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참된 진리(드흐라프)

2012/01/10 11:41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율법이 언약의 율법이라는 사실은 죄의 지식을 아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율법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죄의 참된 지식을 줄 수 있는가? 양심의 가책만으로는 우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51:17)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한 결과로서 우리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종종 하나님이 짓누르고 깨뜨리실 때까지 자신을 책망하는 양심을 붙들고 오래 동안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책망을 받게 되면 그 책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떄문에 우리는 율법을 사랑의 율법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율법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신다.  

 

소위 행위 언약의 율법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10:28)는 규정이 아니다. , 이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규정이 아니다. 행위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공로 및 대가 개념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통해 언제나 먼저 사랑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셨다. 이 관계에는 어떤 규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규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언약 율법(covenant-law)이다. 따라서 행위 언약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호의의 언약(covenant of Gods favor)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낫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명령은 언약을 떠난 자에게 해당한다. 그에게는 다시 스스로 율법을 완성하여 살아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길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옛 언약은 실은 은혜의 언약을 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율법을 통하거나 율법에 의해서는 사람은 저주의 판결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해야 함을 알려준다. 더욱이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 언약 밖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옛 언약은 인간의 저주 상태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셨다.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룰 수 있으셨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조차 율법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언약으로써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해 사랑 가운데 먼저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주셨다.  율법의 형태가 법적인 형식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양면을 띄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면서도 뒤로 물러나셨다.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베일 뒤에 숨으셨다. 이제 율법은 언약의 율법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것으로 우리와 및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규정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율법을 볼 때 그 율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및 그 사랑의 요구를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깨어지게 만든다. 그때에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깨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책임하고 무반응적인 삶에 대해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는 언약의 법으로써의 율법은 우리 안에 책임을 일깨우고 계속적으로 책임 의식을 갖도록 채촉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여길 때, 우리의 사랑을 위한 지침과 규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언약의 율법으로서의 율법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표현할 것일 뿐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사랑-율법은 하나님도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초월하여 있는 어떤 외적인 기준이 아니다. 또는 사랑-율법은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다른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여 하나님을 통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율법이 하나님 위에 있지 않고 또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스콜라 철학이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그러한 신학적인 관건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고백은 오늘날까지 큰 가치가 있다. 이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발견되는 가치이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을 벗어난 어떤 외적인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할 때 우리는 율법을 신격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에서 발견된다. 언약적 율법으로써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그 율법에 따르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율법을 지키는 데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주의 사랑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게 되는 것은 주의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일을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킬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율법주의는 그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거나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 사는 데 있지 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데 있다. 율법주의자들의 최고의 목적은 율법에 일치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수고로운 일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 심지어 율법마저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러할 경우 율법의 기능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되고 사람들은 율법을 오용하게 되고 율법 자체를 향상시키게 된다. 율법주의는 하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위해 충성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알 때 우리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은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된다. 이는 특히 안식일 명령에 대한 자세에서 분명하여진다. 그리스도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안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신성화하여 섬기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율법이 오용되는 정도는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되는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2:27)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는 하나님은 언약적 율법 안에서 사람의 삶에 복을 베푸시며 사람은 율법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안식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청교도의 여러 형태 역시 율법주의에 빠진 것들이 있다. 특히 어떤 청교도 단체 내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 문제는 안식일과 관련한 순종과 섬김이 본질적으로 율법 자체과 관련되어 버린 사실이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언제나 교회 내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해 율법에 일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고 율법은 속박하는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상반되게 된다. 그 이유는 은혜로 받은 율법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규칙으로 사용할 때 사람은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욱이 율법을 임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쉽게 극복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전혀 다른 뭔가를 명령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하는데서 하나님의 주권이 칭송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크게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은 율법이 임의적이어야만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전우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율법을 결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전우주적으로 적용되는 율법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법에 묶여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온 우주에 적용되는 율법이 없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과 주어진 상황 만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되면 상황 자체가 율법이 되며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자체가 율법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이 아니며 도리어 상황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주장과 함께 참으로 가장 달갑지 않은 형태의 이상주의에 이르렀다. 인간들은 다양한 관계의 이상들을 형성하여 놓았다. 인간들은 그러한 이상으로부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율법을 따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은 완전하게 자아 의지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만든 율법에서 나온 그러한 행위와 자세를 여러 인간 관계 가운데서 보게 된다. 결혼 관계에서, 가족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과 소유의 관계 속에서, 집단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국가들과의 관계 가운데서조차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적용한다. 하지만 사물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이상주의는 실제로는 불법의 형태일 뿐이다. 물론 이상주의와 함께 많은 불법이 묵인되고 위선이 난무하게 된다! 우리는 이상주의를 통해 사랑은 신이다라는 전제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선포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이 결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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