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고찰(1)

구원론 2014. 5. 4. 12:35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고찰
예수가족교회 임범진 집사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은 미국에서 1980년대 대중들에게 알려져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어 자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극소수의 출판물과 인터넷 상의 글이 주재권 구원을 비성경적 행위구원론이라 비판하며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본 글에서 필자는 주재권 구원 찬성파와 반대파의 주장을 비교하여 주재권 구원이 결코 행위구원론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이고 종교개혁의 전통에 충실한 구원론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전개하겠다.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0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04 한국교회와 주재권 구원 논쟁
05 결론 및 요약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주재권 구원 논쟁의 자세한 역사는 잠시 뒤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이 논쟁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은 1988년에 발간된 존 맥아더(John McArthur, 사진1)의 Gospel According to Jesus2 라는 책 때문이었다는 사실만 언급하겠다. 당시 미국 교회에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결단주의식 구원론, 즉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의지적 결단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과 그 이후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독립된 두 개의 단계로 보았고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그의 책에서 이런 구분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구원 얻는 믿음은 오직
John McArthur 1
1 이하 인물 사진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경우 http://en.wikipedia.org 에서 얻었다.
2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 참된 무릎 꿇음-예수가 목숨 걸고 전한 복음 (살림출판사, 2008)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2
G로 약함)로 명명하였다.
중생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중생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을 참된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정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책이 미국 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특히 달라스 신학교를 근거지로 한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위와 같은 구원론을 미국 교회에 유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이었으며 존 맥아더 역시 출신학교는 다르지만 세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집안 식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모양새였다. 이에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인 핫지스(Zane C. Hodges)가 Absolutely Free! (1989) 라는 책3을 통해 맥아더의 구원론은 믿음에 행위의 요소를 첨가한 행위구원론이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질시킨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세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출발했으나 맥아더가 옹호하려는 구원론이 개혁신학의 전통적인 구원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지한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가세하면서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존 맥아더와 같은 구원론을 가진 이들을 주재권 구원파(이하 LS로 약함)4라 부르게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값없는 은혜파(Free Grace파, 이하 F
주재권 구원 논쟁의 주요 논점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 몇 가지 항목에 대해 LS와 FG의 견해를 대조하여 열거해 보겠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은 LS와 FG가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주요 논점이며 양 진영이 이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는 좋은 방법이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FG: 믿음이란 예수가 구원자이시며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다.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한 번 쳐다 본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원인인 믿음은 선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LS: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기적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구원은 값없이 얻으나 그 이후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행위는 제
3 이하 책의 이미지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경우 http://www.amazon.com에서 얻었다.
4 누가 이 명칭을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주재권 구원파라는 명칭은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반대파가 자신들을 Free Grace라 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자신들은 값없는 은혜,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상대방은 율법주의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려는 계산이 깔린 작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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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일 뿐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LS: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위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을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할 근거는 없다.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회개 역시 일종의 행위이기 때문에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할 뿐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행위구원론이다.
LS: 중생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회개한다. 믿음과 회개는 회심이라는 사건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믿음이 중생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중생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회개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회개와 믿음은 언제나 함께 한다.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FG: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영생을 확신할 수 있다. 설사 외적으로 배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배교로 보시지 않는다.
LS: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FG: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가 있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졌으나 아직 육신에 속한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LS :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육신에 속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나 오직 중생한 자와 불신자가 있을 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성화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주재권 구원’이라는 적절치 못한 작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중생(거듭남, regeneration)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입장차로 요약할 수 있다. FG에게 있어서 중생은 인간이 믿음이라는 의지적 결단으로 예수의 구원자 되심을 인정한 결과 획득하게 되는 사건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발휘해 의지적 결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의 삶,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두 번째 결단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LS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중생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중생한 자는 믿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의 행실은 필연적으로 거룩을 향해 변화되어 간다. 다시 말해 믿음과 행위는 모두 중생의 결과이며,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이 입장차가 주재
권 구원 논쟁의 배경이다. 이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 혹은 펠라기우스-반(半)펠라기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구원론 사이의 논쟁이다. FG는 개혁주의 구원론 중 중생과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의 교리를 반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혐오의 감정까지 드러낸다. 이 두 교리가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라는 FG의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반박하기 때문이다. FG의 저자들이 이 사실을 매우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재권 구원 논쟁을 세대주의 내부에서 벌어진 집안 싸움으로서 FG를 은혜 구원론으로,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겠다.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주재권 구원 논쟁은 1980년대에 본격화 되었지만 그 뿌리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fer, 사진)는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스코필드 주석 성경의 저자)와 더불어 미국 세대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는 세대주의적 관점의 조직신학 교과서를 집필한 것과 현재까지도 세대주의 신학의 본산 역할을 하고 있는 달라스 신학교를 설립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후에 주재권 구원 논쟁을 촉발시키고 지속시킨 주요 주제들이 20세기 초에 출판된 그의 저작들에 거의 모두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주재권 구원 논쟁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1918년에 출판된 He That Is Spiritual5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체이퍼는 고전2:9~3:4을 근거로 사람을 1) 자연인(natural man), 2) 육적인 사람(carnal man), 3) 신령한 사람(spiritual man)의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자연인은 불신자를 말한다. 문제는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점인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구원을 받은 이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도달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그것이다. 이 전제 하에 체이퍼는 신자가 신령한 사람의 상태에 도달하는 비결을 기술한다. 이 주장에 대해 당시 개혁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사진)가 서평6을 통해 비판을 가하였다. 워필드의 설명에 의하면 체이퍼의 주장의 핵심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첫 번째 결단이 있은 후, 성화의 삶에 도달하기 위한 두 번째 결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 번째 결단의 유무에 따라 신자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제공하며 각자가 구원 받는 것은 스스로의 결단 여부에 달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적 구원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인 성화를
Lewis S. Chafer
B. B. Warfield
4
5 이 책의 전문은 http://www.baptistbiblebelievers.com/BookList/HeThatIsSpiritualbyLewisSperryChafer 1918/tabid/271/Default.aspx 에서 읽을 수 있다.
6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919;17:322-7. 이 글의 전문은 http://www.thebluebanner.com/pdf/ bluebanner11-3.pdf 에서 읽을 수 있다.
5

