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어떤 목사님과 

WCC 관련 대화를 하면서

다시 한번 확인된 것들이 있었다.


WCC에 가입되어 있는 교단에 속한 목사님들과

WCC 관련 문제점에 대해서 말하면

그래도 많은 목사님들이  

WCC가 종교다원주의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신다.


하지만 교단의 공식 입장과 별개로 

자기 개인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분들 중 대부분이 동의하는 것은 

만약 어떤 목사 개인이 종교다원주의를 추구하면 

그것은 배도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들은 

개인이 종교다원주의 입장을 갖는 것은

확실한 배도라고는 하시지만 특이하게도 

WCC 같은 종교다원주의를 

공식 입장으로 갖고 있는 단체에 

교단 자체가 가입 되어 있는 것은 

크게 문제로 여기시지 않고

그 교단에 속해 있더라도 

개인들 신앙만 똑바로 있다면 문제 없다는 것이다.


교단 차원의 입장이 아무리 비성경적이고

성경과 상충되도 

자신 개인만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국 마지막 때 최종 배도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왜그럴까?

한번 생각해보라.


교단의 권위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누구로 부터 부여 받는 것인가?

목사의 권위는 누구로부터 부여받는 것인가?


말씀 아니었는가?


교단의 권위가 말씀보다 높을 수가 있는가?

말씀을 거스르거나 어길 수가 있는가?


교단들이 왜 생겨났는가?


만약 교단이 아무리 비성경적이고 문제가 있어도

그안에 소속되어 있는 개인들이 

그 비성경적인 교단 입장에 반대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문제가 없는가?


생각해보자.


정상적인 개신교인이라면

카톨릭은 사이비 이단 혹은 

배도한 음녀교회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왜 그런가?

심플하다. 

카톨릭의 성경을 벗어난 비성경적 공식 입장들 때문이다.


이 분들의 논리대로라면 

카톨릭이 아무리 비성경적인 입장들이 있었어도

그 안에 소속 된 개개인들이 

동의 안하면 문제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애시당초 카톨릭에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분리될 필요도 없지 않았던 것 아닌가?


(물론 종교개혁자들이 

처음부터 카톨릭에서 분리해 나가려 한 것이라기 보다

카톨릭이 회개를 거부하고 그들을 내쫓은 것이라고 봐야지)


카톨릭의 공식 입장은 

비성경적이라 할지라도

그것과 별개로 카톨릭에 속해 있는 개개인들이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 성경대로 잘 믿으면 되는거지

뭐가 문제이겠는가?


게다가 그 카톨릭 교단이 워낙 크니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성직자들이 있지 않겠는가?


카톨릭의 비성경적 입장을 

개인적으로까지 동의하는 배도자들도 있고

그 비성경적 입장에 동의 안하는 

'순결한(?)' 성직자들도 있으니

카톨릭에 속하였다고 해서 

이단자 혹은 배도자라고 한다면 

얼마나 교만한 태도이고 

하나님 앞에 '벌받을 짓'이겠는가?


그런데 왜 종교개혁을 한 믿음의 선배들은

굳이 카톨릭에서 구별되어 나왔어야 했을까?


카톨릭안에 그냥 머물지 

왜 굳이 카톨릭에서 '연합'을 깨고

'분열'을 일으키고 나와서 

기어이 개신교 교단들이 만들어지는 

'분열의 열매'를 맺은 것일까?


그리고 아예 결론적으로 

반대로 한번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카톨릭에 

다시 흡수되게 된다면 굳이 카톨릭을 거부할 이유가 있을까?


카톨릭의 공식 교리 중에는 비성경적인 것도 있지만

나름 성경적인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카톨릭 10계명중 첫째 계명이 무엇인가?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이다.

이 것만 보면 카톨릭도 고백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아니겠는가?

말은 오직 예수인데

행동이 종교다원주의일 뿐이다.


그러면 카톨릭안에 속하여서도

지금처럼 개개인 차원에서만 비성경적인거 동의 안하고

마음 순결히 잘 지키면 되는 것 아닌가?


'연합'도 잘 유지되고 

시끄러운 '분열'도 안일어나고?


이러니 이 말세에 '연합' 명분으로

구별됨을 사탄이 조장한 '분열'로 죄다 싸잡아 매도하면서

카톨릭으로 하나되자는 말이 먹히지..... ㅠㅠ


종교개혁이 사탄의 분열이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유명 개신교 목사들이 어떤 논리로 그러는지 

오늘 더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ㅠㅠ


그들은 '선두주자'로서 

자기 교단 차원을 넘어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확장해서 

이 미혹의 논리를 적용했던 것 뿐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자기 교단과 한국 교회 차원 안에서만으로 

국한되게 그 논리를 적용 중이신 목사님들은

아마도 본인들이 하시는 말씀이 진정 무슨 뜻인지

스스로도 이해가 없으셔서 

교단의 비성경적 입장과 개인의 신앙을 별개라고

생각하시는 걸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본인은 열심히 목회하고 

신앙이 순결하니 괜찮다고 생각하시지만

이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미혹으로 인도하는지 못보시는 것 같다.


눈을 열어주시길 기도한다.


이 분들 뿐 아니라

이분들의 대수롭지 않게 여김을 보고

그 미혹들을 받아들여 배도의 길에 들어서는 

영혼들이 전세계적으로 어마어마 하다.


사탄 이 씹어먹을 놈이 

이렇게 체스를 잘둔다


생각할때마다 안타까움에 

열받고 속이 훼까닥 뒤집어진다... ㅠㅠ


하지만 소망은

그래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분들은

결국 들을 귀 갖고 이 전세계적 배도의 

흐름에서 다 구별된다는 것이다.


주님 곧 오신다.

단장하자.



글: 박성업 선교사님 

(https://blog.naver.com/up0124/221312078568)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대학 신학부 교수이며, 그 대학 성 교회 주임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로마교황 레오10세를 향한 질의서를 그 성당 출입구에 붙임으로 촉발된 개혁의 시작이 어느덧 498주년을 맞이했다.

개혁자들이 외친 핵심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Sola Scriptura’(오직 성령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였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신전의식)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 이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왜곡된 교리와 제도에 대한 성경적 회귀를 외치는 부르짖음이었다.

어떤 면에서 로마교회 안에 존재해있던 사제제도 중심의 계급주의도 하나의 개혁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다양한 직분이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방법과 수단이며, 역할임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었다.

최근 한국교회는 이런 개혁주의 정신이 왜곡된 채 오히려 교회직분이 계급화 되는 현상들을 초래해 어떤 직분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열심히 섬기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 직분을 얻기 위해 교회 안에서도 세상 선거 때나 있을 법한 부도덕한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직분을 교회성장의 도구로 이용해 직분자들을 세움으로 교회의 세를 확장시키려 의도한 면도 적지 않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성장하므로 교회의 다양한 섬김을 위해 그 일을 섬길 사람들을 택하기 위해 직분자를 세웠다.

지금처럼 직분자를 세워 교회 성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직분자를 많이 세우는 것이 마치 교회의 자랑인 것처럼 되어 버렸으며, 그것이 교회의 교세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직 직분을 맡을 자격이 없음에도 너도나도 모두가 직분을 가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교회에 등록한 후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당연히 서리집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창피하게 생각하며, 또 서리집사가 되어 몇 년 섬기고 나서 당연히 안수집사가 되거나 권사가 되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그 다음에는 시무집사로 얼마간 섬기면 당연히 장로가 되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시험에 들거나 불평하며 교회를 떠나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교회 직분은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역할을 맡았던지 그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교회 직분은 그 다음 직분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결코 아니다. 교회 직분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하나하나가 소중하며 가치 있으며 주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 대한 바른의식이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직분은 계속 계급화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직분 간에 갈등이 생기며,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

실제적으로 교회안에서 직분간의 갈등이 생겨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안에서 직분을 얻기 위해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수단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일은 직분은 역할의 차이라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직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달란트의 비유는 어떤 역할을 맡느냐 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맡겨진 역할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역할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많다. 맡겨진 역할이 자신의 욕구에 만족스럽지 못할 때 스스로 시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 대한 바른 인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첫째, 직분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가 회복되어야 한다.
달란트의 비유는 직분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보여준다. 직분이란 그 사람의 신분이 아닌 역할이라는 것이다.

교회안에서의 직분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임을 바로 인식하며, 계급의 차이가 아닌 섬기며 봉사하는 수단이며, 영역의 차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벧전4:10에서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듯이 각자가 맡은 역할대로 섬기면 된다. 직분이 결코 그 사람의 신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직분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해선 않된다. 그 이유는 직분은 맡겨지는 것이지 내가 맡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전12:11에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직분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지는 것임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맡으려고 시도해선 안된다.

내가 억지로 맡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부작용이 생기며 영적 공동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달란트가 주인으로부터 맡겨진 것이지 종들이 자신들이 얼마씩을 원해서 맡겨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직분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맡겨지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약1:17에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고전7:7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기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달란트의 주인이 종이 아니고 주인인 것처럼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직분을 탐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행8:18이하에서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돈으로 이 권능을 사려고 한 사건이 나온다.

이런 일들이 교회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임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인위적으로 직분을 맡기 위해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크든 적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임을 깊이 인식하며, 직분이 맡겨질 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맡겨지지 않으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직분자는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열처녀의 비유는 직분을 맡은 자가 하나님과 어떤 영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등을 준비하는 영적 관계가 필요하다.

등은 보여지는 외적인 행위로 직분자가 어떤 신앙적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진실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직분자가 바른 예배자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지금 바른 예배가 무너지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며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예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예배 형태로 변질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감정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할 때가 많이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예배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직분자는 신앙의 연륜을 가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 바른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바른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다.

동시에 직분자는 주일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직분자들이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너진지 오래됐다. 과거에는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으로 알고 믿음 생활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저 교회 가는 날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므로 직분자에게 주일성수에 대한 바른 인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주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는 직분자는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주일에 대한 바른 인식을 회복함으로 직분자 스스로가 주일에 철저하도록 자신을 회복시켜야 한다. 주일을 바로 성수하지 못하는 자는 직분자의 자격이 없다. 다른 날도 하나님의 날이지만, 주일은 더더욱 하나님의 날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바른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

바른 섬김은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이다. 롬 12:6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했다. 지신의 분수를 지킬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분수를 넘어서기에 혼란이 생기며 어려움이 생긴다. 분수를 넘을 때 남을 비판하게 되며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며 불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영적인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관계를 위한 또다른 하나는 기름을 준비하는 자세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직분자의 진정한 영적 자세는 외적인 행위 내면에 숨겨진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이며 교제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가 바로서지 못할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이 관계는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지므로 직분자에게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수고가 필요하며,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내적인 깊은 영적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도는 내 요구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셋째, 직분자는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님은 눅 9:23에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는 십자가를 지는 자세이다.

많은 직분자들이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신의 직분을 즐기며 누리려는 현상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누군데’하는 생각들이 은연 중 밑바닥에 깔려 있다. 정말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으면 직분자의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지는 자세의 시작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 주님의 명령에 복종한 후 자신의 무익함을 고백할 줄 아는 것이다.

눅17:10에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했다. 때로 직분자가 자신을 드러내며 나타내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어떤 일의 성과가 좋을 때 더더욱 그러하다. 그럴 때 과감하게 ‘나는 무익한 종’일 뿐이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일을 자랑하려 해서는 않된다. 그럼에도 자랑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고전3:21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으며, 고전5:6에선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고 했다. 성경은 인간의 자랑은 허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약4:16에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런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바울이 갈6:14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직분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는다.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올바른 직분자의 영적 자세가 회복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바른 직분 의식은 일의 결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무익한 종임을 분명히 고백하며, 오직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도록 사는 것이다.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일 뿐이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4402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어느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가?

 

- 김명도 박사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어느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른 교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신학교이건 교회이건 할 것 坪� 대개가 마치 무슨 회사를 운영하듯, 비지니스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서 교회를 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미국 San Francisco 근방 Oakland 에 본부를 두고 세계를 상대로 방송하는 Family Radio 라는 전도기관에서는 “교회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별도로 예배를 드리라” 고 종용 하는데 이는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잘못된 권고이고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 존속하며 성도는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과(communicatio sanctorum)" 이라고 한 사도신경의 가르침처럼 그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히 10:25).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지요. 어느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가는 누구와 결혼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유는 그릇된 교회에 출석하면 영혼이 파괴되기 때문이며, 바르지 못한 신앙은 우리 영혼을 파멸과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알아야 할것은 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듯이 (21장) 이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 "참다운 교회"와 "거짓교회" 가 존재하지만 그 구별은 “거듭난 성도만 모였다” 고 해서 참 교회가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 (유형교회, 혹은 가시적 교회 church visible) 에는 구원 받은 사람도 있고 구원을 받기는 고사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으로 “참 교회(true church)와 거짓 교회 (false church)를 식별합니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라고 해서 진리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큰 교회를 찾아 예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치고 참다운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큰 교회는 하나님보다 사람 위주로 목회하기 쉽기 때문에 말씀 선포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참 교회” 즉 우리가 출석할 교회라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구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1.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합니다.

설교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마다 목사님들이 소리 높여 설교하지만 문제는 “성경적”인 설교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서에 입각한 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모르몬교도 모두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교훈을 전하지 않으니 거짓 교회 혹은 이단입니다. “교회”라는 간판을 내 걸고 온갖 비성경적인 말을 하는 교회가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의 교계는 대개가 그런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즘 성도가 주의할 것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Scotland나 Holland 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한결 같이 말씀 중심, 교리 중심의 설교로 이름 나 있는데 오늘에는 어디서도 그런 <참 교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 하며 따라서 천당 지옥 이야기는 “기분 나빠서” 듣기를 싫어하니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보십시오. 개혁주의 설교를 하는 목사는 요즘에 인기가 없지만 그런 교회가 참 교회 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이며 인본주의적 번영신학, 신비주의 세속주의를 전하는 교회는 거짓 교회입니다. 따라서 그런 교회는 출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작은 교회 중에 말씀을 바로 전하는 교회가 간혹 존재합니다.

2. 성례식을 바로 행하는 교회가 참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성례식을 행하는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라면 모두 해당됩니다. 그러나 세례를 베풀 때 아직 믿음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행한다든지 성찬식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나 회개하지 아니한 자에게 성찬식에 참여함을 허락한다든지 하는 일은 명백한 죄입니다. 또 성례식이 없는 교회도 출석해서는 안 됩니다. <참 교회>가 아닙니다. 성례식에는 아무나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읽으면 준비없이 성찬식에 참여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에서는 성찬의 중요성, 세례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세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 얻은 성도는 세례를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3. 권징이 바른 교회가 <참 교회> 이며 이런 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요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권징, discipline"입니다. 대개 교회마다 권징이 약하거나 전혀 없습니다. 징계가 없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교적인 모임에 불과합니다.

바로 권징하는 교회가 과연 몇 개나 됩니까? 미국의 OPC(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미국정통장로교단), RCUS(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미국개혁교단), RPCNA(Reformed Presbyterian Church in North America, 북미주 개혁장로교단), PRc(Presbyterian Reformed church 장료교 개혁교단) 를 빼놓고는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복음주의>라고 떠드는 미합중국 장로교단PC(USA) 교단도 제217차 총회(2006년 6월20일 Birmingham, Alabama) 에서는 “동성연애자” 에게 “목사 장로 안수”를 허락하는 결의를 하여 많은 지교회가 교단을 탈퇴하는 소동이 벌이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이런 발의를 한 사람이나 찬성한 사람은 모두 성경을 위반했으니 징계를 받아 마땅하지만 오히려 비호하고 있으니 이런 교회는 권징이 없는 교회이므로 (마태 18장) <참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가 이혼하고 목회를 계속해도 권징이 없는 교회나 교단 또 목사가 사기를 범하고, 교인들을 우롱해도 전혀 권징이 없는 교회나 교단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므로 모두 출석해서는 안 될 교회들입니다.

