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결론: 성령은 우리 역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 루이스 B. 스미디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상황 안에 있고, 새로운 권위 아래 살고 있으며, 새로운 질서의 계율에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고, 자유케 된 인격체들로서의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받고 있다. 역사는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 교회, 그리고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기업을 굳게 붙들 것을 명하신다. 그분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일깨우시며, 그들을 자신의 사역의 동역자로 삼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양식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자신을 인도자, 주, 머리, 그리고 동역자로서 제시하신다. 그분의 주권은 그것을 알고 그것에 절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는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는 망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주권은 모든 것에 미치며, 그는 그 주권이 만물에게 미치는 때를 향하여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동안 그분은 우리를 자신과의 연합으로 부르신다.

 

십자가와 부활은 성령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교리적 강설의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성령에 관해서 말하는 바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움직이라는 배경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 내에서의 새로운 상황과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의 새로운 국면을 그 배경으로 한다.

 

바울이 성령을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는 방식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실제적으로 차이가 없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창조, 운동, 행동의 하나님이시다. 즉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수면을 운행하셨던 분은 성령이시다(창1:2).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창조되었으나, 그 일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입김(breath) 혹은 영(ruach)을 통해 이루어졌다(시33:6). 인간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영[또는 신]의 능력을 통해 유지시키신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두실 때 우리는 진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4, 15). 성령은 이처럼 창조시에 운행하시고,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은 만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으로부터 소원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미래를 목표로 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 상황을 변화시키시며 그 안에 포함된 인간들을 또한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새로운 상황은, 성령이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위하여 임하실 때 임하게 된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돌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율법이 기록되었다고 전할 때 그가 염두에 둔 이상(the vision)의 요지이다(렘31:33). 새로운 활력, 새로운 세대, 새로운 관계가 성령이 능력 가운데 임하실 때 도래하리라고 약속되고 있다.(사32:15)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 "내가 또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겔37:5, 11)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그분의 영은 뚜렷이 구분되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계시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의 역사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인간의 삶 어디에 존재하시든지 간에, 그는 거기서 영으로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행동이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아래에"(down here)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영에 대한 구약 성경의 표현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대비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 되셨다. 바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죽은 인간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신다. 그는 생명을 창조한 영과 동일한 분이시다(고후3:6).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새 이스라엘인, 신앙을 가진 순종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영이시다(고전12:12, 13). 성령이 옛 언약에서 하나님과 가지셨던 동일한 관계를 새 세대에 있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가지신다.

 

우리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구별을 무시하고 있는가? 어떤 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메시지를 우리 앞에 견지해 두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성령은 주님의 명백하고도 구체적인 실재를 희미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수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벌코프(H. Berkhof)가 말하고 있듯이, 성령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또다른 이름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주이시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 차이를 포착하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옳은 것 같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의, 즉 그 공동체를 위한 그분의 능력 있는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그는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다. 그가 친히 주가 되시며, 그의 능력을 마음대로 행사하시는 한에서는 그는 성령과 구별된다. 마치 자아(the ego)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인격적인 힘과 구별되어야 되듯이.(참고.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VI, 419. 바클레이는 바울이 주와 동일시 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필수적인 구별을 지적하였다: "바울이 그 내용을 기록하였을 때, 그는 삼위일체와 신성의 인격에 대한 교리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체험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그의 체험에 따르면,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여기에, 바울은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성령이 개인적인 체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바울 서신서에 나타나 있는 주와 성령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예리한 연구서에서 잉고 헤르만은 성령이 "성취의 기독론적 범주"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본 문제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곧 바울이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는 구속의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 말의 의미이다. 헤르만은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동일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능"이라는 단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성령은 단지 그리스도와 한 팀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자신의 구속적 기능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헤르만이 이해한 바에 의하면 주님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완수한 대속의 사역을 현세대로 가져다 주시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방법은 그의 영의 방법이다.(참고. 헤르만은 성령에 관한 바울의 모든 진술이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순전히 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모든 진술들은 기독론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성령은 그의 고유 권한을 가진 한 인격체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그는 반드시 한 인격체로 이해되어야지 독자적인 권한을 가진 분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는 "인격체"(person)라는 단어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심리학적으로 형성된 인격체들에 대한 사고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만일 어떤 한 인간이 하나의 구별된 개인으로서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를 인격체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을 독자적인 고유권한을 지닌 인격체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사고 방식이 아니었다.

 

성령은 한 인격체로서 체험되고 알려지며 영광을 받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독자적인 권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한 인격체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로서 알려지고 체험된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분리된 인격체로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인 목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다섯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성령은 지상에서 그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고 실현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②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체험되는 그리스도이시다.

③ 성령은 지금 여기 지금 존재하시는, 그러나 장차 완전히 실현될 새로운 창조를 통치하시는 주로서, 그의 세상적 기능들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④ 성령은 새로운 창조 안에 있는 자유의 삶을 위한 객관적인, 그러나 역동적인 규범이시다.

⑤ 따라서, 새 언약 안에서의 삶에 관한 한, 성령은 현재의 그리스도이시다.

 

성령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합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바울의 노력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이 된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된다. 이제 이 연합의 더 깊은 의미들을 계속해서 탐구하기로 하자.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 (81-88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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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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