할을 하였다.

어난다고
박하였다. 1994년에 출판된 로마서 주석에서도 존 스토트는 동일한 입장을 고수한다.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다. 그런 일은 불
구원 이후 이차적인 헌신 혹은 특별한 결단을 한 일부의 신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부가적인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당시 유행하던 더 높은 삶 운동(higher life movement)7에 동조한 것이다.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이퍼의 가르침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 인기를 얻었고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빌리 그래엄(Billy Graham)으로 대표되는 대중전도집회와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1951년 창립)를 위시한 선교단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빌리 그래엄은 ‘내 모습 이대로’와 같은 찬양으로 감정적, 심리적 반응을 자극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전도자의 초청에 응해 강단으로 걸어 나오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흔들고, 특정한 기도문(영접기도)을 따라 하게 하고는 이것을 구원 얻는 믿음과 동일시하는 전도방법8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은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등의 결단주의적 전도 기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양산된 새로운 유형의 ‘회심자’들(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진정 구원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체이퍼의 이론을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CCC는 유명한 ‘마음의 보좌’ 예화로 체이퍼의 가르침이 대중화되는데

체이퍼의 가르침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시기에 다시 한 번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바로 존 스토트(John R. W. Stott)이다. 1959년에 Eternity 지에서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되어야 하는가? (Must Christ Be Lord to Be Savior?)”라는 제목의 지상논쟁이 벌어졌을 때 에버렛 해리슨(Everett F. Harrison)은 “아니다”의 입장에서, 존 스토트는 “그렇다”의 입장에서 글을 기고하였다.9 대체로 이때부터 주재권 구원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된 것 같다. 논의의 초점이 구주(Savior)로서의 그리스도와 주님(Lord)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를 사용해 체이퍼의 주장을 다시 기술하자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으나 아직 주님으로 모시지는 않은 사람이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이자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다. 존 스토트는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구주이자 주님이지 그 둘이 분리될 수는 없으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는 칭의와 주님으로 모시는 성화 두 가지 모두 반드시 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은 그 안에 복종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평생에 걸친 순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완전하고 거리낌 없는 헌신을 기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것을 ‘믿음의 순종’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으면서도 구주로는 영접하는
7 19세기 말 영국에서 케직(Keswick) 사경회를 통해 대중화된 운동으
blessing)’, ‘성령충만’을 통해 완전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함. 8 빌리 그래엄 전
1967) pp11-16.
9 Eternity Magazine, 1959;10:14, 16, 48 & 15, 17-8, 36-7. 아쉽
6
가능하다.10
슷한 시기에 로이드 존스 또한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분
한 태도를 보여줬다.
모실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이단입
니다.11
신학자나 설교자들을 주재권 구원에 대해 취하
입장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salvation)파
Eternity에서의 논쟁과 비

