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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앞에 길이 있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길 앞에서 우리가 내딛을 길의 앞을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앞서서 행하시기에 그분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시는 길이라는 그 길이 기적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은 기적의 연장에 있습니다. 
                                          기적이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행하심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기적을 표적 이적이라고 표시했는데
특히 요한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서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시려고
행하신 모든 이들을 표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표적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표적을 기록할 수 없었다고..

사실 표적은 예수님에 의해 복음서 시대에 있었던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세계 속에 현실을 통해 늘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현실을 통하여 이 표적과 이적 기적을 보게 만듭니다.
불신앙은 기적 앞에 있는 현실이 장애가 되지만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에
쉽게 불평과 원망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지만
믿음은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에
모든 현실은 기적을 위한 전조일 뿐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보면서도
믿음의 눈은 그것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봅니다.
어느 전도자는 운전을 하면서 그저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시는 기적을 보며 할렐루야라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은 현실을 하나님의 역사의 기회로 바라보기에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이 표적과 기적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역사 속에서 기적으로 행하셨듯이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일상 속에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그렇게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기적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사소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사소한 것마저도
그분의 엄청난 능력으로 해결 해 주시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로 인하여
감사와 기쁨이 넘쳐나는 삶을 살아
늘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간증이 흘러나길 원합니다.


일상 속에 하나님의 기적으로 충만하신 삶을 살아가십시오



                                          - 펌글입니다

주사파 세력의 멸망을 통한 <복음통일>과

주사파 세력에 의한 <적화통일>의 기로에서

대한민국은.. 결정적 순간을 맞고 있다.


미혹에 빠진 백성들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겪을지 모를,

심판으로서의 '전쟁'은 미국의 북폭이 아니라

미군 철수 후 남침의 형태로 올 가능성이 더 높다.

불길한 조짐이 보인다. - 김성욱 대표



전 주한미군사령관들 “군사훈련 연기를 협상수단 삼으면 미군철수해야”

버웰 벨, “이제 미국이 한미동맹을 저버려야 할 시점이라고 강력히 권고하겠다”


3월 한미연합훈련인 키리졸브·독수리훈련에 참가한 미 해군소속 F-18 전투기가 항공모함 칼빈슨호에서 이륙하고 있다.


1.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등 전직 주한미군 사령관들이 VOA(미국의 소리 방송)와의 인터뷰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韓美) 상호방위조약 폐기를 경고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로 연기할 수 있다는 문재인 한국 대통령의 제안을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특히 벨 전 사령관은 “자신이 사령관직에 있을 때 한미 두 나라 중 어떤 쪽이라도 북한을 달래기 위해 군의 준비태세를 낮추자고 제안했다면, 자신은 미국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두 나라간 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할 것을 즉각 권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누구라도 한미양국의 준비태세를 협상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두 나라 병력과 한국 시민을 위험하게 만드는 만큼, 자신은 이제 미국이 한미동맹을 저버려야 할 시점이라고 강력히 권고하겠다”고 덧붙였다. 아래는 27일 VOA 보도 내용이다.

 

2.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미-한 연합군사훈련 연기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은 정당하고 타당하다고 밝혔습니다.

[녹취: 버웰 벨 전 사령관] “It’s not good to be conducting military exercises when you’re bringing in hundreds, even thousands of athletes from over a hundred countries around the world. I just think that is probably not a good idea. So the whole issue of postponing the military drills--exercises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n and the United States, I believe, is a legitimate issue and a sound issue…”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주한미군사령관과 유엔군사령관 겸 미한연합사 사령관을 지낸 벨 전 사령관은 ‘VOA’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미-한 군사훈련 연기 제안과 관련해, 1백 개가 넘는 나라에서 수천 명의 선수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시기에 군사 훈련을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준비태세에 아무 변화가 없도록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훈련을 재개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전투 태세와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군사 훈련의 기능이며, 전장에서 적을 압도하고 파괴하기 위해 군사 장비 기술을 익히고 정신을 무장하는 법을 배우는 유일한 방법이 군사 훈련이라는 설명입니다.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버웰 벨 전 주한미군사령관.

벨 전 사령관은 (북한과의) 외교적 관여를 위해 훈련을 연기해야 한다는 어떤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며, 올림픽을 치르는 단기간 동안 훈련을 연기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올림픽 폐막 직후 원래 계획된 훈련을 전 범위에서 실시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녹취: 버웰 벨 전 사령관] “Any notion by anyone that exercises should be postponed to achieve some kind of diplomatic engagement is wrong. I agree they could be postponed for very short period of time so as to accommodate the conducts of the Olympics but it is crucial that those exercises be conducted to their full range of requirements immediately following the Olympics.”

특히 미국과 한국 어느 나라 대통령이든 적국에 “협상에 응하면 아군의 전력을 떨어뜨리겠다”식의 제안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이는 미군과 한국인들의 생명을 협상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북한과의 협상을 위해 경제적, 외교적, 혹은 다른 안보 관련 접근법을 시도할 순 있겠지만 절대 미-한 연합군의 준비태세를 협상 수단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놔선 안 된다는 겁니다.

벨 전 사령관은 자신이 사령관직에 있을 때 미-한 두 나라 중 어떤 쪽이라도 북한을 달래기 위해 군의 준비태세를 낮추자고 제안했다면, 자신은 미국 대통령에게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두 나라간 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할 것을 즉각 권고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버웰 벨 전 사령관] “If either party ever told me when I was in command to lower the readiness of the force, so as to appease the North, my immediate recommendation to both Presidents, particularly to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would be because of the increased risk to failure, it would be necessary for the United States to withdraw its forces from South Korea and abrogate the security treaty.”

누구라도 미-한 양국의 준비태세를 협상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두 나라 병력과 한국 시민을 위험하게 만드는 만큼, 자신은 이제 미국이 미-한 동맹을 저버려야 할 시점이라고 강력히 권고하겠다는 겁니다.

[녹취: 버웰 벨 전 사령관] “So my strongest recommendation has always been if either side ever chooses to use military readiness as a bargaining chip that that would be a time when the United States should turn away from this alliance because it is too dangerous for our forces and it also shows a lack of confidence by the South Koreans because it would endanger their forces and their civilian population. I find that unimaginable.”

벨 전 사령관은 명석하고 애국심이 강한 미-한 양국의 대통령이 연합군의 준비태세를 협상테이블에 올리는 결정을 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1990년대 미-한 연합훈련인 팀스피리트를 중단한 전례를 상기시키며, 이는 절대 북한을 상대하기에 옳은 전략이 아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팀스피리트 중단은 미-한 양국 모두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할 잘못된 접근법이었으며, 이는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고 북한과의 모든 핵 관련 협상은 그들의 기만 전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는 지적입니다.

벨 전 사령관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최대의 이익으로 판단하기 전까지는, 선제타격 능력을 확보하려는 북한의 노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 외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버웰 벨 전 사령관] “Quite frankly, until China decides that is in their best interests for the North to give up their nuclear weapons, nothing we can do short of going to war will stop the North’s efforts to gain nuclear first strike capability. This is in China’s hands.”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에서 복무한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관도 'VOA'에 평창 올림픽 개최를 위한 미-한 군사훈련의 일시적 연기에는 찬성한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
제임스 서먼 전 주한미군사령.

[녹취: 제임스 서먼 전 사령관] “I think it is important not to disrupt the Olympics so there should be some consideration for the ROK and US to work the dates for the Exercise out so it is not disruptive to the Olympics.”

