 몸으로부터 다시 절단되어 신적 이상(ideal)을 무효케 할 수는 없다. 연합은 항구적이며 불변하는 원인, 즉 하나님의 영원하고 값없는 사랑에서 발원하므로 항구적이다.


(5)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댑니(Dabney)는 “성령이 지금 역사하기 시작하지만 곧 그를 포기할 것이며, 천상적 출생의 생동적 불꽃이 일시적으로 불붙다가 완전한 흑암 속으로 스러지게 되며, 새로운 출생에서 증개된 영적인 생명은 돌발적이며 발작적이어서 죽은 영혼에 외면적으로 생명이 발현하는 듯하다가 결국 소멸하게 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령의 지혜와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경에 의하면 신자는 이미 이생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요3:36;5:24;6:54) 우리가 영생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 행동할 이유는 무엇인가?


(6)구원의 확신으로부터

성경을 보면 신자들이 이생에서 구원의 확신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히3:14;6:11;10:22;벧후1:10) 신자들이 어느 순간 은혜로부터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확신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시작하신 사역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에 서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


D.견인의 교리에 대한 반론들


1.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

견인의 교리가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론은, 진정한 자유는 무관심의 자유나 혹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일들에서 잘못된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는 오류이다. 진정한 자유는 거룩함의 방향으로의 자기 결정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일 때보다 저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러한 자유를 누린다.


2.태만과 부도덕으로 인도한다

견인의 교리가 태만, 방종, 심지어 부도덕까지도 초래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릇된 안정감이 이 견인의 교리로부터 유래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교리는 우리가 우리 편에서의 지속적인 경계와 열심, 기도없이 지내도록 방임한다는 사상을 전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신자에세 거룩함으로의 견인을 확신시키는 교리가 어떻게 죄의 동기가 될 수 있겠는가? 성화를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보다 더 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자극이 될 것이다.


3.성경에 위배된다

이 교리는 성경에 위배된다고 종종 주장된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된 성경 구절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배교에 대한 경고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가 타락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필요했을 것이다(마24:12;골1:23;히2:1;3:14;6:11요일2:6)하지만 이러한 경고들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모든 문제를 고려한 것이요, 진지한 의도로 진술된 것이다. 이들은 자기 점검을 촉진시키며 신자들이 견인의 길을 유지하는 도구가 된다. 이 구절들은 말한 대상 중 어느 누가 배교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이러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수단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원리의 예시로서 행27:22-25을 31정과 비교 해 보라.


(2)성경에는 신자들이 성화의 길에서 지속적으로 정진할 것을 권면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는 신자들이 끝까지 이를 수행한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불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1)에서 언급된 경고들과 연관되어 발견되며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신자들의 어느 누구도 견인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도덕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도덕적 수단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3)또 성경은 실제적인 배교의 사례들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한다(딤전1:19,20;딤후2:17,18;4:10;벧후2:1,2;또 히6:4-6참조) 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진정한 구원적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진정한 신자들이 은혜로부터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 구절들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중생에 근거하지 않은 일시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신앙을 소유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이 신앙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롬9:6;요일2:19;계3:1) 요한은 일부 신자들에 대해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말하며 그 이유로서 “저희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를 언급한다(요일2:19)


E.이 교리를 부정한다면 구원은 인간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견인의 교리를 부정한다면 실제로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펠라기우스적 자력 구원관을 지닌 자들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 하지만 이 생각은, 은혜로 인한 구원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이 문제를 숙고하게 한다. 이러한 견해의 요점은, 인간이 성령만의 사역에 의해서는 혹은 성령과 인간의 의지와의 협력 사역에 의해서든 은혜의 상태로 옮겨진 이후에는, 신앙을 지속하느니 신앙을 포기하느냐의 여부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되어 인간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동기를 매우 불확실하게 하며, 인간이 신앙의 복된 확신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견인의 교리를 고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호비(Hovey)는 “이 교리는 큰 위로와 능력의 근원, 즉 감사에 대한 자극, 자기 헌신의 동기, 위험시에는 불기둥이 될 수 있다” 고 말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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