아마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모시면서도 수 년 동안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혹은 수년간은 그분을 당신의 주님으로 믿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어왔을 것입니다....만일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가 당신의 주님이심은 알지 못한 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믿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분을 구주로만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당신을 사심으로써 당신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심을 즉각 알아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위험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화 없는 칭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위험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 되지 않는 한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정도는 시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도 구주로
그러나 체이퍼식 구원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인지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존 맥아더의 공이다. 1988년에 출판된 그의 책 Gospel According to Jesus에 의해 미국 교계에서 소위 주재권 구원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등장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국 교회 안에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현대 교회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LS(Lordship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제임스 몽고
존 맥아더
존 파이퍼(John Piper)
R. C. 스프로울(Robert C. Sp
존 거스너(John Gerstner)
11 D. M. Lloyd-Jones, Romans: Exposition of chapter 1. The Gospel of God (The Banner of Truth, 1985), p134. (설교를 한 시기는 1955년)
12 Dennis Rokser, Examining the Lordship Salvation: Part 2, Grace Family Journal 2007:3, http://www.duluthbible.org/246451.ihtml 에서 인용. Rokser 자신은 FG파이다. 마이클 호튼 같은 이는 자신이 LS로 분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으나 FG 주의자들은 어쨌든 그를 LS파로 인식하고 있다.
7
)
더 핑크(Arthur W. Pink)
l S. Horton)
케네스 젠트리(Kenneth L. Gentry

마이클 호튼(Michae
FG(Free grace)파13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fer)
제인 핫지스(Zane Hodges)
드와이트 펜테코스트(J. Dwight Pen
찰스 라이리(Charles C. Ryrie)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 사실 FG파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Google에서 ‘Lordship salvation’을 검색해보면 즉각 알 수 있듯 적어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미국 목회자의 절대 다수는 FG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는 한결같이 LS를 행위구원론과 동일

서 접할 수 있는 글들은 대부분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폄하하는 내용이다. 논쟁이 벌어지면 거기에는 언제나 기존의 입장을 수성하는 측과 새로운 견해를 들고 나와 기존 견해를 반박하는 측이 있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서는 FG와 LS 어느 쪽이 수성의 입장일까. 많은 사람들이 LS가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현대 복음주의의 배경 속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야를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로 확장해 보면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개혁교회가 일관되게 고수했던 구원관에 더 가까운 것은 LS이며 FG가 오히려 변종에 해당한다. 실제로 FG의 수장격인 핫지스는 LS를 과거 청교도주의자들의 뒤틀린 믿음관을 현대에 되살리려고 애쓰는 자들이라고 말한다.14 LS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LS와 FG가 실제로 무엇을 말

13 Gentry KL, Lord of the Saved (P&R Publishing, 1992), p5. Gentry 자신은 LS파이다. 14 Hodges, Absolutely Free!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32. p220의 각주에서 알 수 있듯 핫지스는 존 맥아더가 신학적으로는 청교도주
주의 신앙 자체이다. 15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과 그의 White Horse Inn 사역(www.whitehorseinn.org 참조)의 동료들이 함께 저술한 Christ the Lord (WIFF and STOCK Publishers, 1992)는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매우 훌륭한 안내서이다. 이 책이 번역되었더라면 필자가 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호튼은 FG를 비성경적 구원론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지만 동시에 맥아더의 세대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또한 맥아더의 초기 저작들이 믿음의 본질에 대해 오해를 살 만한 문구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후 맥아더가 개혁주의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오류를 기꺼이 수정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를 비판하는 것은 그의 초기 저작들만 읽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FG 주의자들이 이 책
8
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에서 인용하는 FG의 자료들은 그들 내부에서 광범위한 지지와 인
을 받은 것들임을 밝혀둔다.
G: 믿음은 결단의 산물이며 믿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다. 이 장에서 그는 믿음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시는 것이 진실이라는 내적 확신이다.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17
0
-구
주재권 구원 논쟁은 무엇보다도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다. 개신교 구원론의 핵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즉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LS와 FG가 ‘믿음’, 혹은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두 진영 모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S는 FG가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FG는 LS가 구원 얻는 믿음의 기준을 높여놓는 오류, 즉 믿음뿐 아니라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추가하는 행위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앞에서 말했듯 대중들은 FG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으며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LS를 행위구원론자와 동일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록 주재권 구원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드물지만 많은 설교자들과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FG의 견해에 동조하는 입장을 기독교의 정통 구원론인양 가르치고 있다.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분명히 밝히지만 필자는 LS와 개혁주의의 구원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글의 목적은 LS와 FG의 견해를 단순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LS가 성경적인 구원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FG의 주장을 인용할 때 문맥을 무시하고 일부분만 인용하여 기괴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어느 집단에나 존재하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견해를 전체의 것인 양 과장하는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 필자가 이 글

