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속죄제사>

 

오랜 세월 드려오던 짐승제사는 예수님의 단 한 번의 제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 단 한 번의 제사는 당시 세계최대, 최강의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세계의 중심 예루살렘에서 백주에 벌어진 참혹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는 순 엉터리로 드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는 소나 양을 사서, 가난한 백성인 경우는 비둘기라도 구해서,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 속죄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이 희생제물을 끌고 오면 먼저 제물을 검사합니다. 병이 들었거나 눈이 멀었거나 비루먹었거나 다리를 절거나 흠이 있는 짐승은 불합격입니다. 짐승이 검사에서 통과하면 제사장은 그 백성에게 죄를 자백하게 하고 짐승에게 안수하여 그 백성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한 다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립니다. 죄를 범한 백성대신 애꿎은 짐승이 죽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가룟유다에게 은 삼십을 주고 예수 희생양을 샀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은 예수가 합당한 제물인가 검사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너희가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하고는 안수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 이 보다 더 훌륭한 제물이 어디 있고 무슨 검사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안수를 아주 고약스럽게 합니다.

손을 머리에 얹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는 대신 주먹과 손바닥으로 뺨을 치고 침을 뱉고 온갖 거짓고소와 욕설과 모욕을 퍼붓습니다. 참으로 못돼 먹은 안수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예수님에게 악독하게 안수를 한 다음 빌라도에게로 끌고 옵니다.

 

이번에는 로마총독 빌라도가 온 인류를 대표해서 제사장 역할을 합니다.

온 인류를 속죄할 제물에 흠과 티가 있나 없나 검사합니다.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유대인의 왕이냐 물어보고 네 나라가 어디 있느냐 물어보고 진리가 뭐냐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사람은 죽일 죄가 없다.”고 예수 제물에 합격판정을 내립니다.

아무 흠도 점도 없고 죄도 없는 완벽한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라바와 예수를 세워놓고 묻습니다. “누구를 놓아줄까?”

유대인들은 소리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그럼 예수는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달아 죽이시오.”

제물이 될 염소 두 마리 중 하나는 아사셀 속죄염소로 광야로 보내고 하나는 희생제물로 잡는데 여기에서는 바라바가 아사셀 염소가 되고 예수님은 희생제물이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줄 요량으로 옷을 벗기고 잔혹한 채찍질을 하게 하는데 그 채찍은 끝에 작은 금속 갈고리를 달아 단 한 번의 채찍질에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이 잔혹한 채찍질은 제사장이 희생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칼질을 해 각을 뜨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대야에 물을 담아오게 하여 손을 씻습니다.

성막과 성소에는 번제단이 있고 그 다음에 물을 담아놓은 물두멍이 있지요.

제사장이 거기에다 손을 씻는 것과 똑 같습니다.

빌라도가 멋모르고 하는 짓이 완전히 제사장 짓입니다.

 

 

그런 다음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은 끌고 가서 홍포를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쥐어주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조롱을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는 엉터리 대관식을 치러줍니다.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며 못 된 축하연까지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보좌 우편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세우실 것인데 로마군병들이 멋도 모르고 대관식을 하고 축하연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워 골고다 언덕 제단으로 끌고 갑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뭇짐을 지고 모리아산을 오른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그 언덕을 오릅니다.

아브라함은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이삭을 올렸는데 그들은 십자가를 세우고 예수님을 못으로 박아 매달았습니다.

불을 피우는 대신 뜨거운 태양 아래 놔두었습니다.

그렇게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아주 못되고 악독한 제사입니다.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경건은커녕 조롱하고 조소하면서 구경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고 욕을 했습니다.

십자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은 고통으로 불태워졌고 그 연기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처절한 부르짖음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숨을 거두자 로마군병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제물은 미리 죽인 다음 태워야 하는데 태운 다음 죽인 것입니다.

그 참혹한 고통을 다 당하도록 말입니다.

 

 

참으로 못돼 먹고 참으로 악한 제사였습니다. 참으로 못돼 먹은 백성들, 참으로 악한 군사들이었습니다. 제사장도 엉터리요 아사셀 염소도 엉터리요 제사의 순서나 방법도 엉터리, 모조리 엉터리였습니다. 도대체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개판 제사였습니다. 참으로 악하고 참혹한 엉터리 속죄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엉터리 제사를 받으시고 모든 죄인들,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사는 순 엉터리였지만 그 제물이 완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흠 없고 완전한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을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 제사를 받으신 이상 누구든지 엎드려 그 속죄제사에 참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용서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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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 3-4절)
 
 
과학의 발달의 끝은 어디일까요? 1990년부터 30년 동안 머나먼 우주의 사진을 찍어 보내온 허불 망원경 보다 훨씬 정교하고 강력한 제임스 웹 망원경이 2년 전 2021년 12월 25일에 발사되어 지구로부터 약 140만 킬로미터(지구-달 거리의 약 4배 거리) 떨어진 라그랑주 지점에 도착하여 6개월여의 조정작업을 거쳐 활동을 개시한 후 이제 우주과학자들은 더욱 더 깊은 우주의 모습을, 우주의 비밀까지도 파헤칠 듯 한 더욱 뚜렷한 우주의 사진들을 받아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웹을 만들고 쏘아 올려 우주공간에 설치하고 백 수십억 광년 거리에 떨어진 아득한 우주의 사진을 선명하게 찍는 인간의 기술도 놀랍지만 하나님의 작품인 빛은 더욱 더 놀랍고 경이롭습니다. 옹스트롬 단위의 진폭으로 진동하는 고유진동수를 가지는 빛이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진행, 백 수십억 년 동안 달려 지구에 도달할 때까지도 희미해지지도 흩어지지도 흐트러지지도 않고 천체의 선명한 모습을 전해주는 빛의 기술은 무엇이며 그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빛의 정체는 과학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밝혀내지 못 할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인지를 과학이 밝혀내지 못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아득한 우주공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은 왜 존재하며 빛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요? 빛이 있든 없든 우주공간을 운행하는 별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빛이 있고 별들은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일까요? 만일 빛이 없다면, 또 빛을 보고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별들도 의미 없을 것이며 우주가 아무리 광활하든 그 존재도 아무 의미 없을 것입니다. 우주만유는 그 존재를 인식하는 자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해도 우주만유에게는 반드시 창조주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만유를 지으시고, 빛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신 하나님은 하나님 혼자서 우주만유를 감상하고 좋아하지는 절대로 않으셨을 것입니다. 광활한 우주, 아름다운 세계를 하나님 홀로 보는 것은 오히려 한없는 외로움이며 끝없는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빛을 지으시고 그 빛을 인식하는 존재, 생명체들을 지으시고 함께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며 사랑할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존재를 겨우 몇 십 년, 길어야 백년을 살고 죽는 존재로 짓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은 더욱 견딜 수 없는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과 교감하며 즐거움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우리 인간은 본래 영생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서 43:21)
우주만유를 지으신 하나님, 이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시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 나를 다시 영원히 살리시려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합니다. 할렐루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4년,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은혜 안에서 건강하시고 형통하시기 바랍니다. 
2024. 1. 1 아침, 뉴저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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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

 

 