평창 올림픽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한 만큼, 미국과 한국이 연합군사훈련 날짜 조정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한반도 긴장의 원인은 미-한 군사훈련이 아니라 북한의 도발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녹취: 제임스 서먼 전 사령관] “I think the exercises are essential to maintaining the required readiness to defend the Peninsula and to protect the South Korean People. If North Korea is interested in reducing tensions they need to quit launching and testing ballistic missiles and denuclearize. The Military Drills are necessary to maintaining the readiness required by the Alliance.”

군사훈련은 한반도와 한국인들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준비태세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며, 북한이 긴장을 낮추는데 관심이 있다면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멈추고 비핵화를 하면 된다는 겁니다.

서먼 전 사령관은 미-한 군사훈련 연기가 자칫 북한을 달래려는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지적과 관련해, 북한을 달래려는 시도에 매우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녹취: 제임스 서먼 전 사령관] “We must be careful appeasing North Korea. It has never worked and I do not think cutting deals with them will be effective…The Alliance must remain strong and vigilant.”

그런 시도는 통한 적이 없고 북한과의 거래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지적입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에서 근무한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은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군사훈련을 평창 올림픽 이후로 연기하는 것을 고려할 만 하지만, 북한의 위협과 준비태세를 포함해 평가해야 할 여러 요소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존 틸럴리 전 주한미군사령관.

틸럴리 전 사령관은 국가 지도자의 첫 번째 의무는 자국민 보호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군사훈련은 미-한 연합군의 준비태세에 핵심적인 부분이고, 심지어 북한도 자신들의 훈련에 대해 같은 주장을 해왔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1990년대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한 뒤에도 북한의 도발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틸럴리 전 사령관은 미-한 군사훈련은 연합군의 준비태세를 창출하고, 강화된 준비태세는 더욱 강한 억지력과 한반도 보호 능력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출처: VOA 미국의 소리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소식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놀라운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단순히 좋은 복된 소식만이 아닙니다. 
이 복음에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만물이 그 말씀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에도 능력이 있습니다.
즉, 복음이 선포되고 예수 이름이 선언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을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복음에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묶인 자를 풀어내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원한 절망과 멸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천국으로 옮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흑암의 세력을 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권세를 멸하고 죄와 사망의 결박에서 풀어내는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피 묻은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입니다.
어찌 능력이 없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믿는 자에게서, 그리고 교회에서 이 놀라운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능력,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믿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믿음을 의식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의 능력이 복음 전하는 자의 믿음에 좌우되고, 어떤 사람이 어떻게 전하느냐애 따라 달라지고, 전하는 사람에 따라 역사가 나타나기도 안 나타나기도 한다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목소리가 기어들고 움츠러들고 부끄러워져서 예수님의 “전하라.” 하신 명령에 따르지 못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우리는 내 믿음이 부족해서 능력이 아니 나타날까 두려워 복음을 내 안에 가두어 놓고 전파를 막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 엄청난 능력의 복음을 말입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데 아무 걸림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잘못 된 생각과 오해에 걸리고 우리 마음 안에 갇혀서 그 능력이 막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나의 믿음과 능력에 따라 역사가 일어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지 못 하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기를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신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믿음을 걷어치워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비켜서고 복음의 능력이 나가서 드러나고 주님의 이름이 역사하도록 길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우주를 움직이고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히 전합시다.
우리의 믿음이 없더라도, 내게 아무 능력 없더라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전하라.” 하신대로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복음의 능력이, 예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역사할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입을 통하여서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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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한 틈을 타 남침한 북한에 의해 짓밟히고 적화될 수 있었던 민족의 위기 가운데 외교를 통해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적화의 위험에서 건져냈다.


지금 이 민족의 위기는 전쟁의 가능성 이상이다. 지금 정부는 친북, 친중 노선을 걸으며 미국과의 외교단절로 치닫고 있다. 미국과 소통했다는 대통령의 거짓말은 지속되고 있다. 미군이 철수하게 될 경우 이 나라는 '연방제' 또는 북한의 기습 남침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지금 우리는 이 민족의 권력자들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올바른 정책을 펴도록 기도해야 할 때이며, 그 일이 시행되지 않을 때..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지도자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금 이 나라의 영적인 상황은 너무 암울하다. 한 때 신실한 것으로 알았던 한 자매의 페이스북 담벼락에는 현 정부가 원하는데로 판결을 내리지 못한 판사에 대해 '박피'로 죽이는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어조의 끔찍한 포스팅이 올라와 있었다.


잠들어 있는 이 세대에 '연방제'가 이루어지고, 그 체제에 반대하는 목사들을 '박피'한다고 할지라도 옹호하는 자칭 기독교인들을 상상하는 일이 억지가 아닌 시대가 된 것 같아서 암울하다. 이 세대 교회들은 성령을 거부하고, 살인의 영을 받기 시작한 것일까?


교회여! 언제까지 '정의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의 술, 거짓의 술, 음란의 술, 증오의 술을 들이키고 있을 것인가? 진노가 임하기 전에 당장 더러운 우상을 벗어버리라.


진정 가난한 자의 친구, 환난 당한 자의 친구는 주사파로 채운 이 나라의 정부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이심을 회복하라. 지금 우리는 이 민족의 참 된 리더십의 회복과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도록 엎드려 울지 않으면 안된다.



- 이환희 목사님 묵상단편 / 시편 72:1~11절

중보자 그리스도는 단번에 구원의 의를 이루시고 성도에 전가하기 위해 지금도 중보 하신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삼위일체론, 기독론과 더불어 삼대 교리 중의 하나라고 불리는 이신칭의 교리가 체계적으로 수립되어 갔다. 루터는 본 교리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천명하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칼빈은 다음 세 가지를 들어 이를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 외에 다른 구원의 의는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전가(轉嫁)된다. 즉, 거저 성도의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나 <로마서 주석> 등 여러 곳에서 구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음을 강조한다. 첫째, 구원의 근원적 동기는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 혹은 의가 구원의 유일한 질료 혹은 실체, 즉 값이 된다. 셋째, 구원의 유일한 도구는 믿음이다. 믿음은 도구일 뿐, 믿음 그 자체에는 어떤 공로도 없다. 넷째,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행 16:31).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꾀는 것은 모두 불법이며 미혹이다(갈 3:1).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롬 10:17; 마 17:5).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값이 된다. 성도의 선택, 칭의, 성화, 영화의 전(全) 구원 과정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롬 10:3). 여기에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이 개진한 언약신학의 핵심이 있다.



▲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형벌을 당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을 순종하셨다. 칼빈은 이를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성도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계속 중보하신다’고 복음의 핵심을 설명했다.

구속사적 성취: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의를 이룸

루터가 이신칭의를 기치로 삼아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면서 성도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 자체에 집중했다면, 칼빈은 그 은혜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성도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계속적으로 중보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복음의 핵심을 간파하였다. 이로부터 개혁신학을 특징짓는 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이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의를 다 이루게 하셨다(롬 8:3; 엡 1:4; 요 19:30). 그 의는 모든 형벌을 당하신 순종(obedientia passiva, 受難 혹은 受罰)과 율법에 계시된 아버지의 모든 뜻을 행하신 순종(obedientia activa, 守法)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에 모두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마 1:1).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레 17:11; 히 9:22).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요 12:2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오신 주님이 “하나님의 큰 일”을(행 2:11) 다 이루셨다(요 19:30). 그 다 이루심은 구약의 언약과 절기와 제사에 모두 미친다.


