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7년 10월 29일에 켈름스콧 자유 개혁 교회에서 개최된 여성 연맹의 날에 클라렌스 바우만 목사님이 행하신 강연입니다.

 


드보라와 바락:

여자들을 위한 모범인가? 남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인가?[1]

(Deborah & Barak: Example for Women or Embarrassment for Men?)



1. 도입

 

1.1 드보라는 모범입니까?


드보라는 결혼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모범을 우리에게 제공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 인도 데라 둔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 교수인 도나 스트롬은 여성들이 단지 인구 증가에만 관계하고, 세상을 다르시는 일에 있어서는 남성들과 연합하는 일이 (마가렛 태처나 인디라 간디를 제외하고)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2] 그래서 그녀는 드보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드보라의 모범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여성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어떤 것을 결정하는 일에 제외되어서는 안된다” [3] 스트롬 교수는 여자가 지도자의 지위를 취하는데 있어서 남자가 방해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녀는 또 이렇게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드보라가 어디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오늘날 보다 더 관련된 질문은 ‘하나님께서 그의 드보라를 사용하시도록 한 바락, 랍비돗 그리고 10,000명의 남자들은 어디 있는가?’ 이다.”[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보라 안에서 어떻게 그가 여자들이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일까요? 하나님의 교회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드보라들(복수)를 우리에게 허락하신다고 생각을 재고해야만 할까요?


현금 세상의 대답은 분명히 ‘예’,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동의하십니까? 아내와 어머니들로써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자들을 지도자의 지위에서 기꺼히 사용하도록 부지런히 여러분의 남편과 아들들을 촉구해야 합니까? 여권 확장의 우리 시대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 무슨 그림으로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자리매김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함축적으로, 우리 시대의 연약한 남성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아들들이 지도자가 되도록 독려해야만 합니까?

   

1.2 우리가 무엇을 증명하기를 원합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분위기에서, 남자와 여자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주님께서 여자들에게 할당하신 위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 앞에 두는 저의 의도를 설명할 때, 저는 주님께서 사사기4장과 5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출발점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이 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듣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여자의 지위에 대하여 선입견이 없이 이 구절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자들의 지위에 대하여 입증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이 두 장들로부터 증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5]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사사기 4장과 5장을 근거로 하여 여자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여선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사사기4:4에 호소하여 강한 논증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드보라가 여선지자였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자들의 지위는 자기의 남편 옆이고, 자기의 남편에 복종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4:4을 드보라와 관련하여 강한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드보라는 그녀의 남편의 이름에 의해 확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압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만약 여러분이 여자들은 행복하게 결혼할 수 있고, 가족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갖고, 동시에 사회에서 지도적인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사사기 4장에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여자 드보라, 랍비돗의 아내는 동시에 사사였습니다.

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지위에 대해 성경적 정당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사사기 4장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전통주의자들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성경을 경청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경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한 옆으로 치워두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가능한 한 우리는 우리 선조들로부터 상속받은 행낭이나 혹은 우리 시대의 사회로부터 받은 꾸러미 없이 이 구절을 읽어야 합니다. 


1.3 서술적인가? 혹은 규범적인가?


한 가지 더 언급되어야만 하는 서론적 항목은 서술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 사이에 구별입니다. 사사기 4장은 서술적입니다. 그것은 드보라가 행한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드보라가 자기 시대에 했던 것의 이 서술은 우리를 위한 규범으로 요약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수세기 전에 드보라의 행동을 서술한 사사기 4장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다양한 곳에서 주어진 행위는 서술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범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유다가 노정에서 만난 매춘부와 맺은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7]  우리는 성경이 유다가 행한 것을 우리를 위해 서술한다는 것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동일한 행위를 하라고 서술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행위는 분명히 그의 죄에 대한 서술이지 결코 우리의 행위를 위한 규범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사사기 4장과 5장은 서술적입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또한 규범적입니까? 다시 말해서, 이 장들은 오늘날 우리 여성들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규범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 땅에서 지도자로서(여선지자와 사사) 드보라의 출현은 우리의 딸들이 지도자의 지위를 열망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4 개요


우리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규범을 배우기 위하여 그의 계시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드보라에 관하여 사사기4장과 5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읽겠습니다. 이것은 이 글의 두 번째 부분을 구성하고, 세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드보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셔야만 했던 내용을 살필 것입니다. 네 번째 부분은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드보라 시대 이후 그의 백성에게 계시하셨던 것을 둡니다. 우리는 사사시대 이후 하나님의 계시에 변화가 있었는지를 식별하는데 엄밀하게 관심을 가집니다. 마지막 부분은 오늘 우리를 위한 결론을 내립니다.




