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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제3시 http://3-rd.net]에서 닉네임 infiltrator 님의 글을 허락을 받고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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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라교[Mithraism]는 조로아스터교 이전 고대 페르시아인들(현재 이란 근교 지역에서 활동했던)이 숭배했던 태양·정의·계약·전쟁의 신인 미트라를 숭배했던 종교를 의미합니다.

2, 3세기 로마 제국에서 미트라스로 알려졌던 이 신은 황제에 대한 충성의 후원자로 존경받았다고 합니다. 4세기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뒤 미트라교는 급속히 쇠퇴했다고 하죠!^^

조로아스터교 이전에(BC 6세기나 그 이전) 페르시아인들은 다신교를 믿었으며 미트라는 그들이 숭배하던 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이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미트라는 계약과 상호간의 의무의 신으로 히타이트인과 미탄니인 사이의 조약을 담고 있는 설형문자판에서 서약의 신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더욱이 인도의 몇몇 베다 문서에는 신 미트라(Mitra:미트라의 인도식 표기)가 '친구'와 '계약'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미트라란 단어는 계약과 상호간의 의무가 친구를 만들기 때문에 양자 모두를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미트라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와 사람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을 중요시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미트라는 중재자로 불렸다고 합니다.

또한 미트라는 태양의 신이며, 만물을 품은 빛나는 빛의 신이어서 사람들은 미트라를 맹세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미트라를 태양신으로 간주했으며, 왕들은 태양을 숭배하는 의미로 미트라를 숭배했다고 합니다.

또한 미트라는 왕과 왕의 전사 사이의 [쌍무(雙務): 상호의무이행]를 나타내는 신이자 전쟁의 신이었으며, 왕이 보증하는 정의의 신이기도 하여 사람들이 정의와 계약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기 전에 언제든지 미트라를 경배하며 그 맹세를 체결했다고 합니다.

미트라를 숭배하는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은 황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의 기원이 조로아스터교 이전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나
조로아스터교는 황소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을 비난했기에
그 의식은 고대 페르시아인들(현 이란인들)의 우상숭배의 일부였던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러한 추론은 미트라가 흰 황소나 달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소마'라는 이름을 가진 신의 희생에 마지못해 참여하곤 했다는 내용의 인도 문서에 의해 제기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기념비들에 있는 기록에도 나중에 달로 변형되는 '미트'라는 흰 황소를 마지못해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세세한 부분이 인도와 로마의 기록에 의해 유사함을 살펴볼 때, 소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 조로아스터교 발생 이전에 행해졌음을 추론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고대의 조약은 공동 식사를 통해 승인되었기 때문에, 소를 재물로 드린 후 그것을 공동으로 나눠 먹음을 통해 결속을 다시고 계약을 성사시켰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다리우스(BC 522~486)로부터 시작되는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 왕들은 조로아스터교도였습니다. 그러나 다리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마음 속에서 여전히 존중하는 옛 신앙을 근절시켜 시끄러운 정치적 문제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는 점차 옛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다신론적인 예배 요소에 물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던 찬송가(Yasht)는 옛 신들을 기리며 작곡되었는데, 거기에는 만물을 주의깊게 보는 천상의 빛의 신, 서약을 보호하는 자, 이승과 저승에서 의로움을 수호하는 자, 무엇보다도 악과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하는 자로, 그래서 그러한 전쟁에서의 승리의 신으로 미트라를 찬송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후기 아케메네스 시대의 혼합종교에서는 점차 조로아스터교의 양상이 이교도적인 양상을 지배하게 되어, 조로아스터교가 거부했던 황소 희생에 대한 언급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으며, BC 330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을 때는 미트라 숭배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미트라 숭배가 알렉산더 대왕의 정벌과 함께 과연 사라졌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멸망 이후에도 과거 페르시아 제국 서부 지역의 귀족들은 미트라 숭배를 존속시켰고, 그리스 로마와 페르시아 지역 사이 경계지역에 있던 왕과 귀족들은 여전히 미트라를 예배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티리다테스가 로마 황제 네로를 자신의 최고 주인으로 승인했을 때, 그는 계약과 우정의 신인 미트라가 아르메니아와 강력한 로마 사이에 좋은 관계를 확립시켜 줄 것을 기원하면서 미트라 의식을 치루었다는 기록도 나타납니다.

터키의 남동쪽이었던 콤마게네라는 곳의 왕들이 미트라 의식을 거행했다는 기록과 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6세도 미트라를 숭배했으며, 동맹자인 실리시아의 해적들도 미트라를 숭배하는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BC 67).

오직 한 곳 그리스 세계에서만은 미트라 숭배가 전혀 인기가 없었는데, 그리스인들은 미트라가 자신들의 적인 페르시아의 신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마 세계는 페르시아의 신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나, 136년 이후로는 미트라에게 바쳐진 수백 개의 비문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로마가 점차 페르시아의 신에게 동화되어 나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이 되살아난 이유를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장 그럴듯한 가설에 따르면 100년경 생존했던 어떤 종교적 천재가 전통 페르시아 의식을 신(新)플라톤적으로 해석하여 미트라교가 로마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미트라교는 로마에서 재 창조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미트라교와 같이 로마의 미트라교도 결국 왕에게 충성하는 종교였기에
콤모두스(180~192),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카라칼라(211~217) 같은 황제들에 의해서 미트라교는 계속해서 권장되었다고 합니다.

