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2 (토마스 왓슨)

 

 

제 2장 가장 나쁜 것들이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말라. 나는 가장 나쁜 것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나쁜 것은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 악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롭고 압도하는 손이 그것들을 써서 거룩하게 하므로 그것들은 도덕적으로 선하다. 물론 모순되는 성질을 가진 요소이지만 하나님이 적절히 조절하셨기에, 그것들은 우주의 선을 위하여 조화로운 방식으로 활동한다.
시계의 톱니바퀴는 서로 반대로 움직이지만, 모두가 시계의 운동을 수행한다. 그래서 경건한 자에게 십자가를 안겨다 주는 것같은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하여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이런 가장 나쁜 것 가운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선을 이루는 고약한 악이 넷 있다.

1. 고난의 악한 것이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이 특별히 간섭하신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평온하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룻 1:21) 휘두를 손이 없이 도끼만으로는 쪼갤 수 없듯이 하나님이 사명을 주시지 않으면 도구는 움직일 수 없다. 욥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하듯이, 욥은 “주님은 주셨고 마귀는 가져갔다”고 말하지 않고 “주님이 취하셨다”고 말한다. 누가 우리에게 고난을 주든지, 그것을 보내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난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생각하면 또 한번 마음이 평온해진다.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같이 보아 좋게 할 것이라.” (렘 24:5)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의 포로 생활은 그들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 고난의 쓴 물에 모세가 던진 나무처럼, 이 본문은 쓴 물을 달고 마시기 좋게 만들 것이다.
경건한 자에게 고난은 의약품이다. 하나님은 가장 해로운 독약에서 우리의 구원을 추출하신다. 고난은 구례만큼이나 필요하다. (벧전 1:6) 불이 없이는 황금으로 그릇을 만들 수 없다. 그처럼 우리가 고난의 풀무에 녹아 제련되지 않으면 존귀의 그릇이 될 수 없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시 25:10) 화가가 밝은 색과 어두운 그림자를 섞어 사용하듯이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자비와 심판을 섞어 사용하신다. 고난의 섭리들이 불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유익하다.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후에 그를 판다. 그런 다음 요셉은 감옥에 들어간다. 하자만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선을 이루었다. 그의 비천해짐은 그의 발전을 위한 길을 만들었고 그는 나라에서 이인자가 되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여 환도뼈가 어긋났다. 이는 슬픈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선이 되게 하셨다. 왜냐하면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고 주님은 그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30) 하나님의 얼굴을 뵈려고 굳이 탈골하려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므낫세 왕은 사슬에 묶였다. 차마 두 눈으로 보고 싶지 않은 슬픈 일이다. 황금 면류관이 족쇄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선을 이루었다. 왜냐하면
“저가 환란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했기” (대하 32:12,13) 때문이다. 그는 황금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보다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 나았다. 전자는 그를 교만하게 했지만 후자는 그를 겸비하게 했다.
욥은 비참할 대로 비참해진 사람이었다. 그는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남은 것은 악창뿐이었다. 이는 슬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선을 이루었다. 그의 덕망은 입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증진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정직함을 하늘에서 증거 하셨고 이전에 두 배나 주셔서 그의 잃은 것을 보상하셨다. (욥 42:10)
바울은 눈이 머는 고통을 받았다. 이는 불편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그에게 선이 되었다. 하나님은 바울을 눈멀게 하심으로써 그의 영혼에 은혜의 빛이 비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다. 이는 복된 회심의 출발점이었다. (행 9:6)
겨울의 매서운 서리가 가시고 봄꽃이 피듯이, 밤이 지나고 새벽별이 나오듯이, 고난의 악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큰 선을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지 언제든 질문하고,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했듯이 “어찌 그럴 수 있나이까?” 하고 말하자. 그러므로 나는 고난이 어떻게 선을 이루는지 몇 가지 방법을 당신에게 보여주려 한다.
1) 고난은 우리의 설교자와 교사의 역할을 하므로 선을 이룬다 -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미 6:9).
루터는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 몇몇 시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고난은 죄가 무엇인지 가르친다. 우리는 전파된 말씀에서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배운다. 죄란 더럽게 하고 저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의 사자 보듯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난을 내리시며 그럴 때 우리는 죄의 열매를 보고 죄를 비통하게 느낀다. 병상은 종종 설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곤 한다. 우리는 고난의 안경으로 죄의 추한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고난은 우리 자신을 알도록 가르친다. 생활이 풍족할 때 대체로 우리는 자신에게 이방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을 더 잘 알도록 하시려고 고난을 맛보게 하신다. 우리는 평소에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우리의 마음이 부패한 것을 고난의 때에 본다. 그릇에 담긴 물이 깨끗해 보이지만, 그릇에 불을 지피면 찌꺼기가 올라온다. 성마름과 불신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내 마음이 그렇게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제야 두 눈으로 확인한다. 전에는 나의 부패상이 그렇게 분명하고 나의 덕이 그처럼 연약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2) 고난은 마음을 더욱 올곧게 하는 수단이므로 선을 이룬다. 생활이 풍족할 때는 두 마음이 되기 쉽다 (호 10:2)
마음이 하나님께도 얼마간 붙어 있고 세상에도 얼마간 붙어 있다. 이는 자석 사이의 바늘과 같다. 하나님도 끌어당기시고 세상도 끌어당긴다. 이제 하나님께서 세상을 제거하시면 마음은 참으로 하나님께로 더욱 향할 것이다. 징계는 마음을 올바르고 곧게 한다. 우리가 때때로 굽은 막대기를 불에 대고 펴듯이, 하나님은 고난의 불에 우리를 두셔서 우리가 더욱 바르고 올곧게 하신다. 죄가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 고난이 영혼을 다시 바로잡는다면 그 얼마나 선한 일인가!
3) 고난은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회초리는 우리에게 더욱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는 펜이 된다. 머리와 지체가 대칭과 조화를 이루는 것은 선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면서 그분을 닮지 않을 것인가! 칼빈이 말하듯이 그분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사 53:3)이다. 그분은 우시고 피흘리셨다. 그분이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는데 우리가 장미관을 쓸 생각을 하겠는가?
고난을 통해서라도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은 선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쓴 잔을 마시셨다. 그 생각을 하실 때 그리스도는 피와 같은 땀을 흘리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잔(하나님의 진노)의 독을 마시셨지만, 잔에는 쓴 쑥이 얼마간 남아 있으며 성도들은 그것을 마셔야 한다. 오직 이 점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우리의 고난이 다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보속(補贖)을 이루는 것이었고, 우리의 고난은 징벌의 고난이다.
4) 고난은 죄를 파멸시키므로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죄는 어머니이며 고난은 딸이다. 이 딸은 어머니를 파멸시키는데 이바지한다. 죄는 벌레를 자라게 하는 나무와 같으며 고난은 나무를 먹는 벌레와 같다. 아무리 뛰어난 마음에도 부패는 심하므로, 불이 황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듯이 고난은 그 부패를 상당히 제거한다.
“그 죄를 없이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 (사 27:9) 우리에게 있는 녹이 더 많이 없어진다면 거친 줄보다 더한 것도 마다하랴?
고난은 죄의 찌꺼기만 제거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의 몸은 탈이 났고 나쁜 체액이 가득하니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게 되오. 내가 약을 처방해줄 텐데, 그 약을 먹으면 아프긴 하지만 질병의 찌꺼기가 없어져 당신은 목숨을 건질 것이오.”하고 말한다면, 이것이 환자에게 선하지 않겠는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질병을 없이하는데 사용하시는 약이다. 고난은 교만의 고창, 탐욕의 질병, 욕심의 수종을 고친다. 그러니 고난은 선을 이루지 않는가?
5) 고난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므로 선을 이룬다.
당신이 나무뿌리에서 흙을 파서 없애면, 그것은 나무를 땅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우리의 지상적 위로를 파서 없애신다. 꽃마다 가시가 함께 자란다. 하나님은 흔들거리는 치아를 비틀어 빼서 우리로 크게 고통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젖을 떼는 것은 선한일이 아닌가? 아무리 나이 먹은 성도라도 그 일이 필요하다. 어찌 주님께서 그 공급하시던 관을 부수지 않으시겠는가? 이는 “나의 모든 근원” (시 87:7)이 되시는 그분께 우리로 나아가게 하시려함이다.
6) 고난은 위로를 위한 길을 열므로 선을 이룬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호 2:15) 아골은 괴롬을 뜻한다. 하나님은 내면의 평안으로 외면의 고통을 누그러뜨리신다.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요 16:20) 여기서 물은 포도주로 변한다. 쓴 알약 다음에 주님은 사탕을 주신다. 바울은 감옥에서 찬양을 드렸다. 하나님의 회초리 끝에는 꿀물이 있다. 고난 가운데 성도는 너무도 달콤한 기쁨의 황홀경에 빠지므로 자신이 천상의 가나안 경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7) 고난은 우리를 크게 하는 것이므로 선을 이룬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욥 7:17) 하나님은 고난을 쓰셔서 우리를 세 가지로 크게 여기신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살피려고 지극히 낮아지시는 데서 우리를 크게 여기신다. 하나님이 먼지와 재에 마음을 두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광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고통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크게 여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
“네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사 1:5) 만일 당신이 계속 죄 가운데 행하고 스스로의 길을 취해서 가려하면, 스스로 범죄 하여 지옥에 떨어진다.
둘째, 고난은 역경의 깃발, 양자됨의 표이므로 우리를 크게 여기시는 것이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히 12:7) 회초리 자국마다 존귀의 붕대가 감긴다.
셋째, 고난은 세상에서 성도를 유명하게 하여 성도를 크게 하곤 한다. 성도가 고난으로 칭찬받는 일은 없었다. 순교자들은 시련에서 열정과 한결같음을 보여서 후세에 이름을 떨쳤다. 욥은 그 인내로 얼마나 유명한가!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기록에 남겨 두신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약 5:11) 고난당하는 자 욥은 정복자 알렉산더보다 유명해졌다.
8) 고난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수단이므로 선을 이룬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욥 5:17) 십자가에서 행복을 발견한 정치가나 도덕론자가 있었던가? 욥은 참으로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어떻게 고난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고난 때문에 우리가 성화되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된다고 대답한다. 보름달은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은 번영의 보름달에 취해 하나님께 멀리 떨어져있다.
고난은 그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한다. 긍휼의 자석은 고난의 밧줄만큼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지 못한다. 압살롬이 요압의 보리에 불을 놓았을 때, 요압은 압살롬에게 달려갔다. (삼하 14:30) 하나님이 우리의 세상적 위로에 불을 놓으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며 하나님과 화평 한다. 탕자가 궁핍하여 수척해졌을 때 아버지께 돌아갔다. (눅 15:13) 비둘기가 발꿈치를 둘 곳을 발견할 수 없을 때 방주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의 홍수를 보내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방주로 날아간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므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신앙은 고난의 물살을 이용하여 그리스도께로 더 빨리 헤엄칠 수 있다.
9) 고난은 불의한 자를 침묵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불의한 자들은 경건한 자를 헐뜯고 비방하는데 얼마나 빠른가! 그들은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의 거짓된 입술에 맹꽁이자물쇠를 두시려고 자기 백성이 신앙을 위하여 고난을 참도록 하신다. 먹을 것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한 백성이 하나님께 있는 것을 볼 때 세상의 무신론자들은 그 입이 막힌다.
마귀는 욥이 돈을 위하여 사는 위선자라고 고소했다. 그의 모든 신앙이 금은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욥 1:9-10)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욥 1:12) 마귀는 임무를 받자마자 욥의 산울을 부순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경배했고(1:20)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한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그를 의지하리라”(13:15, 한글 개역에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로 되어 있음). 이리하여 마귀는 침묵했다.
경건한 자가 고통을 받는 처지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하고 모든 것을 잃을 때도 여전히 흠없이 지내는 것을 볼 때 불의한 자는 기가 꺾인다.
10) 고난은 영광을 위한 길을 열므로 선을 이룬다.(고후 4:17)
고난은 영광을 받을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준비하는 것이다. 쟁기질은 밀이 자라도록 토양을 준비하는 것이듯이 고난은 우리로 영광을 준비케 하고 맞이하게 한다. 화가가 어두운 색 위에 황금색을 칠하듯이, 하나님은 고난의 어두운 색을 먼저 칠하시고 영광의 황금빛 색을 칠하신다. 포도주를 붓기에 앞서 그릇을 먼저 닦듯이, 먼저 자비의 그릇을 고난으로 닦고 그런 다음 영광의 포도주를 붓는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성도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임을 안다. 우리는 고난이 악한 것을 보지 않고 선한 것을 보아야 한다. 구름의 어두운 면을 보지 않고 밝은 면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아무리 호되게 대하시더라도 그것이 그들이 하늘로 향하도록 치시는 채찍질이다.

