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1차 전도여행은 아시아 지역에 국한되었다

다소를 중심으로 인근의 밤빌리아,길리기아 지역이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서구지역(그리스,메카도니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마케도니아, 고린도, 데살로니가, 겐그레아, 아가야, 빌립보교회, 로마교회가 세워졌다

이방인 사도답게 바울은 아시아와 서방교회의 개척자가 되었다




<서구 초대교회들>


1. 로마 교회

 

로마서를 기록하기 30년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있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로마에는 읽을거리가 많았지만 무명의 저자가 쓴 로마서를 주목하는 대중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로마서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자리잡아 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력만으로도 바울의 상급과 비중은 높아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로마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중심교리인 구원, 칭의, 성화 문제를 심도있게 저술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거룩한 삶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강조했다


특히 로마서에 소개되는 하나님의 의(義)는 농축된 의미를 가진 신학개념으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교리에 권위를 부여했다

의(義)는 영어의 의미로 <Righteousness, Justice) 개인의 도덕적 올바름, 개인적 윤리와 관련된 개념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바른관계, 언약관계를 성실하게 행할때 죄로 억눌린 자들을 옹호하여 의롭다 평가하는 구원의 폭넓은 의미를 담고있다

따라서 칭의는 율법의 행위(율법조항과 할례)와 무관하게 타락한 인간의 죄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인정받는 것이다


세상법에서도 범죄하면 법정에서 사형,징역,벌금형 같은 선고를 받아 속죄를 한다

죄의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개념은 어디에나 있다

하나님의 옛언약에 따르면 범죄한 사람은 지옥에서 형을 치루어야 한다

그런데 새언약(복음)은 그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해서 속죄를 대신 치루게 했다

단지 죄를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속죄되는 복음은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 칭한 것이다


2. 마케도니아 교회


마게도냐 교회에 대한 기록은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온다

마케도냐 교회와 아가야 교회가 특별히 거액의 연보를 하였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15:26)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고후8:20)

이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에게 전달되었다


특별히 마케도냐 교회는 부자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은 환련의 시련과 극심한 가난에 처한 상태였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8:1~2)

그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아마도 이런 서구의 초대교회 전통이 훗날 미국교회에서도 가난한 국가에게 후원을 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도 전쟁 직후 미국교회로부터  재정적, 물자 후원, 병원이나 학교설립 등의 지원을 받았다


3. 고린도 교회


분쟁이 많았던 고린도교회 때문에 바울은 심오한 교리들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마케도니아 교회보다 먼저 연보를 시작하였으나 1년이 넘도록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고후9:2)

고린도교회가 연보를 시작하였다는 소식은 다른 교회들에게 분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바울은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마무리 지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노니" (고후9:4~5)


4. 빌립보 교회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기쁘게 만든 교회였다

바울이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선교를 떠날때 두 번이나 선교비를 후원하였다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때도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후원금을 전달하였다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후원금에 대한 감사편지였다

교회의 재정은 이렇게 선교비로 흘러나가야 한다



5.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미래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데살로니가 서신에 특별히 휴거와 휴거의 시기, 부활의 순서에 대한 기록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미래가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편지를 쓰자 이번에는 강림이 가깝다고 오해하여 두번째 편지를 쓰면서 강림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을 언급하였다

일하지 않고 게으른 자들과 빈둥거리는 신자들을 위해 주님과 동행하는 성결의 삶을 요청하였다



6. 겐그레아 교회


겐그리아 교회는 가이오가 자신의 집을 교회당으로 제공하면서 시작되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지역의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시작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롬16:23)

겐그레아 교회에는 바울의 보호자였던 뵈뵈도(롬16:1) 교회의 일원이었고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서원의 표시로 머리를 깍았다(행18:18)



7. 아가야 교회


아가야교회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마게도냐 교회가 연보를 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를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롬15:26)

아가야에서 처음 믿은 사람은 스데바나의 집으로 그도 바울의 후원자였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고전16:15)




<아시아 교회들>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외에도 아시아(터키, 수리아 지역)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고 바울은 그들에게도 서신을 보냈다


1. 갈라디아 교회


갈라디아 교회는 개종한 유대인들이 바울의 교리와 권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옛방식(율법조항, 할례)을 다시 소개하며 신자들을 미혹했다

이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직과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다른교훈(옛방식)에 미혹된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나 자신을 변증하기 위해 베드로의 외식을 언급한 것은 옥의 티에 속한다



2. 골로새 교회


당시 로마에 있었던 바울에게 에바브라가 찾아와 골로새 교회의 사정을 알림으로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마호메트,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같은 역사의 중요한 성인들과 동급 취급한다

그러나 예수 외에 다른 사람들은 성령으로 잉태하지도 않았고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았고 부활하지도 않았다

골로새 교인들 중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 예수를 많은 영적존재들과 같은 위치에 두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천사를 숭배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게 그들 삶의 중심으로 돌려 놓으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가장 먼저 존재한 만물의 으뜸이요, 창조에 참여했으며 죄의 권세를 멸하고 영광의 소망이 되신 유일성에서 차별화되었음을 강조하였다



3. 디모데전후서(에베소 교회)


바울에게 믿음의 아들이자 복음의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이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에 거주하며 바울의 로마 1차 투옥시 함께 투옥되었고 석방후에는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 시무했다

바울은 감독, 집사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지 편지로 지도하였다

지도자는 말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

도덕적, 윤리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으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신중하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가정을 천국으로 만든 신자이어야 한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13번째 마지막 서신으로 67년에 기록하였고 68년에 베드로와 함께 순교하였다

마지막에 소개한 인물 중 리노는 바울이 순교한 후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12년간 봉직하였다



<​교회의  사명>

계시록의 일곱교회도 마찬가지지만 바울 서신의 수신자 교회들도 다양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도자의 문제, 트러블메이커들, 쉽게 미혹에 빠지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믿음에 여정에서 파선한 두 사람,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딤전1:18)가 있으며 세상으로 돌아가 배교한 데마도 있다(딤후4:10)

최고의 상급에 이른 신자들도 있다

지금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돈을 좋아하며 성공한 목회자는 제왕처럼 행동하는 것 때문에 교회가 지탄을 받고 있다

교회의 재정은 선교와 구제,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데 흘러가게 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보고 어떻게 짧은 인생에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것인지 교훈을 받아야 한다

바울과 베드로는 항상 우리의 본향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으로 보고 살았다

땅에서의 삶은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하늘의 본향이 영원하고 실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림자와 실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신자들을 얻어 도와주고 격려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출처: acoloje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까지 주시려고 
이 낮은 땅에 죄인들을 찾아오셨으나 
사람들이 방을 다 차지해 버리고 
아기 예수님은 
누우실 자리조차 없어 구유에 누이셨는데... 
여전히 세상은 서로 차지하려는 싸움과 
빼앗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싸움으로 가득하군요. 

