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의 창조적인 대리인으로서의 성령 / 루이스 B. 스미디즈

 

 

주와 성령에 관한 요한 칼빈의 사고 방식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의 특별한 주체성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유익한 예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전제가, 승천하신 주 예수님이 바로 영화롭게 되셨으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었으며 제한되었던 한 인간이신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여기 그리고 신자 안에 존재하시는 분은 바로 인간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참고. 워필드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브루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가 "칼빈주의적 사고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상을 떠나셔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 그분은 우리의 실재를 그가 계신 "하나님의 우편"으로부터 분리하는 간격에 의하여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으시다. 예수님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 계신다. 그분은 덧없는 영(an ephemeral spirit)으로 변화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것들"은, 만일 그분의 행하신 바가 우리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면, 반드시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삶의 현장(out there)으로부터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분의 행위들의 혜택들은 이제 그분의 인격과는 불가분리에 있다. 그것들은 그분 자신인 것이다.

 

성령은 그분과 우리들 간의 살아있는 끈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직분(what is Christ)을 취하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성령은 언제나 인격적인 용어들을 통해 묘사된다. 그분은 생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물질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지는 도관(a pipeline)이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있는, 역동적인 생명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지각을 일깨워 주시고, 그리스도의 실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며, 우리의 믿음을 양육하시고, 우리를 훈련시키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접붙여 주신다.

 

칼빈이 성령에 대해서 생각하는 역동적이고 기능적인 방식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논의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성령은 모든 신적 행동의 능력이자 효력이시다: "행동의 시작과 만물의 샘과 근원은 하나님께 속한다. 지혜, 계획(counsel), 그리고 만물의 질서 있는 배열은 아들께 속한다. 그러나 그 행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속한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그것들을 지상에서 효력있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라는 점에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활동하시며 생명을 유지시키시고, 피조물을 발전시키시며, 인간 역사를 전적인 혼돈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종종 칼빈이 성령을 중보자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에 관해 기록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아버지로서의 성령이라는 이름과 연합되었기 때문만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자신의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우신다. 왜냐하면 만일 그분에게 이러한 능력이 제공되지 않았었다면, 그분의 강림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게 되는 것이라면 그분은 "이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이 틀림없다. 여기서 언급된 능력이 바로 성령이다.

 

그러나 칼빈이 성령을 증발하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분을 모호하게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적인 임재에 있어서 우리로부터 분리되신 반면에, 그의 영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신다.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지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통해서 영적으로 존재하신다.(참고. 신성과 그리스도의 영 사이의 동일한 중첩이 하이델베르그 요리 무답에서 발견된다. 질문 47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인데,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가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지만, 그의 신성, 엄위와 은혜와 영으로는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을 통해서 존재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이제 하나님의 오른손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분의 몸이 하늘 위로 올리워졌듯이 그분의 힘과 능력은 분해되었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을 넘어 퍼졌다.(Institutes II. x vi.14)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힘"과 "능력"을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으 성령이 아버지의 "덕과 효력"(virtue and efficacy) 이셨던 것처럼, 그가 실제적으로 효력있게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칼빈의 표현 방식인가?

 

칼빈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담지자(the bearer of Christ)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과 그리스도의 동일시에 직면케 될 때 그는 갑자기 멈추고 있다. 바울이 주와 성령을 극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구절(고후3:17)을 주석하는 가운데, 칼빈은 바울이 "단순히 그분의(즉 성령의) 직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은 존재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 부활하신 중보자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 가운데 제한되고 국한되어 있는 중보자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여기 지상에서 우리와 연합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계시며, 그는 성령 안에서 여기 계신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구별되지만 기능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분께 종속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필자는 우리가 칼빈의 일반적인 방향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더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바울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자료들을 좀더 고찰해야 할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57-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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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과 아비후는 이상한 불로 분향하였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어떻게 이상한 불을 가져올 수 있는가? 암브로스는 욕망과 탐욕들이 낯선 불이라고 했다. 낯선 불보다 정열과 분노의 낯선 불을 가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러분의 마음에 뜨거움과 분노가 치솟을 때는 언제든지 이 성경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에 의하여 소멸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불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낯선 불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나올 때 격렬한 열정을 가지고 나오신 적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기도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속이 뜨거워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격렬과 분노의 불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딤전2:8). 격렬한 상태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면 기도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올 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이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마음을 차분하게 해야 한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1:21).

성찬에 참여할 때에도 악의에 찬 마음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상한 불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들에게 아주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강단에 낯선 불을 가지고 등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설교자 자신의 열정을 가지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 저는 설교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게 된 이후로 이것에 대하여 깊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도록 세움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진노를 내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하나의 규범이다. 주님은 일꾼들을 파송하시되 당신의 진노를 죄인들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더 많이 나타내면 낼수록 설교자 자신들의 격노는 숨겨져야 한다. 그들의 설교는 더욱 잘 받아드려지게 될 것이다.

물론 육적인 인간들은 설교자가 하나님을 향한 참 열정을 말할 때 이 설교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청중들은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저는 청중 여러분들이 그런 유혹에 빠진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임무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불을 가지고 오는 것이라야 한다. 제단으로부터 나온 불이어야 한다. 설교자들의 입술은 그 제단에서 나온 숯불에 의하여 지져져야 한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정열적인 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서는 안된다. 그렇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달성하지 못한다.

- 제레미야 버러스, ‘예배의 타겟을 복음에 맞추라’, pp 42-44


출처: 청교도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고린도전서 14장 번역과 주석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본래 방언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 보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몇몇 구절들을 잘못 번역했거나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든다.

1.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흔히 방언 기도에 대한 바울의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잘못된 방언을 꾸짖는 것이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한다고 하는 것을 바울이 교정하는 것이다(115).
2.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하는 자가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부정적인 말로 교회를 세우는 것에 반대된 것이다. 곧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이다.
3.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에서 동사는 가정법인데 이것은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의 말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올바른 번역은 “내가 만일(ean=if)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de=but)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이다(118).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한 말도 영과 이성으로 모두 기도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방언 기도가 있다면 미래에 영과 마음으로 번갈아 기도해야 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번거롭겠는가.”라는 말이다.
4. 고린도전서 14장 18절과 39절에서 바울이 방언을 했다고 하고 또 방언을 하라고 할 때, 그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한다. 바울은 외국어를 잘했고, 또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하도록 권고했다. 바울은 단수형 명사를 사용해서는 고린도교회의 가짜 방언을, 외국어를 나타낼 때는 복수형 명사를 사용했다.
5.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는 개역개정의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로 고쳐야 한다. 현대 교회에서 하는 방언 행습은 ‘품위 없게 하는 것’이다.

책에서, 또한 유투브에서 노우호 목사는 이 부분을 주장할 때 매우 교조적으로, 확신 있게 말한다. 사실 여기에서 주장하는 내용에는 상당한 정도의 헬라어 실력과 성서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필자는 그가 신약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쓴 내용으로 볼 때 다음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그의 성서 번역과 주석에는 억지와 무지가 난무한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14:2)

헬라어:? γ?ρ λαλ?ν γλ?σσ? ο?κ ?νθρ?ποις λαλε? ?λλ? θε?· ο?δε?ς γ?ρ ?κο?ει, πνε?ματι δ? λαλε? μυστ?ρια·
개역개정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노우호역: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but)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114).

여기서 노우호 목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번역한 단어는 접속사 γ?ρ와 불변화사 δ?다. 그는 문장 첫 마디에 있는 γ?ρ는 번역하고 뒤에 나오는 γ?ρ는 번역하지 않는다. 이 접속사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왜냐하면” 혹은 “그 이유는”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요 2:25).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확실히”라는 뜻으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면서 쓰이기도 한다(롬 2:25). 그러면 그 의미는 문장과 문맥에서 결정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을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장과 14장 2절의 문장과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바울은 예언을 하라고 해놓고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γ?ρ는 별 뜻 없이 사용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 γ?ρ가 번역되면 여기서 이 접속사는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14:1). 그 이유는 방언은 그렇지 않는데 비해 예언은 교회를 세우기 때문이다(14:2-3).” 그런데 14장 2절의 중간에 있는 γ?ρ는 본 절 안에서 두 문장의 관계를 명확히 말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인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혹은 즉] 영에 의해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우호 역은 매우 엉뚱하다. 첫 번째 γ?ρ가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고, 두 번째 γ?ρ는 14장 2절 내의 두 문장에 관련된 것인데, 14장 2절 내에서 앞 문장을 이유의 근거로, 뒤 문장을 그 결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은 헬라어 문법상 가능하지 않다. 본문 내에서는 그가 말한 것과는 오히려 반대로 뒤 문장이 이유의 근거이다. 올바른 번역은 이렇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인간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γ?ρ) 그것은 그는 영으로(혹은 성령으로)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불변화사 δ?에 대한 번역이다. 이 단어는 문장의 계속을 나타내는데 주로 쓰여 “이제, 그리고, 그런데”라는 뜻이다. 문장에서 비교되는 것이 상반될 때 이 단어는 “그러나” 혹은 “이와 대조적으로”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바울은 “세우다”라는 동사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데 여기에서 δ?가 쓰였다. 여기서 이 단어의 뜻은 “이에 반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14장 1절의 문맥에서 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가? 여기서는 δ?가 어떤 두 개념을 대조시키는 것과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단지 문장의 계속을 의미할 뿐이다. 특별히 번역할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도 본 절의 δ?는 번역되지 않았다.

설혹 δ?가 본 문맥에서 “그러나”를 의미한다고 해도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δ?가 “하지만”을 의미하려면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방언은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 여기서 뒤 문장은 부정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14장 14-15절에서 영으로 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바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지만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신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완벽한 오역이다. 그는 자신이 모델로 삼은 KJV조차도 올바로 번역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4장 2-4절의 KJV을 보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즉[혹은 왜냐하면]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KJV은 전반적으로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본 절에서는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노우호 목사는 왜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었을까? 그는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방언은 외국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방언을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행전이 말하는 방언을 외국어를 말하는 표적이라고 보고, 이 정의를 바울 본문에 대입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글에서 방언을 정의하는데, 노우호 목사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정의를 여기에 심고 있는 것이다.
본 문맥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은 그 방향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고(14:3), 방언은 하나님께 말한다고 하는데(14:2), 노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면 문맥상 방언과 예언의 대조가 성립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노우호 목사의 고린도전서 14장 2절 번역은 헬라어 문법과 문맥, 바울 전체 신학으로 볼 때 완전히 틀린 것이다. 
  
방언이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하는 말이라고?(14:4)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과 예언을 “세우다”라는 단어로 비교한다. 방언은 자신을 세우는 데 반해, 예언은 교회를 세운다. 노우호 목사는 본 문맥을 교회를 세우는 긍정적인 면과 자신을 세우는 부정적인 면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만방언은 자신을 세우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이다. 학자들 중에도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하다. 또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바울의 생각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 다음 절(5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문맥상 바울이 방언을 부정하고 예언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 두 은사는 모두가 사모해야 할 은사인데(고전 12:31; 14:1), 공동체 예배 가운데 사용될 때 소통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 즉 타인에게 아무런 “세움”(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언은 그 자체로 소통이 일어나는 은사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 가운데서 더 권장된다. 반면, 방언은 개인 스스로를 세우기에 개인 기도에서 귀중하다. 다만, 예배 가운데 사용할 때는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통역을 동반해야 한다(고전 14:5). 그러므로 바울이 방언을 개인의 영성을 함양한다는 의미로 “방언이 자신을 세운다”고 한 것은 방언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고?(14:14)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ν [γ?ρ] προσε?χωμαι γλ?σσ?)에 사용된 동사가 가정법 현재형인데, 헬라어에서 가정법은 현실을 반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은 방언기도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노 목사는 영어의 가정법과 헬라어 가정법을 헷갈린 것 같다. 헬라어 사전에서 ??ν을 찾아보면 이런 용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상의 조건을 인도하는 영어의 if와 같은 용법이 있다(막 3:24). 하지만 ??ν은 많은 경우에 미래에 나타날 조건을 말하는 영어의 if와 whenever, 혹은 when을 의미한다(요 14:3). 또한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when의 의미로도 쓰인다(살전 3:8). 물론, 그 용례는 문맥에서 결정된다. 본 문맥에서 ??ν은 when의 의미다.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면(고전 14:2) 이것은 당연히 기도 혹은 찬양일 수 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영으로도 기도하고(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노우호 목사는 사용된 동사가 미래형이기 때문에 바울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자가 얼마나 법거롭겠는가?” 하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 해석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자 자신 스스로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이성으로도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를 많이 말하는 것을 감사했다고?(14:18)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은 바울이 여러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 이것이 옳다면 영적 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왜 바울이 갑자기 자신이 외국어를 잘한다는 말을 했는가? 둘째,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깨달은 이성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데(고전 14:19),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선교를 위한 일만 마디 외국어가 어떤 이유로 이성에 기인한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한 것인가? 한 마디로, 이렇게 해석하면 뒷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통성으로 방언기도 하는 것은 품위 없는 행위라고?(14:40)

노우호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적당하게 하고”(개역한글)를 개역개정성경이 “품위 있게 하고”로 번역한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방언과 연관하여 “품위 있게”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설정한 품위와 질서는 조용하게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대 교회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6-40절에서 말하는 품위와 질서는 예배 시 방언을 비롯한 여러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차례를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방언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지 않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의 입장은 노 목사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상을 통해서 고린도전서 14장의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성서 번역을 시도했지만, 그의 헬라어 실력과 신약학에 대한 지식으로 볼 때 새로운 번역 제시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는 이러한 번역을 확인하기 위해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좀 더 물어보았어야 했다. 필자가 보기에 노 목사의 헬라어 실력, 주석 실력,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는 초보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전제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우 억지스런 문법과 번역을 들이댄 것이다.

방언부정론 평가

노우호 목사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였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방언부정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방언부정론은 신학적 고찰과 성경의 내용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성서적 근거가 미약한 주장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과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그의 사상 기저에는 은사중지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방언론은 은사중지론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사부정론까지 간다. 그는 바울에게 있어 방언 기도의 은사는 있었다가 중지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것은 없었다고 한 것이다. 한 때 바울이 잠시 오해해서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착각한 적은 있었으나 후속 서신에서 그것을 바로 잡아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 고린도교인들의 헛소리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주장은 바울 방언론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이 성령이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또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도 물론 없다.

어설픈 역사비평적 성서 이해에 의한 주장
방언 반대자 중 특이하게 노우호 목사는 성서해석을 하는데 있어 역사비평적 방법을 일부 도입한다. 그는 대담하게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잘못 판단하고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고린도후서에서(특히 11장에서) 이 오류를 교정했다는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보다 후에 쓰여진 로마서에도 은사 목록이 나오는데(12:6-8), 여기에 방언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사이에 바울의 방언 은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0-31).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약성서 서신은 상황에 따라 그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지, 계속해서 어떤 주장을 업데이트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 다 은사이지만, 그 성격상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말한 은사는 영적인 은사이고, 로마서 12장에서 말한 것은 교회 봉사를 위한 재능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가 신약학자들이 사용하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성서를 해석하기는 했으나, 그 방법을 제대로 익히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그는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말았다.

편견에 의해 균형을 잃은 주장
본서에서 그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본서를 쓴 것인가는 다음 인용구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작금 한국 교회에 번지고 있는 방언을 두고 지난 37년 동안 검증해 본 결과는 100% 거짓 방언이었다.”(5)
“필자가 알기에는 정상적이고 아름답게 사역을 하고 주님께로 가신 분들 중에 방언기도를 했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229)
“방언하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수용하지 않는 편협한 사람들이 많았다.”(201)
“..지난 200년 동안 여성들 중에서는 탁월한 신학자나 철학자가 없었다.”(110)

이 인용구들 속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 그의 편견, 그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첫째,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야 말대로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다. 둘째, 남성우월 사상에 의한 그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상식적인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위험 수위에 올라있다. 셋째, 성서학 전문가도 아니요 영적 은사에 대한 체험도 별로 없는 개인이 자신의 권위로 방언을 혼자 검증하고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께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하는 내용보다도 확신 있게 말하는 태도에 의해 그에게 설득당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주장을 듣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노우호 목사의 방언부정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확신에 찬 태도와 달리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확신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바울과 누가 모두에게 방언은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나는 한 결과 혹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울과 누가가 기록한 성경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필자는 신약학자로서 방언에 대해서 십 수 년 간 집중적으로 이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방언중지론, 방언부정론은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독자 중 아무도 이러한 이론에 현혹되지 말고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바란다.
  (c) 뉴스미션.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13장에 하늘나라에 대한 7가지 비유가 있는데, 어떤 이는 이 세상의 역사를 7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런 자는 세대주의자라 불린다. 마지막은 최후의 심판이지만 그 전에 성령의 시대, 즉 은혜의 시대가 온다는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 전천년설은 핍박과 어려움에 직면한 자들이 갖는 종말론이다. 이단성 있는 이 사상은 초대교회부터 있었다. 대표적인 이단이 몬타누스파로서, 시한부 종말론자였다. 성령의 직통계시를 받는 자들을 중심으로 하늘나라의 지상 재림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중세시대에 이르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종파인 영성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성령의 시대를 강조하여 극단적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종교개혁시기에도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억지 주장하는 급진파와 신비주의자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영성주의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오순절운동, 은사운동, 현재에 이르는 음악과 더불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운동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정통신앙은 어떠한가? <벨지카 신앙고백서>는 10항 ‘성자의 신성’에 이어, 11항 ‘성령의 신성’을 고백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3~64문까지 성령 하나님에 대해 묻는데, 주로 성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 특별히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53문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1문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임을 묻는다. 성자의 신성에 비해 보다 간략하게 다루는 이유는 성령이 성화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성령의 사역에 보다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서 간략하게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다룬다. 이후 3권 1장에서만 성령의 신성과 사역을 다루면서 “성령의 주된 사역이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히고, 성령의 사역인 믿음과 관련된 내용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물론 주로 성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성령의 신성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먼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데 있다. “성령에 관해 무엇을 믿느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3문의 답변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이 고백은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토록 나오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고백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임을 의미한다(<벨지카 신앙고백서> 11항).

다음으로, 그분은 선택된 자에게 성자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사역을 적용시키는 분이라는 데 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3문에서는 “그분의 모든 혜택의 참여자가 되고, 그분은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답한다. 그렇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성령이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16장에 이르러 자신과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세히 밝히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 약속한 성령의 강림과 아울러 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고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관한 가장 중요한 고백임을 밝힌 바 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성령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부리는 영이거나 환영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이시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이 중생의 저자이시고 바람임을 밝히신다. 이 사역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요 3:8)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기뻐하시는 대로’라는 의미를 닮고 있다.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 지각에 새겨진 말씀을 기억시켜 감동시키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인간들이 흉내 내어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노력하거나 환경을 맞추면 그분이 역사한다고 기만하는 거짓된 자들이 허다하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행하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여 사역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훼방죄를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을 하나님으로 신뢰한다면, 그분의 사역을 임의로 우리가 주도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하거나 또는 일치하여 사역한다. 9가지 측면을 지닌 열매들이 없는데도 그분의 사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신성모독에 해당된다. 성령의 사역이라 핑계 대면서 성취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사역이지 그분의 사역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유기된 자나 비중생된 자가 악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끝으로,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13장 14~15항에서 ‘성령의 신성’을 다루고 있는데 그분을 “중생의 저자”라고 칭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휘포스타티체 또는 본체”라고 명한다. 우리는 그분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말한다(고전 3:16, 6:19; 고후 6:16).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5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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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유태화(현 백석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 유태화 -

 

 

저자는 안양대학교(영문학)를 졸업한 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교의학을 연구한 후

남아공의 프레토리아대학교에서 G.C.Berkouwer의 마지막 학생이였던 C.J.Wethmar 교수의 지도하에

박사과정에서 교의학을 2년동안 연구하였다.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로 옮긴 후

A. van Egmond 교수의 지도하에

The Spirit of Liberation : Jurgen Moltmann's Trinitarian Pneumatology

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2002년도에 학위(교의학, Dr. Theol.) 를 취득하였다

 

 

 

미국의 개혁신학자인 B. B. Warfield는 오늘 기적들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자연적인 현상들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으로 볼 필요가 없으며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표적과 기사는 사도시대로

제한하는 것이 옳으며 동시에 그 사역은사도직의 종결과 더불어 종결되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한바가 있다.

273) B. B. Warfield, Counterfelt Miracles, NewYo 1918, 119-120

 

이 견해를 벌코프도 상속하였으며, 완고한 개혁주의자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워필드의 이 주장은 당시에 널리 신봉되었던 소위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야말로 시대제약적인 상황에 편승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계시의 계속성과 표적과 기사를 연결시킨 것은 본질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계시는 성경과 더불어 종결되었으며, 계속되지 않는다. 실로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가 사건으로 계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마치 성례와 설교와의 관계처럼, 말씀계시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명석한 계시로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요”, 혹은내 피요라는 말씀의 선포 없을 때, 그저 떡이고 포도주에 머무르고 마는 것처럼, 사도들의 사역에서 표적과 기사도 마찬가지다. 표적과 기사는 말씀계시와 함께 있을 때, 분명한 의미를 획득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호해진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씀계시가 주어질 때,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면, 전달하는 바가 더욱 효과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항상 그런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고전2:1~5; 살전1:5~6).

 

이것은 21세기 복음 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씀사건으로 계시는 새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록된 성경이면 족하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는 그 때와 같이 지금도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큰 능력과 확신으로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더불어 증거되어야 한다.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일하시는 동일한 성령께서 21세기 인간에게도 동일한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조금 다른 관점에서 하비 콕스(H. Cox)는 그의 Fire From Heven이라는 책에서, 워필드의 주장을 색다르게 다룬바가 있다. 콕스에 따르면, 워필드의 이런 주장은 인종적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는 다소 주관적이지만 정황적으로 볼 때 적절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당시 성령의 오심을 경험한 교회 안에 당시로서는 이상하고 낯선 결과가 나타나곤 하였다. 아직도 흑백(黑白)의 갈등이 상당했던 때에, 성령오심을 경험했던 교회 안에 흑백이 서로 부둥켜안고 화해하며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는 일이 일어나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워필드의 눈에 낯설게 느껴졌고, 이것을 불편하게 여긴 소상한 귀족인 그가가짜 기적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성경주적에 충분히 근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의 성경을 인용하지 않은 낯선 책을 발표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하비 콕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하비 콕스의 주장의 문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성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식철학 때문이든, 인종적 편견 때문이든, 령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은사와 성령께서 그때와 같이 지금도 능력 가운데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을 확신케 하시며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의 교제를 회복하여 가도록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려는 그의 태도는 비평에 열려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식적인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확신이고 가장 평범한 성경의 독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발견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출처:개혁주의마을

“우리들을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음을 감사 드립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오니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보혜사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오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립니다”

위의 발췌된 기도문의 내용은 "두가지의 [인치시고 성령으로 보증하심]"으로 설명 합니다.

