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a24ae9cbab46a7a6b4035990b759078_1528448714_3.jpg“퀘렌시아”는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입니다. 투우장 한쪽에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구역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소는 투우사와 혈전을 벌이다가 쓰러질 만큼 지쳤을 때 바로 이 피난처 구역인 ‘퀘렌시아’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힘껏 에너지를 모읍니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 힘을 모을 수 있고 쉼을 가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회복의 장소이자 ‘퀘렌시아’입니다. 곤충의 퀘렌시아는 나뭇잎의 뒷면이고, 땅 두더지의 퀘렌시아는 땅굴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퀘렌시아가 필요합니다. 일에 지쳐 휴식이 필요할 때,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억장이 무너질 때, 그때가 바로 나만의 ‘퀘렌시아’를 찾아가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의 ‘퀘렌시아’는 어디입니까?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퀘렌시아’는 바로 가정입니다. 아무런 부끄럼 없이 얘기도 하고, 핀잔도 받고, 인정받기도 하고, 쉬면서 치료받고 회복되는 그런 감사와 기쁨을 주는 곳입니다. “가정은, 가족은 그런 겁니다.” 어느 한분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동생이 중학교 2학년이었던 시절입니다. 집 근처에 학교가 있어 걸어 다녔던 저와는 달리 동생은 학교가 멀어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늘 엄마가 주시는 차비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차비를 들고 집을 나선 동생이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괘씸했습니다. 그래서 쫓아가 따져 물었더니 “가족의 평화를 위하여”라는 이상한 말만 하고 씩 웃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어김없이 엄마는 동생에게 차비를 주었고, 그 모습을 본 저는 "엄마 차비 주지 마세요. 버스는 타지도 않아요. 우리 집 생활도 빠듯한데 거짓말 하는 녀석한테 왜 차비를 줘요!" 하며 동생이 얄미워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먼 길을 걸어 다니는 동생이 안쓰러우셨는지 내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에게 차비를 쥐어주며 "오늘은 꼭 버스 타고 가거라"라고 당부하시며 보냈습니다. 그 차비가 뭐라고 전 엄마한테 왜 내 얘긴 듣지도 않냐며 툴툴대기 일쑤였습니다. 며칠 후, 학교 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주방으로 얼른 뛰어가 보니 놀랍게도 맛있는 불고기가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워 고기는커녕 끼니 챙겨 먹기도 힘든 상황이어서 더욱 기쁨은 컸습니다. 저는 얼른 들어가 고기를 한 쌈 크게 싸서 입에 넣으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오늘 무슨 날이에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날은 무슨 날... 네 동생이 형이랑 엄마 아빠 기운 없어 보인다고, 그 동안 모은 차비로 고기를 사왔구나" 그 먼 길을 가족이 오순도순 고기를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뻐할 진정 가족의 평화를 위해 걷고 또 걸었다고 했습니다. 성인이 되고 불고기라도 먹는 날이 면, 그날 동생의 모습이 생각나 대견함에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가족은 그런 것 같습니다. 형이 못하면 동생이, 동생이 부족하면 형이, 자식에게 허물이 있으면 부모가, 부모님이 연세가 들면 자식이. 그렇게 서로 감싸며 평생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 가족은 그런 것 같습니다.


“형제자매가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라. 물론 많이 싸우겠지, 하지만 항상 누군가 곁에 있잖아,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곁에 있잖아”(트레이 파커). “가정은, 가족은 그런 겁니다.” 세상을 살아갈, 이겨낼 사랑의 그런 추억을 주는 곳입니다. 어머니날에 나온 어머니들의 반격. "꽃 한송이로 퉁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안에는 그래도 내 아들들, 내 딸들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가슴에 전해집니다.


얼마 전 서울여자대학교 사랑의 엽서 공모전에서의 대상작입니다. -나에게 티끌 하나 주지 않은 걸인들이 내게 손을 내밀 때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전부를 준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나한테 밥 한번 사준 친구들과 선배들은 고마웠습니다, 답례하고 싶어서 불러냅니다. 그러나 날 위해 밥을 짓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드라마 속 배우들 가정사에 그들을 대신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일상에 지치고 힘든 어머니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골방에 누워 아파하던 어머니 걱정은 제대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친구와 애인에게는 사소한 잘못 하나에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잘못은 셀 수도 없이 많아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가정은, 가족은 그런 겁니다.”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 인생의 크고 작은 깨달음이 있는 곳, 바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는 그 용서와 화해, 쉼과 위로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경험되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족입니다. 가정의 달을 지나며 다시 한번 삶에 채워봅니다. “가정은, 가족은 다 그런 겁니다.”


은희곤 목사 (참사랑교회) pastor.eun@gmail.com

ⓒ 미주크리스천신문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사5:4)”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종종 “신앙이 좋다, 나쁘다” “믿음이 좋다, 나쁘다”라는 표현을 큰 주의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가량 ‘주일날 예배 참석을 빠지지 않고 한다’던가, ‘헌금을 잘 낸다’던가, ‘교회내 봉사 활동에도 열심히 있다’던가 하면, 흔히들 “신앙 좋고” “믿음이 좋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을 때는 “신앙이 나쁘다” “믿음이 없다”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또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상대의 신앙을 얘기할 땐 쉽게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가?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 이전에 무엇보다 성경을 대하는 자신의 중심이 어떠한지 살피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와 현재의 신앙상태가 꼭 같을 수는 없다. 또한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수시로 자신의 신앙상태가 어떠한지, 신앙생활은 바르게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크리스천의 신앙상태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이다. 과연 현재 나의 신앙상태는 아래의 유형에 해당하는 것들은 없는지 스스로 반성하고 견책한다면 앞으로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있지 않을까. <편집자주>
 
 바리새파적 신앙(눅18: 11-12)
"나는 떳떳한 의인…율법을 하나님보다 중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부류가 오늘날에도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의외로 교회에서 이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누구보다 신앙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어느 집사, 장로를 떠올리기 이전에 자신을 스스로 점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지는 않는가. 율법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죄가 없고, 스스로 판단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의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가. 한마디로 바리새파적 신앙은 율법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긴다고 하겠다. 
 
 기복주의적 신앙(행8:18-19)
"외형적인 복 중시…복 받기 위해 예수믿어"


솔직히 지금까지의 한국교회는 좋은 신앙의 기준을 눈에 보여지는 ‘외형적인 복’에 초점을 둔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상품 가치가 없는 들포도와 같은 무늬만 성도인 크리스천들이 대량 양산되어진 것은 아닐까. 이 유형은 ‘복’에 대한 개념을 잘못 배운 것인지, 아니면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하면 신앙의 실패자로 보고, 물질이 없으면 예수를 잘못 믿어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결국 복 받기 위해 예수를 믿으며, 물질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우를 범한다.
 
■ 추상적 신앙(욥42:5)
"정말 하나님 계실까…안 믿자니 손해같고 믿자니 속는 느낌"

 
실재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다. 즉 “하나님이 진짜로 계실까?” “천국과 지옥은 실재 존재하는 걸까?” “성경은 정말 정확무호한가?” 반신반의하며, 막연한 생각으로 믿는 신앙생활이라 하겠다. 이런 신앙은 성경도 확실히 믿지 못하고 “어떤 내용들은 교훈이 되라고 꾸며낸 이야기 일거야”하는 식으로 늘 미적지근할 수밖에 없다. 안 믿자니 손해 보는 것 같고, 믿자니 속는 것 같은 어정쩡한 유형으로 믿음이 자랄 리가 만무하다.  
 
 자기중심적 신앙(롬2:1)
"나는 부족함 없어"…영적상태는 '가뭄'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유형이라 하겠다. 자기만 옳고 완전하다고 하는 이기적인 신앙으로 영적상태가 메마르기 쉬울 수 있다. 내 의와 내 주장과 내 뜻이 강한 스타일이기 때문에 상대는 틀렸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정도가 심하면 자신의 부족성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온전함을 주장하는 유형이랄까.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자신이 대신 주인이 되어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미신적 신앙(사1:11-12)
"한인에게 많은 유형…지성이면 감천일터"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인들에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이렇게 까지 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실까”하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부류. 덮어놓고 오래하고 많이 하면 들어주시는 걸로 착각한다. 이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뒤로 하고 내 열심으로 잘 받들고 공을 들이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의 타입이다. 잘못하면 안 되니까 잘해야 된다는 자신의 의가 하나님 말씀보다 앞선다고 진단된다면,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먼저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이 순서이지 않을까.

 

출처: 크리스챤 투데이 

 

 

송금관 기자

1938년 "9월 9일"은,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의한 날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12시 정오에 사이렌이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일본 천황에게 절을 하기로,

교단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결의를 했다.


더 나아가...

신사참배를 하고 난 후,

신도들에게 헌금을 걷어서, 

일제 전투기 3대 값으로 

일본 정부에게 바쳤고,


무녀나 승려들이 받는 천황종교의 세례의식에 

한국교회 목사들까지 다 참여하기도 했다.


총칼의 위협앞에 한국교회가 

신앙을 져버리고 우상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심한 고문과 박해로 인해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여러번 있었던 일이지만...


교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배도하기 위해 교리까지 바꿔버리는 일은 

2000년 교회사에 전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이땅에서

한국교회가 저지르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끔찍한 배도가 

1907년 대부흥이 일어났고,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땅에서 일어난 것이다.


1938년 9월 9일,

이 끔찍한 배도가 낳은 열매는 바로


1948년 9월 9일,

북한 우상 정권이 수립된 날로 저주의 싹이 나게 되고,


1958년 9월 9일 

북한의 모든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폐쇄한 날로 그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1998년 9월 9일은 김정일 정권이 수립된 날.)


참고: http://reading-tg.com/220810050912


9월 9일...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절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이 당신께 어떤 끔찍한 배도의 죄악을 저질렀고,

그로 인한 무서운 보응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를,

'9월 9일'이란 날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경고의 사인'을 보내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1907년 성령의 대부흥이 임했던 

평양 장대현교회 바로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이 세워진 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경고의 사인'을 알 수 있다.

