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제 1장 성령과 삼위일체
1. 성령은 인격이시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3.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별된 하나님의 한 위이시다
4.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

제 2장 성령과 창조
1. 창조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역사
2.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
3. 재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

제 3장 성령과 보편 은혜
1. 문제
2. 해결

제 4장 성령과 계시
1. 지식의 문제
2. 특별 계시
3. 특별 계시에 있어서의 성령

제 5장 성령과 조명
1. 인간의 암매
2. 성령의 조명

제 6장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1. 그리스도의 수육
2. 성령의 그리스도 안에 거하심
3. 그리스도의 성장
4.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
5.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
6. 그리스도의 죽으심
7. 그의 부활하심
8. 그의 영화

제 7장 성령과 중생
1. 그 필요성
2. 그 방법
3. 그 결과

제 8장 성령과 성화
1. 성화에 대한 비성경적 해결책
2. 성공적인 성경적 해답
3. 성경적 두 요소(수동적, 능동적)의 결합
4. 최후 승리를 위한 3대 촉진제

제 9장 성령과 인도하심
1. 성경의 인도
2. 범하기 쉬운 잘못들

제 10장 성령과 하나님의 아들 됨
1.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
2. 창조에 의해 아들 됨
3. 신자의 아들 됨

제 11장 성령과 기도
1. 성령 안에서의 기도
2. 성령에 의한 기도
3. 성령께 하는 기도
4. 성령받기 위한 기도

제 12장 성령과 교회
1. 성령이 교회를 세우신다
2. 성령은 교회를 통일하신다
3. 성령은 교회를 장비시키신다
4. 성령이 교회를 통치하신다
5. 성령이 교회를 인도하신다

제 13장 성령과 그 상징
1. 물
2. 바람
3. 호흡
4. 불
5. 기름
6. 비둘기
7. 열매 맺는 나무

제 14장 성령과 사하심을 얻지 못할 죄
1. 사함 받지 못할 죄가 아닌 것
2. 사함 받지 못할 죄
3. 심판

제 15장 성령과 인간의 책임
1. 인간의 책임이 없는 곳
2. 인간의 책임이 있는 곳 

 

출처: 생명나무 쉼터 = 한아름 발췌

 1. 삼위일체의 뜻은? (Trinity)

삼위일체란 용어는 성경 안에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즉 하나님은 본질상 하나이시나이 한분 안에는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3인격이 각각 다르며역사는 함께 하시는 한 하나님이십니다여기서 인격(person)이란 위()를 말하므로 세 인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떻게 한 하나님이 셋으로 나누어지는가 하고 의심이 생기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따지려고 들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깨닫는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그러나 참으로 신비하더라도 얼마든지 믿어진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삼위일체 만큼이나 흥미롭고 확실하며 은혜가 넘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고후 13:14, 요 1:14)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에 없지만 2세기경에 교부였던 터툴리안이란 사람이 처음 사용하였습니다성경은 하나님이 성부성자성령으로 나타내셔서 그때그때마다 구원 사역을 이끌어 나가시는가를 많이 나타내어 주고 있습니다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안에 세 인격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광과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영원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여기서 말하는 셋(三位)이란 각각 완전한 인격이 다르신 하나님이시면서도 한(一體하나님이지 여러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기에 힘을 씁시다. (엡 1:17)

본체인 영광의 광체시며 초월적인 하나님 (히 1:3)

본체의 형상이시며 물질로서의 객체화되신 말씀의 하나님 (요 1:14)

본체의 영이시며 감 잡으시는 주체적인 하나님 (요 14:26)

이렇게 신비의 삼위일체를 성경의 조명을 받아 말할 수가 있습니다.

   

 ※ 인간도 삼위일체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속사람은 마음이요 초월적이므로 영적인 세계를 마음으로 감 잡을 수가 있고겉 사람은 객체화된 몸 즉 오감 각을 통해서 감 잡을 수 있고감 잡는 인생 즉 미래의 감을 잡을 수 있는 자는 장래에 소망이 있으므로 이런 사람을 선각자라고 하며그때그때 감 잡는 자를 현실주의자지나간 다음에 감을 잡는 자를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마음도 나요몸도 나요내 인생도 나입니다그러나 마음도 몸도 인생도 완전히 다르면서 나라는 하나의 존재를 볼 때 역시 신비한 삼위일체가 아닌가요?

*<이 다음에 큰 식당을 경영하고자 꿈을 앉고 지금껏 힘써 왔는데 결국 포장마차 사장이었더라.>

참고 성구(창 1:1-2, 1:26, 마 3:16-17, 28:19, 요 14:26, 고전 12:4-6, 벧전 1:2, 엡 2:18)

   

 ※ 이단적 삼위일체

삼위일체의 이단적 교리는 터툴리안에 의해 사용된 그 후로부터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이런 교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여 일어났습니다. 3세기에 나타난 이단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샤벨류즈란 신학자인데 그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기 위해 성자나 성령은 별개의 신격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이 구약시대 때는 성부로 나타나시고 신약시대 때 잠깐 성자로 변모하여 나타나셨으며 오늘날은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더 쉽게 예로 든다면 나 김 목사는 생명샘교회 성도들에게는 담임목사요신학교 학생들에게는 

교수요 집에서 사모에게는 남편이요딸 한나에게는 아버지의 역할을 한다는 그럴듯한 학설입니다.

   

 △ 반증

듣기에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속에는 무서운 독이 있다는 것입니다한 인격자로서 3직분을 맡은 김 목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면 3직분을 담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이 교리를 보고 천부 수난 설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하나님도 성령님도 모두 죽었다는 무서운 뜻이 들어있는 말입니다주후 325년 당시 니케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파문당한 학설입니다.


오늘날도 유명하고 신령하다는 부흥사들이 부흥회 때 침 튀겨 가면서 이렇게 고함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삼위일체를 올바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교인들은 삼위일체가 뭐 그리 대단하며 중요하단 말이냐그냥 예수만 믿으면 됐지하고 편한 말씀을 하십니다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자식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하나님의 삼위일체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집을 지으려면 먼저 땅을 잘 정리하여야 하며그 위에 주춧돌을 세우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의 말씀을 공부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잘 정리해 놓은 다음 그 위에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말씀을 잘 쌓아 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이 밝히는 삼위일체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밝혀주는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그 대표적인 것만을 골라서 그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1) 구약성경

(창 1:26) “우리라는 복수의 단어를 사용하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 18:1-21)여호와의 사자 (천사) “”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출현으로 알 수가 있습 니다.

(이사야 48:16)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2) 신약성경

(마 28:19)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마 3:16-17)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실 때 예수께서성령이하늘에 소리가 있어

(고전 12:4-6) “성령은 같고주는 같으며하나님은 같으니

(고후 13:13) 축복기도 중에서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예수 그리스도의

(엡 2:18) “저로 말미암아한 성령 안에서아버지께 나아감을

이 외에도 (사 6:3, 요 14:16, 요 1:1-4, 4:10, 히 4:12, 롬 4:17, 1서 5:6-8)

   

 ※ 삼위일체 교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그 논쟁과 변증이 끊임없었습니다.


옛날 (주후 325) 콘스탄틴 황제 시대에 아리우스라는 말 잘하고 똑똑한 신학자가 있었는데그는 말하기를 예수는 하나님과 다르다예수는 육신을 태어난 피조물이다신성은 전혀 없다.”고 온 천지를 향해 떠들어댔습니다그 문제로 기독교계에 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걷잡을 수 없는 논쟁이 일어나자 황제는 교계의 대표 300명을 소아시아에 있는 니케아란 도시로 소집을 시켜 놓고 친히 종교 회의를 열었으니 그것이 유명한 1차 니케아 회의였던 것입니다하나님을 학식으로 믿는 머리 좋은 기독교 대표자들이 말 잘하는 아리우스의 웅변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보다 열등한 피조물이라는 그의 설교에 많은 종교 지도자즉 박,목사들이 고개를 끄떡이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보이는 촌사람이 아니요!” 하고 소리치며 일어섰습니다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집사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라는 30세밖에 안된 시골청년이었습니다.

   

그는 호모우시아(Homousia,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하시다)”라고 크게 외쳤습니다그는 성자 예수님은 본질이나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신 동일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신성을 단호하게 주장하면서삼위일체를 말하였습니다.대세가 아리우스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사전에 준비한 사람 아타나시우스의 추상같은 표호였던 것입니다참으로 기적의 순간이었습니다비록 말에는 능하지 못한 초라한 시골 띠기였지만 진리에 굳게 섰으며 성령 충만한 청년 아타나시우스콘스탄틴 황제와 니케아 종교 회의는 그의 정통 변증에 완전히 압도당한 채 회의는 끝났습니다소수의 진리가 다수의 이단을 격파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아리우스는 완전히 이단으로 파문당하였고그때로부터 니케아 신조가 작성이 되었으며뒤이어 아타나시우스 신조(AD 295-373)" 같은 정통 신조가 뒤를 이었고후에 천주교에서 고백한 사도신경이 천주교에서 나왔고후의 "톨트 신조(AD 1618-1619)," "웨스트민스터 신조(AD 1643)" 등 유명한 신조들의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삼위일체 부분만,

정통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곧 삼위로서 일체이시고일체 가운데 삼위이신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이 삼위를 혼돈하거나(유일본질을 분리함이 없이 성부의 한 위()가 계시고성자의 다른 한 위()가 계시며또 성령의 다른 한 위()가 계신다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하나이시며 그의 영광도 같으며그의 존엄도 동일하게 영원 하신다그러나 세 분들로서 영원한 분이 아니시며한 영원한 분이시며 한 전능자이시며 한 주이시다성부도 하나님이시고성자도 하나님이시며성령도 하나님이시다어느 한 위()가 다른 한 위()보다 크거나 작거나 할 수 없다.


※ 이단자 아리우스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를 완강히 반대할 때 그는 아리우스여 요단강에 가라 그리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볼 것이라하고 일격을 가했다고 합니다이 얼마나 통쾌한 표현입니까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위로 올라 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위에 임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 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6-17)"


이 글을 쓴 김영빈<벤허> 목사가 한마디 한다면, “셋은 구별이 되나 분리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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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빈 목사 지음 

흙에서 천국까지 (From Dust to Heaven) 평신도 신앙교재 중에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 함은,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해졌을 때만 아니라 타락 전에도, 그의 생득적 지혜로는 완전한 하나님 지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가 있었고, 하나님의 신성이 내재된 만물계시(롬 1:20)도 있었지만, 그것들만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광대하셔서, 인간의 하나님 지식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편린적이어서, 2위 성자의 말씀(λ?γο?, logos)의 계시 없이는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삼위일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 각 위(位)는 오직 삼위일체적으로만 알려지십니다. 흔히 삼위일체 하면 고도의 신학 수련을 받은 전문 신학자들의 사변적 지식인 줄 아나, 사실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보편적 지식입니다. 만일 누가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자 그리스도가 창세 전부터 말씀(λ?γο?)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요 1:1) 이유도, 성부 하나님을 계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크신 하나님은 성자 로고스(λ?γο?)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으며, 그 없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다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9)."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동원된 '말씀(히 11:3, 벧후 3:5)'이 바로 '성자 로고스'였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창 1:3)"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이 '성자 로고스'였고, 그 로고스로 인해 빛이 생겨났습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골 1:16)"고,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에 대해 깜깜해진 후에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알려졌습니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2)".


성육신하신 2위 성자도-성부가 그랬듯이-육체로 나타난 그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만으로는 온전히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성자는 오직 아버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적으로 알려지도록 경륜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요 5:31-32)",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7)".


많은 사람들이 성육신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도록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로 알지만, 사실 성육신의 근본 목적은 계시가 아닌, 육체에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계시가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골 1:15) 이스라엘 땅을 밟고 다니셨지만, 성부와 성령의 계시를 받은 소수 외는, 그를 하나님으로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를 보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아버지의 성령으로만(삼위일체적으로) 알려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를 자기보다 앞서 계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아 본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았고(요 1:29-34), 다음의 구절도 동일한 어조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의 육체를 입고 나타났음에도, 그의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가려졌음은, 삼위일체적 계시 없이, 위(位)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 곧 보고 듣고 만져지는 육체의 현현만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 몸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본 후에야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아 본 도마를 향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요 20:29)"고 하신 것은, 오감에 의존된 그의 믿음의 불완전성을 타박한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한 것은, 드러난 그의 육신을 본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계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한 것은,-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본 것은 사도됨의 확증이라는 뜻이지만-삼위일체적 계시로 알려진 예수 이해는 마치 보고 듣고 만지는 오감의 체험처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동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오감으로 직접 경험했다면, 지금보다 더 예수를 잘 믿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가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더 북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에 빠뜨려졌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요 10:24)."


이는 보고 듣고 만지는 오감이 진정한 신앙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보이는 것에 좌우된다면,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고 즐거워했던 아브라함이나(요 8:56), 그리스도를 보지 못함에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벧전 1:8)고 가르친 베드로는 다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 확신을 북돋도록 보냄을 받은 성령의 사역도(살전 1:5) 불필요해집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도, 성자 그리스도가 복음을 이루시고 승천하므로, 오감의 기능이 불필요해지고,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었을 때, 오히려 믿음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끝으로 3위(位)인 성령 역시,-성부와 성자가 그랬듯이-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증거에(삼위일체적 증거에) 의존되어 있음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은,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므로 자신을 드러내는, 상호 교호적(interactive) 방식입니다.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누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면, 성령이 그것을 듣고 "아 저건 내가 증거 해 주어야 하는 말이네" 라며 그 말에 찰싹 붙어 증거해 주는데, 그 증거 과정에서 성령이 복음을 말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현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지 않으면, 성령은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성령이 자신을 나타낼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 선포'와 '성령의 나타남'은 불가분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성령을 실업자로 만들고, 그의 나타나심도 봉쇄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전파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룰 뿐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의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체험을 원하며, 그것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각오하겠다는 결연성까지 보입니다. 그들 중에는 다행히 좋은 교사를 만나 건전한 성령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신비주의자나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낚여 영적 파산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진정한 성령체험이란, 한 마디로 성령의 증거에 수반되는 성령의 현현에 연루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를 첫째 사명으로 삼는 성령은, 그 어디에서보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한 성령체험의 방법이며, 또한 성경의 약속이기도 합니다(요 15:26).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관성 없이 발생되는 성령체험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칼빈(John Calvin)도 언제나 성령과 말씀을 연관지었으며, 그에게 붙은 '성령의 신학자'라는 별명은 '말씀의 신학자'라는 별명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같은 청교도들의 성령체험 역시, 복음이 말해지는 강단과 전도 현장에서 연루된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누가 성령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상한 방법을 쓰지 말고 지금 밖으로 나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우리 죄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이 전한 그 복음을 증거해 주시며, 당신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한 분 하나님의 각 위(位)는 삼위일체적으로만 알려진다는 사실들을 설명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7744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 함은,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에 대해 무지해졌을 때만 아니라 타락 전에도, 그의 생득적 지혜로는 완전한 하나님 지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가 있었고, 하나님의 신성이 내재된 만물계시(롬 1:20)도 있었지만, 그것들만으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고 광대하셔서, 인간의 하나님 지식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편린적이어서, 2위 성자의 말씀(λόγος, logos)의 계시 없이는 제대로 알려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삼위일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 각 위(位)는 오직 삼위일체적으로만 알려지십니다. 흔히 삼위일체 하면 고도의 신학 수련을 받은 전문 신학자들의 사변적 지식인 줄 아나, 사실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의 보편적 지식입니다. 만일 누가 삼위일체적으로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자 그리스도가 창세 전부터 말씀(λόγος)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요 1:1) 이유도, 성부 하나님을 계시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크신 하나님은 성자 로고스(λόγος)를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으며, 그 없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다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히 12:19)."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동원된 '말씀(히 11:3, 벧후 3:5)'이 바로 '성자 로고스'였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창 1:3)"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이 '성자 로고스'였고, 그 로고스로 인해 빛이 생겨났습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골 1:16)"고,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한 말씀이 그 뜻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에 대해 깜깜해진 후에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알려졌습니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행 28:25)",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2)".

성육신하신 2위 성자도-성부가 그랬듯이-육체로 나타난 그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만으로는 온전히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

성자는 오직 아버지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적으로 알려지도록 경륜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 인줄 아노라(요 5:31-32)",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7)".

많은 사람들이 성육신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도록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로 알지만, 사실 성육신의 근본 목적은 계시가 아닌, 육체에 죄를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계시가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골 1:15) 이스라엘 땅을 밟고 다니셨지만, 성부와 성령의 계시를 받은 소수 외는, 그를 하나님으로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를 보고,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아버지의 성령으로만(삼위일체적으로) 알려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를 자기보다 앞서 계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아 본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았고(요 1:29-34), 다음의 구절도 동일한 어조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의 육체를 입고 나타났음에도, 그의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가려졌음은, 삼위일체적 계시 없이, 위(位)의 '존재적 계시(existence revelation)', 곧 보고 듣고 만져지는 육체의 현현만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 몸의 못자국과 창자국을 본 후에야 비로소 예수를 하나님으로 알아 본 도마를 향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요 20:29)"고 하신 것은, 오감에 의존된 그의 믿음의 불완전성을 타박한 말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한 것은, 드러난 그의 육신을 본 때문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계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한 것은,-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본 것은 사도됨의 확증이라는 뜻이지만-삼위일체적 계시로 알려진 예수 이해는 마치 보고 듣고 만지는 오감의 체험처럼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동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오감으로 직접 경험했다면, 지금보다 더 예수를 잘 믿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가 유대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더 북돋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에 빠뜨려졌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요 10:24)."

이는 보고 듣고 만지는 오감이 진정한 신앙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보이는 것에 좌우된다면,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보고 즐거워했던 아브라함이나(요 8:56), 그리스도를 보지 못함에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벧전 1:8)고 가르친 베드로는 다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믿음에 확신을 북돋도록 보냄을 받은 성령의 사역도(살전 1:5) 불필요해집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도, 성자 그리스도가 복음을 이루시고 승천하므로, 오감의 기능이 불필요해지고,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을 힘입었을 때, 오히려 믿음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끝으로 3위(位)인 성령 역시,-성부와 성자가 그랬듯이-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증거에(삼위일체적 증거에) 의존되어 있음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자신을 나타내는 방식은,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므로 자신을 드러내는, 상호 교호적(interactive) 방식입니다.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누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면, 성령이 그것을 듣고 "아 저건 내가 증거 해 주어야 하는 말이네" 라며 그 말에 찰싹 붙어 증거해 주는데, 그 증거 과정에서 성령이 복음을 말하는 자와 듣는 자에게 현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지 않으면, 성령은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성령이 자신을 나타낼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 선포'와 '성령의 나타남'은 불가분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성령을 실업자로 만들고, 그의 나타나심도 봉쇄당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전파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이룰 뿐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의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체험을 원하며, 그것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어떤 희생도 각오하겠다는 결연성까지 보입니다. 그들 중에는 다행히 좋은 교사를 만나 건전한 성령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신비주의자나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낚여 영적 파산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진정한 성령체험이란, 한 마디로 성령의 증거에 수반되는 성령의 현현에 연루되는 것입니다. 복음 증거를 첫째 사명으로 삼는 성령은, 그 어디에서보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가장 안전하고도 확실한 성령체험의 방법이며, 또한 성경의 약속이기도 합니다(요 15:26).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관성 없이 발생되는 성령체험은 신뢰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칼빈(John Calvin)도 언제나 성령과 말씀을 연관지었으며, 그에게 붙은 '성령의 신학자'라는 별명은 '말씀의 신학자'라는 별명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같은 청교도들의 성령체험 역시, 복음이 말해지는 강단과 전도 현장에서 연루된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누가 성령 체험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상한 방법을 쓰지 말고 지금 밖으로 나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우리 죄값을 지불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이 전한 그 복음을 증거해 주시며, 당신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한 분 하나님의 각 위(位)는 삼위일체적으로만 알려진다는 사실들을 설명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정통 교회에 속하여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오소리 다리처럼 들쭉날쭉하여 균형 잡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을 외치는 건전한 신앙인들 중에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이-성자와 성령이 배제된-유대교의 일신론처럼 왜곡되어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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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성자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비인격적인 통로(through)로 간주하는, 성자 경시(輕視)도 한몫 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mediator)직은 성경의 핵심 사상이지만, 그것이 성부와 분리된 비인격적인 통로가 될 때 성자는 삼위일체 지위를 상실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통로 개념이 극대화될 때, 그리스도의 용도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유효하며,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용도 폐기됩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첩경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 강림 후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에 비견되고, 극단적인 세대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이단이, 안식교에서 이탈하여 '엘××선교원'을 세운, 박XX입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께 도달하는 수단이고, 성부 하나님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들을 내어준 성부의 희생을 극대화하는 드라마틱한 주제일 뿐,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에게는 오직 성부의 사랑만 있을 뿐,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향해 했던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라는 절절한 고백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부가 분리될 수 없는 일체 임을 부정한 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mediator)가 분명하지만(딤전 2:5), 중보 대상인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인 동시에 중보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지위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제물인 동시에 그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으로(히 9:24), 기도의 중보자인 동시에 기도 응답자로(요 14:13), 제물의 요구자인 동시에 제물의 제공자로(창 22:13-14) 나타났습니다.


 

왜곡된 중보자 개념은, 근본 삼위일체의 부정에서 온 것이지만,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 의 통념을 '중보자(mediator)' 그리스도와 '궁극(finality)'인 성부께 무차별 적용시킨 원인도 있습니다.


 

예컨대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는 거리차가 있고, 각각에 도달하는 데도 시간차가 있다는 통념이, 중보자(mediator) 그리스도와 궁극(finality)인 성부는 거리가 있고, 둘을 조우하는 데는 시간차가 있다는 추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중보자' 그리스도와 '궁극'인 하나님은 일체이시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둘 사이에는 거리가 없으며, 둘의 조우(遭遇)에도 시간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조우할 때 이미 하나님을 조우합니다. '중보자' 그리스도와 '궁극'인 성부의 관계를,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라는 통념에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통로로만 보는 그리스도 경시적(輕視的) 입장과는 상반되게, 그리스도를 왜곡되게 중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소위 '구속사적 성경해석' 혹은 '구속사 신앙'을 부르짖는 이들에게서 종종 발견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되면 뭐든 정통 신앙인인양 간주되며, 그들의 말, 설교, 어법은 온통 예수로 덧칠되고, 반면 성부와 성령은 홀대를 받습니다. 성경 해석 원리 역시 "오직 예수(마 17:8)"이며, 모든 성경을 이 원리에 맞추어 풀려다보니, 억지스러운 풍유적 해석들이 난무해집니다.


 

여기서 진일보한 극단의 '오직 예수주의(pure Jesuism)'가 있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가 이데올로기처럼 경화된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이면에서는 그런 낌새가 물씬 풍깁니다. 이는 '오직 예수(Jesus only)'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삼위일체 무용론까지 들먹이는 그들의 태도에서 확인됩니다. 삼위일체 개념이 '오직 예수'의 초점을 분산시킨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유대교의 일신론적인 '하나님 중심'과 유사합니다.


 

또 한 부류의 왜곡된 예수 강조자들이 있는데, 곧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예수는 삶의 모범자로서의 인간 예수이며, 그의 이타적이고 모범적인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살아있는 예수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에게는 흥미를 못느낍니다.


 

설사 그것에 관심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그것이 입혀주는 구속의 은혜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지를 불문하고-그의 이타적인 행위 자체를 칭송하고 본받기 위해섭니다.


 

그러나 예수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삶의 활동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고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한 마디로 죽기 위함이었습니다(마 20:28). 곧 자기 육체에 우리 죄를 담당시켜 죽으므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섭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성경이 그의 죽으심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유력한 성경연구 단체가 쓴 "아직도 그리스도의 대속에만 매달립니까?"라는 글을 대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2천년 전 과거사일 뿐, 현대인들에게 흥미 없는 주제라는 것과, 더불어 오늘 교회 강단의 메시지가 어떨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됨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인 것보다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이질감 없이 그를 모범자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말하며(요 20:28, 요일 5:20), 그의 점 없고 흠 없는 피 만이 우리 죄를 속량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벧전1:18-19).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셔야 하는 이유는, 그를 대신하여 오시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 성령은 2위 그리스도의 바톤을 이어받아 오시기에, 삼위 성령이 오시려면 2위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합니다.


 

단지 인간 예수의 죽음으로는 성령을 오시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이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위에 오시고, 그의 죽으심을 근거로 역사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 송아지의 피가 뿌려진 속죄소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출 25:22), 제물 위에 하나님의 불이 임한 것은(레 9:24, 왕상 18:38),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간과된 채, 성령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과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이 펼치는 성령 운동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없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조우 방법도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가 아닌, 소위 침묵, 관상, 센터링 기도, 참회 같은 다양한 '영성적 기술들(Spiritual arts)'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지 않는 성령추구는 이방 종교들의 접신 추구와 다를 바 없으며, 그렇게 하여 만난 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입니다.


 

루터가 "십자가가 없는 곳에 임하는 영은 악령"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 원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특정한 훈련이나 영적 기술을 통해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이는 그분의 약속입니다.


 

자신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외는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죄 값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인다는 신앙고백적 행위이며,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받아들여지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7571

 추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제 1장. 성령과 삼위일체(三位一體) / 에드윈 H. 파머


이 책에서는 주로 성령의 다각적인 역사(役事)를 생각하고자 한다. 그러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이 첫 장은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하여 진술하되 성령에 관하여 네 가지 명제로 고찰한다.


1.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리스도인이시라면 성령을 한 인격으로 믿는다. 교회의 초대로부터 오늘의 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양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다한, 소위 기독교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성령을 "그분"이라 하지 않고 "그것"이라 한다. 그들은 그분을 제 삼 위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에게서 몇 가지 구원의 큰 축복들을 빼앗는다. 더구나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령이 인격이심을 보여 준다.

첫째로, 성경은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와 의지와 감정이 그에게 있음을 가르친다. 비인격적인 사물은 이런 성질들을 갖지 못하나 하나님의 영은 가지신다. 바울은 성렁께서 사고력을 가졌음을 전제한다(이하 모든 성경 인용은 '개역 개정판' 성경임).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 11) 여기서 바울은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이 가질 수 없고 인격만이 가지는 지식이 성령께 있음을 밝힌다. 성경도 또한 성령께서 의지의 인격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비두니아로 가려 했을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다(행 16:7). 또 성령께서 많은 선물들을 신자에게 주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또한 성령은 인격이시므로 감정을 가지셨다. 이를테면, 에베소서 4:30은 성령께서 슬픔을 가지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명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또한 로마서 8:26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둘째로, 성경은 성령을 다른 인격들과 병치(竝置)시킴으로 그가 인격이심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인격이심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을 때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꼭 같이 인격이심을 지적하셨다. 야고보도 초대 교회에 어떤 지시를 내리면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28)라고 썼다. 성령께서 자기나 사도들과 같은 생각을 하실 수 있는 인격이라고 생각한 것이 명백하다.