(누가복음 2장 6-12절)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로마황제 아구스도의 칙령에 따라 후손인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원적지인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갔다가 거기에서 아기 예수님을 출산합니다. 혼인으로 인하여 지파들이 분배받은 땅이 뒤섞이지 않도록 하나님이 명하심에 따라 모세 때부터의 율법은 같은 지파 안에서만 결혼이 가능토록 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같은 유다지파요 같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따르든 어머니를 따르든 구약성경의 약속, 선지자들의 예언과 같이 틀림없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관(여관)이 손님들로 꽉 차서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태어나는 엄청난 사건에 쓰임 받고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도우시고 천사라도 보내어 따뜻한 방이라도 얻게 하시고 거기에서 아들이 태어나게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두 사람은 들어갈 여관조차 없어서 가축들을 두는 외양간에서 아들을 낳았고 태어난 아들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이 굉장한 사건을 양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를 보내어 알게 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이셨다고 말하는데, 아닙니다. 마굿간도 아니고 말구유도 아닙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랍인들에게 처음 아파트를 지어주었더니 아파트에는 양들을 집어넣고 자기들은 마당에다 텐트를 치고 살더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 당시에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이라고 불리던 이스라엘 땅에 살던 사람들은 가옥에 사람 사는 방과 가축(양) 두는 방을 함께 만들고 한 지붕 밑에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도 틀림없이 그런 양우리였고 거기 양구유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실 어린양으로, 그리고 화목제물로 오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애굽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시던 그 무서운 날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먹게 하셨으니 이것이 유월절 사건입니다. 또 하나님께 드린 화목제물은 제사장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제물, 곧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양 우리에서 태어나신 것이며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화목제물로 양 구유, 곧 양의 밥그릇에 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들을 보내어 알리셨습니다. 양들에게 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목자라 하셨고 제자들에게 양을 치라 하셨고 양을 먹이시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양으로 예수님을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이 성탄절에 예수님의 탄생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좋아합니다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태어나신 때는 아무래도 겨울이 아니고 봄철, 유월절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목자들이 양을 치러 들판으로 나갔고 그래서 양우리가 비어있어서 요셉과 마리아가 거기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 곧 1년 된 숫염소로 오셨기 때문에 유월절 무렵에 태어나시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성탄절, 예수님의 탄생 때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그는 우리 양들에게 들판의 풀이 아니라, 광야의 만나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이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을 양우리, 양구유로 보내셨습니다.

 

 

아름다운 성탄절 소망의 새해, 복 된 주님의 양이 되신 기쁨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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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낼모레면 미국의 추수감사절입니다.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에서 플리머스에 내린 청교도는 102명이었습니다. 

그들이 그 한 해 겨울을 넘기면서 절반이나 죽고 나머지는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남아 나중에 그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함께 먹으며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1903년 1월 13일 미국 상선 갤릭호에서 호놀룰루에 내린 조선인 사탕수수노동자들도 102명이었습니다. 

1902년 12월 23일 제물포항을 출항하여 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오는 그 배 안에서 인천 내리교회 교인이었던 김이채, 안정수 두 사람이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쳐 호놀룰루에 도착할 때는 절반 넘는 사람들이 감리교인이 되어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로 사탕수수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지급되는 일당은 남자는 하루 65센트, 여자는 50센트였고 아침 해 뜰 때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루나'라고 불리는 십장의 채찍질을 당하며 고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난 가운데서도 돈을 아껴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을 안고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길은 고난의 광야길인가 합니다.

 

 

코로나 감기는 나았지만 기침이 참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이젠 기침도 다 나은 것 같은데 그래도 가끔씩 쿨룩거립니다. 

다시 우버엑스 운전을 나가면서 전도지를 좀 바꾸어 보았습니다.

 

 

<Do you know Him?>

 

 

God can never forgive sinners. The wages of sin is death.

No one can appear before God.

When you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God will have no choice but to throw you into hell for your sins as well.

Then answer like this:

“My Lord Jesus died on the cross for my sins.”

God will look at Jesus on the right and ask:

“Son, do you know this guy? He says you died in this guy’s place.”

Do you know Jesus?

“Yes, father. I know this friend of mine. Please forgive him. I died on the cross for him.”

Do you know the One who will answer with these words for you?

If not, pray right now and ask your Savior Jesus to be your friend.

 

 

 

 

<그를 아십니까?>

 

 

하나님은 결코 죄인을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심판대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죄 때문에 당신을 지옥에 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이렇게 대답하세요.

“나의 주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른쪽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아들아, 이 친구 아니? 이 친구, 네가 이 친구 대신 죽었다고 하는구나."

당신은 예수님을 아시나요?

“예, 아버지. 이 친구 압니다. 그를 용서해 주세요. 제가 그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이 말로 대답해 주실 그 분을 아십니까?

아니라면 지금 바로 기도하고 당신의 구주 예수님께 당신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내가 구원 받습니다.

이 한 가지만 부여잡고 갑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길을.......

 

 

하나님 앞에서 즐겁고 행복한 추수감사절 되시기 바랍니다.

 

이응한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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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용서를 구합니다. 

지난번에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를 보내고 나서 은혜가 안 되는 글을

써 보내 걱정을 끼쳐드린 같아 무척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 글을 보고 위로를 보내주시고 도움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참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 그 사랑을 받으시고 갚아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실 드라이버 일이 제게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운전을 할 때는 별로 느끼지 못 하다가 이튿날 피로를 많이 느끼고, 그래서 장시간, 혹은 며칠 연달아 하지는 못 하겠더군요. 

또 운전하다가도 가끔 아찔한 위험한 순간이 닥칠 때는 내가 나이 들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 일을 오래 할 수는 없겠다, 아무래도 다른 일을 찾아 봐야겠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럴수록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언제나 어디서나 불꽃같은 눈동자로 저를 보호하고 계심을 믿고 힘을 내어 봅니다.

 

 

그리고 드라이버 일을 전도의 기회로 삼아야겠다 싶어 아래와 같이 영어로 짤막한 전도지를 만들었습니다.

 

 

<Eternal Life>

 

Do you want eternal life?

What is eternal life?

Is it living a thousand or ten thousand years?

Is it long long living a million years or a billion years?

No. No matter how long you live, if there's an end, it's not eternal.

If there is an end, there an eternal time awaits with open mouth.

Eternal life has no end.

Eternal life is being with the eternal God forever.

God sent His Only begotten Son to the cross to save you from sin and eternal perishment and give His eternal life.

The Bible says; This is eternal life: to know the only true God, and to know his sent one, Jesus Christ (John 17:3).

Do you know God and Jesus Christ?

 

 

 

<영생>

당신은 영생을 원하십니까?

영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천 년을 사는 것입니까, 만 년을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백만 년 사는 것입니까, 십억 년 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끝이 있으면 영생이 아닙니다. 

끝이 있다면 거기에 영원한 시간이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끝이 없습니다.

영생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영원한 사망에서 당신을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의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 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영생이다: 유일한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

당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이 영어 전도지를 반쪽짜리 종이에 프린트해서 제 차를 타는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여 내릴 때 전해줍니다.

어떤 이들은 기쁘게 받고 어떤 이들은 받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잠시 들여다보고 고맙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라도 작은 전도지로 전도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라도 저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다면

예수님도 헛되고 십자가도 헛되고 우리의 삶도 헛되고 하나님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으므로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아름답게 드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코로나 감기에 걸렸습니다. 아무래도 손님에게서 옮겨졌나 봅니다. 