성경에 280회 이상 나오는 모든 언약을 주님이 다 이루셨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과 맺은 구약의 언약이 모두 성취되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었을 뿐, 그들에게 공로가 있어 그들의 후손이 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의 주님이 모든 언약을 다 이루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마다 “피로 세운 새언약”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고전 11:25). 주님이 유일한 대속의 “씨”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르셨다. 이것이 “새언약”(히 8:8, 13; 9:15), “더 좋은 언약”(히 7:22; 8:6), 곧 신약의 복음이다.


주님은 또한 모든 절기를 다 이루셨다. 주님이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이 되셨다. 주님은 또한 단번에 죽음을 죽이시는 죽음을 죽으셔서 영원한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의 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맺혔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주님은 초막절의 장막이 되셨다. “성전보다 큰 이”가 자기 자신을 깨뜨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되셨다(마 12:6). 그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육체를 찢어 모든 민족이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있도록 “새로운 살 길”을 여셨다(히 10:20; 슥 14:16~21).


이렇듯 주님은 절기를 다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또한 다 이루셨다. 절기의 중심에는 제사가 있었다. 유월절에는 죽음이 지나간 것을, 오순절과 수장절에는 생명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제사를 드렸다(출 12:43~51; 레 23:1~44; 신 16:1~17).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의 제물로 반복해서 제사를 드렸지만, 주님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엡 5:2; 갈 1:4; 딤전 2:6) “단번에”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9:12, 26, 28; 10:10; 롬 6:10; 벧전 3:18).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속죄제(贖罪祭)로, 허물을 가리는 속건제(贖愆祭)로, 감사로 되돌리는 감사제(感謝祭)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화목제(和睦祭)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자기 자신 전부를 헌신제인 번제(燔祭)로 드리셨다. 허공에 달리셔서 거제(擧祭)로, 몸을 요동치시며 요제(搖祭)로, 살이 짓이겨져 소제(素祭)로, 물과 피를 다 쏟아 전제(奠祭)로 드리셨다(레 1:1~7:38).


구원론적 적용: 보혜사 성령의 임재


주님은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상세히 가르쳐주셨다(요 14~16장).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녀요 상속자로서 그가 이루신 모든 의를 누리게 된다(롬 8:17).


첫째,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영원히 계신다(요 14:16~17; 마 28:20). “임마누엘”이신 주님이(마 1:23)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갈 2:20; 골 1:27). 성령의 임재는 ‘단회적’, ‘절대적’, ‘인격적’이다. 성령은 두 번 임하시지 않고, 양적으로 임하시지 않고, 물질적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성령을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내 안에 마음껏 사시도록 성경 읽고, 기도하고, 경건하게 살고, 회개하는 것이다(엡 5:18).


둘째,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요 14:26; 16:13; 요일 2:20, 27).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신다(요 15:2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요 14:20). “진리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주님 못 박히신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갈 3:1). 그리고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이 되심을 믿게 된다(요 14:6).


셋째, 보혜사 성령은 ‘능력의 영’이다. 이는 ‘은혜의 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성도에게는 은혜 외에는 어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능력이다. 보혜사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받은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이 친히 행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롬 8:15; 갈 4:6; 요 14:13~14). 성도의 순종은 오직 그의 “예”에 대하여 “아멘”하는 순종밖에 없다(고후 1:20).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은 임마누엘 되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일컬어지신다(롬 8:9; 빌 1:19).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세 가지 특성이 주님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가운데 하신 다음 말씀에 모두 나타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임마누엘의 영)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진리의 영)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능력의 영)”(요 15:7).


그리스도의 삼중직: 선지자, 제사장, 왕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 의를 우리의 것 삼아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신학자들은 언약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 점에 특히 주목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이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모사”와(사 9:6; 28:29) “증인”이(사 55:4) 되셨다. 그가 “영원한 의”를 드러내셨다(단 9:24). 사람들에게 “큰 빛”이 비추어(사 9:2) 그들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요 4:25). 그는 곳곳에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다(마 4:23).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1:1~2).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오직 그의 얼굴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다(고후 4:6).

 

둘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랬듯이, 우리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시는 일과 기도를 드리시는 일을 포함한다.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요 17:19; 벧전 1:19; 히 7:26~27; 10:10~14).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마 20:28; 롬 5:8). 그가 우리의 “화목자”로 세움을 받았으며(롬 3:2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롬 5:10). 그가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것은 죽음에 삼킴을 당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삼키시기 위함이셨다(요 1:29; 10:15; 롬 4:25; 벧전 3:22). 그리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 동안 죽음에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시고자 하셨다(히 2:14~15). 그가 하늘에 있는 참 성소에서 그들을 위하여 지금도 간구하신다(히 7:24~25; 9:11~12).


셋째, 그리스도의 왕직이다. 교회가 영원하듯이 그리스도의 왕국도 영원하다(단 2:44; 눅 1:33; 엡 1:20~23). 그리스도의 통치는 단지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을 부여하심이 다스리심이다(엡 4:7).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시고, 자신의 의로 우리를 채워주시고, 자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시고, 자신의 부요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심에(고후 8:9) 왕권이 있다.

▲ ●기고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서 친히 다스리신다(엡 1:20~22; 빌 2:9; 고전 15:27). 보혜사 성령을 내려주심이 주님의 통치방식이다. 그 영의 임재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영의 임재의 확산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산이다. 전도와 선교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701

 

출처: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로마 멸망의 시작 코모두스, 그리고 문재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끝으로 ‘현제’로 일컬어지는 다섯명의 훌륭한 황제의 시대가 끝나고 그의 아들 코모두스가 로마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코모두스 황제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요 등장인물이었기에 우리에게는 비교적 익숙하다. 실제 역사에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러셀 크로우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을 하기는 커녕 죽기 삼 년 전부터 코모두스를 공동황제로 삼았고 전선에서 죽는 순간까지도 망나니였던 코모두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코모두스의 치세를 시작으로 팍스 로마나의 시대는 끝나고, 로마제국은 점차 정치적, 군사적, 재정적 우위를 잃고 쇠퇴해 멸망의 길을 걷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 적 앞에서 부르짖는 평화


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선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황후가 다른 남자에게 붙어 황제로 추대할 만큼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오래 머물렀지만, 아버지가 죽자 코모두스는 얼른 게르만족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당시 로마제국의 무력이 게르만족을 압도했다는 사실에는 역사가들 간에 이견이 없다. 충분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평화’를 명분으로 화친을 해버린 것이다.


실제 로마 복귀 후 코모두스는 자신이 이루어낸 ‘평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마치 자신이 로마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구해냈다는 듯이... 마치 자신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 평화를 이끌어 냈다는 듯이...


그러나 인류 역사상 언제나 그래왔듯이 “적과의 대화와 협약”은 의미가 없었고, 평화는 환상에 불과했다. 로마의 선대 황제 모두가 야만족들과 싸워왔고, 코모두스 이후로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그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코모두스는 그 어떤 평화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선대가 이루어놓은 우위를 바탕으로 적 앞에서 비겁하게 물러섰을 뿐이다.


2. 인사 재앙


코모두스는 자신의 오랜 측근인 서테루스에게 황제의 인장을 주고 원로원을 관리하고 원로원과 소통하는 로마에서 황제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긴다. 그러나 서테루스는 노예출신의 그리스인이었다.