이 성탄절에 
이 요란한 세상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 근심걱정의 먹구름 속에서 
내 마음에는 
내 가슴에는 과연 
작은 한 구석 한 귀퉁이라도 
아기주님 누일 자리가 
남아 있는지 돌아보아집니다. 

이 때만이라도 
내 작은 가슴을 아늑하게 둘러치고 
요란한 세상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예쁜 보료를 깔고 
따뜻하게 비치는 등불을 켜고 
난로불과 보글거리는 주전자와 젖병 
아기주님 눕혀 드릴 
포근한 요람을 준비하고 싶습니다. 

이 때만이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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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이라는 용어는 성경과 현대 크리스찬의 언어에서 자주 발견된다. 아직 이 용어의 의미와 적용에 대한 불일치가 넓게 퍼져있다. 이러한 불일치 가운데 어떤 것은 중요하지 않은 점에 대한 해석상의 단순한 문제인 반면, 어떤 것은 전통적인 복음주의와 오순절적인 믿음의 근본적인 교의에 도전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성회에서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관심을 분명히 하는 것이 적절하다. 


나라의 언어학적 의미


히브리어의 말쿠트(malkuth)와 헤라어의 바실레이아(basileia)의 원래 의미는 왕의 권위, 통치 혹은 지배 등이다. 나라의 영토, 국민, 경영은 부차적인 의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 범위이다.(시 22:28 참조)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그의 권위에 대항하는 우주적인 반역에 참여하고 있다.(요일 5:19, 계 11:17-18) 믿음과 순종에 의해서 사람은 그 반역에서 돌아서고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며 나라와 그 경영의 일부가 되다. 나라에 사람이 참여하는 것은 자원해서 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든지 안하든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다. 


오직 하나님 나라가 있으나 성경에는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즉 천국, 하나님 나라, 인자의 나라(마 13:41, 한글 번역에는 “그 나라”로 되어있음:역자주) 아들의 나라(눅 22:30 한국 번역에는 “내 나라”로 되어있음:역자주),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엡 5:5), 우리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계 11:15) 등으로 표현되어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구약에서 “여호와의 나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말쿠트 야웨(malkuth yahweh)라고 하는데 구약에 한번 나온다(대상 28:5) 물론 지상의 영토 혹은 소유지에 대한 말로써 “나라”라는 말은 많이 나타난다. “주권 혹은 지배”는 자주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의 개념에 대한 번역이다.(시 22:28 45:6, 66:7, 103:19, 145:11-13, 대상 17:14, 29:11) 구약 전체를 통하여(특히 시편과 예언서) 하나님의 개념은 그의 피조물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명백하게 표현되어있다. 비록 구약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왕되심이 분명히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가 장래에 성취 될 것에 대한 강한 강조도 또한 나타난다. 이러한 예상은 예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된 메시아적인 기대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9 시 9:6,7, 11:1-12, 24:21-23, 45:22-23, 슥 14:9) 단 4:34 은 하나님의 통치를 “영원한 권세”이며 “대대에 이르는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신약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개념이 구약에 스며있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는 덧붙여진 의미와,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중요성을 취한다. 예수의 사역은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 4:17, 막 1:15)는 선포와 함께 시작된다.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천국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신 적은 없지만 그는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셨고 (마 13 장, 막 4 장), 그의 사역에서 천국의 권세를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천국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7, 눅 9:2, 10:9,11) 예수 그리스도를 주(Lord)로 묘사한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임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천국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문맥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 통치는 ①사람들이 지금 들어가는 왕국 혹은 영역이며 ②시대의 마지막 의인들이 들어가는 장래의 종말론적인 질서로 보여지고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는 현존하는 실재이며 장래에 성취될 약속이다. 천국은 성령에 의하여 예수의 인격과 활동으로 지상에 이미 임하였다. 그러나 충만한 천국은 이 시대의 마지막에 있을 최종의 종말론적인 도래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 천국의 상태


예수를 따르던 몇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한 것”처럼 (눅 19:11)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찬들이 지상통치에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안내하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어느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인지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 17:21)고 대답하셨다.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자 하시는 분이 지상에서 그의 구속사역을 완수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회복될 하나님의 통치는 곧 현실로 나타날 것이었다. 사단의 지배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오늘날 구속사역은 완성되었으나 궁극적인 천국의 실재는 한정 되어있다. 현재 천국의 권세는 늙는 것이나 죽는 것을 막지 않고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이 주권적인 활동이나 신자의 기도와 믿음의 응답으로 자연법칙을 파기하시지만 천국은 여전히 연약한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 이전에 세상을 최종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의로운 정치적 및 사회적 활동도 중요하지만 천국이 주로 힘쓰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고 있는 각 사람들의 영적 변화이다. 천년 왕국과 천국의 궁극적 도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눅 21:31) 천국은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것을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이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시기는 (현재시대)천국의 권세와 현재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세 사이의 격렬한 대결로 특징 지워진다. 마귀와 하나님과의 싸움이 현 시대를 특징짓는다. 그것은 싸움의 시기이자 또한 성려의 시기이다. 신자들은 어두움의 세력을 대적해야 한다.(엡 6:12)


우리는 이 싸움에서 와전하고 즉각적인 성공을 보장받고 있지 않다. 질병, 죄 억압 혹은 귀실들림에 대한 승리는 현재의 천국의 권세와 앞으로 다가올 최종적인 승리와 부활에 의해서 확인될 승리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질병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리도록 부름 받았으나 우리는 우리가 기도해준 모든 사람이 다 낫지 않는 현실에 부딪친다. 우리가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하여 질병에 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눈에 띄는 승리에 즐거워하며 어떤 사람이 치료받지 못했을 때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악에게 지지 아니하며 현질서의 투쟁에서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에도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아니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생활의 본질은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하여 움직이는 것이며 완전한 구원은 항상 가능하지만 매 순간마다 즉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다.(롬 8:18-23 참조)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히 11 장, 행 12:2, 고후 11:23-12:10) 미래로 연기된 구원을 바라보며 고난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우리는 악의 파괴행위를 방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 시대에 천국의 도구로서 우리는 충성스럽게 악과 고통에 대항하는 싸움을 싸울 것이다. 


