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 하나님의 속성

1. 전지전능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능치 못하신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지하신 것입니다.
(민 32:23)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민 32:23)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대상 28:9)『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대상 28:9)『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렘 16: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김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은폐되지 못함이라』
(렘 16: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신 것입니다.
(창 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 35: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렘 32: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렘 32: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2.무소부재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도 계시고, 교회 밖에도 계시며, 우리들과도 계시고, 이웃사람들과도 함께 계시니 그분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우리들의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물질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시 33:5)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 33: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 119: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 119: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사 6: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렘 23: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렘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3.영원불변(현재하시는 분)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 있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은 또한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사 48: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사 48:12)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말 3: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 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처럼 우리들이 신앙하는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시는 분으로서 영원한 현재이신분이십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And God said unto Moses, I AM THAT I AM: and he said, Thus shalt thou say un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th sent me unto you.』(NKJ)
(출 3:14) 『And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And He said, "Thus you shall say to the children of Israel, 'I AM has sent me to you.'"』‘New Revised Standard Version’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KJ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He said further, "Thus you shall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NIV)

4.거룩하심
우리들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옥에도 티가 있다’는 우리나라의 속담이 해당이 되지 않는 거룩함이십니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출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
(출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출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출 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레 11:44)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4)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20: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
(레 20:8)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레 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레 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민 27: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민 27: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시 99: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시 99:3)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시 99:9)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대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살전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5.살아계심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중요한 속성은 지금도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딤전 4: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히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계 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 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로 지나간 세대와 오늘의 세대와 앞으로 나타날 세대를 지금 현재로 만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반면에 이 세상의 모든 우상들은 사람들의 수공물이요, 죽어 있는 모습입니다.
(시 115:4-8)『[4]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 115:4-8)『[4]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8]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렘 10:3-5)『[3]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요동치 않게 하나니 [5]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렘 10:3-5)『[3] 여러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 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5]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출처: USA 아멘넷 자게판/복된소식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같은 형용사적(adjective), 서술적(descriptive) 정의(definition)를 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며 '하나님'과 '사랑'을 치환(置換, substitution)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 방식이시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도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엡 1:4),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도(창 1:27)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해 주신 것도 독생자(골 1:16)와 택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전 3:21).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저주 아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사,그들을 구속하셨으며, 이 구속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요일 4:10, 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구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불과(?) 2천 년 전이었고, 각 사람이 구속의 사랑을 입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개인의 생애에서 찰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은 영원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내려져 있고, 영원 속에 함께 연루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역사 속의 유한된 사건이나, 피조물들에 의해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유한된 것들이 '영원의 영역(territory of eternity)'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 사랑의 기원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의해 작정되고 경륜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오직 부르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되는(롬 9:11)" 구원 경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기원적 사랑은 선악간의 인간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제적 어떤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무조건성'을 특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기원하고 있음을 아는 지식은, 유한된 피조물에 의해 구원이 훼방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북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하나님 사랑' 타령은, 대부분 위에 열거한 정의들과 합치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사랑' 개념은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잘못하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을,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닌 하나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이 자기에게 있게 된 시점에 둡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행위에 세울 때, 사랑의 영원성은 소멸되고, 제 하기 나름인 조건적인 것으로 전락됩니다.  


나를 사랑해 다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마 22:37)"고 요구하신 것은,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으니 너도 받은 만큼 내게 사랑을 되돌려 달라'는 반대급부적 요구가 아닙니다. 혹은 '피조물인 너는 창조주인 나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절대자의 전횡적 요구도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의 표출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 하나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잠 8:17)"는 말씀인데, 이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한다"는 조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서 그 시작이 하나님이라고 못 박기 때문입니다(요일 4:10). 사실 이 말씀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순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주려므나. 내게도 너의 사랑이 필요하단다"는 뜻입니다. 비유컨대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엄마에게 과자 하나 주면, 나중에 엄마가 장난감 하나 사주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이로부터 과자 하나를 받아야만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마는 아이가 그에게 과자를 주든 안 주든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 줄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과자가 아니라 과자를 건네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손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혹자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고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피조물 인간들을 향해 사랑 타령이실까 싶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이기에 더욱 사랑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하신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희귀하여 주님은 사랑을 구걸(?)하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아 5:2)" 고 읍소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에 마음을 뺏긴 채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은 교회(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레나데입니다.


독점적인 전부의 사랑을 다오


"마음, 성품,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30:6-8)"는 성경 말씀은 일견 현실성 없는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명분으로 우리를 그에게 종속시키려는, 사랑을 가장한 매정한 율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의 요청이고, 남겨지거나 유예된 것 없는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받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이는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부분적이거나 나눠질 수 없는 독점적 속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사랑은 나누는 것이니 다른 여성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면 마땅히 질투를 느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상을 용납지 않으시고(요일 5:21) 우리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도(신 4:24, 아 8:6, 약 4:5), 우리에 대한 사랑의 독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점적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이전에, 먼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렇게 독점적이고 완전한 전부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하셨고, 열방 가운데서 오직 우리만 알 정도로(암 3:2)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을 하셨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망각하지 않고(사 49:15), 우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사 49:16). 마지막에는 아예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고전 3:16).


이렇게 우리를 향해 독점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자신이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 독점적인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상에게 마음을 뺏겨 하나님께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향해 종일 손을 내밀며 사랑을 구걸하셨던 그 하나님은(롬 10:21), 오늘도 간음하는 여자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약 4:4) 향해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구걸(?)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1836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01.하나님(2316, qeov")

(사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왕하 19:14-15)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15]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의 위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왕하 19:14-15) 『[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15] 그 앞에서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 1 ] 홀로 유일하신 하나님

(고전 8:5-6)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전 8:5-6)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딤전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홀로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 37: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사 37: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세상에는 부모들이 많이 있지만,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듯이 이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한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에 낳아 준 분도 없으시고, 하나님을 만드신 자도 없는 홀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신 것처럼, 스스로 계신 분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러한 홀로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출처: USA 아멘넷 자게판/복된소식

기독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 팀 켈러


오늘날 세계적으로 종교의 분열적인 속성을 처리하려는 모든 주요한 노력들의 효용성에 대해 나는 예전부터 변함없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 왔다. 하지만 그런 활동이 지향하는 목적인만큼 강력하게 지지한다. 1장을 지지하면서 일반적으로 신앙은 마음에 가파른 비탈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 비탈은 너무도 쉽게 모두를 억압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확신에 찬 정통 기독교 신앙에는 그 도리를 따르는 이들을 지상에 평화를 전달하는 일꾼으로 만들 풍부한 자원이 가득 들어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내면에 작용해 분열 성향을 설명하고 깨끗이 지워 버릴 힘이 있다.


기독교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존중할 견고한 토대를 제공한다. 예수는 믿지 않는 이들이 저마다 가진 문화적인 배경과 상관없이 크리스천들의 행동을 대부분 '선하게' 여기리라고 보았다(마 5:16 참조, 벧전 2:21). 크리스천의 가치 구성과 그 어떤 개별적인 문화나 다른 종교들의 가치 구성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있음을 당연히 여기신 것이다. 이처럼 중첩되는 영역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선을 행하고 지혜롭게 판단할 수 있는 존재로 빚어졌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형상에 관한 교리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이 그릇된 믿음을 가진 이들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아울러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에 대한 교리는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정통 기독교 신앙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다고 기르치는 수준보다 사뭇 떨어질 수 있다고 예상하게 한다. 이만하면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협력할 충분한 토양이 준비된 셈이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도 선량함과 슬기로움을 갖추고 있음을 믿게 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 상당수는 윤리적으로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삶을 산다는 인식을 구성원들에게 심어 준다. 이 시대의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들 대다수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분과 관계를 맺고 선하고 의로운 삶에 힘입어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정반대로 가르친다. 예수는 이만저만하게 살아서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라는 말씀을 하러 오신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처지가 되어 살고 또 죽음으로써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러 오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자신들보다 훨씬 인격적이고 슬기롭고 훌륭한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째서 그런가? 크리스천들은 스스로의 윤리적인 공로나 지혜, 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가 이루신 역사 덕분에 하나님의 용납을 받은 까닭이다. 대다수 종교와 인생 철학은 신앙적인 성과에 한 인간의 영적인 신분이 달렸다고 추정한다. 그 교리를 좇는 이들로서는 자연스럽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또 그렇게 행동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그와 같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


흔히 '근본주의'는 폭력으로 이어진다고들 하지만, 지금껏 살펴본 바와 마찬가지로, 너나없이 스스로 다른 믿음들보다 우월하다는 근본주의적이고 입증할 수 없는 신앙에 깊이 몰입하고 헌신하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정말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근본주의적인 신앙인들이 그 추종자들을 이끌어 의견이 다른 이들의 눈에도 더없이 사랑스럽고 끌어안을 만한 인간들로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배타적일지라도 따르는 이들을 겸손하고 평화를 사랑하게 만드는 쪽으로 이끄는 일단의 신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초기 크리스천들의 신앙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당시 문화와 비교해 보면 역사의 역설이 드러난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신앙관은 개방적이어서 거의 방임에 가까워 보일 지경이다. 누구나 섬기는 신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문화적인 관습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리스-로마 세계는 경제적으로 대단히 계층화되어 있었다. 빈부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이와 달리, 크리스천들은 오직 한 분, 참 하나님이 살아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주장했던 이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다양한 민족과 계층 출신들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스캔들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스-로마 세계는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크리스천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넉넉하게 베풀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세상일수록 여성들의 지위는 형편없이 낮았다. 여자아기의 영아 사망률이 턱없이 높았고, 강제 결혼이 빈번했으며, 경제적 평등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독교는 여성들에게 예로부터 존재했던 그 어떤 계급 사회에서보다 더 큰 안전과 평등을 제공했다. 1-2세기 무렵, 도시를 중심으로 끔찍한 역병들이 밸생했을 때, 크리스천들은 시내 곳곳에 있는 병자와 죽어 가는 이들을 보살폈다. 그러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처럼 배타적인 확신 체계가 다른 이들에게 그토록 개방적인 행동을 하게 만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크리스천들은 신앙 체계 속에서 헌신적으로 섬기고 너그럽게 베풀며 화해를 이룰 더없이 강력한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현실관, 그 한복판에는 원수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어 간 이가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되새기노라면 결국 자신과 완전히 다른 이들을 대하는 전혀 다른 방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적대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도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질렀던 일들을 눈 질끈 감고 가볍게 넘어갈 순 없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가장 근본주의적인 신념에서 나오는 힘이 이 어지러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그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팀켈러의 "팀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에서 발췌(54-57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맥 잡기 (3-1)-최초의 변증가

▲ 라은성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등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현재는 교회사아카데미의 대표로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라은성 교수가 잠자고 있는 교회사의 면면들을 다시금 깨워냅니다. 크리스천투데이는 매주 목요일 라은성 교수의 교회사 맥잡기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힘차게 박동하는 맥을 타고 생명의 기운이 흐르듯, 라은성 교수와 함께 역동하는 교회사의 맥을 짚어봅시다. -편집자 주




진리를 발견한 사람에 대해 예수님은 마태복음 1345~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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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우리는 인생에서 삶을 헌신하거나 포기할 정도의 결단을 하는 것만큼 숭고한 사건을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그 숭고한 사건을 이끈 인물이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변증하며 끝내 생명을 받친 고귀한 한 인물은 바로 순교자 유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철학을 통해 진리를 찾고자 했던 자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야기를 자신이 쓴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1~9장에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세겜 땅에서 태어난 사마리아인 철학자였지만 부친이나 조부는 그리스인 아니면 로마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유했던 그는 철학을 배우면서 진리를 찾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크시투스 출신 친구와 함께 산보를 하고 있는 도중 어느 한 사람이 여러 명과 함께 그를 좇아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철학자 양반!그리고는 그에게 다가와 동행하였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그런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아르고스에서 소크라테스 문하생인 코린투스가 말하길 당신과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말고 친절하게 인사하고 그들과 대화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나나 그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당신과 같은 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그들은 그를 따라오면서 무엇인가 좋은 애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장난삼아 그들 중 한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호머의 일리아드6123절에 나오는 글을 인용하면서 죽을 운명에 직면하면서도 가장 용감한 자 같은 당신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요? 트리포라고 하오. 할례를 받은 히브리 사람으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전쟁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이라오. 그리스 지역을 여기저기 다녔지만 주로 고린도에서 살았수다!


이렇게 대답하는 트리포에게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철학에서만 아니라 율법 수여자와 선지자들에게서도 무슨 혜택을 얻을 수 있을까요?그러자 트리포는 철학자들도 하나님에 대해 논의하는데 전심을 다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섭리와 주권에 대해 연구하는데 전심을 다합니다.이 답변에 대해 유스티누스는 동의하면서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그렇다고 나도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지 여러 신인지에 관해 관심이 없거나 또 그 신들이 우리 각자를 위해 무엇인가를 제공하는지 아닌지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지식이 그들이 보기에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죠.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전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만 우리와 같은 개인들에 대해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억지 주장하기에 그분에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철학이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끄는 것이라고 여긴 것은 적어도 그분은 모든 것의 근원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철학은 행복, 즉 진리를 찾는 길이라고 여기고 유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자들, 소요학파(遡遊學派, Periatetics), 사색가들, 또는 피타고라스학파 등을 만났습니다. 결국 사람들에 의해서 그 길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짓고 기나긴 여행을 떠나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화3~4장에서 유스티누스는 적어도 하나님에 대해 세 가지로 이해했습니다. 첫째, 그분은 진리시고 둘째, 동일한 성품과 도를 변함없이 유지하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그리고 셋째,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진리와 기본적으로 유사한 것을 가진 영들 속에 갑작스럽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갈망하도록 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는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한 갈망을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나이든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유스티누스에게 당신이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서 진리를 찾을 수 없었다면…”이라고 시작하여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을 소개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보았고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행했던 이적들 때문에 믿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조성자시며 근원이십니다. 그분으로부터 그분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기만적이고 불순한 영을 가진 거짓 선지자들은 이렇게 행하지도 않고 그것을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사람들을 놀랍게 하는 몇몇 이적들을 수행하며 잘못된 것을 가진 영들과 귀신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을 빛의 문으로 인도해달라고 그분에게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사람에게 주지 않으면 이런 것들은 결코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들은 유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은 고백했습니다.


