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유일한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과 '성전됨'의 관련성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지녔다 함은, '본체(substance)'인 하나님을 찾아 모시려는 속성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고 한 말은, '형상(image)' 인간이, '본체(substance)' 하나님을 찾아 모시려는 마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아덴(Athens)의 수많은 제단들을 본 후에 한 '아레오바고(the Areopagus) 강설'에서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행 17:22)"고 한 것은, 단지 아덴인들(Athenians)의 종교성에 국한지어 말한 것이 아니라 '본체(하나님)'을 찾아 모시려는 '형상(인간)'의 본성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는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오직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인간 내면의 한 공간"을 의미합니다.


'본체(substance)' 하나님 역시 그의 '형상(image, 창 1:27)' 인간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려는 본성을 가졌습니다. '형상(인간)'이 집에 해당한다면, '본체(하나님)'는 그 집의 거주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사 8:8)이라는 사실 역시, 인간의 하나님 성전 됨을 시사합니다. 아담이 범죄 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자,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며 찾으신 것은, 하나님의 임마누엘 갈망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 삼을 인간이 죄로 하나님을 떠났으니, 애착을 갖고 찾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는 말씀은 '본체(하나님)'가 머물 '형상(인간)'을 찾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행 17:24)"라는 솔로몬의 고백 역시, 하나님을 모실 성전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그의 '형상(image)' 인간임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 오순절 성령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문도들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성전으로 삼았다는 확증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3-4)." 초림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은 인간으로 오셨기에, 말구유라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했지만,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영적 성전인 성도가 필요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천국엔 성전이 없고,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고 한 것도 성전의 비공간성을 말한 것입니다.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이 천국에선 어린 양을 당신의 성전 삼으셨고, 땅에선 성도를 당신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구약의 공간 성전은 송아지의 피가 뿌려졌을 때만 일시적으로 임하시는, '간헐적 방문(intermittent visit)' 장소였고, 한 번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 '지속적인 임재(continued presence)'가 이루어지는, 인간 성전(a human temple)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리스도 이후에는 성전 파괴를 통해, 물리적인 공간 성전은 실체가 도래하기까지 한시적으로 경륜됐던 그림자였으며,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은 성도만이 유일한 성전임을 확증해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벧전 1:2)"라고 한 것은 "구원 택정을 입은 자" 라는 뜻과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둘째, 인간 성전이 진정한 성전임은, 영접이 있는(요 1:12) 성전의 인격성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합 2:20)"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은 어디든 성전이지만, 영접이 있는 인간 성전(a human temple)만이 진정한 성전입니다. 노크(knocking)로 허락받아 들어가는 하나님의 겸손한 태도 역시, 영접하는 인간 성전만큼이나 인격적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처럼 '노크(knocking)'와 '영접(receiving)'이 있는, 인간 성전(a human temple)은 인격자 하나님이 머무실 만한 유일한 성전입니다.


셋째, 구원이 성전 개념을 함의합니다. 얼핏 구원과 성전이 무관해 보이나, 둘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 버림받았다"는 말은 사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두 이름, '예수(마1:21)'와 '임마누엘(마 1:23)'은, '구원'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이며, 둘을 연결지으면 "하나님이 구원하여 함께 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당신과 분리됐던 인간들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구원의 결과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반면 심판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예수님이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요 3:18)"고 하신 것은, 믿지 않으므로 이미 "하나님과의 분리" 심판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저주는 질병이나 가난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 된 채,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지옥 멸망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영원히 떠나는 것(살후 1:9)"입니다.


끝으로 인간 성전(a human temple)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주 방식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인간 성전은 벽돌로 된 구약 성전과는 달리, 하나님이 성전과 분리된 채 모셔지지 않고, 인간 성전과의 연합 속에서 모셔집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분리되지 않는 영원한 연합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연합은 서로 섞이거나 둘의 개체성이 약화, 소멸되지도 않습니다.


이는 인간과 섞이거나 인간의 죄에 오염되지 않는, 나 밖의(out of me) "전가(imputatio)된 의(義)" 개념과 일치하며,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죄성에 오염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자신 안에 거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의의 주입(infusio of righteousness) 교리를 믿는 로마천주교인들이 죄인 안에 주입된 하나님 의가 죄로 손상 받을 수 있다고 믿듯이, 하나님이 성도 안에 들어오면 인간의 죄성에 오염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려면, 소수의 성자 반열에 든 사람들처럼 하나님이 그에게 들어가도 하나님을 오염시키지 않을 만큼 완전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불특정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8007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멜기세덱

(qd<x,AyKil]m',  Melcisedevk , Melchisedec) 의의 왕

 

아브함 시대의 예루살렘 제사장(창 14:18). 후대에 이상적인 왕의 전형이 되어 이러한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 사장"이라고 칭하게 되었다(시 110:4). 히브리서에서 그의 특이한 지위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히 5:6-10, 7:).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1)
                                                  
<자료 1>

멜기세덱과 그의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은 창세기 14:18-20에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전장을 이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왕이란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부모가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다 하였다(7:2-3).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은 역사적 인물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나? 또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면 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비교하고 있는가? 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먼저 역사적 인물로서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중간 청동기 시대로서 B.C. 1500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돌라 오멜 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왕을 사로잡고 거기서 살았던 롯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의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동맹군을 격파해 롯을 구하고 탈취 당했던 물건과 많은 노략물을 얻어 돌아온다(창 14:1-16). 그러나 거기서 중심 인물은 그돌라 오멜 왕에게서 회복을 바랐던 소돔 왕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은 제사장 왕으로서 아브라함에게서 1/10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디의 누구였는가? 멜기세덱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거나 정의롭다는 뜻으로 합법적인 왕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으나, 의의 왕이란 해석이 적합하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도 멜기세덱을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 불렀다. 이 의의 왕이란 말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살렘이란 말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완성하다, 다 지불하다는 뜻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평화란 뜻이 옳다. 그러므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나 랍비들 그리고 조세프스는 시편 76:2을 따라 살렘을 시온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덱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다.
  
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아브라함이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서 선물을 받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해석된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한 손님을 맞이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살렘은 그리심 산과 동일시되며 이곳에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다스리며 사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창세기 14:18의 칠십인 역을 지지한다.1)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 사건 후에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이 생겼고 이들이 아론 제사장 계열과 합치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독과 멜기세덱은 같은 어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주의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제사장 왕들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B.C. 164ㅡ 63)고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사두개 파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견해는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멜기세덱은 천사장 전사로 나타난다.2)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정종이 분리되기 이전의 신정 정치체제에서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 그의 사역자(제사장)까지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역사성에 보다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멜기세덱을 소개하고 있다. 그를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며 출생과 부모와 족보가 없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에 적합한 분임을 지적하였다. 모세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도 레위 계통의 아론보다 더 근원적이시며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사실에서 레위의 제사장직을 초월하신다.

   1.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더 넓힌다면 레위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2. 그는 그보다 열등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3. 그는 레위같이 죽을 인간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히 사신다.3)

이렇게 하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다스리시며 평화를 구축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사 9:5-6; 32:17; 렘 23:5-6; 33:15; 단 9:24; 슥 9:1-10; 말 4:22).4)

   주
   1. George W. Buchanan, To the Hebrews(New York: Doubleday, 1972).  p.117
   2.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for the New Testament,  p.104
   3. George W. Buchanan, Op,cit., p.122
   4. Ibid.,
http://www.revdavidsuh.com/

 

<자료 2>

창세기 14: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나타나 제사장의 직능으로 떡과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써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다.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과 왕의 두 직능을 한 몸에 겸비한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자로 되고, 따라서 이상적 왕자는 `멜기세덱과 같은 자'라고 칭함을 받았다(시 110:4).

이것은 히브리서 5:6, 7에 있어서 그리스도에의 적용에 대성(大成)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엘람 왕˙고임 왕˙시날 왕˙엘라살 왕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했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정병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다메섹 좌편 호바에서 롯과 부녀, 그리고 재물을 다 찾았다. 돌아올 때 소돔 왕이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상술한 바와 같이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줌으로써 십일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멜기세덱에 대해 보는 관점이 많고 구구하지만, 히브리서 7:1- 17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는 영원한 제사장(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

 

그의 제사장직은 조계(祖系)를 전연 가지지 않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대제사장직과 유사하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탄생 2,000년 전에 이미 멜기세덱이란 인물로 예표되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히브리서 7:4, 7, 특히 7절에 "폐일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리만큼 영전이 컸다. 즉,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창 12:3).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점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증표다.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축복을 암시한다(마 26:26- 29).
     

그리고 `살렘'은 예루살렘일 것이다. 그 이유로써,

ⓧ 살렘은 이스라엘 사람의 가나안정복 전부터 예루살렘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 시편 76:2에서 살렘은 예루살렘(평화의 성읍, 평화의 소유란 뜻)의 단축형으로써 쓰이고있다. ⓩ 만일 멜기세덱이 다윗처럼 같은 이 도성의 왕이라면 시편 110:4에서 다윗의 주가 멜기세덱과 대비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①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호바와 다메섹에서 귀환하는 도상에 있었다는 것(창 14:15, 17, 18) 등의점을 들 수 있다.

http://cafe.daum.net/LoveBibleLove/DRaT/

 

<자료 3>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기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율법적인 대제사장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1) 멜기세댁이란 이름에 담겨진 메시야적인 의미
멜기세댁이란 이름에는 메시야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의의 왕인 것처럼 사3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장차 의로 통치할 왕’이란 그리스도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유대인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이란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예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은 가졌지만 그 분의 위치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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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지명| 원글보기

교회를 슬프게 하는 신학논리"

 

-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

    나용화 목사(전 개신대학원대학교총장)

              

1. 한국교회의 신학적 비극

 

기독교 세계화를 선도하고자 하는 한 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총장인 분이 말하기를,

“신학교와 신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 성장은 멈추고 오히려 교회가 죽어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 분의 대학교는 생명신학을 주제로 논문발표를 매년 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신학은 신앙의 종으로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학문으로서,

교회를 살리고 부흥시켜야 한다.

교회를 부흥하지 못하게 하는 신학은 이론상으로는 건전하게 보일지라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학교 교수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 목회 경험이 없고 목회를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집중적인 기도와 성령의 은사 체험이 없고,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의학을 전공하는 의학자들은 의료 현장과 의학 강의실을 연계하여

의료 현장의 자료들을 가지고 의학 이론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질병을 예방하며 제거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이에 반하여, 신학자들은 목회 현장과 신학 강의실을 연계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제도적으로 신학교 교수들에게 목회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보수 정통 신학을 자랑하는 한 신학대학교에서 10여 년간 교수를 하다가

목회를 하게 된 한 목사가 어떤 신학회에서 개회 설교를 하는 가운데,

말씀 묵상과 기도하는 일에 매일 세 시간을 바치라고

신학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목회 현장을 모르고 한 신학 교수 사역은

생명과 능력이 없는 공허한 이론으로서 교회를 죽이는 신학을 가르칠 뿐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의 성장과 부흥이 멈춘 이유 중의 중요한 것이

바로 이론에 치우친 신학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학 교수가 아니라 목회자 곧 목사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목사이다. 내가 신학을 하는 것은 더 좋은 목사가 되고,

목회를 더 잘 하기 위해서이다”

 

고 했다. 그가 신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데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가지고 성령으로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여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튼튼하게 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성경을 가지고,

진리와 계시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고

또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계시하고 있으며,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적 은사들(예: 신유, 방언, 축사 등)이 나타나게 하고 계신다.

 

한국의 보수 정통 신학을 자랑하는 신학대학교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가지고 성령으로 지금도 계시하고 계신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8장 8항; 대요리 43문답; 소요리 24문답)

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계시종결론만을 주장한다.

 

그리고 은사중지론 즉 성령의 계시적 은사(예언)와 방언의 은사 및

신유와 축사의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로는 중지되었다고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을 가지고 이단 시비를 하여

이단 아닌 이단을 만들어 정죄한다. 한국교회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2. 배척되어야 할 계시종결론

 

기독교는 우상숭배의 이방종교와는 달리 말씀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결코 변명할 수 없게 인간의 본성과 자연계와 섭리를 통해서

항상 계시하고 있다(롬 1:19-20; 시 19:1-6; 참고,

칼빈, 「기독교강요」 1권 5장 1-3, 8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1항).

 

이 일반계시는 그 자체로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주기에 불충분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말씀계시를 안경과 같은 방편으로 마련해 주신 것이다(「기독교강요」 1권 6장 1,3절).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이후로는 계시가 종결되었다고 한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시요(요 1:1, 18; 20:28)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 무오 절대적 권위의 계시이시므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조명 사역만 있고 계시 행위가 아예 없으며,

따라서 계시의 중요한 수단들인 꿈, 환상, 음성, 이적(방언, 축사, 치유 등)이 필요없게 되어

이제는 중지 되었다고 강조한다.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말하는 바 성령의 조명이란 성경의 진리성

곧,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

(참고, 벌코프,「조직신학」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196)일 뿐 아니라,

성경에 말씀으로 계시되어 있는 바 모든 구원의 진리들을 깨닫게 하는 사역이다

(칼빈, 「기독교강요」 1권 7장 4절; 1권 9장 3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5,6).

 

이로 보건대, 성령의 조명 사역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들을 깨닫게 하는 바 계시 행위인 것이다.

 

성령의 조명 사역이 계시 행위라는 사실은 첫째, 성경이 밝히 말한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18),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영원히 계셔 예수님을 증거하여 알게 하시며

그의 말씀들을 깨닫게 하신다(요 14:16-17,26; 15:26; 16:13).

 

둘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 성령의 조명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이 밝히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0-13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참고, 요 16:13; 엡 1:7), 성령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믿게 한다

(참고, 고전 12:3).

 

셋째,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이 밝히 말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선지자로서 사도들과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가지고 계시와 진리의 성령으로 계시 사역을 항상 하고 계신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8장 8항; 대요리 43; 소요리 24문답; 참고,

벌코프, 「조직신학」하, p.596).

 

넷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공적 사역에서 항상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계시하신 사실(참고, 눅 4:16-21; 24:13-35)과,

사도들도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계시 활동을 한 사실 (행 2:14-36; 28:23-31)이 밝히 말한다.

 

다섯째, 일반계시가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 밝히 말한다.

일반계시가 구원의 비밀을 알리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안경 노릇할 특별계시가 늘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참고, 시 19편).

 

여섯째, 예수님이 항상 살아계시고(히 13:8; 계 1:18), 성경도 항상 있고

살아 있다는 사실 (벧전 1:23)과, 성경의 각 책이 본래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기에

교회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인되었다는 사실이 계시 종결론을 배척한다.

 

이로 보건대, 계시종결론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지직 뿐 아니라

성령의 계시 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성령의 역동적인 계시 활동을 제한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이는 것이다.

 

3. 비성경적 반목회적 은사중지론

 

계시종결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계시의 으뜸가는 목적(end)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다.

물론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으뜸가는 목적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말세에 사람의 몸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시어

자신을 나타내셨을 뿐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하고 충만하게 계시함으로

계시의 목적이 성취되었고(참고, 요 1:18; 히 1:2),

사도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였으며,

그 계시들이 성경에 충분하게 기록되어 (계 22:18-19)

계시의 과정이 종결됨으로써 더 이상의 특별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 계시를 위한 수단(신현, 예언, 이적)도 필요 없게 되어 중지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신학자들의 주장은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에서 가르쳐진 바,

성경의 절대필요성과 충분성과 성령의 내적 증거(조명) 등에 근거하되,

1장 1항에 언급된 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는 진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우선 계시의 목적(end)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처음부터 종결(end)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1항의 “과거의 방식들이 이제 중단되었다”는

말을 계시의 수단의 중단으로 주장한다.

 

편, 이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자연계 그리고 섭리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계시하는 것(일반계시의 지속성)을 인정하는가 하면,

성령님께서 성경을 가지고 구원의 비밀을 개닫게 하는 바 조명 사역을 인정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1항에서 진술하는 바 중단된 것은

계시의 수단들(means)인 신현(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련된 꿈, 환상, 음성)과

예언(하나님의 말씀 맡음)과 이적(치유, 축사, 방언)등이 아니고,

8장 6항에 진술되어 있는 바 구약에서 사용된 방식(ways)

곧, 약속과 예표와 희생제사 등이다 (참고, 히 1:1; 8:5; 9:1, 9-10, 23-24; 10:1,8).

 

사도행전 2장에 인용된 요엘서 2:28-32에 의하면 마지막 날들

곧, 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말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언과 환상과 꿈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많은 이적과 표적들을 행하시게 되어 있다.

 

이 예언은 사도행전에서 종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이르러서야 완결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8장 8항과 대요리 43-45문답과

소요리 24-26문답 등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이 성취한 구속을 성도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시고 중보 기도하시며,

 

대선지자로서는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비밀들을

여러 가지의 시행 방법으로 계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고,

대왕으로서 모든 원수 마귀들을 물리치신다.

 

예수님께서 계시의 성령을 통하여 계시해 주지 않으면 어느 시대나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예배할 수도 없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 11:27; 고전 2:10-13).

 

계시가 없으면 사람들이 방자하게 되고 결국은 멸망 한다(잠 29:18).

 

이로 보건대, 성경을 가지고 계시와 진리의 성령을 통해 선지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는 일은

사실상 주님의 재림 때까지 지속되어 마땅하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성령의 계시 사역을 자세하게 말하는가 하면

(고전 2:10-16), “너희가 모일 때에는 각각 찬송도 있고 가르침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도 있으나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여라”(고전 14:26)

하고

 

예언과 방언을 덕스럽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고전 14:27-40),

여자들의 경우 방언할 때 조용하게 하라고 하였다(고전 14:34).

 

계시종결론자들은 계시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의 과정이 완성되고,

사도들에 의하여 예수의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구속 성취 사역이

온전하게 증거되어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외에는 다른 계시가 없으며,

결론적으로 지금은 계시가 없고 단지 조명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시의 정의에 초점을 맞추어 논리를 전개하되

그리스도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과 성령의 계시 사역 및 성경에 있는 바

 

계시와 관련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마 11:27; 요 15:26; 16:13; 고전 2:10-13; 엡 1:17-18)과

역(행 2:14-41; 3:11-26; 4:8-12; 5:29-32; 9:22; 28:31)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계시의 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계시의 수단들을

여전히 지금도 사용하여 참고, (행 5:12-16; 8:4-8; 9:4,10; 10:3,46)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학이 말하는 바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작정, 성취, 적용) 및

장래에 되어질 일들을 알리고 깨닫게 하는 행위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지식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회개하고 구원 얻으려면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참고, 고전 12:3).

이로 보건대, 계시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면 계시가 종결되어

이제는 없다고 결론 짓게 되지만, 계시의 정의에 초점을 맞추면

계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있고 살아 있기에(벧전 1:23) 하나님의 계시도

 항상 있고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 이외에 새로운 다른 특별계시는 없지만,

그 특별계시는 항상 있고 살아 있으며,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증거되고 가르쳐짐으로써 늘 계시된다.

 

계시종결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계시의 수단들(신현, 예언, 이적)이

이제는 필요없다고 보기 때문에 은사중지론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신현(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최고의 신현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신현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 등이 이제는 없다고 말한다.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맡음)과 관련해서는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언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예언의 은사가 없다고 말한다.

 

이 같은 주장에 의하면 오늘날의 말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일이 없는 셈이요 (참고, 고전 4:1-2),

그 말씀을 가지고 장래의 일들에 대하여 예언하는 일이 불가능하다(참고, 요 16:13).

 

그리고 이적(또는, 표적)과 관련하여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최고의 표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표적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요

특별 계시임을 확증할 목적으로 표적들이 주어졌던 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이 사도들에 의해 확실하게 선포 되었고,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이후로는 사실상 이적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은사중지론자들에 의하면,

치유와 방언과 축사와 같은 표적이 중지되고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계시의 수단들과 관련하여

꿈과 환상과 음성이 지금도 성도들에게서 체험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뿐 아니라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는

물론 치유 사역과 축사 사역도 부정하고 이단으로 정죄한다.

이 같은 이단 정죄 행위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를 죽이는 죄와 악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성경 계시를 확증하는 데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출 7:5)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막 5:25-34; 요 20:30-31)과

성령님의 능력(행 10:38)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의 신적 권세를 세워주고 (고후 12:12),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 운동하는 것을 보여 주며(행 19:11-12,20),

 

궁핍한 중에 있는자들에 급한 도움을 주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행 16:25-34) 등 여러 가지이다.

 

하나님은 과거 뿐 아니라 언제라도 이적을 행하신다

(참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5장 3항).

 

나용화 교수(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총회신학위원회 위원장)

출처 : http://chtimes.co.kr/lib/37896

        개신대학원대학교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던 글을 재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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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한다-윌리엄 퍼킨스

설교는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1) 설교는 교회를 모으고, 선택받은 모든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도구다. 2) 설교는 주님의 양무리에게서 늑대들을 쫓아 버린다. 설교는 플렉사니마 즉 영혼의 ‘유혹자’다 설교로 인해 자의적인 마음이 누그러지고, 불경건한고 이교적인 삶의 양식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회개하는 삶으로 전환된다. 고대 이교도들의 근원을 흔든 것이 설교라는 무기다.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14:3)

말씀의 사역자에게는 오직 두 가지 의무가 있다. 하나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대언이라는 말은 설교만이 아니라 기도에도 적용된다(대상25:1). 그러므로 모든 대언자의 임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목소리로(설교로)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백성의 목소리로(기도로) 아뢰는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대언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 은혜로 부름을 받고 은혜 안에서 보호하심을 입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로 오게 하셨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백성에게 간청한다. 이는 우리를 시켜 백성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18-20).

성경의 완전성과 내적인 연속성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한다.

성경은 설교의 유일한 주제이며 설교자가 끊임없이 일해야 할 유일한 밭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거룩한 진리이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딛 1:1-2).

성경의 본질이 가진 탁월함은 완전성 또는 순결성 또는 영원성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의 완전성은 충족성 또는 순결성에도 있다.

성경의 충족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완전해서 어느 것도 성경에 더하거나 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은 어느 것이나 적절한 목적을 위해 항시 제자리에 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19: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성경의 순결성은 성경이 실수나 속임이 없이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12:6).

성경의 영원성은 침범할 수 없는 특성을 말한다.

성경이 명하는 모든 것이 완전히 성취될 때까지 다 이루어진다(마5:18).

성경의 효력은 두 가지 독특한 특징이 있다.

1. 인간의 영을 꿰뚫는 능력(히4:12).

2. 양심을 묶는 능력,

즉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하여 변명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한다(약4:12, 사33:22).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한 성경 속에 있다. 성경은 성령의 서기나 비서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교회를 위해 적절한 언어로 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우리가 성경을 정경이라 부르는 이유는 주님이 사용하는 잣대 또는 줄이기 때문이다.

정경의 도움으로 진리를 발견하고 검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모든 논쟁에 따른 판단과 최종적이며 최고의 결정은 성경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의 핵심과 본질을 다음과 같은 논증(삼단논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전제: 참된 메시야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사람이 되실 것이며, 다윗의 씨를 통해 오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 아버지의 품에서 태어나실 것이다. 메시야는 율법을 만족시키실 것이며,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한 희생으로 자기 자신을 드리실 것이다. 메시야는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이기실 것이다. 메시야는 하늘에 올라가실 것이고, 때가 되면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소전제: 마리아의 아들 나사렛 예수는 이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신다.

결론: 따라서 예수님은 참된 메시야이시다.

