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본질과 현대 복음의 오류


아더 핑크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나의 전 존재와 생명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기꺼이 영접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에 경의를 표하면서 또한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혹 어떤 사람은 그러면 왜 로마서 12:1과 같은 권면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며

반대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 반대에 대해 우리는 모든 권면은

그들이 시작한 그대로 계속 행하라고 그들에게 단순히 요청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서 '영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아, 오늘날 은혜를 구하는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의 표준에 비춰볼 때 얼마나 저급한가.

만일 당신이 성구사전을 찾아본다면,

주와 구주 이 두 단어가 함께 들어 있는 모든 성경구절들 속에는

언제나 '주와 구주'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코 '구주와 주', 즉 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46,47, 벧후 1:11, 2:20, 3:18 등을 한 번 찾아보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47),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1:11),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2:20)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3:18)]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자기만족과 고집대로 사는 그들의 삶이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악한 삶에 대해 애통해 하며 참회할 때까지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살기로 결심할 때까지는,

자비와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들의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라

시끄러운 촐싹거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그들의 말은 단지 모욕적인 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더러운 입술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최고로 무시무시한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며,

또한 끔찍스럽게도 사함이 없는 죄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아, 슬프도다.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은 많은 격려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마치 추악한 기형아와 같은 사람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부문에서,

심지어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구원받는 것은 굉장히 간단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 3:16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하거나'

혹은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면'

그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했다고 평해진다.

사람이 은행을 신뢰하듯, 혹은 아내가 남편을 의지하듯

죄인이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향하기만 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들 한다.

이런 생각이 아주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 생각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기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그 생각이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로부터 나온 거짓말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인간적인 대상을 의지하는 일은 자연적인 신앙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신적인 대상을 의지하는 일은 초자연적인 신앙이 요구된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과 '개인전도자'들이 채택한 전도방법들을 조사해볼 때

그들이 생각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접해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님께서 사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항복시키려고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실 때

완성하시는 그 은혜스런 이적에 대한 개념을

그들은 최고로 약화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 슬프다.

이 타락한 세대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초자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지에서 나온 행위보다 우월한 것은 못되며,

단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잘 묘사했거나

'믿음'이란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 구절 몇 개를 피전도자 앞에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득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되었다는 생각이 오늘날 보편화되어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평안 속에 잠재우는 사단의 마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은 정말 두렵다.


죄인이 마음을 성결케 하는 일을(약 4:8)

마치 손을 깨끗이 씻는 일만큼이나 간단한 일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그리고 육체의 소욕을 약화시키는 신적 진리의 빛이 영혼을 탐색하도록 허용하는 일을,

커튼을 열어젖힘으로써 아침 햇살이 방안을 비취게 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며,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께, 죄로부터 거룩으로 돌아서는 일을

배가 키의 도움으로 선회하여 방향을 바르게 잡는 일 만큼이나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오 독자들이여,

이 생명에 관한 일에 대해 절대 이렇게 속지 말라.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는 것, 세상에 대해 못 박히는 것,

사단을 이기는 것, 죄에 대하여 날마다 죽고 의에 대하여 날마다 사는 것,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게 되는 것,

그리고 신뢰와 순종, 경건과 인내, 신실과 강직, 사랑과 친절의 사람이 되는 것 등,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저히 이루지 못할 과업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처럼 간단한 일로 간주하는 이유는

현 세대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참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성격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여서

위에 언급한 망상이 아주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그처럼 간단한 일로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이기에

오늘날 복음이 '인기있는 상품'(?)으로 아주 잘 팔리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믿음 그 이상의 것이며,

그 믿음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나의 마음과 생명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지옥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죄와 인간의 뜻, 그리고 자기만족으로부터이다.

이쯤 되고 보면 그토록 어려운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은 더더욱 극소수이리라.

주 예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간단한 것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님은 영혼구원이 간단한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고 말씀하셨다.



젊은 관원이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돌이켜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4,25)고 하셨다.

목사나 전도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이 구절에 대하여 내리는 신학적인 평가는 어떠할까?

그들의 평가는 전혀 타당치가 않은 것 같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백만장자의 구원은 극빈자의 구원만큼이나 손쉬운 일인데

그 이유는 백만장자나 극빈자 모두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재물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구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 곁에 있었다면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어느 누구라도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확신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그렇게 말함으로써 확신시키지 않으시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부연하셨다(막 10:27).

타락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또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을 특별히 변호하기 위해 신청하는 모든 재판을 각하시켜 버린다.

성령님의 은혜스러운 이적 외에는 아무것도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러면 자연인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을 그 젊은 관원의 경우에서 이끌어내 보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면서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갔다.

그는 재물에 빠져 있었다. 재물이 그의 우상이었다.

그의 마음은 땅의 것에 얽매여 있었다.

그리스도의 요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혈과 육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독자들이여, 당신의 우상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그 젊은 관원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조의 요구에 대한 복종, 즉 하나님께 대한 항복심의 결여였다.

이 지상의 찌끼들로 영혼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하늘의 감동을 받을 여유가 없다.

사람은 육적인 부에 만족을 느낄 때 영적인 부를 향한 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일한 진리가 그리스도의 큰 잔치 비유에서 다시 발견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잔치는 널리 공고되었고 복음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초청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다 일률적으로 사양하였다.'(눅 14:18).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온갖 다른 일에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밭과(18절) 소와(19절) 가정의 행복(20절) 등에 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시하는 조건 아래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건 아래서 기꺼이 '그리스도를 모시려고'한다.

그리스도의 조건이 무엇인가는 같은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장 귀중한 분으로 마음속에 모시는 것(26절),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27절), 모든 우상을 내던지는 것(33절) 등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하늘의 것에 애정을 품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계산에 넣고)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 14:28)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여기 '영광'이란 말은 칭찬이나, 혹 찬양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주요목표를 서로에게서 칭찬 듣는 일에다가 두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무관심했을 때,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려는 열망과 결심을 가지며)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 4:4).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과, 불경건한 (또는 종교적인) 친구들의 존경받는 일을 멀리하는 것과

그리고 경멸과 거절당하신 그 분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는 일,

또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항복하는 일,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 등과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이 구절이 함의하고 있는 것이 영생 얻는 일은 간단한 일이라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구원받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현대의 인기 있는 이론이 거짓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은

어느 누구라도 그가 결심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는 육체중심주의와 피조물 찬양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그 까닭은 자연인은 죄의 종이며(요 8:34) 각색 정욕에 종노릇을 하며(딛 3:3),

마귀의 포로이기 때문에(딤후 2:26),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끄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3:3),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따라서 자연인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깨뜨리고 감옥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보존본능 때문에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사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삶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죄인은 "그의 길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사 55:7).

그리고 우상으로부터 돌아서지 않고는(살전 1:9) 아무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눅 14:33)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찬미를 빙자하여

그리스도를 죄의 사역자로, 즉 그의 속죄 제사로써

육적이고 세상적인 정욕들을 습관적으로 즐기는 인간들의 사면을 획득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공할 만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대속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또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공언을 하면, 그의 매일의 삶이

신앙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 불신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마귀는 바로 이 착각 작용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마취시킨 후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고 말씀하시며

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신다.



영광의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의 용서를 획득키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며,

또 우리 마음이 여전히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하여 있는데도

우리를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오신 것이 아니며

(요 10:4,14, 히 10:20-22, 벧전 2:21),

또 그 길로 사람들을 불러들이시려고 오신 것이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0-2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그리고 그의 교훈과 약속,

또 그의 선례와 정신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영화된 상태로 재구성하시려고 오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화의 소망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도록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목적으로 사시다가 죽으신 후에

그의 성령께서 오셔서 죽은 죄인들을 생명의 새로움으로 소생시키시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들로 재창조하시며,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또한 마음이 이미 세상과는 절연된 자들로서 이 세상에서 체류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심령의 변화나 회개, 개인적인 성결, 하나님께 대한 지고한 사랑,

그리고 주저함이 없는 순종 등,

즉 인간 없이도 가능하나 인간에게 전혀 무익한 구원을 연출하시려 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이상한가!


우리는 로마서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 말씀이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입술로 주를 부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든 사람은 단지 말의 소리에 속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마 7:22-23).

만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옥의 공포가 죄인으로 하여금 주를 부르게 하는 것이라면,

그는 나무정령을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능자는 공포를 느껴 자비를 간청하는 어떤 반항자가 하라는 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 중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이시는 경우는

상한 심령과 온유한 마음,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성결을 목말라 하는 마음에서 부르짖을 때 뿐이다.

동일한 원리가 사도행전 16:31과 다른 모든 유사구절,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으리라"는 모든 구절들에게도 적용된다.

무관심한 독자들은 한번 힐끗 봐선 잘 모를 깊은 의미를 찾아내리라.

사도가 빌립보 간수에게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의지하라"거나

"그의 속죄제사를 의지하라"고 하지 않은 점에 주의하라.

그 대신에 그 간수 앞에 그는 한 인격을 들이댔다.

그것은 단순히 "구주에 대하여 믿으시오"라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12은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과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시기도 한 분을 영접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렇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리스도는 구주가 되기 전에 '주님'으로서 영접되어야만 하는 분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골 2:6) 받는 일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우리 자신의 죄 된 주인의식을 포기하는 일과

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사용하던 무기를 내려놓는 일,

그리고 그의 멍에와 율법을 복종하는 일에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어떤 인간이 그런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스런 이적이 먼저 그 사람의 내부에서 역사해야만 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인간 심성의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전달된 영적인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골 2:12)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능력'(고전 2:5)의 산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1:12),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5)]

죄인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므로

그가 세상을 창조할 수 없듯이 스스로 회생할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은 세상의 죽음의 의복과 육체의 정욕으로 꽉 조여 있기 때문에

오직 전능자만이 그의 마음을 소생시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할 수 있다.

만일 이 완악한 세대의 형식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개개 자연인의 실제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바른 개념을 소유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은혜의 이적만이 구원받고자 하여 믿는 어떤 죄인에게나

진정한 권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덜 빈정거리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가장 세련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지는 마음의 태도가

가장 비천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갖는 그 태도와 과히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과,

또 동료 피조물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리스도를 많이 갈망하고

반대로 가장 이기적이고 야수 같은 자들이라고 해서

덜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만 있다면,

오직 신적인 능력만이

사람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리라.


오늘날 '정통주의' 서클 내에 아주 널리 파급된 심각한 잘못이 하나 있다.

외관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교리인 듯하나 실상은 많은 영혼들을 속이고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한다'는 교리가 그것이다.

아, 사단은 매우 교활하다.

사단은 각각의 낚시터에서 가장 효과있는 미끼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세례와 성만찬은 영혼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이라고 설교자가 전하면

몹시 분개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은

쉽게 받아들인다.

이 말은 하나님 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사람 편에서는 틀리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부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하게 우리를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디도서 3:5 전체를 주의깊게 숙고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구원은 양면성이 있다. 법적인 면과 경험적인 면이 그것이다.

또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구성된다.

나는 성자에게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 모두에게 나의 구원을 빚지고 있다.

아, 슬프다.

오늘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이 사실을 설교하는 사람 또한 적도다.

나는 첫째로,

구원을 계획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성부 하나님께 나의 구원을 빚지고 있다(살후 2:13).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디도서 3:4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고 계신 분은 바로 성부이시다.

두 번째로

나는 나의 구원을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의 가치 있는 순종에 희생에 빚지고 있다.

성자께서는 나의 구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행하셨고,

또한 나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셋째로,

나는 나의 구원을,거듭나게 하시고 성화되게 하시며,

끝까지 보존하시는 성령님의 효력있는 역사에 빚지고 있다.

그의 사역은 누가복음 15:8-10에서 탁월하게 나타나 있고

4-7절에 있는 목자의 사역과 동일하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8-10),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4-7)]

디도서 3: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단호히 확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생활에 구원의 직접 증거를 보여주는 성령님의 '열매'의 출현이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존재증거를 발견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조사해야 할 대상은 바로 마음이다.

성경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케 하사"라고 말한다(행 15:9).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렘 4:14).

믿음에 의하여 깨끗해진 마음은(벧전 1:22) 지순한 대상께 고정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그 마음은 순수한 샘으로부터 마시며, 순전한 율법(롬 7:22)을 즐거워하며,

순결한 구주(요일 3:3)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을 예견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7:22),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리고 그 마음은 영적인 더러움 못지않게 도덕적인 더러움도 혐오한다.

그렇다. 그것은 육체로 더럽혀진 의복을 싫어한다(유 1: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1:23)]

반대로 그 마음은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비록 현자라 할지라도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계 21:27)을 행한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천국에 우리가 거하려면 마음의 청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마 좀 더 충분한 설명을 요구하리라.

믿음에 의한 마음의 청결은

첫째, 신적 빛의 조명에 의한 지식의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식은 오류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둘째는 양심의 청결이며, 양심은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셋째는 의지의 청결이며 의지는 고집과 자기추구로부터 돌아서게 된다.

넷째는 감정의 청결이다. 이제 감정은 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화한다.

성경에 의하면 "마음"은 이 네 가지 기능 모두를 포함한다.

구속의 목적은 동일한 죄를 계속 짓지 못하도록 하려 함이라는 점에서

청결한 마음과 일치한다.

한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에 의하여 입증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불로 연단된 정금(벧전 1:7)과 같아서 매우 소중하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참 그리스도인은 어떤 시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 그분께 기꺼이 시험받으려고 한다.

그는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므로 그는 타인이 그의 신앙을 시험하도록 기꺼이 허락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성경의 시금석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는 자기자신을 시험한다.

왜냐하면 평안하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태로울 때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좋은 상태 못지않게 최악의 상태도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설교는 자기자신을 낱낱이 파헤치는 설교이다.

그는 헛된 소망으로 망상에 빠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는 근거없는 영적자만에 빠져 우쭐거리지 않는다.

시험이 왔을 때 고린도후서 13:5에 기록된 사도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바로 여기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형식주의자들과 구분된다.

건방진 신앙고백자는 교만으로 가득차 있고,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으며,

자기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탐색하는 시험은 경멸하고,

신앙에 해롭고 신앙을 파괴하는 자기반성은 중시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설교는 자기와 거리가 멀고 양심을 찌르지 않으며,

자기 마음을 정밀검사하지 않는 설교이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그를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보장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

그의 거짓된 평안은 더욱 넘쳐 나게 되고, 그의 인간적인 확신은 더욱 견고하여진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그의 소망은 환상이고 그의 확신은 거짓이라고 확신시키려 들면,

그는 그 하나님의 종을 의심의 불화살을 쏘아대는 원수 사단으로 간주한다.

자신의 상태를 착각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구원받은 살인자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또 다른 특성은 그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헛되고 괴로운 이 세상의 것들과 싸워 승리케 한다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현재 경험되는 실재임을 주의하라.

이 점에서 성도는 그의 머리와 일치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세상을 이기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백성들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계신다.

그는 그들의 눈을 열어서

이 세상이 제공하는 최상의 것의 공허함과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영적인 것들로 만족케 함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떼어놓는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대해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를 그리워한다.

아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일들에 관해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에 의해 속고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이 논문을 기쁘게 사용하셔서

몇몇 미혹된 영혼들의 거짓확신을 분쇄함으로써,

그들이 절박하게 되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습득방법을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하라고 대답하겠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일진대, 하나님 자신의 방식으로 주시리라.

우리가 그 믿음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전달하실 때 항상 사용하시는 방식 속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자신이 제공하신 수단의 채널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제정된 수단들은 그 자체에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들린 유용한 도구들에 불과하다.

하나님 자신은 그 수단들에 묶여 있지 않으나 우리들은 제한받는다.

또 하나님은 자유하시나 우리에게는 수단이 필요하다.



첫 번째 수단은 기도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

이것은 참 소중한 약속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경에 귀를 기울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새 마음, 새 영, 그리고 선물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는 보편적인 의무이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불신자들이 범죄한다 하더라도

(그 밖의 모든 경우에서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다.



두 번째 수단은 말씀을 듣고(요 17:20, 고전 3:5) 읽는 것이다.(딤후 3:15)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17:20),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3: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다윗은 말한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진지한 마음으로 생명과 능력과 구속, 그리고 평안을 간구하면서 성경을 읽으라.

주께서 그의 축복을 더하시기를.


아더 핑크의 ‘실천적인 기독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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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개혁주의 구원론에 관한 소고(小考)

- 총신원보 주최 제1회 논문공모대회 최우수상 수상작

Ⅰ. 연구의 필요성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많은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은 결국 강단의 문제로 귀결되고, 이는 곧 설교의 문제요,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교리상의 문제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이신칭의 교리의 재발견으로 개혁 교회는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스코필드 주석의 영향과 샌디먼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가 만연되게 되었고, 한국 교회도 C.C.C. 선교 단체의 사영리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구원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고, 그러한 결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구원론의 개념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은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존 머레이(J. Murray)교수는 '확정적 성화' 교리를 통하여 성화가 구원론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역설하였다. 교회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청교도들이나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C. H. Spurgeon)이나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등의 설교자들의 설교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회심의 문제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소논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서 재고의 작업 없이 일반화되고 있는 구원론의 문제를 역사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구원의 교리에 대한 평가 작업을 시도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가시적인 유형 교회 내의 알곡과 가라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본 논문을 통하여 작은 문제 제기라고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Ⅱ. 역사적 개혁주의 구원론

'그리스도인'을 두 개의 그룹이나 또는 등급으로 구분 짓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찰스 핫지(C. Hodge), 제임스 보이스(J. M. Boice), 로버트 답니(R. Dabney), 존 번연(J. Bunyan),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89년의 침례교도 신앙고백, 남침례교 신앙 선언문등에서 나타나 있다.


조지 휫필드(G. Whitefield)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찰스 스펄전에게 극찬을 받았던 경건한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는 그의 마태복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모든 은혜는 우리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서 그분으로부터 받을 혜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 '만일 공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고 공언하면서 그 뜻을 전혀 따를 의사가 없다면 그의 주제넘은 말을 그냥 받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지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사람이 우상들에게 붙잡혀 있고 아직도 마음이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확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구프린스턴(The Old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탁월한 조직 신학자였던 A.A.핫지(Hodge)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성화를 위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칭의를 위한 분으로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죄인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거룩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지금 성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나 지금 저를 의롭게 해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혈액 순환과 공기의 흡입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호흡과 혈액의 순환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느 한쪽이 빠지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동시적이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끌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칭의와 성화를 다 같이 가져야 합니다. 이 둘은 함께 공전하면서 하나의 삶을 이룹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성화가 없는 칭의만을 위해 영접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성화되지 않은 것처럼 의롭게 되지도 않습니다.'


스펄전(C. H. Spurgeon)은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그것은 사실상 구원의 결과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이 아니라, 우리의 나쁜 습관, 악한 심성, 더러운 마음, 습관적인 죄악으로부터 구출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나 청교도들도 이러한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를 배격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를 오해한 나머지,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죄의 심각성, 율법의 필요성, 심판의 엄중성을 간과한채, 죄에 뒤따르는 건전한 죄의식을 영적 우울 증상으로 매도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론자(신자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사람)와 알미니안(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통탈할 노릇이다. 아더 핑크(A.W. Pink)는 회개 없는 복음은 복음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길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떼어내는 것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같이 성경을 완전하게 오해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언제나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에 거룩하여지기로 결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를 비논리적으로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서 시작이 되고 거룩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원의 시작이자 끝인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로 우리들을 인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거룩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관하여 아주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전도자는 거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야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입니다. 복음전도의 전체적인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죄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째서 그들이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어째서인가 하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빛이시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점,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분리하여 놓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성경의 진수와 같은 교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을 우리들이 가입하려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전적으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지 아니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기업이 될 것을 정하는 우선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곧 그리스도 전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필연적으로 진리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이 거룩의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선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을 실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거룩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을 선택하여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의 가능성이 아니라, 거룩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서 어떤 거룩의 표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교리를 말하고, 그가 선택을 받았고 예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거룩의 요소가 없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정통적이면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 그는 선택함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함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엄숙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John Murray) 교수도 그의 조직신학 선집에서 확정적 성화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 따라서, 죄 안에 또는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영역 안에서 살며 활동한다-그것은 그의 삶과 활동의 장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에서 살지 않는다. 그것과의 연계는 끊어졌으며, 그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어조로 '나는 그를 찾았으니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간격이다. 그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전 관념이 근거하는 토대이고, 일상적인 죽음의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진정으로, 결정적으로, 참인 간격이요 옮김이다. 죄가 죽음 안에서 또는 죽음으로 지배하는 영역과의 단번에 확정된 바꿀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대비는 이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롬 6: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한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진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 아래 있다(14절). 죄에 대하여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10, 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12, 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안에 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한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른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한다. 대비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결론

필자가 짧은 이 소논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이 완전주의(Perpectionism)는 물론 아니다.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와 같이 필자도 완전주의를 거부한다. 지상에 있는 성도중 그 누구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화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러한 문제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다시 말하여 회심하지 않은 자연인을 예배당에 출석하고 믿음을 표시하는 것만으로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심각한 구원론에 있어서의 혼동을 겪고 있다. 이에 이러한 구원론에 대한 재발견과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져서,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가 구원에 있어서 성도의 열매를 매우 강조하면서 실제로 자신의 노샘프(Northampton) 목회지에서 그러한 원리를 적용시켰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이러한 실천적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한 적용이 목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본 소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어네스트 롸이씽거, 거짓 신자,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3.
존 머레이, 조직신학 선집 Ⅱ, 박문재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마틴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1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조엘 비키, 청교도 전도, 김홍만 역, 청교도신앙사, 2002.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7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제프리 윌슨, 뒤틀린 복음,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7.

 

 


개혁주의마을

박형룡 박사는 『교의신학V-구원론』(서울:은성문화사,1972)에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오르도 살루치스) 9단계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텍스트 북으로 크게 의존하였던 루이스 벌코프는 양자를 독립적인 단계로 제시하지 않았고, 마지막 영화단계도 생략하고 있습니다. 박박사는 1950년대에 구원론을 저술한 H. Kuiper아 J. Murray등의 저술을 읽으므로서 벌코프의 구원 서정론을 약간 수정 보완하게되었습니다. 아래에서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구원서정론은 누군가 입시준비를 위해서 요약한 것입니다. 박은제 목사님이 제게 보내준 많은 자료중에 속해 있습니다. 후일에 시간을 내어 본격적인 정리를 해 보고자 하나 당분간 임시적으로 아래의 요약으로 대체합니다.


① 소명 :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구원을 신앙으로 수납하도록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다(롬 8 :30).

② 중생 : 사람안에 새 생명의 원소를 심고 영혼의 주관적 성향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요 3 :3-5)

③ 회심 : 죄인이 죄에서 더나 하나님께 돌아가는 의식적인 변화(요일 1 :9)

④ 신앙 :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영혼의 운동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심적으로 신뢰함이다(막 1 :15).

⑤ 칭의 :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여 죄인에 관한 모든 율법적 요구가 만족된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롬 8 :30).

⑥ 수양 : 사람을 외계의 세속적 가족으로부터 하나님 자신의 가족 중에 전입시키는 행위(요 1 :12)

⑦ 성화 : 칭의된 죄인을 죄의 오염에서 건지셔서 그의 전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닯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롬 8 :14).

⑧ 성도의 견인 : 택함을 받은 자들을 기어코 구원을 받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딤후 4 :18).

⑨ 영화 :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이다(롬 8 :30).

 

 

루  터

로 마 가 톨 릭

펠라기우스

1

준비단계

소 명

충족한 은혜(저항, 차동가능)

회개(죄인자력)

2

조 명

협력은혜(칭의준비) 하나님의 말씀접수. 죄악상태통찰 긍휼희망. 하나님사랑시작 죄의 증오. 계명순종결실 세례받을 욕구

순    종

3

회 심

 

4

중 생

 

5

신  앙

 

6

칭  의

 

7

신비적 연합

주입은혜(칭의의 은혜) 세례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온다.

 

8

갱  신

 

9

보  전

 

 

 

 

 

개혁파

알미니안파

칼빈

1

소  명

소명(순웅, 저항)

소명

2

중  생

회  개

신앙

3

회  심

신  앙

중생

4

신  앙

칭의(의의전가)

회심

5

칭  의

중  생

성화

6

수  양

성  화

칭의

7

성  화

견  인

예정

8

성도의 견인

 

부활

9

영  화

 

 

 

 

2. 소명이란 복음을 죄인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이다.

명사의 의미로는 καλειν, κλησι?, κλητο?, εκκλησια가 있다. 소명의 발령자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특히 성부이시다.

실물적 소명과 말씀의 소명으로 구분되며, 외소(external calling),와 내소(internal calling)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외적소명이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 제시하여 사죄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진실한 권고인데, 이 경우에 죄인은 응답을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소명이다. 그러나 이 소명에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다.

외적 소명의 요소로는 복음적 사실과 이념의 제시, 신앙과 회개로 그리스도를 받으라는 초청,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가 용서되며 구원에 이른다는 약속의 제시 등이 있다.

외적 소명의 특징으로는 외적 소명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다. 즉, 이것은 복음을 듣는 사람에게는 모두 아무 차별없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외적 소명은 성실한 소명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이 복음으로 죄인을 부르실 때,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진정으로 바라신다.

내적 소명이란 복음이 제시될 때, 죄인이 믿음으로 응답하는 경우로서, 이 소명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명이다. 외적 소명에서 전해진 그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내적 소명을 받은 죄인의 마음 속에서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 내적 소명의 특징은 도덕적 설유의 방법으로 역사한다. 즉, 하나님은 권능의 말씀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수용하도록 설득하신다.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역사한다. 즉, 인간의 의지를 효과적으로 감화시킨다. 항상 한 목적지로 향하게 한다. 즉, 성령께서 피택자를 인도하여 확실하고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한다.


3. 중생에 대하여 약술하라.

 

중생의 정의 : 협의 - 죽은 영혼을 일깨워 새생명의 원리를 심어주는 성령의 역사이며, 광의 -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사람의 첫 번 응답. 즉 말씀에 응답하여 새생명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약1:18, 벧전1:23). 칼빈의 경우에는 회심과 성화의 전과정을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과정을 말한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일생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계속한다.

중생의 본질 :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즉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인간의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므로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

중생의 논리적 순서 : 말씀전파(외소) - 성령의 역사(새생명의 발생) - 유효적 소명 - 거룩.

중생의 필요성 :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과 평화하고 교제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영혼의 전 성향을 갱신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중생의 역사가 필요하다.

중생은 하나님 편의 단독 사역이다. 중생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 하지만 말씀이 있어도 성령의 일깨우는 역사가 없이는 중생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령의 단독 역사이다.


4. 회심(convers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회심의 성경적 의미 - 국민적 회심(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니느웨 등), 넓은 의미의 피상적 회심 = 일시적 회심(자시 동안은 진정한 회심인 것 처럼 보이나, 허식적 회심에 불과), 좁은 의미의 진정한 회심(중생자가 자기의 의식생활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과 회개를 계속해 나가는 것을 의미) = 반복 회심 등이 있다.

회심의 특징 : 회심의 특징은 구원과정의 한 부분이며, 회심은 재창조의 동작, 각성의식에서 회심하며,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음이며, 단번적인 변화, 돌연적 회심과 점진적 회심이 있다. 이는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에 의해서 일어난다.

회심의 정의 : 회심은 죄악의 길을 떠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다. 구약의 개념으로는 ??? ‘후회하다’의 뜻으로서 계획과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는 ‘떠났다가 돌아오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심의 구약적인 개념은 계획과 행동을 수반하는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약의 개념에서는 μετανοεω 는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며, επιστρηφω는 ‘방향을 돌려 되돌아 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적인 개념에서 회심은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로 방향을 돌려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의 요소 : 知(생각의 변화로서 자신의 생활이 죄로 가득찬 생활이었음을 인식하는 것), 情(감정의 변화로서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반역하여 범한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 意(목적의 변화로서 죄에서 떠나 전격적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의 돌이킴을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의 회개의 개념 - 통회, 고명(고백), 보속이 있다.

통회 - 죄에 대해 진정한 애통과 비애를 느끼는 것

고백 -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신부에게 고백하는 것

보속 - 죄인의 행동의 회개로서 자신의 죄를 인내와 선행으로 속량하는 것

회심의 특징 : 회심은 상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회심은 인간의 의식생활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죄를 벗고 하나님을 향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회심은 좁은 의미로는 단회적이며, 넓은 의미로는 반복적이다.

회심의 창시자와 선행자는 하나님이지만 사람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한 인간의 협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회심은 회개의 복음, 구원에 필요하며, 사죄에 필요하다. 회개의 과실(열매)로서 성실한 자백 수복과 개선, 깨어 죄를 대적함, 하나님 사랑이 진정한 회개의 열매이다.


5. 신앙에 대하여 약술하라.

 

신앙(πιστι?)란 하나님의 진실성에 관한 확신이다. 그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중심으로 그에게 신뢰하는 것 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구원적 신앙이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일으켜진 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실한 신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이다.

일반적 기초적 의미의 신앙 : 자아헌신, 의견보다 강함, 즉각적 확정, 증언에 기초하고 신뢰를 포함하는 확신을 의미한다.

종교적 구원적 신앙 : 신앙의 개념은 역사적 신앙, 일시적 신앙, 이적의 신앙, 진정한 구원적 신앙으로 구별된다.

신앙의 조성자 : 신앙의 조성자는 성령의 중생하게 하심으로, 그리고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으로, 성령의 증언으로 신앙이 조성된다.

신앙의 본질과 자리는 마음이다.

신앙의 성분 : 신앙은 지성적 성분, 감정적 성분, 의욕적 성분으로 구성된다.

다른 파들의 신앙관 : 로마 가톨릭의 신앙관 : 역사적 신앙과 구원적 신앙의 구별이 없다. 표명적 신앙과 묵종적 신앙, 비형성적 신앙과 형성적 신앙으로 구별한다. 알미니안주의 신앙관은 하나의 칭의하는 행위로 만든다. 불완전한 행위를 완전한 행위로 계정한다. 사람이 창시한다. 칭의의 원인과 근거이다. 자아 충족 경향.



6. 칭의에 대하여 약술하라.

 

칭의의 정의 :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이다.

칭의의 중요성 : 칭의가 미치는 영향은 죄인의 상태가 아닌 신분에 해당한다.

칭의의 성질 : 은혜성, 법정성, 선언성, 제정성, 즉각 완전 최종성.

칭의의 특징 : 1)죄책의 제거, 2)외계에서 단행, 3)단번에 단행, 4)성부의 선고

칭의의 구성과 구별 : 1)사죄 - 중요성, 포함성, 무차별성 2)영생권 3)능동적 혹은 객관적 칭의와 수동적 혹은 주관적 칭의로 구별된다.

칭의의 때와 관계 : 1)영원부터의 칭의 - 도덕폐기론자들은 죄인의 칭의가 영원에서 혹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단행되었다고 주장한다. A.Kuyper, Herman Hoeksema 등이 주장하고, H.Bavinck가 이에 반대하였다. 2)그리스도의 부활에서의 칭의 3)신앙으로 칭의 - 성경에 의한 신앙과 칭의의 관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칭의된다.

칭의의 근거 : 1)사람의 선이 아니다. 2)그리스도의 의다 3)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롬5:17-19)

칭의의 다른 견해들 : 로마 교회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있다.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를 부인한다.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강조한다. Schleiermacher는 우리 안에 구속의 시작의 주관적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Ritschl은 은혜로 죄인을 영접하여 자기와 교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주장한다. 신정통(Barth)주의는 칭의를 순간적 행위로 말하나, 오히려 칭의는 성화와 제휴하여 전 노정을 행진하는 것으로 보았다.

칭의 교리에 이의 : 1)행위에 의한 심판 2)은혜의 제외 3)불경건한 처사 4)방조에 인도한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칭의의 요소 : 소극적 요소 - 죄의 용서를 말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기초로 해서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모든 죄책과 모든 형벌을 제거한다. 적극적 요소 - 자녀됨과 영생에의 자격을 부여한다. 하나님은 신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때, 그들은 자녀의 모든 법적 권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된다. 그래서 영원한 기업과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보증받는다.


7. 수양(收養;Adopt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수양의 개념 : 사람을 외계의 세속적 가족으로부터 하나님의 자신의 가족 중에 전입시키는 행위이다.