이런 교회들을 계시록에서는 <사탄의 회, Synagogue of Satan>이라고 책망합니다. 성경에 충실하지 않는 교회를 말합니다. 성경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충실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pure integrity) 입니다. 이것이 <hagios 하기오스>와 <ecclesia 에클라시아>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표준을 갖고 여기 저기 교회를 방문해 보십시오. 등록하지 말고 우선 몇 주를 다녀보면서 목사님의 신학, 인격, 행정을 지켜보신 후 계속 출석 여부를 결정하십시오.

오늘의 현실은 교회가 모두 진리에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신학교 교수들도, 목회자들도, 교인도 모두 성경적인 진리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귓맛 좋은 말”만 전하기를 원하며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그러므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교회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략)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내 영혼을 맡길수 있는 교회, 내 영혼을 책임져 줄 목회자를 만나야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좋은 참다운 교회를 속히 발견하여 만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도(왕상 19장) 모두 타락하여 바알에게 팔려간 사람들 같았지만 그래도 신앙을 지킨 7,000 명의 선지자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런 교회가 찾기는 어려워도 분명히 몇 군데 있을 것입니다.

(중략)

- 상담역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

교회란 어떤 곳인가

 

?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서울의 하늘만큼 십자가로 가득한 도시를 만나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밤이면 교회 종탑의 빨간 십자가들이 한무리의 물결을 이룬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그 수에 비해서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상당 부분이 교회에 대한 인식의 부족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교회란 과연 어떠한 곳인가?

성경은 교회를 가리키는 데, 다음 몇 가지 ?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 표현들을 통해서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알아 볼 수가 있다.

 

에클레시아

성경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은 희랍어 '에클레시아'이다. 이 말은 '안에서 밖으로(out of)'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크'와, '부르다(to call)'를 의미하는 동사 칼레오가 합해진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밖으로 불러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밖으로'는 '세상 밖으로', 또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밖으로'를 뜻한다. 그리고 '부르다'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클레시아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구원에로 불러내진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흔히 구원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집합체라고 일컬어져 오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교회는 성도(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교통하는 곳(집합체)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의 교통은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리고 피차의 교제(코이노니아)를 통한 성도들 사이의 수평적인 교통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배와 교제가 있는 것이 교회이다. 예배와 교제가 없으면, 또는 이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축복이나 나누어 가지는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정신 수양원이 아니다. 교회는 사교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단순한 자선 단체가 아니다.

 

에클레시아는 어느 한 가정에 모인 사람들이나(고전 16:19, 골 4:15 등), 하나의 독립된 단체를 구성한 사람들에 관계없이 사용되었다(행 5:11, 11:26 등). 그리고 독립된 단체들이 연합하여 모여진 경우에도 사용되었다(행 9:31).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예배를 목적으로 모인 지상의 모든 집합체라면, 그 규모나 형태에 관계없이 교회가 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규모나 형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배와 교제가 있으면, 건물이 없이도 교회이다. 직분자가 없어도 교회이다. 십자가 상이 걸려 있지 않아도 교회이다. 이런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예배와 교제이다. 만일 자기 자신을 교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이러한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성경은 에클레시아 이외에도 교회를 가리킬 때, 다음과 같은 많은 비유적인 명칭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비유들 속에는 교회가 어떠한 곳인지, 또는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주의깊게 살펴 볼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

사도 바울께서는 고전 12:27에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의미한다. 사도께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래서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2, 23)라고 하셨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명령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설립자, 또는 특정인의 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교주를 모시는 사이비 집단이 되어 버리고 만다. 교회는 주님의 교훈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와 지체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서로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머리되신 주님과 하나이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생각이 같아야 한다. 감정도 같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탄식을 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범사에 주님을 배우고, 주님을 닮아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한다.

 

만일 교회는 즐거워하는데 주님의 마음은 아파하시는 일이 있다면 , 그 교회는 심각한 병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교회가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이다.

머리는 한나이지만 지체는 많다. 많은 지체들은 각기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체들은 한 머리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와통일을 이룬다. 교회의 성도는 하나 하나의 지체들이다. 서로의 분량과 역할이 각기 다른 지체들이다. 그러나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간에 조화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면, 피리를 부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춤을 추고, 애곡을 하는 자가 있을 때 함께 슬퍼하며 가슴아파 할 수 있어야 한다. 지체들끼리의 대립이나 견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와 교회들 간에도 지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진정한 몸된 교회들이라면, 교파나 교단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 간에 반목이나 질시를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교회들은 상호 보완적인 역할로 머리되신 주님을 섬겨야 할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던 곳이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그들이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이 성전, 즉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약은 교회를 가리킬 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나 하늘의 예루살렘, 또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갈 4:26, 히 12:22, 계 21:2).

하나님은 무한하시어서 온 우주 어디에나 편재하시고 계신다. 그러기에 하늘에 올라 가든지 땅 아래로 내려 가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할 곳은 아무 곳도 없다(시 139: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자신의 지정된 거처로 삼으셨다(합 2:20).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을 찾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에 성전을 찾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반드시 성전을 찾았다. 기도할 때도 시간을 정해 놓고 성전을 찾아갔다. 교회를 예루살렘에 비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이요 보좌이다. 모든 성도들이 마시도록 생수가 흘러나는 생명샘이다. 하나님의 은헤가 시작되는 시은소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함께 모여서 세속적인 행사나 모임 또는 오락만을 즐기느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의 마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마음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손쉽게 모여 교제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언제든지 들러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과?? 비례한다.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가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서 한 주간에 한 번 정도나 힘들여 찾아가는 곳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복잡한 여건 때문에 부득이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교회를 옮기는 것이 좋다. 아니면 차라리 교회 옆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좋다.

 

성령의 전

교회는 개인 신자의 경우와 더불어서 성령의 전이나 집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고전 3:16, 엡 2:21-22, 벧전 2:5). 교회가 성령, 즉 거룩한 영의 전이라는 말은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곳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세속과 구별이 된 곳이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바쳐진 곳이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으로 인쳐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나 의식들도 세상적인 일들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직 또는 성례라고 부른다. 읽는 책이나 부르는 노래도 세상 것둘과 구별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또는 성가라고 부른다. 건물이나 물건들이 겉으로 보기에 세상의 것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세상 것들과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다. 그러기에 성전 또는 성물(성구)이라고 부른다.

 

한편, 교회는 불의나 죄와 구별되어진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거룩하심을 이루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의 장소이다. 여기에는 말이나 행동이나 계획 등이 모두 다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많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이름에 합당하도록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어지기를 힘써야 한다. 그리고 온전히 거룩한 새사람으로서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는 개인차와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간혹 잡음들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잡음 때문에 교회를 오해하거나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룩해져 가는 흔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최소하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근 우리 주변에는 세상과의 구별을 상실한 교회들이 없지 않다. 생각이나 언어, 행동이나 벌리고 있는 행사에서 세상과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일부 가사를 제외한다면, 동작이나 마음가짐이나 기교 등이 세상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노래가 유행하고 있다. 나누는 대화도 세상사 일색이다. 집안이나 직장에서 어른이면, 교회에서도 무조건 어른 행세를 하려 하기도 한다. 교회에서조차 계 모임이 이루어진다. 심지어는 성전이 세속 모임을 위해 대여되기까지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 무리 속에 숨어 있는 염소를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염소 무리 속에 끼어 있는 양을 구해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주님으로 하여금 오늘의 예루살렘 보시고 눈물울 흘리시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눅 23:28). 그래서 교회로 하여금 구별된 곳이 되게 해야 한다.

 

진리의 기둥과 터

사도 바울께서는 교회를 가리켜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고 하셨다(딤전 3:15). 교회를 기둥이나 터에 비유한 것은 교회의 기초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주시려 함이었다.

교회의 터는 진리이다. 교회는 오직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한다. 교회가 혈연이나 사업이나 권력 등의 기초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진리되신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가 없다. 혹 성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진리나 교주를 그 기초로 삼고 있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는 아무리 십자가를 내다 붙이고, 그럴싸한 교회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도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들을 형제로 보지 않는다. 이방인으로 여긴다.

 

교회가 붙들어야 할 기둥도 오직 진리이신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진리의 소호자이다. 교회는 진리만을 전하고, 진리만을 가르쳐야 한다. 진리는 타협이나 양보를 허락하지 않는다. 타협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로울 때가 많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할 때도 많다. 이것이 교회가 가야 할 길이다.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졌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 피를 지키기 위하여 수없이 피를 훌려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자기 자신의 생각만을 진리라고 독선적인 주장을 늘어 놓으면서 분쟁과 분리를 일삼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 진리는 자기의 생각이나 고집이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양보하면서까지 타협을 모색하시는 것 역시 옳은 일이 아니다. 교회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

 

금 촛대

사도 요한은 교회가 금 촛대로 나타나는 계시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내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20).

 

교회가 밝히는 빛은 하나님과 진리이다. 하나님이 빛이시요(요일 1:5), 진리, 즉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바로 빛이기 때문이다(요 8:12). 이 빛은 흐려지거나 변하지 아니하는 빛이다. 그러기에 가장 고상한 빛이다. 따라서 교회는 금으로 만든 촛대에 비유가 되었다.

 

촛대에서 빛이 나오기 위해서는 먼저 심지가 타지고, 양초가 녹아져야 한다. 자기 희생이 우선하지 않으면 빛은 생겨나지 ?는다. 교회는 등경 위에 있는 등불이나 산 위에 있는 동리처럼 높이 들려져야 한다.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의 수고와 자기 희생을 통해서 진리와 착한 행실로써 세상을 비추어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교회는 만에 한나라도 허물과 실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린 소자 하나라도 실족치 않게 하려는 세심한 주의를 항상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사도 바울께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 비유를 하셨다. 그리고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엡 5:22-25).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에 비유가 되어진다.

마치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여기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과 같은 의도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신부로서의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항상 순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또 오직 그리스도께만 복종을 해야 함과 동시에, 희생을 아끼지 않는 헌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는 밤 언제쯤 올 줄 모르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도 같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둠과 함께 졸거나 잠이 들러서는 안 된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진다 해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려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진리에 대한 왜곡이 심할수록, 죄악이 관영할수록, 불평이나 탄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귀가 바라는 것이다. 그럴수록 교회는 더욱 재림에 대한 임박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밤이 깊었다는 것은 새벽이 가까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수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참된 역할이다. 교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나 행사 등 겉으로 나타나는 것에다 관심을 집중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비유되어진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예루살렘, 성령의 전, 진리의 기둥과 터, 금 촛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 있는 교회가 된다.

 

출처: 행복충전소/DMpastor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는 우주적인 기관이며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유기적인 기관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누구도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이처럼 주님만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를 운영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바울은 교회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오직 한 분,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직 세우시는 이도 주님이시며 이제 세워진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아니고는 어떤 사람도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게 하기 위하여 각 교회마다 장로를 택하여 교회를 인도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을 위탁하였다.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보냄을 받았던 것도 바울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인식한 안디옥 교회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바울을 파송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권능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내려 주셨음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의 부름에 쓰임 받은 일꾼이었을 뿐이다. 물론 일꾼이 누리는 기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먼저 그 일꾼은 누구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도 그에게 영광을 입혀주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일을 통하여 교회도 역시 이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면이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늘의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지혜와 권위를 가지고 다스려 보겠다고 날뛰는 직분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이다.


이 점을 명심하여 오직 주님에 의해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직분에 따라 모든 노력을 다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이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wildfield&document_srl=367389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트랙백 주소 : http://blog.cgntv.net/lib/rss/trackback.asp?ID=aboe907945
문서 주소 : http://blog.cgntv.net/document/aboe907945

제 7장 그리스도의 몸(3) / 루이스 B. 스미디즈

 

 

2. 그리스도의 몸이 계신 곳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그 몸은 어디에 있는가? 그 몸이 어떤 특정한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대해서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곳이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조직인가? 그것이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교단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은 제도적인 교회에 의해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공동체인가?

 

바울은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은 예배와 섬김의 행위로 나타나는 친교라는 것이다. 둘째, 그 몸은 지역적(local)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다"(고전12:27). 바울이 고린도의 한 가정의 거실에 모인 어떤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 무리ㅡ그 이름, 직분들, 예배의식, 그리고 가시적인 활동들과 더불어 그 무리ㅡ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사진처럼 묘사될 수 있다.

 

이것은 조직이나 구조의 어떤 구성 요소들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나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함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구성 요소들이 부재한 경우는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은 그렇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그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들은 하나의 기관에 달려 있으며, 그 가장 주된 구성 요소는 그 기관의 대주교인 베드로의 권위 하에 살고 예배를 드리는 곳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삶을 나타내는 개신교도들이 등장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러한 공식을 계속 유지하는 데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밝히 증거하는 북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성장과 진정한 기독교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계속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종의 교리적인 승인을 만들어 내려고 고심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회때 출간된 교회에 관한 법은 그리스도의 몸이 가톨릭 교회에 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법은 몸과 가시적인 교회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의 복합적인 실재의 두 차원 혹은 국면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신비적인 국면인 몸은 그 가시적인 구조를 초월하여 확장된다. 이런 식으로 교회와 유사한 차원이 비 로마 가톨릭의 영역들과 중첩된다.

 

반면,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그 몸의 위상을 그리스도인들의 비가시적인 친교에 두는 경향이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기관(제도-역자주)은 기껏해야 그 몸을 양육하기 위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을 모호하게 하거나 방해하기도 한다. 그 의미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만질 수 있고 구체적인 '몸'이라는 단어는 믿음과 감정에 있어서 무정형이며, 막연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관계를 언급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같은 견해는 복음주의자들에게 교회의 분리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치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때로는 분리를 일으키는 데 대한 허가증을 부여하기도 한다.

 

가톨릭 성례주의자들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이 내주하심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믿는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교회에게 은혜와 생명의 저장소를 제공해 주며, 각 개인들은 성례를 통해 그것들을 받는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개인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며, 각 개인은 다른 개인들 안에서 동일한 실재[성령]를 인식한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몸 안에 계시며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 없이 창조하신 몸 안으로 인도된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서로간의 사귐에 의해서 새롭게 된 몸을 구성하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만일, 우리가, 바울이 주장한 대로 그리스도이 몸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환영과 같은 몸에서 위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 역동적인 실재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기관이 그리스도의 몸 신분의 영원한 보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몸은 성령 안에서 주의 역동적인 활동에 반응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환언하자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것은 오직 몸으로서 활동할 때에만 진정한 몸이다. 그 공동체는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위해 활동할 때에만 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3. 얼마나 많은 몸이 존재하는가?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에게는 지상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는 몸이 하나밖에 없는가? 아니면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많이 만들어 왔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느냐"고 도저히 못믿겠다는 어조로 질문하였다. 교회의 정체성을 고려해 볼 때,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교회의 분열은 믿을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이상한 것이었다.

 

몸의 분열은 새창조와는 기괴한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있는 일이다. 몸이 나뉘인다는 것은 이상하고, 모순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너무나도 실제적인 현상이다.

