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가족을 잃은 슬픔 너무나 크죠.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 보낸 슬픔도 너무나 괴롭고 큽니다. 그러나 그 슬픔이 우리 예수님하고 바꿀 수는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그 빈자리에 그리움, 그 사무치도록 그리운 그 그리움, 가슴이 그냥 콱! 막히는 것처럼, 호흡할 수 없는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그리움의 아픔이 있지요? 

여러분, 그 그리움, 그 떠나 보낸,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그 그리움을 붙들고 그 그리움 때문에 고통하며 이 그리움을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나 보고싶은 그리움이 슬픔으로 왔는데 그것을 털어버리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으면 그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슬픔에서 온전히 자유를 누리지 못해요.
그 슬픔의 무게, 그 슬픔의 아픔, 그것 때문에 일상의 삶이 무너지고 그것 때문에 헤어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 영적인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슬픔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 슬픔과 우리 예수님 하고는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슬픔을 예수님 보다 더 애착을 가지고 그 슬픔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저 처럼 하십시오. 제가 방금 1시간 전에 겪었던 체험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특별합니다. 제가 장남이고 아버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고 정이 많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님 자신, 당신도 상처가 컸던 분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장남인 저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에 대한 어떤 원망보다는 아버님이 제게 그런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서 더 많이 불쌍하고, 애처럽고 그러 거예요.
저는 아버지를 다 이해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의 모습을 추억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하고 잊어버리려고 일부러 이렇게 저렇게,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쑥쑥 들어오면 저는 일부러 피하고 도망다녔는데 오늘은 제가 그것을 방어할 틈도 없이, 아버님 사진을 딱 보는 순간에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사무치게 훅! 들어와 버린 거얘요. 그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핑 돌아서 괭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주님, 제가 어떻게 합니까? 지금까지 아버지의 기억을 잘 막고 왔는데 이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같은데 이 슬픔이 또 저를 힘들게 할텐데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제 안에서 성령께서 "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을 선포를 하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슬픔을 가져다 주는 어둠의 영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묶임을 받고 떠나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떠나갈찌어다! 이 사악하고 악한 어둠의 영들아, 천국 가신 아버님의 그리움으로 인해서 내가 내 주님을 보는 눈을 흐리게 하고 가리게 하는 이 악한 어둠의 영들아, 이 미혹의 영들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내 앞에서 떠나가라!" 이렇게 단호하게 제가 선포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여러분, 이 가슴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확 무너져 내렸던 그 순간에 봄눈 녹듯이 그냥 사라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예,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그 어떤 사람, 그 사람이 살아 있던,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던 간에, 우리 예수님 보다, 우리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여러분, 단호하게 배격하십시오.
가족이라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 허울 좋은 이름 앞에, 예, 악한 원수 마귀가 그 사람의 혼과 영과 정신을 사로잡아 슬픔에 계속 빠지게 하고, 우울에 계속 빠지게 하고 하나님의 안겨 있는, 떠나간 내 사랑하는 가족들, 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오늘 이 시간까지 그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었고, 떠나 보낸지도 수 일이 지났고 수 개월이 되고 수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떠난 사람에 대한 그 슬픔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그걸 붙들고 있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전심을 더해서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제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 가까운 사랑하는 지체들, 지인들, 가족들을 향한 그 그리움을 통해서 미혹의 영이 역사하는 거에요, 여러분. 거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는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어떤 때는 꿈에서 그 그리운 사람이 나타납니다. 눈을 뜨면 눈가에 눈물이 적셔저 있어요. 꿈에서 봤기 때문에, 꿈에서건, 현실세계, 정신 차리고 있는 일상 가운데서도 어떤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알상을 제대로 살어가지 못합니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너무나 그립고 슬퍼서 기도할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나고, 떠난 남편이, 떠난 아내가, 떠난 사랑하는 딸이, 아들이 생각나서 주님께로 더 깊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  분명히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수 마귀 더러운 귀신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여러분. 아멘. 
 
 

설교: 정리, 루디아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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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갇힌 자들을 위하여서 기도합니다. 갇힌 자들이 갇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장소가 되게 하시고 축복의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저들이 세상 가운데 살다가 잠깐 실수로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 갇힌 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장소가 참으로 복된 장소가 되고 그 시간이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의 삶을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들에게 만남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이 땅의 소년 소녀 가장들과 고아들을 주님 손에 올려드리고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와 나라의 지자제가 이 땅의 고아들과 소년 소녀 가장들을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저들을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정부나 지자제가 실천하게 하시고 정치적으로나 법이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교회가 고아들과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주시고 교회가 발벗고 나서서 저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보호받아야 할 연로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려운 노인 분들도 교회가 섬길 수 있도록, 우리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의 실상을 볼 수 있도록 성령님 가르쳐 주세요. 
주님께서 내가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고 너희 나를 찾았느냐? 나를 돌보았느냐.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 그렇게 책망하시고 주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너무나 잘 배웠습니다. 하나님,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나서서 섬길 수 있도록 가난한 우리 이웃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젊은 청년들이 너무나 많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만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 교회에 젊은이들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저 서부는 교회서 예배드릴 때 노인들 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한국교회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 땅의 젊은이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부모세대들이 젊은 세대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 후세대를 위하여 우리 부모들이 거룩한 두 팔을 들고 주님을 향하여 우리가 도고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이 땅의 어버지, 어머니들을 기도군대로 불러 세워주시옵소서.
젊은 세대, 자녀 세대를 위하여 이 땅의 어른들, 기성세대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부 기도의 군사로 불러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젊은이들이 돌아올 수 있게 교회가 세상의 빛이되고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교회를 각성시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기 원합니다. 내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오 주님,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주님, 이 죄인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허물과 죄를 씻어 주옵소서. 내 안에 모든 악한 죄악의 쓴뿌리들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고 거룩한 성령의 생수로 씻어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새롭게 빚어주시옵소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간절히 기도, 더 깊은 기도의 자리, 임재의 자리, 지성소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혼으로, 내 욕심으로, 욕망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좇아서 간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구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내 안에서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성령의 그 간구함이 우리의 영이 성령에 순종하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영혼을 살리는 기도를 하게 하시고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을 바로 세우는 기도를 하게 하시고 내 자신을 주님 앞에 바로 세우게 하옵소서. 아멘.
 

설교: 테힐라 : 정리: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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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열매, 주님의 신부>   
계시록: 14장 중에서


들어가면서:
어제도 평소대로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해 의자에 앉아

순차대로 14장을 읽는 순간 갑자기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를 터치하셨다.

주신 말씀은 "사랑하는 나의 딸아, 내가 너에게 산을 넘게 하여도

너는 그 산을 넘었고 강을 건너게 하여도 그 강물 속에 뛰어드는구나. 그런
순종이 바로 첫 열매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임을 전하여라."아멘.

이 말씀에서 내게 깨달음을 주신 것은
1. 휴거의 날이 임박하다.(날짜와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2. 신부가 되려면 신부수업을 받아야 한다

3. 첫 열매란 어떤 사람을 말씀하는가

내가 댓글로 올리기에는
좀 무거운 주제이나 주님께서 전하라 하시니 나는 순종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휴거 받기를 원하며,

모두 휴거된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고 있으나 실상 휴거될 사람은 첫 열매들,
그리스도의 신부들만 휴거 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등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처녀들처럼 남게 될 것이다.

1.번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기에 재론하지 않겠다.

2. 신부수업이란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성도들 중에서

특별히 골라 뽑아 강한 훈련을 시키시고 그 훈련(고난, 질병, 환란과 역경)

이런 것을 너끈히 통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부수업 받는 자의 자세와 마음가짐 그리고 목적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같은

그런 어려운 때, 곧 시험이 다가 왔을 때 원망과 불평이 없었던 그들의 자세,

바로 그런 자세를 가지도록

주님께서는 원하시며 강하게 훈련시키시고
이런 환난을 잘 이기고 너끈히 통과케 하는 것이 신부수업의 목적이다.

3. 첫열매들이 휴거 된다. 교회시대가 점점 막을 내리기 시작하는 것은

접붙임 받은 이방인 교회가 끝나가고 원가지인 유대인들을 구

원하실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증거다.

인생의 여정 길은 늘 평탄한 곳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험준한 굴곡의 길, 눈물의 길, 가시밭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가는 길에, 바싹 메마른 광야를 만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철통같은 여리고 성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이 답답할 때도 있고,

때로는 넘실거리는 홍해가 앞을 가로 막는 것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때도 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편안하다 안전하다 가르치는 자들은

모두 거짓 교사들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자고

꼬드기는 번영신학에 물든 거짓 교사들을 삼가해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다

불 시험, 물 시험, 사자 굴같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이다.

성도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수 많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로 다져진 터 위에서

신앙생활의 바톤을 이어 받아 뛰고 있는 마지막 세대, 마지막 주자들이다.

우리는 아직 안전한 포구에 이른 것이 아니다.

여전히 거듭되는 난제에 난제를 만나서 끙끙거리기도 하고,

심한 태풍을 거스르며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눈동자처럼 사랑하며 아끼시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을 통과 잘 하는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첫 열매, 주님의 신부가 될 것이다.

글: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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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은 화면에 띄워놓은 중보기도를 순서에 따라서 함께 간절하게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특별히 이 나라와 민족, 대한민국을 위해서 좀 심각하게 생각하시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려드리기 원합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너무나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남과 북으로, 동서가 갈라져 있는 이런 어려운 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가 이념으로 인해서 갈등이 심합니다. 역사 이래로 지금 대한민국이 이념의 갈등으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그러한 자유민주의 그 토양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린 대한민국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념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보다도 더 이념에 치우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그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이념 위에 올라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념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그러한 세력들과 연합하고 그 세력을 묵인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사고관이 아닙니다. 

공산당과 하나님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와 하나님과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나라의 리더쉽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가 얼마나 축복되고 아니면 멸망의 길로 가느냐, 그 주변국가까지도 힘들게 하는 것이, 지도자 한 사람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히틀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도 무수한 인명이 살상이 되고 얼마나 큰 끔찍한 고통 가운데 인구가 전쟁으로 인한 고통가운데 있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도자들을 위해서, 정치인들, 국회의원들을 위해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가 영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영적인 지각을 가지고 주님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이념으로 병들어 있고 사회 전반적으로 곳곳에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자들이 사법부를,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지 방송언론을 보십시오. 얼마나 좌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정말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한 시간 정말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간절히 이 테힐라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말쑴: 테힐라 강도사님
정리: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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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고쳐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제가 찬양할 분이십니다. 새번역 예레미야 17장 14절 말씀."

이 말씀을 띄워놓고 여러분, 정말 주님께 내 자신을 다 내어놓고 오픈(open)해서 이 시간은 주님께 나아갑시다. 제가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 주님 앞에서 내가, 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고 내 자신도 속고 있는 내 안에 있는 이 가라지, 내 안에 있는 이 옛사람, 이 자아의 쓴뿌리 이런 것들
내가 일상가운데서
평안하다 잔잔하다.

그냥 편안한 생활을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마치 종지에 빗물을 담아놓고 있으면 그 빚물이 깨끗한 것같은데 시간이 지나 한참 있으면 그 밑에 많은 오물이 가라앉지 않습니까? 우리 심령의
상태도 평안할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극한 상황이 오고 사람과의 인과관계에서 감정을 건드리고 나를 예민하게 하고 나를 자극시키면 내 안에 있던 흙탕물이 일어나거든요.

제가 여러분에게 주님, 나를 고쳐주십시오. 하는 그 말씀은 여러분 안에 가라앉아 있는 평안할 때는 들어나지 않는, 가라앉아 있는, 내 안의 가라지들, 내 안에 있는 이 옛사람의 자아의 쓴뿌리들, 이런 것들을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을 깊이 만나며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여러분의 영혼 속에, 심령 속에, 마음 속에 있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돌아보면서 이 부분, 주님, 내 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 안에 교만이 있습니다. 내 안에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내 안에 음란이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주님, 나는 너무나 나태합니다. 나는 남의 흉을 잘 봅니다. 나는 남을 잘 판단하고 정죄를 잘합니다. 게으릅니다. 기도도 게으르고 모든 것이 제가 게으릅니다. 이것을 드려다 보란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 테힐라   정리: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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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반가운 한통의 카톡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먼저 나누고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주사랑 권사님의 남편 이창길 집사님 병원에서 페렴이 악화되어 식사를 코로 관을 꽂아서 식사를 했지 않습니까? 병원에서는 의사가 계속 입원할 것을 권하고 코로 관을 통해서 식사를 해야지 관을 빼버리고 입으로 식사를 하게되면 페에 무리가  가서 페렴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많이 부담이 되었는데 주사랑 권사님이 정말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고 집으로 퇴원을 하고 코에 식사하는 관을 빼고 입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우리 군사님들이 이창길 집사님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렇게 집에서 지내시는 동안에 며칠, 약 일주일 정도 지난 것같은데 그 과정이 우리도 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권사님을 통해서 연락을 제가 카톡으로 받았는데 여러분과 함께 나누겠습니다.