 

더욱이 성령께서 비인격적인 세력뿐이라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성령의 권능으로"(눅 4:14) 갈릴리에 돌아가셨다고 말함은 무의미한 말의 중복일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하랴! 오직 그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성경을 영감(靈感)하시며, 우리로 깨닫도록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도하시며, 기도를 인도하시고, 우리 가운데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을 맡기신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불손하게 대하거나, 그를 대적하거나, 멸시, 훼방 등으로 그를 불쾌하게, 또는 슬프게 한다면 우리 자신이 해(害)를 자취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아무쪼록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지 말고 오히려 믿고 그 사실에서 오는 축복들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한 인격으로는 믿되 그를 한 피조된 인격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이 비인격적인 "그것"이 아닌 것은 알면서도 성부보다 낮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특성뿐 아니라 신성도 겸비했음을 보여 준다. 이 신적 속성은 곧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표(標)가 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사 창조(창 1:2)와 섭리(시 104:30)와 예수의 초자연적인 잉태(눅 1:35)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그는 또한 전지(全知)하시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질문함으로 그것을 암시하였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13,14) 사도 바울도 그것을 우리로 믿게 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나아가 성령의 편재성(遍在性)을 말할 수 있다. 시편 기자(다윗)는 웅변적으로 이르기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하여 그가 하늘에 오르거나, 음부로 내려가거나, 바다로 피하거나, 밤의 흑암 중에 숨는다 해도 곳곳마다 성령(주의 영)이 거기 계셔 결코 그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그는 말한다. 성령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령은 신도들 안에 거하며, 많은 신도들은 각자 안에 그의 임재를 제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히브리서 9:1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이것은 성자와 동역(同役)하신 성령께서 영원한 신성을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이, "성령이 말씀하시기를"과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어구를 섞바꾸어 쓰는 사실도 성령의 신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다.

 

끝으로, 대사명 위임 시(大使命委任時, 마 28:19)와 사도의 축도(고후 13:13)에서와 같이 성부, 성자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을 병기(竝記)한 사실은, 성령께서 다른 양위(兩位)와 동등한 자리에 위치하여 그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피조물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그처럼 긴밀히 연합된 표현으로 한데 묶는다면 도무지 조리가 맞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신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창조의 아름다운 역사와 영감의 권위 있는 일과 그리고 각 사람 마음속을 조명하는 일들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타락을 극복하여 중생시키고,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지 못하였으리라. 그가 유한자(有限者)가 아니고 하나님의 한 위(位)이신 사실을 고마워함이 마땅하다.

 

3.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별된 하나님의 한 위(位)이시다

 

교회 역사상에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믿으나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각이(各異)한 삼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3세기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 때에는 성부로서, 그 후 역사상에는 성자로서, 마지막에는 성령으로서 나타나신 분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처음엔 성부로, 다음엔 성자로, 세 번째로는 성령으로 불려지는 셈이다. 즉, 성부가 성자로 변하고, 다시 성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다 성경의 계시에서 이탈된다. 어떤 성경 본문은 한 하나님의 단순한 변모가 아니라 각이한 삼위의 존재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때를 예로 들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와 동시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와 예수님 머리 위에 앉았다고 했으니(마 3:16-17), 이들 삼위의 동시 현현(顯現)은 하나님을 단순히 단일(單一)하다고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33도 하나님의 삼위 간에 분명한 구별을 짓는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한 위가 아니고 삼위이심은 확실히 우리에겐 축복된 일이다. 그것은 풍성한 삼위일체가 되시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전능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생명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4. 성령은 성부와 상자로부터 나오신다(發出, 發生)

 

삼위일체의 삼위 간에는 일정한 관계와 차서(次序)가 있다. 이 삼위가 똑같이 하나이시라고 해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녔고 서로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제 일 위와 제 이 위 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영원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셨다. 성령이 아들을 낳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과 다른 두 위 간에도 일정한 관계가 있으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하나님의 영의 나오심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경에서 이 말을 설명해 주지 않으므로 여기에 성경 말씀을 되풀이할 뿐 그 이상 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가 성령을 낳으셨다거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낳으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교부들이 암시하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형제이거나 성부의 손자가 되는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에 관하여 조심성 있게 '낳다'라는 용어를 피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信經)은 이에 대해, 성령은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고 누가 그를 낳은 것도 아니고 다만 나오신다."고 표현하였다. 이 '나오신다'란 말은 예수께서 사용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의 이름이 또한 이 삼위 간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를 준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보여 주며, 아들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의미 하듯이 성령이라는 이름도 다른 두 위(位)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시하고 있으니 곧 영(靈)이라는 그 이름은 불어넣었다(spirited or breathed)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령이 비록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며 혹은 그로부터 불어넣어졌다 할지라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해도 그 두 위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없음은 마치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시 2:7, 행 13:33)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이 아니라 할 수 없음과 같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영원히 낳음을 입은 것같이 성령도 영원히 불어넣어졌다는 사실에 신비가 있다. 그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셨다.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또는 '불어넣어졌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보다 낮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삼위의 다른 두 위와 영원히 유지하는 관계를 표시할 따름이다.

 

또한 성령이 다만 성부께로부터만 나오지 않고, 성부, 성자 두 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성부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15:16에서 분명하거니와,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것은 그처럼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을 세상에 보내사 제자들 위에 불어넣었다('숨을 내쉬며')고 하는 이런 구절들(요 15:26, 16:7, 20:22)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한 번 불어넣는 것은 영원히 불어넣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들이 삼위 내의 관계에서도 가지는 일정한 권위를 반영한다. 그 위에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 불려질 뿐 아니라 "아들의 영"(빌 1:19)으로도 불려진다. 이러한 성령의 다른 두 분과의 관계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제일, 제 이 위가 아니고 제 삼 위로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으니 맨 처음이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낳음을 입었으니 제 이 위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니 제 삼 위이시다.

이 삼위일체의 차서는 역사 가운데 나타나서, 처음 두 위가 연속하여 전면에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현저하게 되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세상에서 더 뚜렷하였던 분은 아버지시다. 창조에서 주된 영광을 받으신 분이나,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주로 관계한 분도 그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자 아버지는 그처럼 현저히는 나타나시지 않으셨고, 성령은 아직 충만히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만 더욱 뚜렷한 역할을 담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시고 승천하시자, 삼위일체의 제 삼 위께서 더 뚜렷이 등장하셨다. 이와 같이 삼위께서는 삼위일체 안에 일정한 차서가 있어서 그 차서는 역사 가운데 현시되어 각 위는 바로 삼위일체 내에 발견되는 차서대로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려 나오기(breathed out) 때문에 오순절에 교회 위에 불려 나온(임재하신) 분도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성령이었다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중 제 이 위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땅에서 성육하신 아들이어야 하는 사실과 상응한다. 같은 모양으로, 삼위일체의 제 일 위가 삼위일체 중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또한 믿는 자들의 아버지시다.

 

이상은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몇 가지 면에서 고찰한 것인데, 비록 우리가 이것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계시한 것을 무시하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가 교회를 인도하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과 다른 두 위와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진다는 교리의 실제적인 결과는 광범위하다. 1054년 기독교 세계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나뉘었다. 비록 저변의 요소가 많았으나 서방 교회들이 톨레도(Toledo) 회의(589년)에서와 같이, 성령은 아버지 "와 아들(filioque)"=("and the sun") - 이는 논쟁의 소지가 있는 용어 - 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는 반면에 동방 신자들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믿었던 것은 실족케 하는 걸림돌이었다. 이 차이의 결과로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서 분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교리는 거대한 실제적 효과를 발휘하여 만약 1500년 전 교부들이 이것을 작성치 아니하였던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주시는 지식을 감사해야 한다.

 

더욱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filioque(and the sun)"의 부정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예수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게 되며, 성령의 성화의 일만 내세우고, 예수의 구속은 뒷전으로 돌리게 되며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경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성화가 칭의보다, 성령과의 주관적인 교통이 객관적 교회 생활보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이 성경보다 더 중요시될 우려가 있다. 카이퍼는 이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동방 교회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옴을 부인하는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회의와 대회에서 행해지는 긴 신학적 토의가 때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 토론이 언어상의 문제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 결론들은 위로부터 아래 대열에까지 배어든다. 우리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분이라는 고마운 계시에 감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관념적인 지식만으로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위에 성령과 그의 사역을, 체험을 통하여 알도록 힘써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 장(章)과 다음 장들이 씌어졌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9-30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삼위일체 하나님

 

김영재교수 / 합동신학대학원(역사신학)?

 

세계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어서 제각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말하고 있으나,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유일하게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즉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하거나 만들어낸 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뜻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나 단일신(單一神)은 아니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유일신’이란 뜻을 ‘단일신’으로 이해하여 홀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 성령 하나님(성령) 세 분이시나 한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나 세 분으로 계시며 일하십니다. ‘삼위일체’란 단어는 성경에는 없으나, 교회는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위(persons)가 한 하나님이신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제일 처음 삼위일체라는 말을 한 이는 터툴리안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물으면서, 아들이시면 아버지와 같이 동등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데서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하게 된 교리입니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재확인하기까지 교부들이 많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교회가 교의로 받아들이게 된 교리입니다.

 

양자설과 가현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잘못 가르친 초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와 에비온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의 철학과 동방의 여러 종교의 혼합 사상이며, 에비온주의는 유대교적 배경에서 나온 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났다는 뜻에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고 역사적인 인물로 사신 것을 부인하거나 그런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에비온주의는 예수는 단지 인간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양자(養子)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가현설과 양자설, 이 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설을 대변하는,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전형적인 이단설입니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이나 그 다음 세대의 변증가들은 나사렛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나신 분으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도들의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다소 표현상 미흡한 점은 있었으나 그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항하여 정통적인 신앙을 변증하며 전수하였습니다. 미흡한 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들 하나님을 헬레니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 사상으로 설명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로고스’는 순수한 신과 물질 세계를 중계하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을 ‘로고스’로 설명하자니까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한가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양태론의 생성과 파급

?

3세기에 이르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삼위일체를 결과적으로 부인하는 단일신론(單一神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양자로 이해하는 소위 동적(動的) 단일신론과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었습니다. 동적 단일신론은 에비온적 양자론에 가깝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영지주의적 가현설에 유사한 것입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그냥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사벨리우스가 처음 말했다고 해서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도 합니다.

 

3세기 중반에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과 교회 시대의 세 시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자(單子, monad)로서 하나님의 존재 내에서 구별이 없으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 가지 이름과 양식으로 구별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양과 빛과 열을 비유로 사용하여 로고스를 통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장차는 로고스가 다시금 흡수되고 하나님은 하나일 뿐이라고 합니다. 사벨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무시하였으므로 그에게서 성육(成肉)의 개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물론 이단설로 정죄를 받았으나, 교회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래 삼위일체 교리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그 교리를 논할 경우에는 양태론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신학자들은 역사적인 예수를 찾느라 예수전 연구에 헛되게 열을 올렸습니다. 유니테리안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따르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표방하는 합리주의적인 신자들의 그룹입니다.

 

한국 기독교장로교회가 1972년에 내 놓은 신앙선언서 제 1장 1절에 보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을 작성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계시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들로 나타나셨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에서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만난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이 양태론을 말하는 것은 알 만한 일로 여기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자에게서도 양태론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자못 긴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보수적인 신학자의 글에서도 “이 세 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적으로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 위는 하나님의 본체(本體)가 존재하고 있는 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봅니다.

 

이러한 양태론적 이해는 부흥사들이나 일반 목회자의 설교에서도 흔히 듣는 것입니다. 일반 목사들의 경우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해, 햇빛, 열, 혹은 물, 얼음, 수증기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로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양태론에 빠지게 됩니다. 신학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유신론적으로 논증을 하다가 그러한 논증의 잣대를 삼위일체론에까지 적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양태론적 이해가 만연되고 있는데다가 그냥 주관적인 성경공부에만 열을 올리고 교리 교육에는 대체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 교회이다 보니 신자들은 이단들의 가르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양태론을 가르치는 윗트니스 리도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는가 봅니다.

 

1996년부터 98년의 기간에 월간지 <교회와신앙>의 발행인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측과 벌인 논쟁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감합니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태론은 합리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는 삼위일체 이해로 나름대로의 전제와 논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경우는 논리성을 결여한 채로 겁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전혀 부적합하고 불경스런 비유를 들면서 조잡한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논쟁할 가치조차 없음을 발견합니다. 윗트니스 리는 너무 많은 비유와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대꾸하고 논쟁을 한 최삼경 목사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삼위일체는 경외심을 가지고 신중히 논해야 합니다

 

교리사를 보면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거나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때 어휘 선택을 하는 데도 얼마나 신중을 기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니케아 공의회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 본질(homoousios)이신 한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동 본질이란 말이 사벨리우스가 쓴 말이므로 사용하기를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삼위가 한 하나님이심을 그런 대로 가장 적절하게 이해하게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사용하였습니다.

 

목회자가 성경에 충실하다가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과 교리사적(敎理史的)인 지식을 동원하기보다는 자연의 비유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어거스틴을 포함한 많은 교부들도 그랬으나 그러나 그것은 양태론에 문을 여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시도가 못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체를 비유로 설명하는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말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답하시는 말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her ehyeh, 출 3:14)하는 말씀을 발견할 뿐이다. 그밖에, 예컨대, 이사야 9장 6절에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는 이름이나 유추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역할과 능력을 묘사하는 말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철학적인 막연한 신관이나 다신론적인 혹은 범신론적인 신관이나 다른 종교적인 신관으로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물질 세계를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의 유추를 통한 설명으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설명은 약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의문을 일으키게 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 뿐이다. 즉,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이해로 오도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삼각형을 그려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안 될 말입니다. 그런 설명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오묘한 것을 도식화함으로써 쉽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비신학적인 발상입니다.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을 그대로 받아, 그 원리를 수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설명이 옳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예정론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치시키면서 해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예정을 바로 이해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사도 시대 이후 로고스를 우주구조론(cosmogony)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오던 것을 이레니우스(∼202년)가 구속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확립에 전기(轉機)를 마련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레니우스는 당시까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써 설명하려는 것을 지양하여 그리스도로써 로고스를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 즉 그리스도의 이해가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 개념보다 선행하며 더 명확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고백하며 예배하는 교리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은 무슨 사색으로나 비유를 사용하는 설명을 통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따라 논구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만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해하기를 시도해야 하는 현학적인 논리의 희롱이 아닙니다. 목회 현장에서 평신도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난해한 교리라든지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함으로써 미리 겁을 주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배우는 일에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는 초절적(超絶的)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으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자이면 누구나 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교리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믿고 있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면서부터 있게 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교리 작성을 위하여 연구하고 논의하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이고, 교회가 세례식을 행할 때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베풀었으며, 수세자로 하여금 사도신경을 따라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고백해야 하는 교리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논의할 때, 논의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같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비록 만족할 만하게 설명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따라, 혹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하는 도마의 고백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실제로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먼저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시인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모든 이단은 단일신론적 신학을 지지합니다.

 

초대 교회의 유대교적 에비온주의적 양자론(養子論)과 영지주의적 가현설(假現說)은 반 기독교적인 이단의 전형(典型)입니다. 영지주의는 희랍적 철학 사상과 동방의 신비주의적 종교 사상이 혼합된 사상이었습니다. 양태론은 인간의 육체를 옷 입듯 입으셔서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가현설과 통합니다. 합리주의적인 그리스도 이해나 신비주의적 그리스도 이해가 서로 통합니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 안에 사람으로 나셨음을 믿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사람으로 나신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종교적인 체험을 위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이로 생각할 뿐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각자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에 양태론적 삼위일체 이해가 보수적인 교회에까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양태론적 이해는 신비주의 운동이 준동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합니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떠나서 “신 중심 신학”을 거점으로 한다는 종교다원주의자에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완전히 폐기될 수밖에 없는 교리입니다.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의 핵심을 떠나 단일신론적인 신관을 견지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이제 기독교적 신학 세계를 벗어나 “우주론적 기독론”이란 말에 걸맞게 종교다원주의의 무중력 세계로 접어들어 표류합니다. “우주론적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적 근거를 두려는 비역사적인 기독론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임은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격이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확정하고 난 이후에, 즉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교리만 해도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보면, 그것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parakletos, 위로자)라고 하심으로써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말씀하십니다(요 14:26, 15:27, 16:7, 17:13~14, 참조: 롬 8:26~27).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즉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17). 즉,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요 14:6).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롬 8:9, 요 3:5).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 전에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 기독교 서방 교회의 전통적인 고백입니다. 동방 교회는 성령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고백하는 점에서 다소 다릅니다. 그러나 삼위 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사랑하기 시작하셔서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며,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과 더불어 사랑으로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요 15:9, 17:24).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시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며 서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음을 믿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아 구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맺는 말

 

유신론적(有神論的) 논증은 철학과 종교에서 성경의 계시의 말씀을 접어 둔 채 신의 존재를 논의하는 논증입니다. 즉, 자연 만물을 보아서 신(神)이 존재함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논증이다. 유신론적 논증을 통하여서는 신의 존재를 막연히 추측할 수 있게 해 줄 뿐입니다. 이러한 지극히 제한된 일반적인 유신론적 논증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일에 더 연장하여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합리한 논리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 안에서,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부수적(附隨的)인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의할 경우와 같이 술어(述語)나 보어(補語)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주어(主語)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즉, 우리의 신앙고백과 예배를 받으시는 주격이신 하나님 자신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논증할 수 있거나 논증을 감행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며, 필요 없이 많은 말로 설명해야 하는 교리가 아니고 신앙고백과 예배로 응답해야 하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나 우리의 언어의 취약성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쉽게 양태론이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한국 교회는 양태론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점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당치않은 논리의 비약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아니 모든 교리는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재삼 인식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사람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관한 교리이기 때문이다(졸고: “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차영배외, 태백사, 1999. 235~253 참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고, 당신이 지으신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돌보도록 하는 직임을 맡기시고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하여 타락하였습니다. 타락하여 죄와 죽음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셔서 우리는 그 진리를 알게됩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1:17).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요 14:6).

 

그래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재확인한 신조는 이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며 천지와 가시적이며 불가시적인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우리가 믿사오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며 창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시고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으니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믿습니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한 마디로 말씀합니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비로소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님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님과 더불어 사랑 안에 계심을,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므로 영원전부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아들은 자신을 희생으로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서 우리 죄인을 회개케 하시며, 정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독생자가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심으로 기도하시고 성화시키시며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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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

 

                                                                                                       김정우/총신대 교수

 

이 글에서 필자의 중심 관심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적 발판을 새롭게 형성해보는 데 있다. 이 새로운 발판을 세우기 위해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 사용된 논거들과 증빙자료 구절(proof text)들을 구약신학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교의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해준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구약 성경 구절을 주석하여 이 구절들이 갖는 원래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후대의 의미와 구별해보고 원래의 의미에 근거하여 후대의 의미와 새롭게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필자의 또 다른 관심은 신약시대에 몸으로 찾아오신 성자와 성자가 보낸 성령이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찾아보는 데 있다. 즉 신약시대에 찾아오신 성자는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또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필자는 계시의 유기성을 전제하므로 이미 구약 속에 성자와 성령의 사역과 인격이 그림자나 씨앗의 형태로 있었음을 가정하고 그들이 구약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살피고자 한다. 무엇보다 신약의 성자와 성령이 구약에서도 독자적인 인격성을 가지면서 신적인 통일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지 살피고자 한다.

 

루이스 벌코프는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거 가운데 구약의 증거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창1:26; 11:7). 둘째,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 인격(위)으로 묘사되었다(창16:7-13; 18:1-21; 19:1-22). 셋째,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사48:16; 63:10).

 

그러나 찰스 핫지는 훨씬 더 조심스럽다(Ch. Hodge 446).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는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 구성요소들은 이곳저곳에서 드러날 뿐이다." 핫지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구성요소'는 벌코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벌코프가 제시하는 세 가지 논점을 살필 뿐 아니라 그가 빠뜨리고 있는 잠언 8장의 하나님의 지혜를 추가하여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필자는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자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과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구약이 열어주는 삼위일체 교리의 가능성 등을 생각하고자 한다.

 

I .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거의 대부분의 전통적 조직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점을 구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이와 연관된 가장 중요한 구절이 창세기 1장 26∼27절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가"라고 말씀하신 본문인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1절도 구약의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본문으로 함께 인용되고 있다. 이세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있다. 학자들은 다섯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 신화의 파편

게블러(Gabler 1795, Hasel 59쪽에서 인용됨)로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현대 비평학자들은 이 창세기의 본문이 신화의 파편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고대 근동아시아의 창조신화에서 '신들' 이 서로 상의하여 인간을 창조하는 사상이 '우리' 라는 복수형으로 아직도 창세기의 본문 속에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에누마 엘리쉬에는 마르둑이 에아와 상의하고.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는 여러 신들이 상의한 뒤 인간을 만든다. 궁켈은 이 복수형이 P기자가 이전에 있었던 다신론적 기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반영해준다고 한다(1901:101). 그러나 문서가설의 정당성을 제쳐놓고서라도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다신론을 비판하며 그 신화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철저하게 논쟁하고 있으므로 다신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2. 위엄의 복수형(Plural of Maiesty)

카일(Keil)과 드라이버(Driver)는 '우리' 를 위엄(혹은 장엄)의 복수형으로 본다. 이것은 "신성 안에 있는 속성과 능력의 충만함"이다(Driver 1904:14). 히브리어와 셈어에서는 단수개념이 복수형으로 강화된다. 예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수적인 복수가 아니라 높고 강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뜻한다. 데라빔(teraphim)도 하나의 신상이지만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위엄의 복수형은 명사에만 나타나고 대명사에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P.Joueon 1923:309).더구나 "만들자(asa)"라는 동사는 한번도 위엄의 복수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3. 의사표현헝 복수형(Plural of Self-deliberation)

게세니우스-카우칠(#124f, n.3)와 쥬옹(Joueon #ll4e), 브로켈만(24,14a)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보며, 카수토(55)는 스스로 격려하는 형식(self-encouragement)으로 본다. 최근에는 베스터만과 몇몇 학자들이 지지한다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문법학자들은 이사야 6장 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와 사무엘하24장 14절의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 두 본문에 따르면, '나'와 '우리'가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11장 7절도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사실 창세기 11장 7절은 의사표현형 복수형으로 보기에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이런 용법은 지극히 희소하며 문맥을 볼 때 의사표현형 복수형은 창세기 3장22절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사야 6장 8절도 마찬가지다.

 

4. 신성의 복수형(Plural of Fullness)

(1) 바나바 서신과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여기의 복수형을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으로 보았으며 전통적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삼위일체를 예시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령이 복수형 속에 있다고 보았고 터툴리안은 성육한 말씀, 즉 그리스도가 포함되었다고 보았다(Hasel 1975:58). 구약신학자 페인(1978: 167)은 여기에서 "삼위일체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설명도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본문 속에 "삼위일체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클라인스는 하젤을 이어, '우리' 를 신성 안의 복수형(plurality within the Godhead)으로 해석한다. 창세기 1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이미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 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가능하게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창조의 수단으로 나타난다(욥 33:4;시104:30;겔37).또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있으라")을 신적 인격으로 본다면 여기에서 삼위일체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신성의 복수형으로 보는 이 해석은 창세기의 자연스런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특히 왜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7절에 삼위일체가 나와야 하는가?

 

5. 천상의 총회

필로로부터 유대인 랍비들(Bereshith Rabba viii 3-7)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복수형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 즉 '천사들' 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 왔다. 즉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 있는 여러 천사들을 향하여 "우리가…"라고 말씀하셨다. 최근에도 이런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폰 라드, 침멀리, 베스터만 144에서 인용됨).그러나 이 해석에 대해 카수토는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1961: 55).즉 이 해석은 첫째로 창세기 1장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중심 사상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로 "우리가 만들자"는 표현은 천사들과 상의하는 말투가 아니다. 또한 셋째로 만약 하나님께서 상의하는 투로 말씀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와 상의하셨는지 더 구체적으로 시사했을 것이다(왕상 22:19;사 6:1-8; 욥 1-2장). 카수토의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여러 해석 가운데 천상의 총회를 기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아래에 제시된 네 가지 논거에 근거하여 구약 자체의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본다.

 

첫째, 천상의 신의 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에 널리 나타나고 있다. 뮬렌(1980:113)은 이 개념이 "애굽,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페니시아, 이스라엘 문화에서 아주 일반적인 종교적 모티프였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총회에 대한 개념뿐 아니라, 그 용어조차 서로 유사함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벨론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인간창조에 대한 결정은 신들의 총회에서 질문과 응답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Enuma Elish 토판 VI, 5-8, ANET 68).

 

둘째, 구약성경 안에는 천상의 총회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왕상22:19;욥1:6이하 2:1이하 38:7). 물론 구약의 천상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천상총회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스라엘에서의 천상총회 개념은 유일신앙의 틀 속에서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상의 존재들은 결코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신들이 아니며, 이들은 "야웨의 뜻에 복종하는 천상의 영물들에 불과하다"(Miller1973:70).구약에서는 '하늘과 구름'과 같은 비유법과 '거룩한 자들, 신의 아들들, 그(하나님)를 둘러싼 자들, 야웨의 군대'와 같은 용어로 천상의 총회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필자의 논문 1992:104를 보라).

 

셋째, 이사야 6장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는 창세기 1장26절과 상당히 유사하며, 주님은 그룹과 스랍들이 있는 천상의 총회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있다.

 

넷째, 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 가 천상의 총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어떻게 27절에서 오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명 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도 인간창조에 개입하였는가?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는가? 그러나 본문 창세기 1장26-27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선언과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구별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서 "우리가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창세기 11장 7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지만, 바로 이어 8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홑으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6장 8절과 9절에서도 같은 경우를 발견한다.

 

즉 창세기 1장 27절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창조했음을 명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 있는 천군천사들을 향하여 인간창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실 때 그들의 경배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욥기 38장 4절과 7절이 이 사실을 지지해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던 말할찌니라‥‥그 때에 새벽별(kokbey boqer)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beney 'elohim)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 여기서 천군천사들이 "노래하며(ranan)", "기쁜 소리를 낸(rua)"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요 경배였다.

 

6. 정리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 라는 복수형은 하나님과 천상의 총회를 포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천사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명백하게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한정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자'는 천상의총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천군천사들의 경배를 받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창조를 주목하게 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상의 총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언을 가리킨다고 해서삼위의 제 2위시요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배제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는 아직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천지 창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의 본문이 가지고 있는 더 '충만한 뜻(Sensusplenior)'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본문은 구약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다 표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는 구속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른 본문을 통해 더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창조에 있어서 성자의 역할은 바로 다음에 다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에서 보다 명백해진다.

 

II .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잠언 8:22-31)

 

전통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연관하여 잠언 8장 22-31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박윤선 1972:13)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잠언 8장은 예언은 아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선지서에서 보는 예언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잠언 8장에 소개된 지혜의 본질과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선재한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혜의 성격 때문에 칼빈도 요한복음 5장 17절에 근거하여 여기의'지혜' 는 제 2위이신 성자라고 주장'한다(「기독교강요」,1960:129-130).

 

그러나 잠언 8장의 지혜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때 생기는 문제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실 신약성경이 잠언 8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예수와 선재한 지혜를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에 잠언 8장의 본문은 구약의 삼위일체와 연관하여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본문을 구약의 맥락에서 자세히 살핀 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자.