2. 시험의 악한 것이 경건한 자의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시험의 악은 선을 이룬다. 사단은 시험하는 자(막 4:15)로 불린다. 그는 늘 수풀 속에 누워있으며 이 성도 저 성도에게 항상 일을 꾸미고 있다. 마귀는 매일 돌아다니는 구역이 있다. 그는 아직 완전히 옥에 던져지지 않았지만 보석 상태에 있는 죄수처럼 성도를 시험하려고 배회한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큰 방해가 된다. 그런데 사단의 시험에 관해서는 세 가지를 살펴야 한다.
1) 사단의 시험 방법
여기서 두 가지를 주의하라. 사단은 시험할 때 폭력을 행하므로 붉은 용이다. 그는 마음의 성을 쳐들어가려고 애쓰며 참람한 생각을 집어넣으며 하나님을 부인하려 한다. 이것은 사단이 쏘는 사나운 화살인데, 사단은 이 화살로 고통을 일으키려 한다. 또한 사단은 교묘하게 시험한다. 그래서 그는 옛 뱀이다. 마귀가 사용하는 중요한 술책은 다섯 가지가 있다.

(1) 사단은 기질과 체질을 관찰한다.
사단은 시험의 적절한 미끼를 던진다. 농부처럼 사단은 어떤 곡물이 토양에 가장 적합한지 않다. 사단은 자연적 성질과 기질을 거슬러 시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책략인데, 그는 바람과 조수를 함께 사용한다. 그래서 마음의 자연스러운 조수가 흘러가는 곳에 시험의 바람이 분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기질은 알며 그에 따라서 미끼를 놓는다. 그는 야심찬 사람에게는 면류관으로 시험하고 다혈질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으로 시험한다.
(2) 사단은 시험할 가장 좋은 시간을 관찰한다.
예리한 낚시꾼이 고기가 가장 잘 물때에 낚싯줄을 드리우듯이 말이다. 사단의 시험 시간은 보통 성찬식 후이다. 그 이유는 그때 우리가 가장 걱정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엄숙한 의무를 행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쉬워 태만해져서 이전과 같은 열정과 엄격함을 팽개친다. 전투에서 돌아와 원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고 해제한 군인처럼 우리가 가장 의심하지 않을 때를 사단은 관찰하다가 시험을 걸어온다.
(3) 사단은 가까운 관계를 사용한다.
마귀는 대리인을 통하여 시험한다. 그래서 그는 욥의 아내를 통하여 욥에게 시험을 걸어왔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욥 2:9) 품속의 아내가 범죄 하게하는 마귀의 시험 도구가 될 수 있다.
(4) 사단은 선한 사람을 통하여 악을 일으키려고 시험한다.
그래서 그는 황금 잔에 독을 집어넣는다. 그는 베드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시험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지 마시도록 권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마 16:22) 사도의 입에서 시험하는 자를 발견하리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5) 사단은 신앙을 구실로 범죄하도록 시험한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변할 때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 가서 성경을 언급했다. “기록되었으되.” 마귀는 낚시 바늘에 신앙의 미끼를 단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을 부양한다는 구실로 탐욕을 부리고 관직을 이용하여 부당히 이를 취하도록 시험한다. 그는 어떤 이들을 시험하여 더 이상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도록 자살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피한다는 구실로 사람들이 범죄 하도록 시험한다. 이런 것들이 사단이 시험할 때 사용하는 교묘한 전략이다.

2) 사단의 능력 범위
사단이 시험할 때 그 능력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1) 사단은 목적을 제안할 수 있다.
아간 앞에 황금덩이를 두듯이 말이다.
(2) 사단은 상상력을 못쓰게 만들어 지성에 악한 생각을 주입한다.
성령님이 선한 제안을 내시듯이, 마귀는 나쁜 제안을 낸다. 그는 유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배반할 생각을 넣었다.(요 13:2)
(3) 사단은 마음속에 부패를 일으키고 자극할 수 있으며 마음에 시험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사단이 인간의 의지로 하여금 동의하도록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열심히 고소하는 자이므로 끊임없이 졸라대며 악을 행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윗으로 하여금 백성의 수를 세도록 격동했다.(대상 21:1) 마귀는 미묘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우리에게 의심을 품게 하여 죄를 범하게 할 것이다.

