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론 / 게르할더스 보스

 

2. 죄

2.1 죄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
2.2 펠라기우스 죄론
2.3 로마교 죄론
2.4 원죄
2.5 행위 언약
2.6 아담의 범죄
2.7 첫 범죄로서 원죄

 

2.7.1 원죄(peccatum originale)의 정의와 장점

 

31. 어떤 명칭으로 신학자들은 우리가 화란어로 "유전된 죄"(에어프쏜테; erfzonde)라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가?

 

그들은 이를 위해 페카툼 오리기날레(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 원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32. 왜 이 용어가 화란어 용어보다 더 나은가?

 

이 용어가 "유전된 죄"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모든 것들을 표현할 때, 다음 두가지 사항을 구별한다면, 더 맞기 때문이다:

 

1) 아담의 첫번째 죄 때문에 우리에게 전가된 죄책.

 

2) 이 전가된 의 때문에 형벌로서 우리에게 내재하는 부패.

여기서 금방 알 수 있는 것처럼, 엄격하게 말해서 단지 후자[Nr. 2]만이 유전된다. 전자는 유전되지 않고, 다만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옮겨진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유전됨으로써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원죄(peccatum originale)는 이것을 유전된 죄보다 잘 표현한다.

 

33. 그러면 원죄(peccatum originale)라는 용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죄를 원죄라고 할 때, 이것은 그 기원이 인류의 뿌리에서 났기 때문이다.

 

2) 나아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라, 모방을 통해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근원을 두기(origineel) 때문이다. 비록 이 용어가 이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의식적으로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용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을 몇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탁월한 도구이다.

 

 

2.7.2 내재적 죄(peccatum inhaerens)

2.7.2.1 내재적 죄의 두 구성요소: 원의의 부재, 적극적 악의 실재

 

34. 이 원죄가 유전되는 경우만을 한정하여 생각할 때(peccatum inhaerens = erfschuld), 어떤 것으로 구성되는가?

 

두 가지로 구성된다:

 

1) 원의의 부재(abwezigheid). 이것은 유전된 결핍이요, 박탈이며,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었을 때, 이 죄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기 때문에, 형벌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그에게 합당한 순종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방금 앞에서 본 것처럼, 로마교 신학자들은 이것을 유전된 원죄의 유일한 요소로 생각한다[cf. Q. 7].

 

2) 적극적인 악의 실재(aanwezigheid). 이것은 적극적인 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2.7.2.2 적극적 악의 실재

 

35. 내재적 죄의 두번째 적극적인 요소와 관련하여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1) 첫째는 내재적 죄는 본질적이고 고유한 의미에서 죄라는 것이다. 여기서 단지 우리와 절반만 동행하고, 죄를 비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동방 그리스 교부들, 항론파들)에 반대하여, 인격적인 죄책이 거기에 결부되었는지만 질문하면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내재적 부패성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붙들지 않는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죄는 인간 영혼에 주입된 실체(substantie)가 아니다. 또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실체의 변화도 아니다. 이것은 마니교도들과 종교개혁 당시 플라쿠스 일루리쿠스(Flacus Illyricus)의 오류이다. 죄를 실체로 만들므로써, 사람은 그것의 실재를 견지하려는 열심으로 자기 자신을 지나치고 만다. 실체로서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다. 죄의 개념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죄가 성질의 영역에 있지 실제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3) 마니교도들에 대한 변증에서 어거스틴은 죄의 개념에 철학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이 철학적 요소는 그 이후로 한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죄가 실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죄가 존재의 박탈, 즉 어떤 부정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오리겐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제한이라는 범신론적 이론과 연관된다[cf. Q. 1,2]. 그러므로 이 철학적인 요소를 죄 개념에서 몰아내는 것이 낫다. 어거스틴은 다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을 통해 야기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죄를 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거스틴처럼 이 둘을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을 위한 기초로서 이 철학적 견해를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A. 이 철학적 견해는 단지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이것을 우리도 견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죄를 야기시켰다는 주장에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죄의 기원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신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B. 죄에 관한 옳은 견해를 갖기 위해 죄를 부정으로 묘사하는 것은 위험하게 보인다. 죄는 삶에서 적극적인 권세이다.

 

C. 후대의 정통신학은 어거스틴의 가르침 중에서 이 철학적 요소를 배제했다. 정통신학은 죄를 단순한 박탈이 아니라 실제적 박탈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따라서 죄는 실체가 아니다. 또한 단순한 박탈도 아니다. 오히려 죄는 어떤 하비투스(habitus) 곧 기질로서, 이것은 실체에 들러 붙어 있으며, 후자[실체]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이도 바뀔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어떤 기질로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 이로부터 영혼의 실체가 피할 수 없는 것과 반립을 이룬다. 연장(uitbreding)[이라는 속성]을 소유하는 것이 물질의 본성에 속하듯이, 어떤 도덕적인 기질(habitus)을 갖는 것, 그것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실체의 본성에 속한다.

 

5) 죄 된 기질은 영혼 전체에 고유한 것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 된 기질은 영혼의 모든 기관과 영혼의 전 삶에 미치며, 그 어느 것도 손대지 않은 채 남겨두지 않는다. 저급한 기관에는 죄가 머물고, 반면 고등한 기관은 [건강하게] 남아 있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낮은 기관 높은 기관 할 것 없이 둘 모두에 죄의 부패는 자리잡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대상이다. 이것을 "전적 부패"라고 부른다. 이 용어의 의미는 지금까지 우리가 죄의 본질과 형태를 정의한 것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만일 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전적 부패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적 부패는 다음 4가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A. 전적 부패는 각 사람이 그가 될 수 있을만큼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와 적대적이 되었지만, 이 적대적의 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B. 또한 죄인은 양심에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의 현실태(actus)이다. 이 도덕적 의식도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머무는 한 이 사실에 대한 인식은 그의 의식으로부터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양심은 이것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이 인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인간 안에 하나님께 대하여 선이 있다는 것을 전혀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할 수 있는 무엇이다. 물론 양심은 의지와 감정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동기들로 하는 그렇게? 것이다.

 

C. 나아가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모두가 죄인이요 이기적이다. 그러나 자연인이 움직이는 이 이기심의 원들 안에 많은 동심원들이 있다. 어떤 죄인은 하나님을 행해서는 이기적이지만 그의 주변에 대해서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자신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하여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민적의(justitia civilis)가 있을 수 있으나, 동시에 거기에 속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죄인 것일 수도 있다.


D. 죄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들이 있다. 어떤 사람 안에서도 이 모든 형태들이 다 발현된 적이 없다. "전적 부패"라는 표현에서 "전적"(totale)이란 형용사는 모든 가능한 부패성이 인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반면, 이 전적 부패라는 말은 본성상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사랑도 우리 삶의 동기적 원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코 우리의 행동과 사고, 말을 결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의 전 삶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성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을 의식적으로 대적하는 것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외적 자극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 안에는 어떤 영적인 선도 없다.

6) 다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이 내재적 부패성은 "영적 선에 대한 무능함"이다. 만일 인간이 모든 것에서 죄인이고 죄 된 것 뿐이라면, 이것으로부터 이미 죄인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무능"이란 행하는데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능"은 다른 의미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즉 무능이란 자신의 의지의 방향을 거스르는 일의 불가능성으로, 악으로부터 선하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의미에서도 인간은 무능하다.

 


2.7.2.3 인간의 본성적 무능

36. 본성적 무능과 이성적 무능 사이의 구분은 무엇을 뜻하며 왜 이 구분을 버려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적 무능함을 부인하고 그의 도덕적인 무능함을 주장힌다. 이들이 이 주장으로 의도하는 것은, 인간이 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본성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서, 이것을 영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그는 합리적인 이성, 의지력 등을 가졌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한 기초가 그에게 전적으로 존재하며, 다만 도덕적으로 무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본성적 기관을 옳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 구분에 반대하여 다음 사항을 주목해야 한다:


1) 도덕적 무능과 본성적 무능을 구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도덕적"인 것과 "본성적"인 것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동시에 도덕적이고 본성적일 수 있다. 만일 사람에 관하여 그가 영적인 선에 무능하다고 말할 때, 이 무능은 본성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능함은 그의 부패한 본성에 속하고, 이것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제 누군가 이 무능함이 본성적이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는 이 말이 가진 유일한 의미에서 그것이 본성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도, 위에서 논의했던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사람들은 보통 본성적 무능과 도덕적 무능 사이의 대립을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본성적인"과 "도덕적인"이라는 두 형용사가 이 "무능함"과 함께 쓰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무능함에 두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덜 강한 것을 도덕적인 무능함이라 부르고, 더 강한 것을 본성적인 무능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어법으로 볼 때, 대체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방식으로, "도덕적"이란 용어와 "본성적"이란 용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변화가능성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선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이 단지 상대적인 것이라는 오해가 생겨난다.

3) 이 구분은 의지를 너무나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의지의 죄 된 기질과 선한 기질은 의지의 추상적인 셩격과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의지의 기질인 것이다. 그러나 이 추상[의지]이 그것이 내재하는 결정성과 상관없이, 자체로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악한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무능하다. 그럼에도 본성적으로는 무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일하게 유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만일 사람이 이 의지를 로마교의 초자연적 의미에서 본성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의지를 가진 것은 의지의 무능력으로부터 어떤 것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의지의 본성적 존재는 무능함의 약화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구분은 로마교 신학 체계에 속한 것이고 개혁파 신학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4) 그러나 이 안에 진리의 요소가 없지 않다: 인간을 말할 때, 그가 영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하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 안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 욕망의 흔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논의한 부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일 그가 원했다면, 영적인 선을 행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이 원하여 악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이런 강조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이 개념은 너무나 애매하다. 마치 영적인 무능이 우리의 운명이며 우리의 의지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그 아래 신음하며 우리의 최선으로도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생각은 자신들의 무능력 뒤로 숨고 거기에 호소함으로써 복음에 대한 책임성을 회피하려는 무리들 중에 팽배해 있다. 따라서 항상 무능함과 무자원성은 동일한 일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선을 원치 않으며 우리의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본성적인 무능과 도덕적 무능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호소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이미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지성과 감정의 능력을 [모두] 잏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5) 인간이 본성적으로 무능하지 않다는 견해는 또한 인간의 이성, 의지 등의 능력이 죄로 인해 심각히 약화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한다. 인간이 악하고 또 악에 머무는 것은 이 능력들이 단지 잘못된 방향으로 작용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설사 도덕적인 방향이 일시적으로 변화되었다 해도, 동시에 그 기관들 자체의 변화가 일어나, 그들이 이전 능력과 완전성을 돌려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하다 인정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동도 실행할 수 없다. 지성의 맑음, 의지의 능력, 감정의 기품, 이 모든 것이 죄 된 인간 안에서 손상을 입었다. 여기에 또한 인간의 무능함이 있고, 이것이 여기 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한 행위가 결코 완전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본성적인 무능과 도덕적인 무능 사이를 구분을 받아들인다 해도, 본성적 무능은 여전히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37. 인간의 영적인 무능은 그의 자유 의지의 상실 때문인가?

 

이 질문은 다양한 차원을 고려하여 답해야 한다. 만일 자유 의지의 의미를 영혼으로부터의 강요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영혼이 행하는 즉흥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속성은 의지의 개념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유롭지 못한 노예적 의지란 자체 모순으로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달리 자유 의지를 인간의 의지가 선에서 악으로 또는 악에서 선으로 바꿀 수 있는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자유의지는 타락 전에 존재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죄의 결과중 하나로서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선으로 악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악으로 선을 만들 능력은 없다. 후자, 곧 어떤 선한 것을 일으키는 일, 나아가 악을 폐지하는 일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권이다. 인간이 타락 이후 악을 행할 때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든 능력이 발전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므로,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함과 구속됨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안에서 죄인으로 존재한다.

38. 어떻게 당신은 영적인 선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가르침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 교리는 다음으로 증명된다:

 

1) 성경이 그 어느 곳에서도 타락한 인간에게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2)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성경의 명백한 선언으로부터. Cf. 요 15:4, 5; 6:44; 롬 8:7; 고전 2:14.

 

3) 성경이 우리에게 원죄를 제시하는 형태로부터.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성경은 죄 된 인간의 자연 상태를 사망의 상태일 뿐 아니라 육적인 상태로 묘사한다. 이 두 가지 상들[사망, 육]에 포함된 비교점은 [인간이] 영적인 선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죽은 사람이 자신을 일으키거나 죽은 육체에 생명을 표출시킬 수 없듯이, 자연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 없다.

 

4) 인간이 부정적으로 말해서 단지 하나님 앞에서 죽고 육체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죽음 안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발전되는 원리와 적의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성경의 설명으로부터. 따라서 인간은 단일 사슬이 아니라 이중 사슬로 전적인 무능함에 묶여 있다.

 

5) 만일 인간이 영적인 선을 이루려 할 때, 하나님의 호의와 교제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된다는 필연성으로부터.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머무는 한. 인간은 그의 인생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인간은 심판에 대한 의식 앞에 있는데, 이 심판에 대한 인식은,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도, 모든 선한 행위를 그 뿌리부터 잘라내 버린다.

 

6) 하나님의 성령이 거듭날 때,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은혜의 사역의 필연성으로부터. 이것은 위의 Nr. 3)에서 언급한 것의 다른 측면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성령님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시요, 생명의 원천으로 소개한다. 성경에서 인간 영혼은 그 어느 곳에서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항상 외부로부터 역사하는 은혜로 변화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새로운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 등을 말한다.

 

7)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험으로부터. 누구도 그가 율법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깨어있는 죄인의 죄책의식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가 죄에 메여 있다는 것과 자신을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확신을 포함한다. 후자[인간이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확신]는 인간의 실제적 상태를 의식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로부터 이것이 실제로 무능함의 상태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39. 이 전적 무능력 교리에 대적하여

 

1) 인간의 전적 무능력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반론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어떤 반론이 제시되었는가?

 

A. 선을 행하는데 무능력이 책임성과 양립할 수 없을 때는, 이 무능력이 도덕적이지 않은 기원을 가질 때이다. 이것은 인간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의 방향이 잘못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것을 원할 본성적인 능력이 결여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에게 결여된 것은 자신의 능력의 선하고 도덕적인 성질이다. 우리가 본성적 무능력과 도덕적 무능함을 그별할 때, 이것을 진리의 핵심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도덕적이고 선하다는 것이 인간 본성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도덕적 무능력을 또한 본성적 무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B. 인간의 법적 절차에서, 이 절차가 하나님의 길로 수행되는 경우에도, 책임성은 무능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재판관도 피고가 언제나 그것 때문에 정죄받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능력이 항상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죄 판결을 내릴 것이다. 더욱이 재판관은 바로 본성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서 그의 판결의 이유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왜 사람이 피고의 성격과 고소당한 행동 사이에 일치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 그것이 항상 유효한 증거로 생각되는 이유이다.

 

2) 인간의 전적 무능력 교리는 [선을 행할] 모든 자극을 제거할 것이라는 반론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단지 거룩한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만 유효하다. 그래서 이것은 경륜이 아직 율법적인 때이던 구약에서보다 신약에서 더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은혜 언약의 혜택들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향하는 영혼의 활동들의 경우, 어떤 자극을 제거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이것으 단순히 다음에서 설명되는 이유에서이다. 즉 이런 활동들은 영적으로 선한 행동이 아닌 도구적 행동으로 여겨진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라는 은혜 언약의 요구가 온다면, 이것은 "영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의미이다. 물론 믿음과 회개의 경우, 그 안에 영적인 선의 원리가 포함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도 믿음과 회개는 거듭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은혜 언약의 혜택들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이런 관점으로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사람이 의를 얻는 믿음의 경우도, 질료적인 차원에서 볼 때, 여전히 죄와 불의로 오염된 영혼의 표출이다. 정화를 위해 믿음이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를 통해 의롭게 되는 믿음도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아니다.

 

3) 인간의 전적 무능력 교리는 회개를 지연시킨다는 반론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맞지 않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자신의 주도권 아래 자신의 회심이나 심지어 자신의 거듭남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면, 이것은 그에게 무관심과 태만함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 있는 행위들이 우리의 영혼의 생명 안에 더 깊은 움직임을 야기하지 않고, 반면, 이와는 반대로 중요한 일에 있어서 무능력과 무력한 수동성에 대한 의식이 사람을 가장 깊은 심연에서 흔들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심리학적인 증거로 생각할 수 있다. 누구든지 인간에게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은 인간이 이것을 쉽게 한 시간 후 다음 시간으로 미룰 수 있다고 기대할 것이다. 반면, 만일 이 무능력 자체는 죄책과 책임성으로 양심에 각인되었다는 것을 주의한다면, 인간에게 그의 조건에 관한 완전한 진리를 말하는 것은 결코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2.7.2.4 내재적 원죄의 범위

 

40. 무엇으로 원죄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결정할 수 있는가?

 

1) 성경은 모든 곳에서 모든 육체는 죄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길이 부패했다고 가르친다(욥 14:4; 요 3:6; 롬 3:9ff; 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갈 3:22; 요일 1:8). 만일 모든 인간, 그가 누구든지, 심지어 아무런 실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예를 들면 막 태어난 아이)에게도 이것이 해당된다면, 이것은 그들이 원죄 때문에 죄책이 있는 것과 관련 있다.

 

2) 죄는 인간 안에서 너무나 일찍 드러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예를 모방함으로써 죄 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 존재가 시작되는 처음 순간부터 이 죄가 우리에게 들러 붙어 있다고 가르친다(시 51:5; 우리는 이 시편에서 다윗이 내재하는 부패를 변명이 아닌 자신의 간음죄에 대한 심각한 상황으로 인용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시 58:3과 엡 2:3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한다. 죄가 본성이라는 것은 죄가 우리의 인간됨과 함께 주어진 것이며, 생육이라는 본성적 선을 따라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무엇보다 이 본문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이 내재적 죄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츠빙글리파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는 질병이나 결핍이 아니라 완전히 심판을 받을 만한 죄라는 것이다.

 

3) 죄의 결과는 보편적이다. 시간적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심지어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른다. 결과가 있는 곳에 그 원인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소시누스주의자들과 항론파 사람들은 이것을 옳게 인지했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육체적 죽음은 어떤 윤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cf. 롬 5:12-14). 신학파 신학은 이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인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아이들을 그들의 이성을 사용하기 전에는 동물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이 입장을 감히 취하지 않으려고 했다.

 

4) 성경은 도처에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구속인가? 이 구속은 일차적으로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속이다. 따라서 만일 원죄의 규모를 결정하려 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필연성을 결정하는 것이 된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는 표와 인이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원죄의 실재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유아들에게 구속은 악으로부터 해방이 아니요, 단지 악을 막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은혜 수단의 지속적인 의미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 3:3, 5*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가르치신다(cf. 행 17:30; 막 16:16).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 그는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고 있는 것이다(요 3:36).

 

5) 성경에서 몇 군데는 죄가 인간에게 보편적이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우리는 다음 3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A. 시민적 의. 시민 사회 영역에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지 않으면서, [시민 사회] 법을 의도적으로 범하지 않을 수 있다.

 

B. 이스라엘 내의 언약적 의. 어떤 이가 모세의 법이 규정하는 의식법을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이루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이 언약적 의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 의는 기껏해야 단지 예표적 의미가 있는데, 이는 믿음의 의가 아니며, 행위의 의는 더욱 아니다. 시편의 많은 구절들은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cf. 시 18:20; 37:36-40].

 

C. 전가된 의.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의로, 이것은 내재적 의를 전제하지 않고, 그것을 정확히 배제한다. 인간의 의와 죄 없음을 말할 때, 모든 본문은 이 세 그룹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6) [인간] 경험은 이 세계를 살아간 어떤 피조물도 죄없는 것은 없었다고 증거한다. 심지어 원리상 원죄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이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고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내재적 부패성이라는 설명 외에 다른 모든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죄인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 중거일 수 없다. 죄는 눈을 멀게 하는 권세이다. 이 권세를 통해 죄는 그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한다. 반대로 은혜의 진보가 있을 때, 그것은 죄와 자연적 마음의 무능력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간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41. 어떻게 이 내재적 부패가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전가되는지에 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1) 대다수 개혁파 신학자들은 죄는 비질료적인 무엇으로서 아버지의 씨에 숨겨질 수 있다는 데에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따라서 죄의 전파도 이 씨로부터 몸이 기원하는 것과는 다른 근거가 있어야만 했다.

 

2) 죄의 전파는 생식 행위의 죄 된 성질에 돌려질 수도 없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죄를 육체의 정욕으로 보는 편협한 견해와 관련있다. 인간이 그것을 통해 태어나는 그 행위가 전적으로 죄 되다는 것은, 이 행위의 산물이 또한 죄될 원인이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죄는 성질이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단지 그 행위를 한 사람들의 영혼에 자리잡을 뿐이며, 그들의 육체는 단지 이 영혼의 유기적 도구일 뿐이다. 그 행위 자체는 형이상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생각할 때 전혀 죄 된 것이 아니다.

 

3) 세 번째 견해는 영혼의 죄성을 영혼이 육체에 접촉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다. 이 견해 또한 주요 교의학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 견해가 옳다면,] 그러면 영혼은 죄없이 창조되었고, 육체와 연합하는 순간에야 죄가 있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여기에 물질설적(또는 유전설적) 결론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덧붙여야만 한다: 즉 육체나 배아의 부패성이 자체로 죄를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원의를 빼앗긴 영혼이 이것을 하는[죄를 짓는] 그런 부조화한 육체와 연합이다. 따라서 육체 안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자체로 죄가 없지만, 그들의 생각에, 영혼을 통해 얻게 된 육체의 어떤 상태가 그것[영혼]에 죄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영혼]은 우리를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적극적인 거룩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는 육체 자체에도, 영혼 자체 안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성에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인간의 본성은 육체와 영혼의 유기적 결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을 예를 들면, 피터 버밀리와 폴라누스, 베나딕투스 아레티우스, 휘페리우스, 케커만 등이 있다.

 

4) 대부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은 언약에 입각하여 아담의 첫 번째 죄의 죄책을 영혼에 전가한다.

 

B. 이 일이(하나님의 판결로) 영혼의 실제적인 존재 이전에 이미 일어난 후에, 하나님은 영혼이 존재하게 하는 곳에서 창조자와 심판자 이중 자격으로 나타나신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영혼의 실체를 무로부터 나타나게 하신다.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그 실체로부터 이미 이 창조시 원의라는 기질을 거두신다.(단지 몇몇 신학자들, 예를 들면, 잔키우스 등은 영혼이 매우 짧은 시간 원의를 가졌으나 그 후 즉시 잃었다고 가르쳤다).

