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재림의 때를 과연 아무도 모를까? / 박신 목사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호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재림하시어 이 땅을 완전히 심판하는 시점은 아무도 모릅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당신께서 부활 승천하여 천국보좌에 앉으신 성자 하나님으로서 그 때를 모른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유대 땅에 오시어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 인자 랍비의 상태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재림의 정확한 시기는 삼위 하나님 외에 어떤 인간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영성이 뛰어난 신학자라도 일단 그 날짜를 지정하면 무조건 잘못된 것입니다. 언제쯤이라고 추측을 하거나, “몇 주일 몇 달 몇 년 안에”라고 시간대로 제안해도 틀린 것입니다. 불시에 홀연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비나 도피할 여유라곤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40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도 재림의 때를 모르기에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중에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계속해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기에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아도 언제 심판이 닥칠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러나 방주를 다 짓게 되면 곧바로 심판이 임하리라 짐작은 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동물들이 종류별로 한 쌍씩 방주로 몰려올 때에는 정말로 곧 닥치겠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노아가 처음 방주를 지을 때는 틀림없이 미친 사람이라고 조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들이 자발적으로 방주 안으로 몰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는 반드시 이상하다고 여겼어야 함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노아가 마술을 사용해 동물들을 불러 모은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창7:4) 하나님은 드디어 노아에게 심판의 날을 일주일 전에 통보해주었습니다. 노아는 480 세에 홍수 심판의 예언을 들었습니다.(창6:13) 그 후 120년이 지난 600세에 홍수가 임했습니다. 그 동안 그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며 마지막 7일 간은 정말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을 것입니다. (방주 속에 들어갔다 해도 열린 창이 있었습니다.)

그가 심판의 시기는 정확히 몰라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식양대로 방주를 지어 나갔기에 언제쯤 완성되리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방주가 완성되자 동물들이 몰려왔고 결국에는 7일 후라는 최후통보도 받았습니다. 요컨대 그는 심판의 때를 거의 근사치로 미리 추측할 수 있었고 7일 전에는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다른 말로 노아의 때는 사람들이 심판의 시기를 몰라서 멸망당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노아의 경고를 믿지 않고 코웃음 치며 먹고 마시다가 명확하게 제시된 구원의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렸습니다.

그럼 예수님 재림의 때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노아 같은 선지자를 보내어 구체적인 심판 시기를 미리 경고케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종말의 징조들이 너무나 명료하기에 누구나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죄악이 온 세상에 관영하여 선한 구석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극소수의 하나님의 남은 자들은 세상의 비방과 조롱과 핍박을 받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명료하게 보이는 그 종말의 징조가 무엇일까요? 지진, 해일, 화산폭발, 쓰나미, 이상기후, 공해오염, 테러, 핵전쟁 등일까요? 그런 것은 재난의 시작이자 종말의 징조일 뿐이지 막상 종말은 아닙니다.(마24:8)

노아의 때에 마음 놓고 먹고 마신 자들은 아무리 노아가 회개를 외쳐도 심판은 아예 없다고 여겼습니다. 자기들이 회개할 일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심판 받을 만큼 죄 지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겉으로 드러나는 타락상의 정도나 세기로 판단해선 안 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면 회개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고픈 소망이나 찔림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어떤 짓을 해도 죄가 아닐 때에는 죄에 대한 심판이나 구원은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냥 기독교인들이 종교 장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어낸 “Fiction Horror”물일뿐입니다.

한국에서 드디어 그저께 간통죄가 무효화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아닙니다. 마음 놓고 간통해도 처벌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대법원이 동성애 결혼에 대한 심의를 앞으로 일절 중지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전체 50개 주의 합법화가 이뤄진 셈입니다. 나아가 어제 한 크리스천 신문에 따르면 마리화나를 담배처럼 합법화 하는 주가 서서히 늘어나고 미국 전체가 마약에 취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앞으로 분명한 죄로 남을 것은 아마도 연쇄살인 정도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도 정신이상으로 치부하던지 아예 뇌를 조종해서 그런 범죄 자체가 발생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는 정말로 죄를 죄로 여길 것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은 없으며, 회개도 필요 없고 하나님은 더더욱 동화 속의 할아버지로 전락할 것입니다.

작금 한국과 미국의 뉴스를 접하니까 노아가 120년 후의 홍수에 대비해 방주를 짓기 시작한 단계는 훨씬 지난 것 같습니다. 저에겐 마지막 일주일을 남기고 더 늦기 전에 하루 속히 회개하라고 외쳐대는 소리로만 들립니다. 단순히 목사의 노파심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말입니다. 노아의 때와 비교하여 가만 따져 보니까 예수님 재림의 때를 신자가 전혀 모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저도 이단인가요?

2/27/2015

 

출처: http://whyjesusonly.com/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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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하나님이 욥을 시험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성경의문2)

[질문]


보통 목사님들은 욥기를 얘기할 때 고난을 견디면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신다. 혹은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하게 하신다. 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은 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는 가장 큰 목적* 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욥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욥기서의 후반부에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말씀들을 하시는 중에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40:8)는 말씀을 하셨는데 욥이 스스로 의롭다 하여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려 했는지,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결국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고 변화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박신목사

질문자님의 지적대로 목사님들이 욥기를 단순히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그를 더 성숙시키려 했다고만 해석하고 치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성격의 고난을 통해서 성숙시키는 것인지, 또 그에 대한 욥의 반응과 성숙되어 가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성숙해진 후의 결과는 과연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분석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인생을 살면서 겪어야 할 고난에도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고통의 세기도 다 다릅니다. 또 신자마다 믿음의 수준도 각기 다릅니다. 고난을 통해 믿음을 성숙시킨다는 언급도 구체적인 설명을 요합니다. 고난에서 영적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인지, 또 그 깨달음은 어떤 내용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고난을 참아 내기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자동으로 믿음도 성숙된다는 것인지 등등 따져 보아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책, 욥기

욥기의 가치는 아주 무궁무진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욥기가 포함되어 있기에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에 틀림없다고 더욱 확신합니다. 욥기의 주제가 어떤 것입니까? 아무 이유 없이 도무지 감당치 못할 정도의 엄청난 고난을 졸지에 당한 욥이 그 원인을 알고자 씨름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구체적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나버립니다. 이런 전제를 가져야만 욥기에 대한 피상적 해석과 적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욥기가 언제 기록되었습니까? 성경학자들은 욥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봅니다.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때 벌써 아주 신실한 신자도 아무 이유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했으며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유마저 끝내 모를 수 있다고 진술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의 어떤 종교 경전이 수천 년 전에 이런 기술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욥과 세 친구의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논쟁의 초점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친구들은 죄를 지었으니 환난을 당했다는 것인 반면에 욥은 자기는 그런 정도의 환난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것이 없으니 하나님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그런데 토론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엘리후와 욥에게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도 세 친구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형편은 어떠합니까? 잘 믿으면 복 받고 죄 지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기복주의 신앙이 얼마나 성행합니까? 최근에는 아예 기독교의 주된 흐름이다시피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기복주의가 틀렸다고 욥기에 명시적으로, 그것도 지금부터 4천 년 전에 이미 선포 해놓았는데도 목사님들이 욥의 세 친구 같은 설교와 가르침을 줄기차게 되풀이하고 있으니 대체 어떻게 된 연유입니까?  

이 책의 오묘한 내용은 그 첫 부분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욥이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발단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늘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욥을 두고서 두 번의 내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랍다 못해 신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분노를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 신비로운 까닭은 지상의 모든 일이 천상에 동시에 생중계 되고, 아니 천상의 계획과 조종대로 지상에서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분노가 치미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사단이 서로 장난치듯이 행한 두 번의 내기에 당시로선, 아니 지금도 도저히 찾기 힘든 신실한 믿음의 종이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몰라도 도대체 하나님이 그럴 수가, 그것도 사단과 힘을 합해서,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욥기에서 파내어야 할 신앙상의 과제가 많고 심오하다고 제가 서두에서 말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성숙된다고 믿으면 하나님은 신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채찍만 사용하시는 분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장 먼저 따져야 할 것은 전체 줄거리입니다. 문맥 전체에서 밝히고자 하는 주제와 신학을 알지 못하고는 단편적이고도 문자적인 해석으로 그칩니다. 욥기는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욥의 세 친구의 말에도 부분적으로 옳은 내용이 곳곳에 많이 숨겨져 있으며 또 계속 논쟁만 이어지기에 구체적인 맥을 잡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분에서 누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조차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 할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따지고 보면 신학적으로 틀린 말이며, 수아 사람 발닷이 욥을 조롱하면서 말한 일종의 욕설에 해당됩니다. 그런데도 단순히 그 문자적 의미가 너무 좋아 신자들이 금과옥조처럼 기도나 권면에 사용하고 집집마다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습니다.(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 # 9번 글, “욥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참조 바람)

또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난 후에 믿음이 자란다는 말씀에만 모든 초점을 모읍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니까 고난 중에 신자 스스로 묵상하고 깨닫고 배우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만 흐르면 자신이 정금같이 변화되어 있으리라는 손쉬운, 아니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기대만 키웁니다.  

욥기의 전제

욥기는 천상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욥의 믿음에 대해 내기를 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욥의 믿음을 칭찬하자(1:8) 즉, 도전을 유발하자, 사단은 당장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반발했습니다. 복을 많이 받아 믿음이 좋은 것이지 모든 소유물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경외치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런지 보게 욥의 몸에만 손대지 말고 자녀들과 소유물 송두리째 없애는 환난을 사단이 일으키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1:21,22) 했습니다. 첫 번 내기는 사단이 보기 좋게 하나님께, 사실은 욥에게 완패했습니다. 욥은 자기가 받은 행복 아니 불행의 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순전하게 경외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사단에게 욥을 칭찬해 더 격한 반발을 촉발시켰습니다.(2:3) 또 다시 사단은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큰 질병에 들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2:4)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2:10) 했습니다. 자신이 원인 모를 고질병에 걸려 고통이 극심했어도 하나님께 말로도 불만 내지 원망을 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단의 두 번째 시도 또한 무참한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이만한 믿음의 사람이 고래로 있습니까? 아마 성경 전체에 인간으로는 가장 믿음이 좋은 자일 것입니다. 욥은 아들들이 잔치를 벌인 다음 날에는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한 후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들들이 잔치하며 즐긴 것까지 번제로 성결을 시킬 정도였으니 본인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욥은 어떤 환난에도, 자식들과 소유가 하루아침에 다 사라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한 순간도 편안치 않고 고통이 겹치는 그런 상황에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로선 스스로 노력하여 어떤 고난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 상태에 도달한다는 면에선 따로 더 성숙시킬만한 부분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여 정금 같이 변호시키려는 내용도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훨씬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단과 하나님의 내기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로 욥기가 시작하는 것은 그 시사(示唆) 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서 이뤄지는 일이 인간이 몸담아 살고 있는 가시적인 물질계에 큰 영향을, 아니 사실은 그 전부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욥의 경우처럼 사단이 인간에게 환난과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주권 하에서만 이뤄집니다. 사단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특별히 신자에게, 행세할 권세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과 허락 하에서만 움직이도록 그 활동 범위와 시기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우주가 선한 신(세력)과 악한 신(세력)의 싸움터이며 번갈아서 승패를 나눠가진다는 동양적 이원론과는 그 내용을 달리 합니다. 또 각기 통치 관할이 다른 신들끼리 그것도 순전히 인간식의 감정과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그리스 신화도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 신들의 노리개 감이나 정체모를 영적 세력에 의해 그 일생이 좌지우지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우주의 가시적 물질계든 비가시적인 영적영역이든 그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신자를 돕는 영적 존재인 선한 천사들을 직접 주관하십니다. 또 악한 천사와 그 수괴 사단이 있지만, 하나님이 일부러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원래 선하게 창조됐던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한 것임, 그분의 대적 내지 상대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 오직 신자의 유익을 위해 한시적으로 불신 세상에서 왕 노릇 하도록 허락 받았을 뿐입니다. 또 아무리 사단이 불행을 인간에게 끼쳐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영광은 그 안에서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물질계 안에 제한된 존재인 인간, 욥으로선 하나님과 사단이 자기의 믿음을 걸고 내기를 했고 또 그 결과 자신이 환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이었습니다. 욥의 두 번에 걸친 고백을 보면 하나님께 전혀 불평하지 않는 대신에 범사가 오직 절대적인 그분의 주권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그도 분명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로선 왜 그런 환난이 자기 같은 자에게 일어나야만 했는지 그 원인은 오리무중이었던 것입니다.  

욥기의 진행 과정

욥에게 큰 불행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세 친구가 위로하러 나타납니다. 반면에 욥은  너무나 고통이 심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한탄과 함께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에게 원망을 쏟아 붓지는 않았습니다.  

세 친구는 환난의 원인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 하는 욥에게 정말로 판에 박힌 권면만 합니다.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고 불경하게 한 일이 있으니까 마땅히 벌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유 없는 고난이 없다는 것입니다. 착하면 상주고 악하면 벌을 주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반면에 욥은 시종일관 그들의 말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까지 큰 환난을 받을만한 죄나 허물을 범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를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10:2)라고, 고난의 원인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따졌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며 진행되자 제 삼의 인물이자 연소했던 엘리후가 등장하여 그들 모두를 야단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해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여러 질문들을 던집니다.

주로 자연의 이치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자연의 이치란 눈에 보이는 물질계의 운행질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에 욥은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인생의 영적인 문제에 관해 하나님과 변론해 이유를 알고자 덤비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40:2)고 물었더니 그가 무슨 대답, 아니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40:4,5) 욥도 하나님의 질문에 숨은 뜻을 눈치 채고는 동식물이 생장하는 이치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주제에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따지고 든 것은 잘못이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40:8) 여기서 하나님이 말한 “내 심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주관 운행하는 일반적 통치와 지금 욥 개인에게 내린 환난, 두 가지입니다. 물론 욥기 전체의 주제에 비추어 보면 욥에게 죄가 많아서 그에 상응하는 큰 환난을 주었다는 문자적 의미의 심판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욥더러 당신을 대신하여 직접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보라고 제안했듯이 먼저 당신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해 불만과 의혹을 드러내는 욥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 욥이 친구들과 토론 중에 자신의 의를 고집하는 태도를(6:24-30, 10:7, 13:13-24, 16:17, 21:4-7, 23:1-9, 27:5-6, 29:11-25 31장 등등) 끝까지 버리지 않은 잘못도 지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는 대신에 자기 같이 의로운 자가 환난을 당한다고 의혹을 드러낸 뜻은 역으로 말해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욥의 그런 속내를 예리하게 지적해내신 후에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찌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40:9-14)

참으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반어적(反語的)인 꾸중입니다. 욥이 지금 의로운 자기는 환난을 당하는 반면에 악인들이 형통한다는 의혹을 가졌었는데, 만약 그가 하나님 자리에 오른다면 불평했던 그 악인들을 정말로 공평하게 치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저 악인을 벌주고 의인에게 상을 달라고 아우성치지만, 하나님으로선 일일이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당신만의 온전한 긍휼과 인내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치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던진 말씀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만약 인간끼리 정말로 선과 악을 엄밀히 구분해서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욥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해도 될 만큼 선하다면, 인간 자력(自力)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반어적으로 전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기에 흔히들 착한 자가 구원받고 악한 자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 종교의 구원관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또 욥 같이 성경 전체에 최고 믿음이 좋은 의인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합격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욥기에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보석 같이 숨겨져 있다니 말입니다.

욥기의 결론

하나님은 또 다시 욥에게 세상의 통치와 자연의 이치에 관한 많은 질문들을(40,41장) 던집니다. 여전히 그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욥이 마침내 가까스로 입을 뗀 내용은 이러합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2-6)

그럼 욥이 자기가 당한 환난의 원인을 알았습니까? 또 하나님이 그 이유를 밝혀 주었습니까? 둘 다 답은 ‘No'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환난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욥도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 공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게 되자, 도무지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문제까지 알려고 든 자신이 잘못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다른 말로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고 선하다고 겸비하게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나님께 변박하거나 의혹을 갖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에 오직 자신의 사정과 생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아뢰어서 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껏 하나님께 따지다시피 환난의 이유를 알려고 덤벼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이후에 욥이 환난 전보다 더한 복을 받는 내용이 따라 나옵니다만, 욥이 친구들을 위해 빌어준 선행을 보상하거나 환난을 잘 참아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욥은 이제 어떤 일에든, 심지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롭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시인했기에 복을 받은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말년에 설령 복을 주지 않았더라도 욥은 더 이상 원망은커녕 그 이유조차 묻지 않는 자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으로선 욥기 서두에 사단과 내기를 한 잘못(?)이 있는지라 욥에게 복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욥이 벗들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들의 잘못을 야단을 치고 욥을 찾아가 사과를 하라고 명했다는(42:7,8)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이 책의 주제는 잘 믿으면 복주고 악하면 벌을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욥의 고난과 그 의미를 다각도로 논쟁하는 가운데 밝히려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욥기의 결론이 너무 어이없게 끝난 것 같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인 하나님은 절대로 옳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또 정작 그렇게도 극심한 고생을 겪은 욥의 믿음도 크게 자란 것 같지 않을뿐더러 환난의 이유마저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로 끝났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욥기는 사실은 그 본인보다 성경을 읽는 후대 독자를 위해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시작하는 콜롬보 형사 시리즈처럼 사실은 처음부터 환난의 원인은 밝히고 들어갔습니다. 영적 차원에서의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가 그 원인이었지 않습니까? 문제는 당사자와 주변 친구들, 즉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마저 몰랐던 것입니다. 문학적 구성으로 보면 구태여 다시 원인을 설명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끝까지 환난의 원인을 몰랐던 욥에게는 싱거운 결론일지 몰라도 그 전후사정 전부를 아는 오늘날의 독자에겐 이만큼 귀한 책이 없는 것입니다.

세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물어왔습니다; 1)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는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인지?, 2) 후반부에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3) 욥이 스스로 의롭다 하여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려 했는지?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고 변화되었는지? 이에 대한 답변은 상기 설명에서 이미 다 드린 것과 다름없지만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욥 개인의 입장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알아야할 내용으로, 합시다.

우선 시험의 목적은 즉, 신실한 신자마저 겪는 환난의 이유는 가장 먼저 신자더러 하나님이 이 땅을 운행하시는 원리를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질병이 하나님이 신자가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그럴 때도 있지만 당신의 인내의 한도가 차거나 또 신자를 강권적으로라도 고쳐야 할 때만 하나님이 직접 손을 들어서 치십니다. 그 외의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인간 스스로의 잘못과 사단에게 기인합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5:7)라고 말했듯이 삶에서 환난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세 친구의 변론에도 전체 맥락에선 틀렸어도 부분적으로는 신앙적으로 합당한 진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욥기는 그래서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잘 따져서 읽으면 너무나 풍성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피조세계가 함께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끼리 부딪히며 사는 세상에서 실패와 잘못은 당연히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자기에게 닥친 환난을 두고서 잘 믿는데도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의심과 불만부터 가지기보다는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는 환난이라도 하나님의 공의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그분만의 뜻과 계획은 있는 것입니다. 욥의 믿음을 훈련시키려는 목적도 바로 그런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재삼재사 말하지만 그더러 거푸 겪은 환난 각각에 대한 구체적 이유를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환난에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숨겨져 있다는 영적 진리만 깨닫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하신 말씀의 거의 전부가 욥에게 던진 질문이었는데도 그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럼 그 목적은 당연히 대답조차 못하게 만드는 것 즉, 욥이 하나님의 세상 운행 이치를 알려고 했지만 인간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미처 이해되지 못하는 고통이 있으며 또 그런 고통이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가 굽어진 표시가 아님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욥이 스스로 의롭다한 예들은 위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했습니다. 또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선 분명히 자기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릴 수는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한 말이 잘못이라고 시인했으므로 하나님은 절대 불의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욥기에 숨겨진 복음

좀 더 첨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공의만 있지 사랑은 전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의와 죄에 대해 일일이 그에 상응하는 상과 벌을 준다고 주장했지 않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영적인 진리가 바로 이 부분에서 도출됩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으로 알 수 없는 환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작동될 수 있는 계기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빤히 알 수 있도록 상벌이 분명하다면 기계적이고도 율법적인 하나님일 뿐이지 그분의 인자와 긍휼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또 만약 인간이 범사의, 특별히 환난의 원인을 다 알 수 있다면 스스로 그에 대한 대응책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 상과 벌을 자기 행한 대로 이미 정확하게 받았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회개할 이유도 따로 없습니다. 이유 없는 어려움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이자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을 괴롭게 만들어서 다시 행복을 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소위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욥의 경우도 사단에게 불행을 일으키도록 허락만 했지 당신께서 직접 손을 들어 욥을 치시지는 않았습니다.(1:12, 2:6) 그리고 끝까지 그의 생명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구원을 미리부터 예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 있는 한에는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계획과 영광이 신자를 통해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사단더러 환난을 허락한 후에 나중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니까 결국은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런 진술이 옳으려면 하나님이 환난을 허락하신 목적 자체가 나중에는 반드시 복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과 달리 순교로 그 믿음의 여정을 끝나게 만드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지 않습니까? 또 욥의 경우도 고난을 주고 견뎌내게 한 후에 복을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환난에 대한 소중한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욥기처럼 나중에는 복을 받았다고 결론내리는 것과 또 사단과 하나님이 천상에서 내기했다는 것 같은 성경상의 진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되 영적 진리를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한 목적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환난과 질병이 사단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단과 내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또 끝에 가서 복을 다시 주어 욥을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단 단독으로 신자를 마음 놓고 주무를 수 있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병 주고 약 주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단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간이 병을 겪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방치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과 권능으로 인도하십니다. 욥의 경우 그 기간이 길었고 환난 정도가 심했을 뿐입니다. 사실 그마저도 그렇게 심한 환난 중에도 욥은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진리를 증명케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엘리후의 변증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하나님)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34:19)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35:6-8)

바로 십자가 복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이나 당신이 지은 백성으로 동일하게 긍휼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와 악은 인간 세상에서나 통할 뿐이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욥이 아무리 스스로 의인이라고 해도 그 또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극심한 환난 가운데도 당신께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는 믿음은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바꿔 말해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 취할 태도는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는 분”(33:13)이기에 인간이 그분과 변쟁할 수는 결코 없으며, 대신에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는”(34:10) 분임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로 바꾸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환난을 통해 변화되고 믿음이 성숙된 모습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의로운 행위만 했지 악행은 안 했으니까 자기는 의인이라고 자부하며 하나님께 이유 없는 환난을 당할 수 없다고 쟁변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하나님만이 옳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했습니다. 즉 진짜 의인은 오직 그분만이 의롭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의인은 이해할 수 없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오직 그분 당신을 믿는 믿음으로만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화난을 허락하고 친구들과 엘리후를 통해 논쟁을 거치게 했고 마지막에는 당신께서 직접 나타나신 모든 과정이 욥을 믿음으로만 사는 의인으로 바꾸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류 구속의 진리는, 비록 욥에게는 수건으로 가린 것처럼 어렴풋한 소망만 가지게 했지만,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히 밝혀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신자들이 욥기를 보는 시각이, 아니 강대상에서 욥기를 강해하는 내용의 폭이 넓고 깊어져야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구체적으로 살펴볼 내용들이 욥기에는 무궁무진하지만 지면 관계상 간략하게만 살펴보았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욥기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에 비추어서 세밀하게 읽고 또 읽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깨달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whyjesusonly.com/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

그 동안 고민하면서도 누구와 상의하기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겠습니다. 헌데 너무 원초적인 질문이라 답변이 곤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픈 질문은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변이 가능할지요?  

