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율법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신율법주의는 네오노미아니즘(neonomianism)으로도 불립니다. 개념적으로는 반율법주의(안티노미아니즘)와 반대입니다. 반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적 방향성을 가진다면, 신율법주의는 인간 행위의 필요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강조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법, 예수 그리스도


청교도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년)의 칭의론이 신율법주의로 평가되곤 합니다. 백스터에 의하면 죄인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중적(twoford) 의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필요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법"(new law) 입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의는 죄인의 믿음과 회개입니다. 죄인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백스터의 가르침은 대니얼 윌리엄스(Daniel Williams, 1643~1716년)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발전합니다. 독립파였던 아이작 초운시(Isaac Chauncy, 1632~1712년)는 백스터의 칭의론을 반대하면서 윌리엄스와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초운시가 생각할 때 백스터의 칭의론은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였습니다. 왜냐하면 초운시는 만약 새로운 법을 순종하는 데 인간의 믿음. 순종. 회개가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본 것입니다.


백스터의 신율법주의적 칭의론은 존 페스코(John Fesko),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한스 부르스마(Hans Boersma) 같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칭의의 조건으로 강조되면 율법주의적 칭의론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유려 때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티머시 보거(Timothy Beougher) 같은 경우에는, 백스터가 강조하는 믿음과 회개의 행위가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백스터를 신율법주의로 간단히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표하기도 합니다.


행함의 역할 강조


신율법주의의 칭의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칭의에서 적어도 인간의 역할에 주목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둘은 동일하게 보면 안 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는 "행위"가 공로적 조건으로 사용되어 그 중요성이 꽤 크다고 본다면,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은 새로운 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가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율법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 역할의 중요도에서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율법주의는 반율법주의의 칭의론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는 칭의론입니다.


신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면, 다음에 살펴볼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역할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책임 강조 사이의 시소게임이 의와 관련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박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3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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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율법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반율법주의자들(anti-nomian)은 기본적으로 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에서 인간의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지 공로적 형식으로 참여하는 것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반드시 배격해야 할 신학 사상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가 칭의의 방정식 안에서 공로적 원인으로 참여한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반율법주의는 안티노미아니즘(antinomianism) 혹은 율법폐기론으로도 불립니다. 여러 신학적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할 수 있겠지만, 특별히 칭의론의 관점에서 이런 용어들을 해석하면 죄인이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행동이란 그 어떤 형태의 "믿는 행동", "율법을 행함", "인간의 노력" 등을 포함합니다. 즉, 반율법주의자들에게 칭의는 인간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형태의 "무상(free)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반율법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바로 "무상 칭의"(free justification) 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반율법주의의 원류와 성격 들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반율법주의의 원류


반율법주의는 1630-1640년대의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학자들은 반율법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원류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민의 결과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의견이 주류를 이룹니다. 첫째, 일부 학자들은 반율법주의의 사상적 원류를 초대 교회의 각종 신비주의나 중세의 미신적 사상들, 혹은 16-17세기의 각종 분파 사상들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둘째, 보즈먼(T.D. Bozeman) 같은 경우에는 반율법주의의 원류를 반청교도주의(anti-Puritanism)라고 봅니다. 즉 청교도주의가 성경에 근거한 매우 높은 수준의 삶과 행함을 요구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를 일종의 율법주의로 인식해서 그것을 경계한 사람들에 의해 반율법주의가 생겨났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셋째, 데이비드 코모(David Como)는 반율법주의를 극단적 칼빈주의(extreme Calvinism)로 이해합니다. 코모에 의하면 반율법주의는 칼빈주의와 많은 부분에서 신학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드높인 나머지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일정 부분 경시합니다. 이런 의견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반율법주의의 원류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극단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반율법주의의 성격


반율법주의는 비록 "~주의"라는 접미사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어떤 특정 형태의 교단이나 종교 그룹이 일치된 교리적 논제를 가지고 잘 짜인 조직과 구성 아래서 펼친 정밀한 신학적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7세기 영국의 반율법주의는 넓은 스팩트럼을 가진 다양한 신학적 성향들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코모는 반율법주의자들을 단순화하여 보는 것 대신에 "전가적"(imputative), "내재적"(inherent) 혹은 "완전주의적"(perfecttionistic)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어 다양한 스팩트럼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칭의된 자는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것을 설명할 때 전가적 반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적/문자적으로 아예 죄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 반면, 내재적 혹은 완전주의적 반율법주의자들은 칭의된 자에게서 실제적/문자적으로 더 이상 죄를 찾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반율법주의 안에도 신학 사상의 정도 차이가 존재했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존 이튼의 칭의론


반율법주의자 중 하나였던 존 이튼(John Eaton, 1619년경 사망)의 칭의론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의 칭의론에서 우리는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핵심 요소를 쉽게 발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튼의 칭의론은 그가 죽은 뒤인 1642년에 출판된 그의 책 [무상 칭의의 달콤함](The Honey-Combe Free Justification)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을 신학적 원인, 내용, 결과의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이튼이 [무상 칭의의 달콤함]을 쓴 이유는 칭의의 방정식에서 모든 형태의 인간의 이성. 감정. 노력, 심지어는 믿음의 역할까지 제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튼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튼에게 칭의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튼은 칭의가 반드시 "무상 칭의"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튼이 무상 칭의론을 전개한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칭의를 위한 인간의 내적 준비가 필요함), 개혁신학의 가르침(믿음은 도구적 원인),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 전체를 비판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반() 로마 가톨릭, 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을 펼치기 위해 이튼의 결혼식 예복 은유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우리는 거룩한 "결혼식 예복"을 입게 되고, 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됩니다. 완전히 깨끗한 결혼식 예복을 입는 행위는 "하나님의 눈"에서, 완전히 "무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튼에게 믿음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까요? 그렇습니다. 이튼에게 결혼식 예복을 입는 것(즉,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서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과 믿음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믿음이 하는 역할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결혼식 예복을 입었다는 그 사실"을 믿는 것뿐 입니다.


특별히 이튼의 죄에 대한 이해는 개혁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에게서 더 이상 죄를 찾지 않으신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튼은 하나님이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들의 죄를 깊은 바다 속에 다 던져 버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아무런 죄의 흔적이나 부산물을 찾지 않으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와 반대로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 토머스 베이크웰(Thomas Bakewell, 1618년경 출생)은 하나님이 칭의된 자의 죄를 회심 전.후에 다 보신다고 주장합니다. 이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칭의된 자의 죄는 완전히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청교도 개혁신학자 버지스는 죄 용서를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죄를 지으므로" 반드시 "매일 그 새로운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튼의 이런 죄와 칭의 개념 이해는 신학적으로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인해 무상으로 결혼식 예복을 입은 자는 완전히 의롭게 되어 더 이상 죄가 없다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이나 책임 혹은 성화에 대한 요구를 약화시킵니다. 마치 "한번 칭의된 자는 막 살아도 된다"는 식의 도덕적 방종과 무책임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튼도 성화의 필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칭의된 이후의 삶 속에서 죄를 찾을 수 없다는 가르침은 성화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와 근본적으로 묘한 신학적 긴장을 이룹니다.


이튼의 무상 칭의에서 가장 약화되는 것은 믿음의 역할입니다. 사람이 믿음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결혼 예복을 입는 순간 완전히 외롭게 되기 때문에, 종교개혁적 칭의의 원리인 "오직 믿음을 통해"(sola fide) 의롭게 된다는 원리는 무시됩니다. 칭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극단적으로 드높인 결과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고 무시된 것이 바로 이튼의 반율법주의적 칭의론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강조, 인간의 역할 약화


인간의 역할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킨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과 대적하기 위해, 반율법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반대로 인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칭의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들의 동기 자체는 칭찬받을 수 있겠지만, 반율법주의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주권"만"을 강조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칭의에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경시되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는 반대 방향으로 추가 기울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기울어진 추의 균형을 돌려놓기 위해 또 다른 신학 사상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에 살펴볼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입니다.



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26-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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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이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을 딴 칭의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은 후일에 아르미니우스주의로 불렸고 그 사상적 후예들은 항론파(remonstrant)라고도 불렸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전통적 칼빈주의와 대비되는 가르침을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빈주의의 가르침에 이의를 제기해 항변서 형식으로 다섯 가지 논제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바로 부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보편적 속죄, 가항력적 은총, 구원의 탈락 가능성입니다. 이런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 사상은 그 당시 유럽 전체 개혁교회의 신학 사상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그 반응으로 도르트회의가 소집되어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정죄와 비판을 받게 됩니다.


칭의의 행위적 조건인 믿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핵심은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믿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 믿음의 행위는 인간의 자유 선택의 능력에서 비롯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기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그 행위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의 행위적 "조건"이 됩니다. 얼핏 보면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칭의는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중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개념이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가 믿음의 역할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칭의의 4중 원인


세상의 모든 일에는 다 원인(cause)이 있습니다. 만약 밖에 비가 내린다고 생각해 봅시다. 비는 스스로 내릴 수 없습니다.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비가 내린다"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복잡한 신학 개념을 다룰 때 기본적으로 원인을 네 종류로 분석하여 신학 개념을 설명하곤 했습니다. 사실 이런 4중 원인론을 사용하는 것의 원류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였습니다. 그는 현상의 원인을 질료인(質料因), 형상인(形相因), 목적인(目的因), 작용인(作俑因)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신학자들도 각종 신학 개념을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신자의 구원을 설명할 때 유효적 원인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나 즐거움이고, 형상적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도구적 원인은 복음이며, 마지막으로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런 원인을 칭의에 적용시켜 봅니다.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자인 앤서니 버지스는 그의 책 [참된 칭의 교리]에서 칭의를 다음과 같이 4중 원인으로 설명합니다. 칭의의 유효적 원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이고,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와 그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이고, 도구적 원인은 믿음이며, 목적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런 설명은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보편적으로 가르쳐진 칭의의 4중 원인입니다.