 

C. 원의 없이 존재하게 된 인간 영혼은 즉시 적극적 내부적 부패로 넘겨진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으로부터 거두어 가신 필연적이고도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실재이며, 실제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영혼에 행하시는 무엇이 아니다. 단지 영혼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시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겪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이 마지막 설명이 우리에게도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명이 모든 반론을 잠재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중 아주 큰 어려움은 첫째, 하나님을 죄를 조성하는 일과 상관없는 분으로 붙들려고 할 때, 만나게 된다. 둘째, 영혼이 단 한 순간도 무죄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도록 할 때이다. 이 두 조건 모두 하나의 일관적 이론으로 통합할 수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야기하지 않으셨다면, 죄는 이미 존재하는 영혼에서 발생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것은 죄 없음에서 죄 됨으로 이동이며, 만일 사람이 이것을 시작점으로 저것을 종착점으로 둔다면, 그러면 영혼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죄없는 상태로 두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잔키우스가 시초에 소유했다가 그 후 곧 상실한 원의와 관련하여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은 우리가 섭리론에서 하나님의 인간의 악한 행위에 관여하신다는 것과 동일하다. 거기서도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배제될 수 있었는지 어떤 지점도 표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고 실행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 행위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어떤 방향과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많은 비유들을 가져올 수 있으나, 이들 모두는 대체로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를 줄 뿐,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아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육체 밖에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육체와 긴밀한 연합속에서 창조하셨다. 배아는 밖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기관을 통해 형성되나 스스로 어떤 형성원리를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원리를 영혼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자란 배아가 계속해서 어머니 기관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또한 영혼은 후자[어머니 기관]와 긴밀히 연결된다. 여기에 유전설이 갖는 진리의 일면이 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가장 깊은 내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하나이다. 그래서 육체가 여전히 모체의 일부를 구성할 때, 그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전파까지 확장되는 데에까지 끄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생각과 의지, 감정은 전체 또는 일부가 육체적 기관들과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또한 반대로 이 기관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발전이 결정된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죄에 관하여 동일하게 말할 수 없다. 죄는 육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죄가 육체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죄의 강도에 대한 척도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죄는 본성상 순수히 영혼에 관련된 것이다.

죄는 타락 후, 그렇게 되자 마자 인간의 본성적 상태에 속한다.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은 재생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규정은 본성적 성향과 속성들은 부모와 자녀들에게 공통적이 되도록 한 것이다. 반면, 순수하게 인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은 재생산될 필요가 없다. 본성이란 용어는 우리가 이 용어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을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성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에서 고유하지 않고 각자마다 차이가 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죄가 본성 죄이며, 따라서 본성적인 전이의 선을 따른다는 것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더 설명할 수 없다. 이 일이 일어나는 근거는 단지 본성의 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죄의 본성적 성질은 그들이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인격적인 모습을 취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죄 된 의지와 어두워진 지성 그리고 부패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의 소유한 인격성이 각각 특별한 경우에 모두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죄 또한 그 어느 곳에서도 두 개별자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거나 동일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게르할더스 보스의 '개혁 교의학(신론, 인간론)'에서 발췌(458-47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죄를 이기는 최선의 길 / 박신 목사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믿음이 아무리 좋은 신자라도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니 수시로 유혹에 넘어가 죄에 빠집니다. 그 때마다 회개하며 기도와 말씀에 열심을 내어 봅니다. 그런데 막상 또 닥치면 그것도 이전에 실패했던 똑 같은 상황인데도 이겨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 같은 예감마저 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차라리 한 길로만 강압적으로 인도해주시면 안 될까하고 실현불가능한 일마저 소원해봅니다.

유혹이란 항상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 보이는 복수 방안을 눈앞에 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나쁜 일이라면 아예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예로서 퇴근하여 집으로 바로 갈 것인지 동료들과 술집에 들렀다 갈 것인지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둘 다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일찍 귀가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동료들과 한담을 나무며 종일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럴 때는 최종결과를 미리 유추해 보는 것이 죄를 이기는 좋은 방안입니다. 일찍 귀가하는 것은 좋은 결과뿐입니다. 휴식을 취하며 가족끼리 사랑을 나누며 이튿날 출근도 상쾌하고 거뜬해집니다. 동료들이 당장 비난할지 몰라도 속으론 사실 부러워하거나 다음날 아침에 잘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동료와 술집에 가면 처음 얼마 동안은 건전하지만 곧바로 건강, 금전, 정신적으로 손해 보는 일만 생깁니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 그 모임이 절대 간단히 끝날 것 같지 않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그럴 자신과 의지도 없지 않습니까? 오직 나쁜 결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를 알아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의 종류가 아닌 죄가 불러오는 결과를 아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타락한 본성이 방해하더라도 지정의를 전부 동원해 성경 말씀을 분별하여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에 대한 이야기이며 죄에서 구원해 주는 길을 밝혀 놓은 책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위 성도들의 위로와 권면과 도전도 받아야 합니다. 정말 평생을 두고 죄와 피 흘리며 싸워야 합니다. 항상 성령의 인도에 따라 쉬지 말고 기도하며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할 경우가 생기면, 아니 아예 처음부터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멸망으로 이끄는 길은 넓고 쉽습니다. 선을 행함은 우선 당장에는 무료하고, 힘들며, 손해 보고, 아무 열매 없을 것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일단 행하기만 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보람과 평강과 위로가 넘칩니다. 그 열매도 반드시 아름답고도 풍성해집니다. 반면에 죄는 처음에는 재미있고 신나며 즐겁고 흥분됩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아무 유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더럽고 추하며 멸망으로 이끌 뿐입니다.

그렇다면 죄와 싸우는 최선의 방안이 나왔습니다. 죄를 알아서, 죄를 버리되, 선을 행하며 버리는 것입니다. 죄 자체를 이기려 하지 말고 죄라고 판단되면 무조건 그것에 등을 돌려야 합니다. 죄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되면 그 최종적인 결과를 정말 냉정하게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잘 분별이 안 되면 그 전부에서 일단 돌아서야 합니다. 등 돌리기조차 너무 힘들다면 아무리 작은 선이라도 일단 행하고 봐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이 신자가 가만히 있는데도 신령하고 거룩해지게 만들어 준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선을 행할 소망을 심어주며 그런 여건을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어려운 이웃을 붙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참모습을 말씀 앞에 완전히 벌거벗겨 철저한 회개를 하게 한 후에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죄를 이기지도 선을 행하지도 못할 만큼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악은 그냥 버려지지 않고 반드시 선을 행해야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10/12/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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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탄생에 대해 궁금합니다.(Q&A) / 박신 목사 


[질문]

셋째로, 죄의 탄생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창세기의 처음부터 등장하는 죄,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죄 같은데 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죄가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는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던 시기인데 왜 죄란 것도 같이 공존해서 있었을까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죄란 것이 필요(?)했던 것인지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제대로 정리하고 있지 못하는 주제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더 강해지려면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도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처럼 여기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아니면 사탄이 아담을 유혹해서 범죄케 했으니 전적으로 사탄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경향도 보입니다.

질문자님이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절대 죄와 공존(共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선미(眞善美)에서 완벽하며 온전하게 거룩합니다. 어떤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과도 티끌만큼도 연관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독생자라도 죽이시어 인류의 죄 값을 치르게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죄를 저주합니다. 한마디로 죄는 그분과는 전혀 별개로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엄격히 말해 죄가 아니라 악의 세력 즉, 사탄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하늘의 영적 존재인 천사들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높은 천사장이 스스로를 너무 높이고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사14:12-20, 겔28:11-19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벌을 받아 천국에서 추방되었는데, 그 때 자기를 추종하는 악한 천사들을 데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악한 영적 세력(evil spirits)들의 우두머리가 마귀 혹은 사탄(satan)이며, 그 졸개들을 귀신 또는 악령(demons)이라 부릅니다. 참고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혹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성하신 후에,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했습니다. 인간은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릴 존재였습니다.(창1:28, 시편 8편)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기에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또 그런 교통에 의거해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할 다른 피조물은 갖지 못한 인간만의 특성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인간을 정해진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나, 생존과 종족보존만을 위한 한정된 지정의(본능)를 소지한 동물처럼 만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또 기꺼이 당신과 교제하며 그 뜻에 순종하여 이 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라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분 대신에 세상을 통치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존재였습니다.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어떻게든 떼어놓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는 인간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하는 명령을 내린 까닭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까 스스로 두렵고 싫었기 때문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불평하거나 의심을 품는 마음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러자 아시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적 존재로 그 활동 영역은 영적 차원에 머뭅니다. 물질계에 직접 자기를 드러내고 악을 행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대체물을 이용합니다. 때로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도 사탄의 실체는 아닙니다. 인간을 속이는 짓일 뿐입니다. 에덴에서도 뱀을 이용해서 인간을 속인 것이지 뱀 자체가 사탄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사탄은 악으로만 뭉쳐진 존재로서 영계에서 활동하기에 죄가 시작된 출발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근본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얼마든지 사탄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의 탄생은 인간에 의한 것입니다.

흔히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가 들어왔다고 계명을 위반한 행동 자체를 죄로 보지만 죄의 본질은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불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이미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불순종을 죄의 본질로 보지만 여기서도 한 칸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워버렸기에 불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뜻입니다. 불순종 이전에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런 맥락은 사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비롯한 천사들 모두에게도 당연히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성경문답 사이트 #117 “왜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었나요?”의 글을 참조 바람) 하나님은 결코 규칙을 제정해서 강제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지움으로써 불순종을 넘어 거역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죄의 궁극적인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分離)라는 것입니다. 모든 윤리적 죄악도 엄밀히 따지면 바로 그분을 외면, 거부, 대적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잠시나마 의도적으로 그분을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자 자신과도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자연인에게는 자아를 찾는 것이 평생의 과제가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서 그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자아 발견 혹은 실현은 전혀 불가능한데도 그럽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또 인간으로 이웃과도(진정한 사랑의 실종), 피조세계와도(인간의 안락만 목적으로 무분별한 자연정복) 분리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너무나 명백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분리라면 그 근원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게 하고 또 그런 은혜와 복락을 누린 인간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 위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당신과 교통할 대상인 인간과의 분리란, 인간적 표현으로 하자면,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기원은 전적으로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간혹 만약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지금껏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지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세상이 선으로만 가득 차면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악이 있어야만 선을 선으로 알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서두에 잠시 언급한대로 인간의 도덕적 발전을 위해서 하나님이 고의로 악을 만들었다는 가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만 고찰해 보아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음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만약 아담이 끝까지 순종하였더라면 세상은 선으로 가득 차서 정말로 더 풍성하고 살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선을 선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선을 행할수록 더 큰 선을 행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차게 것입니다. 절대 무료하지도 않고 날마다 더 새롭고 신나고 즐거울 것입니다. 오늘날 죄의 본성이 생생히 남아 있는 우리로선 그 아름답고 은혜로운 상태를 도무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비유컨대 천국은 분명 그러한 곳일진대 우리로선 과연 어떨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뜻은 인간더러 이 땅을 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끝까지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했다면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만약 아담이 그랬다면 죄가 이 땅에 들어올 여지는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탄생이 과연 누구의 책임이 됩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과 분리할 뜻이 전혀 없었다는 이유로, 또 사탄은 아담이 그의 유혹을 거절했다면 죄는 얼마든지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유로, 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됩니다. 아무리 주인이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를 철제금고가 아닌 화장대 위에 방치해 놓았다 해도 또 곁에서 자꾸 갖고 가자고 부추긴 악한 친구가 있었다 해도, 결국은 훔친 자가 죄를 지은 것이지 주인과 친구의 잘못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10/28/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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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회개의 증거들


(고린도후서7장11절)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 내었느니라


1,먼저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라는 것은 자신의 죄 된 삶을 고치기 위한 간절함을 의미한다.


2,(얼마나 변증하게 하며)는 이제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면서 은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3,(얼마나 분하게 하며)는 자신이 지은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서 분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죄에 대한 슬픔보다 더욱 강렬한 성질을 의미한다.


4,(얼마나 두렵게 하며)는 여전히 동일한 죄에 빠지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것을 말한다 이것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성향이다.


5,(얼마나 사모하게 하며)는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6,(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면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영적 성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성화된 열심이다.


7,(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는 스스로를 징계함으로써 자신이 죄를 범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진정한 회개를 통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성령님의 도우시는 믿음의 역사 가운데 (고후7:11)말씀의 증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김홍만 목사님 저서중에서-

출처:물과피와성령/박요셉

 


첨부파일 회개의 참된 의미 a 내용 발췌.pdf



책 내용 중에 묵상할 만한 핵심 내용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첨부화일(같은 내용)도 있습니다.

편집: 최용진목사

 

 

“회개의 참된 의미”에서 발췌

by 조셉 얼라인 (목회자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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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9)

 

 

제 1장 회개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14)

“회개는 도덕적 의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17)

“회개는 겉으로 경건의 규율을 지킨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17)

“회개는 교육, 인간의 법 혹은 형벌로 단순히 부패를 방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17-18)

“회개는 조명을 받거나 깨닫거나 혹은 피상적인 변화나 부분적인 개혁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8)

 

 

제 2장 회개의 본질

 

“회개란... 마음과 생활 양면에 걸쳐 일어나는 철저한 변화입니다.” (23)

“회개란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으로서, 전능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회개는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24)

"회개는 옛 사람과 세상적인 관심사보다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더 비중을 두게 합니다.” (30)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자기의 최선의 선택임을 굳게 믿으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경우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보다도 그분을 소유하게 된 것을 더 좋아합니다(빌 1:23). 또한 그는 좁지만 의로운 길을 갑니다. 어쩔 수 없어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고 사랑해서 갑니다.” (33)

"경건한 체하면서 도덕을 무시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기의 모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열의만 앞서고 실제로는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아무리 작은 범죄라도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지 않는 것이 회개입니다.” (39)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힘을 다해 죄에 항거합니다. 죄와 투쟁하고 그것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는 동안 숱하게 넘어집니다. 그러나 몸에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는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습니다. 화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41)

“위선자는...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습니다. 죽어서 천국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것만이 그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55)

 

 

제 3장 회개의 필요성

 

“여러분, 죄에 빠져들어 가면서 나중에 기도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겠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회개는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67)

계속 회개하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받는다는 소망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하고 싶은 소망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71)

회개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소망한다면 그것은 그분의 진리가 거짓임이 입증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74) 그리스도께서는 뉘우치거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 없이는 그 공로가 여러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73)

 

 

제 4장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

 

“자기가 회개했다는 강한 확신 이상의 증거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은 분명히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89)

 

쉽게 의식하지 못하는 12가지 죄들 (94-100)

“(1) 의도적인 무지 (2)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가는 데서 은밀하게 제외시켜 둔 것들 (3) 형식적인 믿음 (4) 거룩한 일을 할 때 악한 동기가 앞섬 (5) 자기 의를 의지함 (6) 엄격한 신앙을 속으로 싫어함 (7) 일정한 정도의 신앙에서 멈춤 (8) 세상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사랑 (9)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를 품고, 그들을 괘씸하게 생각함 (10) 자부심을 억제하지 못함 (11) 쾌락을 사랑함 (12) 세속적인 안전으로 만족함, 혹은 자기들의 상태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짐”

 

 

제 5장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참함 (109-127)

 

“1.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원수로 삼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들이 여러분을 적대하고 있습니다.

3. 사단은 자기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여러분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4. 여러분의 죄책은 산더미같이 여러분을 덮쳐누르고 있습니다.

5. 타오르는 정욕이 여러분을 비참한 노예로 만듭니다.

6. 영원한 진노의 용광로가 여러분을 위해 달구어져 있습니다.

7. 율법은 모든 위협과 저주를 여러분에게 쏟아놓습니다.

8. 복음도 여러분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언합니다.”

 

 

제 6장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는 지침

 

“1.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는 결코 하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한 진리로 믿으십시오.

2. 여러분의 죄를 철저히 살펴보고 있는 그대로 느끼려고 노력하십시오.

-죄책감을 느끼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과 벌이는 씨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138). 여러분의 마음에 죄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들기까지 죄의 본질을 연구해보십시오(140).

3. 여러분의 현재 상태가 매우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4. 여러분 자신에게 일고의 가치도 두지 말고, 스스로 도우려는 태도를 버리십시오.

5.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죄들을 버리십시오.

-죄와 결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과 결별하게 됩니다. 한 가지 죄라도 아낀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끼지 않을 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 대신 여러분이 죽어야 합니다(145-146).

6. 엄숙히 하나님을 여러분의 기업과 복락으로 선택하십시오.

7. 주 예수님이 하신 모든 사역들을 여러분의 것으로 영접하십시오.

-아무 생각없이 그리스도를 믿으러 나서지 마십시오. 먼저 앉아서 그 대가를 따져 보십시오(154).

8. 그분의 소유가 되는 데에 여러분의 능력과 기능들,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쏟으십시오.

9. 그리스도의 법을 여러분의 말과 생각과 행동의 준칙으로 삼으십시오.

10. 이 모든 사항들을 재확인하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과 여러분의 영혼 사이에 언약을 맺으십시오.

11. 지체없이 회개하고, 즉시 하나님께 마음을 굴복하십시오.

12.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도로 주신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13.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서 일하시기 시작할 때 여러분도 함께하십시오.

14. 늘 깨어 진지하고 뜨겁게 기도하십시오.

-기도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세속적이고 거룩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항상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166).

15. 악한 친구들을 버리고, 죄를 짓게 할 만한 자리들을 피하십시오.

16. 하루를 정하여 금식 기도를 하면서 여러분의 죄와 비참상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제 7장 회개의 동기들

 

“나는 회개하고 믿을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가능케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주십니다.” (192-193)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마음과 생활의 철저한 변화이다.

 

1) 회개케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1)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

또는'성령의 새롭게 하심'(3:5)으로 회개하게 된다.

 

회개는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당신 스스로 자신을 회개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회개는 죽은 자의 상태에서 다시 사는 것이며(2:1),

새로운 창조이며(6:15, 2:10),

전능하신 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1:19).

이런 것들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회개는 초자연적인 일이다.

 

 

(2)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자는

예수님이 해산(解産)의 고통을 치르시며 얻어낸 열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통은

우리를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셨고(고전 1:30),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17:19).

 

(3) 말씀이 우리의 눈을 밝게 하고, 영혼을 소성케 하고(19:7-8),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썩지 아니할 씨'이다(벧전1:23).

우리가 씻음을 받았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 덕분이다(5:26).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진리를 통해 그렇게 된 것이다(17:17).

 

(4) 부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60:21).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벧전 2:9)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1:10).

 

회개는 자기의 모든 몸과 능력과 마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먼저 당신의 회개를 증명하라.

그런 다음, 당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회개가 전인(全人)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육욕적(肉慾的)인 사람도 어떤 면에서 선할 수 있지만,

그의 인격 전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회개는 낡은 건물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전부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

 

회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2) 회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며

사람의 마음과 몸과 삶 전체의 행동들을 변화시킨다.

 

(1) 마음의 변화

 

첫째, 회개는 사람의 판단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놓는다.

둘째, 회개는 비뚤어진 의지를 바로잡아준다.

         회개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목적과 계획이 생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원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원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겨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이 행복과 바꾸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은 선택의 기준이 바뀐다.

 

셋째, 회개는 뒤틀린 감정을 바로잡아준다.

         회개한 사람의 눈과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다.

         회개하면 기쁨의 대상이 바뀐다.

         회개하면 관심사가 꼭 바뀐다.

         회개한 사람은 고난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한다.

         회개한 사람은 사랑의 대상도 바뀐다.

         사람이 회개하면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도 달라진다(고후7:9-10).

 

(2) 몸의 변화

 

회개하기 전에는 죄의 도구로 사용되던 인간의 몸이

     회개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성전의 거룩한 도구가 된다.

     자신의 몸을 욕되게 했던 사람이 회개하면

     거룩함과 영예와 절제와 순결과 근신 가운데 지키면서 주께 온전히 바친다.

 

회개하기 전에는 세상적인 계획들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하나님을 위한 계획들로 채워지고, 그분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고심한다.

     회개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데 머리를 쓰지 않고

     자기의 책무를 다하는 데 머리를 쓴다.

     회개한 사람의 입은 생명의 우물이며 그의 혀는 최상급 은()이다.

     그 입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인다.

 

(3) 생활과 실천의 변화

 

새로워진 사람은 새로운 길을 간다(2:2-3).

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3:20).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에 율례를 새겨주시면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율례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의 판단을 따른다.

 

회개의 종류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한 사람은 죄와 영원히 적대 관계에 놓인다.

모든 죄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죄,

특히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죄에 대해서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자신을 혐오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에 맞서 전심전력으로 싸운다.

 

사탄으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움직인다.

때때로 사탄이 덫을 놓아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그는 '원하지 않으면서 잡혀 있는 포로'일 뿐이다.

믿음의 길을 갈 때 그는 사탄의 올무와 미끼를 경계하면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연구한다.

사탄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을 경계하고 의무를 다한다.

 

세상으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누구나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는 세상에 압도당한다.

돈에 절하거나 자기의 명예를 우상시하거나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

그는 사람에게 치우쳐 있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영광과 신뢰와 애정을 사람에게 바친다.

본래 우리를 섬기도록 만들어진 세상이 이제는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회개하게 만드는 은혜는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려놓는다.

하나님을 보좌에 앉게 해드리고, 세상을 그분의 발등상에 두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세상을 발아래 둔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사람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는 그가 즐겼던 세상 것에 '헛되고 괴로운 것!'이라는 딱지를 써 붙이고,

모든 인간적 위대함에 '쓰레기와 배설물!'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제 그는 생명과 불멸(不滅)을 추구하며, 은혜와 영광에 목말라 하고,

썩지 않을 면류관을 목표로 삼는다.

그의 마음은 주님을 찾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최고로 여긴다.

주님의 이름이 가장 소중하고,

주님의 은총이 너무나 귀해서 주님의 이름을 마음에 새긴다.

 

자기 의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하기 전에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하고,

자기 의무를 다함으로써 자신을 온전케 하려고 애쓴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의(自己義)를 세우고

자기가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의()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개하여 변화된 사람은

자기의 의를 누더기 옷처럼 여긴다.

그는 마치 더러운 거지의 옷을 벗어던지듯 자기의 의를 벗어던진다.

심령이 가난해진 그는 자신에 대해 불평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회개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과 당신의 온 힘을 쏟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시고, 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도 그리스도께 똑같이 말씀드릴 수 있는가?

 

이것이 시금석(試金石)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회개한 사람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68)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한다. 그렇다면

 

회개한 사람은 어느 족으로 향하게 될까?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한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하늘 아래에서 유일한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오직 그분만을 의지할 뿐이다.

 

이렇게 회개하는 영혼은 그리스도에게 모험을 걸고

그분을 결코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분이 주시는 유익과 짐을 지는 것 또한 좋아한다.

 

온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절반만 붙든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환영하지만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은 반기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권은 환영하지만 인격을 본받지는 못한다.

 

온전히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부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모든 뜻과 목적을 예외 없이, 한계 없이, 주저함 없이 받아들인다.

주님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시더라도 그 조건에 따르면서 받아들인다.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의 지배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율법과 규례와 방법으로 돌이킨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과 방법과 관련하여 네 가지 일을 이루신다.

 

첫째: 판단력

 

회개한 사람의 판단은 그리스도의 율법과 규례와 방법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가장 의롭고 합리적이라고 동의한다.

이성의 판단에는 객관적인 판단과 주관적인 판단이 있다.

객관적 판단은 개인의 입장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그 판단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길이 옳다고 판단하는데,

이것은 자신과 무관하게 판단하는 객관적 판단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결부시키는 주관적 판단이기도 하다.