"강도사님, 안녕하세요.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오늘 병원에 가서 폐사진을 찍었는데 거의 정상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폐가 안 좋아서 계속 어려운 가운데 있었는데 오늘 병원에서 정상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의사 말이 재발 확률이 크다고 하니까 잘 하라는 권면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치료해 주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솔직히 코에 관을 빼고 나오면서 불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베드로전서 2장 24절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다." 말씀을 우리가 받을 때 저의 마음에 평안을 받았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기도 후에 이렇게 완치가 되어서 너무나 기쁩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저를 위한 말씀은 읽기에 좀 그렇고
테힐라 님과 루디아 님 그리고 중보기도 해주신 모든 기도군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힘이 없어서 잘 걷지를 못합니다. 치매 약 때문에 파킨슨도 왔고 몸이 많이 경직되어 뻣뻣합니다.  몸이 풀리고 근육이 부드러워지고 잘 걸을 수 있도록 기도 계속 기도부탁드립니다. 하는 요지의 간증입니다. 기쁜 소식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계속 기도하시겠지만, 우리가 "주님, 이 병을 고쳐주세요." 하는 기도의 패턴을 바꾸라고 그랬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있으라 하면 있고 없으라 하면 없는 겁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까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채찍에 맞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병에서 깨끗이 나음을 입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너무나 단순하게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게 믿어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읍시다. 할렐루야!

저도 어릴 때 너무나 큰 병으로 인해서 거의 죽음직전까지 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의 능력으로 깨끗이 고침받고 저는 그 병 이후로 재발되는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건강하게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데, 여러분들, 주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그 질고를 담당하시고 질고를 깨끗이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채찍을 맞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그 채찍이 보통 채찍이 아니라고 얼마나 많이 설명했습니까? 우리의 영혼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 모든 억만 죄악을 다 홀로 담당하시고 한 번에, 단번에 화목제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구원을 받습니다.

자, 육신의 구원, 질병의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이것도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 채찍을 맞은 것은 십자가 골고다 언덕길을 가기 위한 그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 속의 하나의 어떤 채찍으로 맞는 하나의 형벌이나 고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더러운 질병을 깨끗이 탕감하고 다 치유하시기 위하여 그 치유의 댓가를 예수님께서, 그 살벌한 채찍을 맞으심으로 다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여러분,마지막 이 믿음,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음으로 내 모든 병, 어떤 병이든지, 불치병이나 암덩어리든, 희귀병이든 모든 병을 깨끗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단순하게 선포해야 될 줄 믿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너무나 순전하게 받아드려야 될 줄 믿습니다. 

예, 내 병, 내 이 아픈 고질병, 희귀병 나를 괴롭히는 지긋지긋한 이 병 이것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셨음으로 나는 깨끗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너무나 단순한 이 진리의 말씀을, 예수님의 빽을 믿고 그냥 선포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 병을 다 치료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이 병에서 놓여 났고 해방을 얻었다. 완전히 치유되었다." 이것을 여러분, 정말 순전한 믿음, 단순한 믿음으로 우리는 선포해야 될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봅시다,  여러분. 끝까지 돌파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나의 왕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산성으로, 피난처로, 나의 의사, 치료자, 나를 치료하시는 만병의 의사로 우리는 예수님을 모십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치유를 선포하셨고 예수님이 치유를 담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셨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다 치유를 받았다고 확실하게 믿으면 됩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믿음으로 선포합시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선포해도, 테힐라 님, 내 아픈 몸의 증상은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내 환부의 이 상처와 이 아픈 증세는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증세는 아직 남아 있다 할지라도 계속 믿음으로 우리가 고백하고 앞으로 달려나가면, 치유를 선포하면서 나가면 반드시 이 병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고 치유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의 선포를 기도시간에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도시간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도 늘 이 치유의 믿음의 선포를 마음으로 또 입술로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가 그냥 치유의 습관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치유 사역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정말 단순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주시옵소서. 아멘.

간증: 테힐라 글: 루디아/최송연

<천사가 콩글리쉬로 말하다. 1.>

여러분,
예수님도 천사도 나같은 한국계 미국인, 특히 이민 1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콩글리쉬를 사용하여 소통을 시도하신다는 것을 아시나요?

저는 이 신기한 체험을 한 적이 몇 번 있고
그 간증을 나누어도 좋다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콩글리쉬?" 그게 무슨 말씀?
궁금하시고 그
뜻을 모르시는 분의 이해를 먼저 돕고 넘어가야 순서겠죠?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한인계 미국인들은 영어를 필수로 사용해야만 하는 미국에서 살기는 하지만 모국어가 훨씬 더 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용어는 모국어보다 영어가 더 이해도가 높고 또 입에서 쉽게 튀어나오는 단어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주차장' 이라는 말은 자동차를 갖다 대는 장소의 고유명사입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 단어를 'parking lot (파킹 랏)'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미국에 사는 한인1세들은 백이면 백 모두 영어와 한국어를 섞은 특수단어
"parking장( 파킹장)" 이라고 합니다.

Parking lot   도 아니고 주차장도 아닌 두 단어를 섞어 parking 장이죠. 이럴 때 이 섞어서 사용하는 용어를 우리는 "콩글리쉬" 라고 하죠. 그러니까 영어와 한국어 섞어서 사용하는 말이라고 이해하시면 정확합니다.
물론 미국인과 대화할 때는 정확히
Parking lot 이라고 말하죠.

이 말은 "브로큰 잉글리쉬"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콩글리쉬는 한국계 이민자만 사용하는 특수 용어라고 한다면 "Broken English" 는 한국계 뿐 아니라 일본계, 중국계  아니 전 세계, 심지어 같은 미국 인이라 할지라도 영어를 하기는 하되 문법도 맞지않게 말하거나 쓰는 것, 즉 쉬운말로 '부러진 영어, 엉터리 영어"를 지칭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먼저 이런 배경을 이해하시면 영의 세계, 예수님과 천사들도 우리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심이 큰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오늘은 간증에 들어가기 전 먼저 이해를 돕는 말을 서론으로 하고
간증은 다음 번에 기회되면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몇 분이 예수님께서 콩글리쉬로 제게 하신 간증을 듣고 싶다고 하셔서 우선 오늘은 천사편1 을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루디아/최송연.

<천사가 콩글리쉬로 말하다.>

러시아에서 여러가지 병을 얻었고 나의 건강상태가  심각하다는 의사 진단에 의해 우리는
하와이에서 요양하며 치료를 받는 동안 남편은 작은 성경공부반을 시작했습니다.
그 성경공부반을 깃점으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떠나기 전 섬기던 교회는 부목사님께 이미 일임을 하고 우리는 러시아로 떠났기에 내가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탓에
하와이에 돌아가기는 했으나 섬길 교회가 마땅히 없었다고 해야 옳겠지요.

아뭏든, 그 성경공부반이 급성장을 하였고 3년 정도 되니까 나의 몸도 점차 회복이 되었고 이제 교회도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1주간의 휴가를 받아 미국 본토에서 사업하는 여동생네에 가서 쉬었다 오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반 개척때부터 함께 하시던 분, 남편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수쟌 챙(가명) 여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 남편은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미정부 청사에서 일을 하시는 분인데 너무나 진실하고 착한 분이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아내가 밤운전이 위험하다고 저녁예배 때나 수요성경공부반에나  교회에 언제나 데려다 주고 데리려 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 남편이 러시아까지 가서 헌신하고 왔다면서 무척이나 아끼고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씩 집에 불러서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었고 그럴 때면 남편이 짧은 영어로 복음을 전하면 아주 잘 받아드리던 착한분이셨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시작한지 7년 쯤 되었을 때 였던 것같습니다.

어느날 60도 채 되지 않은   Mr. Chang이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결과는 갑상선암이라고 했습니다. 대개 갑상선 암은 가장 착한 암으로 재발이 잘 안 되는 것으로 의학계에서 말하니까 우리도 안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경우는 특이하게 암이 급속도로 다른 장기에 전이되었고 더 이상 의사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지경까지 갔습니다.

여백 관계로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루디아/최송연 

 

<천사가 콩글리쉬로 말하다. 3. >

그렇게 온갖 노력을 다해 봤지만 차도가 없고 점점 더 나빠져 갔고 이제는 가망이 없다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습니다.

물론 남편과 나는 틈나는 대로 병동에 찾아가 함께 기도하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려고 최선을 다했지요. 어느날 드디어 그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Mr. Chang 은 당신 아내에게 늘 입버릇처럼 "내가 죽으면 장례예배는 반드시 Pastor Choi가 집례를 하도록 해다오. 나는 다른 사람은 못믿는다." 하고 유언의 말을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 아내가 그 사실을 우리에게 몇 번에 걸쳐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1년에 한 번뿐인 휴가를 나가기 위해 미리 비행기표를 사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9월초였고 하와이가 1년 12달 더우니까 시원한 가을 바람, 가을 향기도 느낄겸해서 9월 중순 쯤에 나가기로 하고 싼비행기표를 미리 구입해 두고 예약도 마쳤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란 것이 아무리 아픈 분이라고는 하여도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짜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휴가를 나갔다 온 후에 떠나주시면 좋지만 만약 우리가 휴가중에 떠나신다면?

정말 난감해집니다. 가족이 우리만 의지하고 바라보다가 갑자기 다른 목사님을 찾으려면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영어권이니까 미국 목사님들 중에서 쉬는 분을 찾을 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에 여행을 나갔으니
나가고 없는 사이에 돌아가신다고
하여도 우리를 원망하지는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담임 목사의 도리가 아니란 생각에 우리 부부는
갈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하고 비행기 예약을 취소해 줄 수 있냐고 했더니 마침 비행기가 학생들 개학시즌이어서 성수기인데다 갑자기 여행을 취소하면 한푼도 환불해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미리 싸게 사둔 티켓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와이가 섬이어서 미본토에 나가는 비행기 값은 엄청 비쌉니다. 우리는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떠날 기약이 없는 생명을 두고 신의를 지키려고 수천달러(한화 수백만 원)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예약대로 떠나느냐.

하여 결정을 못하기에 우리는 주님께 묻기로
했고 나는 하루 왼종일 기도로 매달렸습니다. "주님, 여행을 취소할까요? Mr. Chang님을 천국 데려가실 계획을 알아야 됩니다."

에고~ 사람의 죽는 날을 어느 신이 알 수 있으며 또 그 죽을 날이 언제인지 알려달라고 떼를 쓸 수 있는 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암튼, 그날이 금요일, 비행기표를 해약하려면 적어도 금요일 오후까지는 결정이 나야만 하는 것은 그 다음 월요일이 무슨 공휴일이어서 업무 중단하니 여행사와 통화조차 불가능하고 그러다 보면 물어볼 필요도 없이 환불은 커녕 반도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에 꼭 알아야만 했기 때문에 저는 필사적이어죠.

사람이 세상을 떠나실지 말지...( 살다살다 별난 기도도 다 해보네요.ㅋ)

금요일 오후가 다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을 주시지 않고 할 수 없이 비행기 표는 다 날라가더라도 화요일에나 가서야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던지 하는 수 밖에는...

여백 관계로 다음에 계속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호로 끝납니다
조금만 더 인내로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루디아/최송연

<천사가 콩글리쉬로 말하다. 마지막 회>

금요일 밤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한 밤중에 눈이 떠져서 화장실에 갔다와 침대에는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주님, 어찌하면 좋습니까? 여행을 가도 될까요? 주님...." 기도를 막 시작하는데 갑자기 "따르릉, 따르릉." 하고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이 밤중에 누구지? 하면서 수화기를 얼른 들어 보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수잔 챙 집사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여보세요." " 네, 저 수잔 챙이에요. 여기 "피너랄 써비스(Funeral Service, 장례식장을 우리 콩글리쉬들은 이 단어 역시 종종 영어로 말함) 인데요. 안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아, 그래요? 네 집사님." 내가 대답하자 곧 전화가 탁! 끊어졌습니다.

아니, 지금 몇 시지? 시계를 보니까 새벽 2시 30분이었습니다. "이 늦은 시각에 수잔 집사님이 전화를? 그런데 남편이 위독하다는 것도 아니고 이 밤중에 장례식장이라니?
도데체 이게 무슨 소리지?

"엥? 그렇다면?
그제야 정신이 화들짝 들었습니다.
"와! 천사다! 천사가 수잔 챙의 음성으로 기도 응답을 정확히 알려주었네..."

너무 놀라서 잠자는 남편을 흔들어 깨워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남편도 놀란 눈치로 "그래, 그런 것같소. 화요일날 비행기 캔슬합시다. 돈은 생각하지 말고."

몇 며칠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니까 천사가 수잔 챙 집사님의 음성으로 정확히 알려준 것입니다.  천사는 "여행가지 마라 그가 죽을 것이다 장례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장황게 말하지 않고 이곳 한인들이 자주 쓰는 용어 "여기 funeral service다. 안 가는 게 좋을 거다."

정확하고 간단하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함축된 말.. ."수잔 챙, Funeral service, 안 가는 게 좋을 거다." 그 짧은 문장 안에 모두 함축되어 있는 것이 너무 정확해서 놀라웠습니다. 하여 마음 편안하게 먹고 잘 쉬고 월요일 지난 다음 화요일에 여행사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형편상 비행기 예약된 날짜에 여행을 못가겠는데
언제 갈 수 있을 지 우리도 모르니까 무한정 오픈으로 연기해 주십사 했습니다. 에이전트가 막 짜증섞인 목소리로 이제 예약일이 며칠 남지 않았은데 그럴 수 없다 하고 딱 잘랐습니다.