 

몸은 나누어질 수 없으며, 사람들은 오직 그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로마 가툴릭의 견해가 되어 왔다. 몸은 세상에 흩어져 있는 "진정한 신자들" 간의 비가시적인 친교의 끈이며, 따라서 제도가 해체되고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 몸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앞 단락에서 내렸던 결론이 옳다면, 이러한 신학적 해답들은 그 문제의 정곡을 찌른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더 나은 해답은 어떤 것인가?

 

바울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지역 공동체의 연합[통일성]에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받고 성찬 예식을 통하여 정규적으로 그의 즉으심을 선포하는, 남.녀.노.소로 구성된 매우 구체적인 공동체를 지적하는 것이다. 교회 성찬 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함으로 인해 파괴된 그 연합은 한 지역 회중의 연합이었다. 사람들간의 사소한 마찰이 구체적인 실예에서 몸을 분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한 구체적인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동체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몸의 하나됨을 위해 하셨던 기도 가운데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그 몸의 하나됨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대한 가시적인 선포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디에서 새 사람의 연합 혹은 분리를 볼 수 있는가?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최소한 무엇보다 먼저 지역 교회 안에서 그 몸의 하나됨을 보지 않겠는가? 세상이, 인종과, 사회적 배경, 직업상의 신분과 세상적인 성취 등이 각기 다른 개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아가페적인 사랑 안에서 섬기고 예배하는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곳은 구체적인 지역 교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된 것과 얼마나 거리가 멀게 나타나는 것도 지역교회가 아닌가? 분열의 첫째 되고 최우선 되는 비극은 지역교회에 개인주의와 분파주의가 존재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세상에 가장 걸림돌이기도 하며 따라서 가장 해로운 곳이 바로 지역 교회가 아닌가?

 

고린도나 근교의 다른 곳에 있는 한 공동체 안에 서로 분리된 혹은 서로 분쟁을 벌이는 몇 개의 몸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도저히 못할 짓을 행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누어진 것이다. 가장 긴급하고도 힘든 치유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분열의 문제이다.

 

연합에 대한 관심은 물론 지역 공동체에 국한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보다 커다란 의미에서 존재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전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한다(엡1:22, 23; 골1:18). 지역 공동체들은 단지 커다란 몸의 지체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전체적인 몸이 존재한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 흩어진 몸들, 그리고 몇몇 지역에 흩어진 교파들은 모두 함께 지상에서 화목케 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이다.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각자는 상대방을 인식히고, 상대방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바울 당시 각 지역에 흩어진 몸은 한 몸의 완전한 표현으로 간주되었었다. 예를 들어, 안디옥에 있는 몸은 그 지역에서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그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기도하며 고난을 받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의 새로운 실재, 즉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유감스럽게 생각하여야 하며, 마음 아파해야 한다. 서로 다투고, 배척하고 적개심을 품고, 분열하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우쭐대며 주장하는 것은 지상교회에서는 있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지역적인 면에서 분명히 사실인 것은 대륙의 국경을 초월한 교회 일치 운동이 점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각 교파가 상대방의 사역을 배척하고, 서로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경쟁을 일삼으며, 다른 교파의 성례전에 대해 배타적이며, 공개적으로 상대방이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곳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바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보게 된다.

 

세계 교회 협의회(ecumenicity)에 대한 거부는 대개가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쁘게 말해 그 거부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신학적인 껄끄러움, 진실성 없는 고백에 기인한다. 좋게 말해 그것은 주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구속에 신실한 몸을 유지하려는 바람에 기인한다.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령의 실재, 그리고 그의 구원의 역사성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동맹들에 가입하기를 매우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그처럼 동맹을 꺼리는 교회들은 주님께서 한 몸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그리스도의 몸-비록 그것은 항상 병약하고 죄로 가득찼지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은 어떤 이름 그리고 어떤 신조를 지니고 있던 간에 그것은 하나의 몸이며 동일한 실재인 것이다.

 

복음주의적 배타주의자들과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일치주의자들은 칼빈이 가톨릭 교도인 사돌레토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돌레토여,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일행에게 교회적인 연합의 유일한 참된 띠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하셨으며, 현재 흩어져 있는 우리를 불러 그의 몸의 친교 안으로 모으시는 주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주 그리스도의 하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칼빈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 중심적인 마음과 소망을 좀더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께서 그 일을 행하셔야 하며, 말씀과 성령으로써 그 사역을 수행하신다는 확신을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중에서 발췌(251-259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제 7장 그리스도의 몸(2) / 루이스 B. 스미디즈

 

 

(3)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공동체의 기원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서 행하신 바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혼란과 공동체, 아담 안의 옛 인류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공동체 사이를 나누는 분할선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 공동체에 관해 언급된 모든 것은 여기에 그 지향점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 공동체의 전환점은 역사의 전환점, 즉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과 동일하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십자가로 인하여 옛 분열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옛 언약을 파괴하지 않았다. 율법에 기록된 "우리를 거스리는 의문의 법령들"은 폐지되었으나 아브라함과 더불어 시작된 언약공동체는 폐지되지 않았다. 십자가는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갈3:8), 그 복음은 율법이 폐할 수 없었던 북음이었다(갈3:17).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은 처음부터 만민을 위한 복으로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였으며, 그가 죽으셨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들에게 가져다 주셨다(갈3:14).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갈3:7). 십자가는 새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 관계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로 인하여 아담에 의해서 이룩된 혼란의 와중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몸 안에 계신 성령 

 

교회 안에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몸에 영혼이 제공되었다는 오랜 전통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며,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몸이 된다. 그러나 가장 바울의 관심을 끈 것은 성령이 그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2장). 그러나 초점은 활동하시는 성령에 맞춰져 있다. 성령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신다(12:7). 이 은사들은 그 공동체의 사역을 위해서 부여된 여러 직책들과 대략적으로 대비가 된다. 어떤 때에는 보기드문 믿음을 행사하는 능력의 은사들로 나타난다. 그 공동체 안팎에는 수행해야 할 사역, 즉 사랑의 사역이 있다.

 

우리가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다시금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상기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분의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성령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그 몸 안에서 효과적이 되게 하는 것, 즉 공동체로 하여금 화목케 하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성령은 그의 주권의 능력과 목적 안에서 역사하시는 지상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성령은 각 개인들을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대망하는 몸 안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로 수립된 공동체 안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전12:11). 그는 말씀 선포와 성례로 구원 사건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 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를 재삼 기억케 하신다. 성령은 미래의 보증(첫 분할금)이시며 현재의 촉매가 되신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 실현된 새로운 것을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상의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 공동체가 가시적인 행동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도록 인도하신다.

 

필자는 성령이 교회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자유로우시다. 또한 그는 그 지체들 안에 생명이라고 불리우는 물질을 집어 넣으시는 일괄 작업 배치를 묵묵히 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무시되고 거부되며, 무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편, 그의 임재는 단독적인 보장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령이 일하시니 지체들도 일해야 한다. 성령이 활동하고 계시니 지체들은 그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학 관계의 인간적인 측면이 결여될 때, 그 몸은 좋게 말해서 동면 중이며, 나쁘게 말해서 죽어 있는 것이다.

 

몸의 머리

 

바울이 사용하는 상(像)들은 계속되며, 매우 다양한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그것을 좇아가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전체-즉 머리와 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동시에 그 몸의 머리가 되신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1:18)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머리 상(像)은 두 가지 개념을 암시해 준다. 그 중 하나는 주인, 통치자 혹은 인도자의 개념이다. 이것은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비유이다. 우리는 우두머리 혹은 지배자를 의미할 때 어떤 단체들의 머리, 혹은 정부의 수뇌부를 지칭한다. 그러나 바울이 몸의 머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그와 동시에 몸과 머리의 긴밀함과 몸의 머리에의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상은 몸에 대한 머리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두 번째 상은 그들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다. 바울은 그 상이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우월하신 그리스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부를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가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머리이기도 하다(골2:10). 그러나 이것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베소서 1:21, 22에서 그리스도는 한 때 세상의 주인들처럼 보였던 정사와 권세들의 주로서 찬양을 받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를 향한 그분의 관심에 부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양자의 머리이다. 그는 승리하심으로써 모든 곳에서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 새로운 상황은 범세계적이다. 그것은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각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주와 머리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의 머리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 세상을 그 관심과 사역의 대상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교회가 자신만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한다고 추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주변의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낙관론은 기독교적인 가능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라는 사실은 분명 그분께서 통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신분의 우월성을 지적해 준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신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엡5:23). 그것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신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1:3). 남성의 우월한 신분은 직분과 관계가 있다. 이 말은 남성의 신분이 우월한 특성 혹은 자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의 신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예증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근본'이시며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함으로써 몸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근본'(biginning)이라는 말은 짐작컨대 희랍어 "아르케"를 가장 훌륭하게 번역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뿐 아니라 교회를 유지하시는, 다른 모든 힘 배후에 있는 창조적인 능력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당장에라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imminent creative power)이시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격체이신 그분은 권위에 있어서 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몸보다 우월하시다. 따라서 '근본'이라는 말은 내재성(immanence) 혹은 긴밀성(closeness)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은 히브리적인 어조를 담고 있다. 먼저 난자는 지명된 상속자, 종족의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그와 동시에 그 이후에 태어난 형제들 중에서 첫째였으나, 중요한 것은 그의 우월한 신분이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역사상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권위 있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먼저 나신 자이다. 그리스도는 "으뜸이 되려"하시기 위해 "먼저 나신자"가 되신다(골1:18). 이 모든 사실들은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상과 조화된다. 그는 머리로서 우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몸의 머리인 그리스도에 담겨 있는 무엇보다도 첫째되고 분명한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신분과 통치하는 기능에 있어서 우월하시다는 것이다.

 

[2]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 몸과 긴밀하게 그리고 활력있게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컨대, 바울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고 권고한다. 그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생소한 생물학적 개념을 도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생리학적인 상(像)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그 다음에 계속되는 내용으로 보아 분명하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그는 성장과 생명을 공급받기 위하여 몸이 머리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상을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의존성에 적용하고 싶어하는가? 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단언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로서 교회의 섬김의 수단인 은사들과 직분들을 부여하신다(4:11, 12). 우리 모두는 각자의 소명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 사랑 안에서 섬기며 그렇게 할 때 성령의 하나됨이 유지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4:13, 14). 이러한 묘사는 매우 역동적인 묘사이다. 우리는 순종과 사랑의 실천, 믿음과 지식의 습득, 교회의 특수한 직분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섬김을 명받는다. 이것들은 "머리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비유의 의미를 파악하는 배경이 된다.

 

몸의 "머리" 비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가 얼마나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으며 얼마나 총체적으로 하나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다.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바울의 말 또한 동일한 사실을 가르친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비유를 몸과 머리 간의 구별로 확대 적용함에 있어 바울이 마음에 두고 있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가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비유는 그 둘 사이의 구별을 다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 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나와 내 몸이 그러하듯이 통일된 두 개체 간의 구별은 있다.

 

이 단락을 마치기 전에 바울이 머리와 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바울은 몸에 관하여 말하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바울은 교회가 그 자체 안에 그리스도의 전체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유의 구절은 통상적으로, 단어들에 대한 주석이 아니라 바울의 메시지의 전반적인 대의에 의하여 해석되곤 한다. 성례주의자들은 그 구절을 인간의 신성화를 위해 성육하신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에 의해서 해석한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에 흘러넘치는 그리스도의 신인으로서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성례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일종의 생명이라는 물질의 저장소이며, 성례를 통하여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다. 성례주의자들은 머리ㅡ몸의 비유를 최대한 활용하여, 몸은 생명을 공동체 안으로 부으시는 머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창조적이며 능력 있는, 살리는[생명을 공급하는] 영이다. 성령은 머리로부터 나와 몸을 채우신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이 그리스도를 채우는 방식들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수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골1:24).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 사람"이 드러나고 실현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온전케하여야 한다. 화해가 이루어지며, 인간과 하나님이 그리고 인간들이 화평케 될 때, 그리고 새 인류가 전체적으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그리스도는 온전케 될 것이다.

 

전술한 것을 요약하자면, 몸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상은 그가 교회에 대해서 그 신분과 권위에 있어서 우월하신 존재이심을 지적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교회의 생명의 살아 계신 샘이라는 사실을 전해준다. 교회에 대한 그의 우월한 신분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긴밀한 관계와 대비된다. 두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다.

 

몸의 사역

 

예수님의 몸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희생적 사역을 성취하시는,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 몸은 세상에서 떠나 여기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지속되며 그의 고난은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골1:24). 그의 화목케 하는 직분을 이제 그 공동체가 맡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아직도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성령은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성령은 홀로 활동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 공동체 배후에서,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체를 수단으로 활동한다. 그는 공동체를 세우시고 실현하여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몸 이 되도록 구비하신다. 성령은 공동체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심으로써 그리고 공동체를 세상을 위한 희생적인 활동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공동체를 화목케 하는 사역자로 만드신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 행위로 세우신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가 계속 수행하는 활동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동일하다. 그러한 동일성은 바울이 언제나 매우 관심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다. 바울은 그 기능에 있어서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듯이, 몸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자신의 몸과 더불어 시작하신 사역은 역사에서 자신의 몸을 통하여 화목케 하는 그 사역으로써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영으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시대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서로에게 화목케 하시는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하여 형성하시고 실현하시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 보충적인 의미 혹은 뉘앙스를 띠고 있다. 그 근본적인 의미는 활동이다. 즉 몸은 활동으로써 외부로 나타나는 인격체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내용은 그 몸의 기능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의 실재에 대한 배경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전 구속 사건이다. 새 사람이 갈보리에서 존재하게 되었을 때 몸으로서의 그 공동체가 창조되었다. 그 몸의 활동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십자가에서 수립된 새 사람을 실현시키며, [2] 세상에 대한 화목케 하는 사역을 계속하는 일 등.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몸인 교회 간에 진정한 동일성이 존재한다. 그 동일성은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새 사람을 창조하셨듯이, 그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화목케 하는 사역 혹은 섬김을 계속하신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신분, 권위, 그리고 능력에 있어서 우월하시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자유롭고 은혜롭게 교회를 화목케 하는 사역에 그의 동반자로 부르시는 주님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분은 교회에게,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원수의 담을 허무심으로써 창조하신 생명의 보편성을 반영하라고 명하신다. 그는 교회에게 자신과 함께 사역하여 그 몸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라고 명하신다.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밖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어 있거나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몸은 몸이 아니라 시체에 불과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 간의 연합은 서로 맞지 않는 당사자들간의 연합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주이시다. 몸인 교회는 언제나 종이다. 그리고 순종이 없는 곳, 세상을 위한 화목케 하는 행동이 없는 곳에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활동하는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새창조가 활동을 개시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중에서 발췌(240-251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종교개혁 전야(1)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여러 곳에서 종교개혁의 의미를 살피고 한국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한국 저자들에 의하여 종교개혁자들의 평전이 출판되었습니다. 한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종교개혁자들의 모습은 한국 교회의 성장을 잘 보여줍니다. 이제 유학 가서 공부하여야 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학 가는 사람들이 줄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 가운데 가장 독특합니다. 복음이 증거 되고 단기간에 세계 최고의 성도수를 자랑하는 교회가 세워질 정도로 성장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복음이 먼저 들어갔던 일본과 비교하여 본다면 그 차이는 더욱 기이한 일입니다.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를 보면 이러한 은혜가 무색한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500년전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한 순간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 전조 증상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서 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적용하는 일에 우선해야 합니다. 도대체 종교개혁 전야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지 살피는 것은 매우 의미있습니다.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을 중심 말로 정의한다면 네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회의 탐욕입니다. 둘째 사제의 타락입니다. 셋째 사제의 무지입니다. 넷째 성도들의 각성입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 전야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상고하게 합니다.