 

둘째: 마음의 소원

 

회개한 사람의 소원은 그리스도의 온 마음을 아는 데 있다.

전에 알지 못했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의무를 깨닫게 해주고

숨은 죄를 드러내는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자유롭고 단호한 의지

 

회개한 사람은 자유롭고 단호한 의지로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한다.

의지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자유롭게 선택한다.

육신이 저항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의지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통치를 좋아한다.

그래서 율법과 통치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복으로 여긴다.

거룩함이 주는 유익을 기뻐하고, 거룩한 사람에게서 반드시 나타나는 표를 드러낸다.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과 번영을 누릴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마다하고 엄격하고 거룩한 삶을 선택한다.

 

넷째: 삶의 방향

 

회개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율례를 준수하는 쪽으로 달려간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날마다 신경 쓰면서 살아간다.

오직 완전함을 목표로 계속해서 달린다.

죄를 전부 없애고 완전한 성결에 이를 때까지는 결코 쉬지 않는다(3:11-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찾는 사람이 아주 적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규장)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회개치 않은 자들의 12가지 죄 (조셉 얼라인)

 

 

1. 고집스러운 무지의 죄: 무지가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한 명씩 단두대로 끌고 가 처참하게 목을 자르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의 무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무지의 죄를 버리지 않으면 이 죄가 당신의 생명을 취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지의 죄를 회개하라.

 

2.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은밀한 죄: 자기만 아는, 몰래 즐기는 죄를 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결국 영원한 멸망으로 이끈다.

 

3. 형식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죄: 종교적 의무(기도, 금식, 봉사 등)를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죄.

 

4.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신앙 생활하는 죄: 육신적인 동기 곧 자기의 양심을 달래기 위해, 경건하다는 평판을 듣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의 재능을 과시하기 위해, 세속적이고 불경건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등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죄. 이러한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으려면 당신의 행위뿐만 아니라 당신의 동기까지도 깊이 살펴야 한다.

 

5. 자기의 의를 믿는 죄: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는 것이므로 이것이야 말로 자기 영혼을 멸망으로 이끄는 죄이다. 악한 죄로 멸망할 수 있듯이 겉으로 드러난 의와 선행 때문에 멸망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한 후에 당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인정하라. 나의 의를 더러운 옷처럼 여겨라.

 

6. 철저한 신앙 생활에 대한 은밀한 증오: 제대로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은근히 미워하는 죄. 이들은 철저한 신앙생활을 기묘한 것, 경솔한 것, 무절제한 열정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사람들은 거룩함을 사랑하지도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결국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이다.

 

7. 일정 수준의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죄: 자기가 정한 어떤 범주의 테두리 안에서만 신앙생활 하려는 죄. 곧 자기들의 신앙생활이 구원받기에 충분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면 더 이상 진전하려고 하지 않는 죄로 이것은 오히려 그들이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진정한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언제나 완전함을 열망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8. 세상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죄: 이것이야 말로 거룩하게 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이것은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특징 중 하나이다.

 

9.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심을 품는 죄: 겉보기에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당한 모욕을 기억하고 원한을 품고 악을 악으로 갚고 보복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악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는데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억제하지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오히려 습관적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은 악독이 가득하며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10. 억제되지 않은 교만의 죄: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칭찬을 더 사랑하고 사람의 존경과 갈채와 인정에 마음을 두는 사람들은 아직도 진정한 회개를 모르고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교만을 보지도 못하고 문제 삼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죄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는 것이다.

 

11. 쾌락을 사랑하는 죄: 육신에게 자유를 주고 육신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육신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 배와 감각을 만족시키면서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다 가짜이다. 육신을 기쁘게 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12. 육신의 안전을 의지하는 죄: 돈, 명예 등 자신을 안전(secure)하게 지켜줄 수 있을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붙들고 그것을 의지하여 거기에 안주하려는 죄.

 

 

- 조셉 얼라인, “돌이켜 회개하라” 중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령으로 회개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조셉 얼라인)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세상으로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고 마음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를 일으켜 새사람으로 새로운 삶의 길을 취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세상적인 관심사보다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에 더 비중을 두게 합니다. 회개는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죄를 짓고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는 죄가 모든 악의 주범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라면 진절머리 나고 죄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며 죄가 혐오스럽고 저주스럽게 느껴집니다. 심지어 죄를 짓는 자신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죄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마음을 항상 살피고 죄짓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전에는 스스로 무결하고 회개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자신의 본성이 심히 부패해 있고 전체가 절망적으로 오염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를 정결케 하시고 나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내 속에 정결한 마음을 갖도록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전에는 자기의 처지에서 아무런 위험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자기가 상실된 사람이며, 은혜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지 아니하면 자신은 결국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임을 깨닫습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흠모할 만한 아무런 것도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자기가 찾는 진주, 감춰진 보화로 여깁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자기의 전부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그 분을 진정으로 더 사랑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세상 것들에 미련을 두거나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섬기고 그 분께 영광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매사에 순종하며 억지로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그 분께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들을 굴레로 생각하지 않고 유업으로 생각 합니다. 그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 뿐 아니라 이를 스스로 원합니다. 그는 거룩한 생활을 좋아하고 거룩함을 실천하는 것이 그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그의 가장 큰 욕구는 은혜입니다. 그는 은혜를 목말라 하고 위대해 지기보다는 은혜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것을 기뻐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교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이 번영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전에는 세상에 몰두하다가 시간이 남아야 자기 영혼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이제는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 큰 관심사가 됩니다. 전에는 재산이나 명성 같은 것을 잃을까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이 등 돌릴 때 가장 슬퍼하고 예수님과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괴로워 못 견딥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고 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는 한때 죄 속에서 살고 쾌락을 즐겼지만, 이제 그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생각만 해도 심히 메스꺼움을 느낍니다. 전에는 육체가 죄의 도구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이제 그는 거룩함과 영예, 절제와 정절, 그리고 근신함을 간직하며 주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전에는 사단 마귀의 소리에 열려 있었고 부도덕한 말로 시시덕거리며 남을 즐겨 판단했지만, 이제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항상 조심합니다. 전에는 세상적인 계획으로 가득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려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의 생각과 관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에서 떠날 것인가에 몰두 합니다. 전에는 마음이 더러운 정욕의 소굴이었지만, 이제는 향기로운 제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서 항상 거룩한 사랑의 불이 타오르고 매일 기도와 찬미를 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전에는 그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었으나, 이제는 거룩하고 순결한 숨결을 내뿜습니다.

 

이제 그의 입은 지혜를 내고, 그의 혀는 하나님의 덕과 영광을 찬미하는 금 나팔입니다. 그는 옛 사람에서 새사람으로 철저하게 변화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는 선한 행위를 행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매사에 정직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선한 양심을 가집니다.

 

성령으로 회개한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죄에 항거합니다. 죄와 투쟁하고 날마다 죄와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는 동안 때로는 죄에게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죄와 타협하지도 않고 죄를 대적하며 성령의 능령으로 죄를 이기고 이겨나갑니다. 날마다 알게 모르게 짓는 죄를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습관적인 죄는 모두 다 끊어버리고 죄에 대해서만큼은 무자비하며 반드시 그 끝을 보고야 맙니다. 죄짓지 않는 고귀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세상의 즐거움들을 헛되고 귀찮은 것들로 여기며, 인간의 모든 탁월한 것들을 쓰레기와 배설물로 간주합니다. 그는 은혜를 갈망하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고 주님을 따르기로 온 마음을 다해 정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생명과 불멸의 영생을 추구합니다.

 

전에는 세상에 끌려 다니며 돈과 명예를 중요시했지만, 이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좁은 문, 좁은 길로 기꺼이 나아갑니다. 또한,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자리에 둡니다. 전에는 예수님을 쓰레기 더미 옆에 놓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자기 앞에 내세웁니다. 전에는 자기 멋대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면서 그 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 뜻대로 행함을 실천합니다. 삶 속에서 자신의 자랑은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주님의 영광과 영화만을 사모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공로감에서 돌이킵니다. 전에는 자기를 신뢰하며, 자기 의를 세우고, 돈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치 아니했으나, 이제는 자기의 의를 냄새나는 누더기로 여기고 오물통에 벗어 던져 버립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의로 새로 입혀지기를 간구합니다. 이제 그는 심령이 가난하고 비천하며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의에 높은 가치를 둡니다. 매사에 자기를 의롭게 해 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실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 분 없이는 한 순간도 숨을 못 쉬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항상 그 분께 꼭 달라붙어 있고 싶어 하며 늘 그 분과 함께 호흡하기를 갈망합니다. 이제 그는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을 찾아가 소리 높여 기쁨의 복음을 전합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성령으로 회개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특징 중에서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리스도께서 다루실 대상, 그는 상한 사람이다.

 

리차드 십스


1. 회심의 필수 요건인 '상함'


이 상함은 회심 전에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상황을 통하여 우리의 모든 교만하고 높은 생각들을 낮추어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실 길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떠나 방황하며 집을 떠난 이방인처럼 지내기를 좋아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혹은 저런 십자가를 주심으로 우리를 상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탕자인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7] 

둔하고도 간사한 심령으로 하여금 자비를 구하기 위해 간절히 부르짖도록 만드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마치 범죄자처럼, 모든 잔꾀를 동원하다가 실컷 얻어맞은 후 에야만 

심판장에게 자비를 구하기 위해 부르짖습니다. 


회심 이전의 상함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가치를 높이 여기도록 만듭니다. 

복음은 그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Morality)라는 무화과 나뭇잎은 우리에게 무용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더욱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합니다. 


감사로 인해 우리의 삶은 더욱 열매 맺는 삶이 됩니다. 

무엇이 많은 이들을 그처럼 냉담하고 메마르게 할까요? 

죄 때문에 상함을 입은 일을 겪으면서 

자신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사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 같은 다루심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길에서 넘어지고 상하게 함으로써, 

그리하여 그분의 길에 서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에 첫발을 내딛을 때, 

죄에 대한 슬픔을 경험하지 않고 율법의 채찍을 충분히 맞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타락하고 배교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는 원인은 그런 경험의 부재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후10장 5절의 말씀처럼 

'높아진 생각을 낮추는' 성령의 초보적인 사역이 회심 전에 필요합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그리고 성령은 일반적으로 죄인됨을 확신시키는 사역을 진전시키기 위해 

어떤 고통을 더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결하게 하며, 치유하고 정화하는 힘이 있습니다. 


 


2. 회심한 후에도 필요한 우리의 상함


 


회심한 후에도 우리는 상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한 상함을 통해 갈대는 자신이 참나무가 아니라 갈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갈대조차도 상함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본성 속에는 교만의 찌끼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비에 의해 산다는 사실을 알 게 하기 위해서 상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보다 강한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고 상하는 것을 볼 때 

너무 심하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26:75에서 베드로가 심히 통곡할 때 그는 그처럼 상해 있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이 갈대는 그가 그렇게 상함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힘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신앙 위인들의 영웅적인 행동보다는 

그들의 실패와 상함이 교회에 더 큰 위로를 줍니다. 


이와 같이 다윗도 상함을 입었습니다. 

시32:3-5에서 다윗은 

마침내 거짓 없는 영으로 자유로운 고백에 이를 수 있을 때까지 종일 신음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32:3-5] 

아니, 시51:8에 의하면, 그는 

그 자신의 감정 안에서 뼈가 꺾이는 정도의 극한 고통을 느끼기까지 슬픔을 

겪었다고 말했습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시51:8] 


히스기야도 이사야 38:13에서 

하나님께서 사자처럼 '그의 뼈를 꺾으셨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사38:13] 

택하신 그릇인 사도바울도 너무 자고해지지 않도록 

그를 괴롭히는 사탄의 사자를 필요로 하였습니다(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3.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 한 가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함 위에 상함을 역사시키실 때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가혹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 상함을 받으신'(사53:5)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상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어떻게 천국으로 데려가시는지에 대해 

무지한 불경건한 영혼들은 

심령이 상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롭고도 선한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너무나 강퍅하고 고집스럽기 때문에, 

한 사람을 그의 본성으로부터 은혜로 데려가는 것과 은혜로부터 영광으로 데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리차드 십스의 ‘꺼져가는 심지와 상한 갈대의 회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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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건성으로 붙듭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환영의 뜻을 표하지만, 구원을 받았으니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데에는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말하면서도 그분의 인격을 닮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여해 주신 임무들과 유익들을 분리시킵니다. 근본부터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이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임금과 구주”( 5:31)로 삼으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그렇게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구원받기는 열망하되
, 죄짓는 데서 구원받기는 그다지 바라지 않습니다.
생명의 구원을 바라면서 여전히 육체의 정욕도 갖고 싶어 합니다
.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구원과 육체의 정욕을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
또 그들은 자기들의 몇 가지 죄는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들릴라의 무릎에서는 떠나지 않으며, 사랑하는 헤로디아와는 이혼하지 못합니다. 오른손이나 오른쪽 눈을 제거할 만큼 결단력이 있지 못합니다.

이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편벽됨 없이 영접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의도와 목적대로 그분을 받아들이되, 아무런 예외나 제한이나 보류함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다스림도 받으려고 애씁니다
.
그는 바울과 같이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시키시든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대로 자기를 쓰실 수 있도록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계명으로 돌아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 하나 하나에 동의하고 만족한다고 고백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로 행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으로는 원치 않으면서도 의무감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행하는 데 반해,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며,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데서 자유를 누립니다.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자유로이 그분을 따라가며,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며,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당신께 속한 자들을 완력으로 통제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백성들의 왕이십니다.
그들은 그분의 은혜로 자원하여 자신을 드리며 그분을 섬깁니다.
노예처럼 어쩔 수 없이 섬기는 것이 아니라
, 아들처럼, 배우자처럼, 사랑과 충성이 우러나와서 자진해서 섬깁니다.
한마디로 회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끊임없이 공부합니다
.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의 매일의 관심사입니다.
그는 자기 속의 죄가 완전히 없어지고 마침내 거룩함으로 온전해질 때까지 푯대를 향하여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위선자는 거룩함을 천당에 들어가는 다리로써만 좋아합니다
.
그는 세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은 채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습니다.
죽어서 천당에만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 이것만이 그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단지 천당에 가기 위해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 그 자체를
좋아합니다
.
그는 지옥에 가지 않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룩함의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 소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관과 목표가 바뀌었습니까?
거룩함이 여러분의 추구하는 바요, 신앙이 여러분의 주된 일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한 셈입니다
.

 


- 조셉 얼라인,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 중에서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C.H. 매킨토시

 

그리스도인이 죽어서 하늘에 갈 때 죄의 권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죄가 죽은 사람에게 권능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치 죽어서 하늘에 갈 때처럼 믿는 이가 현세(現世)에서 죄의 권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보지 못합니다. 죄가 실제 죽어서 장사된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지 죄의 존재(presence)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주의하여 주지하십시오.

 

죄의 문제에 관해서 현재의 그리스도인과 장래의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이러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현세(現世)에서 그리스도인은 단지 죄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장차 그는 죄의 실재(實在)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신분에서는 죄가 그 안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를 군림하지는 못합니다. 머지않아 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지 못할 것입니다. 죄의 군림은 끝났습니다. 은혜의 군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십자가에서 이미 정죄되었습니다. 지금은 은혜가 왕좌에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얼마나 영광스러운 해방입니까! 얼마나 복된 해방입니까! 부디 성령님의 보배로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 들어가서 은혜의 권능으로 살 수 있기를!.

 

로마서 6장을 세심히 살펴보면, 사도는 죄들(sins)의 용서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죄들의 용서는 3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죄들은 용서되었고-지워졌으며-영원히 말소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의 주제는 죄들(sins)의 용서가 아니라, 지배하는 권능이나 원칙으로서의 죄(sin)로부터 완전한 해방입니다.

어떻게 이 엄청난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죽음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 사실이 모든 믿는 이들에게 적용됩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믿는 이들은 하늘의 덮개 아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믿는 이가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모든 참된 믿는 이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이의 공통된 신분입니다. 복되도다, 거룩한 신분이여! 우리를 위해 이러한 신분을 획득하시고, 우리를 이러한 신분 안으로 인도하신 분께 모든 찬양과 경의를 표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은혜의 영광스러운 군림 아래서 살고 있다-“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이 영광스러운 해방의 진리를 주님의 백성들이 거의 알지 못합니다. 비교적 소수만이 죄들의 용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죄의 권능이 실재함을 느끼며,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대로 자신들을 인정하려는 대신, 고통스러운 감정을 끊으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심에 대하여 의심과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대신 자의식으로 사로잡힙니다. 화평과 위로를 얻기 위하여 자신들의 상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참합니다.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고의 영적 상태로도 결코 화평의 기초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태, 우리의 상황, 우리의 경험, 우리의 어떠함으로부터 화평을 구하려 한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입니다. 화평을 얻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고, 지금 그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고, 그분 안에서 받아진 바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의 어떠하심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이것이 화평의 신성한 기초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거룩한 삶의 유일한 신적 비결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죽음에 처하려고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수도사, 금욕주의자, 죄 없는 완전함을 열심히 추구하는 자들은 다양한 육체적 연습으로 죄를 죽음에 처하도록 애쓸지 모릅니다. 그 필연적 결과는 무엇입니까? 비참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열심에 비례한 비참함입니다. 그것은 참된 기독교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복된 지식으로 출발하여, 이 사실을 믿음으로, 몸이 아닌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오늘 우리는 믿음에 의해 이 완전한 해방의 권능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 출처 : http://www.christi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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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사로부터 비롯되는 복음적 회개(존 콜쿤)

참되고 복음적인 회개의 실천은 거듭남과 성화에서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행 5:31)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죄인의 마음속에 회개의 원리를 삼으시고, 그 원리를 성화의 과정 속에서 한 성향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참된 회개는 본성의 열매가 아니요,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회개를 주시는 것이 중보자의 직무이므로 그분은 택하신 자들을 향한 다음의 약속을 성취하심으로써 그러한 회개를 베풀어 주십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저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참된 회개, 그것은 마음의 복음적인 통회함이요 모든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영혼의 확고한 결단으로, 영혼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그분께 그의 권능의 한량없이 부어진 성령께서는 동일한 영으로 자신의 택하신 자들과 교통하십니다. 그들은 그분의 전능하신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을 죄에 대하여, 죄를 향하여 깨드리시고, 거기에서 돌아서서 거룩으로 향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회개의 일차적인 기초인데, 여기에서부터 죄의 해악됨을 바라보는 참된 참회자의 시각과 그 죄를 향한 슬픔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령의 은혜로운 영향력의 결과입니다. 영혼 속에 이러한 거룩한 원리를 심고 그것을 자극시키며 정규적으로 활용하도록 훈련시키는 일은 은혜로운 보혜사이시요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그러한 성향을 이끌어 내고 강화시키는 일에, 그리고 이러한 은혜를 훈련시키는일에, 성령께서는 일반적으로 그의 복된 말씀을 활용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율법을 사용하셔서 완고한 마음으로 깨뜨리시며, 복음을 불같이 사용하셔서 그러한 마음을 녹이시고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을 품게 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이처럼 각성된 죄인은 한편으로는 율법에 의하여 쫓기며, 다른 한 편으로는 복음에 의하여 신실한 회개의 실천으로 이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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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육공동체  http://onesfamily.org/technote/board.php?board=book&command=body&no=1833

 

 

정리: 돌이켜 회개하라 (조셉 얼라인, 규장) 

 

 
돌이켜 회개하라(조셉 얼라인, 규장)

<제목 차례>


1.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2
  1)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2
  2)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한 것은 아니다. 2
  3) 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2
  4) 형식적으로 경건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2
  5) 교육, 법, 가혹한 억제를 통해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2
  6)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2


2. 이것이 회개이다. 3
  1) 회개케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3
  2) 회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사람을 만들어내며 사람의 마음과 몸과 삶 전체의 행동들을 변화  4


3. 당신은 생명 얻는 회개를 한 적이 있는가? 8
  1) 당신이 왜 회개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8


4. 회개하지 않은 자는 어떤 죄를 짓는가? 10
  1) 회개하계 않은 열 가지 부류의 죄인 10
  2)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열두 가지 죄 11


5.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임한다. 12
  1)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항하여 싸우신다.  12
  2)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가 당신을 대적한다.  13
  3) 사탄은 회개하지 않은 당신을 완전히 지배한다.  13
  4) 당신의 모든 죄목이 산처럼 당신을 짓누른다.  13
  5)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 당신을 비참한 노예로 만든다.  14


6. 회개하지 않는 자를 위한 생명의 지침 15
지침1.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명심하라. 15
지침2. 당신의 죄를 철저히 살피고 뼛속 깊이 느끼도록 노력하라. 15
지침3. 당신의 비참한 현재 상태를 가슴 깊이 절감하라. 16
지침4. 행위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잘 살펴라! 17
지침5. 당신의 모든 죄들을 남김없이 버려라! 17
지침6. 하나님을 당신의 기업과 복음으로 엄숙히 선택하라! 17
지침7. 주 예수님의 모든 직무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라! 18
지침8. 당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과 관심을 주께 바쳐라! 18
지침9.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당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려라! 19
지침10.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엄숙한 언약 안에서 온전해지게 하라! 19
지침11. 회개를 미루지 말고 속히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라!  20
지침12.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편으로 세우신 말씀을 성실하게 경청하라! 20
지침13. 성령님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실 때 순종하라! 20
지침14. 진지하고 뜨거운 기도를 쉬지 말고 열심히 드려라! 20
지침15. 악한 친구들과 작별하고 죄의 유혹을 이겨라! 20
지침16. 하루 동안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영혼을 겸손히 낮추라! 21


7. 바로 지금 돌이켜 회개하라 21
  마지막 그물을 던지며‥‥ 21
  1) 탕자처럼 돌아오라. 21
  2) 당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친절하게 초대하신다. 21
  3) 천국 문이 당신을 향해 열려 있다 22
  4)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놀라운 특권을 주신다. 23
  5)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조건들을 최대한 낮추어 당신에게 제시하신다. 23