이 삼단 논법에서 대전제는 모든 예언서의 범위 내지 주된 요지이며

소전제는 모든 복음서와 사도 서신 속에 담겨 있다.

- 윌리엄 퍼킨스,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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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토마스 브룩스)

 

 

참된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비참함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이며 영원토록 행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영혼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영혼이요,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영혼이다. 이런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사랑을 받는 영혼이요, 하나님께서 보물처럼 귀하게 여기시는 영혼이다. 이런 영혼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혼이다. 이런 영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에 안겨 있는 안전한 영혼이다. 이런 영혼은 가장 고결하고 가장 고상한 모든 특권들을 완전하고 탁월하게 소유하고 있는 영혼이다.

어떤 사람이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람의 처지는 행복하고 안전하며 확실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그런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알아야만, 그 사람의 삶이 즐겁고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지금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현재 이런 은혜의 상태 가운데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죽은 이후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소유하게 되어 있다.

확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영혼의 반사적 행위이다. 확신은 어떤 사람이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것에 관한 현저한 느낌이요, 체험적인 인식이다. 또 그 사람이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사람이라는 것에 관한 현저한 느낌이요, 체험적인 인식이다.

이런 확신은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조명과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받는 증거와 보고를 통하여 자기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특별하고도 구체적이며 탁월한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6-17).

은혜를 받는 것과 내가 받은 바 은혜를 스스로 아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믿는다는 것과 내가 진실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확신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내가 진실로 믿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고 분명하며 명확하게 앎으로써 생겨난다.

확신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영광의 아름다움과 극치이다. 대개의 경우 확신이 있으면 아주 강력한 기쁨을 누리게 되고, 가장 감미로운 위안을 느끼게 되며, 가장 큰 평안을 얻게 된다. 확신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진주와 같으며, 극소수의 사람만이 쓰는 면류관과 같다.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행복, 곧 그리스도인이 안락하고 기쁨에 찬 존재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다. 확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결정짓는 필수 요건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 그런 은혜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영광의 왕좌에 올라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이다.

 


- 토마스 브룩스, 『확신,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

 

 

- 출처 :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대체 신학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 스며든 사악한 교리 중 하나가 유대인과 하나님의 교회와 이방인의 구분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들 사이에는 구별(차별)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 이방인이 없다. 필자는 한국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은 본래 유대인이지만 그는 과거에 유대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갈1:13).


 대체신학이란 로마 가톨릭이 만든 사악한 교리인데 교회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대신 계승해서 받았다는 것이다. 이 논리의 근거는 유대 백성들이 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멀리했기 때문에, 그 댓가로, 하나님이 그들을 거절했고, 그분의 언약을 취소하셨으며, 그분의 약속들을 거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복, 예언들이 이방인 교회(로마 가톨릭)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독자적인 언약을 강탈하려는 '강탈, 도둑 신학'이라 할만한 것이다.


이런 신학이 개신 교회 내에도 암암리에 깊이 퍼져 있다. 

대체신학이란 누룩은 대부분의 개신 교회가 수용하는 방법은 이렇다.



이스라엘---> 교회

성전---------->교회 건물

대제사장 ---------->교황

레위 제사장---------->사제, 목사들, 성직자

할례---------->세례

안식일 ----------> 주일

십일조---------->헌금, 십일조

열방의 머리 ----------> 교회의 수위권

절기, 명절 ----------> 교회가 정한 절기들 

유대의 전통----------> 교회의 전통

모세의 율법 ---------->교회법



한 마디로 웃기지도 않는 신학이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 영적 유대인이란 주장이다. 오늘날 개신 교회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주장, 신학에 은근히 동조하는 것을 본다. 


과연 그런가?

교회는 분명히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진리다. 

그렇다면 교회 성도가 이스라엘(유대인)이 된 것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는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새로운 창조물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며 진리가 아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없이 하나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몸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 세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교회(크리스천)은 유대인이 아니며, 이방인도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신약에서 바울에게 계시되었는데 핵심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유대인(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다. 


이 둘은 아래와 같은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 교회

레위의 제사장  ------------영적 제사장

동물 희생물---------------영적 희생물

건물 성전-----------------몸된 성전(영적 성전)

지상의 복----------------- 하늘의 복


물질적인 복---------------영적인 복 

지상의 예루살렘-----------새 예루살렘

땅의 왕국-----------------하나님의 왕국 

육체의 할례---------------그리스도의 할례

안식일--------------------안식


정해진 날과 달, 절기--------성도 각자 마음에 정함

음식 규례------------------모든 것이 정결케 됨

죄의 한시적 용서------------죄의 영원한 제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자기 의---------------------그리스도의 의


종의 자녀-------------------약속의 자녀 

율법에 속박-----------------율법에서 해방

율법 아래--------------------은혜 아래

원수와 물리적 전쟁------------영적 전쟁

혈과 육의 싸움----------------믿음의 선한 싸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녀--------아브라함의 믿음의 자녀



크리스천은 결코 이스라엘에 주신 표적으로서의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성전 건축대신 교회 건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제사장 직분을 계승한 것도 대체한 것도 아니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구약의 율법을 신약에서는 변형, 승계, 심화(upgrade version) 된 줄로 가르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 아니라 사악한 교리이다. 복음은 율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유대인의 회중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전도 회당도 아니다. 침례는 할례나 정결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정결례는 자신을 씻는 것이지만 침례는 죽은 시체를 묻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교회가 유대인을 뿌리로 계승한 것인 줄로 아는 몰지각한 자들이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는 자신들이 유대인들을 계승한 줄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율법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며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복음에 따라 교회에 주어진 약속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는 주로 땅에서 우리 육신에 주어지는 복이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교회) 땅에서 복을 받고 잘된다(이스라엘)"고 설교하는데 이는 저주의 복음이다.


신약은 "예수를 잘 믿으면 이 땅에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고 가르친다. 


대체 신학과 참된 복음의 차이를 잘 인지하기 바란다. 


Written by Pasto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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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가 고난당할 때
호라티우스 보나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에게 가족의 의미

 
성도들을 가족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이름들은 가족이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든 것들을 다 표현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그분의 “양떼”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성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보살핌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또 자신의 자녀들을 “포도나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것은 우리의 하나 됨을 나타내면서 또 나무의 원줄기로부터 가지로 순환되는 끊임없는 자양분 공급을 표현한다. 또 하나님은 성도들을 “성전”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는 건물의 튼튼함과 균형 잡힌 설계, 아름다운 외양,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그 주거 기능과 주께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분은 또 성도들을 “몸”이라 부르기도 하신다. 이는 각 지체들의 적절한 기능 분배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일체성과 함께 각 지체가 깨어 움직이는 활동력을 나타내고, 더 나아가 서로 서로 연락되는 가까운 연관성과 상부상조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나타낸다. 주님은 또 성도들을 “도성”이라고도 부르신다. 이는 위임된 특권, 개인의 권리, 그리고 잘 조직된 정부가 있는 행복한 공동체, 치안과 평화와 사람들이 누리는 부요함과 쾌활한 인사와 서로 서로 사랑으로 사명들을 떠맡는 그러한 공동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왕국”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고귀함과 영광스러운 지위, 존귀함과 영광의 통치권, 그리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은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나타낸다.

 
이렇게 다양하고 표현력이 넘치는 이름들은 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들이지만, 그 어느 것도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러한 이름들은 마치 어떤 공동체의 외형적인 모습만을 나타내는 이름들처럼 어느 한 부분만 묘사해 주는 이름들일 뿐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내면에 자리 잡은 중심, 즉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내면세계는 전혀 나타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사랑할 만 한 그 모든 것들을 나타내 주는 유일한 이름, 그 신비한 이름은 우리 귀에 낯익은 “가족”이라는 이름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고, 그 사랑이 거침없이 흐르고 순환되는 광경을 교회를 통해서 보기를 기뻐하시며, 또 교회로부터 그 사랑의 물줄기가 바깥으로 흘러나가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노라면, 머리 속에 즉시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갖고 계시는 특별한 관심을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요 17:12 한글킹제임스성경). 가족 감정이라는 것이 이토록 애틋한 것일까? 식구들 각자의 이름이 너무나 친숙하고 그 얼굴 모습들이 너무나 선명히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식구 중 누구 하나 아무리 작고 어린 자라도 잠시 못 보면 금새 그리워 못 견디게 되는 법이다. 각자가 앉아 있는 장소,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방, 각자가 아침에 집을 나셨다가 저녁에 귀가하는 시간, 각자의 얼굴 모습과 습관, 그리고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그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잠시도 눈에 띄지 않으면 금방 그리워 못 견디게 되는 것이다. 가족 중 한 명이 비워 놓은 자리는 아무도 대신 채워 줄 수가 없다. 다른 사람 누구도 대신 채워 주지 못한 채 그의 빈 자리는 그저 텅 빈 공간으로 남게 된다. 친척이나 동네 이웃이 다녀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그리워지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금새 다른 사람이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구는 그렇지가 않다. 식구가 떠나면 마음이 텅 비고 울적해진다. 만약 죽음이 형제 중 한 사람을 데려가 버리기라도 하면, 만약 죽음이 자매 중 한 사람이나 부모 중 한 분을 데려가 버린다면, 그가 있던 방을 그 누가, 그 무엇이 대신 채워 줄 수 있겠는가? 꽃 한 송이가 시들면 다른 송이가 또 피고, 오히려 더 싱싱하고 더 향기로울 수가 있을 테니 먼저 시든 꽃이야 금방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식구라는 꽃 한 송이가 져 버리면, 그 뒤를 이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식구라는 꽃 한 송이가 떨어지면, 그 곳에는 영원한 빈 자리가 남고 만다. 예수께서 거대한 식구들을 보살피실 때도 이와 똑같은 심정이 아니시겠는가? 한 사람 한 사람 그 낯익은 얼굴들을 하나 하나 헤아려 보신 뒤, 누구 하나도 잃은 자가 없다는 걸 아시고 그분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아버지께서 주신 식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없어지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시다는 듯이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으시는 그 마음은 얼마나 깊은가! 그것은 실로 식구들 각자를 일일이 개인적으로 대해 주시는 특별한 애정이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 세상살이 중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자칫하면 간과해 버리기가 쉽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대하는 이 감정을 두고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p.24-27

  

 

가족의 표식 - 시련

 
사도 바울이 진정한 아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고난을 달고 다녔다는 사실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고난을 하나님 가족의 표식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우리 혈토의 적법성 여부를 이 표식으로 시험하고 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한글킹제임스성경). 이 얼마나 강력한 표현인가! 영감 받은 사도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쓸 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고함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말씀 그대로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징계란 우리 출생의 정통성과 영광의 법적 지위를 증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표식들 중 하나이다. 성도에게서 이러한 특성을 찾아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증거 할 증명서 하나를 상실한 셈이 되어서 자녀로서의 합법성을 의심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출생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편에서 친권을 인정하실 수 밖에 없는 보증서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가족의 표식을 달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실로 엄숙한 일이다. 그래서 육이나 혈은 이렇게 생각하기를 꺼린다. 고난을 모면할 길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정말 그래야만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 그것을 기피해 보려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기운이 생기기도 한다. 시련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친자식이라고 인정하는 증명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련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오히려 기운이 솟아나게 된다.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는 증명서와 같으니, 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p.45-46

  

 

하나님의 연단의 목적은 훈육임  


“아이를 그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훈육하라”(잠 22:6)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적용하시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연단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들과 가지시는 교제의 참된 특징이다. 성도들을 교육하시겠다는 것이 그분께서 세우신 목표다. 이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연단이요, 영원한 생을 살기 위한 필수 교육이다.

 
그러므로 이 연단은 너무도 중요하다. 성령을 통하여 연단을 진행하고 게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 이 연단의 대상이다. 교회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이 연단의 목적이다.  


수많은 아들들을 영광 가운데로 데려오기 위해서 구원의 대장이신 예수님도 먼저 고난을 통해 완전해지셔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연단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도저히 이 연단을 경시할 수도 없고, 의미 없다고 할 수도 없으셨다. 이것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이는 지극히 엄한 명령이기에 가볍게 여길 수 없고, 너무나 중요해서 그냥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가족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영광의 상속자가 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과정이다. 이 연단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히 12:6). 그러나 이 연단의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은 아니며, 항상 의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벧전 1:3)하신 바로 그 날로부터 하나님의 채찍질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연단은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 또는 교회가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살전 4:17)가게 될 때에나 비로소 끝나게 된다. 이는 평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된다. 매를 맞고 있구나 하고 항상 눈치 채지는 못하더라도, 연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p.48-49

  


시험으로 드러나는 성도의 죄악

 
옛 성도들이 시험받았던 경우를 살펴보면, 그들 가운데에서 그냥 보통 죄악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도저히 예상하기 어려운 죄악까지 드러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노아는 절제심과 자기 억제력을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많이들 알고 있다. 그는 방탕하고 음란하며 죄악으로 숨이 막히는 세상 가운데 홀로 서서 사람들의 방탕과 음란을 꾸짖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혹적인 환경에 처하자 그도 넘어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아가 곤드레 만드레 술 취하고 만 것이다.

 
또 아브라함은 어떤가? 그는 믿음과 용기에 있어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와 그랄 지방에 갔을 때, 겁이 난 나머지 믿음은 내팽개쳐 버리고 그만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롯은 소돔의 음란과 더러움에 대항해 싸운 인물이었고 의로운 혼을 간직하고 있어 사람들의 가증스러움을 한탄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소돔의 멸망으로부터 구해냄을 받자마자 멸망당한 사람들과 똑같이 술 취함과 정욕에 넘어지고 말았다.

 

또 욥은 그 인내심에 있어 특출한 사람이었지만, 시련의 날이 계속되는 동안 그 인내심을 끝내는 저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온유했던 모세도 노기를 드러내며 그 입술로 범죄하고 말았다.

 
돌맹이 한 개와 돌팔매 끈 하나만 들고 골리앗을 무찌르러 나아갔을 정도로 용맹했던 다윗마저도 사울왕을 피해 도망하여 가드왕 아키스에게로 갔을 때, 적이 너무 무서워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야 말았는데, 이 때에 그의 용감성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엘리야는 왕들 앞에서 전혀 떨지 않고 판결문을 큰 소리로 읽었고, 하늘 문을 닫았으며, 수 천 수만의 사람들 가운데서 혼자 하나님의 복수의 칼을 휘둘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한 여인의 협박에 겁먹고 도망하더니, 생명을 건지려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말았다.

 
에스겔 또한 그 거룩함과 순종함에 있어 빛나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았을 때, 불순종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영이 나를 들어올려 멀리 데리고 가시기에 내가 괴롭고 내 영이 화가 났었으나 주의 손이 내 위에 강하게 임하시더라”(겔 3:14 한글킹제임스성경)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는 열성적인 제자였지만 주님을 부인했다. 요한은 주님께 가장 사랑받은 제자였지만, 사마리아에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기를 원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참으로 인간이란 이 정도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여 그 속이 속속들이 드러날 때 인간의 마음은 - 성도의 마음마저도 - 겨우 이런 정도인 것이다. 존 베릿지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 너, 마음아! 너는 도대체 어떤 존재냐? 바로 천치 덩어리가 아니더냐? 만물 가운데 가장 거짓되고, 간사하고, 악하고, 어리석은 자로다! 몰래 숨어 있던 죄악아! 이기심과 자존심아! 거칠은 성깔, 세속적인 욕망아! 하나님의 매가 영혼 깊은 곳을 치신다고 해서,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고개를 쳐들고 나온단 말이냐?”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정직성을 굳게 잡고 욥은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견뎌냈던가! 얻어맞고 또 얻어맞는 고난 가운데 처참하게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뻗었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내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자아”에는 아직 하나님의 매가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역겨운 질병이 엄습하여 그를 더러운 거름 무더기로 처박았을 때, 그리고 친구들이 덤벼들어 하나님의 정죄를 받은 자로 그를 낙인찍었을 때, 그도 별 수 없이 자신의 믿음과 인내심을 저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매가 그의 중심을 시험하자, 그는 안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불신의 물줄기가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고 만 것이다.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활을 힘껏 당겨서 마음의 심연까지 깊이깊이 꿰뚫고 들어갈 아주 날카로운 화살이 필요했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의 질병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속 깊이까지 찌르고 들어가자 그의 진짜 본성이 마침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속으로부터 고개를 들고 나오는 모든 죄악들 가운데 가장 악하면서도 공통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과거에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나 가졌던 생각이다. 그때는 하나님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홀대 받으실 만한 분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이 크신 놀라운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과거의 불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우리는 그 때, 이제부터는 결단코 하나님을 나쁘게 생각지 않으리라며,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 분을 신뢰하리라”고 마음먹기도 했다.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더 그분께 매달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자마자 예전의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된다. 주님의 은혜를 꼭 붙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면서 급기야는 그 은혜가 모두 다 달아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들은 시들어 버린 박넝쿨 아래에 있었던 요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회가 날 때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분의 사랑을 맛보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 전과 같지 않다고 여기고 만다. 마침내 우리 마음 가운데 숨어 있던 배교가 반역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조건 하나님을 섬기리라”던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도 무참히 드러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계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네가 성내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 입에 그 무슨 말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용서해 주시고 말끔이 도말해 주셨거늘, 우리가 화를 내거나 낙담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겠는가?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셨으며,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이신 그 큰 바위에 우리를 숨겨 주셨거늘, 그래도 우리가 성을 내는 것이 잘하는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고, 그 아들의 왕국을 영원한 유업으로 받았거늘, 우리가 성을 내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밤이 다 지나갔고 낮이 가까워져, 저 멀리 동쪽 하늘의 구름자락이 붉게 물들고 태양이 곧 떠오를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우리가 성이나 내고 있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이란 말인가? p.85-88

 

 

하나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은 아무리 작은 음성일지라도 마치 천둥 번개와 지진이나 되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가벼운 시련들의 의미와 용도를 배워야 한다. 아무리 가볍고 일시적인 아픔이나 슬픔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알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많은 고난을 모면할 수가 있다. 또한 가벼운 책망으로도 우리는 좀 더 편하고 쉽게 하나님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다. 아무리 가벼운 고통일지라도 은총의 향기를 가득 담고 온다. 그런데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내팽개쳐 버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고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계기를 무시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이 가벼운 십자가를 잘 활용하여라. 그러면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귀를 막고 외면함으로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는가!

 
한편, 가벼운 고통에 대해서 귀를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 무거운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무거운 고통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보다도 더 무거운 고통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안일한 태도로 시련을 극복하려 하는데, 이것은 아주 어리석을 짓이다. 시련을 당하는 순간에는 감정이 격렬하게 복받쳐서 울고불고 야단을 하지만 그것은 그때뿐이고 마음 속으로는 깊이 그 시련의 의미를 새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련이 곧 또 닥쳐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시련을 마음 속 깊이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감정적이 되어 울고불고 하기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듭되는 고통과 고통의 막간에는 아주 태평하고 유쾌하게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되면 시련자체가 영혼에 큰 손상을 입힐 뿐만 아니라 면역이 생겨 버려 별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또 다른, 훨씬 더 아찔하게 아픈 주먹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가짐이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기시게 되면, 시련에 시련이 거듭거듭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닥치게 하시거나, 하나의 고난이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서 그 길로 너를 인도하셨을 때 네가 그를 버림으로써 이것을 네 자신에게 자초하지 않았더냐?”(렘 2:17 한글킹제임스성경)는 말씀은 이러한 우리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파도에 파도가 거듭거듭 우리를 덮쳐 오지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폭풍을 자초한 결과이다. 파고가 더욱 거세게 높아져서 결국 우리가 거의 압도되어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기 전에 하나님께 즉시 굴복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복 주시도록 했더라면, 파도는 한 번으로도 족했을 것이고, 하루 해가 지기도 전에 폭풍은 잠잠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거친 항해를 자초하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향을 향해 가고 있다. 이 모든 폭풍과 파도들은 가나안을 향해 불어 닥치고 있기에 결국 우리는 그곳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바다에 떠 있을 때보다 이따금씩 파도 꼭대기로 높이 치받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저기 떨어져 있는 영원한 유업의 불빛을 더 밝게 볼 수 있게 된다. 그 불빛이 폭풍의 암흑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파도가 아무리 사나울지라도 그럴 때마다 본향으로 좀 더 가까이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있으며, 물결이 세찰수록 우리는 더욱 빠르게 그리운 항구를 향하여 항해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p.94-96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고통을 주시는 의도

 
우리 자신을 “그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뜻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이 표현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벧후 1:4 한글킹제임스성경)라는 말씀과 상응한다. 이 말씀은 대단히 우리를 높이 올려 주는 복된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아만큼 깊은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 자신의 거룩함 - 바로 그 분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천사들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이다.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속받은 자들 -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 가운데 포함된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평안이며, 주님의 주시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단순한 거룩함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거룩함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동참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으신 뜻인가!

 
이것만 있어도 다른 모든 것은 내팽개쳐 버려도 될 만한 아주 엄청난 상급이다! 이 훌륭한 상급의 모든 가치를 우리가 깨닫고 우리 마음이 온통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충돌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는 복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해 주시려면 불가불 몸을 구부리고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과 어떤 지점에서 딱 만나게 되면 이 충돌은 끝이 난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실은 우리에게도 그게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기를 원하시고, 우리들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의 뜻이 일치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목적에 대해서 우리가 뜨거운 열망으로 진실하게 응하게 되다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것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형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이제는 영광으로 가득 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이 우리의 거룩해진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한글킹제임스성경). 고통이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다. 고통은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같아서, 나무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다. 고통은 잔디를 깎아 주는 것과 같아서, 뿌리가 더 왕성히 뻗게 하고 잔디 잎이 더 푸르르게 해준다. 고통이란 횃불을 휘휘 내젖는 것과 같아서 불빛이 더 환하게 비치도록 해 주는 것이다. p.105-106

 

 

하나님의 잠자는 성도 깨우기 ; 고난의 의도

 
성령께서 죽음의 깊은 잠에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신 지가 언제였는가! 우리는 다시는 그토록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우리를 깨워 주셨던 주님은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우리를 계속 깨어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히 졸릴 대가 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난 날의 졸음이 자꾸만 다시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 세상 것들이 여전히 매혹적으로 보여서 거기에 한눈 팔다 보니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술 취한 듯 하고, 의식은 몽롱하고, 힘이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망대에 올라가 보초를 서고 있으면서도 잠에 곯아떨어져서 밤이 다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곯아떨어져 있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안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만다. 움직임은 둔해지고 생기를 잃는다. 믿음은 희미해지고 사랑은 식어 버리며 열정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는다. 전에 있었던 싱싱한 활력은 사라져 없어지고, 담대한 용기도 떠나 버린다. 계획을 짜도 온통 허점투성이고 일을 진행해도 졸린 사람이 비틀거리듯 허술하기만 하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은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그것에 방해가 된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것을 질질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그냥 놔둘 수가 없으시다. 자신의 사역을 위해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라도 사태가 이런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을 용납하실 수는 없으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우리가 다시 잠에서 깨어나게 하셔야만 한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빛의 자녀들이요, 낮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늘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생을 한가롭게 즐기며 흘려버리도록 놔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 낭비적인 삶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수가 없으시다. 게으르고 김빠진 임무수행, 성의 없는 기도, 별로 꾸짖을 데 없이 반들반들 길이 들어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자세, 하는 말마다 매끄럽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실상은 깊이가 업고 진실 되지 못해서 무게가 없는 언행, 이런 것들이 성도들에게 엿보인다면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다.

