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령에 의한 기도

성령은 우리로 기도하게 하실 뿐 아니라, 친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성령에 의한 기도도 있다. 이 사실은 로마서 8:26-27에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울은 성령에 의하여 그런 기도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연약함 곧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약함이 있음을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나"라고 번역될 것이 아니라 현재대로(위와 같이) 해야 한다. 신자는 자신의 필요를 알지 못하므로 빌 바를 알지 못한다.

성령은 우리가 본 대로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여 주셔서 우리 자신이 정당한 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이 이상의 것을 하신다. 특별한 방법으로 또한 우리 대신 우리를 위하여 비신다. 본문이 말하듯 "성령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이 간구는 그리스도의 간구와 혼동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간구는 하늘에서, 성령의 간구는 땅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것은 우리 마음 밖에서이고 성령의 것은 안에서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잘 알만한 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고, 성령은 우리가 모를 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이 간구에 대한 개념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흔들어서 너무 깊어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소원을 발하게 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우리를 통하여 기도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 마음에 거하는 성령께서는 우리와 따로 홀로 간구하신다고 한다. 그는 우리 위해 기도하시나 우리 안에 거하실지라도 우리를 통해서 하지 않으시며, 성령이 하시는 기도요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마지막까지 분석해 보면 실제적인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결과는 꼭 같은데 곧 성령께서 놀라운 길로 우리의 결핍을 채우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면서도 빌 바를 알지 못하였을 때 우리 위해 기도하신다.

이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우리는 때로 우리 앞에 있는 위험을 모르며 어느 길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두 다른 직업에 종사할 소원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어느 처녀와 결혼해야 할지 모른다. 두 가지 매력있는 대학 교육과 과정이 다 우리 마음에 맞을지 모르나 그것들은 우리 생애를 현저히 다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기독교 서적을 저술하느냐, 교회 시무 장로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이를지 모른다. 이런 모든 경우 "우리는 빌 바를 모른다." 그래도 성령은 무엇이 빌 바인지 잘 알아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 앞에 내놓으신다.

성령이 간구하시기 때문에 기도가 응답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 한 이유는 바울이 암시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령이 무엇을 비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성령께서 간구하실 때 우리와 따로든지 우리를 통하여서든지) 또한 성령과 하나이신 그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기" 때문이다.

더욱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신다. 이는 우리 기도의 응답에 필수 조건이니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의 한 가지 이유가 바로 흔히 그릇된 것,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이기적으로 기도한다. 혹은 무지로 하기도 한다. 우리는 빌 바를 모른다. 성령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는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그는 삼위일체 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지 아신다. 그러므로 본문이 밝히 말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라." 그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맞기 때문에 항상 응답을 받는 기도이다. 생의 중요한 문제에 있어 아버지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효과적인 간구를 하시는 제삼위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랴! 이것이 성령에 의한 기도이다.

3. 성령께 하는 기도

이제는 성령께 하는 기도를 살펴보자. 때로 "성령께만 기도함이 옳은가" 하고 묻는 일이 있다. 이 질문은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에게 할까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아버지 곧 삼위일체의 제일위에게 기도하는가, 하나님 전체로서의 아버지에게인가, 삼위일체 각 위에게 각각 하는가?

성경에는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할 때 전체로써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가르치는 곳이 없다. 있다면 삼위일체의 제일위께 한다는 암시가 있다. 아버지란 명칭은 현저히 그분의 칭호다. 더구나 신자들이 믿고 기도하러 갈 아버지께 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아버지는 분명히 삼위일체의 제일위임을 표시하였다. 예를 들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실 때 그는 분명히 자신을 아버지라는 그 말에서 제외하였다. 또 예수께서 부활 후 마리아에게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하셨을 때 그 잇닿은 평행구로 보아 마리아의 아버지는 예수의 아버지요, 삼위일체의 제일위 외에 아무도 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작별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되 아버지께 기도하라(요 15:16) 권고하신 것을 주목하자. 예수께서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위해 성령 자신에게 기도하지 않으시고 보혜사를 보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요 14:16)은 눈에 띄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 증거와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곧 삼위일체의 제일위)께 거의 국한하여 기도함으로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 하나님께 주로 기도를 올리는 것이 성경적 근거에서 하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그러나 때때로 삼위일체의 각 위에게 기도하는 것이 정당하며 더 좋기까지 한 때도 있다. 각 위가 우리에게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우리를 위해 특별한 사역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각각에게 함이 마땅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과 보호를 원할 때 우리는 아버지께 가야 한다. 우리가 우리 죄의 사유와 씻음 받기를 원할 때는 그리스도께 기도하여야 좋을 것이다. 그는 죄책과 죄의 오염(汚染)을 제거키 위해 죽으셨다.

이와 같이 성령께 기도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누가 친족을 잃었다면 특별히 성령께 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보혜사 [곧 안위자(安慰者)-역자 주]로 보내어진 분은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요 주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안위하는 것을 임무로 하시는 분이 그분이시다. 혹은 우리가 자신 속에 성결의 결핍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계속하여 거룩케 하시도록 성령께 기도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생명 안에서 하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게 따로이 기도할 수 있듯이 우리가 성령께도 기도할 수 있다. 성령께 올린 훌륭한 기도의 예들을 보려면, 많은 찬송가집에서 성령께 드린 수많은 찬송가들의 가사를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4. 성령 받기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께 기도할 뿐 아니라, 또한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전장(前章)들에서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았으며, 아직도 그분에 대한 공부를 끝맺지 않았다. 성령께 관하여는 축도에 포함된 것 이상 말하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에 대하여 말할 것이 많음을 보았다. 그의 일은 다양하다. 그는 객관의 세계에서 곧 창조와 보편 은혜와 하나님의 두 말씀에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또한 주관의 영역에서 놀라운 일을 수행하셨다.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에게 증거 하시고, 우리의 기업을 인 치시고, 우리의 기도 생활의 원천이시다. 그의 일은 다양하고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분명히 이 다양한 성령의 일을 위해 기도함이 좋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은 우리의 의무다.

기도는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성령을 더욱 받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기억하자. 만일 우리가 성령을 더욱더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 만일 우리가 그를 더욱 온전히 받지 않는다면 이 책은 목적을 달성치 못할 것이다 -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그를 구함으로 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항상 죄와 부딪친다면 그것에 대해 이김을 주는 원동력은 성령이시다. 우리가 생의 결단을 지으려 하니 어쩔 줄 모를 때 우리에게 성령이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더 큰 확신이 필요할 때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이것은 또한 기도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기도 생활이 무디고 단조롭다면, 기도가 짐이 되고 즐겁지 않다면, 우리 기도가 상달치 못하는 듯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것 같고,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가 우리 생활의 능력의 방도가 되어 있지 않으면 - 그러할 때 우리는 간구의 성령 자신께 나가 우리 생명에 더 충만히 임하사 이런 언약 중에 있는 우리를 도우시도록 구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대망(待望) 중 이렇게 하면 그가 들어오사 우리의 기도 생활을 혁신시킬 것이다. 그가 모든 거룩한 생활의 비결임과 꼭 같이 기도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분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못한다. 그러나 그분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변화되어 영적으로 풍부하고 다채롭고, 능동적이며 기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성령 안에서, 성령에게, 성령 받기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면 성령은 그대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성령과 기도' 중에서(231-237p) 

출처: 생명무 쉼터 =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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