 

[답변]박신목사

너무 원초적인 질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의문입니다. 답변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만약 답변이 불가능하면 천국의 실재성(實在性)이 의심 받게 되는 결과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기독교 신자가 다른 종교의 신자와 확실히 다른 점 하나는 언제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갈 자신이 있다고 하면 벌써 그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간다고만 했지 그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천국에 관해 체계적인 정리가 되어 있지 않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천국이 어디 있는지 알려면 천국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정의부터 분명해져야 합니다.

특별히 질문자께서 궁금하신 내용 중의 하나가 틀림 없이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 이 우주 가운데 공간적으로 어떤 물리적 장소를 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믿기에 더더욱 천국에 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1.천국의 정의(定意)

1.1. 두 가지 천국

천국에 관해 적용된 용어와 그 의미는 교회사적으로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천해 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듭니다. 지금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알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지면 상의 제약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 복음서에 천국에 관해 비유(마13장 참조)와 설교로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모든 가르침의 주제는 천국이었습니다. 흔히 성도들의 실천적인 윤리에 관한 교훈이라고 알고 있는 산상수훈의 주제도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말로는 천국이라는 한가지 표현뿐이지만 사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흔히 말하는 천국(Heaven) 즉 구원을 얻은 영혼이 죽은 후에 가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과 경배로 섬길 곳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요14:1,2) 간다고 하신 바로 그 곳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의미입니다만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죽은 후에 가 봐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 된다고 가르칩니다. 살아서는 어떻게 하든 최선을 다해 자기들 신의 노여움을 풀고 그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정성, 치성, 헌금, 희생 등을 가능한 많이 갖다 바쳐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은 남이야 어떻게 되었든 오직 자기 자신의 성적표만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선행과 구제는 진정한 선이라기보다 죽은 후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이 땅에서 자기 공적을 쌓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거룩한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으로서의 “하나님의 왕국 혹은 주님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혹은 the Kingdom of the Lord)”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전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4:17)였습니다. 주님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이 땅에 편만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 죄악과 사망의 사슬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구원 하심으로써 인간의 삶 속에 천국을 실제적, 현재적으로 도래시키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만이 갖는 천국에 관한 특유의 의미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신자가 이미 이 땅에서 주님의 통치를 받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죄인으로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베풀었습니다. 신자는 중생 이후 그 분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아 자기 모든 삶을 바쳐 오직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기에 자신의 성적표만 관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 땅에 더욱 많이 펼쳐지도록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선행은 주님 대신 이 땅에 천국을 실현시키는 것이자 다른 이들을 더욱 주님께로 인도해 자기가 받은 은혜를 동일하게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1.2.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도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전적으로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장소적으로 어디 있는가를 따지기 위해선 신자가 죽기 전에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각각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신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왕국’에는 현재 임재한 나라와 미래에 도래할 나라라는 이중적 성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래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마6:10) 나아가 당신께서 재림하셔서 새롭게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계시하시고 신자더러 영육간의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라고 하셨습니다.(마16:28, 계19-22장, 계22:12,20) 종말론적인 의미로 예수님 재림 시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뿌리 내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씨 뿌리는 비유(마13:3-23)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좋은 땅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씨앗을 이미 뿌려 놓으셨습니다.(마13:11, 23) 구원 받아 천국의 비밀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3. 천국의 구성 요소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디 있는지 알려면 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도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한 나라를 구성하려면 주권, 국민, 영토 반드시 이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먼저 주권이란 그 나라를 통치하는 권력이 누구에게서 나오며 누구에 의해 집행되는지를 의미합니다. 국민들의 정치참여로 권력구조가 결정되는 나라는 민주 국가이고, 일인 독재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면 전제 국가이며, 세습왕조에 의하면 왕정국가가 됩니다. 따라서 통치권의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그 분이 집행하며 궁극적인 결과도 그 분이 책임져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또 나라가 성립되기 위해선 그 나라의 주권에 순종하여 국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고 그 나라가 부여하는 특권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왕만 있고 국민이 없으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공산전제 국가의 체제를 도저히 인정 못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는 자는 이미 그 나라의 국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과 인생의 안전과 결과를 궁극적으로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여 그 분의 뜻대로 살며 그 분이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통치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긴 주의 자녀가 반드시 한 명 이상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가 구성됩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공간적인 위치를 점하는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국경으로 경계선을 지을 수 있는 영토, 영해, 영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 지리적으로는 세상의 나라들과 그 영토가 겹칩니다. 또 죽어서 가는 천국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2.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2.1.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the Lord) – 이 땅에서의 천국

 

2.1.1.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먼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세상 나라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꼭 어떤 입법, 행정, 사법적 기관을 구비해 제도적인 조직의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분의 통치는 성령을 통해 신자의 영혼과 교통하는 불가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가시적인 조직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이 세상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고 추정하거나 주장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만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중생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참된 성도만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며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데 조직체로서의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같은 교인도 있기 때문입니다.(마13:24-30) 따라서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2.1.2. 각 자의 마음 속에 천국이 존재하는가?

 

또 어떤 종교에선 천국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고 각자가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천국이란 여러 가지 죄를 스스로 반성하고 염려와 불안을 정신 수양을 통해 없애고 도덕적 훈련을 통해 인격의 도야를 얻어 평강을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걱정이 더 이상 자신의 자아를 흔들지 못한다는 뜻에서만 천국입니다.

그러나 이는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주권자의 통치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자신을 내어 맡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의 의지적 결단과 반복되는 수련으로 얻은 일시적인 정서적 안정을 천국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주권자도 자기요, 백성도 자기요, 영토도 자기의 지정의적 능력이 미치는 부분 안에서만 그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혼자서 왕과 백성을 겸하는 일인(一人)  왕국이자 왕 마음대로 하는 독재 국가입니다.

그 왕국은 자신의 생각과 기분대로 천국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었다 허무는 자기 구원입니다. 아무리 오랜 수련을 거쳐도 그 결과는 허무로 끝나고 실제 천국의 문턱에도 못 가 봅니다. 자연인의 지정의 능력은 너무나 제한되고 무능하며 그 영혼은 부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는 살아 계신 주님을 대면할 수도 없어 그 분의 의로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는 아무리 염려 불안이 없고 세상적으로 형통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해 보여도 여전히 그것은 인간의 왕국, 세상의 왕국에 불과합니다.

 

대신에 기독교의 경우는 다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성령 세례를 받은 참 신자 안에는 분명히 성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고 성도가 천국 갈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성도에게 와 계시고 성도는 백성으로 그 분의 인도를 받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의 경우는 혼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라도 자기의 정욕과 남아 있는 죄의 본성에 이끌리거나 심지어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정서적,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 훈련을 통해 얻은 평강은 절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기도하여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분명히 듣고 그대로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할 때 만이 혼자라도 천국이 되며 하나님 나라가 자신에게 도래하는 것입니다. 

 

2.1.3 천국을 실현시켜야 할 성도의 삶

다른 말로 해서 성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천국을 간헐적으로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이 땅에서 얼마나 천국을 지속적으로 오래 풍부하게 나아가 더 많은 다른 성도와 함께 맛볼 수 있는가의 싸움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되는 까닭입니다.(살전5:17.18) 

반면에 성도가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가고 나아가 부활하여 주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통치에 참여할 때는 더 이상 죄와 사탄의 방해가 없습니다. 항상 삼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인도와 통치가 가능해집니다.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천국의 현재성은 가변적이지만 미래성은 불변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내포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참다운 성도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이 드러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있습니다. 특별한 공간적 경계선이 따로 없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자기가 속한 가정, 직장, 사회, 민족, 국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확장하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주권자, 백성, 영토 셋이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가 성전을 짓고 어떤 자선 행사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꼭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전 가족이 교회를 나가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며 형제 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그 가정에 천국이 이뤄졌다고 무조건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먼저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일에 참여하는 모든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담임 목사의 욕심과 고집으로 진행되고 교인들도 불평 불만을 갖거나 의무감으로 참여한다면 아무리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강요로 교회에 억지로 나가거나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서로 화목하고 섬겨선 하나님의 통치가 없다는 점에서 천국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 온 사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 하는 일의 선한 동기나 종교적 취지와 관계 없습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 어디에서든 각 개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서 성령님을 통해 서로 교통하고 주님을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천국이 실현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에게 종교적인 의무를 강요하기 앞서 각 자녀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일 대 일로 만나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발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게 되며 주님의 뜻이 가장 우선되는 가정으로 변화되며 그 안에 천국이 실현됩니다. 

천국은 항상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의 사람으로 먼저 변화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그 분께 자신을 바쳐야만 시작됩니다. 기독교적 조직체를 만들어 그 조직 전체가 선하고 거창한 기독교적 일을 한다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조직체의 구성원 각자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 자기가 소속한 세상 조직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만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지상명령(the Great Commision)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2.2. 천국(Heaven) – 죽어서 가는 천국

2.2.1. 어느 별에 천국이 있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성도가 죽은 이후에 가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질 차레입니다. 스스로 천국을 갔다 왔다고 주장하며 시한부 종말론을 믿는 한 미국의 이단 목사가 지은 책에서 천국이 오리온 성좌 곁에 있는 어떤 별이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과연 천국이 우주 천체들의 좌표 상에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까요?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1:17)이라고 했습니다.

화학적 분자 구조를 가진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입니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며 썩지 않기에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질은 반드시 보입니다. 아무리 미세한 것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홀로 하나라는 것은 그 존재의 생성 근원과 그 존재가 계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자 운행자로서 영원히 계신 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영으로써 물질계가 아닌 영계에 세세토록 계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 보이는 오리온좌 같은 별은 벌써 물질계입니다. 천국이 그런 곳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은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로 화성이나 태양 같은 하나의 별일 뿐입니다.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신4:19)

 

영계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가로 세로 높이의 입체적인 3 D(Dimension)에다 시간을 합한 4 D와도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육안과 지정의로 측량하여 분석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인간으로선 천국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삼층천까지 직접 갔다 온 영적 체험을 한 바울 사도가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3,4)

 

인간의 죽음이란 영혼이 생물학적 육체를 벗는 것을 말합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는 이 땅에 남겨두고 썩지 않는 영만 영계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나쁘고 영혼은 선한 것이라 영만 천국에 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 신자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어 멸절(滅切)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는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존재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로 이뤄진 지구상의 분자구조와는 다른 구조의 존재가 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체험을 한 바울 사도가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0-49참조)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성도들의 완전한 영육간의 부활을 묘사하고 있지만 천국에서의 우리의 존재 형태가 이 땅에서의 것과는 전혀 다른 신령한 형체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천국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라면 영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형체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물질로는 영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본체를 본 자는 바로 죽는다고 합니다.(삿 13:22) 이는 죄악으로 부패한 인간이 너무나 거룩하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과는 공존할 수가 없으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 소멸하신 불 앞에 바로 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본질적으로 물질로 이뤄진 존재와 영으로 된 존재가 동일한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선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빌2:6-8)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육신을 벗고 영혼만 더 정확하게는 천국에 합당한 형체가 가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2.2.2. 천국의 실체

그렇다면 영들만 있는 천국에서 어떻게 24장로들과 천사들과 구원 받은 성도들이 찬양할 수 있습니까?(계시록 4장) 장로들이 흰 옷을 입었고 보좌가 있고 그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으며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물질계와 동일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성도가 천국 갈 때에는 그 존재가 멸절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체의 존재로 바뀌어 계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존재 가능한 신령한 형체로 바뀌어진 것이지 영만 천국 간다고 해서 아무 의식도 없는 단순히 안개 같은 존재들이 구름처럼 떼로 몰려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도 분명히 성도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감정적 의식과 그 존재가 스스로 움직임이 가능한 3D 적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지구상에 지금 우리가 측정하고 분석 가능한 물질의 형태와 시공간의 차원과는 다른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하고도 새로운 형태와 시공간의 차원이 분명히 천국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천국 특유의 썩지 않는 신령한 물질계(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그곳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말로는 절대 표현하지 못합니다. 환상으로 자세하게 천국을 본 요한 사도마저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등으로 이 땅의 비슷한 형체에 갖다 대어 비유만 했지 딱 집어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구조와 모습은 지상의 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못합니다. 사람이 죽어 봐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천국의 실체에 관해 관심을 갖고 소망으로 기대해야 할 부분은 천국의 물리적, 공간적, 형체적 모습과 위치가 아닙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더 이상 죄가 존재하지 않는 곳(free from the presence of sin)’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이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22:3,4)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3,4)

하나님과 함께 거할지라도 더 이상 인간이 불에 타 소멸되지 않는 곳이 천국입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땅에서 갖고 있던 죄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미쳐 이르지 못했던 부분들도 어린 양이 다 대속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가 천국에 들어 오는 순간 이땅에서의 더러운 것은 다 벗어버리게 하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이 계시 받은  그대로 세세토록 주님을 친히 바라보며 그 분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나아가 주님을 섬기는(성도가 천국에서도 따로 할 일이 있음)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7,18)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실이며 크나큰 은혜입니까?  

3. 결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님의 영광을 증거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합니다. 심지어 신자 혼자서라도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분명히 실재하지만 인간이 측정하고 이해하는 시공간의 범위상으로는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영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듯이 영은 물질계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천국은 비록 그 차원과 형체는 다르지만 인간이 알 수 있는 물질계 영역 안 어디엔가 소재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이미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영계로 들어가는 천국행 기차를 탔습니다. 더 이상 그 기차에서 내려지지 않으며 방향도 바뀌지 않습니다. 신자가 오직 할 일은 이 땅에서 자기의 삶과 인생과 존재를 통해서 소속한 세상 조직에서 더 많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실현하고 확장하는 길 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http://whyjesusonly.com/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현실과 믿음을 조화시키려면? / 박신 목사

 

 

[질문]

취직 준비생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장소 안에서 최선을 다해 그 준비를 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말씀과 기도와 신앙서적을 읽는 일 등에만 온전히 정신을 쏟고 있습니다.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허송세월만 하는 것 같아 제 자신을 바라 볼 때마다 안타깝습니다. 범사를 주님이 선한 계획으로 인도하실 것은 믿지만 나이도 29살이라 집에 걱정시키는 것도 싫고 결혼도 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걱정이 드는 것도 믿음에 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 과정을 헤쳐 나가야 할까요?

 

 

[답변]

많은 믿음의 청년들이 형제님과 비슷한 고충을 호소합니다. 믿음과 현실의 조화와 균형을 어떻게 하면 잘 이루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 말씀과 기도에 더욱 집중하면서 살고 싶은데 살아가는 문제로 방해 받는 것 같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현실과 믿음생활 둘 중에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정해져 있지 않고 또 정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의 소명과 소명을 이루는 방안에 대해 정확히 분별하지 못해 생기는 의문입니다. 또 그동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무조건 믿음이 현실보다 우선한다고 잘못 가르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신자들이 현실 삶에 매달리는 것이 하나님과 영적교제에 정진하는 일보다 열등하다고, 심지어 신자가 해선 안 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소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서 자신이 속한 모든 공동체에 예수님의 거룩한 빛이 비취게 해서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아직도 십자가 구원의 길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자기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 땅 끝까지 이르도록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세 소명은 목회자, 선교사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가 자기 현재의 위치와 신분에서 최선을 다해 실현해야 합니다. 다만 그 소명을 실현하는 방안에서 크게 둘로 나뉠 뿐입니다. 첫째 풀타임을 투자해 전문적 구체적 종교 활동을 하는 방안과 둘째 세속적 직업을 통해 그 소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자는 목회자, 선교사, 신학자, 기독교 관련전문기관 종사자등이며 후자는 일반 신자입니다.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이 두 방안 사이에는 절대로 영적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지위, 권능, 자격, 신분 등에 결코 차별이 없습니다. 현실의 직업도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일반 신자가 행하는 현실의 일은 불신 세상을 직접 상대하며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전해야하므로 오히려 하나님 나라 확장의 첨병이자 실제 전투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더더욱 소중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풀타임 사역자들은 그 십자가 군병을 교육 훈련시키거나 후원해주는 것이 주된 역할입니다.

 

요컨대 현실의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성직입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의 실제적인 도구이자 통로입니다. 대학 공부하고, 직장 얻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열심히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정말로 고귀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방식으로 하면 목회자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불신 세상은 일반신자의 삶을 보고 예수님과 그 십자가에 관해 관심을 갖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님을 비롯해 모든 신자는 가장 먼저 풀타임 사역자가 될 것인지, 일반 신자로 세속 직업을 가질 것인지 부터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풀타임 사역자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구체적, 개인적, 인격적, 직접적, 확정적인 대면과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부르심이 없으면 아무나 섣불리 하겠다고 나설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됩니다.

 

바꿔 말해 그런 부르심이 없는 신자는 세속 직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현실 삶에 장애가 될 만큼 종교생활에 시간과 정력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주일 성수나 성경읽기 기도를 등한시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아침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는 정도는 현실생활에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충만해져서 자기 일을 더 잘 할 수 있게 만듭니다.

 

제 뜻은 일반 신자에겐 현실의 삶이 하나님의 일이자 더 소중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모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만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만 모여도 됩니다. 성경적 참 복음이 선포되고 진리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현실과 동떨어진 수도원에서 성숙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수도원에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할 자는 신학자뿐입니다. 전문 사역자라도 종교적 일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 충실해야 하며 어떤 면에선 그 올바른 삶이 더 감동적이고도 영적인 설교가 됩니다.

 

교회는 십자가 군병을 훈련시켜 세상으로 파송시키는 곳입니다. 모든 신자는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세상에 나가, 그것도 죄악이 더 많은 곳으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의 파수군 역할에 충성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 붙들어 놓고 목사와 교회에 충성시키는 작금의 상황은 아주 큰 잘못입니다. 주일에 예배와 성경공부로 모였으면 평일에는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신자는 세상에 떨어져 썩어 죽음으로써 다른 이의 생명이 수십 배의 결실을 맺게 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의 직업에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가능한 많이 끼쳐야 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직업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전문가가 되어서 그 일을 통해 인류의 복지가 증진되는데 보탬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회와 단체에서 꼭 필요한 사람, 다른 사람으로 영육 간에 강건케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로 그것이 아주 거룩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신자로서 복음전파를 하기 이전에 의사로서 생명을 살리고, 경찰로서 시민을 보호하고, 공무원으로서 순리대로 법을 운용하고, 선생으로서 학생들의 지성과 인성을 함양하고, 과학자로서 질병치료나 공해방지 등의 일을 성실히 행해야 합니다. 신자는 더더욱 세상에서 전문적 실력은 물론 정직과 겸손과 섬김과 사랑으로 신자답게 행함으로써 사람들로 신자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영적 원리가 또 하나 있습니다. 믿음과 영성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만 한다고 쉽게 자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깨우침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지적 종교적 배움과 훈련이 아니라 실제 삶의 모든 부분에서 평생토록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끈질기고도 고달프고 외로운 씨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구체적으로는 현실의 고난과 문제들을 믿음으로 갈등, 고민, 기도, 인내, 소망, 맞서 싸움으로써 신자의 성품과 믿음과 영성이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사도 바울, 베드로 등등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렇습니다.

 

혼자서 말씀 보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것에 시간을 빼앗기는 일, 특별히 젊었을 때에 열정적으로 믿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질문자에게 이미 현실을 등한시 한다는 우려가 생겼다면 사실은 조금 과한 상태에 들어간 것입니다. 어쩌면 죄악으로 추해가는 세상과는 담을 쌓고 혼자만 경건하고 싶은 영적교만 내지는 질문자가 우려하는 대로 현실을 외면 도피하려는 게으름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시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조만간 스스로 분명한 결단을 해야 한다는 의미임, 전임사역자의 길로 갈 것인지 세속 직업을 택할 것인지 여부를 정하십시오.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어떤 방식이든 그 본인은 알 수 있음, 부르심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 직업을 어떻게 하면 잘 수행할지를 연구하고 그 준비에 시간과 노력을 우선적으로 투자하십시오.