참고: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66&replyAll=


그리고, 6.25사변 후

북괴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전국토가 함락되고,

부산경남 지역만 남겨져 있었는데,,


부산경남 지역만 

마지막까지 유일하게 지켜졌던 이유는 바로,

신사참배 결의 당시,

여러지역 교단들 가운데, 

유일하게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한 교단이 

바로 경남노회였기 때문이다.

참고: https://blog.naver.com/up0124/220938117761


행한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경고의 사인'인 것이다.


1948년 이후부터 한반도에서는 

민족 최대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1950년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인한

6.25가 발발해 4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90년대엔 북한에서 

무려 30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인구 2,400만 가운데 

전쟁없이 300만명이 굶어죽은 것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치범수용소에서만

무려 100만명의 사람들이 

70년이 된 지금까지도 학살당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중에도 자비를 잊지 않으셔서,

남쪽땅에서만큼은 

신사참배의 끔찍한 죄악 속에서도,

결코 촛대를 옮기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선

남쪽땅엔 자비를 베풀어주셨는가?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이 나라를 의탁하기로 선포하고

공산 치하에 노예로 붙들린 동포들을 해방하고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는

언약적 선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언약적 선포는 국가적 선포 이전에

남한의 교회들과의 언약이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에게

부르심의 언약을 이어갈 기회를 

한번 더 주시기로 결정하실 때,

하나님의 뜻은 아마 이러지 않으셨을까?


"너희들이 비록 나를 배반하는 죄악을 저질렀지만,

그 죄에 대한 보응은 

이 정도(분단, 6.25)로 유보하고,

나와 맺은 언약을 

너희들(대한민국)이 잘 이어가도록

충분한 지원(부흥과 경제발전)까지 다 해줄께

하지만 언약 꼭 지켜야 한다.

언약을 잘 이행해내는지 지켜보고 있겠어."


그렇게

7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배도로 인한 보응으로 

이 민족을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그래도 대한민국에게만이라도,

언약적 부르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는데...


교회가...

고통속에 죽어가는 

북한 동포 해방을 위해


합심해서 발벗고 나선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합심해서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되려 고통속에 죽어가는 

북한 동포 해방은 커녕 

저 북한 태양신 정권과의

가증한 혼합을 참된 평화인 것처럼 

미혹하는 거짓된 흐름에 

이땅 교회들까지 전부 미혹되어 놀아나면서 

신사참배보다 더 악독한 배도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게 지금의 현실이 되버렸다.


세계선교를 위한 

마지막 때 제사장 나라로 언약을 맺고 

부요와 축복까지 더해줬더니,


총칼의 위협 속에 

마지못해 했던 배도도 아니고,

아주 자발적으로 자랑스럽게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여기며,

다른 이방 잡신들과 가증한 혼합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음녀짓거리(WCC)를

교단들이 앞장서서 저지르고 말았다.


이런 상황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이 나라를 어떻게 다루실까?


신사찬배의 죄악에 대한 보응으로 

6.25라는 참혹한 환란과 

남북이 갈라져 70년간 

북한땅에 내린 저주의 열매를 

그 후손 교회들이 

아주 분명하게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면 정녕 몰라서 이러는건가?)


이보다 더 심각한 배도의 죄악이 

1+1으로 더해진 상황에서,


이런 끔찍한 죄악들을 

어찌 하나님께서 

그냥 눈감아주실 수 있겠는가ㅜ


정녕 우리가 아는 공의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일까?


어쩌다 교회들이 이렇게 영이 닫히고

눈과 귀가 멀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뻔히 보이는 것도 못 보고,

눈뜬 소경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어쩌다...

이땅의 교회가 이 지경까지 와 버렸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땅에는 아직

하나님과의 언약적 부르심을 기억하고,

무너져가는 현실에 애통해하며,

눈물과 간구로 주님께 나아가는 

소수의 깨어있는 중보자들이 있다.


WCC가 열릴 때도,

간절히 중보로 막아서고, 

행동으로 막아서던 자들이 있었다.


북한의 저 우상체제가 박살나고

북한 주민들이 해방되어 

자유복음통일을 이뤄달라 기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지금껏 해온 

애통한 마음과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실거라 믿는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수많은 교회들이

스스로 아무 문제없이 잘하고 있다 착각하면서,

"세계에서 두번째로 선교사 파송하는 나라니까..."

이런 교만한 마음 품고 

죄롤 죄로 여기지도 못하고,

회개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이 나라 교회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과 맺은 언약을 파기치 않으시고,


촛대를 옮겨버리는 '멸망'이 아닌,

"죄의 보응"의 '징계'를 허락하셔서,

교회가 그제서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주실 것이다.


그렇게 믿고싶다...

그렇게 기도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땅 교회들에 주실 수 있는

마지막 '긍휼'과 '자비'의 기회이다.


(참고로, 2018년 나팔절이 9월 9일임.

나팔절, 즉 ‘로쉬 하샤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함.)



글: 엘샤다이

죽은 자의 부활   


찬송 : 164장 예수 부활했으니

성경 : 고린도전서 15: 13~20

요절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세상의 삶 뿐

       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

       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

       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19~20)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사를 나눌 때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배고픈 시절, 한 끼의 밥이 그들에게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2천 년 전 초대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

다."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부활이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부

활은 기독교 신앙의 초석(礎石)이며 근본입니다.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

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원한 삶(eternal life), 천국이 있는지도 모른채 여전히 죄 가운데서 허우적대며 덧없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를 뻔히 아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실 수 없

으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 죗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셨습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만일 환

난과 시험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이 세상이 끝이라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

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예수님 믿으세요!"라고 전하

는 복음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나를 믿은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은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고 물으셨던 예수님은 직접 부활하심으로서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결국 기독교는 '십자가의 믿음'과 '부활 신앙'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

은 이후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은 사람들은 이미 모든 죄를 용

서받았기에 두여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살기에 죽

음 이후의 삶을 기다립니다.성도에게 죽음은 종말이 아닌 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이며, 예수님의 부활 역시 나의 부활입니다. 이 선명(鮮

明)한 전리를 붙잡은 만큼 ,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날마다 감사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기 바

랍니다.


* 부활 신앙을 마음에 가득 품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사는 일에 힘들고 지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라는 가장 무거운 고통을 짊어지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인내할 수 있게 하옵소서.부

활하신 주님과 영원히 산다는 소망을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

다. 아멘.


                                                  최재화 감독  명암교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찬송 : 171장 하나님의 독생자 

성경 : 누가복음 3:23~38

요절 :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 시니라(38)


사람은 빈손으로 태어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갖게 되는 한 가지기 있습니다.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합니

다. 새 생명이 태어남과 동시에 부모 된 이들은 자식을 사랑하고 양육해야 하는 첵임

을 갖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요셉과 마리아라는 부모를 통해서 오셨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 칭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족

보 맨 처음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38)


또한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마3:17,17:5, 막 97,눅 3:22, 벧후 1:17"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심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임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

기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왜 굳이 사람의 혈통, 즉 족보가 성경에 기록돼 있으며,

그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the son of god)

이시며 또한 인자(the son of man)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란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즉 그리스도란 말이며, '인자'란

우리와 같은 육체와 성정(性情)을 지닌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

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

가의 길을 가는 사명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후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다시 영광의 그리스도

가 도셨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을 믿은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영생

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려고 사람으로 오셔서 희생 제물이 되셨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서 '영원히 사는 그리스도인' 으로의 본(本)을 보여 주셨습니다.그렇게 앞

장서 가신 길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은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

게 하는 복음의 진리이며, 우리가 믿은 바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기 없느니라."(요 14:6)


하신 말씀처럼,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과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믿고, 예수님을 열

심히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사람의 아들임을 믿고 고백하며 살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신 주님,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부활하심

으로 구원과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신비와 사랑을 기억하고 사

랑으로 고백하면서 진리 위에 굳게 서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홍규 목사  큰믿음유신교회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 2:2-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세 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사람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사람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아시고
그 죄값을 치르기 위한 속죄제물로서 준비된
하나님의 비밀이었습니다.

인류가 범죄한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셨다는 듯이 
0.1초도 안되어 즉각적으로
구원의 언약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겠다는 건...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친히 인간세상에 내려오시겠다는 것이고

뱀이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건...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대신 달려 죽으시겠다는 것이며

뱀의 머리를 밟으신다는 건...
무덤을 박차고 부활하사 죄와 사망권세를 
완전히 이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치밀한 구원계획이
이미 창세 전에 완성되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 전부터 존재하셨던 그리스도 안에는
창세 전에 택하셨던 내 영혼이 들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진
내 자신이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8-9)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제대로 깨닫고
믿음의 전원을 연결시키는 순간...
그 안에 창세 전부터 꼭꼭 감취어져 있었던
나의 진짜 본질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하나님은 창세 전에
앞으로 지구상에 지으실 모든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지구상에 존재할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각오하고 시작하신
아가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창세 전부터 준비된 이 사랑에 
믿음의 전원을 연결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창세 전에 완전하게 퍼부으신
조건없는 그 사랑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버리시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류가 범죄한 후
당황하셔서 급하게 뒤치닥거리 하듯
십자가를 뒤늦게 준비하시고 처리하시는
허술한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을 만드시기 훨씬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사랑이었으며...
이미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창조하기 전부터 
완성된 상태였습니다.

단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인간세상에서
그 완성된 구원이 순차적으로 실행되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죄를 앞섭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속죄제물인 그리스도의 몸이 
예비되어 있었고...

죄가 온 세상을 집어삼키기 전에
먼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나타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태초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예수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탄마귀는
단 한번도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쫓겨나 공중으로 내려오고,
공중에서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땅으로 내동댕이 쳐질 것이며,
땅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어
땅 밑 무저갱에 천년동안 갇힐 것입니다.

천년왕국 이후 무저갱에서 잠시 나와 
성도를 미혹하다가 결국은
영원한 지옥불못에 던지워져
세세토록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히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비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내 모든 삶 가운데
승리의 주님으로 함께 하십니다. 마라나타!