 

문학적 형식면에서 볼 때 본문은 창세기 1장 1∼2장3절 그리고 2장4절 이하와 애굽의 아포피스 책(Book of the Apophis)과 에누마엘리쉬 토판 1,1-9줄까지와 유사성을 가지며, 시편의 여러 창조시편과 유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찬양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창세기 1장 같은 창조의 순서에 관심을 갖기보다 모든 창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선재한 지혜에 대한 찬양' 을 다루고 있다. 잠언 8장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지혜를 낳고 왕위에 않히심(22∼26절)

1) 요약적 진술: 주께서 창조 전에 지혜를 낳으심(22∼23절)

(1)주께서 지혜를 낳으심(22절)

(2)주께서 지혜를 세우심(23절)

2) 부정적 상황 (24∼26절)

(1)물이 있기 전(24절)

(2)산이 있기 전(25절)

(3)땅이 있기 전(26절)

 

2. 지혜는 어린아이로서 주의 창조를 보고 기뻐함(27∼31절)

1) 긍정적 진술: 하늘, 바다. 땅을 만드실 때 지혜가 거기 있었음(27∼29절)

(1)하늘과 궁창을 만드실 때(27절)

(2)궁창과 바다의 샘을 만드실 때(28절)

(3)물과 땅의 경계를 정하실 때(29절)

2) 주절 : 이 기간 동안 여인 지혜는 주 앞에서 놀고 인간을 기뻐함(30∼31절)

(1)지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어린아이(30상)

(2)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창조를 보고 기뻐함(30하∼31절)

 

3. 결론: 지혜자는 아들에게 교훈을 받으라고 권면함(32∼36절)

 

위의 구조를 보면 전체적으로 세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연과 둘째 연은 각각 두 개의 소절로 다시 나누어져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혜는 창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왕으로 세우심을 입고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 본문에서 구약의 삼위일체와 연관된 중심 단어들과 그 논쟁점은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지혜를 낳으심(22절)

"야웨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나를 가지셨으며"(22절)에서 "가졌다"(qana)는 동사가 논쟁의 핵을 이룬다. 1926년 버니(Bumey)는 히브리어 qana에 대한 연구에서 다섯가지 의미를 제시하였다(윤영탁 1991:100에서 인용됨). "사다"(buy, 잠20:14등), 구매한 권리에 의하여 "소유하다"(own,사 1:3, "그 임자"), 구매한 방법이 아니고 "획득하다"(acquire, 출15:16;시74:2; 78:54; 잠1:5등),"낳다 (beget;신32:6; 잠8:22) · 얻다"(get, 낳아서 얻음, 창4:1), "창조하다"(create, 창14:19,2; 시139:13)등이다. 이 다섯 가지 의미 가운데 버니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이전에 소유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으로 보았다. "이 얻음은 사거나, 만들거나, 낳거나(아기인 경우), 마음속에서 계속 생각함으로(지혜인 경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윤영탁,100). 이 동사가 기본적으로는 얻다는 의미를 가지나, 이렇게 다양한 어감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잠언 8장 22절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첫째로 아귈라, 시마크스, 데오도션(ekthsato)과 제롬(possedit), 루터, KJV, NASB, 한글개역성경은 "나를 가졌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가졌다"는 번역은 "획득했다"는 번역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 "태초 전에 나를 가졌다"는 "하나님 안에 나를 하나의 속성이나 기능으로 가졌다"는 뜻보다 지혜를 독자적 인격으로 가지신 것이다. 즉 지혜는 이미 창조질서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고 창조질서 밖에 있었다. 온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이 번역을 따르면 잠언 8장 22절의 지혜와 신약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 쉬워진다.

 

둘째로 70인역(ktizein), 시리아역(mtqnh), 탈굼(br'ny)은 "창조하다"로 번역하고, 현대에 와서는 RSV와 NEB(create)가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초대교회 당시(4세기) 아리우스가 이 번역에 근거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를 피조물로 보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창조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했다(Scott 73). 최근에는 슈미트(Hans H. Schmidt 1966:150)와 올브라잇(Albright 1955:1∼12)이 이 번역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창조하다"로 번역된 세 개의 번역된 본문(창 14:19,22;시 139:13)도 "얻다, 혹은 소유하다"로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윤영탁106-108을 보라).

 

세번째 가능성은 "나를 낳다"(to beget)로 보는 것이다(Irwin 1961:133-42). 본문에서'낳다"는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동사가 구약에서 출생의 맥락에서 여러번 나타나기 때문이다(창4:1;신42:6;시139:13).잠언 8장 역시 출생의 맥락이 두드러진다. 24절과 25절에서는 "내가 이미 났었다"(holalti)는 말로서 출생 이미지를 명백히 한다. 민수기 11장 12절에서도 잉태와 출생의 관점에서 나타난다.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hara)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나이까(yalad)." 또 신명기 32장 6절의 "우매 무지한 백성아 야웨께 이같이 보답하느랴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에서도 잉태와 출생을 통한 신인동형적 표현이 나타난다 또한 잠언 8장 30절에 있는 아몬(amon)을 유아로 본다면 8장 22절에 있는 카나(qana)를 낳다고 보는 것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만약 이 번역이 옳다면 첫번째 가능성인 가졌다의 의미가 더 명료해진다. 하나님은 어떻게 지혜를 가지셨는가? 그는 잉태와 출산을 통하여 지혜를 소유하였다. 즉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왔으며 하나님과 통일성을 갖고 있으며 그리하여 지혜는 창조 전에 이미 존재하게 되었다. 주님은 태초에 창조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지혜를 낳으셨다. 따라서 이지혜는 주님과 연대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창조 전에 계신 존재로서 창조에 필수적인 존재이며 주님에게 소유되고 있으나 또한 사람들에게도 소유될 수 있다.

 

2. 주께서 지혜를 왕으로 세우심(23절)

다음으로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에서 세웠다는 단어 나사크(nasak)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붓다, 쏟다"는 뜻으로 금속을 주형에 부어서 만들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 하나는 "세우다, 앉히다"는 뜻으로 시편 2편 2절에서는 "왕을 세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대관식 배경이 깔려있다. 특히 시편 2편 7절에 있는 "내가 너를 낳았도다"와 평행을 이룬다. 원래는 기름붓는 환유법을 통하여 어떤 직분에 세우게 되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창조에 있어서 지혜의 역할은 본문에서 능동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으나 암시되어 있다.

 

3.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어린아이였음(30절 상)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양육받는 아이('amon)가되어" 에서 히브리어 'amon은 크게 둘로 번역된다. 첫째로'amon은 '창조자' 혹은 '건축자', '명공(master craftsman)'으로 번역된다. 지혜를 창조자로 보면 지혜는 창조에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부분의 역본들과 학자들은 이 입장을 지지한다(Keonig, Gesenius, BDB, Albright).이 번역은 70인역과 시리아역과 벌게이트를 따르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서 7장21절과 8장 6절도 "지혜는 만물을 만든자"라고 말하며 "그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성자"라고 한다. 필로는 로고스와 소피아의 구별을 없애고 di' hou ho kosmos edmiourgeito(de Sacerdot. 5)를 언급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와 골로새서 1장 16절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는 소피아-로고스가 "만물의 띠(bond of all things)"라고 말했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17절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창조자로 읽는 것에 대한가장 강력한 근거는 예레미야 52장 15절에 근거한다. 한글 개역성경은 "무리의 남은 자"로 번역하고 있으나 NIV는 the rest of the craftsmen으로 번역한다. 이 본문은 '장인들' 에 대한 집합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창조자' 로 읽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레미야 52장15절은 본문비평상 어려움을 갖고 있다.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생략되었으며. 이 절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열왕기하 25장 11절은 "무리"(hehamon)로 읽고 있다. 만약 우리가"창조자"로 읽으려면 아가서 7장 2절처첨 "공교한 장색"들 뜻하는 'omman으로 되어야 한다(Akk., ummanu; 셈어의 장모음 아<a>는 히브리어데서 규칙적으로 장모음 오<o>로 바뀐다. 역본들은 ' amen으로 인는다. 70인역은 '치키는 자, 수탁자'를 탈굼은 "신실한, 믿을 만한"을 뜻할 수 있다).

 

둘째로 'amon을 "유아"로 인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상당히 많은 학자들(Gunkel, Fichtner, Kayatz, B.Lang 등)과 여러 역본들(KJV, JPS. Moffatt)이 이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애가 4장 5절에 있는 복수형태는 "길리운자"로 나온다.

 

문맥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요약을 제시한 22절의 "나를 낳았다"(qana)와 24절에 있는"내가 이미 낳았다"(holalti)에 아주 잘 일치하고 있다. 또한 유아로 읽는 것은 30절에서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고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와 잘 어울린다. 고대 애굽의 창조론에 나타난 마아트의 역할도 본문과 상당히 유사하다. "아툼은 그의 딸이요 수(Schu)의 여동생인 테프누트(Tefnut)가 마아트(Maat)임을 공식화했다. 그는 태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에 오직 마아트와 슈와 그의 자녀들만이 그와 함께 있었다"(Kaystz 1966:93∼95).이 본문에서도 마아트의 실제적인 창조활동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단지 태초에 놀고 있는 유아로 그려지고 있다. 구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마아트가 창조기사에 있어서 "전에 아직 멀었을 때"라는 표현과 연관되어 나온다는 사실이다. 마아트와 슈는 전재하고 있었다. 땅이 창조되기 전에 지혜는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들과 같이 있었다.

 

킬(Keel)이 연구한 애굽의 벽화 그림들을 보면, 마아트는 왕의 아내로서 성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왕도 의식적인 행동으로 신들을 기쁘게 하려고 장난을 치고 있다. "잠언 8장 22∼31절에 따르면 세상의 비밀은 신의 기쁨과 즐거움에 있다. 욥기28장은 세상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간에겐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잠언 8장에 따르면 우주의 기초는 슬픔과 혼란스러운 우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랑하게 즐거워하며 인생의 즐거움으로 가득찬 것이다"(Keel 1947:72).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the first born)라는 표현(골1:l5)은 유아로 번역하는 것과 아주 잘 어울린다(계 3:14 참조). 문맥으로 볼 때에도 22-23절에 있는 첫번째 요약적 진술에 있는 출생 영상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유아로 보려면 먼저 발음을 수정하여 ' amon을 ' amun으로 읽어야 한다. 또한 유아로 볼 때는 전체적 인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즉 지혜를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자리에 둔 이후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영상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천지창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여인 지혜가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은 잠언 1-9장에서 갖는 지혜의 권위에 일치하는 것 같지 않지만,그러나 이 즐거움과 기쁨과 웃음을 활력의 상징(삼상18:7; 렘30:19; 31:4; 시104:26)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것은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 된다. 특히 "… 앞에서 기뻐한다"는 의식적인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보고 경배하는 기쁨을 드러내어 준다. 사울과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올 때 여인의 무리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하였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며(렘 30:19) 춤출 것이다(렘 31:4). 웃음이란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해주기 때문에 웃는 자는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은 자이다(창 21:9 참조).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이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유아'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

 

4. 정리

잠언 8장에 나타난 지혜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은 지혜를 창조전에 낳아서 가지셨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의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혜를 왕자로 세우셨다. 셋째,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기뻐하는 유아이다. 창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며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지혜의 모습 속에서 신약의 저자들은 선재하신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에 계신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이"(골1:15)라고 말하면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말한다(16-l7절).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이런 신약의 해석은 비록 잠언 8장 22-32절을 명백하게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본문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의 본문은 모든 만물이 만들어지기 이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태어나고 세움받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며 기뻐한 선재한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니케아신조에서 성자를 "태어나되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잠언 8장에 근거하고 있다.

 

III . 하나님의 사자와 삼위일체

 

벌코프는 "야웨의 사자가 신적 인격(위)으로 묘사되었다"(창16:7-13; 18:1-21; 19:1-22)는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의 정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비평학자들은 주의 사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천사"로 보거나 혹은 "한 명의 하나님 사자"로 본다. "왕과 관리들처럼 하나님은 자기 사자를 갖고 있었다"(Gunkel, Westermann 243에서 재인용). 게스터(Castor)는 주의 천사가 나타나는 중요한 본문들을 대부분 '통속설화' (Maerchen)로 보고 하나님의 사신으로 다를 뿐이다(IDB 1:128-130). 베스터만은 하나님의 사자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명의 사신"이라는 노트(R. Noth)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하나님은 사신에게 임재한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에 함께 하셨다"고 말한다(244).주의 사자의 신분을 좀더 높이 보는 학자들은 그를 "야웨의 가견적인 신현'(Davidson 299; O.Procksch, "the theophany of the person of God")으로 보기도 한다. 에드몽 쟈꼽은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는 인물이 여러 곳에서 "난해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한다(Payne.167,n.5에서 인용됨).

 

또한 유대교에서도 "주의 사자"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으로 보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초기 성경기록자들)은 그들(천사들)을 개인화하거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따라서 사사기 13장 18절이나 창세기 32장 30절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을 거절하였다" (Jewish Encyclopaedia 1901:584)

 

구약성경에서 "야웨의 사자"(mal'ak yhwh)는 58회, "하나님의 사자"(mal' ak 'elohim)는 11회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일반적인 천사들(beney 'elohim, boney 'elim, qedoshim,그룹과 스랍들, 미가엘과 가브리엘 등)과 그 성격과 기능과 존재양식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 물론 이 표현은 아주 가끔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천사를 가리킬 경우가 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만난 존재는 하나님이 보내신 한 명의 천사이다(왕상 19:5). 이어서 주의 사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앞에 명시된 천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왕상 19:7).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선 주의 천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이다(삼하 24:16). 그러나 이런 천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사자' 가 나타난다.

 

주의 사자는 족장시대와 초기 성경 기록들에 주로 나타나고 있다. 베스터만이 잘 관찰한 바와 같이(242)주의 사자는 주로 '아들의 탄생 소식' 과 '구원의 소식' 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의 사자가 등장하는 모든 본문에 나타난 하나의 공통점은 그가 하나님과 상호 교통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과 거의 동격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 먼저 창세기 16장 7절에 따르면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야웨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난다. 여기에 나타난 야웨의 사자의 모습은 일반적인 천사나 선지자와는 아주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그는 하갈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사라에게 복종할 것과 이스마엘을 낳을 것과 그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주신다. 그때 하갈은 야웨의 사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13절)라고 말한다.

 

창세기 22장 11절에서도 야웨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 15절에서는 "야웨의 사자가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라고 말한 뒤 16절로 넘어가자마자 "야웨께서 이르시기를 ..."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원래의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야웨의 사자는 야웨와 다른 듯 하면서도 그 역할과 속성과 기능에 있어서 너무나 유사하다.

 

창세기 31장 11절에서 야곱은 라반과의 논쟁에서 자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셨다"(31:11)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13절). 우리는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그 다음에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시는 "벧엘의 하나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야곱은 후에 요셉을 축복하면서 독특한 평행법을 쓰고 있다(창 48:15,16).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소서"

 

이 본문은 "조상의 하나님"과 "나를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과 야곱의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지신 사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여기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다.

 

야곱 이야기와 연관하여 우리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주의 사자와 씨름한 사건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야곱은 한사람과 씨름하지만 그의 이름을 물어서는 안되었으며(28절) 그는 야곱을 축복하였고(29절) 야곱은 그가 씨름한 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30절).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호세아 선지자에 따르면 "야곱은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 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다"(호 12:3-6)고 재해석한다.

 

야웨의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신적 존재라는 점은 오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인 출애굽기 3장에서도 나타난다. 본문 2절에서 "야웨의 사자가 가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 뒤, 바로 이어 "야웨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신다(6절).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야웨의 사자와 야웨 사이에 구별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자 흑은 천사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신 것과 같다.

 

출애굽기 23장 20-33절에 보면 주님은 자신의 사자를 모세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겠다"고 말한다(20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는 각각 다른 인격으로 나타난다. 이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목소리를 청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22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의 이름이 중첩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백성들의 "허물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있다(21절). 나아가 주님은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3절).데이빗슨은 여기에서 "나의 사자"와 "내 얼굴의 사자"로 주님께서 소개하는 사실을 잘 주목하면서도 "구원하기 위해 드러난 야웨와 야웨 자신 사이에는 구별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298).

 

그러나 야웨의 사자는 단지 야웨의 가견적인 신현이라고만 볼 수 없다. 이 둘 사이에는 연대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32-33장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도 주님은 모세에게 계속하여 "내 사자가 앞서 가리라"(32:34)고 말씀하시며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겠다"(33:2)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고 말씀하신다(3절). 그러나 모세의 간청으로 주님은 다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로 말한다. 여기에 "나의 얼굴(나의 임재)"과 "내"가 평행을 이룬다. 여기의 나의 "얼굴"은 하나님의 사자를 가리킨다. 이사야 63장 9절에 따르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한다. 이 구절에서는 "얼굴"과 "사자"가 연계형으로 이어졌다. 즉 주의 사자는 주님과 다르나 주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사자를 보면서 주님이 그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었다.

 

모세의 지도력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야웨의 군대장관"을 만난다(수5:14).그 군대장관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이스라엘 군과 마주섰다(13절). 여호수아는 그 앞에 나아가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하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이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의 경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한 명의 천사일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씀하신다(15절). 이것은 이전에 주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하다.

 

사사기에서 "야웨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삿6:11). 기드온은 처음에는 그를 몰라보고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기드온에게 사사로서의 사명을 부여한다. 사명부여의 형식은 모세에게 주신 것과 동일하다(출3). 여기에서도 야웨의 사자와 주님 자신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16절, "야웨께서 이르시되"). 기드온은 손님 대접하듯이 그에게 양식을 준비해왔으나 그는 고기와 떡을 다 제물처럼 살라버렸다. 그때 기드온은 "슬프도소이다 주 야웨여 내가 야웨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고 말한다(22절). 그때 "야웨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신다(23절).

 

말라기에 보면 다시 주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3:1). "그가 내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엘리야를 미리 보내어 그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4:5).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Vos, 88). "이 사자는 참으로 신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성례적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 주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이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정리해보면 하나님과 그의 사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동질성과 구별된 인격성이 드러난다.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주님의 얼굴이며 그의 계시요 그의 임재다. 그는 하나님처럼 말씀하셨고 하나님처럼 나타났으며 하나님처럼 경배 받으셨고 하나님처럼 일인칭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는 다른 인격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주님의 사자였다. 주님은 그에게 "내 사자"요 "내 얼굴의 사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가 바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였다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의 속성과 기능과 사역을 볼 때 신약의 그리스도를 충분히 가리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IV. 하나님의 신과 삼위일체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난수십년 사이에 출판된 대표적인 구약신학 책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성령"이 하나의 독자적인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나온 구약신학책들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달라진 현상이다 예로서 욀러(G. F. Oehler,1883), 데이빗슨(A. B. Davidson,1926), 스네이스(N. H. Snaith, 1944)등이 쓴 구약신학 책들에서는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아이크롯트(Eichrodt,1967:46-68)는 그의 구약신학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구약신학을 다루는 학자들은 대부분 구약의 "성령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약신학에 있어서 성령론이 방치되어 있는 현상의 근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비평학계의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전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비인격적인 '힘(바람과 힘은 상통한다)'으로 보게 된다. 이들의 사상적 밑바닥 속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가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들은 삼위일체 개념이 후대 교회의 산물로서 구약 자체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아이크롯트조차도 성령을 "힘과 능력" 정도의 차원으로 다를 뿐이다. 침멀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야웨로부터 나오는 동적인 힘의 현상"이다(1978:101;cited from Batteau:190). 람프(Lampe) 역시 성령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며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의 양상"이라고 말한다(1962:626). 볼프(H.Wolff,1977;66)는 영이 "일차적으로 인식(heart)이나 욕망이 아니라 행동하려는 강력한 힘과 의지"라고 본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과연 구약에서 나타난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인지 아니면 인격적 존재인지를 결정하는데 있다.

 

1 .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 창조의 영

1)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짜시는 하나님의 신(창 1: 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선언은 천지창조를 요약하여 진술해준다.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땅이 수면 위로 나타나기 직전의 상황을 1장 2절은 삼중적으로 제시한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먼저 "하나님의 신"이란 구가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기본적으로 "바람"과 "호흡"을 뜻하기 때문에 이 구는 "하나님의 바람"(Gottessturn, Westermann 1984:106; Eichrodt, II:47,n.5), 혹은 "하나님의 호흡"(Ridderbos, B,Jongeling, Dasberg; cited from Gispen 1974:44; 최근에는 Wehnam 1987:17)으로 직역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흡"이 여기에 나오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하나님의 바람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창세기 첫장 둘째 줄부터 삼위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 혹은 영"의 개념을 허용하고 싶지 않거나 혹은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바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람"이란 표현이 시사해주는 영상이 어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형용사적 용법의 최상급으로 보고 "강한 바람", "폭풍"으로 번역하게 되었다.

 

비평학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이 하나님의 신(영)이 수면을 운행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상은 P의 창조기사가 지닌 일반적 사상구조에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다"(Eichrodt, II:47f., n.5). 이리하여 이 구는 일반적으로 "강한 바람", 혹은 "무서운 폭풍"(von Rad, 1965)으로 번역되고 있으며 이런 입장이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Albright, Peters, H.G.May, McClellan, Orlinsky, W.H.Schmidt, E.4.Speiser). 물론 문법적으로 볼 때 이런 번역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이 최상급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Waltke,1990:268).문맥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기 때문에 2절 하반절 역시 유사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즉 태초의 바다수면에 "강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히브리어 엘로힘을 최상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elohim)은 항상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인격적 존재로서 그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게다가 웨남이 잘 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야웨의 영은 단 한번도 '강한 바람'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바람으로 나타난다"(Wehnam,17). 구약성경에서 ruah 'elohim은 대부분 "하나님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루아흐는 호흡으로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흡"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단어 속에는 기본적으로 힘과 능력의 뉘앙스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첫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창조역사를 했는지에 대해 명시되고 있지 않으나 이 절에 사용된 동사 히브리어 rahap가 실마리를 준다. 이 동사는 오경에서 단 두 번 나타나며(Piel형)특히 신명기 32장 11절에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위를 "너풀거린다"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우가릿어 rhp도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Gordn,1965:484). 신명기 32장에서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 위를 "너풀거리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자기 새끼를 보호하며 돌보는 영상을 준다. 이 영상을 창세기 1장 2절로 가져온다면 하나님의 신이 아직 혼돈과 공허로 가득찬 세상을 지키며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의 동사가 피엘형 분사로 사용된 것은 지속적인 동작으로서 빈번성, 혹은 지속성을 가리키기 위함이다(Waltke,1990:414 참조).

 

신명기 32장의 문맥을 좀더 살펴보면, 독수리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주님은 이스라엘을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시고"(신32:10)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한다. 출애굽기 19장4절에서도 "내가 어떻게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명기 32장10-11절과 창세기 1장 2절 사이에는 명백한 유추가 있다. 즉 독수리가 광야에서 그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 새끼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신(영)이 "혼돈과 공허로 덮인 땅과 흑암으로 덮인 깊음"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돈의 광야 길에서 보호받는 것과 창조시 혼돈의 물을 주의 영이 감싸고 보호하고 있는것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클라인의 해석은 아주 새롭다. 즉 창세기 1장2절에서 하나님의 신은 태초의 혼돈을 "창조적 능력으로서 뿐 아니라 창조의 파라다임으로"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Kline,1980:17). 클라인이 말하는 "창조의 파라다임"이란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만드는 파라다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클라인의 해석이 옳다면, 창세기 저자는 창세기 첫 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 사역에 밀접하게 관여하시며 온 우주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이루며 현재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드신 것은 말씀의 사역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 주의 말씀과 주의 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창조사역을 이루고 있다. 워필드(B.Warfield, 189i)가 이점에 대해 잘 말해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윤영탁 역1985:110).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신의 인격성은 창세기 1장 2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지성과 총명과 모략의 신(사 40: 12∼17)

이사야 선지자는 40장 12-17절에서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만드신 우주의 방대함과 위엄과 주님의 섬세한 솜씨를 노래하면서 주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연약함을 수사의문으로 대조하고 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릴 수 있는가, 즉 잴 수 있는가? 시인은 한번 더 묻는다. "누가 그 뼘으로 하늘을 잴 수 있는가" 그는 계속해서 "누가 땅의 티끌을 되에 담을 수 있겠는가, 누가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모았겠는가? 인간은 이 세상과 우주를 잴 수가 없다(욥 38:5).

 

나아가 선지자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는가?"(13절)고 묻는다. 여기에서 "지도하다"(tikken)는 동사는 앞의 12절에서 "하늘을 재다'(tikken)와 같은 동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물과 하늘을 그 손바닥과 뼘으로 재셨지만, 주님은 아무에게도 측량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도 그를 지도할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주의 영"이 창조의 맥락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주의 영"은 바로 창조 때에 물 위를 운행하신 지성과 총명의 영이시다(창 1:2; 사 34:16; 욥 33:4). 성령은 생명을 만드시고 살게 하시는 분이며 혼돈에서 질서를 만든 분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지도한 적이 없다."누가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라는 후반부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느냐,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의 모사로 일할 수 없다'것이다 옛날에는 왕에게 많은 모사가 있었다. 그들은 왕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말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그가 숙지해야 할 사항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의 신이 창조를 지도하셨기 때문이다. 즉 창조에 있어서 성령은 온 우주를 지혜로 만드신 건축자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건축의 맥락에서 지혜의 영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사역에 동참하듯이 출애굽기에서 성막 건설에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신다. "내가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리라"(출 31:2-5). 건축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바람"으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 성막건설에 브사렐이 나타나듯 후에 솔로몬 성전건축에서는 새로운 브사렐로 나타나며 성전건축을 위해 주님께서 특별한 지혜를 그에게 주신다(대하 2:12). 브사렐과 솔로몬의 성막과 성전건축 사역은 주의 영이 천지창조를 하는 것의 그림자이다.

 

2. 출애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 구원의 영

느헤미야 9장 19-20절에 따르면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등으로 밤에는 불기등으로" 인도하셨으며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학개 선지자도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회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2:5).

 

1) 근심하시는 주의 영(이사야 63:7∼14)

이사야63장 7∼14절은 구원사에 나타난 성령 역사의 인격성을 찾는 데 좋은 출발점을 주고 있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hewed)과 긍훌(rehem)과 구원의 은총을 말하면서 백성들의 반역을 대조적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백성의 반역은 출애굽의 여정에 있었던 어떤 특정한 사건과 연결되지 않고,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다"로 설명된다(10절). 여기에서 "주의 성신이 근심하였다"는 표현은 성신의 인격성을 더욱 드러내준다. 성령은 단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근심하시는 인격이시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 성령은 후일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역경 속에 처한 백성들은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며" 말하기를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고 탄식한다. 여기의 바다는 홍해를 가리킨다.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엔서 구원받은 사건을 성령과 연관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중요한 점은 홍해에서 올라오게 하신 다음부터 주님은 "그들 중에 성신을 두셨다"는 데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다글라쉬(Daglash)가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가르치게 하신다"(느9:20; 9:30; 슥7:12)고 말한 것처럼 선지자에게 임한 영이 아니고 출애굽과 홍해를 건널 때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다. 바로 다음 절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12-13).

 

선지자는 끝으로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14절)고 한다. 이절은 주의 신이 친히 출애굽한 뒤 광야를 통과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비로소 안식을 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2)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사야 4:2∼6)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시온에 임할 심판을 통한 구원을 예언하면서 출애굽에 나타난 불과 구름 기둥의 영상을 명백하게 사용하고 있다. 선지자는 먼저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ruah mishpat)과 소멸하는 영(ruah ba'er)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4절)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라"고 말한다(5절).

