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와 만났던 마리아, 그 세 여인 - 지미라즈키(폴란드, 1843-1902)


    수많은 그림들 가운데 종교와 관련한 그림을 감상하는 느낌은, 일반 그림들과는 또 다른 감동을 줍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성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비하고 장엄하며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성화도 그러하며, 독자들이 상상하는 성화에 대한 선입견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헨드릭 헥터 지미라즈키(Henryk Hector Siemiradzki, 폴란드, 1843-1902)의 아래 그림은 기독교와 관련한 다른 성화들처럼 신비하거나 성스러운 분위기의 그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신격화하거나 미화하여 그린 그런 종류의 성화가 절대 아닙니다.

     인간 예수의 일상을 묘사한 종교화

   즉 우리가 쉽게 접하는 예수의 죽음이나 부활, 탄생과 같은 신비한 그림도 아닙니다. 이적이나 병고침, 비유에 관한 이야기들처럼, 많이 알려진 내용의 일반적인 그런 작품도 아닙니다. 단지 인간 예수로서 살아가는 삶의 하루 가운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오늘 감상할 지미라즈키의 그림은 우리에게도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미술사에도 등장하지 않을 만큼, 그에 대한 소개나 설명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마리아와 예수
"에 대한 베르메르와 지미라즈키의 두 그림을 비교, 감상한 기사를 접했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익숙할 것입니다. 또한 지미라즈키는 폴란드에서는 예수의 일상을 담은 그의 그림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를 그린 종교화와 풍경화, 초상화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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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미라즈키의 초상 ⓒ Don Kurtz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지미라즈키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아래 세 그림의 배경이 되는 성경책의 내용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지미라즈키의 그림과 글은
Wikipedia와 Olga's Gallery, Art Renewal Center, 아름다운 미술관을 참고하였으며, 영문은 번역, 정리한 것입니다. 함께 읽고 감상하면서 평안을 얻을 수 있길 바랍니다.
   

   고전주의 화가, 지미라즈키

   오늘의 작가 지미라즈키는 특별히 고대 그레꼬 로마 양식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843년에 우크라이나 카르코프(Kharkov) 근처의  페케네지(Pechenegi)라는 작은 마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과 청소년기를 러시아, 카키프(Kharkiv)에서 보냈으며, 고등학교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으며, 1864년 카키프대학 자연과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그림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후부터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1870년까지 페터즈(Saint-Peters)시에 있는 순수예술(Fine Arts)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문적인 고전주의(classicism)를 고수하면서 어렵게 일하며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 후 1871년까지 뮌헨과 로마에서 유학하였으며, 이때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는 폴란드의 국립박물관과 모스크바의 국립역사박물관에서 일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작품으로, 모스크바 성당(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에서 작업했을 때 남긴 프레스코(fresco, 갓 바른 회벽 위에 수채로 그리는 방법) 화법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와 로마에서도 전시회도 가졌으며, 판매된 그림값을 국가에 기부하는 애국자였습니다. 그의 대부분의 그림들은, 그의 고향에 있는 박물관(Juliusz Słowacki theatre)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1902년에 스트잘코보(Strzalkowo)에서 눈을 감았으며, 이 때 바르샤바(Warsaw)에 매장되었다가, 나중에 국가에 의해 그의 고향인 카르코프로 옮겨졌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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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1890. Oil on canvas. The Lvov Picture Gallery, Lvov ⓒ Siemiradzki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 :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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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세부그림(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Detail), 1890, Oil on canvas, The Lvov Picture Gallery, Lvov, Ukraine ⓒ Siemiradzki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위 성경내용의 저자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예수가 사랑했던 제자 사도요한입니다. 기록 연대는 대략 주후 80-90년대로 추정하며, 간결한 언어로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푸른빛 채색으로 일상을 강조

   위 그림은 요한이 기술한 에피소드를 지미라즈키가 상상하여 그린 삽화같은 작품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성화 네 점은 예수의 흔한 일상들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 여인과 만났던 장소와 그 때의 정취를 매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묘사한 그림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던 길에,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가고, 예수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쉬다가 '수가'라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말도 나누지 않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예수가 물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가 너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줄 수 있다는 신학적인 말을 건네자, 수가라는 여인은 그 말을 믿고 마을로 돌아갑니다.

   이 짧은 얘기의 한 장면을 요한은 저술하였고, 그 이야기를 읽은 지미라즈키는 상상하여 한 순간의 그림으로 그려냈던 것입니다. 마치 찍어 놓은 오래된 사진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림 속의 주인공들도 매일의 일상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여주며 정겨운 표정입니다.

   위 그림을 보면, 큰 우물 주변을 아주 오래된 아름드리 큰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그늘아래 얘기를 나누는 두 주인공의 모습을 큰 나뭇잎 사이로 반사되는 엷고 약한 빛과 푸른빛 채색으로 부드럽게 표현하여 평화로운 분위기를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화가가 옆에서 바로보는 듯한 낮은 시각으로 처리하여, 독자가 그림 속에라도 들어가 옆에 같이 앉아 비밀스런 이야기를 같이 엿듣고 있는 듯,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직사광이 아닌 그늘 아래로 스며드는 반사광을 진하지 않은 푸른빛 색조로만 채색하여 전체적인 느낌을 통일하였으며, 특별하지 않은 일상을 강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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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죄인, 막달라인 마리아와의 첫 만남(Christ and Sinner, The First Meeting of Christ and Mary Magdalene), 1873,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병고침을 받은 막달라인 마리아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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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와 죄인, 막달라인 마리아와의 첫 만남 세부그림(Christ and Sinner, The First Meeting of Christ and Mary Magdalene, detail), 1873,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이 그림의 배경을 기술한 저자, 역시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누가입니다. 의사출신이었으며, 사도바울의 동역자로서 사도행전도 기술한 사람입니다. 저작 연대는 주후 61년에서 6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은색 계열로 통일하여 차분한 일상을 강조

   예수를 만났거나 따랐던 여인들 가운데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란 이름은 총 세명이 나옵니다. 첫 째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예수의 발에 향료(향수)를 바르고 그녀의 머리로 닦아 말려주었던 죄인, 마리아가 있습니다. 둘 째는 나사로와 마르다의 형제로서, 예수를 집으로 초대해 죽었던 남매 나사로를 살려냈던 마리아입이며, 맨 아래의 그림이 바로 그 여인입니다.

   셋 째는 막달라라는 마을에 사는 귀신들린 마리아로, 예수가 귀신을 쫓아 그 병을 고쳐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맺은 인연으로 아래에 있는 그림처럼, 예수를 집으로 직접 초대하기도 하였으며, 훗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마지막으로 무덤에 장사될 때 그 옆을 떠나지 않고고 지켰던 여인이기도 합니다.

   바로 위 두 그림이 그렇게 첫 만남을 갖는 이야기 가운데 한 순간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아낸 그림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열두 제자들도 보이고, 마리아와 함께한 여러 명의 여인들도 보입니다. 기적을 일으킨 신비한 광경으로 보이지 않으며, 그림 속의 인물들도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상으로 보입니다.

   우선 화가는 둘레가 제법 큰 기둥으로 받혀진 건물 지붕의 처마와 아름드리의 오래된 나무를 뒷 배경으로 배치하였습니다. 그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비치는 빛 조각만을 모아 명암의 미세한 묘사에 사용함으로써 차분한 일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맨 위 첫 두 그림들과 같이 위 두 그림에서도, 화가는 부드럽고 약한 빛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무대장치를 통하여 은회색 빛을 연출한 것처럼, 매우 담담한 느낌을 주었고, 두 여인을 제외하면 등장인물들의 의상을 흰색 계열로 통일하여 기분좋은 일상을 표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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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886.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마르다의 초대로 담소나누는 막다라 마리아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에게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으로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 : 38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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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886.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 Siemiradzki


   이 막다라인 마리아와의 인연은 깊은 믿음과 신뢰 속에서 시작됩니다. 예수와 거리가 먼 동네에 살고 있었음에도, 마리아는 애써 예수를 찾아갔고, 그렇게 모신 예수 역시 무덤에 이미 장사했던 나사로 형제를 살려줌으로 기적같이 맺어집니다.

     어두운 명암으로 편안한 일상을 강조 

   이런 인연은 바로 이 두 그림에서처럼, 두 자매가 종종 예수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종종 들러 편안한 마음으로 쉬어가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맨 위 그림에서 우물가의 수가라는 사마리아 여인이나 바로 위 막달라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모두 참 정겹게 느껴집니다. 두 여인은 물론이거니와 예수의 표정과 모습도 어디 하나 불편한 곳 없이 편안해 보입니다.

   특히 이야기에 심취해 있는 예수의 손동작이나 의상이 무척 자유로워보입니다. 발 아래 바짝 다가 앉은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과 자태에도 반가움과 겸손함이 베어있으며, 평소에도 정갈한 마음으로 서로 경청하며 진지하게 대화도 나눴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늘로 드리워진 어두운 빛의 음영이 눈을 편안하게 하며 낮은 명암이 무척 부드럽습니다. 또 은은한 은회색빛 채색으로 통일하여 전체적인 분위기를 평안하게 강조하였습니다.

   오하려 다소 가라앉은 듯 차분한 일상입니다. 평소에 보는 각도와 시각을 기준으로 독자가 보기에도 거부감없는 일상으로 표현하였으며, 여백을 남겨둔 여유로운 구성으로 일상의 자연스러운 정취를 잘 자아낸 작품입니다.
 

     고전주의 화풍으로 예수의 일상의 평화로움 강조

   이상에서 감상한 바와 같이, 그의 그림에는 신념처럼 고수해온, 이성과 통일성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색채가 짙게 베어있습니다. 그 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세 그림이 모두 통일된 사실성을 보여준 것처럼, 고대 로마 형식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통일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째, 빛의 명암을 들 수 있는데, 그늘을 통해 일관되게 보여주는 어둡고 낮은 명암이 그렇습니다. 세 그림 모두에서 차분한 조명으로 편안한 일상을 강조합니다.

   둘 째, 채색을 통일하였는데, 화폭 전체에 은푸른빛이나 은회색의 밝은 색채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통일함으로써 차분하고 평범한 일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셋 째, 전체적인 구성을 비슷하게 통일하였습니다. 세 그림 모두 뒷 배경으로 아름드리 고목나무와 큰 집이나 건물이 등장합니다. 각 주인공들은 그 앞 나무 아래 배치하여 위 세 이야기의 상황과 조건을 통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한 날 한 시에 이루어진 세 사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미라즈키는 이런 일관된 표현 기법과 색채의 사용, 그리고 화폭의 구성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일상의 편안함과 평화로움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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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이거나 만져질 없다.

         그것들은 오직 마음 속에서 느껴질 뿐이다. – 헬렌 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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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평화 그리고 낭만과 예술이 살아 쉬는 나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비겔란 조각 공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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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조각가  Gustav  Vigeland (1869 – 1943) 200여개의 작품들이

       전시 되어있는, 작가의 작품만이 전시되어있는  공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조각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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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겔란은 생명의 순환이라는 테마로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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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본 욕구와  삶을 테마로, 특히 어린아이들의 생생하고 다채로운

       표정들을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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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우는 아이의 손과 발은 방문객들이 하도 많이 만져서,

               반들 반들 윤이 난다. 손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저렇게 아이가 아파 정도로 만져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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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사이 사이에 있는  많은 분수는 다산을 의미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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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컵을 바치고 있는 작품은 인생의 고뇌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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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보았을 때에는 , 너무 투박하다라는 느낌을 받았으나,

 계속 작품을 보고 있으니 누드로 인한 작품성이 떨어질까봐 고뇌한

 작가의 심정을 이해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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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명의 형상을 묘사한 화강암 기둥 조각품인 모노리스(Monolith),

        높이17미터, 무게 260톤의  화강암 기둥에  121명의 인간들이 뒤엉켜있는,

 

 안간힘을 다하여 정상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투쟁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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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과 여성, 아이들과 놀고 있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등이 똑같이 누드로

     표현되었지만,  야하거나 어색하다기 보다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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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과 인권이 생활 속에 뿌리  깊게 녹아있는 노르웨이 사람들은,

  국왕가를 사랑하지만,  특별 대우를 하기 보다는 평범한 이웃으로 대한다고 한다.

  국왕가의 이야기가  메스콤에서 조차도 거의 다루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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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에서는 아이들에게도 명령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흔히 아이들한테 먹어라라고 명령조로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는 지금 먹을 생각이 없니?” 라고 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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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과 호수,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들이 조성 되어 있어,

        관광과 휴식을 함께 있었고,

 

        조각품들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는 재미있고도

        기이한 경험을 하는 귀한 시간들을 가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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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둥지에서
글과 사진 : 들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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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라 Georges Seurat(1859~1891)
나는 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글미을 그렸들 뿐이다.

인상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쇠라는 방법적인 면에서 동료 화가들과 다른 면을 추구했다. 쇠라는 신인상파 화가로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순간을 화폭에 고정시키고자 했다. 색채를 분할하여 작은 색점으로 그림을 만드는 새로운 화법을 창조해내고 대상의 순간을 영원히 자신의 화폭에 고정시키려는 의도했다. 그는 인상파가 그리고자 했던 순간의 이미지를 정반대의 입장에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쇠라가 인상파전에 몇몇 작품을 전시했을 때 그는 동료 화가들의 심한 반발을 받아야 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즉흥적이고 직관에 의한 표현에 주력했다면, 쇠라는 과학적 접근 방법을 해결책으로 보아 순수하고 정확한 색채 분할을 화면에 창조하고 기하학적 체계를 적용시키려 했다. 쇠라는 처음부터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도서관을 출입했다. 이 당시는 색채가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서 이론적으로 보색관계나 광선에서 보색을 섞으면 흰색, 물감에서는 검은색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쇠라가 인상파에서 얻은 것은 광선에 대한 관심이었고 인상파의 자유롭고 불규칙한 터치를 질서있게 적용했다. 인상파에서 사라진 형태를 명확한 윤곽선으로 추구하게 되었고 인상주의와의공통점으로 광선과 색채에 대한 관심을 꼽는다면 그 차이점은 인상주의자들이 직관적이고 본능에 따라 분해한데 비해 신인상주의자들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한 의식적인 분할인 것이다. 또 인상주의자들이 형태를 파괴할 만큼 빛의 동요를 쫓았다고 한다면 신인상주의자들은 뚜렷한 윤곽선으로 고전적인 구도를 고수한다고 하겠다.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신인상주의의 미학을 이루는 점묘주가 등장하고 있다. 그 주제도 다양한 계층의 휴일을 즐기는 모습으로 인상주의의 향락적인 여흥보다 의식있는 주제로서 그 뒤에 많이 응용되기도 한다. 그는 아카데믹한 수업을 통해 형태의 윤곽은 포기하지 않고 반 아카데미로서 면밀한 색채에서의 관찰을 통해 당시의 발달한 색채학을 수용하여 시각적 혼합을 일으키는 치밀한 분할주의를 택한 것이다. 그래서 형태의 윤곽은 독특한 광선에 의한 명암의 차이를 이용하여 반짝이는 대상의 색조의 대비를 이용하는 것이다. '퍼레이드'등에 이르면 완전한 점묘가 이루어지면서 착각적인 깊이를 배제하고 그늘이 없는 배경을 평면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더욱 평면적인 2차원 공간이 된다. 인상주의가 근대성이라는 과제와 함께 비전의 근대화라는 역사적 흐름의 필연적 단계로서 성립되었다고 한다면 신인상주의는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여 자칫 손끝의 기교나 매너리즘이 될 소지의 것을 구축한 것이다. '퍼레이드' '광대'등 일련의 작품의 공통점은 구성의 평면화와 형태의 기하학적 도식화이다. 그리고 그 결과러서 점묘주의적 색채효과와 형태적 견고성의 통합이라는 과제와 함께 화면의 장식성 추구하였다. 쇠라는 야외에서의 소재를 외면하고 실내에서 포즈를 취했던 모델들의 누드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점차 인상주의적인 즉흥적인 빛의 향연에서 벗어나 인공 조명의 세계에 탐닉했다. 그러면서 쇠라는 형태의 균형과 조화된 구성을 새로운 목표로 설정하게 되었다. 이후 쇠라는 고전적인 황금비율을 연구하며 매우 과학적이고 건축적인 구도를 형성해 나갔다. 고전주의적인 안정감 위에 또다시 일정한 색점을 찍어 나감으로써 정교하고 세밀한 작품 을 창조했다. 쇠라 회화의 또 다른 특징은 형태를 단순화하고 무표정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안정된 구도와 명확한 인물의 윤곽. 하지만 그의 화폭에 담긴 모든 존재들은 운동감을 상실한 채 정지되어 있다. 이는 인상주의 기법에 반대되는 경향의 일면으로 오히려 고전주의적인 성향에 가깝다. 마치 자로 잰 듯한 직선과 타원형, 곡선 등 다양한 기하학적인 형태들의 조합이 그러하다. 미세한 점으로 가득 찬 쇠라의 분할주의(미세한 필촉에 의해 색을 분할 표현하나 사람의 눈에는 혼합되어져 보이도록 하는 기법)는 흑백 데생을 통한 경험의 결과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콘테에 의한 흑백 데생을 유난히 많이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쇠라의 데생은 선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점묘에 의한 명암의 효과, 형태와 불륨의 정확한 표현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분할주의를 옹호하고 시도하면서도 쇠라의 작품 세계에 골격을 이루는 바탕은 엄격한 고전주의와 정교한 서정의 세계에 있었다. 1890년 여름, 쇠라는 자신의 인생이 종말을 맞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고요함과 명랑함, 그리고 슬픈 이미지들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랑함은 색조의 밝음과 선의 상승성을 통해서, 고요함은 온색과 난색의 조화로운 균등과 수평선을 통해서, 그리고 슬픔은 어두움을 주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결국 쇠라는 1891년 3월 29일 전염성 후두염으로 31세의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가 추구했던 과학적인 체계는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상징주의의 세계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예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신인상파의 창시자 : 과학적 지식이 풍부햇던 그는 색점들의 집합으로 표현. 점묘주의. 분할주의.

수평선의 효과 도입 : 학구파였던 그는 선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 동원. 수평선의 활용으로 정숙함과 온화함을 추구.
 
마니에르수욕 1883∼84년, 캔버스에 유채201×301.5cm 런던 내셔녈 갤러리
세잔느가 인상파 화가들의 수법과 질서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모색했던 반면, 쇠라는 인상주의 회화의 수법을 기반으로 해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 이론을 연구하며, 순수한 색채를 규칙적인 작은 점들로 찍으면서 작품을 모자이크처럼 구축해 왔다.
쇠라는 세잔느가 시도했던 것보다 더욱 형태를 단순화시켜 수직과 수평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그의 화법은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점차 벗어나 흥미롭고 풍부한 구성을 화폭에 담아 내게 된다.  이 작품은 1884년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후에 '앙데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최초의 대작이며, 작품 전반에 걸쳐 여름날의 열기에 취해서 몽롱해진 느낌을 전해준다. 쇠라는 이 그림을 구상하면서 현장에 직접 나가서 예비 스케치를 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창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놀고 있 화면이 주는 인상은 매우 질서정연하다. 점묘법을 통해 빛나는 것 같은 밝은 교외의 풍경을 쇠라는 고요하게 붙잡아 놓고 있다. 쇠라는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창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놀고 있는 풍경이지만 이 화면이 주는 인상은 매우 질서정연하다. 점묘화법을 통해 빛나는 것 같은 밝은 교외의 풍경을 쇠라는 고요하게 붙잡아 놓고 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86년, 205.7×305.8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

쇠라는 미학에 큰 관심을 가졌던 수학자 샤를 앙리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앙리는 음악에 관철되는 성격을 색과 선에 접목시켜 동일한 법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쇠라의 주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즐겨 다뤘지만, 한편으로 상징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신비감과 분위기를 그 안에 부여했다
<아스니에르의 미역감기>으로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중심적 인물로 부상한 쇠라는 바로 두 번째 대작인 이 작품에 착수했다.  모티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밝은 야외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이지만, 등장 인물의 수가 많아지고 땅의 부분에서는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대비로 구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될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자트 섬에 나가 여러 포즈를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오후에는 그 모습들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배치하곤 했다. 쇠라는 1884년 5월부터 작업에 착수해서 1985년 3월까지 대강의 윤곽을 잡은 뒤, 1985년 10월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 1986년 5월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순색의 작은 반점의 병치로 더욱 완벽한 분할 묘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정감적인 인상파를 극복하고, 그 고유의 과학적 인상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1886년 제 8회 인상파전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3년 동안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쇠라는 아침 일찍부터 라 그랑드 자트 섬에 나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아틀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새롭게 창조해 화면에 배치시켰다.


포즈를 취하는 여인들 1886~88
실내에 포즈를 취한 3명의 누드 모델이 보이고 그 옆으로 쇠라의 '그랑쟈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커다랗게 벽면을 차지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거대한 크기는 물론 허구적이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다시 한 번 그림에 인용함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앞에 포즈를 취한 모델들은 점묘로 인체의 묘사를 시도한다.

포즈를 취하는 여인들을 위한 습작1886~87  유채
누드화를 그리면서 쇠라는 아틀리에 내부의 빛을 통해 흐르는 인공 조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필촉의 크기가 부분 부분 다르게 사용되었으며,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점들은 자유자재로 날아 다니고 있다.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의 실험 이후 쇠라의 그 다음 거대한 작품인 <포즈를 취하는 여인들>은 그가 과학적 색채 이론에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쇠라의 분할 묘법은 3세기 로마의 고전미술에서처럼 타일로 만든 모자이크가 멀리서 보면 색이 합쳐져 형태가 드러나는 작품들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 쇠라는 색채의 순도와 명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순수한 색채들이 시각 작용으로 인해 눈에서 혼합되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할 묘법이라 불리는 이 기법은 사물의 윤곽을 허물어뜨리고, 모든 형태의 다양한 색깔의 점들이 한데 찍혀, 그의 그림을 알아보기 힘들게 하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전통과 현대의 관계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시적인 비유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왼편에 등을 돌리고 있는 앉아 있는 여인은 옷을 조심스럽게 벗고 있고, 가운데 여인은 정면을 향해 포즈를 잡고 있다. 오른편에는 스타킹을 신고 있는 여인이 있는데, 이 세 여인은 쇠라 특유의 설정으로 각각 독립된 자신으로 돋보이고 있다

서커스의 호객1888년, 99.7×150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그랑자트 섬>의 자연광선과 <서있는 모델>의 작업실 조명에 이어 여기서는 인공조명이 등장된다. 가스등과 아세틸렌등은 유랑곡예단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라드(La parade)는 손님을 끌기 위한 간단한 코메디를 말한다. 쇠라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한 구도에 의해서 완성되는 조형적 구성은 견고한 현대 회화의 미래를 예고한다.  이 작품은 아마도 인체주의까지 예고하는 유일한 19세기 회화일 것이다. 파라드는 손님을 끌기 위한 간단한 코메디를 말한다. 쇠라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한 구도에 의해서 완성되는 조형적 구성은 견고한 현대 회화의 미래를 예고한다.


 

샤위춤1889~90 캔버스 유채169.1×139cm 뮐러 미술관

쇠라의 점묘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작품에는 윤곽의 선이 살아나게 되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패턴은 미끄러지듯 리드미컬한 구도를 이루며,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미지를 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쇠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화장하는 여인
쇠라의 애인 마드레느 노브로크를 그린 작품인데 후기의 양식성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인물의 객관적인 묘사와 인물과 배경 전체를 에워싸는 분위기에 깃들어 있는 문양적(紋樣的) 패턴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일종의 음악적인 톤을 형성해 주고 있다. 이 점은 <샤이 춤>이나, <서커스>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성이다. 여인의 모습과 화장대의 모양, 그리고 배경의 곡선적 패턴이 상승하는 무드를 타고 있는데, 쇠라는 이 상승적 무드를 즐거움으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 즐거움은 다른 실내 작품에서와 같이 유머를 곁들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그려진 꽃이 있는 곳에는 원래 쇠라 자신의 얼굴이 그려졌다가 지워 버렸다

봄의 그랑드 1888 캔버스 유채 65×82cm벨기에 왕립미술관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고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완성했던 것으로, 쇠라는 야외에서 보았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 화면에 질서를 부여하고 끈기 있게 필촉을 두들겼다. 그 필촉의 힘으로 색조에 힘을 불어넣으며 완성을 이룬다.
 
서커스 바생항구  옹플레르등대  옹플레르부둣가 포즈를취한옆모습 파라솔여인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마네는 인상파 그룹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위치에 있었고 당시 많은 신문들이 인상파의 거두로 그를 표현하긴 했지만 마네는 한 번도 인상파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

전통적인 기법으로 동시대를 그리다 : 고전적+현대적+새로운 미의식의 창조=서양 근대 회화의 창시자

회화의 의미 부여 거부 : 작품의 자립 추구.

대담한 공간 처리와 강력한 색채 대비 : 원근법과 결별하고 대상의 단순화. 명쾌한 색면대비로 본질 구현

검정색을 매혹적으로 사용한 화가 : 인상파화가들과 가장 큰 차이점임.