이런 얘기들을 나에게 들려주면서 그들처럼 추구하라고 강권했습니다. 그 이후 그를 다시 볼 수 없었지만 내 영혼 속에 불이 타올랐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선지자들과 사람들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말들을 생각했을 때 이것이 바로 확고하고 유익한 철학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트리포와 함께한 사람들은 크게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빙그레 웃으면서 유스티누스는 그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스티누스는 자신이 철학에서 발견한 하나님에 대한 어리석은 판단들이 나이든 사람과 대화하면서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먼저 궁극적인 진리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나이든 사람의 질문에 유스티누스는 이성으로라고 대답했지만 잘못된 대답임을 그는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선지자들이 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한계성을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계속>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06977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의 섭리(2)-존 플라벨-

섭리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룬다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가 직면한 상황에 보편적이고, 효율적이며, 유익하고, 고무적인 영향을 미친다.

먼저 본문은 성도가 직면한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섭리의 보편성을 암시한다. 섭리는 한두 가지 상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상황을 아우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과 관련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신다. 중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까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처리하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까운 일이나 먼 일을 막론하고, 성도와 관련된 일이면 무엇 하나도 배제하지 않는다.

또한 본문은 섭리의 효율성을 암시한다. 섭리는 성도가 직면한 상황을 다룰 뿐 아니라 완전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사역을 시작하시면 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행하신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을 수 없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 섭리의 진행 과정이 방해를 받는 상황은 절대로 없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아울러 모든 섭리의 결과는 성도를 이롭게 한다. 섭리는 성도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룬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섭리를 섣불리 판단하고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곤경과 시련에 처할 때면 우리는 흔히 “모든 상황이 내게 불리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성도의 진정한 유익과 행복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섭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말씀을 이룰 뿐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주님의 작정과 약속에 위배되는 상황을 연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은 오로지 성도의 행복을 지향한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이라는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위기와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많은 용기와 위로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마음에 소망과 용기를 주어 큰 시련 앞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만든다.

다윗은 죽음이 목전에 이른 상황이었다.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도무지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하고 기쁨을 잃지 않았다. 분노에 사로잡힌 무자비한 권력자가 다윗을 바위 동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까지 바짝 쫓아왔다. 다윗은 언제 동굴에서 끌려나와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굶주린 사자들에게 둘러싸인 것 같은 상황에서도, 지금까지 자기를 도와주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용기와 희망을 얻었고, 주님을 향해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로다.”라고 간절히 도움을 호소했다.

하나님의 섭리를 항상 묵상하라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지(특히 시련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이다.”

교회는 “주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셨사오니”라는 말씀대로(사 26:12),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하신 섭리의 손길에 의해 인도된다. 경건한 성도는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대한 기억을 늘 귀한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성도의 영원한 안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체험한 경험을 꼭 책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기록해야 한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만 해도 은혜로울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고 경험하면 얼마나 은혜롭겠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기도의 힘으로 아말렉을 물리친 사건을 책에 기록했을 뿐 아니라, 희생단을 쌓고 그곳을 “여호와닛시”(하나님은 나의 깃발)라고 칭했다(출 17:14-15).

모르드개와 에스더도 “각 세대, 각 가족, 각 지방, 각 도시에서 이 두 날을 기억하여 지키고 또 부림의 이 날들을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치지 아니하게 하며 이 날들을 기념하는 일이 자기들의 씨에게서도 없어지지 아니하게 하였더라.”라는 말씀처럼 부림의 날을 제정해 하만의 계략에서 구원을 얻은 사건을 영구히 기념했다(에 9:28).

편에서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지은 시’라는 표제가 달린 시가 발견된다(시편 70편). 또한 자녀에게 지어준 이름을 통해서 자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던 사실을 떠올렸던 부모도 있고(삼상 1:20),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났던 장소에 새 이름을 붙여 그곳에서 경험한 은혜와 구원을 영원히 기념하게 했던 예도 있다. ‘벧엘’ 바로 대표적인 경우이다(창 28:19). 곤경에 처한 하갈도 광야의 샘 곁에서 천사를 만나 도움을 얻고, 그곳을 “브엘라해로이”(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샘)라고 일컬었다(창 16:14).

뿐만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그분의 성호를 새롭게 일컫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여호와이레”라는 호칭을, 기드온은 “여호와살롬”이라는 호칭을 각각 사용했다(창 22:14)(삿 6:24). 하나님께서는 이따금 자신을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오신 하나님”, 혹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주 하나님” 혹은 “북쪽 나라에서 그들을 데려오신 하나님”으로 일컬으시는데(느 9:7)(렘 31:18), 이 역시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해 행하신 은혜로운 섭리를 상기시켜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은 온전하고 완전한 이해이다. 이는 섭리 사역 전체와 세부를 모두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해는 완전한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장차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광야와 가나안(즉,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광스러운 왕국)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종착지에 이르게 된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도는 섭리 사역의 전체와 세부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축복을 누린다. 그때가 되면 개개의 섭리 사역이 왜 필요했고, 또 서로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었는지는 물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구원 계획이 효율적이고 질서 있게 이루어진 과정을 낱낱이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배가 나침반으로 올바른 항로를 유지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약속을 이정표와 북극성으로 삼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나간다. 하우(John Howe, 1630-1706)는 [의인의 축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차 영원한 기록이 공개되고, 우리가 궁구했던 심오한 지혜의 은밀한 계획과 사역의 결과가 밝히 드러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아마도 ‘저것 좀 봐, 저런 계획이 있었다니! 그토록 복잡하고 당황스러웠던 일들이 저렇게 절묘하게 연관을 맺고 서로 의존하고 있었을 줄이야!’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이해이다.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는 동안에는 한 가지 행동이나 혹은 관찰이 가능한 일련의 행동과 몇 가지 상황만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밖에 없다.

이 두 이해의 차이는 톱니바퀴가 서로 어긋나고 시침과 분침이 제멋대로 떨어져나간 시계와 각각의 부품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질서 있게 작동하고 있는 시계의 차이와 같다. 혹은 절개된 인체의 핏줄 몇 가닥과 관절을 바라보는 무지한 구경꾼과 정맥과 동맥이 흐르는 길을 정확히 알고, 전체 속에서 세부를 바라보며 각 기관의 올바른 위치와 형태와 용도는 물론 그 상호 관계를 꿰뚫고 있는 전문 해부학자 사이의 차이와 같다.

세상에서 알 수 없었지만 장차 섭리의 전 과정을 한눈에 바라보며 개개의 상황이 서로 적절히 관련을 맺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할 것인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3:7).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당시의 특별한 상황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는 섭리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때로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고 당혹스러운 섭리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분노를 느끼곤 한다. 그럴 때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행복을 짓밟으려는 줄 알고 비통해하며 쓸데없는 불평불만을 쏟아 놓는다. 하지만 험난한 광야 길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사 그들이 거주할 도시에 이르게”하는 통로가 되었듯이(시 107:7), 우리도 장래에는 모든 섭리가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때와 비교한다면, 현재 섭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시야는 매우 불완전하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벧엘을 “하늘의 문”이라고 일컬었던 것처럼(창 28:17), 현세의 섭리 역시 ‘작은 하늘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놀랍고 은혜롭기만 하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의식을 통해서는 물론,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도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이루어낸 뜻밖의 결과 앞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곤 한다.

또한 과거에 겪었던 사건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면, 나는 설령 죽진 않았더라도 큰 고통을 받았을 거야.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면 난 어떤 피해를 얼마나 많이 당했을지 몰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내버려두어 멸망하게 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도로 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린다.

- 하나님의 섭리에서 -

 http://thevine21.hompee.com/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03 / (The Divine Essence an Attributes)













저자/역자 : 리처드 멀러/김용훈 | 출판사 : 부흥과개혁사


발행일 : 2014-12-30 | (150*228)mm양장 960p


판매가 : 45,000원 → 40,500원








신학서론과 개혁파 신학체계의 두 원리들(principia)에 대한 본 연구는 실로 그 자체로 스콜라주의적인 정통주의 개신교 사상에 대한 논의와 부분적인 재평가를 위한 알맞은 기초를 제공한다. 함께 다루어진 이 세 개의 논제들(loci)은 17세기 신학의 전제들과 방법들에 대한 일별을 제공한다. 정통주의자들이 신학 원리들로 규정했고 아마 틀림없이 개신교 정통주의의 정신에 가장 중요했던 이 교리들의 두 가지 내용들―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개관은 신학서론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정의들 · 연구법들 · 신학 방법들을 교리의 공식화에서 어떻게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를 예증한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하나님의 본질 · 속성들 · 삼위일체―은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의 특징에 대해 신학서론과 성경론보다 훨씬 더 많은 증거를 준다. 이 교리는 매우 성경적이고 · 고도로 철학적이며 · 철저히 17세기의 석의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맥락 안에 위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탁월하게 전통적이고, 결코 경건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교리는 그것의 고백적 서약에 있어서 개신교적이고, 그것의 스콜라주의적인 방법과 초대 교부적 토대들과 고전 철학적 뿌리들에 있어서 가톨릭적(catholic)(보편교회적 의미에서!)이다. 이 교리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함께 삼위일체론적인 정통주의(a trinitarian orthodoxy)뿐 아니라 존재론적 · 설교적 · 케리그마적 경향을 공유하지만, 또한 중세의 신학 박사들의 신학과 함께 변증법적 · 철학적 예리함과 실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들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다. 더욱이 이 주제를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 하나는 본질과 속성들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것은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하나로 이해했던 주제들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주제를 이렇게 나누는 것은 단지 이 연구 과제의 늘어나는 길이를 감안한 것일 뿐이다.




개신교 정통주의의 교리적 진술들의 특징은 스콜라주의적인 개신교 교의학을 이성주의의 한 형태와 동일시하는 것을 아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성경의 규범들 · 신앙고백의 범위 · 공식화의 보편교회성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보여준다. 누구든지 종교개혁자들을 맹목적인 믿음주의자들(blind fideists)로 내쫓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을 이성주의자들로 내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비록 17세기의 신학자들이 개신교의 1, 2세대 종교개혁자들보다 더 형이상학적인 특성을 가진 교리적 논의들을 하고자 했던 것은 아주 분명하긴 하지만, 이런 논의들이 완전한 규모의 신학 체계를 형성하는 것에 속하고, 정통주의자들이 이 논의들을 경솔하게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아주 확실하다.




따라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성경주의(biblicism), 혹은 더 정확하게는 17세기 신학의 특징인 석의와 교리의 공식화 사이의 밀접한 관계는 또한 제 3권과 4권의 주제이다.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이 매우 석의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논제의 부분이 두드러지게 석의적이었다는 것은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주제는 증거 구절들(dicta probantia)의 사용에 대해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제 2권에서 진술했던 요점을 계속 이어가는 것과 증거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위치한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제 2권에서 이 “증거 구절들”(proof texts)이 그것들의 문맥에서 왜곡되어 비-석의적인 교의 신학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된 성경 구절들이 아니었다는 명제를 제시했는데, 여기에서는 이 명제를 다양한 주석자들의 작업과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교리적 공식화들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예증한다. 이와 비슷하게 석의 · 교의학 · 경건 사이의 관계는 신학의 학술적 주석들과 체계들뿐 아니라 설교들과 (일반적으로 일련의 선포된 설교들에서 나오는) “대중적인” 주석들을 인용함으로써 예증한다. 이렇게 본권은 또한 이것의 조직신학적인 구성(systematic organization)에도 불구하고 대학 강단을 넘어선 개혁파 정통주의의 더 폭넓은 영향력을 예증하고 입증한다. (나는 또한 조사한 성경 본문들에서 선별적이어야만 했다는 것을 밝히는데, 교리의 긍정적인 석의상의 기초를 증명하거나 다양한 반-삼위일체론자들에 반대한 논박의 증거 자료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본문들만 선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본 연구의 길이를 감안할 때, 모든 석의상의 논거들을 개관하기란 불가능했다.