2. 드보라는 누구였는가?


2.1 한 인간으로써 드보라의 정체성


드보라라는 인물에 관하여 사사기4:4,5은 우리에게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고 말해 줍니다.


- 여자


비록 우리 본문은 분명하지 않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드보라가 여자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4절은 “그리고 드보라, 여자 여선지자(우드보라 이솨 느비아)”라고 읽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성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십니다. 그녀가 여자라는 언급은 또한 히브리 문법에 따라서, 그녀가 “어떤 여자(a certain woman)”였다는 것을 시사합니다.[8] 사사기4장의 저자는 드보라를 그녀 당대의 다른 여자들 위에 서 있는 지도자, 마치 그녀가 분명한 지도자인양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안에서 한 정상적인, 일반적인 여자로써 묘사되고 있습니다.  


- 여 선지자.


그녀는 여선지자로써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많은 여자들이 여선지자였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미리암: 출애굽기15:20,21에서 우리는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미리암이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앞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을 읽습니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너희는 야웨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도다”.


훌다: 열왕기하22:14에서 우리는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홀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매”


이사야의 아내: 이사야8:3에서 이사야의 아내는 여선지자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선지자에게 갔다. 그리고 그녀는 잉태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한 아들을 낳았다...(히브리어 직역... 한글개역은 이렇다: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안나: 그녀에 대해서 우리는 눅2:36에서 읽는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래서 성경에서는 여 선지자로 잘 알려진 5명의 여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임명하신 예배 봉사에서 선지자의 공적인 기능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그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 자일뿐입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직분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읽지 못합니다. 드보라는 예를 들어, 엘리사와 예레미야와 다릅니다. 주님은 그 두 사람을 선지자의 직분으로 부르셨습니다(왕상19:19이하, 렘1:4이하를 보십시오).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비록 드보라가 여선지자 일지라도 그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갔다는 것을 읽지 못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모든 다른 선지자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드보라에 관하여 그런 것을 전혀 읽지 못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가지고 백성에게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녀에게로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삿4:5b). 그녀는 종려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정확하게 동일한 일이 훌다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녀는 예언을 가지고 어느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우리는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홀다에게로 나아가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왕하22:14)


- 랍비돗의 아내


우리는 사사기4장에서 드보라가 랍비돗의 아내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녀가 그녀의 남편의 이름에 의해 알려진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비록 그녀가 이스라엘 안에 특별한 위치를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유발합니다. 왜 그녀는 여기서 그녀의 남편의 이름에 의해, 즉 랍비돗의 아내로 언급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나중에 계속 대답되어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9]


- 사사


드보라는 여기서 사사로 불려집니다. 이 용어는 사사기에서 드보라의 프로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12명의 사사들 중 한 사람입니다. 12명의 사사들 중에, 6명은 주요한 사사들입니다(드보라를 포함하여), 그리고 그들 중 6명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중요하지 않는 사사들입니다. 이 글의 목적 때문에, 6명의 주요한 사사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 사이에 몇 가지 비교를 하겠습니다.

  

- 드보라가 사사로 선택받는 것은 가능성이 없었다. 


6명의 주요 사사들(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그리고 삼손)은 모두 사사로의 선택을 전혀 가능성이 희박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10]

옷니엘: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삿3:9). 성경 역사는 우리에게 그 아우가 특권적인 지위를 얻는 것이 거의 없고, 사회에 두각을 나타낼 기회가 가장 적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에훗: “그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삿3:15). 일반적인 상황에서, 에훗이 외손잡이였다는 것은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사건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유리하게 바꾸셨습니다).

드보라: 사사기4:4에서 우리는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사사로 선택받는 일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드온: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백성들에게 가서 구원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기드온은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삿6:15). 기드온: 사사로 선택되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한 자입니다.


입다: 비록 사사기11:1에 “큰 용사”로 기술되었지만, 그는 또한 “창녀의 아들(다른 여인의 자식)”이었습니다(11:2). 그것 때문에 그는 가망성 없는 후보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조차 그를 거절했습니다.

삼손: 사사기13:7에서 우리는 삼손이 나실인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과는 달라야만 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민6:1-21). 삼손은 사회적 ‘괴짜(odd-ball)’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머리를 자르거나 시체를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모든 술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주요한 사사들은 모두 사사로 선택되는 것이 거의 가망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드보라에게도 역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약한 것, 밑바닥에 있는 것,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여 강한 자와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고전1:26이하를 보십시오). 