지난해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고 쉽게 넘어가는 듯 했지만 기침이 쉽게 낫지를 않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드라이버 일도 잠시 쉬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감기조심, 건강조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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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한국전력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종사하던 제가 나이 만 마흔일곱 살 한창나이에 IMF 한시퇴직 하고 미국에 와서 신학공부와 개척교회를 하다 은퇴하였으니 수중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재산도 없고 한국의 연금도 없고, 얼마 되지 않는 미국의 사회보장연금(SSI)만으로는 살아갈 길이 막막합니다. 교회나 교단에서 지원해주는 것도 없고 미국정부에서 저소득아파트 같은 극빈자 혜택프로그램을 받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 겨우 식품보조 프로그램(Food Stamp) 혜택을 받아 생활에 보탬을 얻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여태 굶주리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앉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생존의 위기를 겪었을 때를 생각하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아파트 렌트비도 낼 수 없던 그 때의 아슬아슬했던 상황과, 그 때마다 기가 막히게 도움을 보내오신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과 방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립니다. 참으로 우리 가족은 그 때 살아계신 하나님,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로 하나님을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개척교회 목회를 접고 은퇴 아닌 은퇴를 한 뒤 2020년에 본격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을 때가 또한 저희에게 닥친 큰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10년마다 하는 미국 인구센서스가 마침 그 해 2020년에도 있었고 약 3개월 정도 소요되는 센서스 기간 중 일을 할 인구센서스 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있어 저도 응모하여 인구센서스 요원이 되었습니다. 3개월이라도 일을 해야 하겠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센서스 요원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창궐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센서스요원 교육과 센서스가 한 동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정부에서 코로나로 인한 실업수당 지금 프로그램이 시행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자격은 희한하게도 제가 센서스 요원으로 응모한 직후 시점을 기준으로 코로나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히게 시점이 들어맞은 것입니다. 덕분에 한 주에 몇 백 달러씩 주는 코로나 실업수당을 1년 반 동안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팬데믹 실업수당을 받지 못 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찔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이었습니다.

 

 

작년 2022년 가을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실업수당지급도 중단된 다음부터는 승용차로 한인마트 빵배달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아름 마켓의 식품배달 일도 몇 달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어대시, 우버이트 딜리버리, 그리고 우버엑스 드라이버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들고 체력이 달려 젊은 사람들처럼 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게도 아직 건강하고 운전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한 주일에 사나흘 정도 일을 합니다.

 

 

이젠 편안한 은퇴후 생활을 누려야 할 나이에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싶고 내가 왜 이런 가난과 궁핍의 길을 걸어왔는지 후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부르셨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까지 고생하지는 않았을 텐데 싶은 때도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때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저희와 지금의 저희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과 홍해를 건넌 백성이 같을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가마솥 고깃국과 마늘과 부추를 먹으면서 편안하게 애굽 종살이 하는 것과 만나를 먹으며 불기둥과 구름기둥,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가나안을 향하여 메마르고 거친 광야를 걷는 것의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도 드라이버 일을 나갑니다. 어두운 밤 뉴저지의 열악한 도로를 달리는 밤길운전도 이젠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이렇게 운전을 할 수 있는 건강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를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다 가도록 하시지는 않을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쓰임 받도록 부르심 받은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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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아들을 잃고 애통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중 하나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아들 요셉을 잃은 아버지 야곱 이야기입니다. 꿈 이야기를 했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은 야곱은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양떼를 치는 형들을 찾아갔다가 형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고들에게 노예로 팔립니다. 은 이십을 받고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은 요셉의 아름다운 자색 옷을 찢어서 염소를 죽인 피에 적셔서 아버지에게 보입니다. “우리가 돌아오는 길에 이 옷을 발견하였는데 혹 당신의 아들의 옷이 맞는지 보세요.” 그렇게 아버지를 속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속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못 된 짐승에게 잡혀 먹힌 줄 알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애통합니다. 그 모든 위로를 받지 아니하고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목 놓아 슬피 울고 또 울었습니다.

 

 

또 하나는 사무엘하 18장과 19장에 나오는 다윗왕이 악한 아들 압살롬을 잃은 다음 대성통곡하는 장면입니다. 악한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여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고 다윗은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을 궁궐 지붕 위에서 범하는 극악무도한 패륜까지 저지릅니다. 결국은 다윗의 부하들과의 전투 끝에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도망하다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됩니다. 온 이스라엘이 반했다는 아름다운 그 머리카락이 휘날려 상수리나무에 휘감겨 버린 겁니다. 다윗은 전투에 나가는 부하들에게 비록 패역한 아들이지만 압살롬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군대장관 요압은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창으로 찌르고 그 10명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쳐 죽여 버립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왕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전쟁에 이기고 압살롬을 쳐부순 백성들과 부하들이 오히려 민망해 합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을 예표(豫表)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팔아버린 열 명의 아들들이 피 묻은 요셉의 자색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 죄인들은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집, 천국에 돌아갑니다. 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도망하다가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창으로 심장을 찔려 죽었는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로마군병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야곱과 다윗은 그렇게 슬피 울었는데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십니까?” 울부짖을 때 하늘에서 통곡하지 않으셨을까요? 제 육시부터 제 구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지르시고 죽으셨을 때 성소 휘장이 갈라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렸습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그 슬픔을 숨기시려고 어두움으로 가리셨고 애통을 참으시며 땅을 치지 않으셨겠습니까? 아, 하나님, 이 죄인을 구하시려고 그렇게 아들을 내어주셨단 말입니까? 벌레보다 못 한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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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인지 넋두리인지를 하고자 합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제가 한전 뉴욕사무소에서 기술담당부장으로 근무하던 시기에 미국에서 제작하는 기자재의 기술지원을 위하여 기계담당, 전기담당 부장이 파견되어 나와서 저를 도와 함께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함께 일했던 한기 부장님 세 분이 다 일찍 돌아가셨으니 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혼자 남았습니다. (설명: 한전기술(주: 한기, KOPEC)는 한전의 원자력발전소 건설기술을 담당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1970년대에 한국원자력엔지니어링(주: KNE)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지금까지 한국전력과 한수원(원자력)의 기술과 설계를 담당, 지원해 오고 있는 회사입니다.)

 

 

그 세 분 부장님 가운데 가장 먼저 최H 부장님은 저와 함께 뉴욕사무소에서 근무하던 중 1997년엔가 아직 40대 나이에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 둘을 남겨놓고 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저와 참 친하게 지냈던 조W 부장님은 뉴욕사무소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여 영광원자력 건설현장에서도 잠시 저와 함께 일했는데 그 두어 해 뒤 아직 50대 초반 한창나이에 늙으신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을 남겨놓고 혈액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H 부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최 H 부장님의 후임으로 뉴욕사무소에 부임하였던 조H 부장님은 퇴직후 귀국하지 않고 지금까지 미국에서 살아오셨는데 당뇨병과 공황장애, 그리고 파킨슨병 등 등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저 지난 주에 병원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아직 71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조H 부장님이 투병중이던 때에 가끔씩 방문하여 왔는데 지난 7월 8일 오후, 제가 아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병원에 갔을 때 제가 도착하기 불과 십 분 전에 운명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조H 부장님이 25년 넘게 다녔던 교회에서 치러진 천국환송예배와 장지(葬地)에서 치러진 하관예배에는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여 조 집사님을 기리며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이별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조 부장님은 세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내었고(아들은 목사요 아프리카 선교사, 큰딸은 전도사) 손주도 다섯이나 보고 71세에 돌아가셨으니 앞서 돌아가신 두 분에 비하면 훨씬 복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일했던 한기 부장님들 세 분을 모두 그렇게 일찍 데려가셨는지부터 의문스럽고 원망스럽고 슬펐습니다. 저의 기억 속에는 함께 일할 때와 함께 골프를 치던 때의 그 세 분의 모습과 음성이 또렷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세 분 부장님들이 모두 이른 나이에 뜻하지 않은 병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였지만 그렇다고 저는 저만 그런 고통을 면제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저도 뜻하지 않았던 퇴직을 당하고 미국으로 와 뒤늦은 신학공부와 목회자의 길, 가난과 궁핍의 가시밭길을 걸어왔고 저와 우리 가족의 고난의 길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저도 머지않아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고난의 고통과 슬픔의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성경 시편 90편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수고와 슬픔 속에 살처럼 빠르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좀 일찍 죽었다고 불행이 아니고 좀 더 살았다고 복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들이 줄을 이어 수고의 산과 슬픔의 골짜기를 넘으며 신속히 날아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세상을 뜨고 있으며 우리 모두 그 줄에 서서 마지막을 향하여 떼밀려 나아갑니다. 내가 그 줄의 어디쯤에 서 있는지, 내 앞에 선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지, 언제 내 차례가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 줄에서 빠질 수도 없고 비켜설 수도 없고 멈춰 설 수도 없습니다. 확실히 아는 것은 언젠가 내 차례가 오고 나도 떠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한 것은 제가 한전 뉴욕사무소에서 그 세 분 부장님들을 믿음 안에서 만났고 또 하나님의 품안에서 다시 영원히 만날 것입니다. 그 세 분은 제가 한전 뉴욕사무소에서 윗분의 핍박을 받으면서 신우회를 이끌 때 신우회 모임에 동참하여 저를 도와주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업무에 있어서도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마음을 함께 하여 일하였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 분은 이제 저보다 앞서 주님 품에 안겨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뒤에 남겨두고 간 그 분들을 “죽음이나 고통이나 슬픔이 없는” 그 곳에서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저도 그 곳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웠던 그 때처럼, 함께 일하고 함께 골프를 치던 그 때처럼 천국에서 다시 함께 할 것입니다, 영원히.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면, 죽음이 끝이라면, 우리가 소멸될 존재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할 이유가 없습니다. 믿음도 신앙도 헛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을 자들에게서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도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살리시려 아들을 내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히 살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도 하루하루,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며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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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苦痛)