그러나 칭의의 4중 원인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생각은 사뭇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에 대한 것입니다. 개혁신학에서 믿음의 역할은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믿음 자체는 어떤 능력이나 힘, 공로가 없습니다. 믿음은 공로적 원인인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유익을 인지하고 믿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전적인 공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칭의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혹은 "덕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에 근거할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을 형상적 혹은 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칭의에서 "믿는 행위"는 칭의의 조건이 되며 자연스럽게 칭의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는 그 행위로 인해" 칭의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인간의 역할과 행동이 칭의의 방정식에서 사뭇 중요해집니다. 그러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깊이 연구한 키스 스탱글린과 토머스 맥콜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다"라고 바르게 언급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믿음을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것에 대해 그 당시에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역할과 공로는 작아지고 오히려 인간이 믿는 행위의 역할과 공로는 상대적으로 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은 칭의 때 믿음이 하는 바른 도구/수단적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 하시되, 그들 속에 의를 부어 넣으심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고 받아들이심을 통해서이며, 그들 안에 이루어진 혹은 그들에 의해 행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나 다른 어떤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로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그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킴을 통해서인데, 그 믿음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1절에서 칭의 때 믿음이 하는 역할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릅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즉 믿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때" 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믿음은 어떤 공로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 믿음이 우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지식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나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적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신인협력설(synergism)이란 단어로도 표현됩니다. 신인협력설은 신인협동설이라고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 선택 의지/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협력하여 구원을 이루어 나간다는 이론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신인협력설을 주장하기 위해 중간지식(scientia media)은 매우 유용한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은 본래 예수회 신학자였던 페드로 데 폰세카와 루이스 데몰리나에 의해 발전된 개념입니다. 아르미니우스도 중간지식 개념을 차용하여 자신의 구원론을 전개합니다.


그렇다면 중간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지식은 크게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으로 나뉩니다. 자연적(혹은 필연적) 지식이란 하나님이 스스로의 본성에 의해 자신뿐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필연적으로 다 알고 계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에 반해 자유 지식이란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한 지식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실체화되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예수회 신학자들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이 두 가지 지식 외에 또 다른 지식을 추가합니다. 이 지식은 의도적으로 자연적/필연적 지식과 자유 지식 사이에 위치하여 미래의 우연성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개념입니다.


중간지식을 구원론에 적용해서 이해해 보겠습니다. 구원에 대한 전통적 시각에서,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자유 지식에 의해 영원 전부터 주권적으로 선택하십니다(엡 1:4, 9, 11; 롬 8:30; 딤후 1:9; 살전 5:9; 벧전 5:10). 하지만 중간지식 개념에서의 구원은 인간의 선택 행위를 포함합니다. 인간이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하는 "조건에 근거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행됩니다. 중간지식 개념에서는 인간이 선택할지 여부가 하나님의 지식 바깥 영역에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입니다. 결국 중간지식을 차용한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미래의 우연적 사건들에 기초한 "조건적 구원론"이 됩니다. 그러므로 중간지식 개념은 구원의 방정식에서 인간이 구원에 대해 자유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인간 중심적 구원 지식론입니다.


개혁신학은 중간지식 개념을 반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연적/필연적 지식이나 자유 지식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염두에 두는 포괄적 지식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우연성에 근거한 그 어떤 형태의 중간지식 개념을 위한 자리도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예를 들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었던 프란키스쿠스 투레티누스(Francis Turretin, 1623-1687년)나 윌리엄 트위스(Willian Twisse, 1578-1646년)는 중간지식 개념이 하나님의 속성인 전지(全知, 모든 것을 다 앎)를 무너뜨리고,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이론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역할 강조, 하나님 주권 약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의 역할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을 약화시키는 우를 범했습니다. 믿는 행위를 칭의의 조건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믿는 행위에 칭의의 공로를 부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믿음을 칭의의 도구적 원인으로 이해하지 않고 형상적/공로적 원인으로 이해한 결과 그리스도의 의의 공로는 약화되었습니다. 결국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서 균형 잡기에 실패한 칭의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에서 약화되었던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높이기 위한 신학적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 신학적 바람은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반율법주의의 칭의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18-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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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유행하는 경건(영성) 훈련들이 대개 하나님의 임재를 표방하고 있으며, 임재의 방편에 관상,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예수 기도(Jesus Prayer) 등이 단골 메뉴로 올려집니다.




기독교 서점가의 스테디 셀러 목록에는 하나님 임재를 주제로 한,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1611-1691)의 '하나님의 임재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프랑스의 경건주의자 '마담 귀용(Madame Guyon, 1648-1717)'의 서적 등이 랭크되고 있음은, 그만큼 임재가 기독교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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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 자체나 임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존자이시기에 그가 현현하는 곳에 신자가 임재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문제는 그것의 왜곡과 남용 때문입니다. 임재란 정확히 말하면 임재 의식(consciousness of presence)이며, 말 그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의식하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임재의 기원은 무죄했던 에덴이며, 아담과 하와에게는 임재가 일상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만족의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이를 성경은 모든 성도들의 금생과 내생의 지복으로 칭송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거두어졌습니다. 범죄 후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죄인에게는 임재가 불허된다는 하나의 징표였습니다(창 3:23).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을 통해(창 3:21) 임재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적인 인물들로는 3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등이 거론됩니다.


    

교회사에서는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 1899-1981) 같은 이들은 탁월한 임재의 경험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재는 이 분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허락된 보편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임재가 특별한 일인 것처럼 되고,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들이 동원되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는 이런 비정상의 편린들로 넘쳐납니다.


영지주의, 화체설, 성자의 유물 숭배, 경건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오늘날 에큐메니칼적 영성훈련은 왜곡된 임재 추구의 산물들입니다. 단언컨대 이런 인위적인 수단들로 하나님의 임재를 이끌어낼 순 없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성경적 근거는, 속죄소 위의 하나님 현현입니다(출 25:21). 피가 뿌려진 속죄소는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겠다고 약속한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어디든 안 계신데가 없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심에도, 죄가 세상에 유입된 후에는 오직 그 곳 속죄소에만 임재하셨습니다.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1-22)." 피가 뿌려진 속죄소는 장차 세상에 오셔서 피흘리실 그리스도를 상징했습니다. 또한 이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머무실 유일한 성전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라는 찬송가 가사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임마누엘의 피'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임마누엘이심을 진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임마누엘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살아계신 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어 모든 삼위께서 그들 안에 거주하시고 동행하십니다(조지 휫필드,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 전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요단강 수세(受洗)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을 예표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직접 자신의 피뿌림을 받은 자에게만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피뿌림이 하나님 임재의 조건이 됨은, 이방의 미신 종교에서처럼 피에 무슨 영험이 있어서거나, 하나님을 호츨하는 영매 역할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임재의 장애물인 죄를 없이해 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없이한다는 것은 시종일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히 9:14)'.


그리고 임재를 불러오는 그리스도의 피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뿌려집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도께서 택자를 위해 흘려 놓으신 속죄의 피가 믿음을 통해 현재적으로 그들에게 뿌려집니다. 모세가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율법을 선포한 후, 송아지의 피를 율법책과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히 9:19-21), 언약을 어기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과 아울러, 언약을 어겨 죽을 죄인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 구속받을 것을 예표했습니다.


이해를 돕는 말씀이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여기서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임재(화목)을 불러 온다'는 뜻이고, '믿음'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피, 임재(화목), 믿음'의 긴밀성으로 인해 '하나님이 믿음에 임재한다(엡 3:17)'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에 임재한다(출 25:21)'가  성경에서 상호 교호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오는 유일한 통로로 주장하는 이유도,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혀 의롭다함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율법적(행위적) 의(義)가 임재를 불러올 수 없음은, 그것이 임재를 불러올 만큼 완전한 의(義)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적(행위적) 의(義)는 의로우신 그리스도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를 소유하는 길은, 그가 이룬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덧입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적 완전을 덧입어 된 의(義)를, '믿음으로 된 의(롬 4:11)',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빌 3:9)'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반면 자기의 율법적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정죄를 이룰 뿐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종말 때까지 칭의가 유보된다고 주장하는 칭의유보자들에게는 종말때까지 하나님의 임재가 유보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타 반(反) 이신칭의론자들 역시 자신들이 추구하는 임재 형태에 따라 나름대로의 임재 수단들을 고안합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을 가진 교인들은 타종교의 수행방법들을 차용해 임재를 실현하려 하고, 자유주의 신자들은 직관이난 신비를 통해 임재를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철학적 종교인들은 명상(meditation)을 통해 임재를 꿈꾸고, 뉴 에이지(New Age)에 세뇌된 교인들은 음악 문학 예술 같은 문화를 통해 임재를 끌어내려고 합니다.


이들이 외면적으로는 매우 아카데믹하고 컬츄럴(cultural)해 보이나, 무당이 접신을 위해 강신술을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저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당과 주술사만큼이나 악합니다. 이는 그들이 명분상으로는 하나님임재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실제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자아 우상(ego-god) 아니면 잡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내려고 인위적인 수단들을 고안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믿음을 좌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은 고답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구약 시대는 짐승의 피에 임재가 이루어졌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믿음으로 임재를 이끌어냈다면,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21세기 종교다원주의 시대에는 다양한 임재 방식이 동원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한 임재' 방식은 태초부터 세워진 불변의 경륜이고, 시대를 초월한 원리입니다. 이 외에 다른 방안은 없습니다.