- 드보라가 사사가 된 것은 주님에 의해 일으키심이 아니었습니다. 


드보라가 사사가 된 것과 관련하여 두 번째 요점은 우리는 그녀가 주님에 의해 사사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성경에서 읽지 못합니다. [11] 그것은 다른 (주요) 사사들과 다른 경우였습니다.

   

옷니엘: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께 부르짖으매 야웨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3:9)

에훗: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께 부르짖으매 야웨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3:15).

기드온: “야웨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

입다: “이에 야웨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11:29)

삼손: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야웨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13:25) “삼손이 야웨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14:6). 이미 삼손의 출생 전에 주님의 사자는 그의 부모에게 그들의 아들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드보라에게 부여된 어떠한 자격도 읽지 못합니다. 그녀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드보라에 관해 읽는 것은 사사기5:7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드보라와 다른 다섯명의 주요 사사들 사이에 다른 강조점에 주목하십시오. 분명히, 주 하나님은 드보라가 사사로 일어나는 일 배후에 계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그토록 많은 말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사의 직분을 그녀에게 주셨다는 말이 진술되지 않는 유일한 주요 사사입니다. 우리는 ‘왜’라고 의아해 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 드보라는 군대의 기능을 가진 사사가 아니었다.


사사로서 드보라의 직분과 관련하여 세 번째 요점은 사사기의 다른 모든 사도들과 달리 그녀는 군대의 기능을 갖지 않았다. [12] 다른 주요한 5명의 사사들 중에서, 우리는 그들의 군대 업적을 성경에서 읽는다.

  

옷니엘: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야웨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3:10)

에훗 : “...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함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3:27)

기드온: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7:19)

입다: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야웨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11:32)

삼손: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15:8,15)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16:30).


그러나 드보라와 관련하여 유사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녀와 관련하여 사사기6:4에서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드보라는 군대의 지도자가 아니었고 다른 사람, 남자에게 군대의 책임을 후원했습니다(second). 우리는 의아해 합니다. 왜? 


- 종려나무 아래 앉았다.


사사기4:5에서 우리는 “그녀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왜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 앉았습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신명기16:18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officer)를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일단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꼭 재판관을 임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재판관들은 “네 모든 문”에서 직분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이 문들은 각 마을의 문들을 말합니다. 재판관들은 국가적인 권위나 모든 지파들을 총괄하는 권세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명기16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규례는 그 재판관이 각 지역에서 권세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재판관은 한 특별한 마을(또는 지파)에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사람들은 시비가 생긴 사건에 대해서 재판을 받아야만 한 곳은 바로 그 마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어느 누구도 재판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있는 재판관으로부터 “공평한 재판”을 기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자기 성문에 앉아있지 않고 어느 들판에 앉아 있었습니다. 즉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라마와 베델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성에 앉아 있지 않았고, 심지어 한 성에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확실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드보라는 아마도 잇사갈 지파 출신이었습니다(삿5:15). 어쨌든, 드보라는 잇사갈 사람들을 알았고, 그들은 그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에브라임 산지에.... 종려나무 아래에” 한 자리를 찾았습니다(4:5). 그래서 그녀는 심지어 집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드보라는 자신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열린 자리에서 재판을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모든 잡다한 사람들에게 재판을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사기4: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의 지위는 단지 그녀 자신의 지역 사람들에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지위는 국가적이었습니다. 다시, 우리는 의아해 합니다. 왜? 신명기16장의 명령이 주어져 있는데, 왜 그녀는 그렇게 직분을 수행했습니까?   


2.2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


이 모든 것은 드보라가 바락을 앞지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반대로, 그녀는 매우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남자의 그림자 안에 두려고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그녀가 대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자기 배후에 군대를 모집할 수 있었을지라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렀습니다”(4:6). 그리고 그에게 대적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쥘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녀가 바락이 출정할 때 동행한 것은 그녀가 영예를 원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바락이 겁을 집어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4:8). 바락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바락의 두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따라갔습니다.

사사기5장은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노래를 “드보라의 노래”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단지 드보라의 노래만은 아닙니다. 5장 1절에서 우리는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라고 읽습니다. 