비문을 통해 알려진 미트라 신봉자들은 신이 자신들을 승진시켜 주리라 믿었던 하급 및 고급 군인, 황제에게 봉사하는 공직자, 제국의 노예와 자유인(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음)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미트라에게 바쳐졌던 신전과 봉헌물은 로마와 오스티아에서,
군사적 변경을 따라서는 영국, 라인,도나우,유프라테스 강 유역 등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비교적 평화로운 지역에서는 봉헌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는데, 봉헌자가 있다면 당시 형편으로 볼 때, 지방의 통치자나 제국의 공직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페르시아를 정복했던 로마 제국은 몇 세대 안 가서 자신들이 정복했던 페르시아의 신 미트라에 의해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의 도시와 종교를 부활시켜려고 했을 때 미트라를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에 미트라가 얼마나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는 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307년 카르눈툼(빈 근처의 도나우 강가에 있음)의 봉헌식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동료들은 제국의 보호자(fautori imperii sui)인 미트라에게 제단을 봉헌했습니다. 그러나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꿈에 본 십자가를 기치로 밀비아교(橋)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미트라를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트라 의식을 즉각 공식적으로 금지시키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곧 미트라에 대한 헌신을 그만두게 되었고, 제국이 미트라교도에 대해 불호의적으로 돌아서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배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미트라에 대한 헌신이 357년과 387년 사이에 다시 나타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단지 로마에서뿐이었다고 합니다. 로마 시의 오래된 이방인 귀족 출신의 미트라 봉헌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도교 황제를 공공연히 반대했지만, 미트라는 마침내 여러 이방신 중 하나로 격하되었고, 그 신비의식은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창조(creation of the world)는 미트라교의 중심이 되는 신화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태양신이 자신의 사자(使者) 갈가마귀를 미트라에게 보내어 황소를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미트라는 마지못해 그 명령을 수행했는데 여러 부조에서 그는 슬픔에 잠겨 얼굴을 돌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소가 죽는 바로 그 순간에 커다란 기적이 일어나 그 흰 황소가 달로 변했고[소가 달로 변했다는 부분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이 부분이 제가 '시리우스'라는 글을 쓸 때, 말씀드렸던 zodiac과의 커넥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트라의 외투가 빛나는 행성과 고정된 별이 있는 하늘의 둥근 천장으로 변했으며[천궁도 즉 zodiac의 배경이 됩니다. 한국에서는 별자리 운세가 한때 한참 유행을 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이 그 배경 속에 포함됩니다.]

황소의 꼬리와 그의 피에서 낟알의 첫 이삭과 포도가, 동물의 생식기에서는 신성한 종자들이 나와 그것들을 뒤섞는 그릇에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은 그 신성한 종자들이 섞여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고 그들의 신화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트라의 한 찬송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당신은 영원한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식물과 나무가 창조되었고 낮과 밤이 교차하고 달이 주기를 갖추었으며 계절이 한 해를 통해 둥근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창조의 신화의 구도가 그러하듯 창조의 선에 대비되는 악의 구도가 여기서도 등장합니다.

갑작스런 빛으로 깨어난 어둠의 동물들이 땅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뱀 한 마리와 개 한마리가 황소의 피를 핥았고[사진 2를 참고 하십시오], 전갈 한 마리가 생식기에서 나온 신선한 종자를 빨아먹으려고 했다고 합니다[다음에 확인하실 수 있는 사진을 올리면 좋겠습니다].

이들의 신화에서는 황소의 죽음과 세상의 창조로 인해 선과 악의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인생의 상황으로 묘사합니다. 갈가마귀는 공기를, 사자는 불을, 뱀은 땅을, 뒤섞는 그릇은 물을 상징한다고 하며, 그래서 이 4가지 요소가 이 지구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신화는 주장합니다.

황소를 희생시킨 뒤에, 미트라와 태양신은 함께 연회를 베풀어 고기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셨다하며, 그뒤 미트라는 태양신의 전차에 올라타 대양을 건너 공중에서 세상 끝까지 몰고갔다고 창조신화는 기록합니다.

로마의 미트라교도들은 이 창조신화를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론 Republic〉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처럼, 세상의 형상인 동굴 안에서 그들의 제물이 희생되었습니다. 미트라는 <대화 Timaeus〉의 조물주(데미우르고스)와 같게 되었고,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만물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4가지 요소들, 섞는 그릇, 시간의 창조, 새로 탄생한 피조물에 대한 흉악한 동물들의 공격등은 〈대화〉의 유명한 특징이라고 합니다.