<적용>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루되기 원합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오시기 전에는 늘 부분적으로 행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삶에 오셔서 내 마음 한복판에 보좌를 틀고 좌정하신 이후부터 제 삶은 바뀌었습니다. 내가 주인되어 살았을 때에는 믿음생활도 내 기준과 내 생각에 따라 내 맘대로 신앙이었습니다.

내가 머리로 만든 하나님, 내가 머리로 지은 성전에서 표면적으로는 주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내 자아를 섬기고 있었던 지난 날의 모든 죄악을 회개합니다. 이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복음을 만난 후부터는 진정 주님께서 제 삶의 주인이 되셨나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시는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내 안에 주께서 사시는 이 삶을 날마다 노래하며 남은 생을 살 것입니다. 죄인된 날 사랑하사 완전 파산한 내 삶을 창세 전에 이미 접수해 주신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받은 사랑 나누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곰팅이의 하늘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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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의 특징 10가지

美뉴욕 레저렉션 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셉 마테라(Joshep Mattera) 목사의 말이다. 그는 미국 보수교회의 대표적인 인물로, 최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10가지 징후"(10 Signs You Are a Secular Believer)라는 칼럼을 통해 이와 같이 주장했다.

조셉 마테라 목사는 이 칼럼에서 "1981년부터 목회 사역을 해왔고,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먼저 말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이들 중 상당수가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다음과 같은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의 특징 10가지를 소개했다.

 

1.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신앙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다(이를 무신론적 유신론이라 함 - 편집자주). 왜냐하면 이들은 결혼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는 것, 직업을 바꾸는 것, 교회를 바꾸는 것 등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성경 말씀을 찾아보지 않으며, 영적 지도자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

 

2.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한다.

세속적인 셀피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지혜의 시작인 여호와를 두려워하기보다 친구들에게 보여지는 겉모습(외양), 지위, 인기를 더 추구한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할 때, 우리는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이 아니라 돈에 이끌린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보다 돈을 우선순위에 둔다면, 당신은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많은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는 이들이 일을 하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신앙의 공동체와 교제하는데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 이유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하신다고 하셨다(마 6:33).

 

4.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위해서다(사람들을 사귀려고).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목적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 주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성도와 교제하기 위해서다.

 

5. 대중문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방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연애(데이트), 혼전성관계, 옷, 대중음악 등에 있어서 세속적인 가치들을 신봉한다. 이것은 나에게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꽥꽥거리면 오리일 것이다(If it looks like a duck and quacks like a duck, then it's a duck!)'는 속담을 상기시켜 준다. 당신이 내적으로 세상의 가치 시스템을 찬양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의 생각(spiritually-minded)이 아니라 육의 생각(worldly-minded)을 하는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다.

 

6.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 일부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일부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전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7.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이곳 저곳에서 잽싼 기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축복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며, 성경을 따라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8. 당신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은 지난 5년이나 10년 사이에 단 한 명의 영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포섭되어 있어서 영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구원 받지 않은 가족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 등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전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9. 제자를 삼지 않는다.

구원 받은 이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한 명의 영혼을 제자로 삼는 일을 위해 조금도 투자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당신이 현재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멘토링을 해주거나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대위임령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목회자나 장로 등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다른 이를 제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0. 재정에 있어서 성경적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편할 때만 헌금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자신들의 생명이나 돈이나 부에 대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십일조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소유의 10%가 아니라 그들의 소유의 100%의 주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돈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당신은 성경적 청기지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천헌옥 choug2@hanmail.net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http://m.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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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순종의 상관관계

믿음 따로 삶 따로

 

믿음이 있다면서 그에 상응하는 순종의 삶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함께 가고 분리될 수 없음에도 그들이 그 둘을 분리시키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까닭이 뭘까, 잠시 헤아려 보았습니다.

 

믿는다면서 삶은 전혀 믿는 자 같지 않은, 요즈음 소위 “개독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는 바울의 선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든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사도는 지금 첫째,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고 둘째,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지지 우리의 어떠한 행위로도 얻을 수 있는 게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아,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구나, 그러니 믿음은 좋은 것이고 행위는 안 좋은 것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공식화한 게 아닐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어느새 ‘믿음’을 ‘믿어서’라는 행위로 대치시키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받았다, 그러니 너도 ‘믿고’ 구원받아라” 아마 바울 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지, 바울은 여기에 대해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확실히 밝혔는데도 말이지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또 다른 이유는 “행위는 자기 의를 조장한다”는 가르침에 대한 지나친 몸사림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말씀대로 살려다,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그런다는 말을 들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런 속말을 들었거나 하여 행함에 주저함이 생기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경우보다는, 믿음대로 살자니 귀찮기도 하고 불편한 것도 많고 손해보는 것도 많기에, 다시 말해, 내 욕심, 내 마음, 내 감정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싫어서라는 것이 더 큰 이유일 듯합니다.

 

믿음의 순종

 

이렇게 선물로 주어진 믿음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순종을 유발시킵니다. ‘믿음과 순종’이라고 하니까 그 둘을 분리시켜 별개의 상호독립적인 관계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둘은 상호유기적인 불가분의 관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순종이 믿음에 의존하는 그러면서도 순종이 더 큰 믿음을 만드는 역동적 선순환의 정비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순종도 자라고, 순종이 자라면 믿음도 자라는 그런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순종’이라는 것이 보다 좋은 표현일 것입니다. 믿음에서 나온 믿음에 근거한 순종(행동, 행위). 역으로, 순종으로 드러나고 증명된 믿음. 그래서 야고보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내게 보이리라.” (약 2:18)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도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일관되게 순종 곧 행함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하고 시작되는 곳부터입니다. 너희는 선물로 받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한 군데만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 9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배우고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과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믿음의 내용이지요. 듣고 본 것은요? 그 믿음따라 사는 바울의 삶의 내용일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 믿음을 사는지 너희가 듣고 보지 않았느냐, 너희도 그렇게 그 믿음을 살아내어라,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친절하게도,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거랍니다. 왜 이 말을 덧붙였을까요? 믿음을 따라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그들에게 닥칠 어려움과 조롱과 멸시와 핍박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약속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평강, 평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세상 평화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이며 그래서 언제 깨어질까 조마조마하고 두려운 것인데 반해, 하나님의 평화 곧 샬롬은 아무런 근심 걱정과 두려움이 없는 완전한 평화입니다. 거기엔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니 아무런 주저도 두려움도 없이 너희의 믿는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장

 

말씀은 믿음을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만으로 자라지는 않습니다. 믿음이 자란다 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내용의 양과 질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견고함입니다. 전자는 말씀으로,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자랍니다. 그러나 믿음이 견실하게 자라는 것은 오직 말씀대로 행하고 살아 봄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순종했더니, 그렇게 살아 보니까, 과연 말씀대로 되더라는 확인이 말씀에 대한 신뢰를 더 하게 되고 또 다른 순종을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 체험으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순종에 응답하십니다. 순종했는데 모른 체 계시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쌩까지 않으십니다. 순종에 대한 즉각적인 인정이 주어집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러한 인정만으로도 순종의 충분한 보상이거늘 이외에도 이런 저런 부상을 덤으로 얻는 경험이 쌓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점점 자라고, 하나님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자주 더 큰 순종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칭찬을 얻기 위해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바쳐 충성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 위해 무엇을 가리겠습니까.

 

(칭찬 하니까, 제 어릴 때 기억 하나가 스치는군요. 아마 네다섯 살 때였을 겁니다. 형과 누나와 함께 밖에서 놀고 있었는데 둘 중 누군가가 제게 집에 가서 무언가를 가져 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대답이 왠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아, 착하다 하면 갔다 올게.” 물론 형인지 누나였는지가, “그래, 우리 유상이 착하다”고 말해 주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심부름을 해 주었지요. 지금 생각난 건데, 엄마가 제게 무얼 시키실 때 늘 “우리 유상이 착하지” 하셨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지금도 저는 칭찬에 무척 약합니다.)

 

말씀만으로는 믿음은 견고해지지 않음은 자주 인용되는 마태복음서 7장 24절부터 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로 뒷받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한 자의 믿음은 견고하여 심한 비바람을 견디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즉 말씀을 듣기만 한 자의 믿음은 사상누각처럼 허약하여 강한 비바람의 시험 앞에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바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각만으로는 이웃을 위해 대단한 희생도 할 수 있고 더우기 주님을 위해서는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웃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라도 더 가질까 온갖 궁리에 힘과 시간을 쏟습니다. 혹시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어떠한 불이익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여 예수 믿음을 감추기도 하고, 대충 믿는 척하기도 하며, 세상사람들이 황당해하고 놀리는 성경의 특정 부분들과 나아가 복음을 부끄러워 합니다. 분명히 말씀을 읽을 땐, 설교를 들을 땐 순교자의 심정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행함을 강조하시는 것이 명백함에도 이 비유를 가르칠 때 혹여 행위구원을 가르친다는 말을 듣게 되지나 않나 몸을 사리는 교사들이 많은데, 그래서 심지어 박영선 목사조차, 이것은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초점이 있는 비유라고 다소 무리하게 해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집을 지은 행위는 두 사람에게 다 있었다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차이는 한 사람은 주님의 말을 듣고 지었고 또 한 사람은 주님의 말이 아닌 다른 사람의 혹은 자신의 생각대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가르침은,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아닌 주님의 말만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더군요. 그때는 그런 줄로만 알았고 지금도 꽤 그럴듯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그리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러한 해석은 행위구원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린 억지 해석이지, 바른 해석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주님과 함께 무려 삼년 반의 시간을 함께 숙식하며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의 믿음이 주님의 십자가 처형과 함께 무너져내린 것을 압니다. 베드로를 필두로 한 열두 제자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 마지막까지 큰소리쳤으나 주님의 처형장엔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꼈던 요한 뿐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다니는 동안 그들의 주된 관심은 누가 더 크냐, 다윗왕국이 회복되면 누가 무슨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였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복음서를 쓴 제자들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참 제자답게 살기 시작한 것은,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뵈온 지도 몇 달이나 지난 오순절에 그들에게 성령께서 능력을 입혀 주신 후부터입니다. 그날부터 그들은 복음을 담대히 전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내 것 네 것 없이 필요에 따라 쓸 것을 나누는 등, 지금까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살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이 쌓여 비로소 다른 사람들로부터 크리스챤이라는 별칭을 얻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사는 데까지 믿음이 자란 것입니다. 결코 말씀만으로 그들의 믿음이 자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 주심