1. (고후1:22) “우리들을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는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삼위의 한분이신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주하셔서 구원받았음을 마음에 인치시며 성령으로 보증하신다는 말씀 입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도록 성령께서 보증하신다는 의미로 이해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님이 그들의 삶에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6:44; 14:17; 로마서 8:9; 고린도전서 12:13). 아무도 성령의 자비로운 역사하심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성령세례를 받았건 않았건 성령이 모두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지 못한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사용하실 수 있고 또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결코 그들의 사역을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령세례가 우리들의 삶과 사역을 더욱 더 효과적으로 만들 것을 인식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에게 그 명령은 주어 집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계속해서 충만함을 받으라” (엡5:18)

2.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로 아오니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것은 (고후5:1-4절)을 인용한 기도 입니다.

5절에는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즉 1절- 5절로 주님께서 부활승천 하시기 전에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며 복스러운 소망이 우리에게 이루어 지도록 그 보증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는 말씀의 의미 입니다.

어떤 형제들은 구원을 인치시고 보증(구원의 확신)하시는 성령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기로 작정한 자들 같이 성령을 배척 합니다. 구원의 필수로 따라야 할 구원의 확신에는 아무 가르침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그들이 믿는다는 구원의 인치심(고후1:22)도 없는 것입니다.

고후1:22절의 중생할 때의 성령의 인치심은 구원의 여정의 시작일 뿐이며
고후5:5절은 구원의 종착역, 즉 천국으로의 입성을 보증하는 보혜사 성령의 인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부님의 댓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 로이드존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일서4:13)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1. 여러분의 관심을 어디다 두고 사십니까?

자기 영혼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영원에 대해 흥미를 가집니까? 이것들이 여러분을 흥미롭게 합니까? 확신하건대,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땅의 일을 생각”(빌립보 3:19)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이란 육욕적이고 육신적인 일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신문에 나는 살인 사건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왕실가족이나 소위 상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화려한 허식 그리고 인생의 각종 구경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합니다. 결국 그것은 동일한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거기서 그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관심은 영적입니까? 여러분은 영혼불멸과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것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2. 두 번째는 죄의식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 속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특정한 일들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죄와 악한 생각이 있으며 또한 무가치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발하게 하는 근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혐오스러워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르시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18-24)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관해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제시한 방법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고 또 만일 여러분 안에 존재하면서 여러분을 무너뜨리는 그것을 미워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르기를, 그분이 오셨을 때 이 세상의 관원들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믿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2:7-8,10)


이 세상의 관원들, 세상의 위인들, 힘 있고 지혜로우며 귀족에 속하는 자들마저도 나사렛 예수를 보고서 한 사람, 목수, 그리고 기술자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를 일종의 특출한 종교적 천재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가 영광의 주이심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이르기를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2:13)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한일서 4: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믿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며,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믿을 수 없습니다.

지성과 이해력과 큰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곧 건전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제시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들었지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비천하고 무지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인들이 그것을 듣고서 그 안에서 기뻐함과 아울러 그것으로 인해 변화받아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설명하기를, 성령께서 이들로 하여금 보고 또 믿게 하셨다고 합니다.


4. 여러분은 자기 안에서 육신과 성령간의 투쟁과 싸움이 진행됨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라디아서 5:17)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성품이 있음을 자각합니까? 그것은 단지 여러분이 때때로 나쁜 일을 저지르기 원하며 그래서 마음속으로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의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자각합니까? 여러분 안에는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을 원하는 새로운 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무너뜨리려는 또 다른 사람이 있으며, 이 두 세력 간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처럼 대조적인 세력들과 싸우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면 그러한 다툼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옛 사람’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새 사람과 옛 사람간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면, 성령께서 사실상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5.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역사하고 계심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이르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립보 2:12-13)라고 합니다. 이는 크고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일들을 행하려고 결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도덕가들과 종교적 의무를 복종하는 자들은 그 모든 일을 행하며, 그 때문에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주일 아침에 침대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일어나 교회로 갑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고자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간을 조절하며, 그런 후에는 자신의 근사하고 고상한 이상들을 내세우고 의기양양해 합니다. 얼마나 근사해 보입니까!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달리 말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 여러분을 감동시키며 인도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합니다. 자만하는 것과는 달리,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시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나는 나의 한계 너머로 이끌어 올려졌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합니까?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활동하며 감동시키고, 변화를 일으키며, 인도하고 설득하며, 또한 고무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자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분 자신의 영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 안에서 그런 식으로 그분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6. 성령은 생명이시며, 생명은 항상 어떤 형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죽은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지를 시험하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는지 혹은 그런 증거가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들이 입증됩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세 개씩 짝을 이룬 9개의 열매들은- 여러분이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될 그분에 관한 가장 완벽한 묘사라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입니다. 사랑은 그분의 삶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희락은 모든 상황에도 아량곳하지 않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화평은 그분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 양선, 온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사 이러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7.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며, “양자의 양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로마서 8:15)

하나님은 더 이상 영원 가운데 멀리 계시는 어떤 막연한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분께로 갈 때 우리는 우리 아버지 곧 탕자의 아버지께로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분께로 갑니다. 이 점을 가리켜 요한은 본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분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봅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분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13)


만일 여러분이 이 은사를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이 값 없는 선물을 얻기를 바란다면, 지체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파탄 상태를 인정하며 자신의 공허함을 자백하고서, 은총을 내려달라고 그분께 간구하며 그분 자신의 역속에 호소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받을 때까지 계속 간구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은 너무도 확실하며, 우리는 그분의 은혜롭고 복된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그분께 간구하십시오. 만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여러분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풍성함을 얻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 D. M. 로이드존스, ‘요한일서 강해’중에서.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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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방언이 없다고? “성경과 교회사를 보라, 지금도 있다”
김동수 교수 북콘서트 ‘방언, 성령의 은사’

2015/05/07 (목) 13:42 ㆍ추천: 0      

방언은 일부 교회에선 여전히 신앙성숙의 척도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방언은 이미 중지된 은사(은사중지론)일 뿐이다. ‘방언’을 바라보는 시각이 성도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크리스천에게 ‘방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난 2일 국성연에서 김동수 교수의 '방언, 성령의 은사' 출간 기념 북콘서트가 열렸다.ⓒ뉴스미션

못 받았다면 받도록 사모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받았다면 가짜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방언에 대해 무엇이 진실이고 오해인지 성도들을 혼미케 하는 상황에서 신약성경과 교회사적 측면, 그리고 신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검증한 책이 출간됐다. 평택대학교 김동수 교수의 ‘방언, 성령의 은사-성경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방언’(킹덤북스)이다.

김 교수의 방언 관련 저서는 이번이 세 번째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 2008), ‘신약이 말하는 방언’(킹덤북스 2009) 집필을 통해 신앙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의 방언을 다룬 바 있다. 이번 저서는 방언 신학과 교회사에 나타난 방언, 그리고 방언중지론에 대해 담았다.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방언이 신앙생활에 매우 유용하며 성경의 원리대로 사모하면 방언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김동수 교수는 한국교회에서 방언 논쟁을 네 가지 입장으로 정리했다. ▲방언중지설: 방언은 중지됐기 때문에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방언 적극 지지설: 방언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지금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방언 소극적 인정설: 방언은 지금도 유용하지만 방언 체험 유무는 성령에 의한 것이므로 신자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평화주의자: 논쟁은 좋지 못하며 이 문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 적극 지지의 입장에서 신학자로서 방언이 충분히 연구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관해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서 방언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것에 저서를 통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방언이 지금까지 학자들과 신자들이 흔히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학적 주제임을 다뤘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 국제성령신학연구원 사무실에서 열린 ‘방언, 성령의 은사’ 북콘서트에서는 신학자, 목회자, 성도 등 방언에 관심 있는 청중들이 모여 김동수 교수의 ‘방언’에 대한 연구 결과와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와 저자 김동수 교수 사이에 오간 질의응답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어 소개한다.

- 방언에 차별이 있던데, 남자들보다는 여자가, 강남보다 강북이, 유럽보다 아프리카에서 방언을 더 잘 받더라. 심지어 진보보다는 보수에 속하는 쪽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계몽주의와 현대주의 사고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몸을 쓰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몸이 컨트롤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 기도 방식에는 묵상 기도가 많고 방언 기도가 없다.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방언을 덜 받는 것 같다. 계몽주의적 은사중지론, 세대주의적 은사중지론 사상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거 같다. 이미 정신 속에 들어간 사상이 있으면 방언을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한 사회학자는 1970-80년대에 낸 책에 보면 방언은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들이 주로 하고, 배우고 잘난 사람들은 안 한다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설명하기도 했다. 평균적으로는 낮은 사회 부류에서 방언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원불변의 법칙인 것은 아니다. 최근 온누리교회 같이 사회적으로 중산층 이상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방언을 많이 한다는 것이 이것을 방증한다.
그래서 방언을 체험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언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담임 목사가 방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는 부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보다 방언 체험이 더 많다.

- 방언해도 사람이 성숙해 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인격이 변하지 않고. 특히나 방언하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던데, 어떤 입장으로 설명 가능할까?

이 세상에 방언이 아니라 3층천을 갔다 와도 사람이 안 변한다.(웃음)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인격 자체가 완전히 변해 천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표현이라는 게 노동자 분들(워킹클래스)는 마음보다 말이 거칠다. 배운 사람들은 마음보다 말이 훨씬 더 부드럽다. 배운 사람들이 마음보다 말을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배우는 거다. 매너 없이 표현하는 걸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셨기에 거친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깨끗하다고 본 경우가 많다. 방언이 신앙성숙에 이바지 하지만 방언을 비롯한 어떤 신앙 체험도 사람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방향성이 분명하다면 개인적으로는 영적 체험이 강할 때 인격이 꾸준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되긴 하더라. 통역에 대해 질문해 보겠다.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는 통역도 중요하다. 방언은 강조되는데 반해 왜 통역은 약할까? 어떻게 균형을 잡아갈 수 있나?

현상으로 통역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방언 천명이면 통역 한명 있을까 말까다. 방언은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입술만 맡기면 쉽게 터진다. 하지만 방언 통역은 임해도 막상 하기가 두려울 거 같다. 그래서 통역이 많지 많다. 또 통역을 하려면 통역의 장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교회 예배 시에는 찬송시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었다(고전 14:26). 은사집회 같은 형식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교회의 예배가 포멀화(formal) 됐다. 우리나라는 오순절 교회도 똑같다. 주일 낮 예배는 장로교식 예배고, 금요철야예배는 순복음식 예배다. 금요철야예배라도 은사집회가 있으면 좋은데 장이 없고, 모델이 없었다. 토레이 신부님이 원장으로 있던 예수원에는 그런 것들이 좀 있었다. 방언 통역이 임했을 때 해보고 검증도 받아보고 이런 게 있었다. 오순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집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언과 방언, 통역이 모두 있으려면 권위가 담임목사에게만 있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임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의 위계질서, 유교적 가부장제의 폐해 같다.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가부장제가 자유함을 빼앗았다.(웃음)

- 가짜방언은 어떻게 구별하나.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나도 가짜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짜방언이라는 것은 누가 퍼드렸느냐.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간다. ‘가짜방언’이라고 할 때 움츠러들지 않나. 천사와 마귀 중 누가 이 풍문을 퍼뜨렸냐고 묻는다면 마귀가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진짜나 가짜냐를 구분하라고 하는데, 고전 14장에는 두 세 사람이 방언하고 한 사람이 통역해서 분별하라고 한다. 또 신앙고백 여부로 구별할 수 있다(고전 12:3). 실제 집회에서 가짜방언은 우려할 만큼 많지 않다고 본다.

- 방언은 신의 언어인가?

언어학 분야 논문을 보니 방언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언어학 규칙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 실존하는 언어는 아니다. 그러면 방언이 하나님의 말인가? ‘천사의 말’ 이라는 표현은 아름다운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방언이 하나님의 언어나 천상의 언어는 아닐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는 혀에 근육이 생기기 때문에 혀는 해보지 않은 발음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근육의 움직임을 뛰어 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한다. 그래서 방언을 ‘other tongue’이라고 하는 것이다.

- 방언은 외국어여야 하는가? 종종 외국어 방언이 검증된다고 하던데, 언어학자들이 조사해 보면 거의 UFO 발견처럼 근거가 없는 얘기인 경우가 많다.

누가는 성령 세례를 설명하던 중에 방언을 말했다. 성령, 은사, 충만, 세례를 풀다보면 방언이 나온다. 사도행전 2장에는 방언이란 말만 있고 외국어인지 분명하지도 않다. 지금과 같이 똑같이 방언이 터진 거고, 알아듣는 기적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오순절 사건에서만의 일회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는 성령론이 아니라 구원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사도행전 2장은 특수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듣는도다’라는 의미가 다른 나라 말로 유창하게 한다는 내용은 아닐 것으로 본다.

- 방언이 바로 이런 유익이 있다는 설명을 한다면?

바울이 말한 건 두 가지다. 고전 14장에는 자기를 ‘오이코도메’ 한다고 하고 있다. ‘빌드 업(build up)한다’ 곧 ‘허물어진 것을 세운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이코도메오(세운다), 오이코도메(세움)라는 말을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주로 썼다. 방언으로만 회복할 수는 없지만, 희로애락, 마음의 상처, 마음의 응어리 이런 것들이 회복될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돕는다는 의미로 방언을 사용한다. 성령의 기도인데, 피조물이 탄식하고 처음 익은 열매 신자들이 탄식하는 것에 공감한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이 나의 기쁨, 희로애락에 공감해 주신다는 거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신자들을 조사해 보니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참석률에 가장 크게 있더라.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이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 참석률이 높았다. 다른 차이보다 깊이 기도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 방언의 체험 중 소개해줄 만한 체험이 있는가?

인생의 위기 때마다 대부분 기도로 극복했는데 그 때마다 방언 기도를 했다. 어느 대학에 갈까, 어디로 유학을 어떻게 갈까와 같은 모든 문제를 새벽기도에서 방언 기도를 하며 결정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갔을 때는 기도로 결정하고도 3년을 후회했다.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10년 후에 돌아보니 대부분 좋은 결정이었다.

이동희 ⓒ 뉴스미션

USA 아멘넷

조직신학회 전국대회서 공헌배 박사 발제… 한·중·일 신학포럼도 진행

 

▲한국조직신학회 전국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한국조직신학회(회장 배경식)가 9일 오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에서 제9회 전국대회를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의 미래’를 주제로 개최했다. 특히 공헌배 박사(한국기독교학술원 연구교수)가 ‘방언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고찰’을 제목으로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기도는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공 박사는 우선 “개혁교회의 교리들은 방언기도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고, 제대로 된 기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 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기도의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제대로 하는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지를 구별할 수 없으므로 그 기도는 타당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공헌배 박사. ⓒ김진영 기자

이어 그는 “칼빈은 방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외를 두었다. 내적 감정의 힘이 부족해 스스로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거나 감정이 격렬해져서 자연적으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경우”라며 “칼빈은 현상적으로 방언이 일어나며 또 방언기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고, 지성과 헌신이 따른,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라는 것이 칼빈의 주문”이라고 말했다.

 

공 박사는 칼 바르트의 견해를 살피며 방언기도에 접근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은 흔히 방언의 성경적 근거로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을 예로 든다”면서 “그런데 칼 바르트는 성령 임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대면시킨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사건을 소통으로 이해했다. 즉 성령의 임재를 동시통역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리고 칼 바르트는 고린도전서를 주석하면서 고린도 교회야 말로 바울을 속상하게 한 곳이요, 문제가 많은 교회로서, 인간 혹은 영웅들을 숭배하고 이교적 종교행태와의 혼합을 시도해 은사를 오남용했음을 지적했다”며 “따라서 개혁교회의 기도신학이나 목양의 방식을 따를 때 기도는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오남용되지 않도록(망령되게 일컬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방언기도 경험하는가에 더 초점 둬야”

 

그러나 공 박사의 발표를 논평한 김화영 교수(연세대)는 “칼빈의 경우, 상당히 전투적인 그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방언기도를 대면한 태도는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이냐의 식별에 있는 것 같다. 칼빈의 초점은 성령으로 인한 방언과 다른 영으로부터 오는 유사방언의 식별과 구분에 있다”며 “개혁주의 교회가 구더기를 잡는 것에만 주력하지 않고 성령충만함, 그리고 성령과 청중의 하나됨을 경험하는 진정한 방언기도를 경험하고 있는가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의 활용에 있어서는 특별히 성경적 식별과 지도가 필요하다”며 “성령이 마음 깊은 곳에서 통회하도록 하여, 알아들을 수 없지만 성령이 신비의 언어로 말하게 할 때, 소통하여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방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즉 공동체에 덕을 끼치도록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방언기도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이날 한국조직신학회는 전국대회와 함께 한·중·일 신학포럼을 함께 개최했다. 이 포럼의 기조강연은 일본의 코이치 기무라 박사, 중국의 왕친성 교수(푸단대), 한국의 김영복 교수(한일장신대)가 각각 맡았다.

 

 개혁주의마을

칼빈주의적 성령론의 발전

 

마이클 헤이큰(Michael AG. Haykin)

 

역사적으로 볼 때, 개혁주의 전통은 성령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이 성령론적 열정의 주요근원은 바로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계속해서 매우 독특한 관심'을 보였던 존 칼빈 자신이었다. 비범한 미국 장로교 신학자인 워필드는 심지어 칼빈을 탁월한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영어권 세계에서 성령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칼빈의 심오한 관심은, 청교도와 그들의 계승자들, 여러 칼빈주의 분파들, 그리고 18,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과 관계된 개혁주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칼빈의 후예들은 성령의 사역을 논하면서 죄인의 모든 구원 사역에 관계하시는 성령의 주권을 강조했다.

 

스튜어트(Stuart) 왕조 시대의 초기 청교도들 중에 존 프레스톤(John Preston)영적인 용기와 담대함은 우리의 속사람을 강하게 하시는 유일한 방편이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인이 이 영적인 강력함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부지런하게 사용해야 할 경건의 다양한 방편들도 주장했다. 이런 훈련들 가운데는 말씀을 들음, 성례 참여, 기도, 묵상, 대담, 성도의 교통, 선을 행하려는 특별한 결심들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은혜의 방편이나 영적 훈련들이 신자의 영혼을 살찌우고 회중의 삶의 내적 성장을 이루는 데 완전히 충분한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만이이 일에 충분하신 분이다.

 

그래서 18세기 후반 영국의 칼빈주의 침례교도인 존 서클립(John Sutcliff), “성령의 감화들은 영혼, 신앙으로 활발하게 각성된 영혼이다. 만일 성령의 감화들이 억제된다면, 성례와 같은 신적인 의식들은 텅 빈 수조와 같고 영적 은혜들은 시든 꽃과 같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대표적인 개혁주의 전통들은 역시, 존 프레스톤이 제시한 은혜의 방편들을 제외한 채 성령의 능력만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17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인 벤자민 키치(Benjamin Keach)1681년에 퀘이커 교도들을 빗대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빛과 권세를 소유했다고 확신 한다. 그러나 실상 이 모든 것들은 망상에 불과하다‥‥‥ 어떤 이들은 성령을 자랑하고 자신이 성령을 소유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모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또한 그들은 주께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그분의 말씀 가운데 제시된 하나님의 복된 은혜의 방편들과 기관들을 매도하고 폐기 처분 한다‥‥‥그러나 성령께서는 합당한 경계선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항상 영적인 경로를 통해 역사하신다. 그러한 경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공적 예배와 사적 예배이다.”

 

이것이 성령이 원하시는 전통이다. 따라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청교도인 리차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이 잘 지적했듯이, '우리는 항상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한다.

 

앞에서 인용한 프레스톤의 글에 몇 가지 경건의 방편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중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네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것들은 바로 성경, 기도, 성례와 영적 교제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의 영성(성경)

 

종교 개혁은 중세 로마 가톨릭주의의 신학, 즉 영성을 계발시키기 위해 상징과 형상들을 사용하는 그들의 신학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출판 인쇄술을 충실히 이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영성 계발의 가장 주요한 방편으로 삼았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월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의 생애이다. 영국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틴데일은, 1520년대 중반부터 1536년에 순교할 때까지 바로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틴데일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영성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임을 믿었다. 그는 1530년에 창세기 번역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것을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한 참된 길을 밝히 보여 주는 빛이다. 또한 성경은 모든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요새이며, 역경 가운데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게 하는 위로이며, 번영 가운데서도 죄를 짓지 못하게하는 두러기다.”

 

이 종교 개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 중심의 영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인물이 바로 18세기 미국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틴데일과 마찬가지로 에드워즈 역시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사역자들이 반드시 조명을 받아야 하는 빛이며, 회중들에게 높이 들려 선포해야 할 빛이다. 또한 성경은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마음까지도 타오르게 하는 불과 같다.”

 

따라서 성경 묵상이 그의 경건의 핵심이었음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에드워즈의 친한 친구이자 최초로 그의 전기를 썼던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는 에드워즈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내가 아는 한, 그의 비밀은 기도에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묵상하는 데 있었다‥‥‥그에게는 지식에 대한 비범한 목마름이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었고, 특별히 신학에 관계된 책들을 많이 읽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책들보다 더욱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고, 다른 어떤 신학자들보다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다 성경에 대한 그의 비범한 지식은 그의 설교와 모든 저작에 나타나 있다.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쏟았던 열정은 그의 원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전 생애에 나타난 성경 묵상의 훌륭한 열매는 여백 성경이라고 알려진 에드워즈의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페이지에 한 장의 여백이 삽입된 작은 성경책이다. 그리고 이 여백들은 에드워즈가 인접한 본문에 대한 주석을 기록할 수 있도록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에드워즈의 여백 성경에는 1730년부터 1758년까지 그가 기록한 전 성경에 대한 일만여건 이상의 주석이 담겨 있다.

 

2.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기도)

 

개혁주의 신자들이 역사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또 다른 방편은 바로 기도이다. 청교도 신학자인 토마스 굿윈이 잘 지적했듯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위대한 요소이다.’ 그린햄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신자의 견인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엄청난 전투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독교 고전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으로 잘 알려진 청교도 목사 존 번연은, 1662년에 쓴 내가 영으로 기도하리라」』 I Will Pray with the Spirit 라는 소책자를통해서 기도에 대한 그의 분투를 묘사한 바 있다.

 

번연은 오직 성령만이 기도를 시작한 신자를 인내할 수 있게 도우시는 유일한 분임을 강조했다.

 

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 해야만 하는 기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하겠다. 가련하고 사리 분별이 없으며 육적인 당신은 나의 이 이상한 생각을 좋아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몹시도 싫어했고,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분과 머물러 있는 것을 싫어했으며, 마지못해 기도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을 묵상하게 하고 주의 도를 행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했다(86:11 참고). 그러나 많은 경우에 나는 눈이 멀어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너무나 무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몰랐다. 오직 성령만이(은혜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뿐이다(8:26 참고).