<요한복음 1장 12-13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모든 동물은 자신에게 닥친 극심한 고통을 피하건 줄일 재주가 없습니다. 진화론자들은 고통이 그렇게 싫은데도 왜 모든 동물들이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해오지 않았는지 그 모순성을 설명하지 못 합니다.

생각해보면 고통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산고(産苦)를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님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1969년에 제이거와 에반스(Zager and Evans)가 부른 유명한 노래 서기 2525년(In the Year 2525)에는 먼 미래에 인류는 출산의 고통 없이 기다란 유리관 아래에서 아들과 딸을 집어올 것이라는 가사가 들어있는데, 글쎄요, 고통 없이 공장의 시험관으로 만들어 데려오는 자녀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울까 모르겠습니다. 우리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동물의 자식을 사랑하는 눈물겨운 모성애는 고통을 통하여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하셨습니다. 흔히 이 잉태하는 고통을 저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정작 더 큰 고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잃은 것도 고통이지만 죄악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여자의 후손, 곧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에 내어 주셔야 할 하나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미리 막지 못 하셨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은 아담과 하와의 배반과 이로 인한 잉태의 극심한 고통과 가슴을 찢고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더욱 극심한 고통을 통하여 인류를 재창조(再創造), 다시 낳으시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은 이를 “하나님이 낳으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흙을 빚어 생기를 불어넣어 아무런 고통 없이 탄생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과연 얼마나 큰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배반과 잃음, 사랑과 증오, 희생과 고통, 눈물과 피흘림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자식, 죽었던 자식을 다시 얻었을 때의 기쁨과 진정한 사랑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를 위하여 그 고통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눈물로 찬송합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울면서 찬양합니다. 그렇게 잃어버렸던 나,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송축합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고통 가운데서 살고 있을지라도 더욱 큰 고통을 통하여 나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영원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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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아내가 죽었다!>

 

 

“마침내 아내가 죽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일본에서 아내와 사별한 66세 홀아비가 부엌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6분짜리 짧은 동영상이 누적조회수 80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함께 한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잔소리 들을까 봐 그동안 못 갔던 동창들 술자리부터 가야겠다. 도쿄 가부키쵸 캬바쿠라(고급 술집)의 아미씨 문자도 이젠 지우지 않아도 되겠지. 밤에도 당당히 아미씨한테 LINE(메신저)할 수 있겠네. 연애도 실컷 해서 김정은처럼 기쁨조도 만들어 봐야지......” 이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혼자 살게 되면 이렇게 자유를 만끽할 줄 알았는데 내 현실은 정반대다....... ”,

“아내가 떠난 지 5년이나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상실감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LINE 메시지로 만나자고 해도 나가지 않았고 여전히 혼자 식당에 가서 밥 먹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애인을 만드는 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수십 년 인생을 같이 보내온 배우자와 사별하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만약 아직 배우자가 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매우 행복한 것이다.”

 

 

이 동영상에는 ‘인생말년 부부에게 닥칠 일을 리얼하게 알려줘서 감사드린다.’, ‘중반부부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어제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는데 얼른 화해해야겠다.’,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상실감, 나도 아내를 잃고 지옥에 떨어진 듯했다’는 등 공감과 감사댓글 4천 개가 넘게 달렸다고 합니다. 이 동영상과 댓글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싶습니다. 시쳇말로 "있을 때 잘 해야" 합니다. 결혼을 거룩하게 여기고 아내와 남편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것입니다. 

 

 

결혼(結婚)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알콩달콩 백년해로를 하고 나서 한 날 한 시에 함께 죽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듣고 보니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정말 ’결국 혼자 남게 되는 것‘이 결혼이고, 언젠가는 죽음이 남편과 아내를 갈라놓는 운명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 인생인가 싶습니다. 결혼이라고 다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을 했지만 도저히 합쳐지지 않는 부부도 있고 평생을 원수처럼 싸우는 부부도 있고 처음부터 잘못 된 결혼도 있습니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도 전에 이미 불화와 결별과 이혼으로 찢어지고 갈라지는 부부도 많고 요즘엔 졸혼(卒婚)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인생의 황혼무렵에 갈라서는 부부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내는 혼자가 되어도 잘 버티는데 아내를 잃은 남편은 챙겨먹지 못 해서 곧 쇠약해지고 병들게 되니 남편들은 미리 요리하는 법, 빨래하는 법을 배워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우습게 들리지 않습니다. 어두운 세상, 죄 많은 인생, 아니 불완전한 인간에게 온전한 일심동체(一心同體)의 결혼, 영원히 갈라지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 결혼이란 아예 없다고 할 것입니다.

 

 

완전한 결혼은 주님과의 혼인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피로 완전하게 씻으시고, 그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원한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살과 피를 주셨으니 우리는 주님과 한 몸이요, 성령(聖靈), 곧 그리스도의 영을 주셨으니 우리는 주님과 한 영, 한 마음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신부, 곧 아내로 삼으셨으니 죽음도 헤어짐도 없이 영원히 함께 하는 완전한 결혼인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천국신혼잔치에 참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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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돌아가자."

 

(민수기 14장 1-5절)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성경에 기록된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둔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탐꾼들을 보내 가나안땅을 정탐합니다. 40일 동안 가나안을 탐지하고 거대한 포도송이까지 둘러메고 돌아온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혹평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장대한 족속들을 이기지 못 할 것이라고 보고합니다. 정탐꾼들의 보고에 놀란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죽게 하려고 이곳으로 인도하시는가, 밤새도록 소리치며 곡을 합니다. 한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니 저들은 우리의 먹잇감이라, 두려워 말고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습니다. 이 패역한 백성들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이 다 죽은 다음 비로소 여호수아와 갈렙에게만 광야에서 태어난 후세들을 이끌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밤새도록 곡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 백성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우리 가족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따라나선 길은 평탄하고 풍요로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거칠고 험하고 외로운 광야길이었습니다. 시애틀에서 개척교회를 하면서 저는 병원통역 일을 하였고 아내는 아기 돌보는 일을 하였습니다. 뉴저지로 옮긴 다음에는 양로원에서 노인환자들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일도 하였습니다. 이제 나이 들어 목회를 접은 지금은 딜리버리 일을 하면서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 하고 진로를 잡지 못 하고 고생하였고 혼기를 놓쳤습니다. 내 인생이,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나 싶은 생각이 때때로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인들 가나안의 거인들이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인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며 애굽을 떠나 온 것이 후회스럽고 애굽의 평온한 삶이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고기와 부추와 마늘을 먹던 애굽생활이 생각나고, 그냥 그곳에서 그렇게 살았더라면 이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을, 아이들도 고생에 잡히지 않았을 것을, 하는 후회의 마음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라나선 길은 되돌릴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리 험하고 두렵고 힘들어도 계속 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길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이 되어주시고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과 공급하심을 만일 애굽땅에 그냥 살았더라면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굽의 따뜻한 고깃국 가마솥 곁에서 평온한 삶을 살았더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후회할 수가 없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말할 수도 없습니다. 돌아서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앞만 바라고 걸을 뿐입니다. 이제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겠지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까요.