 

4절에 있는 "심판하는 영"은 이사야 28장 6절에서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ruah mishpat)이 된다"는 표현으로 다시 나타난다. 따라서 "심판하는 영"은 엄격한 공평의 원리를 따라 선악을 구분하며 악을 징계하며 나아가서 악을 처단하는 "소멸하는" 영이다. 뒤에 있는 "소멸의 영"은 앞에 있는 "심판하는 영"을 꾸며주며 철저한 심판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의 심판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로서의 심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을 뜻한다(Young1965:I:184).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심으로 시온의 더러움을 씻고 예루살렘의 피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은 명백하게 심판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께서 이들을 심판하신 후 다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시온산에 임하실 것이다.

 

3. 새 창조의 영

1) 내주 하시는 주의 영(시편 51 : 10∼12)

시편 51편 10-12절은 영적인 갱신을 위한 기도로서 새로운 사람의 창조와 성령의 사역을 이어주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에서, "마음"과 "영"은 평행을 이룬다. 구약성경에서 마음과 영은 둘 다 지성, 감정, 의지를 다 포함하여 한 인격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세분하자면 마음은 감정적인 의식활동이나 의지적인 측면보다 지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영"은 내적인 인격, 성격, 태도, 성품을 가리키며, 특히 의지적인 차원을 강조해준다. 죄는 의지력을 붕괴시키므로 시인은 "내 안에 정직한 사람의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라고 구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창조하다"(bara)라는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를 구한다. 그는 정결하고 변함없는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한다. 앞의 5절에서 시인은 인간의 본성 속에 부정과 죄가 내재한다고 말했다. 이 부패는 생명이 시작하던 순간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창조를 구한다. 그의 마음은 출생 때부터 부패하였으므로 새 창조를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울도 새마음을 얻었다(삼상 10:6,9). 후기 선지서에서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새마음을 창조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겔 36:26; 11:10; 렘 32:39).

 

더 나아가서 시인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구한다(11절). "주의 성신(ruah qodsheka)"이란 표현은 여기와 이사야 63장 10,11절에만 나온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다른 구약의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가르치게 하신다(느 9:20; 9:30; 슥 7:12).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은 온 나라에 임한 것이 아리라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사람들, 즉 초기 사사들이나 솜씨있는 장인이나 선지자나 왕에게 임하셨다. 시편 51편 11절에서 시인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인은 왕이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 성령이 임하셨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면 성령이 떠나시는 것으로 믿어졌다. 사울이 범죄한 후 주의 영이 그를 떠났다. 그후부터 그는 암담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며 고통 가운데 빠진다. 따라서 시인은 주의 영이 계속 그에게 임재해 계시기를 구한다. 이 본문을 볼 때 성령은 인격적인 영이시며 언약의 중보자들에게 내주하셨다. 다윗왕은 범죄한 후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떠나시지 않도록 간구하고 있다.

 

2) 새 언약의 영(에스겔 36:26.∼28)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며 새 마음, 새 영, 새 언약과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다 연결시키고 있다. 먼저 주님은 그들에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영"은 "감각" 혹은 "성향'과 같은 것으로서 영적 생활을 이끄는 기관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방향성을 결정한다. 따라서 "새 마음'과 "새 영"은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자세를 뜻한다. 새 마음은 바로 26절 하반절에서 부드러운 마음(살의 마음)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돌같은 마음과 대조를 이룬다. 새 창조는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 즉 이스라엘의 불감증과 연관된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반역의 집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새 사람을 만드시는 새로운 창조를 하셔야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에스겔 36장 26절의 약속이 근본적으로 새 언약을 명시하고 있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 36장에 나타난 회복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의 마음은 돌처럼 굳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소귀에 경읽기였다. 그들은 소경이요 귀머거리였다. 그러나 아제 마음이 새로 살아날 것이다. 예레미야 31장31절에 있는 핵심단어 "새로운" 언약이 여기에서는 마음과 연결된다. 주님의 새로운 활동의 결과가 마음에서 열매맺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은 자신의 신을 인간의 마음속에 두신다. 새 사람에게 주님 자신의 신("내 신")을 부어주신다(27절). 이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동기와 하나님의 본성과 뜻에 일치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이 비로소 같은 뜻을 갖게 된다. 이 에스겔의 신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라"(30:1)고 꾸짖었다. 이제 주님께서 자신의 신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속에 주어 범사에 그를 따르게 하실 것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셔서 내적인 개혁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순결과 거룩을 닮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새시대, 새백성의 모습이다. 이제 옛 본성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단지 외적인 행동 규범에 일치하는 삶을 배우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 계명의 정신에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이다. 이제 습관적으로 죄짓는 데서 벗어날 것이며 죄가 더이상 왕노릇 할 수 없다. 주의 신이 그들에게 임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이 그들에게 부여된다. 인간의 모든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새사람이 된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함 자체가 해결된다.

 

새 이스라엘에게 주실 "하나님의 신"은 단지 지혜나 총명의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새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신이시며(삼상 10:6-7)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겔36:27). 그는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시다. 이미 에스겔 11장 20절에서도 비슷한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곳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주님은 그동안 자기 백성에게 계속 순종을 요구하였다(레 26:3).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로 점철되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신을 우리 속에 두어 순종할 수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시 예레미야 31장 31절과 연결된다. 그곳에서 선지자는 주님께서 자신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스겔은 주님의 신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렇지만 두 선지자가 바라본 것은 동일하다. 말씀을 우리 속에 두시는 것과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둘 다 새언약의 선물이다.

 

4. 정리

구약에 나타나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정리해볼 때 주의 영은 명백한 인격성을 갖고있으며, 창조와 구속과 새창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주의 영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격을 가지면서도 구별된 독자적 인격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V . 총정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를 살피면서 우리는 조직신학자들의 사용한 전통적인 논거들이 기본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것들은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성경신학적인 해석의 견고한 발판 위에서 새롭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전에 선재한 하나님의 지혜와 구속역사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자와 창조와 구속과 새창조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의 인격과 사역을 볼 때 삼위일체 교리는 이미 구약 속에 확고한 발판을 갖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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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거짓 구별하는 중요 기준

삼위일체론에 관한 교리를 바르게 알고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정통신앙 또는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이단들이 범람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도 삼위일체 신앙이 희미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거짓 교사, 거짓 선지자, 적그리스도를 구별할 뿐 아니라 거짓 신자나 중생된 척하는 신자, 거짓된 교회를 구별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교리에서 가장 오래된 논쟁되어 1차 니케아 범종교회의(325년)와 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범종교회의(381년)에서 결정되므로 올바른 삼위일체 설명이 선언되었다가, 다시금 4세기에 3명의 카파도키아인들과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에 의해 마무리 되므로 초대교회에서 가장 먼저 또 가장 중요하게 세워진 교리이다.

삼위일체론은 지성의 이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설명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해시키려는데 초점을 맞추면 실수하거나 실족하는 경우가 있기에 아리오스주의(Arianism)나 소찌니주의(Socinianism)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 두 이단사상은 모두 이해와 설득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중요성을 알고 있던 신앙의 선배들은 삼위일체론을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4~6문,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8~11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장, <벨지카 신앙고백서> 8~9항,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4~25문 등에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서 자세하게 이 교리를 설명한다.

삼위일체론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에서 선언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수(基數)로 비교하여 ‘한 분’으로 여기는 오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기수적 의미로서의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시고 살아계시는” 분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맥은 ‘구별된 세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래서 ‘구별되는 세 위격과 한 본질’이신 하나님이라 우리는 고백한다.

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즉 한 분이라 할 때에는 지난주에 설명한 하나님의 속성 중 비공유적 속성을 삼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지니고 계시다는 것이다. 사역을 비롯한 모든 것에서 삼위 하나님은 동등하시다. 곧 본질-영원, 무한, 불변, 전지, 전능 및 편만함-에 있어 동등 또는 동일하시다(<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6문). 이런 면에서 축복기도에서 삼위 하나님의 순서를 굳이 성부, 성자 및 성령의 순서를 밟지 않아도 된다(고후 13:13 참고).

둘째,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은 구별된 삼위, 즉 세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위격을 영어로 섭시스탄스(subsistence)로 표기하지, 섭스탄스(substance)로 표기하지 않는다. 전자는 본체라 번역되고, 후자는 본질(essence)이라 번역된다. 신앙의 선배들은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기 위해 라틴어 숩시스텐티아(subsistentia), 즉 본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숩스탄티아(substantia), 즉 본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세 본체를 지니신 한 본질이라고 하지 않고 세 위격을 지니신 한 본질이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위격이란 단어가 그리스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히포스타시스는 위격이라 번역되는데 그 의미는 ‘특성’이다. 라틴어 본체 또는 그리스어 인격이란 단어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어 위격이란 단어는 성경적 용어이다. 성경에선 ‘실상’(히 11:1)과 ‘본체’(히 1:3)이라 표현되어 있다. 위격이란 말이 특성이란 뜻이 있으니 삼위 하나님은 세 특성을 지니신 분으로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고 말해야 한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구분된다고 해선 안 된다. 구분이란 단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칼빈은 강조한다(1권 13장 17항).

간단히 말해서 삼위 하나님은 한 (동일 또는 동등하신) 본질이시고, 구별된 세 위격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구별된 세 위격, 즉 세 특성에 따라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않으시고 나오시지 않으신 분’을 성부, ‘영원토록 성부에게서 태어나신 분’을 성자, 그리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토록 나오시는 분’을 성령이라 고백한다. 그렇다고 그 특성에 따라 그분을 정의 내려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구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특성을 지니신 분이라 여기는 것이지, 아버지이기에 성부이며, 아들이기에 성자이고, 보내졌기에 성령이라고 구분한다면 이미 이단성을 갖게 된다.

동시에 세 위격은 차별이나 차등이 있지 않다. 만일 영어공부의 3요소로 삼위일체라든지, 3인조 행동 지침으로 삼위일체라든지 또는 삼중이란 의미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결코 사용해선 안 된다. 아버지이니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니 아버지보다 열등하거나 저급하다는 것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설명에서 이단이다. 아무쪼록 삼위일체론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단성을 구별하는 준거기준이기 위한 설명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자(<벨지카 신앙고백서> 9항).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5581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제17장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충족적인 존재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와 비교해서 구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숫자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그 자신 안에 구체적이고 숫자적인 존재의 구별(a distinction of specific and numerical existence)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신성의 본질에 대해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 of the Godhead)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듯이, 삼위일체의 각 위(各位)가 신성 자체를 다 드러내면서도(exhaustive of divinity itself), 삼위 간의 참된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일성(Unity)과 복수성(plurality)이 꼭 같이 궁극적이다. 신성의 각 위는 서로를 다 드러내면서(exhaustive of one another), 따라서 신성의 본질을 다 드러낸다(exhaustive of the essence). 하나님은 하나의 의식을 가지신 존재이시면서, 동시에 세 개의 의식을 가진 존재(a tri-conscious being)이시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친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를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약에 대해서는 우리가 피하여야 할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구약에서 완전한 신학의 체계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 분명히 가르쳐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교리의 체계를 가리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 왔다. 그들은 구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에 대조해서, 우리는 성경이 사람에게 유기적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고,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이것은 히브리어 단어로서 복수형임)의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즉,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보역).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는 증거는 후대의 계시의 단계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각위 간의 구별에 대한 증거이다.


1.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1) 신성 안의 구별(the differentiation in the Godhead)에 대한 시사로서는 창세기 19:24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 여호와께로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여기서는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 같이 내리셨다고 한다.

 

(2) 창세기 16:13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를 "당신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Thou God seest me)라고 부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20, 21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 여기서는 사자(the angel)가 여호와의 이름과 동일시 되었다. 한편에 출애굽기 33장에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자를 이스라엘과 함께 보낼 것이나, 그 자신은 가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구별되었다.

(3)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삼위일체의 구별이 시사된 듯하다.

  1)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the breath of his mouth)으로 이루었도다"

  2) 잠언 3:12-31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창조주와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3) 이사야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리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런 구절들에서는 성령이 구별되는 인격(a distinct person)으로 언급되고 있다.

  4) 시편 45:6, 7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히 1:8,9에서도 인용됨)

  5)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6)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본문들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본문들은, 벌코프 교수가 말하듯이 구약에 나타난 심위일체의 각 위에 대한 시사들일 뿐이다.


2.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신약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인용된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구들만을 간단히 열거해 보려고 한다.

  (1)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3)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엡 2:18)

  (4) 요한복음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라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히 1:2-6; 골 1:15-17)

  (5) 요한복음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6) 갈라디아서 4:6 : "너희가 아들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3. 교리적 진술

  이런 구절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에 근거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제2장, 제3장):  "단일한 신성에 삼위가 계시니, 곧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 속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아니했으며 나오시지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이를 설명하면서 핫지(A.A. Hodge)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계신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계심을, 그리고 그의 본질적 속성들이 모든 온전성을 포괄함을 밝힌 후에, 이 부분은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성부, 성자, 성령이 똑같이 한 하나님이시고, 나뉘어질 수 없는 신적인 본질과 모든 신적 온전성과 대권들이 그 각각에게 같은 의미와 정도로 속한다.

    2.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 명칭들은 각기 다른 관계를 가진 한 분의 다른 이름들이 아니고, 다른 위들의 이름들이다.

    3.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들(certain personal properties)에 의해서 구별되며, 그 존재와 작용이 일종의 질서를 가진 것으로 계시된다.


  여기 언급된 세 가지 요점에 대하여 핫지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 전체가 아주 중요하다.


4. 이 교리의 역사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성경적 진리의 온전한 진술은 오래고 힘든 성경 해석의 열매이다. 이 역사에 대한 지식은 그에 반하여 이 교리가 진술된 여러 형태의 이단을 살펴 보는 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 교리의 역사의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여기서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아주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한 속성들을 논의한 후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좀더 친근한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특별한 마크가 있다. 즉, 그분은 당신 자신의 일체성을 선포하시면서도, 우리 앞에 삼위로(in three persons) 존재하심을 분명히 제시하신다. 신성의 이름이 아니면, 이것들은 아무런 참된 지식도 없이 우리의 두뇌 안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Institute, 1. Xiii, 2) 이 때 칼빈은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방식외에 달리 존재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워필드(Warfield)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면, 칼빈에 의하면, 단일론적 하나님(a monadistic God)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다양성(multiformity)의 개념이 하나님의 개념 안에 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단순하다고 하고, 삼위가 그 신성에서는 서로 동등하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는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 이단의 특성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제1세기와 2세기의 교부들은 이미 에비온주의와 가현론과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유일하게 변호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의 체계를 가졌음을 밝히기에는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철저히 무장되었었다고 하기 어렵다.

  제2세기에 변증가들, 특히 저스틴 마터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사이의 내재적 관계는 저스틴 마터의 경우에서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마치 성자가 이 세상의 창조를 위해서 낳아진 듯이 여겨진 듯하다. 여전히 하나님 그 자신(God in himself)은 감취어진 하나님(숨어계신 하나님)이고, 성자는 계시된 하나님인 듯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저스틴 마터에게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나 성자와의 본체론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다.


(1) 아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리레니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로고스 개념에 대립하여 상당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로고스가 이중적 성격(his twofold nature-의미상 중간적 성격)을 벗어버리고 신성을 가진 것으로 진술되었다". 비록 언제나 일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레니우스는 성자와 대립되는 '숨어계신 하나님' 개념에 대립하였다. 이것은 아주 큰 진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자기 표현적이셨음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비록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하나(a unit)이기는 하지만, 신성에는 통일성(unity)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성(trinity)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레니우스를 보충하고 있다. 터툴리안에 대해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종속설을 언제나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본체론적인 삼위일체와 우주론적인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론적 삼위일체를 충분히 구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일체론의 진술을 위한 개념과 단어들을 제공하였다. 그는 '로고스' 사변을 아들됨의 관계(filiation)로 대치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 사변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그는 각 위의 삼위일체성을 성부의 인격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오리겐 역시도 종속설의 오류에 빠졌다. 그는 성자의 성부와의 하나됨(the unity)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위해서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성부는 다시 한번 희랍적인 방식으로 가장 궁극적인 존재이며, 성자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로 생각되었고, 성자는 세상보다는 더 높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아리우스주의

  핫지는 오리겐의 여러 추종자들이, 예를 들어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와 특히 아리우스가 오리겐보다 훨씬 더 낮은 교리를 가르쳤음을 지적한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ek ouk ontoon) 창조되었고, 따라서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3) 사벨리우스주의

  삼위일체에 대한 또 하나의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진술은 흔히 사벨리우스주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삼위의 본질적 통일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서 삼위의 다양성을 가르쳤는데 비해서, 사벨리우스주의는 삼위의 다양성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본질의 통일성(단일성)을 가르쳤다고 일반적으로 대조되어 설명된다. 이것은 옳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를 분명히 파헤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범신론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유신론은 그 모두를 강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별이다. 요점음 교회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연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둘 다가 그 근저에서는 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과 동리한 수준에서 연합시키는 같은 이단에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을 다 거부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리우스주의’의 이름으로 요약된 모든 종속론적 사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벨리우스주의 역시도 전체로서의 실재의 통일성을 제공해 주는 영원 세계에 대한 보충으로 시간 세계가 복수성을 제공하도록 해 보려고 한 것이다.

 

  (4) 나이신 신조(혹 니케아 신조)

  니케아 공의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 교리를 진술하고 변증하려 모였을 때,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n to patri)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고, 삼위들이 단순히 세상과 관련한 경륜적 표현일 뿐 아니라,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삼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다. 그것들은 전혀 그 종류가 다른 것(allo kai allo)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이단을 거부함에서 니케아 공의회는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를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삼위일체에 대한 한 가지 기본적인 이단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궁극적 연합으로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에 대립하기 위해서는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두 요점을 주장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신성 안의 각 위의 내적인 관계가 피조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선행하며, 독자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찰스 핫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성의 본질이 각위에게 공통적이므로, 그들은 공통적 지성과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안에는 세 지성과, 세 의지와 세 작용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가 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한 정신과 한 의지를 가지신다. 이 밀접한 엽합을 희랍교회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라틴어 'inexistentia', 'inhabitatio' 또는 'intercommunio'(상호 연합, 침투) 등의 말로 설명하였다.

 

  (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나이신(니케아) 신조에는 참된 성경적 교리의 모든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참된 교리가 주장되려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재진술되고, 세련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심이 더 분명하게 진술되어야만 했다. 아다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삼위 모두가 동등함을 더 분명히 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이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심을 밝히는 일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오셔야만 삼위일체 삼위의 내적 교통이 영원히 온전한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삼위의 동등성을 더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배타적인 내적 교통은 '아들로부터'(filioque)라는 어귀 없이는 표현될 수 없음을 더 분명히 보았다.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낳아지심)이 영원한 출생이므로, 성령의 나오심도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영원한 나오심이어야만 한다. 핫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신 신조의 가장 분명한 결함은 성령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진술이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나이신 신조의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에 "주님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시고, 아버자와 아들과 함꼐 경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던" (성령을) 이란 말을 덧붙였다" ('아들로 부터도, filioque'라는 말은 최종적으로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수납되었다.

  (6) 칼케돈(451)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이단들은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이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칼케톤 공의회에서 거부되어진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유티케스주의도 교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반대의 변형된 형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칼케돈 신조에 대해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니케아의 첫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선재하시는 신성을 수립하였으나, 제4차 공의회의 신조(칼케돈 신조)는 땅 위에서 걸으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성육신하신 로고스와 관련하였다. 칼케돈 신조는, 아리우스주의에 반해서 나이신 신조에 동의하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잘못 생각한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오류에 반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조의 진술 형태에 대해서도 샤프의 말을 인용해 볼 수 있다. "정통 교리는, 유티케스주의에 반해서 성육신 이후에도 혼동이나, 변화없이(asygchytoos, inconfuse 그리고 atreptoos, immutabiliter), 또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해서)구분이나 나뉘어짐없이(adiariretoos, indivise 그리고 achoristoos, inseparabiliter) 있는 각 성질의 구별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인데,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삶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각 위와 같이 서로 침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여기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말을 덧붙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요,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요.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찾을 때에 인간성(man's nature)을 취하셨는바, 그 본질적 속성들과 그 일반적 약점을 모두 같이 취하였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사, 그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 따라서 두 가지 온전하고 구별되는 본성인 신성과 인성의 변화됨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함께 한 인격 안에 나눌 수 없게 연합되어졌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인격이며, 한 그리스도이시고, 그는 사람과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8장, 2항)

  이 진술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혼동이나 혼합없이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온전하신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자기 온전성에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온전성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이 하나님은 피조된 우주의 토대이시고, 이 우주를 초월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우주의 토대라고 먼저 생각되지 않고, 이 우주와는 다른 분이라고만 정의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 타자성'이 결국, 시간적 우주와 연관되게 되면, 전체로서의 실재의 한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이신론[理神論]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든지, (희랍 사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창조와 섭리를 모두 부인하는 교리는 결국 영원과 시간을 혼합시키고야 만다. 이신론과 범신론은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고 혼동하는 근본적 오류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을 때나, 삼위일체의 제2위가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을 때에도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은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역시 참된 교리에 대한 이신론적 형태의 대립이며, 유티케스주의는 명백히 범신론적 형태의 대립인 것이다.

  (8) 현대의 반삼위일체주의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의 신학적 이단들은 그 기원을 거짓된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다고 하든지, 그런 왜곡된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시사할 수밖에 없다. 고대에서와 같이 현대에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을 한데 섞었던 것이다.

  그런 한 가지 대표적인 예는 칼빈이 정리한 삼위일체 교리에 개한 반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s of the Godhead)의 동일 본질성(the consubstantiality)을 주장하는데 아주 관심이 있었다. 워필드의 말을 인용해 본다: "성자의 '스스로 신적이심'(the autotheotes)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 칼빈은 결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 자신들이 '아주 많은 말로' 이를 주장하고 있다고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주장에서 삼위일체 교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자의 하나님으로의 자기 존재와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진술하는 현대의 양식이 성자의 신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결함있는 양식의 도입을 넓게 열었으므로,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되심'(autotheotes)에 대한 날카로운 주장이 필요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을 위해 교회가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세 사람을 든다면 터툴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진술이 굉장한 반대를 받은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내에서 칼빈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천주교 사상이나 자세한 몇 부분에서 반대하는 루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알미니안적 반론을 간단히 주목해 보기로 한다. 루터파에 반대해서 알미나안주의자들은 오리겐주의자들의 종속설적 성향을 매우 분명히 가지고 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만 "그의 정통성을 어느 정도는 견지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무게의 중심은 하향적이 되었다. 그래서 에피스코피우스의 가르침에서는 벌써 '영원한 출생'과 '나오심'에 대한 니케아 신조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삼위 간의 질서상(in order) 종속이 아니라, 삼위 간의 본성상(in nature)의 종속을 위한 출생과 나오심이 언급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켈셀레우스는 삼위 간의 '특정한 통일성'(asoecific unity)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조오지 벌 은 컬셀레우스보다는 덜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벌 이후에는 사무엘 클락이 오는바, 그는 "성자가 무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등하게 있음을 허용하기를 하였으나,"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졌음을 인정하려고 한다.

  바른 삼위일체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대립은 좀더 급진적인 일탈의 길을 준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관념론 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전체로서의 실재 안의 정.반.합 원리와 동일시하였다. 이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신학자들이 신앙에서 벗어나 나아갔다. 결국 유니테리안주의도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섞는 옛 오류의 새로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주의(modernism)는 이 모든 이단들의 행복한 상속자들인바, 그 모든 이단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 본질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는 그 오류가 좀더 깊이 나타나서 현대주의에 있어서는 성부 자신이 실재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다. 참된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때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이나 많은 오해가 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바르트의 칸트주의적인 원리는 자충족적인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정통주의의 용어들은 사용하나 그 의미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비공유적 속성들은 바르트에 의해서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역동주의는 그로 하여금 그리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도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생사의 투쟁을 하기 위해 준비한 듯하다. 그 삼위일체론을 진술함에서 교회는 자충족적이고, 신비하신 하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언하였다. 이 자충족적이시고 신비하신 존재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 낮추신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이 그러하시듯 반드시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어떤 사역을 특히 성부께 돌리고, 어떤 사역을 성자께 돌리며, 어떤 사역을 특별히 성령께 돌릴 때, 우리는 그렇게 돌리는 것(ascription) 배후에 신성 안에 참된 구별이 있음을 전제하게끔 된다. 반면, 각 위에게 돌려진 사역은 절대적인 한 분의 사역이다.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우리는 언제나 신성 안에 있는 참된 위격적 구별(personal distinctions)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허용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무시하도록 신성 안의 삼위의 구별을 허용하므로써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리가 다음과 같이 하면 이 위험을 가장 잘 피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a) 이 교리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안에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론을 발견하여 보는 것이고, (b)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언급 가능한 전제라고 아무런 변명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의 주된 난제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잘못된 데서 시작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할 수도 있고, 유비적(analogically)으로 추론하기보다는 일의적(univocally)으로 추론을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류 중의 하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삼위일체가 자연인의 전제에서 합리적인 교리로 비그리스도인에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삼위일체는 비합리적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그 위(person)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통일성(unity)과 삼위성(trinity)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다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전체로서의 하나님(the whole Godhead)이 한 분(one per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 속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이라는 것을 살펴 본 바 있다. 어떤 종류의 해석되지 않은 존재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소위 '순수 사실'의 망령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존재의 일치성을 주장하게끔 된다. 또 비슷하게 우리는 신학자들이 신성의 각위가 신성의 존재와 동연적이라는 주장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위격적 특성의 구별이 단지 이름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속성과 각 위의 하나님의 전체 존재와의 절대적 동연성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속성들과 위격의 참된 구별(distinctions)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각 위는 하나님의 전체 본질(the whole essence of God)과 동등하며, 다른 두 위와도 동연적이고, 삼위 모두와도 동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다른 존재들, 즉 피조된 존재들에 반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인 숫자적 단일성을 제시하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 안에서도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하나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는 한 분(one person)이시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란 수식어구가 그에게 대해 붙여질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성을 가지신 본질이신 것(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이 아니라, 그는 절대 인격체(absolute personality)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존재 안에서 존재의 구체적인 형태나 유형(a specific or generic type of being), 그리고 삼위의 위격적 존재 방식(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의 구별을 알 수 있다는 허용과 강요를 성경에 의해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런 삼위일체가 우리의 철저한 파악을 넘어선 신비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신비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존재의 전체성 가운데서, 우리의 파악을 넘어 서신다. 동시에 이 신비하신 하나님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이시므로 신비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합리성이 있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규정할 수 있다는 것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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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칭을 두고, <삼위>를 <세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일체>를 <한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에 대하여 각종 선행 연구물과 자료가 분석되어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도출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토론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풍성하여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 자료를 드러내어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삼위 하나님

1) 삼위가 존재하심을 같은 자리에 나타낸 곳(창1:26;마3:16,17,28:19;요14:16,17;고후13:13;벧전1:2)

2) 삼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시89:26;요8:41;고전8:6;엡1:17), 예수(롬9:5;딛2;3), 성령(행5;4)

3) 삼위가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사9:6), 예수(히6;20), 성령(히9;14)

4) 삼위가 상호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곳(롬8:9-12;요14:10,17,17:21)

<의견>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분이 없이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그러다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상호 내재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지칭(指稱)

1)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① (신6:4) : 하나인 여호와(개역한글), 유일한 여호와(개역개정) 한 분 여호와(표준새번역, 공동번역)

② (말2:10)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하나님 한 분(공동)

2)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① (막2;7) : 한 분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② (막10:18;눅18:19;요8;41)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③ (롬3:30;고전8:4;딤전2:5;약2:19)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④ (고전8:6)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하나님 한 분(표준, 공동)

⑤ (갈3:20) : 한 하나님(개역) 한 분 하나님(개정, 표준, 공동)

3)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① (딤전1:17;유1;4,25) : 하나이신 하나님(개역, 개정), 한 분이신 하나님(표준, 공동)

② (딤전2:5) : 중보도 한 분(모든 번역본 동일)

4)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① (고전12:9,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② (고전12: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③ (엡4;4) : 성령이 하나(개역, 표준, 공동), 성령도 한 분(개정)

<의견> 1) 구약성경에,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던 유일신 개념의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 표현에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영어번역본(KJV,NIV,NRSV,RSV)에서는 모두 <one god>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 신약성경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칭호할 때,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3) 결론적으로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구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삼위일체란 어의(語義)

1) 삼위(三位)의 어의

① 희랍어 -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tres hypostasis)

② 라틴어 - 트레스 페르소나에(tres personae) -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 조건, 신분 기능의 의미 - <외적>

③ 영어 - 트리 퍼슨스(three persons) - 사람, 개인, 인간 -> 의식하는 주체

< 어의(語義)> : 여기에서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며, 셋이 따로 따로 독립된 존재로 있다는 뜻이다.