8.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다! 24

 
1. 가짜 회개에 속지 말라
먼저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1)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기독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이교도(異敎徒)이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공언하기만 하면 회개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佛儀)에서 떠나지 않고(딤후 2:19), 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딘 1:16).
2)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회개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형적 세례의식(洗禮儀式)이 구원에 필요한 은혜를 주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면 누구나 실제로도 거듭났다고 착각한다. 회개와 세례가 동일한 것이라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세례 증서만 챙기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세례 받는 것이 곧 회개이고 중생이라는 주장은, 마태복음 7장 13-14절을 비롯한 수많은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사람이 세례를 받을 때 무엇을 받았거나 받은 척 할지라도 그 후 진리에 대해 무지(無知)하거나 불경스러운 언행을 일삼거나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한다면 그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요 3:7).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세례 때 무엇을 받았든 간에 이후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는 철저한 변화를 통해 확실히 새로워져야 한다(갈 6:7).
3) 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도덕적 의(義)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마 5:20). 회심(回心)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빌 3:6). 바리새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도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눅 18:11)라고 말할 정도로 도덕적 의가 뛰어났다. 물론 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박애를, 은혜와 이성을 분리하면 안 되듯이 경건과 도덕성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4) 형식적으로 경건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서도 경건의 모양만을 나타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딤후 3:5). 오랜 시간 기도하고(눅 20:47) 자주 금식하고(눅 18:12) 기꺼이 듣고(막 5:20) 비싼 대가를 치르며 하나님을 섬기지만(사 1 11) 사실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경건의 능력 없이 겉모습만으로 봉사할 수도 있다.
5) 교육, 법, 가혹한 억제를 통해 타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회개는 아니다.
6) 한 번 비췸을 얻는 것,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가책을 느껴본 사람들 중 대다수는 죄의 깨달음이 회개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고 욕망을 극복하고 근신하면서 예의 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회개했다고 착각한다. 무지한 사람에서 지식 있는 사람으로,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는 사람에서 점잖고 경건의 모양이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중생하지 못한 본성이 변하지 않았다면 계속 육욕적일 수밖에 없다.
한 번 비췸을 얻고 종교적 의무를 형식적으로 준행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판명되어 지옥에 간다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2. 이것이 회개이다.
회개는 마음과 생활의 철저한 변화이다.
회개의 본질과 동인(同人)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1) 회개케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1) 우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살후 2:13) 또는'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으로 회개하게 된다.
① 회개는 인간이 가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다.
당신 스스로 자신을 회개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회개는 죽은 자의 상태에서 다시 사는 것이며(엡 2:1), 새로운 창조이며(갈 6:15, 엡2:10), 전능하신 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엡 1:19).
이런 것들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다.
② 회개는 초자연적인 일이다.
(2)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자는 예수님이 해산(解産)의 고통을 치르시며 얻어낸 열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통은 우리를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이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셨고(고전 1:30),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요 17:19).
(3) 말씀이 우리의 눈을 밝게 하고,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8),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딤후 3:15).
말씀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썩지 아니할 씨'이다(벧전1:23).
우리가 씻음을 받았다면 그것은 바로 말씀 덕분이다(엡 5:26).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진리를 통해 그렇게 된 것이다(요 17:17).
(4) 부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사 60:21).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德)을 선전하고(벧전 2:9)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골 1:10).
회개는 자기의 모든 몸과 능력과 마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먼저 당신의 회개를 증명하라. 그런 다음, 당신이 선택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라.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행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① 회개가 전인(全人)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육욕적(肉慾的)인 사람도 어떤 면에서 선할 수 있지만, 그의 인격 전체가 선한 것은 아니다.
회개는 낡은 건물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전부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것이다.
② 회개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2) 회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내며 사람의 마음과 몸과 삶 전체의 행동들을 변화시킨다.
(1) 마음의 변화
첫째, 회개는 사람의 판단 기준을 완전히 뒤집어놓는다.
둘째, 회개는 비뚤어진 의지를 바로잡아준다.
회개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목적과 계획이 생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원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원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겨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이 행복과 바꾸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은 선택의 기준이 바뀐다.
셋째, 회개는 뒤틀린 감정을 바로잡아준다.
회개한 사람의 눈과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다.
회개하면 기쁨의 대상이 바뀐다.
회개하면 관심사가 꼭 바뀐다.
회개한 사람은 고난을 받을까봐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한다. 회개한 사람은 사랑의 대상도 바뀐다. 사람이 회개하면 그를 슬프게 만드는 것도 달라진다(고후7:9-10).
(2) 몸의 변화
① 회개하기 전에는 죄의 도구로 사용되던 인간의 몸이 회개한 후에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성전의 거룩한 도구가 된다.
자신의 몸을 욕되게 했던 사람이 회개하면 거룩함과 영예와 절제와 순결과 근신 가운데 지키면서 주께 온전히 바친다.
② 회개하기 전에는 세상적인 계획들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하나님을 위한 계획들로 채워지고, 그분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고심한다.
회개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데 머리를 쓰지 않고 자기의 책무를 다하는 데 머리를 쓴다.
회개한 사람의 입은 생명의 우물이며 그의 혀는 최상급 은(銀)이다. 그 입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인다.
(3) 생활과 실천의 변화
새로워진 사람은 새로운 길을 간다(엡 2:2-3).
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에 율례를 새겨주시면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율례 안에서 행하며 하나님의 판단을 따른다.
① 회개의 종류
㉠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한 사람은 죄와 영원히 적대 관계에 놓인다. 모든 죄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자기의 죄, 특히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죄에 대해서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자기의 죄 때문에 자신을 혐오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에 맞서 전심전력으로 싸운다.
㉡ 사탄으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움직인다.
때때로 사탄이 덫을 놓아 발목을 잡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도 그는 '원하지 않으면서 잡혀 있는 포로'일 뿐이다. 믿음의 길을 갈 때 그는 사탄의 올무와 미끼를 경계하면서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연구한다. 사탄의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적(敵)을 경계하고 의무를 다한다.
㉢ 세상으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누구나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는 세상에 압도당한다.
돈에 절하거나 자기의 명예를 우상시하거나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 그는 사람에게 치우쳐 있어서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영광과 신뢰와 애정을 사람에게 바친다. 본래 우리를 섬기도록 만들어진 세상이 이제는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나 회개하게 만드는 은혜는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려놓는다.
하나님을 보좌에 앉게 해드리고, 세상을 그분의 발등상에 두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세상을 발 아래 둔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사람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는 그가 즐겼던 세상 것에 '헛되고 괴로운 것!'이라는 딱지를 써 붙이고, 모든 인간적 위대함에 '쓰레기와 배설물!'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제 그는 생명과 불멸(不滅)을 추구하며, 은혜와 영광에 목말라 하고, 썩지 않을 면류관을 목표로 삼는다.
그의 마음은 주님을 찾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義)를 구한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최고로 여긴다. 주님의 이름이 가장 소중하고, 주님의 은총이 너무나 귀해서 주님의 이름을 마음에 새긴다.
㉣ 자기 의로부터 돌이키는 회개
회개하기 전에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하고, 자기 의무를 다함으로써 자신을 온전케 하려고 애쓴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의(自己義)를 세우고 자기가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의 의(義)에는 순종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개하여 변화된 사람은 자기의 의를 누더기 옷처럼 여긴다. 그는 마치 더러운 거지의 옷을 벗어던지듯 자기의 의를 벗어던진다.
심령이 가난해진 그는 자신에 대해 불평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회개했는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영혼과 당신의 온 힘을 쏟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네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시고, 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도 그리스도께 똑같이 말씀드릴 수 있는가? 이것이 시금석(試金石)이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회개한 사람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고백할 수 있으며, 영생의 말씀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한다. 그렇다면
② 회개한 사람은 어느 족으로 향하게 될까?
㉠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한다.
회개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하늘 아래에서 유일한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오직 그분만을 의지할 뿐이다.
이렇게 회개하는 영혼은 그리스도에게 모험을 걸고 그분을 결코 놓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분이 주시는 유익과 짐을 지는 것 또한 좋아한다.
㉮ 온전히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절반만 붙든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환영하지만 거룩하게 살라는 명령은 반기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권은 환영하지만 인격을 본받지는 못한다.
㉯ 온전히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부 받아들인다. 그리스도의 모든 뜻과 목적을 예외 없이, 한계 없이, 주저함 없이 받아들인다. 주님이 어떤 조건을 제시하시더라도 그 조건에 따르면서 받아들인다.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의 지배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 회개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율법과 규례와 방법으로 돌이킨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과 방법과 관련하여 네 가지 일을 이루신다.
첫째: 판단력
회개한 사람의 판단은 그리스도의 율법과 규례와 방법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가장 의롭고 합리적이라고 동의한다.
이성의 판단에는 객관적인 판단과 주관적인 판단이 있다.
객관적 판단은 개인의 입장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그 판단이 최선이라고 믿는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길이 옳다고 판단하는데, 이것은 자신과 무관하게 판단하는 객관적 판단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결부시키는 주관적 판단이기도 하다.
경건한 사람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들어보자(시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시119:127-128) (시119:137-138)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시119:160).
둘째: 마음의 소원
회개한 사람의 소원은 그리스도의 온 마음을 아는 데 있다.
전에 알지 못했거나 신경 쓰지 않았던 의무를 깨닫게 해주고 숨은 죄를 드러내는 말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셋째: 자유롭고 단호한 의지
회개한 사람은 자유롭고 단호한 의지로 그리스도의 길을 선택한다.
의지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자유롭게 선택한다. 육신이 저항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의지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통치를 좋아한다. 그래서 율법과 통치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고 복으로 여긴다.
거룩함이 주는 유익을 기뻐하고, 거룩한 사람에게서 반드시 나타나는 표를 드러낸다. 세상에서 엄청난 성공과 번영을 누릴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것을 마다하고 엄격하고 거룩한 삶을 선택한다.
넷째: 삶의 방향
회개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율례를 준수하는 쪽으로 달려간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에 날마다 신경 쓰면서 살아간다. 오직 완전함을 목표로 계속해서 달린다.
죄를 전부 없애고 완전한 성결에 이를 때까지는 결코 쉬지 않는다(빌3:11-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은 협착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을 찾는 사람이 아주 적고,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3. 당신은 생명 얻는 회개를 한 적이 있는가?
당신이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천국에서 만날 가능성은 없다.
당신이 완전히 돌이켜 하나님께 복종하고 거룩함과 새 생명 가운데 살지 않으면, 당신이 구원받을 가망성은 전혀 없는 것이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회개는 높은 수준의 신앙에 오른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다.
1) 당신이 왜 회개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1)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존재가 소용없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의(義)의 문제에서 무력하듯이 행함의 문제에서도 무력하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모른다. 또한 회개하지 않은 자의 마음은 너무나 약하고 쉽게 지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힘이 없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목적 없이 살 뿐만 아니라 악한 목적을 위해 봉사하며 살기도 한다.
당신이 창조된 이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당신을 만드셨다.
(2) 회개하지 않으면 종교도 헛되다.
종교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인데 회개가 없으면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롬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고전13:2-3).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자기의 생활을 고치고 기도와 구제를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라!
마음이 거룩해지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난 행위들은 무용지물이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기뻐하신다.
(3)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소망도 헛되다.
(욥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저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렘2: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
① 회개는 영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영혼의 위로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회개 없는 구원의 소망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당신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이런 소망에는 죽음과 절망과 신성모독이 있다.
당신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하는 장막에서 당신을 송두리째 뽑으실 것이요, 당신은 무서움의 왕에게 잡혀갈 것이다(욥 18:14, 27:8).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이 계속 무지(無知)와 불의(不義)속에 살면 결코 당신을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의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 아니라 그분을 거스르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4)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주님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죄짓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라.
죄 가운데 머무는 사람들을 구원해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림.
둘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무너뜨림.
셋째, 하나님의 진실성을 훼손함.
넷째, 하나님의 지혜에 어긋남.
다섯째,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불변성에 위배됨
여섯째,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남
일곱째, 그리스도의 맹세에 어긋남(히 3:18)
그리스도에게서 생명 얻기를 소망하는 자들은 그분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죄를 옹호하는 분으로 오해받을 것이다(딤후 2:19, 딛2,12, 요일 3:3).
이성과 이해력이 있다면 두 눈을 뜨고 지옥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말고, 멈추고 생각하고 회개하라.
 
4. 회개하지 않은 자는 어떤 죄를 짓는가?
1) 회개하계 않은 열 가지 부류의 죄인
(1) 깨끗하지 못한 자
(2) 탐욕스러운 자
(3) 술 취하는 자(사 5:11-12, 22, 갈 5:21)
(사5:11, 22)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4) 거짓말하는 자(계 21:8,27, 요 8:44, 잠 5:17)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5) 맹세하는 자(약 5:12, 슥 5.1-3)
(약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6) 욕하고 험담하는 자(시 15:1, 3, 고전 5:11)
(시15:1, 3)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7)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자(욥 15:4, 시 14:4, 79:6, 엡 2:12, 4:18)
(요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8) 도적질하는 자, 강탈하는 자, 압제하는 자(살전 4:6, 약 5:2-3)
(살전4: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9) 무익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잠 9:6, 13:20)
(잠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10) 신앙을 조롱하는 자(대하 36:16, 잠 19:29)
(대하36: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당신이 어느 한 부류에라도 속하는지 잘 생각해보라.
만일 이에 해당한다면 당신은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된 것이다(행8: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죄악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겔18: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당신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나의 말을 깊이, 깊이 새겨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은밀한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 이런 죄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성찰의 결여로 자신도 모르게 지은 죄들이다.
공개적으로 드러날 죄가 아니더라도 발견하지 않은 죄 때문에 결국 멸망하게 된다. 이런 죄 때문에 사람들은 무수히 멸망의 구덩이로 떨어질 것이다.
2)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열두 가지 죄
(1) 고집스러운 무지(호 4:6, 사 27:11, 살후 1:8, 고후 4.3)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2)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지 않는 은밀한 죄(눅 14:26, 28-33)
(3) 형식적인 신앙생활
(4) 잘못된 동기에 이끌려 거룩한 일을 하는 것
(5) 자기 의를 믿는 것(빌 3:9, 사 64:6)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6) 철저한 신앙생활에 대한 은밀한 증오
(7) 일정 수준의 신앙생활에 안주하는 것(빌 3:13, 잠 4.18)
(8)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요일2:15)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9) 자기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악의와 시기심을 품는 것(행 8:23, 마 18:32-35, 요일 3:14-15)
(10) 억제되지 않는 교만(요 12:43, 갈 1·10, 요 9:40)
(11) 쾌락을 아주 좋아하는 것(갈 5:24, 고전 9:25-27)
(고전9:25-27)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12) 육신의 안전을 의지하는 것
주님의 제자들처럼 (마19: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묻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을 잘 안다.
부지런히 자신을 살펴라.
양초를 켜들고 깊이 조사하라. 저울에 당신을 달아보아라. 성소(聖所)의 표준에 따르라. 시금석으로 금화의 순도를 확인하라. 사탄은 속이는 데 능하다.
 
5.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임한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종종 태평하게 앉아 있을 정도로 지독한 게으름과 잠에 빠져 있다. 육체적 쾌락에 대한 사랑,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일 그리고 세상의 정욕과 애착과 근심은 양심의 목소리를 잠재운다. 그래서 회개하고 고치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채 살아갈 뿐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비참함이란 어느 누구도 다 이해할 수 없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명심하라!
1)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항하여 싸우신다.
(1) 하나님의 공의는 엄격해서 완전히 충족되어야 한다.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을 내시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다(롬 2:8-9).
자신이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무섭고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당신이 죄를 버리지 않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철저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 위에 계속 머무르고 당신을 대적하신다고 선언하신다(겔5:8)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너를 치며 이방인의 목전에서 너에게 벌을 내리되).
(2)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당신을 대적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죄를 무한히 대적하셔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죄인을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실 뿐만 아니라 경고하신 것도 그대로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지 않으면 우리를 멸망시킴으로써 자신의 성실하심을 드러내실 것이다.
예수님은 (요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분명히 말씀하셨다. 또한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마 18:3).
(4) 속히 돌이켜 회개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에게 형벌을 내리실 능력이 있으시다. 당신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영혼과 육체는 영원히 비참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가 당신을 대적한다.
바울은 (롬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탄식하는가?
거룩하게 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피조물을 남용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은 영혼은 자기가 피조물에게 짐을 지운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해야 한다(눅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3) 사탄은 회개하지 않은 당신을 완전히 지배한다.
당신은 울부짖는 사자의 손아귀 안에 있다(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딤후 2:26).
(1) 마귀는 어둠의 세상, 어둠가운데 사는 무지한 죄인들을 지배한다.
당신은 마귀를 신(神)으로 섬기는 미개인들을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여기지만 당신도 마귀를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게 되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참한 사실은 그들이 마귀를 신으로 섬긴다는 것이다(롬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4) 당신의 모든 죄목이 산처럼 당신을 짓누른다.
(1) 당신이 회개하지 않았다면 어떤 죄도 씻김을 받지 못하며, 모든 죄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당신을 대적한다.
중생과 죄사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거룩하게 되지 못한 사람들은 의롭게 되지도, 죄 사함을 받지도 못한다.
(2) 자기 죄의 무게를 느끼는 죄인의 얼굴을 보라.
그의 표정과 하소연에서는 두려움이 묻어나온다. 그의 평안은 고민으로 바뀌고, 살은 윤기가 사라져 까칠하게 되고, 그의 눈에서는 잠이 떠났다. 그는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근원이 된다. 차라리 감각이 없어 비참함을 느끼지 못하는 길거리의 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5)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 당신을 비참한 노예로 만든다.
(1) 회개하지 않은 한 당신은 죄의 종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죄는 당신을 다스리고 지배한다. 죄와 같은 폭군은 없다. 죄는 그의 종에게 아주 비열하고 무서운 일을 서슴지 않고 시킨다.
잠들어 있는 당신의 양심이 죽음을 거쳐 심판대 앞에 서면 감각이 살아나 모든 상처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죄를 깨달은 죄인은 죄의 비참한 속박을 받게 된다. 양심이 그를 꾸짖고,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하지만 정욕의 노예가 되어 계속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중단하지 못한다.
(2) 욕망은 유혹이 찾아올 때 그의 모든 약속과 맹세를 깨뜨리고 그를 멸망으로 끌고 간다.
(3) 지옥과 멸망이 당신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린다.
그것들은 그 욕망을 크게 내어 당신을 집어삼키려고 한다(사 5:14).
하나님의 뛰어난 종들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감추실 때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탄식했다.
죄인이여, 이제 멈추고 깊이 생각하라, 당신이 감각 없는 나무토막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한번 생각해보라.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살펴보라. 당신은 지금 멸망의 낭떠러지 끝에 서 있다.
(4) 진실을 가리지 말라. 자신을 속이지 말라.
당신의 비참함을 똑똑히 보고 늦기 전에 대책을 세워라. 하나님께 버림받은 저주스러운 진노의 그릇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라.
율법의 말은 뽑아든 칼이요, 용사의 날카로운 화살이다.
율법은 완전한 복종에만 만족하고, "공의! 공의!"라고 외친다. 그것은 당신에게 피와 전쟁과 상처와 죽음을 선포한다.
(5) 당신의 죄에서 떠나 당신의 요새요 성소요 도피성이신 그리스도께 가라!
만일 당신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이 당신을 정죄하게 된다.
복음의 정죄는 단지 첫 언약을 어긴 것에 대한 정죄보다 훨씬 더 무섭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마땅히 떨어야 한다(욜3:16).
주님의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들어보자(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6) 깨어 일어나 가장 시급한 문제에 신경 써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재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하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친 사람은 회개하지 않았으면서도 아무 가책이나 감각 없이 그대로 살아가는 완고한 죄인이다. 깨어라!
죄인이여, 일어나 피하라!
당신이 피할 길은 딱 한 길이다. 그것은 회개와 거듭남의 좁은 길이다.
당신의 모든 죄로부터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을 당신의 주(主)와 의(義)로 영접하고 그분 안에서 생명의 거룩함과 새로움 가운데 행하라.
 