임재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죄의 장벽이 하나님의 임재를 막았으니, 피뿌림으로 죄의 장벽을 없이해 임재를 복구시키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외에 다른 임재 방식은 없습니다. 만일 누가 인위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임재를 경험했더라도, 그것은 필시 하나님이 아닌 악령의 임재입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만나지 않은 하나님을 악령이라고 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것이라고 한 것(갈 3:2) 역시, 성령의 임재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의 피뿌림을 받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임재의식이 따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또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임재에 만족하여 별도의 임재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여기저길 기웃거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오직 의의 복음에 있음을 알았기에, 오직 복음만을 구하고 복음만을 듣고 싶어 할 뿐입니다. 루터에게 천국이 열려지는 경험을 갖다 준 로마서 1장 17절, 시편 22편의 체험 역시 이신칭의의 복음이 갖다 준 임재의 경험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순간, 하나님과 루터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천국도 함께 열려졌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3069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김영희 강의안

 


(롬4:23-25) (23)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우

 

-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23)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나님의 의의 방식, 구원 방법, 이신칭의의 전 과정에 대한 가장 뛰어나고 극적인 실례이며 예증이다. 아브라함에게 진리였던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과거나 현재, 미래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진리이다. 이것만이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이다. 다른 길은 없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처럼 믿는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받았던 것처럼 의롭다함을 받을 것이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24)

의롭다 함을 얻는 이 믿음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이다. 어떻게 사람이 확신 있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이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 이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진수임과 동시에 복음적 기독교의 진수이다.

- 첫 번째,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영화롭게 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위대한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하는 믿음이다.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결코 언급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이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에 관한 바울의 정의에서 아직 그는 하나님을 믿는 차원에서 그것을 논하고 있다. 마귀는 우리를 혼란케 하여 하나님에다가 모든 강조를 하고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게 한다. 또 성령이 무시되거나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우도 있어 이 위대한 삼위일체 교리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경향을 보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를 성경에 나타난 순서로 유지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에게서 마친다. 이것이 출발점이며, 첫 번째 단계이다.

 

- 두 번째, 그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바울이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께 화해하는 길에 관해서 알기 원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나 모하멧 교도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특유한 어떤 것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어 그 점이 그를 의롭다함을 입게 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는 그저 예수가 영체로서 휘장 저편에 생명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사실을 믿지 않는 한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없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전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그렇다면 너희는 그저 너희 죄 가운데 있느니라”(고전15:13-17). 부활의 사실은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중추적이며 치명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말씀하신 것은,

①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구세주’라 하지 않고 ‘우리 주’라 한 것을 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1:3-4)

 

우리가 명백히 해야 할 점은 예수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아들이라는 점을 선언하는 부활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격위의 교리 즉 한 인격 안에 두 성질을 가진다는 교리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이다.

② 이 예수가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준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단순히 ‘예수는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의 범죄함을 위해 내어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를 거두시어 그에게 짊어 지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심판하셨다.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사람이다. 그들은 단지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 때문에 주님은 자발적으로 복종하셨다. 어느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자기 자신에게 지우셨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그것의 다른 국면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재판자로 주님께 그들을 맡긴다. 그리고 그들을 거기서 단번에 다루신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며, 그것이 부활로 천명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처리하는 유일한 길이 그것이기 때문에 죽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의 죄악을 처리하셨던 것이다.

③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 나셨느니라” 그런데 5:9에서 바울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순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죽음과 부활은 떼놓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죽음만 전했지 부활은 전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역사를 완전히 만족해하신다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큰소리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을 그를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아 그것이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에서 하나님은 엄청난 선언을 하시고 계셨다.

만일 하나님이 그를 무덤에서 살리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책에 대한 심판을 담당하실 수 없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살리심으로 아들이 사역을 완성시켰으며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그의 부활에서이다. 그 일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으나, 부활에서는 그것이 충분하다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택한 증인들에게 나타나 보이신 후 승천하셨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그의 피를 가지시고 하늘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거기 계신다. 거기 계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그를 완전히 열납하셨고 그의 제물을 흠향하셨다는 증거이다. 그는 거기서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하신다. 또한 그는 들어가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대표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모든 위대하고 풍성한 은사를 받으셨다. 우리는 그로부터 그것을 받는다(요1:16) 부활은 이 모든 것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심으로 이 위대한 선포를 하고 계신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해하시고 계셨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이다. 신앙은 여러분의 완전한 구원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그것만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점은 ‘우리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는’ 바로 그것이다.


- 세 번째,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가 알아보았듯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오직 하나님이 말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행동하였다. 반대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언제나 그와 같게 마련이며 그래야만 한다. 여러분들에게 약한 신앙과 강한 신앙은 있지만 이들 요소들은 약하든 강하든 모든 신앙 속에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기독교적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려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자기에게 하나님이 말씀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의뢰하는 사람이다. 그 모든 것이란 성령, 성육신, 생애, 순종, 죽음, 장사, 부활, 승천 등 이 모든 것이다.

분명히 신자는 자기의 행위나 다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자기를 의롭다 하는 것이나 그렇게 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행한 선한 일이나 여러분의 됨됨이를,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구원 받지 못하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 무엇이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인가?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그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믿는 믿음이다. 아직도 자기 속에 악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다.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며, 자기 자신의 약함과 자신의 타락하기 쉬움과 실패하기 쉬움을 알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이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그와 같아야 한다.

 

믿음이란 마귀가 “너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나?”고 말하면 “그렇다.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는 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의롭다함을 찾기 위해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만을 바라본다. 믿음이란 우리 안에서 또는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요동케 하는 모든 음성에 대항할 바로 이 확신 그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8:33)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위대성에 대해 머뭇거리며 의심치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비록 약하고 절망적이고 비천하고 힘없지만 나는 부활의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 새 사람을 새 본성을 조성하시고 힘과 능력 주심을 믿는다. 나는 ‘흠 없고 점 없고 티 없이’ 될 자이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믿는다. 죽음이나 무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신자가 뽐내고 있는 것 같이 들릴 줄 모르나 그러나 이것은 극한 겸손이다.

 

 

출처: 청교도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다

 

 

 

 

 

종교개혁사를 쓰면서 부제로 ‘진리의 재발견’이라고 붙인 적이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청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교회의 부패의 고리를 풀려고 무수한 순교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했던가? 성경에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항상 타락했다. 종교개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칭의’를 주장하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즉 스콜라주의자들은 당황했다. 그것의 의미를 몰랐을 뿐 아니라 처음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성자로 추앙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역시도 칭의에 대한 개념을 희미하게 말할 정도였다. 약 1500년 동안 ‘칭의’개념은 묻혀 있었고 감춰져 있었다. 종교개혁자들로 인해 이 진리가 재발견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놀랍게 전해준 진리 중에 진리인 칭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자.

 

 

1. 칭의란?

칭의의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33문과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70문에 잘 밝히고 있는데, “죄들을 용서하고 의롭다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한 정의를 위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11장 2항, 11항, 23항 그리고 17장 8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죄들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어떤 행위나 의로움에 근거하여 죄들을 사면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와 다를 바 없음을 볼 수 있다.

 

 

2. 죄들의 용서란?

죄들의 용서가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행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회개로 용서를 받는다고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무상적으로 우리에게 죄들의 사면이 이뤄진 것이다(3권 3장 18~19항 참고). 최초의 부모로 인한 부패와 타락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용서를 베푸신 것이다.

죄들의 용서라는 의미는 시편 32장과 로마서 4장에서 잘 나타난다(<벨지카 신앙고백서> 23항). 죄들의 용서란 ‘덮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죄들을 우리가 범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졌기에 또는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긴다. 이것을 과거나 미래에 범한 죄들이라도 용서한다고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용서를 지운다거나 없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3. 오직 믿음이란?

아르미니우스파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억지 주장하며 영생의 보상을 받는 가치로 여기고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거절 4항). 믿음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죄들의 용서를 받고 그분이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단순히 수용하는 도구에 불과하지 무슨 힘을 제공하는 뭔가가 결코 아니다. 이 점에 있어 신앙의 선배들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밝힌다. “내 믿음의 가치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수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만족, 그분의 의와 거룩만이 하나님 앞에 나의 의가 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3째 주간 61문).

그런데 왜 ‘이신칭의’라 부를까? 그것은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것을 받을 수 없고 내 것으로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62문). 그래서 지식을 의미하는 믿음은 ‘사도신경’에 나타난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 죄들의 사하여 주는 것을 신뢰하고 그것에서 위로를 얻는다(21~22째 주간 54~58문). ‘오직 믿음’의 의미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오직’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이신칭의는 행위로부터 모든 것을 제거하는 자만이 오직 믿음에만 모든 것을 기인시킨다”(<기독교강요> 3권 11장 19항). 오직 믿음이란 의는 칭의를 얻기 위한 인간의 어떤 행위를 배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4. 의의 전가란?

칭의는 죄들의 용서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분이 행하신 구속 사역이 곧 우리가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성취하신 모든 순종을 내가 성취한 것처럼 또 내가 결코 모든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신다”는 것이다(23째 주간 60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으로 여기신다. 지상에서 인간의 그 어떤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수천 년 동안 모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치 물 한 방울을 태평양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 오시안더 뿐만 아니라 아르미니우스파는 칭의를 무슨 알약을 먹어 힘을 얻는 것처럼 여긴다. 구원을 얻게 하는 선행을 행할 수 있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 즉 인격을 보시지 외모를 판단하지 않는다(3권 23장 10항). 무상적 칭의를 믿음으로 확신하므로 그분의 자녀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양자됨인데 다음 호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811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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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3솔라(3solas)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또 이 믿음이 겨자씨만큼 하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마 17:20).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는 말씀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17).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의심나기도 하다. 이렇게 믿음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⑴ ‘구원하는 믿음’ 또는 ‘참된 믿음’이란 말씀에 계시된 모든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뢰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1문).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 정의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7항).