2.3 드보라와 야엘의 관계


원수의 패배가게 되었을 때, 그 원수를 패배시킨 사람은 드보라가 아니라 또 다른 여자 야엘이었습니다(4:17-22). 야엘에 관하여 이렇게 노래합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5:24). 드보라를 여권 주장자 모델로 나타내려는 시도에 맞서, 그녀가 그 원수를 패배시킴으로 오게 되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주목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영광이 드보라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


여기까지 요약해 볼 때, 사사기4장과 5장을 근거로 하여 드보라를 일종의 여권 주장자(feminist)로 관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말씀에서 드보라를 “해방된 여성” 즉 자기 자신을 중심 무대에 두는 여권 주장자, 자신의 지도권을 실행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여성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읽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 무대에 두지 않으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여성입니다. 드보라는 분명히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끌지 않았습니다.


2.4 드보라가 살았던 상황


때때로 사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의 목적에서 악을 행하였더라”(삿2:11)는 구절을 읽습니다. 이 구절은 각각의 주요 사사들과 관련하여 언급됩니다.


옷니엘: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야웨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3:7).

에훗: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3:12)

드보라: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4:1)

기드온: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6:1)

입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야웨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10:6)

삼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야웨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13:1)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더라”는 이 구절은 반복입니다. 이 반복은 사사기21:25에서 동일한 사상의 재구성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거기에 잘 알려진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은 드보라의 시대에도 여전한 특징이었습니다. 각 사람은 가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때는 근본적인 개악의 시대였고, 부패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를 특징짓는 타락의 정도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사사기17-21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미가의 우상과 레위인의 첩이 잔인무도하게 강탈당한 사건을 읽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행위와 경건의 표준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세우신 규범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난 시대였습니다. 한 마디로, 비정상적인 시대였습니다. 


드보라의 시대에도 분명합니다. 개악과 부패는 지도자들이 없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지적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이 와서 지도하라고 불러야만 했습니다(4:6). 일단 그가 내몰려 오기는 했지만, 너무나 겁이 많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4:8) [13] 바락의 중견(中堅: backbone)이 어디 있습니까? 바락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힘과 지혜를 위해 주님께 기댈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적어도 그것은 그의 행동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기골이 없는 남자는 단지 바락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5:6과 7에서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잠시 우리가 우리 마을의 주요 도로를 자유롭게 걷거나 차를 운전할 수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직장에 가기 위하여 밤에 살금살금 기어가야만 하고, 잡혀 죽지 않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야만 한다면, 어떻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을의 도로가 안전하지 않다고 우리 마을의 권세자들에게 아주 당장에 불평할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사사기4장의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도로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도력이 어떠했다는 말입니까? 공포의 상황은 백성들의 압제자에 대하여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이 상황에서 주요 사사들 중 어느 누구도 사사가 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그 시대의 문제였습니다.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왜 지도자들이 없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어떤 양식에 따라 이스라엘을 다루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28장에서 주님은 순종에 대한 그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1절)... 야웨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야웨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13절)” 그러한 안전은 지도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순종이 있을 때 약속하신 것입니다. 거꾸로, 순종이 없을 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15절)...(소경이 어두운 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29절).” 여기에 사사기5:6,7의 공포가 있고, 여기에 지도자들이 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기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왜 드보라 시대에 도로가 안전하지 못했습니까? 왜 어느 누구도 감히 지도력을 갖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영적인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신명기16:18에서 주님은 모든 마을에 사사들(재판관)을 임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재판관들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을의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5] 그래서 그들은 그 대신에 드보라에게 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영적인 부패는 백성들을 재판관(사사)으로서 전혀 기대하지 못한 사람에게 몰고가는 마비상태(paralysis)를 낳게 됩니다.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에 선지자로 일어났습니다. 영적 부패의 시대에, 주 하나님은 그의 선택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사사로 보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은 신명기18:15의 그의 말씀을 따라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은 특별히 아우였고, 왼손잡이였고, 여자였고, 매춘부의 아들이었고, 모든 지파들 중의 가장 작은 자 등이었습니다. 특별히 사사기4장에서 하나님은 한 여자를 부르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세상에서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여 능력 있고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고전1:26이하를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정하신 것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드보라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되어야 할 일들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무엇을 알고 있었습니까?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중심 무대에 두고자 한 드보라의 표현과 행동은 불확실한 특성을 나타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겸손한 순종을 보여줍니까?

 


3. 하나님께서 드보라 시대를 통하여 계시하신 규범.


3.1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드보라와 이스라엘이 배운 성경은 주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 앞에서 동등한 지위를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그림1을 보십시오). 창세기1:26,27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땅과 바다와 짐승 등을 다스리라는 위임령을 받았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과업을 받았습니다(28절). 이 점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이점은 없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둘 다 동일한 위임령(mandate)를 받습니다.


