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론 / 게르할더스 보스

 

2. 죄

2.1 죄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
2.2 펠라기우스 죄론
2.3 로마교 죄론
2.4 원죄
2.5 행위 언약
2.6 아담의 범죄
2.7 첫 범죄로서 원죄

 

2.7.1 원죄(peccatum originale)의 정의와 장점

 

31. 어떤 명칭으로 신학자들은 우리가 화란어로 "유전된 죄"(에어프쏜테; erfzonde)라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가?

 

그들은 이를 위해 페카툼 오리기날레(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 원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32. 왜 이 용어가 화란어 용어보다 더 나은가?

 

이 용어가 "유전된 죄"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모든 것들을 표현할 때, 다음 두가지 사항을 구별한다면, 더 맞기 때문이다:

 

1) 아담의 첫번째 죄 때문에 우리에게 전가된 죄책.

 

2) 이 전가된 의 때문에 형벌로서 우리에게 내재하는 부패.

여기서 금방 알 수 있는 것처럼, 엄격하게 말해서 단지 후자[Nr. 2]만이 유전된다. 전자는 유전되지 않고, 다만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옮겨진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유전됨으로써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원죄(peccatum originale)는 이것을 유전된 죄보다 잘 표현한다.

 

33. 그러면 원죄(peccatum originale)라는 용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 죄를 원죄라고 할 때, 이것은 그 기원이 인류의 뿌리에서 났기 때문이다.

 

2) 나아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라, 모방을 통해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근원을 두기(origineel) 때문이다. 비록 이 용어가 이 개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의식적으로 계산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사용되었을 때, 이 모든 것을 몇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탁월한 도구이다.

 

 

2.7.2 내재적 죄(peccatum inhaerens)

2.7.2.1 내재적 죄의 두 구성요소: 원의의 부재, 적극적 악의 실재

 

34. 이 원죄가 유전되는 경우만을 한정하여 생각할 때(peccatum inhaerens = erfschuld), 어떤 것으로 구성되는가?

 

두 가지로 구성된다:

 

1) 원의의 부재(abwezigheid). 이것은 유전된 결핍이요, 박탈이며, 있어야만 하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었을 때, 이 죄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기 때문에, 형벌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 그에게 합당한 순종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방금 앞에서 본 것처럼, 로마교 신학자들은 이것을 유전된 원죄의 유일한 요소로 생각한다[cf. Q. 7].

 

2) 적극적인 악의 실재(aanwezigheid). 이것은 적극적인 선 대신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2.7.2.2 적극적 악의 실재

 

35. 내재적 죄의 두번째 적극적인 요소와 관련하여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1) 첫째는 내재적 죄는 본질적이고 고유한 의미에서 죄라는 것이다. 여기서 단지 우리와 절반만 동행하고, 죄를 비유적인 의미에서 말하려고 하는 사람들(동방 그리스 교부들, 항론파들)에 반대하여, 인격적인 죄책이 거기에 결부되었는지만 질문하면 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내재적 부패성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붙들지 않는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죄는 인간 영혼에 주입된 실체(substantie)가 아니다. 또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실체의 변화도 아니다. 이것은 마니교도들과 종교개혁 당시 플라쿠스 일루리쿠스(Flacus Illyricus)의 오류이다. 죄를 실체로 만들므로써, 사람은 그것의 실재를 견지하려는 열심으로 자기 자신을 지나치고 만다. 실체로서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다. 죄의 개념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죄가 성질의 영역에 있지 실제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3) 마니교도들에 대한 변증에서 어거스틴은 죄의 개념에 철학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이 철학적 요소는 그 이후로 한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죄가 실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죄가 존재의 박탈, 즉 어떤 부정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그는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오리겐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제한이라는 범신론적 이론과 연관된다[cf. Q. 1,2]. 그러므로 이 철학적인 요소를 죄 개념에서 몰아내는 것이 낫다. 어거스틴은 다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을 통해 야기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죄를 부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어거스틴처럼 이 둘을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을 위한 기초로서 이 철학적 견해를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A. 이 철학적 견해는 단지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죄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이것을 우리도 견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죄를 야기시켰다는 주장에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논리적으로 하나님이 죄의 기원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신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B. 죄에 관한 옳은 견해를 갖기 위해 죄를 부정으로 묘사하는 것은 위험하게 보인다. 죄는 삶에서 적극적인 권세이다.