 

믿음과 순종이 정비례 관계에 있다 하여, 반드시 1대1의 관계라고 상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비례의 폭은 다를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어린 믿음은 연약하여 순종을 일으킬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믿음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순종의 행위가 나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로 믿음의 순종을 가능케 하는 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영생복락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니만큼,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우리를 순종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우리는 주눅이 들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아무리 해도 제대로 잘 하는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요. (제 형은 저와는 달리 제대로 못하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과 신임을 듬뿍 받았는데 문제는 아버지께서 제게도 그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전 늘상 꾸지람과 눈총을 받고 살았는데, 그래서 제가 아주 자신있는 것이 아니면 잘 하려 들지 않습니다. 괜히 손댔다가 꾸지람과 핀잔만 들을 것이 두려워서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번에 잘 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시간이 많으시고 참을성이 많으신 분이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주시고 잘못해도 노하시거나 꾸중하지 않으십니다. 핀잔도 비아냥도 하시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다독이시고 격려하시고 조그만 성공에도 대단히 칭찬하시는 ‘자식바보’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사도 바울인지라 앞서 빌립보서에서 “행하라”고 했을 때 그가 사용한 단어는 ‘프라쎄떼’ 영어로 ‘프랙티스(practice)’ 우리말로 ‘연습하라 혹은 익히라’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그것에 익숙할 때까지, 될 때까지 해보고 또 해보라는 말이지 지금 당장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라는 주문이 아닌 것입니다. 그 말은 틀려도 잘못해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런 실수와 잘못은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런 염려와 두려움없이우리는 될 때까지 우리가 믿는 바를 살아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꾸중은 않으시나 칭찬은 작은 것에도 엄청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도, 난 믿음이 작어서라며 주저하신다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16절에서 말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를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할 수 있는 만큼, 아는 만큼, 믿는 만큼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 이상을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심지 굳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악하고 게으른” 자뿐입니다. (마 25:24-26)

 

하나님의 마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실제로 우리가 얼마만큼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닐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순종케 하는 이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이도 순종의 마음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기에 그 조차도 하나님께는 중요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가 할 일은 실상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건 제가 글을 쓰기 전에, 아니 글을 쓰면서 조금 전까지도 전혀 의도하지도 생각치도 않았던 결론인데, ) 그런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이 아닐지요? 내가 네 안에 그런 믿음과 그런 마음을 심어 놓았다. 왜인지 아느냐? 내가 널 사랑해서란다. 너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가 네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잘 다니다가 머리 큰 다음부턴 이런저런 세상의 유혹에 빠져 성당에도 다니지 않더니, 급기야는 성경의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결론짓고, 뉴에이지 사상에 빠져 자신이 신인양 교만을 떨며, 온갖 추악한 음란하고 문란한 생활을 할 때에도, 너를 불쌍히 여겨 네게 복음을 전하라 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흔드려 하고 나를 모욕하고 욕보였을 때에도, 그리고 너가 마침내 정신을 차려 나와 함께 지내온 지금까지의 지난 시간 동안에도 널 한 시도 놓지 않고 사랑했기 때문이란다. (전 이 답을 옮기며 하나님의 사랑에 북받쳐 눈물이 왈칵 솟구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눈에 눈물이 그렁한 채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종은 내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았노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대답이 아닐지요? 즉, 하나님에 대한 내 애정고백이 아닐지요? 그렇게 볼 때, 순종은, 우리가 얼마만큼 어디까지 순종하느냐는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순종의 마음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제게도 하나님에게도.

 

201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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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주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자녀에게 유우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느날 나 아버지는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글쓴이 : 東素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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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터의 법칙.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만 웨이터에게는 거만하게 행동한다면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미국의 경영 및 인사관리에 진리처럼 퍼져 있는 ‘웨이터의 법칙’입니다.

2006년 웨이터의 법칙을 소개한 미국의 일간지 USA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자신과 이해관계가 있거나 가까운 사람에겐 친절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에게 거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과 파트너가 되면 결국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니 파트너로 삼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식당 종업원과 버스 기사 등은
누군가의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허드렛일을 하는 그들이 엑스트라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의 가족이고 영웅입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세 명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매우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하고 대접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이들은 바로 천사들이었습니다.
때로는 나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남루한 차림의 모습으로 천사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들을 소홀히 여기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를 업신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1∼2)

한 고급레스토랑에서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을 하고 있는 사업가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빙을 하던 웨이터가 실수로
그 중 한명에게 와인을 쏟았습니다.
옷을 버린 사업가는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미쳤어? 내가 누군지 알아?
여기 지배인 나오라고 해!”

이 사람이 미팅을 하던 사람은 브렌다 반스라는 의류업계의 거물이었는데,

그녀는 이 모습을 보고 당장 거래를 취소했습니다.

유명 IT기업 위트니스 시스템의
데이브 굴드 대표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계약 협상자가 “마침 아침에 샤워를 못했는데 잘됐네요.
양복도 사실 싸구려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라며 미소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미국의 빌 스완스가 정리한 비즈니스 규칙 33가지 중 하나인
‘웨이터 의 법칙’입니다.
웨이터의 실수에 대하는 태도를 보고 계약을 정해도 된다는 것인데,
빌은 다른 건 몰라도 이 법칙만큼은
예외 없이 정확하다고 언급했습니다.

나보다 낮은 사람,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오는 모습이

나의 성품 이며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사회의 어렵고 약한 사람들을 주님을 대하듯이 섬기는 믿음의 성도가 되십시오.

주님! 사람을 외모와 가진 것으로 판단하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들에게 되도록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하십시오.
<어느 목사님의 묵상에서 >

 

옮긴 글입니다!^^

시간의 소중함

10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귀한지 알고 싶다면
직장에서 명퇴하신 50대 가장에게 물어보라

4년의 세월이
얼마나 귀할까 알고 싶다면
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에게 물어보라

1년 세월이
얼마나 귀중한 세월인지 알고 싶다면
방금 성적이 나빠서 유급을 당한 학생에게 물어보라

1달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인지 알고 싶다면
1달 먼저 미숙아를 낳은 산모에게 가서 물어보라

일주일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주간 잡지 편집장에게 물어보라

1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애인을 기다리는 총각에게 물어보라

1분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방금 기차를 막 놓친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라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사고의 순간
간발의 차이로 살아난 생존자들에게 물어보라

마지막으로
 100분의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딴 선수에게 물어보라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진 지금 바로 이 순간이 가장 큰 보물입니다

-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인생을 위한 7가지 지혜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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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마테라 목사(Photo : 출처 = 조셉 마테라 페이스북) 조셉 마테라 목사

 

미국 보수 교계의 대표적 인사인 뉴욕 레저렉션 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셉 마테라(Joshep Mattera) 목사는 최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10가지 징후(10 Signs You Are a Secular Believer)"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교회 안에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점검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경적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테라는 이 칼럼에서 "1981년부터 목회 사역을 해왔고, 수천명의 기독교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면서 "교회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이들 중 상당수가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속화된 기독교인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징후가 있다면서 10가지를 소개했다.


 

1.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신앙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다(이를 무신론적 유신론이라 함 - 편집자주). 왜냐하면 이들은 결혼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는 것, 직업을 바꾸는 것, 교회를 바꾸는 것 등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성경 말씀을 찾아보지 않으며, 영적 지도자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

2.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한다.

세속적인 셀피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지혜의 시작인 여호와를 두려워하기보다 친구들에게 보여지는 겉모습(외양), 지위, 인기를 더 추구한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할 때, 우리는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이 아니라 돈에 이끌린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보다 돈을 우선순위에 둔다면, 당신은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많은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는 이들이 일을 하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신앙의 공동체와 교제하는데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 이유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하신다고 하셨다(마 6:33).


 

4.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위해서다(사람들을 사귀려고).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목적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 주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성도와 교제하기 위해서다.


 

5. 대중문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방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연애(데이트), 혼전성관계, 옷, 대중음악 등에 있어서 세속적인 가치들을 신봉한다. 이것은 나에게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꽥꽥거리면 오리일 것이다(If it looks like a duck and quacks like a duck, then it's a duck!)'는 속담을 상기시켜 준다. 당신이 내적으로 세상의 가치 시스템을 찬양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의 생각(spiritually-minded)이 아니라 육의 생각(worldly-minded)을 하는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다.


 

6.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 일부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일부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전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7.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이곳 저곳에서 잽싼 기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축복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며, 성경을 따라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8. 당신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은 지난 5년이나 10년 사이에 단 한 명의 영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포섭되어 있어서 영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구원 받지 않은 가족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 등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전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9. 제자를 삼지 않는다.

구원 받은 이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한 명의 영혼을 제자로 삼는 일을 위해 조금도 투자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당신이 현재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멘토링을 해주거나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대위임령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목회자나 장로 등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다른 이를 제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0. 재정에 있어서 성경적 청기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편할 때만 헌금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자신들의 생명이나 돈이나 부에 대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십일조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소유의 10%가 아니라 그들의 소유의 100%의 주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돈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당신은 성경적 청기지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출처: 재경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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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하게 살면 우리의 삶이 잘 풀릴까?

 

 

욥기는 모든 재물과 자녀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 흠 없는 사람은 없다(욥 4:17-19; 15:14-16; 25:4-6. 롬 3:9-18, 23 참조). 그렇다고 인간은 고난받아도 마땅한 것일까? 죄의 분량이 고난의 이유만은 아니다. 엄청난 죄악을 행해도 대대손손 건강에 호사를 누리는 이도 있고 사소한 죄밖에 없는데 엄청난 재앙을 겪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죄가 고난의 원인이라 하기엔 분명히 죄와 징벌 사이에 지나친 불균형이 있다(욥 13:23-26 참조).