 

그래요. 저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예수를 믿는 것은 돌아설 수 없는 길입니다.

저희보다 더욱 험하고 더욱 고생스러운 길을 기쁨으로 걷고 또 죽음을 당하기까지 한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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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부활의 의미>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 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누가복음 23장 34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일곱 개를 흔히 ‘가상칠언’이라고 하며 그 중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맨 먼저 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저희’는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내어준 빌라도와 또 예수님을 처형하는 군병들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치고 둘러서서 조롱하며 비방하는 자들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다만 그 자리에 있던 악한 자들만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린 꼴이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죄인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저희 죄를 깨닫지 못 하고 갈 바를 알지 못 하고 제 갈 길로 가는 모든 무리들,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사해 달라고 간구하신 것입니다. ‘저희’ 속에는 저와 또 여러분, 모든 인류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이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이 예언해 온 마지막 완전한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피값이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값 보다 가치가 못 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께 진노하셨을 것이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그 값어치를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값어치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가 없었고, 그 제사를 받으시는 이상 온 세상 죄인들, 온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시지 않으실 수 없었고,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으므로 또한 죄와 사망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묶어 잡아둘 수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과 모든 죄인들, 온 인류의 죄가,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죽으셨던 인류의 죄가 사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또 그렇습니다. 사함 받은 인류의 죄가 또한 우리를 사망 가운데 묶어둘 수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다시금 논리와 순서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우리 죄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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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지셨더라면, 일부라도 감춰 두었다가 꼭 필요할 때 쓰셨더라면, 예수님의 생애나 십자가의 고통은 한결 가볍고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대속(代贖, Redemption)도 아니고 일종의 쇼였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배고프셨고 힘드셨고 시험을 받으셨고 마귀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늘 기도하시며 성령님의 도우심에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그렇게 이 땅에 보내실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만일 연약한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사역에 실패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 하는 것일까요?
마지막 날에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도 함께 심판하셔야 할까요? 아니면 심판을 포기하고 구원도 포기하고 하나님의 주권도 포기하고 사단마귀가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도록 헌납해야 할까요?
“아들을 심판해? 그렇게는 할 수 없어. 차라리 하나님의 지위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그것은 절체절명의 모험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두루마리 책을 일곱 인으로 인봉하셨습니다.
아들이 구원사역에 성공하고 돌아온 다음 그 아들이 인봉을 떼도록 말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어린양만이 그 두루마리 책의 인을 떼도록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사도요한은 크게 소리쳐 울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심판의 두루마리 책의 인봉을 뗄 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두루마리책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가 없다면 심판은 없을 것이며 사단마귀의 권세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사도요한에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이기신 어린양이 떼시리라.”
어린양 예수님이 나아가 두루마리 책을 받아 들었습니다.
이제 그 일곱 인을 뗄 때마다 재앙이 쏟아지고 무서운 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사단 마귀는, 죄와 악은 영원히 징벌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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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모두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변형되셔서 얼굴이 해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지는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고, 이 신기하고 황홀한 광경을 본 제자들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세 복음서에 똑같이 기록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장가 든 맏형이 죽고, 둘째가 죽고, 셋째가 죽고, 결국 같은 한 여자를 아내로 취한 일곱 형제가 다 죽었는데 부할 때에는 누가 그 여자의 남편이 되느냐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고 모두 천사와 같이 된다 말씀하시고, 또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음을 들며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 앞에 다 살아있고 일곱 형제가 다 부활하여 천사와 같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날 것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죽고 살지 못 한다면,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 못 하신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죽은 자들에게, 또 죽을 자들에게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며 하나님 노릇하는 그런 한심한 하나님이시겠습니까?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도 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에 그 몸을 찢으사 그 피를, 그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참혹한 십자가에 아들을 찢어 그 생명을 우리에게 뿌리시고도 우리를 살리지 못 하신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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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종려주일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부터를 보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이 눈이 가리워서 알아보지 못 하여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NIV 영어성경을 보면 "because you did not recognize the time of God's coming to you." 너희들이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성자 하나님이 오시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알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 후 70년, 로마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1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참살되어 피가 바다를 이루는 그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그 참혹한 미래를 보시고 예수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루살렘을 그 당시의 예루살렘으로만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마음이 예루살렘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눈이 가리워 알지 못 하면 우리의 영혼도 그 비극을 당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기쁨으로 영접하는데, 어떤 이는 거부하고 비웃고 조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천국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다스리실 때 천국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주님이 재림하실 때 천사들이 믿는 자들을 모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성도들을 모아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는 뜻도 되지만 이미 주님의 통치하심으로 천국이 된 성도들을 모은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이루셨나요? 혹시 새끼 나귀를 타고 여러분의 마음 앞에 오신 주님이 슬피 우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 종려주일, 오신 주님을 향하여 찬양하며, 춤추며,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나의 왕이여, 오소서, 나를 다스려 주소서. 우리 왕, 우리 구주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저와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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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참으로 끔찍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아끼고 모아 그토록 갖고 싶었던 멋진 페라리 경주용 슈퍼카를 샀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아들이 그 차를 못으로 긁어 놓았습니다. 순간 너무나 화가 난 아버지는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망치로 아들의 손을 내리쳐 으깨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피가 흐르는 손을 움켜쥐고 “아빠, 잘못 했어요, 잘못 했어요.”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들이 못으로 긁어놓은 글자는 “Daddy, I love you."였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아버지는 방으로 올라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내가 아끼는 물건을 깨뜨리거나 망친 사람에게나 아이에게 화를 내고 혼을 내주고 단단히 가르쳐 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수로 커피를 쏟은 점원에게 소리를 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세요. 아이가 화병을 깼다고 소리 지르지 마세요. 새 옷을 입고 나가 뒹굴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고 야단치지 마세요. 아내가 차를 망가뜨렸다고 화를 내고 남편이 실수하여 재산을 잃었다고 비난하지 마세요. 사람이, 아이가, 아내가, 남편이 모든 물건이나 재산 보다 수 천 배 소중하니까요. “괜찮아, 괜찮아, 네가 괜찮으면 됐어. 너는 내게 그런 것들 보다 천 배, 만 배 소중하니까.”라고 말해 주세요. 행여나 그 마음과 그 영혼이 다치지 않게 감싸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보듬어 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참혹한 십자가에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를 살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셈입니다. 우리 같아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죽게 만든 우리에게 화를 내고 혼을 내야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 한 마디도, 단 한 번도, 우리에게 화를 내거나 꾸지람하지 않으셨습니다. 잠잠히 눈물로 우리에게 아들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셔서 먹게 하시고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토록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 용서,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찌 화를 내고 야단칠 수 있나요? 하나님이 내게 보내주신 그 귀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
.
.
.
(덧붙여)
네델란드 처자를 아내로 맞이한 한국인 신랑의 이야기입니다. 네델란드에서 장인과 장모가 사위와 딸을 보려고 한국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함께 우이동 계곡으로 놀러가서 고기를 구워먹으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그런데 한참 놀다가 네델란드 장인이 갑자기 커다란 돌을 ‘풍덩’ 물에 던져 한국 사위에게 물벼락을 씌웠습니다. 그러고는 깔깔깔 웃었습니다. 졸지에 물을 뒤집어쓰고 옷을 적셔버린 한국인 사위는 어처구니없어 ‘이 양반이 미쳤나?’ 하는 눈빛으로 장인을 멀뚱멀뚱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한참 깔깔 웃던 장인은 머쓱해서 슬금슬금 피했고 자리는 그만 썰렁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사위가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친구가 그러더랍니다. “이 친구야, 그까짓 옷 젖는 게 무슨 대수야? 그럴 때는 더 큰 돌을 주워서 ‘풍덩’ 장인에게 더 큰 물벼락을 안겨주는 거야. 물장난을 하자는 거라구, 그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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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를,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니까 더러, 특히 남자분들 마음이 좀 거북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결혼한 사람이, 더구나 남자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있냐고요.