수양의 절차와 자격의 함의 : 아들(子)격의 함의 - 1)하나님의 독생자 혹 맏아들 2)하나님의 총애받는 피조물 3)하나님의 파견하신 권세를 받은 재판장 4)신적 수양의 대상들로서의 사람들(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특정적으로는 영적으로 구속된 양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되는 자들)

양자의 기업 :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기업


8.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하여 약술하라.

 

신약 명사 : 동사 ?γιαζω의 다양 의미, 거룩의 관념을 표현하는 형용사들, 성화와 성결을 표시하는 명사들

구약 관념 : 위엄적 거룩, 윤리적 거룩, 파생적 의미의 거룩.

성화의 정의 :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다.

성화의 특징 : a.성화의 창시자는 인간의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으며, 또한 협력해야 한다. b.성화는 칭의와 달리, 법정적 행위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재창조적인 행위이다. c.성화는 오랜 기간의 과정이어서 현세에서는 결코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d.그러므로 성화는 죽을 때 완성된다.

성화의 성질 : 1)하나님의 초자연적 공작 2)신자들이 협력하는 하나님의 공작 3)의식적 협력 4)거룩한 생활의 실제이다.

성화의 특징 : 1)옛사람과 새사람 2)온사람에 영향을 미친다. 3)현실적인 변화이다. 4)성장성 5)장구한 과정이다. 6)완성기는 죽음과 부활의 때

성화의 조성자와 방편 : 1)삼위 하나님, 특별히 성령이 조성자이시다. 2)신적 조성자 강조의 필요 3)성령에 전적 의뢰 4)성령 공작의 신비 방편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 성례, 기도와 묵상, 섭리적 지도, 방편의 고집적 사용을 통해 성화된다.

완전론 :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현세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신자라도 그가 육체를 입고 있는 한 결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백과 사죄기도가 계속적으로 요구된다. 중생한 신자는 매일 그 속에 있는 죄와 싸워야 한다. 중생함으로 죄는 그 지배력을 상실하였으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와 말씀과 성령에 의지하여 죄와의 전쟁을 계속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날마다 닮아가야 한다.

성화와 율법 : 율법은 신자 생활의 규범이다. 율법에 의한 선행이 강조된다. 이는 강요없는 생활지도의 기준이다.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 요구된다. 율법은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감사 생활의 규칙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9.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

 

교리의 진술 :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그의 영에 의해 유효적으로 부르시고 성화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로부터 전적으로도 최종적으로도 타락할 수 없고, 그 상태에서 끝까지 확실히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 얻을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 ⅩⅤⅠⅠ. 1)

견인의 정의 : 견인(끝까지 인내함)이란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시작하고, 계속하여 마침내는 그것을 완성케 하시는 성령의 계속적 역사이다.(요10:28-29, 롬11:29, 빌1:6, 살후3:3, 딤후1:12, 4:18)

추론적 증명 : 1)선택의 교리 2)구속언약의 교리 3)그리스도의 공로와 중재대언의 효력 4)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5)마음에 성령과 말씀의 역사 6)구원의 확신

견인 교리의 이의 : 1)사람의 자유에 모순 2)나태와 방종에 인도 3)부도덕에 인도 4)성경에 위반 5)이의의 결과-견인 교리는 성도에게 큰 위안과 능력의 원천이 된다.


10. 영화에 대하여 약술하라.

구성과 시기 : 영화는 현세가 아니라 죽음과 부활에서이다. 죽음에서 영혼의 완전성화와 부활에서 신체의 영화가 이루어진다. 죽을 때 영혼의 성화가 완성되는데, 성령의 순간적 행동과 하나님이 구원의 조성자이기에 죽을 때 영혼의 성화가 완성된다. 또한 신체의 부활에서 구속이 완성되어 온사람의 최종 완성한 구속으로 그리스도와 유사하게 영화된다. 영화의 시기는 개인별로 다른 때(성화의 완성)와 모든 성도들이 동시에(구속의 완성) 곧 죽음과 부활 때에 이루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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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웅 목사님 홈피에서 퍼왔습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구원이 은혜라면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없나요? (Q&A) / 박신 목사


[질문]


은혜로 얻은 구원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서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을 믿는 것에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없습니까? - 즉, 신자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고자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들은 잘못된 것인가요? 이 부분이 가장 혼란스럽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답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당연히 신자가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구원에 칭의, 성화, 영화의 세 단계가 있는데 그 중간 단계인 성화는 신자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 지식이 없이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모든 인간은 의롭게 되려고 노력해야 하며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의로워지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절로 의로워지는 법은 결코 없으니 신자는 의로워지려고 갑절의 노력을 해야 함은 너무나 지당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세 단계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원은 순전히 은혜로 얻습니다. 인간의 신분, 자격, 조건, 공로, 행위 등이 아무리 선하고 의롭다고 해도 하나님의 온전한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완전히 이루신 의에 의거하어 신자를 의롭다고 칭해주십니다. 또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단계를 특별히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단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뿐입니다.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비유컨대 사형집행을 앞둔 사형수에게 왕이 아무 조건 없이 사면선언을 내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형수였던 우리 모두가 한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데도,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할 나의 죽음과 마땅히 살아야 할 예수님의 죽음을 맞바꾼 것입니다.  

단언컨대 신자가 거룩해져서 구원 받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무능한 죄인임을 절감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것뿐입니다. 이제 겨우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보려는 결심을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도덕적으로는 이전과 같으며, 영적으로만 앞으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겠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그래서 하나님이 죄의 형벌만 면제해 준 셈입니다.(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이는 과거에 있었던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의 신분과 소속의 변화만 완료되었습니다. 한 번 믿어 구원 받은 자에게 다시 칭의의 절차가 필요하거나, 취소 내지 수정 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순전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인간이 믿음으로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 있기에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거룩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이는 신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선 영원히 벗어났어나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와 세상의 악과는 평생토록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는 구원의 두 번째 단계인 성화(聖化, Sanctification)로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싸움입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두 번째라고 해서 이 단계를 온전하게 통과하지 못하면 즉, 완전히 거룩해지지 않으면 셋째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구원은 확정되고 취소되지 않으나 반드시 통과해야할 과정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더 거룩해질수록 천국에서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부끄러운 구원이 되는 차이만 있습니다. 성화는 그래서 이미 바뀐 신분에 걸맞게 성품이 거룩해지려고 계속 노력하는 진행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자가 죽어 천국에 가면 주님과 맞대면함으로써 구원이 완성됩니다. 주님과 닮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기에 영화(榮化 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눈물과 고통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죄악 자체가 없습니다.(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그리고 마지막 때엔 육신의 부활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님과 함께 강림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더 거하겠느뇨?

구원은 인간의 공적 하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선물로 얻습니다. 또 믿은 후에 짓는 모든 죄도 용서 받습니다. 지옥의 심판에서 면제된다는 것이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사랑의 매로 부과하는 징계에서조차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히12:1-13 참조) 죄지을 때마다 입술로 자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거룩하게 자라야 합니다.(요일1:9)

이런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두 종류의 극단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무도덕주의입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에 어떤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더 받으려면 죄를 더 많이 짓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거기다 기독교 초기에는 육신은 악하고 영만 선하다는 이단사상까지 보태져서 죄에 대해 아주 무감각해지고 도덕이나 율법이 아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1-4)

바울 사도는 그런 잘못을 크게 나무라고 있습니다. 지옥 형벌이 없어지고 믿은 후의 죄마저 용서 받는다고 해서 제 멋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깨트려버린 죄의 권세에 다시 굴복하는 너무나 어리석고도 악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까닭은 다시는 그런 죄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옥 안 가게 되었으니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신자 된 진정한 은혜이자 권세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은 성화를 너무 강조해서 도덕주의로만 신앙을 변질 시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죄의 형벌과 징계를 구분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형벌을 면제해준 까닭은 인간 스스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당신의 의의 기준에 합당할 수는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은 후에도 평생토록 어떤 자라도 완전한 성자는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이란 매번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오직 주님의 용서의 은혜에 힘입어서, 때로는 그분의 강권적 징계로 새삼 깨우쳐서, 한 걸음씩 성화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의롭고 악한지 기준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신자의 잘못과 허물을 끝까지 관용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성도들끼리 서로 참아주고 권면 위로하면서 함께 아름답게 자라는 것이 참 복음의 능력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화가 신자의 책임이라고 해서 신자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가만히 있어도 성화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4)에서 보듯이 정말로 평생을 두고 모든 의지를 다 동원해서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피 흘린다는 것은 이어지는 구절에 설명이 나오듯이 성화의 싸움에 등한히 하거나 죄와 쾌락을 즐기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형벌이 아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화의 의지가 약해지려 하거나, 징계를 받을 때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이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됨을 체험해서 주위의 불신자들 앞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1-13)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자신의 힘으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또 신자의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실패했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습니다. 따라서 성화를 자신의 의지로 피 흘리기까지 이루려 노력은 하되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어서 자신의 성품을 깨끗케 하고 또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2-16)

‘항상’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구원(항상 해야 하므로 단회로 끝나는 칭의가 아니라 성화임) 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의 소원도 주님이 심어주시고 또 그분께서 행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세대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화가 신자 개인만의 인격적 변화만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할 소명도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맡은 일과 처한 여건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일, 내적으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고 외적으로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옮겨다 심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자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으로 항상 또 미리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금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항상 피 흘리기까지 복종하며 성화를 이루고 있기는커녕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주로 무엇입니까? 오직 자신의 형통과 안일을 위한 것뿐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 기도는커녕,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기도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얻게 된 새 생명 안에서 사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고 이제 지옥 형벌은 걱정 없으니 현생에서만 잘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꾸짖었던 “은혜를 더 받으려 죄에 더 거하는” 또 다른 행태입니다.

구원에서 칭의와 영화는 믿음으로 그대로 순응하는 것 외에 신자가 할 일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는 반드시 평생토록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성품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며, 세상 죄악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주위에 드러내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소명을 실현해야 합니다.

7/9/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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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와 구원의 관계 / 박신 목사 


성경문답 사이트를 개설한 이래로, 또 개인적으로 이메일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은 주제는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였습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경륜이 오래되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데도, 구원에 대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칭의, 성화, 영화를 구분할 줄은 아는데 각각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그 셋을 연결하여 종합적으로 판단, 적용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으면 미래에 지을 죄까지 이미 다 용서 받았기에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원파 식의 한쪽 극단이 있습니다. 그 반대쪽 극단은 엄격한 도덕주의 율법주의에 치우쳐서 사소한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이 주제를 직간접으로 이미 여러 번 다뤘지만 각기 조금씩 다른 질문내용에 각도를 맞추어 답변 드리다보니 그 전체를 연결해서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사한 의문을 가지실 분들이 쉽게 참조하고 오해의 소지를 줄이도록 구원과 죄의 관계를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죄의 본질과 구원

구원은 하나님이 죄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죄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에다 말로 남에게 상처 주는 죄(마5:22)와 마음으로 짓는 죄(마5:28)까지 죄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말로 범한 잘못은 당연히 그러하지만 생각 또한 사고 활동이기에 인간이 작심하고 지은 행동의 죄로 봐야합니다. 주님의 뜻은 다른 이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는 행동만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는 자기를 몰라도 자기는 알기에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의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그 모든 죄들이 외부 여건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마15:17-19) 행동과 말과 생각을 조종하는 인간의 마음이 따로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타락 오염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이 타락된 것은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배제한 데서 기인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 세우고 마음의 중심에 두었기에 그분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는 범법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특별히 자기를 최고로 높이려 드니까 인간 사회에서의 경쟁 분쟁 원수가 되는 온갖 윤리적 죄가 발생합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근본 의미도 하나님을 스스로 절대 찾지 않으며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 특별히 자기만 높이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마음에서부터 죄(생각, 말, 행동)가 나온다면 결국 인간 존재 전체가 죄로 찌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 존재 전체가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요3:5) 존재 전체가 타락되어 있기에 스스로 그 타락된 마음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 심령 안에서 역사해야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를 생각, 말, 행동 즉 자신의 의지적 행위로 인한 잘못으로만 정의한다면 논리적으로 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깨끗케 되려는 선행 구원이 타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 전체(한 인격체)가 타락되었다면 그 사람을 깨끗케 해야만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진정한 의미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그분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자연인이 태어난 이후에 하나님께 범과한 그 모든 결과를 보면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법정에선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은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자 단 한 명도 없기에 그분의 공의대로 하자면 단 한 명도 구원을 입을만한 조건, 자격, 공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심이 너무 크신 그분은 우리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며 우리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동과 서는 먼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만나지 못함)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시103:8-12) 구약 시대 다윗의 고백이지만 바로 십자가 복음을 예표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타락한 아담이나 그 이후의 인간들이 당신에게와 같은 인간에게 지은 죄과로 치면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그러면 단 한 명도 살아날 자가 없기에 그 죄는 철저하게 응징하되(공의) 그 죄인은 살려주는(사랑) 구원의 길을 태초 전부터 정했습니다.(창3:15, 요1:1, 엡1:3-14)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당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죄인과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엡2:11-18, 히10:10-20)

따라서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정확한 뜻은 우리의 죄과는 주님이 다 짊어지셨기에 한 죄인의 인격체 전부가 하나님에게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어도(사실상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어도) 그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용납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눅15:11-32)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갈4:6), 그분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벧전2:9,10).

이런 예수 십자가의 구원은 다윗 시편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베풀어집니다. 그 경외는 단순한 행동으로 지은 죄를 반성하고 고치는 도덕적 종교적 회개(悔改)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아시기에(고전2:6-16)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대로 성령의 간섭과 역사가 전제 되어서 한 존재 전체가 거듭나는 영적인 회개를 수반합니다. 타락한 마음 전체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으로 회심(回心)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지난날에 지은 죄 된 행동들만 반성해서 고친다면 여전히 선행구원에 머무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을 중심에 둔 자기 존재 전체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썩어 없어졌어야만 했다는 철저한 자각입니다. 자기만 높이려고 살았던 지난 모든 삶이 최악의 실패와 절망뿐이었음을 너무나 깊이 깨달았기에 다시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인생의 완전한 유턴입니다. 앞으로는 주님만 중심에 모시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는 순간 이런 회심이 일어나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그 죄인의 회심한 중심을 아시며 본인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과 미래의 죄

예수님이 죄인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대신에 그 죄인은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 받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 관계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기는커녕 훼방도 하지 못합니다.(롬8:31-39) 인간의 부모 자식 관계도 절대 끊어지지 않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신자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나 사건은 우주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권능과 은혜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절대로 구원의 취소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하고 자기 자녀로 삼아주었기에 구원이 취소된다는 생각은 하나님 그분을 왜곡 부인하는 짓입니다. 인간 부모도  그것도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아니라 입양한 자녀가 잘못했어도 내치는 법은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 자기 자식처럼 키울 확고한 결단과 헌신이 따르지 않으면 아예 입양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자녀로 받아들인 그 관계를 취소하고 다시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이 그렇게 잘못을 했어도 아버지가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주고 다시 쫓아내는 법은 없듯이 말입니다. 이를 죄와 연관해서 말하면 죄로 인해 받을 지옥형벌이 완전히 면제(free from the penalty of sin)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입장권을 준 것이며 그 준 것을 다시 회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광스런 완성은 이미 보장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 용어로 칭의(稱義-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전혀 의롭지 않은 자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었기에 하나님이 그 주님의 의를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준,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이는 단회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전부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처음 믿은 때입니다. 죄인 그 상태로 그 신분과 소속과 위치만 흑암 사망 사탄의 미혹 아래에서 빛 생명 하나님의 품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간섭으로 일어난 일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요 선물입니다.  

한 죄인 전체가 이미 용납되었기에 그 후로 죄(생각, 말, 행동의)를 지어도 절대 다시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죄까지 모두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은 후에 죄 지었다고 다시 심판하지 않으니까 미래의 죄도 당연히 용서 받은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십자가 구원은 하나님이 한 죄인(여전히 죄에 찌들어 있는)을 있는 그대로 당신 자녀로 품어주시고 완전히 용서해준 것입니다. 이런 확고한 이해가 없으면 자꾸 구체적 사소한 죄들과 연결해서 구원을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성화와 징계

문제는 구원이 한 죄인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것이기에 그 내면에 있는 죄로 찌든 본성은 그대로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치사하고 추하거나 흉악한 행동을 짓고 싶은  생각이나 습관을 죄의 본성이라고 곡해 하면 안 됩니다. 서두에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만 높이려는 고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어 회심할 때에 하나님을 멀리했던 지난 삶을 철저한 실패로 인식하고 마음의 전체 방향은 분명히 하나님 쪽으로 돌렸지만 자기를 높이려는 옛 자아의 흔적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 있어서 수시로 하나님을 망각 외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짓는 구체적인 죄도 결국 자기중심성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죄와 싸워 이기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붙들어야만 가능합니다.(눅9:23, 롬7:17-25) 이는 바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입니다. 죄의 본성과 그 힘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씨름으로 믿은 후 일생 동안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되 자신이 책임지고 계속적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고 말한 까닭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믿거나 선행을 쌓아서 천국 가는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성화를 충실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성화와 칭의가 시간적 혹은 수준적으로 구분되는 두 단계가 아닙니다. 칭의가 되는 순간 성화도 자연스레 필연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의 행동을 다 없애고 뜯어 고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부인했던 타락한 마음은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버렸습니다. 죄의 본질은 씻어졌고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앞으로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면서 지난 인생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완전한 방향전환을 했습니다. 그럼 그분과 동행하는 삶, 성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단지 자기를 높이려는 타성은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서 신자가 그 타성을 얼마나 죽이느냐에 따라서 성화의 정도와 수준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래에 지은 죄까지 다 용서 받았다고(심판이 면제되었다고) 해서 계속 죄에 더 거할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습관적, 의도적,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는 합니다.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자관계는 결코 끊지(심판) 않지만,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고 매는 드는 것(징계)과 같습니다.(히12:4-13)

그런데 징계는, 하나님만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아주 비상한 경우를 빼고는, 죄를 지을 때마다 혹은 회개치 않는 죄마다 일대일 대칭으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서운 독선적 하나님이 되어서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도 공포심으로 믿는 척만 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이 계속 돌이키지 않고 잘못을 범해 도저히 그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 싶을 때에 매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징계의 시기와 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신자가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았다고(단지 심판의 면제이지 징계는 하신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죄를 짓고도 무심해선 안 됩니다. 혹시 회개를 못하고 지나친 죄에 대해선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의 사소한 잘못은 눈 감아 주시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그 영혼에 내주하는 신자라면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집니다. 제대로 회개하지 않은 경우라면 정말 죄로 인식하지 못한 아주 사소한 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것까지 징계는 않습니다.

대신에 신자가 죄에 대해 이전보다 아주 민감해졌고 때로는 성령마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기에 습관적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는 사실상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를 하게 되거나 최소한 본인의 죄의식이나 내면의 영적 눌림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는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요약하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 되어 자기를 대신 높이는 것입니다. 구체적 행동(생각, 말,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은 그 결과입니다. 처음 예수 믿어 얻는 구원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 된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용납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자신의 이미 바뀐 신분, 위치, 소속, 특권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성화의 과정에서 아무 두려움과 주저함 없이 죄와 당당하게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합니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었기에 구원 후 짓는 죄도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구원이 취소되는 법도 결코 없습니다. 나아가 천국에서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존재로 바뀌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도 이미 확보된 것입니다. 그 영화를 죄와 연관시키면 더 이상 죄의 형벌과 능력은 물론이며 죄 자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그 때까지는 이 땅에서 죄의 세력과 맞서 싸우며 날마다 조금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천국에서의 상급만 달라지지 구원 자체가 변경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회심으로서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 받았지만, 그 형벌(심판)에서 면제된 것이지 구체적 죄를 계속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징계는 받습니다.

1/28/2015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구원이란 무엇인가?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의 구원에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도 구원을 받는 데 있다. 그러면 이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구원은 누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또 이 구원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제 이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구원의 의미

구원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 의미는 예수님의 이름에서 잘 나타난다. 가리브엘 천사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다(마 1:21). 그리고 그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일 것이라고 밝혀 주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고 죄의 결과에서부터 해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의 결과인 죄책과 죄의 오염에서부터 해방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죄는 사람들에게 죄책과 오염을 안겨 주었다. 여기서 죄책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이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과 더불어서 영원한 지옥의 저주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한다.

 

죄책과 오염은 서로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책은 법률적인 것이고, 오염은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죄책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감옥에서 형을 사는 것과 같다. 형기가 끝나면 그 죄에 대해서 더이상 법률적인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옥에서 형을 사는 사람은 선하게 교화되기 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오염이 되어지기가 더 쉽다. 그래서 형기를 마치고 난 이후에는 그 삶이 더욱 간교한 죄를 가중시키기 쉬운 상태가 되어지는 일이 많다. 오염은 이러한 상태에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러한 죄책과 오염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즉 구원은 죄의 책임인 죽음에서부터 해방이 되어 생명으로 옮겨지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죄로 오염된 옛사람에서 해방되어 날마다 새사람을 입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모든 육체의 연약함과 유혹을 견디어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위험이나 재난, 또는 육체의 질병이나 경제적인 가난 등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구원의 모든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큰 오해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는 에녹보다도 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을 먼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난이나 죽음에서 기이한 방법으로 살아난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를 위해 굶주리고 헐벗음을 당한 자나 목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을 더 높이 찬양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와 관련이 되어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한 세 가지 구분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해방은 한 순간에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률적인 해방은 법률적 선언이 주어지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제적인 해방은 오랜 시간, 또는 일평생을 두고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구원은 그 시간적 적용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 의미로 구별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성취된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구원을 과거형으로 말한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결과인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였다(요 5:24). 그리고 사도 바울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에 그 즉시로 거듭나게 된다(엡 2:1).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롬 3:30).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에게 즉시로 양자의 영을 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신다(롬 8:15). 성경은 이러한 중생과 칭의와 양자됨을 가리켜서 과거형의 구원으로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미 성취된 구원이다.

 

현재 진행중인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과거형과 함께, 현재진행형으로도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히브리서의 저자도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사용해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하였다(히 10:39).

 

중생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생활이 순간적으로 다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후폐한 옛사람의 구습을 없애고 거룩한 새사람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싸움이 필요하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이 싸움이 날마다 계속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싸움과 관련하여 말씀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고전 15:31). 성경은 성도가 걷는 이 성화와 견인의 과정을 현재진행형의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진행중인 구원이다.

 

장차 완성될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미래에 완성되어질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도 야고보는 이미 믿음 가운데 있는 성도를 향하여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다(약 1:21).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구원을 말했던 사도 바울은 또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다(빌 2:12).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의 모든 결과들과 사탄의 유혹에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은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성도가 장차 누리게 될 영화로운 상태를 미래형의 구원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장차 완성될 구원이다.

 

구원을 현재 진행중이거나 장차 완성될 의미에서 본다면,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지금 받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거나, "장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구원이나 장차 완성될 구원은 과거에 성취된 구원의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성취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도 받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확신 속에서 어느 경우의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대답을 할 수가 있다. "예,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적용 사역으로서의 구원

구원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다(엡 2:8). 여기서 하나님이라 함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막중한 일인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삼위 하나님은 일체가 되시기 때문에, 그 존재나 사역에서 서로 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삼위의 인격은 각각 독립이 되어 있으므로 그 존재나 사역에서 일정한 순서가 구분이 있다. 성부께서는 창세전에 구원을 계획하셨다. 성자께서는 이 땅에 성육신을 하시어, 성부의 구원 계획에 따른 내용들을 객관적으로 단번에 성취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을 그를 믿는 각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적용을 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예수룰 믿을 때에 우리 속에서 주관적으로 일어나는 구원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 대상과 목적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임하여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보통사역과 특별사역이라고 부른다.

 

보통사역

성령의 보통사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생명을 잉태케 하시고, 유지하게 하신다(마 1:18). 생명은 우연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존중히 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주신 성령께서 근심을 하지 않으시도록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가 되어진다.

 

?. 각종의 재능들을 부여해 주신다(추 31:2)-성경구절 확인. 어떤 사람에게는 노래를 잘 하는 재능을 주신다. 다른 사람에게는 운동을 잘 하는 재능을 주신다. 또 바느질, 무용, 그림, 글씨 등을 잘 하는 재능도 주신다. 그래서 이 재능들이 서로 어울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하신다. 모든 사람은 성령께서 부여해 주신 바 자기 나름대로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주어진 남다른 재능이 무엇인지를 가급적 빨리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무시를 해버린다면, 한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놓았던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려지고 말 것이다.

 

?. 도덕질서를 유지케 하신다(롬 2:14-15). 사람의 양심이나 역사의 교훈이나 행정관리의 힘이나 특별하신 섭리 등을 방편으로 사용하여서 선을 증진케 하고 악을 억제케 하신다. 그리고 종교성을 자극하여 종교적 활동이 가능하게도 하신다(행 17:22). 이러한 성령의 사역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죄가 관영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나마 윤리와 도덕이 지켜지고 있다.

 

특별사역

특별사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그리스도를 자기의 참 구주로 믿을 수 있도록 세례를 베풀어주신다(마 3:11).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속사람에게 베푸시는 불세례가 있어야 한다.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 즉 불세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에 대한 외면적인 표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 성령의 세례는 여러 차례 또는 수시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물세례의 경우처럼 일생에 단 한 번 받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세례는 그 효력이 약해지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믿는 사람들의 심령을 충만케 하신다. 구원함을 받는 사람은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구원에 합당한 열매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깨어 죄를 대적하면서 날마다 더욱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 일이 가능하도록 충만함을 주신다. 성경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일이 없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은 명령한다(엡 5:18).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은 믿음의 간구와 회개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은 약화 또는 소멸이 되어질 수가 있다(살전 5:19).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기도가 필요하다.

 

?. 충만함과 함께 각종 영적 은사들을 주신다(고전 12장).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언, 방언, 통역, 영분별, 병고침 등의 신령한 은사가 수반될 수 있다. 이 은사들은 사람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다양한 수준으로 주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둘 이상의 은사가 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은사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진 은사만을 높게 보고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를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영적인 은사가 있어야만 성령충만에 이르거나 성령충만을 유지하게 된다고 하는 것도 역시 잘못이다.

 

?. 믿는 사람 안에서 내주(內住)를 하신다. 믿는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 안에서 내주 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치고 보증하신다(고후 1:22). 힘들고 어려워 할 때에는 도움을 주시고 새 힘을 얻게 하신다(롬 8:26).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를 때나 오묘한 것을 만날 때는 깨달음을 주사 하나님의 신비함이라도 통달케 하신다(고전 2:10).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기도 하신다(롬 8:16).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셨다(요 15:26). 보혜사란 옆에서 속삭여 주는 자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을 행함은 주의 손이 나를 안보함이요,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고 찬송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믿는 사람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신다(롬 8:27). 믿는 사람이 연약해 있을 때나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롬 8:28).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다(롬 8:28).

 

구원의 기초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선행, 기도, 예물, 공로 등 그 무엇이라도 구원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이것들은 구원을 받았기에 생겨나는 결과이다. 심지어는 믿음마저도 구원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5: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우리를 가리켜서,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다(엡 2:10). 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이나 말이나 지식의 풍성함을 누린다고 했다(고전 1:5).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도 하고 부활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살전 4:16, 고전 15:22). 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도 받는다고 했다(롬 8:17).

 

구원이란 마귀의 자식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죽으심과 함께 의를 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의 부활과 함께 새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의 고난과 함께 의를 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의 영광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그의 순종과 함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이다. 그의 승리와 함께 율법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한다. 생각, 목표, 취미, 관심, 생활방식, 등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 그러기에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와 조직에 가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개인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제도나 생활방식의 변화보다는 심령 즉 인격의 변화가 우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사이비 주장자들이 내세우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행동양식을 보여야 하거나 특이한 신비체험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특정 집단에 가담하거나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도 없다. 제도나 생활의 개혁보다는 심령의 변화에 집중해야 한다. 심령이 변화되면 그 생각이나 취미가 예수님과 같아지게 되고, 따라서 육신을 즐겁게 하는 술을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 잘 입증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시는 사실이 성경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로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요(요 17:21), 아담과 그 후손(롬 5:12), 남편과 아내(엡 5:22), 머리와 지체(고전 12:12), 목자와 양(요 10:14),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 15:5), 건물과 모퉁이의 머리들(엡 2:20) 등이다. 이 모두가 서로 분리가 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구원은 우리의 모든 인격과 생활이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완전하게 해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서 선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선물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여서, 이 엄청난 선물을 값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동시에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출처: 행복충전소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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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C.H.매킨토시


5. 성도의 기업 


자 이제 우리는 회심의 주제에 대한 긍정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상 버림" 즉 우리의 마음을 붙들고 휘어잡았던 모든 사물로부터의 돌이킴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그것들은 헛된 것이며 어리석은 것이며, 우리의 어둡고 캄캄했던 모든 지난날들의 정욕과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행전 26:18에 있는 말씀과 같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의 돌이킴이다. 


그러나 회심은 그 이상의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회심은 단순히 죄된 세상과 사단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라면 너무나 협소한 것이 되리라. 

회심은 우리들의 모든 비참한 과거 생활과 영적 타락으로부터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건짐을 받은 것이라는 면에서 보면 확실한 은혜임에는 틀림없다. 

회심은 이 세상 신과 이 세상 임금의 비참한 속박으로부터의 건짐이요, 악한 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헛되고 공허한 세상으로부터의 건짐이요, 한 때 우리를 휘어잡았던 사악한 세상 애착 즉 죄에 대한 사모와 죄된 행실로부터의 건짐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 문제점을 다루고 있는 모든 면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다시 반복해서 말하는데, 회심에는 그 이상의 것이 더 있다. 

우리는 마음에서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한 댓가로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모든 것을 부정만 하는 제도인가? 

우리가 만일 이 세상과 나 자신과의 이음줄을 끊는다면, 또는 우리의 과거 쾌락과 오락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등진다면, 그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데살로니가 전서 1:9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러한 모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준다. 충분하고도 확실하고, 분명하고도 납득이 갈 만한 해답을 준다. 

그 해답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귀한 해답이다. 그렇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의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귀한 해답이다. 

나의 과거라는 우상 대신 얻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 세상의 헛되고 죄된 즐거움 대신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세상의 부와 영예와 세상의 우월감 대신 무엇을 얻을 것인가? 하나님이다. 

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고도 완전한 대치인가? 


탕자가 먼 나라에서의 넝마 조각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바로 그것은 아버지 집에 있는 최고의 옷이었다. 돼지의 쥐엄 열매 대신 무엇을 얻었던가? 그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예비하신 살찐 송아지였다. 먼 나라에서의 비참한 고역 대신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그것은 아버지의 환영이었고, 아버지 자신의 품이었고, 바로 아버지의 식탁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대치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항상 참 회심 속에 있는 두 면(곧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의 감동적이고도 인상적인 예를 탕자의 비유에서 쉽게 얻지 않는가? 이 비길데 없는 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멋진 회심인가! 얼마나 멋진 우상으로부터의 돌이킴이며, 하나님께로의 

돌아감인가!


감히 누가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느 인간의 언어가 감히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품안에서 아버지의 온화한 사랑의 빛에 쏘임을 받는 그의 감정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헌옷, 쥐엄 열매, 돼지, 종살이, 냉냉하게 굳어진 자아, 궁핍, 기근, 비참, 도덕적 타락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영원히 없어졌다. 그 대신 이루 말할 수 없는 밝고도 행복한 가정의 기쁨과 게다가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주위에서는 축제의 즐거움이 되살아났고, 또한 그의 돌아옴이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대신 채워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예인가? 귀하고도 거룩한 사실에 대한 예이다. 

하늘의 기준에서 볼 때 어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참 회심에 대한 예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헛되고 어리석은 세상 것의 포기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곧 그것은 하나님 앞으로의 인도됨이다. 고향으로 돌아옴이다. 아버지 품으로의 되돌아옴이다. 가정으로의 돌아옴이다. 어떤 틀에 박힌 메마른 공식 문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전능한 역사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지체, 하늘나라의 상속자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이것이 참 회심이다. 독자들께서 충분히 납득하기 바란다. 

이 위대한 사실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안일하게 있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이 바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돌이킴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세력과 우상 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해서 현재 하늘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강렬한 말 같아도, 복스럽게도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 


무엇이라고? 우리가 죽은 후에 하늘나라라고? 

아니다. 지금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이다. 