 

, 기도 시간에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위험은 너무나 많다.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미끄러지게 하는 샛길과 뒷길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언변에 능통하면, 얼마나 많은 교만이 밀려오는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얼마나 위선적으로 기도하게 되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간구하는 심령’(12:10)을 부어 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영혼의 사이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적은가!”

 

이 문장은 청교도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들 가운데 몇 가지를 보여 준다. , 우리는 여기서 투명한 정직함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오한 지식을 볼 수 있다. 경험을 통해, 번연은 하나님의 존전에서 옛사람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기도를 통해 인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번연이 앞서 한 말 바로 다음에 아래와 같이 덧붙인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붙잡으실 때, 우리 마음은 비로소 기도하게 된다. 진실로 그 전까지 우리는 기도할 수 없다.”

 

많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기도의 훈련을 통해 인내했다는 것을 증거하며, 기도의 의무가 순전한 기쁨으로 바뀔 때에 절묘한 기쁨이 임하게 됨을 알게 해 준다.

 

존 번연의 좋은 친구였던 존 오웬은, 에베소서 2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천상의 평안함과 영혼의 만족스러운 기쁨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지 못하며 그 어떤 지성으로도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오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 나아오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충만한 기쁨과 만족이 되는가!”

 

3. “왕께서 우리와 함께 앉으시기를 기뻐하심”(성례)

 

칼빈주의자들이 풍성한 영적 자양분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부분은 주의 만찬이다. 이것은 최근에 주의 만찬을 중요한 영적 훈육으로 생각하지 않아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의외일 수도 있다. 그들은 성찬을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들의 신자들의 영혼을 먹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18세기 칼빈주의적 고찰의 실례 두 가지는 복음주의자들이 항상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많은 작품을 남긴 듀턴(Anne Button)18세기 주요 복음주의자들과 자주 교류했다. 그는 주의 만찬이 왕께서 우리와 함께 앉기를 기뻐하시는 식탁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또한 이 은혜의 방편이 너무나 훌륭해서 주의 만찬에서 신자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자아‥‥‥, 천국에서의 영광스런 임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허락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묘사했다.

 

이 시기의 다른 개혁주의 신자들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진술을 약간 지나친 것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듀턴이 성찬을 그들의 설교와 같은 수준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구속자와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방편이 되는 성찬에 대한 듀턴의 견해를 기꺼이 인정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정서가 18세기 초반 런던의 칼빈주의 침례교회에서 목회했던 요셉 스텐네트(Joseph Stennett)목사의 찬송시인 복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며(the Sufferings Of Our Blessed Saviour Jesus Christ)’에서도 발견된다. 스텐네트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마땅한 '영구한 기념'으로서의 성찬에 대한교회의 찬미를 모사한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합당한 상징들 또는 형상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이러한 상징들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당신의 피는 풍성한 포도주로다.

이 당신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그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요!“

 

스텐네트는 성만찬 자리에서의 식사와 관계되는 것이 믿음임을 명료하게 하면서도, 특별히 그의 언어는 주의 만찬이 신자에게 있어서 풍성한 영적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방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 하나님의 식탁

오직 유일한 신적인 식탁에 우리의 믿음이 있나니

믿음으로 볼 때, 당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당신의 피는 가장 고상한 포도주로다!“

 

4. “우리의 신앙을 유지시키는 최고의 도움 가운데 하나”(영적교제)

 

신약성경은 고독한 기독교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영적인 힘의 위대한 근원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우정과 교제이다. 부당하게도 칼빈은 차갑고 가혹하며 사랑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그는 교제의 중요성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우정의 풍성한 진가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프랑스 개혁주의 역사가인 리차드 스토퍼(Richard Stauffer)종교 개혁 시대에 칼빈처럼 수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나눈 사람은 많지 않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칼빈은 그의 디도서 주석의 머리말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었던 기음 파렐(Guillaume Farel)과 피에르 비레(Pierre Viret)와의 우정을 다음과 같이 찬미한 바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목회 사역만큼, 또한 매일의 삶만큼 이렇게 깊은 우정을 나눈 사람은 없었다. 나는 파렐과 비레, 이 두 사람과 함께 이 지상에서의 목사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는 질투나 시샘이 없었다. 그들과 내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형제 같은 우정은 세 사람의 빈번한 서신 왕래를 통해 잘 드러난다. 그들은 서로에게 보낸 서신들을 통해 신학적 쟁점들과 교회의 문제점들을 솔직하게 논의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활과 관련된 문제들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여기 하나의 사례가 있다. 1552127, 칼빈은 파렐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서 그는 파렐의 지나치게 긴 설교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칼빈은 그의 사랑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일깨워 주었다.

 

자네는 종종 설교를 지나치도록 길게 하는 것이 잘못임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겠다고 고백하였지.” 그리고는 사탄이 설교 시간에 대한 파렐의 실수를 파렐의 사역으로 낳은 많은 선한 일들을 파괴하는 데 사용하지 못하도록, 설교의 시간을 좀 줄이라고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당시 칼빈의 설교는 1시간~1시간 30분 정도였지만 칼빈의 친구 파렐은 3~4시간 정도 설교를 했다)

 

개혁주의 신자들이 우정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사례를 소개하겠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사라 에드워즈의 8명의 딸들 가운데 셋째 딸로서, 식민 시대에 뉴저지에서 믿음 있는 가정주부로 살았던 에스더 버(Esther Burr)의 일기를 한번 살펴보자. 1750년대 중반에 에스더는 다음과 같이 아주분명하게 선언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제외한다면, 친구들이나 단체의 모임이나 대화보다 더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해 주는 것은 없다.”

 

그녀는 훗날 프린스턴 대학의 교장이 된 아론 버(Aaron Burr)의 아내이자 두 아이들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바쁘고 소란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간절히 추구했다. 그리고 그릴게 함에 있어서 친구들이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선물임을 깨달았다.

 

1756123일의 일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했다고 말한다. “우리에게‥‥‥친구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자비이다.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친구 하나 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비참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있는 삶은 진정한 활력을 가져다줄 것이다.”

 

에스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친구는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복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에스더는 왜 친구와의 우정에 그토록 큰 가치를 부여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인 친구들과의 대화가 영적 성장에 매우 중요한 것임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확신은 그녀가 1755420일에 가장 친한 친구인 사라 프린스(Sarah Prince)에게 쓴 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사랑하는 당신도 역시 그러하겠지만 나는 당신과 같이 속마음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있는 매력적인 친구들을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비밀스러운 예배를 제외하고는 종교적 담화가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것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 외에 더 좋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일에 게으른 것은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인지요!”

 

여기서 에스더가 말한 종교적 담구와 우정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에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친구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삶을 함께 나누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음을 투명하게 여는 사람들이다. 에스더의 표현에 의하면, 그들은 서로 아음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털어놓은사람들이다.

 

신자는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힘과 격려를 얻는다. 친구들과의 영적 대화를 가리켜 '우리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라고 표현할 때, 에스더는 분명히 이것을 은혜의 한 방편, 즉 그리스도인들을 구세주와 교제하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한 방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5. 은혜의 또 다른 방편들

 

칼빈주의자들은 항상 은혜의 방편을 존중해 왔으며, 다른 방편들도 높이 평가했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 시대의 칼빈주의자 찰스 스펄전은 1868년 그가 출판한 잡지인 검과 흙손(The Sword and the Trowel)에 기고한 논문에서 침묵과 금식과 기도로 보내는 고독한 시간을 옹호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이 네 가지 방편들,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영적 교제를 부지런히 사용하고 이 방편들에 헌신한다면, 우리는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삶을 살며,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의식 있는 존재로서 합당한 신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방편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를 소원한다!

 

질문:

1. 존 서클립이 성령의 감화들영혼, 신앙으로 활발하게 각성된 영혼이라고 말한 것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표현인가? 그렇다면 왜 그렇고, 아니라면 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2. ‘말씀의 영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3. 개혁주의 전통은 왜 리차드 그린햄의 표현대로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한 것인가?

 

4. 우정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더 성숙해지게 만드는가?

 

5.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삶 속에서 유익했던 은혜의 다른 방편들은 무엇인가?

 

마르투스선교회에서 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최근 노우호 목사의 방언 검증론에 대한 논쟁이 페이스북(facebook)을 뜨겁게 달구었다. 사실 공개적으로 책은 발간되지 않았지만(회원에게만 판매 됨), 그의 강의가 유투브에 올라와 있었고, 그의 책 요약본이 페이스북에 돌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말하면 방언은사 부정론이다. 그 동안 방언에 대한 반대는 주로 은사중지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은사중지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본래 성령의 은사인 방언이 있었지만 사도들이 죽으면서 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을 넘어선다. 방언의 은사는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잘 몰라 잠시 착각하여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생각했었으나(고린도전서 12-14장) 나중에 그 실상을 알고 그것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린도후서 11장) 그의 주장이다.

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 논란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최근에 그의 책 『방언을 검증하자』(경남: 에스라하우스 2014)를 입수해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방언을 검증하자는 그의 주장과 논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면밀히 분석해 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게다가 논리 또한 허점투성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은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과연 올바른 성서적 근거에 기인했는지 여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또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역시 그의 주장에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듯하다. 단지 “그 사람은 체험이 없어서 엉터리 해석을 하지.”라고만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그의 주장을 분석해 본 결과,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크리스천의 상식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방언은사 부정론

노우호 목사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현대 교회에서 행하지는 방언은 100% 가짜다. 자신이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의 은사를 검증해 본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인가? 그에 의하면 고린도교회에는 방언의 은사가 본래 없었고, 바울이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였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해 본 결과 외국어는 없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방언은 100% 가짜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주장에는 많은 논리적 오류와 비약, 왜곡된 지식과 편향된 해석이 자리 잡고 있다.

방언이 외국어라고?

노우호 목사 주장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순환논법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방언을 외국어라고 전제하고 현대 교회의 방언은 가짜라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외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전제와 똑같다. 그는 자신이 전제하는 것, 즉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외국어라는 것을 선언할 뿐, 바울의 편지글을 통해서 이를 증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통해 방언을 검증했다. 노 목사는 ‘방언’을 가리키는 ‘글로사’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지방어’이기 때문에 방언은 실제 언어인 외국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글로사’의 의미를 일반 용법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헬라어에서 ‘글로사’의 기본 뜻은 ‘혀’다(막 7:33). 영어에서 모국어를 ‘mother tongue’이라고 하여 ‘언어’를 의미하듯이, 헬라어 ‘글로사’도 ‘언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행 2:11). 또 환유에 의해 이것이 ‘공통 언어를 쓰는 나라 혹은 백성’을 의미할 수 있다(계 5:9). 바울이 ‘방언을 말하다’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 ‘글로사’는 새로운 의미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가 방언을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8-10). 바울이 열거한 9가지 성령의 은사는 모두 초자연적인 성령의 나타남(고전 12:1, 7)을 의미한다. 그런데 학습이 가능한 외국어가 성령의 은사 목록에 들어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또 바울이 설명한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는 구절에서도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님을 암시한다. 아울러 방언이 이성이 아닌 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방언을 통역하기 위해서 그 언어를 잘 아는 통역사가 아닌 통역의 은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이어서 바울은 방언이 공적으로 행해졌을 때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고전 14:6-19), 인간의 언어도 그 뜻을 알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외국인이 된다고 비유하는데(10-11절), 통역되지 않은 방언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방언이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할 때는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과 외국어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교통이 안 되는 공통점이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 외국어가 인간의 언어라면 방언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어야 한다.

방언을 외국어인가로 검증한다고?

위에서 본 대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면 노우호 목사가 방언을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검증했다는 것은 무의미한 말이 된다. 그는 37년 동안 방언을 바울이 말하는 방언이 아닌 것으로 검증하느라 헛수고를 한 것이다. 방언의 진위 여부를 그것이 실제 외국어인가 아닌가로 증명한다는 자체가 엉뚱한 생각이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 통역 은사의 목적이 방언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통역의 은사의 목적과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예배 가운데 예언이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고 하는데, 그 조건은 그것이 통역되지 않았을 때다(고전 14:5). 만약 통역이 되면 방언은 예언과 같은 효과를 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들에게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했다(고전 14:13). 예언이 위로, 책망, 권면을 통해 듣는 사람을 세워주는 것이라면(고전 14:3), 방언도 통역을 통해 사람들을 세워 주는 은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언 통역의 목적은 예언의 목적과 같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하라고 한 일이 없다. 만약 있다면, 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올바로 신앙고백을 하는가에 해당할 것이다(고전 12:1-3).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 그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고, 그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올바른 신앙고백도 없는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와 비슷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나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언의 은사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9가지 성령의 은사 중 하나로 제시하는 영 분별의 은사다. 영 분별의 은사란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으로(고전 12:7) 어떤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임하는 은사다. 다른 이에게 나타나는 영적 현상의 출처가 성령인지 악령인지를 즉시 분별해 내는 것이다. 바울이 첫 선교 여행지인 구브로에서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만나자마자 보였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바예수를 향해 “모든 거짓과 악독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 13:11)고 말했다. 바울이 바예수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토대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여 볼 때 이런 말이 바울의 입에서 나왔던 것이다(행 13:10). 그래서 혹 어떤 사람의 방언이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서 분별해 낼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방언을 녹음해서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 해석이 동일해야만 참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데, 이 역시 방언통역의 실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의 주장 자체가 방언이 외국어라는 전제에 기인한다. 실제로 방언이 외국어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신자의 기도라면 통역의 범주는 그 기도 전체라기보다 그 사람의 위로와 책망과 권면의 필요에 따른 일부분이다. 또 통역의 은사 자체도 그것이 통역자라는 인격을 통해서 표출되기 때문에, 같은 성서를 읽어도 다른 설교가 나오듯이, 같은 방언이라도 통역하는 사람의 언어와 신학으로 표현이 달라질 수 있다.

노우호 목사가 제시하는 방언 검증의 원리로 제시된 사랑과 교회건덕(96-98)도 검증의 원리로써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길을 따라 그것을 사용하라고 하는데(고전 12:31), 그 전제는 그 은사가 진짜라는 것이다. 은사의 진위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사람이 진정한 은사를 체험했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고전 13:1-3). 바울은 은사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지, 사랑이 없이 사용되는 은사가 가짜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방언이 통역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때는 자신을 세운다고 했지 교회를 세운다고 하지 않았다(고전 14:4). 그러므로 교회를 세우는가의 여부로 방언의 진위를 증명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또 예배 가운데 일어나는 영적인 일에 대한 분별은 개인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공동체가 함께 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방언이나 예언을 하면 예배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이 그 예배 가운데 그 영의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다(고전 14:29).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취소했다고?

노우호 목사의 주장 중 그가 매우 중점을 두는 것 중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의 실상을 잘 모르고 처음에는 은사로 인정했다가 후에 취소했다는 것이다. 성경에 방언의 은사가 없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방언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로 열거하는 고린도전서 12장 10-12절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를 비껴가기 위해 노 목사는 역사비평적방법론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바울이 지식과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나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실상을 알고 은사로 인정한 사실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11장에 바울이 뭐라고 했기에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을 취소했다고 주장하는가? 흥미롭게도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방언이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가 주목한 구절은 두 절이다. 첫째,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해도 잘 용납한다는 것이요(고후 11:4), 둘째,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고후 11:13)이라는 것이다. 노 목사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속이는 일꾼(그는 개역한글번역을 사용하여 “궤휼의 역꾼”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이 바로 고린도교인들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린도후서를 심각하게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는 “궤휼의 역꾼”을 고린도교인 전체로 해석하여 바울이 고린도교인 전체를 부정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이 하는 모든 것을 바울이 부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방언도 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후서에 대한 그야말로 엉터리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은 고린도교인들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온 자들이었다(고후 10:12, 18). 바울은 이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학자들은 이들을 바울의 반대자 혹은 대적자라고 부른다. 최근 발행된 한 신약개론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대적자들은 분명히 당시에 회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방문자들로서, 그들은 회중과 함께하는 바울 사역에 어떤 위협을 초래”했던 자들이다(I. Howard Marshall 외, 『서신서와 요한계시록』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7], 162. ). 이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주석자들 가운데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은 고린도교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거의 없다. 신약개론 책이나 고린도후서 주석 책 한 권만 읽어도 해결되는 문제를 노우호 목사는 말도 안 되게 풀고 있는 것이다.

표적으로서의 방언은 그친 것이라고?

노우호 목사는 사도행전과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방언은 표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 후에는 그쳤다고 말한다. 그는 표적이 나타날 때의 순간성과, 이 표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계속 나타날 필요성을 착각한 것 같다. 표적이 일어날 때는 그것이 순간적이지만, 그 체험은 다른 곳에서 성령이 임할 때 얼마든지 계속 될 수 있다. 만일 노 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마가복음 16장과 사도행전에서 각각의 저자는 이러한 표적이 일시적으로 존재하다가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본문을 썼다는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또한 성령이 임하는 곳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마가복음 본문(16:9-20) 저자는 예수 믿는 곳에 방언을 비롯한 여러 표적이 나타난다고 본 것이고, 누가는 성령이 임하는 곳에 사람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행 1:8).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고 엉뚱하다. 성서적 근거도 설득력이 없고, 논리적 비약도 심하다. 그런데 노우호 목사의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어필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 그가 오랫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일로 얻은 신뢰일 것이다. 둘째, 그는 한국 교회 대다수의 신학적 지지를 얻고 있는 칼빈을 신봉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설명에서는 그는 매 은사마다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라는 어투로 칼빈의 주장을 소개한다(70-83). 셋째, 그의 주장이 체험보다는 성경 해석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헬라어 단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약 성경 구절에 대한 자신만의 새로운 번역을 제시할 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 대한 역사적, 나아가서 비평적 해석까지 곁들여 자신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애를 썼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주장을 일정 부분 신뢰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서 해석은 초보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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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 오늘날에도 지속…단, 사도시대와는 구별해야”
김영한 박사, 기독교학술원 성령은사연구 첫 시리즈 <영적 분별> 펴내

2015/02/12 (목) 13:38 ㆍ추천: 0      

지난해 12월 한 여전도사가 퍼뜨린 ‘한국전쟁설’은 기독교인의 영적 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교회 안팎으로 영적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이때, 축사와 은사, 방언, 예언, 신유 등 다양한 영적 현상에 대한 성경적 기준과 통찰력을 제시한 책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김영한 박사가 펴낸 <영적 분별>이 그것이다.

성령과 사탄에 의한 영적 현상, 공통점과 차이점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장 1절).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는 최근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2천 년 전 사도요한은 초대교회를 향해 ‘영들을 분별하라’고 교훈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상황”이라며 “각종 이단의 득세와 사이비 종파들의 발호는 교회와 사회의 영적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다. 이러한 한국교회 상황에 도움이 되고자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기독교학술원의 성령은사연구 첫 번째 시리즈로 출간된 <영적 분별>은 영분별ㆍ귀신추방ㆍ은사ㆍ방언ㆍ예언ㆍ신유 등 영적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별해야 할지를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풀어내고 있다.

성경적, 역사신학적, 종교현상학적, 조직신학적, 영성신학적 측면에서 영적 현상들의 의미를 차근차근 짚어나간 그는 성령과 사탄에 의한 영적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올바른 영분별을 위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 △공교회를 인정 △사도신경의 내용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5가지 기준은 또한 △일상생활에서의 성결 △인격적인 삶과 믿음 △이웃을 위한 헌신 △선행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김 박사는 “어떤 기적이나 신비 현상, 직통계시, 입신, 방언, 예언기도, 축사(귀신축출), 신유 그리고 교주의 카리스마나 열광적 종교행사가 진리의 영적 현상을 담보하는 기준이 결코 될 수 없다”며 “신구약 66권만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논지의 연장선에서 그는 피터 와그너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신사도운동에 대해 “건전한 성경적 은사 현상과 다르다”며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은사운동 대부분이 초기에는 교회 갱신을 가져왔으나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성령의 역사에 사용된 은사자들이 초창기에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욕심과 교만이 들어가서 성령의 역사를 인본적으로 사유화했던 것”이라며 “성령 운동의 핵심은 표적 추구가 아니라 열매”라고 강조했다.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사도시대와는 구별해야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성령의 역사에 동반하는 은사와 기사(奇事)와 이적(異蹟)들은 과연 지금도 있는 것인가? 있다면 거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의 외적 증거인가 아니면 신비주의에 빠진 것인가?

김 박사는 은사와 기사와 이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은사지속설’을 지지한다. 이와 관련 18세기 영국의 버틀러 감독(Bishop Butler)과 기브슨 감독(Bishop Gibson), 이후 미국 구프린스턴학파의 워필드(B. B. Warfield),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등은 은사와 기사, 이적이 사도시대에서 끝났다는 ‘은사중지설’을 주장했다.

그는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오셔서 성경의 증언을 깨닫게 하시고 교회를 지속적으로 설립하도록 도우신다는 은사지속설을 믿는다”며 “다만 오늘날의 은사는 사도시대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열광주의적이고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58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영적 분별>은 매 순간 치열한 영적 싸움의 현장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에 유익한 교훈을 제공한다.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를 비롯해 림인식 목사(노량진교회 원로), 조종남 목사(서울신대 명예총장),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원로),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김중은 교수(장신대 총장 역임),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 등이 추천사를 썼다.

김민정 ⓒ 뉴스미션
USA아멘넷

 

예수 시신 덮었던 수건의 피에서 모계유전 23개 염색체만 나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방영... 과학자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것은 사실인가? 아니면 꾸며낸 얘기인가?' 

 

성경에 많은 기적들이 기술돼 있지만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구절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은 '예수를 신성시 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라는 평가를 내려왔다. 과학적으로 남성의 도움 없이 여성이 잉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할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라.'(마태복음 1장 18~21절) 

 

예수의 동정녀 출산은 누가복음에도 비슷하게 기술돼 있다. 또 예수가 탄생하기에 700여년 전에 이사야도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예언한 바 있다. 

  

하지만 성령 잉태라는 성경의 기록은 인류 역사에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 사건이기에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인식돼왔다. 과학은 여러차례의 실험을 거쳐 동일한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타났을 때 '과학적 입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통상 사람의 유전체(genome)는 46개의 염색체로 구성된다. 46개의 염색체는 22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 염색체로 구성된다. 성 염색체는 XY(남성), XX(여성) 등 성을 구별하는 염색체이다.  이같은 염색체의 결합이 있어야 아이가 탄생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과학적 상식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방송매체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National Geographic Channel)이 최근 스페인 오비에도 성당에 보관돼 있는 '예수의 얼굴 수건' (Sudarium of Oviedo. 사진 위)이 묻어 있는 피를 전문연구소에 의뢰해 DNA를 분석한 결과 혈액형이 AB형이라는 것과 함께 모친 쪽으로부터 이어받은 22개 염색체와 남성(XY) 염색체 1개 등 23개만이 추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부친 쪽으로부터 받게 돼 있는 23개 염색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 속에 모계의 유전자만 발견됐다는 것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예수의 피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 검사는 백혈구가 살아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유전자 염색체 검사를 할 수 없다. 사후 2천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피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피 속 유전자 검사에서 모계쪽 염색체만 발견됐다는 것 또한 기적이라는게 과학자들의 평가다. 