하기에 "아, 네. 그럼 비행기 캔슬해 주세요. 돈은 뜻대로 처리하시고요." 저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투로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사장님께 보고하고 다시 연락주겠다고 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서 곧 다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뭐라고 왔을까요? "원래는 안 되는 것인데 어제가 공휴일이어서 사모님이 전화하실 수 없었음을 감안해서 오픈 티켓으로 연기해드리라고 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결과는? 천사가 시키는 대로 휴가를 안 가고 있었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 곧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낮시간에 진짜 수잔 챙 집사님이 호스피스에 있는 남편에게 심방을 같이 가서 기도해 줄 수 있겠느냐? 하는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셋이 달려갔더니  Mr. Chang이 핼쓱하지만 편안한 얼굴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함께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갑자기 Mr. Chang이 큰 소리로
" Sue, I gotta go." 수잔의 애칭이 Sue 였고 직역하면 "수, 나는 가야만 해." 하시는 겁니다. 와우~그렇게 그분은 천국에 입성하셨고...

우리는 천사의 콩글리쉬 덕분에 장례식 잘 끝내었습니다. 물론, 포기했던 비행기 값은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았지요. 10월의 어느날 사랑하는 여동생네 집에 무사히 갈 수 있었고 휴가 날짜가 약간 늦어진 덕분에 9월이면 보지 못했을 단풍이 한창 산천을 곱게 물들이기 시작하는 진짜 가을의 향기를 즐기면서 생애 최고 멋진 휴가를 잘 다녀 왔답니다. 할렐루야.  Praise the Lord!

긴 이야기 끝까지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디아/최송연.

참조. I gotta go 는  proper 영어가 아니고 가족끼리 편하게 사용하는
I have to go의 표현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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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새해 첫날 기도를 준비하면서 주님의 김동에 새로 시작하는 새해 첫날의 말씀을 화면에 올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할렐루야! 

 
주님께서 올 한해 24년 새해에는 주님의 변함없고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저와 우리 기도의 군사님들, 사랑하는 가족들, 자녀들, 그리고 군사님들의 삶의 공간 위에, 삶의 환경 위에 그리고 일터와 사업장과 교회 위에 주님의 평강이 충만이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선포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이 악보나 가사 없이도 너무나 잘 아는 찬양을 불러드리기 원합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이 찬양을 주님께 먼저 올려드리겠습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 앞에 새해 첫 기도, 첫 찬양을 올려드리는 귀한 시간입니다. 여러분,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주님 앞에 찬양으로 이 기도의 문을 열기를 바랍니다. 찬송 중에 거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이 찬양을 올려드리기 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여러분, 말씀 속에는 평화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 주님은 우리가 정말 평안하기를 원하십나다.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가운데서도 늘 곤비하고 피곤하고 어려운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오셔서 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샬롬이 임할지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임할지어다. 내가 주는 평안을 받아라. 할렐루야.  요한복음 14장 27절, 화면의 말씀이지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그런 일시적인 그런 평화하고는 다르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속적입니다. 이 온 세상이 정말 노도 광풍으로 혼란스러울 때도 하나님의 평안은 정말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유명한 미술 작품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미술 전시회에서 대상으로 걸려있는 그림을 가만히 보니까 제목이 "평화 였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란 제목의 그림 내용은 노도 광풍 태풍이 부는 성난 파도와 바다가 휘몰아치는 캄캄한 밤, 폭우가 내리고 바람이 태풍이 몰아치는 바닷가의 암벽, 바위 섬같은 그런 시커먼 암벽에 가만히 보니까 거기 새 한마리가 있는데 그 새의 깃털 속을 가만히 보니까 어린 새끼 새가 엄마의 날개 품안에 딱 품어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태풍이 몰아치는 그 혼란스러운 가운데서 어린 새가 어미새의 가슴 깃털에 폭 파묻혀 있는 광경을 그림 화폭에 옮겼는데 그 그림의 제목이 평화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주님의 어린 양들이요, 새까들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날개 아래 딱 품고 계시면 이 세상이 정말 노도광풍 태풍이 오고 혼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품 안에 있는 우리는 평화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평안은 아와 같습니다. 시편 18편 2절에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아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우리가 힘과 보호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자 우리의 요새이고 우리는 압도 당하거나 두려움을 느낄 때거나 환난 가운데서 피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그 다음에 빌립보서 6장 4절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어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할렐루야! 마태복음 11장 8절~ 29절의 말씀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할렐루야!
 

메게지 by: 테힐라  정리 :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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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늘 말하는 복음, 복음이란 무엇인가? 물어본다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로 답하겠지만 정확히 말씀드리면  다음 4가지 구조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잘 기억하셨다가 전도할 때 적용하시면 좋을 것같습니다.

1. 하나님. 2. 인간 3. 예수님.
4. 믿음의 단계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이십니다. 동시에 공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놀라운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너무나 사랑이 많으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시지만 당신의 죄를 간과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죄를 미워하십니다.

다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두 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죄의 값은 영원한 형벌, 영원한 지옥형벌입니다.

세째로,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 하시기 위해서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참인간, 참하나님이신데 그분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로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상에서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그 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으로부터 이제 구원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 의 과정에 이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다루시면서 우리가 구원을 완성해 나가도록 성령님께서 견인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이 4가지의 구조,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시지만 당신의 죄는 미워하십니다. 인간인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 스스로 우리 죄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영원한 형벌, 영원한 지옥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신데 참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서 십자가의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핵심적인 요소만 잘 전하시면 좋을 것같습니다. 아멘.

 

테힐라 님의 말씀 / 정리 :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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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얼굴을 구하라  (1) 2023.10.02

오 성령님.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를 내려 주옵소서. 기도의 강력한 영적무기인 방언의 은사를 풀어 주시옵소서. 성령님,  방언의 은사를 사모하는 우리 군사들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따라, 주님의 아름다운 뜻에 합당하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군사 한 분 한 분에게 신령한 은사를 풀어 주옵소서. 

아버지, 기도 군사의 처소에 신령한 은사를 풀어 주세요. 오! 성령의 충만함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직 방언은사를 받지 못한 군사들에게 기도의 언어, 기도의 영적무기인 방언의 은사를 이 시간 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우리 기도의 군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까지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기도군사들이
계신다면 오늘 이 시간이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시고 우리 문제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정결하고 성결케 하여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우리 기도 군사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겸손하게 마음문을 활짝 열어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세요.  

아버지 하나님이여, 선 줄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항상 낮고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나보다 남을 다 낫게 여기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하시며 아버지여, 친절하고 사랑하며 배려하게 하옵소서. 주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미워하고 그렇게 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니 우리도 사랑하게 하시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사람의 관계에서 그것이 부부이던, 자녀와 부모의 사이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게 하시고 악이 있더라도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직 화평을 심는 자들이 되게 해주세요.

내 자아를 죽여주시고 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주시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이 사랑을 우리도 나누어 주며 베풀며 도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들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화평을 심는 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세요. 사랑으로 소금치듯 베풀게 하여 주시고 배려하게 하시고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테힐라 님의 말씀 / 정리 :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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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목양연가 식구님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절기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의 중보기도와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사탄은 이 시대의 어두운 세상 모든 문화와 미디어를 장악하고, 불신자를 비롯해서
 믿는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서 떠나 배도케 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최후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힘입어 사탄의 진영과 권세를 깨트리고 믿는 자들을 문서사역으로 무장시켜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우뚝 세우고자 세상 문화를 이길 믿음의 양식인 책 2권을 출간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선교 활동 중 죽음의 골짜기에서 주님이 파송하신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인 구출을 받은 생생한 간증과, 신앙 에세이집인 
1권: 여호와는 나의 목자(제목)
또 그리스도인의 영성을 노래하듯 그동안 살아오면서 기도와 묵상 가운데 틈틈히 지은 

2권: 내 영혼의 노래(제목)
이 두권을 지난 2월에 출간했습니다.
구입처는 교보문고/ Yes 24/ 알라딘에 올려져 있습니다.

-교보문고에서는 반응이 좋아 2권이 동시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은퇴 선교사인 제가
주님나라에 갈 때까지 문서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중보 기도 부탁드리고 도서도 구입해 주셔서 
자녀들과 젊은 세대들에게 영의 양식으로 나눠주시면 참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여기  저의 책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최송연 드림

작가 정보 보기 = 최송연.com

여러분, 그동안 1부. 기도시간에 찬양을 많이 올려드렸으나 오늘은 마음을 모아서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 주님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정결하게 되므로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귀한 시간 되게 해달라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또 여러분 각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이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 한 지 5년 10년이 되었지만  나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많은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뜻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냥 성경책을 들고 교회 문지방을 왔다갔다 하는, 그런 종교적인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닌지 이 기도시간을 통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테힐라는 이전에도 간증을 했지만 "주님, 저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환상 가운데 주님께서 말씀으로 분명하게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나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런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종교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생활, 예배생활을 하니까 그냥 왔다갔다 하는 그런 종교적인 신앙이 아니라 정말 성령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삶, 그런 주님과의 만남이 참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그러한 삶을 살지 않았다면 자신을 곰곰이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에서 훌륭한 주의 종들을 통해서 귀한 말씀을 듣지만 그러나 테힐라 기도의 방송에 들어오셔서 테힐라가 말씀을 나누는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이 말씀을 깊이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한 분 한 분 개인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계획하시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그 뜻을 진심으로 간절히 구하며 기도하고 "아버지, 저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제발 가르쳐 주옵소서."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이 테힐라 기도회를 통하여 그러한 영적인 하나님과 만나는 귀한 축복의 시간을 꼭 가지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네, 많은 분들, 제 주위에도 있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교회 가서 예배생활, 헌금생활을 하고 또 봉사하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구원의 확신이 있고, 내가 진정 거듭났고,  내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한 번 깊이 돌아보십시오.

니고데모는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에 대해서 예수님께 들었습니다. 들었을 때 니고데모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사람이 어떻게 두 번이나 어머니 배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영적인 거듬남을 말했는데 육적인  대답을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말씀의 코드가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니고데모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났습니까?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거듭났습니까? 이 시간, 오늘 저녁에 목숨, 숨을 거둔다면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여러분 구원에 확신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오늘 이 시간 한 번 깊이 묵상하면서 정말 진중하게  주님과의 만남, 인격적인 만남, 나를 향하신 주님의 계획과 뜻이 있는지에 대해 주님께 물어보고 이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주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고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더욱더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기를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야 됩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착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님의 얼굴을 구하되 얼마나 간절하게 구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되 얼마나 간절하게, 진심으로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그냥 형식에 치우쳐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정말 인격적으로 만나서 주님과 대화하고 내 삶을 통해서 동행하며 동역하는, 임마누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와 소통하고 나와 대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오늘 한 순간도 내 뜻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내가 내 머리 속에, 내 마음 속에 생각하는 것까지도 성령님의 간섭과 성령님의 통제를 받는 그런 임재의 연습을 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우리 기도 군사님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방언통변을 여기 적어봅니다. 
 

병낫기를 구하는 분들에게 주시는 성령님의 말씀

"사랑하는 딸아, 내가 어찌하면 좋겠느냐, 내가 저들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저들이 내 앞에 나아오나 내가 저들을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죄를 회개치 아니하고
죄와 동거하기를 원하니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저들에게 고하여라. 호리라도 갚기 전에는 그곳에서 나올 수 없으리라.
내게로 나오려거든 "죄" 를 버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여라. "
 
그리고 후에 주신 말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대하 7:14)
최송연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 예루살렘 성지가 될 것 같습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성지를 순례하며 둘러 보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꿈이 이루어져 지난 며칠간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져 있는 숭고한 길,  “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 이상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칸”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에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칸’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옷을 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  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 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그랬습니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  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입니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합니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최송연/사모

 

