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생에 관한 잘못된 견해

1) 세례 중생설의 오류

가장 먼저 눈여겨보아야 할 사실은, 중생이 외적 예식이나 세례를 통해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의 빛이 이토록 밝게 비치는 이 시대에, 성경적인 근거도 없고 영혼의 영적 유익에도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주장을 옹호하면서도 오히려 성령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믿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데도 복음 진리를 수호한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교회의 강당과 언론에서 이런 교리를 얼마나 열심히 전파하고 있는가! 그래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교리를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진리로 받아들이고, 파멸로 이끄는 이런 착각 속에서 살다가 죽어 가고 있다.

오, 기독교의 모든 목사들이 구원의 길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령님께 그 진리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요한복음 3장을 연구한다면, 단지 세례만 받아도 중생하게 된다는 세례중생설을 주장하는 이단은 금세 교회의 강단에서 자취를 감추고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지 않겠는가! 이런 사악하고도 치명적인 오류 위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밝히 임하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례식에서 물을 어떤 형태로 사용하든지, 그 물 자체는 인간에게 이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만한 효험이 전혀 없다. 물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인간의 영혼에 그 어떤 영적 생명도 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 출생에 대해 기록하면서 매우 강하고 분명한 표현들을 사용한다.

"거듭나다", "성령으로 거듭나다",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영적 생각이 깊은 영혼이라면, 신성한 예식에서 물을 뿌리는 것이 위에 언급된 구절이 의미하는 엄청난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기 위하여 세례라는 예식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고 하는 것도 역시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다. 세례는 우리가 은혜의 수단으로 여기며 의지할 만한 것이 아니다. 만약 세례 예식을 행하기 전에 중생되지 않았다면, 단지 세례라는 외적 예식을 통하여 그 사람에게 영적 생명이 주어질 수는 없다. 그런 말씀은 진리의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세례식과 성찬식이라는 이 두 예식은, 전능하신 성령님께서 일으키시는 효과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그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심어진 은혜가 더 자라날 수 있도록 영적 자양분과 격려를 제공하는 공급원 정도로만 여겨져야 한다. 특히 세례식은 이미 존재하는 은혜에 대한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더 옳고, 성찬식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증가시키고자 제정하신 예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행해지는 이 두 예식을 영적 생명의 원인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비성경적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예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현재 필연적으로 실제로 중생을 경험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세례중생설이 맞다면, 공적으로 고백만 했을 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의 영원한 처지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죽는 날이 결국 그가 불멸하는 영광스러운 세상에서 태어나는 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토록 끔찍한 오류가 우리가 방금 말한 그들의 주장에서 정당하게 추론하여 얻은 결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례중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런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정당하고도 논리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그 예식을 통해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게 된다면, 결국 현재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있지 않아야 할 절망의 땅에 갇혀 있는 셈이다. 여러 기록들이 증언하듯이, 세례를 받았더라도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는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죽을 때에 그들의 양심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공포로 인해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반대로, 만약 세례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면, 세례를 받지 못했는데도 영광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세례라는 외적인 예식 말고 다른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를 증명하는 많은 사례 중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성경 그 어느 곳에도 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므로 어린 시절에도 세례를 받았을 리가 없고, 죽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앞에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한 이방인 범죄자가 가장 비참한 순간에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는 세례에 사용되는 물 대야에서 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매달려 있던 그 십자가에서 왕국과 왕관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물세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강도가 겪은 놀라운 회심과 승리의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유아기에 세례를 받았든 장성에서 받았든, 여러분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면 그 세례는 여러분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사람도 불신자일 수 있다. 또는 재료를 받지 않은 사람도 구원받았을 수 있다. 다음의 말씀은 세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여러분은 세례를 통해서 그 어떤 생명의 원리도 주입받지 않는다. 세례는 여러분에게 구원의 은혜를 줄 수 없다. 여러분은 반드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야 한다.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겨야 한다. 이 땅에서 은혜의 왕국에 들어가거나 하늘에서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어야 한다.


옥타비우스의 '성령님의 구원사역' 중에서(54-57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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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두 요소(수동적.능동적)의 결합]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은 참말이다. 그분들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편에서 행하기를 촉구(促求)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일이 우리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는다.

중생에서 신자는 수동적일 뿐이다. 그가 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만 태어나는 것뿐이요, 출생에 있어 협력하지 않는다. 아기와 꼭 같이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추가된 일면이 있다. 사람은 수동적이며 동시에 능동적이다. 확실히 사람의 생명 내에서 잠재의식의 영역, 그 마음에서 주권적으로 역사(役事)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므로 사람은 이 일에서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다. 사람이 성령이나 그리스도를 주관하지 못하며, 그들(성령과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사람은 성화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다. 신령한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이뤄 나간다. 우리가 시계를 감아서 책상 위에 놓으면 제대로 똑딱거리며 가는 것같이 취급되지 않는다.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지와 감정, 지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성화시킬 때는 이런 기능들을 인정하여 사용하며 그들로 활동케 하신다. 따라서 성화는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은혜임과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께서 수동적으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내리시는 은혜요, 일단 성령을 받았으면 그 받은 자들이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의무이다.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행치 않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할 힘과 능력을 은혜로 주시는 한에서만 행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반만 역사하여 우리를 발동만 시키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100퍼센트 일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 100퍼센트 일한다 하겠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나, 적극적 선을 행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나, 우리가 하는 윤리적인 행위 하나하나마다 성령께서 그것을 하도록 능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것이 참이지만 우리가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그로 모두 다 하시게 하거나" "노력 없는 승리"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성령은 가르친다. "열심히 하는 것 아니면 선하지 않다."고.

승리가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어질지라도 성경은 우리를 항상 격려하여 죄와 마귀로 더불어 싸우라고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엡 6:11,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벗어버리고...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신자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도록(마 5:48) 힘쓰라고 권고하는 이상과 같은 성경을 인용하자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신자가 행해야만 되고 무엇을 해야만 될 것을 지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에는 매우 능동적인 면이 있다.

아마 빌립보 2:12,13과 같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관계를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같이 수동적이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노력하지 말라, 단지 성령께서 모두 하시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강조하여 명확히 말한다. “일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성화에서 능동적인 면,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하여 말함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거룩히 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발휘하라고 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라, 그가 다 하시리라, 우리는 힘쓰지 않으리라 하지 않고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성취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면이 직후에 따른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다 이루라! 네 가진 모든 것, 네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라. 그것이 네 의무다. 그러나 잊지 말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을.

거기에 성경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있고 성공의 비결이 있다. 만일 타 부분이 없이 한 부분만 시도되면 실패가 올 것이다. 성령 없이 힘쓰면 우리는 좌절하리라. 반면 모두 다 성령께 맡기고 힘쓰지 않으면 또한 우리는 실패로 마치리라. 그러나 성령에 힘쓰는 것을 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리라. 거룩한 생활의 비결은 이 결합에 있다. 이로써 신자는 성공을 얻을 수 있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62-166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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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중생]

1. 그 필요성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완전히 타락했고, 그의 지능과 의지와 정서는 철저히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지능으로 말하면, 하나님과 그 나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죄가 그의 이해력을 어둡게 하여 영적으로 완전한 소경이 되게 했기 때문이다. 또 그의 의지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이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요 8:34)이기 때문이다. 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는 말씀대로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서로 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롬 8:7)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전혀 하나님께 돌아올 수도 없으니 선한 일을 할 수도 없다. ”구스 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뇨?“(렘 13:23) 물론 할 수 없다(렘 13:23, 롬 3:10-12). 그것은 물리적으로나 자연 법칙상으로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악에 익숙한“ 그도 선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인(육에 속한 자)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려면 반드시 그의 생명 안에 성령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다만 성령만이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킬 수 있고 영적으로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은 인간에게 있어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이것이 새 피조물을 낳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2. 그 방법

이제 방향을 돌려 성령께서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지, 어떻게 거듭나게 하는지 살피기로 하자. 첫째로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성경은 성령의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조금도 우리에게 말해 주지 않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기로 작정한 일이다. 바울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신비하게 신도들과 연합되는가 하는 것은 비밀이다. 이 연합은 그 형적을 찾아낼 수도 분석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그것이 거기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그건 마치 원자의 에너지와 같아서 그의 파괴력에 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원자의 힘의 궁극의 기원은 인간으로선 설명할 수 없고, 다만 그 결과를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성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중생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 결과는 분명하고 놀라우며 뚜렷하게 볼 수 있으나 인간의 영혼 안에서의 그의 작용을 정의하기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당할 수 없다. 물론 그 이유의 하나는 인간의 영혼이나 성령은 다 영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는 그것들을 분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의 방법을 설명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그의 중생의 역사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다.

(1) 중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식물의 성장처럼 몇 달이나 몇 해에 거쳐 서서히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거듭난 사람이거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거나 그 어느 한쪽이다. 성경적 비유는 흔히 그리스도인은 찰나적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말로써 중생을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조는 한순간에 일어난다. 어떤 물건이 존재하든가 아니면 존재치 않든가 이다. 거기 점진적 중간 단계라는 것은 없다. 한 죽은 사람이 깜짝할 사이에 부활 되며, 그는 죽은 사람이든가 아니면 산 사람인 것이다. 그 중간 단계란 없다. 한 아기는 순간적으로 잉태된다. 생명이 있든가 아니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도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2) 성령은 사람의 영혼에 와서 무엇인가를 행하신다

그는 다만 그 마음에 기독교의 진리를 제공하기만 하고 그의 선택 여부를 사람에게 내맡겨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온갖 논리와 추론으로써 설복하려 드는 한낱 외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속, 그의 영혼, 심령 또는 마음속(다 같은 뜻임)으로 침투한다. 중생이란 단지 행위의 변화, 생활의 개혁, 사상이나 언어, 행동의 혁신만이 아니다. 중생 시 성령은 이 모든 행위의 근원 바로 그것인 사람의 심령에 작용한다. 그는 문제의 심장 곧 모든 인간 행동의 중심이고 최저 동기인 사람의 심장, 내심(內心)에 작용한다....

(3) 성령 사역은 무엇을 더하거나 새 기능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어느 새로운 것을 부가하거나 생각하고 믿는 더 많은 영이나 새 기능을 부여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성향을, 죄에 대한 사랑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았을 때 그는 새로운 눈이나 귀나 손이 더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이 이미 있었다. 오직 그는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생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를 다시 소생시킨 것이다.

비슷한 모양으로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의 영적 생명에 새로운 지성이나 의지나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의 타락에 상관없이 이러한 기능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그는 영혼 없는 동물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릇된 것은 이 기능들이 그릇된 목표 – 하나님을 위하는 대신 사단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하시는 바는 사람에게 지성이나 의지와 감정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대신 그를 위하여 쓰이도록 작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들의 용도(用途)의 방향을 변경시키신다.

(4) 사람의 중생 시에 성령께서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다

성령은 꼭 그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중생을 어떤 방법으로 조정할 수 없다. 중생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은 바람과 같아서 ”...임의로 분다“(요 3:8). 아무도 바람을 명하지 못한다. 아무도 서인도 제도의 태풍을 플로리다 주로 부는 대신 바다로 불도록 명할 수 없으며 또 그 속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다. 예수의 말씀대로 바람은 임의로 분다. 그와 같이 성령도 임의로 중생시키신다....

만일 중생이 신앙의 선행(先行)치 않고 그 뒤에 오며 그에 의존한다면 구원은 로마서 9:7 말씀과는 정반대로 달음박질하는 자나 원하는 자로 말미암는다....

성경에 의하면 신앙이 중생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된다. 사람이 영적으로 선한 일을 단 한 가지라도 행하기 전에 중생이 필요하다. 중생에서 사람은 100퍼센트 수동적이고 성령은 100퍼센트 능동적이다.

이와 같이 성령이 중생시키는 방법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지만 이만큼은 우리가 안다. 중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바로 사람의 영혼(심령)에 어떤 일을 행하시고 이것은 또한 마음이나 행위 간에 그의 모든 행동을 변화시키신다. 그러나 성령은 사람에게 어느새 실체나 새 기능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가 이미 가진 영혼을 소성시킨다. 그는 또한 사람이 전적으로 수동적인 데 반하여 주권적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행하신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 전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매우 신비일 따름이다. 우리는 바람을 못 보듯이 성령을 볼 수 없다.

3. 그 결과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으나 그의 결과는 볼 수 있다. 폭풍이 나무를 뿌리째 뽑고 집을 떠밀어 버릴 때 우리는 바람이 발휘하는 능력을 본다. 마찬가지로 중생에 있어서도, 우리는 성령의 작용하는 방법을 모르지만 예수께서 예시(例示)한 바, 그 결과는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옛 죄는 벗겨지고 새 덕행이 대치될 것이다. 이전에는 죄를 이기지 못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던 것이 이제는 온통 변했으니 이는 성령께서 새로운 성향과 새 욕망을 심은 때문이다. 쓰디쓴 샘이 달디단 샘으로 변하여 그 흘러나오는 물이 이제는 달다. 가시밭이 포도원으로 변하여 찔레 대신 포도가 자라며(눅 6:43-45), 돌 같은 마음이 생명 있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된다. 한 인간이 출생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어떤 새것이 창조된 것이다. 옛사람은 원칙상 벗겨졌고 새 사람이 입혀졌다. 예수께서 이를 요약하여, 거듭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난 자는 이젠 어두움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옮겨졌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는 잃어버린 자에 대하여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놀라운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왜냐면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한때 역경에 처했을 때 고국에 편지하기를 ”우리는 이곳에 아주 개척하기 어려운 밭을 가지고 있습니다....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시고 또 앞으로도 하실 것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절망하여 포기할 뻔했습니다.“라고 썼다.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이디오피아 인이 그 피부를 바꾸지 못하나 하나님이 그의 영을 보내시면 그 백성들은 저항할 수 없이 회개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활발치 못한 이유의 하나는 그들이 여러 번 아무 결과를 보지 못하는 때문이다. 그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나 흔히 그들은 낙망하게 된다. 표면상의 결과가 없으면 그들은 그것이 가치가 있는지 의아하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령의 중생하는 일을 위하여 더욱더 기도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에 앞서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성령의 책망하는 역사를 인하여 그를 찬양하라! 그 책망은 사람을 몹시 불안하게 하고 그의 양심은 그를 번민케 하여 안절부절못하게 한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적대하는 것 같고 그의 죄가 그 앞에 크게 떠오른다. 양심이 그를 괴롭히어 그는 부르짖게 된다. 그는 성령이 오순절에 임했던 삼천 명과 같이 마음에 찔리어 그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한 것같이 부르짖게 된다. 그리하여 이 책망을 통하여 그는 죄의 대속자인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는 회개하고 믿고 그리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책망의 고통을 통하여 그는 기쁨을 얻고 심령의 괴로움을 통하여 평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성령의 역사를 제지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성령께서 책망하실 때 그가 아무리 잔인하였건, 아무리 괴팍스런 죄인이었건 그의 과거를 불문하고 성령 앞에서 그가 녹아서 눈물 흘리며 그의 마음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다. 죄 가운데 죽은 극히 냉담한 죄인도 성령에 의한 출생을 지극히 작은 규모로도 거역할 수 없다. 그는 믿고야 만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지로다!

만일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다. 우리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누리려면 또한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데 성공하기 위하여는 성령께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 안에 오셔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성령의 중생시키는 감화력(感化力)을 위하여 기도하라.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29-145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앞 장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중생을 통하여 죽은 사람 곧 싸움터에 한 주일 동안이나 쓰러져 누워 있는 병사의 시체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킴을 보았다. 성령께서는 죽은 사람들이 죽은 상태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던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영적 생명을 부여한다. 이것은 커다란 기적이다.

이 영적 생명과 그전에 있은 죽음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생명이 흔히 병약(病弱)하다는 것은 너무도 부인할 수 없는 뻔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도 여전히 죄짓는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가 너무 죄를 짓기 때문에 새 생명이 그를 완전히 떠나고 그가 다시 죽어 버린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의 연약함은 죽음에는 이르지 않으며 또 불치(不治)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점차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가 정말로 병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중생한 자도 범죄한다는 것은, 성경으로 또 자신의 경험으로 분명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마다 너무도 쓰리게 자신의 생활에서 죄악적인 실패를 맛보았을 것이다. 때로는 자기 생애 가운데 죄가 득세해 보이기 때문에 낙담하고 회개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고 부르짖을지도 모른다. 그는 겸손하게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자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필요를 느낀다. 요한은 만일 누구든지 거듭난 사람을 포함하여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라(요일 1:8,10) 말하여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좀 더 거룩하고 좀 더 성별되면 그만큼 더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수록 죄에 대한 그의 감각은 더욱 민감하다. 그의 현저한 죄가 그를 슬프게 할 뿐 아니라 전에는 외견상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서 마음을 괴롭히지 않던 죄들이 이제는 그의 마음에 크게 떠오르게 된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부르짖은 것은 그가 그토록 고수준(高水準)의 성화의 단계에 도달해서 죄에 대하여 민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사야가 거룩한 여호와의 환상을 보고,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하고 창화(唱和)할 그때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 6:3,5)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누구든지, 아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성도도, 이 세상에서는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없다. 중생한 자도 여전히 범죄한다. 그는 생명을 가졌으나 병든 생명이다.

이제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는 이 죄에 어떻게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분노, 성냄, 증오, 시기, 음욕 그리고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른 악한 것들을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1. 성화에 대한 비성경적 해결책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성화의 근원(根源)이시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밝히기 위하여는 먼저 죄에 대한 이 문제에 항용 주어지는 두 가지 해답을 고찰함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총력을 다해 죄와 싸우라는 요지요,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죄와 싸울 것 없다는 것인데 이 두 해결책은 다 그릇된 것이다.

(1) 자력(自力)에 의하여

첫째 번 해결책은 우리로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도록 명한다. 성화를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긴다. 우리의 죄악된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라고 한다. 덕행의 유익과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며 하나님께 대한 우리 의무의 합리함을 보여 준다. 죄가 우리 자신의 몸과 영혼에 현세와 내세에서 미치는 결과를 들며 선함과 거룩함이 무엇임을 알았으니 이제 네 생명을 주장하라고 한다. 모든 악성을 정복하라. 내 안에 있는 모든 규율, 결의, 자제력들을 발휘하라.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사람의 모범을 좇으라. 그는 자서전에 기록하기를, 자기의 악습 목록을 작성함으로써 자신을 개선하였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무엇이 옳은가를 알고 우리의 이성과 결의를 사용하면 우리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죄를 정복할 수 있다 한다.

(2) 타력에 의하여

둘째 번 해결책은 첫째 번과는 정반대이나 꼭 같이 그릇되다. 첫째 것이 우리가 자력으로 죄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릇됐다면, 이번엔 우리가 조금도 죄와 싸워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위해 싸우게 하라는 신앙이므로 그릇되다. “전부를 하라,”와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는 표어 간의 차이다.

예를 들면, 케즈윅 지도자들은 주장하되 “구원은 (죄에서) 분투나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으며 진지한 결의나 극기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만일 죄를 이기려고 무엇을 한다면 죄가 그를 이길 것이다. 사람은 “단지 하나님으로 그 인격을 붙잡으시도록 그에게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 성령께서는 그 인격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시도록 하기까지는 할 수 없다.

한나 휘톨 스미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생활의 비결]에서, 신자는 주께 완전히 내맡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기의 생명을 마치 토기장이 손안의 진흙과 같이 창조주의 손안에 맡기고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토기장이가 일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처지를 주의 손에 맡겼으니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만약 우리가 스스로 짐을 지면 주께서는 져 주시지 않는다.”

트럼불은 그의 승리의 생활 운동에서 “가만 두라, 하나님이 하시도록” 하는 표어를 강조했다. 또한 “쉽지 않으면 좋지 않다.” “무릇 내가 얻기를 노력함으로 얻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참 값진 은혜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노력은 “그러한 승리를 못 거두게 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못 거둔다.” 승리가 얻어질 때는 “전투에 의한 승리라기보다 자유에 의할 것이며” 모든 “죄악된 충동”으로부터 “노력 없는 자유”다. “그러므로 노력을 그치라. 그가 모두 하시도록.”

이러한 운동에서는 종종 이차적 축복이 강조된다. 사람이 아무 행위 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에 그리스도를 받는 것처럼 성화 시에 그가 칭의를 받는 믿음과 구별되는 별개의 믿음의 행위로 재차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칭의 시에 신자는 순간적으로 완전히 그리스도를 받는 것과 같이 성화에서도 점차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눈 깜박일 새에 그리스도를 받는다고 그들은 믿는다. 차이는 처음엔 그가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받으나 둘째 번엔 모든 알고 있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주시는 주(主)로서 받는다. 이것이 소위 이차적 축복에 의한 즉각적인 무죄 – 완전이란 것이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를 위해서 제시된 이 방안은 둘 다 비성경적이다.


2. 성공적인 성경적 해답

이제 우리는 유일하고 성공적인 해결책 곧 성경적 해답이 무엇인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력으로 전심 분투하는 것으로만은 거룩함을 결코 찾지 못한다. 그 외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곧 초자연적 도움이다. 또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분투함이 없이 초자연적 도움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죄에 대한 승리는 피상적으로 이 둘의 결합인 듯이 보이는 것에 의하여 얻어질 것이며 그럴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거룩의 비결은 두 겹의 활동 곧 우리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일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길이다.

(1) 성령의 중생의 역사(役事)

우리의 생활에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는 데 우선적으로도 필요한 것은 성령의 중생의 역사다. 성령께서 우리 생명 안에서 일하시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오사 거처를 정하신다. 우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그와 연합된 것이다. 이것은 두 친구 간에 있을 수 있는 기억이나 감정 혹은 사랑으로 연합된 것이 아니고 존재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 안에 오사 거하시며 우리와 연합된 것이다. 이 연합은 포도나무에 가지들(요 15장)이나 삼위에 있어 아버지에 아들(요 17:21)이나 몸에 머리의 연합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사실이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할 만큼 실제적인 일이다.

이처럼 성령께서 중생시키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이뤄지면 그때 죄에 대한 승리 곧 점진적이 아닌 즉각적 승리가 따른다. 분명히 지상에 있는 신자 내에 죄의 완전한 근절은 없으나 순간에 얻은 승리가 있다. 그래서 요한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요일 5:4)”라고 쓸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강하게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롬 6:14)”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죄는 정복되었다. 죄인이 승리한다. 물론 그가 범죄할 것이나(요일 1:8) 그의 의지에 반(反)하여 그리할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 때로는 그가 아무 소망도 없고 죄에 대한 승리자이기보다 패배자인 듯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으로 나서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는 자신을 죄에 내맡길 수 없다. 왜냐면 그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죄가 그를 주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가 어느 기간 여러 모양으로 승리할는지 모르나 종국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죄를 완전히 멸할 것이다. 사단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그의 운명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는 싸우며 떨어져 가는 것이다.

그 승리는 1945년 일본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에 비교할 수 있으리라. 승리는 얻었다. 일본은 항복했고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평화 조약이 조인되고 일본군의 태반이 항복한 뒤에도 미군이 섬들을 점령하려고 했을 때 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군인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한 자의 생명에서 승리는 이미 얻어졌다. 사단과 죄는 패배했다. 그러나 아직도 게릴라 전투가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때로는 대규모적으로 일어나나 승리는 조인되어 반항(조)의 마지막 잔재가 청산되기까지는 시간 문제일 뿐이다. 이런 성경적인 뜻에서 승리의 생활은 가능하다(요일 5:4).

성령의 성화하는 일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중생과 꼭 같이 신비다. 다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2) 성령의 성화의 역사

성화는 주로 성령의 일이다. 전에 말한 것같이 영적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하는 데서 오며,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신자 안에 거하신다 하셨으며(요 14:23) 삼위의 역사를 나눌 수 없음을 아는 바이나 성경은 성화가 주로 제삼위의 일이라고 표시한다. 그는 중생시키시는 분이며(요 3장), 새롭게 하며(딛 3:5), 거룩하게 하며(살후 2:13; 벧전 1:2), 인도하며(롬 8:14), 사람 속에 거하며(요 14:17; 롬 8:9; 고전 3:16), 사람의 마음에 편지를 쓰신다(고후 3:3). 그리고 바울은 분명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한다. 이 구절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생활을 하려면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가리킨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는다. 즉, 그의 생명을 나눠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 안에 거하여 그를 거룩히 하려면 성령을 통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나 성부께서 내재(內在)하여 직접 매개 없이 성화시키지 않고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하신다. 성화는 주로 제삼위의 일이다.

(3) 성령의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 역사

이 성화의 특성은 중생에서와 꼭 같이 성령께서 사람의 바로 중심 혹은 영혼을 움직인다. 그는 도덕이나 합리적 설복을 사용하고 성화는 사람으로 하든지 말든지 그에게 맡겨 두는 것이 아니요 그의 기본 성질을 움직여 사람이 협동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는 잠재의식, 영혼의 깊은 곳에 작용한다. 결과는 선행이 따른다. 나무의 열매는 그 성질에 좌우되며 마음에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나기 때문이다(잠 4:23).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 우리가 저항할 수도 없는 영혼의 잠재의식의 영역에서 일하시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항상 저항함으로 우리는 결코 성화되지 못할 뻔하였을 것이다.

(4) 전인적(全人的) 성화의 역사

성화에 있어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가 변화받게 하신다. 예를 들면, 의지만을 거룩케 하여 선행을 결심케 하되 선을 깨닫지 못하거나 선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법이 없다. 사람의 전부 곧 그의 의지와 감정과 이해력을 다 거룩하게 한다. 신생(新生)에 있어 완전한 성화를 주시지는 않지만 사람의 전체를 변화시켜서 전 존재로써 거룩한 길을 출발시키는 성화를 주신다. 완전하게 창조된 아기의 출생 및 성정과 유사하다. 아기는 비록 작기는 하지만 마음과 몸의 전 기능을 가졌다. 그의 손톱은 자그마할지 모르나 완전하게 만들어졌다. 손가락, 발가락, 귀, 눈썹, 또 내부 기관이 충분히 발육되지 않았어도 있어야 할 수(數)는 다 갖춘 것이다. 같은 모양으로 성령께서는 사람의 전체를 중생시키고 성화시키신다. 겨우 시작에 불과할지라도 사람의 각 부분이 변화받는다. 영적 이해력이 의지를 무시하고 자라지도 않고 그의 의지가 감정을 저해하고 발달치도 않는다. 각 부분에서 자란다. 그는 각 부분에서 완전하다. 단지 정도에서 불완전할 뿐이다.

이 성령의 일의 포괄성은 마음이 사람의 전 활동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잠언 4:23이나 예수께서 마음에서 나온다는 모든 악을 마가복음 7:20-23의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심층부 곧 그의 심장 혹은 영혼이 변하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도 역시 변할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의지와 지식과 감정이 각각 거룩해졌다고 말함은 여러 곳에서도 볼 수 있다.

(5) 성화의 점진성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일의 특성은 그 과정의 점진성(漸進性)이다. 사람은 결코 땅 위에서 즉각적이며 죄 없는 완전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죄 많음에 맞추어 하나님의 수준을 낮추는 사람만 자기가 완전하다고 그릇 생각한다. 성경은 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갑자기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싸움 끝에 구원이 온다고 증거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과정이 느리고 때론 빨라지지만 아무튼 일정한 기간을 요하는 일이다.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하였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신자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죄와 사단과의 끊임없는 싸움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배드로도 “은혜와 지식으로 뛰어들어 가라.” 하지 않고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성화가 점진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6) 성화의 과정이 완성되는 순간

그러나 이 점진적 과정은 죽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완성될 것이다. 하늘나라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없으며, 죄가 완전히 폐하여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27). 그러므로 신자가 죽어 바로 하늘나라로 갈 때 성경에서 명시하는 대로 성화의 과정은 순간에 완성되고 일초도 못되어 죄없이 완전케 된다[눅 23:43; 히 12:23-개혁주의 신행협회 출간, [소교리 문답 강해](184쪽, 제 37문답)와 [불멸의 생명] 참조:편집자 주].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성령의 계속적인 일이 죄에 대한 승리, 비록 그것이 쉽지는 않으나 그 승리를 위해 불가결의 조건이다. 우리가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필수요 근본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그렇지 않고는 부분적인 승리일지라도 얻을 수 없다. 굳은 결의, 결심, 고통스러운 노력도 성령과 그리스도 없이는 쓸데없다. 그 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치 씨나 작은 사과를 어느 나무에 붙여 놓고 아름답고 붉고 즙 나는 사과를 내려고 하며 그것들이 자라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다. 그런 외부적인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다. 차라리 바른 성질, 사과나무의 성질을 가진 나무를 골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서 적당히 재배하면 그 나무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쉽게 좋은 사과를 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대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서 그로부터 생명과 생명력을 받아 자라 포도를 맺는 것과 같이 신자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와 성령으로부터 내적 힘과 생명과 선행을 할 힘을 얻는다. 그래서 절대로 묵고 마르고 죽음 막대기로부터 포도를 낼 수 없듯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 생명을 주지 않으시면 거룩하게 되기는 불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로부터 죄를 이기는 힘, 우리 안에 없는 이 힘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외적인 수단 곧 금욕이나 단련이나 도덕적 훈계나 벤자민 프랭클린의 반성 목록 등, 성령 없이 자력으로 하는 수단으로 죄를 정복하려고 함은 마치 묘목(苗木)의 껍질을 늘리고, 가지를 잡아당기고, 줄기를 들어 올림으로 큰 나무로 만들려 함과 같다. 그런 외부적 방법으로 강제될 수 없다.