풀밭위의점심식사(1863년, 214×270cm 파리 인상파 미하고 술관)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연출로 인해 1863년 낙선작 전시회에 출품되자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다.
'거장이 갖는 이미지와 현대 생활을 보여주는 정경의 융합'이라는 마네의 의도가 감춰져 있다. 그것은 당시 권유에 대한 도전이자 예술의 인습에 대한 문제 제기와 도발이기도 했다.이 작품은 마네의 작품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인상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미술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고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올랭피아(1863년. 130×190cm 파리 루브르미술관)
티치아노의 올랭피아의 구도에서 차용. 여체로서의 관능성, 신비로운 신화적 일면을 배제하고 창녀임을 알수 있는 도상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신있으며 저돌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재현양식은 중간색조는 사용하지 않은 단순화된 색채가 어둡고 밝게 대조되어 단조로운 색채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했다
도발적인 태도와 시선은 현재에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 그림이 1865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관객들의 비난과 항의 때문에 경관을 배치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해 살롱전에 걸렸던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이런 그림들이 쉽게 받아들여 진 것은 이러한 작품들이 신화나 역사화의 허울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캔바스의 표면이 창문처럼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문의 형식자체를 보여주는 것, 즉 미술의 형식이 중요해지는 것도 매우 현대적인 양상이라 하겠다

투우 (1863~66 48×60.8cm 시카고 미술관)

마네는 1865년에 스페인을 여행했다. 그는 스페인의 회화에 매료되어 있었고,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단지 빛과 그림자로만 승부를 걸고 있다. 극적인 상황의 형상을 통해 마네는 추상적인 요소에도 근접하고 있는 듯하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1~82 96×130cm 런던 대학 커톨드미술관)
이 살롱에 전시되었던 1882년 레죵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그에게 이 명예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중앙의 우울한 표정을 지닌 젊은 여인과 그 옆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 실크 모자를 쓴 남자 등의 배치가 재미있다. 우울에 젖어 있는 여인과 서로 공유하기를 꺼리는 배경의 화려함은 마네의 근대적이고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을 드러낸다

스페인 무희 롤라 드 발랑스 ( 1862년, 123 x 92cm)
이 작품은 '스페인 발레'에 등장했던 롤라 멜레아라는 무용수를 그린 것이다. 그녀는 마드리드 왕립극장의 마리아노 캄푸르비 무용단의 수석 무용수였으며, 세칭 롤라 드 발랑스라고도 불렸다. 마네는 이 여인을 통해 당시 스페인 사람의 전통적인 모습을 표현하려 했으며, 고야의 <알바 공작 부인>을 본떠 작품을 제작했다. 이 스페인 여인에게서 착상을 얻은 보들레르는 마네를 위해 사행시를 지었고, 그의 유명한 시집 『악의 꽃』에 수록하게 된다.

거리의 여가수 (1862 175.3×108cm 보스턴 미술관)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던 마네는 카페에서 나오는 거리의 여가수를 보았다. 순간 예술적 가능성을 포착한 마네는 그녀에게 다가가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도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른 모델을 통해 그가 보았던 포즈를 만들어 냈다. 마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서도 얼마든지 예술적인 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걸작은 당시의 아카데믹한 인습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맥주잔을 들고 있는 여급 (1878 97.5×77.5cm 런던 국립미술관)

마네의 후반기 작품으로 빛과 그 흐름을 통해 색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구성의 면밀함보다 빛에 의한 강조를 통해 시원한 화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피리부는소년 (1866년)
강력한 색채 대비로 화면에 독특한 효과를 주는 방법을 이용했으며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

나나,(1877년)
파리의 상류층 사회의 퇴페풍조를 전하는 작품으로, 속옷바람의 육욕적인 여인이 거울 앞에 서서 루즈를 바르고 있다. 긴 의자에는 야회복 차림의 중년신사가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생명력이 응축된 튀어나온 엉덩이와 이 엉덩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나이와의 대조가 해학적이다.

해변에서, 에두아르 마네, (1873년, 캔버스에 유채, 59.6 x 73.2cm)
마네는 1873년 살롱전에 <비어 홀>을 출품해, 네덜란드 화풍을 제대로 옮긴 작품이라 하여 보수적인 평론가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비어 홀>은 조각가 에밀 벨로의 초상화로서, 1872년 네덜란드에서 본 프란스 할스의 <술고래>에 대한 마네의 경애심을 담고 있었다. <해변에서> 역시 그림 속의 모래알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할스의 예술적 감각에 대한 정취를 감지할 수 있다. 마네의 풍경화는 풍경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 인물을 배치하고 있다. 으젠느 부댕이나 모네가 그린 해변과 비교해 볼 때, 마네의 <해변에서>는 화면 대부분을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1873년 7월 마네가 가족과 함께 베르크쉬르메르에서 3주간 체류하는 동안 그린 그림으로, 해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부인 쉬잔과 남동생 유진을 담고 있다. 수평선은 그림의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늘을 배경으로 선박의 닻이 드문드문 점을 그리고 있다. 마네는 모래와 하늘뿐인 회색빛 세계에 붉은 선을 가미하면서, 북해의 해변을 밝은 분위기로 바꿔 놓고 있다.

로슈포르의 탈출, (1880∼81년, 80 x 73cm)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후일 마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그린 것이다. 소재를 제공한 로슈포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나폴레옹의 제 2제정을 반대했던 로슈포르는 파리 코뮌 시기에 코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872년 누벨 칼레도니아로 유배되었다. 그는 투옥된 지 2년이 지난 1874년 섬을 탈출하였다. 이후 스위스에 숨어 지내던 로슈포르는 1880년에 사면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 작품의 소재가 실재 사건을 토대로 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혹은 암시적인 비판, 시사성을 찾을 수 없다. 이는 마네가 한 정치인의 극적인 일화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 로슈포르가 누구인지, 함께 탈출을 돕고 있는 인물들은 누구인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결치는 파도가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림의 주된 모티프는 탈출자가 아니라 일렁이는 파도이다. 바다를 강조함으로써 작은 배는 더욱 위태롭게 부각되어서 탈출자의 고독이 강조되고 있다.

모든 인상주의자들에게 있어 바다는 가장 중요한 묘사 대상이었다. 모네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종킨트로부터 처음 그림을 배운 것도 바로 프랑스 북부의 해안이었다. 19세기 후반, 바다는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라 해수욕 붐과도 관련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삶이 이루어지던 공간이기도 했다. 인상주의자들에게 바다는 눈부신 빛의 공간이자 동시에 해수욕이나 해변 산책을 할 수 있는 여가를 즐기는 도시 공간이기도 했다.

1880년대 초에 그려진 마네의 그림은 인상주의의 터치가 눈에 띠긴 하지만 그림의 분위기에 있어서는 인상주의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마네의 바다는 좌절된 꿈의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선원이 되기 위해 두 번이나 시험에 응했지만 실패했고 그 사이 견습 선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던 마네에게 바다는 남다른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바다가 인상주의자들의 바다보다 어둡고 해변의 사람들도 우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연유인지도 모른다.

아틀리에에서의 식사

좋아하는 모티프를 자유롭게 그려 넣은 작품으로 왼족 테이블 위에 있는 투구, 장검, 검은 고양이, 그리고 그 뒤의 화분, 부인이 들고 잇는 물병과 식탁 위의 여러가지 소품이 인물 못지 않게 흥미를 끈다. 노랑, 검정, 하얀색과 엷은 푸르름이 조화를 이루고 부드러운 음영이 화면 전체를 뒤덮어 방안 공기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밀감이 돌도록 표현하였다. 앞쪽의 소년은 마네의 아들로 전해지는 레옹 코에라, 그 뒤가 마네의 부인, 그리고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친구인 오귀스트 르스랭이다.

막시밀리언의사형
고야의 < >의 구도 차용.

에밀졸라의초상(1868년. 오르세미술관)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지만 인상파화가들과는 몇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색채로서의 검정색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같은 검정이라도 밝고 품위 있는 검벙, 분위기 있는 검정등 변종이 만들어졌다. 필치도 인상파처럼 섬세하지 않고 붓에 물감을 듬뿍 적셔 견고한 화면을 만들었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검정색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파리교외의 경-마장 보트의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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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매너리즘 미술  (0) 2013.03.31
7)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 (15세기)  (1) 2013.03.05

1. 특징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
(16세기 말 종교적 대립이 끝난 뒤 바로크양식이 나타남.)

·17세기 바로크 미술이 상당부분 로마 카톨릭 교회의 힘과 열정에 힘입어 피어났음
·카톨릭의 새로운 교회체제를 마련하려는 노력으로 로마는 다시 카톨릭세계의 중심이 됨.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미술의 역할 강조
·신교국가들의 성상타파에 대항이라도 하듯, 더욱 더 화려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교회를 장식
·엄격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무쌍하고 율동감 넘치는 교회를 고안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

이탈리아 바로크의 조각 및 건축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
로마 성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교회 (1664-67년)

로마, 성 이보 델라 사피엔자교회(1642-44년)

성 베드로 대성당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거듭난 것은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서임.

베르니니 (Gianlorenzo Bernini. 1598 ~ 1680)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건축가. 나폴리 출생의 베르니니는 어려서부터 토스카나의 조각가였던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니니(1562-1629)로부터 수학하였고, 1605년 로마로 이주하여 젊은 나이에 천재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교회 건축, 궁정건축, 조각 등의 다방면에 그의 재능을 발휘했다.

베드로성당 광장의 열주

아폴로와 다프네(1622-25년. 로마 보르게제 박물관)
신화속의 안타까운 사랑의 순간을 묘사. 달리는 아폴로와 막 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 옷자락에서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작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콘스탄차 보나넬리(1636년경. 피렌체 국립 바르젤로 박물관)
매우 사실적인 묘사와 심리가 표출된 초상 조각들을 남겼는데 이는 이전 로마시대 초상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인물의 순간적인 표정을 포착하는 방식이나 옷주름, 머리카락을 동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전조각, 미술과는 다른 바로크 시대의 특징.
성녀 테레사의 환상 (1647-52년, 로마 산타 마리아 델라 빅토리아 교회)
청동 빛줄기를 배경으로 테레사 수녀는 신의 은총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수녀의 황홀함은 펄럭이는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베르니니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깔의 대리석, 석회벽토, 청동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자유자재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회화

카라밧치오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 ~ 1610)
극심한 명암대비를 이루면서 형태를 강조 : 빛과 그림자가 엮어 내는 극적인 효과 대상 속에서 찾고자 함이 르네상스양식을 뛰어넘어 바로크양식의 주요 특징이다.

성인도 서민으로 그리다. : 철저한 리얼리즘을 추구. 새로운 미학으로의 전환점으로 리얼리즘 뿐 아니라 인간 육체 에로티시즘이 자연스럽게 표출되어 인간미 넘치는 조형적 묘사.

자연주의 화가 : 이탈리아 북부 출신으로 고전주의의 고상함을 따르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본 것에 의지하여 추하더라도 현실을 그리고자 하였다.
카라바지오는 밀라노 근처의 롬바르디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이 곳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북유럽 사실주의의 영향이 강했던 곳이었다. 초기에 카라바지오는 이곳에서 정물화나 장르화를 주로 그렸다. 동성애 성향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사소한 놀이 끝에 동료를 살해한 경력과 잦은 투옥 등 곡절 많은 생애를 살았던 카라바지오는 평생 제자를 두거나 일가를 이루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도하였던 혁신은 이탈리아에서 많은 추종자를 낳았으며, 스페인, 프랑스, 플랑드르 등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스도의 매장
당시의 종교화가 관념적으로 흐르고 종교적인 감동이 공허해지는 데 반대하여 현실적인 묘사를 통해 극적인 표현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종교적인 격정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그 시대적 인물상을 사실적으로 다루었으며, 극단적인 명암의 대조로 장면을 실감나게 그렸다. 이 작품을 통해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비극적인 삶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신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고 행동은 침착하다. 성모 마리아의 침통한 표정에서는 오열보다는 고요한 슬픔이 느껴지고 싸늘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 분위기는 더욱 무겁다. 마리아 옆의 두 젊은 여성이 오히려 인생의 지주를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며 탄식하고 있다. 이상적인 유형의 종교화보다 현실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구상되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색이다.

젊은 바커스(1596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카라밧지오가 활동하던 당시 이탈리아는 매너리즘이 지배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사실성이 충만한 그의 이 작품은 이색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풍속화도 초상화도 아닌 이 그림은 주제가 말하듯이 그리스 신화의 소재를 세속화한 것이다. 건장한 신체와 낙천적인 표정의 젊은 바커스는 술잔을 들고 탁자에 앉아서 여러 가지 과실과 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인물은 정확한 묘사에 조소적인 표출이 되어 있고 탁상의 과실 또한 그 사실적 성격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바커스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 중에서 이 그림처럼 세속화되고 젊음의 혈기를 나타낸 것은 매우 드물다.

류트를 연주하는 사람(1595년)
인물과 꽃. 전통적인 회화에서는 인물이 회화의 중심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겠지만, 여기에서 감상자의 시선은 꽃과 인물 양쪽으로 흐른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물화와 사실주의의 탄생을 엿볼 수 있다.

과일바구니 사기꾼 병든 바커스 점쟁이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1598년)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온 카라바지오는 성 프란체지 교회의 콘타렐리 가족예배실 제단화를 주문 받아 본격적인 종교화를 제작

예수의 저녁식사(1601-02년. 런던 국립미술관)
소스라치게 놀란 한 제자는 경이로움에 우리쪽으로 의자를 반쯤 밀치며 일어나고 있으며, 베드로의 뻗친 팔은 화면을 뚫고 나오는 것 같다. 식탁의 모서리에 비죽 나온 접시는 이러한 극적인 장면을 더욱 긴박하게 만든다. 그리고 화면의 긴장감은 강렬한 빛의 사용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어둠속에서 예수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듯한 빛은 어떠한 소란한 설명보다도 훨씬 웅변적이다. 그러나 그 빛은 자연의 빛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마태와천사 1 (1602년. 2차대전때 소실)
마태의 세가지 사건, 즉 예수의 부름을 받고, 천사의 인도로 복음을 남겼으며, 마지막에 순교하는 장면을 그렸다. 기독교에서 성인들을 고귀하고 품위 있게 묘사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성인들을 그리는데 앞시대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 맨발을 드러낸 채 의자에 엉거주춤 걸쳐 앉아 천사의 목소리를 받아 기록하는 마태는 매우 당황한 모습이다. 그의 두 손은 너무 어색해서 이전에 사도들이 학식 높은 철학자로 그려졌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주문자로부터 거절당해 다시 제작했다.

성마태와찬사2(1602년. 로마,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교회 )

성모의 죽음 (1606 년. 파리 루브르박물관)
당대의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던 걸작이다. 루벤스는 카라밧지오의 회화 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카라밧지오의 강렬한 빛의 사용과 극적인 사실감에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이러한 기법을 도입하기도 했다.반종교개혁시기의 다른 벽화들처럼 화려하게 교회를 장식하는 종교화를 과감하게 거부한 또 다른 작품으로 카라바지오는 로마의 강변에서 건진 여자의 시체를 모델로 삼아서 그렸다고 하는데, 흐트러진 머리와 옷 매무새, 퉁퉁 부은 몸과 푸르뎅뎅한 피부색까지 그대로 그려져 있어 주문자에게 거절당했는데 순진한 사람들에게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종교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의 대중화를 추구하였던 반종교 개혁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성마태의 소명(1599∼1600년) 도마의 의심 다윗과 골리앗 에로스 잠자는 큐피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1593-1652)

영웅적 여성을 카라바조 양식으로 그린 17세기 로마 출신의 화가. 여성화가라는 점과 작품이 그녀의 생애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성주의 미술사'(페미니즘)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딧
적장을 유인하여 목을 베는 유대의 여걸 유디트의 이야기는 잔혹한 그림을 선호하였던 바로크 시대에 많이 그려졌다. 그러나 억센 여자들의 손놀림과 화면을 뚫고 나오는 홀로페르네스의 반쯤 잘린 머리 때문에 젠틸레스키의 이 그림은 다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더욱 끔찍하다. 아버지의 조수에게 추행 당했던 젠틸레스키의 생애와 이 그림이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질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남성화가들의 시선의 대상으로 재현된 유디트의 모습과 여성화가인 젠틸레스키의 유디트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화상 유딧

스페인 회화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1599 ~ 1660) 에스파냐의 궁정화가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여 몇번의 단순한 필치로 작품을 완성.스페인 왕실의 공적을 알리는 선전화나 왕가의 초상화를 제작하며 화가로서의 입신을 이루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찾아온 예수(1618)

성 루가복음서에 나오는 일화에 기초하여 제작한 작품 사건 그 자체는 하나의 시각적 장치를 통해 묘사되어 있는데, 몇몇 미술사가들은 그 장치를 거울이나 창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비야의 물장수(1623년)
그의 나이 스물살에 그려진 것이다. 투박한 느낌을 주는 커다란 항아리와 헤진 망토를 입은 남자의 옆모습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은 화면 뒤쪽으로 인물들이 엇갈려 있습니다. 당시의 정물화들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그린 큰 질그릇과 물컵, 그리고 작은 항아리도 역시 상징으로 보인다. 세사람의 연배가 서로 다르다는 점, 그들이 서로 지그재그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생의 세 단계를 은유하고 있다. 벨라스케스가 젊은 나이에 이미 다양한 질감들을 묘사해내는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펠립페 4세(1631-35)


교황인노켄티우스10세초상(1650)
뒤늦게 로마의 교황청을 방문하여 제작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에서 벨라스케스의 이 두가지 시선을 교묘하게 결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권력자의 냉혹한 초상이지만, 동시에 붉은 빛의 공단과 사그락거리는 흰 레이스 대비가 눈부시다

난장이 발레카스 (1642-45. 프라도미술관)
왕실의 노리개감이었던 난쟁이, 시종들 그리고 걸인들의 모습도 많이 남겼다
거울앞의비너스(1649-50)

빛과 대기의 표현과 구도에 대한 연구 등으로 서양 회화사에서 위대하 ㄴ업적을 남긴 벨라스케스가 그린 네점의 나체화 가운데 유일하게 전해 오는 작품으로 작가의 예술성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냉정한 통찰력과 사실적 표현으로 자연스러운 여체의 우아한 곡선을 과장이나 꾸밈없이 잘 그려내고 있다. 사랑의 신 큐피드가 거울을 받치고 있으므로 주인공은 현실이 아닌 신화 속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여인의 앞면을 거울을 통해 나타내는 공간 구성은 바로크 표현 양식의 하나이다.

라스메니나스(궁녀들)(1656년)
작가의 만년작으로 한 폭의 그림 속에 초상화, 일상생활, 화실의 화가. 실내묘사등 여러 소재들을 함께 담은 사실주의 미술의 걸작이다. 3m가 훌쩍 넘는 크기 뿐 아니라 흥미진진한 구성과 회화적인 솜씨로 인하여 이 화가의 대표작이다 . 거울에 어슴프레 포즈를 취하고 선 왕과 왕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화가 자신일지 모른다. 그는 자신을 이젤을 당당히 들고선 화가의 모습으로, 동시에 가슴에 붉은 기사훈장이 선명한 귀족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이제 장이가 아닌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 그림은 궁정화가로서 성공한, 자의식이 강한 화가가 자기 세계를 자랑스럽게 반추하는 장면처럼 보인다. 라스메니나스의 황녀의 빛나는 금발과 레이스를 표현한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벨라스케스는 단 몇번의 붓질로도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개의 보드라운 털, 그리고 화려한 의상의 반짝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는데 이러한 시각적인 효과를 누구보다도 높이 샀던 이들은 근대의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화가의 아틀리에에 온 마르가리타 공주에게 쏟아진 빛에 의해 화면 전체가 통일감과 깊이를 얻고 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거울에 비치는 국왕 부처를 그리던 화가가 모델을 쳐다보고 있고, 마르가리타공주를 비롯한 두 명의 시녀와 두명의 난쟁이, 어릿광대와 개, 거리고 그 뒤에 남녀 시종이 있고, 문간에는 한 남자가 서서 구경하고 있다. 이러헌 인물 배치와 방 구조는 공간감을 나타낼 뿐 아니라 실내 정경에 변화를 주면서 자연스럽게 궁내의 일상생활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구경뿐을 그림의 이야기와 화면에 참가시키는 그의 기법은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말을타고 있는 펠립페3세(1628-35) 말을타고 있는 마르가리타왕비(1628-35)

마리아나왕비(1652-53)

1634년에 태어나 1696년에 죽었다. 그녀는 황제 페르디난드3세와 펠립페4세의 누이인 마리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1649년 마리아나는 겨우15세의 나이로 당시 부르봉가의 이사벨라왕비를 여윈 그녀의 외삼촌 팰립페 4세와 결혼하였다.

2(1653-54) 3

1651년에 태어난 마르가리타 공주는 펠립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딸이었다. 그녀는 1666년에 독일 황제 레오폴트1세와 결혼하여, 1673년에 죽었다.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이 공주를 모델로 그린 여려 점의 초상화 중에서 첫 번째 것으로, 당시 그녀는 세 살 가량되었다고 한다.

8세의마르가리타왕녀1(1659)

마리아테레사공주(1652)

국왕펠렙페 4세가 합스부르크가에 선물로 증정.펠립페4세와 이사벨라 왕비의 딸인 마리아테레사공주는 1638년 9월 20일에 태어났다. 1652년도에 제작된 그림이라면 14세가 된다. 공주는 프랑스 루이 14세와 1660년 결혼하였고 1683년에 죽었다.

황태자카를로스기마상


1.특징

·르네상스 전성기가 끝나가는 16세기 중엽부터 17세기초(1520년경부터 1600년경까지)

·‘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 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쇠퇴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완전한 미를 추구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돌파구)
( 이전의 고전주의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일탈과 변형의 미술이 이루어짐)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

·매너리즘의 소산
루터의 종교개혁
지리상의 발견.
지동설의 학설로 그들이 믿던 중심은 해체되고 새로운 언어 갈구.

·베네치아와 스페인 미술에서도 두드러진다
·불안감, 의도적부조화,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는 시대정신의 표출

파르미지아노(1503-1540)

인체를 늘이는 과장된 표현

목이 긴 성모(1534-40년. 피렌체미술관)
얼굴도 작아서 아마 10등신 정도는 되어 보인다.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전형이 형성되자 이를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한 과장의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장은 어느덧 변형의 미를 낳게 되었다. 이 그림은 성모자와 성인 또는 천사들이 같이 있는 것 같지 않고 마치 채색된 성모자 조각상에 천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 같다. 성모자의 묘사가 너무 인위적이며, 좌대 위에 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인간보다 훨씬 거대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바로 마리아의 뒤에 놓인 큰 기둥 때문이다. 그 앞에 있는 수도자는 오히려 너무 작다. 이제 미술가들은 더 이상 실제같이 보이게 하려는 재현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로쏘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 1494-1540)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림(1521년. 볼테라성당)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면 우리는 땅에 쓰러질 듯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부터 마리아를 부축이고 있는 여자와 예수의 발을 붙잡고 있는 왼쪽의 남자, 잘 붙들고 있으라고 소리치는 왼쪽 위의 남자들까지 한 바퀴를 돌아야 한다.주인공인 예수와 성모, 요한은 중앙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늘에 가려있다. 이제 중심은 해체된 것이다.

폰토르모(Jacopo Pontormo: 1494-1557)
예수의 시신을 눕임(1528년. 피렌체 산타펠리치타)
푸른 보라빛을 배경으로 한 붉은 색의 난무와 같은 이미지. 고유색을 부정한 이러한 인위적인 색채와 빛의 효과가 특색이다. 그가 그린 예수의 시신을 눕히는 장면은 보라빛이 감도는 연한 푸른색과 연한 주황, 연분홍, 연한 살색의 배치 같다. 이러한 탈색된 듯한 색들은 그림에서의 색채가 이제는 사물의 묘사를 위한 색채이기보다 색들 자체의 유희임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의 엘리자벳 방문(1528-9년. 피렌체 카르미냐노)
산 미켈레 매너리즘의 여러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화면 가득히 차지하고 있는 네 사람의 머리와 발은 작고 몸체 중앙만 부풀린 채 커서 마치 공중에 약간 떠 있는 듯이 보인다. 마리아와 엘리자벳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나 뒤의 두 사람은 관람자를 쳐다 보아 네 사람의 관계는 서로 불일치하며, 그들에게 비추는 광선 또한 마리아는 화면 왼쪽에서, 엘리자벳은 화면 정면에서 오는 빛을 받아 분산된 효과를 주고 있다. 이 광선들은 한쪽에서 오는 자연광이 아니며 화가가 임의로 정한 인위적인 국부 조명인 것이다. 이 그림이 더욱 괴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경과 인물들 간의 비례 때문일 것이다. 인물들은 건물의 3층까지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여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들은 왼쪽 건물 아래에 있는 아주 작은 인물들과 대비되어 있다.
브론치노(Angelo Bornzino 1503-1572)

피렌체 코지모 1세의 궁중화가. 정확한 묘사와 차가운느낌. 생명감의 약동으로 새로운 감각의 발현을 엿볼 수 있음.

시간과사랑의알레고리
작품의 주제는 명확하다. 음탕한 쾌락 추구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도덕적으로 훈계하는 그림인 것이다. 쾌락은 고통을 가져도고, 그것은 쉽게 망각될 것 같지만, 시간은 언제나 진실의 편이어서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글미을 보다 보면 작의가 훈계하겠다는 건지 문제가 된 음탕함을 시각적으로나마 함께보고 즐기자는 건지 도저히 구분이 안된다. 여체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우미한 표헌 형식으로 그림 속의 관능미를 한껏 고조시켜 놓았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색채와 분위기 아래 자신의 타고난 감각을 마음껏 과시하는 작가의 붓길에서 회화라는 예술에 있어 주제가 갖는 의미가 때로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와 그의 아들(1550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엘레오노라는 메디치가의 피렌체 공작 코지모 1세의 부인이다. 16세기 중엽 피렌체 정치는 여러 면에서 이전 르네상스시대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공작은 곧 이 지방의 주인이었으며 정치면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문화, 모든 것을 지배하여서자신을 신격화 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국제 정세에서의 피렌체는 오히려 약세였으니 이러한 신격화는 과시에 불과했다. 인물의 얼굴은 마네킹 같이 차갑고, 부인이 입은 옷은 마치 의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듯이 옷의 특징 만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은 마치 박제된 듯 고정되어서 주인공의 성격이나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우며 인물이 그림으로부터 소외된 듯이 느껴진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년 그리스출신.에스파냐의 화가.)

