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본문: 딤후 2:11-13

요절: 11

 

?미쁘다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11 미쁘다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노릇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없으시리라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복음을 위해 싸우고 고난받는 예수님의 증인들을 격려합니다. 증인으로서의 우리 삶은 전투에 임한 군인과 경기자와 농부와 같이 수고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결코 무사히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투쟁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에 좋은 모범이 없이는 너무나 살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자기 예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도도 죄인과 같이 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이제 처형을 기다립니다. 사도는 우리를 바로 이러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만약 사도가 이렇게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이미 1-2세기에 완전히 변질하여 다른 종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이러한 가르침에 순종하여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피를 흘림으로써 신앙과 가르침을 지켰습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려면 먼저 주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지 않으면 결코 증인의 삶을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는 , 어찌하든 살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죽되 영원히 죽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진리의 말씀에 대해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자가 되고자 합니다.

 

사도는 본론을 말하기 전에 먼저 미쁘다(피스토스) 말이여라고 합니다. 이것은 말은 믿을만하다!”라는 의미로서 뒤에 나오는 말을 강조합니다. 무엇이 강조되었습니까?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시작한 1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반드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마음에 꽂혀있어야 하며, 매일 살아나가는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이해와 실천에 따라 여러분의 영생이 달려있으므로 정말로 중요합니다!

 

우선 본문의 형식과 구조를 보겠습니다. 본문은 NA(원어) 판에 송가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4 문장이 모두 조건절(“…한다면”) 시작하고, 뒤따라 나오는 주절은 “…하리라 되어 있습니다. 있으면 개역개정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다시 번역을 합니다:

 

말은 믿을만하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우리가 끝까지 견디면                         함께 다스릴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미래)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현재)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를 부인하실 없기 때문이다.

 

 

1.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것이요

 

그리스도인은 주와 함께 죽었다라는 말은 바울 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므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과거형

  • 6:2-8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가운데 살리요…그의 죽으심과 합하여…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우리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죽은 죄에서 벗어나…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줄을 믿노니

  •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현재형

  •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8:36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고전 15:31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고후 7:3 “내가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이것을 통해서 분명히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죽은 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6:2),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에 대해 죽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입으로 낱낱이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이심전심이 통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죄를 짓는 자신을 미워해야 하고, 거룩함을 갈망하여 전심으로 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고 감동할지라도,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말씀이 항상 자기를 찔러야 합니다. 교회는 주로 말씀에 찔림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또한 저와 같은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사함이 없는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항상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 찾지 않고 남에게 찾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있으므로 교회가 어지러워집니다. 그들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실제로 자기 생명을 잃는다면, 우리 주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자기 영광에 영원토록 참여하게 하신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있습니다. 그는 이생에서 자기를 좇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3).

 

여러분을 포함하여 대부분 교인이 자기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심하지 않았음에도 강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징그러운 죄를 지으면서도 이것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습관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에 무관심하거나 이것을 싫어하고 어기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죄를 생각하고 , 수십 년간 고통스러워한 경험이 없음에도 자기가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음에도 자기는 영적이라고 생각하므로 남을 전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구원의 확신은 여러분을 지옥으로 이끄는 독약이 있음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구원을 수없이 의심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죄가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자기도 놀라고 불안해서 그리스도를 찾지만,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고후 4:10-11 다시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의 특징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고사는 입니다. 그는 항상 죽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를 위하여 자기를 죽음에 넘겨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있는 시체에 욕설을 퍼붓는다고 해서 시체가 화가 나서 다시 벌떡 일어나겠습니까? 옛사람 때문에 잠시 그럴 수는 있지만, 이것은 잠시여야 합니다. 상처를 받는 것은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함의 은혜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실을 몰랐다면,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러분에게 엄청난 경고가 됩니다. 오늘 설교가 무의미하게 끝나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자기에게 기울여져서 이것이 이미 굳어졌으므로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두 자기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2. 우리가 끝까지 견디면 함께 다스릴 것이요

 