 

C. 후대의 정통신학은 어거스틴의 가르침 중에서 이 철학적 요소를 배제했다. 정통신학은 죄를 단순한 박탈이 아니라 실제적 박탈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 따라서 죄는 실체가 아니다. 또한 단순한 박탈도 아니다. 오히려 죄는 어떤 하비투스(habitus) 곧 기질로서, 이것은 실체에 들러 붙어 있으며, 후자[실체]의 본질적인 변화가 없이도 바뀔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어떤 기질로서, 그것과 반대되는 것, 이로부터 영혼의 실체가 피할 수 없는 것과 반립을 이룬다. 연장(uitbreding)[이라는 속성]을 소유하는 것이 물질의 본성에 속하듯이, 어떤 도덕적인 기질(habitus)을 갖는 것, 그것이 선하든지 악하든지 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실체의 본성에 속한다.

 

5) 죄 된 기질은 영혼 전체에 고유한 것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 된 기질은 영혼의 모든 기관과 영혼의 전 삶에 미치며, 그 어느 것도 손대지 않은 채 남겨두지 않는다. 저급한 기관에는 죄가 머물고, 반면 고등한 기관은 [건강하게] 남아 있을 것 같으나, 그렇지 않다. 낮은 기관 높은 기관 할 것 없이 둘 모두에 죄의 부패는 자리잡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대상이다. 이것을 "전적 부패"라고 부른다. 이 용어의 의미는 지금까지 우리가 죄의 본질과 형태를 정의한 것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만일 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전적 부패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전적 부패는 다음 4가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A. 전적 부패는 각 사람이 그가 될 수 있을만큼 악하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그와 적대적이 되었지만, 이 적대적의 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B. 또한 죄인은 양심에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의 현실태(actus)이다. 이 도덕적 의식도 죄의 영향을 받았으나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머무는 한 이 사실에 대한 인식은 그의 의식으로부터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양심은 이것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이 인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인간 안에 하나님께 대하여 선이 있다는 것을 전혀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할 수 있는 무엇이다. 물론 양심은 의지와 감정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동기들로 하는 그렇게? 것이다.

 

C. 나아가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모두가 죄인이요 이기적이다. 그러나 자연인이 움직이는 이 이기심의 원들 안에 많은 동심원들이 있다. 어떤 죄인은 하나님을 행해서는 이기적이지만 그의 주변에 대해서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자신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하여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민적의(justitia civilis)가 있을 수 있으나, 동시에 거기에 속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죄인 것일 수도 있다.


D. 죄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형태들이 있다. 어떤 사람 안에서도 이 모든 형태들이 다 발현된 적이 없다. "전적 부패"라는 표현에서 "전적"(totale)이란 형용사는 모든 가능한 부패성이 인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반면, 이 전적 부패라는 말은 본성상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사랑도 우리 삶의 동기적 원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코 우리의 행동과 사고, 말을 결정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의 전 삶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성이 기저에 흐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을 의식적으로 대적하는 것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외적 자극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 안에는 어떤 영적인 선도 없다.

6) 다른 측면에서 생각할 때, 이 내재적 부패성은 "영적 선에 대한 무능함"이다. 만일 인간이 모든 것에서 죄인이고 죄 된 것 뿐이라면, 이것으로부터 이미 죄인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점에서 "무능"이란 행하는데 불가능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무능"은 다른 의미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즉 무능이란 자신의 의지의 방향을 거스르는 일의 불가능성으로, 악으로부터 선하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번째 의미에서도 인간은 무능하다.