2) 일체(一體)의 어의

① 희랍어 - 우시아(ousia)

② 라틴어 - 숩스탄티아(substantia) - 형이상학적 존재, 만물의 근원의 의미 - <내적>

③ 영어 - 원 서브스탄스(one substance) - 본성, 본질 -> 본체

< 어의(語義)> : 본체가 동일하다든가, 동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의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기본 도식(圖式)은 <세 실체(實體)>와 <하나의 본체(本體)>였다. 이 도식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본질(本質)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3. 삼위 하나님의 관계(關係)

영원부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은 성부에게 고유(固有)하며, 성자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낳으신바 되심은 성자에게 고유하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나아오심은 성령에게 고유한 것이다(히1;5-8;요1:14,18,15:26;갈4;6).

1) 존재론적 순서(順序)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한다.

2) 경륜적 순서(順序)

삼위 하나님을 외적인 사역의 순서로 말하면, 만물이 성부에게서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 , 성령 안에 있다(요1:3,14).

3) 사역적 순서(順序)

3위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순서로 말하면,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3:18).

 

 

4. 삼위일체 교리(敎理)의 문제점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내었지만, 현재까지 그 삼위일체를 세상 언어로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三位)를 주장하다 보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단정지어 설명하려다가 이단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들이 있었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느라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의 독립적 신성이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삼위일체>에서 <위격>과 <본질>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가 혼란이 온다. 구약에서는 <본질>이 중심이었는데, 신약에서는 <위격>에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유일신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해는 되는데 막상 정의를 내리려면 헷갈리게 된 것이다.

 

 

5. 신학(神學)에 표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

1) 터툴리안(삼위일체론의 기초형성) : 하나님은 한 분 - 한 본질(本質) 세 위격(位格)

2) 요한(동방교회) : 한 실체(實體)인 동시에 상호침투(相互浸透)의 관계인 세 객체(客體)

3) 어거스틴(서방교회) :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세 존재 양식(樣式)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장1,3) : 한 분 하나님으로 본체(本體)는 삼위(三位)가 계신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문8,9)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문5,6) : 한 분 하나님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7)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문25)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8) 토마스빈센트 소요리문답(문5,6) : 하나님 한 분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9)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신앙요리문답(문11) : 한 하나님의 세 위(位)

10) 벨직 신앙고백(8조) : 삼위(三位)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11) 니케아신경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12) 아타나시우스 신경 : 삼위(三位)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6.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에 대한 문제점

1) 삼위(三位)의 위(位)가 인격체를 의미하니 우리말 <분>으로 대입하여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참으로 간결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삼신론이란 저항에 대응할 수 있어 신학적인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소망이다. 그런데도 <분>이란 용어가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라는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세 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의 과정 하나가 추가된다는 결과가 된다.

2) 삼위(三位)의 <세 분>은 삼신론적 표현이니 삼위(三位)를 그대로 표현하여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삼신론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있으나 양태론이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삼위>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쉬운 우리말 표현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할 바에야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본질을 살린 표현이 된다.

 

 

♥ 나가며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한 분'이란 말도 가능하고 '세 분'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측면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가능한 말입니다. 칼빈도 '한 분'이란 말도 하고 '세 분'이란 말도 하였습니다(기독교강요, 13장 2. 16. 17.). 즉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분'이라고 할 수 있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는 '한 분'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뭉치로 표현하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알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일을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4-8).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란 참으로 심오하고도 절묘한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면서도 1700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 이상의 접근은 차단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생활이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구원론은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대량 생산 시스템에 어울리도록 산뜻한 매뉴얼로 패키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메가처치 구원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기존의 개신교 구원隙�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구원론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좀 복잡한 문제인데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 자체가 일종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덫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가 일종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러한 덫은 성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덫은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지난 2000년 간 신학이 발전해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덫은 신학적 덫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덫을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물은 이중성이 있다. 한 편으로 우물은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무덤이 되고 만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논리적 함정도 꼭 이 우물과 이와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신교 구원론은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버린 우물은 세 개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우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루터가 우물의 주인이다. 개신교 구원론 논의를 위해서 이 세 개의 우물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첫 번째 우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려졌다고 해도 오해되어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서의 우물이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를 충분히 대표할 만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이라는 우물에 빠진 시기는 대단히 이르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대략 2세기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그리스 철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는데, 이들은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신학을 살펴보면 이것이 신학인지 플라톤 철학인지 도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참 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한 철학이라고 논증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분명 많은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엘룰이 ‘계시의 철학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 계시가 첫째 우물에 빠지면서 나타난 현상들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추상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사고의 특징이 고도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추상적 사유가 그들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어에서 ‘정관사 +형용사’ 하면 ‘명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다음 이 명사가 계속 추상화 과정을 겪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를 들어, ‘희다’라는 형용사에 ‘정관사’(to)를 붙이면 ‘흼’이 된다. 그리고 이 ‘흼’이라는 명사는 고도로 추상적으로 활용될 때 ‘흼 자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름답다’는 ‘아름다움’ 혹은 ‘미’로, 더 나아가 ‘미 자체’ 혹은 ‘미의 본질’로 추상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들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 대상화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명료하며, 철학하기 좋은 개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계시의 역동성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점차 철학적 일자(the One)로 고정되거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얼어붙게 된다.

 

이와 함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 개념으로 고정되고,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객관화, 대상화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가상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다. 점차 기독교 신학은 이 가상적인 개념적 존재들을 엄격하게 조작하고 다루는 작업이 되어 간다.

 

가령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론이 예수라는 인물 속에 ‘신성’(divinity)과 ‘인성’(huminity)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되는지를 놓고 다툴 때, 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전적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놓고 다툴 때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소위 신학 방법론으로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수용한 것이다.

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으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다. 이런 법칙들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무슨 뜻인가? 쉽게 설명하면 ‘그런 건 그런 것이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법칙이다. 무슨 말이냐? 정류장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그가 오바마라면 그는 부시가 아니다. 여기서 ‘그는 오바마다’가 동일률이고, ‘부시는 아니다’가 모순율이다. 그러니까 동일률과 모순율을 합치면 그는 오바마이면서 동시에 부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배중률은 무엇인가? 가운데가 없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신은 50%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신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한다, 뭐 그런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모든 것들을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대단히 명료해진다. 데카르트가 ‘명석함'과 '판명함'의 사고를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리스인의 후예이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법칙들은 머릿속의 뿌옇고 희미하던 관념들을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깔끔하게 이해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성서를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유익을 얻지만, 동시에 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셋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일종의 추론 방식을 말한다. 삼단논법을 쉽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자동화(automation)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 기계에 원재료를 넣기만 하면 재료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후 완제품이 되어 ‘짠~’하고 나오는 것과 똑같다. 정교한 삼단논법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지키기만 하면 결론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이상의 방법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서 신학적 작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기 300~400년간의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한 번 추적해보자. 맨 처음에는 신학이 아니라 ‘예배’가 존재했다. 이 예배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남성을 기리는 예배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배’가 문제를 촉발시켰다. 과연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정당한가? 구약성서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예배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이것은 정당한가?

 

최초의 신학은 이렇게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야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 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스무래(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된 데 무슨 음모론이 있었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논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자,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느덧 논리는 엉뚱한 곳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칼빈주의 구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된다. 따라서 전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된다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야 한다. 또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신앙의 선물을 주지 않으실 자도 아시는가? 모른다고 하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자와 주지 않으실 자를 미리 정하셨는가?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시고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정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논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상의 일련의 논리적 추론 과정은 성서의 계시 자체로부터 왔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도의 균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작업들이 준 유익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논리적 자동 기계는 성서의 계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구원론은, 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어거스틴의 우물

어거스틴의 우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판 우물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은총의 빛을 받기 전에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 주장했다. 그래서 의지는 의지로되 기능이 상실된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상대방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보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성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논쟁을 통해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vs 인간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만 것이다.

 

김기현의 <가룟 유다의 딜레마>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심각한 딜레마가 성서에서는 전혀 딜레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독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이러한 논쟁은 신학생들의 시간 죽이기 말싸움 게임의 소재로도 훌륭하고, 소그룹 성경 공부 리더를 골치 아프게 만들게 하기에도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서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둘 다야!’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선택안이 남게 된다. 첫째는 100% 은총과 0% 행위라는 어거스틴주의, 둘째는 은총 0%와 행위 100%라는 펠라기우스주의, 셋째는 은총 50%와 행위 50%라는 세미(semi)-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synergism).

 

중세 가톨릭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를 붙드는 것 같다가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한(0% 행위) 순어거스틴주의(100% 은총)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신인협력설(synergism),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라는 주홍색 낙인이 찍히고 만다. 따라서 은총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율법 폐기론의 위험이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금세 확인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개혁주의 궁정에서 보였던 금욕과 절제에 비해 루터주의 궁정에서는 폭음과 난잡함이 현저했던 것이다. 신속하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논리적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불가지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빠져 나간다. 그것은 택자와 비택자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알 수 없고 다만 내면의 변화와 외적인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신도들을 끊임없는 경건과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앙의 성격 및 주체에 관한 문제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그 말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식물인간이 아닌가? 이러한 식의 물음이 생겨난다.

 

이 문제를 두고 격돌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이다.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논쟁이다. 필자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이 논쟁은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이 문제가 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저 문제가 걸린다. 대세는 칼빈주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는 조금이라도 행위나 윤리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이니, ‘율법주의’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양 그렇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개신교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교부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구원 간증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천상 성령의 물을 흠뻑 받고 난 다음 제2의 탄생이 나를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은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총일세.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네.”(Ad Donatum 4.)

 

3. 루터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세 번째 우물은 루터가 판 것이다. 루터가 판 우물은 무엇인가?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우물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볼 때 행위 은총론이 판을 치고 있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우렁차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신학에 따르면 반복되는 성사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으며,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거기에 선행까지. 그 중 가장 루터를 분노케 한 것이 면죄부였다.

 

이제는 돈으로 구원을 사다니! 이 모든 관습들을 향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향해 누차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선언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조차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루터가 말하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이 믿음은 ‘모종의 체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이 문제와 함께 끙끙거리며 씨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높고, 크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전가되는 복된 의라는 사실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의 체험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으며, 확신에 차고, 담대해졌다. 수도원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루터는 보름스 회의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투사로 바뀌었다. 이 체험은 마치 밤이 낮으로 바뀌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흑백이 칼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루터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값진 백 만 불짜리 체험이다. 그리고 500년간 개신교 구원론은 바로 이 루터의 백만 불짜리 체험에 대한 각주(脚註)가 되었다.

 

그의 체험은 개신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나오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등. 그리고 오늘날 강단에서 자신의 구원 체험을 간증하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루터의 백 만 불짜리 체험을 함께 공유한 자들이다. 루터의 실제적인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는 형식적이고 관습적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신교 구원론은 거의 1500년 간 구원을 침례·세례와 연결시켜 왔던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아 세례로 변질되어 버리기 훨씬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 300년 동안 침례․세례는 구원의 가장 강력한 표지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았으며, 결코 쉽게 행하지도 않았다. 3세기 경 초대교회가 침례를 베풀던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예비 입교자는 침례 받기 전 자그마치 3년간이나 예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있는지, 그리고 순교의 잔까지 마실 진지한 결심이 있는지가 확인되었을 때만 침례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의 순간적인 신앙 체험을 구원과 연결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 이후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있다고 가정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순간이요, 믿음의 순간이며,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순간에 대한 이해는 통일되지 않았다. 가령 정통주의자들의 경우 믿음을 정확하고 순수한 정통 교리의 지식과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 문답서를 잘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신적인 임재의 체험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청교도 신학에서는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죄에 대한 격렬한 깨달음과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부어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앞서 들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죄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통회, 그리고 밀려드는 죄 사함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청교도 신학에 기초한 복음 전도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랄하게 죄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지옥불의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선포하며, 십자가의 길을 소개한다. 하지만 죄인들에게 믿겠느냐며 초청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에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라도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와 같은 구원 초청(altar calling)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원을 모종의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개신교 구원론이 루터의 우물에서 빠져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절부터 루터의 우물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급진 종교개혁가들이나 혹은 재침례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믿음을 교회가 베푸는 의식과 연결시키거나 혹은 모종의 내면적인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삶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300년 동안 초대 교회가 유지했던 관점과도 유사하다.

 

어쨌든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 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항상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모태교인과 같이 강렬한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어쩌랴.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면서 위로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미지근함 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 구원론이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2%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소위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는 체험이다. 혹자는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오로지 '예수의 몸, 삶, 말'

이상에서 보듯이 개신교 구원론은 세 가지 큼직큼직한 우물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물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우물은 생수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우물은 무덤이 된다. 따라서 우물은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시대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에 붙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제안하는 바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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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칭을 두고, <삼위>를 <세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일체>를 <한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에 대하여 각종 선행 연구물과 자료가 분석되어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도출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토론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풍성하여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 자료를 드러내어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삼위 하나님

1) 삼위가 존재하심을 같은 자리에 나타낸 곳(창1:26;마3:16,17,28:19;요14:16,17;고후13:13;벧전1:2)

2) 삼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시89:26;요8:41;고전8:6;엡1:17), 예수(롬9:5;딛2;3), 성령(행5;4)

3) 삼위가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사9:6), 예수(히6;20), 성령(히9;14)

4) 삼위가 상호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곳(롬8:9-12;요14:10,17,17:21)

<의견>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분이 없이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그러다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상호 내재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지칭(指稱)

1)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① (신6:4) : 하나인 여호와(개역한글), 유일한 여호와(개역개정) 한 분 여호와(표준새번역, 공동번역)

② (말2:10)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하나님 한 분(공동)

2)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① (막2;7) : 한 분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② (막10:18;눅18:19;요8;41)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③ (롬3:30;고전8:4;딤전2:5;약2:19)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④ (고전8:6)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하나님 한 분(표준, 공동)

⑤ (갈3:20) : 한 하나님(개역) 한 분 하나님(개정, 표준, 공동)

3)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① (딤전1:17;유1;4,25) : 하나이신 하나님(개역, 개정), 한 분이신 하나님(표준, 공동)

② (딤전2:5) : 중보도 한 분(모든 번역본 동일)

4)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① (고전12:9,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② (고전12: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③ (엡4;4) : 성령이 하나(개역, 표준, 공동), 성령도 한 분(개정)

<의견> 1) 구약성경에,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던 유일신 개념의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 표현에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영어번역본(KJV,NIV,NRSV,RSV)에서는 모두 <one god>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 신약성경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칭호할 때,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3) 결론적으로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구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삼위일체란 어의(語義)

1) 삼위(三位)의 어의

① 희랍어 -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tres hypostasis)

② 라틴어 - 트레스 페르소나에(tres personae) -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 조건, 신분 기능의 의미 - <외적>

③ 영어 - 트리 퍼슨스(three persons) - 사람, 개인, 인간 -> 의식하는 주체

< 어의(語義)> : 여기에서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며, 셋이 따로 따로 독립된 존재로 있다는 뜻이다.

2) 일체(一體)의 어의

① 희랍어 - 우시아(ousia)

② 라틴어 - 숩스탄티아(substantia) - 형이상학적 존재, 만물의 근원의 의미 - <내적>

③ 영어 - 원 서브스탄스(one substance) - 본성, 본질 -> 본체

< 어의(語義)> : 본체가 동일하다든가, 동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의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기본 도식(圖式)은 <세 실체(實體)>와 <하나의 본체(本體)>였다. 이 도식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본질(本質)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3. 삼위 하나님의 관계(關係)

영원부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은 성부에게 고유(固有)하며, 성자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낳으신바 되심은 성자에게 고유하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나아오심은 성령에게 고유한 것이다(히1;5-8;요1:14,18,15:26;갈4;6).

1) 존재론적 순서(順序)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한다.

2) 경륜적 순서(順序)

삼위 하나님을 외적인 사역의 순서로 말하면, 만물이 성부에게서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 , 성령 안에 있다(요1:3,14).

3) 사역적 순서(順序)

3위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순서로 말하면,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3:18).

 

 

4. 삼위일체 교리(敎理)의 문제점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내었지만, 현재까지 그 삼위일체를 세상 언어로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三位)를 주장하다 보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단정지어 설명하려다가 이단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들이 있었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느라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의 독립적 신성이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삼위일체>에서 <위격>과 <본질>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가 혼란이 온다. 구약에서는 <본질>이 중심이었는데, 신약에서는 <위격>에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유일신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해는 되는데 막상 정의를 내리려면 헷갈리게 된 것이다.

 

 

5. 신학(神學)에 표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

1) 터툴리안(삼위일체론의 기초형성) : 하나님은 한 분 - 한 본질(本質) 세 위격(位格)

2) 요한(동방교회) : 한 실체(實體)인 동시에 상호침투(相互浸透)의 관계인 세 객체(客體)

3) 어거스틴(서방교회) :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세 존재 양식(樣式)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장1,3) : 한 분 하나님으로 본체(本體)는 삼위(三位)가 계신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문8,9)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문5,6) : 한 분 하나님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7)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문25)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8) 토마스빈센트 소요리문답(문5,6) : 하나님 한 분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9)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신앙요리문답(문11) : 한 하나님의 세 위(位)

10) 벨직 신앙고백(8조) : 삼위(三位)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11) 니케아신경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12) 아타나시우스 신경 : 삼위(三位)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6.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에 대한 문제점

1) 삼위(三位)의 위(位)가 인격체를 의미하니 우리말 <분>으로 대입하여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참으로 간결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삼신론이란 저항에 대응할 수 있어 신학적인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소망이다. 그런데도 <분>이란 용어가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라는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세 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의 과정 하나가 추가된다는 결과가 된다.

2) 삼위(三位)의 <세 분>은 삼신론적 표현이니 삼위(三位)를 그대로 표현하여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삼신론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있으나 양태론이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삼위>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쉬운 우리말 표현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할 바에야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본질을 살린 표현이 된다.

 

 

♥ 나가며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한 분'이란 말도 가능하고 '세 분'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측면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가능한 말입니다. 칼빈도 '한 분'이란 말도 하고 '세 분'이란 말도 하였습니다(기독교강요, 13장 2. 16. 17.). 즉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분'이라고 할 수 있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는 '한 분'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뭉치로 표현하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알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일을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4-8).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란 참으로 심오하고도 절묘한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면서도 1700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 이상의 접근은 차단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생활이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구원론은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대량 생산 시스템에 어울리도록 산뜻한 매뉴얼로 패키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메가처치 구원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기존의 개신교 구원隙?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구원론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좀 복잡한 문제인데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 자체가 일종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덫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가 일종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러한 덫은 성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덫은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지난 2000년 간 신학이 발전해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덫은 신학적 덫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덫을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물은 이중성이 있다. 한 편으로 우물은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무덤이 되고 만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논리적 함정도 꼭 이 우물과 이와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신교 구원론은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버린 우물은 세 개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우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루터가 우물의 주인이다. 개신교 구원론 논의를 위해서 이 세 개의 우물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첫 번째 우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려졌다고 해도 오해되어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서의 우물이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를 충분히 대표할 만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이라는 우물에 빠진 시기는 대단히 이르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대략 2세기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그리스 철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는데, 이들은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신학을 살펴보면 이것이 신학인지 플라톤 철학인지 도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참 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한 철학이라고 논증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분명 많은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엘룰이 ‘계시의 철학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 계시가 첫째 우물에 빠지면서 나타난 현상들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추상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사고의 특징이 고도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추상적 사유가 그들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어에서 ‘정관사 +형용사’ 하면 ‘명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다음 이 명사가 계속 추상화 과정을 겪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를 들어, ‘희다’라는 형용사에 ‘정관사’(to)를 붙이면 ‘흼’이 된다. 그리고 이 ‘흼’이라는 명사는 고도로 추상적으로 활용될 때 ‘흼 자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름답다’는 ‘아름다움’ 혹은 ‘미’로, 더 나아가 ‘미 자체’ 혹은 ‘미의 본질’로 추상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들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 대상화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명료하며, 철학하기 좋은 개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계시의 역동성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점차 철학적 일자(the One)로 고정되거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얼어붙게 된다.

 

이와 함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 개념으로 고정되고,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객관화, 대상화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가상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다. 점차 기독교 신학은 이 가상적인 개념적 존재들을 엄격하게 조작하고 다루는 작업이 되어 간다.

 

가령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론이 예수라는 인물 속에 ‘신성’(divinity)과 ‘인성’(huminity)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되는지를 놓고 다툴 때, 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전적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놓고 다툴 때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소위 신학 방법론으로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수용한 것이다.

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으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다. 이런 법칙들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무슨 뜻인가? 쉽게 설명하면 ‘그런 건 그런 것이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법칙이다. 무슨 말이냐? 정류장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그가 오바마라면 그는 부시가 아니다. 여기서 ‘그는 오바마다’가 동일률이고, ‘부시는 아니다’가 모순율이다. 그러니까 동일률과 모순율을 합치면 그는 오바마이면서 동시에 부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배중률은 무엇인가? 가운데가 없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신은 50%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신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한다, 뭐 그런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모든 것들을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대단히 명료해진다. 데카르트가 ‘명석함'과 '판명함'의 사고를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리스인의 후예이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법칙들은 머릿속의 뿌옇고 희미하던 관념들을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깔끔하게 이해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성서를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유익을 얻지만, 동시에 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셋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일종의 추론 방식을 말한다. 삼단논법을 쉽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자동화(automation)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 기계에 원재료를 넣기만 하면 재료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후 완제품이 되어 ‘짠~’하고 나오는 것과 똑같다. 정교한 삼단논법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지키기만 하면 결론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이상의 방법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서 신학적 작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기 300~400년간의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한 번 추적해보자. 맨 처음에는 신학이 아니라 ‘예배’가 존재했다. 이 예배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남성을 기리는 예배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배’가 문제를 촉발시켰다. 과연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정당한가? 구약성서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예배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이것은 정당한가?

 

최초의 신학은 이렇게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야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 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스무래(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된 데 무슨 음모론이 있었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논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자,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느덧 논리는 엉뚱한 곳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칼빈주의 구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된다. 따라서 전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된다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야 한다. 또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신앙의 선물을 주지 않으실 자도 아시는가? 모른다고 하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자와 주지 않으실 자를 미리 정하셨는가?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시고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정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논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상의 일련의 논리적 추론 과정은 성서의 계시 자체로부터 왔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도의 균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작업들이 준 유익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논리적 자동 기계는 성서의 계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구원론은, 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어거스틴의 우물

어거스틴의 우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판 우물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은총의 빛을 받기 전에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 주장했다. 그래서 의지는 의지로되 기능이 상실된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상대방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보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성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논쟁을 통해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vs 인간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만 것이다.

 

김기현의 <가룟 유다의 딜레마>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심각한 딜레마가 성서에서는 전혀 딜레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독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이러한 논쟁은 신학생들의 시간 죽이기 말싸움 게임의 소재로도 훌륭하고, 소그룹 성경 공부 리더를 골치 아프게 만들게 하기에도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서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둘 다야!’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선택안이 남게 된다. 첫째는 100% 은총과 0% 행위라는 어거스틴주의, 둘째는 은총 0%와 행위 100%라는 펠라기우스주의, 셋째는 은총 50%와 행위 50%라는 세미(semi)-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synergism).

 

중세 가톨릭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를 붙드는 것 같다가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한(0% 행위) 순어거스틴주의(100% 은총)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신인협력설(synergism),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라는 주홍색 낙인이 찍히고 만다. 따라서 은총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율법 폐기론의 위험이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금세 확인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개혁주의 궁정에서 보였던 금욕과 절제에 비해 루터주의 궁정에서는 폭음과 난잡함이 현저했던 것이다. 신속하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논리적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불가지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빠져 나간다. 그것은 택자와 비택자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알 수 없고 다만 내면의 변화와 외적인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신도들을 끊임없는 경건과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앙의 성격 및 주체에 관한 문제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그 말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식물인간이 아닌가? 이러한 식의 물음이 생겨난다.

 

이 문제를 두고 격돌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이다.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논쟁이다. 필자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이 논쟁은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이 문제가 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저 문제가 걸린다. 대세는 칼빈주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는 조금이라도 행위나 윤리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이니, ‘율법주의’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양 그렇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개신교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교부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구원 간증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천상 성령의 물을 흠뻑 받고 난 다음 제2의 탄생이 나를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은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총일세.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네.”(Ad Donatum 4.)

 

3. 루터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세 번째 우물은 루터가 판 것이다. 루터가 판 우물은 무엇인가?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우물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볼 때 행위 은총론이 판을 치고 있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우렁차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신학에 따르면 반복되는 성사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으며,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거기에 선행까지. 그 중 가장 루터를 분노케 한 것이 면죄부였다.

 

이제는 돈으로 구원을 사다니! 이 모든 관습들을 향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향해 누차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선언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조차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루터가 말하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이 믿음은 ‘모종의 체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이 문제와 함께 끙끙거리며 씨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높고, 크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전가되는 복된 의라는 사실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의 체험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으며, 확신에 차고, 담대해졌다. 수도원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루터는 보름스 회의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투사로 바뀌었다. 이 체험은 마치 밤이 낮으로 바뀌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흑백이 칼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루터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값진 백 만 불짜리 체험이다. 그리고 500년간 개신교 구원론은 바로 이 루터의 백만 불짜리 체험에 대한 각주(脚註)가 되었다.

 

그의 체험은 개신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나오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등. 그리고 오늘날 강단에서 자신의 구원 체험을 간증하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루터의 백 만 불짜리 체험을 함께 공유한 자들이다. 루터의 실제적인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는 형식적이고 관습적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신교 구원론은 거의 1500년 간 구원을 침례·세례와 연결시켜 왔던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아 세례로 변질되어 버리기 훨씬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 300년 동안 침례?세례는 구원의 가장 강력한 표지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았으며, 결코 쉽게 행하지도 않았다. 3세기 경 초대교회가 침례를 베풀던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예비 입교자는 침례 받기 전 자그마치 3년간이나 예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있는지, 그리고 순교의 잔까지 마실 진지한 결심이 있는지가 확인되었을 때만 침례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의 순간적인 신앙 체험을 구원과 연결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 이후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있다고 가정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순간이요, 믿음의 순간이며,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순간에 대한 이해는 통일되지 않았다. 가령 정통주의자들의 경우 믿음을 정확하고 순수한 정통 교리의 지식과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 문답서를 잘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신적인 임재의 체험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청교도 신학에서는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죄에 대한 격렬한 깨달음과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부어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앞서 들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죄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통회, 그리고 밀려드는 죄 사함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청교도 신학에 기초한 복음 전도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랄하게 죄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지옥불의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선포하며, 십자가의 길을 소개한다. 하지만 죄인들에게 믿겠느냐며 초청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에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라도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와 같은 구원 초청(altar calling)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원을 모종의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개신교 구원론이 루터의 우물에서 빠져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절부터 루터의 우물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급진 종교개혁가들이나 혹은 재침례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믿음을 교회가 베푸는 의식과 연결시키거나 혹은 모종의 내면적인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삶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300년 동안 초대 교회가 유지했던 관점과도 유사하다.