 
이렇게 싸늘하게 죽어 있는 자세를 일컬어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해서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임하리니 어느 때에 너에게 올 것인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고 하셨다. 또한 그런 미지근한 태도를 지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계 3:1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실 때, 처음에는 아주 살살 깨우신다. 향나무 아래에서 잠자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그랬듯이,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신다. 너무 마음 푹 놓고 깊이 잠들었다 싶으시면, 가벼운 재앙을 보내서 깨우신다. 소란한 소리가 멀리서 귀에 들려오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국가적인 소동일 수도 있고, 기근 소식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고, 또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발생한 역병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전이나 다름없이 우리는 안전하다 생각하고 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맥 풀려 있고 생기가 돌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 이웃이나 친척들 가운데 어떤 일을 일으켜 가까운 소리로 들리도록 음성을 약간 높이신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이번에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신다. 때가 급한데도 성도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주 우리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다. 연약한 곳을 매로 때려서 온 몸을 뒤흔들고, 심장이 펄떡 뛰게 하고, 맥박이 빨라지게 하시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 영혼은 수천 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아픔을 느끼며, 그제서야 놀라서 긴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쩌다가 이토록 긴 잠에 곯아떨어졌던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잠에서 완전히 깨려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얻어맞아야 한다. 일단 깼다가도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래서 잠을 깨우기도 해야겠지만 또한 깨어 있도록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 졸음 때문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 그 찢어지듯 아픈 가슴의 상처는 또 얼마나 큰가! “시온성에서 평안히” 여러 해를 푹 빠져 있던 우리들의 호사스런 삶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에 대해 생각하라”는 격언은 사려 깊은 독일인들에게는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죠. 이 격언을 인용하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불행한 자라고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인생은 한가한 꿈이 아니라 엄숙한 현실이라네. 그 인생은 그대 자신의 것이라네. 그 인생 전부를 마주 대해야만 한다네. 그러므로 일하게나. 결코 서두르지는 않되, 그렇다고 쉬지도 않는 ‘별’처럼 말일세.”

 
일은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깨어 있는 사람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더러 있다. 말은 사명을 그럭저럭 수행하고는 있지만, 발걸음은 지쳐 있고 힘이 없다. 열정 없이 마지못해 움직인다. 선한 일도 제법 하고, 그럴 듯한 계획들도 많이 세우는가 하면, 훌륭한 말도 깨 한다.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삶의 힘찬 맥박은 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열정, 불타는 열정, 활기찬 열정, 이것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불태우지도 않거니와 다를 사람들에게 불을 지피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도무지 ‘별’다운 데가 없고 싸늘하기만 하다. 아마도 곧 날카로운 징계가 내려질지 모르며, 사실 이들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또 어떤 이들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발작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열을 올리기 때문에, 무슨 짓을 벌일지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 놓고 무엇을 맡길 수가 없다.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성격이 아주 충동적이다. 또 그런 성격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거나 스스로 억제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깨어 있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때는 소용이 있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집을 세우기도 하고 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도 ‘별’다운 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그 들쭉날쭉한 성격을 일관성 있도록 고치고 영적인 변덕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주 쓰라리고도 오래 계속되는 고난이 필요하다.

 
이와는 약간 달리 항상 깨어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법석만 떨고 요란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휘젓고 다니면서 일을 꾸미지 않고는 못 배기며, 여기 저기 뛰어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기질적으로 신경이 예민하고 겁이 많으며 참을성이 없어서 좀 쉬라거나 한 발짝 물러서라고 하면, 크게 제지를 당한 듯 속상해 한다. 이런 사람들은 실상은 자기가 하는 일은 별로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한시도 가만있는 것을 못 보기에 그들을 들볶아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멀다.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다 보면 영적 성장 면에서는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모습에는 ‘별’다운 데가 있기는 하다. 잠자는 법 없고 쉴 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성급하게 허둥대는 바람에 차분히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혜롭지 못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그릇된 열성을 털어 버리고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영적 고요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깊은 데를 찌르는 날카로운 채찍이 필요하다. 이들의 진정한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아주 뼈저린 징계가 있어야 한다.

 

상 꾸준하게 일하고 또 열정 또한 분명히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나눠 보면 그들 역시 진정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일은 많이 하지만 기도는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그릇에 담긴 기름이 다 떨어지고 만다. 이들은 앞서 예를 든 사람들 보다는 낫지만, 역시 잠에서 더 깨어나야만 한다. 쉬지 않고 일하면서 설쳐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는 ‘별’다운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불빛이 아직은 미약하다. 어두운 세상에 반사되는 빛이 희미하고 가냘픈 것이다. 이들에겐 좀더 깊은 영적 삶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도 역시 부딪혀야만 하는 아픈 고통이 마련되어 있다.

 
진정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위의 예들과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그것은 강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런 것이다. 어딘지 늘 조용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내면에서 발산되는 위엄이 은은히 감돈다. 불처럼 뜨겁지만 열광적으로 흥분하지는 않으며, 힘이 넘치지만 날뛰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하는 일이 신속하면서도 결코 허둥대지 않고, 신중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하거나 이기적이 아니다. 결단력 있고 두려움이 없으면서도 경솔하지 않으며,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 입을 다물고 있는 듯 하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의 영향력을 느낀다. 즐거움과 화평으로 충만하면서도 밖으로 떠벌이는 법이 없다. 따사로움과 사랑이 넘치면서 동시에 또 신실하고 진실된 그런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다! 아, 그러나 이렇게 온전해 지려면, 얼마나 많은 역경들을 거쳐야 하는지!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육신적인 본성이 고개를 들고 반발한다. 우리 자신을 마땅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초래되는 고난을 또 얼마나 많이 거쳐야 하는지!

 
징계로 우리를 졸음에서 깨워 주셔서 우리는 더욱 활기 넘치고 근면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점이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마도 많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시련만큼 기도를 되살려 주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시련에 부딪히면 우리는 즉각 무릎 끊게 되고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게 된다.

 
번영하던 시절에는 즐길만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몸을 숨길만한 피난처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러나 고난의 시절에는 우리에게 오직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없다. 비통함이 너무 깊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도 없고, 또 너무 아픈 것이어서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기도를 드린다. 전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나 되는 듯 싶어서 별로 기도를 드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기도가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팔이 부러지면,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전보다 몇 갑절 더 어둡게 느껴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빛이 비치는 곳이라곤 정말이지 우리의 기도실 밖에는 없다. 바깥은 사방이 음침하고, 구름이 온 지면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드릴 골방만이 밝고 조용하다.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기도실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있는가! 기도의 골방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행복한 섬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모든 시간을 다 써 버려도 아깝지가 않다. 어쩌다가 피치 못해 여기를 잠시 떠났다가도 다시 이리로 돌아 올 때면, 얼마나 마음이 가뿐한가! 이곳에서 유일한 친구인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조용한 시간들이 그 얼마나 행복한가!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고 폭풍우는 아직도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잊어버릴 수가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가 훨씬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지만, 또 현실적으로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고, 기도를 통하여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기도가 진짜 간구가 되었고 진짜 간청이 된 것이다. 격식도 없다. 탄원을 올릴 때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에너지,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많이 쏟아 부어지는지 모른다!

 
이제는 입으로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한다. 우리 마음의 갈망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여 이제는 복바쳐 오르는 것들이 “말할 수 없는”신음뿐이어서, 이 신음소리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된다. 전에는 입은 있으되 마음은 없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제는 훨씬 더 의식할 수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화제들이 거론된다. 새로운 소망들이 샘솟아 오르고 새로운 바램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완전히 비워진 우리의 마음 앞에 하나님의 풍성한 충만하심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깊은 영적 갈망들이 불타오르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외쳐 부르짖는다. 다윗의 가슴을 기도로 가득 차게 했던 것도 고난들 때문이었다. 요나가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쳐 부르짖은 것도 물고기 뱃속에서였다. 그리고 므낫세가 기도를 배우게 된 것도 광야의 가시덤불과 바빌론의 압제 가운데서였다.

 
교회여, 주님의 택함 받은 상속자여, 이제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자!

빛과 낮의 자녀들이여, 이제 모두 일어나자1

긴긴 겨울밤은 거의 끝났다. 이제는 낮의 별이 막 떠오를 때가 되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벧전 4:7), “어찌하여 너희는 자고 있느냐?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눅 22:46). 이제는 이 말씀들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p.107-115

 

 

고난, 우리의 이기심을 깨는 하나님의 방법

 
‘진리’가 마음을 몽땅 점령하고 있어서 진짜 진리이신 “참되신 분”을 깡그리 망각하고, ‘사역’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상대해야 될 대상을 놓쳐 버리며, 주님의 일이랍시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바람에 인격적인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의 필요성을 간과해 버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되심을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하나의 사실로만 간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언젠가 주님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게 되면, 그때 그분을 개인적으로 상대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들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위한 사역을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에, 주님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평안을 얻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잘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값을 치르고 이 복을 우리들에게 사 주신 주님이시건만, 주님과 나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속죄 받았으니 다 되었고, 속죄하신 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주 조금 밖에 관심이 없다. 주님의 사역이 충복된 것만 중요하고 주님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으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은총을 취해 버리고는 주님 혼자 남겨 놓고 떠나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이 비슷한 양상의 또 다른 이기적 행동과 생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교리의 틀이 어떤 것인지는 얼마든지 파헤칠 수 있다. 그들의 구속관부터가 아주 이기적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어떻게 성취하셨으며 그 영광이 어떻게 드러났던가에 대한 원리를 토대로 삼지 않고 단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 하는 원리만 토대로 교리의 틀이 짜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인견해가 죄인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빼앗아다가 죄인 자신의 손에 갖다 놓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도 이 절대적 필요성을 축소하고 그 대신 인간 자신의 의지와 판단이 구원에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획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 교리관을 채택하지 않는 곳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런 곳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이기적 성향이 잠재해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것은 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이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징계를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위로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른 경우보다 더 심하게 다루신다. 살아 계신 주님과 내가 개인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때가 고난의 세월 말고 또 언제이겠는가? 고난에 처하게 되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뿐이라고 느끼게 된다. 진리도 귀하다. 그분의 사역도 아주 귀하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 “자신”이 가장 귀하다.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주님과 함께 꼭 붙어 있는 일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다. 우리의 고난들을 모두 쏟아 버릴 곳은 오직 그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기심의 뿌리를 겨냥하여 고난이 닥쳐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그 복된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훨씬 더 영광스러운 “자아”를 우리 앞에 갖다 놓고 그 새로운 자아가 비참한 나 자신을 흡수해 버리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 자신이 모두 녹아 없어지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그분 자신과 가장 친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고난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우리들 자신을 뿌리 째 뽑아 없애는 데 고난만큼 큰 효력을 지닌 것이 없다. 이것이 우리의 이기심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의 것이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를 뛰어 넘어 “진리이신 그분”께로 데려다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p.128-130

 

 

세상을 닮은 성도는...

 

성도들 사이에도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들이 많이 엿보인다. 모슨 일을 하는 동기를 보거나 행실을 보아도 그렇고,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보아도 그렇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나 가족들을 교육하는 것에 온통 세상적인 요소들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독서나 대화에서도 세상의 냄새를 풍기는 성도들이 많다. 돈 쓰는 것도 세상적 이어서 자신을 위해서는 펑펑 허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구두쇠가 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나 동료 형제들에게 봉사하면서 일하고 수고하고 돈을 쓰고 또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하기 싫어하고, 심지어는 신앙적인 계획이나 선교단체들과 관련된 일에서도 그들은 세상 방식대로 움직인다.

 
한 마디로 모든 처신들이 세상 사람들을 닮아 있어서 세상 것들을 뛰어 넘는 성도들만의 평안과 고요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불안해하고 안달하고 야단법석이다. 세상 냄새는 풀풀 나지만, 하늘나라 향기는 전혀 안 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에 대해서 머지않아 자신들이 들어가게 될 썩지 않을 유업에만 늘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주 요지부동이지만, 하나님 일이라면 뒤로 발을 빼고 겸양한다.  p.132

 

 

고통으로서의 광야생활의 의미

 
“그가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기억되게 하셨으니“(시 111:4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렇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될 일들이다. 그 경이로운 일들을 이루신 의도부터가 기억되도록 하기 위하심이었기에 망각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들은 한갓 이야기처럼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경이로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징계다. 징계만은 특별히 기억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징계는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 징계가 우리와 연관될 때는 더욱 가치가 높다. 징계만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다른 것은 징계만큼 우리 마음 가운데 그토록 깊이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징계는 지난 날 우리가 두려워했고 또 소망했던 모든 것들과 얽히고 설켜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 그 어떤 펜을 가지고 써도 고난만큼 지워지지 않게 영혼 속에 써넣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셨을 때, 바로 이점을 지적해서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셨던 모든 길을 너는 기억하라. 이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시험하사 네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려 하심이니라. 주께서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너를 배고프게 하셨으며, 너도 모르고 네 조상도 모르는 만나로 너를 먹이셨으니, 이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옷이 낡아 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어오르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징계하는 것같이, 주 너의 하나님께서도 너를 징계하시는 것을 네 마음 속에 생각할지니라”(신 8:2-5 한글킹제임스성경)고 말씀하셨다.  


광야에서의 이런 기억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 속에 영원토록 새겨놓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막을 방황하면서 그분과 가졌던 교제의 은총을 그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기억들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다양하게 하나님과 가까이서 홀로 가졌던 사십 년 동안의 교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또 그들 자신에 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기억들은 영원토록 간직해 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지명 하나 하나마다 경이로운 광경이 담겨 있었고, 바위 하나 하나마다 거기에 들려 줄 이야기가 서려 있었다. 적들과 위험들, 배고픔과 목마름, 만나와 물, 불평들과 감사의 기도들, 여행과 야영 생활들, 해지지 않던 옷, 쇠와 놋쇠 같이 닳지 않았던 그들의 신발, 부어오르지 않았던 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 이에 떠돌던 구름들과 그들 한 가운데에 펼쳐졌던 하나님의 성막, 이 모든 것들이 기억되어야 할 장면들이었다. 광야 생활 이전에는 한 번도 이와 같은 놀라운 교제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되어 그들의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두고 두고 물려 줄 고귀한 유업이 되었던 것이다. p.136-139

 


고난이 무겁지 않은 까닭

 
고난이 죄를 없애고, 죄에 물든 몸가짐과 성격들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일생 고난에 처한들 그게 그렇게 길고 무거운 것은 아니다. 죄들 제거하고 더욱 거룩해지며 더욱 경건해지고, 주님의 모습을 더욱 닮아 가게 되는 수단이기에, 일생 겪는 고난이라도 그렇게 길고 무겁지가 않다. p.149

  


성도가 고난당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계신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씻는 일에 전능하시듯, 우리를 위로하시는 일에도 전능하시다. 주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거하시며, “위로자”라 불리신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 외에도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직접 능력의 손을 뻗어서 낙심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그 영혼을 꼭 붙잡아 주시고 힘을 불어 넣어 주신다. 우리의 상한 영혼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감싸여 있고, 그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지탱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슬픔의 샘, 바로 그것을 말려 버리신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정말 헤아릴 수 없이 큰 위로를 받게 된다. 고난에 짓눌려서 땅에 엎드려 있을 때야 말로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는가? 우리의 영혼 속으로 직접 다가와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도움 말이다. 인간의 위로는 이럴 때 아무 소용이 없다. 친구들이 우리를 위로해 주기 위해 별별 말을 다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슬픔의 근원까지 손으로 어루만져 줄 수는 없다. 기진맥진해 있는 육신을 팔로 안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쇠잔해진 영혼을 안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영원한 팔로 감싸 안으셔서 단단히 붙잡아 주신다. 그분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마음을 북돋아 주시기에, 우리는 주저앉을 수가 없다. 우리를 어떻게 붙잡아 주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위로하여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그분만큼 잘 아시는 분이 어디 있겠는가? p.151-152

 

 

고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셋이나 노아, 또는 아브라함이 걸어가야 했던 그런 순례의 긴 여정이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순례의 길은 그들의 것과 비교해 볼 때 한 뼘 밖에는 안 된다. 우리의 온 생애가 곤비한 날들과 잠 못 이루는 밤들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그 고난의 나들이 며칠 안 되고, 깨어 있어야 할 밤들이 몇 밤 남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 가운데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짧은 수명도 수명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점이 또한 위로가 된다. 환난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승리의 시작이 눈 앞에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식하게 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안식과 구원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들 “그리스도의 몸”은 깨어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영광스런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 영광된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이요, 영원한 즐거움이 우리들 머리 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잠든 사람들을 애도하는 사별의 슬픈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이 위로는 특히 귀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어 있는 자들을 주님께서 함께 데리고 오실 테니까 말이다. 주님이 가까이 와 계시다는 사실은 그들과 재회하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 저녁에 잠자리에 누운 사람은 온 밤 전체를 잠을 자야 하지만, 아침이 가까워진 시각에 잠든 사람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새벽이 그를 깨울 테니까 말이다. 이 마지막 날들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이 벌써 밤 사경 쯤 되었고 해가 떠오를 준비를 이미 하고 있으니 그들은 오래도록 잠자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사별의 아픔을 얼마나 달래주는가! 상한 영혼을 얼마나 북돋아 주는가!

 
“잠깨어라, 노래하라, 너희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라는 말이 이제는 우리의 매일 매일의 표어다. 우리는 망대 위에 올라서서 한밤중 어두움 속에 비쳐 오는 아침의 첫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땅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 보면 주님 오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벌써 오래 전에 약혼했던 신부가 온 마음을 다하여 소망하면서 눈물과 고독 속에서 그토록 여러 세대, 여러 세기 동안 기다려 왔던 젊은 날의 신랑이 이제 곧 신부의 가슴으로 찾아오실 것이다. p.152-153

 

 

출처: 네이버/긍휼의 그릇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예레미야 버로우즈)
 
“먼저 "땅의 일"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 이 세상의 영광, 이 세상의 화려함, 이 세상의 유익, 이 세상의 쾌락과 명예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그들을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악한 사람의 특징으로 지적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마땅히 돌아와야 할 몫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러이러한 것들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넓고 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고급 가구를 마음대로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으며,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아, 나도 그런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들은 참으로 귀중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인생의 기쁨과 행복이 무엇이랴? 그런 것들을 마음껏 많이 누리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요 행복 아닌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의 행복을 거는 사람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마음을 쏟으며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한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나의 탁월함으로 여기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탁월함이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에 우리의 마음도 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것과 어울리는 상태에 있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27:28-39절까지 보면,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각각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별히 야곱에 대한 축복의 내용과 에서에 대한 축복의 세부 내용이 순서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경우
: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너에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절)
에서의 경우: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39절)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현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마음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늘 이슬입니다. 땅의 기름짐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반면에 육적인 마음은 어떻습니까? 육적인 마음도 자신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적인 마음은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마음이 우선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땅의 기름짐입니다. 하늘 이슬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땅의 일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일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쁘다면, 그 사람은 죄악된 방식으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생각입니다. 본래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분출되거나 솟아오르는 무엇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 일어나는 거품과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 직접 솟아나는 것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어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곧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약속을 지키거나 품행을 단정하게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은밀히 마음에 자주 떠오르는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조사해볼 수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 직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인사고가를 잘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여러분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단정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자주 다니는 장소에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이 방안에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내면의 생각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평가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마음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여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무조건 다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평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때로 마귀는 가장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도 사악한 생각들을 주입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다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면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마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생각은 우리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생각이요, 우리가 감미로움과 만족을 얻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혼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아,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은 얼마나 좋은지! 나는 주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노라."
품행이 악하고 더러운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불결한 생각에 빠지며 거기에서 감미로움을 느낍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가운데 감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성공을 생각하며 거기에서 감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잠겨 두세 시간도 거뜬히 보낼 수 있으며 거기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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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지의 비유 / ‘하나님 나라와 비유’(홍창표 교수)에서 발췌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이 비유의 전반적인 문맥은 다음과 같은 반대 이미지들을 한 쌍으로 하여 짝을 이룬다.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 생선과 뱀,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위에 지은 집, 하나님과 재물, 개와 거룩한 것, 진주와 돼지, 좁은 문과 넓은 문, 양과 염소, 알곡과 잡초이다. 이처럼 반대되는 것들을 한 쌍으로 만든 것은 마가복음 4:10~12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준 제자들과 주지 않은 “외인들”로 구분한 것과 조화를 이룬다. 가라지 비유는 바로 앞에 기록된 씨 뿌리는 비유(마13:1~9, 18~23)와 한 쌍을 이룬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지 않은 땅에 뿌려진 씨와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한 쌍을 이루고,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대조된다. 여러 구절에서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은 것”과 “적은 수가 선택받은 것”이 대조되고 반대되는 주제로 한 쌍을 이룬다(마13:47~50, 22:14, 25:31~46, 7:13~14; 눅13:23~24, 7:22~23, 13:26~27)


이런 반대되는 이미지로 한 쌍을 이룬 문맥은 심판이 올 것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권고한다. 이처럼 실제로 심판이 오리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인내할 것과 죄사함을 가르치신 복음서의 일반적인 넓은 문맥에 가라지의 비유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에 대하여 다른 의견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일부 비평학자들에 의하면 이 비유가 초대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하면서, 비유가 생긴 동기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지나친 열심을 가진 자들, 다시 말하면 “인자”가 종말의 심판 때에 행하실 특권인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는 것을 이 지상에서 이루려고 하는 열심자들을 경고하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이다.(A. Schlatter, Der Evangelist Matthaus(1933), p.442) 그러나 이 논의는 비유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유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제시한 것은 임시적인 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종들이 제시한 것이 임시적인 분리(a provisional separation)였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 같은 교인들에게만 적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유에서 나타난 분리는 알곡에서 가라지를 마지막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때 일어날 최종적인 분리(the definitive separ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비유의 주제는 종들과 주인 사이에 분리시키는 자가 누구인가 혹은 어떠한 종류의 분리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때에 일어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즉 분리가 추수할 때까지 연기된 것이다.


다드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의 분리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조급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의심을 해소시켜 주시려고 가라지의 비유를 베푸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주인이 추수 때에 가라지가 알고 중에서 있다고 해서 추수를 미루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이스라엘 안에 죄인들이 있다고 해서 미루어지거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C.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p.185)  


물론 다드는 자신이 세운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의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그렇게 관찰한다. 그러나 가라지 비유는 추수에 대하여 말하면서 분리하는 것을 미루지 않고 곧 실행되어야 할 때로 묘사한다. 다시 말하자면 가라지의 비유에 나타난 추수는 현실에서 아직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는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알지 못하고 범하는 죄인들이라고 저주한 사람들과도 교제하였는데,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사게 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분노가 예수님께서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the dragnet) 비유를 베푸시게 된 동기였다.


가라지의 비유의 확실성을 두고서 한때 비평학자들은 마태가 마가복음 비유의 단편에서 가져와 꾸며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확실성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도마복음이라는 위경의 연구를 통해 반박을 받게 되었다.((B.B. Scott, Jesus, Symbol-Maker for the Kingdom) 그리고 다드 교수도 비평학자들의 이런 의견을 배척하고 마태복음의 비유가 독자적이라고 논증했다.(C.H. Dodd, op.cit, pp.137~183) 그러나 다른 비평학자들처럼 다드도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하는 마태복음 13:36~43이 마가의 씨 뿌리는 비유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이차적인 것이라고 했다. 다드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마태복음 13:36~43에 “설교적”(homiletic)인 것과 “종말론적”  (eschatological) 동기가 보인다는 점 때문이다.(C.H. Dodd) 이것은 가라지 비유의 설명을 단순히 자신의 실현된 종말론적 전망에 국한시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가라지 비유의 확실성을 더 심하게 비난한 사람은 예레미아스(J.Jeremias, The parables of Jesus)이다. 예레미아스는 마태복음 13:36~43에 합당하지 않은 말들이 있다고 했다. 그 중에 하나가 38절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 “세상“이란 의미를 가진 아람어가 기독교 이전 시대에도 있었는지 의심한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자신이 확신을 가지고 의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심할 필요 없이, 그러한 의미를 가진 아람어 ”알마“가 나타났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밭은 세상”이라는 말이 다른 구절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11:27, 13:31,32, 24:14, 28:18,19; 요3:16, 4:42).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곳에 선포되어야 하는데, 물론 즉시 그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10:5,6), 점진적으로 모든 곳 곧 온 세계에 공포되는 것이다.