3) 이 시험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바람에 흔들린 나무가 더욱 굳게 터를 잡고 더욱 깊이 뿌리를 박듯이, 시험의 바람은 그리스도인을 은혜 가운데 더욱 굳게 터를 잡게 한다. 시험은 여덟 가지 방법으로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1) 시험은 영혼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든다.
사단이 사납게 시험하면 할수록 성도는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한다. 사슴은 화살에 맞을 때 물을 찾아 더욱 빨리 달린다. 사단이 사나운 화살을 쏠 때, 영혼은 은혜의 보좌를 향하여 더 빨리 달린다. 바울은 사단의 사자 때문에 괴로웠을 때,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고후 12:8)고 말한다. 시험은 보호를 얻게 하는 약이다. 시험은 우리가 더욱 기도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2) 죄로 이르게 하는 시험은 도리어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시험받을수록 시험과 맞서 싸운다. 사단이 참람하게 하려고 시험할수록 성도는 그런 생각에 떨며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한다. 요셉의 여주인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시험했을 때, 그 시험이 강해질수록 요셉의 반대도 강해졌다. 마귀가 죄를 짓도록 하는 박차로서 사용하는 시험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죄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굴레로 만드신다.
(3) 시험은 교만의 종기를 수그러들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고후 12:7) 육체의 가시는 부풀어 오르는 교만에 구멍을 낼 것이다.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시험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의무보다 더 낫다. 그리스도인이 오만한 마음을 계속 갖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그를 마귀의 손에 잠시 떨어지게 하여 그의 종기를 낫게 하실 것이다.
(4) 시험은 마음에 있는 것을 알아보는 시금석이므로 선을 이룬다.
마귀는 속이기 위하여 시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시험을 당하게 하신다. 시험은 우리의 신실함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똑바로 보고 난 다음 등을 돌릴 때 시험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순결하고 충성스러움을 입증한다.
또한 시험은 우리의 용기를 알아보는 것이다
.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지혜가 없어서”(호 7:11) 그런 말을 듣는 자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마음이 없다. 사단이 오자마자 그들은 굴복한다. 도둑이 다가오자마자 지갑을 내주는 겁쟁이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의 검을 사단에게 휘두르며, 항복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 하는 자가 용감한 그리스도인이다. 로마인의 용기는 카르타고인 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가장 잘 나타났다. 성도의 용기와 능력은 붉은 용과 싸우고 믿음의 능력으로 마귀를 패하게 만드는 전쟁터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연단되어 정금이 된 그런 덕목은 사나운 시험을 견디고 사나운 화살을 막을 수 있다.
(5) 하나님이 시험받는 자를 쓰셔서 역시 괴로움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므로 시험은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은 약한 자에게 시기적절한 말을 해줄 수 있으려면 먼저 사단의 괴롭힘을 당해야 한다. 성 바울은 시험에 통달했다
.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2:11) 그래서 그는 사단의 저주스런 계략을 다른 사람에게 잘 알릴 수 있었다. (고전 10:13) 늪과 유사가 있는 곳을 달려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위험천만한 길에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울부짖는 사자의 발톱 맛을 보고 상처가 나서 피를 흘려 본 사람이 시험받는 사람을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다. 시험의 펜싱 도장에 오래 다닌 사람보다 사단의 술책과 책략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6) 시험당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부성적 긍휼을 입게 되므로 시험은 선을 이룬다.
아이가 병들고 상처를 입을 때 가장 잘 돌봐주는 법이다. 성도가 시험으로 상처를 입을 때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며 성부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신다. 사단이 영혼에게 열병이 나게 할 때 하나님은 음료를 갖고 오신다. 그래서 루터는 시험이 그리스도께서 용인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영혼에게 자신을 가장 친절히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7) 시험은 성도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더욱 바라게 만들므로 선을 이룬다.
하늘에 가서야 성도는 사정권을 벗어날 것이다. 하늘은 안식의 장소이며 시험의 총탄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하늘 높이 오르며 높은 나무에 앉아 있는 독수리는 뱀의 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처럼 신자는 하늘로 오르게 될 때 옛 뱀에게 훼방 받지 않을 것이다. 이생에서는 하나의 시험이 끝나면 다른 시험이 찾아온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이 물러가는 소리를 듣기 원하며, 총알이 너무도 빨리 날아다니는 전쟁에서 벗어나 빛나는 면류관을 받고자 한다. 그곳에서는 북이나 대포가 아니라 수금과 비파가 계속 울리고 있다.
(8) 시험은 그리스도의 힘을 끌어들이므로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친구이며,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우리를 위하여 모든 힘을 쓰신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만일 가련한 영혼이 지옥의 골리앗과 홀로 싸워야 한다면 틀림없이 패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별도로 힘을 쏟으시며 은혜를 새로이 공급하신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그래서 시험의 악한 것은 선을 위하여 제압된다.

질문. 때때로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을 좌절시키곤 한다. 이것이 어떻게 선을 이루는가?
대답.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지고 시험이 불같이 일어나서 성도가 정복당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처럼 시험으로 좌절되는 일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제압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좌절을 통하여 은혜를 더 많이 베푸는 길을 여신다.

베드로는 시험을 받아 자만심에 빠져서 스스로 힘 있는 체했다. 그리고 그가 혼자 서려 할 때 그리스도는 그를 넘어지게 하신다. 그러나 이 일이 그에게 선을 이루어, 그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마 26:75) 그러자 그는 더욱 신중해진다. 그는 다른 사도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했다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그는 자신의 타락이 교만의 목을 부러뜨렸다고 감히 말하지 않았다.

시험으로 좌절될 때 하나님의 자녀는 더욱 신중하고 경계하게 된다. 사단이 그를 유혹하여 범죄 하게 만들긴 했지만, 장차 그는 더욱 조심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자의 쇠사슬에 더욱 깊이 빠질까 걱정할 것이다. 그는 범죄의 기회를 더욱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한다. 그는 영적 무장 없이 나가지 않으며 기도로 갑옷을 입는다. 그는 미끄러운 땅을 걷는 것을 알기에 지혜롭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보초 서듯 영혼을 면밀히 살피며, 마귀가 다가오는 것을 볼 때 무기를 들고 신앙의 솜씨를 보인다. (엡 6:16)
마귀는 이렇게밖에 해를 끼치지 못한다. 마귀는 시험으로 성도를 좌절시키면서, 성도의 부주의한 태만을 고친다. 성도로 하여금 조심하며 더 많이 기도하게 하는 것이다. 사나운 짐승이 울타리를 넘어 곡물을 상하게 할 때 사람은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 것이다. 그처럼 마귀가 시험을 통하여 울타리를 넘을 때 그리스도인은 울타리를 단단히 수리할 것이다. 그는 죄를 더욱 두려워하고 의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래서 시험에 패배하는 것은 선을 이룬다.

반론. 그러나 좌절하는 것이 선을 이룬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시험에 패배하든 패배하지 않든 그 일로 인해 부주의해질 것이다.

대답. 시험에 떨어지는 것과 시험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은 큰 차이가 난다.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선을 이루겠지만 시험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것은 그렇지 않다. 강에 떨어지는 사람은 도움과 연민을 받지만 처절하게 강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죽음을 자초한다. 이는 사자의 소굴로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이다. 시험 속으로 달려드는 사람은 자기 칼에 거꾸러지는 사울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에서, 옛 뱀의 시험을 자기 백성의 선으로 바꾸심으로써 하나님이 옛 뱀을 어떻게 절망시키는지 모라. 마귀는 시험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안다면 분명히 시험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때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을 형성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즉 기도와 묵상과 시험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여행할 대 역풍을 만났다. (행 27:4) 그처럼 시험의 바람은 성령의 거스르는 역풍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바람을 이용하여 성도를 하늘로 보내신다.

3. 버림당함의 악한 것은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버림당함의 악한 것은 선을 이룬다. 아가서에는 버림당하는 것을 하소연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나의 사랑하는 자)가 벌써 물러갔네.”(아 5:6) 이중적인 물러남 (withdrawing)이 있다. 은혜에 관하여 하나님은 성령의 영향을 중지시켜 은혜의 생생한 활동을 억제하신다(withdraw). 만일 성령님이 떠나시면 은혜는 냉랭하고 나태함으로 얼어붙는다. 또 위로에 관한 물러남이 있다. 하나님이 호의를 달콤하게 나타내지 않으시고 즐거운 시선으로 보지 않으시며 얼굴을 감추시면 영혼으로부터 아주 사라지시는 것 같다.
하나님은 물러나실 때 언제나 공정하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기 전에 우리가 그분을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내팽개치고, 그분의 진리를 버리며, 그분을 위하여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인도와 지도를 버리고, 우리의 부패한 성정과 정념의 가짜 빛을 따를 때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먼저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말로 달리 탓할 이가 없다.
버림당하는 일은 아주 슬프다. 왜냐하면 빛이 물러갈 때 대기에 어둠이 찾아오듯 하나님이 물러나실 때 영혼에 어둠과 슬픔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버림당함은 양심의 번민이다. 하나님은 영혼을 지옥 위에 맴돌게 하신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욥 6:4) 페르시아 사람들은 전쟁 때 뱀의 독을 화살에 묻혀 더욱 치명적이게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은 버림당함이라는 독화살을 욥에게 쏘셨으며, 화살에 맞아 상처난 그의 영혼은 피를 흘렸다.
버림당하는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비참해지기 쉽다. 그들은 스스로 갈등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아주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버림당한 영혼에게 위로의 처방을 말한다. 뱃사람은 방향을 알려 주는 별이 없어도 등불이 있으며 나침반을 볼 수 있어 도움을 얻는다. 그처럼 나는 뱃사람의 등불처럼, 가련한 영혼이 버림당함이라는 어두운 바다를 항해하며 새벽별을 간절히 찾을 때 빛을 비추는 네 가지 위로를 말하고자 한다.

