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서 율법의 역할

스데반 황 목사

I. 서론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복음”을 강조하다가 율법의 존재와 그 역할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율법주의”와 율법의 바른 기능을 혼돈함으로 율법이 없는 복음을 외치는 사례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없는 복음이란 사실 성경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율법이 없는 복음은 “무법주의” (Antinomianism)로 향하게 되어 복음을 아주 값싸고 능력없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도 바울의 복음을 오해하여 바울의 복음을 “무법주의”로 만든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들은 “마음껏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드러날 것이니 죄를 짓자. 더 이상 율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하여 바울은 탄식하며 부르짖는다.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롬 3:8)

사실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율법과 은혜에 바른 인식은 치명적으로 중요하며 나아가 우리의 개인적 구원에 대한 인식과 연결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 받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복음과 율법의 바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은 이 글을 통하여 복음과 율법은 서로 상충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하나님께로서 온 선물로서 율법은 복음의 절대 필요성과 위대함을 드러내고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이루어 간다는 진리를 롬 3:19-31을 통하여 주장하려고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 로마서 3:19-31 )

II. 본론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은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곧,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 개혁의 창시자였던 마틴 루터(1483-1546)의 대 발견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귀한 진리가 불법을 행하여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불법 (”lawlessness”) 기독교로 크게 오해 되는 일이 번번히 있었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 내부에는 언제나 두개의 큰 이단이 있었다. 첫째는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란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어떻게든지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다. 이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필요 없게 된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모범 정도가 될 뿐이다. 이들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둘째 이단은 무법주의(antinomianism)이다. 이들의 주장은 율법이란 구약에나 필요한 것이지 지금은 은혜 시대이며 따라서 율법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오직 믿음”을 주장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를 제안한다. “오 주님! 은혜를 감사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신나게 죄를 지으면서 죄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흔히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방종하는 집단을 이루게 된다.

이 두 가지 이단을 향한 교회의 대책과 성경의 균형 잡힌 답은 다음과 같다. 곧, 율법은 우리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회개케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게 하고, 반면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은혜는(믿음은) 율법을 세우고 율법을 지키게 한다는 것이다.

먼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의” (righteousness)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의”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이 지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가 “의”로와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율법의 요구를 완벽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의”를 이루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은 19-20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곧,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함으로 모든 인간의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율법 앞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절대기준에 의하면 롬3:10 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가 되는 것이며 율법에 의하여 “모든 사람이 율법아래서 의로울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그 누구라도 율법에 의하여 지옥에 보내더라도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때 “복음” 이 등장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복음,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은혜로만 얻는 구원의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다. 이 구원의 길이 얼마나 중요하면 이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갈 1:7-9을 통하여 경고한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멈춘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복음에 관하여 그 은혜와 복음의 능력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저질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타락하는 사례가 이 땅에 너무나도 많게 되었다. 나아가 복음을 빙자하여 죄를 합리화시키면서 죄를 계속 저지른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믿는 “복음” 때문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구원과 믿음에 관하여 정리하여 보자.

(1)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곧 십자가의 은혜로 받는다. 이 진리는 영원한 진리이다.

(2) 그러나 우리가 이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속고 있는 점이 있다. 이는 자신들의 “믿음”에 관한 착각이다. 흔히 우리가 오해하는 점은 우리의 지적 동의를 믿음으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단지 어떤 내용에 지적인 동의를 한 후, 우리는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한다. 이것은 믿음에 대한, 그리고 은혜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은 “바른 믿음”은 필히 우리를 구원한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죽은 믿음, “거짓 믿음”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곧 많은 사람이 거짓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 믿음에 관한 착각은 자신의 거짓 믿음을 통하여서도 자신은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하는 것이다.

(3) 고전 6:9-10을 읽으면 이 내용은 고린도 교회에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거짓 믿음의 교인들이 발견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갈5:19-21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4) 그러므로 로마서 3:31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서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아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구나.!”로 이해하여 율법주의자가 되고, 결국 바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여 저주 받는 자가 된다.

바울의 주장을 좀더 확실히 이해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연구하여 보자.

(1) 요한복음 14:15를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한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증거이다.”가 된다. 사실 예수의 계명을 요약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계명이다. 예를 들어 고전 13장을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가르쳐 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이러한 계명이 없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2) 요한복음 15:10도 계명을 지키는 것을 강조한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 일서의 강조점을 보아도,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입증된다. 계명은 성경에 있어서 율법이며 이는 곧,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음을 말한다.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랑은 가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그 사랑은 율법을 알고 지킴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바로 율법을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율법이 없이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과 믿음의 관계는 바로 사랑과 율법의 관계와 유사하고, 이는 율법과 은혜는 (믿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증명한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사람에게 명령하고 그 내용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어디까지 요구하는가?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만큼 너희도 완전하라.’를 요구한다.

(2) 완전히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합격”을 말하면서 축복 및 상급을 약속한다. 그러나 율법을 완전히 못 지키는 자에게 “정죄”를 말하면서 “벌”, “심판”등을 선고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는 율법의 정죄와 함께 그들은 죄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

(3) 율법은 죄를 고발한다. 가장 깊은, 숨겨진 죄라도 드러낸다. 마치 흠이 없이 깨끗한 양심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양심은 사실 죄로 인해 더럽혀져서 자신의 더러움과 죄악을 보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율법을 볼 때, 율법은 마치 영혼의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더러움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곧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Doctor M.R 디한의 책 “율법이냐 은혜냐”에서의 설명에 의하면 율법의 기능이란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유리컵의 먹물을 젓가락으로 젓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인간들의 숨겨진 죄악들을 다 드러내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 그 정체를 알려주는 일을 한다.