“밭은 세상”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벗어나 온 세계에 미칠 선교사역을 전제하고 있다(10:16~18, 28:18~20). 이 말은 10:5~6에 나타난 협의의 명령인 예수님의 지상 사역 동안에 국한된 열두 제자의 사역에 배타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확증된다. 여기서 실제로 “밭”이라는 말은 교회를 의미한다. “밭” 곧 교회가 세상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가 온 세상에 공포되므로 예수님이 “밭은 세상”이라고 설명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주적이며 지금 실현되고 있다는 것, 곧 교회가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셨다. 초대교회 교부들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예, Augustine, Breviculus Collationis cum Donatistis) 칼빈도 “세상”이 제유(synecdoche,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거나, 한 단어로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나타내는 표현방법, 또는 그 반대)로 교회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능력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심을 의미하며, 교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실현이요 결실인 것이다.


예레미아스가 가라지 비유의 설명(마13:36~43)을 예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38절에 나타난 “악한 자”가 마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레미아스는 세상이라는 말처럼 “악한 자”라는 아람어가 마귀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예레미아스가 단언하듯 확증을 내세울 수 있는 논의는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마귀가 흔히 나타나며(마4:1, 5:37, 6:13), 사단의 자녀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마귀의 아들들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마귀 곧 “악한 자”라는 말은 비방자(slanderer), 참소자(accuser, 욥1:9; 슥3:1,2; 계12:9,10), 대적 마귀(adversary, 벧전5:8)를 뜻한다.


마귀가 “악의 왕자”(prince of evil)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믿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믿음이 옳은 것으로 인정하시고, “마귀”를 만나게 되었다(마4:1,5,8, 13:39, 25:41; 요3:8,10; 유9; 계2:10, 20:2; 마5:37). 마귀는 하늘에서 쫓겨난 뒤 분노와 질투와 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증오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내며, 특별히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고 구원역사를 이루시려는 하나님께 그 증오를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마귀의 목적은 자기의 대원수 메시아를 속이려고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 예레미아스가 논증한 대로 비록 아람어.문서에서 “악한 자”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확증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 자신이 확증이 되신다.


예레미아스가 가라지 비유의 설명을 거부한 또 하나의 이유는 마태복음(13:38)에 기록된 “천국”이라는 말이 제한(qualification)하는 단어가 없으므로 세상적 정권을 표시하는 것이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예레미아스가 이같이 주장하는 근거로는 히브리어 말쿠트를 제한하는 말이 없으면 세상적 정권을 가리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레미아스는 그러한 근거에서 “천국의 아들들”(38절)이란 말이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표시한다고 보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고 했다. 예레미아스가 “천국의 아들들”이란 말을 그처럼 이상하게 본 또 하나의 이유는, 같은 말이 마태복음 8:12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마태복음 8:12의 “천국의 아들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상실한 유대인들을 의미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본문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천국의 아들들”이란 말이 어떤 문제를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38절에서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라고 한다. “천국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독립된 말이 아니며, 본문은 “좋은 씨”를 곧 “천국의 아들들”이라 말한다. 38절의 “좋은 씨“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고, 이 말씀이 온 세상에 공포되어야 할 것이다. 그 좋은 씨의 결실이 ”천국의 아들들“ 안에 나타나는 정도에 따라 천국의 아들들은 좋은 씨 자체와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함의하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략법”(elliptical) 표현들 중 하나이다. “...의 아들들”이라는 말 중에서 “...의”라는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나 혹은 “악한 자”에게 매여 있는 더욱 깊고 가까운 관계를 나타낸다.(H.N. Riddelbos, Matthew, 126p)


예레미아스가 마태복음 8:12을 바로 해석한 것은 사실이다. “나라의 본 자손들”에서 소유격 “의”는 “종속된“(belonging to) 혹은 ”예정된“(destined for)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SBI, 476~78; 마9:15~23:15) 그러므로 ”나라의 본 자손들“은 유대인을 나타내고, 그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아브라함의 아들들(3:9~10) 곧  혈통에 의한 권리로 말미암아 나라에 속한 자들로 인식한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 같은 유대인의 전제와 전망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비록 같은 언어를 사용하셨더라도 의미는 다른 것이다. 같은 말을 다른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용법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8:12의 문맥은 한 백부장의 산 믿음을 다루고 있다. 구원을 확증한 백부장의 믿음은 혈통과 권리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불신과 대조를 이룬다. 그 같이 불신하는 유대인들 곧 “나라의 본 자손”들이란 유대인 종족으로 태어나 메시야의 왕국을 바라보고 언약의 권리만 소유한 자들을 뜻한다. 하지만 그런 외적 유대인들이 언약의 권리를 상실했다는 것을 8:12이 증거하고 있다. 반면 13:38의 “천국의 아들들”이란 참된 이스라엘 곧 메시야의 왕국에 참여하게 된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8:12에서 다른 용어를 사용하시지 않고 13:38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혈통적, 법적 권리를 가진 아브라함의 자손이 “본 자손”으로서 왕국의 많은 특권들(the kingdom privileges)을 소유하고 내려왔기 때문이다.(시147:20; 사63:89; 암3:2; 롬9:4; 엡2:12; Wm. Hendriksen, Matthew, p.397)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받은 것이다. 8:12의 “본 자손들 혹은 자녀들”이라는 말은 유대인 하나하나가 배척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대다수가 바깥 어두운 데 버림받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지상 사역 중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부정적으로 묘사된다.(H.N. Ridderbos, op.cit, p.164)


예레미아스가 가라지 비유의 설명을 인정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천사들이 “그 나라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41절)라고 한 대목 때문이다. 그는 가라지를 거두는 일을 천사들에게 맡긴다는 것을 이상하게 보았다. 그러나 이 말이 그처럼 이상한 것도 아니고 다른 성경구절과 조화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계시록 14:14~16에 보면 “인자” 자신이 알곡을 거두고 14:17~20에 보면 포도 수확을 천사들에게 맡기고 있다. 마태복음 24:31에는 인자가 재림하실 때 천사들을 보내는데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계시록 14:14~20과도 조화를 이룬다. “인자”가 자기의 택한 자들을 모으는 데 종속적 혹은 부차적인 기능(a subsidiary function)을 천사들에게 맡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마태복음 13:40은 부차적인 일 곧 “가라지를 거두는” 일을 천사들에게 맡길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3:24~30, 36~43의 가라지 비유와 설명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확실한 비유라는 점은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25절에서 “원수”라는 말에 정관사가 붙기 때문에 고정된 “그 원수”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 말이 “셈족어 방식”이므로 고정적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 그냥 원수(an enermy)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할 것을 28절이 확증하고 있는데, 28절에는 원수라는 말 앞에 정관사가 붙지 않는다. “가라지는 ”곡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자라는 초기에는 이 둘을 분간하기 어렵다.


이 비유는 다음의 세 가지 교훈을 전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자기의 공회, 곧 실현된 하나님 나라에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함께 공존할 것을 이 세상 끝날까지 허락하신다. 이 공존 현상은 다른 비유들에도 나타난다(마13:47~50, 22:9~10, 25:31~46).(cf. Jack Dean Kingsbury, The parables of Jesus in Matthew 13:) 2) 종말의 끝에 악한 자들은 의로운 자들과 분리되어 심판을 받고 영원한 저주에 들어간다. 3)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전에 인도되어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이처럼 가라지의 비유는 추수 때가 이를 때까지 곡식과 가라지가 공존하는 것을 종들은 그냥 그대로 놔두고 그 추수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받는 용서, 그리고 가라지가 당할 대심판, 이 세 가지 요점을 함축하고 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말론은 서로 견해가 나누게 된다.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이 세상 끝까지 공존한다는 것은 무천년설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천년자들도 이 비유가 후천년설을 지지한다고 본다. 그러나 밭에서 가라지가 곡식으로 변하는 일이 없으므로 이 세상이 기독교화 된다는 후천년설의 주장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후천년설은 이 난점을 다음과 같이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한 세대(one generation)는 이전의 한 세대를 계속 이어 내려오는 것인데, 각 세대 안에는 부단한 변화(constant change)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인류 모두가 이 세상에 타락한 인생으로 들어온 까닭에 모두 다 가라지이고, 가라지로 시작한 것이 변화되어 곡식 곧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된 것이다(Boettner, Millennium, p.128). 세대주의자들은 이 비유에서 휴거를 찾는다. 물론 이런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본문에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세대주의는 휴거한 후에 예수님이 천년 동안 악한 자들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라지 곧 악한 자들이 불에 태워졌으므로 악한 자들이 남아 있는지 문제가 된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세대주의는 가라지를 불태우려고 곁에 묶어 놓고 먼저 곡식을 거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마태복음 13:41~43(36~43)과 충돌이 난다. 마태복음 13:41~43은 마지막 대심판을 묘사한다.



‘하나님 나라와 비유’(홍창표 교수) 132~139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주의

 

이승구 교수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에만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 모든 삶의 국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살아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북돋우기 위해서 우리네 한국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세속주의의 두 가지 양태를 생각해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고... 여겨진다.

 

1. 교회 안에 들어 온 세속주의의 현저한 양태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나타날 때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우리 주변에 창궐하고 있는 아주 명확한 비도덕성과 비인격성, 물질 추구, 인간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루고 유지하려는 노력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노골적인 세속주의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또 때로는 이 세상에서 보는 것 보다 더 심각한 여러 형태의 현저한 죄악이 있고 불의가 있음을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그 모든 일에 대해 회개해야만 한다. 또한 교회 안에도 물질을 추구하며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떤 교회가 존중되는 교회이며, 어떤 교우가 존중되는 교우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그 기준에 세상적인 것들이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교회가 매우 세속적이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교회 안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일을 하여 교묘한 정치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저한 세속주의이다. 개 교회에서의 인간 관계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교단 안에서 어떤 일이 나타나고 있는 지를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서 질문해야 한다. 교단에서나 교회들 간의 모임에서 어떤 이가 어떤 기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들의 교회가 세속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에 생각할 문제 보다는 덜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생각할 교묘한 세속주의의 양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그것을 세속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한 형태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2. 교회 안에 들어온 교묘한 세속주의

우리네 교회에 들어 와 있는 교묘한 세속주의란,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려고 하는 경향을 뜻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문자적으로 힘이 없을 때는 이와 같은 세속주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시작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숫자의 힘이나 우리들의 경제력이나 우리들의 정치적인 영향력 등을 무의식중에라도 의존하게 되기 쉽다.

 

아주 명확한 악에 대항하는 우리의 바른 노력에서도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이 나타나기 쉽다. 더구나 아주 명확한 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의 유익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 가운데서는 우리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드러내며,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감히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가 매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가장 교묘한 세속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께 의존하지 않고, 이 세상적인 것에 의존하든지, 우리 자신들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나 구제 등과 같은 우리의 종교적 행위에 의존하든지, 우리들이 체험한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면, 우리는 자신들이 전혀 세속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모르는 그 상태가 가장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성령님께 의존하지 않고, 이상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며 의존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세속주의의 형태인 것이다.

 

성령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비인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하는 것은 아무리 성경임을 강조한다고 해도 성령님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3.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해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세속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십자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만이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항상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삶과 교회를 생각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힘에만 의존하려고 해야 한다. 적어도 고난 주간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항상 십자가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 아래서도 자신의 영광과 행복과 자신의 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 박은 유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나 본디오 빌라도, 또한 그들의 지시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쳐 대던 유대 민중(오클로스)이나 빌라도의 지시대로 십자가 처형을 준비하고 그 일을 시행한 무자비한 로마 병정들과 같은 사람들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자행한 이들도 후에 복음 선포를 들은 후에는 “우리가 어찌할꼬? 했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과 우리 자신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복받음만을 추구해 간다면 그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기를 추구하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자기를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우리의 모든 것의 실질적 목표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 등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그것을 우리의 궁극적 실질적 목표로 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왕국을 구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이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기를 바라게 된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실성을 분명히 말해 주고 그 의미를 명확히 해석해 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부활의 빛에서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약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성경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사는 일의 유일하고도 충족한 기준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성경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의 다스림에만 온전히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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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죄의 결과는 “타락 그 자체”에 있다. 사람은 포세
    페까레(죄를 범할 능력)를 지닌 존재로 피조되었으므로, 처
    음부터 타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선하게
    피조되었지만, 변화의 가능성도 아울러 자녔다. 이 겉은 범
    죄 가능성을 가리켜 후에 칼 바르트는 “불가능한 가능성”
    이라 불렀다. 이것은 분명 넌센스요 모순된 말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선한 피조물이 죄에 빠지는 일의 불가해성을 지
    적하기 위해 일부러 이 같은 모순된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
    다. 타락은 분명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타락의 심각성은 이것이 인간의 숭고

    한 원태 상태와 뚜렷이 대조된다는 점에서 드러나게 된다.
    샤프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우리가 아담의 높은 신분과
    그 속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온갖 종류의 과실들이 풍
    성했던 낙원에서의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했다는 점과 그것
    을 순종하기기 쉬웠던 점을, 그리고 그를 지으신 분이요 그
    의 가장 위대한 보호자이신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고려
    한다면, 아담의 타락이 징벌을 받아 마땅한 짓이었다는 사
    실은 더욱 분명하다.”

    죄의 두 번째 결과는 “자유의 상실”이다. 창조시에 인간은
    선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대해 적극적인 성향을 갖고 있
    었다. 비록 사람이 죄를 범할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가 죄
    를 범해야 한다는 도덕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타
    락의 결과 인간은 악의 속박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타락
    한 의지는 선의 원천보다는 악의 원천이 되었다.

    죄의 세 번째 결과는 “지식의 장애”이다. 창조 당시 인간의
    지적 역량은 타락 후보다 훨씬 우수했다. 타락의 결과에는
    신학자들이 지칭하는 바 “죄의 지적 영향”이 포함되어 있
    다. 영어 단어 “noetic"은 ”지성“을 의미하는 헬라어 노우
    스에서 파생되었다. 원래의 인간 지성은 정보를 받아들이
    고 분석함에 있어 현재에 비해 훨씬 더 낫고 정확했다. 그
    는 진실을 왜곡됨 없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전지성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것
    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더불어 나누지 않으시고 또 나누실
    수도 없는 그분의 “비공유적” 속성들 중 하나이다. 실재 전
    반에 대한 무한하고 영원한 통찰력을 지닌 전지한 존재는
    영원하고 무한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신이 받은 지
    식에 있어 한계가 있었고, 처음부터 배운 과정에 있었다.
    그의 학습 역량은 원죄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는 상태였다.
    창조 당시에 학습 과정은 힘들지 않았다. 사람의 지성이 죄
    로 인해 어두워진 상태가 아니었다.

    타락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 여전히
    그는 생각할 수 있다. 여전히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그는 지성의 역량을 잃지 않았다. 그 역량은 남아 있지만,
    편이성이 상실되었으므로 한때 쉬웠던 것이 지금은 힘들다
    . 분명하게 사유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훼손되었다. 이
    제 우리의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기 쉬우며 논리적인 잘못을
    범하기 쉽다. 우리는 어떤 자료로부터 비논리적인 추론을
    하거나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우리의 논거들이 항
    상 건전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결부되어 있다. 하나는

    지성의 힘과 그 사유 역량의 약화요, 또 하나는 죄악 된 선
    입견과 편견의 부정적 영향-특히 선이나 하나님께 대한 우
    리의 이해력과 관련하여-이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어
    두워졌고” “타락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생각 속에 하나님
    을 두기 싫어한다. 이는 단순한 정신적 타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도덕적 타락까지도 의미한다.

    타락 후의 마음의 작용과 몸의 작용 간에는 유사점이 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물리적인 힘을 발휘한다. 몸은 여전히
    활동한다. 그러나 몸의 활동이 지금은 땀과 고역을 동반한
    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여전히 활동하지만, 올바른
    생각을 위해서는 힘들게 수고해야만 한다.

    죄의 네 번째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실”이다. 창조 시
    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아듀토리움, 곧 선을 위한 은혜로우
    신 도움을 제공하셨다. 타락 후에 하나님은 이 도우시는 은
    혜를 피조물에게서 거두셨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은 자신
    의 죄에 넘겨졌고 자기 마음의 악한 생각을 따르게 되었다.
    이제 그의 마음이 기만으로 채워졌고 그의 욕구는 줄곧 악
    할 뿐이다. 분명,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과 섭리를 통해 인
    간의 악을 제재하시는 은혜는 아직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
    님의 이 같은 제어는 선을 행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우시는
    은혜가 아니라 악에 대한 부정적인 제재이다.

    죄의 다섯 번째 결과는 “낙원의 상실”이다. 타락에 뒤이은
    저주의 일부는 에덴에서의 추방이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낙원에서 내쫓으신 후 화염검을 든 파수꾼 천사로
    하여금 에덴 입구를 지키게 하셨다. 이 파수꾼이 아담과 이
    브를 에덴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따라서 그들
    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친교를 누렸던 환경은 제거
    되었다.

    추방과 함께 여자와 뱀과 남자 모두에게 저주가 임했다. 여
    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했고, 뱀은 배를 땅에 대고 기
    어 다녀야 했으며, 또한 남자는 자신의 노력에 저항하는 땅
    에서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이 새 환경의 특징은 잡
    초와 가시와 엉겅퀴라 할 수 있었다. 에덴 동산에는 잡초가
    없었다.

    죄의 여섯 번째 결과는 “정욕의 현존”이다. 어거스틴의 저
    서들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정욕이라는 개념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선호를 내포한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성향을 가리킨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으
    로 향하는 의지의 성향을 내포하며, 이 정욕은 영을 대적한
    다.
    “원래 몸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즐거이 순종했듯이, 영
    에게 즐거이 순종했다”고 샤프는 설명한다. “단 하나의 의
    지만이 작용했다. 그러나 타락에 의해 이 아름다운 조화가
    깨졌고,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반목이
    일어났다. ... 그러므로 ‘정욕’은 바울이 나쁜 의미에서 ‘육
    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것은 그 자
    체가 감각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보다 높고 합리
    적인 인간 본성을 지배하여 ... 따라서 ‘정욕’은 단지 육체적
    인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르크스로서,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이 없이는 아무런 탐욕도 일어
    나지 않는다.”

    죄의 일곱 번째 결과는 “육체적인 사망”이다. 창조 당시에
    인간은 포세 모리(죽을 능력)와 포세 논 모리(죽지 않을 능
    력)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경고하기를,
    만일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뱀은 이
    경고를 부정하며, 아담과 이브는 죽지 않고 신들처럼 될 것
    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즉각적인 사망을 경고하셨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러
    나 아담과 이브는 범죄한 바로 그 날에 육체적 사망(사나토
    스)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혹자로 하여금 죄에
    대한 “실제” 형벌이란 곧장 경험된 영적 사망이었다고 결
    론 짓게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과 어거스틴의 입장에 의하면, 죄에 대한
    형벌은 영적 사망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
    가 마침내는 경험했던 육체적 사망도 포함한다. 이것은 그
    리스도께서 후에 자기 백성을 위해 정복하셨던 큰 대적이
    었다. 타락의 결과, 육체적 사망은 이제 단지 가능성이 아
    니라 필연성이 되었다.

    어거스틴은 설명하기를, 아담과 이브에게 있어 육체적 사
    망이란 그들이 마지막 숨을 헐떡일 때까지 완전히 연기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이 범죄한 그 순간에 육체적 사망이 시작되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사망의 폐해들-노쇠, 육체적 쇠약, 그리고 질
    병-이 인간의 삶을 따라다녔다.

    아담의 범죄 이래로, 모든 아기들이 산고 속에서 태어나게
    되었고, 출산의 고통과 신생아의 첫 번째 울음소리와 함께
    사망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삶 전체가 바로 이러한 과정이
    다. 생은 무덤을 향해 쉼 없이 나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죄
    의 정가표이다.

    죄의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결과는 “유전되는 죄책”이다. “
    원죄”는 죄가 단지 하나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조
    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유전되는 하나의 상태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죄는 우리의 인간 본성에 “거하는” 그 무엇이다.
    이러한 상태 혹은 죄악 된 습성은 출산을 통해 세대를 거듭
    하여 지속된다. 원죄는 출산의 자연적인 과정을 통해 직접
    유전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각 영혼을 새로이 창조하시는가?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입장(영혼 전이설과 영혼 창조설)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와 믿음( R.C. 스프룰 )/개혁주의마을

2009년 칼빈대학교 박사논문(Ph.D./조직신학) 신원균 목사

 

Ⅰ. 서론

 

개혁교회는 신조와 함께 세워지고 발전해 왔다. 메이첸(Gresham Machen)이 “복음적 교회는 신조적 교회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신조가 교회 안에 세워지면 교회도 세워졌고, 신조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졌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연구하므로 교리의 확립과 교회의 개혁을 이루기보다는 종교적 감정과 생활을 더 강조하여 신조 없는 교회론을 21세기 교회론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17세기 이후 경건주의가 교리보다는 삶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나타났고, 18-19세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정통교회가 사변적 교조주의와 신조주의에 빠졌다는 비판을 통해서 더 확대되었다.

경건주의와 자유주의의 신조무용론도 문제지만, 실존주의 철학에 입각한 바르트(K. Barth)의「바르멘 선언」(1934),「WCC 선언」(1948/1961),「1967년 신앙고백서」(UPCUSA),「1972년 신앙고백서」(기장측),「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통합측),「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2001/통합측) 등과 같은 신정통주의자들의 고백이 더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신정통주의자들은 항상 사랑과 화목의 주제 아래 수평적 교회연합을 최고의 목표로 제시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이 운동을 위해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이 갖고 있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교회관을 넘어서야 한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의 핵심 중 첫째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이 신앙고백서가 중세신학처럼 스콜라적이며 명제적인 교리중심의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목회현장에 있어서 신앙교육의 역동성과 실천성이 미흡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교육과 교회연합운동에는 보다 실천적이며 효과적인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필요로 하고 여기에 적절한 것이 신정통주의적 입장에서 고백하는 신조들이라고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둘째는 전통적 신조의 교리가 너무 학문적 체계성만 강조하고 있어서 현실의 당면한 문제들을 탄력적으로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직적인 체계성보다는 이 시대에 필요한 내용을 즉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동적 형식의 신조가 필요하다는 비판이다.

이와 같이 신정통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개혁교회 신조의 교회론 구조와 내용이 너무 스콜라적으로 경직되어 있어서 목회현장에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중심적인 해석과 여기에 기초한 새로운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을 작성해야 한다고 비판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본 연구는 개혁주의 신조들의 교회론적 구조와 내용이 결코 경직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교회론의 논리적 구조와 언약을 중심으로 구성된 교회론의 내용들이 역동적이며 실천적인 체계성을 잘 갖추고 있음을 변증하고자 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신조사적인 관점에서「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적 구조와 언약신학 중심의 교회론을 분석하여 개혁파 신조들의 교회론이 갖고 있는 역동성과 체계성을 부각시키겠다.