봄철에 나무들을 보면 성경적 방법을 알 수 있다. 죽고 마르고 바삭바삭하며, 갈색이 된 잎사귀들이 아직 가지들에 붙어 있다가도 생명이 내부로부터 발현하자, 그 묵은 잎사귀는 자연히 떨어지고 새롭고 파릇한 새싹이 나타나 시초엔 작으나 점점 완전하게 모양을 갖추어 성숙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실 때 우리에게 능력과 생명을 주심으로 옛 죄는 하나씩 떨어지고 대신 비록 새싹과 같이 작지만 주님을 닮은 새 덕(德)들이 생겨 점점, 그러나 확실히 자라간다.


이와 같이 성화는 큰 결심이나 의지력으로써 내적 능력의 근원과 별도의 외적 수단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직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는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신자 아닌 자들이 갖지 못한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케 되는 것이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8)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능력과 승리의 비결 곧 성공의 길이 있다.

이제는 범하기 쉬운 다음과 같은 비성경적인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 승리가 성령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면 우리는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힘써 일하여선 안 된다.” 우리는 “그(성령)로 다 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격을 맡으시게 하고 우리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지고 말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노력 없는 승리를 얻어야만 한다.”


3. 성경적 두 요소(수동적.능동적)의 결합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는 승리가 불가능함은 참말이다. 그분들이 우리 마음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 성경은 우리 자신이 우리 편에서 행하기를 촉구(促求)한다. 그렇다고 성령의 일이 우리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는다.

중생에서 신자는 수동적일 뿐이다. 그가 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만 태어나는 것뿐이요, 출생에 있어 협력하지 않는다. 아기와 꼭 같이 아무것도 보태는 것이 없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추가된 일면이 있다. 사람은 수동적이며 동시에 능동적이다. 확실히 사람의 생명 내에서 잠재의식의 영역, 그 마음에서 주권적으로 역사(役事)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므로 사람은 이 일에서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다. 사람이 성령이나 그리스도를 주관하지 못하며, 그들(성령과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람의 활동과는 상관없이 자신에게서 흘러나온다. 사람은 성화의 측면에서는 완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은 매우 능동적이다. 신령한 생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그 생명을 이뤄 나간다. 우리가 시계를 감아서 책상 위에 놓으면 제대로 똑딱거리며 가는 것같이 취급되지 않는다. 사람은 시계와 달리 의지와 감정, 지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을 성화시킬 때는 이런 기능들을 인정하여 사용하며 그들로 활동케 하신다. 따라서 성화는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그것은 은혜임과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께서 수동적으로 자기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내리시는 은혜요, 일단 성령을 받았으면 그 받은 자들이 행동에 옮겨야 하는 의무이다.

확실히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행치 않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행할 힘과 능력을 은혜로 주시는 한에서만 행한다. 이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반만 역사하여 우리를 발동만 시키고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100퍼센트 일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하는 모든 일에 100퍼센트 일한다 하겠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시험을 물리치는 일이나, 적극적 선을 행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나, 우리가 하는 윤리적인 행위 하나하나마다 성령께서 그것을 하도록 능하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뿐이다. 또한 이것이 참이지만 우리가 최대한으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엄숙한 의무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거나" "그로 모두 다 하시게 하거나" "노력 없는 승리"를 구하여서는 안 된다. 성령은 가르친다. "열심히 하는 것 아니면 선하지 않다."고.

승리가 오직 성령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얻어질지라도 성경은 우리를 항상 격려하여 죄와 마귀로 더불어 싸우라고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엡 6:11,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이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벗어버리고...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신자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도록(마 5:48) 힘쓰라고 권고하는 이상과 같은 성경을 인용하자면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은 신자가 행해야만 되고 무엇을 해야만 될 것을 지시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화에는 매우 능동적인 면이 있다.

아마 빌립보 2:12,13과 같이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관계를 더 잘 표현하는 구절은 없으리라. 여기서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으라,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같이 수동적이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 노력하지 말라, 단지 성령께서 모두 하시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강조하여 명확히 말한다. “일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는 성화에서 능동적인 면, 사람의 의무와 책임에 대하여 말함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거룩히 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노력을 발휘하라고 권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맡기라, 그가 다 하시리라, 우리는 힘쓰지 않으리라 하지 않고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성취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동적인 면이 직후에 따른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렇다 이루라! 네 가진 모든 것, 네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라. 그것이 네 의무다. 그러나 잊지 말라!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심을.

거기에 성경적인 두 요소의 결합이 있고 성공의 비결이 있다. 만일 타 부분이 없이 한 부분만 시도되면 실패가 올 것이다. 성령 없이 힘쓰면 우리는 좌절하리라. 반면 모두 다 성령께 맡기고 힘쓰지 않으면 또한 우리는 실패로 마치리라. 그러나 성령에 힘쓰는 것을 합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리라. 거룩한 생활의 비결은 이 결합에 있다. 이로써 신자는 성공을 얻을 수 있다.


4. 최후 승리를 위한 3대 촉진제

완전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신자가 취하여(물론 순전히 성령의 은혜로) 마지막 승리를 촉진시키는 데 도울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중요한 방법 셋을 제시하고 싶다.

(1) 기도

자기 생명 안에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위하여 기도할 일이다. 성령께서 우리로 성령과 그리스를 구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심이 사실이나 우리가 그의 내적 임재를 믿음으로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의 생명 가운데 더 오시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손이 우리 몸을 위하여 양식을 취하는 도구이듯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8,39) 하셨다. 바울은 에베소 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7) 하였고 갈라디아 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며 자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생명을 누린다(갈 2:20)고 선언했다. 이와 같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충만히 거하시는 열쇠요 따라서 죄를 이길 능력을 얻는 열쇠다. 우리의 생명에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시도록 믿음으로 기도하자. 그러면 받으리라.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충성이나 감사의 표시만이 아니라 능력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항상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한 요구를 가지고 다시금 하나님께 나가는 꾸준한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대답을 원하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은 시리라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이 아닌, 그가 우리 기도를 들으시라고 믿고 기대하면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히 11:6).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니다. 믿음에는 지식과 아울러 신뢰하는 요소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과 그리스도의 충만을 주실 수 있다고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그렇게 하시리라고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이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갈  때에 자기의 선하고 거룩한 은사를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을 주심을 볼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최대하여 대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이기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안에 거하시기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첫째로 긴요한 일이요 중요한 방법이다.

(2) 말씀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홀로 묵상하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경우 외에는,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별도로 일하시지 않는다. 그 말씀을 통하여 일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온 은혜의 방도를 소홀히 하고 우리에게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 보여 주는 유일한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서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모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우리 자신의 생명을 위해 씌어진 교훈이 밝히 혹은 내포(內包)되어 나타나 있다. 만일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닮을 것이면 우리는 성경에서 그와 친숙해져야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교훈을 성경 매장에 기록된 대로 지키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우리는 게으르게 성령께서 기적적으로 계시를 또 보여 주리라고 바랄 수 없다. 아니다. 우리는 그 말씀으로 가득 차야 한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먹을 때 성령께선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우리로 더욱더 성화되게 하신다. 예수께서 분명히 진리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고 하셨다(요 17:17,19). 베드로는 이것을 확증하여 “순전하고 신령한 젖(말씀)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하였다. 그러면 우리로 우리 하냐 남아 있는 죄를 이길 수 있게 하는 둘째 번 구체적인 일은 철저하고 개인적인 말씀의 묵상이다.

(3) 공중 예배 생활 충실

거룩한 생활을 추구하는 신자는 공중 예배에 충실할 것이다. 말씀의 진실한 전파를 통하여 성령은 말하며 죄를 책망하여 거룩함에 인도할 것이다. 성례에서 또한 그의 믿음이 굳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목사가 성화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어떤 죄와 싸우고 있던 신도 중 몇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고 생각하자.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자기들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인 선언을 듣지 못하게 되면 그만큼 성장이 뒤지게 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의 공적인 해명을 통하여 일하신다. 그래서 거룩히 되고자 하는 신자는 모든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부지런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길을 따라가면 죄에 대한 승리가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생활상 어느 죄든지  - 가령 분노, 참지 못함, 미움, 시기, 음욕, 술 취함,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그 외 어떤 죄든지 이긴다. 성화는 이중(二重)의 역사다. 첫째로 100퍼센트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는 그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내주를 체험해야 한다. 그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가 함께하시면 우리는 모두 할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화는 사람이 결심하여 꾸준히 추구하는 일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을 향해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이 두 요소-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를 묶으라. 그러면 결과는 죄에 대한 승리다. 분명히 죽음 이편에선 죄는 근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한 거룩을 향해 달려가면 현저하고 분명한 진보가 있을 것이며 죽음 건너편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더 높은 생활”의 비결이요 이것이 “승리의 생활”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149-170p)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이와 같이 오늘날 성령에 가장 엄청난 역사의 하나는 버림받은 자들 중에서 그들의 악행을 제지하여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육에 속한 자는 겉으로는 하나님 법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으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공경치 않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수한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자의 모든 행위는 죄인 것이다....

보편 은혜의 영역에서 성부, 성자의 역사와는 구별되는 성령의 삼중의 역사가 있다. 그는 거듭나지 않은 자를 죄에서 억제하고, 그로 선행하도록 권장하며, 위대한 문화적 성취를 위한 자질을 구비시키신다....

죄인에게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보편 은혜뿐 아니라, 특수 은혜가 필요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독생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성령의 보편 은혜 안에서의 역사에 감사하되 단 한 사람도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줄로 잘못 생각하지 말 일이다. 오직 구원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의 옛 길에서 돌이켜 예수께 구속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자만이 얻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에드윈 H. 파머의 '성령과 보편 은혜' 출 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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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늘 남침례교단 소속의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오순절파 은사주의 교회에 다니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우리 교인들을 부드럽게 표현하여 ‘경직된 신자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친구의 초대로 그들의 은사 부흥 집회에 참석해 보고서야 그들이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제일침례교회 성도들은 찬송가에 있는 찬송을 부르고, 목사님의 설교를 조용히 경청하며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질서를 깨는 것이라고는 겨우 설교 중에 가끔씩 ‘아멘’이라고 하는 말들 뿐이었다.

 

은사주의 교회에서의 경험이 내게 생소한 느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절제된 표현일 것이다.

 

친구의 초청으로 참석했던 그 부흥 집회의 첫 날 밤에, 나는 수많은 방언을 들었다. 절제할 수 없는 웃음(그들은 성령의 웃음이라고 불렀다), 기절, 강렬한 대성통곡, 두통과 암에서 나음을 입는다거나 하나님의 노하심이 몇 개의 미국 도시에 내린다는 예언 등이었다. 그리고 남녀 성도들이 예배당 안을 뛰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한쪽 구석에서는 한 젊은 남성이 마치 전류가 흐르는 전선을 붙잡은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의 몇 줄 뒤에서는 한 여성이 주님을 찬양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추는 꼭두각시처럼 보였다. 한번은, 어떤 나이든 여성이 내게 다가와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안수를 받고 싶은지 물었다. 나는 내가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이런 일을 몇 번 경험한 후에, 은사지속론자인 내 친구는 내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친구에게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사실 그러한 현상들이 진정으로 성령의 역사인지 확실히 모르겠다고 시인했다. 나는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내가 하나님의 사역을 거역할까봐 두려워서 내 눈으로 본 모든 현상을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만일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정말로 방언이 아니라면, 그리고 사람들이 기절하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확실히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현재 은사중지론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는 무엇이 사람의 몸과 감정을 그렇게 완전히 동요시키는지 궁금하기는 하네.”

 

1990년대 중반 즈음에 토론토와 펜사콜라 같은 장소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들이 오순절파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났다. 많은 현상들이 성령의 역사로 여겨졌다. 거기에서 기적 같은 치료가 일어났고, ‘거룩한 웃음’과 ‘성령의 파도타기’가 있었다. 하늘에서 금가루와 천사의 깃털이 내려온다는 주장도 있었다.

 

논란이 된 그러한 현상은 캘리포니아 레딩에 있는 베델교회와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은사주의 교회와 기관들에서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영들을 분별하라 

 

이러한 현상들 중에 몇 가지는 명백하게 성경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현상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내 친구가 20여 년 전에 “이러한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었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현상이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는 결과의 산물인가, 아니면 절제되지 않은 감정에서 단순히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자기 암시에 의한 결과인가? 그도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제안하듯이 사탄의 역사일까?

 

성경 말씀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기 위하여 영들을 점검하라고 요구한다(요일 4: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그들 진영 밖의 이방 문화가 아니라 그들 내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참 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군중을 끌어들였고 더 잘 알려져 있었다.

 

표면적으로, 금송아지 사건은 크고, 소란스럽고, 심지어 축하하는 대규모의 군중들이 있는 진정한 부흥의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것은 생기 있는 예배나 성령에 의해 인도된 예배와는 정반대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분별의 표지’ 

 

우리보다 앞서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성령 강림 이후로 모든 부흥 운동은 참과 거짓, 알곡과 쭉정이가 뒤섞여 있는 듯하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하여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730-4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부흥 운동이 있었는데,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를 포함한 여러 설교가들의 설교로 미국과 유럽 대륙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을 하는 성령의 엄청난 역사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분명하게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지만, 에드워즈와 다른 설교가들은 그 부흥 운동 기간 동안에 성령의 역사를 왜곡하는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들이 시인하는 사항들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현상과 유사한 급격한 감정적 신체적 징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부흥 집회에서 나타난 과도한 행위를 비판하며 이를 ‘과도한 열정’이라고 일축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탄의 일로 철저히 거부했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사역을 분별하는 표지들’(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1741)에서 부흥 운동을 요한일서 4장에 비추어 평가하였다. 그는 그가 ‘불확실한 표지들’이라고 부른 징후들, 즉 진정으로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하기도 어렵고 부인하기도 어려운 징후들을 조사했다.

 

에드워즈가 제안하는 분별의 표지들은 내 친구와 기독교 역사에서 계속 제기되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 쭉정이에서 알곡을 골라낼 수 있는, 훌륭한 지혜를 제공한다.

 

불확실한 표지들

 

에드워즈는 ‘분별의 표지들’(Distinguishing Marks)의 제1부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는 현상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나열한다.

 

1. 몸에 나타나는 결과

기절이나 고함을 치는 등의 감정적이거나 신체적인 반응은 성령에 의한 표지가 아닐 수도 있다. 경련, 비틀거림, 웃음 등 여러 많은 징후들이 첫 번째 대각성 운동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이러한 현상이 개인의 특성일 수도 있고 감정적으로 압박을 받을 때 나타나는 돌발적인 행동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반드시 성령에 의해 촉발되는 현상은 아닐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성경은 성령의 영향력 하에 몸과 감정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하여 정확한 공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2. 흥분된 감정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영혼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을 압도하고 그들의 감정을 고취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감정적인 반응을 공식화하는 일에 대하여 경고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령의 영향에 의해 영적 경험을 했음에도, 감정적으로 그렇게 격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즉각적인 개인적 계시

현대 은사주의자들은 이것을 “형제님, 하나님이 저에게 당신을 위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때로 그 말씀은 성경 말씀일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사탄도 성경을 알고 잘 인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자극에 의한 현상은 성경 말씀이 인용되더라도 항상 신뢰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부흥 운동이 항상 지도자들과 참가자들의 판단 오류로 인해 문제가 있었고 사탄의 속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주의를 기울이고 분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확실한 표지들

 

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여겨지는 일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성경의 역사라고 구별할 수 있는 5가지 확실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1.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는 사랑이 깊어짐

성령이 사람을 온전히 움직이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의 복음에 대한 큰 애정이 솟아난다.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최고의 기쁨이 된다. 더 나아가, 성령은 신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게 한다.

 

2. 죄를 제거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끊으려는 열망

성령은 크리스천이 죄를 싫어하고 거룩한 열망이 일어나도록 그를 새로 창조하신다. 세속적인 쾌락을 높이 사는 마음은 비록 그것이 좋은 일이더라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3.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깊어짐

에드워즈는 성경 말씀이 죄인들을 그리스도와 거룩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사탄은 사람들 안에 성경 말씀을 사랑하는 열망을 결코 넣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악마는 거룩한 책인 성경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증오심을 보여 왔으며, 성경이 어둠의 왕국을 멸망하게 할 빛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4. 건전한 교리에 대한 신념이 확고해짐

성령은 성경 말씀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리를 신자에게 수용하도록 이끌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진정으로 역사하시면,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영원성의 실재와 심판날의 확실함을 사람에게 확신시켜 주신다. 이러한 신념은 영적 눈이 열린 사람들에게 단단한 초석이 된다.

 

5.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짐

성령의 참된 역사는 크리스천에게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도록 인도하는 겸손을 심어줄 것이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반드시 이어지게 된다. 에드워즈가 말했듯이, “사랑은 값없이 주신 은혜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든 탁월함과 자기 의를 포기하게 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적대하고 증오하는 자들과 비교하여 우리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날을 위한 지혜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에드워즈가 은사지속주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과장된 표현을 지지한다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그가 유작으로 남긴 ‘사랑과 그 열매’(Charity and Its Fruits)의 고린도전서 13장 설교에서, 은사 중단의 표지들을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부흥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통찰에서 은사지속주의자나 은사중지주의자나 모두 똑같이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흥 운동을 제기하는 오늘날의 주장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우리는 에드워즈의 저술로부터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부흥 운동에 대한 그의 풍성한 저술을 통해서, 우리는 아마도 네 가지 정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모든 현상이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적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기 바란다. 만일 그것이 말씀에 어긋나 있으면, 거짓된 표지로 여길 필요가 있다.

 

둘째, 모든 영들이 다 거룩한 것은 아니다. 스프로울(R. C. Sproul)이 말하고 있듯이, 거룩의 영은 또한 진리의 영이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봄으로써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 만일 영적 경험이 성경 말씀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영적 경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셋째, 지역 교회와 교회의 설교 사역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우리가 의심을 해야 한다. 현대의 부흥 운동은 그 운동을 이끄는 개인과 운동이 일어나는 초교파 모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고의든 아니든, 그러한 경험은 특히 성경적 설교처럼 지역 교회 내에서 평범한 수단을 통해 행해지는 은혜 사역을 경시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운동은 종종 내가 ‘번개 영성’이라고 부르는 일을 조성한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특정한 목사가 특정한 장소에서 제공하는 매우 극적인 감정적 경험을 통해서만 성화를 추구하며, 거기에서 영적 번개불에 맞고 즉각적으로 더 성화되기를 원한다. 이 반응은 성경에서 성화를 점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 사실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성경은 성화가 하나님의 평범한 은혜를 통하여 일생을 거쳐 천천히 진행된다고 가르친다. 에드워즈는 회심자들에게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예수님께 향하며, 부흥 운동 모임에서 떠나 지역 교회로 향하라고 말한다. 예수님 때와 같이 오늘날에도 성령의 진정한 역사에 대해서는 그들의 열매로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마 7:16).

 

그러면 오늘날 내 친구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20여 년 전에 내가 본 현상에 대해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령과의 친밀한 만남은 삶에 극적인 변화를 동반한다는 에드워즈의 생각에 동의한다. 경직된 신자이든 열정적인 은사주의자이든 영적 경험의 결과가 삶에서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God’s Spirit or Human Hysteria? My Time Among the Charismatics by by Jeff Robinson

번역: 정은심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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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성령은 자유하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 일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성령께서 예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과의 관계에서 보이시는 겸손하심이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인 현상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미혹의 영의 장난인지를 분별하는 척도는 성경이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냉철한 성경적 검증과 분별을 거부할 때, 교회 안에는 봇물 터지듯 온갖 종류의 사이비 가르침과 미혹하는 영의 역사라 밀려들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굴레에서 벗어난 성령 운동은 이단들이 득실거리는 온상이 된다.

성경으로 입증되지 않은 영적인 현상과 체험을 비판이라도 하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성령을 소멸한다는 식으로 위협하고 저주하는 것이 사이비 성령 운동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들은 항상 성령의 주권적이고 자유로운 역사하심이라는 허울 아래 성경의 가르침을 교묘히 피해가려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굉장한 표적과 기적이 일어났을지라도 그것을 무턱대고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를 제한할까 두려워 성경적인 검증을 회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오히려 성령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성령을 가장하는 미혹의 영의 자유로운 역사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의심스러운 것은 그대로 믿기보다는 의구심을 가지는 편이 훨씬 지혜로운 일이며 성경 말씀을 신앙과 체험의 척도로 삼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성령뿐 아니라 육신의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하는 곳이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 박영돈 목사,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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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풍을 날리는 집사

박영돈 목사님 인터뷰 기사를 읽었었습니다.

장풍을 날리는 어느 집사님이 있답니다.
재작년에 노회고시를 볼 때, 저와 함께 봤던 어느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투석을 하시는 분인데 치료받으려 소개받아 어느 교회에 다녔답니다.

성령춤추는 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그 집사님은 병을 치유받았고
어느날 갑자기 손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나가 떨어지는 겁니다.
미국의 어느 치유 사역자와 같은 현상이랍니다.
자신도 맞아보니 꽤 아플 정도의 힘이 느껴졌고 나가 떨어지더랍니다.

그분이 그 집사님에게 기도와 성경을 더 보라고 충고했는데..
그 현상에만 집중해,
집회할 때마다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서 장풍(?)을 과시하곤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 즉 눈에 보이는 것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저희 처가 식구들도 그곳(?) 예배 중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나오기가 쉽겠습니까?
정말 분별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또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 아멘넷 게시판에서: 정리: 나무 목사님

제9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 보다는 광란에 사로잡혔다고 해야 한다. 아주 교만해지고 오만해진 사람들이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서 성경 읽은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고,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그렇게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 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 도대체 어떤 영인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그 확신은 참으로 조소 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고 그들도 생각할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더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그는 "내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내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내 입에서와 내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여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곧 성령에 의해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잇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 이끌려 다녀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후 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은 것이 착념하라고 권했다(딤전 4:13).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성경에 대한 찬사를 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6-17).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거시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관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성령으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영으로서 예수 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ㅂ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처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요약에서 /바요나

 

THE POWER SOURCE - BAPTISM IN THE HOLY SPIRIT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t I, and I am not fit to remove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Matthew 3:11).

What is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a second encounter with God (the first is conversion) in which the believer begins to receive the supernatural power of the Holy Spirit into his life. Jesus promised this power to his disciples when He said, "You sha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upon you; and you shall be My witnesses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even to the remotest part of the earth" (Acts 1:8).

This promise was fulfilled at Pentecost when the Holy Spirit fell on the one hundred and twenty gathered in the upper room.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with other tongues., as the Spirit was giving them utterance" (Acts 2:4).

When do I have the Holy Spirit? Someone will say "don’t we have the Holy Spirit when we become Christians?" The answer is yes. The moment you accept Christ as your Savior, the Holy Spirit takes up His residence in your heart (Romans 8:9; 1 Corinthians 6:19). We are born-again of the Spirit, transformed by the Spirit, led by the Spirit, strengthened by the Spirit, and we can be filled with the Spirit.

While the Holy Spirits indwells all believers, it does not follow that all believers are Spirit-filled. Peter’s sermon at Pentecost speaks of two separate events: (1) "Repent and be baptized..." (2)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 (Acts 2:38). The converts at Samaria had believed and been baptized, but received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later (Acts 8:12,17). The same was true at Ephesus (Acts 19).

Three statements bring the matter of the Holy Spirit and the believer into focus.

First, the Holy Spirit is in every believer. Through the initial operation of the Spirit, the mysterious change, the new birth, takes place (John 3:5-7).

Second, the fullness of the Spirit is not experienced by every believer (Acts 8:12-17; 19:1-7).

Third, the fullness of the Spirit may be experienced by every believer (John 7:4=37-39), Jesus said, "If any man..." Obviously, He meant all when He said, "He that believeth on Me."

Is the baptism for me? If you are a Christian you are a candidate. And Christ’s promise is very personal; it is to you. "He that believeth...out of his belly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 (John 7:37-39). "The Father...shall give you another comforter...He dwelleth with you, and shall be in you" (John 14:16,17). "It is expedient for you...I will send him unto you...He will guide you...and show you" (John 16:7,13).

"I will send the promise of my Father upon you, but tarry ye..until you be endued with power from on high" (Luke 24:49). "For the promise is unto you and your children" (Acts 2:39).

Is the baptism necessary? For salvation? No, for we are justified by faith. For life and service? Yes! If you will search the Bible, you will find that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God’s plan for a normal Christian experience from the day of Pentecost until Jesus comes again.

Jesus commanded the Disciples to stay in Jerusalem until they had been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cts 1:4,5). The Ephesians were told, "...be filled with the Spirit" (Ephesians 5:18). This is not an invitation; it was a clear directive, a command.

Jesus promised that I would receive power to witness for Him when the Holy Spirit comes (Acts 1:8). To fulfill God’s will in my life to the fullest, I must have the enabling power of the Holy Spirit.

How do I receive? The experience is not earned or merited. As do all other gifts from God, the baptism comes by grace and faith.

But one thing is essential. Known sin must be confessed. At Pentecost, Peter exhorted his questioners to "repent". God gives the Holy Spirit to "Them that obey Him" (Acts 5:32). Associated with repentance is faith. Faith is the condition on which God bestows all His gifts.

Jesus promised to fill those who hunger and thirst after Him (Matthew 5:6) and "to them that ask Him" (Luke 11:13). The word translated "take" here is the same word translated "received" in the passages relating to receiving the Holy Spirit.

Scriptural prerequisites to receiving the Spirit may be covered by four words: saved, obey, ask, and believe.

First, one must be saved. "He shall give you another Comforter...whom the world cannot receive" (John 14:16,17).

Obedience is essential. "And we are his witnesses of these things; and so also is the Holy Spirit, whom God hath given to them that obey Him" (Acts 5:32).

The believer must ask the Father or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Luke 11:13.

As in all spiritual matters, faith is required in receiving the gift of the Holy Spirit (Hebrews 11:6).

How do I know I have received? There must be some evidence of the promised gift or else how ill you know that you have received this Baptism? For an answer let’s settle on some basic assumptions. First, the evidence must be a Bible sign. Second, the sign must be recognizable by both the receiver and others nearby.

For the Bible record of people being baptized in the Spirit we go to the Book of Acts. The fulfillment of John the Baptist’s statement and of Jesus’ promise took place on the Day of Pentecost (Acts 2). The same thing happened on four other occasions in the Acts (chapters 8,9,10,19), at four different places and four different times.

Speaking in tongues was a distinctly Pentecost and post-Pentecost experience. Speaking in tongues was prophesied by Isaiah some 700 years before the Day of Pentecost (Isaiah 28:11,12). Paul links this prophecy directly with the New Testament experience (1 Corinthians 14:21). Jesus Himself foretold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 (Mark 16:17).

The initial physical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speaking in tongues."

We believe that it is the privilege of every believer to receive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to endue them with power for living the Christian life.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 박용규 교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작성합니다. 지난 3월 말 우연히 목사님께서 저에 대해 쓰인 글이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바른믿음>이란 사이트에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글은 제가 한 강의에 대해 정 목사님께서 평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는 사람마다 견해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 그냥 넘어갔습니다.

얼마 지난 후, 어느 목사님이 “정이철 목사님께서 저에 대해 쓰신 글을 살펴보라.”고 조언하셔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살펴보니 저에 대해 목사님께서 3번에 걸쳐 글을 게재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견해차가 있고 나아가 비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책을 출간하거나 논문을 기고할 때 저의 석사박사과정의 학생들이나 동료들에게 읽고 비평적 조언을 비교적 구하고 있습니다. 비판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자처합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의 저에 대한 비판의 글 중에 사실이 아닌 내용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건강한 토론 문화와 논의를 위해서 저는 먼저 이 부분을 분명히 확인하고 진행하려고 합니다. 제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요청하는 것은 단순히 저에 대한 비판이나 평가를 넘어 총신공동체 전체, 예장합동교단 전체를 연결하셔서 글을 쓰셨기 때문에 장고 끝에 이렇게 공개적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제 개인의 문제만 취급하였다면 그냥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정 목사님은 저 개인의 문제를 떠나 총신과 교단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연관하여 질문을 하셨고,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총신의 졸업생들과 전국의 동료 교수들의 명예와도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이 들어 부득이 이렇게 목사님에게 공개적인 질문을 드립니다. 우선 저와 직접 관련이 있는 2가지 문제에 대하여 묻게 되오니, 정 목사님께서 먼저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1. 과연 제가(박용규) 정이철 목사님의 비판이 두려워, 어느 사이트에 연락을 취해 어떤 영상을 내리라고 했다는 말인지 밝혀주기 바랍니다.
 

정 목사님께서 주장하기를 ‘제가 정 목사님의 저에 대한 비판의 글을 보고서 겁이 나서 관련 영상을 게재한 사이트에 연락하여 영상을 내리라고 해서 내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총신의 신학은 개혁신학이 아니고 성경을 겉으로 대충 따르는 현대 복음주의이다. 그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총신신대원에서 오래 동안 교회사를 가르친 박용규 교수이다. 나는 우연히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에 대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이것이 총신의 실상이구나!’하면서 한탄했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박용규 교수의 강의 앞 부분을 녹취하여 간단히 기사 하나를 작성하여 <바른믿음>에 올렸다. 나중에 보니 그 글의 근거가 되는 강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박용규 교수 본인이 손을 써서 없앤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신학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면 정직하게 사과하고 해명하던지, 아니면 반박하던지 해야 할 것이다. 명망있는 교수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컴퓨터에 이미 그 강의 영상이 다운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정이철,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 강의는 총신 죽이는 산당신학,” 바른믿음, 2018년 3월 29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6/(2018년 4월 17일 접속)).
 