엘그레코란 스페인말로 그리스사람이라는 뜻.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렛토의 영향을 받음

스페인 최초의 위대한 종교화가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 감각으로 정열을 표현 : 현실적으로 존재할 리 만무한 형태와 색채를 그리다. 특이한 발상과 묘사력을 추구. 현실감이 상실된 왜곡 추구. 이상한 장소에 광원이 있고, 그 빛이 대상이 되는 인물을 기괴하게 비춤. 규범으로부터의 탈출.

오르가스백작의매장
인망이 두터웠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순간, 성 스테파누스와 성 아우구스타누스가 날아 내려와 백작의 유체를 묘에 안장했다는 전설에 근거하여 그려졌다. 매장에 참석한 톨레도 시민들의 줄을 경계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나뉘어져 있다. 비례에 왜곡이 있는 천상계는 필치나 색채 모두 신비스럽다. 백작의 혼은 갓난아기 같은 형태로 천사들에 의해 운반되고 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그리스도에 의한 심판을 받는 장면이다.

게쎄마니에서의 기도(1588년. 톨레도미술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예수가 공포와 번민에 싸여있는 순간의 기도이다. 데리고 간 세 제자는 잠에 빠져 예수와 함께 깨어있지 못하였으며 이때 이미 유다는 로마인들에게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준 순간이다. 엘 그레코는 기도하는 예수에게 붉은 옷을 입혀 크게 중앙에 놓고, 왼쪽엔 잠에 빠진 제자들, 오른쪽엔 로마 군인들을 희미하게 암시하였다. 길게 늘어트린 인물의 비례와 명암의 강한 대비, 마치 초점이 없는 듯 흐릿하고 어긋난 윤곽선들, 빠른 필체 등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매너리스트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 그는 사물을 배치하는데 있어서 현실의 고정관념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예수와 천사의 관계는 공간적으로 매우 애매하며, 잠든 세 제자가 있는 곳은 마치 동굴 속 같기도 하고 공기의 막에 싸여있는 듯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푸른 달무리와 밤하늘의 구름은 환상적인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다.
툴레도풍경(1600-10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인물 형상이 없어서 표현력이 더욱 큰 것 같다. 짙은 먹구름 아래에서 번개 빛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음산한 언덕과 건물들, 빛의 흐름만이 번쩍이는 검은 하늘은 거의 추상화 같다. 중세 종교화가 지닌 영적인 힘과 현대의 추상회화가 만난 듯한 표현력이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마리아의 승천 기증가가있는 크리스트의십자가상

성안드레아와성프란체스코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강한명암대비, 격정된 동세감, 불안정한 사선구도

최후의 만찬 (1592-94년. 베네치아, 산 조르지오 마죠레 )
베네치아의 산 조르지오 마조레(San Giogio Maggiore) 교회에 걸려있는 거대한 캔버스화 .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틴토레토의 작품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식탁은 대각선으로 놓여있고, 예수와 사도들 보다 이들의 식사를 시중들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번잡스러움이 화면을 지배한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임을 알아보게 하는 요소는 번쩍이는 두광의 빛이다. 예수의 두광은 마치 자체가 빛을 발하는 힘이 있는 듯 하며, 제자들의 두광은 화면 왼쪽 위의 등불에서 발하는 빛의 역광인 듯 처리하였다. 빛의 원천이 뒤에 있기 때문에 인물들은 모두 어둡고, 따라서 표정을 알기 어렵다. 인물의 역할보다는 빛이 화면의 효과를 좌우한다. 어두운 부분은 거의 색채가 없는 듯 검은 색이며 밝은 부분은 섬광이 빛나듯 즉흥성이 번뜩이고, 등불의 빛이 번져 나가면서 형성하는 천사들의 환영은 초자연적인 신비감마저 조성한다.

최후의 심판 터어키인과 크리스트교도들의싸움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8.html )


1. 특징

·알프스 산맥 북쪽 지역(현대의 벨기에와 네델란드 지역인 플랑드르와 독일지방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음 )

·부유한 시민 계급 형성(종교화임에도 현실이 사실적으로 반영된 새로운 미술을 발달)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지역의 비교

이탈리아지역 플랑드르지역

원근법. 명암범. 고전의 발견등 이론 강조 고딕 전통 고수

신흥 시민 계급이 주도했지만 교회나 광장과 같은 대중공간을 위한 거대한 규모의 미술품 선호
실질적인 경제력이 우선하여 비교적 소품이며, 사적이고. 친밀함을 보여주는 미술품 선호




랭브르 형제(Limbourg Brothers, Herman, Jean, Paul: 1370/80년경-1416년)
플랑드르 출신의 필사본 화가. 베리 공작의 미술품 제작에 종사했다. 그들이 공작을 위해 그린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는 크기가 22.5×13.6cm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기도서로써 12달의 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 중 5월은 사랑의 축제로 그려졌다. 5월의 색채인 녹색 옷을 입은 여인들과 호화로운 옷을 입은 남자들이 야외로 나가고 있으며 그들의 앞에는 음악대들이 축제의 흥을 돋우고 있다. 이들은 아마 1400년과 1410년에 결혼한 베리공작의 딸과 아들인 듯하여, 멀리 보이는 성은 그들이 결혼식을 행하였던 파리의 시테궁이라고 짐작된다.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5월(1414-16). 9월
9월은 포도수확이 한창인 과수원과 그들의 주인이 살고 있는 하얀 성(城)으로 그려졌다. 포도를 따고, 그들이 거둬들인 수확물은 모두 성으로 옮겨지고 있다. 성벽으로 굳게 둘러싸인 하얀 성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귀족과 농노계급으로 대변되는 중세 말의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년경-1444)

메로데 제단화(1427년경.메트로 폴리탄 박물관)
세 폭의 제단화 중에서 왼쪽의 무릎꿇고 있는 이들은 이 그림의 주문자 잉겔브레히트부부이다. 당시의 부유한 시민계급들은 귀족들을 모방해서 미술품들을 주문하였는데, 귀족들은 필사본이나, 금속공예품과 같은 값비싼 매체들을 주로 주문한데 반해서 이들은 제단화라는 매체를 선호했다. 제단화는 값이 쌀 뿐 만 아니라 그림의 장면에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넣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림에 자신들의 집이나 생활도구들을 넣을 것을 계약서에 명시하였다고 한다. 제단화는 신흥 브루주아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매체였으며, 이들의 요구는 마치 현장을 그대로 살린 듯한 사실적인 회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가운데 수태고지 장면이다. 창문은 위 아래를 따로 열 수 있는 방식이며, 나무로 된 천장은 격자로 엮어져 있다. 물을 담는 커다란 포트 옆엔 면 수건이 걸려 있고 마리아 앞의 테이블엔 화병에 꽃이 꽂혀 있다. 마치 이 시대 가정집의 내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마치 집안 살림도구와 같은 이들 소품들은 또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동제 그릇에 담긴 물과 화병에 꽂힌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
오른쪽 패널엔 목수일에 열중하고 있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그려져 있다. 수태고지에 요셉을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요셉과 함께 있는 여러 공구들은 예수 수난에 많이 등장하는 도구들이어서 오른쪽 패널은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광경 또한 당시의 목공작업실 같다다. 그리고 창 너머엔 꼭대기 층을 삼각형으로 한 북유럽 특유의 집들이 빽빽한, 바쁜 도시의 풍경이 참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반 아이크 형제(Jan, Van Eyck 1390-1441. 벨기에출신)
궁중화가로 초상화에 정취가 넘치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

롤랭 수상의 성모상(1436년. 루브르박물관)
아예 그림의 안으로 들어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1376-1462)이라는 주문자는 브르고뉴 공국의 3대 공작인 선량공 필립(Philippe de Bon)의 수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 경제, 외교의 권력을 거머쥐었던 권력자였지만 그는 부유한 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아이크의 이 그림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롤랭수상은 돈주머니를 차고 있었다고 한다. 그림이 진행되는 동안 이 돈주머니는 지워졌지만 그러나 그의 부(富)는 그림 곳곳에 나타나 있다.이탈리아의 제단화에서는 주문자가 아직 작은 크기로 묘사되었던 시대에 플랑드르에서는 이렇게 주문자를 그림의 주역으로 크게 등장시키는 것은 참으로 대담한 개인의 선전이었다.


아르놀피니부처의초상
부유한 상인들은 독립된 초상화도 주문하였다. 주인공 죠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그의 부인 죠반나 체나미(Giovanna Canami)는 모두 이탈리아의 루카(Lucca)출신으로 브루주(Bruges)에 정착한 이후 가장 성공한 은행가였다. 아마 이러한 신흥시민들은 자신들의 고상함이나 신비감, 그리고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 초상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단정한 자세의 부부는 갈색톤을 배경으로, 매우 성실하게 그려져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은 세속적인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선 아르놀피니는 값비싼 모피코트를 입고 있으며 창가엔 수입산 오렌지가 놓여있고, 침대 밑엔 터키산 융단이 깔려있다. 이 그림에서도 소품들은 물론 상징의 역할을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강아지는 믿음을 상징하며 하나만 남은 샹들리에의 불빛은 이들의 결혼을, 그리고 침대의 붉은 색은 사랑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배경에 볼록거울을 배치한 반 아이크의 창조성이었습니다. 두 인물이 있는 방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게 되어있는데 반 아이크는 배경에 볼록거울을 놓음으로써 천장과 바닥, 창문 밖의 풍경에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습니다. 거울의 더욱 중요한 역할은 이 두 부부 앞에 있었을 화가 자신을 넣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울 위 벽면에 "얀 반 아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 1434년"이라고 서명함으로써 반 아이크는 자신의 존재를 그림 속에 확실히 하였다.
이 거울 속의 화가 이미지와 서명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을 증명하는 증인으로서의 화가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회화 안에 자신을 넣으려는 화가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는 해석이다. 이 시대에 부각되고 있던 화가의 자의식의 발달을 염두에 둔다면 두 번째 의미가 더 잘 부합되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시대 화가들은 회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겐트의제단화 십자가책형 추기경초상 터어번의사나이
반데르파알레성모 마아가레트반아이크의초상

북유럽 미술(16세기 이후)

히에로니무스 보스(Bosch, Hieronymus. 1450-1516년) : 지옥의 화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보쉬는 반 아이크 전통의 리얼리즘과는 매우 다른 환상적인 그림을 남겼다. 그가 그린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하여서 그는 '악마의 화가, 지옥의 화가' 라고 알려졌다. 심지어 초기의 비평가들은 지옥의 광경을 소름 끼치게 묘사한 그를 비밀종파에 가입했을 것이라면서 이단자로 몰아붙였다.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이 종교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속세의 악에 이끌려 결국 타락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형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형제회의 초정통주의 종교단체에 속해 있었고,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신자와 문하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용 그림이었다. 스페인 펠리페2세가 보스 작품의 최대 수집가였다는 점을 들어 그의 작품이 진지한 신앙에 의한 창조물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소묘가로서도 뛰어났던 그는 불가사의한 상상력이 산물이 뛰어난 묘사력으로 재현됨으로써 존재할 리 없는 광경이 보는 이의 마음 밑바닥까지 파고든다. 그야말로 20세기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의 원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수의 십자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힘들게 걸어가고 있으며 화면 왼쪽 아래에는 군중 속에서 성 베로니카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천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렇듯 보스는 현존하는 그림들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화가이다. 물론 그의 그림들에서 보는 이런 몽환적이고 강박적인 시각들은 중세후반 고딕의 여명기에 여러 화가들을 통해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전작의 화가들과 달리 광기(狂氣)와 부조리(不條理)와 도착(倒錯)의 지옥도(地獄圖)이며, 합성·변모된 무수한 동물과 식물 비유기적(非有機的) 물체들로 화면을 꽉 메우고 날뛰는, 괴기하고 어두운 해학(諧謔)의 마술세계로 그의 화폭을 가득채운다.

접었을 때의 쾌락의 동산
플랑드르 전통의 세 폭 제단화로 그림은 흑백의 그리자이유로 그린 우주의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양쪽 패널을 열면 <쾌락의 동산>이 펼쳐진다. 닫았을 때의 태초의 모습은 안쪽의 왼쪽 날개인 낙원으로 이동하며, 낙원은 인간의 갖가지 탐욕이 그려진 가운데 패널을 지나 오른쪽의 지옥으로 이어진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데 비해 탐욕과 지옥의 세계는 무질서하고 기괴하다.

쾌락의 동산. (1505-15년경. 프라도미술관)
성욕.식욕.물욕 등 인간의 모든 욕망과 악덕, 그 악몽과 같은 이미지가 뒤얽혀 있는 이 작품은 사실 세 개로 구성된 연작의 일부다. 왼쪽 패녈에는 '낙원' 즉 에덴동산, 오른쪽 패널에는 죄의 결과로서의 '지옥'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패널에 그려진 이 '쾌락의 동산'은 최초의 죄, 즉 원죄를 그린 것이다.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가득 찬 '낙원'이나 '지옥'에 비해, 이 작품에 그려진 것은 오히려 사랑스럽고 순순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세상의 거짓과 위선, 욕정, 경박함 같은 악덕이 가득 차 있다
이 그림은 제단화라는 형식 때문에 교회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성적이고 기괴한 그림이 어떻게 교회에 놓여 있었을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이 그림이 1517년에 나사우의 앙리 3세(Henry Ⅲ of Nassau)의 브루셀 궁전에서 발견되었음을 상기해 볼때 1568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기까지 왕의 개인 소장품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 욕망을 절제하라는 교훈을 담은, 개인의 결혼과 관계된 작품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다.

중앙패널의 부분
벌거벗은 인간들은 괴상하게 변형된 파충류나 거대한 식물들에게 갇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며, 쾌락을 즐기는 남녀를 바라보면 거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가운데 패널의 오른쪽 중간과 아래쪽을 보면 사과를 따먹으며 즐기는 남녀가 있으며 사과를 들고 춤추는 두 여자의 머리는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로 덮혀있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1
여기에 그려진 수많은 탐욕은 분명 아담과 이브의 유혹이며, 타락한 인간들은 오른쪽 패널에서 벌을 받게 된다. 음악에 지나치게 탐닉한 사람들은 하프에 매달려죽는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2
1어떤 이는 머리가 새인 옥좌의 왕(?)에게 통째로 먹히고 만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3
멀리 유황불이 터지는 지옥 아래엔 커다란 귀에 눌린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꿈틀대고 인간의 영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다. 정상적인 모습은 화면 가운데서 조금 위에 그려진 한 인간의 얼굴뿐이다.

이단의 지옥도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옥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확대된 귀와 나이프는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며, 또 나이프에는 반 기독교를 뜻하는 문자 M이 그려져 있는 등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림 속에 보스의 자화상이 있다는 말도 있다.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altl: 1470/80-1528) : 마귀의 화가
뷔르츠부르크 출생. 1508년 이후 마인츠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나 나중에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가 1528년 할레에서 죽었다. 남아 있는 작품수는 적으나 종교적인 정열에 넘치는 대표작 이젠하임 제단화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의 신비주의를 살펴볼 수 있다.

이젠하임 제단화(1515년경, 콜마르, 운테르린덴박물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부분도
이젠하임(Isenheim)의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 예배실에 놓여 있었던 제단화이며 양쪽 날개가 두 쌍인 다소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제일 표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있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다. 피부병이 돋아있는 몸과, 고통에 뒤틀린 손가락의 표정을 보면 보는 이까지도 아픔을 느낄 듯하다. 그의 왼쪽에는 실신할 듯 슬퍼하는 마리아를 요한이 부축하고 있으며, 그 아래엔 막달라 마리아가 오열하고 있다. 막달라의 붉은 옷과 흩날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그의 제스춰는 우리까지도 전율하게 한다.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오른쪽 세례요한의 붉은 색들은 검은 바탕을 배경으로 매우 표현주의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수태고지.예수탄생.부활
반으로 나뉘어 그려진 위 그림을 양쪽으로 열면 제일 왼쪽부터 수태고지, 예수 탄생, 예수 부활로 이어진다.

성 안토니오의 유혹
가운데 패널을 다시 열면 오른쪽 패널에 그려져 있다. 수도하고 있는 안토니오에게 온갖 마귀가 그를 괴롭힌다. 용머리의 괴물은 머리칼을 잡아 당기고, 올빼미 형상의 괴물은 몽둥이를 내려친다. 음산하고 파괴적인 배경에 무너진 건물 위를 날아다니는 기괴한 동물들이 특색이다.
뒤러 ( Albrecht Durer 1471.5.21~1528.4.6)
이탈리아여행을 하면서 르네상스와 독일고딕성향이 만나 북구양식의 인체표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을 이루게 되었다. 25세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이 가득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배율에 대해 연구하였다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 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마틴 루터의 신봉자가 되어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뉘른베르크 화가 뒤러는 근사한 외모에 모피 옷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다. 사치만 부리는 게 아니라 그림도 곧잘 그렸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 그의 붓놀림을 본 벨리니가 화들짝 놀랐고,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황제에 버금가는 국빈 예우를 받았다. 그 당시 화가로는 드물게 부와 명예를 누린 셈이다. 당대의 예술가, 인문학자와 교류했고, 나중에는 황제가 초상화 좀 그려달라고 뉘른베르크까지 찾아와 모델을 설 정도였다. 뒤러가 올라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아누스가 사다리를 붙들고 시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동박박사의 예배>

폐허를 무대로 하여 오른쪽에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성모를 좌단에 배치하여 성보자와 세박사의 만남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북방 특유의 섬세한 자연묘사에 이탈리아적 원근감을 가미하여 밀도있는 화면을 형성하고 있다. 북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뒤러는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과학적인 원근법과 완벽한 인체표현을 가증하게 했던 해부학에 근거한 세밀한 인물묘사로 유명하다. 1504년은 뒤러의 목판화 연작 '성모전'이 완결된 해이며, 당시 열중하고 있던 성모화 시리즈의 야심작이 바로 이 그림이다.

아담과이브
1494년과 1505년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미술을 통하여 인문주의적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린 그림으로 더 이상 원죄를 지은 성경의 인물이 아니다. 등신에 가까운 크기로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조화로운 비례와 경쾌함을 지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이다.

1498자화상 1500 자화상
그는 베네치아 체류 중 독일의 인문학자 친구인 피르크이머(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에서 나는 신사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뉴렘베르그에서의 화가는 아직도 목수나 양복쟁이와 다름없는 장인이지만 베네치아에서의 화가는 대우받는 신사라는 뜻이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다. 그의 나이 26살 때 그린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을 잘 차려입은 신사로 나타내더니 2년 후 28살 때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을 예수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왕이나 예수의 상에 주로 사용하는 정면 자세에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원근법 연구(1525년, 목판화)
그가 남긴 수많은 드로잉과 판화 중에는 인체 비례와 원근법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비스듬히 놓여있는 류트를 손잡이 쪽에서 보면 화면에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화가와 사물 사이엔 한쪽을 움직일 수 있는 화폭이 놓여있고, 화면에서의 사물의 형상을 정하기 위하여 화가의 눈과 사물을 잇는 선이 화면 위치에서 만나는 점을 찾아내고 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
4인의시도
그의 생애 말년에 그린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결산 같다. 좁고 긴 두 폭의 화면은 두 사도의 긴 옷이 가득 차지하고, 나머지 두 사도는 거의 얼굴만 그려졌다. 단색의 옷은 거대하고 단순하며, 명암처리에 의해 입체감이 풍부하다. 옷은 이렇게 이탈리아 르네상스전통의 화법으로 그려졌으나 얼굴의 사실적인 묘사는 미화시키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북구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왼쪽부터 붉은 옷의 요한과 열쇠를 들고있는 베드로, 복음사가 마르코, 그리고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이다. 그러니까 그림은 요한과 바오로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네 명의 구성은 종래의 종교화에서는 거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이 그림은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주문 없이 스스로 제작하여 뉴렘베르그의 시청 위원회에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독일지역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휩싸였고, 뉴렘베르그시는 막 루터주의를 인정하였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분위기와 관계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뒤러는 루터를 '참으로 큰 고뇌에서 자신을 구해 준 크리스챤'이라고 존경해 왔으며 프로테스탄트가 거론한 성상 숭배의 금지에 대해서도 마음속 검토하고 있었다. 요한은 루터가 가장 좋아하는 사도이며, 용감한 바오로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적인 아버지임을 고려하면 루터주의적인 주제의 선택이며, 이를 시청에 선물하였음은 시와 루터교의 평화로운 해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일수도 있겠다.

-노성두의 미술이야기에서-.

<멜렌콜리아>
뭣하나 부러울 것 없던 뒤러는 마흔 셋에 아주 골치 아픈 그림을 한 점 그린다. 훗날 `미술사학의 우울한 저주'로 일컬어질 손바닥만한 동판화였다. 제목부터 우울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멜랑콜리의 우의일까? 그러나 중세 이후 알려진 멜랑콜리의 여러 유형 가운데 달콤한 우울, 나태한 우울, 꿈꾸는 우울 어느 것하고도 안 어울린다. 그냥 머리 총명한 학생이 눈빛을 반짝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그림 해석은 여러 갈래가 나왔다.

'I'는 숫자일까? 준말일까?

먼저 멜랑콜리를 아리스토텔레스 기질론과 연결해서 흑담즙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자 박쥐 날개에 새긴 멜렌콜리아 I에서 `I'이 숫자 1인지 라틴어 IRE의 줄임말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1이면 동판화 연작 첫 그림일 테고, 줄임말이면 `멜랑콜리, 꺼져라'다.

멜렌콜리아는 멜랑콜리?

뒤러의 동판화가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가 쓴 <비밀 철학>에 나오는 세 단계 멜랑콜리를 설명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울부짖는 박쥐가 표상하는 공포, 절망, 슬픔, 고독 따위 부정적인 우울로부터 날개 달린 우아한 알레고리의 여성이 신성의 비밀을 투시하는 상위 단계까지 차례로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그리파가 흘려 쓴 수기원고를 미리 돌려읽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정작 책으로 나온 건 동판화보다 19년이나 늦고, 그림 중앙 사다리 디딤목이 아그리파가 내세우는 천체 구성처럼 여섯 개가 아니라서 주장의 설득력이 바랬다.

혹시 연금술 비밀이 감춰져?

돌을 깎은 다면체 뒤쪽에 곤로와 집게가 연금술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박쥐 꽁무니에 뱀 꼬리가 달렸고, 밤에 뜨는 무지개에다 마방진의 숫자 배열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러가 연금술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는 기록이 없고, 비교할 만한 작품도 남기지 않아서 아직 가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벽에 걸린 천칭, 모래 시계, 마방진, 그리고 컴퍼스, 막대자 같은 도구를 두고 우주의 생성 비밀을 측량하려는 예술가의 야심으로 보기도 했다. 솔로몬의 지혜서 11장 끝줄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다”는 인용이 따라붙었다. 그럴 경우 뒤러는 갑자기 플라톤을 성서의 눈으로 읽는 피치노 류의 신플라톤주의자로 둔갑한다.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 예시?

또 멜랑콜리의 알레고리 여성을 뒤러의 정신적 초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술가의 정령이 돌계단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길짐승과 날짐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박쥐가 빛을 등지고 무지와 맹목 속에 빠져드는 것을 필멸의 예술가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약점으로 보고, 제 몸을 부수며 밤하늘을 떠도는 혜성은 궤도 없이 헤매는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을 예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화상을 그토록 좋아하는 뒤러가 왜 여기엔 제 얼굴을 안 그렸을까?

중구난방 해석이 그럴싸

요컨대 문제는, 미리 결론을 정해두고 끼워 맞추는데도 신통하게 논리의 구슬이 술술 꿰어진다는 데 있었다. 사방 팔방 어디를 꿰어도 수의 합이 일치하는 마방진처럼. 결국 지난 백 년 동안 논의와 반론이 빗발치고 무수한 학문적 굴착과 시추가 거듭되는 동안 뒤러의 동판화는 끝없는 의문부호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학문적 노력들이 전혀 무상한 건 아니었다. 그 사이 미술사학의 학문적 방법론이 지레 성숙하고, 부수 성과들도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으니까.

비탄에잠긴예수 마리아의일곱비애 예수의애도 산토끼 카나리아날개 히에로니무스초상 기사, 죽음과 악마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Hans Holbein d..의 아들이며,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북유럽에서는 성상제작을 금지한 종교개혁의 확산으로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고,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화가들은 종교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아야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북유럽의 미술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처음 아버지와 목판화가인 브루크마이어에게 그림을 배우고 바젤·북이탈리아·런던 등지에서 명성을 얻은 뒤 영국 헨리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523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홀바인은 그 곳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그 중엔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우산 예찬』(1509)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초상>도 여러 점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사실적인 얼굴묘사와 모피코트의 질감묘사 등 북유럽 회화의 방식을 전수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초상화의 중요 요인은 배경의 기둥이나 책꽂이 선반에 적용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함께 어울려 품위 있고 침착하며 정확한 초상화로 완성되었다.

헨리8세(1540년)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그림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홀바인은 그림 주문을 찾아 영국에 가게 된다. 1526년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들고 영국에 건너 간 그는 그 곳에서 역시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등 인문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그림들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1532년부터 영국에 정착한 그는 1536년 영국 왕 헨리 8세(Henry Ⅷ)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왕은 1539년 앤 클레브(Ann of Cleves)와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있다. 보석이 달린 수놓인 모직 옷과 비단 겉옷, 그리고 모피 등걸이 등의 묘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섬세한 사물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홀바인의 역량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가 택한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언제나 초상화 주인공의 성격과 초상화의 제작적에 적합했다. 헨리8세는 정면으로 당당히 서 있고, 과장되게 넓은 어깨는 그의 과감한 정치력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외교관들(1533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초상화의 주인공은 주영 프랑스 대사 쟝 드 딩테빌(Jean de Dinteville)과 죠르쥬 드 셀브(George de Selve) 주교이지만 두 인물 사이에 있는 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제일 위칸엔 지구본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과학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 데 반해 그 아래 칸엔 루트와 피리종류의 악기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루트의 끈은 끊어진 채있고, 그 아래 바닥의 중앙엔 알 수 없는 물체가 애매하게 떠 있다. 여러분의 눈을 오른쪽 인물의 아래 손 부근에 바짝 가져다 대고 이 형상을 한 번 보면 인간의 해골임을 알 것 이다. 해골은 전통적으로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는 정물이다. 외교관의 화려한 명예, 첨단의 과학, 음악의 즐거움, 이 모든 것 무상함을 말하려 한 것으로 추측된다.