 

Ⅱ. 본론

 

1. 현대의 신앙고백서들이 드러내는 교회론적 구조와 신학적인 문제점

1) 교회론적 구조의 변형

(1) 성령론과 선교론을 추가한 1903년 수정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903년 수정판은 제34장 “성령론”과 제35장 “선교론”의 추가를 통해서 33개의 전통적 구조를 변형시켰다. 이 고백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그의 뜻이 선언되었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과 제한속죄의 의미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변형되었다. 전통적 교회론의 고백은 선택을 교회의 본질로 삼고 이 예정론에 입각하여 전도와 선교의 문제를 취급하였다. 그러나 온건한 장로교인들은 이 예정론이 부흥운동과 선교에 가장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처럼 성령론과 선교론을 추가하여 전도 활동의 문을 넓히고자 했다.

바빙크가 1903년 수정판이 알미니안주의적 토대를 갖고 있는 컴버랜드 장로교회와 연합하게 하는 결정적 기초가 되었다라는 비판에 입각해 볼 때 두 항목의 추가는 성경적 입장을 강화하는 의도가 아니라, 당시의 초교파적인 부흥운동을 수용하고자 하는 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즉 1903년 수정판을 통해서 선택과 예정을 통한 전통적 교회론의 구조는 파괴되고 알미니안주의적인 교회론으로의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2) 화해신학 중심의「1967년 신앙고백서」

 

미국연합장로교회(UPCUSA)의「1967년 신앙고백서」는 칼 바르트(K. Barth)의「바르멘 선언」에 기초하여 “화해신학” 중심의 교회론 구조를 새롭게 제시하여 1903년 수정판보다 더 심각한 변형을 시도하였다. 즉「1967년 신앙고백서」의 주된 문제점은 “기독론” 중심으로 전체 교리를 체계화한 것이다. 이들은 신약의 기독론을 중심으로 구약의 내용들 중 기독론적 의미만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버리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기독론도 전통적인 복음 중심의 기독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나 사회복음주의적(the Social Gospel) “화해”를 중심으로 한 기독론이다.

 

(3) 에큐메니칼 운동과 Missio Dei 중심의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2001/통합측)는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기초로 교회론의 구조를 변형시켰다. 이 고백서의 특징은「1967년 신앙고백서」의 “화해사상”을 “교제”(Koinonia)라는 개념으로 좀 더 세속화시킨 것이다. “교제”라는 것은 죄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중생적 개념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세계교회와의 일치, 피조물 전체와의 회복을 의미하며 또한 인종, 민족, 신분, 남녀, 빈부, 사상적 차이를 극복하고 인류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정치와 사회적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조 해설문에서 “‘교제’ 개념을 본 신앙고백 전체 구성에 있어서 핵심개념으로 삼았다. 이 개념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앙과 직제 전통에서 온 개념으로써 … 칼 바르트「교회교의학」Ⅳ의 핵심개념이 ‘화해’라고 한다면, 본 신앙고백이 사용하는 ‘코이노니아’ 개념은 화해 개념보다 더 풍성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 매우 훌륭하다고 판단되었다”라고 언급하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전통적 교회론의 구조를 에큐메니칼 운동과 하나님의 선교를 통하여 사회복음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변질시켜 버렸다. 특히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은 교회론의 세속화 운동에 있어서 핵심인데 이들은 “다른 장로교회들과의 일치운동은 물론, 다른 교회들과도 일치 연합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더 이상 선교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와 사회를 개혁하고 인류평화를 도모하는 여러 도구 중의 하나로 제한 시켜버렸다.

 

2) 교회론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1) 교회관의 인본주의화 시도

 

1903년 수정판은 교회 본질의 기반이 되는 전통적인 “이중예정론”의 개념을 축소시켰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일부 조항들이 1729, 1788, 1887년 등에 걸쳐서 약간씩 수정이 있었지만, 1903년 수정판처럼 교회 본질의 핵심인 이중예정론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1903년 수정판은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 항목 자체를 수정하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해석을 추가시켰다. 즉 하나님의 의지를 강조하는 본문의 내용이 스콜라적 사변주의의 표현으로 이해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해되도록 선언문을 새롭게 제시했다. 이 선언문에서 이들은「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안에 있는 독특한 체계는 결코 손상시키지 않았다고 하며 또한 그 고백을 대신할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고 단지 기존 교리의 보다 나은 이해를 시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박해경 교수가 “이런 표현은 도리어 예정론적인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오해하게 만들지나 않을까 생각된다”고 평가하듯이 제3장은 하나님 중심을 강조한 “이중예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2) 성례관에 있어서 언약사상 포기

 

성례관에서 언약개념을 제외시키기 시작한 시도는 유아세례의 항목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1903년 수정판은 이 부분을 형식적으로는 수용하면서도 제10장 3항에서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1647년 초판 제10장 3항은 “택함은 받은 영아는 어려서 죽는다 할지라도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유아들의 구원에 있어서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을 고백하는 “선택”을 강조한다. 그러나 1903년 수정판에서는 이 표현이 선택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죽은 유아가 구원받을 수 있는 보편적 구원의미로 해석되어야 함을 선언문에 언급했다. 이런 수정에 대해서 김영규 교수는 “역사적으로도 1638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으셨다라고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 혹은 일명 카메론주의와 박스터주의를 정죄했다”고 비판했으며, 벌콥은 유아세례에 대하여 언약적 표시로써 유아세례 주장자들과 “가정적 중생론”(presumptive regeneration)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음을 제시하면서 둘 중에 언약적 원리에 입각한 유아세례의 입장이 훨씬 더 성경적임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유아세례의 문제를 선택과 관련해서 이해했으며, 또한 언약론까지 포함해서 이해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교회의 성례론이 스콜라적이며 사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유아세례와 선택과 언약의 문제를 분리시키려는 1903년 수정판의 시도는 개혁신학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있는 것이다.

 

(3) 정교분리원칙의 혼동

 

현대의 신앙고백서들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입장을 취하든지, 아니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세속화 시켜서 정교분리원칙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문제를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WCC 선언」중 1948년 1차 총회에서 발표한 성명서에는 “정의를 희구하며 평화를 모색하는 모든 사람들과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투쟁하며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과 비록 알지는 못하지만 의가 깃들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예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언급한다. 이 표현은 정치신학적이고 사회복음적인 경향이 강하게 표출된 고백이다. 즉 세계 평화와 사회 발전이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며, 특히 부활과 종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없이도 단지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여 사회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통적 개혁교회의 교회정치의 사회적 책임과는 차이가 있는 표현이다. 또한「WARC 선언」도 같은 신학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선언의 문제점에 대해서 조석만 교수는 “이들이 말하는 교회의 복음전도란 인류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것은 교회의 언약적 책임과 영향력을 세속화 시켜서 문화의 다양성, 평화, 인간의 부와 권력, 인권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사회복음을 표방하는 정치신학적 선언임을 알 수 있다.

 

(4) 저항권의 포기로 인한 국가관의 축소

 

비개혁파 신앙고백들은 국가의 언약적 책임을 부정하여 국가 자체를 세속적인 것으로 비판했고, 그 결과 국가의 질서를 회피하는 무기력한 회피주의를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알미니안주의의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재세례파 신조 중 첫 번째는 1527년 초기에 작성된「슐라이타임 신조」(The Schleitheim of Confession)이다. 이 고백은 6장에 “무력에 관한 합의”라는 항목으로 “유화적 국가관”을 제시한다. 두 번째는 1632년에 작성한 재세례파의「도르트 신앙고백」(The Dordrecht Confession)이다. 네덜란드의 재세례파는 기존의 과격한 재세례파의 성격과 달리 온건한 입장을 주장하는 메노 시몬즈(Menno Simons)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저항이란 개념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는 회피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이 입장은 회중교회가 1658년에 고백한「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 of the Congregational Churches)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장식 교수가 사보이 선언을 평가하면서 “이 선언은 교회의 제도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평가하듯이 회중교회는 장로정치원리의 핵심인 상회의 치리권에 대한 복종과 상호 언약적 연합의 유대성을 부정했다. 또한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분리적 입장을 강조하므로 국가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고자 했던 개혁교회의 저항권을 약화시켰다.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적 구조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영향을 끼친 대륙의 고백서

(1) 4개 구조 형식의「제네바 교리문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1560)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교회론)라는 4개의 구조가 조직신학의 형식을 따라서 25개의 주제로 확대된 형태이다. 이 4개의 구조는 칼빈의「제네바 교리문답」(1542)에 기초한다. 칼빈은 이미 1537년에「제네바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으나, 청소년들과 초신자들의 신앙교육을 돕기 위해서 묻고 답하는 형식을 추가하여 좀 더 실천적이며 적용에 편리하도록「제네바 교리문답」을 만들었는데 낙스는 이런 교리문답의 효과성을 신앙고백서에 담으면서 교회론의 역동성을 높였다.

칼빈은「제네바 신앙고백서」(1537)를 처음 작성할 때, 루터의 교리문답처럼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의 형식을 따랐지만,「제네바 교리문답」(1542)을 작성할 때는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의 형식을 취했다. 이런 구조적 변화에 대하여 정일웅 교수가 “칼빈의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형태상의 변화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전체적인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 하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칼빈은 이 변화를 통해서 교리문답 구조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사고의 변화를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의 구조는 단순한 배열이 아니라, 신학적 깊이의 이해에 따라서 계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낙스는 칼빈이 교리문답의 구조변화를 통해서 제시했던 역동성과 실천성을「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단어들과 문장들을 통해서 생동감 있게 담아냈고, 특히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하는 4개의 구조를 25개로 확장하는 새로운 시도를 시도함으로써 더 발전적 형식을 추구했던 것이다.

 

(2) 사도신경 형식의 「제네바 신앙고백서」

 

칼빈의「제네바 신앙고백서」(1537)는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교리를 논리적으로 체계화 한다. 신앙교육은 논리적 체계성을 갖게 될 때 더 잘 전달되며, 오래 기억할 수 있는 효과를 나타내기 때문에 칼빈은 신앙교육의 실천성을 높이기 위해서 사도신경의 구조를 성부, 성자, 성령, 교회, 종말이라는 논리적 구조로 조직화시켰다. 그리고 이 형식은 신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라는 구조로 체계화되었다. 낙스는 칼빈이 사도신경을 통해서 제시한 논리체계의 형식을 자신의 신앙고백서에서 25개의 조직신학적 구조로 발전시켰다. 그는 사도신경의 형식을 기초하면서도 각각의 교리를 조직신학의 구조로 분리했으며, 이 과정에서 25개 구조는 신론, 성경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형식을 갖추었으며 그리고 교회론도 조직신학적 형식을 갖게 되었다.

 

2)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역동적인 교회론 구조

(1) 교회론을 중심으로 25개 구조의 확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전체 구조는 칼빈이 제시한 4개 구조를 25개 구조로 확대한다. 그 중에서 교회론은 가장 많은 항목을 차지했고, 구조와 내용면에서도 모두 실천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수사학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고 교리의 설명이 매우 웅장하고 힘차며 때로는 전투적이고 순교적인 비장함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특히 25개 항목은 소제목으로 잡아서 교리의 생동감을 높였다. 즉 제18장 “무엇으로 참된 교회는 거짓된 교회와 구별되며, 교회 교리의 바른 판단은 무엇인지에 대하여”라는 항목은 교회의 정의에 추가한 부분인데, 참된 교회의 정의를 한 번 더 사고함으로써 교회라는 것은 단지 머릿속에서만 학문적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세워가기 위한 영적싸움의 한 복판인 삶의 현장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실제적인 것임을 제목 그자체로부터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형기 교수는 제18장을 소개하면서 낙스가 교회의 법적 치리권을 첨부함으로써 칼빈보다 더 엄격하게 나갔다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적용에 대한 강조점 차이를 살피지 못한 오해다. 오히려 칼빈을 따라서 교회의 정의, 예배와 성례, 교회와 국가 등 교회론 각각의 항목에 짧은 소제목을 달아서 기독교 교리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2) 사도신경 구조에 의한 교회론의 교리체계 확립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의 또다른 특징은 사도신경의 논리구조를 토대로 한 교회론의 교리체계의 확립이다. 낙스는 신앙교육의 효과성과 실천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사도신경의 성부, 성자, 성령, 교회의 논리체계를 이용하여 25개 구조를 조직신학적 구조로 발전시켰다. 즉 25개 구조는 신론, 성경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논리적 형식으로 정리되었고 그 중에서 교회론은 구원론과 종말론 사이에 위치하는 조직신학적 교리체계의 확립을 마련하였다.

낙스는 25개의 각 항목을 사도신경을 따라 성부(제1-5장), 성자(제6-11장), 성령(제12-14장), 성례(제15-25장) 형태로 구분한다. 이런 특징에 대해서 잭 로저스는 “사도신조의 구조와 평행선상에 있다. 제25장으로 이루어진「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 교회, 종말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짜여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을 조직신학적인 체계로 다시 나누어 보면 성경론(제4장, 제19장), 신론(제1-2장, 제8장) 인간론(제3장), 기독론(제6-7장, 제9장, 제10-11장), 구원론(제12-13장), 교회론(위의 9개 항목), 종말론(제17장) 등 이다. 비록 지금처럼 세밀하게 조직적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으나, 대략적 구조는 현재의 조직신학인 형식과도 상당히 일치할 정도로 칼빈의 4개 구조보다 더 발전적 형태를 취한다.

이것을 통해서 낙스가 당시 스코틀랜드와 영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로마 카톨릭을 배격하고 참된 교회를 수립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 알 수 있다. 결국 교회론의 논리적 체계성의 강화는 개혁교회의 기틀을 놓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그러고 각각의 내용을 배열하는 구조 속에서도 수사학적인 화려함과 복잡함을 피하고 성도들이 성경적인 교회론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받아들여서 부패해 가는 국가와 교회에 대해서 생명을 다해 개혁할 수 있도록 간단명료한 구조, 역동적이면서도 실천적인 구조를 정립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는 스콜라적이며 사변적인 교조주의적 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앙교육의 효과적 적용을 강화하기 위한 실천적 목적에서 만들어진 형식임을 알 수 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영향을 끼친 대륙의 고백서

(1) 3개 구조로 체계화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칼빈이 제시한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의 4개 구조를 좀 더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서 “비참”, “구원”, “감사”라는 3개 구조로 압축시켰다. 이것은 박일민 교수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로마서의 순서를 따라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본 교리문답은 예정론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에베소서의 구조와 달리 죄로부터 시작하는 로마서의 형식을 따랐다. 즉 본 교리문답은 논리적 체계성을 추가하여 전체 구조를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죄로부터의 구원과 성장, 열매 등과 같은 연속적 과정으로 새롭게 발전시켰다. 3개 구조는 삶의 규범으로써 율법의 토대인 십계명이 마지막 “감사” 부분에 자리 잡았으며, 교회론에 해당되는 성례도 역시 “감사” 부분에 놓였다. 이것은 율법과 교회를 법적인 제재로 이해하지 않고, 성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감사로 순종하는 선물의 의미를 구조에 담아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의 4개 구조를 비참, 구원, 감사라는 3개의 발전적 구조로 체계화시켰다. 특히 3개 구조는 로마서의 순서를 따라서 구원의 시작과 성장, 열매라는 논리적 형식을 구성했으며, 교회론은 감사의 항목에 자리를 잡으면서 실천적 의미가 강화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이런 구조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4개의 구조를 토대로 하면서도 논리적 형식은 신론과 교회론을 강조하는 에베소서의 방식으로 체계화하는 발전을 보이고 있다.

 

(2) 5개 구조로 체계화한 「도르트 신조」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 1618-1619)는 교회본질의 토대인 예정론의 체계를 완성하는데 실제적 영향을 끼쳤다. 이 신조는 비록 교회론이라는 형식적 구성은 빠져있지만, 교회본질에 해당되는 선택사상과 관련해서 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예정론”을 배격하고 칼빈주의의 “절대 주권적 예정론”이 더 성경적인 예정론의 체계임을 논리적으로 발전 시켰다. 「도르트 신조」는 무조건전 선택, 제한속죄, 전적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으로 구분되어 칼빈주의의 5대 교리라고 한다. 각 항목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정론에 입각하여 선택하고, 선택된 백성만 속죄하며, 이 타락한 죄 가운데서 선택자만 구원하시고, 견인하는 논리적 형식을 갖는다. 따라서「도르트 신조」는 좀 더 신학적이며, 논리적인 체계성을 가지고「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관을 완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체계적인 교회론 구조

(1) 33개 구조로 조직신학적 체계성 확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조적 특징은 33개의 조항들이 성경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의 조직신학적 교리체계로 정확하게 확립된 부분이다. 교회론을 포함한 7개의 조직신학 구조는 서론에서부터 종말론에 이르는 논리체계를 가장 완벽하게 정리하므로 신앙교육에 있어서 간결성, 통일성, 적용성을 높였다. 특히 교회론을 구원론과 종말론 사이에 논리적으로 배열하면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조직신학적 구조를 완성했다. 이런 형식의 발전에 대하여 조석만 교수는「기독교 강요」의 구조에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발전된 조직신학적 형식임을 강조 한다. 하지만 켄달(R. T. Kendall)은 퍼킨스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이르는 청교도의 전통은 반(反)칼빈주의적인 잘못된 전통 위에 세워졌다. … 웨스트민스터의 목사들은 무의식중에 다방면에 있어서 사실상의 알미니안이 되어 버렸다. … 웨스트민스터 신학에서 예정론을 제외한 칼빈의 사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라고 비파하면서 이 신조의 조직신학적 강화는 경직된 스콜라주의의 변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 신앙고백서가 교회론을 구원론과 종말론 사이에 체계화한 이유는 로마 카톨릭이 교의학에서 교회론을 신적 계시와 하나님의 논의보다 선행시켜서 교회를 은혜의 분배자로 강조하면서 율법적 형식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시도였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교회론을 신론 다음에, 그리고 구원의 은총의 결과로써 구원론 뒤에 두었다. 이런 구조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위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거룩한 백성이요, 영적공동체임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는 비판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칼빈 신앙에서 변질된 스콜라적 교조주의가 아니라, 신앙교육의 효과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 교리체계를 논리적으로 강화하였던 것이다. 즉 33개의 각 주제는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라는 7개의 조직신학적 논리체계로 확립되었다. 특히 성경 중심적 교회론과 하나님 중심적 교회론을 강화하기 위해서 성경론과 신론이 교회론과 관계하여 더 깊이 체계화되었다. 이 외에도 교회론을 구원론 다음에 배치함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회생활에 대한 필연성을 완성했고, 또한 종말론 앞에 배치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성도들이 이 땅위에서 현세적 책임과 소명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적 사명에 대한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성격을 완성시켰다.

 

(2) 교회론의 구성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확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교회본질, 예배와 장로정치, 성례, 교회와 국가, 교회표지, 직분론 등과 같은 교회론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을 가장 완벽하게 논리적이며 조직적으로 체계화하였다. 교회론은 대략 13 개의 장으로 확대된 것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조직신학적인 주제로 정리해보면 서론, 예배론, 맹세, 국가, 결혼, 교회의 본질, 성례, 권징, 총회로 나눠진다.

교회론은 제19-24장과 제25-31장으로 나눴다. 즉 그것은 제25장 “교회 정의” 전에 제19장 “율법”(Of the Law of God)과 제20장 “자유”(Of Christian Liberty of Conscience), 제21장 “예배”(Of Religious Worship, and Sabbath-day), 제22장 “맹세”(Of lawful Oaths and Vows), 제23장 “국가”(Of the Civil Magistrate), 제24장 “결혼”(Of Marriage and Divource) 등을 배치하여 교회론의 “간접적 주제들”(제20-24장)과 “직접적 주제들”(제25-31장)로 이분화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는 구원론 다음에 교회론의 직접적 주제들이 소개되고 윤리론에 해당되는 간접적 주제들은 교회론의 구조 안에 포함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본 고백서는 윤리론에 해당되는 간접적 주제들을 앞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구별하여 교회론이 가지고 있는 조직적 특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교회론의 요소들은 성도들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발전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에 나타난 언약신학적 특징

1) 언약론에 기초한 교회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본질은 언약론에 기초한다. 5장에서 “교회의 지속과 증가와 보존”(De Perpetua Successione, Incremento et Conservatione Ecclesiae)이란 제목으로 교회의 지속과 증가와 보존은 아브라함과 맺은 은혜언약에 기초하며 이 언약의 성취자로서 예수 그리스가 약속되었으며 결국에는 이 약속에 따라서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이 신조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공동체로서 교회를 이해했다. 이와 같이 언약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신론에서부터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고, 언약백성으로서 교회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어가는 실제적인 실천성과 역동성을 담아내는 근원적 원리였다. 이것은 낙스의 언약사상에 힘 입음바 크다. 낙스는 1560년에 “An Answer to a Great Number of Blasphemous Cavillations Written by an Anabptist, and adversaries to Gods eternall Predestination”라는 제목으로 예정론을 서술하면서 교회의 본질이 선택사상에 기초하는 것을 인정했지만 로마 카톨릭의 부패가 만연한 스코틀랜드 지역에 속히 성경적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국가와 교회의 개혁을 구체적이며 효과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언약적 사명을 고취시키고 이 언약의 책임성에 따라서 전 사회를 개혁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했던 것이다.

 

2) 언약공동체로서 장로정치

 

장로정치도 언약공동체로서 교회의 의미를 기초해서 교회정치의 개념을 고백한다.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실천하는 언약공동체로서 교회를 이해했기 때문에 교회의 정치도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집행해야 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이해하여 장로정치가 가지고 있는 역동적이고 실천전인 생동감을 강조했다. 언약공동체로서 장로정치의 내용은 크게 3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언약의 주체인 동시에 교회정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다. 두 번째는 교회정치의 원리가 되는 언약으로서의 성경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세 번째로 언약의 집행자로서 치리회를 통한 교회통치원리이다. 이 원리가 20장 “총회와 그 힘과 권위 및 총회의 소집의 이유에 관하여”(De Conciliis Generalibus, Deque Eorum Potestate, Authoritate et Causis cur Cogantur)라는 제목에 나타나듯 교회정치는 한 개인이나 회중 전체에 의해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의한 “교회회의정치(총회)”를 고백하고 있다.

 

3) 언약의 성취로서의 성례론

 

성례론은 “성례전은 보이는 표지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공허한 고백을 배격한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의 단순한 외적 의식이나 기념이 아니라 “은혜언약”(foedus gratiae)의 실제적 성취로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과 교제의 기쁨을 누리는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선물임을 언약사상에 기초하여 역동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세례와 성찬을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에 연결하여 실제적으로 성도 개인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주는 실천적인 유익들을 생동감 있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옛 계약의 성례전과 같이 새 계약의 성례전”이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구약의 성례전을 “옛 계약”(the Old)으로, 신약의 성례전을 "새 계약"(the New Testament)으로 언급하면서 성례전의 언약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낙스가 1550년에 “주님의 성찬과 성경에 관하여”(A Summay, According to the Holy Scriptures, of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라는 글을 통해서 일찌감치 제시한 것처럼 성례는 단순한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교회가 무서운 신앙의 핍박과 생명의 위협과 고난과 환란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통해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을 쏟아 부어주는 충만한 은혜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4) 언약의 대상으로서의 국가관

 

이 신조는 교회통치자인 장로들을 언약의 대상임을 고백한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국가 통치자들도 시민적 평안과 질서를 위해 하나님과 언약 관계 속에 맺어진 언약의 실제적 대상으로 고백하는 역동적인 국가관을 제시 한다. 즉 이 고백서는 24조 “국가 공직에 관하여”(De Magistratu Civili)의 항목에서는 “제국의 황제, 왕국의 왕, 영지의 군주, 도시의 관리의 권력과 권위는 하나님의 신성한 명령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또 인류의 이익과 복지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또 제정하신 것”(to be distinguished and ordained by God)이라고 언급하는 것처럼 국가의 종교적 의무를 단순하게 소극적으로 고백하지 않고 언약적 관점으로 연결하여 아주 적극적으로 발전 시켰다. 권세의 근원은 백성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세우신 것임을 엄숙하게 고백한다.