죄 안으로의 타락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에게 똑같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둘 다 타락의 결과에 고통을 받았습니다(창3:16). 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그의 언약을 맺으실 때, 그는 남자와 여자 둘 다 그들의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와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 그들에게 말하라...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너희 중 어떤 사람이 주님께 제물을 가지고 올 때...(번역자 사역)”(레위기1-4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레위기15장도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불결하고, 그래서 둘 다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구속을 필요로 합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죄를 받습니다. 이것이 모든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막 봉사의 분명한 명령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지위를 가집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드보라와 그와 함께 한 모든 이스라엘은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동등하게 사죄와 그 결과 생명과 생명력 그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2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두신 관계


- 낙원


하나님은 남자에게와 여자에게 서로와 관련하여 다른 지위를 주셨습니다. 비록 달란트에 있어서 동등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동등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계급 조직을 정하셨습니다(그림2를 보십시오). 창2:7,8에서 우리는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야웨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 사람은 - 그는 아담입니다 - 동산에서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라”는 위임령을 가진 지위를 받습니다. 다음에 18절에서 우리는 “야웨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여자를 만드셨습니다(21, 22절). 


여기서 여자는 돕는 자로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돕는 자’라는 말이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된 (서양의?) 귀를 가지고서, 우리는 ‘돕는 자’라는 말을 ‘보조자’라는 즉 해야 할 일을 듣는 사람의 개념으로 듣기 쉽습니다. 성경은 돕는 자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동일한 말이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는 자로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시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33:20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는 우리의 도움이시오 우리의 방패시로다(역자 사역).

시70:5 그러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시115:9-11 오 이스라엘이여... 오 아론의 집이여.... 야웨를 경외하고, 야웨를 신뢰하는 너희여 그는 그들의 도움이시오 그들의 방패시로다.


위 구절들에서 그 말에 ‘보다 적은(less)’의 개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 구절들은 우리가 남자와 여자를 ‘보다 나은’ 혹은 ‘보다 덜한’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요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돕는 자라는 용어는 남자에게 여자와 관련하여 존재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자가 되기 위하여 남자에게 주어져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자가 여자의 돕는 자가 되기 위하여 여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지도자의 지위를 받습니다. 남자는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 과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자기 동산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남자를 돕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둘은 문화 명령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을 함에 있어서 한 사람은 돕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은 돕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지도자요 다른 한 사람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다시 창세기2:22에서 주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데려오셨지 남자를 여자에게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계급 조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도자요 한 사람은 돕는 자입니다. 창세기2:23에서 우리는 아담이 그녀를 환영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녀가 아담에게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한 사람은 지도자요 다른 한 사람은 돕는 자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우리가 창2:19로부터 배운 대로) 지도력의 역할입니다. 아담은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여자가 아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반면에 주 하나님은 창세기2장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 권위 구조/ 복종 구조를 두었습니다.


- 타락


창세기3장에서 죄로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2장에 함축된 이 권위/복종 구조는 보존되고 있습니다. 유혹을 받고 결과적으로 타락한 자는 하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불러 책망했습니다. 창3:9을 보십시오. 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로 타락하였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우선적으로 아담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창3:10,11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남자가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로마서5:12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적습니다. 이 ‘한 사람’은 아담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비슷하게 고전15:22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즉 죽음은 아담을 통하여 왔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죽음은 하와를 통하여 왔다는 것으로 읽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와가 먼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책임을 지우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권세(또는 책임)의 관점을 보게 됩니다.


죄 안으로 타락 후 남자와 여자(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창3:16이하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여자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에서 ‘할 것이니라(shall)'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할 것이니라(shall)'라는 말은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반영합니까? 아니면 ‘할 것이니라(shall)'라는 그 말이 이 파탄이 난 타락한 세상에서 여자는 그녀의 남편이 끊임없이 그녀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하나의 예언을 나타냅니까? 만약 후자라면,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그리스도인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다스리려” 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인 여자는 그의 남편의 통치를 얌전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창세기 2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서 권위/ 복종 구조와는 다른 관계 구조를 갖게 됩니까? 


