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클레어 퍼거슨/ 김재성 옮김 

IVP 조직신학시리즈 

 

목차: 

 

1장     성령과 그의 내력 

2장     그리스도의 영 

3장     성령의 선물 

4장     오늘날의 오순절? 

5장     질서의 영 

6장    재창조의 영 

7장    성결의 영 

8장    성령의 교통 

9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10장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 

11장  우주적인 영 

 

 

역자서문 

 

성령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적으로 정리된 교과서가 아브라함 카이퍼 이후로 약 100년 만에 출간되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파마다, 심지어 목사마다 정리되지 않은 온갖 성령론을 주장하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은 그런 혼돈을 치유할 수 있는 훌륭한 해답서이다.  

 

이 책은 현대의 성령론에 대한 수많은 조류와 사조를 각주에서 일일이 참고하고 논평하고 점검하면서,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령론을 체계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순절과 성령의 은사 이해에서 이미 주목할 만한 저술과 논문을 발표한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Jr. 아들)도 이 책이야말로 개혁신학의 발전을 보여 주는 놀라운 책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성경적 안목으로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주고 다. 경험이나 전통, 혹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관행에서 성령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교회의 문서들과 신학자들의 설명에서 찾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정리된 본서의 내용은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1998년 9월 합신 연구실에서 김재성. 

 

 

정리자 주: 

퍼거슨의 성령론을 읽으면서 필자가 감탄을 한 점은, 이 책이 다소 스콜라적인 정통 개혁 조직신학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재편성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그간의 많은 학문적 발전의 결과와 논의가 이 책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퍼거슨의 깊은 신약 신학적인 연구 결과도 들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퍼거슨의 깊은 영적 체험이 그의 학문과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직결된다. 혹자에게는 이 책이 정통의 틀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마음이 들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정통 개혁 신학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 신학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다가 후배들에게 정리를 해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정리록을 만들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김재성 교수의 탁월한 번역(어려운 말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의 깊은 내용을 쉽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노파심 때문이다. 먼저 번역서를 읽고 이 정리록을 읽으면 이해가 쉽게 되고 배운 것이 기억에 남을 것을 희망한다.  

 

가끔 나타나는 괄호에 들어 있는 말이나, à 이후에 있는 말은 정리자가 이해를 더하려고 붙인 말, 혹은 요약이다. 송다니엘(하이델베르크 개혁교회 목사) 

 

5장   질서의 영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은 회복의 영이다(성령님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러 오셨다). 성령은 이처럼 새로운 창조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로운 지배권을 회복하실 자로서 봉사하도록 예수님을 구비시켜 주셨다(고전15:45-491)) à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금이빨로 바뀌는 곳에서는 인간의 탐욕이 부추겨지고, 넘어지는 곳에서는 인간이 물건이 된다비인격적인 역사는 인간적 혹은 사단적이다! 

새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고, 믿는 자들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그날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은 마지막 날의 영광을 향하고 있으므로 종말론적이며, 종국에는 하나님이 새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신 영광을 모든 피조물에게서도 완성하신다.  

그러나 그 영광이 이미 믿는 자들 안에서 회복2)되고 있으므로 반(半) 종말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는 이미와 아직 이라는 긴장 속에서 산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활동은 물 위에 퍼지는 동심원의 물결처럼 역사를 통해서 퍼지고 있다. 구약 시대와 같이 신약 시대에도 성령의 활동은 구원론적이요 공동체적이요 우주적이며 종말론적이고, 개개인의 변화와 교회와 세상의 통치,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에 대한 시사는 이미 사도행전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속주요 주님으로 믿게 되고, 새로운 주님의 공동체는 성령의 활동 안에서 형성되며, 장차 올 새 시대의 권능이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현시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히2:4; 고후12:12; 행3:1-10;5:12)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서 수치스러운 삶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옮겨지려면, 거기에는 분명히 기나긴 여정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성령의 길과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가?  

 

 

구원의 서정 

 

신학사에서 보면, 먼저 신론과 기독론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야 구원론의 문제에 대한 자세하고도 비평적인 탐구가 이루어 졌다. 교부시대에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에 관한 질문이 압도적이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론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들이 추구되고 제시되었다. 칭의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전적 해설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 말기에야 공포되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어떻게 구원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은, 불가피하게 그 구원의 개인적인 적용에 관한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 신학의 주된 관심은 구원의 은혜를 성에 연계시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의롭게 되는 과정(processus justificationis)에서 교회의 제사장적인 사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은 7성례의 시행에 한정되어 버렸다.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이것을 볼때, 일곱 성례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령은 교회의식의 시행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은 주로 칭의의 과정에 집중하였으므로, 죄인이 은총을 받기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비중을 두었다: 

·선행적 은총(gratia praeveniens3))을 받아 의지가 죄를 미워하고 의와 칭의를 사모하는 쪽으로 움직이게끔 하다 보면 그에게는 상습적으로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진다. (선행적 은총은 아무에게나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따라서 성례를 은총의 수단이라고 한다. 성례를 계속 받으면서 죄를 미워하게 되면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habitus가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가톨릭은 사람을 교회와 예식, 시제에 단단히 묶는다. 사제 없는 구원은 없다! 신교에서는 만인이 제사장이다. 은혜론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가틀릭에서는 공짜는 없다이고, 신교는 오직 은혜로를 가르친다) 

·죄에 대한 완전한 비탄이 결여된 불완전한 애통은 고해성사라는 수단으로 보충된다. 

·평생토록 충분한 은총을 단번에 받을 수 있는 의식이란 없다(따라서 가톨릭은 오직 은혜로 단번에 칭의를 받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칭의를 향한 지속적인 과정에서 정규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들의 칭의 개념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justum facere)을 뜻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고, 간주되고, 구성되는 종교개혁적 개념은 없었다. 즉 칭의가 내적인 의로움과 혼동되고, 법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개인이 완전한 성결에는 못 미치기 때문에 결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드물게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계시 없이는(성자) 누구도 칭의의 복을 확신할 수 없다.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면, 특별한 계시 없이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칭의 문제는 마틴 루터가 해결했다. 그는 많은 정신적 영적 투쟁을 통하여 중세적인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롬1:16-17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분출되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기 위한 자신의 업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루터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의 전환이었고, 이 깨달음은 종교개혁의 초석이 되었다 à 전혀 다른 구원론) 

 

제2세대 종교개혁자인 빈은 성령의 신학자로 불린다. 칭의는 의로움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gratia infusa) 전가되며, 스스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 양도된 것이 (루터가 발견한) 칭의의 본질이다. 칼빈은 이 새로운 이해를 구원과 적용시켜 성령의 역할을 회복시켰다. 칼빈은 구원에 관해서는 성례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례가 말씀과 성령의 활동에 종속되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칼빈은 어떻게 성령이 개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을 적용하는가4)에 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므로 이것은 구원의 서정5)이라는 표제 아래서 논의되어 왔다. 서정이라는 말은 일련의, 한 가지 계열로 된 연속된 구조를 의미한다. 구원의 서정이란, 구속의 적용에 관해서 사용될 때,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구원을 부여해 주실 때, 구원의 다양한 측면이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특히 어떤 방으로 그 다양한 구속 적용의 측면들(중생, 회심, 칭의, 성화와 같은)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면에서의 내적인 일관성과 논리성을 밝혀 보려는 시도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주지해야 할 점은, 정통신학자 사이에도 관점이 일치하지 않으며, 이것이 소모성의 논쟁으로 발전될 위험도 있고, 점차적으로 이 개념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은연중에 표출되기 마련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는 방식을 좌우하는 사고틀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성령이 개인에게 역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논리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어떤 순서인가? 

 

 

구원의 서정(예정)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됨  성화  성도의 견인  영화  

학자에 따라 순서가 바뀔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에서는 회심과 신앙이 중생에 앞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à 정리자 주. 

 

 

구원의 서정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배열이다. 서정에서 드러나는 순서는 시간상 어떤 것이 먼저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논리적인 연관성과 본질상의 순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6).  

 

영어권 전통에서 구원의 서정에 대한 고전적 사례는 초기 청교도 신학자인 윌리엄 퍼킨스(1558-1602)의 저작 황금 사슬에서 발견된다. 그는 구원의 모든 다양한 측면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주로 롬8:28-30, 특히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바울의 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퍼킨스는 이것을 서로 나눌 수 없는 연속적인 것, 즉 구원의 황금 사슬안에서 하나로 묶인 것으로서 그 안에서 구별되는 요소들로 보았다. 사실 퍼킨스의 도식은 스스로 닫힌 형태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는 외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목회적인 탁월함을 가지고 있고, 많은 좋은 영향을 끼쳤지만, 근래에 이 유형은 심각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롬8:28-30과 같은 구절들은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의 순서에 관해 언급한다기 보다도 오히려 구원으로 말미암는 복의 풍성함과 충만함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 왔다. 벌카워는 여기에 성화가 빠져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여기에서 전혀 다른 요소들의 순서를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만약 이것이 구원의 순서를 지칭한다면 성화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사슬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될 때,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은 구원론의 핵심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빼놓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의 열매들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슬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연합으로 연결시키는 일이 좀 더 근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예를 들자면, 이 도식에서는 선택은 중생의 원인이며, 이어서 중생은 믿음의 원인이 되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불변하고 필연적인 결과는 성화와 견인이다. 각각의 경우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모호하고 심지어는 축소되고 만다 

 

따라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분과 우리의 연합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관심의 초점이 우리 안에 무엇이 이루어졌느냐에만 있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와 그분의 연합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르만 리델보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의 설교에는 구원의 인간론적인 적용에 대한 자세한 교리인 구원의 서정의 조직적인 발전 단계와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 이는 바울의 교리의 특징이 학문적인 의미에서 조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의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구원의 서정이라는 개념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신학을 거론할 때에는 질서 정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원리, 혹은 모델을 사용하여 성령 사역의 순서가 추론되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전체 사역에 핵심적인 개념 안에서 더 좋은 모델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엔 크리스토) 

 

성령의 핵심적인 역할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분을 우리와 연합시키고 그분의 몸 안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약에서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7) 유지시키는 것이 성령 사역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이는 성령의 역을 구조화함에 어서 우리가 채택할 모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모든 측면은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방식에 관계되어야만 하고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의 서정의 가장 두드러진 동기이자 중추적인 근본 원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에 위치해 있고, 칼빈이 기독교강요의 제3권을 시작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그분이 불쌍하고 곤궁한 인간들을 부요하게 하려고 주신 그 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계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떨어져 계시는 한, 그분이 고난 당하신 모든 것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들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가 없는 채로 있게 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 안으로 접목되어야 하고(롬11:17),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갈3:27)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될 때까지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복음주의 신학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강조점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야말로 성령의 사역을 고찰할 때 뼈대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전1:5(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그분 안에서라는 말을 그대로 지키는 것을 그분에 의해서 라는 말로 바꾸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우리가 그 몸의 일원이기 때문이요, 우리가 그안에 접목되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우리가 그분과 하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분은 성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칼빈은 여기서(그리고 유사한 다른 주석에서도) 구원의 복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그저 그 복들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직접 참여함으로써만 우리의 것이 된다고 여겨야 함을 강조하다. 이러한 접근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더 나은 성경적 관점을 대변한다.  

구원의 복은 성령을 통해서, 배타적으로, 즉각적으로, 동시적으로,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다. 바울의 용어로 말하면, 그분 안에서(엔 크리스토)만 구원의 복들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한 완성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도 우리의 것이 된다(엡1:3이하) 

 

이러한 접근은 구원의 서정에 대한 해석의 주류를 이루는 일련의 묶음 또는 원인론적인 사슬 구조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다. 이것은 우리가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떨어져서는 복음의 축복들을 생각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심과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구원의 사슬상 현재의 체험에 두게 되는 주관주의가 배태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구원의 적용의 다양한 부분은, 신약 사상에 광범위하게 나타나 있는 생동감 있는 종말론적 차원(그리고 긴장)을 지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령의 사역을 해석하는 중추적인 원리가 될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 사람들은, 또한 한편으로 이 세상 즉 육체에 해서 지배되는 곳에서 살고 으므로, 거기에는 구원의 현재 체험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8)이라는 특성이 있다. 

사슬 모델에서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므로, 이 긴장 관계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예컨대생의 결말에 이르면 믿음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반대로, 구원의 측면들 각각에는 아직 완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부분들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사슬 모델은, 이미 시작된 것은 또한 완전히 성취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러나 구원론의 각 측면에는 종말론적(이미, 그러나 아직) 구조가 들어있다: 

·중생이란 현재적 실재이지만, 이것 역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마19:29) 

·성화 역시 죄의 지배로부터 이미 급격하게 그리고 단번에 결별이 이루어졌지만(고전6:11; 롬6:1-14), 이것 역시 완성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살전5:23). 

·영화도 미래에 완성되지만, 이미 이곳에서도 그리고 지금 은혜와 영광의 성령이 임재하심을 통해 시작되었다(고후4:18) 

·칭의 역시 이미 완성되고 완벽한 실재이면서 또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양자됨 역시 우리 몸의 구속, 곧 아들로 양자됨(롬8:23)을 우리는 기다린다.  

 

 

모형과 근원이신 그리스도 

 

이렇게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구원의 복들이 지닌 동시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실상 바울 신학의 종말론적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9)밀하게 검토해 보면, 그 신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적용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덕인 칭의, 양자됨, 화, 영화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얻으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형이요 근원이 되신다이러한 교훈은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 점에 관련하여 사도의 사상에 담긴 핵심은 바울의 경우, 우리의 구속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써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롬6:3이하; 엡2:5-6; 골2:12-13;3:110)). 이처럼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우리도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대표적으로 이루어졌다.  

믿는 자들에게서 이것이 현실화되거나 실존화 되는 것은 중생이나 회심에서이다. 이들 두 가지 순간, 즉 그리스도와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시간적으로는 떨어져있으나 논리적으로 묶여 있다. 양쪽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 à 우리의 영적 투쟁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2) 바울은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으로 보았다11). 그분의 죽으심은 진정으로 죽음의 모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았고,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죄의 삯으로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죽은 것으로 생각된 그리스도가 일으킴을 받았고, 건져졌고, 보호를 받았고, 부활을 통하여 구출되었다.  

 

3)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서 믿는 자들에게 구속의 적용을 설명하고자 사용된 범주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에 대한 구속의 적용은 그리스도께 대한 구속의 적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칭의로 간주된다(딤전3:15).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죽음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다.  

2.바울은 또한 이 부활은 예수님의 양자됨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활은 그분으로 하여금 권능있는 메시아적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했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새로운 시대의 사람으로 양자가 되셨다12).  

3.부활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의 성화에 근본적인 것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성화의 점진적인 측면이 아니라 결정적인 측면을 유념하고 있는데, 이는 죄의 영향권으로부터의 점진적인 해방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주는, 죄의 지배권으로부터의 급격한 구원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죄의 지배권 래 들어갔다. 부활에서 그분은 그 지배권에서 구출되었다. 이 구출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우리의 성화의 근거이다.  

4.부활은 그리스도의 영화를 이루었다.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그분의 육의 몸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빌3:21) 

 

그리스도 안에 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그분의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를 함께 소유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것들은 그분의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의 모든 측면이며, 그분에게 그것들이 동시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들이 즉시, 종말론적으로, 동시에 우리의 것이 된다.  

 

물론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는 구속의 적용에서 각각 구별되는 범주어며 우리는 결코 이것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들을 각각 동떨어진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그분의 부활하신 영광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한 가지 사건의 측면이요 부분들이며,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고 성령의 권능으로 획득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은덕(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을 우리도 성령을 통해 누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통한다. 그리고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결합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다양한 전치사들은 그 연합의 긴밀성과 범위를 강조한다.  

 

1) 위해서(hyper) 

믿는 자들은 하나의 연합의 끈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롬5:6,8; 8:32; 고후5:21). 이러한 연합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그분이 하신 일이 곧 그들의 것이 된 것을 의미한다.  

 

2) 함께(syn) 

그리스도의 구속의 순간들에서 믿는 자들은 그분에게 긴밀히 결합되어 으므로, 그 순간들 가운데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사건들은 그들의 현세적 삶에서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갈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롬6:4: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롬6:8: 그와 함께 산다. 

 

3)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은 바울 사상의 특징이자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전부를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동의어와 같다. 신자는 아담 안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 오게 되었다.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담이 대표성을 가지고 행한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요, 우리가 죄를 통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아담과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유비로서, 그리스도 안에 다는 것은 그분이 대표적으로 나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것이 실제로 나의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세 가지 차원: 그리스도와 연합은 세 가지 순간, 곧 영원한 순간, 성육신의 순간, 실존적 순간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르지만 보완적이다.  