로마서 5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느니라"(롬 5:10-11) 


이것은 아주 중요한 원리이다. "돌이킴"이라든가, "하나님께로 돌아선다" 라는 말속에 함유되어 있는 모든 의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로는 힘든 일이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온전하신 영접으로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신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신임장으로, 그분의 미덕으로, 그분의 피의 대가로, 그분 자신의 가장 고귀한 이름의 향기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우리를 연결하시고 그가 갖고 계신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시고, 그분의 자격까지도 나누어주신다. 다만 하나님으로써의 그분 자신의 위치는 제외하고 말이다. 그것만은 감히 언급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니라"(요 14:19)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또 요한 복음 17장에서 신비스런 주님의 기도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본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6-10)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26) 


자, 이제, 이보다 더 고상하고 더 축복스러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으리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처럼 일치되고, 그분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을 나누듯이 그분과 전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 그분의 평화, 그분의 기쁨, 그리고 그분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이 모든 사실이 한 피조물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이며, 특성인 것이다. 


지옥 구덩이의 영원한 공포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것, 죄 사함 받는다는 것, 씻음을 받는다는 것,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 아담이 잃은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동일한 기초로, 동일한 특성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자비이며, 축복이며, 사랑의 배려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사랑과 호의 속에서 하나님께로 인도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의 위치와 동일하게 일치된다는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전지 전능만이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걸작품인 것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말하는 회심 속에 다 내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엄청난 큰 은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그런 것이다. 비록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때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사악한 일로 마음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라도, 여러 가지 정욕과 쾌락에 빠졌을 때에라도, 우상을 섬기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죄와 사단의 타락한 종이 되었을 때에라도, 진노의 자녀로 곧바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때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 중 최대의 선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축복과 사랑과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는 마음 자세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보다 뒤쳐지는 자리를 선물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 못된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이 이 엄청난 은혜로 감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엡 1:3-7) 


여기 얼마나 깊은 사랑과 충만한 은혜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의 지혜에 알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배려로 자신의 은혜의 부요함을 보이신다. 우리의 죄사함, 우리의 칭의, 우리의 온전한 구원, 우리를 영접함, 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베푸신 것인데 이 모두는 이 광대한 온 우주 안에서 영원히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의 위치말고, 다른 위치에 우리를 둔다면 이것은 영광스런 하나님 자신의 요구에 미치는 것이 못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 속 사랑에 대한 만족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두가 너무나 신비하다. 너무 훌륭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에게 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귀해서 확고히 받아들이기 힘들 수는 있을는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속 사랑에 따라 우리에게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의 대가를 기초로 해서 활동하신다. 


탕자는 품꾼 중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집에서 종으로 취급한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들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행한 공적에 따라 대우한다면 우리는 아들의 위치는커녕 종의 위치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전혀 우리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이름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회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인도되었다. 

이보다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우상에서 돌이켜, 그것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는 실제로 바로 하나님 존전에 인도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그와 동행하며,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생수를 찾으며, 소멸되지 않은 근원으로 인도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그분 안에서 찾으며,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은 만족하게 되고, 또한 그것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가 우상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절대로 안된다. 

과거의 우리의 대상물을 갈망하고 따라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분깃을 깨닫는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에서, 아버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상에 같이 앉아 있으면서 돼지나 쥐엄 열매를 찾았던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고, 믿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탕자가 복된 사랑의 가정이라는 밝고도 거룩한 곳에 자신이 살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먼 나라를 한숨 지며 바란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말하고 있다.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돌이켰다고 고백하고, 잠시동안은 그것을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금방 그들은 열의가 식어지고 지치고 만족을 잃는다. 그들 내면의 역사는 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짜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된 것이 아니다. 우상은 잠시 포기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관련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 마음에 만족을 찾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참 교제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심령의 만족감과 심령의 안식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이 흐름을 따라, 그 가련한 심령들은 세상을 한번 더 바라게 되고, 그들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평상시보다 더 많은 탐욕으로 어리석게도 헛된 것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슬픈 모습이다. 매우 실망스런 모습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오히려 보다 큰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사단의 옹호자가 되어 회의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한 회심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 버린다. 


참으로 회심한 심령은 단순히 이 악한 세상에서 헛된 꿈과 기만을 버리고 떠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서나 영원한 곳에서나 원하는 모든 진실 된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거룩하게 세상과 분리된 사람이다. 영원히 세상과 끊어진 사람이다. 그의 눈은 철저하게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자신이 이미 세상을 심판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준으로 이미 세상을 측정한 사람이다.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저울로 세상을 달아보았고 세상에 대하여 영원히 등을 돌린 것이다. 대신, 저주받은 나무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진지하고, 당당한 목적을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은 바로 그를 구원키 위함이요, 영원한 불못에서 구원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승리케 위함인 것이다. 


-출처: 착한책과 사람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구약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히브리서 11장 4절~32절은 믿음의 본을 보였던 허다한 증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벨과 에녹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무엘과 선지자들에 이르는 수많은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다른 모든 사례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한다(히 11:32). 이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살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을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았을까.

 

이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와 구원에 이르는 방법에 관한 내용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구원의 의미

“구원”의 문자적인 의미는 건짐, 도움, 해방을 뜻한다. 그래서 성경에는 재난이나 불행 또는 쳐들어오는 적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이나(시 34:6, 행 7:25), 병의 치료를 받는 것(마 9:22)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말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장 일반적 의미의 구원은 죄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죄의 용서, 죄의 법적 책임과 죄의 오염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죄로 말미암는 지옥 형벌에서의 건짐 등을 가리켜서 구원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원은 다음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죄를 용서받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즉 거듭남(중생)과 의롭다 일컬음을 받는 것(칭의)이다. 이러한 일은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은 이런 의미의 구원을 가리킬 때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과거에 이미 완성된 것을 나타내는 동사(과거 완료형)로 표현한다(눅 7:50, 딛 3:5 참조).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날로 거룩하여져서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성화)이다. 이것은 믿는 순간 시작되어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성경은 이런 의미의 구원을 가리킬 때는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현재 진행형)로 표현한다(히 10:39 참조).

 

셋째는, 죄의 결과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금도 죄의 흠과 티가 없는 상태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 즉 완전히 영화롭게 되는 것(영화)이다. 이것은 죽는 순간에 가서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경은 이런 의미의 구원을 가리킬 때는 “주께서 나를 ···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딤후 4:18)라는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나타내는 동사(미래 완료형)로 표현한다(빌 2:12, 약 1:21 참조).

 

그러므로 특별한 언급이 없이 구원이라고 하면, 앞에서 말한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죄를 용서받고 거듭나는 것(중생)만을 제한해서 구원이라고 하려는 사람도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성급한 대답을 하기에 앞서 어떤 의미의 구원을 말하는 것인지를 먼저 밝혀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이라야,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하거나, ‘구원받고 있습니다’ 또는 ‘구원 받을 것입니다’ 라는 식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구원받는 방법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밝혀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는 구원을 받는 방법이 매우 분명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는 말씀들이 이를 입증해준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기도, 선행, 봉사, 노력, 헌금, 종교의식, 세례 등 사람의 그 무엇도 구원을 위한 조건이나 공로(功勞)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말씀했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요 14:6), 만일 있다면 그는 “절도요 강도”라는 말씀으로 우회적 표현을 통해 교훈하기도 하셨다(요 10:1, 8).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달리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이전에 살았던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까.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를 인류의 모든 사람들, 즉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킨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할 수 있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이라고 구원의 방법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앞에서 밝힌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직접적인 말씀에서 확인이 될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의 저자가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로서의 구약 시대 성도들을 소개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대전제로 밝히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믿어야 할찌니라”(히 11:6)고 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분명하게 강조한 점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 당시나 신약시대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육신을 가지고 직접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장차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문설주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거나, 장대 끝에 달린 뱀을 바라보거나,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방식으로 죄의 용서와 구원받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그들의 구원에 이용된 어린 양이나 뱀 등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장차 오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물로 제시된 것이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아직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예표들 속에서 그림자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우리들이 우리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는 못해도, 이미 육체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과 똑같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가, 아니면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돌이켜 보는가 하는 시점(時點)만이 다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이 없다.

 

로마교회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세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례제도가 생겨나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을 하신 후, 육체가 무덤에 머물던 사흘 동안에 집단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원은 세례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증거로 받는 것, 즉 구원의 결과에 불과하다.

 

어떤 경우에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각자의 양심에 따른 심판의 결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양심에 따른 심판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다. 설사 양심에 따른 심판을 해본다 하더라도 의롭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철없는 어린 아이까지도 다 알 수 있듯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 예외 없이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롬 3:10).

 

이제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었던 예표에 대해서 살펴보자.

 

3. 구약의 예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상징적인 글이나 말 또는 행동을 하는 데 익숙해 있다. 이러한 사람의 성품에 맞도록 성경에도 많은 상징적인 사물, 행동, 표현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구약의 예표에는 구약이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상징과 구분되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예표와 상징이 다른 점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예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사용된다. 둘째, 상징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들을 포함하지만, 예표는 미래의 인물이나 사건만을 소개한다. 셋째, 악한 것은 결코 선하고 좋은 것의 예표가 되지 못한다.

 

구약에는 이런 특징을 가진 수많은 예표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예표들에는 세 가지의 유형이 있다. 첫째 유형은 사람이 예표로 사용된 경우이다(예; 아담, 멜기세덱, 아브라함, 요셉, 아론, 요나 등), 둘째 유형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물이 예표로 사용된 경우이다(예; 유월절, 출애굽, 홍해 건넘, 광야에서의 방황, 구리 뱀, 반석, 가나안 정복, 아브라함의 부르심, 사사들의 활동 등). 셋째 유형은 의식(儀式)과 관련된 것들이 예표로 사용된 경우이다(예; 제단, 제물, 제사장, 성막, 성막의 기구들, 할례 등).

 

그러나 모든 예표들은 그 유형과 관계없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와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씨 또는 다윗의 혈통으로 소개된 언약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각각 그 당시에 주어진 예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했고, 또 그 예표를 믿고 따라야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장소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통해서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구약시대에는 예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예수님 당시에는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 그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 과거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마다, 사람이나 어떤 특별한 행위나 의식(儀式)과 같은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려 하지 말고,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다만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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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 : 7]    


//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단 마귀가 가져다 주는것입니다.

  

당신은 확신하십니까? 

Steve Nicholes (http://www.wolkorea.org)

 

<요한복음 10:27~30>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빅토리아여왕이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예배에 참석해 영생이란 주제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다 들은 후 여왕은 누구든지 영생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 예배당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도 누구든지 완전한 확신을 갖을 수 있는지를 알아낼 방법을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이 대화를 존 타운센드(John Townsend)가 듣게 되어 궁정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존 타운센드는 영국에서 많은 고아원들은 지은 죠지뮬러의 친한 친구입니다.

 

타운센드는 여왕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친애하는 빅토리아 여왕폐하, 미천한 제가 떨리는 손과 친애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먼저 가셔서 준비하신 집에서 영원히 사는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위대하신 여왕께 요한복음 3장 16절 과 로마서 10장 9~10절 을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하신일들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저의 서명을 여기다 남깁니다. 당신의 미천한 종, 존 타운센드"

 

2주후에, 존 타운센드는 여왕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됩니다.

"존 타운센드에게; 당신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조심스럽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당신이 알려준 구절들을 읽었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예수님이 하신일을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하신 '내가 가서 너희의 자리를 준비하겠다' 라고 하신 집에서 당신을 만날 거라 믿습니다.(서명)빅토리아 그웰프(Victoria Guelph) "


심지어 영국의 여왕도 구원의 확신이 가능하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제가 여러분의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릅니다. 당신은 문으로 와서 문을 열것입니다. 그러곤 "들어와..들어와도돼!"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당신은 문에 서서 계속 "들어와..들어와도돼!"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런 행동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에 무엇이 좋은 것일까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이라 되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문앞에 서서 "들어와..들어와도돼!"라고 외치는 사람과 같습니다. 어떨때에는 그들은 기도하고 예수님이 자신의 마음과 생활에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들은 특별한 느낌을 받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가서 좋은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곤 다시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제 마음에 들어와주세요." 그런 후에는 그들은 계속해서 위와 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약간 바꾸어보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의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당신은 문으로 오겠지만 이번엔 문은 잠겨있고 문이 잠겨진 집안에서 "들어와..들어와도돼!"라고 말합니다. 이런 행동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에 좋은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도 이와 역시 같습니다. 그들은 모임에 가고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이 기도하면 당신은 기독교인이 될것이고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은 기도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실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 모릅니다. 그들은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에대한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기도합니다, "예수님, 들어오소서. 저의 마음으로 들어오소서." 그러나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예수님이 그들 안에 있는 척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할것입니다. 또 그들은 의로운 척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에 초대한 적이 없습니다.

 

1.당신은 예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제 손안에 있는 동전이 '영생'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저는 이 동전을 봉투에 넣습니다. 봉투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곤 동전을 넣은 봉투를 여러분께 줍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예수님(봉투)이 있습니다."


"맞습니다...다른건 없습니까? " "영생(동전)도 제게 있습니다.", "맞습니다.

[디도서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 하나님은 영생의 약속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에게 여러분의 마음에 와달라 부탁하십시오.


요한복음 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족중 한명이 될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할때 여러분 역시 영생도 받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될것입니다.

 

2.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9절의 그의 손은 아버지의 손입니다.동전을 하나 집어 제 오른손에 놓을 것입니다. 저의 오른손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에 들어오길 바랄때 여러분은 예수님 손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29절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손에 있다는걸 보여줍니다. 그래서 제 왼손은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제에게 영생(동전)이 있고 제가 예수님 손안에 있다면 저는 역시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한 목사님이 하나님과 친밀함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팔을 펴서 작지만 상처입은 새를 잡고 있는 손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물었습니다. "제가 손을 완전히 펼치면 어떻게 될까? " 신도들이 답합니다."그 새는 날아가려고 날개를 퍼득이겠지만 땅으로 떨어져 죽게될것입니다."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그러면 제 손을 닫으면 어떻게 될까요? " 신도들이 답합니다. "그 새는 갇혀서 죽게 될것입니다. " 그러자 목사님은 미소를 지으시곤 말하셨습니다.

"친밀한 것이란 무엇을 감싸고 있는 손과 같습니다. 완전히 열린 상태도 아니며 또 완전히 닫힌 상태도 아닙니다. 그 곳은 성장할수 있는 장소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전능한 손은 경외해야하고 존경해야합니다. 그러나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손은 쉴 수 있는 곳이며 피난처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안에서 안전함을 느낄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평안과 근심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됩니다.

 

하나남의 손 가운데에서 우리는 사랑과 친밀함과 성장과 평안의 장소에 있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누구도 짓누르시거나 버림받게 하지 않으십니다. 악마나 적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요한복음10:29).그의 존재안에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의 아들 벤쟈민은 최근 예수님이 그의 마음과 삶에 와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에게 "저는 제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아요. 왜냐면 저는 하나님의 주먹안에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주먹을 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싸우시고 당신을 보호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손안에 있을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3.당신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10:29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28절은 예수님이 주신 삶은 영생이라 했습니다. 영생이라면 얼마나 긴 걸까요? 영생의 끝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영생은 영원하다란 의미입니다. 끝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약속하신 삶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오른손을 여러분 앞으로 내어보이십시오. 엄지를 포함해 모두 5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히브리서13장 5절에는 5단어가 있습니다."나는 절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겠다(I will never leave you) ". 한 단어씩 말하면서 새끼 손가락부터 엄지손가락까지 손가락을 하나씩을 구부리십시오."예수님은 나를 절대 버리지 아니하신다(Jesus will never leave me)". 이번에는 '나를'이란 말대신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보십시오. "예수님은 Steve를 절대 버리지 아니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들어오면 절대 버리시지 않으실거라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C.H.매킨토시


3.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라도 회심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또 어느 정도 무엇이 참 회심이 아니라는 것도 지적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회심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확실한 가르침에 접근해야만 한다. 우리는 보다 못하지 않고, 보다 틀리지 않은 확실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요즈음 많은 사람이 회심했다고 하는데 전혀 회심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난 것에 대해 몹시 염려되는 바다. 소위 회심했다고 하는 많은 간증이 나오고 또 그런 소문을 듣고 있는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볼 때 적합 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고 고백하고 또 그렇게 믿어 주고 있는데, 그들이 단순히 무감각한 청중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 마음에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영적 움직임은 없고, 양심에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실제적 활동도 없고, 세상과 함께 철저한 부서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람의 영향력을 받아 감정의 작용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 들고, 또는 어느 복음 전도자의 감정이 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든다. 그러면서도 자아(self)는 판단 받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자연에 대한 집착은 계속 있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열의는 없고, 또한 신약 성경에 기록된 회심의 특성을 지닌 그런 진짜 회심자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심하는 그런 회심자를 찾고 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천박한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시도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은혜로운 복음 전도 사업에 몰두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성경의 밝은 빛으로 그 문제를 상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언급하는 바이다. 그리고 많은 복음 사역자들이 얼마나 성경 원리에서 이탈하고 있는가를 알리기 위함이다.

 

아마도 우리의 복음 사역에 많은 인간적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도록 맡기지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능력과 효율성 자체를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다. 아마도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려는데 신경을 쓰고,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선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할애를 하는 것 같다. 아마도 좋은 결과를 보려는 욕심에서 많은 회심자들의 일시적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도자들은 그들을 회심으로 인정해 주고, 공중 앞에서 공포까지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열의가 위축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들의 열심을 더 강렬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남모르게 더 열심을 간구할 것이며, 공중 앞에서는 청중들에게 더 열렬히 호소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의 중요성을 보다 깊이 깨닫게 되고, 우리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는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역사하심이 와야 함을 전적으로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소중히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바른 자세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바른 자세란 지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역사하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자아를 비운 마음으로 의뢰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골방에서나 공중 앞에서나 회심의 영광스런 사역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보다 똑바른 마음으로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황금 같은 알곡과 잘 익은 열매가 열릴 것이다. 그럴 때 진짜 회심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회심은 그 회심 자체가 증거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회심자와 함께 회심의 신용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진실로 우리의 마음은 귀한 영혼들이 구원받음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사람들이 회심한 경우를 일일이 세고, 우리들의 사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만심과 자기 만족 속에서 거들먹거리는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과 비교해 볼 때 참으로 귀한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배하는 마음 자세가 우리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설교자로 또는 대단한 복음 전도자로 땅 끝까지 드러내는 것보다 얼마나 훌륭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자세인가!

 

진실로 영의 인격으로 판단해 볼 때 우리의 사역은 비교조차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맡길 때 복음 사역의 위엄과 실제적 효과와 중요성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 사역자들의 마음에서는 행복과 영적 평안함과 실제적 효과는 점점 증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은 온전하게 되고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이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는가를 알아보자.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살전 1:1-3) 


이것은 참 기독교의 위대한 근본원리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 1:4)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바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확실하고도 의심할 바 없는 증거로 알게 된 것이다. 즉 한 성도가 택함을 입었을 때, 알 수 있는 바로 그 동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의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축복 받은 사도는 그의 일상생활 자체가 그 자신이 설교하는 복음의 해설자였던 것이다. 그는 복음으로 살았다. 바울은 성도들로부터 무엇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의 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설교했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밤낮 없이 일하고 수고했다. 그는 사랑스럽고 유순한 유모와 같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나, 자신의 직분에 대해서나,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나, 자신의 은사에 대해서나,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나, 다른 지역에서의 기적 행함에 대해서 전혀 과장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랑하고 낮아진 자세에서 난체하지 않고, 열심을 다하는 헌신하는 사역자였다. 그러한 그의 생활 자체가 회심의 일을 했고, 그의 전 생활이, 그의 영이, 그의 생활 모습이, 그의 태도가, 그의 생활 습관이 그의 설교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사역자들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천박한 사역이 사역자의 천박성의 결과임을 바울의 생활 태도로 믿게 된다. 

 

능력은 어디에 있을까? 성령의 드러남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충만한 확신"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의 설교에는 혹 이런 생활의 부족함은 없지 않은가? 유창한 언어구사가 많을 수 있다. 소위 재치라는 것도 많이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귀를 즐기고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많은 것들이 일시적으로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오! 거룩한 기름부음은 어디 있으며, 살아 있는 열의와 깊은 진지함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럴 때 일상 생활과 습관이 산 해설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주께서 그의 사역자들의 마음에 작용하여 그의 사역을 되살아나게 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사역의 열매를 보다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회심의 일이 사역자에게 달렸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괴기한 생각은 멀리멀리 안녕이다! 그런 일은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성령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이 모든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는 말씀은 사역의 모든 부분과 매 경우마다 항상 바르게 붙들어야 할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성령님은 보통 어떤 도구를 사용하실까? 우리 사역자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 아닐까? "주님의 마음에 드는"것은 어떤 그릇일까? 그것은 비고, 깨끗한 그릇이다. 우리는 과연 그런가? 우리는 자신을 비웠는가? 우리의 손은 깨끗한가? 우리의 교제, 우리의 방법, 우리의 환경은 깨끗한가?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주께서 그의 거룩한 봉사에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이 중요한 문제에서 은혜 받기를 바란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하사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을 정도로 보다 합당한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데살로니가 전서 1장을 계속 진행하자. 그 전체의 내용은 능력으로 가득차 있다. 한편에는 사역자의 특성이요, 다른 한편에는 사역 자체의 특성인데, 그 특성들은 우리에게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저희가 우리에게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 1:6-9) 


이것이야말로 참 사역이다. 그 사역은 그 자체에 신임장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헛된 것이나 불만족이 전혀 없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떤 비평도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주님의 인침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분명함을 줄 수 있는 확고함이 있다. 회심의 역사는 행해졌고, 그 회심의 결과는 기쁨 충만함으로 뒤따랐다. 그 증거는 더 멀리 더 넓게 펴져 갔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신의 사역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회심자의 수를 세어 드러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직접하신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었는데 거기에는 실수가 있을 수 없고, 그 사역에 또 다른 말을 더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사도는 충만한 확신으로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설교한 것 뿐이다. 거기에는 헛됨도 없고, 그의 증거에 대해서 의심 할 수조차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설교 내용을 믿고, 그 내용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설교했을 뿐이다.

 

그것은 어떤 단순히 알고 있는 지적 진리의 유창한 언어구사가 아니었다. 어떤 틀에 박힌 열매 없는 교리 강연이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고 말고다. 그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퍼부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말씀의 의미를 깊숙이 느끼는 그러한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설교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가슴에 와 닿은 모든 것을 수령한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의 그의 사역이 그러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고,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적 참 열매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 흥분도 아니고, 선동도 아니고, 들뜸도 아니고, 리바이벌 붐을 일으키려는 시도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울 정도로 고요했다. 

 

사도 행전 17장에서 사도는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행 17:1-2) 

 

귀하고 능력 있는 강론이었다. 하나님께 구하노니 우리 가운데서도 그보다 더한 역사가 있기를 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행 17:3) 


이 얼마나 단순한가! 성경으로 예수를 설교했다. 그렇다 여기에 위대한 바울의 설교의 비밀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신 인격자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 있는 말씀의 권위로 설교했다.

 

이 설교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 회심자들의 생활 속에서 산열매로 드러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고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그것은 단순한 틀에 박힌 설교가 아니고, 종교 대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선포된 그리스도의 설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출처: 착한책과 사람들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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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다”(롬 10:17)고 하신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의 이름을 전
파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하
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
요”(롬10:14)라고 하신 바 있다.

구원에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복음을 듣지(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
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하는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아들과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시대나 지역에 살았던 성인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경우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영아(嬰兒)의 경우

1) 영아의 상태

우리는 보통 생후 1세~2세 아이들을 영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영아나 유아를 나이가 아닌 영적 상
태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체적 나이로는 소년이나 청
년에 해당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영아와 다를 바 없는 사람도 있
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나이와는 상관없
이, 자아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켜 영아라고 해보
자.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자범죄를 범하
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아도 성장하면 성인이 되고, 자아의식에 따라 자범죄를 범하
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아의 구원
문제는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즉 자범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의 상태로 죽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
다. 그러기에 그 영아의 구원 문제가 별도의 관심사로 등장하
게 된다.

2) 영아 구원의 가능성
우리는 성경에서 영아의 구원 여부에 대한 단정적인 언급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영아의 구원에 관한 내용
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성
경에는 영아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
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교훈을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
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
라”(마 18: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상태의 어린 아
이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가져야 천국
에 들어갈 수 있음을 교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서 천국의 교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예로 드셨다는 사실을 통
해, 어린 아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 즉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구원에 관한 대표적 원리를 밝히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셨다. 여기서 ‘네 집’이라는 말씀은 어린 아이도 포
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
으로 볼 때, 가정에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온 집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빌립보의 루디아
(행 16:15)나,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의 집에도
어린 아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때
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
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했다. 이 말씀은
천국의 평화로운 광경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
만 여기에 어린 아이가 등장한 것을 보면, 천국에는 어린 아이
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
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
으로 죽음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순결한 어린 양이신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에서 구원받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그 중
에는 분명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
게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
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를 가졌다. 이 할례는 예수를 믿
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런데 그 할례는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주로 태
어난 지 8일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했다. 그러므로 할례 의식
은 어린 아이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
력하게 암시해준다.

3) 영아 구원의 범위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영아에게도 구원의 가능성
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영아 상태로 죽은
모든 어린 아이가 다 구원을 받을까, 아니면 믿음의 부모를 둔
아이들만 구원을 받을까.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만을 고려해보면, 모든 영아
들이 다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자범죄의 유무 여부로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다. 그
러므로 영아 상태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처럼, 부모의 믿음
이 온 가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족 구원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믿는 부모의 자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구
원이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교훈한다(겔
18:4, 20). 이것은 부모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의 믿음이라
도 영아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믿으면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영아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범
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웨
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에 밝힌 것처럼, 영아 때 죽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사람들이 구
원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영아 구원의 방법
영아에게는 아직 자아의식이 없다. 따라서 영아는 스스로의 판
단이나 결정에 따라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
고 있지 못하다. 만일 영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범죄가 없는 영아라도, 원죄가 있기에 반드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따
라서 성령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성인들의 일반적인
체험과는 다른 방법, 그러기에 성인들에게는 신비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영아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그
리스도 안에서 중생케 하실 것으로 여겨진다.

2. 성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
에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의 상황은 영아들과 똑
같다. 그러나 그들은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영아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시려고 하신다면 길
가의 돌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고(눅 3:8), 죄인을
마술처럼 신기하게 구원해 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는 자신의 선하신 의도와 반대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
신의 능력을 항상 오직 자신의 선하신 의도에 맞도록 사용하신
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원하신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해
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자신의 선
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셨고, 그 계
획의 결과 죄에 대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다. 그래서 예
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
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실 때에 일정
한 방법을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 즉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방법이다. 복
음을 듣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수단이 없
으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수단을 허락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수단
으로 말미암는 결과인 구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거나 복
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
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
이 멸망에 이른 것은 하등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당연한 일이
다. 이것은 온 인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
람은 듣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불평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
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구원은 양심에 의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
고, 또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외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영아들의 경우처럼 성령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생각
은 근시안으로 우리 눈앞의 것만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오해이
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넓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나에게는
이 시대 이 지역에 살면서 복음을 들어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불공평
하게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찾
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구원의 확신이 사라져가는 교회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안겨준 진귀한 선물은 구원의 확신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 칭의의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음으로 이 신앙의 유산이 유실되고 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칭의론은 거짓 구원의 확신만을 남발하였다. 교인들을 믿기만 하면 삶의 변화와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구원받는다는 거짓 안위에 빠지게 하였다. 이것은 성령이 주시는 확신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환각이다.


사탄은 교인들이 가진 거짓 구원의 확신을 전혀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시켜 철저한 자기기만에 빠져 확실하게 멸망하게 한다. 값싼 은혜의 복음, 구원파적인 변종 복음은 사람들을 파멸로 인도하는 사단의 도구인 셈이다. 회개의 열매, 복음에 합당한 삶이 전혀 없으면서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이 확신으로 충만한 이들은 화가 있을 진저!


반대로 사단은 진정으로 거듭난 이의 확신을 집요하게 공략한다. 신자 안에 부패성, 즉 율법주의적인 성향을 부추겨서 확신이 계속 흔들리게 한다. 값싼 은혜의 복음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설교가 참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며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는 사단의 도구로 교묘히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교인들이 도덕적이고 율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에 풍성한 생명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이 신자의 의무와 헌신과 열심을 요구하며 닦달하는 설교가 교인들을 율법주의에 찌들게 한다.


한국교회를 쇠락하게 하는 것은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인한 거짓구원의 확신뿐만이 아니다. 신자의 올바른 삶과 봉사를 복음의 바탕에서 강조하지 못하는 새로운 율법주의가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는 것이 교회에 치명적인 폐해를 끼치고 있다. 십자가 복음에 담긴 은혜의 풍성함과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칭의 복음의 진수를 들려주는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에 속히 회복되어야 한다.


-박영돈 목사-

 


십자가가 왜 필요한가 / R.C. 스프로울

 

 

앞에서 세 가지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존재한다고 말했듯이, 속죄의 필요성에 관해서도 역시 세 가지 기본적인 견해가 존재한다. 소시니우스주의자와 펠라기우스주의자는 속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이들은 속죄가 "가설적으로" 필요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해 보자. 속죄의 "가설적" 필요성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많은 방법 가운데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는 견해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구원 방법으로 속죄를 선택하셨지만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그냥 간과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극적인 일을 행하기로 결정하시고 그 일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셨다. 속죄가 필요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속죄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결국 속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언약, 곧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에 따라 어떤 일을 이루시겠다는 언약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약속은 단순히 하나님의 호의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런 약속을 하신 것뿐이다. 하나님은 일단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정하신 대로 이행하셔야 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가설적 필요성에 함축된 내용이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의 견해는 다르다. 정통 기독교에 따르면 속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가설적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속죄가 왜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이 문제는 4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펠라기우스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한 하나님의 성품과 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하나님의 성품이나 죄의 본성을 잘못 이해하면, 속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성경은 죄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죄는 빚이다. 곧 주어진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부과하셨다. 주어진 책임을 이행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빚진 상태가 된다. 둘째, 죄는 반목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을 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파괴된다. 죄를 지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헌신하는 대신 그분과 반목 관계에 놓이는 것이다. 셋째, 죄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다. 다시 말해 그분의 거룩하심과 율법을 거스르는 범죄 행위다.

 

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 지 알 수 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고, 반목으로 관계가 파괴되었을 경우에는 관계 회복이 필요하며, 범죄에는 마땅히 형벌이 주어진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60~62p 에서..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250.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하신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고 하신 바 있다.

 

구원에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복음을 듣지(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하는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아들과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시대나 지역에 살았던 성인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경우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영아(嬰兒)의 경우


1) 영아의 상태

우리는 보통 생후 1세~2세 아이들을 영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영아나 유아를 나이가 아닌 영적 상태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체적 나이로는 소년이나 청년에 해당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영아와 다를 바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아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켜 영아라고 해보자.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아도 성장하면 성인이 되고, 자아의식에 따라 자범죄를 범하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아의 구원 문제는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즉 자범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의 상태로 죽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 영아의 구원 문제가 별도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다.

 

2) 영아 구원의 가능성
우리는 성경에서 영아의 구원 여부에 대한 단정적인 언급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영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아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교훈을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상태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교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교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예로 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어린 아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 즉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구원에 관한 대표적 원리를 밝히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셨다. 여기서 ‘네 집’이라는 말씀은 어린 아이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으로 볼 때, 가정에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온 집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빌립보의 루디아(행 16:15)나,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의 집에도 어린 아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때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했다. 이 말씀은 천국의 평화로운 광경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어린 아이가 등장한 것을 보면, 천국에는 어린 아이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죽음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순결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에서 구원받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분명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를 가졌다. 이 할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런데 그 할례는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주로 태어난 지 8일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했다. 그러므로 할례 의식은 어린 아이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

 

3) 영아 구원의 범위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영아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영아 상태로 죽은 모든 어린 아이가 다 구원을 받을까, 아니면 믿음의 부모를 둔 아이들만 구원을 받을까.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만을 고려해보면, 모든 영아들이 다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자범죄의 유무 여부로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아 상태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처럼, 부모의 믿음이 온 가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족 구원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믿는 부모의 자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교훈한다(겔 18:4, 20). 이것은 부모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의 믿음이라도 영아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믿으면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영아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에 밝힌 것처럼, 영아 때 죽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영아 구원의 방법
영아에게는 아직 자아의식이 없다. 따라서 영아는 스스로의 판단이나 결정에 따라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일 영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범죄가 없는 영아라도, 원죄가 있기에 반드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성인들의 일반적인 체험과는 다른 방법, 그러기에 성인들에게는 신비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영아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케 하실 것으로 여겨진다.