첫째로 교회의 탐욕입니다. 중세 교회는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형식적인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당시의 권력자들과 끊임없는 결탁을 통하여 교회 부동산을 한 없이 늘렸습니다. 교회는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교회가 부자가 되자 하는 일은 건물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중세에 나타난 로마네스크, 고딕,돔 양식의 성당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습니다. 급기야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짓는 일에 돈이 모자라니까 면죄부라는 기상 천회한 방식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교회의 탐욕이 낳은 괴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교회의 탐욕을 향하여 일침을 가하였던 단체가 수도원과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프란체스코는 대표적인 청빈한 수도사입니다. 청빈을 강조하였던 수도사들은 교회의 탐욕에 대하여 회개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은 지금 세게 도처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땅과 건물들이 엄청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탐욕은 종교개혁의 아침을 오기전의 칠흑과 같은 새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탐욕으로 가득차면 복음이 바르게 증거되지 않습니다.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말씀이 증거되지 않고 조미료가 가득찬 말씀만이 들려집니다. 면죄부는 교회의 탐욕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는 강단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더 이상 회심의 설교는 하지 말자고 요청합니다.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은 경쟁 사회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성도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선포하지 말고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좀 조미료가 가득찬 달콤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설교를 하자고 말합니다.

교회가 탐욕에 차 있으면 타협하기에 딱 좋습니다. 그래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이를 만드는 일입니다. 더구나 요즘 교회가 힘든 시대에 설교자리 하나 얻는 것도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타협은 아주 절묘합니다.

교회가 커지면 소속된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습니다. 한 통속이 되고 의기양양합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마치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여 우상숭배의 자리에 있자 그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그에게 속하여 있는 자들은 부끄러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14:9-11]

누구에게 속하여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전야에는 탐욕스러운 교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탐욕의 중심에 있는 성도들이 탐욕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처럼 탐욕을 누리는 것이 축복이 된 것입니다.

부유함이 탐욕이 아닙니다. 부가 목적이 될 때 탐욕이 됩니다. 부는 나눔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평균케 하는 일에 쓰여 지도록 해야 합니다. 더구나 교회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역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개혁적인 목사님이 청년들을 위한 공간을 몇 백억 들어서 사서 공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때 10억씩 수도권과 지방에 건물을 사서 지역 청년들을 위한 공유 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하여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언지하에 거부당하였습니다. 그 교회는 잘 나갔고 더욱 커졌으며 갈수록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점점 빈약한 교회들은 숨쉬는 것도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대형 집회에 서는 강사들의 교회에 젊은이들은 몰리고 가난하고 한번도 그런 자리에 서보지 못한 이들의 교회에는 청년들이 씨가 말랐습니다. 작은 교회는 청년들을 혹사 시킨다는 헛소문은 큰 교회를 가게하고 놀랍게도 그 곳에서 더 바쁘게 사는 것을 봅니다.

교회의 탐욕은 종교개혁의 전야의 모습입니다. 더 높아지고. 더 커지고, 더 넓어지고, 더 많이 집중되고,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것이 바로 교회개혁의 전야였습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물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어떠한가? 

출처: 문화와 설교연구원/쉐퍼

|가ㅈ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회의 표지란 무엇인가?

 

박일민 교수(칼빈신학대학원)

 

 

지상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다. 그 중에는 천주교회도 있고, 성공회도 있으며, 개신교회도 있다. 개신교회 안에는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교회, 루터교회 등 많은 교회가 있다. 또 그 안에는 각기 많은 교단들이 나뉘어 있다. 그래서 어느 교회가 과연 참된 교회인지를 분별하기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어려움은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심했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많은 교회들 중에서 참된 교회를 구별해 주는 기준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그 기준을 가리켜서 교회의 표지라고 한다. 교회의 표지는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되어진다.

 

말씀과 참된 전파

 

참 교회를 분별케 해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또 말씀을 수호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서 주신 말씀만을 전파해야 한다. 이 말은 교회가 기록되어진 성경 말씀만을 전파해야 함을 의미한다. 성경에 없는 계시를 새롭게 받아 전하려 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역사적인 전통이나 학설들을 전파하려는 교회도 참된 교회가 아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말씀을 주시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말씀이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 그 말씀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서 그 진위 여부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설사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을 이해하고 실천함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만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이외의 것을 전해서는 안 된다. 이에 벗어나는 것은 참된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가감이 없이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또 좋던 싫던 자신의 느낌과는 관계없이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파해야 한다. 자기의 이해 관계에 따라 성경 말씀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어렵다고 피해 지나가서도 안 된다.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성경 말씀을 수단화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성경을 사사로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거나, 억지로 풀려고 하는 교회는 참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참되게 전파되는 기준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사도신경에 고백된 내용을 그대로 믿고 전파해야 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기본적인 내용들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사도신경이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믿고 가르치셨던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 천지창조,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사람되심,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의 용서, 성도의 육체적 부활, 영생, 최후심판 등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교회는 이러한 내용들을 그대로 믿고 전파해야 한다.

 

둘째, 성경에 무엇을 더한다거나 빼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성경은 조그마한 가감도 허락하지 않는 책이다. 죄인의 구원과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일점이나 일획을 더하게 되면, 재앙을 받게 된다. 성경에서 일점이나 일획을 빼게 되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 함에서 제하여 버림을 당하게 된다(계 22;18-19). 이해하기가 어렵다거나 현대 과학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성경에서 어떤 부분을 삭제하는 일이 있다면, 참된 교회가 될 수 없다. 궁금하다거나 꼭 필요하다고 하여 새로운 계시를 추가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성경 전체를 편협 됨이 없이 균형 있게 전파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는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다. 죄를 책망하고 저주를 경고하는 부분이 있고, 위로와 내일의 소망을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 내세를 말하는 부분이 있고, 현실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치는 부분이 있고, 가이사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 참된 교회는 이 모든 것들을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이 균형있게 전파해야 한다.

 

넷째, 성경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여겨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그 권위는 그 자신의 권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가진 권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말씀의 전파자를 말씀과 같은, 또는 말씀보다 높은 권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종이 아들한테 하다가는 버림을 당하게 된다. 헤롯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다가 충이 먹어 죽었다(행 12:23). 말씀의 전파자가 말씀의 권위를 가로채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말씀의 전파자가 아니라, 그가 주장하는 사상의 교주에 불과하다. 참 교회에는 이런 일이 없다.

 

정당한 성례의 거행

 

성례(聖禮)란 거룩한 의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자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거룩한 의식들이 행해진다. 예배, 기도, 안수, 결혼, 임직 등 모든 의식물들이 다 거룩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이 모두다 참교회를 구분하게 해 주는 성례라고 보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성례의 종류가 7가지나 된다고 말한다. 영세성사, 성체성사, 고백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종부성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로마교회와 달리,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인정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에서 신약 교회를 위해 보여준 예표도 하례와 유월절 잔치 의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서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하셨다. 주님께서 명하신 성례는 확대나 축소를 할 수가 없다. 선서식 같은 것으로 대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처럼 명령하신 성례를 반드시 말씀 그대로 거행하여야만 참된 교회라고 할 수가 있다.

 

주님께서 교회에 성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주는 효과적인 수단을 삼으시기 위함이었다. 성례를 주님의 말씀대로 정당하게 거행하면, 교회는 이를 통해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자체만으로 은혜가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례는 다음의 기준에 따라 행해질 때라야, 은혜의 수단이 되어지고 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어진다.

첫째,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행해야 한다. 정확한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고 행해지는 성례는 성례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방 종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술적인 의식과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성례를 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성경 말씀을 통한 그 의미에 대한 설명과 확인이 우선되어야 한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씻어짐을 의미한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쳐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짐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형제와 자매가 되어짐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 것에 대한 서약을 의미한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그 몸과 피를 내어 주셨음을 의한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영양을 공급받게 됨을 의미한다. 그의 죽으심을 땅끝까지 전할 것에 대한 우리의 다짐을 의미한다. 동일한 음식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이 피차 한 지체들임을 의미한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정당한 절차와 방식에 따라서 행해야 한다. 세례는 먼저 자신의 죄인임과 그리스도께서 구주가 되심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은 후에 행해져야 한다. 왜냐하면 세례 그 자체가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례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죄가 용서받아졌음을 인치는 표에 불과하다. 그리고 세례는 반드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한다. 고백이 없이 베풀어진 세례나, 삼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지 않은 세례는 정당한 세례가 아니다.

 

성찬은 먼저 말씀을 통한 의미의 설명이 있은 후에 행해져야 한다. 오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먼저 떡을 들고 사례한 후에, 나누어 먹어야 한다. 그 다음에 잔을 나누어 마신다. 잔을 나누지 않거나 그 순서가 바뀌면 정당한 성찬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성찬에서 가져야 할 결의를 다짐하며, 찬송으로 마친다.

 

셋째, 지정된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성례에는 지정된 재료가 있다. 세례는 물로 베푼다. 물 속에 잠그는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물 속에 잠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물을 찍어 바를 수도 있고, 뿌릴 수도 있다. 또 물을 부을 수도 있다. 또 물만 있다면, 특정한 장소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성찬은 누룩이 없는 떡과 포도에서 난 음료가 지정된 재료이다. 우유나 포도와 관계없는 술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반드시 지정된 재료를 사용하여 성례를 거행해야 한다는 것은, 그 재료 자체가 어떤 특별한 효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다. 또 그 재료가 성찬과 함께 특별한 형태로 변하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 재료를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넷째, 합당한 사람에게 베풀어져야 한다. 성례가 아무에게나 행해져서는 안 된다.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해져야 한다. 그러나 유아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아들은 아직 죄나 신앙을 고백할만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례를 예표하는 구약의 할례가 유아들에게도 행해졌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자들 중에 유아들이 포함되어 진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성찬은 그 의미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만 받아야 한다. 또 자기를 살펴서 죄를 회개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찬은 은혜의 수단이기보다, 오히려 죄를 먹고 마시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유아세례 후, 아직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이나, 범죄로 인하여 징계 중에 있는 사람은 성찬을 받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합당한 사람에 의해서 베풀어져야 한다. 성례는 개인적인 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성찬도 주위 몸을 함께 나눔으로서, 서로가 지체됨을 공적으로 확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례는 공적으로 그 자격을 인정받은 사람에 의해서 행해져야 한다. 부득이 하다거나 급하다고 하여, 아무나 성례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해서 집사도 성례를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빌립은 공궤를 맡은 집사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전도자의 자격으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다(행 21:8).

 

신실한 권징의 실시

 

참된 교회를 분별케 해주는 또 하나의 기준은 권징이 신실하게 실시되는 것이다. 권징이란 선한 일은 권장하고, 악한 일에는 징계를 가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된다는 것은 권징이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또는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행됨을 의미한다.

 

교회는 사랑을 내세워 범죄자를 동정하는 나머지 마침내 그 사람을 심각한 죄악에 이르게 하기가 쉽다. 또 작은 쓴 뿌리를 묵인하고 용납하다가 교회 안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쉽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다가 오히려 심각한 상처를 낳게 할 수도 있다. 또 일부 힘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권징이 악용될 소지도 있다. 그래서 교회는 권징을 신실하게 시행해야 한다. 고린도교회는 이 일을 등한히 하고 당을 만들어 분란을 일삼다가 사도로부터 심한 책망을 들었다(고전 5:12).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이 일을 잘함으로 칭찬을 받았다(계 2:23).

 

권징은 단지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교회가 권징을 실시하는 것은 성경의 실예와 교훈을 따른 것이다. 성경에는 교회에 직원들을 뽑아 세운 기록이 있다(행 6:1-7). 감독자와 장로들로 양무리를 치게 했고(행 20:28, 벧전 5:1), 피차에 가르치고 권면을 하여 덕을 세우게 했으며,(골 3:16, 살전 5:11), 필요에 따라 규례들을 작성했다는 기록도 있다(행 16:4).

 

또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하셨다.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감독자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행 20:28). 사도 바울께서는 어지러움이 아니라 오직 화평이 되시는 하나님의 교회를(고전 14:33) 질서대로 다스리라고 하셨다(고전 14:40). 사도 베드로께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부득이 함으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치라고 하셨다(벧전 5:2). 또 교회의 순결을 더럽히는 자들과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사귀지 말든지(살후 3:14), 내어 쫓으라고 하셨다(고전 5:2,13). 이러한 교훈은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에는 과연 권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교회의 혼란사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은 권징의 부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부 권징이 시행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시비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권징이 신실하게 시행되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권징을 신실하게 시행하는 것이겠는가.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성경적 표준을 따라야 한다.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일정한 질서를 유지하여 혼란을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피차 권면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서, 조직과 제도와 규범들을 만든다. 예배의 형식과 절차를 만든다. 믿음의 표준이 될만한 신앙고백이나 신조를 제정한다. 권징이나 교육, 또는 봉사를 담당할 직분자의 수, 그 임무와 자격 등을 재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성경적 표준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것들을 한 번의 제정으로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 어떻게 하면 질서를 잘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를 항상 연구하고 살펴야 한다. 그래서 오류가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한다. 시대와 환경에 따른 새로운 요구가 있으면 개선을 해야 한다.

 

둘째, 회개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

만일 교회 안에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단을 퍼뜨리거나 범죄를 하는 자가 있다면, 교회는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교회는 먼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죄인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를 할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와 순결에 치명적인 영향이 있을 경우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주님처럼, 채찍을 휘두르고 상을 뒤엎어서라도, 성전을 깨끗게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권징을 실시하는 목적은 교회의 순결과 질서를 바로 하기 위함이요, 범죄자를 회개하게 하기 위함이다. 권징은 결코 어떤 힘있는 사람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권징이 남용 또는 오용되고 있다면, 참된 교회라고 할 수가 없다.

 

셋째, 일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교회는 권징의 실시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 따른 일정한 절차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범죄자에게 공개적인 징계를 가하기 이전에 문제가 된 사실을 정확하게 분별하여서 오해나 실수가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범죄자에게는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두세 차례 회개를 촉구하여서 가급적 조용하게 해결되어지게 해야 한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증인을 세워서 다시 한 번 조용하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 다음에야 공적인 권면이나 책망을 고려한다. 이때는 범죄의 정도나 회개의 여부를 보아서 정직이나 면직을 시킨다. 또 성찬에 참여할 수 없도록 수찬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도저히 회개의 가망이 없을 경우에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서 출교를 명하기도 한다(마 18:15-17).

 

이름이나 소속 교파와 같은 명분만으로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내걸고, 조직은 그럴싸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모두 참된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참된 교회가 되려면 말씀을 참되게 전파하고, 성례를 정당하게 거행하고, 권징을 신실하게 실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들이 이러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쉬지않고 경주해야 한다

고객의 만족에 매몰되는 교회

차성도 교수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

고객을 만족시키지 않고서는 어떤 성공도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고객의 만족도는 점차 중요시되고 있다. 그래서 연말만 되면 고객의 만족도가 높은 회사나 상품들이 대문짝처럼 발표된다. ‘고객을 만족시켜라! 그리해야 성공할 것이다!’라는 슬로건이 대세를 이루면서 ‘고객만족’이라는 세상가치가 교회에도 보란 듯이 들어와서 설교, 예배, 주일학교에서도 고객(?)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시도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핵심요소가 설교라는 설문결과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는 너무도 중요하다. 이토록 중요한 설교에서도 고객을 만족시키려다 보니 설교는 점차 ‘좀 더 달콤하고 좀 더 순하게’ 변질되고 있다. 마치 술꾼들이 순도 100%의 위스키를 그대로 마실 수 없어서 순하게 희석하거나 달달하게 주스를 섞듯이... 왜냐하면 고객들이 입에 쓴 설교보다는 좀 더 달콤하고 좀 더 순해서 아무런 부담 없는 설교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복음을 부담스러워한다고 복음까지 적절하게 희석해서 복음도 달콤하고 순하게 변질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5-6)처럼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인가를 더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이기에 모든 교회들은 예배를 중요시한다. 그런데 이같이 중요한 예배에서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도 예외가 아니다. 예배에도 점차 바빠지고 편리를 추구하는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여 예배는 점차 ‘좀 더 짧고 좀 더 편리하게’ 변질되고 있다. 이제는 설교의 내용과 관계없이 20분 이내여야 명설교이고, 예배도 50분 이내에 마무리해야 은혜롭단다.