이와 같은 이해는 낙스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낙스는 「잉글란드인에게 보내는 신실한 훈계」(A Faithful Admonition to the Professors of God's Truth in England, 1554), 「불링거에 대한 응답으로서 합법적인 왕에 대한 순종에 관한 어떤 질문들」(Certain Questions concerning Obedience to Lawful Magistrates, with Answers by Henry Bullinger, 1554),「귀족과 지주들에 대한 호소문」(The Appellation from the Sentence Pronounced by the Bishops and Clergy: Addressed to the Nobility and Estates of Scotland, 1558) 등의 글을 통해서 국가 위정자와 관리들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의 대상임 밝혔고,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개혁에 가장 적극적인 책임자로서 활동해야 함을 열정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언약적 국가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스의 저항론은 다른 개혁자들에 비해서 가장 발전적이었고 또한 자신의 나라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내용들을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낙스는「런던과 뉴캐슬, 버윅, 다른 도시에 있는 신실한 크리스천에게 보내는 권면과 경고」(A Godly Letter of Warning, or Admonition to the Fatihful in London, Newcastle, and Berwick, 1554), 「 악한 여성 통치에 반대한 첫 번째 나팔 」 (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erous Regiment of Women, 1558) 등에서 언약을 지키지 않고 교회를 핍박하는 악한 통치자는 백성들의 저항을 통해서 쫓아 낼 수 있다는 적극적 저항관을 소개 하였다. 이처럼 낙스는 국가 위정자를 언약의 직접적 대상으로 적용해 줌으로써 왕 스스로나 또는 백성들 전체가 각자 자신의 소명과 책임감을 더욱 실제적으로 이해하도록 했고 그 결과 교회의 개혁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정, 학교, 정치, 경제, 사회, 종교, 국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역동적인 실천적 책임감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5) 언약의 실천과 보존을 위한 직분론

 

직분론과 관련된 특징은 언약론에 기초하여 언약공동체의 직분자들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교회에서 실천하고 세상 끝까지 보존해야 하는 역동적인 사명감을 강화시킨 것이다. 이 직분론은 칼빈을 따라서 목사, 장로, 집사로 세분화 시켰으며, 논리적 체계보다 역동적이고 실천적인 표현을 우선했기 때문에 직분론의 표현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따로 구별하지 않고 전체 항목에 스며드는 방식을 취했다.

신앙고백서 22장 “성례전의 올바른 집행에 관하여”(De Recta Administratione Sacramentorum)란 항목에서 “로마 교회는 교회에서 성령이 세례를 받도록 지시하지 않은 여자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한다”라는 고백은 직분자를 단순한 의식 집행자로서 이해하기 보다는 구약의 대제장이나 선지자처럼 언약을 교회에 실천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신적사명의 수행자로 받아 들였다. 단지 성례전 의식을 수행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여자들도 편의상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집행자는 편리성보다도 철저한 부르심의 원칙과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23장 “성례전의 참여자에 관하여”(Quibus Communicari Sacramenta Debeant)에서는 “우리 교회에서는 우리들의 교역자가 공적으로 또는 특별하게 주 예수의 만찬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신앙과 생활에 관하여 조사를 한다”라고 고백하면서 교회 치리자로서의 역할로 직분론을 설명하면서 “우리들의 교역자”(our Ministers)라고 말하면서 교역자를 복수로 표현했다. 언약공동체적 개념을 살리기 위해서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교역자에게도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례전에서 교회직원들의 역할과 관련해서 목사와 장로는 언약 집행의 신적 대리자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활을 “조사”(examination)할 수 있는 사법권을 소유했고, 성찬 참여의 자격을 “허락”(admittance)할 수 있는 치리권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제 1 치리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직분론을 실제화 시켰다. 당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지교회 치리는 목사와 장로, 집사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집사가 당회의 직원으로 참여하는 방식은 프랑스 치리회와 알 라스코의 런던 외국인 교회의 치리회와 비슷한 모습이기도 했다. 알 라스코의 치리회에서는 집사들이 요청이 있을 때만 자격을 얻었으나 제 1 치리서에서 제시되고 있는 집사의 성격은 치리회에 속한 고유권한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다. 직분자들의 역할은 당회뿐만 아니라 노회제도에 해당되는 지역순회감독자 회의와 총회 가운데서도 나타난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지교회의 치리회뿐만 아니라 지역을 넓혀서 교회의 제반 문제를 살피기 위한 지역순회감독자를 세웠다. 지역순회감독들은 오늘날 노회와 대회의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제 1 치리서에 나타나고 있는 형태는 아직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정립되지는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6) 언약의순수성을 확인하는 교회의 3대 표지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가운데서 가장 역동적이며 생동감 있는 표현이 교회의 3대 표지를 고백하는 18장이다. “참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별하게 하는 표시와 누가 교리의 판단자인가 대하여”(Quibus Indiciis vera Ecclesia Distinguatur a Falsa, et quis in Ecclesiasticae Doctrinae Controversiis Sitiudex)라는 제목에서부터 투쟁적 이미지가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본 항목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의 참된 선포”(the tru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와, “성례의 올바른 집행”(the right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of Christ Jesus)과 “권징의 신실한 시행”(ecclesiastical discipline uprightly ministered)을 제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말씀과 성례는 칼빈 때부터 철저하게 제시되어 왔지만 본 고백서에서는 “권징”에 대한 부분도 명확하게 교회의 표지로 정립을 해 놓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권징에 대한 낙스의 특별한 관심은 스코틀랜드 국가가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심각하게 부패해 있었고, 또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전쟁의 위협을 항상 받는 형편에서 교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함과 또한 언약을 순수하게 지켜가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생애 후반기에도「스코틀랜 총회에서 인준된 금식과 출교의 형식」(The Order of the General Fast, and the Form of Excommunication Approved by the General Assembly of the Church of Scotland, 1566-1569),「공적 회개와 출교서」(The Order of Excommunication and of Public Repentance, 1569)라는 작품들을 저술하면서 권징의 효력이 스코틀랜드 교회 안에 바르게 정차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에 나타난 언약신학적 특징

1) 예정론에 기초한 교회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관은 “그 교회는 …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다”라는 고백처럼 언약의 주체와 대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정론을 언급했으며, 이 예정론을 통해서 교회본질의 조직성과 체계성을 높였다. 예정론의 근본원리는 선택과 유기 사상인데「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은 언약의 실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선택사상을 언급했다면 본 고백서는 언약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선택사상을 언급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예정론에 기초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회론을 비판하는 자들은 바로 이 예정론 때문에 본 신앙고백이 번쇄적이며 사변적 스콜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이형기 교수는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론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다른 개혁교회 신앙고백들과 일치를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윤선 박사는 제25장을 강해하면서 “이 교리는 참된 신자들이 선택된 사실과 그들이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단체라는 사실”이라고 언급하면서 선택사상과 교회관을 연결했고, 조석만 교수는 신앙고백서의 선택사상이 “이중예정(쌍방예정)”을 정립하는 단계까지 나갔기에 알미니안주의의 인본주의적 교회관을 막고 오히려 성도들을 부르시고, 모으시고, 세우시는 주체가 오직 하나님 자신임을 확고히 하는 하나님 중심적 교회관의 기틀을 정립 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중예정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자들과의 싸움은 더 나가서 예정의 방식까지 논쟁하게 했다. 본 신앙고백서 제3장 2항에서 “그가 어떤 것을 결정하실 때, 그것이 장차 있을 것으로 아시기 때문에 예지(豫知)하셨거나, 또는 그 가정된 조건들에 근거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지했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을 결정하신 것은 아니다”라는 언급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도르트 신조 이후 계속 주장했던 “조건적 예정” 방식의 예정론 논의를 “무조건적 예정(절대적 예정)”의 고백으로 반박한 중요한 표현이다. 인간의 의지적 결정을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보다 앞세우고 예정론의 근원으로 설명하는 알미니안적 표현은 결국 예정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었기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예정론의 가치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는 “무조건적 예정”이란 신학적 표현을 선택했던 것이다.

 

2) 언약의 실천적 표현수단으로써의 예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예배론은 은혜언약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집행하는 실천적 표현수단으로 정립한다. 즉 예배의 참여와 존중은 언약의 참여와 존중에 대한 표현이며, 반면에 예배의 회피는 언약을 거절하는 행위로 체계화 했다. 제21장은 “예배와 안식일”(Of Religious Worship and the Sabbath-day)의 항목을 따로 설정해서 예배의 중요성을 확립한다. 각 내용은 “예배의 주권”, “예배의 대상”, “기도”, “기도의 대상”, “예배의 요소들”, “예배의 장소”, “예배의 시간”, “안식일과 주일” 등 8 가지로 세분화 했으며, 이 8 가지 항목은 크게 둘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예배의 정의, 둘째는 예배의 체계적 요소들이다. 언약의 실천적 표현수단으로써 예배는 엄밀한 주일성수를 통해서 가장 깊이 체계화된 것도 독특한 특징이다.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 신앙고백서는 “주일성수”를 예배론의 핵심으로 체계화 했다. 특히「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에서는 예배의 체계적인 질서를 “십계명”과 연결해서 제시해 주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런 독특성에 대해서 윌리암슨은 “1계명부터 4계명까지로 나눠서 예배의 ‘대상’, ‘방식’, ‘자세’, ‘시간’ 등으로 세분화 될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3) 언약공동체로서의 질서를 강조한 장로정치

(1) 장로회에 의한 정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제시하는 교회정치의 첫 번째 원리는 언약의 사명자로서 장로들에 의한 복수정치원리이다. 본 고백서는 언약의 사명자로서 목사와 장로가 소유하는 치리권을 회원 개인에게(uni) 두지 않고 장로회원 전체(unitati)에 둠으로 언약집행의 균형을 체계화시켰다. 제30장 1항은 “예수께서는 세속의 위정자와는 구별된 교회 직원들의 손에(in the hand of church officers) 교회의 정치를 제정해 주셨다”라고 고백함으로 교회직원을 복수 개념으로 표현했다. 2항에서도 “이 직원들에게는(to these officers) 천국의 열쇠가 맡겨져 있다, 그들은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they have power)”라는 복수 개념을 사용했다. 그리고 4항은 “교회의 직원들(the officers of the Church)은 당사자의 범죄와 과실의 성격에 따라서 권계, 일시적인 수찬 정지, 그리고 교회에서의 제명을 행할 수가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 복수정치 개념과 이들이 갖는 권위는 통치하고 다스리는 치리권의 개념임을 밝혔다.

복수정치의 치리권에 대한 장로정치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대표 중 한 사람인 죠지 길레스피(George Gillespie)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는 위에서 지적한 장로들에 의한 치리회 구성을 이미 스코틀랜드 교회에 제시한바 있고, 그의 책 「아론의 싹난 지팡이」(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1646)란 책을 통해서 에라스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장로정치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유고작으로 출판된 그의 「논문집」(The Works of George Gillespie)에서 카톨릭 교회와 영국 국교회의 정치원리들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장로회(unitas)에 의한 정치원리를 확립할 정도로 본 신앙고백서에 장로정치원리를 체계화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감당했다.

 

(2) 교회회의의 단계적 구성에 의한 정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정치는 언약 실천의 유대성(relationship)을 토대로 언약집행의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질서를 높이기 위해서 장로들의 치리권을 당회에서 노회와 총회로 확대하는 교회회의 단계적 구성원리를 강조한다. 이처럼 상회와 반드시 연결해야 하는 교회정치원리가 장로정치의 두 번째 핵심이다. 하지만 이 연결의 성격을 어느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즉 그것은 개교회와 노회의 연결 관계에 대해서 “철저한 연결”(must be)인가 아니면 “느슨한 연결”(may be)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이것은 “회중교회”와의 논쟁을 말한다. 민주주의 형태의 회중교회 방식은 각 지교회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형태를 취한다. 노회를 통해서 전체 교회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개인 목사를 중심으로 당회 중심의 치리만을 인정하는 방식이다. 두 논쟁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교회들의 연합이 반드시 필요함을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31장 대회와 협의회 항목은 이 상회와의 관계를 “더 나은 교회의 정치와 건덕(健德)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노회나 총회로 불리는 모임들이 반드시 있어야(ought to)한다”고 언급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장로정치는 한 개인도 아니요, 또한 여럿도 아닌 목사와 장로를 통해서 다스려져 가는 대표자들에 의한 복수정치이다. 즉, 치리권을 가진 장로들(장로회)에 의한 정치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지교회는 반드시 노회나 총회 같은 상회와의 유기적 연결을 통해서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교회회의 단계적 구성을 인정하는 정치임을 고백하고 있다.

 

4) 언약성취의 의식적 도구로써의 성례론

(1) 은혜의 수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언약의 실제적 성취의 특징뿐만 아니라 언약성취의 의식적 도구로써 성례론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즉 성례는 은혜를 공급하는 보편적인 은혜의 수단으로써 유형교회의 질서를 확립하는 수단으로까지 그 의미를 확대시켜서 성례론의 체계성을 높였다. 이 신앙고백의 성례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변증한 고백이다. 첫째는 재세파가 영적은혜만을 강조하면서 보편적 은혜의 질서를 무시한 것에 대한 변증이다. 즉 재세례파는 외적질서를 무시하고 오직 신비적 내적인 은혜의 수단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본 신앙고백서는 성령께서 외적인 질서를 사용하여 은혜를 주실 주 있음 고백한다. 제14장 1항은 “믿음의 은사는 … 말씀과 성례집행과 기도에 의하여(은혜의 수단) 믿음의 은혜는 증가되고 강화된다”고 고백하면서 교회 안에 세워 주신 보편적 질서 중 하나로 더욱 강조했다.

둘째는 로마 카톨릭이 7 성례를 주장하면서 성례가 그 행위를 자동적으로 역사한다(ex opere operato)는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7 성례를 내세워 외적인 성례가 그 행위를 통해 자동적으로(ex opere operato) 역사함을 주장한다. 내적인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고 단지 신부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는 외적 수단만이 유효함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요리문답은 161문에서 “성례가 구원의 효력 있는 방편이 되는 것은 그것들 자체 안에 있는 어떤 능력이라든지, 혹은 그것들을 집행하는 자의 경건이나 의도에서 나오는 어떤 덕행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다만 성령의 역사와 그것들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축복으로 말미암는 것이다”고 고백하면서 성례의 힘은 성령과 그리스도에 기초한 은혜의 수단임을 강조했다.

 

(2) 권징의 수단

 

본 고백서의 성례론은 언약성취의 의식적 도구인 “권징의 수단”으로 고백하기도 한다. “권징의 수단”이란 언약의 부패를 막고 보존하기 위한 유형교회의 치리절차의 과정이다. 이것을 제30장 4항 “권징”(Of Church Censures) 항목에서 “이러한 목적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교회의 직원들은 당사자의 범죄와 과실의 성격에 따라서 권고, 일시적인 성찬 정지, 그리고 교회에서의 제명을 행할 수가 있다.”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성례를 권징의 도구로 적용하여 성도의 죄를 바로잡고 성화시키는 교회의 중요한 외적 도구로서 구별했다.

 

5) 언약적 책임으로써의 정교분리의 원칙

(1) 1647년 초판의 국가관

 

이 신앙고백서의 국가관은「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처럼 언약의 집행자요 하나님의 사자(롬13:4)로 고백하지만,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국가 위정자의 언약적 책임의 역할과 범위를 엄격히 분리함으로 정교분리원칙의 체계성을 높였다. 즉 말씀과 성례와 총회 소집권은 교회 직원들의 권한으로, 그리고 시민질서와 교회의 보호는 국가 위정자의 권한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왕권중심의 독특한 종교적 배경과 에라스티안파의 영향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7년 초판은 “총회 소집권”과 “교회 치리권”을 국가 위정자에 위임하는 내용을 고백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20장 4항, 제23장 3항과 제31장 2항이다. 이 부분에서 국가 위정자는 이단들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이단방지 및 예배와 권징을 개혁하기 위해서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또한 대회와 협의회를 소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직원들과 함께 치리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치리권인 권징의 행위도 행할 수 있는 권한을 합법적으로 소유함을 지적했다. 비록 초판에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인해서 국가 위정자의 권한이 강조된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본적인 정교분리의 개념을 완전히 제거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초판에서도 제20장, 제23장, 제25장에서 이미 두 영역을 구별해 주고 있듯이 근원적인 정교분리 개념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해야 한다.

 

(2) 1729년 수정판의 국가관

 

1729년 수정판은 국가관에 대한 결정적인 수정을 제시한다. 국가 위정자가 총회 소집권과 교회 치리권을 갖지 못하도록 수정해서 시민보호의 언약적 책임에만 전력하게 만듦으로 국가관의 논리적 체계성을 강화하였다. 이 문제는 미국장로교회의 초기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스코티시-아이리쉬(Scottish-Irish)와 영국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한 미국장로교회는 1729년 필라델피아 대회에서 교회문제에 대한 국가적 위정자의 참여를 만장일치로 거절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표준 교리로 채택할 것을 정식으로 결정했다. 또한 1736년에 교회가 “교리 채택안”(The Adoption Act)이라 불리는 이 신앙고백서에 어느 정도까지 충실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대회는 국가 위정자의 총회 소집권과 교회 치리권을 제거한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선언했다. 이런 수정에 대해서 프린스톤의 조직신학자인 핫지(A. A. Hodge)도 이러한 작업을 “에라스투스적 오류에 가깝다고 인정되는 것을 일체 제거하는 행위”로 평가했다.

 

6) 언약적 사명자로서의 체계적 직분론

(1) 예수님의 3직 위임자로서의 목사

 

직분론은「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처럼 언약 실천의 사명자와 보존의 책임자로서 직분론을 고백하면서도 직분자들의 언약적 책임에 대한 고유한 범위와 유기적 관계를 확대하여 직분론의 조직성과 체계성을 높였다. 언약의 집행자인 목사와 장로, 집사는 유형교회의 질서를 바로잡고 돌보며 세워가야 하는 항존직(ordinary officers)으로써 상호 협력적이며 유기적 질서를 갖는다. 신앙고백에서는 목사직을 예수님의 3직을 위임한 가장 중요한 역할로 소개한다. 장로직과 집사직은 목사직을 설명하는 내용 안에서 다루거나, 아니면 정치모범에서 각 역할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목사의 역할은 우선 제30장의 “세속의 위정자와는 구별된 교회 직원들의(in the hand of church-officers) 손에 교회의 정치를 제정해 주셨다”라는 항목에서 교회 직원의 독립된 정체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성례의 집례 의무는 “세례를 주되, 합법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복음의 사역자인 목사에 의해서(by a minister of the gospel, lawfully called thereunto) 집례되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목사의 위치를 더 강화했다.

 

(2) 행정적 집행자로서의 장로

 

장로의 존재와 역할은 주로 행정적 집행자로서 치리회를 구성하는 직분과 관련해서 소개한다. 장로는 치리회에서 성도들의 대표자로서 의미를 가지며 교인들을 돌아보고 치리하는 권징사역을 통하여 목사와 함께 유형교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체계화하는 역할로 구별된 것이 특징이다. 제30장 2항에 “이 직원들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맡겨져 있다”(to these officers)라는 고백이나, 4항에 “교회의 직원들은 당사자의 범죄와 과실의 성격에 따라서”(the officers of the Church)라는 고백에도 장로가 함께 참여하는 치리회로서 복수정치의 개념을 정립해 주고 있다. 제31장 대회와 협의회의 항목에서도 노회와 총회를 구성하는 대표자로서 “교회의 감독자들”(overseers)과 치리장로로서 “개교회의 치리자들”(other rulers of the particular churches)을 동시에 언급했다. 이처럼 장로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유형교회를 좀더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강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 당회의 보조자로서의 집사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달리 이 고백서는 집사직을 따로 설명하고 있지 않고 다만 당회의 보조자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 집사직은 정치모범에서 “또 더러는 일반적이며 계속적인 것인데 목사와 교사와 또다른 교회의 치리자인 장로와 집사이다”라고 언급한다. 집사직도 목사, 장로직과 마찬가지로 교회질서를 조직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에 많은 강조를 하고 있다. 특히 “개교회의 교직자에 대하여”(Of the Officers of a particular Congregation)라는 항목에서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일에 특별히 봉사할 이들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직분의 숫자는 교회의 형편에 따라 결정한다. 그리고 이 직분 맡은 자들은 편리하게 정한 시간에 회집하여 교회의 제반 모든 일을 각기 직책에 따라 처리한다”고 언급함으로써, 당회의 다스림 안에서 구제와 분배를 주 업무로 행사하는 집사직의 독특성을 강조해 주었다.

 

7) 언약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교회의 2대 표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은 언약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교회의 2대 표지를 고백한다. 참된 교회의 2대 표지는 언약의 내용인 성경을 바르게 설교하는 것과 언약 실천의 의식적 도구인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다. 본 신앙고백서는 언약의 정체성과 체계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말씀과 성례의 변증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는 2대 표지로 제한했고, 권징은 단지 보조적인 역할로 구별하므로 교회표지의 조직성과 체계성을 높였다. 신앙고백에서 25장 4항에서 첫 번째 표지인 말씀의 강조를 살펴보면, “복음의 교리를 가르치고 받드는데 따라,(according as the doctrine of the gospel is taught and embraced)”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은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들이 “말씀의 참된 증거”라고 표현하는 것과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말씀이라는 포괄적 의미보다는 “교리”(doctrine)라는 신학적 표현을 선택하여 체계적 성경교육의 교육적 기능을 더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회표지는 성도를 낳고, 기르고, 교육하고, 변화시키는 교육적 기능의 유형교회 성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거듭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유형교회의 설명 가운데서 “이 유형교회를 떠나서는, 즉, 교회 밖에는 통상적으로 결코 구원받을 수가 없다”라는 강경한 표현을 담아서 체계적인 교육적 기능으로서 유형교회의 성격을 드러내 주었다.

 

Ⅲ.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는 칼빈의「제네바 교리문답 」과「제네바 신앙고백서」의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성례의 4 형식을 기반으로 해서 성경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라는 7개의 조직신학적 배열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이 고백서는 논리적 체계보다는 교리전달의 역동성과 생동감을 세부 항목에 배열했고, 설교적인 권면과 예언자적이며 웅장한 표현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는 교리의 체계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전체를 조직신학의 논리적 형식으로 정립한다. 교회론은 우선 7개의 조직신학 구조 중에 구원론과 종말론 사이에 배치되었다. 다음으로는 교회본질, 예배와 장로정치, 성례, 교회와 국가, 교회표지, 직분론 등과 같은 교회론의 중요한 구성요소들을 가장 완벽하게 논리적이며 조직적으로 체계화시켰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의 특징은 언약신학을 중심으로 역동성과 실천성을 강조한 6개의 주제를 고찰해 보았다. 은혜언약에 기초하여 언약의 백성으로 고백하는 교회관과 언약공동체로서의 장로정치와 언약의 성취로써의 성례, 언약적 대상으로서의 국가관, 언약의 실천과 보존을 위한 직분론과 마지막으로 언약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교회의 3대 표지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의 특징은 언약신학을 중심으로 논리성과 체계성을 확립한 것이다. 이것은 7개로 고찰해 보았다. 즉 언약과 예정론에 기초한 교회관과 언약의 실천적 표현수단으로써의 예배와 언약공동체로서의 질서를 강조한 장로정치와 언약성취의 의식적 도구로써 성례관, 언약적 책임으로써 정교분리의 원칙, 언약적 사명자로서의 체계적 직분론과 마지막으로 언약의 순수성을 확인하는 교회의 2대 표지이다.