성령과 하나님 나라


오순절 주의자로서 우리는 천국의 시작과 진행하는 사역에서 성령의 역할을 인정한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성령이 임사셨다.(마 3:16, 막 1:10, 눅 3:22)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그의 권세있는 활동은 병든 자를 치료하고 죄 가운데 있는 남자와 여자를 영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그가 세례받을 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예수의 사역에서 의미있는 점이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게 이끌리시어 광야에 가셨다.”(눅 4:1) 예수의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는 천국의 출현을 증명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령의 역할을 묘사하였다. 구약 예언에 대한 성취의 부분으로서 그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였다. 천국의 권능은 십자가 부활과 승천에서 나타났는데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다. 성령의 시대는 성령의 공동체인 교회의 시대이다. 교회를 통하여 성령은 예수 자신의 천국 사역을 계속하신다. 


미래의 실재로서의 천국


성경적인 은사, 기름부음 받은 말씀의 선포, 적합한 표적과 기사 등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 활동 중임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시이다. 사단의 왕국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에 의해서 이미 침략을 당하고 있다.(요 16:11, 골 1:13, 2:15) 그러나 사
단의 최종적인 멸망과 모든 악에 대한 완전한 승리는 미래의 종말론적인 성취에 속한 것이다.(계 20:10)

우리는 계시록 20 장에 묘사된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전천년설을 믿는다. 우리는 현시대의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다음에 일어날 성경 예언의 주요한 성취는 지상에서 교회가 휴거되는 것이다.(고전 15:51-52) 우리는 교회의 휴거가 임박하였으며(막 13:32-37) 대환란 전에 휴거가 있을 것이며 (살전 4:17-18, 5:9) 그것이 하늘과 땅의 표적들이 이 시대의 끝이 가까이 옴을 나타낼 때(눅 21:25-28) 우리가 바라는 “복스러운 소망”(딛 2:13)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육체적인 휴거와 이어서 천년동안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과 함께 가시적으로 다시 오시는 것을 포함한다.(슥 14:5, 마 24:27,30, 계 1;7, 19:11-14, 20:1-6) 사단은 반역하고 타락한 이후 처음으로 결박당하여 무력하게 될 것이다.(계 20:2) 이 천년왕국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져오고(겔 37:21-22, 습 3:19-20, 롬 11:26-27) 인간의 타
락 이래 처음으로 우주적인 평화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사 11:6-9, 시 72:3-8, 미가 4: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에 불러들이실 것이며,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11:24-26)

천국과 교회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인 영적인 몸이다.(엡 1:22-23, 골 1:18) 그것은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것을 데려가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었던 사람이나, 믿을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도 있었고 교회의 사역이 완성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시대에는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고 있다. 교회가 천국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할 때“(마 24:14) 마지막 때의 극적인 사건이 시작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포함한 그의 영원한 나라를 영광 가운데 다스리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들

현재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들은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도 아니며 같지도 안을 것인데 이 세상 나라들을 “우리 주의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된다.(계 11:15)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정치제도 안에서 움직여 나가지만 이 정치제도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천국복음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가서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정치적인 실재는 아니지만 천국의 시민은 그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현재 모든 인간의 정부는 어느 정도 악한 자의 영향 아래에 있지만(단 10:13,20, 요 12:31, 14:30, 엡 6:12) 성경은 정부가 악한 자를 벌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가르친다.(롬 13:1-7) 정부의 권세자들은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하나님의 종들이다.(롬 13:6) 정부와 사회에서 발견되는 정의와 예의에 대한 이상들은 이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유산이다.(롬 1:20, 2:14) 그들이 반항적일 수도 있으나 세상 나라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불의와 사악함에 대하여 밝히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야 될 것이다. 

성경은 사회의 구족 속에 침투된 사회악과 싸우는데 있어서 크리스찬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명백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으나 진실한 신자들은 사용하는 수단에 있어서 달라야 할 것이다. 크리스찬들은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마 5:13,14) 그들은 가난한 자와(약 1:27, 2:16) 억울한 자(약 5:4-6)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불의한 법을 공격하며(사 10:1,2), 공의와 선을 추구해야 한다.(미가 6:8, 암 5:14,15)

세상의 나라들은 사단의 영향을 받기가 쉽다.(요 12:31, 14:30) 그리스도만이 악의 권세를 초자연적이며 대대적으로 멸망시킬 것이다.(단 2 장, 계 19 장 참조) 현재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자랑하는 좋은 구조일지라도 결국 보다 나은 천국 통치를 이루기 위하여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세속적인 신권정치나 혁명적인 의견에 근거하여 과격한 문화 변혁을 꾀하는 청사진이 아니다. 그 대신에 그것은 이간의 인격과 삶을 급격하게 변화시킨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기준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과 여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흐름을 간섭한다. 이 과정을 메시야의 초림으로 시작되었으며, 교회시대를 통하여 진보되었으며 그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안에 있지만 이에 속해서는 안된다.(요 17:11, 14:16) 롬 14:17 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통치)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게 됨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잘못된 관점

적극적이 사고방식이나 적극적이 고백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성경적인 실재를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천국의 영광이 임하도록 주장하는 것을 여기서 잘 깨닫고 그것이 진실된 크리스찬들을 오도하며, 혼동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이 천국의 건강과 번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단순히 고백한 보상으로서 그 것들이 임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단순한 의미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신자들은 그들의 “신적 권리(divine right)”를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작은 신들(little gods)"이라고 하는 신학적 주장은 명백하게 성경적인 진리와 모순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다고 약속하셨지만(빌4:19) 우리의 물질적인 탐욕을 채우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고난과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부정과 같은 중요한 성경적이 주제를 깍아 내리거나 파괴하는 어떠한 가르침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크리스찬들에 대하여 우월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가르침은 하나님께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아시며 공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6:25) 생활의 필수적인 것들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믿음이 적은 것을 나타낸다. (마 6:30) 그렇다면 호화스러운 생활에 마음을 빼앗기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느끼시겠는가? 만일에 우리가 구하는 것을 받는다고 약속을 주장함에 있어서 물질적인 소유에만 관심을 집중한다면 우리는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 나라에 앞서 이러한 것들을 구하는 것이 된다.(마 6:33)