누구에게나 의견 차이는 있기 마련이고 또 비판할 수 있다고 하여도, 문제는 그것은 진실과 사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단정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처럼 왜곡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정 목사님의 주장처럼 제가 어느 사이트에 연락해서 무슨 내용을 내리라고 했는지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떤 사이트에 무엇이 게재되었는지 전혀 몰랐고, 정 목사님께서 최근 제 강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그 사이트에 연락해 그것을 내리라고 요청할 수도 없고 그런 일을 한 일이 결코 없습니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진실을 호도하여 마치 제가 정직하지 않은 학자, 교수답지 않게 행동하는 학자로 단죄까지 하는 것은 가뜩이나 윤리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교계 풍토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확인해 본 결과, 정목사님이 언급한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에 대한 인터넷 강의”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CGNTV에서 방영한 ‘박용규 교수의 예루살렘에서 평양까지(총 28편)’ 중 제25편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을 말한 것으로, 이 동영상은 현재 CGNTV 홈페이지에서 언제든지 다시보기가 가능합니다. 박용규, “25편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 박용규 교수의 예루살렘에서 평양까지, CGNTV 홈페이지, 2007년 3월 13일. <http://www.cgntv.net/player/home.cgn?vid=50886&pid=422> (2018년 4월 17일 접속).) 제가 어느 사이트에 연락하여 무슨 내용의 글을 내리라고 요청했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도 언론일 터인데 언론의 기본은 당사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묻는 것이 기본이고, 묻지 않을 정도로 확신이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기본일 터인데, 정 목사님은 지금 그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과연 정이철 목사님의 주장처럼 제가(박용규)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했던가요?
 

정 목사님께서 제가 단지 몇몇 이단만 이단으로 삼고 다른 이단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별 관심도 없는 것처럼 아래와 같이 글을 썼습니다.
 

괜히 개혁신학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유일한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 박용규 교수 같은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 자신들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에서는 절대로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이철, “박용규 교수, 20세기에 방언이 나타나고 더 중요해진다,” 바른믿음, 2018년 4월 8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41> (2018년 4월 17일 접속).)

 

아무리 비판의 자유가 있다고 하여도 허위 사실에 의하여 비판할 자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것도 상대의 인격과 진실을 호도하고 정죄하는 글을 쓸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정 목사님은 어떤 근거로 위의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박용규 교수는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고 용감하게도 단정하는 글을 썼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단에 맞서 총신과 교단과 한국교회를 지키는 일에 교수 사역의 생명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께서는 제가 몇몇 이단 외에는 이단에 대해서도 관심도 없는 신학자로 매도하고 이렇게 단죄까지 하였습니다.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셨는지 그 근거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더 기가 찬 정 목사의 부언은 “자신들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에서는 절대로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날카로운(?) 평가까지 덧붙였습니다.
 

저는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을 왜곡해도 보통 심각한 왜곡이 아닙니다. 정 목사님이 제가 쓴 책들과 활동을 기초적으로 조금만 살폈다고 하여도 이런 허위 사실에 의한 글을 이렇게 용감하게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 간단히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저술한 <한국기독교회사 1-3권>까지 보면 한국교회 안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이단들에 대해서 얼마나 혹독하게 비판을 했는지 간단하게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기독교회사 2권>4장 변천하는 사회, 갈등하는 교회의 ‘3. 교회 내부로부터의 도전: 이단의 전성시대’(205-239쪽) 전체가 이단에 대한 기록이며 여기에는 당시 이단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습니다.

1) 김장호의 조선기독교회 설립

2) 최중진의 자유교

3) 이만집의 자치교

4) 성결교에서 파생된 하나님의 교회

5) 최태용의 복음교회
 

또한 <한국기독교회사 2권>14장 6.25전쟁과 종교 사회적 혼란의 ‘3. 이단의 발흥: 용문산기도원, 통일교, 전도관’은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3개의 이단을 집중 조명하였습니다.
 

1)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2) 문선명의 통일교

3) 박태선의 전도관
 

이단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연구를 진행했고 다양한 이단들을 조명했습니다. 최근 출간한 <한국기독교회사 3권>의 ‘제19장 급부상한 한국교회 이단세력’ 855-915쪽은 전체가 이단에 대한 것입니다.

1. 1960-1980년대 이단들의 급부상: 안식교, 여호와의증인, 몰몬교 외 18개

2. 1980년대 통일교의 기성교회 침투

3. 박태선의 전도관

4. 김기동의 귀신론과 베뢰아 아카데미

5. 깨달음의 종교, 구원파/ 권신찬-유병언계열, 박옥수 계열, 이요한 계열

6. 이장림과 1992년 10월 28일 재림론

7. 류광수의 다락방 전도운동

8. 평강제일교회(구 대성교회) 박윤식

9.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10. 급부상한 신흥이단: 안상홍증인회와 만민중앙교회, 레마선교회, 예수중심교회, 지방교회
 

저는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외에도 통일교, 전도관, 김기동 귀신론, 구원파, 이장림, 시한부재림론, 류광수 다락방, 만민중앙교회, 지방교회, 레마선교회, 이초석 등 수많은 이단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저는 2005년 평강제일교회 문제만 아니라 1996년에 류광수 다락방 문제가 나왔을 때도 총신교수로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고, 여러 이단들에 대해서 이단보고서를 작성해서 이단에 맞섰습니다. 제가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것이 사실이고, 이는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저는 류광수 다락방 외에도 구원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1992년 10월 28일 재림론의 문제점을 <신학지남>에 게재하고, <한국기독교회사>나 <신학지남> <총회 100년사> 등에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을 상술하였습니다. 제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고 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그 근거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불성실 문제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을 비판하기 위하여 거짓된 환경을 설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위 2가지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비판과 비평에 대해 열려 있습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허위사실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위 2가지에 대해 앞으로 5일 안에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에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정 목사님의 글 가운데 한 가지 더 발견한 문제는 “총회에 7명의 교수들의 이름으로 올린 보고서를 제가 작성하고 다른 6명의 교수가 그저 공동서명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거짓입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공동의 글이란 어디에서나 누군가가 초안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위의 글은 그 초안도 복수의 교수가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이 자세히 다 읽고 의견과 추가 사항까지 조언해 주어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앞으로는 제가 작성해서 다른 교수들의 그저 동의만 받은 보고서처럼 주장하는 것은 진실의 왜곡이요 다른 교수들에 대한 명예훼손입니다. “총신신대원 교수 7명의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라고 분명히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점이 있는데, 조금 전 어떤 분이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의 분류 항목 명이 수정된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문제인물’이란 항이 ‘깊은토론’이란 항목 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왜 이렇게 수정했는지도 말씀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문제인물’이라는 항목 안에 유명인사들을 나열하여 강하게 성토하다가 왜 은근히 분류 항목을 수정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인물’과 ‘깊은토론’은 전혀 의미도 주는 이미지도 다릅니다.

혹시 총회 실행위원회와 이단대책위원회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는 점이 부담이 가셨나요? 정 목사님께서 이들 인물들을 문제의 인물이 아니라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입장 수정을 하셨다는 의미인가요? 며칠 사이에 그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놀랄 일입니다. 왜 수정했는지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얼마 전에 정 목사님께서 감리교 웨슬리의 구원관을 행위구원이라고 주장하였다가 사과한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정 목사님의 답변 태도에 따라 제 자신의 문제만 아니라 존경받는 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밝힐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것은 제 개인의 명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장합동과 총신의 명예가 같이 걸려 있고, 이 같은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적인 폭로는 정 목사님이 그렇게 강조하시는 개혁주의 신앙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제 문제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분명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사이트의 글을 바꾸지 마십시오. 은근히 입장을 아무 말도 없이 수정하지 마십시오. 수정할 때는 사과를 하고 수정하든지, 아니면 수정한 이유를 밝히고 수정해야 정론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 목회자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또 글을 올릴 때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께서 제 자신과 총신과 예장합동과 관련하여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셨기 때문에 제 질문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답변해주시기를 정중히 요청합니다.
 

공개적으로 총신문제와 관련하여 저에 대한 글을 정 목사님께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리셨으니 저의 질문에 대한 답신과 근거를 공개적으로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에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토론은 중립적이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을 고려하셔서 <뉴스파워>와 <교회와신앙>에 실리는 저의 공개질문에 대하여 정 목사님은 자신의 <바른믿음>에 밝혀 토론을 진행하기 바랍니다. 답신은 5월 2일부터 7일까지 5일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5월 7일까지 답신해 주시길 바라고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정 목사님, 이렇게 불가불 공개적으로 질문을 드리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 목사님의 사역 위에 주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2018년 5월 2일

부족한 사람, 박용규 드림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역어로서, 이것은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 부른다. 초청한다. 위로한다. 격려한다)에서 온 형용사이다.

종종 명사로사 [변호자], [탄원자], [중보자]를 가리킨다. 랍비 문학에서는 [페라 클레타 (pera qleta')]의 형(形)으로 인용되고, 피고인의 성격에 대하여변호하고, 특히 유리한 증거를 말하기 위해 출정하는 친구를 가리켜 씌어져 있다.

1. 제4복음서의 저자가, 신자들을 강하게 하고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한 이름을 말한다.
2. 영어 paraclete는 희랍어 parakletos를 음역한 것이다(보혜사라는 용어 이 한글로서의 의미는 신자를 보호하여 돕는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의 옆으로 불림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이러한 수동적인 의미('~를 도와 구원해 주기 위해 옆에 서 있는 자'란 뜻)가 그것의 능동적인 외연적 의미와 결합되어서 어떤 사람을 위해 그의 '대언자'(요일 2:1)로서 탄원해 주며,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그 죄의 잘못을 인식시켜 주는 자를 가리키는가 하면, 또한 '상담자'(한글개역, 보혜사; KJV, comforter; RSV, counselor;요 14:16,26, 15:26, 16:7)로서 다른 사람을 권고하고 강건케 하며 위로해 주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용어는 요일 2:1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자기 백성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백성을 중재하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리키고 있다. '의로운 자'(참조. 사 53:11에 나타난 여호와의 종에 대한 묘사)로서 그리스도는 스스로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세우셨다.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거되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비로소 시작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탄원해 주며 하나님을 향해 그들을 대리하는 '대언자'이다. '보혜사'로서 그리스도의 직분은 히브리서에서 주창된 대제사장의 직분과 일치한다(참조. 특히 히 7:25-28) 제4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분은 성령이며 그 직분은 의미상 그리스도의 직분과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령은 그리스도와는 구별된다.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를 가리켜 남성대명사들과 형용사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요 14:16, 또 다른; 14:26, 그가; 16:13, 그가)은 성령이 완전히 인격적인 존재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제4 복음서에 나타난 '보혜사'에 관한 구절들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인격성에 관한 가장 고도로 발전된 사상을 보여 주고 있다. 보혜사는 무엇보다도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는 자이며 여러가지 모양으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자이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요 14:16-17) 그는 믿는 자들을 진리 그 자체(6절)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이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계시자로서 보혜사는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 옆에 임재해 있는 '또 다른 보혜사'(16절)이다. 성령은 내재하는 인격적 현존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든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할 것이다(17,20-24절). 바로 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알려지게 되며 드러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이란 매개를 통하여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돌아온 사실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고 있다(14:18, 16:16; 참조. 20:22). 보혜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계시를 연결짓는 이러한 사상은 요한 신학의 밑바닥을 흐르는 기본적인 것이며 또 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단언되고 있다.

내재하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도래할 것인지의 여부는 그리스도의 들리우심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구원사업이 성취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고 이것이 성취되면 보혜사도 오실 것이다(참조. 7:39). 따라서 보혜사의 도래와 활동은 철저히 미래시제로 언급되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죽으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창조행위로써 제자들 속에 내재하는 성령을 불어넣어 주실 때에만 성취된다(20:22). 그러므로 보혜사의 도래는 예수의 떠남의 전제조건이며, 예수의 육체적 현존이 사라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은 주의 지상적 사역의 기간에는 현존하고 있지 않았던 성령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을 수 있을 것이다(7:39). 바울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제4 복음서에 있어서도 성령의 내재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기본원리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합일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신자들에게까지 확장될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에 의하여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실들과 성령이란 매체를 통한 계속적인 임재가 동시에 암시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은, 즉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그리스도의 행동과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재하시는 보혜사의 활동이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14:26).

제4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이다. 말하자면, 복음서 기자는 교회 내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단지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의 시절에 그를 보았던 사람들이 알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 완전하고 더 적절하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보혜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사실상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 대한 보혜사의 계시가 지닌 전체 내용이다. 따라서 보혜사의 직무는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의 사건들 속에서 단번에 이루신 일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혜사는 기독교인들을 모든 진리에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새로운 이해력을 제공해 주지만 진리 자체는 이미 계시되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참조. 16:13-15). 그리스도에 대한 보혜사의 증거는 보혜사의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즉 보혜사는 자신의 증거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를 깨닫게 하며,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의롭다 하심을 입증해 주며 악마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종적 정죄를 선언한다(16:8-11). 이증거는 사도적 증언의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설교에 영감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할 수 있는 분이 바로 보혜사이다. 보혜사 자신의 증언이기도 한 사도들의 증언은 박해 아래서 행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순교에 직결된다(15:26-16:4).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제4 복음서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즐겨 사용한 주제를 반향하고 있다(참조. 막 13:11, 눅 12:8-12). 3. 요한에게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 용어 '파라클레토스'는 칠십인 역 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성경과 동시대에 저작된 다른 유대교 저작들에서 발견된다. 신약성경 이외에서 이 용어는 가장 일반적으로 '변호자','매개자', '중재자' 즉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타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랍비 자료에 의해서 입증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변호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뚜렷이 의미하고 있는 요일 2:1(한글개역, 대언자)에서 적절히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 이 용어를 그 추리된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만다야교의 '조력자'와 쿰란 사본에서 기술된 대천사 미가엘은 각기 이 보혜사의 모델들로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가장 안전한 길은 복음서 자체를 근거로 보혜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길이다. 분명히 보혜사, 즉 진리의 영(요14:17, 15:26), 또는 성령(14:26)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요 16:7) 영원토록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다(14:16,15:26).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14:17). 그러나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들에게 회상시켜줌으로써 예수를 영광스럽게 한다(14:26, 16:14). 그는 제자들이 예수의 지상적 사역의 기간 동안 깨닫지 못한 예수로부터 나온 진리들을 알려주며, 다가올 일들을 선포한다(16:12-15). 그는 애초부터 예수와 함께 있어왔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증거를 지니고 있듯이(15:27) 예수에 관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15:26). 그는 죄의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논박하고 폭로한다(16:8-11). 사실상 보혜사는 예수의 육체적 현존이 더나고 없는 중에도 예수의 지도력과 권능을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실현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몇가지 이유로 보혜사는 예수를 계승한(요일 2:1)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불린다(14:16). 보혜사의 역할에 대한 복음서의 상세한 묘사는 그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실적 의미를 전달한다. 보혜사는 단순한 희망의 대상이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 내의 생생한 경험과 분리된 기능이 낳은 문학적 추출물로 여겨진다. 복음서 기자는 보혜사의 공동체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해준 기독교 교회 내에서 행사된 예언자적인 직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언자에게 교회들에게 써 보낼 바를(계 1:11) 가르치고 있는(계 1:3,10, 22:6-7,9-10,18-19) 계 2-3장의 일곱 편지들이 요한 신학의 보혜사에 대한 몇가지 평행구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각 서신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말씀이다(1:17-19; 각 서신의 서두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2:1,8,12,18, 3:7,14).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말씀이기도 하다(2:7 등).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요한의 보혜사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비록 계시록과 제4 복음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성령(보혜사)에 대한 그들의 묘사는 몇가지 점들에서 상호보완적이다.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잠긴동산

2. 신자들의 부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 / 머레이 J. 해리스




 부활에 대한 성령의 관계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사실상 바울 서신에 국한하며, 바울 서신에서도 오직 고린도후서에서 그리고 그 후에야 이 관계가 특별한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관련 있는 문절들을 연구하면 우리는 신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성령의 네 가지 기능을 인지할 수 있다.

(1) 성령은 미래의 부활 변화에 대한 보증이시다.

세 개의 바울 문절에서(고후 1:22; 5:5; 엡 1:14) 성령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아라본(arrabon)이라 불리운다. 이 전문 술어는 그리스 상업 용법에서 두가지 기본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 말은 더 지불해야 할 필요가 있으나 문제의 물품에 대하여 법적인 권리를 주는, 구입의 첫 불입금 곧 첫 지불액(a down payment) 또는 보증금(deposit)이었다. 때때로 이 부분적인 지불은 전체의 상당히 큰 부분을 지불하는 것이었으나, 다른 경우들에는 단지 명목상의 보증금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의 다른 의미에 있어서, 아라본은 실제의 지불과는 종류가 다르나 실제의 지불을 의무적인 것이 되게끔 만드는 서약 또는 보증을 표시했다. 바울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아파르케)"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로마서 8:23에 나타나는 상사한 사상을 지적하면서, 많은 주석가들이 전자의 의미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 어구는 단순히 성령이 맺게 하신 처음 익은 열매"(즉 양자됨에서 완성되도록 되어 있는 아들됨의 영, 롬 8:14-16, 23)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라본에 대하여 "첫 지불액"이라는 의미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의미심장하게도, 현대 그리스말에서 "약혼 반지"에 대한 한 가지 말이 아라본 곧 평생의 사랑과 정절에 대한 서약이다. 비록 몇 가지 현대 번역이 두 가지 의미를 다 유지하기를 선호하기는 하지만(예를 들면 MOFFAT. "서약과 불입금"; NIV, "장차 올 것을 보증하는, 보증금"), 우리는 이 술어를 "서약"(pledge) 또는 "보증"(guarantee)으로 번역하는 역본들(WEYMOUTH, GOODSPEED, TCNT, RSV, NASB, NEB)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분명히 이 말의 모든 상업적 뉘앙스들을 다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은 계약상으로 구속력이 있는 계약에 의해 비준을 받는 상호 흥정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데, 하나님은 자발적인 선물로 그의 성령을 신자들에게 수여하신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성령을 반환해야 할 담보물(창 38:17-20 참조) 또는 단순한 사전 견본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기독교인이 받는 유업의 열등한 부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1:22과 5:5을 비교하면 바울에게는 "인치심"이 하나님께서 서약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을 나타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중대한 질문이 남는다. 무엇에 대한 서약으로 주셨단 말인가? 바울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고 진술한다. 여기서 언급한 "(이것을) 이루게 하시고"는 1-4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된 신령한 몸을 받고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을 얻는 것(1절).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2절) 그리고 죽을 몸이 삼킨바 되는 것(4절).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한 확증은 "약속의 성령"을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에베소서 1:13-14에서 온다. 하나님의 성령 선물은 그러므로 약속의 성취일 뿐 아니라(갈 3:14; 엡 1:13) 또한 성취의 약속이기도 하다(고후 5:5; 엡 1:14). 기독교인이 받을 기업의 보증이신 성령께서 또한 그 기업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롬 8:23; 고후 5:2, 4-5).


(2) 성령은 하나님이 미래의 부활 변화를 가져오려고 사용하시게 될 수단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고 신약성경이 어느 곳에서도 분명히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고전 6:14; 참조. 고후 13:4) 또는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엡 1:19-20)으로 돌릴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에 대한 강한 암시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 로마서 8:10-11은 신자들의 부활의 출처를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에서 분명히 찾아낸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죽게 되는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살려주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shall impart life to)." 이 "살리시는 것"(impartation of life)이라는 말을 성령이 가져다 주시는 신자들의 매일 매일의 영적 갱신 또는 강림 때에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의 변화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0절과 11절이 다 생명을 육체적 사망(physical death) 또는 필멸(mortality)과 대조하기 때문에, 산 자의 변화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변화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가 10절에서 11절로 지나갈 때 그 생각의 움직임은 현재의 몸의 필멸에서 변화된 몸의 불멸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장차 이렇게 활기를 돋우실 역할은 갈라디아서 6:8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만일 마치 느낄 수 있는 세계와 그들 자신의 자연적 욕구가 우주에 있는 유일한 실제들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들의 심은 것과 일치하여 그 동일한 "육체"(flesh)에서 썩음과 죽음이라는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특히 신령한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신령한 선생들을 부양함으로써(갈 6:6),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시는 영역인(롬 8:16) 인간의 영을 보강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는 자들은 때가되면(갈 6:9) 그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종적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일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활(갈 6:8)과 부활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에 나타나는 그의 역활(롬 8:11)을 구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리라.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은 죽은 자들 또는 죽기로 작정되어 있는 자들에게 작용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다(롬 8:2, 10; 고후 3:6).


(3) 성령은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


바울이 성령은 "살리신다"(고후 3:6)는 것을 말하거나 그를 "생명"(롬 8:10) 또는 "생명"의 성령(롬 8:2)으로 묘사할 때, 요점은 단 하나이다. 성령의 한 가지 특질, 아마도 주요한 특질은 그가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시며 영구히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그는 중생 때에 신자가 얻은 영적인 생명과 부활로 말미암아 신자가 얻은 새로운 몸의 생명을 끊임없이 유지하심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의 결과는 그의 다시 사신 생명을 공유하는 것임을 우리가 살펴 보았다. 이 생명은 성령이 중재하신다(롬 7:6, "영의 새로운 것으로," 영이 가져 오신 새 생명<the new life brought by the Spirit>).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고"(갈 5:24),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성령으로 산다"(갈 5:25). 디도서 3:5에서 두 가지 별개의 활동을 구원의 수단으로 묘사한다: 중생을 가져오는 씻음, "중생의 물"(NEB); 성령이 가져오시는 새롭게 하심(아나카이노시스). 중생은 단 한번 일어나며 순간적인 것이다. 새롭게 하심은 연속적이며 점진적인 것이다(롬 12:2, 신약성경에서 아나카이노시스를 사용하는 유일한 다른 곳; 고후 4:16 하반절). 오직 성령께서 신자 안에 영적인 생명을 끊임없이 넣어주심으로만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중생" 때에 받은 새로운 부활 생명이 유지된다. 성령으로 마음을 이렇게 새롭게 하는 것(롬 12:2; 엡 4:23)은 성령으로 "속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 또는 새롭게 하는 것(고후 4:16; 엡 3:16)에 상응한다. 


성령께서 신자의 몸의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직접적인 진술도 없으나, 그러나 성령께서 신자의 몸의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는 이 결론은 여러 조각의 증거에서 이끌어낸 그럴듯한 추론으로 보인다. 첫째, 바울이 부활 몸에 관하여 신령한이라는 형용 어구를 사용할 때 그는 부활 몸의 물질적 구성이 아니라 부활체의 조직 원리 또는 규정 원리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신령한 부활체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고 하나님의 영의 통제를 받는 몸,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그 초자연적인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복종하거나 응하는 몸이다. 둘째, 아마도 요한게시록에 나오는 "생명수"(living water) 샘 또는 생명수 강이(7:17; 21:6; 22:1, 17)라는 상징은, 제4복음서에서 물은 성령을 상징하므로(요 4:14; 7:38-39),신령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성령의 영구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가능성은 별문제로 하고도,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성령의 기능이 장차 올 시대가 완전히 이를 때 갑자기 끝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 현 시대에서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이 내세에서도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게 될 것이다. 세째,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한 범례라고 바울이 믿었으므로(빌 3:21),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상태에 해당되었던 것이 기독교인의 부활 상태에 해당되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보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연약하심"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는 지금 "하나님의 능력으로"(고후 13:4) 유지되는 부활 생명 가운데 사신다는 것을 바울은 주목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능력"이 때때로 사실상 성령(the Spirit)과 동의어이다(예를 들면 고전 2:4-5; 롬 8:11과 비교한 고전 6:14을 보라). 만일 성령께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유지하신다면, 그는 또한 신자의 미래의 부활 생명도 유지하실 것이다.


(4) 성령은 신자의 부활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 사이를 연결하는 분이시다


전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생명의 초기 단계는 영적인 생명이 장차 얻게 될 완전함과 결코 혼동되거나 동일시되지 않는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영생을 거두는 것"과 아주 구별된다(갈 6:8). 지금(Now)과 다른 그때(Then)가 있는 것이다. 장차 올 세대(the Age to Come)는 여명이 밝았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이 악한 세대"에서 산다(갈 1:4). 기독교인들에게 지금(the Now)과 그때(the Then)의 연결은 인간론적인(anthropological) 것이 아니라 성령론적인(pneumatological) 것이다.즉 지금과 그때의 연결은 자연적으로 불멸한 영혼의 영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유하심과 활동하심에 있는 것이다.


현 세대에서 또는 두 세대의 겹쳐진 부분에서, 신자들은 주의 영광을 응시하고 또 그다음에 반사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전과정은 성령의 사역(일)이다(고후 3:18; 차조. 엡 3:16). 그 다음에 또 다시 성령의 작인을 통하여(롬 8:11). 하나님이 장차 올 세대에서 신자들 안에 일으키시는 부활 변화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하는 "좋은 일"이 완성된다(롬 8:29; 갈 4:19; 빌 1:6; 3:21). 그 다음에 이 하늘에 속한 몸은 성령의 생명으로 고동치게 될 것이니.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롬 8:10)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의 목표 곧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는 일을 성취하시자마자 성령께서 갑자기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원을 갖고 살도록 그들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지금과 그때 사이의 연속성을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 놀라움을 야기해서는 안된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특징지어지므로(롬 8:2, 10; 고후 3:6). 우리는 죽음이 성령의 사역(일)을 종식시키거나 뒤엎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죽음이 성령의 활동을 더 이상 가릴 수 없고 기독교인을 그의 자선심이 많은 영향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죽음이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롬 8:38-39).


두 세대(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활이 하나의 문절 안에서 넌지시 언급되는 경우가 두 번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바로 이 운명(즉 부활 변화에 대한 경험)을 분비시키셨다"(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very destiny: 한글 개역 성경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시게 하시고"라고 되어 있다-역자 주)라는 말을 읽을 때(고후 5:4 하반절. 5 상반절), "준비시키심"(preparation)은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주시는 것일 수가 있고(고후 5:5 하반절) 또는 성령께서 가져다 주시는 매일 매일의 내적인 갱신(새롭게 하심)일 수가 있다(고후 3:18; 4:16). 어느 쪽이든, 성령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고(엡 3:16) 그래서 신령한 몸의 핵을 형성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실상 기독교인에게, 새롭게 하심의 과정의 끝을 표시하게 될, 절정적 변화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5을 풀어서 말하면: "그런데 그의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 변화를 준비시키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신데, 그는 부활의 행위자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이 최종적인 변화를 가져오시기로 맹세하신 것이다." 그 다음 로마서 8:23이 있다. 창조된 온 우주가 이제까지 해산의 고통으로 신음해 오고 있다는 것을 말한 후에, 바울은 계속하여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아바'라 부르짖게 하는 아들됨의 영(롬 8:14-16)-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롬 8:11)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말한다. 현재 아들됨(sonship)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는 그 동일한 성령께서 종말(the End)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인하여 저 아들됨(sonship)을 인치시게 될 것이다.  



머레이 J. 해리스의 '신약에 나타난 부활'에서 발췌(252-25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6장.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 에드윈 H. 파머

 


성령의 역사를 철저히 알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때 아주 놀랄 것이다. 성령을 중생과 성화와 관련하여서만 생각하곤 했던 사람에게는 그가 창조의 완성자요 일반 은혜의 매개자(媒介者)요 특별계시의 주(主)요 그리스도 교회의 효과적인 건설자임을 깨닫고 나면 다소 놀라울 것이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또한 성령의 또 다른 큰 역사, 곧 우리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에 있어서의 그의 활동을 살피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제 이 위(第二位)요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셨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시고, 알 수 없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편재(遍在)하시다. 때가 차매 그는 자진하여 땅에 와서 인성을 취하사 동시에 하나님이며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되셨다. 그는 완전한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신 점에서 일찍이 땅에 산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

이 커다란 진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필요를 의문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라면 그는 성령이 필요치 아니하리라고 어떤 이들은 거론하였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이신 사실 때문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미미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치우쳐 강조하였거나, 그의 인성을 과소평가함으로 일어나는 오류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성령의 영향은 적다. 삼위일체의 제 이 위는 제 삼 위와 동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성령의 끊임없는 임재가 필요하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므로 그의 인성이 그의 신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인성이 변하여 신성과 융합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이에 대한 아름답고 짧은 규정을 보려면 451년에 주의 깊게 선택된 언어로 쓰여진 칼케돈 신조를 읽으라). 두 성질의 연합은 그의 신성이 인성에다 전능이나 전지 등의 신성을 부여하여 예수께서 참으로 사람되기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만 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인성에로의 전이(轉移)가 일어나 예수께서 한 신성과 한 인성인 대신 두 신성으로 끝나게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예수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히 사람이시어서 그는 아기에서 - 소년 - 성년으로 자랐고, 우리와 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았으며(히 4:15), 자기의 재림의 날과 때를 알지 못하였고(막 13:32), 하나님께로부터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음을 인하여 부르짖으셨다(마 27:46). 그의 두 구별된 성품은 상존(尙存)했다. 그는 동시에 완전히 하나님이었으며 영원하였으나 인간적인 유한성도 함께 가지셨다.

예수께서 완전히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전 생애에 성령의 역사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충분히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 수육(受肉)에서부터 그의 최후 영화(榮化)까지 줄곧 역사하셨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살펴보자.

 


1. 그리스도의 수육(受肉)

 

령은 예수의 인간 생활의 맨 처음 출발인 그의 성육 시에 요구되었다. '수육(受肉)' 또는 '성육(成肉)'이라는 말은 삼위일체의 제 이 위께서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행위를 뜻한다(요 1:14). 이는 마태의 글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라고 한 것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라고 한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으로 된 행위다. 성령이 예수 잉태의 원인이었다. 생명의 씨를 마리아 태(胎)에(신비한 방법으로) 심은 분은 성부도 성자도 더구나 요셉도 아니요 성령이시었다.