1) 경건한 자가 아니면 버림당할 수 없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을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건강과 친구와 장사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도 하나님의 호의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당신은 버림당하므로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하고 두려워한다. 주님이 불의한 자에게서 자신의 사랑을 거두신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결코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버림당한다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웃음과 사랑의 표를 때때로 받아 보지 못했는데 어찌 하나님이 멀어지셨다고 불평할 수 있는가?
2) 기쁨의 꽃으로 피지 않는 은혜의 씨가 있을 수 있다.
땅은 밀 알갱이를 원하지만 실제 그 땅 속에는 황금 광맥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속에 은혜를 지니고 있어도 기쁨의 달콤한 열매가 자라지 않을 수 있다. 보석과 향료를 가득 담고 있는 바다의 배도 어둠 가운데서 폭풍우에 흔들릴 수 있다. 은혜의 보화로 풍성한 영혼도 버림당함의 어둠 속에서 심하게 흔들려 폭풍우 속에 흔들릴 수 있다. 다윗은 버림받은 상태에서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하고 기도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그는 “주여, 주의 신을 내게 주소서”하고 기도하지 않고 “주의 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하고 기도한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자신 속에 하나님의 신을 모셨다.
3) 이와 같은 버림당함은 잠시뿐이다.
그리스도는 잠시 물러나서 영혼을 내버려 두시겠지만, 다시 오실 것이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이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8) 물이 빠져 낮아지면, 곧 다시 조수가 밀려든다.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 57:16) 온화한 어머니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만 곧 아이를 다시 품에 안고 입 맞춘다. 하나님은 영혼에게 진노하시겠지만 그 귀한 품안에 영혼을 안고 사랑의 깃발을 영혼 위에 흔드실 것이다.
4) 이 버림당함은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버림당함은 나태한 영혼을 고친다. 우리는 나태의 침상에서 떨어진 배우자를 발견한다
. “내가 잘지라도”(아 5:2) 그리고 곧 그리스도는 떠나셨다.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아 5:6) 조는 사람에게 누가 이야기할 것인가?
버림당함은 세상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을 고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우리는 세상을 꽃다발처럼 손에 들고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 마음에 너무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상을 식사하는 여관으로 이용할 수 있지만 집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마 이 세속적인 것ㅇ 마음을 너무 많이 도둑질하는 것 같다. 선한 사람들이 때때로 너무 많이 먹어 탈나고 번영의 달콤한 기쁨에 취하곤 한다. 주님은 은혜의 은빛 날개를 더럽히고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문질러 아주 추하게 만든 자들을 고치시기 위하여 구름 가운데 그 얼굴을 감추신다. 이처럼 감추심은 선한 결과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어둡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버림당함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 어느 때보다 귀하게 여기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시 63:3) 하지만 이 자비가 흔하니까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본다. 진주가 로마에 흔해지자 그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잠시 하나님의 사랑을 거두심으로써 우리가 그 사랑을 고귀하게 여기게 만드는 뛰어난 방법을 갖고 계신다. 태양이 일 년에 한 번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태양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는가! 영혼이 오랫동안 버림당한 상태에 있을 경우 의의 태양이 다시 오실 때 얼마나 환영하겠는가!
버림당함은 우리가 죄를 쓰라린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수단이 되므로 선을 이룬다.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하는 것보다 큰 비참함이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시는 것보다 지옥 같은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죄 말고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이와 같이 우리의 죄가 주님을 가져갔으니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누워 계신지 모른다. 하나님의 호의는 가장 좋은 진주이다. 이 호의는 감옥을 즐겁게 하고 사망이 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좋은 보석을 훔쳐가는 죄는 얼마나 밉살스러운가!
죄 때문에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셨다. (겔 8:6) 죄는 하나님을 원수처럼 보이게 하며 하나님께서 갑옷을 입으시게 만든다 .이리하여 영혼은 거룩한 원한을 갖고 죄를 쫓아가서 복수하고자 한다. 버림당한 영혼은 죄에게 담즙과 식초를 주어 마시게 하고 굴욕의 투창으로 그 심장의 피를 쏟게 만든다.
버림당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눈물을 흘리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태양이 사라질 때 이슬이 내린다. 그처럼 하나님이 가버리실 대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미가는 자신의 신들을 잃었을 때 얼마나 괴로웠는가!
“나의 지은 신들……을 취하여 갔으니 내게 오히려 있는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삿 18“24) 그처럼 하나님이 가버리실 때 우리에게 무엇이 더 있겠는가? 하나님이 가버리실 때 수금과 비파가 위로를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의 부재를 한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버림당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한다. 그리스도가 떠나실 때 신부는 그를 발견하지 못해서 소리치며 그를 찾아 나선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아 3:3) 버림당한 영혼은 한숨과 신음만 연신 발한다. 버림당한 영혼은 기도로 하늘의 문을 두드린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황금 광선이 비칠 때까지 쉴 수 없다.
버림당함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탐구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떠나신 이유를 탐구한다. 하나님을 화나시게 한 저주스런 일이 무엇인가? 교만일 수도 있고 폭음일 수도 있고 성찬식을 수도 있고 세속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사 57:17) 아마 죄가 허용한 어떤 비밀이 있을 것이다. 수도관의 돌이 물의 흐름을 방해하듯이, 생활 속의 죄는 달콤한 하나님의 사랑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래서 탐정이 죄를 뒤쫓아 가서 잡듯이, 양심은 이 아간을 잡아 돌로 쳐서 죽인다.
버림당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보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만일 그 잔을 조금씩 마시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신 잔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리스도는 치명적인 독배를 마셨으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하고 소리치게 되셨다. 버림당하여 겸비해져서 잠시 지옥의 불길에 휩싸인 사람보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더 불타오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버림당함은 성도로 하여금 장차 위로를 맞이하도록 하므로 선을 이룬다. 얼어붙게 하는 서리가 봄꽃을 준비시킨다. 처음에는 쓰러뜨리고 다음에는 위로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고후 7:6) 우리 구주께서 금식하고 계셨을 때 천사가 와서 힘을 도왔다. 주님이 자기 백성을 오랫동안 금식하게 하셨다면, 위로자(성령님)를 보내며 비밀의 만나로 그들을 먹이신다.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시 97:11) 성도의 위로는 씨처럼 땅에 감추어 있을 수 있지만 씨는 썩어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는다.
이런 버림당함은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더욱 달콤하게 만들 것이므로 선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의 위로는 마치 달처럼 어느 때는 가득 차고 어떤 때는 기운다. 하나님은 잠시 우리에게 자신을 부이시며 그런 다음 우리에게서 물러나신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다면, 하늘은 얼마나 더욱 돋보이고 더욱 즐겁고 기쁘겠는가(살전 4:17)!
그래서 우리는 버림당함이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깊은 버림당함에 빠뜨리시는데, 이는 우리로 깊은 저주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주님은 우리를 진짜 지옥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지옥의 허울에 빠뜨리신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미소를 향유하고, 하나님의 얼굴에 구름이 끼거나 해가 지는 일이 없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신부와 함께하시고 신부가 다시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떠났다”고 말하지 않을 때를 맞이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4. 죄악은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죄는 본래 저주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신 지혜로 죄를 제압하고 선과 가장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선이 생기게 하신다. 사실 꿀이 사자에게서 나온다면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이중적으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1) 다른 사람의 죄는 경건한 자에게 선이 되도록 제압한다.
덕스러움은 마음이 불의한 자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적지 않은 괴로움이다
. “메섹에 유하며 게달의 장막 중에 거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시 120:5) 하지만 주님은 이런 것도 선을 바꾸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다른 사람의 죄는 거룩한 눈물을 만들므로 경건한 자에게 선을 이룬다.
하나님의 백성은 개혁할 수 없는 것을 두고 눈물을 뿌린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다윗은 시대의 죄를 슬퍼했다. 그의 마음은 샘처럼 그의 눈은 강처럼 바뀌었다. 불의한 자는 죄와 더불어 즐거워한다.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렘 11:15) 그러나 경건한 자는 시대의 저주와 참람을 한탄한다. 다른 사람의 죄는 창처럼 그들의 영혼을 꿰뚫는다. 다른 사람의 죄를 이처럼 슬퍼하는 것은 선하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 행한 불의를 슬퍼하며 분개하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막 3:5) 주님은 이 눈물에 특별히 주의하신다. 그 눈물을 아주 좋아하신다. 주님의 영광이 해를 입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우리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죄를 슬퍼하는 것이 더욱 큰 덕을 입증한다. 지옥이 두려워서 자신의 죄를 슬퍼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죄를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원리에서 나온다. 이 눈물은 장미에서 물이 떨어지듯 떨어지며, 이 눈물은 달콤하고 향기로우며, 하나님은 그 눈물을 병에 담으신다.
(2) 다른 사람의 죄는 경건한 자로 하여금 죄를 대적하여 더욱 기도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만일 그런 불의의 정신이 널리 퍼져 있지 않으면, 아마 그런 기도의 정신도 마찬가지로 퍼져 있지 않을 것이다. 심한 죄는 강력한 기도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대의 부정에 대적하여, 하나님께 죄를 억제하여 주시고 죄를 부끄럽게 하여 달라고 기도한다. 그들은 기도로 죄를 무찌를 수 없다 해도, 죄를 대적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친절하게 대하신다. 이 기도는 기록되고 상 받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에서 이기지 못한다 해도, 기도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시 35:13)
(3)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와 더불어 사랑가운데 더욱 거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다른 사람의 죄는 은혜의 광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금박이다. 대립되는 것들은 서로를 돋보이게 한다. 추함은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한다. 불의한 자의 죄는 불의한 자를 더욱 추하게 한다. 교만은 꼴사나운 죄이다. 이제 다른 교만을 지켜보는 것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사랑 가운데 있게 한다. 악의는 볼썽사나운 죄이다. 마귀의 모습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악의를 보면 볼수록 온유함과 자선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술 취함은 볼꼴 사나운 죄이다. 사람을 짐승이 되게 하고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술 취하는 모습을 볼수록 맑은 정신을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죄의 검은 얼굴은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더욱더 돋보이게 한다.
(4)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강력하게 반대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내가 주의 계명을……사랑하나이다.”(시 119:126,127)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법을 그렇게까지 대적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진리에 더욱 광폭할수록, 성도는 진리를 위하여 더욱 용맹을 떨친다. 살아있는 고기가 물살을 거스른다. 그처럼 조류가 밀려들수록 경건한 자는 밀려드는 물결을 더욱 거슬러 헤엄친다. 시대의 불 경건이 성도 안에 거룩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죄가 없으면 죄를 거스르는 분노가 없다. 다른 사라의 죄는 숫돌처럼 우리에게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그 죄는 죄를 반대하는 우리의 열정과 분개를 더욱 불러일으킨다.
(5)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진지하게 구원을 이루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우리는 불의한 자가 지옥에 가려고 그렇게 몸부림치는 것을 볼 때, 하늘에 이르려고 더욱 노력하게 된다. 불의한 자는 죄 지을만한 일이 전혀 없어도 죄를 짓는다. 그들은 수치와 불명예를 당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반대를 뚫고 지나간다. 성경이 그들을 대적하고 양심이 그들을 대적하고, 그 길에 화염검이 있어도 그들은 범죄 한다. 경건한 마음은 불의한 자가 금단의 열매를 먹으려고 미쳐 날뛰며 마귀에게 봉사하려고 지치도록 일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길에서 더욱 담대하고 활기를 얻는다. 그들은 폭풍우에 밀려가듯 하늘에 이를 것이다.
불의한 자는 죄에 발이 빠른 암 약대이다. (렘 2:23) 그리고 우리는 신앙의 문제에서 뱀처럼 기지 않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보다 불순한 죄인은 마귀에게 더욱 봉사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천국에 가려고 재촉하는 것보다 불의한 자가 지옥에 가려고 더욱 재촉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죄를 짓는데 지치지 않으며 우리는 기도하는데 지치지 않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주인이 계시지 않는가? 덕의 길은 유쾌하지 않는가? 의무의 길에는 기쁨이 있고 그 끝에 하늘이 있지 않은가? 벨리알의 아들이 행하는 범죄의 행위는 경건한자로 하여금 보폭을 바꾸어 더욱 빨리 하늘로 달려가게 하는 박차이다.
(6) 다른 사람의 죄는 우리의 마음을 볼 수 있는 거울이 되므로 선을 이룬다.
우리가 흉악무도하고 불경건한 죄인을 보고 있는가? 우리 마음의 정경을 살펴보라.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시면, 우리도 그런 흉악무도한 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행동으로 실천하고, 우리는 본성에 숨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불의한 자의 죄는 봉화대의 불과 같아서 활활 타올라 빛을 발한다. 경건한 자의 죄는 깜부기불과 같다. 그리스도인이여, 추문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않더라도 자랑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본성의 깜부기불에 많은 죄가 한데 모여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진 뿌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당신을 속박하거나 그 은혜로 당신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누구 못지않게 지옥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7) 다른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욱 감사하게 하므로 선을 이룬다.
다른 사람이 전염병에 감염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이 당신을 거기서 벗어나게 하심을 얼마나 감사하는가! 더욱 감사하게 된다면, 다른 사람의 죄를 잘 이용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그처럼 극심한 소동에 내버려 두지 않으실까? 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이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 친절을 베푸셔야 하는지 생각해 보라. 왜 하나님은 자연의 돌 감람나무에서 그 사람이 아닌 당신을 빼내어 주셔야 하는가? 이리하여 당신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얼마나 동경하게 되는가!
바리새인은 교만하게 말했지만 우리는 감사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1) 그처럼 우리는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여, 다른 사람들, 곧 술 취하고 욕하고 안식일을 어기는 자들과 같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둘러 죄를 짓는 것을 볼 때마다, 그런 자가 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격분한 사람을 볼 때 자신이 그렇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사단의 능력 아래 있는 것을 볼수록,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사하게 인정해야 한다.
(8) 다른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을 더 좋아지게 하는 수단이 되므로 선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죄를 통하여 당신이 이득을 얻게 하실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거룩하지 않을수록, 당신은 더욱 거룩해야 한다. 불의한 사람이 죄에 빠질수록, 경건한 사람은 기도에 더욱 전념한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 (시 109:4)
(9) 다른 사람의 죄는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므로 선을 이룬다.
죄인이 없다면, 우리는 봉사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경건한 자들은 종종 불의한 자를 회개시키는 수단이 된다. 경건한 자의 사려 깊은 충고와 경건한 모범은 죄인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유혹과 미끼이다. 환자의 질병은 의사에게 선을 이룬다. 환자에게서 해로운 체액을 없앰으로써 의사는 부자가 된다. 이와 같이 죄인을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함으로써 우리의 왕관은 더 커지게 된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등불이나 가느다란 촛불이 아니라 별과 같이 영원히 비췬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가 우리의 선을 위하여 제압되는 것을 본다.