 


2.7.2.3 인간의 본성적 무능

36. 본성적 무능과 이성적 무능 사이의 구분은 무엇을 뜻하며 왜 이 구분을 버려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적 무능함을 부인하고 그의 도덕적인 무능함을 주장힌다. 이들이 이 주장으로 의도하는 것은, 인간이 그의 타락한 상태에서도 본성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서, 이것을 영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그는 합리적인 이성, 의지력 등을 가졌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한 기초가 그에게 전적으로 존재하며, 다만 도덕적으로 무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 본성적 기관을 옳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 구분에 반대하여 다음 사항을 주목해야 한다:


1) 도덕적 무능과 본성적 무능을 구별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도덕적"인 것과 "본성적"인 것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동시에 도덕적이고 본성적일 수 있다. 만일 사람에 관하여 그가 영적인 선에 무능하다고 말할 때, 이 무능은 본성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무능함은 그의 부패한 본성에 속하고, 이것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제 누군가 이 무능함이 본성적이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는 이 말이 가진 유일한 의미에서 그것이 본성적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도, 위에서 논의했던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사람들은 보통 본성적 무능과 도덕적 무능 사이의 대립을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데 "본성적인"과 "도덕적인"이라는 두 형용사가 이 "무능함"과 함께 쓰이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무능함에 두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덜 강한 것을 도덕적인 무능함이라 부르고, 더 강한 것을 본성적인 무능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어법으로 볼 때, 대체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방식으로, "도덕적"이란 용어와 "본성적"이란 용어와 전혀 관련이 없는 변화가능성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선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이 단지 상대적인 것이라는 오해가 생겨난다.

3) 이 구분은 의지를 너무나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의지의 죄 된 기질과 선한 기질은 의지의 추상적인 셩격과 공통점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의지의 기질인 것이다. 그러나 이 추상[의지]이 그것이 내재하는 결정성과 상관없이, 자체로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악한 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무능하다. 그럼에도 본성적으로는 무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유일하게 유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만일 사람이 이 의지를 로마교의 초자연적 의미에서 본성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의지를 가진 것은 의지의 무능력으로부터 어떤 것도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의지의 본성적 존재는 무능함의 약화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모든 구분은 로마교 신학 체계에 속한 것이고 개혁파 신학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4) 그러나 이 안에 진리의 요소가 없지 않다: 인간을 말할 때, 그가 영적으로 무능하다고 말하면,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 안에는 자신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이 욕망의 흔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논의한 부분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일 그가 원했다면, 영적인 선을 행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이 원하여 악하다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 이런 강조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이 개념은 너무나 애매하다. 마치 영적인 무능이 우리의 운명이며 우리의 의지에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그 아래 신음하며 우리의 최선으로도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생각은 자신들의 무능력 뒤로 숨고 거기에 호소함으로써 복음에 대한 책임성을 회피하려는 무리들 중에 팽배해 있다. 따라서 항상 무능함과 무자원성은 동일한 일의 두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우리는 선을 원치 않으며 우리의 의지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본성적인 무능과 도덕적 무능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렇게 하지 않고도]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호소할 수 있다. 이 [개념]은 이미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지성과 감정의 능력을 [모두] 잏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5) 인간이 본성적으로 무능하지 않다는 견해는 또한 인간의 이성, 의지 등의 능력이 죄로 인해 심각히 약화되었다는 것 또한 부인한다. 인간이 악하고 또 악에 머무는 것은 이 능력들이 단지 잘못된 방향으로 작용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설사 도덕적인 방향이 일시적으로 변화되었다 해도, 동시에 그 기관들 자체의 변화가 일어나, 그들이 이전 능력과 완전성을 돌려받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하다 인정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동도 실행할 수 없다. 지성의 맑음, 의지의 능력, 감정의 기품, 이 모든 것이 죄 된 인간 안에서 손상을 입었다. 여기에 또한 인간의 무능함이 있고, 이것이 여기 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선한 행위가 결코 완전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본성적인 무능과 도덕적인 무능 사이를 구분을 받아들인다 해도, 본성적 무능은 여전히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

 

37. 인간의 영적인 무능은 그의 자유 의지의 상실 때문인가?

