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구원받다]

구원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려면 반드시 "무엇이로부터 구원받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9,10).

"장래의 노하심"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자들에 따라 서기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킨다고 믿기도 하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장차 다가올 진노를 모면하는 것이다. 장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마지막 심판을 믿지 않는다. 심지어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예수님을 전한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의미 있고, 그 때문에 삶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친다면 당신이나 잘 믿으세요. 나는 예수가 필요 없습니다."

이런 말이 과연 옳을까? 마치 집에 불이 나지 않았는데 왜 소방수가 필요하냐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심판의 위협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구세주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라는 논리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장차 심판의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마지막 심판을 믿는다면, 아마도 복음전도의 열정이 지금보다 세 배는 강렬해질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참 선지자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을 예언한다. 반면, 거짓 선지자는 거짓 평화를 외친다. 이것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다. 사람들은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거짓 선지자는 주의 날은 기쁨과 빛과 영광이 가득한 날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라는 말로 백성의 비위를 맞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우지 않으신다. 그런 사람은 심판의 날에 결코 행복한 운명을 맞이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미가, 아모스 등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가 한결같이 전한 메시지였다. 아모스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암 5:18-20).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복한 날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재앙의 날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날은 스바냐의 예언대로 환난과 고통의 날이다.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그날이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날은 환난과 고통, 황폐화 패망, 구름과 흑암의 날이다. 스바냐는 주의 날이 오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주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라"(습 1:18)고 예언했다.

무엇으로부터 구원받는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구세주가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말했다(살전 1:10 참조).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구세주이시다.


R.C. 스프로울의 '구원' 중에서(25-28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