(4) 율법은 죄로 더욱 죄를 짓게 하고 반항하게 만든다. 율법과 죄는 사이가 전혀 좋지 않다. 율법이 항상 먼저 죄에게 시비를 건다. 그러면 죄는 더 큰 죄를 지으며 율법에게 반항을 한다. 예를 들면 “죄라는 못된 놈”이 침을 튀기면서 말한다고 하자. 율법이 말한다. “침 튀는 것은 실례입니다.” 죄라는 놈은 이 지적을 듣고 율법에게 가래침을 뱉으면서 더욱 반항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율법은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거나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죄라는 주인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독재자인지 그 본색을 드러내게 한다.

그러나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은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곧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안에서 주어지는 은혜가 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율법을 어긴 자를 용서할 수 있거나 율법 아래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죄인을 나오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을 감옥에 넣는 역할은 하지만 그 사람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2) 율법은 죄로부터, 죄라는 주인으로부터 죄의 노예들을 풀어 주거나 해방 시킬 수 없다. 율법은 죄를 폭군 주인으로 드러내고 그 악함을 드러내지만 그러나 그 주인에게서 그 노예를 구해주지는 못한다.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율법이 하지 못하므로 다른 것이 해야 하는 데 바로 이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요 “믿음”이다.

(3) 따라서 “은혜와 믿음”은 율법과는 상대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곧, 죄의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진다. 은혜와 믿음은 그 무한한 능력으로 죄라는 폭군과 싸워 우리를 그 암흑과 악의 세력에서 구출해 내어 승리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구원” 또는 “구속”이라 하며 오직 은혜(믿음)로만 가능하다.

(4)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 애굽의 바로 왕은 “죄”의 왕이요 사탄을 상징한다.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 피는 그 피를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혜요, 그 은혜는 엄청난 능력으로 그 강한 바로 왕으로부터 해방과 구원을 이루어낸다. 곧 은혜는 유월절의 피를 믿고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구원의 대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나타나 “죄”라는 폭군과 싸워 승리하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이는 내 힘 가지고 사탄과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드러나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은혜요,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역동하는 힘이 있다.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드러나는 유일한 통로,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이다.

(6) 따라서, 은혜는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게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그래서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그 것, 즉 죄인을 해방하고 그로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죄를 짓지 않도록, 율법을 지키도록, 율법을 완성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겠다.

(7)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믿음을 통한 같은 이 능력의 은혜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간다. 이는 내가 율법을 이룸이 아니고 (율법주의)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율법을 이루어 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은혜 속에 있는 자가 아니며, 동시에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님이 판명된다.

(8) 야고보서는 율법과 믿음 (은혜)의 관계를 정리한다. 율법주의가 야고보서를 읽으면 행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불법주의자 (즉, antinomian)들은 야고보서는 성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두 주장이 틀림을 알 수 있다. 사실, 야고보서는 가짜 믿음을 구별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참 믿음은 행위(순종)로, 열매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고 은혜를 얻은 자는 모든 삶에서 선행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과 믿음의 바른 관계에 관한 이해를 통하여 야고보서 3:11-12에서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하고 야고보서 2:26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9) 아무튼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자들은 율법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제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그 안에 사시사 율법을 완성해 나가는 삶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과 부활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정리하면

(1) 은혜로 우리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다. 주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죄의 세력이 틈 탈 수 없다.

(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는 율법을 폐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 시킬 수 있도록 돕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율법의 요약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믿음의 삶이란 이웃을 향하여 선한 삶과 사랑의 삶으로 나타난다.

(3) 은혜는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도록 하며, 새 주인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 속에 나타나 죄와 사탄과 대항하여 싸우는 능력으로 표출된다.

(4) 은혜를 받았는지, 참 믿음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율법으로 그를 평가할 수 있다. 곧 그들의 삶의 열매를 볼 수 있다.

(5) 그러므로 “은혜”를 빙자하여 죄를 지어도 된다는 방종된 가르침을 성경은 결코 허용치 않는다. 롬6:15 “그런즉 우리가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 이유는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실제로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의의 은혜의 상태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죄의 노예 상태 : 죄악된 노예생활. => 의의 은혜 상태 : 의롭고 거룩한 하늘나라의 삶.

죄의 종 => 의의 종

사탄의 종 => 하나님의 종

율법을 어기는 상태 => 율법을 지키는 상태

사형 선고 => 하나님의 자녀, 결혼 축제

(6) 율법은 근의 공식처럼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우리가 지금 죄의 종인지 의의 종인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율법을 통하여 우리의 죄의 종된 상태를 발견하면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기능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히 변함없는 율법의 절대적 역할이다.

(7) 다시 말하면,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냄새나는 부패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우리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나는 지옥불에 떨어져 합당한 자이구나.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이구나”를 깨닫게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그리스도를 발견케 돕게 몽학선생인 것이다.

(8) 이 때 주님을 발견하는 자마다 주님 안에서의 주어지는 은혜를 체험한다. 그 은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거룩한 삶을 살게 도와준다. 은혜로 말미암은 거룩한 삶 속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있고 모든 하나님의 영광과 약속이 담겨 있다. 또한 이 은혜는 계명의 대 강령인 “목숨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9)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0) 이에 바울은 로마서 3:31을 통하여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III. 결론

예수 안에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끝이 있다. 곧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구원을 얻은 모든 신자들에게 지금도 죄와 싸워 이길 은혜를 주시는 분은 예수이시다. 오직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승리의 능력을 얻는 은혜를 입는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서로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예수 안에서 이미 얻게 하고 또한 예수 안에서 그 의를 이루어 가게 돕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