나라가 임하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마 6:10) 천국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 천국은 사단의 영토를 침범하였으며 최종적인 승리를 확신시켜 준다. 천국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치료를 받거나 건짐을 받거나 접촉이 될 때 얼마간 임한다. 그러나 장래에 모든 악과 반역이 제거될 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야 말로 크리스찬들의 뜨거운 소망이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함께 우리는 현재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강림하시는 것 즉 교회의 휴거는 영원하고 완전한 천국의 완성과 실재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천사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라고 선포할 것이다 사랑받는 계시자 요한과 함께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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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가장 큰 은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병고치는 은사 (신유)

순교하는 것 (좋아하지 않겠지만 상급은 최고)

전도 많이 하는 것 (상급 최고)

기도 많이 하는 것

구제하는 것

예언하는 것 (요즘 예언하다가는 이단 됨)

큰 믿음

가르치는 은사

지혜와 지식

방언, 방언통역, 영분별

성령, 구원, 영생, 능력행함....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22:37~38)


가장 큰 계명이자 은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인격적으로 완성할 수 있는 근본적인 삶의 기준을 말하며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신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은사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 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13)


 


이것은 신자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가이다

예를 들면 신자가 하루하루 살면서 직장도 다니고 공부도 하고 사역도 하면서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고 있나요?

질문하면 사실은

돈이 최고죠

현재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입니다

머니머니해도 선교가 제일 중요하지 않겠어요

목사님들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겁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는 신자들이 대부분 거절을 한 이유는 경제문제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들이 우선순위에 있었기 때문이다(눅14장)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변함없이 신뢰하고 있습니까?

실패의 연속 가운데서도 신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일상의 바쁜 삶을 살다보면 현상에 집중하면서 본질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하나님보다 사역이 우선이 되고 교회가 우선이 된다

예수 없는 사역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에베소교회가 처음사랑을 잃어 버리자 예수님은 촛대를 옮기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가 옮겨져서 예수없는 수많은 교회가 생긴 것이다

담임목사가 주인행세를 하고 삯꾼 목사가 생겨난다

도덕적으로 지탄받는 목사가 뉴스를 탄다

가장 큰 은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은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상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맘몬을 섬기는 것이다

맘몬을 섬기는 것은 사탄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의 대상을 기억하는 것이며 인격적이고 실제가 되어야 한다


출처: acolo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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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들어가는 비밀이 있다(마13:11)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면 비밀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밀을 깨닫는 자가 있고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비밀은 무엇일까?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비밀을 깨닫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세계인구 76억명중에서 구원받을 자는 몇명이나 될까?

깨닫는 자는 6억명(8%) 정도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76억명의 세계인류 중 기독교인은 31%인 24억명이고 그중에서 3/4(75%)은 자갈밭,잡초밭,길에 뿌려져 결실하지 못한 신자들이고 1/4(25%)만이 깨닫고 결실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관심이 있다

깨닫지 못한 수십억명은 단지 그들을 개들이라고 인식한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계22:15)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빌3:2)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15:26)

여기서 개들이란 부정한 동물로 불신자와 깨닫지 못한 자들을 상징하며 예수께서 언급하신 '그들'에 속한다

그들이란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 깨닫지 못한 부류에 속했던 자들이다

노아 홍수때에 세계인구는 최소 10억명이라고 추정하는데 구원받은 8명은 단지 0.0000008%에 불과하였다 

사람은 존귀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단지 짐승과 다를바 없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49::20)

​그러나 실상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

짐승은 죽으면 그 존재가 소멸되지만 사람은 불못에 들어가 세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비밀 중의 하나는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란 '연하여 던진다'는 의미로 알려진 진리와 감추어진 진리를 동시에 던진다는 의미다

알려진 진리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다

알려진 진리를 아는 사람은 76억명 중 31%인 24억명이다

그러나 24억명 중에서 감추어진 진리까지 깨달은 사람은 1/4인 6억명 수준이다

교회의 일원이지만 깨닫지 못한 18억명도 '그들'에 속한다

감추어진 진리를 아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66권의 성경에서 복음의 진수를 기록한 것은 사복음서이며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기에 중요하다

사도행전은 예수께 직접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 예수 승천 후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굳이 성경에서 중요도를 따진다면 바울서신은 복음의 교리를 해석한 것이기에 복음서보다 더 중요하거나 우선순위에 위치할 수 없다

교리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복음의 핵심, 복음의 진수는 복음서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비밀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비밀은 복음서에 너무 강조되어 있고 너무 빈번해서 무시되곤 한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Acts(행적)를 제거하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요소가 많지 않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냈고 그들의 병을 고쳤으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집도 없었고 교회건물도 세우지 않았으며 통장도 없었고 부동산도 갖지 않았다


사도들의 행위들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의 Acts (행적, 행위, 행동)를 기록한 책이다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았고 병을 고치고 선교와 구제를 했으며 감옥에 갇히고 순교했다

예수님의 사역과 유사하지만 현대교회의 행적은 사뭇 다르다

현대교회는 Acts가 없다

성경은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사실 현대교회는 행적이라고 할 것도 없는 형편이다

현대교회의 행위의 대부분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교회봉사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삶은 예수님처럼 살았지만 현대교회는 예수님처럼 살지 않는다

초대교회에는 동물제사와 할례를 버리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지만

현대교회는 동물제사와 할례를 버리면서 신자가 올바르게 살아야 할 행실도 함께 버렸다


 


천국의 들어가는 비밀은 다음과 같다(산상수훈이 복음의 진수에 속한다)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지만 무시되거나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행하지 못한다

깨닫는 못하는 것은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기 깨문이다

다카이오수네는 성도가 살아가야 할 고결한 삶의 지침이자 근원이며 진정한 내면의 선에 기반한 의로운 삶이다

산상수훈은 디카이오수네의 최상의 지침이다

예수를 몰라서가 아니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명하신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은 문

 아름다운 열매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 

(깨닫고 삶으로 행하는 신자)

 의로운 삶

 예수

 천국의 백성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

 넓은 문 

 나쁜 열매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신자)

 불의한 삶

 자신

 지옥의 백성들


76억개의 길이 있다

세계인구 76억명은 모두 다른 길을 간다

복음의 씨가 뿌려진 사람의 마음은 다양하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1. 고의적이다

옳고 그름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도 알고 말씀도 알지만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며 나쁜 행실을 선택한다

죄중에 가장 질이 나쁜 케이스로 염소들에 속한다

2. 무지하다

죄가 죄인지 모르고 깨닫지 못하니 잘못 살아간다

무지하다고 죄를 탕감받지 못하는데 무지도 죄에 속하기 때문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53:4)

이들은 진리를 왜곡하기도 하고 이단의 미혹에 빠지기도 한다

3. 착각한다

자신들이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만 산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알지만 예수님처럼 살지는 않는다

인본주의적 교훈에 미혹되기도 하고 바리새인의 누룩이나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려간다

천국의 비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산상수훈에 기록된 삶의 지침대로 사는 것이며 그래야 결실할 수 있다

산상수훈은 신자가 살아가야 할 삶의 지침서요 안내서요 설명서다

이대로만 살아라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거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해 성령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인가? 그들인가?