 

어쨌든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 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항상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모태교인과 같이 강렬한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어쩌랴.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면서 위로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미지근함 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 구원론이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2%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소위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는 체험이다. 혹자는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오로지 '예수의 몸, 삶, 말'

이상에서 보듯이 개신교 구원론은 세 가지 큼직큼직한 우물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물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우물은 생수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우물은 무덤이 된다. 따라서 우물은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시대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에 붙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제안하는 바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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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칭을 두고, <삼위>를 <세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일체>를 <한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에 대하여 각종 선행 연구물과 자료가 분석되어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도출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토론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풍성하여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 자료를 드러내어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삼위 하나님

1) 삼위가 존재하심을 같은 자리에 나타낸 곳(창1:26;마3:16,17,28:19;요14:16,17;고후13:13;벧전1:2)

2) 삼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시89:26;요8:41;고전8:6;엡1:17), 예수(롬9:5;딛2;3), 성령(행5;4)

3) 삼위가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사9:6), 예수(히6;20), 성령(히9;14)

4) 삼위가 상호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곳(롬8:9-12;요14:10,17,17:21)

<의견>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분이 없이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그러다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상호 내재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지칭(指稱)

1)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① (신6:4) : 하나인 여호와(개역한글), 유일한 여호와(개역개정) 한 분 여호와(표준새번역, 공동번역)

② (말2:10)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하나님 한 분(공동)

2)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① (막2;7) : 한 분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② (막10:18;눅18:19;요8;41)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③ (롬3:30;고전8:4;딤전2:5;약2:19)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④ (고전8:6)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하나님 한 분(표준, 공동)

⑤ (갈3:20) : 한 하나님(개역) 한 분 하나님(개정, 표준, 공동)

3)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① (딤전1:17;유1;4,25) : 하나이신 하나님(개역, 개정), 한 분이신 하나님(표준, 공동)

② (딤전2:5) : 중보도 한 분(모든 번역본 동일)

4)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① (고전12:9,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② (고전12: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③ (엡4;4) : 성령이 하나(개역, 표준, 공동), 성령도 한 분(개정)

<의견> 1) 구약성경에,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던 유일신 개념의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 표현에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영어번역본(KJV,NIV,NRSV,RSV)에서는 모두 <one god>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 신약성경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칭호할 때,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3) 결론적으로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구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삼위일체란 어의(語義)

1) 삼위(三位)의 어의

① 희랍어 -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tres hypostasis)

② 라틴어 - 트레스 페르소나에(tres personae) -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 조건, 신분 기능의 의미 - <외적>

③ 영어 - 트리 퍼슨스(three persons) - 사람, 개인, 인간 -> 의식하는 주체

< 어의(語義)> : 여기에서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며, 셋이 따로 따로 독립된 존재로 있다는 뜻이다.

2) 일체(一體)의 어의

① 희랍어 - 우시아(ousia)

② 라틴어 - 숩스탄티아(substantia) - 형이상학적 존재, 만물의 근원의 의미 - <내적>

③ 영어 - 원 서브스탄스(one substance) - 본성, 본질 -> 본체

< 어의(語義)> : 본체가 동일하다든가, 동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의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기본 도식(圖式)은 <세 실체(實體)>와 <하나의 본체(本體)>였다. 이 도식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본질(本質)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3. 삼위 하나님의 관계(關係)

영원부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은 성부에게 고유(固有)하며, 성자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낳으신바 되심은 성자에게 고유하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나아오심은 성령에게 고유한 것이다(히1;5-8;요1:14,18,15:26;갈4;6).

1) 존재론적 순서(順序)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한다.

2) 경륜적 순서(順序)

삼위 하나님을 외적인 사역의 순서로 말하면, 만물이 성부에게서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 , 성령 안에 있다(요1:3,14).

3) 사역적 순서(順序)

3위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순서로 말하면,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3:18).

 

 

4. 삼위일체 교리(敎理)의 문제점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내었지만, 현재까지 그 삼위일체를 세상 언어로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三位)를 주장하다 보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단정지어 설명하려다가 이단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들이 있었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느라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의 독립적 신성이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삼위일체>에서 <위격>과 <본질>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가 혼란이 온다. 구약에서는 <본질>이 중심이었는데, 신약에서는 <위격>에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유일신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해는 되는데 막상 정의를 내리려면 헷갈리게 된 것이다.

 

 

5. 신학(神學)에 표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

1) 터툴리안(삼위일체론의 기초형성) : 하나님은 한 분 - 한 본질(本質) 세 위격(位格)

2) 요한(동방교회) : 한 실체(實體)인 동시에 상호침투(相互浸透)의 관계인 세 객체(客體)

3) 어거스틴(서방교회) :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세 존재 양식(樣式)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장1,3) : 한 분 하나님으로 본체(本體)는 삼위(三位)가 계신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문8,9)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문5,6) : 한 분 하나님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7)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문25)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8) 토마스빈센트 소요리문답(문5,6) : 하나님 한 분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9)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신앙요리문답(문11) : 한 하나님의 세 위(位)

10) 벨직 신앙고백(8조) : 삼위(三位)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11) 니케아신경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12) 아타나시우스 신경 : 삼위(三位)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6.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에 대한 문제점

1) 삼위(三位)의 위(位)가 인격체를 의미하니 우리말 <분>으로 대입하여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참으로 간결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삼신론이란 저항에 대응할 수 있어 신학적인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소망이다. 그런데도 <분>이란 용어가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라는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세 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의 과정 하나가 추가된다는 결과가 된다.

2) 삼위(三位)의 <세 분>은 삼신론적 표현이니 삼위(三位)를 그대로 표현하여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삼신론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있으나 양태론이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삼위>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쉬운 우리말 표현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할 바에야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본질을 살린 표현이 된다.

 

 

♥ 나가며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한 분'이란 말도 가능하고 '세 분'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측면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가능한 말입니다. 칼빈도 '한 분'이란 말도 하고 '세 분'이란 말도 하였습니다(기독교강요, 13장 2. 16. 17.). 즉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분'이라고 할 수 있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는 '한 분'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뭉치로 표현하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알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일을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4-8).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란 참으로 심오하고도 절묘한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면서도 1700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 이상의 접근은 차단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생활이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구원론은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대량 생산 시스템에 어울리도록 산뜻한 매뉴얼로 패키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메가처치 구원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기존의 개신교 구원隙�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구원론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좀 복잡한 문제인데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 자체가 일종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덫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가 일종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러한 덫은 성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덫은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지난 2000년 간 신학이 발전해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덫은 신학적 덫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덫을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물은 이중성이 있다. 한 편으로 우물은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무덤이 되고 만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논리적 함정도 꼭 이 우물과 이와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신교 구원론은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버린 우물은 세 개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우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루터가 우물의 주인이다. 개신교 구원론 논의를 위해서 이 세 개의 우물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첫 번째 우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려졌다고 해도 오해되어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서의 우물이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를 충분히 대표할 만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이라는 우물에 빠진 시기는 대단히 이르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대략 2세기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그리스 철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는데, 이들은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신학을 살펴보면 이것이 신학인지 플라톤 철학인지 도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참 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한 철학이라고 논증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분명 많은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엘룰이 ‘계시의 철학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 계시가 첫째 우물에 빠지면서 나타난 현상들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추상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사고의 특징이 고도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추상적 사유가 그들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어에서 ‘정관사 +형용사’ 하면 ‘명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다음 이 명사가 계속 추상화 과정을 겪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를 들어, ‘희다’라는 형용사에 ‘정관사’(to)를 붙이면 ‘흼’이 된다. 그리고 이 ‘흼’이라는 명사는 고도로 추상적으로 활용될 때 ‘흼 자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름답다’는 ‘아름다움’ 혹은 ‘미’로, 더 나아가 ‘미 자체’ 혹은 ‘미의 본질’로 추상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들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 대상화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명료하며, 철학하기 좋은 개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계시의 역동성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점차 철학적 일자(the One)로 고정되거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얼어붙게 된다.

 

이와 함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 개념으로 고정되고,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객관화, 대상화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가상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다. 점차 기독교 신학은 이 가상적인 개념적 존재들을 엄격하게 조작하고 다루는 작업이 되어 간다.

 

가령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론이 예수라는 인물 속에 ‘신성’(divinity)과 ‘인성’(huminity)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되는지를 놓고 다툴 때, 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전적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놓고 다툴 때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소위 신학 방법론으로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수용한 것이다.

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으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다. 이런 법칙들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무슨 뜻인가? 쉽게 설명하면 ‘그런 건 그런 것이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법칙이다. 무슨 말이냐? 정류장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그가 오바마라면 그는 부시가 아니다. 여기서 ‘그는 오바마다’가 동일률이고, ‘부시는 아니다’가 모순율이다. 그러니까 동일률과 모순율을 합치면 그는 오바마이면서 동시에 부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배중률은 무엇인가? 가운데가 없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신은 50%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신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한다, 뭐 그런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모든 것들을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대단히 명료해진다. 데카르트가 ‘명석함'과 '판명함'의 사고를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리스인의 후예이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법칙들은 머릿속의 뿌옇고 희미하던 관념들을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깔끔하게 이해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성서를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유익을 얻지만, 동시에 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셋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일종의 추론 방식을 말한다. 삼단논법을 쉽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자동화(automation)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 기계에 원재료를 넣기만 하면 재료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후 완제품이 되어 ‘짠~’하고 나오는 것과 똑같다. 정교한 삼단논법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지키기만 하면 결론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이상의 방법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서 신학적 작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기 300~400년간의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한 번 추적해보자. 맨 처음에는 신학이 아니라 ‘예배’가 존재했다. 이 예배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남성을 기리는 예배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배’가 문제를 촉발시켰다. 과연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정당한가? 구약성서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예배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이것은 정당한가?

 

최초의 신학은 이렇게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야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 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스무래(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된 데 무슨 음모론이 있었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논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자,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느덧 논리는 엉뚱한 곳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칼빈주의 구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된다. 따라서 전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된다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야 한다. 또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신앙의 선물을 주지 않으실 자도 아시는가? 모른다고 하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자와 주지 않으실 자를 미리 정하셨는가?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시고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정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논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상의 일련의 논리적 추론 과정은 성서의 계시 자체로부터 왔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도의 균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작업들이 준 유익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논리적 자동 기계는 성서의 계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구원론은, 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어거스틴의 우물

어거스틴의 우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판 우물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은총의 빛을 받기 전에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 주장했다. 그래서 의지는 의지로되 기능이 상실된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상대방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보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성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논쟁을 통해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vs 인간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만 것이다.

 

김기현의 <가룟 유다의 딜레마>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심각한 딜레마가 성서에서는 전혀 딜레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독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이러한 논쟁은 신학생들의 시간 죽이기 말싸움 게임의 소재로도 훌륭하고, 소그룹 성경 공부 리더를 골치 아프게 만들게 하기에도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서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둘 다야!’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선택안이 남게 된다. 첫째는 100% 은총과 0% 행위라는 어거스틴주의, 둘째는 은총 0%와 행위 100%라는 펠라기우스주의, 셋째는 은총 50%와 행위 50%라는 세미(semi)-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synergism).

 

중세 가톨릭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를 붙드는 것 같다가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한(0% 행위) 순어거스틴주의(100% 은총)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신인협력설(synergism),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라는 주홍색 낙인이 찍히고 만다. 따라서 은총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율법 폐기론의 위험이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금세 확인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개혁주의 궁정에서 보였던 금욕과 절제에 비해 루터주의 궁정에서는 폭음과 난잡함이 현저했던 것이다. 신속하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논리적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불가지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빠져 나간다. 그것은 택자와 비택자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알 수 없고 다만 내면의 변화와 외적인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신도들을 끊임없는 경건과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앙의 성격 및 주체에 관한 문제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그 말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식물인간이 아닌가? 이러한 식의 물음이 생겨난다.

 

이 문제를 두고 격돌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이다.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논쟁이다. 필자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이 논쟁은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이 문제가 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저 문제가 걸린다. 대세는 칼빈주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는 조금이라도 행위나 윤리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이니, ‘율법주의’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양 그렇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개신교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교부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구원 간증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천상 성령의 물을 흠뻑 받고 난 다음 제2의 탄생이 나를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은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총일세.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네.”(Ad Donatum 4.)

 

3. 루터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세 번째 우물은 루터가 판 것이다. 루터가 판 우물은 무엇인가?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우물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볼 때 행위 은총론이 판을 치고 있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우렁차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신학에 따르면 반복되는 성사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으며,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거기에 선행까지. 그 중 가장 루터를 분노케 한 것이 면죄부였다.

 

이제는 돈으로 구원을 사다니! 이 모든 관습들을 향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향해 누차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선언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조차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루터가 말하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이 믿음은 ‘모종의 체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이 문제와 함께 끙끙거리며 씨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높고, 크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전가되는 복된 의라는 사실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의 체험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으며, 확신에 차고, 담대해졌다. 수도원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루터는 보름스 회의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투사로 바뀌었다. 이 체험은 마치 밤이 낮으로 바뀌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흑백이 칼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루터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값진 백 만 불짜리 체험이다. 그리고 500년간 개신교 구원론은 바로 이 루터의 백만 불짜리 체험에 대한 각주(脚註)가 되었다.

 

그의 체험은 개신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나오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등. 그리고 오늘날 강단에서 자신의 구원 체험을 간증하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루터의 백 만 불짜리 체험을 함께 공유한 자들이다. 루터의 실제적인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는 형식적이고 관습적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신교 구원론은 거의 1500년 간 구원을 침례·세례와 연결시켜 왔던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아 세례로 변질되어 버리기 훨씬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 300년 동안 침례․세례는 구원의 가장 강력한 표지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았으며, 결코 쉽게 행하지도 않았다. 3세기 경 초대교회가 침례를 베풀던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예비 입교자는 침례 받기 전 자그마치 3년간이나 예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있는지, 그리고 순교의 잔까지 마실 진지한 결심이 있는지가 확인되었을 때만 침례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의 순간적인 신앙 체험을 구원과 연결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 이후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있다고 가정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순간이요, 믿음의 순간이며,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순간에 대한 이해는 통일되지 않았다. 가령 정통주의자들의 경우 믿음을 정확하고 순수한 정통 교리의 지식과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 문답서를 잘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신적인 임재의 체험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청교도 신학에서는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죄에 대한 격렬한 깨달음과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부어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앞서 들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죄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통회, 그리고 밀려드는 죄 사함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청교도 신학에 기초한 복음 전도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랄하게 죄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지옥불의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선포하며, 십자가의 길을 소개한다. 하지만 죄인들에게 믿겠느냐며 초청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에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라도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와 같은 구원 초청(altar calling)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원을 모종의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개신교 구원론이 루터의 우물에서 빠져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절부터 루터의 우물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급진 종교개혁가들이나 혹은 재침례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믿음을 교회가 베푸는 의식과 연결시키거나 혹은 모종의 내면적인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삶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300년 동안 초대 교회가 유지했던 관점과도 유사하다.

 

어쨌든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 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항상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모태교인과 같이 강렬한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어쩌랴.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면서 위로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미지근함 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 구원론이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2%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소위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는 체험이다. 혹자는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오로지 '예수의 몸, 삶, 말'

이상에서 보듯이 개신교 구원론은 세 가지 큼직큼직한 우물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물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우물은 생수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우물은 무덤이 된다. 따라서 우물은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시대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에 붙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제안하는 바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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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교리(2)| 신론[神論]
Great Light 조회 45 |추천 0 | 2009.01.30. 17:29

 

 

 

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제17장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충족적인 존재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와 비교해서 구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숫자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그 자신 안에 구체적이고 숫자적인 존재의 구별(a distinction of specific and numerical existence)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신성의 본질에 대해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 of the Godhead)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듯이, 삼위일체의 각 위(各位)가 신성 자체를 다 드러내면서도(exhaustive of divinity itself), 삼위 간의 참된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일성(Unity)과 복수성(plurality)이 꼭 같이 궁극적이다. 신성의 각 위는 서로를 다 드러내면서(exhaustive of one another), 따라서 신성의 본질을 다 드러낸다(exhaustive of the essence). 하나님은 하나의 의식을 가지신 존재이시면서, 동시에 세 개의 의식을 가진 존재(a tri-conscious being)이시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친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를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약에 대해서는 우리가 피하여야 할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구약에서 완전한 신학의 체계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 분명히 가르쳐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교리의 체계를 가리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 왔다. 그들은 구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에 대조해서, 우리는 성경이 사람에게 유기적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고,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이것은 히브리어 단어로서 복수형임)의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즉,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보역).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는 증거는 후대의 계시의 단계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각위 간의 구별에 대한 증거이다.


1.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1) 신성 안의 구별(the differentiation in the Godhead)에 대한 시사로서는 창세기 19:24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 여호와께로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여기서는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 같이 내리셨다고 한다.


(2) 창세기 16:13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를 "당신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Thou God seest me)라고 부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20, 21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 여기서는 사자(the angel)가 여호와의 이름과 동일시 되었다. 한편에 출애굽기 33장에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자를 이스라엘과 함께 보낼 것이나, 그 자신은 가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구별되었다.


(3)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삼위일체의 구별이 시사된 듯하다.

  1)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the breath of his mouth)으로 이루었도다"

  2) 잠언 3:12-31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창조주와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3) 이사야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리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런 구절들에서는 성령이 구별되는 인격(a distinct person)으로 언급되고 있다.

  4) 시편 45:6, 7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히 1:8,9에서도 인용됨)

  5)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6)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본문들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본문들은, 벌코프 교수가 말하듯이 구약에 나타난 심위일체의 각 위에 대한 시사들일 뿐이다.


2.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신약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인용된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구들만을 간단히 열거해 보려고 한다.


  (1)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3)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엡 2:18)

  (4) 요한복음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라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히 1:2-6; 골 1:15-17)

  (5) 요한복음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6) 갈라디아서 4:6 : "너희가 아들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3. 교리적 진술


  이런 구절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에 근거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제2장, 제3장):  "단일한 신성에 삼위가 계시니, 곧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 속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아니했으며 나오시지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이를 설명하면서 핫지(A.A. Hodge)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계신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계심을, 그리고 그의 본질적 속성들이 모든 온전성을 포괄함을 밝힌 후에, 이 부분은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성부, 성자, 성령이 똑같이 한 하나님이시고, 나뉘어질 수 없는 신적인 본질과 모든 신적 온전성과 대권들이 그 각각에게 같은 의미와 정도로 속한다.

    2.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 명칭들은 각기 다른 관계를 가진 한 분의 다른 이름들이 아니고, 다른 위들의 이름들이다.

    3.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들(certain personal properties)에 의해서 구별되며, 그 존재와 작용이 일종의 질서를 가진 것으로 계시된다.


  여기 언급된 세 가지 요점에 대하여 핫지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 전체가 아주 중요하다.



4. 이 교리의 역사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성경적 진리의 온전한 진술은 오래고 힘든 성경 해석의 열매이다. 이 역사에 대한 지식은 그에 반하여 이 교리가 진술된 여러 형태의 이단을 살펴 보는 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 교리의 역사의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여기서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아주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한 속성들을 논의한 후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좀더 친근한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특별한 마크가 있다. 즉, 그분은 당신 자신의 일체성을 선포하시면서도, 우리 앞에 삼위로(in three persons) 존재하심을 분명히 제시하신다. 신성의 이름이 아니면, 이것들은 아무런 참된 지식도 없이 우리의 두뇌 안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Institute, 1. Xiii, 2) 이 때 칼빈은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방식외에 달리 존재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워필드(Warfield)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면, 칼빈에 의하면, 단일론적 하나님(a monadistic God)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다양성(multiformity)의 개념이 하나님의 개념 안에 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단순하다고 하고, 삼위가 그 신성에서는 서로 동등하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는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 이단의 특성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제1세기와 2세기의 교부들은 이미 에비온주의와 가현론과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유일하게 변호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의 체계를 가졌음을 밝히기에는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철저히 무장되었었다고 하기 어렵다.

  제2세기에 변증가들, 특히 저스틴 마터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사이의 내재적 관계는 저스틴 마터의 경우에서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마치 성자가 이 세상의 창조를 위해서 낳아진 듯이 여겨진 듯하다. 여전히 하나님 그 자신(God in himself)은 감취어진 하나님(숨어계신 하나님)이고, 성자는 계시된 하나님인 듯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저스틴 마터에게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나 성자와의 본체론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다.


(1) 아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리레니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로고스 개념에 대립하여 상당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로고스가 이중적 성격(his twofold nature-의미상 중간적 성격)을 벗어버리고 신성을 가진 것으로 진술되었다". 비록 언제나 일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레니우스는 성자와 대립되는 '숨어계신 하나님' 개념에 대립하였다. 이것은 아주 큰 진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자기 표현적이셨음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비록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하나(a unit)이기는 하지만, 신성에는 통일성(unity)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성(trinity)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레니우스를 보충하고 있다. 터툴리안에 대해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종속설을 언제나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본체론적인 삼위일체와 우주론적인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론적 삼위일체를 충분히 구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일체론의 진술을 위한 개념과 단어들을 제공하였다. 그는 '로고스' 사변을 아들됨의 관계(filiation)로 대치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 사변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그는 각 위의 삼위일체성을 성부의 인격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오리겐 역시도 종속설의 오류에 빠졌다. 그는 성자의 성부와의 하나됨(the unity)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위해서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성부는 다시 한번 희랍적인 방식으로 가장 궁극적인 존재이며, 성자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로 생각되었고, 성자는 세상보다는 더 높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아리우스주의

  핫지는 오리겐의 여러 추종자들이, 예를 들어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와 특히 아리우스가 오리겐보다 훨씬 더 낮은 교리를 가르쳤음을 지적한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ek ouk ontoon) 창조되었고, 따라서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3) 사벨리우스주의

  삼위일체에 대한 또 하나의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진술은 흔히 사벨리우스주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삼위의 본질적 통일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서 삼위의 다양성을 가르쳤는데 비해서, 사벨리우스주의는 삼위의 다양성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본질의 통일성(단일성)을 가르쳤다고 일반적으로 대조되어 설명된다. 이것은 옳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를 분명히 파헤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범신론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유신론은 그 모두를 강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별이다. 요점음 교회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연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둘 다가 그 근저에서는 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과 동리한 수준에서 연합시키는 같은 이단에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을 다 거부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리우스주의’의 이름으로 요약된 모든 종속론적 사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벨리우스주의 역시도 전체로서의 실재의 통일성을 제공해 주는 영원 세계에 대한 보충으로 시간 세계가 복수성을 제공하도록 해 보려고 한 것이다.


  (4) 나이신 신조(혹 니케아 신조)

  니케아 공의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 교리를 진술하고 변증하려 모였을 때,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n to patri)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고, 삼위들이 단순히 세상과 관련한 경륜적 표현일 뿐 아니라,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삼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다. 그것들은 전혀 그 종류가 다른 것(allo kai allo)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이단을 거부함에서 니케아 공의회는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를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삼위일체에 대한 한 가지 기본적인 이단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궁극적 연합으로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에 대립하기 위해서는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두 요점을 주장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신성 안의 각 위의 내적인 관계가 피조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선행하며, 독자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찰스 핫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성의 본질이 각위에게 공통적이므로, 그들은 공통적 지성과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안에는 세 지성과, 세 의지와 세 작용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가 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한 정신과 한 의지를 가지신다. 이 밀접한 엽합을 희랍교회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라틴어 'inexistentia', 'inhabitatio' 또는 'intercommunio'(상호 연합, 침투) 등의 말로 설명하였다.


  (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나이신(니케아) 신조에는 참된 성경적 교리의 모든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참된 교리가 주장되려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재진술되고, 세련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심이 더 분명하게 진술되어야만 했다. 아다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삼위 모두가 동등함을 더 분명히 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이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심을 밝히는 일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오셔야만 삼위일체 삼위의 내적 교통이 영원히 온전한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삼위의 동등성을 더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배타적인 내적 교통은 '아들로부터'(filioque)라는 어귀 없이는 표현될 수 없음을 더 분명히 보았다.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낳아지심)이 영원한 출생이므로, 성령의 나오심도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영원한 나오심이어야만 한다. 핫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신 신조의 가장 분명한 결함은 성령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진술이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나이신 신조의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에 "주님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시고, 아버자와 아들과 함꼐 경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던" (성령을) 이란 말을 덧붙였다" ('아들로 부터도, filioque'라는 말은 최종적으로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수납되었다.


  (6) 칼케돈(451)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이단들은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이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칼케톤 공의회에서 거부되어진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유티케스주의도 교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반대의 변형된 형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칼케돈 신조에 대해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니케아의 첫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선재하시는 신성을 수립하였으나, 제4차 공의회의 신조(칼케돈 신조)는 땅 위에서 걸으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성육신하신 로고스와 관련하였다. 칼케돈 신조는, 아리우스주의에 반해서 나이신 신조에 동의하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잘못 생각한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오류에 반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조의 진술 형태에 대해서도 샤프의 말을 인용해 볼 수 있다. "정통 교리는, 유티케스주의에 반해서 성육신 이후에도 혼동이나, 변화없이(asygchytoos, inconfuse 그리고 atreptoos, immutabiliter), 또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해서)구분이나 나뉘어짐없이(adiariretoos, indivise 그리고 achoristoos, inseparabiliter) 있는 각 성질의 구별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인데,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삶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각 위와 같이 서로 침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여기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말을 덧붙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요,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요.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찾을 때에 인간성(man's nature)을 취하셨는바, 그 본질적 속성들과 그 일반적 약점을 모두 같이 취하였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사, 그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 따라서 두 가지 온전하고 구별되는 본성인 신성과 인성의 변화됨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함께 한 인격 안에 나눌 수 없게 연합되어졌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인격이며, 한 그리스도이시고, 그는 사람과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8장, 2항)

  이 진술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혼동이나 혼합없이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온전하신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자기 온전성에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온전성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이 하나님은 피조된 우주의 토대이시고, 이 우주를 초월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우주의 토대라고 먼저 생각되지 않고, 이 우주와는 다른 분이라고만 정의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 타자성'이 결국, 시간적 우주와 연관되게 되면, 전체로서의 실재의 한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이신론[理神論]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든지, (희랍 사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창조와 섭리를 모두 부인하는 교리는 결국 영원과 시간을 혼합시키고야 만다. 이신론과 범신론은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고 혼동하는 근본적 오류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을 때나, 삼위일체의 제2위가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을 때에도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은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역시 참된 교리에 대한 이신론적 형태의 대립이며, 유티케스주의는 명백히 범신론적 형태의 대립인 것이다.


  (8) 현대의 반삼위일체주의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의 신학적 이단들은 그 기원을 거짓된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다고 하든지, 그런 왜곡된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시사할 수밖에 없다. 고대에서와 같이 현대에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을 한데 섞었던 것이다.