...

 

만일 개인이 당하는 고난이 죄의 크기와 어느 정도 비례한다면 욥은 우주 전체에서 가장 몹쓸 악인이어야만 한다. 욥은 그럼 도대체 왜 그리 처참한 재앙을 겪은 걸까? 욥기에서 설명하는 그가 당한 고난의 유일한 이유는 그의 경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두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내기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그깟 내기 때문이라고? 사실 표면적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냥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으면 안 되나? 이 내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사탄과의 이런 내기를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일까?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계명대로 신실하게 사는 것은 오로지 그 대가가 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욥 1:9). 맙소사! 사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린 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원망하지 않고 인간의 죄인 됨을 인식하고 늘 그분께 순종하며 찬양해야 한다고. 사실 욥도 처음엔 그랬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로다!” 자신의 한계가 오기까지는! 그때부터 그는 악에 받쳤다. 달라졌다. 이젠 전투 모두로 바뀐다. 더는 하나님의 섭리에 무조건 굴복할 수가 없었다. 그분의 처사가 틀림없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정말 아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자신의 결백과 의로움을 주장한다. 자신을 괴롭히시는 하나님께 따지고 비난하며 모질게 대든다(욥 9:19-22). 이런 욥이 정말 하나님이 생각하던 "천하에 이만한 자가 없느니라"고 장담한 진짜 하나님의 사람 맞을까?

결국 하나님이 옳았다. 사탄의 주장과 달리 욥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가장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결코 하나님이 권선징악의 원칙대로 세상을 잘 다스리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삶에 아무 대가가 없이 오로지 재앙과 치욕만 있을지라도 원망을 할지언정 하나님을 떠날 그가 아니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끝까지 읽어야 한다. 욥기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가 복을 받는다는 원칙은 완전히 무시되지 않았다. 시험의 때는 기한이 있다. 이 기간이 다한 후 욥은 모든 면에서 훨씬 큰 복을 받는다. 그는 이전보다 행복한 가정과 번영을 누리며 백사십 세까지 산다(욥 42:10-17). 전에 죽은 자녀를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시험을 이겨낸 그는 말년까지 그 당시 최상의 복을 받으며 살았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욥의 고통은 공감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하나님 편에 서서 신학적으로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을 변호하며 욥을 가르친 친구들을 꾸짖고 벌하시는데 오히려 그들의 교훈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하나님께 무례하게 원망한 욥의 말이 정당하다고 그의 편을 들어 주셨다(욥 42:8). 물론 하나님은 욥에게도 인간이 주제넘게 하나님께 무례하게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자제하라고 명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이 막상 그의 소원대로 나타나 말씀하셨을 때 욥은 곧바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고(욥 42:1-6), 자신의 성급함과 무지함을 뉘우친다. 사실 그의 투정들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한 말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진작 나타나실 것이지!

 

욥기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고난받는 이유를 사실 설명하지 않는다. 욥의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욥기에는 없다. 의인이 고난받는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일 뿐 인간에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어떤 인간의 지혜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대로 행하셔야 한다는 주장은 다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이 욥을 통해 보여주시는 신앙의 자세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무례하게 구는 것도 용납하신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감정적이고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창조주께서는 잘 아신다. 우리는 욥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길 고집해야 한다. 제발 만나 달라고 떼를 써야 한다. 하나님이 이런 요구에 쉽게 응하시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앙,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버티다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만나주신다. 그때는 알게 될 것이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정말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고? 만나 보면 그 이상의 복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욥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유일하게 행복하고 성공으로 향하는 통로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신앙, 그분이 우리의 복이라는 가르침을 알려준다. 전혀 다른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을 것이란 말이 아니다. 욥의 결말을 보라. 다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때가 되면 다 충분히 주어질 것이다. 버텨라. 끝이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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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임금님께서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이곳 저곳을 시찰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시골의 넓은 들판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많은 염소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 목동 한 사람이 이끄는 염소떼가 눈에 띄었는데
      이 목동이 얼마나 염소떼를 잘 모는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염소들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임금님께서는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잘 가르치면 좋은 신하가 되겠다 싶어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몇 년 동안의 교육 후에 그에게 작은 일이 맡겨졌는데
      얼마나 일을 지혜롭게 잘 감당하는지 맡기는 일마다
      임금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해 내었습니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나중엔 나라의 모든 재물들을 관리하는
      재무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왕궁에 있는 많은 신하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목동 출신 주제에 임금님의 총애를 받더니
      급기야 재무대신의 자리까지 오르다니..."

      모든 신하들이 그의 헛점을 잡아 왕궁에서 내 쫓으려고 했지만
      얼마나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지 도무지 허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생각해 낸 것이 첩자를 붙여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고,
      뭔가 이상한 행동이 발견되면 즉시 보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재무대신에게 무언가 이상한 행동이
      한 가지 발견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매일같이 왕궁의 모든 불이 꺼진 늦은 밤에
      재무대신이 작은 등을 손에 들고 왕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방으로 가 자물쇠를 따고 들어간 후 한참 있다가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방의 열쇠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고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생각하기를
      "그럼 그렇지! 나라의 보물중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보물들만
      몰래 훔쳐다가 그곳에 쌓아두고 있을 것이다"라고 판단을 하고
      바로 임금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임금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재무대신을 잡아 들이게 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빼앗아 그 방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했습니다.

      얼마 후 그 방을 뒤지고 돌아온 신하들이 보고하기를
      "그 방에는 보물은 커녕 동전 한 닢 없었고 작은 책상 위에
      허름한 옷 한 벌과 다 떨어진 짚신 한 켤레만 놓여 있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이 궁금해진 임금님께서 재무대신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재무대신이 대답하기를
      임금님 저도 사람인데 왜 저라고 나라의 보물을 만질 때마다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비천한 목동이었을 때
      그리고그렇게 평생을 살아가야 했을 때 임금님께서 저를 불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의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옷과 신발은 제가 목동이었을 때 입고 신었던 것들입니다.
      그곳에 가서 저의 옛 모습을 기억하면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임금님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그 유혹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재무대신의 그 말에 신하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으며
      임금님께서는 재무대신에게 큰 상을 내리셨습니다.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던,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 간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속에 유혹을 견디고 신앙적 초석이 될 만한
      그런 초심의 작은 방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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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토종들풀 종자은행" 이야기가 실렸다. 고려대 강병화 교수가 17년간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야생들풀 1백과 4439종의 씨앗을 모아 세웠다는 이야기다.

한 사람이 장한 뜻을 세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잡초들의 씨앗을 받으려 청춘을 다 바쳤다는 것은 그것 만으로도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기사의 끝에 실린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죠.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겁니다."

오호라!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된다.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이냐.

사람도 한 가지다.
제가 꼭 필요한 곳,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산삼보다 귀하고,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게면 잡초가 된다.

그가 17년간 산하를 누비며 들풀의 씨를 받는 동안, 마음 속에 스쳐간 깨달음이 이것 하나 뿐이었으랴만, 이 하나의 깨달음도 내게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참으로 달고 고마운 말씀이다.

타고난 아름다운 자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잡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보리밭에 난 밀처럼, 자리를 가리지 못해 뽑히어 버려지는 삶이 너무나 많다.

지금 내 자리는 제 자리인가? 잡초는 없다. 자리를 가리지 못해 잡초가 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탓입니다 (시39:9)

요셉은 자신을 푼돈에 팔아넘긴 형들의 옹졸한 시기와 선을 넘어간 배신에 대해 "나를 보내신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욥도 여호와의 불이 떨어지고 갈대아 사람들의 잔혹한 약탈이 자행되고 악창으로 몸까지 망가졌을 때에 분노와 복수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고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으며 오히려 "주신 분도 여호와요 취하신 분도 여호와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죽은 개처럼 여겨졌던 시므이가 자신을 비루한 자로 여기며 돌맹이를 던지며 저주의 무례한 입...술을 놀렸을 때에 오히려 격분한 충신들을 달래고 면박까지 주면서 "주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고 했던 분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쓰라리고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을 사려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태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억울함과 분통과 원망을 온 몸과 생으로 삼켜야 하는 고통과 희생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희생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고 생을 갱신하고 시선을 사망의 땅에 떨구지 아니하고 생명과 평강의 하늘로 올리는 열매를 얻습니다. 억울하다 생각하면 한없이 억울하나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 요셉을 생각하면 영광의 도구로 쓰여진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억울한 희생과 참혹한 죽음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입니다. 욥과 요셉과 다윗은 그런 예수님을 예표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희생과 손해를 미덕으로 여기자는 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실 때 기쁨으로 맞이하는 준비는 필요할 듯합니다.

막상 그런 현실에 부딪히면 내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은 화려해도 몸은 사리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제가 늘 그러니 그런 분들의 행보가 더 잘 보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낍니다. 유익이든 손해이든 하나님의 행하심을 늘 감지하며 촐삭대지 않고 잠잠히 입을 열지 않는 연습부터 하렵니다.

 

글: 한병수 전도사

그리스도인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탓입니다 (시39:9)

요셉은 자신을 푼돈에 팔아넘긴 형들의 옹졸한 시기와 선을 넘어간 배신에 대해 "나를 보내신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욥도 여호와의 불이 떨어지고 갈대아 사람들의 잔혹한 약탈이 자행되고 악창으로 몸까지 망가졌을 때에 분노와 복수의 불길에 휩싸이지 않고 입술로도 범죄치 않았으며 오히려 "주신 분도 여호와요 취하신 분도 여호와니 오직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뿐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윗은 죽은 개처럼 여겨졌던 시므이가 자신을 비루한 자로 여기며 돌맹이를 던지며 저주의 무례한 입...술을 놀렸을 때에 오히려 격분한 충신들을 달래고 면박까지 주면서 "주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고 했던 분입니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쓰라리고 아무리 다급해도 하나님을 사려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태를 이해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반응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억울함과 분통과 원망을 온 몸과 생으로 삼켜야 하는 고통과 희생이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희생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교훈을 얻고 생을 갱신하고 시선을 사망의 땅에 떨구지 아니하고 생명과 평강의 하늘로 올리는 열매를 얻습니다. 억울하다 생각하면 한없이 억울하나 자신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 요셉을 생각하면 영광의 도구로 쓰여진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억울한 희생과 참혹한 죽음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입니다. 욥과 요셉과 다윗은 그런 예수님을 예표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희생과 손해를 미덕으로 여기자는 건 아닙니다. 그 자체로는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실 때 기쁨으로 맞이하는 준비는 필요할 듯합니다.