출처: acolo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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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지는 쓸쓸한 가을이 우리에게 오히려 감사한 것은
풍성한 추수 때문일 것입니다.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는 농부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곳간을 채워 겨우살이 준비를 하는 손길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넘칩니다.
 
그런데 만일 애써 키워 한여름 무성하던 작물과 나무들이 아무 곡식과 열매 없이 잎이 떨어지고 시들어 버린다면 농부들은 얼마나 슬프고 허망할까요?
더욱 슬프고 허망한 것은 열매 없이 끝나는 인생일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방황하다 빈 쭉정이로 세상을 떠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슬픔과 허망함은 아무리 술을 부어넣고 노래를 불어넣고 춤을 추고 통곡의 눈물을 쏟아 넣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돈도 재물도 지식도 명예도 가족 친지도 다 인생의 지는 이파리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아무리 무성하여도 다 시들고 지는 것들이요, 결국은 두고 떠나야 할 것들입니다.
인생을 마치고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원한 생명의 믿음, 예수님의 생명의 씨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드넓은 우주공간 가운데 이 지구 위에다 아들의 씨, 아들의 피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려는 농부 말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올리브)라 하고,
세상은 밭이요, 거두어질 영혼들은 알곡이요, 천사들은 추숫군이요, 천국을 곳간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이한 낫을 가진 추수꾼을 보내실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천국복음이 뿌려지는 땅에 비유하셨고,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셨으며, 아름다운 열매 맺지 못 하는 나무와 쭉정이는 불에 던지워질 것이라 하셨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낙엽 지는 가을에 내가 과연 거두어질 열매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슴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그 영생의 씨앗, 열매가 맺어져 있는지요.
아들의 피를 뿌렸는데도 열매 없는 쭉정이들은 진노의 불에 던지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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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심판 

영원한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입장을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 선언”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제 15항, 마지막 심판 : 

악한 죽은 자들이 살아나서 그들의 행한 대로 심판받는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마귀와 그 사자들 그리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영원한 심판으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 에 던져질 것인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마25:46, 막9:43-48, 계19:20, 20:11-15, 21:8) 여기서 우리는 심판이 마귀와 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둘째 사망이라 불 리는 불못에 있는 것임을 주목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하여 더욱 자세히 정의하고 설명을 하고자 한다. 

악한 자는 사단과 운명을 같이 나눈다. 

성경은 불못이 사람을 위해 예배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되었다고 말씀한다.(마25:41)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선하셨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좋게 창조되었다.(창1:31). 율법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 여 주어졌다.(신6:24)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 3:9) 사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선을 위하여 모든 일에서 역사하신다.(롬8:28)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단이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을 더럽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불못에 그를 가두러 놓으실 것이다. 사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단의 운명을 같이 나눌 것이다.(요16:8,11)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사단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요8:44) 


사단이 받는 벌을 함께 받는 사람들은 “악인”이라고 한다.(마13:49,50) 이것은 그 행동이 악하고 가치 없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자이며(믿음이 부족하여 비겁하게 행한다), 믿지 아니하는 자 들이며, 흉악한 자들이며(혐오스럽고 진저리나는 사람), 살인자들이며, 행음자들이며, 술객들이며(마술을 사용하는 사람과 마약을 쓰는 사람), 우상 숭배자들이 며,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계21:8, 마8:12, 13:41,42, 22:13, 23:15, 25:30,33, 눅13:27, 계21:27, 22:15 참조) 바울은 이것을 구원에 관한 개인적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와 복음을 계속적으로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자라고 요약하고 있다.(살후1:8) 

악한 자의 심판은 끝이 없다. 

“근본진리의 선언”에서 주어진 첫 번째 성경 인용문인 마25:46에서 “영(헬라 어, anonion)벌”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절대적으로 끝이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영원하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같은 구절에서 예수께서 똑같은 말을 “영(헬라어, aionion)생” 이라는 말에서 사용하는데 여기서 이것은 직접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전자와 병행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생명 이 영원한 것처럼 그 벌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악인을 회복시켜 주 겠다는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마25:41에서 그 벌은 “영원한(헬라어, anionion)불”로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악인이 죽은 후에 가는 중간상태를 하나의 불로서 특정짓고 있다. (Hades, hell, 눅16:23,24) 그러나 이것은 영원히 있을 불과 구분해야 한다. 눅 16장에서 예수의 말씀은 악인이 의식이 있는 상태이며,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 으며,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놓쳤는지를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영원한 불 은 예수께서 게헨나 혹은 “불의 게헨나”라고 부르셨던 것과 같은 것이다.(마 5:22,29,30, 10:28, 18:8,9, 23:15, 막9:43,45,47, 눅12:5) 이 불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꺼지지 않는 특성을 가졌다. 이것은 그 불이나 벌이 끝날 수 있는 가 능성이 전혀 없음을 가르친다. 그 형벌은 불과 마찬가지로 영원하다. 만일에 불 이 악인을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라면 불이 영원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는 같은 불을 “풀무불”이라고 말씀하셨는데(마13:42,50),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가는 비참한 후회는 “멸망의 자식”으로서 영원한 파멸에서 자신을 구하지 못하였다.(요17:12, 행1:16-20) 예수께서는 이렇게 울며 이를 가는 것을 “바깥 어두 운데서” 일어나는 것으로 동일시하고 있다.(마8:12, 22:13, 25:30) 이 어두움은 최종적인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새 예루살렘의 빛이신 어린 양과의 분리를 가리 키는 것이다.(계21:23) 