  그런 한 가지 대표적인 예는 칼빈이 정리한 삼위일체 교리에 개한 반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s of the Godhead)의 동일 본질성(the consubstantiality)을 주장하는데 아주 관심이 있었다. 워필드의 말을 인용해 본다: "성자의 '스스로 신적이심'(the autotheotes)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 칼빈은 결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 자신들이 '아주 많은 말로' 이를 주장하고 있다고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주장에서 삼위일체 교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자의 하나님으로의 자기 존재와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진술하는 현대의 양식이 성자의 신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결함있는 양식의 도입을 넓게 열었으므로,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되심'(autotheotes)에 대한 날카로운 주장이 필요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을 위해 교회가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세 사람을 든다면 터툴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진술이 굉장한 반대를 받은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내에서 칼빈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천주교 사상이나 자세한 몇 부분에서 반대하는 루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알미니안적 반론을 간단히 주목해 보기로 한다. 루터파에 반대해서 알미나안주의자들은 오리겐주의자들의 종속설적 성향을 매우 분명히 가지고 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만 "그의 정통성을 어느 정도는 견지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무게의 중심은 하향적이 되었다. 그래서 에피스코피우스의 가르침에서는 벌써 '영원한 출생'과 '나오심'에 대한 니케아 신조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삼위 간의 질서상(in order) 종속이 아니라, 삼위 간의 본성상(in nature)의 종속을 위한 출생과 나오심이 언급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켈셀레우스는 삼위 간의 '특정한 통일성'(asoecific unity)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조오지 벌 은 컬셀레우스보다는 덜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벌 이후에는 사무엘 클락이 오는바, 그는 "성자가 무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등하게 있음을 허용하기를 하였으나,"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졌음을 인정하려고 한다.

  바른 삼위일체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대립은 좀더 급진적인 일탈의 길을 준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관념론 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전체로서의 실재 안의 정.반.합 원리와 동일시하였다. 이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신학자들이 신앙에서 벗어나 나아갔다. 결국 유니테리안주의도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섞는 옛 오류의 새로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주의(modernism)는 이 모든 이단들의 행복한 상속자들인바, 그 모든 이단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 본질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는 그 오류가 좀더 깊이 나타나서 현대주의에 있어서는 성부 자신이 실재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다. 참된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때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이나 많은 오해가 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바르트의 칸트주의적인 원리는 자충족적인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정통주의의 용어들은 사용하나 그 의미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비공유적 속성들은 바르트에 의해서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역동주의는 그로 하여금 그리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도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생사의 투쟁을 하기 위해 준비한 듯하다. 그 삼위일체론을 진술함에서 교회는 자충족적이고, 신비하신 하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언하였다. 이 자충족적이시고 신비하신 존재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 낮추신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이 그러하시듯 반드시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어떤 사역을 특히 성부께 돌리고, 어떤 사역을 성자께 돌리며, 어떤 사역을 특별히 성령께 돌릴 때, 우리는 그렇게 돌리는 것(ascription) 배후에 신성 안에 참된 구별이 있음을 전제하게끔 된다. 반면, 각 위에게 돌려진 사역은 절대적인 한 분의 사역이다.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우리는 언제나 신성 안에 있는 참된 위격적 구별(personal distinctions)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허용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무시하도록 신성 안의 삼위의 구별을 허용하므로써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리가 다음과 같이 하면 이 위험을 가장 잘 피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a) 이 교리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안에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론을 발견하여 보는 것이고, (b)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언급 가능한 전제라고 아무런 변명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의 주된 난제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잘못된 데서 시작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할 수도 있고, 유비적(analogically)으로 추론하기보다는 일의적(univocally)으로 추론을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류 중의 하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삼위일체가 자연인의 전제에서 합리적인 교리로 비그리스도인에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삼위일체는 비합리적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그 위(person)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통일성(unity)과 삼위성(trinity)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다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전체로서의 하나님(the whole Godhead)이 한 분(one per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 속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이라는 것을 살펴 본 바 있다. 어떤 종류의 해석되지 않은 존재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소위 '순수 사실'의 망령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존재의 일치성을 주장하게끔 된다. 또 비슷하게 우리는 신학자들이 신성의 각위가 신성의 존재와 동연적이라는 주장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위격적 특성의 구별이 단지 이름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속성과 각 위의 하나님의 전체 존재와의 절대적 동연성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속성들과 위격의 참된 구별(distinctions)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각 위는 하나님의 전체 본질(the whole essence of God)과 동등하며, 다른 두 위와도 동연적이고, 삼위 모두와도 동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다른 존재들, 즉 피조된 존재들에 반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인 숫자적 단일성을 제시하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 안에서도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하나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는 한 분(one person)이시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란 수식어구가 그에게 대해 붙여질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성을 가지신 본질이신 것(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이 아니라, 그는 절대 인격체(absolute personality)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존재 안에서 존재의 구체적인 형태나 유형(a specific or generic type of being), 그리고 삼위의 위격적 존재 방식(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의 구별을 알 수 있다는 허용과 강요를 성경에 의해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런 삼위일체가 우리의 철저한 파악을 넘어선 신비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신비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존재의 전체성 가운데서, 우리의 파악을 넘어 서신다. 동시에 이 신비하신 하나님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이시므로 신비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합리성이 있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규정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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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Warfield의 삼위일체론 연구 

                                                                                                                                                                     작자 미상


I.서론: B.B.Warfield의 생애와 그의 신학적 작업

워필드(Benjamin.B.Warfield)는 구 프린스톤의 위대한 3대 정통신학자들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Archibald Alexander, Charles Hodge와 함께 그는 구 프린스톤의 신학적 기초를 놓은 조직신학자들 중의 한 분이기 때문이다.1) 그는 1851년 켄터키(Kentucky) 주의 렉싱턴(Lexington)근교인 “Grasmere"라는 곳에서 출생하였으며, 1871년에는 뉴저지 대학(현 프린스톤 대학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는데, 대학시절에는 학문적 탐구열이 뛰어난, 열렬한 다윈주의자(Darwinian)였다.2)

워필드는 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의 에딘버러 (Edinburgh), 하이델베르그(Heidelberg)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유럽에서 1년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와 1873년에는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876년에는 졸업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Annie Pearce Kinkead와 결혼한 후, 곧바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공부했다. 1877년에 귀국한 후, 볼티모어 제일 장로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사역하기도 했으나, 다음 해인 1878년에는 웨스턴 신학교의 신약학 강의를 담당해달라는 요청을 수락하여 그 곳에서 프린스톤 신학교로 옮기기까지 9년동안 교수사역을 수행했다.3)

워필드의 스승은 Charles Hodge로서, 그의 스승의 아들인 Archibald A. Hodge도 프린스톤에서 조직신학자로 사역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A.A.Hodge가 프린스톤 신학형성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교수 재임기간이 1877년부터 1887년까지 십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4)

오히려, C.Hodge의 진정한 후계자는 바로 B.B.Warfield인 것이다. 워필드는 조직신학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스승인 C.Hodge의 신학에 크게 의존적인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어떤 새로운 조직신학의 체계를 세우려하기 보다는 스승의 조직신학의 체계 위에서 신학을 전개하면서, 자유주의를 비롯한 당시의 수많은 도전들에 대해서 정통 기독교를 변호하는 변증학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잡지나 정기 간행물, 혹은 사전류, 그리고 특히 Presbyterian & Reformed Review (후에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기고한 논문들을 통해서 신학적 변증작업들을 수행하였다. 프린스톤의 신학적 입장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관점들과 주장들에 대해서 정통신학자의 입장에서 논쟁을 벌이고 변증을 시도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물론, 그도 많은 저술들을 남긴 것이 사실이나,5) 그 저술들은 어떤 하나의 종합적인 조직신학서라기 보다는, 그의 스승들이 확립한 정통신학의 전제들 위에서 전개된, 여러 가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서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는 완전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서를 들 수 있다. 19세기의 지평 위에서 신학을 전개했던 워필드는, 프린스톤의 신학에 도전하는 여러 경향들에 대해서 주목했는데, 특히 오벌린 학파가 채택했던 New Divinity 신학과 연관되었던 완전주의사상을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반박하는 글을 광범위하게 써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그의 저서인 완전주의(Perfectionism)6)에 포함되어있다. 그 밖에도 그가 주목했던 프린스톤의 대적들 중에는 슐라이에르마허, 리츌의 신학을 비롯하여, 테일러와 부쉬넬의 신학, 그리고 성서비평, 진화론 등이 포함되었다.7)

삼위일체론에 대한 워필드의 논의들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체적인 조직신학의 체계적 논의들을 전개해가는 가운데, 그 일부로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을 비롯한 다양한 현대의 도전들을 주목하면서, 정통신학의 삼위일체론을 대변하려는 입장에서 하나의 개별적인 논문을 집필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The Biblical Doctrine of the Trinity"라는 글은 자신의 조직신학서의 전체틀 속에서의 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한 성경사전 속에서 발견된다.8) 따라서, 본고에서 논의의 초점은, 그 논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워필드가 자신의 삼위일체론 논의를 어떻게 전개했느냐 하는 부분이다. 그 논문을 통해서 그가 강조하려했던 특징적 요점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워필드의 삼위일체론 논문의 구성과 그 내용들을 요약, 정리한 후, 그 논문을 통해서 워필드가 강조하려했던 주요 관심점들이 정리해보려 한다.


II. Warfield의 삼위일체론 논의의 구조와 내용

워필드의 논의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9) 첫째 부분은 성경이 제시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성경의 계시적 진리임을 주장하는 내용이고,10) 둘째 부분은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계시적 진리를 말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들을 신,구약의 본문들을 통하여 설명해준다.11) 그리고 끝 부분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초대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자 칼빈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개관해주었다.12)

(1) 논문의 첫째 부분: 삼위일체는 성경의 계시적 진리(교리)이다.

먼저, 워필드는 성경에서 계시된 기독교 유신론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성경적” 교리이고, 또 “계시적” 교리임을 주장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철학적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에서 찾아질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발견되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논문의 첫 번째 부분이 마무리되는 곳에 이르러,13) 워필드는 기독교의 유신론만이 오직 안정되고 견고한 유신론이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첫째 부분의 내용들 속에서 워필드가 먼저 주장하고있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란 “성경적 교리”라는 지적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주어진 교리이지,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들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성격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삼위일체”라는 용어 자체가 성경에서 발견되는 용어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본체는 하나이나 삼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진술할 때, 우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여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교리가 성경적 교리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내용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성경에서 직접 나타나는 어휘들을 사용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게될 때, 그것은 성경적인 교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접근될 수 밖에 없는 이유로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에서 하나의 “공식화된 정의”로서 제시되지 않았고, 오히려 “단편적인 언급들”을 통해서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s given to us in Scripture, not in formulated definition, but in fragmentary allusions; when we assembled the disjecta membra into their organic unity, we are not passing from Scripture, but entering more thoroughly into the meaning of Scripture.14)

우리들이 그러한 성경의 단편적인 언급들을 유기적으로 연합시켜나갈 때, 워필드는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벗어나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의미 속으로 더 철저하게 들어가게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작업의 과정 속에서 철학적인 반성을 통하여 제공된 기술적인 용어들이 사용될 수도 있으나, 그 진술된 교리내용은 진정한 성경의 교리가 된다고 보았다.

계속해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계시적 진리라는 명제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들을 더 설멸해준다: 즉, 그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얻어지는 진리이므로, 인간의 자연이성이나, 어떤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질 수 있는 성격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의 어떠한 추구나 노력들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적 논구를 통해서는 성경의 삼위일체 개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워필드의 논지는 당시의 자유주의 신학이 견지하고 있는 “자연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정통신학자의 분명한 비판적 시각이 반영되고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통개혁신학의 중요한 성격들 중의 하나를 “신본주의적 신학(theocentric theology)"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통찰력이나 종교적 경험이나 재능을 통하여서는 진리가 찾아질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성경의 계시말씀만을 통하여 진리가 찾아질 수 있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5) 반면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단지 하나의 종교로만 간주하고,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들도 단지 과학적, 경험적 연구방식을 따라 분석될 수 있고, 추구될 수 있다고 보는 자연주의적 혹은 내재주의적(immanent) 신학방법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신학연구란 단지 현상적 세계에 속한 인간의 종교적 활동에 대한 분석과 연구일 뿐이다.16) 정통개혁신학이 신본주의적 성격을 띄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교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서부터 기초하여 세워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삼위일체 논의를 시작하면서, 워필드는 우선적으로 이러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내재주의적 경향성에 대해 주목하면서, 정통개혁신학의 입장에 서서 암묵적으로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워필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란 인간의 이성적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들 속에서 발견될 수 없는 진리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워필드는 이집트인들의 Osiris, Iris, Horus와 같은 존재들의 경우들과 같이 제시되는 “3개의 신격들”의 개념은 거의 모든 다신교적 종교들에서도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혹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숭배되는 신들이 모여진 형태의 혼합주의적 개념이나, 힌두교의 Brahma, Vishnu, Shiva, 혹은 Homer의 신화에 나타나는 삼위일체적 개념, 불교의 Triratna, 플라톤 철학의 관념론이나 파르시교의 교리 등과 같은 여러 이방종교들 속에서 제시되는 삼위일체와 유사한 개념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그러한 것들은 성경의 계시적 가르침 속에서 제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성격과는 어떤 유사성도 확인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It should be needless to say that none of these triads has the slightest resemblance to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nity.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nity embodies much more than the notion of "threeness," and beyond their "threeness" these triads have nothing in common with it.17)

일반 다른 종교에서 제시되는 방식처럼, 단순히 3개의 신격들이 혼합적으로 설명되는 형태의 개념만으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개념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오직 성경의 계시적 가르침에서만 찾아진다는 점에서 유일성 내지는 독특성을 지니게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방향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인간 이성의 통찰력에 의해서도 찾아질 수 없고 또 이성으로부터의 어떠한 증거나 자연 속에서의 어떠한 유추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임을 강조한다. 초월자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전 우주 속에서 유일한 존재방식이므로, 그 분의 존재방식을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삼위일체에 대한 이성적 증거들을 세우려했던 시도들을 몇 가지 사례로 들면서, 그 시도들의 한계점들을 지적함으로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의 유일성과 초월성의 성격을 확인해준다.18)

워필드는 삼위일체 개념에 대한 이성적 증거들을 제시하려 했던 과거의 시도들을 크게 2종류들로 분류한다. 즉, “자기 의식”(self-consciousness)의 개념과 "사랑(love)"의 개념 속에 함축된 의미들을 분석함으로서 입증하려했던 시도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 두 개의 개념들은 그 개념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러한 개념을 위한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우리가 “자기의식”이나 “사랑”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통일성과 아울러 복수의 형태로서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기의식”의 개념을 통한 삼위일체 입증의 시도는 17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Bartholomew Keckermann에 의해서 발전된 것으로 보았는데,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식적 사고라고 전제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고는 전부터 존재해온 완전한 대상을 소유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완전한 대상은 하나님이므로, 바로 복수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게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와같은 시도가 범신론으로 빠질 위험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 그리고 또한 세 번째 위격인 성령님의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시하기 어려운 점을 지적했다.19)

다음으로 “사랑”의 개념을 통해 삼위일체 개념을 입증하려했던 시도를 소개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랑이신데, 그러나 그 사랑이 사랑의 대상을 갖지 않는 한 사랑일 수 없다”라고 주장했던 Valentinus의 논증, 그리고 “the lover", "the loved", 그리고 ”the love"라는 3개의 개념들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유추하려했던 어거스틴의 논증들을 워필드는 차례로 소개한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추상적인 관념 정도로서가 아니라, 좀 더 명백하고 구체적인 요소들로서 설명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결국 그러한 시도들은 단지 비유적인 언어의 남용일 뿐이라고 비판했다.20)

이성적 논증들의 마지막 사례로서, 워필드는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본체론적 증명을 소개한다. 에드워드가 사고, 사랑, 공포와 같은 개념들 혹은 영적 개념들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를 전개했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 대해 가지시는 관념은 다시 그 자신이 된다”는 논지를 제시했음을 지적했다.

God's idea of Himself is absolutely perfect, and therefore is an express and perfect image of Him, exactly like Him in every respect... But that which is the express, perfect image of God and in every respect like Him is God, to all intents and purposes, because there is nothing wanting...."21)

그러나, 워필드는 이러한 시도들도 결정적인 논증이 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개념이란 그 형태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아니므로, 단지 그 형태들의 반복을 통하여 그것을 이중적이거나 삼중적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 할찌라도, 우리는 본체의 복수성을 말하게될 뿐이며, 한 본체 안에 계시는 복수적인 위격을 말하게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와같이, 워필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완벽한 관념이나, 완전한 사랑의 개념들로부터 하나님 자신을 또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방식의 시도들을 비판했는데, 결국 그것은 그 분이 그의 개념이나 자신에 대한 그의 사랑과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22)

그런데, 워필드는 삼위일체 존재에 대한 위와같은 이성적 추론들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비판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의 긍정적인 기능까지도 간과했던 것은 아니다. 워필드는 이성의 긍정적인 역할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 교리가 단순한 추상적 단자(monad)적 개념보다 훨씬 우월한 가르침이 되고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되고, 그 교리에 대한 중요하고도 합리적인 지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23)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있어서, 다양한 난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조명하며 또 풍요롭게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논문의 첫째 부분의 마지막에 이르러, 워필드는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을 그냥 단순한 추상적 단자로서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으므로,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부르짖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만 인생의 진정한 풍요로움이 발견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에서 인간의 이성과 마음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인생의 참 풍요로움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도록 역할을 하게된다는 보았다.

(2) 논문의 둘째 부분: 그러면, 성경의 계시내용은 무엇인가?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위에서 정리한 바와같이, 워필드는 논문의 앞부분에서 다른 종교의 가르침들이나 인간의 이성적 증거들을 통하여 삼위일체 개념을 제시하려는 이들의 모든 입을 틀어막은 후, -바른 접근방식으로서- 논문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계시적 증거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계시의 증거들에 대한 워필드의 설명들은 크게 두 부분들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앞의 부분에서 워필드는 삼위일체 진리가 신약과 구약의 성구들 속에서 제시된 방식들을 살피는 가운데, 그것이 구속사의 계시사건들과 어떻게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둘째 부분에서는 삼위의 하나님들 사이의 관계성(성부,성자,성령 3위격들의 연합성과 구별성의 문제, 혹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동등성과 종속적 성격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한 성경의 설명들을 제시하고 있다.

1)삼위일체 교리의 기초: 구속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

이제 워필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들과 신약성경의 증거들에로 향한다. 그런데, 구약과 신약의 구체적인 구절들을 살펴보기 전에, 그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증거들의 성격들을 먼저 정리하고 있다. 그 두 부분의 증거들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그럼에도 또 어떻게 유기적 연관성 지니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워필드는 궁극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란 사실상 삼위 하나님의 계시내용 즉,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계시와 성령 하나님의 부으심(outpouring)이라는 행위 계시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뒷받침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4)


ㄱ.구약의 증거들

먼저 워필드는 구약의 증거들의 성격을 정리해준다. 구약성경 안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워필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구약 안에서 주어진 계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 교리에 도달할 자는 아무도 없음을 지적한다. 구약의 증거들은 단지 모호한 암시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복수적인 형태인 “엘로힘”과 같은 단어처럼 사용된 복수명사(창 1:26; 3:22; 사6:8)나 복수동사의 용례, 잠언 8장에서의 지혜의 개념,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언급들(출 3:2), 그리고 민 6:24-26과 같은 구약의 암시들은, 단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이미 숙지한 이들이 그와같은 모호한 암시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줌으로서, 구약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게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았다.25)

단순히 구약의 특정한 본문들을 인용하는 방식 외에도, 워필드는 ‘모든 사물들의 존재와 보존에 대한 3중적 원인들’이라는 개념으로 제시되는 구약계시의 유기적 성격에 호소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즉, 시편33:6; 학개2:5,6과 같은 내용들 속에서 언급되는 “하나님”, “말씀”, “그의 영”의 역할에 대해 설명함으로서 삼위일체를 증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결국 구약 안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에 관한 개념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단지 아직 오지 않은 삼위에 대한 계시를 바라보는 준비를 확인케될 뿐이라고 정리해준다. 그는 구약을 “호화스럽게 가구가 비치된, 그러나 불이 희미한 방”으로서 비유하면서, 구약증거의 성격을 정리하였다:

The Old Testament may be likened to a chamber richly furnished but dimly lighted; the introduction of light brings into it nothing which was not in it before; but it brings out into clearer view much of what is in it but was only dimly or even not at all perceived before.26)

구약의 증거들에 대한 워필드의 결론은 이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구약에서 명백하게 계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약의 계시의 기초로 존재해 있었고 그러한 차원에서 여기 저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는 계속되는 더 충분한 계시에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완성되고 확장되며 풍성해진다는 것이다.27)

ㄴ.구약과 신약 계시 사이의 연속성

워필드의 계속되는 논지는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 사이의 유기적 연관성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 사이에 있는 연속성이 무시되거나 간과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신약의 저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과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개념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 사이에 어떠한 부조화도 느끼고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신약성경의 많은 증거들 속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약의 저자들도 분명코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배를 잃지 않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묘사할 때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새로운 창안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갖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물론, 이 말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구약의 모든 부분들 속에서 명백히 가르쳐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속에서 그들이 예배하고 있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확인하였으므로, 구약계시의 문맥 속에서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었다. 또 그 두 하나님의 동일성에 대한 그들의 확신은 너무나 명백하므로,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떠한 의구심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ㄷ.신약의 증거들

바로 그러한 신구약 계시의 연속성의 관점 속에서, 워필드는 신약의 증거들의 성격을 설명한다. 그러한 신구약 계시의 유기적 통일성은 우리가 신약성경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개념으로 하나님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찾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신약에서 나타날 때,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조는 이미 전체 내용들 뒤에 놓여있는 기초로서 간주되고 있으며, 이미 세워져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전제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여기 저기에 산발적으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신약 전체의 핵심이 삼위일체이므로, 오히려 그것은 모든 다른 가르침들의 기본적인 전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 속에서 그 교리는 “이미 충분히 완성된 상태로서”, 그것이 발전되어진 어떠한 자취들도 남겨놓지 않았다는 Gunkel의 말을 인용하면서,28) 워필드는 그 교리가 신약성경에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제시되지 않고,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전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에게 이 어려운 교리가 싸움없이- 그리고 논쟁없이- 기독교의 진리들로서 수용된 다른 항목들 사이에서, 조용하고도 알아채기 어려울 만한 방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인간사상의 역사들 속에서 매우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한 Sanday의 말을 인용한 후에,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경이 어떤 교리의 발전이나 융합에 대한 기록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워필드는 말한다. 그 교리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미 수납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 수납되는 과정에 대한 것은 신약성경의 배후에 놓여있다고 보았다.

ㄹ.구속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 계시”에 기초한 교리로서의 삼위일체

워필드는 이어서, 신약성경의 배후에 놓여있다고 보았던 바로 그 ‘삼위일체가 수납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해준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왜 구약성경 안에 좀 더 충분하고 명백한 증거들이 부족했는가에 대한 이유에 대한 답도 발견할 수 있고, 또 신약성경이 왜 그 교리를 이미 수납된 교리로서 간주했으며, 가르치는 방식이 아닌, 단지 암시적인 방식으로만 제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게된다.

삼위일체 교리란 “성경적 교리”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신약과 구약의 내용들 속에서는 그 교리가 반영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 교리가 수납되는 과정에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행위계시에 기초하여 수납된 것으로 봐야한다고 워필드는 주장한다:

The Old Testament was written before its revelation; the New Testament after it. The revelation itself was made not in word but in deed. It was made in the incarnation of God the Son, and the outpouring of God the Holy Spirit. The relation of the two Testaments to this revelation is in the one case that of preparation for it, and in the other that of product of it. The revelation itself is embodied just in Christ and the Holy Spirit.29)

이러한 의미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적”교리인 것이다. 그 진리는 인간의 고안이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수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오심의 “행위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수납된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성령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가 된다고 워필드는 설명한다.30)

여기에서 워필드는 또한 삼위일체 교리가 “구원론적” 진리가 됨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교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에 기초한 교리이라면, 그것은 곧 삼위일체 계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구원의 성취를 위해 주어졌던 행위계시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교리는 인류의 죄의 문제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속에서, 그리고 세상에 죄와 의와 심판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성령님의 강림 사건 속에서 이해되는 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이해하고 믿는 자들은 그 분을 삼위일체 존재방식 이외의 모습으로 생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Those who knew God the Father, who loved them and gave His own Son to die for them; and the Lord Jesus Christ, who loved them and delivered Himself up an offering and sacrifice for them; and the Spirit of Grace, who loved them and dwelt within them a power not themselves, making for righteousness, knew the Triune God and could not think or speak of God otherwise than as triune.31)

결국, 삼위일체 교리란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행위계시”를 통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좀 더 확장되고, 완성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적인 기초를 바로 이해하게될 때,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의 계시와 신약의 계시의 성격들에 대한 몇 가지의 의문점들을 해결하게 된다.

첫째 의문점은 왜 구약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좀 더 명백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는가? 에 대한 문제이다. 워필드는 먼저 Nazianzus의 그레고리 시대로부터 구약계시의 임무란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확고히 세우는 일이었다고 설명해왔음을 지적한다. 그 임무가 충실하게 성취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신격의 유일성 안에 존재하는 복수성을 말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그의 논지를 따라, 구약에서 삼위일체의 계시가 지연되었던, 좀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고 말해준다:


the times were not ripe for the revelation of the Trinity in the unity of the Godhead until the fulness of the time had come for God to send forth His Son unto redemption, and His Spirit unto sanctification.32)

하나님 안의 복수성에 대한 구약의 계시가 지연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경륜 속에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의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말씀의 계시가 그 충분한 설명을 더하기 위해서는 그와같은 행위의 계시를 기다렸어야 했던 것이다. 구속역사 속에서의 구체적인 행위계시에 대한 이해없이, 하나님 안에 계시는 삼위에 대한 단순한 추상적인 진리진술은 적합하지 않었기 때문이다.

신약의 계시와 관련된 또 다른 의문점도 그러한 “행위계시”의 사실과 연결되어 설명될 수 있다. 그 의문점이란, 왜 신약성경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가르치는 표현으로가 아인, 단지 암시적인 형식으로 제시되는가? 공식적으로 가르쳐주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우연히 제시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그것은 구속역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의 사실들이 이미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라고 워필드는 설명한다.33)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들이었으므로, 서로에게 어떤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다시 상기시키며 확인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워필드가 자신의 논문의 둘째부분의 전반부에서 주장한 내용의 요점은, 삼위일체 교리의 근원적인 증거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혀주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의 행위계시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교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신약성경의 전 내용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거해주는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그 안에는 성령의 신적인 인격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로 가득 채워져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위한 어떤 새로운 진리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은 이미 확인된 계시적 진리임을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34)

2)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 3위간의 상호관계성

논문의 둘째부분의 후반부에서, 워필드는 논의의 초점을 성경에서 제시되는 삼위 하나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관한 주제로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성과 구별성, 그리고 동등성과 종속의 성격에 관한 주제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논의한다.