 

또한 고객들이 골프약속이나 각종행사 또는 바겐세일쇼핑이나 학원수업에 늦지 않으시도록 그들의 편리를 최대한 충족시켜드리는 예배도 마련해야한다. 고객들의 이런 요구들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고객들이 주저 없이 옮겨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배의 인스턴트 화는 가속화되고 있다.

 

이와 같이 예배가 고객의 만족이라는 세속가치에 빠져서 고객 중심으로 변질되고 있지만,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시 86:12)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주 나의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송하는 예배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여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의 최대 관심은 자녀교육이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자녀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자녀를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양육이 되어야한다.

 

그럼에도 명문학교에 입학해야 성공이며 무엇이든 재미있어야만 한다는 세상가치를 그대로 답습하여 주일학교는 점차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재미있게’ 변질되고 있다. 고객들의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주일학교를 최대한 간단히 줄이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주일학교를 짧게 끝내면 끝낼수록 칭찬을 받는 반면에 주일학교를 1시간 이상 진행한다거나 예전처럼 토요일에 제자반을 운영하는 교사는 외려 지탄의 대상이 된다.

 

더욱이 교회의 중직들까지도 자녀가 수험생이라는 빌미로 학생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꺼림으로 중고등부가 점차 와해되고 있다. 교회의 중직들조차도 지금 중고등부가 와해되면 도미노처럼 장차 교회 전체가 와해된다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또한 고객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다보니 주일학교에 재미는 넘쳐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고갈되고 있다. 이와 같이 주일학교가 고객의 만족에 매몰되어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재미있게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라는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b)라는 고백을 통해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순종해야하듯이 우리는 사람의 만족보다는 하나님의 만족을 추구해야한다.

 

성경은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의 일군으로 삼은 것은 바로 고객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임을 분명히 명하고 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 교회의 권위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 그것은 교회 그 자체을 위한 권위부여가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권위 이해의 요점이다. 이 점을 통해서도 권위의 부여가 교회의 기능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분명하게 알수 있다. 즉 교회에 주신 권위는 가르치는 사명과 교회를 다스리는 사명을 위한것이다.

 

   가르치는 권위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을 위해 위로부터 받은 가르치는 교리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취사선택의 권한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가르침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또한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도덕의 문제가 아니며,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의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 확정된 한 가지 사항일 뿐이다. 교회를 다스리는 권능에 있어서도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바른 질서가 확립되지 않으면 직무를 완수할 수 없다. 가르치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의 일치와 질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다스리는 사람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위임받은 직무에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지, 사람에게 권위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회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사회의 기존 질서 유지를 주장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중하게 피해야 할 부분이다. 또 한 가지는 질서라고 할 때, 교회에서는 말씀의 직무와 연결되지 않은 질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질서가 잘 지켜지는 교회는 평온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와 봉사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라는 의미이다. 앞에서 교회의 표식에 대해 말했지만, 교회의 표식이 분명한 교회가 바로 질서 있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본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모임을 통해서 행사된다. 이러한 권능을 실수 없이 대행한다는 것은 어렵다. 아무리 영적인 은사를 풍부하게 받은 개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단체라 해도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다른 단체를 통해 인간의 잘못이 확인되기 때문에, 잘못이 비교적 적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교회가 행사하는 권위는 무엇보다도 교리 또는 신앙의 조항들을 결정하는 권위이다. 이것이 결정되지 않을 때, 교회는 이른바 방향 잃은 배와 같아서 목적지인 구원의 항구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교리가 교회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각각의 설교자의 재량에 맡겨진다면, 교회의 일치도 없게 된다. 하지만 교회의 결정은 성경에 입각한 결정이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결정권이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교리의 결정은 이미 확인된 것이다. 교회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데,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한다고 저절로 질서가 서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결정하고, 각 개인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법이 바른 양심을 구속해서는 안된다. 한편, 이런 권위의 행사는 회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회의가 바른 기능을 하지 못할 때는 한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에게 권위가 집중되거나, 혹은 권위가 확산되어 어떤 것도 확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모든 회의가 항상 올바른 것만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행사하는 재판권 또는 치리권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이 열쇠를 복음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 과연 교회의 권위를 대표하고, 또 집행하는 것은 누구일까? 이러한 교회정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강요는』 그다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회정치의 여러 형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칼빈을 연구해 왔는데, 결과적으로 칼빈은 장로제 교회 운영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교회정치 형태에 있어서 문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도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출처 양무리 마을/아바다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는 우주적인 기관이며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유기적인 기관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누구도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이처럼 주님만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를 운영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바울은 교회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오직 한 분,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직 세우시는 이도 주님이시며 이제 세워진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아니고는 어떤 사람도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게 하기 위하여 각 교회마다 장로를 택하여 교회를 인도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을 위탁하였다.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보냄을 받았던 것도 바울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인식한 안디옥 교회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바울을 파송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권능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내려 주셨음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의 부름에 쓰임 받은 일꾼이었을 뿐이다. 물론 일꾼이 누리는 기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먼저 그 일꾼은 누구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도 그에게 영광을 입혀주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일을 통하여 교회도 역시 이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면이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늘의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지혜와 권위를 가지고 다스려 보겠다고 날뛰는 직분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이다.


이 점을 명심하여 오직 주님에 의해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직분에 따라 모든 노력을 다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이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wildfield&document_srl=367389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13:25).

유형 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뿌려져 있는 넓은 들판과 같다. 신자와 불신자, 거듭난 사람과 아직 변화 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천국의 자녀들과 악의 자녀들이 모두 회중 가운데 섞여 있다.

 

순수한 복음의 선포로도 이 상황은 막을 수 없다.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들은 이 상태를 변함 없이 유지해 왔다. 초대교회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자들도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경험을 했다. 현재의 사역자들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세상의 어떤 교회나 종교적인 모임도 알곡으로만 이루어진 단체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의 영적 대적인 마귀가 늘 가라지를 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엄격하고 철저히 훈련시키더라도 이 상황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성공회나 장로교, 감리교, 그 밖의 독립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깨끗하게 한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순수한 알곡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노력과 방법들이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가롯 유다와 같은 신자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많은 신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가라지를 뿝으려다 알곡의 뿌리가 뽑힐 위험도 있다. 이러한 열정은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해를 불러올 수 있다.

 

심겨진 알곡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는 전연히 가라지가 자라게 되고 그리스도에게서도 점차 멀어지게 되어 있다. 한편 어거스틴이 남긴 은혜로운 격언 가운데 깊은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 “오늘의 가라지가 내일의 알곡이 될 수 있다.”

 

- 존 라일, 존 라일의 예수묵상 365, pp 18-19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마이클 호든- 주님은 "내 교회를 세워라"하지 않고 "내 교회를 세우리니"하셨다

교회의 사역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를 통하여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세상을 향해 넘쳐흐르는 진정한 선물의 시혜를 받는 감사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무엇이다(12:28). 교회의 주께서는 내 교회를 세워라하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라는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고 말씀하셨다.

 

지상 명령을 주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내가 지금 떠나니 내 자리를 승계하여 내가 끼친 모범을 좇음으로써 내 구속의 일을 확장하도록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런 말씀을 주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

 

복음이 우리 뒤에,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가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에 의해 창조되어 의롭다 함을 받고 새로움을 입은 백성으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존재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심판과 은혜 안에서 활동하시는 장소이며 동시에, 심판당하고 의롭다 함을 받아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창설한, 그리스도가 세례, 설교 그리고 성찬 안에서 죄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역사적인 조직이면서 동시에, 믿음을 통해 살아 계신 머리에 연합해 있는 영적인 유기체다. 복음이 다른 모든 인간 활동에 앞서 우위를 갖는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교회도 그리스도가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셔야만 진정한 교회라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거느리셨다. 제자는 학생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의 학생은 오늘날 대학생과는 다르다. 선생이 교훈과 개인적인 교제를 위해 정기적으로 만나는 추종자들을 모은다. 강의를 하곤 교실을 떠나는 오늘날의 거리감 있는 교수(목사도 아주 자주 이런 식이지만)와는 달리, 이런 선생들은 학생들과 시간을 보냈고 학생들은 랍비로부터 정보를 받을뿐더러 그의 지혜와 모범을 통해 인격을 형성한다.

 

루터가 사도신경,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이나 겨우 아는 무지한 서민들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그들을 아랫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그 자녀들에게 주중이면 교리문답을 써 가르쳤다는 점에 늘 감명을 받는다. 칼빈과 다른 개혁자들도 주로 교리문답 선생으로서 목사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수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들 역시 일부요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공동체에 젊은이들이 연결되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언약의 상속자가 아니라 고아들 마냥 영적인 지도자, 코치 그리고 멘토들에게 환호한다.

 

성공하는 과학자는 선배들의 권위에 순복한다. 좋은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바이올린 주자 혹은 양조 기술자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써야 한다. 성숙과 질보다는 효율성과 규모를 중시하는 이런 사대에서 우리는 쉬운 네 단계로 바이올린 켜는 법 혹은 와인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전문가를 훨씬 더 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인(藝人)이 되기 위한 장기적인 헌신을 가치 우위에 두는 실천이다.

 

기독교인의 제자도는 목사와 교사들이라는 선물을 통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4:11-13,14-16)으로 세워지는 평생 과정이다. 이 사역은 부모와 가정의 친구들, 조부모와 어린이 체육 활동 코치들을 어린이들을 위해 말씀의 종이 되도록 한다. 또한 우리는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7-18) 가기 위해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

 

공증된 복음이 공증된 사역과 함께 온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스스로의 체험을 유포하며, 강조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는 자들이 아니다. 훈련과 시험 그리고 인정으로 하나님이 자격을 보증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선물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산을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하나님의 선택하고 구속하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결과이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296-299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아더 핑크(1886~1952) 목사님은 회개와 회심(回心)을 강조하는 청교도 스타일로 복음을 제시했기 때문에 부담을 느낀 그 당시 회중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그리하여 시무할 교회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더 핑크 목사님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열심과 하나님 말씀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타협하지 않는 회심과 거듭남의 촉구, 심오한 신관(神觀), 명확한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 등이 깊이 있고 적용성 있는 성경 해석과 더불어 제시된 그의 글들은 경박한 미국식 복음주의와 현대의 자유주의 신앙에 지친 사람들에게 청량제(淸凉劑)로 다가오고 있다.

 

- 조계광의 번역서에서 요약하여 옮김. 

 

 

 

아래는 아더 핑크 목사님이 로웰 그린이라는 형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아더 핑크 목사님께서 지적한 당시 교회의 타락해가는 모습은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에도 아주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들이다.

 

교회들이 성경적인 바른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잠식당해 가는 모습을 바로보노라면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조국의 교회들이 속히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며, 거룩을 회복하고, 경건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교회의 상태

로웰 그린에게 보내는 아더핑크의 편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 이에게

주님의 거룩하고 복되신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그 앞에는 높이 있는 천사들도 머리를 숙이고, 그의 거룩한 임재앞에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6:3)고 외칩니다. 그분은 우리가 겸손함과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공적 예배에서 거룩한 경외심을 찾기가 어찌나 힘든지요! 이방인들조차 그들의 우상에게 절을 할 때에는 고상함과 단장으로 처신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회칠한 종교인들과 관계를 맺을수록, 우리는 그들의 천박함과 방종함에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썩은 사과 속에 있는 잘 익은 사과는 썩은 사과를 온전케 할 수 없고 오히려 모두 썩게 됩니다.

 

 

형제의 12일자 편지가 제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23일자 저의 편지를 통해 형제의 마음에 말씀하심으로 인해 그를 찬양합니다.

저에게는 사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온유함은 하나님 앞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은사입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4)

 

그것은 성령의 열매의 한부분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우리는 온유함을 구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성구사전을 찾아보면 온유한 자에게 귀한 것들이 많이 약속되어 있음을 볼 것입니다. 온유함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29)

 

형제께서는 알려진 죄를 극복하는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써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형제께서는 제가 그 문제에 대해 쓴 것이 많지 않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은 지난 20년간 성공적인 삶에 대해 가르쳐진 내용에 대해 저로서는 찾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앞장서서 변론하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유능한 판단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별로 신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본적인 교리에 있어 상당히 불건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선택된 사람들을 영원히 구별하심을 부정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담당하심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 그 자신의 결정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참조:1:13)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6)

 

어떤 설교자나 교사가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에 불건전하게 되면,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그들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기초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위에 구성하는 것도 잘못되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참된 종들, 건전한 교사들은 이 땅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4:3)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소위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을 관용하고 시대의 표적들에 대한 말을 진지하게 듣고자 합니다. 내용인 즉 성경의 내용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흥미위주의 기사를 신문에서 오려 모아 놓은 것입니다 .

 

그들은 선교사의 연설을 듣고자 하나 건전한 교리 즉, 바른 가르침은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결코 오류가 없는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련한 자녀들은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언어의 혼란 속에서 사물들을 판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 판단 기준이란 이것입니다.

, 오늘날 종교적인 세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는 가르침은 바른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서는 항상 그의 말씀으로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세우시고 무장을 시키시고 그의 종을 보낼 때 그의 종은 반드시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인기가 없기 마련입니다. 사실은 중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가르침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어떠했습니까?

루터와 칼빈의 시대에 그들은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까?

비천하고 타락한 인간 품성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여,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사람들은 종교심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갖고자 했으며, 그들에게 어울리는 종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죄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정통기독교 국가도 그 자신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 안에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조금은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로마 카톨릭교에도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것이 많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그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 그리고 나서 성령께서 간증과 기도회를 갖게 해서 여인들이 남자 앞에서 말하도록 격려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함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님께 매우 헌신적이고, 매우 영적이고, 매우 건전하고, 죄인들의 구원에 관심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분별된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간증과 기도회를 갖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잘못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그들을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자 세상에 나왔음이니라"(141)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해 보라고 어떻게 명령했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2)

 

그러나 어떻게 그들을 시험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디모데 후서 4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의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바른 가르침의 한 부분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침묵입니다.

 

디모데 전서 212,13"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을 비교하고,

그들에게 고린도 전서 143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을 읽어주고 그들이 그 말씀을 감당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한다면 그들은 잘 감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밝혀준데 대해 감사할 것이고 그들의 실수를 자백하고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주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겉으로의 거룩함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갖고자 하며, 형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들에게 전해주는 빛을 거절하고 오히려 논쟁하려고 할 것입니다.