그건 그래요.
신부(아내)는 신랑(남편)으로부터 씨, 아니 정액을 받아서 새 생명을 잉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몸, 곧 그 살과 피를 받아 새 생명,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여 십자가에 그 몸을 찢어 생명을 주시고 신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신부, 곧 아내이지요.
신랑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신부, 당신은 빛나는 드레스와 면사포, 면류관을 쓰고 주님을 맞이하실 거예요. 그리고 천국혼인잔치가 열릴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당신을 사랑하사 피 흘려 목숨을 주시어 살려 신부로 삼고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어느 누가, 사단 마귀인들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5: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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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잘 되고 오래 살기 원하십니까?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하나님은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2장 6-7절을 보면 거기에도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나오는데,
희한하게도 새둥지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새둥지가 무엇이길래 하나님께서 그토록 관심을 기울이시며,
새끼는 잡아먹어도 좋은데 어미새는 반드시 놓아주라 하시면서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는 약속까지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엔 어미새가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아예 손도 대지 말라 하시든지,
잡아먹으려면 어미새는 먹을 것도 있고 또 살만큼 살았으니까 잡아먹고
애처로운 새끼들은 살려주라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을 낳은 자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존귀하게 여김 받아야 할 것은 새끼들이 아니라 어미새입니다.
어미새의 수고를 생각해 보십시오. 풀잎, 지푸라기, 나뭇가지를 물어다 둥지를 짓고 그 안에 알을 낳고 그 알을 품어 새끼가 나게 하고 먹이를 부지런히 잡아와 짹짹 입벌리는 새끼들을 먹이는 그 눈물겨운 싸움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잉태의 고통과 희생, 인내의 아픔을 겪으면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길러내는 자는 존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엔 어미가 되지 않고 새끼로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결혼해 자녀를 낳더라도 최대한 적게 하나만 낳겠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부모세대가 전쟁의 폐허와 가난의 보릿고개를 넘으면서도 다섯 남매, 일곱 남매씩 주렁주렁 낳아서 길러 주셨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미루고 심지어 독신을 고수하려는 이기적인 세대는
개인의 자유와 풍요는 누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통로를 막아버림으로써
후손을 단절시켜 부모에 불효하고 민족과 인류의 멸종에 기여하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실까요?

또한 새둥지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과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합니다.

어떤 신부가 좋은 신부입니까? 순결? 사랑? 순종?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낳는 것’입니다.
출산을 못 하는 석녀(石女)가 어찌 좋은 신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당연히 복음으로 자녀를 낳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낳으십시오, 많이 나으십시오, 육신의 자녀도, 복음의 자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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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제물>

[시편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

성경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찾아온 때에”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17절에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상한 심령”은 어떤 심령일까요? “상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말로는 부패하고 썩어서 상한 것도 “상했다,” 다치고 부서진 것도 “상했다,” 하는데, 여기에서는 다치고 부서져서(broken) 상한 것을 말합니다. 깨끗하고 싱싱한 과일이나 향내 나는 고기를 칼로 자르고 저민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심령은 깨끗하고 싱싱하고 향내 나는 “상한 심령”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부패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야바 대제사장 집에서부터 빌라도 법정과 골고다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고소와 주먹질과 침뱉음과 매질과 집단폭행 등, 말할 수 없는 부당한 학대와 곤욕을 당하십니다.
그러나 한 마디 항변이나 반항도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보면 빌라도가 심히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자기들의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인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이 참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인내라는 것, 참는다는 것은 화나고 속상하고, 복수심과 증오심, 악과 독이 치밀어 오르는데도 꾹 눌러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받으실 희생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희생제물이 되려면 악과 독이 아예 없어야 합니다.
사과나 복숭아를 찔러도 “아얏, 왜 찔러!” 독과 악이 아니라 달콤한 사과즙, 복숭아 즙이 나오고, 싱싱한 횟감 물고기를 회칼로 저며 놓아도 향긋한 맛이 나듯이 말입니다.
개나 호랑이 같은 동물이 제물이 될 수 없는 것은 정결하지 못 한 탓도 있지만, 잡아 보십시오, 반항하고 악을 쓰며 “나를 때려? 나를 죽여? 두고 보자, 지옥에 가서라도 원수를 갚을 거다.”는 듯 으르렁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양이나 소 같은 동물은 목을 찌르고 매달아 죽여도 고통으로 버둥거리고 울며 피를 흘릴 뿐 악독과 원망은 아예 할 줄을 모릅니다.

제물은 칼로 상하고 죽임당해야 드려질 수 있습니다.
심령도 상함 받고 죽임당해야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악하고 죄인의 심령은 부패하여 상함 받을 때 악과 독과 원망이 터져 나오고 악취의 죄가 풍겨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인간들의 악한 취급에 마음이 상하였는데도 참으셨다면,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데 누르고 인내하셨다면,
그런 식으로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셨다면,
예수님의 이 속죄제사는 무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제물을 받으셨을 리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대속물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그 심령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여 만민을 구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어린양 예수님의 심령은 악한 인간들의 배반과 욕설과 조롱과 침 뱉음과 채찍질과 못 박음을 당하며 부서지고 찢기고 저며져서 향기로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 없었으며 그 제사를 받고서 온 인류의 죄를 사해주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였습니다.
그 단 한 번의 제사로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는 종결되었으며 인류의 모든 죄는 사해졌으며 더 이상 다른 속죄제사가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의 이 완전한 제사에 참예하십시오.
십자가 앞에 엎드려 당신의 죄를 내어놓고 사함 받으십시오. 구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삶은 주님께 드리십시오.
주님의 제사로 속죄함 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를 거룩한 산 제사로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나의 성김과 봉사와 희생이 힘들고 고달프고 아플지라도, 내가 환난 가운데 부서질지라도 주님의 희생과 죽으심 만 하겠습니까? 나의 섬김과 희생과 예배가 결코 억지로 참으며 드리는 것이 아니게 하십시오. 오직 감사와 기쁨과 자원으로 나의 삶과 생명이 주님께 드려지게 하십시오.
또 주의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결코 우리의 수고와 섬김과 공로를 앞세우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직 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보혈, 그 향기로운 제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주의 이름으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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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고,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째서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금방 혼돈하고 공허하단 말일까요?

어떤 성경학자들은 1절과 2절 사이에는 기록되지 않은
긴 시간과 엄청난 사건이 생략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간격이론(間隔理論, Gap Theory)" 이라고 부릅니다.