미트라의 [영혼에 대한 교리]는 창조신화 및 플라톤 철학과 의도적으로 결합된 흔적이 보입니다.〈대화〉에서처럼 인간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면서 행성의 악(예를 들면 화성과 금성)을 타고 일곱 영역을 건너와 마침내 육체 속에 갇혔다고 합니다. 인간의 과제는 그의 신격의 일부인 영혼을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일곱 영역을 통해 붙박힌 별들의 영원불변한 영역까지 다시 올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늘로의 상승은 미트라가 태양신의 전차로 지구를 떠났을 때 미트라 자신이 예시한 것이라고 주장하죠.

이번에는 미트라교의 예배와 의식 그리고 제도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미트라의 신전은 그 규모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지하의 동굴이었습니다.
발굴된 여러 성지 중의 어느 것도 100명 이상 수용하지 못하며 대부분은 그 이하의 규모였다 합니다. 모든 의식에는 반드시 인공조명이 필요했고 그래서 동굴에는 항상 벽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굴에는 입교예식이 시작될 때 이용하는 지하통로가 있었고, 남자만이 이 군인의 종교에 허용되었으며, 어떤 조직적인 위계질서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입회자들은 갈가마귀(corax), 신랑(nymphus), 군인(miles), 사자(leo), 페르시아인(Perses), 태양의 시종(heliodromus), 아버지(pater) 등 7등급으로 조직되었는데, 각 등급은 특별한 가면(갈가마귀·페르시아인·사자)이나 의상(신랑)을 가졌다고 합니다. 미트라교도의 등급이 올라가는 것은 죽은 뒤 영혼이 상승하는 것을 예시했다 합니다. 입문과정은 7개의 관문을 통과하고 일곱 계단의 사다리를 올라감으로써 행해졌던 것 같습니다. 각 등급은 일곱 행성의 신에게 속했고, 열성적인 미트라교도는 점차 이런 중요하지 않은 신들의 영역을 통과하여 마침내 고정된 별의 영역에 도달해야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들의 7등급과 행성의 연결을 소개합니다.
Corax: The Raven with Mercury
Nymphus: The Bridegroom with Venus
Miles: The Soldier with Mars
Leo: The Lion with Jupiter
Perses: The Persian with the Moon
Heliodromus: The Runner of the Sun or the Messenger with the Sun
Pater: The Father with Saturn

입교의식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현재는 거의 없습니다.
고대문서에는 세정식(세례)과 정화예식, 징벌, 속박과 해방, 그리고 어떤 의식의 암호에 대해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카푸아(이탈리아)의 프레스코에서는 입문자들이 눈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체하는 것과 부활을 나타내는 그 무엇이 의식의 일부였던 것 같습니다.

2세기 북아프리카의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는 군인등급에 부과된 용기의 시험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요, 손에 무기를 들고 아마도 거짓 결투를 하면서 화관이 있는 곳까지 나아가야만 했고, 성공했을 때 한 사제가 화관과 함께 왕관을 수여하지만 패배한 자는 미트라만이 그의 화관이라고 말하고서 남은 생애 동안 다시는 화관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트라교의 동굴은 프레스코와 부조 및 중요하지 않은 신과 행성의 신의 신상으로 보통 장식되어 있다고 합니다. 좁은 복도 양면에는 예배자가 무릎을 꿇거나 몸을 눕힐 수 있는 넓고 높은 벤치가 붙어 있습니다. (종종 반원 같은) 복도의 한끝에는 언제나 황소의 희생제물을 표현하는 부조나 프레스코가 있습니다. 때로 축으로 회전될 수 있는 부조의 뒷면은 미트라와 태양신의 식사를 표현했다고 합니다. 후에는 황소의 희생제물에 대한 의식이 자주 수행되지 않았던 반면 입교자의 공동 식사는 미트라 예배의 일상적인 특징으로 굳어 갔다고 합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제가 미트라에 대한 수집 자료를 여러분들께 공개하며 알려드립니다.
다소 복잡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으시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미트라교가 헬레니즘과 함께 파급되었을 그 효과를 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거슬러 올라가 니므롯으로부터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니키아 그리고 알렉산더를 통한 로마제국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혼합형태의 태양신 숭배의 흔적들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지요.
그리고 이 태양신 숭배가 용과 봉과 소 그리고 뱀 심지어 개와 전갈까지...
그리고 그것이 서양의 점성술 동양의 무속, 샤머니즘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져 있는지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사단의 총체적 전략아래... 수많은 우리 인류가 그 궤계에 종노릇한 흔적들이
우리 인류의 역사를 통해 곳곳에 묻어나고 있음을 주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는 좀더 compact한 자료들로 우리의 목표를 조준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보죠!
이 내용을 읽으시면서 여러분께 주시는 성령의 음성도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계속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 부탁도 드립니다!^^

사진 1: British Museum에 있는 미트라가 소를 희생제물로 잡는 장면의 조각상입니다.
사진 2: 특별히 같은 조각상에서 개와 뱀이 미트라가 칼로 찌를 소의 상처에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을 확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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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0) 2012.07.20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해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물을 공급하는 두가지 방법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준비: 주의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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