 

삶에서 영성이 자란다는 것은 현실과 부딪혀서 겪는 갈등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그런 문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고 오묘한 인도와 간섭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반추하여 발견하고 누린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현실을 잘 준비하는 것보다, 그 반대로 삶의 문제를 말씀과 기도로 해결할 때에 그 믿음이 훨씬 더 크게 자란다는 뜻입니다. 또 그런 작은 진보들이 매일매일 모여서 결국은 노년의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믿음의 거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에선 이런 삶으로 믿음을 실현해 보여주는 진정으로 경건한 신자들이 절실합니다. 전문사역자는 공급과잉입니다.

 

6/29/2015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와 구원의 관계 / 박신 목사 


성경문답 사이트를 개설한 이래로, 또 개인적으로 이메일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은 주제는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였습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경륜이 오래되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데도, 구원에 대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칭의, 성화, 영화를 구분할 줄은 아는데 각각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그 셋을 연결하여 종합적으로 판단, 적용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으면 미래에 지을 죄까지 이미 다 용서 받았기에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원파 식의 한쪽 극단이 있습니다. 그 반대쪽 극단은 엄격한 도덕주의 율법주의에 치우쳐서 사소한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이 주제를 직간접으로 이미 여러 번 다뤘지만 각기 조금씩 다른 질문내용에 각도를 맞추어 답변 드리다보니 그 전체를 연결해서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사한 의문을 가지실 분들이 쉽게 참조하고 오해의 소지를 줄이도록 구원과 죄의 관계를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죄의 본질과 구원

구원은 하나님이 죄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죄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에다 말로 남에게 상처 주는 죄(마5:22)와 마음으로 짓는 죄(마5:28)까지 죄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말로 범한 잘못은 당연히 그러하지만 생각 또한 사고 활동이기에 인간이 작심하고 지은 행동의 죄로 봐야합니다. 주님의 뜻은 다른 이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는 행동만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는 자기를 몰라도 자기는 알기에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의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그 모든 죄들이 외부 여건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마15:17-19) 행동과 말과 생각을 조종하는 인간의 마음이 따로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타락 오염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이 타락된 것은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배제한 데서 기인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 세우고 마음의 중심에 두었기에 그분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는 범법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특별히 자기를 최고로 높이려 드니까 인간 사회에서의 경쟁 분쟁 원수가 되는 온갖 윤리적 죄가 발생합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근본 의미도 하나님을 스스로 절대 찾지 않으며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 특별히 자기만 높이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마음에서부터 죄(생각, 말, 행동)가 나온다면 결국 인간 존재 전체가 죄로 찌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 존재 전체가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요3:5) 존재 전체가 타락되어 있기에 스스로 그 타락된 마음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 심령 안에서 역사해야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를 생각, 말, 행동 즉 자신의 의지적 행위로 인한 잘못으로만 정의한다면 논리적으로 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깨끗케 되려는 선행 구원이 타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 전체(한 인격체)가 타락되었다면 그 사람을 깨끗케 해야만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진정한 의미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그분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자연인이 태어난 이후에 하나님께 범과한 그 모든 결과를 보면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법정에선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은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자 단 한 명도 없기에 그분의 공의대로 하자면 단 한 명도 구원을 입을만한 조건, 자격, 공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심이 너무 크신 그분은 우리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며 우리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동과 서는 먼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만나지 못함)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시103:8-12) 구약 시대 다윗의 고백이지만 바로 십자가 복음을 예표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타락한 아담이나 그 이후의 인간들이 당신에게와 같은 인간에게 지은 죄과로 치면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그러면 단 한 명도 살아날 자가 없기에 그 죄는 철저하게 응징하되(공의) 그 죄인은 살려주는(사랑) 구원의 길을 태초 전부터 정했습니다.(창3:15, 요1:1, 엡1:3-14)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당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죄인과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엡2:11-18, 히10:10-20)

따라서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정확한 뜻은 우리의 죄과는 주님이 다 짊어지셨기에 한 죄인의 인격체 전부가 하나님에게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어도(사실상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어도) 그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용납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눅15:11-32)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갈4:6), 그분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벧전2:9,10).

이런 예수 십자가의 구원은 다윗 시편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베풀어집니다. 그 경외는 단순한 행동으로 지은 죄를 반성하고 고치는 도덕적 종교적 회개(悔改)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아시기에(고전2:6-16)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대로 성령의 간섭과 역사가 전제 되어서 한 존재 전체가 거듭나는 영적인 회개를 수반합니다. 타락한 마음 전체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으로 회심(回心)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지난날에 지은 죄 된 행동들만 반성해서 고친다면 여전히 선행구원에 머무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을 중심에 둔 자기 존재 전체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썩어 없어졌어야만 했다는 철저한 자각입니다. 자기만 높이려고 살았던 지난 모든 삶이 최악의 실패와 절망뿐이었음을 너무나 깊이 깨달았기에 다시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인생의 완전한 유턴입니다. 앞으로는 주님만 중심에 모시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는 순간 이런 회심이 일어나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그 죄인의 회심한 중심을 아시며 본인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과 미래의 죄

예수님이 죄인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대신에 그 죄인은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 받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 관계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기는커녕 훼방도 하지 못합니다.(롬8:31-39) 인간의 부모 자식 관계도 절대 끊어지지 않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신자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나 사건은 우주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권능과 은혜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절대로 구원의 취소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하고 자기 자녀로 삼아주었기에 구원이 취소된다는 생각은 하나님 그분을 왜곡 부인하는 짓입니다. 인간 부모도 그것도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아니라 입양한 자녀가 잘못했어도 내치는 법은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 자기 자식처럼 키울 확고한 결단과 헌신이 따르지 않으면 아예 입양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자녀로 받아들인 그 관계를 취소하고 다시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이 그렇게 잘못을 했어도 아버지가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주고 다시 쫓아내는 법은 없듯이 말입니다. 이를 죄와 연관해서 말하면 죄로 인해 받을 지옥형벌이 완전히 면제(free from the penalty of sin)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입장권을 준 것이며 그 준 것을 다시 회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광스런 완성은 이미 보장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 용어로 칭의(稱義-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전혀 의롭지 않은 자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었기에 하나님이 그 주님의 의를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준,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이는 단회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전부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처음 믿은 때입니다. 죄인 그 상태로 그 신분과 소속과 위치만 흑암 사망 사탄의 미혹 아래에서 빛 생명 하나님의 품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간섭으로 일어난 일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요 선물입니다.

한 죄인 전체가 이미 용납되었기에 그 후로 죄(생각, 말, 행동의)를 지어도 절대 다시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죄까지 모두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은 후에 죄 지었다고 다시 심판하지 않으니까 미래의 죄도 당연히 용서 받은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십자가 구원은 하나님이 한 죄인(여전히 죄에 찌들어 있는)을 있는 그대로 당신 자녀로 품어주시고 완전히 용서해준 것입니다. 이런 확고한 이해가 없으면 자꾸 구체적 사소한 죄들과 연결해서 구원을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성화와 징계

문제는 구원이 한 죄인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것이기에 그 내면에 있는 죄로 찌든 본성은 그대로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치사하고 추하거나 흉악한 행동을 짓고 싶은 생각이나 습관을 죄의 본성이라고 곡해 하면 안 됩니다. 서두에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만 높이려는 고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어 회심할 때에 하나님을 멀리했던 지난 삶을 철저한 실패로 인식하고 마음의 전체 방향은 분명히 하나님 쪽으로 돌렸지만 자기를 높이려는 옛 자아의 흔적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 있어서 수시로 하나님을 망각 외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짓는 구체적인 죄도 결국 자기중심성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죄와 싸워 이기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붙들어야만 가능합니다.(눅9:23, 롬7:17-25) 이는 바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입니다. 죄의 본성과 그 힘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씨름으로 믿은 후 일생 동안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되 자신이 책임지고 계속적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고 말한 까닭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믿거나 선행을 쌓아서 천국 가는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성화를 충실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성화와 칭의가 시간적 혹은 수준적으로 구분되는 두 단계가 아닙니다. 칭의가 되는 순간 성화도 자연스레 필연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의 행동을 다 없애고 뜯어 고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부인했던 타락한 마음은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버렸습니다. 죄의 본질은 씻어졌고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앞으로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면서 지난 인생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완전한 방향전환을 했습니다. 그럼 그분과 동행하는 삶, 성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단지 자기를 높이려는 타성은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서 신자가 그 타성을 얼마나 죽이느냐에 따라서 성화의 정도와 수준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래에 지은 죄까지 다 용서 받았다고(심판이 면제되었다고) 해서 계속 죄에 더 거할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습관적, 의도적,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는 합니다.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자관계는 결코 끊지(심판) 않지만,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고 매는 드는 것(징계)과 같습니다.(히12:4-13)

그런데 징계는, 하나님만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아주 비상한 경우를 빼고는, 죄를 지을 때마다 혹은 회개치 않는 죄마다 일대일 대칭으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서운 독선적 하나님이 되어서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도 공포심으로 믿는 척만 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이 계속 돌이키지 않고 잘못을 범해 도저히 그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 싶을 때에 매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징계의 시기와 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신자가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았다고(단지 심판의 면제이지 징계는 하신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죄를 짓고도 무심해선 안 됩니다. 혹시 회개를 못하고 지나친 죄에 대해선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의 사소한 잘못은 눈 감아 주시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그 영혼에 내주하는 신자라면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집니다. 제대로 회개하지 않은 경우라면 정말 죄로 인식하지 못한 아주 사소한 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것까지 징계는 않습니다.

대신에 신자가 죄에 대해 이전보다 아주 민감해졌고 때로는 성령마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기에 습관적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는 사실상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를 하게 되거나 최소한 본인의 죄의식이나 내면의 영적 눌림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는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요약하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 되어 자기를 대신 높이는 것입니다. 구체적 행동(생각, 말,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은 그 결과입니다. 처음 예수 믿어 얻는 구원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 된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용납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자신의 이미 바뀐 신분, 위치, 소속, 특권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성화의 과정에서 아무 두려움과 주저함 없이 죄와 당당하게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합니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었기에 구원 후 짓는 죄도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구원이 취소되는 법도 결코 없습니다. 나아가 천국에서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존재로 바뀌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도 이미 확보된 것입니다. 그 영화를 죄와 연관시키면 더 이상 죄의 형벌과 능력은 물론이며 죄 자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그 때까지는 이 땅에서 죄의 세력과 맞서 싸우며 날마다 조금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천국에서의 상급만 달라지지 구원 자체가 변경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회심으로서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 받았지만, 그 형벌(심판)에서 면제된 것이지 구체적 죄를 계속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징계는 받습니다.

1/28/2015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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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창세전에 택함이란? (Q&A) / 박신 목사


[질문]

에베소서 1:4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요? 창세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택함을 받는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로 구별을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신학적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인 예정론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나기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알미니안주의와의 끝없는 논쟁의 핵심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현대 기독교의 주된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반발, 거부, 비난,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개인적으로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깊이 따지자면 신학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뤄야 하며 또 자칫 이 홈피의 방문자들 사이에도 쟁론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두 신학이론을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용이한 차원에서 순전히 성경말씀에 따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시간은 피조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 내지 누적인 역사도 지구상의 인간들의 행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주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대적 구분에 따른 해석, 적용, 예측은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필립 얀시가 든 비유를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해가 뜰 때에는 사실상 8분 전에 벌써 떠있는 해를 보게 되며, 지는 해도 이미 8분 전에 진 해를 봅니다.

그런데 한 발은 태양에, 다른 한 발은 지구에 걸쳐 놓을 만한 거인이 있다고 치면, 순전히 논리적 가정으로, 그에게 8분의 시차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나 태양을 한 순간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실종되고 없는 셈입니다. 지구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우주 한 쪽 끝에 한 발을, 다른 쪽 끝에 다른 발을 두실만큼 큽니다. 하나님이 그런 가시적 물리적 형체를 갖춘 거인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시간과 연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행성과 항성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과 실제 길이도 각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운행, 통치하시기에 시간 개념이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본다는 것은 시간 밖에 존재하여 시간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에 실려 다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각기 시간에 묶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물체와 존재는 반드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과 완연히 구별된 유일한 분입니다. 시간 밖에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현재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영원하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오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하라는 권면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이 하루만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반면에 천 년간의 인간 역사도 단숨에 허물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주만물을 관리 통치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관자로서 그 시간마저 통치하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 또한 시간에 종속되기에 수정, 변개, 쇠퇴, 소멸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  

대신에 그분에게는 하루나 천 년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역사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해 있다는 초시간성(超時間性)과 초역사성(超歷史性)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 즉, 영원만 있습니다. 또 그래서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언약 또한 전혀 수정 변개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달성되는 법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영생을 유토피아 상태에서 시간적 무한대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으면 그 육체는 멸망하고 영은 예수님 계신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이가 죽으면 그렇게 되지만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이 옮겨지는 거처만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또 낙원으로 옮겨진 신자는 마지막 날의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미 천국에 올라간 신자에게도 시간 개념이 전혀 없어집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영원한 현재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천국에서 무병(無病)은 몰라도 장수(長壽)는 어울리지 않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 됩니다. “이제는(이 땅에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의 실체 뿐 아니라, 그분의 구속사적 경륜, 또 이 땅에서 가졌던 의문과 오해 등이 씻은 듯이 밝혀집니다. 아니 그 전에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문제 삼을 시도는커녕 용의조차 사그리 없어질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과 이 셋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이 목적하던 바는 천국에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달성된 셈입니다. 신자가 그 둘을 더 이상 소유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사랑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아니 그곳은 아예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자가 그 육신까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갈 소망이나 믿음을 구태여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군인이 매일 달력에 표시하면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예수님이 지구상으로 재림할 때 육신도 부활해 그 분과 동행 귀환할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영원한 현재로 천국 신자에겐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성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혀져 그 분처럼 변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이후 이 땅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하게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의미가 시간적 무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온전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신자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로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완성된 관계의 실체를 가시적 형태로 하나씩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29)

바로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교리적이 아니라 일대일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생 즉, 구원을 자꾸만 시공간의 차원 안에서 이해하려 들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아니 맛도 보지 못합니다. 수박을 잘라 먹지 않고 그 겉만 핥은 셈입니다.

토기장이가 악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이런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질의하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먼저 "창세 전"에라는 뜻은 하나님의 경우는 시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형체나 존재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성하기 이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실 때입니다. 시공간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한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 계셨던 상태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분,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창세 전은 인간이 이해할 때에만 아주 오래 된 과거사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결코 창세  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라도,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죄로 물든 이 땅과 하늘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하늘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이런 진술마저도 인간의 사고로 즉,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차원에서 이해 적용하려 들어선 명료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데도 한국인이 속도와 억양만 조금 다를 뿐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믿고 해석하려 들어선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착할지 악할지, 또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원 줄 자와 안 줄 자를 어떻게 창세 전에 독단적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분이 아주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여겨집니다. 언뜻 일리 있는 판단 같지만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판단하는 인간적 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 구원, 택함, 예정은 전부 하나님이 일방적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간섭은커녕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되었고, 신자와 불신자로 나눠져 택해졌고 예정 받았기에, 구원 받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해도 단 한 치의 불공평성, 편애, 자의(恣意: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 불합리성, 불완전성 등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신학적 과제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답게 사고 유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 듭니다. 이는 아주 크고도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본 주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이 나중에 착할지 악할지, 믿을지 안 믿을지 미처 모르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편 가름 했다고만 여기고 치웁니다. 반대로 인간의 하는 짓과 그 처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 구원해주어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예 처음부터 믿을 자와 안 믿을 자로 나눠서 창조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 신분에서 그렇게 나눈 창조와 창조주가 잘못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비유이긴 해도 인간은 물건, 토기에 불과합니다. 본차이나가 아니라 뚝배기로 만들었다고 감히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택함의 근거가 인간의 소원이나 달음박질(공적)이 아니고 오직 당신의 긍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에서나 야곱 둘 다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진노 아래에서 지금 당장 몽땅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선언하는 바는 인간에게 아무리 높은 도덕성, 영성이 있어 보여도 창조, 택함,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논의 밖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택함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이미 예정되어 지어진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함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함이 결코 무조건적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또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의 택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택함도 없고 예수가 있기에 택함이 가능하고 또 타당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타락과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 전제가 된 창조라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말은 시간적 전후 순서는 논외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예수님의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의 타락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타락 전(supra) 예정설과 타락 후(infra) 예정설이 옳은지, 또는 예지예정인지 이중예정인지 같은 복잡한 신학논쟁이 대두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측면은 제외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그 선택을 완성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때에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쪽에선 하나님이 볼만하고 기뻐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당신께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로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는 자리까지 한 치의 착오 없이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지구 상의 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만 문제됩니다. 천국에선 그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누차 강조하지만 시간의 무한대 개념이니, 아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뜻임) 뜻 안에 이미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성경 계시대로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져서 꼭 오셔야 할 때가 되면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지구상에 강림하십니다.

신자는 확보된 재림의 영광 속에 살기에 그 종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소유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저 “영원한 현재의 사안”일뿐입니다. 영원한 현재라는 용어 또한 그분의 신비한 경륜을 결코 다 드러낼 표현이 되지 못하겠지만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세 전에 세운 당신의 뜻과 계획은 당신 안에선 창세 전부터 현재 시제로 다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시공간 안에 제한되었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인간에게만 창세 전이 시간적으로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이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창조는 물론, 21세기의 한 신자의 탄생과 그 택함과 구원까지도 그분 안에선 이미 성취되어 있으되,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시기와 방식만 미결로, 그것도 인간에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올라가 있는 이름을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앎으로써 자기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기에 그만한 위로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택함과  예정에 따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와 은혜에 속할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아무 계획 없이 도기를 굽지 않듯이, 하나님도 태초에 이미 당신만의 마스터 플랜이 있었고 그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4)

질의하신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고 택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그 택함은 완벽한 거룩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신자가 할 바는 이어진 말씀 그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5,6절) 뿐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 땅에선 물질적 차원에 머무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천국에선 그분과 맛 대면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예정이란 신비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낙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잠시 남겨 놓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함 받았으니 잠시 있다 없어질 이 땅보다는 영원과 맞대어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5/25/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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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상에 주는 메시지는? / 박신 목사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3:2,3)


마하트마 간디는 크리스천은 아니었지만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산 표본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당신이 평생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더니 “내 삶이 나의 메시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조국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비폭력저항 운동을 주도하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검소한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어떤 어려움과 핍박에 닥쳐도 일생을 바쳐 이루어야 할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전진했습니다. 말하자면 어느 누가 그의 삶을 보더라도 왜 그런 삶을 사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신자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배와 성경공부나 기도 등 교회의 각종 모임에 성실하게 참석해야 합니까? 이는 신자의 기본적 의무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자라는 범주 이상으로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교회 활동 외에 평소 착하게 살면서 남들을 도와주어야 할까요? 이 또한 신자라면 응당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불신자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간디가 대표적 예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신자라서 그런지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밖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내용이든 메시지를 전해 들으려면 반드시 그 인생에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그곳을 향해 진전해 나가는 모습과 그 열매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간디가 왜 그렇게 사는지 누구나 알 수 있었지 않습니까?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 빌게이츠의 삶을 보고도 그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알아채지 못하는 바보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신자의 삶을 보면서 “저 사람은 기독교인이구나.”라고 여길 정도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신자로서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목표가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를 좇아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강력하게 도래시키고 또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 혼자 거룩하게 바뀌는 것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로 인해 다른 사람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또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라 그 다른 사람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감으로써만, 그렇지 않고 거룩해질 방도도 사실 없음, 거룩해져야만 합니다.

다른 자를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인도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뿐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다른 사람들의 심비에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새겨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전도에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 전도는 또 다른 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 그 일은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신자가 속한 모든 공동체, 또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 속에서 그 관계와 일을 주도하는 힘이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권세여야만 합니다. 신자의 가정에서부터 직장과 사회 모두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능력이 자기를 죽이며 남을 살리는 십자가뿐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가는 곳마다 행하는 일마다 예수님의 거룩한 빛이 비춰져야 합니다. 요컨대 기독교인끼리만 모여서 기독교적 업적을 쌓는 종교 왕국 대신에 예수를 좇는 제자들이 모여서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인생을 볼 때에 과연 어떤 메시지를 보고 듣고 읽을 수 있을까요?

10/19/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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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응답이 되지 않는가? / 박신 목사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마저 매번 당혹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의 약속과 현실의 상황이 이율배반적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든 믿고 구하면 주신다고 약속합니다. 본문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즉, 무슨 일이든지 쉽게) “예”(즉, 이뤄진다)가 된다고 분명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틀렸든지 우리가 틀렸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틀렸을 리가 없으니까 우리가 틀린 것입니다. 무엇이 틀린 것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시늉만 냄으로써 성경대로 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가 되지 않는 경우는 신자가 그리스도 밖에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뜻을 곡해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광의로 해석해선 신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경우란 없습니다. 구원을 얻은 후로는 그분의 은총과 권능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며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로 신자가 죄를 범하거나 사단의 유혹에 빠져도 주님은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당신의 품 안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반면에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죄와 시험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교회 생활을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를 보내어 죄와 사단과 사망의 멍에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구원해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 정말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해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구원 안에 들어온 신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약속하신 모든 것도 아멘으로 화답하여 지키면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 본문의 뜻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하게 믿고 기도했으니 당연히 예가 될 것이라고 또 되어야만 한다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하자면 바울은 실제로 어떻게 아멘으로 화답했는지에 관해선 구체적으로 알아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기도할 때만 그리스도 안에 있지 평상시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모습과 바울이 따랐던 방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었지만 우리는 마찬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같은데도 정말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가까스로 예가 되는 까닭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환난 중에 있었음에도 그 환난 중에 주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해주었습니다.(1:6) 또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대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했습니다.(1:12) 인간적 지혜나 욕심으로 성도들을 자기 뜻에 맞추어 조종하려고 한 적이 전혀 없으며 정말 하나님께 받은 은혜만 전해 주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 혹은 아볼로 파로 나뉘었지만 바울 자신은 자기편을 만들어 이득 혹은 명성을 얻으려는 욕심이 추호도 없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아니”(1:13)했다고 합니다. 말로 가르친 것과 실제 삶이 다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당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먼저 보낸 편지대로 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비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계획의 변경도 단순히 자기 욕심과 편의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고 결국은 그분의 은혜를 다 같이 알고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될 것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로서 사나 죽으나 성도들이 영적으로 유익하고 충만해지는 것만으로 자기 자랑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던 자가 새로이 구원을 받고 또 구원 받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만이 바울이 취할 성령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가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함이 없노라.”(1;17,18) 의문문을 사용해 부정의 뜻을 강조했습니다. 고린도 교인을 대할 때에 육체를 좇은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하기만 간절히 기도했고 또 자기가 전한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뿐이었으며 자기 역시 전한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매사를 그렇게 경영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교회 생활 성실히 하고 또 하나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질 것을 확실히 믿고 있으니까 단순히 무엇이든 기도하면 다 이뤄지리라고 기대합니다. 바울처럼 사람이나 일을 경영할 때에 주께 대하듯이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미혹된 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는 모습이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일을 위해서만 기도해서, 그것도 억지로 쥐어짜듯 얻어낸 응답이 자랑일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뜻은 절대로 단순히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실제로 살 때에만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실 만큼 우리를 사랑했던 그 사랑은 결코 철회, 가감, 수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약속이 우리에게 응하느냐 못하느냐는 당신의 사랑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이치가 아닙니까?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 변화가 없지만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또 부모도 사랑하는 자녀니까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무조건 다 해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런 부모라면 참 부모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자녀를 완전히 망치려고 작정하지 않는 한 그렇게 못합니다.