이처럼 신정통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개혁교회 신조의 교회론 구조와 내용들이 스콜라적이며 폐쇄적인 교조주의적 편협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목회현장에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을 변증하기 위해서 본 연구는 신조사적인 관점에서「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회론 구조와 언약신학 중심의 교회론을 분석하여 개혁교회 신조의 교회론이 갖고 있는 역동성과 체계성의 우수성을 오늘날 한국교회의 나아갈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selck



외식을 조심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마태복음 6장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놀라운 진리들을 담고 있다. 그 진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우리는 6장 1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달리 말해,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간단한 말씀 한 마디가 놀라운 진리의 파노라마를 시작하는데,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외식에 대한 원리를 소개해 주고 있다.

외식의 개념

1) 거룩에 대한 재정리

동양의 금욕주의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우뚝 솟은 성 모퉁이에 먼지와 재를 둘러쓰고 늘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어느 여행자가 사진 한 장만 찍자고 부탁을 하자 그 사람은 ”잠깐만요, 내게 쌓인 재를 다시 잘 꾸미고요”라고 말했다.

기독교계 안에는 재를 다시 보기 좋게 꾸미는 일이 많다. 우리는 더 낫게 보이기 위하여 우리들의 경건의 모습을 바꾼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적지만 이와 같은 꾸밈들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한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는 종교적인 속임수는 우리에게 아주 흔한 일이다. 특별히, 주위에 진실로 거룩한 사람이 있을 때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외식의 속임수를 쓰지만, 사실은 엉터리, 가짜인 것이다.

2) 거룩의 실체

성경을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진실되고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외형적인 꾸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은 당신이 겸손하게 보이든 아니면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든,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예수께서 계시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항상 외형적인 꾸밈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나타내려고 애썼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1-18절에서 다루시는 문제이다.

외식에 대한 심판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외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어떻게 보시는가를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한다. 외식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외식은 창세기에도 있고 요한계시록에도 있다. 세상이 창조될 때 그곳에 외식이 있었고 세상의 끝에도 외식은 있다. 이 외식은 모든 종교계 안에 있으며 진정한 기독교계 안에도 있다. 12명의 주님의 제자들 안에도 외식자가 있었으며 초대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 외식자가 있었다. 이 외식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이것은 악한 인간이 종교인 행세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1) 구약에서

아모스 5장 21:24절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이 외식의 문제를 다루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제시하고 명령한 이 모든 것들을 보라. 이제 내가 이것들을 기뻐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는 너희가 이 모든 나의 명한 것들을 뒤틀고 굽게 했으며 그 목적을 완전히 변조시켰기 때문이다. 너희는 외적인 것에 전념했고 내부는 썩었으며 텅비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이며 위선이다.

2절과 5절 그리고 16절에 나와 있는 ”외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휘포크테스」(hupokrites)이다. 고대 헬라어에서 이 말은 무대 위에서 어떤 인물의 역할을 하는 배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배우는 그의 삶에서의사실이 아닌 것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진실로 그의 삶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만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6장 1상반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한 것에 주의하라. ”보이려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데아오마이」(theao-mai)이다. 이 단어의 처음 네 글자는 영어의 극장(theater)의 처음 네 글자와 같은데, 달리 말하자면 마치 당신이 극장에 놓인 어떤 전시물인 것마냥 관객들 앞에서 배우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의로운 행실을 극적으로 과장하거나 꾸며서 하지 말라. 당신을 바라보는 주변시선 때문에 당신의 경건이나 신앙심을 꾸미지 말며, 거룩한 체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 그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실 영적인 사기꾼이다.

이 외식의 문제는 선지자가 탄핵할 정도로 대단히 큰 종교적인 죄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이를 지적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패망(북왕국의 포로됨)의 주요 원인이 진실한 신앙심 대신 거짓 신앙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한 데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일이 남왕국에도 일어났는데 이사야가 그 문제를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1-18)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명하고 세운 모든 제물과 월삭과 제사와 분향들을 내가 싫어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의 행하는 것들이 속임수였기 때문이다. ”너희의 마음이 눈처럼 희고 양털처럼 깨끗하기 전에는 내 앞에 나오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도 그 당시 많은 죄인들을 대하셨다. 하지만, 어떠한 죄인도 마태복음 23장 13-36절에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신 것처럼 꾸짖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가장 통렬한 말을 영적 위선자들, 영적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 악한 마음에 경건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에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이사야 9장 17 상반절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이사야 10장 5-6 상반절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외식한 나라)를 치게 하며...”

이사야 65장 5절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달리 말하면, ”나는 거룩하니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내가 부정할까 염려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 대하여 ”내 코의 연기요...”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코로 연기를 마셔 본 적이 있는가? 코로 연기를 마시는 것은 굉장히 신경을 자극하게 한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로 인하여 굉장히 진노하셨다.

욥기 15장 34 상반절 ”사곡한(외식) 무리는 결실이 없고 ...”

욥기 8장 13 하반절 ”...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욥기 27장 8절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욥기 36장 13 상반절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외식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 신약에서

주님이 사셨던 시대

주님이 계시던 당시의 유대교는 외식의 종교로 규정지을 수 있다. 마가복음 7장 6-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지적하셨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외식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나 그 마음은 멀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을 인간의 전통으로 대신하여 불합리한 외식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에 외식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외식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 맨처음 나타난 외식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였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5장 1-11절에 나와 있다. 그들은 판 것 중에서 사실 얼마를 감춰 두고 주님께 모두 드렸다고 속임수를 썼다. 하나님께서는 전 교회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들을죽이셨다. 당신은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고 그 이상의 외식자는 없었지 않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장래에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니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초대 교회의 외식자들이 있었고 교회 시대의 끝에도 외식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

버림받은 외식

우리는 성경에서 추한 외식자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1) 가인

그는 분명 농부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고 과시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위선에 찬 예배를 드렸다. 그는 많은 대가를 치르며 이 일을 했다. 그의 외식은 그의 의로운 동생을 죽여 놓고도 심히 화를 내는 것에서 나타나고 있다(창 4:3-16).

2) 압살롬

사무엘하 14장 33절-15장 12절에 보면 압살롬은 그의 아버지를 죽일 모략을 꾸미면서 그의 아버지를 껴안고 입맞추는 것을 볼 수 있다.

3) 요압

요압은 아마사의 입을 맞추면서 칼로 아마사를 찔러 죽였다(삼하 20:9-10).

4) 유다

유다는 이미 군병들과 자기가 입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잡으라고 계획을 다 짜놓고서 예수께로 나와 입을 맞추었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다(마 26:48-49).

5) 마술사 시몬

사도행전 8장 9-24절에서 시몬은 거짓으로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력이었다. 그는 그 마력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시몬의 외식을 드러냈다. 이와 같이 성경은 가인, 요압, 압살롬, 유다, 시몬 등 추한 외식자들의 외식과 그 방법들을 폭로하고 있다.

6) 바리새인과 헤롯당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기회를 찾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외식을 했다.

외식에 대한 비유

외식은 성경에 한 번도 좋은 것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성경은 외식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1) 누룩(눅 12:1)

이것은 온 덩어리에 퍼지게 하는 파급 효과가 큰 것이다.

2) 회칠한 무덤(마 23:27-31)

이 무덤은 더러운 썩은 것들과 뼈들이 들어 있지만 그 위를 하얗게 회칠을 해서 아름답게 단장을 한 것이다.

3) 회칠한 담(행 23:3)

이 담은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은 것이어서 보기 흉한 색깔인데, 그 위에 하얗게 회칠을 한 것이다.

4) 평토장한 무덤(눅 11:44)

이 무덤은 평평한 데다가 풀이 많이 나 있어서 더이상 무덤으로 분별할 수 없는 무덤이다. 누구든지 그 위를 밟는 자는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5) 은을 입힌 토기(잠 26:23)

이것은 금이 간 것을 덮어 가리우기 위하여 은으로 입힌 것이다.

6) 가라지(마 13:38)

가라지들은 곡식들 가운데서 자란다.

7) 양무리 가운데 양의 탈을 쓴 이리(마 7:15)

8) 물 없는 샘(벧후 2:17)

모든 것이 정상같고 좋은 샘같이 보이지만 두레박이 내려갈 때 부딪혀 소리만 나고 물이 없는 빈 샘이다.

9) 죄를 덮는 탈(살전 2:5)

10) 직업적인 애도자(마 9:23)

유대인들의 풍습 중의 하나를 보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자기의 옷을 찢는 것이 있다. 역사가들은 유대인들이 애도하는 뜻에서 옷을 찢는 일이 아주 형식적이고 외식적이어서 그들은 옷을 찢을 때 서로 이은 곳들을 찢어서 다음날 쉽게 다시 꿰맬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외식이다. 속으로는 슬퍼하지 않으면서 겉으로 슬퍼하는 체하는 것, 내적으로는 의롭지 않으면서 겉으로 의로운 체하는 것, 겉을 잘 꾸며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 하는 것이 외식이다.

외식의 부패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다루신 것이다. 주님은 ”조심하라”(Beware)고 말씀하셨다. ”조심하라”고 번역한 것이 ”주의하라”(Take heed)는 번역보다는 더 나은 번역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의 심각성에 대해서 알도록 강하게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의로운 행동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점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조심하라는 것이다. ”조심하라”는 말은 어떤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고 심각하고 엄한 불같은 경고이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왜냐하면 조심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결과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외식에 관한 말씀의 전후 관계

이 외식에 대하여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산상 수훈(마 5-7장)의 전후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 후의 모든 세대들에게 의의 진실한 표준으로서 주신 것이다.

1) 의의 표준을 세움

의의 기초

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마 5:1-12) 주님은 ”의의 특성”으로부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의의 영향”으로 옮겨 가셨으며(세상의 소금과 빛 / 마 5:13-16) 그런 다음 ”그 의의 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특성

여기에서 의의 특성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청결하지도 온유하지도 않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도, 화평케 하는 자들도 아니었으며, 의에 주리지도 긍휼히 여기지도 않았다.

영향

의의 영향은 빛과 소금과도 같다. 이것은 부패하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며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상을 부패하게 하고 어둡게 만드는 부분들이었다.

표준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주님은 의의 표준들에 대한 목록을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표준들 어느 것 하나도 맞게 생활하지 못했다. 그들의 특성, 그들의 영향, 그들의 의의 표준은 전적으로 하늘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의의 균형

바리새인들에 의해 오용됨

마태복음 6장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의의 표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한 가르침보다는 바리새인들이 행하고 있는 의에 대해서 더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5장에서 주님은 ”이것이 너희가 가르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렇다”고 말씀하시며, 6장에서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표준은 그보다 우월하다”고 하셨다. 첫째로, 주님은 그들의 도덕을 다루셨고 다음에는 그들의 신앙을 다루셨다. 주님은 그들의 삶에서 그 도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셨다. 그들의 신학이 가짜였기에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도 거짓이었다.

참다운 종교는 도덕적인 표준과 그에 대한 합당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마 6:2, 5, 16)이 표준 이하인 것을 말씀하셨다. 그들의 신학과 종교적인 실행이 적합하지 못했다.

기독교계에 의해 오용됨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신학과 그에 따르는 실행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는 오직 실행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헌금을 조금하고 예배의 절차를 마치고 매일 성경을 읽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도덕적 표준을 가져야 한다.

또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도덕적인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종교성 없는 기독교라고 부른다. 이들은 반 교회주의자들이며 반조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무(無)에서 사회적 방법으로 도덕을 도모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두 가지에는 서로 균형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적절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교제가운데 기도하고 금식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서로 적절하게 실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2) 우월한 신앙의 표준

예수께서는 하나님 외에 인간사에 있어 아무도 세울 수 없는 신앙의 표준을 세우셨다. 이 표준은 인간이 세운 모든 표준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도덕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말씀으로 시작해서 이스라엘 선생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도덕적인 표준보다 우월한 표준을 말씀하셨다.

실행

마태복음 6장 5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2절에서는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6절에서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종교의 실행에 있어서도 그들 것보다는 우월해야만 했다. 그래서 주님은 듣는 자들에게 당시 그들 가운데 있던 표준과, 실행과, 의보다 우월한 그분의 표준과 실행과 의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전 조직에 대한 엄청난 고발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그 대화를 도덕과 연관된 의에서 종교의 실질적인 행실과 연관된 의로 옮기셨으며, 이 종교적인 실행의 의에서 당시 사회적인 의로 옮기셨다.

현세적인 것들

마태복음 6장 19-3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들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당신이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삶에 있어서 신학과 신앙과 매일의 접근 방법이 부적당하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25절에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주님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는가? 이는 바로 그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에 재물을 쌓는 일에 몰두해 있었고 그들의 생활을 염려하였다.

내가 이것에 대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신학이나 신앙이나 예배는 인간들이 만든 그 어떤 조직이나 신앙이나 신학보다 우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 기준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다면 나는 이방인이 되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방인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자.

도덕

마태복음 5장 47-48절에서 예수께서는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말해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표준보다 더 우월한 표준을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표준보다 우월한 것을 말씀하셨다.

실행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주님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현세적인 것들

마태복음 6장 32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달리 말해서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그 내용이나 예배나 매일의 삶에 있어 세상의 종교나 비종교적인 어떤 체제가 전혀 보지도 못한 우월한 표준을 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외식에 대한 선고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까?”라고 물어 오면 당신은 그에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의심할 것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편협한 분이셨다. 그분이 말한 모든 것은 진리였으며 다른 것들은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은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뒷받침하셨다.

이 설교에서 그분은 ”너희 사람들은 이 표준에 이를 수 없다. 너희는 내 나라의 표준에는 비참하고 형편없이 미달된다. 나는 왕이며 왕으로서 나의 왕국을 제시한다. 하지만 너희가 내게 주는 것들로서는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너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너희들의 노력으로는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점이다. 너희들의 선택과 종교 그리고 매일의 삶은 충분하지 않다. 너희는 너희들의 죄를 씻고, 깨끗하게 하고 너희에게 나의 나라에 맞는 새로운 성품을 줄 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적인 면에서 산상 수훈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지금 산상 수훈에서 특별히 종교적인 실행에 대해서살펴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의를 행할 때(종교적인 활동)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1). 주님은 그에 대한 세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곧 구제(2-4절)와 기도(5-15절)와 금식(16-18절)이 그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세 가지 예배의 요소를 지적하셨다. 구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할 행동으로서 우리 신앙과 더불어 행해져야 하며,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행동으로서 신앙을 갖고 해야 하는 것이며, 금식은 우리 자신에 관련한 것으로서 신앙으로 행해야 한다. 금식은 자기 부인, 훈련,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한 하나의 고행 또는 금욕을 다루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루며, 구제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다루고 있다.

이 세 가지가 아주 적절하게 우리들의 영적인 삶인 예배의 요소들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상징적인 순서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먼저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심령, 그리고 자신을 깨끗케 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금식은 자기 부인의 한 부분으로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도 올바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로부터 구제가 나온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제로부터 기도, 기도로부터 금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말씀하신다.

2, 5, 16절에서 ”너희가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라고 되어 있는 것에 주의하라. 주님은 ”만일 너희가”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가 ...할 때에 ...”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이는 그것들을 하나의 예배와 영적인 섬김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처음 1-4절 안에 세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다. 곧, 의의 실행, 종교의 위험성, 보상에 대한 약속이다.

의의 실행(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의로운 행위)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성경에서의 묘사

성경은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도승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망각하고 고난당하며 어떤 우리 안에 갇혀서 그 안에서 의를 행하는 금욕주의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어떠한 의로운 행동도 하지 말고 안보이는 데 가서 행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06:3)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사 58:2)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달리 말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의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이 그 의로운 행실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소원

당신은 ”그러나 여기에서는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목적 또는 의도를 말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의를 행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서 당신을 좋게 봐 주도록 의도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1) 확실한 동기의 업적

마태복음 5장 16절과 6장 1절 사이에는 상당한 대조점이 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의로운 행실)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은 ”말씀이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동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16절의 긍정적인 면은 사람들이 선행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며, 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2)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유혹

외식의 삶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이 경고에 관하여 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필요한 경고이다. 모든 선행에 외식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 외식이 침범해서 더럽혀지고 부패하지 않을 선행은 하나도 없다.” 나도 내 삶에 이러한 시험을 받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시험을 받으셨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에서보다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가르친 때도 있다.

당신은 당신의 헌신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 때문에, 구제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들로 당신의 헌신이 진실인 것을 보이려고 구제한 때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때로 미사여구로 가득찬 긴 기도를 드리고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흉하게 한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가끔 신령한 것들과 혼돈이 된다. 우리 모두는 이 외식의 시험을 받으며 때로 위선 가운데 행한다.

존경받기를 좋아함

어거스틴은 ”존경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경건을 죽이는 독약이다. 악덕은 다른 악한 행실을 가져오는데, 이 악덕이란(외식) 선한 행실을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외식을, 악덕을 덕으로 색칠한 경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 알리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다. 기도할 때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공 장소에 서서 크게 기도함으로 그들이 얼마나 신령한 자들인가를 알게 했으며, 금식할 때에는 얼굴을 거의 반쯤 죽은 사람의 모습처럼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얼마나 거룩한 사람이냐”는 말을 하게 했다. 우리는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춰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해야 한다.

3) 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두가지 죄

마태복음 5장 16절과 6장 1절은 서로 다른 죄들을 다루고 있다. 5장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겁내는 죄(겁장이)가 우리로 그와같은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소금과 빛이니 겁내지 말고 당신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주님은 외식에 관한 죄를 다루고 계신다. 나는 부루스(A. B. Bruce)가 이 두 가지를 알기 쉽게 하나로 말하였다고 본다. ”우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시험이 오면 숨겨야 하고 숨기고 싶은 시험이 닥치면 나타내야 한다.” 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의 충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그러한 시험이 올 때에 그 시험을 의로운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다.

두 제사

문제의 중심은 바로 마음의 문제이다. 당신의 동기는 어떠한가?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둘 다 똑같이 종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이 두사람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한 사람은 기쁨이 되고 향기로운 냄새의 제사가 되며 다른 사람은 그분의 코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될 수 있다.

삶에서 드러남

1) 말씀에 의해 조명됨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이 드러나는 것은 나쁠 게 하나도 없다.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바울은 자기의 거듭남에 대한 소식을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들었다고 말하였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24절). 바울은 영광을 자기가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다.

로마서 10장 9-10, 14절 우리는 우리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절). 우리는 공적으로 의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고 수도승이 되어 무용한 망각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를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엡 2:10). 다만 우리의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2) 그리스도에 의해 조명됨

주님은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공적으로 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주시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루하루를 흠없고 위엄있고, 죄없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이적과 표적과 기사들을 행하셨다. 그 모든 가운데서도 그분은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라고 말씀하셨다(요 5:30).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를 행하여 당신의 빛이 비취게 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 그러나 순수한 동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그들에게 인정받고 더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에서 한다면 조심하라.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 복스러운 소망 교의의 중요성:

이 교의는 증인으로서의 삶과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주된 동기를 부여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신자들에게는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은 참으로 복스러운 소망입니다! 휴거 (“들림 받음”)이라고 흔히 불리는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의 변화 혹은 들림 받음은 질고, 고통, 그리고 어려움에 종지부를 가져올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그때에 주님과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비록
몸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는 살아있지 않지만, 영혼은 잠자지 않고 늘 주님의 존전에 살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에게는 휴거는 복스러운 소망이 아닙니다. 뒤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반항적이고 불순종한 세상을 판단할 때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용서함을 구하고 하나님 자신과의 교제를 회복하기를 갈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짐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지우셨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형벌에 대한 것을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두셨습니다. 교회의 주된 사명이 다가올 심판으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휴거를 포함하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복스러운 소망이며,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이 땅을 통치하시기 위해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가시적으로 오실 때에 따라 옵니다 (스가랴 14:5; 마태복음 24:27, 30; 요한계시록 1:7, 19:11-14, 20:1-6).
이 천년 통치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과 (에스겔 37:21-22; 스바댜 3:19-20; 로마서 11:26-27), 우주적 평화의 확립을 가져옵니다 (시편 72:3-8; 이사야 11:6-9; 미가 4:3-4).

이 교의의 중요성:
사탄이 이 세상을 그의 손아귀에 그토록 꽉 붙들고 있어서 때때로 그러한 형편을 개선하는 기회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회의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재림하시기 전 그리고 마지막 때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기 전에 이 세상의 형편이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죄와 범죄, 그리고 자연의 재해들이 해마다 증가할지라도 우리들은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을 예언하였지만, 그러나 그 말씀은 세상 끝날에 하나님께서 승리자가 될 것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천년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하심이 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정부의 모든 실패한 체제를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마지막 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계속적으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은 미래의 어떤 날에 많은 수의 유대인의 마음이 그들과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신 메시야에게로 돌아 올 것을 믿고 있습니다.

@ 마지막 심판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때 죽었던 사악한 사람들 - 그리스도의 구원을 영접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 - 이 부활하고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 (그리스도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을 기록한 명단)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불과 유황이 끓는 못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마태복음 25:46; 마가복음 9:43-48; 요한계시록 19:20, 20:11-15, 21:8).

이 교의의 중요성: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죄와 사악한 자들이 형벌을 받지 않도록 내버려 두실 수는 없습니다. 한 거짓 가르침은 의로운 사람이건 의롭지 못한 사람이건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위배됩니다. 이 교리는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로마서 6:23), 마귀와 그를 따르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마련하신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는 영원토록 의인이 거하며 통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베드로후서 3:13; 요한계시록 21:22).

이 교의의 중요성:
하나님께서 그분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약속들은 매일의 삶의 고투와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천년통치 후,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며 아름답고 새로 단장된 세계를 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교의는 우리들이 장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다도 훨씬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옮긴 글
USA아멘넷 게시판/잠긴동산

멜기세덱

(qd<x,AyKil]m',  Melcisedevk , Melchisedec) 의의 왕

 

아브함 시대의 예루살렘 제사장(창 14:18). 후대에 이상적인 왕의 전형이 되어 이러한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 사장"이라고 칭하게 되었다(시 110:4). 히브리서에서 그의 특이한 지위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히 5:6-10, 7:).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1)
                                                  
<자료 1>

멜기세덱과 그의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은 창세기 14:18-20에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전장을 이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왕이란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부모가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다 하였다(7:2-3).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은 역사적 인물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나? 또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면 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비교하고 있는가? 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먼저 역사적 인물로서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중간 청동기 시대로서 B.C. 1500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돌라 오멜 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왕을 사로잡고 거기서 살았던 롯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의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동맹군을 격파해 롯을 구하고 탈취 당했던 물건과 많은 노략물을 얻어 돌아온다(창 14:1-16). 그러나 거기서 중심 인물은 그돌라 오멜 왕에게서 회복을 바랐던 소돔 왕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은 제사장 왕으로서 아브라함에게서 1/10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디의 누구였는가? 멜기세덱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거나 정의롭다는 뜻으로 합법적인 왕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으나, 의의 왕이란 해석이 적합하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도 멜기세덱을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 불렀다. 이 의의 왕이란 말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살렘이란 말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완성하다, 다 지불하다는 뜻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평화란 뜻이 옳다. 그러므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나 랍비들 그리고 조세프스는 시편 76:2을 따라 살렘을 시온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덱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다.
  