평등이니 인권이니 노예제니 하는 현대적 생각은 접어두자. 노예출신이 황제의 인장을 찍고 자신들과 동등하거나 심지어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상황을 원로원의 귀족들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황제와 원로원의 사이는 더욱 더 멀어졌다. 당연히 국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서테루스가 죽자 코모두스는 클리앤더라는 또 다른 해방노예에게 그 자리를 넘긴다. 애초에 몇몇 자기 측근에게 권력을 쥐어주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주변의 시각이나 국정운영은 코모두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물론 서테루스를 죽인건 클리앤더다. 클리앤더는 원로원을 자격없는 자기 측근으로 채우고 매관매직을 했으며 로마를 향하는 곡물을 빼돌리는 등 국가를 혼란에 빠트리다가 코모두스 암살시도에 연루된 죄로 처형된다. 친분관계, 무자격, 권력투쟁, 범죄, 반역이 코모두스의 인사의 전부였다.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 목적인 인물들을 중용한 대가는 참혹했다.


3. 퍼퓰리즘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은 사실상 코모두스가 유일하게 노력을 기울인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에서는 인기가 곧 권력이었다. 검투경기를 반복적으로 개최하고 현금을 길거리에 뿌리는 등, 코모두스는 오로지 민중에게 돈과 즐거움을 먹여 지지율을 얻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당연히 국가 재정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검투경기를 개최할 돈이 없으면 대중에게 공표부터 해놓고 원로원에게 돈을 내라고 미루기도 했다. 급기야 직접 검투사 옷을 입고 실제 검투경기에 나선다.


검투는 노예 검투사들간의 싸움으로 여겨졌기에 황제가 검투사 옷을 입고 경기에 나서는 것은 황제가 대중에게 내려가 눈높이를 맞추는 파격행보로 여겨졌다. 동시에 지켜야할 최소한의 법도조차 지키지 않는 역겨운 행위로 비춰지기도 했다.


코모두스는 검투시합에서 승리를 보장받기 위해 상대 검투사에게 날이 없는 검을 주거나, 심지어 멀리서 보는 관객이 알아보기 힘든 것을 이용해 검투사가 아닌 노인이나 장애인을 상대로 싸웠다고 전해진다. 코모두스는 통치보다는 그저 쇼를 벌여 민중의 관심을 끄는데만 집중했던 것이다.


#. 글에 문재인은 언제 등장하냐고? 이미 다 나왔다.



글 출처: 이재홍님 페이스북




 



 



 



 



 



 



 



 

        주님이 오신 12월이면/최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 드는 말씀일지라도
              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이 글은 한국 창원 극동방송 '새벽산책'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 기도문으로써,
                        지난 해 베풀어 주신 사랑, 뜨거운 성원에 감사를 드리며,
                        성탄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넘치기를 기도드려요!^^*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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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서트클리프가 미국 CBN NEWS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영국의 한 교사가 수업시간에 한 번의 말실수로 해고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CBN NEWS>에 따르면 잉글랜드 중남부 옥스퍼드셔주(州)의 한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조슈아 서트클리프는 트렌스젠더인 제자의 과제물을 칭찬해 주면서, 그를 'girl'(소녀)이라고 불렀다.

 

이 학생은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남자로 대해 줄 것을 학교 측에 요구한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트클리프 교사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학생에게 사과했지만, 학생은 교사의 부주의한 행동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해당 학생의 부모는 교사의 처벌을 주장했고 학교는 서트클리프 교사를 해고 조치했다. 학교 측은 "학교 규정상 수업시간에는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원칙"이라며 교사의 잘못으로 규정했다.  

 

서트클리프 교사는 학교가 부당한 처사를 진행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목회자이기도 한 그는 "평소 학교 규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며 "의도적으로 한 말이 결코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어 "교단에서 늘 청렴하게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 소녀를 '소녀'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가 되느냐. 억울해서 눈물도 안 나온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현재 서트클리프 교사를 징계한 이유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답변은 하지 않은 채 학생의 평등권을 침해했단 이유로 고소한 상태이다. 조슈아 서트클리프 교사도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학교를 두고 법적 절차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기독법률센터는 성명서에서 "학교는 교사들에게 성 정체성에 변화가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육도 하지도 않았다. 성 정체성의 혼란은 일종의 '망상'에 불과하다"며 부당한 처우를 한 학교를 규탄했다.

 

최에녹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아멘넷

미리 메리 마라나타!





세 개의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마지막 때의 징조와 재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예언하신 <감람산 설교>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복음서마다 그 복음서가 쓰여진 대상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마지막 때에 대한 기술방식과 논점도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유대인이고,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이방인이며, 마가복음의 수신자는 로마황제의 극심한 핍박가운데 있었던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감람산 설교는 유대인이 수신자이기 때문에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하나님의 언약을 맡은 선민)이 되라는 권면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반면, 누가복음의 감람산 설교는 이방인(데오빌로)이 수신자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때가 끝날 것과 대환란을 피하고 주님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에 깨어 있으라는 권면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또한 마가복음의 감람산 설교는 로마의 그리스도인이 수신자이기 때문에 매우 급박한 어조로 핍박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인내하라는 실제적인 메세지로 마무리가 됩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감람산 설교>의 핵심 메세지를 심플하게 정리하며 마음에 새겨봅니다.



1. 이방인의 때가 끝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눅 21:24)


예루살렘의 멸망과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는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 자체가 이방인(데오빌로)을 위해, 이방인(누가)에 의해 쓰여진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시대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 11:25)

사도 바울도 계시를 통하여 이스라엘 멸망 이후의 1900년간의 교회시대에 대하여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 로마서에서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는 복음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다시 이스라엘로 복음의 바톤터치가 이루어지는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모두가 잠드는 때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 21:34)

마지막 때는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사망의 깊은 잠에 빠져드는 때입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흘러가는 명확한 시대의 징조를 밝히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노아의 때와 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미혹의 때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 24:37~39)

평안하다, 안전하다 생각하며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 가치관에 뼛 속까지 물들어 죄악짱아치가 되어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여 결단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 5:3)


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눅 21:35-36)

이 심판과 형벌의 날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몸된 '주님의 신부들'은 장차 올 이 모든 환란을 능히 피하고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상대 나라에 거주하는 모든 자국인들을 다 철수시킨 다음에 폭격이 들어가듯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다 철수시키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먼저 공중으로 끌어올려 구분하신 후에 하나님의 진노가 온 땅에 퍼부어질 것입니다. (노아의 때도 방주에 의인들을 구분하신 후 심판하심, 소돔과 고모라 때도 롯과 가족들을 소알성에 구분하신 후에 심판하심)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0)

주님을 진정으로 믿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날은 기쁨과 환희와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이 임할 것을 간절히 사모하며 천국에서 부를 새 노래를 이 땅에서 미리 부르며 어린 양께 속한 천국백성임을 매순간 선포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계 14:3-4).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은 군사의 삶이요 경기자의 삶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죄와 사망권세와의 영적 전투에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자들이며, 주님만 바라보며 보좌를 향하여 전력질주하여 달려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는 다시오실 주님의 재림의 날은 기쁨과 축제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적용>
새노래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함으로 '미리 메리 마라나타'를 외쳐야겠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어찌 그리 사모가 되는지요! 이 땅에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몸담고 살아가지만 정작 이 세상은 내 집 아닙니다. 날 데려가시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주와 함께 영원토록 거하게 될 천국이 유일한 내 집입니다.

오늘부터 주님 오실 그 날까지 '미리 메리 마라나타'를 외치며 천국에서 부르게 될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날마다 새 노래로 날 향한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며 감사하기 원합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왕의 오심을 예비하며 소망 가운데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이웃 블로그 / ♡곰팅이♡

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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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종교개혁의 신앙유산과 교훈들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들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을 주장하는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하거나 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롬 1:7).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롬 5:17,21). 은혜를 강조하면 할수록, 선행과 성화를 무시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아래에 있지 아니하지만,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자들은 의를 추구한다!