 

1) 영원한 순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의 언약적인 연합 안에서 복을 받아,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선택되었다(엡1:3-4,11-12). 이 연합에는 우리의 개인적인 실존을 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으로 돌이켜 생각해야만 할 초월적인 차원이 있다. 여기에는 주권적이요, 단독적인 결정이 놓여 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산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택하신 것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선택하신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은 어거스틴이나 여러 신학자들이 총체적 그리스도(totus Christus)라고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 하여 떨어질 수 없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2) 성육신의 순간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로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1.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 안에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 그분은 우리 구원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몸을 입으셨다. 이는 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하신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이것들(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2.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그의 육체에 접지되어 있고 그 연합의 수행자인 성령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 사역의 위대한 순간들이 함축하는 것들은 우리가 함께 공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죽임을 당하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였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에서 연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중보자로서의 그분의 신분에도 연합된다. 그분과 연합으로, 우리의 신분은 급격히 바뀌었다. 더욱이 그분이 우리의 육체적인 실존을 거듭나게 하시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켜 가는 이상, 우리의 인격은 그분이 우리를 영광의 최종 단계로 변화시키실 때까지 점진적으로 바뀔 것이다(빌3:21) 

 

3) 실존적 순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초시간적으로 의도된 이 연합은, 성육신에서 구체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하심과 그에 관련된 믿음을 통해서 비로소 실존적인 실재가 된다. 이 실재는 신자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연합의 충만한 실재는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연합시킬 때, 우리의 실존 안에 자리하게 된다. 바울의 특유 표현 중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비록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까지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대상(엡2:3)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다. 오직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언약적 목표가 우리 안에 현실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함축된 의미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적용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전반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 가지 요점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역이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물려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칼빈은 이를 잘 그려내고 있다(II,16,9):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됨을 알 수 있다(행4:12).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부분들을 다른 데서 찾아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구원을 알기 원한다면, 이것은 그분의 것(고전1:30)이므로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만족이라면, 그분의 희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결하게 하심은 그분의 보혈에서, 화해는 그분의 지옥에 떨어지심에서, 육체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분의 무덤에서, 생명의 새로워짐은 그분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 안에 모든 종류의 선이 풍성하게 넘친다. 그러므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샘에서 우리에게 충분한 양을 채우자. 

 

두 번째 함의는, 신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된 것으로,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지난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의 생활에 더 이상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영에 속한 사람이다(롬8:9). 우리의 과거는 아담 안에서의 과거다. 우리의 현재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 있다.  

 

셋째로,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인성 안에서 그분이 우리와 연합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구원받은 인성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목표이다. 이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점차로 참되고도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령의 성화시키는 사역을 논할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를 훌륭하게 언급한 바 있다.  

 

이 연합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따라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 안에서 행사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분에게 일어났던 일의 복제이자 재생산이다. 객관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도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못박히고, 죽임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킴을 입는다. 그들은 다소간 그들의 주님의 경험을 공유한다13). 

 

정리: 성령의 역사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을 통한 우리의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6장   재창조의 영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우리가 중생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단원은 중생과 회개를 다룬다)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묶는 일에는 성격상 다양한 차원이 있다.  

바울이 말한 바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계에 들어가는 것이다(고후5:1714)). 이는 죄와 사망의 옛 질서, 즉 육체와 마귀에 의해 지배 당하는 시대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새로운 질서에 길을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이 이루는 상호 결합은, 출애굽 때와 안식의 땅에 들어갈 때 나타났던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 간의 옛 언약적 결합에서 어렴풋하게 예시된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메시아의 사역에 근거한 것으로, 새로운 인성을 창조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생명은 다양한 차원을 가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약 성경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그분의 죽으심, 부활, 승천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간의 상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창시자이므로 단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하나님이 기원인 것)은 본질적으로 믿음(인간이 수납하는 것)과 양극단을 이루는 양면적인 것이다.  

중생과 믿음의 실타래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 성령은 이 두가지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이것은 별도로 분석되어야 하지만, 실존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 끝나고, 어디에서 신자의 행동이 시작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중생과 회심이라고 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종말에 완성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신자들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에 의해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의 내주하심을 통해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주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활 양식을 낳게 될 것(겔36:24-27)이라는 옛 약속은 성취된 것이다.  

 

칼빈의 가르침 가운데 중생이란 용어는, 성령이 신자의 생애 전 과정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새롭게 하심을 지칭하는 것15)으로 사용되었다. 칼빈은 중생이 묘사하는 실재는 회심, 회개의 경우와 동일한데 단지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17세기의 많은 저술가들은 유효적 소명과 중생을 동의어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직 복음주의 신학의 지속적인 발전 과정에서 중생은 좀 더 제한적인 의미, 곧 하나님의 주권과 은밀한 사역에 의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심을 가지도록 돕고 있는데, 이것이 합당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벗어날 때, 거듭남이라는 이 용어는 성경적인 근거로부터 동떨어져서 주관적이며 심리적인 것이 되고 만다16) 

 

신약은 중생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복음주의 구원론의 구조에서 중생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 탄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된다(복음주의 구원론 비판!: 정리자 주17)). 그러나 중생을 뜻하는 용어인 팔링게네시아는 신약에서 단지 두 차례밖에 쓰이지 않았다. 

마19:2818)에서 이 단어는 만물의 새로워짐을 암시하며, 우주의 재탄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팔링게네시아는 마지막 부활이요 하나님 아들의 양자됨의 실현이며, 그들의 몸과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며(롬8:19이하), 의의 본향과 새 하늘과  땅의 설립이다. 이는 우주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약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팔링게네시아는 딛3:519)에서 바울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20)이라고 한 말에 나타난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같은 의미로 보는 중언법, 즉 두 가지 표현이 한 가지 개념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인데, 그렇다면 개인의 중생과 새로운 세대의 도래 사이의 놀라운 관계를 시사해준다. 왜냐하면 바울은 새롭게 함(아나카이노시스, 롬12:2. 이 세대를 본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용어를, 현존하는 세상 질서와 다가올 시대가 이루는 대조를 강조하면서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헤르만 리델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문맥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성령의 부어주심은 전형적인 종말론적 용어이다. 이것은 바울이 중생을 좀 더 넓은 문맥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시작된 부활의 새로움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중생의 결과로 나타나는 새롭게 됨은 단순히 내적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사물의 현재 질서에 대한 새로운 질서의 침입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둘째 사람이며 첫 열매인 종말론적 아담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써 초래된, 밖으로부터 혹은 위로부터의 변혁을 의미한다(고전15:45).  

 

1. 새로운 창조  새 생명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생각은 신약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요한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주제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이 탄생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은 훗날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요한의 신학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특징짓는 설명 방식인데, 이는 사도 바울의 글에 나타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과 같다. 

 

중생은 원인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벧전1:3). 이치상 어떤 존재이든 그와 동류를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우리의 중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이다.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그분이 돌아오실 때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분은 마지막 때에 이룰 부활  중생의 첫 열매이다. 우리는 마지막 추수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이미 성령 안에서 연합의 끈을 통해서 첫 열매에 참여한다(롬8:23). 여기에 중생의 종말론적 본질이 강조되고 있다.  

 

2. 하나님의 단독 사역 

 

신약 성경의 설명은 중생이 성령의 주권적이고 단독적인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태어난다는 비유는 그 자체에 급격하고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암시를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이 결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단독사역(divine monergism)은 다른 곳에서 반명제 형식을 통하여 설명되어 있다. 즉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서이다(요1:12). 아래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것이며, 육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움 없이는 잉태하거나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이,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생의 사역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3. 중생의 측면들 

 

중생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의 사역은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지적인 조명을 포함한다. 이전에는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이것을 기름부음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받은 결과로 진리를 안다고 말한다(요일2:20). 그들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일2:27).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것을 공유하며, 인간 중개인이 없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은 옛 언약에서 제사장들, 선지자들, 왕들을 통해서 전달되던 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둘째로, 중생은 죄에 의해서 지배되던 본성에 속박되었던 의지가 자유롭게 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중생에서 핵심적인 요소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도록 인간의 의지에 성령이 능력을 주는 것21)이다.  

 

셋째로, 중생에는 깨끗이 씻어 낸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물로 거듭난다(요3:5)는 구절의 가장 유력한 해설이다. 성령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동시에 심령을 깨끗게 하신다.  

중생에서 일어나는 씻음은 딛3:5과 함께 고전6:11에서도 강조되었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이 되었다 여기서 씻음과 거룩함은 중생과 같은 것이다. 중생과 더불어 인간의 욕망들은 갱싱되고 깨끗하게 씻긴다. 성령의 새로운 시대와 그 실재들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영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따라서 중생에서, 성령의 사역이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의 범위는 총체적이다. 거듭나는 사람은 전인격적인 개인이다. 중생은 개인의 삶의 근본적인 욕구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그의 존재 중 손대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중생의 범위는 부패한 전 영역에 해당된다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렘17:9)는 말씀에 근거해서 신학자들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악해질 수 있는 만큼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는 죄의 영향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패를 역전시키는 것이며, 비록 중생한 개개인이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는 않지만,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씻으시는 사역에 의해서 영향을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중생은 새로운 심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4. 성령의 주권 

 

어떻게 성령이 새로운 탄생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의 사역은 신비롭고 주권적이다. 성령의 사역은 바람과 같아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역에 의해 알 수 있다. 성령의 임재는 오로지 그 결과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우리는 믿음과 회개의 표현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생에 한 고전적인 개신교 신학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사람의 인격의 온전성(우리는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는다)이나 하나님의 단독 사역의 필요성(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우리 자신의 의지로는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중 어느 것도 타협하지 않는데, 이는 올바른 입장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생명으로 예정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인정한 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실제로 불러서 또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영적으로 또한 구속적으로 계몽하신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게 하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다. 선을 원하게 하는 절대적인 권능으로써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가까이 나오게 하신다. 이때에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며 은총으로써 그것을 원하도록 변화를 받는다22). 

 

우리가 여기서 직면하게 되는 긴장의 초점은(하지 않으려는 자들로 기꺼이 하도록 만드는 것)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개입(의지)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에 속한 것이며, 성경의 영감과 섭리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역할의 신비로움과 유사하게, 여러 면에서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은 인간 행동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기초가 되고 그것을 가능하 만들어 준다.  

비록 개인의 중생이 추상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정신적이고 의지적이고 감정적인 능력들에 대한 성령의 작용이 개인의 인격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은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가지 피조물이요 전인격적인 존재이다. 성령은 지식, 의지, 감정이라는 넓은 맥락 가운데서 활동한다. 결과적으로, 비록 중생이 요한에 의해서는 주권적이며 단독적인 사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반을 향해서 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마음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설득되고, 감성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이나 배려로 인하여 감동을 얻으며, 이로 인해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개인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되고(회개),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된다(믿음).  

그러나 믿음과 중생은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우리에게 개입하고, 우리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행동 수준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단독적이며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개념을 희석시키지 않은 채, 어떻게 중생이 말씀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듣는 자가 의지적으로 말씀을 수납해야 한다) 

신약 성경의 기록자에게는, 성령이 중생의 유효적인 원인인 반면에 말씀이 중생의 도구적 원인이라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중생에 어서 성령의 사역은 인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능력을 포함한 전인격의 변화에 관여하기 때문에, 말씀의 외적 계시에 의해 성령의 내적 조명이 수반되는 일이 전적으로 타당하다. 믿음이 지식을 포함하는 까닭에, 성경에서는 믿음이 복음의 가르침과 연관되어 등장하기 마련이다. 중생과 그것이 가져다 주는 믿음은 오로지 신적인 주권에 의해 다른 요소들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모체로 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5. 믿음, 하나님의 선물 

 

한가지 더 신약에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열매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지도를 받는, 그리스도를 향한 전인의 행동이다. 우리가 믿는 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지만, 우리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그분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행동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본문이 엡2:8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은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 은혜는 우리의 행동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관여시킨다. 믿음이란 우리의 능동적 반응이다즉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받게 되지만, 행위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에 관련되지만,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엡2:9) 

 

필드는 이 문제의 핵심을 잘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다: 

 

믿음의 구원하는 능력은 그(믿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거하고 있는 전능하신 구원자 안에 있다. 성경에서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이러한 지성의 틀이나 마음의 태도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보상을 요청할 만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리적인 행위로서의 공식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23)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 구원하는 권능이 믿음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이 신뢰하는 대상 속에 들어 있다. 는 벌카워가 다른 곳에서 이와 관련하여 기록한 바와 같다: 

 

믿음은 단 한 순간도 건설적이거나 창조적이지 않다. 오직 약속의 실재 안에 유일하게 오로지 머물러 있을 뿐이다. 

 

 

회개 

 

믿음과 회개는 중생에서 성령의 사역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측면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에게 회심할 때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에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믿음과 회개라고 하는 두 가지는 회심에 있어서 본질적이기 때문에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믿음은 항상 참회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라면 언제나 믿음을 동반한다. 믿음과 회개, 두 가지로 표현되지 않는 중생은 없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반항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믿음과 순종의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회개는 이러한 인식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먼 나라에 머물게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2. 회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로운 규정의 빛 가운데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란, 뉘우치는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면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 본연의 자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생각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극되고, 죄의 참된 특성에 대한 인식으로 촉발된다. 이것은 하나님께 중심을 두는 반응이다. 참으로 이것은 참되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첫 출발이다. 회개는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회개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필수적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이것은 용서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우리의 성화를 포함한다. 따라서 그것은 개에 포함한 바 죄로부터의 돌이킴으로 구원받는 자들을 성화의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 변함없이 죄악된 행실을 계속 허용한다면 구원은 주어질 수 없다. 그러나 회개가 믿음처럼 구원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회개는 칭의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받아들여지고 구원자로서 좌정하신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회개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회개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다. 회개는 동일한 개인이 죄를 중지하는 것이다. 둘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회개의 징표들 

 

회개의 체험은 개인마다, 그들의 죄에 대한 표현이나 자의식이 그러하듯이 매우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몇 가지 요소를 추론해 볼 수 있다. 

 

1. 회개의 순간에 성령은 죄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가지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감정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롬6:2124)). 죄에 대한 그러한 태도는 구체적이다. 회개는 불순종의 영 가운데 걸어온 길을 벗어나서 순종의 영 가운데로 돌아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해 구체적인 순종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신30:225)). 이점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이 체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족된다고 말할 때, 회개를 거듭난 심령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롬8:3-4). 여기에서 회개는 순간의 행동에 제한되지 않고, 지속적인 생활 양식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2. 회개에서 성령은 또한 자아에 대한 변화된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회개는 옛 생활에 대한 죽음이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회개의 첫 단계는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회개는 근본적이고도 과격한 변화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실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육체의 정욕들을 함께 못박음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는 영구한 변화이다. 이것은 육신이 그 욕망을 성취할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이고 새로운 삶으로 살리는 일은 개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난다.  

 

3. 회개는 또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께 대한 변화된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처음의 두 요소 어느 것도 이것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참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죄악을 따진다면 어느 누구도 설 수 없다. 그러나 죄 용서가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기 위함이다(시130:4). 복음적인 회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시작되어 지속되면, 항상 용서의 약속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된다.  

 

성경 신학에서는 개인의 자율적인 죄의식을 회개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회개를 향한 격려는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아더 와이저에 의하면,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전적인 유형을 시편 51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편은 죄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으로 시작하고 있다. 

 

·참된 회개는 불가피하게 상한 심령을 포함한다(시51:17). 그것은 감정이 고조된 상태가 아니라, 자만심과 자기 방어가 깨어지고 부서진 상태의 심령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에 대한 희망으로 이끄는 데서 나온다. 회개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중심의 진실함과 깨끗한 생활(시51:6-7), 정결함과 새롭게 하심을 향한 새로운 열망, 깨어진 자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바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대한 열망(13)도 여기에 수반된다. 

·마지막으로, 참된 회개는 은혜의 맥락에서 오기 때문에, 예배로 인도하고, 예배할 힘을 불어넣는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5) 

 

믿음과 회개는 중생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국면들일 뿐 아니라,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특징들이요 열매이다. 참으로 성화의 전 과정은, 다름 아니라 중생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되어가고 믿음과 회개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점점 드러나게 되는 과정이다.  

 

 

 

 

 

7장  성결의 영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성령께서는 중생한 자들 가운데 이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역사하신다. 그분의 목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롬8:29)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Christiformity): 성화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칭의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중생의 씨가 자라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외적으로 작용해서 삶의 열매가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그분의 모양대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존재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귀한 신분으로부터 떨어졌으므로, 구원과 성화(구원의 외적 열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 형상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성령의 역할령은 하나님의 상을 수치스러운 죄악으로 망쳐 버린 자를 변화시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덧입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4)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화가 우리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될 때 의도되었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 일이 현재에는 원칙상으로, 미래에는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와 그리고 아직 사이의 긴장). 

 

 

구약 성경에서의 거룩 

 

거룩하게 하다라는 히브리어 카다스는 구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개인의 소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은, 다른 목적과 용도로 사용되던 사람과 사물을 하나님이 다시 취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말이다.  