결국 드러난 것처럼, [16] 창세기3:16의 공식문구는 우리가 창세기4:7에서 읽은 것과 평행을 이룹니다. 거기서 주님은 가인에게, 그가 희생제사를 드린 후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그를 지배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실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말씀에 덧붙여 가인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가인은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그것이 또한 정확하게 3:16에서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로의 타락의 결과로써 여자는 남자를 다스리고자 열망합니다(“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니라”). 그러나 남자는 그녀가 성공하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18]   


그렇다면, 창세기3:16에서 우리는 창세기2장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사상 즉 권위/ 복종 구조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2장에서는 스스로 조화를 이룬 구조였던 반면에 지금 이 권위/ 복종 구조는 싸움이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3:16은 “성 대결(전쟁)의 시작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19]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2장에 내포된 권위/ 복종 구조는 타락 후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여자는 자기의 자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남자는 여자가 기꺼이 자기 자리를 지키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죄로의 타락에 대한 형벌로써 남자와 여자에게 고통이 있습니다. [20]

  

- 타락 후


창세기2장의 권위/ 복종 구조가 타락 이후에도 유지되는 것은 우리가 창세기의 더 많은 부분과 오경의 다른 책들을 읽음으로써 증명이 됩니다.


창세기5장과 10장의 족보에는 단지 남자들의 이름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장들에서 우리는 누가 살았고, 얼마나 오래 살았으며, 누가 어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왜 이 장의 이름들은 모두 남자들입니까? 그것은 지도적인 지위(headship)가 남자에게 놓여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자는 그녀의 남편에 의해, 남편과 함께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남자는 지도자이고, 여자는 그의 돕는 자라는 원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부름을 받습니다. 사라가 아닙니다. 창세기12장1절에서 우리는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왜 아브람이 부름을 받고 왜 사라가 부름을 받지 않습니까? 사라는 따라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브람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남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창세기2장의 동일한 권위/ 복종 구조 때문입니다.


오직 남자들만 언약의 표와 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여자들은 받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7:10에서 우리는,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왜 여성들은 할례를 받지 않습니까? 여성이 할례받는 것은 가능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언약의 다른 표와 인을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여기서 하나님은 처음에 설립하셨고, 타락에도 불구하고 유지하셨던 지도자/ 돕는 자 구조를 표현하십니다.

  

주님이 시내산에 오실 것을 준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만 하는지에 관하여 오직 남자들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산에서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그의 백성들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거룩케 함과 관련하여 받은 명령 중의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여인을 가까이 말라(너의 아내를 가까이 하지 말라)”(출19:15). 다시 말해서, 그 구절은 남편들, 남자들에게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자기 언약을 맺으시고 그는 남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자가 언약에서 자리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확실하게 언약의 자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한 사람은 머리이고 다른 사람은 돕는 자라는 권위/ 복종 구조가 증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남자만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출28:1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이 명령을 주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왜 아론의 아이들(Children)이나 아론의 딸들은 아닙니까? 그것은 창세기2장 때문입니다. 즉 남자의 위치는 머리가 되어야 하고, 여자의 위치는 돕는 자이어야 합니다.  


오직 남자들만 주님 앞에 보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야웨께 보일찌니라”(출23:17, 신16:16). 여자들은 환영받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환영받았습니다. 한나는 주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일년에 한 번 실로에 엘가나를 따라 가지 않았습니까? 요점은 남자가 머리이기 때문에 남성에게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장로들은 남자들이어야만 했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주님께 영감을 받아, 모세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남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재덕이 겸전한 자(남자)를 빼서 그들로 백성의 두목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왜 여자들은 언급되지 않습니까? 남자가 머리의 지위 곧 지도자로 하나님에 의해 임명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인구조사에서 오직 남자들만 계수되었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민수기1:1-4에서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야웨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찌니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라.“ 하나님은 창세기2장에 계시된 원리를 따라서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민5:19이하에서 우리는 불성실한 아내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은 그녀에게 맹세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말하라, 만약 남자가 너와 함께 눕지 않았다면, 만약 네가 네 남편의 권위 아래 있는 동안에 타락하여 더럽히지 않았다면, 저주를 가져오는 이 쓴 물에서 자유하리라(번역자 사역)”(한글개역성경은 이렇다: 여인에게 맹세시켜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네 남편의 권위”라는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그 아내는 그녀의 남편 ‘아래에(under)’ [21]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의 종속적 위치의 분명한 진술입니다.”[22] 이 본문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적 측면이 아니라 창세기2장의 규례를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남성 대명사의 사용: 레위기1장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한 죄를 지었을 경우 가져와야만 하는 제물에 관해 말해 줍니다. 3절에서 우리는 “만약 그의 제물이 소의 번제물이면, 그로 하여금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게 하라. 그는 야웨 앞에서 회막 문에서 그의 자신의 자유로운 뜻으로 그것을 드릴 것이다(번역자 사역: 한글개역 - 그 예물이 소의 번제물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야웨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왜 남성 대명사입니까?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할 경우 오직 남자들만 희생제물을 가져와야만 하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포괄적 언어 번역자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경향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만약 어떤 사람(anyone)이 소의 번제를 드린다면, 그 사람으로(that person)하여금 ..... 드리게 하라." 그러나 주님은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기2장에서 두신 그 구조의 반영입니다. 즉 남자는 머리이고 여자는 돕는 자입니다. 남성 대명사는 여성을 제외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남성 대명사는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정하신 것, 즉 남자는 머리요 여자는 그의 돕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경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적용하시는 규범이 분명합니다. 비록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 앞에 동등하지만, 삶 속에서 그들의 역할(기능)은 다릅니다. 남자는 ‘지도력’에 의해 특징짓게 되고, 여자는 ‘돕는 것’에 의해 특징짓게 됩니다. 이것은 드보라가 알 수 있었던 내용입니다. 