로마 가톨릭과는 전혀 다르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적으로 은혜의 교리를 재구성하게 되면서, 구원 교리가 완전히 다시 정립되었다.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종교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신앙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은혜의 교리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칭의론과 구원론을 가능하게 했고, 죄의 용서와 사면을 확신케 해 주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영혼의 위로를 맛보고 싶어하던 중세 말기의 성도들은 시원한 복음의 축복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일터와 삶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어, 열심히 주어진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갔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유산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경고한 바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기억을 상실할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유산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들, 상실된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러하다면, 과연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적 유산을 얼마나 소화하고, 계승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은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다 새롭게 체험하고, 핍박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생애를 슬기롭게 가꾸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각박한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했던 은혜의 교리와 그와 연계된 성경적 교훈들은 설교와 책자를 통해서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침으로 남았다. 루터와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성도들의 일상생활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 깊은 감동을 주었고, 역동적인 삶에의 동기를 부여했다. 중세 말기 시대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둠이 깊이 드리워져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로마 가톨릭의 권세 아래 농촌과 가정에서 소소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성도들에게 자긍심과 행복이란 전혀 맛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전쟁과 전염병과 마귀에 연루된 소문들은 널리 팽배해 있었다. 일상은  불안하고 비참하며 우울했으며, 불행한 소식들만이 난무했었다.


중세말기에는 명쾌한 구원론이 정립되어져 있지 않았다. 칭의와 대속, 교회와 구원에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흘러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 교회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게 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종교개혁의 신학사상들은 16세기를 살아가던 성도들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이었고, 주어지기 시작한 모국어 성경, "말씀의 빛"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큰 감동과 평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 죽음과 전쟁으로 퇴락하던 사회


종교개혁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갈망하고 있던 생존에의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를 제공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 아래서 신음하던 자들이 기다려온 자유함에의 응답이기도 했다. 비록 뮌쩌의 농민혁명이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군주들과 교황에 대해서 절대 충성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유럽에 몰아닥친 전쟁과 전염병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을 흔들어 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종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신뢰를 저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자유에의 갈망과 근대적인 개인의 소중함을 터득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낸 개신교회로 진행하게 한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연옥에 가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고백하지 못한 죄 때문에 고행을 당해야 한다는 형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고행과 순례를 마친 후에 면죄부를 받았다. 사람들은 장래에 지은 죄에 대해서도 미리 면죄부를 주문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의 사업수단으로 변질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형벌을 피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재발견하게 된 종교개혁자들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로부터 거대한 공적인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전쟁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분야의 문제들을 새롭게 재설정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는 성직자들과 수도원에서만 하나님께 의미 있는 일들이 이뤄진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특징은 아주 사소하고 시시하게 여겨지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그것을 아는 지식으로 파헤쳐 나가도록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고답적인 학문탐구에 빠지지 않았고, 일상이라는 현실의 토양에서 자신들의 깨우친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들이 견고히 뿌리내기기를 갈망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자신들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에 깊이 관련을 맺은 사항들에 대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새로운 서구문화의 출현을 갈망하던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적합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에 격리된 경건이 아니라, 시장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중요시하여 복음을 선포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와 강의와 저술을 통해서 선행과 공로사상에 대해 냉철한 비판정신을 발휘하면서, 일상을 중시하는 성경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했다. 칼빈이 수도사들을 비판했는데, 그들의 게으름, 무지, 악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적합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교황권의 혼돈, 권위의 위기와 민족주의


오랫동안 쇠퇴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던 유럽사회에서 무기력하고 무능하던 봉건 군주들과 결탁했던 로마 교황청에서는 자신들의 내부적인 권력쟁탈에 여념이 없었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는 결정적인 날을 맞이하고 있던 중세말기,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가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1303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전쟁비용의 충당을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보니파시우 8세 교황이 반발하였다. 1308년 프랑스 국왕은 교황의 별궁인 아나니를 습격하고 교황을 납치하였다. 프랑스 국왕의 간섭 하에 새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지만,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비뇽에 머물면서 힘을 잃어버렸다. 이것을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고 있는데, 1307년부터 1377년까지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프랑스에서 재위하던 변칙적인 상황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 우르바노 6세가 로마에서 선출되자,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이를 거부하고 1379년 아비뇽에 또 다른 교황을 세웠다.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각각의 교황이 재위하는 극심한 혼란상이 빚어졌다. 두 명의 교황들은 서로를 향해 파문하였고, 어느 쪽이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모두 취소하고 새로운 교황을 뽑았지만, 모두 다 물러나지 않아서 세 명의 교황이 재위하기도 했었다. 세 명 교황들 중에서 1415년에 마지막 한 사람이 사망하면서 극렬한 혼돈 사태가 종결되었다.


14세기 백 여 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는 권력쟁탈전에 몰두해 있었기에,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혼돈 속에 빠져 있었다.


최고로 여겨지던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상실되고 교황청에서 관할하는 행정력도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활의 거의 모둔 분야에서 로마 가톨릭의 무능함이 드러났다. 일반 시민들은 교회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정치와 사회와 경제까지도 장악하여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 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들어왔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이탈리아 주변의 유럽 거의 모든 국가들의 군사문제 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대에, 이 사건은 유럽을 뒤흔든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밀라노의 감독 사보나롤라는 부패한 교황청과 시정부 부유층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질타하였다.


유럽 각 지역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결탁해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림에 저항하는 민족주의가 등장하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저지대 국가, 영국 등 국왕들과 군주들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황제에 맞서서 각자의 재정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발이 크게 퍼져있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사회적 요구가 무엇이었던가를 민감하게 파악하였다.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등 각 지역에서 확산된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제시하여 재세례파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분리주의를 방지하는데 앞장섰다.


2) 전쟁과 죽음


유럽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1337-1453)이었다. 프랑스 국왕 필립 6세 (1328-50까지 재위)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키텐 지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프랑스 전지역에서 피나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부담시켰고, 농민들과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6세기에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던 것은 귀족들의 억압과 큰 땅을 소유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귀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의 영토 확장 경쟁에도 나섬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받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스위스 땅에 침략해 들어오자, 칸톤들이 연합하면서 스위스라는 산악지대의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1511년에 합스부르그 왕가의 후원을 받은 스위스 용병부대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1515년에 이탈리아 마리그나노에서 대대적인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는데, 프랑스에서는 밀라노 지역을 남부의 관문으로 생각하여 장악하려고 했다. 스페인, 잉글랜드, 이탈리아 로마 교황의 군대까지 동원되어 스위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연합군이 형성되었으나, 프랑스의 새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스위스 부대를 전멸시켰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교황과 이탈리아에 대해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자 방안을 강구해 왔었다. 스위스 등 연합 군대가 참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가공할 신무기로 무장된 프랑스 군의 포병부대가 없었던 것이다.


츠빙글리는 전쟁의 비통함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면서, 스위스 사람들이 참여하던 용병제도에 반대하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던 스위스 칸톤 들의 연맹은 살아남기 위해서 결코 주변국가들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영구 중립을 선포해야만 했다.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이상을 갖고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14세기에 실존했었다고 알려진 "빌헬름 텔의 신화"를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폭정에 거부하여 민족을 구원하려던 한 영웅의 이야기는 전쟁의 공포에 두려워하던 스위스 동맹들에게는 큰 위로였다.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동부를 지배하던 사보이 공국은 수백 년 동안 인접지역에 있는 스위스 제네바를 다스려왔다. 인구 6천명이 살던 교통의 요충지 제네바는 교황이 지명한 주교가 다스리던 독립 도시였다. 그래서 사보이 공작이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고, 점령군을 통해서 지배를 강화하자 목숨을 걸고 싸웠다. 1525년에 주교와 모든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두려움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웃 도시 베른 등에서 온 스위스 동맹군의 도움으로 마침내 제네바는 독립을 하게 되었고, 1535년에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과거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종교개혁으로 가입하였으며,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 (post tenebras lux)는 문구를 도시의 표어로 채택하였다. 1602년 11월에 다시 재침공을 가해왔으나, 완전히 무찌르고 독립하였다.