 

이 질문은 다양한 차원을 고려하여 답해야 한다. 만일 자유 의지의 의미를 영혼으로부터의 강요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영혼이 행하는 즉흥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속성은 의지의 개념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자유롭지 못한 노예적 의지란 자체 모순으로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이와 달리 자유 의지를 인간의 의지가 선에서 악으로 또는 악에서 선으로 바꿀 수 있는 추상적인 가능성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자유의지는 타락 전에 존재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자들이 죄의 결과중 하나로서 자유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선으로 악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악으로 선을 만들 능력은 없다. 후자, 곧 어떤 선한 것을 일으키는 일, 나아가 악을 폐지하는 일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특권이다. 인간이 타락 이후 악을 행할 때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든 능력이 발전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방해하므로,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함과 구속됨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안에서 죄인으로 존재한다.

38. 어떻게 당신은 영적인 선에 대한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가르침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 교리는 다음으로 증명된다:

 

1) 성경이 그 어느 곳에서도 타락한 인간에게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2)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성경의 명백한 선언으로부터. Cf. 요 15:4, 5; 6:44; 롬 8:7; 고전 2:14.

 

3) 성경이 우리에게 원죄를 제시하는 형태로부터. 이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성경은 죄 된 인간의 자연 상태를 사망의 상태일 뿐 아니라 육적인 상태로 묘사한다. 이 두 가지 상들[사망, 육]에 포함된 비교점은 [인간이] 영적인 선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어떤 죽은 사람이 자신을 일으키거나 죽은 육체에 생명을 표출시킬 수 없듯이, 자연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 없다.

 

4) 인간이 부정적으로 말해서 단지 하나님 앞에서 죽고 육체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죽음 안에 무엇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발전되는 원리와 적의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성경의 설명으로부터. 따라서 인간은 단일 사슬이 아니라 이중 사슬로 전적인 무능함에 묶여 있다.

 

5) 만일 인간이 영적인 선을 이루려 할 때, 하나님의 호의와 교제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된다는 필연성으로부터.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머무는 한. 인간은 그의 인생에서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인간은 심판에 대한 의식 앞에 있는데, 이 심판에 대한 인식은, 다른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도, 모든 선한 행위를 그 뿌리부터 잘라내 버린다.

 

6) 하나님의 성령이 거듭날 때,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은혜의 사역의 필연성으로부터. 이것은 위의 Nr. 3)에서 언급한 것의 다른 측면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성령님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시요, 생명의 원천으로 소개한다. 성경에서 인간 영혼은 그 어느 곳에서도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항상 외부로부터 역사하는 은혜로 변화어야 할 대상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새로운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 등을 말한다.

 

7)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험으로부터. 누구도 그가 율법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깨어있는 죄인의 죄책의식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가 죄에 메여 있다는 것과 자신을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확신을 포함한다. 후자[인간이 스스로 구속할 수 없다는 확신]는 인간의 실제적 상태를 의식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로부터 이것이 실제로 무능함의 상태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39. 이 전적 무능력 교리에 대적하여

 

1) 인간의 전적 무능력은 인간의 도덕적 책임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반론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어떤 반론이 제시되었는가?

 

A. 선을 행하는데 무능력이 책임성과 양립할 수 없을 때는, 이 무능력이 도덕적이지 않은 기원을 가질 때이다. 이것은 인간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의 방향이 잘못되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어떤 것을 원할 본성적인 능력이 결여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에게 결여된 것은 자신의 능력의 선하고 도덕적인 성질이다. 우리가 본성적 무능력과 도덕적 무능함을 그별할 때, 이것을 진리의 핵심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도덕적이고 선하다는 것이 인간 본성에 속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도덕적 무능력을 또한 본성적 무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B. 인간의 법적 절차에서, 이 절차가 하나님의 길로 수행되는 경우에도, 책임성은 무능력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재판관도 피고가 언제나 그것 때문에 정죄받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능력이 항상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정죄 판결을 내릴 것이다. 더욱이 재판관은 바로 본성과 행위 사이의 관계에서 그의 판결의 이유를 찾을 것이다. 이것이 왜 사람이 피고의 성격과 고소당한 행동 사이에 일치점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때, 그것이 항상 유효한 증거로 생각되는 이유이다.