사진:나일강


카이로를 향하다
우리 지역, 같은 교단에 소속한 목사님, 사모님들 16명이 지난 1년간 계획하던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꿈이 이루어져 지난 2월23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가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 성지순례는 처음에 계획하던 이스라엘행 비행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대신 이집트행 비행기를 타고 먼저 이집트로 가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한 그 과정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카이로까지는 비행시간만 해도 장장 22시간이 걸렸다. 중간 대기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26시간, 날짜로는 꼬박 이틀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뉴욕과 이집트의 시간 차이가 7시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카이로와의 시간은 꼭 12시간, 그러니까 지구의 반 바퀴를 횡단한 셈이다. 나는 매우 지치고 많이 피곤했지만, 그래도 내가 평소에 그렇게도 가 보고 싶었던 곳이라 카이로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을 들으면서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창에 코를 박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막 한 가운데로 나일강이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띠처럼 둘러쳐 있고, 카이로 시내가 모래먼지와 공장에서 나는 매연 때문인지 잿빛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비행기가 카이로 상공에 들어서면서부터 벌써 공기 속에 섞여 있는 먼지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목을 심하게 자극하면서 콧물을 동반한 재채기가 쉴새없이 터져 나왔다. 먼지 알레르기가 심한 나에게는 이번 여행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중나온 현지인 안내원'장동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향해 서서히 미끄러지 듯이 뚫고 들어가던 비행기가 요란한 진동과 함께 멎자, 여행객들은 저마다 먼저 내려야한다는 듯, 서로가 앞을 다투어 내릴 준비를 했고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내가 들고가야 할 짐들을 주섬주섬챙겨 손에 들고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비행기가 멎자 나는 그들과 함께 섞여 비행기트랩을 밟고 내리는 순간, 카이로 공항도 역시 모든 제삼국이 그러하듯, 많이 어수선하고 지저분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나는 무척 즐거웠다.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성지 순례의 서막이 열렸기 때문이다. 공항에는 우리를 안내해 줄 젊고 싹싹한 한국 안내원이 현지인 젊은 청년 안내원 한 명과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랐더니 우리 일행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모두 공항 출입국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숙소로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안내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카이로의 사전정보를 들을 수가 있었다. 카이로시내에서는 한국사람들이 대단히 인기가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곳에 주재한 여러 전자회사 직원들 그리고 자동차회사 직원들 상사원들이 그곳에서 아주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카이로의 젊은이들은 한국사람들을 자신들의 평생 반려자로 맞아들이기를 소원하고 있는 사람도 꽤 많이 있다고도 했다. 그 한 예로 우리를 마중 나온 젊은 현지인 안내원의 이름이 "장동건"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일행들이 "왜 하필이면 장동건이냐?"고 물었더니, 자기의 옛 애인이 한국 아가씨였는데, 그녀는 장동건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자기를 향해 장동건이를 많이 닮아서 좋다고 이름까지 그렇게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까 그는 키도 크고 눈이 서글서글한 것이 탈랜트 장동건을 많이 닮긴 닮은 것도 같았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 나와서 신실하게 자기의 맡은 일을 잘 감당해 내어서 이집트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또 이집트인들에게 자국을 선망의 대상국가로 인식시킬 수 있을만큼 나라의 위상을 크게 높여준 조국의 모든 근로자들, 자동차회사 직원들, 전자회사 직원들, 해외 공사원들,주재원 등, 그리고 수출산업에 앞장선 모든 분이, 같은 해외 동포로써 무척이나 자랑스러웠고 마음 흐뭇했다.
나일강과 고센땅그 옛날 이집트 막강한 파라호의 포악한 학정에 견디다 못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아기 모세를  역청과 나무진을 칠한 갈대상자에 넣어 하숫가 갈대밭 사이에 놓아 둔다. 때마침, 강물에서 목욕을 하던 파라호의 딸인 공주가 갈대밭 사이에 놓인 역청이 발린 갈대상자를 보고 꺼집어내는데 그 속에서 한 탐스럽고 준수한 아기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집으로 데리고 와, 자기의 아들로 삼아 기른다는 이야기가 (출애굽기 2장1절이하)에 나온다. 역청으로 칠한 갈대상자에 누여서 울고 있던 모세를 건진 그 강물의 이름이 바로 아름다운 나일강이다. 나일강, 6천 6백여km로 세계 제2의 큰 강이다.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빅토리아호수에서 시작하여 열대 초원을 흐르는 물과 에티오피아의 산악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아프리카의 젖줄이라고 부른다. 애굽강은 카이로 북방에서 여러 줄기로 나뉘어지며 나일 델타란 넓은 대평원을 만들고, 나일 삼각주라는 비옥한 땅으로 세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이 비옥한 땅 곡창지대에 고센지역이 있다. 이 고센지역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대흉년기에 자기를 찾아온 아버지 야곱과 그의 열 한 형제들에게 이집트의 왕 파라호에게 구하라고 한 곳으로써 고센 땅이 얼마나 기름진 땅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숙소로 가는 길에 나일강변에 있는 한 이집트인 식당에서 그들의 요리로 점심을 했다. 기름기는 좀 많았지만, 생각보다는 깨끗했고 맛도 괜찮았다. 허기야, 어제서부터 한 끼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우리로서는 무엇인들 맛이 없었을까? 우리는 삼삼오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나일강을 바라보면서 처음 대하는 진귀한 이집트식 뷔페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나는 점심을 먹는 내내 음식보다는 아기 모세의 울음소리, 아름다운 공주의 웃음소리, 모세의 성장기, 모세의 장년기, 그리고 모세의 출애굽과정이 마치 어제 일인양, 영화 필름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 아름다운 성경그림을 바라보며 꿈꾸듯 넋을 놓고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나일강의 특이한 점은 강물이 시내 한가운데까지 흘러 들어와 식당 벽에 찰랑거리며 햇볕에 반짝거리는 것이 참으로 로맨틱하다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무사히 성지 순례를 마치고돌아왔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계속 성지순례 기행문과현지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올릴 예정입니다.많이 사랑해 주세요.  최송연 드림 ^^*

 

                     

음악: Ito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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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거대한 피라밋과 우아한 스핑크스

 

아기 예수님의 피난 기념교회와 모세 기념교회

 

이집트인이 운영하는 나일 강가의 한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끝내고, 우리는 카이로 중심가, 올드시티에 있는 박물관과 아기 예수님의 피난 기념교회, 그리고 모세 기념교회를 방문했다. 나일 강변에 버려진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건져낸 곳이라고 추정되는 곳에는 모세 기념회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와서 머물렀다고 추정되는 장소에 ‘예수 피난기념교회’가 있었다. ‘예수 피난기념교회”와 ‘모세 기념교회’는 모두 성지 곳곳에 세워진 다른 회당들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도 겉모양은 사원과 같았고 내부는 요란하게 치장되어진 전통 유대교 회당이었다. 마침 우리가 들어간 시각은 유대교인들의 예배시간이라 회당 지하실 깊이까지는 내려가 보지 못했고, 내부는 사진 찍기마저 금지되어 있어서 조용히 내부와 바깥을 둘러보는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었다.

 

콥틱 그리스도인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이집트 내에도 소수의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을 일컬어 ‘콥틱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집트 내에, 콥틱 그리스도인들이 이집트인구의 10-12%를 차지하는 전성시대도 있었지만, 최근 들어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는 이집트 인구의 5% 미만이라고 한다. ‘콥틱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당시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소아시아지역을 비롯한 각 곳에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이때 이집트에도 복음이 들어왔으며, 콥틱교회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마가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져 내려오기도 하고, 바울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아무튼, 그 역사가 대단히 오래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집트 안의 콥틱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다른 이슬람국가들과 마찬가지, 모슬렘들의 심한 박해로 인해서 성장하지 못하고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라고 했다. 역사에 박식한 한국 안내원이 들려준 콥틱 그리스도인들 삶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슬람의 모슬렘이 이집트의 주도권을 잡은 지난 천이백 여년 동안, 사회의 모든 지도권, 상류층의 사람들이 모슬렘이다 보니, 기독교인들에게는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마저도 허락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개중에서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피나는 노력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여도 그들에게 선뜻 좋은 직장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일정 수입근원을 지원받지 못하는 그들의 생활수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정부로부터 보조도 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지목되고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는 그들은 시내에서 살지도 못하고 외각지, 그것도 지난 날, 쓰레기수거 지로 쓰이던 곳으로 쫓겨나, 그곳에 땅굴 같은 것을 파고 거기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물 공급도 잘 안되니 깨끗이 씻을 수도 없다. 그 동네는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역겨운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키며 대대로 그 신앙을 전수해 내려오고 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신앙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아들은 또 그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대물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기독교인인 아버지는 자기의 어린 아들의 팔목에다 십자가표식의 문신을 새겨넣어 준다. “너는 세상과는 구별된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때마침, 우리 일행 앞에는 팔에 십자가 문신을 새겨 넣은 한 초라한 할머니가 자신의 팔을 보여주면서 무슨 말인가 열심히 전하려 했지만 그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던 나는 그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른 관광객들처럼, 바싹 마른 그녀의 손바닥에 1딸러 지페 한 장을 쥐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님, 좋은 환경에서 안전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치 못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여, 저들을 축복하소서”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뒤돌아 서 나오는데, 주님 나라에서 별과 같이 빛날 콥틱 그리스도인들과 그 앞에서 초라한 내 모습이 영안으로 보이는 듯, 육신적으로 초라한 그들 앞에서 내 영혼은 심히 부끄러워 몸 둘바를 몰랐다.

 

거대한 피라밋과 우아한 스핑크스

 

다음은 이집트 관광 최대로 꼽을 수 있고 이집트인의 긍지로 삼는 거대한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안내원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나는 우선 그 거대하고 웅장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피라밋은 고대 파라호, 그러니까 왕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호들이 자기들의 무덤을 저렇게 큰 피라밋으로 만든 것은, 그들이 내세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쓰던 물건들, 침대며 집기며, 심지어는 자기가 부리던 신하들까지 죽여서 같이 묻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 파라호들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거대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왕들의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도 한다. 스핑크스를 쌓아 올린 재로는 흔한 일반 돌이 아니고 천연 화강암이었다.

 

스핑크스에는 매우 흥미로운 전설이 담겨져 있다. 스핑크스란 ‘교살 자’라는 의미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괴물이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을 지녔고 몸은 사자이며 등에는 날개를 달고 있다. 스핑크스는 테베 시민을 징벌하기 위하여 헤라의 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스핑크스는 테베 근처의 피키온 산으로 갔으며, 거기에 있는 벼랑 위에 앉아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두 개의 수수께끼를 던져 풀지 못하면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 점심때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스핑크스는 이 기묘한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방식으로 지혜의 신이라고도 불렸고 악마라고도 불리면서 테베 시민을 괴롭혔다고 한다. 하지만, 청년 오이디푸스가 나타나서 그 수수께끼를 풀자 굴욕감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슬피 울며 자살하고 만다. 이 일로 테베 시민은 오이디푸스를 기쁘게 환호하며 맞아들이고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한다는 이야기이다. 수수께끼의 정답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람이었다.’ 아기 때는 기어다니니까 네 발로 걷는다는 것이고 장성해서는 두 발, 늙어서는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으니 세 발로 걷는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 정교함과 웅장함은 대단했다. 나는 오래전에 중국에 있는 만리장성을 보고 그 규모에 놀란 적이 있는데 피라밋을 보니, 만리장성의 규모와 정교함도 놀랍지만 피라밋과 스핑크스와는 비교할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피라밋은 모두 돌들로 쌓여 있는데 돌 하나가 작은 것은 1.5톤에서 2, 보통은 3-4, 큰 것은 20-30톤까지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 4500년 전에 이렇게 엄청난 무게의 돌들을 어떻게 저렇게 높이, 그리고 빈틈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일까?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아직 철기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런 때에, 도대체 어떤 연장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저렇게까지 정교하게 다듬어 올릴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과연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규모다. 참으로 인간 속에 잠재한 능력과 지혜가 무궁무진하고 끝없음을 보면서 창세기의 말씀이 생각났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과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끝은 어디쯤일까? 하나님을 닮은 그 엄청난 지혜와 지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할 것인가? 신의 형상을 닮은 그 엄청난 지식과 지혜를 단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사용하던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던지 그 선택은 자유일 것이다. 지혜는 있으되 지혜 주신 분을 경외치 아니하는 것이 어리석은 자요, 멸망의 길을 자초하는 것이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1:7절 상반절)이란 말씀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14: 1절 상)”하시는 말씀이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내 머리에서 뱅뱅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음악: Ito상님 방에서

다음에 계속 됩니다, 많이 기도해 주시고 기대해 주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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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광야의 싯딤나무

불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

 

우리는 피라밋이 아주 가깝게 바라보이는 한 호텔에서 첫날밤 여장을 풀었다가, 다음날 아침 일찍 카이로시내를 벗어나 광야로 향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그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다. 카이로시내를 벗어나자 곧 메마른 광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3월의 하늘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태양빛에 눈이 부셔,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것조차도 힘이 든다. 가도가도 끝없는 황량한 벌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바싹 메마른 땅, 시뻘건 모래 먼지가 수북이 쌓인 끝없는 들판에는 짧고 앙상한 가시나무 떨기 같은 것이 어른의 주먹 뭉치만 하게 군데군데 엉겨붙어 있는 것 외에는 생명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지금 화성에 온 것일까? 지구 안에도 이런 곳이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황량함이 보는 이의 마음마저 메마르게 한다.

 

사막 여기저기에 듬성듬성한 가시덤불 같은 것에 우리 모두의 시선이 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재치있는 젊은 안내원이 입을 연다. “지금부터 광야가 시작됩니다, 홍해까지 버스로는 두 시간 반을 더 달려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화장실은 없습니다. 혹시 급하신 분들이 있으시면 여자분들은 무조건 얼굴만 가리시고 남자분들은 돌아서서 볼일을 보십시오, 여자분들은 그런 때에 대개 저 작은 가시나무 떨기 사이로 가서 숨으시는데, 그곳에는 절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그곳이 바로 광야에서 서식하는 전갈과 불 뱀들의 서식처입니다. 그곳에 앉아서 볼일을 보시면 큰일이 나죠.” 우리는 그의 익살스런 말에 와~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민수기 21 4절 이하에 잘 나온다. 광야의 불 뱀들이 모두 몰려나와서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게 한 그 무시무시한 불 뱀과 전갈들이 이 불볕더위를 피해 숨을 곳이 있다면 바로 저런 가시나무 떨기밖에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무서운 전갈과 불 뱀들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며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는 듯, 끔찍한 환상에 전율했다.