 

이는 삼위일체의 다른 위(位)들은 이 성육에 아무런 몫을 하지 아니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조의 문제에서 본 것같이 삼위가 모두 이 세상 만사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적 토대에서 성 삼위의 두 위께서 다른 한 위를 통하여 일하신다고 말함은 타당하다. 예수의 잉태도 그렇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라고 하신 말씀이 증거하듯이 성부는 수육의 공역자(共役者)이시었다. 바꾸어 말하면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인성(여기서는 몸이라 불리다.)을 예비하셨다. 아들도 자신의 수육의 공역자ㅏ였다(육신이 되사). 그는 우리처럼 수동적으로 나지 않으시고 농동적이었다. 그는 즐겨 자원하여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기를 택하셨다. 바울은 이를 드러내어 말하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6, 7)라고 하였다. 요는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성령과 같이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에 참여하셨다.

 

비록 수육이 하나님 삼위 모두의 일이지만 그것은 특별히 성령의 역사였다.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요 그가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실제적인 원인이었다. 누가가 말한 대로 그는 예수의 잉태를 일으킨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이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예수는 아버지나 아들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의미에서 성령이 수육의 원조이며 실제적인 원인이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마 1:18) 따라서 "성령의 아이"라고 불릴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렇다고 성령이 예수의 아버지라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 됨은 존재하게 한 것 이상으로 된다(Fatherhood depends upon more than causing something to be). 그렇지 않으면 소년이 만든 모형 비행기를 소년의 아들이라, 또는 의복을 재봉사의 딸이라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령과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삼위일체의 제 삼 위가 아니요 제 일 위이시다.

 

이 성령에 의한 잉태는 그리스도의 무죄를 확보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고, 이것은 다시 그가 우리 구주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고, 이것은 다시 그가 우리 구주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인 원죄와는 무관하게 하였다. 인간은 그 잉태와 탄생을 통하여 거룩하지 못하고, 간사하고 더러우며, 한가지로 죄인이 된다. 그리스도는 그 잉태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었다(히 7:26). 사람은 죄 중에 잉태하여 출생한다(시 51:5).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룩한 중에 잉태하여 출생하였다.

 

이를 더 상론(詳論)하자면, 각인은 원죄의 두 요소 곧 에덴 동산에서 그 대표로 행한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죄책과 모든 악에 기울어진 부패한 성품을 유전받았다. 이 원죄는 스스로 실제 범행(자범죄: 自犯罪)하기 전에 인류 각자가 출생시부터 공통적으로 유전받은 것이다. 그가 타고난 그 부패한 성품은 하나님께서 개입치 않으시면, 처음엔 무구(無垢)한 듯 보이나 결국 그 추한 모습을 모두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이 이중적인(아담의 죄책과 부패한 성품) 원죄로부터 보전되었다. 마리아가 아니고, 그가 무구히 잉태되었다. 그는 참 사람이요 "모든 일에 우라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고후 5:21),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벧전 2:22),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벧전 1:19) 같았으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히 7:26)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명시하고 있다.

 

이는, 사람은 출생과 함께 적어도 두 가지로 죄인이 되는 데 반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나심으로 인하여 이런 죄에서 무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모든 인류가 받는 아담의 대표적인 죄책을 받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그의 인성은 흠 없고 도덕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리스도의 이 점 없는 순결성은 요셉의 참여 없이 무구히, 그리고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잉태되게 하신 성령의 역사에 의한다.

 

이와 같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그 맨 시초부터 필요하였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필요하였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탄생되기 위함이요, 둘째는 그의 인성이 아담의 죄의 유죄성과 오염에서 보전되어 그가 우리 구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심

 

성령께서는 예수를 모든 형태의 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의 인성에 거룩함의 시여자(施與者)이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선언에 포함되었다. 왜냐면 사람이 죄가 없다면, 그는 완전히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영혼에는 진공 상태가 있을 수 없다. 악의 결여는 거룩함의 현존을 의미한다.

 

성령이 예수의 인성 안에 역사하신 거룩함의 시여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본 것같이 성령이 자연적, 신령적 모든 생명의 주라는 사실의 의미도 포함되었다. 그는 지적, 미적, 도덕적 재능의 시여자다. 이는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성에도 참되다.

 

더구나 요한은 예수께 관하여 말할 때 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고 특별히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분적으로 주시고 충만히 주시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에게는 한량없이 완전히 충만히 주신다. 이는 물론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만 관하여 말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셨음을 뜻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시는 이상으로 그리스도 안에 오사 거하셨다. 사실 예수꼐서 자기 몸을 유대인들이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요 2:19) 하심으로써 자신을 성전에 비하셨을 때 그가 이 내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도 믿어진다.

 

 

3. 그리스도의 성장

 

성령이 인간 예수 안에 한량없이 거하신 것도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에 성장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이는 성경 중 가장 매력적인 기사의 하나이며, 또한 종종 특히 현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모든 공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는 이 성장을 아주 예리하게 드러내어 말하기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고 하였다. 누가는 신체적으로 "아기가 자라며" 또 지적으로 "강하여"졌다고 하는 의미를 포함하여 말한 듯하다. 자라며 강하여짐이 동일한 일, 곧 신체적 생명에 관한 말이라면 중복체(重復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가복음 1:80에서 동일한 말("아기가 자라며...강하여지며") 이 "강하여지며"란 구에 "성령이"가 덧붙여져서 세례 요한에게 사용되었다. 이 성장은 2:52에 의하여도 확증되는데 거기서 누가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예수의 지적, 육적, 영적 생명에 성장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말하여 준다. 그는 아담처럼 어른으로 태어나서 아기인 것처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고 참 아기로 났었다. 그는 보통 아이들처럼 영아기에서 포복기로, 걷고 말하는 유년기로, 자라며 배우는 소년기로 마침내 완전한 성인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했다. 누가복음 2장 한 장에서 누가는 그리스도를 처음 12, 16절에선 "아기(baby)", 다음 17, 40절에선 아이(child), 그리고 43절엔 "아이 - 소년(boy) -", 마지막으로 52절엔 "예수"라 칭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참으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의 인성은, 신성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전지, 전능, 무한 등의 신의 속성을 부여받지 아니하였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는 성경이 명시하듯이 아기로 태어났으며, 위의 40, 52절이 명백히 선언하듯이 지혜가 자라갔다. 그는 영적으로도 자랐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는 실제로 "자라 가며...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시었다. 이 모든 성장이 오직 예수의 인성에만 적용됨을 기억한다면, 이 큰 신비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신성은 항상 완전하시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나 조금도 자랄 필요가 없었다.

 

이 모든 성장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자동적인 성장이 아니었다. 또한 그 모든 온전한 성장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신분과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었으므로 인간으로서의 그가 전지(全知)하였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었다. 이는 예수의 참 인간성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그가 성인으로서 본격적인 사역 중에라도 자신의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막 13:32). 이 영적, 지적 성장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의한다. 이사야는 이것을 예시하며 기록하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곧 예수)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라고 하였다. 요컨대 예수의 인성에 관한 한, 예수 위에 강림하여 그를 어린 아기와 소년으로서 자라며 강해지고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게 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었다. 성장해 가는 소년 예수에게는 성령이 필요하였다.

 

혹시 누가 예수께서 한량없이 성령으로 충만하시면서(요 3:34) 영적으로 자란다는 사실에 의혹을 품는다면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완전한 무죄와 완전한 거룩함 간의 구별과 예수께서 아기로부터 성년으로 자라 갔다는 사실에 있다. 아기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과 거룩함의 모든 성향과 의지를 가졌으나, 단지 그가 유아인 때문에 어른이 하듯이 인성의 지능과 의지를 가지고 행사할 수 없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아기였을 때 자신이 12세였을 때처럼 신학자들과 토론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마음이 윤리적 문제를 이해할 만큼 발달되지 못하였기(발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선악의 선택의 문제에 봉착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는 아기였을 때도 성령이 내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기질은 비록 표현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완전히 거룩하였다. 이 거룩한 성품은 잠재하여 있었고 그 행사(行使)는 그의 마음이 자라고 발달함에 따라서만이 따라올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순종을 배워야 했다(히 5:8). 이는 그가 한 번이라도 불순종하여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 오직 그는 성령께서 그 안에 이미 심으셨으나 그가 아기인 동안 결실치 못하던 선천적인 거룩한 성향을 발달시켜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예수의 잉태와 탄생을 위하여 필요했을 뿐 아니라 성령은 또한 아기와 성숙하여 가는 젊은이로서 전 성장기를 위하여 필요하였음을 본다.

 

 

4.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중보자로서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성별되고 능력을 받은 수세(受洗) 시에 나타난다. 예수께서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함을 입고 자라며 그의 사생활에서 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신 후에도 아직 그는 공생애를 위하여 새로운 면으로 성령이 필요하였다. 그의 거룩한 생활과는 별도로 그는 메시야 -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다.

 

이 성령의 은사는 수세 시에 임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1, 22)라고 쓰여 있다. 이 일 전에는 복음서 아무 곳에서도 예수의 사역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의 탄생과 소년 시절에 관하여 읽을 뿐이다. 그런 후로 우리는 그의 전도와 기사를 행하신 사역에 관하여 듣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받으심에 대한 누가의 기록 직후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었다고 그는 명언(明言)한다(3:23).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수세 시에 성령이 강림하심은 그의 공생애를 위하여 공적으로 자격을 갖추게 할 목적에서였다는 결론을 짓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의 공직을 위함인 줄 의식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위와 같이 세례를 받음과 동시 성령이 그의 위에 강림한 직후 그는 그의 첫 강설을 나사렛에서 하실 때에 본문으로 이사야 61:1 곧 그 선지자의 예언인 "주의 성령이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는 말씀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앉으신 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그때 그로 그의 공적 사역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능력 주시려고 그 위에 오셨던 것이다.

 

성령께서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기사를 행하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이, 예수께서 바리새인과의 갈등 중 한 장면에서 하신 말씀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에서 나타난다. 그리고서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성령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 하므로 이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를 범하는 것임을 경고하셨다. 그 이적들이 예수를 통하여 이뤄졌지만 참으로 그 시행자는 성령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여러 번 이적을 행하셨을 때 아버지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사람으로서의 그가 성 삼위의 제 이 위(신으로서의)로부터 초자연적 능력을 받은 때문도 아니요, 오직 성령이 그에게 그렇게 할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사도행전 10:38의 베드로의 말 -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꼐하셨음이라." 함도 이 진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세례받으심과 전도와 이적 행하심은 그가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고 성령에 의하여 권능을 받고 자격을 구비하여 그의 공직에 들어갔음을 보여 준다.

 

 

5.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위대한 역사의 또 하나는 예수의 시험과 관련하여 니타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와 지도 하에 일어났다.

수세(受洗) 직후 그가 시험받으려 하셨을 때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 세례받을 때의 성령 강림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또한 복음서들은 "성령에 이끌리어...광야로 가사" 시험받았다고 하였다. 마태와 마가는 광야"로(into)"라 말하는 데 반하여 누가는 특별히 광야"에서(in)"라 말하며 동사의 시상은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요 일정 기간을 표시하는 미완료형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성령이 그리스도를 광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거기 머무신 동안 성령이 그와 함께하사 인도하고 시험에 승리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그것들이 다 끝나자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돌아가시니"(눅 4:14)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험받는 시초부터 끝까지 온 기간이 성령의 지배 하에 있었고 예수의 인성이 자기 앞에 놓인 격심한 시험을 이길 힘을 받은 것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았다. 이는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에 신의 성질을 흡입시켜 그가 사탄의 시험과 모든 악의 세력을 저항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는 그 이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악을 물리칠 수 있기 위하여 성령의 내주를 굳게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시험 기간뿐 아니라 그의 전 사역의 모든 시험 전체에 성령이 필요하였다고 생각함이 완전할 것이다. 이 첫 시험이 있은 후 사단은 그를 다만 "얼마 동안"(눅 4:13)만 그를 떠났던 것이다.

 


6.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 놀라운 성령은 그리스도의 잉태 시로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줄곧 역사하셨다. 히브리 9:14은 이를 말하여,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공은 예수의 외적 죽음 곧 그가 숨을 거둔 표면의 행위에만 있지 않고 그가 죽으신 내적 태도에 있다. 하나님은 항상 마음과 표면성 행위 간의 정당한 관계를 요구하신다. 그의 뜻에 겉으로만 순종함을 기뻐하시지 않고 반드시 영혼 안에 상응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그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거나 겉만 깨끗한 그릇을 돌아보시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태도를 요구하신다. 만일 예수께서 마음에 없이 - 침울하게, 억지로, 극기심으로, 단순히 필요상 십자가에 나아가셨거나, 즐거이 온전하고 뜨거운 열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신뢰심을 가지고 행하지 아니하셨던들 아무 속죄도 이뤄지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나는 십자가를 지기 싫다. 원치 않으나 의무니까 해야겠다."고 하셨다면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아무런 의도 효용을 발휘치 못하였을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에는 구원에 필요한 수동적 및 능동적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예수께서는 온전한 희생을 드렸다. 그는 그 결과를 알면서, 그러나 기꺼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랑과 신뢰와 복종으로 죽음에 나아갔다. 그의 태도는 온전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서 9:14에,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함과 같이, 이 모두는 성령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그 완전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하신 분은 곧 성령이었다. 그분 없이는 예수께서 구속의 사역을 감당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완전한 태도로 십자가에 나아갔고 그로써 우리를 위한 구속을 이루셨다.

 

 

7. 그의 부활하심

 

성령의 역사는 예수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부활에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버지께 돌려지고(행 2:24), 때로는 아들에게 돌려지지만 성경은 특별한 의미로 성령께 돌린다. 바울은 로마서 8:11에,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기록하였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하셨다는 것은 그의 일반적인 생명을 주는 활동 곧 아담에게 생명을 주거나 오늘날 새 생명을 내거나 중생에서 신령한 생명을 허락하는 일들과 일치한다.

 

 

8. 그의 영화(榮化)

 

그리스도의 생에 있어서 성령의 마지막 행위는 어느 특정한 본문에서 증시(證示)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많은 곳에서 연역적(演繹的)으로 나타내고 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聖化)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가 모든 순결한 종교적 생명-무죄 상태의 아담 같은 생명들의 근원임을 추론한다. 구원받은 자 안에 영원히, 하늘에서까지 거하실 분이 성령이시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의 부활에까지 계속하신 성령께서 그가 모든 성도 안에 거하시듯, 또한 영화롭게 되신(榮化) 그의 인성 안에 거하실 것은 확실하다.

 

 

결론

 

결론으로 강조할 것 셋이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생애의 모든 면에 있어서 그의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어도 인성으로서의 인간 되심을 그치고 사신 것이 아니다. 즉, 인성을 신성화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인성으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참 인성을 부인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 육체(인성)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적그리스도의 영이다(요일 4:2, 3) - 편집자 주]. 오히려 예수께서는 항상 완전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러하시다.

 

이것은 그 신성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불필요하게 하지 아니하였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서가 아니요 사람으로서 예수는 우리가 여러 번 본 것같이 성령이 필요하였다. 사람으로서 그는 탄생 시에 죄에서 지켜지기 위하여 그가 필요하였고, 청년 시엔 거룩함과 순종과지혜를 주실 분으로, 또 수세 시에는 메시야적 직임을 위해 그로 구비하기 위하여, 시험 시에는 악을 대적할 힘을 위하여, 죽음에서는 온전한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필요하였다. 그때마다 성경은 성령이 그리스도를 도우셨다고 말해 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령을 필요로 하셨음을 부인함은 곧 예수의 참 인간성에다 그 인성이 갖지도 아니한 신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그 인성을 손상시킴이 된다.

 

둘째로, 무구(無垢)히 잉태되어 그 죄책이나 부패에 걸쳐 원죄의 흠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 예수께서도 성령을 의지하였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성령이 필요하랴! 우리는 신성과 연합되지 아니하였고, 본질상 전적으로 타락하여 모든 악에 기울이고 있다. 예수의 행사와는 반대로 중생한 후에도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며 이로써 우리 안에 그의 임재를 손감(損減)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 내주의 충만을 위하여 한층 더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만일 예수께서 소년 시에 그에게 개인적인 거룩함과 지혜를 주사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게 하실 성령이 필요하였다면 본질상 죄악적인 우리 어린 것들이 영적으로 아름답게 자라고 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워 가려면 얼마나 성령이 필요하랴! 만일 하나님이시요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성인(成人)으로서 그의 전도를 위하여 성령의 세례를 요했다면 오늘날 죄 있는 복음의 전도자들이 그들의 전도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기 위하여 그들의 생에 성령이 얼마나 더욱 필요하랴! 그리스도께서 그 시험 중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거늘, 우리가 우리 생명 안에 더 성령의 충만하심을 구하지 않고 어찌 죄에 대해 승리하기를 기대할 수 있으랴!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싫은 마음 없이 기꺼이 순종하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으니, 우리가 무엇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즐거이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욱 성령이 필요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항상 조심하여 지키면서 또한 우리의 삶에서 그가 우리의 모범도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그가 우리에게, 성령이 충만한 생애로써 거룩함과 죄에 대한 승리의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우리 생에 적용시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구속 그 자체의 성취에서부터 그가 활동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할 수 없었다.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그는 그의 잉태와 출생 시에, 그가 자라날 때, 그의 공직 사역에 임하여 세례받을 때 성령이 필요하였다. 그의 수태로부터 영화롭게 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성령께 구속의 공로를 중생과 성화로써 우리 생명 안에 적용하심을 인하여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 자체를 이루심을 인하여도 찬송을 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07-126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제 1장. 성령과 삼위일체(三位一體) / 에드윈 H. 파머


이 책에서는 주로 성령의 다각적인 역사(役事)를 생각하고자 한다. 그러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이 첫 장은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하여 진술하되 성령에 관하여 네 가지 명제로 고찰한다.


1.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리스도인이시라면 성령을 한 인격으로 믿는다. 교회의 초대로부터 오늘의 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양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다한, 소위 기독교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성령을 "그분"이라 하지 않고 "그것"이라 한다. 그들은 그분을 제 삼 위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에게서 몇 가지 구원의 큰 축복들을 빼앗는다. 더구나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령이 인격이심을 보여 준다.

첫째로, 성경은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와 의지와 감정이 그에게 있음을 가르친다. 비인격적인 사물은 이런 성질들을 갖지 못하나 하나님의 영은 가지신다. 바울은 성렁께서 사고력을 가졌음을 전제한다(이하 모든 성경 인용은 '개역 개정판' 성경임).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 11) 여기서 바울은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이 가질 수 없고 인격만이 가지는 지식이 성령께 있음을 밝힌다. 성경도 또한 성령께서 의지의 인격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비두니아로 가려 했을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다(행 16:7). 또 성령께서 많은 선물들을 신자에게 주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또한 성령은 인격이시므로 감정을 가지셨다. 이를테면, 에베소서 4:30은 성령께서 슬픔을 가지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명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또한 로마서 8:26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둘째로, 성경은 성령을 다른 인격들과 병치(竝置)시킴으로 그가 인격이심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인격이심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을 때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꼭 같이 인격이심을 지적하셨다. 야고보도 초대 교회에 어떤 지시를 내리면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28)라고 썼다. 성령께서 자기나 사도들과 같은 생각을 하실 수 있는 인격이라고 생각한 것이 명백하다.

 

더욱이 성령께서 비인격적인 세력뿐이라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성령의 권능으로"(눅 4:14) 갈릴리에 돌아가셨다고 말함은 무의미한 말의 중복일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하랴! 오직 그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성경을 영감(靈感)하시며, 우리로 깨닫도록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도하시며, 기도를 인도하시고, 우리 가운데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을 맡기신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불손하게 대하거나, 그를 대적하거나, 멸시, 훼방 등으로 그를 불쾌하게, 또는 슬프게 한다면 우리 자신이 해(害)를 자취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아무쪼록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지 말고 오히려 믿고 그 사실에서 오는 축복들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한 인격으로는 믿되 그를 한 피조된 인격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이 비인격적인 "그것"이 아닌 것은 알면서도 성부보다 낮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특성뿐 아니라 신성도 겸비했음을 보여 준다. 이 신적 속성은 곧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표(標)가 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사 창조(창 1:2)와 섭리(시 104:30)와 예수의 초자연적인 잉태(눅 1:35)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그는 또한 전지(全知)하시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질문함으로 그것을 암시하였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13,14) 사도 바울도 그것을 우리로 믿게 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나아가 성령의 편재성(遍在性)을 말할 수 있다. 시편 기자(다윗)는 웅변적으로 이르기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하여 그가 하늘에 오르거나, 음부로 내려가거나, 바다로 피하거나, 밤의 흑암 중에 숨는다 해도 곳곳마다 성령(주의 영)이 거기 계셔 결코 그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그는 말한다. 성령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령은 신도들 안에 거하며, 많은 신도들은 각자 안에 그의 임재를 제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히브리서 9:1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이것은 성자와 동역(同役)하신 성령께서 영원한 신성을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이, "성령이 말씀하시기를"과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어구를 섞바꾸어 쓰는 사실도 성령의 신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다.

 

끝으로, 대사명 위임 시(大使命委任時, 마 28:19)와 사도의 축도(고후 13:13)에서와 같이 성부, 성자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을 병기(竝記)한 사실은, 성령께서 다른 양위(兩位)와 동등한 자리에 위치하여 그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피조물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그처럼 긴밀히 연합된 표현으로 한데 묶는다면 도무지 조리가 맞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신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창조의 아름다운 역사와 영감의 권위 있는 일과 그리고 각 사람 마음속을 조명하는 일들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타락을 극복하여 중생시키고,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지 못하였으리라. 그가 유한자(有限者)가 아니고 하나님의 한 위(位)이신 사실을 고마워함이 마땅하다.

 

3.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별된 하나님의 한 위(位)이시다

 

교회 역사상에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믿으나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각이(各異)한 삼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3세기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 때에는 성부로서, 그 후 역사상에는 성자로서, 마지막에는 성령으로서 나타나신 분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처음엔 성부로, 다음엔 성자로, 세 번째로는 성령으로 불려지는 셈이다. 즉, 성부가 성자로 변하고, 다시 성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다 성경의 계시에서 이탈된다. 어떤 성경 본문은 한 하나님의 단순한 변모가 아니라 각이한 삼위의 존재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때를 예로 들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와 동시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와 예수님 머리 위에 앉았다고 했으니(마 3:16-17), 이들 삼위의 동시 현현(顯現)은 하나님을 단순히 단일(單一)하다고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33도 하나님의 삼위 간에 분명한 구별을 짓는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한 위가 아니고 삼위이심은 확실히 우리에겐 축복된 일이다. 그것은 풍성한 삼위일체가 되시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전능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생명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4. 성령은 성부와 상자로부터 나오신다(發出, 發生)

 

삼위일체의 삼위 간에는 일정한 관계와 차서(次序)가 있다. 이 삼위가 똑같이 하나이시라고 해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녔고 서로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제 일 위와 제 이 위 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영원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셨다. 성령이 아들을 낳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과 다른 두 위 간에도 일정한 관계가 있으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하나님의 영의 나오심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경에서 이 말을 설명해 주지 않으므로 여기에 성경 말씀을 되풀이할 뿐 그 이상 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가 성령을 낳으셨다거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낳으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교부들이 암시하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형제이거나 성부의 손자가 되는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에 관하여 조심성 있게 '낳다'라는 용어를 피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信經)은 이에 대해, 성령은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고 누가 그를 낳은 것도 아니고 다만 나오신다."고 표현하였다. 이 '나오신다'란 말은 예수께서 사용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의 이름이 또한 이 삼위 간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를 준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보여 주며, 아들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의미 하듯이 성령이라는 이름도 다른 두 위(位)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시하고 있으니 곧 영(靈)이라는 그 이름은 불어넣었다(spirited or breathed)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령이 비록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며 혹은 그로부터 불어넣어졌다 할지라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해도 그 두 위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없음은 마치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시 2:7, 행 13:33)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이 아니라 할 수 없음과 같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영원히 낳음을 입은 것같이 성령도 영원히 불어넣어졌다는 사실에 신비가 있다. 그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셨다.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또는 '불어넣어졌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보다 낮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삼위의 다른 두 위와 영원히 유지하는 관계를 표시할 따름이다.

 

또한 성령이 다만 성부께로부터만 나오지 않고, 성부, 성자 두 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성부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15:16에서 분명하거니와,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것은 그처럼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을 세상에 보내사 제자들 위에 불어넣었다('숨을 내쉬며')고 하는 이런 구절들(요 15:26, 16:7, 20:22)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한 번 불어넣는 것은 영원히 불어넣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들이 삼위 내의 관계에서도 가지는 일정한 권위를 반영한다. 그 위에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 불려질 뿐 아니라 "아들의 영"(빌 1:19)으로도 불려진다. 이러한 성령의 다른 두 분과의 관계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제일, 제 이 위가 아니고 제 삼 위로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으니 맨 처음이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낳음을 입었으니 제 이 위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니 제 삼 위이시다.

이 삼위일체의 차서는 역사 가운데 나타나서, 처음 두 위가 연속하여 전면에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현저하게 되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세상에서 더 뚜렷하였던 분은 아버지시다. 창조에서 주된 영광을 받으신 분이나,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주로 관계한 분도 그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자 아버지는 그처럼 현저히는 나타나시지 않으셨고, 성령은 아직 충만히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만 더욱 뚜렷한 역할을 담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시고 승천하시자, 삼위일체의 제 삼 위께서 더 뚜렷이 등장하셨다. 이와 같이 삼위께서는 삼위일체 안에 일정한 차서가 있어서 그 차서는 역사 가운데 현시되어 각 위는 바로 삼위일체 내에 발견되는 차서대로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려 나오기(breathed out) 때문에 오순절에 교회 위에 불려 나온(임재하신) 분도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성령이었다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중 제 이 위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땅에서 성육하신 아들이어야 하는 사실과 상응한다. 같은 모양으로, 삼위일체의 제 일 위가 삼위일체 중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또한 믿는 자들의 아버지시다.

 

이상은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몇 가지 면에서 고찰한 것인데, 비록 우리가 이것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계시한 것을 무시하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가 교회를 인도하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과 다른 두 위와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진다는 교리의 실제적인 결과는 광범위하다. 1054년 기독교 세계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나뉘었다. 비록 저변의 요소가 많았으나 서방 교회들이 톨레도(Toledo) 회의(589년)에서와 같이, 성령은 아버지 "와 아들(filioque)"=("and the sun") - 이는 논쟁의 소지가 있는 용어 - 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는 반면에 동방 신자들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믿었던 것은 실족케 하는 걸림돌이었다. 이 차이의 결과로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서 분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교리는 거대한 실제적 효과를 발휘하여 만약 1500년 전 교부들이 이것을 작성치 아니하였던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주시는 지식을 감사해야 한다.

 

더욱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filioque(and the sun)"의 부정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예수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게 되며, 성령의 성화의 일만 내세우고, 예수의 구속은 뒷전으로 돌리게 되며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경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성화가 칭의보다, 성령과의 주관적인 교통이 객관적 교회 생활보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이 성경보다 더 중요시될 우려가 있다. 카이퍼는 이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동방 교회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옴을 부인하는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회의와 대회에서 행해지는 긴 신학적 토의가 때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 토론이 언어상의 문제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 결론들은 위로부터 아래 대열에까지 배어든다. 우리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분이라는 고마운 계시에 감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관념적인 지식만으로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위에 성령과 그의 사역을, 체험을 통하여 알도록 힘써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 장(章)과 다음 장들이 씌어졌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9-30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제2장 성령과 창조 / 에드윈 H. 파머


성령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항상 실제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욕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의 위대함을 인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증진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이루도록 하려면 오직 성령을 그 모든 행하심에 있어서 분명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이 성령은 누구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혼미(昏迷)할 때, 우리는 성령을 완전히 영화롭게 할 수 없으며, 우리 안에서의 그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의 역사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역사를 신도들의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흔히 우리의 좁은 생각에서, 구원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로 생각함으로 인해 인간의 죄, 영원한 정죄 및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필요성, 이렇게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게 그칠 때,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주로 인간 중심이어서 거의 구원이나, 기도, 성경 읽기, 안식일과 기도회에 관한 일들에만 관심을 두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입장을 취한다면 자연히 인간과 자신의 신앙 체험의 관점에서 성령을 생각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 성령의 행하심도 그것에 국한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인간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시적하였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다. 성경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영원에서 영원까지 또한 주일과 주일 사이 엿새에까지도 그를 등장시킨다. 그는 인생의 어느 한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만물 위에, 절대적으로 만물 위에 곧 우주 안에서 절대적인 통치자이다. 이에 따라 성령의 역사도 유독 성화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는 세상의 창조와 섭리, 계시, 성육, 대속, 성화, 그리고 심판 날까지의 사건들에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참여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성령의 중생과 성화에서의 역사에만 우리 생각을 국한시키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그것은 성령의 성화의 사역만을 논구(論究)함이 아니요, 그의 전반적인 역사를 논구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창조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의 역사(役事)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의 각 위는 독자적인 기능과 역사를 수행하신다. 예를 들면, 창조에 관해서는 아들이나 성령이 아니고 주로 아버지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외치심으로 스스로를 아버지와 구별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성화나 우리 안에서의 구원의 사역에 관하여 생각할 때는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주로 성령을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신자 안에 거하시는 분이다. 사실상 이러한 구별을 소홀히 한 때문에 어떤 이는 근심 걱정을 가지고 위로받기 위하여 보혜사이신 성령께 갈 줄을 모르고 아버지나 아들을 찾아간다. 동시에 삼위를 분리해서 생각지 않아야 되는 데도 일리가 있다. 우리는 주로 아버지를 창조주로 생각하지만 삼위의 근본적, 필연적 일체성 때문에 역시 아들과 성령께서도 창조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아들임은 자명하나 어느 의미로는 아버지도 거기 함께 계셨다고 할 수 있으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예수께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는 분이 성령이심을 주장함도 충분히 성경적이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에게 관하여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 14:23)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사실들은 삼위께서 각기 구별되시면서 또한 셋이 하나인 근본적인 일체성이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단순한 이유로 참(to be true)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특히 창조에 관한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삼위 간의 근본적인 통일성의 균형을, 우리가 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 균형을 우리 눈앞에 항상 유지해 둬야 한다. 우리는 삼위께서 각기 온전히 홀로 행동할 수 있는 듯이 분리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단지 성경대로 그 각각의 특성과 사역을 살펴볼 수는 있겠다. 대체로 성경은, 삼위일체의 역사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르름을 보여 준다. 아버지는 창안하시고, 아들은 집행하시고, 성령은 완수하신다. 예를 들면- 구속(救贖)의 경우,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요 3:16) 분은 하나님이시다. 에베소서 1:3-5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성경은, 선택의 사랑은 아들이나 성령으로부터가 아니고 "아버지께로부터"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구속을 이루신 분은 아들이시다.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고 아들이었다. 이와 같이 구속은 "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구속을 성도들의 생명에 적용하고 완수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구속은 "성령에 이르러" 완성된다. 그래서 구속의 사역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구속에서 보는 바와 같은 구별을 창조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창조된 우주도 아버지로부터,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성경은 삼위일체의 각 위께서 창조의 역사에 동일한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셨음을 가리킨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고전 8:6)라 했다. 만물의 존재가 아버지 "에게서"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아"인 점에 주목할지니 아버지는 만물의 근원이요, 아들은 이 재료를 사용하여 세상을 구성하였음을 뜻한다. 로마서 11:36엔 비슷한 모양으로 세 개의 다른 전치사를 사용하여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하였고, 히브리서 1:1-2도 같은 조(調)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1장과 골로새 1장에도 세상은 "아들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창조되었음을 말했다. 이 외에 성경은,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완성시키시는 분임을 언급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저서 [성령]에서, 우주 창조를 왕국 건축에 비유하여 왕은 궁전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고 청부인은 실지로 건물 짓는 일을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즉, 창조에서 아버지는 왕처럼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해 내는 만물의 근원이며, 아들은 그 청부인같이 그 재료로써 구성하시고, 성령은 아들이 성취해 놓은 것에 더 손을 보아, 그 잠세력(潛勢力)을 끌어내고 제 성질에 따라 발전하도록 함으로 완성시키신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이상의 모든 것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삼위 간의 통일성이 그 저변에 있음을 기억하고 각각의 활동을 분리시키지 말아서 어떤 의미로는 삼위 모두가 동시에 구속과 창조에 활동하셨다고 해야 한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적 계시가 허락하는 한에서 우리는 삼위의 역사에 관한 이해와 기술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2.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

 

우리의 사고(思考)를 위한 배경으로서 이만큼 삼위 간의 구별을 가지고서, 우리는 이제 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성경이 더욱 직접적으로 말하는 바를 살피기로 하자. 적어도 이 역사의 다섯 가지 다른 면을 얘기할 수 있다.