 

2) 인간의 전적 무능력 교리는 [선을 행할] 모든 자극을 제거할 것이라는 반론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단지 거룩한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만 유효하다. 그래서 이것은 경륜이 아직 율법적인 때이던 구약에서보다 신약에서 더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은혜 언약의 혜택들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향하는 영혼의 활동들의 경우, 어떤 자극을 제거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이것으 단순히 다음에서 설명되는 이유에서이다. 즉 이런 활동들은 영적으로 선한 행동이 아닌 도구적 행동으로 여겨진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믿음과 회개라는 은혜 언약의 요구가 온다면, 이것은 "영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의미이다. 물론 믿음과 회개의 경우, 그 안에 영적인 선의 원리가 포함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도 믿음과 회개는 거듭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은혜 언약의 혜택들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이런 관점으로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사람이 의를 얻는 믿음의 경우도, 질료적인 차원에서 볼 때, 여전히 죄와 불의로 오염된 영혼의 표출이다. 정화를 위해 믿음이 전달하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를 통해 의롭게 되는 믿음도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 아니다.

 

3) 인간의 전적 무능력 교리는 회개를 지연시킨다는 반론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맞지 않다. 인간이 자신의 힘과 자신의 주도권 아래 자신의 회심이나 심지어 자신의 거듭남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면, 이것은 그에게 무관심과 태만함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 있는 행위들이 우리의 영혼의 생명 안에 더 깊은 움직임을 야기하지 않고, 반면, 이와는 반대로 중요한 일에 있어서 무능력과 무력한 수동성에 대한 의식이 사람을 가장 깊은 심연에서 흔들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심리학적인 증거로 생각할 수 있다. 누구든지 인간에게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설교하는 사람은 인간이 이것을 쉽게 한 시간 후 다음 시간으로 미룰 수 있다고 기대할 것이다. 반면, 만일 이 무능력 자체는 죄책과 책임성으로 양심에 각인되었다는 것을 주의한다면, 인간에게 그의 조건에 관한 완전한 진리를 말하는 것은 결코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2.7.2.4 내재적 원죄의 범위

 

40. 무엇으로 원죄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결정할 수 있는가?

 

1) 성경은 모든 곳에서 모든 육체는 죄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그의 길이 부패했다고 가르친다(욥 14:4; 요 3:6; 롬 3:9ff; 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갈 3:22; 요일 1:8). 만일 모든 인간, 그가 누구든지, 심지어 아무런 실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예를 들면 막 태어난 아이)에게도 이것이 해당된다면, 이것은 그들이 원죄 때문에 죄책이 있는 것과 관련 있다.

 

2) 죄는 인간 안에서 너무나 일찍 드러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예를 모방함으로써 죄 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 존재가 시작되는 처음 순간부터 이 죄가 우리에게 들러 붙어 있다고 가르친다(시 51:5; 우리는 이 시편에서 다윗이 내재하는 부패를 변명이 아닌 자신의 간음죄에 대한 심각한 상황으로 인용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시 58:3과 엡 2:3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한다. 죄가 본성이라는 것은 죄가 우리의 인간됨과 함께 주어진 것이며, 생육이라는 본성적 선을 따라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 무엇보다 이 본문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이 내재적 죄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츠빙글리파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는 질병이나 결핍이 아니라 완전히 심판을 받을 만한 죄라는 것이다.

 

3) 죄의 결과는 보편적이다. 시간적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심지어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도 이른다. 결과가 있는 곳에 그 원인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소시누스주의자들과 항론파 사람들은 이것을 옳게 인지했다. 그들의 입장에 따르면, 육체적 죽음은 어떤 윤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cf. 롬 5:12-14). 신학파 신학은 이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인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아이들을 그들의 이성을 사용하기 전에는 동물들과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이 입장을 감히 취하지 않으려고 했다.