 

언약과 성화의 관계구약에 나타난 언약들은 바로 이러한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피로써 인쳐진 그 언약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가족 관계로 만든다. 아니, 가족 관계를 재창조하고 재건한다. 파괴된 하나님의 가정이 하나 된 가족의 모습과 형상을 드러내도록 재창조되고 회복된다(언약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간다. 따라서 언약과 성화는 불가불의 관계가 있다) 

이는 출애굽에서 언약이 시행될 때에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양자삼으신 사건이었다(롬9:4). 하나님과 인간 사이 본래적인 관계가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점점 더 반영하여서 그분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어야만 한다.  

언약 관계의 핵심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혹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역시 거룩하라, 즉 가족적인 닮은꼴의 현상을 나타내어라 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표출하는 것구약 율법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출하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하나님이 이들을 양자 삼으시고, 아들들이 그분의 충만하고도 궁극적인 영광을 표현하는 데까지 나가도록 율법을 주셨는데, 이것은 초기의 걸음마 단를 포함하고 있다. 옛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가정은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며 때로는 강한 금지어들로 표현된 레위적인 율법 조항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모세의 시대가 그 자체로 영광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그것에 뒤따라오는 성령의 새로운 사역을 핵심으로 하는 새 언약의 뛰어난 영광과 비교해 볼 때에는 이제 아무런 영광도 갖지 못한다(고후3:7-18)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한다26) 

 

 

신약 성경에서의 거룩 

 

신약에서 성화의 동기, 목표, 형식은 비록 그 내용이 좀 더 충분하게 그리고 그리스도 심적으로 규정되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에서와 동일한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목표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엡4:24; 골3:10). 형식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기 계시를 설명하는 데 이어 그분에게 순종하는 삶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령한다. 그러나 이제 동기, 목표, 형식은 더욱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언약에서 불분명하고 부분적인 형태로 시되던 것들이 새 언약에서는 분명히 설명되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은 언약의 목표(telos)이다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에서 새로운 순종의 구체적인 내용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일은 장차 다가올 결말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8:29). 성화는 그것을 생산해 내는 변화이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이 나는 나의 영으로 너희로 하여금 나를 닮도록 변화시킬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대체되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너희는 하나님의 집에 소속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맏형이 되시며, 그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셔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너희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니 그와 같이 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변화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틀림없이 이렇게 변화된다.  

 

 

1. 우리를 위하여 성화되신 그리스도 à 성화의 창시자 

 

성화의 기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27),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이 전 생애를 통해서 자신을 죄인의 위치에 두려고, 죄인의 이름과 성품 두 가지를 취하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생애 동안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하셨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가 행한 죄의 죄책을 담당하셨다. 그분은 이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평생 거룩하게 사셨고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셨다.  

신약은 예수님을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화의 창시자, 곧 선구자(히2:10)로 본다. 무엇보다도 먼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거룩함이 그분 안에서 드러났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죽지 않으시고 자신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게 하시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셨으며, 우리와 연합함으로써 우리의 인성 안에서 그분이 이룩한 성화를 이루신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성화의 창시자이며 근원으로 보며 성령을 그 집행자로 볼 때, 성화의 두 번째 요소에 대해서 바른 근거를 가지게 된다. 

 

 

2.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 

 

성육신이 있기 전까지 성화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불분명하고 아직 형성 단계에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다양한 율법은, 그것의 목표가 항상 거룩함, 즉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었으나, 이러한 메시지가 신약에서 처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이제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되었다. 신약은 이것을 설명할 때, 가장 결정적인 구속 사역들 안에서의 그분과의 연합을 특별히 강조한다(갈2:20; 골2:6-3-17; 롬6:1 이하)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와 믿는자들의 연합에서 성령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도움을 준다. 바울은 여기에서 성화의 핵심이 죄로부터의 구출과 의로움 가운데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라고 설명한다: 이전에 죄와 맺은 관계는 끝이 났다. 그리스도 인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롬6:7,18)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 

 

5:12-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속 사역의 풍성함을 아담의 죄와 비교함으로써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인상적으로 드러낼 것이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여기에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한 부정을 한다: 

·그러한 사상은 복음의 핵심을 파괴한다. 바울은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은총이 지배하는 생활 양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본질이 바뀐 사람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의 범주에 속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다. 

·성령이 그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창조한 연합의 끈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새롭고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킴을 받고, 계속해서 셩령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새 생활을 부인하고 옛 사람처럼 계속 죄 안에 머무는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성령의 어떤 사역으로 인해 신자들이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는가?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란 개인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하다는 정체성을 공적으로 확인 받는 시점의 표시이다. 그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으며 새로운 권위 아래 들어간다. 그들은 이것으로써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a)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죽으심이다(6:10). 죽음은 죄의 삯이다. 그리스도는 그 삯을 지불하셨고, 십자가에서 죄의 속박에 대해 복종하셨다. 그분은 죄의 지배하에 들어가셨고, 그 모든 요구를 짊어지고 죽으셨다. 이제 죄는 더 이상 우리의 대속자인 그리스도에게 요청할 것이 없게 되다. 모든 삯이 그분의 죽음으로 지불되었다. 죄가 요구하는 바는 이제 소용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죄에 대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죽음을 공유하게 되므로,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 죽음 안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우리 역시 죄의 속박에 대해서 죽었다. 죄의 통치는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신하가 아니다.  

 

b)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삶으로의 부활이다(롬1:3-4; 고전15:45)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그분과 연합했으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죄에 대해 이미 죽기 때문에, 죄 가운데 계속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물 세례에 담긴 성령 세례의 모든 중요한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성령 사역의 중요한 표현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6:6-7 

이 구절은 성령 사역에 대한 화려한 묘사로서 몇 가지 중요한 표현들을 내포하고 있다.  

 

1) 옛 자아(사람) 

옛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 아담 안에서의 전 존재를 의미한다. 그때 나는 육체 가운데, 죄의 지배하에, 율법의 저주 아래, 죽음의 운명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일이 대표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일어 났으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와 함께는 실존적으로 실현되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분과의 연합이다.  

이러한 연합은 구속사적으로 갈보리에서 일어났고, 그 의미가 실존적으로는 중생, 회개, 믿음 가운데 성령의 의해서 우리 안에서 실현된다후자의 실현은 앞서 일어난 사건의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28). 바울의 다른 표현은(갈2:20):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  

·사는 자는 그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의 생명 가운데서, 그를 위해서 자신을 주시고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2) 죄의 몸 

옛 자아의 죽음으로 인한 직접적인 열매는 죄의 몸이 무능력하다고 간주된다는 것이다. 죄가 지배력을 행사하고 우리의 존재를 다스리는 통로인 우리의 육신이 드디어 굴복하게 되었다.  

 

3) 무능력하다고 간주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죄의 값을 온전히 치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죄의 소유물이 아니다. 몸은 더 이상 죄의 수단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편이므로 신자는 죄에 종노릇 하지 않는다.  

 

4) 죄로부터 자유함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했는가? 이것은 성화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질문이다. 

먼저 잘못된 이해는: 

a) 유사-완전주의(quasi-perfectionism): 죽은 자는 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석의학적으로나 실존적으로 불가능하다. 바울은 신자가 죄에 대하여 면제된 자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b) 법정적 의미: 죽은 자는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다고 했을 뿐, 죄책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이 말하는 초점은 죄가 가져오는 죄책이 아니라 죄의 지배 혹은 다스림이다.  

 

믿는 자에 대한 죄의 권리가 종국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의 내재적인 본성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현존이 근절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죄와의 관계에서 성령 안에서의 모든 현재 생활을 특징짓는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 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통치는 이미 종말을 고했지만 아직 그의 실존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성령의 인도 아래서 살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6:3-10에서 설명한 일련의 선언에 의해서 확정된다.  

여기서 바울은 중간기에 사는 생활에 있는 것들을 묘사하는 6:11-14의 명령에 덧붙여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새로운 실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통치는 끝났고, 당신은 죄에 대해 죽었음을 알아라(6:11) 

·죄가 당신을 실존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그것은 당신에 대해서 아무런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6:12) 

·당신의 몸이 죄가 가져다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에 매혹되어 죄의 종 노릇 하는 데 드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6:13)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자라는 당신의 새로운 신분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켜라. 몸의 지체들을 주님의 병기로 드려라(6:13) 

 

은총의 요구와 의무들은 은총의 신적인 사역만큼 광범위하다. 중생  믿음 패턴은 애초에 성령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사시킨 통로로서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지속된다. 복음의 명령(Imperatives)들은 그 설명(Indicatives)들과 동일한 영역에서 작용한다:  

·하나님은 인격 전체, 즉 몸과 혼과 영을 거룩하게 만드신다(Indicatives). 따라서 신자들은 인격 전체, 즉 몸과 혼과 영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Imperatives) 

·하나님은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시고 행하신다(Indicatives). 그러므로 신자들은 순종과 성별된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해서 살고 죄에 대해서는 죽는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실천해 가야만 한다(Imperatives).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영광과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보장이 그 교리에 결부되어 다. 만일 우리가 죄 운데 산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죽지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죽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안에 살지 않는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29) 

 

 

3. 그리스도를 본받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이것이 성화이다. 성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을 포함한다. 따라서 복음의 명령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구체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전13장에 기술된 거룩한 사랑의 생활 역시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에게 참여한다는 사실이 이런 모방을 가능하게 한다. 신약의 권고들은 그 모방의 구체적인 형태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à parenesis(paraenese). 권고 

 

 

4. 육신을 대항하는 영 

 

성령의 인도로 신약의 많은 권고를 실행하며 사는 삶은 저항이나 방해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에 의해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으며, 죄된 육신을 입고 살고 다. 성령 안에서의 생활은,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 가운데의, 즉 지난날의 죄에 대한 불가사의하고도 끈질긴 집착으로 점철된 육체적 실존 가운데서의 삶이다. 우리를 통치하던 죄와의 과격한 결별은 이미 일어났으나, 죄와의 최종적인 결별은  죄가 아직도 현존하고 다는 면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완벽하지않다. 영화의 마지막 단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역, 새로운 시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존재의 질서는 여전히 옛날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로 긴장, 갈등 그리고 투쟁이 신자의 신분상 주된 특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육체와 영의 싸움이다.  

 

육체는 존재하는 세상 전체이다. 육체는 분열된 세상 질서로서 현시대와 아담과 함께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기 전에, 육체를 따라서, 육체 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육체 가운데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이 대립은 철저하면서 완전한 것이다.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생각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런데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여전히 성령 안에서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육체는 여전히 성령에 반대되는 것을 바란다(갈5:17).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조차도, 육체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배되어 온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실존 가운데 사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갈등이나 긴장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바울의 두 가지 선언을 대조시켜 본다: 

 

갈2:20                                                                                     롬7: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스도인의 현재 신분에 대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가 여기에 있다. 초 개인적(인격적)인 육체- 영의 갈등이 신자들의 존재 안에 깊은 반향을 남기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마음속에 머물러 계신다. 그러나 죄 역시 그 안에 머물러 있다. 두 개의 동등한 힘이 존재하며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지배한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성령 안에 는 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긴장과 갈등은 더욱 치열하고 절실하다.  

성화의 과정에는,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될 근본적이고도 깊이 뿌리박한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을 깔보게 되면, 우리는 완전주의로 빠져버리거나 구원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를 갖도록 만들고 말 것이다.  

이 갈등을 다루고 있는 고전적인 장면은 롬7:13-25에 들어 있으며, 곤고한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전체 해석이 달라진다.  

 

 

연구: 곤고한 사람은 누구인가? 

 

전통적 견해자서전적-실존적 접근 방법.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삶을 언급하고 있다는 견해로서,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종교개혁자들이 지지하고 있다(이 견해는 인간 의지의 무능력이라는 사상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오늘날 심각하게 이 견해는 도전을 받고 다.  

 

반대 의견구속적-역사적 접근 방법.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신을 보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헬라 교부, 아르미니우스 주장. 오늘날 알미니안 주의자들. 이 주장은 1929 큄멜의 로마서 7장과 바울의 회심 이후 현대 신학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다. 즉 롬7의 는 엄밀하게 말해서 수사학적 비유 속의 인물이라는 말이다. (이 견해는 거듭난 후에 자유 의지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는 사상에 바탕을 둔다) 

 

자서전적-실존적 접근 방법 지지는 이유 

 

1)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사용하는 바, 강렬하고 직설적인 표현들은 심리적으로 볼 때, 라는 인물이 허구적인 비유 속의 인물이라는 견해를 어렵게 만든다. 이 표현들은 매우 사실적이다.  

·더욱이 과거 시제로부터(롬7:6-13) 현재 시제로(7:14-25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 전환되는 문맥에 나타나는 라고 하는 주격의 연속성은, 극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의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설사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현재 시제로 갑자기 그리고 일관성 있게 전환한 사실은 그런 견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2) 6-8장의 사고 구조를 고려할 (어거스틴 전통). 

·바울은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6장에서 바울은, 신자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으나 아직 죄의 현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는 못하였음을 논증하였다. 결과적으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싸우는 운명적인 전투에 임하고 있다. 의 강력한 구출이 성령 안에서의 강력한 싸움을 설정한다.  

·7장의 구조도 이와 유사하다: 

o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 죽었다(7:4) 

o그러므로 율법의 정죄하에 놓여 있지 않고, 이제 율법으로 벗어났다(7:6) 

o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으로서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율법은 펄펄하게 살아 있다). 

o문제는 가장 훌륭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율법의 기준에서 보면 완전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육체 안에 있는 한, 그들에게는 율법이 정죄하는 것이 있으며, 그들을 죄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려는 요소가 남아 있다. 

o따라서 부활이 오기 전까지는 죄와의 투쟁이 있을 뿐 아니라, 율법에 관련해서는 좌절의 감정을 피할 수 없다.  

 

이 (곤고한 자가 신자라는) 관점은, 이 문단에 등장하는 특정한 진술에 담긴 의미를 고려할 때, 더욱 지지를 얻는다. 

·바울은 롬7:1-17에서 참된 자아와 자신 속에 거하는 죄를 구분하면서, 스스로를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시키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관점은 신자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는 성령 안에서 자신의 육체 가운데서의 타락을 인식하는(7:18) 삶의 조망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다. 

·7:25 하반절에서 오직 신자에게 해당되는 이중성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문제는 계속해서 모순으로 남아 있다. 바울은 자신을 두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신자에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칙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7:25 상반절에 이어서 나온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두 가지 법, 두 차원, 두 세계그러면 이 두 가지 법 사이에 살고 는 신자의 갈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을 이해해야 한다. 이 모순은 이 세상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는 우주적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는 현시대와 다가올 시대 간의 충돌이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들 두 차원은 바울의 정신-신체적인 존재의 내부를 싸움터로 삼아 각각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마음은 성령의 의해서 새롭게 되었다. 그는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 à 바울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감. 여기에서는 새로운 원리가 적용됨. 

·그러나 그는 죽음의 몸인 그 몸 안에서(갈2:20) 살아가고 있다. 육체의 지배를 받아, 혹은 육체를 따라 살아 간다는 의미에서 육신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물리적인 몸이 불변하는 것처럼 육체의 본성은 불변하는 것이다 à 그가 육신에 있는 한, 육신의 원리의 지배를 받음. 즉 죄를 부추기는 육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완전한 순종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러한 깨달음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야기시키는 긴장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견뎌 낼 수 다.  

 

반론그러나 다음과 같은 표현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성령 안에서의 생활에 대해 묘사한 것들과 조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는 성령이 임하기 전의 사울이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새 언약적 믿음의 관점에서 본 옛 언약의 사람이다. 

·나는 죄 아래서 노예처럼 팔려갔다(7:14). 

·나는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혔다(7:23)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7:24) 

·나는 본성상 죄의 법을 섬기는 종이다(7:25) 

 

그러나 이러한 진술들은 단순히 바울이 자기 존재 내부의 내재적인 모순을 의식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육체의 지배하에 지 않고 성령 안에 을 때에도 지속해서 그 안에 죄가 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과 죄의 동시적인 내재가 섬뜩한 모순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사실을 심지어 모순되는 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사실 표현!). 그는 비록 현재 악한 시대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그는 아직 죄의 영향이 미치는 장소(육신)를 떠난 것이 아니다. 