반면에 자녀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랄 때에는 자녀의 소원을 그것도 당신의 뜻에 맞는 일만 선별해서 들어주지 않습니까? 본문 식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부모의 약속은 얼마든지 부모의 뜻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자녀는 그 뜻에 맞게 순종하면 부모의 기쁨이 되느니라.” 그런데도 아이는 “나는 부모의 사랑 안에 있으니까 내가 요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착각합니다. 분명 자녀가 부모 사랑 안에 있지만 얼마든지 예는 안 됩니다.

성경이 “그리스도 안에”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사신 삶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오직 자기를 버리고 남을 살리는 삶만 살았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남을 살리는 기도를 하면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살리는 기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을 때만 예가 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뜻도 여전히 신자를 세상 앞에 제사장으로 세워서 남을 살리려는 것뿐입니다. 그 일에 필요하다면 신자가 스스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상관없이 당신의 궁극적인 계획에 따라 궁핍하게도 혹은 부유하게도 하십니다.

혹시라도 아무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는데도 잘 응답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믿음이나, 정성이나, 열심의 부족을 점검해보기 보다는 지금 기도하는 내용이 남을 살리려는 것에 초점이 있는지부터, 그것도 자기가 죽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0/5/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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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너를 소유하고 있는가? / 박신 목사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에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보거나 하나님의 관점 대신에 자기 생각으로만 해석하는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그러나 그런 오류들은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고 어느 정도 인식하고 또 고치려 노력합니다. 반면에 잘못인줄 알지도 못하고 많이 범하는 잘못은 꼭 보아야 할 구절을 간과해 정작 깊이 새겨야 할 의미마저 놓친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신자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면 그 즉시로 성령이 내주하여 본문 표현대로 “성령의 전”이 됩니다. 그러나 그 뜻을 단순히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제한 시켜 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신자를 어떤 어려움에서도 구해주고 앞으로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치웁니다.

돈에 심히 궁핍했던 올라브슨이라는 스웨덴 사람이 있었습니다. 쪼들리다 못해 1910년 스톡홀롬의 카를린스카 연구소에 자기 몸을 의료 연구에 쓰도록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일 년 후 그는 많은 재산을 상속 받게 되어 돈을 물려주고 팔았던 몸을 다시 사려 했습니다. 그러나 연구소는 이미 그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팔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동안 허락도 받지 않고 이빨 두 개를 뽑았다고 손해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성경은 분명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의 영육 간 존재 전부의 절대적인 소유권이 영원토록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신자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리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 정말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을 바쳐서라도 순종하며 그분 뜻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신자는 예수님 허락 없이는 이빨도 뽑지 말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살전 5:18)입니다. 신자더러 계속 좋은 것을 받아내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그분 뜻대로만 살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이 행하신 것이므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그분의 신자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그런 실감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구원 이후에도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의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여전히 자기에게 있는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어서 이식도 남기지만 그 이식은 전부 주인의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대신 행하기만 하는 심부름꾼과는 다릅니다. 심부름꾼은 절대로 주인이 시킨 일의 범위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또 당장에 돌아올 벌이 두려워 넘어설 생각도 아예 못합니다.

반면에 청지기는 재량껏 무엇이든 할 수 있어도 소유권만은 절대로 주인에게 귀속시켜야 합니다. 임의로 할 수 있기에 더더욱 주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는 해선 안 됩니다. 심부름꾼은 시킨 일이 우선이지만 청지기는 그 일을 시킨 주인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럼 신자가 된 특권은 따로 없고 의무만 더 늘어난 셈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 받기 전 불신자 시절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 인생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 모두가 사단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완전히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악을 즐기도록 조종되어졌습니다. 참 빛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흥미롭게도 불신자는 도리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며 삽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소유권과 사용권 모두 자기가 쥐고 있는 양 믿지만 사실은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속아서 영과 육 모두 사단의 농간 아래 있는 줄 눈치도 못 채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한 원죄가 바로 “내 인생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데서 발단되었고 또 모든 인간이 그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소유권을 원래 주인이신, 원죄 이전의 선악과가 뜻하는바 그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되돌려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과는 달리 사용권은 계속 허용해 주었습니다. 사용권은 어디까지나 소유권에 귀속되는 것이지 사용권을 가졌다고 소유권까지 확보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의 인생은 불신자 시절에 임의로 행사했던 그 사용권을 소유권자인 예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여정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청지기적 소명이란 외부 피조 세계를 그분의 뜻에 맞추어 다스리는 것을 넘어 자기의 존재, 삶, 인생부터 거룩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니까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권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고 단지 사용권만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여 신자의 영육 간 전부를 사단으로부터 빼앗아 오셨지 않습니까? 작은 예수인 신자가 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당연히 예수님 당신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신자가 사용권을 주인의 뜻에 맞지 않게 행하면 때로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소유권과 사용권 둘 다 사단에게만 있는 불신자의 인생이 아무 징계 없이 형통해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단은 불신자를 간섭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하는 것만을 목표로 평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버려두어도 하나님께로는 절대 가지 않고 사단이 원하는 대로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음행 사건을 인간 윤리나 종교 계명을 범한 죄로 취급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 인생의 사용권을 잘못 행사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되찾은 자기 소유권을 침범한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신자가 자기 인생의 사용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길은 같이 피 값을 치르는 수뿐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그 배후의 사단과 싸워서 자기 삶을 통해 주인 되는 예수님의 이름만 불신자와 세상 앞에 높여드려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2,23) 지금 누가 당신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예수입니까? 당신입니까? 다른 말로 당신은 이미 예수가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소유하려고 추구하고 있는 중입니까?

8/14/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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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 / 박신 목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러할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많은 신자들의 믿음이 좀 더 성숙하지 못하고 항상 연약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나 예배나 성경공부 모임 등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에 비해 얼마나 높고 다른지 잘 모르거나 알아도 자꾸 잊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할 때에 우리의 계획과 뜻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소원과 계획을 두고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무엇이든 바라는 것과 해결 받고 싶은 일을 간구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되는 때와 방법에 관해 갖고 있는 우리의 기대 내지 고집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한 그대로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만의 방식과 시기에 응답되는 일이 훨씬 더 많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결과도 신자에게 더 유익이 되며 최선의 길임을 믿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응답되므로 신자가 기도한 것이 전혀 응답이 안 될 때도 있다는 것까지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무응답이 더 신자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아가 어떤 형태로 응답이 되던 아예 응답이 안 되든 하나님 당신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고 모든 사람으로 그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는 것을 확신하여 신자가 먼저 그 영광에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응답이 안 되더라도 그분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줄기보다 오히려 더 늘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당신의 완전한 뜻을 드러낸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세상의 어떤 일로도 그분과의 관계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성숙된 믿음의 표본이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의 금 신상 사건입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 극렬한 풀무 불에 타 죽게 되었어도 우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주시겠지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하나님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는 인식이 분명히 서 있어야만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숙되어집니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단순히 하나님이 더 크시고 다르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면 자칫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마저 등한히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차피 내 생각과 계획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텐데 뭐 가만있어도 되겠지” 식의 숙명론적 사고로 흐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잘못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게 된 온전한 믿음의 실체는 따로 있습니다. 본문 기사를 읽을 때에 그들이 왕에게 “하나님은 신자를 어떤 위험에서도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우상에게 절대 절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한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쉽게 간과해 버리는 더 중요한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우상 숭배는 우리로선 아예 논할 필요가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그럴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고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왕의 입만 아플 것입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요청을 한마디로 잘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요청인지라 묵살할 수는 없고 굳이 대답하자면 이러저러 합니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그들은 삶과 인생을 주관하시는 근거와 능력으로 하나님 외에는 생각도 아니 꿈도 못 꾸는 자들이었습니다. 단순하고도 온전하게 하나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믿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 있고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하는 것이라 절대 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는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에서도 구원해주시고 심지어 기적도 나타난다고 믿는 믿음으로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보다 높고 다르다는 것만 인정하는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 무슨 일에서든 무조건 옳고 바르며 완전하다는 것까지 철저하게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나아가 믿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온전하신 하나님에게 자기의 전부를, 심지어 생명마저 내어던진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에스더가 자기 동족의 구원이라는 일생일대의 일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아간 모습을 그들은 매일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비장한 각오나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시더라도 그 가운데 분명히 당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죽겠다는 믿음입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죽을 줄 알고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문을 열어 놓은 채로 하루 세 번씩,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6:10) 그도 왕 외에 어느 신에게도 절하지 말라는 금령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문제로 고민하고 염려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려고 단단히 각오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그분께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던지는 삶을 살고 있었고 또 그렇게 죽게 될 것이라 진정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금령을 내린 다리오 왕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왕의 조서를 어긴 그를 어쩔 수 없이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면서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평소에도 여호와 하나님 없는 다니엘의 삶이란 그 조차 상상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그와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를, 세상 최고 권력자인 자기의 명령과 자기들 신의 힘으로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신자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믿음의 실체는 “나의 항상 섬기는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평소 하나님과의 교제와 동행이 성실하고도 견고한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 싶으면 기적도 일어나게 하실 것임을 믿고 그렇게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그분과의 관계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삶에서 제거되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으므로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그 죽음으로 어떤 불만과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여 새로 조정해야 할 문제도 따로 없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죽이기에 그들은 담담히 죽을 것이며 또 당신의 영광 또한 한 치라도 손상될 리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 무슨 일에서나 절대로 선하고 옳으신 나의 하나님만으로 모시는 모습을 하나님과 불신자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온전하고도 진정한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8/1/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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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말라. / 박신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기독교의 구원을 얻는 데는 인간의 자격과 공적이 전혀 요구되지 않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너무 포괄적으로 정의(定意)되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 구속의 교리를 알아서 믿기만 하면 구원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를 감당하고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지성적 동의(awareness)와 이제 그 예수를 믿기로하 다짐하는 의지적 결단(acceptance)이 합친 정도를 두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성령의 간섭 없이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한 죄인이 자신의 지정의적 영역 내에서 단순히 생각으로 구원을 얻으려 결단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으려 결단한 것으로 구원이 된다면 그 믿음은 구원을 이뤄낸 인간의 공적이 되어버린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구원에는 하나님이 한 죄인의 영혼에 직접 간섭한 사건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믿으려고 결심한 것이 믿음이 아니라 이미 믿어지게 된 것을 알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전자는 영적 체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단순히 객관적으로 인정한 것이라면 후자는 그 진리가 자신의 주관적 체험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성령이 인간의 영을 먼저 변화시킨 일이 반드시 있은 뒤에 사람이 자신의 그 변화를 감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구분이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영의 변화라도 인간은 결국 지정의적 차원에서만 인식할 수 있기에 마치 스스로 믿은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구원이지만 주관적 체험을 통해 이뤄지므로 본인은 분명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나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품성이 갑자기 거룩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예수님, 인간, 인생에 대한 관점이 변화 이전과는 정반대가 됐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철저한 자각과 함께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대신 죽이셨다는 사실이 한 치의 의심 없이 믿어집니다. 또 다시 말하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사실을 믿으려 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를 알고 찾아오셨고 그분만이 베풀 수 있는 사랑으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어떤 형태로든 생생한 체험을 통해 확신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내가 그분을 영접하려 결단하기 이전에 그분이 나를 먼저 영접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사랑 앞에 온전히 항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새롭게 이어질 자신의 인생에 예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무 의미와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만이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궁극적인 능력이자 근원임을 알기에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예수님을 증거하며 성령님의 인도만 받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또 실제로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는 행동이 뒤따르게 됩니다.

요컨대 구원을 얻는 참 믿음에도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은 필연적으로 따르지만, 그 이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구속의 진리가 자신의 생생한 체험이 되어서 아무 의심 없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바꿔 말해 구원을 얻은 자는 믿어보려는 노력 내지 결단을 되풀이 할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아직도 내가 이 모양인데,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데, 내가 제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 또 하나님이 이런 나를 용납해 주실까?”라고 의심하거나 죄책감에 빠지는 것은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서만은 결코 뛰어난 영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인간적, 종교적 겸손이긴 해도 엄밀히 말해 하나님 앞에선 지독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도덕적 정화 노력 혹은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도 혹시 이런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완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과연 이런 나를 받아 주실까?”라는 의심은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용서하고 사랑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와야 온전한 믿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신기해야(amazing grace)만 믿음이 제대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것은 “예수님만이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때뿐만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정말로 연약하고 부패한 자라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님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기에 주님을 닮아가는 일도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인식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 결단과 실행이 아무리 고상하고 신령해도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는 것은 절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결코 신념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자연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믿으려 노력하고 결단하지 않지 않습니까? 자식은 부모가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무 교육을 받지 않고도 저절로 알기에 한 치의 의심 없이 부모를 믿고 그 뜻대로 행동하는 법입니다. 신자는 아이가 부모 곁에 있으면 안락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기에 부모 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합니다.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아무리 그런 노력에 찬 물을 끼얹는 것 같을지라도 새롭게 믿으려 노력할 필요 없이 주님의 십자가만 다시 바라보면 됩니다. 바울처럼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주님을 부모처럼 믿기만 해도 그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5/2/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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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가? / 박신 목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기독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양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과 연결해도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맞으려면 가난하고 소외되었다는 것이 복을 받는 전제가 되기에 하나님도 차별하는 분이 됩니다. 돈 많고 권세 있다고 해서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역차별을 받는 셈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우선 사람들의 기대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가 자기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 반해 힘든 일이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면 고난을 해결 받는 경우가 자주 있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더 좋아한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아예 그런 기대까지 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명제가 진리가 되려면 백이면 백 그렇게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항상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근거는 빈곤과 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그 분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실제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이뤄지니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여겨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지상 사역 동안에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보살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현실적 복을 더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목적이었는데 또 다시 말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쉽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을 더 주는 것이 진실이 되려면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구원 후에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지 않습니까? 본문의 결론도 “이는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복을 더 주시려 하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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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이란 반드시 자기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남이 한 것보다 우월할 때에 하는 법입니다. 단지 자기가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재벌 회장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랑한다면 바보입니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두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랑은 소유, 자질, 권세의 많음보다는 그것을 이뤄낸 주체의 형편에 달렸습니다. 예컨대 걷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아무 자랑거리가 안 돼지만 돌을 몇 달이나 앞둔 아기가 그러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인간이 자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반대로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이유도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빤한 이치를 왜 다시 언급해야만 하는가 하면 교회 안의 약한 자로 세상의 강한 자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신자의 강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신자의 자랑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밝힌 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로 부하고 권세 있게 만들어 세상에서 큰소리치게 만들어주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든 거룩하고 신령한 자로 바꿔주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것이나 지혜 있는 것이나,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천한 것이나 귀한 것이나, 멸시 받는 것이나 멸시하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주셨거나 허락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것은 세상 사람들끼리의 평가, 그것도 상대적 일시적 비교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세상 사람은 몰라도 신자가 자랑하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준거를 세상 사람의 잣대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 따르기에 세상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아니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비록 사람들 사이에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인데도 세상에 자랑할 수 있게끔 하나님께 그것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한다면 신자로서 엄청난 자가당착이지 않습니까? 신자와 불신자는 이미 그 인생의 평가 기준이 완전히 정반대로 나뉘어졌기에 서로 경쟁하고 비교해서 자랑할 사이가 아예 아닙니다.

나아가 본문의 근본 주제는 전도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구원 받는데 있어서 세상에서의 지혜와 문벌이 아무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음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귀하고 풍족하다고 느끼는 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이 부끄러워지는 이유도 자기들의 소유, 신분, 능력만 믿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 너무나 허망하고 실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유와 평강과 위로가 넘쳐서 그 인생이 거룩하고 의롭게 변하기 때문에 죄악과 사단에 묶여 있는 그들로선 부러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택하시고 이루시고 또 변화시키는 그분의 사역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혹시라도 구원에 자기 쪽의 원인과 조건이 있었다고 여겨서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자랑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모든 신자가 인생의 지표로 삼아야 할 유일한 기준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확고한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 자랑거리로 삼을 것들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뿐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자랑하는 인생을 살지 않고 오직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인간 세상의 경계선 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무한하며 거룩한 영역 안으로 이미 옮겨진 자입니다. 신자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우신 능력이 신자를 통해 얼마든지 세상으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 멸시 받는 신자라도 오히려 그들로 부끄럽게 만들 만큼 거룩하고 신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그분의 마음에 합하도록 서있기만 하면, 아니 더 이상 인생으로 자랑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분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면 됩니다. 여러분 인생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혹은 무엇을 자랑하려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소원합니까? 자신을 살찌우기를 간구합니까?

7/6/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독교 부흥의 유일한 길 / 박신 목사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우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1-24)



불신자들을 향해 복음을 열심히 전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반발만 살 때가 많습니다. 또 궂은일을 도와주고 어려운 형편을 위해 기도해주어도 잠시 고마워할 뿐 복음에 대해선 여전히 마음을 닫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구원 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다면 어차피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 내가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의심이 듭니다.

말하자면 정말 ‘전도의 미련한 것’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도가 미련하다는 것은 전도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즉 예정이 되어 있어 전도의 효력이 높지 않다든지, 특별한 테크닉 없이 무조건 교리를 선포하고 밀어붙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전도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이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진리에 부족 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내용이 있어서 아무리 전해도 미련스럽게 못 알아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은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율법대로 선하게 살려는 자들입니다. 헬라인은 무신론자이거나 스스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을 대표합니다. 비록 유대인과 헬라인 두 민족을 들었지만 사실은 전체 인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표적을 보이면 믿겠다는 자와 스스로 깨우쳐 지혜를 얻으면 믿겠다는 자로 나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 두 가지 요구 어디에도 부응하지 못하니까 전함을 받는 자의 입장에선 복음이 좋은 소식은커녕 도리어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신자가 전한 내용이 불신자들에게 전혀 미련하지 않게 여겨지고 쉽게 수긍하고 좋아하면 잘못된 것으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유대인이 구하는 표적과 헬라인이 구하는 지혜를 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이 구한 표적이 무엇이었습니까? 모세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이적으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자기들을 구해주었듯이 예수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는 해방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했듯이 손쉽게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당장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병이 낫고 사업이 흥하고 자식이 공부 잘하는 등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예수를 믿어보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복음이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즉 “무거운 짐을 진자는 예수께로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세상에서 형통합니다.”라고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련해 보이기는커녕 전혀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또 헬라인은 어떤 지혜를 구했습니까? “모든 아덴 사람과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21)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철학과 사상에만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간이 얼마든지 스스로 깨우쳐서 의롭고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기에 만약 그런 일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가르침이라도 받아들였습니다.  

헬라인들이라고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온성에 우상이 가득” 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있었기에 바울이 그들을 두고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평했습니다. 즉 조금이라도 그럴싸해 보이는 사상, 도덕, 종교는 그 종류를 불문하고 자기들이 수양하고 정진하는데 이용하려고 채택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기독교도 자신이 의로워지며 정신세계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많은 종교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복음을 산상수훈대로 살면 경건하게 되며 기독교의 박애주의 가치관을 실현하면 가장 고급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전하면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얼마든지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이 두 가지 요구를 맞춰 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표적 아니면 지혜 둘 중 하나를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 수는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너무 힘들기에 먹고 마시는 문제만 해결되면 한이 없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은 먹고 마시는 문제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소원입니다. 둘 다 인간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더 가치 있고 행복한 인생을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그런 요구를 완전히 부인합니다. 부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집습니다. 모든 인간이 과거나 현재에 전혀 선하지 않았으며 앞으로 선해질 가능성도 아예 제로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요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아니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 아예 죽은 지 나흘이니 지나 냄새나는 시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당시로선 가장 경건했던 유대인과 가장 지혜로웠던 헬라인을 구분할 것 없이 말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듣고도 아무리 지성적으로 심오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런 자들이 더 크게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에게 가장 먼저 배척을 당했습니까? 율법사와 공회원들과 제사장들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일반 서민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로마를 물리쳐 주리라는 기대가 무너지자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했던 군중들이 돌변하여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 쳤지 않습니까?  
    