 

 

이 지식은 당연히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된 사항들이다(22문). 이런 지식이 우리 마음에 계시되고 심정에 보증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은 지성적(mind)이라기보다 심정적(heart)이다(3권 2장 36항). 믿음은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루터파가 주장하는 의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이다(3권 24장 3항). 한 마디로 말하면, 삶 속에서 체험되어 갖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어떤 자들이 믿게 되나? 복음 선포가 이뤄지더라도 어떤 이는 믿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의 사역이 불성실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미완성이라기보다 거절하는 자의 잘못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거절한다는 의미다. 결국 거절하는 자는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6항).

 

당사자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선물’이라고 부른다(엡 2:8).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 만사가 믿고자 하는 의지와 믿는 행위를 인간 안에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다”(<돌드레히트 신조> 3~4장 14항). 이와 유사하게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도록 하는 의지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권 2장 33항)라고 한다.

 

⑶ 연약한 믿음이 있나? 믿음을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불완전함과 불안이 왜 이뤄지는 것일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3항)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기독교강요> 3권 17~28항을 읽어보도록 하자. ‘육체의 잔재 속에 잠자고 있던 불신앙이 내면에 있는 믿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3권 2장 18항). 공격에 취약한 이유는 무지 때문이고, 이 무지가 불신앙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감이 나타나는 것이다(3권 2장 20항). 이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숱한 공격들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3권 2장 21항).

 

이러한 내적 투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겸손하기 위함이다.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3권 2장 23).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상적 은혜로 이뤄졌음을 삶을 통해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으려면 믿음을 붙잡고 있는 돌쩌귀가 있다. 하나는 복음에 나타난 약속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3권 2장 16항). 이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있으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하면 살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그분의 말씀 공부와 연구는 필연적이다.

 

⑷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은 ‘없다’. 성숙한 믿음과 미성숙한 믿음도 ‘없다’. 이런 질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억지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그들은 믿음을 양적으로 표현한다. 무엇을 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기준을 허용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을 동의로 주장할 뿐 아니라 교회가 제시하는 것을 신뢰하고 따르면 믿음이 있는 것이라 기만술을 쓰고 있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참된 교회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순전한 말씀 선포가 이뤄지지 않는 교회의 지침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원하고 바라는 바가 기적같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공적으로 간증하거나 예화를 드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가시적인 현상은 단지 믿음의 준비일 뿐 구원과는 무관하다(3권 2장 5항). 그런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고 시작일 뿐이다. 여러 삶을 통해 참과 거짓이 증명되어야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684

 출처:영적분별력/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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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의 상이점과 일치점 / J. C. 라일 

  
 

칭의와 성화의 상이점

J.C. 라일

 

 

1. 칭의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서 의롭게 되었다고 간주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화는 한 사람을 속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매우 희미한 정도에 머무를 지라도 말입니다.

 

2. 우리의 칭의로 인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대하신 중재자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온 것이며, 믿음에 의해 우리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화에 의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로움은 우리 자신의 것이니 많은 결점과 불완전함이 섞여있기는 하나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주어지고 물려받은바 되고 또 이룩하여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칭의 안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는 어떠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전함 믿음만이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성화 안에서 우리 자신의 행위는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싸우고, 조심하고, 기도하고, 분투하고, 고통을 받고 수고하라고 명하신 것들이 그것입니다.

 

4. 칭의는 종결된 완전한 일로서 사람은 그가 믿는 순간에 완전히 의로워집니다. 성화는 비교적 불완전한 일로서 우리가 하늘 나라에 도달 하기까지는 결코 완전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5. 칭의는 성장이나 증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곧 사람은 믿음에 의하여 처음 그리스도에게 온 그 시간에 의로워진 만큼 모든 영원성 속에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성화는 뚜렷이 진보적인 일로서 사람이 살아 있는 한 계속적인 성장과 확대를 인정합니다.

 

6. 칭의는 우리의 인격이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그리고 범죄로부터의 구원 등에 특별한 관심이 있습니다. 성화는 우리의 본성과 우리의 마음의 도덕적 회복 등에 특별한 관심이 있습니다.

 

7. 칭의는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주며, 거기에 들어가기 위한 담대함을 줍니다. 성화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되게 하며 우리가 거기서 살게 될 때, 그 나라를 즐길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킵니다.

 

8. 칭의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쉽게 식별되지 않습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행하시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눈에 그 외부적인 나타남을 숨길 수 없습니다.

 

  

 

 

칭의와 성화의 일치점

 

 

1. 둘 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부터 나온다는 데서 그렇습니다.

오직 그의 은혜에 의해서만 신자들은 의로워지며 거룩하여 집니다.

 

2. 둘 다 영원한 언약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떠 맡으신 위대한 구원의 사역 가운데 한 부분들이라는 데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샘으로서 죄사함과 거룩함, 둘 다 거기서 흘러나옵니다. 각각의 근원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 둘 다 같은 사람 안에서 발견되어진다는 데서 그렇습니다.

의로워진 사람들은 항상 거룩하여지며 거룩한 사람들은 항상 의로워집니다. 하나님은 둘을 함께 연결시켜 서로 떨어질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4. 둘 다 동시에 시작된다는 데서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지 모르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5. 둘 다 똑같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것에서 그렇습니다.

아무도 용서받음과 마찬가지로 새로워진 마음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보혈과 마찬가지고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어떠한 자격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영광에 대한 적합함이 없이는 하늘나라에 도달할 사람이 없습니다.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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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조엘 비키

 첫째로, 조건적 선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선택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아주 오래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는 교리이다(계7:9-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얻을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다(엡1:4,5).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고 믿음과 회개로 이끌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보존하시며, 그 택한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다(롬8:28-39,살후2:13,14,딤후1:9,10). 그리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롬9장).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선함 때문에(고전1:27-31), 혹은 그들이 언젠가는 믿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건적인 선택은 우리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범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광을 가로채고 만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 교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택자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주셨던,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스펼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죄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구원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받도록 선택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건적 선택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에 구원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서 물리치시고 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의롭게 거절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터스 스트롱,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불의하시다고 건방지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찬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의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신다는 이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존 라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신자는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1-123

 

 

출처: 청교도의 길  http://blog.daum.net/kds201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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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는 개신교의 교리적 면죄부인가?

 

< 황대우 목사, 고신대교수 >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결정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이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를 성경 해석의 열쇠로 삼았다.

 

1. ‘이신칭의’는 성경해석의 원리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에 도전하거나 이 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개신교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new doctrinal indulgence of the Protestant Churches)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혹자는 이러한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개혁주의 교리에서 보자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그와 같은 개인주의로 왜곡될 가능성은 희박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단 교회들에 그러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사실이다.

 

“예수천당”이라는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개인주의화하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다. 그런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라는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 모든 교리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이신칭의 교리는 전도전략에서 부동의 모티브로 활용되고 있으며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알을 낳았다. 그리고 여전히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한다.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이요 현주소이다.

 

2. 교회연합은 수단이 아닌 본질

 

때때로 교회들 사이의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교회와의 연합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장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상가의 조그마한 교회가 이웃의 덩치 큰 교회와 연합 사업을 했다는 소식들은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 즉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분리된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기형적인 양상이 단지 교단과 교단 사이에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의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상존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어서 서로가 갈 천국이 다른 것처럼 이웃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적대적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인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염되어 왔다. 어쩌면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뺏어오는 일이 전도라는 미명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각 교회들은 이웃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행사에 대해 민감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 인접한 교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은 더욱 심각하게 증폭되어 왔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연합과 교회연합 사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교회연합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분명 옳지만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량주의의 목표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럴 경우 교회연합은 연합 사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교회연합이란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지 결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개인주의를 거부하는 교회론

 

그렇다면 각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이로 인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야고보 사도가 지적한 것처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는 질문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즉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철부지 아이들의 명분 없는 아집으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아귀다툼은 분명 해소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교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을 옹호하는 도구로,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신칭의를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회론은 결코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룬 “더불어 공동체”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에 속한 한 지체가 된다.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교회의 성도 없이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이다.

 

마치는 말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다. 이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이다.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모든 지체가 함께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지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도움의 필요는 더욱 긴박하고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우리 교회” 내지는 “내 교회”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보다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에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planning_special&document_srl=337624


이신칭의 교리와 개교회주의|황대우 글방
apeldoornh | 조회 140 |추천 0 |2008.10.25. 21:36 http://cafe.daum.net/C.N.B./Qf1s/16 

 

*이 글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 "라는 제목으로 개혁주의학술원(고신대) 홈피에 칼럼으로 실린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결정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이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를 성경 해석의 열쇠로 삼았다. 그래서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에 도전하거나 이 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개신교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new doctrinal indulgence of the Protestant Churches)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너무나도 안타깝다.

 

혹자는 이러한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교리에서 보자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더더욱 그와 같은 개인주의로 왜곡될 가능성은 희박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단 교회들에 그러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수천당”이란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개인주의화 하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는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란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이 모든 교리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그것은 전도전략의 부동의 모티브로 활용되었고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 알을 낳았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부흥이란 황금 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한다.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말 개교회의 외적 성장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과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방법일까?

 

때때로 교회들 사이의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교회와의 연합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장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상가의 조그마한 교회가 이웃을 덩치 큰 교회와 연합 사업을 했다는 소식들은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는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분리된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기형적인 양상이 단지 교단과 교단 사이에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의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상존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어서 서로가 갈 천국이 다른 것처럼 이웃 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적대적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인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염되어 왔다. 어쩌면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뺏어오는 일이 전도라는 미명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각 교회들은 이웃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행사에 대해 민감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 인접한 교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은 더욱 심각하게 증폭되어 왔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연합과 교회 연합 사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교회연합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분명 옳지만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량주의의 목표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럴 경우 교회연합은 연합 사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교회연합이란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지 결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각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이로 인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고 반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즉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철부지 아이들의 명분 없는 아집으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아귀다툼은 분명 해소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교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을 옹호하는 도구로,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신칭의를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회론은 결코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국밥이 아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룬 “더불어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의 한 지체가 된다.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교회의 성도 없이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이다.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다. 이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이다.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모든 지체가 함께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지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도움의 필요는 더욱 긴박하고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우리 교회” 내지는 “내 교회”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보다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에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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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믿음으로 얻는 칭의 / R.C. 스프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야말로 교회가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선언했다. 종교개혁의 이 중요한 교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바로 복음 자체가 달린 문제였다.