또 다른 신약성경 구절은 영원한 벌은 영원한 심판으로 언급한다. 즉 영원토록 유효한 심판이라는 뜻이다.(히6:2) 여전히 다른 구절은 “침륜”(문자적으로 파괴, 사망, 분리를 의미함) 그리고 “멸망”(영원한 사망) 이라고 말한다.(딤전6:9) 이러 한 “영원한 멸망”(혹은 분리)은 “주님의 존전으로부터” 그리고 “그의 능력의 영 광으로부터”의 분리이다.(살후1:9) 이러한 구절들에서 “사망”이라는 단어는 영 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죄인은 현재도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이며, 그리스도와 분리되었거나 그리스도가 없는 자이다. (엡2:1,12) 영원한 심판은 최종적으로 영원히 하나님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둘째사망 
성경은 이렇게 최종적으로 분리되는 것을 “둘째사망”이라고 부른다. 요한계시록에서 불못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계20:14)

예수께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게헨나 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눅12:4,5)고 경고하셨을 때 예수께서 는 게헨나를 둘째 사망과 동일시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육체적인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죽음은 상태나 종류에 있어서 판이 하게 다르다. 육체적인 죽음 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이 몸에서와 우리의 생활환경에서의 분리라고 한다면, 둘째 사망은 하나님으로부터와 새 창조에서 맛보게 될 생명으로부터 최종적이고 영원한 분리이다. 이 둘째 사망에 던져지는 사람 중에는 짐승의 표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있다. (계14:9-11) 이 사람들은 천사들과 그리스도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다. 즉 봇물에 갇혀서 새로운 창조물과 격리되어 있지만 나사로가 음부 (Hades)와 아브라함 몸 사이에 있는 깊은 구렁을 건너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들이 거부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눅16:23) 그들은 결코 타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 다....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로다.”(계14:11)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 문이다. 이들은 영원히 성도들에게 약속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절 중 어느 것도 최종적인 심판이 선언된 뒤에 복구시키거나 회복시키는 것을 약속하는 암시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볼못이나 게헨나와 관련하여 신성한 기관은 나타나 있지 않다. 불은 막9:44,48의 구더기와 병행하고 있다. 그것은 깨끗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형벌로서의 붙인 것이다. 거기에는 또 다른 기회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흔들어 깨워“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며 외치게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고후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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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 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 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 12:14, 벧전1: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 12:14, 벧전 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 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 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 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 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 3:16, 롬 10:11-13, 벧후 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 3:28, 갈 2:20-21, 엡 2:8, 빌 3:9, 히

10:38, 벧전 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 3:5-8, 고전 3:1-3, 히

3:12-14, 12:1, 요일 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 17:12, 딤전 4:1, 5:12,15,

히 6:4-6, 10:26,27,38, 벧후 2:20, 요일 5:16)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 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

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자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 1:1,2)


이 진리를 또한 롬 8:29 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 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 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 10:38, 롬 1:17, 갈 3:11,히 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 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 6:12,13, 8:13, 골 3:1-5, 벧후 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 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 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 8:1 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 5:9-11 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영
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 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 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 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 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 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 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 10:21 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 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 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 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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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명상


동양과 서양철학 사이의 간격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들 중에 하레 크리쉬나(Hare Krishna)와 초월명상의 시도가 있다. TM 이라고 불리는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은 특별히 최근에 미국 전역에 퍼져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주목을 받고 있다. 전에는 동양의 신비적인 의식에 대해서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이제 TM 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다. 


초월명상의 특성


초월명상의 표면적인 정의는 매일 두차례씩 20 분 동안 긴장완화를 위한 자연적인 운동이라고 묘사되었다. 이 과정 중에 만트라(Mantra)라는 한 단어가 반복하는데 이러한 리드미컬한 반복이 긴장완화의 노력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생물학적, 심리학적 법칙에 근거한 과학적인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종교인들이 참여해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비종교적인 활동이라고 반복해서 선전한다.


소정의 요금을 지불하고 초월명상에 가입한 후에 초월명상에 대한 세심한 지도를 받고나서 그 기법을 성실하게 사용하면 생활의 모든 영역 즉 신체적, 심리학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인 영역에서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를 얻는다는 보고가 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연구 결과라고 하는 것을 제시하며 정치가, 교육가, 운동가, 연극배우, 심지어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수많은 증언을 제시하며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초월명상을 깊이 연구해 보면 그에 관한 모든 것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월명상을 진지하게 조사한 결과 그것은 긴장완화의 도구 이상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종교적인 활동이다.


초월명상은 그 뿌리를 힌두교에 두고 있다. 실존, 신, 사람, 구원에 관한 이의 모든 가르침은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Vedas)에서 따온 것이다. 초월명상에 있어서 의식적 초입례의 포함과 은밀하게 만트라를 사용하여 동양의 사교에서 행하는 신비적인 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초월명상의 세계적인 지도자인 마하리쉬(Maharish)는 그 기법의 유익을 설명할 때 과학적 언어보다는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초월명상은 심리학적, 신학적, 사회학적인 면에서 의문이 생기게 한다. 이러한 의문들은 교회가 무시할 수 없는 도전으로서 교회에 제시되고있다. 


초월명상의 뿌리


초월명상은 기원상 종교적인 활동임에 틀림없다. 그것의 개념은 힌두교에까지 추적된다. 힌두교 예배에는 수백만의 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중에 셋만이 특출하게 부각된다. 


첫째 브라마(Brahma)인데 모든 것의 창조자이다.

둘째가 쉬바(Shiva)인데 파괴, 질병 그리고 죽음의 신이며 또한 채소와 동물과 인간번식의 신이다. 인도사람의 생각에 죽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의 전조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의 신은 또한 생식의 신이기도 하다. 

셋째가 비쉬누(Vishnu)인데 사랑과 자비의 신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모든 곳에 퍼져있고 비인격적인 신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브라만(Brahaman)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 초월명상의 문헌은 창조적지성(Creative Intelligence)으로서 브라만을 언급한다.


힌두교에서는 신들을 예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금욕주의 의식, 의례적인 헌신 그리고 명상 등을 포함한다. 명상은 수세기 동안 예배의 수단으로 주목 받아왔다. 모든 요가의 주된 특성은 명상이다. 힌두교의 전통에 있어서 명상은 신들이 신과 연합하여 탄생과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에서도 피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정의하자면 명상은 초월 혹은 신과의 연합을 경험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초월명상에서 강조된다. 지금까지 초월명상의 마지막 부흥은 중세기에 있었다. 중세 힌두교의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 상카라(Sankara)가 있는데 그는 힌두교의 뛰어난 옹호자였다. 동양의 명상술을 회복하기 위한 현대의 노력은 스와미브라마난다 스라스와티(Swami Brahmananda Saraswati)라는 사람과 더불어 가장 큰 추진력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사람은 보통 구루 대브(Guru Dev)라고 하며 인도에 있는 4 명의 주요 종교지도자 중 하나이다. 그러나 초월명상의 대중적인 지도자는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Maharish Mahesh Yogi)인데 구루 데브의 제자이다. 보고에 의하면 마하리쉬가 구루 데브의 명령을 받아 간단의 명상의 형식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히말라야에서 은둔한 후에 1955 년 초월명상을 소개하였다.