4. 드보라 시대 결론


드보라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16:18과 17:8이하에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안에 기꺼이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한 남자들이 없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의무에서 손을 떼 버렸습니다.


이 특별한 지도력 공백 상태에서 주님께서 한 지도자를 일으키신 것은 무가치한 자들에게 지도자를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지도자가 여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지도자들이 되었어야 할 사람들을 돕는 자들로 바꾸심으로써 당황하게 하시고 부끄럽게 하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드보라의 태도는 남자와 관련하여 여자의 지위와 기능에 대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충실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지위 곧 남자를 돕는 지위를 잘 알고 있었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지도자로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바락을 독려하기 위하여 그곳에 보내었고, 바락이 해야만 하는 것을 하도록 했습니다. 드보라는 그녀의 지위를 남자들이 당연히 되어야 하는 지도자가 되도록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사기4장에서 우리는 드보라가 단지 그녀의 남편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남자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돕는 자였는지를 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그녀의 지위에서조차 그녀는 남자를 머리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은 창세기2장의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술한 것과 같이,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로 언급되어 있습니다(4장).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지위를 알았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믿음의 여자였습니다.

 


5. 하나님은 드보라 시대 이후에도 이 규범을 유지하셨다.


5.1 남자와 여자는 계속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


사사기4장과 5장 이후에 하나님의 계시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창세기1장과 2장의 그 원리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 전체를 통하여 보존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동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복음을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선포하셨습니다[23] 갈라디아서3:28에서 우리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베드로전서3:7에서도 남편은 그의 아내를 잘 돌보아야만 한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합니다. 


5.2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두신 대인 관계를 변경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 대인 관계에서 창세기2장의 원리 또한 보존되고 있습니다.


왜 세상의 구주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는지 그 이유가 있습니다.[24]

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었는지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문화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 선택이 문화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태어나야만 했던 그 문화와 시대를 선택하신 그 사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25] 만약 하나님께서 여자를 제자로 삼기 원하셨다면, 그분은 여자를 제자로 부르셨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문화적으로 수용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사도행전1:16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서(남자와 여자를 포함하여 전체120명) 가룟 유다로 말미암아 공석으로 남아 있는 제자의 수를 채우는 문제를 말하는 것을 읽습니다. 베드로는 “남자 형제들”에게 연설합니다(원문 성경은 『안드레스 아델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역자 주). 비록 베드로의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性)과 상관없이 120명의 모든 제자들을 향하고 있다 할지라도, 베드로는 그 모임에서 지도자와 관련된 연설을 함으로써 창세기2장의 원리를 반영합니다.

고린도전서11:3에서 사도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적고 있습니다. 창세기2장의 권위/ 복종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4:34에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율법은 모세 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합니다. 처음의 원리가 성경 전체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에베소서5:22-24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아내가 복종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일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점은 창세기2장의 원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자들에게 디모데전서2:12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 베드로전서3:1-6에서 비슷한 권면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아내 된 자들이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 모든 것은 디도서2:1-5에서 마무리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가 해야만 하는 것을 명령했습니다. 디도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만 했습니다. 디도는 늙은 남자들(2절)과 늙은 여자들(3절)에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늙은 여자들에게 그는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말해야만 했습니다(3-5절). 여기에서 창세기2장과 드보라의 태도가 반향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 우리 시대의 결론