막상 그런 현실에 부딪히면 내공이 드러날 것입니다. 말은 화려해도 몸은 사리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제가 늘 그러니 그런 분들의 행보가 더 잘 보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낍니다. 유익이든 손해이든 하나님의 행하심을 늘 감지하며 촐삭대지 않고 잠잠히 입을 열지 않는 연습부터 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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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말씀 한 절 읽지 않고

주님이 나의 왕이라고 찬양하면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스마트폰 놀이라니요..

이렇게 기본이 무너진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기본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보수적인 게 아니라 ‘정상적’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은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지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력은

높은 연봉과 좋은 차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하면 제대로 한다 저 사람이 말하면 참말이다“

라는 칭찬이 바로 그의 삶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한국교회가 타락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일하기를 기대하기 전에 제대로 살아가는

삶의 실력을 키우십시오.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진실로 말씀 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배에 늦지 마십시오


 

기본을 행하십시오

진실하고 참되게 사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사용하실 때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세가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사랑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김남국


그리스도인의 자족 1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제 1장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무엇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自足)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안락하고 안전하기를 구한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성삼위의 하나님은 완벽하게 복된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족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들 속에서는 자족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자족하기에 충분한 선(善)이나 능력이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신자들은 이러한 영적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만족할 수 있다. 신자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후 6:10).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6-9).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권면을 하고 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내적이며 묵묵히 순종하는 고고한 태도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지혜와 아버지로서의 염려에 무조건 순복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1. 자족이란 내적인 것이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 62: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내적인 평안을 찾는 법을 배웠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5절).
이 말씀은 “나의 마음이여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나의 영혼아 평안을 누리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압박을 받는다면 혀를 억제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하지 않는다면 참고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까지도 잠잠해져야 한다. 겉으로는 아주 평온하게 행동하지만 마음속에는 반항심이 용솟음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판단하신다. 겉모습의 침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고 또 고백하지 않은 죄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잠잠하였다(시 32:3).
 
자족이란 전인(全人)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자족은 지적(知的)인 면에서 한정되지 않는다. 시편 42편에서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묻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5절).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안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외부적인 도움을 받아 그 결과로 자족하는 것은 추운 겨울날 불을 쪼임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과 같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열을 발산하여 자기 옷을 덥힌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변함이 없는 내면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항구적인 태도이다.
 
2. 자족이란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현실적인 비극을 겪는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러한 비극이 닥칠 때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묵묵히 순종하는 자족이 곧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묵묵한 자족이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짜증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여 혼란되거나 반항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소홀히 할 정도로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고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너무 깊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묵묵히 순종한다는 것은 위의 모든 일들과 반대되는 것이다.
 
3. 자족이란 고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천성적으로 갖는 평온한 기질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외부적인 일들에 의해 동요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걱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일종의 자족을 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어떤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 상태”처럼 단순히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참으로 적극적인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가장 고고한 부분이다.
 
4. 자족이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자족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께 순복하며 거리낌 없이 자족을 얻는다.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이것은 곧 그들이 행할 바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마 11:29).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혼의 안식을 찾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에 순복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스스로 세운 계획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정말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더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셨음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어서 자기 자신이 한 번만 잘못하면 파멸로 갈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런 후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 안에서 기쁨을 찾는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겪고 나가서 아니라 환난 중에도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렇게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5. 자족이란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하는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첫째, 어떠한 환난을 당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그 환난이 아무리 오래 갈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그 환난이 어떻게 변화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께 순복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죽음으로 인해 이별해야 하는 상황에도 순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자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된 자족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어떠한 것이든지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얼마나 계속되든지 간에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밖으로 나오라고 하실 때까지 방주 안에 있어야 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이 얼마나 다양하든,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해야 한다. 간혹 한 그리스도인이 생활의 모든 국면, 즉 가정, 건강, 사업 등 모든 면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한 가지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그리스도인이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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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항력적인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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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알듯이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비록 여러 다른 곳에 거처한다할지라도 마음에 역사하시기에 그들은 같은 믿음과 같은 진리를 믿고 받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러브-
      내적인 부름은 성령님께서 외적인 말씀의 부르심과 동반하여 그 사람을 무지에서 지식으로 자연인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부르실 때 일어난다. -크리스토퍼 러브
      부르심은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연합할 자들을 모으시는 것이다. -윌리암 아메스
      그리스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운데서 성령의 은혜원리가 작용되는 과정이다. 내적인 부름은 영적인 계몽이며, 여기서 약속들은 내적인 말씀에 의해 그 사람들의 마음에 증거된다. -윌리암 아메스-
      하나님에 의해 영적이며 신적인 빛이 곧 인간의 영혼에 주어지는데 이는 자연적인 도구에 의해 얻어진 무엇과는 전혀다른 속성이다. -조나단 에드워드-
      육신에 있는 편견은 거룩한 진리와 반대되는 것으로 제거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진리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 적절히 민감해 지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거룩한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적 교리에 대한 완전한 반감이다. 이것은 진리를 입증하는 논쟁에 대해 무익하며 마음에 힘을 잃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누군가 사람의 마음에 기독교적 교리들의 영적인 탁월함을 밝혔을 때에는 이것이 모든 반감을 부수고 모든 편견을 제거하며 이성을 거룩하게 만들고 진리에 대한 논쟁의 힘에 마음을 열게 만든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은 죄로 죽어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복음의 선포와 성령님의 은혜로 불러낸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며 그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한다 -프란시스 튜레틴
      양자됨은 우리에게 아들의 특권, 즉 아들들의 새로운 본성의 거듭남이다. -스테판 차르녹
      첫 창조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렇듯이 두번째 창조, 거듭남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지식과 의와 진실한 거룩성, 사랑에서 새롭게 만드신다. -바바서 파웰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사람의 변화이다. -토마스 아담스
      사람의 관점에서는 인생이 아름답게 보일만한 것들이 여럿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아름답지 못한데, 다만 그 마음이 변화되어 새롭게 될 때까지 그러하다. 이 세상의 어떤 약도 성령님의 거룩케 하는 역사가 없이는, 상처와 병이난 부위를 덮을 수는 있어도 영혼을 치료하고 고칠 수는 없다. -오지 스윈녹-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꾸밈: 최송연의 목양연가"묵상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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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힘을 쓰고,
      (행18:5)



      바울은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전력하였습니다
      여러 반대나 많은 저항
      그리고 두려움에 굴하지 아니하고

      이런 바울에게 주님은
      실라와 디모데를 보내주시고
      이방의 문도 열어 주시고
      브리스길라 부부도 만나게 하셔서
      힘써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철 푸른 솔이
      은근과 끈기로
      오직 위를 향하듯

       
침묵 (엔도 슈사쿠)
-하나님, 왜입니까-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이런 명제를 가지고 쓴 소설이다. 단순히 소설이라기보다 일본 역사의 실존인물인 포르투갈 신부, 오카다 산에몬(岡田三右衡門, 로드리고)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하여 각색한 역사소설이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년 3월 27일-1996년 9월 29일)는 침묵 외에도 <여자의 일생> <위대한 몰락(사무라이)> 등의 작품을 통해 일본의 기독교 박해사를 그의 정밀한 문학적 감수성으로 표현하여 예술작품으로까지 끌어올린 작가이다.

그중에서도 <침묵>은 이 시기 동안 일본의 어느 마을에 잠입했던 포르투갈의 한 신심 깊은 사제 이야기를 다룬다. 로드리고로 알려진 그는 가난한 농민들이 처참한 박해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침묵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끝없는 질문을 퍼붓는다. 이 책은 이 신부의 내면의 질문들을 응집해 놓은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는 하나님은 끝까지 침묵으로만 일관하지 않으신다는 결말을 이끌어낸다.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계속 마음 조리며 기다리던 하나님의 말씀이 책의 말미에 가서 드디어 로드리고의 심령에 속삭여지는 것이다. 로드리고 신부는 하나님의 그 응답으로 새로운 차원의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나님의 침묵- 그것은 결코 침묵이 아니었던 것이다.

침묵의 역사적 배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했던 16-17세기경이다. 이 시기는 ‘기리시탄사’라고 하며 1549년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동료들이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가톨릭을 전했던 때부터 메이지(明治) 정부가 기독교 선교금지를 폐지한 1879년 사이에 일어났던 시기이다. 그 중 1614년 에도막부(江戶幕府)가 금교령을 선포한 후 259년간은 대단히 혹독한 박해 시대가 이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27년부터 수많은 기리시탄(기독교인)들을 지금은 관광지가 된 운젠(雲仙) 유황물의 고문으로 죽였다. 발가벗기고 칼로 베인 상처에 뜨거운 유황물을 10-20일씩 붓고 돌을 달아 뜨거운 온천 아래 가라앉혀 죽이기도 했다. <침묵>에서만 아니라 엔도의 <여자의 일생>에는 이렇게 죽어가는 순교자들의 모습들이 작가의 세밀한 눈으로 처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박해의 시대에 로마 교황청에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 체류한지 33년이나 되고 주교(主敎)라는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 사제들과 신도들을 통솔해온 인물이다. 그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불굴의 신념을 가지고 계속해서 선교를 해왔는데 그런 그가 배교를 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잠복선교를 하면서도 교황청에 무서운 운젠 유황물과 또 다른 고문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한 사제들과 신도들의 용기를 보고했던 신부였다.