리차드 A. 멀러 -저자 서문 중에서






제 1부 서론




제 1장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신론


1.1 신론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관점 | 53


A. 신론의 역사에 대해 - 16, 17세기 위주


1. 본 연구의 범위와 방향


2. 본 연구의 현황


B.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론: 테제를 향해


1. 일반적 문제: 연구 궤적들과 연속성들과 불연속성들을 확인하는 일


2. 몇 가지 세부사항들




1.2 스콜라주의 신론에서의 성경?전통?철학 | 71


A. 초기 스콜라주의의 공헌: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에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까지


1. 역사적 발전의 과정


2. 초기 스콜라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속성들


3. 하나님의 단순성


4. 다양한 속성들


B. 높은 스콜라주의 신론: 13세기의 신학자들


1. 하나님에 대한 이해 가능성


2.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들”


3.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


4. 하나님의 단순성


5. 속성들과 속성들의 공식화의 논리에 대한 다양한 연구법들




1.3 신론에 대한 중세 후기의 공헌들 | 113


A. 중세 후기 신학에서 일어났던 관점의 변화들 - 쇠퇴 혹은 발전


1. 둔스 스코투스, 두란두스, 그리고 그들의 동시대인들의 역할


2. 스코투스와 두란두스 이후의 발전들: “유명론”과 근대의 학문방식의 문제들


B. 세부 쟁점들


1. 하나님에 대한 가지성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


2. 하나님의 능력?의지?자유


3. 하나님의 단순성


4. 다양한 속성들: 속성들의 순서와 배열




제 2장 16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의 신론


2.1 종교개혁의 신론 | 147


A. 종교개혁 초기의 하나님에 대한 견해들


1. 루터와 멜란히톤


2. 츠빙글리


B. 제2세대 집성자들의 저작에서의 신론


1. 칼빈?비레?불링거


2. 히페리우스?무스쿨루스?버미글리?허친슨


C. 개혁파 신앙고백들에서의 신론


1. 16세기의 신앙고백들


2. 정통주의 시대의 신앙고백들




2.2 개신교 스콜라주의와 신론: 초기 정통주의가 이루었던 것 (1565~1640)
| 165


A.관점의 교정을 향해


1. 자료에 대한 현대의 연구법들의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편견들


2. 교정의 근거들


B. 초기 정통주의의 발단들과 후기 르네상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부흥


1. 초기 정통주의 사상가들과 스콜라주의 논법의 부흥


2. 수아레즈?몰리나?수정된 토마스주의의 새로운 형이상학


3. 개신교 신학자들 사이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철학적 관점들




2.3 높은 정통주의 시기에서의 신론(1640~1685) | 195


A. 높은 정통주의로의 변천


1. 사상가들 및 쟁점들


2. 논쟁과 변화: 구체적인 발전들


B. 개혁파 정통주의와 이성주의의 발흥


1.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


2.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스피노자주의


3. 17세기 이성주의의 다른 형태들과 그 영향력


C.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의 완전한 발전


1. 영국의 신학자들


2. 대륙의 개혁파 신학자들


3. 공식화와 논쟁에서의 쟁점들




2.4 17세기 말과 18세기에서의 정통주의?이신론?이성주의 | 229


A. 대륙에서의 발전들


1. 라이프니츠, 그리고 이성주의와 정통주의 사이의 화해의 발단들


2. “과도기적 신학”과 이성주의로의 변천


3. 개혁파 정통주의와 볼프 철학


4. 18세기의 전통적인 정통주의의 잔여물들


B. 쇠퇴하는 영국 제도의 개혁파 신학


1. 영국 신학의 이성주의와 광교회주의


2. 18세기의 정통주의의 잔여물들




제 2부 개혁파 정통주의 신론




제 3장 하나님 안에서의 존재와 본질과 속성들의 단일성


3.1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신론의 순서와 배치 | 251


A.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방법과 순서


1. 종교개혁 시대의 신론의 “방법들”


2. 현대의 비평들: 신론의 순서와 배치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과 잘못된 진술들


B. 초기 정통주의 개혁파 교의학의 순서?방법?구성


1. 초기 정통주의 모델들: 라무스주의의 지식 체계론과 우선순위의 문제들


2. 다른 초기 정통주의의 연구법들




3.2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 | 268


A.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적 불가해성


1.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원천들과 한계들


2. 하나님을 아는 방식들과 신학의 경건


3. 초자연 신학?자연 신학?형이상학-정통주의 시대의 개혁파 사상에서의 관계와 구별


B. 개혁파 신학에서의 자연과 이성, 신 존재 증명들의 문제


1. 개혁파 정통주의에서의 신 존재 증명들의 형태와 특징


2. 종교개혁자들과 신 존재 증명들: 멜란히톤의 신 존재 증명들의 시작


3. 칼빈과 신 존재 증명들


4. 불링거?무스쿨루스?히페리우스의 신 존재 증명들


5. 신 존재 증명들의 방향: 논리적?수사학적 연구법들과 “사변적”?“실천적” 무신론의 문제들


C.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신 존재 증명들


1. 신 존재 증명들의 특징과 유형 분류 체계들


2. 증언으로부터 도출한 신 존재 증명들: 계시와 수사학적 논증들


3. 이성으로부터 도출한 신 존재 증명들: 후험적 증명들


4. 후기 정통주의 시대에서의 신 존재 증명들의 변화




3.3 술어적 서술의 문제와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일반론 | 317


A. 술어적 서술의 문제


1. 술어적 서술과 하나님을 묘사하는 용어의 어려움: 정통주의의 몇몇 예비 단계


2. 술어적 서술의 규칙들


3. 속성들과 본질적 특성들: 유비와 불균형의 문제들


4. 계시와 이성, 그리고 속성들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


B.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


1.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문제


2. 하나님은 “본성”을 가지시는가? 무스쿨루스의 비평적 질문


C.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속성들


1. 해설의 기본 쟁점들: 속성들에 대한 논의와 이 논의의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근거들의 중요성


2. 속성들?우유성들?특성들?본질적 완전성들: “속성들”에 대한 교리에서의 용어의 구별들


D. 분류의 유형들


1. 패러다임들을 이해하는 일을 향해


2. 하나님의 이름들?본질적 혹은 절대적 속성들(첫째 순서의 속성들)?관계적 속성들 및 하나님의 정동들(둘째 순서의 속성들)


3. 본질?생명?지성?의지의 속성들


4. 부정의 방식과 탁월성의 방식으로의 분류 혹은 선험적 속성들과 후험적 속성들로의 분류


5. 본질적 특성들?하나님의 활동성의 속성들?하나님의 관계성의 속성들


6. 논증적으로 배열된 속성들: 무엇인가?얼마나 큰가?어떠한가


7. 비공유적 속성들과 공유적 속성들




제 4장 하나님의 본질?이름들?“본질적” 속성들


4.1 하나님의 본질?비의존성?단일성
| 367


A.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리


1. 개혁파의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의 기본적인 쟁점들과 연구법들


2. 종교개혁 시대의 교리


3.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교리


B. 하나님의 비의존성과 단일성


1. 하나님의 비의존성


2. 하나님의 단일성




4.2 하나님의 이름들 | 399


A.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교리적 논의


1. 하나님의 이름들과 종교개혁자들의 신론


2.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 여호와


3.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


B.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논의


1.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일반론: 분류와 논의의 유형들


2. 여호와 엘로힘


3. 4자신명: 야훼 혹은 여호와


4. 하나님의 유일한 이름으로서 4자신명에 대한 소키누스주의의 반론들


5. 하야: “스스로 있는 자”


6. 엘로힘: 유적이지만 복수 형태인 이름


7. 샤다이와 엘 샤다이


8.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




4.3 단순성?영적 특성?불변성 및 관련된 속성들 | 438


A. 하나님은 무엇이신가: 첫째 순서의 본질적 속성들


B.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


1. 초기 종교개혁자들


2. 칼빈과 무스쿨루스


C.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개혁파 스콜라주의자들의 교리


1. 구성 요소로 이루어지지 않는 특성으로서의 단순성


2. 단순성,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의 구별들의 실재


D. 구성요소로 이루어지지 않은 존재 안에서의 속성들의 구별


1. 존재의 특성들과 존재 안에서의 구별들: 예비적 숙고들


2. 개혁파 정통주의와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의 구별들의 문제


3. 개혁파 정통주의의 다양한 공식화: 전통적인 논쟁의 되풀이들


E. 영적 특성과 비가시성


1.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2. 하나님의 영적 특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견해


3. 하나님의 비가시성


4. 정통주의 시기에서의 하나님의 영적 특성과 비가시성에 대한 논쟁


F. 하나님의 불변성


1. 최근의 사료 연구에서의 불변성


2.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3.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견해: 정의들


4. 불변성과 성경: 석의적 논증


5. 불변성과 이성: 전통적인 석의에 대한 신학적 논증과 철학적 뒷받침


6.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반론들


7. 실천적 적용: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고백과 경건


G. 완전성과 필연성


1. 하나님의 완전성


2. 하나님의 필연성




4.4 하나님의 무한성과 영원성 및 관련된 속성들 | 525


A. 하나님의 무한성


1. 기본적인 정의들과 성경의 근거들


2. 본질적 무한성과 외향적 무한성: 하나님의 무한성에 대한 절대적 이해와 관계적 이해


3. 논쟁에서의 쟁점들


B. 양과 관련된 무한성: 하나님의 위대성


C. 공간과 관련된 무한성: 무변성과 편재성


1. 무한성과 현존: 종교개혁을 반영하는 스콜라주의적인 문제


2. 외향적 속성들로서 하나님의 무변성과 편재성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개념


3. 보르스티우스와 소키누스주의자들?루터파?다양한 데카르트주의자들에 반대한 논쟁들


4. 편재성: 긍정적 해설과 철학적 함의들


D. 시간과 관련된 무한성: 영원성


1. 연구법들과 전제들


2. 석의상의 근거들


3. 영원성, 영원한 지속, 그리고 시간의 계기적 연속의 문제


4. 무한성?영원성?영원한 지속: 하나님의 지속의 내향적 측면과 외향적 측면 및 진정한 시간성에 대한 확언


E. 실천적 부분: 하나님의 무한성?편재성?영원성의 “적용들”




제 5장 생명?지성?의지의 속성들


5.1 “둘째 순서”의 속성들: 하나님의 활동과 외향적 발현 | 587


A. 초기 정통주의 모델들: 퍼킨스와 폴라누스


B. 높은 정통주의: 데카르트주의적 연구법과 반데카르트주의적 연구법




5.2 생명?전충족성?하나님의 복되심 | 591


A.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1. 하나님의 생명과 자존성


2. 하나님의 충족성


3. 하나님의 복되심 혹은 지복


B.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생명


1. 하나님의 생명과 자존성


2. 하나님의 전충족성


3.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복되심




5.3 하나님의 지적인 속성들: 오성?지식?지혜?참되심


?신실하심 | 617


A. 지적인 속성들: 논제의 구조와 내용


B. 하나님의 지혜


1.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2.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정의들


3. 하나님의 사역들에서의 하나님의 지혜의 증명들


4. 하나님의 지혜의 교리의 실천적 적용


C. 하나님의 오성과 지식


1.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들


2. 개혁파 정통주의의 하나님의 지식 혹은 전지에 대한 교리의 성경적?이성적 근거들


3. 기본적인 정의들과 반론들


D.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의 방식?대상들?정도


1. 하나님의 앎의 방식


2. 하나님의 앎의 대상들과 정도


3. 하나님의 “예지”


4. 하나님의 전지 교리의 실천적 적용


E. 하나님의 앎의 구별들


1. 필연적 혹은 본성적 지식과 자유로운 혹은 자발적 지식


2. 단순한 오성의 지식과 바라봄의 지식


3. 한정되지 않은 지식과 한정된 지식


4. 실천적 지식과 사변적 혹은 이론적 지식


5. 보편적 지식과 개별적 지식


6. 승인의 지식과 배척의 지식


F. 하나님의 “필연적” 지식과 “자유로운” 지식, 그리고 “중간 지식”의 문제


1. 기본 정의들


2. 기본적인 구별들에 대한 17세기의 비평


3. 중간 지식


4. 중간 지식에 대한 개혁파 신학자들의 비평: 몰리나주의의 문제


5. 소키누스주의의 문제: 미래의 우연성에 대한 제한된 예지


6. 조건부의 일들?가능한 일들?반사실적서술들: 몇몇 결론들




5.4 의지와 자유 | 694


A. 개혁파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의지


1. 현대의 논의에서의 이 문제의 상황


2.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B.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의지


1.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무스쿨루스?칼빈?버미글리의 교리


2. 하나님의 의지의 구별들


C.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1. 하나님의 단일한 의지에 대한 기본 정의들


2. 하나님의 자유: 필연적이고 불변하며, 자발적이고 구속 받지 않는 자유


3.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 유한한 질서와 관련해서 중립의 자유 혹은 정반대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4. 하나님의 의지의 구별들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교리


D. 내적 구별들


1. 본질적 의지와 위격적 의지


2. 필연적 의지와 자유로운 의지


3. 선행하는 의지의 자유와 동시적인 의지의 자유


4. 의지 행위과 의지 불행위


E. 내적 - 외적 구별들


1. 선한 기쁨의 의지와 표시의 의지


2. 작정하시는 의지 혹은 작정의 의지 혹은 계획된 의지와 계명의 의지


3. 내재하는 의지와 이행하는 의지


4. 감춰진 의지와 계시된 의지


5. 절대적 의지와 조건적 의지


6. 선행하는 의지와 후행하는 의지


F. 외적 구별들


1. 미래의 것들에 대한 작정 혹은 의지와 현재의 것들에 대한 의지


2. 작정하시는 혹은 유효적 의지와 명령하시는 혹은 도덕적 의지


3. 유효적 의지와 비유효적 의지


4. 유효하게 하시는 혹은 유효적 의지와 허용하시는 혹은 허용적 의지


5. 유효하게 하시는 & 유효적 의지와 승인하시는 & 승인적 의지


6. 정하시는 의지와 통치하시는 의지


7. 의무의 혹은 계명의 의지와 승인의 혹은 승인하시는 의지


8. 율법적 의지와 복음적 의지


G. 하나님의 의지: 연속성들?발전들?적용들




제 6장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 및 행사와 관련된 속성들


6.1 하나님의 의?거룩하심?선하심?참되심?신실하심 | 763


A. 하나님의 의 혹은 공의


1.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의


2. 하나님의 의: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기본 정의들


B. 하나님의 의의 구별들


1. “다양하게 숙고된……본질적 올곧음” 내향적/외향적 원동력


2. “이중의 공의”와 법 너머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문제


3. 외향적인 구별들의 요약


4. 말씀에서의 공의와 행하심에서의 공의


5. 배정적 공의와 분배적 공의


6. 분배적 공의에서의 구별들: 상급의 공의와 형벌에서의 공의


7. 하나님의 형벌적 혹은 응징하시는 공의에 대한 논쟁


8.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경건: 실천적 적용들


C. 하나님의 거룩하심 혹은 순수성


1.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수성


2.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3. 피조물들의 거룩함과 이 교리의 실천적 적용


D. 하나님의 선하심


1.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들


2.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견해들


E. 참되심과 신실하심


1. 개혁파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참되심과 신실하심


2.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3.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6.2 하나님의 능력?통치?위엄?영광 | 831


A.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전능과 통치


1. 종교개혁자들과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학 전통


2.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스쿨루스의 교리


B. 초기 그리고 높은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전능


1. 기본 정의들


2. 석의적 쟁점들


3. 하나님의 능력의 구별들과 한계들


4. 절대적 능력과 규정된 능력


5. 능력?권능?통치권: 능력?권능?통치권의 구별과 관계


6. 실천적 적용들


C.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1. 하나님의 속성들 사이에서 위엄과 영광의 위치


2.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교리


3.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신교 정통주의의 교리: 정의들


4.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한 구별들




6.3 하나님의 정동들과 미덕들 | 886


A. 일반적 숙고들: 하나님 안의 정동들과 격정들에 대한 문제


1. 정동들과 격정들의 개념: 쟁점들과 문제들


2. 석의적 해결들: 성경의 신인 동감 동정론의 확인


3. 교리적 결론들: 하나님의 정동들과 미덕들의 본질


B. 하나님의 사랑


1. 개혁파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사랑: 이 논의의 쟁점들과 배치들


2.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사랑


3.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사랑과 우정: 기본 정의와 본성적 사랑


4. 자발적 사랑: 이 사랑의 본질과 대상들


5. 하나님의 사랑의 효과들


C.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


1.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은혜


2.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D. 하나님의 자비


1.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서의 하나님의 자비


2.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교리


3. 하나님의 자비의 구별들


4. 실천적 숙고들


E. 하나님의 진노와 증오: 하나님의 진노와 증오 및 이와 관련된 정동들


1.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들


2.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가르침


3. 하나님의 증오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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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기독교 신학이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멀러 교수의 이 책에 비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어느 한 신학자의 소견을 통해서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 수 있겠으나, 그것은 기독교 신학사를 망라하지를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멀러교수의 이 책은 신학사에 있어서 가장 정밀한 논의가 있었던 12세기로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의 신학지평 전반을 아우르면서 그 배경 위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결정체를 소개한다. 독자는 교회에 남겨진 신학유산의 규모와 부요함에 충격과 감격을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무지와 빈약함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또한 이 귀한 유산을 공부하고 정리하여 우리에게 제시한 멀러 교수의 역량에 존경과 탄성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신론 가운데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다룬다. 이것을 읽는 것은 신학의 절반을 품는 것과 같다. 제발 꼭 읽기를 바란다.