6. 회개하지 않는 자를 위한 생명의 지침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경외심과 경건과 순종의 마음으로 나의 권고를 기쁘게 받아들여라(신32:46-47)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불경건한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은 고집을 꺾지 않기 때문이다.
지침1. 회개하지 않는 상태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명심하라.
지침2. 당신의 죄를 철저히 살피고 뼛속 깊이 느끼도록 노력하라.
(1) 당신의 마음과 삶을 깊이 살펴라.
당신과 당신의 모든 행위를 철저히 조사하여 죄를 날밭이 밝혀라.
당신 혼자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구하라.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그분이 본래 하시는 일이다.
(2) 당신의 마음과 눈에서 눈물이 날 때까지 당신이 지은 모든 죄들을 당신의 양심 앞에 펼쳐놓아라.
하나님과 당신의 영혼이 벌이는 씨름을 포기하지 말라.
죄책감에 못 이겨(광명의 비췸을 입은 간수처럼)(행16: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부르짖게 될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다음과 같이 해보라.
① 당신의 죄가 얼마나 되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가 머리카락의 수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낙심했다.
② 당신의 속을 들여다보라.
당신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부분과 재능이 전부 죄에 오염되어 있다.
당신이 어떤 의무를 준행했다고 해도 그곳에는 죄의 독이 침투해 있다.
③ 당신 본성의 죄를 보라.
그리고 그 본성이 낳은 저주스러운 죄들을 보라.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은 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행한 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 젊어서 지은 죄, 성장해서 지은 죄를 모두 기억해내라.
(3) 당신의 죄가 얼마나 악한지 깊이 생각해보라.
죄는 하나님의 큰 원수요, 당신 영혼의 큰 원수이다.
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은 사망과 멸망이다.
죄는 하나님의 저주를 사람들의 몸과 영혼에 임하게 한다.
죄는 영혼 위에 그려진 악마의 형상이다.
다른 죄보다도 우선 다음 두 가지 죄를 살펴보자
첫째, 마음속의 죄
부패의 뿌리를 그냥 내버려둔 채 가지만을 잘라내는 것은 소용이 없다
바울처럼 사망의 몸 때문에 몸부림칠 때까지 인간의 선천적 부패가 얼마나 깊고 영속적이고 보편적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마음이 본래 뿌리까지 썩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 비로소 무너진다.
죄는 당신의 양심에 무감각과 불성실의 씨앗을 뿌린다.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할 영혼을 온갖 악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
죄 때문에 인간은 거짓말과 아첨과 음담패설에 귀를 기울이고, 생명의 교훈에는 귀를 막게 되었다.
둘째, 자주 탐닉하는 죄
당신이 자주 탐닉하는 특정한 악을 깊이 생각하고 그 특정한 악이 심화되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하라.
지침3. 당신의 비참한 현재 상태를 가슴 깊이 절감하라.
(1) 양심의 눈을 크게 떠라.
(2) 당신의 비참함을 뼛속 깊이 느껴라.
두려움을 피하려고 당신의 비참함을 외면하지 말라. 당신이 비참함을 느끼는 것은 상처가 주는 통증을 느끼는 것에 비유된다.
상처의 통증을 느껴야 치료를 위해 노력하지 않겠는가? 고통을 느끼더라도 지금 치료하는 것이 치료를 외면하다가 영원히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 낫다.
지침4. 행위의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잘 살펴라!
(1) 당신은 당신의 지식과 지혜와 의(義)와 능력을 부인하고 대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해야 한다.
자신을 신뢰하고 자기의 의를 세우고 육신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나와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지침5. 당신의 모든 죄들을 남김없이 버려라!
(1) 죄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당신은 멸망할 것이다.
죄와 결별하든지 영혼을 잃어버리든지 양자택일을 하라.
한 가지 죄라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실 것이다.
(2) 당신의 죄는 죽어야 한다.
지침6. 하나님을 당신의 기업과 복음으로 엄숙히 선택하라!
(1) 최대한의 헌신과 공경의 마음을 담아 주님을 당신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라.
자랑거리와 허식(虛飾)과 화려함과 쾌락과 출세를 제공하는 세상이 당신의 한쪽에 있다. 그리고 무한히 위대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쪽에 계신다.
이제 분명히 의지적으로 선택하라, 하나님의 그늘 아래 앉아라.
(2) 하나님의 약속과 완전하심이 온 세상을 누르고 승리하도록 하라.
주님이 조금도 부족함 없는 기업(基業)이심을 명심하라.
온 세상 보다 더 크신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
그리스도를 의지해 하나님께로 나와 쾌락과 물질과 명예라는 우상을 버려라.
첫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접하여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
① 우선, 성부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모셔라.
탕자처럼 그분께 나와 이렇게 말씀드려라. "주님,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제 모든 것, 즉 제 몸과 영혼과 계산이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주께 제 마음을 드립니다. 저를 온전히, 영원히 주께 드립니다. 저는 제 의(義)를 포기합니다. "
② 이제 성령 하나님을 이렇게 모셔라.
당신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 당신의 옹호자로, 당신의 고민을 의논할 수 있는 상대로, 당신의 위로자로, 당신의 무지를 깨우쳐주시는 분으로, 당신의 기업을 보증하고 증거하시는 분으로 영접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완전한 속성들을 인정하고 복종하라.
그분의 자비를 얻겠다고 하면서도 죄를 사랑하고 거룩함과 순결함을 미워한다면, 그분을 시혜(施惠)자와 후원자로는 모시지만 주권자와 기업(企業)으로는 모시지 않는다면, 철저하고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다.
지침7. 주 예수님의 모든 직무를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라!
아무 생각 없이 그분을 영접하지 말고, 먼저 앉아서 그 비용을 계산해보라.
그분의 발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구원의 길에 오르겠는가?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간에 그 길을 가겠는가?
당신을 부인하고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겠는가?
지침8. 당신의 모든 능력과 재능과 관심을 주께 바쳐라!
(1)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재물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몸과 당신의 영혼과 그 능력들을 주께 드려라.
그러면 주님의 소유가 된 당신의 몸과 영혼을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은 그의 모든 재능을 주께 바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참된 깨달음을 얻은 결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길에 대한 편견과 썩어빠진 추론(推論)과 트집을 버린다.
쓸데없는 의심을 버리고 세상에 맞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좋다고 결론 내린다.
그의 '의지'도 항복하게 된다. '기억력'도 그리스도께 복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감정'도 그리스도께 굴복한다. '슬픔'도 "주님, 주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 주님 백성의 불행, 그들의 죄가 저를 울게 만듭니다. " '증오'도 주님 앞에 무릎 끊고 "주님의 원수들이 곧 저의 원수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주께 바쳐야 한다.
(2) 그분께 드리지 않고 당신의 것으로 남겨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멸망할 것이다(눅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당신의 마음을 준비하고 결심할 때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주님을 모시는 데 당신의 부모나 당신의 생명이 걸림돌이 된다면 부모나 당신의 생명까지 미워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께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의 소유가 되지 못한다.
지침9.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당신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려라!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한다. 이 선택에도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모든 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평탄의 때나 역경의 때 언제라도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야 한다 (시119:31, 112, 111, 117).
셋째,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려면 자기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의도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마 21:28-29, 신 5:27).
그리스도의 법과 길은 당신의 선천적 성향과 완전히 반대되기 때문에 당신에게 엄격한 자기부정을 요구한다.
당신은 좁은 길로 가야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육신은 자유를 원하지만 육신을 억제해야 한다(시119: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지침10.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엄숙한 언약 안에서 온전해지게 하라!
주님 앞으로 조용히 나아갈 시간을 내라.
(1) 주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구하고 당신을 은혜 가운데 받아달라고 간절히 구하라.
(2) 당신의 모든 죄들을 버리고 당신의 몸과 마음을 그분께 바치고 평생 거룩함과 의(義)가운데 그분을 섬기겠다는 마음이 진정 당신에게 있는지 확인해보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라
"전에 저는 세상을 우상으로 섬겨 지나칠 정도로 세상에 집착했지만, 이제는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제 마음을 바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순종을 요구하실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제 결심을 실천에 옮겨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죄를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주 나의 하나님으로 엄숙히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스리려고 한다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생명이나 죽음도 주님과 저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주님과 운명을 같이하며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주님과 함께 온갖 신앙의 모험을 감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지침11. 회개를 미루지 말고 속히 하나님께 마음을 바쳐라!
(시119:60)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1) 오늘이라는 이 때에 돌이켜라.
그래야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으며 은혜의 날이 끝나기 견에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금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당신을 부르고 있고, 양심이 당신을 찌르고 있다.
(2) 은혜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붙들라.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이 기회를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그분의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맹세하실 것이다(눅14: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지침12. 하나님께서 회개의 방편으로 세우신 말씀을 성실하게 경청하라!
(1) 습관적으로 말씀을 듣지 말고 성실하게 들어라.
(2) 말씀을 통해 당신이 회개할 수 있을 거라는 소망과 기대와 바람과 의도를 가지고 들어라.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설교를 통해 나를 찾아오시기 바란다. 오늘이 나의 회개의 날이 되고, 하나님께서 오늘의 설교자를 통해 나를 주께 인도하시기를 정말 소원한다."
(3) 말씀을 회개의 방편으로 여기지도 않고, 말씀을 통해 회개하겠다는 마음도 없고, 말씀의 복된 효과를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말씀이 당신에게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다.
지침13. 성령님이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실 때 순종하라!
지침14. 진지하고 뜨거운 기도를 쉬지 말고 열심히 드려라!
(1) 기도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거룩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죄인이다.
일시적 유혹에 못 이겨 잠시 기도를 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꾸준히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위선자이다.
사람들이 회개할 때 보여주는 특징은 그들의 기도로 나타난다.
(2) 기도에 힘써라. 단 하루도 빼놓지 말고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내어 진지하게 기도하라.
또한 날마다 가족과 함께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려라.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해야 한다. 끈질기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지침15. 악한 친구들과 작별하고 죄의 유혹을 이겨라!
(1)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자기부정(自己否定)을 통해 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죄로부터 벗어나는 회개를 기대할 수 없다.
모든 유혹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이고 나쁜 것은 악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다.
희망의 싹이 보일 때 악한 친구들이 그것을 짓밟은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2) 당신이 악한 동무들을 끊지 않는 한 희망이 없다.
그들을 버리든지 생명을 버리든지 선택해야 한다.
전염병 환자를 피하듯 악한 친구들을 피하라. 그들은 마귀의 하수인(下手人)이 되어 당신을 꾀는 자들이다.
지침16. 하루 동안 금식하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영혼을 겸손히 낮추라!
십계명에 대한 주석을 숙독하고, 이행하지 못한 의무와 계명을 어긴 죄들을 낱낱이 기록하고 목록을 만들라,
부끄러워하고 슬퍼하면서 그것들을 주님 앞에 펼쳐 놓아라.
만일 당신이 주님의 조건에 기꺼이 동의한다면, 앞에서 말한 언약을 주님과 엄숙히 맺으라. 그러면 그분이 보시고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7. 바로 지금 돌이켜 회개하라
당신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기 위해 회개를 위한 몇 가지 동기부여를 하겠다.
마지막 그물을 던지며‥‥
주께서 저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는데 제가 이제까지 헛수고를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는 제 힘을 낭비한 것입니까?
당신이 회개한다면 천국에서는 영광스러운 영들이 기뻐하고 잔치할 것이다. 그들에게 새 형제가 생기고, 함께 기업을 얻을 자를 주께서 얻고, 잃어버렸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이다.
진실로 회개하는 자의 눈물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이다.
1) 탕자처럼 돌아오라.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본 아버지가 자신의 신분과 나이를 잊은 채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자비의 발걸음은 너무나 빠르다. 죄인의 발걸음보다 2배 이상 빠르다.
긍휼로 불타는 아버지의 가슴이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그렇다! 그 아버지는 넘치는 기쁨을 자신의 마음속에만 묻어둘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 함께 기뻐하자고 했다.
2) 당신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친절하게 초대하신다.
지극히 온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초대하신다.
그분의 친절은 놀랍고, 자비는 끝이 없고, 긍휼은 무한하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다.
그분은 당신이 돌이키기만 하면 다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는 분이시다(미7:19)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로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3: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당신이 돌이키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당신 것이 된다.
3) 천국 문이 당신을 향해 열려 있다
영원한 문이 당신을 위해 활짝 열려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당신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일어나 이 나라를 차지하라고 부탁하신다.
(1) 복음의 지도(地圖)가 안내하는 저 세상의 영광을 보라.
미련하고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세상을 추구하고 섬기느라 영원한 영광을 포기하겠는가?
전에는 당신이 낙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던 화염검(火焰劍)이 이제는 당신을 그 안으로 몰아가는데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하려는가?
① 당신 앞에 제시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라.
그것은 복된 나라, 영광의 나라, 의(義)의 나라, 평화의 나라, 영원한 나라이다. 당신이 돌이키기만 하면 바로 이런 나라에 거하며 영원히 다스릴 수 있다. 그곳에서 주님은 당신을 영광의 보좌에 앉히시고, 손수 당신의 머리에 귀한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② 지금 당신의 보잘것없는 육체를 보라.
먼지와 재 같은 이 육체가 그곳에서는 별보다 더 빛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믿는다면, 내게 당신의 결심을 보여 달라.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내 말에 따르겠는가?
당신의 죄악 된 소득과 금지된 쾌락을 포기하겠는가?
세상의 명예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세상의 아첨에 귀를 막고, 세상의 마수(魔手)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겠는가?
천국에 이르기 위해 가난과 불명예를 감수해야 한다면 그것들을 받아들이겠는가?
겸손히 자기를 부인하고 육신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주님을 따르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것은 영원히 당신의 것이 된다.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여 멸망한다면 그 보응은 아주 공정한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당신에게 놀라운 특권을 주신다.
(1) 번영이 당신을 멸하지 못할 것이며, 역경이 당신을 그분에게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의 세력에서 건지실 것이고, 공포의 왕도 당신에게는 평화의 사자(使者)가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에서 저주스러운 것들을 제거하실 것이다.
시련이 당신을 깨끗하게 하는 연단의 용광로로, 겨를 날려버리는 선풍기로, 마음을 고치는 명약(名藥)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2) 주께서는 당신을 비참함에서 구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특권을 주실 것이다
주님 자신을 당신에게 주시고, 당신에게 친구이자 아버지가 되어주실 것이다.
당신에게 해와 방패가 되시며, 당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3) 당신을 자녀로 삼으시고, 기업을 얻을 자로 만드시고, 당신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주님은 당신 안에 늘 거하시며 당신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실 것이다.
주님의 귀, 주님의 문 그리고 주님의 창고가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을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조건들을 최대한 낮추어 당신에게 제시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을 생명의 조건으로 당신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첫 번째 언약에 따르면, 두 가지가 요구된다.
첫째는 과거의 죄에 대해 공의가 요구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남은 생애 동안 율법 전체를 개인적으로, 완전히, 끊임없이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구원을 얻는 것이 우리의 죄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충분히 요구할 수 있으셨으나 자신이 세운 보증인(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으로 만족하셨다(고후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 하나님께서는 "나는 속전(贖錢)을 받았다. 나는 너희가 내 아들을 영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 아들이 너희에게 의(義)와 구속(救贖)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
 
8.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다!
흐트러진 삶을 사는 자여, 들어라!
당신은 허영심이 강하고 제 고집대로 사는 자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지금까지 세속적인 잡담으로 웃고 떠들며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이제 지혜의 부르심을 듣고 돌이켜라.
지혜를 택하고 지혜의 길을 배워라. 그러면 살리라(잠9:5-6)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형식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자여,
당신은 미지근하여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구나. 덥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상태를 끝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돼라.
덥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상태를 끝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돼라.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이제까지는 그리스도께 불쾌한 존재였던 당신이 앞으로는 그분의 기쁨이 될 것이다(계3:16-20)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제, 긍휼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당신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라.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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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살후 1:6-9)

참으로 두렵고 비참한 광경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골짜기로 분별없이 서둘러 가는 많은 가련한 죄인들을 본다. 그들의 현재의 불경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건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그러한 죄를 범하는 그들이 반성을 않는다면 그들은 지옥의 심판대 위에서 견디기 어려운 조사를 당하고 끝내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참담과 비애, 가득 찬 시련에 잠기게 될 것이다. 얼마 후에 그들은 숨을 거두게 된다. 반면에 이성적이고 건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결코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들의 본질의 진가를 결코 망각하지 않고 사라져가는 헛된 것들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잠시 동안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결정적인 시간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슴속에 묻어둔 비밀로 최후의 심판의 시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깨우치고 우리의 근면을 촉진하고 우리의 인내심을 뒷받침한다는 그러한 이유이다. 우리의 주님의 오실 날을 모르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매일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라.”고 했다. 한밤중에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이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 나가서 그를 맞으라. 노아와 롯의 시대에 있었던 일은 주님의 아들의 날에도 있으리니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를 든다.” 무서운 생각 때문에 죄인들은 구원을 청하며 산모의 진통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파괴가 그들에게 닥쳐오며, 지구 위에는 홍수가 쏟아질 것을 생각지 못하고 탐욕에만 빠진 것이다.

심판의 장소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심판의 모습과 공정한 심판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땅 위에 가까운 중간 지점이 될 것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쓰여 있는바“...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그리스도에 주셔서 그에게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명확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에게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부여하신 것은 참으로 합리적인 일인 것이다. 또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지식과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인 것이다. 어떠한 비밀의 행동도 그 선과 악의 구별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으로는 보실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으며 인간과 천사들에게 영원한 대가와 벌을 지우시는 것이다.

죄악성은 이에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날 것이며 한층 더 악화된 상태로 나타나 지독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악은 가장 부드러운 동정에 엄격함으로 다스려지게 된다. 그러한 역할은 그를 축복해 주시는 아버지(광명에 찬 영광의 보좌이며 가장 행복한 은혜의 자리인 엄격한 보좌의 중심이신)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비로운 구주가 담당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겸양에 가득 찬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그의 권력으로 다스리고 인간의 영혼을 영원의 파멸로부터 건져내고 영원한 광명과 영광에 찬 생활을 약속하시기 위해 많은 고통과 불행을 견디셨다. 그러한 피로서 겪으신 많은 고통이 지나간 후 그리스도는 구제할 수조차 없은 죄인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쫓아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죄악에 대한 혐오감을 마음속에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심판관이 되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왕궁 체제를 확실히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구제주가 최고의 마지막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죽음을 선고하신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장 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고 밝혔다. 최후의 심판의 권리는 그리스도가 심한 굴욕과 고난의 세월에 대한 대가로서 하나님이 주신 주 예수의 권한임에 틀림없다. 빌립보서 2장 8,9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했다.

이러한 말씀은 온 세상에 엄숙한 영원의 심판대가 마련되면 그날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심판관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성경책에 있는 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머어마하고 거대한 권능으로 충만해 있으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주 예수는 하늘에서 불꽃을 감은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시리니” 지금 그리스도는 천국에 계시지만 때가 되면 천국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모든 눈이 주님을 지켜보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실 때는 수많은 천사들에게 호위되어 오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의 길로 만인에게 심판할 것이다. 준엄한 상태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경건함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권세를 가진 천사들은 틀림없이 그 최후의 심판에 정의와 자비의 권력자로 일할 것이다. 그들은 죄인을 심판대로 소환하고 그들에게 곧 판결문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즐거이 그들의 행복에 넘친 안식처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주님은 성령의 불꽃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산은 두려워서 움직이는 것 같았고 불과 연기로 둘려 쌓였었다. 그리고 불꽃 중에서 들려온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 재림의 기록은 굉장히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은 그의 인간미로서 감추어졌었다.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빈곤과 멸시로 태어나셨으며 인간들의 숙명적인 질병도 겪으셨다. 그러나 다음에 온 만물을 심판하려 오실 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신 모양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은 뒤흔들리고 땅에선 지진으로 인하여서 용암이 휩쓸고 땅 속 깊이 흔들릴 것이다. 삽시간에 하늘과 땅은 온통 성한 데가 없이 될 것이며 천사장이 부른 나팔소리는 죽은 자를 그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며 바다에서는 무섭게 파도가 치고 하늘에는 천둥이 몰아치며 땅에서는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저주 받은 인간들이 두려운 비명소리를 지르게 된다.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가 권능과 영광에 휩싸여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죄 많은 자들에게는 보기조차 두려운 광경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그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났었고 입으신 옷은 희고 빛났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가 영광과 위엄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 화려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화려함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이 쓴 성경 가운데 인상적인 구절을 잘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3-16)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동시에 오시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빛과 아름다움 장엄함과 권능은 지금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좌는 크고 희며 순결하며 권능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거기서 빛과 천둥과 음성이 들려온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1900년 전에 이미 권능에 휩싸인 몸으로 계셔 그를 체포하러 왔던 사람이 되돌아가다가 땅에 쓰려져 버렸다면 그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하고 영광과 권능에 가득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실 최후의 날을 기다릴 수 잇겠는가?

그리스도의 권능을 나타낼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지구의 끝까지 퍼지고 하늘을 울리며 어두컴컴한 동굴을 뒤흔들고 육지와 바다의 구석구석까지 들려가며 죽은 자에게는 그들의 영혼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의 모든 과거의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정한 심판을 받고 그때부터 영원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만했던 독재자, 음흉한 정치가, 주제넘은 영웅들은 모든 지위를 빼앗기고 그들이 가졌던 권력과 힘, 위엄은 모두 잊어버린 채 산을 향해서 보좌에 앉아계시는 구세주에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들이 멸시했던 구세주 앞에 끌려가 꿇어 엎드려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엎드려 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때가 늦은 비참한 애원에는 냉정하실 것이다.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몸이라면 그들이 죄에 대해 회개를 하고 자비와 용서를 비는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나 그들이 죽어진 다음에는 너누 늦은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일어나셔서 회개하지 않는 낮에게는 자비와 구원의 문을 굳게 잠가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죄 많은 자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이 되면 그들의 심장은 죄의식과 두려움과 수치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려운 판결소리가 온 만민 앞에서 들릴 때 공포와 당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노하신 심판관은 이미 옛날에 자기 자신을 구세주라 밝히시고 회개하기를 만일에게 종용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들이 불꽃같은 예수의 눈을 바라보고 물소리 같은 음성을 들을 때는 그들의 가슴은 날카로운 고통으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궁지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동정하거나 도와 줄 사람은 하늘이나 땅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반면에 크신 하나님과 한때는 사랑을 베푸시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시며 그 사랑을 받아 회개하기를 권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그들에게 냉정하시며 그들의 참회를 비웃으며 모든 천사의 무리와 영광을 얻은 성자들까지도 그들의 파멸에 기쁨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러나 무서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는 불붙는 심판대 위에 놓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구별을 둔다. “염소는 그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마 25:33) 이에 악한 자와 선한 자는 쉽게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니 주제넘은 위선자는 가면을 쓰고 경건한 영혼 가운데 섞을 수도 있고 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교묘한 거짓은 곧 발견될 수 있으니 곧 선한 자들의 집단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위선자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존귀한 틈으로 침입하게 방임해 두지는 않는다.

그리고 큰 죄뿐만 아니라 작은 죄악도 모두 조사를 받고서 이제는 별 악의가 없다고 인정이 되는 죄악도 조사를 받는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알려주시길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두려운 말씀으로 들리겠는가? 많은 죄인들의 죄가 분석되고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선한 자들이 행했던 신앙과 사랑은 자랑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그들이 옳은 일을 위해서 한 숨은 노력과 기도와 눈물과 고통 등 그들의 미덕은 기억되고 경건하게 간주되어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굶주릴 때 너는 음식을 주었고 병들어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고 헐벗었을 때 그대는 옷을 나에게 주었도다” 그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시, 심지어 냉수 한 잔마저도 결코 잊지 않고 보답없이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영광의 보좌로부터 심판하러 오신 왕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이런 말씀을 듣는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보다 더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어디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당신은 그때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을 것이다.

“오라, 땅 위에서 나를 저버린 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너의 나쁜 친구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더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오라! 나의 날개 아래 있는 죄악과 비참의 세상에서 나의 가슴 안으로 와서 나의 사랑의 기쁨을 맛보라! 와서 너를 위해서 창세적부터 예비해 둔 영광의 나라를 상속 받으라! 오라 너 죄인들에게서 고난을 받아 약해진 영혼아! 오라, 너를 위해 남겨 준 것을 물려주리라!” 영광을 받은 자들은 가슴깊이 스며든 기쁨과 즐거움은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선한 자들의 영광에 가득 찬 문장이 끝난 뒤에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 갈 것이다.

다음에는 죄 있는 자들의 재판이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경시한 행동이 나타나고 인정이 된 불순하고 속된 이러한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두려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니, “너 저주받은 자여! 악마와 그의 무리들을 위해 마련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헛된 욕망 속에 쾌락을 즐기며 남에게 아첨을 해왔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됐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대와 떨어져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종의 무리를 멸시했다.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의 무리와는 영원히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가 판결문을 읽으신 뒤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이 불행한 영혼은 심판대에서 끌어내려져 무서운 지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지옥의 불꽃은 불이 붙었다.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온화한 성도들과 천사들에게서도 영원히 추방되는 것이다. 또한 빛과 사랑의 행복에 넘친 곳에서 모든 기쁨과 영광에서도 멀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가질 수 없었던 어두침침하고 공포에 휩싸인 동굴 속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며 같은 죄인들의 끊임없는 비명소리와 소름이 끼치는 비탄의 소리뿐이다. 하나님의 두렵고 무서운 질책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릴 것이다. 이 불행한 영혼들의 수치와 당황과 고통, 괴로움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 약속, 말씀을 경시할 때는 우리가 이미 수난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요 3:36). 우리가 참회를 하지 않는 이상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계속 죄악을 범한다면 주님의 생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겪었던 그 이상의 벌이 그대를 다스릴 것이다. 지옥은 그 입을 벌리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경건했던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도 역시 공포와 불안으로 떨었을 것이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 12:21),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얼핏 보기만 했지만 그는 공포에 휩싸여, “하나님은 성스럽고 영광이로다”라고 부르짖고는 “나는 도대체 누구냐!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으니”라고 한탄했다. 여러 가지 죄로 비열한 모습을 한 그대는 어떻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심판관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그의 허리는 온갖 금 은으로 둘려 있고 그의 몸은 찬란한 녹주석같이 빛나고 얼굴은 빛 같으며 그의 눈빛은 등불과도 같으며 팔 다리는 청동이 잘 닦여진 것같이 윤기가 나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은 것이다.

붉은 예복을 입으신 심판관들이 심판대 위에 선 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포로 두렵겠는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헤치고 내려오셔서 그가 심판대에 찬연히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후회를 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순간에 우리가 하늘의 천둥소리와 요동치는 소리를 듣고 사방에는 갑자기 무서운 불빛이 번득이고 발밑에는 대지가 우리를 삼키려는 듯이 움직이며 갈라지고 열려진 하늘의 문에서는 태양보다 밝은 광채로 천사들로 에워싸인 그리스도 심판관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질려 불안에 잠기어서 하나님에게 때늦은 자비와 용서를 울며 애원하겠는가?

