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 R.C. 스프로울

구원론 2014. 11. 21. 04:03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 R.C. 스프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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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년 동안, 스바냐서를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문제에 깊이 있는 답변을 제시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들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맹인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는 쏟아져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지라 그들의 은과 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1:14-18).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 본문에서 귀중한 복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문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불길하고 두려운 소식을 전한다. 전체적으로 매우 불길한 어조를 띠고 있는 이 본문은 분명 목회자들이 별로 다루고 싶어하지 않을 부분이다. 물론 본문 메시지는 오늘날의 사회 상황과도 큰 관련이 없다. 스바냐는 주의 날을  가리켜 "분노의 날이요 환란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라고 묘사했다. 또한 그는 "경고, 고난, 피, 분노, 불" 등과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이렇듯 스바냐는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여 주의 날을 명확하게 묘사했다. 그의 묘사는 주의 날의 공포를 잘 전달해 준다. 그러나 본문은 스바냐가 한 예언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질 것을 묘사하는 스바냐서의 예언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스바냐서는 구원의 약속으로 끝을 맺고 있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예고하는 끔찍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이 구절을 설교 본문으로 삼은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니라 이 구절이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는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제공하는 보기 드문 성경 구절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논한다는 것은 곧 성경의 중심 주제를 논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의미는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개념이다.

 

구원의 시제

 

지금까지 "구원"이라는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구원하다"라는 표현 역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는 영어보다 동사의 시제가 다양한데 "구원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도 신약성경에서 다양한 의미와 다양한 시제로 사용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창세전에" 구원되었다고 가르친다(엡1:4). 이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과거인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지혜로 우리가 영원 전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예수께서 임금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고 말하는 때가 올 거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었다"라는 과거 미완료시제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일련의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통해 역사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소명,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준비되고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고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는다"라는 현재시제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상태이며,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다.

 

또한 성경은 "구원하다"는 동사를 "구원받고 있는 중이다"라는 현재 미완료시제로도 사용한다. 구원이란 단순히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믿음을 갖는 순간부터 구원은 시작된다. 구원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한다. 성화의 과정도 구원의 과정으로 묘사된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미래시제로 사용한다. 우리는 구원받는 중이며, 장차 온전히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마지막 단계이자 완성이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다양한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조금 혼동을 겪기도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성경이 "구원"이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와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궁극적인 의미를 탐구하려면 반드시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9,10).

 

"장래의 노하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자들에 따라서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믿기도 하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차 다가올 진노를 모면하는 것이다. 장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참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을 예언한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거짓 평화를 외친다.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는 주의 날은 기쁨과 빛과 영광이 가득한 날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로 백성의 비위를 맞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심판의 날에 결코 행복한 운명을 맞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아모스 등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가 한결같이 전한 메시지였다. 아모스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5:18-20).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복한 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재앙의 날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스바냐의 예언대로 환란과 고통의 날이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그날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날은 환란과 고통, 황폐와 패망, 구름과 흑암의 날이다. 스바냐는 주의 날이 오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1:18)고 예언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구세주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했다(살전1:10 참조).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다.

 

주님에 의해,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 또 하나 있다.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돈이나 권력, 공로,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간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온다. 오직 주님만이 구원을 베푸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구세주뿐이다. 궁극적인 구원은 주님께 속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바로 구원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일 뿐아니라, 그분의 진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은 죽은 뒤에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심판의 날에 구세주를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다. 산을 가리켜 "내 위에 무너져 나를 덮어다오. 나를 가려다오" 하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앞에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피하는 자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며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당신은 구원 받았는가?" 이 질문은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게 쏟아져 내릴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에 재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당하셨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단언컨데, 이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면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R.C. 스프로울의 '구원'에서 발췌, 11-31p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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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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