_김병훈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멀러 교수는 개혁파 정통신학의 신론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풍성함을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즉 종교개혁, 성경주해의 전통, 스콜라신학, 신학 방법론, 신학 논쟁, 교회회의, 종교개혁과 후기종교개혁의 연속성과 단절성 등이다. 특히 멀러는 초대교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회사를 관통하는 교리사와 의미 있는 대화를 시도한다. 말 그대로 한 없이 넓은 사료(史料)의 바다에서 독자들은 매우 전문적이며 통찰력 있는 도움을 받으며 17세기 개혁파 신학의 장엄한 유산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_안상혁(합동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리처드 멀러 교수님은 저의 박사 지도 교수님 중 한 분이시며, 이 책은 그분의 가장 주저에 속합니다. 이 책의 주된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원전에 매우 충실합니다. 이 책은 방대한 2차 자료를 섭렵하고 있지만 결코 2차 자료나 3차 자료에 의지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고, 반드시 1차 자료 그것도 16~17세기 당시에 출간된 책들을 직접 독해해 내어 충분한 근거를 가진 결론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다만 17세기뿐 아니라 교부 시대와 중세 시대,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의 신학 논의들 역시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신학 역사 전반을 세밀하게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며, 16~17세기 신학을 그 역사적 현장에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해서 현대 학계에서 논의가 되는 쟁점을 두루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잘못된 오해들을 걷어 내고, 예를 들어 영원성, 불변성 등에 대한 매우 훌륭한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넷째, 성경에서부터 교리가 어떻게 도출되고 있는지 상세히 묘사해 줍니다. 16~17세기 개혁신학은 다양성을 가졌지만 최대한 성경적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다른 교회사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개혁신학자들의 성경 주석에 대해서도 두루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신학자들뿐 아니라 목회자들 역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론의 그 방대하고도 세밀한 아름다움을 최대한 접하게 되실 것을 확신하며 진심을 담아 이 책을 추천합니다.


_우병훈(칼빈신학교 조직신학 박사)




한국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의 신학과 유산이 많은 관심과 조명을 받고 있는 시기에 멀러교수의「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3권이 번역 출간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멀러교수는 방대한 일차자료와 이차자료의 분석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개혁주의 신학전통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고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서는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에 관심 있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_유정모 (침례신학대학교 박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리처드 멀러 교수의 4권짜리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시리즈는 큰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 신학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 더 나아가 중세 스콜라 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3권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다루는데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신론에 있어서 정확한 교의학적 개념들을 역사 신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책은 이미 하나의 고전이 되었다. 교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언급하지 않고 신학을 논하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_이성호(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오랜 기간 개혁파 정통주의 연구에 전념해 오신 멀러 교수님의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시리즈를 한글로 만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시리즈는 신학서론, 성경론 그리고 신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경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교리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체계의 두 원리입니다. 17세기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성경 석의는 신앙과 삶의 모든 문제들에 관한 교리 형성의 기초였습니다. 이번에 부흥과개혁사에서 출간된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해 성경을 연구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노정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 주는 역작이기에 독자 여러분께 적극 추천합니다.


_임원택(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은 유럽과 북미의 학문적 풍토에 변화를 가져왔다.


_윌리엄 반 아셀트(우트레흐트 대학교)




프로테스턴트 정통주의 시대만큼 심하게 간과되거나 현대 신학 논의에서 자주 곡해되는 기독교회사 시대는 별로 없다. 리처드 멀러는 이 시대가 지니는 중요한 의미에 일반적 통념을 전복시키고, 원자료들에 대한 신중하고도 광범위한 분석을 통해 이 분야를 새롭게 재정의 했다. 1550~1800년 시기의 개신교 신학사에 대한 앞으로의 모든 연구 작업에는 멀러 교수의 업적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_데이비드 스테인메츠(듀크 대학교)




이 책에서 멀러 교수는 자신의 방대한 학식과 열정을 담아 기독교 교리사 전반을 아우르는 가운데, 이와 관련된 개혁파 스콜라주의 신학을 실로 기념비적인 대단한 규모로 해설하며 선보이고 있다. 학계는 영구적으로 멀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멀러는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개혁파 교의학의 부요함이 분별력 있게만 사용된다면 기독교회의 신학 성찰과 강단에서의 설교에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을 증명하고 있다.


_폴 햄(리전트 칼리지)




17세기 개혁파 신학을 고전, 교부, 중세, 르네상스, 종교개혁 지성 사조 배경에 비추어 자리매김 함으로써, 멀러 교수는 17세기 개혁파 신학의 밑그림에 풍부한 색을 덧입히고 있다. 이 분야에 관여하는 이라면, 그 누구도 멀러의 논지나 결론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멀러의 주장에 반대하고자 하는 이는 감당하기 벅찬 일에 직면할 것이고, 멀러와 동의하는 이는 이 책을 통해 해당 분야의 연구 기준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_칼 트루먼(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멀러 교수의 저작은 상세하고 정확하게 다루어진 비할 데 없는 최고의 자료로 점철된다. 역사가로서 멀러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는 신학적 전통의 영속성과 그 문맥을 능숙하게 분별하고 있다. 때로는 해악일 수 있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멀러의 접근에는 개신교 스콜라주의에 대한 동정과 함께 일반적 편견에서 벗어난 그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_존 톰슨(퓰러 신학대학원)




리처드 멀러


듀크대학교에서 스타인메츠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현재 미국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에 위치한 칼빈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그리스도와 작정』(Christ and the Decree, 1986), 『진정한 칼빈 신학』(The Unaccommodated Calvin, 2000),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2003), 『칼빈 이후 개혁신학』(After Calvin, 2003, 부흥과개혁사 역간,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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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2)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성경은 창조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로 시작하여, 재창조(구원)의 과정으로 이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 골자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창조와 관련하여서 많은 오해된 주장들이 있다. 그 좋은 예가 진화론의 주장으로 인한 타협적인 자세나, 천사의 창조와 관련한 귀신론의  경우이다. 그 내용과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창조와 진화

얼마 전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가 세간의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일이 있다. 그 영화에는 수백만 년 전에 살았다는 공룡들이 등장한다. 현대인들은 이런 식의 분위기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인류의 시조가 유인원이었다든가, 지구는 수백만 년 전에 우주의 대폭발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든가, 고대 유적지를 발굴하고는 몇 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적이라는 말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진화론으로부터 알게 모르게 쇠뇌를 받은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던 무의 상태에서 오직 말씀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를 하셨다고 한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창 1:11).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창 1:21).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강조되어 있다. 진화론이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신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진화론자들은 인류의 기원을 45억 년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그렇게 오래된 것으로 계산해 내기가 어렵다. 성경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하더라도 일 만 년이나 일 만 오천 년을 넘게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성경을 진화론의 계산과 서로 조화되게 설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해석들을 시도한다.

그 주장들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과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부터 먼저 정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성경을 과학적 근거에 맞추어서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과학이 성경에 맞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성경이 과학적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은 과학을 무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과학과 상반되지도 않는다. 성경은 과학과 잘 조화가 된다. 성경은 과학의 발전에 많은 도전을 제시한다. 그리고 과학의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 준다.

과학은 지금까지 많은 발전을 거듭해왔다. 앞으로는 그 발전 속도가 과거보다 더 빠를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과학적 성과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만한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발전 속에서 과학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많이 밝혀냈다. 그리고 전에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많이 수정했다. 현재의 과학적 결과들도 마찬가지이다. 장래에는 현재 알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많이 밝혀내게 될 것이다. 현재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은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과학 수준에 맞춘 가설에 따라서만 성경을 해석하려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는 현재의 과학으로는 밝혀내지 못했던 사실들이 밝혀질 경우에, 또다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발전이나 시행착오에 따른 수정이 있을 수 없다. 성경은 불변하시고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이 지나도록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천지는 변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마 24:35).

둘째, 과학적 방법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또 오차가 너무 크다. 그러므로 그 수치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무리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보자. 과학에서는 무생물의 경우, 우라늄(U236)이 납(P)으로 변감하는 반감기를 토대로 그 연대를 측정하는 경우가 많다. 생물체의 경우에는 주로 탄소 동위원소(C14)가 탄소(C)로 변하는 반감기를 토대로 연대를 측정한다. 또 지층의 경우에는 퇴적층이 쌓이는 기간을 토대로 연대를 측정한다. 이 측정방법들은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주에는 너무나 많은 이변들이 발생하고 있다.

화산폭발, 지진, 홍수, 화재 등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래서 일정한 조건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과학적 측정의 신뢰도를 근거부터 흔들어 놓는다. 록키산 중턱에서 발견되는 조개껍질 화석, 여러 지층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는 나무화석, 전남 해안 지방에서 발견된 공룡의 발자국 등은 모두 이변들이 낳은 결과이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진화론은 아직도 유인원과 사람의 중간자인 '빠진 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셋째, 최근에는 지구의 나이가 젊다는 많은 증거들이 확인되고 있다. 창조과학회의 과학자들이 제시한 증거들은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지구의 자기 능력의 붕괴속도, 대기 중의 헬륨량, 지구 회전속도의 느려짐, 우주진의 유입량, 태양계 안에 존재하고 있는 혜성의 수, 포인팅 로벗슨(Poynting-Robertson) 효과와 태양 주변의 많은 운석, 짧은 반감기를 가진 달의 동위원소 등등. 여기서 그 내용들을 일일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들은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에서 일 만 년 내외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음을 보여준다.

넷째, 하나님의 창조의 상태는 미완성이 아니고 완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벽한 산과 나무와 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면서 좋아하셨다. 또 완벽한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보시면서 심히 좋아하셨다(창 1:31). 갖 지음받은 아담의 경우, 그는 한국식 헤는 나이로 계산한다면 한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지금의 한 살짜리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또 그 때의 에덴 동산과 각종 동·식물들도 한 살이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모습은 티끌이 모여 쌓이기 시작하는 상태가 아니라 완전한 동산이었다.

과학적 계산에 의하면 수십 억 년이나 수백 만 년으로 측정될 수 있는 상태의 동산이었다. 동물과 식물들도 다 자라서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갖 지음받은 나무의 껍질이나 거북이의 등가죽을 탄소 측정방법으로 실험해 보면 수천 년이나 수만 년 전의 것으로 계산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지금도 실험실에서는 이와 비슷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살아 있는 달팽이의 껍질이 수천 년 전의 것으로 계산되고, 살아 있는 나무 껍질이 수만 년 전의 것으로 계산되는 일이 없지 않다. 하나님의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도 쉽게 얻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닭을 창조하시고, 그 닭이 알을 낳는 방법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를 인간의 진화론 가설에 조화되도록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한 예로 창조의 날의 길이에 관한 주장들을 살펴보자.

2. 창조와 날의 길이

창조를 사람이나 지구가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진화론과 조화되게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간격설이나 시대설이라는 것이 있다.

1) 간격설(또는 重造說)

어떤 사람들은 지구의 나이가 오래 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근거를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서 찾는다. 1절과 2절 사이에는 무한히 긴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유는 이렇다. 1절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그러나 2절에는 땅이 공허하고 혼돈했다고 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공허하고 혼돈한 천지를 만드실 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땅에 공허와 혼돈이 생겨난 것은 천사의 타락 때문에 생겨난 결과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천사를 중심으로 했던 창조가 천사의 타락으로 혼돈에 이르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포기하시고, 사람을 중심으로 천지를 다시 창조하셨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창조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추측은 있을 수 없다. 또 성경은 사람을 타락한 천사의 자리나 메꾸기 위해서 만들어진 대용품으로 보지 않는다. 지혜나 능력에서만 본다면, 사람이 천사보다 뛰떨어질런지도 모른다(시 8:5). 하지만 사람은 천사들이 흠모하는 존재이다. 그 신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천사는 하나님을 수종드는 종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자녀이다(히 1:14).