2) 경건한 자가 자신의 범죄 함에 대하여 갖는 느낌은 그들의 선을 위하여 제압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선을 이룰 것이다. 경건한 자의 죄가 선을 이룬다고 말할 때는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죄에는 선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죄는 피를 더럽히고 심장을 오염시키고 탁월한 해독제가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가져오는 독과 같다. 죄의 해로운 본성이 그와 같으므로, 죄는 치명적이며 저주스럽다. 죄는 지옥보다 악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강력하고 위압하는 능력으로 문제의 죄를 그 백성의 선으로 만드신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황금 격언이 있다. “하나님은 죄에서 선을 이끌어내실 수 없다면 죄를 결코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다.” 성도에게 있는 범죄 했다는 느낌은 몇 가지 방식으로 선을 이룬다.
(1) 죄는 경건한 자로 하여금 이생이 싫증나게 만든다.
죄가 경건한 자 안에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것이 짐이라는 사실은 선하다. 성 바울의 고통은 (이런 표현을 양해하라) 그의 범죄에 비하면 연극에 불과했다. 그는 시련을 즐거워했다 (고후 7:4) 그러나 이 극락조는 자신의 죄 때문에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한탄했는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죄수가 족쇄를 차고 다니듯이 신자는 자신의 죄를 달고 다닌다. 신자는 벗어날 날을 얼마나 바라는가! 죄에 대한 이런 느낌은 선한 것이다.
(2) 죄의 이런 본질은 성도가 그리스도를 더욱 귀하게 여기도록 한다.
병든 사람이 자신의 병을 느끼듯이 자신의 죄를 느끼는 사람은 의원이신 그리스도를 얼마나 환영하겠는가! 죄에 쏘였다고 느끼는 사람은 놋뱀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는가! 바울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것을 소리쳤을 때 그리스도께 얼마나 감사했겠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 그리스도의 피는 죄에서 구원하며 이 변덕스러운 기질을 치유하는 거룩한 연고이다.
(3) 죄에 대한 이런 느낌은 다음 여섯 가지 구체적인 의무를 영혼에게 부가하는 기회가 되므로 선을 이룬다.
① 영혼은 죄를 느낄 때 자신을 살피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의식할 때 말씀의 촛불과 초롱을 취하여 자신의 마음을 살핀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나쁜 것을 알고자 한다. 몸이 병든 사람이 병의 가장 나쁜 것을 알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은혜를 아는 데 우리의 기쁨이 있지만, 우리의 부패를 아는 것에도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욥은 기도한다
.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13:23) 스스로 우쭐하지 않고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은 선하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우리가 우리의 죄를 찾아내는 것은 선하다.
② 날 때부터 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를 겸손하게 만든다.
가슴에 암이 있고 등에 혹이 있듯이 죄는 경건한 자에게 남아서 그를 교만하지 못하게 한다. 자갈과 흙이 바닥짐으로 실려 있어서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된다. 죄에 대한 느낌은 영혼을 안정되게 하여 헛된 영광으로 뒤집어지지 않도록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흠(신 32:5) 에 대하여 읽는다. 경건한 사람이 성경의 안경으로 자신의 운명을 보고 불신과 위선의 흠을 볼 때, 교만의 깃털이 떨어진다. 그 흠은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 때 우리의 죄조차도 좋게 사용할 수 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죄는 나를 교만하게 만드는 의무보다 나은 것이다. 거룩한 브래드포드는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허한 위선자이다.” 후퍼는 “주여, 나는 지옥이며 주님은 천국이니이다.” 하고 말했다.
③ 죄는 하나님의 자녀를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린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잠 30:2)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나,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선하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사람이 스스로를 판단할 때 사단은 활동을 벌이지 못한다. 사단이 성도에게 무엇을 비난할 때, 성도는 이렇게 대꾸할 수 있다. “사단, 나는 이런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미 그 죄에 관하여 스스로 판단했다. 그리고 양심의 저 아래 법정에서 스스로를 정죄했으니, 하나님이 저 위의 하늘 법정에서 나를 사면하실 것이다.”
④ 죄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자기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갈 5:17) 우리의 삶은 나그네 생활이며 전투 생활이다. 두 근원사이에는 매일 이중적인 싸움이 있다. 신자는 죄에게 곱게 사로잡혀 있지 않을 것이다. 신자는 죄를 내쫓을 수 없을 경우, 죄를 억누르려고 할 것이다. 신자는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정복해 나가고 있는 상태이다. “이기는 그에게는”(계 2:7)
⑤ 죄는 하나님의 자녀를 스스로 살피게 한다.
죄를 짓는 하나님의 자녀는 마음을 거스르는 자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을 주의 깊게 살핀다. 민감한 마음에는 주의 깊은 눈이 필요하다. 마음은 매일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 성과 같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를 항상 보초가 되어 자신의 마음을 경계하게 한다. 신자는 추하고 터무니없는 일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엄격하게 바라본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세상 낙이 사라지도록 수문을 연다.
⑥ 죄는 영혼이 스스로 개혁하도록 만든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찾을 뿐만 아니라 죄를 내몬다. 한 발은 죄의 목을 누르고 다른 발은
“주의 증거로 돌이킨다.”(시 119:59) 그래서 경건한 자의 죄는 선을 이룬다. 하나님은 성도의 질병을 약품이 되게 하신다.
그러나 이 교리를 남용하지 말라. 나는 죄가 참회하지 않는 죄인에게 선을 이룬다고 말하지 않는다. 죄는 죄인에게 정죄를 이루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선을 이룬다. 그리고 경건한 자라면 죄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죄에 대하여 대답해지기 위하여 이 교리에서 잘못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임을 안다. 만일 당신이 그런 결론을 내린다면, 하나님은 그로 인하여 당신을 혼나게 하실 것이다.
다윗을 기억하라. 그는 주제넘게 감히 죄를 범했는데, 그가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는 평안을 잃고 그 영혼에 전능자의 두려우심을 느꼈다. 물론 그에게는 많은 낙이 있었다. 그는 왕이었으며 음악에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그는 “꺾으신 뼈” 때문에 하소연한다. (시 51:8) 그리고 그는 결국 검은 구름에서 나왔지만, 몇몇 신학자들은 그가 죽는 날에도 완전한 즐거움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견해를 말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선으로 돌이실 수 있다 하여 어떤 하나님의 백성이 쓸데없이 죄에 관여할 경우, 하나님은 그들을 정죄하지는 않으시더라도 이생에서 그들을 지옥 같은 지경에 빠뜨리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한 고뇌와 영혼의 격동을 주셔서 두려움이 가득하게 하시며 거의 절망 상태에 이르게 하신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금하신 과실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는 화염검이 되게 하신다.
지금까지 나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들이 크신 하나님의 압도하는 손에 의하여 합력하여 성도에게 선을 이룬다는 것을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죄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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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3 (토마스 왓슨)

