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율법주의의 칭의론 / 박재은



신율법주의는 네오노미아니즘(neonomianism)으로도 불립니다. 개념적으로는 반율법주의(안티노미아니즘)와 반대입니다. 반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인간의 행위를 배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신학적 방향성을 가진다면, 신율법주의는 인간 행위의 필요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강조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법, 예수 그리스도


청교도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년)의 칭의론이 신율법주의로 평가되곤 합니다. 백스터에 의하면 죄인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중적(twoford) 의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 필요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법"(new law) 입니다. 두 번째로 필요한 의는 죄인의 믿음과 회개입니다. 죄인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백스터의 가르침은 대니얼 윌리엄스(Daniel Williams, 1643~1716년)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발전합니다. 독립파였던 아이작 초운시(Isaac Chauncy, 1632~1712년)는 백스터의 칭의론을 반대하면서 윌리엄스와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초운시가 생각할 때 백스터의 칭의론은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였습니다. 왜냐하면 초운시는 만약 새로운 법을 순종하는 데 인간의 믿음. 순종. 회개가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본 것입니다.


백스터의 신율법주의적 칭의론은 존 페스코(John Fesko), 제임스 패커(James Packer), 한스 부르스마(Hans Boersma) 같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습니다. 새로운 법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칭의의 조건으로 강조되면 율법주의적 칭의론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유려 때문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티머시 보거(Timothy Beougher) 같은 경우에는, 백스터가 강조하는 믿음과 회개의 행위가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백스터를 신율법주의로 간단히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경계를 표하기도 합니다.


행함의 역할 강조


신율법주의의 칭의론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칭의에서 적어도 인간의 역할에 주목한다는 측면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둘은 동일하게 보면 안 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이 믿는 "행위"가 공로적 조건으로 사용되어 그 중요성이 꽤 크다고 본다면, 신율법주의의 칭의론은 새로운 법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행위가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율법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칭의론은 인간 역할의 중요도에서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신율법주의는 반율법주의의 칭의론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는 칭의론입니다.


신율법주의가 칭의의 방정식에서 새로운 형태로 인간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했다면, 다음에 살펴볼 하이퍼 칼빈주의의 칭의론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역할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더 강조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강조와 인간의 책임 강조 사이의 시소게임이 의와 관련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박재은의 '칭의, 균형있게 이해하기'에서 발췌(33-36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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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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