 

주의할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절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관점의 총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특별한 하나의 관점에서, 즉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영적인 법(7:14,16)에 비추어서 자신을 조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빛 가운데서 볼 때, 비록 신자라 하더라도 그 안에 죄가 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죄는 아직도 머물러 있고, 반항아로서의 죄의 본성과 노예화시키는 근성은 변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바울이 아직 그것에서 완전히 구출되지는 않은 것처럼, 그는 성령 안에 있는 자로서 자신이 율법의 정죄 아래 죽었으나 아직 그 요구에 따라서 볼 때에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점: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와 육체에 의해서 마비된 자가 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양자의 영의 인도하심과 내주하심이라는 빛 가운데서 육체의 잘못된 행실을 죽여야 할(롬8:13이하; 골3:4)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 갈등에서 양측의 세력이 동등하지 않다.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서 다스리신다.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내적인 측면에서 육신과 성령의 갈등은 실재한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함에서 성장해 나가면서 육신이 굴복하는 징후들을 일생에 걸쳐 경험하게 된다. 죄어 빠져 있던 지난날과의 결별이 일어날 때, 그것과의 갈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 오히려 시작되는 것이다.  

2.이것은 영속적인 실재이다. 그러나 신자가 그 강도 면에서 항상 동일한 수준으로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아니다. 롬7:14-25에 나타난 전망은, 비록 이것이 본질적인 전망(perspective)이지만, 신자가 자기 자신을 조망하는 유일한 전망은 아니다.  

3.이 갈등이 해결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비록 성령의 내주하심 가운데서 구원의 보장을 이미 소유하고 지만, 현재의 신자는 죽음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의 성화에서 놀라운 점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는 성령의 임재가 갈등이 일어나는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점이다. 몸의 구속, 곧 양자됨을 간절히 기다리는 가운데 내적으로 탄식하는 자는 성령의 첫 열매들을 가진 자이다(롬8:2330))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와 함께 부활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육신을 죽이고 영 가운데 살라는 명령을 수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신약 복음(indicatives)의 약속 아래서, 복음적 명령(imperatives)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이러한 투쟁 가운데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또한 성령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연합되어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는 방법을 터득해 나갈 것이다31) 

 

 

5. 성령과 율법 (율법과 복음) 

 

롬7장에서 율법 아래서 신음하는 곤고한 나와 8장의 정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율법에 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혹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발생한다: 복음은 율법과 어떤 관계에 으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그리고 오순절과 시내산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 구약 율법은 폐기 되었는가? 

 

우리는 이미 오순절과 시내산 사이에 대립적인 행 관계가 있음을 고찰한 바 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거룩한 하나님 존전에 올라갔으며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로 가지고 왔다.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이 내려왔으며, 성령께서 사람들의 심령에 법을 쓰셨다.  

 

베드로는 이런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데, 그는 시내산적 경영과 오절적인 경영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청중에게 이것이 요엘2:28-30의 성취라고 지적하고 있다. 율법 아래 존재했던 지난날의 차별이 사라졌고,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경영이 시작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시내산의 시대가 끝나는 상징으로 보인다. 신약에는 이러한 전제를 확정 짓는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예컨대 요한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왔으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요1:17). 독립된 문맥에서 읽게 되면 이 구절은 분명히 율법의 폐기를 시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도 율법의 폐기를 가르쳤다는 혐의를 받아 고발당하다(행21:28). 그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이 얼핏 보면 이 점을 가르치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3:28).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롬6:14-15).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 아래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롬8:2) 

· (이외에도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신약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과 율법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 예로, 폐기라는 요소와 함께 연속성이라는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마5:17-20). 사실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데(롬13:8-10), 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신령하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표장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에게 성취되는 것이다(롬8:3-4) 

 

율법의 구분? 

 

이러한 외견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주의 신학에서 모세 율법의 세 가지 차원32)을 구분하였다: 시민법적인 요소, 제사법적인 요소 그리고 도덕법적 요소이다.  

모세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첨가된 것으로서 한시적인 경영을 위한 법으로 의도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과 선택받은 백성의 언약적인 관계에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분이 계획하신 것들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 즉 1) 약속하신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서 나오실 때까지 구별된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2)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들을 어긴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은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1.도덕적인 요구들(십계명)을 통해 구속주가 필요함을 계시함. 

2.제사법적인 요구를 통해 구속의 희망을 주고, 

3.시민법적 요구를 통해 구속주가 나오게 되는 민족을 하나님을 위해 보전해 주었다.  

 

율법 이해에 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모세 율법이 근본적으로 인간 삶에 대한 영구한 하나님의 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율법은 (영구한 가치를 가지는 동시에 또한) 한시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십계명도 하나님의 영구한 뜻을 당시의 상황에서 재생산해 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알아야지만 계명들의 본래의 의미, 즉 인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깨달을 수 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고전적인 구분은 나름대로 의미가 다. 바울도 십계명의 도덕법을 다른 계명과 구분하고 음을 볼 수 있다. 율법이 주어질 때 분명던 점은, 모세의 통치 시대에 통치의 근본 원리로 다같이 기능했던 율법이 특정한 적용점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적용점도 바뀌게 되자 시민법과 제사법은 무용하게 되고, 도덕적 차원33) 은 영원하며 따라서 새 언약의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도록 남아 있다. 

 

율법에 대해 또 한가지 알아야 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율법의 지위가 새로운 언약 아래 변했다는 것이다. 율법이 새로운 방식으로 내면화되리는 것이 옛 언약 아래 하나의 큰 소망으로 주어졌다.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율법의 명령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바울은 폐기가 아니라 완성의 원리를 강조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6:6)라는 옛 언약의 설명이 하나님의 백성 앞에 규범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예례미아가 강조한 것처럼 유다의 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17:1,9). 율법이 아니라 죄가 마음에 새겨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약속이 필요했다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렘31:33-34) 

 

 언약의 배경 내에서 조망한 새 언약의 경험에 대한 기대는, 새로운 시대에 이르러서는 명령된 것, 즉 마음속에 있는 율법이 성취되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와 사역 안에 있는 특별한 요소로 보인다. 마음에 있는 율법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뿐인 새 언약의 실재에서 드러나는 두 측면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선언의 핵심이 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율법은 참으로 모세로 인해서 온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며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언약의 신자들은 모세의 경영하에 있던 신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도덕법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대신에 그 불법의 형벌을 당하시고 그 법령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법을 받는 이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 속에서 그 법들을 성취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는 자에게 정죄란 없다. 성령의 사역은 율법의 정죄가 아니라 그것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내적인 법으로 연결된다(고전9:21).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써 거룩한 율법은 신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6. 나라(Kingdom)를 거스르는 나라(kingdom)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론적 분위기로 인도한다. 그들은 천국의 영역에서 살아간다(엡1:3;2:6). 그러나 이곳은 악한 날을 직접 대면하는 곳으로서 종말론적 갈등의 영역이기도 하다(엡6:12-13). 성령 안에서의 삶은 마지막 날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요, 그 특징은 고통하는 때로 표현된다(딤후3:1). 성령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시작된 다양한 차원의 갈등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육신과 성령 사이의 전쟁 외에 또 다른 차원의 갈등을 접하게 된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출발은 종말의 시작이자 마지막 날의 전쟁의 출현을 표징하고 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라고 묻는다.  

광야에서 그분을 유혹하던 사단을 그리스도가 물리치신 사건은 마지막 날의 승리가 미리 침투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확정되고 보장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았다. 중간기(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교회는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속에서 살 뿐만 아니라, 육체와 영의 갈등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두움의 세력과 대적하여 발전되어 나가는 전쟁 지역 내에서 살고 있기도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지옥의 문들과 마주 서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게 머물러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지배의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병행점이 있다. 인간 안에서의 죄의 지배력은, 아직 그 현존이 완전히 말살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효화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단을 정복하시고, 무장을 해제시키셨다(골2:15; 엡2:2). 교회와 신자들이 사단의 세력들과 충돌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이 충돌은 신자 속에 있는 죄의 지속적인 현존 때문에 더욱 격렬해진다.  

 

그러므로 육체-영의 갈등과 나라-나라의 갈등이 일직선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단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요14:30)고 말할 수 없기 문이다. 죄가 머물고 있는 곳에 어둠의 나라와의 접촉점이 있다. 이런 착륙 공간은 죄를 지으려는 우리의 지속적인 성향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사실을 무시하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  

 

사단은 우리를 시험하는 자요, 우리를 대항하여 (하나님께) 고소하는 자요, 우리를 삼키려고 찾는 자이다(벧전5:8). 이런 이유로 성화의 이러한 요소에서 핵심적인 명령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14:38)는 것이다. 스스로 서 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다른 람들이 시험에 넘어진 길에 관련된 사람은, 그를 돕다가 똑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갈6:1) 

 

 

7겉 사람의 죽음과 속 사람의 소생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어진 종말론적인 긴장과 갈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차원을 창출한다.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은 바울이  겉 사람의 죽음과 속 사람의 소생을 수반한다(고후4:1634)).  

 

바울은 이 점을 의도적인 선언 가운데 암시한 바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부활-죽음 그리고 죽음-부활이라는 교차대구법의 구조에서 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따라서 새로운 삶을 사는 자로서,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고, 이미 시행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함께 나눈다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의 생활 방식에는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즉 죽으심과 부활을 따라가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의 부활 시에 정점에 도달하게 되며, 그때에 그리스도의 몸의 영광과 같이 변형되고 바뀔 것이다(빌3:11,21)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지닌 이런 측면을 언급하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통을 성사시키는데, 이는 모두 죽임(mortificatio)과 소생(vivificatio)으로 구성되는 이중적 혹은 양면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내적으로 성화는 죄에 대한 죽음 혹은 거부와 새로운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다. 외적으로 성화는 온갖 류의 고통과 핍박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지는 죽임, 그리고 궁극적으로 부활의 소생을 포함한다35).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박해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신자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살전1:7). 그들의 경우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 그분과 연합한 모델로서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분명히 전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죽임과 생명의 소생이라는 이중적인 측면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령에 의하여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그분의 백성을 인도한다(롬8:29). 

 

바울은 이 원리의 세부 사항을 고린도후서의 중요한 세 구절에서 자세히 풀어놓았다. 

 

1)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에서 슈퍼 사도들(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연약성을 경멸했다: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고후10:10). 그들은 바울이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고후10:10).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을 그리스도와 유비시키면서, 그분도 연약하셨음을 지적함으로써 반박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반드시 연약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분의 구원하시는 권능은 십자가의 연약성을 통하여 표현되었다(고전1:25이하).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묶였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이 넘칠 뿐 아니라 동시에 그분 안에서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약함은 자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약함은, 연약한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말미암는 직접적인 결과요 열매이다 

 

따라서 이런 것이 성화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 이르기까지 회복이 완성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고후 4:7-12 

 

우리가 항상 예수의 임(mortificatio36))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0-12

 

여기에는 죽음과 생명의 대조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핵심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그 삶 전체의 결정적인 패턴이었듯이, 이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사역의 목적이며 그러한 삶의 결정적인 패턴이 된다.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죽음을 통한 생명의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전인(全人)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성화의 견지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죽음 곧 외적인 죽음에 넘겨진 것은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즉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선행할 때에만 가능하다.  

 

 모든 것의 결론으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죽음(즉,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노라. 밀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만 한다(요12:24). 그 결과 생명이 다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데, 이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3) 고후1:5 

 

바울은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 이미 고후1:5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거기서 그는 성령의 기름 부음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 넘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달라서 대속이나 속죄의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 참여하는 우리의 교제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이 점차적으로 완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다(참고. 골1:24

 

이 원리는 단지 롬8:29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을 풀이해 본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를 그와 닮은 가정의 일원으로 재생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방식을 통해 역사 하신다. 주님이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는 것과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바로 그 패턴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유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성령이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 계획이다. 그분의 죽으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함께 심어지고,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하듯이(롬6:5), 믿는 자들은 그분의 부활 가운데도 이와 같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두 참되며, 종말의 날에 최종적으로 충만하게 실재로 드러날 것이다.  

 


1)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à 인간을 최종적으로는 부활을 통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수 있도록 회복하심.

2)

 정리자 주: 그러므로 믿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부분적으로나마 나타나야 하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3)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이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독특한 교리를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이 선행적 은총은 누구나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의 결단에 따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

4)

 정리자 주: 이것은 기독교강요 3권의 주제이다.

5)

 이 표현은 F. Buddeus(1724)와 J. Karpov(1739)때에 그 용어가 출현했고, 그 개념은 그 후에 정리되었다.  

6)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7)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약 160회 사용한다. 

8)

 already/ not yet, schon/ noch nicht (오스카 쿨만) 

9)

 자세한 내용: Richard Gaffin Jr. 부활과 구속 엠마오. 

10)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1)

 리처드 개핀의 상계서.  

12)

 게할더스 보스. 

13)

 벌코프, 조직신학.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4)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5)

 기독교강요 III,3.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회개. 일반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중생 다음에 믿음이 온다(정리자 주). 

16)

 퍼거슨의 날카로운 비판을 잘 음미해 볼 것. 그는 계속해서 복음주의 구원론을 비판하고 있다(정리자 주) 

17)

 정리자 주: 복음주의자들은 결신자를 강조한다. 빌리 그래함이 설교를 한 후에 결신자들은 강단 앞으로 초대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본인의 결단과 중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은 비췸(Illumination, Erleuchtung)을 얻고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비췸을 통해 결단하고 순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교회는 수없이 많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냈으며, 그들은 교회성장(가짜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18)

 ὑμεῖς οἱ ἀκολουθήσαντές μοι ἐν τῇ παλιγγενεσίᾳ.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9)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20)

 διὰ λουτροῦ παλιγγενεσίας καὶ ἀνακαινώσεω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  

21)

 정리자 주: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의지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2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1 

23)

 B. Warfield, Biblical Doctrines 

24)

 롬6:20-21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5)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26)

 정리자 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 연약한 그들의 수준에 최대한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율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7)

 정리자 주: 내가 보기에는 퍼거슨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애매하게 해석하는 것 같다. 요한복음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저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신다(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로 밑에서 칼빈은 이 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하였다. 또한 퍼거슨은 히2:11을 예수님이 스스로를 성화시키셨다고 해석하였는데, NA27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사본은 없다. 본문은: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하게 되는 자들이다. 즉 본문에 거룩하게 하다의 목적어는 없는데, 그리스도 자신을 거룩하다의 목적어로 취하는 것보다 죄인을 목적어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성경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성화시킨다는 말을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놓는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렇다면 퍼거슨이 계속하여 예수님을 창시자(아르케고스)라고 한 것에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28)

 불트만은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그 의미만 받아들인다.  

29)

 John Murray, Principles of Conduct. 

30)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31)

 이 부분은 퍼거슨의 글을 토대로 정리자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32)

 퍼거슨은 지금 율법의 세 가지 차원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실상은 세 가지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의 세 가지 차원(기능, 용도)이란, 정치적(시민적) 용도, 정죄적 용도, 제3 용도를 말한다.  

33)

 이곳에서 퍼거슨이 혼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번역의 오류인지 모르겠다. 시민법, 제사법, 도덕법은 율법의 종류이지, 율법의 차원은 아니다. 차원이란 말은 한 가지 법에 세 가지 기능이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서 도둑질하지 마라라는 한 도덕법은, 정치적, 정죄적, 제3 용도의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34)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35)

 기독교강요 III,8 

36)

 불가타에 모르티피카티오로 번역됨. 이 단어는 앞에서 칼빈이 사용한 죽임(살인)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죽임이란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한다. 즉 항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었고, 또한 그분은 종국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신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죽임을 항상 몸에 감싸듯이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  



고든 피 교수는 1966년에 남가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Wheaton 대학, 고든 콘월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캐나다 소재 리젠트 대학의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가 집필한 고린도전서 주석(NICNT, Eedmans)은 가장 유명한 고린도전서 주석으로 정평이 나있다. 또한 그는 최근에 출판된 [성경의 성령에 귀기울임](Listening th the Spirit in the Text, Eerdmans, 2002)에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Toward a Pauline Theology Glossolalia)에서 방언의 연속성과 유익성을 변호하고 있다. 다음은 [바울과 성령과 하나님의 백성]의 출판에 즈음하여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든 피 박사의 주장을 요약한 것이다.
 

어떤 형태의 예배가 과연 성경적인가? 성령의 새 술에 취하여 “우. . .”소리를 내면서 예배를 드리는 오순절식인가, 아니면 질서정연하고 점잖게 예배를 드리는 보수적인 방법인가?
이러한 논란은 최근 관심의 표적이 된 '토론토 블레싱'을 한편에서는 지지하고 다른 편에서는 부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인가? 이에 대해 고든 피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나타나시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사역을 대변하며,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고든 피는 은사주의자들이나 비은사주의자들이나 모두 성령의 오심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길들여서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사명을 비효과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으므로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삶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다음은 그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사도 바울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하고, 주석을 집필한 바에 의하면 나는 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허다한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성령 충만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면들도 상태가 나빠졌다.
성령의 오심의 중요한 측면은 (지역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내세의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천국이 현세에 침노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침노’를 구체화 하는 기관이다. 이 말은 교회가 너무나 천국 중심이 되어 지상의 일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령이 침노하여 교회는 내세의 능력으로 무장되고, 교회의 구속이 인쳐지고 보증되었으며,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유하였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제 천국의 백성처럼 살아야 한다.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은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삶을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사는 것”이다.