말씀은 누가 구원을 받으며 구원의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칩니다. 단지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받습니다. “ 너희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13). 곳에서 모두 휘포메노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끝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끝까지 견디지 못하면 고된 행군에서 탈락하여 적진에서 죽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너무 힘들다고 달리기를 중단하면 상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을 여러 들었을 것입니다. 성도는 끝까지 견디고 인내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안에서는 죄가 끊임없이 나를 죄로 부추기고, 외부에서는 나를 유혹하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잠시라도 방심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이렇게 험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만 구원받는다 진지하고 경고하는 설교를 듣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십자가를 지며, 부담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르는 자는( 16:24), 주님과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을 입니다. 그분은 교회에 보내는 순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1). 우리 주님이 승리하신 능력으로 승리하고, 자신을 이기고 극복하는 자에게는, 그분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주실 것입니다(참조: 22;3-5). 이렇게 우리의 보잘것없는 신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대답해주실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진지하게 설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모두 목표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7:3).

 

 

3.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예수님도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10:33).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매우 엄하게 경고하십니다.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번만 부인할지라도 재생의 기회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계속 그분을 쉽게 부인하게 것이고, 이미 타락한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을 한두 부인할지라도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가 자기 마음을 다스리거나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부인하기 전에 부인하려는 마음을 바꿀 수는 있으나, 부인한 후에 이것의 심각성을 깨닫고 통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우리 마음은 고무풍선처럼 쉽게 늘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6:4-6 에서 배교와 같은 무거운 죄에 대해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합니다: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그러므로 신사참배와 같은 배교는 결코 용서받을 없습니다. 당시 모든 한국 교회는 매주 예배 시에 일본 신에 대해 고백을 하고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이것을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마음은 아스팔트처럼 완전히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한 교회가 나중에 감옥에서 풀려난 성도를 오히려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던 이유는 이미 양심이 더러워진 채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회개하지 못하고 부흥과 성장운동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단순히 자비한 아버지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양적으로 팽창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후손입니다. 우리는 우리 피속에 이들의 더러운 피가 조금씩은 흐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정말로 예외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과거 때문에 특히 한국인은 실수로라도 주님을 부인하는 일이 없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식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돌이킬 없는 죄도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언행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식하지 못하고 짓는 죄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은 매우 죄이므로, 우리 생각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죄는 반드시 기억이 것이고, 이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드러났음에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점차로 둔해지고 굳어져서 나중에는 회개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저는 50-60 전에 지은 죄도 갑자기 기억이 됩니다. 그간 번도 생각이 나지 않고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납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하고 부끄러운 일이 한둘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함의 은혜에 더욱 감사를 드립니다. 만약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점차로 생각이 나지도 않을 것이고, 결국 마음이 돌처럼 굳어집니다. 그러면 쉽게 주님을 부인해도 자신은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다시 듣습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4.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면(못할지라도)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말씀은 바로 앞의 말씀과 거의 반대되는 것처럼 들리므로, 해석자에게 어려움을 줍니다. 바로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주님도 그를 부인하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주님께 신실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에게 신실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장은 주님의 신실을 강조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신실하지 못한 것과 주님의 신실하심이 선명하게 대조가 되어 주님의 신실이 크게 돋보입니다. 진실로 가장 위대한 주님의 종일지라도 주님의 엄밀한 판단으로 본다면 신실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함의 은혜를 근거로만 있습니다. 이것이 루터가 가르친 이신칭의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구절은 주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절은,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말씀을 듣고 불안해진 우리 양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있습니다. 과연 내가 앞으로 주님을 번도 부인하지 않고 영적 싸움을 싸울 있으며,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낼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저도 앞으로 15년은 살아야 같은데, 저의 연약함을 생각하면 구원에 대한 자신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믿음을 끝까지 지킬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 이상하게 사람이나 침해에 걸린 사람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도는 대답합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지라도 주는 계속 신실하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로 위로가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도우십니다. 만약 우리가 실수로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분은 반드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가 회개한다면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계속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저의 위로가 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있게 자신을 생각하며, 영원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사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면, 내가 지금 죽어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왕처럼 다스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정말로 내가 죽어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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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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