 

(1)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

 

성령의 역사가 무(無)에서 세상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그의 역사는 그 후에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1,2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즉, 무로부터의 우주 창조가 있은 후에야 성령께서 활동하셨음을 말한다. 이는 아버지께서 삼위일체 안에서도 아들과 성령의 "근원과 원천"이시며, 또한 무에서 물질적 우주를 창조하시므로, 그 "근원과 원천"이심을, 그리고 그 후에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여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일정한 질서를 수립하셨음을 뜻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고, 곧 알게 되겠지만 다만 세상에 이미 있던 잠세력(潛勢力)을 끌어내었고, 생명의 씨와 유아(幼芽)를 심었다.

 

(2) 시편 33:6과 욥기 26:13

 

성령의 완성하시는 일을 이번에는 하늘의 단장(丹粧)에 있어서 달리 가리킨다. 시편 저자는 33:6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말한다. 앞 장에서 본 것같이 영은 숨을 뜻하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리어져 나왔다(발생). 그러므로 이 시편의 입 기운은 성령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곧 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시고 성령은 하늘의 만군(萬軍),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지으셨음을 뜻한다. 욥기 26:13은 성령께서 만군을 창조하셨다고 꼭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입김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여기 '단장'은 개역 성경대로임-편집자 주)라고 했으니 '단장하다'는 '곱게 하다', '빛나게 하다', '아름답게 하다'는 뜻이므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하늘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모는 바와 같은 성좌(星座), 은하(銀河), 햇빛을 반사하는 유성(遊星), 여러 가지 별빛, 달의 그 크고 그 빛의 불변함, 그리고 빛나는 햇빛을 아름답게 꾸미었음을 우리는 추론할 수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 1:2이 성령께서 이미 창조된 세상을 완성시켰음을 시사한 것같이 여기에서 성령께서 하늘에 마지막 가필(加筆)을 던져 천체군(天體群)에 가능했던 온 영광과 미(美)를 이끌어 냈음을 엿볼 수 있다.

 

(3) 시 104편[A]

 

이 시편에서는 성령의 창조 활동의 또 다른 면, 곧 새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한 이 아름다운 시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하나님께 돌리며 그가 만물을 통어(通御)하시고 만물은 그에게 의존한다고 선언한다. 들나귀는 하나님이 만드신 샘에서 목을 축이고, 가축은 하나님이 자라게 한 풀을 먹으며, 새들은 하나님이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에 깃들며, 포효하는 사자가 그에게 먹이를 구하며 심지어 바다의 악어까지도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기를 기다린다. 크고 작은 모든 짐승과 생물들이 그들의 생존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이 시인은 2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요, 더 구체적으로는 성령이시니 이 시인은 30절에 이렇게 계속한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모든 동물 곧 잣나무의 황새들, 산의 산양들, 대해의 악어들 및 수많은 어류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성령임을 지시한다.

그래서 성령은 창세기 1장과 욥기 26:13에서 본 바와 일치하게 성령의 창조 활동을 무에서 무엇을 창조하는 방향에서가 아니고, 이미 창조된 것에 생명을 나눠 주는 데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4) 시 104편 [B]

초목까지도 그 생명을 성령에게서 얻음을 암시한다. 방금 인용하였던 30절을 다시 살펴보자.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 끝마디에서 땅을 새롭게 하는 분이 성령이심을 분명히 말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주의 영(성령)이라고 언급된 본 절의 첫마디와 이 끝마디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곧 알게 되겠지만, 그가 사람에게와 또 동물에게 생명을 주시며 또한 대체로 그의 역사가 창안자의 일이 아니라, 완성자로서의 일인 것들로 보아 땅을 새롭게 하는 분도 역시 성령이시라고 추론하여도 안전한 듯하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는, 비록 인간의 타락 후 모든 창조물에 죽음의 씨가 거기 깃들어 있어 초목이나 짐승이나 사람은 결국 다 죽는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성령의 계속적인 창조 활동에 의하여 이 파멸과 죽음의 과정이 제지되고 대신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는 새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명을 줄 뿐 아니라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함으로써 땅을 새롭게 하신다. 생명을 지닌 씨앗은 제철을 따라 자라게 만들어졌으니 겨울의 죽은 것 같음이 지나면 새 생명이 싹터서 땅은 새롭게 된다. 이로 보건대, 초목의 생명까지도 창세 때나 지금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출되고 있다.

(5) 성령의 창조 역사의 절정(絶頂)

예나 이제나 인간의 창조 역사가 성령의 창조 역사의 절정이다. 엘리후의 말은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물론 기운은 성령의 다른 호칭이니, 이 절은 인간 창조에서 성령의 이름을 두 번 지명하고 있다. 성령의 독특한 창조적 기능은 생명을 주는 것인 듯하며, 그가 반드시 질료(質料)를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흙을 취하여 그 속에 생명의 기식(氣息)을 불어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창세기 2:7의 인간 창조에 관한 기사를 주목하면 흥미롭다. 사람의 창조를 "하나님이...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말로 묘사하여 생기를 불어넣다는 말들을 사용하였는데 전자(생기)는 성령의 이름이요, 후자(불어넣음)는 그를 포함하였다. 욥기 33:4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분은 삼위일체의 제삼위임을 분명히 진술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창세기 2:7도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주시는 분은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분명한 암시를 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람으로서 창조하는 책임을 진 분은 성령이시다. 사람은 단순히 동물이 된 것이 아니요, 산 영혼(생령)이 되었다. 성령은 사람에게 그의 이성적, 도덕적 존재됨을 허락하셨다. 사람이 마음과 의지와 정서를 가지도록 그를 만드신 분이 그분이다. 욥기 32:8은 이것을 일부분 확증한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그리고 인간을 선하고, 정직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분이 또한 성령이시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창조 역사의 다섯 가지 현저한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비록 우리가 삼위일체의 그 일체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되지만, 그러나 각 위(位)에게 성경이 돌리는 독특한 기능을 돌릴 수 있고 또 돌려야 한다. 추운 겨울 밤, 우리가 캄캄한 하늘에 항상 낯익은 북두칠성, 힘센 사냥꾼인 빛나는 오리온 성좌, 또 가냘픈 묘성, 빨간 방랑자 화성이나 북십자성, 허연 은하수를 볼 때는 하늘을 단장시킨 성령을 찬양하자! 봄이 와서 밀이 싹트고 오랑캐꽃 피고, 산딸기나무 꽃이 필 때에는 지면을 새롭게 하시는 이가 성령임을 기억하자. 농어를 잡고 들에 뛰노는 사슴을 볼 때, 또 빨간 대머리의 딱따구리를 지켜볼 때는 시 104:29, 30을 기억하라.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엄마, 아빠로서 내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흥분 속에 듣게 될 때 앞에 언급한 엘리후의 말을 상기하라.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영)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이런 것들은 성령의 활동의 결과이다. 그러니 이들을 인하여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3. 재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

 

여기 또한 빠뜨려서는 안 될 성령의 마지막 창조 활동이 있으니 그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의 그의 재창조의 역사이다. 이는 다음 장들에서 더 충분히 논하겠지만 창조에 관한 성령의 역사의 전반적 묘사를 위하여 여기에 말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성령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또한 그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지식을 주셨으나 인간은 자유 의지의 남용(불순종)으로 그의 본래의 올바른 높은 신분에서 떨어졌다. 그는 영적으로 훼손되고, 흠이 나고, 상하고 찢기고, 필경 죽게 되었다. 그는 참 지식과 거룩한 성향을 상실했다. 성령께서 그를 지어 주신 원래의 형상은 이미 파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 버려두지 아니하셨다. 애당초 인간을 의롭고 거룩하게 만든 그분, 성령으로 하여금 사람을 재창조하셨다. 성령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다(고후 5:17). 그가 사람을 새로 만드시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로 지으셨다. 그가 인간 속에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시고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입은(엡 4:24, 골 3:10) 새 사람을 심음으로써 그를 새롭게 하셨다.

 

성령에 의한 인간의 처음 창조와 이 재창조 사이의 유사성(類似性)을 주목하라. 성령은 아담에게 흠 없는 의를 주셨다. 그와 같이 재창조에 있어서도 성령은 인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아담의 의보다 더 좋다. 아담의 것은 잃어버릴 수 있었고, 실제로 잃어버린 데 비하여, 이것은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 창조에서 성령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거룩하게 만든 것같이 두 번째 창조에서도 성령은 인간을 중생과 성화에 의하여 인격적으로 거룩하게 지으신다.

 

또 주목할 것은 세상의 창조에 있어서, 성령께서 무에서 창조해 내지 않고 혼돈하고, 공허하며, 생명이 없고 정체한 흑암의 땅에 "수면에 운행하심"으로 생명과 질서와 미를 부여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에 있어서도, 죄 많은 인간을 멸하고서 무에서 새 사람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전혀 새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창조에서처럼, 이미 존재하는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것을 취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령한 생명을 나눠 줌으로, 사람의 그 영혼 안에 새 성향을 주어 그로 처음 창조 시와 같이 거룩하고 의롭고 진리로 충만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창조 시에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산 영(생령)이 된 것같이 또한 재창조에서도, 성령께서 그 생기를 그리스도의 교회 위에 불어넣음으로 사람이 영적으로 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성령의 창조의 역사는 영육(靈肉) 양 영역에 걸쳐 포괄적이다. 그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창조 시에 시작해서 인간의 재창조까지 포함하여 오늘까지 계속된다. 이 책의 목적은 성령께서 처음으로, 또는 항상 우리 안에서 의와 거룩함을 새롭게 창조하여 주는 창조주이심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데 있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33-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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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부흥을 위해 ‘비상한 기도’가 필요”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두 차례에 걸쳐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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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부흥이다. 그런데 최근 40년이 넘도록 부흥이 임한 적이 없다. 그러니 1907년, 1920년, 1932년, 1950-53년, 1973-84년 부흥이후에는 부흥이 없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우리가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부흥을 외치던 사람들이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올인 하는 바람에 영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부흥을 위해 성령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데, 부흥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력을 잃어버린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혜를 받고 부흥을 놓고 기도하자고 하는데 부흥이 임하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교인들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교인들의 생각에 답변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개별적로 개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사도행전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에 보면 성령충만을 다 받았다. 부흥이 임하면 공동체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성령이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기에 성경에 있는 성령의 약속들이 더 깊이 있게 내 삶에 체험되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이다. 성령은 공동체적으로 부흥을 주시기도 하지만 개별적으로 당신들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역할을 성령께서는 동시에 하신다. 두 개가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성령이 부으시면 개별적으로 성령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역동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개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끓임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 하나님과 동행해서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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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는 1734-36년과 1740-42년 두 번의 부흥의 파장을  경험했다. 어느 날 보니 부흥이 썰물처럼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언약서명서를 받아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서 부흥이 떠나지 않고 오래지속하기를 원해서 그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엄청나게 일어났는데 7월부터는 어떻게 하면 부흥에 대한 조짐이 이렇게 사라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거의 없는 것이 저는 궁금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했다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부흥을 거두어 가신 것처럼 부흥이 사라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고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부흥을 원한다고 해서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부흥이 가장 지속적으로 임했던 때는 1901-1910년으로 부흥의 계절이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 1905년 인도 카스 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908년 중국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 등 이때만큼이나 부흥의 시즌이 지속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연속된 적이 없다.

 

혹시 이런 부흥들이 조직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당시 공통적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흥을 사모하는 목마름의 기도를 하는 무리들이 그때만큼 일어난 적이 없었다. 성령께서 네트워크를 가지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이 전세계적으로 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는 곳 마다 공동적인 것이 기도이다. 목마른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이다. 목마른 기도의 사모함이 없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7년에 쓴 <겸손한 시도>에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부흥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는 말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상한 기도’, ‘특별한 기도’라고 표현했다. 부흥을 놓고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 기도는 정기적인 집회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부흥만을 놓고 특별하게 시간을 정해서 하는 기도이다. 부흥을 위해 그런 기도가 있어야 한다. 

 

카이스트의 부흥이라고 들어보았는가. 2005년에 생전에 처음 경험한 것이다. 대전 카이스트 집회를 인도하고 함께 기도하자고 9시 반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회개기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새벽 1시까지 진행됐다. 개입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진행될 기도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일 집회가 계속 남아있고 수업도 있는데 여기서 끝내자고 했다. 참된 부흥은 이런 진정한 회개가 가십거리가 아닌 오히려 거룩한 결실을 맺는 것이다. 담당자에게서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사례비를 못 드려 죄송하지만 드리는 것이 결례인 것 같아서 드리지 않았다. 오늘 집회가 교수님에게 선물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너무 멋진 말이다. 생전에 이렇게 멋진 사례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집회를 놓고 기도한 사람이 있었다며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지난 6개월간 집회를 위해 저녁 9시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후에 카이스트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가 없는 부흥은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부흥을 놓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은 하나님이 주권적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지금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1995년 휘튼대학 내에 일어났으며, 2006년 2월에는 에즈베리에서 10월에는 인도 카시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2005년 12월에 카이스트에서 일어났던 것도 작은 부흥이라고 여긴다. 부흥을 옛날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가 직접 부흥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예상하지 않게 은혜를 경험했다. 인도에서 에즈베리에서 부흥의 현장을 직접 보았다. 부흥이 힘차게 일어나고 있을 때 부흥운동을 보는 것이 저로서는 큰 축복이다. 지금도 부흥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부흥을 이야기할 때 조심스럽지만 북한을 이야기하고 싶다. 북한에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3년 전에 14만이라고 한다. 적으면 9만 많으면 18만, 평균 14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14만이라는 숫자가 북한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숫자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AD 30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50년 후에 로마제국 전체에 예수 믿는 사람숫자가 14만이었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일어나고 1910년 한반도 전역에 전체 장로교인의 숫자가 14만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예수 믿는 14만 명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마치 카타쿰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처럼 어둠의 땅 북한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14만 명이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는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북한은 이미 통일될 준비가 되었는데 남한이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있는 14만 명이 북한 전체를 복음화시킬 수 있는 정예요원들이 다 되는 것이다. 오히려 남한이 준비가 안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부흥운동의 목표는 ‘선교’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마다 늘 선교가 일어났다. 오순절 부흥이 일어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서 선교가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제주선교가 시작됐다. 1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북미원주민 선교가, 2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부흥이 늘 일어날 때마다 결과는 선교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오전 10시).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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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는 평양대부흥 연구이후 세계부흥운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세계 32군데 부흥현장을 다니며 <세계부흥운동사>를 출간하고 석박사 과정을 위한 강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 교수들은 5년마다 강의 주제를 바꾸는데 박용규 교수의 가슴에는 부흥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부흥운동을 연구하며 깨닫아지는 은혜와 부흥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어 목회자들과의 세미나를 통해 이를 전하고 있다. “부흥을 위해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박용규 교수는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2003년부터 매달 17개 신학교 교수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기도회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동안 조용히 개교회 목회를 하고 있던 뉴욕영락교회 최호섭 목사도 뉴욕과 미주교계의 부흥을 위해 적극 나서며 세미나의 자리를 주선했으며, 박용규 교수와의 8주 연속 부흥에 대한 나눔과 기도모임을 통해 총체적인 난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자고 부탁했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총신하면 칼빈 신학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에 성령에 대해 그렇게 역동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제가 개혁주의 관점에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해 정말 칼빈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개혁주의 전통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3대 칼빈주의자중 한 명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이 총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을 미친 신학이 오늘날 한국의 총신의 신학이라고 알려졌는데 제가 연구해 본 결과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성령론이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는데 너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실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성령론을 보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영원히 나온다"라고 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령론이 제대로 개혁주의 성령론의 핵심을 잘 집어주고 있는데 이 부분들이 개혁주의 영역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부흥운동사를 연구하고 다음에 성경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부흥을 그렇게 살펴보면서 왜 한국교회 안에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부족할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나누는 것이 제 부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 - 사도행전 2:33

 

사도행전 2:33이 사도행전과 부흥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을 주목한다. 물론 행 1:8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성결구절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행 2:33 구절이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베드로가 해석한 것이다. 베드로가 해석하면서 부어주셨다는 것은 오순절 사건을 가르치는 부분이다. 베드로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오순절에 모인 사람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사도행전 2:17-18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에서 “부어 주리니”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2:33 말씀에서 오순절의 사건을 가르쳐 ‘부어 주셨다’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2:33절 ‘부어 주셨다’는 표현은 사도행전 2:17-18 베드로가 한 이야기이고, 베드로는 요엘서 2:28-29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다. 사도행전 2:33 말씀을 깊이 살펴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약속하신 성령"

 

중요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사도행전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을 보면 오순절의 성령을 가르쳐 아버지의 약속으로 표현한다.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이 아버지의 약속이고, 동시에 아들의 약속이고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엘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사도행전 2:33에는 성령을 가르쳐서 약속하신 성령이라고 했는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주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반복적으로 약속하셨다. 성령은 주님이 하신 약속이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이다.

 

2.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표현이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기 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후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다.

 

예수님이 이미 자기가 영광을 받으실 것은 예언하셨다. 높아지심은 주님이 하신 예언의 약속이다. 누가복음 22: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을 보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둘로 나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다. 낮아지심은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이다. 높아지심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예수님이 높아지심이다. 이것을 사도행전 2:33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사건이 있어야 오순절 성령감림의 사건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이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F F 브루스는 사도행전 주석을 통해 “부활후 예수는 지극히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그 성령을 땅위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부어주신다. 그리고 베드로의 모든 청중들이 바로 이러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나타난 외적인 표적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했다. 

 

예수님도 영광을 받아야 성령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7:3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감림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33에 이 표현이 성령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왜 예수님의 부활이후에 있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다.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왕자에 앉히시기 전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것을 연기하신 것"이다.

 

세대주의자와 개혁주의의 차이는 세대주의자들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주장한다. 십계명은 구약에 따르는 것이고 신약에는 은혜의 복음이라고 둘을 구분한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언약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다 구원을 받지만 견해차이가 있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으로 받았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몰랐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이 없다. 유학시절에 공부하면서 투쟁을 했다. 책을 보니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도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통일성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복음이 아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세대주의자들도 동의한다.

 

세대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중생이 없이 구원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중생의 은혜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다윗과 사울의 예를 들어 구약에는 성령이 들어갔다 나왔다고 한다고 말한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구원의 통일성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신약에 있어서는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것이지, 구약에는 성령은 들어갔다나왔다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비 비 워필드의 책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구약도 성령의 역사 없이 구약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신약에도 성령의 역사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과의 성령의 역사가 구원에 있어서 같다면, 오순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성령이 역사하셨다고 하면 오순절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3-1.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부어 주셨다’는 것은 구약에는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구약에 없었던 사건이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성취된 것이다. 부으심의 사건을 요엘서는 'will'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성령이 부으실 것을 미래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견해준다. 사도행전 2:17-18절에도 ‘will’ 즉 미래로 표현한다.

 

그런데 사도행전 2:33을 보면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현재완료이다. 구약에 예언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현재완료형이다.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현재완료형을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마가의 다박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을 이미 시제가 보여주고 있다.

 

사도행전 2:33에 ‘받았다(has received)’도 현재완료형으로 나온다. 한 번만 받은 것이 아니라 계속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버지께 성령을 계속 받으셔서 계속 부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것이다. 이 부분을 발견하고 나서 사도행전을 보면서 개혁주의 성령론에 대한 바른 정리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베드로가 부어주셨다고 증언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두고 한 표현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사도행전 2:17-18)라고 베드로가 증언한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에 약속되어 있지만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이 부으심은 구약에도 없었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심지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실 때도 성령의 부으심이 없었다.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에야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이 일어난 것이다. 이 부으심은 오순절에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존 칼빈은 "성령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좌에 앉히시기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일을 연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바와 같이 '부어 주리라'는 말로 잘 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어주시는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며, 처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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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되는 증거

 

세미나의 키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부어 주신다’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부어 주시는 것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에게만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약에도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 하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역사 하셨다.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계속된다는 것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사도행전 2:17-18을 보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남종과 여종,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120문도에게만 그 같은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했다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 그것도 말세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120명으로 끝나면 예언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다.

 

F F 브루스가 사도행전 주석에서 말대로 "분명히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을 다 성취시켰다고 불 수 없으며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시작이라는 것은 성취가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어떠냐에 따라 성령을 사모하고 간절히 간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성령의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늘 분문의 "받아서"라는 말과 "부어주리라"는 말의 시제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여기 ‘받아서(receive)’라는 말은 현재 완료형(has received)으로 쓰였다. 쭉 일어난 사건을 말할 때 현재 완료형을 사용한다. 과거 한번 일어난 것이라면 시제를 과거로 사용해야 한다.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도 현재완료이다. 현재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성령의 부으심이 과거에 일어난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는 연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기 때문에 현재완료형을 사용한 것이다.

 

셋째,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약속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립된 사람이 구하면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관계가 정립되었다면 구원받은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을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굉장한 약속이다.

 

넷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에도 나타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을 보면 ‘proceeding’이 진행형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나오는 것이다. 성령을 구하면 구하는 자에게 임하신다는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지원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다.

 

다섯째, 성령의 부으심이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순절 날 일어난 성령의 부어주심의 역사가 사도행전에 다시 나타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하면서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한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은 사도행전의 2장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 사건이다.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과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고 베드로가 증언해 준 것이다.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을 보면 베드로가 마가 다박방과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두 번의 성령의 부으심 사건을 보고 생각났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부으신 사건은 이방선교의 장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취이고,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날까지 이방인들을 국외자로서 자기 백성으로 부터 구별하셨지만 이제 그들을 동일한 사랑 가운데 포옹해주시며 그들을 동일한 영예의 자리에 높여 주셨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구원에 이른 것처럼 이방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이방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준해주시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의 주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사도행전 11:17-18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주시는 사건을 증언하니 더 이상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방선교를 예루살렘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방인에게 부어주신 심벌이다. 앞으로 이 땅에 계속해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성령의 부어주심을 예견하는 것이다.

 

여섯째, 지난 2천년여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의했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 운동, 평양 대부흥운동, 웨일즈 대부흥운동 등 성령의 부으심이 계속되었다. 

 

사도행전 2:33은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이다. 이 부분을 분명히 이해하면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흥을 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곧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한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을 다르게 이해한다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한다면 목양의 현장에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목양의 현장에 성령께서 구원의 역사를 하신 것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4.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간절한 열망

 

조나단 에드워즈는 <겸손한 시도(An Humble Attempt,1747)>에서 ‘성령은 모든 축복중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성령은 축복의 총화’라고 표현했다. 또 "성경은 전반적으로 그 밖의 모든 것들보다 성령을 위해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교회가 말세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과 그것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위해 대단히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말씀한다"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인과 교회는 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지만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을 놓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는 말은 성령의 부으심이 기도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말세’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도행전 2:17에도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나온다. 성령의 부으심은 말세에 일어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는 초림하시고 재림할 때까지 말세라고 한다. 초림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이 땅에 많아 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매우 위대한 무엇을 성취하시려면 에스겔 36장 37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그 일보다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는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 (슥 12:10)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부으시기 전에 간절한 사모하는 기도의 영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무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함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길을 찾았다. 칼빈이 저에게 위대한 도전을 주었다면 칼빈과 현대를 연결해주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한다.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 신학적인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가. 성령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연구를 했겠는가. 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또 성령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으로 누가복음 11:13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을 말씀했다. 

 

성령은 부흥을 주시는 영이시지만 동시에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하시고, 죄를 미워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영이시다. 로마서 8:26에는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악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신다.

 

맺는 말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구분해 주는 사건이다.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은 물론이고 예수님 당시에도 없었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사건이다. 신약교회가 태동된 사건이다. 교회는 성령이 이끄는 교회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120문도에 임했고, 이후에도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F. F. 브루스의 표현대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의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언은 '성령의 부으심'이 바로 부흥이다. 또 이 성령의 부으심,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지 않고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생각으로 도우시는 성령님

 

승천하기 전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고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셨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계획하셨던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을 하도록 권능을 주시려 함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도들이 아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님은 어떻게 보혜사의 역사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면 생각이란 방법을 통하여 도우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6절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다. 

물론 성령님은 영이신 하나님이니깐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사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방법이 생각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주는가?
첫 번째는 잘못된 생각에 따르지 않도록 마음에 신호를 보내심으로 도와준다는 것이다. 우리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세 가지 것에서부터 오는 것인데 첫째는 육신 둘째는 악령 셋째는 성령인데 육신의 생각과 마귀의 생각은 나를 망하게 하는 생각을 주는 것이고 성령님만이 우리를 위해 올바른 생각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육신의 욕심, 안목의 정욕과 자기를 뽐내려는 이 세상 자랑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거짓을 말하고 시기 질투 등을 할 때 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경고음을 내서 망하는 길을 가지 않도록 하신다. 로마서 8장 6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그런데 육신의 잘못된 생각은 금방 알아차리지만 정말 사단마귀로부터 오는 것은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나를 위한 것처럼 포장하면서 찾아오기 때문에 속기 쉬운 것입니다. 하와가 유혹당할 때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뱀이 찾아와 하와를 유혹할 때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하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너를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게 하려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그렇게 달콤한 유혹을 하면서 죄를 짓도록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사단마귀의 세력들이 이렇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네 가지로 한다고 한다. 1)"이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 2)"이번에 딱 한 번만”3)"너는 아직 젊잖아 너 어떻게 그렇게만 살래?”4)"누구나 다 이렇게 사는데 왜 그렇게 특별하게 살려고 하냐? 그러면서  너도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아라." 고 유혹한다는 것이다.

유혹에 넘어갔을 때 꼭, 꼭 기억할 말씀이 있다. 그것은 마귀란 놈이 유혹해 놓고도 막상 꾐에 빠져 넘어져 회개하려 할 때 이렇게 속삭인다는 것이다. ‘너 염치도 좋다. 어떻게 또 용서해 달라고 하니?’ 이러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으면서 용서를 구하지를 못하게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귀의 조롱소리를 들을 때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죄를 이길 수 있도록 믿음을 장성시켜 주옵소서.’라고 구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란 거다.  그러면 우리 연약함을 알고 사단의 간악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마귀가 주는 못된 생각과 싸움을 계속하다보면 언젠가 부터는 ‘야 이놈바라 나를 또 넘어뜨리려고 못된 생각을 주고 있네.’ 그렇기에 예방기도 “주여.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신앙이 성장했다는 증거인 것이다. 내게 마귀란 놈이 역사하는 것만 알아차려도 초보는 벗어났다고 본다. 