 

'예수의 수건'은 요한복음에 처음 기술돼 있으며, 현재 오비에도 성당에 보관돼 있는 손수건이 2천년 전 그 손수건이라는 것에 이견을 다는 학자는 없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제자들이 와 보니 머리를 쌌던 수건(Sudarium)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요한복음 20장 1~8절 발췌) 

 

당시 유태인들은 시체를 세마포로 감싸기 전에 얼굴을 별도의 수건으로 가지런하게 묶은 후 다시 수의로 감싸는 풍습이 있었다. 죽은 사람의 좋지않은 표정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84*53cm)에는 선명한 핏자국과 함께 머리에 씌여졌던 가시관을 서둘러 빼내고 수건으로 동여 매는 과정에서 가시관의 조각들이 같이 묶이면서 수건이 가시에 뚫린 자국도 남아 있다. 

  

예수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 수건은 이탈리아 투린성당에 보관돼 있는 세마포(수의)와 별도의 행로를 밟게 된다.              

 

이 수건은 예루살렘에 보관돼오다가 1100년대 스페인 오비에도의 주교 페라요가 입수해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으로 옮겨왔다. 당시 수건은 다른 성물들과 함께 은 상자에 담겨 안전하게 이동됐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 투린의 세마포(성의)와 오비에도 수건의 혈흔을 정밀 분석한 결과 동일한 시신에 사용됐던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투린의 세마포는 한 때 중세 때 조작된 수의로 발표됐었지만, (중세 때 성당이 화재로 타면서 세마포의 훼손된 부분을 수녀들이 원본과 짜깁기한 부분을) 잘못 검사했다는 정황이 드러났었다.               




[성령훼방죄와 맹세에 관한 고민과 답변]
어젯밤 어느 성도님으로부터 신앙상담을 구하는 메일이 왔습
니다. 어느 날 (군대)후임과 대화 가운데 어떤 사소한 일에 하
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 그 일을
생각해보니 자신이 성령을 훼방한 죄를 범한 것이 아닌가 싶
어서 최근에 너무 불안하고 두려워서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고
민의 내용이었습니다. 혹시 이와 유사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
있지는 않을까 하여 청년에게 보낸 답신을 공유합니다. 작게
마나 신앙에 도움이 되는 분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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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군인이시군요?
우선 힘겨운 군복무 중에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둔 자로 살고
자 애쓰는 님에게 주 안에 안부와 격려를 보냅니다.

메일로나마 님의 마음과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허나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령훼방죄와는
전연 관련 없는 일이니 너무 무섭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
을 드립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님의 고민은 본질적으로 말씀과 교리(신
앙고백)에 대한 빈약한 이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하여, 님의 고민과 관련하여 앞으로 님이 진
리를 배우고 확신함에 있어서 염두해야 할 두 가지 점을 간단
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성령훼방죄에 대한 오해와 참 의미
성령모독죄라고도 불리는 성령훼방죄는 공관복음에 모두 기
록되어 있습니다(마 12:32; 막 3:28,29; 눅 12:10). 그리고
사도 바울 쓴 서신에도 한 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딤전
1:13). 그만큼 신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고의든, 무지든간에) 유독 한국 교회
에서는 이 구절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해석과 적용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나 부흥사들이 주로 신자들에
게 자신의 말(교훈)을 강요하고자 할 때 이들 본문이나 성령
훼방죄라는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또한 신자들의 행동이 자
신의 신앙적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할 때도 그것을 성령
훼방죄라고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들은 목사
나 부흥사의 말에 조금이라도 따르지 않거나 혹은 조금만 양
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경우에 자
신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를 범한 것은 아닌가 하
는 깊은 영적 자괴감과 치명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
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령훼방죄를 이러한 방식으로 가
르치거나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본의를 벗어난 일입니다. 성
경에서 말하는 성령훼방죄란 사함을 받을 수 없는 죄를 가리
킵니다.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극단적인 최절정에 이른
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향해 도
리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그 일을 한 것이라면 악
의적인 증오와 야멸찬 조롱으로 일관한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이 죄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바리새인의 지적은 단
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궁금증이나 예수님에 관한 인식의
부족에서 유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
나님의 영으로 행하신 권능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
사를 파하시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
의 아들이며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사단의 앞잡이로 칭하
며,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마귀적인 사역으로 폄훼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만 그리스도에 대한 반발이 아닙니다. 그를 세상에
구원을 이룰 자로 보내신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을 적용하
시는 성령에 대한,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뜻을 증오하고 배
척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무서원 죄에 대하여 이
것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시면서 이 죄는 세상뿐 아니
라 오는 세상(심판의 때에 맞게 될 영원한 세상)에서도 사하
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엄히 꾸짖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죄는 일반적인 자범죄와 성도들이 여러 가지 방식
으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며 감소되며 심지어 중단될 때가
있는 상황에서 범하는 죄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또한 무지와
태만과 교만과 거짓말같은 죄의 본성적인 성품으로부터 야기
된 여려 형태의 죄와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성도라
고 할지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죄를 범하
게 되며, 지독한 시험과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러한 죄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사역을 전면적으로 부
정하며, 모든 불신앙과 양심의 가책을 초월하여 하나님에 대
해 고의적이며 악의적이고 최종적으로 범하는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닙니다. 성령훼방죄는 모든 죄의 절정이기에 모든 면
에서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와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
로 이 죄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뚜렷한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은
결코 이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죄사함을 받았으며, 설령 죄 가운에 있거나 구원의 확신
이 흔들리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복됨
으로써 마침내 견인하시는 은혜를 입어 구원의 완성을 경험
할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당신의 자녀를 결코 이러한 두려운 죄악 가운데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죄를
들어 말씀하실 때, 그 가운데 내포된 성도를 향한 위로의 메시
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크고 심각한 죄라 할지라도
성령훼방죄만 아니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일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훼방죄가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죄사함을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악마적인 악으로서 너무
나 불신앙적이고 뻔뻔스럽게 사악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총
을 가리며,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의도와 행
위를 서슴지 않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
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일 1:9).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부
요한 은총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와 효력은 우리가 무엇을 했다거나 무
엇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되거나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
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신실하시며 인자하시며 불변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님의 행동은 결코 성령훼방죄라 할 수 없습니다.
님이 두려움과 자책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님의 심령 안에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따라
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죄에 대해 근심하며, 죄로부터 자
신을 분리시키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거듭난 자
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므로, 이번 일로 인해 오히
려 하나님께 더욱 진실히 나아가며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
을 탐구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과 더 깊고 풍성한 교제 가운데
거하며, 성령과 말씀에 의지하여 거룩한 일을 사모하며 행하
며, 날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로서 장성해 가는 기회
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의 주의사항
님의 전언에 따르면, 어떤 사소한 일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으
로 맹세한 일이 마음을 상심케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성령훼방죄가 아니라, 성경적인 맹세가 무
엇인지 잘 모르는데서 발생한 일로 보입니다. 이 점에 대해 간
단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으로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사
적인 차원에서 행해서는 안 됩니다. 합당한 맹세는 경건한 예
배의 한 요소로서 말씀에 합한 예배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따
라서 이 맹세는 우리의 찬송과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에 합당
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행해져야 하기에, 결코 그 영광스
럽고 두려운 이름을 망령되이 또는 경솔하게 대하는 태도나
방식으로는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맹세는 성령과 말씀의 보증을 받아 행해져
야 합니다. 님이 후임에게 한 말은 합당한 맹세라고 할 수 없
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 일에나 함
부로 사용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을 해서
는 안 됩니다. 맹세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
컫는 것은 세째 계명을 범하는 가증스런 죄악입니다. 이 점을
잘 유의하여 앞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 존귀히 대하며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섬기는 성도가 되시라는 소망을 전하면서
이즘에서 갈무리하고자 합니다.

주 안에 평안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성령 하나님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사도신경 강해)의 가르침입니다.
*성령강림절(맥추감사절, 6월 8일)에 저희 교회에서 주일 오전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제20주(53문) 욜 2:28-32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

사도신경의 세 번째 부분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오해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과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령을 믿으며’ 다음에 나오는 조항들은 성령에 관한 고백의 구체적...인 조항이다. 즉 교회, 신자들의 교제, 사죄, 부활, 영생은 성령이 하시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성도들의 실제 생활과 연관된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를 그리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을 주관하셨는데,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를 주관하신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교회에 속하며 서로 교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죽음에서 살아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의 칭의를 이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화를 가능하게 하신다. 필시 성령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면 성부 하나님이 구원을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구원을 성취하신 일이 우리 개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고대에는 성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성자 하나님에 대한 것만큼이나 오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성령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이나 힘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극단적인 혼합주의적 신비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초자연적인 이적과 심리적 황홀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에는 강력한 체험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성부 하나님이 계시며, 성자 하나님이 계시는데, 성령 하나님도 계신다. 한 분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함께 세상을 만드셨고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셨다. 참으로 세 분의 하나님은 함께 존재하시며 일하시는데, 그분들은 어떠한 충돌이나 모순도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신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모양으로 계시지 않았다. 즉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할 수 없다. 세 분은 한 분으로서,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

예수님의 약속

요한복음 13-17장에는 예수님의 긴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고별강화’(farewell discourse)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매우 중요한 말씀을 주셨다. 특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님은 이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지 않겠지만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분이 계시는 것과 똑같게 하시고 그분의 일을 대신하심으로써 그분이 여전히 세상에 현존하시게끔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별강화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작별인사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그들 가운데 계시겠다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령님이 내려오셨다.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 구속사의 진전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는데,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었고,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이제 성령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어야겠는데, 그 이전에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그분이 이 땅에 계시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이 땅에 계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는 성자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이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성령 하나님이 이 땅에 ‘공식적으로’ 오심으로써 그분의 활동이 더욱 왕성해졌다. 이는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구속사역이 구체화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맥추절과 성령강림절

구약의 3대 절기가 있다. 그것은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오순절, 칠칠절)과 수장절(초막절)이다. 유월절(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날에 그들은 첫 열매를 먹으며 감사하였다. 맥추절(여름)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오순절)에 지켰다. 이때에 그들은 처음으로 제대로 익은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수장절(가을)은 그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 시기에 그들은 추수를 모두 마치고 한 해의 풍성한 소출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겨울에 안식하였다. 따라서 구약의 3대 절기의 요점은 봄(유월절), 여름(맥추절), 가을(초막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절기들은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구속사적으로 성취되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이다. 맥추절은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영적 추수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고 사명을 불어넣어주는 절기이다. 초막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완전한 추수와 영원한 안식을 예시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3대 절기는 구약시대에 한정되거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민족적 명절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모든 세대가 인류의 마지막 날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신 의미이다(참고. 출 23:14, 17).

이제 이 절기들 가운데 맥추절에 대하여 알아보자. 맥추절은 밀과 보리를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날이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날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해서 오순절 혹은 칠칠절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이르러 맥추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셨다. 따라서 구약의 맥추절은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것을 기념하였지만 신약의 성령강림절은 성령의 오심으로 영적인 추수가 시작되는 것을 선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본격적인 영적 추수가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맥추절과 신약의 성령강림절은 같은 것이므로 신약의 교회는 성령강림절을 맥추절의 성취의 날로 지켜야 한다.

요엘의 계시와 베드로의 해석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이 엄청난 현상과 함께 강림하셨다(참고. 행 2:1-13).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성령님의 강림을 요엘의 계시의 성취로 해석하였다(참고. 행 2:14-41). 그는 하나님이 맥추절을 통하여 예시하셨고 요엘을 통하여 계시하신 일이 드디어 오순절에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강림을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속사적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오랫동안 준비하셨으며 예수님은 이 일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셨고 드디어 때가 되어서 이 일이 이루어졌다.

요엘 2:28-32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성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임하셔서 다양한 표징들을 보이신다. 여기서 환상과 꿈과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다양한 방식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주셨지만 신약시대에 하나님은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신다.

성령의 강림은 종말의 날의 도래이다. 그리고 종말의 날은 구원과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요엘 2:30-32에 기록된 것과 같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제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너무나 많고 다양하다. 우리의 지식과 감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님의 기본적인 사역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은 나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아무런 선한 요소가 없었지만 그분의 사랑 가운데 성령을 주셨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참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다.

2. 성령은 나를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신다.

성령은 참된 믿음으로 나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이것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보여준다.

성령은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성자의 이름으로 보내어지신 분인데, 성자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성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성자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성자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성령은 성자를 증언하시는데, 성자께서 죽으신 일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과 하늘로 올라가시는 일과 다시 오실 일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성령을 말할 때에는 성자를 말해야 한다. 성자를 제외하고 성령을 말할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영이다. 즉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알고 예수님의 구속을 깨닫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이다.

3. 성령은 나를 위로하신다.

신약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구약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사도들과 신실한 제자들이 커다란 위험과 두려움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들 앞에는 ‘간혹’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위협적이었다. 사실상 그들에게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들은 위험 앞에서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았으며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성령 하나님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근심했지만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는 것과 같이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들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방식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분은 기쁨을 주신다.

4. 성령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베드로전서 4:14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자들은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위에 ‘영광의 영’이신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떠난다. 세상의 재물과 영화도 나를 떠난다. 그러나 우리를 떠나지 않는 유일한 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버리려고 하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의 구원의 보증(견인)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행실과 신실함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 비록 우리가 타락하고 믿음의 많은 부분을 상실할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타락하고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보존하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적용시키신다. 그 일을 통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택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은 우리 영혼을 달콤하게 하고 부요하게 하는 교제의 터이자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연합으로 우리가 모든 영적인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 접붙인 바 되어야 한다. 접붙여진 가지가 새로운 뿌리의 진액과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혼인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특권과 은택을 부여받고 그 안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하나님께 대하여 왕과 제사장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셨고, 성부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받으신 성령의 충만함을 성도들을 위해서 쓰려고 하신다. 마치 태양이 다른 존재들을 비추기 위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그 능력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어 헌신의 직무를 위해 예비되셨다(10:38). 그리고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져 흘러내린 기름은 옷단을 타고 신자들에게까지 흘러내려 그들의 얼굴을 아름다운 영광으로 빛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유연한 마음을 준비하게 한다.

 

기름은 신자들의 영혼 속에 신적 사랑의 화염을 일으키고 유지시키며 등불처럼 그 마음을 비추어 영적인 일들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한다. 기름부음이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기름부음은 또한 신자들의 즐거움이다. 신자들에게 부어진 기름은 그들에게 있어서 환희와 기쁨의 원인이다. 신자들 속에 있는 모든 기쁨의 원인들과 그 기쁨을 일으키시는 장본인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17:13).

 

그리스도께서는 동료들보다 은혜의 성령을 훨씬 더 많이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4:7) 주셨지만, 그리스도께는 한량없이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34).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19). “우리가 그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그리스도의 동료들인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성령에 참여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주신 분량에는 미칠 수 없다. 성도들이 누리는 성령의 은혜와 영적인 특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와의 복된 교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1:3).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pp 174-178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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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령충만한 삶이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오해되고 있는 '성령 충만' ― 신유, 방언, 예언 등 은사의 올바른 개념을 밝힌다. 


바울 선생님처럼 능력있는 삶을 사신 분도 자신은 열심히 선을 행하려 하나 오히려 원치 않은 악을 행할 때가 많다고 했다(롬7:19). 그래서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런 모순에 대하여 그는 선한 것이 육신 안에 거하지 않고 죄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롬 7:20). 바울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 안에 악을 행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은 신약 전편을 통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울 선생님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제시하였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자신의 노력으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은 무기력하여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기쁨과 평안, 그리고 감사를 체험하며, 마음 속에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넘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엡 5:18-20). 지금까지 능력있는 삶을 살았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잘못된 성령론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박철수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삼대 병 중의 하나로 '잘못된 성령론'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무슨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거나 병을 낫게 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비정상적으로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령과 성령 충만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성령론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박철수. 축복의 혁명. 11쪽)

성령 충만에 대한 가장 많은 오해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신비로운 은사만을 은사로 생각하고 이러한 은사를 받은 것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의 은사는 신비로운 은사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말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명백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은혜롭게 해석한다고 하면서 몇 번을 비비 꼬아서 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의 결과에 의하여 신비로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전남대학의 한 교수님은 광주 시내의 어느 교회에 시무하시는 장로님이다. 어느날 그 분이 출근 버스 안에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강사의 가르침을 받고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방언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교회를 섬기는데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결과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구원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장로님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결국 얼마 못가 그 교회를 떠나실 수밖에 없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신비로운 은사외에도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을 은사로 열거하고 있다(롬 12:8). 특히 바울 선생님은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은사를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고 고전 13장에서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하여 말함으로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비로운 은사만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은사를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다르다. 고린도 교회는 온갖 은사를 다 받은 교회였다. 그러나 바울 선생님은 고린도 교회를 어리고 육신에 속한 교회라고 했다(고전 3:1). 왜냐하면 은사는 많았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는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서이다(엡 4:12).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서로 자기의 은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며 싸우곤 하였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 교회를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한 것이다.

신비한 체험은 매우 값지고 좋은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모두 이러한 체험을 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신비 체험은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체험을 한 본인의 신앙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주변에서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이 더 큰 시험에 빠지고 잘못된 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신비 체험을 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게 되고, 체험 중심 신앙으로 전락하며, 그러한 중에 사탄이 주는 체험과 성령께서 주시는 체험을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만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은 실패하기 쉽다. 신비한 것은 초자연적인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에 필요할 때에 예외적으로 특별히 주시는 현상이다.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법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이 수시로 깨어지는 것을 결코 바라시지는 않으신다.

 

기독교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며, 방언의 은사는, 잘못 사용되지만 않는다면, 방언을 받은 자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 한국교회에는 이상하게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냉철한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은사는 교회에는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고전 14:4). 그래서 바울 선생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하였다(고전 14:28).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순수한 이성적인 깨달음으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4:19).

 

방언에도 가짜가 있다. "그 출처로 보아 방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며, 다른 하나는 사탄이 주는 방언이다. 저명한 교회의 지도자요 방언을 실제로 체험했던 잭 헤이포드 목사는 솔직이 고백하기를 '교회에서 하는 방언 가운데는 사단의 방언도 있고, 심리적인 방언도 있으며, 동시에 성령의 방언도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모든 방언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 들이기를 꺼려 하고 있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138쪽)"

 

실제로 소위 은사 집회라고 하는 어떤 집회에서는 방언을 연습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연습으로 습득될 수 있다는 넌센스가 21세기를 바라보는 현 시점에서도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다음의 지적을 우리는 음미해 보아야 한다. "의식있는 마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비자발적인 것은 성령께서 주신 방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힌두교, 몰몬교, 이슬람교에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경험 중에는 사단에 의한 것도 있다. 사단은 순수한 영적 체험을 모방한다.(존 스토트. 오늘 날의 성령의 사역)"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이 성숙한 후에,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것과 사탄이 주는 것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을 때 방언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올무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박사들과 대학 교수들이 말도 되지 않는 이단의 가르침에 빠져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 중에, 많은 교인들이 목사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멘 아멘하다가 심지어는 목사가 기침만 하여도 아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소 과장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해서 무조건 아멘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지를 판단하여야 한다.

 

예언의 은사는 많이 오해하고 있는 은사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들이다. 개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고 말해 주는 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성령 충만하였다고 하는 자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빙자한 점쟁이들이 공공연히 활동을 하고 있다. 무슨 사업을 해야 성공하겠느냐, 내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겠느냐 같은 것은 부채신(?)과 같은 잡신에게나 물어야지 거룩하신 하나님께 물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예언'이라고 번역된 이 말의 헬라 원어를 바로 번역하자면 '대신 말하는 것' 즉 '대언'이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65-66쪽)" 예언이란 "길이 없는 시대에 길을 찾아서 선포하는 것이다. 나라와 백성과 그 시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정치에 길이 없고 남북 통일에 길이 없고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뚫고 나갈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길을 선포해 주는 것, 그것이 예언이다.(김진홍. 비전있는 교회. 38-39쪽)"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살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신유는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오직 안수 기도를 하는 것으로만 병을 고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는 질병들이 많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신유의 은사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필요한 시대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오지나 덜 개화된 사회에서는 신유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문명사회에 살면서 의술을 사용하지 않고 신유의 은사만을 바라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의술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병든 자를 위하여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였다(약5:14). 여기에서 기름이란 옛날에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열심히 공부하여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또 열심히 공부하여 자격을 갖춘 의사가 되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신유의 은사를 받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시는 신유의 은사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초자연적인 체험이나 기적을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한 신앙이 아니다. 성경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전에 설교시간에 어떤 목사님이 쓰신 책에 나온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피곤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권면이 지혜로운 권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이 피곤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쉬라는 메시지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쉬어야 한다." 그랬더니 이 말에 반발하는 교우가 있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바에 의하면 철야기도회 때 피곤하여 더 열심히 기도하였더니 피곤이 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와 같은 특별한 현상을 일반화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살려주시라고 온 힘을 다해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살려 주실 수 있다. 21세기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얼마든지 그러한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당연히 살려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서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4:7)"고 하신다.

 

"성경이 보여주는 기적은 우연적인 사건, 하나님이 갑자기 무엇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구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인생들에게 계시해 주시는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45쪽)" 초자연적인 체험이나 기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이적을 통하여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꾸짖으셨다(마 12:39).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것을 감격으로 간직하여야지 자랑하고 다니는 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한다. 바울 선생님은 삼층천에 올라갔다 온 감격에 대하여 15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이 간직하였다. 신비 체험은 자신의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만 회중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비 체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허욕을 가질 때에 마귀가 뛰어들기 쉽기 때문이다. 즉 마귀가 천사로 가장하여 그런 것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 … 우리 신자들은 (신비로운 것보다) 성경 말씀으로 녹아져야 한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78쪽)" 우리가 관심을 가져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 사단의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잠시 기분이 좋았을 때, 좋은 찬송을 들었을 때, 손뼉치며 즐겁게 찬송하다가 기분이 좋은 것을 성령 충만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하면서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기분을 느꼈을 때 그것이 정말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인지 스스로 분위기에 젖어서 느끼는 것이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쁨이고 감동이지 성령 충만은 아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화된 삶을 사는 것, 인격이 변하는 것,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다(갈 5:22).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열매에 있지 성령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기적을 행하는 사람보다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궂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령 충만에 가까운 사람의 모습이다.