2) 시대설 또는 반시대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6일 동안의 하루는 지금의 하루와 동일한 하루가 아니라 긴 시대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를 히브리어의 '날'이라는 말의 용법에서 찾는다. 히브리어의 '날'은 많은 경우에 긴 기간을 의미하는 말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으시다는 것도 그 근거가 된다. 따라서 창조의 하루는 얼마든지 긴 시대를 의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하루를 백만 년 정도의 기간으로 본다면 지구의 나이는 수백 만 년이 될 수 있다. 하루가 십 억 년 정도의 기간이었다면 인류의 역사는 수십 억 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하루가 긴 시대이었다면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빛과 열이 없어서 모든 것이 얼어죽는 긴 기간이었을 수 있다. 이는 지구에 몇 차례의 빙하기가 있었다는 가설과도 잘 어울린다.

또 6일 전체가 긴 시대는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첫 3일은 긴 시대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루는 해의 뜨고 지는 것으로 결정이 된다. 그런데 해, 달, 별은 4째날에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최소한 첫 3일은 긴 시대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안식일 계명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제 4계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를 하신 후, 이레되는 날에는 쉬셨다는 것을 근거로 주어졌다(출 20:11). 여기서 일곱째 날은 다른 여섯 날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만일 일곱째 날이 긴 기간이라면 다른 6일도 긴 기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안식일은 긴 기간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동안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6일도 동일하게 하루로 보아야 한다. 6일이 동일한 하루이라면, 첫 3일을 예외로 보는 것도 옳지 못하다.

우리는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과학도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과학이 성경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진화론에 근거를 두고 있는 과학과의 조화를 위해 성경을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과학이 발전하는 날, 미숙한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했던 성급한 해석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움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천동설에만 집착하여 갈릴레오를 정죄했던 지난 날의 잘못을 또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창조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하게 천지와 만물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원숭이를 비롯한 포유류, 양서류, 수중동물, 단세포 동물 등은 우리의 시조가 아니다. 천지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가 다스리고 길들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활용해야 할 도구들에 불과하다.

3. 천사의 창조

우리 주변에는 진화론으로 인한 인간성의 포기 이외에도, 마귀론에 메어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바르게 하기 위해, 천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부터 살펴보자.

1) 천사의 존재

천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피조물이다(시 148:5; 골 1:16). 그러나 사람과는 달리 육체를 가지지 않은 순수한 영적 존재이다. 그래서 천사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육체가 없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도 않는다. 결혼을 하거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도 없다(마 22:30). 죽지도 않는다(눅 20:36). 좁은 장소에서 집단적으로 거할 수도 있다(막 5:9). 이러한 존재인 천사는 능히 셀 수 없는 많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천사들은 생육하고 번성함이 없기에, 모든 천사들은 일시에 지음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창조하신 것은 수종드는 일꾼을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천사들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수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를 보호하는 것 등이다. 이런 일들은 각각 질서에 따라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룹이라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수호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래서 낙원의 입구를 지키고(창 3:24), 속죄소를 덮고 (출 25:18), 지상에 임하시는 주님을 모시는 천사들로 묘사된다(삼하 22:11). 스랍이라는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을 한다(사 6:2~7).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해석하는 일을 한다. 선지자 다니엘,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전하시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미가엘은 하나님의 군대를 지휘한다(단 10:13, 21).

2) 천사의 타락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에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처럼 죄를 범할 수가 있었다. 어떤 천사들은 끝까지 자기의 지위를 지켰다. 그러나 어떤 천사들은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로운 의지로 죄를 범했다. 하나님과 같아지고자 하는 교만 때문이었다(유 6). 그리하여 범죄한 어떤 천사들은 지옥에 던져졌다(벧후 2:4). 그러나 범죄한 천사들 중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의 허용하심 속에서 자유롭게 버리운 바 된 채, 악한 일들을 하고 지낸다(계 12:7~9).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지막 날에 영원한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천사도 사람의 경우처럼 자기의 자유의지로 죄를 범했다. 그러나 천사의 타락에는 사람의 경우와 다른 점들이 있다. 천사의 타락에는 대표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한 천사가 죄를 범함으로 모든 천사가 죄를 범하게 된 것이아니었다. 일부의 천사들만이 개별적으로 타락을 했다. 또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복의 소망이 없이 계속해서 죄만을 반복하며 지낸다.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허용하심 속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다. 사람을 미혹하고 범죄를 조장한다. 재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때로는 사람에게 정신이상이나 질병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사단이다. 사단이란 이름은 '대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단은 악한 자, 옛 뱀, 용, 아폴루온, 참소자라고도 불리운다. 사단의 주변에는 타락한 악한 천사들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어두움의 주관자, 공중의 권세잡은 자, 귀신, 마귀, 악령 등으로 불려진다.

귀신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면 어떤 존재인가? 성경에는 귀신이라는 말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존재를 입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귀신은 일부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원한 맺혀 죽은 사람의 혼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변해서 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본래 하나님께로부터서 선하게 지음을 받았던 천사들이다. 그러나 스스로 범죄하여 타락한 상태에 빠진 천사들이다. 마지막 날에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것이지만, 그 때까지는 자유로운 활동을 허락받아서 악한 일들을 하고 지내는 악한 영들이다.

3) 귀신과 질병

최근 우리 주변에는 모든 질병을 귀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귀신은 사람에게 정신이상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몸에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 거라사 지방에는 귀신으로 정신이상에 걸려 무덤 사이에서 살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쇠사슬이나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았다(막 5:4). 예수님이 변형되시었던 산 아래에는 귀신들려 간질병을 앓던 아이가 있었다(눅 9:37).

그러나 우리 몸에 생겨난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질병들은 귀신과 관계없이 대부분 부주의함이나 잘못된 섭생 때문에 생겨난다. 때로는 귀신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는 질병도 있다. 나면서 소경된 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주님께서는 그의 소경된 이유가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의 죄때문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으셨다. 그 때 주님께서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대답하셨다(요 9:3). 그리므로 모든 질병을 귀신과 연관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귀신에 의한 정신병이나 질병은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치료되어진다. 그러나 부주의함으로 생겨난 질병은 적절한 치료를 통해서 나아진다. 예수님께서는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향하여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하시며 귀신을 내쫓아 병을 낳게 하셨다(막 9:25). 그러나 한 소경에게는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심으로 치료하여 주셨다(요 9:7). 그러므로 귀신으로 말미암지 않은 질병은 간절한 믿음의 기도와 함께 적절한 치료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창조 신앙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피조물이 창조주를 평가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피조물된 위치를 지켜야 한다. 왜곡된 과학이나 귀신론이 위세를 더할수록 더욱 그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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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1)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늘 깨어서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시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셨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계획을 하시는 일과,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는 일과,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간섭을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각각 작정, 창조, 섭리라고 부른다. 이 중 작정과 창조에 대해서 다루되 본호에서는 작정, 다음호에서는 창조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작정의 대상과 목적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는 분이시다(엡 1: 11).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작정의 대상이나 범위, 그리고 그 성질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하찮게 보이는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이나 국가나 온 인류에 이르기까지와 바다와 바람과 햇빛과 비 등 무생물까지도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는 우연하게 보여지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생사화복이나 인류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체적인 일들까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며(마 6:26), 참새 한 마리라도 허락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이(마 10:29)가 하나님이시다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면서(마 10:30) 그 하나라도 상치 않게 하신다고 하셨다(눅 21:18).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게"(행 17:26) 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것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만 작정을 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고, 변함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항상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며(롬 8:28), 불변한다. 출애굽 40년을 보자. 40년 세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는 땅을 내주고 쫓겨가야 할 정도로 죄악이 성해질 때를 기다리는 기간이었다. 40년 세월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의 과정이었다. 바벨론 포로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타국에서의 70년은 슬픔과 탄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이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는 여호와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기간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은 합력하여 선이 되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작정이 합력하여 결과적으로 선이 되어지고, 특히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어떠한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일 때에라도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2. 작정과 예정

 사도 바울께서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 중에서도 사람을 향한 작정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것들 중에서도 영혼의 구원, 즉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작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특별한 관심사인 사람의 구원에 관한 작정을 흔히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작정은 만사, 만물(萬事, 萬物)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지고, 반면에 예정은 이성적인 존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진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는 영생과 영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도 영생을 위한 예정이 있고, 영벌을 위한 예정이 있다. 영생을 위한 예정은 선택이라고 부르고, 영벌을 위한 예정은 유기(遺棄)라고 부른다.

 

 (1) 유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지만,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서 죄를 범했다. 사람은 그 죄의 댓가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사망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향해 살아날 수도 없고,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영원한 형벌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말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셨다"(엡 2:1)고 했다. 그리하여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악해졌다. 그리고 죽은 시체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사람의 죄는 점점 더 관영해지고 악해졌다.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의지의 남용으로 죄를 범하거나, 죄 가운데서 점점 더 악해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것을 막지 않으시기로 예정을 하신 것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요셉이나 바로의 예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요셉의 형들에게는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방법을 통해서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심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기근에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대비를 하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었다(창 45:5). 또 애굽 왕 바로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고 종으로 부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점점 더 강해지는 재앙들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을 위한 결심을 촉진하게 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애굽에게는 그 완악한 죄를 인한 형벌을 내리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출 10:27 등)는 적극적인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나 추수 때까지 알곡 속에 섞여 자라는 가라지 등을 비롯한 많은 말씀들에서 발견된다.

 

 (2) 선택

 한편, 하나님께서는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죽은 생명을 살리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아 엎고, 소경된 눈을 떠서 보게 하고, 귀머거리 된 귀를 열어 듣게 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빌립보 강가에 있던 루디아가 사도 바울께서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게 된 것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행 16:1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경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신다"(시 119:18)고 노래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혀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도록 하는 계획, 즉 은혜의 계획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경우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보다 내놓을 만한 장점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른 포도나무의 가지나 타다 남은 그루터기와 같이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계시를 전달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윗이 임금으로 선택된 것도 그러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을 부으러 왔음에도 들에 있던 다윗을 집으로 불러 들이지도 않고 형들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는 같은 흙으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였다(사 45:9; 롬 9:21). 사도 바울은 이 계획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19)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있었다(행 13:48).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로 사용되어진다. 죄인에게는 영생으로의 선택이 무한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은 "모든 신령한 복으로 주어지는 복"(엡 1:3)이다. 만일 선택 때문에 감사가 아닌 비방이나 불평이 생겨난다고 하면, 이는 선택을 오해함에서 나온 것이다.

 

 (3) 작정과 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에 흔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몇 가지 궁금한 문제가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면, 죄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일까. 하나님이 죄를 작정하시지 않았다면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시지 않은 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진다면, 사람은 단지 로봇에 불과하지 아니한가 하는 것 등이다. 그 중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죄의 문제이다.

 

 역사에는 하나님이 죄를 생겨나게 만드신 원인자이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만휼히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불의나 죄와 상관이 없으시기 때문이다(롬 9:14).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요일 1:5). 하나님의 생각과 활동은 항상 선하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선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악한 수단을 동원하시지 않는다.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반드시 선한 방법을 사용하시고 악에 대해서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그 책임을 물으신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선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선이라야 참된 선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서 나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바로 죄이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우주 안에 온갖 악이 뒤따랐다. 그러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잘못인가.

 

 본래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을 돌려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필연적이고 기계적인 찬양보다는 자발적인 찬양이 훨씬 더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에게는 오직 선한 의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어졌다. 이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완전하심과 관계없이 피조물에게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그를 특별히 신임하여 훈련시키셨고 금전관리까지 맡기셨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신임을 저버리고 오히려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아넘겼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하였던 그의 결과는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악한 행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가 악용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전능하시다고 하여 죄도 범하실 수가 있다거나 스스로의 모순을 범하실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의 자유로운 사용을 강제로 막는 것은 자유의지를 주신 의도와 모순이 된다. 자유의지는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예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죄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자유의지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에 앞서서 피조물의 창조가 먼저 고려될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은 창조를 계획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사 60:21)이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창조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목적의 가장 효과적인 달성을 위한 수단은 바로 자유로운 의지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려고 작정하신 이상, 그 창조 목적에 적합하도록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허용하신 죄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죄악된 피조물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선하심마저도 악용하여 죄를 범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작정과 인간의 책임

 우리에게는 때때로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 다른 곳에 있으면, 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내가 수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당연히 얻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기 도취에 빠지거나 책임전가에 급급할 우려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작정이 세밀한 모든 부분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이 과연 인간의 나태함과 책임회피의 구실로 이용될 수 있는가.

 

 모든 일은 궁극적인 원인, 즉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제2 원인들의 활용을 포함한다. 여기서 제2 원인이란 주로 자연법칙이나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의 노력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수단으로 사용하여서 자신의 계획이 달성되어지도록 작정을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거나 거스려서 일하시도록 작정하신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우리 편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그래서 작정은 체념적인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작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음식과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음식은 수고하여 일하는 자에게 보상으로 주어진다. 독을 마시면 죽는다. 여기서 음식이나 음식을 위한 수고나 독을 마시는 것은 제2 원인에 해당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2 원인이 되는 땀흘려 일하기를 게을리 하는 자에게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살후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그것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얻게 하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도록 하신다(마 7:7). 제2 원인을 활용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주시려고 작정하신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 믿음과 천국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제공하심에서, 힘써 침노하는 자(마 11:12),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가 천국을 차지하도록 제2 원인을 활용하신다(딤후 4:7). 또 그 선물의 전달과정에 있어서도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힘써 외치는 전도자의 수고와 그 복음에 대한 진지한 들음이라는 제2 원인의 활용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한다.