그리스도는 그가 오시는 날을 연기까지 하지지만 어리석은 죄인들은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심판의 날에 대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갖가지 죄를 짓고 계속 죄악 속에 머무는 모든 불쌍한 심령들은 그대의 죄악을 다스리러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죄인들은 영원히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추방되어 무섭고 영원한 파멸과 고난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엄하신 정의와 저들의 무섭고 끝없는 파멸에 오히려 영광을 내리실 것이다. 형제들이여! 만일 그대들에게 이러한 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한 벌이 그대들을 다스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이교도인 빌립도 이러한 형벌의 말씀을 듣고서 공포에 떨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자비심을 빌어 그대들에게 빨리 다가올 어쩌면 내일 새벽이 기 전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준비하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도록 권한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는 “한밤에 커다란 소리가 있으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로서 여러분에게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빨리 회개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하기를 바란다. “죄인들이여, 회개하라”

나는 우리들이 최후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죄악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봉사로 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다시금 겸손하게 행하는 모든 행동은 천국에 똑똑히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기록이 될 것이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분이 직접 교회의 봉사자가 되어 있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피의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죄악으로부터 성스러운 몸이 되시오.

죄인들이여!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형제들이여! 심장을 죄악의 소용돌이에서 깨끗이 닦아내십시오. 우리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이 있는지, 그대들의 손을 씻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오. 주저하는 자들이여!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시오. -삶은 짧고 영생은 긴 것, 죽음은 가깝고 심판은 문 앞에 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구원의 기회는 자나가 버릴 것이다. 그대들 중에 죄악과 위기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함으로써 귀중한 보석같이 보존을 하고 그러한 확신을 일깨우시오. - 그대에게는 어떤 희생이 오더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봉사를 하시오. 진지한 신앙은 보다 큰 대가가 치러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이러한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에 비해 비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퇴폐하고 그릇된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더라도 그대는 그렇게 생각 말라는 것이다. 죄진 자들이여!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빌어 바라노니 그대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 만일 당신이 선한 행동을 진실된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는 날이 될 것이며 그대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게 될 것이며 “주 예수여! 속히 오서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아멘.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죄죽임의 교리, 죄의 본질과 세력과 미혹 - 존 오웬 -

글쓴이: 하우톨    03.12.19    http://cafe.daum.net/heavenladder/1wm/89

 

 

< 죄와 유혹 > 존 오웬

서문 - 제임스 패커

오웬은 청교도들 중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서, 오웬의 장례식에서 그의 친구의 한 사람이었던 데이비드 클락슨은 " 거룩함은 그의 모든 업적들에게 신적 광채를 더해 주었습니다" 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웬은 그의 설교를 통해 " 겸손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생각을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자신에 대해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거룩하심과 능력과 위엄과 권위를 생각해야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천하고 가련하고 악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생활은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성화의 약속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이 영이 신자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행하시어 인간의 본성에서 죄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주시며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하고 계속적인 은혜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간단하게 말하자면 성화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본성을 보편적으로 개혁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거룩함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이 사역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새로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포함하므로 은혜의 언약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순종 안에 존재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 우리 영혼 안에 복음이 심기어지고 기록되고 실현되는 것...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은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란 그 말씀에 더욱 일치하는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면에서 성화는 중생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운 새로운 능력들과 기호들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성화는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죄는 점진적이고 계속적으로 약화시키는 것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기독교인의 생활의 내면 상태에 관한 오웬의 전반적인 견해는 다음의 세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면의 죄>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놓고 죄와 은혜가 서로 상충하는 것을 한편의 드라마로 볼 수 있게 하는 책입니다. <유혹>은 상기의 책과 비슷한 구성으로 되어 있으나 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 책입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고차원적인 방안을 제시한 책입니다.
오웬의 이들 세 저서는 모두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오웬은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이를 다시 삶에 적용하였으며, 자신이 제시하는 모든 점에 대해 성경으로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이 세 가지 책은 모두 영적으로 매우 깊은 책입니다. 인간의 심령에 대한 오웬의 통찰에는 초인적인 신비로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통찰을 얼핏 보기에는 특색이 없고 개괄적인 표현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이 점이 바로 그의 능력의 특징입니다.

앤드류 톰슨은 <유혹>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책은 구구 절절 독자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마치 그 책이 그들 각각을 위해 쓰여진 듯이 느껴진다." 고 했습니다. 약 백년 전 유명한 랍비인 던칸은 제자들에게 <내면의 죄>를 읽으라고 하면서 "그러나 칼을 준비하라"고 부언했습니다.

~ 내면에 거하는 죄 ~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롬 7:21 )

1. 죄의 본질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기본이 됩니다.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거룩한 계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만 소유하는 특별한 것입니다.

(1) 죄의 법은 마음 안에 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면에 거하는 죄를 '법'이라고 햇습니다.
자신의 본질에 합당한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고, 그러한 마음을 내키게 하는 강력히 내재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가장 적게 느낄 때가 사실은 죄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입니다.
(2)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3) 믿는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 원할때에 자신의 내면에 이 법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4) 내면에 있는 죄의 상태와 행위를 관찰하십시오.
죄의 원리는 마음 안에 있으며 죄의 현주소는 마음입니다.

2. 죄의 세력

(1) 죄는 증오심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입니다. 죄의 본질이 증오심이므로 발견할 수 있으며, 유일한 대책은 증오심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입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증오심입니다.
둘째, 영혼을 대적하는 죄의 증오심은 보편적입니다.
세째, 죄의 증오심의 세력은 지속적입니다.

(2)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은 채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죄를 내버려두면, 그것은 자라나서 양심을 마비시키고 소경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정복하지 않으면 오히려 죄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첫째, 마음의 경향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라
우리는 개인적인 의무나 공적인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데에 조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반감의 사역이 시작되지 못하게 하라.
최초의 싸움에서 그것들을 공격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그것들이 승리할 것입니다.
세째, 비록 죄가 역사하더라도 이기지 못하게 하라.
네째, 우리의 본성 안에서 죄가 영적 생명에 대해 갖는 반감을 의식하고 겸손하게 사십시오.
다섯째, 신령한 것들의 아름다움 및 탁월함과 더불어 이 마음을 소유하려고 노력하십시오.

(3) 죄는 하나님께 대한 대적 행위입니다.
첫째, 죄는 정욕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마음은 악을 행하려는 은밀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죄악 된 상상들에 의해서 예기치 않게 죄가 영혼으로 분출해 들어올 때에, 우리는 자신의 소유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악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 중에 영혼 안에 침입하는 죄보다 더 큰 짐은 없습니다.
이러한 죄의 침입은 의지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유입의 원천은 의지의 타락입니다.
정욕은 실질적인 접촉 속에서 악을 인정하며, 계속 마음을 침입하고 공격합니다.

둘째,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웁니다.
죄는 감정들을 혼란하게 만들며, 그것들로 하여금 연합하여 정신을 대적하게 만듦으로써 전쟁을 수행합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위대하시고 영광 중에 거하시고 거룩하시며 능력이 있으시고 위엄이 있으시며 권위가 있으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비천하고 죄악 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악이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유익하고 열매를 맺는 견고한 신앙과 순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세째, 죄는 영혼을 사로잡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죄에 사로잡힘과 관련하여 네 가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죄의 세력은 우리를 노예 상태로 이끌어갑니다.
그 다음, 죄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일에 크게 성공을 거둠니다.
물론 사람들이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데는 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로잡힘은 견디기에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싫어하는 상황에 억지로 끌려 들어갈 때에 그의 멍에는 그를 세게 조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로잡힘이란 기독교인만이 처하는 특별한 상태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죄의 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두 가지 특별한 죄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를 원하지 않는 신자들의 사로잡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미워하기를 원합니다.

네째, 죄는 광기를 발합니다.
죄의 격노함과 광기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법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의 현존 의식이 상실됩니다.
이러한 광기에는 종종 무모함과 담대함이 따릅니다.
일관성이 있는 판단 능력은 그것이 발휘하는 영향력과 함께 소멸됩니다.

3. 죄의 미혹

(1) 정신에 대한 죄의 유혹
죄는 정신을 미혹합니다. 유혹이 정신에 영향을 주면, 범죄의 기회는 배가됩니다
정신이 어떤 행동의 방침이나 대상에 고정되어 있으면,의지와 감정은 정신이 하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 속에 감정들이 뒤얽혀 괴로울 때에 가장 위험한 상황은 정신의 유혹입니다. 모든 죄의 책임은 오직 죄인에게 있습니다.
죄의 주된 목적은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산란하게 하여 신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신은 두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하며, 모든 악한 유혹을 깨어 지킬 수 있는 정신 상태와 자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요구하시는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은 동일한 것입니다.
죄는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떠나게 만든 후에 은밀하게 영혼을 공격하여 서서히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첫째, 죄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정신을 어지럽힌다.
확실한 죄사함이라는 교리를 빙자하여 은밀하게 죄에 대한 방심을 심어줍니다.
신앙의 지혜와 능력은 그러한 속임을 대적합니다.
복음의 지혜와 은혜의 위대한 효과는 우리의 마음을 항상 겸손하고 죄를 혐오하며 자기 낮춤의 상태로 유지해 줍니다.

둘째, 죄는 정신을 미혹하여 세상 사람들의 올바른 상태와 처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죄 자체에 대한 진정한 자책감이 없는 영혼은 강퍅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2) 유혹을 약화시키는 묵상과 기도

영혼으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룩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정신의 의무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및 그의 탁월하심, 영광, 위엄, 사랑, 선하심 등에 대해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하고 의지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직접 이야기하듯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을 집중시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들을 합당한 방법으로 차례로 이끌어냅니다. 이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어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찬미와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발휘하게 할 것인 바,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들입니다. 기도하거나 찬송하기를 원할 때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면서 묵상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지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것에 의해 당신의 마음이 감화를 받도록 노력하십시오.

세째, 자주 묵상하십시오.
이 의무는 모든 죄의 은밀한 역사와 활동들을 드러내주며, 그것에 함축된 위험을 인식해 줍니다.

네째, 자주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효과는 죄악에 대한 깊고 풍만한 의식과, 죄를 미워하는 새로운 감정을 줍니다. 우리 앞에 죄를 제시하고, 그 사악함과 가증함과 심각함을 알게 하여 우리로 그것을 버리게 하는 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사30:22). 하나님께 죄 사함을 간구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에게 그것을 미워하라고 요구합니다(호 14:2-3)
그리하여 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며 심판하신다는 것을 영혼에게 확증해 줍니다. 기도는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민감하게 대적하게 하므로 기도하는 영혼은 한 순간이라도 은밀하게 죄의 인정을 받거나 매수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신자의 내면에 거하는 죄를 약화시킵니다. 기도는 죄를 대적하는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은 죄의 온갖 거짓된 작용을 좌절시키며, 죄에 대한 모든 싸움에서 항상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신자의 영혼이 이유없이 피곤하거나 권태로 인해 병드는 것은 죄악된 질병이 그 영혼 안에 머물러 있다는 확실한 징조입니다.
정신이 기도나 묵상이 아닌 일을 곰곰이 생각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타당한 일이라고 주장할 때 발생합니다.

죄는 육체의 피곤함을 이용하며 죄의 유혹은 생활 속에서의 절박한 상황에 대하여 거짓된 주장을 합니다. 특별한 의무들은 쉽사리 일반적인 기도의 실천을 제거해 버립니다. 또한 죄는 보충 의무들을 주장하며 어떤 특별한 의무에 집착 시킴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키며 거짓 약속과 목적으로 영혼을 먹입니다.

영혼을 돌보고 보호하는 주된 의무는 정신에 있습니다.
정신이 그 의무를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파수꾼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이로써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견고함의 참된 본질은 첫째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매달리는 것이요, 둘째는 날마다 새롭고 소생하는 마음으로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요, 세째는 그러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결심입니다.

(3) 특별한 의무에만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 방법

정신이 분산되고 부패하고 연약해지고 자신의 역할을 태만히 한다면,영혼 전체가 그 영향을 받습니다. 죄가 유혹에 의해서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줄 때, 우리는 말씀의 생명과 능력과 감각과 감명을 상실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심각한 일이며, 우리 영혼의 큰 염려의 원인입니다.

첫째, 죄는 정신에게 개개의 특별 의무는 피하고 일반적인 것들만 다루라고 권면합니다.
둘째, 정신은 은밀하게 범죄하면서도 의무를 행하는 데서 만족을 느낍니다.
세째, 정신은 종종 형식적으로 의무를 이행합니다.
네째, 죄는 정신의 부지런함을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가 성공하면 영적 나태함을 낳는다. “깨어 있으라”는 성경의 명령은 이러한 위험에 대한 경고입니다. 놀라지 않고 미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 지극히 부지런해야 합니다. 영적 나태함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부주의하며, 자신의 의무를 행하기 위한 자극을 받을 때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일을 완수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연약하고 무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도덕적인 불굴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죄는 불시에 습격하여 정신을 유혹하고 분산시킵니다.
우리는 죄와 협상하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영혼을 놀라게 할 뿐입니다.

여섯째, 죄는 빈번하고 끈질지게 유혹하여 정신을 미혹합니다.

(4) 특별한 의무에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
우리가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기에 합당한 영혼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첫째, 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세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우리의 지혜와 욕구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는 신령한 욕구와 더불어 수행되어야 합니다.
네째,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죄에 대한 형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섯째, 죄와 대적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곱째, 그리스도의 보혈과 중보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덟째,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각해야 합니다.
출처: 생명수 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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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신앙

1998-3-1

박일민

 

죄란 무엇인가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쳬臼㈋�,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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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궤계에 대한 치료책들(Thomas Brooks)

제 1부 영혼으로 죄를 짓게 하는 사단의 계략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 성도는 사단의 궤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1)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2) 계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3) 딤후 2: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 사단이 영혼으로 죄를 짓도록 사용하는 계략들 가운데 낚시 바늘에 싸여 있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 입니까?

 

1) 창 3:4, 5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2) 마 4:8, 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3. 이러한 계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습니까?

 

1) 잠 5:8, 롬 12:9

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2) 욥 20:12-14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3)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4. 사단은 죄를 덕스러운 모양으로 채색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교라는 이름 아래에서 술 취하게 하거나 방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계책에 대해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고후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5. 사단은 죄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물 타기 작전을 펴서 죄에 대해서 심각성과 경계를 늦추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어기는 것을 아무 것도 아닌 죄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삼상 13:9; 15:15) 그렇다면 대비책은 무엇입니까? 혹은 무엇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까?

 

1)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2)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6. 사단은 영혼으로 죄를 짓도록 부추 키고 유혹을 하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인물들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유혹합니다. 다윗의 간음죄, 히스기야의 교만, 욥의 인내하지 못하였던 것, 노아가 술 취하였던 것,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한 것 등등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벧후 2:14)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여야 합니까?

 

1) 삼하 12:10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7. 사단은 영혼으로 죄를 짓게 하는데,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유혹합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호 4:17; 시 81:12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2) 벧후 2:4-6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3) 시 101:1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4) 출 34:6, 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5) 롬 12:1; 요일 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적 예배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8. 사단은 회개가 매우 쉬운 일이라고 유혹하면서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부추 킵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렘 13:23

2) 렘 31:18

3) 호 14:2

 

9.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 경우에 죄에 대해서 담대하게 만들어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삼손의 경우 들릴라에게 들어감으로 결국 죄에 빠집니다. (삿 16:1)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살전 5:22; 유 23

2) 창 39:10

 

10.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부정하도록 만들고, 결국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해서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렘 44:16-18)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호 4:17; 사 1:5

2) 시 73:17-20

 

11. 사단은 거룩한 길에 있는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와 고난들, 때로는 슬픔과 모욕, 질병들을 이용해서 성도로 당황하도록 만들고, 그 다음 편한 길이 있다고 제시하면서 유혹합니다. 이런 계략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히 12:10, 11

2) 사 27:8, 9

3) 시 30:5

4) 계 3:19

5) 출 11:3; 스 1:7-11

6) 욥 23:10

 

12.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남과 비교해서 자신은 보다 좋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죄를 짓게 합니다.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눅 18:11)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까?

1) 마 7:3, 4

2) 고후 4:4

 

13. 사단은 영혼으로 잘못된 오류를 믿게 해서, 영적으로 느슨하게 만들고, 때로는 악하게 만들어서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롬 1:28

2) 살후 2:10-12

3) 잠 23:23

4) 딤후 1:13, 딛 1:9

5) 시 25:9

 

14. 사단은 악한 친구들과 교제하게 하고 악한 사회 속에 있게 하여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엡 5:11

2) 시 120:5, 6

 

 

 

제 2부 사단의 전형적인 계략 중의 하나는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의무와 봉사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슥 3:1) 어떤 계략들이 있습니까?

 

 

1. 사단은 성도의 눈에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서, 거룩한 봉사에 대한 열정을 식어지도록 만드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가롯 유다가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까?

 

1) 잠 23:5; 딤전 6:17

2) 계 2:17

3) 전 5:10

 

2. 사단은 성도가 봉사 할 때, 그 봉사로 인하여 자신에게 위험과 손실이 임할 것 같은 생각을 주어서, 거룩한 의무와 봉사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요 12:42) 이러한 경우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하여야 합니까?

 

1) 딤후 1:12

2) 히 11:36

3) 히 2:3

4) 딤전 6:6

 

3. 사단은 성도에게 봉사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게 보이게 만들어서 거룩한 의무로부터 떠나게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느 2:19-20

2) 마 11:30

3) 히 12:2

 

4.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서 잘못된 추론을 하도록 만들어서 거룩한 의무로부터 떠나게 만듭니다. (고전 15:58)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빌 2:12

2) 벧전 2:9

3) 시 119:174

 

5. 사단은 성도의 눈에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가난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게 해서 거룩한 의무에서 떠나가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약 2:5

2) 요 4:13

3) 히 12:2

 

6. 사단은 성도의 눈에 세상의 위대한 예들을 보여주면서 상대적으로 주님의 일이나 길을 가볍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도로 거룩한 의무를 등지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계 18:4

7. 사단은 성도로 하여금 대 다수의 헛된 생각과 견해를 따라가게 해서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의무를 버리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출 23:2

2) 고후 10:4-5

3) 엡 3:19

8. 사단은 성도로 하여금 이미 이루어 놓은 봉사로 만족하게 만들어서 거룩한 의무에서 쉬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빌 3:12

 

 

제 3부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슬프고, 의심스러운 상태에 처하게 만들고, 또 불안한 상태로 만들어서 그들의 삶을 지옥과 같은 삶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1. 사단은 성도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비정상적으로 골몰하게 만들어서 결국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롬 8:1

2) 롬 6:14

3) 고후 12:9

4) 사 53:5, 6

2. 사단은 은혜에 대해서 잘못된 개념을 갖게 해서 성도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요일 5:13

2) 갈 4:6

3. 사단은 연약한 성도에게 당신은 진정한 은혜의 상태가 아니라고 고소하여서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호 14:4

2) 유 14-16

3) 고후 12:2, 7

 

 

 

제 4부 사단은 세상에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더욱 부추 키어서 세상에 완전히 빠지게 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멸망시키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1. 사단은 사람들로 자기 일에 바쁘게 만들어서 그 영혼을 멸망시킵니다. (빌 2:21)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롬 1:25

2) 합 2:6, 9-12

3) 느 5:14-19

4) 호 10:1-2

2. 사단은 사람들로 눈에 보이는 즐거움대로 살아가도록 부추 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출 15:9-10

2) 시 2:12; 106:23

 

3. 사단은 배우고 학식이 있는 자들을 유혹하여 자신의 능력을 믿게 하고 그들로 교만하게 만들어서 기독교에 대항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사 40:13-17

 

4. 사단은 성도로 교만하게 만들어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망하게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요 13:34

2) 갈 5:22; 고후 13:11

3) 창 13:8

4) 고전 11:31

5) 벧전 5:5

 

5.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지식의 수단에 대해서 무시하게 만들어서 멸망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마 6:22

2) 살후 1:8

3) 마 22:29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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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기본 개념
 
 

   
 

    오늘부터 우리가 함께 기독교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다시 한 번 정리하여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 성경에 관하여 ◈ 10. 죄 사람은 본래 상태에 오래 머물지 못했고 범죄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면 죄에 대한 성경 진리는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가? 우선, 죄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죄는 불법이라.”(요일3:4) 죄와 죄 아닌 것을 판단할 표준은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이다. 비록 인간 관계의 죄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죄는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와 영광에 대한 모독이요 손상이요 침해이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51:4) 죄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만한 데서 나온다. 즉 죄의 원인은 불신앙과 교만이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죄는 죄책(罪責, guilt)과 죄성(罪性,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죄책이란 죄인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거나 그렇지 못하면 형벌을 받아야 할 법적 책임을 가리킨다. 죄성이란 죄악으로 향하는 실제적 성질, 즉 죄악된 경향성을 가리킨다. 죄는 이 두 요소를 가지고 있다. 또한 죄는 죄악된 행위 뿐만 아니라 죄악된 마음 상태도 포함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요일3:15) 아담의 첫 범죄는 온 인류의 범죄이었음(원죄)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처음 명령(창 2:16-17)을 어긴 범죄는 아담 혼자만의 죄가 아니고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왜냐하면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언약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로 그 죄의 법적 책임(죄책 罪責)과 죄악된 성질(죄성 罪性)이 그의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책과 죄성을 가진 죄인이다. 죄책(罪責)의 전가(轉嫁)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다. 바울은 로마서 5:12-19에서 이 사실을 밝히 증거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실상, 모든 사람)이 죽었고(15,17절) 정죄되었고(16, 18절) 죄인되었다(19절). 또한 죄와 정죄와 죽음의 보편성이 이 사실을 확증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3:2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5-6) 죽음은 사람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죄가 없어 보이는 어린 아기도 죽는다. 그것은 원죄의 사실을 증거한다. 죄성(罪性)의 전달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죄성도 그의 후손인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이 원죄의 죄성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전적으로 죄악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의와 선을 행하기에 완전히 무능하다.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17:9)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죄에는 형벌이 따름 죄에는 하나님의 형벌이 따르는데, 그것은 죽음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죄의 삯[보응, 형벌]은 사망이요.”(롬6:23) 이 죽음은 영적, 육신적, 영원적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사람은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음을 가리킨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둘째, 사람은 육신적으로도 죽는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창3:19)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 자손의 계보에는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하여 나오는데, 그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죄의 형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셋째, 사람은 죄로 인해 장차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회개치 않은 모든 죄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부수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의 수고와 고통, 그리고 땅의 저주도 사람의 범죄의 결과로 왔다. 창세기 3:1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을 것과 사람이 평생토록 땀 흘려 수고할 것을 선언하셨다. 또 그는 여자에게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이 있을 것도 선언하셨다.(창3:16) 출처 : http://blog.daum.net/roadhistory/1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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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왓슨

● 서평

오늘날 애석하게도 회개 없는 복음이 만연하고 있다. 아니면 거짓 회개를 참된 회개와 혼동하거나, 또는 거짓 회개와 참된 회개를 바르게 분별할 수 없는 우리의 무기력함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아더 핑크가 오늘날 복음주의의 현실을 미리 내다보며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으로 비통한 오열을 토하게 될 것이다!”는 선지자적인 음성이 우리의 귀에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 20:21)이다. 이 두 가지는 마치 비행기의 양 날개와 같고, 한쪽이 없거나 부러졌다면 그 비행기는 결코 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에는 회개가 빠져 있다. 혹은 회개에 대해 말한다 해도, 회개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불신자들이 쉽게 믿음을 갖는데 방해가 된다거나, 또는 마음에 상처가 된다고 너무 염려한 나머지 그저 슬쩍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우선 믿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쉽게 믿는 믿음(easy-believism)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회개가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에 대한 성경지식을 많이 쌓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십자가 복음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회개없는 그러한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도 결코 한가지 죄라도 극복하는 힘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회개 없는 지식은 사람들의 지옥길을 밝혀주는 횃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회개는 지금 당장 자기 속에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해준다. 회개하기 전에는 어두운 구름과 폭풍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나, 참된 회개는 밝은 광채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한다. 그 마음에는 잔잔한 평안과 행복이 넘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다.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회개 없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회개가 참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으로 우리 자신의 회개를 점검해볼 것인가?