 

나는 한때,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을 그렇게 많이 체험하고도 수시로 하나님을 원망하다 불 뱀에 물려 죽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어리석고 미련한 백성이라고 비웃었던 적이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된 사람들이기에,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실상에서 체험하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현실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그리도 쉽게 지도자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등을 돌려야만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광야의 실체를 눈앞에 보면서 나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때 그 상황에서,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해하게 됐다. “목마르다, 배고프다. 우리를 애굽에서 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어찌하여 우리를 이 메마른 광야로 끌어내어 죽게 하느냐? 심하게 원망하다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백성들,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만약 그때 그들과 함께했다면, 나는 분명히 그들보다 몇 배나 더 심하게 하나님도 모세도 원망했을 것이다. 나는 현대 온갖 최첨단 문명의 혜택을 다 누리고 살면서도 작은 어려움 앞에서, 들어내어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입술 밖으로 내어 뱉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수시로 내 감정을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았으며, 그럴 때마다 힘들어하던 내가 아니던가? 몸이 조금 불편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마저 저울질하는 쪽으로 문득문득 떠 올리기도 한 나다. 이렇게 나약한 내가, 만일 그들과 함께 이 메마른 광야에서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이 40년간을 헤매고 다녀야만 했더라면…, 불을 보듯 뻔한 나 자신이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영역 외에는 잘 알 수가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불러내셨고, 그들을 희생시켜서 오늘 우리에게 거울로 삼게 하셨구나…, 이렇게 험한 광야에서 헤매다가 원망할 수밖에 없었고, 원망하다가 멸망당한 그들, 선택된 민족, 히브리사람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이의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정죄했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광야의 유목민 베두윈 족

 

사막지대를 달리는 차 속에서 내어다 보니, 다 낡은 천막 같기도 하고 움막 같기도 한 것이 군데군데 보인다. 바로 저 유명한 광야의 유목민 배두윈 족의 집이다. 광야의 베두윈 족에게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야의 배두윈이 집을 떠나 먼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다음 5가지의 필수품을 지니고 가야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물, 낙타, , 소금, 그리고 고양이라고 했다. 젊은 안내원의 재미있는 퀴즈가 시작된 것이다.

 

사막에서 꼭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의 대답은 여러 갈래로 엇갈렸지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역시 소금이란다. 그다음에 고양이, , , 그리고 낙타가 남았는데 어떤 것을 버려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다수가 소금 다음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도 없는 고양이일 것이란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정작 답은 우리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었다. 사막에서 제일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첫째, 소금, 다음은 물,그리고 그다음이 돈이라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소금이야 없어도 그만이겠지만, 광야에서 물은 생명과 같은 것인 데, 그리고 돈이 있어야 먹을 것을 살 수 있을 텐데..., 광야에서건 어디서건 음식을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음식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 할 비상수단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돈’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에 길든 우리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광야에서 인간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것은 돈보다 낙타라고 한다. 낙타만 있으면 먼 길을 갈 수가 있으니 낙타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다. 이제 낙타와 고양이가 남았다.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낙타와 고양이 중 어느 것이겠느냐? 이것이 그날 퀴즈의 클레이맥스였다…. 물론, 우리들은 모두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고 고양이라고 했다. ~~? 고양이라니…” 나는 하찮은 고양이를 맨 마지막까지 남겨두어야만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동물 중에서 고양이는 아주 영민한 동물이라고 한다. 사막에서 잠을 잘 때, 무서운 불 뱀과 전갈의 접근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고양이뿐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광야에는 불 뱀과 전갈이 그만큼 많으며,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붙어 있고서야 돈도 필요한 것이지, 사람이 생명을 잃고서야 돈이 무엇이 소용이겠느냐 하는 부연 설명이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광야에서 인간의 생명이란 얼마나 연약한 것인가? 새롭게 인식한 좋은 기회였다.

 

홍해를 건너다

 

카이로를 떠난 지 2시간 30, 끝없이 펼쳐진 넓은 광야를 가로질러 새로 닦아 놓은 듯한 고속도로를 쉬지 않고 달려서 우리가 홍해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지난 오후였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최근에 이 지역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홍해의 수위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홍해는 여전히 넓디넓은 바다였다. 그 옛날, 저 넓은 홍해 바다가 육지같이 갈라졌고, 바다 속에 뚫린 대로로,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을 것이다(14: 1-4). 짙은 녹색으로 춤추듯 일렁이는 홍해 물은 무척 맑고 깨끗했다. 우리 일행은 카이로시내에서부터 쭉 타고오던 버스에 그대로 앉은 채, 이집트가 돈을 투자했고 중국에서 이루어 놓았다는 바다 속에 뚫린 길로 홍해를 건너는 신비한 체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적 같은 것은 필요 없다’큰소리치는 현대문명의 실상을 보는 듯, 신기한 한 편,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고 수에즈운하 끝자리, 작은 호수가 있는 갈대밭 사이, 육지로 건넜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현대판 구약성서 지도를 보면 성경과는 사뭇 다르게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인간의 생각으로 바다가 갈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유난히도 홍해바다의 길, 그리고 그 주위의 길에 흥미가 있었다. 만일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성경 일부분은 삭제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 점일 획도 틀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전제로 할 때, 지도대로 성경을 찢을 것인가, 아니면 성경대로 지도가 그려져야만 하는가? 내 믿음은 지도가 성경대로 그려져야지, 지도대로 성경을 찢어 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려면, 먼저 내 눈으로 그 지형을 확실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 성경에서 말씀한 지형들이 눈으로 확인될 때마다 눈물이 흐를 만큼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뜨거워 옴을 느꼈다.

 

 글/최송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적응력이
아주 뛰어난 것 같습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거나 우리 민족은 모두
있는 그곳에서 뿌리를 잘 내리고 열심히 그리고 아주 부지런히 살아들
가고 있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네들이 어디를 가건, 결코 버리지 못하고 적응을 하지
못하는게 딱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끼리니까
살짝 알려 드릴게요, ㅎㅎㅎ) 그것은 하루에 한 끼라도 반드시 김치와
된장찌개를 먹어야만 겨우 밥을 먹은 것 같은 음식습관이랍니다.

스테이크가 아무리 맛있다곤 해도 두 끼만 연거푸 먹으면 코에서 냄새가
난다니깐요, 후훗….

우리 부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젊었을 때부터 선교사로 외국의 이곳저곳을 수없이 돌아다닌지가 벌써 20년이 넘어가고 있건만, 우리는 여전히 하루에 한 끼라도 꼭 김치와 된장찌개를 먹어야만 겨우 밥을 먹은 것만 같으니….그런 우리를 가리켜서 남편 친구인 백인 선교사 한 사람이 “야, 너희들의 배는 김치 탱크구나…내 배는 "슬라피조" 탱크인데…(음식 위에 올려서 먹는 양파와 고기를 섞은 서양요리의 일종)” 하면서 크게 웃던 생각이 납니다.

이렇게 그리운 것이 김치와 된장찌개이건만 러시아에 온 후, 거의 1년이 넘도록 김치와 된장찌개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재료들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몸이 튼튼하여 입맛도 좋은 남편에 비해, 저는 몸도 약한 편이라 그런지 아무거나 썩썩 먹지를 못하는 골골이거든요. 얼마나 힘이 들던지요…훌쩍~

된장찌개는 그런대로 안 먹고도 견디겠는데…이놈의 김치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보니…난 아무래도 순종(?) 김치
탱크인가 봅니다.

그런 내가 근 일 년 동안 김치를 먹지 못하고 살려니까, 거의 미칠(죄송^^*)지경이었습니다. 자나깨나 김치, 김치생각뿐이었고 꿈에도 김치를 먹는 꿈을 다 꾸게 되더라니까요.

그렇게 고심하는 우리를 본 어떤 중국 조선족 상인이 배추가 있는 곳을 아르켜 주겠다고 해서 우리는 선뜻 따라나섰다가 어느 늦가을의 노오란 배추밭을 보게 되었고, 그곳 들판에 흐드러진 배추가 새빨간 고추잠자리 떼들과 함께 어우러져 벙글거리고 있는 것을 본 우리는 얼마나 반가웠던지요…(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다 글썽거린다니깐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배추를 끌어 담았는데요, 글쎄, 대책도 없이 30여 포기나 끌어 담았지 뭐예요.

이렇게 어렵게시리 배추를 구해다 놓긴 했는데…아뿔싸, 이 김치를 또 어디에다 담근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김치를 담글 마땅한 통이 어디 있어야지요,때 마침, 우리는 학교 (언어 연수생으로서 극동대학에 다녔음)에 갔다 오던 길에 어느 술집 옆을 지나오게 되었는데, 그 술집 뒷마당에 나무로 된 큰 술통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빈 술통 속에다 비닐로 된 쓰레기봉지를 집어넣으면 훌륭한 김치통이 될 수가 있겠다는 아주 기발(?) 한 아이디어가 내게 떠 올랐고…남편을 졸라 거금? 을 지불하고 그것을 욕심껏 아예 두 통이나 사긴 샀는데…그 큰 술통을 집으로 가지고 갈 길이 또 막연했습니다.

“자, 이걸 어떻게 집으로 가지고 간담?” 아무리 둘러보아도 묘책이 없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길가에 그 빈 통을 세워놓은 채 지나가는 차를 세워보려고 애를 쓰며 손을 흔들어댄 지가 벌써 몇 시간이 지났건만… 그 누구도 차를 세워 주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북쪽 하늘의 해는 유난히도 짧은지, 주위는 어느새, 어두컴컴해 오고 있는데…초겨울의 얼어붙은 땅 위에서 추위를 이겨보려고 우리 부부는 발을 동동 굴러보았지만 여전히 뼈가 쑤시듯 차가운 바람에 한기마저 느끼며 몸은 오들오들 떨려 오고... 배에선 쪼르륵 소리마저 들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학교 가기 전 커피 한잔과 빵 한 조각 먹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곧 시베리아의 무서운 밤이 닥칠 텐데…이 일을 어쩐다? 이 술통만 없다면야 ‘뜨람바이’(전차의 일종)를 태워 주겠지만, 그래도 김치통에 대한 미련만은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술통만은 꼭 가지고 가서 김치를 담구어야 러시아의 긴긴 겨울을 속이 니글거리는 눈물의 밥을 먹지 않을 테니깐요.

다급해진 우리는 “오, 하나님, 우린 꼭 김치를 먹어야만 해요. 우리는 한국사람이요, 김치 탱크인 것도 주님이 다 아시잖아요. 제발 이 술통을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속히 천사라도 좀 보내어 주세요.” 우리 부부는 그곳에 서서 두 손을 붙잡고 기도를 했고…나는 거의 필사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기도를 막 끝내고 눈을 들어보니 이상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아주 낡고 큼직한 군인용 지프차 한대가 우리 앞에 오더니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젊은 러시아인이 고개를 내밀고 손짓으로 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지프차를 보는 순간 반가움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생활 한 지가 1년이 넘도록 이런 군인 지프차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혹시 마피아단 중의 한 명이나 아닌가...해서였지요.

지금부터 13년 전, 그러니까 그때 당시의 러시아는 70년의 사회주의를 막 끝내고 개방된 직후라 문자 그대로 마피아단의 천국이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는 마피아단이 들끓었고,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은 몸에 달러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그들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고, 선교사들의 피해사례가 만발하던 그런 때였던 만큼 두려운 것도 무리는 아니었답니다.

우리는 머뭇거리며 얼른 차에 오르지를 못하고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가? 의심의 눈으로 차 안을 기웃거렸습니다. 뒷좌석을 보니 그곳에 한 대여섯 살이나 먹었을까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아이가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의자 위에 쭈-욱 늘어놓곤 그것을 가지고 혼자서 놀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착하게 생긴 어린아이를 보는 순간, 우리는 마음이 놓였고, 그 차에 올라탈 수 있는 용기도 생겼지요. 우리를 태운 그 지프차의 운전사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웃는 얼굴로 앞만 보면서 달렸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려서 우리가 살고 있는 낯익은 동리가 보이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 지프차는 우리가 머물고 있던 선교부의 아파트 앞마당에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이 아파트에 사는 것은 또 어떻게 알았지? 우린 그저 아직도 익숙지 못한 짧은 발음으로 우리가 사는 동네의 이름만 겨우 버벅거리는 러시아어로 말했을 뿐인데…”그저 정신이 다 몽-롱하기만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스빠시바, 스콜까 스토엣?” (감사합니다.얼마입니까?) 하고 묻는 우리를 향해서 그는 또 빙그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우리는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한사코 돈을 쥐여주려고 했지만 끝내 거절한 채 그는 어느새 차를 돌려 부르릉 힘찬 기어 소리와 함께 사라져버렸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운전석에 앉은 사람도, 그 어린애도 우리가 타고 내리는 동안, 정말이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당신의 자녀가 너무 다급하다고 졸라대니...아직 인간의 언어를 채 배우지 않은 천사들을 급하게 파송하신 것인지...ㅎㅎㅎ.)

“아, 주님. 당신은 김치 탱크들의 고통도 아시고 김치를 담아 먹으라고 천사를 보내어 주셨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종들이 김치를 먹어야만 살 수가 있는 김치 탱크임도 아시고 천사를 보내어서 김치통을 실어다 나르게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시커먼 지프차를 보면 우리가 두려워서 타지를 못할까봐 사랑스런 어린아이까지 대동시켜서 말입니다! (^^*)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런 멋진 배려에 코끝이 찡~해 옴을 느끼며 낡은 지프차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렇게 오랫동안 넋을 읽고 서 있었습니다. 와, 정말 멋있는 나의 주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 생명 다하도록….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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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천사들의 이름도 다양하다고 하던데...글쎄요, 저는 제 수호천사의 이름도 모르네요.(ㅋㅋㅋ)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천사의 이름 이외에는 알 필요도 없고, 또 알아서도 안 된다고 나는 믿습니다! 말씀에 의거한 영분별을 하지 않고 무조건 모든 천사들을 다 받아들이려 하다가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죽음의 천사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별똥별/최송연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하나님 손에 맡겨진 인생


저는 아주 젊은 나이에 남편과 함께 미국에 왔습니다. 남편은 작은 개척교회를 맡아서 담임했고 저는 남편의 목회를 도우면서 두 자녀를 기르고 틈틈이 학교에 다녔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서 교회를 섬긴 결과 하나님께서 놀랍게 축복을 해 주셔서 교회가 지역에서는 제법 큰 교회로 성장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녀들도 열심히 공부를 잘해 주어서 명문 사립학교에 풀 아카데믹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행운도 누렸습니다. 저도 학교를 마치고 미국인 은행에 취직이 되었고 이제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이 될 즈음이었습니다. 그때 구소련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새 과도정부가 들어 섰습니다. 이것을 본 남편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공산정권에 압제당하고 있던 우리 고려인들에게 누군가가 가서 복음을 전해만 한다는 것이었고...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란 것입니다!

