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
사랑의 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앞장에서 우리는 정확히 하나님의 사랑의 영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때때로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기에 다시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제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사랑의 영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모든 악의와 고통은 그 자체가 본성으로 남아 각자 그 일을 나누어 갈망하고 분노하며 대립한다. 따라서 본래 세상적인 인간은 갈망, 분노, 대립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오직 자신을 부인하고 죽으라는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반면 지혜롭고 거룩한 인간이 지닌 모든 선함, 온전함, 행복, 영광, 기쁨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 존재하며 인간의 모든 삶 속에서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시는 주님의 빛과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은 사랑과 즐거움이 가득한 삶의 모든 특성을 채우고 축복하며 그들과 연합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복음의 방법이 아니고서는 천국의 행복과 온전함에 이를 수 없다. 즉 하나님과 본성이 연합하고 인간이 주님의 말씀과 영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날 때만이 가능하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으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하며 그 안에서 일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 없이 우리의 삶은 결코 처음의 거룩한 상태로 변화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거룩한 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말씀이 육신이 되셨으며”(요 1:14),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온갖 악의, 죄, 고통은 틀림없이 각자의 특성대로 본성을 거스르며 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분명 잃어버린 사랑의 영을 바라고 구하며 열망한다. 따라서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일하고 거하시는 곳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리를 따르라

어쩌면 당신은 순결하고 보편적인 사랑의 영을 얻지 못해 힘들어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랑을 머리로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랑이 즐겁고 적절하다는 이성적인 확신에서 그것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사랑이란 뚜렷한 생각이 있다고 해서 곧장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이성이 흔들리고 사랑이 한낱 상상과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인간 스스로가 범하는 오류일 뿐이다. 마치 본성을 거스르며 손과 발의 일을 눈이 대신하도록 노력하는 것과 다름없다.

사랑의 영은 자연과 생명의 영이다. 자연과 생명의 모든 작용은 그 활동하는 힘에 따라 각각의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성장할 수 있다. 뜻하지 않게 우연히 발생하지 않으며 모든 일이 같은 하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불, 공기, 빛은 어느 때는 이곳에서, 또 어느 때는 저곳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은 늘 어디서나 같은 방식으로 같게 작용하는 자연의 특성을 따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같은 이유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진정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육체의 힘이나 건강이 실제로 존재할까? 혹은 정말 튼튼하고 건강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의심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육체의 힘이나 건강은 머리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순결하고 온전한 사랑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의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은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날 수 없으며, 육체적인 생명과 속성은 물론 영적인 생명과 속성조차 변화시킬 수 없다. 악한 영과 사탄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온전하고 순결한 사랑뿐이다. 그 사랑만이 거센 폭풍우에게 “잠잠하라”(막 4:39)고 말하며,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받으라”(마 8:3)고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 중의 하나이다. 반면 이성은 키를 단 1cm라도 자라게 하거나 영적인 삶을 변화시키거나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 온전한 삶은 마치 활짝 핀 꽃과 같아서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기까지 겪는 수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엄밀히 말해 온전한 마음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우선 실제로 삶의 모든 특성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함께 자라야 한다. 온전함이란 오직 뿌린 씨앗을 통해 피어날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씨앗이 변하여 뿌리를 내리듯 우리 마음 역시 더 고차원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은 마치 꽃을 피우는 씨앗처럼 반드시 죽음을 통과하고 생명에 이르러 하늘의 영, 불, 빛으로 축복받게 될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불, 빛, 대기의 축복으로 죽음을 뚫고 생명을 얻어 향긋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완성된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다른 방법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꽃을 피우는 그날까지 처음의 모습에서 더 높은 차원으로 변화되어 나갈 때 인간의 마음은 온전해진다.


거룩한 사랑의 탄생

우리는 다음과 같은 확실한 진리를 알고 있다. 선은 위로부터 오지 않고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우리 영혼 가운데 들어오셔야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선 본성의 상태가 적합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탄생 과정이 시작되며 빛이 생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의 영이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쁨이다. 따라서 기뻐할 수밖에 없는 즐거운 상태여야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기쁨이 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새롭게 태어나며 필요한 모든 본성을 공급해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기쁨이나 사랑의 영의 역사를 맛볼 수 없다. 우리가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그 마음속에 존재하실 수 없다. 오직 갈망, 욕구, 대립만이 존재하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소위 지혜, 명예, 정직, 신앙과 같은 거룩함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를 갖기 때문이다. 또한 본성적으로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게 교만, 야망, 이기주의, 시기, 복수와 같은 상처를 종종 입힌다. 한편 지혜와 신앙을 고귀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야망과 이기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속성이나 그와 같은 분위기와 성향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본성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나을 수 없으며, 어떤 영적인 존재가 마음속에 들어와야 올바른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어떤 원칙이 바뀌면 성직자와 공직자 모두를 비난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러한 책임 전가는 너무 성급한 처사이다. 지금껏 누구도 위로부터 오는 도움 없이 원칙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럴 가능성조차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 ‘옛사람’(롬 6:6)이라고 불리는 본성적인 인간은 그 행동에 수없이 다양한 이름을 붙인다 해도 늘 똑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교회나 국가가 움직이는 방법과 행동에 상관없이 자아는 오직 이기적인 동기만을 갖는다. 분명 교육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가 이기적이다. 따라서 거룩한 생명이 그 안에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이성적인 작용과 본성의 힘으로는 결코 사랑의 영과 거룩한 선을 소유할 수 없다. 사실 이들을 소유할 수 있는 적합한 때와 장소는 따로 있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태어나 인간의 본성을 압도할 때 그때와 장소가 마련될 수 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분명한 진리가 드러났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주님이 인간이 되어 타락한 본성 가운데 태어나 그들과 연합하고 생명이 되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갈급, 고통, 대립, 자학이 가득한 지옥에 영원히 머무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며 분명히 나타나셔야 한다. 그전까지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괴롭히는 갖가지 모습에 불과하다.


자기를 죽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안에서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이것이 사랑의 영에 필요한 반응이다. 십자가나 자기를 죽이는 것은 선행을 위한 하나의 도덕적인 원칙이다. 그럼 이번에는 인간이 의지적으로 도덕적인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했을 때 나타나는 수많은 규칙을 상상해보자. 그러나 이러한 규칙은 어떤 작용도 할 수 없다. 그 안에 여전히 인간의 본성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덕성은 스스로 내면의 죄악을 숨기고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도와줄 뿐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도 분명하다. 규칙이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본성은 스스로 활동하며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항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수밖에 없고, 타고난 것보다 더 나을 수도, 나쁠 수도 없다. 어둠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듯이 본성은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없다. 진정한 도덕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가르침뿐이다. 마음속에 영적인 능력이 임함으로써 거룩한 선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빛을 밝힐 수 있도록 본성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삶은 단 두 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즉 하나는 본성적인 삶이며, 다른 하나는 그 안에 하나님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삶이다. 또한 인간은 본성과 하나님 중 하나가 살아 역사하도록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속에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하기 때문에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세상에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인생은 계속되며 어떤 식으로든 늘 현실로 나타난다. 선은 일종의 울림이다. 또한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사랑의 영으로 호흡하기까지 강렬한 본성과 맞서 투쟁하는 힘에 불과하다. 사랑은 오직 축복과 선이며 하나님의 본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인 사랑의 영이 마음속에 살아 역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실제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윌리엄 로우의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라‘에서(25-32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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