 

4) 성경은 도처에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구속인가? 이 구속은 일차적으로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속이다. 따라서 만일 원죄의 규모를 결정하려 한다면,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필연성을 결정하는 것이 된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다는 표와 인이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원죄의 실재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유아들에게 구속은 악으로부터 해방이 아니요, 단지 악을 막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은혜 수단의 지속적인 의미와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 3:3, 5*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가르치신다(cf. 행 17:30; 막 16:16).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때, 그는 [그 때] 처음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고 있는 것이다(요 3:36).

 

5) 성경에서 몇 군데는 죄가 인간에게 보편적이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우리는 다음 3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A. 시민적 의. 시민 사회 영역에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지 않으면서, [시민 사회] 법을 의도적으로 범하지 않을 수 있다.

 

B. 이스라엘 내의 언약적 의. 어떤 이가 모세의 법이 규정하는 의식법을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이루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이 언약적 의를 소유한다. 그러나 이 의는 기껏해야 단지 예표적 의미가 있는데, 이는 믿음의 의가 아니며, 행위의 의는 더욱 아니다. 시편의 많은 구절들은 이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cf. 시 18:20; 37:36-40].

 

C. 전가된 의.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의로, 이것은 내재적 의를 전제하지 않고, 그것을 정확히 배제한다. 인간의 의와 죄 없음을 말할 때, 모든 본문은 이 세 그룹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6) [인간] 경험은 이 세계를 살아간 어떤 피조물도 죄없는 것은 없었다고 증거한다. 심지어 원리상 원죄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이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고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내재적 부패성이라는 설명 외에 다른 모든 설명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죄인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반대 중거일 수 없다. 죄는 눈을 멀게 하는 권세이다. 이 권세를 통해 죄는 그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한다. 반대로 은혜의 진보가 있을 때, 그것은 죄와 자연적 마음의 무능력에 대한 깊은 통찰과 함께 간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41. 어떻게 이 내재적 부패가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전가되는지에 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1) 대다수 개혁파 신학자들은 죄는 비질료적인 무엇으로서 아버지의 씨에 숨겨질 수 있다는 데에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따라서 죄의 전파도 이 씨로부터 몸이 기원하는 것과는 다른 근거가 있어야만 했다.

 

2) 죄의 전파는 생식 행위의 죄 된 성질에 돌려질 수도 없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생각이었다. 이것은 죄를 육체의 정욕으로 보는 편협한 견해와 관련있다. 인간이 그것을 통해 태어나는 그 행위가 전적으로 죄 되다는 것은, 이 행위의 산물이 또한 죄될 원인이 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죄는 성질이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단지 그 행위를 한 사람들의 영혼에 자리잡을 뿐이며, 그들의 육체는 단지 이 영혼의 유기적 도구일 뿐이다. 그 행위 자체는 형이상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생각할 때 전혀 죄 된 것이 아니다.

 

3) 세 번째 견해는 영혼의 죄성을 영혼이 육체에 접촉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다. 이 견해 또한 주요 교의학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 견해가 옳다면,] 그러면 영혼은 죄없이 창조되었고, 육체와 연합하는 순간에야 죄가 있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여기에 물질설적(또는 유전설적) 결론을 피하기 위해 무언가를 덧붙여야만 한다: 즉 육체나 배아의 부패성이 자체로 죄를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원의를 빼앗긴 영혼이 이것을 하는[죄를 짓는] 그런 부조화한 육체와 연합이다. 따라서 육체 안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자체로 죄가 없지만, 그들의 생각에, 영혼을 통해 얻게 된 육체의 어떤 상태가 그것[영혼]에 죄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영혼]은 우리를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적극적인 거룩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는 육체 자체에도, 영혼 자체 안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성에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인간의 본성은 육체와 영혼의 유기적 결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을 예를 들면, 피터 버밀리와 폴라누스, 베나딕투스 아레티우스, 휘페리우스, 케커만 등이 있다.

 

4) 대부분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은 언약에 입각하여 아담의 첫 번째 죄의 죄책을 영혼에 전가한다.