브뤼겔(Pieter Brueghel 1528-1569)

브뤼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브뤼겔이라 하며 부가 모두 화가.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농민생활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인문주의자로서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수 있다.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 처음에는 인기를 끌었던 판화를 모티브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유화로 표현. 설화집이나 우화집에서 제재를 얻음.

환상적인 풍결 속에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그리다. : 기괴한 형태에 집착하거나 불안정한 구도를 고안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사악한 욕망을 표현

바벨탑(1563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세우려는 인간의 오만에 대해 신이 언어가 통하지 않게 함으로써 혼란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다. 경사로이 세원진 거대한 건축물로서 바벨탑을 그린 것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드문 예인데, 인물들을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브뤼겔은 그 주제를 좀더 선명하게 부각시킴.

사냥꾼들의 귀환
눈 덮인 겨울, 사냥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온 세상은 눈으로 덮인 스산한 겨울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 불을 지피고, 멀리 언 밭에서는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브뤼겔이 조감도의 방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 같다. 이 방법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보이게 하기 보다 무수한 자연물 속의 피조물로 객관화시키고 있다.

장님의 우화(1568년 나폴리국립박물과)
브뤼겔이 만년에 그린 작품으로, 종교적·정치적으로 광적인 믿음이 팽배해 있던 사회를 향한 분노와 조소가 담겨진 그림이다 .마태복음 15장 1절에서 9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예를 든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게 되면 구렁에 빠진다"란 구절이 있다. 이것을 소재로 역동적이면서도 강렬한 표현의 깊이가 이 그림의 주제를 깊이 인식시킨다. 그림을 보면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인간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장님이 장님을 어설프게 인도하면서, 뒤로 넘어지고 어디로 가야할지 좌충우돌하는 혼란만이 화면에 가득할 뿐이다.
장님들이 장대로 서로를 의존하며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맨 앞의 장님이 개울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그 다음 사람은 함께 넘어지려 하고, 그 다음 사람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맨 뒤의 사람은 넋 놓고 쫓아오기만 한다. 브뤼겔은 아마 아무 판단을 못한 채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쫓아만 가는 우매한 인간사를 비유했는지도 모른다. 웃음의 화살은 우리에게 되돌아와 인간사에 대한 비유로 변하게 된다. 그의 유머는 오히려 교훈적이다.

거지들
16세기 북유럽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한 사회로 치닫고 있을 때, 플랑드르 지역은 이러한 혼란을 비껴가면서 더욱 풍속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브뤼겔은 이런 사회가 보여주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빗댄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작품 <거지들> 또한 그러한 전형 중의 하나이다. 그림 오른 편에 부랑자들을 외면하며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목발을 집고 한데 모여 있는 부랑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행색과 흐리게 처리된 표정이며 남루한 의복들을 보면 묘한 슬픔이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확한 원근법이 후면에서 앞으로 접근하게끔 배치되어 시선이 가운데로 고정되게끔 구도를 설정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대 플랑드르 화파들이 보여주지 못한 알레고리들이 숨어 있다.
아주 작은 크기이지만 이 작품은 작가 브뤼겔이 인간 사회를 향한 조소와 고뇌를 그리면서, 한편으로 그것들을 감싸안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이 단순히 나병 구제소에 수용되어 있던 문둥이들이 마을 축제를 구경가기 위해 막 출발하려는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심오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인간 육신의 고통과 부랑자들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 브뤼겔은 강력한 메시지로 혹은 은유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농부결혼축하(1568년 빈미술사박물관) 농민의결혼식
종교화의 주문이 끊기고 등장한 새로운 장르는 풍속화와 풍경화였다. 이 그림은 아마 농민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은 미술의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싶다. 벽에 검은 천을 걸고 그 앞에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는 여자가 신부인 것 같다. 그녀로부터 왼쪽 두 번째에 앉아서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이가 신랑같다. 우리의 시선은 대각선으로 놓인 식탁을 따라 한 가운데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지나 왼쪽 구석의 문으로 향하게 됩니다. 작은 문에서는 하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왼쪽 아래에서 술 따르는 이, 빈대떡을 받아들고 손가락까지 빠는 어린아이, 그리고 문짝을 떼어 받침으로 사용하여 음식을 나르는 이, 식탁에 옮기는 이들을 지나 다시 신부에게 닫는다. 브뤼겔이 농부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들에 대한 진솔하고, 깊은 애정이 담겨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묘사한 농부들의 표정과 다소 퉁퉁하게 부풀린 옷은 그들을 어리석게 보이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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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Raffaello Sanzto di Urbino (1483 ~ 1520)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의 한 사람으로 조숙한 천재였으며,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이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서의 수업은 아버지와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었다.
초기의 작품은 페루지노의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으나 <기사의 꿈> <삼미신> 에서 <마리아의 결혼>에로의 발전은 서정적인 스승의 예술을 점차 순화하고 형식미로 통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04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위시해서 바르톨로메오, 미켈란젤로의 조형법도 단시일에 익혔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그란듀카의 성모=대공의 성모>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 가족그림, 초상화 <도니부처>, 그리고 미켈란젤 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등이 있다.
1508년 말에 고향 친구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초청되어 포마로 옮 긴 라파엘로 는 1520년 4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바티칸 궁정화가로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하고 시대의 총아로 그의 작업의 정점에 이르렀다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상징적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아 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등의 벽화 제작은 그의 총체적인 재능이 그리이스 정신과 그리 스도교 정신의 총합이라는 교회의 세계주의적인 의도와 혼하연 일체가 되어 르네상스 인문 주의 예술의 정화로 되어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장대한 건축공간과 다수의 인물군상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실현하 여 고전양식의 규범이 된다.
건축에도 손을 대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레오 10세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주임에 임명되어 그 조영사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다음해에는 고대 유물 감독관에 임명되고 고대 유품들을 조사하였고, 유적지도의 제작 도 시도했으나 미완에 그쳤다.
그의 설계로 알려진 건축작품에는 앞서 말한 키지가의 교회 외에 비드니카파렐리의 저택, 로마 근교의 빌라마다마 등이 있다.
그 작품은 프란체스코 마우라나와 브라만테를 계승한 우아하고 엄격한 고전주의라 하지만 오늘날 그 작품의 대부분이 대폭적으로 수정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는 어렵다.
라파엘로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성숙한 르네상스의 도달점

독창적인 구도와 인간미 넘치는 묘사 : 세련되고 새로운 조화의 품격을 빚어낸 천재. 특히 많이 그린 '성모자상'은 조화와 독창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청량감과 우아함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세속적인 측면으로 서민들로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적 배경

로마는 카톨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카톨릭과 고대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화될 수 있는 곳이었다. 야심이 있는 교황들은 언제나 '세계의 머리'로서의 로마를 재건하려 하였고 그때마다 고대의 유산을 바탕으로 한 고전주의 경향의 미술이 적용 또는 이용되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 재임 1471-84)는 로마의 도시계획을 정비하고, 옛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설립하였으며, 고대 조각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었다.
식스투스4세의 조카였던 줄리오 2세(율리우스2세)는 교황이 되자 로마가 고대의 위용을 다시 갖추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을 계획하고, 고대 조각들을 열성적으로 모아(아폴로상. 라오콘상등) 바티칸박물관을 만들었으며, 조각전시를 위한 정원도 조성(벨베데레 정원)했다. 또한 궁 안에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의뢰하고, 라파엘에게는 <서명실>의 벽화를 주문했다. 교황의 이 왕성한 미술사업은 로마제국을 되살리고, 자신이 줄리우스 시저의 이미지를 갖추는 것이었다. 줄리오 2세가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의뢰한 <벨베데레>정원은 실로 기념비적이었다. 8각형의 정원에 고전적인 건축방식의 감실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 배치된 조각의 전시방법은 실로 쾌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어서 이 후에도 조각 전시방법의 모델이 되었다.
매우 정치적이었던 교황 줄리오 2세는 이미지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506년엔 4세기에 세워진 바실리카 형태의 <베드로 성당>을 완전히 다시 지을 계획에 착수하고, 1508년엔 미켈란젤로에게 <천지창조>를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시작한 시스틴 예배실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듬해엔 라파엘에게 현재의 서명실벽화를 주문하였다. <아테네 학당>과 <성체에 대한 논쟁> 등의 주제로 그려진 소위 <서명실> 벽화는 라파엘 회화의 가장 완숙한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줄리오 2세의 고전주의 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다. 주문자의 정책과 화가의 스타일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서명실>이라 부르는 바티칸의 이 방은 줄리오 2세 당시엔 개인 도서실이었다. 당시의 서재는 외교적인 공간이었고, 이 그림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물이었다. 그럼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어떻게 이교의 학문인 <아테네 학당>을 이러한 공간에 그리게 되었을까? 교황 줄리오 2세는 군사원정도 마다하지 않던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가 단순히 그리스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이 그림을 주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네 벽면에 그려진 이 방의 회화는 각기 신학을 나타내는 <성체에 대한 논쟁>, 詩를 나타내는 <파르나소스>, 법학을 나타내는 <세 덕성>, 그리고 철학을 나타내는 <아테네 학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학, 철학, 문학, 법학 등의 이들 네 주제는 당시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분류이기도 하며 대학의 전공분류이기도 하였으니 학문의 네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난 로마'라는 이미지는 로마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하는 교황의 정책이었다. 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던 이탈리아는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왕정의 세력 확장 속에 힘이 약화되었으며, 교황청은 그들의 침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해야 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교황 줄리오 2세는 비록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지는 않았으나 군사원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로마를 지키고자 했던 교황의 의지는 라파엘로가 그린 교황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이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이후의 교황들도 끊임없이 지속하였다. 베드로 대 성당의 개축은 브라만테, 라파엘로를 거쳐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져 오늘의 위용을 낳았으며, 교황 파올로 3세가 주문하고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또한 16세기 로마에 고대 로마의 유적을 되살린 사업이었다.
'미술을 동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로마를 예술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정치적인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못하였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카톨릭 역사상 최악의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고전적인 이미지로 미화시킨 정책은 진정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아름다운 양식도 곧 매너리즘을 맞아 붕괴되었으니 이 시대 고전주의는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였는지도 모른다.


<자화상>

<마리아의 결혼>
라파엘로의 초기를 장식하고, 페루지아 시대의 최후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카스텔로 시의 성 프란체시코 성당을 위하여 당시의 명문 알바치니가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의 구상에 있어서나 그 구도에서도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가 그린 <성 베드로에 게 천국의 열쇠를 주는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그림의 특징은 전면과 후면과의 관계를 공간 구성으로 통일시키고 있고, 공간의 원근과 넓이를 통합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배후에 있는 사원 건축물의 구조에 따라 그 기본선이 광장을 규제하고, 또 전면의 인물 배치도 이에 따라 이루어 지고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공간성에 대한 엄격한 탐구가 엿보이는 그림이다.

<聖母子(성모자)와 아기 聖(성)요한>
라파엘로의 성모자 회화 작품 중에서 다음의 두 작품과 함께, 대표적인 것이 여기에 소개되는 그림이다. 시원한 초원에 한가하게 앉아 있는 성모는 아기 예수와 아기 성요한이 서로 어울리고 있는 장면을 애정에 넘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 일견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성모자상은 아기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성모의 연민어린 모정이 은연히 이 장면을 지배하고 있다. 전원적인 자연 풍경은 멀리 마을이 있는 산천을 넓게 보이게 하고 있으며, 자연 공간성에 대한 라파엘로의 이해를 시사해 주고 있다. 라파엘로는 정적이며 종교적 분위기를 온건한 색조로 조절하고 있으며, 인물의 동세, 묘사적인 선, 색채 등에서 강렬한 성격을 배제하고 있다. 성모의 동세는 부드러운 어깨의 곡선에서 아기까지 연결되어 합류돼 있고, 독특한 음악적인 리듬을 낳고 있다

<검은 방울새의 성모 1506년. 목판, 유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성 모자의 주제의 라파엘로 작품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풍미를 나타내는 그림이다. 제목은 어린 요한이 쥐고 있는 검은 방울새에서 비롯되었는데 가시나무의 가시를 먹는다고 하는 검은 방울새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의 수난을 상징한다. 앉아 있는 성모가 화면의 중심이 되고, 그 앞의 두 아기는 성모와 함께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며 안정감을 주면서 그 좌우로 자연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이 그림을 같은 주제를 가진 '목장은 성모', '아름다운 여 정원사'와 비교해보면 크기가 가장 작고, 구도는 세 점이 모두 비슷하지만 명암의 대조가 가장 강하며, 명쾌한 색채보다는 통일된 색감을 주고 쓰고 있다. 친구의 결혼 선물로 그려 준 이 그림은 지진으로 인해 17조각으로 파손되어, 복원할 때 가필되었으나 라파엘로 필적의 정확한 모습이 잘 나타난 걸작 중 하나이다.

<어린 코퍼와 마돈나 1505년, 패널에 유채59.5 x 44cm 워싱턴 내쇼날 갤러리>
온화하고 자애로운 눈빛의 이 성모자 상은 라파엘로의 많은 성모자상 중 하나이다. 그란듀 카의 성모상과 구도가 유사하다. 성모상에는 하나의 형식이 있다. 옷은 주로 빨강과 파랑 색 이며, 성모의 발은 항상 맨발로 표현한다. 맨발은 겸양 또는 땅을 뜻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정원사의 성모 1507년. 목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
이 성모화는 가련미의 매력이 넘치는 작품으로 이름이 높다. 지혜의 상징인 책을 든 성모 마리아와 요한은 꿇어앉아 동경어린 눈길로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 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요한의 모습을 잡는 동시에 성모의 얼굴로 유도된다. 성모마리아 가 들고 있는 책은 <솔로몬 지혜서>로 지혜와 지식과 교양이 있음을 나탄낸다.

의자의 성모
원형 화폭의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성모를 그 자신이 사랑했던 포르나리나를 닮은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녀의 단아한 이목구비와 그윽한 눈길이 인상적이다. 처녀같기도 하고 어머니같기도 한 여인의 미묘한 분위기는 성모의 신비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절묘하게 혼합해 놓은 것 같다.

서명의 방 작품들

<바티칸궁 서명실 천정도>

<아테네학당 1510∼11년, 프레스코 579.5 x 823.5cm >
이 작품은 율리우스 교황의 스탄자(거처)에 그려진 벽화이다. 내부는 거대한 홀로 이루어진 하나의 바실리카(로마의 공회당)처럼 인물 초상화, 브레만테의 건축 기법, 조각, 실내 장식 등을 과학적 원근법을 적용시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꾸며놓고 있다. 그리고 이 곳에 "아테네 학파"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그리스 철학자들의 군상을 각자의 성격에 맞는 포즈와 행동으로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중앙의 거대한 아치를 배경으로 소실점이 가운데로 모이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두 철학자의 모습이 보인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를 옆에 끼고 다른 한 손으로 이데아(Ideal)를 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그 옆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땅을 향해 자연과 생물에 관한 학구적인 몸짓을 하고 있다.
구성에 있어 수평선을 강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계단에는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반라의 차림으로 누워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책상에 기대어 필기를 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으며, 바로 뒤에는 잣대를 든 피타고라스가 무언가 적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는 유클리드가 컴퍼스를 그리면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으며, 약간 뒤쪽으로 검은 베레모를 쓴 라파엘의 자화상이 슬쩍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그 오른쪽에서 지구를 들고 있는 톨로메오, 천계를 들고 있는 조로아스터등 거대한 드라마가 펼쳐져 있는 이 그림은 네 개의 수평적 계단 위로 서 있는 인물들과 아치를 받치는 두꺼운 벽기둥, 그리고 평면적으로 넓게 퍼진 공간 등 모두 플라톤이 있는 위치로 아치가 순서적으로 후퇴하는 양상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거대한 작품은 주제의 뛰어난 형상화와 조각적 입체감이 균형감 있게 하나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성체논의 1509년, 프레스코 바티칸 미술관 >
율리우스 2세의 의뢰로 바티칸 서명의 방에 그려진 성체논의(왼쪽 벽)와 아테네 학당(오른 쪽 벽)으로 중앙 윗쪽에 그리스도 지상의 옥좌에는 성모와 세례 요한이 좌우로 반원형의 양 날개에는 왼쪽부터 성 베드로,아담,복음성의 요한,다윗,성 로란, 성 지오르지오,성 에티엔느, 모세,성 자크,아브라함,성 바울로 가 차례로 앉고 그 위에 천사들이 둘러서 있다. 하단에는 성 그레고리오,성 제롬,베르나르,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위인들과 철학자,시인 등이 있으며 단 테, 라파엘로 자신과 스승 페루지노 등이 그려져있다.


<그리스도의 변용(變容)>
《마태오의 복음서》 17장 및 그 밖의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이 성화는 베드로·야고보·요한 등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간 그리스도의 모습이 변하고, 거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성서에는 “그 때 예수의 모습이 변하여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마태오 17:2)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이는 중요한 장면의 하나이다.

이 장면은 6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처음으로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편도(扁桃) 모양의 만돌라(대형 만돌린) 속에 그려져 있다. 공중에 뜨는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성화에 묘사한 사람은 B.조토였으며, 바티칸의 피나코테카에 소장되어 있는 라파엘의 변모도(變貌圖)가 가장 극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공중에 뜬 그리스도가 화면 위쪽에 그려 있고, 산 위에는 겁에 질려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세 제자, 화면 아래쪽에는 이 장면을 보고 경련을 일으킨 아이와 사람들의 무리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발다사르 카스틸료네의 초상 1514∼15년, 캔버스에 유채 82 x 66cm>

라파엘로가 제작한 초상화 중에서 걸작의 하나이다. 로마 체류시의 초상화로서, 강한 개성의 표출이 인물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되고 있다. 이 작품의 인물은 라파엘로의 친구이며 당시의 저명한 문예가이며 또한 정치가였다. 밀라노와 우르비노 궁전에서 봉사하였으며, 정신론의 자로서도 유명하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에서 현명한 자기의 친구의 모습을 예지에 차 있는 표정으로 보여 주고, 활달한 정신력의 소유자임을 눈의 총기로 시사해 주고 있다. 확고한 인물의 자세는 안정감을 나타내 주고 있고, 차분한 색채는 인물의 성품을 대변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의 대가 렘브란트는 이 작품을 보고 감동되어 모사를 한 바 있으며, 그의 자화상 및 초상화의 영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또한 플랑드르의 대가 루벤스도 이 작품을 모사하였다 한다.
이 작품은 루이 14세의 컬렉션 목록에 있던 작품으로, 1661년 이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의 모델은 귀족의 이상을 담은 『조신(朝臣)』의 저자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이다. 영웅적인 군인이자 문인이었던 발다사레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의 귀족이었다. 그는 1528년 발간된 『조신』에서 이상적인 미학과 정신의 완전함을 주장했는데, 이는 라파엘의 회화관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는 두 사람 사이의 공감과 우정을 시사하는 작품이다. <대공의 성모>를 그린 지 5∼6년 후 한층 완성도가 높아진 라파엘의 초상화는 조금씩 변화의 양상을 띤다. 이 작품은 비교적 그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대공의 성모>에서 사용되었던 극명한 명암 대조법은 배제되었으며 고전적인 균형과 절제가 돋보인다.
기품 있는 자태와 더불어 우아한 의상과 모자는 그가 귀족의 신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살짝 튼 자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연상시킨다. 라파엘은 세밀한 묘사를 과감히 생략한 대신 얼굴 묘사에 있어서 특징적인 부분만을 부각시켰다. 맑은 눈빛, 지긋이 다문 입술 등 온화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통해 모델의 내면 세계까지 드러내고 있다. 또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면을 응시한 모델에게서 화가에 대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교황율리우스2세의 초상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 소장>
바티칸 궁의 서명실 천정화를 그릴 당시의 교황으로 라파엘로를 총애했다.
교황은 151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볼로냐에서 중병을 앓았는데 그때부터 수염을 길렀으며 교황은 "프랑스 왕 루이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때까지는 수염을 깍지 않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1512년 4월 라벤나에서 프랑스를 몰아낸 후 수염을 깎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다. 1512년에 제작된 교황의 초상은 흰 수염이 그득하며 고심에 찬 표정이다. 교황의 정치성을 비판한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낙원으로부터 추방하였으며, '군인왕', '새로운 시저'라고 풍자하였다. 실제로 교황은 기독교의 수장이었으나 정치가 시저의 야망을 지녔으며, 위기의 로마를 '새로운 예루살렘'이라 부르며 로마 시대 이후 가장 큰 제국으로 발전시키려 했다.
<레오 10세 1518 년, 패널에 유채 154 x 119cm 우피치미술관 소장.>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있을 때 바티칸 궁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라파엘로는 레오 10세 때 더욱 신뢰받는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이은기의 라파엘로와 티치아노의 색채 표현의 비교-


라파엘은 붉은 벨벳의 밝은 부분은 붉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검게 함으로써 상체의 양감을 나타내고 있는 반면에 티치아노는 밝은 부분을 흰색으로 어두운 부분을 붉은 색으로 나타내고 있다. 라파엘의 방법은 소묘와 고유색을 중요시한 화법이라면 티치아노의 방법은 햇빛을 비춘 벨벳의 인상을 중요시한 화법이다. 티치아노는 짧은 기간의 로마방문기간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이 그림의 붓터치가 더욱 빠르고 즉흥적이었다고 하는데 티치아노는 오히려 이 방법을 즐긴 것 같다. 그는 이후에도 이러한 효과를 살리고 그와 함께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한 초상화를 많이 남겼다.

<기사의 꿈1500년경. 목판, 유채 런던, 국립회화관 >
라파엘로는 어려서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 지오반니 산치오에게 그림을 배우고 페루지 노 문하에서 수년간 그의 화풍을 익혔다. 이 그림은 페루지노풍의 평온하고 감미로운 시정 이 넘쳐 흐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악덕과 미덕 사이에 있는 헤라클레스' 또 기타 몇 주제로 해석되고 있다. 우의적(友誼 的)인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성숙기에 다가서고 있는 시기의 것으로, 후기 그의 미술의 능숙한 표현력을 엿 보게 하여 준다. 라파엘로 미술의 발전은 그의 성장 과정의 도표로 볼 수 있는 우르비노, 페루지아, 피렌체 시 등으로 엮어진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파엘로가 피렌체로 옮겨 갈 무렵의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면은 중심에 나무 하나가 배치되어 좌우로 정확히 양분되어 있고, 그 밑에 기사가 누워 있으며, 또 좌우로 인물이 배치되어 삼각형의 구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삼각형 구도를 통하여, 농촌의 풍경이 넓게 전개되고 원근법이 이에 적용되고 있다. 간결한 구성과 시정(詩情), 그리고 환상이 담겨져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埋葬)>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은 많은 밑그림과 구상이 필요하였고, 또한 완성된 성과에 대한 논리도 많았다.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의 라파엘로의 화풍은 극히 종교적인 명상과 고귀한 정관의 경향이었음에 비하여, 이 그림은 너무나 동적이고 격정적이며, 극적인 세속성까지 표출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라파엘로 작품에서 특성이 되고 있는 구도의 통일성과 그 간결한 일체성은 여기서 찾아볼 수 없고, 사방으로 분산되는 동세로 복잡한 선을 구성하고 있다. 부드러운 음율적인 선은 여기서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스도의 사체는 미켈란젤로의 < 피에타 像>을 연상시키며, 한편 기절한 성모를 떠받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같은 작가의 <聖家族>에서 빌어온 상이라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모르나, 지적된 점은 양자의 관계를 시사해 준다.

<젊은 부인의 초상 1518-1519 목판 유채 85x60cm.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라파엘로 애인 포르나리나를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에서는 시에나 태생으로 로마 빵집 아가씨였던 마르가리타 루티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매너리즘적 기질이 강하게 나탄난다. 팔찌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문자가 새겨져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트리나>

카트리나는 4세기 초 그리스도 박해 시대에 순교한 전설적 성녀로서, 로마의 황제 앞에서 기독교를 변호하고 50명의 철학자들과 토론 설파하여 마차에 몸을 찢기는 형벌을 받고 참수당한 인물이다. 성모는 붉은 옷에 푸른 망토를 걸치지만 성 카트리나는 반대로 푸른 옷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는 옷 주름이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라파엘로의 이 붓끝의 능숙한 솜씨와 커다란 양감에 의한 표현은 바티칸의 대벽화로 연결된다.

