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과 죽은 후의 천당]

먼저 사람들이 왜 '에이, 죽었으면 좋겠다'든가 '죽고싶다'든가 하는 말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까닭과 핑계가 있겠지만 참으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란 그리 흔치 않습니다. 흔히 이런 말을 그저 함부로 말하는 데서 나올 것입니다.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어떤 신자에게 '죽는 것이 왜 좋으냐?' 하고 물으면 '죽으면 천당에 가게 되니 좋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이런 말로 자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함부로 한 말을 변호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천당에 가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천당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일까요?

보통 이야기하는 천당이란 말은 사후의 좋은 세상 전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 영혼이 천당 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만 임시로 가 있는 낙원을 의미하는 듯도 합니다. 여기 제1부에서는 우선 천당이란 말을 죽은 후의 좋은 세계 전부 곧 낙원과 그 후의 영광의 세계를 다 같이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천당에서 사는 것에 비교할 때 훨씬 못한 것일까요? 그렇게 잘못 생각하면 이 세상의 일은 다 뜬구름 같고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아서 괴롭고 허무한 것이 됩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역려과객(逆旅過客)과 같으니 어서 죽어서 하나님 앞으로 가서 평안하게 '할렐루야' 찬송을 부르면서 지내야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인의 사상이라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도리와는 크게 어긋납니다.

현세의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천당에 가서는 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도록 배정해 놓으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영광의 위치에 이르는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장소는 천당이 아니라 이 세상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사실, 곧 예수를 믿고 영원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천당이 아니고 이 땅 위에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든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을 받든지 다시 말하면 영광을 얻느냐 멸망을 받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땅에서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어떤 사람이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힘써 주를 믿고 의지하며 건실한 봉사의 생활을 함으로써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건축자가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터전 위에 집을 짓되 가급적 영원히 변치 않을 재료로 짓습니다. 재료로는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 따위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집을 짓는 공사는 천당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 땅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집을 짓다가 완성하지 못했다 해서 그 나머지를 천당에 가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땅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이르면 불의 심판이 있어서 어떤 집은 타고 무너지나 어떤 집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곧 나무나 짚이나 풀 같은 것으로 지은 집이라면 심판의 불에 타서 다 없어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공력(功力)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그러나 금이나 은으로 지은 집은 암만 불이 나더라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몸만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 난 속에서 자기 몸 하나만 빠져  나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금과 은으로 좋은 건물을 짓다가 완성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천당에 올라가서 다시 그것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느냐 하면 그런 기회는 전연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이 세상 가운데 사람을 지어 놓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본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땅 위에 있는 것은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어떠한 잘못으로 또는 우연한 일로 사람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땅에 사람을 두신 사실에는 결정적이고도 구체적인 확실한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쩌다가 땅에 떨어졌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고 '거기에 있을 것이 아니므로 얼른 주어다가 천당으로 옮겨야겠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 땅이란 하나님께서 아주 치밀한 섭리하에서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드신 곳이며, 이 땅 위에 사람이 산다는 것도 아주 명확한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냥 우연히 일어난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땅 위의 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 두신 본래의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지상 생활의 가치도 알 수 있고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영원한 문제는 땅의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의 상을 받을 기회가 이 땅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만 주어지는 것이고 일단 땅을 떠나면 그런 기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상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잘했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땅에 있는 동안에 내가 너를 땅에 둔 본래의 큰 뜻을 깨닫고 그대로 살았으니 참 잘했다'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천당에 가더라도 그곳에 합당한 생활의 큰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막연하게 앉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천당이 좋은 곳일진대 사람이 천당에 가게 되면 의식이 더욱 분명해져서 좀 더 확실한 목적과 이상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천당에서는 천당의 목적과 의미가 있어야지 땅에서의 목적이나 의의를 그대로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자신의 목적과 의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천당에 간들 얼마나 잘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천당에서의 목적과 의의란 그가 땅 위에서 살 때 가졌던 목적과 의의의 수행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당에서 거할 때 그 영의 성숙성과 덕성의 정도는 그 인물이 세상에서 얼마나 성신 안에서 거룩히 장성했는가의 결실 위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천당에 들어갈 때 세상에 있는 동안 장성한 '새사람'을 모두 포기하고서 기본 상태만으로 들어가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선지자는 영감 있는 말씀과 덕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고 유치한 신자는 유치한 대로 천당에 들어갑니다. 대덕(大德)과 소인(小人)이 완전 동일한 상태로 되어 버린다면 천당은 지극히 불공평한 곳이거나 세상과 아무 상관없는 전혀 별다른 새 창조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천당은 오직 인생 세계와 영원한 영광 세계 간의 중간 세계(interim state)일 뿐입니다.