성령 충만한 결과는 시와 찬미로 화답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엡 5:18-21). 그 결과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비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고, 사장의 태도가 달라지고, 종업원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엡5:22-6:9). 산 기도를 아무리 많이 다녀도, 봉사를 아무리 잘해도, 방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어도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이웃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과속 운전할 수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신경질적일 수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혀로 남의 마음을 찌를 수가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보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얼마나 닮아 가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성령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많은 일을 하게 된다.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엡 5:18). 성령 충만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의도적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구원을 값없이, 그저 은혜로 받는 것으로 강조하여 가르치다 보니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 생활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생활의 일부 영역이라도 감춘다면 그 분은 우리를 채우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순간 순간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 드리듯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롬 12:1). 의도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결코 성령 충만할 수 없다. 부득이 지은 죄는 수시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여 주님과의 교제가 끊기지 않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더러운 그릇을 채우시지 않는다.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때 바로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점점 더 큰 일을 맡기신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서 큰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다시 영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단번에 받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완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성령 충만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맺는 말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런 경험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도덕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신비로운 일을 하여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행 1:8). 성령 받아서 뒤집어졌으면 권능을 얻고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증인의 삶이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 충만하면 인격이 변하고 행위가 변한다. 행위가 변하지 않는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조인선 / 광주 중부교회 장로, 전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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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무엇때문에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가?

김정한 ㆍ 2014-03-04 (화) 04:39

어때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는지에 대한 斷想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한 말씀과 그 성령님을 반드시 받아야만 할 것을 명하시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지? 그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는 것 때문에 받으려고 하는지 필자는 지나간 저의 개인적 경험과 목회를 돌아보면서 써 보았다.

필자는 주님께서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1. 주기도가 이루며 이루어지길 위해서 (눅11:1-13)
2. 증인이 되기 위해서(행1:8)
3. 거룩하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님이 필요하기에 성령님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레19:1-2 마5:48  엡4:22-24)

그런데 필자의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 대부분 교인들은 행1:8의 성령님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와 *은사*를 받으려고 성령을 구하였지 않나 생각이다. 한때 성행했던 기도원이나 개교회에 온 부흥사들이 그런 것들을 부추겼고 그 당시 목회자들도 그런 것이 대세였다고 본다.

그런 성령의 외적인 사역을 구하고자 함은 예수님의 증인(μάρτυρός= 순교자 동의어)이 되고자 함이 아니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육신적 본성에 기인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변질시킨 이유중 하나라고 필자는 본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1.  주님께서 명한 주기도문처럼 자신과 ‘우리’라는 공동체가 해나가야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가야 하겠기에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고 하셨다고 본다.

2. 또한 증인이 되다가 순교당할 상황에서도 두렴없이 하려면 성령님의 권능이 필요하기에 그랬다고 본다. 교회사를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할 수 있던 힘을 성령님께서 주셨기에 순교하였다고 본다.

3.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거룩에로의 명령은 택민에게 (레위기 19:1-2), 제자들에게 (마태5:48) 주셨다. 거룩은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본다. 거룩은 곧 하나님이시다. 거룩한 분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거룩한 영, 곧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죄인된 우리들을 거룩하게 할 분이 없기에 성령을 받아라고 하였다고 본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하나님을 닮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주기도 문에서 가르쳐준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한 것이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무지와 번영주의에 부합한 잘못된 욕망으로 성령을 구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이 돼서 글 올려봤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보혜사 성령유감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 부릅니다(16:7). 보통 크리스천들에게 보혜사가 무슨 뜻이냐 물어보면 어물어물합니다. 대부분 상담을 해주시는 분”, “조언을 주시는 분” “어깨를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시는 분정도로 이해합니다. 이런 이해를 갖게 된 것은 아마 영어로 "카운슬러"(Counselor, NIV), "위로자"(Comforter, KJV), "돕는자"(Helper, NASB)로 번역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카운슬러(Counselor)라는 단어를 조금만 더 깊이 이해해도 상황은 달라집니다. 카운슬러가 (법률) “고문”(顧問)이란 뜻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고문은 어떤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직책 또는 그 직책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나온 뜻이 변호사”(advocate)입니다. 보혜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클래토스는 원래 변호사”(advocate)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파라클래토스보혜사”(保惠師)로 번역한 것은 아무래도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한자어 보혜사는 은혜를 보존해 주는 분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파라클래토스법적 후견인”, “변호사”, “법률 고문”, “고문 변호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께로 가시면 자기 대신 파라클래토스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했을까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가 하나님께로 떠나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면 퍼즐이 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고아과부나그네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자들이었습니다. 고아는 아버지가 없는 자이고 과부는 남편이 없는 자입니다. 그리고 나그네라 함은 이스라엘 땅에 와서 사는 외국인 거주자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세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모두 법적 보호에서 취약적인 사람들입니다. 착취를 당하기 쉬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그들에겐 법적 후견인들이 없습니다. 아버지도 남편도 없으니 고아와 과부가 억울한 일들을 당하기 쉬운 표적이었습니다. 외국인 거주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땅 본토인들에게 사회적 소외를 당하거나 착취나 조작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법적 후견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파라클래토스가 되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억울한 일들이 없도록 법적인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무방비로 착취와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든든한 고문변호사, 정의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 억울한 일이 없도록 대신 나서서 변호해주는 변호사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이 세상에 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든든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라는 번역보다는 차라리 후견인, 변호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본뜻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어도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하심이라.”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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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성령이 덜 충만히 임재할 수 있는지요?


[질문]

말씀단상 사이트의 글 중에 "죽은 자를 살리는 법"이란 글을 읽다가 평소 궁금했던 점이 있어 문의드립니다. 전 평소 성령의 '충만함'이란 것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었습니다. (충만함? 덜 충만함? 안  충만함?..뭐 그런 데 대한 의문입니다)

글 중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 또 '성령의 인도가 아주 세밀하고도 강하게'등의 표현을 보며 글 중에서 말씀하시듯이 성령의 권능자체는 줄어들 리 없는데 성령의 덜 임재로, 또는 성령의 인도가 둔하고도 약하게 다가와 성령의 권능이 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엔 제가 쉽게 이해가 안갑니다.

성령하나님이 그 어떤 에너지도 아니신데 충만, 덜 충만, 둔하고, 세밀하고, 강하고 약한 개념이 우선 용납이 안 됩니다. 더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기껏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분의 뜻에 의해 있고 없고가 분명하지 덜 고치시고 덜 살리시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지 덜 계시고, 온전히(충만히) 계시고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다르시니 너무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불경스럽게 여겨집니다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사실입니다.

[답변] 박신목사

흔히 생각지 못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해주셨습니다.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살펴야 합니다. 거창하게 신학적 전제라고 했지만 실은 질문자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또 해답으로 거의 다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해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다 알고 있는 두 가지 전제

우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등의 우열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그 위격만(person) 다를 뿐입니다. 요컨대 성령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방식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간략하게 일부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홀로 완전히 자족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아무 영광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오, 모든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가장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며, 그것들에 의하여, 그것들을 위하여, 또는 그것들 위에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한마디로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 별개로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며 오직 자신의 주권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 안에서, 혹은 위에서 그것들을 위하시고 자신의 뜻을 “자유롭고도 기쁘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성령이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간섭 역사 하십니다. 예컨대 신자가 아무리 방언 같은 은사를 갖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까지 해도 오직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고전12:11)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신 성령의 존재하시는 양태(樣態)가 “덜, 혹은 더” 충만하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인류역사와 신자의 삶을 이끄는 이는 성령 하나님인 셈입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사역해도 그 실체가 이 땅에 실재하는 분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속성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며 권능도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영으로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신자 개인은(고전6:19) 물론, 신자들의 모임에는(고전3:16)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승천 직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또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의 실체가 아니라 바로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실 때에는 당연히 온전한 하나님으로서 임하는 것이지 일부러 강하거나 약한 모습으로 위장, 가장, 과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특성과 능력에 주변 상황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가감(加減)이 있다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분명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덜 충만한 성령님이 내주하시다가 신자가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야 다시 충만해지시는 그런 분도 또 그런 내주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또한 질문자님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미처 모르고 있는 두 가지 전제

그런데 미처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자주 잊어버리는 두 가지 전제가 더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삼위 하나님끼리 교통하실 때에 어떤 경로나 수단을 사용하는지 우리로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할 때는 인간의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러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을 낮추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고 또 그 보여주신 부분만큼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 인간이 알도록 하려면 인간의 지정의 수준에 맞추어줄 수밖에 없기에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교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모든 이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자연의 경이로움)(롬1:19,20)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실재성(實在性)을 확인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자기 인식일 뿐입니다. 그 둘만으로 그분의 품성과 인간과 역사를 이끄시는 뜻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과 뜻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인간 언어를 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언어는 둘인데 당신의 절대적 진리를 글로 기록한 성경과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실제로 골고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육안에 훤히 보도록, 말하자면 그 이해수준에 맞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길은 성경과 예수님 말고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외의 경로를 이용했다면, 예컨대 개인의 체험이나 명상이나 학술적 접근 등,  그분에 대한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진술일지라도 성경과 예수님에 계시된 내용과 다르면 틀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계시하다보니 성경에는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모습이나 속성을 가진 것 같은 형식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불같이 진노하거나, 크게 애통해 하거나, 기뻐서 춤을 추거나, 깊은 탄식을 한다는 등의 표현입니다. 이를 두고 전문 용어로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천국보좌에 계시며 그 거룩한(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실존에는 하등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보좌에 일어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마음이 그렇게 기쁘다는 뜻을 인간에게 정확하게 또 강조하면서 알게 해주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표현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신학적 혹은 영적 진술에도 당연히 그런 양식이 채택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간과하기 쉬운 전제는, 실은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함,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주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절대로 당신 뜻대로만 행하십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능력과 품성에는 전혀 변함없지만 당신께서 인간과 세상에 행하시는 사역에는 강약(强弱)과 가감(加減)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설명한 전제와 연결시키면 그분의 실체에는 하등 변함없지만 그분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양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실체가 신약시대의 그것보다 약하거나 적었던 것은 전혀 아니며 또 이 땅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하게 임재하셨음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인류 역사에 간섭하여 사역하시는 모습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그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때에 덜 충만하게 임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제한적으로 역사하셨기에 마치 구약시대에는 덜 충만하게 임재하고 또 역사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임재와 사역의 차이  

위에서 설명 드린 네 가지 전제를 종합하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간단하게 도출 됩니다. 성령님의 실체는 피조물의 상태에 전혀 영향 받지 않으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으로 인간에게 덜 혹은 더 충만히 임재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분의 실존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행해지며 또 그 자유로운 모습을 인간에게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인간의 인식 수준에 맞추어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의 실존(實存)과 사역(使役)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이해하려다 보면 질문하신 것과 같은 혼동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성령이 충만하지 (혹은 임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뜻은 그분이 신자에게 간섭하여 행하시는 사역에서 자유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이해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님이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성도들에게 당신의 임의로 나눠주시거나, 독생자 예수님이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유롭게 역사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이 두 경우 다 인간이 느끼기에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가 더 혹은 덜 충만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비유컨대 아들이 아비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졸라대지만 아비는 더 좋은 뜻과 계획을 가지고 아들의 변화부터 유도하려고 지켜보면서 침묵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비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본인의 품성과 능력과 실체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완전한 아비일 뿐입니다. 아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느끼기에는 마치 자기에겐 아버지가 없거나, 아예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대표인 다윗마저 시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얼마나 자주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신인동형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얼마나 엄청난 진술입니까? 성령이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해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두고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분은 분명히 충만히 신자에게 임하고 계시며 대신 기도까지 해주시니까 그 역사마저 충만히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막상 신자는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아주 약하게, 덜 충만하게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하다면 즉,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어지고 있다면 성령이 탄식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통탄해, 이 또한 인간 이해 수준에 맞춘 계시이지만, 하셨습니까?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50:2) 당신의 품성, 능력, 임재에는 전혀 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으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2,3절)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1,2절) 하나님은 전혀 이스라엘을 외면한 적이 없는데 그들 스스로 영적 간음을 저질렀고 바로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류했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재차 그런 뜻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이스라엘에 충만히 임재는 하시지만 당신의 역사는 약하게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히 임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정말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인간의 죄나 영적무지로 인해 당신의 역사를 약하게 하는 것 자체도 그분의 완전한 자유함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품성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질문자도 비슷한 염려를 하셨는데 이런 표현도 사실은 모순이 있고 엄밀히 따지면 불경스러울 수 있음, 그 역시 당신의 절대적 주권일 뿐입니다.

이런 완벽한 자유함으로 인해서 성령님은 때로는 정말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서 능력도 더 충만하게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전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제자들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절대로 덜 충만하게 임하지 않았고 또 약하게 역사하신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의 역사하시는 모습이 당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정말로 성령께서 스스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 더 충만한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마저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지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임재가 아님)하는 목적은 오직 신자더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가장 신령한 은사는 바로 불신자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로 십자가 복음에 초대하여 그 진리를 가르쳐 그분의 제자로 변화시킨 후에, 그 제자들이 다시 땅 끝까지 가서 사단에 미혹된 영을 복음으로 초대하여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방언을 하게 하려는 것보다, 그럼으로써 그날 하루에 예수 믿는 자를 삼천 명이나 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순례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초석을 심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이 땅에 드러내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이 더 충만하게끔 역사하는 것입니다.  

WHY JESUS ONLY?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영적은사" (성령의 은사)

 

'송병호와 블로그'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이고 신령한 은사는
참으로 감격스럽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축복은
귀하고 소중하기에 더욱 아름답게 사용되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있는 교만함은
마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듯하면서
그 은사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치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위해 사용함으로

다른이의 상처와 아픔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받은 인간 모두는 누구라 할지라도 연약하기에
그 은사의 사용은 늘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엘리바스라는 욥기에 나오는 한 지혜자는
그가 겸허한 영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욥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떨이 주뻣하였었느니라"
그는 분명한 영적인 체험과 경험을 가졌고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영적인 체험으로 인해
자녀를 잃고 아내마저 버린 괴로움에 처한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주는

자리에 서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어떤 영적인 경험이나 은사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사랑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나타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진리인 듯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것인데
종종 영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신령한 경험과 은사로 인해 드러내는 자들을 봅니다.
목사의 명성과 기복적 복을 위해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인간의 연약함은
깊지 못한 영성의 잘못된 표현임을 보게 됩니다.
 
정말 깊은 영성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서 연약한 자를 세우며
자신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길 바라면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신령한 은사보다  은사를 귀하고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깊은 인격 바른 영성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니 보잘 없는 참으로 부끄러운 소질이나 은사라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순전하고 진실 된 그리스도인으로 사용되길 기도합시다.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만을 위해
연약함을 인정하며 그분의 손을 의지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우리를
다듬어 가실 것입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를 닮은 그분의 제자로서
이 땅에서 참된 영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간절히..
 
저희로 주의 은사를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를 만들어 주십시오.


출처: 개혁주의마을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단어들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로마서, 에베소서에서 많이 다루고 있고, 신약성경 상에는 100여 군데 기록되었다. 각개의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기 전에 그 뜻(정의)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서 은사에 대하여 사용되어진 말들은 다음과 같이 불렀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단순히 은사(카리스마)로 표현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에서 은사(카리스마)는 은혜(카리스: 받을 가치 없는 자에 베푸는 호의)에서 유래 되었다. 그러므로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이며, 재능이며, 능력이다.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둔 것이다. 이 은사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 의하여 행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부여된 선물인 것이다(고전 12:12∼27).


둘째, 성령의 은사는 신령한 것(프뉴마티카)이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은사를 신령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고 은사를 복수로서 “신령한 것들”로 구분해 놓았다. “신령한 것”은 어떤 의미로는 “은사”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은사 이상의 것으로 표현이 된다. 즉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것들을 신령한 것들이라고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구원에 있어 의화, 성화, 영화와 성령의 열매 같은 것들이 있다.



셋째, 성령의 은사는 직분(디아코니아)이다.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고전 12:4)에서 직분은 봉사라고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집사(deacon)라는 직분이 이 말에서 유래 되었다. 성령의 은사가 기원적인 측면에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적용면에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영적인 이득과 덕을 세우도록 섬기는 능력에서 드러난다.



넷째, 성령의 은사는 사역(에너지마타)이다.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4:6)에서 사역에 대한 말의 원래 의미는 “능동적인 원칙” 또는 “영향”인데 영어의 에너지(energy)도 이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 되었다. 성령에 의하여 힘을 얻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내는 사역이다. 사역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내지 못하는 은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다섯째, 성령의 은사는 나타내심(파네로시스)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에서 “나타나심”은 “외적인 증거”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인식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한다. 따라서 은사의 활용은 은사 받은 자와는 관계없이 성령께서 전적으로 나타나신 결과인 것이며, 나타심의 순수성은 그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유익을 주는가에 달려있다.



여섯째, 성령의 은사는 다양성(디아이레시스)이다.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라는 단어의 바탕에 깔려있는 사상은 분배사상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두 사람을 통하여 단지 몇 가지 은사가 나타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9가지 은사이외에도 많은 다양한 은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유용한 기능이 많이 있는 만큼 은사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나타나심과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과 한 성령이신 것이다.

 

출처: 창골산봉서방

성령이 덜 충만히 임재할 수 있는지요?


[질문]

말씀단상 사이트의 글 중에 "죽은 자를 살리는 법"이란 글을 읽다가 평소 궁금했던 점이 있어 문의드립니다. 전 평소 성령의 '충만함'이란 것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었습니다. (충만함? 덜 충만함? 안  충만함?..뭐 그런 데 대한 의문입니다)

글 중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 또 '성령의 인도가 아주 세밀하고도 강하게'등의 표현을 보며 글 중에서 말씀하시듯이 성령의 권능자체는 줄어들 리 없는데 성령의 덜 임재로, 또는 성령의 인도가 둔하고도 약하게 다가와 성령의 권능이 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엔 제가 쉽게 이해가 안갑니다.

성령하나님이 그 어떤 에너지도 아니신데 충만, 덜 충만, 둔하고, 세밀하고, 강하고 약한 개념이 우선 용납이 안 됩니다. 더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기껏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분의 뜻에 의해 있고 없고가 분명하지 덜 고치시고 덜 살리시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지 덜 계시고, 온전히(충만히) 계시고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다르시니 너무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불경스럽게 여겨집니다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사실입니다.

[답변] 박신목사

흔히 생각지 못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해주셨습니다.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살펴야 합니다. 거창하게 신학적 전제라고 했지만 실은 질문자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또 해답으로 거의 다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해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다 알고 있는 두 가지 전제

우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등의 우열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그 위격만(person) 다를 뿐입니다. 요컨대 성령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방식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간략하게 일부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홀로 완전히 자족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아무 영광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오, 모든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가장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며, 그것들에 의하여, 그것들을 위하여, 또는 그것들 위에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한마디로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 별개로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며 오직 자신의 주권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 안에서, 혹은 위에서 그것들을 위하시고 자신의 뜻을 “자유롭고도 기쁘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성령이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간섭 역사 하십니다. 예컨대 신자가 아무리 방언 같은 은사를 갖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까지 해도 오직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고전12:11)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신 성령의 존재하시는 양태(樣態)가 “덜, 혹은 더” 충만하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인류역사와 신자의 삶을 이끄는 이는 성령 하나님인 셈입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사역해도 그 실체가 이 땅에 실재하는 분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속성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며 권능도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영으로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신자 개인은(고전6:19) 물론, 신자들의 모임에는(고전3:16)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승천 직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또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의 실체가 아니라 바로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실 때에는 당연히 온전한 하나님으로서 임하는 것이지 일부러 강하거나 약한 모습으로 위장, 가장, 과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특성과 능력에 주변 상황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가감(加減)이 있다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분명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덜 충만한 성령님이 내주하시다가 신자가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야 다시 충만해지시는 그런 분도 또 그런 내주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또한 질문자님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미처 모르고 있는 두 가지 전제

그런데 미처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자주 잊어버리는 두 가지 전제가 더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삼위 하나님끼리 교통하실 때에 어떤 경로나 수단을 사용하는지 우리로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할 때는 인간의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러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을 낮추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고 또 그 보여주신 부분만큼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 인간이 알도록 하려면 인간의 지정의 수준에 맞추어줄 수밖에 없기에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교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모든 이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자연의 경이로움)(롬1:19,20)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실재성(實在性)을 확인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자기 인식일 뿐입니다. 그 둘만으로 그분의 품성과 인간과 역사를 이끄시는 뜻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과 뜻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인간 언어를 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언어는 둘인데 당신의 절대적 진리를 글로 기록한 성경과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실제로 골고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육안에 훤히 보도록, 말하자면 그 이해수준에 맞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길은 성경과 예수님 말고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외의 경로를 이용했다면, 예컨대 개인의 체험이나 명상이나 학술적 접근 등,  그분에 대한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진술일지라도 성경과 예수님에 계시된 내용과 다르면 틀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계시하다보니 성경에는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모습이나 속성을 가진 것 같은 형식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불같이 진노하거나, 크게 애통해 하거나, 기뻐서 춤을 추거나, 깊은 탄식을 한다는 등의 표현입니다. 이를 두고 전문 용어로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천국보좌에 계시며 그 거룩한(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실존에는 하등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보좌에 일어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마음이 그렇게 기쁘다는 뜻을 인간에게 정확하게 또 강조하면서 알게 해주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표현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신학적 혹은 영적 진술에도 당연히 그런 양식이 채택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간과하기 쉬운 전제는, 실은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함,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주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절대로 당신 뜻대로만 행하십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능력과 품성에는 전혀 변함없지만 당신께서 인간과 세상에 행하시는 사역에는 강약(强弱)과 가감(加減)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설명한 전제와 연결시키면 그분의 실체에는 하등 변함없지만 그분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양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실체가 신약시대의 그것보다 약하거나 적었던 것은 전혀 아니며 또 이 땅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하게 임재하셨음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인류 역사에 간섭하여 사역하시는 모습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그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때에 덜 충만하게 임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제한적으로 역사하셨기에 마치 구약시대에는 덜 충만하게 임재하고 또 역사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임재와 사역의 차이  

위에서 설명 드린 네 가지 전제를 종합하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간단하게 도출 됩니다. 성령님의 실체는 피조물의 상태에 전혀 영향 받지 않으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으로 인간에게 덜 혹은 더 충만히 임재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분의 실존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행해지며 또 그 자유로운 모습을 인간에게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인간의 인식 수준에 맞추어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의 실존(實存)과 사역(使役)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이해하려다 보면 질문하신 것과 같은 혼동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성령이 충만하지 (혹은 임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뜻은 그분이 신자에게 간섭하여 행하시는 사역에서 자유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이해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님이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성도들에게 당신의 임의로 나눠주시거나, 독생자 예수님이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유롭게 역사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이 두 경우 다 인간이 느끼기에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가 더 혹은 덜 충만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비유컨대 아들이 아비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졸라대지만 아비는 더 좋은 뜻과 계획을 가지고 아들의 변화부터 유도하려고 지켜보면서 침묵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비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본인의 품성과 능력과 실체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완전한 아비일 뿐입니다. 아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느끼기에는 마치 자기에겐 아버지가 없거나, 아예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대표인 다윗마저 시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얼마나 자주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신인동형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얼마나 엄청난 진술입니까? 성령이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해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두고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분은 분명히 충만히 신자에게 임하고 계시며 대신 기도까지 해주시니까 그 역사마저 충만히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막상 신자는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아주 약하게, 덜 충만하게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하다면 즉,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어지고 있다면 성령이 탄식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통탄해, 이 또한 인간 이해 수준에 맞춘 계시이지만, 하셨습니까?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50:2) 당신의 품성, 능력, 임재에는 전혀 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으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2,3절)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1,2절) 하나님은 전혀 이스라엘을 외면한 적이 없는데 그들 스스로 영적 간음을 저질렀고 바로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류했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재차 그런 뜻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이스라엘에 충만히 임재는 하시지만 당신의 역사는 약하게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히 임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정말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인간의 죄나 영적무지로 인해 당신의 역사를 약하게 하는 것 자체도 그분의 완전한 자유함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품성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질문자도 비슷한 염려를 하셨는데 이런 표현도 사실은 모순이 있고 엄밀히 따지면 불경스러울 수 있음, 그 역시 당신의 절대적 주권일 뿐입니다.