폴리그노의 마돈나 갈라티아 정령 가톨릭 추기경의 초상 시칠리의 스파시모 예수의 죽음동정녀의 즉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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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그 어떤 대리석에도 인체는 이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각가는 단지 그것을 해방시킬 뿐이다.
로마.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 미켈란젤로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 왔다. 수 많은 그의 회화,조각,건축 작품들은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그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조각가라고 여겼다. 그는 평생 대리석 조각에 몰두 했으며 단지 일정 기간에 다른 분야의 예술작업을 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유명해 진 또다른 이유는 그의 예술생애에 대한 기록이 당시나 그 이전의 어느 예술가보다도 훨씬 풍부하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훌륭한 전기가 2권이나 출판된 최초의 예술가였다. 그중 하나는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 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Sculptures & Architects>(1550) 의 마지막 장으로, 이 장에서 바사리는 현존하는 예술가로서 유일하게 다룬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그 이전의 다른 모든 예술가들의 역작을 능가하는 최고봉으로 평가했다. 이같은 찬사에도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미켈란젤로는 조수였던 아스카니오 콘디비를 시켜 별도로 짤막한 책(1553)을 쓰게 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의 구두 설명을 기초로 해서 썼을 이 책은 그가 원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의 2번째 판(1568)에 반박론을 실었다. 학자들은 콘디비의 권위있는 저술을 선호하지만, 바사리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과 그의 책이 지닌 전반적인 중요성 및 여러 나라 말로 자주 재판되는 등의 이유에서 바사리가 쓴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가장 일반적인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수 백통의 편지, 스케치, 시 등의 유품은 생전에 누린 명성으로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많이 보전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듯 엄청난 자료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종종 미켈란젤로의 주장만 알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13살에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로렌초 디 메디치의 주목을 받으면서 메디치家가 수집한 고대조각들을 자유로이 접하고 이를 통해 조각의 기술을 익혀갔다. 이 시기에 제작한 <센토들의 싸움>과 로마체제 중 제작한 <바쿠스>는 그의 초기 학습과정을 잘 보여준다
1494년 그는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에 잠시 머문 후 로마에 체재하였다. 이 기간 중 제작한 <피에타>와 피렌체로 되돌아가 제작한 <다비드>는 그가 이전기간에 습득한 고전적인 조각기법의 완성을 보여준다.
1500년경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공화정의 피렌체는 그에게 다비드 상을 주문한다. 조각상의 공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던 피렌체 공화정은 이를 시청 앞에 놓음으로써 나라를 구한 소년 영웅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미켈란젤로가 구현한 고대 남성 조각의 조형미, 사실과 이상의 조화는 조각으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공화정의 이념으로서도 더 없이 적절하였던 것이다.
교황 줄리오 2세는 1506년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청 안의 시스틴 예배실 천장화를 주문하였다. 교황의 처음 주문은 창문들 사이에 12사도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장식 모티브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워 교황을 설득하고 지금의 천장화를 남겼다. 그는 빛의 창조에서 노아의 홍수에까지 이르는 <천지창조>의 주제를 택하였다. 그는 기존의 건축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천장에 이와 연결된 건축구조를 그림으로 만들었다. 9개의 면적에 천지창조이야기를 그리고, 창문 위 삼각형 사이의 큰 공간엔 예언자와 무녀들을 그렸다. 이 장대한 프로그램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빛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그들의 원죄, 노아의 타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양쪽의 예언자와 무녀들은 구원자가 오실 것임을 알려준 존재들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도 주문하였다. 이 또한 오랜 기간에 걸친 큰 프로젝트였고,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여기서는 이의 부분으로 제작한 일명 노예상 두 점을 보겠다. 16점의 노예상중에서 완성된 것은 현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는 1점뿐이며, 미완성 몇 점이 피렌체 아카데미에 소장되어 있다.
1513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고, 죠반니가 레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올라 1515년에 그의 고향 피렌체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으며, 이후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후의 교황 클레멘테 7세)과 함께 메디치家의 재건을 서두르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메디치가의 가족묘를 주문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건축과 조각, 회화가 어우러진 묘실을 구상하였으나 완성되지는 못했다.
파르네제가의 교황 바오로 3세(PaoloⅢ: 즉위 1534-49)는 교황이 되자마자 메디치 예배실에 전념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여 <최후의 심판>을 주문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켈란젤로는 주문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웠다.

시대적 배경
그의 성장기부터 1564년에 죽기까지, 즉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역사는 격변기였다. 평온을 유지하던 피렌체는 1492년 로렌조 디 메디치가 죽자 1494년에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1495년엔 메디치家가 피렌체로부터 추방되었다. 그후 공화정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힘은 약하였고, 1512년엔 메디치家의 코지모(Cosimo I di Medici)가 장악하면서 피렌체는 거의 군주 국가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교황청 국가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의 침략과 약탈에 위기를 겪는 한편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카톨릭의 권위마저 흔들렸다. 메디치와 공화정의 집권이 번복되던 피렌체와 로마의 교황청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위안과 과시의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주문으로 이어졌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대에 공화정과 메디치, 그리고 교황의 가장 큰 주문들을 받아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정치 속에서 예술가가 겪는 보호와 갈등,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육체미를 추구한 최고의 천재 : 강한 예술적 신념과 자신감으로 그는 점차 '신'같은 존재로 인식.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파악했고 웅장하고 힘이 넘침.아무리 작은 근육이라도 정확하게 그리고자했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그가 그린 인체는 씩씩하고 위압적.

강력한 필치와 묘사로 인체의 내면 세계까지 그려내다 : 인간을 창조하는 것. 후기에 이르자 인체의 움직임이나 비율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난 좀더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을 찾게 됨.

<피에타상 1498∼99년, 대리석 174 x 195cm 로마, 베드로 성당>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피라밋형의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을 좀 더 넓게 잡고 있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는 자세는 중세부터 내려온 도상인데, 이와 더불어 마리아는 33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이기보다 수태고지를 받던 10대의 소녀 나이이다. 순결한 성처녀 마리아를 강조한 도상이라 할 수 있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 상은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되어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다.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1498∼99년> <작가미상, 피에타, 1400년>

<성가족 패널에 유채 지름 120cm>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조각같이 그려진 마리아의 모습이며 회화보다 조각이 수수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인물 배치에 있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가족그림과 비교해 볼 때 다른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전통적인 구성에서는 요셉이 이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은 성모마리아가 몸을 뒤로 젖혀 요셉이 안고 있는 어린 예수를 어깨 너머로 건네받는 모습에서 주요 인물 세사람이 보다 밀접한 구성체가 성립된다. 특히 허리를 비틀은 마리아의 인체 표현과 특수한 운형 화면을 사용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비드 1501∼04년, 대리석 높이 410cm >

두오모 성당 건축 시 성경에 나오는 12 예언자들의 거대한 동상을 세우려던 계획을 대폭 축소하여 도나텔로와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가 하나씩 완성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1464년 두치오에게 한명을 더 조각하게 해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110km 떨어진 카라라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다가 발과 가슴 그리고 옷 주름 정도 작업하다가 그만두니 10년 후쯤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이어서 작업을 진행하지만 신통치 않아 25년동안 성당 작업실에 방치되었고, 그 대리석을 구입하느라 많은 돈을 썼던 두오모 책임자들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1500년 성당 작업소 기록에 '다비드'라는 제목의 대리석 형상 계획에 차질이 생겨 방치 중이라고 적혀 있다. 1501년 위원회는 완성시킬 예술가로 다빈치,안드레아 산소비노가 물망에 오르지만 당시 26세였던 미켈란젤로는 밀랍으로 작은 모형을 가지고 가 자기가 적임자라고 위원회를 설득시켰다.
1494년 메디치가의 몰락과 더불어 피렌체를 떠났던 그는 1501년 아직은 힘이 미약한 공화정 정부에 맞선 거대한 세력들을 물리치는 힘을 상징하고 싶은 목적으로 '다비드'라는 성경의 영웅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게 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크기만 컸지 두께가 45cm정도로 얇았던 대리석을 가지고 이 기념비적인 입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기술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한 번만 손을 잘못 움직여도 작품 전체가 망가져 버릴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원석의 크기 때문에 형상의 자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골리엇의 잘린 머리를 밟고 서 있는 전통적인 다비드의 모습은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대작의 전체를 봐가면서 작업을 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게다가 그는 키가 155cm밖에 되지 않음) 어려움이 따랐기에 그는 씻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마시는 일도 거르면서 작업에 매달려쓴데 일어나서 바로 작업하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신발까지 신고 그대로 작없실에서 잔 적도 있었다.
1503년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요한 축일에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거의 다 완성하게되고 위원회는 설치 장소 논의에 많은 귀족과 예술까들을 초빙해 논의했던 회의록이 잘 보존되어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원래는 두오모 성당의 12m 높이에 설치할 계획이였으나 그 크기와 무게 때문 불가능해 회의 결과 시뇨리아 광장 앞이나 시뇨리아 광장의 돋보이지 않는 장소인 로기아 데이 란치였다. 특히 다빈치가 세 번째 장소를 주장했는데 이 노 예술까는 어쩌면 급성장하고 있는 젊은 예술까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성공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짐. 미켈란젤로 역시 다빈치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결코 인정하지 않음) 그러나 대 평의회가 고집을 부려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 곳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계속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행정부의 수반이었던 소델리니가 코를 좀 다듬길 요구했지만 그 말을 듣는 척하면서 그냥 들고 있던 대리석 가루를 조금 떨어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소델리니도 그 결과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다비드가 대중들의 호응을 얻자, 소델리니는 그 옆에 다른 작품들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여 헤라클레스와 삼손의 밀랍 모형까지는 제작하지만 '바키오 반디넬리가'는 조각가가 실제 조각을 하여 나란히 서있음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 뒤 1530년대 메디치가 다시 집권하면서 미켈란젤로는 처형 대상에 올라 피렌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죽은 후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다비드'는 여전히 광장을 지키며 이번에는 메디치 왕조르 상징하는 역할을 맡는다.
1800년대에 들어서자, 시정을 담당하던 관리들은 3백년 동안 비바람과 햇빛과 베키오 광자에서 흘러노오는 오물이 대리석에 스며들면서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1813년 보수가 시작되고 전체에 보호액을 발라 비자연적인 흰색을 띠게 된다.
하지만 1843년 코스톨리가 쇠수세미로 작품 표면을 밀어 버리는 바람에 섬세한 디테일이 지워져 버리고 대리석 표면도 심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이 한창이때는 다비드가 어떠한 역경도 고귀하게 이겨내는 '이탈리아 민중들의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다비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작품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마침내 옮겨야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지만 16세기 초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디로 옮겨야 할 지가 문제였다.
석고로 본뜨기를 함으로서 다시 한번 더 작품은 손상되고 1866년 복제품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설치되고 1871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진품은 보호상자에 갇혀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질 때까지 볼 수 없었으며, 20년 넘도록 논쟁만 계속되고 상자 안에 갇혀 있으므로 곰팡이까지 생겼다. 그 대신 청동으로 제작된 세 번째 '다비드'는 산로렌초 메디치가 무덤에 세우므로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이제 광장은 어느새 미켈란젤로 광장이라는 새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시뇨리아 광장의 같은 자리에 또 하나의 복제 다비드가 설치된다.
매년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아카데미아로 불러들이는 다비드의 위력은 그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확신과 불안, 초인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도도함과 소박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조각상은 제작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믿음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만약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부분을 통해 누군가의 얼굴과 자세가 확연히 떠올랐다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델을 보고 작품을 제작한다 하더라도 신성한 힘이 돌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건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죠.

율리우스 2세 묘비에 조각된 작품

<빈사의 노예1. 노예2 1513∼16년, 대리석높이 229cm>
이 작품은 1512년 <시스틴 천장화>가 완성된 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 건립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반항하는 노예>와 한 짝을 이루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서의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교황과 왕들이 그에게 작품 의뢰를 요구했던 것을 번번이 물리쳤다는 것이 일화로 남아 있다. 이 작품도 원래는 한 후원자를 위해 만들다가 그가 죽은 후 율리우스를 위해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의 "노예"는 곧 죽음에 이를, 그런 상태에 있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과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에 부여한 생명성에 기인한다. 즉 덩어리 속에 한 인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한 것, 삶의 투쟁과 긴장에서 해방되는 이 노예의 마지막 순간을 실제 노예를 앞에 두고 묘사한다는 믿음으로 작업한 것이, 이 작품을 살아있게 만든 것이다조상의 윤곽선에는 대리석 덩어리라는 본래의 형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조상의 포즈가 복잡한 구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본래의 단순하고 안정된 통일성을 획득하고 있다. 피로와 육체의 고단함으로 가득 찼던 지상에서의 고단함을 이제 놓을 수 있게 된 노예의 나른한 표정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휴식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쯤 벗은 옷을 이제 막 올리려고 하고 있다.
<모세상1513-1516년 로마, 빈콜리, 산 피에트로 성당>
시스티나 천정화가 완성되고 얼마있지 않아서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II가 사망했는데, 그때 유언에, 1505년에 계약한 바 있는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II 묘당을 위해 10,000 두카덴(Dukaten)을 남겨 놓았다. 사실 이 묘당을 위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던 미켈란젤로의 그간의 노력은 그 시스티나 천정 벽화의 고난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식은 적이 없었다. 그곳에 안치될 상의 하나로 예정된 것이 바로 이 모세상이다. 머리 위의 뿔과 십계의 石板(석판)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고자로서의 모세는 그 위엄의 모습을 대리석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여러 예언자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감을 넘어서서, 평생 대리석을 유일한 매체로 삼던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 서의 본격적인 대결이 그의 응집된 量塊(양괴) 속에서 이 <모세>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의 중앙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으로 불타는 정열로 거대한 기념비를 시작했는데 시기하던 사람들 때문에 백지화되었다가 몇십년이 지난 후 대폭 축소되어 고령에 접어든 미켈란젤로가 혼열을 기울려 제작했지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온 모세가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분노에 찬 눈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힘과 정기가 넘치는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이 완성 되었을 때 로마의 유태인들은 샤바트(유태교 안식일 ) 때마다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 한다.


<승리 1520-1525년 피렌체, 베키오광장>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한 조각 가운데는 1505년 최초의 계획 이후 여러 번 그 계획이 바뀌거나 축소됨으로써, 제외되거나 방치되거나 새로 계획되는 조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운데에 <승리>의 이름으로 불리는 조각은 같은 시기에 만들다 미완성한 채로 남아 있는 4체의 노예상(수염이 있는 노예, 젊은 노예, 아틀라스 노예, 잠이 깬 노예)과 의미 내용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승리>의 상이 나타내고 있는 상 자체에서 부터다. 노인(老人)을 발 아래 밟고 있는 젊은이의 나체상, 거기에서 그는 단순히 한 노인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적어도 노인으로 상징되는 내용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中世) 이래 내려오는 '시간의 할애비'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나타내는 4체의 의인상과 더불어 이를 초극하는 승리를 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메디치가문의 로렌초 묘비
미켈란젤로는 이 두 조각상을 통하여 인간의 두 유형 즉 행동하는 유형(칼을 들고 있는 줄리아노)과 명상하는 유형(생각하는 자세의 로렌조)을 만들었습니다


<메디치가의줄리앙 부분 1526∼34년, 대리석높이 173cm 피렌체, 성 로렌초 대성당 >
미켈란젤로가 위촉받은 메디치가 묘당은 교황 레오 10 세의 아버지, 로렌초, 로렌초의 동생인 쥴리아노, 그리고 또 레오 10세의 동생인 쥴리아노, 그의 조카 등 로렌초가의 4명의 묘를 안치하는 묘당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렌초의 상과 그 아래 남녀 한쌍인 <아침과 저녁의 의인상(擬人像)>, 쥴리아노의 상과 그 아래 남녀 한쌍인 <낮과 밤의 의인상>, 그리고 성모자상(메 디치 성모상)이 벽면 건축과 함께 있다. 묘당 자체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높은 인상의 공간감을 주고 원 천정으로 덮어져 있다. 대로렌초와 쥴리아노 형제의 두상(頭像)은 대조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로렌초에 비해서 행동력이 보이는 쥴리아노를 대치시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들 주요 조각 작품을 위해서는 자기 손으로 전부 완성을 해야겠다는 성의를 편지에서 전하고 있다.
<메디치가의 로렌초>

<피에타 1546-55, 대리석 높이 233cm, 피렌체 두오모성당>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합니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이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이다.

<론다니니 피에타 1552-64년, 대리석높이 195cm, 밀라노, 스포르제스코성당>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이다. 시신은 길게 늘려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 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합하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만든 이 작품은 그가 청년기에 만든 바티칸 소장의<피에타>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인다.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기법은 모두 사라지고 절절한 간구만이 남았다. 이미 하나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지키고 있는 마리아의 인상으로서도 박약하고, 또 마리아에 안긴 그리스도의 인상도 박약하리만치 그야말로 특이한 자태의 미완성 상이다. 피에타는 무르익던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미켈란젤로가 구원을 갈구하는 참 모습일 것이다. 미술의 세계도 조화를 버리고 왜곡과 과장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는 매너리즘으로 향한지 벌써 반세기가 되는 시기이다.
<천지창조1 시스틴 성당 천장화 1508∼12년, 프레스코> <시스틴 예배실> <시스틴성당>
긴쪽 벽면에 보티첼리의《모세의 생애》를 비롯한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린 그림과 그 반대 벽면에는 《예수의 생애》 등 신약성서의 내용을 비롯한 도합 12점의 벽화를 좌우의 벽면에 나누어 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들 벽화는 보티첼리를 중심으로 D.기를란다요, P.디코시모, L.시뇨렐리, 페루지노, 핀트리코 등이 3개-년에 걸쳐 그렸다. 그 뒤 1508년에는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미켈란젤로에 의해 유명한 천장 그림의 제작이 시작된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궁 시스티 나 예배당의 벽화를 의뢰 받았을 때(1508) 성당 옆벽에 이미 15세 기 화가에 의해서 모세전과 그리 스도전의 주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그는 구약성서 속의 장면 들로써 이를 완결지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노아의 이야기에 이르는 장면,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예언 하는 사람들, 즉 선지자들과 여자 예언자격인 무녀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그때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해 제작을 추진 중에 있었다.
그것이 중단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천정화를 위해 회화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천정화를 입구에서 제단쪽 으로 진행하였고 표현형식도 4단 계-천지창조연작, 예언자와 무당 및 구약성서: 그리스도의 조상- 로 나누어 발전시켰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로부터 요구되어진 천장벽화의 주문을 거역하고 논쟁을 벌였다. 미켈란젤로는 장식 계획의 확장을 원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당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시오"라는 말로 율리우스 2세는 갈등을 끝냈다고 한다.
540평방미터 넓이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완성하는 것은 거의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방대한 작업이었다. 대부분 그림의 주요 장면은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는데, 미켈란젤로는 작업 당시 이와 반대로 연대기를 거스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작업했다. 1510년 8월까지는 <술 취한 노아>에서부터 <이브의 창조>까지 천장의 첫 번째 다섯 개의 장면이 완성 되었다. 나머지 네 개의 장면인 <아담의 창조>에서 <빛과 어둠의 창조>까지, 그리고 창문 위의 반달 모양의 공간에 그린 그림들은 1512년 10월에야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몸에 심각한 무리가 왔다. 갑상선종이 점점 더 커지고 목덜미와 가슴에 통증이 악화되었으며, 신장과 골반이 뒤틀리는 몸의 불균형이 나타났다.
<시스타나 천장 벽화>에는 결코 미켈란젤로가 혼자 생각해 낸 것으로는 볼 수 없는, 매우 지능적으로 고안된 신학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의 만취까지를 담고 있다. 양쪽에는 구약에 나오는 일곱 명의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던 다섯 명의 <고대 무녀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천장의 반달형 공간에는,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에서 열거된 '그리스도의 선조'들이 그려져 있다. 중앙 화면의 구석에 있는 삼각형의 벽면 네 곳에는 신약의 사건과 예형학적으로 관련된 구약성서의 네 장면이 각각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건축학적인 체계 속에 주요 그림들과 인물들을 고정시켰다. 그는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사이에 부조 형태의 푸토(벌거벗은 동자상)들이 떠받치고 있는 낮은 주춧대를 설치했다. 그로부터 천장의 구획을 나누어 그림의 경계를 만드는 가름대가 형성된다. 주춧대 위에는 나체의 청년상인 <이뉴디>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 중, 비교적 작게 그려진 다섯 개의 그림들을 네 명의 이뉴디가 둘러싸고 있다. 그들에 대한 해석은, 주춧대를 떠받치고 있는 <대리석 느낌의 푸토상>이나 원형의 <청동상 느낌의 청년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고 있다. 바사리는 이뉴디를 황금 시대의 전령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푸토들과 이뉴디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알레고리화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와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그리스도의 선조들'과 연결될 수 있다.


<천지창조>
시스틴 천장 벽화를 구성하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성당 제단 쪽에서 시작해 입구 쪽으로 주제별로 전개되고 있다. 이 작품은 벽화들 중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그림에 속하며, 나체상을 뜻하는 4명의 이그누디(Ignudo)를 작은 형태와 큰 형태 교대로 배열하면서 펼쳐진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19절에 해당되는 이야기, 즉 해와 달, 별, 식물을 창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내용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밝은 빛을 품고 해와 달, 별을 창조하는 역동적이며 힘있는 하나님의 비상하는 모습과 더불어, 식물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저 멀리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모습이 한 벽화 안에 그려져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두려우면서도 경이로운 존경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 그림 뒤에 나오는 <아담의 창조>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거리를 두면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 벽화에는 여느 화가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뛰어난 상상력과 필치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중앙부분의 천지창조관련

<빛과 어둠의 창조>
천정화 중간축(中間軸)의 마지막에 해당되며, 구약성서 순서로는 첫째 장면이 되는 이 그림의 장면은 바로 창세기 1장 45절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빛과 어둠의 창조 내용이다. '-하나님의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내용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담홍색의 옷에 싸인 신령이 두 팔을 들고 위를 쳐다보며 빛과 어둠을 만들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의 그림 내용에 일치하고 있는 듯이 사방 귀퉁이에 낮(右下), 아침(右上), 저녁(左上), 밤(左下)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의인상(擬人像)이 있고, 그 각각 한 쌍씩이 끈으로 메다이용에 연결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한쪽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가서 몸을 옆으로 틀고 있는 <아침>의 상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정신적인 상태를 육체적으로 표출할 때 많은 움직임도 보인다.

<해와 달과 초목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하늘에서 물을 분리하는 일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신 다음 둘째날에 이룬 일이지만, 앞서 말한 그림의 순서로서는 천체(天體)의 창조 다음에 배치하였다. 그 이유는 네 귀퉁이에 물질계의 상징으로 보이는 4원소의 의인상을 함께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창세기 1-9, 10) 이런 내용에 그림의 주제를 맞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나체상의 상징과 어느 정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람, 즉 공기의 상징과 물, 불과 흙의 상징을 이들 속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푸른 옷을 둘러 쓴 여자같은 상은 물(左上)을 나타내고 곱슬머리는 불(右下)이 아닐는지. 두 손을 번쩍 든 하나님은 아래를 보면서 부유하고 있다.

중앙부분 아담과 이브관련

<아담의 창조>
하늘로부터 강렬하게 돌진하는 하나님은 아기 천사들에 둘러싸인 이브를 옆에 끼고, 아담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고 있다. 대지에 밀착된 아담은 하나님을 향해 몸을 내밀고 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아 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브를 보며 묘한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설정은 아담의 표정과 육체와 영혼을 부여하는 신의 강렬한 눈빛으로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몸이 반쯤 세워진 아담이 하나님에게 생명의 힘을 전해 받으며 짓는 표정에는, 앞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고통스런 현실 공간으로 떨어지게 됨이 어렴풋이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취하고 있는 역동성과 신비함은 아담과의 절묘한 대비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아담의 창조>는 성당 입구에서 출발하여 구약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 지점에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과 신이 함께 표현되는 양식을 과감하게 창조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창조적 힘과 인간이 만들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이브의 창조>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창세기 2-21, 23). 커다란 망토에 둘러싸인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그야말로 나무 밑에 자고 있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듯한 이브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그가 볼로냐(Bologna)에서 본, 그가 많은 영향을 받은 쿠엘치아(Gacopo della Querciar)의 힘찬 구약성서 부조와의 유사점을 지적받기도 한다. 주위의 나체상은 인체 속에 흐르는 네 가지의 액체 내지 네 가지의 인간의 기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혈액으로서의 다혈질(右下), 황담즙으로서의 담즙질(右上), 점액으로서의 점액질(左下), 흑 담즙으로서의 우울질(左上) 등으로 지적된다.

<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추방1 2>
여기서는 두 가지의 장면이 동일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중앙의 지혜의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나무를 감고 있는 뱀에 유혹되어 이브와 함께 나무 열매를 따려는 아담, 오른쪽에는 천사에 의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열매를 따려는 아담의 뻗은 파로가 유혹하는 뱀의 팔, 그리고 천사의 검 (劍)을 피하려는 아담의 뻗은 팔에서 다시 양 면(面)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균 제감과 나무를 이중(二重)으로 감고 있는 여자 얼굴의 뱀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천사로 두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오른편의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는 브란카시(Brancasi) 예배당의, 울면서 쫓겨나는 마사치오(Masaccio)의 같은 주제의 상을 방불케 하는 바 없지 않다. 그러나, 젊은 시절 흠모하던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감정이 흐르고 있다.

중앙부분 노아관련

<노아의 번제1 2>
노아의 번제의 주제로 알려진 내용은 홍수에서 구제된 노아가 그의 처와 딸, 그리고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에게 감사의 번제를 올리는 장면으로 창세기 8장 20-21절에 나온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미켈란젤로는 이 천정 벽화에서 캇시나 전투 하도(下圖) 이후 처음으로 프레스코 벽화 제작에 임하였고, 힘든 경험을 겪게 되었다. 방주 문 앞에 딸과 처 사이에 서서 하늘을 가리키며 준비를 지시하고 있는 흰 수염의 노아의 모습에는 <도니가의 마돈나>상의 요셉과 닮은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표현은 후기의 작품에 비하여 딱딱하다. 둘레에는 인간의 네 가지 감각 [후각, 시각(右下), 촉각(右上), 청각(左上), 미각(左下)]이 나체 의인상(擬人像)으로 표시되고 있다.

<노아의 홍수1 2>

<술취한 노아>
'방주에서 돌아온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고하매 이들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는 창세기 9장의 이야기 내용이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묘사되었다. 커다란 포도주 통이 놓여 있는 막사 안에 취해 있는 노아와 그 앞에 세 아들이 서 있고, 밖에는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는 일에, 덥고 춥거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낮과 밤을 끊이지 않는' 농사를 짓는 노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 네 귀퉁이에는 다름 아닌 4계절의 의인상(擬人像)이 그 의미의 내용에 일치시키고 있다. 봄(右下), 여름(右上), 가을(左下), 겨울(左上).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의<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 추방> 마사치오의<낙원추방>



<리비아의 무녀> <드로잉>

주제의 좌우(12선지인)

<예레미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미래에의 희망을 강조하면서 살던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녀(巫女) 리비아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앞선 무녀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그리고 생각에 잠긴,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노인상(老人像)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와 같이 시스티나 천정화에서 여러 가지의 독자적인 해석과 조형적인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와 작업의 범위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은 그 하나하나의 그림의 내용과 도상(圖像)과 그들이 전하는 사상을, 특유한 인간과 인체의 표현으로 매개하면서, 한편 전체의 구성에 대한 그 나름의 리듬에 한 몫을 담당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형태의 표현만이 아닌 특유의 미적 색채감을 남기고 있다.