3) 흑사병과 심판의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관념은 중세 말기 유럽 사람들에게 강하게 남아있었다. 흑사병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인들의 의식주 생활환경이 너무나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열악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체에 필요한 기본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면역력이 극히 저하되어 있었다. 여러 항구를 드나드는 이탈리아 상선들에 실린 짐들 속에는 벼룩과 쥐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1347년 10월 이탈리아 제노아 선박들이 시칠리에 당도하면서 흑사병이 발병했고, 다음 해에는 남부 독일로 확산되어졌으며,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저분한 오물들이 뒤섞여있는 더러운 거리와 습기에 가득 차 있는 건물의 음습한 곳에는 쥐와 벼룩들이 들끓었다. 일단 사람에게 감염이 되면,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서 병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한번 감염이 되면 흑사병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드러내는 흑사병에 감염되면 림프선이 부어올랐고, 피부에 출혈이 있어서 검은 반점과 검은 색 버짐이 나타났다. 그래서 흑사병이라고   불렀는데, 마지막 단계는 피를 토하고 고열을 이기지 못하다가 사망하였다. 몸 속에서 나오는 물질들은 병균에 감염되어져 부패한 것들이, 땀, 배설물, 침, 숨 등에 섞여서 몸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악취가 진동했다. 소변의 색깔도 검은 색이라서,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시켰다. 어떤 도시에는 인구의 절반이 죽기도 했다.


흑사병은 언제 어떻게 옮겨지는지도 모른 채 확산되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박테리아에 감염이 되면 혈관 속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패열증으로 쓰러졌다. 1347년부터 1353년 사이에 퍼진 전염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천 5백 만명이 희생되었다. 공포스러운 죽음은 각 지역의 미풍양속을 바꿔놓았다. 부모가 감염된 자녀를 내다 버렸고, 역시 자녀들도 병으로 죽은 부모를 버렸다. 심지어 교황의 경우에도 페스트에 감염될 경우에는 종부성사를 받지 못할 정도였다.  


1505년 가족의 비극적 사망을 경험하게 되는 루터도 페스트로 인해서 동생 하인츠와 바이트를 잃게 되었다. 루터는 둘째 아들이었고, 네 명의 누이들이 있었다. 자주 흑사병이 창궐해서, 유럽 전 지역에는 예기치 못한 희생자들이 나왔는데, 1505년 6월 13일, 에르푸르트 대학에서도 교수 세 명이 한꺼번에 사망했고,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람들은 차라리 수도사로서 죽게 된다면, 위대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수도사의 길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집에서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으로 돌아가던 길에, 7월 2일 벌어진 무시무시한 천둥번개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된 것은 우연히 벌어진 낙뢰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형제들의 죽음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1519년 여름, 유럽 전 지역에 전염병이 확산되어서 인구의 삼분의 일, 혹은 사분의 일이 몰사하고 말았다. 유럽의 가정들은 엄청난 비극에 휩싸이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성도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돌보다가 자신도 감염되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를 남겼다. 다행히 은혜를 입고 회복되었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생애 속에 개입하여서 호의를 베풀어주신 바에 따라서 살아난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줄어들었지만, 비텐베르크에서는 또 다시 1527년에 흑사병이 발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신을 떠났다. 루터의 집은 원래 수도원 건물이었기에 숙소로 사용되면서, 많은 환자들이 머물러서 치료를 받았다. 루터가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을 정도였다. 여기에 다가 매독병도 널리 확산되어 있어서, 군인들, 성직자들, 농민들, 심지어 교황까지도 감염되었다.


이처럼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기에, 면죄부 판매가 상상치도 못할만큼 성공적으로 판매되었던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옛 신앙이 무너져 내리던 시기에,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품게 하는 새 소식이 될 수 있었다.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유입으로 신속하게 기능적인 소상공인들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제네바는 새로운 정치적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칼빈은 이처럼 전쟁의 공포와 불신, 주교에 대한 불신과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도시에 설교자로 사역하면서,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진 원주민들과 각지에서 몰려온 6천여 명의 종교 피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도합 인구가 1만 2천명에 이르게 된 도시의 문제들을 다뤄야만 했다. 칼빈은 모든 노력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도시에 만연된 불신앙과 신성모독을 고치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경건하게 증진시키는 노력에 치중하였다는 점이다.      


복음을 통하여 제시된 구원의 은총에 확신을 가지도록 선포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교리를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가치로 선포하였다. 오직 은혜로만! 중세말기와는 달리 은혜에 대해서 번잡한 신학적 이론만을 개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여 가장 순수한 복음적 사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하였다. 죄인을 향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가 역동적으로 나타나서 생명이 회복되어지도록 개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 말기의 쇠락해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던져진 은혜의 교리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지만, 결국 루터와 칼빈 등은 이단자들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계속)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3840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대한민국.. 정녕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열에 합류한 것인가?





유엔 총회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것을 철회하라는 유엔 차원의 결의안이 상정되어 찬성 128표, 반대 9표, 기권 35로 통과되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뜻을 함께 하는 나라는 전세계 9개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이것으로 한국과 미국의 정신적 동맹은 끝이 나고, 한국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열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그 대가는 온 국민이 받게 될 것입니다. - 김성욱 대표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가 늘상 보는 신문지면이나 뉴스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많이 보았으며, 또한 세상의 주류언론들 대다수가 반이스라엘, 친아랍 성향을 띠고 있다.


우리가 중동지역의 분쟁을 논할 때 항상 이스라엘이 침략자요 공격자의 입장에서 비춰지는 것도 이처럼 언론의 왜곡 편향 보도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이스라엘을 싫어하고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스라엘을 미워한다.


왜 이 세상은 이스라엘을 미워하는가? 이는 이 세상의 신이 마귀이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한 민족이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율법이 계시되었고, 말씀도 그들에 의해 전수되었으며, 메시야가 나신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요, 예언의 지표가 되는 나라도 곧 이스라엘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서시는 곳도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이요, 그분이 돌아오셔서 다스리실 천년왕국 때 중심이 되는 곳도 바로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이렇듯 중요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요 유대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들에 대해 예언하실 때(마 24장), 그 지표가 되는 대상도 바로 예루살렘이요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하고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도 이는 매우 의미깊은 사건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일거수일투족은 바로 성경 예언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마지막 날들에 벌어질 대환란과 아마겟돈 전쟁과 그리스도의 재림 또한 이스라엘과 연관이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마귀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미워하였고 어떻게든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혼잡케 하여서 메시야를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도 마귀의 시도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백성들로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부추긴 것도 마귀의 시도였고,


그 땅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전히 타민족의 영향 하에서 배교로 치닫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케 하려고 한 것도 마귀의 일이었고,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시자 헤롯으로 하여금 모든 아기들을 죽이도록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시도한 것도 마귀의 사주였고,


그들의 메시야, 성경에 예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케 하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의 가운데 행하도록 하고,