인간은 지성인이든 학문이 없든 자유자든 노예든 부자든 거지든 구분 없이 스스로 잘난 맛에 사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최고가 되든지 최소한 마음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자신들이 선하고 얼마든지 더 경건해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더러 회칠한 무덤인지라 속에서 썩는 냄새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반발하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면, 본문대로 하자면 전도의 미련한 것이 행해지면 사람들이 내보이는 반응도 오직 두 가지 뿐입니다. 크게 반발하며 난리를 치든지 아니면 정말로 가슴에 찔려 자기라는 존재와 인생 전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뒤집어서 심각하게 고민해 보든지 말입니다. 단순히 어떤 새로운 종교의 사상과 교리를 배워 그대로 자기를 고쳐보겠다든지 아니면 절대자에게 빌어서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보겠다는 반응을 보이면,  예수님의 참 생명을 또 다른 하나의 종교 체계 내지 교리로 바꿔서 전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작금 주로 행해지는 전도 방식은 어떠합니까? 아니 강대상에서 전해지는 메시지의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불신자의 요구에 맞추어 주는 방식이자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내용, 즉 환난을 이겨내는 위로나 도덕적 가르침뿐입니다. 이 세대에 만연하는 죄를 지적하려 들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끌어내려지고 산상에서 지혜를 설교하거나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는 예수만 소개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전도해서 일단은 사람을 끌어 모은 후에 나중에 차츰 가르치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거짓 복음을 소개한 것으로 엄격히 말해 사기입니다. 표적과 지혜를 준다고 해서 교회에 나왔더니 피 묻은 십자가를 꺼내 놓으면 화들짝 놀라서 도망갈 것 아닙니까? 처음에 잘못 전한 것을 번복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형통만 주는 도우미나 경건한 도덕선생으로 둔갑해버렸습니다. 교회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들로 가득 찹니다.  

전도가 미련해지지 않고는 기독교가 다시 부흥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사람들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마15:19)라고 당당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 전도든 강대상에서 선포되든 기독교 진리는 반드시 불신자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사야합니다. 교회와 신자를 죽이기까지 핍박하려고 덤빌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당당하게 선언하라고 해서 신자들은 그렇지 않다든지 혹은 그렇지 않은 양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신자야말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자백을 항상 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믿음이 깊어질수록 더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은 자기 같은 그런 천하의 죄인에게도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당신의 보혈로 용서해 주셨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도저히 스스로는 자기 죄를 사죄, 변상할 방법이 이 세상에 없었고 심지어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는 것과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인생을 살 소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진리를 당당하게 선언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전도의 미련한 것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무조건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외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말고는 자기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임을 본인부터 확신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썩은 시체이자 사단의 노예라고 선포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요컨대 전함을 받은 자가 심각한 찔림을 얻거나 크게 반발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여야지, 수긍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잘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6/26/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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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을 따지지 말라. / 박신 목사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6-17)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牛耳讀經)라는 말대로 소는 글을 읽어 주어도 전혀 알아먹지 못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전도자가 가끔 느끼는 기분이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부정의문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러했다고 하며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중적 예언을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예언을 인용해 전하는 것을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반드시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귀에 경 읽는 것처럼 느껴져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 전도자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이 간섭하여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로 전도를 망설이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속뿐 아니라 개인 구원도 예정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차피 구원받도록 정해져 있다면 구태여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또 바울이 예정을 말해놓고 본문처럼 스스로 믿도록 전하라고 권하면 성경 말씀끼리도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정론을 더 확정지어 주는 내용입니다.

예정을 신학적 논리에 비춰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간단히 접근해 봅시다. 믿을 갖는 것이 혼자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거나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 관심 내지 호감을 갖고 성경과 관련 서적을 연구해 깨달아서 가능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주위에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있었고 또 그 들음이 계기가 되어 믿게 됩니다. 교리적 설명뿐 아니라 신자가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들음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믿도록 계기가 되어 준 사람의 입장에서 따지면 그에게도 똑 같이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죽 연결해 가면 전도자들의 고리가 생깁니다. 간단한 예로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서양인 선교사가 생명을 걸고 전했기 때문에 신자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 믿는 자들의 고리는 결국 열두 사도로 모아지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까지 연결됩니다. 따라서 예정되어 있기에 전도 안 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은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는 뜻과 같아집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십자가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들도 개인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열 두 사도는 없었고 또 지금 신자 된 나 자신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스스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1:15)로 인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라고 고백했습니다. 택정함을 입은 모든 세대의 신자들은 다음 세대의 예정된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해 영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신자가 전할수록 소귀에 경을 읽는 것 같은 체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예정된 사람을 미리 알면 그들만 찾아가 전하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세대의 예정자를 전세대의 신자에게 완전한 비밀로 해 놓았습니다.  

만약 구원이 예정된 자를 미리 알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절대 건설 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자꾸 어차피 구원받을 최종 숫자는 변함이 없지 않느냐라는 점에만 주목해 전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민족 전체가 택정함을 받았다고 자신했습니다.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을 맛보았고 거룩한 율법마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하기는커녕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우상숭배에까지 흘렀지 않습니까?

만약 택정함을 입은 자들을 미리 안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선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 유기(遺棄)자들이 볼 때는 그야말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지옥 간다면 선악을 분별해 시행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택함을 입은 자들을 죽이려 들 것 아닙니까? 택함을 입은 자도 어차피 구원 받는데 즐길 것 실컷 즐겨도 된다고 여길 것 아닙니까? 이래저래 죄악만 만연합니다. 죄악에서 구원해 주어야 할 복음이 거꾸로 죄악에 더 불을 지르는 격입니다. 자기들 자녀 중에도 구원 받을 자와 아닌 자로 나눠지면 부모가 제대로 그 자식들을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정되어 있지 않고 누구든 착하게 사는 자를 구원해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구원관이 논리적으로도 틀렸다는 이유를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만 지금 논하고 있는 관점에서만 봐도 전도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남의 구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합격점에 드느냐 못 드느냐 만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비유컨대 대학 입학시험을 앞둔 고3 들이 무한 경쟁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선하게 살겠다는 노력이 단순히 서로 구원의 가능성을 다투는 문제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길 필요도 없습니다. 남들에게 나쁜 짓만 안 하면 됩니다. 대신에 서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바쁩니다. 지금 불신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정되어 있으니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 의심하는 것은 이 땅에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 건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과 통합니다. 전도란 단순히 구원 받을 사람의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의 최종 숫자는 하나님이 정하며 구원 자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전도를 인간이 구원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대신에 전도는 이웃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건설하려는 소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 예수님과 동행 하는 은혜와 기쁨이 너무나 귀하고 좋기에 그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주저하는 신자는 그런 기쁨을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심지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예정이지 확정은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로 구원이 예정된 자의 구원을 확정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예정된 자는 죄악과 사단의 사슬에 묶여 괴롭고도 비참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자식도 예정 밖에 있을 수 있으니 전도하지 않고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예정된 자를 구태여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일이 결코 미련한 짓이 아닙니다. 전도란 하나님이 예정된 자들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만들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미리 맛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신자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 숫자를 내 힘으로 늘리는 것이 전도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끼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복음을 말로 또는 삶으로 남들이 듣고 보아 분명히 알게끔 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열두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예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우리 자식 세대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두고 보시겠습니까?

6/7/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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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키울 수 있는 확실한 비결 / 박신 목사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시77:7-11)



미국에 이민 와서 노년이 되도록 고생을 많이 한 혼자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갈수록 건강이 쇠약해가지만 은퇴 연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속 힘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이에 일을 하려면 건강이 따라가 주지 않아 너무 힘드시지 않느냐?”라고 물어봤습니다.

되돌아오는 대답이 “몸이 고달픈 것은 견딜 만한데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일을 마치고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텅 빈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싫습求? 문을 열기가 마치 지옥문에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였습니다. 종일 힘들었으니까 샤워하고 쉴 것을 생각하며 기쁘게 집에 들어갈 것 같지만 그 정반대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신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의 타격이 더 커다는 증거입니다. 본능에 따라 생존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게 되어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남들과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참 의미와 행복을 느끼게끔 창조되어졌기에 다른 사람과의 사랑이 결핍되면 그것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비록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외면을 당하는 경우가 생겨도 하나님이 함께 하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사랑은 오직 그분께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면 그 때야말로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 헤매게 됩니다. 최근 기독교 신자인 여자 연예인들이 우울증이 도져서 연달아 자살을 한 것이 예사로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 시편의 기자는 바로 그런 상황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나아질 조짐은 아예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갑니다.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토로했습니다. 인생사란 희비가 교차하게 마련이고 비록 환난 중에라도 다른 좋은 일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의심하고 불만을 가질 리는 없습니다. 좋은 일은 전혀 생기지 않고 환난만 겹쳐진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기자의 심경에 극적인 변환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환난이 끝나고 상황이 아주 호전된 것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혹시 그동안 비관적, 부정적이었던 자기 생각을 낙관적, 긍정적으로 의도적으로 바꾸었습니까? 아니면 아예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버렸습니까? 그래서 자족하여 마음이라도 편하게 된 것입니까? 그도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럼 신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을 한 것 같습니까? 우리의 흔한 생각과는 다릅니다. 즉 그 연약함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해 인간이 불완전하고 무능하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구원을 애절하게 기도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자기를 잊어버린 것 같이 여겨진 바로 그 생각이 연약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라고 한 것이 실제로는 의심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따져보았더니 주께서 그럴 리는 결코 없다는 부정의 뜻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의심이 들었지만 “내가 옛날 곧 ‘이전 해(old days, years)’를 생각하였아오며”(5절)라고 했듯이 그분께 받았던 은혜를 회상해 보았더니 잘못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버리신 것은 아닐까?”라고 하면 의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는 일시적은 몰라도 영원히 버리실 리 없다는 생각이 내포된 것입니다. 아무리 그분을 묵상해보아도,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겠는가? 인자하심이 길이 다할 수 있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심을 잊을 리 있겠는가? 노하심이 긍휼을 막을 정도로 그 긍휼에 한도가 있을 리 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는 결론밖에 내릴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신자를 향한 은혜가 ‘영원히’ 끊어진다는 것, ‘다시는’ 베풀지 않는다는 것, 인자가  ‘길이 다한다는’ 것, 은혜 베푸심을 ‘잊는다는’ 것, 긍휼이 ‘막힌다는’ 것 등은 하나님에게 전혀 해당 사항이 아닙니다. 비록 신자가 아무리 위급한 환난 중에 있어도 “지존자의 오른 손의 해”(the years of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에서 체험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해 내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정작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연약하다고 인정해야 할 부분은 능력의 측면이 아닙니다. 인간이 무능하고 불완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혀 흉이 되지 않는 사실이자 하나님도 잘 아십니다. “저는 할 수 없으니 주님이 다 해 주시옵소서!”가 믿음의 출발이자 기도의 본질인 것만은 분명하며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나 기도가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자녀가 매번 “아빠! 내가 힘이 없어 아무 일도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어! 나는 너무 연약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라고 아빠에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너무나 웃기는 일 아닙니까? 아기는 단순히 아빠에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만 하면 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대신에 아이는 “아빠가 왜 빨리 한 해주지?”라는 불평과 의심은 끊임없이 합니다.  

말하자면 아기는 능력이 부족해 아빠에게 의존하는 측면에선 전혀 연약하지 않고 너무나 잘합니다. 반면에 아빠의 진정성과 성의에 대해선 자주 의심합니다. 대부분의 신자의 믿음도 이와 똑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신자 또한 정작 연약하다고 고백할 부분도 하나님의 긍휼을 의심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신자를 잊지 않으십니다. 자식은 부모를 떠날 수 있어도 부모는 절대 자식을 포기하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시 말하건대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는 것조차 신자의 연약함이 아닙니다. 이 또한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아기가 약하고 무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듯이 신자가 하나님을 잊는 것은 거의 본성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자에게 정작 연약한 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잊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환난 중에 신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환난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기 이전에 자신의 이 연약함부터 극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긍휼을 그칠 리가 없다는 진리를 지난 세월의 은혜에 비춰서라도 확고하게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분의 나를 향한 긍휼은 그분의 나를 향한 분노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므로 그 긍휼을 막을 것은 이 세상에는 절대로 아무 것도 없다는 진리입니다.

연약함을 없애면 강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히들 믿음을 강하게 하려고 어떤 노력들을 합니까? 교회에서 하는 종교적 활동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합니다. 신자들은 기도나 말씀에 약하면 믿음이 약하다고 믿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자가 기도나 말씀에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믿음 자체가 약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 자체를 가장 약하게 만드는 연약한 부분을 개선시키면 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에 대한 의심과 불평이 생기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 약해짐은 그분의 긍휼에 제한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시작하지 기도나 말씀을 덜 보았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착각은 지금 닥친 환난에만 신경이 팔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때일수록 기도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묵상하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요구하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외면당하는 일이란, 특별히 신자에겐 너무나 비일비재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의 긍휼은 절대로 다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을 잊어버렸는지 의심이 들 때마저도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 아닙니까?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환난은 잠시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뿐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6,17)

지금 혹시 환난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영원히 당신을 잊겠습니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겠습니까?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겠습니까?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겠습니까? 은혜 베푸심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 중에 하나라도 답이 ‘예스’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얼마든지 믿지 않아도 심지어 불평해도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잠잠히 주만 바라보십시오. 혹시라도 그렇게 하기 힘드시면 하나님과 교통했던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최소한도 예수님의 십자가라도 바라보십시오. 과연 신자를 향한 그분의 긍휼에 끝이 있겠는가를 묵상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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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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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짜 부활을 믿는가? / 박신 목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마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2-24)



얼마 전 작고한 한국의 유명한 목사가 “부활절만 되면 괴로웠다”라고 고백한 것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설교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되어서야 부활이 믿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 지옥에 가는 형벌에서 면제 받는 것입니다. 죽은 이후 천국으로 가게 될 영원한 운명을 살아서부터 미리 보장 받는 것입니다. 오순절날 행한 베드로의 최초의 설교 초점이 오직 예수님의 부활에 모여졌듯이 기독교는 한 마디로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예의 목사님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면, 목사라는 직분과는 상관없이 사실은 기독교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생전에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인격적인 동행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와 하나님이 동행해 주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 자에게 부활이 임할 리도 없지 않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 활동을 한 교인일 수는, 그것도 스스로 칭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 된 신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사실상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잘못을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불신자더러 잘못한다고 야단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작 문제는 부활을 믿는 데도 잘못 믿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재림과 부활의 시기와 모습, 휴거, 대 환난, 적그리스도, 천년왕국 등에 관해 극단적인 견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이 확실하다면 실제 삶이 그에 걸맞게 바뀌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왕자로 태어난 자는 장차 왕이 될 것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될 때까지 두 가지 유형의 생활양식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왕이 될 것이니까 그저 편하게 놀고먹으려는, 심지어 왕이 되면 엄격한 규율 때문에 하지 못할 온갖 쾌락을 미리 맛보려는 왕자가 있습니다. 반면에 왕이 될 것에 대비해 열심히 배우고 훈련을 쌓는 왕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전자의 망나니 왕자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이 보장되다보니 죄에 대해 감각이 무뎌지거나 어차피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쾌락을 더 즐기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망나니 왕자는 왕이 된다는 궁극적 운명이 그 전의 왕자로서의 삶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오히려 나쁘게 작용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부활이 신자에게 그 이전의 삶 즉 이 땅에서의 생활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론 싸이더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기에 만일 그것을 믿는다면 인생관을 바꿀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활이 없다면  물질로 이뤄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부활이 있으면 이 땅과는 별도로 비물질로 이뤄진 눈에 안 보이는 전혀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이 땅에서 물질에만 의존하는 인생관을 가짐에 반하여 믿는 자의 그것은 다음 세상을 대비해 물질이 아닌 것에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죽은 후의 하나님 심판에 대비해 미리부터 선행을 많이 하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심판이 면제된 신자로선 그런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영생이 있다면 이 땅의 삶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갈 찰나에 불과합니다. 신자의 진짜 시민권과 영원한 장막은 하늘에 속해 있습니다. 신자의 진짜 인생은 천국에서 시작하기에 이 땅은 천국의 삶을 연습하고 훈련하는 실습장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신자의 이 땅의 삶은 왕자로서 사는 것이라면 천국에 가서야 왕으로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아니 본격적인 인생은 죽음 이후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왕이 될 것을 대비해서 살아야 합니다. 아니 왕이 되었다고 가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의 보상으로 천국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된 천국의 삶을 이 땅에 갖고 와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에 관한 인식이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것이 끝나면 천국의 보상이 기다린다는 차원에만 머뭅니다. 더 이상 눈물과 한숨이 없는 낙원에서 영원토록 편안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선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경우를 겪더라도 참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최후의 도피성에 불과해졌습니다. 마치 “결국 나중에 누가 잘 되나 두고 보자. 너희는 지옥 가지만 나는 천국 간다!” 식입니다. 불신자에 대한 그런 복수 심리까지는 없을지라도 최소한 천국에서 마음껏 한을 풀겠다는 기대 심리는 있습니다. 부활이 이 땅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혀 없고 부활로 이 땅의 삶을 보완시키리라 작정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이 땅에서 고난 가운데 힘들게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천국 삶의 훈련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에도 고난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천국은 죄만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천국은 물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곳입니다. 물질이 무한정으로 많아서 누구나 마음대로 사용가능하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돈 자체가 아예 없고 전혀 물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죄를 멀리하는 훈련뿐 아니라 물질 없이 사는 법도 배우고 연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질 자체를 아예 소유하지 말라든지 돈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땅에선 물질에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신자의 삶 자체를 좌우할 만큼 우선적 영향을 끼치는 인생을 살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추하고 더러운 것 하나 없이 진선미가 완벽하게 구현되며 참 사랑으로 섬기는 눈에 안 보이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신자는 그런 삶을 장래 일로 소망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방식대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미 소유하고 있는 천국 보화를 평생토록 갈고 닦아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가치를 자기가 속한 곳곳마다 심어서 천국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려준 불씨를 어떻게 하든 끄지 않고 천국까지 갖고 가는 것만이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그 작은 불씨를 천국의 불과 연결시켜 이 땅에 활활 번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신자는 물질만 목표로 사는, 즉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과 이 땅에서 물질을 다루는 면에선 당연히 뒤처지며 그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을 이미 소유했기에 물질에 의해 더 이상 기쁨과 만족이 좌우되지 않으므로 일용할 양식만으로 감사하며 만족하게 됩니다. 고달픈 현실이 육신적 불편은 될지언정 결코 영적인 고통으로 연장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이 땅의 고달픈 삶 자체가 천국을 기꺼이 실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 부활이 없으면 신자가 더욱 불쌍하지만 부활이 있으면 오히려 불신자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결국 썩어 없어질 것들뿐입니다. 이 세상이 인간에게, 특별히 신자에게 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동안의 필요만 공급할 뿐입니다. 죽을 때 남는 것은 집, 자동차, 현찰, 본인의 육신도 아닙니다. 오직 눈에 안 보이는 영혼뿐입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남지도 않을 것들에 영향을 받고 산다면 그만큼 헛된 일이 없습니다.

신자가 영생을 소유한 자처럼, 이미 부활을 입은 자처럼 살지 않는 한 세상 사람은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이미 확보된 부활이 이 땅의 인생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살아가는 방식, 사고하는 중심, 바라보는 목표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영원과 이어진, 아니 이미 영원한 존재가 된 자가 일시적인 가치에 영향 받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진짜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단지 소망하는 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부활을 실현하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물질에 좌우되는 인생들이, 사실은 때로는 그러는 내 자신이 진정 불쌍하게 보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의 노목사님처럼 교인은 되었어도 아직 부활을 진짜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표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2/13/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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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을 따지지 말라. / 박신 목사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6-17)



속담에 “소귀에 경 읽기”(牛耳讀經)라는 말대로 소는 글을 읽어 주어도 전혀 알아먹지 못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전도자가 가끔 느끼는 기분이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부정의문문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러했다고 하며 앞으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중적 예언을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예언을 인용해 전하는 것을 믿기 힘들지만 그래도 믿음은 들음에서 나니까 반드시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귀에 경 읽는 것처럼 느껴져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 전도자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님이 간섭하여 구원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로 전도를 망설이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속뿐 아니라 개인 구원도 예정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어떤 사람이 어차피 구원받도록 정해져 있다면 구태여 전도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또 바울이 예정을 말해놓고 본문처럼 스스로 믿도록 전하라고 권하면 성경 말씀끼리도 서로 상충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예정론을 더 확정지어 주는 내용입니다.

예정을 신학적 논리에 비춰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간단히 접근해 봅시다. 믿을 갖는 것이 혼자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나거나 스스로 예수님에 대해 관심 내지 호감을 갖고 성경과 관련 서적을 연구해 깨달아서 가능한 일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주위에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이 있었고 또 그 들음이 계기가 되어 믿게 됩니다. 교리적 설명뿐 아니라 신자가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도 들음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을 믿도록 계기가 되어 준 사람의 입장에서 따지면 그에게도 똑 같이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꾸 죽 연결해 가면 전도자들의 고리가 생깁니다. 간단한 예로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서양인 선교사가 생명을 걸고 전했기 때문에 신자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 믿는 자들의 고리는 결국 열두 사도로 모아지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에게까지 연결됩니다. 따라서 예정되어 있기에 전도 안 해도 되지 않느냐는 말은 예수님이 구태여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는 뜻과 같아집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십자가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열두 사도들도 개인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열 두 사도는 없었고 또 지금 신자 된 나 자신도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스스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갈1:15)로 인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라고 고백했습니다. 택정함을 입은 모든 세대의 신자들은 다음 세대의 예정된 믿음의 자녀들을 위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해 영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신자가 전할수록 소귀에 경을 읽는 것 같은 체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예정된 사람을 미리 알면 그들만 찾아가 전하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세대의 예정자를 전세대의 신자에게 완전한 비밀로 해 놓았습니다.  

만약 구원이 예정된 자를 미리 알면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이 절대 건설 될 수 없습니다. 신자들은 자꾸 어차피 구원받을 최종 숫자는 변함이 없지 않느냐라는 점에만 주목해 전도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민족 전체가 택정함을 받았다고 자신했습니다.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을 맛보았고 거룩한 율법마저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하기는커녕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우상숭배에까지 흘렀지 않습니까?