'1절과 2절 사이에 아주 긴 세월이 흘렀다, 또 루시퍼를 위시한 천사들의 3분의 1이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전쟁이 벌어지고,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나 마귀가 되었으며, 그 전쟁의 결과로 땅이 망가져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격이론”은 하나의 설(說)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밝히지 아니한 사실을 억지로 추리해내거나 상상해서 믿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말로 '창세기'로 번역되었지만 창세기는 실상 '세상을 창조한 기록'이 아니라 영어로 Genesis, 내력, 즉 이스라엘 민족의 내력입니다.
이 창세기를 근거로 지구가 6천년 전에 창조되었고 태양과 달과 별이 나흘째 날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간격이론이 맞느냐 틀리냐 보다는 창세기가 창조실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예수님의 말씀)

또한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창세기와 매우 흡사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말씀이시요 성자 하나님이시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빛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성령의 깨우치심 없이는 진리의 빛을 깨닫지 못 하고 눈앞에 오신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의 시작에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니라.”는 어두움에 갇힌 죄인의 마음 위를 운행하실 성령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는 아무 가능성 없는 죄인의 절망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 위를 하나님의 신이 안타까이 운행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도 죄인의 어두운 마음을 성령님께서 열어주시지 아니하면 죄인은 결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을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고 빛을 어두움과 나누시는 모습은 요한복음 1장에서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사망으로부터 나누어 내실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의 마음 위를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음성이 들리거든 마음을 여십시오.
성령님의 음성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당신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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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멋대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다가 죽기 전에만 회개하면 되겠지.
언제라도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과연 그럴까요?

엘리 제사장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패역한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제사 드리러 온 백성의 고기를 빼앗아 가로채고,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전에 먼저 뺏어먹는 패악을 예사로 저질렀으며
회막에서 수종하는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심스럽게도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마음이 연약하여 두 아들을 엄히 다스리지 못 하였으며
너무 심하니까 겨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사무엘상 2:24-25)

아버지 엘리 제사장의 말은 그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사람이 중간에 나서서 화해시킬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도대체 누가 나서서 화해시킬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당신도 혹시 언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 제멋대로’ 생각입니다.
낮고 더러운 죄인은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다를 수조차 없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마치
다리 밑의 거지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옷이 순식간에 깨끗하고 화려하게 바뀌고
즉시 구중궁궐 임금님을 만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지가 임금님을 만나려면 누군가가 중간에서 주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거지의 부탁을 들어줄 만큼 거지와 친한 사람이어야 하고
아울러 임금님께 무슨 부탁이든지 할 수 있을 만큼 임금님고 절친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 거지도 임금님 앞에 나서기 전에
깨끗하게 씻고 더러운 옷도 갈아입고 언행의 품격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오직 신(神)이요, 사람이신 예수님이 중보(中保)가 되어 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죄를 씻어야 하고,
눈보다 흰 예수님의 의(義)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구주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그 분만이 죄인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中保者)이시며,
우리 죄를 씻어 하나님 앞에 서게 해주실 분이십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엎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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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에덴동산에다 선악과는 왜 만들어 두셨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인간이 뱀에게 속아서 그걸 따먹을 것을 진작 아셨을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항의하듯이 한 딱한 질문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아예 나쁜 마음도 먹을 줄 모르고 하나님만 섬기는 착한 인간들로 만들고, 남자와 여자도 한 번 짝을 이루면 원앙새같이 서로 사랑하며 알콩달콩 살도록 만드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이 세상은 지금도 사랑이 넘치는 에덴동산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억지로 짜맞추어 놓은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건 마치 인조인간, 로봇, 컴퓨터로 조작되는 사랑이 아닐까요?
완벽히 조종되고 통제, 관리되는 완전한 세상의 완전한 사랑 말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이란 "선택"입니다.
자유의지입니다.
눈물과 고통 속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 는 선택과 결단입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그래서 배반하고 떠나갈 수도 있는 인간들이
아픔과 슬픔을 이기고, 서로를 끌어안고 나누는 사랑일 때
사랑은 진실로 아름다운 것일 것입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조작되고 짜맞추어진 사랑을 원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도록 지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랬더니 뱀에게 속아서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애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당신이 갚아야 할 죄의 빚도 이미 다 갚으셨습니다.
마치 매정하게 떠나간 연인을 애타게, 간절히 부르며 기다리듯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 울면서 돌아오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거 참,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에 약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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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뭔데?>

하루살이와 배짱이가 만나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저녁이 되자 배짱이가 하루살이에게 말합니다.
“오늘 참 즐거웠다. 내일 또 만나서 놀자.”
하루살이가 되묻습니다.
“내일이 뭔데?”

배짱이와 개구리가 만나서 여름철 내내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자 개구리가 배짱이에게 말합니다.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자.”
배짱이가 묻습니다.
“뭐, 내년? 그게 뭔데?”

하나님께서는 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너무나 사랑하셔서라고요?
너무나 불쌍해서라고요?

예, 맞습니다.
그러나 정답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은
인간이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죽어 없어지고 소멸되는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어차피 죽어 소멸될 인간을
애써 구원하시겠다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셨을 리 있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고 되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기로 불어 넣어진 인간의 영혼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이 무서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하루살이나 배짱이처럼, “천국이 뭔데? 영원이라고?”
그렇게 되묻지 마십시오.
당신은 영원한 시공간 속에 잠깐 보였다가 사라지는 하루살이나 아침안개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기 위하여 지음 받은 영원한 존재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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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십 억 인구 중 티끌 같은 나 하나 없어진다고 세상이 눈이나 깜짝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한 사람, 한 영혼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실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당신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인간을 소우주(小宇宙)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그만 머리 속에는 온갖 사물의 인식과 기억들이 들어갑니다.
가슴 속에는 기쁨과 슬픔, 분노와 사랑 등 온갖 감정이 다 들어갑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과 교감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뿐입니다.

광활한 우주에 하나님 홀로 계신다고 생각해 보세요.
우주가 아무리 넓다 한들 하나님을 알아주고 사랑하는 존재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래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차가운 드넓은 우주보다 당신의 마음을 더욱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와 인간, 어느 쪽이 하나님께 더 귀하겠습니까?

당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당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소유라면
당신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소우주(小宇宙)....
하나님께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살리시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당신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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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참말로 계신다면 어디 내 앞에 데리고 와 보세요!!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긴 계시는 겁니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600만이나 학살할 때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셨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세상이 이 모양인데 하나님은 뭘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공중에 나타나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나팔을 불게 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다 하나님을 믿을 게 아닙니까!”

“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을 뒤집어엎어 버리지 않으시고 조용히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만 부탁하시고 승천하셨나요?!”

글쎄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뱀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뱀의 말을 믿어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배반한 것이며 뱀의 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천사를 보내셔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신다면
그 뱀이 하나님께 뭐라고 할까요?
“이 뱀의 말은 듣기만 하고도 믿던데, 하나님 말씀은 보기 전엔 못 믿겠다는군요. 후후후.”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뱀에게 져서 조롱당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안 나타나실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까지는.
공중에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고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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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생명을 보셨나요?
생명이 무엇인가요?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생명,
전기, 전자작용도 아니고 물리작용도 아니고 화학작용도 아닌 생명,
붙잡을 수도 없고 다시 살릴 수도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는 생명......
도대체 생명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생명이 눈에 보인다면, 생명에 무게가 있고 부피가 있고 실체가 있다면,
생명을 붙잡을 수 있다면, 생명이 물리학적, 화학적 작용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떠나가는 생명을 붙잡아 유리병 안에 넣거나,
반도체 소자 같은 것에다 기억시켜 저장했다가 소생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만일 생명이 그런 것이라면 재미있는, 아니 무시무시한 일도 벌어질 수 있겠지요.
숨어 있다가 덮쳐서 생명만 쏙 빼앗아가는 강도도 생기고
여러 생명들을 유리병 안에 넣어놨다가 파는 생명상인도 생기고
그걸 훔치는 생명도적도 생기고
생명을 빼앗고 지키려는 싸움과 전쟁도 일어나겠지요.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과학은 생명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 합니다.
생명의 실체를 규명할 수도 없고 생명의 기원을 알아낼 수도 없습니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혈액을 주입하고 생명연장장치들을 주렁주렁 매달아도
그런 걸로는 인체의 심장이나 폐 같은 장기들을 작동시킬 수 있을 뿐이지 생명을 붙잡거나 연장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이 떠나가면 그만입니다.