칭의란 “불의한 죄인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김받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불의한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의로움이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죄인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로움이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란 우리의 선이나 선행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공로에 의한 칭의이다.

 

칭의의 문제는 공로와 은혜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진다.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우리가 하는 일이 칭의를 얻기에 충분히 선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칭의는 법정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실 때 우리가 의롭다고 선포되고, 간주되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조건은 믿음이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는 믿음이 칭의의 도구적 근거이며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확언한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세례가 칭의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적 근거가 되며 고해 성사는 이차적이며 회복시키는 근거가 된다고 가르친다(로마 카톨릭은 소해 성사를 영혼이 파선된 사람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범함으로 인해 칭의의 은혜를 잃어버린 자들- 의 칭의를 위한 두 번째 항목으로 본다). 고해 성사는 인간이 칭의에 합당한 일을 성취하여 만족시키는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믿음에 의한 칭의는 인정하지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며 필요조건으로서 선행이 첨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칭의를 위한 믿음은 공허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다. 믿음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에게만 붙어 있는 인격적 신뢰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또한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받아들이는 회개하는 신앙이다.

 

성경은 우리가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더해지는 것, 즉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종합적으로 보면, 기본적인 어떤 것에 새로운 어떤 것이 더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더해졌으므로 종합적인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전가에 의한 것이다. 믿음에 의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속하여 있는 분, 즉 그리스도가 가지신 실제적 공로를 우리에게 돌리셨기 때문에 이것은 “법적 의제”가 아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전가이다.

 

[참조 성구] 롬3:21-28, 롬5:12-19, 고후5:16-21, 갈2:11-21, 엡2:1-10, 빌3:7-11

 

<요약>

1. 칭의는 하나님께서 하신 행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불의한 죄인에게 전가시키신 후에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셨다.

2. 그 누구도 선행으로 칭의를 얻을 수는 없다.

3.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받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4. 칭의는 단지 신앙의 고백뿐 아니라 살아 있고 실제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 ->> 그리스도의 공로 ->> 믿음 ->> 불의한 인간

 

 

기독교의 핵심 진리 102가지(R.C. 스프롤) 중에서 발췌(226-227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바울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이신칭의에 대한 비판 - 톰 라이트(Tom Wright)와 존 칼빈(John Calvin)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은선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

I. 들어가는 말

바울의 새 관점은 1960년대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연구에 의해 시작되어 점차로 동조자들이 확대되어 왔다. 1970년대에 샌더스(E. P. Sanders)에 의해 언약적 율법주의가 주장되어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서신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이후 제임스 던(James Dunn)과 헤이스(Richard B. Hays)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으며,1) 그와 함께 개혁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인 톰 라이트가 수용하...여 대중적인 전파자가 되었다.

특히 영국 성공회에서 개혁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톰 라이트가 바울의 새 관점을 수용하여 다양한 저술들을 출판하면서 이 견해는 개신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를 위태롭게 만들어 왔다. 학문 활동에 그치고 있는 다른 학자들과 달리 톰 라이트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 규범성을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 미국의 개혁주의 교단들 안에서도 지지자들을 확보해 가고 있다.3) 그래서 미국에서는 존 파이퍼가 목회자의 입장에서 톰 라이트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였고,4) 미국의 정통장로교회5)와 미장로교회(PCA)6) 등에서 적극적으로 바울의 새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 관점이 개신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심각성을 자각한 한국교회도 2010년에 접어들어 톰 라이트의 견해를 중심으로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다양한 학술대회가 개최되어 학문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7)

지금까지의 바울의 새관점에 대한 논의는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주경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본인은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들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물론 바울의 새관점에 대한 논의는 신약본문을 토대로 하는 주경적인 연구를 통해 전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한 주경작업을 통한 논의와 함께 바울의 새관점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한 논의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 것인지 검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제일 먼저 바울의 새관점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러한 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 후에 그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II.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형성 과정

스텐달은 1961년에 미국 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처음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바울 해석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해석학적 유산에 의해 부당하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바울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은 믿음과 행위, 율법과 복음,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서술들이 중세 후기 경건의 구조 속에서 읽혀지는 추론(analogism)에 의존하고 있다. 스텐달의 전체적인 비판은 신약학자들이 루터가 아마도 16세기에 그를 읽었던 바와 같이 개인의 죄와의 싸움의 관점에서 바울을 읽어 왔다는 것이었다.9) 스텐달에 따르면 루터는 1세기 맥락에서 바울을 읽기보다는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시대착오적으로 공로에 대한 중세의 질문의 관점으로 읽었다.

샌더스는 바울 해석의 분수령을 이루는 작품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주로 제2성전 시대 유대교 문헌들을 분석하여 유대교를 율법주의 혹은 행위 의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일반적인 해석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샌더스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구원을 받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기독교의 통념을 반박하고자 하였다.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선택을 통해 언약 안으로 들어가서, 순종으로 언약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며, 속죄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래서 샌더스는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묘사했는데,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한 사람의 위치는 언약의 토대에서 결정되고 언약은 범죄에 대한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는 동안에 사람들의 올바른 반응으로서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10)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제2성전시대 유대교 문헌을 연구하여 유대교에서 율법의 기능이 언약으로 들어가는 수단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혹은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율법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바울 시대의 유대교의 전반적인 특성을 여덟 가지로 확인한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2) 그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3) 이 율법은 선택을 유지하려는 하나님의 약속과 4) 순종하라는 요구를 함의하며 5) 하나님은 순종을 보상하고 위반을 처벌하며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는데 7) 이 수단들은 언약 관계의 유지 혹은 재확립의 결과를 가져오며 순종,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안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은 집단에 속한다.11)

많은 신약학자들에게 있어서,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는 바울 서신들의 역사적이고 문맥적인 배경을 더 훌륭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인 틀을 제공하는 조명으로 수용되었다.

스텐달과 샌더스의 작품이 나온 직후에 톰 라이트는 루터의 시각으로 해석된 바울을 비판하는 진영에 합류하였다. 물론 톰 라이트 자신은 바울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관점이 이 문제에 대한 샌더스의 중요한 저서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출판 이전에 자신의 옥스퍼드에서의 박사 학위 논문 탐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12) 톰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이미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글을 통한 의견의 발표는 샌더스의 저술 직후인 1978년에 나온 논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이 논문에서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같은 루터파 해석자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말씀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으로서 루터파의 순수성 속에서 보존하기 위하여 신앙을 역사로부터 분리시켜야만 했다고 주장했다.13) 덧붙여서 라이트는 또한 “바울 해석의 전통은 그가 반대하는 거짓된 유대교를 만들어내서 거짓된 바울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였다.14) 다시 스텐달과 같이 라이트는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적이라는 묘사는 로마가톨릭과의 전투 속에서 16세기에 루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15) 그러므로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간단히 말해, 바울의 세계 속으로 종교개혁과 현대의 이념들을 투사한 결과로 역사의 바울보다 그의 발명자들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신앙의 사도, 적어도 상상의 사도인 바울을 가지고 있다.”16) 라이트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 범주들, 그 문제에 대하여 신약 전체는 루터파 논쟁의 얇고, 피곤하며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역사의 바울 자신이 우리에게 준 것들이다.”17)

제임스 던은 스텐달의 토대를 구축하는 논문에 의존하면서 라이트와 같이, 바울은 루터의 로마가톨릭과의 전투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고 믿는다. 샌더스의 연구, 특히 제2성전 시대 문헌 연구의 견지에서 해석자들은 마침내 “바울을 올바르게 그 자신의 맥락 안에서 볼 수 있고, 그 자신의 시대의 관점에서 바울을 들을 수 있으며, 바울이 자신이 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다.”18) 샌더스가 제2성전 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과는 달리 이후에 라이트와 던은 바울 자신의 작품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발표하였다. 물론 바울에 대해 새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들마다 고유한 주장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샌더스가 제기한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라이트도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 동조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바와 같이, 율법주의적인 행위 의의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유대교가 행위-의의 종교이고, 바울이 마치 유대교가 그런 것 같다고 공격하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유대교와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주석가들은 바울과 유대교를 마치 유대교가 오래된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의 형태인 것같이 해석한다. 펠라기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들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것을 통해 칭의, 의, 그리고 구원을 획득한다. 샌더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교 안에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언제나 언약적인 구조 안에서 작용한다. 하나님께서 유대교와 언약을 맺으실 때 주도권을 잡으신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들 (특히) 유대인들이 반응하는 것보다 앞서 간다. 유대인들은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감사로부터 율법을 지킨다. 다시 말해서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것이다. 첫째 자리에 자리잡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19)

톰 라이트는 개신교의 정통적인 바울 해석을 루터와 칼빈 등의 16세기 개혁자들의 해석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의 역사적 맥락, 즉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관점에서 바울을 해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때 바울 서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교리들, 특히 이신칭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III. 톰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비판하는 내용들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마다 그 주장하는 내용에서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해 비판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질문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 서신들을 해석하는 틀로서의 1세기 유대주의에 대한 이해,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의, 율법의 행위, 그리고 이신칭의의 새로운 이...해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톰 라이트의 견해는 개혁파와 폭넓게 복음주의 공동체에 충격을 주었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 있는 일부 학자들의 칭의 교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철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된다.