또 반셈족주의, 반유대주의를 부추기며 계속적으로 이스라엘을 박해하여 존재조차 어렵도록 조장한 것도 그 배후는 마귀이며,


현재도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언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이스라엘을 고립시키려고 시도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온 나라가 합심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힐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때에 사탄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괴롭힐 것인지 잘 나와 있다. 이렇듯 세상이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그 배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계획을 무산시키고자 하는 사탄마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해서 볼 것은

소위 교회라고 불리는 이들이 반이스라엘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도 또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어떤 목사는 모 기독교 신문에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 학살을 즉각 중단하라’는 제목의 글을 싣기도 했는데, 그의 글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친근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순전히 미국 때문이며, 우리 대한민국이 미국에 예속되어 그렇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비단 이 사람 뿐만 아니라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인본주의적인 시각에 휩쓸려 이스라엘에 대해서 폭력국가라고 매도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은 한없이 불쌍하고도 힘없는 민족이며, 이들에게 그들의 땅을, 그들의 고향을 찾아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왜곡된 사실이다. <참고 자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의 진실!>


물론 이스라엘이 지금 모든 면에서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의에 휩싸여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보다 탈무드와 미쉬나 등 자신들의 전통과 구전율법을 더 우위에 둔다. 여전히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눈이 멀어 있는 무지한 백성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고난의 용광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져야 하며, 무지가 깨우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며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을 간과하여 오류를 범한 많은 이들을 보게 된다. 반셈족주의, 반유대주의의 선봉이요 실행자들은 모두가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었다.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기에 박해받고 탄압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바로 그들의 논리였고, 이 논리로 인해 유대인을 향한 엄청난 박해들이 줄을 잇게 되는데, 십자군 전쟁, 유럽에서 일어난 많은 끔찍한 일들, 그리고 가깝게는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학살까지.. 그 배후에는 이러한 엄청난 논리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또한 이스라엘에게, 유대인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과 언약들은 더 이상 유대인의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교회로 대체되었다는 논리를 낳게 되었고, 또한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을 교회에게 적용하여 많은 이단들이 생겨나고, 교리가 혼잡케 되고, 더 나아가서 재림도 삭제되고, 천년왕국도 삭제되는 신학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사탄은 신이 나서 자기 세력들을 더욱 더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성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비록 하나님께 범죄하여 벌을 받았으나, 그것에 대해 기뻐하거나 자신들이 나서서 이스라엘을 응징하려고 했던 나라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들의 행위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선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기뻐하고 그들을 핍박하고 괴롭혔기에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사적으로 보아도 이스라엘을 박해하고 핍박하고 홀대했던 많은 나라들이 쇠락하거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당대 가장 힘있던 제국으로 꼽혔던 바빌론 제국이나 앗시리아가 그러했고, 이집트가 그러하다.


또한 오바댜에는 유대인을 핍박한 에돔의 죄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들의 결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바댜 12절에서는 "그러나 너는 네 형제의 날, 곧 그가 타국인이 되던 날에 방관하지 말았어야 했고 너는 유다 자손이 멸망하던 날에 그들을 기뻐하지도 말았어야 했으며 고난의 날에 너는 오만하게 말하지도 말았어야 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이들의 죄는 바로 유대인들의 고난을 방관하고 멸망을 기뻐하고 그들의 멸망을 통해 어부지리하고자 했던 그들의 행위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또한 에돔은 대환란 때 유대인들의 고난을 기뻐하고 오히려 적그리스도에게 유대인을 넘겨주는 등 악한 행위를 일삼을 것이라 예언하고 있으며(옵 10-11), 그러기에 이들의 결말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영원히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옵 10).


자, 성경을 통해 다시 한번 면밀히 살펴보면서 우리는 단지 유대인들을 향한 악한 행위로 인해 그들이 심판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유대인에 대한 악한 행위이지만 그 내면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시하는 그들의 더 악한 마음들이 숨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 할 줄 안다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인 유대인에 대해서 함부로 하고 그들의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에스겔 35장에서는 세일(에돔)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들의 심판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주가 거기 있었느니라"(10절), "나 자신을 알게 하리라."(11절)고 각 구절의 끝에 말씀하신다.


즉 주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그들의 의도와 생각을 지적하시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이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명시하신 약속의 땅의 상속자요, 소유자는 이스라엘이다(창 15:18-21). 땅의 지경과 각 민족이 거주하는 경계를 정하신 하나님께서(행 17:26)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의 땅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거기는 이스라엘의 땅인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느 누가 감히 그곳을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향이라고 말하며, 이스라엘이 몰래 잠입하여 그 땅을 억지로 뺏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겠는가? 팔레스타인인들을 옹호하고 그들의 난민촌을 클로즈업하고 예루살렘이 그들의 수도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인권이 어쩌구 하며 운운하는 모든 이들은 실상 인본주의의 허울 아래서 하나님을 공공연하게 대적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더 개탄스러운 것은, 소위 '교회'라고 하며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이런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스라엘에 어서 화평이 오도록 말이다.


자,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주님의 재림이 어서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화평과 진정한 안식은 바로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이 땅을 다스리실 때 그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창 12:3).



출처: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통권 113호)

네델란드 기업가 바스 란스돌프(Bas Lansdorp)가 2023년까지 화성에 지구인을 보내는 ‘마스 원(Mars one) 프로젝트’를 추진한답니다. 처음에 4명을 보내고 그 후 2년마다 4명씩 더 보내는 식으로 보낸답니다. 지난 4월 22일부터 화성으로 갈 희망자를 모집했는데 불과 2주일 사이에 7만 8천 명이 지원을 했답니다. 화성까지 가는데만 약 8개월이 걸리고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편도우주여행인데도 말입니다. 지원한 희망자는 미국인이 1만 7천 324명, 중국인이 1만 241명, 그 다음으로 영국인이 3,581명이랍니다. 지구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놀랍습니다. 

화성까지 지구인들을 싣고 날려 보낼 우주선은 우주정거장까지 화물을 싣고 오가던 무인 우주왕복선 드래건(용)호를 개조해서 사용할 것이랍니다. 화성에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기술력이 지금은 없기 때문에 화성에 가면 거기에서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한답니다. 

소요경비는 약 6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데 란스돌프는 이 경비를 “마스 원 프로젝트” 전세계 TV중계권 판매로 충당할 것이라고 한답니다. 화성 우주인들이 화성으로 출발하여 도착하고 화성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전 과정을 TV로 생생하게 중계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마스-원 프로젝트는 올 8월 31일까지 화성 이주희망자 지원을 받고 전세계 300개 지역에서 1차로 50~100명씩 선발하고 다시 네 차례의 선발과정을 거쳐 28~40명을 선발한 다음 7년 동안 우주인 훈련을 시킬 예정이랍니다.


	화성 거주지 상상도/Mars one 제공

화성에 우주인 정착촌이 건설된 상상도를 보면 근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원추형 우주선 단독주택들이 줄을 지어 이어져 있고, 사다리인지 계단인지도 보이고, 앞에는 태양광발전설비가 펼쳐져 있고, 자동차 같은 것도 서 있고 흰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들도 보입니다. 
멋있어 보입니까? 지구로부터 아득히 먼 우주공간의 별천지가 환상적으로 보입니까? 당신도 화성 우주인으로 지원해 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화성은 태양으로부터 1.52 AU(1 AU는 지구-태양 간 거리, 1억 5천만 킬로미터), 즉 태양으로부터 약 2억 3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타원의 궤도를 686.98일 (1.88년)에 한 바퀴씩 공전하고 있습니다. 화성은 지구보다 훨씬 작습니다. 지름이 6,794 ㎞로 지구지름의 절반이 약간 넘고, 질량은 지구의 10분의 1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화성표면의 중력은 지구의 0.38배에 불과합니다. 체중이 3분의 1 정도로 줄어드니까 헤비급 체중을 가진 사람도 화성에서는 몸이 가벼워져서 날아갈 듯 한 기분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화성의 자전주기는 지구와 아주 비슷한 긴 24시간 37분입니다. 또 자전축의 기울기도 지구가 23.5도인데 비하여 25도로 아주 비슷하여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의 변화도 지구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지만 낮에는 기온이 25도 가까이 올라가고 밤에는 영하 110도까지 떨어집니다. 하늘에는 감자처럼 생긴 조그만 달이 두 개나 떠다닙니다.  