신자는 말세를 만난 사람들이다(고전 10:1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통해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구원 및 교회에 대해 현재형과 미래형을 섞어서 말한다. 우리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엡 2:8), 지금 구원을 받아가고 있으며(고전 1:8),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 5:9).
이처럼 교회는 천국과 타락한 지상의 두 가지 갈등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문제가 생긴다.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갈등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천국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많은 경우 잘못된 동기로 인해?모든 것을 너무 빨리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부도덕하고(고전 5장),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었다(고전 7장).


그러나 지상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자들의 삶은 천국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을 살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이 교회가 지상 쪽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법정에 호소했다(고전 6장).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세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한 것이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든 비은사주의자든 내세의 능력에 의해 지배 받는 천국의 삶을 사는 신자들이 드물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현대 사회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자들은 천국의 삶이 아니라 지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고든 피 교수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이렇게 타락하게 된 근본적이 원인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성령의 오심의 핵심은 무엇인가?


첫째,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성령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되었다. 성막이나 성전에 임하시던 성령이 이제는 교회나 신자들 속에 임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자신이 어떤 신분에 있는지를 망각한 것 같다. 이저에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에 임했을 때 제사장들은 서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정도였다(왕상 8;10).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을 때 얼굴을 감추어야 했다(출 3:6). 이전에는 예배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로 두렵게 하고 놀랍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두렵게 하고 놀랍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 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외경심과 함께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절감해야 하며 동시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으로 넘쳐야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기쁨은 있지만 외경심이 부족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외경심은 있지만 기쁨이 없다. 천국과 지상의 삶을 사는 신자들은 외경심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둘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통상적이고 비통상적인 두 가지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능력으로 임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다(고전 12장). 또한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들은 역경과 환난을 이기는 능력을 얻는다(고전 1:11). 즉 신자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빌 2장), 동시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갈 5장). 신약이 말하는 신자들은 성령으로 인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며, 또한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져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단지 추상적인 어떤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다. 성령은 능력을 받은 교회의 신자들을 통해 통상적이고 비통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상적인 사역은 물론 기사와 이적 같은 하나님의 비통상적인 사역도 인정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 일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생각에 너무나 집착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체험적으로 사역하시고 말씀하신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셋째, 성령은 많은 것을 하나로 만드신다. 그리스도 안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만드시는데 있다. 우리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저 12;13)는 말은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은 천차만별로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도 만드는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성전, 가족, 몸이란 말이 그것을 증거한다. 성전이란 말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며 구원 받은 개개인이 이룬 공동체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신자들 모두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롬 8;15-16). 바울이 말하는 몸의 이미지는 하나이지만 삼위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반영한다. 몸은 한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다양한 지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서로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교회로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성령의 사역을 오해하고 있다.


넷째, 성령의 사역은 은사와 열매 두 가지를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성품(열매)과 사역(은사)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바울이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는 ‘성도’이다. 성도란 거룩하게 된 사람을 말하며, 거룩이란 일부 슈퍼 스타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거룩한 삶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이 말하는 열매는 성령 안에서 공동체의 삶을 사는 신자들의 대표적인 성품들이지 성품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단체 속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개인의 경건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의 열매를 개인화시키는 그 자체가 문제이다. 상대방이 없이 어떻게 혼자 사랑하고 오래 참을 수 있는가. 한편, 은사는 보통 공중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행하는 은사(고전 12장)는 물론 생활의 은사(롬 12장)를 포함한다. 기적 행하는 은사들을 지나치게 방치하면 균형을 잃을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은사가 열매의 통제를 받는다면 개인적인 황홀 체험 보다는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은사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은사를 강조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열매를 강조하지만 어느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완전하게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섯째, 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차이점이 많다. 먼저 건강한 교회는 거대 교회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둘째 여러 면에서 통제되고 형식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교회의 예배를 바울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비슷한 사람, 언어, 종족만으로 모여 있는 교회를 바울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구경꾼이 야구장에 가듯이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예배는 행사 위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유급 성가대나 교역자들에게 예배를 맡기고 있다. 예배의 형식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예배가 메마르거나 형식화, 화석화 될 필요는 없다. 예전적인 형식을 통해서도 기쁨이 흘러 넘칠 수 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예배 시에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을 억제하고 소수가 주관하는 행사와 예식에 맡기고 있다. 그 결과 신자들의 삶은 메마르고 성령 하나님은 입술로만 섬기고 있다. 신자들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성령이 당신을 가졌는가, 성령이 당신을 통제하는가,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가 이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계속 추구하고 사모하는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기도한 내용을 바울은 마음 속에 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인 성령이 우리들과 함께 하지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들을 구분할 방도가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계속 구하고 찾고 두르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1:13).




당신은 성령 충만한가? / R.A. 토레이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췌)


당신은 성령 충만한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성령 충만할 수 있는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1.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근거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지해야만 한다.

2.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버려야만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나아가서 우리를 속속들이 살피사 우리의 생활에서, 즉 외적인 생활이나 내적인 생활에서 주님 보시기에 그릇된 것을 드러내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떨쳐 버려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모든 죄를 철저히 버려야 한다.

3.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시인해야 한다. 성령은 은밀하게 제자가 되려고 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세상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4.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어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저의 뜻대로 하려는 모든 주장을, 저의 생애를 주관하려는 모든 주장을 저의 길로 가려는 모든 주장을 포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탄없이 저를 내어 드립니다. 저의 전부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주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하소서.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작게 보이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단지 무한한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말한다. 그것은 세상의 어떠한 아버지의 사랑보다도 더 지혜로울 뿐 아니라 세상의 어떠한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더 부드러운 사랑을 지니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다.

5.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간구가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1:13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성령을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6.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언약이 아무리 명확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믿을 때에만 개인적으로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성령을 간구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한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알고 또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안다(요일5:14-15).

당신은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감정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다고 믿으면, 나중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성령을 바라보며 홀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당신의 삶에 대한 전적인 주도권을 다시금 새롭게 그의 손에 맡기는 것이 좋다. 당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당신의 욕망을 지배하고, 당신의 야망을 지배하고, 당신의 선택을 지배하고, 당신의 목적을 지배하고, 당신의 말을 지배하고, 당신의 행동을 지배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도록 주님께 간구하라.

그리고 반드시 그가 그렇게 행하실 것을 기대하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오로지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당신의 삶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R.A. 토레이의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 중 일부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27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성도들은 흔히 성령훼방죄에 대한 문제에 부딪쳐, 내가 정말 성령훼방죄를 범한 것은 아닐까 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 어떤 일을 두고 그것이 성령훼방죄에 해당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여 서로 격한 논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 할 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 성령훼방죄를 범한 사람이라는 판정이 주어지면,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성령훼방죄란 어떤 죄이며, 우리는 성령훼방죄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성령훼방죄의 다른 이름들
성령훼방죄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부터 생겨났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비난을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시면서, 성령훼방죄를 언급하셨다(마 12:31, 32).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성령훼방죄를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시는 회개로 새롭게 될 수 없는 죄’ 또는 ‘짐짓 범한 죄’라고 표현하면서,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 타락하여 범한 죄 또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범한 죄라고 말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 27).

 

한편, 사도 요한께서는 성령훼방죄처럼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말씀하면서, ‘사망에 이르는 죄’ 그러므로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예수님이나 히브리서의 저자, 그리고 사도 요한의 말씀은 모두 동일한 죄를 말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不可赦罪), 새롭게 될 수 없는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는 동일한 하나의 죄를 각기 다른 시각에서 부르는 이름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령훼방죄의 내용

성령훼방죄와 관련된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성령훼방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죄이다.

 

1) 구원받은 성도의 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죄가 용서함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사 53: 롬 5:18,19). 그리스도께서 용서해주시려고 했던 죄는 사람들이 범한 모든 죄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떠한 형태의 죄를 범했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모든 죄들을 다 용서받는다. 그 결과 성도는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이 되어(롬 8:34),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을 받는 온전히 거룩한 사람이 된다(히10:14).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한다(요 5:24). 영원한 생명이란 결코 취소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다. 또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천국의 삶이 주어진다(마 18:3). 그런데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다. 따라서 성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즉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는다.

 

2) 불신자의 죄가 아니다
성령훼방죄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이다. 이런 사람은 전혀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다. 상당한 시간동안 교회생활이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무엇이 성령의 생각이고 무엇이 성령의 사역인지를 분별할만한 능력을 얻은 사람이다. 교회 안에는 알곡들 속에 섞여 있는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는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면서도 마치 성도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세를 하거나 스스로 자신이 성도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령훼방죄는 참 성도나 전혀 불신자들이 범하는 죄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이다.

 

3) 고의적인 죄이다
사람은 무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성령을 훼방할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과거에 ‘훼방자’이었음을 고백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이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도 바울께서는 바로 이어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도리어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한 주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셨다(딤전 1:13,14).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훼방죄는 용서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성령훼방죄는 부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범한 죄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임이 분명하다.

 

4)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훼방죄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죄와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하셨다(막 3:28-29). 훼방이란 해치거나 방해를 하는 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는 성령 하나님이나 그의 사역을 상대로 방해를 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5)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가 어려운 죄이다
어떤 경우가 성령훼방죄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크고 중해 보이는 죄라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용서 못하실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가 아무리 막중할지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은혜로운 분이시다. 믿음의 선진들이 범했던 맹세코 예수님을 부인했던 죄,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죄, 의도적인 간음에 살인을 더했던 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명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했던 죄 등 모든 죄가 다 용서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보고 그것이야말로 성령훼방죄 임에 틀림이 없다는 속단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로서는 그 사람이 장차 베드로, 바울, 다윗, 요나처럼 회개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이다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임하여진다(행 3:19). 회개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어떠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롬 2:5). 그러므로 성령훼방죄,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훼방죄에 대한 태도
성도는 성령훼방죄가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알고, 성령훼방죄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불신자나 경건하게 살아보려는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훼방죄에 대한 의식이나 두려움이 없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의인일수록 죄의식이 강하고, 성령훼방죄에 대한 두려움도 심하다. 그러나 성도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다시는 정죄 받을 일이 없는 의인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훼방죄의 두려움에 지나치게 눌려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훼방죄에 대한 자유함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령훼방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떨어뜨리고 좌절 속에서 영생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마귀의 경건을 가장한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한편, 성령훼방죄는 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타나는 죄임을 기억하고, 성도는 자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인지 아니면 성도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인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성도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빌 2:12)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성령훼방죄로 여겨질만한 일이 생각나면, 미루지 말고 즉시로 회개하여 바른 길로 돌아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에서가 영원히 축복의 기업을 놓치고 말았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히 12:17).

성령훼방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짐짓 범하는 죄 등으로도 불리는 참으로 무서운 죄이다. 그러나 이 죄는 구원받은 성도의 죄가 아니다. 성도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이다. 또 그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어떤 행위에 성령훼방죄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중한 자세로 자기 자신을 살피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자신의 죄가 깨달아질 때에는 지나친 두려움에 짓눌리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회개하여 의인이 누리는 평안을 가져야 한다

 출처: 안개꽃


성령의 세례(침례)와 충만은 어떻게 다른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께서는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받기를 기도하여 성령이 임하게 하신 일이 있다(행 8:14-17) 그리고 사도 바울께서도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물음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답하는 것을 듣고는,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후, 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게 함으로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하신 일이 있다(행 19:2-8).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 것과 세례를 받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은 또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성령과 세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이 죄를 씻음 받고 의인이 됨으로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표하고 인치는 의식이다. 그래서 세례는 물을 사용하여 죄 씻음을 표시한다. 그러나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믿음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거나 거짓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물세례는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구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물세례 이외에 성령의 세례를 말하기도 한다.

성령의 세례는 모든 것을 정확히 통달하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세례이다. 따라서 물세례에서 있을 수도 있는 오해나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임하시어, 믿음의 내용을 확증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신다. 또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성도의 마음속이나 밖에서 특별한 능력이나 현상이 나타나게 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현을 한 가지 의미로만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중생케 하시는 은혜를 베푸심, 중생을 확증하는 증거를 보여주심, 중생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심, 중생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섬겨지도록 하심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하심은 성령의 세례나 성령의 충만이라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므로,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대해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2. 성령의 세례

성령의 세례는 물세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르쳐주는 예표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나(행 1:5), 세례 요한께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고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물세례를 살펴보면, 세례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례는 예수 믿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에게 맨 처음으로 행해지는 의식이다(최초성). 한 번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효력이 일생동안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반복해서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단회성, 지속성) 세례는 죄 씻음 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의식이다(정결성).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세례를 받는다(보편성). 세례를 주라는 명령은 있으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는 것을 보면, 세례는 사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성질을 가진다(하나님의 주권성).

물세례에 나타난 특성들은 성령의 세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사도 베드로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고낼료가 믿게 된 사실을 말씀하면서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 11:15,16)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이나 고낼료에게 있어서 성령의 세례가 최초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께서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고 하신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고 하신 말씀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성령의 세례에 정결성이 있음을 본다. 또 사도 바울께서는 고전 12:13에서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 하심으로서, 성령 세례의 보편성에 대해 말씀했다. 우리는 성경에 성령의 세례는 받으라는 명령이 없는 사실과, 한 번 성령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다시 받았던 예도 없었던 사실을 통해, 성령의 세례가 하나님의 주권성과 단회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에서 이러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회심과 중생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세례란, 죄인을 회심시켜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3. 성령의 충만

성경에는 브사렐(출 31:3), 여호수아(신 34:9), 세례 요한(눅 1:15), 엘리사벳(눅 1:41), 사가랴(눅 1:67),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행 2:4), 베드로(행 4:8), 바울(행 9:17), 스데반(행 6:5), 바나바(행 11:24) 등 성령에 충만했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브사렐의 경우는 성령께서 그에게 회막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주셨음을 의미하기에 성령의 일반사역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은 모두 영적인 의미, 즉 성령의 특별사역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특별사역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

성령의 세례는 죄 씻음을 인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두 가지의 목적, 즉 도덕적 개선이 있는 생활과 효과적인 사역의 감당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성령에 충만한 생활이란 어떤 이적적인 현상을 경험하는 생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에 사로잡혀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생활, 즉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거룩하게 사는 것이 그 핵심적인 의미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도 도덕적인 면에서는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더욱 거룩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전 3:1-4) 성령에 충만한 사람에게서는 이적적인 현상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적적인 현상은 성령 충만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단지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요소는 도덕적인 변화, 즉 죄를 멀리하고 더욱 거룩해져 가는 성화(聖化)의 삶이다. 스데반과 바나바의 성령 충만 경우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성령의 충만은 특별한 사역이나 봉사를 효과적으로 감당케 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적개심과 성경 지식으로 가득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용기와 성경지식으로 담대하게 복음의 진리를 말할 수 있었다(행 4:8). 사도 바울은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지혜가 뛰어난 총독 서기오 바울 앞에서 예언을 하고, 그를 믿게 만들었다(행 13:9).

엘리사벳은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배 안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언을 할 수 있었다(눅 1:41).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누구라도 지혜와 용기와 능력 등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역(봉사)에 효과적으로 임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다(엡 5:18).

성령의 충만은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수준의 충만함에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그 충만함의 정도가 시간이나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 충만함에서 멀어진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기에 성령의 충만은 단회적이고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성령의 세례와는 달리, 반복적이고 일시적이며 개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여러 면에서 성령의 세례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죄 씻음의 인침인가 성화 또는 사역의 강화인가, 단회적인가 지속적인가, 보편적인가 개별적인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가 사람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역사인가 하는 등에서 서로 뚜렷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4. 성령 충만케 되는 방법

성령의 충만을 명령하셨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일방적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편에서도 힘써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의미한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 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므로 성령을 소멸하거나(살전 5:19) 근심케 하지 않고(엡 4:30),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다(고후 12:18, 갈 5:16).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성령의 충만을 위해, 악한 세월을 따라 살지 않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세월을 아끼는 것, 주의 뜻을 분별하는 것, 술 취하는 것 같이 어떤 것에 빠져 끌려 다니지 않는 것, 신령한 찬송을 부르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 피차에 복종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고 말씀했다(엡 5:15-21).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는 기도를 빼놓을 수 없다.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했던 제자들의 경우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행1:14). 성령의 충만을 위해 힘써야 할 기도는 특히 회개의 기도이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헐어내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면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힘써야 할 우선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남종과 여종을 포함한 만민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셨다(욜 2:28). 그 예언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 회심하고 중생하여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 또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살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고, 주어진 사명과 봉사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그 정도에 있어서 발전이 있을 수도 있고 소멸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성령에 충만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주의 뜻을 지혜롭게 분별하여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노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요, 아울러 무릎 꿇어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출처: 안개꽃


1. 성령님의 오심에 대하여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은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건설하실 하나님 나라인 교회와 그의 백성가운데 영으로 오시어(요 14:16-17 / 내주하심) 그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오신 사건이다(요 14:25-26). 다시 말하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지상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고 그의 백성을 모으셨는데 이젠 그 나라와 그 백성을 다스리실 왕으로서 '영으로 오신 하나님'이 곧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실 왕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셨음을 상징한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로 임재하신 성령님의 대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고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그 머리에 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임을 나타낸 사건과 연속선상에 있다(마 3:13-17; 막 1:9-11; 눅 3:21-22). 당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께 임하였다. 당시 하늘에서 들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음성은 시편 기자가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고 선포하며 장차 모든 세계가 진정한 통치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굴복할 것을 선언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 사상은 이미 이사야에 의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라는 신학으로 완성되어 계시된 바 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神)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1-4). 여기에서 이사야는 ① 하나님의 아들이신 '여호와의 종'이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며 ② 그 날에는 공의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며 ③ 그의 통치는 쇠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신학에 근거를 둔 사건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성취되었다.이와 같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날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오신 성자 예수께서 그 사역을 시작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지상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건설하셨다. 또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적대 세력을 타파하시고 진정한 통치자임을 증거하신 후 승천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오순절에 성령님이 지상에 임하신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건설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즉위하신 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대관식을 하는 이 날은 특별한 날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유대인의 명절을 택하시어 많은 유대인들이 모인 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실 왕이 임재하셨음을 만방에 선포하셨다.