F
핫지스(사진16)는 그의 책에서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장에 ‘믿음은 그저 믿음일 뿐이다 (Faith Means Just That-Faith!)’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맥아더를 위시한 LS 주의자들이 단순한 지적 동의와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을 표현한

성경이 말하는바 믿음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란 구원하는 사실들(saving facts)에 관한 증거를 말한다.
16 http://www.faithalone.org/bookstore/james.html
17 Hodges, p31.
9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선물에 대해 알아야 했으며 이 선물을 주
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했다.20
을 논증하기 위해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성경의 예화는 나사로의 부활과 모세의 놋
사건이다.
음성을 듣는 것을 통해 새로운 탄생이라는 놀
랍고도 비가역적인 기적이 일어난다.21
. 한 번
바라봄으로써 영생이라는 결과가 온다. 이보다 단순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22
핫지스가 말하는 saving facts는 첫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 둘째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 두 가지이다.18 이 사실들을 믿을 때 그가 약속하신 영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appropriate 할 수)19 있다. 영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그는 요한복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무언가를 너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너는 특정한 사실들을 알아야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보다 더 명료하고 이보다 더 단순한 것이 있겠는가? 이 죄 많은 여인은 중대한 정보를 얻기 전에는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믿음은 ‘단 한 번’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으로서 FG는 이 일이 대단히 단순하고 쉽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11:25-26)는 나사로의 생명 없는 상태에 방해 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사로야 나오라!”는 단순한 말씀이 죽은 자의 귀를 관통하였고 그 음성은 나사로에게 다시 생명을 주었다. 그 일은 이토록 단순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라는 말은 직설적이었고, 명료했으며, 효과적이었다. 나사로는 단 한 번 듣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한 순간으로부터 그는 살아났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단 한 번 마시고, 단 한 번 아들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다(민21:9). 모세에게 이렇게 하고 나서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21:8)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 본즉 모두 살더라”(21:9). 구원 얻는 믿음을 보여주는 얼마나 놀랍고도 단순한 장면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달았듯 하나님의 아들도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죄로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정하신 구세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생명을 얻는다
18 Hodges, p39.
19 Appropriate, appropriation 등의 단어는 FG에서 즐겨 사용하는 중요한 용어로서 믿음이 구원, 영생 등 하나님이 우리 외부에 베풀어 주신 선물을 나의 것으로 획득하는 수단임을 강조한다.
20 Hodges, pp40-41, 강조는 원문의 것.
21 Hodges, p61, 강조는 원문의 것.
22 Hodges,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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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지만 영생을 얻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다.
지어 그 믿음이 지속되지 않더라도 문제없다.
정적 순간이
며 이 때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가 비가역적인 영적 부활을 일으킨다.23
40). 심지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믿지 않게 되더
라도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시다.24
참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절
대로 아니다. 문제는 끝마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25
있는 데니스 록서(Dennis Rokser)는 FG의 입장에서
라본 LS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종하고자 하는 일생의 헌신 등을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의
목록에 추가시킨다.26
FG가 ‘단 한 번’이라는 단어를 중요시하고 믿는 것이 단순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대상(saving facts)에 대한 단회적인 신뢰의 결단으로 규정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있다. 전도에서 해야 할 일은 saving facts를 전달하고 이 사실들을 믿기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가 영생의 선물을 소유하게 되느냐의 여부는 이 결단에 달려있다. 단 한 번만 결단 하면 되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전혀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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