 

 로마로 향하던 사도 바울의 예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폭풍으로 파선을 당한 276명 모두를 구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사도에게 보이셨다(행 27:24). 그러나 그 목적은 배불리 먹고, 안심을 하고, 밀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하고, 선원들의 경험을 동원하여 의논을 하고, 닻을 끊고, 키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해안까지 헤엄을 치는 등의 온갖 제2 원인으로서의 수단들이 동원됨으로써 이루어졌다(행 27:36~44). 또 민족의 위기를 앞에 두었던 모르드개의 경우를 보자.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는 말로 에스더의 역할을 촉구했다. 그리고 에스더는 밤낮 삼일의 금식과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감과 지혜로 왕을 접대하는 등 제2 원인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우리는 대부분 매사에 주도면밀하게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작정을 별 어려움이 없이 인정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된다. 때로는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작정을 확인하고 더욱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그러나 죄나 사람의 책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거나 오해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하나님되시게 해야 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소망 중에 전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겸손함으로 힘써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가져온 곳: 행복충전소/DMpastor

다음은 한창덕 목사(예장 개혁 이대위 위원장)의 월경 잉태설 논쟁에 관한 투고 글입니다. 아멘넷의 편집방향과 무관없습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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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덕 목사(예장 개혁 이대위 위원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사도신경과 같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중요한 골격을 제시하고 있는 신조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예를 들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벨직 신앙고백서,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조 등이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세례를 줄 때나 직분자를 세울 때 아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믿고 고백하느냐고 질문을 꼭 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은 ‘이단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고백을 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강압적으로 그런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해서 그런 고백을 하지 말아야 할까?

최근에 한국교회가 월경 잉태설 문제로 시끄럽다. 어떤 사람들은 월경 잉태설을 ‘마리아가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라는 것이라 정의 하고, 그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이며, 기독교의 근간을 헤치는 것으로 이단적 사상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주장을 문헌을 통해 맨 처음 한 단체는 합동 측 서북노회로 보이며, 개인으로는 그 노회에 소속되어 있던 구생수 목사로 보인다. 그래서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연구가라 할 수 있는 최삼경 목사에 대해 총회에  “최삼경 목사 이단성 여부 조사청원서”를 냈으며, 구생수 목사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했는가. 월경으로 잉태했는가.」라는 책과 「실상은 사단의 회라」라는 책을 통하여 성령 잉태를 주장한 박윤식 목사가 월경 잉태를 주장한 최삼경 목사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고 하면서 통합 측과 한기총을 ‘실상은 사단의 회라’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였고, 그 후 통합 측 북노회, 이정환, 예영수, 이광호, 황규학, 원성현, 이형기 교수 등도 같이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이 논쟁은 본래 최삼경 목사가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박윤식 목사를 영입하자 “박윤식씨 이단 사이비 핵심 이단 옹호자에게 공청회를 제안한다”라는 제목으로 최삼경 목사가 그의 이단성을 2005년 6월 30일자 교회와신앙과 현대종교 8월호에 기고함으로 시작되었고, 거기에 대해 반발한 서북노회가 총회에 청원서를 냈으며, 합동 측 교수들은 “최삼경 목사가 “월경 없이 태어나면 인성이 부인 된다”고 말한 것은 정확하지 못한 말이요 불필요한 사색이지만 인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말인 동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므로 최 목사의 진술은 이단성이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라고 하면서 이단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합동 측 교회들은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교회가 들고 일어났으며, 총신대 신대원 학생들은 조기를 달고 수업하였고, 서북노회를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헌의도 빗발쳤다. 그래서 결국 2006년도 9월 총회에서는 서북노회 노회장인 박충규 목사가 공개사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쟁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서북노회가 공개사과 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 논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 논쟁은 계속되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월경 잉태설’ 혹은 ‘난자 잉태설’이란 이름으로 계속 되었으며, 한기총에서도 최삼경 목사를 공격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장을 하면서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심지어 돌고 돌아 합동 측에서조차 불과 5~6년 전의 결의와는 정반대로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 이 논쟁의 원인은 무엇이고, 주된 쟁점은 무엇이며, 그리고 누가 과연 옳은 것일까?


1. 문장 조작

최삼경 목사가 월경 잉태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 심각한 문장 조작이다. 그는 박윤식 목사가 사람을 월경으로 낳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두 종류로 나누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월경으로 낳은 자이지만 성경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 사람 있다고 하며, 그 사람들이 이삭과 세례요한과 예수님이라고 하자 그것을 문제 삼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 했었다.

월경이란 인간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월경이 있다는 말은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임신을 하면 월경이 없어지는데 그 피가 아이에게 가는 것이다. 그 피로 아이를 기르는 것이다. 이들에게 혹 눈에 보이는 월경이 없었다고 하여도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결국 이삭과 요한은 사라나 엘리사벳의 피를 받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박씨의 성적 모티브가 없이는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역시 통일교 출신의 변찬린씨의 영향 때문에 나온 말이다.

예수님도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이 기독론적으로 맞는가? 이 말도 아주 이단적인 말이다. 예수님이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 속에는 예수님의 인성이 부정되고 만다. 우선 마리아는 요셉의 정액에 의하여 임신하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이 주장하는 사상이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그렇다. 그러나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마리아의 육체를 빌리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과도 같이 된다. 굳이 마리아의 몸에 들어가 10달이나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월경이 없었어야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한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처럼 마리아의 몸을 빌리지 않고 그냥 오셨어야 한다.

앞의 이삭과 요한 두 사람은 어머니의 경도가 끊어졌을 때(엘리사벳에게는 그런 말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임신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마리아의 경우는 다르다. 마리아가 월경이 없었다는 말은 마리아의 피 없이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자랐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인성이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고도 남는다.

최삼경 목사는 박윤식 목사가 사람들을 ‘월경으로 낳은 자’와 그렇지 않은자로 나누면서 예수님을 ‘월경 없이 낳은 자’라고 하자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이용하여 마리아가 예수님을 월경 없이 낳았다면, 즉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피와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라고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삼경 목사는 그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문장을 조작하여 최삼경 목사를 월경 잉태설을 주장하는 자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공격은 필자도 당하였다. 필자는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 최삼경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며 11가지 항목으로 조목조목 지적히면서 총회에 올린 글을 보고 오히려 거기에 이단성이 있다며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인 이정환 목사는 “박윤식의 이단정죄는 사실이 왜곡돼 최삼경, 자신의 월경잉태론 벗고자 박윤식옹호론자로 이단정죄요구”라는 제목으로 글을 이단 옹호언론으로 규정된 에클레시안(로엔처치)에 올리면서 필자에 대해서도 신성과 인성이란 말을 다 빼버리고 심각한 문장 왜곡을 통하여 “예수는 성령이 마리아의 난자를 이용해서 낳은 피조물”이라 했다고 하면서 통합 측의 총회에 이단성 조사 헌의를 했다고까지 하였다.


2. 혈통 유전설과 예수님의 인성

이 논쟁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신성모독과 심각한 기독론적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쟁점은 통일교식 혈통 유전설과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문장조작을 통하여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마리아의 피를 받았다는 것은 죄로 오염된 인간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분을 구속주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하며 심각한 이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피 속에 죄가 있고 피를 통해 죄가 유전된다는 통일교식 혈통 유전설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변질시켜 신성모독이라고 한 것이다.

성육신은 삼위일체 중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당신의 인격으로 하나님 되심의 중단됨이 없이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과 상관없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신· 인으로 탄생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류의 일원이 되셨으며, 신성과 인성을 지니셔서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과 동일본질이셔서 완전한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기도 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차이가 있다면 그분은 다만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신인 양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거나 두분(두 인격)이라거나 신성이 변하여 인성이 되거나 인성이 변하여 신성으로 화하지도 않고, 두 성품이 합쳐져서 제 3의 성품이 되지도 않는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성을 입으셨다 하더라도 성자의 인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다.

기독론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네 가지 이단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가 있고, 또 하나는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님의 영혼의 자리에는 로고스인 하나님이 있고 껍데기만 사람이라고 함)가 있으며, 또 하나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이중인격이 되게 하는 네스토리우스 주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제 3의 성품이 되었다고 하는 유티케스주의가 있다.

그런데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은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거나 천적실질을 주장하고, 예수님의 두 성품 중 신성만 있는 것처럼 그분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하며, 죄가 마치 물질이나 되는 것처럼 죄가 피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에 대해 신성모독이라 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라 하며, 죄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용납할 수가 없다. 죄를 만약 피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물질이라 한다면 우리는 코피만 흘려도 죄가 없어지고, 수혈만 받아도 죄가 많아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것이겠는가?


3. 이정환 목사의 문제점

이정환 목사가 소속되어 있는 통합 측 북노회에서는 합동 측 서북노회와 거의 같은 논리로 최삼경 목사의 이단성을 조사해달라고 질의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통합 측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최종 보고서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이단대책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내 놓았다.


4. 최삼경목사의 글에 대한 신학적 판단

a.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최삼경목사가 자극적이고 불경스럽게 보이는 “월경”이란 단어를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은 박윤식 이단 집단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다. 물론 최삼경 목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한 인성을 긍정하면서 그분의 신성 또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월경으로 태어났느냐’는 공격은 최삼경 목사 이전에 칼빈도 받았다. 당시 재세례파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칼빈은 이와 같은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칼빈은 당연히 재세례파의 이러한 공격을 논박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기독교 강요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들 무리 중 몇몇은 부끄러움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우리가 그리스도는 처녀의 월경의 씨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도리어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의 피와 연결되지 않았는지 반문할 것이다 - 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칼빈, 『기독교강요』, 2. 13.3)

Some of their tribe, however, casting shame aside, too wantonly ask whether we mean that Christ was engendered of the virgin's menstrual seed. In return I shall ask them whether he did not unite with his mother's blood - which they will have to admit.(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 13. 3)

b.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피와 살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당시 재세례파의 대표자들인 멘노 시문스(Mennon Simmons), 덕 필립스(Dirk Philips) 등이 주장한 사상이었다. 이에 대해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진영에서는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와 실체적인 연결(substantial unity)을 갖는다는 주장으로 이 견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 후 우리 교단의 전통인 개혁파 진영에서 만든 몇몇 신조에서도 칼빈의 이러한 사상은 확인되고 있다. 이 부분에 해당되는 신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벨직 신앙 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년)

18항: 성육신(Article 18: Incarnation: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살을 취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재세례파 이단들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자녀들의 살과 피를 공유하며, 육체에 따른 다윗의 허리의 열매이며, 육체를 따라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의 열매이며,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다윗의 씨요, 이새의 뿌리의 가지이며, 유다지파에서 나셨고, 육체를 따라 유대인들에서 나셨으며, 아브라함의 씨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다름이 없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Therefore we confess, against the heresy of the Anabaptists who deny that Christ assumed human flesh from his mother, that he "shared the very flesh and blood of children"; that he is "fruit of the loins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born of the seed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fruit of the womb of the virgin Mary"; "born of a woman"; "the seed of David"; "a shoot from the root of Jesse"; "the offspring of Judah," having descended from the Jews according to the flesh; "from the seed of Abraham"-- for he "assumed Abraham's seed" and was "made like his brothers except for sin."(http://www.reformed.org/documents)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년)

질문 35,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뜻은 무엇입니까?*What is the meaning of: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대답: 그것은 현재나 장래나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으며, 따라서 다윗의 참된 씨가 되었으며, 죄가 없으신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That the eternal Son of God, who is and remains true and eternal God, took upon himself our true manhood from the flesh and blood of the Virgin Mary through the action of the Holy Spirit, so that he might also be the true seed of David, like his fellow men in all things, except for sin.(The Constitution: Part I, The Book of Confessions, P.C.U.S.A))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년)

18장 2항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참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신 분이시다. 때가 찼을 때 삶의 본질적인 속성과 공통된 연약함을 가진 사람의 본성을 입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 안에서 그녀의 본질을 취하셔서 잉태되셨다. 그리하여 완전하면서도 완벽한 그리고 전적으로 구분된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에 연합되셨는데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이 없으시다. 이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단 하나의 중보자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The Son of God the second Person in the Trinity, being very and eternal God, of one substance, and equal with the Father, did, when the fullness of time was come, take upon him man's nature, with all the essential properties and common infirmities thereof, yet without sin;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of her substance. So that two whole, perfect, and distinct natures, the Godhead and the manhood, were inseparably joined together in one person, without conversion, composition, or confusion. Which person is very God and very man, yet one Christ,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an.(The Constitution: Part I, The Book of Confessions, P.C.U.S.A))

본 교단의 헌법의 요리문답 (2007년)

문 22.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참 육신과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성력의 능력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그에게서 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c.

따라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셨음에도 어떻게 죄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장로교회의 전통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본 교단은 예수님이 사람의 살과 피를 취하여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성을 가지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며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정환 목사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대위 연구보고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최목사의 월경잉태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피와 살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도하고 이같은 비판을 이단자들의 주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마리아를 통해서 성육신하심과 실체적 인성을 취하신 것을 부정한 사실이 없다. 그럼에도 해 연구보고서는 월경잉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몰아가는 최삼경 목사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9)

이정환 목사는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받지 않았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당장 자신도 「최삼경 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필자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최삼경 목사의 월경잉태 주장의 실체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릇된 주장을 바로 잡고자 함과, 동시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월경과 무관하게 성령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피를 단 한 방울 받지 않으셨다”는 내용으로 신문에 기고하자 최삼경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며 연구, 조사하여 줄 것을 제 95회 총회에 헌의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필자의 주장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는 판단하에 이 글을 써서 알리는 또 한 가지 이유이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10)라고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정환 목사는 자신이 예수님은 마리아의 피를 단 한 방울도 받지 않았다고 해 놓았으면서도 자신을 포함하여 최삼경 목사를 공격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태아의 성품은 산모의 피를 받아 먹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전인적인 유전형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부모로부터 (생식세포를 통해) 물려받은 유전자와 임산부의 행동양식과 그가 처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아기의 신체적 특성과 성품이 형성되는 것이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25)

이정환 목사는 최삼경 목사와 필자를 난자 잉태설이라 공격한다. 난자란 피조물인 마리아의 것이기 때문에 그 난자로 예수님의 인성이 형성되어졌다면 그것은 그분을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은 신· 인 양성을 지닌 예수님을 신성의 잣대로만 가지고 그분을 피조물이라고 했다는 그릇된 주장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공격해놓고는 정작 그 또한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생식세포, 즉 그의 난자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생식세포에 대해 “생식을 통해 유전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세포”라고 요약한 다음 “다세포생물이 유전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세포이다. 생물의 종류에 따라서 형태나 생성방법에 매우 다양한 차이가 있으며 특히 무성생식에서는 포자가 생식세포다. 유성생식에서 생식세포는 배우자가 되며 이는 일반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에 대해 놀아나는 한국교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청교도 설교에 나타나는 전도의 기본은 왕성한 성경적 유신론이었다.

