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에 대한 반성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행위이시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이 많은 이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또 있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조직신학에서 반드시 배운다. 물론 구원의 서정 서론에서 “그 궁극적 실현에는 긴 과정을 요하는 구원 과정의 순서를 논한 것이다.”라고는 했지만 막상 서정의 모든 것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고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살아생전에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조차도 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신자가 받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과 신자가 그것을 수용하는 분야에서의 일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논하자면 구원의 근원이시고 주체자이신 하나님의 일을 논하는 것이 우선일 테고 그것을 받아 수용하고 혜택을 누리는 신자의 일을 나누어서 따로 논해야 마땅하다.

우선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전통 장로교의 구원의 서정을 간단히 나열해보자.

1. 소명

2. 중생

3. 회심

4. 칭의

5. 양자

6. 성화

7. 견인

8. 영화

이것은 원래 서양의 학자들이 7가지로 했던 것을 박형룡 박사가 견인을 추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중생, 회심, 성화 3가지는 명확히 신자의 몫이고 나머지 소명, 칭의, 양자, 영화 등, 4가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전적으로 소속된다.

그러면 나머지 1인 견인은 신자에게 해당되더라도 신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특징 설명에서는 명확히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서나 신자의 일에서나 다 같은 것은 모두 성령의 활약이 전제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다른 양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은 어디까지이고 신자의 자의적 결정이 어디가지 요구되는 것인지를 다루지 않고 있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성화가 현세에서는 완성되지 않으며 영혼의 성화는 성도의 죽음에서, 육체의 성화는 육체의 부활 시에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면 바울의 주장을 되새겨보자.

[빌3:10~12]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 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성경에서 바울이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이 자기가 빨리 죽어서 부활에 이르겠다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살아생전에 성화를 이룩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위 성경 15절에서 바울을 포함하는 몇 사람들이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했다.

[빌3:15]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신자가 하나님의 요구처럼 거룩할 수 있는지, 또는 완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확대하고 이유를 붙여서 이 성경을 본문의 이야기에서 제외시키려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이다. 온전히 이룬 사람들은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할 더 이상 다음단계가 없다.

16절에 말하기를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온전히 이룬 자들이 확실히 존재하며 어떤 상태인지와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까지 설명되고 있으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문제를 더 짚어보자

[롬8:29, 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 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등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 5가지를 빠짐없이 나열하고 있다. 특별히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은 30절의 마지막 부분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이다.

구원의 서정에서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 죽거나 재림 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어째서 성경과 신학이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구원의 서정에서 말하는 영화는 위의 성경 로마서 8장 30절의 영화와는 서로 다른 어떤 무엇인가? 분명히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여 완료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 성경을 보면 마치 바울이 탕자의 비유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아버지는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서 집나간 아들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다. 멀리서 아들이 오는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가서 포응을 하고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마을사람들을 초청하여 떡 벌어지게 잔치를 벌였다.

패륜아를 위하여 얼마나 영화롭게 대하여 주었든지 그토록 얌전하던 큰 아들이 시기가 나서 투정을 부리기까지 하였다. 부르신 자를 곧바로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조직신학은 그 영화로운 대접이 먼 훗날로 지정되었다니.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행위이시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이 많은 이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또 있다.

칭의에서, 사실은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셨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성화를 통하여 언젠가는 의인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라는 것은 행위이다. 상태의 어떠함이 아니다.

행위는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여 의롭다는 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장차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은 착오일 뿐이다. 하나님은 나중에 다시 더 온전한 의를 선포해주시지 않으신다. 그럴 기회는, 오류가 있는, 이 구원의 서정에서조차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칭의는 우리의 어떤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단지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거저 넘겨받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 훗날 정말로 의롭게 되는 날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칭의에 대한 성경을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자.

[롬5:14, 15, 18, 19]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예수의 의가 신자 모두에게 전가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아담의 불순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됨. / 예수의 순종이 신자 모두에게 전가

2018. 5/10 17:36 정 정조

기독교이단사이비 연구가 원로목사 정정조

 

김문제  munjett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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