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아브라함이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서 선물을 받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해석된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한 손님을 맞이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살렘은 그리심 산과 동일시되며 이곳에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다스리며 사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창세기 14:18의 칠십인 역을 지지한다.1)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 사건 후에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이 생겼고 이들이 아론 제사장 계열과 합치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독과 멜기세덱은 같은 어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주의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제사장 왕들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B.C. 164ㅡ 63)고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사두개 파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견해는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멜기세덱은 천사장 전사로 나타난다.2)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정종이 분리되기 이전의 신정 정치체제에서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 그의 사역자(제사장)까지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역사성에 보다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멜기세덱을 소개하고 있다. 그를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며 출생과 부모와 족보가 없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에 적합한 분임을 지적하였다. 모세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도 레위 계통의 아론보다 더 근원적이시며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사실에서 레위의 제사장직을 초월하신다.

   1.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더 넓힌다면 레위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2. 그는 그보다 열등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3. 그는 레위같이 죽을 인간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히 사신다.3)

이렇게 하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다스리시며 평화를 구축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사 9:5-6; 32:17; 렘 23:5-6; 33:15; 단 9:24; 슥 9:1-10; 말 4:22).4)

   주
   1. George W. Buchanan, To the Hebrews(New York: Doubleday, 1972).  p.117
   2.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for the New Testament,  p.104
   3. George W. Buchanan, Op,cit., p.122
   4. Ibid.,
http://www.revdavidsuh.com/

 

<자료 2>

창세기 14: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나타나 제사장의 직능으로 떡과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써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다.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과 왕의 두 직능을 한 몸에 겸비한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자로 되고, 따라서 이상적 왕자는 `멜기세덱과 같은 자'라고 칭함을 받았다(시 110:4).

이것은 히브리서 5:6, 7에 있어서 그리스도에의 적용에 대성(大成)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엘람 왕˙고임 왕˙시날 왕˙엘라살 왕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했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정병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다메섹 좌편 호바에서 롯과 부녀, 그리고 재물을 다 찾았다. 돌아올 때 소돔 왕이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상술한 바와 같이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줌으로써 십일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멜기세덱에 대해 보는 관점이 많고 구구하지만, 히브리서 7:1- 17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는 영원한 제사장(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

 

그의 제사장직은 조계(祖系)를 전연 가지지 않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대제사장직과 유사하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탄생 2,000년 전에 이미 멜기세덱이란 인물로 예표되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히브리서 7:4, 7, 특히 7절에 "폐일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리만큼 영전이 컸다. 즉,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창 12:3).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점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증표다.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축복을 암시한다(마 26:26- 29).
     

그리고 `살렘'은 예루살렘일 것이다. 그 이유로써,

ⓧ 살렘은 이스라엘 사람의 가나안정복 전부터 예루살렘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 시편 76:2에서 살렘은 예루살렘(평화의 성읍, 평화의 소유란 뜻)의 단축형으로써 쓰이고있다. ⓩ 만일 멜기세덱이 다윗처럼 같은 이 도성의 왕이라면 시편 110:4에서 다윗의 주가 멜기세덱과 대비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①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호바와 다메섹에서 귀환하는 도상에 있었다는 것(창 14:15, 17, 18) 등의점을 들 수 있다.

http://cafe.daum.net/LoveBibleLove/DRaT/

 

<자료 3>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기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율법적인 대제사장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1) 멜기세댁이란 이름에 담겨진 메시야적인 의미
멜기세댁이란 이름에는 메시야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의의 왕인 것처럼 사3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장차 의로 통치할 왕’이란 그리스도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유대인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이란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예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은 가졌지만 그 분의 위치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http://www.bamjoongsori.org/board03.html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에덴 동산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차이에 대해 질문하신 분이 있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여러 분과 같이 나누고 싶어서 여기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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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동산은 인간이 창조 받은 원상태로 있던 곳입니다.  그 처음 창조받은 상태는 좋은 것이고 온전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 상태에 영원히 있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그로부터 더 완전한 상태로 나아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차이는 아마 에덴에서는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더 높은 상태는 타락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로부터 더 높은 상태, 타락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로 나아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인격적이고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면 주어지는 가장 완전한 상태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주께 순종해서 그런 상태로 나아 가지 못하고 타락한 상태에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무엇을 주장할 수 없는데도, 주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회복을 약속해 주시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시고 영인의 후손을 통햐ㅐ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전진해 온 사러ㅏㅁ들에게 그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여기 이 땅에서 이미 에수 님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 이들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극치"를 기다리게 되는데, 그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영광의 왕국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에댄과 '새하늘과 새 땅'의 차이는

(1) 새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제 더 이상 타락 가능성이 없고, 죄가 있지 않다는 데에  있고,

(2) 그 범위가 에덴은 국지 적이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전우주적이라는 데 에 있으며,

(3) 에덴은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을 바라 보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주께서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하여 무한 히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늘 주의 은혜 가운데서 강건하시를 기원합니다.

 

이승구 드림
출처 : http://blog.daum.net/wminb/7127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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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backsliding)과 배교(apostasy)는 전혀 다른 문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그들이 그리스도인으서의 친교를 포기했다. 그것은 배교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요한 사도는 또한,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서, 우리는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서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자들 중에서 오직 진실한 자들'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유념하자. 오히려, 그 본문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변함없이 진실하다는 것은 그들의 선택과 소명만큼이나 대단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런데 인내한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성경이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 13)라고 교훈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진실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인내(perseverance)다. 기독교의 신앙은 사회적 진화론과 완전함에 대한 진화론적 원리를 훌적 뛰어 넘는다. 우리의 신념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니라 '약자생존(survival of the weakest)'이다. 즉 자신들의 영적인 무력감을 달게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이제 '승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령께서 자라게 하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삶은 '손쉽게 행복에 이르는 3단계 전략'이라는 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일정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지냈던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쉬운 것이 아니며 언제나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만으로 여행할 수 있는 험난한 길로서, 거기에는 온갖 유혹과 두려움, 상급과 실패, 기쁨과 좌절이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 불어오는 풍랑에서부터 눈을 돌려, 스데반 집사와 같이 우리를 신원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신 천국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에 우리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양상에 부합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도 우리를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된다.

바울 사도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에 포함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경주에서 여러분을 이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장애물들을 잘 넘을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대견스러워할 만한 어떤 것으로 여러분을 빚어가고 계신다. 여러분의 완고함, 불성실, 의심 그리고 자기 의지는 하나님의 길을 가로막아 설 수 없다. 실로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Michael S. Horton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JuNick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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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기독교 부패와 타락은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성경 계첼� 대한 오해가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음을 교회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기독교적인 계시의 올바른 정의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계시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Ⅰ. 계시의 어원(語源)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갈라’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벗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창35:7). 헬라어로는 ‘아포칼뤂시스’는 ‘폭로하다’,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파네루운’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뚜껑을 연다’고 하는 뜻을 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계시란 가려지고 덮어져서 알 수 없도록 감추어진 것을 (커튼을 열어 보여 주듯이)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어 보이시는 섭리를 의미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하신 영광과 능력은 물론, 그의 본질과 속성 등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내시는 사역을 총괄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2. 계시의 정의(定義)

묵시(계1:1)라고도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신29:29;마11:27;롬16:25).

 

3. 계시의 개념(槪念)

인간이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방법뿐이다. 이 방법 밖에는 달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revelation)라고 말한다.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만 한정되어 사용되며,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 성격이 강조된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 능력, 속성, 성품, 의지, 뜻, 목적 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신다. 그래서 계시에 근거한 신학을 ‘계시신학’(啓示神學)이라 하고, 그리스도교를 ‘계시종교’(啓示宗敎)‘라 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 계시(啓示)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 내용(what)에 관한 것이고,

영감(靈感)은 그 내용이 전달된 방법(how)을 말하며,

조명(照明)은 그것이 왜 전달되었는가 하는 이유(why)를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계시의 필요성(必要性)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 보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알 수가 없다(욥11:7,8).

2)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한 부패성으로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다(엡4:18)

 

5. 계시의 구분(區分)

계시의 방법에 따라 '자연계시'와 '초자연 계시'로, 계시의 성격과 대상에 따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한다.

1) 방법에 의한 구분

(1) 자연계시(自然啓示) - 일반적인 자연현상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

(2) 초자연계시(超自然啓示) -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

2) 성격, 대상에 의한 구분

(1) 일반계시(一般啓示) - 창조에 기초하여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주시는 계시

(2) 특별계시(特別啓示) -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는 계시

 

*일반적으로 일반계시는 자연계시로, 특별계시는 초자연 계시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자연계시와 일반계시, 그리고 초자연계시와 특별계시는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반계시에도 자연적인 요소와 함께 초자연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으며, 특별계시에도 초자연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6. 일반계시(一般啓示, general revelation)

일반계시는 창조에 기초하여(시19:1-6;사40:12,26;행14:17;시8:1;시104:24)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주시는 계시로서(마5:45;행14:17), 자연법칙(롬1:20)과 인간의 역사(시9:16;단4:25)와 인간의 양심(롬2:15)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택한 자나 택하지 않는 자의 구별없이 모든 인류에게 계시를 하셨다는 뜻이다. 자연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하며, 그 성격상 ‘비언어적 계시’(non-verb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창세로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1) 일반계시의 목적(目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

2) 일반계시의 방법(方法)

(1)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지혜, 선, 능력들을 보여 주고 있다(시19:1;롬1:20).

(2)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나타내 준다(전9:1;롬11:36).

(3)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이 없다함을 핑계치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3) 일반계시의 특징(特徵)

(1)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2) 신자와 불신자의 접촉의 장을 제공한다.

(3) 특별계시의 보조역할을 한다.

4) 일반계시의 불충분성(不充分性)

(1) 하나님의 인격이나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죄의 결과로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종교를 위한 충분한 기초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구원의 방도인 그리스도를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마11:27;요14:6,17:3;행4:12).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권능, 섭리 등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이나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지 않는다.

 

7. 특별계시((特別啓示, Special revelation)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격에 의해 행하신 특별한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마11:27;엡3:3,5;벧전1:12).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게 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특별계시가 요청되게 되었다.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완성은 성경이다(롬16:25,26). 초자연적 방식을 통해서 제한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초자연적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1) 특별계시의 필요성(必要性)

인간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일반계시를 통하여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수행할 특별한 신적사역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일반계시의 모호한 점을 해석하거나 인간의 잘못된 견해를 정정한다.

(2)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계시를 인간에게 마련해 준다.

(3) 죄의 권세에서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의 영적상태를 전적으로 변화시킨다.

2) 특별계시의 목적(目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

 

3) 특별계시의 방법(方法)

(1) 하나님의 현현(顯現, theophany)

① 그룹들 사이에 나타나셨다(시80:1,99:1).

② 불, 연기, 구름 속에 나타나셨다(창15:17;출3:2,33:9;시78:14,99:7).

③ 폭풍 속에 나타나셨다(욥38:1;시18:10-16).

④ 세미한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다(왕상19:12).

⑤ 천사를 통하여 나타나셨다(단8:13,9:11,10:15;행7:35;갈3:9).

⑥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창2:16,3:8-19,4:6-15,6:13,32:26;출19:9,10;신5:4,5).

⑦ 그리스도 안에서 신격의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임재하셨다(골1:19,2:9).

(2) 하나님의 예언(豫言, divine word)

① 선지자를 통하여 음성으로 들려주셨다(창2:16;출19:9;삼상3:4).

② 제비뽑기나 우림과 둠밈으로 뜻을 전하셨다(민27:1;신33:8;삼상10:21;느11:1).

③ 꿈을 통하여 전하셨다(창40:5;민12:5-7;삼상28:6;삿7:13;욜2:28).

④ 환상을 통하여 들려 주셨다(단1:17;암7:1-9:15).

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들려주셨다(4복음서).

(3) 하나님의 이적(異蹟, divine work)

① 이적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는 방편인 것이다(막16:20;행14:3).

② 모든 이적 중에서 최대의 이적은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성육신의 사건이다(사7:14;마1:23).

 

4) 특별계시의 특징(特徵)

(1) 점진성(漸進性) : 처음부터 완전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보다 명확하게 주어져 왔다. 내용면에서는 최초의 원시 복음에서부터 모세 언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방법 면에서는 처음에는 신언이나 이적, 혹은 선지자를 통하였으나 결국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을 통함으로서(히1:1-2) 선민들이 충족한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사실성(事實性) : 특별계시는 전적으로 말씀과 교리로만 된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만 율법과 예언서,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만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구약의 의식적 예배에서, 현현과 이적에서, 또는 예수님 생애의 구속적 사실에서도 계시하셨다(히4:12).

(3) 목적성(目的性) : 특별계시는 다만, 하나님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데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구원을 위하신 하나님의 계획,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구원의 길, 변화하시며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감화, 그리고 영적인 삶에 참여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등, 이 여러 사실에 관한 특수한 지식을 인간에게 드러내 준다.

 

8. 특별계시와 성경(聖經)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와 언어를 성문화한 특별계시의 최종형태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며, 성경 기록과 기록된 말씀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계시행위와 언어이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특별계시의 책이며,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1) 특별계시와 성경의 같은 점

(1)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다.

(2) 성경의 예언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다.

(3)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다.

2) 특별계시와 성경의 다른 점

(1) 특별계시는 전달 사건이나 성경은 전달 사건의 내용이나 상황의 기록이다.

(2) 특별계시는 그것의 기록인 성경보다 먼저 주어졌다.

(3) 특별 계시의 일부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계시는 구속사 전개의 각 시점에서 주어진 계시이고, 성경은 그것의 문자적 보존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는 특별계시이나 특별계시 전체는 성경이 아니다.

 

9.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비교(比較)

< 구분 >              < 일반계시 >                   < 특별계시 >

1) 계시의 시기         천지창조 ~ 심판                      아담 타락 ~ 사도 요한

2) 계시의 대상         모든 인류                               택한 자

3) 계시의 목적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

4) 계시의 방법         자연적 섭리                            언약적 섭리(성경)

5) 계시의 성질        명확하지 못함                         명확함

6) 계시의 진행       계속 주어짐                             완성되어 종결됨

7) 계시의 지식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요 구속주의 하나님

8) 계시의 방편        정죄하기에 충분함                  구원하기에 충분함

 

일반계시는 특별계시에 의해 완성되고,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그것의 계시성이 더욱 빛을 발한다.

 

나가며

기독교 계시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을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만이 기독교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특별계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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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기독교 부패와 타락은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으나 성경 계첼� 대한 오해가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음을 교회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기독교적인 계시의 올바른 정의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계시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Ⅰ. 계시의 어원(語源)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갈라’라는 말인데 우리말로 ‘벗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창35:7). 헬라어로는 ‘아포칼뤂시스’는 ‘폭로하다’, ‘베일을 벗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파네루운’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뚜껑을 연다’고 하는 뜻을 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계시란 가려지고 덮어져서 알 수 없도록 감추어진 것을 (커튼을 열어 보여 주듯이) 드러내어 보여 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계시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어 보이시는 섭리를 의미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하신 영광과 능력은 물론, 그의 본질과 속성 등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내시는 사역을 총괄해서 표현하는 말이다.

 

2. 계시의 정의(定義)

묵시(계1:1)라고도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신29:29;마11:27;롬16:25).

 

3. 계시의 개념(槪念)

인간이 참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방법뿐이다. 이 방법 밖에는 달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계시(revelation)라고 말한다.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divine revelation)에만 한정되어 사용되며, 특히 진리이신 하나님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적 성격이 강조된다. 하나님은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영광, 능력, 속성, 성품, 의지, 뜻, 목적 등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신다. 그래서 계시에 근거한 신학을 ‘계시신학’(啓示神學)이라 하고, 그리스도교를 ‘계시종교’(啓示宗敎)‘라 한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 계시(啓示)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 내용(what)에 관한 것이고,

영감(靈感)은 그 내용이 전달된 방법(how)을 말하며,

조명(照明)은 그것이 왜 전달되었는가 하는 이유(why)를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계시의 필요성(必要性)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간극(ontological gap)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 보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알 수가 없다(욥11:7,8).

2) 인간의 죄성 때문이다.

인간의 죄로 인한 부패성으로 총명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다(엡4:18)

 

5. 계시의 구분(區分)

계시의 방법에 따라 '자연계시'와 '초자연 계시'로, 계시의 성격과 대상에 따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구분한다.

1) 방법에 의한 구분

(1) 자연계시(自然啓示) - 일반적인 자연현상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

(2) 초자연계시(超自然啓示) -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

2) 성격, 대상에 의한 구분

(1) 일반계시(一般啓示) - 창조에 기초하여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주시는 계시

(2) 특별계시(特別啓示) -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는 계시

 

*일반적으로 일반계시는 자연계시로, 특별계시는 초자연 계시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자연계시와 일반계시, 그리고 초자연계시와 특별계시는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반계시에도 자연적인 요소와 함께 초자연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으며, 특별계시에도 초자연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6. 일반계시(一般啓示, general revelation)

일반계시는 창조에 기초하여(시19:1-6;사40:12,26;행14:17;시8:1;시104:24)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주시는 계시로서(마5:45;행14:17), 자연법칙(롬1:20)과 인간의 역사(시9:16;단4:25)와 인간의 양심(롬2:15)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택한 자나 택하지 않는 자의 구별없이 모든 인류에게 계시를 하셨다는 뜻이다. 자연을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하며, 그 성격상 ‘비언어적 계시’(non-verb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창세로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

1) 일반계시의 목적(目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

2) 일반계시의 방법(方法)

(1)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지혜, 선, 능력들을 보여 주고 있다(시19:1;롬1:20).

(2)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나타내 준다(전9:1;롬11:36).

(3)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이 없다함을 핑계치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

3) 일반계시의 특징(特徵)

(1)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2) 신자와 불신자의 접촉의 장을 제공한다.

(3) 특별계시의 보조역할을 한다.

4) 일반계시의 불충분성(不充分性)

(1) 하나님의 인격이나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죄의 결과로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바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3) 종교를 위한 충분한 기초를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구원의 방도인 그리스도를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마11:27;요14:6,17:3;행4:12).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 권능, 섭리 등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이나 구원의 계획을 증거하지 않는다.

 

7. 특별계시((特別啓示, Special revelation)

하나님께서 그분의 인격에 의해 행하신 특별한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다(마11:27;엡3:3,5;벧전1:12).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게 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특별계시가 요청되게 되었다.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의 완성은 성경이다(롬16:25,26). 초자연적 방식을 통해서 제한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초자연적 계시’(super-natural revelation)라고도 한다.

1) 특별계시의 필요성(必要性)

인간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부패하고 타락하여 일반계시를 통하여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수행할 특별한 신적사역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일반계시의 모호한 점을 해석하거나 인간의 잘못된 견해를 정정한다.

(2)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의 계시를 인간에게 마련해 준다.

(3) 죄의 권세에서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의 영적상태를 전적으로 변화시킨다.

2) 특별계시의 목적(目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셔서 그의 권능과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시려는 것이다.

 

3) 특별계시의 방법(方法)

(1) 하나님의 현현(顯現, theophany)

① 그룹들 사이에 나타나셨다(시80:1,99:1).

② 불, 연기, 구름 속에 나타나셨다(창15:17;출3:2,33:9;시78:14,99:7).

③ 폭풍 속에 나타나셨다(욥38:1;시18:10-16).

④ 세미한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다(왕상19:12).

⑤ 천사를 통하여 나타나셨다(단8:13,9:11,10:15;행7:35;갈3:9).

⑥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창2:16,3:8-19,4:6-15,6:13,32:26;출19:9,10;신5:4,5).

⑦ 그리스도 안에서 신격의 충만함이 육체적으로 임재하셨다(골1:19,2:9).

(2) 하나님의 예언(豫言, divine word)

① 선지자를 통하여 음성으로 들려주셨다(창2:16;출19:9;삼상3:4).

② 제비뽑기나 우림과 둠밈으로 뜻을 전하셨다(민27:1;신33:8;삼상10:21;느11:1).

③ 꿈을 통하여 전하셨다(창40:5;민12:5-7;삼상28:6;삿7:13;욜2:28).

④ 환상을 통하여 들려 주셨다(단1:17;암7:1-9:15).

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들려주셨다(4복음서).

(3) 하나님의 이적(異蹟, divine work)

① 이적은 예언의 말씀을 확증하는 방편인 것이다(막16:20;행14:3).

② 모든 이적 중에서 최대의 이적은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탄생하신 성육신의 사건이다(사7:14;마1:23).

 

4) 특별계시의 특징(特徵)

(1) 점진성(漸進性) : 처음부터 완전하게 보이지 아니하고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적으로 보다 명확하게 주어져 왔다. 내용면에서는 최초의 원시 복음에서부터 모세 언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으로 완성되었다. 또한 방법 면에서는 처음에는 신언이나 이적, 혹은 선지자를 통하였으나 결국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을 통함으로서(히1:1-2) 선민들이 충족한 계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사실성(事實性) : 특별계시는 전적으로 말씀과 교리로만 된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만 율법과 예언서, 복음서와 서신서에서만 자기를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구약의 의식적 예배에서, 현현과 이적에서, 또는 예수님 생애의 구속적 사실에서도 계시하셨다(히4:12).

(3) 목적성(目的性) : 특별계시는 다만, 하나님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지식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데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구원을 위하신 하나님의 계획,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죄인과의 화목,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구원의 길, 변화하시며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감화, 그리고 영적인 삶에 참여하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등, 이 여러 사실에 관한 특수한 지식을 인간에게 드러내 준다.

 

8. 특별계시와 성경(聖經)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행위와 언어를 성문화한 특별계시의 최종형태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며, 성경 기록과 기록된 말씀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계시행위와 언어이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특별계시의 책이며,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1) 특별계시와 성경의 같은 점

(1)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다.

(2) 성경의 예언은 성취되었고, 성취되어 가고 있다.

(3)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다.

2) 특별계시와 성경의 다른 점

(1) 특별계시는 전달 사건이나 성경은 전달 사건의 내용이나 상황의 기록이다.

(2) 특별계시는 그것의 기록인 성경보다 먼저 주어졌다.

(3) 특별 계시의 일부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계시는 구속사 전개의 각 시점에서 주어진 계시이고, 성경은 그것의 문자적 보존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는 특별계시이나 특별계시 전체는 성경이 아니다.

 

9.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비교(比較)

< 구분 >              < 일반계시 >                   < 특별계시 >

1) 계시의 시기         천지창조 ~ 심판                      아담 타락 ~ 사도 요한

2) 계시의 대상         모든 인류                               택한 자

3) 계시의 목적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

4) 계시의 방법         자연적 섭리                            언약적 섭리(성경)

5) 계시의 성질        명확하지 못함                         명확함

6) 계시의 진행       계속 주어짐                             완성되어 종결됨

7) 계시의 지식        창조주 하나님                         창조주요 구속주의 하나님

8) 계시의 방편        정죄하기에 충분함                  구원하기에 충분함

 

일반계시는 특별계시에 의해 완성되고, 특별계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그것의 계시성이 더욱 빛을 발한다.

 

나가며

기독교 계시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을 위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만이 기독교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특별계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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