나는 겨우 누리게 된 행복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가 좋사오니…고집할 수만은 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웠지요…좋은 환경과 직장, 그리고 건강을 주신 분이 그분이니까요. 저희가 섬기고 있던 교회를 부목사님에게 맡기고 선교사를 지원한 남편을 따라서 아직도 어린 두 자녀를 떼어놓고 어렵게시리 구한 좋은 직장마저 포기한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구소련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3년을 잘 마치고 선교부에서 안식년을 주어서 집으로 돌아왔지요… 지친 몸과 육신을 재정비해서 다시 선교지로 나가려고요. 그런데, 우리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돌아오는 즉시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었는데 그때 x-선 촬영결과가 이상하게 나온 것입니다. 허파에 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이 무서운 것은 ‘암일지도 모른다. 조직검사를 하기엔 너무 위험한 부위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자.’ 하고 담담히 말하는 의사의 말이었습니다. (내게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의사는 참 간단하고도 쉽게 말하더군요. 그렇게밖에 또 뭐라고 하겠나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도 섭섭하고...)

그날 저녁부터 저는 사탄의 극심한 공격 속에 들어갔구요…‘네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섬긴 결과가 이것이냐?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모든 좋은 것, 그리고 네 생명보다 귀한 자녀까지 포기하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 어려운 곳까지 가서 헌신하고 돌아온 네게 왜 이런 무서운 병을 주시느냐? 사람들이 너를 도데체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아직도 젊은데 지금 쓰러진다면 주님의 영광이 가려 질 텐데…하나님께 병 낫기를 간구 해 봐라. 성경에도 병 나은 예가 얼마든지 있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부터 저의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서 주님께 울부짖었지요. "살려 달라고, 지금 내가 쓰러지면 하나님의 영광 가리운다고 나는 온 힘을 다해서 주님을 섬긴 것 주님이 다 아시지 않느냐고…" 그런데 병은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점점 더 악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기침이 심하게 나오고 낮에는 아무런 힘도 없고…입안은 하얗게 백태가 끼어서 밥맛은 딱 떨어지고 암 초기에나 발생한다는 설사는 하루에 대 여섯 번씩… 화장실에 가고 또 가고…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는 상태에서 매일 그랬으니, 몸과 마음이 얼마나 곤고한지요…

그냥 목구멍까지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젊은 나이에 쓰러져야만 하느냐?’ 하고 원망하고 싶어졌고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요. 몇 개월을 그렇게 심하게 앓다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니 죽음의 그림자가 시커멓게 씌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죽음의 실체로구나.” 싶었지요. 그리고 3개월 후,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하니까 의사가 또 하는 말이라곤 “ 피가 나오는지, 가래를 잘 조사해 보아라 약은 없다. 암이 진행될 때까지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사탄의 극심한 격동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두렵고 괴로워진 저는 하루에도 몆 번씩 자살 충동마저 생기더군요. 침대 위에 힘없이 배를 깔고 누워서 엉, 엉, 소리를 내어 울고 또 울었지요…

그러든 어느 날, 성령님께서 내 마음속을 두드리시는 음성이 들렸어요. ‘사랑하는 딸아, 너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죽으면 천국이 아니냐?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네 한사람 죽는다고 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될게 무엇이냐? 주께서 오라시면 갈 것 뿐인 것이 인생이 아니냐…너는 강하고 담대 하라!’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때부터 ‘죽으면 죽으리라!’ 생명을 포기하고 불평 대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기로 작정을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 내가 나의 최선을 다 해서 선한 싸움을 싸운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이제 족하오니 죽든지 살든지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도 괴롭고 복잡하고 무섭던 마음이 갑자기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남편 친구 목사님이 찾아오더니 한국에서 새로 온 한의사 한 분을 추천하면서 그를 한번 만나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한의사가 병을 낳게 하지는 못해도 우선 식사라도 할 수 있어야 병과 싸울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서 우리 부부는 그 한의사를 찾았고 상담을 한 후 치료에 들어갔지요. 그때부터 겨우 식사를 조금씩 하게 되었고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다시 담당 폐 전문의를 찾았을 때 그는 “아직 혹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자라지도 않고 있으니 좀 더 두고 보자.” 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도 허파에 혹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는 두렵지가 않아요. 그리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람이 시험이 들었을 때에 그 시험 자체의 두려움보다 사탄의 격동함이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언제든지 가야 할 인생, 너무 미련 두지 않겠다. 이래도 저래도 우리 주님은 선하시다.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 라는 참 믿음의 고백을 고백했을 때, 그때, 사탄은 물러나고 주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는 체험 간증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절)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과 내가 영혼과 육체의 모든 질병이 고침받고 건강한 삶을 사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마음과 생으로 자신을 드리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이란 고백이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고백되어 질 때, 주께서 그 믿음의 고백을 흠향하시고 피묻은 손으로 안수하여 주시며 치료의 광선을 비쳐 주신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1),

위험한 결단

 

 

간밤에 심하게 몰아친 진눈깨비에 심술이 난 걸까? 시계는 벌써 열 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잔뜩 찌푸린 하늘… 금세라도 다시 진눈깨비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12월의 매서운 바람은 윙! 윙! 소리를 지르면서 다 낡은 선교부의 창문을 오늘만은 꼭 부서뜨려놓고야 말겠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부딪히며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습니다.

“아니, 운전사 ‘싸샤’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지…”반쯤 마시다 만 커피잔을 손에 든 남편이 연신 바깥을 내다보면서 걱정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그렇네, 운전사 ‘싸샤가 안 온다면 오늘만은 어쩔 수가 없겠네…, 그래, 어쩌면 오늘은 포장도 안 된 러시아의 저- 지긋지긋한 얼음길을 왕복 여섯 시간이나 흔들리면서 달려가지 않아도 될런지 몰라…아, 신난다. 무엇을 한다? 옳지,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서 집에 남아 있는 어린 딸에게 편지라도 한 장 써야지…," 나는 집에 남아 있는 어린 딸을 생각만 하여도 코끝이 찡- 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왔습니다.

매 주일 아침 7시가 되면 우리는 선교부에서 얻어준 집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서 ‘우수리스크’로 갑니다. 그곳에는 중국 조선족들이 많이 몰려나와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었고, 우리는 러시안교회의 방 하나를 시간대로 빌려서 그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가 벌써 반년이 훨씬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유일한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사용하고 있는 러시아인 기사 ‘사쌰’아저씨가 어젯밤에 내린 폭설 때문에 하얗게 얼어붙은 길을 보고 운전이 불가능하다고 혼자서 판단을 했던지 10시가 다 되도록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집에는 전화도 없으니 알아볼 재간도 없습니다.

부엌에서 커피를 끓이며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나는 남편이 걱정하는 말에, 솔직히 걱정보다는 오히려 오늘 하루를 좀 편하게 쉴 수가 있겠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깥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남편이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성경찬송과 성경공부 교재들을 가방에 주섬주섬 주워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내가 “아니 여보, 지금 당신 무엇을 하세요? 운전사도 오지 않고 날씨도 이런데, 설마…, 당신 오늘 ‘우수리스크’에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응, 여보, 우리 기차로 한번 가 봅시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이 추운 날씨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을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소. 그들은 아직 주님을 잘 알지를 못하지 않소. 그러니 그들은 그리스도인 된 우리를 먼저 바라보거든…” 남편의 결심은 이미 굳게 서 있는 모양인지 담담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 기차로요? 여보, 우리는 러시아 어도 잘 알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기차를…, 그건 말도 안 돼요. 하루쯤 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야단치실 것도 아니니 우리 그러지 마요, 네? 그리고 요즈음같이 마피아단들이 외국인을 많이 노리는 때에…저는 싫어요. 꼭 가시고 싶으면 당신 혼자서나 가세요!” 마른행주로 젖은 손을 닦으면서 단호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지만, 나는 이미 그의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그 일이 무슨 일이 되었든지 또 어떤 일이 되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세워졌다면 아무도 못 말리는 왕 고집쟁이 내 남편…, 때문에 이민교회로서는 제법 큰 교회 측에 들던 우리 교회와 이제 갓 대학에 들어간 아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반인 어린 딸을 버려두고 이곳에 오게 되었고 남편을 아끼는 그의 친구들은 그런 그를 ‘우직하다고’ 나무라지 않았는가…, 그런 남편이니, 혹시나가 역시나였습니다. 그는 오늘도 아내의 현명한? 조언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채, 어느새 두꺼운 외출용 점퍼를 걸치고 털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었습니다.

 

언어도 모르고 길도 낯선 그곳을 굳이 가야겠다고 우기는 것은 참으로 괘씸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붙여 주셨으니 나도 나의 사명을 감당해야지 어찌 남편 혼자만 사지로 보낼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하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털모자가 달린 내 따뜻한 외투를 꺼내어 입고 앞서 가는 그의 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깥에 나오니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대고 그놈의 시베리아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가 영하 40도라던가… 코가 얼어서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는 한 손으로 코를 감싸 쥐고 두 눈만 겨우 내어 놓은 채 길가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기를 한 시간 이상, 다 낡은 승용차 한 대를 어렵게시리 잡아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극동대학에서 육 개월째 언어연수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이도 있고 하여 이제 겨우 숫자나 제대로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형편없는 러시안 실력…, “기차역으로 갑시다.”하고 점잖게 말하고 싶은데 가엾게도 입에서는 버, 버, 거리면서 말보다는 손발이 더 먼저 나가는 것을 어찌하랴….

다행히 그 러시아인이 우리의 끙끙대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하라쇼!(좋다!)" 하고 흔쾌히 대답하며 우리를 차에 타라고 고갯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운전사가 우리를 기차역으로 제대로 데려다 줄 수가 있을까? 아니면 딴 길로…? 위장된 마피아단…? 소심한 나는 온갖 걱정으로 마음에 심한 갈등을 느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쩌랴… 마지못해 남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타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진 나는 차 안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고슴도치 모양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채, “주님, 제발 이 운전사가 우리를 무사히 기차역으로 데리고 가게 도와주세요.”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하면서 옆에 앉은 남편을 흘낏 바라보니 그도 역시 은근히 걱정되는지 입을 굳게 다물고 앉아서 애꿎은 창밖만 뚫어지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려갔을까? 저-건너편에 종탑이 우뚝 솟은 기차역이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안심이 되든지… “쓰바씨바!(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면서 우리는 그 운전사에게 루불(러시아화)을 듬뿍 쥐여주고는 도망치듯 뛰어내렸습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2),

천사를 파송하신 주님

 

기차역에 도착해서 벽을 바라보니 벽에 붙은 낡은 시계가 어느덧 한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지금 곧바로 기차를 탄다고 해도 '우수리스크’에 갔다가 당일로 되돌아오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안내판에 보니까 오후 세시에 가서야 우수리스크행 기차가 있다고 적혀 있지를 않은가? 나는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자고 거의 애원하는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남편의 표정에는 조금도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뚜벅뚜벅 창구로 걸어가더니 기차표를 두 장 사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오, 주님 우리는 과연 우수리스크에 가는 기차를 제대로 탈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제대로 그곳에 내릴 수가 있을는지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무모한 짓이 분명한 남편의 행위이지만 이 일이 분명 주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고는 못할 터…, 내가 너무 강한 반대를 한다면 마귀가 좋아할 테고… 그냥 따라가자니 너무나 무섭고… 나는 속수무책이 된 기분으로 말없이 창가에 기대어 서서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역 안에 설치된 마이크로폰에서는 계속해서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수리스크행 기차를 바로 타지요?” 시간은 거의 세시가 다 되어가는 데, 안내원도 없으니 어디로 가야만 '우수리스크'로 가는 기차를 바로 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혹독한 추위와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으로 거의 새파랗게 질린 채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너무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소.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요.” 두려워서 떠는 나를 조금이라도 안심시키기 위해서 위로하는 남편의 말이겠지...,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남편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아까부터 저쪽 맞은편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던 한 포근한 인상의 러시안 중년부인이 웃으면서 우리에게로 다가오더니 “저-혹시 당신네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아니냐?” 하고 정확한 영어로 묻는 것이었습니다.