만약 택정함을 입은 자들을 미리 안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선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 유기(遺棄)자들이 볼 때는 그야말로 불공평한 하나님이 됩니다.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지옥 간다면 선악을 분별해 시행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택함을 입은 자들을 죽이려 들 것 아닙니까? 택함을 입은 자도 어차피 구원 받는데 즐길 것 실컷 즐겨도 된다고 여길 것 아닙니까? 이래저래 죄악만 만연합니다. 죄악에서 구원해 주어야 할 복음이 거꾸로 죄악에 더 불을 지르는 격입니다. 자기들 자녀 중에도 구원 받을 자와 아닌 자로 나눠지면 부모가 제대로 그 자식들을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정되어 있지 않고 누구든 착하게 사는 자를 구원해 준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 구원관이 논리적으로도 틀렸다는 이유를 수도 없이 들 수 있습니다만 지금 논하고 있는 관점에서만 봐도 전도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남의 구원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본인이 하나님의 합격점에 드느냐 못 드느냐 만이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비유컨대 대학 입학시험을 앞둔 고3 들이 무한 경쟁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선하게 살겠다는 노력이 단순히 서로 구원의 가능성을 다투는 문제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자연히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길 필요도 없습니다. 남들에게 나쁜 짓만 안 하면 됩니다. 대신에 서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바쁩니다. 지금 불신자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따라서 예정되어 있으니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 의심하는 것은 이 땅에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 건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뜻과 통합니다. 전도란 단순히 구원 받을 사람의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의 최종 숫자는 하나님이 정하며 구원 자체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전도를 인간이 구원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대신에 전도는 이웃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부터 건설하려는 소망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후 예수님과 동행 하는 은혜와 기쁨이 너무나 귀하고 좋기에 그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주저하는 신자는 그런 기쁨을 지금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심지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았는지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예정이지 확정은 아닙니다. 구원 받을 자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로 구원이 예정된 자의 구원을 확정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함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예정된 자는 죄악과 사단의 사슬에 묶여 괴롭고도 비참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자식도 예정 밖에 있을 수 있으니 전도하지 않고 그냥 두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예정된 자를 구태여 찾아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일이 결코 미련한 짓이 아닙니다. 전도란 하나님이 예정된 자들을 하나의 고리로 연결시키는 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를 만들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미리 맛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의 신자는 바로 그 일을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 숫자를 내 힘으로 늘리는 것이 전도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끼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복음을 말로 또는 삶으로 남들이 듣고 보아 분명히 알게끔 전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열두 사도들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아무런 소망 없이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예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우리 자식 세대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두고 보시겠습니까?

6/7/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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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겉과 속이 다른 하나님 / 박신 목사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16:59,60)



기독교는 역설(paradox)의 종교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낮아져야 높아지고, 주어야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언뜻 진리와 반대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잘 따져보면 진리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에 반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전혀 상충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아우르면서도 초월한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것과 다르며 높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그런 역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먼저 극도로 타락한 예루살렘에 대해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했습니다. 심지어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가증스럽게 음란하고 부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급기야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에게 행한 대로 하나님도 똑 같이 그들에게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행했습니까? 언약을 배반했습니다. 그럼 하나님도 언약을 취소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어서 오히려 그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뱉은 말을 행하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분노를 주체 못해 저주해 놓고선 다시 그 말을 주워 담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간과는 절대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자신됨이 상황과 사람에 따라 변하지 않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것도 영원토록 그렇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식과 이성의 수준에 맞추어 말한 것입니다.

비유컨대 어린 자녀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네가 한 번만 더 똑같은 잘못을 범하면 다시는 과자를 사주지 않겠다.”고 야단을 쳐도 실제로 그러는 부모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자기 잘못에 대해 가장 실감나게 느끼도록 표현한 것뿐이지. 아빠의 아이를 향한 마음이 변한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아빠는 또 야단으로 치지 않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하면 내가 과자를 더 많이 사줄께”라고 아이와 언약을 맺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따져 보니까 구태여 역설이 아닌 것같이 여겨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끼리 맺는 언약과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언약에는 아주 큰 역설적 차이가 있습니다. 아빠와 아이의 경우는 반드시 아이가 동일한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물론 아이가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아빠도 그런 줄 알지만 그래도 아이의 행동에 따라 상벌을 적절하게 조절합니다.

반면에 본문에는 그런 식의 조건은 없고 하나님이 언약을 다시 세우겠다고만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은 도무지 동등한 위치, 자격, 신분에서 상호 조건을 내세울만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인간은 그분 앞에 연약하며 어리석고 무능한 죄인일 뿐이며. 대신에 그분은 인간에게 전지전능하시며 긍휼에 한이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일 뿐입니다. 서로 조건을 걸고 그 이행여부에 따라 상벌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예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어렸을 때에” 언약을 세웠다고 말한 까닭입니다. 육신적 나이가 어렸을 때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닙니다. 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라는 해석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아이가 어렸을 때에 부모가 유언장을 기록해 놓는 경우와도 다른 것입니다. 아이가 크면 유언에 규정된 복잡하고 구체적인 법적 용어와 절차를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조건대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맺은 언약은 세상에 유대인이라고는 아브라함 한 명만 있을 때에는 그 내용조차 잘 모르고 있다가 민족이 창성해져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생기면 잘 알고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되는 그런 성질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항상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은 아무리 해도 그 언약을 완전히 알아서 제대로 지킬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조건 없이 언약 안에 일방적 은혜만 베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먼저 택하셔서 말입니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이해하고 지킬 수 있는 믿음도 하나님이 키워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할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은혜만을 제대로 헤아리는 것뿐입니다.

헤아리라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세밀하게 따져서 숙지하고 실천하라는 차원까지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그런 일방적인 은혜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항상 그 은혜 안에만 머물러 있기를 소원하여 다시는 그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기만 하면 됩니다.  

아이와 아빠의 언약으로 비유하자면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아이가 아빠를 두고 내 아빠가 아니라고 하면서 남의 집의 아빠를 찾아가지만 않아도 과자는 사준다는 것입니다. 인간 아빠는 그만한 은혜를 베풀만한 품성과 능력이 없어 그런 언약을 맺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스라엘로 언약을 지킬 수 있도록 환경과 사건 가운데 인도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요컨대 이방신이나 우상을 숭배하지 않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주위 여건이 아무리 황무하게 변하고 고달픈 일들이 계속 일어나더라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면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부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더 찾게 되는 것이 상식인데 유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상식대로 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상식으로선 이룰 수 없는 비상한 목적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도 하나님이 자기들을 당신의 의와 거룩으로 이끌고 가시려 한다는 것은 꼭 언약이 아니더라도 상식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관심은 그것보다는 오직 이 땅의 물질과 향락에만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어떤 민족도 받지 못한, 아니 상상도 못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은혜를 넘치도록 받은 이스라엘이 어찌 그리 쉽게 언약을 버릴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이 또한 하나님이 언약을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조건 없이 맺은 언약이라 자기들과는 크게 상관이 없고 안 지켜도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언약 백성인 것처럼 했어도 속으로는 딴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애굽의 노예 생활이 비참하고 고달파 여호와께 구원해달라고 빌었지만,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으로 구원해주자마자 바로 본색을 드러냈지 않습니까? 애굽에선 그래도 부추와 고기를 먹을 수 있었지만 광야에선 맛도 없는 만나뿐이라고 불평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떼를 쓰지 않았습니까? 언제 어디서든 자기 요구대로만 해주면 가나안이든 애굽이든 관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더러 자기들 가는 길로 따라오라고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인간이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선을 떠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세대의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제발 당신 앞에서만이라도 위선을 벗고 속에 있는 그대로 겉으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 소원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완성되었지 않습니까? 또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심중을 꿰뚫어 보실 뿐만 아니라 번듯한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애통하고 상한 심령의 제사를 가장 기쁘게 받으시지 않습니까?

위선적인 인간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은 당연히 역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나중에 진짜 당신의 속을 보여야 인간도 자기 심중이 그 동안에 그대로 드러났음을 마침내 깨닫고 다음부터라도 그 속을 제대로 드러낼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인간이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당신의 은혜 가운데에 머물기만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상벌을 주고 인간의 상식이 이해되는 대로 세상을 운행하시면 인간은 누구나 상벌이 아쉽고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는 목적만으로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굴복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소원하는 것이 하나님 그분인지 그분이 주는 보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도 인간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로 돌아가고 인간으로 오직 현실의 보상만 찾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루살렘의 가증스런 반역에도 언약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더 굳건하게 세우겠다는 역설을 베푼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내가 네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63절) 역설로 대해야만 네가 놀라고 부끄러워져서 또 다시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접을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항상 최종 목적지가 다른 것이 문제가 되지 그 능력과 지혜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는 길만 바르면, 즉 하나님 안에만 있으면 인간이 앞으로 엎드러지든 뒤로 넘어지든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분의 능력과 지혜만 얻으려고 그분 앞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면을 벗길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역설이 문자 그대로 다 이루어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뿐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당신의 생명마저 죽이는 역설 앞에 감히 인간이 어찌 위선을 떨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거나 또 그렇게 하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스스로 진노의 불꽃을 자기 머리에 쌓고 있는 짓입니다.

지금 불신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신자인 우리가 이전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스라엘처럼 옛날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뭄에 콩 나듯 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너무나 자주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세워주실 여지마저 우리 스스로 줄여 나가는 것은 아닐까요?

7/5/2007
박 신(http://www.nosuchjesus.com)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주문을 외우는 목사님들 / 박신 목사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7,38)


동네 어린이들이 모이면 매번 싸우는 논제가 있습니다. 누구 아버지가 더 세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는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들 상상력의 범위 안에서 아빠들이 다들 갑자기 슈퍼맨이 됩니다. 예컨대 우리 아빠는 나에게 장난감 권총을 사줄 수 있다고 시작하면 다른 아이들이 게임기, 컴퓨터, 자전거, 식으로 더 큰 것으로 올라가다가 마지막에는 자동차, 즉 최고 큰 것을 말한 자가 이깁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럼 실제로 증명해 보라고 물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그러겠다고 큰 소리 치고는 집으로 돌아와 아빠를 조릅니다. 그러나 아빠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어떻게 해 줄 생각을 전혀 않습니다. 아이 생각에는 분명히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실력이 있는 데도 안 그러니 이해가 안 되면서 화도 치밉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고 수태고지를 했습니다. 정혼만 했지 남자를 모르는 처녀인 마리아로선 당연히 당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가 성령의 권능이 네게 임할 것이며 또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불임의 몸이지만 같은 권능으로 아들을 가진 것을 보고 믿으라고 권면하자 그녀는 수긍하고 그 고지를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마리아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 중에 좀 이상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신 그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은 것은 할 수는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식 아니 상식으로 불신자마저 압니다. 어쩌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불신자가 신자보다 더 믿음이 나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온갖 차지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하나님께 빌어봐야 다 주지는, 특별히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잘 주지 않는다고 이미 알고 있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자는 무엇이든 해주지 않으면 당장 하나님을 의심하고 짜증내며 원망마저 합니다. 아버지가 해줄 수는 있지만 당신이 약속한 것이 아니라 안 해주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동네에서 폼이나 잡으려는 아이와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마리아도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분명 이뤄질 줄 믿었지 말씀하지 않은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구세주를 자기 몸에서 태어나게 해야지 스스로 계획을 세워서 상상 임신하듯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자기를 지목하였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분명한 뜻을 확신하여 그 뜻에 자기를 바쳤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이뤄준다는 것이 신자는 그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말 한마디로 도깨비 방망이 뚝딱하듯 해치워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선 손 안대고 코 풀려고 무조건 믿고 보자는 맹신이나, 자기 소원을 삼십 배 육십 배 대박으로 키워서 쌓을 곳이 없도록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는 사행심을 두고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전부를 걸고 믿으라고 하니까 간혹 죽기 살기로 믿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전부를 하나님의 일이 이뤄지는 데 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믿음을 키우는 것에만 겁니다. 그래서 잘 안 믿어지는데도 억지로 믿어 보려고 용쓰고 기도할 때도 “믿~?~니다!”만 연발합니다. 떡 줄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자기 스스로 정한 꿈이 이뤄질 때까지 젖 먹던 힘까지 몽땅 동원해 목숨 걸고 믿어보려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고백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이뤄주신다는 것을 믿~?~니다!”라는 단순한 뜻이 결코 아닙니다. 처녀에게 동정녀 임신을 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도 도무지 믿지 못하고 심지어 남편과 부모마저 의심할 일이 이제 곧 일어날 것이라는 통보였습니다. 수태 기간 십 개월을 세상의 의심과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며 심하면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또 만약 큰 일이 없이 넘어간다 하더라도 평생을 두고 남편 요셉과 그 일로 서로 의심하거나 다투지 않고 모든 것을 양보하고 인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두고 “주의 계집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말로 그런 힘든 일들이, 최악의 경우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내게” 일어날지라도 담담히 받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생명을 맞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이 내게 일어나서 세상에서 왕따가 되던 나아가 죽게 될지라도 하나님이 꼭 이루셔야 할 일이고 또 그 일에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다면 그대로 하시옵소서. 저는 그 일에 쓰임 받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기쁨이며 죽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그럼에도 그는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우리 산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빌3:8,9 고후4:11)고 담대하게 선포했지 않습니까?  


신자는 자기 믿음에 전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에 걸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하나님께 직접 받은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이뤄지는 일에 자기의 모두를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받은 말씀도 없으면서 하나님은 무엇이든 이뤄주신다는 믿음만 어떻게 하든 키우는 종교적 수행만 평생에 걸쳐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안 믿어지거나 하나님도 안 들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자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불신자의 생각과 사실 같지 않습니까? 아니 불신자는 현명하게 미리 포기라도 했으니 신자가 더 못한 것 아닙니까?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외쳐야할 신앙상의 모토는 오직 하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가 아닙니다.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왜 신자가 마치 주문이나 염불 외우듯이 외워야 합니까? 그것도 대 예배 시간에 믿음이 좋다는 대표 기도하는 분들로부터 목사님까지 말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여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완전히 바보 병신이 되는 것쯤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나 기꺼이 감당하겠습니다.”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에게 어떻게 주문했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래도 따르겠느냐?)”(마8:20) 그런데 아기 예수는 어디에서 탄생했습니까?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7)


예수님은 날 때부터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당신이 하실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그 엄마도 세상에서 왕따가 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그 아들 예수는 아예 인류 역사상 최고 왕따의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를 따르는 신자는 동네 아이들 중에서 최고 슈퍼맨을 아버지로 모신 골목대장처럼 되려고만 합니다.


아기 때부터 왕따였던 예수님을 그래도 동방박사와 들판의 목동들은 찾아와서 경배했습니다. 왜 그들만 그렇게 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이루신 것을 보기 원했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최초의 성탄절을 참 기쁨과 평강으로 누린 최초의 영광스런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적 신세 또한 슈퍼맨이 아니라 별로 볼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전 존재, 삶, 일생 더 정확하게는 생명을 걸만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이 있습니까? 모두 다 이방의 오지에 가서 선교사가 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의사는 의술로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고 가난한 사람을 고쳐주고, 사업가는 정당하게 돈을 벌어 풍성한 자비로 쓰며, 학자는 인류의 고통을 덜어주는 연구를 하고 또 그럴 후진을 올바르게 양성하며, 구멍가게 주인은 신용과 친절로 동네 사람을 섬기며 팔다 남은 빵으로 걸인과 노인들을 구제하며, 심지어 병실에만 누워 있는 중환자라도 주위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오직 예수님이 아기 때부터 왕따로 와서 머리 둘 곳이 없이 33년을 지내다 마지막도 십자가에서 천하의 왕따로 죽으신 뜻을 증거하라는 말씀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왕따가 되어 심지어 목숨이 날아가도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 아니 헌신하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죽자 살자 믿어서 안락하고 편하게 머리 둘 곳을 찾고 있습니까? 제대로 머리 둘 곳조차 없어도 예수의 생명만 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면 평강하고 안락해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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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2006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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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신자들 / 박신 목사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30:11,12)


영토와 통상 분쟁 ?왕조들 간의 해묵은 반목으로 17세기 전반부에 30년간이나 전쟁의 광풍이 유럽 전역에 몰아쳤습니다. 그 여파로 기아와 흑사병이 만연하여 일반인마저 수도 없이 죽었습니다. 독일의 아이렌 버그 지역의 마틴 린칼트라는 목사는 하루에 장례식을 50번을 치른 적도 있고 어떤 때는 자기 가족의 장례식도 집전해야 했습니다. 


그런 생지옥 가운데 그분은 66개의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 중에 “다 감사드리세 . 온 마음을 주께 바치세.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이 기뻐하네. 예로부터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지금부터 영원토록.”이라는 시도 있었습니다. 도무지 감사할 여건이 되지 않는 전쟁의 와중에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고 한없는 사랑을 영원토록 받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편의 표현대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었고 상복은 입었지만 찬양의 옷을 덧입었습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이 30 년간이나 끌었습니다. 도대체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몰랐을 것입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끝이 안 보이는 암흑의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수명을 감안해 보면 거의 전 평생을 절망 가운데 보낸 셈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찬양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고난이 자꾸 겹치고 호전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 흔히들 어떻게 반응합니까? 처음에는 당연히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도 고난이 자꾸 겹치면 기도와 동시에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 놓게 됩니다. 그런데도 아무 진전이 없으면 이제는 자기의 잘못을 고치거나 뭔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테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구출해달라는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금식, 봉사, 헌금, 성경공부, 등등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하나님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의지적으로 감사하고 열심히 찬양도 해보지만 잠시 그 때뿐 변화가 없으면 서서히 체념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믿음 자체를 포기하려니 뭔가 불안해서 교회 활동은 여전히 성실하게 참석은 하지만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때로는 하시니까 이런 고난을 끝없이 주는가보다 단정지어버립니다. 믿음은 이제 허울만 남았고 아무 힘을 발휘 못합니다.


명목상으로는 신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산소 호흡기에만 의존하는 식물 신자가 되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 말씀 듣는 것이 유일한 신앙 활동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실제로는 고난을 외면, 부인, 망각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예컨대 30 년간이나 고난이 계속되었기에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돌리지 않는 것만도 그나마 잘하는 일인 양 생각합니다.


예의 린칼트 목사의 경우는 그런 흑암 중에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 좋은 일에만 감사하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감사가 절로 되는 일에 감사 못할 신자는, 아니 불신자도 없습니다.  

  

같은 독일 목사로 종교 개혁을 이룬 마르틴 루터에게 있었던 유명한 일화입니다. 카토릭 당국과 홀로 맞서 싸우느라 온갖 음해와 핍박에 시달려 오랫동안 염려와 낙심 속에 휩싸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누가 죽었느냐?” 물었습니다. 아내는 곧바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가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아내가 “지금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처럼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곧 바로 자기 잘못을 깨닫고 다시 개혁의 길에 매진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신자는 완전히 낙망할 수 없으며 또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며 현실에서 실패하여 극도의 실망에 빠질 수는 있어도 완전한 좌절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좌절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범사에 감사는 여전히 잘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이 재앙을 축복으로 바꿔주실 것을 믿기에 그나마 인내는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많은 신자들이 “감사거리에 대해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 당신에 대해 감사하라”는 권면도 잘 알고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30년간이나 침묵하고 있는 것 같다면 도무지 하나님 당신에 대해 그것도 범사에 감사하기는 정말로 힘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해결책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아도 침묵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자라는 지성과 연약한 영성으로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커튼 뒤에서 눈에 안 보이게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겠지 믿고 감사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내이지 실제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이 침묵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반드시 찾아내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고난을 인간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꾸어 보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고난을 당하면 인간은 외면, 부인, 망각, 잘해야 인내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관점에선 끝없는 고난이라도 신자를 향한 끝없는 사랑, 자비, 긍휼이며 최소한도 그분의 주권적 섭리입니다.


온 사방에 질병과 죽음뿐이었던 린칼트 목사가 어떻게 찬양할 수 있었겠습니까? 땅에서 절망이 넘치면 필연적으로 남는 것이라고는 하늘에서의 소망뿐입니다. 사람이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죽음의 공포 앞에 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난 생애를 회개하고 죽음 이후를 생각하며 영원을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회귀하게 됩니다.


특별히 모든 사람이 똑 같이 죽게 되었을 때에는 그동안 서로 쌓았던 원망과 시기와 죄악들을 자연히 용서 내지 용납해 주게 됩니다. 침몰해가는 여객선에 함께 탄 승객들 간에는 용서와 긍휼이, 최소한도 동일한 고난을 나누고 있다는 동료애라도 나타날 것 아니겠습니까? 온 사방에서 육신은 죽어나갈지라도 영혼의 생명은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루터 목사의 경우에도 자신의 대적을 언젠가는 하나님이 막아주시겠지, 설령 순교하더라도 천국에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다시 힘을 얻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니까 자기마저 주저앉으면 이제 겨우 작은 불씨가 붙기 시작한 개혁이 틀림없이 사그라질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 있는 큰일을 자기가 중단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종교개혁이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솔직히 감사거리가 생겨야 감사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적인 인간 습성입니다. 두 마틴 목사님들은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도 실제로 감사할 거리를 찾았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며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또 그 일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범사를 바라 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따져 볼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범사를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감사가 잘 안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세상에 눈이 가려 하나님 쪽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 탐욕이 있고 세속의 쾌락과 죄악을 밝힌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를 안 짓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소망하는데도 하나님의 일을 잘 보지 못하고 있으니 갑갑합니다.


이제 점점 정답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데 사실 그 답도 간단합니다. 신자가 죄 안 짓고 선한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고 또 하나님은 신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가 그런 쪽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그분의 근본적이고도 궁극적인 일을 잘 발견할 수 없어 끝까지 침묵하는 하나님으로만 비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 마틴 목사가 고난 가운데 발견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나라에 당신의 백성들로 채워서 당신에게 세세토록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돌려주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처한 환경과 일어나는 범사가 오직 그 목적에 바탕을 두고 섭리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당연히 이 땅의 좋은 것도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필요하다면 끝없는 고난도 주십니다. 