<페르시안 무녀(Persian )>

에제치엘(Ezekiel)>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대왕국 4대 예언자의 한 사람. 구약성서 속의 한 책인 《에제키엘》의 저자. 에스겔이라고도 한다. 에제키엘은 BC 597년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많은 유대인 포로들의 신앙지도자로서 신망을 한몸에 지닌 사제(司祭)였다. 포로생활 5년째 되던 날 바빌론의 그발강(江)가에서 야훼 신으로부터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숭배한 죄의 대가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BC 587년에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그 뒤 절망에 빠진 유대 민족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은혜와 영광이 빛나는 미래를 예언하였다

<에르트리아의 무녀(Erythrean )>
노아의 이야기를 둘러싼 선지자 그룹, 즉 입구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 <에리트레아의 巫女>는 이사야와 마주하는 비교적 정적인 표현 세계에 속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육체와 영혼의 표현상의 균열이나, 도상(圖像)내용과 표현 형태 사이의 일치의 초극이라 는 문제가 그의 중요한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런 면의 한 경우를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을 말한 에리트레아의 무녀가 비록 책장을 넘기면 서 무시하는 모습에 그의 그 놀랍고도 엄숙한 예언의 기미를 담고 있다고도 하겠으나, 역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체의 움직임이 그다지 크지 않은 조용 함이라 하겠다. 뒤의 기대의 박공을 떠메고 있는 장식 조각의 푸토(putto)들이 입구 위의 예언자 군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정면성을 넘어서 사선으로 움 직이고, 그에 못지 않는 배경의 어린이의 움직이는 포즈도 이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요엘
구약성서 <요엘서>의 주인공. 거대한 메뚜기 떼가 이스라엘 땅에 재앙을 몰고 왔다. 예언자 요엘은 그것을 심판의 날을 알리는 조짐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묵시적인 언어로 하루 빨리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뒤이어 미래에 대한 환상을 펼쳐보인다. 그 환상 속에서 야훼는 그의 백성이 받은 고통을 보상해 주고 그들의 적을 징벌한다. 요엘의 신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책이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온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쏟아짐을 예언하는 구절은 성령강림절에 성령의 선물을 예시하는 것으로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인용되어 있다.
즈가리야
이스라엘의 예언자. 《즈가리야서》의 저자로, 위로와 소망과 영광의 선지자이다.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이 성전(聖殿)을 재건할 때 여러 가지 방해로 중단되면서 백성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할 때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깨우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자연적으로 성전재건을 주제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생활이 다시 부흥됨은 물론 이 회개한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가 강림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지자이자 제사장이었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임과 동시에 선지자로 파악하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델포이의 무녀>
<빛과 어둠의 창조>에서 노아의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9구분으로 된 구약성서 내용의 천정 중심 화면 전 후 좌우에 12체의 선지자, 그리고 무녀가 그 아래 건축적인 틀에 억눌려 있는 그리스도의 선조 그림들보다 훨씬 위풍있게 그려졌다. 그런 예언자의 위치는 입구 바로 위에 있는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를 비롯하여 첫째 그림, <노아의 만취>를 두고 왼쪽에 <델포이 의 무녀>와 오른쪽에 <선지자 요엘(Gioele)>, 그 다음의 삼각 벽면을 건너서, <노아의 번제>를 두고 왼쪽에 선지자 이사야와 오른쪽의 에리트레아의 무녀와 <에바의 창조> 그림을 두고, 구마의 무녀와 선지자 에제키엘, <하늘과 물의 분리>를 두고, 선지자 다니엘과 페르시카의 무녀, <빛과 어둠의 분리>를 두고, 리비아의 무녀와 선지자 예레미야, 그리고 제단 바로 위에 선지자 요나가 위치하게 된다. <델포이의 무녀>는 후반 이후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대담해지고 커지는데 반하여, 균형이 잘 잡힌, 전반의 그림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이다.

<이사야>
메시아를 기다린 선지자 이사야가 정면을 향해 옆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는 데서 드러난다. 직각에 가까운 팔과 다리의 포즈는 등뒤로 둥글게 윤곽을 주는 망토의 곡선과 함께 이 천정 벽황서 미켈란제로가 여러 번 시도하던 경향으로, 여기서도 반영시키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가만히 앉아 있는 좌상에서도 주로 그 포즈나 형태감의 흐름에서 정적인 고전주의를 초극하고 있다. 그런 예를 이 천정화에서는 수없이 헤아린다. 조각가인 그가 그림 세계에서 보여주는 조상적(彫像的)인 것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그와 같은 특수 경향은 그의 예술로 하여금 고전적 이상주의 속에 이미 싹트고 있는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그것이 나아가서는 과장되는 공간감과 더불어 바로크적인 특성을 지닌 것의 근거로 지적 받기도 한다.

<Cumaean 무녀>

<다니엘>
구약성서 《다니엘서》의 주인공으로, 구약시대의 4대 예언자 중 마지막 인물. 유대 민족이 처음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BC 597) 소년인 다니엘도 같이 연행되었다. 처음에는 궁정에서 시동(侍童)으로 일했으나, 시종일관 조국의 복권을 기원하며 이교(異敎)의 권력과 박해에 대항해 싸웠다. 뒤에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몽해 준 일로 인하여 명예로운 지위에 올랐으나, 고관들의 질시로 두 친구와 함께 풀무불 속에 던져졌으나 무사하자, 다시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도 신의 가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흔히 ‘믿음의 용사’ ‘신의 절대적인 가호’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리비아의 무녀>
고대의 여자 예언자격인 시빌라(Sibylla)라는 무녀(巫女)들은 열 명 정도가 세계 여러 곳에 살면서 앞으로 닥쳐올 일을 말하였던 것으로, 후에 와서 그리스도나 그의 가르침에 관한 예언으로도 가끔 인용되었다. 여기서는 남자 예언자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예언자 연작에서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게, 대개가 책이나 종이 두루마리를 펴고 있거나 들고 있는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그 부분의 특성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도 '그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모든 일들을 기록한 책을 내놓을 것이다.' 커다란 책을 두 손으로 들고 뒤에서 옆으로의 움직임의 공간을 예상케 하는 이 리비아의 무녀의 그림에서 앞의 예언자 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격렬한 움직임의 '요나'에 가까운 커다란 움직임의 자태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이 그림을 위한 습작에는 남성상(男性像)의 데상이 돋보인다.

<요나>
천정화의 입구에 위치한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와 마주 보며, 안쪽 제단 위의 중요한 벽면에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요나>이다. 조용하고 균형이 잡힌 전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표현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심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뒷배경의 유동성도 이에 호응하여 한층 더 고조되는 공간을 낳게 한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먹혀 하나님에게 기도 한 결과 3일 만에 그것에서 토해 내어졌다. 그런 뜻에서 부활의 상징이 덧붙기도 한다. 커다란 입의 물고기가 요나 옆에 보인다. 이와 같이 12체의 선지자와 무녀(巫女)의 배치라는 구성이 타에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이들 선지 자 내지 무녀를 그리는데서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해석이나 의미 부여도 독자적인 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요나가 있는 천정에 붙은 벽에 바로 최후의 심판 그림이 위치한다.

네모퉁이

<유디스와 Holofernes>
구약성서의 외경(外經) 가운데 하나인 <유딧書>의 주인공. 유딧이라는 미모의 한 유대인 과부가 민족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미모를 이용하여 베툴리아를 완전포위하고 있는 아시리아군의 적진 속에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하고 동족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교훈적 이야기이다. 가공적인 설화이지만 종교문학적인 기교는 뛰어나다. 마카비 시대 초기에 저자는 바리사이파(派)에 속하는 사람에 의해 헤브라이어(語) 또는 아람어로 쓰여졌다. 가톨릭에서는 이 책을 제2정경(第二正經)으로 채택하였으며, 한국에서도 1977년에 완간한 《공동번역성서》(외경부)에 새로이 번역·수록하였다. 16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7장은 서론에 해당하고, 8장 이하가 유딧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윗과 골리앗>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 왕. 이스라(이새)의 아들로서, 소년시절 사무엘이 사울왕(王)의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성장하여 사울왕을 섬기고 페리시테(블리셋)의 거인 골리앗을 돌로 때려죽여 용맹을 떨쳤으나, 사울의 질투로 적대시당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의 우정과 보호를 받아, 사울이 죽은 후 BC 1000년 유대의 왕, BC 994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신의 언약궤를 옮기고, 제사제도(祭司制度)를 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교[猶太敎]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자식들 간에 왕위계승의 싸움이 일어나는 등 평온하지 못하였다. 또 하프의 명수였고,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구약성서 시편의 상당부분은 다윗이 지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의 사적(事績)은 구약성서 《사무엘 상(上)》 l6장 이하와 《열왕기 상》 2장 및 《역대기 상》 11∼29장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교활한 독사>

<하만의 형벌>

아홉 주제의 그림 네 귀퉁이 마다 다양한 포즈의 《Ignudo》를 배치하였고, 아홉가지 그림의 좌우 옆쪽으로는 《12명의 무녀(巫女)와 예언자》를, 삼각형 모양의 요면벽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가족과 조상들을,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의 그림들을 각각 그렸다.

그리스도 조상들

<Achim 과 Eliud> <Manasses와 Amon 그리고 Ezekias>

그리스도 선조 가족들

<Zorobabel의 가족> <어머니 아비아와 어린 Roboam>

<Ozias 가족> <어린 솔로몬과 그의 어머니>

이구누도1 2 3 4 5 6





<최후의 심판 1534∼41년, 프레스코 1450 x 1300cm> 부분도1. 2. 3
세상과 인간의 탄생과 그에 관련된 것들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낸 혈기왕성한 37세의 대화가 미켈란젤로는 회갑이 넘어 신이 창조한 세상의 종말을 그리기 위해서 다시 이곳을 찾는다. 1534년부터 7년간에 걸쳐 작업한 이 작품은 391명의 군상이 난무하며 장대한 구도와 복잡한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움직임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그의 만년의 대작이다. 성경에 예시된 최후의 날의 그리스도 재림과 그 때 행해지는 심판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천국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지옥의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후의 날에 부활하는 사람들과 심판에 의해 끌어올려지는 선인과 밀려나는 악인은 당당한 심판간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천국을 묘사하면서 그 곳에서 만난 인물들을 비평하고 평가하여 오랜 역사를 심판하였듯이 미켈란젤로는 그의 벽화에서 그러한 심판을 하였다.
중앙에 있는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심판을 하고 왼손으로는 주위의 착한 자들을 부르고 있다. 곁에는 인자한 성모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들러싸고 있고, 예수의 발 아래 오른쪽에는 사도 바르톨로메오가 영혼과 육체가 빠져 나간 미켈란젤로의 껍데기를 쥐고 있다. 작가는 덧없는 인생을 살아온 자신의 위치를 그렇게 예언했다. 예수의 오른쪽에 열쇠를 들고 있는 백발의 노인은 성 베드로이고 그 왼쪽은 성 바울이다. 마리아의 왼쪽에는 십자가를 든 성안드레아와 노인 모습의 성 요한이 있다. 글미의 윗부분은 천국에서 만나는 기쁨을 그렸고, 중간 부분에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심판관에게 순교자의 심벌을 각자 보이고 있으며, 하단의 좌측에는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묘사되어 있는가하며 우측은 반대로 천당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는 장면이다. 무거운 죄를 지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천사들의 부측을 받아야 천당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 작품은 '천지창조'를 그리던 때와는 달리 종교개혁으로 전 기독교계가 몸살을 앓고 있던 때라 당시의 비극적인 시대상과 노년에 접어든 미켈란젤로의 비관적인 인생관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벽면전체를 4구역으로 나누어 7년에 걸쳐 위에서부터 1.천사들, 2.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과 순교자들 , 3.천상으로 끌어올려지는 무리와 나팔을 부는 천사들 ,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리들 그리고 맨 아래층에는 4.지옥을, 높이 20m나 되는 벽면에 391명의 다양한 인물군들로 가득 채움.
-미술사가 노성두에서-
1541년 만성절.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수십 년 째 완공이 지체되는 바람에 줄곧 여기서 의식을 치러왔으니 새삼스런 걸음은 아니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이윽고 창문을 가렸던 휘장을 걷어내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올려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후의 심판 날, 뭇 영혼들의 찬양과 울부짖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재림 예수가 하늘 복판에 앉았다.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성자와 성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퍼렇게 빛나는 하늘은 어떤 심판의 칼날보다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런데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은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성자, 성녀 알몸으로 그려

그림 한 점을 두고 이단의 의혹을 천 가지 이상 꼽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를 달지 않은 것도 시빗거리였다. 예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첫 교황 베드로가 일군 천오백 년 역사의 가톨릭 교회가 그림 속 푸른 바다에서 뱃멀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 시비끝 수정결정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바오로 4세는 `그림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종장의 전언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께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그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 테니.” 그러나 뒤를 이은 피우스 4세에게는 그런 발뺌이 통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는 그림 수정을 결의한다. 1564년 1월 21일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은 미켈란젤로가 여든 아홉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내려졌다.

수정 작업을 그의 제자 볼테라가 맡은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승의 뜻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가리개만 씌우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다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비난을 모았던 성녀 카테리나는 본격적으로 손보았다. 성자들의 부끄러운 곳을 덮는 가리개는 회벽을 파내고 젖은 석회를 새로 바른 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볼테라는 이후 `브라게토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가리개 귀신'이란 뜻이다.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화상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돌로 쳐죽이거나, 자루에 넣고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은 극적 효과를 노리고 가장 참혹한 순교방식을 선호했다. 잔혹 주제가 판치던 17세기에는 심지어 성자를 십자가에 매단 상태에서 인피를 벗겨 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검으로 발라낸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자화상을 새겼다.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유령이 깃들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미켈란젤로는 제 얼굴을 그리면서 두 눈을 후벼팠다. 실명의 달콤한 유혹이 그의 붓을 이끌었다. 또 그의 표정은 젖은 걸레처럼 일그러졌다(그림2). 무슨 심사였을까? 성 바르톨로메오 말고도 살껍질을 벗겨서 죽은 인물이 또 있었다. 마르시아스.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으나 아폴론의 키타라를 능가하는 피리 솜씨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순교자로 추앙 받았던 신화 속의 존재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도 예술의 순교를 꿈꾸었을까?

'목욕탕에 어울리겠습니다'

시인 아레티노는 탁월한 미술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에게는 간지러운 아부를 서슴지 않았으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주특기인 독설을 쏟아냈다. <최후의 심판>을 보고 나서 1545년 일흔 먹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다.

“천사와 성인들은 지극히 고귀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당신 그림을 보면 지상의 진지함이나 천상의 엄숙함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군요. 알만한 예술가라면 디아나에게 옷을 챙겨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베누스도 손으로 가릴 곳을 가리게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대가 예술을 구실 삼아 신앙을 깔보는군요. 순교자와 성스런 처녀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넋빠진 자세로 저마다 성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설령 유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쳐도 도저히 눈뜨고 못 볼 희한한 볼거리가 되겠군요. 이 그림은 교황의 성스러운 예배소보다 고급 목욕탕에 갖다두면 어울리겠습니다.”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4.html )

브루넬레스키 : 이전의 고딕식 건축과 완전히 다른 쾌적한 건축양식

 마사치오 : 명암법과 원근법을 구사

 도나텔로 : 현실감을 갖춘 고전적 균형의 조각

 보티첼리: 신 플라톤적 이상인 아름다움의 세계 표현

브루넬레스키
브루넬레스키는 이전의 고딕식 건축과 완전히 다른 쾌적한 건축양식을 만들어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두오모대성당(1420-36년, 피렌체)
고딕 성당의 뾰족한 지붕 대신 고대로마 방식의 둥근 지붕으로 대체, 벽돌을 2중으로 쌓아 지탱하게 하는 매우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산 로렌조성당(1421-40년, 피렌체)
내부는 가는 원기둥을 아치로 연결하고 지붕을 평평하게 하는 바실리카 방식을 빌어 옴으로써 합리적이고 여유 있는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인노첸티의 병원회랑(1419-24년, 피렌체)
기둥과 기둥사이, 기둥과 벽 사이 그리고 바닥에서 주두 바로 아래까지의 길이를 일치시킴으로써 하나의 정입방향체를 만들고, 이를 공간에서 반복시킴으로서 정돈감을 주었다. 그리고 큰 아치 위에 작은 창문을 두어 율동감을 주고 있다.

 
기베르티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길드의 수호성인상주문이 미술에  끼친 영향
 종교적 기능보다 피렌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역할로 자리함.


 각 길드를 상징하는 조각품들을 주문해 공공장소의 중요 위치에 배치함으로  조합의 위치를  정착시킴.
 원래 세리였던 마태오:은행가 길드의 수호성인
 낙타털을 입고 다녔던 세례요한:모직상 길드의 수호성인이고,
 용을 창으로 찔러 공주를 구한 죠르지오:갑옷제조업자의 수호성인
 이교의 상 제작을 거부하였던 기독교 초기의 순교자 4명:건축가와 조각가의 수호성인
 마르코:면직 공업자들의 수호성인

 고대 조각을 모범으로 삼음(사실적 묘사의 회귀)

예시 작품들

기베르티의 세례요한(오르산미켈레 성당 전면, 피렌체)  마태오(오르산미켈레 성당 전면, 피렌체)
피렌체의 대성당과 시청을 잇는 시내 한 가운데엔 오르산미켈레라는 성당 외벽에 가 제작한 14개의 감실 중 두 작품이다.

난니 디 방코의 네 성인(1411-13년경.오르산미켈레성당, 피렌체)

도나텔로의 성 죠르지오(1415년경. 오르산미켈레성당, 피렌체)
 
가족 예배실의 벽화 유행

회화의 발달 계기가 됨.
양쪽 벽면이나 제단 양쪽에 가족 예배실에 석관을 둠.

산타 트리니타의 사세티(Sassetti)家 예배실도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의 목동들의 경배 와  사세티 부부의 경배(1483-85년)
가운데 <목동들의 경배>가 제단화로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엔 사세티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이고 좌우의 벽엔 그들의 석관이 안치되어있다.

교황으로부터 수도원 인증을 받는 프란체스코(1482-86년)
중앙과 좌우 벽면의 중간과 윗단엔성 프레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엔 성 프란체스코와 수도사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데그 중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인물은 아래 하단에 그려졌던 이 예배실의 주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임을 알 수 있다. 왼쪽엔 이미 성장한 세 아들을 두고 아직 어린 넷째 아들은 자기 옆에 그리게 하였다.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검은머리의 옆면 인물은 로렌조 디 메디치이며 그 옆은 피렌체에서 명망 있던 안토니오 푸치로 사세티의 사돈이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로렌조의 아들들과 그들의 가정교사였던 인문주의자들이다. 메디치 은행의 제노바 지점장이었던 사세티는 메디치家의 총수인 로렌조를 자신의 옆에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함께 넣음으로써 그들 가문과의 결속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종교와 정치, 경제 그리고 미술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도나텔로

도나텔로는 현실감을 갖춘 고전적 균형의 조각 완성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1412-13년, 나무, 높이168×173㎝. 피렌체, 산타크로체성당)
이 작품을 본 브루넬레스키는 도나텔로에게 어떻게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지 않고 농부를 매달았느냐고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에서 도나텔로가 보여주는 현실감을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다.

성 죠르지오(1416년경, 대리석, 높이214㎝.피렌체, 바르젤로 박물관)
고전조각의 조형미를 구현하였다. 콘트라 포스트 자세와 당당한 양감, 8등신의 비례 등 고전적인 이상을 실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감실 배경의 무늬를 없애고, 상을 조금 작게 함으로써 조각상이 배경의 공간에서 여유있게 놓이도록 했다. 그가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치오와 함께 교류하면서 일구어낸 원근법에 대한 관심의 결과이다.
성가대석(1439년, 대리석 348-570㎝.피렌체,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로마 조각에서 모티브를 빌어 왔으나, 1410년대에 지향하던 고전적인 질서는 거부하고 있다. 분방하고 신비하기까지 한 이 부조는 교회의 성가대석을 위한 것이지만 매우 이교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1457년경, 나무, 높이188㎝.피렌체,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
도나텔로는 막달라 마리아의 처절한 기도와 나아가 인간의 참회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를 농부와 같은 현실의 인물로 이해하던 도나텔로에게 조화로운 고전적 아름다움은 오히려 공허한 가상같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

그의 작품은 살아있는 진실 그 자체, 자연 그 자체 - 바자리

피렌체에서 출생한 마사치오는 26살에 요절했으나 15세기 회화 분야에 있어 경탄할 만한 작품을 남겨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어머니.
평면상에 처음으로 현실적인 3차원 공간을 재현 : 원근법과 명암법을 조합
이론적으로 공간을 묘사 : 공간과 양감의 표현법 체계를 수립 
삼위일체  소실점

"성 삼위일체"라는 주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하나님, 양옆에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 렌치 가(家)의 사람들로 밝혀진 봉헌자들을 그린 것이다. 벽화 아래에는 묘소와 접하는 부분에 해골이 그려져 있으며, "나도 일찍이 그대와 같았노라. 이제 그대도 나와 같으리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두 팔 벌린 하나님은 마치 실제로 매달린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만큼 자연스런 사실감이 느껴진다. 이는 마사치오가 적용한 단축법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인물들의 의상의 색감과 주름, 옷 속에 들어 있는 신체의 각 부분들은 자연광선의 명암으로 처리하여 실제적인 공간감을 재현하였다. 이 제단화 속에 적용된 투시도의 선이 한 곳으로 모이는 소실점(The Vanish Point)은 바로 그리스도의 머리 부분이다. 과학적인 선원근법을 시각적으로 성공적으로 적용한 이 작품 이후로 르네상스 회화는 혁신적인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이 그림에서의 소실점은 바닥으로부터 153cm 높이에 위치 있는데 이는 키 162cm 정도의 사람이 그림 앞에 섰을 때 눈의 위치에 해당된다. 마사치오가 벽화에 구현한 이 원근법은 매우 과학적이어서 우리는 벽화의 감실 깊이까지 계산해 낼 수 있다
헌납금

성추방과 더불어 카르미네의 브랑캇치 예배당에 그린 그림으로 회화사상 신기원을 이룸

낙원추방(첫 나체와 비극의 표현)

길고 폭이 좁은 공간에 천국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그린 것이다. 공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마사치오는 왼쪽에 천국의 문을 그려 넣음으로써 주제를 단순하고 재치 있게 묘사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가 천국문에서 쫓겨나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화면은 오른쪽으로 개방된 느낌을 갖게 된다. 문 위에서 그들을 따르는 천사의 존재, 가야할 곳을 가리키는 천사의 손동작 역시 공간을 확장시키고 있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두 사람의 후회와 슬픔어린 표정이 인상적이다.

제롬과 세례자 요한  병자를 치료하는 성 베드로 
프란체스카(Piero Francesca 1416-1492)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섯가지의 기하학 형태로 나눌 수 있다.

피렌체에서 활동. 당시 일류 수학자이기도했던 그는 그림의 구도에 원근법과 색채법을 적용해 저서를 편찬하기도 함. 예술을 위해 논리적연한 수학.기하학적 견해와 기법을 도입.
프레스코화의 획기적인 기법 : 완성작과 같은 크기의 밑그림-밑그림의 윤곽선을 따라 작은 구멍을 뚫어 목탄으로 문질러 형태 잡는다(형태의 정확성)
군더더기 없는 화면과 아름다운 색채 : 도형적인 화면과 아름다운 색채의 조합.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부부초상
배경이 이렇게 멀리 보이게 하려면 아마 높은 건물의 발코니에서 주인공을 아주 가까이 놓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고대의 메달에 그 근원을 두고있는 옆면 얼굴은 정치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는데, 3/4각도의 초상이 많이 그려지던 15세기 후반에 페데리코만이 정 옆면을 사용한 것은 전투에서 잃은 한쪽 눈의 흉한 모습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눈 사이가 푹 들어가고 메부리 같이 강하고 큰 코의 묘사에서 우리는 이 초상을 사실적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이렇게 특정부분을 사실적으로 한 반면 전체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매우 치밀하게 이상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매맞는크리스트(1445) 
건물밖에 있는 인물은 아주 크고 건물 안의 인물들은 작다. 우리는 이것이 거리에 따른 차이라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확한 원근법이 구사되었기 때문이다. 바닥의 기하학적 무늬가 기울어진 각도는 바로 보는 이의 눈 높이에 있는 소실점에서 얻어진 수학적인 계산이다.

크리스트의세례 참된십자가역사 성 줄리앙 콘스탄틴의 꿈 브레라의 제단화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프란체스카의 그리스도의 부활
십자가형을 받고 매장된 지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를 위엄에 가득 찬 모습으로 묘사. 수직선과 평행선을 직각으로 조합시킨 골조의 강력함이 그 위엄을 만들어 낸 포인트다.
배경인 좌우측의 나무 중 오른쪽은 잎이 무성하지만 왼쪽은 앙상한데, 이 또한 '부활', '생명의 탄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병사들의 모습은 모두 삼각형 구도를 지니는데, 이들은 다시 예수를 포함해 큰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왼쪽 끝에 있는 병사의 자세는 쇠라의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 응용.