1.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형성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로마서 1장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새로운 이해였다. 루터가 중세 말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속성이라고 이해했던 것을 비판하고 하나님께서 전가시키는 의라고 해석하면서 그의 종교개혁적인 이신칭의 사상이 탄생하였다.20) 이러한 전가된 의라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는 칼빈에게도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라이트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1세기 유대교 배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것을 주장하고 그러한 1세기 유대교 배경에 근거하여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해석의 오류들을 지적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먼저 1세기 유대교 배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필요한 세 가지 배경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70인 역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약속, 즉 언약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이라는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21) 라이트는 이사야 40-55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의 사악함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다니엘서 9장서 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다니엘의 기도도 역시 하나님의 이러한 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라이트는 두 번째 배경으로 유대 법정의 구조를 제시한다. 유대법정에는 검사는 없고 원고와 피고와 함께 그들을 판결하는 재판관만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판관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할 때에 의롭게 된다.22) 원고와 피고는 법정의 결정의 결과로 의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법정의 상황에서 의롭다는 것은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법정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라이트는 의롭다는 단어를 이렇게 이해하면 재판관이 자신의 의를 전가한다거나 나누어준다는 종교개혁시기의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악한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억압할 때 재판관이신 언약의 하나님께 언약에 충실하셔서 자신들을 의로 변호해 달라고 호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러한 두 가지 배경 하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때 세 번째 요소로서 미래의 심판이 요청되는데, 이것은 그들의 언약의 의무에 충실함을 반영하는 행위-의의 심판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칭의 부분에서 좀 더 살펴보겠다.23)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교 배경을 검토한 후에 교회사적으로 등장했던 하나님의 의의 다층적인 의미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의로 이해하는 가능성(A)과 인간에게 주어진 의로 이해하는 가능성(B)으로 나눈다. 그 후에 A를 도덕적 특성으로서의 의(소유격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A1)와 구원을 이루시는 능력으로서의 의(주격 소유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A2)로 나눈다. A1을 다시 ‘분배적인 의’(A1a)와 ‘언약적 신실성(A1b)’으로, A2는 언약적 신실성의 행동들(A2a)과 비언약적 세계를 패배시키는 행동들(A2b)로 분류한다. B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신분으로서의 의(기원의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B1)와 ‘하나님 앞에서 간주되는’ 특성으로서의 의(목적격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B2)로 분류한다. 그리고 B1은 전가된 의(B1a)와 분배된 의(B1b)로, B2는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 자연적인 특성(B2a)과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 후에 그 자체로 인정되는 특별한 은총(B2b)으로 나눈다.24) 루터 이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신앙의 토대 위에서 복음의 결과로서 사람들이 가지는 신분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B1a와 B1b는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자들과 로마가톨릭의 견해를 나타낸다. 그리고 A1a는 루터가 종교개혁 이전에 가졌던 견해이다. B2a와 B2b는 중세 말기의 유명론자들이 주장했던 견해인 것으로 보인다.25) 그는 A2b는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한 케제만의 견해인데,26) 언약을 배제하고 우주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유대적인 배경과 맞지 않아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 이러한 여러 견해를 검토한 후에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주격적 속격 혹은 소유의 속격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 신자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는 특성이다. 라이트는 로마서 1장 17절을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 자신의 의, 그의 언약적 신실함을 드러낸다 혹은 계시한다고 말한다. 이 신실함은 차례로 신실한 모든 사람들의 은총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하여 역사한다”고 설명한다.28) 그는 로마서 주석의 하나님의 의와 관련된 구절들을 주석한 후에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란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물론 이 의는 공의의 한 형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언약에 속박되셔서 이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주를 갱신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이 언약의 신실성, 이 언약의 공의는 구원 활동일 뿐만 아니라 다니엘 9장이 분명하게 증명하는 바와 같이 언약을 파기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후에 회개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활동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라는 복음이 그 자체 안에 바울이 로마서 2장 16절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구원의 소식뿐만 아니라 미래 심판의 메시지를 포함하는 이유이다.29) 하나님의 의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성이다. 그는 루터 종교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은폐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2. 율법과 율법의 행위

톰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서 두 번째로 문제를 삼는 것은 율법과 율법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3:20)고 쓸 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루터와 함께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학자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의를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의 지시대상은 구원을 얻으려고 율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율법주의적이다.30)

톰 라이트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 행위로 이해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개인적인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편지가 아니라 민족적 집단으로서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가?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서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성격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책으로 읽어온 교회가 얼마나 바울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판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31) 그러므로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1세기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32) 둘째로 이 두 서신은 율법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서신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 개신교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같은 ‘형식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33) 갈라디아서에서 논의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이방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아서 유대 기독교인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참다운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34) 로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이며, 역사의 중간에 예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35)

그러므로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이 아니라,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토라라고 지적한다. 두 서신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의 배경 하에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이 서신서들에게 사용되는 율법은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로마서 4장의 행위가 일반적인 행위가 토라의 행위라고 지적한다.36)

그러므로 이러한 서신서들에서 언급되는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율법의 행위에 반대하는 바울의 논쟁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의 회원권을 획득하려 시도했던 사람들이 아니라(1세기에는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같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그들의 언약의 회원권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하였다”고 주장한다.37) 라이트는 이러한 입장에 따라 율법의 행위는 공로나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주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약에 속한다는 회원권의 증거를 제시하려는 유대 민족의 뱃지, 그리고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구별하려고’ 지키는 율법의 국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율법의 행위들 혹은 뱃지에는 안식일, 음식법, 그리고 할례 등이 포함되어 있다.38)

그는 갈라디아서 2장에 있는 율법의 행위를 당시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유대 민족의 뱃지로 해석한다. 바울이 여기서 할례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혹은 루터나 에라스무스가 직면했던 질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1세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정의하는 방식의 질문과 아주 분명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할례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노력이나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과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39)

3. 칭의

톰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이와 같이 유대민족을 특징짓는 민족적인 뱃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칭의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전통적인 칭의관이 5세기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과 16세기의 에라스무스-루터 논쟁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으로 바울의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신칭의가 “성경 본문과는 아주 독립적인 의미를 발견시켜 왔다”는 맥그래스의 지적40)을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서를... 해석하는 것이 수백 년 동안 그 본문에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평가한다.41)

따라서 라이트는 칭의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첫째로 칭의는 언약의 언어인데, 16-7세기의 언약신학의 관점이 아니라 1세기 유대교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의 약속의 견지에서 해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말할 때,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직면했던 정치적인 곤경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매달리던 1세기 유대교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라이트는 종교개혁 이후의 칭의에 대한 정의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이해된 바울의 교훈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16-7세기 교의학과 더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었던 언약에서 약속했던 구원에 관심이 있었는데, 죽은 후의 영혼의 상태나 행위 의를 통한 무시간적 구원이 아니라 당시 민족적인 재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변호를 통한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라이트는 1세기의 칭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세기의 칭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수립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 즉 사실상 누가 그의 백성의 구성원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샌더스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들어가는 것’ 혹은 ‘머무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누가 그 안에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표준적인 기독교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은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론에 대한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42)

둘째로 그는 이 칭의가 유대 법정을 배경으로 한 용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이것은 아담의 죄를 교정하시고 세상을 올바른 길로 돌이키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의 백성들은 세상 앞에서 변호 받고 올바른 길에 있다고 판결을 받을 것이다.43) 라이트는 칭의에서도 하나님의 의에서 설명했던 유대 법정의 비유를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법정적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셋째로 라이트는 바울이 종말론의 견지에서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칭의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교리의 어떤 추상적인 체계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굴복시키면서 성령을 통해 죄로부터 우주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에 뿌리를 박고 있다.

라이트는 이러한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칭의를 이중적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이다. 현재의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과거의 성취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의 변호를 기대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앞서 현재 예수를 메시아와 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변호하신다. 라이트는 말씀과 성령을 통한 소명을 사람의 심령이나 특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부르고, 칭의는 그 사람이 지금 올바른 길에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그들에게 올바르다는 신분을 수여한다고 이해한다.44)

둘째는 최종적인 혹은 미래의 칭의는 심판 날에 세상 앞에서 어떤 사람이 옳다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다.45) 그러나 라이트에게 있어서 칭의의 근거는 현재로부터 최종적인 칭의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해질 것이라는 것이 주목되어야만 한다. 로마서 8장 3-4절을 주석하면서 라이트는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미래 변호, 마지막 날의 변호, 바울이 로마서 2:1-16절에 묘사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선언은 현재의 선언과 일치할 것이고,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생활로부터 따라올 것이다.46)

바울은 제2성전 시대 주류 유대교와 공동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삶의 전체와 일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행위와 일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로마서 14:10-2과 고후 5:10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 전서 3장에서 교회 건축자에 대해 말하는 그 두려운 문단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주요문단은 로마서 2장 16절이다.

로마서에서 칭의에 대한 첫 번째 서술은 2장 13절에 있는 행위에 따른 심판인데, 로마서 8장과 10장에서 이것을 정의하고 있고,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가장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다.47) 기독교인들이 마지막 날에 그것과 일치하여 변호 받을 행위는 성령의 내주와 역사의 결과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서 8장 17절은 로마서 2장 16절에 대한 실질적인 답변이다. 지금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한 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죄를 정죄하시고, 다른 한 편에서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인 생명을 주는 일을 수행하려고 활동하시기 때문이다.48) 이러한 면에서 라이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행위에 의한 최종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와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다가오는 심판 날을 미리 바라보는데 그리스도의 공적과 죽음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사도의 사역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호의적인 변호를 바라보고 있다.(살전3:19; 빌2:16) 그는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노력으로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효과적인 표지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그의 공적(credit)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49) 올바른 행동을 한 사람은 마지막 날에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라이트가 제시하는 바울의 칭의교리는 교회론의 축 위에서 회전하고 있다. 칭의는 현재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자 할례, 음식법, 그리고 안식일같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표출되는 언약의 의로운 구성원인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현재의 예기이다. 현재의 칭의는 신자들의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행위들에 근거하여 미래 칭의를 기대하는 신실한 순종으로 이해되는 신앙에 근거한다.