 2. 새 시대를 여는 오순절과 '새 날'

 '오순절'이란 유월절을 지내고 안식일 이튿날부터 일곱 번째 맞는 안식일로 이날에는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첫 이삭으로 떡을 만들어 두 어린 양과 함께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리는 날이다(레 23:15-21). 이런 점에서 ① 유월절에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친히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 화목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셨으며 ②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이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새 날'이 시작됨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령께서 통치하시는 이 날부터는 지금까지 있었던 통치 체제와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될 것이다."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3-4)는 기록은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된 성령님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지금까지는 모세의 율법이 돌비에 기록되어 하나님 나라의 헌법으로써 그의 백성을 다스려 왔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그의 백성의 심중에 들어와 다스리시고 계심을 보여줌으로써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다(렘 31:31-34; 욜 2:28-32). 이미 예레미야나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처럼 성령님의 통치는 물리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고 그의 백성의 심령을 다스리는 신령한 통치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이다. 새로운 통치자로 오신 성령께서는 친히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시어(임마누엘) 그들의 인격을 감화하고 그들과 유기적인 일체를 이루어 한 몸을 이루시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나 성령님과 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은 신적 속성을 가지게 된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9가지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신적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발견되어지는 독특한 형태의 열매이다. 이러한 열매는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절대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3.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의 의미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역사적 단회(單回) 사건으로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성도들이 오순절의 사건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사건은 이제부터 이 땅에 교회가 건설되고 새롭게 교회의 역사가 시작하는 역사적인 시발점으로써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후 지상에 세워진 교회의 시대가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또다시 오순절 사건이 발생할 이유가 없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은 일반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성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중생 그리고 충만하심의 일반적 사역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성령님은 성도 안에 내주하시어 그와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고(소명 : calling) 성도로 하여금 중생케 하여(칭의 : justification)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으로써 그 백성이 되었음을 증거(성화 : sanctification)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그의 백성을 다스려 나가신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님의 일반 사역'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령님의 일반 사역을 통하여 ① 성도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고 영적 각성(요 15:26)을 이루게 하시며, ② 친히 성도와 영적 연합을 하심으로써 성도로서의 장성한 열매(엡 5:8-9; 갈 5:22-23)를 맺게 하시며, ③ 그에게 은사(talent)를 주시어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하신다.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성령의 충만을 입은 제자들은 이미 성령님의 일반 사역에 의해 중생되었으며 감화를 받아 인도함을 받아오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 아래 영적 각성이 되어 있었으며 중생한 자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아직도 중생을 하지 못했다면 그들의 영혼이 다시 살지 못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그들은 결코 영적 각성도 없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입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음을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사건 이전에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구약에서 성령님의 사역은 신약에서 나타난 사역과는 그 성격이 다른 면도 있지만 중생케 하시는 사역만은 성령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도 성령의 충만을 통해 중생하였으며 예수의 제자들 역시 성령의 충만을 입은 사람들이었다(요 1:12-13; 요 3:6; 딛 3:5; 롬 8:9).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은 일반적으로 성도 안에서 발생되어지는 중생, 칭의, 성화를 발생케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성령께서는 창세 이래로 성도들 안에서 그와 같은 일반적인 사역을 수행해 오셨다. 그러한 사역을 주관하시던 성령께서 오순절에 만민이 보는 앞에서 강림하신 사건은 앞서 보았듯이 새롭게 건설되고 확장되는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단회적 사건이며 결코 중복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신학자들이(특히 오순절 계통의 신학에서) 지금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연속적으로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님의 고유한 사역에 대한 성격을 오해한 결과이다. 그들은 지금도 오순절과 같은 현상이 교회 안에 나타나야 할 것처럼 외치며 오늘날의 교회들이 오순절과 같은 체험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미 교회 안에 임재하셨고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친히 교회를 통치하시고 계신다. 따라서 오순절 체험을 지금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진정한 통치자로 오신 성령님의 다스림에 교회가 순종하고, 성령님의 인도 아래 교회가 역사선상에서 각자 부여받은 역할과 위치를 확인하고 나가야 한다. 이러한 현상, 즉 교회가 성령님의 통치 아래 역사적인 행보를 지속하는 것을 가리켜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다고 말한다.

 4. 오순절 사건에 대한 조명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특히 구속의 역사를 어떻게 진행시키는가를 볼 때 역사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구속사의 큰 맥락에서 볼 때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었으며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를 이끌어 오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 주관하셨고 부패한 인간의 심성을 구속하신 일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마침내 그 구속의 완성은 성령 하나님께서 이루심으로써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어 갈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속의 완성을 위한 성령께서 왕으로 오시어 이전의 역사와는 달리 새로운 역사를 주관하여 가실 것이라는 신적 의지를 만방에 알린 사건이다. 바로 이러한 선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령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이 임하심을 만방에 나타내시고자 오순절에 임하셨다.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신 모습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좀더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 공개적으로 임재하신 성령님

오순절 날이 이르매 제자들이 함께 한 곳에 모였음을 볼 때 이곳은 마가의 다락방이 아닌 성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오순절은 새 소제가 드려지는 날로 성전에 모이는 규례가 있었기 때문이다(눅 24:53).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전으로 모였을 것이며 이러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성령님이 '홀연히' 임하시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님이 오실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때를 모르고 오순절에 저희가 성전에 모이자 홀연히 성령님이 임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만일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중 성령님이 강림하셨다면 그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여 불의 혀같은 것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외부 사람들이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님은 비밀리에 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임하셨다.혹시 성령님이 가만히 그들 가운데에 임하셨을 경우 어떤 이들은 그 사건을 심적인 감동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성령님의 임재에 대하여 상당한 오해가 발생할 소지를 남겨두게 된다. 그래서 성령님은 은밀히 오시지 않고 그의 강림에 대하여 누구나 인식하고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을 택하심으로써 제자들이 그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셨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까지도 이 사실을 보고 소동을 일으키고(행 2:6) 기이하게 여기는 것을 보아서도(행 2:7) 성령님의 임재가 단순한 심리적인 현상이 아닌 객관적으로 밝히 드러난 사건임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령께서 임하신 사건에 대하여 이후 아무도 부정하거나 심리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성령님의 공개적 임재는 역사가 새롭게 시작한다는 선언이기 때문에 역사 안에서는 한번만 있어도 충분하다. 교회의 왕으로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은 거듭 반복될 필요가 없다.

 2) 성령님의 통치 아래 있는 제자들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행 2:2)는 성령님이 공개적으로 임한 현상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 소리에 놀라 큰 무리가 모인 것을 보아(행 2:6) 심상치 않을 정도로 큰 소리가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느 소리 같으면 사람들이 놀라지도 않을 것이고 관심도 없어서 그 소리나는 처소에 모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들이 들어본 소리와는 완연하게 차이가 나는 신비스러운 소리였기 때문에 그 소리나는 장소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오순절 당시에는 외국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들까지 모였음을 볼 때 이 소리는 여느 소리와는 확실히 다른 기이한 소리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소리를 먼 곳 사람들까지 듣고 성전에 모인 것을 보면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의 소리가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기이한 소리를 듣고 모인 사람들이 그 소리나는 곳에 이르렀을 때는 참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행 2:3)이 나타나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 말은 "불의 혀들처럼 나누어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 각각의 하나하나 위에 머물렀다"라고 번역하면 훨씬 이해하기가 쉽다. 이 묘사는 성령님이 임하시어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불의 혀같은 것이 거기 있는 제자들의 머리 위에 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성령님이 오시어 그의 제자들을 주관하시되 그들을 통해 말씀을 선포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은 실질적으로 성령님이 권세를 가지고 친히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3) 교회의 공식적 출범을 알린 오순절 사건

성령님이 통치하시는 모습은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는 모습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방언을 하나의 소리(sound)로 듣지 않았다. "우리가 다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는 반응을 볼 때 제자들이 어떤 소리(sound)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말(words)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써 제자들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사도들은 정신이 몽롱하거나 자아 도취에 빠진 흥분된 상태에서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단어를 배열하여 그 안에 일종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하여 논술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행 2:13)고 함을 보아 제자들은 어떤 의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상관없이 무슨 말인가를 진지하게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들은 사람들이 그 내용을 가리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한다고 함을 보아 제자들이 성령님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순절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큰 일'을 찬양한 시편 114편 등을 함께 모여 하나님께 찬양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한 시편을 찬송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 시(詩)의 가락은 오늘날과 같은 서양식 음계를 가진 곡조가 아니었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시조를 읊듯이 히브리식 가락으로 찬양하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술에 취했다고 빈정거렸을 뿐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술에 취한 것처럼 무의식 가운데에서 어떤 말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가운데 의식이 분명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찬송하고 있었다.이러한 방법을 통해 성령님은 이제부터 새로운 일을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 가실 것을 만방에 알리셨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15개 나라에서 온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등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당시 전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이한 임재의 현상을 통해 그날에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역사가 일어남으로써(행 2:41) 이제부터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 나갈 왕국은 전혀 새로운 왕국이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바로 그 새 왕국은 모든 민족이 참여하는 '교회'였다.

 4) 오순절 사건의 불연속성

여기에서 마가는 그 당시에 3천명이나 회개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이 날'(행 2:41, that day)은 당일 하루를 지시하기보다는 당시 오순절 잔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오순절 기간 동안 사도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큰 일'을 찬양하는 일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그 '큰 일'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자 할 때 제자들이 풀어 설명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접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당시 성전 뜰은 3천명이나 모일만큼 넓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일 그곳이 마가의 다락방이었다면 3천명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가의 기록은 성령께서 오순절 날 성전에 모인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 그 기간 동안에 3천 여명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이러한 모든 현상은 성령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어 새 역사를 주장하신다는 하나의 표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임하신 성령께서 이제부터 각 사람 안에 내주하면서 그들을 주장하시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해 나갈 것이라는 의지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성령님께서 이처럼 특별한 권능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세상을 통치하신 사실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임할 때에는 오순절과 같은 특별한 현상을 통해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성령님이 왕으로서 임재한다는 공개적인 대관식이 있었으므로 이제는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도록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 가도록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과 같은 현상을 가져야만 성령을 받는 것처럼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교회를 세워나가시고 통치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의지하고 올바른 신앙을 표시하여야 한다.

 5. 성령님의 임재와 구약의 성취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요 15:26)라고 천명하신 것처럼 성령님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이 일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이하)는 말씀이 성취됨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말세'(in the last days)란 구약의 선지자들이 내다본 신약의 교회시대이다. 이때에는 모든 육체(all mankind, all flesh), 즉 모든 민족에게 계시를 주시고 직접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이 마침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성령님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구원 계시를 그의 백성들에게 밝혀주심으로써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는 약속처럼 그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장성케 하시는 사역을 지금부터 시작하시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이러한 근거를 가지고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의 의미를 전파하고(행 2:22-23)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고 증거하면서 성령님의 오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함이라고 변증하였다.

출처 : http://cafe.daum.net/C.N.B.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 & A (12-1)

▲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어떤 집회에 가보니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왜 그런 체험이 안 나타나는 걸까요? 그리고 성령의 불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현대 한국교회 내에 ‘성령의 불’을 빙자하여 너무 신체적인 반응이나 느낌에 치중하게 하는 육감적(肉感的) 체험주의에 호소하는 집회들이 큰 문젯거리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성령운동연구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필자에게는 이런 의심스러운 집회에 대한 진단을 부탁하는 의뢰가 많이 접수되곤 하는데요. 한 예를 들면, 성령의 불을 사모하던 어떤 목사의 인터뷰 내용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Toronto Airport Vinyard) 집회에 참석했을 때 어떤 외국인 목사에게서 안수를 받고 뜨거운 불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곧 그 감동을 잃어버리고는 마침내 국내의 어떤 영성집회에 참석했던 모양입니다. 거기서 어떤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에게서 안수를 받고는 온몸이 뜨거워서 펄쩍펄쩍 뛰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서는 기자들과의 인터뷰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토론토 불보다 역시 국산 토종 불이 더 뜨겁던데요.”

이쯤 되면 이 목사님이 성령의 불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또 어떤 잘못된 집회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 집회의 인도자가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게 해준다고 하면서 입을 벌리고 손을 위로 벌리고 앉게 합니다. 성경에 보면 ‘네 입을 넓게 열라 그러면 내가 채우리라’고 했다는 거죠. 그리고 그는 청중에게 성령은 무의식 상태 속에서 가장 잘 들어간다고 하면서 강조를 하지요. 모두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몸을 흔들며 찬송을 시키고는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을 향하여 기합을 넣습니다.

“하나 둘 셋, 슛!”

그러면 하나둘씩 뒤로 넘어져 비명을 지르면서 떼굴떼굴 구르곤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성령의 역사를 빙자해서 집단 최면을 통한 육감주의적 집회로 이끌어가는 잘못된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연실색할 만한 이런 집회에 순진한 성도들과 분별력 없는 목회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니 더욱 더 놀랄 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불

오늘날 성령의 불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못하다 보니, 종종 이런 이상한 불에 대한 가르침이 진정한 성령의 불을 대치하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필자는 진정한 성령의 불에 대한 설명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불’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의미는 육감적으로 느끼는 뜨거움의 차원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기도하거나 안수 받을 때 몸 전체 또는 특정 부위에 어떤 뜨거운 느낌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대개 몸의 특정 부위에 불같은 뜨거움을 느낄 때는 그 부위에 육체적 연약함이나 질병이 있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성령의 불이란 이런 육체적인 뜨거운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성경에 나타나는 불에 대한 이미지는 심판, 정결, 능력, 사랑, 열심 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오랜 동안 기대되어지던 성령의 불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왕상 18:24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겔 1:27-28.

신약에서도 우리는 성령의 불 사상을 보게 되는데, 특히 이에 대한 구약에서의 기대가 마침내 성령의 강림과 함께 이루어지게 됨을 봅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눅 3:16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 2:3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 -살전 5:19(NIV 성경)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9

 

불세례

신약시대 이후 교회사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성령의 불을 강조하는 운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세기 후반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한 줄기 중에 불세례(baptism with fire)을 강조하는 운동이 확산되어간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중서부와 남부의 시골 지역에서 이런 경향성이 강했습니다(Vinson Synan, The Holiness-Pentecostal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63). 마침내 어윈(Benjamin Hardin Irwin)은 1895년에 불세례성결연합회(Fire-Baptized Holiness Association)를 캔사스, 텍사스 그리고 오크라호마 주에 설립하였는데, 이 연합회는 현대 오순절운동이 시작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 후 파함(Charles F. Parham)이 어윈의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교회에서는 ‘성령의 불’ 또는 ‘불세례’와 같은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의 불에 대한 개념을 다음 세 가지로 매우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사랑의 불(fire of love)입니다. 성령의 불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우리 영혼 속에 불타오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결의 불(fire of purity)입니다. 이 불은 세상과 죄악에 물들어 있는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여 하나님만을 향한 일심(一心)의 마음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셋째는 능력의 불(fire of power)입니다. 성령의 불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복음을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위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무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저와 함께 몇 회에 걸쳐 성령의 불이 지닌 이 세 가지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저의 요지는 우선 잘못된 성령의 불 사상을 가려내야만 사이비 신앙으로부터 우리의 교회를 건강하게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드리는 또 하나의 강조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불은 참으로 실재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 참된 성령의 불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강력하게 확장해 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님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 & A (12-4)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Q) 어떤 집회에 참석해서 굉장히 놀란 적이 있습니다. 기도회를 인도하시는 분이 “쉭! 쉭! 불 받아라!”하는 소리를 내면서 마치 장풍이라도 쏘듯이 손을 내뻗는 겁니다. 그랬더니 앉아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하나둘 쓰러지던데, 그 인도하시는 분 말씀이 자기로부터 능력의 불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정말 그것이 성령의 능력인지 알고 싶습니다.