결론은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게 해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성령님은 우리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때 조용히 말씀해주시며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전도서라는 성경을 보면 7장 14절에 ‘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혹은 네 삶을 되돌아보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천국행 기차를 탔을지라도 우리의 가는 인생길에는 형통한 때와 곤고한 일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형통할 때는 당연히 기뻐하여야겠지만 고통스런 일, 근심되는 일 곤고한 날이 왔을 때는 생각하라 혹은 네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 전도서 7장 14절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신약 야고보서 5장 13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그러니 곤고한 날에는 ‘주님 저에게 왜 이런 문제가 왔나요? 제가 뭘 알기를 바라고 제가 어떻게 해야 되기를 바라서 이런 문제가 왔나요? 라고 하면서 앞에서 말한 돈 한 푼 받지 않고 도와주시는 천재 변호사인 보혜사 성령님이 가르쳐주는 생각을 받자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조언 생각을 받으려면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고집부리며 살았던 자기 생각,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정말 겸손한 마음으로 가르쳐 달라고 간청을 해야 하는 것일 것이다. 

교인들에게 보통은 설교를 듣는 시간에게 ‘너의 목사님 말씀을 들어봐라 너 들으라고 하는 말씀이잖나? 그러니 낙심하지 마. ‘네가 나를 떠나서 문제지 그러니 내게로 오라’고 생각을 주시는 방법으로 도와주시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할 일을 하게 해서 상 받게 복 받게 하심으로 도와주시는 것이란 것이다.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특히 설교를 들을 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한 이유했는지? 어떻게 해야 상과 복된 자가 되는 지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며 속으로 아멘 맞는 말씀입니다 라고 생각게 하심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열심히 일하고 심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매 주 설교시간 마다 심판이 있음을 전하며 행한 대로 심은 대로 일한 대로 하나님은 갚아주실 것이라며 설교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쓰고 싶은 말은 성령 충만을 신비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특이한 방법으로 역사할 수도 있지만 성령님은 생각으로 내 마음에 이미 계시지만 내 생각 속에 생각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면 성령 충만은 하나님 말씀으로 성령의 생각으로 내 마음이 꽉 차게 자리하고 있어 육신적인 생각 마귀유혹이 틈타지 못하는 상태가 성령 충만 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하고 싶다.

성령이 어디 계시며 과연 나에게도 지금 역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면 1) 내 생각이 잘못되어 갈 때 경고음이 울리는가? 2) 설교를 들을 때 성령님이 ‘지금 설교는 너 들어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드린 다면 나는 그런 분에게 성령님이 역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출처: USA 아멘넷 자게판/김정한 목사 

구원 받고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나요?


[질문]


어떤 목사님 설교에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기로는 사람이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전 3:16절)

그런데 그 목사님은 행 1:8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이 말씀과 또 몇 군데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더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신앙이 미지근하다고 합니다. 성령 받아야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올바른 말씀이신지요?


[답변]

구원을 받았어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주제에 대해선 오래 전부터 많은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솔직히 성경적으로 따져볼만한 것은 다 따졌기에 따로 더 보탤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인터넷을 조금만 탐색해 보면 따로 받아야 한다와 받을 이유가 없다는 양쪽의 입장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그 대부분의 논거가 성경의 부분적 기술에만 치중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일관되게 드러난 구원과 성령의 전체 맥락에서 따져보는 면이 부족한 반면에 몇몇 구절에 치중하여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만 해석하려 듭니다. 심지어 자신의 주장을 강화 변증할 목적으로 그에 적합한 말씀만 동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령의 외적 은사, 그 중에서도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려다 그 은사를 받지 않았으면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극단도 등장합니다. 그들은 대게 방언을 설명하거나 방언을 받은 모습에 관한 구절들만 내세워 변증 도구로 사용합니다. 방언은 어디까지나 성령의 외적 은사 중의 하나일 뿐인데도 성령에 관한 근본원리부터 따지지 않습니다.

구원 후에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 이 주제도 그런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구원과 성령에 대해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원리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지금껏 간과했던 측면도 일부 있는 것 같습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구원 받지 못한다.

“구원 받았더라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은 “구원 받았더라도 성령 받지 못한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성령 받지 않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합니다. 신앙 논쟁을 해결하는 기준은 당연히 성경이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그 주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5-7) 한마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7-13)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리라고 합니다. 특별히 죄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을 심판했고 또 승천하심으로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계획이 완성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독생자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데, 그 은혜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성령이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를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질문자님 말씀대로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처럼 아무리 하나님을 알고 믿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공로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요컨대 성령의 가장 근본적 역할은 예수를 자신의 개인적 구세주로 영접케 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성령이 언제 내주하는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아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성령이 역사하여 거듭나게만 해놓고는 일시적으로 떠났다가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 받게 하는 성령이 따로 있고 또 신앙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성령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성령이 있을 수는 절대 없습니다. 결국 한 성령이 처음에는 구원만 준 후에 떠났다가 뜨거운 신앙을 주기 위해 다시 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깊이 따져 볼 것도 없습니다. 성령이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처럼 특정인에게 특정시점에만 제한적으로  역사한다는 뜻과 같아집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바와 다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말하는 바와 완전히 상충됩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성령이 영원토록 너희와 거한다고 했습니다. 수시로 들락날락하지 않고 내주(內住-indwelling)한다는 것입니다.

보혜사라고 번역된 헬라 원어 파라클레토스는 바로 곁에서 위로하는 자(comforter)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신자의 바로 곁에서, 즉 항상 함께 하셔서 환난 가운데 위로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며 영생에 대한 소망을 키우게 하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구원 받은 보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는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이 내주할 것이라는 이 약속 전후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해 보십시오. 신자더러 당신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할 수 있을 테니까 당신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습니다.(12-14절) 그리고선 성령이 와서 신자에게 내주한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럼 성령 내주의 목적은 당신 이름으로 구하게 해서 당신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어서 성령이 오면 세상은 예수를 보지 못하나 성령 받은 자는 보고 또 예수님이 살았듯이 신자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신자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신자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9-20절) 말하자면 성령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신자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는 당연히 그분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당신을 사랑하는 자이며 당신도 그를 사랑해 그에게 당신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21절)

한 마디로 신자가 하나님의 위로 받고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며 나아가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령이 대체 언제 내주해야만 합니까? 두말 할 것 없이 구원 받자마자 아닙니까? 구원 받음과 성령 내주 사이에 시차가 있다면 그 동안에는 이런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또 성령이 중간에 떠날 수 있거나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다는 주장도 똑 같은 하자를 내포하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될뿐더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도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자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바로 그분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열두 제자와 달리 주님의 사역을 곁에서 지켜보거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로선 주님이 당신의 원수였던 자기마저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았지만 그 이유와 자신에 대한 그분의 구체적인 계획까지는 몰랐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는 다메섹 도상의 회심 사건 이후로 바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전의 자기 같은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행9:17-22)

분명히 바울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비록 제자들과 며칠 교제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한 것을 많이 물어보고 또 제자들도 나서서 그분의 가르침과 십자가 사건의 전말을 알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 내주하여 그로 진정과 열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역사하지 않았다면 며칠 새에 열렬한 전도자로 곧바로 변신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구원과 성령 내주의 시점 사이에 간격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체험에 입각하여 고린도 교인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라고 힐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분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성삼위 하나님을 성경대로 올바르게 믿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당연히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성령의 감동으로 저작된 성경을 바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시공간상으로 너무나 떨어져 있는 신약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천주교처럼 사도의 해석에만 의존토록 하나님이 방치하신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이 간섭하여 구원을 얻은 모든 성도에게는 곧바로 성령이 내주케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며 그분의 일을 해야 하고 또 때로는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 탄식하며 기도하신다면 당연히 구원과 동시에 성령이 내주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으라.

그런데도 문제는 구원 받은 자도 성령을 따로 받는 것 같고, 특별히 제자들의 경우는 명시적으로 두 번이나 받았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어 논란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구원의 예정과 구원의 실현을 혼동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내주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를 따져 보기로 합시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19-23)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각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했으니 제자들은 이 때 성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승천하시기 직전에 다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여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데 홀연히 아주 강력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임하며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언뜻 보면 예수님이 제자로 선택하여 함께 동행 했기에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다시 성령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또 심지어 성령을 받았음에도 다시 방언의 은사를 주는 성령을 더 받아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예정하고 선택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6:65)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행13:48) 믿었습니다. 바울도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엡1:4,5)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신자나 바울에게 예정되었던 구원은 성령으로 거듭나면서 비로소 유효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택해 삼년간 동행하고 있을 때는 구원이 예정 된 것이지 아직 그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구원을 받았다가 취소가 된 셈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 때에 이미 몸을 씻은 자는 다시 씻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제자들의 발만 씻겨 주시면서 이중에 하나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유다는 제자로 선택하긴 했지만 구원으로 예정된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세가 도대체 자기 같은 자가 무슨 수로 애굽에 종살이 하는 동족을 구원해 낼 수 있겠는가 물었더니 하나님은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1,12)  

논리적으로 따지면 네가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키고 마지막으로는 애굽의 장자가 죽고 홍해가 갈라질 것이라고 답해야 맞습니다. 그런 말씀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당신의 증거, 즉 답이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를 거치고 시내 산에 도달해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약속만큼 확실한 보장은 없습니다. 출애굽은 아예 생각도 하지 말고 완전히 구원 받은 후 이 산에서 어떻게 제사지낼지나 염려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구원자로 세웠으면 출애굽은 이미 이뤄진 것입니다. 남은 것은 시기와 방법뿐입니다. 그분에게만은 인간과 달리 약속이 바로 보증 자체이며 따로 징표가 필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열한 제자를 택했으면 구원은 이미 이뤄진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때 아직 유다가 남아 있었듯이 구원의 실현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내쉬는 숨, 즉 성령을 받고는 더 이상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정되었던 구원이 비로소 효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감당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몰라도 백이십 명 모두가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죽으려 결심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반드시 실현 될 그분의 또 다른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이 성령 받은 것은 작정 되었던 구원이 실현되었다는 증거이자, 또 앞으로 자기들을 통해 반드시 실현되고야 말 그분의 소명에 대한 보장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구원 받은 후에 성령을 따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예정되어 있던 구원이 성령을 받아 확정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신자도 예수님 말씀대로 진리의 영이 와야만 당신을 믿게 되고 당신 계명대로 살며 당신의 일에 쓰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영생하게 된다는 약속이 반드시 실현된다는 보증으로 구원 때에 성령을 받으며 그 이후로 떠나지 않고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럼 왜 예수님이 이미 부어주신 성령 위에 다시 “성령이 임하면”이라고 말했습니까? 이 문제는 초대 교회의 특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직전에 니고데모나 빌립보 간수처럼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자신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선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어느 때이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제 동족의 구원이 안타깝게 여겨졌고 절실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한 것처럼 질문에 대해선 침묵하고 엉뚱한 말씀으로 대체했습니다. 우선 때는 너희가 알 바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어김없이 실현될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회복은 염려하지 말고 너희더러 지키라고 한 계명부터 철저히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기독교가 태동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했습니다. 승천 직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마지막 계명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전에 그 일을 직접 하시지 않고 죽으신 이후 제자들에게 위탁하셨던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십자가에 죽기 위한 것이므로 공사역 중에 이룰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당신께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온전히 하나가 되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초자연적 능력을 더 크게 베푼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영혼을 구하는 일을 당신보다 더 많이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당신께서 생전에 가르쳤던 제자보다 베드로가 오순절 한 번 설교에 회심시킨 3천명이 수십 배나 많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예수님은 오순절에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를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땅에 교회를, 가시적 조직체 이전에 성도들이 함께 힘을 합해 복음을 전할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창립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 모두가 온전한 하나로 되게 하여 전도 사역을 담대하게 담당할 수 있게 만드는 특별한 조처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어도 개인적으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 인식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영접했고 그분을 위해 여생을 살겠다는 다짐은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 사역에서 성령이 하시는 역사에 대해선 전혀 무지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직 성령의 강력한 임재 체험을 하지 못했기에 담대해지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되었지만 사역자로선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이전에 성령을 받은 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주위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나 참고할 신약 성경이 있었던 오늘 날의 신자와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강력한 외적 은사를 최초로 체험했어야 했고 또 성령이 어떻게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과 역사를 성경기록으로 남겨 후대 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 오순절 날 천하 각국에서 성전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 당신의 큰 능력을 보이기로 했습니다. 아니 능력보다는 십자가 진리를 제대로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던 제자들로 각 나라 언어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게 했던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 요엘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지는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줘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말한 메시아임을 더욱 확증 시켰던 것입니다.

요컨대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각자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초의 교회를 창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성도들 위에 즉, 교회라는 공동체 위에  가시적 모습으로 임재한 것으로 역사상 한 번 있는 아주 특수한 경우였습니다. 한 교회 위에 성령이 강력히 임재하여 모든 성도가 방언을 하고 또 그 모두가 복음 전파 사역에 헌신하게 된 예는 전무후무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으로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 받은 자가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방언을 해야 구원 받았는가?

구원 얻었는데도 성령을 따로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예수 믿은 신자에게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성령이 일시적으로 내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닫지도 못하며 기도나 묵상이나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세상 쾌락과 죄악과 사단의 유혹 및 방해를 제대로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그렇게 방치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는 예수 믿기 전에 어둠 속에 있었던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구원이 살아 있을 때부터 확신을 갖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 약속대로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주 없이 어찌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예수님이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보혜사가 함께 해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지 않습니까?

구원 받아도 성령을, 특별히 방언 같은 은사를 따로 받아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틀린 말입니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는 바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을 통역함 등의 은사는 신자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한 성령이 하시는 일로 당신의 뜻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게 나눠주십니다. 대개의 신자들이 이 중에 하나 정도의 은사는 받습니다. 물론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신자도 많지만 구원 받지 못했거나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2:29-13:2,13)

성경은 분명 외적 은사 외에 크고 더 좋은 은사로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믿어 그분의 사랑을 주위에 전하며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것을 소망하는 신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한 정도가 아니라 성령의 가장 좋은 은사를 소유한 했다는 뜻입니다.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받는 것이 신자에게 더 유익한 것은 사실이나 그런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구원 받지 않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바꿔 말해 흔히 행해지는 설교나 논쟁에서 핵심 주제와 사용된 용어들의 뜻이 애매한, 심지어 당사자마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로든 목사님의 설교에도 그런 모호함이, 그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나 순수함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아님, 여실히 나타납니다.

우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나, “성령을 받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표현은 마치 “공부를 못하는 자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교인들이 이런 너무나 ABC 같은 말씀을 듣고도 아멘만 연발합니다. 아무리 한국인들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라 해도 말씀을 깊이 갈등 묵상하는 일에서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대신에 그분 말씀대로 구원을 받았더라도 신앙이 미지근한 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았더라도 성령이 강력히 역사하지 않으면 신앙이 미지근해진다”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신앙이 더 뜨거워지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해야지 성령을 다시 받으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구원과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차라리 아예 “성령 받지 않고도 구원은 일어난다.”라고 속내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 말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신자더러 당혹하지 않고 쉽게 판단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령과 구원에 관해 용어를 통일되게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 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용어는 행1:5의 성령 세례입니다. 우리말은 항상 한자의 의미와 중첩되고 교회 관행과도 연결되어 해석되므로 성령 세례라고 하면 성령이 인간에게 회개를 하게 만드는 최초의 강림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헬라 원어는 완전히 물에 잠기게 만든다는 ‘뱁티조마’, 우리말로 세례 혹은 침례라고 번역된 모든 말에, 하나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성령세례는 오히려 성령의 더 강력한 임재, 흔히 말하는 성령 충만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구원이 실현되는 것은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또 거듭난 자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여 떠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 성령으로 중생할 때에는 “성령 세례를 받는다는” 용어보다는 오히려 성령이 ‘임재’(강림하여 내재한다는 의미로)한다는 표현이 나을 듯합니다.(이는 순전히 제 개인적 의견입니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성령의 임재와 관련해선 반드시 구원의 예정과 구원의 실현에 대해 구분해서 설교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유익하다든지, 소원하여 기도하면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성령 은사를 받지 않았기에 구원 받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구원 유효성이나 신앙 우월성의 증명이 결코 아닙니다. 반면에 이제는 성경 말씀이 있으니 그런 은사가 실효되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극단도 성경의 진술과는 반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진정으로 구원이 유효해졌다면 이미 성령으로 거듭났고 내주하고 있으므로 따로 성령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신자라면 더 뜨거운 믿음을 갖기 위해 성령의 더 강력한 역사는 당연히 소원해야 합니다.

10/13/2008

출처: 박신 목사 홈피

'성령과 그리스도' / 제임스 패커

 

 

요한복음의 역사적 신빙성을 두고 한 세기에 걸쳐 학계에서 벌어진 논쟁 덕분에, 신약성경의 테마를 탐구할 때 요한복음부터 시작하면 유행에 뒤떨어진다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관례에 따르자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을 통해, 때로는 베르로와 바울 서신까지 거쳐서 요한의 증언에 접근해야 한다. 마치 이들 다른 성경 기자들의 눈을 통하지 않으면 요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요한이 기록한 내용의 정통성이나 명료함을 의심할 어떠한 이유도 없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출발점으로 삼아 성령의 새 언약 사역을 해명하려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성을 통해, 성령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 단서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요한복음이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 어쨋든 우리는 요한의 도움을 받아야만 마태, 마가, 누가, 베드로, 바울이 성령에 대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약속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잡히시던 밤에 당신이 곧 떠날 것이고 영광을 얻게 될 것을 감안하여, 열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앞으로 가져야 할 제자도에 대해 길게 말씀하셨다(13-16장). 예수님은 여러 번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시며, 그분을 진리의 영(14:17, 15:26, 16:13), 거룩한 영(14:26)이라고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떠나신 다음(14:16,26), 성부께서 성자의 요청으로 보혜사를 보내실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성부의 대행자인 성자가 보혜사를 파견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15:26, 16:7). 예수께서는, 보혜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14:26), 다시 말해 예수님의 특사, 대변인, 그리고 대표로서 파견되어, 예수님의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4:16). 이 말은 곧 성령께서 오심으로, 영광스러운 주(主)이신 예수님 자신이 실제로 제자들에게 되돌아온다는 뜻이다(14:18-23). 성령께서는 새 언약 사역을 행하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시고, 모든 관심을 성령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시며, 사람들을 믿음, 소망, 사랑, 순종, 경배, 헌신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이끄신다. 이것이야말로 말하자면 에큐메니컬운동, 은사주의운동, 전례(典禮)운동(20세기 초에 주로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예배 쇄신운동-옮긴이), 소그룹운동, 평신도사도운동, 세계선교운동, 등등 소위 '영적인' 운동과 '영적인' 체험이 진짜인지 가늠할 수 있는 변함없는 시금석이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임재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고, 성부, 성자와 실제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14:21-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14:23).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에게 약속한 놀라운 체험에 대한 선언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체험에 대해 증거하면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요일1:3)고 기록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3절 말씀을 통해,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는 교제를 추구해야지 절대로 그 이하의 상태에는 안주하지 말라고 지금도 권면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영의 가르침

 

그 외에도, 예수께서 3년의 소중한 지상 사역 기간 동안 가르치셨던 것처럼 성령께서도 가르치신다. 성령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직접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이해하도록 이끄시는 식으로 가르치신다(16:13의 "모든 진리"라는 예수님의 표현은 14:26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알 만한 것은 무엇이건 전부'가 아니라 '나에 관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뜻하고, 16:13의 "장래 일"은 '너희에게 닥칠 일'이 아니라 '나에게 닥칠 일', 즉 십자가, 부활, 통치, 재림 등의 모든 것을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이 점을 시금석으로 삼으면,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호소하는 다양한 유형의, 이른바 기독교 신학 하나하나에 성령이 얼마나 내주하시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증거

 

마지막으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범죄자로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그분은 결코 죄인이 아니고, 성부의 영광으로 되돌아가심으로 그분의 의로움이 실제로 입증되었으며,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심판으로 '이 세상의 사악한 임금'(12:31)을 권좌에서 쫓아내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다고 증거하신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바로 불신앙의 죄(15:27, 16:8-11)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신다. 증거하시는 성령은 그런 연유로 인류에 대해 검사하는 직무를 수행하셔서,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나는 잘못했다. 난 유죄다. 나는 용서받아야 한다'는 자백을 받아 내시며, 예수님을 거절하거나 적어도 예수님을 충분히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일인지 절실히 깨닫게 하신다(16:8).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할 때 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의 도우심이다. 교회가 사도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듯이, 성령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사람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분의 이러한 증거는, 사람들의 내면의 귀를 열어 복음 전도자가 펼쳐 보이는 진리를 각 개인의 양심에 적용하시는 일을 가리킨다(15:27, 17:20).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영광스러운 구세주께 영광을 돌려(16:14),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해설자 역할과, 무지한 영혼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조명하는 역할을 감당하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 사역의 중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투광조명 사역

 

성령이 새 언약에서 맡으신 독특한 역할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투광조명'(건축물의 외부나 동상, 기념비, 경기장 따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투광기를 사용하여 조명하는 방법-옮긴이) 사역이라 부를 만한 일이다. 이 역할에 한정해서 본다면, 예수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성령께서 '와 계시지 않았다'(7:39, 헬라어 글자 그대로 풀이했음).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영광을 인식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오직 성부께서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 다음에야(17:1,5) 시작될 수 있었다.

 

어느 겨울 저녁,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설교하려고 교회로 걸어가던 기억이 난다. 모퉁이를 돌 때 건물에 비친 투광조명을 보고, 이거야말로 내 설교에 필요한 그림 같은 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투광조명이 잘되면 조명등 자체는 안 보이는 법이다. 조명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투광조명이 비춰지는 건물만이 보일 뿐이다. 그 기대효과는 조명이 없었다면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을 건물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며, 건물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눈에 띄게 만들어 건물의 위용(威容)을 극대화시킴으로 건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것은 성령의 새 언약 역할을 보여 주는 완벽한 그림이다. 성령께서는 구세주 예수를 비추는, 이른바 숨겨진 투광조명등이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뒤에 서 계신 성령께서 우리 어깨 너머로 빛을 비추어 우리 정면에 서 계신 예수님을 비추신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결코, '나를 봐, 내 말을 들어, 내게로 와, 나를 알아야 해'가 아니라, 항상 '그분을 보고, 그분의 영광을 보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그분께 가서 생명을 얻으라. 그분을 알고 그분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라'는 내용이다. 성령께서는 중매쟁이 곧 천상의 결혼중매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와 그리스도를 결합시켜 함께 머물게 하시기 때문이다. 두번째 보혜사이신 성령은 계속해서 첫번째 보혜사이신 예수님께로 우리를 이끄시며, 위에서 본 대로 두번째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심으로 첫번째 보혜사를 알아보게 하시고, 우리를 감동시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보좌에서 내려오시는 그분께 손을 내밀게 하신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령의 사역[1] (2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위한 5인의 미국 칼빈 신학교 교수들(캘덜먼, 볼트, 쿠퍼, 훌스터, 스미스)의 대담[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캘덜먼: 좀더 세계적인 관점에서 성령의 권능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가 북미권에서 겪는 것보다 더 극적인 힘 - 그들 자신이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겪는 - 에 관해 증거하는 것 같다. 적군은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도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걸까?

훌스터: 나는 당신의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적의 힘은 세계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정말 실제적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가시적이다. 나는 상당 기간동안 북미개혁교단(CRC)의 한 교회를 섬겼고, 비록 적군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드러냈었지만 그곳에서 적들의 힘과 어둠의 권세를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가정폭력, 강간,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중독 문제들을 취급하게 될 경우, 당신은 실제로 당신에게 소리치는 귀신을 상대하진 않겠지만 적군은 그처럼 현실적이고,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서 당신은 인도네시아에서 만큼이나 성령의 권능이 필요하다. 대적들의 힘이 실제적이고 교활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루이스(C. S. Lewis)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를 읽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가운데 내가 깨달은 점들 중 하나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청중들에게 대적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쿠퍼: 훌스터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 또한 북미의 기독교가 [1692년에 있었던] 역사적 살렘 마녀재판 이후엔 천사나 귀신에 관한 부분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우 경건한 자세로, “나는 천사를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천사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샤머니즘이나 원시 종교의 강신술적 배경에서 자란 제 3세계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일들에 정말 관심이 많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공언하는 거의 모든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샤머니즘이나 강신술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성령에 관한 어떠한 성경적 표현일 수 있는 이상으로) 샤머니즘적일 수 있는 징후들 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매우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그것을 쫓아내기 위하여 이름을 부르고 쫓겨가야 할 곳을 정해줘야 하는 지역적인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샤머니즘에서 그것은 일반적인 풍습이다. 샤먼(Shaman)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적인 세계의 달인이다. 동물소리, 웃음(소리), 영적 권위자가 손을 댓을 때 정신을 잃는 것, 방언, 병고침, 사람을 저주함 ? 이런 종류의 일들은 다른 많은 종교에서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매우 분별력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오순절운동과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이어 새롭게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운동인] 제3의 물결 운동(Third Wave Movement)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런 모든 위조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들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얼마나 정통한지 궁금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 동료 교수들인 룻 터크(Ruth Tucker)와 마리아노 아빌라(Mariano Avila)가 그들의 소수파-보고서에서 교단총회에 주의를 주고자 애썼던 것들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이 어떻게 예배와 설교에 관련되는 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훌스터: 오늘날 예배에 대한 많은 경험적 이해가 있다. 만일 음악이 좋고 설교가 좋다면, 성령은 그날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예배가 그리 좋지 못할 지라도 좋았을 경우처럼 성령이 그곳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이 예배당에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이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성령은 예배당에 있다.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의 임재 (the presence of God) 의 척도가 아니다.

볼트: 계획된 즉흥성은 주의 깊게 준비된 기도나 설교보다 성령의 임재에 관한 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훌스터: 모든 설교자는 최선이 아닌 설교를 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방의 햄버거 헬퍼(Hamburger Helper: 제너럴 밀스라는 미국 식품그룹에서 생산하는 인스턴트 파스타)이다. 그것은 그 역할을 할 것이지만, 필레미뇽(filet mignon: 값 비싼 뼈가 없는 소고기 부위로 안심이나 등심부위를 나타내는 프랑스 조리용어)은 아니다. 당신은 설교단에 서서 그것으로 전력을 다한다. 끝에 당신은 부끄러워서 강대상 뒤쪽에서 조금 고개를 숙일 것이고, 설교 후엔 변함없이 누군가 다가와서 “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설교를 통해 오늘 정말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겸손이 잘 자리 잡혔는지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당신에 관한 일이 아니고 다른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설교자로서의 그런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캘덜먼: 나는 잔디밭 축제에 나타난 스컹크가 되는 것이 정말 싫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얘기된 어떠한 것도 틀렸다 생각하지 않지만,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책임을 져야 할]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이 스스로의 신앙유산의 부유함을 모르고 있다고 성급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대응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떠났나요?” 라고 물을 때, 그들의 대답을 관통하는 주제는 종종 이렇다: “있잖아요, 저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싶어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매 주일마다 다녔던 교회에서는 그걸 볼 수 없었어요. 목회자와 찬양인도자와 전체 회중들 중 그 누구도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깊이 믿는 것 같지 않았어요. 시늉만 많았지요.”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길 갈망하고 있다.

 

훌스터: 나는 우리가 증거하는 일에 취약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분명히 말할 줄 모른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른다. 증거(testimony)는 당신 삶에서의 하나님의 권능을 증언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가 예배와 회중들의 삶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증거의 능력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스미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청하는 일에 있어 더 많이 개방되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라고 부르게 될 수도 있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전통에서의 관행이다. 봉헌 증거에서부터 “누가 오늘 아침에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는가?”로 이동하는 것은 그리 큰 발전은 아니고 발전을 위한 좋은 예가 될 순 있겠다.

 

쿠퍼: 분명히 우리는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이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순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랫동안 열심히 지켜봐야 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육체적 건강과 영적인 건강 사이의 비교가 알려 주는 바가 있다. 나는 스스로의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고 내가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다. 아니면 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건강이란 선물을 강화하기 위해 먹는 것을 조절하고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 표지들 중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그 선물을 받고도 그것을 양성하고 있지 않는 현상황의 기독교에 만족하고 있다. 내 생각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 그들이 찾기 원하는 바는 생명력과 성숙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카리스마적 증거라기 보다는 중생의 일반적 열매들이다. 내 생각엔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아마 어떤 교회에서는 대다수가,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이다.

 

훌스터: 많은 사람들이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으로서 예배에 참석한다. “제가 불이 붙고 변화되는 건 예배 인도자인 당신에게 달렸어요.” 하지만 예배는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한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뭔가 해야한다는 각오를 하고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교회가 매주 크게 한 건 하지 못하는 설교자를 두고 있을 때,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적극적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을까? 예배 음악이 당신의 기호에 맞지 않을 경우, 당신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이 예배로부터 무엇을 얻었는가”의 문제일까 아니면 “당신이 예배 속으로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의 문제일까? 우리는 예배를 통한 스스로의 영적 성장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볼트: 우리는 또한 겸손히 성령을 의지하는 데 있어 분명하지 못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칼빈주의자들이지만 미국의 “할 수 있다-주의 (can do-ism)”의 배경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can do)”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함이 없이는 죽은 교회이다 라는 인상을 우리가 늘 주고 있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과 기도에 관해 잠시 얘기해 보자.

 

훌스터: 나는 최근 그들의 당회장이 당회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가에 대해 얘기하는 어떤 장로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당회 때 얼마나 많은 시간 기도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시작할 때와 마칠 때” 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그러면 당신들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든 일에 대해 얼마나 오래 얘기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는 “글쎄, 우린 정말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나는 “아마 당신들의 효율성이 당신들의 영적 리더십을 이기고 있는 것 같다” 라고 대답했다. 만일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교인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들의 필요를 직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기도와 열정의 사람인 영적 지도자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만큼 성령에 민감해 질 수 없을 것이다.