심지어 그는 “…….마침내 우네메는 아무래도 자기가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이런 사실로 우리의 성스러운 교의가 오히려 대중의 칭송을 받게 되고 신도들이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폭군이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굳은 신앙심으로 버티어 폭군이 오히려 당하게 된 싸움의 혁혁한 결말입니다.”라고 써 보내기까지 했었다. 이런 편지를 쓴 페레이라 신부가 아무리 고문을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과 교회를 버리고 이교도에 굴복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여러 명의 사제들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겠노라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 중에 세 명의 포르투갈 사제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학교에서 교수였던 페레이라의 열강(熱講)에 깊이 감동했던 제자들로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본에 들어가 자신들의 스승인 페레이라의 불명예를 설욕하려는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그들은 페레이라 신부가 눈부신 순교를 했다면 몰라도 이교도 앞에서 개처럼 굴종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맑고 푸른 눈과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을 얼굴 가득 담고 있던 페레이라 신부의 인자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인자한 신부의 얼굴 위에 굴욕으로 일그러진 또 다른 표정을 상상한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 사람은 세바스티앙 로드리고와 호안테 산타 마르타, 그리고 프랜시스 가르페였다. 1638년 3월 25일, 드디어 이 세 사람의 젊은 사제들은 요한 다세코 사제의 축복을 받으며 사령관이 타는 인도 함대, ‘산타 이사벨’호에 승선했다. 함선이 황색의 하구를 떠나 점점 멀어질 때 그들은 갑판에 기대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육지의 산을 언제까지나 바라보았다. 그들은 항해가운데 여러 번의 폭풍우에 시달리면서 아프리카를 돌아 마닐라와 고아, 마카오 등지에서 정박하며 1년이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와중에 몹시 몸이 약했던 호안테 산타 마르타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진행하였다. 중간에 그들은 일본에서 3만 5천명의 가톨릭 신도들이 무서운 박해 속에서 학살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마카오 선교회로부터는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들을 일본에 보내는 것은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는 통보도 받는다.

이후 이 책의 절반은 세베스티앙 로드리고의 편지를 통해서 사건들이 알려진다. 그들은 비록 일본의 선교 상황이 최악이라 해도 그러한 박해가운데 있는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가련한 운명을 그저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마카오에서 일본으로 가는 중국 밀항선인 정크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간다.

일본에 도착한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박해의 현장을 목도하며 고통가운데서 하나님께 질문한다.
“하나님, 왜입니까?”
인간은 고난을 당할 때, 고난 그 자체보다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된다. 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알기만 한다면 그 고난도 견딜 만하다. 하지만 이유를 모른 채 당하는 고난은 인간을 아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한때는 기리시탄에 호의적인 정부 덕분에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개종했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불어 닥친 박해의 칼날에 낙엽처럼 쓰러진다. 그중의 얼마는 다시 불신자의 생활로 돌아가지만 신앙을 지키기로 결단한 사람들은 무서운 박해가운데서 무수히 죽어간다. 이런 모든 것을 보고 들으며 신앙에 불타던 로드리고의 마음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신앙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이 무서움 속에서 침묵만 지키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로드리고와 가르페가 묵고 있던 마을의 모키치와 이치소우가 바다에서 수장(십자가를 바다에 세우고 그 위에 사람을 매어달아 죽게 하는)으로 죽어간 뒤에도 파도는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철석이고 바다 새는 자유롭게 그 위를 날아다닌다. 이것이 순교라는 말인가?

“무엇을 위한 순교일까요? 저는…….순교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돌아갈 때 공중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런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지나치게 꿈꿔 왔습니다…….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인 바다는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로드리고는 감옥에 갇힌 후, 바다에 빠져 죽는 신도들을 따라가다가 함께 바다에 빠져 죽은 동료 가르페를 생각하며 또다시 하나님께 질문한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갑자기 이 소리가 모키치와 이치소우가 죽어가던 바다, 거적을 두른 배에서 잇따라 떨어지던 신도들을 좇아가던 가르페가 떠있던 바다에서도 완강하게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가슴을 후벼 팠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리고 가르페도, 힘없이 죽어간 신도들도 모두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로드리고의 의문은 한 애꾸눈의 신도가 감옥 뜰에서 관리에 의해 목이 잘리고 난 후에 더욱 맹렬해진다.

“온 땅에 어둠이 임하며 성소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이것이 그가 오랫동안 생각해온 순교의 이미지였다. 내가 죽임을 당하는 날에도 매미는 여전히 울고 파리는 졸음을 재촉하는 날개 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닐 것인가. 현실에서 본 농민의 순교는 그들의 오두막이나 남루한 옷처럼 초라하고 가련하기만 했다.

그의 주위에서는 매미소리, 날개를 젓는 파리 소리, 닭 우는 소리들이 윙윙대며 끊임없이 울려 댄다. 그러나 정작 그가 간절히 듣고 싶은 하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던진 질문이 이것이었다.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혔으면 좋겠습니다…….제발 좀 내버려 두십시오…….사람이 무엇인데…….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으시고 잠시도 쉬지 않고 그에게 시련을 주십니까?…….침 삼킬 동안도 버려두시지 않으시렵니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당신께서 하시는 일이란 이 몸의 허물이나 들추어내고 이 몸의 죄나 찾아내는 것입니까? …….내가 죄를 짓는가 지켜보시다가 그 죄에서 풀어 놓아 주시지도 아니하십니다…….어찌하여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셨습니까?…….좀 내버려 두소서.”(공동번역)

욥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비록 죄가 없다고 하여도 그는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시겠고, 나 비록 흠이 없다고 하여도 그는 나의 마음바탕이 틀렸다고 하실 것일세. 나 비록 흠이 없다고 하지만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겠네. 살아 있다는 것이 구역질 날 뿐…….”(공동번역)

물같이 쏟아지는 욥의 불평과 원망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런 욥의 불평과 원망을 고스란히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천하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다 보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불평등, 공의롭지 못하신 처사, 인간을 괴롭히는 그 분의 심술(?)들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다 노출시키신다. 하나님 마음의 넓으심은 정말 얼마만큼 큰 것일까.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보고, 알고 계셨다. 이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도 다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시간의 밖에서 시간 안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신다. 다만 욥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가 내 앞을 스쳐 가시건만 보이지 않고, 지나가시건만 알아 볼 수가 없네.”(공동번역)
후에 욥은 자신의 언사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공동번역)
전에는 그렇게도 그의 옆에 계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욥이었건만 고난을 통과하고 나니 하나님이 보였다.

적막하기만 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로드리고는 이제는 자신을 향하여 이렇게 묻는다.
“그럼 네게 바라는 것은 남모르게 죽는 참된 순교가 아니라 허영을 위한 죽음인가. 신도들에게 칭송받고 기도 받고 ‘저 신부는 성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인가.”
고난을 통과하며 로드리고는 자신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 것이다. 과연 나는 내게 닥쳐오는 고난 속에서도 나의 이름이나 물질이나 그 무엇도 다 초월하고 끝까지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이 고난을 견디며 나갈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 고난을 통과하면서 하나님 또는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통과한 영웅’이라는 칭송이라도 듣고 싶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고난 속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영적상태를 세세하게 살펴보게 된다. 나의 신앙은 정말 정금같이 순수하기만 한 것일까? 과연 나의 신앙이란 어떤 것이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정말 살아계시나? 만약 그분이 정말로 살아 계시며 그 분이 나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라면 나는 이런 고난 속에서 그분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로드리고는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또 던진다. 이러한 질문들을 통하여 그는 점점 더 하나님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관리들은 자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교활한 함정을 파놓고 로드리고에게 대답을 재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드리고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그런 그에게 일찍이 배교한 후 이제는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여자와 살고 있는 페레이라가 말한다.

“내가 배교한 것은 구덩이에 매달렸기 때문만은 아니야. 사흘간…….나는 오물이 잔뜩 들어있는 구덩이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있었어. 그러나 한 마디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말은 하지 않았어.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야.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자네가 배교하겠다고 말하면 저 사람들은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있어. 그런데도 자네는 배교하려고 하지 않고 있어. 그것이 사랑의 행위란 말인가?…….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에 계신다면…….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거야! 그리스도는 배교했을 것이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한때는 조국 포르투갈의 신학교에서 신앙의 영웅으로 존경받던 페레이라가 제자인 로드리고에게 배교를 부추키며 그럴싸한 말로 설득한다. 그런 페리이라의 말을 들으며 로드리고는 자기 앞에 놓인 성화(聖畵)를 바라보고 신음한다.

“아아 아프다. 신부가 몸부림쳤다.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고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그것을 지금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그분이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그 주님은 자기를 팔아넘긴 유다까지도 용서했다. 아니 용서를 넘어 유다 마음의 아픔까지도 살피고 계셨다.

그때 “밟아도 좋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여 저는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가서 네가 할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연약한 인간은 처절한 고난이 몰려오면 그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주님을 배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인간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어루만지며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신다. 이것은 고난 속에서만이 깨달아지는 신앙의 비밀이다.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노라.”

작가는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밟고 지나갈 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주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며 함께 아픔을 나누시는 분이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깨닫고 체험되는 이런 신비가 있기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새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나의 부모님은 1960년대 후반, 그 당시 한국가정에서는 드물게 별거생활을 시작하셨다. 많이 배우신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무학에다 귀도 잘 안 들리셨다.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 친척 아주머니를 따라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아버지의 무서운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요지부동이셨다. 어머니를 핍박하다 지친 아버지는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어머니를 경기도 소사에 있는 신앙촌에 들여보내셨다. 나는 결혼 후 미국에 와 살면서도 살아가는 모든 일에 서투른 어머니가 이단의 본거지인 신앙촌에서 홀로 살고 계신다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날마다 나의 기도제목은 어머니 문제였다.