A) 성령의 능력에 의해 쓰러지거나 몸에 진동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나 예배 중에 이런 현상이 있다고 해서 다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능력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이 있었다고 해서 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은 현상 자체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in all kinds of counterfeit miracles, signs and wonders)”(살후 2:9)

 

성령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말씀과 함께 따르는 기사와 이적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사탄도 역시 성령의 역사를 위장하기 위해서 거짓된 기사와 이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타나는 기적 현상을 보면서 어떻게 성령의 역사와 악령의 역사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분별법은 그 기적의 결과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 기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를 굳건히 세우는 열매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반면 만일 그 기적 때문에 하나님 대신 어떤 특정 인물을 숭상하게 되거나 교회에 분열과 갈등이 조장홱摸� 그것은 사탄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불이라는 것이 “불 받아라!”라고 한다고 해서 불이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까 말씀하신 그런 현상은 일반 최면 현상으로도 가능한 것으로서, 성령의 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성령의 불의 세 가지 차원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불을 먼저 말씀 드렸습니다. 또 하나의 세 번째 차원은 복음 증거와 크리스천 사역의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사역의 주된 목적이 한편으로는 크리스천의 성화에 있다면 또 한편으로는 사역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그리스도의 힘 있는 증인이 된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그러면 왜 성령의 능력을 성령의 불 또는 불세례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곤 했을까요?

교회사적으로 볼 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웨슬리(John Wesley)와 함께 동역했던 프레처(John Fletcher)가 ‘불타는 사랑의 세례’ ‘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 ‘불세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나중에 이 말은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1899년에 어윈(Benjamin Hardin Irwin)이 캐나다 사람 로빈슨(A. E. Robinson)과 함께 발행한 <불붙는 석탄>(Live Coals of Fire)이 미국 전역에 배포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령과 불에 의한 능력의 세례가 성결 체험 다음에 일어나는 체험이라는 것을 미국 전역에 소개한 것으로는 최초의 간행물이었습니다.

19세기의 유명한 부흥사 무디(Dwight L. Moody)는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받기 전에는 선교사나 목회자로 합당하게 준비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 받는 것’(enduements of the Spirit)을 위해 추구하고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설교하곤 했으며, 이 능력을 모든 복음적 교단들에 전파하는 것이 그의 사역의 궁극적 목표라고 종종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힘 있는 사역의 근원은 바로 ‘성령의 능력’이었으며, 그때 이후로 그 능력이 자신의 사역을 지탱해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 시기에도 역시 이러한 성령의 불같은 능력이 확산되었습니다.

평양의 동기 사경회가 끝나자마자 놀라운 십자가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부흥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한국교회가 급성장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한국인의 도덕적 각성을 일으키는 힘이 솟아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성령의 불입니다.

성령의 능력은 능력의 불로 복음을 힘 있게 전하여 세계선교의 완수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 팔머(Edwin H. Palmer)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불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스스로 물어봄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그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내적 힘이 운동하는가? 우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도록 능력을 받았는가? 우리는 우리 생명 내의 죄들을 태워버리는 정화하는 감화로써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가?”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성령 충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경의 어느 부분도 성령 충만이 흥분상태의 체험이나 외적인 표시들을 동반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은 확실히 성도에게 형언할 수 없는 희열과 기쁨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서신들은 성령 충만함이 성령의 열매로 생기는 것이지 성령 은사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에베소서 5:19, 6:9에서 우리는 그 구체적인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그의 마음으로 주께 찬송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감사한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피차 복종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권위있는 자들에게 순종할 줄 안다. 성령 충만한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하며...
성령 충만한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주 안에서 순종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부모들은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않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한다. 성령 충만한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고 열심히 일하며 성령 충만한 상전들도 종들을 공평히 대하고 이해한다. 이 모든 것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게 분명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슷한 말씀인 골로새서 4:16-22에서는 성령 충만함의 표시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하는 것으로 인하여 나타난다고 말한다(3:16). 성령 충만한 것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는 것은 둘 다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 안에 거하게 하는 사람이 된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예수에 대해 알수 있는한 모든 것을 배우려고 전심 전력하는 사람이며 예수가 말씀하신 모든 것에 복종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즉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가는 일에 전적으로 그리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매달리는 것이다.

존 맥아더의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인가중에서/개혁주의마을

성령 충만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해 보기 바란다.

나는 찬송하고 있는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당신 안에 풍성히 거하게 될 때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을 성도간에 서로 나누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골 3:16).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성경 읽기와 주님과의 영적 교제가, 일시적이고 형식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위해 일상적인 일로서, 자연스럽게 계속되어야 하는 영적인 양식 섭취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감사하고 있는가? 성경은 항상 감사하라고 가르친다(엡 5:20; 살전 5:18). 당신의 삶은 어떠한가? 불평인가 감사인가, 어느 쪽인가? 이 ...
부패한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불평할 일이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골칫거리와 짜증스러운 일들, 절망과 위기상황들을 경험한다. 그러나 감사할 일들도 너무나 많이 갖고 있다. 당신은 하나님이 계심을 감사하는가? 그리스도안에서 받은 구원을 감사하는가? 죽음의 권세를 이김에 대해 감사하는가? 매일의 삶 속에서 승리함을 감사하는가? 건강을 주심에 대해 감사하는가?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을 주신 것에도 감사하는가? 계속 열거하자면 끝도 없다. 당신이 받은 축복을 헤아려 보라. 당신이 받은 축복이 얼마나 많은지 잊어서는 안된다.

나는 나의 배우자와 자녀들, 친구, 동료, 이웃들과 잘 지내고 있는가? 우리는 바울의 에베소서 5:21-6:9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할 수 있는가? 당신은 나서는 것만 아니라 따르는 일도 잘 하는가? 만일 당신이 한 남자의 아내라면 남편의 이끔에 잘 순종하고 있는가? 또 당신이 한 여자의 남편이라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희생적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가?

당신은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을만한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당신은 윗사람의 말에 순종하는 직원인가? 당신은 성실히 일하고 있는가? 당신이 고용주라면 아랫 사람에게 공평하고 정당하게 대우하고 있는가? 당신이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윤의 많은 부분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차지할까만 고민하고 있는가?

내 삶 속에 자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가? 성령 충만의 한가지 분명한 증거는 자신이 죄에 물들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느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당신은 죄를 더 많이 깨닫게 되고, 그 분이 정말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 있는 죄를 깨닫게 될 때마다 즉시 그 죄를 자백하고 그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성령 충만함을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더 바라는 세상적인 어떤 것이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자기 중심적이지는 않는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하고 있는가?

당신의 삶에서 결핍된 것이 무엇이건 간에, 당신은 그것을 그리스도께 드리고 성령이 바로 이 순간부터 그 부분을 지배하시도록 할 수가 있다. 주님께 그저 당신이 완전히 그 분의 영향 아래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만 하라. 그리고나서 당신 자신을 훈련시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

성령에 굴복하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반응들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사람은 짐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아주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감정의 급격한 변화는 느끼지 못하더라도 다른 것으로 부터는 올 수 없는 평안과 만족을 느낄 수도 있다. 당신의 반응이 어떤 것이 될지는 몰라도, 성경은 “신성한 흥분체험(야ne zap)"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리스도께 진실하고, 날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끊이지 않고 변함없이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적으 양으로 조금씩 조금씩 힘들게 다가온다. 쉬운 길은 없다. 일회성의 “영적인 흥분 상태(spiritual zap)"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과정이다(롬 12:2). 그리고 거기에는 잠재 의식을 개조하는 테이프나, 아무런 노력없이 그런 상태에 도달하게 해주는 방법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도록 힘써야 한다(딤후 2:15). 우리는 부지런하고 한결같아서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눅 8:15)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커다란 수고를 요구하는 계속적인 영적 성장의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어슨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5-8)

우리는 단번에 멋진 새 사람으로 개조되는 것과 이러한 과정을 맞바꿔서는 안된다.
우리는 입에 뼈다귀를 물고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기 오습을 보고는, 거기 보이는 뼈다귀가 더 먹음직스럽게 보여 그걸 물기 위해 입을 벌리다가 자기가 가진 진짜 뼈다귀를 잃어버린 어리석은 개에 관한 이솝우화를 알고 있다. 그 개는 물 속에 비친 뼈가 자신이 가진 뼈보다 어찌나 좋아보였던지 그만 대번에 컹하고 짖었던 것이다. 결국 그 개는 환상 때문에 현실을 내버리고 말았다. 나는 참으로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깊이 갈망하고 있으나, 지식이 없음으로 인해서 그 개가 한 것과 똑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존 맥아더의 진정한 영성이란 무엇인가중에서






다음은 이곳 목양연가 블로그에 "과객"이란 필을 쓰시는 한 독자님께서 내려놓으신 글인데 너무도 잘 정리된, 객관성 있는 좋은 글로서 이곳에 들어오시는 모든 식구님들께서도 읽어두시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게시글로 올렸으니 모두 다 시간을 할애하셔서라도 일독하시기를 강추합니다.^^

"
교회가 세상으로 퍼지면서 그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되었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처음 신앙에서 다소 떠나 있게 되면서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음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소개하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교회 내에서 개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 이후 또 다른 열렬한 사람들이 저마다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들을 형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여러 주장들이 일일이 다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판단할 일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 각각은 나름대로 기존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없거나 다른 미흡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더욱 열심으로 주를 섬기려 하는 마음으로  일어났다고 믿고 싶다.

 물론 개인의 어떤 욕심이나 바르지 않은 마음으로(사탄의 영에 이끌려) 한 조직을 만들고 싶어한 사람이나 사람들의 영향으로  형성되고, 그 이후에도 그들 선구자의 진의를 모르고 오류를 계속 따르며 나름대로의 여러 성경적 근거를 주장하며 유지되는 조직이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이든지 기성 조직에서 더욱 노력하여 자성하는 마음으로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크게 제시하여 달려가면서도 볼 수 있게 그들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진리를 알려야할 책무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름대로 더 잘 섬기겠다는 자세를 가진다는  세상의 모든 조직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말씀을 살펴 자신을 성찰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기존 신조를 방어할 목적으로만 성경의 일부를 인용하지를 말고, 성경 전체적인 생각에서 부분적인 말씀들을 이해하여
명확한 성경 말씀을 오해하지 않도록 하고 잘못이 드러나면 과감히 구습을 버리고 겸손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대개의 경우 성경 말씀을 잘 몰라서  스스로의 잘못된 생각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말씀을 자주 살펴야 하겠고, 자타가 인정하듯이 세상의 마지막 즈음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생각을 주고받으며 진리에로의 회귀와 세상을 진리의 말씀과 복음으로 환하게 비추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대 전제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인 성령님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아래에 제시하는 바이며 특히 이곳을 찾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글을 심도 있게 연구하여 구약에서의 유일신을(구약에서도 복수로 되어있고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신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신약시대에 예수께서 더 확대하여 가르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성경에 성령을 신의 영향력으로 오해할 만한 성경절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하나만을 주장하여 전제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은 창조, 성육신, 구속 사업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로 더불어 활동하셨다. 그분은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능력을 충만케 하셨다. 그분은 인간들을 이끄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며 이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항상 함께 하시도록 성부와 성자에 의해 파송되신 그분은 영적 은사들을 교회에 부여하시며, 교회에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도록 하시고, 성경과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비록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좌절과 고뇌와 공포를 안겨 주었지만 부활을 통해 그들의 생애는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굴레를 깨뜨리셨을 때 하나님의 왕국은 그들의 심령속에 동이 텄다.

이제는 결코 꺼질 줄 모르는 불길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타고 있었다. 몇 주일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 가운데 거친 장벽을 쌓게 했던 불화는 이제 모두 녹아 버렸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허물을 고백했으며 승천하신 그들의 왕 예수님을 모셔들이기 위하여 자신들을 더욱 완전하게 개방하였다.

한때 흩어졌던 이 양무리의 연합은 날마다 기도로 시간을 보냄에 따라 공고해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 그들에게 이르러왔다.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그들 중에 들려왔으며. 그들의 불붙은 영혼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맹렬한 불길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다. 성난 불길처럼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림하셨다.

성령으로 충만된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해 새롭게 타오르는 사랑과 기쁨을 그냥 간직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그리고 열렬하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국가에서 온 순례자들과 지방민으로 구성된 군중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건물 앞으로 몰려들었다.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채 그들은 순박한 갈릴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 능력 있게 증거하는 소리를 그들의 언어로 듣게 되었다.

어떤 이는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저들이 술 취했다."라고 말하며 무시하고자 했다. 무리들의 웅성대는 소리를 뚫고 베드로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아침 아홉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들으시고 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높임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지금 성령을 주고 계시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행 2).

성령은 누구신가?
성경은 성령을 비인격적인 어떤 힘이 아닌 한 인격체로 계시한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 15:28)와 같은 진술들은 초기 신자들이 그분을 인격체로 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을 별개의 인격체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4)라고 말씀하셨다.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성경절들은 성령을 한 인격체로 묘사하고 있다. (마 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고후 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령은 개성을 갖고 계신다. 그분은 노력하시고(창 6:3-"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라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 가르치시고(눅 12:12-"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 죄를 책망하시고(요 16:8-"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교회 일을 지시 하시고(행 13: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 도우시며 중보하시고(롬 8: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루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영감을 주시고(벧후 1: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 성화 시키신다(벧전 1: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힘이나 영향력, 혹은 하나님의 속성에 의해 행해질 수 없다. 오작 한 인격체만이 이것들을 할 수 있다.

성령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을 하나님으로 제시한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성령께 거짓말 한 것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 4)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 32). 이런 일은 성령이 하나님이실 때에만 진실이 될 수 있다.

성경은 성령과 신적 속성들을 관련시킨다. 그분은 생명이시다. 바울은 그분을 "생명의 성령"(롬 8:2)이라고 했다.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진리의 성령"(요 16:13)이라고 부르셨다. "성령의 사랑"(골 15:3)과 "하나님의 성령"(엡 4:30)이라는 표현은 사랑과 거룩함이 그분의 본성 중 일부임을 계시한다. 성령은 전능하시다. 그분은 영적 은사들을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고전 12:11)신다. 그분은 편재하신다. 그분은 영원히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실 것"(요 14: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이다. 그 누구도 그분의 영향권에서 도피할 수 없다(시 139:7-8-"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 그분은 또한 전지하시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전 2:10, 11)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역들은 성령과 관련되어 있다. 창조와 부활 모두에 그분이 관여하신다. 욥은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고 말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시 104:30)라고 말했다. 바울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주장했다.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피조된 존재가 아닌 오직 편재하시는 인격적 하나님만이 신적 그리스도를 한 개인 마리아에게 임하게 하는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오순절 때 성령은 받아들이기를 자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유일하신 신이며 인간이신 예수님이 우주적으로 임재케 하셨다.
성령은 침례식의 공식 문구(마 28:19), 사도적 축복(고후 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 영적 은사에 관한 말씀(고전 12:4-7-"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서 성부, 성자와 동등하신 분으로 간주되고 있다.

성령과 삼위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 중에 셋째 위격(位格)으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다.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하게 자존하시는 분이다. 비록 각 위(位)께서는 동등하시지만 기능상의 경제성이 삼위 일체 내부에서 작용한다. 하나님은 불필요하게 중복해서 일하시지 않는다. 질서는 하늘의 첫번째 법칙이므로 하나님은 질서 있게 활동하신다. 이러한 질서는 신성 내부의 연합에서 나오며 신성 내의 연합을 보전한다. 성부는 근원으로, 성자는 중보자로, 성령은 실행자 혹은 적용자로 행동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성육신은 신성의 삼위께서 가지고 계신 활동상의 관계를 훌륭하게 보여 주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주셨으며,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주셨고, 성령은 예수님이 태어나도록 하셨다(마1:18, 20), 신성의 각위께서는 침례시에 임재하셨다 .

 성령 하나님께 대한 진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그분의 역사 속에서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명에 집중이 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탄생시에 능동적으고 개입하셨고(눅 1:35), 침례시에 그분의 공중 사역을 인정하셨고(마 3:16, 17),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과 부활의 유익을 인류에게 가져오셨다(롬 8:11).
신성 내에서 성령은 집행자의 기능을 성취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주실 때(요 3:16),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 1:18-20). 성령은 계획을 완수하여 실현시키기 위해 오셨다.
창조시에 성령이 밀접하게 개입한 사실은 창조시에 그분이 임재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창 1:2), 생명의 기원과 유지는 그분의 작용에 달려 있다. 그분이 떠나가시는 것은 사망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4, 15, 33:4 참조)고 성경은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 문을 열고 있는 각 사람 속에서 그분이 행하시는 재창조 사역을 통해 성령의 창조적 사역의 추적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업을 창조주 성령을 통하여 개인 속에서 수행하신다. 성육신, 창조, 재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하나님의 의도를 성취시키려 오신다.  성령이 신자들에게 임하실 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오신다. 그분은 자기 스스로의 권위로 자기만의 신임장을 가지고 오시지 않는다.