이런 완벽한 자유함으로 인해서 성령님은 때로는 정말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서 능력도 더 충만하게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전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제자들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절대로 덜 충만하게 임하지 않았고 또 약하게 역사하신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의 역사하시는 모습이 당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정말로 성령께서 스스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 더 충만한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마저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지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임재가 아님)하는 목적은 오직 신자더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가장 신령한 은사는 바로 불신자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로 십자가 복음에 초대하여 그 진리를 가르쳐 그분의 제자로 변화시킨 후에, 그 제자들이 다시 땅 끝까지 가서 사단에 미혹된 영을 복음으로 초대하여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방언을 하게 하려는 것보다, 그럼으로써 그날 하루에 예수 믿는 자를 삼천 명이나 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순례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초석을 심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이 땅에 드러내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이 더 충만하게끔 역사하는 것입니다.  

WHY JESUS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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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황상하 ㆍ 2013/12/23 ㆍ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이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내용을 핵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넓게는 모든 사상이나 철학이나 역사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경제나 정치나 문화가 다 신앙의 활동영역입니다.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믿음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분석하여 나름대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은 단순히 학문적 연구와 분석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수 없습니다. 영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감각적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영에 대해 분별하는 것은 세심한 주의가 요구됩니다.

우리가 신앙과 교리와 신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 영에 대한 말이 나오면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악한 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성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요한이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영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을 볼 수는 없습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이 아닙니다. 만약에 영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면 볼 수 있습니다. 천사나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경우에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런 때도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은 영의 본래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은 모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에 대한 문제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영의 문제에 대해 바르고 건전한 지식과 깨달음이 없으면 아주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은 영이 직접 나타나거나 활동하지 않고 사람이나 지식이나 사상이나 문화나 그 외의 여러 것들을 통해서 활동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1장 21-22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영역에 대해“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곧 예수의 영인 성령의 활동 영역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활동 영역은 곧 악한 영의 활동 영역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하시지만 악한 영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허물기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만물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분별해야 하고 또한 악한 영의 활동도 분별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악한 영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의 활동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을 빙자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을 이용하고 성령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들을 모방하여 성도를 속이고 기만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령께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사용하여 일하셨기 때문에 악한 영은 거짓 사도와 거짓 예언자를 교회에 투입하는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은 목사나 장로 같이 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이용하여 교회를 허무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악한 영의 방법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외부의 공격 보다는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이는 다 악한 영의 전략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증거와 가르치는 것인데 악한 영도 그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들을 이용했고 초대교회에서는 선지자나 예언자나 사도나 교사를 이용했습니다. 요즘은 두 말 할 것 없이 목사나 선교사나 장로나 그 외에 영향력 있는 지도자나 능력이나 신비한 체험 같은 것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분별해야 합니다. 악한 영은 초대교회 때만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도 활동하였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주로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언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전하고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 선지자뿐 아니라 거짓 선지자도 같은 주장을 하기 때문에 누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진리의 영의 지배를 받는지 잘 분별해야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하나님과 바알 중 참 신과 거짓 신을 가리기 위한 갈멜산에서의 대결이 있었고 그 대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바알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참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짓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cf. 왕상 18:6-12).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언제나 왕이나 백성들에게 좋은 말만 하는 것이고 참 선지자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미가야에 대하여, 그는 한 번도 내게 좋은 말은 하지 않고 악한 말만 하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 되게 전하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진리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위로하고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이유로 죄를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싫어합니다. 경제적인 용어를 빌리자면 영적 “수요(需要)”가 그렇습니다. 진리를 간절히 듣기 원하는 수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 축복, 성공, 위로, 형통, 치유, 능력, 체험 같은 메시지는 수요가 많아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진리만 전하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할 지경입니다.

초대교회에 가현설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믿지 않았고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현설 자들은 지식도 많고 수사학에도 능했기 때문에 많이 배우지 못한 성도들이 변론으로는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도들은 거짓 교사나 거짓 선지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들을 이길 만큼 학문과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이긴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한 때문이고 또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악한 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복음을 이상한 사상과 그릇된 가르침과 일치시키려는 교묘한 악한 영이 전략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악한 영은 복음을 적극적인 사고방식이나 긍정적인 생각 같은 것과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복음을 형통과 축복, 성공 지향적인 복음으로 재 설명하려고 합니다. 병 고치는 복음, 기적을 행하는 복음, 성공을 약속하는 복음, 사회개혁주의 복음, 그 외에 별의별 형태의 복음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미혹의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미혹의 영은 우리가 들으면 흥미가 있고 구미가 당기고 관심을 끌게 하는 것들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진리에는 그런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신데 사람들은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을 싫어하여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섬겼듯이 요즘 교인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맞는 성령을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이상한 기적이나 체험하게 하는 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목사도 이용하고 선교사도 이용하지만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성령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이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이 진리의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달콤하고 흥미롭고 내 입맛에 맞으면 악한 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악한 영의 결정적 증거는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은 전략적으로 복음을 왜곡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성경적”또는 “말씀 중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철저한 것 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을 감추기 때문에 세심하게 주의하지 않으면 속기 쉽습니다. 악한 영을 분별하는 데도 결정적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악한 영은 교묘한 엘리트 의식의 교만을 드러냅니다. 뿐만 아니라 악한 영은 이기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악한 영도 사랑을 강조하지만 그 사랑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보다 은사나 능력이나 깨달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영은 절대로 사람을 무시하지 않지만 악한 영은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무시합니다. 진리의 영은 사람을 겸손하게 하지만 악한 영은 영적 교만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이 바로 계시의 말씀을 듣지 않는 증거들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지혜의 영이시고 분별의 영이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악한 영을 분별하고 은혜와 진리 가운데 진실 된 사랑을 실현하여 교회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요일 4:6-



출처: USA아멘넷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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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 제 1 장 성령으로서의 세례 / 고재수지음(N.H Gootjes)

김완수 | 조회 23 |추천 0 |2012.10.02. 10:20 http://cafe.daum.net/wansu63/Ihqp/963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고재수지음(N.H Gootjes)

 

 

제 1 장 성령으로서의 세례

 

1. 머리말

 

교회는 언제나 오순절날의 사건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 사실이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문제에 관심이 많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석가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는 말이 나오는 본문을 다룰 때 그 표현을 설명했지만 교의학자들이 그들의 조직 신학적인 책에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많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개혁주의의 고백문에서도 그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약 150년 전부터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라는 말 그 자체도 신학적 토론에서 핵심적인 것이 되어 왔다. 신성 운동, 오순절 운동과 신오순절 운동에서 그 표현은 그들의 신앙의 핵심적인 체험을 묘사하는 말이 되고 있다. 그 결과로 그 체험뿐만 아니라 그 표현도 이 운동의 안과 밖에서 관심이 대상이 되었다. ‘성령으로서의 세례’ 라는 주제로 쓰여진 책도 많이 출판되었고, 그 중 광범위하게 성령론을 다루는 책도 있다.

 

이 글은 오순절이나 신오순절의 성령의로의 세례에 대한 견해를 완전하게 다루고자 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이 표현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에 근거하여 여러 견해를 살펴보고 거기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을 다루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으로부터 성경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교리를 찾고자 한다.

 

2. 칼빈의 견해

 

먼저 칼빈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가 칼빈을 읽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오순절파나 신오순절파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성례전의 의미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 3:11,12 주석에서 칼빈은, 교회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일치시키고, 요한의 세례가 교회의 세례와 다르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는 오늘날 목사가 성령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칼빈에 의하면 세레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서 요한은 신호를 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호가 제시하는 내용을 주신다는 것이다. “주된 일은 그(세례 요한)가 그리스도를 영적 세례의 주체로 만들면서, 그 자신을 단지 외적(세례) 수종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요한의 세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세례에도 적용된다. “이것으로부터 세례에 있어서 사람의 역할이 무엇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에게 특이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 교훈이 생겨난다. 사람에게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신호의 집행이 맡겨져 있을 뿐이고 진리 자체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마 3:11 이하에 대한 주석에서 한 구절 더 인용해 보자. “그 의미는 분명한데, 곧 그리스도만이 외적 세례가 나타내고자 하는 어떠한 은혜라도 베푸신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피로써 양심을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옛 사람을 죽게 하고 중생의 영을 주신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통하여 인간에게 행하시는 전체 구원 사역, 곧 죄를 씻음, 옛 사람의 죽임, 중생 등을 의미한다. 그때 중생은 믿음의 시작 순간이나 또는 사람이 거듭나는 그 순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를 변화시켜 가는 그리스도의 영이 계속적 사역이라는 의미이다.

 

칼빈은 행 1:5을 따라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오순절날에 성령의 오심과 연관된다는 반대를 답해야만 한다. 오순절 이전에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겠는가? 칼빈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회개와 중생의 영을 주심을 의미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나의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불러 혀 모양으로 그 자신을 주시던 바로 그때에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 일 이전에 사도들에게 이 세례를 주셨고 또 그는 모든 택한 자를 매일 그같이 세례 주신다.”

 

그러면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오순절에 주어졌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칼빈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것 같다.

 

첫째, 오순절 사건은 매일 일어나는 일을 장엄한 방식으로 가시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장엄한 방식으로 성령을 보내심이 주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감추어진 은혜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요한의 증거를 그것에다 결착시킨 것은 마땅한 일이다.

 

둘째, 성령 선물은 오순절날에 완전해졌다. “사도들이 그 자신들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도 거기에는 그가 그의 성령 선물들을 충만한 정도로 부어 주심으로써 그의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우주적 은혜의 반영되었다.”

 

 칼빈의 견해는 그 직후의 시대의 매우 영향력이 있었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스쿨데투스(A. Scultetus, 1566-1625) 라는 신학자는 당대의 일반적 인식이, 세례 요한이 자신과 다른 교사들의 외적 세례나 사역을 그리스도의 내적 사역과 구분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쿨데투스(A. Scultetus, 1566-1625)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두 종류의 세례, 즉 물세례와 불세례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세례는 사람이 물 속에 담가지고 또 건져내어짐으로써 성령을 통하여 죽음과 살아남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불세례는 성령의 불같은 은사들이 사람들 속에 기적적으로 부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례는 오순절에 있었던 특별한 은사들을 설명해 주고 이후로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세례는 복음의 권위가 충분히 확정되었을 때 멈추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쿨테투스 자신도 그가 대다수의 견해를 거슬러 가고 있음을 알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칼빈과 같이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 대조를 두는 신학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둔(J.D.G.Dunn)은 이렇게 말한다. “그 두 세례 사이의 대조는 요한과 예수 사이의 대조, 예비와 완성, 또는 그림자와 실체 사이의 반명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둔과 칼빈 사이의 견해차에도 주목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표현 속에 지시되고 있는 성령의 사역은 믿음의 시작에서부터 계속적인 성화 사역에 이르기까지 전체 사역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둔의 견해는 이 세례가 특별히 믿음 생활의 시작을 의미한다. “성령의 선물 즉 성령 세례는 회심의 도입 단계의 특징적 요소인데, 실상 신약에서는 그것이 회심 돌입의 가장 의미 깊은 요소이며 그 핵심점이다. 이것은 사람이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경험과 생활에, 또 새 언약 속으로, 또 교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구원하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되게 만드는 요소이다.

 

3. 오순절파의 견해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오순절파의 견해쪽으로 차츰 기울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들의 입장의 배경에는 청교도적 사상이 깔려 있다. 구원을 두 단계로 체험하게 된다는 사상이다. 첫째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단계이고 후에 두 번째 단계가 따라오는데, 이는 보통 확신의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은 이같은 확신을 받는 것을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는 것과 일치시켰다. 그러나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확신의 체험 대신 자주 사용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순절파 견해로서의 그다음의 발전 단계가 웨슬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이었던 청교도들과 알미니안적인 웨슬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웨슬리도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두 단계로 구분한다. 하나는 칭의의 단계로서 성화는 이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뒤에 완전의 단계가 오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전적인 성화가 주어진다.

 

웨슬리 계열인 플랫처(John Fletcher)는 종종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말을 사용한다.

 

이 두 단계의 구분은 신성 운동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성화를 이끌어 오는 둘째 체험을 보통 성령 세례로 지칭하였다.

 

이어서 오순절파 운동이 뒤따라온다. 여기서 다시 신자의 삶에 있어서 두 가지 단계가 구분되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제 2 단계는 청교도들의 경우와 같이 확신의 단계가 아니며, 또 웨슬리의 추종자들의 경우처럼 성화의 단계도 아니다. 그들에게 와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말은 이전보다 더 자신감 있게 사용되어진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언급은 능력의 약속과 짝을 이루며, 또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던 오순절을 지적하기 때문이다(행 1:5-8, 2:4).

 

이렇게 성령을 통한 성화란 개념으로부터, 성령을 통한 능력이란 개념으로 옮겨가는데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사람은 특히 토레이(R. A. Torrey) 였다. 그의 세 번째 제안을 인용해 보자. “성령으로의 세례”는 성령의 중생케 하는 사역과는 구분되며 그것에 뒤따라오며 또 첨가적인 성령의 작용이다. ...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더라도 아직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생에는 생명의 부여가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은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오순절파 그룹에서는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이런 가르침이 그들의 교리적 기초에 속한 디 기(D. Gee)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신약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서 중생시에 성령이 처음 들어온 이후 신자들이 성령을 그 분의 원래적이고 유일한 인격으로서 특별하고도 인격적으로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체험을 ‘성령으로의 세례’라 부르며 그 목적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부여하는 데 있다. 그것에 특징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은사들이다.”

 

이 두 단계를 때로는 용어상 구별해서 “성령의 세례”와 “성령으로의 세례”로 나누기도 한다. “중생에서는 성령이 주체요 대속의 피가 수단이며 중생이 그 결과”이다. 성령으로서의 세례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체요(“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성령의 수단이며 능력의 부여가 그 결과이다.

 

칼빈과 이들 오순절파 신학자들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칼빈에게는 성령으로의 세례란 말이 신자의 마음과 생활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지속적 사역을 의미하는데 반해, 기(Gee) 와 윌리암스(Williams)에 있어서는 이 세례가 신자의 생활에 나타나는 두 번째 체험으로서 이를 통해 능력을 받고 보통 방언을 수반하는 체험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4. 바빙크의 견해

 

그러면 개혁 신학에서는 20세기 초반 이후로 되살아난 성령의 부음에 대한 관심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논의할 계획은 없고 다만 한 신학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는 화란 신학자인 바빙크(H. Bavinck)이다. 재미있는 점은 바빙크가 웨슬리 신학의 전개와 오순절과 신학의 시발에 대하여 매우 앞서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을 우리는 그의 책의 몇몇 긴 각주에서 볼 수 있다.

 

바빙크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이 갖게 된 새로운 의미를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핵심이 어떤 것이냐는 점은 감리교식으로 성화의 둘째 단계에 대한 강조와 오순절 사건의 성도에 대한 논의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바빙크는 전통에 따라 인간의 신분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무흠 상태, 부패 상태, 은혜 상태, 그리고 영광 상태이다. 이 마지막 영광 상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날에 무덤으로부터 일어난 후의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빙크가 말하는 은혜의 상태에는 두 부분이 있어서, 그 중 하나는 신자가 바빙크가 말하는 의롭다 함을 받을 때 주어지고, 다른 하나는 성화에서 주어지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바빙크의 대답은 매우 강조적으로 “아니오”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한 순간도 분리된 것은 아니다.” 성화는 윤리적 행위로서 전 삶을 통하여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의를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을 통해 점차적으로 우리의 인격적, 윤리적 자질이 되도록 만든다.

 

우리가 이것을 신분 이론과 맞추기 원한다면이 세 번째 단계 곧 은혜의 단계는 “칭의와 성화의 단계”라 해야만 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신자는 의롭게 되었고 계속 성화되어 간다.

 

조금 뒤에서 바빙크는 감리교 이론을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감리교가 성화와 인침을, 칭의와 믿음과 분리하고 앞의 것을 받지 않고서도 뒤의 것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일성과 불가분리성이라는 이 중요한 진리를 간과하는 주장이다.” “이 감리교 이론은 그 분리된 선물이 칭의 이후 조만감에 특별한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갑자기, 그리고 충만히 나눌 수 있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더욱 실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감리교 교리는 성화의 성격뿐만 아니라, 믿음의 본질도 오해하기 때문이다.” 바빙크의 생각에는 감리교도와 오순절파가 믿는 대로의 둘째 단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그러면 바빙크는 오순절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Magnalia Dei〕 제 19장은 성령 선물에 관한 장인에 이 장을 분해 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된다.

 

첫째로, 바빙크는 성령을 부어 주신 사건을 논의하고(p 368-372).

둘째로, 그는 이 성령의 부음에 수반된 특별한 능력과 사역들을 논의하며(p. 372-377).

셋째로, 그는 이 성령이 회중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정상적이고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사역에 대해서 말한다(p. 377-385). 이 마지막 부분은 현재로서는 우리의 관심 밖이다.

 

성령의 특수한 사역에 대한 두 번째 부분에서 바빙크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관해 논의하고, 나아가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특수 사건들, 가령 사도들이 담대히 말하는 일이나, 믿음의 특별한 힘, 기쁨, 지혜, 방언, 예언, 신유 등을 논의한다. 그러나 바빙크는 이 모든 특수 사역들의 그 첫 사도 시대에 제한된 것으로 본다. “성령을 부으심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첫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특수한 능력과 사역들을 수반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주된 관심은 바빙크가 오순절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차영배 교수에 따르면 바빙크는 오순절 사건을 구원 순서의 한 부분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차 교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빙크가 Magnalia Dei에서나 G.D. (교의학)에서 한결같이 말한 것처럼 구원 서정의 첫사역이라고 함이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이유는 바빙크가 19장에 이 구절을 “첫째의 사역”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 자체는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그 문장 자체를 보자면 이렇다. “높아지신 후에 성부의 우편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사역은 성령을 보내신 일이다. ” 이 문장 자체로서는 바빙크가 여기서 구원 순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전혀 명시하지는 못한다.

 

차 교수는 Ger. Dog에서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논의가 구원의 순서라는 장의 한 부분이 되고 있는 것을 들어서 그의 견해의 더 굳은 기반을 다지고 있는 거으로 보인다. 이것을 볼 때 바빙크가 성령 선물을 구원의 첫째 부분으로 생각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차 교수는 벌써 바빙크가 오순절을 유일한 사실로 보았다는 인상을 주는 몇 가지 표현들을 인용한 바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문단 전체를 인용해 보자. “오순절날에 일어난 이 성령을 보내심은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다. 창조와 성육신이 그러한 것처럼 이 일은 단 한 번만 일어났다. 중요성에 있어서 이 사건과 동일하게 성령을 주신 일이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결코 반복되어질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잉태시에 인간성을 취하시고 그것을 다시 벗어 놓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도 오순절날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였고 결코 다시 그것과 분리되지 못한다. 성경은 오순절에 일어난 이 사건들과 특유한 의미를 명백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말한다(행 2:17, 18, 33, 10:45, 딛 3:6).

 

우리는 여기 나오는 “유일한” 그리고 “단 한 번만” 이란 말을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그러함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만 한다. 창조와 성육신이 되풀이 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의 오심도 반복될 수 없다. 동시에 창조물 자체가 지속적으로 조속하고(이 점은 바빙크가 여기서 강조하지는 않는다.) 또 그리스도가 지속적으로 사람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오순절날에 특유하게 오신 일의 결과도 그러하다. 곧 그는 회중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신다는 것이다.

 

바빙크에게 있어서 이 성령의 첫 번 오심은 구원 순서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일은 구원과 적용에 큰 영향을 준다. 이제 우리는 왜 바빙크가 그의 Ger. Dog에서 오순절에 성령 부어 주심을 구원의 순서를 다루는 단락 속에서 논의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사실이 신약의 구원 순서에 있어서는 기본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5 방법론적 요점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관한 사상들의 발전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고도 불완전하게나마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그 교리 자체에로 돌아가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을 위한 확실한 규법이다.

 

몇 가지 논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방법론적 문제를 이야기하겠다. 성령으로의 세례의 의미를 논하고자 할 때 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네 가지 사건이 특별한 자리를 가진다. 오순절 사건과 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에서 성령을 부어 주신 사실과, 10, 11장에 나오는 고넬료 집안에 성령이 오신 사건, 그리고 19장에 에베소에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사건 이 네 가지이다. 이어서 따라오는 논의의 핵심은 그 각각의 경우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믿는 사람들이었느냐, 아니면 그때에 성령의 오심과 함께 그들의 믿음이 시작되었느냐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2차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건들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라고 불리우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언급들은(마 3:11 등) 어떤 특별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세례가 미래의 어떤 일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행 1:5에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킴이 확실하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전 8장에서 그 세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넬료 집안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종종 간과되는 점이지만, 베드로가 한 말은 고넬료와 그 집안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베드로 자신이 그 집안에 일어난 사건을 보고서, 주님께서 오순절에 임할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관하여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다는 말이다. 행 11: 16은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되어 있다. 이 사건이 바로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지, 그 사건을 가리켜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라 부른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행 19장에서도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행 11:16 이후에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은 고전 12:13인데 여기서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오순절과 같은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쓰여진 문맥과 그리고 오순절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행전에 기록되 다른 사건들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6.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중생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령으로서 세례가 두 가지 방식으로 중생과 동일시된 것을 보았다. 칼빈은 이를 회심의 첫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회개의 전 삶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중생이란 말은 한 사람의 믿음의 시작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 성령의 세례라 불리워지는 형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이란 말을 보다 현대적 의미로 사용하겠다. 이때 우리가 대답해야 할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과연 중생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둔은 Ch.1에서 밝힌 대로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중생사역(믿음 생활의 시작)이 같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 주장의 근거로서 다루는 세례의 요한의 세례와 메시야 세례를 비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두 세례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둔((Dunn)은 요한의 세례가 보다 크신 이의 세례를 위한 준비라고 말한다. 그런데 뒤에 가서 그는 아무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표현을 다르게 바꾸고 있다.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가지 구절들을 논의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 세례의 목적은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고자 함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준비일 뿐이다(1:31).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로써가 아니라 성령으로써일 것이다(1:33). 여기에 의도된 뜻은 요한의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의 그림자요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준비이며 상징이라고 하는 표현도 가끔 그의 책에서 찿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준비와 상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요한의 세례를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준비라 부른다면 이 두 세례의 내용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를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상징이라 할 때, 그 때 두 세례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그때에는 성령으로서의 세례의 내용이 물세례 속에 미리 제시되었다는 말이 된다.