 

2. 성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의 상황은 영아들과 똑같다. 그러나 그들은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영아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시려고 하신다면 길가의 돌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고(눅 3:8), 죄인을 마술처럼 신기하게 구원해 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신 의도와 반대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항상 오직 자신의 선하신 의도에 맞도록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원하신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자신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셨고, 그 계획의 결과 죄에 대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실 때에 일정한 방법을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 즉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방법이다. 복음을 듣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수단이 없으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수단을 허락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수단으로 말미암는 결과인 구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에 이른 것은 하등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온 인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은 듣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불평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구원은 양심에 의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외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영아들의 경우처럼 성령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근시안으로 우리 눈앞의 것만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오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넓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나에게는 이 시대 이 지역에 살면서 복음을 들어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불공평하게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찾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ㅁ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 R.C. 스프로울

 .....

지난 40여년 동안, 스바냐서를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문제에 깊이 있는 답변을 제시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1:14-18).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본문에서 귀중한 복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불길하고 두려운 소식을 전한다. 전체적으로 매우 불길한 어조를 띠고 있는 이 본문은 분명 목회자들이 별로 다루고 싶어하지 않을 부분이다. 물론 본문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 상황과도 큰 관련이 없다. 스바냐는 주의 날을  가리켜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그는 "경고, 고난, 피, 분노, 불" 등과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이렇듯 스바냐는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여 주의 날을 명확하게 묘사했다. 그의 묘사는 주의 날의 공포를 잘 전달해 준다. 그러나 본문은 스바냐가 한 예언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질 것을 묘사하는 스바냐서의 예언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스바냐서는 구원의 약속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예고하는 끔찍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이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은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니라 이 구절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보기 드문 성경 구절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논한다는 것은 곧 성경의 중심 주제를 논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의미는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개념이다.

 

구원의 시제

 

지금까지 "구원"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구원하다"라는 표현 역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는 영어보다 동사의 시제가 다양한데 "구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도 신약성경에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시제로 사용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창세전에" 구원되었다고 가르친다(엡1:4). 이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과거인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지혜로 우리가 영원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예수께서 임금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고 말하는 때가 올 거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었다"라는 과거 미완료시제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일련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통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소명,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준비되고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고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는다"라는 현재시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이며,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

 

또한 성경은 "구원하다"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현재 미완료시제로도 사용한다. 구원이란 단순히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성화의 과정도 구원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미래시제로 사용한다. 우리는 구원받는 중이며, 장차 온전히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이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다양한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혼동을 겪기도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와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려면 반드시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9,10).

 

"장래의 노하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자들에 따라서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믿기도 하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차 다가올 진노를 모면하는 것이다. 장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참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을 예언한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거짓 평화를 외친다.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는 주의 날은 기쁨과 빛과 영광이 가득한 날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로 백성의 비위를 맞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심판의 날에 결코 행복한 운명을 맞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아모스 등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가 한결같이 전한 메시지였다. 아모스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5:18-20).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복한 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재앙의 날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스바냐의 예언대로 환란과 고통의 날이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그날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날은 환란과 고통, 황폐와 패망, 구름과 흑암의 날이다. 스바냐는 주의 날이 오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1:18)고 예언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구세주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했다(살전1:10 참조).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다.

 

주님에 의해,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 또 하나 있다.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돈이나 권력, 공로,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구세주뿐이다. 궁극적인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바로 구원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 뿐아니라, 그분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죽은 뒤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심판의 날에 구세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산을 가리켜 "내 위에 무너져 나를 덮어다오. 나를 가려다오"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앞에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이 질문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쏟아져 내릴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에 재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단언컨데, 이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면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R.C. 스프로울의 '구원'에서 발췌, 11-31p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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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그것은 성직자이건 아니건 할 것 없이 어떠한 사람이 줄 수 있는 세례가 아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신비로운 지체들에게 주시는 독특한 특권인 세례이다. 그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례가 아니라, 내적인 속성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용이다.

 

세례너희를 구원하는 표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함으로써 의미하는 세례는 무엇인가? 그것은 물로 씻어서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벧전3:21)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는”(고전12:13)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주 예수께서 이 내적이고 영적인 세례에 대해 주시는 독특한 특전이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고 세례 요한은 말했다(1:33).

 

우리는 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세례, 성령의 내적인 세례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는지 스스로 주의하여야 한다. 이 세례 없이는 우리가 물세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고교회파이건 저교회파이건, 침례교도이건 감독파 교인이건 어떠한 사람도, 그 어느 누구도 성령의 세례 없이 구원받은 적이 없다.

 

다음은 에드워드 8세 치하의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부 교수 부셔(Bucer)의 중요하고도 올바른 지적이다. “물세례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외적인 교회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로 인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교회에 받아들여진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169-170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고찰
예수가족교회 임범진 집사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은 미국에서 1980년대 대중들에게 알려져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어 자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극소수의 출판물과 인터넷 상의 글이 주재권 구원을 비성경적 행위구원론이라 비판하며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본 글에서 필자는 주재권 구원 찬성파와 반대파의 주장을 비교하여 주재권 구원이 결코 행위구원론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이고 종교개혁의 전통에 충실한 구원론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전개하겠다.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0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04 한국교회와 주재권 구원 논쟁
05 결론 및 요약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주재권 구원 논쟁의 자세한 역사는 잠시 뒤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이 논쟁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은 1988년에 발간된 존 맥아더(John McArthur, 사진1)의 Gospel According to Jesus2 라는 책 때문이었다는 사실만 언급하겠다. 당시 미국 교회에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결단주의식 구원론, 즉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의지적 결단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과 그 이후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독립된 두 개의 단계로 보았고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그의 책에서 이런 구분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구원 얻는 믿음은 오직
John McArthur 1
1 이하 인물 사진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경우 http://en.wikipedia.org 에서 얻었다.
2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 참된 무릎 꿇음-예수가 목숨 걸고 전한 복음 (살림출판사, 2008)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2
G로 약함)로 명명하였다.
중생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중생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을 참된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정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책이 미국 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특히 달라스 신학교를 근거지로 한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위와 같은 구원론을 미국 교회에 유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이었으며 존 맥아더 역시 출신학교는 다르지만 세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집안 식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모양새였다. 이에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인 핫지스(Zane C. Hodges)가 Absolutely Free! (1989) 라는 책3을 통해 맥아더의 구원론은 믿음에 행위의 요소를 첨가한 행위구원론이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질시킨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세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출발했으나 맥아더가 옹호하려는 구원론이 개혁신학의 전통적인 구원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지한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가세하면서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존 맥아더와 같은 구원론을 가진 이들을 주재권 구원파(이하 LS로 약함)4라 부르게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값없는 은혜파(Free Grace파, 이하 F
주재권 구원 논쟁의 주요 논점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 몇 가지 항목에 대해 LS와 FG의 견해를 대조하여 열거해 보겠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은 LS와 FG가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주요 논점이며 양 진영이 이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는 좋은 방법이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FG: 믿음이란 예수가 구원자이시며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다.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한 번 쳐다 본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원인인 믿음은 선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LS: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기적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구원은 값없이 얻으나 그 이후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행위는 제
3 이하 책의 이미지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경우 http://www.amazon.com에서 얻었다.
4 누가 이 명칭을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주재권 구원파라는 명칭은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반대파가 자신들을 Free Grace라 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자신들은 값없는 은혜,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상대방은 율법주의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려는 계산이 깔린 작명이다.
3
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일 뿐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LS: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위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을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할 근거는 없다.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회개 역시 일종의 행위이기 때문에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할 뿐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행위구원론이다.
LS: 중생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회개한다. 믿음과 회개는 회심이라는 사건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믿음이 중생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중생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회개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회개와 믿음은 언제나 함께 한다.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FG: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영생을 확신할 수 있다. 설사 외적으로 배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배교로 보시지 않는다.
LS: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FG: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가 있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졌으나 아직 육신에 속한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LS :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육신에 속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나 오직 중생한 자와 불신자가 있을 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성화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주재권 구원’이라는 적절치 못한 작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중생(거듭남, regeneration)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입장차로 요약할 수 있다. FG에게 있어서 중생은 인간이 믿음이라는 의지적 결단으로 예수의 구원자 되심을 인정한 결과 획득하게 되는 사건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발휘해 의지적 결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의 삶,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두 번째 결단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LS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중생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중생한 자는 믿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의 행실은 필연적으로 거룩을 향해 변화되어 간다. 다시 말해 믿음과 행위는 모두 중생의 결과이며,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이 입장차가 주재
권 구원 논쟁의 배경이다. 이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 혹은 펠라기우스-반(半)펠라기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구원론 사이의 논쟁이다. FG는 개혁주의 구원론 중 중생과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의 교리를 반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혐오의 감정까지 드러낸다. 이 두 교리가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라는 FG의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반박하기 때문이다. FG의 저자들이 이 사실을 매우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재권 구원 논쟁을 세대주의 내부에서 벌어진 집안 싸움으로서 FG를 은혜 구원론으로,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겠다.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주재권 구원 논쟁은 1980년대에 본격화 되었지만 그 뿌리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fer, 사진)는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스코필드 주석 성경의 저자)와 더불어 미국 세대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는 세대주의적 관점의 조직신학 교과서를 집필한 것과 현재까지도 세대주의 신학의 본산 역할을 하고 있는 달라스 신학교를 설립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후에 주재권 구원 논쟁을 촉발시키고 지속시킨 주요 주제들이 20세기 초에 출판된 그의 저작들에 거의 모두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주재권 구원 논쟁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1918년에 출판된 He That Is Spiritual5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체이퍼는 고전2:9~3:4을 근거로 사람을 1) 자연인(natural man), 2) 육적인 사람(carnal man), 3) 신령한 사람(spiritual man)의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자연인은 불신자를 말한다. 문제는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점인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구원을 받은 이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도달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그것이다. 이 전제 하에 체이퍼는 신자가 신령한 사람의 상태에 도달하는 비결을 기술한다. 이 주장에 대해 당시 개혁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사진)가 서평6을 통해 비판을 가하였다. 워필드의 설명에 의하면 체이퍼의 주장의 핵심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첫 번째 결단이 있은 후, 성화의 삶에 도달하기 위한 두 번째 결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 번째 결단의 유무에 따라 신자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제공하며 각자가 구원 받는 것은 스스로의 결단 여부에 달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적 구원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인 성화를
Lewis S. Chafer
B. B. Warfield
4
5 이 책의 전문은 http://www.baptistbiblebelievers.com/BookList/HeThatIsSpiritualbyLewisSperryChafer 1918/tabid/271/Default.aspx 에서 읽을 수 있다.
6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919;17:322-7. 이 글의 전문은 http://www.thebluebanner.com/pdf/ bluebanner11-3.pdf 에서 읽을 수 있다.
5

할을 하였다.

어난다고
박하였다. 1994년에 출판된 로마서 주석에서도 존 스토트는 동일한 입장을 고수한다.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다. 그런 일은 불
구원 이후 이차적인 헌신 혹은 특별한 결단을 한 일부의 신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부가적인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당시 유행하던 더 높은 삶 운동(higher life movement)7에 동조한 것이다.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이퍼의 가르침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 인기를 얻었고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빌리 그래엄(Billy Graham)으로 대표되는 대중전도집회와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1951년 창립)를 위시한 선교단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빌리 그래엄은 ‘내 모습 이대로’와 같은 찬양으로 감정적, 심리적 반응을 자극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전도자의 초청에 응해 강단으로 걸어 나오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흔들고, 특정한 기도문(영접기도)을 따라 하게 하고는 이것을 구원 얻는 믿음과 동일시하는 전도방법8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은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등의 결단주의적 전도 기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양산된 새로운 유형의 ‘회심자’들(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진정 구원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체이퍼의 이론을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CCC는 유명한 ‘마음의 보좌’ 예화로 체이퍼의 가르침이 대중화되는데

체이퍼의 가르침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시기에 다시 한 번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바로 존 스토트(John R. W. Stott)이다. 1959년에 Eternity 지에서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되어야 하는가? (Must Christ Be Lord to Be Savior?)”라는 제목의 지상논쟁이 벌어졌을 때 에버렛 해리슨(Everett F. Harrison)은 “아니다”의 입장에서, 존 스토트는 “그렇다”의 입장에서 글을 기고하였다.9 대체로 이때부터 주재권 구원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된 것 같다. 논의의 초점이 구주(Savior)로서의 그리스도와 주님(Lord)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를 사용해 체이퍼의 주장을 다시 기술하자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으나 아직 주님으로 모시지는 않은 사람이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이자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다. 존 스토트는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구주이자 주님이지 그 둘이 분리될 수는 없으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는 칭의와 주님으로 모시는 성화 두 가지 모두 반드시 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은 그 안에 복종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평생에 걸친 순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완전하고 거리낌 없는 헌신을 기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것을 ‘믿음의 순종’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으면서도 구주로는 영접하는
7 19세기 말 영국에서 케직(Keswick) 사경회를 통해 대중화된 운동으
blessing)’, ‘성령충만’을 통해 완전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함. 8 빌리 그래엄 전
1967) pp11-16.
9 Eternity Magazine, 1959;10:14, 16, 48 & 15, 17-8, 36-7. 아쉽
6
가능하다.10
슷한 시기에 로이드 존스 또한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분
한 태도를 보여줬다.
모실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이단입
니다.11
신학자나 설교자들을 주재권 구원에 대해 취하
입장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salvation)파
Eternity에서의 논쟁과 비

아마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모시면서도 수 년 동안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혹은 수년간은 그분을 당신의 주님으로 믿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어왔을 것입니다....만일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가 당신의 주님이심은 알지 못한 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믿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분을 구주로만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당신을 사심으로써 당신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심을 즉각 알아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위험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화 없는 칭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위험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 되지 않는 한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정도는 시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도 구주로
그러나 체이퍼식 구원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인지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존 맥아더의 공이다. 1988년에 출판된 그의 책 Gospel According to Jesus에 의해 미국 교계에서 소위 주재권 구원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등장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국 교회 안에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현대 교회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LS(Lordship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제임스 몽고
존 맥아더
존 파이퍼(John Piper)
R. C. 스프로울(Robert C. Sp
존 거스너(John Gerstner)
11 D. M. Lloyd-Jones, Romans: Exposition of chapter 1. The Gospel of God (The Banner of Truth, 1985), p134. (설교를 한 시기는 1955년)
12 Dennis Rokser, Examining the Lordship Salvation: Part 2, Grace Family Journal 2007:3, http://www.duluthbible.org/246451.ihtml 에서 인용. Rokser 자신은 FG파이다. 마이클 호튼 같은 이는 자신이 LS로 분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으나 FG 주의자들은 어쨌든 그를 LS파로 인식하고 있다.
7
)
더 핑크(Arthur W. Pink)
l S. Horton)
케네스 젠트리(Kenneth L. Gentry

마이클 호튼(Michae
FG(Free grace)파13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fer)
제인 핫지스(Zane Hodges)
드와이트 펜테코스트(J. Dwight Pen
찰스 라이리(Charles C. Ryrie)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 사실 FG파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Google에서 ‘Lordship salvation’을 검색해보면 즉각 알 수 있듯 적어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미국 목회자의 절대 다수는 FG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는 한결같이 LS를 행위구원론과 동일

서 접할 수 있는 글들은 대부분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폄하하는 내용이다. 논쟁이 벌어지면 거기에는 언제나 기존의 입장을 수성하는 측과 새로운 견해를 들고 나와 기존 견해를 반박하는 측이 있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서는 FG와 LS 어느 쪽이 수성의 입장일까. 많은 사람들이 LS가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현대 복음주의의 배경 속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야를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로 확장해 보면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개혁교회가 일관되게 고수했던 구원관에 더 가까운 것은 LS이며 FG가 오히려 변종에 해당한다. 실제로 FG의 수장격인 핫지스는 LS를 과거 청교도주의자들의 뒤틀린 믿음관을 현대에 되살리려고 애쓰는 자들이라고 말한다.14 LS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LS와 FG가 실제로 무엇을 말

13 Gentry KL, Lord of the Saved (P&R Publishing, 1992), p5. Gentry 자신은 LS파이다. 14 Hodges, Absolutely Free!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32. p220의 각주에서 알 수 있듯 핫지스는 존 맥아더가 신학적으로는 청교도주
주의 신앙 자체이다. 15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과 그의 White Horse Inn 사역(www.whitehorseinn.org 참조)의 동료들이 함께 저술한 Christ the Lord (WIFF and STOCK Publishers, 1992)는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매우 훌륭한 안내서이다. 이 책이 번역되었더라면 필자가 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호튼은 FG를 비성경적 구원론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지만 동시에 맥아더의 세대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또한 맥아더의 초기 저작들이 믿음의 본질에 대해 오해를 살 만한 문구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후 맥아더가 개혁주의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오류를 기꺼이 수정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를 비판하는 것은 그의 초기 저작들만 읽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FG 주의자들이 이 책
8
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에서 인용하는 FG의 자료들은 그들 내부에서 광범위한 지지와 인
을 받은 것들임을 밝혀둔다.
G: 믿음은 결단의 산물이며 믿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다. 이 장에서 그는 믿음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시는 것이 진실이라는 내적 확신이다.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17
0
-구
주재권 구원 논쟁은 무엇보다도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다. 개신교 구원론의 핵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즉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LS와 FG가 ‘믿음’, 혹은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두 진영 모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S는 FG가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FG는 LS가 구원 얻는 믿음의 기준을 높여놓는 오류, 즉 믿음뿐 아니라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추가하는 행위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앞에서 말했듯 대중들은 FG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으며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LS를 행위구원론자와 동일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록 주재권 구원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드물지만 많은 설교자들과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FG의 견해에 동조하는 입장을 기독교의 정통 구원론인양 가르치고 있다.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분명히 밝히지만 필자는 LS와 개혁주의의 구원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글의 목적은 LS와 FG의 견해를 단순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LS가 성경적인 구원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FG의 주장을 인용할 때 문맥을 무시하고 일부분만 인용하여 기괴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어느 집단에나 존재하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견해를 전체의 것인 양 과장하는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 필자가 이 글

F
핫지스(사진16)는 그의 책에서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장에 ‘믿음은 그저 믿음일 뿐이다 (Faith Means Just That-Faith!)’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맥아더를 위시한 LS 주의자들이 단순한 지적 동의와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을 표현한

성경이 말하는바 믿음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란 구원하는 사실들(saving facts)에 관한 증거를 말한다.
16 http://www.faithalone.org/bookstore/james.html
17 Hodges, p31.
9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선물에 대해 알아야 했으며 이 선물을 주
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했다.20
을 논증하기 위해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성경의 예화는 나사로의 부활과 모세의 놋
사건이다.
음성을 듣는 것을 통해 새로운 탄생이라는 놀
랍고도 비가역적인 기적이 일어난다.21
. 한 번
바라봄으로써 영생이라는 결과가 온다. 이보다 단순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22
핫지스가 말하는 saving facts는 첫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 둘째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 두 가지이다.18 이 사실들을 믿을 때 그가 약속하신 영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appropriate 할 수)19 있다. 영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그는 요한복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무언가를 너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너는 특정한 사실들을 알아야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보다 더 명료하고 이보다 더 단순한 것이 있겠는가? 이 죄 많은 여인은 중대한 정보를 얻기 전에는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믿음은 ‘단 한 번’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으로서 FG는 이 일이 대단히 단순하고 쉽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11:25-26)는 나사로의 생명 없는 상태에 방해 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사로야 나오라!”는 단순한 말씀이 죽은 자의 귀를 관통하였고 그 음성은 나사로에게 다시 생명을 주었다. 그 일은 이토록 단순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라는 말은 직설적이었고, 명료했으며, 효과적이었다. 나사로는 단 한 번 듣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한 순간으로부터 그는 살아났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단 한 번 마시고, 단 한 번 아들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다(민21:9). 모세에게 이렇게 하고 나서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21:8)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 본즉 모두 살더라”(21:9). 구원 얻는 믿음을 보여주는 얼마나 놀랍고도 단순한 장면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달았듯 하나님의 아들도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죄로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정하신 구세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생명을 얻는다
18 Hodges, p39.
19 Appropriate, appropriation 등의 단어는 FG에서 즐겨 사용하는 중요한 용어로서 믿음이 구원, 영생 등 하나님이 우리 외부에 베풀어 주신 선물을 나의 것으로 획득하는 수단임을 강조한다.
20 Hodges, pp40-41, 강조는 원문의 것.
21 Hodges, p61, 강조는 원문의 것.
22 Hodges, p62.
10
일이지만 영생을 얻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다.
지어 그 믿음이 지속되지 않더라도 문제없다.
정적 순간이
며 이 때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가 비가역적인 영적 부활을 일으킨다.23
40). 심지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믿지 않게 되더
라도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시다.24
참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절
대로 아니다. 문제는 끝마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25
있는 데니스 록서(Dennis Rokser)는 FG의 입장에서
라본 LS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종하고자 하는 일생의 헌신 등을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의
목록에 추가시킨다.26
FG가 ‘단 한 번’이라는 단어를 중요시하고 믿는 것이 단순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대상(saving facts)에 대한 단회적인 신뢰의 결단으로 규정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있다. 전도에서 해야 할 일은 saving facts를 전달하고 이 사실들을 믿기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가 영생의 선물을 소유하게 되느냐의 여부는 이 결단에 달려있다. 단 한 번만 결단 하면 되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전혀 어려운

바울의 구원론의 기본사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은 처참한 죄인이라 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예 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결론하기 위해서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 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구원론을 시작합니다.

< 죄의 종 >

바울은 '죄(하말티아, )'라는 용어를 64회 사용하는데 로마서에서만 48회 사용합니
다. 그리고 인간이 '죄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롬 6:17,20).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 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롬 3:23).

< 육신 >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147회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 바 울이 91회를 썼습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육체라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지만, 군터 보른캄에 의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에 대립되고 모순되는 인간의 존재와 태도'라는 의미 로 바울에 의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육신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본문은 로마서 8장 1-17절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육신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여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고 육신을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 율법 >

바울이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가 율법입니다. 바울은 이 율법이라는 단어를 119회 사용하는데 신약성경 전체 191회의 62퍼센트 정도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말할 때는 대개 모세의 율법을 말하며, 바울은 그 율법을 하나님의 좋은 선 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헬라어 단어 '칼로스( )'는 '아름다운'이라는 뜻 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데이비스(W. D. Davi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폐기되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즉 바울은 율법의 목적이 그것을 지킴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즉 죄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레온 모리스는 여기서 '범죄'가 원어를 보면 단수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더 많은 범죄(범죄들)를 일으켰다는 말이 아니라 범죄에 대해서 더 밝히 드러냈다는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있음으로 범죄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범죄 여부가 더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의 죄를 명확하게 보여줌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필요를 보여줌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갈 3:24)
그러므로 바울이 생각하는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이 이용되면 율법은 오히려 구원의 방해꾼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죄를 깨달음으로 구원의 필요를 느끼고, 구원의 필요를 율법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는 선까지 나아가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 죽음 >

바울이 생각하는 죽음의 개념은 단순히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죽음은 모든 인간을 쓸어버리는 잔인한 정복자이나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내세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 하나님의 진노 >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 2:3).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철저히 거부권을 행사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속성 자체가 '진노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의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기에 죄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의 구원론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더 살펴볼까요?

< 심판 >

심판에 대한 바울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현재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진행되고 있다.
2. 미래의 종말에 가장 큰 심판이 있다.
3.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딤후 4:1).
4.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딤후 4:8).
5.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구원과는 별도로 행위심판이 있다(고전 3장).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보응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즉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서 건축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금, 은, 보석으로 건축하고 어떤 사람은 나무, 풀, 짚으로 건축한다는 것입니다(12절). 심판의 날에 그 문제가 그냥 눈감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공덕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불 가운데서 심판하는데 나무, 풀, 짚과 같은 것으로 건축한 사람은 그 공력이 타버려서 구원을 받기는 받지만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이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12절).
이런 사상을 바울이 말한 배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교회의 교인의 파당문제와 관련되어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파당 문제로 바울이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1장과 2장에서 분파의 원인에 대해서 원론적인 언급을 했다면 3장에서는 분파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바로 육신의 욕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가 무엇이고,
바울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합니다. 다 사람일뿐이라고 하면서 그는 말합니다. 자기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9절).
그래서 계속되는 바울의 말을 설명하면 이런 말입니다.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인데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진 견고한 성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추악한 분열을 일삼아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세워진 성전이 되려고 하는가? 그러면 심판의 날 너희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 즉 시커먼 숯과 타버린 재처럼 되어서 창피한 모습으로 신랑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 일이 없도록 더 이상 분파행동을 하지 말고 거룩하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않는가?(16절)"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의 잘못된 행위도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참한 업적들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은 심판 날에 안타까운 처지에 처할 것입니다.

< 이 악한 세대 >

바욿은 '이 악한 세대(갈 1:4)'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환경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환경적 요소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첫째, 인간의 범죄가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고, 둘째, 악한 영들의 활동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들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엡 2:2),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도 말하지만 거대한 악의 세력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 십자가 >

바울의 삶과 사상에 있어 가장 중심에 놓인 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처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 2:2). 아덴에서의 선교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십자가는 다른 성경 기자와는 다른 바울의 탁월한 사상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무수히 역설했지만 바울 서신 외에서는 복음서에서의 십자가 사건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에서만 십자가와 관련한 언급이 한 번 나옵니다(히 12:2).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라는 개념이 얼마나 '바울적인 개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지탱하는 두 개의 축 중의 한 축입니다. 또 다른 한 축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는 논란도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논란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중에 하나만 있으면, 혹은 한 축이 더 길면 절름발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은 분리된 개념이 아닙니다.

< 구속 >

구속이란 말은 '속전(대가)을 지불하고 구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말보다 더 의미심장한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속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속을 가져다 준다고 바울은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셔서(롬 3:25)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신 것입니다.

< 칭의 >

'의롭다고 여김 받는다'라는 뜻을 가진 칭의라는 개념은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의로운 재판장으로부터 어떻게 '무죄!'라는 선언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롬 3:24)

< 속죄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 다양한 범주 >

구속(롬 3:24; 고전 1:30; 갈 1:13; 4:4; 엡 1:7; 골 1:14).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서 풀어주는 의미입니다. 무슨 값을 치르셨습니까?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피'라는 값입니다.
새 언약(고전 11:25).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로
운 하나님과의 약속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언약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사죄'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유대교를 조금 변형시킨 것이 아닙니다. 율법보다는 하나님과의 약속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화목(롬 5:10-11; 고후 5:18-20; 엡 2:11-16; 골 1:19-22). 바울의 글에서 앞에 열거한 4구절에서만 '화목'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화목은 분쟁이나 적의를 지니고 있다가 다시 화평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과 원수였다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것입니다.
제물(엡 5:2; 고전 5:7). 동물의 피를 바치면서 하나님 앞에 죄 사함의 확신을 얻는 제사의식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완전한 희생 제물입니다.
용서(골 3:13; 엡 4:32). 우리는 죄의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양자됨(롬 8:15; 갈 4:5; 엡 1:5). 양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가족에 속하지 않던 한 사람이 그 가족의 완전한 일원이 되는 것이며, 권리와 동시에 의무도 주어집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입양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 우리 가운데 역사하는 사랑 >

이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가 "믿음! 믿음!"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나서는 믿음은 무의미합니다. 목회서신에는 사랑이 10번 언급되어 있는데, 그 중에 9번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심 사상입니다. 바울은 수많은 글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바울의 수많은 축도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바울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롬 8:35-39). 바울이 수없이 쓰고 있는 '은혜'라는 단어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랑 없이 은혜가 어떻게 온전히 이해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은 '융통성 없는 심판자'요, 그리스도는 '그 심판자로부터 구출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상한 그림은 바울의 그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구원론 Annotated Bibliography

 

- 작성자 이상웅 -

 

 

I. 교의학 교본속에 포함된 구원론

 

■ 개혁파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 Battles, 2vols. , Philadelphia:Westminster,1960

 

- 칼빈의 강요 제3권이 구원론에 해당한다. 칼빈은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모든 구원축복을 받는 초석으로 강도한다.

 

Heppe, Heinrich. Reformed Dogmatics, Grand Rapids:Baker,1984,pp.510-589; 『개혁파 정통 교의학2』(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4),pp.725-836

 

- 본서는 칼빈과 개혁파 정통주의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주요 내용들을 주제별로 발췌한 것이다. 16-18세기에 이르는 주요 개혁신학자들의 작품들을 직접 읽기 어려운 신학도들에게는 핵심 내용들을 쉽게 접하게 만든다.

 

berkhof, Louis. Systematic Theology,Edinburgh:Banner of Truth,1988,pp.415-549

 

- 벌코프는 바빙크의 교의학을 소화하여 영어권에 전달한 사람이다. 구원론에 있어서 박형룡 박사를 통해서 국내에 미친 영향이 크다.

 

Hodge, Charles. Systematic Theology, 3vols.,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1901

 

- 구 프린스톤의 거장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은 총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3부는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제목 아래 구원순서, 은혜언약,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등을 다루고(vol.2:3131-732)나서, 구원서정의 각론을 다룬 후에, 율법과 은혜의 방편까지 구원론 속에 포괄하여 다룬다(vol.3:3-709).

 

Shedd, W. G. T. Dogmatic Theology,3rd ed. Philippsburg:P&R,2003

 

- 찰스 하지와 더불어서 19세기 미국 장로교 신학을 대변한 쉐드는 주저 교의신학 6부를 구원론이라 명명하고,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대속적 속죄를 다룬 후에 중생, 회심, 칭의, 성화, 그리고 은혜의 방편론을 차례로 다룬다.

 

Kuyper, Abraham, Dictaten Dogmatiek,Kampen:Kok,1910, vol.4

 

- 아브라함 카이퍼는 19세기 네덜란드 개혁신학의 부흥을 주도한 위대한 신학자이자 실천가였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독일 관념론의 짙은 영향하에 있기 때문에 바빙크의 저술들 보다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들 속에는 탁월한 통찰력들이 번뜩이기 때문에 참조할 만하다. 그의 구원론은 여러 다른 책자들 속에도 산재하지만 특히 학생들이 녹취한 『교의학 강의 노트』,제4권의 첫 번째 분책 Locus de Salute에서 완숙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카이퍼는 구원론에서 은혜, 은혜은약, 칭의,중생,소명,회심,신앙,성화순으로 다루고 있다.

 

Bavinck, Herman. Gereformeerde Dogmatiek,4vols.4th ed. Kampen:Kok, 1928- 1930 , vol.3 & 4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재론할 여지없이 개혁파 정통신학의 최고정수를 담은 명저이다. 최근에 구원순서 논의를 담은 3권까지 영역되었고, 오래지 않아 마지막 4권(구원의 각론, 교회론, 종말론)도 출간될 전망이다. 바빙크의 구원론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Magnalia Dei(Kampen:Kok,1909),19장-22장[원광연역,『개혁교의학개요』,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2004,pp.478-640]를 참조하라.

 

buswell, Oliver. 『조직신학』박찬호,권문상역(서울:웨스트민스터출판부,2005),제2권

 

버스웰의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조직신학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버스웰의 이 저서는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후기 집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버스웰은 2권에서 3부 구원론이라는 주제하에 하지처럼 기독론과 엄밀한 의미에서의 구원론을 다 포함시켜 다룬다.

 

Reymond, Robert, L.『최신 조직신학』,서울:CLC,2004

 

- 레이먼드 교수는 밥존스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카비넌트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밥 존스 식의 근본주의 보다는 개혁주의 입장이며, 쉐퍼나 반틸의 변증학을 수용하고 있다. 단권의 조직신학 속에서 레이먼드는 제3부를 우리의 큰 구원이라는 제목아래 기독론, 속죄론을 방대하고 다루고 이어서 십자가 사역의 공효들의 적용이라는 제목(19장)하에 본격적인 구원론을 다룬다. 이점에서 그의 선임자 올리버 버스웰의 책과 유사성이 느껴진다.

 

van Gendenren, J. and Velema, Willem, Beknopte Gereformeerde Dogmatiek,Kampen:Kok,1992

 

- 현재 네덜란드 신학대학중 가장 정통 개혁주의에 가까운 아뻘도른 신학대학의 원로 교수들이 재임시에 공저한 개혁교의학 교과서이다. 본 서는 카이퍼, 바빙크의 신학을 요약한 교본인 A. G. Honig, Gereformeerde Dogmatkekk,Kampen,을 발전적으로 대체한 것이다.