우리는 우리의 딸들에게 드보라가 사사였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그런 지위를 열망하도록 독려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드보라를 사용하게 한 바락, 랍비돗과 같은 남자들이 되라고 장려해야 합니까?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입니다. 그 대신에 여자들은 자신과 그 딸들에게,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 권위와 책임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돕는 자가 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동일하게, 여자들은 그들의 남자들과 아들들이 결혼과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지도자들이 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 말은 여자들이나 그들의 딸들이 결코 지도력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사사기4장에서 하신 대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 역자 주)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과 여러분이 그 지위를 열망하거나 여러분의 시선을 거기 두는 것과는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관련하여 여자에게 주신 지위에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계시가 죄된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의 겸손한 수용을 촉구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받은 그 지위에 불행이 있다는 것이 예언되었습니다(창3:16). 그러나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지위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드보라는 여자들의 모범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녀는 모범입니다. 그러나 여권 주창자들에 의해 변호되는 모범이 아닙니다. 드보라는 여성들의 모범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신앙의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자신의 환경에서 남자들이 마땅히 되어야만 지도자가 되도록 도우려 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남자들을 난처하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시대의 남자들이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 지도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드보라를 주심으로써 남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저마다의 지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도록 서로를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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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tnotes. 


Text of an address prepared for the Women's League Day, held on October 29, 1997, in the Free Reformed Church of Kelmscott. I express my appreciation to Johanna vanderPlas for taking copious notes and so ably putting to paper what I said. (Return)

Donna Strom, "Where are the Deborahs and Baraks?" in 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 (Vol 10/1), pg 19. (Return)

Ibid, pg 23. (Return)

Ibid, pg 25. (Return)

A deSnoo in Vrouw, wie ben je? (Uitgave van de Bond van Gereformeerde Meisjesverenigingen in Nederland, 1988), pg 43. (Return)

cf Miriam and Huldah (Return)

Genesis 38 (Return)

Gesenius' Hebrew Grammar, §131b makes this comment on this passage: "a certain (indefinite) woman (named) Deborah, who was also a prophetess (Return)

cf Point 4 below: Conclusion for Deborah's day (Return)

cf Lillian Klein, The Triumph of Irony in the Book of Judges (Decatur: The Almond Press, 1989), pg 41. See also A Janse, Eva's Dochteren (Kampen: Kok, 1923), pg 93. (Return)

Cf Thomas R Schreiner, "The Valuable Ministries of Women in the Context of Male Leadership: a Survey of Old and New Testament Examples and Teaching", in Recovering Biblical Manhood & Womanhood: A Response to Evangelical Feminism, editors: John Piper and Wayne Grudem (Wheaton: Crossway Books, 1991), pg 216. (Return)

Ibid, pg 216. (Return)

Cf Holwerda, Richteren I (Kampen: vandenBerg, n.d.), pg 17: "Hij steunt niet simpel op de Here en heeft dus niet verstaan de les van cap. III, dat de Here ALLEEN het doet, en Hij daarom onnutte dienstknechten kiest. Daarom komt de eer dan ook toe aan een vrouw (iemand die tot de strijd niet geroepen en bekwaam is) als dienstmaagd des Heeren." (Return)

See in this context also Isaiah 3:4 & 12. (Return)

Holwerda, Exegese Oude Testament (Deuteronomium), (Kampen: vanderBerg, n.d.) pg 424"…achter berichten also Richt IV 4v en I Sam VII 6vv ligt dus een ontsellende tragiek: de ambtsdragers spelen algemeen met hun ambt, en alleen de genade van Jahwe die charismatici verwekt behoedt het volk voor totale instorting van het rechtsleven." (Return)

For this paragraph I am indebted to Susan Foh, Women & the Word of God: A Response to Biblical Feminism (Phillipsburg: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Co, 1979), pg 68f. (Return)

The Hebrew is identical except for the pronouns. (Return)

If I may quote Foh's own words: "After the fall, the husband no longer rules easily; he must fight for his headship. The woman's desire is to control her husband (to usurp his divinely appointed headship), and he must master her, if he can. Sin has corrupted both the willing submission of the wife and the loving headship of the husband. And so, the rule of love founded in paradise is replaced by struggle, tyranny, domination, and manipulation" pg 69. (Return)

Ibid. (Return)

NOTE: Gen 3:16b is not a curse!!! The serpent is cursed (Gen 3:14) & the ground (vs 17), but not the woman (vs 16) nor the man (vs 17ff). (Return)

(Sorry, Hebrew not available in HTML) (Return)

Foh, pg 75. (Return)

cf Foh, pg 91f (Return)

cf Mt 1:25; Rev 12:5 (Return)

cf Foh, pg 93. (Return)

  


  


출처: 언약과 개혁/주의 아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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