 

 

제 3장 왜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가

1.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큰 이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친밀하고 친근한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렘 32:38) 이 계약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 백성에게 선을 이루며 틀림없이 이룬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시로다”(시 50:7)
“네 하나님”, 이 말은 성경에서 가장 달콤한 말이며, 가장 뛰어난 관계를 함축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이런 관계가 있을 수 없다면, 따라서 모든 것이 그들에게 선을 이루지는 않는다. “나는 네 하나님이라”는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1) 의원과 환자의 관계 : “나는 네 의원이다.”
하나님은 솜씨 좋은 의원이시다. 그분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상이한 기질을 관찰하시며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어떤 기질은 친절한 성향에 속하여 자비에 이끌린다. 어떤 기질은 거세고 억세며 복잡하다. 이런 기질은 하나님은 좀 더 강력하게 다루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똑같이 다루지 않으신다. 강한 자에게는 시련을 주시고 약한 자에게는 강심제를 주신다.
하나님은 신실한 의원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주시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은 주실 것이다. 의원은 환자의 취향을 맞추기 위하여 애쓰지 않고 병을 고치려고 애쓴다. 우리는 아주 쓰라린 시험이 닥치는 것을 불평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원이심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기분을 맞추기보다 우리를 치유하려고 애쓰신다. 하나님이 자녀를 가혹하게 다루실지라도 그들은 안전하며 치유를 받는다.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2)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함축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웃음을 보이거나 매를 때리거나 그것은 자녀의 유익을 위함이다. 나는 네 하나님, 네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네 선을 위하여 행한다.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신 8:5) 하나님의 징계는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를 해칠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아버지가 자녀의 파멸을 추구한다면, 그에게서 나온 자녀가 그의 형상을 담고 있겠는가? 그의 모든 배려와 계획은 자녀를 위한 것이다. 그가 자녀 말고 누구에게 유업을 주겠는가? 하나님은 온유한 마음을 가지신 “자비의 아버지”(고후 1:3) 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와 인자를 피조물에게 베푸신다.
하나님은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사 9:6) 그분은 영원부터 우리의 아버지이셨다. 우리가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영원까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아버지는 사는 동안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으면 자녀는 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어 아버지 역할을 그만두는 일이 없으실 것이다. 당신이 신자라면 결코 죽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라면, 당신은 결코 파멸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선을 이룬다.
3)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함축한다.
이는 친밀하고 달콤한 관계이다. 남편은 배우자의 선을 추구한다. 남편이 아내를 파멸시키려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엡 5:29)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는 혼인 관계가 있다.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사 54:5)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전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분은 손바닥에 그들을 새기신다. (사 49:16) 그분은 마음의 인처럼 그들을 품으신다. (아 8:6) 그분의 그들의 속량물로 나라들을 주실 것이다 (사 43:3)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친근한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사랑으로 가득하신 남편이라면, 배우자의 선을 추구하실 것이다. 그분은 상처를 싸매시든지 아니하면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바꾸실 것이다.
4)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친구 관계를 함축한다.
“이는 나의 친구이다”(아 5:16)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친구는 자신의 절반이다. 그는 친구에게 선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힘쓴다. 그는 친구의 안녕을 자신의 안녕으로 여기고 증진시킨다.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위하여 감히 왕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삼상 19:4)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실 것이다. 거짓 친구가 있다. 그리스도는 친구에게 배반당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최고의 친구이시다.
그분은 신실한 친구이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9) 그분은 사랑에 신실하시다. 그분은 품속에 계신 아들을 내어주셨을 때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셨다. 여기 비할 데 없는 사랑의 모범이 있었다. 그분은 약속에 신실하시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약속하신 것인데”(딛 1:2) 그분은 약속을 변경하실 수 있지만 그것을 깨뜨리실 수는 없다. 그분은 행하시는 일에서 신실하시다. 그분은 고통을 주실 때 신실하시다.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 이니 이다.”(시 119:75) 그분은 우리를 은처럼 체질하고 단련하고 계신다.(시 66:10)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친구이시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친구는 종종 위기 대 넘어진다. 여자가 꽃을 다루듯이 많은 사람은 친구를 다룬다. 꽃이 신선할 때 여자는 꽃을 품속에 두지만, 시들기 시작하면 내팽개친다. 혹은 여행자가 해시계를 대하는 것과 같다. 만일 해가 해시계에 비치면 여행자는 길에서 나와 시계를 본다. 그러나 해가 비치지 않으면 여행자는 그것을 지나치며 결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람이 번영할 때라면, 친구들이 쳐다본다. 그러나 역경의 구름이 끼면 그들은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친구이시다. 그분은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다윗이 죽음의 그늘에서 걸었지만, 곁에 친구가 계심을 알았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결코 자신의 사랑을 거두시지 않으신다. “(그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하나님은 그런 친구이시므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 친구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친구는 없다.
5)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좀 더 가까운 관계를 함축한다.
즉 머리와 지체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는 신비로운 연합이 있다. 그는 “교회의 머리”라 불리신다. (엡 5:23) 머리가 몸의 유익을 구하지 않겠는가? 머리는 몸을 인도하며 몸과 공감하며 영혼의 샘이 되며 몸에 영향을 주고 위로를 공급한다. 머리의 모든 부분은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눈은 망루처럼 있어서 몸에 다가올 위험을 탐색하고 막기 위하여 보초를 선다. 혀는 맛보는 자이며 웅변가이다. 몸이 작은 우주라면 머리는 이 세계의 태양이다. 이 태양으로부터 이성의 빛이 나온다. 머리는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의 신비한 몸을 이룬다. 우리의 머리는 하늘에 계시며, 분명 그분은 몸이 상하게 하지 않으시고 몸의 안전을 도모하신다. 그리고 신비한 몸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협력하게 하신다.