 

유해무,『개혁 교의학』,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1997,413-489

 

- 고신의 조직신학자가 쓴 교의학 교과서로서 칼빈과 개혁신학의 전통위에 서서 현대의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과 대화를 하기에 게으르지 않다.

 

■ 비개혁파

 

Erickson, Millard J., Christian Theology,2nd ed.,Grand Rapids:Baker,1998,pp.861-1032

 

- 에릭슨의 기독교 신학은 침례교의 대표적 교의학 교과서이던 A. H. Strong의 저서를 대체하였다.

 

Grudem, Wayne, Systematic Theology,Grand Rapids:Zondervan,2000,pp.634-850

 

- 침례교 신학자인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은 현대 복음주의권에서 광범위하게 환영받고 있는 교과서이다. 그러나 그의 성령론중 특히 예언의 은사론은 개혁파 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Schmid, Heinrich, Doctrinal Theology of the Evangelical Lutheran Church,Minneapolis:Augsburg ,1961, pp.407-499

 

- 이 책은 루터파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들을 주제별로 선집해 놓은 자료원이다.

 

Willams, Roadman, 『오순절/은사주의 조직신학』박정렬역(서울:한세대출판부,2001)

 

- 로드맨 윌리엄스는 개혁주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신학자이다. 3권으로된 조직신학중 제2권에서 성령론과 구원론의 여러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 현대 신학자들

 

Schleiermacher, Friedrich. The Christian Faith, Edinburgh:T & T Clarke,1948.

 

- 슐라이어막허는 근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이다. 그는 경건주의의 영향하에 절대의존감정이라고 하는 주관주의적 체험을 원리로 해서 모든 신학적 주제들을 논구하였다. 주관적 체험상 가장 거리가 먼 삼위일체론을 부록처럼 다루고 있다. 그는 중생, 회심, 칭의, 성화등의 구원론적 주제를 자신의 신학적 원리위에서 해명하고 있다(pp.476-524)

 

Barth, Karl. Kirchliche Dogmatik, Z?rich:EVZ,1932-1967

- 칼 바르트의 주저는 총 5부로 기획했으나 4부로 미완성되고 말았다. 바르트는 4부(IV/1,IV/2,IV/3-1, IV/3-2)에서 구원론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구원론은 화해론(Vers?hnungslehre)라는 제목 아래 기독론, 죄론과 더불어서 교직되어 있음이 특징이다.

 

Pannenberg, Wolfhart.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Eerdmans,1994,vol.2

 

- 계시로서 역사를 주장한 신학자 답게 그의 세 권짜리 조직신학 속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구원론(즉 개인에 대한 구원의 적용교리)은 부재하다. 2권 11장을 세상의 화해(the reconciliation of the world)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Weber, Otto, Foundations of Dogmatics, trans. Darrell L. Guder,Grand Rapids:Eerdmans,1983,

 

pp.229-407(Part 8. The Work of the Holy Spirit)

 

오토 베버(1902-66)는 독일 괴팅겐 대학교 개혁파 신학 교수이자 칼 바르트의 신학적 추종자였다. 그가 쓴 교의학 교본은 바르트의 신학을 간단명료하게 잘 기술한 책으로 평가받아왔다. 현재도 독일에서는 교과서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베버는 제8부 성령의 사역이라는 제목하에 구원론의 여러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Berkhof, Hendrikus. Christelijke Geloof: Een inleiding tot de geloofsleer. Nijkerk:Callenbach,1993

 

- 헨드리쿠스 베르코프는 베르까워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네덜란드 신학계를 대표했다. 그는 초기에는 열성적인 바르티안이었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바르트와 거리를 두었다. 그는 이위일체론을 주장했다. 그의 교의학 주저속에서 구원론을 인간의 갱신이라는 주제하에 다루고 있다(pp.415-485)

 

Rahner, Karl.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New York: Seabury,1978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기조를 결정지은 사람이 바로 칼 라너이기 때문에 현대 가톨릭 신학을 이해하고자 할 때 칼 라너 신학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라너는 하이데거와 불트만의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실존주의 신학을 개진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본 서는 라너가 말년에 자기 신학을 비교적 쉬운 형태로 저술한 것이다.

 

김광식,『조직신학 IV』,서울:대한기독교서회,1997

 

- 감리교에 속한 조직신학자로 바젤대에서 신학박사를 받고 연세대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칼 바르트를 비롯한 현대 독일어권 신학자들의 영향을 대변하고 있다. 4권에서 구원론과 윤리신학을 다루고 있다. 구원론에 있어서 특별히 그는 칭의론에 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는데, 칭의화 성화의 관계 문제도 100쪽이나 할애해서 다루고 있다(pp.270-370).

 

김균진,『기독교 조직신학 III』서울:연세대출판부,1990

 

- 김균진 교수는 튀빙겐 대학교에서 몰트만의 지도로 칼 바르트와 헤겔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연세대 신학대학에서 오랫동안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조직신학 제3권에서 성령론과 신앙론으로 대별하여 구원론을 기술하고 있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바르트와 몰트만의 입장에 서 있다.

 

 

II. 구원론 교본

 

박형룡,『교의신학-구원론』,서울: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1983

 

- 박형룡 박사의 신학은 한국 장로교 신학의 초석을 놓았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성을 가진다. 그의 교의신학은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많은 연구를 통하여서 자신 나름의 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의 구원론 역시도 벌코프의 저서를 근간으로 해서 베르까워, 존 머리, 올리버 버스웰등의 작가들로부터 보충을 하였다.

 

H. Kuiper, By Grace Alone: A Study in Soteriology, Grand Rapids:Eerdmans,1955

 

- 헤르만 카이퍼는 칼빈신학교 교수로 재직했었고, 신칼빈주의 전통에 서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구원론은 구원서정의 역사적 논의, 모든 구원의 궁극적 기초, 소명, 중생, 신비적 연합, 믿음과 회심, 칭의, 성화, 견인, 영화의 순서로 다루어지고 있다. 박형룡 박사도 구원론을 집핍하면서 본서를 활용하였다.

 

J. Murray, Redemption-Accomplished and Applied,Edinburgh:Banner of Truth; 『구속론』,서울:성광문화사,2004.

 

- 존 머리 교수의 구속론은 속죄론과 구원론 양자를 다루고 있다. 구원서정 논의에 있어서 박형룡 박사와 유사하다.

 

A. A. Hoekema, Saved by Grace,Grand Rapids:Eerdmans,1989;『개혁주의 구원론』,서울:CLC,1990

 

- 후크마의 인간론,종말론,구원론 3대 저작은 벌코프 이후의 미국 개혁신학 서클에서 나온 가장 탁월한 교과서에 속한다. 너무 늦게 시작하여 7론을 다 완성하지 못하고 소천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후크마는 자신이 속한 신학전통인 미국 장로교 신학과 신칼빈주의 신학 전통에 굳게 서 있을 뿐 아니라 바르트나 쿨만등의 현대신학자들과 신학적 대화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브루스 데머리스트,『십자가와 구원』,서울:부흥과개혁사,2006

 

- 미국 덴버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데머리스트의 최신간 구원론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구원의 계획, 2부 구원의 제공(속죄론), 3부 구원의 적용(주관적 측면). 현대신학자들과의 대화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좀 더 넓은 의미에서의 복음주의 성격을 가진 책인데,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김광열,『구원과 성화』,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2004

 

-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의 구원론으로서 구원론의 기본 주제들을 다루는 1부와 다양한 성화론에 대한 연구를 담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김남준,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서울:부흥과개혁사,2004

- 청교도 형의 목회자가 쓴 구원론 강론집이다.

 

유태화,『개혁신학의 구원론』,서울:크리스챤출판사,2006

 

- 저자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몰트만의 성령론을 전공하고 학위 취득후 백석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개혁신학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진 저자는 구원론에서도 자신의 관심과 폭넓은 연구 결실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의 구원론은 박형룡 박사의 구원론과 흡사한 논의 절차를 밟고 있다. 머리의 결정적 성화론에 대한 소개, 포괄적 구원론에 대한 소개, 그리고 예정론을 포함하여 다룬다는 점이 특이하다.

 

 

III. 구원론의 특정 주제들1(구은의 총론)

 

● 구원서정

 

Warfield, B. B. The Plan of Salvation

 

[모수환역,『구원의 계획』(서울:크리스천다이제스트,199 )]

 

● 성령의 사역(특별은혜)

 

Brunner, F. D. 『성령 신학』,서울:나눔사,1989

 

- 오순절/은사운동의 성령론을 비판적으로 다룬 탁월한 박사논문이다.

 

Dunn, James D. G. Baptism in the Holy Spirit, Philadelphia:Westminster,1970

 

- 바울신학의 새로운 관점을 대변하여 온 영국 더럼 대학의 신약신학자가 현대 오순절 운동과 관련하여 성령 은사에 대한 신약적 교훈을 재검토한 책자이다. 그의 신학적 입장에 전적으로 찬동할 수는 없으나 중생=성령세례라고 하는 전통 개혁신학의 논지를 신약학적으로 잘 다루고 있다.

 

Ervin, Howard M. Conversion Initiation and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Peabody: Hendrickson, 1984

- 오순절 신학의 입장에서 제임스 던의 견해에 대해서 비판한 책

 

Ferguson, Sinclair B. The Holy Spirit,Downers Grove:IVP,1996

-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퍼거슨 교수의 성령론은 개혁신학교 영국 청교도 신학의 전통에 굳게 서있다.

 

 

Flavel, John. The Method of Grace: How the Holy Spirit Works,Grand Rapids:Baker,1977

 

- 청교도 존 플라벨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신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논구한다.

 

Gaffin Jr., Richard. 『성령 은사론』,권성수역,서울:CLC,1999

 

_________, “The Holy Spirit", in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3/1(1980 Fall),pp. 58-78

- 개핀 교수의 성령론은 구프린스톤의 성령론을 계승하고 있다.

 

Hoekema, Anthony.『성령 세례』,서울:전도출판사,1998

-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라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하고 있다.

 

Krusche, Werner,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n Calvin,G?ttingen:Vandenhoeck& Ruprecht ,1957

- 칼빈의 성령론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논구한 훌륭한 자료원이다.

 

Kuyper, Abraham. Het werk van den Heiligen Geest. Amsterdam 1888-9; 『성령론』,김해연역, 서울:세종문화사,1988

- 19세기에 출판된 최고의 성령론 교본이다. 하지만 관념론의 영향이 짙은 작품이다. 원래 카이퍼는 대중들을 위해서 기독교 신문에 평이한 문체로 쓴 책이지만 한역본은 중역이 되어서 그런지 읽기 용이치 않다.

 

Lloyd-Jones, D. M. Joy Unspeakable, Eastbourne:Kingsway,1984 _______, Prove All Things,Eastbourne:Kingsway,1984

-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강해설교자인 로이드존스의 성령론이 담겨있는 강해서들이다. 로이드존스는 성령세례와 인침을 동일시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칼빈주의적 감리교와 청교도의 전통에 서 있는 그는 선중생 후성령세례를 주창하였다.

 

Macleod, Donald. The Spirit of Promise. Tain:Christian Focus Pub.,1986

- 에든버러에 소재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신학대학의 조직신학교수인 저자가 로이드존스의 성령론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쓴 책이다

 

Owen, John. Pneumatologia or a Discourse concerning the Holy Spirit(Works 3), Edinburgh:Banner of Truth,1994

-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가 쓴 방대한 성령론이다.

 

Packer, James I. Keep in Step with the Spirit,Leicester:IVP,1984;『성령을 아는 지식』,홍종락역,서울:홍성사,2002

- 청교도의 전통에 굳게 서 있는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가 개진한 성령론이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열쇠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임재와 사역을 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웨슬리의 완전론, 고전적 케직 교의, 현대 은사주의 운동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다룬다.

 

Palmer, Edwin H. The Person and Ministry of the Holy Spirit.Grand Radpids:Baker,1958

- 부제가 암시하듯이 본서는 전통적 칼빈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성령론이다.

 

Stott, John, R. W. Baptism and Fullness, Downers Grove:IVP,1976

- 박형룡 박사가 애용할 정도로 전통적인 성령론 책자이다.

 

Torrey, R. A. 『성령 세례』,서울:나단,1994

-선중생 후성령세례에 대한 19세기 고전적인 저술이다.

 

 

김길성, “개혁주의 성령론(I),(II)", in 『개혁신앙과 교회』,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2001,125-194

 

김재성,『성령의 신학자 존 칼빈』,서울:생명의말씀사,2004

- 칼빈의 성령론을 종합적으로 다룬 탁월한 책자이다.

 

변종길,『성령과 구속사』,서울: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1997

- 요한복음의 성령론을 다루되 구속사적 입장에서 다룬 박사논문이다.

 

서철원,『성령신학』,서울:총신대학교출판부,1994

- 개핀교수와 유사한 성령론을 개진하고 있다. 은사에 대해서 철저하게 문을 닫고 있다.

 

이신열, Grace and Power in Pentecostal and Charismatic Theology,Apeldoorn::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2002

- 백석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이신열 교수의 박사논문으로 오순절신학과 은사운동신학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차영배,『성령론-구원론교재』,서울:교회교육연구원,1987

-저자의 성령론은 한국 신학계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성령론은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있다.

 

● 일반은총

 

Bavinck, Herman, Algemene Genade(Kampen:Zalsman,1894); 차영배역,『일반은총론』,서울:총신대출판부,1979,2002]

- 비록 짧은 강연문이기는 하나 일반은총론에 대한 개괄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

 

Daane, James. A Theology of Grace: An Inquiry Into and Eval!!uation of Dr. C. Van Til's Doctrine of Common Grace,Grand Rapids: Eerdmans,1954

 

Douma, Jochem. Algemene Genade: Uiteenzetting, vergelijking, en beoorfeling van de opvattigen van A.

 

Kuyper, K. Schilder en Joh. Calvijn over 'algemene genade',Goes:Oosterbaan & Le Cointre,1966

- 다우마 교수가 칼빈, 카이퍼, 그리고 스킬더의 일반은총론에 대해서 깜뻔 신학대학에서 쓴 박사논문이다. 다우마 교수는 모교에서 윤리학 교수로 오랫동안 가르치다가 수 년 전에 은퇴했다.

 

Engelsma, David J. Common Grace Revisited : A Response to Richard J. Mouw's He Shines in All That's Fair ,Grandville, MI, :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2003

 

Kuiper, Herman. Calvin on Common Grace,Goes:Oosterbaan & Le Cointre,1928.

- 칼빈의 일반은총론에 대한 자유대학교 박사논문, 헤르만 카이퍼는 후에 칼빈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Kuyper, Abraham. Gemeene Geratie,3vols.,3rd ed.,Kampen:Kok,1931-2

- 일반 은총론에 관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대작으로 원래는 자신이 편집하던 De Heraut지에 연재했던 기사 모음이다.

 

Masselink, William, Common Grace & Christian Education(1951)

 

_________,General Revelation and Common Grace,Grand Rapids:Eerdmans,1953

 

Mouw, Richard J., He Shines in All That's Fair : Culture and Common Grace,Grand Rapids: Eerdmans,2001

 

Van Til, Cornelius, Common Grace and the Gospel,Nutley:Presbyterian & Reformed, 1972

- 코넬리우스 밴틸의 이 책자는 마우의 글을 제외한 앞선 논의들 대부분을 다루고 있어서 유용한 입문서 구실을 한다.

 

강웅산, “Jonathan Edwards' Undestanding of the Distinction Between Common Grace and Saving Grace”, Th.M.Thesi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1996

- 조나단 에드워즈의 일반은총과 구원의 은혜간의 구별을 논구한 석사논문

 

● 신비적 연합

 

Smedes, Lewis, Union with Christ,Grand Rapids:Eerdmans,1983;오광만역,『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서울:여수룬,1991

- 저자는 원래 조직신학자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이 바울 신학의 근간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에 대한 바울신학적 내용들을 이 책에서 접할 수 있다.

 

Jae Sung, Kim. "Unio Cum Christo: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s Theology",Ph.D. diss. Westmnister Theological Seminary,1998

- 칼빈 구원론의 근본인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교리에 대한 박사논문이다.

 

V. 구원론 특정 주제들2(구원의 각론)

 

◆ 중생(regeneration)

 

Bavinck, Herman. Roeping en wedergeboorte.Kampen:Zalsman,1903

- 바빙크가 소명과 중생에 대해서 쓴 글이다.

 

Best, W. E. Regeneration and Conversion. Grand Rapids:Baker,1975

 

Charnock, Stephen. The Doctrine of Regeneration,Grand Rapids:Baker,1980

- 청교도 목사가 중생에 대해서 방대하게 다룬 책

 

Pink, Arthur W. Regeneration or the New Birth. Swengel:Bible Truth Dept,n.d.

- 청교도 전통에 서 있는 핑크가 대중들을 위해서 쓴 책

 

 

◆ 믿음(Faith)

 

Bavinck, Herman. 『신앙의 확신』,조주석역,서울:나침반,1987

 

Berkhof, Louis. The Assurance of Faith. Grand Rapids:Smitter,1928

- 루이스 벌코프가 신앙의 확신에 대해서 쓴 책

 

Graafland, Cornelis. De zekerheid van het geloof. Wageningen:Veenman,1961

- 개혁주의 신학사의 대가인 저자가 신앙의 확신에 대해서 쓴 박사논문. 칼빈과 화란 제2차 종교개혁기의 신학자들의 저술들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쓴 책자이다.

 

Maris, Johannes Willem, Geloof en ervaring: Van Wesley tot de pinsterbeweging,Leiden:Groen en Zoon, 1992

- 네덜란드 아뻘도른 신학대학의 교의학 교수인 마리스의 박사논문으로서 신앙과 체험에 관해 다루었다.

 

Seils, Martin. Glaube, Handbuch Systematischer Theologie,G?tersloh:G?tersloher Verlaghaus,1996

- 조직신학총서의 한 권인 본서는 현대 독일 루터 신학자들이 만든 시리즈이다. 본서는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해당 주제에 대해서 중요한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들을 소개하고, 주요 현대신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는 순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입장과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해당 주제에 대한 박식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어야 유익한 점이 있다.

 

Sproul, R. C. Willing to Believing;『자유의지와 믿음』,서울:생명의말씀사,2000

- 스프룰 교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9명의 신학자의 주장을 본서에서 다룬다.

 

◆ 칭의(Justification)

Berkouwer, Gerrit, C. Faith and Justification, Grand Rapids:Eerdmans,1954

- 베르까워가 쓴 14권(화란어로 18권)짜리 교의학 연구의 첫 작품이다. 베르까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 서서 칭의론을 다루고 있다.

 

Buchanan, James,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Grand Rapids:Baker,1955(1867)

- 19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학자가 쓴 칭의론

 

Edwards, Jonathan, "이신칭의“ in 『기독교중심』,이태복역,서울:개혁된신앙사,2002,19-301

- 1734-1735년 노샘프턴 교회의 영적 대각성을 촉발시켰던 강론을 출판한 것이다. 롬4장 5절을 본문으로 하여 이신칭의 교리의 의미, 이 교리의 참됨을 증명하는 네 가지 논증, 복음적 순종과 칭의의 관계, 반론에 대한 답변,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등의 순서로 강론해 나간다.

 

Eveson, Philip, H. 『칭의론 논쟁』,석기신,신호섭 공역,서울:CLC,2001

- 입슨 교수는 웨일즈 복음주의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본서에서 성경적 이신칭의 교리의 진수를 다루고 있다. 복음적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입장과 연합 문제, N. T. Wright 같은 현대 학자들의 그릇된 해석들을 다루되 성경적으로 비평하고 있다. 그리고 이신칭의 교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리스도인 개인들과 교회를 위하여 적실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Kistler, Don(ed.), 『솔라 피데』,조계광역,서울:생명의말씀사,2001

-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신칭의론에 대해서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자는 1. 루터이전-예수님과 칭의교리, 2. 칭의의 법정적 본질, 3. 믿음과 칭의의 관계, 4. 의롭다하는 믿음의 본질, 5. 칭의를 위한 믿음의 충족성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McGrath, Alister E.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3rd ed.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2005 ________, Justification by Faith; 『칭의 이론의 현대적 의미』,이재덕역,서울:한국로고스연구원,1992

-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는 칭의론에 대한 아주 전문적인 책과 대중적인 책을 출간하였다. 전자는 초대교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칭의론의 역사를 학술적으로 다루었고(460쪽), 후자는 칭의론을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 쉽게 저술하였다. 후자는 크게 이신칭의 교리의 배경과 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Piper, John, Counted Righteous in Christ: Should We Abandon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Wheaton:Crossway,2002

- 침례교 목회자이자 신약신학자인 파이퍼 목사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해서 논의한 얇은 책자이다.

 

Seifrid, Mark. Justification by Faith.Leiden:Brill,1992

- 바울신학의 중심 주제로서 칭의론을 파악하고 신약학적으로 다룬 연구서.

 

Sproul, R. C., 『오직 믿음으로』,안보헌역,서울:생명의말씀사,1999

- 대중적인 필치로 많은 유익한 신학서적들을 저술한 스프룰 교수는 본서에서 이신칭의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강웅산,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Jonathan Edwards' Doctrine of Justification in the Light of Union with Christ, Ph.D.diss,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2003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신칭의론에 대한 연구서

 

◆ 성화(Sanctification)

Berkouwer, Gerrit, C. Faith and Sanctification,Grand Rapids:Eerdmans,1952

- 베르까워는 개혁신학의 전통에 서서 현대 신학과의 논의를 통하여 성화론을 개진하고 있다. 오직 믿음과 성화, 성화의 시작, 성화의 과정, 성화와 겸손, 그리스도 닮음, 성화의 율법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Dieter, Melvin et al(ed.), Five Views on Sanctification,Grand Rapids:Zondervan,1987; 김원주역,『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서울:IVP,1991

- 이 책에는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를 개진하고 있는데, 감리교입장(맨빈 디이터), 개혁주의입장(안토니 후크마), 오순절 교회 입장(스탠리 호튼), 케직파 입장(로버트슨 맥퀼킨), 어거스틴적 세대주의 입장(존 월부우드)등이다. 각자의 입장을 개진할 뿐 아니라 반론도 같이 수록하고 있어서 아주 유용한 책자이다.

 

G?hler, A. Calvins Lehre von der Heiligung,M?nchen:Kaiser,1934

- 칼빈의 성화론에 대한 학술적 논구

 

Kraan, K. J. Heiliging , het hart van het heil.Kampen:Kok,1977

- 끄란 박사는 베르까워 교수의 제자로서 화란 개혁교회내에 성령 운동을 도입한 사람이다. 본서에서 끄란 박사는 성화를 구원의 핵심(심장)으로 소개한다.

 

Lindstr?m, Harold. Wesley and Sanctification.London:Epworth,1946

- 존 웨슬리의 성화론을 다룬 연구서

 

Murray, John. "Definitive Sanctification" and "The Agency in Definitive Sanctification."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Edinburgh:Banner of Truth,1977.2:277-293

- 결정적 성화론을 제시한 것은 존 머리 교수의 탁월한 기여이다.

 

Warfield, B. B., Perfectionism,2vols., Grand Rapids:Baker,2003(1932)

- 워필드가 19세기에 대두된 다양한 종류의 완전주의에 대해서 비평한 논문들을 집성한 논문집이다.

 

리스, 존 H. 『칼빈의 삶의 신학』,서울:한국장로교 출판사,1996

 

월레스, 로날드 S. 『칼빈의 기독교 생활 원리』,서울:CLC,1988

- 리스와 월레스의 책은 칼빈의 성화론의 핵심인 vita Christiana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김남준,『마음지킴』,서울:생명의말씀사,2003

______,『죄와 은혜의 지배』,서울:생명의말씀사,2005

_____,『자기 깨어짐』,서울:생명의말씀사,2006

- 김남준 목사의 성화에 관련된 설교집은 학문적 형태도 갖추고 있으며, 대중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정석, Secularization and Sanctification,Amsterdam:Free University Press,1995

- 칼 바르트의 성화론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여 쓴 박사논문으로 저자는 바르트의 성화론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다.

 

◆ 견인(Perseverance)

 

Berkouwer, Gerrit, C. Faith and Perseverance, Grand Rapids:Eerdmans,1958

- 베르까워 교수는 견인에 관련된 주제들을 성경신학, 신학사등의 해박한 지식을 활용하여 잘 다루고 있다.

 

Gundry-Volf, J. Paul and Perseverance:Staying in and Falling Away,Louisville:W/JKP,1990

-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바울의 견인론을 주제로 다룬 박사논문을 출판한 것이다. 유딧 건드리-볼프 교수 역시도 견인론이 우리들의 견인론과 차이가 있다.

 

Marshall, Howard,I. Kept by the Power of God.Minneapolis:Bethany,1975

- 영국의 유명한 신약학자가 쓴 견인에 대한 박사논문을 출판한 것이다. 그는 감리교 전통에 속한 학자로서 개혁신학적인 견인론과는 다른 입장을 개진했다.

 

Pink, Arthur. Eternal Security. Grand Rapids:Baker,1974

-청교도 작가들을 바탕으로 한 대중적 작가가 쓴 견인에 대한 교리적 해설서

 

◆ 영화(Glorification)

 

Edwards, Jonathan,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Works 9, New Haven/London:Yale University Press,1989

________,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World, Works 8, New Haven/London:Yale University Press,1989

- 성도의 영화에 대한 부분은 내세론의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다. 각론으로 다루는 경우는 많지 않다. 박형룡 박사는 앞서 소개한 존 머리의 책과 H. 카이퍼의 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각론을 기술하였다. 위에 제시한 에드워즈의 두 편의 글들도 영화에 대한 훌륭한 기술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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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1)
 
박혜근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구원의 경험 중의 하나이다. 구원의 확신은 평신도 사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었지만 통일된 가르침 없이 흘러왔다. 그런 면에서 어떤 점에서는 생소하고 과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책이 없다. 유일하게 있는 책이 R. Ryle 정도의 책이다. 평신도용이다. 그러나 신학적 지평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신학적인 논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이슈들을 담고 있다. Joel Beeke 박사학위 논문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학교에서 지향하는 목회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적 목회이다. 개혁파는 칼빈 사후에 한번이라도 다른 목회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 점을 꼭 기억하라.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이 목회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목사의 사명이다. 밥 퍼는 집사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선교도 가르치는 것이다. 선교가 나귀타고 들판에 다니면서 성경책 나눠주는 게 선교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들이 말도 타고, 나귀도 타고 밀림도 헤치는 궁극적 목적은 가르치려는 것이다. 병원을 짓고, 학교를 만드는 것은 복지국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라면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 가는 사람이 선교사이고 목사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는 것이고, 교회 안에 교사를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직업을 갖기 위해서 소명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과거에 솔로몬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바톤 터치하였다. 안식일에 바꿀 때까지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잠을 자는데, 누워서 자는 사람은 선임들이고, 나머지는 벽에 기댄 채로 밤을 새웠다. 그러니까 한번이라도 그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멈춘 적이 없었다. 과거 유대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트는 시간을 맞추어서 지평선에 해가 오르는지를 보았다. 해가 오를 때 제사를 집행하고 해가 질 때 집행을 멈추었다.
 
향 피우는 것도 복잡한 절차이지만 그들은 수백 년간 그것을 반복하였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있는데 성전에서 말씀을 날마다 연구하고 가르쳤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말씀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인생 마쳐야 한다. 그렇게 할 생각이 없으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공부하고 그 공부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깨우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1.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

한국교회가 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가볍게 다룬 점이 없지 않다. 사경회나 부흥회에 가면 구원받은 줄 믿습니까? 아멘! 이 말로 구원의 확신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번 학기는 구원의 확신을 다루면서 구원의 확신과 관련된 성경적 근거하든지 신학적인 것을 다룰 것이다.

책을 찾아보니까 루이스 벌코프나 후크마의 책에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구원의 확신은 많이 다루는 주제인데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안타까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신학에 대하여 전반적인 소개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확신이라고 말하면 이렇게 알아들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시대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점 중의 하나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시대로 돌아가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무엇을 가지고 논쟁했는지 들여다보면 논쟁점 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이 논쟁은 또 다른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종교개혁시대에도 그랬고, 종교개혁 후 시대에도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논쟁은 종교개혁시점부터 오늘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핵심 논쟁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논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 죽고 난 뒤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약 1000년, 중세시대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논쟁은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관된 입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교회의 구원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냐,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구원의 확신에 관한 어떤 개인적인 시도를 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1600년대 트렌트 종교회의에 가면 뭐라고 하냐면, 그것은 사악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러니까 로마교회는 중세 1000년 동안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정의하면 그런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하는 시도 자체는 단순하게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그레고리 대제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에 마침내 구원의 확신의 문제가 논쟁점이 되기 시작하면서-반격했던 이유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 터져나온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과거 중세시대의 교회에서 가졌던 것보다 더 강경한 것이었다. 어떤 것이냐면 만약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시도하는 것은 저주를 받을 짓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에는 구원의 확신을 둘러싼 논쟁은 없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가 있었느냐면 있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히포의 어거스틴이었다. 또 한 사람은 Duns Scotus였다. 어거스틴이나 둔스 스커타스의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확실성은 논의하기는 어려워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구원에 대한 대략의 추정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입장은 100% 확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지 개연성 정도에서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자, 이렇게 기껏해봐야 구원의 확신은 개연성 정도에 머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중세의 로마교회의 고해성사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해성사제도는 죄 용서를 베풀기 위한 교회적 절차이다. 지금도 고해성사를 한다. 죄 용서 받기 위해서는 사제를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개인적으로 자백을 하게 되면 그 죄의 고백을 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는데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징벌적인 명령을 내린다. 그것이 헌금이든, 금식기도든 혹은 고행이든 무엇이든 간에 교회가 부과하는 소위 말하는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죄의 용서가 주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고해성사와 관계가 있다.

어거스틴은 견인의 교리를 가르치면서-구원의 확신은 견인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견인을 어거스틴이 가르칠 때 무엇이라고 했냐면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 초기와 후기는 중기와는 다르다. 그의 사상이 절정에 이른 중기 시대에는 견인을 인정하였다. 견인의 교리를 발전시킬 때는 어디에서 근거를 찾았느냐면 예정의 교리에서 가져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세전 예정하시는 무궁하신 사랑 위에서 성도는 구원받는 날까지 구원받는 믿음을 간직하게 된다고 자기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데 후기에 접어들면서 무슨 말을 하면, 어거스틴이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견인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입장을 후기에 보였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견인의 교리의 부정이다. 견인이란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까지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실 때에는 구원이라는 결과만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게 하시되 그 사이 과정은 역사적 우연에 맡겨 놓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예정행위는 목적도 결과도 과정도 구체적으로 예정하셔서 그것을 역사의 우연에 맡겨 놓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과정에 따라 진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영광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그 전체 일생은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된다는 것이 예정론의 중요한 원리이다. 그러니까 예정을 믿는 신자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여곡절을 입고, 천신만고를 당하고 정말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한다.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신자들은 그것을 우연의 바다에 던져진 운명의 슬픔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우리 개인의 기대에는 벗어나는 사고이기도 하고 사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한대로 되는 것이다. 그런 확신 안에서 자신의 삶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정말 여러분들이 긍정적 사고를 말하려면 예정론을 믿어야 한다. 인생의 낙관적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나중에 후기에 가서 뭐라고 하냐면, 신자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해서 끝났다면 어거스틴의 명예에 누가 될 뻔했다. 그런데 뭐라고 했느냐,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들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였다.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가 어떻게 회복 하냐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가 회복된다고 말하면서 성찬에 막강한 권능을 부여하였다. 그러니까 성찬에 참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됨으로써 성찬은 어떻게 되는가? 한마디로 은혜의 주입이라는 기계적인 은혜의 주입이 이루어지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중세 로마교회가 성찬에 구원론적인 의미를 성경이 의도한 것 보다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에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공헌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제도, 고해성사 같은 로마교회의 시스템의 일정한 공로자가 누구냐? 사실 어거스틴이다. 지금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이 사람들에게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통로가 성찬이라고 보는 것이다. 미사의 중심이 성찬이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예배에 언제나 성찬을 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은혜의 수단이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라는 로마교회의 교리적인 시스템은 궁극적인 확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하고, 그리고는 은혜의 회복을 위해서는 성찬에 참여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회복하고 용서를 받는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시스템이다.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해야 하고, 고해성사하면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이다. 상찬을 하게 되면 무엇이 일어나느냐? 은혜의 주입이 일어난다.
 