 

캘덜먼: 우리는 기도를 교회 내에서의 또 다른 프로그램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서 더 깊고 더 충만한 기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에게 도전을 줄 필요가 있다. 이 일은 (생명력 있는 기도생활을 위한 조직신학적 가르침과 실천과 책무 등의) 기도를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교인들 가운데 매우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대개 오래 전부터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왔고 교인들을 보다 잘 기도하도록 돕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주의 깊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기도 갱신을 위한 프로그램을 평가절하 하길 원치 않는다. 나는 또한 참으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각 교회마다 있는 수십 여명의 성도들을 간과하기도 원치 않는다.

 

스미스: 다시금 그 주제가 떠오른다: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특별한가, 또는 우리의 삶 전체에 걸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얼마나 일상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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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령과 그리스도인' / 재임스 패커

 

 

이미 말한 대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 전반을 해석하는 실마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너무나 자주 우리의 결핍과 필요에만 결부시키고,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진리, 곧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이곳에 와 계시며, 그분의 변함없는 주 임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며, 예수님을 온전히 알려 주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게 만든는 진리의 관점에서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기독교 중심으로 보게 되었으니,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견해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사역을 인간 중심으로 보게 된 이유 중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개인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가장 많이 다룬 곳이 서신서이지만, 기기에는 주 예수님과의 사랑이나 예수님과 성도가 누리는 교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다. 반면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반응이 무엇인지 가장 많이 설명하고 예증한 곳이 복음서이지만, 거기에는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선 복음서는 이미 서신서의 교리들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서신서의 수신자들은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이미 친숙한 사람들이었기에,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간략하게만 언급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으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성령께서 새 언약 아래 수행하시는 변함없는 주 임무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음 몇 단락을 통해 보기로 하자.

 

새로운 출생

 

우선,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큰 변화, 즉 예수님이 '새로운 출생' 또는 '거듭남'(요3:3-8; 벧전1:23; 약1:18)이라고 비유하신 이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았다'(요3:6).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세례 요한의 세례나 기독교식 세례, 자연 출산 때의 양수처럼 성령의 내적 사역을 보완하는 외적인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 36장 25절부터 27절 말씀에서 묘사했듯이, 내적인 갱생(更生) 자체가 갖는 깨끗하게 하는 측면을 가리킨다(5절의 물이 성령의 소생시키는 활동의 한 측면만을 보여 준다면 6절에 물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이 과정을 "중생"(딛3:5)과 '새 창조'(고후5:17; 갈6:17)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할 때, 중생한 자의 삶이 변화한다고 설명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입장이다(롬6:3-11; 골2:12-1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믿음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한다. 또 그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흘린 피와 그 피가 보증하는 사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롬4:16-25, 10:8-13; 골2:12; 요3:15-21, 5:24, 6:47, 53-58). 덧붙여서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예수님에게 신뢰와 순종을 직접 표현하게 하시고(고전12:3), 우리를 당신의 몸인 교회의 지체(손발, 장기)로 삼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당신의 능력 안에서 초자연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준다. 이 모든 사실은 정확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새로운 출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뜻은 지나치게 인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그럴 수가 없다) 지나치게 안으로 굽어 있어, 우리의 모든 관심의 초점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믿는 개인에게 쏠려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두 가지 유감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첫째는, 회심할 때 특정한 감정체험(죄에 대한 엄청난 애통, 해답을 찾기 위한 엄청난 고뇌, 넘쳐나는 기쁨)을 해야 한다는 기대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런 기대는 바울, 어거스틴, 루터, 버니언, 웨슬리 같은 사람들의 잘 알려진 회심 이야기나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 기대를 잣대로 삼아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중생을 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한다. 이것은 서글프고 어리석은 일이다.

 

체험이 어느 한순간에 일어나서(우리 가운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날짜를 기억할 수 있다 해도,  회심의 체험은 하도 가지각색이라 어떠한 표준기대치에도 끼워 맞출 수가 없다. ?문에 그런 기대를 잣대로 사용하면, 종종 결과적으로 지금 거듭난 상태라는 충분한 표시가 있는 많은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다고 제쳐 놓는 반면, 오히려 한때 간증하던 회심시의 체험이 이제는 완전히 닳아 없어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중생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다. 청교도들과 청교도들과 조너선 에드워즈의 말처럼, 그 어떠한 감정 상태나 결과 혹은 개별 체험이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런 입장과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현재의 삶만이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시점에 회심했다는 확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두번째 유감스러운 결과는,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의미를 여는 열쇠가 되시는 분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단순히 우리 자신이 현재 안고 있는 몇 가지 자기중심적인 질문(어떻게 하면 내가 양심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압박받을 때 마음과 정신의 평화는? 행복은? 기쁨은? 삶에 필요한 능력은?)에 답하기 위해 불러 들이는 인물 정도로 치부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에 따르는 요구사항들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심지어 원칙적으로 그것들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드는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서 수확한 작물은, 예수님께 우드하우스(P.G. Wodehouse)의 소설에 등장하는 만능 지브즈(Jeeves) 같은 역할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필요할 때 호출해서 구세주와 보혜사로만 써먹고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여전히 중생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반쪽짜리 메시지에 오도(誤導)되어,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큰 어려움으로부터 막아 주신다고 지레짐작하여 모여들었다. 첫번째 집단은 완전히 믿음에서 떠나가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서 고목(枯木)이 되어 버린다. 두번째 집단은 큰 상처가 남는 좌절을 겪게 된다. 그들은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불행이 닥칠 때 더욱 큰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다음의 증언은 모 기독교 신문에서 임의로 인용한 내용이다. "남편과 저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로 있었는데 2살 6개월 된 아들이 사고로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주님을 위해 살아왔고, 한 영혼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4년을 멍하게 지내며 제 속의 분노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계속 강해지려고 노렸했습니다. 저는 제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정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여기서 고백한 것과 같은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이를 악무는 일 외에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양육은, 결함이 있다기보다 잔인하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대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 기대들은 다만 희망적인 생각에 불과한가. 아니면 외부요인들로부터 생겨났는가? 어쨌든 반드시 지적해야 할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경우 인간 중심이 되어 무슨 영업사원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갖는 혜택은 부풀리고 져야 할 부담은 최소화시켜서 결국 새신자들이 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사고 자체를 고정시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이처럼 지나친 나머지 해롭기 그지없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새 언약 사역과 보조를 맞추는 법을 배우고, 구원자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모범이요 앞으로 오실 심판자이시고, 약하고 가난하며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연인이시며, 친히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면 된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 때에 전형적인 체험을 겪는다는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과거의 회심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현재의 회심한 상태 뿐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의 체험만을 따로 떼어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표시라고 여기는 습관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육신한 하나님께서 찬양과 섬김을 통해 온전히 경배받으셔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주 예수를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도록 대기시킨다 불경한 생각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리차드 백스터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안내하셔서 통과하게 하시는 어두운 방들은 그분께서 친히 통과하셨던 방들보다 결코 어둡지 않다"라고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길은 죽음을 경험한 뒤에 부활을 체험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리라고 기대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징밋빛 환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를 읽되, 특별히 사복음서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안일한 견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를 연구하면서 우리 주님을 계속해서 선명하게 바라보고, 우리 머릿속에 '예수님에 대한 제자도'라는 관계의 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도에 대한 교리가 제일 잘 설명된 곳은 서신서이지만, 제자도의 본질이 가장 생생하게 그려진 곳은 복음서이다.

 

그런데 복음서보다 서신서를 더 좋아하고, 복음서를 졸업하고 서신서로 입문하는 것이 무슨 영적 성장의 표시라도 되는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한데, 이러한 행태는 우리가 주 예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보다 신학적인 개념에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이 아닐까. 무엇보다 우리는 서신서의 신학이야말로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제자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종종 지적했듯이, 복음서는 지상에서 가장 놀라운 책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말한 잘못된 생각들을 모두 바로잡는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소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어떤 진리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는다'(행2:38; 갈3:2)는 진리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기본이다. 이렇게 받은 성령은 "보증" 즉, 신자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표시이다(고후1:22; 엡1:13). 그 이후로 성령은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롬8:11). 다시 말하면 성령은 유숙객과 같아서, 성령이 거하시는 신자의 마음속과 그의 삶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 성령께서는 '은혜롭고 주도적인 손님'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변화의 주도자로 활동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더욱 닮아 '점점 더 큰 영광에'(고후3:18) 이르게 하신다. 여기서 독창적인 주장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통상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바로 성화(聖化)이다. 성화의 길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령을 좇아 행하"(갈5:16)는 길이다. 성화의 길을 간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몸과 마음의 악한 욕심)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본 받는 아홉 가지 목록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허용해 드린다는 뜻이다(22,23). 성화의 삶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겸손, 사랑 그리고 죄를 피하고 의를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는 것(요13:12-15,34,35, 15:12,13; 엡5:1,2; 빌2:5-8; 벧전2:21-25; 히12:1-4)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성화란 당신이 말씀한 대로 행하는 일이라고 계속 정의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요약하신다(막12:29-31; 눅10:25-37). 어쨌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입장을 잘 정리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의 삶이 갖는 체험적 측면(지적.의지적.규율적 측면과 별개로)이 주제가 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생소한 영역으로 옮겨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 지각',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한성,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 등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도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각은, 오늘날보다 과거에 훨씬 더 잘 이해하던 영역이다. 이 분야에서 우리는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지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 무방하리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직접 지각'은 생겨날 수 없으며, 성경적 기준이 없으면 그러한 지각을 식별할 수가 없고, 성경적 신학이 없으면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지각 자체는 돌발적이고 주권적이다.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어서 요구하거나 예측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생겨난다. 통상(여기서는 모든 것이 개인별 맞춤이기 때문에, 이 단어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지각을 주시며, 그것은 그러한 신자에게 성부와 성자가 찾아와 함께 거하고 자신들을 나타내 보이시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요14:18,20-23)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지각('체험'보다는 이렇게 부르는 편이 낫다. 물론 우리가 '체험'이라고 할 때 바로 이러한 직접 지각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제임스 패커의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발췌(93-1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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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성령의 지속적 사역: 다락방 강화에서의 그리스도의 맹세를 성취하는 일(요14-16장) / 마이클 호튼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성자 안에서 말씀하셨지만, 안에서 균일한 우주를 생겨나게 하시고 그래서 삼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질서 있는 영역을 창조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다. 심지어 일반 은총 안에서도 칼빈이 말하는 대로 이 타락한 세상에서 선함, 진리, 아름다움이 꽃피는 곳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가 누릴 자격이 없는 지혜와 건강과 그 밖의 유익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창조 속에서도 성령은 역사하시며 하늘의 예루살렘을 이 시대 속으로 가져오시는 한편 지상의 도성의 기둥들을 떠받치신다.

 

새 창조에 있어서 성령은 내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깨닫게 하신다. 요한복음 14~1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다스림을 매개하실(그리고 지금 매개하시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높아지신 은혜와 영광 가운데 우리를 다스리시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면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셔서 삼위일체 창조주께 "내가 여기 있사오니"라고 대답하게 하신다.

우선 먼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은 사법적이다.
성령은 다가올 심판을 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을 책망의 초점으로 삼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보냄 받으셨다(요16:8).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복음의 확산을 특징짓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청중이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을 때(행2:37) 이 약속의 경험적 효과를 본다. 성령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시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죄책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설득하실 것이다.

둘째, 성자가 모든 진리의 유일한 화신이므로 성령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보냄 받으실 것이다(요16:13).
성부는 말씀하시고 성자는 위격적으로나(영원한 낳음) 사역적으로나(복음) 성부가 말씀하시는 내용(말씀)이다. 피조물 안에서 그 말씀의 발화 효과를 일으키시는 일은 언제나 성령의 역할임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성령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낳는 원천이다. 성자는 지상 사역 기간에 자신의 권위를 근거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설명하셨다(요16:13). 성령은 예수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천상의 머리에 우리를 연합시키신다. 성령은 우리의 일상적인 역사를 혼란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새 창조 속에 끼워 넣으신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성부, 성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이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의 경건한 체험을 확증하기 위해서나 우리가 윤리적 왕국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오실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물론 성령의 오심은 우리의 경험과 윤리적 행동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지만 성령의 사역의 초점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전파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역사는 우리를 지금도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는 자신의 증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그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시는 법정으로 우리를 안내하시는 성령의 사역 외에는 우리에게 멀고 사라져 가는 기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정복이 아닌 갈등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에서 '증인'이란 말은 헬라어 단어 마르튀스의 번역어이며 이 단어에서 순교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nartyr)가 나왔다. 전투하는 교회는 성령에 사로잡혀 자유롭게 그리스도께 현재 이 시대의 권력이 말하는 '아니요'와 반대되게 '아멘'으로 대답하는 세상의 일부분이다. 패배하지도 않았고 아직 완전히 승리하지도 않은 전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고난받는 증인이다. 이 둘 사이의 공간은 교회에 있어서는 불확실할 곳이며 교회가 종종 자신을 그 승천하신 머리와 같이 영광 가운데 다스리는 존재로 상상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락방으로 가서 성령 세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행1:4~6).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교회는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처럼 모여서 말씀과 떡을 떼는 일에서 예수님을 인식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땅 끝까지 선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오순절과 재림 사이에서 성령은 죄인들을 말씀을 듣는 자들로 만드심으로써 죄책과 용서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을 주신다. 실제로 성령 자신이 말씀을 들으시는 분이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선교사로서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요16:13). 교회는 성령의 내주와 능력 주심으로 선자자들과 사도들의 외적인 말씀뿐만 아니라 성부 및 성자와 본질이 같으신 분을 통한 그 증언에 대한 내적 확증도 갖는다. 말씀 하나님을 육신으로 잉태되게 하신 성령은 성자에 관한 말씀의 원천이자 해석자다. 그리고 성령은 과거에 대한 진리(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진리(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실' 일)도 말씀하실 것이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우리를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이 은혜의 경륜에 집중하도록 이끄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역사하신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더불어 사명을 띠고 나아가시며 최소한 위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밖으로는 사랑과 증언과 봉사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외향적인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외향적인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한복음 16장에서 가르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통해 부활까지 그리스도 자신의 숙명으로 이끄신 바로 그 성령이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발자취로 이끄신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첫 번째 증거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선포한 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강론에서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은 소위 말하는 "개인적인 종교적 의식 속에 들어오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성령의 영감"에 대한 모호한 정서가 아니라 "그것 나름으로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봉사하는 성령의 선물로 이해해야 하는 구체적인 교회 관습의 형태를 띤" 인도하심이라는 점을 라인하르트 휘터는 지혜롭게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성령은 예수님이 누가복음 24장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말씀 선포와 성찬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이자 주님으로 인식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세례, 가르침, 성찬, 장로들과 집사들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돌봄 등의 피조물적인 수단을 통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은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영감받은 진리를 새로운 언약 공동체에 전달하고자 했다.

 

셋째,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하신다(요16:14). 14절과 15절이 구속 언약에서 성령과 성자가 공통의 보화, 즉 그 두 분이 성부와 함께 우리와도 함께 나누시고자 하는 보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이 상호성(페리코레시스)을 강조하는 것과 같이 이 말씀은 분명 성령의 증언의 핵심을 가리킨다. 이 점은 아마도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가장 충분히 표현될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를 영화롭게 하셨고 이제 성부와 성령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성자는 내용(발화 수반 행위)이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발생하게 하며 그 말씀들을 열매 맺게 하신다(발화 매개적 효과).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그들(그리고 우리)을 떠나 계시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자신의 삼중 직분이 (이제는 다만 하늘에서) 지속되는 것임을 확신시키신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그러나 예수님의 떠나심은 역사 속에 갈라진 틈을 내고 그곳으로 성령이 그리스도를 위한 언약적인 몸을 창조하시기 위해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14:16-18).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과 교회 안에 거하시지만 직접 육체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하신다(고후1:22. 참조, 롬8:17,26; 고전3:16; 갈4:6; 엡5:18). 이 직접적인 임재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돌아오심과 다름없는 것이 요구된다. 승천으로 인해 지상의 교회는 승리한 교회가 아니며 장차 만물의 갱신을 위해 그 머리의 육체적인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육체로 보았겠지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승인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전달하도록 주신 복음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본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함께 먹었지만 성령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인식하지 못했다(마16:17). 지금 이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스승의 경력은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다가올 시대의 첫 열매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역사상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로 인식하게 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고후5:16-17). 몸인 교회는 불가분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구속사 안에서 교회에 영화롭게 된 머리와는 다른 곳에서 존재한다. 자신과 더불어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를 확보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역사 속으로 끌고 가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2:6). 성부는 은혜의 예전을 말씀하시는 반면 성자는 스스로 그 예전의 화신이시며 다음으로 성령은 영화롭게 된 앞서 가신 분 뒤에서 적절한 "아멘"으로 화답하며(고후1:19-22) 답가를 부르는 찬양대를 창조하기 위해 "불순종의 아들들" 안에서 역사하신다. "곧 이것(불멸)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성령 강림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시계는 현재의 이 악한 시대 위로 재깍재깍 흘러가고 있다. 지옥의 문들은 교회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은 "이 마지막 날"에 한 믿음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영화롭게 된 머리의 언약적인 역사(그리고 종말론) 속으로 삽입된 공동체를 보증할 것이다. 실제로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은 신자들 가운데로 보내심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최종적 구속의 보증(아라본)으로서 그들 안에 거하시기 위해 그들 속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기 때문이다(롬8:23. 참조, 갈4:6). 성령은 우리의 최종적 구속의 아라본(첫 불입금)으로서 우리가 새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일의 '이미' 이루어진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다(롬8:18-28. 참조, 고후1:22, 5:5; 엡1:14). 성령의 임재는 우리를 절망에서 지켜 주지만 승리주의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성령에게서 다가올 시대의 실재를 더 많이 받을수록 더 들뜨게 되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서 난 동요가 아니라 이미 미래를 미리 맛본 데서 오는 동요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우리는 또한 성령이 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삼중 직분의 발화 매개 효과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소송을 제기하시고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지자 사역을 매개하신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자 선포된 말씀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 안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바르트의 명언과 같이 "말씀의 주는 또한 우리의 들음의 주다."

 

성령은 또한 "또 다른 보혜사"(변호사)로서 그리스도를 대체함으로써가 아니라 내적으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며 용서에 대해 확신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 매개하신다. 이 강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의 가르치시는 사역의 내용임을 강조하신다(요15:26b). 성령은 또 다른 말씀을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 대해 '아멘'을 불러일으키신다.

 

성령은 불신과 죄의 폭정을 굴복시키시고 죄인들에게 그들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믿음을 주셔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을 매개하신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목사들과 장로들을 주시고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께 속한 목자들로 준비되게 하신다(엡4:11-16). 성령의 이 사역을 통해 민수기 11장 29절에 나오는 모세의 요청("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은 모세의 가장 무모한 꿈 이상으로 성취될 것이다. 70인의 장로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온 진영이 성령 충만한 증인들의 공동체가 된다. 성령은 임명된 직분 담당자들의 사역을 통해 온몸에 주어진 많은 은사들을 주시고 조율하시며 직분을 맡은 자들은 성령의 은혜(존재적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은사들(소명)에 있어서만 서로 다르다. 따라서 누가복음 9장 1-6절에서의 열두 제자의 사명은 누가복음 10장에서 70명에게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는 오순절의 사명 위임 의식의 서곡일 뿐이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 또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즉 우주적 법정에서의 참되고 신실한 증인, 우리의 구속주를 찬양하며 화답하는 성가대로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재창조된다.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_17장 '성도로 부르심 받음'에서 발췌(555-5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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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어떤 면에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흡사하다. 등산가에게 낮은 봉우리들은 단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최정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에 불과하다. 이로 유추해 볼 때, 개인의 중생이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과격한 변화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이것만 알고 있으면 성령의 사역의 충만한 분량을 놓치게 되며 낮은 등성이에서의 조망으로 만족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거듭남이란 장차 완성을 기다리는 새로운 창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한 바와 같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체 역사에 관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 곧 그분의 광범위하고도 공동체적인 사역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하고, 이와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종말론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즉 모든 회중을 불러내신다.

그리스도 사역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묘사한 신약 성경의 많은 비유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떼를 이룬 양들이요, 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요, 신랑의 친구들이요, 성전의 돌들이요, 새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권면들은 개인적으로 심령에 적용되도록 의도된 것이면서도, 일반적으로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복수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은 개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한다.

바울의 신학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사용한 다음의 비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즉 교회란 우리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13).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다. 곧바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1) 바울이 교회를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사회적.문화적 장벽이 무너진 그리스도의 '몸'(body)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무엇인가?

(2) 성령은 어떻게 세례를 통해 이런 몸으로 들어가도록 관여하는가?

 

 

그리스도의 몸

 

첫 번째 질문은, 바울이 사용한 몸의 비유의 기원을 추적함으로써 바울이 의도한 의미를 규명하려는 노력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많다. 본문의 의미는 단순하게 어떤 용어의 어감이나 기원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바울이 가진 사고의 세계에서 몸이라는 개념이 나올 만한 배경을 다양하게 분석해 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도출될 뿐이다.

 

로마 제국의 문학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이란 개념은, 사람들이 중요한 측면에서 함께 결속된 집단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이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메네니우스 아그립바(주전 약 494)의 우화인데, 이것은 리비의 '로마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메네니우스 아그립바는 한 우화를 통해서 민중에게 폭동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그 우화는 몸의 다양한 부분들이 위장을 질투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결과 몸 전체가 망쳐진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의 성례전적 신학에서 그 근거를 찾으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 및 그분의 백성의 하나됨을 동시에 상징하는 빵을 떼는데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최근에는 이것을 고린도 지방의 한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연구도 나왔다. 고린도의 아스클레피온에 대한 고고학적인 탐사에서 인체의 여러 부분을 조각한 테라코타 작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치료의 신(神)인,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우스에 의해 치료된 신체의 각 부분을 묘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바울이 이 비유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이러한 접근은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은유의 기원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단순하지만 최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는 개념이 '공중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바울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이 용어를 채택한다. 특별히 그가 묘사하고 있는 '몸'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분은 몸의 머리요 지배자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섭리 목적에 따라서 우주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머리이시듯이(엡1:22), 자신의 나라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를 지배하며 지도하는 머리가 되신다(골1:18). 여기서 '머리'(kepbale)는 신체의 일부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해부학적 단어가 아니라, 관계성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요, 우주(kosmos)와 교회(ekklesia)를 동시에 지배하시는 분이다. 개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즉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의 생명덩어리로 분리 불가능하게 묶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또한 서로에게 속해 있다.

 

 

성령 세례

 

다음으로, 이러한 몸으로 들어가게 하는 세례에서 성령의 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례와 성령은 신약 성경에서 일곱 번 서로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여섯 번은 명백하게 오순절을 지칭하는데, 성령의 역할과 관련하여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사도행전 1:5, 사도행전 11:16  -->

성령으로(en pneumati bagio)

 

위의 각 구절에서 세례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성령은 그 매개체이다. 일곱 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12:13  --> 영으로(en pneumati)

 

위의 진술들 가운데 '으로'(en)라는 전치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세례에서 성령이 집행자('by the Spirit')임을 지적하는 것인가, 아니면 매개체('with/in the Spirit')임을 암시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이 세례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라는 좀더 깊은 질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쓰인 '으로'(en)라는 전치사는, '의하여'(by), '함께'(with), '안에'(in)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성령을 매개체(with/in the Spirit)로 보고 있지 집행자('by the Spirit')로 보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주제를 만나는 곳마다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한 가지 용어, 즉 성령-세례(Spirit-Baptism)라는 언어 표현을 마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일관되게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보여 준다. 즉 "그분이 세례를 주실 것이요..."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몸의 모든 구성 요소가 한 성령을 공유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합병될 때 동시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일한 실재의 양면에 해당된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성령이 창시자인 어떤 사역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요, 회심 이후의 성령 체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며, 신자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을 마시게 된, 즉 성령을 처음으로 받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참고. 요4:13-14; 7:37-39).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령은 그 세례의 매개체이다. 그러나 이 몸 안에서 삶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수단들, 특별히 세례 의식, 주의 만찬과 사역 등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세례

 

물 세례의 시행은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그것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에 대한 세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 이전에도 그런 세례가 있었느냐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요한의 세례의 경우에는 확실히 해당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반응으로 참된 회개가 시작된 표식이었다. 한편 요한에게 받으신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 시대와, 십자가의 세례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될 사역으로 진입하는 공적인 시작을 알리는 표식이었다(참고. 눅12:50).

 

성령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시작하도록 한다. 물로 받는 세례는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상징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여기서 회개, 물 세례,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는,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속으로의 교제로 진입하는 하나의 실재의 연결된 측면들로 보인다(마28:19).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영적이며 내적인 특성을 가진다면, 그러한 외적인 의식들이 과연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새로움과 일치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곤 했다. 외적인 의식이 성령 사역의 충만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내적인 빛'(inner light)에 대한 가르침이 지배적이던 17세기에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세례는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다....요한의 세례는 그에 대한 비유였고 한시적으로 명령된 것이며, 영원히 존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초대교회는 마태복음 28:18-20의 정신에 따라서 물 세례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조심스럽게 물 세레와 성령 세례의 차이점을 구별하였다(행10:47; 참고.11:16). 여기서 바클레이와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외적이며 물리적인 세례 의식에 내포된 신학적인 구조를 인식하는 데 실패하였다. 세례와 성만찬 모두 복음의 언어적인 표현에서 사용된 상징들(the signs; 단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말씀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이 알려지신 바 된다.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가 오면서 쓸모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복음이 우리 인간의 조건과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 더 잘 들어맞음을 가시적으로 예증해 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지상명령에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생길 때마다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주님이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임재하시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마28:18-20).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내적인 끈으로 역사한다. 그분이 그들과 맺으신 각각의 언약은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보증하는 특별한 증표(sign)에 의해 확정되었었다. 노아와의 언약에서는 무지개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할례가 명백한 증거가 된다(창9:8-17; 17:1-4). 이것들은 언약의 약속을 상징하며, 믿음을 갖도록 그 언약을 확정시키는 물리적인 증표로 작용하는 것이다. '증표와 인침'이라는 용어는 할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롬4:11), 이것은 모든 언약의 증표들이 작동하는 방법(modus operandi)을 잘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노아는 폭풍우 뒤에 언약의 상징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창9:12-17). 약속에 덧붙여서 증표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확증(도장)으로 작용하였다.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그가 베푼 세례의 주된 역할은, 세례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실존적이며 개인적인 중요성과는 별도로, 메시아가 계시되게끔 역사적 상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1:31). 자주 간과되는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세례 시에 그분에게 주어진 증거와(막1:11), 그의 세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의 성취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견해와 함께(눅12:50; 막10:38-39), 물 세례가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 내적 의미(증표)를 지적하고 인치심을 받은 그에게 이를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세례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부의 말씀이 첨가되었으며, 성부의 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여 지금 상징된 그것이 십자가 상에서 참되고 최종적인 세례 가운데 충만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구비시킨 것이다. 곧 그분의 피에 담긴 새 언약을 향한 발걸음이요 그 중심에는 새 언약적 성령의 선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겔36:26-27).

 

신약 성경에 의해 '세례'로 간주되거나 적어도 세례에 유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구약 성경의 두 사건은 한결같이 호된 물 시련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저주받는 동안 선택받은 자들은 구원으로 인도되었다. 이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벧전3:18-21),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고전10:2) 모두에게 해당된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진정한 세례도 물로 말미암은 호된 시련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시편 69편은 호된 물 시련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69:1-2).

 

이 시편은 성격상 신약 성경에서 메시아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구절들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언급되었다(시69:9은 요2:17과 롬15:3에서; 시69:4은 요15:25에서; 시69:25은 행1:20에서; 시69:22-23은 롬11:9-10에서). 물 세례로 상징된 극도의 시련이 십자가 상에서 실재로서 나타난 것이다. 요단 강에서 행해진 상징이 십자가 상에서 그분의 머리 위에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폭풍의 압도적인 힘 속에서 성취된다. 그분은 자신을 죽이다시피 한 비애와 쓸쓸함을 경험하였다(막14:33-34). 여기서 그분의 할례(눅2:21)가 상징하는 바와 그분의 세례가 상징하는 바가 하나로 결합된다(참고. 골2:11-15). 그리스도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다'(사53:8). 그는 자신의 양 어깨에 멘 '우리의 모든 죄악'(사53:5-6, 8, 10)으로 인해서 압제 당하신다(사53:7-8).

 

바로 이런 수단들에 의해서, 용서와 구원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가 언약적인 저주를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복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로 성취된 것이다(갈3:13-14).

 

새 언약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이다. 이는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실체를 상징하며 인치는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 따라서 믿음은 물 세례를 통해 상징되고 인쳐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령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세례가 지닌 내적인 의미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따라서 거듭나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는 상징과 실재 사이의 제삼의 조건(tertium quid)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세례에 대한 신약 성경의 모든 공식적인 진술 속에 전제되어 있다.

 

로마서 6장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런 원리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표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세례 받았으며,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분의 부활의 권능 가운데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라고 여기도록 격려받는다.