철두철미한 신론이었다. 현대 전도의 경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다.

그러나 청교도 전도자들의 경우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이었다.

창조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계획하신 목적들을 이루어 가시는 일들이 펼쳐지는 결과였다.

 

의롭다 하시고 화목을 이루시며 죄인들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는 절대로 속죄, 화목, 죄 용서, 칭의 등의 개념들이

성경적 의미를 지닐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셉 얼라인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 하나가 전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죄인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전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진리를 심으사

죄인으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공의, 그의 신실하심,

그의 순결하심이 모두 그 죄인을 대적한다고 한다.

 

토마스 라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주제가 너무나도 뚜렷한 특징으로 드러난다.

 

존 플라벨,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쇼요리문답 3)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의 책임을 함께 묶어 놓는 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메시지였다.

청교도 목사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만큼

죄에 대하여 반응한다고 보았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그의 거룩하심보다

죄인들에게 더 끔찍스러운 것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토마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첫째 방책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의 앞에 서 있고, 예배로 여러분의 영혼이 그와 교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초라하고 낮고 가볍고 경박할 때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해도 마귀가 온통 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으로,

모든 영광스러운 완전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위엄과 순결과 영광 가운데 계시사

악을 조금이라도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마음에 일어나는 헛된 생각들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그렇게 능력적으로 선포한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인간의 책임의 기초로 제시하였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다섯 째 방책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더욱 가득 차도록, 모든 영적 실체들과 하늘의 것들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힘쓰는 것이다. 잔이 포도주로 채워질수록 그 잔에 물을 담을 여유가

그만큼 적어지는 법이다. 여러분, 하나님으로 더욱 가득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손을 정말로 권능의 손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잠잠히 있게 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5:6).

하나님의 손을 약한 손으로, 가냘픈 손으로, 낮은 손으로, 천한 손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손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적 유신론에 대한 거듭되는 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들의 설교의

대명사가 되었다. 토마스 브룩스,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의 손안에 있는 황금 홀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나, 그의 역사하심으로나, 그의 긍휼하심으로나, 그의 심판으로나

그것을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끄셔서 고개 숙여 절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 따라서 구원 과정에 대한 시각도 결정되었다.

청교도들은 그 어떠한 죄인도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구원받은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죄인에게 주셨기 때문에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설교하였다.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위엄 있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후커, “죄인이 회심하도록 역사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죄인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효력 있는 부르심혹은 유효적 소명이라고

지칭하였다.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렇게 효력 있게 만드셨다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난다는

성경적인 사상을 열열히 증거하였다.

 

토마스 굿윈,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르심이 아주 갑작스런 선택의 회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택하심이 사람을 완전히 휘어잡고, 강력한 힘으로

그 사람을 끌어내며, 그 사람에게 신적인 본성을 각인시키고, 부패한 본성과

이기적인 사랑을 뿌리째 뽑아 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를 심어 놓으며,

첫날부터 그 사람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하며, 바울 이후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런 예들이 없지 않다.

오직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신적인 능력으로만

그런 갑작스런 놀라운 변화가 사람의 영혼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 자신의 기쁘심에 따라

처리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정의하였다. 에드워즈는 그의 교회를

휩쓸었던 부흥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해 보건대, 죄인을 구원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교리를 강조하고, 기도 응답의 문제와 자연인의

고통들이 계속되는 문제 등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하신 자유를 강조하는 설교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설교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청교도들의 전도의 메시지의 기본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있었다.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였고, 사람의 마음을 찔렀다.

그러나 현대의 전도는 이러한 강조점과 비교할 때에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최근 십 수년 동안 <사영리>라는 전도 책자가 널리 사용되어 오고 있다.

국제 대학생 선교회가 제작하여 배포하는 이 책자가 전도에 관한 현대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영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여기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무언가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이 받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로 나타난다. 현대의 복음의 경우 그 핵심적 주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국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도 하나님의 위엄과 그의 성품, 그리고 그의 본성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요구보다는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문제가 중심이

되어 있다. 죄가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다루셔야

했다는 식의 그의 진술에 대해서 청교도 목회자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차녹,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전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은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의 본성의 이러한 탁월하심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시며

또한 악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다.”

 

구속의 계획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깊으신 뜻의 경륜 가운데서

행하기로 정하신 바의 결과였지, 결코 죄악된 인간에게 혜택을 주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시도록 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으로 보았다.

차녹, “피조 세계가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지으신 바 되었듯이,

그의 경영하시는 모든 역사들도 그와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강력한 성경적 신론을 전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피조물이 서로 함께 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그 불의를 벗어버리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순결하심을 벗어버리시든가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음의 원 주제였던 것이다.

 

- 브루스 비클, 복음과 청교도설교, pp 127-141에서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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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 김재성 -
 (합동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머리말

 정통교리를 떠나서 제 나름대로의 독선에 빠진 나머지 급기야 불행한 최후를 장식하는 이단들을 보면 제 궤도를 이탈하여 사고를 낸 기차를 연상하게 된다. 어리석은 지도자들로 인하여 무지한 영혼들이 당해야만 하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인간은 과연 초월의 세계,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나라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있는가? 만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여기저기서 분출되는 다양한 사상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으며, 진정 무엇이 진리인가를 누가 보장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적은 범위에서나마 깨달을 수 있음을 허용하셨다. 우리가 성경이라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참된 지식과 지혜를 붙잡을 수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 글을 통해서 '이단'이란 '거짓교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사도적 교회가 믿어온 바를 버리고 참된 신앙을 포기한 무리들이 지닌 비성경적 신념을 의미한다. 미국 트리니티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인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 박사의 명저인「이단」(Heresis)라는 책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던 초대교회 시대의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단의 아버지, 시몬 마구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aeus)는 「이단들에 반대함」(Against Heresis)이라는 글에서 시몬 마구스(Simon Magus)를 향해 '모든 이단들의 아버지'라고 공격하였다. 이 사람이 사도행전 8장 9절에서 24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한가는 확실치 않다.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행 8:9)라고 하였다.
 이레니우스가 공박한 시몬 마구스도 사마리아에서 크게 위세를 떨쳐서 주후 150년경에는 큰 집단이 되었다.
 시몬 마구스는 자칭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면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거부하였고, 내재하는 영의 성육신을 강조하였다.
 구원을 위해서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천지의 근원을 고요함에서 찾고자 하였다. 마치 신비적인 안개 속을 헤매면서 마음으로 그 속에 있는 진리의 빛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시몬을 훗날 양태론(Modalism)으로 불려지게 될 신론을 갖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형태를 입은 구세주가 아니요, 높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와(시몬 자신) 모두가 동격이다.

 초창기의 이단들

 말시온(Marcion)과 영지주의자들(Gnosticism)
 헬레니즘과 유대교를 혼합하여 형성된 대표적인 이단사상으로 주후 150년경까지 큰 추종세력을 형성하였던 대표적인 이단사상이다. 주후 144년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창조교리를 변조시킨 초대교회 시절의 종교 철학운동이었다. '지식'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실재에 대해서 이원론으로 치달았다. 영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선과 악,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 하나님과 예수님, 율법과 복음, 심판과 칭의 등의 대립과 대결 속에서 만물이 형성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말시온은 크레도(Credo)라는 시리아의 영지주의자에게서 이런 이원론을 배웠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영적인 권능' 정도로 이해하였고, 물질 세계의 근원자가 될 수 없다고 격하시켰다.
 성경과는 정반대로 물질 세계란 전혀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펴서 창조론을 거부하였다. 물론 성경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 자신과는 완전하게 별도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영원히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구분을 영지주의자들은 부인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을 의미있는 곳으로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육체를 죄악시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신앙생활의 이상을 발견하였다.
 말시온의 신론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높이 존경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말시온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우주란 쇠사슬과 같은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데미우르게(Demiurge)라는 것이다. 헬라의 신화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신들은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듯이, 일종의 그런 신이라고 본 것이다.
 이 세상이 원죄로 인해 타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했다.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야훼 Yahweh)은 이때부터 화를 잘 내고, 용서할 줄 모르고, 엄격한 정의만을 고집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헬라의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곡해한 것이다.
 말시온은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창조자는 참된 하나님으로부터도 소외당했고 영적인 사람들로부터도 소외당했으며 이로 인해서 실수도 곧 잘하고, 금방 후회도 잘 하는 거친 신이 되고 말았다고 설명하였다. 이 신이 인간의 불행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이라고 보았다.
 말시온은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진노하니까,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참된 신'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말시온의 극단적인 이원론은 여기서 잘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셨고, 신구약은 서로 내적인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진리를 오해하였다. 예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율법을 없애고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시온은 자신의 생애에 금욕주의적으로 살아가면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말시온의 눈에는 메시야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웠던 신약시대의 교회들도 세계 역사의 일부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의 창시자인 다비(J..N.Darby, 1800~1882)가 약 1천 8백년 뒤에 이 사상을 받아들여서 교회는 역사의 일부가 아니요, 괄호 속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말시온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자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 말시온은 성자를 '구원의 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절대로 죽거나 고난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성자는 성부의 다른 형태로 이해하여 양태론에 빠지고 말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일부가 여기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말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출발점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에서 나왔다.  하나님을 구약의 야훼의 신과 '신약의 알려지지 않는 신'이 예수를 통해 나타났다는 대립으로 곡해한 것이다.

 몬타누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동일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Antonius Pius, 138~161 재위)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새 예루살렘이 곧 임박했으므로 결혼은 금하고 말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몬타누스는 자신에 대해 맹종을 요구하면서, "나는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시켰다.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새로운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곧 말세가 온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재림설을 주장하다 실패한 이장림 등의 재림파들이 쓰는 용어가 이미 이때에 있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개하면서, 추종자들은 기독교의 영적 엘리트로 확신을 불어넣었다. 막시밀라와 브리스가라는 두 여제자를 두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였다. 막시밀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몬타누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동네에 새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세속적인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내 뒤에는 예언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오직 세상의 종말이 있을 뿐이다"고 극단적인 종말론은 가르쳤던 이들의 초기사역은 재림에 대한 사도들의 교훈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잘 구별이 안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종결과 함께 몬타누스가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면서 이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몬타니스트들은 금욕주의적 생활양식과 순교에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인하여 정통교리가 체계화되지 못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정통교회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위세를 발휘하였다. 심지어 터툴리안 같은 교부마저도 관련을 가질만큼 큰 해독을 끼쳤다.

 가현설(Docetism)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현설을 들고 나와서 육체적, 실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적인 예수만이 있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사상은 시몬 마구스가 선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없이 그냥 외형상으로 존재하였으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마술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가현설은 당시 헬레니즘의 합리적 사고와 부합하여 예수님의 탄생, 고난, 부활 등의 객관적 역사성을 모두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트라얀 황제시대(Trajan, 98~117 재위)에 순교한 안디옥의 아그나시우스가 가현설의 오류를 간파하여 "예수님은 형상만 있던 분이 아니요, 참 사람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성부와 성자를 동일본질의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태론(Modalism)
 일반성도들에게 양태론이라는 용어가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는 바 많은 부분이 양태론적 삼위일체임을 발견하게 된다. 일부 교역자들이나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설명이 이와 유사함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양태론이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각기 다른 '형태' 혹은 '양식'(Modes)으로 계시하셨다는 학설이다. 창조시에는 성부로, 구원시에는 성자로, 승천 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흔히 구약은 성부시대요, 신약의 초반은 성자시대요, 지금은 성령시대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를 '단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부른다.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받아들이면서도 창조부터 영원까지 성부와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한 하나님 안에서 세 인격들이 상호 동등한 권위와 경륜을 하고 계심을 인정치 않는다.
 이레니우스는 그의 대전집(Magnum Opus)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체계화하여 초대교회시대의 이단사상을 막는 데 공헌하였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다. 따라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과 말시온에 대항하여, 삼위일체의 구별된 부분에 관해 언급을 하여 줌으로써, 훗날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잘못하면 3위(位) 3신(神)이라는 3신론(新論)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창세전의 일이나 성육신 등에 대해서 지나친 의구심이나 상상력을 갖지 말라고 이레니우스는 충고하였다.

 삼위일체론의 오해 -아리안주의
 325년에 채택된 니케아신경(the Nicene Creel)과 451년의 칼케돈 신경(the Chalcedonian Creel)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체계화한 위대한 문서들이다. 니케아신경은 318명의 교계지도자들이 모여서 초대교회의 신론을 체계화한 것으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종의 양태론을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로서, 피조된 존재이기에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일어나서 성경에 명백히 언급된 성자와 성부의 동일 권위와 신성을 공박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진일보하게 되어졌다. 물론 니케아회의 때까지만 해도 성령에 관한 논쟁이 없었다.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삼위일체의 한 분 하나님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의 논쟁이 있었다.
 무엇이 아리우스로 하여금 성자에 대한 이단적 사상을 갖게끔 하였는가? 아리우스는 지적 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철학적 진술들을 펴고자 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마치 루돌프 불트만이나 한스큉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이 자꾸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철학적 사고에 깊이 영향을 받아 버린 결과와 같다.