여러분, 은혜의 주입의 강조점은 개인의 어떠한 믿음의 여부보다 무엇이 중요하냐면, 교회의 권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교회가 성찬을 집행하면 집행하는 그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믿음이 아니고 교회의 권위라는 것이다. 교회가 시혜(은혜를 베품)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과연 확신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해야 되고 성찬을 통해 회복하기는 하지만 사람에게는 중생한 이후에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죄가 끊임없이 활동한다.
 
그래서 문제는 이러한 고해성사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한계가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저런 시스템에서 용서는 어떤 것이냐면, 용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행에 상응하는 조건적 은혜이다. 용서란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선행이 있어야 한다. 그 선행이 무엇이냐면 기도, 참회, 고행, 헌신 등을 통해서 용서를 받을 만한 선행을 먼저 해야 한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문에 잘 나온다. 로마 카톨릭의 기도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참회에 합당한 열매로서 나의 죄에 대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기도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로 인해서,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 그것이 뭐냐 하면 고통을 겪는다든지, 십자가를 진다든지 혹은 어떤 징벌을 받는다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뭐라고 하냐면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열매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변상을 해야 하는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로 내 지은 죄값을 충분히 치룰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 그런데 이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 그것은 고해성사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돕는 은혜이다.
 
그리고 뭐라고 하냐면 “나는 기꺼이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그것이 고통이든, 십자가든, 환난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사오니 그것을 통하여 내 남은 날을 지나게 하여 주옵소서. 철저하게 죄값을 치룰 각오를 해야 한다. 용서 받으려면. 그것이 사는 것이든 죽는 것이든 나의 죄책에 대한 형벌로서 기꺼이 받아들인 준비가 되었나이다. 간절히 구하옵나니.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에 내가 연합하게 하사 그것에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난에, 십자가에 합한다는 것은 죄값을 치루기 위한 고통을 감내하는 기꺼이 감내하는 일체의 과정을 그와 같이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무엇이 주어지느냐, 마침내 용서가 선포되는 것이다. 이 때 용서는 전적 은혜가 아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전적 은혜가 아니다. 이 은혜는 한마디로 하면 그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선행에 상응하는 조건적 은혜이다. 좋은 예로 미션이란 영화가 있다. 완전히 카톨릭적인 관점이 반영된 영화이다. 형과 동생이 여자 하나를 두고 형이 동생을 죽인다.
 
그리고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폐인처럼 방안에 갇혀 있는 그 남자가 신부의 권면에 따라 어느 날 자신의 등에 노예생활을 하다가 썼던 갑옷이며 투구를 그물에 싸서 벼랑 위를 기어 올라간다. 그것이 바로 고해성사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그것을 지나고 마침내 용서가 선포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기준에 합할 때 마침내 용서는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서는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면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정말 나의 죄값을 지불하고자 했던 일체의 과정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했는지는 모른다. 그것을 모르겠는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중세 시대에 로마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고해성사 때문이다. 고해성사의 과정이 단순하게 내가 이런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신부가 건너편 방에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 그러면 죄를 다 용서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거기에 합당한 선행을 하도록 요구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도달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절벽을 올라가면서 빙벽 타는 마음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동기는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겉으로 볼 때에 처절하게 용서를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마음 중심에는 그 죄를 뉘우치는,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정말 절절하게 있는지, 아니면 과거에 등산하던 마음으로 스릴 있다고 생각하고,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위해서 하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그 동기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 동기가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그 과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온전한 용서의 선포는 유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해성사 시스템 안에서는 사죄의 확신(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의 의로는 절대로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히브리서에서도 가르친다.

여러분, 예술가들이 겪는 가장 고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 굽는 가마에 가면 가마 옆에 도자기 무덤이 있다. 도자기를 망치로 그렇게 좋은 것을 깬다. 망치로 탁 옆구리를 깬다. 계속 깬다. 예술가가 겪는 가장 큰 고뇌는 자기 작품에 대한 불만이다. 그 작품에 대한 불만이, 예술의 경지에 오를수록 줄어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적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오점이나 결점을 보는 눈은 더 날카로워지고 기대치는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늘 좌절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약 자신의 선행으로 이런 죄용서를 받고자 한다면 좌절감은 훨씬 더 커진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교회가 죄 용서를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로마교회도 사실 그것을 인정한다.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의심과 의혹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교회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 묻지도 않고 묻는 그 자체가 사탄적이고 정죄받을 짓이다. 지옥에 떨어질 짓이다.

결과적으로 중세시대에는 확신에 대해 언급할지라도 어떤 오류없는 확신에 이른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아까 말했듯 어떤 특별계시-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주고 너는 천국에 들어올 자다라는 것-을 주시지 않는 한 구원의 확신을 논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그와 같은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믿음, 종교개혁자들은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떠한 것도 진리의 기준의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교회도 아니고, 교회의 수단인 교황도 진리의 준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만약 진리를 논하는 유일한 기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계시, 성경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경에 대한 믿음 때문에, 소위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에 의한 중재 역할을 부정하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면 전부 다 고해성사, 성찬. 그중에서도 고해성사를 부정하게 되었다. Father가 중재자, 중보자인데 그래서 기도할 때도 고해성사하는 사람이 중재자에게 고백하면 중보자가 아버지께 그들의 죄를 사해주기를 구한다. 그래서 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교회란 무엇이냐면 조직으로서의 교회이다. 특별히 조직의 핵심은 성직자단이다. 성직주의가 교회의 핵심이다. 결국에는 이런 성직주의를 버리게 된다. 부정하게 된다. 칼빈이나 루터, 쯔빙글리, 부처 등등의 종교개혁 1세대들은 구원의 확신을 무엇이라고 봤냐면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규범적인, 본질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꼭 기억해야 한다. 시험에 나온다. 이것에 대한 어떤 학자들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The Saving faith(구원하는 믿음), 이것은 assurance와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하는 믿음을 누군가 가지고 있다면 동시에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구원받는 믿음은 곧 구원의 확신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을 가르쳤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아까 칼빈주의자 안에서 많다고 하였다. 그 논쟁도 일단 여기에서 다 동의한다.
 
그러니까 루터든, 칼빈이든 종교개혁 1세대에서는 구원하는 믿음이 구원의 확신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무슨 말이냐면 구원받는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동시적이고, 그런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규범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라고 본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을 갖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결정적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런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중생한 신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굳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강아지가 되고 코끼리가 새끼를 낳으면 코끼리 새끼가 되고,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사람이 된다. 그것은 결정적이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는 순간에 구원의 확신은 자동적으로, 동시적으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입장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된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 믿음에 대한 이해, 루터나 칼빈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이해와 교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달랐다.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그런 종교개혁자들의 칭의의 이해를 우리는 이신칭의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 잘 보시라. 이신칭의라는 것은 사실,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달라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 이신칭의가 justificatio by Faith. 이때 믿음은 수단의 원리. 그러니까 칭의는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받아야 한다. 무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칭의이다. 그런 죄용서, 의로움의 상태에까지 나아가는 일체의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느냐?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이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그들의 이해가 로마 카톨릭과는 확연히 달랐다. 믿음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고, 고해성사하는 것 필요 없는 것이다. 성찬 필요 없고, 의롭게 되는 일의 수단으로서 성찬이나 고해성사를 말하지 않았다. 왜냐, 성경에 보아도 고해성사나 성찬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롭게 한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할례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고 그 어느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유일한, 그래서 by faith only, ‘오직’이라는 말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으로 이렇게 말할 때 액센트는 어디 있느냐, 사실은 그들의 의식 속에는 무엇이 있냐면 로마 카톨릭의 고해성사도 아니고, 공로주의도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이 말이 only 안에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다 배제하는 말이다. 굉장히 부정적은 접근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받는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믿음에 대한 정의와 교리는 로마 카톨릭 그것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동시에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종교개혁자들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해성사에 근거한 죄용서를 가르친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근본적으로 다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가 나중에 교회론으로까지 번진다. 그러니까 칭의를 다룰 때 로마 카톨릭은 제일 먼저 무엇을 다루고 싶었느냐?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 싶었다.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다루고자 하였다. 순서가 다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지를 먼저 다루고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자 하였다.
 
그러니까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 사람들이 교회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 지를 먼저 대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반대였다. 교회가 규범적인 것이고, 칭의론은 그에 따른 결과로 보았다. 어쨌든 이런 이신칭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믿음에 대한 새로운 성경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극한의 논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 이렇게 초기의 종교개혁자들, 특별히 칼빈은 구원의 확신을 어디에 기초했느냐면, 그리스도 위에, 그리스도 공로 위에 놓았다. 이 믿음은 누구를 향한 믿음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어떤 서술적 형용사가 붙지 않은 개인 신념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성경적 용어가 믿음이다. 어쨌든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을 성경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다가 무엇을 두었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므로 구원의 확신을 그리스도 위에 두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면 누구든지 구원의 확신은 마땅히 가진다고 보았다. 가지려고 노력할 것도 없고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은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고 믿을 때 주어지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아! 나는 이제 구원 받았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다. 천국의 영광이 내 것이다. 나는 이제 이리 가나 저리 가나 하나님 나라 간다. 아무리 고난당해도 마침내 하나님 영광의 나라에 이른다.” 그런 확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후 시대, 탈 종교개혁시대에 접어들면서-그러니까 종교개혁 1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종교개혁 후 시대에 접어들면서 구원의 확신은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 구원의 확신이 무엇과 같이 논의되기 시작하냐면, 중요하다, 논쟁점의 핵심이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 구원의 확신이 성화와 관련되어 논의되기 시작한다. 무슨 말이냐면 순종, 헌신, 도덕적인 개선은 점진적 성화. 성화에는 확정적 성화가 있고 점진적 성화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될 때 그들은 이미 거룩하게 된다. 확정적이다. 그러나 확정적 성화 이후에 점진적인, 윤리적인 변화, 개선으로서 점진적 성화가 있다. 그러니까 점진적 성화와 함께 구원의 확신을 같이 다루기 시작하였다. 후대에 들어서.

그것이 무슨 변화냐고 말할 사람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변화이다. 칼빈은 믿음과 확신이 동시적이라고 가르쳤다. 나중에 가면 성화하고 확신 이렇게 되면서 성화하고 확신을 다루어지면 무드는 확실히 달라진다. 아까는 결정적으로 주어진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실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몸부림쳐야 한다. 잠자고 놀고, 기도 안하면 구원의 확신은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또 이 상태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확고부동하게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왔다 갔다고 할 수 있다고 잔 오웬이 나중에 주장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구원의 확신도 그 사람의 성화의 정도에 따라 그 수준과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성화와 확신 쪽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산기도 가야겠구나, 잘먹고 편안했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나를 스스로 채찍질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교회 안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주식시세만 보고 집 값 올라갔는지 본다. 슬픈 일이다. 한국교회에 여기에 고민이 없다. 과거에는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성화가 있느냐고 고민했는데 한국교회가 잠든 지 오래 되어서 그런 것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점진적 성화를 위해서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죄를 끊어 버리기 위해서 기도원에 올라오는지 살펴보면 놀랄 것이다. 하나같이 기도제목이 실용적이다. 굉장히 실천적인 동기가 기도의 동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앙의 순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관심사보다 현세적인 관심사가 너무 지배적이라고 말해도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어쨌든 성화가 확신과 결부되면서 매우 실천적인 내용이 확신과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확신을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확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겠는지, 어떻게 하면 잃었던 확신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지, 우리는 매우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장르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다루게 되었다. 종교개혁 후 시대에는.

따라서 후대에 가면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불가피한 요소로 인식되기보다는 신자 각자의 성숙에 따른 개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해하는가? 이렇게 변화되었다.

자! 이런 변화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서도 그대로 감지된다. 1647년에 작성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두 가지를 확실히 나누고 있다. 거기에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믿음 다루고, 믿음 다룰 때 확신을 같이 안 다루고 확신을 따로 다룬다. 분리했다. 후대의 발전적 경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초기 칼빈의 사상보다는 칼빈의 후예들의 사상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일체성을 강조했다. 믿음과 확신의 일체성을 강조했는데 후대에는 개별적인 것으로 따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소위 말하면 칼빈의 원래적 사상보다는 후대의 발전된 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실제로 신앙고백서를 보면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장을 각각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비연속적인 관계 안에서 다룬다. 둘이 마치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따로 다른 장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다룰 때 성화를 토대로 다루는 것이 칼빈 신학에서 허용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칼빈 신학에 없던 것을 후대가 새롭게 고안한 것인지? 문제가 되고 있다.
 
만약 칼빈이 살아있다면 이런 식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접근을 두고 동의하겠는지? 반대할 것인지? 그것을 두고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양분되어 다투고 있다. 그래서 이런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면 벨카우어, 칼 바르트 이런 사람들은 그런 발전을 칼빈 신학에서 암시되고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계승해 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후대의 변화에 대해서 칼빈의 신학을 제대로 계승했다고 보는 사상을 가장 최초로 표명했던 사람이 하나 있다. 가장 먼저 들고 나온 사람이 윌리엄 커닝햄이다. 로버트 댐리, 찰스 하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후대의 발전은 칼빈의 사상의 계승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것을 칼빈의 신학사상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칼빈의 신학사상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것은 칼빈이 승인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적인 개조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로버트 켄달(R. Kendall), 윌리엄 리즐이다. 그래서 지금도 칼빈주의 안에서 지금도 논쟁중이다. 최근에는 누가 다수냐. 이게 다수다.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개별적인 분리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쉽게 말하자면 믿는다고 꼭 구원의 확신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입장이 칼빈이 가르쳤던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칼빈주의의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칼빈주의의 사상의 이탈이라고 보는 입장이 일반적인 학계의 주류이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 학문적 경향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발전이라 보지 않고 개조라고 보는 사람들이 주류이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칼빈의 사상과 달라진 것으로 본다. 그런 사람들이 학계를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논쟁 안에 뛰어 들면, 만약에 이런 논쟁 안에 뛰어들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원래 논쟁을 통하면 사상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의 성경적인 이해를 제시할 생각이다. 일단 이런 큰 그림을 이해하고 수업에 들어오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란다.

자! 그렇다면 이런 논쟁이 왜 벌어졌는가? 근데 이런 논쟁이 벌어지게 된 사실, 어떤 단초는 칼빈신학 안에 내재되어있다. 가만 보면, 칼빈신학이 그만한 여지를, 이런 식의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도록 어느 정도 여지를 준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칼빈신학을 보면, 왜냐하면 칼빈은 두 가지 사실을 다 가르쳤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의 수동성을 가르쳤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 주어지는 믿음 안에 구원의 확신도 같이 필연적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끝나면 좋은데 칼빈은 동시에 무엇을 가르쳤느냐? 어떤 사실로부터 정당하게 유추된 지식으로서의 믿음의 능동성도 가르쳤다. 어떤 사실로부터 즉 어떤 A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사실 하나를 유추, 지극히 정당한 지식의 유추라고 한다면 유추된 지식도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해하는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

이방 여인이 자신 아들이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는가? 구할 때 내가 이방인을 위해 보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냄을 받았다라고 할 때 그 여자가 뭐라고 했는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얻어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었다. 그것이 사실이란 말이다. 근데 그 사실로부터 정당한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누구든지 나가서 주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예도 있다. 상에 들림 받아 가지고 내려온 중풍병자가 나음 받았다. 그런데 그때 낫게 하실 때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낫게 하신 것이 아니고, 침상을 지붕을 뜯어서까지 내렸던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것을 잘 안다. 우린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비록 어떤 이유든 그가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그의 친구나 그의 부모나 형제의 믿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성경적인 하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교리로 굳히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꼭 주의하셔야 된다. 교리화하는 것과 정당한 유추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침상에서 내려온 중풍병자의 나음을 근거로 해서 본인이 믿지 않아도 부모나 형제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을 교리화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나 정당한 유추는 가능하다.
 
예를 들면 불가피한 상황 즉 어린아이, 자녀들, 아직 자녀들은 스스로 믿거나 결단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럴 때 부모님 믿음에 의탁하고 유아세례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게 하는 이것은 성경적 근거가 있고 지지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믿을 수 있는데도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탁해 구원 받는 것조차도 거기 다 포함시켜 교리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쨌든 이런 어떤 하나의 사실로부터 정당한 유추를 함으로써 그 유추를 지식의 내용물로 가지데 되는 것. 그것도 믿음이라고 칼빈이 말함으로써 믿음의 능동성을 이야기 하였다.

좀 더 쉽게 실천적 삼단논법을 보면,
1. 어떤 사람이 X를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2. 하나님의 은혜로 X를 행하였다.
3. 그러므로 나는 구원에 이른다.

이것이 실천적인 삼단논법이다. 이런 식의 접근을 칼빈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신학 안에 이런 요소가 있다. 단순하게 예를 들면 위의 첫 번째 요소만 믿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그것으로부터 유추된 어떤 사실들을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식의, 소위 말하면 믿음의 능동성, 단순하게 믿음을 지식으로 생각하고, 칼빈이 제일 먼저 강조했던 믿음의 요소가 무엇인가하면 지식이었다.
 
그 지식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내가 받음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받는다고 수동성도 강조했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그 순종을 통해 내가 성화되어가고 성화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 적도 있다. 그런데 그 행함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함으로써 일종의 신인협동설을 닮은 듯이 보이지만 아직 믿음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었다.

칼빈의 신학 안에, 그러니까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믿음의 능동성을 더욱 더 체계화하고 그것을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찰스 하지 같은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켄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발전은 칼빈이 모르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 한마디로 말한다면 칼빈은 믿음의 능동성은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할 때 구약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규명하려고 하는 믿음과 확신 사이의 관계를 구약에 있는 내용만 가지고는 제대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면 그의 믿음이 여호와와 그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할 때 그의 믿음 안에 확신이 있었냐고 물으면 확신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이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확신이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닌데 그의 믿음을 보면 확신이 있었다고 추정할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다.

또 구약성경의 시편을 보면 시편의 저자들이 비록 불안이나 회의를 품고 있기는 해도 아브라함과 유사한 어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피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침내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 22편, 40편, 130편을 보라. 거기에 보면 처음에 굉장히 불안해한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언제까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이렇게 회의로 시작한다. 시편의 1/3이 회의이다. 낙심, 좌절, 이런 슬픔이다. 그러나 언제나 공통점은 끝날 때는 언제나 확신으로 끝낸다.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찬양하리이다. 이런 확신들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만해도 다르다. 신약성경에는 좀 더 명시적으로 딱 말한다. ‘믿음이 곧 확신이다’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히 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 이것이 본문이 의도한 신학적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왜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사실 실상이라는 말이 문자적인 번역이긴 한데 그것이 정확하게 정곡을 못 찌르는 것이다. ?π?στασι?(휘포스타시스), ‘실상’이란 원래에 영어성경에 보면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실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했냐면 영어<NASV>는 ‘assurance’라고 이렇게 번역했다.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했는데 왜 ‘실상이다’라는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이 ‘assurance’의 헬라어가 ‘?π?στασι?’, ‘?π?’는 ‘under', ‘아래’라는 말이고 'στασι?'는 'to stand' '서다'라는 말이다. '무엇 무엇 아래 서다'라는 말이다.

이 ‘?π?στασι?’의 일반적인 고대 헬라어에서의 용법이 무엇인가 하면 ‘권리증서’, ‘보증서’ 혹은 ‘매매계약서’이다. 어쨌든 일단 겉으로 봐도 분명히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믿음은 확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하는데 이 ‘증거’가 영어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the conviction’ ‘확신’, ‘of things not seen’,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한다. 어째든 확정성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확신이고 그건 확정이다. 그럼, 믿음이 무엇이냐? 확신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칼빈은 믿음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본 것은 이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믿음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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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2)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반드시 복음의 진리를 먼저 아는 것이 선행돼야
 
박혜근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양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주의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오늘 이 시간도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배움의 장으로 이끌어 주시니 주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소원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우리 신앙의 책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죄를 경계하며,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하시고, 죄와 싸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나의 신앙과 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훌륭히 쓰임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자리에 있는 주의 종들이 한국 교회의 미래가 되게 하시고, 한국교회의 부흥을 일으키는 역군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형제들의 각 가정마다 평안을 주시고, 그들의 몸에 건강을 주시고, 그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학문하는 주의 종들에게 함께 하시고 학자의 영을 더하시고, 지성을 조명해 주시고 그것을 능숙하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1. 칼빈의 믿음 이해

지난주에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개괄을 하였다. 오늘은 칼빈의 믿음에 대한 이해를 하겠다. 지난주에 확신에 대한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첫째는 칼빈과 칼빈의 후예들, 말하자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확신에 관한 한 통일성과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확신의 문제를 다룰 때 대표적인 인물, 칼빈이 믿음에 대해 가르치고 난 뒤 세상을 떠났는데 능동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을 강조한 그것,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믿음의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능동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는 과연 어떤 것인지, 조금 있다가 소개하는데 칼빈이 믿음의 정의를 할 때 수동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 가면 칼빈주의자들이 이것을 조금 더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것으로 가르치게 되는데 이런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에서의 믿음의 이해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믿음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냐, 아니면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냐를 두고 신학적인 입장이 갈렸다는 것이 지난주에 설명한 핵심이다. 그래서 이것을 단지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이런 믿음에 대한 수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다가 그것이 나중에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흘러가는 것은 결국 칼빈의 전통적인 신앙에서부터 벗어난 탈선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찰스 하지, 커닝햄, 로버트 댐리와 같은 사람들은 이것이 강조점이 차이라고 본다. 그런데 리젤이나 캔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차이는 실제로는 칼빈신학에서부터 이탈한, 말하자면 신학적인 변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사실 칼빈의 신학을 대변하기보다는 칼빈의 신학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드러낸다고 봐야 한다.
 
이런 흐름 본질적인 차이를 대변한다고 보는 입장이 최근 학계에 일반적인 흐름이다. 다수이다.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는 것은 고전적이고 보면 된다. 자,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럼 칼빈이 믿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관건이다. 칼빈의 믿음의 이해를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1. 믿음의 세 가지 속성

칼빈은 원칙적으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루터나 쯔빙글리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칼빈, 루터, 쯔빙글리 이 세 사람은 믿음을 정의할 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Assensus(동의)이다. 그러니까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이 무엇이라고 하냐면 믿음의 본질은 동의라고 보는 것이다. 구원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동의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조금 있다가 설명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칼빈이나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의 본질을 동의라고 받아들이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에 두 가지를 더 강조하였다. 무엇이냐면, Cognitio(지식, 앎)을 강조하고, 또 Fiducia(신뢰)를 더 강조하였다. 이것이 지금 칼빈이 루터나 쯔빙글리와 믿음에 대해서 어떤 점에서 입장을 같이 하고 어떤 점에서는 입장을 달리했다고 할 때 달리한 점의 핵심은 지식과 신뢰를 믿음의 본질로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믿음을 강조할 때 이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지식, 동의, 신뢰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믿음을 세 가지 속성으로 강조한 것은 전적으로 칼빈주의적 전통 안에서만 발견된다. 루터주의에서는 한마디로 믿음을 동의라고 본다.

자, 여기에서 그러면 동의가 무엇이냐, 동의라고 하는 것은 구약적 의미에서는 ‘아멘’에 해당한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진심에서 우러난 찬동을 말한다. 따라서 동의란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동의로서 개인적인 확신을 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칼빈이 동의를 다룰 때 확신이라는 요소가 있다.

벌코프는 동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참조할 필요가 있다. 동의를 매우 정서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지적인 요소가 아니고 정서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는 단순하게 감정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직관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단순하게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한 동의라기보다는 정말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끌림을 내포하는 요소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벌코프는 동의란 진리와 자신이 믿는 대상이 자신의 삶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것과 그것에 관한 깊은 관심과 더불어 흥미에 이끌리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서적인 요소도 설명했는데 동의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것과 그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대한 관심, 흥미에 자신이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다.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고 할 때 필요는 무엇이냐, 인간의 가장 큰 필요는 구원이다.
 
구원, 죄사함, 구속이다. 욥이 고난 받을 때 가장 간절히 바란 것은 나의 구속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의 구원의 필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채어질 것이라는 그것, 아 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강력한 확신, 또 그것에 자신이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동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주관적이다. 이 동의는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정말 구원이 필요하구나, 나에게는 양심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구원에 대한 필요를 먼저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을 채울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거기에 끌려 들어가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동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의는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관적인 반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약을 보약이라고 소개받아도 약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과 효능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약을 손에 쥐고 있어도 이 약을 먹어서 효과를 볼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이 없으면 그 약은 별로 유발하지 못한다. 그런데 동의는 어떤 것이냐면, 그 약의 효능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 약이 내가 당면하고 있는 건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확신하고 그 약을 내 손에 넣고자 하는 강력한 동인이 발생해야 한다. 그 약에 대한 객관적인 인증서보다 인증서와는 매우 다른 주관적인 문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관적인 이끌림, 주관적인 확신의 상태, 그런 것을 동의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을 이해할 때 이런 동의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는 사실을 그 마음으로 주관적인 실존적인 상황 안에서 수용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믿음이란 단순하게 그런 동의만이 아니라 지식과 신뢰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동의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21문을 참조하라. 잘 설명하고 있다. “믿음이란 성령이 내 마음 속에서 믿음으로 역사하신 까닭에 주어진 죄 용서, 영원한 의로움 그리고 구원이 그리스도 공로 덕택에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확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동의를 말할 때 언제나 나의 필요와 마땅한 관계가 있다.
 
내게 주어질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있는데, 거기에도 무엇이라고 하냐면 개인적인 필요를 전제하고 있는 속성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동의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된다. 칼빈은 믿음을 설명하면서 믿음의 속성을 세분화하였고 세분화하면서도 강조점을 달리 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칼빈신학에서는 매우 연속적인 성격에 따른 결과이다.

그 다음에 지식과 신뢰를 말하였는데, 우리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지식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신뢰는 무엇이냐, 신뢰는 지식과는 조금 다르게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자기 확신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는 제임스 보이스 같은 경우에 무엇이라고 설명했냐면, 이것을 제자도와 관련지었다. 일반적으로 신뢰는 어떤 개념이냐면, 향유이다. 실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 은택을 실제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구원론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게 비유니까 비유의 한계가 있다. 그대로 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된다. 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리가 몹시 아픈데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이것이 지식이다.
 
그 다음에 그 의자가 내가 앉았을 때에 튼튼하고 나의 피곤한 몸을 얼마든지 떠받들어 주면서 안락함을 줄 것이라는 의자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심각한 오물이 있으면 앉을 수 없다. 그러면 못쓰게 된다. 어쨌든 그 의자가 내가 앉기에 딱 맞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신뢰는 무엇이냐면, 실제로 거기에 주저앉는 것이다. 앉아가지고 그 의자의 유익을 누리는 것이다. 향유이다.

그러니까 칼빈은 근본적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누가 구원자인지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구원을 받을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다. “전하는 자가 없는데 누가 들으리요 듣지 못하는데 어찌 구원받으리요”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지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마당에는 구원의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이다. 전도가 없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강단에 서서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는 시간부터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고, 그가 말씀을 마치고 강단을 내려올 동안에는 구원의 역사가 휴지, 정지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씀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다시 구원의 역사가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구원의 역사를 열고 닫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천국열쇠를 주노니 네가 열면 열 것이고 닫으면 닫혀서 누구라도 다시 열지 못한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사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면, 증거하는 그곳에 구원의 문이 열리고, 그들이 말씀의 문을 닫고 떠나면 구원은 그 문을 영원히 닫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식은 무엇이냐면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이다. 가르치는 자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기를 의도하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증거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물으면 원칙적으로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보편적인 방법은 언제나 말씀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그가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느냐?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정하신 일반적이고 그가 기뻐하시는 보편적인 원리는 말씀을 가르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지식이다. 둘째는 아까 소개했던 것처럼 동의이다. 그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 말씀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사실 복음을 증거할 때, 신약성경에서 이 복음이라고 나오면, 복음, 은혜,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적으로 동의어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복음이나 은혜나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적으로 같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가 살아계시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라고 하는데 살아 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살아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경에 보면 ‘예’와 ‘아멘’이 된다고 하였다.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약속은 그 안에서 다 성취된다. 그를 떠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없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이 복음의 전체이자 그 복음은 본질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복음을 듣는 죄인들이 복음을 듣는 순간에 성령의 내적인 사역으로 인해서 무엇을 듣느냐면 부르심을 듣는다. Calling. 부르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 복음 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지 알고-이것이 동의이다. 아! 정말 저 복음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준비하신 은혜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을 힘껏 붙잡는다. 붙잡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그래서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고 복음이 증거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열매 맺는 것은 아니다. 복음이 증거되면 반드시 복음과 함께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역사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은 예배할 때 설교자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으로는 듣는 이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한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들을 때 성령이 그 여인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이 증거될 때 누구에게 집중적으로 역사하느냐면 듣는 사람에게 역사하고 부르심을 주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 복음을 증거하는 일, 설교하는 일을 구약적인 선지자가 엑시터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경험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설교는 무엇이 핵심이냐면 설교는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는 성령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령의 부르심이 말씀을 증거되는 곳에 함께 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그리고는 그 말씀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도한 열매를 맺는다. 복음의 수용이 일어난다. 중생하고 그리고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의롭게 된다. 한 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의 열매를 받아 누리는 것이다. 신뢰.

그래서 칼빈은 동의만이 아니고 제일 먼저 지식을 강조하였고, 그리고는 신뢰도 믿음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단순한 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지식과 신뢰를 강조하였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칼빈에게 지식이란 언제나 믿음의 기초이다. 지식은 언제나 믿음의 기초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믿음이 절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은 무엇이라고 예를 들었냐면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뿌리를 내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부드러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돌 위에 떨어진 반반한 것, 바위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칼빈은 뭐라고 설명했나면 무지 위에서는 절대로 뿌리 내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씨와 같다고 하였다. 무지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믿음은 말씀의 지식을 통해 주어지고 그 지식 위에 세워진다’고 하였다. 칼빈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칼빈이 신학만 한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제네바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자신이 교인들을 양육하고 상담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목회자였다. 자신의 경험도 반영된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해 본 것이다. 교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 점점 성장하는 전체 과정은 결국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비례한다는 경험하였다. 저 역시도 경험했다.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육이다. 프로그램이 아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목회에 대한 관념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무슨 프로그램이면 되는 줄 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칼빈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개혁주의자라면 그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믿음은 말씀의 지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교인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목사님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 외에 다른 프로그램이 말씀의 가르침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여기에 확고부동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이다.
 
성령충만이 뭐냐, 바른 방향이다. 성령충만이 컵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있는 상태가 성령충만이다.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가야 배가 빨리 가는 것이다. 바람의 방향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목회에도 바른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 방향만 옳으면 실천이 서툴러서 당장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혹은 결과를 보는 일이 조금 늦어도 방향이 옳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본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결국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바른 방향이 무엇이냐, 목사의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라는 확고부동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젊은 신학도들이 말씀을 강조하면 언제나 의구심을 품고 내 말을 듣는다. 그것만 가지고 될 것인가 의구심이 있다.
 
그러나 된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부흥도 있고 성장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안 해보면 확신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어렵고 수고로운 것이다. 미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다. 앞으로 목회를 잘하려거든 절대로 딴 데 한 눈 팔 것 없다. 평생 연구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에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나의 일생을 온전히 바치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은 바른 방향이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강론할 때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먼저이다. 전제 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먼저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 그들에게 상 주신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참된 믿음이란 무엇이냐, 참된 믿음은 실존적 결단이 아니다. 실존적 결단은 자신의 신념, 혹은 덕목으로서의 믿음이다. 우리가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믿음을 말할 때 대개 이쪽에 가깝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하는 믿음,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개인의 신념이 아니다. 키에르케골은 ‘믿음의 도약’에 대해 말했다. 믿음의 도약은 지식이나 어떤 사실에 대한 확신 혹은 증거 없는 믿음을 말한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믿음을 말한다. 개인의 신념일 뿐이다. 그것이 실존적인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반드시 복음의 진리를 먼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고전 15:3-6에서 바울은 이 점을 반드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와 전도의 핵심이 뭐냐, 복음의 교육이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할 때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복음의 교육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결국에는 믿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병원 짓고 빵 나눠주고 치료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선교의 마지막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무슨 선교인가, NGO이지. 요즈음 영화나 TV에서 많이 나오지 않는가.
 