 

한번 시험해보고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그들에게 고린도 전서 1434절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라 오해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그 말씀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거룩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형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그 바른 가르침그들에 의해 용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형제조차도 원치 않음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으로부터 더 많은 빛이 형제에게 허락 될수록 말씀의 교훈과 명령에 지배 받을수록 말씀의 빛에 의하여 사람들과 종교적인 운동을 시험할수록 이는 그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바른 가르침을 따라 그들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1:18)는 말씀의 진리를 더욱 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근심은 육신이 원치 않는 어떤 것으로, 가련한 기독교계가 빠져들어간 비극적인 상태에 대한 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집트나 그리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던 것처럼, 이 근심을 통해 그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3:10 )

 

이 때문에 형제는 멸시를 받는 자 가운데 처하게 되나 에스겔 914절의 은총을 받는 무리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형제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다른 사람들은 우의(友誼)있는 젊은 사람들과의 교제로 멋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다니고 있을 때에,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를 탐하면서 그 배를 신으로 삼고, 음악을 듣는다든지, 타락한 성도들과 웃고 농담하며 방종에 빠져 있을 때에, 형제는 은밀히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고, 이사야 5919(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의 약속을 간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형제가 은밀하지만 효과적인 중보자가 되어, 모든 은총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 고통과 눈물이 하나님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이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저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일에 쓰디쓰게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를 멸하고 그 대가를 치루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나의 커다란 슬픔은 이곳저곳을 수없이 다니면서 또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능력 있는 중보자가 되겠다고 진정으로 다짐하는 사람을(제 아내를 제외하고) 한사람도 알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땅에 내던져졌고, 이 때문에 제 자신을 어디 적막한 곳에 격리시켜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겠지요.

 

그들은 모두 에스겔3331-33절에 언급된 사람들과 같습니다.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서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고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 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그들은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앉아 엄숙한 가르침에 놀라며, 이를 전하는 자의 용기와 신실함에 감탄하고 심지어는 그런 목회자와 함께 있음을 큰 특권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세한 적용에 이르러 곧 그들의 생활 속에서의 특별한 실패와 죄를 바로잡는 문제에 있어서는(신발이 발을 위축시킬 때에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을 등 뒤에서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함몰시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이 좋아하는 우상에 매어 달립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들이 중보의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련하게 속고 있는 몽매한 영혼들이여!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라디오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농담 섞인 대화를 하고 나서 그들의 방으로 물러가서 기도를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빈말이 아니고 마음의 고통과 눈물입니다.

 

어떤 마음도 세상적인 즐거움과 공허할 이야기로부터, 삼중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통곡으로 옮아 갈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함을 요구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속에 역사하는 성령만이 진실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형제여, 제가 돌보고자 하는 대부부의 사람들 가운데 진실함의 결여를 바라보게 될 때, 나의 영혼은 쳐지고 거의 눌리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미국을 떠나고자 했던 주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거의 틀림없이 그리고 은혜스러운 방법으로 저의 서신사역에 함께 하여왔고,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접촉을 통한 개인적인 사역은 거의 완전한 실패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33장의 마지막 구절이 엄숙하게 선포하는 것처럼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한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나는 개인적인 연약함과 실패 중에서도 제가 간절하게 찾았던 바, 충실하게 봉사할 사람의 손에 그것을 남겨 둡니다.

 

저는 이 편지가 형제에게 약간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방에 홀로 앉아 지난 수년을 돌아보고, 제가 이렇게 일찍 미국을 아주 떠나게 됨을 알고 나서, 공식적인 편지를 쓸 기분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그렇게 자주 그 마음을 제게 열어주었던 것처럼 저의 마음을 형제에게 열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저와 제 아내가, 저의 가장 훌륭하고 친절하고 가까웠던 친구들로 인해 겪었던 슬픔과 고민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여러 방법으로 관대하고 이기심 없이 우리를 도왔고, 우리는 그들에게 영적으로 참되고 부유한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바라왔습니다. 이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뜻에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정하신 최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우리가 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그들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우리의 바람들이 실현될 것입니다. 제가 너무 거리낌 없이 쓰는 것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어떻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종의 내적 경험들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해줄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형제에게 다시편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는 형제의 편지 안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로마서 7장에 대한 저의 소책자를 동봉해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범사에 축복을 기원하며 형제드림.

   

* 출처 :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1819

* 이미지 출처 : http://etc.usf.edu/clipart/54900/54920/54920_church.htm

 

출처: 좁은 길을 걸으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죽은 교회 / 김명도 목사

 서론:
죽은 교회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에서 죽은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신데 주님이 살아계시는데 죽은 교회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지 왜 교회를 죽었다고 주님이 책망하시는지,  죽은 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책망은 비단 사데교회만 아니라 죽은 것과 같은 오늘의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아닌지 자신을 살피며 회개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본문 계시록 3:1-6 말씀을 통해서 죽은 교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I.  죽은 교회의 특징
II  죽은 교회를 향한 책망
III  교회가 살려면

I. 죽은 교회의 특징
  계시록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장차 하늘에서 일어날 놀라운 일들을 강조하지만 주님이 재림하기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날 일을 더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의 요절은 17:14절인데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것이 계시록의 중심 요절입니다. 이 요절 한 절을 가지고 전개해 나간 것이 계시록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부단히 싸우는데 많은 성도들이 사탄의 공격을 받고 핍박을 받지만 반드시 나중에는 참 성도,즉 거듭한 성도는 승리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의 날이 있으므로 인내하며 죄와 타협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싸우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도란 진정 거듭난 성도들을 말하며 사이비 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 신자는 핍박을 받을 이유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상황윤리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미움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다운 성도는 진리를 수호하려다 보니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즉 사이비 신자들과 반드시 충돌하게 되므로 핍박과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디모데후서 4장에서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명령합니다. 참 성도나 참 목회자에 대한 핍박은 점점 더 해가는데 이유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떠나고 따라서 복음을 떠나서 형식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참 성도들을 시기하거나 조롱하게 되며 따라서 대적하게 됩니다. 오늘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은 외부에 불신자의 세력도 있지만 교회 안에 더욱 그런 세력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7에 “심판이 교회안에서 시작되었다” 고 경고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로 전하는 사역자들이 받은 고통과 핍박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합니다. 과거 초대교회나 중세 종교개혁시기에 얼마나 많은 정통신학자들과 진정한 성도들이 대적하는 손에 죽어갔는가를 보십시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Ulrich Zwingli 는 양편에 날센 도끼를 들고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힘을 합하여 천주교 군사와 싸우다가 스위스  Zurich 근처 Kappa 평야에서 순교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지옥에 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고 하며 눈을 감았고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죽은 그를 유품이라도 거두지 못하도록 유해를 불질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천주교 군사가 물러간 다음 쯔빙글리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거두려 갔을 때 놀랍게도 그의 심장만큼은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전설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다운 주의 종들은 복음을 왜곡하는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과 순교를 당하며 기독교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는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속임수가 극에 달하여 상상할 수 없는 영적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

소아세아 교회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는 믿음을 잘 지킨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 같은 좋은 교회도 있었지만 반면에 라오디아 교회처럼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한 중립노선을 걸어가는 기회주의적 교회도 있었고 오늘 본문에서 읽어보는 사데 교회처럼 주님으로부터 “죽은 교회” 라고 꾸중을 듣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으면 분명 부모님은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기 위해서 꾸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내가 무엇을 잘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꾸중을 들으면 무언가 신앙생활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책망을 받으므로 돌아서서 회개해야 하는데 사데교회 성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럼 과연 사데교회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했길래 “죽은 교회” 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교회란 건물을 말함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의 말을 듣고 순종치 않았습니다. 본문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고 했으니 라고 우리 속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살아있다고 떠들어도 하는 행위 즉 신앙생활 양상을 보니 그것이 살아 있는 성도가 할 일이 아니고 죽은 사람 즉 영적으로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성도들도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설교 듣고 헌금도 하고 성례식도 하고 성도의 교제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주를 봉사한다고 했지만 주님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터키에 기원 1 세기에 존재하던 사데교회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로 사데교회를 죽었다고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말은 단지 해위가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복음을 전해도 건성으로 듣고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만은 남에게 자랑하고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리도 모르고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고 봉사와 전도의 열이 없는 그런 생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저들의 믿음이 옳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신앙을 인정받는 길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보다 사람의 이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풀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동정녀 탄생을 이성으로 어떻게 해석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을 이성적으로 어떻게 입증합니까?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지혜 있다고 해도 피조물에 불과하며 피조물은 조물주를 따라가지 못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어서 지혜가 극히 제한되어있습니다. 종이 한 장이 앞에 가리어있어도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5분 이후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그런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미련한 인간은 자기의 이성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에게 순종할 것 뿐입니다.

사데교회가 <죽었다>고 하는 주님의 책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 있다고 하나 실은 죽었는데 그 첫 이유가 “행하는 것을 보니 죽은 것” 이라고 했습니다. “행한 것을 본다” 는 말은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주님에게 숨겨질 일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은 저들의 믿는 도리를 모르거나 아니면 알아도 머리로만 알고 실천생활이 없기 때문인데 어느 편이건  모두 주님의 책망꺼리입니다. 믿음의 도리를 모르면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신앙생활을 바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고 하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도 아들이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나가서 마음대로 악행을 행하면서 “나는 아무 집 아들이라” 고 하면 이는 분명 가문을 더럽히는 결과로 아버지의 혹독한 책벌을 받을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러하거늘 영의 아버지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마다 투철한 교리 공부가 필요합니다. 믿는 도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는 30년 교회를 다닌 성도도 아는 것이라고는 “예수는 우리 구주인데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고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에 가서 영원토록 산다“ 고작 이런 정도의 신앙이라면 자세한 기독교의 심오한 교리들을 알 턱이 없습니다. 설교가 너무 현세 중심적이고 도덕중심이고 바른 요리 문답 공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용서하게 되는지? 그분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지?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는 것인지, 성례식의 참 의미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도 아무것도 기독교의 교리를 전할 수가 없는데도 남에게 그가 교리를 다 아는 것처럼 자처합니다. 이런 사람을 오늘 주님은 죽은 교회라고 책망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 1563년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Zacharius Ursinus 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면서 주일마다 반드시 몇 문제씩 매주 교리를 공부하도록 작성했습니다. 전문 129문으로 되어 있는 이 요리문답은 가장 개혁주의적인 신조이지만 일년에 쉰 두번 다가오는 주일, 매 주일마다 예배하기 전에 기독교의 교리 두 문제 혹은 세 문제씩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1월 첫 주일에는 제1문 “살거나 죽거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뇨?” 이렇게 물으면, 대답은 “죽거나 살거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몸과 영혼이 살거나 죽거나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피로서 나의 모든 죄의 값을 다 갚아주시고 마귀의 지배에서 나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 그는 나를 잘 지켜 주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그의 목적에 부합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그는 영생을 나에게 보장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뜻을 다하여 그를 위해 살도록 준비해 주신 것이다.” 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제2문에는 “당신이 이 위로의 축복 가운데서 기꺼이 살고 죽기위해서는 몇 가지를 알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Heidelberg Catechism 은 답하기를  “세 가지인데, 첫째 나의 죄가 커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그 비참한 결과에서 해방되었는가를 아는 것이요, 셋째는 그러한 구속에 대하여 내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라고 하니 이 얼마나 명확한 교리인가요? 이런 교리들을 교인들에게 매주일 체계 있게 가르쳐주면 이단이나 <사이비 사역자나 부흥사> 를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교리를 모르니 교회마다 분규가 시끄럽고 교계가 어지러운 것입니다.

물론 다른 신앙고백서도 요리문답이 붙어 있지요. 가령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대요리문답 196문과 소요리문답 107문이 붙어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은 원래 만든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들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하여 제정한 것이고 비교적 작아서 “소요리문답” 이라고 부르고 “대요리문답” 은 교회론까지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기독교의 믿는 교리를 총망라하여 체계화하여 “대요리문답” 이라고 하고 성도들에게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인데 매주 몇 문제씩 가르치도록 구성된 것이 아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나온 가장 정확한 개혁주의 교리를 아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신조중 하나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교리 공부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단상에서 비성경적인 내용을 선포해도 그냥 묵과 합니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없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그 목사는 당장 파면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은 문자 그대로 정통을 지켜오는 교단입니다. 한국 교회 중에 말씀을 바로 전하고 권징을 바로 하고 성레식을 바로 행하는 교회는 보기 드뭅니다.

또한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 라고 책망 받은 이유는 믿는 도리를 알되 머리로만 알고 그런 교리를 믿지도 않고, 따라서 그런 교리대로 실천하며 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역사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책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기독교 교계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기에 무르익은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살아 있는 교인, 일을 많이 하는 교인, 모범적 헌신적인 교인”이라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교인입니다. 죽은 교인은 영적생명력이 없습니다.

죽은 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교리의 착념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말하면서 교리에 착념하여 저들을 바로 인도하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옷을 더렵혔다” 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의 옷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주님의 의를 저버렸고 말씀을 떠났다는 말이니 그 행실이 온전할 리가  없으며 따라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사야 64:6에 “우리의 의는 모두 더러운 옷 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옷을 입고 어찌 하나님에게 칭찬받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또한 이사야 4:1에는 “그날에 일곱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우리가 우리의 떡을 먹으며 우리의 옷을 입으리니 당신의 이름으로 일컫게 해달라” 고 애원하는 모습을 읽어보는데 마치 사데 교인처럼 위선적인 교인들, 혹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나와서 참 성도인척 위장한다는 말입니다.

2절에는 ‘일깨워“ 라고 했는데 영적 수면에 취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면 반드시 사탄이 침노합니다. 실수하여 실족하는 이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하다가 잠을 자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잠을 자도록 자장가를 불러주는 목회자들이 수두룩 합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에서 죄 이야기를 말하지 말라“ 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죄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이 기분을 상하여 다음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겠는가?“ 혹은 ”피곤하면 하루쯤 교회에 빠진다고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 피곤한 사정을 잘 아시는데...“  ”기도하면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성경을 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기도만 하면 된다“ 라고 하는 요즘 소위 Contemplative Meditation 을 주장하는 영성훈련가들의 말, “찬송가는 너무 진부하고 장송곡 같으니 세상에서 부르는 템포가 빠르고 신나는 음악으로 찬송가를 대체하자“는 퇴폐한 사이비 목사들, 이 모든 일들이 교회를 영적 수면으로 빠져 들게 합니다.

교회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생활이 침체해서는 온갖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요즘은 목회자의 말이라고 비판없이 믿으면 큰 낭패를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너무도 성경을 왜곡하는 분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거짓말을 가끔하게 되고 이들은 주께서 피로 사신 성도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신앙생활하기가 어럽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 성도님의 말대로 목사마다 다른 소리를 하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성경을 체계있게 공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달하면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자연히 분간하게 됩니다. 문제는 성경공부나 요리문답을 등한히 하는 타성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II. 죽은 교회를 향한 책망
   죽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대단합니다.  “만일 회개하고 일깨지 아니하면 주님이 도적 같이 임하신다” 고 했습니다. “도적같이 임” 하는 것은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 고 살전 5:4에 말합니다. 그러나 벧후 3:10에는 “도적같이 임한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성경구절을 놓고 서로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잘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으니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방심하고 세상의 연락에 취해 있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합니다.  