감사거리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감사하게 되는 이유는 그 일이 자기에게는 진짜 소중하고 귀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 안 짓고 선해지며 하나님에게서 은혜와 자비를 받는 것도 신자에겐 아주 소중하고 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백성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들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게 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발견하여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더 큰, 아니 진정한 자비이자 은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섭리를 모든 일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인데 어찌 다른 데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복을 받는 일 외에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면 매사에 감사할 수 없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46)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두 말씀을 합쳐서 해석하면,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을 발견하면 당연히 그 마음에 기쁨이 오는데 하나님의 보물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기 소유를 다 팔더라도 차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환난 중에라도 정말 귀하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과 섭리를 발견한 자는 환난이 끝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범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서 하나님의 보물을 발견한 자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범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진정한 감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합니다.


신자가 끝없는 환난 중에 염려와 실망에만 끝없이 빠져 있다면 하나님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외면, 부인, 망각 혹은 인내만 하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억지로 감사하려고 노력해 비슷하게 감사의 흉내를 내고 있으니 믿음이 좋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신자는 침묵하는 것 같아도 일하고 있는 하나님을 범사에서 특별히 환난 중에 발견하고 반드시 감사할 거리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과연 신자에게가 아니라 그분에게 가장 소중하고 귀한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묵상해야 하며 그 일을 신자도 정말 그렇게 여기는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일어나는 범사가 오직 그 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겸비하게 인정하고 자신이 그 일을 기꺼이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장단을 맞춘 자는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도 찬양을 부르며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마음에 장단을 맞춘 자는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진정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는 실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믿음이 좋은 자로 칭송을 받아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죽여서 상복을 입고 있는 신자도 사람들 눈에는 얼마든지 찬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비췰 수 있다는 것입니다.

 

http://www.nosuchjesus.com


 

12/21/2006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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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은사는 중지 되었는가? (Q&A) / 박신 목사

[질문]


오늘 대형 서점에서 기독교 서적을 보다가 우연히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서점에 앉아서 책을 속독으로 보았습니다. 옥한흠 목사님 아들 옥성호 형제님께서 쓴 책인데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와 비슷한 색깔의 책으로 현재 교인들이 하고 있는 방언에 대한 반박 글 입니다.

성경의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고린도 전서 12-14장을 상세히 얘기하고 있는데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혹시 목사님께서 이 책을 접하실 수 있으시다면 의견을 나눠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얘기하시는 방언과는 비슷한 부분도, 그리고 분명히 다른 점도 있습니다.

[답변]

먼저 방언에 관한 제 개인적인 의견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 저는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지만 이미 다른 은사를 많이 받았다고 믿기에 막연히 방언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도 절실하게 소원하지는 않습니다.
- 방언에 관해선 성경(고전12-14장)에 기록된 그대로만 이해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보며 그 이유와 근거는 아래에서 다시 설명할 것입니다.
- 방언중지론자의 의견 중에 일부 동의하는 부분도 꽤 있습니다. 예컨대 오순절의 방언은 오늘날 이해하고 시행되는 방언과 달리 외국어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 반면에 방언지속론자의 의견 중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컨대 방언을 받아야만 구원 받은 것이라든지, 성령 받아 구원을 얻었을지라도 이차로 방언을 받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이 되지 못한다는 것 등입니다.  
- 방언 은사는 중지되지 않았지만 그 은사를 실현하는 데에는 필히 성경 지침에 따라야 하며 특별히 은사자는 더욱 겸손하게 그리스도만 증거하여 교회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 따라서 교회에서 방언 외에도 각종 은사에 대해 잘 가르쳐서 교인들로 은사를 받고 싶은, 사실은 이미 받은 은사를 발견하고 키워서 실현하고 싶은 소망을 생기게 해주어야 합니다.
- 그러나 방언을 훈련해서 받는다든지, 어떤 특정한 방법대로 따르면 방언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는 반대합니다.
- 대신에 한 개인이 방언을 받으려 하면 그 전후에 성령 은사에 관한 성경 말씀을 철저하게 가르쳐서 부작용과 폐해를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 결국 방언을 포함해 은사는 구원 받은 신자가 그 믿음을 성숙시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고 각자에게 나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소중히 가꾸고 적극적으로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위해 실현해야 합니다. 반면에 개인적 이득과 욕심을 위한다면 사용하지 않아야할 뿐 아니라 그 배경에 사단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아래의 답변은 순전히 이런 중립적 입장에서 말씀드린다는 뜻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중지되었는지 지금도 계속 지속될 수 있는지에 관해선 지금껏 수 없는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또 양쪽 진영 의견들 모두가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논리적 설득력을 갖고 전개되고 있기에 언뜻 다 그럴듯해 보입니다. 이미 수없이 논의된 내용과 같거나 비슷한 이유를 또 다시 들어봐야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저만의 특별한 이유를 먼저 말씀드린 후에, 옥 형제의 주장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방언 은사 찬성의 현실적 근거

소제목을 현실적 근거라고 붙였듯이 실제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성경적 근거를 살피기 이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유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1.1. 신실한 크리스천의 방언

무엇보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실제로 방언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방언을 구원의 표식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영적 우월성으로 인식해 주위 사람에게 자랑하지도 않고, 자기 개인의 유익과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뜻대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비밀히 대화하며 교회의, 여기선 조직체 개별 교회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뜻이 더 강함, 덕을 세우려 합니다. 주위 사람들과 교회의 영적으로 피폐한 모습을 안타까이 여기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영적으로 위급한 일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지 못하고 온갖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이들 신실한 형제들이 하고 있는 방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 모두가 악령의 방언입니까? 또 그럼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입니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사단에 넘어간 것입니까? 그럼 사단이 성도더러 새벽기도마다 어려운 자와 교회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도록 시킨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매일 한두 시간씩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도 많은데 구원 받은 신자를 사단이 그렇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No.” 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나머지 가능성은 정신적 장애가 있거나, 감정적 절정(ecstasy)에 이르렀거나, 단순히 어떤 초자연적 기운이 작동했거나, 진짜로 혀를 열심히 굴리는 훈련의 결과로 하는 기계적 언어거나, 심지어 뇌의 손상이 있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일부 그런 근거에서 방언하는 일도 분명 있겠지만 방언하는 신자 모두에게 다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또 열거한 그런 이유들은 방언하는 자는 어떤 면에서건 부족하고 심지어 장애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일종의 정신병자 즉, 증상이 항구화 일상화된 병자라기보다는 심각한 mental problem을 최소한 잠재적으로 지닌 셈입니다. 그렇다면 평소에도 자주 혹은 가끔은 그런 부작용들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최고등 교육을 받아 아주 지성적이고, 건전한 가치관과 사고를 가졌으며, 신체적으로 아무 이상도 없으며, 오직 성경 말씀 위에 균형 잡힌 신앙을 가졌음에도 방언 기도를 합니다. 정말로 불신자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도해 변화시키는 신실한 성도들과 목사님들 가운데 방언을 하시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심지어 방언 은사는 받지 못했는데 남들이 하는 방언을 통변만 하는 은사를 받은 분도 실제로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대로의 방언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른 어떤 설명으로도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심지어 사단도 그분의 통제 아래 있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방언 은사가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데 그 모두를 악령의 짓이나 단순히 신체적 심리적 감정적 작용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옥 형제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닌가?”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하려고 방언에 기를 쓰고 매달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존재는 당연히 확신하고 복음 안에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려는 사람에게 방언이 임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또 성경은 분명히 성령이 임의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했는데 순전히 인간의 욕심으로 방언을 얻는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해버리면 진짜로 방언하는 자들은 전부 악령의 자녀가가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1.2. 악령의 방언이 있다면?

물론 방언이라고 다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 아닙니다. 현재 교회 안에 성행하는 방언 가운데는 사단이 주는 방언도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 울음 같은 이상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기괴한 행동을 함께 하기도 합니다. 또 귀신 들린 점쟁이도 다른 사람의 음성으로 말하거나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를, 주문과는 다른, 주절주절 외우지 않습니까? 모두가 악령이 주는 방언입니다.  

비록 악령이 주는 방언이 있고 또 교회 안에 방언 은사의 온갖 폐해가 나타난다고 해서 성령의 방언까지 배제할 이유와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엄연히 실재하는 현상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방언이 성경대로 실행되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방언 기도의 유익이 분명히 있으며 많은 신실한 신자와 사역자들이 영적 싸움에 그 은사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악령의 방언이 현재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성령의 방언 은사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가라지와 알곡이 주님 오실 때까지 공존하지 않습니까? 진짜에는 반드시 가짜가 들어붙게 마련입니다. 기독교만 유독 이단이 많은 까닭이 바로 그것이지 않습니까? 진짜 방언이 있으니까 가짜 방언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악령의 방언만 있고 성령 방언이 중지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든 이들이, 특별히 불신자들이 그들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점쟁이에게 넘어가는 것만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지금껏 계속 있었던 일입니다.

제 뜻은 교회 안의 방언들이 전부 악령이 하는 방언이라고 하면, 혹시 그게 아니라 단순하게 말해 정신이상자들이 하는 방언이라 해도, 거기서 불신자가 영향을 받는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분히 부정적입니다. 미국에서 은사주의자들 집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벌어졌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언중지론자들의 반박 구실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과연 교회 안의 방언이 악령에게만 지배되도록 계속 방관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주님 재림하실 때가 임박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한 명의 남은 자라도 찾고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비록 거짓 사역자와 거짓 성도가 많아도 여전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저주까지 하셨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요23:3) 아무리 흠결이 많은 제도적 교회라도 완전히 사단의 놀이터로 그분이 내어주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령의 방언만 설치도록 방관하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성령의 방언을 지속케 하실 것입니다. 아니 역으로 성령의 방언이 지속되니까 사단이 더욱 기승을 부려 마치 성령의 방언처럼 혼동되는 방언을 교회 안에 계속 많이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여전히 세상을 미혹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림 전과는 다를 것이 이제는 그분의 복음 안에 드는 자는 누구나 성령의 무기로 전신갑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신자만이 사단과 대적해 싸울 수 있습니다. 사단이 방해하는 무엇이라도 신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음부의 권세를 얼마든지 깨트릴 수 있습니다.

예컨대 병균에 의한 질병이 아니라 사단이 심어준 질병이라면, 물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특별한 경우에도 가능하지만, 신유의 은사로 사단과 대응토록 했습니다. 악령의 방언이 성행하고 있다면 마찬가지로 성령의 방언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점쟁이 앞이나 잘못된 은사 집회에 가서 일일이 성령의 방언으로 전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뜻이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영적 차원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에 방언 기도하는 자가 동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악령의 방언이 있으니까, 대적하라고 성령의 방언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자를 미혹시키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해서 거짓 방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려면 반드시 거의 같은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또 흉내 내고자 하는 모습이 이미 실재(實在)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쉽게 말해 성령의 방언이 이왕에 있으니까 그와 비슷한 모습으로 방언해서 미혹시킨다는 것입니다.

악령은 또 주님 오시는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더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계속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다 그 방식마저 효능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는 본색을 드러낼 것입니다. 누가 봐도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전에는 교회 안에 비슷한 모습을 띈 두 종류의 은사들이, 특별히 방언에서 더더욱 성행하며 병존할 것입니다. 방언만큼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까 그러합니다.

또 그래서 하나님은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부터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관심을 우선 끌게 해놓고 율법에 묶인 유대인들과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불신자들로 영적 차원에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이라고 해서 불신 세상의 형편이 오순절보다 그리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방언 은사는 유효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2. 방언 은사 지속의 성경적 근거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방언중지론자는 그 핵심 근거로 “온전한 것”이 오면 방언이 폐해진다는 상기 구절에서 찾습니다. 온전한 것을 신구약 66권으로 "완성된 성경"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속론자는 그것을 마지막 때의 "주님의 재림"으로 해석합니다. 또 두 진영 다 방언에 관한 다른 성경 구절들을 자기 입장에 맞추어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는 경향마저 보입니다. 어쨌든 본문대로 정말 온전한 것이 이미 왔다면 방언은 폐지된 것이며, 아직 오지 않았다면 지속되어야 함은 너무나 간단명료한 이치입니다. 따라서 그 책의 다른 모든 부분은 제쳐두고 이 구절에 관한 옥성호 형제의 해석만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정경의 완성시기와 방언의 유효성

그 전에 먼저 따져봐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방언중지론자들이 미처 주목하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알고도 짐짓 간과하는 요소일지 모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한 시기와 신약성경이 27권의 정경으로 완성되어 인정받게 된 시점의 비교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AD 53-58) 중에 에베소에 체류했던 시기인 AD 55 년  경에 저작한 것으로 봅니다. 신약성경이 현재 27권의 모습으로 공식적으로 확정 된 것은 397년의 칼타고 종교회의에서였습니다. 물론 4세기 초부터 오리겐이 현재 27권을 모두 정경으로 인용했고 또 다른 교부들의 서신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정경화된 칼타고 회의와 바울의 저작시기와는 단지 340년의 차이만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방언중지론자의 “온전한 것”은 정경의 완성으로 아무리 늦어도 주후 397년에는 도래한 셈입니다. 그럼 방언은 아주 길게 잡아야 340년만 유효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 밖에 유효하지 않았던 은사를, 말하자면 일부 세대의 일부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에게 유효했던 은사를 성경이 그렇게 많은 구절을 할애해서 설명할 필요가 구태여 있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혹시 몇 구절 안 된다고 반발할지 몰라도 방언이 신앙의 근본 요소가 아닌데도 그 정도라면 상당히 많은 언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역으로 따져 만약 방언이 일부 시대와 지역의 일부 사람에게만 유효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오히려 너무 많은 언급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의 경우는 그 배경에 담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별도로 하고 이제는 무효로 된 구절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구약의 정결법과 제사법과 일부 사회법 등이 대표적인 예이지 않습니까? 당시 시대에만 유효했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실제 역사 속에서 궁극적인 한 지점 즉, 골고다의 십자가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갔기에 당신의 계시도 그에 상응하여 발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오시면 당연히 폐지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 안에 예정되었던 사항이며 또 신약성경이 그런 의미에 오해가 없게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의 진술은 어떠합니까? 학자에 따라 신약성경에도 약 200여개의 예언이 있는데 예수님의 재림 때에 성취될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스라엘에 관한 역사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초림 때에 다 완성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가르치고, 섬기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무엇보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강림하자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그 의미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초림 전에 성취된 구절이라고 해도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게 된 것은 분명히 성령이 오신 후였습니다.

신약성경의 예언도, 특별히 요한 계시록의 경우는 더더욱,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그 예언이 실현될지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이 다시 오셔야만 완전히 성취되고 혹시 그 전에 성취될 것이 있다 해도 마지막 때에 가서야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에 비추어 보면 방언의 경우 신약정경이 완성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폐지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성급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분명 신약시대의 믿는 자를 위한 책입니다. 구약이 유대인으로 메시아의 초림을 대망케 만드는 책이었다면, 신약은 새 이스라엘인 모든 믿는 자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소망케 하는 책입니다. 신약은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모든 지역, 모든 인종의 신자들에게 절대적 진리로서 유효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만 따져 보십시오. 신약성경을 신자들이 제대로 읽게 된 시기가 언제입니까? 잘 알다시피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활자 인쇄술이 발전되어 각 나라 언어로 번역본이 대량으로 출간하게 된 이후입니다. 나아가 책값이 크게 부담되지 않았던 근자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고, 각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가르쳐지며, 또 대중에게 보급되는 것 전부도 사실은 성령의 간섭 하에 이뤄집니다. 그럼 문제의 고린도전서의 본문 구절도 결국은 현대의 최소한 종교개혁 이후의 독자들에게도 분명히 적용되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뜻이 됩니다.  

바꿔 말해 극히 일부 지역과 시대에만 성행하다가 1600여 년 전에 완전히 폐지된 은사를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 신자들더러 참조만 하라고 기록되었다면,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바울 본인으로선 당장 눈앞에 문제되고 있는 사안인지라 당연히 기록했어야 했겠지만 성령님이 곧장 폐지될 은사와 그 의미와 특별히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그에게 계시해주고 또 기록하게 했을지는 의문이라는 뜻입니다.

딱 한 가지 가능성은 후대 사람들더러 방언의 은사에 대해 오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럼 오히려 그렇다고 분명하게 기록했어야 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4장처럼 구체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십니다. 또 하나님의 뜻은 의외로 간단명료합니다. 신자로 혼란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는 성령의 온전한 조명을 받으면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의, 단 성령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나 십자가 복음 안에 완전히 들어온 자라면, 해석이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고 사람마다 해석이 다 다를 수 있으며 또 어느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럼 한마디로 성경 자체도 존재할 의미가 아예 없어집니다.

어쨌든 최대한 양보하여 이미 1600년 전에 효력이 상실된 방언인지라 후대 신자로 혼동하지 않게 성경에 기록했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서두에서 말한 대로 현재 방언을 하는 모든 신자는 악령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 됩니다. 아무리 감정적, 신체적, 종교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쳐도 성경이 말하는 바는 성령의 통치 하에 있지 않다면 악령의 수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 회색 지대는 성경적으로 없습니다. 신자에겐 매 순간, 매 사건이 다 영적 전투이지 않습니까? 끝까지 현재의 방언이 영적으로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단순한 현상이라고 우겨도, 진짜 그렇다면 그런 의미 없는 일을 성경이 구태여 그렇게 길게 기록할 이유는 더더욱 없지 않습니까?

2.2. 옥성호 형제의 변증에 대하여

방언중지론자 가운데는 옥 형제님이 나름대로는 합리적인 변증을 하려고 많이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몇 가지 맹점(盲點)들이, 특별히 논리전개의 일관성이 부족하여 스스로 모순이 되는 진술을 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일단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보고 또 그 이유를 성경의 완성이라고 단정해 놓고 해석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런 결함이 노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온전한 것”이 성경의 완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크게 셋인데 각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2.2.1. 방언과 사랑

첫째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예언, 지식, 방언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사 전부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셋만 따로 떼어서 말했으니 온전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옳습니다. 이 구절만 따로 떼어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항상 전체 문맥에서 살펴야 하고 또 그 문맥이 일차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분별해야 합니다.  

먼저 문제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이 폐한다는 말씀(10절)은 사실상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13장은 성령의 은사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장입니다. 은사의 부작용은 가르치려 했지만 세 은사가 폐지되는 시점을 구체적으로 예언하려는 의도가 원저자에겐 전혀 없었거나 훨씬 부차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고린도 교회의 은사자들 가운데 방언과 예언 등은 능하게 하면서도 오늘날처럼 많은 부작용과 폐해를 드러내는 것을 바울은 안타깝게 여겼던 것뿐입니다. 특별히 성도에 대한 사랑이 없이 영적 우월을 과시하거나 개인의 유익을 채우는 경우를 많이 봤기에 은사를 사용하되 반드시 사랑에 바탕을 두라고 권면하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방언, 예언, 지식 셋이 8절에서 언급된 이유는 꼭 그것만 폐하고 나머지는 폐해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3장의 1-3절에서 사랑이 없는 은사의 대표적인 예로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것, 산을 움직이는 믿음, 구제, 심지어 자기 몸을 내주는 것 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8절에서 그 예 든 것 중에서 대표적 예로 예언, 방언, 지식을 사랑과 대비하려고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14:1 절에서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또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3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예언과 방언이 곧 폐지될 것을 예상한 언급이 결코 아닙니다. 여전히 오직 사랑에 바탕을 두고 두 은사를 사용하라는 면에 초점이 가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절에서 셋 중에서 지식은 빠지고 방언과 예언만 언급된 이유는 14장은 교회에서 말로 의사 전달하는 그 두 가지 일을 대조해 가르치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의도로 저술하다보니까 13:1에서부터 예언과 방언이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비유했던 것입니다. 또 그래서 13;8절에선 이왕 앞에서 예로 들었기에 온전한 것이 오면 폐지될 것의 대표라는 의미로만 다시 그것들을 거론한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저자는 지금 방언의 폐해를 예언과 비교해서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저술하고 있으니까 방언과 예언이 자꾸 언급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옥형제의 논리대로 만약 그 셋만 폐지될 것이므로 따로 떼어서 강조했다면 중지론자들은 왜 방언만 집중적으로 문제 삼습니까? 정작 더 파고들어 따져야 할 쪽은 예언과 지식이지 않습니까? 바울도 방언보다 예언을 더 사모하라고 했는데 예언의 폐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셋만 폐지되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반증 아닐까요?

만약 13:10절에서 따로 셋을 구별해서 말했기에 그 셋만 폐지되었다는 논리가 옳다고 치면, 13:13의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왜 다른 은사는 다 없어지고 믿음의 은사만 끝까지 폐지되지 않습니까? 또 그럼 나머지 은사들도 혹시 폐지 시기가 각기 다른 것은 아닌가요?  

예언, 방언, 지식은 특별히 말씀과 연관되기에 성경이 완성되면 없어진다는 논리는 아주 미약합니다. 왜냐하면 12:8-10절에서 각종 은사의 종류를 말하면서 지혜도 지식처럼 말씀으로 분류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지식이 폐지되면 자연히 지혜도 폐지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혜란 지식을 삶에 적용해 활용하는 능력이기에 지식이 없이는, 꼭 학술적이 아니라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라도, 지혜가 발휘되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한 마디로 14장의 내용은 방언은 본인만 아니까 교회의 공중집회에선 통변이 없는 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교회에선 모든 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4장에서 “예언”은 순전히 교회에서 일상 언어로 설교하고 교육하고 권면하는 언어적 교통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였던 것입니다. 그럼 그런 의미로서 예언은 아무리 성경이 완성되어도 결코 폐지될 수는 없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13장은 모든 은사는 영원한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은사라는 뜻입니다. 또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셋 다 영원하신 주님을 주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은사가 끝까지 남고 모든 은사가 사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면, 10절 말씀은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포함한 은사들의 폐지에 대한 구체적 시점을 적시하기보다는 그 폐지가 영원과 관련되어서 이뤄질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입니다.  