인도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자 그는 그의 가르침을 영국에 수출하였다. 가장 괄목할만한 개종자 중에는 비틀즈(The Beatles)가 있다. 마하리쉬는 1959 에 미국에서 그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1973 년에 아이오와주의 페어필드에 초월명상의 교육적인 기관으로서 마하리쉬 국제 대학교(Maharish International University)를 설립하였다.


초월명상의 가르침


초월명상은 그 기법이 세워진 개념 때문에, 성격상 종교적인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것의 신학적 전제는 힌두교의 그것이다. 


신에 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힌두교 신학의 전통에 따라서 신 혹은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은 영원하며, 무한하며, 알 수 없으며, 성이 없으며, 비인격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신은 속성, 질, 특성, 형태 등이 없다. 힌두교의 사상에서는 신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없다.

실재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는 모든 창조물이 신과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범신론적인 관념을 버터가 우유에 스며들고 수액이 나무에 스며들 듯이 신이 모든 존재에 스며드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설명한다. 기본적 실재(Basic reality)는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들은 단지 한 본질 안에 있는 두 개념이다. 상대적인 것은 신이 창조물 중에 그 자신을 나타내는 모습인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은 그 속성상 신의 개념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있는 것이다. 마하리쉬의 견해에 의하면 신은 그것이 실재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모든 창조물 안에 내재한다. 나무의 줄기, 가지, 잎, 꽃 그리고 열매는 항상 변하지만 신과 같은 수액은 항상 동일하다. 이와같이 이 세상은 단지 환상일 뿐이다. 그것은 실제와 같이 보일 뿐이다. 

 사람에 관한 가르침
이와 같이 마하리쉬의 견해에 따르면 신은 창조물 중에서 여러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거한다. 사실 사람의 영혼은 브라만을 구성하는 거대한 바다 중 하나이다. 각 사람은 자신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일부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주적인 생명과 그의 관계는 전체 몸에 대한 각각의 조직의 관계와 같다. 각 사람은 그가 자신에게 하는 것같이 창조물 안에 있는 모든 신들을 경험하기 위하여 나와야 한다. 

 구원에 관한 가르침 
마하리쉬에 의하면 이상과 같은 사실을 인간이 무시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환상과 무지의 세계에 묶이게 된다고 한다. 창조물이 실제라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그는 신과 동일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가 이러한 무지함 속에 있는 한, “업”(Karma)의 생명에 묶이게 되는데 여기서 업은 탄생, 죽음 그리고 재탄생의 순환을 끝없이 반복하게 하는 활동이다. 사람의 구원은 생명의 환상을 아는 것과 사람이 신과 하나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사람이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그것은 그의 업(Karma) 혹은 그의 전생에 있어서의 활동의 결과이다. 혼이 지식에 있어서 창조적 지성(Creative Intelligence)과 합하지 않는 한, 각 사람은 개인으로서 지속될 것이며 전 생애 업(Karma)의 열매를 계속 받게 될 것이다. 모든 고난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 안으로 뛰어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의 결핍은 인간의 생명 안에 있는 모든 질병의 뿌리이다. 그러한 경험이 없이는 사람에게 힘과 지성이 부족하게 된다. 그는 피곤하고, 염려하고 긴장하게된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신적 의식을 접촉하기 위한 마하리쉬의 기술은 초월명상이다. 

초월명상의 방법

초월명상이 긴장완화의 기술 이상의 것임은 보다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전제가 종교적일뿐 아니라 그것의 방법도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마하리쉬는 그의 명상술 자체를 사람 안에 있는 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상의 기술
마하리쉬는 명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 자신의 정의를 조심스럽게 보여 준다. 명상은 집중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정신집중은 그의 기법이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명상에 있어서 마음은 전적으로 소극적(Passive)이어야 한다. 어떤 의식적인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은 창조적지성의 거대한 바다에 자연스럽게 뛰어 들도록 단지 허용되어야 한다. 인간지식의 내용물인 인간 사고의 모든 활동은 절대가 아닌 실제의 상대적 영역 안에 있다. 따라서 명상 안에 그 마음은 무의식적으로 신의 능력이 주입되어진다. 성공적인 삶을 살리려 계속적으로 그러한 능력을 받아야 한다. 

신과의 일체감을 얻기 위해서는 사고의 중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마하리쉬는 그의 윤리학에 관한 토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세계의 각 종교마다 윤리의 규약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대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같이 거기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에 대한 성문화된 절대적 기준이 없다. 초월명상을 통하여 창조적 지성에 의해 영향을 받은 마음만이 불변하는 윤리와 더불어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초입례(Initiation Ceremony)
초월명상에서 초입례는 성격상 분명히 종교적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힌두교의 예배의식 혹은 푸자(Puja)로 되어있다. 그 의식에서 초월명상의 초보자는 6 개의 꽃과 3 개의 싱싱한 과일과 하나의 하얀 손수건으로 된 제물을 가져온다. 교사는 이것을 구루 데브의 사진 앞 제단에 놓는다. 촛불과 향의 분위기 아래서 교사는 산스크리트(Sanskrit)로 떠나간 힌두 교사들에 대한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그는 형상이 없는 브라만의 현현으로서 브라마, 비쉬누 그리고 쉬바의 힌두 트리무르티(Trimurti)를 예배한다. 그러나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구루 데브에 대해서인데 그는 작고한 마하리쉬의 교사이다. 그의 사진의 출현은 실제로 예배의 대상으로서 우상의 개념을 암시한다. 

 만트라
초입례의 마지막 행동으로서 초월명상 교사는 개종자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를 위하여 선택한 비밀 만트라를 반복하기 시작한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만트라는 최면적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선택한 무해하며 의미없는 단어라고 선언하지만 그것은 여러 힌두 신들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베다(Vedas)에서 따온 단어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미없는 말이 될른지 모르지만 만트라는 힌두교 개념에서 분명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월명상의 문제점
이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 초월명상은 심리학, 신학, 사회학적인 면에서 문제를 야기시킨다. 