여기 본문에서 사데교회를 향하여 책망하는 말씀 중에 “도적같이 임한다” 는 말은 심판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요즘 교회에는 “심판” 이란 말이나 “지옥” 이란 말을 강대상에서 들어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신학에서는 지옥과 천당의 개념이 뚜렷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분이고 그래서 죄를 참지를 못하는 분임을 설교하는 목사도 드물고 그런 설교를 듣는다고 해도 예배를 마치고 나면 모두 잊어버리고 맙니다.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본질적인 것은 간직하고 지엽적인 것은 문화에 동화한다” 고 말하지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지엽적입니까?  하나님의 법가운데는 casuistic law (사례법) 이 있고 apodictic law (기본법) 이 있습니다. 사례법은 어떤 사건 중심으로 그 사건에만 해당되는 법입니다. 가령 남의 양을 도적질하면 4배가 갚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양을 도적질 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또 민사법이니 각 나라마다 헌법에 참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대로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민사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란 말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때 이건 모든 사람,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모든 인류가 지켜야할 기본 법입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할 때 관습 (Custom) 이 있고 원칙(Principle)이 있습니다. 원칙과 관습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가령 집집마다 외부 손님을 맞으면 발을 씻어주는 것은 당시 Palestine 에 국한된 관습이지 그것이 시대나 문화를 초월해서 항상 남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요 4:24) 는 말은 그런 관습법이 아닙니다. 원칙 (Principle) 입니다.  원칙의 문제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어떤 이유로든지 그 원칙은 변개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다면 예배의 어느 부분이 ”진수“ 이고 어느 부분이 ”지엽“ 적입니까?  대부분 교회가 음악에 대해서는 자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예배시의 음악은 예배의 일부가 아닙니까?  예배란 설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예배 전체 요소를 모두 내포합니다. 기원, 묵도, 설교, 창양, 찬송, 헌금, 성례식, 축도 어느 하나 지엽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두 진수이며 필수입니다. 지엽적인 것을 말하려면 예배 장소와 예배 시간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시행하면 될 것입니다만 개혁주의신학은 예배를 성경적으로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요즘 기독교 교계가 타락하고 성직자가 타락하여 남의 웃음꺼리가 되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예배를 가볍게 생각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극장으로 변해 갑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수은자 중심이 아닙니다. 예배는 항상 시은자이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거룩하게 예배하는 길이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영적 예배로 성경대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데 교회는 나름대로 그들도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고 또 설교도 했을 것이고 성례식도, 시편을 노래하며 찬미도 불렀을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책망했는데 그 책망은 가장 가혹한 책망으로 “도적같이 임하겠다”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도적 같이 임하여 무엇을 하신다는 말인가요?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III  교회가  살려면
    죽은 사데 교회가 살 길은 없을까요?  사는 길은 회개하는 길입니다. 본문은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흰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유혹을 이기는 자 신앙을 지키는 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며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으시겠다고 신실하게 약속하십니다. 회개 운동입니다. 오늘의 교계에는 회개 운동은 거의 없고 대개 무슨 부흥운동이니 영성운동뿐입니다. Rick Warren 목사의 책에는 “회개” 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요새 나오는 모든 best seller 기독교 서적은 하나같이 현세 중심이고 현세의 성공중심입니다. 중고생들이 많이 보고 있는 “Secret ” 이라는 책도 모두 예수를 이용하여 인생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내용일색 입니다.  이런 책들이 청소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해도 교회의 목회자들은 오히려 이런 서적을 장려합니다. 이것이 퇴폐한 현대의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교회가 살려면 몇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깨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성경 교리에 밝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기독교가 침투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성경과 함께 개혁주의 신조들을 읽어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는 필수입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믿을만한 개혁주의 전도자들과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입니다.

둘째,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율법주의” 라고 매도합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이건 헌법을 지킵니다. 천국 시민은 하나님의 법인 성경말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은혜를 아는 것은 율법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제정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이 여럿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골자는 첫째, 율법을 통해서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율법은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내가 다 지키지 못할 율법을 내 대신 완전하게 십자가상에서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모두 지켜주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율법의 목적은 우리 생활의 지침입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표준과 규범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 15, 21, 23, 24 절 등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따르는 자요 내 제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폐기론자” (antinomian) 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율법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혼동한 것입니다.

셋 째로,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달나라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칫 성도는 세상의 물결 따라 흘러가기 쉽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오늘 교회가 얼마나 세상에 물들어 있는가를 보십시오. 교회에 다방을 차려 놓는 교회도 있습니다. 예배는 세상의 풍속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열린 예배” 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뉴스에는 시카고에 있는 Willow Creek 교회에서는 그간 열린 예배를 실험해 보았는데 이제는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Christianity Today” 잡지가 보도합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인데 바로 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벗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일을 해야 하며 절대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넷째로. “흰옷을 입으라” 고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사장직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제사장 직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는 선지자 직분과 왕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직분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도 드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주님의 세 가지 직분을 모두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등한히 하면 주님의 선지자 직분을 믿지 않는 것이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의 왕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의 가리움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구약부터 모두 “가리움, cover" 의 종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니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었습니다. 속죄소도 백성의 죄를 가리는 목적입니다. 속죄일의 희생양도 백성의 죄를 그에게 짊어지게 하여 죄를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흰 옷을 입을 때 주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덧입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을 들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오늘 계시록 3:1-6 말씀을 통해서 왜 사데 교회를 주님이 “죽은 교회” 라고 하셨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사대 교회는 형식만 있고 진액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실속이 없는 형식적인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착각했던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교리가 없고 신앙생활에 열매가 없는 교회라서 주님으로부터 “당장 심판하시게다”는 혹독한 책망을 들었던 교회입니다. 이것이 어찌 2000년 전 소아세아의 적은 교회 였던 사데교회에만 국한된 말씀이겠습니까?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잘못된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현대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책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주님에게 책망 받을 자리에 있지나 않은지요?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리스챤” 이라고 자부하지 마십시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서 제61문에 보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하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주님의 책망의 대상입니다. 바른 개혁신앙을 지켜 나갑시다. 사데 교회를 향한 책망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합시다.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 가십시다. -죽은 교회, 끝-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 마태복음 강해 66 (마13:23-30) **

박윤선 박사

 

<본문>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참조>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36-43)


<강해>


주제 * 알곡과 가리지의 비유

본문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로 알려져 있는 말씀이다.

내용은 예수께서 풀어주신 말씀(13:36-43)처럼 간단하다.

예수께서 옥토(교회)에 알곡(신자)을 뿌려 자라게 하셨는데 주인이 잠을 잘동안 원수(마귀)가 와서 가라지(불신자)를 뿌리고 갔다.

처음 자랄 때는 잘 몰랐지만 점점 커지면서 가라지와 알곡은 구분되게 되고 종(사역자)들이 이를 뽑아 버릴까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말리신다.

그 이유는 가라지를 뽑다가 하나라도 알곡이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심판때까지만 그냥 두라는 말씀이다.


1.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

어느 교회에든지 신자와 불신자는 함께 있다.

진실한 신자들 틈에, 장사속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서나, 편리 때문에 찾아 드는 이도 있고, 단순한 피안의 장소로 찾는 사람도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사단의 자식(악의 씨)도 있어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알곡이 더 많기는 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인들은 이런 가라지들 때문에 시험이 든다든지, 신앙이 흔들리면 그것은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고 가라지를 뿌린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가라지들을 통하여 더욱 알곡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가라지를 그냥 두신 이유는 알곡 때문이지 가라지가 이뻐서가 아니다.

가라지는 어떤 때는 알곡보다 더 잘자란다.

키도 크고, 열매도 틈실한 것이다.

그것은 좋은 옥토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교회안에서 가라지가 대우받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잘되고, 대우받는 것 때문에 결국 그가 가라지 인것이 들어나게 되는 것이다.

숨어 있으면 가라지 인지 알곡인지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라지는 자신이 결국 가라지인 것을 드러내게 된다.

이렇게 가라지가 구분 될때 뽑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구별할 수 있는 데도 그냥 두시는 것은 알곡을 다칠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가라지를 그냥 두시거나 더 잘되고, 대우 받는 것에 시기심이나, 불평 불만을 가져서는 안된다.

가라지를 그냥 두신 이유는 알곡들이 다치지 않고 잘자라게 하시기 위함이다.


3. 심판 때에는 가라지와 알곡이 구별되어진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의 운명은 꼭같은 양분을 먹고 잘 자랐어도 불가운데 던져진다.

그러나 알곡은 곳간에 들어간다.

아무리 형통하는 것 같아도, 잘되고 대우받는 것 같아도 결국 가라지는 불에 타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곡된 신자들은 가라지 때문에 시험에 드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추수때에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는 것 처럼 마지막 때 심판날에는 신자와 불신자가 가려진다.

그 운명도 하늘과 땅 차이다.

하나는 영광 하나는 불에타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모든 신자들은 좀더 자신과 감사함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4. 가라지와 알곡은 씨가 다르다.

아무리 가라지가 알곡을 닮으려해도 알곡이 될 수는 없다.

근본 씨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태어나지 못하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참된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근본이 다르면 안된다.

콩심으면 콩나고, 팥심으면 팥난다.

우리 근본이 인간인가 예수그리스도인가를 돌아보라.

타락하고 죄지은 인간은 결코 알곡이 될수없다.

에수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만 알곡이 되는 것이다.

그는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15:17)


            ****************   교     훈  ****************

1. 교회에 악한 사람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2. 가라지는 잘 자라기 까지는 구분이 안된다.

3. 가라지를 그냥두시는 것은  가라지 때문이 아니라 알곡 때문이다.

4. 가라지 씨와 알곡의 씨는 다르다. 즉 가라지가 알곡은 될 수 없다.

5. 반드시 가라지는 불이 타게된다.

6. 가라지 때문에 시험에 드는 자는 마귀를 기쁘게 할 뿐이다.

7. 가라지를 알더라도 뽑아 태우는 것은 심판때이다.

 

 

출처: 박윤선 박사 주석에서/생명나무 쉼터


그대는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제1부-

김요한 목사

 

제1부

마태복음 13장에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무리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한 무리는 알곡이고, 다른 한 무리는 가라지이다. 어떤 사람이 알곡이고 어떤 사람이 가라지일까? 먼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시는 그리스도의 해석을 살펴보자.
비유 :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 " 마태복음 13장 24~26절.

해석 :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13장 37~40절.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

이 비유는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분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말씀인 진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로 이끌고 계신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곡식을 여물게 하여 당신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밭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밭"의 진정한 의미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씨앗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뿌려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밭에 좋은 씨만을 뿌리셨지만, 밭으로 표현된 교회 안에는 가라지도 함께 자라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가 나오는 씨를 절대로 뿌리지 않으신다. 가라지는 언제나 사단이 뿌린 씨에서만 나오게 된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알곡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 의해서 그 성품에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들을 뜻하며, 가라지는 오류와 거짓 가르침에 의해서 성품이 변화함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성과 특성을 나타내는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자는 반드시 성품과 생애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사단이 교회 안에 뿌려 놓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경우에는 그 성품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변화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를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들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오도되어서 구원에 관한 진리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에는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기 위한 방법으로서 상대방의 밭에 잡초의 씨를 뿌려 놓았다. 잡초씨를 뿌릴 때에는 아무 씨나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밭에 심어 놓은 곡식과 비슷한 모양으로 자라나는 잡초씨를 뿌려놓음으로써, 싹이 난 후 한동안 곡식과 잡초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잡초는 곡식과 함께 어울려서 자라나서 밭의 주인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와 같이 사단도 그의 악한 씨를 천국의 아들들인 "좋은 곡식"이 자라는 밭에 뿌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방해하고자 결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은 자기가 몰래 뿌려 놓은 씨에서 나오는 가라지들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과 책임을 그리스도께로 돌리고 있다. 가라지들도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오고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알곡과 별다른 차이점을 볼 수 없지만, 가라지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사단은 교회 안에 뿌려 놓은 수많은 가라지들을 통해서,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을 감추어 버리며, 그리스도 교회를 세속적으로 만들고, 목회 사업을 하나의 장사 수단으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를 세상에서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교회 안에 참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탄식을 하게 된다. 아직 어린 곡식들이 주변의 가라지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혼돈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교회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부흥과 개혁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교회 안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라지들의 방해와 비웃음으로 인하여 저지받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주인의 종들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자, 자비로운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품성과 동기를 판단하는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성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우리의 생각에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교회에게 끊어버리려고 하다가는 반드시 실수하게 된다. 왜냐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그 겉모습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가라지와 알곡은 세상 끝에 가서야 천사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사람의 동기와 성품을 판단하는 대신에, 사단이 교회 안에 뿌려 놓은 거짓 가르침과 오류들을 뽑아버림으로써, "좋은 씨"에서 올라온 알곡들에게 올바른 영적 양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이다" 라는 말씀을 잊지 말라(요17:17). 오직 진리만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리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만 당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실 수 있다. 이와 반면에, 사단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거짓 가르침을 퍼트림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접촉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태초이래로 사단의 유일한 공격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였다.

 

가라지의 최후의 운명

가라지는 그 잎이 푸른 동안에는 곡식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밭의 곡식이 익어서 누렇게 되면, 곡식들은 열매가 충실하게 익어서 고개를 숙인 모습을 나타내지만, 가라지들은 아무런 쓸모없는 잡초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지금은 경건의 모양을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가라지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섞여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끝인 추수 때가 되면,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 때에는 교회 안에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하지 않았던 자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심판의 때에 주님께서는 알곡을 거두어 하늘 곡간에 거두어 들이실 것이며, 가라지는 한데 묶어서 불에 태우실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가 지금은 거룩한 교회 안에 섞여 있는 상태로 자라나고 있지만, 종말에는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는 한 손이 모든 자들에게 각자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여 줄 것이다. 진리의 빛을 가진 종들과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쳤던 목자들을 나누실 것이며, 백성들에게 경고의 기별을 전했던 충실한 종들과 백성들이 깊은 잠에 취하도록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은 불성실한 파수꾼들을 정확하게 갈라내실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빛과 진리대로 순종의 생애를 산 양떼들과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거절한 이리떼들을 정확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에 의해서 세상 끝에 단으로 묶여져서 불에 던져질 사람들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13:41,42. 그리스도께서는 풀부불에 던지우는 자들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라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고 주말하다 교회에 다니는 종교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서야 비로서 자신들이 사단이 심어 놓은 거짓 가르침과 거짓 목자들에게 기만당했음을 깨닫고 풀무불 속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법이 폐하여졌다고 말함으로써, "불법"을 조장하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라!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키며 손가락질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들은 그런 거짓 형제들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에도 거짓 형제들이 있었지 않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이들도 열두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종하여 다녔다. 요술장이 시몬과 같은 사람도 침례를 받고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공언하였다. 바울을 버리고 진리에 등을 돌린 데마도 한 때는 충성스런 신자로 헤아림을 받았다. 심지어는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은 사도 가운데 하나로 끼였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면서 가롯 유다를 붙드셨던 자애로운 모습은, 그분께서 패역하고 이기적인 인류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동안 참고 계신가를 보여준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참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거짓 형제들에 대해서 참으라고 부탁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교회 안에 거짓 그리스도인들(가라지)이 남아 있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당신의 진리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끝까지 주고자 하신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그분의 깊은 사랑과 자비를 보게 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스스로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오류와 죄에 빠진 형제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깊이 동정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과 연합하여 오류와 죄에 참여해서는 않된다. 죄인을 사랑하는 것과 죄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지만, 죄와 오류와 세속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성장해 가는 두 무리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마찬가지로 가라지에게도 같은 밭(교회)에서 같은 햇빛(성경 말씀)과 같은 비(성령)를 받으면서 자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추수할 시기가 되면,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명히 분별" 하신다(말 3:18). 그리스도께서 친히, 누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살기에 합당한지를 결정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각 사람을 그 성품과 생애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대 위에서 아무런 무게도 더하지 못할 것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곧 성품이다.