2. 모든 것이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협력한다는 명제에 담긴

1)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면, 거기에 섭리가 있음을 배운다.
사물들은 저절로 선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이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과 쟁점을 처리하시는 위대한 분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신다
.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이는 그의 섭리적 왕국을 뜻한다. 세상에 있는 것은 제2원인, 사람들의 계획, 별들과 행성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다.
섭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의 결정, 모든 것을 그 시대와 사건에 일어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사물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이루든, 하나님이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신다. 우리는 에스겔 1장에서 바퀴에 관하여 읽는다. 바퀴에 눈이 있고 바퀴가 움직인다. 바퀴는 전우주이며, 바퀴의 눈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바퀴의 움직임은 아래 이 땅의 모든 것을 돌아가게 하는 섭리의 손이다. 어떤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섭리의 결과이다.
2)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행복한 상황을 주목하라.
가장 좋은 것이든 가장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선을 이룬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시 112:4) 아무리 깜깜하고 구름 낀 하나님의 섭리라도 정직한 자에게 햇살을 비춘다. 참된 신자는 얼마나 복된 상황에 있는가! 그는 죽을 때 하나님께 간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것이 그에게 선을 이룰 것이다. 고통도 그에게 유익이 된다. 불이 황금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가? 키가 밀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가? 키는 밀과 가라지를 분리시킬 뿐이다. 거머리가 몸에 무슨 해를 끼치는가? 거머리는 나쁜 피를 빨아먹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쓰레기를 치우기 위하여 막대기를 사용하실 뿐이다.
고통은 여러 번의 말씀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이룬다. 고통은
“귀를 열어 교훈을 한다.”(욥 36:10) 하나님이 괴롭게 하실 때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본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치는 것은 음악가가 바이올린을 켜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게 하는 것과 같다. 고통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선을 가져다주는가! 성도는 매 맞고 부서질 때 가장 달콤한 향기를 낸다. 고통의 뿌리는 쓰지만 열매는 달콤하다.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고난은 하늘로 가는 대로이다. 고통은 냉혹하고 힘들지만 최고의 길이다. 궁핍은 우리의 죄를 굶겨 죽인다. 질병은 은혜를 더욱 유익하게 만들 것이다.(고후 4:16) 책망은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벧전 4:14) 때문에 받는다. 죽음은 눈물의 병을 막고 낙원의 문을 열 것이다. 신자의 죽는 날은 영광으로 올라가는 날이다. 그래서 성도는 재산 목록에 고통을 포함시킨다. (히 11:26) 테미스토클레스는 조국에서 추방당한 후 이집트 왕의 호의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추방당하지 않았더라면 멸망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고통을 받지 않았다면 멸망했을 것이다. 나의 건강과 재산을 잃지 않았다면 나의 영혼을 잃었을 것이다.”
3) 그러므로 여기서 경건한 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보라.
모든 것이 선을 이룰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신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더 우리를 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신앙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진짜 현자의 돌이다. 신앙의 가장 시큼한 부분, 즉 고통스러운 부분을 택하라. 거기에 위로가 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고난을 누그러뜨리신다. 그분은 설탕으로 쓴 쑥을 감미롭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얼마나 경건하게 하는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실패자가 된 사람은 없다. 이로써 당신에게 유익이 찾아올 것이다. 풍부한 선, 은혜의 달콤한 증류수, 숨겨둔 만나,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 하라. 그분의 이익을 도모하라.
4) 불의한 자의 비참한 처지를 주목하라.
경건한 자에게는 악한 것이 선을 이룬다. 악한 자에게는 선한 것이 해를 끼친다.
(1) 현세의 좋은 것이 불의한 자에게 해를 끼친다.
세네카가 말하듯이, 부와 번영이 유익이 되지 아니하고 올무가 된다. 미갈을 올무로 다윗에게 주었듯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한 자에게 올무로 주어졌다. (삼상 18:21) 독수리는 향수 냄새를 맡으면 병이 난다고 한다. 그처럼 불의한 자는 번영의 달콤한 향수 냄새를 맡고 병을 얻는다. 그들의 자비는 개에게 던진 독이 든 떡과 같다. 그들의 상은 사치스러운 식사가 차려져 있으나, 미끼에는 낚시 바늘이 있는 법이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시 69:22) 그들의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의 진노의 소스가 뿌려진 이스라엘의 메추라기와 같다. (민 11:33) 교만과 허영은 번영의 쌍둥이 형제이다. “네가 살찌고”(신 32:15)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을 버렸다. 부는 거미줄과 같아 유익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사의 알처럼 해롭다.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 5:13)
불의한 자들이 당하는 일반적인 비참함은 그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자석이 아니라 그들을 지옥 깊이 빠뜨리는 바위이다. (딤전 6:9) 그들의 맛있는 음식은 하만의 잔치와 같다. 그들의 거창한 잔치가 다 끝나면 청구서에는 죽음이 적힌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2) 영적으로 선한 일이 불의한 자에게 해를 끼친다. 그들은 천상의 복이라는 꽃에서 독을 빤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배는 그 바람에 밀려 포구에 이르고 다른 배는 바위에 부딪힌다. 사역의 숨결은 선한 자를 하늘에 이르게 하지만 속된 죄인은 지옥에 이르게 한다. 그 입에 생명의 말씀이 있는 자들이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향기가 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사 6:10). 선지자는 슬픈 메시지를 받아 장례식 설교를 전했다. 불의한 자는 설교를 듣고 더욱 나쁘게 된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암 5:10). 죄인은 죄를 지으면서 더욱 결연한 태도를 취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라도 그들은 자신이 계획한 바를 행하려 한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렘 44:16). 전한 말씀은 치유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 사람이 설교를 듣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얼마나 두려운가!
기도가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잠 15:8). 불의한 자는 매우 완고하다. 그는 기도를 아니 해도 범죄하고 기도를 해도 범죄 한다.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시 109:7). 사람이 먹는 모든 것이 나쁜 체액이 되고 몸에 병을 일으킨다고 하면, 서글픈 심판이다. 불의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유익을 끼쳐야 하는 기도인데도 오히려 그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죄를 대적하여 기도하고 기도를 대적하여 죄를 짓는다. 그의 활동은 무신론으로 오염되고 위선으로 더럽혀진다. 하나님은 그 활동을 싫어하신다.
성찬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너희가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게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1,22). 어떤 신앙 고백자는 우상 잔치에 계속 참여하면서도 주의 상에 오곤 했다.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세속적인 사람들은 죄로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주의 상에 참여하러 나올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노여워하시게 하는 것이다. 죄인에게는 그 잔에 죽음이 있어서, 그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다. (고전 11:29) 그래서 성찬은 참회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해를 끼친다. 빵조각을 먹은 후, 마귀가 들어온다.
그리스도께서 절망적인 죄인에게 해를 끼치신다. 그분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벧전 2:8)이시다. 그분은 인간 마음의 부패함을 통하여 그리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을 믿기보다 그분께 죄를 짓기 때문이다. 태양은 순수하고 유쾌한 본성을 갖고 있지만 아픈 눈에는 해롭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흥함뿐만 아니라 패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다. (눅 2:34) 죄인은 구세주에게 걸려 넘어지며 생명나무에서 사망을 딴다. 화학 기름이 어떤 환자는 회복시키지만 어떤 환자는 파멸사키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피도 어떤 이에게는 약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정죄가 된다. 여기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자의 비할 데 없는 비참함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며, 심지어 강심제를 먹고도 그들은 죽는다.
5) 여기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돌이켜 성도의 유익이 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라.
하나님은 그분의 화학품을 써서 불순물 찌꺼기에서 황금을 추출하실 수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이는 그 지혜의 놀라움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다. 주님은 요셉의 감옥을 승지의 한 계단으로 만드셨다. 요나가 구원받을 길이 없었지만, 물고기에게 삼키워서 구원받았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미워하게 하셨고(시 106:41) 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수단이었다. 사도 바울은 쇠사슬에 매였지만, 그를 맨 쇠사슬은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빌 1:12) 하나님은 궁핍을 통하여 부요케 하신다. 그분은 재산이 달아나게 하여 은혜가 늘어나게 하신다. 피조물이 우리로부터 멀어질 때 그리스도는 우리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다.
하나님은 묘하게 일하신다. 그분은 혼란 가운데서 질서를, 부조화 가운데서 조화를 이끌어 내신다. 그분은 자주 부정한 자를 쓰셔서 의로운 일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욥 9:4). 그분은 사람의 분노에서 자신의 영광을 거두실 수 있다. (시 76:10) 불의한 자가 자신이 의도한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되거나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선을 행하게 된다.
종종 하나님은 희망이 거의 없을 때 도움을 주시며, 자기 백성의 생각에는 망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분은 대제사장의 악의와 유다의 배반을 사용하여 세상을 구속하신다. 경솔한 열정 때문에 우리는 일어나는 일을 탓하기 쉽다. 마치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철학을 비난하거나 눈먼 사람이 풍경을 탓하는 것처럼 말이다
.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욥 11:12) 지각없는 동물은 섭리를 비방할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이성을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 길은 헤아리기보다 감탄해야 하는 것이다. 긍휼과 놀라움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 가장 역행하는 시절이 그 백성에게 유익되게 하는 그 지혜는 얼마나 엄청나고 무한한가!
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외적인 시련과 당장 닥친 일에 실망할 이유가 지극히 적음을 배우라.
우리에게 선을 끼치는 것에 실망하다니 말이 되는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불신이나 초조함이라는 죄에 가장 잘 빠진다. 그들은 불신 가운데 비틀거리거나 초조 가운데 안달하기 쉽다. 사람들이 불만과 초조로 하나님을 거슬러 달아날 때, 이는 그들이 이 본문(롬 8:28) 을 믿지 않는 표시이다. 불만은 감사치 않는 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보다 긍휼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만은 불합리한 죄이다. 왜냐하면 고난이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만은 우리를 범죄케 하는 죄이다.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8). 안달하는 자는 악을 행하기 쉬울 것이다. 안달하는 요나는 범죄 하는 요나였다. (욘 4:9)
마귀는 열정과 불만의 숯에 바람을 보내며, 그 불로 몸을 데운다. 이 화난 독사를 우리 품에서 키우지 말자. 이 본문을 듣고 인내를 키우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에게 선을 이루는 것을 불평해야 되겠는가? 한 사람이 친구에게 돈주머니를 던졌는데 돈주머니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고 해도, 친구는 그렇게 해서 돈주머니를 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지만, 이는 우리를 부요케 한다. 이 고난은 우리에게 큰 영광을 이루는데 우리가 불평해야 하겠는가?
7) 여기서 성취된 성경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선을 행하시나”(시 73:1).
우리는 견디기 힘든 섭리를 보고, 주님이 그 백성에게 재를 뒤집어씌우시는 것을 보고, “(그들을) 쑥으로 취하게 하시는”(애 3:15)것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들어 하나님이 그 백성을 호되게 하신다고 말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돌이켜 선이 되게 하는 그분은 선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분은 죄를 없이하고 은혜를 일으키시니 선한 분이 아닌가? “우리가……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고난의 깊은 것은 우리를 정죄의 깊음에서 건지기 위함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옳으시다 하자. 우리의 외적인 형편이 점점 나빠질 때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도다”하고 말하자.
8) 성도가 어떤 이유로 감사의 활동에 자주 참여해야 하는지 살펴보라.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불완전하다. 그들은 간구는 많이 하지만 감사는 별로 하지 않는다. 사도는 말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 왜 그래야 하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의원이 쓴 약을 주어 괴롭게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낫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을 베푸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감사한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신다.
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져가셨을 때 감사했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때 감사할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가져가실 때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거기서 선을 이루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양의 상질물인 수금을 손에 들고 있는 성도에 관하여 읽는다. (계 14:2) 우리는 눈물이 가득하고 입에 불평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난다. 그러나 손에 수금을 들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고난 가운데 감사하는 것은 성도에게만 있는 일이다. 모든 새가 봄에 노래할 수 있지만, 지독히 추운 겨울에 노래하는 새도 더러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잘살 때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참된 성도는 역경에도 감사할 수 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해가 뜰 때뿐만 아니라 해가 질 때도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지독히 어려운 일에 떨어질 때도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으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자.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9) 가장 나쁜 일이 신자에게 선을 이룬다면 가장 좋은 것, 즉 그리스도와 천국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하라.
이런 것들은 얼마나 많이 선을 이루겠는가! 만일 십자가에 그토록 많은 유익이 있다면 면류관은 어떠하겠는가! 만일 골고다에서 그렇게 귀한 포도송이가 자란다면, 가나안에서는 그 열매가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마라의 물에 단 것이 있다면, 낙원의 포도주는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막대기 끝에 꿀이 있다면, 그 황금 홀 끝에는 어떠하겠는가! 고난의 떡이 그토록 맛있다면 만나는 어떠하겠는가! 천상의 음식은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치고 때리심이 선을 이룬다면, 그 얼굴의 웃음은 어떠하겠는가! 시험과 고난이 즐거움을 갖고 있다면 영광은 어떠하겠는가! 악에서 그렇게 많은 선이 나온다면, 악이 없는 선은 어떠하겠는가! 만일 하나님의 징계의 긍휼이 그렇게 위대하면 그분의 상급의 긍휼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로 서로 위로하라.
10)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면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 일인지 생각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천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찬가를 부른다. 그러면 천사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셔서 우리를 천사보다 존귀케 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지 천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 복의 창고에서 우리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복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을 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안녕을 이루려고 애쓰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획은 거저 주시는 은혜로 세워졌다.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분은 그 완전에서 무한하시므로 우리에게 받아 그 완전을 늘리실 수 없다.