 아리우스는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나 성령이나 다른 모든 여타의 존재들은 동등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다(begotten)고 했으니, 이는 달리 표현하면 창조된 것이다(Created)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피조물(creating)의 위치에 있으므로 경배를 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금욕적 생활로 자신이 거주하던 알렉산드리아서 존경을 받았던 까닭에 자연적으로 수명이 다하여 336년에 사망하였다. 핍박이나 물리적 사형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는 거의 모든 명예나 지위를 회복할 정도에 이르렀다.
 아리우스와 같은 사상은 훗날 미카엘 세르베투스(Servetus, 1511~1533)가 다시 들고 나와서 요한, 칼빈을 괴롭혔고, 끝내 회개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시 의회의 결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또한 소시니안파(Socinians)로 불리우는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 삼위일체가 거부되었고, 성자의 신성이 도전을 받았다. 16세기에 인간의 자기 능력 속에서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남아있다는 주장을 하였다니, 종교개혁자들이 명성을 날리던 시대에도 역시 이단들의 활동은 집요하였다. 
 19세기 초 미국의 동북부, 뉴일글랜드 지방에서 역시 단일신교(Unitarians)라는 사상이 유포되어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부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 이단들의 하나님 이해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중세 시대의 이단들은 간략하게 넘어가고자 한다. 중세시대는 알셀름(St. Anselm)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스콜라 신학이 풍미하였다. 여전히 지성주의적 신학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체제 속에서 신을 이해하고 증명코자 시도하였다. 안셀름과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유명하지만 논리적 사유의 부산물일 뿐이다.
 피터 아벨라르드(Peter Abelard, 1079~1142)는 안셀름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여 다른 종류의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아벨라르드도 역시 지성적인 사람들만이 종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교리와 정통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벨라르드의 실수는 삼위일체의 신비로움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다. 그는 하나님을 3신(神)으로 이해하여 이단으로 빠지고 말았다.

 여호와의 증인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반드시 집집마다 방문하고 그 사역결과를 본부에 보고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열성적으로 포교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매월 정해진 양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은 목회자로 준비하는 동안이나, 전담 사역자로 일할 경우에 한 달에 140시간을 전도활동에 쏟아부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 4천명의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정통교회에서는 이 숫자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신학 중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라는 옷을 입은 영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 있다. 마치 가현설과 흡사하다.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 러셀(Russel, 1852~1916)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들의 모습과 같은 일종의 현상화로 나타난 인간적 신체일 뿐이요(창18장), 예수님은 성육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후계자인 러터포드(Rutherford) 때에 급성장하기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제 2의 신으로 전락시키고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단일신교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이며, 영원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이나 성육신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완전히 부인한다. 예수는 제한적 의미에서 신이라고 보고 있으며, 성령의 인격성과 하나님으로서의 지위는 부인해 버린다. 성령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간주한다. 아리우스가 4세기에 주장한 것과 유사하다.

  몰몬교(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몰몬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고 있다. 대신에 요셉스미드(Joseph Smith 1805~1844)라는 창시자와 같은 성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몰몬교에서는 성경의 하나님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4장 28절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여 듣지도 못하여 먹지도 못하여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육체적인 몸을 지진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구별되어서 인간들을 행동과 특징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본문의 신명기 4장 15절에서 18절은 인용치 않는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신명기의 가르침이나 성경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만질 수 없는 초월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몰몬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는 완전히 반대에 서 있다. 
 몰몬교에서의 하나님은 '최고의 경지에 올라선 인간'이다. "인간처럼 하나님도 한때는 같은 존재였고,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인간도 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최상의 회의에서 인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는 예수 그리스도, 에녹, 엘리야, 아브라함, 바울, 베드로, 요셉 스미드(몰몬교 창시자), 브링햄 영(몰몬교의 조직을 체계화함)이 참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다신교의 색채로 점철된 하나님의 이해가 어떻게 나왔는지 성경을 읽는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몰몬교에서는 출애굽기 20장 1절에서 6절, 이사야 40장 12절에서 31절, 45장 18절 등이 강조하는 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지배하시는 주권자시오,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강조를 외면하는 무리들이다.
 몰몬교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분이다.
 
 결론

 이단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거나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비록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시는 부분이 어렵고 난해할지라도 우리들에게 알려 주신 바 그 자체는 명백하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 성부는 성자를 알고, 성자만이 성부를 아신다. 요한복음10장 33절에서 성자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참람하다고 공격을 받았다.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마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정하고 있다(마4:1-11).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되심은 성경이 전해주는 바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다.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의 연합을 의미한다. 한 분 하나님은 세 인격의 상호관계 속에 일하신다(약 2:19).
 삼위일체 교리를 불가해한 것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은, 3차원의 세계를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삼위일체(Trinity)교리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유추를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은 길이와 넓이와 높이를 필요로 한다. 세 가지가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며 서로 없어서는 3차원이라는 공간이 세워지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이중에서 개별적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체 세 가지가 다 필요하다.

 끝으로 두 가지만 첨언하여 둔다. 
 첫째로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하여 세우신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심어주시기 위해서 친히 계시하신 것이며, 삼위를 통해서 구원을 베푸신 사역이 총괄적으로 정리된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대치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구원과 신앙의 참된 기초를 추구하려면 삼위일체는 필수적인 신앙의 내용이 되고 만다. 이단들은 이를 버리고 인간적인 사색과 이성으로 맞추려다가 멸망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NIV.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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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성충정| 원글보기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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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롬 1:19). 그래서 저마다의 하나님을 그려낸다. 그 결과 시대나 지역이나 인종에 따라 온갖 모습의 하나님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효과적인 싸움은 적을 알고 나를 알 때라야 가능한 것처럼, 효과적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바로 알 때라야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그 모습을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독교적인 신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만을 제한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여호와"라고 답하시면서,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록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고 하셨다. 여호와는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여호와는 히브리어의 발음에 따라 '야훼'라고 하기도 한다.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이다.

우리 주변에는 오랜 세월을 지내고 하늘에 올라간 짐승이나 공덕을 쌓은 어떤 사람이 변해서 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누가 있게 해서 존재하게 된 분이나 누군가가 올라가서 되어지신 분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고 계시는 자존자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일정한 원인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이 되신다. 그러므로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으로도 묘사되어질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출 20:4). 심지어는 십자가 형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믿음의 대상이 되어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 존재에서뿐만 아니라 계획이나 활동에 있어서도 아무런 원인을 갖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혼자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만사를 자유롭게 계획하신다. 또 아무의 구애도 받지 않고 그 계획을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은 천지의 변화나 인간의 죄악된 행위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천지가 없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으시고 그의 말씀 역시 변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시거나(삼상 15:11, 35) 뜻을 돌이키신 것(삿 2:18)처럼 보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람 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머물러 있는 태양을 지구가 돌고 있음에도,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상하시고"(시 102:27), "변역하지 아니하시고"(말 3:6), "식언치 않으시고, 후회가 없으시며"(민 23:19),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약 1:17) 분이시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과 함께 쓰여지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혼자 동떨어져 계시지 않고, 사람들을 찾아오시고, 사람들에게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같은 조상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지금도 기억하여 반드시 성취하실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어주실 정도로 은혜로운 분이시다. 그리고 천지는 없어져도 그의 약속을 기필코 완성하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2. 인격적인 하나님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심과, 늘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분이심과, 시간이나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영이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자거나 죽는 법이 없이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저기 멀리 하늘이나 예배당에만 계시는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바알처럼 졸거나 주무시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분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스라엘의 부족신 또는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의 하나님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의 내 하나님으로 나와 더불어 일하시기를 원하시는 임마누엘이시다. 우리는 엘리사처럼 "엘리야의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이까"(왕하 2:14)라고 외치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지금 우리 앞에 가로 놓인 강물을 가를 수 있어야 한다.

또 영은 인격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격적이란 나무나 돌 같지 아니하고 지성적, 감정적, 의지적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성을 가지신 하나님은 천지와 사람들에 관한 모든 것들을 겉모양만 아니라 그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 근원부터 장래에 대한 것까지를 다 헤아리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호리라는 숨겨진 것이 없이 다 밝히 드러난다. 감정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으로 감싸고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다.

불의와 죄악에 대해서는 맹렬한 노를 발하신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비뚤어진 사랑에 대해서는 질투를 하기까지 하신다(출 34:14).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뜻을 정하고 세상 끝날까지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것을 분명하게 이루어 가신다(빌 1:6)고 했다.

인격적 존재는 다른 인격적 존재와 더불어서 교통을 하며 지낸다.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서로 인격적인 교통을 나누신다. 피차 의논을 하시기도 하고(창 1:26), 보고 들으시기도 하고(요 3:32), 보내고 보냄을 받으시기도 한다(요 12:14, 16:17)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사람들과 더불어서도 교통을 나누신다. 사람이 날이 서늘할 때 아담을 찾으시던 하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통,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와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교통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그 대상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고려할 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방적인 묵상이나, 일방적인 요구나, 광란적인 몸짓이나, 번지르한 단어의 나열보다도 중심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대화형이 더 바람직할 수 있을 것이다.

3. 선하신 하나님

사람은 누구나 선을 칭찬하고 악을 비난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판단기준이 애매하거나 서로 달라서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주님께서는 친히 한 청년에게 이르시기를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따라서 하나님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아닌 것은 선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최근 종교다원주의의 바람을 타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선을 인정하려 하거나,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은 크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음 몇 가지로 그 의미를 적용시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섭리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는 때에서만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때를 따라 햇빛과 비와 바람을 주심으로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공중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신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특별한 사랑을 더 쏟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가능하게 하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후사로 삼아 주신다(롬 8:15).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공의에서도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 율법으로 보여 주신다. 그리고 피조믈들을 그 율법에 따라서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어 조금도 변벽됨이 없게 하신다. 또 상과 벌을 그 정도에 따라서 정확하게 베푸신다. 우리에게는 얼핏 보아 당장에 보기에 공평치 못한 것처럼 여겨져서 원망과 불평과 시비를 벌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리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 공평함은 드러나진다. 그러므로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조급하게 속단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요셉은 부당하게 팔려갔지만 그것은 그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미리 보내신 조치이었다(창 45:5). 바울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했지만, 그것은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한 효과적인 인도이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범죄한 자들을 향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을 인하여 당장에 지옥불에 떨어져야 할 죄인들임에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회개의 기회는 오직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천사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눈이 범죄할 때 눈을 빼고, 손이 범죄할 때 손을 찍어버린다면 지금 우리의 눈과 손은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께로 향하는 결단을 가져야 한다.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4. 삼위일체 하나님

1) 삼위일체의 중요성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한 분이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인격으로 계심을 말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회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사도신경의 대부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삼위일체가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또 성경전체의 중심 주제인 구속진리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부정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성령이 하나님 되심도 부정하여, 우리 속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구속적용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2) 삼위일체의 증거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종합해 보면 삼위일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성경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성자를 낳으신 성부를 하나님이라고 하였다(고전 8:6) 태초부터 성부와 함께 계시던 성자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요 1:1).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속였던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행 5:3, 4). 삼위께서 각각 하신 사역을 보아도 하나님으로서의 전지전능하심과 편재하심 등의 속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명사를 사용하여 "우리"(창 1:26, 3:22)라고 하셨다. 세례를 베풀 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였다. 왜냐하면 삼위가 각각 하나님이시고, 그 영광과 권능에서 서로 동등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딤전 6:15)라고 하였고,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신 4:35)고 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말이 삼위일체이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완성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에 의해서 생겨났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맨 처음 삼위로 표현한 분은 주후 2세기 때 교회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데오빌루스이었다. 그 후 220~240년 사이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터틀리아누스가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오해로 인하여 교회에 혼란이 일어나자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전체교회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주후 325년에 니케아라는 도시에서 있었다. 이 회의는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자세한 내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자주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니케아 신경으로 발표가 되었다. 이 회의에서 크게 공헌을 했던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었던 아다나시우스(293~373)이었다.

4) 삼위의 구분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에도 삼위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는 동시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한다. 성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요단강이 그 좋은 예이다.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로 임하시고, 성자께서는 물에서 나오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내려 임하셨다(마 4:16, 17).

삼위 사이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교통이 있고, 그 사역에서 서로 구분이 있다. 성부는 계획을 하시고, 성자는 성취를 하시고, 성령은 적용을 하신다. 예를 들어 성부께서는 죄인의 구원과 그 구체적인 방법을 계획하시고, 성자께서는 그 계획에 따른 율법의 요구를 성육신과 죽음을 통해서 성취하시고, 성령께서는 그 계획의 효력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도록 택하신 자들을 중생시키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이는 마치 한 건물의 경우에 설계자와 건축업자와 입주자의 역할이 서로 구분되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삼위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불려진다.

5)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

사람의 머리로서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교회역사에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로 말미암아 많은 오해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러한 오해를 이단이라고 부르는데, 그 유형은 대체로 성자에 관한 설명여하에 따라서 다음 두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만 계시지 않고 성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시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시다. 그러나 사람의 머리로는 이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이라고만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예수님은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를 주님으로 부르고 찬송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경건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처럼 존경을 받을 수 있을런지는 모르나,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성부 하나님 오직 한 분뿐이라고 하면서 삼위일체를 부인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모사타 출신의 바울이라는 사람이 그 대표이었다. 지금은 유니테리안파와 같은 곳에서 이러한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에"(고전 12:3) 생겨난 이단이다.

정반대의 다른 오해도 있다. 성자의 참 하나님 되심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사람 됨을 부인하는 오해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과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된 육체를 가지실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체가 실제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가 아니었고, 다만 신기루처럼 우리의 육체와 같이 보여졌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터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성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율법을 완성하실 때는 성부로 나타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성자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시고, 구속을 적용하실 때는 성부나 성자로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성령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한 사람의 연극 배우가 각기 다른 세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하는 경우와 같이 생각을 한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내가 교회에 가면 집사이고 집에 가면 가장이고 직장에 가면 과장이지만, 사실 나는 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오해에 해당된다. 초대교회에서는 시벨리우스라는 사람이 그 대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우리들 주변에도 폭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요일 4:2, 3)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오해는 성자를 성부보다, 성령을 성부나 성자보다 못한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기 때문에, 삼위는 동등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열이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을 우열이 있는 하나님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보는 삼신론(三神論)에 이르고 만다. 삼위 하나님은 똑같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영원한 시간을 초월한 것이므로 먼저와 나중이 따로 있지 않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며, 순간이 영원 같고, 영원이 순간 같다(벧후 3:8). 따라서 삼위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삼위일체 앞에 선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갱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얼음속에 박힌 나무가지를 억지로 잡아 빼면 부러지고 만다. 그러나 봄이 오면 그 가지는 저절로 빠진다. 이해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는 주님께서 주의 기이한 것을 밝히 주시기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한다.

 출처: 안개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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