화성의 대기는 지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대기라 할 것도 없습니다. 뭐, 진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성분은 95% 탄산가스입니다. 오존층이 없고 자기장도 없으므로 태양광선의 자외선이 살인광선처럼 대기를 통과하고 우주로부터 방사능 입자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더러 먼지폭풍도 분답니다. 만일 인간이 우주복 없이 화성의 대기 속으로 나선다면 화성의 낮은 대기압이 고성능 진공소제기처럼 달려들어 호흡과 혈액의 산소와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뽑아내어 인간의 몸을 순식간에 북어처럼 말려버릴 것입니다. 우주선 주거공간에 그대로 머문다 할지라도 우주방사선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화성에서는 화성의 지표면에 놓여있는 것이 다를 뿐 우주정거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주복을 입고 밖에 나오는 것 말고는 그저 거주 공간 안에 전자게임이나 하면서 갇혀 있는 것밖에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지구와의 무선통신이나 인터넷이 가능하긴 하겠지만 지구와 화성 사이를 전파가 오가는데 몇 십 분이나 걸리니 그것도 문제입니다.

지구로부터 가져갈 수 있는 식량이나 물이 얼마나 될지, 화성에 도달할 때까지 좁은 우주선 안에 갇혀 캄캄한 우주공간을 8개월 동안 날아가는 동안 우주인들이 정신적 고통과 우주방사선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무중력상태가 가져올 무기력증과 골다공증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 인간관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화성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식량과 물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화성의 혹독한 환경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불의의 사고는 없을지, 과연 정착이 가능할지.....

화성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트루먼 쇼’ 같은 흥미로운 TV중계가 아니라 화성우주여행과 화성착륙의 위험한 순간들과 화성에서 우주인들이 하루하루 당하는 고통과 비극, 인간의 무모한 실험결과를 TV중계로 지켜봐야 할지, 란스돌프가 인류의 이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통하여 거부와 유명인사가 될 수 있을지 화성 우주인 프로젝트라는 인간들의 악한 호기심을 이용한 살인쇼를 벌인 희대의 악마로 지탄 받을지를 지켜보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무덤으로는 화성이 최고일 겁니다. 화성에서 죽으면 절대 안 썩을 겁니다. 하루 한 번씩 영하 110도 냉동에다, 95% CO2(탄산가스) 밀봉방부에다, 생물도 없고, 박테리아 같은 세균도 없고, 태양 자외선, 감마선, 우주 방사선이 항상 완전멸균소독을 계속할 테니까요.

지구에 매장지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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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ft 1

 

Mountain/Sean Kelly

 

Try to be a mountain.

I would like to be one.

It would calm and quiet.

A peaceful  town, nestled at my foot.

Smoke curling gently from chimneys.

The town has a harbor, with fishing boat.

And beyond, the nice calm peaceful ocean.

The pine trees sway in the breeze

Clouds cover my peaks like a gentle blanket.

 

I hear the sounds of the quiet town,

The sounds from the tavern,

The men mining in the caves,

Picks and hammers  rising in the caves.

Taking out large deposits of ore.

The mix of industrial sounds, with natural sounds, it is odd, with even.

The blue ocean rippling in the breeze.

Imagine.

 

I feel. The calm air.

Not rough.

Not bumpy and uneven like a rock wall.

Gentle and soft, like a fluffy pillow.

It is like this when you are a mountain.

It is nice.

But, it can get boring, an empty chalkboard,

Sitting there all the time.

Nothing to do. But watch,

Wait,

And wait.

All the time.

 

I think that time is walking on.

I’m not sure.

I notice bodies being carried to the graveyards.

I sense people being born.

It is depressing, a cold dreary time,

Yet happy, a bright sunny day.

I watch the town grow and shrink.

I keep thinking about things.

I know I will eventually die.

Nothing lives forever.

I don’t mind.

Living is like a birthday present.

Dying is a school critic’s Monday mornig.

This is how I live.

 

 

(11세 천재 소년의 詩)

 

(Mountain)/Sean Kelly

 

하나의 산이 되어보십시오

나는 산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평온하고 조용합니다.

평화로운 마을이, 발아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굴뚝에서 부드럽게 감는 연기.

마을에는 항구가  있고, 낚시 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너머, 평화로우며 조용하고 멋진 바다.

소나무는 산들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구름은 부드러운 담요처럼 봉우리를 덮습니다.

 

나는 조용한 마을의 소리를 듣습니다.

선술집의 소리,

동굴에서 채굴하는 남자들,

망치를 들고 올렸다 내렸다 하며.

대규모의 광석을 캐냅니다.

산업 소리와 자연의 소리가 섞인 것은 고르면서 이상합니다.

산들 바람에 잔물결이 출렁이는  푸른 바다.

상상해보십시오.

 

나는 느낍니다. 잔잔한 공기를.

거칠지 않습니다.

고르지 않은 바위벽처럼 울퉁불퉁하지 않습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솜털 베개처럼.

그대가 산일 이와 같습니다.

그거 좋네.

그러나 그것은 빈칠판처럼 지루할 있습니다,

거기 항상 앉아 있으니.

바라보는 외에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다림,

바라봄,

그리고 기다림.

항상.

 

나는 시간이 걷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시체들을 묘지로 옮겨가는 것을 봅니.

나는 사람들이 태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것은 우울하며, 차갑고 지루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행복하고 화창한 날도 있습니다.

나는 마을이 성장하고 수축하는 것을 지켜 봅니다.

나는 계속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결국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영원한 것이란 무엇도 없습니다.

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삶은 생일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죽어가는 것은 학교 평론가의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번역: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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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 항상 따르는 사람들의 비밀 1. 쉽게 사는 것처럼 보여라 - 하지만 너무 과시하지는 말라 2. ‘작은’ 카리스마를 키워라 - 손짓과 눈빛만 바꿔도 된다 3.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가져라 - 하루하루가 즐거워진다 4. 아무에게나 무조건 퍼주지 마라 - 고마워 할 사람에게 은밀히 베풀어라 5. 감정에 휘둘려서 인간관계를 끊지 마라 - 절대로! - 마크 마이어스 -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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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교회는 공동체이자 가족이다. 진실한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진실한 공동체는 일차적으로 신앙 고백을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한 신앙 고백을 위해 함께 예배하고 성경 공부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공동체이다. 또한 진실한 공동체는 이차적으로 삶을 나누는 공동체이다. 일상의 삶을 나누고, 마음과 생각을 나누고, 나아가 주머니를 나누는 곳이 공동체이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곳, 그곳이 공동체이고 교회이다. -이진오의 [재편] 중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공동체로 세우셨습니다. 각 지체의 연합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다른 지체를 더 요긴하고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가족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을 고백하는 ‘우리’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일상’을 나누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지체의 부족함을 채우는 지혜로움이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시작입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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