쇠라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86년
쇠라는 미학에 큰 관심을 가졌던 수학자 샤를 앙리의 영향을 받아 기하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앙리는 음악에 관철되는 성격을 색과 선에 접목시켜 동일한 법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쇠라의 주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즐겨 다뤘지만, 한편으로 상징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신비감과 분위기를 그 안에 부여했다
<아스니에르의 미역감기>으로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중심적 인물로 부상한 쇠라는 바로 두 번째 대작인 이 작품에 착수했다.  모티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밝은 야외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이지만, 등장 인물의 수가 많아지고 땅의 부분에서는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대비로 구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이 작품이 제작될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자트 섬에 나가 여러 포즈를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오후에는 그 모습들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배치하곤 했다. 쇠라는 1884년 5월부터 작업에 착수해서 1985년 3월까지 대강의 윤곽을 잡은 뒤, 1985년 10월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 1986년 5월에 이르러서야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순색의 작은 반점의 병치로 더욱 완벽한 분할 묘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정감적인 인상파를 극복하고, 그 고유의 과학적 인상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1886년 제 8회 인상파전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3년 동안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쇠라는 아침 일찍부터 라 그랑드 자트 섬에 나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아틀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조형적으로 새롭게 창조해 화면에 배치시켰다.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

동판화가로 도나텔로의 영향을 많이 받음. 궁중화가로 교황에게 초빙되어 작품활동

만테냐는 파도바에서 1459년 만토바 궁정으로 떠나기에 앞서 최초의 걸작, 베로나의 산 제노 교회의 제단화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본래 제단화의 중앙 패널이었는데, 19세기 초에 현재의 상태로 분리되었다. 양옆의 패널은 투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은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을 수직으로 3등분하면 그림의 축을 이루는 그리스도와 양옆에 죄인이 각각 세 개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구도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화면 상단에 역삼각형의 구도가 형성되고, 아래에는 비통한 표정의 신자들과 로마 군인들이 이루는 삼각형의 구도가 그리스도의 발치에서 만나게 되는 불안정한 구도를 보여준다. 만테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더욱 비통하게 그려내고자 불안정한 역삼각형 구도 배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죄인들의 몸은 이미 죽은 상태로 핏기 없는 엷은 푸른빛으로 채색되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감정 표현과 색채 묘사, 후면으로 길게 이어지는 언덕 마을에 적용된 정확한 원근법, 인물들의 조각적인 입체감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그림 전반에 선명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리스도 책형( 刑)"을 주제로 그린 얀 반 아이크의 작품은 시선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끔 되어 있어서 감정의 개입이 차단된 반면, 만테냐의 작품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우러러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긴장감을 일깨워 준다.

 

갈보리언덕
만테냐는 파도바에서 1459년 만토바 궁정으로 떠나기에 앞서 최초의 걸작, 베로나의 산 제노 교회의 제단화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본래 제단화의 중앙 패널이었는데, 19세기 초에 현재의 상태로 분리되었다. 양옆의 패널은 투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은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을 수직으로 3등분하면 그림의 축을 이루는 그리스도와 양옆에 죄인이 각각 세 개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구도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화면 상단에 역삼각형의 구도가 형성되고, 아래에는 비통한 표정의 신자들과 로마 군인들이 이루는 삼각형의 구도가 그리스도의 발치에서 만나게 되는 불안정한 구도를 보여준다. 만테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더욱 비통하게 그려내고자 불안정한 역삼각형 구도 배치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죄인들의 몸은 이미 죽은 상태로 핏기 없는 엷은 푸른빛으로 채색되었다. 세밀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감정 표현과 색채 묘사, 후면으로 길게 이어지는 언덕 마을에 적용된 정확한 원근법, 인물들의 조각적인 입체감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그림 전반에 선명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리스도 책형( 刑)"을 주제로 그린 얀 반 아이크의 작품은 시선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끔 되어 있어서 감정의 개입이 차단된 반면, 만테냐의 작품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우러러보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긴장감을 일깨워 준다.

 

파르나수스
그리스 신화의 파르나수스 산을 찾아보려는 도상해석학이 시도되기도 했던 이 작품의 주제는 아직까지 정확한 정설이 없으며, 15세기 말경 당시 귀족이던 이사벨라 데스테의 "서재"를 장식했던 만테냐의 이 작품과 더불어 로렌초 코스타의 <코스무의 우화>, 페루지노의 <우의화> 및 <정결의 승리> 등의 그림이 미술사가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 작품은 만테냐의 작품 중에서도 고고학적인 박학함과 서사시적 표현을 궁극적으로 높인 고전적인 경향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끄는 그림이다. 화면 구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굴속에서 나와 손을 쳐드는 몸짓을 하는 불칸이 위치한 왼쪽으로부터 시작해서, 중앙에 아치 모양의 바위에 서서 살며시 접근하는 비너스와 마르스, 그리고 오르페우스를 따르는 무희들을 거쳐, 마지막으로 오른쪽으로는 말과 함께 있는 수수께끼의 인물에 이르고 있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세 요소는 각각 개방적이면서 서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집중성과 병렬성을 가지고 있다.

 

형장으로끌려가는 성야곱  천사가있는성모자  겟세마네동산에서기도 성세바스찬 예수죽음의애도
 
기를란다이요
보티첼리와 동시대 화가로 활동했던 기를란다이오는 15세기 말경에 피렌체의 가장 이름높은 작업장의 책임자였다. 그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가대에 있는 성모의 전 생애를 담은 그림, 그리고 피렌체 소재 산타 마리아 마델레나 데 파지의 체스텔로 성당의 예배당에 기증할 작품들이 로렌초가(家)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들은 기를란다이오 두 형제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아하고 빛나는 선으로 그려졌고, 로마 화풍의 고전주의적 아치를 벗어난 기념비적인 표현기법을 보여주는데, 색채의 단순성과 선의 조화는 그림의 정신적인 깊이를 더욱 빛나게 한다.

노인과손자의초상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가 개척한 사실주의적인 화풍에는 시대고증이나 당시 풍속의 증거가 되는 장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때때로 그는 시대에 맞지 않는 묘사를 덧붙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개성적인 인물상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였다. 다시 말해, 초상화에 있어서 모델의 딱딱한 표정을 사실적으로만 그리는 것보다는 때에 따라서는 세부의 정교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의 표정을 특징적으로 잡아 내는 것이 애정어린 분위기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를란다이요의 초상화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이 당시 유명한 은행가였던 프란체스코 사세티의 초상을 그린 이 작품이다.
 이 초상화를 그리는데 있어서 기를란다이오는 인물의 사회적 지위를 표면에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모델의 보기 흉하게 큰 울퉁불퉁한 코를 솔직하게 그릴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힘이 넘치는 늙은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사세티는 자기에게 기댄 손자와 함께 있으면서 자기자신의 삶의 생기를 느끼는 듯한 모습이다. 검정과 잿빛을 주조음으로 하는 배경 앞에서 타는 듯한 빨간빛의 의상은 늙은이에게 잘 어울리며, 마치 화가가 가족의 혈연을 강조하는 듯이 어린 손자의 모자와 옷에도 되풀이해서 표현해내고 있다.

성모의방문
보티첼리와 동시대 화가로 활동했던 기를란다이오는 15세기 말경에 피렌체의 가장 이름높은 작업장의 책임자였다. 그의 대부분 작품들은 로렌초가(家)의 토르나부오니 가족의 주문의뢰로 제작된 것들이 많은데, 그 작품들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가대에 있는 성모의 전 생애를 담은 그림, 그리고 피렌체 소재 산타 마리아 마델레나 데 파지의 체스텔로 성당의 예배당에 기증할 작품들이 로렌초가(家)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들은 기를란다이오 두 형제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아하고 빛나는 선으로 그려졌고, 로마 화풍의 고전주의적 아치를 벗어난 기념비적인 표현기법을 보여주는데, 색채의 단순성과 선의 조화는 그림의 정신적인 깊이를 더욱 빛나게 한다.

세퍼드의예배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년)

데생의 기묘함은 각별했다.  그의 사후 화가들은 그의 그림을 한 장이라도 얻기위해 고군분투했다.-바자리

르네상스의 발원지 이탈리아  피렌체는 그의 타고난 회화적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필리포 리피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으며,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등 거장들과 동시대를 살았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가문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다. 한마디로 대화가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완벽한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의 자화상을 그대로 믿는다면 미남에 멋쟁이였던 그는 결혼을 거부했고 다빈치와는 친구였으며 '비너스 탄생' 완성 후 신플라톤주의를 결렬하게 비난하는 교회 개혁자 사보나롤라의 광신적 설교에 매료되어 피렌체의 상류계급과 더 이상 교류하지 않고 지옥불과 죄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하는 그림을 그리지만 유감스럽게도 보티첼리의 선천적 우아함은 사보나롤라의 설교가 그림으로 표현되는 고통등과는 도저히 융합할 수 없어 그의 후기 종교화는 초기 작품들과 같은 매혹은 더 이상 표현되지 못했으며 새롭게 획득한 신앙의 발견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동 시대의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는 다르게 세상의 흐름에서 소외되고 말았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의 설치장소를 심의하는 위원회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과 함께 출석하였으나, 그 후 그는 제작활동을 거의 중단하고 소식마저 끊었다.
보티첼리의 아버지가 후세에 남긴 세금 고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보티첼리는 마음 내킬 때만 일을 했다.'
보티첼리는 달콤한 성공의 술을 너무 빨리 맛본 탓인지 무거운 짐에 시달린 채 1510년 65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신화와 이야기를 그리는 천재: 당시 회화의 주제로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그리스 신화를 자주 테마로 삼음. 대부분 작품은 메디치가의 로렌초 디 피에르 프란체스코등 명망있는 귀족들의 의뢰로 그려졌으며, 그들 사저에 장식용의 사용됨.

선의 효과를 추구하며 새로운 스타일 구축 : 정확한 뎃생력에 기초한 선은 정확할 뿐만 아니라 신체의 곡선이나 옷감의 흐름을 유려하게 재현해냈다.세밀화가나 금세공사처럼 고도의 집중력을 통해 그려진 선에 의해 형태나 움직임을 재현하려고 했다.그래서 그가 그린 인물들은 우아하고 늘씬하게 뻗어있다. 인간적이거나 격정적인 감벙도 느껴지지 않으며, 그저 세련된 스타일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

2차원적인 공간을 그리다 : 딴에는 배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인물의 배후를 나무로 덮어버린 작품도 있다. 이런 표현 방법 때문에 그는 르네상스의 정통파로 대접받지 못함.

-오카베 마사유키의 청소년을 위한 명화의 길잡이에서-
- 라파엘 전파와 팜므 파탈의 원류 -


보티첼리의 명성은 사후 급속히 냉각. 300년 이상이나 지난 19세기 중반 라파엘 전파화가들에 의해 재조명. 특히 명확하고 투명감을 살린 선과 색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은 여성상의 우수에 젖은 표정은 로제티의 여성상을 비롯해 세기말의 팜므파탈(숙명적인 여인)이미지의 원류가 되었다.
 
 비너스 탄생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아름다운 애첩이 있었다. 대왕은 화가를 시켜 판카스페의 눈부신 젊음이 사그라들기 전에 그의 알몸을 그리게 한다. 불변하는 예술의 거울에다 자연의 드문 기적을 담아두려는 생각이었다.
 -노성두의 미술이야기에서-

알렉산드로스왕 애첩과 '불륜'

신성한 의무를 떠맡은 화가는 아펠레스. 헬레니즘 최고의 붓을 자랑하며 숱한 회화의 전설을 뿌린 명장이다. 어느 날 그림이 잘 되어가나 싶어 화가의 작업실에 들렀던 알렉산드로스는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그만 아연하고 만다. 아펠레스와 판카스페가 꼭 끌어안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젊은 대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니, 저것들이?' 두 연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어림없는 만행의 대가로 모가지가 달아나게 생겼다. 옛 기록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적수를 제압했던 알렉산드로스는 이날, 가장 무서운 적수와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대왕은 자신의 노여움과 질투조차 거뜬히 누름으로써 참된 영웅의 면모를 과시한다. 벌을 기다리던 화가는 뜻밖에 상을 받았다. 아끼던 애첩을 선사한 것이다. 이 일을 두고 플리니우스는 무력의 대왕이 예술의 제왕 앞에 무릎꿇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일화의 미학적 얼개를 풀이하자면, `예술이 권력의 속박을 떨치고 아름다움의 덕목과 결합한다'쯤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아펠레스는 그 일이 있은 후 더욱 분발했고, 기량도 한층 무르익었다. 또 판카스페를 모델로 세우고 절정의 예술을 쏟아서 `바다 거품에서 태어나는 비너스'를 그렸다. 갓 태어난 알몸의 조형에다 새벽별처럼 어여쁜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아서 미와 사랑의 여신을 완성한 것이다.

옛기록 읽고 '나도 그려보자'

피렌체 화가 보티첼리는 플리니우스가 쓴 옛 기록을 읽고 무릎을 쳤다. 당장 붓을 들어 1800년 전 까마득한 옛 거장 아펠레스의 붓을 흉내내기로 결심했다. 애첩을 뺏기고도 관용을 베풀 대왕은 오래 전에 죽고 없었지만, 판카스페에 필적할 모델이라면 자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한다는 시모네타 베스푸치가 이곳 피렌체에서 눈부시게 영글어가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인문학자 폴리치아노가 그녀를 두고 `신성한 아름다움'이라고 단정했으니, 미의 여신을 대신하기엔 아주 그만이었다. 때마침 피렌체에는 호메로스가 인기였다. 아펠레스도 붓을 들기 전에 호메로스를 읽었을 것이다. 보티첼리는 폴리치아노한테서 얻은 서사시를 꼼꼼히 들추었다. 비너스의 그리스 식 이름은 아프로디테.

“나는 아름답고 정숙한 아프로디테를 노래하려네.

황금수관을 머리에 쓰고

바다로 둘러싸인 키프로스 도성을 지배하는 여신을.

여신은 서풍 제피로스의 부푼 입김에 떠밀려

물살 거친 파도에 실려서

부드러운 거품을 타고 왔다네.

황금 머리띠를 두른 계절의 여신들이

아프로디테를 기쁘게 맞이하며

그녀의 몸을 신성한 의복으로 감싸고

신성한 이마 위에 황금 관을 씌워 드렸네.”

보티첼리는 영감의 빛에 손놀림을 맡겼다. 성화를 그릴 때처럼 기도와 묵상에 의존하지 않았다. 제 어깨에 상상의 날개를 걸어 매고 단숨에 올림포스의 산정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키프로스의 금빛 해안으로 직행했다. 오래 전 그리스 고전기 조각가 피디아스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을 지으면서 썼던 방식이었다.
보티첼리의 붓은 마침 첫 돌을 올리기 시작한 인문주의의 신전에 시들지 않는 예술의 향기를 헌정했다. 눈먼 시인의 상상력에 붓을 적셔서 고대의 은성한 예술을 되살린 것이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자 사람들은 “아펠레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보티첼리의 붓은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이주헌씨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에서-

'미의 여신' 비너스라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리스 시대의 조각 '밀로의 비너스'와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인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을 떠 올릴 정도로 양대 미술의 걸작이다.
앤디워홀(1928-1987년 미국 팝아트의 대표적 화가)'는 복제했을 때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걸작의 정의를 내린다.
이런 점에서 이 그림만큼 걸작의 정의에 잘 들어맞는작품도 없을것이다.
갸우뚱한 머리. 이마의 곡선. 약간 숙인 턱을 강조하고 있는 조신하면서 슬퍼보이는 한 여성의 모습에서 욕망의 흐름대로 자유분방하게 사랑을나누던 고대의 여신 비너스를 찾아볼 수 없고 성모상과 닮아 보이며 그 당시 유행했던 신플라톤주의적인 섹스가 아닌 그리스도적인 사랑의 여신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호화롭고 온화한 예술은 르네상스기의 평론가들 사이에서 이미 자연 관찰법과 원근법을 추구한 시대의 유행에서 뒤떨어진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러나 보티첼리의 이러한 특징은 합리성을 외면한 근대미술의 효시적 상상력을 충분히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 상쾌함이 존재해 라파엘전파(1848년 런던에서 형성된 미술운동)의 병적 관능, 클림트의 차가운 우아함, 모딜리아니의 침울한 여인들에서 보티첼리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보티첼리 회화의 근대성은 현대 대중문화가 즐겨 찾는 이상적인 여성상의 편린을 보여 오늘날 여성미의 추구에 기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명화도 아니면서 르네상스를 주제로 한 책의 표지 장식에 우선 그의 비너스가 등장하는 것은 통례이다. 그 아름다움이 구름처럼 잡을 수 없고 깨끗해서일까!!

이 작품을 이주헌씨의 이론으로 다시 한번 해석해보자.
서쪽 바람의 신 제퓌로스와 미풍 아우라가 바람을 불어 조개껍질을 탄 비너스를 뭍으로 밀어주고 있고, 뭍에서는 때의 여신이 꽃무늬가 든 망토를 들고 비너스를 맞고 있다. 수줍어 하고 있는 비너스의 신체는 10등신이며, 모델은 당시 피렌체의 최고 미인이었던 시모네타로 전해져 오고 있다.
사실 보티첼리의 '비너스 탄생'은  구성의 원형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그리스도의 세례'에 있다. 비너스는 세례 받는 그리스도의 형상이고 오른쪽 때의 여신은 물을 붓는 세례요한의 모습이다. 제퓌로스와 아우라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령이거나 천사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그 둘을 조화롭게 매개하는 것은 물론 바닥에 깔린 물이다. '비너스의 탄생'에서 나타나는 거룩한 관능미 추구는 종교적 목적에서 시작된 고대 그리스의 육체적 아름다움의 추구에 이어 서양문명이 육체적 욕망의 미적 합리화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를 되짚어보게 하는 대표적 작품이다. 인간 욕망을 추구하되 거기에 문화적 전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하나한 의미화 하거나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온갖 예술적 성취가 꽃피어나게 한 것, 그것은 곧 서양미술의 깊이와 넓이를 크게 확대시킨 장치였다. 물론 바로 그것의 권위에 기대 남성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 그리고 여성을 그 욕망의 충족 대상으로서 가르고 우열화함으로써 결국 오늘날의 대중문화에서 여성의 성 상품화가 '당위'를 얻게 한 행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파리스가 비너스에게 사과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비너스의 관능적 아름다움이였음을....
그래서 무려 3세기동안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던 '비너스 탄생'은 관능미를 미의 범주로 해석할 수도 있는  19세기에 들어서 그의 작가적 전모가 드러나면서 비로소 재평가 받게되어 명화 중 명화라는 찬사를 얻게되는 것이다.
물론 신플라톤주의 철학이니 종교화의 구성이니 숱한 '보호막'을 인용했지만 이제 욕망의 꽃을 직접 나아가 두손으로 꺾고야 말겠다는 충동과 의욕의 뒤범벅이 이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꽃을 향하여 뻗어가는 손의 근질거림이 이 작품엔 확연히 존재한다.
 어쩜 예술이란 인간의 가장 태고적 본능의 추구이다. 인간의 최대 목표물인 이성과는 정반대 개념인 본능을 이렇듯 아름답게 재해석해 이성보다 더한 감동을 자아내는 작가들의 심혈에 깊은 찬사와 감명을 보낸다.
그들의 노력과 자취는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영원하리라!!!!!!
 
 봄
관능의 아름다움을 보다 폭넓은 여음으로 울리게 한 보티첼리의 또 다른 작품이다. 봄은 모든 계절의 여왕, 곧 비너스의 계절이다. 그 계절의 여왕을 통해 보티첼리는 특유의 감각적이고 서정적 부드러움에 약간의 퇴폐적 관능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음악적 리듬을 타고 오른쪽 올리브 나무가 빽빽한 비너스 동산에 나타난 서풍 제퓌로스는 바람을 힘껏 불고 있고  제퓌로스의 봄바람이 닿으니 클로리스의 입에서는 꽃이 쏟아지고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탈리아의 꽃의 여신인 플로라가 약간 성적 제스쳐로 서있다. 그러나 결국 봄 기운을 주관하는 이는 중앙의 비너스가 성모마리아처럼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웬지 비너스보다 그녀의 시종들인 미의 3여신에게 쏠린다. 속이 비치는 옷을 입은 우아한 춤동작은 이 그림의 클라이막스이며 그들의 사랑스러움, 그들의 관능이 바로 보티첼리가 겨냥한 바다. 이 관능의 드러냄을 위해 보티첼리는 그렇게 '문화의 길'을 에돌아왔고 그러기에 더 가치있는 여운이 있는 것이 아닐까.
메르쿠리우스(머큐리)는 이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다가오는 구름을 막대로 쫒고 있지만 비너스 위를 나는 큐피드가 세 여신 중 하나에게 화살을 쏘려하고 있고 쏘는 즉시 이 아름다운 순간도 물거품이 되겠지.
이 리드미컬한 그림은 막 결혼한 메디치가의 피에르 프란체스코의 침실에 걸려있었다. 문예부흥이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적극적으로 결합을 할 때 비로소 그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보티첼리 그림에서 우린 다시 한번 감명받게 되는 것이다.
 
비너스와마르스
신혼부부에게 던지는 일종의 우의화이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승리의 상징인 사랑은 전쟁까지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올림포스 최고의 추남인 대장장이의 신 불카누스의 아내 비너스와 미남인 전쟁의 신 마르스의 혼외정사 이후의 정경으로, 비너스는 남편에게 불륜의 현장을 들키고 만다. 부부간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교훈적 주제를 갖고 있는 이 작품은 ` 부드럽게 흘러내린 윤기있는 머리카락과 속이 비칠 듯한 흰옷의 부드러운 곡선미 등 보티첼리 특유의 시정과 장식적인 곡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녀에게 선물을 주는 비너스와 삼미신
보티첼리의 이 작품은 비너스와 삼미신을 주제로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이 그림과 더불어 나머지 한쪽 그림은 원래 피렌체 부근 빌라 레미라는 곳에 토마부오니 가족 소유의 그림이었다가 메디치가의 컬렉션이 되었던 작품이었다. 정확한 제작 연도는 남아 있진 않지만 우피치 미술관의 양대 걸작인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작품이 완성된 사이인 1483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통하고 있다.
어린 소녀로 상징되는 세계의 창조는 비너스에게 천지창조라는 선물을 부여받고 있는 알레고리로 표현되었으며, 세계의 아름다운 여신들의 운동감이 부드럽게 묘사된 반면 표현은 단순하게 처리했다. 또한 "삼미신"이라는 제재는 고대 그리스의 나오는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딸들로서 "삶의 기쁨"과 "생의 윤택", 그리고 "쾌락과 우아미"를 뜻하는 상징으로 쓰이면서 조형예술 속에서 하나의 테마로 자리잡고 있는데, 보티첼리의 다른 작품인 <봄의 알레고리> 속에도 역시 "삼미신"이 등장하고 있다.
로렌초의 장려한 양식을 세련된 인본주의로 결합시켜 회화로 표현했던 보티첼리는, 이 작품에서도 부드러운 색채와 선의 운동감을 다양하게 교차시키면서 고전적인 이상의 주제를 잘 드러냈다.
 
성모자 동방박사예배 크리스트애도 장미원성모 반역자처형 자화상 수태고지
젊은남자의초상
 


치마부에

13세기 후반 토스카나 지방에서 활약. 1301년 피샤의 성당에서 일하다 세상 하직

장엄한 성모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1280)
 

지오토(Giotto di Bondone:1266-1337)

어둠에 매몰되어 있던 고대 예술에 불을 당김(보카치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비잔틴양식을 벗어나 피렌체파를 형성.투시법에 의한 공간 묘사에 성공.
인습적인 예술관으로부터 탈피 : 중세의 경직된 형식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고, 회화의 인물에 인간성과 현실감을 불어넣음.
종교화에 자연주의적인 묘사를 도입 : 자연주의적인 표현을 통해 신앙의 독실함과 인간의 미덕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그려냄.

세상의 물건을 거부하는 프란체스코(1297-99)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벽화로 주문받은 25장면 중 하나로 프란체스코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현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장면. 그림의 상하좌우를 보면 위엔 석가래 모양이 아래엔 커튼이, 그리고 좌우엔 기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 장면은 건물의 창 밖 풍경처럼 그려진 것이다. 배경의 건물 또한 원근법을 적용시킨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1297-99)

유다의 입맞춤  십자가에못박힌예수  최후의심판  영광의성모(1300-03년)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베를링기에리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220-30년경,루카, 빌라 쥬니지 국립박물관)
십자가에 매달린 눈을 뜬 예수이지만 마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 같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부활하여 영원하게 된 승리의 예수인 것이다.
쥰타 피사노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230-50년경.볼로냐, 산 도메니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성프란체스코는 자신도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종교운동은 그들의 기도 대상이었던 예수님의 모습까지 바꾼 것이다.
치마부에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1280년경, 피렌체, 산타 크로체)
예수의 몸도 십자가에 매달려 휘어진 모습으로 고통스런 표정과 함께 인체의 볼륨감까지 살린 인간의 형상이다.
지오토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1290)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어깨는 아래로 쳐지고 고개는 앞으로 숙여지고, 엉덩이는 뒤로, 그리고 무릎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13세기의 100여년 사이에 기독교의 예수는 영원한 절대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회화는 상징에서 사실로 변한 것이다.

예수의 죽음

작가미상 "그리스도를 애도함"(1164.마케도니아 성 판테레이몬 수도원)
작가미상 "그리스도를 애도함"(1295.마케도니아, 성 클레멘트 교회)
지옷토의 "그리스도를애도함"(1304-06)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려진 예수의 일생 중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을 매우 인간적인 감정으로 해석하였다.(사실적) 예수의 시신을 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마리아, 양팔을 벌린 채 놀라워하는 여인과 두 손을 뺨에 대고 슬퍼하는 여인, 예수의 발을 만지면서 못 박힌 자국을 보며 애통해 하는 여인, 그리고 두 팔을 뒤로 젖힌 채 탄식하는 제자 등에서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풍부히 느낄 수 있다.