천당에서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가 천당에 가서 할 일은 무엇일까요? 흔히 말하기를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내는 것이라 합니다(계 15:3-4, 14:1-5, 7:9-12).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계 7:15-17).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은 물론이고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언제나 중요한 일입니다. 천당에서 할 일과 관련하여 사람이 가지는 위치의 높고 낮음과 의의(意義)의 깊고 얕음은 그 사람이 땅 위에서 결정하게 되는 것임을 이미 앞에서 지적하였습니다. 거듭 말하면 땅에서 세운 집이 심판의 불로 타버리면 그만이고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상을 받는 것입니다. 천당에서 이런 상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이고 책망을 받는다면 그만큼 그 사람의 위치는 낮고 빈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있을까?

천당에서도 계급의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보십시오. 천당(낙원)에서 아브라함과 나사로는 완전 평등의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고 아브라함은 높은 위치에서 지옥에 있는 부자 유대인과 대화합니다. 천당이라고 누구나 평등해서 똑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 위의 생활이 천당에서의 위치를 결정해 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실컷 죄를 짓고 아무렇게나 산 사람이나 경건하고 의롭게 산 사람이나 천당에서는 다 평등할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땅 위에서 많은 수고를 한 사람, 곧 바울, 베드로, 어거스틴, 칼빈 같은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죽었으면 좋겠다' 하며 아무 의미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이 꼭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천당의 참 의미라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과 같이 "잘했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마 25:23)는 말씀을 듣든지 "너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9)든지 하는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럼 과연 언제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겠는가 할 때에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서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질 이야기가 아니라 저 먼 나라, 곧 이생 이후인 내생에서 일어날 얘기입니다. 천당 생활이 내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생이 끝난 후 우리의 생의 결정, 곧 우리의 위치나 영광이나 의미의 중요성은 땅 위에 있는 동안의 생활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땅 위의 생활 여하는 하늘나라를 위한 준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 되고 어떻게 하면 하늘에서 빈곤하게 되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서 이생을 보내야 합니다. 덮어놓고 천당, 천당, 하며 올라가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천당에 갔을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저 땅에서 선한 행실을 하여 많은 보물을 쌓아놓은 것이 여기 있으니 자, 이 많은 것으로써 너의 활동을 해 보아라'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열 고을의 권세를 차지하게 되었다'든지 '너는 금으로 집을 지은 사람이니 자, 여기서 이 상(賞)을 받고 살아라'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땅 위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천당에 가서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서의 생의 의의를 절대로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장래의 일을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할 것을 생각할 때에 이 땅에서의 일만 가지고 노심초사하며 애쓰고, 장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원통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자기 앞에 당한 경주 하라"(히 12:1)고 한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다 떨쳐 버리고 목표를 향하여 힘껏 경주로를 달려가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의 생활을 달음박질 마당에서 경주하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라고 표현하여 전투하는 사람 혹은 경기하는 사람으로서의 땅 위의 생활을 우리에게 효과 있게 가르쳤습니다.


김홍전의 '부활의 참뜻' 중에서(127-134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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