어느 날, 그날따라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을 안은 채 금요 예배에 참석했다. 설교가 끝나고 기도시간이 되자, 나는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이 세상의 모든 보화를 다 준다고 해도 어머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는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눈물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갈등으로 겪어온 아픔들이 밀어 닥치면서 커다란 슬픔이 온 몸과 영혼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나의 오른 편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분은 어깨에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계셨다.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기적과도 같이 그토록 나를 짓누르던 커다란 슬픔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홀가분하게 가벼워진 내 마음에 한 가지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 문제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 지금까지 나는 나 혼자서 이 무거운 문제를 떠안고 슬퍼하고 탄식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문제는 곧 우리 주님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이기 전에 주님의 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 십자가를 나와 함께 지고 가신다는 것을, 주님은 나와 함께 어머니의 문제를 풀어가고 싶어서 그 분을 나의 어머니로 세워 주셨다는 것을.

그러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깊은 평안이 밀려왔다. 그리고 주님이 나와 함께 가신다면 나도 얼마든지 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 하는 담대함이 생겼다. 그 후로 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힘을 얻곤 한다.

그렇다, 주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신다. 로드리고는 이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 자신의 다섯 개의 발가락이 사랑하는 분의 얼굴 바로 위를 덮었던 것이다. 그는 이 격렬한 기쁨의 감정을 기치지로에게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격렬한 기쁨” 그것은 체험으로만 아는 기쁨이다. 신앙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런 기쁨을 체험한 기억을 갖고 있다. 이런 체험이 있기에 그들은 고난을 이길 수 있고 나아가 순교까지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로드리고 역시 이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비록 그는 외면적으로는 배교했을지라도 진정으로 배교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주여, 저는 배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가 결코 배교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어째서 배교했느냐고 성직자들을 나를 심문할 것입니다……. 저 기치지로와 제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는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과 제 주님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로드리고는 자기 스스로에게도 말한다.

“성직자들은 이 모독의 행위를 질책할 테고,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바로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가톨릭 신부이다.”

그래서 그는 배교자라는 비난에도 의연할 수 있었고 일본에 살면서 계속해서 고백성사나 기도 같은 성무(聖務)를 해나갈 수 있었다. 아직도 박해가 계속되는 그 나라에서, 고문처럼 그를 찌르는 배교자의 아픈 마음을 안고 살아가며 주님을 섬기는 그를 향해 과연 누가 비겁한 사람이라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의 남은 삶은 순교자 못지않게 거룩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기독교 작가인 이상훈 씨는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기도하면 금방 이루어진다는 ‘번개응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의 현실 속에 하나님의 중요한 응답이신, ‘말없음(沈黙)’에 관해서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일하시지만 그분은 그 침묵 속에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사랑으로 함께 하심을 깨우쳐 주신다. 그가 함께 하심으로 인해 믿는 자들은 기꺼이 순교도 감행할 수 있었다. 스데반은 순교의 자리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옆에 서계신 예수님”을 뵈었다. 그러했기에 그는 천사와 같은 얼굴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특이한 인물은 누구보다 기치지로이다. 로드리고는 그를 누더기를 걸친 거지같고 경멸스러우며 교활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는 성화를 밟고 배교한 위에 신도들을 고발하고 로드리고를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도무지 그 어디에도 사랑스러운 면이나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큰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로드리고를 따라 다닌다. 성화를 밟으며, 배교하고, 동료들에 대한 배신도 서슴지 않지만 계속 로드리고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는 로드리고의 용서가 없인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로드리고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알고 신부를 무서워하면서도 그를 떠나지 못한다.

엔도 슈사쿠는 이 인물을 가리켜 “나 자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약함을 생각하며 기치지로라는 인물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강요에 의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성당에 편히 다닐 수 없었다. 적의 종교를 믿는다고 비난받아야 했다. 당시 20대였던 엔도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적의 종교를 믿는 것은 비국민(非國民)의 행위가 아닌가? 이러한 눈초리로 흘겨보는 사람들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자연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나는 그런 경우를 당하면서 살아왔다. 내가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있던 뮈랑 신부가 스파이 혐의로 연행돼 가는 것을 보고 질려서 전쟁 후에도 필요할 때가 아니면 ‘세례 받은 신자’라고 내놓고 말하기를 꺼려한 것이다.”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인임을 밝히지 못한 속사정’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성 바오로 펴냄)

<침묵>은 이러한 엔도의 회감(回感)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였기에 특별히 기치지로의 아픔을 그리도 상세하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로드리고는 기치지로를 경멸하긴 했지만 그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이 찔리는 것을 느낀다.

“저는 성화도 밟았습니다. 네 밟고말고요. 모키치나 이치소우는 강하지요.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한 걸 어쩝니까?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제가 성화를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 말고요…….신부님, 저같은 겁쟁이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그런 기치지로가 밤에 또 찾아왔다. 그는 고해성사를 하겠다고 했다.
“저는 배교자죠. 그렇지만 10년 전에 태어났다면 선량한 가톨릭 신도로서 천국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해받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원망스럽습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신부는 누더기처럼 더럽고 악취 나는 그를 참아가며 습관에 따라 “평안히 쉬어라.”하고 중얼거렸다.

그를 보내고 나서 신부는 생각한다. “정말 저 기치지로가 평안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교회 안에서 좀 익살맞지만 좋은 성도로 살다가 평화롭게 천국에 갔을 것이다.”라고. 그리고 또 생각한다. “주 그리스도는 누더기처럼 더러운 인간들을 찾아 구하셨다.”고. 색 바랜 누더기처럼 되어버린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그때 그리스도의 맑고 다정한 눈이 조용히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 눈길을 받으며 신부는 기치지로를 경멸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로드리고 자신이 성화를 밟게 되었을 때, 그때 그는 기치지로가 “내 발도 아픕니다. 아프다고요.”하고 말했던 것의 의미를 비로소 확연히 깨닫게 된다. 그는 울면서 따라오던 기치지로의 아픈 마음을 주님은 아신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주님은 연약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껴안고 계셨다. 마침내 그는 기치지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더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소?”
이제야 비로소 그는 기치지로를 아무런 경멸의 마음 없이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작가인 박유미씨의 <엔도 슈사쿠의 침묵론-로드리고와 기치지로의 ‘인생’을 통한 순교->에는 이 책의 말미에 역사 기록물 형식으로 <기리시탄 저택 관리 일기>가 삽입되어 있다고 써 있다. 이 일기에는 로드리고가 그 저택에서 은밀히 전도를 계속하였고 기치지로는 로드리고의 곁을 끝내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중간 하인이 되어 함께 그 저택에서 산다고 되어 있다. 기치지로는 나중에 로드리고와 자신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관리로부터 심문을 당하나 끝까지 로드리고를 보호하면서 그를 배반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 채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기치지로를 통하여 우리는 신앙인격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자라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망가지고 경멸받아 마땅한 어그러진 인격의 소유자일지라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 갈 때 마침내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15: )

어쩌면 기치지로는 로드리고가 없었다면 사람들에게 짓밟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로드리고 신부를 따라감으로 로드리고와 같이 새로운 차원의 신앙의 삶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된다.

박유미 작가는 이 기치지로를 베드로의 성품에 빗댄 논문을 발표했다.

“기치지로는 비록 동료들을 팔아 넘겼지만 그것은 그가 협박을 받고 겁이 나서 한 것이지 그의 진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약하지만 끝까지 따라 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관헌들에게 붙잡혔을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으나(마26:56)’ 비록 멀찌기에서지만 끝까지 주님을 따라갔던 베드로와 닮았다…….기치지로나 베드로, 모두 약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대변한다. 그러나 그러한 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직면한 후 신을 통해 다른 차원의 구원을 맛본다.”

엔도 역시 자신이 세례 받은 사실을 떳떳이 밝히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렸으나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고 따라갔으리라 믿는다.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생애> <깊은 강> 등을 쓰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씻으려고 했다.

그러나 엔도는 그의 말년에 쓴 <깊은 강>에서 가톨릭 신부인 오오츠를 통해 자신의 종교관이 범신론적이라는 것을 밝힌다. 오오츠는 가톨릭 신부이면서도 가난한 힌두교, 불교신자들을 위해 몸을 던져 일한다. 그는 이런 일로 인해 교단으로부터 이단시 당한다. 오오츠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가 <마하트마 간디 어록집>에 있는 간디의 말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디는 자신의 종교관을 이렇게 밝혔다.

“나는 힌두교도로서 본능적으로 모든 종교가 많건 적건 진실이라 생각한다. 모든 종교는 똑같은 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종교든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사람에 의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엔도 또한 이렇게 주장한 간디의 말에 동의한다. 기독교든 다른 종교든 오오츠같이 진실하게 사람을 사랑하기만 한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다.

1962년 가톨릭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른 종교에도 하나님이 계신다”고 공표했다. 엔도는 이 공표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14:6)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런데 2013년 3월에 바티칸에서 선출된 프란체스코 교황은 3월 14일 주교들과 드리는 첫 미사에서 그동안 가톨릭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말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영적 신앙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라는 제목의 강론에서다.

“우리는 세속적 가치를 앞세워 선한 일을 할 수도 있고 교황이나 주교, 사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예수와 십자가라는 영적 근본이 없다면,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고 교회는 인정많은 비정부기구(NGO)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정말 예수와 십자가라는 영적 근본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오랜 기간 가톨릭과 개신교회 사이에 쌓여져 왔던 불신의 담이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엔도 슈사쿠는 평생 인간이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슬픔에 천착한 작가이다. 그것은 그가 평생 병약한 몸으로 괴로움을 당했고 어렸을 때 이혼한 부모님,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로 인한 슬픔을 깊이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깊은 강>에서 “신은 사람의 슬픔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분은 인간의 슬픔을 아신다. 그 슬픔을 안아 주신다. 그러므로 신의 품에 안기는 일은 슬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깊은 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고 말한다. 나는 엔도의 신앙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말한 엔도는 자신의 슬픔을 그 큰 팔로 안아 주시는 주님의 품에 안겼으리라 믿고 싶다.

그는 1996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지에는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라는 묘비명이 쓰여 있다고 한다. 슬픔을 가슴 가득히 껴안고 영원의 세계로 돌아가는 한 작가의 살 떨리는 아픔이 느껴지는 비명(碑銘)이다.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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