생명은 신비입니다. 생명은 기적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고 생명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고 생명보다 감사한 것이 없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그 생명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영원한 소망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영원한 멸망에서 건져내어 살리시려고 생명의 주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은 십자가에 그 몸을 찢어 그 생명을 쏟아내셨습니다.
세상 모든 죄인들을 살게 하시려고 그 영원하신 생명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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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말씀 26절을 보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히브리어 원어는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요.
그리고 27절에 가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영어로 “His own image”, 단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복수로 말씀하셨다가 단수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토씨하나 안 빼고,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다 기록해야 했던 모세나, 또 성경을 필사했던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당혹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라 하셨다가 ‘나’라고 하시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하신 것은 여기 뿐 아닙니다. 창세기 3장 22절, 11장 7절, 이사야서 6장 8절에서도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수이면서도 복수이시고 복수이시면서도 단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거듭거듭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하십니다. 영어성경은 “our imag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모양”라고 하십니다. 영어성경은 ‘our like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도 눈, 코, 입, 귀가 있고, 수염이 나고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했는데, 우리와 똑같이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뜻인가? 학자들 간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품을 말한다, 그 성품을 말한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위엄을 말한다, 영원불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한다, 등등........

우리는 정확히는 다 알 수 없지만 세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이 전혀 낯설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 자신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계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실 때마다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여기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같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만일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달랐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26절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는 히브리어 원어로는 ‘우리가 아담을 만들고’입니다. 단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복수로 말씀하고 계십니다.(우리말 성경은 단수 ‘그’로 번역되어 있음)
왜 금방 단수로 말씀하셨다가 금방 복수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지금은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을 만드시지만 그 아담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갈비뼈로 아담 속에 들어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비뼈를 꺼내어 하와를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나중에 “아차, 내 정신 보게. 여자를 안 만들었네,” 생각이 나서, 아담이 외로워 보여서 하와가 필요하겠다 싶으셔서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그들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은 이미 그 속에 하와를 하나로,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이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셔서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까지도 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허리 속에는 이미 후손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그 수가 늘어나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그’를 지으시지만 ‘그’는 ‘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이면서 여럿, 즉 한 분이면서 세 분,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신 형상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유일신 여호와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알라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하나 뿐인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혼자 군림하는 유일신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으신 하나님, 성령님 없으신 독불장군 하나님의 형상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곧 세 분이면서 한 분, 한 분이면서 세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오해와 잘못된 교리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여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삼위일체 아닌 신(神)은 아무 신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홀로 있는 독불장군 같은 인간도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독처하는 것이 선하지 못 합니다.
기독교는 수양이나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너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혼자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는 것은 구원의 큰 비밀입니다(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남자가 여자를 누르고 여자가 남자를 밟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저 잘 났다고 혼자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짓지만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 같이 그가 그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제자삼아 복음으로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가 되어 자기 혼자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찢어지고 갈라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갈라버리는 것입니다.
분열시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고 저 여자입니다. 아닙니다, 뱀입니다. 뱀이 그랬습니다.”
혼자가 되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전쟁과 다툼과 폭력과 추악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고 믿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이전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마귀의 형상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힘써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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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두려워 떨며 일평생 죽음의 종노릇한다.
그러다 결국은 죽게 된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죽음의 너머에 죄를 지고 가는 것은 죽음 보다 더 두렵다. 그러나 죄를 씻을 길이 없다. 아무리 가리고 덮어도 가려지지 않고 아무리 씻고 문질러도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선행을 하고 인격을 수양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더러운 누더기옷일 뿐이다.(이사야 64:6) 죄는 통째로 부패하는 것이다. 부패한 고기는 통째로 버려야지 깨끗이 씻거나 일부만 잘라내고 먹지 못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멸망이다. 영벌(永罰)은 하나님이 버리시는 것이다. 영원히 타는 불에......
다른 세상신(神)들은 죄를 덮어주기도 하고 봐주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屬性)이기 때문이다. 죄를 봐주신다면 그것은 천국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집에 오물과 똥을 들여놓는 것이나 같다. 죄를 거저 용서하거나 봐 주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견디지 못 하신다. 
그러므로 죄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죽음만이 죄를 마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왜 세상신들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기도 하고 복을 주기도 하는가?
그것은 세상신들은 이 세상을 지은 주인도 아니고 인간들을 지은 창조주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용서고 뭐고를 할 능력조차 없기 때문이다. 세상신들은 인간을 속여 영혼을 훔치는 도적들일 뿐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반드시 심판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에 더러움과 악과 원수들을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 세상을 깡그리 쓸어 없애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그 지으신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다.
차마 심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며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요한복음 5장)

그런데.....
심판을 맡은 아들은 심판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버렸다.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니 죄인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이제 하나님은 그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아들의 정결한 피는 믿는 자들의 죄악을 눈보다 더 희게 씻었고
하나님의 그 아들을 향한 사랑은 그 아들이 대신 죽어준 자들에게로 흘러넘쳐가 그들을 한없이 사랑스럽게 하였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주시고 그 아들은 포기해버린 그 심판은 사람들 각자에게 맡겨졌다.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결정으로 영원히 살 것인가, 영원히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취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이 심판주이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이 당신 자신을 심판하여 당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자, 어떻게 하시겠는가?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한복음 3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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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죄로부터, 영원한 절망과 멸망으로부터 구하시려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 십자가를 지고 그 몸을 쪼개어 쏟으셨다.
무엇을 가지고 오셔서 쏟으셨는가?
그의 생명, 그의 영광, 그의 권세, 그의 능력, 그의 사랑을 모두 피와 물로 쏟으신 것이다.

그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그 피와 물이 땅에 쏟아졌다고
그 분의 생명, 그 영광, 그 권세, 그 능력, 그 사랑이 헛되이 썩어지고 없어지겠는가?
그 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Sonship)이 사라지겠는가?
그의 피, 그의 물, 그의 생명은 지금도 온 세상을 흐르며 덮고 있다.

세상 사람들아, 우리 육신의 생명으로는 죄와 사망을 피할 수 없다.
십자가 앞에 나아오라.
십자가 아래에 그대 죄와 썩어질 생명을 내려놓고
생명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피 한 방울 받아 마시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그의 쏟으신 피 한 방울에
영원한 생명과 하늘영광과 권세와 능력, 하나님의 아들 됨(Sonship)이 들어 있으니
그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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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한복음 4:24)

이 말씀이 더러 좀 다른 뉘앙스로 이해되는 것 같다 싶습니다.
“신령하게, 진정으로......”, 즉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 이해되고 있는 것 같다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말씀은 예배드리는 자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NIV 영어성경을 보면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아우톤 엔 프뉴마티 카이 알레데이아”, 곧 “영과 진리 안에 있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를 예배하는 자는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 있는 자이어야 한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나의 예배를, 그 마음자세와 태도를 보고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뵙고 예배드리는 자도 영적존재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는 영(靈, Spirit), 곧 하나님의 영, 성령 안에, 진리 안에 속한 자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 난 자, 이제는 육에 속한 자가 아닌 영에 속한 자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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