 

첫째 이유는, 요한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세례의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다. 이것은 막 1:4이 말하는 것처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였다. 이는 그 세례가 요한이 선도한 회개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요한의 세례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하면 오순절날에 성령이 오시기전까지는 요한의 세례는 다만 공허한 외적 형식일 뿐이라는 말이 된다.

 

칼빈은 이런 반론이 나올 것을 미리 예견한 것 같고, 그래서 오순절 전에 벌써 성령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오순절날에 성령을 보내심은 그 전에 이미 숨겨진 채로 행해진 일을 시각화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구약의 택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까? 또 이 주석은 행 1:5-8과도 분명히 대치된다. 거기서 성령님의 오심은 교회에의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지 이미 일어날 일을 단순히 가시화한 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물로의 세례와 성령으로의 세례는 연관성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관계가 상징과 실체의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령으로의 세례가 중생을 의미한다는 견해는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예언에 근거될 수 없다.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중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신학자 플루르는 그 근거로서 성령으로서 세례에 죄 사함의 요소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든다. 그에 의하면, 세례라는 말 자체가, 성령으로서 세례에 죄 사함의 깨끗케 함이란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도록 말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 주다” 라는 말 자체가 깨끗케 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말은 “담그다” 라는 뜻이고, 요한의 의식과 그리스도인 성례에 사용되긴 했지만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막 10:39, 눅 12:50, 고전 15:29). 깨끗케 함의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맥이 결정할 일이다.

 

플르르(Floor)는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 위해 요한복음으로부터 두 구절을 인용해서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깨끗케 함 사이에 연관성을 세울 수 있겠다고 한다. 그 하나는 요 1:29-34인데, 여기서 구조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 본문의 교차 대칭 구조로부터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 모두가 서로 상통한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사역, 곧 죄를 제거함과 성령으로 세례 주심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평이하게 읽어볼 때에,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예수님의 이름과 죄의 제거 사이에 관계가 있음은 분명하다(29절). 또한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사이에도 관계가 있다(33절). 그러나 죄의 제거와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는 연관성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물론 두 가지 동일 인물의 사역이기 때문에 서로 관련된 것임은 틀임없다. 그러나 그 관계는 죄의 용서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그런 관계는 결코 아니다.

 

플루르가 제시하는 다른 본문은 요 20:22이다. 여기서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말이 나오지 않고 오순절 사건도 언급되지 않는다. 또 본문은 성령을 받는 것이 죄 사함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그 결과로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둘 권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행전 1-2장에 기록된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본문이 중생과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동일시하고 있을까? 오순절날에 성령이 그리스도의 제자들 위에 부어졌다는 사실은 오순절파의 편에서는 하나의 강한 논증의 무기가 되어 왔다. 물론 제자들이 이 경험 이전에도 중생한 신자들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런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적어도 중생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Dunn은 이런 오순절파의 논증을 반박하면서 그는 오순절 사건이 다른 차원의 사건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이유들을 제시한다. 그 사건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클라이막스이며, 새 시대의 계시이며, 새 언약의 시작이며, 교회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Dunn은 여기서 갑자기 그의 어조를 바꾼다. 행 11:17,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를 인용하면서 결론짓기를 오순절에 가서야 제자들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믿음의 위탁의 순간에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위탁의 수준에 이르게 된 오순절에야, 그들이 신약의 의미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야 이루어졌다.”

 

이 본문의 주석적 문제도 있다. ‘믿을 때에’ 란 분사가 어떤 단어와 관련시키면 되겠느냐는 문제이다. 문법적으로 볼 때 ‘믿을 때에’ 란 ‘우리’나 ‘그들’과 연관될 수 있다. 보통 주석서들에는 그 분사가 ‘그들’과 ‘우리’ 모두에 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여기서 이 말은 ‘그들’에만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설혹 우리가 행 11:17이 오순절에 가서야 제자들이 믿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성령의 오심은 그들의 믿음과 결과이지 그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우리가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 즉 믿음과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신약에 사용된 대로의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람을 믿도록 중생시키는 성령 사역과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7.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제 2 단계의 시작인 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둘째 국면의 시작이라는 주장은 오순절파가 믿고 있는 생각이다. 그 파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자르비스(E J Jarvis)를 인용해 보면, “때로 그것(성령으로서의 세례)을 기다림 후에 받았다. 때로는 안수하는 중에 받았다. 때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항상 그 일은 회심 후에 일어났는데 이는 그것이 독특하고 분리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성령으로서의 세례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복음서들을 볼 때는 이 세례와 믿음의 순간 사이에 아무 직접적인 언급도 없다. 행전 2장의 사건에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회심 후에 얼마 지나서 따라온 일임이 일반적으로 지적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너희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당시에 믿는 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마 16:16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해 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자신의 삶과 고난에 관하여 성경을 설명하시고 그들로 이해하게 하셨다(눅 24:36-47). 또한 행 1:15-26에 나오는 베드로와 120 문도들의 행동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보여 준다(22, 24절).

 

이것들을 볼 때 쉽게 이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다. 곧 제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회심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세례가 따라 왔다면 이는 어느 곳에서나 신자들을 위한 일반 규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오순절 사건이 특별한 사건임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① 구약에서 오순절 성령 부어 주심은 결정적 사건으로 미리 예언 되었다(예, 사 44:3, 겔 39:29, 2:28 이하).

 

② 베드로는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 일이 마지막 날에 있는 일임을 덧붙인다(행 2:170. 즉 교회의 마지막 시대가 오순절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③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못할 줄 알았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약속되었다(요 14, 16장).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기간에 속한 것이다.

 

④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인 사건이었던지 누가는 바로 이를 기점으로 그의 두 책을 나누었다. 행 1:1,2에서 그가 그의 앞의 책을 말하면서,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그의 두 번째 책이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일에 대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 중에 그의 성령 보내심은 가장 첫 번째의 일이다.

 

오순절은 베드로가 행전 2장의 그의 설교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점진적인 구속 역사에 속하는 사건이다. 그가 설명하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사람으로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 어떻게 둘째 축복을 받게 되었느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집중된 것으로서 그 분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시고(22절), 죽임을 당하시고(23절),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신 것을(23-32절) 말한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고 성령을 받아(33절) 마침내 이 성령을 부어 주셨다. 이것을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 사건들의 계열에 속하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성령을 부어 주심이 중심이다.

 

물론 이 말은 성령을 부어 주심이 개별적 신자의 신앙과 생활에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모든 사건들이 다 개별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다시 죽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바로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물론 되풀이 될 필요는 없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으심도 우리 신앙과 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오순절의 이 사건이 되풀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행 2:1-4에 묘사된 일들을 오늘날 성령의 반복적인 부으심의 모델로 삼을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순절의 사건을 오늘날 신자들이 생활에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행 1:5에 따르면 오순절날에 성령을 부으심은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도 있다. 즉 어떻게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오늘날 신자들의 생활에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베드로 자신이 그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오순절날에 그의 말을 듣는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바로 다음 절에서 베드로는 이것이 약속이라 하고 그 약속은 유대인들과 그 자녀들과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먼데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라 한다.

 

때때로 이 본문은 무리들이 성령을 그리스도께로부터 회심 후에 두 번째 단계로 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말한다.

 

그렇다면 신자 한 사람이 그 약속된 성령을 받고 다른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이다.

 

하지만 그 약속이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 그런 주석은 행 2:38과 잘 맞지 않는다. 베드로는 회개와 세례를 명령했다가 성령을 약속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성령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행 2:17, 18에서 인용된 요엘의 에언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예언의 말씀대로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행 2:38, 39은 오순절날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우리는 행전 2장의 동일한 본문 속에서 성령의 처음 오심이라는 구속적 사건과(2:1-4) 더불어 그 사건의 결과로서 개개인의 개별적 구원 역사에 대해 동시에 말하는 것을(2:38, 39) 보게 된다.

 

우리는 이를 고전 12:13과 연관시킬 수 있다.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제시하는 것의 근거로서 회중 속에 있는 동일성, 곧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 본문이 주는 의미처럼 모든 성도들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과거에 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을 회피하기 위하여 몇 가지 시도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토레이(R. A. Torrey)는 이런 일이 교회의 가장 정상적 상태이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가 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잊어버린 이후로는 이 일이 더 이상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 온갖 분열과 약점이 있었서 모델 교회로 불리워질 수 없다. 또 성경은 성령의 이런 사역이 신자의 과실 때문에 없어지리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또 다른 회피의 방식은 여기서 의미하는 세례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인 반면, 행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문법적 근거가 없다. 여기 사용된 표현은 행 1:5에 사용된 것과 똑같다. 만일 구분이 있다면 행 1:5의 말이 첫 번째요 결정적이며 구속사적인 성령을 부으심에 적용된 반면, 고전 12:13에서는 그 동일한 성령을 구원사적으로 받음을 말한다.

 

모든 신자가 성령을 가진다는 사실은 롬 8:9, 15이하, 고전 12:13, 엡 2:22 등과 같은 본문에서 확실해진다. 그리고 이 성령이 믿음의 순간에 온다는 사실이 행 11:17, 갈 3:14, 엡 1:13 등에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개개인 신자가 그의 신앙과 생활의 제 2 단계를 시작하는 표시적 체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세례의 결과로서 교회가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행 1:5-8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세례는 사람 속에 믿음이 생기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그 말이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가 복음의 부름에 부응하도록 하는 그런 성령의 사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세례 주다란 말은 오순절날부터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선물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거주시켜 주심을 의미한다. 이 일은 믿음의 즉각적인 결과인 것이다.

 

8.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능력

 

이 성령이 오신 결과가 여러 가지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를 들면 성령의 내주를 말할 수 있고, 그때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 사이에 거하시던 방법과는 다름을 지적할 수 있다. 또는 성령을 보증, 곧 미래의 선물들에 대한 보증이라 강조할 수도 있다(고전 1:22, 5:5, 엡 1:14). 아브라함에게 대해서는 그의 아들로, 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는 그 땅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성령이, 그들이 장차 받을 유업에 대한 보증이 된다. 또는 성령 사역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공동체를 강조할 수 있겠다. 이러한 통일에 대한 강조는 고전 12-14장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바로 이 통일의 근거로 작용한다(고전 12:13, 참고, 엡 4:3).

 

또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계명 중 많은 부분이 신약 시대에는 폐하여졌다. 여러 나라에서 사는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성령님의 인도 아래서 살아야 한다(롬 14:17, 18; 엡 5:18). 위에서 언급된 주제들은 사실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성령 오심의 결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받을 것이라는 행 1:5-8의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때때로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나약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다. 성경은 이 세례가 능력을 준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그 신앙이나 활동에서 나약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는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지 못함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그것을 받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두 가지 실수가 생긴다. 첫째는 오순절 사건을 하나님의 점진적 구속 사역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사건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전 1, 2장을 올바로 주석하면, 오순절 이후로 교회는 단 한 순간도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없이 존재했던 적이 없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실수는 위와 같은 추론의 전제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교회가 오순절 전에는 약한 교회요 무질서하고 능력도 없고 방향도 잃어 버린 교회였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오순절이 되기까지 교회의 사정을 보여 주는 본문들을 읽어 보면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찾아보지 못한다. 눅 24:52, 53을 보면, 그리스도의 승천을 보고 제자들이 돌아올 때 기쁨이 충만했다고 한다. 또 그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기쁨이나 찬양은 약함의 증거들이 아니다. 행 1:14은 또 그들이 그동안에 기도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는 사이에 제자들이 취한 한 행동을 기록한다. 곧 유다를 대신할 한 사람을 뽑는 일이다. 이 일은 사도들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고 성경을 좇아 행해졌다. 그 사건은 행전 1장의 교회가 미래를 위해 준비하였음을 나타낸다. 그 어디에도 신앙이나 활동의 면에서 연약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성령이 왜 능력을 주는 사역과 함께 보내어졌을까? 본문 자체가 이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에과 모든 유대와 사마리아와 세상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행 1:8). 선교의 범위가 넓혀져야 하고,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계를 깨고 나와야 했다. 이는 아브라함 이래로 한 나라에 제한 되어 왔던 교회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인 것이다. 민족 교회로부터 온 세상 나라들에서 모인 교회로의 전이(轉移)가 바로 행전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실수를 지적할 것이 있다. 본문은 제자들의 말이 능력있게 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또 그들 자신이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리라는 의미도 아니다. 행 1:5-8에 나타난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으로 능력을 줌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증인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점은 요엘의 예언에도 강조되었고 오순절에서 성취되었다. 그 예언의 내용은 여러 권능의 사람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듣고 또 그가 많은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예언의 의미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나이나 성별이나 사회적 신분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점은 우연히도 요 7:38, 39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생수의 강이 그의 속에서 흘러나리라.”는 말씀과 일치한다. 이 말씀은 생수가 신자의 속에 있을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흘러 나올 것을 강조한다. 오순절 이후로는 믿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된다.

 

행전 1, 2장에 강조된 대로 오순절 사건의 새로운 면은 그 때 이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 시대처럼 예언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은 결과로서 복음은 구라파와 미국과 아시아에 전달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100년 전부터 복음을 전해 왔던 사실도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은 일의 구체적 증명이다.

 

9. 몇 가지의 구체적 결과

 

이상의 이론적 논리에 이어서 이에 따른 몇 가지 실체적 결과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한국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또 고난 주간과 부활절에는 그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오순절날에 성령을 부으심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오순절날이 부활절 후 제 50일 되는 날에 기념되고 있다. 한국의 교회도 이 성령의 부으심을 특별한 기념 행사와 함께 지킨다면 좋은 발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은, 오순절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과 같은 계열에 속하고 이 모든 사건들이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서 결정적인 사건들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2. 성령을 받기 위하여 특별한 모임을 실행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찾아보게 된다(눅 24:48, 행 1: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을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주시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때와 장소에 대한 지시를 주었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몇 날을 기다려야 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오심을 신자들이 기다려야 한다는 명령을 일반화 한다면 우리가 신자들을 예루살렘에 가도록 재촉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행전 1장에서 오순절파가 실행하는 것과 같은 기다리는 모임을 찾아보지 못한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기도를 명하신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120문도)은 물론 기도했다(행 1:14). 하지만 자신을 비우라든지 안수하라는 명령은 행전 1장엔 전혀 없다. 행전 1장 이후에도 기다리는 모임과 같은 것을 찾아보지 못한다. 8:16이나 19:에서 안수하는 일을 볼 수는 있지만 기다리는 모임의 특성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성령이 모든 신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준비 모임을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들과 오늘날 목사들과의 사이에 있는 근본적 차이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모임과 같은 것에는 쐐기를 박아야 한다.

 

3. 개혁 운동은 그리스도가 그의 신약 교회를 세우실 때 고려하였던 수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격려해야 하겠다. 그 수준은 곧 성령을 받은 회중이다.

 

물론 성령의 보다 많은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엡 1:17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1:13)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한다. 또 그는 엡 3:16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으로 인해 강건해지도록 기도한다. 또 오순절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신다(눅 11:13).

 

기도뿐만 아니라 행위도 필요한데 이는 성령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일은 살전 5:19에 금지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이 말은 뒷 구절과 연결되는데,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엡 4:30에서도 금지가 나온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이는 에베소 교인들의 언어 생활(29절 : 무릇 더러운 말, 31절 :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관계된 말씀이다. 즉 신자는 나쁜 말을 통해서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성령의 지속적 사역에 대하여 적극적인 명령도 찾을 수 있다. 갈 5:16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였는데 이 말은 22절 이하에서 보여진 대로 성령의 열매를 실제상으로 의미한다. 엡 5:18은 “성령으로 충만되라” 고 명한다. 이 명령이 실제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5:22-23), 부모와 자녀 관계(6:1-4),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6:5-9) 등을 들어서 바울이 설명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우리는 능력을 주는 성령을 제 2 차적 단계로 받들고 준비하라는 명령을 찾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살펴본 금지와 명령들을 회중이 성령으로 채워진 회중의 수준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엡 1:17처럼 지식에서 자라가야 함을 의미하며 엡 3:17처럼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바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성령의 회중 속에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이야기하고 또 그 분과 그의 사역을 이해하는 일에 자라가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4. 요사이 한국에서 교회가 약화되었다는 불평이 많이 들리고 있다. 그 이유로서 성령님이 없거나 성령님이 주시는 특별한 힘이 없다는 것들이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자 개인으로서, 그리고 신자 모두가 교회로서 성령을 다시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결과는 그 해결책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님의 힘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이 완전히 안 계신다면 교회는 교회의 이름을 갖지 못한 죽은 교회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이러한 해결책은 비성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너무 쉬운 것이다. 문제의 해결책은 성령의 힘이 없기 때문에 성령을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이미 계시므로 신자로서, 또 교회로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약한 교회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이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고 완전한 사랑과 순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계 2:5-16, 24-25, 3:3,19).

 

기독교 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일상 생활에다가 그저 성경 읽고 예배 드리는 것만 첨가한 그런 생활이 아니다. 기독교 생활은 성경을 읽는 것과 예배가 생활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생활이다. 엡 5,6장에 나오는 예를 든다면, 기독교인 부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엡 5:18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또 기독교 회사가 다나지 일요일의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용주나 근로자 사이에서 또 근로자 상호간에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약화된다면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게 살지 않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사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한국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았고 굳이 표현하자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사용할 수 있다. 이제 온 세계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한국 신자의 책임은 그 성령님의 인도 아래 일상 생활에서 말과 행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 아래 살 때 직면하는 사회의 많은 반대 속에서도 이렇게 기독교적 말과 행동이 진실되게 나타난다면 성령님의 능력은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개혁 운동의 전망은 우리 태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오순절파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발전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위 말하는 제 2 의 축복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받도록 독촉하며 기대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개혁적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갈 수도 있다. 그때에는 강조점이 제 2 의 축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에 강조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에 회중은 성령으로 채워진 회중의 수준에 근거하여 믿음과 기도와 전도와 행동안에 살도록 독려를 받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개혁 운동이 이 후자의 지향점을 택하도록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첨부파일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고재수 지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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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조명 /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

 
제 5장   성령과 조명(照明)

앞 장에서 우리는 계시가 모든 지식의 근원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두 가지 종류의 계시를 주셨다. 일반 계시는 창조된 세상의 모든 부문에서 볼 수 있고, 특별 계시는 성경이다. 이 두 계시가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일반 계시가 한 근원이긴 하지만 성경 없이는 올바로 분별하기 어렵다.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포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속적인 음성이요, 오류가 없다는 사실까지 밝혔다. 만일 누구나 참 지식 가지기를 원한다면 이 두 계시에 가야 하고, 거기서 그는 그 마음에 확실한 것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진리가 정확하게 기록된 외적, 객관적 계시를 가지는 것으로 충분치 않음을 암시한 적이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이전, 아담과 하와의 무죄 시에는 이것으로 충족하였다. 그러나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일반·특별 두 계시로도 참 지식을 주기에 미흡하게 되었다. 이 두 계시가 자체로서 불충분함도 아니요, 어떤 점에 모자람이 있어서도 아니다. 일반 계시에 관한 한,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히 보인다(롬1:20). 특별 계시에 관한 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원어에 있어서 모든 말이 일점일획까지 정확한 성경을 주셨다. 계시들은 완전하고, 분명하고, 평이하다. 결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절대적 지식을 제공하기에 온전히 충족하다.

그러나 결함은 사람에게 있다. 본 장에서는 사람이 성경을 바로 읽을 수 있도록 눈을 주시고 마음을 조명하심이 어떻게 성령의 일인지를 보겠다.

처음에 인간의 영적 조명의 필요성을 살피고, 다음에 성령께서 그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임을 살펴야겠다.


1. 인간의 암매(暗昧)

신약 성경은 자연인이 두더지처럼 암매하여서 그 크고 분명한 진리가 사도에 의하여 제시되어도 깨닫지 못함을 암시한다. 누가는 루디아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강가에서 바울의 전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시사 바울의 말한 것을 청종케 하셨다(행16:14)고 말한다. 여기에 분명히 내포된 것은 그가 처음에 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마음은 영적으로 무디었다. 이방 에베소 인에 대한 바울의 묘사를 빌린다면 그 여자의 총명은 어두워져 있었다(엡4:18). 그가 그 말하는 헬라어는 알아들었으나 그 말의 참 의미는 몰랐다. 그러나 주께서 그 마음을 여시매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주 없이는 그에게 영적 총명이 없었다. 그 여인은 소경이었다.

바울은 영혼의 암매를 마음에 드리운 베일로 묘사한다(고호3:12-18). 회개치 아니한 유대인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하였다. 모세의 기록들이 그들에게 읽혀질 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모세의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요,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수건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바울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16절)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리라는 의미이다.

자연인에게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음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성경 말씀은 아마도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일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버림받은 자들은 복음을 들어도 그것을 헛소리로 여긴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1:18) 자연인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지혜 있는 자와 문벌 좋은 자와 능한 자가 많이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영리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IQ에 상관없이 거듭나지 않고는 모든 마음이 어두워진 때문이다. 바울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2:14)라고 분명한 말로 밝힌다. 그는 지둔(遲鈍)한 자연인 혹은 무식한 또는 교양 없는 자연인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연인이라고 말했다. 타고난 지능에 상관없이 육에 속한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창조의 기사를 분명한 과학적 사실과 모순된다 하여 저버리며 아담과 하와 및 뱀의 역사를 한낱 동화로 생각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신약 성경의 주장도 후대 교회의 미련한 저자가 좀 더 알지 못하여서 그렇다고 판단해 버린다. 대속의 역사도 그에겐 어리석게 보인다. 예정과 인간의 책임은 분명한 모순이다. 전능하시며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예상하신 것은 그에게 불합리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여기므로(고전2:14)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은 자가 된다(롬1:22). 바울은 이 가르침을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강력히 재 확언했다. 그가 그런 것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일은 영적으로 분변(分辨)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이 자연인은 전적으로 암매하다고 말한다 해서 거듭난 자는 그 반대로 완전히 밝은 눈을 가졌다고 추단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하였다. 구약에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시편 기자 앞에 있었다. 그는 율법에 더하여 어떤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그것을 볼 수가 없어서 이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요컨대 다윗은 거듭났을지라도 영적으로 일부분 암매하였다.