이러한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과연 믿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언약의 저주를 짊어지고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어긴 민족적인 죄악의 결과로 저주의 추방의 저주를 당하고 있는 ‘우리’ 유대인들을 구속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들의 추방이라는 저주가 끝나고 이제 그 축복이 이방인에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이러한 그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올바르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트는 전통적인 의미의 칭의를 거부하기 때문에 칭의의 수단이란 의미의 믿음도 반대한다. 그는 믿음을 칭의의 수단으로 이해하게 되면 칭의와 속죄를 통합하여 믿음을 사치품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50) 그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이미 언약 구성원의 자격의 표시로 보며 이것으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이다. 현재 칭의에서 믿음은 “언약 구성원의 뱃지”이며, 언약에 들어가려는 시험으로 수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51) 그는 믿음을 신실함으로 이해하며, 결국은 순종이라고 말한다. 그는 믿음은 (다른 주들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인간의 신실함이다.52)

이와 같이 라이트는 믿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내용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부활이란 자신의 복음에 대한 고백이라 정의한다. IV. 칼빈의 칭의교리

라이트의 견해와 비교하기 위하여 먼저 칼빈이 하나님의 의, 율법의 행위, 그리고 칭의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제시했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의
...
칼빈은 루터의 하나님의 의의 전가 사상을 수용하여 로마서 1장 17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받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의견에 의로 평가받고 간주되는 것이,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라고 언급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성령께서 미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도 있을 하나님의 의를 계속하여 제시하는 많은 예언들을 암시하고 있다. 일부 주석자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나는 틀림없이 이 단어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이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전자의 의미가 나에게는 훨씬 더 적합한 것같다. 일부 학자들이 이 의가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중생의 은혜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자신을 우리에게 화해시키시므로 생명으로 회복된다고 주장한다.53)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구분하고 자신은 전자의 의미가 본 구절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은 루터의 개혁활동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 것으로, 법정에서 선고를 통하여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복음 외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보화 즉 그의 의의 전달”을 통해 불의한 우리가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고 서술한다.54) 그러므로 칼빈은 주격 속격 혹은 소유의 속격으로 해석하는 라이트와 달리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의 속격을 기원의 목적격 혹은 속격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전가되는 의라고 해석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중생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받는 것이라는 의미를 선호한다고 밝힌다. 칼빈은 여기서 중생이 칭의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칭의와는 구별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고 이해한다.55)

칼빈은 하나님의 의를 “중생의 은혜요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 까닭에 이 은혜는 값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거부한다. 칼빈은 바울이 구원에서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하는데, 심지어는 “주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열매 맺힌 행위 일체”까지도 배제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의 칭의를 말할 때 “타고난 본능으로 행하는 도덕적 행위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한 행위들까지도 일체 배제한다.” 그리고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셔서,” 즉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의롭다고 하신다.56) 칼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의 전가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측면은 없는가? 칼빈은 로마서 3장 22절의 “하나님의 의”를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으로의 의와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양면성을 설명하고 있다.57) 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칭의가 무엇과 같은지를 간략하게 밝힌다. 이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믿음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소개하여 하나님을 자신이 말하는 있는 의의 단순한 승인자일 뿐만 아니라 장본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의가 하나님에게서만 흘러나오고, 혹은 그 기원이 하늘에 있는데,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58)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말하는 성도들에게 전가된 의를 단순하게 승인하시는 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의의 장본인이라고 말한다. 이 의는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며, 결국 그 기원이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하나님의 의는 단순하게 전가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셔서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모든 의의 근원”이라고 말한다.59)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로마서 3장 26절 주석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의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는 “자신 안에 홀로 의의 모든 충만함을 포함하고 계신 분으로서 의로우시다는 것이다.”60) 따라서 “전체 인류는 불의하다고 정죄받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홀로 의롭다는 이름과 영광을 얻으시므로 그에 합당한 충만하고 완전한 찬양을 받아야 한다.” 둘째 부분은 “의의 전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의 부요함을 자신 안에 가두어 두지 않으시고 인류 위에 쏟아 부으시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한에서 우리 안에서 빛나신다.”61)

이와 함께 칼빈은 로마서 4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할례를 비롯한 “성례들이, 바울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은혜에 대한 확실성이 확증되는 표징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할례의 표에 의해 이중적인 은혜가 나타났다는 점이 특별히 기술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씨를 약속해 주셨다.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 그리고 값없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그 표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6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할례를 통해 자신의 언약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할례를 통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내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속성으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전가되는 의의 두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서에서 인간이 의를 얻는 방법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으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의 전가를 강조하였다.

2. 율법의 행위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이 교회의 문제가 “거짓 사도들이 의식의 준수가 필요하다고 가르쳐” 발생하였고, 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갈라디아서를 쓴 것으로 이해하였다.63)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지켜온 관습들을 가는 곳마다 어디서나 지키도록 의도했다면 이들은 상당한 잘못을 과오를 범하는 것”이었고, “관습적인 의식을 지키는데서 의를 얻는다고 생각하여” “사람의 양심을 종교의식에 얽어매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의식에는 사람을 의롭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이신칭의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64) 그러므로 칼빈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가 된 율법의 행위는 바로 의식법의 준수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한 의식법 준수를 통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11절을 주석하면서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는 사도행전 15장 이전에 일어난 행위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행위는 제롬이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고 해석한 바와 달리 “이방인들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것같이 유대화하고 있었다”고 해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으로 해석한다.65) 그래서 칼빈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주석하면서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나 믿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을 믿음과 결합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 명제를 제시하였다.66) 그는 갈라디아서 5장 3절의 할례는 거짓 사도들이 의식을 통해 구원얻기 위해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는 것은 행위 의를 얻으려는 율법의 행위에 해당된다고 이해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혼합하고자” 하였다.67) 칼빈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는 바로 할례와 같은 의식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행위-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 1-4장까지의 주석에서 여러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칼빈은 로마서 3장 27절 주석에서 행위의 자랑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 당시 스콜라주의자들의 논의를 먼저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공적이 자랑의 문제라면, 합당한 공로(meritum de congruo) 혹은 사람이 이러한 공로를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케 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공로(meritum de condigno)라고 부르든지 간에, 우리는 이러한 양자가 여기서 파괴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68)

라이트가 비판하는 바와 같이 칼빈은 행위의 공로를 다루면서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것은 칼빈이 시대의 아들인 이상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 시대의 잘못된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올바른 논의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에 대해 당시의 여러 가지 논의들을 충분하게 잘 숙지하면서 로마서가 제시하는 칭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가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할례를 중심으로 한 의식법을 가리킨다는 견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서 3장 20절을 주석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박식한 학자들 가운데서도 율법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말씀을 확대하여 전체 율법의 준수를 포함시키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의식법에만 국한시킨다. 크리스소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은 율법이란 단어의 첨가 때문에 후자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율법이란 단어가 첨가된 것은 이 문단이 모든 행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별한 함축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쉽게 해결될 수 있다. 행위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행위로부터 칭의의 능력을 분명하게 제거하려고, 의롭게 해주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그러한 행위들에 대하여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69)

칼빈은 이미 크리소스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과 같은 초대 교부들이 이미 로마서 3장 20절의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에만 국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 교부들은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이기 때문에 의식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행위가 모든 행위라고 해석하고 있다. 칼빈은 “율법은 약속들을 가지고 있고 이 약속이 없으면 우리의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바울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그의 논의의 주제인 율법의 준수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70)

칼빈은 이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에 제한하면서 인용한 논증들은 의식법에 대한 한 가지 실례로 할례를 제시하여 생각보다 약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당시에 율법의 행위에 대해 율법 전체를 포함한 행위를 말하는지 아니면 의식법만을 포함하는 행위를 말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이 율법의 행위는 바로 율법의 전체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다시 로마서 3장 27절 “행위로냐”를 주석하면서 “여기서 의가 행위의 법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자랑은 배제되지 않을 것”이나 “의가 믿음 만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가 자신을 위해 주장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신앙과 행위 사이에 이러한 대조는 주의깊게 주목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행위들은 아무런 첨가 없이 보편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식의 준수, 구체적으로 외적인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행위의 모든 공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한다.71)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라는 4장 6절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에만 제한하는 사람들이 단지 트집을 잡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서 율법의 행위로 지칭하였던 것을 이제는 단순히 그리고 아무런 형식적인 단어를 첨가하지 않고 행위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이 간략하고 수식이 없는 행위가 모든 행위에 구별 없이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것은 전체 논증에 일관해서 유효한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이 구별없이 모든 행위를 배제하기 때문에 칭의의 능력을 단지 의식들에서만 배제하는 것만큼 모순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72)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인간의 모든 행위들이라고 이해하는 반면에,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안식일 준수와 할례와 같은 문화적인 경계표지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칼빈의 칭의

칼빈은 율법의 행위를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라고 정의하고, 이러한 행위들의 구원론적인 가치를 박탈하므로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의의 전가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주석들을 통해서 칭의는 오로지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 외에” 라는 로마서 3장 21절을 주석하며 이신칭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바울이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우리가 그 의로서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께서 긍휼로서 우리에게 그 의를 주시는 까닭인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두 가지 해석 모두 적합하므로 어느 한쪽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의와 하나님께서 의로 받아서 인정하는 바로 그 의가 율법 외에, 다시 말해 율법의 도움 없이 계시되었다고 바울은 말한다.73)

칼빈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한 칭의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중생의 행위로 인한 칭의도 배제한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사람이 영적 중생으로부터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두 명제가 충분히 일치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칼빈은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할 때까지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완전히 다른 원리를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가르치는 다른 문단에서(고후5:16) 그는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그의 칭의의 방식을 설명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칭의의 효과와 관련하여 율법을 신앙과 대립시켜 놓고 있다. 율법은 명령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약속하고(갈2:16)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열매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공로가 믿음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74)(71)

그러므로 칼빈은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주시는 것인데, 그 방식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동일하게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설명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75) 칼빈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 법정적인 용어로서 행위와 관계없는 죄의 용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방면과 용서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21절) 맨 먼저 나는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게 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문단에서 칭의가 고발과 대조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반제는 이 표현이 법률 용법으로부터 취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히브리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은, 그가 어느 정도 건전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 어구가 이러한 근원에서부터 왔으며 여기서부터 경향과 암시를 끌어낸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행위없는 의가 다윗에 의해 다음과 같은 말들로 묘사된다고 말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76)

칼빈은 칭의에서 율법의 행위를 통한 죄용서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와 죄의 용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그의 칭의 개념에서는 하나님의 의의 전가와 율법의 행위와 칭의가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론을 중심을 밀접하게 연계되어 전개되고 있다.