“…?”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서 있는 우리를 향해서 그녀는 “내가 우수리스크 러시안교회에서 당신들을 보았다. 당신네들 지금 우수리스크로 가려고 하느냐? 그러면 나와 함께 가자. 나도 지금 '우수리스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렇게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 주면서 동행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친절한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뿌리칠 수 있는 다른 어떤 대안이 우리에게 있는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우리는 두 번 다시 생각해 볼 겨를도, 또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 되어서  “그렇다. 같이 가 준다면 고맙겠다.” 선뜻 대답을 하고 그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서 무조건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기차는 우리가 타자마자 곧 눈이 하얗게 쌓인 러시아의 넓은 들판을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을 했고,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간 후, 우수리스크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겨울 해가 서산을 넘어간 뒤였습니다. 음산한 시골 역에 도착한 우리는 또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며 그렇게 그 자리에 서 있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왔던 그 여인이 능숙한 러시아 어로 지나가는 택시를 한 대 잡아서 세우더니 “타세요. 제가 당신들이 가려고 하는 교회까지 안내해 드릴게요.”하면서 상냥하게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멍-한 상태에서 “Thank you.”를 연발하고는 그 여인이 세운 택시에 올라탔고, 잠시 후, 그 차는 우리의 눈에 익어 반가운 그 러시안교회 앞에 정확하게 도착을 했습니다.“여기가 당신들이 오려고 하던 곳이 맞지요?” 따뜻하게 묻는 그 부인의 눈에는 어린아이처럼 방글방글 장난기가 섞인 웃음이 담뿍 배어 있었습니다.

“네, 그래요. 바로 이곳이예요!” 너무나 기뻐서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는 우리를 그곳에 내려 주라고 택시 운전사에게 말을 한 후, “Take care.(조심하세요.)" 하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그 여인은 우리가 내미는 택시비도 거절한 채, 함께 타고 왔던 그 차에 그대로 앉아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제서야 화들짝 정신이 든 나는 "여보, 당신 저 사람을 러시안교회에서 본적이 있어요?”하고 물었습니다. “아니, 나는 모르겠는데…? 음, 당신도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사실, 우수리스크는 우리나라의 면 소재지 정도의 아주 작은 중소도시입니다. 러시안교회의 성도 수라고 해봐야 겨우 30-40명 안팎입니다. 우리가 매주 그 곳에 가서 그들의 예배에도 참석했으며, 구소련 시절에 땅굴 속에 숨어 있던 성도들이라 미국에서 간 선교사들인 우리를 극진히 아껴주었고 또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들의 얼굴을 모두 다 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육 개월이 지나는 동안, 남편도 나도 그 여인의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보, 그분은 우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틀림이 없어요. 정말 당신이 말 한 대로 신실하신 목자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에요. 그렇지요?” "그래, 정말 그런 것 같소…" “오, 아버지 고맙습니다. 당신은 정말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선한 목자,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고백하는 나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23:1) 뜨거운 감사의 가슴을 안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그렇게 서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마저 하나님의 따뜻하신 숨결처럼 포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 생명 다하도록…”

선한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과도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해 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인생 여정은 결코 쉬운 길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거든요…

 

다음에 계속됩니다!^^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3),

시베리아의 겨울밤

 

 

우리가 탄 육중한 기차가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낡고 웅장한 플랫폼을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곧이어 눈으로 하얗게 덮인 러시아의 넓은 들판이 오후 햇살을 받아 은빛 물결처럼 반짝거리며 끝도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나무도 집도 모두 하얗습니다.

옛날 후고구려를 세운 대조영이 이끄던 기마병들의 환호소리, 일제시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흩어진 독립투사들의 본거지, 그들의 활동 무대가 바로 저기 보이는 저 넓은 들판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쁘리모스키 클라이'라고도 하고 '해삼도'라고도 불리우는 곳입니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앉아서 차창밖을 내다 보며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우리가 우수리스크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겨울 해는 서산으로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북쪽 하늘의 해는 유난히도 짧은 듯, 방금 해가 서산에 기울어 음산한 회색빛 건물들이 을씨년스럽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것이 한순간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폴싹 잠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선교 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함께 기차를 타고와서 이곳 러시안 교회까지 안내해준 그 친절한 여인을 태운 차도 벌써 저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성경공부반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벌써 네댓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삐걱거리는 교회당 문을 열고 들어가 보지만, 내가 예상했던 대로 우리와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중국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은 시간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는 우리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모두 숙소로 돌아 가버린 듯 캄캄한 교회당 안은 텅 빈 채 썰렁한 냉기만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은 중국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입니다. 그들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온갖 잡동사니를 이고 지고 가까운 국경, 지금 막 무너져 내린 사회주의를 벗어던지고 새롭게 등장하는 민주주의에로 발돋움하는 과도기 중, 허술해진 국경 수비대의 눈을 피해 떼를 지어 몰래 국경을 드나들기를 서생원이 쌀가마 속을 들락거리 듯 들락거렸습니다. 때로는 국경 수비대에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수리스크는 우리나라 중소도시 규모의 작은 도시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 들어 살 만한 집도 없습니다.

마땅한 셋집을 구하지 못한 그들은 창고를 개조하여 칸막이를 치고 남녀가 함께 여럿이 혼숙을 하며 살다가 러시안 마피아단에 의해서 돈도 빼앗기고 목숨도 빼앗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한없이 모여듭니다. 낮에는 마른 땅바닥에 거적때기를 깔아 놓고 그 위에 중국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쭉 진열해 놓고 팔다가 밤이면 합숙소에 들어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먹고 자고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러시아에서 태어나 뿌리 내리며 살고 있는 '고려인'들에 비해, 중국 조선족들은 비록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독특한 액센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편입니다. 그들의 눈에 미국에서 선교사로 나왔다는 우리들이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지 우리가 전해 주는 성경책도 넙죽넙죽 잘 받고, 또 주일 오후 세 시경에 예배드리며 가르치는 성경공부반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주의 사랑으로 교제하고 또 전해주는 복음의 메세지를 놓칠새라 눈을 반짝거리며 아주 흥미있게 잘 받아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 장사꾼들보다 적어도 한 두 시간 더 일찍 장사를 접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열심들을 내며 모이는 숫자가 점점 늘어가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럽기는 저 역시 매한가지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아무런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들이 실망할 것이고, 먼저 믿는 자로서의 우리가 신의를 저버리면 그들이 우리를 통해서 배울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먼저 믿는 우리를 바라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한 번 약속한 것은 지켜 낸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게 남편의 지론입니다. 옳은 말이이지요. 하지만, 그 신의란 것도 목숨이 붙어있고서야 있는 것이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걸기까지 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모두 휴대전화가 있으니 전화 한 통이면 끝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20여년 전, 처음 구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 새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 그때 당시만 하여도  그곳 사람들은 그 누구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우리는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일것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운전사 '싸샤'(선교 본부에서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채용허락 하여준 러시안) 아저씨도 없는데 그것도 다 늦은 오후 시간대 기차를 타고서라도 꼭 내려가 보아야만 하겠다고 고집하던 남편, 그런 대책없는 남편 때문에 가족들은 언제나 고생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런 남편이 많이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제와서 원망해 보아야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생각에 입을 꼭 다물고 말았습니다.

다음에 계속될 예정입니다.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4),

이브코브 목사

 

한참을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러시안 교회 뒷마당 사택에서 사시는 담임 ‘이브코브(가명)’목사님을 찾아가 상의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상의를 해보면 그분은 로칼 러시안이니 무언가 좋은 대책을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브코브 목사님의 사택을 찾았습니다. 이브코브 목사님 댁 방에서는 따뜻하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불빛만 보아도 얼마나 반갑던지요. “탕, 탕, 탕!” 세차게 문을 두들겼습니다. “크또 땀?(거기 누구요?)"하는 소리와 함께 깡마른 40대 초반의 ‘이브코브’ 목사님이 문을 조금 열고 그 틈새로 얼굴만 빠끔히 내어다 보셨습니다. 아, 이제는 살았습니다.

“쯔드라스 위쩨, 빠스뜨로 이브코브(안녕하세요, 이브코브 목사님.)" 반갑게 인사를 하는 우리를 향해서 “쯔드라스 위쩨, 브라더 이 시스트라, 노, 아니 브쇼 쁘리하질리.”(안녕하세요, 형제님 그리고 자매님, 그러나 그들은 (성경공부 반) 모두 돌아갔소." 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목사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분은 우리를 언제나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참고로 구소련 지하 교회 성도님들은 모두가 다 형제.자매로 통함). 직분보다는 더욱 친근하게 들리긴 하지요. “므이 저나욤 또제, 딱칵(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면 된 것 아니냐?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시더니 더 볼 일이 없다는 듯  손으로 잡고 있던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 저~~… … ….”

이 시간까지 그들(우리 성경공부반)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몰라서 당신의 집 대문을 두드린 것은 아닐텐데…. 우리는 그 교회를 시간대로 빌려 쓰고 있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인도 우리의 선교대상이라는 마음으로 어려운 그 교회에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을 드리고 있었기에, 그리고 평소에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내 생각에는 적어도 잠시 안으로 불러들여 차근차근 이야기라도 해보자라고 하시던지, 아니면 그 자리에서라도, 어떻게 이렇게 늦었느냐, 오늘 밤에 어디서 쉬겠느냐, 무슨 대책은 있느냐? 하고 물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문을 닫아 버린 것입니다.

이럴 수가….순간적으로 섭섭한 마음이들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무언가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입이 얼어붙어 버렸는지, 머릿속이 새카매지면서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육칠 개월 동안 극동대학 언어연수과를 다니며 매일 갈고 닦은 러시아 어, 실력이야 좀 부족하기는 해도 이런 때에 실력 발휘도 해볼 겸 무언가 한마디쯤 더 해볼만도 하건만…어찌 된 영문인지 단 한 마디도 생각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미 굳게 닫혀진 문을 다시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공산주의 [共産主義]가 만들어 낸 인격이나 신앙 인격의 변이를 잠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란 우리가 잘 아는 그대로,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하여 체계화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 대신에 재산의 공유를 실현함으로써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려는 사상 및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개요어근인 '콤무네'(commune)는 다른 사람과의 나눔, 사귐을 뜻하는 라틴어로서 공동체의 재산을 증폭시켜서 일하는 능력대로 나누자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은 부르주아사상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 신은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제거해 버린 사상 속에서는 인간의  사상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훌륭해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지켜내며 승화시킬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선하지가 않다는 것이 나의 체험적 견해입니다.  

이런 허망한 사상 속에서 70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결국 그들은 “내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념이 자리하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국가의 것은 무조건 내 집으로 가지고 가고 본다는 것이고 내 것은 귀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따라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생활습관 역시 부자의 것은 다 불의한 것, 우리가 가져도 가하다라는 형태로 알게 모르게 굳어져 있는 듯했습니다. 부자나라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에게서 지원받는 모든 것은 당연하고 형제.자매들이 많이 가지고 있으면 나누는 것 역시 당연하기에 베푸는 자에 대해 감사한 마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은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던 것 같았습니다.

좋게 생각하자면, 날씨도 춥고 바람마저 모질게도 차가웠으니 방 안에 식구를 생각하면 문을 너무 오래 열어 둘 수만은 없었겠지요, 또 그 목사님에게는 어린 자녀가 올망졸망 여덟인가 아홉이나 되었고 방은 몇 개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밖에서 보기에도 별로 크지 않은 판잣집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어가 보아야 잠자리로 내어줄 장소가 없으니 난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참고로, 러시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주시는 대로 모두 받아야 한다는 교리 때문에 산아제한은 금지된 교회 법이라고 했음.)

그리고 우리는 주일마다 비록 낡은 고물 자동차이긴 해도 자동차도 있었고, 보디가드겸 비상시 언어소통을 할 수 있도록 선교본부에서 배려해 준 러시아인 운전사를 대동하고 다녔으니, 이번에도 운전사와 함께 왔겠거니 생각을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왔다는 선교사들이 설마 이렇게 아무 대책도 없이 그 먼 길을 그것도 밤중에 찾아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소심한 성격인 나는 지레 겁을먹고 새파래져 덜덜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길도 낯설고 언어도 딸리는데….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러기에 처음부터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구운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을 아침 식사로 때운 것이 고작입니다. 유난히도 몸이 약한 편인 나는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속을 비워둔 탓인지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을 견뎌내기에는 무리였습니다. 윙, 윙, 불어대는 매서운 바람이 면도칼처럼 살갗을 깊숙히 뚫고 뼛속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와 텅 빈 배에서 쪼르륵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뚫고 천둥소리처럼 고막을 때리며  들렸습니다. 나는 갑자기 심한 허기를 느꼈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시베리아의 혹한,  캄캄한 겨울밤에 낯선 거리로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될 예정입니다.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5) - 마지막회
“눈밭에서의 기도”


기대하고 찾아갔던 이브코브 목사님의 냉담함에 상한 마음이 되어 사택을 돌아 나왔으나 딱히 갈 곳이 없습니다. 우두커니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니 파랗게 쪽빛을 내뿜는 초승달이 시커먼 구름 속에 가려 보일 듯 말듯 걸렸고 너무 추운 탓인지 몇 개 떠 있는 별들마저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 밤에 또 모진 폭설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음산한 기운이 여간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젠 어쩐다? 뒷일은 생각지 않고 일을 저질러 논 자신을 질책이라도 하는 것일까…… 할 말을 잃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기라도 한 듯 장승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남편이 그날처럼 야속하게 느껴진 때는 다시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말씀드렸듯 ‘우수리스크’란 곳은 한국으로 치자면 작은 면 소재지 정도의 후진 도시입니다. 그것은 상태가 면 소재지 정도로 후지다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땅이 넓은 탓에 모든 것이 가깝게 올망졸망 붙어 있는 것은 또 아닙니다. 역 근처에 호텔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교회 근처에 호텔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작은 여인숙이라도 있어서 나그네가 하룻밤 쉬었다 갈만한 곳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선교지를 옮기기 전 ’우수리스크’에서 지내면서 약 6개월 정도 사역을 했기에 그 지역의 실상을 조금은 알고 있던 우리로서는 그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차갑고 캄캄한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정말이지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한국의 도시들처럼 길가에 가로등이 있어서 길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그곳에는 택시도 없었고 일반 승용차가 용돈을 벌기 위해서 가끔 사람을 태워주는 정도였으나 그것도 낮시간 동안이지 워낙 추운 곳이라 그런지 캄캄해지기 무섭게 모두 집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기차역이 가깝다거나 어디로 가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혹시 역 구내에서 하룻밤 지새우기라도 하겠지만, 동서남북 천지를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낯선 지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편과 나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밭에 털썩 주저앉으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오, 주여, 우리를 살려주소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십시오.” 남편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나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핑~ 고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곧, 놀랍게도 번개처럼 반짝! 하고 어떤 생각 하나가 나의 머리에 주입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 여기 길거리에 이러고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릴 게 아니라 저 멀리 산 너머 동네 어딘가에 한국에서 온 처녀 선교사님들이 사역하고 있다고 하였지? 그곳을 찾아가 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씨 선교사님들이란 다름 아닌 한국 감리교 교단에서 파송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보다 2년 정도 먼저 그곳에 미리 와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는 처녀들로, 우리가 “우수리스크”에 처음 갔을 때 만난 여자 선교사님들입니다.