신약 성경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부분적인 암매를 암시한다. 누가는 승천 전의 사건을 얘기하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의 예언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기 전에는 그들이 성경을 백 번을 읽었을지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 중략....

이와 같이, 성경의 틀림없는 교훈은 하나님의 이중의 계시 곧 창조된 세계와 성경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시들은 명백하다. 그러나 죄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성령이 그 안에서 성화의 역사를 시작하심으로써 거듭난 자는 최소한 이 진리들의 근본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연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이 진리들을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할터인데 그러지 못한다. 구름 없는 한낮에 한 사람을 밖으로 데려 나가서 빛나는 해를 보게 한 다음 그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보라. 만일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는 틀림없이 시각 장애인이어서 안과의에게 갈 필요가 있다. 같은 이치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죄,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심을 쉽게 증거해 주는 명쾌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사람 앞에 내놓고 그 진리들을 보는지 물어보라. 만일 그가 “그것들은 진리로 볼 수 없소. 옛날 얘기요. 사람의 상상으로 지어낸 다만 무식자만이 믿는 뻔한 헛소리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도 역시 전적으로 소경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가지도 볼 수 없다. 성경은 그 이상 쉬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마치 해처럼 빛나기 때문에,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함에도 만일 그 진리를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반드시 그가 영적 소경인 탓이다. 성경이 말한 대로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한다. 베일이 그의 마음을 가리고 그의 눈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조명

그러므로 참 지식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가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람이 또한 볼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이 개입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다. 그는 사람에게 오류 없는 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눈도 주신다.

이미 언급한 몇 구절은 사람의 영안(靈眼)을 여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행위임을 명시한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 자기 눈을 열 수 없는 무능력을 느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르기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하였다.

.... 중략....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4,5)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 일에 있어서는 바울이나 그 누가 신앙이나 신앙에 필요한 지식을 수사나, 웅변, 논리 등으로써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오는 것이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런 방법으로 마음에 찾아 오시며 복음의 진리를 저항할 수 없이 확신시키어서 믿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와 같이 속절없는 것 위에 서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서 있다.

.... 중략....

이제 이를 종합하면 성령께서 사람들의 생명 속에 오실 때 그는 그들을 조명하며, 지식을 주고 가르치며, 그들의 눈을 여시고 가려진 마음의 수건을 벗기시며 마음을 유화(柔和)시키사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알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없이는 사람은 계시의 진리에 암매하며, 오직 성령과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이 은밀한 계시, 새 계시를 사람에게 줌으로써 그를 조명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완성된 후로는 계시가 더 없었다. 특별계시는 신약으로 종결되었다. 더구나 새 계시를 주는 일은 마치 하늘에 태양 둘을 둠으로써 소경으로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처럼 무익하다. 성령께서는 지식의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사람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에 신비하게 역사하여 이미 주어진 계시를 볼 수 있게 하신다. 시편 기자는 또 다른 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앞에 이미 있는 율법을 보도록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을 구하였다. 회개치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계시 위에 다른 계시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요 다만 그들의 마음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 필요하였다. 에베소인들에게는 다른 복음이 필요치 않고 바울이 이미 그들에게 가르쳤던 복음을 보지 못하게 막는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고 쓸 때 그가 새로운 메시지를 주었다 하지 않고 옛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주었다고 말한다. 같은 모양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지혜 있는 자도 이해 못한 복음을 깨달은 것은 어떤 새 계시를 받은 때문이 아니고 이전의 계시가 “성령과 능력이 나타남”으로 임하였기 때문이다.

이 조명은 주의 천사가 발람의 길 앞에 섰을 때 그의 눈에 열린 것에 비할 수 있으니 천사는 거기 있었고 나귀는 그를 볼 수 있었으나 발람은 볼 수 없었다. 발람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또 다른 천사를 보내야 했던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눈을 열어 줌으로써 그는 이미 거기 있던 천사를 보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또한 이 조명은 망원경의 효과에 비할 수도 있겠다. 사람은 이것 없이는 무한의 거리에 있는 저 별들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별들은 거기에 있다. 그가 필요한 것은 곧장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새 눈인 망원경이다. 망원경은 그 앞에 새로운 물체를 놓아 주는 것이 아니요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도 이와 같다. 성령은 사람의 영안을 열어 이미 그 앞에 있는 계시를 보게 한다. 만일 그가 단 한 계시도 볼 수 없다면 천의 계시로도 그로 보게 하는 데는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조명은 어떤 새 지식의 부여가 아니라 사람 앞에 분명히 놓여진 것을 볼 수 있도록 그 눈을 열어 주는 것이다.


결론

이 사실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수수께끼로 남았을 것을 설명하여 준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만일 기독교가 그처럼 좋고 이 세상과 내세에 최대의 유익을 끼치며 그처럼 논리적이요, 그것이 모든 참 지식의 근원이라면 왜 더 많은 사람이 믿지 않는가? 왜 교회가 대학 출신과 전문가들로 구성되지 않았는가? 왜 높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 교회로 많이 모여들지 않는가?

몰론 대답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에 달려 있지 않고 영적 맹목자로 하여금 보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데 있다.

같은 이유로 때로는 어떤 엉뚱한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적인 견지에서 사람을 보고 속으로 판단하기를 “저 사람은 소망이 없어, 너무 완고해서 신자가 되지 못할 거야, 그는 무관심하고 죄 중에 빠져 냉담할 뿐이야, 욕지거리를 지독히 하고 생활은 추문투성인 걸”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사람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생전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완악한 죄인이 눈에 눈물이 어리어 그리스도에게 나온다. 들국화가 코끼리 발에 짓눌려지지 않을 수 없듯이 그가 복음의 부름에 귀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사람에게가 아니고 성령께 의존하는 까닭이다. 천재든지 강퍅한 죄수든지 차이가 없다. 오직 성령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하시면 그의 마음은 부드럽게 녹아지고, 혹은 에스겔이 말한 대로 돌 같은 마음이 살같이 된다(겔11:19).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가 상대할 사람을 조명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은 무효하다. 우리가 회개치 않은 친구를 가장 웅변적이고 인기 있는 설교자의 말을 듣게 할 수도 있고, 그와 함께 논리적인 변론을 할 수도 있으며(기독교는 찬란한 논리를 가졌다.) 아주 교묘하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 요령 있는 방법으로 그에게 접근할 수도 있으며 또 한 숨이 다할 때까지 담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성령께서 그의 눈을 열어 그의 마음에서 수건을 벗기고 그로 진리를 보고 믿게 하시지 않으면 이 모두가 수포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영혼을 얻는 데 첫째 조건은, 성령께서 그 회개치 않는 자의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일이다. 한번 그것이 일어나기만 하면 비록 우리가 서툴고 미련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해치 못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영혼을 얻으려다 낙심하게 되는 대부분의 원인은 우리가 전도지를 전해 주며 복음을 증거할 때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의 생명 안에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실에 있다.

우리 자신의 지식에 관해서도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한다. 바울이 편지한 에베소인들이 이미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들은 바울이 그 영광스러운 제 1장을 써서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터가 영원하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전달받아 이를 아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는 같은 장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시사 그들의 깨닫는 눈이 밝아져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알도록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다(엡1:17-19).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 우리 눈에 상당한 몽롱함이 있고(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많이), 아직도 암매로부터 자유치 못하며, 마땅히 보아야 할 때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사 우리로 계시의 큰 진리들을 더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조명하시기를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전장과 본 장의 결론으로, 기독교는 모든 참 지식의 비결을 가지고 있다. 이 비결은 성령의 이중(二重)의 역사에 달려 있다. 그것은 성경, 곧 모든 지식의 근원이며, 또한 자연 계시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 데 근원이 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달려 있으며, 또한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조명해 주심에 달려 있다. 만일 사람이 성령의 이런 역사에 의지하면 그는 철인(哲人)들이 만대에 걸쳐 탐구한 것 이상의 참 지식을 얻을 것이며 그래서 그는 만족할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91~104p)/믿음은님

타임스 한인기독신문 자료

글쓴이: 부티   08.05.21   http://cafe.daum.net/profchung/3Eug/378

 

 

[신학] 균형잡힌 성령론

정성욱
(덴버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하버드대학 신학 석사 (MDiv)
옥스퍼드대학 조직신학 박사 (DPhil)
King College 신학교수 역임 (2000-2005)
현재 Denver Seminary 조직신학 교수 및 평생 교육원장 (2005 -)
저서)

티타임에 나누는 기독교 변증 (홍성사)
10시간 만에 끝내는 스피드 조직신학 (홍성사)
삶 속에 적용하는 Life 삼위일체 신학 (홍성사)
한 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 (부흥과 개혁사)
한 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부흥과 개 혁사)
정성욱 교수와 존 칼빈의 대화 (부흥과 개혁사) 외 다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고린도 교회에 신령한 은사가 풍부했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 대부분이 아주 어리고 미숙한 성도들이었다는 점이다.

성령의 은사 그 자체로는 결코 성도들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가 없다.

믿음이 어린 성도들에게도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며,

믿음이 성숙한 성도들 중에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은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항상 질서를 따라 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극단적인 성령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은

은사 사용에 있어서 극단적인 무질서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령의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사실은 성령의 뜻에 불복하고 있음을 심각하게 자각해야 한다.


성령의 열매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란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가면서 맺게되는 영적 미덕들이다. 

성도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 감에 따라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 주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인격에 온유함과 겸손함의 열매를 맺게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은 특정한 은사가 없을 경우에

그 사람이 구원을 못받은 것은 아니며,

또 특정한 은사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성숙한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을 경우에는 그 사람의 구원 여부와 성숙 여부를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입술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상당한 기간의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그 사람의 삶과 인격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구원 여부와 성숙 여부를 심각하게 의심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의 차이점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설령 방언의 은사나 가르침의 은사는 받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맺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과정은 어떠한가?

우선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고 통치하지 아니하시고서는

우리의 인격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질 길이 없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가운데 성령과 동행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고, 깨닫게 하시며, 말씀을 따라서 살게 하신다. 

바로 그 때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성령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기도 가운데 주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누리게 하신다.

바로 그 때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세째, 우리는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살리는 성령의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

성령은 우리가 육신의 소욕을 쳐 복종시키고, 성령의 소욕을 선택하도록 이끄신다.

우리는 성령의 이러한 이끄심에 순복해야 한다.

바로 그 때 우리의 삶과 인격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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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중생시키시는 성령 / A.W. 핑크 ('성령론'에서 발췌)

 

 

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회심하는 문제에 있어서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그가 완전히 타락해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거룩한 행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어떤 올바른 기질이나 성향이 조금도 없다. 그렇다. 그는 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올바로 마음을 쓰는 것이 없고 그의 모든 의지활동은 부패하고 죄된 것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거듭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만일 죄인이 전적으로 부패한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이 없이도 그가 그리스도에게 굴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참으로 완전히 타락 가운데 빠져 있으므로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열망이 조금도 없이 오히려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롬(8:7).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에 대해 표현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엡2: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뒷 구절이 앞 구절을 해석해 주고 있다. 아담의 타락한 자손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로 영접하고 그의 이름을 믿게 하여 구원얻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후반부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은혜가 혈통을 통하여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경건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도 본성적으로는 악인의 자식과 똑같이 부패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자연적인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란 말은 자연적이고 부패한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어떤 본능이나 선택이나 노력으로 중생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또한 거듭나는 일에 대해서 무언가를 공헌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노력으로도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그를 중생시키시는 동인(動因)과 협력하여 중생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의 마음의 경향이나 그의 의지적인 활동은 오히려 중생하는 일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셋째로, 새로운 탄생은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나 영향력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나 기타 사역자들의 설득이나 노력의 결과로 죄인이 거듭나게 되는 예는 결코 없다. 그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지혜롭다 할지라도, 또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거룩한 자들로 만들기 위해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들이 그런 결과를 산출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성도들, 그리고 이 땅 위의 모든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뜻과 노력을 합하여 죄인 한 사람을 중생시키는 데 온 정력을 쏟는다 하더라도, 그를 중생시킬 수 없다.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한 지혜와 유한한 능력의 범주를 무한히 넘어서는 일인 것이다.”(고전3:6,7 S.홉킨스)

 

설교자에 가서 들으라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보리라

그러나 더 큰 선생이 네게 있으니

곧 영원한 보좌에 게신 분이라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라

 

중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택한 사람은 피중생자요(‘중생함을 입은 자’라는 뜻이다-역주), 하나님의 영은 유일한 동인(動因)이다. 새로운 탄생은 완전히 수동적이다. 곧 그가 탄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탄생함을 받는다는 말이다. 영혼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모든 마음의 거룩한 행사들 -예컨대 죄에 대한 슬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 등- 보다 앞서는 것이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연적인 마음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변화는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 이 위대한 변화는 점진적이거나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이다. 즉, 일순간에 택한 자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다.

 

중생시에 성령은 참되고 새로우며 영원히 멸하지 않는 생명을 부여하신다. 곧 ‘산 영’이었던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이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신 마지막 아담에게서 비롯된 생명을 부여하시는 것이다(고전15:45). 이 새로운 창조는 최초의 창조와 똑같이 실제적인(real) 것이면서도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최초의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원초적인, 또는 근본적인 창조였으나, 반면에 이 새로운 창조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 -합리적이며 책임질 줄 알면서도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을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받을 자로 중생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새 사람’이 된다. 그러나 똑같은 사람이 단지 ‘새로와 졌을’ 뿐이다.

 

“중생이란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새롭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며 본질적인 원리나 은혜의 성질이 영혼이나, 마음, 의지, 또는 사랑에 부어져서 그것을 가진 자로 하여금 영적이고 초자연적이며 본질적인 활동과 영적인 순종을 실행할 마음이 일어나서 그렇게 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J. Owen). 새로운 기능(faculty)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혼의 능력들이 영적으로 변모되어서(spiritualized) 하나님에 대하여 살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며 그와 교제를 유지하게 되는 것뿐이다. 중생이란 마음의 급진적인 변화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거룩한 일들을 도모하고자 하는 새로운 성향(disposition)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곧 마음이 새롭게 되고 사랑이 고양되며, 의지가 죄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듭난 사람은 영적인 일들을 영적인 것으로 사랑하며, 영적인 축복을 순수하게 영적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들 가운데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학파의 견해와 같이 어떤 독자들은, 중생시에 새로운 어떤 기능들이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은 중생 이전이나 이후나 본질적으로 똑같은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 우리의 논거에 대해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심지어 그가 영화의 상태(glorified state)에 들어갈 때에 있어서도, 결코 무엇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 때에는 다만 기능들이 완전히 자유로와지고 더 확대되고 고양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열왕기하 6:17에 기록된 뚜렷한 경우를 살펴보면 더욱 쉽사리 파악하게 될 것이다. “[엘리사가]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의 사환에게 새로운 기능이 전달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시각기관의 능력이 확대되어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된 것뿐이다. 중생시의 우리의 이해력도 이와 같다. 지성(추상적인 의미의 지성)은 중생하기 이전이나 그 이후나 똑같으며, 다만 후자의 경우 성령께서 그 지성을 되살리셔서 이제 영적인 것들을 분간하고 그것들을 향해서 활동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새로이 거듭날 때에 부여되는 이 새로운 영적 시력은 원래의 기능에 부가적으로 덧붙여지는 하나의 특질 것이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 문제를 조금 더 다루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성도들의 육신의 눈은 부활 후에는 천사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므로(지금은 볼 수 없지만), 그 눈을 새로운 눈이라고, 신령한 눈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육의 몸이 ‘신령한 몸’이 되는 것과 똑같다(고전15:44).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도록 눈에 새로운 영적인 특질을 첨가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난 사람의 전 존재 역시 ‘영’을 부여받아서(요3:6) ‘새 사람’, 또는 ‘신령한’ 사람의 모습이 되지만, 그 모습은 어떤 새로운 존재가 창조되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원래의 사람이 ‘새롭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중생하게 되면 사물들을 모두 새로운 빛 속에서 보게 되며, 또한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심령이 작용한다. 이제 하나님은 무한히 우수한 존재로 보여지게 된다. 그의 율법에 대하여는 지당함과 영적인 면을 지각하게 되어서 중심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 또한 죄가 무한히 악하다는 사실을 분별하게 된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혐오하면서, 자신이 오래 전에 지옥에 가지 않은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는 그러한 버려진 자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죄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거듭났는지 그렇지 못한 지를 판정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그들 마음의 행사와 그것이 그들의 행실에 미치는 영향 및 결과로써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중생시에 사람의 기능들이 영적으로 생기를 얻게 되고, 은혜로 그 기능들에 새로운 능력이 부여 되어서 영적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중생시에 성령께서 영적 생명의 원리들을 전해 주시므로 그것에 의하여 중생한 사람은 하나의 영적 동인으로써 활동하고 초자연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복음에 나타나 있는 바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연적인 기능과 능력의 편에서 볼 때는 초자연적인 대상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햇빛과 박쥐의 눈이, 또한 햇빛과 소경의 눈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창조시에 가졌던 본래적인 행위보다 거룩하게, 그리고 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와 능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시에 생기는 궁극적인 주요 요소는 바로 마음의 거룩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엡1:4) 그 이후로 우리를 언제나 돌보시는(히12:10) 그 은혜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함을 소유하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히12:14)이기 때문이다.

전가시킨다든지(imputation), 변형시킨다든지(transubstantiation)하는 방법으로는 유한한 피조물이 도저히 하나님 속에 있는 본질적인 거룩함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입는 것 외에는 거룩함에 참예할 방도가 전연 없다- “하나님을 따라(하나님을 원형으로 하여)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으라”(엡4:24).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으라”(골3:10).

 

사람들은 중생함으로 최초로 구속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외부로 표현하게 된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나실 때에”(딛3:4). 그런데 그것이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하셨나니”(5절).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은 마치 힘찬 강물과 같아서 지하수가 그런 것처럼 영원히 흘러넘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사랑은 그의 마음속을 통하여 은밀히 흘러내렸고, 그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람들의 이름을 등에 지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아직도 그것이 감추어져 있고, 그것을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회심할 때에 그 사랑은 드디어 겉으로 솟아나며, 사람들 속에 나타나며, 또한 그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T. Goodwin)

 

우리의 중생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에 결코 못지않은 ‘지극히 크신 능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엡1:19, 20). 그런데 그 중생의 일이 자주 반복되며, 또한 죽어가던 강도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대로 순식간에 일어나며, 또한 연약한 자가 다른 사람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어 줌으로써 이루어지는 예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생의 역사 속에 있는 성령의 전능하신 사역을 간과해 버리기가 쉽다. 정말로 성령께서는 부드러운 회유적인 동기와 따뜻한 권유의 방법 -‘사람의 줄’(호11:4)로 이끄는 방법- 을 사용하셔서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의 크나큰 위대함을 숨기시기 때문에 그의 권능이 잘못 인식되고 잘못 숭배되는 것이다.

 

중생의 놀라운 면은 영혼을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영적 생명으로 이끌어 내는데 있다. 그것은 무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 내는 새로운 창조이다. 더 나아가서 그 새로운 창조는 태초에 있었던 창조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이다. 옛 창조시에는 아무것도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 없었으나, 이 새로운 창조에 대해서는 죄와 사단의 모든 권세가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중생이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과는 다르며, 오히려 어떤 것을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굳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겔36:26), 이리를 어린 양으로(사11:6) 변화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어떠한 이적보다도 더 위대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받으면 그들이 그가 행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요14:12)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께서 한 심령을 중생시킬 때에는 그의 놀라운 능력이 행해질 뿐 아니라, 그의 복된 사랑도 함께 나타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향하여 그의 은혜로운 직임을 수행하시며, 그들 속에서 일하시는 가운데, 영광을 상속받을 자들을 향한 그의 사랑이 말로 다할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을 만큼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곧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을 향하여 살리며, 우리로 영원하신 언약 가운데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을 깨닫게 하며,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그와 함께 지내기에 알맞도록 영적 원리들을 부어주시는 것이므로, 그것은 내적인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사역이 우리들 내부에서 이루이짐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시하기가 더 쉬우며, 또한 분명히 그에게 돌려야 마땅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일에 소홀하기가 쉬우며, 또한 대단히 슬프게도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은혜로운 일에 대해서 그에게 감사와 존귀를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의 사랑은 이렇게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계신 것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나 그를 우리에게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도, 그들을 향한 성령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그의 기뻐하심에 대해서는 뜨겁게 묵상하는 예가 적다. 그러나 아들이 이루신 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즐기는 이런 모든 일이 전적으로 영원하신 성령의 내적인 가르침과 그의 초자연적인 감화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성령의 사랑을 생각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를 성삼위 가운데 한 분으로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이시오 주이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을 소홀히 한다는 사실로써 너무나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9,10).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택하심과 그 아들의 구속은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기한이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에 타락한 죄된 상태 속에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며, 죄의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의의 생명으로 살리는 일은 바로 성령께서 행하시는 위대하고도 숭고한 일이며, 이 일을 통하여 그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와 그의 사역의 영원한 덕과 효능을 완전히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한 대속물로 바치실 때 그 마음이 어떠하셨으며, 그 일을 영원히 기억하시는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얼마나 무한하게, 그리고 영원토록 기뻐하시는지를 잘 알고 계신다. 성부와 성자께서 이 위대한 구원을 모든 택한 자들에게 계시하고 적용시키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므로, 성령께서는 자신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의 풍성함으로 적절한 시기에 모든 영광의 상속자들 속에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죽으신 것처럼 -그의 죽으심은 단 한 번만으로도 그것을 통하여 이루실 모든 계획을 보증하기에 충분하다- 성령께서도 단 한 번의 활동으로 심령을 거듭나게 하며, 그 상태를 완전히 변화시키므로, 중생한 사람은 그 일회적인 사역을 통하여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영적 탄생이 없이는 우리는 영적 사물과 하늘의 축복들을 참되게 볼 수가 없다.

 

거듭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곧 거듭난 사람이 영적 사물을 영적인 것으로 사랑하며 영적인 축복들을 그 영적인 면으로서 귀중히 여기게 되는 일이다. 생명 샘이 그리스도로부터 그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그의 모든 영적 삶의 샘이며, 그의 모든 은혜의 뿌리이며, 그의 속에 있는 모든 신적 원리들의 영원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택함을 받은 자는 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영적 세계에만 있는 것들을 즐길 능력을 얻게 되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상태가 영원히 있게 될 상태로 바뀌게 된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맞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은 중생할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골1:12,13). 중생이란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일어나며, 단 한 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증가시킨다거나 감소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든 은혜와 거룩함이 그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지는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단지 그 은혜와 거룩함을 이끌어 내어 실행하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성령론] / A.W. 핑크 / '중생시키시는 성령'(83~92p) / 도서출판 엠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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