여기에 청교도인 토마스 왓슨의 회개에 관한 놀라운 책이 있다. 참된 회개와 거짓된 회개에 대한 명쾌한 제시가 있다. 그리고 참된 회개를 권고하는 간절한 호소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 회개의 화살을 무턱대고 쏘았지만 표적을 맞추게 해주사, 그래서 얼마간의 죄가 맞아 죽게 해달라는 기도와 함께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그의 간절한 기도가 우리의 심령을 울리고, 참된 회개를 통해 우리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의 흐름을 바꿀 수만 있다면!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 우리 모두의 간절한 기도로 승화되길 빌어마지 않는다. 
(이종수)

● 요약본

1. 예비강화

나는 믿음이 먼저냐 회개가 먼저냐 우선순위를 놓고 논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회개는 먼저 그리스도의 생활 속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나는 믿음의 씨가 마음속에 먼저 역사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내가 믿음은 회개 전에 마음속에 씨눈으로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 이유는 회개는 은혜이므로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어떻게 영혼이 살겠는가? 그러므로 참회자의 마음속에는 먼저 얼마간의 믿음의 씨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는 죽은 회개이고 따라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먼저건 회개가 먼저건 회개는 너무나 중차대하기 때문에 회개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회개는 복음 아래서 요구되는 은혜이다. 어떤 이들은 회개를 율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설교하신 첫 설교는, 아니 그의 설교의 첫마디는 ‘회개’(마 4:17)였다. 그리고 그가 승천하실 때에 남겨놓으신 고별사는 “그의 이름으로…회개가…전파될 것이”(눅 24:47)라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모두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말을 되풀이 주장하였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막 6:12)

회개는 순수한 복음적 은혜이다. 행위의 언약은 아무런 회개도 용납하지 않았고, 거기서는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회개는 복음에 의해 들어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로 매입하신 것은 회개하는 죄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2. 거짓 회개

무엇이 참 회개인지 발견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무엇이 거짓 회개인지 알아보겠다.
1) 회개의 속임수는 율법적인 공포이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죄 가운데 지내왔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붙잡아 그가 얼마나 자포자기적인 위험한 짓을 감행해 왔는지를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는 고뇌로 가득차게 된다. 얼마 안가서 양심의 폭풍은 멎고 그는 평온해진다. 그러면 그는 얼마간 죄의 쓰라림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는 참다운 참회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속지 말라!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겁에 질린 죄인이 된다는 것과 회개하는 죄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2) 회개의 속임수는 죄를 안짓겠다는 결심이다.
사람은 결심을 하고 맹세를 하면서도 참회자가 아닐 수 있다. 사람이 병상에 있을 때 혹시 하나님이 자기를 회복시켜 주실까 하여 얼마나 확언을 잘하는지 우리는 경험으로 알지만, 그는 예전에 똑같이 악하다. 그는 새로운 유혹 가운데서 옛날의 마음을 보여준다.
3) 회개의 속임수는 허다한 죄의 길에서 떠나는 것이다.
죄를 떠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죄가 사람에게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는 육욕을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식을 포기하려 들 것이다. 죄는 포기할 수 있겠지만 회개함이 없이 그리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참다운 회개의 성격(Ⅰ)

다음에는 복음적인 회개는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겠다. 회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인데 회개로 인하여 죄인이 내면적으로 겸손해지고 가시적으로 개혁되는 것이다. 한층 더 상술한다면 회개란 다음과 같은 6가지 특수성분으로 구성된 영적인 내복약이다.
1) 죄의 발견
2) 죄의 슬픔
3) 죄의 고백
4) 죄의 부끄러움
5) 죄를 미워함
6) 죄에서 돌이킴

이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회개는 효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성분 1: 죄의 발견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사람은 먼저 자기 죄가 무언지 깨닫고 깊이 생각해야 하며, 그리고 죄로 인해 적절히 겸손해질 수 있기 전에 그의 마음의 역병을 알아야 한다. 나는 추론하기를 죄의 발견이 없는 곳에는 아무 회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을 탐지할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서는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좋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고 외친다. 그런 것이 바로 죄인이 경우다.

성분 2: 죄의 슬픔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이는 자기의 믿음을 의심하고, 슬퍼하지 않고 회개할 수 있는 이는 자기의 회개를 의심한다(p19). 따라서 참다운 참회자는 자기의 마음을 슬피우는 마음가짐으로 전환시키려고 애쓴다. 이런 죄에 대한 슬픔은 피상적이 아니고, 이것은 거룩한 고뇌이다. 성경에서 이것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라 불러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 51:17)고 하였으며, 또 마음을 찢는 것이라 불러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욜 2:13)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슬픔이 다 참다운 회개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참 슬픔과 거짓 슬픔 사이의 차이는 샘에서 나는 단물과 바다에 있는 짠물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고후 7:9) 근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무엇인가? 이것에는 다음과 같은 6가지 조건들이 있다.
1) 참다운 경건한 슬픔은 내면적이다.
이것은 마음의 슬픔이다. 또한 마음의 죄 즉 죄의 처음 발생과 용솟음에 대한 슬픔이다.
2) 경건한 슬픔은 솔직하다.
이것은 형벌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다 범죄에 대한 슬픔이다. 하나님의 법이 침해당했으며, 그의 사랑이 악용당한 것이다. 이것이 영혼을 눈물로 녹인다.
3) 경건한 슬픔은 신뢰심이 두텁다.
죄에 대한 슬픔이 믿음과 섞인 것은, 마치 물을 머금은 구름 속에 찬란한 무지개가 나타나는 것을 본 경험과 같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상적인 슬픔으로 얼굴이 너무나 부어올라 자기 눈으로 밖을 거의 내다보지 못한다. 우리는 찔리운 아픔을 많이 느낄 때 우리의 놋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4) 경건한 슬픔은 대단한 슬픔이다.
요시아가 죽던 날에 두개의 태양이 졌으며, 그래서 대대적인 장례식과 애통이 있었다. 그런 정도로 죄에 대한 슬픔은 끓어올라야 한다. 가장 깊은 마음 속으로부터의 탄식이다.
5) 경건한 슬픔은 어떤 경우 배상과 결부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배상이 없이는 용서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라티머는 연설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만일 부당하게 얻은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지옥에서 기침하여 토해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6) 경건한 슬픔은 영속적이다.
어떤 이들은 설교 때 쓰러져 울 것이지만, 이것은 4월의 소나기 같이 곧 끝나며, 또는 터졌다가 이내 다시는 멈추는 혈관과 같다. 참다운 슬픔은 계속적이라야 한다.

성분 3: 죄의 고백
슬픔은 너무나 격렬한 감정인고로 돌파구를 갖게 마련이다. 이것은 울음에 의해 눈에서 그리고 고백에 의해 혀에서 표출된다. 고백은 자기 고발인 것이다. 즉 나는 “범죄하였고”(삼하 24:17)라고 하였다. 겸손한 죄인은 자기 자신을 고발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그는 말하자면 재판석에 앉아 자기 자신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1) 고백은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 고백은 샘에서 물이 나오듯 자유롭게 나와야 한다.
2) 고백은 양심의 가책으로 해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깊이 죄를 분개해야 한다. 자연인의 고백은 물이 파이프를 통해 흐르듯 사람을 통해 지나갈 뿐이며 사람을 조금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참다운 고백은 사람에게 상한 심령의 감동을 남겨 놓는다.
3) 고백은 충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고백과 동행해야 한다. 위선자는 죄를 고백하면서도 그 죄를 사랑한다. 어거스틴은 회심 전에는 죄를 고백하고 죄를 이길 능력을 간구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내면으로부터 “아직 아닙니다. 주여”라고 속삭였다고 말했다.
4) 참다운 고백은 죄를 상세히 열거한다.
악한 사람은 자기가 일반적으로 죄인인 점을 인정한다. 악한 사람은 “주여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적어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반면, 참다운 회심자는 자기의 세부적인 죄를 시인한다.
5) 참다운 참회자는 근원적인 죄를 고백한다.
그는 자기 성품의 오염을 시인한다. 우리의 성품의 죄는 선의 박탈일뿐 아니라 악의 주입이기도 하다. 우리는 내면적으로 쓸개와 쑥이 맺히는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긍휼을 태어날 때부터 입게 만드는 것이다. 아아! 죄를 근원에서부터 고백하라!
6) 죄는 그 모든 전후사정과 가중죄와 함께 고백되어야 한다.
복음의 범위 안에서 범해진 죄들은 틀림없이 속속들이 염색되어 있다. 지식을 거스려, 은혜를 거스려, 맹세를 거스려, 경험들을 거스려, 심판을 거스려 지은 죄들을 고백하라. 이런 것들은 우리의 죄를 심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치명적인 가중죄들이다.
7) 죄를 고백할 때 우리 자신을 고발함이 하나님께는 변호가 되도록 해야 한다.
주님의 섭리가 혹독하고 피묻은 칼을 뽑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혐의가 없다고 해야 되고 그가 우리에게 부당 대우를 하지 않으셨다고 인정해야 한다.
8) 우리는 그런 죄들을 다시는 되풀이 행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자백으로 죄를 토해버리고 난 후에는 이 토한 것에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반역죄를 고백하고 나서 새로운 반역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어떤 왕이 용서하겠는가?

4. 참다운 회개의 성격(Ⅱ)

성분 4: 죄의 부끄러움
회개의 넷째 성분은 부끄러움이며, 그래서 “그들로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겔 43:10)라고 하였다. 마음이 죄로 검게 물들었을 때 은혜가 얼굴을 붉히도록 만들기 때문에,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스 9:6)라고 하였다.
1) 모든 죄는 우리를 죄책 있게 하고, 그리고 죄책은 통상적으로 부끄러움을 낳는다.
2) 모든 죄에는 감사할 줄 모음이 많이 내포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이 부끄러워 할 일이다.
3) 죄는 우리를 벌거벗겼으며, 그것이 부끄러움을 일으킬 것이다. 죄는 우리의 거룩한 흰 세마포 옷을 벗겨버렸다.
4)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들었는데, 우리는 부끄럽지 않단 말인가? 태양이 마치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고 얼굴을 붉히듯 일식 때 얼굴을 가리는 것을 목격하고도 자기 얼굴은 붉힐 줄 모르는 자는 누구인가?
5) 우리가 범하는 많은 죄들은 마귀의 특별한 충동질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부끄러움을 일으키지 않는단 말인가?
6) 죄인들은 여우들(눅 13:32), 이리들(마 7:15), 들나귀들(욥 11:12), 돼지(벧후 2:22)에 비유된다. 한때 존엄성에서 천사들보다 조금 못했던 인간이 이제는 짐승들처럼 된 것이다. 우리의 죄는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고결하고 남자다운 정신을 빼앗아가 버렸다. 왕관은 우리 머리에서 떨어져 버렸고,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되었고, 이성은 이지러졌으며, 양심은 둔화되었다.
7) 모든 죄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울 것이다.
8) 우리들의 얼굴을 붉어지게 하는 것은 우리가 범하는 죄들을 이교도들의 죄보다도 훨씬 더 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빛을 거스려 행동한다.
9) 우리의 죄는 마귀의 죄보다 더 악하다. 타락한 천사들을 결코 그리스도의 피를 거스려 죄짓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죽으시지 않았으며, 그의 공로의 약은 결코 그들을 치료하기로 작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불신앙으로 그의 피를 모욕하였으며 깔보았던 것이다.

성분 5: 죄를 미워함
회개의 다섯 번째 성분은 죄의 미움이다. 죄에 대한 참 미움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 사람의 영이 죄에 대항할 때
혀가 죄를 향해 맹렬히 비난할 뿐 아니라 마음이 이것을 질색하는 것, 그래서 아무리 교묘하게 죄가 착색되어 보인다 하여도 그 추악함을 간파하는 것이다.
2) 죄에 대한 참다운 미움은 보편적이다.
- 미움은 기능면에서 보편적이다. 다시 말하면 판단에서 뿐 아니라 의지와 정서에서도 죄를 싫어함이 있다.
- 미움은 대상면에서 보편적이다. 한 가지 죄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미워한다. 위선자들은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다소의 죄들을 미워하겠지만, 참 회심자는 모든 죄들, 유리한 죄들, 허울 좋은 죄들, 바로 부패를 부추기는 것들 그 자체를 미워한다.
3) 죄에 대한 참 미움은 모든 형태의 죄에 대한 것이다. 거룩한 마음은 죄를 그것의 본질적인 오염 때문에 혐오한다. 죄는 영혼 위에 오점을 남겨 놓는다. 중생한 사람은 저주 때문 뿐 아니라 감염 때문으로도 죄를 혐오한다.
4) 참 미움은 인정 사정이 없다. 이것은 죄와는 이 이상 도저히 화해되지 않을 것이다. 분노는 화해되겠지만 미움은 그렇지 못하다.
5) 참다운 미움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반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죄도 반대한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못하였다(계 2:2). 바울은 베드로가 비록 사도였지만 그의 허위에 대해 날카롭게 책망하였다.

성분 6: 죄에서 돌이킴
회개의 여섯 번째 성분은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참다운 회개는 질산처럼 죄의 쇠사슬을 산산이 부식시킨다.
1) 마음이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은 전인적인 마음으로 죄에서 돌이키기를 바라신다.
2) 모든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참회자는 죄의 길 밖으로 돌이켜서, 모든 죄를 버린다.
3) 영적인 이유로 인한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죄의 행동을 억제하면서도 올바르게 죄에서 돌이킬 수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다운 참회자는 신앙적인 원칙에 의해, 이를테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죄로부터 돌이킨다.
4)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죄에서의 돌이킴이 되어야 한다. 참다운 회개에서는 바늘이 북극을 가리키듯 마음이 똑바로 하나님을 향한다.
5) 참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죄를 버리는 것은 자기의 본국을 버리는 것과 같이 다시는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다.

5. 회개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들, 완악한 자에 대한 경고를 곁들여
다음에는 회개를 강력히 주장하는 이유들에 대해 계속 말하기로 한다.
1)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령
회개는 재량권이 아니다. 우리가 회개할 것인가 아닌가는 우리의 선택권에 맡겨지지 않았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하늘 나라의 최고 법원에서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아무 죄인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법률을 제정하셨고, 그는 손수 만드신 자신의 법을 어기지 않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순경한 성품은 회개치 않는 피조물과의 친교를 거부한다.
죄인이 회개할 때까지 하나님과 죄인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회개하기 전의 죄인과 평화롭게 지내신다면 하나님은 죄인이 저지른 모든 짓을 좋아도 하시고 승인도 하시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에 역행하게 될 것이다.
3) 계속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범위 밖에 있다.
그리스도는 임금과 구주이시지만 사람들이 회개하건 안하건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구원하는 구주는 아니시다. 마치 왕은 반역자들이 회개하고 자기들의 군주의 자비를 바라고 투항하면 용서해주고, 만일 공공연히 도전하기를 끝까지 고집하면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우리는 죄로 하나님께 해를 끼쳐 드렸다.
우리는 죄를 지어 하나님께 해를 끼쳤으며, 우리는 그의 영광을 가렸었다. 우리는 그의 법을 위반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마땅히 어떤 보상을 해드려야 한다. 회개함으로써 우리는 죄에 대해 우리 자신을 낮추고 또 우리 자신을 심판한다.
5)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을 회개하지 않아도 무차별 구원하신다면, 그러면 이 규칙에 준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셔야 한다.
이것은 인간들 뿐 아니라 마귀까지도 구원하셔야 하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택함과 유기의 명령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6. 회개를 촉구하는 엄숙한 권고

1) 회개는 필수적이다.
회개는 하나의 자격으로서 요구된다. 회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사랑받게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사랑받으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죄의 쓴맛을 알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의 단맛을 알지 못할 것이다.
2) 회개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 이것은 높은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높은 사람들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친다. 지도자들의 죄는 선도적인 죄이며, 따라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먼저 회개할 필요가 있다.
- 회개는 나라 안의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속임수 쓰는 패거리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교양인들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위선자들에게 필수적이다.
- 회개는 하나님의 친 백성, 참다운 은혜의 역사를 이루는 참 이스라엘인들에게 필수적이다.
3) 회개는 모든 죄에 대해 필수적이다.
우리는 원죄에 대해 주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며 애통하자.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가졌던 저 순수한 영혼의 본질적인 상태를 잃어버렸고, 우리의 성품은 부패로 오염되었다. 특별히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감정의 부패를 통탄하자. 우리는 자범죄를 주님 앞에서 엄숙히 회개하자.

7. 회개의 강력한 동기들

1) 마음의 슬픔과 감동은 우리의 모든 거룩한 의무에 잘 어울린다. 죄 덩어리로 굳어진 마음은 아무 짝에도 못쓰지만 이것이 회개하여 녹아질 때 이것은 쓸모 있게 된다, 녹는 마음은 기도하기에 적합하다. 또한 녹는 마음은 순종하기에 적합하다. 회개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의지에 찬성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2) 회개는 귀하게 받으심 직하다. 주님은 튼튼한 마음보다 상한 마음을 존중하신다.
3) 회개는 우리의 모든 봉사를 하나님께 상달케 한다. 경건한 슬픔의 쓴 나물로 조미한 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다. 또한 죄의식으로 감동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 기도도 하나님의 귀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4) 회개 없이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이롭지 못하다. 어떤 이들은 지식을 축적해 가지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회개없이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한 가지 죄를 극복하는 것이 모든 신비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낫다.
5) 회개의 눈물은 향기롭다. 회개는 그 자체는 쓰라리지만 그래도 그 효과는 달콤한 것이다. 회개는 내면적인 평화를 가져온다.
6) 큰 죄도 회개하면 긍휼을 얻을 것이다. 큰 죄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었을 때 용서를 얻었다.
7) 회개는 영적 축복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회개는 우리를 은혜로 풍요롭게 하는 구실을 한다.
8) 회개는 현세적인 축복도 맞아들인다. 회개는 모든 축복의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며, 이것이 황금의 수확을 가져오는 것이다.
9) 회개는 땅위의 심판을 예방한다. 하나님이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실 때, 참회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을 제지시킨다.
10) 회개는 하늘나라에 기쁨이 된다. 찬양은 하늘나라의 음악인 것처럼 회개는 하늘나라의 기쁨이다.
11) 우리 죄가 그리스도께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생각하라.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얼마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깊이 생각하면 우리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게 될 것이다.
12) 회개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모든 고난의 목표가 된다. 그것이 몸의 병이 되든지, 또는 재산상의 손실이 되든지 그는 우리 죄로부터 우리를 각성시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13) 우리의 애통의 날들을 곧 끝날 것이다.
14) 회개에 뒤따르는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보상. 회개는 육신적인 부위에게 쓴 것 같지만 달콤한 열매를 보라. 그것은 영생이다.
15) 회개의 마지막 동기는 심판의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8. 신속한 회개를 권고함

하나님은 자기들의 인생의 청춘과 전성기를 성별해 드리는 젊은 시절의 참회자들을 사랑하신다.
1) 지금은 회개의 시기이며, 만사는 제 시기에 이루는 것이 최상책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참회자에게 긍휼을 베푸실 마음을 가지셨으며, 그는 지금 주실 여유가 있으시다. 지금은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는 날이며, 지금은 하나님께서 평화의 백기를 내거시고 죄인들과 기꺼이 담판하신다.
2) 당신은 더 속히 회개할수록 그만큼 더 적은 죄를 책임지게 될 것이다.
3) 속히 회개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우리가 적시에 죄에서 돌이킬 때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생애의 첫 열매를 드리게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소비하며 또 소비된다.
4) 회개를 더 오래 끌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지연은 위험을 초래한다. 회개를 지연시키고 연기시키는 것이 위험한 것은 곧 만료될 세 가지 날이 있기 때문이다.
- 복음의 날이 만료될 것이다.
- 사람의 개인적인 은혜의 날이 만료될 것이다.
- 생명의 날이 만료될 것이다.

9. 회개의 시험기준과 참회자가 얻는 위로

누가 회개하였노라가 말할 때, 그것은 참된 회개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험기준은 다음과 같다.
1) 회개의 시험 기준
- 조심하기: 모든 죄의 유혹을 조심해서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 자신을 청산하기: 죄가 자기의 양심 속에서 곪아 터지도록 놔두지 않고 자신을 판단한다.
- 분개: 죄를 가지고 마음에 노심초사하는 상태를 말한다.
- 두려움: 회개하는 영혼은 생명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은총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 열렬한 갈망: 죄를 이기는 권능을 갈망하며 죄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 열심: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심이 고무된다.
- 복수심: 참다운 참회자는 거룩한 적의를 가지고 자기의 죄를 추격한다.
2) 필요한 권고
로마 카톨릭은 회개를 성례로 삼고, 회개를 공로로 삼는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용서의 공로를 쌓을 수 있다. 비록 회개가 죄의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데 도우미 되지만, 그래도 죄의 죄책성을 씻어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다. 회개를 우상화하지 말라.
3) 회개하는 죄인에게 주는 위로
-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다.
- 하나님은 대사면령을 승인하실 것이다. 죄를 용서해주시되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고 하였다.
- 양심은 이제 화평을 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은 기도 가운데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를 심판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바라볼 수 있다.

10. 회개의 장애물을 제거하기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에는 10가지가 있다.
1)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2) 교인들은 회개하는 것을 쉬운 일로 상상한다.
3)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주제넘은 생각
4) 무기력하고 나태한 기질
5) 죄의 근질근질한 쾌감을 좋아함
6) 회개는 기쁨을 없애버린다는 생각
7) 또 다른 회개의 방해물은 마음의 낙담이다.
8) 하나님이 그냥 처벌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9) 사람들의 멸시와 비난에 대한 두려움
10) 과도히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11. 회개를 위한 방법적 처방

1) 죄가 무엇인지 심각히 생각해 보라.
- 모든 죄는 하나님에게서 물러가는 것이다.
- 죄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 죄는 하나님에 대한 권리 침해이다.
- 죄는 심층적인 무지이다.
- 죄는 더러움으로 뒤범벅이 되게 한다.
- 죄 속에는 흉악한 배은망덕이 있다.
- 죄는 손상이다.
- 죄는 짐이다.
- 죄는 영적 질병이다.
- 죄는 노예화이다.
- 죄는 영적인 죽음이다.
- 회개 없는 죄는 최후의 지옥 파멸로 향해 있다.
2) 회개를 이루기 위한 둘째의 심각한 고찰은 하나님의 긍휼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군주의 관대함이 흉악범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의 심판으로 몰아치는 동안 줄곧 당신에게는 그의 긍휼로 구애해 오셨다.
3) 세 번째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고난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라.
4)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얼마나 많은 것을 책임지게 될지 깊이 생각하자.
모든 설교가 고발장으로 쓰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깨끗이 씻어줄 것이며, 값없는 은혜의 두루마기가 우리를 덮어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는 마지막 날에 모두 보고 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직접 그것들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한다.