비록 파송 받은 교단은 다르지만 이제 갓 30대 남짓 된 처녀들이 고국을 떠나 이 열악한 곳에 와서 청년들을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며 헌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특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녀들이 ‘우수리스크’ 장터에 나오는 때면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로 데리고 가서 점심을 따끈하게 만들어 먹이기도 하고 커피도 끓여 주면서 그들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하고 그렇게 잠시나마 가정과 같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한 다음 돌려보내곤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선교지를 옮긴 후에도, 그들은 외로웠던지 우리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두서너 번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러시아에서는 흔하게 먹을 수 없는 소고기, 우리가 먹기에는 아까워서 얼음 통에 감추어두었던 것을 꺼내어 달달 볶고 감자와 양파 그리고 당근을 송송 썰어 넣고 미국에서 성도들이 보내어준 카레를 풀고 따끈한 카레밥을 지어줄라치면 두 아가씨 선교사님들은 너무도 맛있다고 어린애들처럼 좋아하면서 즐겁게 먹고 이런저런 선교지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 즐거웠던 일, 힘들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허심탄회 모두 털어놓고 깔깔대며 웃기도 하다가 때론 눈물 짖기도 하다가 편안한 마음이 되면 사역지로 되돌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몇 번 사귐이 있던 그 처녀선교사님들을 찾는다! 아이디어는 기발한 것 같은데…그녀들이 사역하는 곳의 주소나 전화번호를 갖고 있지를 않은 것이 또 문제였습니다. 이건 차라리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산너머 동네란 곳을 찾아갈 수 있는가?” 막연하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얼어붙은 길에 가만히 서 있을 수만은 또 없는 터라 우리는 무작정 산 너머에 있다는 동네를 찾아 나서기로 하고 발길을 산쪽으로 돌려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눈이 발목까지 쌓인 길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터벅터벅, 걷는다기보다는 힘겹게 허우적거리며 움직인다고 해야 옳습니다. 가로등이 없는 대신 불행 중 다행으로 길 양편으로 하얗게 수북이 쌓인 눈 위로 쏟아져내리는 달빛의 반사작용으로 희미하게나마 겨우 우리가 걷는 곳이 길이란 것을 어림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서너 시간 가량 산으로 계속 올라갔을까? 몸에서는 진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저만치서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컹!컹!”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것을 보니까 산너머 있다는 동네가 어쩌면 저곳인지도 모릅니다. 저 동네가 우리가 찾는 그 처녀 선교사님들의 동네이기를 바라면서….

동네에 들어서자 기진하여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 아파트 (아파트라고 해야 다 낡은 창고 같은 것이지만)의 대문을 무작정 밀고 들어갔습니다. 제대로 치우지 않은 탓에 지린내가 확! 덮쳐오지만 가릴 여유도 없었습니다. 캄캄한 아파트 층계를 더듬어 올라가니까 철문이 하나 보이고 그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옵니다. 그 안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강도가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무서운 마피아가 기다리고 있을지….알 수 없는 일이지만 밖에서 얼어서 죽으나 강도에게 잡혀서 죽으나 매한가지란 생각에 무조건 제일 먼저 만난 집의 문을 쾅쾅! 두들겼습니다.

“크토, 땀?(거 누구요?)” 문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는 눈 하나. 그들도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탓에 문을 잘 열어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상식입니다. 하물며 이토록 늦은 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안에서 잠시 망설임 없이 덜커덩! 문빗장 따는 소리와 함께 파랗고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노란 금발의 러시안 중년부인이 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무슨 일이냐? 하고 묻습니다.  

시계를 보니 밤이 깊어 자정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런 시각에 사람이 자지 않고 깨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요. 들어가면서도 혹시나? 하는 또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는 선교부에서 보내어 온 1년 치 생활비, 미화 약 $5, 6,000불 정도의 거액을 집에다 둘 수가 없어서 하얀 천을 만들어 그 띠에 돈을 돌돌 말아 허리에 늘 차고 다녔기에 더욱더 무서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돈이란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 애물단지임을 배웠습니다.

여인의 눈이 착하게 보이긴 하지만 들어오란다고 무조건 따라 들어갔다가 자칫 돈만 빼앗기고 밤거리에 쫓겨날 수도 있고 더 심한 경우에는 많은 중국 조선족들이 당한 것처럼 소리도 없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거의 숨도 쉴 수 없이 질린 채, 더듬거리면서 “혹시 한국에서 온 처녀선교사님들이 이 동네에 살고 있느냐?” 영어 반 러시아어 반, 손짖 반으로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내 아들이 그 처녀 선교사들의 교회에 다닌다. 내 아들이 조금 전 교회에서 돌아와 지금 씻는 중이다. 추울 텐데 따끈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조금만 기다려라. 아들이 나오면 그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방안을 힐끗 드려다 보니, 한쪽 구석 난로 위에서는 늦게 온 아들을 위한 것인 듯, 노랗고 큰 양은 주전자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었습니다. “스바씨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죽을 땐 죽더라도….하면서 얼른 따라들어갔습니다. 추워서 덜덜 떨던 몸이라 한 잔의 따끈한 차는 마치 사막에서 생수를 마신 듯 행복감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어머니를 닮은 듯, 파란 색의 아름다운 눈빛을 가진 20대 젊은 청년이 욕실에서 나오더니 깜짝 놀라며 경계하는 얼굴로 불청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후, 흔쾌히 “하라쇼!” 고개를 끄덕이며 환한 미소로 바뀝니다. 그 청년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이미 새벽이 가까운 듯, 더욱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한참을 그렇게 가더니 허름한 아파트 앞에서 “즈데시(이곳이다.)” 합니다. “오, 주님!” 이곳이 정말 이 밤에 찾지 못하면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반드시 찾아야 할 그 처녀선교사님의 숙소엘 무사히 찾아온 것일까요? 가슴이 다 두근두근 두근거립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비비며 "크토 땀?(누구세요?)" 하면서 문을 열고 나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처녀선교사님들입니다! 연락도 없이 그것도 한밤중에 불쑥 나타난 우리를 귀찮아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여 어찌할 줄을 모릅니다. "어머나! 어머나!" 소리를 연신 지르며 와락 껴안기도 하고… 너무 기쁘다며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죽었던 가족이 살아서 돌아온 듯,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떨며 환대해주었습니다. 아, 이제는 살았습니다.

선교사님들은 그 밤에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일어나 따끈한 밥을 짓고 한국에서 가져온 별미라면서 신라면을 보글보글 국 대신 끓이고…. …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우리에게 밥을 먹게 한 뒤, 싫다고 사양하는데도 굳이 자신들의 침대 방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자신들은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잠을 자는 등… 얼마나 반가워들 하는지요…진심으로 기뻐하며 환대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주의 사랑으로 맺어진 형제 자매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리고 주소를 가지고도 잘 찾을 수 없는 낯선 지역,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가야할 곳으로 인도하신 주님의 기이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기이한지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아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도 감사한 마음 전해드립니다!^^

 

 

 

글/최 송연


울릉도 향나무


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

모처럼 맞는 휴일 이른 아침
게을러지려는 몸과 마음을
진한 커피 한 잔으로 다잡고
차를 타고 한 이십분 남짓 외곽지로 나가니
거기 등산하기 안성맞춤인 산이 있습니다.

이른 시간에 찾아온 블청객에 놀랐던지
산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달아나고
하얀 안개가 띠처럼 둘러쳐진 숲 속은
마치 선녀의 치마폭같이 부드럽습니다.

숲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디선가
향긋한 향기가 솔솔 불어오는바람 결을 타고
내 코 끝을 살살 간지럽히며 파고 듭니다.
달콤한 향에 이끌린 나는 향이 날아 오는 곳을 찾아
우거진 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따라가 봅니다.

 

울퉁불퉁한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는 가파른 곳을 지나니
그곳에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그 떡갈나무들 사이에 여리디 여린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향나무는 덩치 큰 떡갈나무 그늘에 가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듯
잎이 노랗고 길쭉길쭉 한 것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 어린 잎을 하나 똑 따서 코에 대어 봅니다.


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달콤한 향이 코를 톡 쏘며
말초 신경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 행복해 집니다.

향나무는 평소에는 그 향이 약하지만,
어떤 물체에 의해 찍혀지거나,
잎을 하나 똑 따서 맡아 보면,
그 향은 배가 되어 아주 강하면서도 달콤합니다.

은은하고 그윽한 향이
정다운 이의 따스한 미소처럼
아찔하도록 온 몸을 휘감아 옵니다...

달콤한 향을 맡을 때 이렇게 행복해지 듯...
나도 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억세고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어
향나무가 선 자리는 한 뼘이 채 안 되는 듯 해도
그곳에서도 향나무는 향나무입니다

 

다른 이가 설 자리마저 빼앗는
떡갈나무 같은 사람 되기 보다는
내가 설 자리를 남에게 빼앗기고, 찢겨도
불평 대신 향기를 선사하는
향나무 같은 사람 되는 것이 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향기를 따라
숲을 헤치며 먼 곳까지 찾아올 테니까요.

날카로운 창과 대못에 찔린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렇게...,
세기를 거쳐 생명의 향을 전해 주고 있건만... ....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2: 15-16절)"

 


글: 별똥별/최송연

 


 


 



모래 위의 엉덩 자국 (Buttprints in the Sand)

One night I had a wondrous dream,
어느 날 밤 나는 한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One set of footprints there was seen,
그곳에 발자국 한 세트가 보였는데
The footprints of my precious Lord,
발자국은 나의 소중한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But mine were not along the shore.
그러나 나의 발자국은 해안을 따라 나 있지 않았습니다

But then some stranger prints appeared,
그런데 그때 몇 개의 이상한 자국들이 나타났습니다
And I asked the Lord, "What have we here?"
나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여기 있는 이것들이 무엇입니까?”라고

Those prints are large and round and neat,
그 자국들은 크고 둥글고 그리고 단정했습니다.
"But Lord they are too big for feet."
”하지만 주님 저것들은
발자국이라고 하기엔 너무 큽니다.”

"My child," He said in somber tones,
“내 아이야,”
그분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For miles I carried you alone.
“수마일 동안을 내가 너를 업고 오면서
I challenged you to walk in faith,
나는 네가 믿음 안에서 걷기를 독려했었지
But you refused and made me wait."
그러나 너는 거절했고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You disobeyed, you would not grow,
너는 불순종 했고,
너는 성장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The walk of faith, you would not know.
믿음으로 걷는 길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어

So I got tired, I got fed up,
그래서 나는 피곤했고, 지쳤단다.
and there I dropped you on your butt."
하여 내가 너를 너의 엉덩이로 매어친 것이다.

"Because in life, there comes a time,
왜냐하면 삶이란, 어느 한 순간이 닥치는데,
when one must fight, and one must climb.
때로는 싸워야만 하고,
그리고 어떤 때는 기어 올라가야만 하고
When one must rise and take a stand,
때로는 서 있어야 하고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일어나야만 한단다.
or leave their butt prints in the sand."
그렇지 않으면 모래 사장에
그들의 엉덩 자국만 남길 뿐이지
 

외국 詩
번역:
별똥별/ 최송연



 

   
 
 

미북회담 결과에 관한 소고

 

중국처럼 북한도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면서 국제무대에 진출하려고 하나보지만...중국은 정은이처럼 그렇게 심한 독재체제도 아니고. 3대 세습왕조도 아니란 것이다. 이런 때 ICBM 폐기문제를 언급조차 하지않은 트럼프...우찌 해석해야 할지...대략난감이다.

 

지금으로서는 국가에 닥칠 위기, 좌경화를 막는 것은 우리 모두 투표에 참여하여 2번 찍는 방법 외에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한 분도 빠지지말고 일어나 모두 투표를 잘하기 바란다. 트럼프는 이전 지도자와 마찬가지, 정은이에게 시간만 벌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바른 투표로 살려내는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

나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둘이 모여 셋이된다. 시냇물이 모여 강물이 됨을 앚지 말자.
우리가 힘쓸 때, 하나님께서 일어나 도우실 것이다.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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