외국에 선교사로 가서 희생했던 사람들을 보여주고 눈물 질질 짜는 것,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잘 보아야 한다. 복음을 가르치는 행위가 아니고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선교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사람들을 폄하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은 반드시 복음을 가르치는 목표의식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선교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믿음을 말할 때 반드시 Cognitio(지식, 앎)을 말해야 한다.

자,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와 분가분리의 관계를 가진다. 이제부터는 잘 들어야 한다. 칼빈의 논리이다.

자, 믿음은 언제나 지식 위에 세워진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믿음과 지식은 언제나 불가분리의 관계 안에 있다. 그렇죠? 지식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며. 그러면 믿음과 지식은 분가분리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 저기에 있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지금 칼빈의 신학의 논리이다.
 
어떤 논리인가 하면 왜 사람이 바로 믿기만 하면, 바로 믿음만 가지면 필연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칼빈의 논리가 믿음의 교리 안에 나타난다. 칼빈은 이렇게 가르쳤다. 칼빈은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보면서 확신을 구원의 필연적인 귀결로 본다. 믿음의 속성은 세 가지라고 하였다. 지식, 동의, 신뢰.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낳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인 결과가 무엇이냐, 바로 확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이 믿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확신에 이르냐고 할 때 칼빈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 주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금 생각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논리에 약하다. 우리 민족은 선천적으로 직관적인 기질, 도가 통하면 되는 민족이다. 그래서 한 단계씩 생각하는 것이 잘 안 된다. 조금 낯설지 모른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1.1.1. 믿음과 지식은 언제나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다.

지식 없는 믿음 없고,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은 분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 말씀의 전체이자 본질은 살아계시는 말씀인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은 그 다음에 언제나 그리스도와 관계하고 그를 붙잡는 것이다.

1.1.2.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과 관계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약속이 ‘예’와 ‘아멘’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믿음이 지식과 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믿음은 곧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러므로 성경 66권 전체를 하나로 압축하면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결국 믿음과 지식의 분가분리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은 곧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잡는 것이다. 결국 복음의 진리를 통해 사람들이 어디로 가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복음으로 옷입은 그리스도를 맞는 것이다.

1.1.3. 따라서 믿음은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믿음은 언제나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것 매우 중요하다. 현대신학 공부할 때 현대신학자들이 믿음을 재해석한다. 그것을 비판할 때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개혁파 신학에서는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믿음 없다. 믿음이란 막연한 어떤 것에 대한 확신, 신념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닌 이유는 무엇이냐,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는지, 기독론적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 관계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음이란 개인의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하는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 개인의 덕일 뿐이다.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무엇을 위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신 은혜로운 선물이 무엇이냐? 구원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하는 믿음을 받았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단순한 신념도 아니고, 긍정적인 사고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없다. 여기까지 이해되는가? 꼭 이것 세 가지를 이해해야 된다.

그리스도를 기반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믿음,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원하는 믿음, 이 말 이해되는가? 칼빈은 이 말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구원하는 믿음 그것은 전체 기독교 신앙이 세워지는 근본적 토대라고 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이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전체 개혁주의 신학의 일종의 기초, 믿음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아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유일한 통로는 믿음이다.
 
그런데 그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일뿐이다. 구원이라고 하면 무엇을 포함하는가? 하나님의 예정, 부르심,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성화, 영화, 양자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 전부 다 구원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원하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 전체가 다 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을 때로는 복음의 진리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 이 믿음이 구원을 말하기도 한다. ‘저가 믿음의 도를 저버렸도다’라고 말하면 구원을 저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복음의 진리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저 믿음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어떤 기독교 신앙이라도 있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란 오로지 믿음 위에 서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서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권위에 서는 것도 아니다. 이것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를 반대하고 나온 것이다.

자, 그러므로 확신을 포함해서 구원의 서정에 속하는 그 무엇이든지 믿음 없이 혹은 믿음의 적극적인 사용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믿음의 은혜를 받는다. 굉장히 역설적이다. 믿음의 시동도 성령이고, 믿음을 통한 정말 큰 믿음의 수용도 성령의 은혜이다. 그래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
 
로마서 10:10을 이것을 간단하게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입으로 시인하여 부르심 받고 회개하고 의롭게 되고 성화되고 확신에 이르게 되고 영화되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하는 것임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변하는 보증을 확보하게 되고, 그 결과 믿음은 필연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칼빈의 논리이다.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설명하자.

기독교 신앙 전체는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된다. 믿음 위에 신앙이 선다. 믿음 없이 어떠한 구원도 없다. 반드시 구원에 이르려면 언제나 믿음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아까 무엇이라고 했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멘 아까 무엇이라고 했는가? 동의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에 대해 아멘이라고 하는 것임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 말씀이 결국 확실하지 않는가. 여러분, 아멘은 무엇인가? 참되다. 예,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고 참되고 또 그 말씀을 내가 의심 없이 아멘이라고 하기 때문에 확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으면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칼빈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내려가고 있다는 흐름을 정리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 신앙과 구원은 언제나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또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는 것을 성령이 내 마음에서 확정해 주신다. 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확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논리이다. 상당히 분석적이다. 루터의 신학에는 이런 특징이 없다. 칼빈은 아주 정말 세분해서 분석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칼빈은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확신이 믿음의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확신을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믿음과 확신을 한 짝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는 확신을 얻게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확신에 이르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어떠한 공로이든지간에 그것 위에 자신의 약속을 두기를 원치 않으셨다. 인간의 공로 위에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세우고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로는 불완전하고 그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무익함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조건으로 삼거나 기반으로 삼아 약속하지 않으신다. 사 57:12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에게도 무익하고 구원을 이루지도 못할 만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아 인간에게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다. 결코 인간의 공로가 구원이 될 수 없는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 안에서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믿음과 확신을 결부시키셨다고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약속을 예를 들면 인간의 공로 위에 약속을 두게 되면 그 공로가 언제나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 이런 면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옳다. 인간의 공로는 언제나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난주에 말했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확신의 교리를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확신을 인간의 공로 위에다가 결부시키고 있다. 그 말은 맞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우리의 공로와 결부시켰다면 우리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로가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칼빈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왜 구원의 확신이 구원받는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공로 위에다가 구원의 약속을 두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로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은혜 안에 두셔야 한다. 이 공로를 지우고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가 약속을 두기를 원하셨다. 왜냐면 인간의 공로가 무익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약속을 두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은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먼저 하실 일이 있다. 은혜 위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두셨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더 하셔야 한다. 우리에게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주셔야 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주셔야 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주시게 되면 그 믿음이 이 은혜와 관계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마침내 그 약속이 내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은혜로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고 그를 붙들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은혜 위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위에 자신의 구원을 두셨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 되냐면 결국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확신을 갖게 하셨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더욱이 확신하는 믿음, 확신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주신 성령이 그들 안에서 사역하신 결과이다. 그러니까 확신이 믿음의 귀결인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자기의 은혜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믿기만 하면 확신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설명이다. 두 번째 설명은 하나님께서 더 나아가서 믿기만 하면 그 결과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까닭에 사람이 믿기 때문이라고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성령께서 복음을 들을 때 아까 설명했듯이 그들을 부르신다. 그런데 부르심의 기원은 아버지에게 있다.
 
에베소서 1:4-5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예정하셨다는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우리가 부름 받을 때는 그 부르심의 기원은 아버지에게 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만을 개별적으로 성령이 부르신다. 개별적으로 하나 하나 부른다. 부르실 때 그 성령이 부르심을 받는 그 사람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그 복음을 자기를 위한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신다. 그 결과 그들 속에 믿음이 들어오게 된다. 성령께서 말씀을 들을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복음을 아는 지식 위에 믿음이 생기고 그러면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확신을 낳는다. 따라서 모든 확신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하는 믿음과 확신은 필연적인 귀결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시기 위한 은혜로운 조치이고 성령의 사역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

이와 같이 칼빈은 확신하는 믿음을 무엇과 관련시키냐면 구원의 지식, 성령,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약속, 성령의 사역, 하나님의 선택 이런 것들과 연관 지어 놓았다. 한마디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택한 자들의 확신이 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확신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결과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계시하시고 보증하신바 된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공로 없이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 위에 근거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지식을 믿음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올바른 정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이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것은 그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를 깨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칼빈 자신의 신학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많은 논쟁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정교하게 말을 하려고 보니까 말이 길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익숙해져야 한다.

성령이 보증하신 바 된 바로 그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복음을 듣게 하고 복음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확신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모든 약속이 다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공로 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로 그것,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그 결과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공로 없이 거저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분명하고 확고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믿음의 어떤 속성을 강조하냐면 지식을 강조한다. 들어야 한다. 들을 때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나에게 자비로운 분이시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이런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라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두 가지를 구분한다. 객관적인 확신과 주관적인 확신으로 나눈다.

객관적인 확신은 무엇이냐면 객관적은 확신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Certainty).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이 객관적인 확신이다. 주관적인 확신은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두개로 나누었다.

자, 칼빈의 믿음의 정의에 따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거 중요한 말이다.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 된다. 그런데 확신이 없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라면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말한다. “구원의 확신을 붙들음으로써 사탄과 죽음에 대해서 대담하게 승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 사람이 신자가 아니라고 본다.”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확신이라는 열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확신이 없으면 무엇이 없느냐면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선하신 분이다, 내게 대해서 은혜로운 분이라는 것을 결코 알 수 없게 된다. 주관적인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빈은 확신을 가지지 않으면 저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런 칼빈의 주장이 논쟁의 빌미가 된다. 왜냐하면 칼빈은 믿음은 언제나 확신을 수반한다고 했지만 동시에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다. 같은 방향으로만 말했다면 논쟁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말은 이것이다. 믿는다면 확신이 있어야 하고, 확신은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잘 믿는 사람이라도 확신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요 20:3 주석에 있다. 예수님의 부활 아침에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다. 여러분 20:3을 실제로 본다면 그들이 믿음이 있었는가? 없었다. 그냥 간 것이다.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자들과 여인들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극히 미미하거나 혹은 믿음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이렇게 말하다.
 
“그러므로 믿음의 씨가 그들의 마음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동안 소멸되었고 그런 까닭에 그들 자신은 믿음이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확신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은 때로 신자들 속에서 비밀스럽게 일하신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인지할 수 있게 되는 약간의 숨겨진 씨가 있었다고 믿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제자들이 무덤으로 갈 때는 자신들 속에 믿음이 있긴 있었다는 것이다. 있긴 있었는데 그 믿음은 마치 화초가 관리를 못해서 죽었다. 남은 것이 뿌리만 남았다. 그런데 뿌리만 있으면 산다. 지금 칼빈이 그 말을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믿음은 마치 뿌리만 남아 있는 것과 같아서 본인들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그런 정도의 믿음이라도 없었다면 그들은 절대로 무덤으로 달려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의 결과로 숨겨진 믿음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라고 하냐면 거기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확신이라는 것은 자신이 믿음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믿음과 확신은 같이 간다고 해 놓고 요 20:3 주석을 보면 무엇이라고 하냐면 확신이 수반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칼빈의 신학에서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다룰 때 겪는 어려움이다. 도대체 어쩌라고. 모순되는 듯한 주장을 하느냐는 것이다.

칼빈은 모순되는 듯한 두 주장을 어쨌든 간에 믿음의 교리에서 다루고 있다. 어떻게 이 모순인 듯이 보이는 두 주장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은 믿음의 성장, 혹은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칼빈에게는 믿음의 성장, 단계라는 개념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칼빈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유아적 믿음, 믿음의 초보, 약한 믿음을 종종 언급한다. 왜냐하면 칼빈은 실제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그 믿음을 시험하는 도전과 불안과 의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시험을 받아 때로는 그루터기만 남고 위의 모든 나무와 가지가 다 잘라진 듯 보이는 상태가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자신은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확신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까 뭐라고 했냐면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에는 이 두 주장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발전 단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확신이란 믿음과 정확하게 비례관계에 있으므로 믿음의 발전과 성숙의 정도에 따라 지배를 받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믿음이 시험을 받아 뒷걸음질 치게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이 없어지게 되냐면 확신이 소멸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보면 된다. 확신은 믿음이라는 화초에 열매 맺는 잎으로 본다.
 
만약에 믿음이라는 나무가 병들게 되면 제일 먼저 위에 있는 잎이나 열매가 떨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뿌리가 있어서 살아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칼빈이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확신이란 사실은 잠정적인 믿음, 뿌리만 남기고 지금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쇠약해진 믿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계속 수업하면서 말할 것이다.

일단 오늘 칼빈이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또 칼빈에게는 확신이 결국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전체적인 흐림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조직신학 책에서 “믿음”에 대해서 읽어보라. 안토니 후크마, 루이스 벌코프, 바빙크의 책을 읽든지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반드시 정리하고 오라.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로 그와 같이 인식하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붙들게 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함으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크고 놀라운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망각하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오늘도 이 수업에 참석한 주의 종들을 기억하시고 이 구원의 진리를 분명히 깨닫고 잘 정리해서 가르침에 있어 아무런 막힘이 없도록 주님 이들을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준비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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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원의 비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비밀 가운데 하나는 죄인을 미워하시면서 동시에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결과에 대하여 사망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미워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생명을 주시면서 사랑하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하셨으며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비밀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

 

구원에 대한 오해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거저 받는 것에 대하여 불편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어떠한 거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고받는 것이 정상적이며 그래야 마음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누군가 거저 받았다 그러면 잘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하여 큰 오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도 어떠한 선함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선한 행동이 있어야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뒤 엎는 것입니다. 의로운 행동이 있어야 의롭게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양심의 법에 따라 혹은 실정법에 따라 우리의 선함과 행함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우리는 죄와 관계없으며 선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9-18]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선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우리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오심은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의인이 있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들에게 의를 주시려 오신 것입니다. 즉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의롭게 만드신다.

 

그렇다면 경건치 않은 사람이 경건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한다면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인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은 죄를 다 탕감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 죄를 탕감할 수 가 있겠습니까? 이 땅의 사람들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죄인이므로 인간은 누구도 인간 본성의 죄를 해결 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는 방법을 만드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어떠한 행위가 결코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다. 경전치 않은 자가 경건하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구원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그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본성만은 가장 사악한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하나님 없다고 자만한 삶

 

이 땅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없다고 자만한 자들입니다. 혹시 당신이 그 주인공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은 입으로만 부정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삶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롬4:5절의 말씀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경건하게 여겨 주신다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복된 소식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의 주님께서 은혜의 장치를 고안하실 때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염두에 두시고 고안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량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신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해결해 주기로 작정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이처럼 행복하고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원이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준 것입니다. 이것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스펄젼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의 결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결과가 이루어지기 전에 구원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즉 더럽고, 보잘것없으며 잘못된 상태, 형편없는 상태, 경건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 때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 즉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기쁜 소식이 임할 때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어두움의 나라에서 건저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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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를 멍들게 하는 적들(5)- 부족한 구원관

 

한국 교회의 성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세계 교회사 가운데 한국 교회와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단기간에 세계 교회의 중심 멤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별히 1907년에 일어난 부흥은 한국 교회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부흥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난 곳에 교회는 견고하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서구 교회의 침체기에 한국 교회는 계속하여 성장하였습니다. 서구 교회는 전후 세대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무신론자가 되거나 동양종교에 심취하여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난무할 때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착실하게 준비시켰습니다. 비록 일제의 핍박을 받는 과정과 6.25라고 하는 전쟁의 상처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보호하셨습니다. 한국 땅에 흘려진 순교자들의 피가 헛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열매 맺게 하여 주셨습니다.

 

한국 교회는 60-90년까지 30년 동안 서국 교회 수백 년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교회가 방방곡곡에 세워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자와 선교사로 헌신하였습니다. 교회는 성도들로 북적 거렸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높아만 갔습니다. 사회의 중요한 곳에 기독교와 관련이 없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위상은 높아만 같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가 되면서 한국 교회는 침체기를 겪게 되고, 마침내 하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치가 바닥으로 치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약 16%만 교회를 신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을 살렸던 한국 교회가 동네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너누마 서글픈 모습이 지금의 자화상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이면에는 성화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습니다. 성화가 없는 신앙은 샤머니즘에 불과합니다. 진리가 종교로 전락하여 버렸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진리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는 의롭게 됨과 거룩함의 균형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실수는 거룩한 삶에 대한 강조를 왜곡한 것입니다. 신앙의 축복이 성공에 있음을 너무나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어려운 시기를 이겨야 하는 시대적 아픔이 있기는 하였으나 복음은 거짓 없이 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구원의 참된 의미가 종합적임을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은 칭의와 성화의 종합적인 사역입니다. 물론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칭의는 영원합니다. 여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칭의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살게 합니다. 성화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가져옵니다. 성화가 없는 칭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러한 성화를 통하여 완성됩니다.

 

한국 교회의 슬픔은 칭의는 있는데 성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현실 속에 나타는 것은 바로 교인의 성장 없는 교회의 성장입니다. 성도들은 삶의 영역에서 변화가 없는데 교회는 날마다 커져만 갑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모이기는 하는데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당장의 삶의 문제만을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이름만 기독교이지 샤머니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비나이다’ 신앙에 머문 한국 교회는 더욱 개인주의로 달려갔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야 할 사랑과공의가 잘 보이지 않고 세속적인 냄새만 풍겼습니다. 여전히 교회의 크기가 중요하고, 큰 교회는 다니는 것이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인의 장점인 정직과 헌신은 점점 사라지고 고집과 부정과 이기심이 그리스도인들의 별명이 되어갔습니다. 정말 듣기 싫은 소리이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성화는 시간이 갈 수 록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입니다. 신앙은 성화 즉 변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마치 아이일 때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성인이 되면 이웃을 배려하게 됩니다. 미성숙한 성도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성숙한 성도는 공동체 중심적이 됩니다. 신앙이 자라면 생각이 자랍니다. 이기적인 존재에서 이타적인 존재로의 살아갑니다. 그렇게 성품의 변화가 옵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실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열매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성화에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공과 부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방인이 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구할 것은 그의 나라와 의입니다. 성공과 부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는지는 그의 거룩한 삶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함은 단지 윤리적인 정직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죄 죽임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영적인 일입니다. 죄를 죽이는 일이 없이는 결코 거룩함에 이룰 수 없습니다. 죄 죽임은 오직 의롭게 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죽이는 일에 동참하게 합니다. 죄를 죽이는 일이 바로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러한 죄 죽임의 모습이 반드시 동반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백성이라면 반드시 죄 죽임의 자리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죄에 굴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굴복 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온전함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러한 죄 죽임의 가르침이 너무 빈약합니다. 구원 받은 백성의 삶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자신감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종교 생활을 잘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의롭게 된 자로서 죄 죽임의 자리에 날마다 서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고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죄를 죽이는 일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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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에게 진정한 은신처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호라티우스 보나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설 수 있을까? 내 편에서는 행복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로이 나를 받아 주시면서 … ."

이것은 죄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입니다. 죄인은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가로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맨 처음 사람 아담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부분만 가리는 것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반드시 완전히 가리는 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조차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가리는 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오실수록, 자신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낙원의 울창한 숲으로 황급히 숨어 버렸습니다.

아담에게 진정한 은신처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던 아담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가 숨어 있는 곳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아담에게 해결책이 될 것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치를 가리기에 더 나은 것, 그리고 더 나은 은신처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곧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의 편에 서셔서 죄인의 원수, 즉 옛 뱀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여인의 후손, 곧 진정한 은신처가 되는 그 사람(사 32:2)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아담은 안심하고 숲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시된 은혜 안에서 아무런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롬 5:2). 그는 기쁜 소식을 들었고, 비록 그 소식은 짧은 것이었지만 그 소식을 통해 아담의 담대함은 회복되었고, 아담이 느끼던 공포는 제거되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들읍시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그 소식을 듣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들읍시다. 우리에게 믿으라고 계시된 이 기쁜 소식은 사람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신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들을 여기에 몇 구절 인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심령이 이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런 말씀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저 이 말씀을 연구하라는 우리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진술해 놓은 드넓은 말씀의 들판을 우리와 함께 거닐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진수를 참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단순하며, 가장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영광과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 또는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 또는 긍휼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를 들어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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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하신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고 하신 바 있다.

구원에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복음을 듣지(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하는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아들과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시대나 지역에 살았던 성인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경우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영아(嬰兒)의 경우


1) 영아의 상태

우리는 보통 생후 1세~2세 아이들을 영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영아나 유아를 나이가 아닌 영적 상태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체적 나이로는 소년이나 청년에 해당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영아와 다를 바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아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켜 영아라고 해보자.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아도 성장하면 성인이 되고, 자아의식에 따라 자범죄를 범하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아의 구원 문제는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즉 자범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의 상태로 죽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 영아의 구원 문제가 별도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다.

 

2) 영아 구원의 가능성
우리는 성경에서 영아의 구원 여부에 대한 단정적인 언급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영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아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교훈을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상태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교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교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예로 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어린 아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 즉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구원에 관한 대표적 원리를 밝히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셨다. 여기서 ‘네 집’이라는 말씀은 어린 아이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으로 볼 때, 가정에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온 집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빌립보의 루디아(행 16:15)나,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의 집에도 어린 아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때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했다. 이 말씀은 천국의 평화로운 광경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어린 아이가 등장한 것을 보면, 천국에는 어린 아이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죽음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순결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에서 구원받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분명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를 가졌다. 이 할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런데 그 할례는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주로 태어난 지 8일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했다. 그러므로 할례 의식은 어린 아이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

 

3) 영아 구원의 범위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영아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영아 상태로 죽은 모든 어린 아이가 다 구원을 받을까, 아니면 믿음의 부모를 둔 아이들만 구원을 받을까.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만을 고려해보면, 모든 영아들이 다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자범죄의 유무 여부로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아 상태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처럼, 부모의 믿음이 온 가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족 구원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믿는 부모의 자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교훈한다(겔 18:4, 20). 이것은 부모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의 믿음이라도 영아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믿으면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영아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에 밝힌 것처럼, 영아 때 죽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영아 구원의 방법
영아에게는 아직 자아의식이 없다. 따라서 영아는 스스로의 판단이나 결정에 따라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일 영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범죄가 없는 영아라도, 원죄가 있기에 반드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성인들의 일반적인 체험과는 다른 방법, 그러기에 성인들에게는 신비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영아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케 하실 것으로 여겨진다.

 

2. 성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의 상황은 영아들과 똑같다. 그러나 그들은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영아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시려고 하신다면 길가의 돌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고(눅 3:8), 죄인을 마술처럼 신기하게 구원해 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신 의도와 반대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항상 오직 자신의 선하신 의도에 맞도록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원하신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자신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셨고, 그 계획의 결과 죄에 대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실 때에 일정한 방법을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 즉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방법이다. 복음을 듣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수단이 없으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수단을 허락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수단으로 말미암는 결과인 구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에 이른 것은 하등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온 인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은 듣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불평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구원은 양심에 의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외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영아들의 경우처럼 성령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근시안으로 우리 눈앞의 것만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오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넓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나에게는 이 시대 이 지역에 살면서 복음을 들어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불공평하게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찾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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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명(召命, 부르심, Calling)

 

1)외적 부르심(외적소명)

소명에 대하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롬8:30)”라고 했는데 외적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 22장, 누가복음 14장의 잔치초청 비유도 비슷하다. 외적 부르심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경우 외적 부르심은 구원으로 연결되는데,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16:15-16)”라고 말씀하셨다. 외적 부르심은, 비록 구원을 위한 부르심이 될 수 있지만, 아직 구원이라는 의미의 부르심은 아니다. 불택자들의 경우, 외적 부르심과 초청은 단지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낼 뿐이다.

 

2)내적 부르심(내적소명)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효력있게 부르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효력있는 부르심’이라고 말하는데 중생(重生)과 동일한 사건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말씀은 이러한 부르심을 가리킨다.(롬1:6, 롬8:30, 고전1:9, 벧후1:10)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31문에 ‘효력있는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러하다. ‘효력있는 부르심이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인데, 그것에 의해 그는 우리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권하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주권적이며 그것을 ‘성령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이끄시면 죄인들은 그에게로 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또한 하나님의 이 부르심은 불변적인데 그가 한번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시면 그의 구원은 확실해진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2. 중생(重生, 거듭남, Regeneration)

 

성경은 구원을 ‘거듭남(중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중생이란,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며,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 그는 새 사람이 되고 새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성경은 중생을 ‘하나님께로서 남(요1:13), 거듭남(요3:3)’이라고 표현하는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초대 교회의 어거스틴은 중생은 마음의 시초적 변화로서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이며, 회심은 중생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보았다. 중생을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사역으로 본 것은 성경적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의 사상이었고 오늘날 개혁신학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중생과 칭의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았다.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져 있었다. 그러므로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 주권적 활동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중생에서 사람은 전적으로 피동적이며 사람의 의지는 협력적 원인이 될 수 없다. 중생은 영혼의 지배적 성향의 변화이다. 중생 사건에서 하나님은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 속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셨고,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산 결과, 중생한 자의 영혼의 성향, 의향, 혹은 마음가짐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진다.(엡4:22-23)

그리고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중생한 자는 죄를 깨닫고, 죄로부터 돌이키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의지하게 된다.

 

 

3. 회심(回心, 돌이킴, Conversion)

 

회심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절대 요청되는 구속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와 법적으로 연합하는 행위이다. 오직 이를 근거로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어 다음 단계인 칭의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회심은 과거 자신의 삶을 지배하던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와 세상을 향하여 살던 삶의 방향을 전화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이란 두 요소를 포함한다.

 

◆ 회개(悔改, Repentance)

 

1)회개의 3요소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래서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①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죄로부터 떠나려면 먼저 죄를 죄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율법(롬3:20)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②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포함한다. 참된 회개는 상한 마음(시51:17)을 동반하는데, 사람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③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포함한다. 이것이 회개의 핵심인데, 참된 회개는 마음의 변화에서 나온 행위의 변화이다.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캄’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뜻으로, ‘슈브’는 ‘돌아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 ‘메타멜로마이’ 역시 ‘뉘우치다’는 뜻으로, ‘메타노이아’는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2)회개의 성격

회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일으키신 선하신 일, 곧 하나님의 재창조 행위이다. 중생은 사람의 무의식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회개는 의식세계에서의 변화를 가리킨다. 회개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다.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은혜의 말씀일 뿐 아니라, 죄로부터 떠나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말씀을 포함한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회개는 또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회개는 죄의 깨달음과 돌이킴일 뿐이므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 대한 보상이 되거나 구원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회개는 죄 용서와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다. “너희가 돌이켜[회개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믿음(信仰, Faith)

 

1)잘못된 믿음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믿음들이 있다. ①성경의 역사적 내용이나 정통적 신조들을 지식적으로만 믿는 믿음. 이러한 믿음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고 했다. ② 진리에 대한 확고한 지식이 없는 일시적 믿음. 이 믿음은 진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관심과 열정이 있지만 새 생명의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실패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주로 감정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추구한다.(마13:20-21) ③기적을 경험하거나 기적을 행하는 믿음. 이것은 구원을 동반할 수도 있고 동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마7:22-23)

 

2)참된 믿음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심어주신 믿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우리의 믿음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마16:16-17, 고전12:3)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86문답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 대로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 Justification)

 

1)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선언이다.

온 세상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신앙을 가진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그것은 죄인의 죄책(guilt;법적책임)을 제거하는 것이며 죄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사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성화와 비교해 볼 때, 칭의는 죄책의 제거이며, 성화는 죄성 혹은 부패성의 극복이다. 또 중생, 회심, 성화는 사람의 내면적, 인격적, 실제적 변화이며, 칭의는 사람의 외면적, 신분적, 법적 변화이다.

 

2)칭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25).” 그러므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3)칭의는 즉각적이며 완전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그러므로 칭의는 믿음의 크고 작음 혹은 많고 적음의 정도에 관계되지 않는다. 작은 믿음일지라도 진실한 믿음이면 칭의를 얻기에 충분하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하신 것이다. 칭의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5. 양자(養子, 자녀로 삼으심, Adoption)

 

중생이 새 생명의 시작이라면 양자는 새 신분의 시작이다(엡2:1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6,29).” ‘양자란 값없으신 은혜의 행위인데, 그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수에 들고 그 모든 특권을 누릴 권리를 가집니다.’(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34문답) 이와같이 양자 된 성도들에겐 놀라운 특권들이 주어져 있다.

성도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은 자연적 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자연적 관계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양자됨’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것이다.

 

 

6. 성화(聖化, 거룩하여 짐, Sanctification)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새생명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실제적으로 그 인격과 삶이 거룩하여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성화는 전인이 새로워지는 것, 즉 영육 전체, 지정의의 전인격, 전 생활이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죄는 죄책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칭의는 우리의 죄책이 법적으로 제거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의 부패성이 실제로 극복되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에 근거한다. 또한 칭의는 외적, 객관적 사건이지만, 성화는 내적, 주관적 사건이다. 성화는 인격과 삶의 변화의 문제이며, 사람의 전인격과 삶의 실제적 변화이다.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법적인 의를 성도들이 인격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기에 실제적으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성화는 다른 말로 어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성도들은 일생의 성화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성과 무능함,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다. 물론 이와 함께 거룩과 의, 선과 사랑, 진실 등의 도덕성에 있어서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7. 성도의 견인(堅忍, 끝까지 견딤, Perseverance)

 

성도의 견인이란 전적으로 성화와 병행하여 일어나는 사건으로,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은 은혜의 상태 안에서 끝까지 견디어 영광에 이른다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 교리의 증거들은 우선,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11:29).”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원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들이 있다. ①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②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의 완전성.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9).” ③성령의 인치심.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인치심’은 보증이며 보장이다. 이렇게 보증된 자들은 중도에 실패할 수 없다.

 

 

8. 영화(榮化, Glorification)

 

영화란 넓은 의미로는 성도가 죽을 때의 영혼의 완전 성화와 부활 때의 몸의 완전 구속을 의미한다. 존 머리는 ‘영화란 신자의 죽음에서 영혼의 완전 성화를 가리키지 않고, 마지막 날에 죽음 자체의 파멸을 포함하여 죄의 모든 결과들로부터의 구속을 가리킨다’고 정의하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7문답에는 ‘신자들이 죽을 때, 그 영혼들이 완전히 거룩해지며 즉시 영광 안으로 들어가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눅23:43).”,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고 기록하고 있듯이, 우리의 구원의 최종적 단계는 몸의 구속, 곧 우리 몸이 영광스런 부활체가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 곳에는 눈물도, 사망도, 애통도, 아픈 것도 없을 것이며, 현재의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워진 세계일 것이다(계21:1-5).

 

글/큰물고기150마리



언약의 방식으로 부모의 구원이 자녀에게 혈통적으로 계승될 수 있다고요?

 

(도르트 신조 중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17장의 내용과 관련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지향하는 일부 개혁파 교회에서 언약의 방식으로 부모의 구원이 자녀들에게 혈통적으로 계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가르친다. 저들은 이런 사실의 근거를 도르트 신조의 첫째 교리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 제17장에서 찾는다.

 

도르트 신조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 자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으로 인하여 그 부모의 믿음을 따라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이 거룩한 믿음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녀들이 택함을 받아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창 17:7; 행 2:39; 고전 7:14)"고 기술하고 있다.

 

상기 본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믿는 부모의 자녀는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운 계약(신적 언약)으로 인해 자녀들이 택함을 받아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고 진술한다. 이에 대한 보증으로 창 17:7/행 2:39/고전 7:14을 증거본문으로 제시한다. 본 내용에서 '그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표현은 자녀들도 본성상 원죄의 영향을 받은 죄인들로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로 인해 인식기능이 불완전한 어린 자녀들은 개인적/개별적으로가 아니라 부모와의 언약관계에 근거해 혈통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증거본문으로 제시된 성경구절들이 이런 사실을 확실하게 보증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가? 믿는 부모들의 어린 자녀들이 본성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롬 3:10; 5:12), 그리스도의 구속이 아닌 부모들과의 언약적 연대성에 의해 혈통적으로 선택적 구원이 가능하단 말인가(선택적 구원은 창세전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증거본문이 이상의 사실을 확실하게 보증하고 있단 말인가? 어린 자녀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아닌 부모와의 언약관계에 근거해 가능하다면 선택과 신적 언약은 그 기원과 성격이 본질상 다르단 말인가?  