2.2.2. 장성한 분량까지 자람과 방언

옥 형제가 든 방언중지의 둘째 이유는 온전한 것이 예수님의 재림이라면 그 때까지 12절 묘사대로 항상 어린아이처럼 지내야만 하는데 성경은 오히려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권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가야만 이루어질 목표를 왜 성경은 미리 이루라고 권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날은 완성된 말씀을 통해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 않고 또 더 이상 희미하게 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러합니다. 그러나 확실해지고 명료해진 것은 구원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으면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주는 칭의 구원에 관한 측면입니다. 반면에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할 부분은 성화입니다. 그리고 성화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자라도 이 땅에선 완성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정경화 과정이 언제 완성되었던,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닥치든 간에 성도에겐 항상 미완성의 상태로 남는 것입니다. 성경이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라고 했으니 “온전한 것”이 성경완성이라고 하는 것은 초점이 어긋난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궁극적인, 정확한 의미로는 이상적인(ideal), 목표이긴 해도 현실적으로는 성취 가능한 목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곳을 향해서 걸어가야만 하기에 최종 목표지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또 상식적으로도 먼 장래에 가서야 완성되는 일이라도, 심지어 자기 생애에는 불가능하지만 먼 후손들이 달성해야 할 일도 얼마든지 선대(先代)부터 목표로 정해서 권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두 쌍의 은유로 부분적으로 아는 지금과 온전한 것이 올 때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린아이이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반면에 그 때는 장성한 사람이 되었고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옥형제의 주장대로 성경이 없어 진리를 모르다가 성경 완성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을 대조한 뜻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부연해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즉, 출생에서 죽음과 영원까지 심령에 가장 깊숙이 숨겨진 것까지 하나 남김없이 속속들이 아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아도 인간이 주님을 그렇게까지 알 수는 도무지 없습니다. 성경의 예언도 그렇습니다. 지금 이런 토론을 벌리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주님을 온전히 알 수 있는, 특별히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주님이 우리를 아는 정도로 알게 되는 때는 언젠가 도래합니다. 우리가 죽어 천국에 가서 주님처럼 영화로워질 때, 나아가 마지막 때에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이지 않습니까?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13:12)라는 표현이 의미하는바 그대로 됩니다.

나아가 바로 그 앞 절에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고 오해의 여지없이 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자란다는 뉘앙스가 없습니다. 지금 바울이 짝지어 대조하는 대상은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 지금과 그 때, 거울과 맞대면, 부분과 온전한 것, 모두가 완전히 상반되는 개념입니다. 점차 자라면서 변화 성숙되는 이미지의 대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버렸노라”라는 헬라어도 “쓸모없게 만든다.”는 단어에서 유래하여 완전히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자람의 의미라면 이전 것이 전혀 쓸모없거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전 것에 더 좋은 것이 첨가된 것일 뿐입니다.      

설령 성경이 어린아이와 장성한 사람으로 대조한다고 해서 당연히 성장이라는 개념이 둘 사이에  개입될 수 있다거나 되어야 한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누차 말씀드린 대로 어린아이나, 장성한 사람은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보충 설명해주는 은유(metaphor)에 불과하지 중심내용이 아닙니다. 본문의 표현방식 또한 그러합니다. 성장의 의미를 나타내려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 가면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이라고 이미 다 자란 상태를 은유에 사용했습니다.

요컨대 본문은 완성된 성경을 갖고 신앙성숙 하도록 권면하려는 비유가 아니라, 이 땅과 천국, 신약시대와 재림 후 새 시대를 대조하여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당연히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보다는 예수님의 재림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캘빈도 온전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고 강해했습니다.  

2.2.3. 로마서와 방언

옥 형제가 방언이 중지 된 세 번째 이유로 고린도전서 외의 다른 성경에는 방언의 언급이 없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보다 1-2년 후에 저술된 로마서에선 그 교회에 전하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가 방언이 아니라 복음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로선 방언의 은사는 곧 사라질 줄 예측했기에 고린도전서에 그런 언급을 한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먼저 다른 성경에 언급이 없는 것은 이미 고린도전서에 충분히 설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곧 사라지리라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무리한 가정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고린도전서에도 기록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최소한 후대에 이런 식의 오해와 논란이 없게끔 명료하게 그 뜻을 밝혔어야 했습니다.

당시는 손으로 쓴 편지가 먼 지역의 교회까지 배달되고 또 전 교인이 회람되는 데만도 족히 최소 수개월은 걸릴 것입니다. 저자들도 그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저작하는 시점에 이미 방언 은사가 곧 사라질 줄 확신, 예상, 최소한 감을 잡은 저자라면 구태여 그것을 편지에 쓸 이유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편지를 읽고 그 의미를 교인들이 충분히 숙지했을 때는 이미 방언 은사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는 뜻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견책해야하는 당장의 필요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혀 틀림없는 말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 교회의 방언 은사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를 고치려는 의도로 이 편지를 저작했습니다. 그 말은 저자인 바울로선 이 편지를 저작할 당시에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성경이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확신 내지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아마 바울을 필두로 사도들이 서신서를 저작할 당시에는 자기들 편지가 나중에 수집되어져 정경으로 완성될 것을 알았거나 예측한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 해도 저작 시에 약 3백년 후에 이 편지들이 신약성경으로 편찬 될 것이니 정신 차리고 쓰라는 영감은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전히 수신자인 교회와 개인의 상황에 맞추어 십자가 복음을 온전히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와 믿음만 심어주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당시에 신약성경의 완성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는데도 어떻게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신약 정경의 완성으로 뜻하고 저작했겠습니까? 너무 무리한 억측입니다. 또 후대 사람이 저자도 몰랐던 일을 어떻게 제 멋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에 성령의 은사로 방언을 소개하지 않고 복음만 말한 것은 오히려 당시의 모든 상황과 이치에 더 들어맞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오순절에 성전 순례 온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자생적 교회입니다.(행2:10)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들은 방언과 베드로의 설교만 보고 듣고 간 셈입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모든 소문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럼 바울로선 무엇부터 전해야 합니까? 사도들이 직접 세운 교회는 사도들이 처음부터 복음을 제대로 가르칩니다. 오순절 순례객은 방언 현상과 베드로의 일회 설교, 그것도 이스라엘 역사에 간섭하셨던 하나님이 보내주기로 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단순한 내용의 설교만 들었습니다. 당연히 복음의 진리와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했습니다. 방언은 그들이 이미 봤기에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기보다는 구원의 핵심진리와는 상관없으니 로마서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옥 형제의 주장대로 하자면 방언과 함께 폐지될 예언의 은사가 로마서 12장에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6절)라고 소개되어야 할 이유는 전무합니다. 예언은 방언보다 후대에 더 천천히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동일한 문장에서 분석해낸 이유와 근거가 방언에만 적용하고 예언에는 적용하지 않은 셈으로 논리 전개에 일관성이 없어집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을 예측했기에 로마서에 예를 들지 않았다면, 비록 늦게 사라질지라도 예언도 포함시키지 말았어야 합니다.

또 그와는 반대로 사라지지 않을 다른 은사들 예컨대 신유, 통변은 왜 로마 교회에 소개해줄 신령한 은사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입니까? 그들이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방언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도 그들이 잘 알기 때문일, 실제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방언이 사라지면 통변도 자연히 사라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통변은 폐지되는 목록(고전13:8)에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은사 폐지 여부를 옥 형제 식으로 단호하고도(?) 구체적으로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에서 은사들을 열거한 이유는 바로 그 앞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 안에 많은 지체가 있고 당연히 많은 은사들이 따르는데 여전히 사랑의 바탕에서 실행하라고 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사의 많은 종류들을 설명하려다보니 고린도전서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권위하는 자, 다스리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등도 포함시킨 것입니다. 방언이 사라질 것이라거나 조금이라도 그와 연결되는 예시는 로마서엔 전혀 없습니다.

로마서도 은사를 열거한 직후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다시 강조했지 않습니까? 또 각종 은사를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맡은 직분의 본질에만 충실하여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 자랑이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하지 말라고 또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두 서신서를 망라한 바울의 논리가 일관성을 유지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눈을 닦고 보아도 옥형제의 주장처럼 1-2년 사이에 방언에 대한 그의 생각이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2.2.4 은사의 본질

옥 형제는 방언과 예언과 지식을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와 거의 같은 반열에 두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완성되었으니 완전히 용도 폐기 되었다는 것은 그 전에는 어쨌든 성경이 맡을 역할을 대신 했다는 뜻이 됩니다. 일종의 절대적 계시이거나 그와 유사한 계시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 세 가지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없었던 초대 교회 시절,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따지면 초대 교회 신자들은 최소한 이 셋 중에 하나는 받았어야 그분의 계시를 제대로 알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사도와 그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음으로 계시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쨌든 초대교회 모두가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다 받은 것은 아니기에 성경은 모든 성도가 이 세 은사 중 하나는 받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그 셋은 계시에 준하는 은사라는 언급은 있었어야 합니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기 전이니까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그 셋은 누구는 받고 누구는 받지 않아도 될 만한 은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은사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12:11)

우선 은사는 “성령의 (겉으로) 나타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내면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본인이나 제삼자가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나서 자신과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게 되는 것이 은사라는 것입니다. 또 각 사람에게 성령이 당신 임의로 나눠준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 안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각 지체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방언과 예언과 지식들도 당연히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을 수 있는 은사였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꼭 받아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또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고 했습니다. 방언과 가르치는 말씀(여기선 예언을 의미)을 계시와 분명히 다르게 취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언이란 장래 일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도 일부 포함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선 주로 방언과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14:22)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제 삼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는 기도이고, 예언은 통용어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예언이 성경 완성으로 폐지 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바울의 초점은 시종일관 고린도 교회 내에서 방언을 통변자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함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불신자와 방언을 받지 못했거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영적 지식이 모자라는 자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제거하는데 두고 있습니다. 곧 폐지될 방언이라면 그렇게까지 염려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방언, 예언, 지식 등도 다른 모든 은사와 같이 이미 계시된 말씀이나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권능이나 은혜를 더 정확히 이해하여서 주위에 증거, 교육, 실천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초대교회에 한해 말씀을 대체할 만한 계시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사도와 그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설교들만이 성경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였던 것입니다.

이 셋도 문자 그대로 성령의 나타남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는 한에는 그 은사의 나타남도 계속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악령도 설치고, 악령의 방언이 있는 한 성령의 방언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컨대 방언이 구원과 성화에 절대불가결한 계시의 역할을 맡았기에 성경이 완성되자마자 폐지되어야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3. 맺는 말

결론적으로 옥형제가 온전한 때를 성경이 완성된 때라고 든 세 근거는 성경의 다른 부분과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에 무리하고도 부족한 해석입니다. 방언중지라는 예단된 결론에 맞추려다 보니까 성경을 좁은 시각으로 풀어나간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전의 다른 책들이 참고할 내용이 풍부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안타깝고 유감스럽습니다. 물론 책의 다른 부분까지, 본 논의에선 구태여 다룰 필요가 없었음, 다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는 시야를 좀 더 넓혀 주었고, 옳고 그름을 떠나, 또 방언 은사의 부작용과 폐해를 다시 심각하게 지적했다는 면에선 분명 이 책의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대할 때에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온전한 때에 방언, 예언, 지식이 폐해지리라는 말씀의 근본 목적은 그 폐기시점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영원하도고 진정한 사랑의 바탕 위에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그 때를 밝히자면 앞뒤 문맥과 성경 전체에 일관된 뜻에 따라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전에는 비록 방언이 폐해가 많아도 지속될 것입니다.

만약에 방언중지론자의 주장대로 성경 완성으로 방언이 폐지 된 것이 옳다면 현재 신실한 교인들이 방언기도를 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성경적이고도 합리적인 해석을 내어 놓아야만 합니다. 아니면 방언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와 같은 크기로 그들은 악령의 부하라고 선언해야 합니다. 정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방언 반대의 주장만큼 예언과 지식의 폐지에 대한 성경적 논의는 따라 나와 주어야 합니다. 예언과 지식이 정확히 무엇이며 언제 어떻게 폐지되었는지에 관해 그동안 있어왔던 방언의 논쟁만큼 활발하게 전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들 주장의 모순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신약성경은 신약시대 즉, 성령시대의 신자를 대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주후의 모든 세대, 모든 신자에게 항상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이 수없이 남아있습니다. 설령 일부 성취되었다 해도 정확한 의미는 그분이 다시 오셔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달리 신자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그 전부를 기록된 내용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함부로 일부 내용을 빼버려선 안 됩니다. 방언을 폐지하면 그와 관련된 고린도전서 12-14장의 일부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게 아니라 후대의 독자에게 경고만 줄 목적이라고 해석해도 누차 강조하지만 현재 방언을 하는 신실한 신자에게 정말로 납득될 만한 확정적인 증거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교회 안에 양과 염소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성령이 주는 방언과 악령이 시키는 방언이 교회 안에서도 혼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을 분별하는 은사도 주었습니다. 또 성경은 그 분별의 기준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계 내부에서 서로 방언이 중지되었다 지속되고 있다는 논쟁은 접어야 하고 오히려 이왕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분별할 것인지 또 그래서 그 폐해를 어떻게 방지할지에 관한 논의와 실천으로 초점이 옮겨져야 합니다. 그렇게 교회와 성도들이 방언의 폐해를 스스로 줄이고 영분별을 정확히 해나가다보면, 실현 가능성은 극히 적지만, 언젠가는 이 논의에 대한 모두가 공감하는 확실한 정답도 자연히 얻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알다시피 갈라디아서 5:22, 23절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 안에서의 화합”입니다. 반면에 악령에 넘어간 육체가 도모하는 일은 그와 완전 대조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온갖 악행으로 인한 분열”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기준이 있는데 바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그분의 향기를 더 드러내느냐 여부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되 예수님을 더 확실히 증거하며 성도 간의 화평도 더 증진되면 성령의 방언입니다. 반면에 방언을 하면 할수록 은사자 개인이 앞세워지고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면 악령의 방언입니다.

4/21/2010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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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전에 택함이란?


[질문]

에베소서 1:4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요? 창세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택함을 받는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로 구별을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신학적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인 예정론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나기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알미니안주의와의 끝없는 논쟁의 핵심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현대 기독교의 주된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반발, 거부, 비난,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개인적으로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깊이 따지자면 신학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뤄야 하며 또 자칫 이 홈피의 방문자들 사이에도 쟁론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두 신학이론을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용이한 차원에서 순전히 성경말씀에 따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시간은 피조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 내지 누적인 역사도 지구상의 인간들의 행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주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대적 구분에 따른 해석, 적용, 예측은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필립 얀시가 든 비유를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해가 뜰 때에는 사실상 8분 전에 벌써 떠있는 해를 보게 되며, 지는 해도 이미 8분 전에 진 해를 봅니다.

그런데 한 발은 태양에, 다른 한 발은 지구에 걸쳐 놓을 만한 거인이 있다고 치면, 순전히 논리적 가정으로, 그에게 8분의 시차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나 태양을 한 순간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실종되고 없는 셈입니다. 지구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우주 한 쪽 끝에 한 발을, 다른 쪽 끝에 다른 발을 두실만큼 큽니다. 하나님이 그런 가시적 물리적 형체를 갖춘 거인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시간과 연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행성과 항성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과 실제 길이도 각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운행, 통치하시기에 시간 개념이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본다는 것은 시간 밖에 존재하여 시간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에 실려 다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각기 시간에 묶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물체와 존재는 반드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과 완연히 구별된 유일한 분입니다. 시간 밖에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현재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영원하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오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하라는 권면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이 하루만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반면에 천 년간의 인간 역사도 단숨에 허물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주만물을 관리 통치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관자로서 그 시간마저 통치하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 또한 시간에 종속되기에 수정, 변개, 쇠퇴, 소멸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  

대신에 그분에게는 하루나 천 년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역사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해 있다는 초시간성(超時間性)과 초역사성(超歷史性)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 즉, 영원만 있습니다. 또 그래서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언약 또한 전혀 수정 변개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달성되는 법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영생을 유토피아 상태에서 시간적 무한대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으면 그 육체는 멸망하고 영은 예수님 계신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이가 죽으면 그렇게 되지만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이 옮겨지는 거처만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또 낙원으로 옮겨진 신자는 마지막 날의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미 천국에 올라간 신자에게도 시간 개념이 전혀 없어집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영원한 현재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천국에서 무병(無病)은 몰라도 장수(長壽)는 어울리지 않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 됩니다. “이제는(이 땅에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의 실체 뿐 아니라, 그분의 구속사적 경륜, 또 이 땅에서 가졌던 의문과 오해 등이 씻은 듯이 밝혀집니다. 아니 그 전에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문제 삼을 시도는커녕 용의조차 사그리 없어질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과 이 셋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이 목적하던 바는 천국에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달성된 셈입니다. 신자가 그 둘을 더 이상 소유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사랑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아니 그곳은 아예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자가 그 육신까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갈 소망이나 믿음을 구태여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군인이 매일 달력에 표시하면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예수님이 지구상으로 재림할 때 육신도 부활해 그 분과 동행 귀환할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영원한 현재로 천국 신자에겐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성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혀져 그 분처럼 변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이후 이 땅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하게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의미가 시간적 무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온전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신자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로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완성된 관계의 실체를 가시적 형태로 하나씩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29)

바로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교리적이 아니라 일대일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생 즉, 구원을 자꾸만 시공간의 차원 안에서 이해하려 들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아니 맛도 보지 못합니다. 수박을 잘라 먹지 않고 그 겉만 핥은 셈입니다.

토기장이가 악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이런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질의하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먼저 "창세 전"에라는 뜻은 하나님의 경우는 시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형체나 존재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성하기 이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실 때입니다. 시공간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한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 계셨던 상태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분,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창세 전은 인간이 이해할 때에만 아주 오래 된 과거사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결코 창세  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라도,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죄로 물든 이 땅과 하늘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하늘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이런 진술마저도 인간의 사고로 즉,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차원에서 이해 적용하려 들어선 명료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데도 한국인이 속도와 억양만 조금 다를 뿐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믿고 해석하려 들어선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착할지 악할지, 또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원 줄 자와 안 줄 자를 어떻게 창세 전에 독단적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분이 아주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여겨집니다. 언뜻 일리 있는 판단 같지만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판단하는 인간적 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 구원, 택함, 예정은 전부 하나님이 일방적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간섭은커녕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되었고, 신자와 불신자로 나눠져 택해졌고 예정 받았기에, 구원 받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해도 단 한 치의 불공평성, 편애, 자의(恣意: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 불합리성, 불완전성 등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신학적 과제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답게 사고 유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 듭니다. 이는 아주 크고도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본 주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이 나중에 착할지 악할지, 믿을지 안 믿을지 미처 모르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편 가름 했다고만 여기고 치웁니다. 반대로 인간의 하는 짓과 그 처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 구원해주어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예 처음부터 믿을 자와 안 믿을 자로 나눠서 창조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 신분에서 그렇게 나눈 창조와 창조주가 잘못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비유이긴 해도 인간은 물건, 토기에 불과합니다. 본차이나가 아니라 뚝배기로 만들었다고 감히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택함의 근거가 인간의 소원이나 달음박질(공적)이 아니고 오직 당신의 긍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에서나 야곱 둘 다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진노 아래에서 지금 당장 몽땅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선언하는 바는 인간에게 아무리 높은 도덕성, 영성이 있어 보여도 창조, 택함,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논의 밖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택함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이미 예정되어 지어진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함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함이 결코 무조건적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또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의 택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택함도 없고 예수가 있기에 택함이 가능하고 또 타당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타락과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 전제가 된 창조라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말은 시간적 전후 순서는 논외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예수님의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의 타락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타락 전(supra) 예정설과 타락 후(infra) 예정설이 옳은지, 또는 예지예정인지 이중예정인지 같은 복잡한 신학논쟁이 대두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측면은 제외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그 선택을 완성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때에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쪽에선 하나님이 볼만하고 기뻐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당신께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로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는 자리까지 한 치의 착오 없이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지구 상의 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만 문제됩니다. 천국에선 그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누차 강조하지만 시간의 무한대 개념이니, 아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뜻임) 뜻 안에 이미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성경 계시대로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져서 꼭 오셔야 할 때가 되면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지구상에 강림하십니다.

신자는 확보된 재림의 영광 속에 살기에 그 종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소유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저 “영원한 현재의 사안”일뿐입니다. 영원한 현재라는 용어 또한 그분의 신비한 경륜을 결코 다 드러낼 표현이 되지 못하겠지만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세 전에 세운 당신의 뜻과 계획은 당신 안에선 창세 전부터 현재 시제로 다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시공간 안에 제한되었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인간에게만 창세 전이 시간적으로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이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창조는 물론, 21세기의 한 신자의 탄생과 그 택함과 구원까지도 그분 안에선 이미 성취되어 있으되,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시기와 방식만 미결로, 그것도 인간에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올라가 있는 이름을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앎으로써 자기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기에 그만한 위로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택함과  예정에 따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와 은혜에 속할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아무 계획 없이 도기를 굽지 않듯이, 하나님도 태초에 이미 당신만의 마스터 플랜이 있었고 그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4)

질의하신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고 택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그 택함은 완벽한 거룩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신자가 할 바는 이어진 말씀 그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5,6절) 뿐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 땅에선 물질적 차원에 머무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천국에선 그분과 맛 대면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예정이란 신비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낙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잠시 남겨 놓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함 받았으니 잠시 있다 없어질 이 땅보다는 영원과 맞대어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5/25/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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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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