프란체스코

보나벤투라 베를링기에리"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1235년.페샤, 성 프란체스코 교회 )
지오토의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1297-99.아씨지, 성 프란체스코 교회)
새들마저도 프란체스코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로 두 그림을 비교하면 지오토는 나무와 사람, 그리고 새의 비례를 사물의 크기대로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요한 것을 크게 그리던 중세의 방법에서 사물외관의 비례를 중요시하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마리아 신앙과 사회
13-14세기 동안 확산된 마리아 숭배 신앙은 어머니의 미덕을 중요시하였다. 수호성인이였던 마리아 신앙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은 이탈리아 중부 도시 시에나였다. 당시의 종교는 종교적 기능과 더불어 정치적인 기능도 지녔다.

두치오의 "존엄한 마리아(1308-11년.시에나, 두오모 박물관)
마리아 제단화는 시에나에서 점점 크게 제작되어서 높이214cm에 폭이 412cm에 달한다.
 
안제리코(Beato Angelico 1387-1455)

피렌체 출신으로 프라 안젤리코의 본명은 지오반니 다 피에졸레(Giovanni da Fiesole)이다. 수도사의 이름 앞에 붙는 명칭인 "프라(fra)"가 말해주듯 그는 화가이자 수도사였다. 일생을 수도원에서 보낸 만큼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수도원 벽의 프레스코화였는데, 독특하게도 그의 거의 모든 그림의 주제는 성서에 의거한 성스러움과 기독교 진리를 찬양하는 것이다.

수태고지 동방박사의예배  성모대관  수태고지와 동방박사들의 경배  현성용(顯聖容)  산 브리지오의 예배당 

1. 특징

13.14세기(원시적인 르네상스)

·중세 말이라고 부르는 이 시대가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대 

  ·프랑스 파리와 근교 중심으로 고딕미술이 유행
  ·이탈리아북.중부지방에서 새로운 미술의 근원지 형성(상·공업중심의 도시국가로 발달하면서 도시엔 시청과 광장이 형성)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세 사람(공통점:현실추구)
  ·문학 : 단테(Dante)의 신곡
  ·종교 : 성프란체스코(S. Francesco)의 교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보다는 예수의 말씀 실천 강조
  ·미술 : 화가 지오토(Giotto, 1267-1337)의 상징적인 비잔틴 방식의 그림을 현실의 모습으로 변환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의 미술( 종교중심을 인간 중심으로)

·‘부활’, ‘재탄생’(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간 중심 미술을 부활)

·이탈리아에서 시작(15c-16c:이탈리아 피렌체중심,16c후반:이탈리아 베니치아중심)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짐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음
  ·미술가의 지위가 향상되는 분위기가 형성

·본격적인 회화 양식들이 등장

  ·관찰에 바탕을 두고 원근법 등의 수학적 원칙에 따라 회화 연구
  ·인체를 보다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해부학을 연구
  ·유명한 화가들이 많이 등장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

·향유의 예술, 상징의 예술로 부활하기 시작

2.건축

·브루넬레스키(1400-1450): 돔을 설계하고 조화있는 볼륨을 공간에 세우는데 성공(피렌체두오모성당)

·알베르티

·브라만테(1444-1514):고전적인 규범의 변형을 시도했다

3.조각

·도나텔로(1386-?):조각을 건축의 부속적 지위로부터 해방(다비드  성지오르지오)

·기베르티(1378∼1455)는 수학적으로 정확한 원근법 (천국의 문)

4.회화

·고딕 양식의 유행을 물리치고 피렌체화파 본래의 힘찬 조형성을 강조

·마사치오에 의해 르네상스 회화 시작

·로마의 예술,철학,종교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문화의 융합

·종교를 인간적인 것으로 해석

·상징에서 사실로 표현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쓰여진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

"음영이 중요하다.그림자로 인해 입체적으로 보이는 미와 불가사의를 놓쳐서는 안된다"
 
그에게는 그에게 중요한 과학적인 발견들을해게 했던 날카로운 눈과 빠른 생각이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의 생각들을 결코 출판하지 않았다. 그는 동물들을 좋아하고, 전쟁을 경멸했던 친절한 채식주의자이었다. 그래도 그는 치명적인 무기들을 발명하기 위해 군엔지니어로서 움직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화가들 중의 1명이었다. 그래도 그는 소수의 완료되었던 그림들만을 남겼다
당시 종교적 이유로 사체에 손을 대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도 그의 인체해부도는 사실적이고 아주 정교 그리고 사람의 몸에 혈액이 흐른다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한 유럽인이다.
그의 연구결과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9세기말에 들어서 주목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기 시작했고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있다. 과학론은 그의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전 분야에 걸친 그의 지칠줄 모르는 탐색과 광범위한 업적은 당대의 특징인 '全人(L'uomo universale)의 최고 전형이라 하겠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피렌체 근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빈치에서 온 레오나르도'라는 뜻이다. 변호사와 농촌여인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고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는 14살쯤에 베로키오(Andrea Verrocchio)의 제자로 들어가 화업을 시작했고, 3-4년 후인 1470년경엔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처음으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세례> 그림 가운데 좌단의 천사가 실로 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 붓을 버렸다고 하는 일화는 이 화실에 있었던 무렵의 일이다. 사실 베로키오는 그 후 조각에 전념하였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완성하지 못한 채 밀라노에 갔으며 거기서 거의 17년을 머물게 된다. 루도비코 스포르자(Ludovico Sforza)의 초청으로 밀라노에 가서 그가 주로 한 일은 엔지니어 역할이다. 움직이는 다리를 설계하고, 대포나 전쟁무기를 고안했으며, 건축설계도 하였다. 그가 최초로 하늘을 날 수 있는 장치를 고안했다. 실제로 제작된 것은 많지 않지만 그는 물리적인 이치를 적용하여 도구를 만드는데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던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있는 동안 제작한 그림은 그리 많지 않지만 그의 화업에서 빼 놓지 못할 작품들이다. 그 중 하나가 <동굴의 성모>이며 다른 하나는 <최후의 만찬>이다. 밀라노에 도착하자 성프란체스코성당의 제단화 <동굴의 성모>를 시작했으며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동굴의 어스럼으로 부터 나타난다. 수증기를 품은 대기가 그들을 감싸고 그 형태에 보드라운 베일을 씌우고 있다. 이 엷은 안개를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동굴의 성모>는 현재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 소장. 2 점의 서로 다른 버전이 전해진다. 1483년 밀라노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가 주문하여 완성한 것은 루브르 소장의 작품이며, 이것을 후에 프랑스의 루이12세에게 선물하면서 다시 그 자리를 위해 그린 것이 런던의 대영박물관작품이라고 연구되었다.
<동방박사의 경배> 나 <동굴의 성모>는 독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초기르네상스와 뚜렷하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12년 후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 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모나리자>는 <동굴의 성모>에서 이미 주목한 미묘한 스푸마토가 이 회화에서 완성을 보였다. 형태가 극히 엷고 섬세한 겉칠의 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화면 전체가 부드러운 빛으로 빛나고 있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만년에 이르러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 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등 다방면에 이르며,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등이 많이 남아 있다.

 미술을 통하여 자연을 탐구 : 사물과 보는 이 사이엔 공기가 있으며, 자연의 관찰자 레오나르도는 이 공기의 존재를 우리에게 인식시켜줌.
인물의 제스춰와 표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그릴 수 있다고 말했고 많은 드로잉을 보면 실제 인물의 행동을 관찰한 후 글로 써서 이론화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탐구의 과정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천재 : 지적 호기심은 철저한 관찰과 과학적인 논리에 근거한 방법으로 발휘.
레오나르도는 공간에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하기 위하여 미리 정확한 원근법의 스케치를 하고 이를 확대하여 패널에 옮긴 후 그 위에 비례에 맞게 인물을 배치.


스푸마토와 대기원근법을 창안 :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윤곽에 해당하는 부분을 미묘하게 문질러 맞은편으로 계속 이어지는 느낌을 주고자했다.
평생 완성시킨 회화는 10점 내외로 독특한 회화적 공간을 표현하고 있음.인간은 공기를 통해 사물을 본다는 현실을 새삼 직시, 그중에서도 색채의 변화를 포착. 질감포착. 원근감포착 

그림자효과 추구 : 그는 사물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은 음영 때문이라고 생각함. 그의 작품에서 그림자는 어떤 화가의 작품보다 색이 진하다.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 부분>
레오나르도와 그의 스승 베로키오가 합작하여 그린 사실적 작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좌단의 천사가 실로 빼어난 것이기에 그의 스승이 붓을 버리고 조각에만 전념했다는 일화가 있다.
천사가 예수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천사와 예수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그 옆의 천사가 다른 천사를 향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세례 장면을 강조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뒤로 멀리 뻗어 있는 요단강은 물로 세례를 받아 깨끗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얀 비둘기는 하늘에서 강림하고 있으며, 암벽의 돌들은 신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스승 베로키오가 그린 예수 모습은 색채나 윤곽선 묘사가 분명한데 비해 레오나르도가 그린 부분은 다소 어슴프레 하다. 천사의 머리카락이나 눈, 또는 옷 부분을 보면 잔 선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경계를 흐릿하게 하였다.

<수태고지> 1472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가브리엘이 나사렛에 사는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주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니 그대가 한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 부르십시오.'라고 전하는 장면이다. 그 때 책을 읽고 있던 마리아는 놀라면서 왼손을 치켜들고, 천사는 순결의 상징으로 백합을 들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안개나 구름. 비. 연기까지도 밀도가 다르게 표현하고, 생물의 움직임까지도 표현하고 싶은 욕망에서 딱딱한 선 원근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기 원근법을 개발했다. 이 그림에서 먼 산의 흐릿한 윤곽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많은 화가들이 이 주제로 그림을 그렸으나 다빈치의 작품만큼 훌륭한 작품은 드물 것이다
 

<지네브라 데 벤치> 1474-76년. 목판, 유채 워싱턴, 국립화랑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메리고 데 벤치의 딸로써 1474년 루이지 니콜리니와 결혼하였다. 뛰어난 미모와 직접 시를 쓸 정도로 교양이 풍부하여 로마 교황청에 까지도 그녀의 뛰어난 재능과 미모가 소문이 났었다. 배경의 침엽수가 이탈리아어로 지네브로라하며 토스카나 방언으로 여성명사가 되면서 지네브라가 된다

<암굴의 성모> 1483년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동굴의 어스럼으로 부터 나타난다. 수증기를 품은 대기가 그들을 감싸고 그 형태에 보드라운 베일을 씌우고 있다. 이 엷은 안개를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1510년, 패널에 유채, 168 x 130cm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화는 15점의 많지 않은 작품이 현존하는데 비해, 소묘는 상당수가 남아 있다. 1510년경 밀라노에서 그려진 이 그림도 많은 밑그림과 데생을 거친 작품이다. 현재는 이 작품의 소묘 단 한 점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어머니 성 안나의 무릎에 마리아를 그리는 소재는 중세 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성모는 성 안나의 무릎 위에 걸터앉아 두 팔을 뻗쳐 아기 예수를 끌어안고 있다. 아기 예수는 어린양을 꼭 붙잡은 채 성모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성 안나는 두 모자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성 안나의 시선이 성모의 머리 부분을 통과하여 아기 예수의 눈과 정확하게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구도는 마사치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공기 원근법 연구의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공기 원근법으로 인해 풍경은 안개가 흐르는 듯 부드럽고 신비롭게 채색되어 있다. 다 빈치는 윤곽선으로 형태를 나타냈던 이전 화가들과는 달리 풍부한 명암법(키아로스큐로)으로 사실적인 입체감을 나타냈다. 윤곽선을 흐릿하게 하고, 어두운 색에서 밝은 색으로 미묘하게 변해 가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은 형태를 부드럽게 드러내면서 주위와 융화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명암법은 세 사람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통일체로 비춰지게 한다. 이 작품과 내셔널 갤러리의 소묘를 비교하면, 어린 세례 요한이 양으로 바뀌었으며 소묘에서는 서로 마주 보았던 성모와 성 안나의 시선 또한 수정되었다. 성 안나가 성모를 아래로 굽어봄으로써, 그림은 수평 구도에서 수직 구조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성 안나의 시선의 변화는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의 모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섬세한 요소들에 힘입어 작품은 종교적 메시지보다는 가족의 화목한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자화상>  1512년. 붉은쵸크 이탈리아 토리노 왕립도서관

최근 이탈리아의 다빈치 전문가 카를로 페드레티 교수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모델이 다빈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 신 프로메테우스를 그려넣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영국 윈저성에 소장된 초상화의 얼굴이 다빈치라고 주장하였다.그 근거로 윈저성 초상화는 다빈치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그림위에 다빈치의 이름과 1515년이라는 제작연도까지 있다는 것이다.

<스케치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비례연구 >

마돈나리타 밀라노 왕궁 여인의 초상 흰 족제비와 여인 베노아의 마돈나
 
<모나리자> 1503∼06년, 패널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77 x 53cm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의 최초의 고전적 표현이라 한다. 중앙의 인물 그리스도 뒤쪽에 소실점이 있어 공간감과 원근감이 잘 나타난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에 구애받는 것이 싫어 템페라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벽에 잘 붙지 않아 훼손이 심하다.
"모나(Mona)"는 이탈리아어로 "부인"을 칭하는 말로써, 작품의 제목은 <리자 부인>정도가 될 듯하다. 피렌체의 은행가 자놀리 델 지오콘도(Zanoli del Giocondo)의 부인, 리자 지오콘도(Lisa Giocondo)가 이 작품의 모델로 알려지고 있다. 1479년생인그녀는 음악을 아주 좋아했던 관계로 레오나르도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할 동안 가수와 연주자를 동원하여 그녀의 미묘한 미소를 항상 유지시켰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델의 이름을 따서 <라 지오콘다(La Gioconda)>, 혹은 불어로 <라 죠콘드(La Joconde)>로 소개되기도 한다. 모나리자는 3/4 측면 자세로 약간 몸을 비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대 로마 이래 초상화의 기본적인 자세는 측면이었다. 15세기 중엽 플랑드르 화가들이 3/4 측면 자세를 시도하긴 하였지만, 다음 세대의 초상화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다 빈치의 <모나 리자>이다. 명확하지 않은 윤곽선, 은은하고 부드러운 색채를 겹겹이 덧발라 형태는 대기 속에 부드럽게 녹아 있다. 다 빈치가 창안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은 형태와 형태가 겹쳐지고 융화되는 부드러운 화면을 만들었다. 모나리자의 생기 있는 눈가와 입매는 흐릿한 그림자로 처리되어 조금씩 계속 변하는 미소는 이 작품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냈다. 다 빈치는 이 작품에서 얀 반 아이크가 시도하였던 공기 원근법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멀리 보이는 구불구불한 길, 다리, 계곡, 암벽들은 점차 푸르스름한 빛으로 채색되어 모델이 있는 곳으로부터 상당한 거리감을 나타낸다. 풍경은 왼쪽 지평선이 약간 낮게 깔려 있고, 모나리자의 얼굴도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모나 리자>는 보는 이의 시점이 바뀜에 따라 그림의 일부분이 크게 보이거나 다른 쪽이 작게 보이는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다 빈치는 1503년 밀라노에서 그리기 시작한 이 작품을 자신이 프랑스 궁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 미완성이다. 이 작품은 그의 사후에 프랑수아 1세의 컬렉션에 소장되었으며, 1804년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미술사가 노성두에서-

이탈리아에서는 이 그림을 <라 조콘다>라고 부른다. 모나는 마돈나, 리자는 엘리자벳을 줄인 말이다. 리자는 1479년 피렌체 남쪽 시골에서 태어나 열여섯 나이로 열아홉 연상의 홀아비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와 결혼한다. 이때부터 조콘다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참금은 겨우 170플로린. 삼십 년 뒤 리자의 조카딸 카산드라가 시집가면서 챙겨간 1400플로린에 비하면 거저나 다름없다. 그러고 보면 피렌체에서 비단 장사로 큰 돈을 번 남편은 어린 리자의 미모에 단단히 반했던 모양이다. 리자의 초상 그림을 당대 최고의 화가 레오나르도에게 부탁한 것도 아내 사랑이 지극하지 않고서야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1500년대 피렌체 비단상인의 부인

<모나 리자>는 미소가 일품이다. 만약 보험설계사한테 미소의 가치를 매겨보라고 맡기면 클레오파트라의 콧대나 양귀비의 발바닥보다 더 후하게 쳐줄지 모른다.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도 그 덕에 한 몫 알뜰히 챙기고 있으니까. 미소 이야기는 1550년 바사리가 레오나르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처음 썼다.

“물기 밴 두 눈의 광채는 흡사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가에 더없이 섬세한 연보랏빛 그림자가 드리웠고, 믿을 수 없이 정교한 붓으로 완성된 속눈썹도 기가 막힐 따름이다. 눈썹은 보일 듯 말 듯 솜털부터 시작해서 점차 짙어지는 터럭들이 하나하나 솟아 나와 이마와 눈 사이에 융기한 눈썹뼈의 흐름을 따라 새겨졌는데, 살아 있는 자연이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코의 생김새와 발그레한 콧구멍은 살아서 숨쉬는 듯하다. 입술 가장자리는 알 듯 모를 듯 부풀어올랐고, 바로 여기서 입술의 붉은 색조와 뺨의 살색조가 만난다. 그래서 이 여성은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피와 살로 빚어낸 창조물처럼 보인다. 목우물에서 맥박이 느껴진다…얼굴 표정에서 사랑스런 미소가 피어나는데, 이 미소는 지상보다는 천상에 속한 것 같다. 어찌나 생생한지 사람들은 그림을 보고 한결같이 입을 모아 예술의 기적이 탄생했노라고 말한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그후 크게 유명세를 타게 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유명해지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1858년 테오필 고티에는 사랑스런 천상의 미소는 커녕 “뱀처럼 꼬여드는 입술이 도도하고 우아하고 달콤한 미소를 뿌리며 남성을 제압하고 쪼그라들게 만든다”고 탄식했고, 1873년 월터 페이터는 한 술 더 떠서 “병든 관능의 고통이 영혼 속에 녹아들어…무수한 죽음을 경험하고 무덤의 비밀을 품은 흡혈귀의 아름다움”이라고 몸서리쳤다. 이런 주장들은 <모나 리자>를 두고 레오나르도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여성으로 바꾸어 그리면서 입가에 비웃음을 흘린다고 보거나, 싸구려 창녀가 지어 보이는 음탕한 미소일 뿐이라고 얕잡아보는 입장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또 레오나르도가 어려서 헤어진 친모의 자애로운 미소를 떠올리며 리자의 초상에다 옛 추억을 투사했다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설명도 그리 딱 부러지지 않는다. 화가가 왜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뒤늦게 그리움이 사무쳐서 초상을 그렸을까 의아하기도 하고, 모델 없이 그린 사후 초상이 그토록 생생한 느낌을 뿜어낼 수 있을지도 미심쩍다. 이 모든 의문들은 그림에 작가 서명이 없고 주문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서 더욱 깊어졌다. 4년 넘게 붙들고 있던 초상화를 다 그린 다음에도 주문자한테 안 넘긴 까닭도 석연치 않다. 레오나르도는 뭐 하러 남의 안사람 얼굴 그림을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있었을까?

미술사학자들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놓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우선 바사리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모나 리자> 연구는 바사리의 기록을 엉터리로 보고, `숨은 진실'을 밝히려는 쪽으로 치우쳤다. 바사리가 <모나 리자>를 본 적이 없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레오나르도가 죽었을 때 바사리는 겨우 여덟 살이었고, 커서도 퐁텐블로에는 간 적이 없으니 그곳에 걸린 실물 초상화를 뜯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눈썹 없는 <모나 리자>의 눈썹 터럭이 볼만하다는 둥, 콧구멍이 발그레 숨을 쉰다는 둥, 꼭 제 눈으로 본 것처럼 써놓은 건 어림없는 흰소리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꽉 다문 입술이 관행

이 문제는 1994년 프랑크 쵤너가 옛 기록들을 찾아내면서 해명되었다. 바사리가 예술가 전기자료를 수집하러 피렌체에 갔을 때 메디치 저택에 머물곤 했었는데, 리자가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고, 남편 프란체스코도 이전부터 메디치와 거래를 트고 자주 내왕했으며, 피렌체에 살고 있던 남편의 사촌 둘하고 바사리가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모나 리자>의 탄생을 설명할 일차 정보원에게 접근이 가능했다면 전기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의혹도 해소된 셈이다. 또 16세기초에는 유랑화가들이 많았다. 종교 개혁 이후 뒤숭숭하던 시기에 예술가들은 새로운 주문을 찾아서 알프스를 넘나들며 피렌체와 퐁텐블로를 오갔다. 그렇다면 누가 <모나 리자>를 보고 와서 바사리에게 얼마쯤 과장을 섞어가며 들려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바사리는 왜 하필 <모나 리자>의 미소에 주목했을까? 피렌체 시민 초상화들을 훑어보면 16세기까지 웃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우는 표정도 없다. 화가들은 한사코 진지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만 고집했다. 비탄과 희열의 표현은 성모나 성자들에게만 유보된 종교화의 특권이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달랐다. 그는 영혼의 움직임을 포착할 줄 알았다. 붓 끝에 미소를 묻혀서 성과 속의 경계를 물렀다. 그의 붓이 미소를 머금고 백 년이 지난 뒤, 초상화 장르는 만면에 주름을 잡으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영혼을 빛내기 위해 더없이 수수하게

레오나르도는 <모나 리자>를 더없이 수수하게 그렸다. 검은 너울과 나무 의자를 빼고는 아무 장식도 덧붙이지 않았다. 심지어 왼손에 결혼반지도 빼고 그렸다. 화가는 그림에 착수하기 몇 해 전, 유랑 수사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에서 영혼의 덕목을 설교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은 미모를 뽐내지 말라. 추악할 따름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가?…경건한 이들의 내면에서 신성의 아름다움과 열기가 솟아나는 것을 보아라. 기도하는 이들의 얼굴에서 신성의 아름다움이 거울처럼 비추어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아라.”

피렌체 시인 단테도 영혼의 아름다움이 오직 눈과 입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영혼의 표정은 두 군데서 드러난다. 눈과 입이다…눈빛과 부드러운 미소는 보는 이의 눈길을 끌고 기쁨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눈과 입을 두고 육신의 건축에 거주하는 영혼의 창이라고 말한 비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너울을 쓴 여성일지라도 영혼은 눈과 입을 통해서 말하기 마련이다


-오카베 마사유키의 청소년을 위한 명화의 길잡이에서-

레오나르도의 위대함은 인간존재의 신비를 예술로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는 윤곽선이 없다. 그 대신 형태는 빛과 그림자의 대조, 즉 스푸마토 기법에 의해 그려졌다. 그것이 그녀의 입가에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가사의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또 전체적으로 안개가 낀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공기를 통해 대상을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형태와 색채는 서로 미묘하게 녹아들었으며, 분명한 경계선은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이 환상적인 분위기는 단순히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사물을 보고 그것을 회화로 구현할 때, 어떤 기법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심했던 레오나르도의 예술관이 화면에 반영된 결과이다.
 
<최후의 만찬> 1498년, 템페라, 460 x 880cm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

예수께서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셨다.(마태복음 26:21-28)

'최후의 만찬'은 같은 주제로 많은 작가들에 의해 그려졌었다. 그러나 다 빈치의 작품은 인물들의 배치와 성격 묘사가 뛰어다. 그리스도의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하노니 너희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는 말에 놀라는 12제자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인물의 구성은 12제자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3명씩 4그룹으로 좌우에 배치하였다. 그리스도 왼편에 요한과 그에게 손을 대고 있는 베드로, 그들 사이에 유다가 어깨를 약간 뒤로 기대고 있다. 그리고 안드레,베드로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있는 야고보, 그 끝에는 바르롤로메오, 그리스 오른 편에는 작은 야고보,의심많은 토마,빌립보,그 다음은 성 마태,성 유다, 성 시몬이다.
공간 전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원근법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오른쪽 눈에 있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고안된 구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등뒤에 후광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1498년)    틴토레토(1592-94년)

레오나르도는 예수를 중앙에 놓고 12명의 제자를 식탁의 양쪽에 놓았으며, 마치 그들이 방의 한쪽에서 식사하고 있듯이 보이도록 하였다. 넓은 방의 양쪽 창문과 천장의 선들에 기하학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소실점이 주인공인 예수에게 모아지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주인공에게 집중하게 된다. 반면에 틴토레토는 식탁을 대각선으로 놓았다. 주인공인 예수와 제자들보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이 더 크고 번잡스럽다. 그럼에도 우리의 시선은 예수를 찾게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예수의 두광에 강한 빛을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화면 왼쪽에서 오는 은은한 광선을 적용하여서 모든 인물과 사물은 양감과 함께 중간 톤의 색채를 띄는데 반해, 틴토레토는 인물들의 뒤에 강한 등불을 놓아 인물들은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되었다. 결과적으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과학적인 공간묘사와 안정된 구도, 사실적인 인물묘사를 끌어내었고,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은 역동적인 구도와 인물의 순간적인 묘사, 그리고 사건의 극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전자는 르네상스양식을 후자는 매너리즘양식을 대표한다.

그림이 있는 방의 모습
만약 현장에서 이 벽화를 본다면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의도한 바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식당의 넓은 벽 위쪽을 가로지르는 실제 선은 그림 속의 창문 윗 선으로 이어진다. 실제공간과 그림 속의 공간은 하나인 셈이다. 식당에 있던 수도사들은 아마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 조선 3대 명기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이난향
사진 속 이난향(1900~1979)은 평양 태생으로 당대 3대 기생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특히 빼어난 미모와 노래 실력으로 정평이 났던 인물이었는데, 현재 가곡전수관 관장직을 맡고 있는 인간문화재 조순자 명인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김수현 기자 penpop@ilyo.co.kr


10.다섯째 인:제단아래 있는 죽임당한 영혼들 (계6: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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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여섯째 인:자연의 진노(계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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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침(계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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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맞은 십사만 사천과 흰옷입은 큰 무리 (계7: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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