대답. 참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지만, 복음주의적 의미에서는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생각을 품게 할 때, 하나님은 이를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보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게 만들 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우리는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진척시킬 수 있겠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최종의 목적으로 삼을 때이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모든 지류가 중심부에서 만나듯이,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서 끝난다.
둘째, 우리는 은혜 가운데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진척시킨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열매 없음은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는 백합처럼 아름답게 자라고 백향목처럼 크게 자라고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셋째, 우리는 행하는 모든 것의 칭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스웨덴 왕의 탁월하고 겸손한 연설이 그러했다. 그는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려 일을 행하기도 전에 물러나지 않을까 두렵다는 말을 했다. 누에가 공들여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은 명주실 아래 숨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을 때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고전 15:10)하고 말했다. 이 연설이 교만으로 가득 찬 것처럼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어 은혜를 거저 주시는 분의 머리에 두었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콘스탄티누스는 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써 두곤 했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가 한 일 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써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고 유명하게 만들기 위하여 힘쓰자.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덕을 이루게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그분을 높이자. 본문에 언급된 특권을 생각하며 더욱 그리하자.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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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 토마스 왓슨의 '묵상'에서 발췌


                                          [기도에 대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엡 6:18)



  경건한 사람이란 곧 기도하는 사람이다.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시32:6)고 하였다. 은혜가 부어지면 곧바로 기도는 쏟아져 나온다. 기도는 영혼과 하늘나라 사이의 교통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우리는 기도에 의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영적인 기도는 믿음의 기도를 말한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마21:22)고 하였다. 어째서 그 많은 기도가 난파를 당하는가 하면, 그 기도들이 불신앙의 바위에 부딪혀 깨어지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총알 없이 사격하는 것과 같다.

  영적인 기도는 거룩한 기도를 말한다. 그런고로 거룩한 손을 들어서 기도하라(딤전2:8). 기도는 순결한 마음의 제단 위에서 드려야 한다. 죄짓는 삶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하나님의 귀를 막아버린다. 죄는 기도하는 입을 막아버리며, 도둑이 길손에게 하듯 기도자의 입에 말 못하도록 재갈을 물린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고 하였다. 죄에 대항하여 기도드리고, 그러고 나서 기도에 대항하여 죄짓는다면 이는 얼빠진 것이다.

  영적인 기도는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시10:17)라고 하였다. 기도는 일종의 자선을 요청하는 것이며, 그래서 겸허함을 필요로 한다. 불쌍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창조주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보기에 어여쁘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라고 하였다. 보다 낮은 위치로 마음이 내려갈수록, 보다 높은 위치로 기도는 올라간다. 깨어진 표현이라도 깨어진 마음에서 우러나오면, 그 기도를 하나님은 받으신다.

 영적인 기도는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이다. 영적인 기도와 세속적인 욕망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위선자의 목적은 세속적이다. 그는 기도를 해도 한눈을 팔면서 한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영적 부족감이 아니라 육욕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하였다. 죄인은 은혜보다 양식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은 기도로 이해하시지 않고, 울부짖음으로 이해하신다.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포도주를 인하며 모이며”(호7:14)라고 하였다. 진실한 목표가 없는 기도들에겐 진실한 응답이 없다. 경건한 사람은 은혜의 재고를 늘리기 위해 기도의 무역업에 종사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귀를 즐겁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녹게 하며, 하나님의 손을 펴게 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영혼을 거절하지 못하신다.

  하나님을 찾겠다고 마음에 다짐하기가 때로는 얼마나 어려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보다 더 기꺼이 십자가로 나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뇌 가운데 몸부림쳐 기도하셨다(눅 22:44). 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 고뇌 가운데 몸부림쳐 기도하기보다 되레 무기력 가운데 심드렁하게 기도한다. 세상일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온통 불덩이가 된다. 기도할라치면, 그들은 온통 얼음장이 된다.

  성도들의 기도의 공동출자는 경건한 자에게 유익이 되도록 작용한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행 12:5-7)고 하였다. 천사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끌어냈지만 천사를 이끌어낸 장본은 기도였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5)고 하였다. 시들한 기도는 시들한 구혼자처럼 일을 진척시키지 못한다. 열정 없는 기도는 불 없이 드리는 제사와 같다. 기도를 가리켜 “심정을 통한 것”이라 불러, 그 열렬함을 나타내고 있다(삼상 1:15). 형식적인 기도는 기도를 질식시킨다.

  당신의 마음을 기도에 집중하고 싶거든 당신의 눈을 고정시키라.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라고 하였다. 많은 허영심이 눈을 통해 들어온다. 기도할 때 눈이 갈팡질팡하면, 마음도 갈팡질팡한다. 사랑은 생각들을 한곳에 고정시켜 주는 유력한 막후 해결사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의 생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뗄 수 없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생각이 온통 세상에 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더욱 기도로 하나님께 전심전념할 것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 제멋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기도할 때 바른 생각으로 회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기도하기를 그치는 사람은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그치는 사람이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욥 15:4)라고 하였다. 기도를 그만둔 사람은 아무 악행이든지 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물어보기를 포기하더니 엔돌의 무당에게 찾아갔다.

  믿음은 기도의 호흡이다. 기도할 때 믿음이 호흡하지 않으면 기도는 죽는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약 1:6)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고 하였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지껄이는 것이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기도의 손을 잡아주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9)고 한 말씀은 기도에도 해당된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하여 / 토마스 왓슨의 '묵상'에서 발췌 (113-117p)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1167 /믿음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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