12. 회개를 위한 방법적 처방

만일 누가 회개한다면 당장 그는 자기 속에 하늘나라를 소유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그의 것이고 모든 것이 평화다. 따라서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를 떠나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다. 당신이 회개하기 전에는 구름과 폭풍밖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으니, 하나님의 얼굴에는 구름이요 양심에는 폭풍이다. 그러나 회개한 후에는 얼마나 날씨가 바뀌는가! 위에는 얼마나 빛나는 햇빛이! 안에는 얼마나 잔잔한 평온이 넘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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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은 가짜 회개를 많이 만들어놓고 이 사람은 이 방법으로, 저 사람은 저 방법으로 속인다. 교묘한 속임수를 사용하는 데 아주 능수능란해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까지도 속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회개했다고 믿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실제로는 회개했는데도 자신이 회개하지 못했다고 믿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무엇이 회개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먼저 회개가 아닌 것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1. 기독교를 믿는다는 고백이 회개는 아니다

    단지 이름뿐인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기독교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4:20). 이교도이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공언하기만 하면 회개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진정한 회개라면, 사데교회나 라오디게아교회 사람들을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신앙고백으로만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고, 그들에게는 '살았다 하는 이름'(계3:1)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단지 이름만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고, 그들을 토하여 내칠 수도 있다고 경고하셨다(계3:14-16).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不義)에서 떠나지 않고(딤후2:19),말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한다(딛1:16).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회개한 사람으로 여기실까? 죄에서 돌이켜 회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안에 사는 것이 정말 회개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그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신앙고백이라는 등(燈)으로 회개가 입증되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처녀들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마25:11,12).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한 설교자들이나 기적을 행한 자들도 악을 행하기 때문에 쫓겨날 것이다(마7:22,23).

 

2.도덕적 의가 회개는 아니다 

   도덕적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마5:20). 회심하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빌3:6). 바리새인들은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눅18:11)라고 말할 정도로 도덕적 의가 뛰어났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자신을 아무리 정당화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실 것이다. 물론 도덕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에 안주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박애를 포함하고 은혜가 이성을 포함하듯이 경건은 도덕성을 포함한다.기독교와 박애를, 은혜와 이성을 분리하면 안 되듯이 경건과 도덕성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3. 죄책감을 느끼는 것, 피상적 변화, 부분적 개혁이 회개는 아니다

    한 번 비췸을 얻은 사람도 배교할 수 있으며(히6:4-6), 총독 벨릭스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떨 수도 있다(행24:25). 또 진리를 접했을 때의 헤롯처럼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막6:20). 그러나 단지 죄책감을 느끼며 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다고 해서 회개의 은혜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본 사람들 중 대다수는 죄의 깨달음이 회개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한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이 곧 회개라면 아벨을 죽인 가인도 회개한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할것이다. 건축과 세상일에 몰두하여 죄책감을 잊을 때까지는 그도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미친 듯이 온 세상을 헤맸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악한 친구들을 멀리하고 욕망을 극복하고 근신하면서 예의 바른 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회개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게 되는 것과 단지 예의바른 것이 엄청난 차이를 알지 못한것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면서 기독교를 거의 받아들일 뻔했지만 결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양심의 채찍이 춤출 때에도 기도하고 설교 듣고 말씀을 읽고 죄를 멀리하지만 양심의 사자(獅子)가 잠들면 이내 죄에 빠진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는 동안에는 경건했지만 고난의 시기가 끝나기 무섭게 하나님을 잊었다. 문제가 되는 특정한 죄를 끊고 세상의 상스럽고 불결한 것들을 버렸지만 육욕적 본성이 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4. 지금, 돌이켜라!

   죄인이여, 내말을 들어라! 살려거든 들어라! 당신은 왜 제멋대로 스스로를 속이는가? 어찌하여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당신의 소망을 두는가? 나의 직언이 당신의 거짓된 소망을 산산이 깨뜨릴 거라는 것을 잘 안다. 내 이야기가 당신에게 불쾌하게 들릴 것이다. 나 역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외과의사가 사랑하는 친구의 다리가 썩어가는 것을 본다면 눈물을 머금고 그 다리를 절단하지 않겠는가? 내가 바로 그런 심정으로 당신에게 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나를 이해해 달라. 나는 무너지기 직전의 집을 허물고 아름답고 튼튼한, 영원한 집을 지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무너져 당신이 깔려 죽을 것이다. 성경은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잠11:7)라고 가르친다.

   죄인이여 ,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결국 죽어서 지옥에서 뒤늦게 눈뜨는 것보다는 지금 내 말을 듣고 깨닫는 것이 낫다. 당신 자신을 속이는 거짓된 소망을 붙들지 말라. 당신이 잘못된 것에 소망을 두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둔다면 나는 거짓되고 불충한 목자일 것이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지하는가? 성직자의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의지하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것을 의지하는가? 눈에 보이는 교회의 교인임을 의지하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아는것,교양 있고 예의 바른 것,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 깨끗하게 사업하는 것,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의지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언하건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결코 통하지 않는다. 선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신의 회개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당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제발 정신 차려라! 철저히, 신속하게 돌이키겠다고 결심하라! 당신의 마음을 깊이 살펴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철저히 다루실 때까지는 쉬지 말라.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어버린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물며 세속적인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세속적인 사람들은나의 이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눈길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관심을 보인다면 그들을 만드신 분께서 "너희는 하나님나라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구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혜로운 처녀들과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리석은 자들과 어울리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깨끗한 거래를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데 더구나 거짓된 거래를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불쌍한 죄인이여, 당신의 양심이 당신을 고발하지 않는가? 한 번 비췸을 얻고 종교적 의무를 형식적으로 준행한 사람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판명되어 지옥에 간다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불쌍한 죄인들아!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기도조차 하지 못하는 불쌍한 죄인들아! 돌이켜 회개하라! 의(義)로 당신의 죄를 깨뜨려버려라. 그리스도께 달려가 당신을 용서하고 새롭게 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라. 당신을 주께 드리고 거룩함 가운데  동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말하겠다. 내 책망을 듣고 돌이켜라.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근신하며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라. 죄인이여,손을 씻어라. 두 마음을 품은 자여,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워라(잠1:23,9:6;딛2:12;약4:8;사1:16,17). 명심하라! 계속 악을 행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조셉 얼라인의 '돌이켜 회개하라' 중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6:7,8).

사람이 자기 죄 가운데 계속 거하며, 육신을 위하여 삶에도 불구하고 천국의 소망을 주려 하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지옥불에 대한 보험 증서는 팔면서 죄를 이기는 권세는 주지 못하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육신의 삶을 계속 살게 하면서 육신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생명 없는 종교를 공급하며 소유(possession) 없는 고백(proession)만을 공급하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하늘에 이르는 두 개의 길은 가르치며, 우리 주님께서 마 7:13,14절에서 가르치신 ‘좁은 문’의 오직 한 길밖에 없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거짓복음을 경계하라. 이 거짓 복음은 두 번째 의 길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육신적 기독교의 길이다. 이 길이 바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그것은 육신에는 매력적인 길이지만 필경 지옥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거짓복음 - 그 복음은 당신에게 아무런 요구도 없고 다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쉬운 길임을 보여 주지만 실상은 지옥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다 - 이런 복음을 경계하라. 이 거짓복음은 당신의 육신을 거스리지 않고 오히려 ‘친절한 벗(friendly pal)'이 된다. 그리고 그 복음은 바다 같은 선(good)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깨끗한 놀이이며 순결한 유희로써 이해된다. 그 복음은 당신의 사람을 방해하지도 않고, 당신의 삶을 바꾸지도 않고, 여전히 당신의 인생을 즐기게 하며, 술집 노래 대신에 합창을, 독한 술 대신에 종교영화들을 즐기면 충분한, 그러한 복음이다. 그 강조점은 여전히 즐기는 인생에 있다든지 지적 또는 도덕적으로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누리는 그런 복음이다.

이 거짓복음은 하나의 새롭고 전혀 다른 전도 방식을 권장한다. 그 방식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기 전에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옛사람이 죽음을 당하기 전에 먼저 새 생명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즉 죄인의 방향을 약간 돌려놓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전도는 죄인을 보다 행복한 생활 방식을 전환하게 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그 죄인의 자존심을 구하여(saves)주려 한다. 이 거짓복음은 자기주장 강한 사람에게는 “와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주장하라”고 하고, 이기주의자에게는 “오라,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하고, 감각적 자극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자, 와서 크리스천 교제를 맛보라”고 말하는 전도방식이다. 이것은 낡은 부대에 새 술을 쏟아 붓는 격이다. 이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새집을 짓기 전에 먼저 옛집을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적 기독교라는 거짓복음은 십자가라는 의미, 곧 죽음이라는 의미를 완전히 간과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은혜의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인 당신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요구하고 있다. 이 은혜의 복음은 당신의 본성에 속한 모든 것을 단호하게 강력하게 끝내 버리고, 죄의 죄사슬을 부숴버리고 당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일으켜 세워 버린 것이다. 또한 이 은혜의 복음은 당신의 교만과 대망을 끝내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긍휼을 비는 자로 내려앉게 한다.

하나님의 참 복음은 당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하고, 당신의 벗들과 세상을 향해서는 작별을 고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당신은 옛날의 사람과 같은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참복음은 당신의 삶을 약간의 방향 전환만 하라고 하지 않고 죽음의 곳으로 가라고 말하고 있다. 히 13:13절 말씀과 같이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왜냐하면 우리는 거기서 세상에 대하여 죽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좇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우리는 갈 6:14절 말씀과 같이 이 세상과 그의 모든 쾌락과 유혹들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러분은 우리가 매일 쓰는 식용 소금이 두 개의 원료(화학 원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것들을 각각 먹으면 독약이 되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배합되면 소금이라는 축복이 되어서 정화하고, 맛을 내고, 썩지 않게 하고, 수많은 다른 용도로 쓰인다. 참 복음,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도 그와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로 죄 용서 받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과 우리 행실의 복음과 우리 죄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인들을 기만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설교에 필요한 요소 전부를 넣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는 영혼의 독약이 되어 구원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이 육신적 기독교라고 하는 거짓복음의 교리는 오늘날 기독교 국가에 범람하고 있으며 이 복음에는 - 이는 결코 복음이 아니다 - 죄를 미워하게 하는 회개의 요소가 없다. 또한 참 구원에는 죄의 권세가 부서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또한 거룩케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 칭의와 성화란 한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또한 거룩케 하신다. 곧 우리를 하나님의 쓰임을 위해 성별(聖別)하시어서 하나님의 길을 행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복음은 죄와 더불어 타협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 정결하고 하나님께 투명할 것을 요구한다. 아니면 멸망이다. 그 복음은 “죄인이여 엎드리라. 거룩하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 발 앞에 엎드려 회개하라. 그리스도의 발 앞에 믿음으로 엎드리라. 구원을 위하여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라”고 그 복음은 말한다. 그리고 모든 죄는 버리고, 모든 죄를 배척하고, 모든 죄는 회개하고, 모든 죄를 혐오하라. 당신은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세상도 당신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당신은 죄를 버리고, 나아가서 당신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참구원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결단코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은 당신의 죄를 덮거나 방해하거나 변명하는 것을 결단코 용납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호소력이 당신의 가슴 속에서 역사하면, 당신은 죄에 대하여 죽고 자신에 대하여 죽게 되고, 그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 곧 복음의 능력으로 당신을 새 생명으로 일으키신다. 이것이 당신 안에 들어온 새 생명이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조건을 제시하지 마라. 왜냐하면 당신은 지옥불에 던지움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요. 다만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만약 지옥 갈 마땅한 죄인으로써 하나님께 나와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마음에 진정한 회개를 고백할 때,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또한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을 위한 유일한 소망이다. 다시 말하면 목에 줄을 매고 그 끝을 하나님께 드리며 죽으시든지, 그리스도를 인하여 구원해 주시든지 하옵소서라고 비는 길이다. 머리를 숙이고 당신 모습 그대로, 상실된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오시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눅 19:10).

그리스도의 참 복음은 죄와 더불어 타협치 아니할 뿐 아니라 참복음에는 중간지대 즉, 좁은 길과 넓은 길의 타협도 없다. 절대로 없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인하여, 지옥의 죄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그에게 와서 자유함을 받을 때 - 이것이 칭의이다 - 당신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죄의 권세와 지배로부터 해방받기 위해 그에게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화이다. 그리스도 전부를 영접받는 믿음의 본질은 칭의와성화의 비분리(非分離)를 요구한다(고전6:11).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 - 곧 그분의 인격체(person)자체 - 이 우리의 구원이며, 영광의 소망이며,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위격(位格 person)을 나눌 수 없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Lord)시라 부를 수 없다(고전 12:3). 그리스도를 - 당신의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자유케 하신 - 당신의 주(Lord)로 알지 못한 채 당신의 구원자(Savior)로 알 수는 없다. 요 8:36절 말씀과 같이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죄로부터, 하나님의 구원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그 권세에 대하여도 죽었다(롬 6:2).

아, 얼마나 교활한 사탄의 속임이 오늘날 막대한 대다수의 교회에 자행되고 있는가, 얼마나 교활한지 많은 사람들이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죄의 권세가 부서지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육신의 삶을 살며 육신을 위하여 심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속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만사형통하여 그 영혼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 어떤 결정을 한 적이 있으며, 자신들이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롬 5:19-21절 말씀을 들어보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들어보라.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내가 제시하려는 바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하나님께선 죄의 권세를 꺾어놓으신다. 이제는 은혜가 왕 노릇한다. 어떻게? ‘의로 말미암아’ 또한 의와 무관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와 참 거룩 안에서 행할 수 있게 된다.

이 육신적 기독교라는 거짓복음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 이제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관심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육신 속에서 육신을 위하여 심고 살아가면서도 죽으면 천국 갈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옥에서 나온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보여 온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말씀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서 5장에서 읽은 바와 같이 율법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엄청남과 죄의 죄성과 죄의 심히 죄 됨으로 우리 마음을 찌를 때, 우리는 죄가 우리 마음과 우리 삶 속에 넘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의 긍휼을 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동시에 우리에게 새 성품을 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내주케 하신다. 그러면 이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과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왕노릇한다.

로마서 6장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려 고 죄에 거하겠느뇨?”이다. 결단코 물론 그럴 수 없다! 하늘 아래 그럴 수 없으며 그런 생각도 사라져야 한다. 왜냐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만약 우리가 죄의 책벌과 그 권세로부터 해방되었다면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어 버렸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더 계속하기 전에 우리는 ‘죽음’에 정의(定議)를 내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에 ‘죽은’, ‘죽었다’ 혹은 ‘죽음(사망)’이라는 말이 14번이나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육체로부터 사람이 분리될 때 성경은 육체적 죽음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구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죽었다 - 한번이자 마지막으로 영원히 - 는 것이다. 곧 우리의 삶을 왕으로서 다스리는 죄로부터 우리가 분리된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은혜가 왕으로서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권세가 부서져 버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 다시는 죄의 권세 아래로 붇들려 오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은혜의 권세가 더욱 넘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복음 -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 이다.

그러면 은혜가 이렇게 왕노릇하므로 은혜가 더욱 왕노릇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범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이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을 받고, 보혈로 씻음을 받고, 깨끗함을 받은 죄인이 우리가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그 안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 없다. 딛 2:11,12절 말씀에 지금 왕노릇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도록 가르치시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롬 5:20, 21절과 6:1,2절 말씀에서 참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참아들은 죄책(罪責)과 그 형벌에 대하여 죽었고, 죄의 권세에 대하여 죽었고, 마음속에 죄가 왕노릇하는 것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분계선상에서 기독교계는 오늘 날 분열되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탄의 간교한 역사가 육신적 그리스도인이라는 교리와 함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교리인즉,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순간 죄책과 형벌로부터는 구원을 받지만, 죄의 권세는 아직 부서지지 않았고 당연히 그는 죄 속에서 살 것이며 그의 삶 속에서 여전히 죄는 왕노릇할 것이다.”는 것이 그 가르침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항의의 음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신 것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 곧 구원 안에서 죄의 형벌과 함께 죄의 통치(권세)가 동시에 부서진 것이다. 물론 신자는 여전히 그의 육신 안에(in flesh) 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신자 안에서 주인으로 다스리지도 못하고 왕노릇하지도 못한다.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참자녀이면 그는 “나는 죄의 왕노릇에 대하여 죽었고 죄는 더 이상 내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는 죄가 아니라 은혜가 나의 마음과 나의 삶 속에서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참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는 일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출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였노라.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가 왕노룻하는 죄의 통치 아래 있거나 그래서 상실된 채로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은혜가 왕노릇하는 은혜의 통치 아래에 있어서 구원받고 안전한 신분으로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육신적 기독교라는 하는 중간 지내는 절대 없다. 만약 성령께서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죄의 다스림과 그의 권세, 곧 그의 통치 영역으로부터 해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상실된 자이고 그리고 영원히 상실된 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소극적인 면만 보는 것이다. 동일한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를 은혜의 통치 아래로 데려오신다. 성령께서는 이일을 구원 안에서 이루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은혜의 통치) 권세와 힘과 세력과 그 역동적 영향이 의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나의 경고를 들으시오, 기만을 당하지 마시라. 만약 여러분이 육신을 위하여 심으면 육신으로부터 썩어질 것과 영원한 심판을 거둘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영생을 거둘 것이다(갈 6:6,8). 여러분, 속임을 당하지 마시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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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하나의 세력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sin, 罪)란,
"과녁을 빗나가다"는 뜻으로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전도서12:13)
성경과 진리의 영이라는 과녁을 이탈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변함없이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의로움과
그 완전한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세상 죄는 어린양(예수님)의 어깨위에 지워졌으며(요1:29)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 십자가에 쏟아졌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행4:12)

죄가 실재(實在)하듯 지옥도 사실이며 심판도 사실입니다.
(히9:27. 계20:10. 계21:8. 롬3:23. 롬6:23. 요일1:19)
죄와 지옥과 심판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죄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타난 죄의 여러 현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죄는 아버지를 등지고 나가는 탕자와 같습니다.
죄는 만왕의 왕께 반역하는 태도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주의 주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분을 일부러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되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이며 삶의 태도입니다.
죄는 항상 육체적이며 동물적이며 본능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신적 형상을 잃고
(본능과 탐심만이 생명을 추동[推動]하는) 짐승이 된 것입니다.
죄는 늘 육체-중심적이며 물질적이며 권력적입니다.
항상 외모-지상주의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주의적입니다. 죄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로 나타납니다.

 

죄는 항상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 3:6) 특징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육체적 욕구와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모든 가치들입니다.


(요일2:16)의 말씀은 (창세기3:6절)과 하나가 됩니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거의 전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5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갈라디아서 5장 19~21에서 열거되는 것들입니다.

또,  보이지 않는- 영이신 전능자 앞에서
보이는 사람(목사나 교주)을 높이 세우는 것은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창32)와 똑같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우상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추겨 세우고
설교의 례[例]와 간증의 본보기로 삼는 행위 역시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며, 변장술로 은폐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자기 육신의 사고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롬8:6. 롬8:7. 롬8:13.
-요14:17. 롬8:5. 고전2:12. 요3:6. 요6:63)

죄는 하나의 세력입니다.


욕심, 시기, 미움, 증오등과 같이, 악의 힘, 어둠의 힘이고,
타오르는 열정입니다.죄는 지옥이 지옥되게 하는 원소이며
지옥을 불 타오르게 하는 에너지원(源)입니다.(약3:6)

자료ⓒ창골산 봉서방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의 세 가지 특징(리처드 백스터)

1) 악인은 자신의 최고 만족을 땅에서 구한다.

악인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며, 하늘의 행복보다 육체의 만족을 더 좋아한다.

또한 육체의 일을 구하며, 성령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땅의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천국의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천국으로 가기보다는 여기에 머무르려고 한다.

천국에서 칭찬 받을 만한 온전하고도 거룩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여기 이 세상에서 건강과 부와 명예를 얻는 삶을 추구한다.

또 설령 그가 거짓으로 하나님을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할지라도, 참으로 그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결코 알지 못하며, 하나님보다 세상과 육체의 쾌락을 더 많이 생각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천국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육체의 만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악인이요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다.

반대로 회심한 사람은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분별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누릴 영광을 믿고 마음으로 그 영광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느 것보다 이러한 영광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는 세상에서 모든 부와 쾌락을 누리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찬양하며 살기를 구한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그는 자신의 재물과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둔다.

그는 모든 것들을 버리리라 각오한다.

불이 위로 타오르고 나침반의 바늘이 북쪽을 가리키는 것처럼, 회심한 영혼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경향을 가진다.

하나님의 사랑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회심한 영혼을 만족시켜 줄 수 없으며, 어떤 만족이나 안식도 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모든 회심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더욱 존경하며 사랑한다.

또한 그들에게는 하늘의 행복이 세상의 번영보다 더욱 매력적이다.

2) 악인은 출세하고 세속적인 목표들을 달성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로 삼는다.

혹시 그가 성경을 읽거나 듣고, 형식적으로는 신앙의 의무들을 많이 행하며, 부끄러운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일 뿐, 그는 결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한 영광을 얻는 것을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삼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세속적인 것들을 즐기며,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육신을 더욱 아낀다.

그는 천국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한다.

반면에 회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구원받는 것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와 과업으로 삼는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복들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다른 세상을 향해 가는 여행에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고는 피조물을 하나님께 복종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는 거룩한 삶을 사랑하며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며, 죄를 미워한다.

그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소망하고 기도하며 노력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는 경향과 성향을 가진다.

죄를 짓는 것은 그의 마음과 삶의 성향에 방향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죄를 짓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회개하며, 기꺼이 알고 있는 모든 죄에서 떠나려고 한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그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며,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의 소망을 위해서 포기하고 버릴 수 있다.

3) 악인의 영혼은 결코 구속의 신비를 분별하거나 맛보지 못한다.

악인은 이 세상에 오신 구주를 감사함으로 영접하지도 않고, 구속주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또한 그는 자기 죄의 형벌과 세력으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께로 회복되기 위해 자기 영혼의 의사인 구주에게 기꺼이 순복하지도 않는다.

그가 형식적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결코 한 번도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맡긴 적이 없다.

반면 회심한 영혼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느낀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과의 평화와 천국에 대한 소망들을 상실했으며,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면서구속 사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 예수를 자신의 유일한 구주로 믿으며, 지혜와 의와 성화와 영화를 위해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위탁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자기 영혼의 생명으로 받아 들이고, 그리스도를 힘입어 살며, 그리스도를 모든 문제의 열쇠로 사용하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찬양한다.

한 마디로, 그의 마음 안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내주하고 계신다. 이제 그는 그를 사랑하사 그를 위해 자기 목숨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렇다. 이제 사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는 것이다.

-회심 중에서-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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