 심리학적인 문제
심리학적 문제의 가능성은 초월명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소극적 자세를 강조하는 데 있다. 이 기법은 명상하는 동안 사람의 마음이 완전 방임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 일상적인 생각도 함께 초월하게 된다. 초월명상에서 배출되는 것은 지성적인 이해의 도를 넘게 된다. 크리스찬에게 초월명상의 방법은 역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나타났던 침묵 의식의 회복이 아니다. 그 기법은 지식이나 이성과 동떨어진 신비적인 경험을 유발한다. 이와같이 초월명상은 우상숭배 이상으로 해로운 것이다. 성경시대에 귀신은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었다.(신 32:17, 고전 10:19,20)

초월명상의 또 다른 심리학적인 문제점은 근본적인 문제해결보다는 염려에 대한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한 심리학적 스트레스의 원인을 무시하고 오직 임시변통만을 제공할 뿐이다. 초월명상에 대한 외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초월명상으로부터 얻어지는 유익은 단기간에 그칠 뿐이었다. 

 신학적 문제
초월명상이 가져다주는 신학적 문제는 다양하다. 마하리쉬는 그의 신학적 가르침을 창조적 지성의 과학(Science of Creative Intelligence) 혹은 SCI 라고 불렀다. SCI 가 가르치는 신, 실재, 사람,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거스리고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을 부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임을 보여 준다. 그는 아시고(마 6:8,32) , 사랑하시고(요 3:16), 뜻하시고(마 6:10) 그리고 활동하신다.(창 1:1) 더구나 SCI 는 성경 계시에서 근본적인 창조자-창조물의 구분을 부인한다. 신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하는 SCI 의 범신론적인 전제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의 창조물과 구분된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시 19:1) 하나님은 창조물과 혼동함으로써 SCI 는 옛날 사람들의 죄를 반복하고 있다.(롬 1:23,25).

SCI 는 자신을 계시하지 않은 신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연에서, 양심, 역사, 기적, 예언, 성경,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확실하게 말한다. 마하리쉬는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성을 경험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있다. SCI 의 교리는 인간이 중보자가 필요로 한다는 개념을 제시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초월명상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구세주가 될 수 있다. SCI 에서는 회개라는 말이 없다. 업(Karma)에 의하면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 거기에는 자비나 은혜를 위한 공간이 없다. 사람의 현재 상태는 그의 업혹은 과거의 행동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현재 상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가르침들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하리쉬는 기독교인들이나 어느 종교 추종자도 아무런 갈등 없이 초월명상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그의 신학에 있어서 수만의 선하고 악한 신들을 수용하는 힌두의 배경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을 더 받아들이는 것이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의 종교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지, 교회나, 절이나 , 모스크나 사원에서 어떤 예식을 따르던지 별로 관계없다고 한다. 

힌두교는 그의 거대한 우상으로 세계의 종교를 덮고 있다는 것이 마하리쉬의 관점이다. 따라서 힌두교는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종교적으로 가장 관대하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베다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세계의 신성한 책들이 포함하고 있는 진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베다에 이미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한 종교의 기본적 진리는 모든 다른 종교의 기본적 진리라고 한다. 

 사회적인 문제
창조적 지성의 과한(SCI)을 퍼뜨리기 위한 마하리쉬의 대담한 계획으로 인하여 초월명상과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 그는 그의 교리를 세계의 모든 질병들 즉 신체적, 심리학적, 영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인 질병에 대한 치유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1972 년에 마하리쉬는 SCI 와 초월명상 프로그램을 지상의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세계적 계획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 천명당 SCI 의 교사가 한 명이 있으면 이 계획을 이루는데 충분하다고 계산하였다. 이 사업을 위한 3600 개의 세계적 계획 센터(World Plan Center)를 짓는 프로그램이 진행 중에 있다. 마하리쉬 국제대학, 비디오 테입 프로그램 그리고 초월명상이 소유하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이 계획을 위해서 쓰여질 것이다. 

대학 외에도 4 개의 다른 기관이 세계적 계획의 가지들로서 형성되었다. 학생들의 국제 사회(Student's International Society)는 젊은이들과 함께 일한다. 국제 명상학회(The International Meditution Society)는 폭넓게 장년층에게 환심을 사고 있다. 영적 갱생 운동(The Spiritual Regeneration Movement)은 생활에 대한 영적 접근에 관심을 가진 사람 중 특히 은퇴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다.

창조적 지성의 과학은 위한 재단(The Foundation for thew Science for Creative Intelligence)은 사업가와 전문인을 위하여 기획되었다. 초월명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건강과 행복 이상의 것에 관심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들의 야망은 사회제도를 변화시키는 것 이상의 고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마하리쉬는 주어진 시간에 사회에서 인기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 혹은 교육 혹은 정치일 수도 있다. 

이 세대에 초월명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무엇이 가장 적합하겟는가?
마하리쉬에 의하면 그것은 정치이다. 이와같이 그는 정부기관을 통하여 초월명상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그의 정력을 쏟고 있다. 이미 실험적인 조건으로 초월명상에 대한 가르침이 정부의 경비로 미국의 어떤 학교들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 SCI 와 초월명상(TM)학과가 일리노이, 뉴욕 매사추세스, 플로리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의 공립학교에서 합법적으로 개설 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염려하는 시민들이 그러한 계획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적절한 것인지에 관하여 법적 질문을 하고 있다. 

초월명상의 도전
초월명상은 3 가지 면에서 교회에 도전하고 있다. 
첫째는 교리의 정확성에 대한 새로운 강조에 관한 것이다. 교리와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의 신학적 잘못을 보고 초월명상 기법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다. 
둘째로 교회는 신자의 생활에서 성령의 역사를 새롭게 하는 일을 강조해야 한다
초월명상은 순수하고 성경에 근거한 성령의 경험에 대하여 믿을 수 없는 대치물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로 교회는 성경의 시작부터 가르쳐 온 안식일, 안식의 위대한 원리를 다시 선포해야 한다. 일과 놀이에 미친 현대인들은 점점 안식일의 원리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칠일 중에 하루는 쉬고 예배함으로써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인 쇄신을 가져다주는 적합한 도구를 인간에게 주셨다. 초월명상을 주장하는 사람들 밖에서 행해진 어떤 사람들의 연구는 그들의 기술은 아무런 신체적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했다. 사람의 원기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따른다면 크리스찬은 초월명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시 1:2 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고 권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명상의 참된 내용이다. 이러한 묵상의 유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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