 

이상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본 주제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한다. 위의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중요한 관점은 각종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이나 요리문답들은 16세기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정리된 신앙적/신학적 산물들이란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역사적 개혁주의 고백서나 요리문답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 지를 교리적/체계적으로 정리한 성경해석과 적용의 탁월한 지침서로 기능할지라도 성경과 동일한 가치와 정도의 절대규범으로 수납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앙과 삶의 제 2 규범은 될 수 있을지라도 성경과 동일한 수준의 제 1 규범으로 평가될 수는 없다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은 원본과 관련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계시서로 절대무오함에 비해 각종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들은 16세기 당시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합의된 신학적 연구의 산물들이기에 진일보된 21세기의 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 해 볼 때 부분적이나마 해석상의 오류의 개연성과 이로 인한 추가적인 수정과 보완의 필요성이란 과제로부터 아주 자유로울 수 없다는 한계를 자체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누가 이런 사실을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식적으로 과감하게 지적함으로 감히 메스를 댈 수 있는 가의 문제는 별개이겠지만 말이다. 본 주제 또한 이런 문제 중 하나로 지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 주제와 관련된 문제점들을 증거본문을 통해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1. 창 17:7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들의 정체성은 본질상 혈통적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롬 2:28-29, 9:6-7).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영적 자손을 가리킨다(갈 3:7, 29).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 언약 속의 자손들은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된 천상적 교회 공동체를 총체적으로 가리킨다(엡 2:11-22). 따라서 창 17:7에 근거해 어린 자녀의 선택과 구원의 문제를 부모와의 언약의 연대성과 혈통적 계승의 관점으로 정당화시키려는 태도는 자의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의 결과로 사료된다.

 

2. 행 2:39에서 언급된 부모/자녀의 구원에 관한 언약적 약속의 연대감은 자체 문맥을 통해 단순한 부모-자녀와의 혈통적 관계에 근거한 보증의 약속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39절 말미를 유의해 보면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는 전제 조건이 부가돼 있다. 본절에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란 표현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소명을 가리킨다(엡 1:4-5). 그러므로 행 2:39은 자체 문맥 안에서 단순한 부모-자녀와의 연대감이나 혈통적 관계에 근거해 구원이 약속의 방식으로 보증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어떤 경우건 죄인이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방식 외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한결 같은 진술이다(엡 2:8).

 

3. 고전 7:14은 부모 중 한 편의 믿음 여부가 그들의 자녀들을 (혈통적 관계)로 인해 거룩하게 한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본문에서 언급된 거룩의 의미를 단순히 구원의 보증으로 해석한다면 다소 비약의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구원의 정체성과 관련해 보다 명백한 구절을 인용한다면 요 1:12-13을 들수 있다. 특별히 요 1:13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사람의 혈통/육정/뜻'으로 말미암을 수 없음을 확고하게 증거한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주권적 선택 사상)로 제한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고전 7:14에 언급된 거룩의 의미는 자체 문맥 안에서 '거듭남의 구원과 이로 인한 신분의 변화'라기보다는 믿는 부모에 의한 선한 간증의 삶을 통해 자녀들이 선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부부간의 경우에도 동일한 관점으로 추정된다). 구원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 결코 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 없기 때문이다(엡 1:4-5; 고전 12:3; 행 11:21; 13:48; 16:14; 딤후 1:9). 아울러 요 1:12-13절의 해석과 적용은 단순히 성인 남녀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다. 유아들까지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불변의 말씀임에 틀림없다.

 

4. 선택과 신적 언약은 그 기원과 성격에 있어서 본질상 다르지 않다. 공히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과 영원한 구속언약으로 설명되고 있는 에베소서 1장 4절-14절 및 디도서 1장 2절에 근거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자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곧 하나님의 택자가 된다. 결국 선택과 언약은 본질상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상의 관점을 정리하면 성경은 결코 한 사람의 구원 여부를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방식 외에 다른 방도의 개연성을 결코 허락지 않는다(엡 2:8). 만일 그리스도의 구속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이 가능할 수 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허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마 1:21; 막 10:45; 행 4:12).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선택적 은혜에 근거할 뿐이다. 사람의 혈통과 육정과 뜻으로는 절대 불가하다(요 1:12-13).

 

아울러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임에 반해 각종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들은 16세기 당대의 권위 있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여러 교회회의를 통해 합의/정리된 연구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진일보된 신학적 관점으로 조명해 볼 때, 전자는 시공을 초월해 만고불변의 진리요 여전히 신앙과 삶을 관장하는 유일무이한 최고의 가치와 규범으로 기능할지라도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제 2의 규범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부분적인 수정과 보완의 필요성이 상존할 수 있는 시대적 산물이다. 결코 성경과 동일한 권위와 가치를 지날 수 없다. 이들을 절대화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연유한다.

 


 

교단별구원의 계획(The Plan of Saluation) 비교 

 

  

 

전택설(제한속죄)

후택설(제한속죄)

알미니안주의

(무제한속죄)

루터

웨슬리

카톨릭

일부사람을 영생 얻도록 선택

인간의 타락을 허용해

부패,범죄,전적 무능에 처함

인간의 타락을 허용해 부패,범죄,

전적 무능에 처함

인간의 타락을 허용해 부패,범죄,

전적 무능에 처함

인간의 타락을 허용해 부패,범죄,

전적 무능에 처함

인간의 타락을 허용해 초자연적 의로움을 상실함

인간의 타락을 허용해

부패,범죄,전적 무능에 처함

일부 사람을 영생 얻도록 선택

모든 사람이 구원 얻도록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짐

세상 죄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짐

세상 죄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주어짐

선택된 자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모든 자에 대한 기본적 제의

선택된 자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모든 자에 대한 기본적 제의

도덕적 능력 부여를 위한 일부 사람의 선택

구원의 은혜를 전달하기 위한 은총의 수단 부여

모든 자에게 원죄 사면 및 충분한

은혜 부여

그리스도의 보상을 적용하기 위한 교회 및 성례적 제정

구속된 자를 구원키 위한 성령의 은사

구속된 자를 구원키 위한 성령의 은사

선택된 자의 도덕적 능력 발휘를 위한 성령의 은사

은총의 수단을 거부치 않는 자들의 구원 예정

충분한 은혜를 발전시킨자들의

구원 예정

제2작인 활동 아래 성례전 통한 그리스도의 보상 적용

모든 구속된 자들과 거듭난 자들의 만족

모든 구속된 자들과 거듭난 자들의 만족

성령에 의한 성화

은총의 수단을 통한 성화

충분한 은혜와 협동하는 모든 자들의 성화

성례전을 계속하는 모든 자들의 거룩한 삶

 

B.B. Warfield, The Plan of Saluation(Reprint. Grand Rapids: Eerdmans,1977). p.31에서 발췌

 

 

[출처] 교단별『구원의 계획』(The Plan of Saluation) 비교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138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창세기 15장의 언약에 대하여 - 그라아프

언약에 있어서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죽은 동물의 쪼
개진 사이로 하나님께서 자나가셨을 때 아브람이 따라 지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언약의 다른 영역이 계시되었다
.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다.

 

이는 당시의 전통적 관습과는 상반 되는 것이다. 사람들 사

이에 언약을 맺을 경우 죽은 동물의 쪼갠 고기는 언약의 양
당사자들을 상징한다. 즉 쪼개진 고기가 한 몸에 속한 것같
이 언약의 당사자들도 한 몸에 속한 것으로 개별적이 아님
... 을 뜻한다. 이러한 의식의 배후에 있는 또 하나의 사상은,
만일 어느 한 편이 언약을 어길 시에는, 그는 이 동물이 죽
은 것처럼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
의 언약에 있어서 쪼개진 고기는 오직 상대편 즉 아브람과
그의 백성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시기를 원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시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적 표적은 그리스도 안에

서 궁극적인 성취를 보게 되는데 그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연기나는 풀무와 타
는 횃불로서 그의 백성들 사이에 계시는 것이다. 때때로 하
나님께서는 정결케 하는 불로써 어두움과 두려움 사이에
계시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말씀하신 바
와 같이 이 표적은 처음으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압박으로 성취된다. 그 표적의 궁극적 성취는 그리
스도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모든 하나님 백성의 성결케 됨
에 있다. 그는 그러한 성결을 통하여 우리의 빛과 구원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서 자
기 백성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은 이유이며 또한 여호와께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신 이유이다.

약속 그리고 구원 - S. G. DE. 그라아프


 

10부. 중생|다시읽고싶은글
keeper77 | 조회 93 |추천 0 |2006.07.31. 23:53 http://cafe.daum.net/keeper77/17Ia/13  

 

 

10. 중생


  중생이란 본질적으로 두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본질적인 측면, 성품, 우리의 마음 등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중생은 회개하도록 만들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새 생명의 시작이다. 이것을 현상으로 보면, 중생은 오관의 영역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우리의 관찰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현상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러한 새 생명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노출되어서 사람들이 명백하게 볼 수 있는 어떤 변화된 삶의 증거를 중생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우리 삶의 주변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반드시 일어나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우리 삶의 특징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본질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중생의 변화를 현상학적으로 관찰해서 그 증거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신비적인 것이지만, 가시적으로 눈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현상적인 중생의 증거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중생이란 의미가 통일된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지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의미하고 있는 그 범위를 두고 학자들 간의 의견이 약간씩 다르다. 예를들면, 존 칼빈은 중생을 회심하고 돌이키고 성화까지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신학적 이유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되는 삶의 전부라고 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는 중생이라는 의미를 약간 좁게 해석하였는데,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것이다. 물론 현상학적으로 죤 칼빈은 성화까지를 중생의 측면을 접근하려고 하였다. 중생을 이해하는 가능한 것은 이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한다고 했는데 그 변화가 단순히 어떤 부분에 멈추는 것이 아니하고 성화에 까지 변화가 나타난다면 그 변화를 중생이라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중생의 증거가 굉장히 다양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넓게 이해했다는 것은 중생을 단순히 본질적인 측면에서 신비로운 길로 성령의 하시는 우리가 볼수 없는 길로만 남겨놓지 않고 그것을 관찰 가능한 증거를 수반하는 경험으로 중생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넓게 이해되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를 말한다. 그 이유는 그 중생이 그렇게 새롭게 된 삶에 중요한 변화들을 수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중생이다.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면 예수를 믿을 때 한 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보통 중생을 우리 일생에 단 한번 예수 믿을 때 일어나는 신생이다 라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본질적인 이해이다. 이 본질적인 신생이 우리 삶의 인격이나 말이나 생각이나 의지나 인간관계나 죄에 대한 관계나 하나님에 대한 관계나 교회에 대한 관계나 이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어 갈 때 그 나타나는 변화되는 중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을 중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신학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넓게 본 것이다. 중생이 단 한번 일어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상학적으로 볼때 우리 일생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상학적으로 보는 것을 지지한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단 한번의 인생에 한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적으로 본다면 우리의 생애의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그 중생의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내적인 변화가 국한된 시간이나 국한된 국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의 삶, 전 생애 동안에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정도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에 있어서 중생이 우리의 어떠한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성화와 중생을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성화를 가르치면서 중생을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수반하는 사건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성화를 이야기 할때 그 성화는 우리의 삶에 성숙이고 개성이고 변화이다. 그러한 성화론적 변화는 중생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성화를 중생과 떼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믿을때 한 번 중생하고 믿으면서 거듭 거듭나는 것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성화라는 것을 중생으로 말하자면 성화는 반복된 중생이고 중생은 성화를 위한 중생(거듭남)이다. 성화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반복된 중생이다. 그래서 어제 나는 죽고 오늘 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라는 말이 성립된다. 다시 오늘의 나는 죽고 내일의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중생은 무엇인가하면, 성화를 위한 거듭남이다. 그냥 목적없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성화의 목적을 앞두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와 중생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면에서 성화론을 다룰때, 성화와 중생을 같이 이해하는 신학자는 상당히 성경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자 신학자가 누구인가하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수인 닥터 데이비스가 있다. 이분은 주로 성화론을 다룰 때 중생과 같이 이해하였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부터는 중생을 우리 일생에서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일어나는 신비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도 옳지만, 중생이란? 본질론적인 좁은 의미에서 정리하면,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엡2장 1~2절)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새 생명 가운데서 출생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중생이란? 거듭나고 회심과 믿음과 의롭게 되는 성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본질론적으로 중생이란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넓게 말하자면 중생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의 경험에 제일 먼저오는 한번있는 사건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회심하고 믿고 거룩하게 되는 전 과정의 문제라고 이해해야 한다.


  중생이란 말은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성경에서는 딱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마태복음 19장28장에 나타나는 중생은 한 개인의 신생을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온 우주가 새롭게 될 것을 중생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신생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오직 디도서 3장 5절에만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진실로 거듭남의 중생한다고 말한다. 마19장28절의 종말론적 우주론적 변화에 중생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현재 이 땅에 있는 것을 새롭게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데 이것은 있던 땅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은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마19장28절 중생이라고 말하는데 이 중생은 본질적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 있는 것을 고치는 것은 개선이 아니다. 새로운 것의 유익이다. 그전의 어떠한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그전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어떠한 것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완전의 새로운 것으로 재 창조를 의미한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생을 언약적으로 볼 때 사람이 태어나면서 죄인이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담의 행위언약에서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적으로 죄인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들고 죄를 생각나게 만들고 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삼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율법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율법에는 구원을 상징하거나 구원을 암시하거나 구원의 가능성이 일체 그안에 없다. 그런데 행위언약에서 태어나는 자는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결국에는 언약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 언약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아담의 행위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죄인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적으로 볼때 중생은 필연적이다. 중생이 없이는 언약에 들어갈 수 가 없다. 따라서 중생은 새 언약의 들어갈 수 있는 절대 조건이다. 중생은 우리가 새 언약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시에 새 언약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중생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백성이 누리게 될 은혜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아담 언약안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죄의 전가와 죄의 결과를 모두 우리에게 전적으로 다 물려받게 되고 그 저주와 심판 아래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담의 언약가운데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이 중생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약속된 그 모든 은혜를 언약안에서 누리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그러하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지식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깨달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안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일평생 세가지 중요한 사건은 태어나고 결혼해야 하고 죽는 것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집행하신다. 태어날 시간과 장소와 부모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하므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언제 어떻게 부르실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한번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결혼이다. 결혼생활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선택적 생활에 맡겨진 것이다. 이 세가지 중대한 사건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결혼에는 권리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잘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의와 진리로 태어나는 사건이다. 태어남으로서 구원받는다. 기독교의 이 진리를 잊지마길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남으로써 자녀로 살고 태어남으로써 자녀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행을 믿어 하지 않고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그 선행으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오직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중생하길 바랍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회개하라고 말할 수 있고, 다만 믿어라 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중생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 그 청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단지 외치기만 할 뿐이고 그 외침을 통해서 중생케 할 일은 성령이다. 그래서 성령이 외치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외침이 무익하고 변명일 뿐이다. 특별히 강단에서 서는 목사들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설교문을 잘 준비하고 아무리 성경본문을 철저히 잘 준비하더라도 아무리 뛰어난 수사적 표현을 동원하여 증거한다 할찌라도 성령이 불러주지 아니하고 성령이 중생케 하지 아니하면, 그 전하는 외치는 자의 수고가 무익되고 전혀 헛된 것이다. 이 말은 목회의 성공도 하나님의 뜻이고 목회의 실패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인간이 목회에서는 적어도 성공했다, 실패했다 라고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만 가르칠 뿐이다. 이것이 충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훌륭하고 업적을 이룬 사람 이라고 말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상 받는 사람은 크게 이룬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충성이라는 말은 주어잔 조건하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에 바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를 찾지 않고 그 자세로 우리를 찾는 것이다. 어떠한 자세로써 말이다. 그 자리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 왔는가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인 것이다. 따라서 충성된 종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너무 큰 것을 이룰려고 하지 말고 너무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 언제나 오늘 내게 그 주어진 작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충성된 종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따라 그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이다. 여러분 삶의 자리를 바꾸려고 하는 시도자체 어려운 것이고 불순종의 모습이다. 바꾸려는 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너희의 부르심 행하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의 수용성이 요구된다. 주시는 대로 잘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 쳐다보지 말고 여기 이 자리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여기 이 자리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할 때 열매 맺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최선이고 지혜이다.


  중생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성을 살펴보면,(요3장 3~5절) 기독교 신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중생이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한 것은 중생이다. 중생은 완전히 본성이 변화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이나 고행이나 깨달음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이방종교의 특징은 한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중생을 통해 받는 구원은 세상사람들이 어떤 것으로 이룰 수 없는 존재인 것으로 우리가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지도 구하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적인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다. 우리의 주어진 구원은 특별한 구원이다. 유대인의 지도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성령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출생하므로 (본질의 변화를 가지므로)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니고데모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적어도 행위에 따른 순종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이루는 것이나 종교적인 규례나 규정을 따라서 충실하게 살 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이해를 완전히 거부하신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것이냐 가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구원의 방법에 관한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전환을 요구하신 것이다. 구원은 니고데모가 생각해 왔던 그런 종류가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혈육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해질수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근본적으로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데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사과와 오렌지가 다르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오렌지가 사과 되고, 사과가 오렌지 되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새로운 종으로의 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이다 변화가 와야 하는 것이다.


  아마 니고데모는 그날 밤에 절망을 느꼈을 것이며, 이것은 그기 평생을 유대인의 규정에 따라서 말씀을 지킨다고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지만 그러한 자기의 노력이 이룰 수 없는 곳에 구원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해볼 수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 말씀하시는데 성령은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동에서 서로 불고 부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성령이 신비롭게 역사해서 역사하는 사람만이 거듭나고, 거듭나는 사람만이 곧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구원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율법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사망 선고이었다. 니고데모에게 그날 밤에 절망감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특별히 결정적으로 절망감을 안겨 준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어로 “게네 아우트”로써 부정시제 수동형으로 위로부터 중생되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갔을 때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어 루디아가 그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한 지라 라고 했을 때, 루디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바로 그 때가 시제가 없는데,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없는 부정시제인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그 시간이 언제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중의 그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갑자기 열어주신 것이다. 그 어떤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열다 라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힘의 작용이 아니라 자기 밖에서부터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힘에 의해 열려지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있던 중에 그 여자의 마음이 열려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을때 그 말씀을 깨닫아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소원이 생긴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닌까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를 규정할 수 없고 부정시제로서“위로부터”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 그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는 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이 말씀앞에 절망과 무력감 ,박탈감을 가진 것이다. 그는 그날 더 나은 종교적인 의무감 대문에 예수님을 찾아 오신 것인데, 즉 종교적인 모든 의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가르침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거듭나야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네가 거듭나야 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요한 복음 3장에서는 위로부터 태어나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은혜로서 거듭남으로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중생이 필요한가? 인간의 육체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사도요한과 사도바울 사이의 육체에 대한 이해가 조금 다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인간의 타락성이나 우리 인간을 죄로 이끌어 가는 죄의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 죄의 원리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아서 그 몸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은 죄를 완전히 벗어 버릴수 없다 말한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강한 윤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말하는 육체는 단순히 육체의 원리 죄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대조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나라이므로 성령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자연인들은 성령과 관계가 없는 죄에 종된 사람이다. 그래서 사고 요한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요한은 말하고 있다. 중생은 한마디로 영적 존재의 출생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방언해야 하고 신유해야하고 기적해야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곧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가지 사실은 분명한데, 영적이다 라고 말할 때, 그 영적인 사람은 곧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중생한 사람이 다 영적인 사람이고 이렇게 되는 사람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후 그가 설교할 때, 유월절 지내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설교할 때 “너희가 회개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말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곧 회개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계통에서 성령세례를 말하는데 성령세례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믿을 때 받는 성령과는 다른 성령 체험이라고 말한다. 예수 믿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중생도 성령의 능력이고 믿음과 회개도 성령의 능력이고 의롭게 되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난후에 성령의 세례는 무엇을 가져오는가? 방언을 수반한다.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은 오순절 계통에서는 교리적으로 그것이 방언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방언받다는 것이다. 그러닌까 오순절에서는 성령체험이란 중생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체험이다. 그런식으로 성령세례를 가르치는데, 이 성령세례가 신학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라는 것은 사실, 성령께서 우리 구원의 경험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을 가르치는 것이지 이미 성령을 받고 중생한 자가 다시 두 번째 축복인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축복은 성령이 우리에게 중생을 일으키게 하고 회심하게 하고 믿음 갖게 하고 두 번째 축복은 방언하게 하는 성령세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그렇게 매번씩 일정한 구분을 가지고 체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성령체험이란 말 자체가 온당치 않다. 성령의 체험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인격적 하나님의 신이시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중생할 때 그들이 다 영적인 사람이 되고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세상 끝날 때 까지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필요성의 첫 번째 필요성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질이다. 자질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선한 사람이 되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도덕군자를 만들어서 안되고 교회안에서 착한 사람을 양성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되고, 사실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곳이다.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다.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는 착하게 살아서 성령 체험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착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 중생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자연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인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구스인의 피부와  표범의 비유에서와 같이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아서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것은 큰일 날일이다. “선을 행할수 있으리라”는 말은 악과 선을 대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선을 행하여 구원받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표범은 그 반증을 변할 수 없고 사람은 그 타락한 성품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 그러나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 선이 완전한 선도 아니고 누구든지 선을 통해서 구원받도록 하나님이 섭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괜찮다.


  롬8장 7~8절에서 보듯이 영적으로 라야 분별하는 것이다.“영적이란”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성령에 성령에 의해서 조명되어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우리가 비록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의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는 요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믿어야 중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수 있다고 사람을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성경에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부정적이다. 성경이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진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탓에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알미니안 주의는 주장한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갖고 있는 인간이해의 제일 큰 문제는 성경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토록 부정적이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인간의 타락성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이해를 고상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믿음은 자유적인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 믿는 것이다.


  중생의 두 번째 필연성, 중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변화들의 가시적 변화와 부가시적 변화가 있다. 가시적인 변화에 대한 주의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특히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영적변화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기원 시작 중생의 수요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일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이다.(요3장 7~8절) 그런데, 성령의 사역을 바람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에스겔서 37장에서 온 것이다. 뼈들의 관한 환상에서 뼈들이 사람으로 육체를 입고 일어설 때에 바람같이 하나님이 성령이 역사할 때에 그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뼈들이 다시 결합하고 살이 덮이고 사람이 되어 큰 군대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역사했다고 에스겔 37장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언제나 바람과 같이 사역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같이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은 그 강조점이 성령의 사역이 신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령이 어떤 양식으로 어느 때에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우리 인간이 직접적으로 분석할 수 없고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 거듭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소위 구원파에서 중생은 시간과 날짜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중생의 사역은 신비롭기 때문에 누구도 명확하게 언제라고 말할 수 없다. 방금전 부정시제라고 말하한 것과 같다. 어거스틴 이 말하기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수는 있으나 성령의 사역의 깊이를 알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를 알 수가 있는데 언제 어떻게 역사하는지 사람이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신비롭게 사역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아니하시고 동의를 구하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깨서 주권적으로 한사람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본성을 하나님의 자기의 본성으로 바꾸어 버리신다. 새로운 생명을 덧입게 하신다. 우리자신의 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다. 주권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구원에 위안과 확신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사도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었지만, 성령에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 할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식하든 못하든간에 그들의 성경기록 모든 사역에 하나님이 감독자로 관여하셨다.  어떻게 어느 부분까지 어떤 양식으로 그 제자들과 성령이 역사하셨는지 본인도 모른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계시가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는 중생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변화) 중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중생의 역사가 시작되면 중생이 광범위한 변화를 동반한다. 혁신적인 변화다. 이 중생은 우리의 마음(존재의 중심)에 이다. 우리 이성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이 원하는 것만 이해하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만 듣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듣고 강조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이 곧 감정으로 나타나고 이 마음이 의지하는 곳에 내 인생과 운명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제물도 있다. 이 마음이 존재의 중심이다. 가장 깊은 곳, 자기 인생의 중추가 어디 있는가는  마음에 있다. 중추가 바뀌지 않으면 그 주변의 것들을 아무리 개선해도 그 개선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수가 없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런데 이 중생은 우리 마음에 일어난다. 첫 번째는 신비롭게 사역하고 둘째는 우리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


  렘31장 33절을 보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을 속에 그 마음에...” 단순히 우리의 기억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호나 선호도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 정결한 소원은 자연인에게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소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의 부르심, 성령의 감동, 거기 믿음에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생기는 소원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들을 때 이러한 소원이 생겨나길 사모해야 한다. 중생은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가져 오므로써 어디까지 그 변화를 미치는가 하면 그 변화가 우리의 머리에 있는 과학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중에는 중생의 변화가 그냥 내 마음의 관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내 생각의 길까지 바꾼다. 결국에는 사고하는 방식을 바꾼다. 또 의지를 바꾼다. 우리의 정신(지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가운데 바르게 온전하게 작동한다. 이렇게 하므로써 중생은 예레미야 31장 33절에 있는 말씀을 정말 아름답게 성취한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이 중생하게 되면 근본적으로 마음에 변화가 오고 생각의 변화가 오고 지성과 이성의 변화가 오고 의지의 변화가 오고 그 의지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말도 변화시키고 행동도 변화시키고 외모도 변화시킨다. 얼굴이 박색이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 마음에 신앙이 있으면 그 신앙이 얼굴로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겉모습 보다 그 겉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 그런 사람은 함께 살면 살수록 더 사랑스럽고 더 다정스럽고 같이 있는 사람이 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얼굴은 너무 예쁜데 성격은 완전히 괴팍하다. 그러면 그 잘생긴 것이 때로는 괴롭고 가증스럽다. 사람이 중생하면 우리의 전부를 바꾼다. 비록 새마을 운동을 가진 얼굴도 큰 위안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마음이 비단결 같은 중생된 사람의 증거이다. 중생을 하고 나면, 죄악이 끊어진다. 그러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반드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 중생했는가? 오순절 성령강림때 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했다. 신비적이기 때문에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중생을 일으키시는 자(원 보혜사)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성령이 오순절 성령강림때 오셨지만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례받는 그 때 성령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공생애 기간중에 어떤 때에 이미 중생은 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한 출발이다. 그래서 이 성령세례가 반드시 중생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도 너무 제한적이다. 성령에서 세례는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례는 성령이 임하는 양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이 어떻게 임하는가? 그들에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충만하게 임했다. 그래서 성령이 이끄시는데로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사역했다. 그런데 세례라고 쓴 것은 그 세례식에서 물이 부어지는 양상을 통해서 세례가 어떤 모양으로 그들에게 임할것인가를 보여주는 형용사적으로 사용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세례은 물을 완전히 뒤집어 쓴 세례이었다. 그러나 개혁파의 세례는 물을 의식행위로 뿌리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라는 말은 마치 무리 우리에게 적시듯이 임함을 표현한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의 삶의 광범위한 외형적인 변화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래서 온 우주가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변화를 보고 내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중생은 못 속인다. 중생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중생의 증거를 숨기지 못하고 잘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했으면 중생에 합당한 열매들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외면적 행위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7절에서 “사람이 태어날 때 모두 죄의 종”이다. 따라서 중생은 마음과 지성을 새롭게 하고 의지를 교정하고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아, 그리고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게 된다.(요3장 5절의 물은 청결함의 모티브이다) 말하자면,  물이 강조하는 것은 청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각종 더러운 것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던 그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중생할 때 그 마음의 생각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일체의 더럽거나 추하거나 악한 것을 사모하거나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악한 것을 느끼는 것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만 가질수 있는 경지다. 우리 주위에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자도 없고 선한 것을 참으로 선하다고 말 할수 있는 사람도 없다. 백가지의 악을 깨닫는 것보다 한가지의 선을 깨닫는 것이 더 어렵다. 마음이 청결해 지면 선한 것을 선하다고 말할수 있고 무엇이 비로소 무엇이 선 한줄을 안다.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에서 물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모든 우상들이 다 씻겨져 가는 것을 상징한다. 성령은 새로운 어펙션(affection) 어펙트란 열정, 뜨거움을 말하는데 훨씬 더 감정적인 것에 호소하는 말이다. 의지는 죄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펙트(열정)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내 마음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강한 반응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 믿고 선교하고 남을 돕고 헌신하고 남을 섬기는 것을 왜 기뻐하는가? 이것이 중생의 결과이다. 영적인 기호가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 좋아하던 것이 바뀌고 이제는 새로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열심이 생기는 것이다.


  중생하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생기는데 그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한 뜨거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헌신에 열심히 생긴다. 중생이 새로운 열정을 마음에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도한 쪽으로 가도록 마음을 변화시키고 이성을 교정하고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열심을 줘서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이 영원 전에 우리를 향해서 그 영광의 성취를 향해서 나도 모르게 그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작은 변화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향으로 내 삶이 갈수 있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것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매 순간 나의 삶을 정교하게 이끌어 가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갖고 오고 이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정열을 주셔서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길을 걷도록 이끌어가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의 능력이다.


  불가항력적 은혜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 원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인데, 칼빈주의자들이 사용한 것은 강제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비롭고 교묘하게 사람들의 의지로 가도록 역사하신다. 왜 이것을 불가항력적 이라고 하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목적의 사람이 반드시 이루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이지, 그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는지 그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를 설명할 때 하나님이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데 그 가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원하고 의지하는 바에 거슬려서 데려간다고 생각하는 데 그것이 아니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란 그것에 결과에 관한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자리에 우리들이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 이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느냐 물으면 그 역사는 마치 중생과 같아서 신비롭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막상 그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 의지로 자신의 생각으로 한다고 충분히 느낄만큼 자유롭다. 그러나 충분히 자유로운 그 상황에서 이미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그 역사가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다. 본인은 모르지만 나중에 이루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거기에 도달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알게 된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우리를 이끄시는 결과를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신비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를 변화 시키시고 이성을 새롭게 하게 함으로 정말 그 마음이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플랭팅거 신학자는“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고 신비롭고 따뜻해서 그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마치 자신이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가는 길이 자기가 정한 길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유롭게 역사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필연성을 말했다. 중생도 결국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중생이 강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중생은 외적인 증거가 꼭 드러난다.


  중생의 증거는? 첫째는 죄에 대한 변화이다. 죄에 대해 달라진 태도이다.(요일서 2장29절,요일서 3장9절)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난자(중생된)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일단은 죄에 대해서 달라진 자세(태도)로 중생의 증거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죄를 짓는 것은 자연(nature)이지만 중생하고 나면 죄를 짓는 것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죄짓고 사는 것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로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지는 것이 일상생활이 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죄를 짓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지는 것이다. 죄짓는 사람은 죄의 영감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로 난자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생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안다. 죽은 고기는 흐르는 물에 그냥 떠내려가지만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그 악한 세월에 묻혀갈 수 없는 것이며 노력하고 거슬리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것이 중생의 증거다. 죄짓지 못한다는 이 말은 죄를 짓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다르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인들처럼 짓지 않는다.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죄를 범할 때 즉시 회개한다. 요일서 3장 5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한다. 아무도 죄가운데 살지 않는다. 죄가 그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규정하는 특징적인 원리가 되지 않는다.


  싱클레 퍼거슨 이라는 분이 성령론이란 책을 썼는데, 나의 멘토인데, 요일서 3장 5절 중생한 자가 죄에 대해 죽었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이것은 현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예수 믿고 중생하고 이 사람들이 영광에 들어가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라는 관점에서 사도요한이 말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뜻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이들은 장차 완전히 죄를 짓지 못하는 자들이 될 것이고 그러한 자들로서 오늘 죄와 다툰다 라고 설명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죄를 짓지 못하는 불가능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지금은 그 죄와 계속해서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와 다투면서 죄와 이기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의지가 자유롭게 되고 우리 속에 새로운 열정이 찾아왔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할 때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고 성령의 감동도 있으므로 죄와 다투기를 힘써야 한다. 죄와 다투기를 힘쓸 때,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자들이다. 이러므로 중생을 드러내는 자들이다.


(6강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감사,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주님을 떠나 있을 그 때에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중생케 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게 하시고 천국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새로운 것을 심게 하시고 나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놀라운 은사를 부어 주시니 주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글래스에 참석한 모든 종들에게 오늘 이 성령의 과목을 가르치니 관념의 지식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정말 새로운 용기와 도전과 힘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다음 주에 그 동안 우리가 배운 것을 한번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님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다 기쁨으로 이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음은 11부. "믿음과 회개(돌이킴)1" 입니다. coming soon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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