교회라는 밭에 뿌려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알곡은 아니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통하여 거룩하게 변화된 성품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상 끝까지 두 무리가 함께 어울려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하에서 한 무리는 곡식으로 여물어서 추수 때를 기다리게 되며, 다른 한 무리는 가라지의 모습과 본성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불에 태워지기 위해서 단으로 묶여지게 될 것이다. 그대는 혹시 "불법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 속하지 않았는가? 그대는 혹시 희생과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절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써, 가라지가 되기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도 그대를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지 않은 지금, "좋은 씨"만을 뿌리시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라. 그대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대의 마음을 낮추고, 그대 양심 속에 조용히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자신의 생애를 맡겨라.

 

                         Living the Life of the Lifegiver 에서 발췌

 

 

 

출처: 진리회복선교회  http://blog.daum.net/8520592/14142062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천국, 교회, 가라지 (마13:24~30) / 박윤선 박사 (주석에서 발췌)

 

  마 13:24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여기 "천국"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헬라원어로 헤이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을 가리킨다. 이것은 현세에 있어서는 진정한 교회요, 내세에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이고(계21:1,22:5), 사후의 세계에는 천당이다(요14:1-4). 이 귀절들에 나온 비유에서는 천국이란 말이 교회를 의미한 방면이 농후하다. 진정한 "좋은 씨"란 말은 예수님께서 이 뒤에 해석하신 대로(마13:38), "천국의 아들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 마음속에 참되어 받은바 되어 그 생활에 변화를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약1:18; 벧전1:23).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히 받으면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생활이 이세상의 사람과 달라진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산다.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 뒤에 해석하신 대로 (마13:38,39)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원수는 마귀"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 마귀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악도들도 섞여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의할 말씀은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왔다는 것이다. 곧, 이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한 씨가 들어온다는 말씀이다. (1)악한 씨는 신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마음에 들어와서 자라고 커서 장차 그의 신앙생활을 무실하게 만든다. (2)우리가 어떤 때에는 무엇을 선하고 유익하다고 하여 택하였으나 후에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도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참으로 선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 그것을 택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교회 안에 있는 악도도 한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실의 시기에는 그 본색을 나타낸다.


  마 13:28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들이 가라지와 같이 악한 결과를 나타낸 교회원을 교회에서 아주 단절시키고 아무런 소망도 두지 않으려는 심정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한 처분은 교회의 권징이 아니고 마지막 심판인 것이다. 권징은 단절하여 내어버리는 처분이 아니고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실시하는 사랑의 처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라지를 뽑는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고 자극성 있는 약을 주는 것과 같은 일종의 배양 행위이다.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이 말씀은 윗말에 있는 바와 같이 범과자를 아주 심판하여 내어 버림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징 행위를 금지함이 아니다. 교회가 범과자에게 대하여 권징하여야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바 있다(마18:15-20). 권징 실시의 필요에 대하여는 신구약이 일률적으로 가르친다.(고전5:1-13; 살후3:14,15).


 마 13:30

  둘 다 추구 때가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이것은, 교회가 그 교훈 노선이나 생활 노선을 분변 없이 해도 좋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사상이나 행위에 대하여 처리하는 것을 금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마16:6,12). 이 구절들에 있는 말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인신에 정죄함을 금지하는 것뿐이다. 인신 정죄는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 풀러라는 학자는 인간으로서 인신 정죄를 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말하였다. 그것은 (1)교회에 있는 외식자를 인간의 지혜로는 지목하기 어려운 까닭 (2)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인간이 한다면 악한 신자들도 외식자로 오해될 우려가 있다. (3) 교회에서 그렇게 불가능한 심판을 한다면 아직 나타나지 못하였던 귀한 영광의 그릇들이 쓸 데 없는 자로 오해되어 내어 던짐이 될 우려가 있는 까닭 (4) 진실한 신자들과 불신실한 자들이 서로 섞여 있으므로 신자들이 깨어 있게 되고 더욱 경건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개혁파 정통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제27장 교회'에서 발췌 


11. 개인이 교회에 소속하는 것은 성령을 통한 그들의 소명에 근거한다. 그러나 성령의 소명이 외적인 말씀을 통하여 전달되기 때문에, 즉 선택받은 자의 마음에는 유효하게 하고 유기된 에게는 전적으로 무효하게 하기 때문에, (1) 오로지 성령을 통하여 전달되고 오로지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통하여 신자 개인에게 보증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불가시적인 교회 공동체는 또한 가시적 측면, 즉 선포와 말씀의 외적 주재권이라는 가시적 영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2) 교회가 외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한 은혜 언약의 공동체에는 속하지 않은 외식자와 죽은 교인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전투적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나눈다. 불가시적 교회는 말씀과 성령에 의해 유효적으로 소명된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이며, 가시적 교회는 말씀에 의해 소명된 자들의 공동체이다.


마레시우스는 말한다.(XVI.51-52): "가시성과 불가시성이 교회에 속하는 것은 교황파가 비방하는 대로 우리가 교회를 두 개로 분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두 가지가 다른 측면에서 교회에 속하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의 형식적 요소인 선택과 신앙과 사랑은 불가시적이다. 따라서, 분명히 구별하고 확정할 수 있는 교회의 판별 기준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런 증표는 단지 혼돈과 가정을 조장하는 지역화의 암시를 부과할 뿐이다. 그러나 개교회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구별되었는데, 교회를 볼 수 있는 것과 그것이 참된 교회인지를 볼 수 있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반틸은 말한다.(Hypotyposis, 218): "불가시적 교회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가시적 교회는 말씀과 성례와 권징의 시행을 받는 외적 연합체에 가입한 자들의 모임이다.“ 다른 교의학자들도 유사하다.


12. 그러나 이 둘은 두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한 교회이며, 그것이 “그리스도와의 내적인 교제의 측면에서는” 불가시적이라 불리고, “외적인 고백이나 신성한 규칙과 정치의 측면에서는” 가시적이라고 불린다(픽테트, XIII.i.7).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별은 두 종류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주체를 그 구성의 다른 관계에 따라 다르게 정의하는 것일 뿐이다. 리쎈은 말한다(XVI.9.1): "우리가 교회를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으로 구별할 때, 우리의 적대자들이 마치 우리가 두 개의 상호 대립되는 종류의 교회를 만들어 낸다고 비방하는 대로 이 구분이 종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다양한 상태에 따라 주체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교회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여러 면에서 가시적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여기서 그 내적인 형태, 즉 참된 신앙의 측면에서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으로 생각되는 한 불가시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하다.“


13. 가시적 교회 외적인 말씀과 성례의 사용, 그리고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하나의 외적인 몸과 사회에 가입된 사람들의 회집이다“(레이든 신학통론, XL.32). 가시적 교회는 외적인 다스림과 예배의 통일성을 가진 지역적 교회나 외적인 고백의 통일성을 가진 고백적 교회의 형태를 가진다. 후자는 지역적 교회들과 복합될 수도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33): "이 가시적 교회는 두 방식으로 인정된다. 하나는 신앙과 성례뿐 아니라 외적인 통치와 교회의식의 형태에 있어서 하나의 공동체로 상호 연합된 사람들이 한 부락이나 도시나 지역 단위로 모이는 특정한 회집으로, 다른 하나는 비록 흔히 외적인 정치의 실제적 형태와 의식의 구체적 방식에 있어서는 상당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성례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전 세계에 걸쳐 다른 장소에 흩어져 있는 연합적이고 우주적인 회집으로 나타난다.”


14.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불신자와 위선자들이 당연히 발견되지만, 그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비록 외적으로는 그들이 교회의 신앙고백을 표현하며 성례에 참여하고 교회법에 형식적으로 순응하지만, 그들의 불신은 결정적이어서, 그들은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아니라 단지 외적 조직의 연관자일 뿐이다. 리쎈은 말한다(XVI.8.1): “우리는 유기된 자가 교회의 외적 상태에 속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외적인 교회는 단지 신앙 고백과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성례 참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말씀과 성령을 통한 내면적이고 유효적인 소명으로 구성되는 교회의 내적 상태에 속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교회의 본질적 형태가 오로지 외적 신앙고백으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신앙의 내적 진정성에서 발견되어야 하는가? 만일 불경하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단지 외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고백하는 교제에 연합되어 있다면, 비록 그들이 신앙과 성결을 결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다고 말해도 되는가? 교인이라고 불리고 그 특권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참으로 믿고 중생한 신자와 경건한 자만이 아닌가? 여기서 교황파와 우리는 견해를 달리 한다.”


벤델린은 말한다(Coll,308): "불경한 자가 참된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이 아닌 이유는 바로 실제적인 불경 때문이며,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교회에 머리와 분리되어 있어서, 비록 그들이 간혹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외적인 신조의 고백과 성례의 사용을 통해 신앙을 연출하는 한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되지만,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고 성령에 의해 신앙으로 그에게 연결될 수 없다.“ 마레시우스는 말한다(XV.12): "선택받은 자만이 교회의 진정한 구성원이라고 하는 말이 가장 참되다.” 투레틴은 말한다(XVIII.iii.1): "소명된 선택받은 자들 외에 유기된 자나 불신자도, 그 사실이 숨겨져 있든 분명히 알 수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 교회의 진정한 회원이 될 수 있는가? 교황파들은 긍정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


15. 그러므로, 교회에는 권징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여 공동체로부터 그렇게 확인된 불경자와 위선자를 제거함으로써 자기를 정화해야 될 의무가 주어져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36): "비록 이 교회가 위선자와 불경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한 위선자들을 적발하고 그리스도의 처방에 따라 그가 위엄된 열쇠들을 사용하여 자기 집단에서 불경한 자들을 제거할 책임이 있다. 마18: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계2: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 14(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실제적인 신자의 경우에는, 바울이 권고하는 대로, 삶이나 신앙에서 결함이 발생할 때 동일한 권징을 통해 진지한 회개에 이르도록 도와야 한다. 고전5: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16. 불가시적 교회는 유효적 소명을 통하여 중생하고 회심한 선택받은 자들의 교제이다. 이 공동체를 불가시적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 속하는 내적이고 본질적인 형태와 성령 안에서의 진정한 신앙과 생명이 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효과와 외적 신앙고백과 선행은 불신자에 의해서도 기만적으로 모방될 수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만이 오류 없이 중생자와 위선자를 구별하여 볼 수 있다. 레이든 신학통론은 기록한다(XL.27): "우리는 이 전투적 교회를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로 구별한다. 불가시적 교회는 특정한 교회이든 전 세계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의 회중이든 신자 그리고 선택된 자의 모임에 주어진 이름이다. 이 교회를 불가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실제적인 내적이고 본질적인 형태, 말하자면 참된 신앙과 성결이 신앙고백과 선행을 통해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선자들이 이 모든 것을 일시적으로 모방할 수 있기 때문에 단지 이와 같은 것들을 근거로 하여 타인에 대해 무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볼레비우스는 말한다(111): "불가시적 교회는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것을 불가시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에 속한 자들이 사람 처럼 보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받은 자인지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누가 자기 것인지를 인지할 수 있다. 딤후2:19(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17.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의 구별이 일차적으로는 전체 교회에 해당되지만, 그것은 또한 그 지체인 개교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브라운은 말한다(II.iv.24.22.7): "동일한 교회가 가시적이러고 불릴 수도 있고 불가시적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나, 그 이유는 서로 다르다. 가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지 사람이 사람으로서 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합법적 용법을 통하여 외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고백하고 성례를 거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불가시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마음속에 존재하여 아무 인간도 볼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 볼 수 있는 성령과 참된 신앙 때문이다.“



[개혁파 정통 교의학 - 하인리히 헤페] ‘제27장 교회‘ 940~944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 에드먼드 클라우니

믿음은 ㆍ 2013-12-11 (수) 10:24 IP: 1.xxx.205 ㆍ조회: 16      

교회에 대한 조망: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교회'에서 발췌

교회의 표지를 규정하려면 우리는 교회가 보이는 형태를 가졌다고, 즉 교회는 땅위에서 보이는 사회로 조직된다고 가정해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천상적인 것인가 아니면 지상적인 것인가,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천상적인 용어로 교회에 대해서 말한다.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으로 선택된(엡1:4-5) 교회는 이 세상의 욍국에 비교될 수 없다(엡1:23; 5:23; 골1:18; 요18:36). 교회는 하나님의 거처이며,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한 산 돌들로 지어진다(엡2:20); 벧전2:5). 주님만이 자신의 백성을 정확하게 아시며, 그들은 성령의 은밀한 사역에 의하여 하나님께 연합된다(딤후2:19; 요3:8).

종교개혁가들은 로마 가톨릭 변증자들이 제시한 외형적인 설명을 반박하였다. 교회가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이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벨라민 추기경이 교회는 베니스 공화국처럼 가시적이라고 말할 때 그는 신약 성경에 사용된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한스 큉이 지적하듯이, 그렇게도 완전하게 보이는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거룩한 공회를...믿사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세상에서 구분되어 알려지고 있다. 교회에는 회원들과 교직자들이 있다. 성례는 교회의 믿음과 소망의 외적인 표지이다. 하지만 교회에는 위선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에도 이스라엘이 아닌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들어 있다(롬2:28; 9:6). 악한 자들은 축출되어야 한다(고전5:13). 큰 집에는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딤후2:20). 요한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나간 자들이 있다고 쓰고 있다(요일2:19).

우리는 교회의 보이는 측면도 보이지 않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교회를 보이는 측면으로만 제한하면 하나님의 선택의 실체가 제거된다. 주님은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자신의 양들을 알고 계시므로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말을 듣고 행위를 보기 때문에 위선에 의하여 속을 수도 있고 참된 믿음을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속을 아신다.

서로 겹치는 두 원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도식이 이 사실을 보여 준다. 한 원은 '보이지 않는' 교회,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하나님이 아시는 모든 성도이다. 다른 원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보이는' 교회다. 거기에는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다. 주님의 많은 백성은 다른 백성들에게 알려진(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꼻지 않은 다른 7,000명을 남겨 두셨는데도 얼리야는 오직 자기 홀로 남았다고 느꼈지만. 왕상19:18). 그러나 '보이는' 교회를 나타내는 원에 속해 있으면서도 겹치는 부분에는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만 주님이 그를 향하여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사람이다.




A원: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 = 우리에게 보이지 않음
B원: 우리가 보는 교회 = 우리에게 보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두 측면은 인식하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교회를 규정하며 그 둘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로 모이는, 지금까지 있어 왔고 현재 있으며 앞으로 있을 선택된 자들로 이루어진다”(25장1절). 보이는 교회는 “전 세계를 통하여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이루어진다”(25장2절). 이 예리한 구분은 우리가 오직 보이는 교회와 관계 맺을 수 있음을 표시한다. 이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신자들에게 그들의 중생을 증명하기 위한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요구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또한 교회의 회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자신의 기만을 드러내는 위선자는 외면적으로 교회의 회원이라는 사실을 피난처로 삼을 수 없으며, 회원으로서 그가 누린 특권은 그의 심판을 더욱 엄중하게 할 뿐이다.

복음 주의자들은 가끔 교회의 보이지 않는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질서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을 변명한다. 만약 보이지 않는 교회만 중요하다면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심지어 사도성까지도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보이는 교회에 대한 관심의 상실이 교회를 새로 창안해 내기 위한 길을 열었다. 신약 성경이 교회의 형태에 관해서는 거의 말하는 바가 없다는 가정 아래, 경영에 관한 훈련을 받은 지도자들이 최근의 사회 과학 이론에 따라서 교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 클라우니의 '교회' 제8장 교회의 표지에서 발췌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5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