 

B. 이 일이(하나님의 판결로) 영혼의 실제적인 존재 이전에 이미 일어난 후에, 하나님은 영혼이 존재하게 하는 곳에서 창조자와 심판자 이중 자격으로 나타나신다.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영혼의 실체를 무로부터 나타나게 하신다. 심판자로서 하나님은 그 실체로부터 이미 이 창조시 원의라는 기질을 거두신다.(단지 몇몇 신학자들, 예를 들면, 잔키우스 등은 영혼이 매우 짧은 시간 원의를 가졌으나 그 후 즉시 잃었다고 가르쳤다).

 

C. 원의 없이 존재하게 된 인간 영혼은 즉시 적극적 내부적 부패로 넘겨진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으로부터 거두어 가신 필연적이고도 직접적인 결과이다. 이것은 실재이며, 실제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영혼에 행하시는 무엇이 아니다. 단지 영혼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시는 특별한 방식을 통해 겪게 되는 어떤 것이다.

 

이 마지막 설명이 우리에게도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명이 모든 반론을 잠재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중 아주 큰 어려움은 첫째, 하나님을 죄를 조성하는 일과 상관없는 분으로 붙들려고 할 때, 만나게 된다. 둘째, 영혼이 단 한 순간도 무죄 상태에서 존재하지 않도록 할 때이다. 이 두 조건 모두 하나의 일관적 이론으로 통합할 수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야기하지 않으셨다면, 죄는 이미 존재하는 영혼에서 발생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것은 죄 없음에서 죄 됨으로 이동이며, 만일 사람이 이것을 시작점으로 저것을 종착점으로 둔다면, 그러면 영혼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죄없는 상태로 두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잔키우스가 시초에 소유했다가 그 후 곧 상실한 원의와 관련하여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은 우리가 섭리론에서 하나님의 인간의 악한 행위에 관여하신다는 것과 동일하다. 거기서도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배제될 수 있었는지 어떤 지점도 표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고 실행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 행위는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어떤 방향과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많은 비유들을 가져올 수 있으나, 이들 모두는 대체로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를 줄 뿐,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아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육체 밖에서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육체와 긴밀한 연합속에서 창조하셨다. 배아는 밖에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기관을 통해 형성되나 스스로 어떤 형성원리를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원리를 영혼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자란 배아가 계속해서 어머니 기관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런 점에서 또한 영혼은 후자[어머니 기관]와 긴밀히 연결된다. 여기에 유전설이 갖는 진리의 일면이 있다.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가장 깊은 내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들은 유기적으로 하나이다. 그래서 육체가 여전히 모체의 일부를 구성할 때, 그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전파까지 확장되는 데에까지 끄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생각과 의지, 감정은 전체 또는 일부가 육체적 기관들과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또한 반대로 이 기관의 형성을 통해 그들의 발전이 결정된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죄에 관하여 동일하게 말할 수 없다. 죄는 육체를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죄가 육체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은 죄의 강도에 대한 척도일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죄는 본성상 순수히 영혼에 관련된 것이다.

죄는 타락 후, 그렇게 되자 마자 인간의 본성적 상태에 속한다.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은 재생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규정은 본성적 성향과 속성들은 부모와 자녀들에게 공통적이 되도록 한 것이다. 반면, 순수하게 인격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은 재생산될 필요가 없다. 본성이란 용어는 우리가 이 용어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을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인격성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에서 고유하지 않고 각자마다 차이가 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죄가 본성 죄이며, 따라서 본성적인 전이의 선을 따른다는 것을 확고히 붙들어야 한다.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더 설명할 수 없다. 이 일이 일어나는 근거는 단지 본성의 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죄의 본성적 성질은 그들이 여전히 모든 사람에게 인격적인 모습을 취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죄 된 의지와 어두워진 지성 그리고 부패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기관들의 소유한 인격성이 각각 특별한 경우에 모두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죄 또한 그 어느 곳에서도 두 개별자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거나 동일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다.

 


게르할더스 보스의 '개혁 교의학(신론, 인간론)'에서 발췌(458-47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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