 

자연스럽게도 해석자들은 이것을 실제적인(혹은 유사) 성례주의라고 추론하거나 그와는 정반대로 여기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물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교단적 입장을 대변한다. 제삼의 대안이란 허용될 수 없다(Tertium non datur). 그러나 믿음을 떠나 의식 자체만으로 그 상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신약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다. 제삼의 가능성이 있다. 즉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 결과로 세례를 통하여,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믿도록 조명한다("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따라서 말씀과 관련된 그분의 사역과 성례와 관련된 그분의 사역에는 직접적인 병행 관계가 존재한다. 둘 다 객관적인 증표이다. 두 경우 모두 성령이 의미를 깨우쳐 주고 적용시키며, 그것들이 지시하는 실재가 믿는 자들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게끔 한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회심이라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거울로 생각되며, 그 핵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증거로 종종 간주되곤 한다. 따라서 회심 시 복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한 증표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경의 관점이 아니며, 세례의 축복을 과소평가함은 물론 세례와 관계된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에 따를 때, 모든 사람은 세례를 자신의 믿음의 결단을 반영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은혜의 상징이요 인치심이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예비하신 부요함의 상징이다. 상징되고 인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물 세례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은혜이다. 따라서 믿음은 세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표에 의해서 인쳐지며,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에 대해서처럼 믿음이 그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말씀으로 해석되는 상징과 함께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우리에게 확증되며, 그 확증에 의해 믿음이 강화되고 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행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세례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되, 그분의 메시아적 사역에 포장된 바 그분께 속한 것들을 취하여 백성에게 그분을 밝히 드러낸다.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말씀은 변화를 시키든지, 강퍅하게 하든지 그 기능을 수행한다(사55:11; 막4:10-12). 이와 유사하게 복음의 성례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은혜 안에서 변화를 초래하거나 심판 아래 강퍅하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경고할 때 무분별한 정신으로 성만찬에 참여할 때 그들은 아무 변화 없이 떠나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실상 그들은 심판을 먹고 마신 것이다(고전11:27-30). 복음의 상징에 대한 거부는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거스르고 반항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런 원리를 인식하면서, 미혹으로 곤궁에 처했을 때에 스스로를 향해서 '나는 세례 받은 자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해 성령이 밝혀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고백으로 대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보내신 분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듯이, 세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게 된다.

 

성령이 세례를(성찬도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성례 신학에서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을 피할 수 있다.

(1) 한 가지 오류는, 의식의 상징적인 성격을 매우 주관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행동, 결단, 경험에 의존하게 만들어 믿음의 기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즉, 믿는 자 스스로의 자원이나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로 돌이키게 하는 믿음의 기능을 망각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오류는, 상징이 축복의 효력을 지나치게 객관화함으로써, 상징의 수납을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수납과 동일시하고, 그 상징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믿음의 여지나,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의 유효성은 성경을 읽는 것과 듣는 것의 효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듯이 성령의 사역으로부터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주의 만찬

 

세례와 성찬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언약의 상징이자 인을 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성례는 독특한 기능과 독특한 목적을 갖고 있다. 세례는 시작이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징으로서 단 한 번 받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의 상징이요 자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성령은 어떤 것을 특별히 증거하는가?

 

성찬의 핵심은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그것을 받아 먹는 것은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10:16).

 

이것 역시 세례처럼 언약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월절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은(그것의 성취가 성만찬이다, 고전5:7-8), 하나님의 심판 곧 죽이는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의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그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린양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참여함을 의미했다(출12장). 그것은 언약에 의해 구속되고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한데 묶여 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성만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새로운 언약을 인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담당하셨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도모할 새로운 언약의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언약의 저주와 심판의 잔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받으셨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자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그분의 간청은(마26:39),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이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암시한다(시75:8; 사51:17,22; 렘25:15,17; 겔23:31-33; 합2:16;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잔을 마심으로, 예수님은 헐벗음과 가난함과 목마름과 굶주림 가운데서(참고. 신28:45-48), 그리고 어둠 속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의 저주(마27:45; 참고. 창15:12) 아래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나무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는 저주 받은 사람의 경험을 모두 겪으셨다(갈3:13).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고 치시며 괴롭히신다고 느끼셨다(사53:4-6,10; 마27:46).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두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눅24:39).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 것이다. 그분이 떡을 떼실 때 제자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근본적인 역동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에 심판의 저주를 퍼부으시는 대신, 신자들은 믿음을 통해 언약의 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이제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이 그처럼 중요한 이유는 분명해졌다. 오직 성령의 사역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성찬에 대한 가톨릭(ex opere operato: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소위 예전적 성례론으로서, 성만찬을 신부로부터 받아 먹으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주장-역주)과 복음주의(기념설 주장자들: 루터에 반대하여 츠빙글리가 내세운 견해-역주)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다가 이제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누리는 것은 교회의 제도나 우리의 기억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장소적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제한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로마 가톨릭의 견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단지 그분을 기억하는 일뿐인 것처럼 성만찬에서 떠나 계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기념설의 견해).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by the Spirit) 그 물질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알려지시는 이다. 성만찬에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교통(communion)이 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주님이 성경 안에(장소적으로), 혹은 믿음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어떤 물질적인 요소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다(행3:21). 그러나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되며 그분은 우리 가운데 서 계신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성만찬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기리켜 언급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것은 요한이, 교회가 '주님의 날에 성령 안에서'(계1:10) 그분과 함께 즐거워할 것에 대해 믿은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역사상 줄곧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예를 들면, 세빌의 이시돌은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임재하게 만든다고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에 자신을 묶음으로써, 믿음으로 성만찬을 받는 성도들에게 성찬의 권능 혹은 힘을 전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르비에의 라트람누스는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화체설에서 최고의 신학자로 자주 거론됨)와 맞서서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뛰어난 논쟁을 벌였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를 성령에 의한 임재로 간주하는 입장을 견지하고자 노렸했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칼빈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그의 강력한 설명에도 여전히 신비의 여지가 남아 있다.

 

비록 우리로부터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에게 침투하여, 그로 인해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하더라도, 어떻게 성령의 비밀스러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초월하여 우뚝 솟아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분량을 우리가 측량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기억하자. 우리의 마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믿음으로 품어 안게 하자. 즉, 성령은 장소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거룩하게 나눌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뼈와 골수에 파고들게 되고, 그분은 또한 성만찬에서,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인을 치신다. 이것은 단순히 공허하며 헛된 상징을 보여 줌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이 그분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함을 밝히 드러내심으로써이다. 그리고 진실로 그분은 거기에서 상징되는 실재를 영적인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고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 즉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참된 믿음으로 그처럼 위대한 자애로우심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받을 수 있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17.10.)

 

이러한 사상[그가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인성의 실재에 대해 강조한다는 이유로 실제주의라고 불리는]은 칼빈의 성만찬 교리 전체에 깊이 배어 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고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영광스럽게 되신, 바로 그 인간의 몸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신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된다."(Institutes, IV.17.4.)

 

성만찬에 대한 일반적인 복음주의 교리보다 오히려 칼빈의 용어가 훨씬 더 실재적임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그의 강해는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어는 요한복음 6:51-58과 고린도전서 10:16에도 확실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의 말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때문에 성경 자체에 대한 불편함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신중해야만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실제로(real) 먹고 마신다는 견해를 가진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carnal, 식인종처럼) 그 몸과 피를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문맥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칼빈이 주장하는 바 성령의 권능과 역할이다. 성만찬에 관한 그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강림하시는 성령 사이의 연결성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고자 강림하신다(참고. 골3:1-4). 이와 유사하게, 성만찬에서 성령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성도 사이의 '떨어진 간격을 메꾸려고', 그리고 승귀하신 구주와 교통하게 하려고 찾아온다.

 

그러나 칼빈의 질문은 좀더 나아간다. 성찬의 식탁에서 신자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와 교통하는가?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 당하고, 죽으시고, 장사지내고, 살아나실 때에, 또한 지금 영광 가운데 승천하실 때 인성으로 옷 입으신 그 그리스도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Logos ensarkos) 외에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통을 통하지 않는 다른 은혜의 방법은 없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합체라는 신비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통한다. 우리는 성령으로/영적으로, 즉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교통한다.

 

칼빈이 이보다 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될 필요는 없다. 이보다 덜 말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고전10:16) 교통(koinonia)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혹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인성의 지속적인 실재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은 칼빈이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에서 말한 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독론적 사상이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승천의 진리를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것을 파악하기만 하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물론(이 종교개혁가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것이 나타내는 진리는 여전히 신비 속에 감춰져 있지만, 덜 난감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6:14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여 그것을 제자들에게 알린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도적 계시를 통해서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만찬에서는 성경에 이미 알려지지 않은 다른 것이 새롭게 계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만찬에는,

(1) 눈에 보이는 상징물이 있으며

(2)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보혈에 대해 단순하고도 특별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로 인도하며, 성령 사역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새로운 계시란 없다. 다른 그리스도가 알려지는 것도 아니다. 로버트 브로스(Robert Bruce, 1554-1631)가 잘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성만찬 때에 말씀에서 얻는 그리스도와 다르거나 혹은 더 나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이 말씀과 결합된 물질적 상징의 증거를 통해 역사하실 때, 동일한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Robert Bruce, pp. 64, 85.)

 

과거에 기독교 저자들이 솔로몬의 아가서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성을 설명하고자 구애, 사랑 그리고 결혼 등의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입맞춤'이란 말을 했는데, 이것은 성령의 비밀스러운 사역을 의미한다. 입맞춤이라는 육체적인 표시 혹은 행위가 사랑을 전하는 것처럼(또는 상징하는 것처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가리키는 물질적인 표시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에 의해 사용되어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을 향해 품으시는 사랑이 전달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은혜의 확정인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서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 있다. 즉 신자들이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성령에 의해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 때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은 완성될 것이다(고전11:26). 또한 성령께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때(계22:17), 상징물에 의해서 표시되던 것의 충만한 실재가 임할 것이며, 그러한 상징물은 성전 건물처럼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다(계21:22).

 

 

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발췌 / (219-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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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성령님의 내주하심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기독교는 참으로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섬기는 실재적인 종교이다. 이슬람교와 같이 허황되거나 거짓된 종교가 아니다. 또 로마 신화와 같이 인간이 치밀하게 궁리하여 꾸며 낸 이야기도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참된 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다른 증거들과는 구별되며서도 훨씬 더 탁월하여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그것은 바로 신자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심어 주시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 위대한 진리는 너무나 분명하여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하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궤변이나 사탄의 술책으로도,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악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이 진리를 약화시키거나 제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증거들을 뒤로하고 친히 증인석에 앉아서 사역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대적하여 "누가 정죄하리요?"(롬8:34)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이 증언의 갑옷을 입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가장 연약한 제자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서는 '매우 이성적이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는 있지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확신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은 없다.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신앙이 정직하고도 담대하게 선포되고, 또 이 정직하고도 담대한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에 강력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회의론자들이 그에게 도전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고, 여러분이 대답할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공격할 수도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던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증인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적 추룬의 능력이 힘을 얻고, 그의 영혼이 더욱 온유해질 것이다. 또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그 신자의 모든 행동이 진실해지며, 결국 그 모습에 감동을 받은 대적자들이 지난날 주님께서 받으신 찬사를 고스란히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7:29).

 

그는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믿을 뿐만 아니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어떤 대적도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눅21:15)를 그에게 주셨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주된 이유에 대해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특별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복된 이 교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 더욱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곧 자신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신자들이 경험하는 위로와 거룩하고도 자녀다운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이 주제는 그 무엇보다 위대하고 소중하다. 특히 이 주제의 광대함은 가히 압도적이라고도 할 만하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사57:15)가 사람과 함께, 아니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생각해 보라. 그분이 자신의 피조물인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한 민족을 불러내어 그들을 성령님께서 거하실 장소가 될 만큼 새롭고도 거룩하게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또 이 천상의 방문자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면서 자신의모든 능력, 곧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인 치고 위로하는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광대하고 영광스러운지, 이 유한하고도 보잘것없는 마음으로는 절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 주제에서 흘러넘치는 위로가 참으로 크고, 이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 너무나 큰 동기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 주제를 통하여 큰 영광을 거두신다. 그래서 이번 장의 가장 첫머리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부디 성령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진리를 펼치시며, 그 거룩한 영향력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1. 하나님의 성전으로 창조된 신자, 그리고 타락

~생략

 

2. 성전의 회복

~생략

1)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순종

2)그리스도의 죽으심

3) 그리스도의 부활

~생략

 

 

 

3. 성령의 내주하심

 

이제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성경의 증언

 

먼저, 이 교리에 대해 성령님이 어떻게 증언하시는지를 보자. 이 진리가 잘 나타나는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특히 신약성경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구약성경을 보면, 그 시대에도 이 교리가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서를 보라.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겔36:27).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겔37:14).

 

신약성경에는 이 교리가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펼쳐져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롬8:11).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고후6:16).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더 많은 구절을 찾지는 않겠다. 이 정도로도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성경이 증언하는 교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중생의 역사

 

성령님께서는 언제 영혼 가운데 들어가시는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중생의 순간'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행하시는 첫 번째 은혜로운 역사이다. 중생의 순간 이전에는 모든 것이 어둡고 황량하며 죽어 있었다. 이미 우리는 이 사실을 앞에서 다룬 바 있다. 성령님께서 자신의 교훈과 생명과 빛과 질서를 가지고 영혼에 들어오시기 전에 그 사람이 겪던 도덕적인 몰락에 대한 두려움과 영혼의 황폐함에 대한 공포를 어느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시는 것이 더 정확하고 생생한 묘사일 것이다.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1:19).

 

그런데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은혜 언약에 합당한 방식으로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그분은 이 언약을 자신의 사랑의 날개 위에 올려놓고, 그 위대한 힘과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구세주께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산 성전을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소유하시는 모습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 어둠과 적의와 더러움과 죽음은 물러가고, 빛과 사랑과 거룩과 생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에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는 것이 당연하다(눅11:21 참고). 그러므로 우리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모든 저항에 맞서 싸워 결국 그 의지를 굽히고 적대감을 없애며 그 마음을 풀어서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해야 한다.

 

'여호와께 복 받을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창24:31). 들어 오셔서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취하소서. 제가 오랫동안 주님께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주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저를 정복하고 지배하셨으니, 복되신 성령님이시여, 저에게 들어오셔서 저를 주님의 것으로 인 치소서.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한 슬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시며, 우리의 영혼을 낮추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재 가운데 스스로 낮아지게 하시고,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양심에 용서와 평화를 선언하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3)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문이 건축했던 성전의 웅장함과 장엄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 땅에서의 영광일 뿐이다.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는'(행7:48 참고) 성령님께서 설령 그 성전 가운데 강림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세우시고 거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전과 비교해 볼 때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이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하기에 사도는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그 성전이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명령하신 기준을 충실히 따랐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복음의 경륜과 비교해 보면 그 성전이 가진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인가? 오늘의 복음시대와 비교해 보면, 그 당시에는 성령님의 임재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시대를 그 어떤 시대보다 특별하고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임재가 더욱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성도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고후3:8-10).

 

 이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영광이 탁월한 것은 그 영광이 더욱 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리시는 역사가 전보다 더 자주, 풍성하게 일어난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고 인 치시는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그리스도와 닮아 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거룩한 역사가 더 자유롭게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더 단순하고 영적인 모습이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주하시는 역사야말로 이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특별한 현현(顯現)이 있다.

 

성령님께서는 임마누엘께서 성취하신 광범위한 속죄 사역의 기초 위에서 은혜 가운데 불쌍한 죄인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룩하게 만드시고 영원토록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증언하고 역사하시사 그들을 빛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물려받게 될 기업에 합당하게 만드신다.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2:22)가 된 영혼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전능한 능력이 영화롭게 되고, 예수님의 속죄 사역과 충족한 은혜와 죄인들을 향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연민이 영화롭게 되며, 저항할 수 없는 성령님의 능력과 무한한 인내와 효과적인 사역이 영화롭게 된다. 영혼을 회심시키고 그 영혼에게서 일어난 회심이 지속되도록 돌보며, 그가 거룩하고도 정직한 걸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그 긴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피고 마침내 그를 영원한 행복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천 개나 더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보여 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성령님께서는 신자 안에 거하시되 영원토록 거하시며, 모든 은혜와 평안의 영으로 거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질 수 있는 진정으로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모든 것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서 비롯된다. 또 영혼이 거룩한 호흡을 하고 거룩한 것을 열망하며,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뜻과 형상을 닮고자 소망하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이다. 더 나아가 성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모든 것과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것들도 전적으로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보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런데 10절 말씀을 보면, 이 샘물이 곧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알았더라면."

 

이 '하나님의 선물'이 성령님을 의미한다는 점은 요한복음 7장 38,39절에서 더욱 강조되어 제시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것이야말로 은혜로운 진리이다. 모든 영적인 복이 깊고도 생명력 넘치는 샘물이신 성령님에게서 솟아난다. 성령님께서는 고여 있는 물처럼 영혼 속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날씨가 궂을 때나 좋을 때나 습할 때나 건조할 때나, 그 어떤 외부 환경에도 상관없이 사시사철 항상 흘러 넘치는 샘물이시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맺게 되는 열매들은 절대 저절로 맺힐 수 없는 것들이다. 의에 주리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려는 것이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소망하는 것, 죄의 법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나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의 원리에 대해 슬퍼하는 것 등은 모두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맺게 하시는 귀중한 열매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자연적인 것과 은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해했던 적이 많을 것이다. 또 율법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의 사역과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비결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청난 차이를 밝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마련이므로, 그것이 처음 시작된 근원으로 다시 올라가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죄인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솟아나는 샘물, 곧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이다.

 

자신의 마음에 임한 재앙을 저절로 알게 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재 가운데 엎드려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과연 사람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또 자연적으로 은혜의 보좌를 사랑하게 되고, 속죄의 보혈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로, 잘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이 저절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모든 일들은 자연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들이다. 여러분이 방금 말한 상태에 있는가? 위를 바라보라. '혈육'은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못한다(마16:17 참고). 이것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신 분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복된 성령님을 통해 그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5) 거룩의 영

 

성령님께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되, '거룩의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가볍게 여기면, 그분을 증인이나 위로하시는 분으로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도 다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다음 장에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성화의 사역을 다루겠지만, 여기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관련하여 성화의 사역을 잠깐 살펴보자.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감당하시는 사역 가운데 특히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한 부분이다. 성령님께서는 단지 신자 곧 성전의 질서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의 순결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영혼이 다시금 거룩한 통치를 받도록 만드시고,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확립시키고 율법의 교훈을 드러내시며, 그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신다. 또한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널리 전파되어 그 율법이 가진 온유하고도 강력한 구속력 아래서 신자들이 '주의 계명들의 길로'(시119:32) 달려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 안에서 성령님은 '거룩의 영'이 되신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어떻게 진행하시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장(5장)을 참고하라.

 

6) 영원토록 내주하심

 

우리는 성령님께서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영원하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자신의 보좌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요14:16)를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분의 영적 임재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임재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님께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이 진리를 간과하지 말라. 영적 어둠과 불신앙의 역사가 일어나 자신에게 내재하는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안과 위로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구름과 어둠이 일어나 이 진리를 둘러싸 가릴 수도 있다. 혹독한 시련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비관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불길한 예감 때문에 두려워 떨 수도 있고, 험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만나기도 하며, 어둡고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믿음이 약해져 불신앙에 뒤덮일 때도 있고, 여러분의 영혼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탄식할 수도 있다.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42:36).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시77:7-9).

 

그러나 이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백성이 기운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안팎으로 모든 것이 어둡고 절망스러운 그때에도, 거룩하게 하시며 위로자 되시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하신다. 여러분이 강력한 부패성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위로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져 다윗처럼 기도하게 될 수도 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그러나 여전히 복되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분의 작고 고요한 위로의 음성이 그 모든 요란한 폭풍우 소리를 잠재우고서 들려올 것이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동행하신다. 여러분이 아무리 방황하고 게으르며 불친절하고 무가치하며 신실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 무엇도 성령님을 여러분 안에서 떠나시게 할 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우리를 향한 위로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또 성령님께서 우리의 경망스러운 모습을 슬퍼하신 나머지 잠시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뇌두시고, 우리를 위해 증언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잠깐 동안 중단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본래대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마음을 깨뜨리셨다면 그 마음을 다시 싸매실 것이다. 상처를 내시고는 치료하실 것이다. 마음을 거룩한 슬픔으로 가득 채우시고는 그 마음을 변화시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이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54:7).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23:3).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남은 내용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요점만 다루겠다. 이 사역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다른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성령님은 양자의 영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성령님은 증인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님은 미래의 영광을 보증하는 증표요 약속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3,14).

 

성령님은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는 분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이 모든 영광스러운 역사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동일하신 한 분 성령님의 역사이다.

 

 4. 적용과 권면

~생략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님의 구원사역' 中에서 발췌(143-1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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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 서신에 나타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 루이스 B. 스미디즈


바울에게 있어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존재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만큼 쉽지가 않았다. 바울 서신에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문구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보다 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문구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개념은 바울의 사고 내에 대단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바울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자기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전형적인 예를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거하심이 교회 내의 특별한 엘리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전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13:5)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내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도록 기도하고 있다.(엡3:17)

 

그리스도께서는 한 몸이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개념은 바울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단 두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두 번의 경우 모두 구약으로부터의 인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간의 결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결혼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 우상들이 있는 것 만큼이나 화합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유추는 훌륭한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6:16). 또다른 하나는 바울이 예배와 성찬식에서 교제의 필요성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르치는 내용 가운데 있다.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하며 누구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외부인들은 "하나님께서 진실로 너희 안에 계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 말을 이사야 45:15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인 신학을 폄에 있어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에 관한 교리를 펴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셨으나 우리 안에 계신 분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개념은 바울의 서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개념이 흔하지 않은 것 만큼이나 흔한 개념이다. 우리는 아마도, 바울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에게 역사하신다고 항상 말하고 있다고 언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표본적인 구절을 언급하는 것이 적어도 이러한 생각에 대한 바울의 경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주장하고 있다. 성령의 내주는 궁극적인 부활에 대한 확신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이다(8:11). 우리는 2장에서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과 그리스도간의 관계에 대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연구했었다. 그리고 거기서 언급되었던 내용을 여기서 다시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령의 내주그리스도의 내주 로마서 8장에서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들은 로마서 8장에서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그리스도인에게 확신과 그리스도인의 덕에 대한 설명이 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의 삶에 사랑을 가져다 주신다(롬5:5).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신분을 그리스도 안에 세워 주신다(고후1:22). 성령의 임재는 우리의 불멸성에 대한 보증이다(고후5:5).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고전2:12).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롬8:16). 바울은 또한 성령이 그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 주신다고 말한다(고전7:40). 이 예들 가운데 성령의 거하심이 명백히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강하게 암시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바울의 말을 고려해 볼 때, 다음 몇 가지 사실들이 명백해진다:

(1) 그리스도인들 안에 그리스도의 내주와 성령의 내주의 분명한 구별이 없다.

(2) 바울이, 비인격적인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닮은 존재 또는 성령과 닮은 존재로 만든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 비유를 사용한 예는 전혀 없다.

(3)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구체적인 개체인 예수라는 이름의 인물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4)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이나 특별한 순간들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상적인 사실이다.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17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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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론: 성령은 우리 역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 루이스 B. 스미디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상황 안에 있고, 새로운 권위 아래 살고 있으며, 새로운 질서의 계율에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고, 자유케 된 인격체들로서의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받고 있다. 역사는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 교회, 그리고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기업을 굳게 붙들 것을 명하신다. 그분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일깨우시며, 그들을 자신의 사역의 동역자로 삼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양식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자신을 인도자, 주, 머리, 그리고 동역자로서 제시하신다. 그분의 주권은 그것을 알고 그것에 절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는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는 망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주권은 모든 것에 미치며, 그는 그 주권이 만물에게 미치는 때를 향하여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동안 그분은 우리를 자신과의 연합으로 부르신다.

 

십자가와 부활은 성령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교리적 강설의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성령에 관해서 말하는 바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움직이라는 배경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 내에서의 새로운 상황과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의 새로운 국면을 그 배경으로 한다.

 

바울이 성령을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는 방식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실제적으로 차이가 없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창조, 운동, 행동의 하나님이시다. 즉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수면을 운행하셨던 분은 성령이시다(창1:2).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창조되었으나, 그 일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입김(breath) 혹은 영(ruach)을 통해 이루어졌다(시33:6). 인간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영[또는 신]의 능력을 통해 유지시키신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두실 때 우리는 진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4, 15). 성령은 이처럼 창조시에 운행하시고,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은 만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으로부터 소원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미래를 목표로 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 상황을 변화시키시며 그 안에 포함된 인간들을 또한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새로운 상황은, 성령이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위하여 임하실 때 임하게 된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돌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율법이 기록되었다고 전할 때 그가 염두에 둔 이상(the vision)의 요지이다(렘31:33). 새로운 활력, 새로운 세대, 새로운 관계가 성령이 능력 가운데 임하실 때 도래하리라고 약속되고 있다.(사32:15)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 "내가 또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겔37:5, 11)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그분의 영은 뚜렷이 구분되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계시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의 역사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인간의 삶 어디에 존재하시든지 간에, 그는 거기서 영으로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행동이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아래에"(down here)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영에 대한 구약 성경의 표현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대비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 되셨다. 바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죽은 인간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신다. 그는 생명을 창조한 영과 동일한 분이시다(고후3:6).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새 이스라엘인, 신앙을 가진 순종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영이시다(고전12:12, 13). 성령이 옛 언약에서 하나님과 가지셨던 동일한 관계를 새 세대에 있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가지신다.

 

우리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구별을 무시하고 있는가? 어떤 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메시지를 우리 앞에 견지해 두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성령은 주님의 명백하고도 구체적인 실재를 희미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수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벌코프(H. Berkhof)가 말하고 있듯이, 성령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또다른 이름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주이시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 차이를 포착하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옳은 것 같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의, 즉 그 공동체를 위한 그분의 능력 있는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그는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다. 그가 친히 주가 되시며, 그의 능력을 마음대로 행사하시는 한에서는 그는 성령과 구별된다. 마치 자아(the ego)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인격적인 힘과 구별되어야 되듯이.(참고.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VI, 419. 바클레이는 바울이 주와 동일시 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필수적인 구별을 지적하였다: "바울이 그 내용을 기록하였을 때, 그는 삼위일체와 신성의 인격에 대한 교리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체험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그의 체험에 따르면,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여기에, 바울은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성령이 개인적인 체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바울 서신서에 나타나 있는 주와 성령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예리한 연구서에서 잉고 헤르만은 성령이 "성취의 기독론적 범주"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본 문제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곧 바울이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는 구속의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 말의 의미이다. 헤르만은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동일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능"이라는 단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성령은 단지 그리스도와 한 팀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자신의 구속적 기능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헤르만이 이해한 바에 의하면 주님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완수한 대속의 사역을 현세대로 가져다 주시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방법은 그의 영의 방법이다.(참고. 헤르만은 성령에 관한 바울의 모든 진술이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순전히 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모든 진술들은 기독론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성령은 그의 고유 권한을 가진 한 인격체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그는 반드시 한 인격체로 이해되어야지 독자적인 권한을 가진 분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는 "인격체"(person)라는 단어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심리학적으로 형성된 인격체들에 대한 사고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만일 어떤 한 인간이 하나의 구별된 개인으로서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를 인격체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을 독자적인 고유권한을 지닌 인격체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사고 방식이 아니었다.

 

성령은 한 인격체로서 체험되고 알려지며 영광을 받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독자적인 권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한 인격체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로서 알려지고 체험된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분리된 인격체로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인 목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다섯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성령은 지상에서 그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고 실현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②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체험되는 그리스도이시다.

③ 성령은 지금 여기 지금 존재하시는, 그러나 장차 완전히 실현될 새로운 창조를 통치하시는 주로서, 그의 세상적 기능들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④ 성령은 새로운 창조 안에 있는 자유의 삶을 위한 객관적인, 그러나 역동적인 규범이시다.

⑤ 따라서, 새 언약 안에서의 삶에 관한 한, 성령은 현재의 그리스도이시다.

 

성령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합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바울의 노력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이 된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된다. 이제 이 연합의 더 깊은 의미들을 계속해서 탐구하기로 하자.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 (8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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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님과 성령 / 루이스 B. 스미디즈

예수님은 결코 성령 없이 존재한 적이 없으셨다. 또한 그분은 성령 없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신 적도 없으셨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은 그분이 성령과 결코 동일시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별개의 인격체이시다.

창조 사역을 통해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길을 예비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1:20). 성령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셨으며, 그와 함께 하셨다(막1:10). 성령은 그를 광야로 인도하셨으며, 그곳에서 그는 원수의 시험을 받으셨으며, 자신과 "권세들" 간의 문제가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셨다(막1:12).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통해서 그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내신 것은 성령을 통해서였다(마12:28). 그리고 그가 지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부활의 직접적인 증인들로서 부활을 증거할 것을 명하신 것 또한 성령을 통해서였다(행1:2).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시도록 그에게 자격과 권한을 부여 하시고 고무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셨다.(행10:38)

그러나 성령은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신다. 활동의 주체는 구세주이시다. 그는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집행인으로서 활동하시는 구체적인 인간이시다. 성령이 없이 단순한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었느냐는 것은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질문이다. 모세가 기도할 때 그의 손을 받쳐 주었던 사람들처럼, 성령은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조력자로서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께서 성령을 필요로 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증거인 것이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자신과 성령 간의 차이점을 강조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분께서 자신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눅12:10; 막3:28).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의 능력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끊어진 자이다. 그는 "영원한 죄에" 처한 자이다(막3:29). 어쨌든 예수께서는 성령을 자신과는 구별된 분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자신의 사역을 마치시는 시점에서, 특별히 요한에 의해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그 강조점이 바뀌고 있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의미에 있어서만 이 세상을 떠나신다. 또다른 의미에 있어서 그분은 세상에 머물고 계신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몇 장에 등장하는 "떠나심"과 "머무심" 간의 놀라운 연결은 바울의 전망을 예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떠나신다. 그러나  그는 후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요14:1-3). 따라서 한 편으로 그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반면에(요16:16),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요14:16). 예수께서 떠나시고 성령이 그 자리를 대신 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그가 임하실 때, 세상은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물의 외모만 보고 중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때뿐 아니라 처음부터 임하실 것이다. 그의 강림과 성령의 강림은 서로 구별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성령을 약속하셨을 때, 그는 반드시,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 것임에 틀림 없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또한 그의 임재는 다음과 같은 낙관적인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께서는 이미 인류 역사의 조류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6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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