4. 칼빈은 1세기 유대주의 성격에 대해여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칼빈은 이러한 이신칭의를 주장할 때에 1세기 유대주의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오로지 행위로 종교로만 이해하였는가? 칼빈의 여러 가지 언급들을 살펴볼 때, 그는 이미 1세기 유대교 안에 은혜종교로서의 유대교와 행위종교로서의 유대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라이트는 칼빈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그리고 중세 말기의 공적 논쟁에 영향을 받아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개인의 이신칭의의 구원의 서신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칼빈의 그 이전의 주석전통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는가? 칼빈 자신이 로마서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으로 제한하는 사람들로 크리소스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으로 볼 때 칼빈은 이미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의 저술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주석전통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스타인메츠도 칼빈이 로마서를 주석할 때 당시의 학자들의 주석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주석전통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77)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자들이 새관점의 학자들만큼 1세기 유대교 문헌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러한 흐름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칼빈은 로마가톨릭이 인정하여 사용하고 있던 외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외경에 기록된 어떤 행동들에 대해서는 미신적인 행위로 간주한 반면에 어떤 내용들에 대해서는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마카비서에 기록된 유다가 죽은 자들을 위해 예물을 드린 행동을 미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다의 경건은 죽은 자들을 위한 헌물을 예루살렘에 보냈을 때 최후 부활의 굳건한 소망을 가졌던 특성에 대하여 칭찬을 받았다. 그 역사의 기록자는 유다가 행한 것을 구속의 값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국과 종교를 위해서 죽었던 다른 성도들과 함께 영생에 참여하도록 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행위는 참으로 미신과 오도된 열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희생물들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율법의 희생을 우리에게조차 확대하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다.78)

칼빈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가 최소한 외경을 통해서 오는 한에서 미신적인 요소를 포함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지만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외경인 바룩서의 내용을 참된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언자 바룩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누구였든지 간에, 그의 말은 참되고 거룩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 --- 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이 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주님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주님 앞에서 자비를 비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 왕들의 어떤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바룩2:18-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3:22)79)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바룩서의 기도의 말을 참되다고 하여 인용하고 있다.80) 그러므로 칼빈은 최소한 암시적으로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1세기 유대교에 정통적인 신학의 흐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반면에 칼빈은 사람들이 펠라기안주의라고 불렀던 그러한 흐름들과 친숙했다. 칼빈은 집회서의 “만약에 당신이 선택한다면, 당신은 명령들을 지킬 수 있고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는 당신 앞에 불과 물을 놓을 수 있고, 당신이 선택하는 무엇을 향하여 당신을 손을 뻗칠 수 있다. 각자의 사람 앞에 생명과 사망이 있으며, 사람이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간에 제공될 것이다”라는 문단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창조시에 생명 혹은 사망을 취할 능력을 받았다고 인정하자.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사람이 이러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대답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고 선언하는 솔로몬을 반박하려는 것은 확실하게 나의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해서 자신과 모든 소유물을 파산시켰기 때문에, 원래의 창조에 무엇을 귀속시킨다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그가 누구였든지간에 집회서 저자에게도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을 능력을 자신 안에서 찾으라고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의 권위를 높이 평가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에 대항하여 어떤 편견을 일으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81)

칼빈은 집회서가 정경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로마서 3장과 같은 성경의 증언과 모순되기 때문에 외경으로부터의 이러한 문단을 거부한다.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는 이미 당시 논쟁과정에서 이 문단에 관심을 기울였다. 칼빈 당시에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16세기 신학토론은 1세기 유대교의 문헌인 외경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외경 가운데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문서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칼빈의 언급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외경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글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V. 칼빈과 라이트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비교

1. 1세기 유대교 문헌에 대한 이해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 문헌들에 근거하여 언약적 율법주의를 만들어 냈던 샌더스의 견해에 동조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의 해석학적인 틀을 구성한다. 그리하여 1세기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라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하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다. 적어도 유대교 안에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톰 라이트 자신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1세기 유대교는 언약에 들어갈 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은혜나 언약을 유지하는 데는 행위가 필요하였다. 또한 샌더스 자신도 의의 종교라고 인정한 에스라4서의 견해도 있다.82) 그러므로 1세기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보여진다.

칼빈은 당시 로마가톨릭과의 성경관의 차이로 외경의 내용에 대해 논쟁하면서 적어도 1세기 유대교 문헌 안에 바룩서와 같이 은혜에 의존하는 흐름과 함께 집회서와 같이 행위에 의존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 행위에 의존하는 문서들을 거부하고 은혜에 의존하는 문서들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서 톰 라이트보다는 칼빈의 관점이 그 다양성을 파악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관점의 가장 중요한 기여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맥락으로 율법적 언약주의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해의 폭의 확장인 반면에, 그들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하나의 관점으로만 모든 것을 다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83) 새관점이 등장한 이후에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서 밝혀지는 사실들이 1세기 유대주의에 다양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칼빈이 암시적으로나마 유대교의 은혜 중심의 흐름과 행위 중심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은혜중심의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수립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로마가톨릭의 은혜와 함께 행위를 인정하는 교리가 그러한 외경의 흐름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 외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의 외경에 대한 거부의 입장이 행위-의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좀 더 깊이 연구되어지면 칼빈의 1세기 유대주의의 관점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서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함께 파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와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서의 은혜의 측면이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속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의의 측면은 하나님의 전가되는 의가 그 자신의 의의 속성에서 유래한다는 언급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 할례의 성례로 시행되는 측면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의 타락성 때문에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의 의와 전가되는 의의 통일성을 인식하고 있고,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한 해결책은 오히려 의의 전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인 의로서 언약의 신실성만 강조하는 라이트의 견해는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을 않고 있다. 라이트는 언약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면서 개인과 하나님의 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그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당시 유대 민족의 고통을 추방이란 측면에서 이해하고, 그 언약적 대표자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한 인간 죄의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을 유대교와의 연속성에서 이해하였는지 아니면 오히려 이방인들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성취로서 이해했는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라는 구원론에서 언약의 신실성을 이해한다면, 교회론과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라이트의 이해보다는 훨씬 더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파악하는 칼빈의 이해가 더 타당한 것을 보인다.

3.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해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 대부분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토라이며. 이러한 법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84)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연구 성과들은 수용될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할례, 음식법, 그리고 안식일 준수 같은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표지로 이해하는 반면에, 칼빈은 율법의 행위를 그러한 의식법에 제한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알고 있었으나, 바울의 논의에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아 거부하고 오히려 율법의 모든 행위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율법의 모든 행위를 통해서는 정죄를 당하므로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학자들도 칼빈의 견해에 동조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 특히 로마서 3장과 4장에서의 행위는 선한 행동을 의미하고 결국 바울은 그러한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지적한다고 해석하고 있다.85) 실바도 갈라디아서 3장 6-14절을 분석한 후에 루터의 믿음과 행위의 대조를 지지하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86) 던의 제자인 개더콜(Simon Gathercole)도 로마서 3장 20절의 “율법의 행위”에 대해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의 학자들이 할례와 음식법같은 민족적 표지로 해석하나 바울은 이 구절에서 토라에 순종하여 그것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의 무능력(cf. 롬8:3)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87)

4.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

톰 라이트는 이신칭의에 대해 현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에서의 하나님의 변호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말한다.88) 톰 라이트의 이신칭의는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이 누가 교회에 속했느냐는 것을 결정하는 교회론의 차원과 동시에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했다는 사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의 하나님의 변호행위라는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주장이 초대교회가 아니라 5세기 펠라기우스-어거스틴의 시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하나, 이미 2세기 속사도 교부들인 로마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 등도 이미 그러한 견해를 가르쳤다는 주장도 있다.89)

반면에 칼빈은 이신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현재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므로 양심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칼빈의 이신칭의는 현재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구원론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죄를 전가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동시적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따른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상급을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칼빈은 이신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데,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종말론적인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90) 칼빈은 이신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동시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게 되고, 이러한 신비로운 연합을 통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이신칭의와 함께 동시에 성화를 이루어 가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확신과 상급을 받는 소망의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VI. 나가는 말

톰 라이트는 샌더스 이후의 바울의 새 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공유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연구결과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신칭의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이신칭의를 제공하는 배경인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를 바울서신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자신의 특성이다. 그리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분리시키는 민족적 경계표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율법의 행위들은 안식일 준수, 할례, 음식법준수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율법의 행위들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언하면서 그의 행위에 대한 종말론적인 변호를 기다리는 것을 칭의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라이트의 연구는 기여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죄의 심각성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해 죄를 용서받아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 구원론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에 기초한 최종적인 심판은 인간이 구원을 확신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이신칭의를 통한 구원의 확신과 함께 평화를 누리면서 동시에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건전한 칼빈의 구원론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시켜 나가야 하겠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관점들 가운데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부분들을 잘 정립시켜 나가면서 동시에 보존해야할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고하게 파수해 나가야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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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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