신약성경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든 곳에서 또한 하나님으로서의 성령,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그리고 하나님으로서의 성부를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삼위는 구별된 인격들로서 셋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워필드는 삼위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요구되는 3가지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소개해준다:


...... the principle which has ever determined the result has always been determination to do justice in conceiving the relations of God the Father, God the Son, and God the Spirit, on the one hand to the unity of God, and, on the other, to the true Deity of the Son and Spirit and their distinct personalities.35)

즉,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지니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원리들이란,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아들과 성령의 참된 신성, 그리고 그 삼위간의 구별된 위격성의 원리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본적인 원리들을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확인해준다. 특히 워필드는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속에서의 증거들을 제시해주는데, 예를들면, 주님의 수태고지 사건이나(눅1:35; 마1:18), 예수님의 세례장면(마 3:16-17; 막1:10-11 등)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가르침들 속에서의 증거들로 나아간다.36)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들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구별되었다는 의식 속에서 아들로서, 그러면서도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하나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그와같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하나됨과 구별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워필드가 핵심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본문들이다.

워필드는 요한복음 10:30, 38 등과같은 본문들 속에서 발견되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하나됨의 증거들을 언급한다. 또한 요 8:58과 같이 성자의 영원성을 제시하는 구절들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의 연합성에 대한 요한복음의 증거들을 요약해준다. 그러나, 워필드는 이러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관계성은 거기에서 멈추지않고, 성령님과의 관계성에까지도 확장되고 있다고 지적한다.37) 특히 요한복음 14:16-26의 본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구별성과 하나됨에 대한 요한서신의 가르침을 요약해준다:

...... But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He shall teach you all things, and bring to your remembrance all that I said unto you.'(본문 속의 강조는 워필드의 강조임) It would be impossible to speak more distinctly of three who were yet one. The Father, Son, and Spirit are constantly distinguished from one another- the Son makes request of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response to this request gives an Advocate, "another" than the Son, who is sent in the Son's name. And yet the oneness of these three is so kept in sight that the coming of this "another Advocate" is spoken of without embarrassment as the coming of the Son Himself (vs.18,19,20,21), and indeed as the coming of the Father and the Son (ver.23).38)

워필드가 설명하는 삼위 간의 구별성과 하나됨의 원리는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떠나시고, 그 대신 성령님이 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구별성) 있으나, 동시에 성령님이 오실 때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또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성부께서 오신다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이(하나됨) 또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위격들 사이의 구별성이 인정되면서도, 동시에 그들 사이의 연합성이 존재하는, 다시 말하면 그 양자의 양립을 위한 여지가 삼위일체 교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성경의 계시적 증거는 하나님의 유일성(Unity)과 3위간의 위격적 구별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때에, 우리는 구별된 인격들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또한 더 깊은 근원적인 의미에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세 위격들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만나게된다는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은 성령도 하나님이신 것이다.39)

다음으로 삼위 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워필드의 또 다른 관심있는 주제는, 그들의 동등성과 종속적 성격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앞 부분에서의 워필드의 강조는 성부 만이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참되신 하나님으로서 인정하되, 그 삼위간의 하나됨과 위격적 구별성을 함께 제시하려함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의 논의의 초점은 “종속론”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성자 예수님을 “아들”로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가 “존재의 파생이나 종속”에 대한 암시를 받게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워필드는 성경의 어법을 주의해야한다고 하면서, “독생하신 하나님”(요1:18)과 같은 구절이 결코 파생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요5:18절과 같은 구절을 통하여 동등성이 확보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40)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령”이나 “여호와의 영”이라는 이름들도 파생이나 종속의 개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줄 뿐이라고 설명한다. 고전2:10-11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의 원리임을 말하고 있으며, 곧 그는 하나님의 존재의 가장 깊숙한 본질인 하나님 자신임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워필드는 신약성경에서 성자나 성령의 종속 혹은 파생의 의미를 제시하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결론내린다.41) 단지,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modes of operation)”에 있어서, 즉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삼위의 하나님 각각에게 부여된 기능들을 수행함에 있어서, 종속의 원리가 표현되고 있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The Father is first, the Son is second, and the Spirit is third, in the operations of God as revealed to us in general, and very especially in those operations by which redemption is accomplished.42)


워필드는 여기에서 삼위의 하나님 사이의 의논이였던, “(구속)언약”의 개념을 도입한다. 구속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에 있어서의 종속의 성격으로서, 즉 성부에 대한 성자의 종속, 성자에 대한 성령의 종속이란, 삼위 사이의 언약적 논의를 기초로 하여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삼위의 하나님 각자가 자발적으로 취해진 성격의 종속으로 이해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워필드는 성경에서 제시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의 사용례들이 구속역사 속에서의 “경륜적(economical)"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만 가능할 뿐 아니라, 그러한 용어들은 또한 영원하고 필연적 관계성에도 적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이 결코 성부와 성자가 그 존재방식에 있어서 첫째와 둘째라든지, 혹은 우월과 종속과 같은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43) 워필드의 결론은 신약의 어떠한 성구를 가지고서도, 우리는 성자나 성령의 종속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논문의 마지막 부분: 구원교리와 맞물려있는 삼위일체론

워필드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그 교리가 성경의 구원교리와 밀접히 연관되어있음을 지적해준다. 먼저, 삼위일체교리는 성경의 구원역사를 경험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경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구원역사의 과정 속에서 삼위의 하나님은 3중적인 신적 원인들로서 계시되었기 때문에, 그 구원을 경험한 모든 신자들의 의식 속에서 그 3위 하나님에 대한 반향이 자연스럽게 울려나게 된다는 것이다:


Every redeemed soul, knowing himself reconciled with God through His Son, and quickened into newness of life by His Spirit, turns alike to Father, Son, and Spirit with the exclamation of reverent gratitude upon his lips, "My Lord and my God!"44)

역으로 말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가 없다면, 신자는 자신의 영적 구원의 삶에 대하여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남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사역을 이루신 예수님, 그리고 그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삼위일체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안정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와같은 차원에서, 워필드는 F.E.Koenig의 글을 인용하면서, 삼위일체교리와 구원의 교리는 역사적으로 함께 서고 넘어진다고 주장한다.45) 그 점이 바로, 왜 기독교회가 역사적으로 분명하고 완숙한 삼위일체 교리에 도달하기까지 안식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답변이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에서 그는 자신의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개관해주었다.

우선 대표적인 사례로서, 유니테리안 신학을 들면서, 그들의 신학적 (일신교적) 오류는 그것이 펠라기안주의 인간론과 소시니안 구원론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밖에도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이단들을 지적해준다. 예를들면, 사벨리안주의나 아리안주의의 오류도 그것들이 신자의 구원경험의 내용들에 대해서나, 그리고 성경계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같은 타협되거나 왜곡된 설명들이 나타날 때마다, 신자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계시내용들을 다시 검토하게 되었고, 완숙한 삼위일체교리가 제시될 때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워필드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삼위일체론 논의들, 즉 로고스 기독론이나 양태론적 군주론(Monarchianism)과 같은 오류들에 대한 정통신학자들의 반응들, 즉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 칼빈의 신학적 시도들에 대해서 간략히 개관해준다. 그러나, 워필드의 관심은 단지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를 연구하려함에 있다기 보다는, 그러한 신학적 시도들 속에서 기독교회와 신자들은 그 교리가 성경의 계시내용의 자료들과 자신들의 구원경험에 충실한 내용으로 세워지도록 노력함으로서, 완숙한 삼위일체교리에 이르려 하였었다는 사실을 말하려한 것이다.


III. 결론: Warfield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주된 강조점)들

서론에서도 지적했었듯이, 워필드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의는 자신의 포괄적인 조직신학서의 체계적 논의들 속에서 그 일부로서 제시되는 교리적 진술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 C.Hodge의 조직신학서를 전체적인 조직신학의 틀로서 전제하고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논문에서 워필드는 기존의 삼위일체론 논의들을 모두 반복하려하지 않았다.(물론, 그 교리의 중심적인 내용들이 중복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46) 그렇다면, 자신의 논문에서 그가 주로 주장하려 하였던 특징적인 강조점들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내용들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강조점은 그의 논문의 첫 번째 부분에서 주장되었던 내용으로서,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의 계시적 진리임을 강조한 사실에서 찾아진다. 그러한 강조를 통해서, 변증학자였던 워필드는 당시의 자유주의의 내재적 신학에 대한 정통개혁신학의 비판과 변증을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삼위일체 교리의 내용은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과 같이, 인간의 자연이성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초월적인 계시말씀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47)

그와같은 강조점은 곧 그의 논문의 두 번째 주된 강조점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워필드가 삼위일체론을 구원론과 직결된 교리임을 강조한 사실을 가리킨다.48) 그 점은 그의 논문의 두 번째 부분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구속역사 속에서 주어진 ‘행위계시’에 기초한 교리”임을 말하는 대목에서 그 점을 제시하였다. 삼위일체 교리가 인간의 고안이나 다른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행위계시”에 기초하여 주어진 진리이라면, 그 계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성취를 위해 주어졌던 행위계시의 필연적인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49)

삼위일체 교리란 구속역사의 과정 속에서 인류의 구원사역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더욱 온전히 계시하신 하나님의 “행위계시”를 통하여 제시된 교리이므로, 그것은 신자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바로 만나며 자신의 구원 경험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교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지적은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다시 반복된다. 신자의 구원경험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3중적인 원인들로서 역사하시고 계시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신자가 자신의 구원경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하는 틀을 제공해준다고 지적했다.50)

이와같은 워필드의 강조점들은 결국 삼위일체 교리를 더욱 실천적인 교리로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 즉, 삼위일체 교리란 신학자들이 단지 책상 위에서의 이론적인 토의 만으로 제시되는 어떤 사변적인 가르침인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신자의 삶과 구원경험과 밀접히 연결되는 “구원적” 진리임을 드러내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워필드가 자신의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위일체 교리와 구원의 교리는 함께 서고 넘어진다”라고 말했던 것은, 교회사적으로도 삼위일체 교리가 완숙한 표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회가 안정할 수 없었다는 의미에서도 이해될 수 있으나, 좀 더 근본적으로 그것은 신자 개인의 영적 경험의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는 지적인 것이다. 구원의 경험을 소유한 신자의 마음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사역을 이루신 예수님, 그리고 그러한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을 말해주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 안에서 안식을 얻게되기 까지는 혼돈에 빠지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워필드는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바로 이해하며, 신자의 구원경험을 바로 해석함에 있어서 필수적인 교리임을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소위 “본체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와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에 관한 워필드의 관점을 지적해볼 수 있겠다. 물론, 워필드가 그러한 용어들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의 설명들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개념들이 어느 정도는 표출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예를들어, 경륜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삼위일체 교리가 계시적 진리임을 말하는 대목에서, 그 교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성령님의 강림하심이라는 “행위계시”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수납된 교리임을 말할 때, 이미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51)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개념은, 삼위 하나님 사이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설명하는 문맥 속에서,52)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사용이 구속역사의 경륜적 관계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영원하고 필연적인 관계성 속에서도 적용되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가 바로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하고있음을 보게된다.

물론 워필드는 이 주제에 대한 현대적인 논의의 상황이 전개되기 전에 논문을 정리하였으므로, 그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하고있지는 않다. 그러나, 논문의 전체적인 구조 속에서 분석해볼 때,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구속의 과정 속에서 주어진 예수님의 성육신, 성령님의 강림과 같은 행위계시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주어졌음을 지적하였고(경륜적 삼위일체), 다음으로 3위간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들 속에서 성경본문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삼위간의 영원한 하나됨이나 동등성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본체론적 삼위일체)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워필드의 논문 속에서는 그렇게 충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필드의 관점은 -그리고 그의 논문들 속의 어떠한 내용들도- 적어도 현대의 논의들 중에서 본체론적 삼위일체 자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그것이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들을 거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출처] B.B.Warfield의 삼위일체론 연구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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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3:13~15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여호와시다

 

여호와의 증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성부만이 여호와라고 주장한다.
여호와는 성부에게 해당한다는 여호와의 증인의 말과는 달리
성경을 보자면 여호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모두에게 해당된다.

 

여호와라는 내용이 나오는 성경

출3:13-15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여호와증인이 하루는 우리 집에 찾아와서 말하고 싶지않으니 가라고 해도 끈질기게 늘어져서 그러면 여호와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나오냐고 나는 물었다.

그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하면서 신세계역을 피는데 그들의 책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신약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는 안나오고 의미만 나온다고 말했다. .......

 성장와 성령이  여호와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대주면 당신의 진리가 그릇되다는 것을 받아들이겠냐고 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구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고 신약에는 안나오는데 그 여호와라는 단어가 주라는 단어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말했다. 성경을 보자.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마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해석: 여기서(마3:3) 주는 예수님을 가르키고 구약 사40:3에는 여호와라고 기록되었다. 다시말해서 주의 길은 여호와의 길과 같은 것이고 여호와는 예수님(성자)이다라고 나는 그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또 성경구절을 찾아보자고 했다.
욜2:28-32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2: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2: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요엘서 2:32절에 나오는 여호와가 예수님이라고 하며 그 증거로 사도행전2:16-21절을 찾아주었다.

 

행2:16-21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요엘서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는데 사도행전2:21절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다. 여기서 요엘서에 여호와라고 표현된 사도행전의 주가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라고 나는 이야기했다.  

행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행2:21절의 주를 예수님이라고 36절은 말하고 있다.

러므로 예수님은 여호와시다라고 여호와의 증인에게 이야기했다. 이제 성령이 여호와인 것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사6:1-10 사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아도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야흐웨? 체바오트)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내가 또 주(아도나이)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6장 1절과 8절에서 나오는 아도나이여호와로 묘사되며 8절에서는 아도나이께서는 내가= 우리 로 묘사된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말하고 있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6:9 여호와께서(-->원문:그가) 가라사대 (너는)가서 이 백성에게 (너는)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9절에 나오는 “그가”는 문맥상 아도나이며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라고 한글성경이 표현해도 옳은 것이다. 이 그가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가 신약에는 무어라고 되어있느냐가 중요하다.

 행28:25-27

28: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디아 --통하여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사6:9의 “그가 한글성경은 여호와께서” 가 행28:25절에는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통하여)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6:9절의 그가(여호와)라는 단어는 행28:25절의 성령과 같으므로 성령이 여호와이다라고 나는 말했다.

 

(행 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기본형: 프슈도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아니고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기본형: 프슈도

성령께 거짓말하는 것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을 동일시 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성부가 여호와 이시고 성자가 여호와 이시고 성령이 여호와이시다.

 

요약

[성자가 여호와]

사40:3 여호와의 길---> 마3:3 주의 길

욜2:28-32 여호와의 이름---> 행2:16-21 주의 이름

36절 예수 =주와 그리스도

 

[성령이 여호와]

사6:9-10 ---> 행28:25-27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9 여호와께서(-->원문:그가) 가라사대 (너는)가서

행5:3절 성령을 속이고 = 행5:4절 하나님께 거짓말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lamad님 http://cafe463.daum.net/_c21_/bbs_read?grpid=1QfVM&fldid=D0VS&contentval=0007J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453&regdt=2012100922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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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재탕입니다.(전에,여기'아멘넷'에 올렸던 글입니다)
독자들께는 좀 송구스럽습니다(재탕이라서).
그렇지만, 이미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저의 '아래' 글을 읽고서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올리는 이유는, '리마인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복적인 교육을 쇄뇌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써먹는 숫법이지요.
하지만, 성경은 벌써 수천년 전부터 '반복적 학습효과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자기백성 가르침의 방식'이었음을
성경은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다시 올립니다.
해량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혜자 올림


"식은 밥도 데워 먹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 하잖아요?
해서, 예전에 어느 카페에 올린 글 옮겨와 봅니다.

<신학 단상-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단에 대한 반동으로
정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이후 역사적 이단(교회사에 드러난 이단)의
그릇된 신관에 대한 대응으로
이 교리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이단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단일신론과 양태론입니다

단일신론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강조키 위해 나타난 이단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어야 하기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
아닌 종속적 위치에 두고자 했습니다

양태론은 구약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의 격위를 구분짓지 않음에서 나온 이단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승천하여 다시 성령으로 오셨다는 말이지요

혹자는 삼위일체 교리가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합니다
그냥 성경대로 믿으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세우신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에게 별 유익이 없을까요?

초대교회, 사도후 교부시대,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들의 거짓 교훈은 하나님의 진리를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코자 했으며 인성도 부인코자 했습니다

삼위 간의 격위를 인정치 않음으로 해서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과
성령님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부인코자 했습니다
단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여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미명 아래서 말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들어온 이리들의 거짓된 가르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바른 교리를 주셔서 주님의 양떼를 지키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격위를 구분하면서도
한 분 하나님임을 믿을 수 있는 진리 체계가 세워지도록 하셨습니다

각각의 신격이 셋인데 어떻게 한 분이냐고 항변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계시와 성령의 조명 아래서 이성은 입을 다물어야 마땅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믿음이 이성을 사로잡기에 이성이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성자와 성령의 격위를 허무는 그릇된 가르침을 펴는 자들이 있습니다
심히 우려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성령으로 오셨다는 가르침이지요
그들이 구약의 야웨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 말하지 않을 뿐,
이미 그들의 말은 그것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한 축이 무너지면 전부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작수발-작대기 세 개를 걸쳐세워 그 위에 무엇을 얹거나
걸고자 하는 작대기-은 하나를 빼면 쓰러집니다)

어떤이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이해는 안 되지만 믿는다 하면서
이상한 예를 들기도 합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수증기도 되듯이 삼위일체는 그런 것이다'
'태양은 태양 자체가 있고 열이 있고 빛이 있듯이 삼위일체도...'
'집에서는 아버지고 학교에서는 선생이고 교회에서는 집사고...'

잘 가르치려고 해서 그렇게 하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전부 양태론적입니다
개미가 인간을 모르듯이 인간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알아지는 것이 이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성경말씀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기록하신 원저자이신 성령의 조명없이는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한 기록인 성경에서
이끌어 낸 교리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간섭과 도움없이
인간이 스스로 만든 교리 체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의 역사성을 인정하듯이
교리도 교회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서 나온
역사적 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유명하다는 이들이(난 그들이 하나님께서도
유명하다고 인정하시는지는 모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피흘려 세운 진리 체계를 그렇게 쉽게
부인하는 것에 분노와 서글픔을 느낍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
삼 위로 계시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누구뇨?
아들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아니뇨!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누구뇨?
아들이 다시 성령으로 오셨다고 하는 자들이 아니뇨!

성경을 교묘하게 왜곡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이 있을진저!

*십수 년 전에 정리한 글을 몇 년 전에
어느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부영학적(富養學的) 견해가 난무하는 이 즈음에...

*추가로 옮겨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언어(말과 글)란 의사전달의 수단이기에 단어 자체의 어원적 의미에
치중하다 보면 본의를 놓치기 쉽습니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그 단어를 채용하여 문장을 통해 의미를 드려내려고 하는가
하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적에도 문장 속의 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추
적하는데 너무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장 속의 어떤 단어의 개념(concept)은 그 문장이 정합니다
문장의 의미를 알면 어떤 단어에 대한
개념이 드러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똑 같은 단어라도 문장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단어를 연결해서 의미를 드러내려는
관주읽기식의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느냐 하면
삼위일체가 가지는 한문의 어의(語意)가
자칫 우리의 사고의 폭을 제한할 수도 있겠기에 말입니다

직역하면 '세 자리 한 몸'입니다
세 분이 한 몸으로 계신다는 의미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셋 한 분'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 격위(Persona-페르소나)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으로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세 격위로 계신 분이 '한 분'이냐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격위를 가지고 계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강조하다 보니 '삼신론'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 교계에서도 삼신론 논쟁이 전에 더러 있었습니다)

셋이 한 분이다!
이해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해하려고 들지말고 그냥 믿으라! 고 합니다
믿으면 그냥 이해가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한 분 하나님으로 받아들일 때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 격위로 계시는 하나님이 '한 분'이다 할 때는
이성으로서는 한계를 느낍니다(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니까요)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한 분'이라 할 때 '한'입니다
'한'을 수의 개념으로 대부분 접근을 합니다
우리가 숫자에 익숙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물방울 셋을 합치도 하나 이다!'
'셋을 합해도 넘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하나 이다!'등등...
여러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다 한계가 있는 설명들입니다

이'한 분'이라는 말은 '오로지'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 격위로 계시는 하나님 외는 달리 하나님이 없다!
이것이 강조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이 성부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 데,
그렇게 계시는 하나님 외는 달리 하나님은 없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하나님이십니다
격위로서 구별이 됩니다 인격(신격)으로도 구별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입니다 본질이 같고 속성이 같습니다
세 격위가 동등한 하나님이십니다
똑 같은 하나님이란 말씀이지요

셋으로 계시되 하,나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하나'는 수의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같다'라는 의미 곧 동질이라는 의미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두 객체가 있는데 '하나'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뜻과 목적을 가진 자들이 모여서 구호를 외칠 때
'우리는 하나다'라고 하는 것에서 조금 도움을 받을 수 있을런지....

아무튼 셋이 한 분 하나님이란 말에서
한 분이라는 말에 걸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끄시면 전혀 그 '한 분'이라는 말이 걸림이 되지 않습니다

수(數)나 양(量)의 개념이 아니라 질의 개념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출처: USA 아멘넷/ 지혜자 목사님

질문: 삼위일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대답: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이 가장 난해한 것은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사람도 온전히 이해하여 설명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인간보다 훨씬 무한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늘의 아버지도 하나님, 예수님도 하나님, 성령님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하나님은 단 한 분이시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내의 서로 다른 세 인격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삼위일체가 진실이 아니라거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세요. 이 용어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세 분이 공존하시고, 함께 영원한 존재로서 한 분의 하나님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서술할 때 쓰였습니다. 기억해야 될 것은 세 명의 하나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유일한 하나님이 세 인격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지만, 이 용어 사용은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공존하시는 세 인격체로 구성된 한 분의 하나님”보다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니까요.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할아버지라는 단어도 성경에 쓰이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할아버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압니다. 아브라함은 야곱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로 표현된 개념이 성경에 나와 있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럼 몇 성경 구절을 살펴 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 나가 봅니다.

1. 오직 단 한 분의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신명기 6:4; 고린도전서 8:4; 갈라디아서 3:20; 디모데전서 2:5).

2. 삼위일체는 세 인격으로 구성됩니다 (창세기 1:1, 26; 3:22; 11:7; 이사야 6:8; 48:16; 61:1; 마태복음 3:16-17; 28:19; 고린도후서 13:14). 구약의 구절에 있는 히브리어를 이해하면 도움이 됩니다. 창세기 1:1에는 복수 명사 “엘로힘”이 쓰였습니다. 창세기 1:26; 3:22; 11:7그리고 이사야 6:8에는 복수 “우리”가 사용되었습니다. “엘로힘”과 “우리”는 의심할 것도 없이 둘 이상을 가르킵니다. 영어는 오직 두 가지 형태, 단수와 복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쌍은 2개 만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는 세 형태가 있습니다. 즉 단수, 쌍, 그리고 복수입니다. 히브리어의 쌍은 눈, 귀, 그리고 손과 같이 쌍을 가진 것에만 사용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엘로힘”과 “우리”라는 단어는 복수로서 둘 보다 많은 즉 셋 이상이 되어져야 합니다 (천부, 아들, 성령).

이사야 48:16 과 61:1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언급합니다. 이사야 61:1을 누가복음 4:14-19과 비교하여 보세요. 마태복음 3:16-17은 예수의 세례 사건을 서술합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천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기뻐하신다고 할 때, 성령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9 와 고린도후서 13:14은 삼위일체 가운데 구별되는 세 인격체를 말하는 예가 됩니다.

3. 또 다른 많은 구절들도 삼위일체의 세 인격을 구별합니다. 구약에서 “주 (LORD)” 는 “주 (Lord)” 와 구별됩니다 (창세기 19:24; 호세아 1:4). 전자의 주는 “아들”을 소유합니다 (시편 2:7, 12; 잠언 30:2-4). 영도 또한 “주 (LORD, 민수기 27:18)” 와 “하나님 (God, 시편 51: 10-12)” 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성자 예수님도 천부 아버지 (시편45:6-7; 히브리서 1:8-9)와 구별됩니다. 신약 요한복음 14:16-17에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하나님 아버지를 따로 언급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나 성령님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따로 언급한 또 다른 구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삼위일체 가운데 계시는 다른 인격체-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하셨습니다.

4. 삼위일체의 각 인격체는 하나님 되십니다 (요한복음 6:27; 로마서 1:7; 베드로전서 1:2). 아들도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 14; 로마서 9:5; 골로새서 2:9; 히브리서 1:8; 요한일서 5:20).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5:3-4; 고린도전서 3:16).

5. 삼위일체 내 상호 종속, 의존: 성경에서 보여지듯이 성령은 아버지께 속하고, 그리고 아들도 아버지께 속합니다. 이 삼위일체 내의 관계는 각 인격의 독립된 신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의 유한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하심입니다. 아들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22:42; 요한복음 5;36; 20:21; 요한일서 4:14, 그리고 성령에 관하여는 요한복음 14:16; 14:26; 15:26; 16:7 그리고 특히 요한복음 16:13-14을 보세요.

6. 삼위일체 각 인격체의 역할: 하나님 아버지는 이하 열거한 일들의 궁극적인 자원 혹은 원천이 되십니다. 가) 우주 (고린도전서 8:6; 요한계시록 4:11); 나) 계시 (요한계시록 1:1); 3) 구원 (요한복음 3:16-17); 4)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과업 (요한복음 5:17; 14:10).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개시하셨습니다.

아들을 통하여서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 창조와 우주 경영 (고린도전서 8:6; 요한복음1:3; 골로새서 1:16-17). 나) 계시 (요한복음 1:1, 16:12-15; 마태복음 11:27; 요한계시록 1:1). 다) 구원 (고린도후서 5:19; 마태복음 1:21; 요한복음 4:42). 아버지는 이 모든 일들을 그의 매개체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또 성령을 통하여는 이런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가) 천지창조와 우주 경영 (창세기 1:2; 욥 26:13; 시편 104:30). 나) 계시 (요한복음 16:12-15; 에베소서 3:5; 베드로후서 1:21). 다) 구원 (요한복음 3:6; 디도서 3:5; 베드로전서 1:2). 라) 예수님의 업적 (이사야 61:1; 사도행전 10:38). 이렇게 아버지께서 이 모든 일들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해내셨습니다.

사실 어떤 뛰어난 묘사도 삼위일체를 적당히 표현해 내기 힘듭니다. 달걀을 예로 들자면, 달걀 껍질, 흰자, 노란자는 달걀의 부분들이지 달걀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의 한 부분들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또 물로 설명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지만, 그래도 삼위일체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물, 증기, 얼음은 물의 다른 형체일 뿐이지만, 아버지, 아들, 성령님은 하나님의 단지 다른 형체가 아니라, 각각 하나님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 모든 비유가 삼위일체의 모양을 보여줄 수 있지만, 전적으로 합당하지는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유한한 비유로 온전히 묘사될 수 있겠습니까?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한하게 높으신 사실에 초점을 두도록 합니다.” (로마서 11:33-34)

What does the Bible teach about the Trinity?
http://www.gotquestions.org/Trinity-Bible.html



"The term "Godhead" is found three times in the King James Version: Acts 17:29; Romans 1:20; Colossians 2:9. Three different Greek words are used, but each one means “divinity.” It is important for us to understand from the outset that God exists in three Persons. The concept of the Godhead is that God is one yet God is three. How can this be?"

흠정역의 신격(Godhead)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What is the Godhead?"
http://www.gotquestions.org/Godhead.html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 JuNick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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