약속된 성령
우리는 성령의 거하시는 곳이 되도록 의도된 존재이다(고전 3: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 구약 시대에 성령은 특별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개인들을 준비시키셨다(민 24:2-"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삿 6:34-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 삼상 10:6-"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 때때로 그분은 사람들 "안에" 계신다(출 31:3-"하나님의 신을 그(브사렐)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사 63:11-" 백성이 엤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 진실된 신자들은 언제나 그분의 임재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육체에게"(욜 2:28 난하 주) 성령을 부어 줄 것이 예고되었다. 이 때는 성령이 훨씬 크게 나타나심으로 새 시대가 열리는 때이다.

세상이 아직도 찬탈자의 손아귀 속에 남아있는 동안 성령의 충만한 부어주심은 미루어져야만 했다. 성령께서 만민에게 부어지기 전에 그리스도는 당신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여 속죄의 희생을 치루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성령의 사역으로 가리키면서 침례 요한은 말했다.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그러나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는 내용의 언급이 없다. 당신의 죽음 직전에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 17). 약속하신 성령의 침례를 십자가에서 받았는가? 십자가에 달리시던 금요일에 비둘기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오직 암흑과 번개뿐이었다. 부활하실 때까지도 그분은 성령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불어넣지 않으셨다(요 20:22). 그분은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 24:49)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능력은 "오직 성령이(너희에게) 임하"(행 1:8)실 때 받게 되어 신자들은 땅 끝까지 그분의 증인이 될 것이었다.

요한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성령님을 부어주시기 위한 전제 요건이었다.
새 시대는 승리하신 우리 주님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 오직 그 때에 그분은 성령을 충만하게 보내실 수 있으셨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신후에 "성령을... 부어주셨느니라"(행 2:33)고 말했다. 이 사건을 열렬하게 고대하는 제자들은 함께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다.(행 1:5, 14). 오순절, 곧 갈바리 사건 후 50일 되던 때에 성령께서 모든 능력으로 임재하심과 더불어 새 시대가 개막되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제자들]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행 2:2-4).

예수님과 성령의 사명은 전적으로 상호 의존적이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전까지는 성령의 충만함이 주어질 수 없었다. 그 반면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시고(마 1: 8-21),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시고(막 1:9, 10), 성령에게 이끌리시고(눅 4:1),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기적들을 행하시고(마 12:24-32), 당신 자신을 갈바리에서 성령을 통해 드리셨고(히 9:14, 15), 어떤 의미로는 성령에 의하여 부활하셨다(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예수님은 성령 충만을 체험한 첫번째 인간이셨다. 간절히 그분을 사모하는 모든 이에게 당신의 성령을 우리 주께서 부어 주시길 원한다는 것은 깜짝 놀랄만한 진리이다.

성령의 사명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당신께서 떠나갈 때가 임박했다고 하신 말씀은 그분의 제자들을 크게 괴롭혔다. 그분은 즉시 당신의 개인적 대표자로서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증하셨다. 그들은 고아처럼 홀로 남지 않을 것이었다(요 14: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사명의 기원.
신약은 성령을 독특한 방식으로 소개한다. 그분은 "예수의 영"(행 16:7). "그 아들의 영"(갈 4:6), "하나님의 성령"(롬 8:9), "그리스도의 성령"(롬 8:9. 벧전 1:11),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 1:19)으고 일컬어지고 있다. 성령의 사명을 창안하신 분은 누구이신가? 예수 그리스도이신가, 혹은 아버지 하나님이신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세상에 대한 성령의 사역의 기원을 나타내셨을때 그분은 두 개의 근원을 언급하셨다. 첫째로 그분은 아버지를 언급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요 14:16, 15:26 참조, "아버지께로서" ). 성령의 침례를 그분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행 1:4)이라고 불렀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언급하셨다. "내가 그 [성령]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따라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로부터 나오신다.

세상에 대한 그분의 사명.
우리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만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시인할 수 있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참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출생하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비추신다는 보증을 받고 있다(요 1:9). 그분의 사명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요 16:8)하시는 것이다.

첫째. 성령은 우리에게 죄, 특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죄를 깊이 슬퍼하도록 하신다(요 16:9). 둘째, 성령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강권하신다. 셋째, 성령은 우리에게 심판에 대해 경고하시는데, 심판은 죄로 어두워진 심령들에게 회개와 회심의 필요를 깨닫도록 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우리가 회개했을 때 우리는 물과 성령의 침례를 통하여 거듭날 수 있다(요 3:5). 그 때에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을 위한 그분의 사명.
 성령에 관한 성경절 중 대다수가 그분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분의 성화케 하는 감화력이 순종으로 이끈다(벧전 1:2). 그러나 그 누구도 특정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아니하고는 그분께서 내재하시는 체험을 계속적으로 가질 수 없다. 베드로는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말했다(행 5:32).* 따라서 신자들은 성령을 거스리고, 슬프게 하고, 소멸시키는 것에 대해 경고를 받는다(행 7:51; 엡 4:30; 살전 5:19).
성령은 신자들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시는가?

1. 그분은 신자들을 도우신다.
 성령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는 그분을 "또다른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요 14:16)라고 부르셨다. 이 헬라어는 "돕는 자"(Helper, NBU), "위로자"(Comforter, KJV), "상담자"(Counselor, RSV)로 번역이 되었으며, "간구자"(Intercessor), "중보자"(Mediator) 혹은 "대언자"(Advocate)를 의미하기도 한다.
성경에 언급된 유일의 또 다른 파라클레토스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 혹은 간구자이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혹 보혜사)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간구자, 중보자, 돕는 자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이것은 왜 성령이 "은혜의 성령"(히 10:29)이라고 일컬어지는지를 설명한다. 그분께서 기여하시는 가장 큰 점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백성들에게 적용하는 것이다(고전 15:10; 고후 9:4; 요 4:5, 6 참조).

2. 그분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가져 오신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진리의 성령"(요 14:17, 15:26, 16:13)이라고 칭하셨다. 그분의 기능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요 14:26)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요 16:13)는 것이다. 그분의 기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요 15:26).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 14).

3. 그분은 그리스도를 임재케 하신다.
 그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기별만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도 가져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돕는 자, 요 14:16, 17]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인성으로 제약받으신 인간 예수님은 편재하실 수 없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떠나가는 것이 유리하였다. 성령을 통하여 그분은 언제든지, 어느 곳에나 계실 수 있으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 17).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요 14:17, 18)라는 보증을 주셨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표자이시지만 인간의 개성을 갖지 않으신 분이며, 그러기에 독립적인 분이시다.

성육신 때에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 마리아에게 임하시도록 했다. 오순절 때, 성령은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임하시도록 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성령을 통하여 실현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약은 구약에서 그분에 대해 결코 사용되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란 칭호를 사용한다"(빌 1:19).

 아버지와 아들이 신자들을 당신의 거처로 삼으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므로(요 14:23)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 수 있는 것도 오직 성령을 통해서이다.

4. 그분은 교회의 활동을 주관하신다.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분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이시다. 신앙과 교리상의 항구적인 권위의 중심으로 그분이 교회를 이끄시는 방식은 성경과 아주 잘 조화된다. "개신교의 두드러진 특색-이것이 없다면 개신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은 성령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시요 후계자시라는 것이다. 조직, 혹은 지도자, 혹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자리에 들어앉는 것이다."

 성령은 사도 교회를 치리하는 일에 깊이 관여하셨다. 선교사를 선발할 때 교회는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그분의 지도를 얻었다(행 13:1-4). 개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 사람들이었다. 사도행전은 그들이 "성령이 충만"했다고 묘사한다(행 13:9, 52 참조). 그들의 활동은 그분의 지배하에 있었다(행 16:6, 7).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그 위치를 얻은 것은 성령에 의해서라는 것을 상기시켰다(행 20:28).

 성령은 교회의 일치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경은 최초의 교회 총회가 내린 결정에 대해 "성령과 우리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행 15:28)라는 말로 소개하고 있다.

5. 그분은 교회에 특별한 은사들을 주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은사들을 부여해 주셨다. 구약시대에는 "주의 영"께서 개인들 "위에" 임하셨으며,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구출할 수 있도록 탁월한 능력을 주셨었다(삿 3:10, 6:34, 11:29, 등). 또한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민 11:17, 25, 26; 삼하 23:2).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로 사울과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임하셨다(삼상 10:6, 10, 16:13). 어떤 백성들에게는 성령의 충만하심을 통해 독특한 공예 기술이 임하였다(출 28:3, 31:3, 35, 30-35).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은사들을 교회에게 부여하신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을 통해서였다. 성령은 이러한 은사들을 당신께서 적합하다고 보시는 이에게 분배하심으로 온 교회에 유익을 끼치신다(행 2:38, 고전 12:7-11). 그분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능력을 준비하셨다(행 1:8; 본서16장 보라).

6. 그분은 신자들의 심령을 채우신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라고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모든 신자에게 중대한 질문이다.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을 때 바울은 그 제자들 위에 안수했으며, 그들은 성령의 침례를 받았다(행 19:6). 성령에 의하여 죄를 자각하게 되는 일, 그리고 생애 속에 성령이 충만케 되는 일은 별개의 두가지 체험이라는 것을 이 사건은 지적해 준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의 필요성을 지적하셨다(요 3:5). 승천 직전에 그분은 새 신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에 조화를 이루어 베드로는 "성령의 선물"을 침례 때에 받게 된다고 설교했다(행 2:38). 또한 바울은 성령의 침례의 중요성(본서 14장)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는 긴박한 호소를 통해 인정하고 있다.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일,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중생 때 시작된 성화사업을 계속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비를 좇아 구원하시며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딛 3:5, 6)셨다.

"복음 사역이 그토록 힘이 없는 것은 성령의 부재 때문이다." 지식, 재능, 능변, 각종 천부적이거나 후천적인 자질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임재하시지 않는다면 그 누구의 마음도 감동시킬 수 없고, 한 사람의 죄인도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할 수 없다. 반면에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면, 성령의 은사를 그들이 갖고 있다면, 가장 보잘 것 없고 무식한 그분의 제자라 할지라도 심령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우주에서 가장 고상한 감화가 흘러가는 통로로 삼으실 것이다.

죄인의 회개나 성화에 있어서 성령은 필수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서 일으키시는 모든 변화는 성령의 봉사를 통해서 이르러 오는 것이다. 신자로서 우리는 성령이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인식해야만 한다(요 15:5-: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 오늘 성령은 당신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가장 위대한 선물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신다. 그분은 당신의 호소에 저항하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받아들이라고 호소하고 계신다.

 우리가 그 분의  호소에 주의를 기울이고 어느 곳에 소속해 있든지 한 마음으로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할 때 세상 마지막 때 약속된 성령의 임재로 우리가 한가지 생각으로 변하게 되지 않겠는가? 성령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첫 번째 단계는 죄를 버리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개인의 죄와 가족의 죄와 교회의 죄를 버리며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이 세상의 철학과 망령된 생각들로 오염된 것으로 부터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행위의 첫 단계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요즘 그릇된 성령론을 주장하며 또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서 성도들로하여금 혼란을 이르키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 성령은 회심하여 예수를 믿고 난 다음 다시 받는다" 라 고 가르치는 목사들이 날로 늘어만 갑니다. 고린도전서 12:3 에는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에수를 주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며 로마인서 9:8 에도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면 모두 구원 얻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한 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중생" 자체가 성령으로만 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헤 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사람이 중생할 수 없습니다. 근자에  본 선교회 "질의응답 시간" 에는 성령에 관한 질문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데 오늘은 <성령의 조명>(illumination of the Spirit) 이 무엇인지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성령의 조명을 오해하여 마치 <성령의 조명> 이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이는 가장 비성경적인 교리 입니다. 오늘날 "다른 복음" 을 가르치는 목사들이 너무 많아서 기독교  교계가 이처럼 어지럽습니다. 바로 배우고 바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성령의 조명” 은 새로운 계시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 사이에서는 성령의 조명을 마치 새로운 계시를 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이 문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성령의 조명은 새로운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으로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마다 모두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서 같은
성경구절을 놓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여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에는  이단들이 무성하고 교회가 분렬되며 성도들은 무엇이 참 복음인지 모르게 됩니다.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류는 모두 지.정.의가 완전 타락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에게 나아
올 수도 없지만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 깨닫는 성경은 항상 인간 중심이며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령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의 자주장사 루디아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안식일에 바울을 만나서 바울의 설교를 들었는데 들으면서도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고 했습니다 (행 16:14). 마음이 열려져서 예수를 믿게 되었지요.  누가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나요?  그것은 성령입니다.  완악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것은 항상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모두 아담의 죄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진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성경구절은 고전 1장과 2 장 일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영혼이 어두어진 인간에게는 십자가는 미련스럽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신화처럼 들립니다. 동정녀 탄생도  옛날 “콩쥐 팥쥐” 이야기를 듣든 것처럼 미개한 하나의 이야기 꺼리로 들립니다.  이것이 자연인 (예수를 모르는 사람) 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이런 분들이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바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자연인에게 우리가 가장 능한 변술로 설교해 보십시오. 가장 그럴사한 논리로 설득하려 해 보십시오.  가장 좋은 예화를 들어서 기독교릐 교리를 설명하려 해 보십시오.거듭나지 못한 영혼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전도하는 마음이나 방법이 잘 못되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비성경적인 말을 전해서가 아닙니다. 그 영혼이 죄로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 하늘에 햇빛이 비치는 날 두 사람을 밖에 데리고  나가서 머리를 들어 하늘에 무엇이 보이는가 물어 보세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장님입니다. 하늘에 눈부신 태양이 보인다고 하는 사람은 장님이 아닌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하늘에 태양이 너무나 밝게 빛나는데 한 사람은 못보고 한 사람은 그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태양을 못보는 사람은 태양이 그 사람에게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은 그대로 있는데 바라보는 사람의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 다시 말하면 태양을 볼 능력이 없는 장님이기 때문에 남이 보는 태양을 그 분은 못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불변한데 성경을 읽은 사람이 글은 읽어도 그 뜻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지능지수 (IQ) 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그의 영혼이 진리를 볼 능력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경은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유식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일에 아주 무식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회 명사라고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죄악된 인간,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자기의 “죄” 라는 검은 안경을 벗어야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깨달을 수 있고, 자기의 지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과, 자기의 지식은 하나님에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본인이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그 마음속에 역사하여 잘못된 길에서 떠나 바른 길로 가게하고 어두어 진 영의 눈을 뜨게 할 때 성경말씀을 바로 깨닫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날마다 주의 말씀을 상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영의 눈이 열려도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20/20 의 완전한 눈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설명됩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그때부터 “성화” 라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성화는 과정입니다. 즉 죽을때까지 성화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서정에서 소명, 회심, 중생, 칭의 양자 과정는 모두 일시적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소명이 있고나서 얼마 있다가 중생이 일어나고 얼마 있다가 칭의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동시에 일어나지만 신학에서 논리상 이렇게 구분을 두눈 것 뿐입니다.

    성화는 하루 아침에 일어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죽을 때 완성되어 영혼은 하늘에 올라가고 몸은 땅속에 묻혀 흙에서 취함을 받았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날 땅속에 묻혀있던 성도의 몸이 부활하여 주님과 같이 내려오는 영혼과 연합하여 영화로운 몸이 되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이 지식과 지혜는 유한하여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조명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하늘의 별들을 보려면 망원경을 이용합니다.  그 별들을 보기 위해서 다른 물체를 놓는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놓을 뿐입니다.  발람은 앞에 천사가 길을 막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귀는 그 천사를 보고 앞으로 한발직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있듯, 객관적인 사실인데 미미한 나귀는 볼 수 있어도 발람은 볼 수 없었습니다.  가장 무식하고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를 알고 성경을 이해하는 분이 있는가 하면 고등교육을 받아 유식하지만 성경을 모르고 기독교의 진리를 조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신들이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4).

   성령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읽고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것이 결코 아 닙니다. 한 가지 계시도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천가지 만가지 새로운 게시를 준들 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조명이란 새로운 지식의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바로 이해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고로, 전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대상자의 마음의 문을 열고 영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진리의 말씀을 전해도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눈을 뜨게해 주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또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19:18에 보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인한 것을 보게 하소서” 라고 다윗이 말합니다. 거듭난 우리 성도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성령계서 더 좋은 지식과 지헤로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야합니다. -끝-

+ Recent posts